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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문단소식]-화룡출신 "허씨 3형제" 유명작가로 등록되다...
2017년 04월 24일 20시 47분  조회:4178  추천:0  작성자: 죽림
허씨 3형제의 남다른 문학사랑
—문학인 3형제 허충남, 허봉남, 허두남의 이야기
                                                               /채선애
 
    독일에 수많은 동화작품을 창작해서 이름을 날린 그림형제가 있다면 우리 연변에는 여러가지 쟝르의 문학작품을 무더기로 발표하고 도합 17권의 책자를 출판하여 문학인 3형제로 소문을 놓은 허충남, 허봉남, 허두남이 있다.
    두만강변에서 태여나 맑은 물을 마시고 자란 이들 3형제중에서 맏이 허충남선생은 시작품을, 둘째 허봉남선생은 소설작품을, 셋째 허두남선생은 극작품을 많이 창 작하였지만 세분이 모두 아동작품창작을 더없이 사랑하는지라 얼마전에는 3형제 아동 문학작품을 함께 묶은 단행본 《자기를 잃어버린 아이》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맏형님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둘째형님이 인사불성이 되여 누워계신지 여러해 되는 지금에 와서 홀로 문필활동에 종사하고있는 셋째 허두남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다.
 
“마당형님” 허충남
    어린 시절 셋째 허두남은 맏형님이라는 발음을 잘 번지지 못해 큰형님인 허충남선생을 “마당형님”이라고 불렀다. 그 말이 “씨”가 되였는지 허충남선생은 진짜로 평생 시골을 떠나지 않고 명실공히 제집 마당을 지키는 “마당형님”이 되였다.
기실 자식이 9남매나 되는 대가정에서 제일 먼저 문학의 길에 들어선 사람도, 동생들을 문학의 길로 이끌어준 사람도 맏이인 허충남선생이였다.  
    1939년생인 허충남선생이 태여난 곳은 두만강변에 위치한 조선 함경북도 무산군 량영리 오리장마을, 다년간 월강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던 가정이 1946년에 강건너 중국땅으로 이민오면서 13호 동네인 화룡시 남평진 길지촌 송전동에서 살게 되였다.
목재판에서 뜨개소를 잘 다루기로 이름난 아버지는  또한 이야기를 잘해 소문을 놓았다. 아버지는 밥상에 마주앉아서도 국수오리가 질기면 “줄싸움(바줄잡아당기기)을 한다”고 말할 정도로 언어가 다채롭고 형상성이 풍부했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랄가 허충남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고 문장을 제법 잘 지었는데 초중 1학년때에는 작문 “소조학습의 저녁”을 소년아동신문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남평향이 생겨나서 어른이고 아이고 다 하여 처음 발표한 글이다.)
