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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템문화를 알아보다...
2016년 11월 11일 00시 39분  조회:3415  추천:0  작성자: 죽림
[ 2016년 11월 10일 11시 41분 ]

 

 

 

 

호남(湖南)성 천주(郴州)시 북해(北湖)구 대형 동굴 식당,ㅡ



“토템문화”와 조화세계

          

남영전 / 전 길림신문사 사장
              전 장백산잡지사 사장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

3, 단군신화의 발상지

4, 토템은 씨족의 개념

5, 민족은 문화의 개념

6, 토템관념의 현실의의

7, 나오는 말

 

 

 

 

 

들어가는 말


필자의 짧은 글 《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게 주는 중요한 계시》가 2004년 10월부터 《문예보》, 《중국민족보》등 10여개 중국주류 간행물과 우리 말 간행물인 《문학과 예술》, 《도라지》와 한국의 문예지인 《문예시대》에 발표된 후 근간 몇 개월동안 우리 문단의 일부 지식인들이 이 글의 관련 내용에 대해 질의(質疑)가 있었다. 토템문화에 대한 관심과 흥취는 참으로 좋은 일이다.


본고는 상기의 짧은 글의 관련 내용에 대한 다소 상세한 담론이다.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

 

영국의 생물학자 다윈(達爾文)의 진화론이 발표된 후 인류의 기원과 이동에 관한 과제는 줄곧 국제과학연구계의 하나의 열점화제다.


현생 인류의 조상은 누구인가? 중국학계에는 두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아프리카 기원설이고 하나는 본토기원과 아프리카기원의 융합설이다.


융합설을 주장하는 인류학자의 증거는 주로 아래의 몇 가지다.


1929년 북경 주구점에서 발견된 50만년전의 북경원인 두개골은 아세아에서도 인류가 기원했다는 증거다.


1972년부터 하북 니하만(河北泥河灣)에서 구석기시기 인류유적 80여 개가 발굴되었는데 호두량유적(虎頭梁遺跡), 소장량유적(小長梁遺跡)은 몇 십만년, 심지어 200여 만년 전의 문화유적지로서 돌도끼, 돌망치 등 구석기(舊石器)가 출토되었다. 30여년의 연구로 전문가들은 이곳의 인류활동은 260만 년전부터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아프리카 대륙의 인류활동과 동일시기라고 한다. 그리고 역시 하북 울현(蔚縣)에서 300만 년 전의 석기를 발견했는데 이것은 아프리카에서 260만 년을 한계로 하는것에 대한 초월이라고 보고있다.


20세기 80년대 운남 원모지역에서 170만년 전의 원모인을 발굴할 때 석기도 함께 출토되여 학자들은 원모인을 “동방인”으로 이름을 지어주기에 이르렀다.


또한 중국에서 발견된 제 3빙천세기의 삼림고원(森林古猿), 녹풍고원(綠豊古猿), 상신원(上新猿), 강소성에서 발견된 4000만 년 전후의 고급 영장유화석 등은 아세아에서도 인류가 기원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2007년 4월 2일, 중국신화사통신은 중국과학원고척주동물 및 고인류연구소가 “중국인의 조상은 전부 아프리카에서 온 것만이 아니다”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이 연구소는 북경 주구점 유적지 서남쪽 6Km 거리의 전원동(田園洞)인류화석의 연구를 완성했는데 전원동인의 특징은 절대다수의 현대형 인류와 일치하다는것이다. 이것은 곧 아프리카현대형인이 중국의 고로형인을 대체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였다.


현생 인류가 어디에서 왔는가?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곤혹에 빠지게 하는 난제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하여 세계 각국의 과학가들은 여러 가지 추리와 논증을 내놓았다.


1991년 9월, 오스트랄리아와 이탈리아 국경지대의 알프스 산맥에서 미이라 한 구가 발견되었다. 방사선 년대측정 결과 약 5천년 전의 시체로 판명됐지만 누군가 남미의 미이라를 옮겨다 알프스의 눈밑에 묻은 것이라는 조작론이 끊이지 않았다.


1995년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진이 설인의 미트콘드리아 DNA를 분석한 결과 유럽인이 분명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의 DNA는 현재의 유럽인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연구진은 나아가 영국 남부지방의 경영 컨설틴트인 마리 모슬리라는 녀인이 설인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런 결과들을 통해 DNA가 인류의 계보를 탐구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떠오르자, 20세기 90년대 후로부터 인류학자와 분자생물학자들은 전세계 민족들의 DNA를 수집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보통의 DNA는 세대가 지남에 따라 부모의 것들이 섞여 복잡하게 변하지만, 미토콘드리아와 Y염색체의 일부 유전자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 미트콘드리아의 유전자는 어머니로부터, Y염색체는 아버지로부터만 물려받아 뒤섞임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어쩌다 돌연변이가 일어나 하나 둘 정도가 변할 뿐이다. 또 여러 민족간의 DNA의 유사성을 살피면, 가까운 친척인지 먼 친척인지 하는 “근연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사촌은 아버지대에서 육촌은 할아버지대에서 갈려나오듯, DNA가 많이 다른 두 민족은 더 먼 옛날에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전체 민족간에 이런 근연관계를 파악하면, 종내에는 현생인류가 언제쯤 공동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는지를 알 수 있다는게 진화인류학자들의 생각이다.


인류기원연구프로젝트 총지휘인 미국의 스펜서 월즈의 저서 《인류전사(人類前史)》(동방출판사, 2006년판)인류의 유전인자 보고서이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는 하나의 공동한 조상을 갖고 있는데 바로 6만년 전 아프리카에 살던 한 남성이라는 것이다. 5만년 전 장시간에 걸려 가뭄과 기황이 지속되면서 그들 중 한무리가 고향을 떠나 모험적 이동을 시작, 수만년에 걸쳐 사람이 살만한 지구우의 거의 모든 것을 차지한다. 현재 지구상 모든 사람들은 지역에 따라 문화, 체형, 생김새, 피부색이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만 과학연구결과는 85%의 유전인자변이는 전반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며 약 8%만이 인종획분의 증거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서로 다른 인종의 차별은 8%에 그칠 뿐이라는 것이다. 인류는 공동한 생물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종에는 우렬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스펜서 월즈는 여러 나라 과학자들과 합동연구를 진행한 결과 화석으로 발견된 2백만년전의 오스트랄로피테구스나, 50만년 전의 북경인, 30만년 전의 네안데르탈인 등은 모두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현생 인류가 도착하기전에 멸종됐음을 밝혀냈다.


