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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 창작법 ① 동시(童詩) 산책(散策) 신 현 득
동시가 어떻다는 말을 하기 전에 나는 나의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빠꼼
문구멍이
아가 키가
스무 글자가 되지 않는 이 작품은 이런 피나는 작업 긑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69년도 조선일보에서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혔다.
뽕잎이 핍니다.
아까시아 잎이 핍니다.
<봄>이라는 작품이다. 어떤 이들이 이 작품을 읽고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사 이 작품이 객관성이 없는 표현에서 씌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까만 아기 눈 속
그림자 덮고
꿈 속에서
이 작품은 제법 시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역시 표현들이 분명하지 못하다. 그것은 끝연에 가서 더욱 그렇다.
아가씨가 베를 짜고 있었습니다. 뒷밭에 목화씨가 베짜는 장단에 싹이 틉니다.
목화싹은 베짜는 장단에 쑤욱쑤욱 키가 컸습니다. 베짜는 장단에 잎이 돋고 가지가 나고, 베짜는 장단에 꽃망아리를 맺고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베짜는 장단에 뚝뚝 꽃이 지고 베짜는 장단에 복숭아 같은 다래가 열고 다래가 벌어 목화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목화밭>의 전문이다. (1978년 가을 『아동문학평론』 제9호) |
동시 창작법 ② 동시(童詩) 산책(散策)
신 현 득
학교 종이 땡땡 친다.
이 <학교종> 노래의 「땡땡 친다」는 어법에 맞지 않다 해서 지금은 「땡땡땡」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첫 행에서 「땡땡」을 빼버리면 「학교 종이 친다」가 된다. 「종이 친다」는 「글씨가 쓴다」「옷이 입는다」「공이 친다」와 마찬가지로 문법적인 모순이 있다.
저기 가는
처음 지어졌을 때의 <자전거>라는 이 동요는 교육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이런 노래를 권한다면 도의 교육이 어떻게 되겠는가? 어른을, 특히 나이 많은 할아버지를 놀리는 것이 되고 만다.
땅 속엔
손가락으로
쏘옥
이 아동시는 조금 전까지도 교과서에 실려 전국 어린이들의 본보기 글이 되어 주었다. 땅속에다 손가락을 두고 봄날 돋아나는 새싹의 광경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병아리떼 뿅뿅뿅
병아리가 놀던 곳은 무논 가운데가 아니다. 그런데 미나리는 미나리논 같은 물이 고인 데서 싹을 틔운다. 물론 마른 땅에서 미나리가 돋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보편성이 없다. 보편성이 없는 경우는 작품에서 피하는 것이 좋다.
하나의 물줄기로
나뉘어져 흐르는데
나는 며칠만에 이런 낱귀절 몇을 생각하고 더 다듬어 보면 대작이 되리라는 기대를 해봤다.
비가 돼 내리면서
하나의 반도가 젖고 있네.
나의 한 끝은 벌써
도롱이를 쓴
틀림없는 같은 나라 사람이 걷고 있네.
백두산 천지가, 작은 그릇이
저쪽에서도 한라산이
이 시는 동시라는 이름으로 지난 여름 『소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제목은 <비가 돼 내리면서>였다. (1978. 10. 『아동문학평론』 제10호) |
동시 창작법 ③
철저히 의인(擬人)을 하라 신 현 득
―연필이 말을 한다 그렇게 보고 있으니 재미있다. ―나무는 그 많은 과일을 들고, 낑낑거리네.
이렇게 생각해 봐도 재미있다.
돌각담 너머로
―이거 내가 익힌 거야
탱자 울타리 밖으로
―이거 내가 익힌 거야
이건「가을」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이다. 재미있다.
대추나무
오롱조롱
바람이 가지를
빨간 대추
이 글은「대추나무」라는 동요다. 여기서도 나무의 착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바람이 불어서 흔들리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 몸을 흔드는 거로군. 그런데 자기 몸을 자기가 흔들 때는 무슨 뜻이 있어서일 것이다. ―틀림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나 보다.
시인이면 누구나 나무가 흔드는 모습을 보고 느끼는 것이다.
몸짓
하고 싶은 말이
나무는
몸이라도 흔들어 나무를 관찰하는 김에 다시 나무의 가지를 바라보자. 나뭇가지에는 새가 집을 짓는다. 새둥지 안에는 새새끼가 자란다. 이 때 나무가 흔들리는 건 바로 새새끼를 잠들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시인은 쉽게 알아낸다.
