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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라고 해서 다 시인이다?... 아닌 이도 있다!...
2017년 10월 14일 22시 20분  조회:1773  추천:0  작성자: 죽림

/// 이오장 시담론

 

                     시인은 물가의 등불이다

 

빛은 물속에 들어가지만 등불은 물속에 들어가지 못하듯 빛은 어디든 훤하게 밝혀주고 자신은 밖에서 자신의 그림을 방관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것의 차이를 알아야 능력을 찾게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느낌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느낌에 기반을 둔 모든 생각은 멀리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자신의 주관만을 가지고 작품을 쓴다면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말로 어떠한 대상을 만났을 때 느낌만 갖고 표현해서는 안 된다. 이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인식은 마음의 두 가지 근원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첫째는 인상을 받아들이는 능력, 둘째는 인상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인데 첫째 능력에 의하여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둘째 능력에 의하여 주어진 대상과 인상을 연관 지어 생각한다. 그러므로 직관과 개념은 인식의 모든 요소이며 개념이 없다면 직관도 인식을 제공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우리는 감성 즉 오감을 통하여 사물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파생되는 감동을 지식과 연관하여 모두가 공감하는 시를 쓰게 된다. 그러나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가 어떤 형식을 가진 것이 아니다. 감성이 무분별하게 수용한 정보를 지성이 판단하고 추론하여 범주에 맞게 인식하는 것이다.

사람의 성향은 모두 다르다. 사물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성향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대상을 포함하여 배경까지 전체를 나타내고 어떤 사람은 대상이나 배경의 세부 사항에 초점을 맞춰 느낌을 그린다. 여기서 사람마다 능력이 구분되고 표현의 느낌이 다르게 된다. 즉 개개인의 능력이다. 어떤 시인이 좋은 작품을 발표했다 하여 그것을 모방하여 시를 쓴다면 외면당하는 것이다. 물가의 등불이 물속을 아름답게 비추지만, 물속에는 들어가지 못하듯 시인은 대상을 꾸며주는 빛으로 밖에서 안을 비춰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물의 모양과 크기만을 그리지 말고 사물의 내부 사항과 배경을 찾아내는 자기만의 능력을 길러야 한다.

 

시인정신에 의한 체험적 창조

 

 

사람의 정신은 과학적인 해석이 불가하다. 정신으로 발생한 모든 결과는 체험에서 이뤄지고 정신적인 체험은 주관적이어서 내면의 신비를 밝히는데 과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생생한 의식의 흐름, 생각에서 얻어지는 생각과 충동. 기분. 감각과 기억. 몽상이 쉬지 않고 흘러간다. 언어를 사용하여 다른 이의 마음에 이미지를 전달하고 함께 공유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힘을 가진 사람이 곧 시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존 브로더스 왓슨(John Broadus Watson) 인간의 학습 방식은 고전적 조건화라고 했는데 이는 보통 사람이 시인으로 변하는 과정은 환경에 존재하는 유발인자가 학습으로 인하여 자동적인 신체적 반응이나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체험과 거기에서 얻은 지식만큼 시를 쓸 수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1938년대의 스키너(B.F Skinner)의 조작적 조건화라는 학습에 대한 연구발표로 모든 학습은 자기가 한 행동의 결과에 따라 그것을 배우는 것이라 했다. 어떠한 행동의 결과에 따라 그 행동을 되풀이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의 사고방식은 긍정적 강화와 부정적 강화 그리고 그 결과에 따른 표현으로 일반인과는 다른 유형을 가졌다.

인간은 오감을 통해 외부세계와 몸 안에서 발생하는 정보를 받아드린다. 감각수용체 세포는 물리적인 변화를 감지하고 그 정보를 뇌로 전달한다. 시인은 한발 더 나아가서 오감을 통해 얻은 정보를 더 큰 폭으로 확대하여 상상을 결부하여 거기서 발생한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항상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다. 이것이 시인이 창조하는 예술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창조행위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과 문학의 본질은 미메시스(Mimesis) 즉 모방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에게 모방행위가 불가능했다면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미메시스론의 핵심이다. 어떤 대상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자신의 경험처럼 느낄 수 있는 심리적 모방행위가 없다면 새로운 창조가 없다는 것이다.

남을 이해하는 능력의 기초로 여기는 공감능력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개념에서 유래 한다. 독일의 심리학자 로베르트 피셔(Robert Vischer)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 일어나는 미학적 체험을 감정이입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설명했다. 감정이입이란 그 전에는 없던 개념이었다타인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느낀다.라는 말은 영어권에서는 공감이라고 표현되었고 현재는 일상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타인의 감정은 그 사람의 정서표현을 그대로 모방했을 때 제대로 이해가 된다. 공감 능력이란 바로 이러한 정서의 모방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발달 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는 모방이 창조적 능력으로 진화하는 것은 지연모방(Aufgeschobene Nachahmung)이 가능하면서부터다. 사람이 두 살 무렵부터 며칠 전 본 것을 기억하여 흉내 내기 시작한다. 그 행위를 머릿속에 상징적으로 표상할 수 있다. 지연모방과 같은 상징으로 매개된 행위가 창조성의 원천이다. 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인간의 두뇌는 창조적으로 치달아 여러 가지 상상력으로 문학이나 과학 또는 생활의 발달을 이루는 것이다.

시 창작에 있어 모방행위는 기초적인 것으로 자연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연에서 발견된 사물의 변화를 읽게 되는 것이 문학 즉, 시 창작의 기본이다. 그러나 모방이 아니라 표절이 된다면 창조적인 예술이 아니라 감정이나 사상이 전혀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시를 쓰면서 가장 기초적인 기술은 자연과 사물을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떠한 경치나 새로운 사물을 대했을 때 거기서 얻은 영감이나 정적인 감동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이 시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객관적 세계와 본질적 세계

 

시는 시인의 눈에 비친 사물의 감정적 변화의 그림이다.

어떠한 대상이든 시인의 눈에는 연관된 이미지를 연상하게 되며 그것을 글로 표현하여 독자와 공유한다. 한마디로 사물에서 느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그릴 줄 아는 게 시인이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느끼고 표현하지 않는다. 같은 사물을 두고 여러 가지 방법을 찾게 되고 이미지의 연상을 다른 사물과 비유하여 자신만의 세계로 읽는 이의 감정을 끌어모은다. 그것이 시인 개개인의 능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껴야 많은 독자가 자신과 같은 감동을 하게 되는지는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다. 시를 쓰는 순간에 자신의 감동을 그리게 되지만 시의 완성이 이뤄졌을 때는 독자를 찾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어떠한 대상을 보든 인간의 두뇌는 기하학적 원리를 따르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시각정보를 해석하는 인간의 두뇌는 자신만이 갖는 의심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눈과 대상의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나면 그 대상의 크기는 당연히 반으로 작아져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100m 앞의 사물의 크기와 100m 높이에서 바라보는 사물의 크기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물리적 거리는 같지만 위에서 내려다볼 때가 훨씬 작아 보인다. 수직으로는 기하학적 원리가 작동하지만, 수평으로 볼 때는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항등성이라는 지각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항등성이란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도 사물을 일정한 방식으로 계속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둥근 접시를 옆에서 봐도 타원이 아니라 여전히 둥근 원으로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변하는 상황과 관계없이 사물의 본질을 본다는 뜻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동일성의 심리학적 구성원리다.

