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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 단성사와 "아리랑" 영화와 라(나)운규
2019년 10월 25일 01시 20분  조회:3870  추천:0  작성자: 죽림

독립운동가

나운규

<아리랑>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인, 건국훈장 애국장 1993

 ]

출생 - 사망 1902.10.27. ~ 1937.8.9.
 이미지 1

 

 

“조선 영화계의 위대한 개척자 나 군이여.
조선의 살림이 좀 더 넉넉하고 문화가 좀 더 발달되었더라면 
그대는 벌써 세계적 예술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평론가 서광제

<아리랑>이라는 사건

 

1926년 10월 1일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제작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1) ‘마치 어느 이 서울 한구석에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렘을 느끼게 했다’2)는 이경손()의 회고처럼 관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아리랑>의 열기는 단성사에서 상영이 끝난 이후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내내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영되었던 이 영화는 1942년 조선인들이 징용으로 끌려와 있던 홋카이도의 탄광에서도 상영되어 조선인 노무자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3)

<아리랑>의 주인공은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미치광이가 된 최영진(나운규 )이었다. 소작인의 아들인 최영진에게는 여동생 최영희(신일선[)가 있었다. 최영희는 오빠의 친구인 윤현구(남궁운[]4) )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런데 마름 오기호(주인규[)가 영희를 차지하려 한다. 미친 영진은 영희와 현구 사이를 훼방 놓던 오기호를 살해하고 감옥에 간다.

 

단성사

의 한 장면"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9_167/1475138420889Y50LS_JPEG/17a.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영화 <아리랑>의 한 장면

6․10 만세운동 직후에 제작된 <아리랑>의 근저에는 토지를 매개로 한 계급문제가 있었다. 마치 “토지는 농민에게”와 같은 6․10 만세운동의 슬로건을 연상시킴으로써 6․10 만세운동의 열기를 거리에서 스크린으로 옮겨 놓은 듯 했다. 고소설이나 일본 신파를 번안하여 영화로 만들던 당시에 당대 사회현실에 대해 비판적 인식과 이를 극적으로 묘사한 <아리랑>의 제작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아리랑> 영화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준 충격은 대단했다. 예컨대 카프 소속의 평론가 최승일()은 소설이 하지 못한 것을 영화가 하고 있다며 이전의 조선영화 모두를 불살라버려도 될 정도의 거상()이라 극찬했다.5) 이렇듯 <아리랑>은 식민지 조선영화인들에게 있어서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넘어야 할 산이었다. 36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 간 나운규는 <아리랑>을 통해 일제강점기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인으로 기억되었다.

3.1운동 발발과 독립군 활동

 

나운규

나운규(1902~1937)는 1902년 10월 27일6)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금성()이며 호는 춘사()이다. 회령보통학교를 졸업 후 간도의 명동중학()에서 수학했다. 부친은 대한제국 무관 출신인 나형권()으로 군대 해산 후 회령에서 약종상을 했다고 전한다.7)

나운규가 수학했던 간도의 명동중학은 독립군 양성 기지로 민족운동의 중심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했을 때에는 명동중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회령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나운규 역시 회령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수배를 당했다. 연해주로 도주한 나운규는 러시아혁명의 발발로 내전이 한창이던 시베리아를 방랑하던 중 러시아 백군의 용병으로 입영했다. 그러나 목숨을 건 용병 생활에 대한 회의로 탈영하여 훈춘()을 거쳐 북간도로 돌아왔다.

3․1운동 이후 간도지역의 무장독립운동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나운규는 독립군 단체인 도판부()에 가입했다. 나운규의 은사이기도 했던 박용운()이 책임자였던 도판부는 독립군이 간도에서 회령으로 진격하기 전 터널이나 전신주를 파괴하는 임무를 띤 결사대였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기 위해 청산리 인근으로 갔던 나운규는 그곳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독립군에게 “당신 똑똑한데 군대말고 공부를 해라”라는 조언을 듣는다. 공부를 통해서 더 큰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충고에 나운규는 독립군 부대를 나와 서울로 간다.

 

명동중학교 낙성식 (1918년 4월)

회령 시내

서울에 온 나운규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과정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훈춘사건을 일으켜 북간도로 출병한 일제는 도판부 관련 비밀문서를 획득하고 도판부 책임자인 박용운 등을 곧바로 체포하고 곧이어 나운규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재판에 회부된 나운규는 보안법 위반으로 2년 형을 언도받고 1921년 3월부터 1923년 3월까지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3년 3월 출소 한 나운규는 회령에서 머물던 중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1924년 1월 북선지역을 순회하던 극단 예림회()가 공연차 회령을 방문했을 때 예림회에 가입한 것이다. 나운규가 가입한 예림회는 함흥에 동명극장()과 함흥극장()이라는 주식회사 형태의 두 개 극장이 설립되는 것을 계기로 지두한()을 중심으로 20여명의 청년들이 조직한 소인극단이었다.8) 예림회 단원 대부분은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고향으로 돌아온 도쿄유학출신의 학생들이었기에 연극공연을 위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때 윤백남()이 만들었던 민중극단() 출신의 전문연극인인 안종화()가 문예부장으로 초빙되어 이들을 이끌었다.

