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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者 옛반려를 알아보다...
2016년 12월 07일 00시 58분  조회:6978  추천:0  작성자: 죽림
 
Picto infobox music.png
존 바에즈
Joan Baez
Joan baez01.jpg
2003년 모습
기본 정보
본명 존 챈도스 바에즈
Joan Chandos Baez
출생 1941년 1월 9일 (75세)
미국 미국 뉴욕 스태튼아일랜드
국적 미국 미국
직업 가수, 인권 운동가, 반전 운동가
장르 포크 록컨트리 음악
악기 보컬어쿠스틱 기타피아노
활동 시기 1959년 - 현재

존 챈도스 바에즈(Joan Chandos Baez1941년 1월 9일 ~ )는 미국의 가수이며, 인권 운동가이며 반전 평화 운동가이다.

 

 

경력[편집]

성장과정[편집]

1941년 1월 9일 뉴욕의 스태튼아일랜드에서 멕시코 출신의 앨버트 비니시오 바에즈(Albert Vinicio Baez)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브리지 바에즈(Joan Bridge Baez)의 세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핵무기 제조에 반대하는 물리학자였으며 어머니는 희곡작가였다. 나중에 바에즈가 인종차별을 반대하고 반전평화운동가로서 활동하게 된 데에는 반핵물리학자였던 멕시코계 아버지를 둔 가정적 환경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음악계 데뷔[편집]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 고등학교(Palo Alto High School)를 다닌 바에즈는 음악에 심취하여 졸업 무렵에는 자신의 노래를 녹음하여 음반회사에 보내기도 하였다. 1958년 아버지의 새로운 직장 때문에 매사추세츠로 이주한 그녀는 보스턴 대학교(Boston University)에 진학하지만 직업적인 가수활동을 하기 위하여 곧 중퇴하였다.

1959년 캠브리지(Cambridge)의 포크음악클럽인 클럽 47(Club 47)에서 정식으로 노래하기 시작한 바에즈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The Newport Folk Festival)을 통하여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1960년 포크 전문 레이블인 뱅가드(Vanguard Recording Society)와 장기계약을 맺고 음반들을 발매하였다.

반전운동[편집]

 
밥 딜런과 함께

바에즈는 1961년 뉴욕에서 밥 딜런을 만나 함께 전국순회공연을 하며 흑인들의 인권 향상을 위한 인종차별 철폐운동에 앞장서고 월남 반전평화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국내외에서 펼친 음악활동만큼 반전운동도 맹렬했던 그녀는 직접 반전시위에 가담하여 체포당하기도 하였다. 1968년 3월 26일 반전운동가인 데이비드 해리스(David Harris)와 결혼한 바에즈는 해리스가 비폭력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양심적 병역거부로 투옥되자 우드스탁 축제(The Woodstock Festival)에 참여하는 등 반전운동에 더욱 열중하게 되었다.

작품활동[편집]

베트남 전쟁이 끝나가면서 바에즈의 활동도 변화되어 전통 포크의 모습에서 새로운 음악스타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녀의 최대 명곡인 〈Diamond & Rust〉는 새로운 음반사 A&M를 통하여 1975년 4월에 발매되었다.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하고, 대학마저 중퇴했지만 실력으로 평생 큰 업적을 이루었다. 바에즈는 8장의 골드앨범과 1장의 골드싱글을 기록하였다. 그래미상후보에 6번 선정되었으며 2007년 그래미 평생공로상(Lifetime Achievement Award)을 수상하였다. 인권과 평화운동의 공로로 2개 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았고 2개 주로부터 존 바에즈의 날(Joan Baez Day)을 지정받는 명예를 얻었다.

골드 앨범 및 골드

  •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 (1971년)
  •  
==========================================

 

(출처:Wikipedia)

 

 

존 바에즈(Joan Baez)는 대중에게 밥 딜런, 스티브 잡스의 연인이었으며, 60년대를 풍미한 ‘포크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칭호들은 그녀를 표현하기에 너무나 부족합니다. 왜냐면 그녀는 뮤즈, 혹은 포크 뮤지션이기 전에 인권운동가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음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음악에서 그렇듯 전쟁터에서도 생명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그 모든 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소용없죠.

- 바에즈

 

 

오늘은 평화주의자이자, 인권운동가 존 바에즈를 알아볼까 합니다.


 

 

유년기 - 인종과 사상의 ‘다름’, 음악의 자극제가 되다

 

존 바에즈는 멕시코인 물리학자인 아버지와 스코틀랜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반전론자였던 그녀의 아버지 영향으로, 어린 나이부터 인권과 정치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런 아버지의 행동이 존 바에즈에게는 가장 큰 유산이었다고 말하는데요.

 

 

 

바에즈가 여성들

 

 

그녀는 남캘리포니아 레드랜즈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됩니다. 백인들은 피부가 검은 멕시코계라는 이유로 따돌렸는데요. 그리고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정치적 발언을 자주 하여,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존 바에즈는 그때 느낀 ‘고립’과 ‘다름’이 음악을 하기 위한 자극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노력의 결과, 그녀만의 톤과 비브라토를 가지게 되었는데요. 존 바에즈는 교내 장기자랑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음악활동을 통해 인지도를 얻게 됩니다.

 

청아한 목소리는 대중을 사로잡았으며, 당대 최고의 아이돌이자, 우디 거스리(Woody Gurthrie)를 잇는 포크계의 샛별이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킹과 흑인인권 운동에 앞장서다

 

프로테스탄트였던 존 바에즈는 퀘이커교 모임을 통해 마틴 루터킹의 연설을 듣고, 그의 사상을 배웠습니다. 어릴 적부터 본인이 인종차별을 경험했고, 흑인 출입을 제한한 공연까지 경험한 그녀는 누구보다 인종차별의 심각성을 크게 느꼈는데요. 마틴 루터킹의 연설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고, 그와 비폭력주의 운동에 동참하게 됩니다.

 

 

 

‘사상적 스승’ 마틴 루터킹과 함께 (출처:nesta)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연설로 유명한 1963년 워싱턴 대행진 때, 존 바에즈는 20대 초반에 불과했지만 35만 명의 군중을 이끌며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열창했습니다. 그 외에도 흑인 아이들이 백인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입학하는 현장에 있었으며, 이때부터 대중들에게 단순히 가수가 아닌 인권운동가로 알려집니다.

 

마틴 루터킹은 존 바에즈의 사상을 다지는 데 다른 누구보다 훨씬 많은 도움을 주고, 신념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소울메이트’ 밥 딜런과 인권을 노래하다

 

무명이었던 밥 딜런(Bob Dylan)은 존 바에즈를 동경하고 만나고 싶었습니다. 피트 시거(Pete Seeger)의 소개로 두 사람의 만남은 이루어지고, 동갑내기이면서 서로의 재능에 매력을 느낀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합니다.

 

이미 스타였던 존 바에즈는 그를 자신의 무대 게스트로 세우면서 도움을 주는데요. 밥 딜런은 순식간에 포크의 거물이 됩니다. 존 바에즈는 밥 딜런에게 정치적 행보에 동참하길 원했지만, 밥 딜런은 원하지 않았으며, 결국 두 사람은 결별하게 됩니다.