시는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항등성이 작동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멀리 떨어진 나무가 작은 묘목으로 보인다면 허상이다. 대상의 본질을 알고 있다면 큰 나무가 묘목으로 보일 리가 없다. 거리는 같지만 위에서 보는 크기와 거리를 두고 보는 크기를 다르게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인간의 생활이 대부분 수평 공간에서 이뤄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항등성을 잊고 산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를 쓸 때 그러한 원리를 모르고 감동만을 앞세워 본능적인 감각으로만 쓰기 때문이다. 이것은 객관적이고 과학적 세계에 대한 강박 때문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대상의 본질을 본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모른다면 시의 구성에서 사물과의 연결이 끊어져 읽는 이의 감정을 훼손시킬 뿐이다. 한 편의 시가 혐오스럽고 감정을 격하게 한다면 이미 시의 근본 목적을 잃는 것이다.

여려가지 학설과 실험에 의하면 인간이 중요한 순간에 한쪽 눈을 감게 된 것은 원근법 때문이다.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에 정확히 재현하려는 시도에서 인간은 양쪽으로 보이는 세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원근법은 눈이 하나일 때에만 가능했다. 렌즈가 하나인 카메라처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러한 현상은 두드러졌다. 그것은 항등성과 같은 두뇌의 작용을 제거하고 눈을 두뇌로 부터 단절시켜 기계적인 정보만을 얻겠다는 것이다.

객관적 세계와 본질적 세계가 다르다는 것은 시인들에게서 먼저 나타났다.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파괴하기 전부터 시에서는 항등성 제로의 원근법 강박에서 벗어나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시를 쓰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부터 시의 주류는 본질적 세계의 이상을 그려나가 인류는 객관적 재현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현시대의 사람들은 기계문명에 완전히 물들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스마트폰 컴퓨터 등의 화면 세상에 빠져 두 눈으로 확인한 것보다 카메라가 잡은 세상만을 믿고 산다. 본질의 통찰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으니 자신의 존재가 어디에 있는 줄을 모른다. 이것이 시가 독자를 잃은 이유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사물의 본질 찾기다. 항등성의 원리를 파악하지 못한다 해도 사물에서 파생된 감정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느껴야 시를 쓸 수 있다. 카메라가 잡는 객관적 정확성만을 가진다면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카메라 눈을 버리고 두 개의 눈을 넘어 세 번째의 눈인 본능적 감성에 충실하여 사물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시는 창조행위다. 시인은 창조자로서의 요건을 갖췄을 때 비로소 진정한 시인이 된다. 창조적 사고에 대한 선구적 연구자인 월러스는 창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어떠한 문제로부터 몸과 마음이 일시적으로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시의 대상인 사물을 대했을 때 확연한 상상(이미지)이 이어지지 않는 것을 고민하지 말고 잠시 떨어져 다른 생각을 하게 되면 불현듯 어떠한 상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상상의 존재란 항상 자신이 속한 맥락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물을 지각할 때 사물의 각 부분을 따로 인식하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형태 즉 게슈탈트로 파악한다. 이때 중요한 부분은 전경이 되고 나머지는 배경이 되어 시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사진을 찍어 인물만 뚜렷이 나오게 하는 아웃포커싱과 같은 원리다.

문제는 시에서 이와 같은 전경과 배경의 관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물의 어떤 부분이 관심의 초점이 되어 전경이 되면 나머지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맥락이 바뀌면 전경이 배경이 되고 배경이 전경이 된다.

문제는 전경과 배경의 전환이 매끄럽지 않을 때다. 배경으로 물러나야 할 전경을 바꾸지 못하고 사물의 고정된 존재만 바라본다면 시의 구성이 한정되게 되어 형성이 뒤엉켜버리면 화자만이 힘들어지는 게 아니라 독자들도 이해를 못 하고 시를 외면하게 된다.

시에 전경과 배경을 바꾸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몇 가지를 든다면 첫째. 고정된 관념을 버리는 것이다. 항상 같은 단어를 고집하고 누구나 보는 것만을 본다면 창조적인 작품이 되지 못해 제자리에 머물고 말 것이다. 둘째. 사물의 움직임을 봐야 한다. 즉 자신이 새로운 사물을 찾아내어 그 움직이는 모습을 자신에 맞춰야 한다. 다시 말한다면 자신이 움직여 사물의 움직이는 모습을 찾는 것이다. 셋째. 관심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까지 몰랐던 세상에 흥미를 느끼고 새로운 사실을 깨치고 경험해야 한다. 

 

현상을 바라보기가 시의 시작이다

 

 

우주의 중심은 지구다라는 천동설은 과학이 발달한 근대에 이르기까지 정설로 통했다. 이와는 달리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는 태양을 도는 위성에 불과하다는 지동설이 확실하게 굳어진 것은 과학적인 실험과 그것을 확인한 여러 가지 작업으로 우리는 모두 지동설을 믿는다. 과학은 객관적인 진리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험을 통하여 사실을 믿게 하는데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이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 확실한 근거에 의한 불변의 현상이라 하여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사실이라도 사람의 주관에 의하여 주관적인 주장도 가능한 것이다. 한 시대에 사는 사람은 대체로 비슷한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경향이 짙다. 그러한 이유로 과학자들도 그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한 현실에서 그 시대에 풀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나면 그것을 풀기 위한 새로운 눈이 등장한다. 천동설로 이해하지 못한 현상을 지동설로 명쾌하게 설명한 것 같이 언제나 시대에 맞는 학설은 대두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새로운 사실을 대부분 사람이 받아들이는 현상을 패러다임이라고 하며 그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꾸는 것을 과학의 혁명이라고 한다. 시문학에서도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패러다임은 형성되었고 그 패러다임은 시대에 맞추어 문학의 혁명을 이뤄냈다. 시는 과학을 초월하는 영적인 존재이므로 패러다임 현상은 사람의 정신세계를 과학보다 먼저 앞서게 한다.