신입회원으로 가입한 나운규는 연구생으로 예림회 무대에서 본격적인 연극배우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예림회는 북선공연을 마치고 자금난에 직면하여 문을 닫게 된다. 문예부장 안종화는 민중극단 출신들이 주축이 된 무대예술연구회()의 연락을 받고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나운규는 연극 활동에 관심이 많던 김태진(, 예명 남궁운), 주인규와 함흥역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안종화를 배웅하며 이별을 아쉬워했다.9)

<아리랑>과 나운규 시대

 

예림회가 문을 닫은 후 서울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던 나운규는 반가운 인물과 조우한다. 부산으로 내려갔던 안종화였다. 이 때 안종화가 활약하던 무대예술연구회원 전원은 부산의 일본인 실업가들이 세운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전속배우로 입사하여 있었다. 부친상을 당해 서울에 올라와 있었던 안종화의 소개로 나운규는 부산으로 내려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연구생으로 입사한다. 이미 부산에는 주인규와 김태진이 연구생으로 있었다. 나운규는 이들과 더불어 제2촬영반의 영화감독으로 초빙된 윤백남의 집에 하숙하며 영화배우로 첫발을 내딛는다.

나운규의 영화 데뷔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두 번째 작품인 윤백남 연출의 <총희의 연(의 )>10)에서 가마꾼 중 한명으로 출연한 것이다.11) 이 영화가 제작되던 중 윤백남과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고 그 결과 윤백남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와 결별하고 조연출이던 이경손을 위시하여 자신이 데리고 있던 연구생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1925년 윤백남은 백남프로덕션을 세우고 이경손 연출의 <심청전()>을 제작했다. 윤백남을 따라 서울에 온 나운규는 <심청전>에서 중요 배역인 심봉사 역을 맡아 연기했다. 나운규는 살아있는 연기를 위해 실제 소경을 만나 그 모습을 탐구했다.12) 이러한 노력의 결과 나운규는 <심청전>의 심봉사 역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흑과백>, <장한몽()>, <농중조()> 등에 연거푸 출연하면서 특색 있는 배우로 주목받게 된다.

이즈음 백남프로덕션은 문을 닫았다. 윤백남을 따라 나섰던 사람들 중 나운규, 이규설, 주인규, 남궁운 등은 일본인 모자상() 요도 도라죠()가 세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입사해 있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창립 작품은 이규설의 <농중조()>였다. 일본의 신파물을 번안한 것이었다.

 
1 (매일신보 1926.9.17.)"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202/1475026020014KEWfE_JPEG/5.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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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의 한 장면 (매일신보 1927.10.15.)"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279/14750260208966okAH_JPEG/9.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3"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114/14750260204144JFYw_JPEG/7.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4 영화 제작진들"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156/14750260206833jx9S_JPEG/8.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새 영화 <아리랑> (매일신보 1926.9.17.)

단성사 (매일신보 1923.12.21.)

영화 소설 <아리랑>

<아리랑> 영화 제작진들

<아리랑>의 한 장면 (매일신보 1927.10.15.)

<농중조>에 이어 나운규의 <아리랑>이 제2회 작으로 제작되었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당대의 현실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으면서도 곳곳에 서양 활극영화와 같은 박진감 있는 장면들이 포함되어 흥미를 돋우었다. 관객이 쏟아져 들어왔고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은 큰돈을 벌었다. 나운규는 일약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았다.

을 보고 (매일신보 1926.10.10.)"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282/1475026881268asuf7_JPEG/10.jpg?type=w646" style="border: 0px; clear: both; display: block;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title="" />

신 영화 <아리랑>을 보고 (매일신보 1926.10.10.)

<아리랑>의 성공에 고무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는 나운규에게 곧바로 다음 작품을 만들 기회를 주었다. 나운규가 선택한 작품은 <풍운아()>(1926)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나운규가 연기한 니콜라이 박이였다. 그는 시베리아 방랑시절의 나운규를 연상시키는 듯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인물로 세탁소를 내서 고학생들을 돕고 악한을 응징하는 영웅적인 인물이었다. <아리랑>보다 활극적 요소가 강했던 이 작품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급하게 만들기 시작한 작품이라 시나리오 없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촬영이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예림회 시절부터 함께 활동하던 주인규, 김태진, 이규설 등 동료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 결국 나운규의 독선적인 행동을 이유로 주인규 등은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탈퇴한다. 이들의 빈자리는 나운규의 연락을 받고 회령에서 내려온 윤봉춘()이 메웠다.

