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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 "민성보"
2021년 05월 10일 21시 43분  조회:3361  추천:2  작성자: 죽림

민중의 소리- 《민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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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8-05 
  •  
 

민성보 옛터.

룡정에는 민성가라는 거리가 있다. 지난 세기 20년대에 그 거리에 민성보라는 신문을 꾸리는 신문사가 있었고 거리의 이름은 그에서 연유되였다.

그 신문사 옛터는 조선말로 된 간행물의 탄생지로서만이 아니라 “중공룡정촌지부”유적지로도 유서가 깊다.

1919년 중국 5·4운동은 문화운동의 영향하에 연변의 진보인사들은 반일무장투쟁을 배합하여 어려움을 이겨나가며 많은 간행물을 꾸렸다. 1919년 3월, 연변지역에서 발행한 조선문신문들로는 《일민보》, 《신국보》, 《중외통신》, 《구국일보》, 《조선민보》가 있었다.

그러던중 1928년 1월, 《민성보》가 룡정에서 고고성을 올렸다. 신문사는 룡정촌 신안거리(현 민성거리)에 세워졌다. 《민성보》의 최고지도기구는 40명으로 구성된 “보무위원회”였다. 강위청(연길 현상회 회장)이 위원장으로, 관준언(화룡현교육국 국장)이 신문사 사장으로, 방지함(룡정촌 전화국 국장)이 경리로 추대되였다.

《민성보》는 한문과 조선문으로 된 4절지 4개 면으로 된 일간신문이였다. 그중 1, 2면과 3면의 전반부는 한문판이고 3면 후반부와 4면은 조선문판이였다. 한문판 총편집은 안회음이 겸했고 조선문판 총편집은 윤화수였다. 일발행량은 2000부, 연변에서 그 영향이 컸다.

신문은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취지에서 《민성보》라고 이름을 달았다. 그 취지에 걸맞게 《민성보》는 신학제, 신문풍, 백화문을 구사하였으며 혼인자유, 남녀평등을 제창하는 등 진보적인 언론의 구실을 톡톡히 하였다.

1928년 2월 주동교가 신문사 편집일군으로 초빙되여 왔다. 주동교는 겉으로는 편집일군의 명색을 띠였으나 실제로는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으로 민중의 토대와 혁명적극성이 높은 연변에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발전시키는 사업을 하러 온것이였다. 하여 1928년 2월 연변에서의 첫 공산당조직인 중공룡정촌지부가 민성보사를 거점으로 건립되였다. 주동교가 당지부 서기를 맡았다.

《민성보》의 한문판 주필 안회음은 신문사내의 진보세력들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세우지 못하게 되자 1928년 여름 사직하고 천진으로 돌아갔다.

이를 기회라 생각한 주동교는 중공만주성위에 청시하여 당간부를 증파해줄것을 요구했다. 곧 공산당원 손좌민, 리별천이 파견되여 와 신문사에 취직했다. 이리하여 《민성보》의 주필로부터 책임편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산당원들이 필을 잡게 되였고 《민성보》는 실제상 중공룡정촌지부의 전투보루로 되였다.

중공룡정촌지부가 건립된후 중공북방국에서는 지방교육부문에서 북평의 해당 당국에 교원을 파견해달라고 요구를 제기하는 기회를 빌어 1928년 3월부터 6월까지 연변에 파견되여오는 북평 향산자유원(香山慈幼院)의 졸업생속에 17명의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을 함께 파견하였다.

연변에 도착한 17명 당원, 단원은 인차 주동교와 련락을 맺고 중공룡정촌지부의 령도밑에서 지하건당사업을 전개하였다. 불과 몇달이 못되여 그해 7,8월에 국자가, 동불사,로투구, 광개욕, 팔도하자, 옹성라자, 삼도구, 화룡, 훈춘 등 9개 지역에 당지부가 설립되였다.

8월에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정신에 따라 중공동만구위가 건립되였다. 동만구위를 민성보사에 두었다.

주동교가 서기를 맡고 조직위원을 류건장, 선전위원을 조지강이 맡았다.

이들은 《민성보》를 하나의 선전도구로 삼고 용감하게 일제의 침략행위를 폭로, 규탄하였으며 피압박자들이 일떠나 침략자들과 용감히 싸우라고 호소하였다.

1929년 1월 15일 중공동만구위 서기 주동교가 룡정의 국민당특무들에게 체포되고 2월에는 서기대리인 류건장도 체포되였다. 손좌문, 리별천 등 북평에서 온 당원들도 선후로 피신하여 연변을 떠나는바람에 중공동만구위는 실제상 와해되고말았다. 국공합작의 분렬, 국민당의 간섭, 지방관원들의 무능 등 원인으로 1931년 “9.18”사변후 민성보는 부득불 정간되였다.

