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내면에 저항한 파격의 휴머니스트” /
‘윤동주 전문가’ 마광수 교수가 말하는 윤동주
이혜민 기자 |
월간 [신동아] 2016년 04월 호
“윤동주는 자기 내면에 저항한 파격의 휴머니스트”
● 쉬운 詩語로 빛나는 은유 만들어
● ‘저항시인’보다는 ‘사랑의 시인’
● 영화 ‘동주’, 尹 시인의 문학 조명 못해
● 윤동주와 나의 공통점은 ‘솔직함’
윤동주(1917~1945) 시인과 마광수(65) 연세대 국문과 교수.
언뜻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윤동주 시인은 청순(淸純)하고,
마광수 교수는 퇴폐(頹廢)한 이미지다. 하지만 연세대(연희전문) 출신인
두 사람을 잇는 다리가 있다. 마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국회도서관 홈페이지에서 마 교수의 학위논문을 검색하면
‘尹東柱 硏究 : 그의 시에 나타난 상징적 표현을 중심으로’
(馬光洙, 연세대학교 대학원, 1983. 8 학위논문(박사)’가 나온다.
청년 마광수는 이 논문으로 좋은 평을 받고 이듬해 연세대 조교수로 임용됐다.
두 사람은 대척점에 선 느낌이다. 윤 시인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펴낸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반면 마 교수는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소설 ‘즐거운 사라’로 외설 논란에 휩싸였다.
윤 시인은 특히 ‘서시(序詩)’로 유명한데, 마 교수도 책을 낼 때마다 서문 격으로 서시를 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1941년 11월 20일 作)
별것도 아닌 인생이/
이렇게 힘들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사랑이/
이렇게 사람을 괴롭힐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도덕이/
이렇게 스트레스를 줄 수가 없네.(…)
--- 마광수 ‘서시’(2011년 7월 作)
자신에게 저항한 시인
영화 ‘동주’가 화제가 되면서 새삼 윤동주 시인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윤 시인, 그리고 그의 시가 지닌 문학적 가치를 제대로 알고 싶어 마 교수를 만나고자 했다.
마 교수는 논문에서 ‘윤동주의 작품들은 일제 말 암흑기,
우리 문학사의 공백을 밤하늘의 별빛처럼 찬연히 채워주었다’고 평가했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아줌마 기자’와 영화 같이 보고 윤동주 문학 얘기를 하자”고 제안하자
마 교수는 다짜고짜 “집으로 오라”고 했다.
3월 7일 그의 집을 방문해서야 굳이 집으로 오라는 이유를 알았다.
그는 기자와 대화하면서도 담배를 연신 피워댔다.
▼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윤동주 전문가라고 들었다.
“내 논문이 1983년에 나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윤동주 연구가 별로 없었다.
대개 시 한 편 내지 두세 편을 연구했는데, 난 그의 시 전편의 상징적 표현에 주목했다.
요즘도 중·고교 참고서에 내 연구 내용이 나온다.”
▼ 그 시절 윤동주에 대한 평가는 어땠나.
“평판 자체가 거의 없었다. 시집도 정음사란 출판사 한 곳에서만 나왔다.
‘그 어린애가 뭘 알았겠나…’ 했을 거다. 그가 어디 박사 감이 되나.
근데도 우기고 썼다. 내 연구 이후로 많은 사람이 윤동주를 사랑하게 됐으니 뿌듯하다.
물론 윤동주가 고결한 외모 덕에 점수를 받은 점도 있다.
윤동주는 심약한 휴머니스트다. 저항이 잘 안 보인다.”
▼ ‘미친 말의 수기’(마광수, 꿈의열쇠)에서 ‘윤동주 연구를 상징 분석 중심으로 써가면서
그가 절대로 저항시인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면적 저항을 한 ‘자아 해부’의 시인이었다’고 설명했던데.
“윤동주는 저항시인이 아니다. 소극적이지. 그 당시 시인이나 소설가는 방탕했다.
본처 버리기 운동이 한창이었다. 그렇다고 윤동주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도 아니다.
창씨개명 하면서까지 일본에 간 건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우러 간 거다. 그게 안타깝다.
