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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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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아, 나와 놀쟈...
2017년 12월 09일 22시 01분  조회:3463  추천:0  작성자: 죽림

 

 

노을

 

최영철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이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내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이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 

 

 

 

―시집『찔러본다』(문학과지성사, 2010)

 

 

 

 

 

쑥국

 

 

참 염치없는 소망이지만
다음 생에 딱 한번만이라도
그대 다시 만나
온갖 감언이설로 그대 꼬드겨
내가 그대의 아내였으면 합니다

그대 입맛에 맞게 간을 하고
그대 기쁘도록 분을 바르고
그대 자꾸 술 마시고 엇나갈 때마다
쌍심지 켜고 바가지도 긁었음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의 그대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고맙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아이 둘 온 기력을 뺏어
달아난 쭈글쭈글한 배를 안고

그래도 그래도
골목 저편 오는 식구들을 기다리며
더운 쑥국을 끓였으면 합니다

끓는 물 넘쳐흘러
내가 그대의 쓰린 속 어루만지는 쑥국이었으면 합니다.
 

 

 

이암의 그림 <모견도>와 최영철의 시 <찔러본다>

 

 

햇살 꽂힌다

잠든 척 엎드린 강아지 머리에

퍼붓는 화살

깼나 안 깼나

쿡쿡 찔러본다

 

비 온다

저기 산비탈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

죽었나 살았나

쿡쿡 찔러본다

 

바람 분다

이제 다 영글었다고

앞다퉈 꼭지에 매달린 것들

익었나 안 익었나

쿡쿡 찔러본다

-<찔러본다> 전문

 


=========================같이 공유하여 시공부 해봅시다...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내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이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 


 

     
 

시를 읽는 것은 어쩌면 시인의 뛰는 심장 안으로 들어가서 혼자 즐기는 관음증을 앓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러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분주하면 사물이 자기를 불러 세우기 힘들다고, 게으름은 유용하다고 말합니다. 모든 창의적인 것의 밑천은 게으름이라 했던가요. 시인은 창의적이기 위해 게으름 피우고 있다합디다. 만사 다 빗장 지르고.

둥근 보름달을 한 열흘 깎아서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칼날이, 무뎌진 가슴을 스윽! 베자 서녘하늘이 붉게 물드는 거라는군요.

무료하고 무능한 자기 존재에 대한 수치심을 거두어가는 망각이 없다면 게으름은 지속될 수 없다고, 피 닦은 수건을 산 뒤에 걸고 경고를 합니다. 해가 넘어간 보이지 않는 뒤쪽에서는 더욱 붉고 강렬한 선혈이 뚝뚝 흐를 것 같습니다. ///박정옥 시인

© 경상일보



===================================
노을에 대한 강박(强迫) 전영관 
돌이켜 보면내가 키운 짐승이다 
시뻘건 아가리로 들어갈 것은 나의 懷疑
나무들은 잎을 접고 어둠 속 하나로 뭉쳐지는 데
가로등은 거부 못할 일이라는 듯 환히머리를 조아린다 
공포는 피하고만 싶던 방향에서 시작되는 법 
서쪽만 바라보는 내 습성을 알아챈 저 짐승이
하구언 근처로 서식지를 결정했을 것이다
제 종족을 맞이하겠다고 도주하던 그림자는 
가로등 불빛에 족적을 들킬 때마다 흔들린다
이미 몇몇을 집어삼켰다는 증거가 강물에 번들거리는 지금 
가능한 도피 방법은 이 자리를 지키는 것뿐
역광으로 찬연했던 억새들이 허리 숙이고
홀로 선 버즘나무도 몸 떨며 제 잎을 떨어트리고 마는 것이
두려움 아니라 철 이른 바람인 까닭을 
나는 밀려들 어둠이 황망해 알아채지 못했다
경계병처럼 하늘을 배회하던 구름이 
저 짐승의 아가리를 짙은 윤곽으로 강조해 주지만 
낭자한 출혈 끝에 먹히고 말 일
자신은 캄캄한 포만감으로 세상을 덮은 채 숙면하는 동안 
응시하는 것 외에 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자들은 
나처럼 웅크린 불면을 供物로 바쳐야 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저녁마다 
나를 먹어 치우는 짐승을 사육하고 있다 


소 떼 울음소리 뒤의 저녁노을 서상만 
덩구덩 북소리가 섞여 있다가죽회초리에 뚜들겨 맞아 
게거품 물고 바다는 미쳐서 
갈기갈기 제 옷을 찢어발겨 흔든다 
한 무리 눈알 부릅뜬 소 떼 울고 간 저녁바다 물결 위에
시뻘건 노을이 엎질러져 뉘엿댄다 
수 만 번 불러도 말 못하는 것이 끝없이 흘러가는 
저 피 묻은 서쪽하늘 
또 날이 저문다푸른 묘등 위로 길이 저문다 
수평선 멀리 굼실대는 돛배 하나또 다른 저녁을 향해
한 점 먹물로 번진
겁 없는 목숨들의 징징거림도 보인다 
가끔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차갑게 식었다가바람에
스스로 제 몸을 맑히는 먼 불국의 목어처럼
간기에 젖어 눈 멀어버린 
백발의 파랑을 치다가 어느 뭍으로 스며들어
하얀 소금꽃이 되고 싶은,
덩구 덩덩 북소리 들리면
바라만 보아도 찔끔찔끔 눈물 나는
소 떼 울음소리 뒤의 저녁바다 


들판의 노을한성례

지평선 너머로 지는
꼭두서니빛 노을은
서서히 번지는 땡감물처럼
발끝으로 스며든다
온 세상이 낮도 밤도 아닌 어스름녘
세상의 변혁도 구원도 모두 남의 어깨너머로
내다보았듯
텅 빈 들판에서 
나는 그림자 하나 만들지 못한다
멀리 깜박깜박 불빛 한둘이
웅크린 짐승처럼 숨죽이며
눈을 반짝이고 있어
그나마 피가 도는 세상이라고 믿는다

