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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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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시인 - 알프레드 드 비니
2016년 12월 13일 23시 00분  조회:5968  추천:0  작성자: 죽림

운명

Les Destinees ]
 
저자 알프레드 드 비니(Alfred de Vigny, 1797-1863)
국가 프랑스
분야
해설자 최복현(상명대 불문학 박사과정 수료, 저술가)

알프레드 드 비니는 자신의 깊은 철학 사상을 시로 표현해 유명해졌다. 생전에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사후 시집인 ≪운명≫이 발표된 후에 명성을 얻었다. 그는 일생 동안 좌절과 고독을 독서와 명상으로 관조한 철학 시인이었다. 비니의 철학 사상은 비관주의로서, 인간은 비극적인 운명 앞에서도 좌절하지 말고, 인간의 품위를 지키면서 묵묵히 극기[견인주의()]로써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니는 ‘인간은 고독한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한 존재이기 때문에 고독감에서 오는 고뇌를 맛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적으로 탁월한 인물일수록, 선택받은 위대한 사람일수록 고독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는 시의 모티프를 성서에서 가져오곤 했는데, 모세라는 인물은 선택받은 위대한 인물이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중대한 사명을 받은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의 고민과 고독감을 소재로 한다. ≪운명≫에서 그는 삼손과 예수를 위대한 인물로 등장시켜 그 고독을 절감하게 한다.

그는 뒤로 물러선다. 내려간다. 무섭게 소리친다.
“너희들은 나와 함께 기도하며 철야할 수 없단 말이냐?”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잠이 제자들을 눌러 버린다.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선생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체한다.
그러자 인자는 천천히 다시 올라간다.
이집트의 목자처럼 하늘의
천사가 어느 별 속에서 빛나고 있는지를 찾는다.
슬픔에 잠긴 구름이 과부의 옷처럼
펼쳐지고, 구름자락이 광야를 뒤덮는다.
예수는 33년 전부터 그가 겪었던 괴로움을 상기하면서
인간이 되었다. 두려움은 견딜 수 없는
중압감으로 그의 마음을 조여 온다.
그는 죽을 만큼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느낀다.
추워졌다. 세 번을 부르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으니;
“나의 아버지여!”−바람만이 그의 부름에 답할 뿐이다.
−<감람산>

하나님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그는 인간적인 고독을 느끼며, 하나님의 위대함 앞에서 느끼는 허무감을 토로한다. 비니는 시를 통해 천재적 시인이 당시 사회에서 일반 대중에게 이해받지 못한 채, 고독감과 공허함을 느끼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니는 인간은 누구나 고독을 좋아하지 않으며 피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독은 인간이 가진 필연 조건이므로 이를 감수하고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비관주의에서 출발해 극기주의에 이른다.

어쨌든 나는 피곤하고 지쳤다.−나는
무거운 청동 기둥의 무게를
거대한 몸과 강한 머리로 지탱해야 하는 슬픔으로
영혼을 지닐 수가 없다.
진흙 속을 기며 그곳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금빛 살무사가 사행하는 것을 보는구나!
−<삼손의 분노>

그의 시에 나타난 사상은 크게 비관, 자비, 극기로 나눌 수 있다. 고독한 존재인 인간은 이 고독을 피할 수 없고, 신에게 사명을 부여받은 위대한 존재일수록 그 고독감은 크다는 것이다. 모세가 그러했고, 예수가 그랬다. 이러한 인물들은 남들과 다른 더 깊은 고독감을 맛보게 된다.
예수의 삶과 죽음, 삼손의 분노에서 우리는 인간의 고독을 절감한다. 신이 부여했든, 선택했든 결정적인 순간에 인간은 홀로 고독한 존재로 남는다. 시시포스처럼 부조리한 숙명을 발견하지만 그 숙명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우리는 나약하게 자살을 생각해서도 안 되며, 늑대처럼 장렬하게 끝까지 투쟁하다 죽어야 한다. 부조리한 존재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간, 부조리한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존재, 그것이 극기하는 인간이며, 인간다운 고귀한 품격을 지닌 존재다.

