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가을에는 야해져야 한다.
가을에는 신이, 자연이 인간더러 야해지라고, 야해지는 법을 가르친다.
가을이 되면 자연은 옷을 벗을 채비를 한다. 여름내 잎사귀로 가리던 자신의 위선을 발가벗는다. 여름은 위선의 어른이고, 가을은 진실의 갓난아이이다.
인간은 위선의 가면 안에 있을 때 가장 인격적 인간이라 칭송받고, 진실의 진면목을 보일 때 가장 비인격적 인간이라 비판받는다. 문화는 인간의 인격과 비인격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과 비인간, 사람과 짐승을 대칭시킨다. 누가 만들었는지 알지 못하는 문화가, 삶의 잣대가 되어 인간을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하고, 인간의 자연적 욕망의 출구와 폐쇄구가 된다. 오늘 하루를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느냐의 평가는 인간이 만든 문화규범의 한계 안에서 얼마나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며 살았느냐에 의해 결론난다.
지난 9월 5일, 마광수 교수가 스스로 자신의 집 베란다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즐거운 사라”라는 소설을 써, 음란물을 제작 반포하였다는 죄명으로 형사처벌 받고, 재직 중이던 연세대학교에서 축출당하기도 했던 그가 스스로 자신의 삶의 기간을 결정지었다. 문득 어느 시인이 술좌석에서 했던 말 “자살은 인간의 가장 용기 있는 행위”라는 말이 떠오른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신의 섭리를 부정하는 가장 최종적이고, 단호한 용기 있는 행동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자살이라는 취지였다. 인간이라면 모두가 두려워하는 죽음을 스스로 택하는 자살결정이 사실은 절박하게 살아남고 싶은 자의 마지막 몸부림임을 우리 모두는 잘 안다. 얼마나 의미 있게 살고 싶으면 죽음으로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지는 자살을 택하겠는가?
법조인으로서, 법률가로서, 대학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반사회질서행위의 의미를 가르치고 있다. 9월 이때쯤, 학기초면 어김없이 새로운 학생들에게 어김없이 “반사회질서행위”를 가르친다. 프리섹스니, 원조교제니, 축첩행위니 많은 성풍속 사례들을 그 예로 들기도 한다. “즐거운 사라”라는 그의 소설이, 포르노보다 못하다며(이때 못하다는 의미는 더 하다는 의미인데, 왜 더 하다는 의미를 못 하다고 표현하는지, 한국어의 반어성이 사뭇 재미있다), 이런 저질의 외설물에 소설이라는 포장으로 면죄부를 줄 수 없다며 그를 음란물제작반포죄로 대한민국은 형사처벌하였다. 시중 유통이 뒤늦게 금지되었지만, 그 소설은 알게 모르게 시중에 유통되었고, 호기심 있는 이들은 어찌저찌 그 책을 구해 읽었다. 하지만 소설의 문체가 감동을 줄 만큼 오밀조밀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별 거 없네!” 하고 도중에 읽기를 그만 두기도 했을 법한 소설이다. 어찌 보면 국가 권력이 쓸 데 없는 곳에 낭비되기도 한 셈이다.