아직은 눈을 감고 있어야 한다
땅 속 깊이 숨쉬는 
깊고 뜨거운 열기가
대지를 향해 솟아오를 날을 기다리며

일상은 청동색으로 흘러가고 있어 
무거움을 이기고 고개 들어
노을을 보면
역설처럼 모두가 한 주먹 깃털로 가벼워진다

문득
숨을 고르며 내려가던 노을이
요염하게 타오르며 얼굴을 붉히는
순간
그 배면에 얼비치는 
파르라한 슬픔의 빛깔이 
시선을 붙잡으며 훅 달려든다
뒤를 좇을 수 없는 아득함
유년의 배들평야 만석보 뚝길에서 바라보던 
현기증 일던 노을
그 황홀함에 갇힌 채 나는 지금껏 
길을 잃고 서 있다
  
노을 만 평 신용목 
누가 잡아만 준다면
내 숨 통째 담보 잡혀 노을 만 평쯤 사두고 싶다
다른 데는 말고 꼭 저기 폐염전 옆구리에 걸치는
노을 만 평 갖고 싶다
그러고는 친구를 부르리
노을 만 평에 꽉 차서 날을 만한 철새
한 무리 사둔 친구
노을 만 평의 발치에 흔들려줄 갈대밭
한 뙈기 사둔 친구
내 숨에 끝날까지 사슬 끌려도
노을 만 평 사다가
친구들과 옛 애인 창가에 놀러가고 싶네

노을 이영혜

맨입으로 먹어야 제맛을 알제
구순이 넘은 외할머니
달그락거리던 틀니를 빼고
합죽합죽오물오물쪽쪽
홍시를 드신다
애써 오므린 쪼글한 입술 사이에서
가끔씩 검버섯 같은 씨앗이 똑똑 떨어진다
저녁 해늘어진 괄약근이 움찔움찔 하더니
터진 홍시처럼 좍 벌어지고
우듬지 까치밥 몇 알 더 붉어진다


너무 무거운 노을김명인 

오늘의 배달은 끝났다 
자전거를 방죽 위에 세워놓고 저무는 
하늘을 보면 

그대를 봉함한 반달 한 장 
입에 물고 늙은 우체부처럼 
늦기러기 한 줄 
노을 속으로 날고 있다 

피멍든 사연이라 너무 무거워 
구름 언저리에라도 잠시 얹어놓으려는가 
채 배달되지 못한 
망년(忘年)카드 한 장 


노을 형무소 이병철

노을을 훔친 내 눈이 수의를 입는다
먼 마을에서 흔들리는 눈빛은
눈동자에 수인번호를 새긴다
수런거리는 것들은 전부 노을 너머에 있고
혼자된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다
먼 마을과 노을 너머에 있는 수런거리는 것들’ 속에 내가 들어가지 못하고 이만큼과 저만큼의 거리라는 공간적 경계에 서 있을 때가 있다그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기도 한 것이어서 시시때때로 느끼게 되는 외로움이란 건 필경 그 탓일 것이다그렇지 않은가해질 무렵에 그립지 않은 것이 있는가 말이다우리의 귀소본능 만으로도 해질 무렵이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혹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 아니던가 말이다.

의 죄라면 수런거리는 것들을 좇아간 것뿐이다그것들은 전부 노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가중 처벌을 내린다면 그 또한 혼자된 사람은 누구나 죄인인 탓 정도겠으나 노을까지 훔쳤으므로 와 당신’ 유죄임을 인정하자그리하여 저노을 형무소를 향해 오늘도 뚜벅뚜벅 걸어들어 가지봄날 외로움에 극형을 언도하자. -최광임-


노을 조태일

저 노을 좀 봐
저 노을 좀 봐

사람들은 누구나 
해질녘이면 노을 한폭씩 
머리에 이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서성거린다

쌀쌀한 바람 속에서 싸리나무도 
노을 한폭씩 머리에 이고 
흔들거린다

저 노을 좀 봐
저 노을 좀 봐

누가 서녘 하늘에 불을 붙였나
그래도 이승이 그리워 
저승 가다가 불을 지폈냐

이것 좀 봐
이것 좀 봐

내 가슴 서편 쪽에도 
불이 붙었다

석양의 출구 김진돈
노을이 출하되고 있다 저녁의 출구에서 흘러나온 노을은 어디로 가는가 귀가를 서두르는 하루의 얼굴에 낙관을 찍는 시간
소강상태로 닳아버린 장마는 어깨를 적시지 못해 흥건한 노을저녁에 넘친 저녁놀의 출구는 서쪽이다 저편의 낯빛이 흔들린다 강변을 내려다보던 바람이 강을 윤슬로 물들이고 새들은 저녁 한 톨을 물고 둥지로 날아간다 
머리를 검붉게 염색한 자전거의 무릎들이 사열하듯 굴러간다 석양의 출구는 아직 남아있는가 아침의 입구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도착하지 않았다
노을이 어둠을 잡아당긴다 점점 출구가 닫힌다 

해질 무렵 
천도화 

길 위에서 무작정 기다린다
의자 하나 없는 오지 버스정류장
한 곳만 바라보고 서 있다

산마루에 노을이 흩어지고 
불안한 마음이 파문처럼 번진다
늘 보았던 노을도 낯설다 

지친 하루도 슬며시 산의 어깨를 넘어가는데
길은 보이지 않는다 

오가는 노선이 텅 비었다 

낮과 밤의 경계에 서서 
끊어진 길을 이으려고 하염없이
나를 달래며 기다린다 


저녁을 말하다 임향자

머리부터 시작한 문장이 발목까지 내려가면 
정독한 하루를 끌고 누군가 골목을 걸어온다
서쪽은 낮과 밤의 점이지역
잠깐의 증거가 선명하다 
그 붉은 흔적마저 사라지면 
담장은 무늬를 지우고 골목의 낯빛도 어두워진다 
숟가락이 닳도록 마주친 저녁의 얼굴 
늘 어둠에 스미거나 빛에 소멸되어
한 번도 보지 못했으나,
어둠의 피는 뜨거워 다시 재생되고
비행하던 말들이 내려앉으면
행간을 넘어 밤은 왔다
그는 늙지 않는 시간 밖에 있었다
GPS를 달고 시작한 빌딩 숲이 불을 끄고 
귀가를 서두를 때 그는 길 밖으로 비켜서거나
두 갈래로 제 몸을 가르곤 했다
두 다리에 각주를 매달고
먼 길을 돌아온 지루한 하루는 단문으로 요약되고
밤은 갖가지 어구가 달린 만연체여서
호수도 풍경을 지우고 수면을 닫는 시간,
저녁의 무늬들이 태어나고 
밤은 검은 탁본을 뜨기 시작한다



