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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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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모택동의 딸 리민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댓글:  조회:5710  추천:2  2016-01-17
모택동의 딸 리민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번역)   건국후에 살아있었다고 알려진 모택동의 아들딸은 리민(李敏), 리눌, 모안영, 모안청이였다. 모택동은 이 네명의 자녀를 몹시 사랑했다. 모안영, 모안청은 모택동과 양개혜의 아들이고 리눌(李讷)은 모택동과 강청의 딸이다. 그리고 여기 소개하는 리민은 모택동과 하자진의 딸이다. 1936년 겨울에 모택동은 홍군을 거느리고 섬북의 보안현으로 왔다. 보안은 작은 현소재지로서 인구가 모두 400명밖에 안되였고 집도 많지 않았다. 당시 모택동과 하자진은 보안현 소석산의 자그마한 토굴에 거주했다. 토굴은 매우 낡아서 지붕에서는 물이 떨어졌고 땅바닥은 매우 습했다. 실내에는 침대도 없고 흙온돌이 있었지만 난로도 없고 부뚜막도 없었다. 토굴밖에 세개의 벽돌을 쌓아놓아 그우에 주전자를 놓고 물을 끓일수 있을뿐이였다. 하자진은 부사당한 몸으로 아이를 낳았다. 하자진과 함께 장정을 했던 녀홍군전사 등영초, 강극청, 류영, 종월림 등이 소식을 듣고 축하하러 토굴로 찾아왔다. 모택동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들을 맞아주었다. 그녀들은 “자진이가 낳았어요?”하고 물었다. 모택동은 유머스럽게 “낳았소, 낳았소, 큰 닭알을 낳았소”하고 대답했다. 녀홍군들은 토굴안으로 들어가 하지진의 품에 안겨 울고있는 아기를 보았다. 등영초는 앞으로 다가가서 가볍게 아기를 안아보았다. 그녀는 아기가 여위고 작은것을 보고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정말로 꼬마교교(娇娇)구나”하고 말했다. 다른 녀홍군전사들도 따라서 꼬마교교라고 불렀다. 옆에 서있던 모택동은 등영초의 말을 듣고 딸의 아명을 “교교”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름은 리민(李敏)이라고 지었다. 후날 리민이 쏘련에서 귀국했을 때 모택동이 “리민아”하고 부르자 리민은 “저의 이름이 왜서 모민이 아니고 리민인가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모택동이 말했다. “너의 이름은 민이지만 꼭 모민(毛敏)이라고 불러야만 하는것이 아니라 리민이라고 부를수 있다.” “왜서요? 큰오빠는 모안영, 둘째오빠는 모안청, 그들은 모두 아빠의 모씨성을 따랐는데 난 왜서 성이 모씨가 아닌가요?” 리민이 의아해서 눈을 크게 뜨고 묻자 모택동이 웃으며 알려주었다. “아빠의 성이 모씨인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혁명사업의 수요로 아빠는 모윤지(毛润之) , 자임(子任), 리득승(李得胜) 등 10여가지 이름을 썼단다. 그 이름중에서 아빠는 특별히 리득승이라는 이름을 좋아했단다. 그래서 널 리민이라고 부르는거지.” 1947년 3월에 호종남의 20만대군이 연안으로 쳐들어왔다. 그 당시는 잠시 연안을 포기해야 나중에 연안을 다시 찾을수 있는 형세였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떠나면 승리한다는 리득승(离得胜)이란 뜻으로 “리득승(李得胜)”이란 가명을 썼다. 모택동은 리득승이란 이름으로 작전을 지휘하여 다시 연안을 찾고 전국을 해방했다. 모택동은 토굴에서 태여난 교교를 매우 귀여워했다. 하지만 하자진은 마음속에 근심이 가득하여 조금도 기뻐할수 없었다. 그녀가 그 시기에 생각한것은 어머니로 된 기쁨이 아니라 사업이였다. 그녀는 아이가 자신의 리상을 실현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낳은지 4개월밖에 안되는 교교를 옛 고향집에 맡겨놓고 자신은 항일군사정치대학에 들어가 공부했다. 1937년 10월에 하자진은 모택동과 리혼하고 연안으로부터 서안을 거쳐 쏘련으로 가서 공부했다. 쏘련에서 하자진은 모택동의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1939년에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은 병에 걸렸는데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해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고독에 빠진 하자진은 뼈저리게 후회했다. 1941년 4월에 모택동은 하자진을 위안해주기 위해 4살된 딸 교교를 하자진이 있는 모스크바에 보내주었다. 이렇게 교교는 천리밖에 있는 어머니를 만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리민은 모스크바에서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냈다. 타국생활은 하자진에게 수많은 고난을 가져다주기도 했고 행복과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천리밖에서 찾아온 딸은 방금 아들을 잃은 타격에 상처를 입었던 그녀의 마음에 령단묘약이였다. 하자진은 딸의 응석을 받아주었으며 딸때문에 애쓰고 근심하면서도 귀여운 딸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몹시 자호감을 느꼈다. 쏘련에서 생활하는 몇년동안에 교교의 마음에는 엄마뿐이고 아빠는 없었다. 그녀가 연안을 떠나 쏘련으로 갔을 때에는 너무 어려서 아빠에 대한 인상이 별로 없었다. 국제아동원의 대청에는 각국 공산당령수의 거폭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는데 그중에는 쏘련공산당 거목인 레닌과 쓰딸린, 벌가리아공산당 령수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格奥尔基·季米特洛夫), 중국공산당 거목인 모택동, 주덕 등이 있었다. 아동원의 선생은 늘 아이들에게 국제주의교육을 시켰는데 각국 공산당령수가 본국의 인민을 지도하여 투쟁한 일을 이야기해주군 했다. 선생은 중국공산당의 령수 모택동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교교는 경모하는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듣군 했다. 그녀는 중국의 령수가 자신의 아빠일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자진도 아빠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어느 한번은 쏘련에 와있던 모안청이 특별히 국제아동원으로 찾아와서 녀동생을 만나보았다. 그는 녀동생에게 사탕을 사다주었다. 그들 남매는 사람이 없는 대청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안청이 갑자기 높은 곳에 걸려있는 모택동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교교야, 넌 저분이 누구인지 아느냐?” “알아. 중국공산당의 령수 모택동이지.” “저이는 우리의 아빠야!” “거짓말, 나에게는 아빠가 없어요.” “거짓말이 아니야. 저분은 정말로 우리의 아빠야! 아빠가 우리를 쏘련에 보내 공부하게 해주었어.” 그제야 리민은 모택동이 자신의 아빠라는것을 믿게 되였다. 그러나 아빠는 아직도 거리가 너무 먼 존재였다. 교교는 자신이 아빠와 어떤 관계인지 상상할수 없었다. 아빠에 대한 교교의 감정은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점차 깊어졌다. 하자진은 교교더러 아빠에게 편지를 쓰라고 당부했다. 교교가 아빠에 대해 잘 알수 없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것이다. 그러나 하자진의 서술은 너무 간단하고 일반적이였다. 그녀는 교교를 아이로 생각하고 심도가 깊게 이야기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교교는 갑자기 많이 성숙되였다. 교교는 많은것을 깨닫게 되였다. 교교는 어머니가 왜서 오래도록 그렇게 우울해 하고 상심에 잠겨 있었는지를 알게 되였다. 1947년 여름에 하자진은 왕가상, 주중려부부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귀국하여 할빈으로 돌아왔다. 11세의 리민에게 이 곳은 완전히 낯선 고장이였다. 눈깜짝할 사이에 모택동이 령도하는 해방전쟁은 승리했다. 모택동과 당중앙은 북평으로 들어갔다. 그때 모택동은 의연히 동북에 있는 딸과 하자진이 생각되였다. 모택동은 여러해동안 보지 못했던 딸이 몹시 그러워졌다. 그는 딸을 북평으로 데려다가 공부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949년 여름에 하자진의 친녀동생 하이는 모택동의 부탁을 받고 할빈으로 갔다. 그녀는 언니 하자진을 만나서 “모주석께서 먼저 교교를 데려다가 북평에서 공부시키겠다고 하면서 언니는 할빈에 남아서 통지를 기다리라고 했어요”하고 말했다. 그때 교교는 이미 13살이였다. 교교는 천진하고 활발하고 똑똑하고 령리했으며 로어를 류창하게 구사할수 있었다. 교교는 어머니를 닮아 선천적으로 타고난 미모에 몸매가 호리호리했으며 피부가 하얗고 온몸에서 소녀의 매력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오관, 눈섭, 얼굴륜곽은 모택동을 닮아서 매우 귀여웠다. 교교는 아빠를 만나러 북평에 간다는 이모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아빠와 헤여진지 너무 오래 되여 아빠에 대한 인상이 남아있지 않은것이 걱정되였다. 그리하여 리민은 필을 들어 로어로 아빠에게 편지를 써보냈다. 그후 리민은 아빠를 리해하게 되였고 아빠를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였다. 리민은 북경사범대학 화학학부에서 공부하는 기간인 1959년 8월 29일에 북경항공학원의 우등생 공령화(孔令华)와 결혼식을 올렸는데 모택동은 기쁜 마음으로 딸의 결혼식에 참가했다. 결혼후에 리민과 공령화는 중남해에서 살았는데 모택동에게 천륜지락(天伦之乐)의 새로운 즐거움을 갖다주었다.  