스스로 죄를 범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고통을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자유하고, 충분히 무능해질 수 있다.
강자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폭풍우 치는 물결 속에 허약한 팔을 던지고
어느 호수의 얼음 도가니 속에 잠기고
깊고 깊은 화산의 잉걸불을 괴롭게 할 용기 있는 약자를 사랑한다.
이 영원한 시시포스는 아름답고, 홀로이며
심한 상처를 입었고, 다급하지만 한마디도 외치지 못한다.
그는 언제나 다시 굴러떨어지고 마는 바위를 잡으려고
심한 고통을 당하며, 짓눌리고 있다고 결코 고백하지 않는다.
만약에 너희들보다 더 높이 오른 영광스러운 정신이
업신여겨진다면 그들의 멸시를 무시하라.
모든 영광을 지배하는 모든 것의 정상
그들이 정상에 있지 않듯이, 그 눈은 정상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높은 곳에 있지 않다. 그들의 발자국 앞에서 강한 자들은
밑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산을 발견해 낸다.
−<플루트>

인간은 부조리한 존재다. 시시포스의 후예인 우리는 신으로부터 굴러떨어진 돌을 언덕으로 올려야 하는 벌을 받았다. 이 업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시시포스가 있던 산이 아닌 새로운 산에서 각자 운명의 돌을 굴려 올리고 있는 것이다. 온몸에 땀이 흐르지만 운명을 걸머지고, 운명에 맞서서 살아가는 모습은 차라리 아름답다. 시시포스이기를 자처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시시포스이기를 포기한 사람이 비겁하다. 이러한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도 인간의 본분에 충실하려는 사상, 그것이 비니의 극기 사상이다.
근원적 고독을 안고 있는 인간은 그 고독을 달래 보려고 여인을 찾아간다. 아름다운 여인은 고독한 존재를 기꺼이 받아 주어 고독을 행복으로 변하게 한다. 여인은 존재를 황홀하게 하여 잠에 취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존재를 평안하고 행복하게 하여 지상을 낙원으로 만든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품에서 인간은 고독을 벗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인가?

“여자, 병들고 열두 번이나 음란한 아이로다!
어느 성소에 있는 것처럼 모욕당한 가슴속에 언제나
힘을, 분노를 유지하도록 조처하니,
거기로부터 달아나는 불은 모든 것을 게걸스레 삼키러 갈 것이며,
그의 눈이 보거나 울지 못하도록 금하러 갈 것이다.
그건 너무 심한 일이다!−신이 원하면 그는 내 죄를 소제할 수 있다.
나는 내 비밀을 주었고 델릴라는 그것을 팔러 가리라.
나에게 죽음을 통고하러 오게 될 사람의 발은
진정 아름다울 것인가!−존재할 수 있는 한 존재하라!”

그는 이 말을 하고 나서 그녀 옆에 잠들었다.
그의 머리칼의 값을 비싸게 치르고,
전사들은 그가 그녀의 집에 있다는 것에 떨면서
그의 손을 붙잡아 매고 그의 눈을 지질 때까지도 떨고 있다.
그는 말없이 신음하며, 두 바퀴를 돌고 주춧돌로 물러났다.
신전의 승려들이 황홀감에 빠져 창백해지며
그들의 신, 다곤 앞에 섰으니;
그들은 열두 마리의 큰 황소가 겨우 끌 수 있는
사슬을 그에게 채워, 질질 끌고 다니다가 피 흘리는 그를
조용히 그들의 신 앞에 서게 한다.
(…)
땅이여, 하늘이여! 무기력한 시선으로 태양을
찾으면서 피로 얼룩진 살벌한 눈으로
쫓고 있는 눈으로 거짓말쟁이 창부를 당신들이 보았을 때,
결국 삼손이 거대한 철탑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흔들어
치명적인 파편 아래로 단번에 3000명의
그의 원수들과 신상과 제단을 짓누를 때
당신들은 기쁨으로 마음이 설레었습니까?

땅이여, 하늘이여! 위선적인 사랑으로 꾸민 배반을
재판으로 벌하소서.
거짓된 입맞춤 때문에 찢긴,
가슴에 맺힌 비밀의 밀고를 그렇게 벌하소서!
−<삼손의 분노>

그랬다. 여인은 아름다움과 함께 배신을 지녔다. 겉은 아름다움으로 치장하고, 속은 배신을 숨기고 있었다. 인간은 고독을 피하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사랑을 시도하지만 여성은 냉정하게 배신한다. 변심하고 배신하는 여성에 대한 불신과 저주와 절망의 내용을 <삼손의 분노>에 담아냈다. 이 시는 실연한 남성의 슬픔과 고통을 잘 묘사하고 있다. 고독한 인간이 믿을 존재란 여인이 아니었다. 여인은 순간을 아름답고 황홀하게 하지만 결국은 인간 존재를 송두리째 파멸로 몰아간다.

