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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알고싶다] - 목화는 인류의 보배
2017년 02월 18일 18시 35분  조회:5069  추천:0  작성자: 죽림

목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수확을 기다리는 목화 솜
 
1890년대 미국 오클라호마 주에서 목화를 수확하는 모습
 
주사형 전자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본 목화 섬유

목화(木花)는 아욱과 목화속 식물 가운데 섬유를 뽑는 식물, 또는 그 섬유를 말한다. 그 섬유로 짠 직물을 (綿)이라고 한다.

 

 

꽃말[편집]

어머니의 사랑.

전파[편집]

인도에서 기원전 3000년경 첫 목화재배가 이루어졌는데, 그리스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헤로도토스가 목화씨를 가져와 유럽의 목화재배마저도 기원전 2500년 즈음에 이루어졌다. 인더스 유적과 안데스 유적에서 목화가 발견된 것은 이 때문이라는 일설이 있다. 또 몇천 년이 지난 1000년부터 2000년까지 그리스의 이리스에서 목화솜으로 여러 물건을 만들어 썼는데, 이는 십자군이 목화에 대해 유럽에 전한 것이다. 결국 그러한 과정이 여러번 반복되면서 동아시아 중원대륙까지 전파됐다.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고려 말기의 문신 문익점으로 알려져 있다. 1363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목화의 실용성을 깨닫고 씨를 가져왔다. 보통 목화가 원나라의 금수품목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붓뚜껑속에 몰래 목화씨를 숨겨서 들여왔다는 전설이 있지만, 원나라에서 금수품목으로 지정한 것은 화약등의 무기류였기 때문에 역사적 근거는 없다.[1] 문익점은 그 가족들과 함께 목화를 키워 솜으로 실을 뽑아냈다.

특성[편집]

아욱과의 한해살이 또는 목본성 작물로, 높이 60-150cm로 줄기는 열 개의 가지로 나뉘고, 잎은 긴 잎자루를 가진 손바닥 모양이며, 잎의 반대쪽에 흰색 또는 노란색 꽃이 핀다. 일반적으로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어 홍색으로 변한다. 열매는 달걀 모양의 녹색 삭과로서 익으면 속이 3-5개로 갈라지고, 수십 개의 종자가 나온다. 씨앗의 표피 세포가 순백색 털로 발달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솜으로 이용하거나 실로 뽑아 옷감을 짠다. 한편 종자는 기름을 짜기도 하는데, 이것을 면실유라고 하며 식용이나 공업용으로 쓰기도 한다. 목화는 종류에 따라 육지면·해도면·아시아면·인도면 등으로 구분된다.

종류[편집]

목화에는 상업적으로 가꿀 수 있는 네 종류의 종이 있다.


  • Gossypium hirsutum
  • Gossypium barbadense
  • Gossypium arboreum
  • Gossypium herbac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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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에 갔던 문익점이 붓대 속에 숨겨 온 목화씨는 고려인의 생활에 혁명을 불러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비단은 값이 매우 비쌌다. 그러니 일반 백성들은 한겨울에도 삼베나 모시로 옷을 지어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익점이 목화씨로 면화를 짜는 데 성공한 후에는 목면이 보급되어 혹한기를 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또 가난한 사람들은 결혼할 때 비단 이불을 마련하지 못해 혼기를 놓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이 비단이 면포로 대체되면서 혼인 풍습까지 변하게 되었다. 목면으로 면포를 만들고, 면포를 유통하는 과정에서 상업이 발달했다는 것도 문익점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문익점이 목화를 몰래 숨겨 왔다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태조실록》과 《고려사》에는 문익점이 “목화씨를 얻어 왔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어디에도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목화씨를 숨겨 왔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목화는 원나라 곳곳에서 재배되고 있었고, 반출 금지 대상도 아니었다고 한다.

이 주장은 2007년에 문익점의 목화씨 재배보다 800년이나 앞선 백제 시대의 면직물이 출토되면서 더 힘이 실리게 되었다. 국립부여박물관이 국보 제287호 백제 금동대향로가 출토된 부여 능산리 절터 유물을 정리하다가 백제 시대의 면직물을 발견한 것이다. 함께 출토된 창왕명석조사리감이 567년에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통해 이 면직물도 비슷한 연대로 추정된다. 다만 이 백제의 면직물은 목화의 원산지인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지역에서 들여온 토종 종자를 어렵게 소량 재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익점이 들여온 종자는 남쪽의 기후에 맞게 개량되어 대량 재배가 가능했기에 서로 쓰임이 다르다는 것이다.



[Daum백과] 목화씨는 문익점이 들여온 것일까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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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목화씨 도입의 미스테리


우리는 흔히 목화씨 도입에 대해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즉,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돌아가는 길에 목화씨 3개를 관리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몰래 따서 그것을 붓뚜껑 속에 넣어서 고려로 돌아오다가 그것도 국경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원나라 관리들의 엄중한 검사를 무사히 피해서 그것을 가지고 고국에 와서 재배를 했는데 그 중 2개는 죽고 1개가 용하게 살아남아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에 성공해 그로 인해 국내에 널리 퍼져 의류 혁명을 일으켰다는 그런 내용이다.

