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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삼겹살 좀 뒤집어라
- 묘사는 관찰로부터 -
나는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그 음식에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곰곰이 따져본다. 모르면 음식점 주인에게 물어본다. 그리고 음식의 재료가 어떤 순서로 조리되었는지 생각해 본다. 즉 음식을 나름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 음식을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시란 내가 먹어본 맛난 음식, 내가 바라본 멋진 풍경을 언어로 재현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눈이 우르릉거리는 사나운 날엔 국수를 해 먹는다. 애 곤지 알이 명태머리 꼬리가 처박는 폭설. 된장을 푼 멸치국물이 가스불에 설설 맴도는, 까닭 없이 궁핍한 서울. 엉덩이 들고 홍두깨로 민 반죽을 칼질하고 밀가루 뿌려놓은 긴 국숫발. 바다 모래불 가 눈발을 그리는 20년 객지, 하며 창밖에 펄펄 날리는 하늘 눈사태 바라보는 나는 이런다,
이런 날은 이 조태 칼국수만이 저 을씨년하고 어두운 날씨를 이길 수 있다.
고형렬, <조태 칼국수> 전문
객지 땅 서울서 먹는 조태 칼국수는 원초적 기억을 불러오는 중요한 매개다. 여기에서 고향은 단지 그리움의 기억 장소가 아니라 을씨년스럽고 어두운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어릴 적에 먹던 조태 칼국수라는 음식이 이렇게 긴장감 넘치는, 힘 있고 품격 높은 서정을 낳았다.
기억은 시의 중요한 질료가 된다. 삼겹살을 구울 때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며 젓가락만 들고 있는 사람은 삼겹살의 맛과 냄새만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고기를 불판위에 얹고 타지 않게 뒤집고 가스레인지의 불꽃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은 더 많은 경험을 한 덕분에 많은 기억을 소유하게 된다.그런 사람이 시인이다. 묘사는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할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와 냄새는 오로지 묘사를 통해서만 언어로 그릴 수 있다.
햇살 깔깔대며 양철지붕 구르는 봄날 할머니들은 식은 밥덩이처럼 모여 앉아 감자 눈 딴다 ~ (중략) ~ 초승달 양철지붕에 내려 앉히는 소리 속에서 감자 씨눈 트는 소리 잔설 그림자 기웃거리는 개울물 소리 속에서 피라미 지느러미 터는 소리 소리가 소리를 끌고 또 소리를 끌고
김남극, <봄날1>
봄날에 들릴 법한 소리들이 한 편의 시 안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는 듯하다. 시인의 예민한 귀는 감자 씨눈 트는 소리, 피라미, 지느러미 터는 소리까지 듣는다. 이런 것들을 언어의 연필로 그리는 게 묘사다. 묘사는 개념을 해체한다. 밤은 어둡다, 여름은 덥다, 꽃은 아름답다, 개나리는 노랗다와 같은 문장은 고정관념이 만든 개념적 표현이다. 묘사는 개념을 구체화하거나 해체하는 데 기여한다.예를 들면 “시장에 여러 가지 채소가 많다”라고 쓰면 죽은 문장이다. “가락시장에는 배추 시금치 상추가 많다”고 쓰기 시작해야 문장에 조금이라도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 대상과의 거리 두기 -
신석정의 시 <작은 짐승>을 읽으며 묘사가 어떻게 한 편의 시를 열고 닫는지 살펴보자.
난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믄다믄 선 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1연 - ‘밤나무/소나무/참나무/느티나무‘라고 나무 이름을 한 행씩 배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뒤에 나오는 ’다믄다믄‘이란 부사의 도움을 받아 촘촘한 간격으로 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특별한 장식이나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지 않고도 우리는 시가 제시하는 정황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묘사의 혜택이다.
2연 - 그런데 난이와 나는 왜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까? 2연이 그 궁금증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바다를 앞에 두고 난이와 ‘작은’짐승처럼 앉아있는 까닭은 들끓는 현실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다는 것이다. 격정의 바다가 말없이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난이와 나도 말없이 앉아 있음으로 해서 바다와 일체를 이루려고 한다.
3연- 풍경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비교적 화려하게 등장한다. 그래서 3연은 시에 아연 활기를 불어 넣으며 흐름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데 기여한다. 화자의 호흡은 길어지고 이제까지 원경을 비추던 시의 카메라는 ‘난이의 머리칼’로 클로즈업된다. 바다에서 구름으로 이동했던 화자의 시선이 다시 지상의 느티나무로 옮겨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느티나무 잎새가/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 시의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느티나무 잎새가 머리카락에 붙음으로 해서 난이는 자연스럽게 느티나무와 한 몸이 된다. 난이와 느티나무의 연결은 ‘난이=느티나무=작은 짐승’이라는 등식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것이다.
