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항미원조 유가족의 눈물겨운 마지막 소원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5월30일 10시09분    조회:179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오빠들 유해라도 보고 죽었으면 한이 없겠는데…》

항미원조전쟁 유가족 김필련할머니의 눈물겨운 마지막 소원

김필련할머니가 본사 편집부에 보내온 편지

최근 돈화시에 살고있는 할머니 한분이 항미원조전쟁터에서 희생된 오빠들이 너무 보고싶다면서 본사 편집부에 만장같은 편지를 써보내왔다. 할머니가 신문사에 편지를 쓰게 되였던것은 지난 3월말 한국정부가 중국인민지원군유해를 중국에 송환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행여 전쟁터에서 사망한 오빠들의 유해라도 찾을수 있지 않을가 하는 일루의 희망을 품었기때문이다.

할머니의 성함은 김필련(77세), 돈화시 홍석향 림강동촌에서 큰아들내외와 함께 살고 계셨다. 5월 28일, 기자는 돈화에 가서 할머니를 수소문해 찾아 장장 50여년 세월이나 전쟁터에 나간 오빠들에 대한 안타까운 기다림에 지쳐버린 김할머니의 가슴아픈 이야기들을 들을수 있었다.

오빠들 모두 참전용사, 2명은 항미원조 렬사

할머니가 살고계시는 돈화시 홍석향 림강촌은 돈화시에서 조선족이 가장 많이 집거해 살고있는 조선족 마을이다. 중국조선족젊은이들이 국내해방전쟁은 물론 련이은 항미원조전쟁에까지 용약 참가해 피끓는 젊음을 희생했던것은 력사가 기록하고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김필련할머니는 도합 6남매인데 우로 오빠 셋과 언니, 그리고 동생이 있었다. 오빠들 셋은 모두 국내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한 유공자들이다. 김필련할머니의 부모님은 모두 장질부사로 일찍 사망했고 집에는 년로한 할아버지 한분이 계셨는데 언니와 김필련할머니 그리고 동생은 아직 10대 나이의 어린이들이였다.

당시 오빠들은 두살 터울로 스무살내외의 청년들이였는데 세 오빠 모두 참군하여 국내전쟁은 물론 항미원조전쟁터에까지 나가 피흘리며 싸웠다. 큰오빠 김순학은 참군하여 국내해방전쟁에 참가했다가 1950년 10월에 또 항미원조전쟁에까지 참가했는데 항미원조전쟁이 끝난후 다행히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둘째오빠 김성학과 셋째오빠 김명학은 전쟁터에서 희생되여 다시는 영영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김필련할머니는 지금도 15살되던 해인 1952년도에 마을에서 열었던 셋째오빠 김명학의 추도회를 생생히 기억하고있다. 오빠들중 셋째오빠의 희생소식이 가장 일찍 전해져온것이였다. 셋째오빠와 한 부대에 있다가 항미원조전쟁이 끝난후 돌아온 이웃마을의 청년이 집에 찾아와 셋째오빠의 희생소식을 알려주었다. 말로는 당시 셋째오빠 김명학은 부대의 련락원으로 있었는데 련락임무를 받고 부대를 떠났다가 미처 부대의 후퇴명령을 받지 못한채 철거하지 못하고 락동강전투에서 희생되였다고 한다. 둘째오빠 김성학도 1953년도에 부산에서 사망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당시 락동강전투에서 희생된 지원군렬사들의 유해를 부산에 옮겨갔다고 전갈이 와서 찾아가면 유해를 찾을수도 있었다고 하는데 집에는 아직 어린 동생들뿐이여서 오빠들의 유해를 수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오빠들은 전쟁터에서 사망하여 외로운 무주고혼이 되여 장장 50여년 세월을 나이 어린 동생들의 마음속에 가슴아픈 한으로 남게 되였던것이다.