 

 

 

‘소울메이트’ 밥 딜런과 함께 (출처:tripod)

 

 

하지만 밥 딜런은 ‘Blowin’ in the wind’와 같은 전쟁반대, 인권을 노래하는 곡들을 씁니다. 그때부터 밥 딜런은 60년대 최고의 저항 뮤지션이자, 가사를 문학 반열에 올려놓은 시인으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존 바에즈는 그의 방식을 인정하고, 이 인연은 나중에 ‘롤링선더’라는 프로젝트 밴드를 통해 이어집니다.

 

사람이 얼마나 먼 길을 걸어봐야

비로소 참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중략)

얼마나 많은 포화가 휩쓸어야

세상에 영원한 평화가 찾아올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 곁에 흩날리고 있다네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다네

 

- 밥 딜런 ‘Blowin’ in the wind’ 가사 중

 

대중들에게 두 사람은 혼동기였던 60년대에 한 줄기의 빛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영향으로 포크는 저항의 음악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많은 후배 뮤지션들이 그들을 롤모델 삼아 노래 부르고 있습니다.

 

 

공연에서 밥 딜런 곡을 자주 부르는  바에즈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 최전선에 나서다

 

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이 거세지자 미국에서 전국적으로 반전운동이 일어납니다. 존 바에즈도 당시 오클라호마에서 징집 거부 운동 대열에 합류하는데요. 그때 징병 거부 운동의 지도자인 데이빗 해리스(David Harris)를 만나, 비폭력 시위에 대한 열정을 공유합니다. 그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연인에서 결혼까지 골인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데이빗 해리스가 징병거부로 수감되면서 둘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남편이었던 데이빗 해리스와 함께(출처: three years in prison)

 

 

70년대 초, 존 바에즈는 베트남 남부에 직접 찾아가는데요. 하지만 그때 ‘크리스마스 폭격’이 시작되고 그녀는 11일 동안 방공호 아래에서 절망적인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며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녀의 곡은 금지곡이 되었지만 군인들은 몰래 들었으며, 무사히 군 복무를 마치거나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오, 방공호의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내게 어떤 선물을 주었던가

내게 미소를 지어 주고 조용히 고통을 나누었지

(중략)

나는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아들아, 넌 지금 어디 있니?

 

- 바에즈 - ‘Where Are You Now, My Son?’ 가사 중

 

하노이 외에도 태국의 라오스 피난민 수용소, 말레이시아 표류난민들의 임시거류지에서 노래를 부르며 최전선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우드스탁, 반전과 희망을 노래하다

 

혼란스러운 60년대, 당시 젊은 세대들이 가지고 있던 기성세대의 불만으로 히피 문화가 조성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반전, 사랑, 평화를 외치며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개최됩니다.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더 후 등 당대 최고 록스타들이 참가하였습니다. 존 바에즈 또한 임신한 몸으로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여하여 50만 명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반전을 외쳤습니다.

 

 

 

우드스탁의 영웅 지미 헨드릭스와 함께(출처:reddit)

 

 

우드스탁에서 지미 헨드릭스는 미국 국가를 기타로 연주해서 베트남 전쟁에 허덕이는 미국을 조롱했는데요. 왜곡된 기타음으로 폭격하는 소리를 내는 모습은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록됩니다.

 

우드스탁은 60년대의 종지부였으며,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는 축제였습니다. 그 이후로도 존 바에즈는 ‘라이브 에이드’에서도 첫 번째 순서로 노래를 불렀으며, 역사적 현장에는 항상 그녀가 있었습니다.



 

존 바에즈, 노래하는 인권운동가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사회적, 정치적 시각은 확고했습니다. 항상 비폭력 저항의 원칙에 충실하며, 세계 방방곡곡에서 그녀의 가치를 실현했습니다.

 

프랑코 정권이 끝난 스페인에서, 생방송 중 저항 세력의 성가로 유명한 ‘노 노스 모베란’을 열창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보스니아 내전에서는 ‘사라예보 첼리스트’로 유명한 ‘베드란 스마일로비치’와 함께 공연하며 시민들을 위로했는데요.

 

 

 

 

'사라예보 첼리스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의 행동에 자극받은 존 바에즈

 

 

그 외에도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일했으며, 후마니타스라는 인권보호기구의 회장으로 지내면서 군비 철폐에 관한 갖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이 인정받아, 2007년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하고, 인권 평화운동의 공로로 2개 대학교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아틀란타에서는 8월 2일, 산타나 크루즈에서는 8월 27일을 ‘존 바에즈의 날(Joan Baez Day)’로 지정받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명예는 행동에 깃드는 것이다.”(출처: thelocal)

 

 

 

뮤지션은 자신의 가치를 음악을 통해 표현합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음악은 유행을 타게 되고 대중과 멀어지기 마련인데요. 그녀는 음악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가치를 보여줬습니다. 추구하던 가치가 행동에 깃들었기 때문에 더 인정받을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그녀의 음악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은 언제 어떻게 죽을지 선택할 수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금 당장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뿐이다.

- 바에즈

 

 

 

출처: 포크의 여왕 존바에즈, 존바에즈 자서전 - 평화와 인권을 노래하다
=======================================

 

 

 

 
존 바에즈 -
Donna Donna(도나 도나) 가사
 
 
On a wagon bound for market
there's calf with a mournful eye.
 
High avove him there's swalow,
wingling swiftly through the sky.
 
장터가는 마차위에
슬픈눈의 송아지야
머리위로 제비 한마리
날쌔게 하늘을 나르네
 
 
 
 
 
 
How the winds are launghing,
they laugh with all their might.
 
Laugh and laugh the whole day through,
and half the summer's night.
바람들 웃는것 봐
허리꺽고 웃어대네
온종일 웃고 또 웃고
여름밤이 다 가도록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돈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돈
 
 
"Stop complaining" said the farmer,
"Who told you a calf to be?
 
Why don't you have wings to fly with,
like the swallow so pround and free?"
 
주인이 말했네. "불평일랑 그만해"
누가 너더러 송아지가 되랬나?
 
왜 당당하고 자유로운 제비처럼
날 수 있는 날개를 달지 못했니?
 
 
 
 
 
 
How the winds are laughing,
they laugh with all their might.
 
Laugh and laugh the whole day through,
And half the summer's night.
 
바람들은 계속 웃고 있네
온 종일 웃고 또 웃고,
여름 밤이 다 가도록
웃고 있네.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돈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돈
 
 
 
 
 
 
Calves are easily bound and slaughtered,
never knowing the reason why.
 
But whoever treasures freedom,
like the swallow has learned to fly.
 
송아지는 묶이어 죽음을 당하면서도
그 이유는 까맣게 모른다네
하지만 자유를 소중히 여긴다면
누구나 제비처럼 나는 법을 배우지
 
 
 
 
 
 
How the winds are laughing,
they laugh with all their might.
 
Laugh and laugh the whole day through,
and half the summer's night.
 
바람들은 계속 웃고 있네
온 종일 웃고 또 웃고,
여름밤이 다 가도록
웃고 있네.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존바에즈 도나도나?
 
이 곡은  극작가 Aaron Zeitlin이 제작한
연극 Esterke(1940~1941)가 1940년에
유태인의 언어인
이디시어(Yiddish)로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조국없이 떠돌아다니며
세계인의 핍박을 받았던
유태인의 불행한 삶을
노래했다는 해석이 있다.
 
이 곡이 그 후
20여년간 빛을 발하지 못하다가
가사가 다소 개사되어
1960년  Joan Baez와
1965년 Donovan이 리바이벌 하면서
인기를 얻게 된다.
 