엄마 까치
나무가
이 글은「까치 둥지」라는 동요다. 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까치 새끼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는 뜻에서 씌어진 글이다.
―내가 이 나무라면?
이렇게 해서 습관이 되면 무엇을 보든지 우선 이런 방법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예쁘다고 모두 쳐다보는군. 벌써 시가 되었다.
꽃송이
벌과 나비가
다음은 방아개비가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아주 작은 방아개비가 된 것이다.
불국사의 층계다리
층계는
발자국 위에 놓이는 신발
옛날의 왕에서
발자국 위에
온 신라를 살다 간 사람의
그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 시는 불국사 자하문을 올라가는 층층대인 청운교, 백운교를 놓고 지은 시이다. 물론 자기가 층층대가 되었다는 가정에서 씌어진 글이다. 층층대의 입장이 되어 본 것이다. 누구나 불국사의 자하문 올라가는 층층대가 되었다는 생각을 해 보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불국사에 가 보았습니다.
―누구의 발이나
나는 층층대의 돌이 돼 이렇게 생각한 거여요. (1979년 봄『아동문학평론』제11호) |
동시 창작법 ④
자연의 음성을 번역해서 들어야 신 현 득
자연의 어느 것도 생각을 갖고 있다고 했다.
나는 나는 갈 테야.
나는 나는 갈 테야.
강소천은 이슬비의 음성을 알아 듣고 이 동요를 지었다. 그래서 처음 이 동요의 제목을 <이슬비의 속삭임>이라 했다.
빈 화분·빈 병
국화는 선생님 손으로 심겨진다.
병이 빈 병으로 굴러 다니며
화분과 꽃병은
이 시에 대하여 지은이는 시를 지을 때까지의 일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무끼리
―잎을
잎이 같을 때
나무는
같은 나무끼리는
―너는 형제다.
추운 겨울을 눈 속에 떨면서도 이 시는 산에 가서 나무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시로 옮긴 것이다.
첨성대
신라의 옷을 입은
이 돌이 쌓여지던 날
그 날부터 점잖은 학자님들이
그리고
이 시는 지은이가 첨성대를 바라보고 지난 날을 미루어 생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 첨성대에게 물어보아 첨성대가 대답하는 것을 적은 것이다. (1979년 여름『아동문학평론』제12호) |
동시 창작법 ⑤ 손은 생각지 않아도 된다 신 현 득
사람의 손이 작용을 해 주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다.
나무에 올라가
이런 시의 구절이 된다.
빨간 감이
아무래도 감이 제 스스로 내려왔다는 표현에 맘이 끌린다.
소 등을 타고 오든지
시월에
산에서 여문 도토리도
가을 씨앗이 대신 나가
10월을 노래한 시의 구절이다. 10월이 마당이다. 추수를 해들이는 광경이다. 어느 것이나 사람의 손에 의한 것이다. 실어 들이는 것도 져 들이는 것도 그렇다. 가을 씨앗을 묻는 것도 그렇다.
―연필이
이런 시의 구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할 수 있다. 논리만을 따지는 사람이 있다면
―지우개가
이런 시의 구절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된다.
학교는 제 시간에
학교 이름을
첫 번째 교문을 들어서는 아이
집에서 밭갈이를
저녁 썰물에
그러나 더러는
집은 가까워도
학교의 품은 크다.
그래도 오는 아이가 없나?
이야기가 담긴 이런 시를 읽고도
아침에 교실에서
영희가 보자기를 풀었다.
드르륵―
5월의 교실을 노래한 이 시에서 「문을 열고 꽃다발이 들어온다」 「꽃병이 입을 벌려 받는다」의 두 구절을 두고 생각해도 그렇다.
골목에 아침에
저 집서도 대문이 열리며
―학교 가자.
저 골목서도
참새 짹짹
아침에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있는 골목의 광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손을 생각지 않은 것이다.
거울 속에
새벽이면
거울 속에서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
거울 속에 내다보며
우리를 이 시는 거울 속의 세상을 두고 생각한 내용이다. 즉 이 소재에는 사람의 손이 작용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손이 있고 없고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1979. 겨울. <아동문학평론> 13호에서 |
동시 창작법 ⑥ 모든 것을 하나로만 본다
신 현 득
시를 쓰는데 있어서 비인격물을 인격화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세상을 하나로 보는 작업이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 출발이 된 것이다.