오빠들의 빈자리, 서럽고 아팠던 성장이야기

오빠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가 렬사로 유명을 달리한 김필련할머니의 가정은 그야말로 힘든 나날의 련속이였다. 설상가상으로 유일한 할아버지마저 일하다가 쑥대에 발을 찔리워 그 상처가 곪고 썩으면서 앓다가 사망하다보니 집살림은 당시 겨우 10살밖에 안되는 큰언니가 도맡아했다. 아래로는 아직 세살밖에 안되여 배고프다고 어머니젖을 매일 울면서 찾아헤매는 남동생이 있어 어린 고아들의 기구한 생활은 이루 말할수 없이 어려웠다. 고아들의 어려움을 알고 구정부에서 큰오빠를 군대에서 집으로 보내 보살펴주도록 했다. 그런데 1950년 10월에 큰오빠마저 또 지원군으로 조선전쟁터에 나갈줄이야. 다행히 큰오빠 김순학은 항미원조전쟁이 끝난후 무사히 돌아왔지만 집에 있는 나어린 고아들의 겪은 인생의 고초는 헤아릴수조차 없이 크고 무거웠다.

지원군유해송환소식이 실린 신문을 보면서 희망을 가지게 되였다는 김필련할머니 

김필련할머니와 두살 터울인 언니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는데 겨울이 되여 빙상대회가 있으면 연길이며 장춘에 가서 운동대회에 참가하여 상도 받아오군 했다. 그때 돈화에는 고중이 없어서 언니는 통화고중에 붙었는데 돈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는수 밖에 없었다. 김필련할머니 역시 그 이듬해 서란고중에 붙어 한학기 공부하고 방학에 집에 왔다가 새학기가 되여 서란으로 가는 차비 3원이 없어서 결국 공부를 그만둘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학교다닐 때 김필련할머니는 고아렬군속이라고 정부의 보조로 언니는 1등공비 8원 50전을 받았고 김필련할머니는 3등공비 6원 50전씩 받아 공부를 했다고 한다.

매달 식비 6원을 내면 남는 50전으로는 얼음과자 하나 사먹을수 없고 연필 한대 제대로 사서 쓸수 없는 어려운 생활을 했다. 남들이 쓰고 버린 꽁다리연필을 주어 그것을 쑥대에 꽂고 공부했다고 한다. 못 먹고 못 입는 가난한 살림을 하면서 어렵게 자란 과거를 추억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며 할머니는 눈굽을 찍었다.

오빠들의 진토가 된 유해라도 보고 눈 감는것이 소원

지난 4월에 한국으로부터 중국에 귀환된 중국지원군유해소식을 신문을 통해 본후 김필련할머니에게는 한가지 간절한 소원이 생겼다. 바로 죽기전에라도 오빠들의 진토가 되여버린 유해일지라도 한번 보고 눈을 감았으면 한이 없겠다는 소박한 소원이였다.

가난했던 살림에 사진 한장 남기지 못한 오빠들이여서 김필련할머니의 기억속에있는 오빠들은 스무살미만의 젊은 모습 그대로이다. 셋째오빠는 마을에서 싸움도 잘했다면서 김할머니는 오빠를 추억했다. 장질부사로 앓아서 몸이 몹시 여위였지만 강기가 있고 누구한테 지지 않는 강인한 성격이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전쟁놀이를 무척 좋아해서 옆마을의 큰 부락 애들도 모두 범접 못하고 두려워할 정도로 완력이 있었고 군대에 나가는것을 그렇게도 원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참군할 때 셋째오빠는 병으로 앓다보니 무게가 표준에 못미쳐서 3번이나 시험에서 미끌어졌는데 나중에 바지가랭이에 모래를 채우고 몸무게를 늘여서야 간신히 부대에 가게 되였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둘째오빠도 2번이나 징병모집시험에 떨어졌지만 군대 가길 너무 원해서 결국 군대에 참군했다고 말했다.

마음이 따뜻하고 다감했던 셋째오빠가 아직 어린 녀동생들의 머리를 깎아주군 하던 일을 김할머니는 지금도 어제일처럼 기억하고있었다. 《내 몸에 부스럼이 있어서 옮는다고 언니 먼저 머리를 깎아주어 내가 서러워 울기도 했다》고 말하면서 김할머니는 소녀처럼 웃어보였다.