고고학의 고증으로 보면 조선반도에는 60만년전부터 인류가 생활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생 인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스펜서 월즈는 조선민족은 약 4만년전 중앙 아시아에서 동으로 이동해와 형성된 것으로 최첨단 DNA분석 결과를 통해 밝히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발원한 현생 인류가 중앙 아시아 일대에 옮겨와 살다가 3-4만년 전에 갈라진 원주민 가운데 서북쪽으로 이동한 일파가 유라시아인종이 됐고 등으로 몽골을 지나간 일파는 중국 북부, 한국 등에 퍼졌으며 또 한 일파는 남쪽으로 해서 중국 남부와 동남아로 퍼졌다는 것이다.


유전적으로 한국인은 북방한족과 가장 가깝고 다음으로 일본, 몽골, 남방 한족순으로 가깝다는 것이 한국단국대 생물학과 김욱교수의 견해다. 한국 카돌릭대학의 한훈교수가 한국인과 여러 민족을 대상으로 항원을 검사한 결과 한국인들은 일본인, 미르마인, 인도 동북부의 소수민족, 운남성주민, 화북 한족, 동북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실험결과가 확인되었다.(2004년 5월 11일자 한국 연합뉴스) 


필자가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접하게 된 시기는 1989년 5월 캐나다와 미국을 방문할때였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 한인 작가의 수필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여 신선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 의도적으로 많은 자료들을 접했는데 한국에서 인류의 본토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단 한사람도 없었으며 모두다 아프리카 기원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었다.


중국학계에서는 미국, 영국, 호주, 인도네시아 등 외국 연구기구와 합작연구 결과 본토기원설로부터 아프리카 기원설을 수용하는 현상이 우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일부 본토기원설을 주장했던 학자들도 아프리카 이민설을 배제하지 않고 본토인류기원과의 융합을 주장하는데 도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기원 연구에서 DNA의 측정방법은 현생인류는 아프리카, 아세아, 유럽, 미주 각 대륙에서 동시에 진화되었다는 상대이론(相對理論)을 흔들어 놓았고 아프리카 기원설을 수용하는것이 세계학계의 보편적인 추세다.

 

 

단군신화의 발상지


필자가 단군신화의 발상지가 돈황부근의 삼위산이란 말을 들게 된것은 지난 세기 90년대 초반 연변대학에서 개최된 한중문학심포지엄 때었다. 이번 심포지엄에 한국학자 10여 명이 참석했는데 한국 월간 문예사조사의 안수길선생이 한국측 주체발표자로 “동이족의 우월성”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단군신화와 관련되는 내용을 풀이하면서 “동이의 조상은 막고골로 유명한 돈황에 있는 삼위산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지금 막고굴 어구 좌측 ‘막구굴박물관’이 있는 삼위산의 몇 백메터 지하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인가 묻혀 있을 가망성은 있다”고 하였다. 

단군신화의 발상지가 돈황의 삼위산? 나로서는 다소 어리둥절한 문제였다. 나의 상식으로는 단군신화의 발상지가 줄곧 조선반도였지 중국쪽으로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였다. 

1987년부터 1992년 세 번이나 조선을 방문하여 묘향산에 올라 단군굴의 전설을 들었기에 조선의 학자들은 단군신화발상지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3년 2월, 조선과학원 출판사에서 출판 발행한 리지린선생의 저서 《고조선연구》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조선 《고기》에 의하면 단군의 출생지는 《삼위태백(三危太伯)》이다. 이 《삼위태백》은 한 개의 지명이 아니라 삼위와 태백의 두 개의 지명을 결부시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동국여지승람》의 저자는 삼위태백을 황해도 구월산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은 후세 사람들의 부회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삼위》라는 지명을 우리 나라 지리 문헌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태백산은 《삼국유사》에서 묘향산이라고 쓰고 있으나 이것은 후세의 부회된 명칭이며 고조선 국가형성시의 명칭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삼위와 태백은 별개의 지명인데 후세의 불도들이 이 양자를 억지로 결부시킨것에 불과하다. 

《삼위》란 지명은 중국 고대문헌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산이다.


그러면 이 삼위산이 어디 있는 산인가?


고힐강교수는 《우공평》의 삼위산의 위치를 고증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三危山,左傳昭公九年杜預汽說, 이하 략, 필자)이에 의하면 고대의 《삼위산》은 오늘 중국의 서쪽 맨 끝에 있는 산이라는 것은 확실하나 오늘의 어느 산인가는 불명확하다. 일본의 어떤 사가는 삼위산을 알타이산으로 비정하고있다.


일본 사가의 설은 부정확하기는 하나 삼위산이 대체로 알타이산과 련결되는 현 중국 서북방의 산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면 어찌하여 단군신화에 이러한 산이 관계되어 있는가? 이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서 우리는 단군신화의 가장 이른 기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위서》에는 이 산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인용되어 있는 《고기》에 이 산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기》의 편찬자들이 《삼위》(三危)를 고대 중국의 유명한 산임을 모르고 썼다고 보기는 곤난하다. 진술한 바와 같이 기원 1세기로 낙랑사람들이 《서경》을 통달했다는것이 확증되니 고조선인들이 《삼위》가 《서경》에 보이는 산명임을 알았을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고기》의 편자들이 어찌하여 그 먼곳에 있는 산 이름을 단군신화와 결부시켰는가? 이것은 《고기》편자들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의 표현이라고 지적할 근거는 없다. 그들은 단군을 고조선의 창건자로 인정한 것이며… 단군이 구체적 인물의 이름이 아닐진대 고조선족의 선조가 《삼위산》과 관련되고있었다는 것을 《고기》편자들이 인정했다고 볼수 있을것이다.... 단군신화에 《삼위산》이 관련되어 있는 사실은 주목하여야 할 문제로 남는다.