교장실의 시계 속
상당히 먼 옛날일 텐데 ―중략―
벙글거리는 아이들의 얼굴을 거느리고 교문을 나오셨을 때
이 시는 유여촌 선생의 회갑을 축하하는 시의 몇 구절이다. 유 선생은 교단에서 회갑을 맞으셨다. 동화 작가다. 그러므로 페스탈로찌나 안데르센과 관계를 가진다. 그런데 페스탈로찌와 안데르센은 생존자가 아니다. 그러나 생과 사를 둘로 보지 않는다면 한자리에서 서로 만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는 것이다. 생사를 하나로 보았을 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고향 마을로 드는
나와 같이 크던 산짐승
고향에 돌아와서 옛일을 회상하는 장면을 노래했다.
선생님이 걷는 길은
쪽지 한 장을 들고
한 교실
새 소리 솔바람이 ―중략―
산꿩이 우는 골을
산토끼들이 모이라는 듯 발령장을 들고 먼 산골로 전근가는 교사의 심정을 노래했다. 여기서 교사가 걷는 길을 교실과 교실 사이라 했다. 이것은 전에까지 근무했던 교실과 이동해서 근무해야 할 교실의 사이다. 사실 교실과 교실 사이인 것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먼 것 가까운 것을 하나로 보지 않았을 때는 이 사실을 발견할 수가 없다.
엄마는
오빠의 일선 고지서
어머니를 하나의 나무에 비유한 이 시에서 소총의 무게 절반을 가지에 단다는 구절을 음미해 보자. 일선 고지와 나무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 멀리에 있는 소총을 끌어 오는데 있어 마치 옆에 있는 물건을 거머쥐는 듯이 표현했다. 거리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것이다.
나의 하나는
나는 누워서 ―중략―
그러나 바다에서 가지고 온 것
틀리지 않게
그것들이
내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자라고 있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이 시에서는 외부에서 받아들여진 것이 쌓여서 나를 형성하고 있다. 이 때 나는 하나이지만 사실 열도 되고 백도 된다. 그것이 모두 또한 나다. 그 많은 나가 하나인 나 안에서 나타나 외부와 작용을 하고 있다.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생각이 미치는 데까지를 쏘다닌다.
아기 울음이
바위도 석기시대의 어느 날을 노래한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아기 울음과 이야기다. 울음은 형체가 없다. 이야기도 형체가 없다. 그러나 어떤 액체의 형태가 되어 바위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계절은 오다가 ―중략―
저녁 해에 돌아오는
산 넘어 사라지는
여기서 「계절」이란 말을 두고 생각하자. 계절은 물체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배를 탄다는 것이 거짓으로 들리지 않는다.
나무―
그것뿐인 그것이 이 시는 햇살이나 송아지 울음, 학교의 종소리 같은 것이 쌓여 무게를 갖는 과정을 노래했다. 재미있는 생각이라 느껴지는 것이다.
햇볕은 물 위에 쌓인다. ―중략―
바람 소리 새 소리가 봄 개울을 노래한 것이다. 형체가 없는 햇볕이나 바람 소리·새 소리가 물밑에 쌓이면서 부피를 느끼게 한다. 그 부피는 커지는 물 소리에서도 나타나 있다.
도라지 뿌리가
소나무 큰 뿌리에 ―중략―
새 움의 입김이 모여
봄 산의 광경이다. 도라지가 기지개 켜는 소리, 소나무에 물 오르는 소리들이 모인다. 메아리가 커졌다는 데서 그 부피를 느끼게 한다. 새 움의 작은 입김들이 모여 산을 감을 수 있는 커다란 안개를 이룬다. 입김의 부피가 쌓인 것이다.
그런 일들이
아, 그런 것이 이 시에서는 착한 일 한 것이 쌓여 키가 되고 있다. 키 크는 원인이 착한 일 한 것에 있는 것이다. 영양분이 쌓여서 키를 이룬다는 생각이 아니지만 거짓말로 느껴지지 않는다.
종일
종일 푸르른
여름 산의 정경을 읊은 것이다.뻐꾸기 울음이 머루 알이 되고 산의 빛깔이 물 소리가 된다. (1980년 봄 『아동문학평론』 제14호) |
동시 창작법 ⑦
의인(擬人)에는 난이도(難易度)가 있다 신 현 득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 해를 그리기 좋아한다. 그리고 해에다 눈이나 귀·코·입들을 그려 넣는다.