시의 목적은 사물의 숨겨진 원인이나 작용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에서 이뤄지는 정신적 현상을 가장 진실한 방법으로 찾아내어 인간 개개인의 영혼을 무한대의 상상으로 몰입하게 하여 진정한 인간 정신을 바로 세우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목적에 맞게 사물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맞게 사물을 그리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절차와 도구는 필요 없다. 오직 바른 정신과 사물을 관통하는 통찰력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인이 사물의 현상과 자신이 체험한 직관적인 사실만을 형상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 문제가 된다. 순간적으로 다가온 사물과의 만남에서 얻은 자신의 심적 변화를 크게 확대하여 대중에게 노출하려는 의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예술작품은 누구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술을 위한 예술적 작품이 되어야 한다. 완성된 작품이 예술적 가치를 가졌다면 서두르지 않아도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인정받게 되는 것이

 

시는 세상의 기운을 읽는다

 

문학은 인간생활의 편리함을 찾기 위하여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활로를 찾기 위하여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했다. 자연속의 인간은 나약하기 그지없고 자연을 뛰어넘었다 해도 내면의 슬픔이나 외면의 아픔을 감내하지 못한다. 육체가 강할수록 내면의 갈등은 더욱 커지고 무엇인가를 얻어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한 희로애락을 극복하고 빈 곳을 채우기 위하여 문학은 탄생했다. 소설은 설명으로 채워주고 희곡은 보여주는 것으로 인간이 지니고도 자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느끼게 한다. 이와 반면 시는 의문을 깨어나게 하여 스스로 채워주게 하는 역할로 인간의 숨겨진 감각을 일으킨다. 다시 말해 시는 답을 주는 게 아니고 답을 찾아내는 감각을 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문학을 떠나 인간의 최대 목표는 완성이다. 무엇인가를 발견하여 삶의 만족도를 찾아내는 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기본 목표다. 그렇다면 완성은 과연 무엇인가. 외면적이든 내면적이든 인간이 완성을 보는 것은 꽃이다. 꽃은 완성이다. 무엇인가를 이룬다는 것은 꽃을 피우고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꽃이 지고 열매를 맺기 전에는 완성이라 할 수 없다고 할지 모르나 일단은 꽃을 피워낼 수 있다면 그것이 완성이다. 그러나 문학 중에 시는 완성이 없다. 수많은 봉오리를 만들어 활짝 피어나기를 기다리며 영원히 멈추지 않고 나아갈 뿐 시를 완성했다고 하는 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시의 완성을 봤다고 하는 시인이 있다면 당장 성인이라고 추대 받아 마땅하지만 아쉽게도 그러한 시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완성이 없는 시를 왜 쓰는가. 그것은 완성을 이룰 때까지 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끝을 보기 위하여 전력으로 매진하는 게 시인이다. 그러나 완성을 보지 못한다고 아무렇게나 시를 쓴다면 시인의 자세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시는 오감과 체험을 통하여 얻게 된 물상의 움직임과 내부에서 발생한 고뇌와 이념이 상충작용으로 부딪쳐 발생한 감정으로 쓰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되는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등 감각기관에서 청각이 가장 중요하다. 감각에서 청각의 깊이가 깊기 때문이다. 귀는 소리를 듣는다. 귀를 틀어막아도 희미하게 들리는 기관이 청각이다. 완전히 막았다 해도 울림으로 들린다. 시인의 기능은 세상의 기운을 감지하는 데 있다. 활력이 강하고 약하고의 차이는 있지만 삶의 기운과 죽음의 기운을 감지하는 역할은 시인의 몫이다. 귀가 소리를 듣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시인이 세상의 기운을 감지하는 기능은 누구도 막지 못한다. 시인이 전하는 희로애락의 전달이 또렷할수록 생명의 기운도 뚜렷하다. 이것이 시의 역할이다. 이러한 시의 역할을 시인이 외면한다면 시를 쓰기를 그만둬야 할 것이다. 시인은 착각하지 않는다. 생명의 기운을 있는 그대로 감지하고 이를 정확하게 전달한다. 하나는 둘이 아니고 둘은 하나가 아니다. 여기에 착각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를 전달하기만 한다면 옳은 것일까. 여기에서 시의 고민이 시작된다. 전달은 하되 변형이 있어야 한다. 큰 느낌을 작게 한다거나 어떠한 장치를 가미해서 다르게 느끼도록 변형을 주는 것이 좋은 시의 출발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사물이나 감동의 변형을 읽는 이가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변형을 그만두지 못하는 게 시다. 한마디로 현대시는 이미지의 변형이다. 시인이 쓰고 읽는 이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귀에 들리는 울림을 이미지는 놓치지 않고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높은 것을 낮게 또는 더 높이는 것이 시의 기본 틀이다.


객관적 이미지와 주관적 이미지

 

 

모든 사물에는 겉과 속이 있다. 그러나 겉과 속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는 명백한 규정이 없다. 나무의 껍질을 겉이라 하고 껍질 속에서부터 속이라 규정한다면 그것은 주관적인 주장일 것이다. 그렇다고 껍질부터 겉이고 보이지 않는 껍질 안쪽부터 속이라 하는 것도 객관적이지는 않다. 보이는 것에 따라서 얼마든지 겉과 속이 나뉘어 질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겉과 속을 구분할 수 있는 선은 어디인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규정의 잣대로 본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어디가 겉이고 어디가 속이냐고 확정지으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미지의 변형이다.

자신의 주장대로 이미지를 규정했다하더라도 독자는 얼마든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꽃의 이미지는 변형이 없다. 누구나 알고 있고 느끼는 감정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미지를 갖는 언어가 관념이다. 현대시에 있어서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의 이미지를 새롭게 찾아내어 시를 쓴다는 것은 그래서 어렵다. 새로운 이미지를 구상하였다고 자기 뜻을 관철한다면 그것은 주관적 이미지가 되어 독자에게 혼란만 주게 된다. 이것을 피하고자 객관적인 이미지를 찾게 되는데 하나의 창조적인 언어가 탄생하여 모두에게 공감이 되는 이미지로 규정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만큼의 이유가 필요하다.

사물은 이름을 갖게 되는 순간 관념이 된다. 새롭게 탄생한 물질도 모두가 부르는 이름을 갖게 되면 고정된 물체로써 관념이 되는 것이다. 시에서도 새로운 언어를 찾아 썼다 해도 모두가 공감하고 따라 부르게 된다면 굳어버린 관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쓰기가 쉽지 않고 언어로 만들어내는 이미지 찾기는 쉽지 않다. 시는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의 용광로다.

그렇다면 어떻게 찾아내는 이미지가 객관적인 새로운 언어가 되는가. 그것은 감각에서 찾아야 한다.감각은 느끼고 깨달아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외부적으로 받는 자극이 있어야만 깨달을 수 있는 조건이 생기고 거기에 반응하는 자극으로 새로운 언어가 탄생하는 것이다. 감각은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으나 어느 한 가지도 빼놓는다면 시 쓰기의 자극은 발생하지 않는다. 발생한다 해도 한정된 주관적인 이미지만 갖게 된다.

미각. 촉각. 후각. 시각 등 모든 감각 기능은 항상 열려 있어야하고 모든 감각이 하나의 연결체로 뇌파에 전달되어 넓혀진 상상이 하나의 언어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의식적인 상징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상징

 

 