흔들리는 밤 임향자

불투명한 미래처럼 깜깜한 밤을 달리는 야간버스*
나를 깨워서 낯선 곳으로 데려가는 곳은 어디인가
세상의 길이 모두 지워진 시간
여러 길 위에서 헤매던 젊은 날처럼
나는 흔들리며 가고 있다
먼 이국땅에서 지도 한 장 들고 밤새 달리는 길
내가 걸어온 길이 마치 흔들리는 길이었으니
더러 돌부리에 넘어지고 더러 차를 놓치기도 하며 
지나온 시간내가 놓쳐버린 역은 얼마나 될까 
잠시 멈춘 간이역도 많지만
결국 이 막차를 타기 위해 이렇게 달려온 것이다
흔들리며 흔들리며 놓쳐버린 것들
사랑과 열정 놓쳐버린 이름을 생각하며
열 시간을 달린다
아직 어둠은 거치지 않았고 
이 어둠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
종착역이 없고 마침표가 없는
나를 기울게 하는 흔들림이 길을 만들어간다
붉은 노을을 지나 어둠속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 노을이 사라졌다고 진정 사라진 것이 아니듯
내 가슴엔 아직 내일이 떠있다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파묵칼레까지 11시간 이동하는 야간버스



무렵이라는 말

조경숙 

어슴푸레한 이 말,
철들 무렵동틀 무렵해질 무렵
무렵이란 굳이 무엇으로 완성되었다는 
그런 단단한 언어가 아니다 
아침 점심 저녁 사이 
살짝 요깃거리 같은 
하루 잠깐의 쓸쓸한 마음 같은

한 그루 나무가 서 있는 풍경,
그 어딘가의 언저리 같은
해를 바라보며 노을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허기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암시 같은 

손을 호호 불며 
주전자에 뜨거운 찻물을 끓인다
수증기 속에서
국화꽃잎이 제 형태를 갖출 무렵 
계절은 기억의 냄새를 풀고
나의 두 손은 온기를 안고 
그분이 오실 
그 무렵의 시간을 기다린다



말뚝 장요원

초록이 접힌 들판에
겹겹이 바람을 껴입은 느낌표 하나 서 있다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제 그림자를 묶어두고 있다 
몸집 큰 바람이 그림자를 넘어뜨릴 때도 있지만
그림자는 한번도 줄을 놓지 않았다 
어린 그늘에 
스스로 묶였던 기억을 떠올리곤 했을 것이다 
수만 겹의 바람이 묶였다 가는 곳
말뚝은 처음 묶였던 목덜미를 기억한다 
가끔 바람을 타고 온 굽소리를 되뇌이며 
느릿한 되새김질을 한다 
그때마다 머리에선 
구부러진 각질 덩어리가 자라곤 한다 
애기덩굴 한 줄기가 
더딘 걸음으로 뒤늦게 노을을 감는다 
허리 굽은 저녁을 끌고
누군가 말뚝을 쑥 뽑아 풀숲으로 던진다 
흩어졌던 풀벌레들이 누운 말뚝 근처로 모여든다 
풀숲이 와글와글 소란스럽다 
속이 다 타버린 것을 어둠이 뒤꿈치로 비벼 끈다 
한 개비의 저녁이 꺼져가는 풀숲 
말뚝이 사라진 들판엔 
캄캄한 씨앗들이 뿌려질 것이다 
나무들이 일제히 바람의 고삐를 풀어주고 있다 


소금 창고가 있는 풍경 외 1편 

조완춘

실핏줄이 드러난 바다의 맨몸,
소금기 머금은 낭금갯벌은 온통 청자 빛이다 
위성이 찍은 고향 갯벌
피돌기 하는 물길 끝 암록청의 바둑판들염전이다
교실에 파머머리 계집애가 들어왔었다
간척공사에 따라온 인부의 가족이라 했다
완공도 되기 전
가로막은 허술한 제방을 세찬 밀물이 밀어버린 날
밀가루 급료를 받던 삶들 함께 무너져 
들어올 때처럼 또 가볍게 떠나갔다그 후 
소금밭에 남은 한 사내가 땡볕 내내 수차를 밟고 밀대를 밀었다
몇 번인가 소금꽃 피고 염판 위로 솟아오른 하얀 소금산들
소슬바람 불어오면 소금철은 빨리 끝나버렸다
정산포를 넘어가는 석양빛에 
녹슨 소금창고는 붉고 
소금기를 털어내는 사내의 정강이도 붉고
미루나무 하나 없는 허허 벌판붉은 함초길을 
말간 계집애를 무등 태운 사내가
노을 속으로 오래오래 걸어가고 있었다 

명선이라 했던가
갯벌 생채기로 남은 무너진 제방 위
내 기억의 녹슨 창고에
또렷하게 살아나는 붉은 점 하나 


시간의 주름
-원양제전元陽梯田*

조완춘

구름이 감도는 숲은 태고의 비밀처럼 신성하고
그 숲이 내리는 물은 은총이었다 
마른 풀씨처럼 산기슭에 생을 기댄 사람들 

여인들은 물길을 가두기 위해
돌을 나르고 흙을 다졌다 
등에서 잠들던 딸들과 또 그의 딸들은 
어미의 생을 복사하고
강물 같은 길을 아득하게 흘러왔다 

다랑다랑 조각보를 기워낸 억겁의 시간들
좁은 어깨로 짐을 지어 나르던 여인들가벼이 날고 싶었을까
영롱한 잠자리나비며 매미온갖 날개의 무늬로 
광활한 대지가 일시에 날아오른다

한 삽의 흙한 동이 물로 시작한 밑그림은
이제 골짜기 가득한 풍경화가 되었다
물이랑은 하늘의 마음을 읽어
노을이 젖어들고 사계절이 지나가고

자불자불 잔물결 일어 윤슬에 눈부신 아침
물소를 따라나서는 오리 떼 한가로운데
시간을 측량하는 등고선
그 주름이 조밀하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중국 윈난 성의 하니 족 마을해발 600~2000m의 산을 1,300년에 걸쳐 3,700여 계단식 논을 개간해서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데칼코마니 박주용