그 과정이 상당히 드라마틱하며 극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사실을 유심히 보면 다소의 과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문익점에 관해서는 현재도 신화처럼 되어 있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그의 목화씨 도입으로 인한 의류혁명의 공헌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정확한 사실상의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

그에 관한 고려사 문익점 열전의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문익점은 진주 강성현 사람인데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올라 가 정언(正言)이 되었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덕흥군에게 붙어 있었던 바 덕흥군이 패배하니 본국으로 돌아 오면서 목화씨를 얻어 가지고 와서 자기의 외삼촌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그것을 심었다. 처음에는 재배하는 방법을 몰라서 거의 다 말라 버리고 한 그루만 남았었는데 세 해만에 마침내 크게 불었다. 목화씨를 뽑는 물레와 실을 켜는 물레들은 다 정천익이 처음 만들었다. 신창이 임금이 되니 문익점은 좌사의 시학으로서 상소하여 학문을 하는 방도를 논의하였다. 그때 간관(諫官), 이준(李竣) 등이 개인의 토지를 다시 돌려 주어서는 안된다고 상소하여 논쟁하였다. 문익점이 이색(李穡), 이림(李琳), 우현보(禹玄寶) 등에게 의탁하여 병이라 칭하고 서명하지 않고 있다가 이튿날 빨리 서연에 나갔다. 대사헌 조준(趙浚)이 핵론하여 말하기를 “문익점은 본래 벼슬하지 않고 시골 진주에서 농사하던 사람으로서 전하께서 현량(賢良)으로 불러 간대부(諫大夫)를 임명하여 측근에 두고 자문을 돕도록 한 것이니 진실로 충성스런 말을 올리고 정치 상 방도를 진술하여 훌륭한 정치를 보좌하여야 할 것인데 날마다 경연에 나와서는 아첨으로 우물쭈물하여 충직한체 하면서 순순히 전하의 비위를 맞출 뿐이요 간곡하게 간하는 절조가 없이 굽실거리며 덮어 놓고 모두 ‘예! 예!’합니다. 요전에 동료들인 오사충(吳思忠)과 이서(李舒)는 각각 상소하여 현재 시국에 대하여 극력 논평하였으나 문익점은 받는 봉록을 잃어 버릴가 걱정하여 말 한 마디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또 동료들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토지제도를 통론하였으나 문익점은 권세에 아부하여 병으로 칭탁하여 출근하지 않고 그 논의에 참여하지 않아 여러 사람들의 비방을 피하기를 꾀함으로써 잘 된 계획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위으로는 전하께서 사람을 아시는 총명을 더럽히고 아래로는 선비들의 기대하는 뜻에 어그러지니 마땅히 그의 벼슬을 삭탈하고 제 고향으로 돌려 보내 말할 책임이 있고도 말하지 않는 자들의 경계로 삼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곧 문익점을 파면하였다. 그의 아들은 문중용(文中庸), 문중성(文中誠), 문중실(文中實), 문중진(文中晉), 문중계(文中啓) 등이 있었다.

또다른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편에 나와있는 문익점 졸기의 내용을 보자.

" 전 좌사의 대부 문익점의 졸기. 전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 문익점(文益漸)이 졸(卒)하였다. 익점(益漸)은 진주(晉州) 강성현(江城縣) 사람이다. 아버지 문숙선(文淑宣)은 과거(科擧)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익점은 가업(家業)을 계승하여 글을 읽어 공민왕 경자년에 과거에 올라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순유 박사(諄諭博士)로써 좌정언(左正言)에 승진되었다.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갑진년에 진주(晉州)에 도착하여 그 씨 반으로써 본고을 사람 전객 영(典客令)으로 치사(致仕)한 정천익(鄭天益)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천익(天益)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이르러서는 그 종자를 나누어 향리(鄕里)에 주면서 권장하여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아니하였다. 중국의 중 홍원(弘願)이 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木)을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하였다. “오늘날 다시 본토(本土)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천익은 그를 머물게 하여 몇 일 동안을 대접한 후에 이내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으니, 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주고 또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서 1필을 만드니, 이웃 마을에서 전하여 서로 배워 알아서 한 고을에 보급되고, 10년이 되지 않아서 또 한 나라에 보급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니 홍무(洪武) 을묘년에 익점을 불러 전의 주부(典儀注簿)로 삼았는데,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가 졸(卒)하니, 나이 70세였다. 본국의 조정에 이르러 의사(議事)하는 사람의 말로써 참지의정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 강성군(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江城君)으로 증직(贈職)하였다. 아들은 세 사람이니 문중용(文中庸)·문중실(文中實)·문중계(文中啓)이다.