단단하고 올곧은 나무를 고른다껍질을 천천히 벗겨/칼질할 곳을 그린다/꽃 모양을 떠올려/한 꺼풀 한 꺼풀 떠내려가다가/망가지기도 한다/곡선을 파내려다 직선이/직선을 긋다 칼 놓칠 때도 있다/한 잎 두 잎 꽃잎 모양 보일 때면/모란 인지 작약 인지 분간 못 하고/색칠부터 하려 물감 찾는다/무지개 색깔 칠하다 먹칠이 되고/머릿속 지우개는 색을 잃어버려/장미로 해당화로 국화가 되었다가/회양목 울타리에 꽂아두면/꽃잎 숫자가 적고/색깔이 부족하단 말 듣는다/귀를 막는다/새김칼을 놓고 텅 빈 마당에 던진다/누구는 꽃이라 말하고 누구는 막대라 하지만/어떻게 깎았던/머릿속에 들었던 그림은 꽃이 된다 위의 시는 시 부수기라는 제목의 연재시 중 시 깎기. 시가 사람이 만든 인위적인 꽃이라는 가정 아래 쓴 일종의 시론 시로써 어떻게 깎든 꽃이 된다는 의미로 쓴 시작법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정답이 있다. 사물과 사물의 혼합에도, 색깔이나 모양 그리고 변형의 이미지 등 모든 것에는 답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세계에서 발원되는 시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사물에서 발견된 것이나 내면에 잠재했던 것이나 상상으로 이뤄지는 인위적인 언어에는 제약이 없으며 시작과 끝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것은 시의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오답을 찾는가에 있다. 무지개와 비교해본다면 이해가 된다. 무지개는 분명히 원형이다. 태양의 모양대로 빛을 받아 반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지개의 반쪽만 볼 수 있다. 지구의 반쪽이 태양빛을 가린 이유로 항상 반쪽을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사람은 무지개의 원형을 찾지 않는다. 그냥 보이는 대로만 그린다. 시는 그런 무지개의 원리를 일부 갖고 있다. 하지만 무지개는 우주선 위에서 본다면 원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는 무지개와는 다르다. 완전하게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쓰던 각자의 모양을 찾아 시의 틀을 만들고 거기에 자신만의 꽃을 깎아 꽂는다면 시가 되는 것이다.

시는 자신의 체험과 정신이 부딪쳐 일어나는 감동의 꽃그림이다. 그러나 혼자서 가진 감동이라면 시가 아니고 혼자만의 독백일 뿐이다. 독자와의 만남에서 발생한 감동이 화자와 통했을 때 시의 시작인 것이다. 시의 정답이 없다고 해도 시인은 시의 답을 찾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영원히 지속한다.그래서 시인이면 어떻게 해야 독자와 통하는 시가 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를 말한다면 상징성이다. 상징은 눈에 보이거나 마음속에 느껴지는 형이상적 형상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자신이 만든 상상을 깃발로 만들어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가 있는 그대로의 상징을 세워 참된 가치를 떨어트리고 있어 문제다. 비둘기는 평화, 소나무는 절개, 태풍은 포악성, 구름은 어둠 등 상징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완전히 드러내어 함축성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상징은 우리의 이성으로 얼마든지 해석이 가능한 평범한 일상용어에 불과하다, 시 속의 상징은 의식을 초월한 어떤 내용에 대한 이미지다. 합리적이고 의식적인 면과 더불어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면이 공존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에른스튼 카시러(Cassirer, 1874-1945)는 사람을 상징적 동물이라고 규정하면서 인간의 지식 자체 즉 인간의 사고와 문화의 다양한 영역 속에 있는 도덕적 위기의 문제를 연구하였다. 인간 외의 동물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자극을 받아들이는 수용계통을 사람은 의외의 상징계통이라는 제3의 연결물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상징은 시에 있어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요소다. 시인은 사람 속의 또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평범한 일상용어로만 자신의 감동을 그린다면 평범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체험에서 얻은 심덕을 사물에 옮겨 새로운 기호와 신호로 상징을 만들어 낸다는 건 쉽지 않다. 어떻게 깎든 꽃이라 부르면 꽃이겠지만 독자의 손으로 옮겨진 꽃이 화자가 만든 상징을 피워 냈을 때 또 하나의 답이 찾아진다는 것을 인식하고 시 쓰기를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넓은 의미의 비유, 좁은 의미의 비유

 

언어는 소리의 값과 의미의 대상을 드러내고 표현하며 지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언어는 한정되어 있는데 나타내고 표현하며 지시하고자 하는 대상(사물)은 한계가 없어 전부를 표현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사물에서부터 왔지만, 사물의 한계는 무궁무진하여 각각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실로 방대하기 때문이다. 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언어는 사물에서 왔으나 사물에서 떨어져 나와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것을 언어의 가동성 즉 시라고 한다. 시는 언어의 유한적 한계를 극복 표현의 무한한 가능성을 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비유나 상징이 발생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는 동시에 시가 창조되는 발상도 언어의 가동성에서부터 시작한다. 비유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기능이라 할 수 있다. 비유는 넓은 의미의 비유와 좁은 의미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넓은 의미로는 문체와 수사의 뜻으로 쓰고 있으며 읽는 이의 관심과 흥미를 끌고 문장의 변화와 정체를 더하기위한 수사형식을 말한다. 좁은 의미의 비유는 구상적 회화적 표현 특히 은유와 같은 뜻으로 쓴다.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이나 의미를 다른 사물이나 의미에 유추하여 표현하는 직유, 은유, 환유 등을 포함한다. 시를 쓰는 화자가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할 때 본래의 것을 좀 더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또 하나의 사물이나 의미. 즉 관념을 끌어들여 자신이 느낀 감동을 표현하는 것을 비유라 하며 이것을 비유의 성립조건에서는 본래의 것을 원관념,동원된 것을 보조관념이라 하는데 원관념을 본의, 보조관념을 유의라고 말한다.

비유는 두 개의 사물과 두 가지 의미의 비교가 있어야 한다. 흔하게 장미꽃은 허공에 수놓아져 있고,포도송이는 가을과 함께 익어간다, 등 장미와 허공 포도송이와 가을 두 개의 사물이 동원되었을 때 장미와 포도송이는 원관념 허공과 가을은 보조관념인 유의가 된다. 이러한 비유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본의와 유의가 이질적인 것으로 되어야 하며 이질적인 두 개의 사물은 유사성이 있어야 성립이 되는데 여기에서부터 시의 본질이 훼손되기 시작하여 문제가 된다.

 

비유에는 크게 직유, 은유, 환유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직유는 하나의 사물에 하나의 관념을 직접 비유하는 것이고 은유는 암유라고도하며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조사를 넣지 않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동일하게 보는 비유로 메타포 즉 유추나 공통성의 암시에 따라 사물이나 관념의 대체를 외연하는 비유라 한다. 이는 초월 및 벗어난다는 뜻으로 이동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이나 관념, 의미나 감정이 다른 사물이나 의미로 옮겨진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란 어떤 사물에 다른 사물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으로 그 전이는 속에서 종으로 종에서 속으로 혹은 종으로 또는 유추를 토대로 이뤄진다고 시학에서 말하고 있다. 환유는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명칭이 체험을 통하여 그것과 관련된 것에 사용되는 비유법으로 명칭의 변경을 의미한다. 즉 근접성을 말한다.

이처럼 시창작에서 비유는 절대적인 것으로 비유가 없는 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으로 시인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언어의 가동성에 의한 비유를 하며 시창작에 임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되는 것은 직유의 남발에 있다. 우리는 시인 2만명 시대에 살고 있고 인터넷이나 그 밖의 매체에서 수많은 시를 대하게 된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길이길이 남아 있을 명시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답은 분명히 아니다. 일반적으로 발표되는 시 중에 그나마 읽히는 시는 품격이 갖춰진 일부에 지나지 않고 이것조차 명시에 속하기에는 어렵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직유의 남발이 가장 큰 이유다.