 
 
3절로 구성된 이 곡은
유대인 대량학살(Holocaust)과
비유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바람(Wind)은 독일국민들로
농부(farmer)는  포로수용소 운전수들,
제비(swallow)는 유태인이 아닌 사람들,
송아지(calf)는 유태인을 나타낸다고 한다.
 
 
 
 
 
조안 바에즈
(Joan Baez, Joan Chandos Baez)?
 
 
존바에즈: 1941년 1월 9일 미국출생.
 
데뷔: 1959년 1집앨범
<>
 

 

 

 

 
한때  밥 딜런,
스티브 잡스의 연인이었으며,
60년대를 풍미한
"포크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다.
 
 
 
 
 
비교적  평안한 가정에서 자란 그녀이지만
 
소수자와 약자, 아프고 힘든 민중들을 위해
 
평생을 노래하며 살아온
 
"노래하는 인권운동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그녀의 노래는 
항상 힘없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위안이 되는 노래들이었고,
 
소외받는 약자들에게 힘이 되었다.
 
 
 
 
"나는 음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음악에서 그렇듯
전쟁터에서도
생명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그 모든 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소용없죠."
 
-존 바에즈-
 
 
 
멕시코인  물리학자인 아버지와
 
스코틀랜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비교적 평안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렸을때 반전론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때부터
인권과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중학교시절에  백인들은 그녀가
 
피부가 검은 멕시코계라는 이유로
그녀를 따돌림을 당하게 하고
 
존 바에즈는 그때 느낀
 "고립" 그리고 "다름"이
 
음악을 하기 위한
자극제가 되었다고 한다.
 
 
 
 
 
한때 마킨 루터킹의 연설을 듣고
 
그의 사상을 배웠으며
 
어릴때 인종차별을 느꼈던 그녀는
 
마틴 루터킹과 비폭력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마틴 루터킹이 
 존 바에즈의 사상을 다지고,
 
신념에 따라 행동할수 있도록 
많은 도움과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을 대표하는 곡을
부르기 시작하여,
1960년대 반전운동의 기수,
흑인민권운동가,
평화주의자,
포크계의 여왕으로 유명해진 그녀는
그래미상 후보에 6번씩이나 선정되었고,
 
2007년에는
그래미 평생공로상
(Lifetime Achievement Award)을
수상했다.
 
인권과 평화운동의 공로로
2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고,
2개의 주로부터
존 바에즈의 날
(Joan Baez Day)을 지정받는
명예를 얻는다.
 
 
 
 
 
양희은이 불렀던
"아름다운 것들"의 원곡은
존 바에즈의 노래 "Mary Hamilton" 이다.
 
 
우리나라에서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라는 노래가
"The River In the Pines",
 
 
들을수록  슬프면서도
가슴에 스며드는 노래
"Ace of sorrow"  등
 
 
 
 
들을수록 영혼을 맑게하고
 
스며들게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찬바람이 부는 가을과 겨울
 
이맘때 들으면
 
더 가슴에 스며드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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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밥 딜런과 존 바에즈의 서로 다른 길

 

2016-10-14 

 

존 바에즈, 페이스북에 밥 딜런 노벨문학상 축하
60년대 초반 뉴욕의 포크송 가수가 민권·반전의 기수로
그 자리에 계속 남은 존 바에즈
늘 한 곳에 머물지 않은 밥 딜런
 
존 바에즈(왼쪽)가 밥 딜런(오른쪽)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며 함께 올린 예전 젊은 시절 사진 존 바에즈 /페이스북 갈무리
 
한때 연인이기도 했던 가수 존 바에즈가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축하의 말을 전했다.
 
바에즈는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노벨문학상 수상은 밥 딜런의 불멸을 알려주는 또 한 걸음”이라며 “저항적이고, 세상을 등진 듯도 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이 예술가/작곡가는 노벨문학상에 딱 맞다”고 말했다. 바에즈는 “밥의 노래는 깊이, 어두움, 분노, 미스테리, 아름다움, 유머로 가득찼다. 지난 60년간 내가 그의 노래를 부를 때보다 기뻤던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런 노래는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소감을 밝히면서 젊은 시절 딜런과 함께 있던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
 
1941년생 동갑인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60년대의 아이콘’으로, ‘광장의 노래’로 함께 했고, 사랑했다. 그러나 둘은 1965년을 기점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1961년 4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하던 무렵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금새 연인이 되어 뉴욕의 한 호텔에서 함께 지냈다. 딜런이 무명작곡가에 불과했던 시절, 이미 신비한 미성으로 포크음악의 신예로 떠올랐던 바에즈는 딜런을 자신의 무대에 내세웠고, 딜런은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g in the wind), ‘하우스 오브 라이징 선’(House of rising sun) 등 자신의 곡을 바에즈가 부르게 했고, 둘은 어느새 민권·반전 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1963년 8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내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 이후, 이어진 워싱턴 대행진 뒤 20대 초반이었던 둘은 수많은 시민들 앞에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라는 노래를 부르며 공연했다. 1965년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이 시작된 직후 열린 7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도 딜런과 바에즈는 선배 피트 시거와 함께 반전 공연을 펼쳤다.
 

1963년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이 함께 공연을 하며 노래부르고 있다.

 
그러나 1965년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헤어진다. 딜런은 그해 어쿠스틱 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나타나 ‘포크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어나간다. 그러나 당시 관객들은 그를 향해 (예수를 배신한) “유다”라고 소리치며 항의했다. 그리고 그의 노랫말에는 점점 ‘우리’보다 ‘나’가 많아졌다. 이후 발표한 ‘미스터 탬버린맨’ 등 그의 걸작들도 대부분 개인의 고독을 노래한 곡들이 많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를 “사람들은 내게 이 시대의 양심으로서 의무를 회피하지 말고,밖으로 나와 그들을 어디론가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내가 대변하고 있다는 세대와 공통적인 게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밥 딜런과 헤어진 뒤에도 민권·반전 운동의 선봉에 섰고, 그 지평을 국제적으로 더 넓혀나갔다. 1971년 그리스 저항운동을 돕기 위한 콘서트를 그리스에서 연 것을 비롯해 프랑크 독재 치하의 스페인, 베트남, 북아일랜드, 아르헨티나, 레바논 등 전쟁과 독재에 시름하는 사람들을 찾아갔다.
 
이처럼 존 바에즈가 전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민중과 민권을 벗어나지 않은데 반해, 밥 딜런은 늘 움직였다. 포크록으로 넘어갔던 그는 이후 내슈빌 컨트리록으로 건너가기도 했고, 1980년대에는 기독교에 귀의해 가스펠록을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거기에서도 또 벗어났다.
 
밥 딜런은 존 바에즈와 헤어진 직후, 사라 라운즈 클레어와 결혼하는 등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고, 동시에 여러 여자들을 사귀다 늘 불화로 끝맺었다. 존 바에즈는 운동권 지도자였던 데이비드 해리스와 1968년 결혼했으나, 그도 이혼했다. 존 바에즈가 무료공연과 공연기금 전액기부 등을 할 때, 밥 딜런은 엄청난 금액의 위자료, 소송비용 등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또 순회공연에 나서 이를 메우기를 반복했다.
 