45년 전에 조선의 학자 리지린선생이 단군신화의 발상지에 대해 이렇게 선명한 견해를 펴냈다는 것은 실로 그는 실사구시적이고 학문연구가 깊으며 양지가 있는 학자임을 말해준다. 돋보이는 학자가 아닐 수 없다. 

리지린선생의 말마따나 단군신화에 《삼위산》이 관련되어있는 사실은 주목하여야 할 문제로 남았다. 이 몇 년간 한국의 학자들도 《삼위산》에 대해 관심을 돌리고 있다. 

한국 효성여대 박은용교수는 30년전 일본 도꾜대 객원교수 시절 우여곡절 끝에 한자, 만족어, 몽골어, 아라미아어, 타밀어, 장족문자 등으로 된 청나라 건륭 28년(1763년)에 편찬된 지리서 《흠정서역동문지(欽定西域同文志)》를 입수했는데 이 고서에 “삼위”에 대한 기록을 인용하면서 “삼위산이 곧 천산이며 이를 백산이라고 한다고”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삼위태백(三危太伯)’이란 글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지 못했던게 우리 학계의 실정이다.”면서 “우리 학계가 민족의 기원 신화에 나오는 ‘삼위’란 글자가 태백을 수식하는 관용어인지 별도의 지명인지에 대한 학술적인 규명도 못하고 있다”며 “천산 일대의 위글족 등과 우리 민족은 인종적, 언어풍속학적으로 유사점도 많아 역사, 언어, 문화인류학계의 연구가 뒤따라야 할것”이라고 견해를 피력하였다. 

한국상고사학회 회장 율곤 이중재선생은《신시개천경(神市開天經)》(원저 神志赫德)을 입수해 공개했는데 관련 원문에 “下視三危太白,三危山名,非今外興安嶺也,又非今文化九月山也,乃今甘肅界敦煌縣所在地三危山也,本黎苗祖盤古初降之地是也”(아래를 내려다보니 삼위태백이 보였다. 삼위란 산의 이름, 지금의 흥안령이 아니고, 지금의 문화구월산도 아니며 지금의 감숙성 경계이다. 이곳은 돈황현에 있는 삼위산이다. 본려 묘족의 조상 반고가 처음 내려왔던 땅이다.)라고 적혀 있는 것을 지적하고 나서 “三苗 三危山의 관계에 대해서는 堯典,山海經,愚責,韓非子,管子,呂氏春秋,呂刑,繆鳳林 등 많은 사서에서 밝히고있다”면서 “삼위산은 동북아 전체를 놓고 중국의 서쪽 감숙성의 삼위산 한 곳 밖에 없”는 이상 “‘삼국유사’의 환웅에 대한 기록에서 삼위산을 언급한 것은 함부로 넘겨 버릴수 없는 앞으로 우리 민족의 근원을 찾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삼위산의 서북쪽엔 천산산맥이 있으며 우랄알타이 이족의 근거지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율곤선생은 이 지역을 《삼국유사》에서 말한 태백산 일대라고 보고 있다. 

단군신화의 발상지를 놓고 한국 학계는 구월산설, 태백산설(묘향산), 백악산설이 있고 감숙 돈황 삼위산설이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새로 발견된 문헌자료와 고고학자료도 조선반도를 벗어나 중국의 요동, 요서, 산동, 하북, 산서, 섬서 등 지로 부단히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무엇 때문에 단군신화의 발상지가 이렇듯 범위가 넓어지고 복잡해지는가? 그 원인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귀납해보았다.

첫째, 단군신화 발상지에 관심을 가진 연구가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문헌자료와 고고학자료도 점점 더 확보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둘째, 단군신화의 유전범위가 넓고 영향력이 크며 그 때의 여타 씨족, 부족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셋째, “삼위태백”이 적혀 있는 일연의 《삼국유사》와 일연과 동시대인인 이승휴의 《제왕운기》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학자들의 이해와 해설이 각기 달라졌다. 

상기의 현상을 보면서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신화는 설화(說話)로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유전되고 또 기록을 통해 문헌에 남긴다. 

사람과 더불어 이동하는 신화는 세대의 바뀜, 시대의 변천, 환경의 지배로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신화의 흐름은 역사의 흐름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한 신화를 연구함에 있어서 그 신화의 탄생과 유전궤적을 통 털어 연구함이 타탕성을 가진다고 생각해 본다. 예를 들어 현존의 연구를 보면 단군굴이 있는 묘향산은 단군신화의 최후 정착지의 한곳일수 있다. 그런데 왜서 이곳을 단군신화의 최초의 발상지로 말하는가? 만약 틀렸다면 어디가 어떻게 틀렸는지 차분하게 연구하고 논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토템은 씨족의 개념


토템이란 용어가 언제 나왔는가? 

현재 학계에서 보편적 인정을 받는 것은 1791년 영국의 상인 요한랑그의 저서 《번역원 겸 상인인 한 인디안인의 항해와 여행》인데 이 저서에서 미주 인디안어의 방언인 totem(토템)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학자 정원자는 1725년에 출판된 이탈리아 학자 비꼬(維柯)의 저서 《신과학》의 내용이 만약 주광잠(朱光潛)선생의 번역오차가 없다면 “토템”용어의 등장시간을 140여년 앞당길 수 있다고 하였다. 

토템의 정의는 무엇인가? 

북미 인디안어의 방언 totem의 뜻은 “형제 자매 친척관계”다. 

학계에서 토템에 대한 정의는 각이하다. 

미국학자 모르간은 토템은 한 개 씨족의 표지 또는 도휘라 하였고 프레이저는 토템은 친척이며 조상이라 하였고 오지리학자 프로이드는 토템은 종족의 조상인 동시에 수호자라고 하였다. 토템의 정의, 혹은 토템의 내함 문제는 문화인류학, 종교학, 민족학, 민속학 등 학계의 뚜렷한 하나의 큰 과제다. 하지만 학자들이 토템에 대한 이해와 해설은 지금까지도 통일적인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실정이다. 

