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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학규 소설

석노인의 전설
2014년 08월 31일 21시 43분  조회:832  추천:0  작성자: 비전

단편소설

석노인의 전설

            
장학규


1,
“경옥식당”이란 간판이 클로즈업되어 한눈에 들어온다. 사자구(沙子口)에도 이런 식당이 있을 줄 꿈에도 생각지 못한다.
출입문은 미닫이 형식으로 되어있다. 독특한 디자인이란 생각이 든다. 현호는 이젠 기억에도 까맣게 사라지고 있는 한옥을 어슴프레 떠올리며 집안에 들어선다.
미닫이 출입문과 걸맞게 집안도 봉당이 아닌 구들이다. 낮다란 네모 밥상 여섯개가 셋씩 두줄로 가지런히 놓여있다. 한창 때시걱인데도 밥 먹는 손님은 하나도 없다.
현호는 텅빈 주머니를 괜스레 손빗질하며 허영허영 신을 벗는다. 연료가 다 떨어진 엔진같다는 생각이 든다. 방전된 배터리같다고나 할까?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 명자가 다리를 꼬고 앉아있다. 전보다 늙은 건 확실한데 이상하게 더 섹시해진 모습이다. 무엇보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예쁜 비행기 그림이 그려진 T가 눈길을 끈다. 자기도 모르게 눈길을 그곳에 꼿으면서 묘하게 허영이 엿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섹시하고 즐겁게 늙으라는게 요즘 유행어라면서…”
조심스러우면서도 현호는 특유의 장난기를 고집한다.
“왜 비행기가 욕심난거냐?”
“아니, 비행기보다는 비행장이 더 인기 끌지.”
“흐흐, 그건 벌써 폭격 맞을대로 맞은 비행장이야!”
“지금 시설로 미루어 그럭저럭 재폭격해도 괜찮을 거 같다. “
“아직도 요격시스템이 작동하고 있거든. 구식 비행기가 다가오면 도리어 격추당할 수도 있어.”
“요격이 두려워 꼬리 감추면 전투기가 아니지 흐흐.”
“그러구보니 아직 덜 혼난 거 같구나.”
명자는 독설을 퍼부으면서도 환하게 웃는다. “설비”가 아직 쓸만하다는 평가에 대한 만족감때문일까 그녀의 웃음은 추호의 꾸밈도 없는 자연산 그대로이다.
그 맴시있는 웃음은 요리를 주문하고 쉴 새 없이 완샷을 하고 식대를 지불할 때까지 이어진다. 지어는 아내의 행방을 묻는 현호의 물음에 “모른다.”로 일관하면서까지 자연산을 입가에 걸고 있다. 역시  대단한 여자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현호는 오랜만에 명자 덕분에 배 불리 먹으면서도 기분 더럽게 먹었다는 생각뿐이다. 오늘 맛 다 버린 거다.