나운규는 <들쥐>(1927), <금붕어>(1927)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내며 조선영화계의 스타로 군림한다. 그야말로 흥행의 보증수표와 같은 이름이었다. 그러한 나운규에게 단성사 운영주 박승필()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나와 독립할 것을 권한다. 1927년 9월 나운규는 단성사의 후원을 받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나와 자신의 이름을 딴 나운규프로덕션을 세운다.

나운규프로덕션 시절 나운규는 <잘 있거라>(1927), <옥녀()>(1928), <사랑을 찾아서>(1928), <사나이>(1928), <벙어리 삼룡>(1929) 등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중 <사랑을 찾아서>는 <두만강을 건너서>라는 원래 제목이 검열에 문제가 되어 제목을 바꾸어야 했던 작품으로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시기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또한 <벙어리 삼룡>은 나도향()이 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문예영화였다.

 
1
3간도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하던 <두만강을 건너서>는 일제 경찰의 검열로 영화 제목을 <사랑을 찾아서>로 변경하였다."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51/1475045294244guqJg_JPEG/13.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2 (1926)"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139/1475045293905W1FVq_JPEG/12.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아리랑 선전지 압수 (매일신보 1926.10.3.)

나운규영화 <사랑을 찾아서> (1926)

인기배우 나운규를 고등과에서 호출조사 (매일신보 1928.4.10.)
간도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하던 <두만강을 건너서>는 일제 경찰의 검열로 영화 제목을 <사랑을 찾아서>로 변경하였다.

나운규가 만들어낸 작품은 여전히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벙어리 삼룡>이 대구의 만경관()에서 상영될 때에는 너무나 많은 관객이 들어 극장 2층이 붕괴되었고 진주에서는 무대에까지 들어찬 관객들로 배우들이 극장에 들어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누가 뭐래도 나운규의 시대였다. 그러나 실상은 초라했다. 나운규의 방탕한 생활로 인해 회사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나운규프로덕션의 살림을 맡았던 형 나민규()는 나운규와 다투고 회사 운영에서 손을 뗐다. 동시에 나운규의 동료들 역시 나운규의 방탕한 생활과 절제치 못하는 행동에 반기를 들며 나운규프로덕션을 탈퇴한다.13) 혼자 남은 나운규는 일본의 촬영소를 시찰한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을 떠난다.

몰락과 재기

 

추장복 입은 나운규 (매일신보 1927.11.13.)

도쿄의 가와이영화제작사()를 견학하고 돌아온 나운규는 1929년 12월 30일 서대문의 아성키네마에서 열린 영화인들의 망년회에 얼굴을 비췄다. 나운규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여전했다. 나운규는 자신에 대한 화살을 일간지 영화기자들의 모임인 찬영회()에 돌렸다. 우수영화를 소개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영화인들 위에 군림했던 찬영회에 대한 조선영화인들의 반감은 컸다. 망년회장은 찬영회 성토회장으로 바뀌었다. 유도선수 출신의 영화배우 이원용()이 조끼를 찢어 깃발을 만들었다. 몇 개의 조를 짜서 찬영회 회원인 중외일보의 최상덕(), 매일신보의 이서구(), 정인익(), 조선일보의 안석주(), 동아일보의 이익상()의 집으로 향했다. 영화인들은 이들 신문기자들을 불러내 폭력을 가했다. 기자들에 대한 폭력사건으로 경찰에서는 다수의 영화인을 체포했다. 이중 김형용(), 김태진(), 이원용, 홍개명(), 나웅()이 검사국으로 넘겨졌다. 충남 금산으로 도망친 나운규는 사태가 수습되기를 기다렸다.14) 기자들과 영화인들 간의 폭력사건은 기자들이 찬영회를 해체하기로 약속하면서 일단락되었다.15)