필자가 공부를 하면서 토템은 전사시기 인류최초의 우주관이고 전사시기 인류의 제일 고로한 원시종교형식이란 것을 인식하였다. 원시인들은 자신들과 더불어 사는 동물, 식물과 천체를 영물이고 신이라고 믿었다. 자신의 조상의 탄생은 어느 동물이나 식물, 혹은 천체와 관계가 있다고 여겼는데 이 관계가 있는 물체는 곧 그들의 토템물로 숭배를 했다. 이렇듯 원시인들은 지(知)적과 지(智)적이 아닌 영(靈)적인 사유방식이었다. 때문에 원시인들은 조상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물체를 친척으로 생각했고 조상으로 모셨으며, 또한 영물이고 신인 그들(토템)이 후대들인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믿었다. 씨족사회에 와서 이러한 토템은 또 씨족과 씨족을 구분하는 표지 혹은 도휘로 되었다. 이렇게 상기 토템에 관한 각가지 설을 종합해놓으면 상대적으로 완정한 토템의 정의 혹은 내포가 아닐가 싶다. “토템” 두 글자의 본질, 혹은 핵심은 “친척”이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하여 “토템”을 “친척”으로 바꾸어 말해도 전혀 문제가 될것이 없으며 더 쉽게 마음에 와 닿을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토템의 산생시기는 언제인가?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의 증거는 토템의 산생시기는 지인(智人)시대인 25-20만년전이란 것을 말해 준다. 실제로 토템 의식의 발생시기는 이 년대보다 훨씬 더 이른 40만년전일것으로 추정하지만 아직까지 고고학적 발견이 없다는 이유로 이 설을 부정하는 학자도 있다. 

이렇듯 까마아득한 옛날에 발생한 토템은 인류의 진화, 발전과정에서 하나의 자연실체였고 또 하나의 문화실체였다. 자연실체로 말하면 토템은 신비로운 영적 힘이고 문화실체로 말하면 토템은 인성을 담은 현실적인 힘이다.

인류의 발전과정에서 토템의 작용은 무엇인가? 필자는 나름대로 다음 세가지가 특별히 중요하다고 본다. 

첫째, 토템은 인류문화의 시원이다. 

원시인들은 토템숭배를 했기에 자신이 살고 있는 동굴이나 암벽에 토템형상을 그리거나 새겼고 자신의 몸에 문신(紋身)을 하였으며 도자기에 토템물을 그려 구웠다. 이것이 곧 인류 최초의 미술의 탄생이다. 

원시인들은 또 자신들이 숭배하는 토템동물을 잡아 고기를 먹고 배고픔을 달래면서 그 동물의 가죽과 뼈를 모아 놓고 둘러서서 참회, 혹은 양해를 구하는 모임을 가졌는데 그런 참회의 뜻을 높고 낮은 말의 음조로 표현하다보니 노래가 되었고 토템물의 동작을 모방하다보니 춤(무용)이 되었다. 이것이 곧 인류최초의 노래와 춤의 탄생이다. 

토템물의 가죽과 뼈를 놓고 원시인들이 참회의 모임을 가졌다는 것은 그들은 이미 참회를 할 줄 아는 사유를 가졌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곧 철학적 사유의 탄생을 의미하며 이런 모임은 곧 하나의 제의(祭儀)로서 원시 종교의 탄생이 아닐 수 없다. 

이로 보아 예술, 철학, 종교의 탄생은 토템숭배를 그 기원으로 하는것이다. 그래서 토템숭배는 인류문화의 시원(始原)이라고 한다. 

둘째, 토템은 씨족사회의 헌법이다. 

씨족사회보다 20만년 좌우 더 일찌기 발생한 토템숭배는 원시공사(原始公社)단계를 거쳐 4만년 전인 씨족사회에 와서는 씨족사회 성원들의 행동의 지침이 되었다. 한 토템을 숭배하는 씨족은 가까운 친적관계를 가진 한 집안이기에 서로 서로 보살피며 살아야 한다. 자신들의 토템은 그들의 친척이고 조상이고 그들을 보호해주는 수호신이기에 살해하지 말고 존경하고 숭배하여야 하며 그들의 거주지에는 어떤 형식으로 표시를 해놓는다. 한 토템씨족은 한집안이기에 통혼은 금기시되었다. 다른 토템씨족과 혼인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러한 규정과 금기는 실상 씨족사회의 헌법으로 그 위력이 대단하여 사회질서의 유지와 인류의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셋째, 토템은 성씨의 내원이다. 

인류는 태어나자마자 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원시 인류에게는 원래 성이란 부호가 없었다. 원시가족시대에 발생한 토템의 최후형태는 씨족사회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가족토템의 간단없는 확장과 더불어 씨족사회가 형성되었고 나아가 토템의 분화(分化)를 가져왔다. 때문에 동일한 부족내부에 하나의 토템이 아니라 여러 개의 토템을 가지는 현상이 불가피하게 나타났다. 토템이 씨족의 표지가 되면서 씨족성원들은 토템과 관련되는 성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들이 잘 알고있는 동의족의 시조 복희(伏羲)는 성이 풍(風)씨다. 문일다선생의 《복희고(伏羲考)》에 의하면 고대 번자체의 바람“風”자와 벌레 “蟲”자는 원래 한글자였다. 벌레“蟲”자는 뱀을 말하는데 풍씨는 뱀의 소생이라고 한다. 실지로 복희가 풍씨인것은 그의 토템이 뱀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우뢰신의 아들이라고 해서 우뢰도 그의 토템이 되여 그는 한쌍의 토템을 가진셈이다.  부여(夫餘)는 역시 동이족의 한갈래로 소, 말, 돼지, 개, 닭, 양 등 육축을 토템으로 하였고 또한 토템을 관직의 칭호로 하였다. 그리고 흑룡강류역에 소호(少昊, 동이족)의 후예라고 불리우는 한무리는 개를 조상으로 모셔 구국(狗國)이란 나라가 생기기도 하였다.현존사회에서 牛씨, 馬씨, 狗씨가 있고 鷄씨, 羊씨, 豬씨는 찾아볼수 없는데 이 鷄, 羊, 豬와 동일음인 姬, 楊, 朱 세개 성씨와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필자는 《부족문화와 선진문학》의 저자 이병해선생과 담론한적이 있었는데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그와 나의 똑같은 생각이었다. 황제(黃帝)는 토템이 곰이기에 그는 웅(熊)씨라고 불리웠다. 