경계란 참으로 가깝고도 먼 그리움인가 
소금쟁이가 연못 위를 미끄러지며
생의 균형을 잡으며 간다
경계에 푸른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수양버들도
수면에 닿을 듯 말 듯 삶의 촉수 내민다
물 위에 떠 있는 연잎에 나도 손바닥 대어본다
노랗게 불을 켠 손금 같은 잎맥들이 표면장력으로 달려 나오고
덩달아 셀 수 없는 물이랑이 자맥질하며 내 나이 자꾸 건져 올린다.
그리움은 접어도 그리움인가 
허리 숙여 연못 속을 들여다본다
목덜미 물렸는지 하늘은 온통 노을빛이다
하늘은 흐르고 꽃그늘이 머문 구름 속엔 우물거림으로도 잘 씹히지 않는
살아온 신발 자국이 숨바꼭질처럼 웅크리고 숨어 있다
어둠과 빛살 가득 담긴 신발을 펴 운동장에 활짝 펼쳐보면
내 나이는 신기하게 거꾸로 걷고 있고
몰린 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는 가끔 철봉에 발 얹기도 한다
하늘에 뿌리를 둔 탯줄이 연잎을 둥글게 경계로 밀어 올리는 지금
소금쟁이보다 짠하게 물 위를 걷고 있는 
간간한 내 나이가 반으로 접히고 있다.

결 장요원
사과는 조각을 내어 깎는 게
예의라지만
나는 사과를 둘둘 풀어내는 걸 좋아해
짓무른 부위를 풀어낼 때면
상처를 감싸고 있는 붕대를 풀고 있는 것 같아
진물에 찌든 붕대를 풀어줘야 할 것 같아
머그잔 속의 커피를 돌려보렴 물레성형처럼 커피를 돌려보렴
나도 모르게 커피를 왼쪽으로 돌리고 있는 건
어젯밤 우리가
공원 호수를 왼쪽으로 돌았기 때문이야
호수에
내리꽂히는 빗방울들
동그랗게 말고 있는 몸을 점점 커다랗게 풀어가는풀다가 사라지는 빗방울들
비 오는 날
호수에는
빗방울의 나이가 겹겹이 자라고 있지
오늘 아침 창밖은
잘 구워진 노을빛
부풀어 오른 구름이 페이스트리처럼 접혀 있네
접혀진 주름과
주름 사이의 바람이
바스라지지 않도록 한 겹 한 겹 풀어내야지
세상의 무늬들은
주름들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자라나지​ 


달리는 이불
정와연
이삿짐 트럭에 실려 가는 이불 
검은 밧줄이 필사적인 빨랫줄이다 
반듯하게 개켜진 이불의 한쪽이 들썩거리는 
달리는 이불은 지금 어떤 잠자리인가
어느 방에서
또 어느 방으로 뒤척여지고 있는 것일까
집 밖으로 나온 이불을 보며
왜 으스스하게 몸살 앓았던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일까
민망한 내면의 몸살을 덮어주던 이불
잠의 냄새가 아닌 
을씨년스런 백주의 냄새
이부자리를 끌어당기는 바람의 발목이 앙상하다
지금 달리는 저 이불 속엔
뒤척거리는 바람이 잠자고 있다 
세간을 실은 적재함이 추운 방 한 칸이다
지금껏 자신을 덮고 있는 것들이
다름 아닌 저런 요동치는 바람이었다는 것일까
이사를 오래 다닌 살림살이에는 
그곳만큼 차곡차곡 쌓은 방도 없을 것이다
달리는 이불을 뒤따라가 보면
저녁 무렵의 서쪽하늘
노을을 끌어 덮고 있는 것을 본다 
노을을 뒤따라 어둠 한 채가 깔리고
그 고요 속에는 
뒤척거리는 뼈가 자라고 있다 


모래 화풍 

이해원

사막은 커다란 모래화폭
종일 사막에서 그림을 그리는 바람의 붓끝은 유연하다 
수시로 지우고 그리는 모래그림
바람은 움직이는 풍경을 좋아한다 

노을 위에 발자국이 포개진다
배경으로 그려놓은 신기루는 증발되고 
수많은 별이 조문객처럼 찾아온다 

돌아 갈 수도 멈출 수도 없는 곳
손끝 따라 변하는 스케치에 사구는 늘어난다
낙타의 방울소리가 매장되고 
모래파도가 출렁인다
건조한 바다에 물결무늬가 찍힌다 

바람도 목이 마를 땐 
숨어버린 물소리를 찾아 구렁을 깊이 파기도 한다
때론 
종적을 감춘 자의 흔적이 화폭을 뒤지는 바람의 붓끝에서 발굴된다

같은 듯 다른 사막의 무늬
노련한 화가는 
똑같은 무늬를 그리지 않는다

그릴 수 없는 건 낙타 울음뿐이다
어미를 찾는 새끼 낙타의 울음소리에
사막은 늘 미완성이다

호박죽 김복연 
늦여름 저물녘 호박죽을 끓인다 
부엌창에 내린 노을 
겉보다 속이 더 붉은 노을 한 자락 
-윽 베어다 죽 솥에 넣은 것 누가 알까 
우주 한 귀퉁이가 풀어지고 엉키고 
붉게 솟구쳐 올라 
나무주걱 쥔 내 손도 붉고 
지금 막 몰려드는 어둠 죽 솥에 눌러 붙을까 
걱정하시는 칠순 어머니도 
한 십 년은 붉어 
잘 익은 단내가 온 집안 진동이다 
마당가에 엎드린 개와 
어깨에 앉은 어스름 갈기를 손질하던 나무도 
지금은 다 부엌 쪽 향해 경배 중이다 
아직 돌아오지 않는 식구들 몫까지 
식탁 가득 붉은 호박죽 
우주로 창을 낸 저녁이다 