비니는 이 시도 성서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구약성서의 삼손과 델릴라 이야기를 시 속에 옮겨 담았다. 그는 성서적 모티프를 통해 자신이 믿었던 여인,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마리 도르발의 배신을 비난하고 있다. 믿고 사랑했던 여인 도르발의 배신은 그를 그만큼 아프게 했다. 그는 스스로 삼손이 되어 시 속으로 들어갔고, 마리 도르발을 델릴라로 등장시켰다.
민족의 복수를 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가졌던 삼손을 유혹했다가 철저하게 배신하여 파멸로 이끌었던 델릴라다. 비니는 배신한 여인 마리 도르발에 대한 복수심으로 델릴라에 비유해 맹렬한 비난을 가했던 것이다. 결국 여인이란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아름답긴 하지만 그 아름다움 뒤에 감추고 있는 변심과 배신은 인간을 더 고독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여성은 더 이상 평안과 위로의 대상이 되지 못하니 여성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가중되는 고독감을 여성에게 위로받으려 했으나 여성은 오히려 그를 더 힘들고 아프게 만들었다.
여성에게 위로받지 못한 인간은 이제 자연을 찾아간다. 자연은 그를 받아들여 여유를 갖게 하고 평안을 꿈꾸게 한다. 그의 근심과 외로움을 달래 주는 매혹적인 경치로 다가온다.

모든 도시들은 남겨 두고 용감하게 떠나라.
더 이상 길의 먼지로 네 발을 더럽히지 마라.
인간 노예가 짊어진 숙명의 바위들처럼
우리 생각이 고양된 지고의 단계에서 노예근성으로 가득한 이 도시들을 보라.
커다란 숲과 들판은 광활한 안식처들이니
침울한 섬 주위에 있는 바다처럼 자유로운 안식처들이다.
손에 꽃 한 송이 들고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가라.
(…)
네가 원한다면 나는 눈 내린 마을을 보리라.
사랑스러운 별이 가득히 내려와 반짝이고 있는 마을,
바람이 소리 내며 부는 마을, 바다가 밀려오는 마을,
저주받아 얼음 밑으로 어두운 극지가 있는 마을.
우리는 우연히 방랑자의 행로를 따라간다.
낮이 나에게 무슨 상관 있을까? 세계가 나와 무슨 상관 있을까?
네 눈이 그렇게 말할 때 나는 그것들은 아름답다고 말하리라.
−<목자의 집>

그러나 그런 느낌도 잠시, 자연은 걷잡을 수 없는 폭우나 태풍으로 인간을 괴롭힌다. 마치 덧없는 존재인 인간을 비웃으면서 영원한 존재인 자신의 힘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거들먹거린다.

신은 산악을 통행하는 철도 위에서
목적지로 급히 가는 증기 열차를 인도하고,
천사는 시끄러운 대장간에 서서 기도하니,
증기 열차가 땅 밑으로 가거나 다리를 떨리게 할 때,
열정적으로 도약하는 사슴보다 더 빨리
가마솥을 삼키는 불의 입으로부터,
도시들을 통과하고, 강물이 범람하기를!

그렇다. 푸른 눈의 천사가 도로 위에서 지켜 준다 해도,
손에 든 검으로 허공을 가르며 칼을 방어한다 해도,
그가 지레질을 하며,
바퀴가 회전하는 소리를 듣는다 해도,
마술의 도가니를 조각으로 만들기 위해
물 위에는 눈이, 잉걸불 위에는 손이 있다 해도,
언제나 아이의 조약돌이면 족하리라.
−<목자의 집>

자연은 인간에 대하여 무관심한 존재로 나타난다. 자연은 인간의 고뇌에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하며, 영원히 계속되는 자연에서 인간이 위안을 구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입김을 내며 음매음매 울고 있는 힘센 황소 위에
인간은 너무 일찍 올라탔다. 어느 누구도 아직은 모른다.
가혹한 소경이 그의 마음속에 어떤 뇌우를 가지고 오는지를,
즐거운 여행자는 그에게 보물을 넘겨주나니;
그의 늙은 애비와 그의 아들들, 그는 그들을 볼모로 삼아
카르타고산 황소의 뜨거운 배 속에 던져 버리고 황소는
그들을 재로 만들어 금빛 신의 발치에 던져 버린다.
−<목자의 집>

