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詩人 대학교

[노벨문학상과 시인] - 문학과 언어학의 부흥을 주도한 시인
2017년 10월 29일 23시 00분  조회:3449  추천:0  작성자: 죽림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동상Nobel Prize.png

프레데리크 미스트랄(Frédéric Mistral, 1830년 9월 8일 ~ 1914년 3월 25일)은 19세기에 오크어 문학의 진흥을 일으킨 프로방스 출신의 시인이다. 펠리브리지 운동의 중심적 인물이었으며, 190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생애[편집]

그는 1830년 남프랑스의 마이얀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미스트랄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비뇽의 왕립대학(이후 프레데릭 미스트랄 학교로 개명)을 다녔다. 미스트랄은 1851년 액상프로방스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특별히 직업을 가져야 할 필요가 없었기에 미스트랄은 일찌감치 프로방스의 문화와 언어 부흥을 위해 힘쓰기로 결정했다. 미스트랄이 프로방스의 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데에는 아비뇽에서 학교를 다닐 때에 조세프 루마뉴를 만났던 것이 계기로 작용했다.[1]1854년 프로방스와 오시타니아 전체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 진흥하기 위한 조직인 펠리브리지를 세웠다. 미스트랄은 트루바두르들의 오크어 문학전통을 부흥하기 위해 그 자신이 오크어로 많은 작품을 썼으며, 1878년에는 2권짜리 사전을 편찬했다.

미스트랄은 오크어 부흥운동을 하며 프랑스어의 철자법에 맞춘, "미스트랄 표기안"이라는 오크어의 새로운 표기법을 만들어 냈는데, 현재까지도 중세의 표기법에 기준한 "표준안"과 병용되고 있다.

작품 세계[편집]1859년 미레유




(프랑스)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출생 1830. 9. 8, 프랑스 마얀
사망 1914. 3. 25, 마얀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시인. 19세기에 프로방스 어문학의 부흥을 주도했고,
1904년에는 문학과 언어학에 이바지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프로방스 지방의 유복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아비뇽의 콜레주 루아얄(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서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고등학교로 바뀌었음)에 다녔다. 이 학교 교사 중 한 사람이었던 조제프 루마뉴는 그에 앞서 프로방스 속어로 시를 쓰기 시작했었고 평생 동안 그의 친구가 되었다. 1851년에 엑상프로방스대학교에서 법학사학위를 받았다.

직업을 갖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했던 그는 일찍부터 프로방스 지방의 생활과 언어를 재건하는 데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854년에 몇몇 친구들과 함께 프로방스어와 관습을 유지하기 위한 모임인 '펠리브리주'를 창설했고, 나중에는 범위를 남부 프랑스 즉 '오크어의 지방' 전역으로 넓혔다(프랑스 남부지방을 '오크어의 지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대 프랑스어로 '그렇다'를 뜻하는 '위'[oui]가 남부지방 사투리에서는 '오크'로 발음되었기 때문). '오크어'는 음유시인들의 언어로서 남부 프랑스의 문화어였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시인들도 이 언어를 사용했다.

미스트랄은 '오크어'를 문학으로 되살리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그는 전2권으로 된 오크어 학술사전 〈펠리브리주의 보석 Lou Tresor dóu Félibrige〉(1878)을 만드는 일에 20년의 세월을 바쳤다. 또한 아를에 프로방스 민속박물관을 세웠고, 노벨상 상금도 이 박물관을 위해 사용했다. 오크어를 옛날의 지위로 돌이키려는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의 시적 재능은 그 언어를 이용하여 오래도록 살아남는 걸작을 만들었고, 오늘날 그는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문학작품으로는 〈미레유 Mirèio〉(1859)·〈칼랑도 Calendau〉(1867)·〈네르토 Nerto〉(1884)·〈론 강의 시 Lou Pouèmo dóu Rose〉(1897) 등 4편의 장편 서사시와, 역사비극 〈잔 여왕 La Reino Jano〉(1890), 서정시집 〈황금의 섬 Lis Isclo d'or〉(1876)·〈올리브 수확 Lis Oulivado〉(1912), 그리고 〈아르마나의 산문 Prose d'Armana〉(1926~29)에 수록된 많은 단편소설 등이 있다.

1848년에 최초의 서사시 〈저택 Lis Meissoun〉을 썼는데, 이 작품은 그가 죽은 뒤인 1927년에 〈르뷔 드 프랑스 Revue de France〉지 7월호와 8월호에 발표되었다. 회고록인 〈나의 근원 Moun espelido〉(1906)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위대함은 첫번째 장시인 〈미레유〉와 마지막 장시인 〈론 강의 시〉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2편의 작품은 12편으로 이루어진 본격적 규모의 서사시이다.

시인이 살았던 시대와 지역을 무대로 한 〈미레유〉는 부유한 농부의 딸이 가난한 바구니 제조공의 아들을 사랑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생트마리드라메르 교회에서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고장에 대한 사랑을 이 시에 쏟아넣었다.

구노는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오페라를 작곡했다(1863). 〈론 강의 시〉는 낭만적인 젊은 네덜란드 공작과 가난한 나룻배 사공의 딸이 거룻배인 '루 카뷔를'호를 타고 리옹에서 보케르까지 론 강을 따라가는 이야기이다. 먼저 배에 탄 네덜란드 공작과 나중에 올라탄 사공의 딸 사이에 사랑이 싹트지만, 루 카뷔를 호는 론 강을 오가는 최초의 기선에 의해 뜻하지 않게 침몰당하게 되고, 이와 함께 그들의 연애도 막을 내린다. 승무원들은 강가로 헤엄쳐 가지만, 두 연인은 물에 빠져 죽는다. 이 서사시는 〈미레유〉보다 덜 음악적이고 문체의 밀도도 더 높지만, 생기와 문채(文彩)로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은 미스트랄이 말년에 이르러 자신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며 그가 사랑하는 것 대부분이 그의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았음을 시사한다.