 

관찰력과 지식 그리고 응용력

 

 

시인이나 기타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분야에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기를 기대하며 글을 쓴다.그러나 좋은 평가를 받고 영원히 남길 작품을 쓰기란 쉽지않다.그렇지만 그러한 바램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노력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쓸수 있다.시를 쓰는데 가장 기초적인 것이 무엇일까.시인이라면 누구나 갖게되는 고민이다.천부적인 소질이 있다고 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어떠한 시상이 떠올랐다 하여도 거기에 따르는 지식이 없다면 한행도 써내려가지 못하는게 시다.우리는 흔히 무슨일이든 막힘없이 실행하고 남보다 빠른 결과를 내놓는 사람을 아이큐가 높다고 말한다.하지만 그 아이큐는 지식이 없다면 측정하지 못한다.천부적인 머리를 갖고있다는 사실은 교육으로 인한 지식의 습득으로 알수 있는 것이다.눈앞에 보이는 정경이 감탄을 금치못하게 하여 시를 쓴다고 가정한다면 그 광경에 적합한 지식을 갖고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눈으로 들어온 정보와 안에서 발현하는 지식이 합쳐지지 못한 시는 그냥 하나의 정경을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 감탄사 일 뿐이다.그렇다고 지식만으로 시를 쓴다면 하나의 교과서에 불과하다.시는 남에게 자신의 지식을 알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받은 감동을 지식과 합친 추상적인 그림으로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다.이러한 이유로 시는 관찰력과 지식 그리고 응용력이 중요하다.그중에서 가장 앞서는 것이 관찰력이다.시인은 남보다 먼저 관찰하는 사람이고 관찰의 결과를 감정으로 순화시켜 함께 감동하는 독자를 찾는 사람이다.관찰의 대상은 지구상의 모든 사물과 끝을 모르는 우주,그리고 한계가 없는 상상까지 사람이 할수 있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관찰한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이끌어 내고 자신이 쌓은 지식과 응용력이 발현 되었을 때 비로소 시를 쓸 수있는 것이다그렇다면 관찰력은 무엇인가.말 그대로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우리는 일상에서 무수히 많은 사물을 만나고 그때 마다 움직임과 부딛침에서 느낌을 얻는다.나무가지에서 바람을 보고 바람의 흐름에서 방향을 알게되고 자신이 처한 심적동요에서 상상을 얻게된다.그런데 어떤 사물을 대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자신도 하나의 물체에 지나지 않는 고정체가 되어버려 상상의 나래를 펴지 못하고 언어의 꼬리를 따라가지 못한다.산봉우리를 지나가는 구름을 보고 그냥 지나치고 달밤에 우는 개구리의 울음에도 듣기만 한다면 시 쓰기의 기초는 없다.평상시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관찰력만이 시상의 첫문이다.그러나 무엇인가를 깊이있게 봤다고 시가 써지는 것은 아니다.거기에 따르는 지식이 있어야 새로운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산 위의 구름이 어떻게 형성되어 무슨 이유로 흘러가게 되는지.또는 달밤에 개구리가 우는 자연의 생태를 알아야 사물과의 만남에서 새롭게 발생되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또한 관찰과 지식에서 얻은 시상이 언어의 길로 바로 들어서지는 않는다.자신의 내면과 표면에서 파생된 어떤 감정이 관찰과 지식에서 얻은 상상과 합쳐지는 응용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한 편의 시가 된다.응용력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지만 이는 개개인이 극복해야 할 과제로써 가르침을 받고 공부를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수많은 작품을 써보고 좌절을 겪은 사람만이 시의 목표에 도달하게된다.


작품의 평가는 독자 몫이다

 

예술의 모든 작품은 평가를 받는다.시와 소설  영화 연극 음악 무용 등 창조적인 작품의 결과는 받아드리는 대상 즉 독자들로 부터 평가를 받고 그 수준 여하를 판가름한다.그것이 형식에 맞지 않고 의외적인 요소를 지녔다 해도 어떠한 결론에 다다르게 되고 잘됐던 못됐던 혹은 그자리에서 사장 되던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예술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오는 결과다.모든 예술작품은 작가의 감동과 의지로 창조되지만 시각과 청각 느낌으로 독자를 가지게 된다.작가 혼자만의 감동으로 결과물을 만들고 혼자서 가지려고 창조를 했다면 그것은 작품이 아니라 자연속 이름없는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작품.즉 창조는 독자를 대상으로 발현되고 독자의 판단으로 살아남는 것이다.특히 문학은 언어로 시작되기 때문에 독자의 관심과 평가는 냉혹하다.그 중 시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비판을 받게 되는 데 그 이유는 시가 언어의 시작이고 끝이기 때문이다.그렇게 때문에 한 편의 시를 쓰는데 있어 심혈을 기울려야 하고 신중하게 발표해야 된다.

현재 대한민국은 2만 명의 시인 시대를 맞고있다.단체에 등록 되지않는 시인까지 합하면 그보다 훨씬 많다는게 중론이다.그 많은 시인 중에 과연 독자들로부터 시인이라고 인정 받는 시인이 몇이나 될까.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을 제외하고 순수문학을 이해하는 독자들로 부터 그나마 인정받는 시인은 2만명의 10%도 안된다고 단정한다.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했을까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큰이유는 독자를 무시하고 시를 쓰기 때문이다.혼자만의 감동으로 만족하여 아무런 여과없이 발표하고 자기의 만족도에 따라 저절로 독자가 형성될것이라는 만용 때문에 빚은 결과다.

매월 수많은 문학지에서 발표되는 시 작품은 통계조차 내기 힘들만큼 많다.그 많은 작품 중에 독자들의 안목에서 살아남는 작품은 0.1%에도 못 미친다.이러한 결과는 작가 혼자만의 만족으로 독자의 주목 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화자와 독자는 떨어져있는 관계가 아니다.호홉을 함께하고 작품 속의 길을 동시에 바라보는 관계다.어떠한 사물을 대하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이루는 현상이나 상상 등 모든 것을 망라하여 작품을 창조했다 하여도 그 평가는 독자 몫이다.화자는 평가를 두려워해야 한다.그 두려움이 없다면 한 편의 작품도 남기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모든 작품은 화자의 만족이 없다면 창조되지 않는다.먼저 자신의 만족으로 작품이 써진다.이것이 과하여 자신의 만족을 독자의 만족으로 오판하여 그것을 믿고 마구잡이로 발표하게 되어 외면을 받게되고 곧바로 사장되는 현상이 발생한다.그렇다면 어덯게 해야 제대로 자신의 작품을 판단 할 수있는가.사람의 마음과 행동은 대부분 일치한다.자신의 생각은 동시에 다른 사람도 같게되도 느끼는 감동도 공유한다.그것을 인지 해야만 독자에게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그럴려면 다른 사람의 작품.특히 인정받는 작품을 먼저 알아야한다.수많은 독서와 체험만이 좋은 작품의 소재가 되고 독자와의 호홉이 일치하는 것이다.쓰는데 서두르지 않고 발표하는데 망설이고 자신의작품을 남의 작품과 비교할줄 알아야 살아남는다