우리 민족성원과 토템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리 민족도 씨족사회, 부족사회를 거쳐 지금의 조선민족으로 형성되였다. 토템이 씨족사회이전의 산생물이지만 씨족사회의 표지로 되었고 씨족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작용을 하였기에 우리 선조의 씨족, 부족사회에 토템이 없을수 없다. 

문제는 씨족, 부족사회 때 매 개인의 숭배대상물이었던 토템이 민족이 형성되면서, 특히 사람들이 새로운 종교들 받아들이고 공업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토템숭배는 광채를 잃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아리숭한 옛날 이야기로 되었다는것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 4만년 전부터 흥성했던 토템숭배의 문화를 재현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고고학 발견, 고서의 기록, 신화전설은 우리가 선조들이 숭배했던 토템물을 얼마만이라도 찾을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준다. 

씨족, 부족사회 때 토템숭배가 얼마나 흥성했는가 하는 것은 민속학자 우병안선생의 저서 《중국민속학》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호주에서 700개가 넘는 토템 표기를 발견했다. 한 부족내부의 각 씨족은 각기 부동한 토템표기를 가지고 있었다. 조사에 따르면 호주의 알란트(阿蘭特)부족과 놀리노(露裏惹)부족은 모두 442종의 토템을 가졌다. 상대적으로 과거가 잘 보존되어 있는 호주에서 한 부족내부에 이렇게 많은 토템물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점이 적지 않다. 

2만5천년전부터 현생 인류의 조상들이 조선반도로 이민왔다는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또 그 때 사람들은 틀림없이 씨족, 부족들의 성원이었기에 그들 각자의 토템물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 때 일연이 쓴 《삼국유사》가 조선민족의 최초의 고서라고 하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선조들이 실제로 숭배했던 토템물은 그들의 몸과 함께 땅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지금 우리가 능히 찾을 수 있는 것은 쌀에 뉘 찾기에 불과하다. 

보통 조선민족은 동이족(씨족, 부족)의 후예라고 하는데 조선민족을 형성시킴에 있어서 동이족(씨족, 부족)이 주종을 이루었을수 있지만 여타 여러민족(씨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동이족(씨족, 부족)에 속하는 토템물은 어떤 것이 있는가? 이병해선생의 저서《부족문화와 선진문학》에 동이족(씨족, 부족)의 토템물이 거론되었다. 태양, 새, 뱀, 용, 여우, 닭, 개, 돼지, 양, 소, 말, 제비, 꿩, 봉황, 비둘기, 소리개, 뻐꾹새, 까치, 물고기, 수달, 사슴, 우뢰, 구름 등이 동이족(씨족, 부족)의 토템물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곰이나 범은 동이족(씨족, 부족)의 토템물이 아니라 황제(黃帝)를 대표로 하는 서북 고대민족의 토템물이었다. 우리 민족의 조상탄생신화로 믿는 《단군신화》에 곰과 범이 등장한 것은 우리 민족의 조상도 황제를 대표로 하는 서북 고대민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병해선생은 황제집단의 토템문화에 대해서는 선배학자들이 일찌기 연구를 시작했고 일정한 진전을 가져 왔지만 이 영역은 진일보 개척할 여지가 있고 허다한 문제는 다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 민족성원의 토템물을 연구할 때 반고(盤古)의 후예는 동이계통, 소호씨의 후예가 부여(夫餘),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으며 은나라의 왕실이 동이족, 진시황도 동이족, 그리고 여진(女眞)족도 후기의 동이계성원임을 념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인류사는 우리 민족도 여타 민족과 같이 여러 부동한 씨족, 부족의 융합체라는 것을 말해준다. 때문에 우리 민족의 조상들이 수많은 토템물을 가질수밖에 없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지금에 와서 학자들이 토템문화에 관심을 돌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국의 한국학중앙연구원 허흥식교수는 《단군신화와 동아시아 민족신화의 토템에서 범의 위상》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 고대신화의 토템은 범, 곰, 사슴, 고니 등 야생동물 뿐 아니라, 해와 달과 북극성 등 천체를 내포한 천신이 있고, 말과 소, 돼지 등 가축과 산천과 바위와 고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물과 무생물이 포함되었다. 이 가운데서 맹수인 곰과 범은 불교에 의해서도 소멸되지 않는 대표적인 토템이고, 그 가운데서 범은 곰보다 실제로 우세한 토템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토템을 어떻게 찾는가? 선조들의 탄생신화는 우리가 토템을 찾는 근거로 된다. 토템물은 모체감응(母體感應), 입거(入居), 직접 선조들을 생육, 혹은 변한 동식물과 기타 객체 대상물이다. 그리고 선조들이 탄생할 때 필요한 전제조건, 혹은 도움이 되었던 물체도 토템과 무관하지 않다. 

사례의 하나로 고주몽의 탄생신화가 전형적이다. 《위서》(魏書)의 기록에 의하면 주몽의 어머니 하백녀를 부여왕이 방안에 가두어 놓았다. 하루는 해빛이 하백녀의 몸을 비추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해빛을 피했지만 해의 그림자는 또 그녀를 따랐다. 그로하여 그녀는 곧 임신이 되었다. 그녀가 낳은 것은 알이었는데 크기가 다섯되나 되였다. 부여왕은 그것을 꺼리어 그 알을 개에게 던졌지만 개는 이 알을 먹지 않았다. 또 돼지에게 주었지만 돼지도 먹지 않았다. 또 길에 버렸지만 소와 말은 이 알을 피했다. 후에는 들판에 버렸는데 여러 새들이 날개로 이 알을 감싸주었다. 부여왕은 이 알을 쪼개려고 했지만 알은 쪼개지지를 않아 할 수 없이 이 알을 하백녀에게 돌려주었다. 하백녀는 이 알을 이불로 덮어 따뜻한 곳에 두었다. 한 남자애가 알에서 나왔다. 이 아이가 커서 고주몽으로 불리웠다. 