139    선생을 팔아먹었다는 오명을 쓴 탕은백 댓글:  조회:5268  추천:0  2016-01-10
선생을 팔아먹었다는 오명을 쓴 탕은백   (번역)     상해에서 후퇴할 때 국민당 제37군은 강만(江湾)에서 후퇴할 준비를 하고 기다리라는 탕은백(汤恩伯)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부대는 강만에서 오래도록 기다렸지만 탕은백한테서 소식이 오지 않았다. 군장 라택개(罗泽闿)는 사처에 사람을 파견하여 수소문해서야 탕은백이 강만의 수만명군사를 버리고 이미 상해에서 군함을 타고 도망쳤다는것을 알았다. 인민해방군이 공격해오자 갈길이 없는 37군은 손을 들고 투항하는수밖에 없었다. 라택개는 혼란을 틈타서 백성의 옷으로 갈아입고 사천로의 한 친구집에 숨었다. 며칠후에 조용해지자 라택개는 배를 타고 향항으로 도망쳤다. 라택개는 향항을 거쳐서 대만으로 갔다. 구사일생으로 대만에 도착한 라택개가 첫번째로 한 일은 부하들의 목숨은 상관하지 않고 자기만 살겠다고 달아난 탕은백을 질책하는것이였다. 탕은백의 측근은 탕은백을 감싸면서 도리여 라택개를 비난했다. 상대방은 서로 공격하면서 충돌은 더욱 격화되였다. 이 송사는 나중에 장개석까지 나서도록 커졌다. 상해를 잃은데는 탕은백에게 일정한 책임이 있었지만 필경 그는 장개석이 배치한 “서둘러 운송하는 계획”을 완성했고 마지막의 후퇴명령도 장개석이 내린것이였다. 후퇴질서가 매우 혼란하여 이미 후퇴명령을 기다리고있던 한개군을 포기한데는 탕은백의 책임이 있었다. 이 일에 대해 장개석은 탕은백을 두둔할수 없었다. 그는 회의를 열어 상해보위전에 대해 검토하는것으로 이 일을 해결하려고 했다. 회의는 진성(陈诚)이 주최했다. “여러분, 오늘 회의를 열게 된것은 상해전을 돌이켜보려는것입니다. 상해를 잃은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를 토론해보고  제가 회의의견을 장총재께 보고해드리겠습니다.” 진성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라택개는 벌떡 일어나서 “상해를 잃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난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탕사령은 전장(战场)의 최고지휘관으로서 전투가 가장 치렬할 때 부대를 버리고 먼저 도망쳤습니다. 우리 37군의 수만명 장병들은 전쟁터에서 벼려져서 하늘을 향해 하소연해도 대답이 없었고 땅에 대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늘에 눈이 있어 나를 망하게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진작 내가 공산군의 총에 맞아 귀신이 되였을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부하들은 불쌍하게도 부상당하고 포로되여 모두 대륙에 남았습니다. 난 그들에게 미안합니다!” 회장은 끓는 가마처럼 대번에 술렁거렸다. 어떤 사람들은 탕은백을 질책하면서 상해를 잃은 책임을 모두 그가 져야 한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옹군 국민당이 모두 대륙을 잃고 대만으로 도망쳤는데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고 따지면서 탕은백을 두둔했다. 탕은백은 줄곧 침묵을 지키다가 회의가 끝날 무렵에야 손을 들고 발언했다. “여러분, 상해를 잃은데 대해 전구(战区)사령관인 내가 응당 주요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후퇴명령은 총재께서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친히 내렸습니다. 후퇴는 질서있고 계획에 따라 실시되였습니다. 당시 오송구(吴淞口)밖의 배는 적재량이 8톤이였는데 장갑병을 포함한 8만명의 부대를 모두 싣고 후퇴했습니다. 37군도 원해 배를 타고 후퇴할수 있었지만 후에 공산군의  선두부대가 오송구를 공격하여 전화가 통하지 않아서 내가 파견한 련락원과 련계할수 없었습니다. 만약 후퇴하지 않고 좀 더 기다렸다면 우리 모두 공산군의 대포밥이 될것이 뻔했습니다. 나는 할수 없이 배를 출발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37군이 후퇴하지 못한것에 대해 나도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여기까지 듣고있던 라택개는 탕은백의 말을 중동무이를 하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 “형제들이 채 후퇴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먼저 도망치고도 무슨 체면이 변명하는겁니까? 당신은 응당 총으로 자살하여 당국에 사죄하고 천하에 사죄해야 합니다. 당신은 가슴이 아파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말에 탕은백은 노하여 소리쳤다. “라택개! 네가 적전을 잘못해 진지를 잃고 37군이 대륙을 잃은거야. 그러니 넌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해! 너야말로 진작 자살해야 했어. 무슨 낯짝에 목숨을 달고 대만까지 도망쳐왔어?!” 두 사람은 서로 손가락질하며 상대방을 질책했다. 진성은 하는수없이 37군문제는 군사법정에 넘긴다고 선포했다. 이 송사는 후에 진성이 라택개와 탕은백을 찾아가서 화해를 시키면서 흐리부지해지고말았다. 라택개의 송사가 해결되지 못했는데 진의(陈仪)에 대한 처리문제가 또 탕은백을 골치아프게 했다. 진의는 대만에 호송되여온후 기륭요새사령부에 감금되였다. 그는 정서가 저락되여 온종일 한마디 말이 없었으며 어떤 사람과의 담화도 거절했다. 탕은백은 대륙에서 대만으로 도망쳐온 초기에 면구스러워 찾아가지 못하고 측근 진대경을 시켜 두번 일상용품을 사가지고 진의를 보러 가게 했을뿐이였다. 1950년 6월, 조선전쟁폭발전야에 대만형세는 급변했다. 장개석은 인민해방군이 대만을 공격할가봐 진의를 재판하라고 명령했다. 원래 진의는 탕은백이 고발한것이였다. 1948년 11월에 절강성정부 주석직을 맡고있던 진의는 절강성경보처 처장 모삼(毛森)이 처결하라고 비준했던 100여명의 공산당원과 진보인사들을 풀어주었다. 그는 또 1949년 1월에 중공지하조직의 도움을 받아 이전의 부하 탕은백에게 봉기를 일으키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탕은백은 장개석에게 고발했고 진의는 “공산당과 결탁하여 모반음모를 꾸몄다”는 죄명으로 붙잡혔다.   탕은백은 장개석에게 보고하면 장개석이 자신과의 정분을 생각해서 진의에게 최대로 해직처문만 내릴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모인봉이 진의를 압송하여 대만으로 왔을 때 “총재께서는 진선생을 대만으로 호송해오면 안전할것이라고 말했는데 별일이 없을것입니다”라고 말했던것이다. 그런데 지금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한다고 하니 진의는 죽음을 면할수 없을것이 뻔했다. 탕은백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장개석이 이미 대남으로 가고 대북에 없었다. 즉시 대남으로 찾아간 탕은백은 장개석을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사흘을 기다려도 장개석은 만나주지 않았다. 나흘째 되던날에 장개석의 시종이 탕은백에게 말했다. “총재께서 이미 대중(台中)으로 갔는데 떠날 때 진의의 문제가 해결된 후에 당신을 만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탕은백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 서있었다. 하지만 탕은백은 포기하지 않았다. 급히 대북으로 돌아간 그는 선후로 상해에서 환난을 같이 겪었던 곡정강, 뢰진, 방치, 진량을 찾아가서 장개석앞에서 좋은 말을 하여 진의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모두들 진의는 죽은 목숨이나깐 구할 방법이 없다고 대답했다. 뢰진은 “그 어른이 죽이겠다고 마음먹으면 꼭 죽이고야 마는것이니깐 당신은 찾아가지 마십시오”하고 직방 말했다. 아무리 해도 어쩔수 없게 된 탕은백은 마지막으로 동갑인 모인봉을 찾아갔다. “자네가 장총재께 잘 말해보게. 당년의 약속을 지켜 진선생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말이네.” 모인봉은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대답하고 장개석을 찾아갔다. 그러나 며칠후에 모인봉이 탕은백을 찾아와서 말했다. “내가 장총재를 찾아가서 애걸했지만 줄욕만 얻어먹었네. 이제 나도 방법이 없네.” 1950년 6월 18일에 진의는 사형장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진의는 큰 걸음으로 사형장으로 걸어가면서 소리쳤다. “사람은 죽어도 정신은 죽지 않는다!” 탕은백은 진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했다. 그는 자택에 고인의 빈소를 세우고 절하면서 참배했다. 사흘째 되는 날에 장개석은 탕은백을 불렀다. 장개석을 만난 탕은백은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분을 다 풀지 못한 장개석은 탕은백을 훈계했다. “진의는 법에 의해 처결되였고 죽어 마땅한데 자넨 왜 아직도 우는거야? 듣자니 자네가 집에 진의빈소를 세웠다던데 돌아가서 당장 없애버리게!” 탕은백은 집에 돌아간후 눈물을 흘리면서 빈소를 없애버렸다. 진의가 죽은후 탕은백은 대만군정계에서 “선생을 팔아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죄명을 쓰게 되였다. 친구들도 래왕이 적어졌다. 1954년 6월 29일에 탕은백은 일본에서 치료를 받다가 수술대우에서 사망되였는데 그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되고있다.     