찬영회 사건 이후 좌익영화인들은 민족영화인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 첫 번째 대상은 나운규였다. 나운규프로덕션을 지원하던 단성사와 나운규 사이는 <사랑을 찾아서>를 제작하면서 그 관계가 틀어졌다. 제작비가 부족했던 나운규가 조선극장()에서 자금을 지원받은 후 단성사가 아닌 조선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상황에서 원방각(, ○□△)이라는 영화제작회사를 만든 단성사에서는 이구영() 연출로 <아리랑 후편>(1930)을 제작하기로 한다. <아리랑 후편>의 제작을 위해서는 나운규의 이름이 필요했던 단성사에서는 나운규프로덕션 해산 이후 재기에 골몰하던 나운규를 영화에 출연시킨다. <아리랑 후편>이 개봉되자마자 나운규에 대한 좌익영화인들의 비난이 시작되었다. 포문은 좌익영화인인 평론가 남궁옥()과 서광제()가 열었다. 특히 서광제는 이 영화가 허무주의와 숙명론을 주입시키는 영화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영화제작에 참여했던 촬영기사 이필우()가 현실적 문제를 들어 반론을 펼쳤다. 이에 대한 서광제의 반론이 이어졌고, 더불어 안종화, 윤기정(), 나운규 등이 가세한 논쟁이 이어졌다. 1930년을 뜨겁게 다뤘던 민족영화인과 좌익영화인 사이의 논쟁은 신흥영화예술가동맹()에 대한 카프영화부의 해산명령으로 인한 좌익영화인들 사이의 분열로 흐지부지 종결되었다.

나운규는 카프연극부를 지도했던 최승일과 손잡고 미나도좌에서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시도했으나 소부르주아적인 연극이라는 비난을 들었다.16) 이어 일본국수회() 회원인 도야마 미츠루(滿)가 세운 원산만프로덕션에 참여하여 <금강한()>(1931)이라는 영화에 출연하였고 배구자무용단()과 함께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나운규의 갈팡질팡한 행보에 나운규에 대한 영화인들의 성토는 높아졌다. 나운규의 죽마고우인 윤봉춘이 앞장서서 “나운규 성토대회”를 열었다. 박완식()은 “ 에게 하여 아모 도 가질 수 업게 되엿다. 오히려 에서 하여 주기를 하고 십다”17)고 비난 했으며 심훈()은 “천인비봉  기불탁속 (봉황은 천 길을 날며 주려도 조 따위는 먹지 않는다)”18)라며 나운규의 몰락을 안타까워했다. <아리랑>으로 얻은 성공의 빛이 찬란했던 만큼 그 그림자는 짙었다.

1932년 일본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돌아온 이규환()은 후원자인 강정원()의 도움으로 <임자 없는 나룻배>(1932)를 만들기로 한다. 나운규라는 스타가 출연하기를 바랐던 이규환은 나운규에게 시나리오를 보냈고 나운규는 출연을 결심한다. 이규환은 뱃사공이라는 배역에 어울리게 삭발을 한 채 나타난 나운규의 모습에 놀랐고 한편으로 고마웠다.19) 나운규가 혼신의 연기를 펼친 <임자 없는 나룻배>는 성공적이었다. <아리랑> 이후를 대표하는 무성영화라는 평을 얻었다. 더불어 나운규는 제작비 부족으로 중단되었던 <개화당이문()>(1932)을 강정원의 도움으로 완성시킬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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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무화과>의 한 장면

1930년부터 토오키(talkie) 영화20)가 상영되기 시작한 조선에서 조선영화의 제작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1931년 단성사의 후원으로 <말 못할 사정>이라는 제목의 토오키 영화를 제작하려 했던 나운규는 기술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한다. <임자 없는 나룻배>와 <개화당이문>을 통해 다시 명성을 회복하기는 했으나 1932년 1월 조선영화 제작의 가장 큰 후원자이던 단성사의 박승필이 사망한 이후에는 영화제작을 지원해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운규는 궁여지책으로 연쇄극()을 제작, 상연하기 시작했다.21)

영화를 지속적으로 제작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지방순회극단이던 현성완 일행을 따라 다니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그 사이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아 적조하던 조선영화계에 영화제작의 움직임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나운규에게도 영화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나운규는 <아리랑>을 제작한 바 있었던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통해 <무화과>(1935)와 <그림자>(1935)를 만들었다. 이 사이 차상은()의 자금 지원을 받아 한양영화사()를 세워 <강 건너 마을>(1935)을 제작했다. 관객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신화가 된 이름

 

1935년을 전후하여 조선영화계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강 건너 마을>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나운규는 한양영화사의 두 번째 작품으로 조선 최초의 토오키 영화를 만들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해 다시 <아리랑>을 들고 나왔다. 3만원을 투자하여 이태원에 촬영소를 만들고 일본에 가서 녹음기와 조명기를 구입하였다. 촬영은 동시녹음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3개월에 걸쳐 촬영된 필름은 초점이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고 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동시녹음 촬영이 실패한 것이다. 부랴부랴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촬영기사로 활약한바 있었던 고려영화협회()의 대표 이창용()의 도움을 받아 재촬영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녹음을 했다. 하지만 이 사이 경성촬영소()에서는 최초의 토오키 영화 <춘향전()>(1935)을 세상에 내 놓았다.