지금 룡정시연수학교 정원에는 기념석 하나가 세워져있다. 2010년 룡정시 당위와 정부에서 건립한 기념석에는 조, 한 두가지 문자로 룡정촌당지부 건립상황이 주홍빛 글자로 음각되여있다.

기념석의 건립을 주도했던 룡정시로혁명근거지건설추진회 박호만회장은 “민성보는 푸른 벽돌로 지은 불과 240여평방메터 되는 단층집이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룡정촌의 당지부가 들어서면서 이로써 항일투쟁은 새로운 단계에로 들어서게 되였고 연변의 당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적어내려갔습니다”고 말했다.

또 “《민성보》의 옛터는 이곳에서 남으로 수십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었으나 그곳에 민가가

밀집하기에 룡정시연수학교내에 세우게 되였다”고 소개했다.

《민성보》는 20세기 20년대 동북에서 중문과 조선문으로 꾸린 유일한 신문이였다. 또한 《민성보》는 예봉을 직접 일제와 국내통치계급에 돌렸고 인민대중들에게 각성하고 단합하여 다같이 대적하며 외환을 막아나서라고 호소한 진보적 신문이였다.


글 김혁/사진 리련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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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목소리 『민성보』

한자 1920年代 間島에서 한글과 中國語로 刊行된 民衆의 목소리 『民聲報』
영문 Min Sung Bo, the newspaper published in both Korean and Chinese in Gando in 1920s
중문 1920年代在间岛用汉语和朝鲜语出版的报纸民声报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민중의 목소리 『민성보』의 탄생

『민성보』는 1928년 1월 연길현 용정에서 당시 연길현·혼춘현·화룡현·왕청현 등의 연변 지역 교육계와 공상계 상류층 인사들이 공동 출자하는 형식으로 창간된 신문이다. 『민성보』는 1920년대 간도 용정에서 간행된 대표적인 진보 신문의 하나였다.

중국어와 한국어로 간행된 『민성보』는 “언론을 빌어 동포를 깨우친다.”는 취지로 창간된 이래 언론을 통한 활발한 항일 구국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2년 초 중견 편집진들이 일제에 체포되면서 부득이하게 폐간되었다.

『민성보』는 연변 지역 한인 사회를 대상으로 이 시기 활약하였던 한인 사회 단체의 활동, 사상과 이념 문제, 향토 역사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래는 이를 알 수 있는 한인 사회에 관련한 기사 목록이다.

「연변 시사 만평(중)(延邊時事漫評(中))」[民國 17.05.05], 「동만운동의 종횡관(팔):방화산(東滿運動의 縱橫觀(八):方火山)」[民國 17.05.27], 「혁신단 사건 발생지 용암동 실사기(革新團事件發生地龍岩洞實查記)」[民國 17.06.03; 17.06.10; 17.06.14; 17.06.21; 17.06.29], 「집회일속(集會一束)」[民國 17.06.21], 「레닌주의에 대한 민족 문제 개요(6)(레닌主義 對한 民族問題概要(六))」(民國 17.06.10), 「일본 제국주의 재동북지전도(속)(日本帝國主義在東北之前途(續))」[民國 17.10.07], 「논한민공당지기인급중일아국제지관계:천수(論韓民共黨之起因及中日俄國際之關係:天水)」[民國 19.09.18], 「화룡현 조사지(1):박창한(和龍縣調查志(一):朴昌翰)」[民國 19.09.06].

『민성보』가 탄생하기까지

『민성보』는 일본 제국주의가 연변에 대하여 정치·경제·문화·군사적으로 전반적인 침략을 감행하던 시기에 탄생했다. 일제는 1907년 8월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세웠고, 1909년에는 청나라 정부와 간도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일제는 용정·국자가 등지를 일본인에게 거주와 무역을 허용하는 상부지(商埠地)로 만든 동시에 길회(길림-회령) 철도 부설권과 한인 영사 재판권을 얻었다. 또한 그들은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철수하는 대신에 간도 일본 총영사관을 설립한 후 연길·화룡·혼춘·왕청·안도현 등을 관할하였다.

일제는 용정의 민족 교육을 말살하기 위해 1906년 개교 1년 만에 폐교된 서전 서숙의 교사(校舍)를 매입하여 1908년 한인 자녀를 상대로 만주 경내에서 처음으로 식민주의 교육의 거점인 간도 보통학교를 설립했다.