이 두 사료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목화씨 도입 당시의 드라마틱하면서도 극적인 목화씨 도입의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기록상으로는 고려사에서는 목화씨를 얻어 가지고 왔다고 하고 있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길가의 목면(木)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목화가 주위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당시 목화씨는 국경에서 삼엄한 감시를 하며 반출을 금했던 물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익점의 정치 생활도 우여곡절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기록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덕흥군에게 붙어 있었던 바 덕흥군이 패배하니 본국으로 돌아 왔다"는 내용에 대해 사실 관계를 살펴보자. 당시 문익점이 원나라로 갔을 때는 공민왕의 반원 정책으로 인해 여몽 관계가 급속히 악화된 상태였다. 이와 더불어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피난길에 오르게 되자 원 정부는 공민왕을 폐하고 원에 와 있던 충숙왕의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왕으로 책봉해 고려에 보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문익점 일행이 원나라로 출발한 시기와 덕흥군이 고려로 향한 시기가 같았다. 당시 원나라에 있던 고려 관리들은 공민왕과 덕흥군 중 한 명을 임금으로 선택해야 했다. 과거에도 원나라가 고려의 왕을 폐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왕을 세운 선례가 많이 있었다. 충선왕과 충숙왕, 충혜왕 등이 모두 원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다시 즉위했던 임금들이다. 이런 전례 때문에 문익점은 원나라에서 선택한 덕흥군이 승리할 것으로 생각하고 덕흥군에게 붙어 벼슬을 받았다.

그 후속 조치로 원나라는 군사 1만을 보내 덕흥군을 받들고 고려를 치게 했는데 이 군사는 최영과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덕흥군이 패함에 따라 그에게 벼슬을 받은 문익점은 객관적으로 역신(逆臣)이 되었다. 그런데 문익점 일행은 무슨 언질을 받았는지 우두머리인 이공수(李公遂)와 함께 공민왕 13년 10월 고려로 귀국했다. 다행히 파면에 그치면서 목숨을 건진 문익점은 고향인 진주 강성현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목화 재배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천익이 장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사에는 외삼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정천익과 함께 목화를 시험재배 하는데 처음에는 재배법을 몰라 한 그루만 겨우 살게 되었다. 목화 재배에는 성공했으나 목화씨에서 실을 뽑는 법을 몰라 실생활에 접목되지 못한 상황에서 원나라 승려(湖僧) 홍원(弘願)의 도움으로 목화에서 실을 뽑는 물레를 만드는 방법을 전수 받아 전국적으로 전파된 것이다.

이런 과정에 따라서 백성들의 의복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목화는 당시 반출 금지 품목이 아니었고 그의 정치 행적도 후세에 바뀌게된다. 덕흥군에게 가담했던 문익점이 덕흥군에게 저항했던 것으로 바뀌게 된다. 덕흥군에게 저항하다가 미움을 사 강남에서 3년 동안 귀양을 사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 내용은 훗날 문익점의 후손들에 의해 이뤄것 같다.

순조 19년(1819) 후손 문계항(文桂恒) 등이 편찬한 (삼우당실기 (三憂堂實記)와 (정조실록)에 실린 전라도 유생 김상추(金相樞)의 상소문에서 문익점의 내용이 나타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문익점은 사명을 받들고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공민왕이 어둡고 포악스럽다고 원나라에서 장차 폐위시키고 새로 다른 임금을 세우려고 하자, 조칙(謂勃)을 받들 수 없다고 다투다가 드디어 검남(劒南)으로 유배 (流配)되었습니다. 3년 만에 비로소 돌아오게 되자 중국에서 목면(木綿)을 몰래 가져와 사람들에게 직조(織造)를 가르쳤으니, 백성들에게 이롭게 한 사실이 이와 같았습니다."라면서 고려사 내용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바뀌게 된다.

공민왕을 배반하고 덕흥군에 붙었던 내용이 공민왕에 충성을 바치다가 강남에 유배당하는 것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그와 함께 목화도 몰래 들여오는 것으로 바뀐다. 그리고 사전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적 태도를 보이다가 대신들의 상소를 받아 파면 당하는 내용도 없어지고 만다. 이처럼 문익점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오면서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문익점으로 인해 백성들의 의류 생활이 보다 윤택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고 그의 크나큰 공헌이다. 그에게 높이 평가할 것은 중국을 왕래하는 많은 다른 사람들도 수없이 보았을 목화를 보고 고국에서도 재배할 것을 생각해낸 탐구정신이며, 귀국을 하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도 목화씨를 가지고 와서 재배를 해서 성공한 과학적 사고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객관적인 공로를 주관적인 정치 논리에도 개입시켜 정치행적마저 바꾸어 버리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 후손들이 문익점이 목화씨 도입으로 인한 공로외에 정치적으로도 완벽한 조상을 만들려고 했을까? 어쨌든 역사가 후세에 의해 자의적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게되어 씁쓸하기만 하다.


/출처: 세이클럽 역사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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