2,
바다가 사납게 요동친다.
청도의 명물 석노인은 수천 수만년간 파도의 부대낌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바다에 서있다. 용왕에게 잡혀간 딸을 애타게 기다리며 마냥 수심에 잠긴 모습이다.
소피아호텔은 석노인에 의해 유명하다. 탁 트인 시야는 바다를 한눈에 아우른다. 그 앞을 구불하게 뻗어간 동해로는 여느 거리와 달리 퇴근 물결은 없다. 고급스럽거나 섹시한 차림을 한 신사숙녀들이 혹은 관광을, 혹은 향락을 즐기려고 그 거리를 오간다.
지하에 위치한 나이트클럽은 아직 초저녁이지만 제법 손님들이 북적인다.
명자는 칵테일잔을 든채로 지배인실에 내려진 카텐 사이로 홀을 내다본다.
“그래 어쩔 타산이더니?”
현정이는 여전히 무관심인듯 쏘파에 몸을 깊숙히 파묻고 실없이 묻는다. 가슴 라인이 그대로 훤히 드러나게 윗 양복 단추를 풀어놓고 있다. 불현듯 현호가 떠올라 명자는 피씩 소리내며 웃는다.
“왜?”
“걔가 내 이 가슴 아직 쓸만 하다고 글더라마.”
“그 인간 꺼내들면 연장이야. 착각하기는.”
“그래도 이만하면 나도 유통기한내에 들 수 있지 않을까?”
“싸가지가 바가지네.”
“도대체 누굴 욕하는 거니? 나를?”
“번짓수 다른 소리 고만해! 나 지금 요상한 쇼를 구경할 여유가 없거든.”
연분홍 내의에 꽉 조인 현정의 불룩한 가슴을 내려다보면서 명자는 자기라도 이런 여자는 박차지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환장을 한거지.
“니 뜻 충분히 전달했어. 그런데…”
“그런데?”
“아무래도 집에 돌아갈 생각이 아니더라. 취직할 생각 갖고 있어. 어느 여행사인가 면접간다구 하더라.”
“엉? 어느 여행사?”
“말하지 않더군. 그나 저나 너한테 집념이 아주 강해요. 어쩌면 아직도 순결하다고 할까.”
“순결이 뭐 훈장이냐?! 아무데나 얹어주게.”
잠간 침묵이 흐른다. 현정이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진다. 그러는 현정을 명자는 낯선듯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이다.
“여행사라? 으흠!”
중얼거림이라기에는 너무 무거운 혼잣말이 지배인실에 오래 메아리된다.

3
“꼬끼오! 꼬끼오! 꼬…”
닭울음소리가 멀찌감치에서도 들을상 싶게 높다.
현호는 손을 뻗어 신고스레 부르르 떨며 아침을 알리는 핸드폰을 더듬어 쥐다가 불시에 벌떡 일어선다.
셋집이다. 노산자락에 자리잡고 바다를 내다보고 있으면서도 아직은 청도에서 인기가 별로 없는 사자구의 구석 동네다. 산동사람들 집답게 벽 여기저기에 누기가 들어 떨어져나간 싸구려 집이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이 집에서 산지도 벌써 한달이 되어온다.
어제는 꽤나 취했던 거 같다. 어쩌면 취한 것처럼 가장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명자가 술값 지불하던 장면이 가물거리며 떠오른다. 그리고 어떻게 헤어졌는지 모른다. 곱 없는 배가 알콜의 충동질을 받고 뇌를 급습했던게 분명했다.
옷을 주섬주섬 주어입으며 핸드폰을 켠다. 오전 10시에 여행사 면접을 보기로 약정되어 있다. 이제 집에 돌아갈 면목은 없다. 13억 인민 모두 그가 망하기를 바라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대로 청도에 눌러 사는 거다.
읽지 않은 메시지 하나가 있다. 명자가 엊저녁 느즈막에 보낸 것이다. 은행구좌를 알려달라는 것이다. 일단 전화를 건다.
“저녁에 만나자.”
“또 밥 사달라니?”
비위 상하는 억양은 아니라도 약간 실웃음이 흘려나오는 어조다.
“네 그릇 수준은 사발이냐? 맘 쓰는게 왜 종재기 같아.”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제 본질 나오네..”
“버릇 하나 잘못 배웠구나. 저녁에 만나자. 너한테 과외를 해줘야겠다.”
현호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신을 궤찬다.
“과외 사절이다. 구좌나 때려넣으라마.”
“나 어제 돈 달랬더니? 하긴 주머니 빈 건 사실이지만…”
“적반하장에 후안무치구나. 차비 줄테니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조선족 출판업계는 니가 필요하잖아!”
“똑똑히 전달해. 내 현정이랑은 천생연분에 보리개떡이라구 절대 갈라서지 않아. “
“걔 가슴은 이미 식을대로 식어 유통기한 다 지났단 말이야.”
“지금 유통기한 안 넘기는 물건 몇개 있어? 슈퍼에 가봐!”
“훗훗, 페기처분은 니가 한 거잖아?”
“페기처분은 왜? 아직 삐까번쩍 생생한데…”
전화 저쪽에서 나이에 걸맞지 않게 깔깔깔 숨 넘어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저 기집은 요사해서 탈이야. 현호는 머리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래도 명자와 얘기할 때면 기분 하나는 죽여주게 좋은 것만은 사실이다.

