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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쓸 자서전에는 / 나의 글쓰기는 이랬어야 했다고 / 후회하는 장면이 담겨있을 것이다 /
우선 손톱이 긴 여자가 좋다고 /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고 / 그리고 야한 여자들은 / 못 배운 여자들이거나 방탕 끝의 자살로 / 생을 마감하는 여자여야 했다고 /
그리고 무엇보다도 / 사라는 즐겁지 않았어야 했다고 / 권선징악으로 끝을 맺는 / 소설 속 여자이어야 했다고’
‘이 시대 가장 음란한 싸움’ 필화 사건 주인공
생전 마광수 전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는 시 《내가 쓸 자서전에는》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바뀌지 않는 세상을 조롱이라도 하는 그의 시처럼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지난 9월5일 자택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채 발견됐다. 마 전 교수가 세상을 등지자 많은 이들이 후회하거나 탄식하는 장면이 벌어졌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그에게 선뜻 시간을 내 말동무가 되어주거나, 그의 처지를 바꿔줄 만한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 해석된다. 빈소는 쓸쓸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를 추모하는 행렬에 평소 그를 비아냥하던 이들이 끼어들거나 방해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마광수 전 교수는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나왔다. 마 전 교수는 성(性)에 대한 가감 없는 소설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의 문학 인생의 출발은 시였다.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77년 현대문학에 《배꼽에》 등 6편의 시가 추천되며 등단했다. 28세에 대학교수로 임용되면서 천재로도 불렸다.
마 전 교수는 1991년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를 펴내고, 이듬해 10월 음란물 제작·반포 혐의로 구속되면서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 대한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섰다. 《즐거운 사라》는 주인공인 여대생이 성 경험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92년 12월28일 1심 재판부는 《즐거운 사라》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작가와 출판사 대표에게 각각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의 형을 선고했다. 마 전 교수는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그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일로 1993년 연세대에서 직위 해제되었고, 1995년 6월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기각되어 유죄가 확정됐다. 대법원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확정 선고했다. 당시 대법원은 “정상적인 성적 정서와 선량한 사회풍속을 침해하고 타락시키는 정도의 음란물까지 허용될 수 없다. 이 소설은 그 한계를 벗어난 것이 분명하다”며 《즐거운 사라》를 음란물로 판정했다. 곧이어 그는 해직되는 불운을 겪으며 교수직을 잃었다.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던 마 전 교수에게는, 그러나 제자들이 있었다. 연세대 국문학과 학생회는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을 ‘이 시대의 가장 음란한 싸움’으로 보고 마 전 교수의 변호에 나섰다. 1995년 학생회는 《즐거운 사라》 사건과 관련된 공판기록 및 감정서는 물론 마 전 교수의 문학세계를 조망하는 자료집 《이 시대의 가장 음란한 싸움에 대한 보고: 마광수는 옳다》를 발간했다.
‘스승 마광수’를 되찾기 위한 제자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해 3월 복권된 마 전 교수는 다시 교수직에 복직되었다. 하지만 2000년 6월 논문 실적 미달 등의 이유로 교수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 조치에 대해서도 학생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에 학교 당국은 마 전 교수의 재임용 탈락을 보류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우울증을 앓는 등 심한 심적 고통으로 휴직해야 했다. 2002년 복직한 그는 더욱 심한 우울증으로 고통스러워하며 다시 휴직했다가 2004년 복직하면서 휴직과 복직을 반복해야 했다. 지난해 8월 정년퇴임한 마 전 교수는 해직 경력 탓에 명예교수 직함도 얻지 못했고, 필화 사건의 상처와 동료 교수들의 따돌림에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우리나라는 문화적으로 민주화되지 않았다”
마광수 전 교수의 제자와 지인들은 고인에 대해 “한국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며, 자유주의자였고, 방식의 차이 때문에 공격을 받으면서도 위선을 비판한 작가”라고 평가한다. 필화 사건 이후 문학계는 고인을 사실상 외면했다. 책을 낼 출판사를 찾기도 어려웠다. 올해 초 《마광수 시선》을 출간한 출판사 페이퍼로드의 최용범 대표는 마 전 교수가 책을 내고 시평이나 추천사 등을 동료 국문학자들에게 의뢰했는데, 대다수가 거부하거나 답변을 회피해 상처를 크게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다들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라는데, 그의 제자와 지인들은 고인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입을 모은다.
마 전 교수는 올해 1월 시작(詩作) 40년을 맞아 시선집 《마광수 시선》을 출간하면서 자신의 40년 시 세계를 ‘통념 부식(通念 腐蝕)’으로 함축해 설명했다. 그는 책을 내면서 “내가 원래 시로 지망을 했고 시로 데뷔를 했기 때문에 시에 제일 애착이 간다”며 한 언론사와 인터뷰했다. 인터뷰 도중 그는 자신의 현 상태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인생에 풍파가 많았다. 학교에서는 평생 왕따를 당하고. 에세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부터 구설이 많았다. 문단에서도 그렇고. 지금 굉장히 우울하다.”
통념을 부식시켜버리겠다며 글을 썼던 마 전 교수지만 필화 사건을 겪으며 모진 풍파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사면·복권되어 연세대학교로 돌아와 정년퇴임까지 했지만, 그 시절을 돌아보면 착잡하다는 그는 필화 사건이 20여 년 지났어도 2017년 한국 사회는 여전히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고 있다고 보았다.