연세대 학적부에 보면 ‘윤동주’에 줄이 그어 있고 일본 이름(平沼東柱)이 있다.
창씨개명을 안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윤동주는 비명횡사했다. 윤봉길이나 안중근이 아니다.”
윤동주의 저항은 자기 내면 또는 본능적 자의식과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이러한 투쟁이야말로 진정한 ‘저항’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가 목표했던 저항의 대상은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압박이나 조국의 현실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별 헤는 밤’이 최고
▼ 왜 윤동주를 연구했나.
“좋으니까. 시의 서정성이나 완성도의 최고는 ‘별 헤는 밤’이다.
중학생 때 문예지 ‘학원’을 봤다. 나는 ‘학원’에서 주는 문학상을 받았는데
그때 정호승 시인도 상을 받아서 지금도 알고 지낸다.
‘학원’에서 매월 ‘기억할 만한 시’ 한 편을 소개했다.
언젠가 그 코너에 윤동주의 ‘서시’가 나왔는데,
단순하면서도 의미의 함축이 대단했다.
이해하기 쉽고.”
▼ 마 교수도 글을 이해하기 쉽게 쓰는데, 그런 점에서 통했나.
“맞다. 광복을 전후해 나온 시들 중에서 주석(註釋)을 안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시는
윤동주 시밖에 없다. ‘또 다른 고향’만 난해한 편이다.
정지용 시만 해도 어려운 조어가 많다. ‘향수’에도 ‘해설피’(해가 질 때 빛이 약해진 모양)가
나오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지 않나. 서정주도 일반인이 못 알아듣는 시어를 많이 썼다.
다른 사람들은 더했고.”
▼ 백석의 시도 이해하기가 쉽진 않다.
“이상하게 비평가들이 어려운 글을 높이 평가한다. 언제부턴가 백석을 막 띄우더라.
하지만 백석과 정지용은 기교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자, 이름을 대보자. 김훈, 이문열 이런 사람들의 문장은 두 번씩 읽어야 한다.
난 학생들에게 ‘한 줄을 두 번 읽게 쓰지 마라’고 한다. 소통이 안 되는 건 문학이 아니다.
우리나라 책이 안 팔리는 데는 (작가들의) 어려운 문장 탓도 있다.
‘한국 사람들은 책도 안 사면서 노벨문학상 수상만 바란다’는 기사가 나왔던데,
창피한 일이다.”
▼ 영화 ‘동주’는 봤나.
“봤다. 실망했다. 윤동주의 비애를 상기시켜주긴 했다. 끝날 때 눈물 한두 방울은 나왔다.
윤동주 역(강하늘)이 시 낭송을 아주 잘했다. 일본말 외우느라 고생도 많았을 거다.
근데 너무 저예산으로 찍었다. 윤동주가 경성 시내 다방도 많이 갔고,
헌책방 순례도 하고 그랬는데 그런 장면이 하나도 안 나온다.
동경 거리 장면에선 거리는 안 나오고 전차만 나온다. 그마저 너무 조악하다.
더구나 연희전문이 안 나온다는 게 말이 되나.”
▼ 연희전문? 졸업식 장면에서 본 것 같은데….
“예고편에 기숙사 건물이 보이는 것 같던데, 영화에서는 안 보이더라.
졸업식 장면이 나오지만 실내가 정체불명이다. 그동안 이준익 감독의 영화를 잘 봐왔는데
이번에는 좀 날로 먹었다. 윤동주가 살던 기숙사 건물,
공부한 건물이 그대로 있으니 찍으면 됐을 텐데….”
▼ 연희전문이 등장하지 않은 게 그렇게 문제가 되나.
“당연하다. 윤동주는 대표작들을 연희전문 다닐 때 거의 다 썼다.
그때가 낭만이 꽃피던 시절인데, 왜 그런 묘사를 안 했을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도 연전 캠퍼스 오가며 착상한 건데,
일본 장면에서 내레이션으로 나오더라. ‘서시’도 연전 졸업할 때 출판하려다
못한 시집의 서문인데 라스트 신에 나오고. 고등학생들은 윤동주를 저항시인으로 보는데,
시를 봐라, 사랑이다. 가난한 사람, 여린 것들, 비둘기, 토끼, 노루… 이런 것들이 나오지 않나.”