그러나 김할머니 기억속의 다정다감했던 오빠들은 이젠 백골이 진토되여 어느 낯선 땅에 이름없이 누워있겠지만 오빠들이 흙이 된들 어떠라, 오빠들의 유해라도 직접 어루만져보고싶은 할머니의 친인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히 절절했다.

《지금 있으면 둘째오빠는 87세, 셋째오빠는 85세이지요.》 김할머니는 오빠들 생각이 나기만 하면 마을에 세워져있는 렬사기념비를 찾아간다. 거기에는 오빠들의 이름이 새겨져있기때문이다. 렬사비에 가면 오빠들 이름에 묻은 먼지들을 닦아내면서 오빠들과 대화라도 하듯 불러본다.

《성학이 오빠~ 명학이 오빠~ 》

오빠들이 보고싶을 때마다 마을의 렬사기념비를 찾군 한다는 할머니

지난 2011년도에 한국 인천에서 살고있는 딸네 집에 갔다가 김필련할머니는 딸에게 한번 부산에 가서 무작정 오빠들의 유해라도 찾아볼 생각을 터놓았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무작정 부산 어디에 가서 오빠들의 유해를 찾을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의 생각을 리해하지 못하는것은 아니지만 사전계획이나 조사가 없이 무작정 유해를 찾아나서는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판단해 딸이 굳이 만류했고 결국 김할머니는 한국에서 아쉽게 돌아올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중국지원군의 유해가 중국에 돌아온후 심양에 있는 지원군렬사릉원에 안치된다고 하던데 우리 오빠들의 유해도 어서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김필련할머니는 간절히 기대하고있었다. 언젠가 손꼽아 기다리던 오빠들의 유해가 돌아오면 훈춘에 살고있는 언니와 함께 지팽이걸음을 걷더라도 꼭 심양까지 가서 오빠들을 만나보고싶다고 김할머니는 말했다.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 항미원조전쟁관에서 집계한 조선전쟁가운데서의 중국지원군 사망자수는 18만 3108명이다. 한국의 《중앙일보》는 해외에 매장된 중국군인유해가 11만 5217구인데 그중 11만 4000여구는 조선반도에 분산되여 매장되여있다고 보도했다.

지원군렬사들이 조선전쟁터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수천수만 가족들의 가슴속에 아픈 그리움으로 못박힌지 어언 50여년 세월, 세월이 흐를수록 지원군렬사들을 절실히 가슴에 묻고 살아왔던 렬사유가족들도 점점 줄어들고있는 실정이다.

 

김필련할머니에겐 오빠들에 대한 기다림이 유일한 바람으로 남아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동구밖까지 배웅하면서 남긴 김할머니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는다.

《내 죽기전에 흙이 되여버린 오빠들의 모습이라도 내 눈으로 확인하고 보았으면 죽어도 눈을 감을텐데…》

6남매들중 이제 남아있는것은 근 80세 고령의 언니와 김할머니 둘뿐, 그만큼 김할머니 가족처럼 마음 깊이 그리움을 아픔으로 간직한 유가족들의 눈물이 진정 영원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해본다.