시단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지도자의 길을 걷는 분들도 순간적인 감흥으로 발표하여 미흡한 부분이 많다.시는 대중적인 지지도가 필요하지만 대중가요는 아니다.한 소절의 직감적인 감동으로 발표한다면 대중가요와 무엇이 다르겠는가.이같은 상황은 모두 칭찬에서 온다고 본다.익히 아는 얼굴에 또는 가르치는 관계나 친분으로 여과 없이 좋다고 칭찬하는 것은 발전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인사치례다.그것이 익숙해진다면 영원히 제자리걸음일 것이 분명하다.바르게 익히고 바르게 정리된 작품을 쓴다는 것은 작가의 의무다

 

분석 된 이미지에 의한 객관적인 시

 

 

문학은 인간의 행동 뿐만 아니라 정신세계를 아우르고 사물이 가진 특성을 새롭게 이미지화하는 창조행위다.1913년 심리학자 존 왓슨은 의식적인 경험은 과학으로 연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이말은 오직 예술의 창조성에서만 인간을 이해 할 수있다는 것으로 문학을 알지 못하면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인간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과학으로 분석하는 일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본 것이다.자기가 아닌 타인 즉 사물이나 그 밖의 것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게 인간이다.삶 속에는 이러한 관심이 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발전하여 물질이 아닌 정신적 창조행위 곧 문학이 계승된 것이다.문학의 여러가지 장르 중에 시를 쓰는 시인은 인간과 사물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 영향을 예측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 시를 쓰는 이유도 자신이 아닌 타인 마음을 이해하려고  창작에 열중한다.시가 인간에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우리가 사물과 타인에 대해 알고있는 여러가지 상식은 지식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고 정신적인 상상이 필요하다.인간은 왜 사는가.인간은 왜 사랑 하는가.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왜 영원히 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가 등 등,인간은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일에 부딛쳐 고민한다.인간의 삶에서 이같이 기본적인 의문에 누구나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다.인간의 이같은 직관적인 심리는 문학을 탄생 시켰고 그 문학중 처음으로 발생한 장르가 시다.한마디로 시는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해도 정신적으로 일부를 해결할 수있는 정신적 양식이다.따라서 시를 쓰는 시인의 책임도 그만큼 클수 밖에 없다.그러한 이유로 시는 객관적이어야 한다.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처음부터 객관적으로 시를 쓸수가 없는 것이문제다.주관이 없다면 일단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게 시다.시인이 처음 시를 대하는 순간은 발광이라 할수 있다.사물이나 인간의 어떤 행동에서 발견된 시의 발현은 사소한 것이라도 빛이나고 감동하게 된다.그때는 주관적이지 않을 수 없어 그대로 시속에 빠져든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좋은 시란 모두가 객관적이며 객관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한 다는 것이다.여기에서 시 쓰기의 문제가 발생한다.쓸 때는 주관적인데 발표후에는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모순에 빠져 그만큼 시 쓰기 어렵다.그렇다면 좋은 시,다시말해 누구나 공감하고 소중하게 품을 수 있는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가장 쉬운 방법이 선명한 이미지다.사물이나 정신적 형태의 사상의 이미지를 누구나 알 수있는 상상으로 펼친다면 우선 쓰기가 어렵지 않고 그만큼 독자들의 가슴에 스며든다.어떤 사물이든 이름을 얻기 전에는 하나의 물체일 뿐이다.처음 발견하였거나 발견후의 논의에서 이름이 지어지고 거기에 맞는 이미지가 형성되는데 자기만이 아는 사물의 이미지를 만들고 혼자만의 상상을 펼친다면 독자들의 이해를 얻지 못한다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게 되는 데 남보다 앞서가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되 거기에 합당해야 한다.현시대는 과학이 정신보다 앞서가는 같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여도 인간의 정신세계는 따라가지 못한다.그러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시문학이 과학보다 뒤쳐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우선은 이미지의 분석이 필요하고 분석된 이미지를 활용하면 말 그대로 화자와 독자간의 공감은 이뤄질수 있다고 본다.아무리 쉬운 언어를 동원하여 시를 쓴다해도 그것이 자신만의 의도대로 썼다면 이미지의 분석이 되지 않는다.과학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분석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분석이 필요한데 정신적인 분석은 개개인의 능력이고 시인 또는 문학인이라면 누구나 겪게되는 고민이고 풀어야 할 숙제다

 

무엇을 쓸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요점이다

 

현대시에 있어 사물을 배제한다면 시의 요건이 갖춰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공감한다.이미지는 사물에서 발생하고 그것의 전달도 사물로 하는 것이 시적 역량을 넓히기 때문이다.사물의 발견이 곧 시의 시작이다.그러나 화자의 내면에 잠재된 의식이 새로운 사물과 만나서 새로운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게 아니다.순간적으로 찾아오는 시적 발현은 곧 잊혀지고 그것을 기억하여 재현하는 것은 어렵다.시인이라면 누구나 고민하게 되는 일상이다.새로운 사물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것이 지닌 기질을 받아드린다는 것이다.사물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늘 마주치는 것이고 어느날 갑자기 새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정신이 받아드린 순간의 착상은 얼마나 크게 얼마나 정확히 받아드리느냐에 따라서 성취도는 달라진다.모든 사물은 제 각기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항상 마주치는 출입문도 모양과 재질 여닫는 방법 등이 모두 다르고 빼놓지 않고 찾아먹는 밥도 재질과 그릇에 따라 영양과 형상이 다르다.심지어 같은 사람이라도 말과 행동에 따라 달리보인다.사람은 똑 같아도 그때의 상황변화에 따라 달리 보이게 된다.그러한 사물의 특성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간직한 의구심과 고민 또는 고난의 연민이 새롭게 부딛친 사물의 특성과 마주쳐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시다.그러한 과정은 얼마나 많은 상상과 노력을 해야되는 지는 일반인은 상상하지 못한다.그렇다고 오랜동안 고민하고 상상 했다고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가.그것은 아니다.사물의 새로움을 발견하고 자신의 정신과 육체에 자연스럽게 조화시킨다는 것은 상당한 숙달이 필요하다.언제나 받아드리려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시를 쓰겠다는 구도자적 자세를 한시라도 허물어트리면 되지 않는 게 시다.물론 억지로 쓸수는 있겠으나 그 작품의 질은 현저히 떨어질수 밖에 없다.십중 팔구는 도태되고 만다.그렇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한마디로 무엇을 쓸 것인가를 찾지말고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사물은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나뉜다.또한 상상 속에서 나타나는 정신적인 사물도 이에 속한다.시는 이러한 사물에서 발현하여 내형과 외형을 갖춰 새로운 이미지로 형성되는데 사물의 모양만을 그린다면 반 쪽 짜리 시가 되는 것이다.비행기를 보고 날아가는 모습과 화자의 내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감흥만 그린다면 시의 가치가 떨어진다.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 뿐 아니라 날아가는 이유날아가는 힘과 기체를 이루는 형질 등을 볼 줄 알아야 하고 그러한 이유를 들어 자신의 심경변화와 조합을 이룬다면 사물을 이용한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이러한 시도는 목월의 시에서도 많이 나타나는데 사물의 이름만 가지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있는 서정시를 남겼다.필자의 어머니 아버지를 그린 사물시를 예를 들어보자.잿간 오줌 구멍/노을 물들어 지게 위에 얹힌 산/독새풀 돋은 쟁깃밥/미농지에 말린 쌈지 담배/새벽 깨우는 헛기침/내 이마에 얹힌 뜨거운 손/모악산 아버지[시 부수기 키우기 전문]스무동이 물항아리/두말 반 가마솥에 쌀밥/무명베 행주치마/열두고랑 콩밭 앉은 자리/호롱불 아래 바느질 그림자/정안수에 담긴 나의 길/지평선 어머니[시부수기 넓히기 전문이같이 사물만을 그려 아버지 어머니의 크기와 넓이를 그려내어 독자들이 읽을 때도 공감 할 수있게 할수 있는 것이다.사물은 언제나 변한다 움직이지 않는 나무라 할지라도 잎이 돋고 지는 등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이는 것은 말 할 것도 없다.그런 사물에서 이미지를 그려내는 일은 쉽지 않다.끊임없는 관찰과 놓치지 않으려는 그릇이 준비되어야 한다.대체로 무엇인가를 쓰려는 노력은 하지만 사물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다.한 편의 시를 쓰는데도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모두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시는 인간의 거울로 자신의 이해가 재현된 표상이다