4,
그들은 대학 동기동창이다. 명자와 아내 현정이는 더구나 소굽 친구다.
남자는 천생적으로 애교에 약하다. 그래서 현호는 하마트면 명자와 먼저 연분이 이어질 번 한다.
쪽지는 분명 명자의 침대에 놓았다. 그런데 약속장소에 나타난 것은 현정이다. 음차양차였지만 솔직히 싫지 않다. 어쩜 현정이는 접근하기 두려웠던 존재이다.
“왜 불렀어?”
“나하구 사귀자.”
현정의 도고한 기세에 오기가 솟구친다. 무작정 다가가 야들야들한 손목을 거머잡는다. 어긋난 김에 계속 틀리자 그거다.
“뭐야? 이 손 놔!”
“연애하자구 했잖아!”
“두꺼비가 요행 접시에 뛰어들었다고 고기덩이인줄로 아나봐.”
“너 버르장머리 밥 말아 먹었구나.히히.”
“헤식다. 번데기앞에서 주름잡는 격이지만 거 웃음소리 정말 소름 끼친다.”
“뛰어봤자 벼룩이야.”
“너한테는 멸치 똥만큼도 관심이 없다니깐.”
“얘, 그러지 말고 정식으로 한번 가보자.”
현정이는 킥 웃으며 막무가내라는 듯 더 깊은 수림속으로 걸음을 옮긴다.
결혼후 현호는 현정에게 번지수가 잘못 매겨졌음을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그래서 명자와 현정이 침대를 바꾸어 잔지도 한주일이 넘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 둘 이름에 모두 ‘현’자가 들었잖아. 천생연분이야.”
“그게 같은 글일세 말이지.”
현정의 명자에 대한  방어는 그때로부터 시작된다.
현정이는 명자네는 어머니대부터 여우같이 간사스러웠다고 말한다. 그 집 여자들은 대개 그렇다고 한다. 엄마도 주변에 염문이 그칠새 없었고 언니는 병든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어딘가 도망치기도 했다고 한다.
다행히 명자는 청도외자유치국으로 조동하는 남편을 따라 떠났다. 그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함께 민족출판사에 배치받은지 2년만의 일이다.

5,
“행복이란 마음속으로 생각해낸 것이지요.”
면접도 별난 게 다 있구나 생각하면서 현호는 내키는대로 말한다.
여인은 퍽 재미난 대답이란 듯 빙그레 웃는다.
“행복도 생각해낼 수 있어요?”
“그럼요. 로또에 당첨되고도 돈 비락질 올 사람들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오면 행복할 수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생각하기 나름이라 그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네, 참 신선한 대답입니다. 그럼 나쁜 일도 좋게 생각할 수 있을가요?”
“차사고로 다리 한짝 잃었습니다. 아, 난 앞으로 어떻게 살지? 이 모양 갖고…이런 생각하면 세상이 곧 끝장나겠죠. 근데 다리 한짝 남은 게 얼마 다행이냐고 생각하면 살 용기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현호는 자기 처지가 그런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그건 좀 궤변 같아요. 적어도 성실한 대답은 아닙니다.”
“사람 마음이 성실이란 단어에 목 맬 일 없잖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좀 높았던지 우뚤 놀라면서 이쪽으로 건너다보는 얼굴들이 한눈에 보인다. 놀라기는 현호도 마찬가지다. 흥분을 잘하지 않는 타입인데 자기도 모르게 고담준론이 나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여인은 계속 웃는 얼굴이다.
“저희들 일이요. 그러니까 한번 나간다 하면 2박 3일 정도는 기본이예요.”
“저도 기본 정도는 챙기고 있습니다.”
“흐흐, 그러면 기본은 회사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네요.”
비슷한 나이의 여사장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선 현호는 곧바로 나무그늘밑을 찾아 명자한테 메시지를 발송한다. 공상은행….