고대 페니키아인에 의해 북부 아프리카에 세워진 식민지 카르타고가 기원전 6세기에 서지중해의 무역을 장악해 번영해 나가다가 포에니 전쟁에서 패하여 로마의 속주가 되었던 것처럼, 고독을 피해 자연으로 들어갔던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잠깐 동안의 위로를 얻었을 뿐 자연에 지배당하며 그를 신으로 받들어야만 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자연에 휩쓸려 버린 인간은 거의 망하다시피 했다. 그러니 어떻게 자연을 믿을 것인가. 인간은 모든 것들과 안녕을 고할 수밖에 없는 존재, 자연의 힘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인간을 휩쓸어 간 자연은 물리적인 면뿐만 아니라 인간이 가진 사상마저도 휩쓸어 갔고, 오만한 자세로 인간을 철저히 무시한다.

위선적인 그들은 오만하고 불손하다. 그러나
땅은 로마 호민관의 발아래서 떨고 있다.
(…)
자연은 내게 말한다.
(…)
“나는 너희들의 외침도, 한숨 소리도 듣지 않는다.
하늘에서 말없는 관람객들을 찾고 있는
인간의 연극이 헛되이 나를 지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개미 같은 민중을 보지 않으며, 그들의 소리를
듣지도 않고 달려간다.”
나는 그들의 재로 이룬 은신처 따위엔 관심이 없다.
−<목자의 집>

그렇다고 우리의 삶, 인간의 역사를 포기할 수만은 없다. 오만한 자연에 맞서 무언가 희망을 찾아야 한다. 자연이 오만하게 인간을 무시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자연을 무시하고 새로운 길, 새로운 희망을 찾아 일어서야 한다. 자연에 희생당하는 것은 표면적인 것뿐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자연으로부터 피해를 입는다.

살아라, 냉정한 자연이여, 다시 살아라, 끝없이,
우리의 발밑에서, 우리의 머리 위에서,
그것이 너의 법칙이니까; 너희들, 그리고 너희들이 여신이라면
업신여기시라, 당신을 왕으로 섬겨야 할 비천한 나그네 인간을;
너희들의 처세나 헛된 화려함보다도
나는 인간의 괴로움으로 점철된 위엄을 사랑하나니;
너희들은 나로부터 사랑의 외침을 듣지 못하리라.
−<목자의 집>

<목자의 집>에서 비니는 대자연 속에 홀로 서 있는 목자의 집에서 자연은 인간에게 냉담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비니는 자연을 냉담하고, 태연자약하며, 고고하게 아름다운 것으로, 하늘을 광막하고 황량한 것으로 느낀다. 자연 속에서 그는 ‘거룩한 고독’을 느끼면서 인간의 사상을 심오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인에게서도 자연에서도 존재의 고독을 위로받지 못한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이제 인간이 호소할 곳은 신이란 존재밖에 없다. 하지만 신마저도 인간이 고독하고 힘겨워서 간절히 부르짖을 때 응답하지 않는다.

그렇게 신의 아들은 거룩한 아버지와 이야기했다.
그는 아직 엎드려 있다. 그는 기다린다. 그는 희망하고 있지만
포기하고 이렇게 말한다. “나의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영원히!”
끔찍한 공포감, 끝없는 고뇌는
그의 느린 임종의 고통을 더욱 배가한다.
그는 오랫동안 바라본다. 오랫동안 찾고 있다.
침울한 대리석처럼 하늘은 온통 캄캄할 뿐이다;
빛도, 별도, 달도 없는 이 땅,
영혼의 빛이 없어 땅은 아직 신음하고 있다.
−그는 숲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유다 무리의 횃불이 배회하고 있는 것을 본다.
−<감람산>

신도 인간에게 위로를 주지 못하는 것이다. 신도 역시 인간에게 무관심하고 냉담한 존재다. 인간에게 아무런 위안을 주지 못하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영원하신 아버지가 아니다. 비니는 <감람산>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던 전날 예수님의 간절한 호소에 ‘영원한 침묵’만을 보낸 냉담한 존재로 신을 묘사하고 있다.

