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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理的 仇討(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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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작품으로 김도산이 감독, 각본 및 주연을 맡고 신극좌의 단원들이 배우로 출연한 연쇄극이다. 연쇄극이란 키노드라마(kino drama)라고도 불리는데,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야외장면이나 활극 장면을 영화로 찍어 연극 중 무대 위 스크린에 삽입한 형식을 말한다. <의리적 구토>에는 약 1,000피트의 필름이 삽입되어 연극 중간에 상영되었다. 이 작품은 연쇄극으로 제작되기 앞서 신파 연극으로 우미관에서 공연된 바 있다. 당시 국내 기술진이 전무해 각본과 연출은 김도산이 맡았지만 촬영과 편집은 일본인 미야가와 소우노스케에 의해 진행됐다.
<의리적 구토>는 자신을 괴롭히고, 심지어 그의 유산까지 탈취하려는 계모일파에게 온갖 박해를 받으며 살아가는 송산이 주인공이다. 온갖 고통을 받으면서도 가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송산은 어느날 매초라는 친구를 만나, 정의를 위해 싸울 것을 권유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 계모일파를 물리치고, 가문의 평화를 찾게 된다.
이 작품은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이후 잠시 연쇄극의 유행을 가져오기도 했다. 특히 이 작품은 새로운 형태의 연쇄극을 시도하면서 영화 제작에 있어서 한 단계 진보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한편, 1962년 '영화의 날 제정위원회'에서는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를 한국영화 제1호로 정하고,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선포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도 이를 두고, 영화사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에서는 1923년 4월 9일 상영된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서>를 한국영화의 출발이라고 주장한다. <월하의 맹서>는 술과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한 남자가 착실한 약혼녀의 저축으로 갱생한다는 내용을 담은 작품으로, 비록 조선총독부의 저축장려 영화였으나 완전한 극영화라는 점에서 무성영화 시대의 서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리적 구토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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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에 단성사(團成社)의 사장 박승필(朴承弼)이 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활동사진 연쇄극(連鎖劇)이다. 제목이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라는 주장도 팽팽하다. 연극 공연에 영화 장면 일부를 삽입한 변형된 연극 형식인 연쇄극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1919년 7월 우미관(優美館)에서 신파연극으로 절찬리에 공연되었다. 김도산(金陶山)이 각본을 쓰고 연출하였으며 일본인 미야가와 소오노수케(宮川早之助)가 촬영과 편집을 맡았다. 김도산, 이경환, 윤화, 강원형, 최일, 양성현, 김영덕과 신극좌(新劇座) 단원들이 출연하였다.
송산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불우하게 자란다. 재산을 욕심내는 계모의 간교한 계략으로 인해 집안에서 재산을 둘러싼 알력이 심하였다. 송산은 복잡한 집을 떠나 보람있는 일을 하려고 결심한다. 그는 뜻을 같이 하는 죽산과 매초를 만나 의형제를 맺는다. 계모는 재산을 차지하려고 송산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죽산과 매초는 분노하며 칼을 휘두르려고 하는데 송산이 만류한다. 송산은 가문과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참지만 매일 괴로운 마음을 술로 달랜다. 계모 일당에 의해서 송산의 가문이 위기에 처하여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송산은 눈물을 머금고 칼을 든다.
박승필의 자본과 신파극단 신극좌의 대표 김도산의 인력이 서로 결합하여 만들어진 신파 연쇄극은 침체된 신파극계에 획기적인 재기를 가져다 주었다. 김도산 일행은 단성사의 후원을 받아 일본에서 촬영기사를 초청하여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이 작품을 완성하였고 1919년 10월 27일에 단성사에서 상영하여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구체적인 제작의 결과를 기준으로 하여 또한 우리의 자본과 인력이 주축이 되어 제작하였다는 두 가지 점에서 한국영화의 기점으로 설정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리적 구토 [義理的仇討]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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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산의 본격적 활극. 일명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 전 3막 22경으로 구성된 신극좌의 연쇄극으로 가문의 명예와 선친의 유산을 지키려는 전실 아들과 악랄한 계모간의 암투를 그린 내용. 단성사 사장이던 박승필이 제작·기획하고 신극좌를 창설하여 이끌던 김도산(金陶山 1891~1921)이 각본·연출·출연했다. 운동이 일어난 그해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어 기차와 한강 다리를 찍은 김도산 최초의 기록영화인 ‘경성전시(京城全市)의 경(景)’과 함께 동시 상영됐다. 제작비 5,000원. 우리나라 최초의 활동사진으로 우리의 자본과 인력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영화의 기점이 되고 있다(한국영화 75년사 CD롬, 조선 95. 1. 1). 당시 광고에 보면 입장료는 특등 1원 50전, 1등 1원, 2등 60전, 3등 40전 등 4등급이 있고 촬영 장소는 한강철교, 장충단, 청량리, 남대문 정차장 등으로 밝히고 있다.
송산(김도산)은 계모(김영덕) 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선친의 유산을 탐내는 계모에게 온갖 설움과 구박을 당하는 등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계모의 흉계는 날이 갈수록 흉포해지고 눈엣가시 같은 송산을 없애려는 음모가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송산은 가문과 선친의 명예를 위해 집에서 잠시 떠나 의형제인 죽산(이경환), 매초(윤혁)와 함께 계모 일파와 맞서 싸울 것을 결의한다. 계모와 그 일당의 발악이 극에 달했을 때 송산은 정의의 칼을 뽑아 그들을 물리치고 가문의 평화를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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