길림신문 안상근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한국 속 작은 중국 “장사하고 싶어도 상가가 없다” 대림2동에 중국인들이 몰려들면서 상권이 활성화되고 있다. 사진은 대림2동 도깨비시장 거리. 아주경제 김현철·권경렬·노경조 기자 = "대림2동 상권은 경기를 타지 않습니다. 권리금이 치솟아도 상가를 넘기지 않는 이유는 이 권리금으로 다른...
  • 2013-12-11
  • 한평생 농사군으로 황소처럼 일하며 자식들을 위해 살아오신 아버지 박두현. 《세월이 류수》라더니 아버지께서 저 세상에 가신지도 어느덧 30여년이 흘렀습니다. 아버지, 셋째딸 동선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그날부터 이 딸은 종래로 아버지를 잊은적 없습니다. 세월이 좋아질수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애절하게 가...
  • 2013-12-09
  •   (흑룡강신문=서울) 나춘봉 특약기자 = “이젠 엄마도 힘들고, 돈도 없으니 수술을 포기하겠어요.”   세 번째 골수이식수술을 거부하는 딸애의 말에 중국 동포 박경옥씨는 억장이 무너졌다. 그 동안 딸이 병마와 싸우며 얼마나 많은 고통의 시간을 이겨냈고, 삶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누구보...
  • 2013-12-05
  • 4년간 주덕해주장의 경호원을 지낸적 있는 곽해선(郭海善, 80세)옹은 쉽게 자기 경력을 내비치지 않는 특이한 사람이다. 그는 또 남다른 주장을 가진 사람으로서 소수민족지역 공무원들은 민족을 막론하고 반드시 소수민족언어로 말할줄 알아야 자격있는 공무원이라고 한다. 혹 조선족자치주 초대주장의 경호원으로 사...
  • 2013-11-29
  • 연길시 남양사회구역 경로전통미덕 이어가 “로인들의 오늘이 우리의 미래다.” “로인들 행복해야 우리도 행복하다” 연길시 진학가두 남양사회구역에서는 로인을 존중하고 로인을 사랑하며 로인을 돕는 경로분위기를 형성하여 사회구역의 로인들이 보다 편하고 보다 즐겁게 만년을 보내게 하고있다....
  • 2013-11-28
  • 소아마비로 지체장애 3급 판정을 받은 정태룡(58살)씨와 지체장애 2급판정을 받은 허채란(56살)부부는 목발없이는 한발작도 내디딜수 없다. 남보다 느리지만 이들 부부는 늘 멈추지않는 걸음을 옮긴다. “우리 부부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무리 별볼일 없더라도 살면서 포기해야 할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숫...
  • 2013-11-27
  • 또 하나의 풍년해이다. 훈춘시 반석향 맹령촌의 산골짜기와 들은 울긋불긋 사과로 뒤덮였다. 벌거우리하고 어린애머리통만한 사과들이 가지휘게 달려 보는이들을 경탄케 한다. "우리 촌의 사과산업발전에는 이름없는 영웅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시농업국의 안종헌이야말로 첫손 꼽을만한 무명영웅이지요." 맹령촌 리호...
  • 2013-11-25
  • 연화조선족향 장복촌 당지부서기 마덕운. 유수시 연화조선족향에는 의지할곳이 없는 조선족아이를 자기집에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키운 한족 당지부서기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미담으로 전해지고있다. 이야기의 장본인은 바로 연화조선족향 장복촌 당지부서기인 마덕운이다. 1995년 연화조선족향 장복촌의 조선족농민 현청산...
  • 2013-11-23
  • 설경촬영 떠났다가 선봉령에서 폭설에 갇혀 19시간만에 구조돼 눈에 갇혀 움직일수 없게 된 박군걸기자의 승용차(박군걸기자 제공). 지난 11월 17일에 연변지역을 강타한 폭설로 인한 각종 재난과 사고소식이 빈번한 가운데 연변주 화룡시소방대대에서 발부한 한편의 기사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해당 기사...
  • 2013-11-22
  • 연길시제3중학교 종미영학생. 11월 16일 저녁, 연길시제3중학교에 다니는 종미영(18세)학생은 연길천성쇼핑광장부근에 있는 학원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골목입구에서 남성용지갑을 주었다. 안에는 현금 한묶음과 령수증 여러장이 들어있었다. 지갑을 주은후 종미영은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께 알렸다. 《아...
