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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편집자", 53, 그리고 외길 인생
2016년 12월 31일 00시 05분  조회:3011  추천:0  작성자: 죽림
1천권 책 만든 ‘한국출판 산 증인’
한용운 전집·역주 목민심서·창비…
“다산은 당대 최고 지식인, 행복했다”
편집·교정 반세기
정해렴 지음/한울엠플러스

 

53년 동안 편집, 교정, 번역 작업을 해 1천여 권의 책을 만들어온 정해렴(77)씨가 첫 저서를 냈다. <편집·교정 반세기>다.

 

자신이 만든 책을 시간 순으로 배열하고 만든 과정과 얽힌 사연을 기록했다. 신구문화사 10년, 창작과비평 20년, 현대실학사 23년 등 53년 동안의 역정이다. 편집 외길 인생을 걸어온 정씨 개인의 자취인 동시에 한국출판의 역사라 할 터이다.

 

<한용운 전집> <시조문학사전> <국어국문학사전> <8억 인과의 대화> <역주 목민심서>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 <채만식 전집> <소설 동의보감> <임꺽정> <역주 흠흠신서> <역주 경세유표> 등. 한국 출판의 획을 그은 책들의 탄생 비화가 흥미진진하다. <독립운동사 연구> <타는 목마름으로>를 만들 당시 ‘문화공포부’의 검열 행태와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심문을 받던 기억, 판매금지를 당해 책과 지형을 작두질해야 했던 일 등은 군부독재를 건넌 출판인의 나이테에 해당한다.

 

“편역은 많이 했지만 저술은 처음이다. 나도 쓸 수 있나 시험 삼아서 써봤다. 얘기가 되더라. 한 가지 일에 매진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정씨는 자신이 만든 책 판권란을 보고 기억을 되살려 기술했다며 원고지 1800장에 이르는 양이지만 생각이 안 나서 거론 못한 것도 있다고 했다. 때로 관련된 분들이 불편한 부분도 있으나 한국 출판계의 편집교정 실태의 기록을 남긴다는 뜻이며 누구건 책을 조심스럽게 내야 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장덕순의 <한국문학사> 교정을 보니 한 면에 평균 3~5자, 최대 15군데나 틀린 곳이 있었다. 전체가 500쪽이니 1500~2500군데가 틀린 셈이다. 지은이가 제자들한테 교정을 맡기면서 벌어진 게 아닌가 추정한다. 그는 교정 이후 학계 행사 때 만나면 슬그머니 피하시더라고 전했다. 이에 비해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은 5면당 1자씩 잘못이 있더라면서 우리나라 출판 현실에서 최상의 책이었다고 술회했다.

 

“재주가 없고 말주변이 없으니 오랫동안 책을 만든 게 아닐까. 해방, 한국전쟁 등 과도기에 대학을 다녀 학창시절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다. 자기계발 기회도 없었다. 출판계 입문해 1천권의 책을 만든 것은 밥벌이인 동시에 제대로 된 공부 과정이었다. 나만큼 독서를 많이 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행복한 인생이었다.”

 

편집자로서 그가 우선시한 것은 원문 대조. 지은이가 인용한 문장을 원전과 대조하여 잘못을 바로잡았다. 영어나 한문의 번역문도 마찬가지. 지은이의 저술 과정을 되짚어가는 작업이라 저술 못지않은 공부와 노력을 들여야 했고 그것은 그대로 자신의 피와 살이 되었다. 한국문학, 역사의 콘텐츠를 줄줄이 꿰어 어느 면에서는 그 분야 학자들을 능가하는 실력자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연마한 한문 독해력은 실학자들의 저술을 편역하는 기초가 되었다. 창작과비평 퇴임 뒤 현대실학사를 차려 다산의 저서 18권을 편역한 것은 출판계 이력 30년의 결실이다.

 

“다산은 한중일을 통틀어 당대 제일 가는 학자다. 학문 수준도 그렇지만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컸다. 최고 석학의 책을 펴내는 게 행복했다. 편집자의 눈으로 봐도 그의 책은 거의 오류가 없었다. 인용한 중국 사료는 비교적 정확했다. 저술을 한 뒤 제자를 시켜서 원문 대조를 한 게 틀림없다. 하지만 국내 저서는 조금 달랐다. 연암의 책을 인용하면서 원문과 다른 부분이 있더라. 구하기 어려워 기억이나 필사에 의존하면서 빚어진 게 아닌가 싶다. 편역하면서 바로잡았다.”