138    모택동이 가장 두려워한 3가지 댓글:  조회:6254  추천:1  2016-01-05
모택동이 가장 두려워한 3가지   (번역)   첫째, 눈물을 두려워했다   모택동은 하자진(贺子珍)을 보고 “나는 가난한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가장 두렵소. 그들의 눈물을 보면 나도 눈물이 나오는것을 참을수 없소”라고 말한적이 있다. 1937년 9월에 8로군이 동쪽으로 황하를 건넌후 모택동은 찦차에 앉아 서백파로 간적이 있었다. 찦차가 량쪽면이 가파로운 절벽인 큰 산골짜기를 지날 때 도로옆의 풀숲에 8~9세쯤 되는 녀자아이가 누워있고 그 옆에 30여세 되는 시골녀인이 앉아있는것을 발견했다. 시골녀인은 두눈을 꼭 감고있는 안색은 노란 녀자아이를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그 정경을 본 모택동은 “차를 세우시오”하고 소리쳤다. 운전수 주서림이 차를 멈춰 세우자 모택동은 첫 사람으로 뛰여내렸다. 이런 거동에 경호원들은 어짤바를 몰랐다. 이전에는 경호원들이 먼저 뛰여내린후 모택동을 부축하군 했다. 큰 걸음으로 그들한테 다가간 모택동은 녀자아이의 손과 이마를 만져보면서 물었다. “이 아이가 병에 걸린것 같은데요?” “감기에 걸려 열이 올랐는데 약을 먹어도 열이 내리지 않고 헛소리만 칩니다. 이러다간 잘못될것 같습니다.” 녀인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모택동은 즉시 차우에 앉아있는 주의사를 불렀다. 아이의 병을 살펴보던 주의사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모택동은 급히 물었다. “구할수 있습니까? 조그만 희망이 있어도 꼭 구해야 합니다!” “구할수 있지만 약이…” “약이 없습니까?” “있긴 하지만 한대밖에 남지 않아서…” “무슨 약입니까?” “페니실린(盘尼西林)입니다.” “그럼 빨리 아이에게 사용하시오!” “이는 수입약이여서 돈으로도 사기 매우 어렵습니다. 주석께서 필요하시게 되거나 가장 요긴한 대목에 쓰려고…” “지금이 바로 요긴한 대목이요. 당장 아이에게 주사를 놓으시오!” 주의사는 소중하게 간직해두었던 페니실린을 아이에게 놓아주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항생소가 흔하지 않았기때문에 매우 특효가 있었다. 주사를 맞은 아이는 갑자기 눈을 뜨더니 가볍게 “엄마”하고 불렀다. 아이가 눈을 뜬것을 본 시골녀인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목메여 소리쳤다. “보살님, 목숨을 살려주신 보살님!” 모택동은 눈굽을 찍으며 주의사를 보고 말했다. “당신은 뒤의 차로 이들 모녀를 집까지 실어다주시오. 그리고 아이를 다시 살펴보아서 괜찮으면 돌아오시오!” 후에 그 불쌍한 모녀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모택동은 눈물이 글썽하여 “그 아이가 지금은 어찌 되였는지 모르겠군. 그때 그 아이를 데려다가 치료해주는걸 그랬군”하고 말하군 했다. 모택동은 여러번이나 불쌍한 농민들을 걱정하면서 말했다. “농민들은 병을 보이려면 몇십리길을 걸어야 하지요. 방법을 대여 의사들이 농촌으로 찾아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농민들이 지은 쌀을 먹고있으니 응당 농민들을 치료해주어야지요!”   둘재, 피를 두려워했다     가렬처절한 전쟁터를 천만번이나 넘나들면서 시신이 산처럼 쌓이고 피가 강물처럼 흐른것을 볼때로 보아온 모택동이 피를 두려워한다면 누구도 믿지 않을것이다. 모택동의 가족과 친구들도 전쟁터에서 얼마나 많이 희생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모택동은 적들의 흉악하고 잔인한 만행앞에서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모택동이였지만 어떤 의미에서 볼 때 피를 보는것을 두려워했다. 1949년 3월 25일에 중공중앙은 서백파에서 향산쌍청별장으로 옮겨왔다. 총포소리에 습관된 군관과 전사들은 전투가 없는 태평성세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향산엔 새들이 많았다. 누가 먼저 앞장섰는지 그들은 새사냥에 나섰다. 그 당시에는 야생동물보호법이 없었고 록생평화조직도 없었다. 세계대전이 결속된지 얼마 되지 않고 중국의 해방전쟁도 남방에서 계속되고있는 현실에서 몇천명의 사람이 죽는것도 문제로 삼지 않는데 하물며 몇마리의 참새을 잡는것쯤이야… 그날에 회의를 마치고 쌍청별장으로 돌아오던 모택동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몇몇 경위간부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사격술이 뛰여나 많은 참새를 잡아가지고 돌아오는 길이였는데 참새를 쇠줄에 길게 꿰여들고 기쁨의 환성을 지르며 걸어왔다. 모택동은 그들을 보고 물었다. “무슨 기쁜 일이 있는거요? 손에 든것이 무엇이요?” “참새를 좀 잡아가지고 오는 길입니다.” 한 경위간부가 참새를 꿴 쇠줄을 모택동의 앞에 흔들어보이며 말했다. 쇠줄엔 참새피가 가득 묻어있었는데 모택동의 발앞에 피방울이 떨어지기까지 했다. 모택동은 마음아픈 표정을 지으며 한걸음 물러섰다. 그는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빨리 치우시오. 내 눈앞에 보이지 않게 하시오!” 참새를 들고있던 경위간부는 놀라서 피가 떨어지는 참새를 얼른 등뒤에 감추었다. “누가 참새를 잡으라고 했소:? 참새도 생명이 있단 말이요! 기쁘게 날아다니는 참새를 그렇게 처참하게 쏘아죽이다니? 이후엔 참새를 잡지 마시오. 누구든 참새를 잡아선 안되오!” 1964년에 모택동은 중남해에서 사교무활동에 참가했다. 휴식시간에 그는 쏘파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때 함께 춤추던 공군정치부예술단의 녀배우가 모택동의 옆에 와서 앉았다. 모택동은 관심조로 친절하게 물었다. “훈련이 힘들지 않소?” “예. 매우 고생스럽습니다. 어떤 때는 사고까지 생긴답니다.” “사고까지?” “네. 천진의 한 극단에서는 《효천견(哮天犬)》역을 맡은 배우가 곤두박질을 련습하다가 넘어져 목이 자꾸만 빠져들어가서…” “아이구!” 모택동은 끔찍하여 차마 눈 뜨고는 볼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만, 그만 말하오.” 모택동은 한숨을 내쉬더니 비극에서 빠져나기라도 하듯이 총망히 구석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곡이 울렸을 때에도 모택동은 이마살을 찡그리며 구석쪽에 앉아서 춤을 추지 않았다.     셋째, 목숨을 살려달라는 소리를 두려워했다     모택동은 농민의 아들이였지만 우화중의 농부처럼 꽁꽁 언 독사를 불쌍하다고 품속에 넣지 않았다. 장개석이거나 기타 정치군사상의 적들이 살려달라고 애걸해도 모택동은 “초패왕 본받지 않고 승승장구로 궁한 원쑤를 추격”했다. 하지만 모종 의미로 볼 때 그는 확실히 살려달라는 소리를 듣기 두려워했다. 섬북에 있을 때 생활이 가장 간고할 때 한 경위전사가 고생을 견딜수 없어 도주했다. 경위전사는 적지 않은 비밀을 알고있었기에 일반 작전부대의 전사가 도주한것보다 성질이 엄중했다. 경위부대는 즉시 사람을 동원하여 추격한 결과 그 전사를 붙잡았다. 사람들은 원래 도주행위를 증오한데다가 도주병을 쫓느라고 고생했기때문에 도주병을 손가락질하며 가슴에 가득찬 화를 풀었다. “저 새끼를 때려죽여야 해!” “응당 총살해야 해!” 분노에 찬 소리는 모택동을 놀라게 했다. 요동에서 걸어나온 모택동이 붙잡아온 도주병을 보니 나이가 어렸는데 온 얼굴에 눈물코물이 흐르고있었다. 총살한다는 소리를 듣고 혼비백산한 그는  엉엉 울면서 “살려주십시오! 저는 적에게 투항한것이 아닙니다. 그저 집생각이 나서 도망칩것입니다. 저의 목숨을 살려주십시오”하고 애걸복걸했다. 모택동은 원래 도주병을 증오했지만 도주병이 애걸하는 소리와 그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눈시울이 젖었다. 모택동은 손을 저으며 소리쳤다. “그를 놓아주시오! 빨리 놓아주란 말이요!” “그는 도주병입니다!” “그는 나쁜 놈입니다!” “어디가 나쁘단 말입니까?” 모택동은 이마살을 찌프리며 말했다. “그는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빨리 놓아주시오. 아이를 더 놀라게 하지 말고요.” 한 간부가 불복하며 말했다. “이렇게 엄중한 문제를 판결하지 않고 놓아주다니요? 규률을 집행하지 않고 어떻게 병사들을 다스리겠습니까?” “당신만 병사를 다스릴줄 압니까?” 모택동은 설복력 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아직 어리고 갓 혁명에 참가하여 고생을 해보지 못했기에 힘들었을겁니다. 집생각도 나구요. 당신이 그들 가두어놓으면 그는 더욱 집생각을 할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그는 적에게 투항한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빨리 놓아주시오. 맛있는것도 많이 만들어 먹이시오. 그래야 집생각도 적게 할게 아닙니까? 알아들었습니까?” 그리하여 그 도주병은 풀려나게 되였다.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며칠동안 보살핌을 받으며 특별식사를 했다. 물론 그 경위전사는 다시는 도주하지 않았다.  