6
현정이는  출입문을 등지고 눈을 지그시 감는다.
찰칵 하는 아주 단순한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절대 실수 없이 정확하게 문 따는 소리다.
이 콘도에 들어서 유일하게 현정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일이다.
언젠가 사람이 없을 때 궁금증을 참다 못해 직접 시험해보기도 한다. 신경을 한껏 도사리는데도 키가 정확히 꽂혀지지 않는다. 바느실 꿰듯 한쪽 눈을 지그시 감으며 키를 들이밀어도 아래위 아니면 좌우로 허우적대기가 태반이다.
그러나 강사장은 매양 한번으로 매끈하게 문을 딴다. 그의 모든 언행도 로봇처럼 추호의 오차도 없다. 그래서인지 차가움이 느껴진다.
소리없이 어깨에 손이 얹혀진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손이다. 큼직한 금반지가 반짝인다.
현정이는 미동도 않는다. 언제처럼 바삐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듯 숨소리마저 조용하다.
“오늘 컨디션이 별로인 모양이군.”
현정이는 여전히 무표정하다. 눈앞에는 현호의 흐트러진 움직임이 하느작거린다.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차분하게 설명 좀 해봐.”
“차분이라니요? 억수로 현학스레 말씀하시느라 수고 많네요.”
“어허, 이건 무슨 옥황상제 똥구녕 뚜지는 소리여? 문제 생겼으면 해결하는 게 첫 순서인데 화낸다고 되는 거야?”
뼈가 들어간 말이다. 하회는 말치 않아도 예고할 수 있다. 온 하루 앉혀놓고 과거 현재 미래를 깐깐히 엮어서 얘기한다. 아, 지겨워. 현정은 몸을 일으키면서 자연스레 강사장의 손을 털어낸다.
“개념 드시고 사는 냉정한 분들은 화가 뭔지 모르시죠?!”
“더위 먹었어? 아님 가을 타는 거야?”
“한번 제대로 미쳤다 그거죠? 그러니까 돌아가시죠.”
품격 만땅인 강사장은 이럴 때면 절대 뒷일이 따로 없다. 현정은 느릿느릿 냉장고에 다가가 캔맥주 하나 따서 쭉 들이키고는 유유작작하게 강사장앞을 지나 침실로 들어간다. 침대머리에서 한바퀴 빙 돌면서 잠옷을 풀어낸다. 실 한오리 걸치지 않은 30대 후반의 싱싱한 알몸이다.
“찰칵”
출입문이 밖에서 닫히는 가벼운 마찰음이 육감으로 전해온다. 현정의 입가에 실웃음이 흐른다.