    그후 가정생활난으로 초중를 중퇴하고 농사일에 몸을 담았지만 문학만은 버릴수 없었던 그는 열심히 독서를 하고 부지런히 습작을 하면서 차곡차곡 문학기량을 쌓았다. 20살의 애젊은 나이에 허충남은 발목뼈에 이상이 생겨 3년동안 앉음뱅이로 살았다. 현립병원에서 발목을 절단하라는 진단을 받았으나 죽으면 죽었지  못하겠다고  한사코 자르지 않았다. 눈물겨운 그 3년동안 바깥출입을 마음대로 할수 없게 된 그는 병치료를 하는외의 시간을 몽땅 독서와 습작에 할애하였다. 이 시기에 와서 끄릴로브의 우화시에 특별한 흥취를 가지게 되면서 시인이 되기로 작심한 그는 시공부에 심혈을 쏟기 시작했고 우화시 “메돼지”를 소년아동신문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동불사에 있는 로중의 서의사의 처방에 따라 메밀엿을 환부에 붙이고 기적적으로 병이 나은 허충남은 부모님들을 도와 농사일을 하는 한편 시간만 있으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시와 문학평론을 애독했던 그는 하많은 문학작품을 접촉하면서 국내외의 문학명인들을 더없이 흠모하였다. 한번은 수수깡으로 액자를 만들어 마야꼽스끼, 로신, 박지원, 엄호석의 사진을  벽에 걸어놓았는데 그때 집에 주숙했던 군대들이 머리를 빡빡 깎은 마야꼽스끼를 흐루쇼브인가해서 자꾸 캐물은 일이 있다. 
    허충남의 영향으로 두 동생인 허봉남과 허두남은 물론 남평향에는 많은 문학애호가들이 나타났다. 1975년 시를 쓰는 젊은이들이 많아지자 허충남은 당시 남평문화소 소장인 김응룡을 도와서 이런 시애호가들을 조직하여 연변인민출판사 출판으로 된《공사의 아침》이라는 시집을 출간했다. 이 책은 문화대혁명후 제일 처음으로 출간된 지방작품집이다. 책에는 허씨 3형제 외 김응룡, 최룡관, 신창수, 박상국 김영철. 최홍일(당시 남평향에 하향지식청년으로 내려갔던 지금의 연변작가협회 부주석)등 남평향의 문학애호가들의 시작품 46수가 수록되여있다.  출판사에서는 남평향의 시집원고가 올라온다니 거개 민가가 올라올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알쭌한 서정시들이여서 어지간히 놀랐다고 한다. 작품집중의 “로전사 고향에 돌아왔네”는 초중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차츰  남평은 화룡시 나아가 전반 연변의 농촌문학활동중심지로 중시를 받게 되였고 허충남은 문학스승으로 젊은이들이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였다.
    1976년부터 남평중학교에 들어가 조선어문교원으로 된 허충남선생은 문학리론연구와 작품창작에 정진하는 한편 후대양성에  알심을 넣어 여러명의 문학애호가들을 양성해내였는데 현재 시인으로 성공한 제자들로는 박장길과 김영건이 있다.
    시인으로서의 허충남선생이 가장 존경하는 시인은 조선의 조기천과 영국의 바이론이였다. 시창작에서 랑만주의풍격을 선호한 선생은  중국시인들가운데서는 두보보다 리백을 더 좋아했다. 
    수십년의 창작생애에서 선생은 또 리영식아동문학상을 수상한 동화집 《꺼꾸로나라려행기》를 비롯해서 많은 아동작품을 어린이들에게 선물하였다.
    당년에 허충남선생의 그늘에서 문학활동에 종사하던 두 동생을 포함해서 김응룡, 최룡관, 리태학, 김호근, 박장길, 김영건 등은 선후로 연길에 진출했지만 허충남선생은 산골에서 일생을 마치였다. 평범한 시골백성으로 한생을 살아가는것이 소원이였던 선생은 화룡3중에서 작문교원으로 초빙할 때도, 남평중학교에서 교장직을 맡으라고 할 때도 완곡하게 사절하고 2009년에 심근경색으로 돌아갈 때까지 고스란히 “마당형님”으로 살았다.
 