137    장개석 모택동의 작전에 고립무원 처지 댓글:  조회:5925  추천:0  2015-12-26
장개석 모택동의 작전에 고립무원 처지   (번역)   1946년에 국민당이 전면적으로 내전을 일으켰을 때 호종남이 거느린 부대는 서북에서의 국민당주력이였다. 애초에 호종남(胡宗南)은 국민당군의 최후 방어지역을 중경과 성도를 축으로 하는 서남지역 보다 귀주의 서중부쪽인 먄마와의 변계지역을 선택할 예정이였다. 1949년 8월 11일에 국민당 천상악(사천-호남-호북지역)변구 수정공서(绥靖公署) 주임 송희렴(宋希濂)이 비행기로 한중(汉中)으로 날아와 호종남과 만나 최후방어지역을 상의했다. 두 사람은 황포군관학교 1기 동기생이다. 그들은 국민당군의 최후방어지역을 귀주서중부 만먀변계지역으로 꼽았다. 부대를 이 일대로 집결해 란창강(澜沧江), 노강(怒江)과 고려공산(高黎贡山)의 지형적리점에 의지해 계속 저항하기로 했다. 그들은 만부득이 할 경우에 접경지역인 먄마로 퇴각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당시 호종남은 40만명, 송희렴은 10여만명의 병력을 거느리고있었다. 패전중에 있는 국민당군의 대부분 병력에 해당되였다. 송희렴은 항일전쟁시기에 11집단군을 이끌고 인도먄마로 원정해 귀주와 먄마변경에서 4년동안 전투를 벌려 이 일대의 지형과 민정(民情), 물산 등에 대해 훤히 알고있었다. 그들은 제1단계로 서강(西康)과 사천서쪽지역을 통제해 점차적으로 귀주와 먄마변계지역으로 부대를 이동하기로 했다. 2단계로는 인민해방군이 서남쪽에서 진군할 때 곧바로 주력을 귀주서쪽의 보산(保山), 등충(腾冲), 룡릉(龙陵), 망시(芒市) 일대를 축으로 하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란창강, 노강과 고려공산의 천험을 리용해 인민해방군의 진공을 막기로 했다. 그런 연후에 상황에 따라 귀주로부터 먄마와 타이변경과 먄마경내로 들어가 인민해방군과 싸운다는 전략이였다. 호종남과 송희렴은 장개석이 8월중순 중경에 도착했을 때 관저로 찾아가 이런 전략계획을 보고했다. 뜻밖에도 장개석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안돼! 이 계획은 절대로 안돼! 너희들이 사천과 서남의 반벽강산(半壁江山)을 모택동에게 거저 바치려는게 아니야?” “그런게 아니고 사실은 군사상으로 볼 때 사천은 대만이나 해남, 주산(舟山)과 달리 공산당군이 4방에서 포위공격해온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해볼수 없습니다!” “안돼! 절대 안돼! 너희들은 군사는 알지만 정치를 모른다! 너희들이 단지 6개월만 지켜준다면 제3차세계대전이 폭발될수 있어. 그때 북경, 금릉(金陵-남경의 별칭), 상해는 우리것이 된다.” 장개석은 손을 휘저어가며 그들의 계획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나중에 호종남이 사천으로 퇴각할 때 그의 수중에는 국민당군의 정예인 제1군단을 포함해 30만명의 병력이 있었다. 호종남은 다시 장개석에게 서창(西昌), 운남(云南)으로 퇴각해 방어할것을 건의했으나 이 역시 거부당했다. 한편 모택동은 국민당군의 최후방어저지선인 서남을 공격하여 점령하기 위해 북쪽에서 치고 들어가는척하면서 남쪽에서 공격하는 량동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예로부터 사천을 공략하는 방안은 두가지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섬서에서 진령(秦岭)을 넘어 진격하는 길이다. 또 하나는 호북서쪽에서 장강의 원류를 따라 사천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장개석은 모택동이 팽덕회, 하룡이 이끄는 제1야전군의 주력을 진령으로 보내 사천을 공격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다. 장개석은 이런 판단에 따라 1949년 8월에 서남군정장관공서군사회의를 열어 직접 사천-섬서변계를 중점방어하는 서남방어를 위한 병력배치를 완료했다. 호종남집단군의 주력이 진령의 주산맥을 따라 제1방어선을 구축하고 백룡강(白龙江), 미창산(米仓山), 대파산(大巴山) 지역에 제2방어선을 설치하는 방어계획이였다. 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사천동쪽과 귀주방면에 병력을 따로 배치했다. 하지만 모택동은 통상적인 진공로선 대신 제2야전군이 대우회작전을 펼쳐 호남서쪽, 호북서쪽에서 직접 귀주로 진격해 사천의 서부(叙府-지금의 의빈), 로주(泸州), 중경으로 돌격하도록 했다. 이런 작전은 인민해방군이 국민당군이 생각지도 못한 허를 찔러 국민당군의 서남 방어선의 뒤쪽에서 호종남집단군과 사천변계에 진을 친 국민당군의 퇴로를 끊어버리는것이였다. 이럴 경우에 사천경내의 국민당군주력은 대문이 닫히는 격이 되여 사천성내에 고립될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인민해방군 제1야전군의 일부부대가 진령으로 진격해 대거 사천을 공격하는 모양새의 거짓공세를 펼쳐 호종남집단군이 북쪽방어선에 주력하도록 했다. 그런 연후에 국민당군의 요해를 찔러 부대를 남하시켜 사천북쪽과 성도로 공격해 들어가도록 하는 성동격서전략을 펼쳤다. 이런 군사행동은 예측불허의 전략이였지만 위험부담도 높았다. 대병력이 “사천-호북-오남-귀주”의 수천메터높이의 높은 산과 험난한 협곡을 행군해야 하고 원활하지 못한 보급을 인내심있게 극복해야 했다. 때때로 궁지에 몰린 짐승이 마지막 발악하듯이 목숨을 걸고 덤비는 국민당군의 최후의 저항에 맞서 싸워야했기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장개석이 총력을 기울여 구축한 서남방어선은 변변한 전투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버렸다. 1949년 11월 1일에 몰래 호남서쪽지역에 집결한 인민해방군 제2야전군의 제3, 제5 두개병퇀(兵团)은 제4야전군의 일부부대와 합동작전을 펼쳐 쾌속으로 진격해 일거에 “호남-귀주”방어선을 돌파했다. 인민해방군은 11월 15일에 귀양을 해방시키고 11월 21일에 준의를 점령했다. 이렇게 하여 인민해방군은 사천성경내에 있는 국민당군의 귀주퇴로를 끊어버렸고 승기를 잡아 남쪽에서 사천남쪽을 포위공격할수 있는 유리한 기반을 만들었다. 이때 중경에서 지휘하던 장개석은 장담했던 철통방어가 남가일몽이 되자 부랴부랴 호종남부대를 사천으로 후퇴시켜 방어하게 하고 사천동쪽방어군도 서쪽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인민해방군 제2야전군은 국민당군의 어수선한 부대배치를 틈타 사천서쪽으로 철수하는 국민당군의 동쪽방어군과 호종남의 일부부대를 우회해 포위한후 사천남쪽산골짜기에서 궤멸시키고 중경을 점령했다. 성도로 후퇴한 장개석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져 날로 압박해 들어오는 공산당군의 공격에 쩔쩔매였다. 마침내 권토중래의 꿈이 물거품이 되면서 대륙에서 도망쳐야하는 절명의 순간에 놓이게 되였다. 1950년 3월 26일에 인민해방군이 서창공항 가까이 공격해오자 호종남은 너머지 6만명부대의 지휘권을 참모장 라렬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황망히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도망쳤다. 대만에서 호종남은 패배한 책임을 지고 탄핵을 받을번 했다가 처벌을 면하게 되였다. 1951년 9월 9일에 호종남은 “진동창”이라고 변성명하고 “강절인민반공유격총지휘”로 임명되여 대진도에 주둔하면서 부대를 지휘하여 대륙연해에서 소란을 피우며 파괴활동을 했다. 1952년 10월 19일에 호종남은 국민당 제7기 중앙평의위원으로 당선되였고 “절강성정부주석”직을 겸임했다. 1953년 6월 24일에 인민해방군이 대진도로 진군하자 대만당국은 “강절인민반공유격총지휘부”를 취소했다. 그해 7월 23일에 대만으로 돌아온 호종남은 총통부전략고문위원회 상장고문직에 있으면서 한가하게 지내다가 1955년 9월에 팽호수비사령부 사령관직을 맡으면서 륙군2급상장으로 승진했다. 1962면 2월 14일에 병으로 사망되였다. 륙군2급상장이였던 호종남은 사망된 이튿날에 대진자제198호명령에 따라 륙군1급상장으로 진급되였다. 장개석의 신임과 중시를 받아온 호종남은 득의양양해했으며 야심발발하고 아주 거만하여 안하무인격이였다. 그는 항일전쟁시기에 서북에 숨어지내면서 왕으로 자처했으며 내전시기에 급선봉이 되였다. 하지만 그는 포부가 크지만 재능이 없었고 전략에 대해 알지 못했으며 선악을 가지지 않고 맹목적으로 장개석에게 복종했다. 호종남은 군사상에서 팽덕회의 적수가 되지 못했기에 패하여 대만으로 도망쳤으며 탄핵을 받는 랑패상이 되고말았다.  
136    조자룡이 관우보다 뛰여나다는 증거 댓글:  조회:5781  추천:2  2015-12-21
조자룡이 관우보다 뛰여나다는 증거       ◇ 관우와 조자룡에 대한 적장의 평가   관우는 적장 방덕으로부터 단 한번 영웅이라고 칭해졌다. 그러나 조자룡은 적장 조조, 이전, 하후무, 곽준, 만정으로부터 다섯번 영웅으로 칭해졌다. 여몽과 감녕은 관운장이 손에 큰 칼을 들고 로숙을 붙잡고있는것을 보고 로숙이 상처를 입을가봐 두려워 감히 움직이지 못했지만 관우의 칼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주유의 여러 장수가 모두 류비를 죽이려고 할 때 조자룡이 검을 차고 따르는것을 보고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여러장수가 두려워한것은 검을 쥐고 따르는 조자룡이였다. 육손은 류비와 관우를 칠 때 그들이 형주를 잃고 대패하여 도망치는것을 보고 “후퇴하지 말라. 주야로 추격하여 류비를 잡아라”고 전군에 명령을 내렸지만 나중에 조자룡이 구하러 왔다는 말을 듣고는 전군에 퇴각명령을 내렸다. 조조는 관우에 대해 “나는 일찌기 관공의 인재와 무예가 삼군에서 으뜸간다는 말을 들었기에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자룡에 대해서는 “내가 만일 조자룡을 얻었다면 천하를 얻지 못할가봐 걱정할 필요가 있었겠는가”하고 말했다.     ◇ 적군에 대한 관우와 조자룡의 위력 대비   관우가 혼자서 여러명과 싸운 경우는 딱 한번뿐인데 토산에서 서황, 허저와 싸운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적을 유인하기 위한것이였다. 조자룡은 혼자서 다섯번이나 여러명과 싸웠다. 양산에서 장료, 우금, 이전과 싸웠고 장판파에서 마연, 장개, 초촉, 장남과 싸웠고 적벽에서 서황, 장합과 싸웠고 봉명산에서 한요, 한기, 한경과 싸웠고 봉명산에서 위나라의 8명 장수와 싸웠다. 그중 적을 유인하기 위한것은 한번뿐이였다. 