 

가장 빛나는 그의 업적은 정본 만들기. 채만식 전집, 한용운 전집, 홍명희 <임꺽정> 등이 그것이다. 작품이 처음 선보인 신문, 나중에 나온 단행본 등을 찾아 일일이 대조해 조판과정에서 실수로 빠뜨리거나 뒤바뀐 글자와 문장을 되살렸다. 지은이조차 바로잡지 못한 부분을 잡아내어 지은이의 애초 의도와 최대한 가까운 형태로 완성했다. 정본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그의 철두철미한 작업은 단연 돋보였으며 출판인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 되었다.

 

“읽다 보면 어색한 부분이 눈에 띈다. 원사료를 확인해보면 대개는 편집자의 오류였다. 활자가 작고 행간이 촘촘해 새 간행물로 옮기는 과정에서 건너뛰는 사례가 종종 있더라. 원사료에도 어색한 부분이 보이는데, 앞뒤를 살펴보면 전말이 드러난다. 문선, 조판하는 과정에서 앞뒤가 뒤바뀌거나 한 글자씩 밀려난 것이다.” 그는 자신이 활판인쇄 과정을 겪었기에 금세 알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추정일 뿐. 몇 번씩 읽어 추론이 합리적일 때에 한해 바로잡았다면서 함부로 고치는 것은 위험하다고 덧붙였다.

 

이밖에 그는 한글화, 역주, 색인을 보편화했다. 입문 무렵 출판계는 국한문 혼용이 보편적이며 한문은 원문을 그대로 실었다. 그는 한글을 우선하고 필요하면 괄호에 한자를 병기했으며 인용문이 한문일 때는 번역문을 우선하고 원문은 괄호 또는 각주 처리했다. 교수가 대부분인 저자들이 책이 가벼워진다며 이를 반대했지만 어려운 학술서의 가독성을 높임으로써 역사, 철학서의 대중화에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색인 역시 마찬가지. 책에서 밑줄 친 고유명사, 열쇳말을 가로 8, 세로 1.5㎝ 카드에 일일이 옮겨 적어 가나다 순으로 분류해 권말에 붙였다. 이로써 학문하는 이가 이용하는데 편리한 책이 되었다.

 

<편집 교정 반세기>는 대체로 이러한 내용인데, 1976년 설악산 대청봉 등산 이야기가 들어있는 게 이채롭다. 얼마나 책 만들기에 전념했으면 그럴까, 싶다. 꼼꼼한 원문대조와 주, 색인 작업은 이제 당연시하는 관행이지만 그것이 한 편집자의 외ч 삶이 이룬 결과임을 알겠다.

 

“여력이 되면 근대 실학자들의 저술, 특히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번역하는 게 꿈”이라는 그는 작업 틈틈이 눈을 쉬어주며 시력관리를 한다고 했다.

 

/임종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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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를 든 정해렴 대표. 해지도록 사전을 들추며 보낸 반세기 편집 인생이다. [사진 한울]

돋보기를 든 정해렴 대표. 해지도록 사전을 들추며 보낸 반세기 편집 인생이다. [사진 한울]

“공판타자(활자판에 활자를 늘어놓고 한 글자씩 찾아 원지에 찍은 후 등사하는 기법)를 사용했는데, 활자가 없으면 같은 계열의 글자를 찍어놓고 철필로 써 맞췄다. 가령 ‘하’자가 없으면 ‘히’자를 쳐놓고 철필로 ‘ㅏ’의 점을 그은 것이다.”

