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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시인의 연못’에 자리잡은 ‘계관시인 비’. 뒤로 한라산이 보인다.
이 칭호를 받은 사람은 영국 왕실에서 봉급을 받지만, 후에 직책에 따르는 시인으로서의 특정한 의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 직책은 그것이 계속 계승된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계관시인이라는 직책은 1616년 제임스 1세가 벤 존슨에게 연금을 준 데서 시작되었으며, 1630년에 찰스 1세는 연금 지불을 승인하고 연금 액수를 늘렸다. 또 1630년부터는 '카나리아 제도산 포도주 술통'이 해마다 추가로 주어졌지만, 1790년 계관시인이 된 헨리 제임스 파이가 포도주 대신 돈으로 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런 관행은 중단되었다.
존슨이 연금을 받은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인으로서 국왕에게 봉사한 공로를 인정받고 계속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637년에 존슨이 죽은 뒤로는 16개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윌리엄 대버넌트 경에게 이와 비슷한 봉사를 한 대가로 또한 비슷한 연금이 지불되었다. 1668년 대버넌트가 죽은 뒤 1주일 만에 존 드라이든이 계관시인으로 임명되면서부터 계관시인이라는 직책은 공석이 되면 자동적으로 메워야 하는 왕실의 상설 직책이 되었다.
1688년의 명예혁명 때 드라이든은 충성의 맹세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계관시인의 지위는 정치성을 띠게 되었으며, 이런 성격은 그뒤 200년이 넘도록 유지되었다. 드라이든의 후임자인 토머스 섀드월은 새해와 왕가의 생일에 송가를 짓는 관습을 만들었고, 이것은 1690~1820년경까지 전통으로 굳어져 계관시인의 주요한 직분이 되었다. 송가에는 곡을 붙여 국왕 앞에서 연주했다. 로버트 사우디는 1813년 계관시인으로 임명되자 이 관습을 없애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이 관습은 지켜지지 않아도 묵인되었지만 정식으로 폐지된 것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빅토리아 여왕이 1843년 윌리엄 워즈워스를 계관시인으로 임명한 때부터 계관시인이라는 지위는 뛰어난 시인에 대한 보상을 의미했고, 그뒤 이 직책은 어떤 특정한 의무를 지지 않게 되었다. 알프레드 테니슨 이후의 계관시인들이 왕실 행사와 국가 행사를 위해 시를 쓴 것은 다만 그 행사의 정신에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계관시인의 명단과 임기는 다음과 같다. 존 드라이든(1668~89), 토머스 섀드월(1689~92), 네이엄 테이트(1692~1715), 니콜러스 로(1715~18), 로렌스 유스던(1718~30), 콜리 키버(1730~57), 윌리엄 화이트헤드(1757~85), 토머스 워턴(1785~90), 헨리 제임스 파이(1790~1813), 로버트 사우디(1813~43), 윌리엄 워즈워스(1843~50), 알프레드 테니(1850~92), 알프레드 오스틴(1896~1913), 로버트 브리지스(1913~30), 존 메이스필드(1930~67), 세실 데이 루이스(1968~72), 존 베처먼 경(1972~84), 테드 휴스(1984~) 등이다.
1985년 미국 정부는 계관시인이라는 칭호를 만들어 의회도서관에서 시 부문 고문의 지위를 갖는 사람에게 이 칭호를 주었다. 의회도서관의 시 부문 고문과 계관시인은 해마다 새로 임명된다. 미국의 계관시인은 그리 많지 않은 급료를 받으며, 주요한 시작품을 1편씩 제출해야 하고 특정한 국가행사에 참석해야 한다. 계관시인이라는 칭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명예의 상징으로 월계관을 씌워준 전통에서 유래했다.
=======================================계관시인은 한 나라의 가장 저명하고 명예로운 시인을 가리키는 칭호다. 공식적으로는, 왕실에서 가장 명예로운 시인에게 하사하는 칭호를 말한다. 비공식적으로 보았을 때, 영국 최초의 계관시인은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에 살았던 벤 존슨이다[참고로 셰익스피어는 존슨의 첫 번째 희극 〈십인십색(Every Man in His Humour)〉(1598)에서 주연을 맡았다]. 1605년, 존슨은 여러 편의 가면극을 내놓았다. 1616년, 그는 계관시인으로 지명되었고 상당한 양의 연금을 받게 되었다. 존슨의 작품 중 대표작으로는 희극 〈볼포네(Volpone)〉(1606), 〈에피코이네(Epicoene)〉(1609), 〈연금술사〉(1610) 등이 있다.
일부는 최초의 계관시인이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 ?1552~1599)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1638년 이전까지 계관시인이란 칭호를 수여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계관시인이란 칭호를 얻은 극작가는 윌리엄 대버넌트(William D'Avenant, 1606~1668)다. 이외에 영국의 계관시인으로는 존 드라이든(1631~1700),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 그리고 앨프리드 테니슨(1809~1892) 등이 있다.
이 칭호를 받은 사람은 영국 왕실에서 봉급을 받지만, 후에 직책에 따르는 시인으로서의 특정한 의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 직책은 그것이 계속 계승된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계관시인이라는 직책은 1616년 제임스 1세가 벤 존슨에게 연금을 준 데서 시작되었으며, 1630년에 찰스 1세는 연금 지불을 승인하고 연금 액수를 늘렸다. 또 1630년부터는 '카나리아 제도산 포도주 술통'이 해마다 추가로 주어졌지만, 1790년 계관시인이 된 헨리 제임스 파이가 포도주 대신 돈으로 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런 관행은 중단되었다.
존슨이 연금을 받은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인으로서 국왕에게 봉사한 공로를 인정받고 계속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637년에 존슨이 죽은 뒤로는 16개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윌리엄 대버넌트 경에게 이와 비슷한 봉사를 한 대가로 또한 비슷한 연금이 지불되었다. 1668년 대버넌트가 죽은 뒤 1주일 만에 존 드라이든이 계관시인으로 임명되면서부터 계관시인이라는 직책은 공석이 되면 자동적으로 메워야 하는 왕실의 상설 직책이 되었다.
1688년의 명예혁명 때 드라이든은 충성의 맹세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계관시인의 지위는 정치성을 띠게 되었으며, 이런 성격은 그뒤 200년이 넘도록 유지되었다. 드라이든의 후임자인 토머스 섀드월은 새해와 왕가의 생일에 송가를 짓는 관습을 만들었고, 이것은 1690~1820년경까지 전통으로 굳어져 계관시인의 주요한 직분이 되었다. 송가에는 곡을 붙여 국왕 앞에서 연주했다. 로버트 사우디는 1813년 계관시인으로 임명되자 이 관습을 없애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이 관습은 지켜지지 않아도 묵인되었지만 정식으로 폐지된 것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빅토리아 여왕이 1843년 윌리엄 워즈워스를 계관시인으로 임명한 때부터 계관시인이라는 지위는 뛰어난 시인에 대한 보상을 의미했고, 그뒤 이 직책은 어떤 특정한 의무를 지지 않게 되었다. 알프레드 테니슨 이후의 계관시인들이 왕실 행사와 국가 행사를 위해 시를 쓴 것은 다만 그 행사의 정신에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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