1921년 7월에는 중국 동북 지역 침략의 중요한 발판 가운데 하나였던 연길현 용정에서 『간도 신보(間島新報)』를 창간하였다. 창간 당시 『간도 신보』는 일본어판과 한글판 두 가지가 발행되었다. 『간도 신보』에는 일본 거류민회의 내용뿐만 아니라 연변 지역 한인 사회와 관련한 정치·경제·문화·사회 전반에 관한 내용, 조선 총독부 관리들이 연변 지역을 방문한 내용, 소련연해주 지역 한인 사회와 관련한 내용 등이 실렸다.

1927년 7월, 일제는 일본 상인들을 선동하여 중국 정부가 부과하는 수입 물자에 대한 부가세 납부를 반대하고, 중국 해관 창고 문을 부수고 공공연히 물품을 약탈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의 법령을 무시한 불법적 행위는 연길 도윤(延吉道尹)과 각 현 인민들의 지대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각 현의 인민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시위 행진을 전개하며, “길회 철도 부설을 반대한다!”, “연변에서의 일제의 각종 특권을 취소하라!”, “관세 자주를 쟁취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일본 측에 강력히 항의했다. 결국 일본 측은 일본 상인들로 하여금 잘못을 승인하고 사과하게 하며, 세금을 보충하여 납부하고 일체 손실을 배상하도록 하였다.

그 뒤 연변의 애국적 진보 인사들은 자발적으로 민중을 각성시켜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주권을 수호하며 정의를 주장하고 압박과 착취에 반항하기 위하여 『민성보』의 창간을 준비했다.

『민성보』는 1927년 여름, 연길·화룡 2개 현의 저명인사들인 화룡현 교육국 국장 관준언(關俊彥), 용정촌 전화국 국장 방지함(方芷涵) 등이 발의하고, 연길·혼춘·화룡·왕청, 용정촌의 교육계·공상계의 애국 인사들이 마음을 합쳐 성금을 모금하여 인쇄기를 구입한 후 용정촌 신안 거리[지금의 민성 거리]에 신문사를 꾸림으로써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민성보』의 조직과 편집 방향

민성보사의 최고 집행 기구는 4개 현과 용정촌에서 선출된 40여 명의 보무 위원회(報務委員會)였다. 그리고 신문사 내의 조직기구로는 사장과 경리를 두고 그 아래에 편집부·영업부·인쇄소를 두었다. 『민성보』의 중국어면 총편집은 안회음이 맡았다. 그는 국내외 주요 신문 편집을 책임지고 주관하였다. 안회음은 국민당의 중간파 인물로써 신문사내의 진보 세력들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게 되자 얼마 후 사퇴하고 1928년 여름에 용정을 떠나 천진으로 돌아갔다. 『민성보』의 지방 신문과 문예면은 주동교가 주관하였다. 중국어면 편집에는 손좌민이, 교정은 이별천이 맡았다. 한국어면 총편집은 윤화수(尹和洙)였다. 민성보사에는 60여 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조선족과 한족이 각기 절반씩을 차지하였다.

『민성보』는 매주 6회 발행했는데, 총 4면으로 1면부터 3면 전반부까지는 중국어면이고, 3면 후반부터 4면은 한국어면이었다. 당시 『민성보』의 주요 영업 수입은 광고비였다. 4면 중의 한 면은 광고가 차지했다. 『민성보』의 하루 발행량은 2,000부 정도로 비록 발행량이 많지는 않았으나 영향력은 매우 컸다. 특히 한인 주민들에게 그 영향이 컸는데, 『민성보』의 출간으로 일본인 신문 『간도 신보』가 독점했던 용정촌 여론의 동향이 변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민성보』는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막고 안으로는 봉건 세력을 공격하는 것에 편집 방향을 맞추었다. 『민성보』는 투쟁의 예봉을 직접 일본 제국주의와 중국 통치 계급에게 돌리고 압박을 당하고 있는 민중에게 각성과 단합을 촉구하면서, 민족 평등을 주장하고 문화와 인종이 같은 중국인과 한인들에게 환난을 함께 이겨나갈 것을 호소했다. 『민성보』는 한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출병한 일제의 야만적 행위를 적발 및 폭로했고, 일제가 설치한 경찰 조직, 경제계와 문화계 등에서 활동하는 간첩[특무] 활동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며 규탄했다.