“애서가” 허봉남
    형님 허충남선생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태여났지만 어머니의 잔등에 업혀 중국땅에 들어온 허봉남은 형님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했고 소학교 6학년때에 소년아동신문에 “눈내리는 아침”이라는 작문을 발표하였다.
    당시 선생님들로부터 천재적인 문학소년이라고 긍정을 받을 정도로 글솜씨가 뛰여났던 그는 그때에 벌써 《범죄의 길》(미발표작)이라는 장편소설을 썼고 초중시절에는 동화 “다람쥐”룰 완성해서 소년아동신문에 투고하였지만 편폭이 너무 긴 관계로 채용되지 못했다.(편집부에서는 동무를 발견한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면서 작품을 참고로 두었다고 했다.)
    장남인 형님이 초중도 채 졸업하지 못하고 농사일을 하는판에 고중공부를 기대할수도 없게 된 허봉남은 초중졸업전야에 진학시험을 포기하고 매일 두만강가에 나가서  조선작가 리기영의 장편소설 《두만강》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복습도 제대로 하지 않고 진학시험에 참가한 그가  다른 2명 녀학생과 더불어 고중에 진학하게 될줄이야?
    여느 집들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기뻐날뛰겠는데 돈이 없어 뒤바라지를 해줄수 없는 허씨네 가정은 초상난 집처럼 썰렁했다. 미구에 자식의 전도를 막을수 없게 된  부모님들이 이를 악물고 둘째아들을 고중에 보내지만 구차한 살림형편때문에 공부를 계속할수 없게 된 허봉남은 몇달뒤 휴학을 결심, 1년간 농사일을 하면서 문학창작에 종사했다. 그즈음 최우등의 성적으로 소학교를 졸업한 녀동생도 초중진학을 포기하고 농사일에 몸을 담았다.
    모처럼 길지촌에 내려왔던 남평향당위 제1서기  최해당동지(후에 화룡현 현장)가 이 정황을 알고 녀동생을 공급판매합작사 판매원으로 취직시켜주었다. 이렇게 허봉남은 녀동생이 출근하면서 벌어들인 로임으로 고중공부를 마칠수 있게 되였다. 고중시절 허봉남이 창작한 “상처자국”이란 단편소설은 상당한 수준이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즈음 발표된 황봉룡선생의 희곡 “상촌의 소나기”와 내용이 비슷한바람에 해빛을 보지 못하고말았다. 허봉남의 동창이고 문우였던 리태학은 지금도 그 소설에 쓰였던  “억병으로 취하여” “장잎 쩍쩍 뻗은” 등 구절을 입에 올리면서 허봉남의 높은 어휘기교에 대해 감탄을 아끼지 않고있다. 책을 눈동자처럼 아끼는 허봉남이였지만 사전을 통으로 외우려는 욕심에 하루 사전 한장씩 찢어서 외우고는 찢은 책장은 구겨서 버리군 했다. 그런데 1년 휴학으로 고중을 한해 늦게 졸업하면서 대학진학의 길이 막혀버렸다.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학생을 모집하지 않는통에 평생 대학문턱을 넘어보지 못하는 유감을 지니게 되였던것이다.
    어쩔수없이 귀향지식청년이 된 허봉남은 농사일을 하는 여가에 문학작품을 창작하면서 농촌문화활동의 골간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한마을의 김응룡과 함께 화룡현교원강습반에 들어가 공부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였다. 이렇게 몇년간 농사일을 하다가 중학교 조선어문교원이 된 허봉남선생은 교수임무를 착실하게 완수하는 전제에서 문필활동에 열성을 쏟았고  10년뒤에는 화룡현문련 창작실에 전근되여 김문회선생과 더불어 전직창작원으로 일하게 되였다.