관우의 무예가 대단하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멸시한 사람은 원술, 순정, 진기 세사람이였지만 조자룡의 무예를 대단하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멸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관우가 늙지 않았을 때 허저, 채양, 양령 등이 관우를 생포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조자룡이 늙지 않았을 때 조자룡을 생포하겠다고 큰소리친 사람은 없었다. 관우를 직접 대면해서 생포하겠다고 말한 사람은 하후돈, 채양, 방덕이 있었지만 조운의 면전에서 그를 생포하겠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우금의 선봉인 방덕은 관우를 생포하겠다고 큰소리쳤고 하마터면 성공할번했다. 다만 관평이 도와주어 실패했다. 곽준의 선봉인 소우는 조운이 늙었을 때 조운을 생포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조운의 창에 찔려 죽었다. 관우가 “관우가 여기있다. 방덕은 어찌 나와서 죽음을 받지 않느냐”고 소리치니 방덕이 말을 타고 나와서 관우와 백합을 싸웠지만 조자룡이 “조자룡이 여기 있다”고 소리치니 위나라 병사들은 놀라서 말에서 떨어진 자가 100여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고개를 넘어 도망쳤다.     ◇ 관우와 조자룡의 방어능력 비교   관우가 방덕과 싸울 때 고개를 들어보니 화살소리가 났다. 화살이 다가와서 미처 피할 틈이 없어 왼쪽팔에 맞게 되였다. 방덕의 궁술에 대하여는 따로 언급이 없었다. 조자룡이 한경과 싸울 때 한경은 한꺼번에 3발을 쏘았다. 하지만 모두 조자룡이 창으로 막아냈다. 한경은 무예에 정통하고 궁술과 마술이 뛰여났다. 관우는 조인의 수하에게 화살을 맞아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 조자룡은 원소의 화살이 비오듯하는 상황하에서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리고 주선의 군사가 화살을 쏠 때에도 창으로 막아내서 모두 물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 관우와 조운의 1:1 결투능력 비교   1합이내의 결투: 관우와 싸운 사람은 모두 10명이다. 정원지, 화웅, 순정, 공수, 변희, 왕식, 진기, 하후존, 한복, 양령인데 그중 3명을 죽였다. 조자룡과 싸운 사람은 모두 14명이다. 고람, 배원소, 장호, 하후은, 종신, 형도영, 모용열, 초병, 주연, 주찬, 소우, 금환삼결, 순우도인데 그중 9명을 죽이고 1명을 생포했다. 관우는 1합에 화웅을 참하였는데 화웅은 그전에 삼합만에 유섭을 참하고 다시 반봉을 참했으므로 체력이 많이 소모된 상태였다. 조자룡은 1합에 고람을 참하였는데 고람은 3합만에 유벽을 참하여 체력이 그다지 많이 소모되지 않은 상태였다. 2~3합의 대비: 관우는 2~3합의 정면승부에서 한번도 상대방을 죽인 적이 없다. 조운은 2~3합에서 딱 1번만 상대방을 죽이지 못했다: 관우와 문추의 싸움에서 2합만에 문추가 겁이나서 말을 끌고 강을 따라 도망했다. 조운과 안명의 싸움에서 2합도 되지 않아 조운은 창으로 안명을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관우와 장흠의 싸움에서 3합도 되지 않아 장흠은 대패하여 도망쳤다. 조운과 종진의 싸움에서 조운은 1창에 종진을 말에서 떨어뜨렸다. 관우와 주연의 싸움에서 3합이 되지 않아 주연은 도망쳤다. 조운과 한영의 싸움에서 3합도 되지 않아 한영은 창에 찔려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관우와 반장의 싸움에서 3합도 되지 않아 반장이 도망쳤다. 조운과 한덕의 싸움에서 3합도 되지 않아 한덕은 창에 찔려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관우와 맹탄의 싸움에서 맹탄은 3합을 싸우고 말을 돌려 도망쳤다. 조운과 반수의 싸움에서 3합이 되지 않아 반수가 패했다. 여러합을 싸운 경우의 대비: 관우와 차주의 싸움에서 차주는 여러합을 싸우다가 막지 못하게 되지 말을 몰고 되돌아갔다. 그런데 차주는 다른 장수를 참한 기록이 없다. 조운과 여광의 싸움에서 수합을 싸우다가 조운의 창에 찔려 여광이 말아래로 떨어졌다. 여광은 수합만에 잠벽을 참한 기록이 있다. 회수를 모르는 경우의 대비: 관우는 북을 울리며 채양을 참하였고 장비가 이를 보고 기뻐했다. 조운은 자리에 앉기전에 유준, 마한을 참하였고 이로 인하여 마초가 그를 더욱 존중하게 되였다. 관우는 단독대결에서 일곱번 10합이상을 싸웠는데 그중 한번 승리했다. 조자룡은 여섯번 10합이상을 싸웠는데 그중 세번 승리했다.   ◇ 관우와 조자룡의 포위돌파능력 비교   관우는 1번 무인지경으로 돌파한 적이 있었지만 조자룡은 3번 무인지경으로 돌파한 적이 있었다. 관우는 4번 포위당하였는데 제1차는 몸을 뺄수 없어 항복했고 제2차는 포위망을 뚫고 나왔으며 제3차는 몸을 빼지 못하고있는것을 관평, 요화가 구출해주었고 제4차에서는 사망되였다. 조자룡은 5번 포위당하였는데 제1차는 공손찬을 보호하면서 포위망을 뚫었고 제2차는 유리를 보호하며 퇴각했으며 제3차는 아두를 안고 7번이나 들락날락 했고 제4차는 포위망을 뚫었으며 제5차는 몸을 빠져나가지 못하여 관흥, 장포가 구출해주었다. 관우가 토산에서 포위를 빠져나가지 못할 때는 관우의 전성기였고 조자룡이 봉명산에서 포위를 벗어나지 못할 때는 이미 로년이였다. 토산에서 포위당했을 때 관우의 수하에 3000인마가 있었고 적군인 하후돈이 5000, 허저와 서황의 군대는 인원수가 불명확했다. 이렇게 다 합쳐도 2만 5000명이상은 아니 되였것이다. 봉명산에서 포위당했을 때 조자룡의 수하는 1000여명이고 적수인 동희, 설측은 각각 3만을 데리고있었으며 주사령관인 하후무의 군대는 인원수가 불명확했지만 동희, 설측보다는 많았을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10여만명은 되였을것이다.     ◇ 동일한 적수간의 비교   관우는 주연과 삼합을 싸웠는데 주연이 거짓으로 패한척하고 도망쳤다. 그러나 조자룡은 한창에 주연을 찔러죽였다. 허저는 조자룡과 싸워본 후에 조자룡이 10여일을 나가서 싸움을 걸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장판파에서 조조가 조자룡을 생포하라고 하였는데도 허저는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허저는 관우와 싸워본 후에 관우를 생포하겠다고 큰소리치고 다녔다. 관우는 장료와 싸우면서 장료의 무예가 자기의 아래가 아니라고 하였다. 조자룡은 혼자서 장료, 우금, 이전과 싸우면서 류비가 멀리 도망치기를 기다려 몸을 뺐다. 관우의 적수 문추는 조운과 비긴 적이 있다. 조운의 적수 서황은 관우를 물리친 적이 있다. 문추는 관우앞에서 두회합을 싸우고 도망쳤다. 서황은 옆에 장합이 있는데도 감히 조운과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하비성에서 하후돈이 사람을 시켜 성아래에서 욕을 하게 하였다 관우는 대노하여 3천인마을 이끌고 하후돈과 싸웠다. 여기서 적을 유인한 자는 하후돈이며 리성을 잃고 싸우러 나간 자는 관우였다. 박망파에서 하후돈이 대노하여 말을 내려치며 앞으로 와서 조자룡과 싸웠다. 여기서 유인한 자는 조자룡이고 리성을 잃은자는 하후돈이였다.      
135    모택동의 아들 모안룡의 생사비밀 댓글:  조회:5922  추천:0  2015-12-12
  모택동의 아들 모안룡의 생사비밀   (번역)     양개혜는 1927년에 모택동의 셋째아들 모안룡(毛岸龙)을 낳았다. 1930년 11월 14일에 양개혜가 국민당반동파에게 살해된후 모안룡은 두 형인 모안영(毛岸英), 모안청(毛岸青)과 함께 모택동의 큰 동생 모택민의 집에 가서 살게 되였다. 거기서 모안룡은 상해지하당이 령도하는 대동유치원에 다녔다. 1931년 봄에 상해지하당은 엄중한 피해를 입었다. 그리하여 모택동의 세 아들은 류랑아로 되여 상해의 거리에 떠돌아다니게 되였다. 그때 모안영, 모안청은 동생 모안룡을 잃었는데 지금까지 모안룡의 생사는 수수께끼로 되고있다.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설도 있고 세균성리질로 상해광자병원(지금의 서금병원)에서 사망되였다는 설도 있다. 텔레비죤극 《모안영》을 촬영하는 현장에서 총고문이 취재를 접수할 때 이렇게 말했다. “병원의 한 간호사가 모안영을 보고 모안영의 동생이 독성리질에 걸려 사망되였다고 했습니다. 후에 모안청의 부인 소화가 그 병원에 와서 모안룡의 병력서를 찾았는데 없었다고 합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1931년 5월말이거나 6월초의 어느날에 모안룡은 갑자기 설사를 하고 고열이 났다. 그래서 보육원의 진봉영(리구실렬사의 미망인)이 모안룡을 안고 부근의 광자병원으로 달려가 구급을 받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그날밤에 사망되였다. 유치원에서 행정사무사업을 책임진 요아부가 관을 사서 장례식을 치뤘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광서에서 모안룡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중공지하조직에서는 전문 사람을 파견하여 찾아보았으나 결과를 보지 못했다. 20세기 80년대에 저명한 특형배우 고월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그가 모택동이 잃어버린 셋째아들 모안룡이 아닐가 하고 추측했다. 《모택동의 아들 모안룡》이라는 책에는 사회상에 생사불명이라고 전해졌던 모안룡이 세상에 살아있다고 했다. 모안룡은 어느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가 후에 강남항일부대에 참가했으며 항미원조전쟁까지 나갔다고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 모택동이 모안룡이라는 신분을 승인하지 말라고 부탁했다는것이다. 이에 대해 모안영의 부인 류사제는 믿을만한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134    중국공산당력사에서 첫번째 잠복영웅은 누구인가 댓글:  조회:5366  추천:1  2015-12-06