성서에 기록된 성스러운 낙원에서 인자가 본 것을
말하고, 알렸음에도 피조물들의 외침에 못 본 척,
못 들은 척, 말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유산되어 버린 세상처럼 하늘이 우리를 내버려 둔다면
정의는 그 부재에 대해 멸시로 대응할 것이며,
신의 영원한 침묵에는 오로지
냉정한 침묵으로만 대답할 것이다.
−<감람산, 침묵>

비니는 그의 시에서 하나님이란 존재를 비난한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하더라도, ‘피조물의 외침에 벙어리이고 소경이며 귀머거리다’. “영원한 아버지, 위안자인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심판 날이 있다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면서 죄악에 빠지게 했던 사람들 앞에 변명하러 올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기 전, 그것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기 위해 간절히 신을 부르지만 신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 설령 신이 존재한다 해도 인간에게 위로를 주지 못하는 나약한 신에 불과하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그 일을 처리하기 어려워진 신은 비겁하게 숨어 버린 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존재한다면 예수를 곤경에 처하게 해 놓고 그것을 처리할 자신이 없어 숨은 신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신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신이란 존재도 믿을 것이 못 된다는 말이다.
인간이 호소할 곳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외로움을, 고독을 위로받을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인간의 호소나 바람이나 기도는 무익한 일이다.

그러고는 바다 위 위선적인 별을 향해 항해했다.
항해술이 부족한 그는 공중으로 깃발을 올렸지만 곧
돛대 아래로 침몰해 버렸다.
앞에는 시커멓고 삭막한 물결뿐 아무것도 없었다.
폭풍우로 인한 가혹한 노동의 대양
물결은 수많은 생명들을 싣고 와서 부수어 버린다.
며칠 동안 맥없이 물결치면서
그의 영혼은 굴곡 속에 떠올랐다.
−<플루트>

이렇게 의지할 곳 없는 인간은 자유의지대로 삶을 꾸려 나가는 일조차도 불가능한 존재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어디에서든, 어느 순간이든 늘 한계에 부딪친다. 의욕을 가지고 용감하게 도전해 본들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무자비한 운명의 무게에 눌려 있는 것이다. 운명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인간 존재는 지상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인간에게 부여된 지력의 테두리 안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 한계의 최종 선에는 죽음이 예리하게 버티고 서 있다. 인간 조건은 이렇게 고독하고 무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한 마리 소의 머리가
돌을 넘어서지 않고도 깊은 밭고랑을 파거나, 선이 그어지는 것처럼
각각의 머리는 굽실거리며 일상을 그리고 있었다.

냉엄한 신들은 자신들의 노예인 인간들의
두개골과 눈 위에 무거운 멍에를 메우니
인간은 모두 끝없는 사막에서 별도 없이 헤매며,

족쇄가 채워진 발을 힘겹게 들면서
운명이란 원에서
청동으로 된
끄떡없는 손가락이 하라는 대로 따르고 있다.
−<운명>

<운명>에서 비니는 인간 조건과 운명이라는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인간을 누르고 있는 운명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운명 앞에서 무력한 존재다. 인간은 누구나 무자비한 운명의 중압에서 방황한다.

완다여, 그대가 침묵한 후에도 난 아직 듣고 있다오.
생각하는 영혼이 있는 모든 세계의 끝에
지고의 운명의 공포를 지니고 있는 실팍한 손이
내 가슴을 괴롭히고 있음을 느꼈다오.
−<완다>

마치 둥지 안에 있는 새처럼 인간에게 한계를 설정하고 조건을 부여하는 운명을, 죽음과 직면하는 인간의 숙명을 묘사한다. “비니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완전한 굴종과 요구하는 숙명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인 것이다.”[귀스타브 랑송(Gustave Lanson, 1857∼1934)] 따라서 인간은 각자 주어진 운명을 극기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가 농노의 신분을 벗고 속죄 받은 손으로
타르타로스의 노예만이 존재하는 마음을 만들며
자유로운 목자를 만들면서
대기와 자유를 그들에게 동시에 돌려주려고
많은 새들을 구입하고 큰 새장을 만드는 데 몰두하는
유복한 여행자처럼
온 민족을 인도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완다>

세상에 태어났지만 아버지 우라노스의 심술로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지하에 갇혀 있어야 했던 티탄 족처럼 우리는 노예와 같은 숙명을 타고났다. 신의 손가락이 지시하는 대로 따를 뿐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인에 불과하다. 그렇게 자유롭지 못한 삶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비니는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우선 인간은 체념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거대한 운명의 짐에 무기력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체념밖에 없다. 반항해도 소용없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반항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다. 화를 낸다 해도 화를 받아 줄 대상도, 반응할 대상도 없으니 화를 내는 것도 어리석다. 그러니 앓는 소리를 낸다든가 하소연하는 일은 비겁한 일이므로 긍지 있게, 명예롭게 고역을 치러 나가야 한다. 그러다 죽음이 닥쳐오면 묵묵히 인내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렇다고 그저 체념하고 삶을 포기하는 것은 극기주의가 아니다. 비니는 이 인간 존재의 비관에서 벗어나는 일로 자비를 내세운다.