    그뒤 다시 연변일보사, 연변인민출판사를 전전하며 문학편집사업에 몸을 담게 된 허봉남선생은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정성껏 다듬어서 신문 또는 책자에 실어주면서도 새록새록 새로운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문필활동에 극성을 부렸다. 이 시기에 와서 선생이 고중시절 일기장에 적어두었던 사소한 이야기들이 작품의 뼈가 되고 살이 되여 선생은 현실생활을 반영하면서도 음미할 가치가 있는 소설작품을 련속 내놓을수 있게 되였다.
    동생 허두남선생의 소개에 따르면 허봉남선생은 고중에 다닐 때부터 일기를 쓰는 습관을 키웠다. 하루동안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세부묘사까지 하면서 어찌나 생동하게 적었는지 소설책보다 더 재미있어서 동생인 허두남은 한시기 심심할 때면 형님의 일기장을 뒤적이는것을 소일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허두남선생은 만약  문화대혁명기간에 여러권이나 되는 일기장을 없애버리지 않았더라면 형님이 더욱 많은 작품을 발표할수 있었을거라며 아쉬운 심경을 내비치였다.
    소설가 허봉남선생에게서 가장 특징적인것은 책에 대한 사랑이다. 소학교시절에는 금방 서점에 나온 조수리의 중편소설 《리가장의 변천》을 하도나 사고싶어 어머니 몰래 남비를 페품수매소에 팔아서 돈을 마련했고 고중시절에는 한사발에 3전씩 하는 국도 사먹지 않으면서 돈을 절약해서 한권에 2원도 넘는 《세계문학선집》을 사들였다는 허봉남선생이다. 아글타글 책을 모은 선생은 화룡에서 세집을 10여차씩 옮기며 힘들게 살던 나날에도 책만은 단 한권이라도 버릴세라 비닐마대에 담아 정성들여 간수했고 장서가 아무리 많아도 눈에 드는 책이 있으면 주머니사정과는 상관없이 꼭 사놓고야 시름을 놓았다.
    사위가 책을 빌려달라고할때 “딸은 가져가도 되지만 책은 안된다!”고 하면서 말도 다시 꺼내지 못하게 할 정도로 책에 대해서만은 지나치게 몰인정하고 린색한 “애서가”이다. 아빠트에 들게 되자 선생은 객실 한칸 벽을 몽땅 책장으로 만들고 건축설계사가 고층건물을 설계하듯 낡은 책과 겉보기에 못한 책들은 안쪽에, 표지가 멋스러운 책과 정제본은 바깥쪽에 두겹으로 모셨다. 그리고는 금고문을 잠그듯  자물쇠를 꽁꽁 잠궈놓고 동생들이 빌리러 가도 “그 책이 어디에 꽂혔는지 모르겠다”, “책장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어째 도서관에 가서 빌리지 못하니?”라고 하면서 빌려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허봉남선생은 작가중에서 발자크를 가장 숭배했고 작품으로는 숄로호브의 《고요한 돈》을 특별히 사랑했다고 한다. 조선작가중에서는 리기영과 천세봉을 제일 좋아했다. 소설창작에 조예가 깊은 허봉남선생도 형님 허충남선생과 마찬가지로 아동작품창작에 취미가 있어서 중병에 걸려 인사불성이 되기전까지 성인소설을 많이 창작한외 아동장편소설 “엄마 찾는 아이” 동화집 “수림속의 생사박투”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처음으로 된 과학소설집 《까불이 모험기》 등 7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는데 이런 책들은 모두 주급이상의 상을 수여받았다.
 