존 바에즈는 1993년 사라예보 내전 당시 자신의 공연을 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오는 관객들을 위해 방탄조끼를 입고 나서 눈물을 흘리며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고, 2011년 11월 뉴욕 리버티 파크에 통기타를 들고 나타나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며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에 대한 지지를 나타냈다. 존 바에즈는 그가 부른 노래 ‘흔들리지 않게’(노 노스 모베란·No Nos Moveran)처럼 (물가 심어진 나무처럼) 늘 그 자리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밥 딜런은 자신이 작곡한 노래이자, 종종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 ‘아임 낫 데어’(I am not there)처럼 늘 한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존 바에즈는 “나는 음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전쟁터에서도 생명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그 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밥 딜런은 “나는 집단적 인물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2001년 밥 딜런이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공연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지난 2011년 11월11일 뉴욕 리버티파크에서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농성’을 벌이고 있는 시위대 앞에서 존 바에즈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존 바에즈 트위터 갈무리
 
존 바에즈는 밥 딜런과 헤어진 지 10년이 지난 1975년 본인이 작사·작곡한 ‘다이어먼드 앤 러스트’(Diamonds and rust)에서 딜런과의 시절을 회상하는 듯한 노랫말을 쓰기도 했다. ‘다이어먼드 앤 러스트’는 ‘숯은 다이어먼드가 되고, 철은 녹이 된다’는 뜻으로 지난 일을 회상하는 뜻으로 자주 쓰인다.
그 가사 내용 중 일부다.
 
“10년 전/난 당신에게 커프스 단추를 사줬어요/당신도 내게 뭔가 선물했죠/우리 둘다 추억이 뭘 가져다주는지 알고 있어요/다이아몬드와 녹(행복과 상처)이죠/
이미 흘러간 사람인데/잊히지 않는 사람/타고난 방랑자/당신이 내 품에 들어왔죠.
 
(…)
갈색 낙엽 흩날리는 가운데/당신 서 있는 걸 보네요/당신 머리칼도 희끗희끗하네요/이제 워싱턴 광장 너머/초라한 그 호텔 창가에/당신의 미소
(…)
당신이 내게 말하네요/이젠 지난날 그리워 않는다고/다른 말로 해봐요/언제나 모호하게 말하는 당신/당신의 모호함이 내겐 너무 분명하네요/
 
그래요난 당신을 너무 사랑했어요/이미 지나간 행복과 상처가 내게 다시 온다 하더라도”
1975~76년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전미투어 공연을 함께 했다.
 
권태호 기자 

 

 

 

 

 

 

 

밥 딜런은 가수일까요, 시인일까요?

 

2016-10-14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 올해 노벨 문학상 깜짝 수상
‘적절하다’vs‘적절하지 않다’ 의견 분분해
 
 
자신을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이라 지칭했던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이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스웨덴 한림원은 13일(현지시각) “위대한 미국의 노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며 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를 밝혔습니다. 한림원이 노벨상 수상자로 밥 딜런의 이름을 언급하자, 현장에 있던 취재진들이 모두 놀라며 탄성을 쏟아낼 정도로 이번 노벨 문학상 수상은 ‘깜짝’ 수상으로 여겨집니다.
 
소설가나 시인과 같은 문인이 아닌 대중음악인이 노벨 문학상을 받는 일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밥 딜런의 수상이 발표된 뒤 주요 언론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밥 딜런의 수상이 ‘적절하다’,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분분한 이유입니다.
 
 
미국 <시엔엔>(CNN) 방송은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을 둘러싼 논란’이라는 제목을 통해 밥 딜런 노벨상 수상에 대한 찬반 양론을 자세히 전했습니다. 영상 말미에는 “‘페이지’(page, 책을 지칭)가 아닌 무대(stage)에서 더 잘 알려진 사람에게 노벨상이 돌아갔다”고 전했습니다.
 
1984년 독일 뮌헨의 올림픽 경기장에서 공연하고 있는 밥 딜런의 모습. 뮌헨/AFP 연합뉴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 역시 ‘밥 딜런이 수상하면 안되는 이유’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실었습니다. 기고문은 “밥 딜런은 유능한 작사가다. 그의 가사를 시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딜런의 가사는 그의 음악과 떨어질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며 “딜런은 작가가 아닌 음악가이며, 그렇기 때문에 노벨상 위원회가 ‘작가’에게 노벨상을 주지 않은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선택”이라고 전했습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역시 밥 딜런의 수상을 비판하며 “이는 ‘스웨덴즈 갓 탤런트’(텔레비전 오디션 프로그램)이 아니라 ‘노벨문학상’이다”이라고 일갈했습니다.

 

 
영국의 유명 작가인 하리 쿤즈루는 트위터에 “오바마가 부시가 아니기 때문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이래로 가장 믿기 힘든 노벨상 수상”이라고 평했습니다.

 

 
밥 딜런의 수상에 대한 옹호론도 나옵니다. 미국의 유명 배우 제프 다니엘스는 자신의 트위터에 “밥 딜런이 노벨상을 받았다. 예스, 예스, 예스(YES)”라는 글로 수상을 환영했습니다.

 

 
미국의 유명 공상과학 작가인 존 스칼지 역시 자신의 트위터에 “작사도 문학이며, 밥 딜런은 지난 100여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였다”다며 수상을 축하했습니다.

 

 
 
영국 <스카이 뉴스>는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전하면서, ‘115년 노벨상 역사상 여성 수상자는 단 14명 뿐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올해 노벨상 수상자 역시 모두 남성이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영상 말미에는 밥 딜런의 유명곡인 ‘시대는 변하고 있으므로(The Times they are a changin)’를 인용하며 ’아카데미(학계)의 시대는 변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밥 딜런은 아직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50년전 ’나는 시인이기보다,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밝혔던 밥 딜런은 여전히 자신을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황금비 기자
 

 

 

 

 

 

2017년 6월이면 6월 항쟁 30주년...

 

이제 1년 있으면 6월항쟁 30주년이 됩니다. 6월 항쟁 이후로 많은 점에서 퇴보를 거듭했습니다.

 

헌데 30년이면 현대 자본주의 발전에서 시대의 변곡점에 도달한다는 것이 저에 생각입니다. 가장 단순하게는 30여년이면 한 나라가 압축적으로 자본주의화가 완성되는 기간입니다. 또한 2차대전 이후의 케인즈주의는 80년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사조로 대체되었습니다. 이 또한 30여년이 경과하면서 세계적인 경제 위기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되는 조건을 형성하고 있고 그러한 조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6월 항쟁 이전에 학생운동은 극도의 탄압상황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움터오르고 있었습니다. 선도적인 학생들이 군부독재의 손발 노릇을 하던 파출소 타격투쟁을 벌여서 서울 시내 모든 파출소들은 철망을 둘러쓰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학내에 경찰들이 상주하고 있어서 꼼짝 달싹할 수가 없이 옥죄고 있었지만 학생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도서관에 형사들이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밧줄을 몸에 감고 도서관 벽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유인물 뿌리고 학생대중에게 시위를 선동하고는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떨어져서 죽은 학생도 있었습니다. 채광석의 밧줄을 타며라는 시는 바로 이런 처절한 정경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학생들은 알바를 해서 등록금 대기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신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푸른 창공을 가르며 고공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고공에 매달렸던 80년대 학생들과 고공으로 올라가서 농성을 벌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것이 역사의 반복일까요?