“나의 자매여 내 집으로 들어오라.”
너의 조상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으니; 그들의 마지막 딸을
나의 견고한 지붕 아래로 맞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내 집에서
네 아이들은 너처럼 순결하게 자라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일하는 우리에게서
대지는 성스러우며, 건강한 팔로 섬기는 자에게
상속권을 준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농사꾼 카인이 여기서 앙갚음을 하고
숲에서 목표도 없고, 법도 없고,
영혼도 없는 야생의 늑대들이 분노로 눈멀고 굶주리며
불행하게 서로 물어뜯다가 길을 잃은 것처럼
사냥꾼 아벨은 노동과 여자를 업신여겼던 연고로
그의 족속이 방황하다가 죽어 가는 것을 보게 되리라.
−<토인의 딸>

공통적인 업보를 지고 함께 허덕이는 비참한 동포들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자비의 출발점이다.

그는 이미 이렇게 말했을 것이오. “나는 연민을 가지고 있다.
나는 거드름을 피우고 있으니; 옛날의 범죄는
새로운 순교자들에 의해 씻겼다.”;
그의 목소리는 놀라서 주의를 기울이는 국가들 앞에서
자유로운 민족, 속박당하는 민족 앞에서
마지막 입을 열고 있는 천사들의 목소리처럼
공간에서 세 번 반복했을 것이오.
“암양이 어린양의 피로 나를 굴복시켰다.”
−<완다>

예수가 고통을 당하고 그 피로 인류를 구원했듯이,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고귀한 정신은 서로 돕고 사는 일이다. 자연에게 버림받고 여인에게 버림받고 신에게마저 버림받은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일이란 공동의 운명을 가진 인간끼리 서로 도우며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는 일뿐이다. 예수가 그런 아름다운 동포애를 보여 주었으니, 우리가 고독과 무거운 운명의 짐에서 그나마 행복할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는 길은 서로를 위한 희생뿐이다.
비니는 인간의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동족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제시한다. 이것이 비관주의에서 극기주의로 나아가는 길, 즉 자비다. 이러한 연민과 자기희생의 화신은 <늑대의 죽음>에서 수늑대가 아내와 가족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는 장엄한 죽음의 장면에서 나타난다.

그는 자기 살을 꿰뚫은 우리의 총탄에도,
십자로 가로질러진 우리의 날카로운 단도에도 불구하고
강철 같은 턱을 벌리지 않았다.
목이 물린 개가 죽어서
늘어진 후에야 늑대는 개를 내려놓고 우리를 노려본다.
(…)
그는 다시 우리를 노려보더니 눕는다.
쏟아지는 피를 핥으면서 자신이
어떻게 죽게 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 채
커다란 두 눈을 감고 말없이 죽어 간다.
−<늑대의 죽음>

인간에게 무정한 자연과 존재하지 않거나 침묵할 뿐인 신에 대한 사랑을 그치고, 차라리 인간의 장엄을 사랑하고, 영원하지만 공허한 것에 사랑을 쏟을 것을 <목자의 집>에서 주장한다.

너, 무심한 여행자여, 너는
네 이마를 기대고 내 어깨 위에서 꿈꾸고 싶지 않은가?
오라. 회전하는 집의 평화로운 문턱으로부터 오라.
지나간 사람들, 지나갈 사람들을 보라.
순결한 정신이 나에게 주는 인간의 모든 그림들은
오래도록 고요하고 위대한 나라들이
우리 문 앞에서 펼쳐질 때 생명력을 얻으리라.

우리는 그렇게 걸을 것이다. 죽은 자들이 지나간
불모의 이 땅 위에 우리 그림자만을 남겨 둔 채로;
우리는 그들에 관해 말하리라. 모든 것이 어두워진 시간에,
네가 지워진 길을 따라가고 싶어 할 그 시간에,
불확실한 나뭇가지에 기댄 채
마치 샘가에 있는 디아나1)처럼
울다가 침묵하며 위협받는 너의 사랑을
몽상하기 좋아하는 그 시간에.
−<목자의 집>

인간의 고독과 신의 침묵, 허무와 부조리의 인식, 절망적 조건에서의 능동적인 자기 극복, 공동 운명의 의식에서 일어날 번민과 동포애 등을 보여 준다. 그의 이런 사상은 실존주의를 예비하고 있기도 하다.
인간이 처해 있는 비극적 숙명 앞에서 조용히 자기의 운명을 감수하고 최선을 다하며 묵묵히 살다가 죽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이 그의 극기주의의 핵심 사상이다.