7
(흥! 어디 한번 드라마 연출해보시지.)
현정이는 문소리가 나기 바쁘게 침대에서 뛰어 일어나 검은색 스프링코드를 걸쳐 입는다. 옷장에서 속절없이 몇년 묵은 옷이다. 선글라스도 꺼내들었다가 어쩐지 너무 요란하다는 느낌에 그대로 침대에 던져버린다.
(비 오는 날 먼지 좀 나겠지.)
익숙한 뒷그림자를 멀찌감치에서 따른다. 액션영화맨이어서인지 쉽게 캐릭터에 진입한다. 전혀 서먹하거나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없다. 앞서서 두리번 거리는 꼬라지가 꼭 죄지은 넘이다. 그래서 사람은 나쁜 일 하지 말라 한거다.
(날아봐야 여래불 손아귀에 든 손오공이지 흥!)
서로 독립된 개체라도 10년을 부딪치면 텔레파시란 게 있다. 눈길로도, 냄새로도, 몸놀림으로도 알만큼 알린다. 지가 새침 떼고 내숭 떨어봤자다.
그러다가 정말이면 어쩌나 속이 졸여온다. 의심이 현실로 펼쳐지면 쪽 팔려 어떻게 살까 싶다.
(에라이 내가 쪽이나 있어야 팔리지.)
총총하니 어느 레스토랑으로 들어간다. 많이 급했던 모양이다. 하긴 안되는 거짓을 꾸밀려니 세월을  좀 소모했겠지 싶다. 부부가 같은 직장에 있으면 선의의 거짓말도 못하게 되어있다. 쉽게 오해하고 많이 눈치 보이고 또 그만큼 서로 불편하다. 그래서 어느 일방이 다른 직장으로 옮기자는 토론도 가끔 한다. 현정이가 떠났으면 하는 바램이 온 얼굴에 덮혀있다. 여자를 움직이려는 속셈에 약간 원망스럽다. 거기서 티가 난건가?
(눈밭에 꿩이야. 머리 틀어박아봤자지. 치부가 다 드러났는데.)
거짓말같이 레스토랑에서는 현정이가 짜놓은 시나라오가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손을 잡은 채로 와인잔을 부딪치던 두 남녀는 현정이의 돌연적인 출현에 조각같이 굳어진다.
(길위의 똥이라도 모두 쇠똥인 건 아닌데 하필이면…)
현정이는 심한 구토를 느끼며 발작 한번 못하고 돌아나온다.
이틑날부터 현호의 발뺌소리가 귓가에 앵앵거린다. 난 주간인데 넌 월간이잖아. 그 월간도 발행이 제대로 되지 않아 쩍하면 격월간이 된단 말이야. 참을 수 있어야 말이지. 남자 그거 참으면 죽는 수도 있어. 어떻게든 버려야 돼. 물 건너다 바지 젖은 셈 치자.
(개 풀 뜯어 먹다가 기침하는 소리 작작 하라구.)
그런 애원이 귀에 들어갈 리 없다.
어느날 현정이는 남편 몰래 사직하고 사라진다.

8
“왜 하필이면 이 곳이지?”
명자는 돈봉투를 집어 주머니에 넣고 입에 술잔을 갖다댄다. 양주병 하나가 벌써 굽나있다.
“사냥개처럼 무슨 냄새 맡은 건 아니니?”
그래도 명자는 시무룩이 웃기만 한다. 벌써 현호와 여러번 이 동네에 와서 술을 마신다. 현정이가 신경이 날카로와질만도 하다. 명자는 묻는 말에는 대답 않고 쏘파에 비스듬히 기댄채 현정에게 되묻는다.
“근데 강사장하구는 어떻게 된거니?”
“사람 물색하는가 보던데…”
“내 우리 여보보구 한방 날리라 할까?”
“관둬. 강사장도 어지간히 속이 저려있을 거야.”
“너 지금 사돈 남 말하둣 하구나.”
“안 그러면 어쩔건데? 어차피 모두 착각이잖아.”
강사장을 겪으면서 현정은 남편 현호를 이해할 듯도 싶다. 사랑이란 게 어쩌면  착각일 수도 있다.
청도에 와서 첫 반년은 정신 없이 일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점점 외롭고 쓸쓸하다. 마담으로 손님들한테 불리워가서 술 한잔 나누며 자연스레 오가는 짓궂은 장난에 저도모르게 짜릿할 때가 한두번 아니다. 동물적인 본능으로 타매 불가능이다. 사랑 없이도 섹스가 즐겁다는 걸 뒤늦게 안 자신이 바보스럽다. 그리고 섹스가 사랑을 키워준다는 사실도 알아버린다. 강사장과는 그런 이유로 가까이 다가선지 불과 한달이다. 이젠 정리가 눈앞이다.
“그러면 넌 어쩔 타산이냐?”
“지금 장소를 알아보는 중이야. 이젠 독립할 때도 되었잖아?”
“현호는 어떻게 처리할거니?”
“걱정 붙들어매라마. 때가 되면 감이 떨어지겠지.”
“재밋다. 내 물 버리고 인차 오마. 귀도 씻고 올거야 히히.”
명자는 요란하게 엉덩이를 꼬며 달려나간다.