 

지난 4년간 야당은 정동영 천정배에게 역할을 주지 않다가 급기야 탈당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정동영 천정배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야당이 FTA에서의 민중의 권익을 지키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당력을 기울여서 추구해야 할 복지정책은 종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야당이 이처럼 자진해서 무장을 해제해버린 까닭에 선거만 했다 하면 연전연패를 하는 야당 사상 가장 무기력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번 총선을 통해서 작은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참여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냈지만 노동자 민중의 이해에 배치되는 한미FTA에 반대한다며 25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던 천정배 전 장관, 담대한 복지를 추구한다며 한미FTA 찬성 당론을 반대 당론으로 뒤집어 엎고서 직접 거리투쟁에 나섰던 정동영 전 장관, 그는 야당 사상 최초로 복지 등 야당이 추구해야 할 가치노선을 정립하기까지 했습니다. 한미FTA 반대와 대여 복지투쟁은 당시 민주당으로 하여금 거대 여당을 상대로 한 모든 선거에서 연전연승을 하는 기염을 토하게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박근혜가 착해서 국회선진화법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당시 야당의 기세가 그만큼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민주당의 기세를 지난 4년간 친노당 무리들이 갉아먹었습니다. 이제는 야당 교체가 초읽기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배제되었던 정동영 천정배가 다시 야당의 깃발을 들고 대여투쟁에 나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야당이 야당답다면 진보정당과도 견결히 연대할 것입니다. 순도 99%의 진정성을 가진 진보정당에 교섭단체 구성이라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헬조선의 탈출로는 바로 진보정당에 있습니다.

 

친노동과 복지라는 무기로 무장한 야당이 진보정당과 진보적인 성향의 시민사회단체와 일체가 되어서 대여전선에 나설 때에 우리는 여당과 수구세력을 압도하는 새로운 정치지형을 창출할 수가 있습니다. 그 힘이 만들어내는 공간에 중소사업장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백만 이상이 진출할 수가 있습니다. 민주주의란 잘난 정치인의 선물이 아니라 노동대중이 힘으로 쟁취해 내는 것입니다.

 

 

 

 

밧줄을 타며 

 

채광석


밧줄을 탄다 

히말라야 산맥 우리의 형제와 동료들의 
목숨을 머금은 봉우리에 오르기 위하여 
도봉산 인수봉의 바위벽, 설악산 골짜기의 얼음벽 
벽을 탄다 기어오른다 
하나의 밧줄에 차례로 몸을 엮고 하나의 운명 되어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비지땀을 흘리며 
식은땀을 훔치며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땡볕 아우성치는 여름이나 혹한 내리꽂히는 겨울이나 
저 꿈에도 못 잊을 원한과 열망의 봉우리 
꼭대기에 두 발을 딛고 새 하늘 새 땅을 보기 위하여 

산사나이들 밧줄을 탄다 

비바람이 밀치고 설한풍이 손끝 발끝을 흔들고 
뇌성벽력이 몰아친다 해도 
밧줄을 놓을 수는 없다 

그것은 목숨이기에 단속반원들 우르르 달겨들어 
패대기치더라도 리어카는 우리들 목숨의 줄이므로 
비루먹이고 병들게 하고 꼬드김 손찌검 
발길질 똥바가지질 몽둥이질 이간질 
쳐대도 노동삼권은 우리의 목숨이므로 민주화는 
통일은 우리의 목숨이므로 

목숨을 탄다 

민주 민족 민중의 산맥 우리의 선열과 형제들의 
목숨을 머금은 봉우리에 오르기 위하여 
공장 농촌의 얼음벽 학교의 바위벽 
벽을 탄다 기어오른다 
하나의 밧줄에 차례로 몸을 엮고 하나의 운명 되어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비지땀을 흘리며 
식은땀을 훔치며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아우성치는 압제의 손길 내리꽂히는 수탈의 손길을 뚫고 
저 꿈에도 못 잊을 원한과 열망의 봉우리 
꼭대기에 두 발을 딛고 새 하늘 새 땅을 보기 위하여 
외치며 노래하며 

민족의 아들딸 
밧줄을 탄다 목숨을 탄다 

민주주의여 
통일이여 
질기디질긴 목숨의 밧줄이여

 

 

 

 

no, no, no nos moveran !  no, no nos moveran !

como un arbol firme junto al rio

no nos moveran.

 

절대로 절대로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리
절대로 절대로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리
강변에 꿋꿋이 서 있는 나무처럼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리

 

 

 

 

 

 

 

Sube a nacer conmigo, hermano

- Pablo Neruda

 

Dame la mano desde la profunda

zona de tu dolor diseminado.

No volverás del fondo de las rocas.

No volverás del tiempo subterráneo.

No volverá tu voz endurecida.

No volverán tus ojos taladrados.

Mírame desde el fondo de la tierra,

labrador, tejedor, pastor callado:

domador de guanacos tutelares:

albañil del andamio desafiado:

aguador de las lágrimas andinas:

joyero de los dedos machacados:

agricultor temblando en la semilla:

alfarero en tu greda derramado:

traed a la copa de esta nueva vida

vuestros viejos dolores enterrados.

Mostradme vuestra sangre y vuestro surco,

decidme: aquí fui castigado,

porque la joya no brilló o la tierra

no entregó a tiempo la piedra o el grano:

señaladme la piedra en que caísteis

y la madera en que os crucificaron,

encendedme los viejos pedernales,

las viejas lámparas, los látigos pegados

a través de los siglos en las llagas

y las hachas de brillo ensangrentado.

Yo vengo a hablar por vuestra boca muerta.

A través de la tierra juntad todos

los silenciosos labios derramados

y desde el fondo habladme toda esta larga noche

como si yo estuviera con vosotros anclado,

contadme todo, cadena a cadena,

eslabón a eslabón, y paso a paso,

afilad los cuchillos que guardasteis,

ponedlos en mi pecho y en mi mano,

como un río de rayos amarillos,

como un río de tigres enterrados,

y dejadme llorar, horas, días, años,

edades ciegas, siglos estelares.

 

Dadme el silencio, el agua, la esperanza.

Dadme la lucha, el hierro, los volcanes.

Apegadme los cuerpos como imanes.

Acudid a mis venas y a mi boca,

Hablad por mis palabras y mi sangre.

 

나와 함께 오르자, 형제여

 

네 고통이 부려진 그 깊은 곳에서

내게 손을 다오.

넌 바위 밑바닥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하리.

땅 속의 시간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하리.

딱딱하게 굳은 네 목소리는 돌아오지 못하리.

구멍 뚫린 네 두 눈은 돌아오지 못하리.

대지의 밑바닥에서 나를 바라보라,

농부여, 직공이여, 말없는 목동이여.

수호신 구아나코를 길들이던 사람이여.

가파른 발판을 오르내리던 미장이여.

안데스의 눈물을 나르던 물장수여.

손가락이 짓이겨진 보석공이여.

씨앗 속에서 떨고 있는 농부여.

너의 점토 속에 뿌려진 도자기공이여.

이 새 생명의 잔에

땅에 묻힌 그대들의 오랜 고통을 가져오라.

그대들의 피와 그대들의 주름살을 내게 보여다오.

내게 말해다오, 보석이 빛을 발하지 않았거나 땅이 제때에

 

돌이나 낟알을 건네주지 않아, 나 여기서 벌받아 죽었노라고.

그대들이 떨어져 죽었던 바위와

그대들을 못박아 매달았던 나무 기둥을 내게 가리켜다오.

그 오랜 부싯돌을 켜다오,

그 오랜 등불을, 그 오랜 세월 짓무른 상처에

달라붙어 있던 채찍을

그리고 핏빛을 번뜩이는 도끼를.

나는 그대들의 죽은 입을 통해 말하러 왔다.