비 오는 날
빗방울을 빗방울을
비가 개었다.
이 시는 놀랍지도 못한 글이지만 마당을 의인한데서 더욱 어색한 느낌을 갖게 한다.
감
형아,
감나무에 달린 감은 의인화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그것은 감이 가지고 있는 모양과 몸빛깔에서 사람과 닮은 요소를 느끼기 때문이다.
인형
내 팔을
정말이어요.
영이를 따라
이 인형의 호소는 실감나게 들린다. 그것은 인형이 아주 어린 아이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돌멩이 ①
냇물에 퐁당 빠졌다.
돌멩이 ②
<쬐그만 게 까불어>
<정말이냐?>
<아니 아니 제발> 이상의 작품은 돌멩이의 성질을 잘 알아서 의인했기 때문에 실감과 재미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돌멩이가 갖는 성질과 맞지 않을 때는 저항을 느끼게 된다.
돌멩이 ③
몸뚱이가
소나기 한 줄기가
―시원해요, 시원해요.
여기서 돌멩이가 노래를 불렀다는 표현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노래라는 것이 돌멩이의 특성에는 맞지 않아서이다.
천둥
먹구름 속에서
겁먹은
바람의 경우에도 그렇다. 등이 바람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향으로 의인이 되어야 한다.
바람 ①
개암나무 가지를 흔들다가
바람 ②
바람의 발끝에 걸려
바람 ①에서는 바람의 손을 생각했고, ②에서는 바람의 발과 발끝을 생각했으나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달밤의 나무
나무는 귀가
개울가 물소리를
이 시에서 나무가 물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것은 달이 떴다는 사실 때문이다. 달이 뜸으로써 나무의 영혼이 가지 끝에 나와 달빛에 반짝이게 되고 영혼의 문이 열리면서 나무는 귀로써 개울물 소리를 듣게 된다. 이렇게 그럴사한 분위기를 설정해 놓고 보니 나무가 소리를 듣는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게 된다. (1980년 여름 『아동문학평론』 제15호) |
동시 창작법 ⑧ 표현(表現)과 객관성(客觀性)의 사이 신 현 득
작품은 작가가 쓰는 것이지만 독자인 어린이에게 호감을 얻어야 한다. 공감이란 독자가 그 작품에 대해서 작가와 같은 걸 느끼는 일이다.
박덩굴
어떻게 어떻게
놀랍지 못한 작품이다. 그러나 독자들이 이해되지 않을 구절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쓰고 몇 해 후에 느낀 것은 <사다리를 놓아주어/올라갔다>는 두 행이 독자들에 그릇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꽃나무 가지
꽃냄새가 풍겨오네.
언뜻 읽어서 무난한 글 같지만 나는 얼마 후 이 글에서 모순을 발견했다. 물론 독자가 되어 이 작품을 완전히 객관적인 자리에 두고 발견한 것이다.
겨울의 노래
수정보다 맑은
눈이 오면
바람이 부는 날은
팽이도 쳐야지
처마마다 기다란
얼음이 얼면
이 작품은 4학년 국어 교과서 12페이지에서부터 시작되는 시 한 편이다. 교과서에 수록될 만한 작품이라면 어린이들에게 본보기글로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그 분위기는 되어 있으나 몇 구절의 표현이 모호해서 상당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1980년 가을 『아동문학평론』 제16호) |
동시 창작법 ⑧ 표현(表現)과 객관성(客觀性)의 사이 신 현 득
작품은 작가가 쓰는 것이지만 독자인 어린이에게 호감을 얻어야 한다. 공감이란 독자가 그 작품에 대해서 작가와 같은 걸 느끼는 일이다.
박덩굴
어떻게 어떻게
놀랍지 못한 작품이다. 그러나 독자들이 이해되지 않을 구절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쓰고 몇 해 후에 느낀 것은 <사다리를 놓아주어/올라갔다>는 두 행이 독자들에 그릇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꽃나무 가지
꽃냄새가 풍겨오네.
언뜻 읽어서 무난한 글 같지만 나는 얼마 후 이 글에서 모순을 발견했다. 물론 독자가 되어 이 작품을 완전히 객관적인 자리에 두고 발견한 것이다.