  • 2013-11-22
  • 화룡시 서산소학교에는 품덕도 좋고 학습성적도 좋아 선생님들의 사랑을 한몸에 듬뿍 받고있는 공금령이라는 녀학생이 있다. 그런데 얼마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열심히 수업을 듣고있던 그가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가까운 병원에 호송되여 긴급치료를 받았지만 병세를 확진할수 없어 또 연변병원에 호송...
  • 2013-11-21
  • 130명 고아, 결손가정 아이들을 부양한 중위기씨 심장병으로 쓰러져   “불우아이들과 함께라서 더 맛있어...” 왕청현 대명사회구역의 “봄비 사랑의 집”의 “애심아버지” 중위기씨(60살)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거느리고 아침 일찍 새벽운동에 나섰다가 갑자기 쓰러져 병...
  • 2013-11-21
  • “형사경찰로서 자아희생을 겁내면 안되죠, 앞으로도 이런 사건이 터지면 례외가 아닙니다.” 올해 31세에 나는 남궁승인(南宫胜仁)은 연길시공안국 형사경찰대대 인신침범사건정찰중대의 한 일반 조선족형사이다. 사업에 참가한지 그닥 오래되지 않고 또한 공안국 형사경찰대대에 입문한지는 1년밖에 되지 않지...
  • 2013-11-20
  • 아이들과 함께(두번째줄 우로부터 여섯번째 남수부서기)/ 사진 리성복 특약기자 연길시 북산가두 단연사회구역 당총지 부서기를 맡고있는 남수(42세)씨는 고혈압환자지만 자기 직책을 훌륭히 완수해 주민들의 칭찬을 받고있다. 연변대학의 한 학생이 생활난에 부딪쳤다는 말을 듣고 푼푼치 않은 상황에서도 매달 200원씩 이...
  • 2013-11-19
  • 조선족불구자 김영화 일전 장백조선족자치현심계국, 현발전개혁국, 현불구자련합회에서는 공동으로 돈을 모아《장백 좋은 사람》이며 조선족불구자인 김영화한테 가치가 6600원에 달하는 전동휠체어를 가져다주었다. 장백현 십사도구진 삽사도구촌에 살고있는 김영화는 어려서부터 선천성 척추(脊柱)병에 걸려 다리가 마비...
  • 2013-11-16
  • 1953년 아홉자식들과 함께 있는 아버지, 어머니(뒤줄 오른쪽 첫벗째 13세 나는 작자 김영자) 나의 어머니는 93세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림옥련이라 부르는 어머니는 글공부를 하지 못해 평생 자기 이름을 써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러나 빈궁속에서도 아홉자식을 낳아키워준것만도 고마운데 공부까지 시켰다. 자식농사...
  • 2013-11-15
  •      “내 자식과도 같은 나젊은 소방장병들이 더 안전하게 불을 끄고 생명을 구조하도록 하기 위해 이 총을 만들었습니다. 한번 봐주십시오.”  일전, 훈춘시의 열정시민 최선생은 자신이 발명한 소방용격파권총(消防破拆手枪)을 가지고 주공안소방지대훈춘대대를 찾아 소방장병들로부터 발...
  • 2013-11-14
  • 길림시 선영구의 한 로인협회에는 올해 79세 나는 안련복로인이 있다. 젊었을 때는 전국 로동모범으로 활약했고 지금은 로인협회에서 로인들과 함께 마지막 여생을 뜻깊게 보내고있다. 안로인은 《남보다 일 좀 더 하는것이 참말 행복한 일이요》라고 한다. 로인활동일이면 안련복로인은 언제나 일찍 활동실에 가서는 깨끗...
  • 2013-11-14
  •   “량부모를 일찍 여의여서인지 아프고 힘든 로인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손길이 다가가고 보살펴드리게 됩니다. 때론 하루에 2~3시간도 못 자지만  몸은  힘들어도 마음만은 편하고 보람을 느낍니다…” 룡정시 하서가두 봉림촌 봉림 2대에서 봉림로인락원을 경영하는 림계화(46세)씨의 진...
  • 2013-11-12
  •          미국 국회의사당앞에서 딸과 함께 지난 8월 14일부터 9월 13일까지 나는 손자가 미국 뉴욕대학에 붙은 덕분에 난생 처음으로 미국을 유람하는 행운을 갖게 되였다. 14일 저녁 나는 대련에서 한국 아시아나려객기에 올라 한국 인천에 도착했다가 거기에서 다시 미국비행기에 오...
  • 2013-11-11
‹처음  이전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