말없는 실천가 허두남
    1950년생인 허두남선생은 소학교시절부터 큰형님이 보는 《끄릴로브우화집》을 따라 읽고 형님을 본받아 우화시를 쓴답시고 머리를 쥐여짰다. 소학교 6학년때에 작문 “생일날”을 소년아동신문에 발표하면서 문학창작에 자신감을 갖게 된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후 대대선전대의 공연프로를 창작할 중임을 떠메고 재담이며 촌극, 가사 등을 닥치는대로 창작하며 실천가운데서 창작기량을 닦았다.
    1977년 봄에 이웃향인 용화향에 가서 대과교원으로 사업하게 된 허두남선생은 2년뒤인 1979년에 31편의 우화시로 우화시집 《개미와 코끼리》를 묶어서 연변인민출판사에 투고했다. 당시 문예편집이였던 류원무선생님과 김창욱선생님은 그 작품들을 높이 평가해주었고 김창욱선생님은 멀리 용화에까지 찾아와서 수정의견을 제기해주었다. 용화중학교 교장 조창송은 덕재를 겸비하고 흉금이 넓은 호남아였는데 이름없는 시골의 대과교원이 책을 낸다는건 대단한 일이라고 하면서 개학초 다른 교원들이 참나무버섯재배때문에 로동에 종사하는 드바쁜 와중에 집에서 작품을 수개할 특혜를 주었다. 이렇게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우화책이 없던 공백을 메꾼 허두남의 처녀작작품집은 고마운 여러 사람들의 지성어린 관심속에서 고고성을 울리였다.
    1982년 가을에 허두남선생은 화룡탄광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전근해간지 1달만에 연변작가협회에서 문학반을 모집하게 되였다. 그때 30대초반의 조선족작가중에 단행본을 낸 사람은 허두남뿐이였는데 문학반의 초생을 책임진 당시 작가협회 김기형비서장은 현문련에다 허두남을 보내달라고 이름을 찍어 부탁했다. 그런데 탄광에서 내놓지 않는 바람에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탄광을 떠나 보다 많은 시간을 문학창작에 투입할수 있는 단위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던 허두남선생은 후에 당시 현당위 선전부장인  김동운동지(주인대 부주임 력임)의 도움으로 현방송국 문예편집으로 전근하게 된다.
    방송문예로 전문창작의 길에 들어선 선생은 선후로 중학생신문, 연길시 창작실 등 단위로 자리를 옮기며 창작이라는 한우물만 팠다. 연길시 창작실에서 사업하면서 선생은 소품 “감주”, “로임봉투”, “아첨경기”, “남매간” 등 많은 작품을 창작해서 연길시구연단에 공급, 여러차나 주급, 성급 창작상을 수상하였다.
    주위에서 발생된 진실한 이야기를 주선으로 창작한 이런 작품들은 진실성, 해학성으로 관중들을 울고웃게 만든것이 특징적이였는데 소품 “남매간”에서는 출국해서 돈을 벌고 돌아온 오빠가 자기를 보러온 녀동생을 돈꾸러온걸로 생각하고  전전긍긍하는 모습과 그런 오빠를 야속해하는 녀동생의 마음을 하도 생동하게 표현하여 이름난 연출가 최인호선생까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소품 “로임봉투”에서는 가짜 부조명세를 봉투에다 가득 적어넣고 안해를 속이다가 발각되는 이야기를 썼는데 어찌나 현실생활을 잘 반영했던지 친구 여러 사람이나 허두남선생을 보고 “당신이 그걸 다 폭로해놔서 인젠 그 방법을 못 쓰게 됐다이.” 했단다. 가장 대표적인 소품은 그래도 감주일것이다. 돈 한푼이라도 벌겠다고 감주 팔러나온 안해한테서 감주를 홀려먹는 주정뱅이 남편의 행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배꼽 잡고 웃게 한 뒤끝에 눈굽을 찍게 한다.
    정년퇴직한후에도 여전히 창작에 정진하고있는 선생은 또 연변생태문화예술협회에서 조직한 공모활동에 적극 참가해서 솜씨를 자랑하고있는데 단편소설 “천렵” 가곡 “첫날색시” 재담 “로천화장실” 등  작품으로 련속 3년간 수상의 영예를 안아왔다.
    두 형님들처럼 아동작품창작에서도 손을 펴고있는 허두남선생은  한국계몽문학상을 수상한 아동소설 “보배야 보배야”와 소학교 음악교과서에 수록된 가요 “꿈에 울었답니다”를 비롯해서 많은 아동문학작품을 창작하여 아동문학작가로도 뚜렷한 위치를 굳히고있다.
    2009년에 큰형님 허충남선생이 하늘나라로 떠나가고 둘째형님 허봉남선생이 더는 작품을 발표할수 없게 된 오늘에 와서 혼자서 외롭게 문필활동에 종사하고있는 허두남선생은 최근에 3형제의 아동작품가운데서 제일 알쭌한 작품들을 정선한외 두 형님을 그리면서 쓴 수필 “마당형님“, “둘째형님의 책장”을 곁들여서 허씨 3형제의  아동문학작품집인 《자기를 잃어버린 아이》를 출간하였다. 선생이 계속해서 많은 작품을 창작하면서 두 형님의 몫까지 다 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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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와 동시의 절묘한 “하모니”
우화동시 작가 허두남선생
2015-6-11   