 

우리는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려 한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자신의 얼굴에 관심이 많아 맑은 물이나 번쩍거리는 쇠붙이 판에 비춰봤다. 다른 사람을 바라봤을 때의 호감도를 자신의 얼굴로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호감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비춰본 것이다.언어 이전의 시대에도 원시인들은 물가에 앉아 자신을 비춰보며 상대방과 비교하였다. 소리가 의미를 더하여 언어가 되었을 때 거울의 역할은 더 커졌다. 언어를 건네기 전에 먼저 상대방을 바라보고 기대한 대답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언어는 소통이다. 그러나 약속에 의한 소통이다. 여기에는 일정한 학습이 필요하고 서로의 믿음이 동반되어야 가능하다. 그러한 이유로 지역에 따라 언어는 다르게 생성되고 유통되었다. 그런 언어가 확장되어 유일한 소통 창구가 되었을 때 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희···락을 표시하게 되고 더욱 아름답게 가꿔 노래, 즉 시가 탄생하였다. 오늘날의 시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하여 언어 너머의 언어로 비약적인 확대가 이뤄졌고 현대시를 쓰기란 쉽지 않게 되었다. 시는 우리의 인간다움을 비춰준다. 그것은 나를 나로 보여주는 거울이자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이해하게 하는 거울이다. 시가 거울이라고 표현될 때 소유격인 "인간의"는 목적어임과 동시에 주어이다. 시에 비친 인간을 바라본다는 것은 의미에서는 목적어이지만 인간 자신을 이해하고 규정하는 자신의 거울이란 점에서는 시가 인간의 거울인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시는 주어 적이다. 그 어떤 경우에든 시는 인간이 자기 이해를 밝혀내는 도구이므로 인간 존재의 얼굴인 것이다. 따라서 시는 존재의 얼굴을 비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장한 얼굴을 비치기도 한다. 때로는 허무의 거울이기도 하고 자신의 실존에 가슴 떨려하는 흔들림을 비추기도 하며 자신을 자기도취에 빠트리는 욕망의 늪일 때도 있다. 또한 성찰의 거울이 되어 자신을 돌아보게 하거나 자신을 이해하는 모습이 시를 통하여 드러나기도 한다. 시는 한마디로 인간의 자기 이해가 재현된 표상이다.

시는 자신의 마음을 비치는 얼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것에 자신의 욕망이 투영되어 왜곡되어 보이기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마음이고 자신을 비추는 성찰의 도구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같이 시가 가진 의미는 매우 커 인간의 범주에서 발생하지만 그것을 모두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시의 발생은 어디에서부터였을까. 하는 문제는 언어의 발생 이전과 이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문제로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시에 비친 나의 모습과 나의 이해, 나 자신이 본 나의 얼굴임에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 자신의 한계와 욕망 무지의 어둠을 나타내기도 하고 인간의 존재를 깨치기도 하여 오히려 자신의 존재와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시 쓰는 작업은 인간 본연의 자세로 임하여야 하고 언어의 확장, 해석, 높이와 넓이, 소멸로부터 찾아내기 등 다방면의 방법을 찾아야 하고 시 속에 비친 얼굴들을 새롭게 꾸민 이미지로 나타내야 한다. 이제 완연한 봄이다. 모든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시인들이 가장 크다. 그래서 봄의 문턱에서 계절의 변화를 노래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의무가 생긴다. 이번호의 특징은 계절의 영향으로 봄을 노래하는 시편들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이 작년의 작품이 그대로 다시 게재 된 듯 느낌을 준다. 시가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시 쓰기의 걸음걸이가 언제나 제자리에 머물러서는 발등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시는 인간이라는 것을 가장 밝게 비춰주는 거울

 

시를 써 오면서 흔하게 듣는 말이 있다. 돈이 되지 않는 시를 왜 쓰는지를 모르겠다는 말이다. 시는 정말 돈이 되지 않는 것인가.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그렇다. 시는 돈이 되지 않는다. 만약 시가 돈이 되어 생활비를 충당한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 시는 생필품이 아닌 정신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최고의 정점이고 최후의 보루다. 육체가 소멸한다 해도 영원히 남아 전해지는 것이 정신이며 그 정신이 시다. 그래서 시는 돈이 되지 않지만 돈을 넘어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귀중한 것이다. 이 땅에는 많은 시인이 활동하지만 생활을 위하여 시를 쓰는 시인이 몇 명이나 될까. 극히 적은 수의 시인이 전업 작가로 활동하지만 그것은 이미 시를 넘어 생필품이 된 보편적 예술인이 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대중적 인기를 얻어야 하는 대중가수가 된 것이다. 시는 정신이다.인간이 인간이라는 것을 인간 편에서 철저히 비춰주는 가장 밝은 거울이다. 인간이 당면하여 고민하는 것을 풀어주고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진리를 찾으려는 무의식적인 본능의 예술이다. 인간이 가진 모든 행위와 거기에 따르는 고민과 의구심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인간이 가진 성찰적 작업 전부를 풀어내는 것은 예술 전부를 통틀어 시밖에 없다. 화가 소설가 작곡가 무용가 등 모든 예술인은 일가를 이뤘다는 ‘가’자를 붙이지만 시인에게는 영원히 ‘가’자가 붙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은 자연 속에 살지만 자연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러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에 경탄하기도 한다.이러한 자연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묻기 시작하였다. 자연은 무엇이며 왜 두려워하는 존재인가. 예술은 자연에 대한 놀라움과 자연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일상의 삶에서 놀라움이 사라지고 아무런 느낌을 못하는 사람은 절대 묻지 않는다. 오직 의문과 고민을 한 사람만이 묻고 예술인이 된다. 화가는 자연 그대로를 그린다. 무용가는 자연의 움직임을 따라 한다. 작곡가는 자연의 소리를 듣고 옮긴다. 시인은 자연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인간의 삶에 비유하여 거울을 보듯 이해와 해석을 통한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예술 중에 가장 중심적인 것이 시라는 것은 여기에서 증명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는 결코 돈이 될 수 없고 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시인을 제외한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을 보면서 그런 변화는 인간이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억측에 불과 한다는 인식을 하지만 시인은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 존재하는 것을 이해하는 생각, 그 생각하는 능력인 인간의 이성만이 참되다는 인식을 한다. 변화의 환상에 잠겨 들고 생성과 소멸의 근원을 찾아 모든 감각과 이성을 동원한다. 인도 철학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환상이나 불교에서 보는 모든 것은 공하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같은 면에서 사유하는 반야심경과 같은 생각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시인이 추구하는 의식은 생필품이 아닌 오직 정신적 해탈이나 무너지는 삶에 대한 기둥 역할이 된다. 따라서 시를 쓰는 데 있어 자기만의 확고부동한 방향이 있어야 한다. 시는 인간이 가진 지성에 따라 사실과 의미를 밝히려는 노력의 과정이자 그 결실이다. 인간이 접하는 여러 사건과 현상은 물론 내면적 상태와 삶과 관계되는 온갖 것들에 대한 자신의 해명과 해답이다. 그래서 자기만이 가진 이해와 해명이 있어야 시다운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과거의 유명 싯귀를 모방하여 유행적인 결과를 낳는 시를 중점적으로 한다면 자신의 정신이 깃든 작품은 단 한 편도 쓸 수 없다. 모든 예술 중에서 시인은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는 존재다. 그만큼의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것이다. 따라서 자부심만큼의 수준의 시를 써야 누구나 우러러보는 예술인, 시인이다.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과 원인을 알아야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다