지금 신탁은 공중과 거리를 떠돌고 있다.
행인이 행인에게 하늘에 있는 검은 점을 가리킨다.
우리는 구름 속에 있는 고독과 우리를 연결시킨다.
운명의 빛이 비치기 4년 전 일이다.−하지만 권력은
그의 교리 속에 갇히고, 그림자 속에서 그는 시소 놀이에
숨겨진 문제들을 생각하느라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신화>

그는 <늑대의 죽음>에서 수늑대가 자기 가족을 구하기 위해 묵묵히 죽어 가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극기주의를 찬양한다. 인간은 누구나 불가피한 운명 앞에서 아무런 불평 없이 자기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극기주의를 <늑대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 철학자 제논에 의해서 주장되었던 극기주의는 오직 이성을 따르면서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인간의 불행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인간이 어떠한 불행 앞에서도 묵묵히 침묵을 지키면서 참는 것, 이와 같이 극기하는 데는 자제심, 자기 포기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이 극기하고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불행과 고통 앞에서도 태연자약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불행을 당하고 고통스러우면 신음하고 울부짖게 된다. 또한 부당한 대우를 당하면 불평하게 마련이고, 불행을 당하면 그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기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니는 “신음하거나 울거나 기도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비굴하다”고 말한다.
자기의 불행을 처음부터 단념하고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 불행을 타개하려고 노력하다가 불가능하면 노력을 포기하고 묵묵히 자기의 숙명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침묵을 지키고 감수하면서 인간의 자존심과 긍지를 지키라는 것이다. “침묵만이 위대하고 나머지는 모두 나약한 것이다.” <늑대의 죽음>에서는 인간이 품위와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 하며 신음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간청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어떠한 일에도 최선의 노력을 하다가 안 되면 극기하고 말없이 운명을 감수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는 일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비니는 비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다른 방법으로서 순수 정신의 소산인 사상을 후대에 전달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바다에 던진 병>에서 시인은 인류 복지를 위해 사회의 불행이나 악조건에 굴복하지 말고 사상을 후대에 전달하는 사명감을 갖자는 생각을 펼친다.

그는 희생되었다. 대지는
경건한 불후의 명작인 그를 거둬들여야만 한다.
그것은 군주나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귀한
박식한 일기이며 고독한 계산이다.
그건 폭풍우 속에서 생긴 파도의 지도이며
그의 머리를 부수게 될 암초의 지도이니;
미래의 여행자들에게는 숭고한 약속이다.
(…)
진정한 신이여, 강한 신은 사상의 신이로다!
우리 이마 위에는 운명이 던진 씨앗이 있으니
풍요로운 지식의 소나기를 쏟읍시다.
그러고 나서 영혼과 돌 같은 과일을 거두어 그는 외출한다.
모든 것은 성스러운 고독의 향기로 생긴다.
우리의 작품을 바다에 던집시다. 넓은 바다에;
−신이 항구로 그녀를 인도하기 위해 그녀를 잡을 것이다.
−<바다에 던진 병>