중국공산당력사에서 첫번째 잠복영웅은 누구인가   (번역)     집정지위를 얻기전에 특수한 환경때문에 중국공산당 당원은 공개신분의 당원과 비공개신분의 비밀당원으로 나뉘였다. 비밀당원중에는 “룡담3걸(龙潭三杰)”로 불리운 리극농(李克农), 전장비(钱壮飞), 호저(胡底), “후룡담3걸(后龙潭三杰)”로 불리운 웅향휘(熊向晖), 신건(申健), 진충경(陈忠经), 그리고 백숭희신변의 기요비서 사화갱(谢和赓) 등이였다. 이런 비밀당원들은 모두 상급과 단선련계를 가지고있었기에 병사했거나 희생되였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중국공산당 당원인줄 모르고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중국공산당력사에서 첫번째 비밀당원이였는가? 그가 바로 구군벌의 진영에서부터 혁명의 길을 걸어온 주덕이였다. 주덕은 중국공산당의 비밀전선에서 싸운 첫번째 “잠복영웅”이였다. 소년시절에 서당에서 글을 배운 주덕은 20세에 성도의 고등사범에 들어갔다. 그후 운남강무당에 들어가 반청혁명(反清革命)의 동맹회와 신해혁명에 참가했다. 운남강무당을 졸업한후 주덕은 운남군에 참군하여 소위 패장으로부터 시작해 원세개토벌과 군벌혼전을 겪으면서 소장(少将) 려장으로까지 승직했다. 그는 다른 장군들과 달리 무력람용과 권력다툼에 대해 염오했다. 그는 많은 청년군관과 학생들을 집에 끌어들이며 “신청년” 등 진보잡지를 애독했다. 로씨야의 10월혁명과 “5.4”운동의 영향을 받은 주덕은 낡은 군사투쟁의 방법으로는 혁명의 목적에 도달할수 없다는것을 의식했다. 1921년에 주덕은 주동적으로 월수입이 매우 높은 군부를 떠나 중국공산당을 찾기 시작했다. 1922년 7월초에 주덕은 북경의 《민보》에서 주필을 맡고있는 친구 손병문(孙炳文)을 찾아갔다. 손병문은 공산당이 상해에서 창건된 정황에 대해 주덕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해 8월중순에 주덕과 손병문은 함께 상해로 왔다. 그들은 상해에서 손중산을 만난 혁명을 군벌과 동맹을 맺는데 의거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며칠후 주덕은 손병문을 따라 상해의 갑북에 있는 당중앙거처에 찾아가 중공중앙집행위원회 주임직을 맡고있는 진독수를 만났다. 주덕은 자신의 경력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으며 공산당에 가입하겟다고 신청했다. 그러나 진독수는 주덕처럼 구군벌에 있던 사람이 입당하려면 더 고찰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게다가 주덕은 손병문과 진독수에게 입당소개인이 되여달라고 하지 않았기에 진독수는 주덕의 입당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주덕은 실망했다. 그러나 주덕은 공산당에 가입하려는 욕망이 강렬했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1922년 9월에 주덕은 주은래를 찾아 입당신청을 제출했는데 주은래도 주덕의 입당요구에 대해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주덕은 밤을 지새우며 주은래에게 자신의 신분, 경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공산당에 가입하려는 의지를 밝혔다. 이렇게 되여 주은래는 주덕에 대해 깊이 료해하게 되였다. 2개월후에 주은래와 장신부는 함께 주덕의 입당소개인으로 되였다. 주덕은 로동자가 아니였기에 당의 장정규정에 의해 그의 입당은 반드시 중앙집행위원회의 심사통과를 거쳐야 정식당원으로 될수 있었다. 주덕이 당의 고험을 통과했고 주은래와 장신부의 소개가 있었기때문에 진독수는 당중앙을 대표하여 주덕의 입당신청을 비준했다. 그러나 주덕의 당적은 대외에 비밀로 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진독수가 심사숙고한 후에 내린 결정이였다. 당시의 환경에서 공산당은 어렵게 구군대에서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을 당원으로 접수했는데 이는 군중들에게 불량한 영향을 끼칠수도 있었다. 동시에 주덕의 당적이 대외에 공개되지 않는것이 혁명에 유리하다고 판단되였기에 진독수는 주덕을 “비밀당원”으로 두기로 결정했다. 이는 진독수가 내놓은 우리 당의 최초의 시도였는데 그후의 중국공산당력사에서 “비밀당원”을 받아들이는데 선례를 만들어놓았다. 이런 “비밀당원”들은 모두 혁명실천중에서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수 없는 작용을 발휘했다. 이처럼 주덕의 당적은 최초에 비밀이였다. 이는 당의 사업에 유리했으며 군군벌을 우리편으로 끌어오는데 중대한 공헌을 할수 있는 보장이 되였다. 북벌전쟁이 시작된후 1926년 7월에 주덕은 쏘련에서 귀국했다. 주덕이 상해에 도착하자 진독수가 상해 갑북구의 당중앙거처에서 그를 회견했다. 진독수는 주덕을 비밀당원의 신분으로 사천군벌 양삼(杨森)한테 파견하여 양삼을 설복하여 북벌을 지원할수 있게 하라고 했다. 그와 동시에 진독수는 주덕더러 운남군과 옛관계를 리용하여 군벌 손전방(孙传芳)의 실력을 조사하라고 했다. 그런 임무를 맡고 사천으로 간 주덕은 원래 오패부와 결탁하려고 했던 양삼을 설복하여 기치를 바꾸게 했다. 양삼은 그해 11월 2일에 정식으로 국민혁명군 제22군 군장직을 맡았다. 그 시기에 주덕은 공개적인 당원의 신분으로 당대표직을 맡았다. 구군벌들속에서 비밀사업을 한 이 경력은 주덕으로 하여금 우리 당의 가장 이른 “잠복영웅”으로 되게 했다. 1927년의 남창봉기시 전군(滇军)교육퇀 1부를 거느리고 참가했는데 제9군 부군장을 맡았다. 봉기군이 호산으로의 남정이 실패했을 때 주덕은 위험한 정황에서 근 천여명의 너머지 “철군”을 거느리고 광동서북부와 호남을 거쳐 1928년 4월에 정강산에 올라 모택동과 회합했다. 모택동과 주덕은 홍4군을 건립하고 주덕은 군장을 맡았는데 전국에서 첫번째 홍군주력의 최고군사지휘관이였다. 후에 중국로농홍군 총사령, 팔로군 총지휘(후에 제18집단군으로 개칭), 중국인민행방군 총사령 등 인민군대의 최고령도직무를 맡았다. 주덕은 인민군대의 창건자와 령도자의 한분이며 당과 국가의 주요령도자의 한분이며 중화인민공화국 10대원수의 첫자리에 계신 분이다.      
133    1300년동안 완정하게 보존된 무측천릉묘의 비밀 댓글:  조회:5900  추천:1  2015-11-29
1300년동안 완정하게 보존된 무측천릉묘의 비밀   (번역)     만약 세계에서 어느 황제의 릉묘를 파헤치기 가장 어려운가고 묻는다면 조금의 의심도 없이 무측천의 “만년수역(万年寿域)—건릉(乾陵)”이라고 대답해야 정답일것이다. 무측천의 릉묘는 랭병기(冷兵器)시대의 도검(刀剑)에도 시달렸고 열병기(热兵器)시대의 기관총과 대포의 세례도 받았다. 1300여년을 거치면서 건릉을 파헤치려고 했던 도굴범(盗墓贼)중 이름이 있는 자만 해도 17명이상이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무제의 무릉(茂陵)이 도굴당해 텅비였고 당태종의 소릉(昭陵)도 모두 파헤쳐졌다. 강희황제의 릉묘는 더 험하게 당해 뼈마저 완정하게 보존되지 못했다. 그런데 왜서 유독 무측천의 건릉만이 완정하게 보존되였을가? 이 일은 건릉을 수건할 때부터 말해야 할것이다. 건릉은 기원 684년에 수건하기 시작하여 23년만에 공사가 기본상 완공되였다. 건릉은 섬서성 건현성 북쪽 6킬로메터 되는 량산에 자리잡고있는데 서안과 76킬로메터 떨어져있다. 량산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석회암질의 산봉이다. 3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는데 최고봉인 북봉은 해발 1047.3메터이다. 동서가 서로 마주서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내두산(奶头山)”이라고 불렀다. 건릉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량산은 녀성이 반듯이 누워있는 형상인데 북봉은 머리같고 남이봉은 가슴같다. 사람들은 이를 녀황제 무측천을 상징하는 절묘한 형상이라고 말했다. 당나라의 풍수선생은 량산이 녀주인에게 유리하다고 인정했다. 때문에 무측천은 량산을 당고종과 자신이 죽은후에 누워있을 “만년수성”으로 선택했다. 건릉을 수건할 때는 당나라가 흥했고 국력이 강했기때문에 릉원규모가 방대했고 건축이 웅위롭고 아름다와 “력대황제의 릉묘중 최고”라고 불리웠다. 당조초기에 당태종 리세민은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파헤쳐지지 않은 무덤이 없었다는 력사교훈을 받아들여 그와 장손황후의 소릉(昭陵)부터 시작하여 “인산위릉(因山为陵)”의 장례제도를 내왔다. 당시의 저명한 예술대사 염립덕, 염립본 형제가 건축군과 조각군을 결합하여 설계한 릉원이 끝없이 이어진 산우에 기복을 이루며 놓여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룡이 누워있고 봉황새가 날아오르는듯한 형상이다. 당고종과 무측천의 건릉(乾陵)은 점차 소릉(昭陵)의 모양을 갖추었다. 당조의 도읍 장안의 격식으로 건설된 릉원은 황성(皇城), 궁성(宫城), 외곽성(外郭城)으로 나늬였는데 남북주축선은 4.9킬로메터에 달한다. 다년간의 탐측과 고찰을 거쳐 릉원안의 보물은 적어도 500톤에 달할것으로 문물전문가가 예측했다. 전후통로의 량측에 각각 4개의 석굴이 있는데 석굴안에는 당조흥성시기의 가장 가치있는 보물이 가득 차있다. 금강벽으로 통해있는 근 100메터되는 통로량측에는 각종 금은제기(金银祭器)가 빼곡이 배렬되여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세인들의 흥미를 끄는것은 최상급 국보(国宝)인 “란정서(兰亭序)”이다. 건릉일대의 민간에는 일찍 “란정서”가 무측천의 묘지에 묻혀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상습도굴범, 변경을 지키는 총독, 토비, 군벌 심지어 농민봉기군까지 건릉에 수많은 금은보화가 묻혀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삽과 괭이로 묘지를 파혜쳤다. 무측천이 건릉에 누워있은 시각부터 량산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제일 처음 건릉을 찾아온것은 당조말기의 반란대군 령수 황소였다. 이 소금장사군은 60만대군을 거느리고 장안을 공격한후 한바탕 통쾌하게 불사르고 략탈하는것으로 토비근성을 만족시키고 나서 갑자기 할일이 없는것을 발견했다. 이때 누군가 량산의 서측황토지하에 대량의 자갈이 매장되여있다고 아뢰였다. 이 소식은 당릉중 가장 부유한 건릉의 입구가 량산의 서측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것을 암시했다. 황소는 크게 기뻐서 즉시 40만병사들을 동원하여 량산에 올라 서측부터 파헤치기 시작했다. 병사들 대부분이 농민출신이였기에 삽과 괭이를 쓰는 솜씨가 매우 능숙했다. 얼마 안되여 절반의 량산을 파헤쳐 40메터 깊이의 “황소도랑”을 남겼지만 건릉의 입구를 찾지 못했다. 