조선 최초의 토오키 영화라는 타이틀을 얻는데 실패한데다가 3,000원의 추가비용까지 들었던 <아리랑 제3편>은 손해가 막대했다. 폐병으로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지만 큰 빚을 진 상황에서 쉴 틈이 없었다. 조선흥행계의 실력자인 경성촬영소의 와케지마 슈지로()가 나운규에게 접근해 왔다. 와케지마 수하에 있던 도야마 미츠루가 만든 원산만프로덕션에서 활동하여 조선영화인들의 지탄을 받았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많은 자본과 최신의 기술이 필요한 토오키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일본인 흥행업자들의 지원이 필요했다. 나운규는 경성촬영소에서 <오몽녀>(1937)를 만들기로 한다.

나운규는 <아리랑>을 만들기 전, 어느 신문에서 한 무명작가의 소설을 읽고 영화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오몽녀>라는 제목만 기억하고 있었다. 누군가 이 소설이 소설가 이태준()이 무명 시절에 쓴 작품이라고 했다. 당시 이태준은 병으로 성북동 집에서 정양 중이었다. 나운규 역시 폐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이태준을 문병했다. 이태준은 시대일보에 연재했던 <오몽녀>의 스크랩북을 꺼냈다. 십여 년 전 읽었던 그 작품이었다. 이태준에게 영화로 만들 수 있는지를 물었고 다행히 승낙을 받았다. 검열을 고려하여 어떤 부분을 고칠 것인지를 상의하고 곧바로 영화제작에 착수했다.22)

촬영은 강원도에서 진행되었다. 쇠약한 몸에 주사를 맞아가며 분투하고 있었기에 신경은 여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촬영 중 전기사용 문제로 시비가 붙자 주먹을 휘둘러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했다. 병색이 극도로 좋지 않았던 나운규는 와케지마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병든 몸으로 힘들게 완성한 <오몽녀>는 1937년 1월 20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한국 영화계의 신화 나운규

나운규의 병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쉬면서 몸이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차도가 있자 무성영화로 제작했던 <사랑을 찾아서>를 발성판으로 바꾸기 위해 도쿄에 다녀왔다. 몸이 완쾌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움직였던 것이 독이 되었다. 폐병이 악화된 것이다. 1937년 8월 9일 나운규는 향년 36세로 사망했다. 영결식은 11일 <아리랑>이 개봉되었던 단성사에서 열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시대였기에 만드는 영화마다 검열의 가위에 잘려나가기 일쑤였다. 그러한 상황에도 나운규는 영화를 통해 조선인 관객들을 울고 웃게 만들었다. 나운규가 만든 영화의 밑바탕에는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이를 위한 실천이 깔려 있었다. “진정 그가 없었다면 우리들의 지난날이 얼마나 삭막했을지 모를 일이다.”23) 1962년 나운규 탄생 60주년 기념을 맞아 오영진()이 남긴 추도사의 한 구절이다.