“표현의 자유를 처참하게 유린하고 그것 때문에 학교에서 잘리고 고생 많이 했다. 일본에서는 번역된 《즐거운 사라》가 잘나갔는데, 표현의 자유가 없다는 것과 구속까지 했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민주화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마광수 전 교수는 이 사회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던 것일까. 고인이 된 마 전 교수를 기리는 제자와 지인들의 기억 속에서도 이 사회에 대한 개탄이 묻어난다. 최태호 중부대 한국어학과 교수는 “돌이켜 보면 마광수는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요즘 그의 책을 다시 읽으면 재미없다고 한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나 《임마누엘 부인》에 비해 덜 야하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나 《즐거운 사라》는 그저 상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소설은 소설이다.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작가의 사상과 감정에 의해 꾸며낸 이야기라는 말이다. 소설을 가지고 그를 변태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렇게 떠날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주 만나서 속내를 털어놓을 걸 잘못했다. 그가 곁에 있을 땐 몰랐는데 떠나고 나니 뭔가 죄지은 기분이다. 나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지성인들이 다 같은 생각일 것이다”고 말했다.
위선적·이중적인 우리 문화 경고한 선각자
의학 전문 칼럼니스트 이성주 코메디닷컴 대표는 “문학도, 현실도 고운 그림만으로 채울 수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름다운 것, 교훈적인 것, 도덕적인 것만 보기를 원한다. 본능적인 것, 솔직한 마음은 숨겨야 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위선적·이중적이 된다. 마 전 교수는 우리의 이런 문화를 경고한 선각자였다. 마 전 교수는 법정에서 위선과 싸울 때 ‘지금 우리나라의 성문제는 마치 쓰레기통에 뚜껑만 덮어놓고 있는 양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 ‘높으신 분들, 하느님 찾는 분들, 엘리트님들이 낮에는 근엄한 목소리로 마광수 죽여라 해 놓고 밤에는 룸살롱에 간다’고 말했다. 지금은 다른가? 세계에서 이슬람 문화권 외에는 가장 규제가 심하지만 성적 일탈은 세계 최고 수준일 것이다.
성적 문제뿐 아니다. 대중이 원하는 그림에 어긋나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주장을 내놓으면 법망이 다가온다. 인문학·자연과학에 대해서도 학계가 아니라 판사가 전지전능하게 판결하려고 한다. 우중(愚衆)은 인민재판식 야유로 ‘왕따’를 시킨다. 고교 때 친구의 어머니인 교사를 사랑해 결혼까지 갔던,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같은 사람이 있다면 씨를 말려 죽였을 것이다”고 말했다.
한편, 마 전 교수는 최근 새 소설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단편 21편을 묶어 책 제목도 《추억마저 지우랴》로 정했다고, 편집까지 마친 상태라 9월 안에 출간할 수도 있다고 해당 출판사가 밝혔다.
필화 사건 후 적극적 작품 활동 못해
‘내가 죽은 뒤에는 / 내가 《윤동주 연구》로 박사가 되었지만 / 윤동주처럼 훌륭한 시인으로 기억되긴 어렵겠고 // 아예 잊혀져 버리고 말든지 / 아니면 조롱섞인 비아냥 받으며 / 변태, 색마, 미친 말 등으로 기억될 것이다 // 하지만 칭송을 받든 욕을 얻어먹든 / 죽어 없어진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 그저 나는 윤회하지 않고 꺼져버리기를 바랄뿐’(마광수의 시 《내가 죽은 뒤에는》 전문)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가 지난 9월5일 오후 1시50분쯤 자택인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자택에서는 유산을 자신의 시신을 발견한 가족에게 넘긴다는 내용과 시신 처리를 그 가족에게 맡긴다는 내용을 담은 유언장이 발견됐다. 경찰은 A4용지 1장짜리 유언장에 대해 지난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마 전 교수는 지난 1985년 12월 연극학 교수와 결혼했지만 1990년 1월 합의 이혼했고, 자녀는 없다. 마 전 교수 빈소는 누나와 조카 등 친척들이 지키고 있었고, 전 부인은 빈소에 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성 문제를 음지에서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야 우리 사회의 위선적 성문화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신념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즐거운 사라》가 변태적 성행위와 스승·제자의 성관계 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음란물’이라는 혐의를 받으면서 사회적으로 예술과 외설의 구분, 창작과 표현의 자유 문제로 논쟁이 확산됐다. 대법원 확정판결 전에 고인이 구속되자 문학계뿐 아니라 미술·영화 등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구명운동을 벌였다. 당시 대다수 문화예술인은 고인에 대한 구속수감과 판결에 대해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권력의 시대착오적 탄압으로 받아들였다.
마 전 교수의 제자와 지인에 따르면, 필화 사건 이후에도 작품 활동을 했지만, 자기검열 탓에 과거처럼 적극적이지 못했다. 소설 《광마일기》(1990)와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1989), 에세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1989) 등 필화 사건 이전의 작품들이 대표작으로 남아 있다. 올해 초 《광마집》(1980)부터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2012)까지 여섯 권의 시집에서 작품들을 골라 펴낸 《마광수 시선》이 생전 그의 마지막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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