『편집·교정 반세기』 펴낸 정해렴 대표
책 1000여 권 만든 53년차 출판인
“60년대 활자 없어 철필로 써 넣기도”

53년차 현역 출판인, 정해렴(77) 현대실학사 대표가 출판 입문 첫 해인 1964년 교학도서에서 중학교 작문 교과서를 만들며 경험한 일이다. 한국 출판계의 살아있는 역사로 통하는 그는 신구문화사·을유문화사 등을 거치며 1000여 권의 책을 펴낸 편집·교정 전문가다. 1980∼83년엔 창비 대표를 지냈고, 97년부터는 고전 번역서 전문 출판사인 현대실학사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그는 자신의 출판 인생을 꼼꼼히 되짚어 기록한 회고록 『편집·교정 반세기』(한울)를 펴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1980년대까지도 원고는 원고지에 쓰는 것이었다. 신문 연재 소설을 책으로 출간하는 과정은 이랬다. 작가가 200자 원고지에 손으로 써서 신문사로 보내면, 신문사에서 활자를 찾아(문선) 조판해 신문에 싣고, 작가는 신문 연재 분을 모아 한 권 분량씩 출판사에 넘긴다. 출판사에서는 신문을 보며 다시 문선·조판하고 초교·재교·삼교의 과정을 거쳐 지형(紙型)을 떠서 인쇄소로 넘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신문 스크랩이 혹 누락되면 책에서도 그 내용이 빠질 수밖에 없다. 1972년 신구문화사에서 『한용운 전집』을 펴낼 때 일이다. 조선일보에 연재됐던 소설 ‘흑풍’의 교정을 보다보니 한 회씩 빠진 부분이 여덟 곳이나 있어 이야기가 뚝뚝 끊겼다. 그는 사직도서관과 중앙대 도서관 등을 다니며 과거 신문철을 뒤졌고, 마침내 빠진 8회 분을 찾아 내용을 보충했다. 당시엔 복사기도 보편화돼 있지 않아 신문을 일일이 손으로 베껴 옮겼다. 그는 또 “신문의 깨알같은 글자를 보고 문선·조판하다 보면 한두 줄, 한두 단어씩 빠뜨릴 확률이 매우 높았다. 이를 교정에서 못 찾아내면, 교묘하게 빠진 이 문장은 영원히 작품에서 사라지게 된다”고 했다. 그가 평생 ‘철저한 원고 대조’를 강조하고 지킨 이유다.
 
#‘xxx’은 금기어?
1980년 창비에서 출간한 『독립운동사 연구』(박성수 지음)는 독립운동가 이름에 ‘xxx’을 포함시켰다가 절판되고 말았다. 당시 창비 대표였던 그에게 문공부 간행물 심의관이 “좀 보자”고 했다. 17쪽에 실린 “해방 직전에 3대 독립군사단체가 있었으니 그 하나가 광복군(김구)이었다. 다른 둘은 연안의 조선혁명군(김무정)과 간도 장백산의 조선인민혁명군(xxx)이었다”는 내용이 문제였다. 심의관은 이 구절을 고치거나 xxx에 대해 ‘현재 fh의 xxx이 아니다’라는 각주를 달아 발행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책을 더 찍지 않는 것으로 수습했다”면서 “당시 소문으로는 반공 단체 혹은 경찰이 문공부에 항의해 생긴 일”이라고 기억했다.
 
#작두질당한 시집
82년 김지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출간한 뒤엔 3박4일 동안 남산 안기부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사무실을 나서 지프차를 타고 가다가 눈을 가리고 남산에 올라갔다. 새벽까지 이런저런 조사를 받고 진술서를 썼다. (…) 나에게 시집과 지형 포기 각서를 쓰라고 하기에 그냥 써주었다. 출판사 폐업계도 쓰라고 하기에 써주었다. 이날 오후 풀려나 회사에 도착하니 서울지방국세청에서 회사에 들이닥쳐 장부 일부를 가져가고 또 목동 내 집에서도 어음장과 장부를 가져갔다.”(199, 200쪽) 당시 제본하던 책과 지형은 작두질해 폐기했다. 이후 출간한 김지하 시인의 『남』 역시 판매금지를 당했다. 그는 “판매금지처분을 문서로 하지 않고 발행인을 불러 통고했다. 공문을 보내면 나중에 이를 근거로 삼아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으니 말로 처리하는 듯했다”고 돌아봤다.

DA 300

 


이지영 기자 

[출처: 중앙일보]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냈다 안기부서 3박4일 조사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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