참고문헌
  • <라운규 서거 20주년 기념회 진행>. 《문학신문》. 1957.8.15.
  • <藝林會에 巡廻劇團>. 《朝鮮日報》. 1924.1.8.
  • 金幽影. <映畵街에 立脚하야(10)>. 《東亞日報》. 1931.4.12.
  • 羅雲奎. 〈映畵時感〉. 《三千里》 9卷 1號. 1937.1.
  • 朴完植. <朝鮮映畵人槪觀(四)>, 《中外日報》. 1930.3.15.
  • 승일. <라듸오·스폿트·키네마>. 《별건곤》. 1926.12.
  • 沈熏. <朝鮮映畵人 언파레드>. 《東光》 제23호. 1931.7.
  • 安鍾和. 『韓國映畵側面祕史』. 현대미학사, 1998
  • 오영진. <‘아리랑’은 영원하다>. 《한국일보》. 1962.11.25.
  • 柳珍山. <映畵人 羅雲奎>. 《大韓日報》. 1973.5.8.
  • 李慶孫. <無聲映畵時代의 自傳>. 《新東亞》. 1964.12.
  • 李圭煥. <映畵60年>. 《中央日報》. 1979.12.22.
  • 이효인. 「찬영회 연구」. 『영화연구』 53호. 2012.
  • 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1997.
  • 최창호·홍강성. 『라운규와 수난기 영화』. 평양출판사, 1999.
  • 한국예술연구소.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윤봉춘 편』. 도서출판소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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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당시 영화관에서는 요즘처럼 한편을 여러 번 상영하는 것이 아니라 뉴스와 코미디와 같은 단편과 멜로드라마 류의 장편 여러편을 묶어서 3시간 정도의 프로그램으로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리랑>과 함께 상영된 영화는 미국 유니버셜사에서 만든 <작은 거인(The Little Giant)>(1926)이었다.
2
李慶孫. <無聲映畵時代의 自傳>. 《新東亞》. 1964.12. 346쪽.
3
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1997. 178쪽.
4
남궁운의 본명은 김태진(金兌鎭)으로 1930년대 이후에는 극작가로 활동했다.
5
승일. <라듸오·스폿트·키네마>. 《별건곤》. 1926.12. 107~109쪽.
6
남한에서 나운규는 1902년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청진형무소 수형기록에는 광무6년(1902년) 생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이다(조희문, 위의 책, 35쪽). 반면 북한에서는 나운규의 생년을 1901년 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나운규의 아들 나종익과 누이동생 나필규가 참석한 1957년 8월 9일 북한의 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주최한 나운규 서거 20주년 추념식에서 나운규의 생년을 1901년으로 기록했다(<라운규 서거 20주년 기념회 진행> 《문학신문》, 1957.8.15.). 이를 통해 보면 나운규의 실제 태어난 해와 호적상의 기록이 다를 수 있다.
7
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1997. 37쪽.
8
<藝林會에 巡廻劇團>. 《朝鮮日報》. 1924.1.8.
9
安鍾和. 『韓國映畵側面祕史』. 현대미학사, 1998. 72쪽.
10
<운영전(雲英傳)>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제는 <총희의 연>이다.
11
안종화, 이경손 등은 나운규의 영화데뷔를 <운영전>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이것이 정황상 맞다. 그러나 나운규와 함께 연구생으로 있었던 이규설, 김태진 등은 나운규가 <해의 비곡>의 어부로 처음 영화에 출연했다고 전한다.
12
최창호·홍강성. 『라운규와 수난기 영화』. 평양출판사, 1999. 65~68쪽.
13
한국예술연구소.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윤봉춘 편』. 도서출판소도, 2004. 139~141쪽.
14
柳珍山. 〈映畵人 羅雲奎>. 《大韓日報》. 1973.5.8.
15
찬영회 사건에 관하여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했음. 이효인. 「찬영회 연구」. 『영화연구』53호, 2012.
16
金幽影. <映畵街에 立脚하야(10)>. 《東亞日報》. 1931.4.12.
17
朴完植. <朝鮮映畵人槪觀(四)>. 《中外日報》. 1930.3.15.
18
沈熏. 〈朝鮮映畵人 언파레드〉. 《東光》 제23호. 1931.7. 61쪽.
19
李圭煥. 〈映畵60年〉. 《中央日報》. 1979.12.22.
20
영사(映寫)할 때 영상(映像)과 함께 음성, 음악이 나오는 영화로 발성영화(유성영화)를 말한다. 기존의 무성영화와 대비.
21
연쇄극이란 연극의 일부 장면을 영화로 보여주는 것으로 연극과 영화가 결합한 흥행물이었다. 1919년부터 1920년대 초반 사이에 유행하던 연쇄극을 다시 상연한 것은 토오키 영화의 유행에 따른 나름의 자구책이었다.
22
羅雲奎. 〈映畵時感〉. 《三千里》 9卷 1號. 1937.1. 231쪽.
23
오영진. <‘아리랑’은 영원하다>. 《한국일보》. 196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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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나운규알제강점기에 활동한 영화인. 민족영화의 선각자이며,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한국영화진흥공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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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나운규 [羅雲奎] - <아리랑>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인, 건국훈장 애국장 1993 (독립운동가, 한상언, 이달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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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한국사

나운규

[아리랑]을 만든 우리나라 영화의 선구자

 ]

출생 - 사망 1902.10.17. ~ 193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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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0월 1일에 서울의 단성사에서 첫 개봉된 흑백 무성 영화 [아리랑]. 영화가 끝날 무렵 극장 안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관객 모두가 영화의 주제곡인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영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민족의식과 항일 정신을 고취시키는 작품이었다. 첫 개봉 이후, 영화 [아리랑]은 당시로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흥행하여 전국 구석구석까지 상영되었으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각본, 감독, 배우 1인 3역을 맡아 종횡무진 활약한 당시 20대 중반의 나운규(, 1902~1937)였다.