겨울의 노래
수정보다 맑은
눈이 오면
바람이 부는 날은
팽이도 쳐야지
처마마다 기다란
얼음이 얼면
이 작품은 4학년 국어 교과서 12페이지에서부터 시작되는 시 한 편이다. 교과서에 수록될 만한 작품이라면 어린이들에게 본보기글로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그 분위기는 되어 있으나 몇 구절의 표현이 모호해서 상당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1980년 가을 『아동문학평론』 제16호) |
동시 창작법 ⑩ 동시(童詩)는 동화적(童話的)인 시(詩)다 신 현 득
1981. 봄. <아동문학평론> 제18호에서 |
동시 창작법 ⑪
자연(自然)에게 물어보라.
신 현 득
자연(自然)의 음성(音聲)을 듣는 것만으로는 시(詩)가 씌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이 때는 자연물(自然物)에게 대화(對話)를 거는 것이 좋다. 그러면 자연(自然)은 나름의 음성(音聲)으로 대답해 줄 것이다.
달그림자를 띄우고
다시 더 깊은 이야기를 해 줄 것과 대화를 나누어 보자. 우리에게는 두 개의 손이 있다. 내 가장 가까운 손에게 물어 보자. 손
할머니가
엄마가
할머니 손에
오빠 손에는
죽 한 그릇씩을 먹고
자 이리로
아기 손부터
내 손이 커서
아기가 커서
자연에 물어보니 자연은 무엇이나 가르쳐 주고 있다. 탱자나무
같은 나무이지만
여럿이 어깨동무하고
잎은 자라
과일밭의 과일이 익을 무렵에
그러나 어둡고 무서운 밤에
―과일을 탐내는 놈이냐?
―아야 아얏!
자국 소리도 그림자도
과일밭을 지키면서
<흙과 나무>의 한 작품도 자연과의 대화에서 씌어졌다. 처음에는 흙과의 대화였다. 흙과 엄마
"나는엄마다."
배나무가 뿌리를 뻗어 오면
미루나무 키다리를
흙은 넘어지지 않게
아침에 태양이 지평선에 떠서
"엄마야!"
흙과 나무는
"엄마야
"엄마야
1981. 가을 '아동문학평론' 제20호에서 |
동시 창작법 ⑫ 동요운동(童謠運動)에 붙여 신 현 득
동요(童謠)를 쓰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근 30년 동안 자유동시(自由童詩), 즉 동시(童詩) 일변도가 되어온 아동문학의 시분야(詩分野)가 동요도 아동문학의 책임영역이라는 자기 반성을 한 데서 시작된 것이다.
봄비
보슬보슬 봄비야 꽃나무에 내려라.
위의 동요의 경우를 두고 보자. 첫 연과 둘째 연을 볼 때 「보슬보슬 봄비야」로 시작이 되고 있다. 「잔디밭에 내려라」와 「꽃나무에 내려라」의 대구다. 행을 살펴보면 「파릇파릇 피워라」와 「곱게곱게 달아라」의 대구다. 끝맺음을 「융단으로 덮어라」와 「꽃밭으로 꾸며라」의 대구로 이루어져 있다.
황새야 덕새야 이것은 황새를 보고 부르는 구전동요이지만 4·4조도 7·5조도 아니다.
별 하나 똑 따서
별을 세는 이 구전동요(口傳童謠)도 4·4조와는 멀다. 이것만 보아도 동요는 그 리듬이 퍽 다채로우면서 자유로웠다는 것을 알게 된다. 「푸른 물 출렁출렁 어디로 가나?」
이 시구(詩句)는 1행(行)만으로도 동시의 문장과는 구별이 되고 있다. 악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의성어나 의태어가 악상을 잡아 주는데 역할을 한다고 믿어 왔다. 그것은 사실이다.
이슬 눈 방울 눈
풀잎 끝에 매달린
이 동요는 소재를 잘 택한 보기가 된다. 「이슬 눈 방울 눈」이라는 제목에서 벌써 노래가 연상돼 온다. 좋은 동요가 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겨울 밤
나무들아 춥거든 별을 보아라.
이 작품에서 느끼는 것은 강한 문학성(文學性)이다. 그러므로 이만한 작품을 쓰기가 쉽지 않다. 각고(刻苦) 끝에 낳아진 작품이다. (1982년 여름 『아동문학평론』 제2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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