▼ ‘동주’를 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로 보고 평가하는 건 아닌가.
“그래도 너무하다. 재판 장면도 안 나온다. 판결문이 명확히 남아 있는데도,
윤동주의 죄목이 뭔지도 불분명하다. 영화에는 문학적인 조명도 빠져 있다.”
▼ 영화에 시가 내레이션으로 나와서 좋던데…. 윤동주 문학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윤동주는 한국문학의 축복이다. 근데 윤동주 시집이 왜 정음사에서 나왔을까.
그 이후에도 시집이 군소(群小) 출판사에서만 나온다.
이번에 나온 복각본 시집도 1인 출판사에서 나왔더라.
모 교수는 ‘윤동주 시인은 동시를 썼다, 유치하다, 유아기로의 퇴행’이라면서 폄하했다.
우리나라는 문단이 권력이 됐다. 나만 해도 문단에서 왕따를 당하지 않나.”
▼ 마 교수는 논문에서 ‘부끄러움’이란 단어로 윤동주 시를 해석했다.
‘부끄러움이란 시어가 나오는 작품이 10편이나 된다.
이는 우리나라 시인들이 표피적 정서나 표피적 이데올로기만을 좇는 경향과 비교해볼 때
가히 파격적이리만큼 독특한 문학 세계다’라고 했는데.
“시 ‘자화상’은 자기혐오다. 우물에 왔다, 갔다 하는 거다.
마지막에, 우물 속에는 하늘이 있고 추억처럼 한 청년이 서 있다고 하는데,
자기 갈등을 그린 거다. 윤동주 시에는 부끄러움이란 단어가 무지 많이 나온다.
그렇지만 아주 독창적이다.”
“자기 내면에 저항한 파격의 휴머니스트”
▼ 얼마나 독창적인가.
“정지용처럼 모더니즘도 아니고, 청록파같이 자연회귀도 아니다. 일기 같은 시다.
작품마다 날짜를 적어두지 않았나. 이광수처럼 계몽가로서의 강박관념에 시달린 것도 아니다.
저항시도 아니고 시류를 전혀 타지 않았다.
‘내 모가지를 드리워서 꽃처럼 드리우는 피를 흘리겠다’는 건 마조히즘이다. 독창적이다.
다만 본능에 충실했다. 시 ‘팔복’을 보면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란 대목이 나온다.
예수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로 간다’고 했는데
기독교에 대한 회의도 한 거다.”
▼ 시 ‘자화상’의 우물을 ‘자궁으로 가는 통로’라고 설명했던데, 동의하기 어렵다.
“정신과 의사들이 보는 ‘정신분석 상징사전’이란 책이 있는데,
거기 보면 물의 이미지가 양수, 자궁, 여자다. 자궁은 물이 아니라 긴 통로를 거쳐야 하는 양수다.
윤동주에게도 성욕이 있었을 거 아닌가. 이상은 여성편력이 심했는데
윤동주는 연애도 한 번 못 한 것 같다.”
▼ 논문에서 ‘윤동주는 가장 솔직한 인물이면서도 내면의 본능에 솔직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당시에 이상 정도는 프로이트를 알았고, 성에 대한 시를 몇 개 썼다.
다방 개업할 때 ‘69’라고 했고. 하지만 윤동주는 술도, 연애도, 담배도 안 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윤동주 시인과 마 교수가 닮은 점도 있다고 보나.
“우리 둘 다 ‘솔직’하다. 소통도 잘하고. 내가 69학번인데
그때 연세대에 윤동주 시비가 생겨서 자주 갔다.
윤동주처럼 ‘알아듣기 쉽게 써야겠다’ ‘구어체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만약 윤동주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떻게 보면 윤동주가 더러운 꼴 안 보고 죽은 게 다행이다 싶다.
6. 25가 나고 세상이 얼마나 복잡해졌나.
살아서 월북했다면 다른 월북 문인들처럼 이용만 당했을 테고,
남한에 있었더라도 납북될 수 있는 거니까.
어떻게 보면 행복한 죽음일 수 있다.
기다리던 광복을 맞았는데,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고 얼마나 힘들었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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