그후 당왕조군이 장안을 공격하자 황소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채 도망쳤다. 자칭 서생이라고 우쭐댔던 황소는 우둔하기 그지없어 건릉이 북쪽에 자리잡고 남쪽을 향했다는것을 알지 못했다. 당조황제는 고의적으로 시공할 때 생긴 자갈을 릉원에서 300여메터밖에 있는 곳에 매장했다. 때문에 황소는 속임수에 들어 다른 방향으로 파헤쳤던것이다. 건릉에 죄악의 손을 뻗친 두번째 인물은 5대시기의 요주절도사 온도였다. 온도는 당왕조의 황제릉묘를 파헤치려고 태여난것 같았다. 그는 건릉전에 이미 17개의 당나라의 황제릉묘를 파헤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건릉을 파헤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리상은 파멸되였다. 그는 황소처럼 수만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시퍼런 대낮에 건릉을 파헤치려고 했다. 그러나 산에 오르면 폭우가 내리고 산에서 내려오면 날이 개이군 했다. 이렇게 세번이나 반복되자 온도는 무슨 일인지 도무지 알수 없었다. 그는 하느님이 노한것이라고 생각되여 다시는 건릉을 파헤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렇게 되여 건릉은 두번째로 재난을 면했다. 가장 위험한것은 세번째였다. 세번째로 출동한것은 40만대군보다 더 강한 현대화로 재편성한 한개 사였다. 또한 도구도 삽과 괭이가 아니라 바위도 가를수 있는 기관총과 대포였다.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출동한 도굴주범은 바로 민국시기의 국민당 장군 손련중(孙连仲)이였다. 부하들을 거느리고 량산에 오른 손련중은 손전영(孙殿英)이 자희태후와 건륭황제묘를 폭발시킨것을 본받아서 군사훈련을 한다는 명의로 작탄을 묻어 건릉을 폭발시켜려고 했다. 그러나 폭발준비를 하고있을 때 갑자기 검은 연기같은것이 몰려와 룡권풍을 이루더니 흙먼지가 휘몰아쳐 삽시에 온천지가 어두컴컴해졌다. 돌이 굴러떨어지고 모래가 날려 섬서성에서 온 7명의 병사가 당장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버렸다. 그 바람에 다른 병사들은 목숨을 구하겠다고 산아래로 도망쳤다. 이렇게 되여 건릉은 마지막 재난을 면하게 되였다. 건릉은 당조의 제3대 황제인 고종 리치와 그의 황후 무측천을 합장한 묘이다. 건릉릉원의 주작문(朱雀门)밖의 동서량측에는 61존석인상(61尊石人像)이 분포되여있다. 61존석인상의 크기는 1.50~1.77메터로서 진짜사람과 비슷한데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번상(蕃像)” 또는 “빈왕상(宾王像)”이라고 부른다. 건릉에 현존하는 번신상은 모두 61존인데 동쪽에 29존이 있고 서쪽에 32존이 있다. 이렇게 대칭되지 않았기에 학자들은 번신상이 모두 61존만이 아닐것이라고 의심했다. 과연 연구일군들은 건등의 동쪽릉원구에서 높이가 2.45메터이고 너비가 0.86메터인 미완성석재를 발견했다. 후에 또 그쪽에서 사람형태가 형성된 다른 하나의 반제품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부근의 촌민들이 미완성석상을 발견했다. 이 발견으로 하여 학자들은 건릉의 번신상이 원래는 64존이였을것이라고 판단했다. 건릉의 번신상은 명조중후기에 엄중하게 파손되여 대부분 머리가 없어졌다. 그리고 본세기초에 모든 번신상의 머리가 사라졌다. 명조 가정(嘉靖) 34년(기원 1555년 1월 23일)에 섬서성 화현일대에서 8~11급의 강렬한 지진이 발생되였다. 사람들이 달콤하게 잠을 자고있던 밤중에 지진이 일어났기때문에 그번 지진에 80여만명이 사망되였다. 화현은 건릉에서 100여킬로메터밖에 안되여 진중지대(震中地带)에 속했기에 건릉은 훼멸성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것이 력사상 저명한 관중대지진(关中大地震)이다. 전문가들은 관중대지진이 번신상(番臣像)의 머리를  끊어지게 한 원인중의 하나라고 단정했다. 번신상뿐만아니라 건릉의 많은 석상석마가 훼손된 부분도 모두 머리부분이였기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석상의 경부가  취약한 외에 다른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석상의 재질(材质)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조각에 채용된 석료(石料)에는 일부 흠이 있었다. 즉 석료에서 일부 옅은색의 선을 볼수 있었다. 돌이 손상을 받을 때 이런 곳이 가장 쉽게 갈라지게 된다. 연구일군의 판단에 의하면 61존번신상(尊番臣像)의 일부분이 그번 관중대지진에 훼손되였다. 나머지 석상은 500~600년전의 명조말기에 발생된 여러차례의 전쟁에서 훼손되였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이 61존번신상의 머리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수 없지만 소매폭이 몸에 딱붙는 옷, 너른 허리띠, 짧은 가죽신, 두발이 마치 살아있는것처럼 생생한 형상은 마치 조정에서 번신(蕃臣)들이 시립하고있는 정경을 보는듯 하다. 이런 정경은 우리에게 당나라의 태평성세를 상상하게 한다.    
132    등소평이 사망전에 한 마지막 한마디 말 댓글:  조회:6382  추천:0  2015-11-22
등소평이 사망전에 한 마지막 한마디 말   (번역)   1994년 음력설이후 등소평은 다시 공개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해외매체들은 다투어 등소평의 병이 위급하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등소평은 북경의 4방형(四方形)자택에서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1997년 2월에 등소평의 병이 위급했다. 의사의 해석에 따르면 등소평의 심장, 간장, 비장은 모두 건강하고 로인에게서 흔히 볼수 있는 당뇨병이거나 전위선염도 없었다. 치명적인 문제는 신경계통에서 발생되였다. 이것은 의학상에서 파킨슨(帕金森)합병증이라고 하는 일종 완치할수 없는 질병이였다. 1996년 12월의 어느 아침에 일어난 등소평은 호흡이 곤난한것을 느꼈다. 그리고 움직이기도 힘들었고 음식도 넘기지 못했다. 신변의 의사들은 이런 국면을 통제할수 없어 등소평을 변원으로 호송하는수밖에 없었다. 그해 양력설에 적은 눈이 내려 북경은 어디라없이 은빛세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301병원은 명절기분이라군 조금도 찾아볼수 없었다. 등소평의 병실은 병원마당의 남단에 있는 작은 청사의 꼭대기층에 자리잡고있었다. 병상주위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서있었고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쉴새없이 드나들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담당의사 황림(黄琳)과 등소평만이 함께 있었는데 등소평은 이따금 정신을 집중하여 텔레비죤기록편을 시청했다. 그럴 때면 얼마간씩 정신상태가 좋아진것 같았다. 한번은 또 텔레비죤기록편을 시청했는데 등소평은 텔레비죤화면에서 멀리 걸어오는 사람을 똑똑히 분별하지 못했다. “저기 걸어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등소평의 물음에 황림은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당신입니다. 좀 찬찬히 보십시오.” 그 사람이 가까이 오자 등소평은 자신이라는것을 알아보고 가볍게 입술을 움직이며 웃었다. 황림은 “이 기록편의 제목은 《등소평》인데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방금 제작한것입니다. 모두 12부랍니다”라고 알려주었다. 등소평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한부 한부씩 감상했다. 황림은 등소평이 청각기능이 감퇴되여 잘 듣지 못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그는 등소평의 귀가에 입을 대고 텔레비죤기록편에서 등소평을 찬송하는 말을 한구절 한구절씩 중복하여 말해주군 했다. 황림은 갑자기 등소평의 얼굴에 한가닥 부끄러워하는 표정이 떠오른것을 발견했다. 등소평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병마의 고통속에 시달렸는데 이런 표정을 짓는것은 매우 힘든 일이였다. “그분은 매우 굳센 분이였습니다.” 황림은 나중에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분이 림종전에 고통스러워하는것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다디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그분은 매우 평온했습니다. 저는 그분도 자신의 병세가 매우 심해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알고있으리라고 느꼈습니다. 그분은 1992년에 그토록 많은 말을 했는데 지금 다시 전국인민에게 무슨 말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분에게 무슨 말을 하고싶은가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몇주일동안 그분은 다시 그런 화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저의 물음에 가볍게 한마디 대답했습니다.” 그때 등소평이 사망하기전에 마지막으로 남긴말은 다음과 같은것이였다. “나는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했어.” 1997년 2월 7일은 바로 음력 정월 초하루였다. 등소평의 병세는 점점 위중해졌다. 경위비서 장보충은 새해를 축하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라 모두를 한곳에 모이게 했다. 모두들 술잔을 들었지만 눈물만 흘릴뿐 한마디말도 하지 못했다. “새해 의학계에서 기적을 창조했으면 좋겠는데…” 모두들 그렇게 기원했지만 애석하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93세의 등소평은 12일을 더 지탱하다가 1997년 2월 19일에 호흡기능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의기에 의해서만 생명을 유지할수 있었다. 그날 21시 08분에 위인은 심장의 고동을 멈추었다.     