 

요즘 허두남선생의 여덟번째 우화동시집 《빵순이 다이어트》가 출판되여 화제를 모으고있다. 우화동시ㅡ문예사전을 펼쳐봐도 없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우화동시는 허두남선생이 수십년간의 창작생애에서 더듬고 연구하면서 세상에 내놓은 참신한 새 형식으로 선생은 개념을 이렇게 세워본다고 했다. “비뚠 인물의 비뚠 행동을 빌어 작고 깜찍한 도리를 귀띔해주는 유머동시…”

지금까지 근 40년 동안 오직 우화라는 한 우물만 꾸준히 파온 허두남선생은 지금까지 시로 쓴 우화집 6권과 산문으로 쓴 우화집 2권을 출판하였다.

허두남선생은 맏형님을 추모하여 쓴 수필 “마당형님”에서 이렇게 썼다. “나를 우화창작에로 이끈 사람도 맏형님이다… 소학생이였던 나는 형님이 보는 《크릴로브우화집》을 따라 읽었고 형님을 본받아 우화시를 쓰느라고 긁적거렸다. 그것이 내 우화인생에서 걸음마전의 엎치기련습이였을것이다. 그 엎치기련습이후에 첫 걸음마로, 미력의 내가 라 퐁텐과 크릴로브 같은 작가가 될 뜻을 품고 부단히 자신을 갱신하려 고행을 거듭한 수십년의 려정으로 이어졌다.”

맏형인 허충남선생의 영향으로 우화를 사랑하게 된 허두남선생은 소학교때 《위풍 없는 사자왕》이라는 제목으로 첫 우화시집을 묶었다. 책속에는 “위풍 없는 사자왕”, “남의 공을 모르는 달”과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옮긴 “꿀을 훔치는 곰” 등 20여편의 우화시를 수록하였다. 물론 그 우화시들은 한편도 발표되지 못한것들이였다.

1979년 우화시집 《개미와 코끼리》를 출판해서부터 지금까지 세상에 내놓은 여러권의 저작에 수록된 작품들을 살펴보면 우화시를 개혁하려고 얼마나 모대겼는지 한눈에 알린다. 한 제재로 여러편의 우화시를 쓴것도 볼수 있는데 비록 하나의 제재지만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초기에 허두남선생은 조선 우화시의 영향을 받아 동화시처럼 과정을 전개시켰는데 후에 과정전개를 생략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다. 수십년의 끈질긴 노력끝에 마침내 동요동시의 형태로 고정시켰는데 이번에 출판된 《빵순이 다이어트》가 그 결과물이다.

“살구나무가지끝에서/ 바람이 앵앵 울고있어요/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못된 장난 재미 삼던 개구쟁이 바람/ 빨래줄에 걸린 옷 팽개치고/ 장독뚜껑 허공중에 날려버리더니/ 나무가지 부러뜨리려 심술 부리다가/ 가지끝에 옷자락 걸렸나봐요/ 도와줘요/ 도와줘요/ 애처롭게 구원 청하는데/ 아무도 내다보지 않네요/ 저러다 옷자락이 찢어지면 어쩐담?/ 아이참, 그러게 / 고약한 미운짓 일삼지 말게지.”

—우화동시 “바람”

얼핏 봐도 한편의 훌륭한 동시이다. 내용으로 보면 또한 교훈과 풍자를 두루 갖춘 완벽한 우화라고 할수도 있다. 이 시는 잘 짜인 동시에 “남잡이 제잡이”라는 철리와 나쁜 일을 일삼는자는 도와주는이가 없다는 인생교훈을 담고있다.

허두남선생은 크릴로브의 우화시와 조선의 우화시들을 배우면서 우화시를 창작하기 시작했지만 그가 완성해놓은 우화동시는 크릴로브동화시와도 조선의 우화시와도 다르다.

허두남선생의 우화동시는 다음과 같은 특점을 갖고있다. 성인을 상대로 쓴 끄릴로브우화시와 달리 어린이를 상대하였으며 이야기과정을 전개하는 조선의 이야기시와 달리 완전히 동요동시로 개변했다. 그리고 동식물을 주로 쓰던 재래우화시의 전통에서 벗어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랑만주의 우화시”로부터 “사실주의 우화시”로 개조하였으며 일일이 다 말하지 않는 수법을 많이 썼다.

우화동시를 쓰자면 서사적인 내용에 운률을 갖춰야 하기에 일반적인 서사문이나 동시보다 구상도 집필도 더 어려운바 서사문과 운문 두가지를 다 다룰줄 알아야 우화동시를 창작할수 있다는것이 허두남선생의 일가견이다.