나무 램프 조영민

추억이 어두울 때면 나무 하나를 켭니다
플라타너스는 빛이 가장 환한 혈족이지만
기름이 떨어져도 어둠으로 불을 켤 수 있지요
그 어둠으로 골방을 비추면곧장
사라지는 것들의 빨간 내복이 보입니다
선반 위 기도하는 인형과 머리맡에 누워있는
할머니의 타구 안쪽까지 환하게 어둠을 켜 놓으면
그런데할머니는 왜 가까운 미래를 소등했을까요
주름 골짜기 사이마다언뜻언뜻 켜져 있던
민가의 불빛들도 이제 더는 보이지 않아요
저수지 속으로 유성들이 하나둘 꺼지고 나면
낯선 풀벌레 소리는 점점 환해지곤 했지요
언제나 정전된 과거를 과다 복용하는 할머니
싱싱한 염문들 모두 말라버린 빈집 마당 같은 치마폭에
얼마 남지 않은 시든 풀잎들이 얼비치곤 했어요
불 꺼진 노을은 다음 생으로 가는 플랫폼인가요
가끔 골방의 적막을 열 때마다
오래전 떠나간 등 굽은 시간들과 재회하는 기분이예요
그녀진통제 같은 집 한 칸 마련하려
서둘러 후생의 램프를 장만했던 것인지밥알 흘리는
할머니가 오래 앉았던 그늘 밑엔
문고리도유리창도 죄다 그녀를 따라가고 없네요
이런 날이면 나는,
가끔씩 나의 길도 단 한번 멀리까지 열어보기 위해
잔가지 무성한 나무를 켜듭니다
벌써내 주변은 온통 타들어가는 것들 천지네요


봄이 오기 전 김두일 

남으로 가는 기차를 타겠습니다더딘 열차에서 노곤한 다리두드리는 남루한 사람들과 소주잔을 나누며 지도에도 없는 간이역 풍경들과 눈인사를 나누겠습니다급행열차는 먼저 보내도 좋겠습니다

종착역이 아니라도 좋습니다자운영이 피고 진 넓은 들을 만날 수 있다면들이 끝나기 전맨발로 흙을 밟아 보겠습니다신발을 벗어들고 천천히흙내음에 한참을 젖겠습니다쉬엄쉬엄 걷는 길그 끝 어디쯤에 주저앉아 혼자 피어있는 동백이며 눈꽃이며 키 작은 민들레의 겨울 이야기를 듣겠습니다서두르지 말고 봄이 깊기를 기다리라고 이르기도 하겠습니다

기차가 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봄이 오는 소리에 귀를 열고 해지는 들에서 노을 한 개비를 말아 피우겠습니다이제껏 놓지 못한 시간을 방생하겠습니다

봄이 오기 전완행열차를 타고 남으로 가겠습니다남녘 어디라도 적당합니다

바람의 역설 최규철

바람은 연체동물이다.
인사동 어느 카페 골목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문득 벌거벗은 몸으로 큰 거리를 나선다


투명한 살결에 
전혀 부끄럽지 않은 유연한 몸짓으로 
가로수 등걸에 올라가 불을 켠다

바람의 모세혈관에 흐르는 피가 노을 되어 
저녁 하늘에 불기둥으로 머물었다가
홀연히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밤새 거친 바다 속에서 몸을 씻고
날이 샐 무렵에야 다시
파도를 헤치고 구름기둥으로 솟아오른다

바람은 불다가 오던 길로
다시 돌아서는 천국의 숨결 같은
하늘을 가득 채울 만큼 크고
바늘구멍으로도 빠져나가는 작은 익살이다

봉인된 무덤에 들어가
살을 입히고 뼈대를 살리며

때로는 보이지 않은 곳으로부터 다가와서
키 큰 포프라 나무에서
바람의 뼈로 일어서는 척추동물이 된다

은밀한 매복 이해리 (2003년 토지문학상 수상 보조작품

이상하지 
늦게 귀가한 와이셔츠를 받아걸면 
한 마리 축 처진 톰슨가젤이 생각난다 
축 처진 것을 걸고도 빳빳한 옷걸이는 
톰슨가젤을 단숨에 사냥한 치이타일까 
고요하고 하얀 달의 숨소리 
이상도 하지 
술 냄새를 풍기는 와이셔츠를 바라보면 왜 
세렝게티 초원의 바람소리가 들리는 거지 
점점 밀림이 되어가는 도시 
넥타이를 풀어헤친 사막과 창 밖으로 몸 던지는 빌딩의 
추락음이 들리는 거지 
발톱을 세운 의자들이 의자를 할퀴고 
몰카를 매단 자동차들이 어두운 구석에 숨어 
누군가를 노리는 눈알을 빛내고 있는 거지 
아무 일 없다는 듯 고요해서 더 팽팽히 긴장되는 
섬유올 속 촘촘한 불안의 숨구멍 
턱 언저리에 푸른 노을을 묻힌 채 
혼곤한 잠 속에 빠져드는 
시달린 수사자가 보이는 거지 
참 이상도 하지 
늦게 귀가한 와이셔츠를 받아 걸면 

  

폐선 정순 (2011년 평사리 문학대상)
저녁의 딱딱하고 고단한 파도 한 켠에
세월 하나 뒹굴고 있다
부력의 한쪽을 추억으로 비워낸 듯
기우뚱 균형을 놓아버리고서는 낡은 부피를 달래고 있다
얼핏 보아 고기들의 길을 단념한지 오래인 듯한,
따라온 길 파도에 녹이 슬어 보이지 않는다
저 배도 한때는 사랑을 했거나 어느 이름 모를 추억 속에서
며칠이고 향긋한 정박을 했을 것이다
불 켜진 환락의 깊이를 쏘다니거나 가슴 속으로 저며드는
이름 모를 물살들에게 운명을 맡기며 추억을 탕진했을,
나 이쯤에서 저 배의 소멸들에 대해 받아내려 한다
기억 속 깊이 끼어 있는 몇 줌의 항해일지와
폐유 같은 어둠 저쪽에서 환락을 장만하던
나폴리 마르세이유 요코하마의 날들과
며칠이고 정지된 엔진 근처에서 뜬눈으로 보내던 
불임의 위도와 경도를 짚어보려 한다
이튿날이면 폐유처럼 떠오르던 희망이라는 낯선 부력의 위로는
어느 해협에서 배운 악몽이었을까
나는 조용히 언젠가의 서풍이 불어와
가슴 속에서 일러주었던 말이라도 실천하듯
관념 속 무례한 부력을 내려놓고서
노을이 내주기 시작하는 저녁 쪽으로 어스름한 귀향을 한다