고주몽의 탄생신화에서 보듯이 하백녀 류화는 해빛으로 인해 임신되였고 낳은 것이 알이었다. 여기에서 해빛(태양), 알(새)는 곧 고주몽의 토템이다. 그 시대 태양과 알은 다 둥글었기에 새와 태양을 다 동일시하였다. 그리고 이 신화에서 왜 개, 돼지, 소, 말 등 짐승들은 알을 해치지 않았고 여러 새들은 또 알을 보호해주었는가? 이들은 다 고주몽의 친척, 즉 토템이였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일연이 쓴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간추려 보자. 환인의 서자 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삼위 태백산정 신단수아래에 내렸다. 그는 풍백, 우사, 운사들로 하여금 인간세상의 3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한 동굴에 사는 곰과 범이 환웅이 내린 신단수 아래에 가서 사람되기를 빌었다. 곰은 수련을 거쳐 사람으로 되였지만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했기에 념원을 이루지 못했다. 사람으로 된 웅녀는 또 신단수 아래에서 애기 갖기를 기원했다. 천신 환웅이 사람으로 변신해 웅녀와 혼인을 하였다. 그들이 낳은 아들이 단군 왕검이다. 일연과 동시대인인 이승휴의 《제왕운기》의 단군신화는 환인을 상제(上帝)라 하였고 환웅을 단웅(檀雄) 단수신(檀樹神)이라고 했으나 왕검은 그저 檀君이라고 지칭했다. 

학계에서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을 보편적으로 우리 민족의 토템으로 인정한다. 필자는 신단수, 범, 그리고 풍맥, 우사, 운사도 토템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단군 왕검의 탄생은 신단수와 깊은 인연이 있다. 환웅이 신단수 아래에 내렸고 곰이 신단수 아래에서 사람이 되기를 기원했으며 또 아기를 가지려고 빌었다. 그리고 이승휴의《제왕운기》에서 단수신(檀雄)의 아들을 단군(檀君)이라고도 함은 단군신화에서 신단수는 아버지 역할을 한 것이다. 곰과 범이 한 동굴에 살았다는 것은 곰토템씨족과 범토템씨족지간에 혼인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단군 왕검의 할아버지는 상제(上帝)라고 하는 하늘신이다. 하늘신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원시인들의 관념으로 하늘신이란 보이지 않고 감지할 수 없는 허무한 것이 아니다. 하늘신이란 해, 달, 별, 바람, 구름, 비, 우뢰 등 천체와 직결된 존재이다. 단군 왕검의 아버지가 천왕(天王)으로 불리우고 그가 풍백, 우사, 운사로 하여금 지상의 일을 주관하게 했다고 하는 것은 풍신, 우신, 운신 이 세 신과도 남이 아닌 한 집안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고대원시인들의 관념으로 바람, 비, 구름도 단군 왕검의 친척(토템)으로 보는 것은 부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신화, 왕비 알영의 탄생신화, 신라 석탈해왕의 탄생신화, 미추왕의 조상 김알지의 탄생신화, 고려시조 왕건의 조상에 관한 신화, 작제건의 안해에 관한 신화, 아달라 왕때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에 관한 신화들은 우리가 역사인물들의 토템을 찾는 근거로 된다. 백제왕 견훤의 탄생은 지렁이와 관련이 있는데 지렁이는 곧 견훤의 토템인것이다. 

매개 성씨의 시조탄생이나 어떤 특정 인물의 탄생을 두고 왕왕 신화전설이 류전돼 왔는데 이런 신화전설속에 해당 인물의 토템이 내포되어 있는것이다. 

중국, 조선, 한국 등 동남아의 여러 민족은 지금도 사람이 태어난 해의 띠(屬)를 가지는 풍속을 유지하는데 12개의 띠(12生肖), 즉 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는 모두 토템인 것이다. 

중국 광주 해주구 관주가 륜두촌(廣州海珠區官州街侖頭村)에는 중화토템박물관과 중화성명박물관이 서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토템박물관에는 화하토템기원, 성씨토템, 가족토템, 띠(生肖)토템과 상표토템 천여건이 진렬되어 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이 토템박물관에 전시된 토템자료는 우리 민족토템연구에 대해서도 큰 참고가치를 가지고있다. 

한개 민족의 토템의 풍부함과 빈약함은 그 민족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신화에 의해 결정된다. 일반적으로 풍부한 신화를 보존하고 있는 민족은 토템물도 풍부하지만 신화가 없는 민족은 토템물도 빈약한 것이다. 

용과 봉황이 분명 우리민족에게도 속하는 토템물이지만 학자들은 왕왕 이것을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민속전통으로 보면 우리민족은 용과 봉황에 대한 숭배는 대단하다. 남자들의 이름에 용자, 여자들의 이름에 봉자를 쓰는 빈도는 여타민족보다 높다. 주위를 돌아보면 남자는 김용, 박용, 이용, 용남, 성용, 명용, 복용, 억용, 운용, 금용, 용운 허다하며 여자는 봉자, 봉녀, 봉순, 봉선,봉옥, 봉화, 봉련 등 수두룩하다. 

현, 당대에 와서 왕왕 한 개 민족에 한 개의 대표적인 토템을 내세우는 것은 토템이 가지고 있는 기발(旗幟)작용과 응집력 때문이다. 모든 국가들에 국기, 국가, 국회가 하나씩 있듯이 토템을 하나의 기치로 하기 위해서이다. 

한개 민족의 형성과정을 보면 민족은 부동한 토템물을 가진 씨족, 부족의 집합체이다. 민족을 하나의 그릇으로 비유한다면 이 그릇 안에는 여러 씨족 부족 성원들이 담겨있다. 토템은 매개 씨족의 성원과 관계되는 물체로 개개인의 부호인 것이다. 때문에 토템은 어디까지나 씨족의 개념이지 민족의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민족사회에 와서 우리가 민족토템을 운운하는 것은 민족이 형성된 다음 씨족 부족이 사라졌기에 그 민족에 속하는 각 부족, 씨족들의 토템을 통털어 말하는 것이다.