대지를 통해 흩뿌려진 말없는 입술들을 모두 모아다오.

그리고 밑바닥으로부터 얘기해다오, 이 긴긴 밤이 다하도록.

내가 닻을 내리고 그대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내게 모두 말해다오, 한땀 한땀,

한구절 한구절, 차근차근,

품고 있던 칼을 갈아,

내 가슴에, 내 손에 쥐어다오,

노란 광선의 강처럼,

땅에 묻힌 호랑이의 강처럼.

그리고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몇 해고, 날 울게 내버려다오.

눈먼 시대를, 별의 세기를.

 

내게 침묵을 다오, 물을 다오, 희망을 다오.

내게 투쟁을 다오, 강철을 다오, 화산을 다오.

그대들의 몸을 내 몸에 자석처럼 붙여다오.

나의 입술과 나의 입으로 달려오라.

나의 말과 나의 피로 말하라.

 

 

 

 

원 뜻과 다르지 않게 우리 제목도 “흔들리지 않게”이지요. 이 음원의 앞은 남미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존 바에즈가 낭송하는 것입니다

 

최루탄 연기 자욱한 속에 뛰어 나와서 흔들리지 않게를 노래 부르며 대오를 정비하던 그네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다시 한번 흔들리지 않게라는 노래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는 날에 세상은 또 한번 개벽을 하게 되겠지요.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 그 날에
오오, 참 맘으로 나는 믿네 
우리 승리하리라(1절).

 

손에 손을 잡고/
손에 손을 잡고
손에 손을 잡고 그 날에
오오 참 맘으로 나는 믿네 
우리 승리하리라(2절).

 

두려움이 없네
두려움이 없네
두려움이 없네 그 날에
오오 참 맘으로 나는 믿네 
우리 승리하리라(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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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someday. 
Oh,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day.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승리할 것입니다.
내 마음 속 깊이, 나는 반드시 믿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we'll walk hand in hand, we'll walk hand in hand,
we'll walk hand in hand some day. 
Oh,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day.

우린 함께 손맞잡고 걸어갈 것입니다.
우린 함께 손맞잡고 걸어갈 것입니다.
우린 언젠가 함께 손맞잡고 걸어갈 것입니다.
내 마음 속 깊이, 나는 반드시 믿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we are not afraid, we are not afraid,
we are not afraid today.
Oh,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day.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내 마음 속 깊이, 나는 반드시 믿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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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존바에즈 - 도나도나, 메리 해밀턴 Ace of sorro당신은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선택할 수는 없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존 바에즈-



얼마 전 노벨상을 수상한 <밥딜런>의 기사를 살펴보다
우연히 "Joan Baez"라는 이름을 알게되고, 
포크송세대는 아니지만 드라마 배경음악 등으로 익숙한
 를 부르신 분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는데요


오늘은 포크의 여왕, 노래하는 인권운동가로 불리어지는 
그녀의 삶, 그리고 가치관에 대해 준비해보았습니다


 

1941년 1월 9일, 뉴욕 <스태튼아일랜드>에서 
멕시코 출신의 아버지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세 딸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 바에즈는 
물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핵무기제조를 반대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인권과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남캘리포니아 <레드랜즈>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피부가 까만 멕시코계라는 이유로 이미 인종차별을 경험했던 그녀는
훗날, 이 모든 경험들이 그녀의 노래와 인생 전반에 걸친 뿌리가 되어주었다고 하는데요


 

먼저, 그녀의 러브스토리,부터 잠깐 살펴볼까요?
밥딜런과 스티브잡스(?)의 연인으로 유명한 그녀이기도 한데요


 

1961년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할 무렵, 
밥딜런을 처음 만나게 되고
이후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는데요
당시, 무명작곡가에 불가했던 딜런에 비해 이미 유명한 가수였던 바에즈는
딜런을 자신의 무대에 게스트로 초대하고 그가 만든 노래를 부르는 등
밥딜런의 음악활동에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이들은 이후 <60년대의 아이콘>으로 함께 노래하며 
인권 ,반전운동의 기수가 되었지만
아쉽게도 1965년 가치관의 차이로 헤어졌다고 하더군요


 

또한 그녀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한 분 더 계시는데요
바로, 비폭력운동의 지도자였던 <마틴루터킹>입니다
프로테스탄트였던 JOAN은 "퀘이커교모임"에서 그의 연설을 듣게되고
이후 그의 사상에 매료되어 비폭력주의 운동에 동참하게 되는데요


마틴루터킹목사의 이라는 연설로 유명한 
1963년 워싱턴 평화 대행진에서
당시 20대초반에 불과했던 그녀는 35만명의 군중앞에서 
<우리는 승리하리라 : We shall overcome>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더군요


 

이렇게 마틴목사로 부터 인생의 가치관과 삶에 대한 자세를 배우게 된 존바에즈는
이후에도 국/내외 음악공연을 통해 반전운동을 이어가게 되는데요


60년대후반 베트남전쟁이 일어나자 반전운동과 징병거부운동을 시작했고
(이때. 징병거부운동지도자 데이빗 해리스를 만나 결혼하지만, 
해리스의 수감으로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1972년에는 베트남 하노이를 직접 찾아가서 
미국민들에게 베트남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등 
최전선에서 활동하며 비폭력운동을 이어갔습니다


Joan Baez는 이후에도 수십년동안 내전과 분쟁등으로 자유가 위협받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요
그런 그녀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에는 그래미상 공로상을 수상하고
미국 아틀란타와 산타나크루즈는 각각 8월2일, 8월 27일을 <존 바에즈의 날>로 지정하여
그녀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가수활동을 시작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던
1960년대 미국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였고 
그러한 시기 그녀의 노래는 대중들에게 희망이 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음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전쟁터에서도 생명의 편을 들지않는다면
그 모든 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소용이 없겠지요"



올해초에는 그녀의 75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콘서트가 열렸다고 하는데요
그녀는 지금도 무대위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서 공연을 하며,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속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
과연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해야하는지 많은 고민을 하게 하는 요즘, 
한 사람의 뮤지션으로 그녀가 평생을 걸어왔던 삶, 그리고 행동에 대해 알아가는 동안
나름 제게도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신은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선택할 수는 없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존 바에즈-



얼마 전 노벨상을 수상한 <밥딜런>의 기사를 살펴보다
우연히 "Joan Baez"라는 이름을 알게되고, 
포크송세대는 아니지만 드라마 배경음악 등으로 익숙한
 를 부르신 분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는데요


오늘은 포크의 여왕, 노래하는 인권운동가로 불리어지는 
그녀의 삶, 그리고 가치관에 대해 준비해보았습니다


 

1941년 1월 9일, 뉴욕 <스태튼아일랜드>에서 
멕시코 출신의 아버지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세 딸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 바에즈는 
물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핵무기제조를 반대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인권과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남캘리포니아 <레드랜즈>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피부가 까만 멕시코계라는 이유로 이미 인종차별을 경험했던 그녀는
훗날, 이 모든 경험들이 그녀의 노래와 인생 전반에 걸친 뿌리가 되어주었다고 하는데요


 

먼저, 그녀의 러브스토리,부터 잠깐 살펴볼까요?
밥딜런과 스티브잡스(?)의 연인으로 유명한 그녀이기도 한데요


 