축제 권정일 
그랬다순식간 허공을 점령하는 가창오리 떼를 보며 예민한 저들의 신호체계를 나는 울음으로 들었다 한 놈의 수상한 날갯짓이 수십 만 마리 한점 노을이었다가 회귀하는 바람의 획나는 공포였다
솟구쳤다내리꽂히는 저들의 생태계깃털하나 다치는 일 없이 일사분란하다 누가 새대가리라 조롱하는가 천수만을 점령하고 남한강을 점령하는 저 기막힌
활공을 보라오차 없는 날개와 날개의 틈을 서로 잇대어 어느 한 놈 낙오 없이 풍경을 거두는 싱싱한 먹이사슬의 자유저들은 한 끼의 운행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랬다한 끼를 위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너에게 칼을 겨냥했고 하나의 의자를 위해 평화라는 이름으로 너를 추락시켰다 새대가리만도 못한 머리를 굴리며 사람 사이를 비행하는 사람인 나는 거둘 것 없는 너무도 불편한 저녁 축제를 보고 있다


지느러미 여자서동인 

밤새 수평선을 지킨 등대처럼 
충혈된 눈알을 좌판 위에 깜박거리는 
저 여자그 옛날 파도가 삼켜버린 
남편이라도 건져 올렸을까 
하루종일 염하듯 물을 끼얹다가 
울컥하얀 포말을 토해낸다 
게처럼 어시장을 어기적거리는 행인들 
봄 햇살을 떨이하자 물간 생선 
거적같은 비닐 봉지에 주워 담으며 
구시렁구시렁 물고기 숨쉬듯 
담배 연기 허공으로 말아 올리는 저 여자
밀물지는 눈동자에 첫날 밤 
꽃이불 같은 저녁 노을 붉게 퍼진다 
닳아버린 지느러미 꼼지락거리며 
반지하 어항 속으로 투숙한다는 저 여자
비린내 흘리던 자리에 알을 스는 비늘들 
귀갓길 저녁 별로 투두둑박힌다 

독수리를 말한다 김남권
그러니까 독수리는 산 것을 먹지 않는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죽은 짐승의 시체만 먹는다
하늘의 제왕帝王이지만 겁을 주지도 않고 
함부로 날개를 퍼덕이지 않는다
참새 한 마리도 우습게 보지 않고 
날개가 없다고 깔보지도 않는다
새들을 불러 모아 짐승을 공격할 줄도 모른다
죽어가는 토끼를 놀리거나 위협하는 법도 없다
바람의 방향을 알고 빈 나뭇가지에
홀로 내려앉는 법도 없다
산 밑을 내려올 때는 강이 흘러가는 길을 먼저 생각한다
강물 가까이 물고기 웃음소리에 귀 기울이며
물결무늬 수를 놓기도 한다 
강물 속 물고기들이 노니는
수초들의 흔들림까지도 숨죽여 지켜보다가 
구름이 일러주는 하늘길에 무늬를 새겨 넣는다
무리지어 다니지 않아서 외로울 때도 있지만
고독한 정신으로 깨달음을 찾아낸다
상처 주는 일을 가장 두려워하며
상처받는 일에는 두려움을 모르는 각시붓꽃처럼 
노을이 타는 강가에 홀로 앉아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먹물처럼 머금고
바보 같은 새
그러니까 독수리는 함부로 사랑을 버리지 않는다 

고수(高手) 양해열 
1.1에서 2.9 사이의 난이도로 입수하는 비오리
공중에서 세 바퀴 반을 굴러
산 그림자가 놀라지 않게 물풀이 다치지 않게
날개 접고 다리 뒤로 뻗어
몸의 곡선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방금 사선으로 잠수한 비오리
강물의 속살을 뜯어 물면서
푸우쏟아낸 하늘 몇 모금
구시렁구시렁 살아나 수면 위로 피어오르더니
물꽃을 딛고
피라미가 비오리 혀독설을 물고
훨훨 타는 갈밭 위로 붉은 노을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든 찰나
공중사리탑
그가 낡은 처마 끝으로 갔다
고난도의 다비식전광판도 기록하지 못했다



상처는 여전히 붉다 정용화
  
나는 그 새 이름을 알지 못한다
깃털만 만져도 가슴에
상처 하나씩 갖게 된다는
  
그 새는 내 입 안 깊은 동굴 속에 살다가
무심코 입을 벌리자
기어이 세상 밖으로 빠져 나왔다
새가 빠져나간 자리허공이 자꾸 아프다
  
햇빛의 온기가 남아있는 돌 위에서
새는 아까부터 견고한 비밀을 쪼아대고 있다
저녁은 어두워지게 내버려두고
오래도록 물어뜯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처음엔 그저 작게만 보였던 새
걷는 것이 전부인 듯 보이더니 날개가 생겼다
날카로운 발톱이 생기고
부리가 점점 커져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다
  
어둠도 가둘 수 없는 새가 날아간다
무엇으로도 저 새를 잡을 수 없다
  
새가 날아간 자리
두고 간 소문만 무성하고
노을 너머 상처는 여전히 붉다

사라지는 오렌지
최호일 
오렌지 나라에서는 오렌지가 사람 
사람의 투명한 옷을 입고 의심하고 이해한다 오렌지가 되려면 오렌지의 크기와 색깔과 색다른 구두가 필요하고 
열 개의 손가락이 당장 필요하다 
만일 당신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면 
그건 오렌지의 감정 
문을열고들어가비와사람의단추를누르면주렁주렁열리는팔과다리들오렌지는사람들을박스에넣어선물한다 
당신과나사이를주고받는어느선물 
상자 속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빠져나온 옆구리처럼 걸어 다닌다 
뒤돌아보았을 때 
일정한 높이와 냄새와 수만 개의 눈을 가지고 
오늘 계단은 몇 개의 기분일까 
백만 년 전 우리는 허리를 숙이다가 누군가의 호주머니에서 
굴러떨어진 노을이었지 그걸 주우려다 또 떨어뜨린 노을빛 
저녁은 가장 오래된 물질 
죽은 척하고 놓여 있는 이 오렌지는 지워진 안개와 강물이 다 사라지는 오후와 다른 사람이 사는 마을을 거쳐 여기 희미하게 굴러 온 것 
가보지 않은 여행지를 천천히 다녀온 사람들로 
아는 얼굴로 