허두남선생은 자신의 우화동시에 아직도 보완해야 할 점들이 적지 않는바 시의 편폭이 긴것과 여전히 이야기전달식으로 기술하는것 등이 제일 마음에 걸린다고 한다.

선생은 우화동시는 정감을 쓰는 일반 동시보다 달리 이야기를 담는 시이기에 자칫 무미건조해질수 있다면서 앞으로 우화동시 창작에서 재치, 유모어, 생활적인 세부 등 세가지에 모를 박으련다고 창작타산을 피력한다.

우리 조선족문단에 한떨기 이색적인 꽃을 피운 우화작가 허두남선생이 앞으로도 갱신이란 두 글자를 등대로 걸어놓고 더욱 완전하고 독특한 자신만의 스찔을 갖춘 우화작가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글·사진 김인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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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7 [안녕?- 아침 詩 한송이]ㅡ 봄소동 2016-03-08 0 4019
1156 "나는 단어를 찾는다"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 2016-03-07 0 3695
1155 [동시야 놀자]- 지각 대장 싸움 대장 2016-03-07 0 4135
1154 [동시야 놀자]- 쫑마리 2016-03-07 0 3710
1153 [동시야 놀자]- 오줌싸개 지도 2016-03-07 0 4188
1152 [동시야 놀자]- 아름다운 국수 2016-03-07 0 4262
1151 [동시야 놀자]- 까만 밤 2016-03-07 1 4208
1150 [동시야 놀자]- 봉숭아 2016-03-07 0 4218
1149 [안녕?- 아침 詩 두송이]- 들깨를 터는 저녁 / 뜨개질 2016-03-07 0 4452
1148 {안녕? - 아침 詩 한송이} - 白石 詩 2016-03-06 0 5348
1147 詩作初心 - 좋은 시를 모방하되 자기 색갈 만들기 2016-03-06 0 7873
1146 詩에서 상상은 허구, 가공이다... 2016-03-04 0 5027
1145 {안녕?- 아침 詩 두송이} - 나무들의 목소리 2016-03-04 0 4290
1144 詩는 그 어디까지나 상상의 산물 2016-03-04 0 4607
1143 [아침 詩 두수] - 황지우 시 두수 2016-03-03 0 4514
1142 산문시가 산문이 아니다라 詩이다 2016-03-03 0 4626
1141 산문과 산문시의 차이 알아보기 2016-03-03 0 4795
1140 산문시와 산문을 구별해보자 2016-03-03 0 4299
1139 "시의 본질" 이라는 거울앞에 서보자 2016-03-03 0 4209
1138 독자가 없으면 詩는 존재할수 있다... 없다... 2016-03-03 0 4595
1137 밀핵시(密核詩)란? 2016-03-02 0 4659
1136 [아침 詩 한수] - 내가 뜯는 이 빵 2016-03-02 0 4106
1135 눈물보다 독한 술은 없다... 있다... 2016-03-02 0 4046
1134 詩의 천하루밤 2016-03-02 0 4126
1133 詩作初心 - 독자 없는 시대를 독자 있는 시대로... 2016-03-02 0 4507
1132 詩作初心 - 詩를 읽는다는것은... 2016-03-01 0 4380
1131 詩作初心 - 한편의 시를 탈고하기 위하여... 2016-03-01 0 5210
1130 [아침 詩 한수] - 어떤 평화 2016-02-29 0 4613
1129 詩作初心 - 좋은 詩 없다... 있다... 2016-02-26 0 4350
1128 詩作初心 - "詩의 본질"이라는 거울앞에서ㅡ 2016-02-26 0 4342
1127 [아침 詩 두수] - 늙은 꽃 / 기적 2016-02-26 0 4295
1126 [아침 詩 한수] - 가벼운 농담 2016-02-25 0 4322
1125 민족시인들을 찾아서... 2016-02-25 0 4894
1124 詩作初心 - 詩의 출발은 사춘기, 고정관념 벗어나기 2016-02-24 0 4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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