 

 

민족은 문화의 개념


이 세상에는 원래 민족이란 개념과 단어가 없었다. 

민족이란 인류발전의 산생물이다. 

인류사를 보면 원시공동체사회로부터 가족사회, 씨족사회와 부족사회가 나타났으며 또 여러 씨족, 부족들의 끊임없는 융합과정에서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심리소질 이 네 가지 요소가 상호 작용하여 하나하나의 민족을 산생시켰다. 

민족은 단일혈통의 집합체가 아니라 여러 부동한 혈통의 집합체로서 민족의 본질은 공유한 문화다. 

조선민족도 여타 민족과 마찬가지로 단일 혈통의 민족일 수 없다. 

한국 건국대학 정치외교학과 신복용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형성되었을가? 정확하게 말한다면 우리 민족은 북방계와 남방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그 밖의 소수민족으로서는 내침족(來侵族)과 귀화인의 네 종족으로 이뤄지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유전자를 따져보면 적어도 35개이상의 혈통으로 이뤄져 있다. 태초에 아프리카에서 인류가 태여난 이후 그들은 동이 트는 곳을 향해 한없이 이주를 하였다.” 

그러면 왜서 우리 민족을 하나의 혈통으로 보는 현상이 나타나는가? 한국 고려대학 정호영교수는 《민족공동체의 형성과 변화: 력사적, 이론적 접근》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중요한 것은 민족은 실제로 같은 혈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합”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는 ‘믿음’”이란 문화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생물학적인 근거는 아니라는 뜻이다. 

민족을 혈통으로 논의하는 현상에 대해 신복용교수는 이런 비판을 하였다. “현대 민족주의에서 이미 혈통은 대체로 부인되고 있으며 역사적 운명의 공유와 일체감, 그리고 언어의 통질성을 민족의 본질로 삼는 것이 지금의 추세인 점에서 보면 혈통이 같거나 다름은 민족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인순이도 할리도 주현미도 윤수일도 모두 우리가 보듬고 사는 세계화 시대인데 더 이상 내 피줄만을 따져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민족을 문화의 개념으로 보는 것은 민족개념의 본질, 핵심을 꿰뚫은 논리이지만 만약 민족을 혈통으로 논의한다면 오히려 민족의 정체성확보에 불리한 페단이 생긴다. 

필자가 1989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그 당시 미국 본토에는 120만이요, 130만이요 하는 한국 이민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국인 이민 3세는 자신을 미국인이라고 생각하지 한국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국에는 우리 민족 학교가 없다. 이민 3세들이 받은 교육은 미국학교에서 받은 서양교육이고 그들 대부분은 우리 말을 모르는 후대들로 미국문화에 아주 푹 젖어 있다고 하였다. 한국인 이민 3세가 이러할진데 이들의 후대들은 어떠하겠는가? 후에 한국 방문시 또 이런 일이 있었다. 한 한국인 회사에 갔을 때 전형적인 한국인 생김새의 접대원 아가씨가 커피를 대접하면서 하는 한국말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옆에 있는 친구가 필자를 보고 이 아가씨가 어느 민족이겠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왔다. 실은 물음과 동시에 답안이 나온 것이다. 이 아가씨는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석사과정까지 마친 한족 처녀였다. 만약 이 아가씨가 계속 한국인 직장에서 일하고 한국청년과 결혼한다면 그들의 후예는 물론, 지금 이 아가씨도 한국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로부터 종종 이런 현상을 목격한다. 우리 민족 후대들이지만 유치원 때부터 한족들의 교육을 받았기에 우리 말을 전혀 모르고 심지어 민족풍속과 예절을 모르는 아이들이 많다. 그들 대부분은 한족들과 결혼한다. 그들의 후예를 어느 민족으로 보아야 하는가? 

상기의 현상을 놓고 민족을 혈통으로 운운한다는 것은 이미 의의를 상실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우리들게 시사해주는 점이 있다. 실상 매개인의 민족신분은 자신이 어느 민족의 문화를 고수하는가 하는 문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후예라 할지라도 우리민족의 말을 못하고 풍속습관과 예의 범절 등 문화를 잃어 버린다면 그는 타민족이 되는것이고 타민족성원이지만 그가 우리민족문화를 받아들이고 고수한다면 그는 우리민족성원이 되는것이다. 그래서 민족성원은 고정불변하는것이 아니다. 

글로벌시대라고 하는 현시대, 국제적인 인적교류가 날로 빈번해지는 현시대, 그리고 타민족과의 결혼, 국제 결혼이 점점 늘고있는 현시점, 한개 민족의 흥망성쇄는 혈통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 결정되는것이다. 우리는 늘상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잘한다. “피”를 말함에 있어서 응당 “문화의 피”가 더 중요시 되어야 한다. 

인류의 융합발전과 민족의 형상과정, 민족성원의 전이와 변화를 지켜보면서 필자는 《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란 글에서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을수 없었다. 

네속에 내가 있고 내속에 네가 있는것이 인류사이고 민족사다.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 
민족은 혈통으로 구분되는것이 아니라 문화로 구분된다. 
혈통으로 말하면 각 민족은 모두 형제다.

 

 

토템관념의 현실의의


토템관념은 인간과 자연지간의 혈연관계, 인간과 인간지간의 혈연관계를 확인하는 관념으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지간의 조화를 이루는 관념이다. 

민족전통문화의 정수는 바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천(天), 지(地), 인(人), 신(神) 합일의 사상이다. 

하지만 인간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할수록 인간은 민족전통문화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인성을 상실하고 자아를 잃고 있다. 

현대인류에 있어서 상기의 두 가지 조화를 이룩하느냐 않느냐는 인류의 생사존망과 직결되는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다. 