  
 <노을 시 모음한용운의 '지는 해외 
  
지는 해 
  
지는 해는 
성공한 영웅의 말로(末路같이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창창한 남은 빛이 
높은 산과 먼 강을 비치어서 
현란한 최후를 장식하더니 
홀연히 엷은 구름의 붉은 소매로 
뚜렷한 얼굴을 슬쩍 가리며 
결별의 미소를 띄운다 
  
큰 강의 급한 물결은 만가(輓歌)를 부르고 
뭇 산의 비낀 그림자는 임종의 역사를 쓴다 
(한용운·시인, 1879-1944)
  
  
노을 
  
산 밑 
교회당 
에 
노을이 내렸다
  
어미새가 
에 앉아 
저녁 기도 드리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마을은 
노을 속에 아늑하다
(김영일·아동문학가)
  
  
노을
  
봄이 오는
산개울에
두런거리는 소리
  
오늘은 
또 누가
다비茶毘를 하는가 
  
서쪽 하늘엔
슬픔마저 타는
저 찬란한 빛
저녁노을.
(하청호·시인, 1943-)
  
  
노을 

보아주는 이 없어서 
더욱 아리따운 아낙이여.
(나태주·시인, 1945-)
  
  
노을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이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내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저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 
(최영철·시인, 1956-)
  
  
남은 빛 모두 거두어 
  
어느 저녁 바다에 
내 남은 빛 모두 거두어 
붉게 빠져들고 싶다 
  
황홀한 노을 잠깐이겠지만 
그렇게 누군가의 품에서 
잔잔하게 저물고 싶다 
(권경업·산악인 시인)
  
  
노을
  
어디서부터 울려 퍼졌나
꿈결처럼 아련한 노랫소리
영원인 듯
먼 지평선 아래로 잦아드는 화음
마지막 발자국 지우며
사막 끝으로
장엄히 사라져간 부족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노랫소리
(조향미·시인, 1961-)
  
  
황혼
  
온종일 건너온 고해를
피안의 테두리 안으로 밀어 넣는
이승과 저승이 만나는 곳
  
수평선 위에
바닷새 한 마리
불타고 있다
  
하루의 제물을 바치고 있다
(조옥동·시인충남 부여 출생)
  
  
선문답禪問答
  
뜨거운 물음이네
서녘 하늘 붉은 것은
  
활활
태워 버리고
가진 것 하나 없이
  
산너머 머나먼 여행
떠날 준비 됐느냐는.
  
말없는 대답이네
산 그림자 짙은 것은
  
듣지 않는 아우성
속으로만 삼키려니
  
두 팔을 가지런히 하고
나를 따라 하라는.
  
그대도 모를 거고 나 또한 알 수 없네
한 생을 건너가면 모든 의문 풀리는지
하늘도 산도 아니면 바다는 알고 있는지.
(구금자·시인)
  
  
어느 해거름
  
멍한
저녁 무렵
  
문득 
나는 여섯 살의 저녁이다
  
어눌한 
해거름이다 
정작
여섯 살 적에도 
이토록 
여섯 살이진 않았다 
(진이정·시인, 1959-1993)
  
  
저녁 노을

어두워지며
썩은 강에 검은 산이 소리 없이
조선 망하듯 누울 때
앞논에 개구리야
뒷산에 소쩍새야
빚진 빚진 나라 울지 마라
한 사십 년 가문 사랑 탓하지 마라
오늘 저녁 부끄러움에 멍든 가슴들이
저렇게 다란히 피워 올리는
너무 찌들려서 아름다운 저녁밥 짓는 연기를 보아라
밥 먹고 어디 머리 둘 곳 없을지언정
끝없이 살아
우리 현대사 내려다보는 노을 아래
우리가 씨 뿌린 곡식같이 당당하게
살아 이 땅을 잠들지 않게 하는
내 아버지 붉은 얼굴과 더불어 살아
(안도현·시인, 1961-)
  
엮은이정연복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노을 시 모음손광세의 '서쪽 하늘외 
  
서쪽 하늘
  
빨간 사과 껍질이
널려있다.
드문드문
귤껍질도 섞여있다.
(손광세·시인, 1945-)
  
  
노을을 적다 
  
노을이 저 혼자 붉다 
바다는 놀빛을 당겨 
물위에 적는다 
좋은 시 한 편 
공양받은 하늘 한쪽이 붉다 
하늘도 때로 취할 때가 있으니 
하루에도 몇 번 
길을 내는 바다를 
누가 
바라만 보라고 바다라 했나 
보라 
넘치지 않는 건 저것뿐이다 
하늘을 안고 있는 건 
저것뿐이다 저런
(천양희·시인, 1942-)
  
  
노을
  
우리 집 개가
막내 놈이 콩밭에 눈 똥을 
훌떡 삼켜버렸다
그리고 내게로 와서
맨발을 핥았다
걷어차지 못했다
물리치지 못했다
부르르 떨고 있는 늦가을 목련나무를
한참 쳐다보았을 뿐,
옆에 서 있는 미친 대추나무에
막걸리 서 되 받아주고 나도 한 잔 마셨다
(우대식·시인, 1965-)
  
  
일몰 앞에서
  
저 일몰 끝에
발목을 내려놓은 그가 앉아 있다
눈멀고 귀멀어 그는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와 나는 시소 타는 사람 같고
해와 달 같아서
누가 먼저 궁둥이를 털고 일어나면 툭 떨어진다하늘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저 뜨겁고 차가운
해와 달을
'시소 타는 남녀'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유홍준·시인, 1963-)
  
  
석양
  
거대한 군불을 쬐려고 젖은 새들이 날아간다 
아랫도리가 축축한 나무들은 
이미 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매운 연기 한 줌 피어오르지 않는 맑은 군불
새들은 세상을 떠돌다 날개에 묻혀온 
그을음을 탁탁 털어내고 날아간다 
깨끗한 몸으로 쬐어야 하는 맑은 군불
어떤 거대한 혀가 몰래 천국의 밑바닥을 쓱 핥아와 
그것을 연료로 지피는 듯한 맑은 군불
숨막힐 듯 조여 오는 어둠을 간신히 밀쳐내고 있는 맑은 군불
그곳으로 가서 새들은 제 탁한 눈알을 소독하고 눈 밝아져 
아득한 허공을 질주하면서도 세상 훤히 내려다보는 힘을 얻는다 
저 거대한 군불 앞에 놓인 지구라는 제단
그 제단 위 버둥거리는 사람이라는 것들
누구의 후식인가 
살짝 그슬러 먹으려고 저리 거대한 군불을 지폈나 
(김충규·시인, 1965-2012) 
  
  
노을 꽃 
  
피는 꽃만 
예쁜 게 아니다
  
지는 꽃도 
못지 않게 예쁘다 
  
가만히 보면
지는 꽃이 더 예쁘다
  
슬퍼지니까
가슴 아리도록 예쁘다.
  