1961년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할 무렵, 
밥딜런을 처음 만나게 되고
이후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는데요
당시, 무명작곡가에 불가했던 딜런에 비해 이미 유명한 가수였던 바에즈는
딜런을 자신의 무대에 게스트로 초대하고 그가 만든 노래를 부르는 등
밥딜런의 음악활동에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이들은 이후 <60년대의 아이콘>으로 함께 노래하며 
인권 ,반전운동의 기수가 되었지만
아쉽게도 1965년 가치관의 차이로 헤어졌다고 하더군요


 

또한 그녀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한 분 더 계시는데요
바로, 비폭력운동의 지도자였던 <마틴루터킹>입니다
프로테스탄트였던 JOAN은 "퀘이커교모임"에서 그의 연설을 듣게되고
이후 그의 사상에 매료되어 비폭력주의 운동에 동참하게 되는데요


마틴루터킹목사의 이라는 연설로 유명한 
1963년 워싱턴 평화 대행진에서
당시 20대초반에 불과했던 그녀는 35만명의 군중앞에서 
<우리는 승리하리라 : We shall overcome>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더군요


 

이렇게 마틴목사로 부터 인생의 가치관과 삶에 대한 자세를 배우게 된 존바에즈는
이후에도 국/내외 음악공연을 통해 반전운동을 이어가게 되는데요


60년대후반 베트남전쟁이 일어나자 반전운동과 징병거부운동을 시작했고
(이때. 징병거부운동지도자 데이빗 해리스를 만나 결혼하지만, 
해리스의 수감으로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1972년에는 베트남 하노이를 직접 찾아가서 
미국민들에게 베트남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등 
최전선에서 활동하며 비폭력운동을 이어갔습니다


Joan Baez는 이후에도 수십년동안 내전과 분쟁등으로 자유가 위협받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요
그런 그녀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에는 그래미상 공로상을 수상하고
미국 아틀란타와 산타나크루즈는 각각 8월2일, 8월 27일을 <존 바에즈의 날>로 지정하여
그녀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가수활동을 시작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던
1960년대 미국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였고 
그러한 시기 그녀의 노래는 대중들에게 희망이 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음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전쟁터에서도 생명의 편을 들지않는다면
그 모든 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소용이 없겠지요"



올해초에는 그녀의 75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콘서트가 열렸다고 하는데요
그녀는 지금도 무대위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서 공연을 하며,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속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
과연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해야하는지 많은 고민을 하게 하는 요즘, 
한 사람의 뮤지션으로 그녀가 평생을 걸어왔던 삶, 그리고 행동에 대해 알아가는 동안
나름 제게도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w 가사|작성자 은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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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박소영 기자]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 시상식 참석을 거부한 가운데 수상소감을 감사의 연설문으로 대신할 전망이다.  

5일 '할리우드 리포터' 보도에 따르면 밥 딜런은 '노벨 재단'에 감사의 연설문을 써서 보냈다. 이를 시상식 당일 누가 읽을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오는 10일 열리는 시상식에 밥 딜런은 '선약'을 이유로 불참을 예고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직접 받고 싶지만 아쉽게도 다른 일들 때문에 불참한다"고 알린 바 있다.

밥 딜런은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한 때는 수상 거부설까지 나돌기도. 그러나 밥 딜런 측은 "영광스러워 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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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75)이 10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불참한다.

 

딜런은 대신 수락 연설문을 보내 다른 이에게 대독시킬 예정이라고 미 뉴욕타임스(NYT)가 5일 보도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이날 트위터를 통해 딜런의 시상 소감 대독 사실을 밝혔다. 스웨덴 현지매체는 호레이스 엥달 한림원 종신위원이 대독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시상식에는 또 미국의 가수이자 시인 패티 스미스가 참석해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으로 딜런의 명곡 ‘하드 레인즈 고나 폴(A Hard Rain's A-Gonna Fall)’을 노래할 예정이다. 스미스는 딜런의 오랜 팬으로 그와 함께 음악 작업을 하기도 했다.

딜런은 지난 10월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후에도 2주가량 수락 의사를 밝히지 않아 논란의 대상이 됐다. 그는 노벨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말문이 막혔었다”고 이유를 설명했지만, 딜런 특유의 ‘반골 기질’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한림원은 또 딜런에게 노벨상 시상식에서 연설과 공연을 해도 괜찮다고 제안했지만, 딜런은 이마저도 “선약이 있다”는 이유로 불참을 통보하며 거절했다. 한림원 측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고 연설문을 대독하게 하는 것은 일반적이지는 않다”면서도 “그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앞서 1964년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제도권에 규정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거절했고, 1958년 ‘닥터 지바고’의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도 정치 탄압 등의 이유로 수상을 거부한 바 있다. /정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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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가수로는 처음으로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올 10월 13일, 스웨덴 학술원이 미국의 포크송 싱어송라이터 밥딜런을 노벨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시인으로 불리는 가수이긴 하지만 대중음악 가수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이변에 세상이 술렁이고 있다.

한국에서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굉장히 많다. 하지만 정작 그의 곡을 들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미국의 음악 순위 관련 차트 중에서 가장 대중성 있고 공신성 있다고 인정 받는 빌보드 차트에서도 빌보드 차트에서 밥 딜런의 곡은 단 한 곡도 1위를 해본 적이 없다. 물론 빌보드 차트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밥 딜런의 명곡들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더 위대한 셈이긴 하지만 뭔가 아쉽다. 밥 딜런의 곡 중 10위 안에 든 곡은 고작 네 곡 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솔직히 요즘 한국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리는 밥 딜런의 곡이라곤One more cup of coffee이나 Knockin` on heaven`s door 정도 밖엔 없다. 유명세에 비한다면 초라할 정도다.

하지만 뮤지션들에게는 다르다. 존 레논은 “밥 딜런이 비틀스의 음악을 통째로 변화시켰다”고 고백한 바 있고, 폴 사이먼, 닐 영, 도노반, 돈 맥클린, 조니 미첼 등 수많은 가수들이 밥 딜런의 영향을 받았다.

음악 전문지 <롤링 스톤>은 “66년까지만 해도 150이상의 밴드와 가수들이 적어도 하나 이상의 밥 딜런 곡을 불렀다”고 기술했다. 이 잡지는 지난 97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팝 음반 200장“을 선정하면서 그의 앨범을 다섯 장이나 꼽았다.

그가 남긴 작품을 '명반의 무더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앨범이 비틀스나 롤링 스톤스의 것보다 훨씬 음악적 파급력이 컸다“고 지적한다.

지난 97년 마흔 다섯의 나이에 발표한 앨범 <내 마음을 벗어난 시간(Time Out Of Mind)>을 예로 들어도 평단의 격찬 속에 여기저기서 그 해의 최고 앨범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었다. 이 앨범으로 그는 그래미상을 탔다. 유명한 비평가 그레일 마커스는 그의 앨범을 연구한 저서 <보이지 않는 공화국>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음악은 음악으로만 보면 안 된다. 그것은 대중음악의 정신혁명과 관계한다. 그의 음악은 20세기 모더니즘의 가장 강렬한 분출이다. 이 점을 빼놓고는 왜 그의 음악과 앨범이 명작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한편 대한민국의 가수들도 그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면 김민기, 양희은 등이다. 또한 포크록의 전설로 불리는 한 대수도 밥 딜런의 창법과 스타일을 연구해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내놓은 것이 명곡 “행복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는 김광석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로 번안해 불러 널리 알리기도 했다.

