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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 칼릴 지브란...그림 DANIEL GERH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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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며 화가, '예언자'인 칼릴 지브란은 1883년 12월 6일 레바논의 비샤리(Bsharri ; 베챠리)에서, 마론파(Maronite) 교회 목사의 딸인 어머니와 부유한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지브란의 아버지는 도박을 좋아하여 감옥생활을 하는 등 가정 불화가 심하였고 결국 그의 가족은 아버지를 두고 1895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보스톤의 빈민가에 정착을 했다.
말년이 평탄치 못했던 칼릴 지브란... 그는 40세에 예언자를 출판했지만 삶이 주는 어떤 문제가 힘겨웠나 보다. 결국 그의 간은 망가지고 휴식을 요구했으나 알콜중독으로 그 고통을 무마하려했던 그의 대응은 '예언자'의 죽음을 초래한다.
그의 삶이 어떤 굴곡이 있었던 간에 그는 삶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싶었고, 자신의 삶에도 제시하려 했으나 힘이 부족했나 보다. 인간의 한계가 가끔 이럴 때 느껴지는 데 그래서 예전부터 어떤 수행자에게는 스승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한다. 그리고 도반도.. 나 역시 스승과 도반이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그의 그림을 감상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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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릴 지브란이 사랑했던 세 여인들
메리 헤스켈(Mary E. Haskell)
그녀는 헤스겔보다 나이가 많은 연상의 여인으로
1904년에 열렸던 지브란의 그림 전시회에 참관한 후
그의 예술성과 천재성을 사랑하여 평생 그를 돌봐 준 여인이다.
그녀는 고등학교의 교장이었으며,
그의 파리 유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였으며,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힘썼다.
1910년 보스톤으로 돌아온 지브란은 메리의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청혼을 하였으나 그녀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로써, 지브란은 그녀에 대한 심적 부담감에서 벗어나,
그녀와 플라토닉한 사랑을 지속할 수 있었다.
지브란은 그녀를 "하늘" "천사"로 책에서 묘사할 만큼,
그녀에 대한 고마운을 잊지 않았으며, 그녀와의 사랑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외에도 수 많은 책으로 남겼다.
그는 생전에 여러 점의 그림을 그녀에게 헌납하기도 하고,
죽기전에는 그녀를 그의 유산 관리인으로 지목하여,
생전에 진 그녀의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였다.
메리 헤스켈과 칼릴 지브란의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두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들을 시의 형식으로 배열하여
마치 시를 읽는 듯한 기분으로 서간문을 읽을 수 있다.
또힌 지브란의 일기, 명상록, 작품집등에서 발췌한
보석 처럼 빛나는 글들도 조화롭게 실려있다.
얇고 작은 사이즈라 사랑하는 이들끼리 손 안에
꼬옥 쥐어 주던 책
마이 지아다 (May Ziadah)
지브란과 그녀는 단 한차례도 만나지 않은채 서신으로 만
서로의 예술과 문학을 존경하며 영혼의 사랑을 나누었다.
마이 지이다는 금세기 아랍 문학계에서 가장 뛰어난 여성 작가 중의 하나이다.
마이는 팔레스타인의 나사렛에서 태어 났으며
일생의 대부분을 카이로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한 운동에 평생을 관여했다.
이들은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없는 운명 속에서도,
1912년 지브란이 [부러진 날개]를 출간한 이후부터
그들은 영적으로는 완벽하게 하나된 사랑을 하였다.
[칼릴 지브란의 러브레타]는 지브란이 그녀에게 보낸 수백통의 연서들로 출간 된 책이며,
[내 영혼 가장 가까이에 그대가 있습니다.]는 그들이 나눈
아름다운 영혼의 사랑을 재 조명한 책이다.
1917년 12월 3일
모든 사람중에서
당신이 내 영혼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세상에 태어나던 바로 그 순간에
내가 잃어버린 나의 반쪽입니다.
............................
1919년 7월 25일
그대는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을 생각하며, 당신을 이야기하며,
당신의 비밀을 찾으려 애쓰며,
당신의 신비를 캐기 위해 노력하며,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냅니다.
..........................
1923년 12월 3일
나는 나의 귀여운 이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왜 그녀를 사랑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나는 알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 만으로 충분합니다.
내가 영혼으로 마움으로 사랑한다는 사실 만으로 충분합니다.
...........................
-[칼릴 지브란의 러브레타]중 발췌
바바라 영(Babara Young) --
영국 출신이며, 영어 교사로 서점을 운영하던 그녀는
지브란의 마지막 생애 7년을 헌신적으로 돕고,
임종을 지키며 유품들을 고향으로 보내는 역활을 하였다.
그녀는 1944년에 [레바논에서 온 사람]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유고를 모아 그의 마지막 작품집[예언자의 정원]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그녀도 역시 지브란과 함께 살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의 임종을 지킨 그의 마지막 연인일 뿐이었다.
지브란의 여인들은 모두, 지브란의 책을 읽고, 또 그의 그림 전시회를 보고, 그의 천재성과, 그의 감성을 사랑하여,
독신인 그에게 연서들을 보내 오면서 그와의 사랑이 시작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5세때 아랍어로 예언자의 초고를 썼고, 12년 후 영어로 다시 쓴뒤,
수차례의 퇴고를 거쳐서, 40세가 되던해 1923년에 책으로 출간하였다.
그는 스스로 "나는 예언자를 쓰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할 만큼,
전 생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한다.
[20세기 미국에서 성서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인 예언자는
사회적인 불안으로 정신적인 안식처를 찾던 60,70년대 젊은이들에게
힘과 안식처가 되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1975년에 초판이 발행되어 사상 유레없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중학생이었던 나도 교과서 대신 이책에 몰두했던 기억이 있는 만큼,
이책의 위력은 대단했던 것 같다.
사랑에 대하여
사랑은
사랑외엔
아무 것도 줄 수 없으며,
사랑외엔 아무 것도 받지 못하는 것,
사랑은 소유하거나 소유당할 수도 없는 것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으로 족할 뿐이므로
-칼릴 지브란
1883년에 레바논에서 태어난 칼릴 지브란은 1895년에 방탕한 남편을 버려둔채
자식들 만을 데리고,미국으로 이민온 어머니를 따라 보스톤에 정착하게 된다.
그림에서 천재성을 발견한 선생님의 권유로 예술학교를 다녔다.
15살때 아랍어로 예언자의 초고를 썼고,
조국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홀로 레바논으로 돌아가
고교를 다니고, 다시 보스톤으로 돌아왔다.
그때 그는 어머니를 암으로 잃고, 형을 폐렴으로 잃게 되는 비운을 안게 된다.
그후 그는 메리 헤스켈의 도움으로 파리로 유학을 떠나,
그 시대의 철학자, 사상가, 문학가, 화가들을 두루 만나,
그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 역시 위대한 예술가,사상가,철학자, 작가이며,시인의 길을 걷게된다.
1931년 48세로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서 독신으로 숨을 거두며,
그는 그의 유골이 조국에 묻히기를 소원한다.
워싱턴 DC의 칼릴 지브란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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