민족을 울린 영화 [아리랑]

1920년대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킨 영화 [아리랑]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실성한 영진에게 옛 친구 현구가 방문하고 현구는 영진의 여동생 영희와 사랑에 빠진다. 악덕 지주의 마름이자 친일파인 오기호는 마을 축제의 어수선한 틈을 타 영희를 겁탈하려 하고 이를 말리던 현구와 난투극을 벌인다. 지켜보던 영진은 갑자기 환상에 빠지고 환상 끝에 낫을 휘둘러 기호를 죽인다. 붉은 피를 본 영진은 충격으로 다시 맑은 정신이 돌아오지만, 살인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끌려가는 영진의 뒤로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지며 영화는 끝이 난다.

미치광이 영진역은 이 영화의 각본과 감독을 겸하고 있던 나운규가 맡았고 영희역은 신일선, 오기호역은 주인규가 맡았다.

영화 [아리랑]은 핍박받던 농촌의 현실과 일제에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주인공에 감정이입한 관객들에 의해 영화 주제가 ‘아리랑’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국에 퍼져 나갔다.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 신일선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관객들이 너무나 감동이 벅차서 목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였다.

나운규. [아리랑]을 만든 한국영화의 선구자.

일제치하 암흑기 고통받던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이 그대로 표현된 영화 [아리랑]은 서울에서 성공한 이후, 전국 곳곳에서 상영되었는데. 평양에서는 관객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극장의 들보가 부러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제는 [아리랑]의 성공에 당황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리랑을 보고 공감했기 때문에 통제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프롤로그에 '고양이와 개'라는 자막을 넣어 속박하는 자와 속박당하는 자의 대립을 암시하였고, 주인공 영진이 실성한 사람인 것은 나라를 빼앗겨 온전한 정신이 될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을 상징한 것이었다고 한다. [아리랑]은 당시 신파물이나 외국작품의 번안물이 넘쳐나던 시절, 사실주의에 바탕하여 민족의 문제를 영상화함으로써 한국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다는 평을 받았다.

배우로 출연한 것 외에 각본과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으로 나운규는 일약 한국 영화계의 총아로 떠올랐으며 이후, 한국영화를 이끌어 가는 선구자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아리랑]의 필름은 현전하고 있지 않다.

항일운동을 하던 청년의 영화계 입문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구한말 군인이던 나형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말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낙향하여 고향에서 한약방을 하면서 후학들을 키우기도 하였다.

나운규는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8년 만주 북간도 용정에 김약연이 세운 명동중학에 입학하였지만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북간도와 만주 일대를 떠돌았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만주에서는 독립군 단체에 투신하기도 하였는데, 1920년에는 북간도에 사는 한국인들이 만든 대한국민회(혹은 간도국민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비록 미수사건에 그쳤지만 일제의 수비부대 간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회령-청진간 철로 폭파임무를 맡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다.

회청선 폭파 미수사건으로 나운규는 일제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이때 나운규는 감방의 동료로부터 춘사()라는 호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 [사랑을 찾아서]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노골적인 저항의식을 담고 있어 상영 닷새 만에 중단되었다가 많은 장면이 가위질 된 채 재개봉되어, 우리 영화사 사상 최초의 검열 사건으로 회자된 작품이다.

1923년 출감 이후 나운규는 당시 지방 순회공연을 하던 신극단 예림회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안종화를 만났다. 나운규와 동갑내기인 안종화는 이듬해 부산으로 내려가 한국 최초의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창립에 관여하게 되고 나운규를 부산으로 불러들였다.

1924년에 설립된 조선키네마는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 실업가들이 20만 원의 자본금을 공동 출자해 세운 영화 제작사였다. 이들은 총포 화약상인 다카사 간조를 사장으로 내세우고 일본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 영화를 찍기 시작하였는데 이 영화사에 우리나라 배우와 제작자, 연출가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안종화의 소개로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에서 단역배우로 배우 인생을 시작하였다.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대사 없는 가마꾼으로 출연했던 나운규는 이듬해 윤백남이 조선키네마를 나와 세운 백남프로덕션의 첫 번째 작품 [심청전]에 심봉사로 출연하여 연기파 배우로 성장하였다. 또 조선키네마에서 만든, 자유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이규설 감독의 [농중조(새장 속의 새)]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연기에 절찬을 받으면서 명배우로 뛰어올랐다.

[농중조]에 주연 여배우로 출연한 복혜숙의 회고에 따르면 [농중조]를 찍을 무렵 나운규는 이미 자신의 감독 데뷔작 [아리랑]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농중조] 촬영현장에서도 배우의 역할뿐만 아니라 연출부분 스태프 역할도 자진해서 했다고 한다.