이 가을에, 야한(?) 시를 한 편 읽어보자. 이인원 시인의 “사랑은, 3”이라는 제목의 시는 이렇다. “그 뒤처리는// 반드시 며느리밑씻개풀로.// 그것도// 여러 번, 아주 철저하게”라는 아주 짧은 시다(전문, 시집 ‘궁금함의 정량’, 작가세계 간). 독자는 저 짧은 시 속에 나오는 “며느리밑씻개풀”이라는 꽃말 하나에 묘한 상상을 하면서 괜히 야하다는 느낌을 가질지도 모른다. 며느리밑씻개풀의 꽃말은 “시샘, 질투”이다. 며느리밑씻개풀을 만져본 사람은 그 잎새에 껄끄러운 자디 잔 가시가 아주 많음을 안다. 요즘이야 여성 청결제가 많이 출시되어 문제가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얼마나 시기와 질투심이 컸으면 저렇게 잔 가시가 많은 며느리밑씻개풀로 여성 청결제를 대신하도록 했겠는가? 이인원 시인은 저 시를 통해 사랑이 끝나면 철저하게 정리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이인원 시인의 같은 시집에 수록된 다른 시 “절해고도”를 본다. “내 팔 길이보다 딱 한 치 더 먼/ 환장할 그 바다// 간질간질 보채는 파도가/ 넘실넘실 해안을 할퀴는// 딱 간장종지 만한 섬// 애간장 끓이다 끓이다// 쨍그랑,// 간장이고 뭐고 피범벅으로 깨뜨려버리고 마는”(전문). 저 시를 읽는 독자들로서는 절해고도라는 제목에서 바닷가 어디쯤에 있는 작은 섬 하나를 떠올릴지도 모르겠고, 사랑하다 헤어진 첫사랑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필자가 앞서 언급한 “사랑은, 3”과 연관지어 이인원 시인의 심중을 헤아려보려고 할지도 모른다. 우리네 삶은 “내 팔 길이 보다 딱 한 치 더 먼 환장할 그 바다”의 연속이다. 내 팔 길이가 한 치만 더 길든지, 아니면 그 섬이 한 치만 가깝든지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인데, 그 한 치의 간격이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고통에 빠지게 한다.
50여 년 전 중고등 남학생들의 필독서(?) 중에 “꿀단지”라는 야한 소설이 있었다. “꿀단지”라는 제목의 저 소설은 진짜 야설 소설이었다.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야한 내용들로 가득찬 소설이었고, 책이 귀했던(?) 시절이라 이 소설을 돌려보며 히히덕덕 거리고는 하였던 기억이 문득 난다. 작가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고, 소설도 양장이 아니었기에 별로 멋져보이지도 않았지만, 내용이 상당한 음담패설로 되어 있어서 남학생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했던 소설이다. 지금 청소년들이야 인터넷을 통한 음란동영상을 보다 더 쉽게 접근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전혀 그런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꿀단지” 정도의 야설을 읽는 것이 최고의 음란물 접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소설을 읽은 남학생들이 그로 인해 크게 잘못된 적도 없었고, 다들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사회인이 되었다. 평범한 월급쟁이나 사업가, 또는 공직 등에서 일생을 살아왔다.
왜 jys정권 시절에 갑자기 “즐거운 사라”를 그렇게 음란물의 최고봉으로 평가하여 거의 사문화되어 있던 음란물제작 반포 등의 죄로 처벌하였을까? 나는 아직도 그 속내를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그 기저에는 지금의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같은 문화계 길들이기의 한 방편으로 삼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볼 뿐이다. 현재의 동영상 시대가 도래할 것을 미처 알지 못한, 활자문화에 갇혀 있던 이들의 집단반발이 은연 중에 한 몫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때 당시 마광수 교수를 단죄하기에 앞장섰던 수많은 교수와 문단 사람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웃기는 일인 것만은 틀림없다. 조금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잡지 못하는 이들의 경직된 사고가 자신의 뒤쳐짐을 자백하는 행위였던 것은 아닐까? 마광수 교수를 기소한 검사도, 판결한 판사도 어쩌면 웃기는 짓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담당 판사도 10년쯤 지나면 자신의 판결이 웃기는 판결이 되지 않을까 하고 자조했다는 말이 시중에 떠돌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 일로 인해 1987년에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를 출간하여 출판으로 성공하였던 장석주 시인이 5년 뒤 “즐거운 사라”를 출간하여 마광수 시인과 함께 공범으로 형사처벌받는 바람에 출판사가 풍비박산나기도 하였으니,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친 김에, 예전에 필자가 소개한 적이 있지만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다시 한 번 보자.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가을이다. 대추 한 알로 상치되는 우리네 삶 속의 사랑도, 미움도, 홀로 서기도 모두 이인원 시인의 “절해고도”이다. 그러다 마광수 교수의 자살로 의미와 무의미가 혼재되기도 한다.