세상의 모든 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 사라지거나 소멸될 수 있다. 그러나 사상만은 영원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사상은 보이지 않는 재산이지만, 머리 또한 우리 몸에 붙어 있으니 우리 몸이 볼모로 잡히거나 사라지면 사상 또한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기록을 해야 한다. 그리해서 그것을 깨지지 않는 병에 넣어 영원히 존재할 바다에 던져 놓으면 언젠가 우리 후손들에게 전달될 것이다.
극기주의는 연민을 토대로 한 인류애와 순수 정신이 지배하는 인간의 사상과 문명을 믿는 낙관적인 사상으로 바뀐다. 그는 순수 정신의 지배를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순수 정신의 지배는 창작에 의해서 준비된다. 긍지를 가지고 명랑한 기분으로 자기 작품을 후세에 맡기는 것이다.
<바다에 던진 병>에서 그는 인간의 순수 정신과 사상의 소산인 한 권의 책이 빈 병에 넣어져 바다에 던져지고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프랑스 해안에서 후세의 사람에 의해 건져지면, 인류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만일 이 책의 사상이 위대하다면 언젠가는 이해되고 찬양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일시적인 당대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세의 사람을 위해서 숭고한 사상이 담긴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순수한 정신>에서 그는 독자들에게 확고한 희망과 위안을 주고 있다. 위대한 사상은 불멸하여 후세에 영원히 남게 된다고 믿는다. 예술 작품의 영원성을 그는 위로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유일하며 최후의 부서져 버린 두 사슬로 된 반지,
나는 머문다. 그리고 나는 아직 고도에서
우리의 재치 있는 학자들과 순결한 선생들 사이에서 버티고 있다.
시인과 준엄한 사상가들의 이상이다.
나는 20년의 침묵 속에서 그 지속을 느껴 오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프랑스가 나의 그림을
응시하며, 내 그림들 위에 꽃을 던지는 것을 보고 있다.
(…)
당신을 사랑하는 산 자의 젊은 후예여!
당신의 눈에서 나의 모습은 지워졌으니
나는 거울 속에서 나 자신을 알 수 있으니
늘 과거 우리의 업적을 새롭게 판단하라!
다시 부활하는 많은 친구들이여! 나의 운명은
10년 내로 당신을 나에게 데려올 수 있으니
내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라. 그러면 나로서는 족하다!
−<순수한 정신>

시인은 사상가의 대표다. 누구보다도 깨어 있는 존재이며 세상을 밝히는 빛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 모든 것은 스러져도 사상은 남을 것이니 시인은 순수한 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시인의 예술성은 영원하여 후대가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니는 자신의 사상을 상징적인 방법을 통해 표현했다. 그는 낭만파 시인으로서 감정 토로를 직접 표현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표현하면서 장중한 음악적 효과를 이용한 시인이기도 했다.
비관주의로 출발해 만년에 이르러 극기주의 사상을 갖게 되기까지, 비니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세 가지의 주된 흐름을 유지했다. 고독한 존재라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인간, 그 인간은 후에 카뮈가 부르짖었던 부조리한 인간과 닮았다. 벗어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숙명으로 안고 있는 인간은 바로 시시포스가 굴려 올리는 돌처럼 끊임없는 벌을 받는 존재인 것이다. 이 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없다. 단지 벌을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
늑대는 자기가 처한 운명을 타개하려고 노력했지만, 불가피한 숙명 앞에서도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을 묵묵히 감수하면서 장엄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잔인한 사냥꾼들을 늑대는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장엄한 죽음을 맞이한다.
늑대는 가장 용감한 개가 먼저 자기에게 덤비는 것을 보고 목을 물고 놓지 않는다. 늑대는 투쟁할 줄 알았다. 만일 그 투쟁이 무익하고 소용이 없을 때는 투쟁을 포기하고 자기 운명을 감수하는 것이다. 투쟁할 때는 투쟁하다가 불가능하면 침묵을 지키면서 자기 운명을 감수하라는 것이다. 늑대가 개의 목을 놓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늑대가 개의 목을 놓아 주었다면 자제심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끝까지 투쟁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늑대가 사냥꾼에게 덤비지 않은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심한 분노에서 행동하는 것이지 냉정한 이성을 지키는 행위는 아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숙명을 타고난 존재들이자 동포다. 그럴 바엔 같은 처지의 존재끼리 동포애와 연민을 가져야 한다. 이 숭고한 정신이 자비다. 작게는 가족애로,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정신이다. <늑대의 죽음>에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은 아버지 늑대의 희생이다.
이러한 자비와 희생의 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서로를 위해 어떠한 고독이나 고통도 참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를 수 있다. 고매한 인간으로서의 명예와 품위를 갖는 일이다.
늑대는 다만 경멸하는 눈빛으로 사냥꾼을 바라본다. 그 눈빛은 말없이 죽을 줄 안다는 긍지를 보이는 것처럼 보였다. 신음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간청하지도 말아야 한다. 신음하는 것, 눈물을 흘리는 것, 기도하는 것,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품위를 상실하는 일이다. 어떤 불행과 고통 앞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하다가 안 되면 극기하고 말없이 운명을 감수하는 것이 극기 사상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인간이 다다라야 할 지고의 단계라는 것이다.

 

각주

  • 1) 로마 신화에 나오는 숲의 여신으로 야생동물의 수호신, 여성의 수호신이다. 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와 동일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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