11. 체험을 재구성 하라
- 시적 허구 -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낡은 목선을 손질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그물 한 장을 주셨다
안도현, <그물> 부분
스무 살 때 쓴 졸시 <낙동강>의 한 부분이다. 이 시는 사실이 아니다. 나는 낙동강이라는 제재를 붙들고 할아버지-아버지-나로 이어지는 삼대의 면면한 핏줄을 노래하고 싶었고 그물 한 장을 물려받는 것으로 마음속의 메시지를 구체화하고자 했다. 관계를 상징하는 그물을 어떻게든 시로 끌어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아니 의도적으로) 아버지를 어부로 둔갑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있지도 않은 사실을 있는 것처럼 시로 말했으니 사기를 친 것인가? 나는 시인으로서 진실하지 않은 뻥쟁이인가?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을 화자라고 한다. 화자는 때로 ‘서정정적 자아’ ‘시적 자아’ ‘시적 주체’ ‘서정적 주인공’ ‘페르소나persona'와 같은 용어로 부르기도 한다. 어떻게 부르든 시인과 화자를 따로 구별하는 것은 그 둘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습작기에는 시인과 화자를 의식적으로 구별하는 공부가 필요하다. 시인은 화자를 통해 말해야지 스스로 시 속에 뛰어들면 안 된다. 그러면 시가 시인의 고백, 즉 사적인 발언으로 전락하고 만다.
시인과 화자를 동일하게 여기지 말고 구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라는 형식이 하나의 허구임을 전제로 해야 한다. 시는 시인의 사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의 바탕위에 만들어지는 것일 뿐 시인의 체험이나 감정을 단순히 나열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의 사소한 체험을 작품 속에서 치밀하게 재구성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것을 우리는 ‘시적 허구’라고 부른다.
‘시 속의 나’는 ‘현실 속의 나’가 아니다. 시 속의 나는 허구 속의 존재이며 창조적 공간인 작품 속의 존재이다. 시인은 현실 속의 나를 죽이고 구체적 경험 속의 또 다른 나를 살려 형상화할 의무가 있다. 신은 ‘사실’을 만들고 인간은 ‘진실’을 만드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사실보다 진실에 복무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진실을 그리기 위해 시인은 사실을 일그러뜨리거나 첨삭할 수 있다. 사실과 상상, 혹은 실제와 가공 사이로 난 그 조붓한 길이 바로 시적 허구이다. 이 시적허구를 인정하지 않고 사실 속에 갇혀 있으면 시인은 숨을 쉴 수도 없고 노래할 기력도 사라지며 상상의 나라에 가지 못한다.
- 화자의 뒤에 숨은 시인 -
시를 한 편 한 편 쓸 때마다 당신은 연출가가 되어야 한다. 화자를 시의 무대위로 내보내 놓고 화자의 뒤에 숨어 배후 조종자가 되어야 한다. 배우(화자)의 연기가 서툴거든 호되게 꾸짖어라. 우리 현대시의 훌륭한 배후조종자인 김소월과 한용운은 <진달래꽃>과 <님의 침묵>에서 여성 화자의 입을 빌려 이별의 정한을 멋들어지게 노래했다. 고은의 가계에는 실제로 누이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허구가 빚어낸 노래에 탄복할 뿐 아무도 시인의 시를 두고 가식의 산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 부분
80년대 대학 4학년 때 신춘문예를 준비하면서 나는 혁명에 실패하고 서울로 잡혀가는 전봉준을 그리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80년대라는 시대와 시를 어떻게 결합할 수 없나 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 읽은 한국근대사의 뒤표지에 실린 사진 한 장,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을 나는 노트 한 쪽에 적어 두었다. 그 것을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고쳐 제목으로 삼고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또 다른 책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상상력을 건드리는 몇 가지 허구의 재료를 모았다. 체포 시기는 음력 정월, 이걸 보고 시의 배경에 눈을 퍼부어 대기로 했다. 이렇게 시작되는 시는 시가 끝날 때까지 눈이 내린다. 시적 허구는 역사적 사실보다 생동감 있는 진실을 보여 준다.
<바닷가 우체국>이라는 시를 발표한 후 독자들한테 전화를 몇 차례 받았다. 그 바닷가가 도대체 어디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것, 정보통신부에서도 연락이 와서 그 바닷가 우체국의 위치를 알려 주면 시비를 하나 세워 보겠다는 것이었다. 아아, 나는 그분들을 모두 실망시키고 말았다. 나는 가끔 변산반도 쪽으로 바람을 쐬러 가는데 그 바닷가 언덕에 몇몇 낡은 집에 매혹되어 오래오래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게 죄였다. 그 언덕위의 낡은 집 문 앞에 빨간 우체통을 세워두고 우체국장을 출근시키고 우표를 팔고 우체부의 자전거를 굴러가게 하고 ‘바닷가 우체국’이라는 간판을 거는 상상을 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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