마침내 1926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자본으로 자신이 구상하고 각본을 쓴 [아리랑]을 감독하면서 주연으로 출연하는 1인 3역의 역할을 해냈다. [아리랑]은 개봉하자마자 요새 말로 하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한국영화의 선구자

나운규가 출연한 [임자 없는 나룻배]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일제 강점기 뱃사공 부녀가 겪는 비극적 현실을 그린 1932년 한국 흑백 무성영화이다. 나운규가 주연으로 나왔다. [아리랑]과 함께 일제시대 문제작으로 손꼽힌다. 민족저항영화로서 조선총독부의 검열에서 도끼로 철로를 찍는 부분 등이 삭제당하였다.

[아리랑]의 성공 후 나운규는 1927년 고향 친구였던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옥녀]·[사나이]·[사랑을 찾아서]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문예영화라 할 수 있는 [벙어리 삼룡]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나운규의 개인적 인기와는 달리 ‘나운규프로덕션’은 경영이 순조롭지 못했다. 결국, 영화사는 해체되었고 나운규는 원방각사 박정현의 자본으로 [아리랑 후편]과 [철인도] 등을 만들었지만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때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리던 나운규는 돈 때문에 일본 ‘도야마 프로덕션’의 작품에 출연하여 대중의 지탄을 받기도 하고,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배구자의 악극단을 따라다니며 무대에 출연하기도 하였다.1931년 일본 영화계를 돌아보고 온 나운규는 영화 [개화당이문]을 만들었지만 일제의 검열 때문에 많은 중요 장면들이 잘려나가 결국 흥행에 실패하였다.

대신 그는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관객들의 가슴에 남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이후에도 나운규는 비록 [아리랑] 만큼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감독하고 출연하여 한국영화의 중심에 있었다.

1936년 나운규는 [아리랑]의 성공 이후 우리 영화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될 시도를 하였다. 그는 새로 제작하는 [아리랑 3편]을 당시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한 발성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영화는 변사가 대신 대사를 말해주던 무성영화시대에서 벗어나 배우가 그대로 대사를 하면서 연기하는 유성영화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운규는 문학작품의 영화화를 선호하였다. 1937년 나운규는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를 영화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그동안의 침체에서 벗어나 흥행과 예술성 면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생활고와 영화촬영 시의 과로 등이 겹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35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나운규는 영화계에 입문해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그중에서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자유로운 영화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작가이자 감독 그리고 배우였으며 초창기 한국영화를 이끈 영화계의 선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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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나운규알제강점기에 활동한 영화인. 민족영화의 선각자이며,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한국영화진흥공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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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나운규 [羅雲奎] - [아리랑]을 만든 우리나라 영화의 선구자 (인물한국사, 김정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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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상식사전

나운규

 

 

 한국의 영화감독으로, 1926년 <아리랑>으로 한국 영화가 도약하는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1927년에는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고, 특히 1936년 <아리랑 제3편>을 제작하면서 동시녹음을 실시하여 한국 영화가 무성영화 시대에서 유성영화 시대로 전환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외국어 표기

 

 

(한자)

 

 

출생~사망 

 

 

1902~1937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춘사'이다. 1912년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신흥학교 고등과로 진학했으며, 1918년에는 간도에 있는 명동중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학교가 폐교된 이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수감되었고, 1923년 출감하였다. 1925년 부산으로 내려가 극단 예림회에 가입한 뒤 안종화의 소개로 부산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연구생 배우로 입사했으며, 이때부터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였다. 

그러다 1926년 자신이 원작·각본·주연을 맡은 <아리랑>이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는 강렬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영상화하여 진정한 한국영화의 효시가 되었다. 이후 '조선키네마'에서 <풍운아>(1926), <들쥐>(1927), <금붕어>(1927) 등을 만든 나운규는 1927년 '나운규 프러덕션'을 창립해 시나리오 작가·감독·배우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때 나왔던 작품들이 그해 5월 단성사에서 개봉한 <잘있거라>, 1928년 <옥녀>와 <사랑을 찾아서>, <사나이> 등이다. 

그러다 1929년 초 조선극장에서 개봉된 <벙어리 삼룡이>를 끝으로 잇단 흥행 실패와 운영난에 처해 있던 나운규 프러덕션은 문을 닫게 된다. 나운규는 이후 <아리랑 그 후 이야기>(아리랑 2편, 나운규 주연, 이구영 감독)을 만들었지만 대중들의 호응을 받는 데는 실패했으며, 1937년에는 수양딸과 아버지에 얽힌 인간의 애욕 문제를 다룬 <오몽녀>(1937)를 내놓았다. 

나운규는 잇단 흥행 실패 이후 이류 극단을 따라다니며 연기를 했는데, 이때 <철도공부의 죽음> 등 사회주의적 연극을 연출하거나 출연하면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병인 폐결핵 악화로 1937년 3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한편, 나운규는 영화인으로 활동하는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 중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특히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는 15편에 이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운규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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