해 뜨고 질 때의 노을도 
꽃이랑 비슷하다
  
새 아침 새 희망을 
노래하는 아침 노을보다도 
  
저무는 하루를 속삭이는 
저녁 노을이 더 곱다
  
아롱아롱 눈물 너머
가슴속 파고들며 곱다
  
어느새 이제 
나의 생도 지는 꽃이요
  
해 저물녘 
노을 쪽으로 기운 모양이다.
(정연복·시인, 1957-)
[출처] 노을 시 모음|작성자 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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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락된 과식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햇빛이 가득한 건
근래 보기 드문 일

오랜 허기를 채우려고
맨발 몇이
봄날 오후 산자락에 누워 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햇빛을
연초록 잎들이 그렇게 하듯이
핥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고
허천난 듯 먹고 마셔댔지만

그래도 남아도는 열두 광주리의 햇빛!
(나희덕·시인, 1966-)


+ 햇빛이 말을 걸다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나에게 사명을 다하며 떨어진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햇빛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플랑크톤들에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며 날아가는 물방울들
초록으로 빨강으로 답하는 풀잎들 꽃들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봄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권대웅·시인, 1962-)


+ 햇살에게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종일
찬란하게 비춰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호승·시인, 1950-)


+ 햇빛 바람

손가락에 침 발라
쏘옥 쏙 쏙
장에 가는 엄마 내다보려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아침에 햇빛이 반짝

손가락에 침 발라
쏘옥 쏙 쏙
장에 가신 엄마 돌아오나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저녁에 바람이 솔솔.
(윤동주·시인, 1917-1945)


+ 햇살의 분별력

감나무 잎에 내리는 햇살은 감나무 잎사귀만하고요
조릿대 잎에 내리는 햇살은 조릿대 잎사귀만하고요

장닭 벼슬을 만지는 햇살은 장닭 벼슬만큼 붉고요
염소 수염을 만지는 햇살은 염소 수염만큼 희고요

여치 날개에 닿으면 햇살은 차르륵 소리를 내고요
잉어 꼬리에 닿으면 햇살은 첨버덩 소리를 내고요

거름더미에 뒹구는 햇살은 거름 냄새가 나고요
오줌통에 빠진 햇살은 오줌 냄새가 나고요

겨울에 햇살은 건들건들 놀다 가고요
여름에 햇살은 쌔빠지게 일하다 가고요
(안도현·시인, 1961-)


+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이문재·시인, 1959-)


+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 날 농사꾼 아우가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 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 비로소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정진규·시인, 1939-)
 

 

+ 노을

누군가 삶을 마감하는가 보다
하늘에는 붉은 꽃이 가득하다

열심히 살다가
마지막을 불태우는 목숨
흰 날개의 천사가
손잡고 올라가는 영혼이 있나보다

유난히 찬란한 노을이다.
(서정윤·시인, 1957-)


+ 노을
  
저녁노을 붉은 하늘 누군가 할퀸 자국
하느님 나라에도 얼굴 붉힐 일 있는지요?
슬픈 일 속상한 일 하 그리 많은지요?
나 사는 세상엔 답답한 일 많고 많기에 …
(나태주·시인, 1945-)


+ 석양

바닷가 횟집 유리창 너머
하루의 노동을 마친 태양이
키 작은 소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다
그 모습을 본 한 사람이
'솔광이다!'
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좌중은 박장대소가 터졌다

더는 늙지 말자고
'이대로!'를 외치며 부딪치는
술잔 몇 순배 돈 후
다시 쳐다본 그 자리
키 작은 소나무도 벌겋게 취해 있었다
바닷물도 눈자위가 볼그족족했다
(허형만·시인, 1945-)


+ 노을

해는 온종일 스스로의 열로
온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여 놓고
스스로 그 속으로 스스로를 묻어간다

아, 외롭다는 건
노을처럼 황홀한 게 아닌가.
(조병화·시인, 1921-2003)



+ 노을
  
보내고 난
비인 자리
그냥 수직으로 떨어지는
심장 한 편
투명한 유리잔
거기 그대로 비치는
첫이슬
빨갛게 익은
능금나무 밭
잔잔한 저녁 강물
하늘에는
누가 술을 빚는지
가득히 고이는
담백한 액체
아아,
보내고 나서
혼자서 드는
한 잔의
술.
(홍해리·시인, 1942-)


+ 노을

바이올린을 켜십시오
나의 창가에서
타오르던 오늘
상기된 볼
붉은 빛 속에
가만히 감추고
사랑의 세레나데를 연주해 주십시오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주십시오
곧 다가올
달빛 함께
가벼운 춤 출 수 있게
고운 선율로
복숭아 빛 그대 볼
감싸 안게 다가오십시오

떠나버린 한낮의 뜨거움을
새악시 외씨버선처럼
조심스레 산등성이에 걸어 놓고
또다시 돌아올
아스라한 새벽 빛 맞으러
길 떠날 수 있게
사뿐한 사랑으로
그대 내게 오십시오
(전은영·시인)


+ 황혼까지 아름다운 사랑

젊은 날의 사랑도 아름답지만
황혼까지  아름다운 사랑이라면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아침에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의 빛깔도
소리치고 싶도록 멋이 있지만

저녁에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지는 태양의 빛깔도
가슴에 품고만 싶습니다

인생의 황혼도 더 붉게
붉게 타올라야 합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기까지
오랜 세월 하나가 되어

황혼까지 동행하는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입니까.
(용혜원·목사 시인,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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