한편, 『민성보』가 탄생되던 시기를 전후하여 지방의 중소 민족 공상업은 이미 생기를 띄고 있었다. 용정 한 곳만 하더라도 사영 발전소·제분소·양조소·사탕 공장·제재 공장, 벌목 회사·은행 등이 연이어 세워졌다. 그러나 당시 값싼 일본 상품과 박리다매를 추구하는 일본 담배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민족 공상업은 더이상 발전할 수 없었다. 이에 『민성보』는 "외국 상품을 배척하고 이권을 만회하자!", "관세 장벽을 높이 쌓자!"라고 강력히 설파함과 동시에 세금을 감면 혹은 면제받을 수 있는 좋은 방법들을 건의 제출했다. 그러나 지방 관원들이 자기 이익만 채우고 관세권을 무시하는 바람에 결국 이권이 외국인의 수중에 들어가 버려 그 어떤 방안을 제시해도 무용지물이 될 뿐이었다. 『민성보』는 이러한 암울한 현실을 만화로 묘사했다. 만화의 내용은 닭[중국 상품] 한 마리가 노끈[세금]에 얽매여 있는데 독수리[외국 상품]가 덮쳐들어 닭의 깃털을 쪼아 닭이 죽어가는 형상이었다.

『민성보』가 교육, 문화 생활에 끼친 영향

교육 방면에 있어서 『민성보』는 새로운 학제를 도입할 것과 백화문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연변 지역은 한문(漢文)이라고 불리는 문언문(文言文)을 쓰던 것에서 현대 한어(現代漢語)인 백화문(白話文)을 쓰게 되었고, 지방 정부의 공문, 포고문마저 차츰 백화문으로 쓰게 되었다. 한인에 대해서는 형식에 구애되지 말고 스스로 학교를 꾸릴 것을 제시함으로써 한인이 꾸린 학교가 일본 사람이 꾸린 소학교나 영국, 독일 사람들이 꾸린 교회 학교보다 훨씬 많아지게 되었다. 동시에 신문화·신사상을 전파하기 위하여 『민성보』는 문예, 노동자 원지, 여성, 아동 등 전문란을 설치하여 새로운 격조로 대량의 새로운 작품을 발표했으며, 농업 집단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러시아 농촌을 소개하고 「들끓는 새 로씨야 농촌」, 「철의 흐름」 등 새로운 러시아 작품을 전재하였다. 연변 문단이 활기를 띤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민성보』는 또한 문화 생활면에서도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1930년 봄, 수구파인 장창일과 주광일 등은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제창하고 ‘이풍이속(移風移俗)’을 반대한 반면 화룡현 삼도구 제6 소학교 교장 주소성 등은 공가점(孔家店)을 타도하고 낡은 예교를 반대하며 신문화를 받아 들이고 백화문을 사용할 것을 주창했다. 이들은 『민성보』를 통해 3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논쟁하였는데, 이는 결국 존공파(尊孔派)의 실패로 끝났다. 이 3개월의 필전(筆戰)은 여성들의 단발부터 남녀 합교(男女合敎), 남녀 동학(男女同學), 혼인 자유, 남녀 평등과 여성 참정 등의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켰고 잠잠하던 연변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처럼 『민성보』는 한 자루의 비수가 되어 일제와 낡은 통치 계급을 위협했고, 이들은 『민성보』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면서도 두려워하였다. 일제는 한국어면 총편집자인 윤화수를 위협하며 압박했지만 윤화수는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나갔다.

『민성보』, 역사가 되다

1924년에 시작된 제1차 국공 합작은 1927년 마무리되었고, 『민성보』의 간행에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1929년 1월 손좌민·이별천 등 신문사 내의 공산당원들이 용정을 떠났고, 1930년 말에 이르러서는 『민성보』의 주요 편집진이 공산당원에서 국민당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항일이라는 대의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1930년 말 국민당 우파의 원로인 호한민(胡漢民)이 ‘민성보’라고 신문의 제호를 친필로 쓴 뒤부터 『민성보』는 우파적인 성향을 담기 시작했다. 특히 문예 전문란의 좌파적인 성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민성보』의 창간 주역인 방지함은 직접 편집을 맡고 의연히 일제를 비판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 사변’으로 불리는 ‘9·18 사변’-유조호(柳條湖)만주 철도 폭발 사건-의 발발로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략을 위한 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시작하자 『민성보』는 마침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제가 『민성보』의 주요 지도자들을 갖은 수단을 동원해 탄압했고, 외교에 무능했던 지방의 중화민국 관리들은 끝내 신문사를 보호하지 못했던 것이다.

『민성보』는 곧 '나라를 위해 몸 바친 투사'라고 할 만하다. 다음의 글은 『민성보』의 창간인이자 사장인 관준언이 서명했던 비장한 정간사이다.

"동인들은 엎어진 둥지에 성한 알이 없음을 번연히 알면서도 원쑤들의 온갖 위협과 유인을 물리치면서 몇 달 동안 출판을 견지해왔다. 꺾어질지언정 휘여 들지 않으려는 의지로써 원쑤를 섬기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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