오늘 날, 공업문명과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함과 더불어 자연에 대한 인간의 파괴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생존환경이 갈수록 렬악해지고 있다. 그에 따른 인간의 도덕성상실은 인간지간의 “랭담”을 초래하여 인간의 삶의 안정성마저 위협하고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인류의 삶의 터전인 지구를 놓고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지구도 살아 숨쉬고 희로애락이 있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이다. 지구는 지금 자신의 품속에 살고 있는 60억인구의 온갖 시달림을 받고 있다. 지구는 자신의 몸우에 수풀처럼 일떠선 무수한 콩크리트 건축물과 공장으로 인해 숨쉬기도 가쁘다. 몸속으로 파고드는 지하철, 지하축조물과 각종 광산의 개발로 기막힌 상처를 입고 있다. 또한 온몸에 들씌운 오염물로 만신창이 되었다. 지구는 앓고있고 신음하고 있고 몸부림 치고 있다. 그래서 무서운 광풍이 자주 오고 홍수가 자주 오고 지진이 자주 와서 무수한 사람들이 생명을 앗아가고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연현상이라고 말할뿐 그 책임을 자신으로부터 찾지 않는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60억 인구는 모두 지구란 이 거대한 어머니가 낳아키운 형제자매다. 하지만 국가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종교가 다름을 이유로 각자의 리익과 목표를 위해 매일매시각 서로 각축전을 벌리고 있다. 현대전쟁에 있어서는 승자도 결국은 패자다. 한순간 승리자이지만 전쟁으로 인한 생태파괴와 패자의 반발과 복수가 가져다주는 악과는 패자의 손실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쌍롱과 팔레스티나의 알라파트는 천년 전에 한 할아버지를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두 개의 국가, 두개의 종교로 나누어지면서 서로 죽기내기로 싸웠다. 결과 그들 둘은 서로 다 크게 다치고 말았다. 만약 그들의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눈을 뜨고 천년후의 두 손자를 굽어본다면 그 감회가 어떠하겠는가? 

인류의 삶의 터전인 이 지구는 무수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생물 고고학가의 화석발견에 의하면 나이가 50억년인 이 지구에는 현생인류이전에도 수차례 인류의 발생과 멸망이 거듭되었다고 한다. 인구의 대폭팔, 생태균형의 파괴, 자원의 고갈, 핵전쟁은 인류멸망의 원인이 될수 있다. 몇백만년 혹은 몇천만년후, 지구상의 생존조건이 회복될 때 인류는 다시 태어나서 원시사회, 노예사회, 봉건사회 등 단계를 거쳐 또 고도의 문명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현생 인류가 지구에서 생존하려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계선, 인간지간의 관계 계선이 유일한 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과 자연이 조화적인 관계를 이루고 인간과 인간이 조화적 관계를 이루는 길만이 현생 인류의 살 길이다. 

현대인들의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여 서방철학가들은 문제해결의 희망을 토템관념회복에 걸면서 새로운 사회질서구축을 호소하고있다.

 

 

나오는 말


세계 최초의 토템문화연구는 1791년에 시작되었고 19세기 하반기부터 20세기 상반기까지 서방학계에서는 토템문화연구 열조가 일어났다. 중국에서 맨처음 토템문화를 연구한 사람은 엄복(厳複)선생이다. 1903년 그가 번역한 《사회통전(社會通詮)》이란 책에서 처음으로 “totem”을 “図騰”으로 번역한 후 “토템”이란 단어가 있게 되었다. 엄복선생 이후 곽말약, 문일다 등 학자들도 토템을 연구하였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토템연구는 그닥 활발하게 진행되지는 못했다. 근간에 《용토템》, 《곰토템》 등 연구저서들이 출판되고 신화학학술토론회를 가지는 등 일은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문제점도 없지 않다. 

필자는  시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부터 토템문화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찾아 읽으면서 이른 바 “토템문화”의 진수를 터득하기 위해 힘써 왔다. 

안타까웠던 것은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에게는 우리 민족의 토템문화를 론한 체계적인 전문저서가 없다는 것이다. 몇몇 학자들의 토템관련 론문이 간혹 눈에 띄이지만 체계적이고 계통적인 연구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타민족학자와 국외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흡수하면서 나름대로 진위를 판단하고 우리 민족신화와 토템물에 접근하였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모종 의미에서 말한다면 한 이론의 생명력의 강약은 이 이론이 역사의 약점을 얼마나 극복했는가를 보는 것이고 또 무형중 후세 사람들이 초월하여 재구축할 수 있는 약점을 얼마나 묻어두었는가를 보는 것이다. 약점은 창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어차피 민족토템문화에 대한 연구는 학계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수 없다. 여러 학자들이 관심을 돌리면 연구는 활성화 될 것이다. 우리 학계에 토템문화연구붐이 일어날것을 희망하면서 졸문에 대한 기탄없는 비평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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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문화보》2007년 4월 3일. 
2) 리지린 저 《고조선연구》조선과학원출판사, 1963년 2월, P119-121.

3) 2002년 3월 21일자 한국 대구 《매일신문》

4) 이원저 저《토템미학과 현대인류》,학림출판사, 1992년 3월 제1판, P27-28, P21-23.

5) 위와 같음. 

6) 이병해  《부족문화와 선진문학》,고등교육출판사, 1995년 11월, 제1판, P87, P135. 

7) 위와 같음. 

8) 우병안 저《중국민속학》,료녕대학출판사, 1985년 8월 제1판, P263. 

9) 허흥식 “단군신화와 동아시아 민족신화의 토템에서의 범의 위상”《만주 북방 민족의 요람》, 만주학회 제11차 학술대회 발표 논문집, 2005년 9월 2일, P70-76. 

10) 신복용《한국인은 단일민족이 아니다》, 2001년 5월 8일자 료녕조선문보. 

11) 정호영《민족공동체의 형성과 변화: 력사적, 이론적 접근》 

12) 신복용《한국인은 단일민족이 아니다》 

13) 곽패명 편저《풀리지 않은 인류의 수수께끼》(人類未解之謎), 길림문사출판사, 2004년 12월 P17-24. 


--<21세기 중국에서의 한국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태평무 주필, 민족출판사, 2008년 9월 출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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