9,
여기는 “석노인”을 떠나서 얘기가 되지 않는다.
바다속에 우뚝 솟은 돌바위에는 석노인의 전설이 슴배어 있다. 그 해안을 따라 길고 평퍼짐한 석노인해수욕장이 펼쳐져 있다. 뒤로 노산기슭을 타고 오르는 산언덕은 석노인관광원이다. 그 가운데는 새로이 석노인골프장이 자리하고 있다.
“저 돌이 용왕에게 딸을 빼앗긴 할아버지가 굳어진 거라면서?”
“여행사에 있는 사람이 더 잘 알잖아.”
그들 부부는 아직도 해라로 통한다.
“난 꼭 나자신 같은 생각이 들어. 아내 찾으러 왔다가 굳어지는…”
현호는 칙칙한 모래불에 그대로 누워버린다. 사내답지 않게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현정이한테 그게 발각된 것이 많이 체면이 깎인 듯 실없이 두덜댄다.
“아, 별 싸가지 없는 것이 다 기어나오고 야단이네.”
현정이는 시무룩이 웃는다.
“나 거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여행사잖아. 유흥업소와 쇼핑점은 필수과목이짐.”
“그래서 명자랑 들락거리면 내가 나타나리라 짐작한거야?”
“옛날부터 식초 잘 드셨잖아.”
“점입가경이군. 니 똥 굵다 히히.”
“글지 말고 우리 여기서 애 하나 더 낳고 잘 살자마.”
“애기가 뭐 자판기에서 마음대로 뽑아내는 커피인감?”
그러면서도 현정이는 행복감에 정신이 아찔해나고 몸이 부르르 떨린다.
“이젠 물러설 자리도 없는 처지인데 어떻게 할 참이야?”
“사장님이 나더러 청도지역을 도맡으라구 그래. 상해에다 새로 여행사 세우고 그쪽으로 갈 생각인가 봐. 난 노임보다는 지분을 갖는 쪽을 택했어. 젊었을 때 모험 해보는 것도 괜찮겠지.”
“잘했어!”
“명자한테 다 들었어. 장소는 찾은 거야?”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참.”
맑은 하늘처럼 현정의 얼굴도 구름 한점없이 펴져있다.

10,
시원스레 뻗어나간 해변도로로 현대차 한대가 달린다.
내려진 차창으로 핸들을 잡은 현호의 모습이 보인다. 전보다 얼굴이 많이 검붉다.
옆좌석에는 금방 고향에서 데려온 열살난 딸애가 앉아 쉴새없이 재잘거린다. 처음 보는 바다가 신기한 듯 시도 때도 없이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손을 내밀고 한다.
그러는 딸애가 걱정인 듯 뒷좌석에 앉은 현정이는 가끔 충고를 준다.
“얘, 글지마. 위험하다니까!”
그녀의 품에는 태어난지 두달 남짓한 아들애가 안겨있다.
정말로 자판기에서 뽑아내 듯 아들애가 생각보다 쉽게 나온 것이다. 현호와 재회해서 두달 좀 넘어 생겨난 늦둥이이다.
현호는 요즘 엄청 바쁘다. 아내가 임신하면서 현호는 아내 장사까지 겸해 돌보다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요행 찾아온 추석 연휴로 모처럼 한가정이 뜻깊은 석노인 관광을 나선 것이지만 현호는 집에 돌아가서 당할 일이 그저 무섭기만 하다.
“벌써 한달이 되어오네. 정말 이럴 거야?”
현정이 매달려도 현호는 심드렁하기만 하다. 이젠 현호가 월간이 되고 현정이가 주간으로 돌아온 셈이다.
하느님 맙소서.
저 멀리로 바다에 발을 담근 석노인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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