======================
 

 

 

 

1914 - 프랑스의 시인 미스트랄(Mistral, Frédéric) 사망   

 

 

미스트랄 [Mistral, Frédéric, 1830.9.8~1914.3.25]

 

 

프레데리크 미스트랄(Frédéric Mistral, 1830년 9월 8일 - 1914년 3월 25일)은 19세기에 오크어 문학의 진흥을 일으킨 프로방스 출신의 시인이다. 펠리브리지 운동의 중심적 인물이었으며, 190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생애

그는 프랑스의 옛 프로방스 출신의 농부였으며, 미스트랄은 아비뇽의 왕립대학(이후 프레데릭 미스트랄 학교로 개명)을 다녔다. 미스트랄은 1851년 액상프로방스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특별히 직업을 가져야 할 필요가 없었기에 미스트랄은 일찌감치 프로방스의 문화와 언어 부흥을 위해 힘쓰기로 결정했다. 1854년 프로방스와 오시타니아 전체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 진흥하기 위한 조직인 펠리브리지를 세웠다. 미스트랄은 트루바두르들의 오크어 문학전통을 부흥하기 위해 그 자신이 오크어로 많은 작품을 썼으며, 1878년에는 2권짜리 사전을 편찬했다.

미스트랄은 오크어 부흥운동을 하며 프랑스어의 철자법에 맞춘, "미스트랄 표기안"이라는 오크어의 새로운 표기법을 만들어 냈는데, 현재까지도 중세의 표기법에 기준한 "표준안"과 병용되고 있다.

/위키백과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570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290 시인의 고향 룡정에서 반세기만에 첫 기념회를 열었던 때가 ... 2017-02-27 0 1989
289 시가 스스로 울어야 독자들도 따라 운다... 2017-02-27 1 2438
288 시의 창으로 넘나드는 시어는 늘 신선해야... 2017-02-27 0 2280
287 "알파고"와 미래의 조선족 2017-02-24 0 2373
286 인공지능 번역기가 없다?... 있다!... 2017-02-24 0 2568
285 인공지능이 영화대본을 못쓴다?... 썼다!... 2017-02-24 0 3826
284 시도 모르는 비인간적인 사회는 배부른 돼지들만 사는 세계 2017-02-24 1 2617
283 인공지능이 천여편의 시를 못쓴다?...썼다!... 2017-02-24 0 2474
282 중국 연변 룡정 동산마루에 "별의 시인" 윤동주묘소가 있다... 2017-02-24 0 2532
281 시인은 궁핍(窮乏)으로 시인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말아야... 2017-02-24 1 2265
280 윤동주 시와 이육사 시를 재조명해 보다... 2017-02-23 1 8827
279 책을 그렇게도 사랑했던 덕화 남평 길지籍 허봉남 문학가 2017-02-23 0 2498
278 시는 꽃씨와 불씨와 꿈을 지닌 여백(餘白)의 미학이다... 2017-02-23 0 2398
277 "하이쿠시"는 불교, 도교, 유교의 종합체이다... 2017-02-22 1 2716
276 덕화 남평의 "마당형님"이였던 허충남 문학가 2017-02-22 0 2225
275 시는 예쁜 포장지속에 들어있는 빛나는 보석이여야... 2017-02-22 0 2278
274 "한글통일"이 언제 오려나(4)... 2017-02-22 0 3317
273 "한글통일"이 언제 오려나(3)... 2017-02-22 0 2302
272 "한글통일"이 언제 오려나(2)... 2017-02-22 0 2648
271 "한글통일"이 언제 오려나... 2017-02-21 0 2656
270 세계가 기리는 100년의 시인... 2017-02-21 0 2219
269 진정한 시는 "찾아지는 감춤"의 미덕과 미학의 결과물이다... 2017-02-21 0 2634
268 안도현 시론을 재정리하여 알아보다... 2017-02-21 0 3150
267 시 안에서 "잔치"를 벌리라... 2017-02-21 0 2620
266 시는 발효와 숙성의 간고하고 처절한 시간과의 결과물이여야... 2017-02-21 0 2770
265 시인이여, 단순하고 엉뚱한 상상력으로 놀아라... 2017-02-21 0 3381
264 시어는 "관념어"와 친척이 옳다?... 아니다!... 2017-02-21 0 2776
263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가 "이미지"를 말하다... 2017-02-20 0 3269
262 애송시가 되는 비결은 우리 말로 우리 정서를 표현해야... 2017-02-20 0 2341
261 창조적 모방을 위하여 // 트럼블 스티크니 / 정지용 2017-02-19 0 4004
260 "아버지가 서점이고, 서점이 곧 아버지였다" 2017-02-19 0 2938
259 한국 최초의 번역시집, 최초의 현대 시집 / 김억 2017-02-19 0 4465
258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즈려밟다" 와 "지르밟다" 2017-02-19 0 3738
257 아르헨티나 극단주의적 모더니즘 시인 - 보르헤스 2017-02-19 0 4545
256 "내 시가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죽어도 쉬지 않으리라" 2017-02-19 0 2216
255 시작은 탈언어화로부터 시작하라... 2017-02-19 0 2312
254 "낯설게 하기"를 처음 제시한 사람 - 러시아 작가 쉬클로프스키 2017-02-19 0 2437
253 시는 언어의 건축물이다... 2017-02-19 2 2440
252 시작을 낯설게 하기도 하고 낯익게 하기도 하라... 2017-02-19 0 2177
251 시인은 재료 공급자, 독자는 그 퍼즐맞추는 려행자 2017-02-19 0 2285
‹처음  이전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