 

히피의 선지자

밥 딜런의 노래에는 낱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아, 확실하지는 않다. 대중들이 그의 노래가사에서 의미를 찾아낼 때, 밥 딜런 본인은 그런 행위를 부정하려는 건지 코멘트 자체를 피했으니까.

그래서 그는 대중음악 가수 중에서도 가장 탐구하기 어렵고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다. 밥 딜런을 연구하는 학과가 존재함은 물론이고, 밥 딜런의 노래가사를 주제로 논문을 써 박사 학위를 받는 이들도 실제한다.

이런 밥 딜런의 독창적인 가사 작성 능력은 미국을 물들인 히피물결과도 떼어낼 수 없다. 밥 딜런이 부른 노래는 히피들의 중추 사상의 일부가 되었다. 그의 Like a rolling stone이나 Blowin' in the wind는 많은 히피들에게 감명을 안겨주었다.

베트남전에 휘말린 미국에 사는 이들은 세계에 보내는 저항의 메시지로 밥 딜런의 노래를 선택했다. 당시 미국의 대학생과 지식인들은 케네디 대통령이나 킹 목사의 연설만큼이나 그의 노래에 담긴 메시지를 봤다.

당시 히피였던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기술자이면서도 예술적인 디자인으로 이름 높은 스티브 잡스는 열광적인 밥 딜런의 팬이었다. 그는 100시간이 넘어가는 분량의 1960년대 딜런 음악 해적판을 수집했고, 그의 동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 역시 딜런의 팬으로써 마음이 맞았다.

워즈니악은 과거를 회상하며 “딜런의 노래책을 구입해 가사를 해석하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고 말한 바 있다. 1984년 매킨토시의 발표 자리에서 잡스는 딜런의 곡을 인용하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에게 딜런의 가사들은 창조적 사고를 불러내는 주문이었다.

1965년, 밥 딜런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통기타가 아닌 전기기타를 들고 무대에 섰다. 히피들은 포크의 배신자라며 달걀과 돌을 던졌지만 그는 “나를 그대로 내버려두라”며 의연히 무대에 서 포크와 록을 결합한 포크록을 대중에 전파했다. 그는 가사를 잘 쓰는 음악가에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음악의 창조자로서의 지위도 획득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자매지이자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주간지인 뉴스위크는 ‘금세기의 사건’으로 포크 페스티벌에 있었던 이 사건을 꼽기도 했다.

 

윈스턴 처칠도 받은 적 있는 노벨문학상

노벨문학상은 알프레드 노벨이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평화상과 함께 1901년에 제정했다. 지금까지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사람은 모두 113명이다. 한 해에 두 명 이상 받은 적도 있지만 1914년, 1918년, 1935년, 1940-1943년에는 수상자가 없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대부분 문학성을 인정받은 소설가, 시인, 극작가다.

철학자 중에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있다. 1908년에는 독일의 루돌프 오이켄, 1927년에는 프랑스의 앙리 베르그송, 1950년에는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이 각각 상을 받았다.

또한 1953년 처음으로 정치가인 윈스턴 처칠에게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쓴 공로로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당시 스웨덴 학술원은 “역사적이고 전기적인 글에서의 탁월한 묘사 능력과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기 위한 눈부신 웅변술”을 수상이유로 내세웠다. 그가 뛰어난 독서가이고 문장가이고 사상가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별로 없지만 정치적인 판단이 들어가 있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이어 장 폴 사르트르가 1964년 철학자로서는 네 번째로 수상자에 정해졌지만 자신은 공적으로 주어지는 상은 거부해왔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벨라루스의 기자 출신 넌픽션 작가다. 그가 제2차 세계대전, 체르노빌 사고 등을 겪은 이들과의 인터뷰를 글로 옮긴 Novels of Voices은 그 독특한 가치로 상을 받았다.

한편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국적은 유럽이 가장 많다. 비유럽 지역 작가로는 인도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가 1913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밥 딜런은 1993년 토니 모리슨 이후 23년 만에 노벨문학상을 받는 미국인이다. 1950년 이후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작가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1954), 존 스타인벡(1962), 솔 벨로(1976), 아이작 싱어(1978), 체슬라브 밀로즈(1980), 요세프 브로드스키(1987) 등이 있다

 

왜 수상 소감 밝히지 않는가?

뭐가 어찌 되었든 밥 딜런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 이유는 “미국 가요 전통 안에서 참신하고 시적인 표현을 창조해낸 공로”였다. 이제까지 그의 일대를 생각하면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영국 사설도박 업체 레드브룩스는 일본 소설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꼽았었는데…하루키도 매 년 기대주로서 상위에 랭크되지만 상을 못 받고 있다. 레드브룩스의 도박꾼들은 작년의 노벨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맞췄지만 올해는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현재 밥 딜런은 노벨위원회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있다. 노벨위원회는 장기간 연락이 되지 않는 밥 딜런에게 직접 수상하는 것을 포기하고 측근에게만 수상 사실을 알렸다.

밥 딜런은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해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수상을 거부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밥 딜런의 에이전시 CAA(Creative Artists Agency) 측은 한 인터뷰에서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는가 아니면 수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밥 딜런에 관해서는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으로 드러났다. 사실상 밥 딜런의 측근들도 밥 딜런에 대해 말하기를 함구한 셈이다.

그는 "밥 딜런이 건강에 문제 있느냐, 수상소감을 밝히지 않는 이유가 수상을 거부하기 때문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밝힐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앞서 밥 딜런은 수상발표가 있던 지난 10월 13일과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하지만 그는 공연에서도 자신의 수상소감을 밝히지 않고 시종일관 공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이날 공연의 앵콜곡이었던

앞서 밥 딜런은 수상발표가 있던 지난 13일과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하지만 그는 공연에서도 수상 소감을 밝히지 않고 시종일관 공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이날 공연 앵콜곡이었던 Why Try To Change Me Now가 노벨상 수상 거부 표시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가 반전과 평화를 노래한 가수이기에 노벨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노벨상 자체가 '다이너마이트'라는 폭탄을 개발해 인류를 전쟁으로 몰아넣었던 화학자 알프레드 노벨이 만든 상이기에 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다.

노벨상 시상식은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된다. 수상식 전에 수상을 거부하면 상금은 한림원에 환수된다.

한편 한국에서는 고은 시인이 올해도 고배를 마셨다. 고은 시인 본인이 노벨상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지 않으니 고배라고 말하기엔 조금 어색하지만, 그래도 시인의 팬들은 고은 시인이 노벨상을 받기를 매 해 기대하고 있다.

그는 올해 뿐만 아니라 매 해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고은 시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계에 많이 알려져 있다. 그의 시는 현재 20여개 국에 번역되어 많은 문학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고은 시인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 것은 2005년 이후로 12년째 계속되는 연례행사다.

그의 저명성은 매 년 여러 나라에서 그를 초청하는 문학행사들에서도 알 수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자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에른손을 기린 비에른손 훈장을 받았고, 스웨덴에서도 스웨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하뤼 마르틴손을 기리는 상인 동시에 동아시아권 문학인에게 주는 상인 시카다 상을 수여 받았다. 스웨덴의 한 언론매체는 기사에서 그를 군산의 제왕Kungen av Kunsan)이라 칭했다.

고은 시인은 매 해 도박사이트에서 노벨문학상을 받을 사람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다. 고은 시인의 작품이 문학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죽기 직전에 주는 장례상이라는 농담도 도는 노벨상인데 어떻게 내년에는 안 되려나?

 

김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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