 

시를 어떻게 하면 잘 쓰는가의 문제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갖는 고민이다. 시의 본질이 다른 예술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자연의 모방과 상상의 언어만 가지고는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틀을 벗어나서는 시가 되지 않고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은 혼자만의 창조일 뿐 아무도 따라주지 않는다. 실제로 지구상의 언어는 많은 수가 사라지고 그만큼의 새로운 언어가 발생한다. 거기에 따라 언어를 사용하여 시를 쓰는 시인들도 얼마든지 창조는 가능하다. 하지만 언어의 활용과 변화유지는 많은 시간이 요구되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로서의 언어창조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는 새로운 언어가 아니라 그 시대의 언어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갈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다. 그러한 이유로 시인의 감각은 살아가는 시대의 사물의 움직임과 그것에 맞춰 펼쳐지는 상상에 집중된다. 오늘날 새롭게 태어나는 언어 즉 이름은 물질의 발견에 따라 나타난다. 발명이나 발견한 사물에 새로운 이름이 주어지고 그 활용도에 맞춰 언어가 탄생하는 것이다. 시인은 시대의 대변자라 불리는 이유는 이렇게 탄생한 언어의 활용도를 널리 퍼트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나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본래의 모습인 이데아 즉 관념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그림자에 불과한 그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야 하고 그 관념에서 다시 떨어져야 하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언제나 고정된 관념을 이탈하여 언어의 창의성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원형적 세계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만 감각의 끈에 묶여 그 사실을 잊고 지낸다시는 원형의 기억 찾기이다. 따라서 시인은 잠시의 틈이 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그리는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시를 써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각자의 노력 여하에 따라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보면, 첫째 낚시로 잡는 방법 둘째 그물로 잡는 방법 셋째 물을 막고 퍼내는 방법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중 어떠한 방법으로 물고기를 잡던지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잡는 물고기의 상태는 모두 다르다. 낚시는 깨끗하지만 양이 적고 그물은 많이 잡을 수 있으나 고기가 상하기 쉽다. 물을 막아 퍼내고 잡는 것은 양과 질이 좋으나 힘들고 번거롭다. 시를 쓰는데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이를 시에 비교한다면 낚시는 명상으로 얻어지지만 상상의 한계는 현실과 동떨어진다. 그물은 여기저기 설치하는 관계로 시행착오가 많다. 물 퍼내기는 체험의 육체노동이 수반되지만 확실하다. 어느 방법으로 쓰든지 장단점이 있다. 그중 물을 퍼내어 쓰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어떻게 퍼내어야 할까. 시 쓰기의 물 퍼내기는 체험이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체험이 없이 쓴 시는 독자의 감성을 끌어내지 못한다. 사물의 존재는 형상과 질료,목적과 운동이다. 구체적인 사물의 원인과 형상을 알아야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정의 아래 그것을 확실하게 아는 것은 체험밖에 없다. 물리학, 동물학, 식물학, 천체학, 기상학과 자연과학은 물론 정치학, 시학, 논리학, 윤리학 등 시대에 맞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이미지로 언어의 끝을 바라볼 수 있다. 요즘 발표되는 작품 대부분은 체험에서 얻은 원인과 형상으로 이미지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릇이 크기보다 너무 작다. 그것은 체험은 있으나 거기에서 얻은 상상의 한계가 좁기 때문이다. 체험은 하되 하나에 극한 시키지 말고 여러 가지를 종합하여 이뤄내야 한다. 더 높게, 더 넓게 시야를 넓히는 훈련을 해야 누구나 인정하는 그런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다

 

시라고 모두 시가 아니고 시인이라고 모두 시인이 아니다

 

시는 체득하는 방법, 탐구하는 방법,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나타날 수 있고 사상과 체험에 따라 그 형식을 달리한다. 남에게서 얻은 지식이나 이념이 아닌, 자신 속에서 무르익은 사상, 인격, 취미, 감정 등을 자신만의 표현방식으로 나타나 읽는 이와 함께 공유하는 감동이야말로 누구나가 인정하는 좋은 시다. 어떤 시도 자연과 동떨어져 분리된다거나 기본적인 감정을 외면할 수 없다.

 

시는 자연과 인간의 연결고리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 속의 인간은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시라고 모두 시는 아니고 시인이라고 다 시인이 아니다. 그것은 느낌과 감동으로 시가 되지 않고 시에도 구성의 품격과 감동의 절제와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인은 시를 쓸 줄 아는 사람이고 자연 속에서 또는 생활 속에서 새롭게 발견한 언어의 음률적 조형을 문자로 형상화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누구나가 시인이 될 수 있으나 모두가 시인이 아니다.

시를 쓰는 데 있어 체험과 상상은 기본적인 요소다. 오감을 동원한 직접적인 체험이나 책이나 미디어 매체를 통해 얻은 간접적인 체험 등 시를 쓰는 동기는 모두가 체험을 통해 나오고 체험을 기초로 한 상상에서 시의 감정은 살아난다.

 

체험을 겪은 후 상상을 결부시켜 쓴 시는 체험으로 얻은 언어의 공간이 무한대로 펼쳐져 무궁무진한 감동의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반대로 상상을 먼저 하고 체험을 통해 얻은 시는 체험과 상상의 상충한 벽을 넘지 못해 감동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이것은 체험으로 얻은 감동이 상상의 날개를 달아 연이어 펼쳐갈 수 있지만 상상으로는 직접적인 경험을 얻지 못해 그것이 체험을 통해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는 체험과 상상의 결과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과 독서량 또는 인간사의 모든 고난과 역경을 겪은 사람이 시를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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