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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어’ 단상
정인갑
김정룡 군의 글 《어설픈 조선족 경어에 대하여》는 조선족 언어생활 중의 문제점을 면바로 진맥한 좋은 글이다. 따라서 필자도 ‘경어’에 대한 단상을 적어본다.
첫째. 우리말에는 경어 외에 ‘경어체(敬語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경어보다 더욱 중요한 특징을 이룬다. 경어는 어휘의 범주에 속하고 경어체는 문법의 범주에 속한다. ‘체’는 문법적으로 체계를 이룬다는 뜻이겠다. 필자는 본문에서 경어의 반대어를 ‘반말’로, 경어체의 반대어를 ‘반말체’로 표현하련다.
‘처먹다’ ‘뒈지다’ ‘꼴까닥하다(죽은다의 뜻)’는 욕이지만 ‘처먹으시요’ ‘처먹으십시오’ ‘뒈지시오’ ‘뒈지십시오’ ‘꼴까닥하시오’ ‘꼴까닥하십시오’는 경어체이다. ‘잡수다’ ‘계시다’는 경어이지만 ‘잡수라’ ‘계시라’는 반말체이다.
漢語에는 경어는 있지만 경어체가 없다. ‘您’(nin, ni+n)은 경어이지 경어체가 아니다. 만약 ‘您’이 반말체 ‘你’에 대응되는 경어체라면 ‘탄(他)’ ‘원(我)’ ‘라우슨 (老師)’…등의 말이 있어야 한다.
《어설픈 조선족 경어에 대하여》중의 ‘-씨’ ‘-분’ ‘-님’ ‘저’는 경어이고 (그중 ‘저’는 自謙語) ‘하시다’ ‘-요’는 경어체이다. ‘-요’는 함경도 방언에서는 반말체로 취급하지만 기타 지역 방언에서는 ‘半경어체’이다. 김정룡 군의 ‘-요’에 대한 서술에는 약간 미비한 점이 있다고 본다.
둘째. ‘-시다’는 특수한 경어체이다. 다른 경어체는 듣는 사람을 존경하기 위해서이고 ‘-시다’는 행위자를 존경하기 위해서이다. ‘제가 지금 신문사에 찾아가시려고 하는데’에서 ‘찾아가는 사람’이 행위자 즉 말하는 사람이므로 ‘가시다’로 자기를 존경하면 분명 어폐이다. 필자는 ‘-시다’와 같은 체를 ‘행위자경어체’ 또는 ‘주체경어체’라고 부른다.
‘-시다’에서 존경을 표시하는 형태소는 ‘시’인 듯 하지만 ‘아뢰사돼…’ ‘했수다(평안도 방언)’ 등에서 보다시피 ‘사’ ‘수’로도 표현할 수도 있으므로 ‘시’가 아니라 형태소(語素) ‘ㅅ’로 보아야 한다.
셋째. 지구촌에서 경어체가 있는 언어는 극히 적다. 적어도 漢藏어계, 印歐어계의 수백종 언어에는 없다. 필자가 모든 알타이어계의 언어를 체크해 보지는 못했지만, 조선어, 일본어를 제외한 다른 알타이어계 언어에는 경어체가 없다. 그러면 우리말의 경어체는 분명 후세에 새로 생긴 듯 하다.
우리말에 경어체가 있어 자오감을 느끼고 있지만 필자는 생각을 달리 한다. 다른 언어들은 경어체가 없다 하여 추호의 결여감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말의 경어체는 오히려 많은 불편과 폐단을 일으킨다.
아르젠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리레스에는 약 200명의 화교가 살고 있지만(1978년) 다 한어를 잘한다. 그러나 북경에는 6만명 이상의 조선족이 살고 있지만(외 한국인 6만명) 2세만 되면 조선말을 모른다.
무엇 때문인가? 주요 원인의 하나가 경어체 때문이다. 손님이 왔다가 떠날 때 자식이 “또 놀러 오라!” 하면 부모는 “이놈 자식, ‘또 놀러 오세요’ 하여야지!” 라며 핀잔준다. 다음 기회에 “또 놀러 오세요” 하면 “이놈자식, ‘또 놀러 오십시오’ 하여야지(이번에 온 손님은 전번보다 더 연로한 분)” 라며 또 핀잔준다. 이렇게 둬번 당하고 나면 자식들은 아예 입을 다물고 조선말을 외면하게 된다.
그러니 조선말을 못할 수밖에 없다. 필자의 집안에서도 이런 일이 자주 생기곤 하였다. 한어는 한마디 알면 한마디를 써먹을 수 있지만 우리말은 다 알아야 한마디를 써먹을 수 있다. 경어체가 주요 원인이다. 경어체가 없는 언어에서는 이런 폐단이 없다. 필자는 우리말에 경어체가 제발 없었으면 한다. 경어체가 없던데로부터 생겨난 것이라면 다시 없어지지 못 한다는 법은 없다.
한국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젊은 일대들이 경어체를 써야 할 곳에 반말체를 쓰는 현상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인터넷에 의한 교류가 일사천리로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 혹시 그에 힘입어 우리말의 경어체가 없어질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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