이인원 시인의 “절해고도”는 우리네 팔이 닿지 않는 등짝 어느 한 점이 가려워, 그 가려운 부분을 긁어 시원해지려고 몸부림치는 우리네 모양새를 그린 작품이다. 그러다 징한 인간이 그 가려운 한 점 절해고도를 기어이 등긁개로 긁고 긁다가 피 터지게 하고 마는 형상을 통해, 인간의 참지 못하는 욕망과 피를 보고서야 가려운 부분의 긁기를 끝내는 인간의 무지를, 약함을 묘사한 재미있는 글이다. 장사꾼들은 그 등긁개를 “효자손”이라는 이름을 붙여 장사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마광수 교수가 있다. 자신들이 속한 분야에서 마광수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은 이들이 있다. 세상은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백안시하거나 축출하려고 한다. 이단아 취급을 한다. 이인원 시인의 “절해고도”처럼 이 세상에 가려움을 안겨 주기에, 이 세상은 이를 참지 못하고 그 가려움을 긁어 피가 터지게 하고 만다. 그 간장종지보다 작은 그 한 부분을 우주 같이 광대한 몸 전체가 견디어내지 못한다.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처럼 이 가을의 햇살을 받아 붉게, 맛있음직하게 익어가는 그 가려운 사랑을 이 세상은 견디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인원 시인의 “사랑은, 3”처럼 며느리밑씻개풀로 거칠게, 아프게 긁고 또 긁어 상채기를 남기려 한다.
마광수 교수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였다. 스스로 이 세상에서 철저한 패자(敗者)가 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삶에서 패자(覇者)가 되었다. 50년 전 청소년들이 호기심으로 읽었던 “꿀단지”보다 훨씬 내용이 순화된 소설 “즐거운 사라”가 국가적으로 공식 음란물로 판정이 되고, 형사처벌을 받았다. 음란물을 만든 이가 그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사실 없다. 시인이, 소설가가, 교수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작품에 세상은 “음란물”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마광수 교수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현실은 “즐거운 사라”보다 훨씬 더 음란스럽다고. 자유의지를 가진 이가 자유의지에 의해 자유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당신의 눈으로 “음란”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어두운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당신은 얼마나 더 많은 음란한 생각을 하고, 음란한 행동을 하느냐고. 그런데 왜 밝은 곳에서, 보이는 곳에서는 여름의 잎사귀에 가려진 숲속처럼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느냐고. 하지만 마광수 교수는 그 시대가 아직 여름이었음을, 가을이 아직 멀었음을 인식하지 못한 잘못이 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했던 것임을 깨닫지 못한 채 몸으로 부딪혔던 것이다. 그러니 본인이 이인원 시인의 절해고도처럼 파도에 부서져야 했던 것이다.
가을이 오고 있다. 야해져야 할 때이다. 자연이 모두 옷을 벗고 야해질 심호흡을 하고 있다. 이 가을에 한 권의 시집을 사자, 그리고 읽자, 가난한 시인들이 인세로 밥값을 벌 수 있도록 제발 좀 한 권의 시집을 사서 읽자. 영혼을 살찌울 대추 한 알을 씹어 먹고, 절해고도의 피터짐과 남겨짐의 지혜를 배우자. 저 소개된 시들, 시인들이 써내려간 짧은 몇 줄에 마음에 울림은 없는가? 곰탕 한 그릇 값에 지나지 않는 시집 한 권 사는데 왜 그리 인색한가? 허리통 굵어지는 비만 걱정을 덜어, 한 끼 절식하는 호기로움으로 한 권의 시집을 손에 들기를 바란다.
문득 ...이 글을 읽고, 시집 한 권을 사서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대한민국 목사님들이, 스님들이 성경과 불경을 놓고 한 권의 시집을 읽었으면 한다. 그래서 그 분들이 시인들의 이글거리는 시를 읽고, 즐거운 사라를 읽고, 그리고도 “명경지수와 같은 맑고 평안한 상태의 고요”를 유지했으면 한다. 세상은 여전히 새로운 마광수를 찾기 바쁘다. 심지어 “마광수 나와!”라고 고함치기도 한다. 지금도 필자는 “꿀단지”의 저자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누가 그때 그렇게 야한 소설을 썼을까? 그 많은 청소년들의 성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며 학교 성적에 영향을 미쳤던.
야해지는 가을,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시를 읽자고. 필자의 “사랑”이라는 미발표 시로 글을 마친다. “달빛에 붓으로/ 검은 점 하나 찍는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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