131    모택동이 당적을 제명당했던 원인 댓글:  조회:4390  추천:0  2015-11-15
모택동이 당적을 제명당했던 원인   (번역)     “좌경”로선을 집행한 호남특위에서는 특위군사부장 주로(周鲁)를 강서성 녕강현 롱시의 룡강서원에 파견하여 모택동의 행동이 너무 우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리하여 전선위원회를 취소했는데 이는 모택동의 전선위원회 서기직을 제명한것과 같았다. 더욱 놀라운것은 주로가 모택동의 당적을 제명했다고 선포한것이다. 《모택동년보》(상권)과 중국청년출판사에서 출판한 《모택동의 길》의 기재에 따르면 1928년 3월 상순은 바로 모택동이 로농혁명군을 거느리고 정강산혁명근거지를 세웠을 때였다. 당시 모택동은 중공중앙정치국 후보위원이고 중국공산당 제1차대표대회 대표였으며 중국공산당의 창시인중의 한 사람이였다. 주로는 당시 중공호남특위 군사부장, 성군사위원회 특파원직을 맡고있었다. 그는 호남특위의 대표로 정강산으로 갔는데 무슨 권리가 있어 모택동의 당적을 제명했겠는가? 주로는 자신이 중공중앙문건을 보았는데 이 문건에 모택동의 당적을 제명할데 대한 중공중앙의 결정이 똑똑히 씌여있었다고 하면서 자신은 다만 당중앙의 결정을 집행했을뿐이라고 말했다. 중공중앙에서는 어느때에 모택동의 당적을 제명하기로 결정했는가?  1927년 11월 9일부터 10일까지 중공중앙림시정치국에서는 상해에서 확대회의를 열었는데 구추백(瞿秋白)이 회의를 주관했다. 그번 회의는 구추백의 “좌경”망동주의가 고봉에 달한 회의였다. 회의에서는 모택동이 장사진공을 포기하고 정강산으로 들어간것은 중앙의 전술전략을 완전히 위반한것이며 단순한 군사투기라고 호되게 비판했다. 그리하여 《정치규률결의안》을 내왔는데 그중 모택동의 처분에 대해 이렇게 썼다. “호남성위 위원 팽공달(彭公达), 모택동(毛泽东), 역례용(易礼容), 하명한(夏明翰)의 현임 성위위원자격을 반드시 취소하고 팽공달동지의 중공중앙정치국 후보위원자격을 취소함과 동시에 당내에 두고서 반년동안 관찰하는 처분을 주어야 한다. 모택동동지는 8.7긴급회의후 중앙에서 호남성위를 개편해 중앙의 추수폭동정책을 집행하라고 파견한 특파원이기에 사실상에서 호남성위중심이다. 따라서 호남성위에서 범한 착오에 대해 모택동동지는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 이에 응당 중앙림시정치국 후보위원직에서 해임시켜야 한다.” 모택동에 대한 처분결정은 중공중앙에서 1927년 11월 9일부터 10일까지 사이에 진행된것인데 무엇때문에 1928년 3월 상순에야 주로에 의해 전달된것일가? 처분결정은 모택동의 중앙림시정치국후보위원의 직무를 해직시킨것인데 주로는 왜서 모택동의 당적을 제명했다고 선포했을가?  그 원인은 주요하게 다음과 같다. 당시의 중공중앙문건이 비밀지하교통원을 통해 전달되였는데 상해에서부터 호남으로 전달되는 과정이 비교적 길었다. 녕강에 도착하려면 백색구역을 지나야 했기때문에 주로는 중공중앙문건을 몸에 지니고 갈수 없어 기억에 의해 전달했다. 그리하여 모택동의 중앙림시정치국후보위원회의 직무를 해직한다는 결정을 모택동의 당적을 제명했다고 잘못 전했다. 1927년 4월 상순에 모택동이 부대를 거느리고 호남에 도착했을 때 호남특위에서는 이 중공중앙문건을 보았다. 그리하여  주로가 중앙문건의 결정을 잘못 전달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1956년 9월 10일에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제8차대표대회예비회의 제2차전체회의에서 상술한 일에 대해 언급할 때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그것은 헛소문이라고 했습니다. 정치국에서 제명당한것은 당적을 제명당한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아, 그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습니다. 그 때 나에게 “총자루주의”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그것은 내가 “총에서 정권이 나온다”는 한마디 말을 했기때문이였습니다. 그들은 ‘정권이 어떻게 총에서 나온단 말입니까? 맑스도 말한적이 없고 책에도 그런 말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착오를 범했다면서 나에게 “총자루주의”라는 별명을 붙였지요. 확실히 맑스는 그런 말을 한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맑스는 “무장으로 정권을 탈취할수 있다”고 말한적이 있습니다. 내가 언급했던 그 말의 뜻도 무장으로 정권을 탈취한다는것이였지 그 무슨 보총이나 기관총안에서 정권이 쑥 빠져나온다는 말이 아니였습니다.” 상술한 정황으로 보아 모택동의 중앙정치국후보위원과 전선위원회 위원직무를 해직시킨것은 모택동이 일으킨 추수봉기가 중앙위원회의 비준을 거치지 않은 문제때문이 아니라 구추백의 “좌경”착오로 인해 조성된 위해의 결과라는것을 알수 있다.  
130    히틀러와 함께 소문난 독재자 무쏠리니 댓글:  조회:4488  추천:0  2015-11-08
히틀러와 함께 소문난 독재자 무쏠리니     이딸리아 파쑈당의 괴수이고 독재자이며 제2차세계대전의 원흉인 베니토 무쏠리니(贝尼托·墨索里尼)는 1883년 7월 29일에 이딸리아의 작은 진에서 태여났다. 학교에 다닐 때 무쏠리니는 말썽꾸레기였다. 툭하면 친구들과 싸웠고 선생에게도 대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기에 공부를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집중할줄도 알아서 사범학교를 나왔다. 1919년 3월 23일에 무쏠리니는 밀라노(米兰)에서 “파쑈(法西斯)전투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1921년에 이 조직을 “이딸리아국가파쑈당”이라고 고치고 이 당의 령수로 되였다. 1922년 10월 28일에 무쏠리니는 파쑈당의 군사조직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폭동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무쏠리니는 그해 10월 30일에 내각총리로 되였다. 세계 최초의 파쑈국가가 이딸리아에서 탄생된것이다.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维托里奥·伊曼纽尔三世)는 이름뿐이고 실권은 무쏠리니에게 있었다. 무쏠리니는 정권을 잡은 직후 의회를 위협해서 법률을 독자적으로 개정할 권한을 가짐으로써 령수가 되였다. 이듬해에는 “선거결과 가장 많이 득표한 정당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한다”는 선거법을 만들어 파쑈당이 영구적으로 집권할 토대를 마련했다. 군대와 경찰간부는 파쑈들로 채워졌다. 집권이전과 마찬가지로 파쑈행동대가 날뛰며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사나 사회주의자들을 습격했는데 징역중이던 흉악범들중에서 행동대 대장들을 특별채용했다. 무쏠리니는 “사납고 잔인한 자들이 좋다…불굴의 기백을 가진 자들! 범죄자들중에 쓸만한 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1924년 5월에 행동대가 정권의 비리를 고발한 사회당의 마테오티를 암살하자 맹렬한 반정부운동이 벌어졌는데 무쏠리니는 언론을 검열하고 사회주의자들을 무차별 검거함으로써 대응했다. 또한 1927년까지 지방자치제를 없애며 파쑈당외의 모든 정당을 페지하는 일련의 조치로 명실공히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이딸리아파쑈은 같은 전체주의로 분류되는 독일의 나치스주의나 구쏘련의 스딸린주의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무쏠리니의 파쑈당은 아돌프 히틀러(阿道夫·希特勒)의 나치스(纳粹)당이나 쓰딸린의 쏘련공산당처럼 국가우에 군림하는 권력집단이 아니였고 국민의 사상을 개조하며 “열성집단”을 박멸한다는 목표를 추진하지도 못했다. 무쏠리니의 집권을 도와준 자본가들과 국가관료들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막강한 힘을 유지했으며 이름뿐이라 해도 국왕의 대권도 유지되였다. 이들은 21년후에 결국 무쏠리니를 타도해버렸다. 무쏠리니의 권력은 화려하고 자극적인 볼거리로 유지되였다. 그는 로마식의 경례를 했으며 장교출신이 아니였음에도 원수군복을 입고다녔다. 그는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유의 웅변술로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리고 해외원정으로 그 허풍을 조금이라도 실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국제련맹탈퇴를 불사하며 1935년에 에티오피아를 침략하고 1939년에 알바니아도 병합했다. 그러나 이딸리아군대의 허약체질은 개선되지 않아서 거의 두손을 들고있었던 알바니아를 점령하는데도 한껏 힘이 들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된후에는 독일에 압도당하고있던 프랑스와 힘들게 싸웠고 그리스와 애급을 침략하다가 도리여 반격당해 독일군의 힘을 빌리는 치욕을 겪었다. 히틀러는 권력을 잡으며 무쏠리니를 많이 본받았으나 얼마후에는 히틀러가 무쏠리니를 아래사람 대한듯하는 관계가 되였다. 독일과 이딸리아의 국력차이와 나치스와 파쑈의 국민장악력차이때문이였다. 히틀러는 어려움에 부닥친 무쏠리니를 여러번 도와주었으나 1939년의 “강철협정”에 명시된 조항에도 불구하고 타국과 전쟁을 벌릴 때 무쏠리니와 협의는커녕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전쟁이 계속되며 히틀러가 무쏠리니에게 바라는것은 지중해쪽에서 련합군을 막는 방패막이와 “총알받이”에 지나지 않는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무쏠리니는 리해관계가 전혀없는 쏘련전선에 병력을 보내라는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이때문에 10만명의 이딸리아인이 얼어붙은 땅에서 쓰러져갔다. 이렇게 되자 “공연히 히틀러의 전쟁에 말려들어 막강한 미국, 영국, 쏘련과 적이 되면서 실제리익은 전혀 챙기지 못하고있다”는 불만이 높아져 갔다. 화려한 연극도 하루 이틀이지 황제놀음과 호언장담도 점점 싫증이 났다. 1943년에 “비밀병기로 적들을 끝장낼테니 두고 보라”는 무쏠리니의 말을 비웃듯이 시칠리아섬(西西里岛)에 련합군이 상륙하고 로마(罗马)에 폭탄이 떨어지자 이딸리아의 파쑈당중에서 배반자가 나왔다. 1943년 7월 24일에 파쑈평의회에서 측근이던 디노 그란디와 그의 사위 치아노 등이 앞장서서 무쏠리니를 당수뇌에서 끌어내렸다. 그 다음날에는 이딸리아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쏠리니의 수상직을 해임했다. 그리고 그를 체포하여 은밀한 곳에 가둬버렸다. 21년이나 집권하며 그토록 많은 군중을 열광시켰던 무쏠리니였지만 권력을 잃은 그를 위해 나서는 이딸리아인은 아무도 없었다. 나선 쪽은 오히려 독일인이였다. 이딸리아가 련합군쪽으로 돌아서면 곤난하다고 여긴 히틀러()는 특공대를 보내 무쏠리니를 구출했다. 그후 무쏠리니는 약 20개월정도 북이딸리아의 살로에서 “살로공화국”을 다스렸다. 하지만 그것은 허울뿐이였으며 대부분의 결정은 독일이 내렸다. 그랬지만 무쏠리니는 자신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배신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배신자들을 처단할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했다. 독일은 이를 허락했다. 무쏠리니를 배신한 자들중에는 그의 사위 치아노백작(齐亚诺伯爵)도 있었다. 무쏠리니의 딸 에다(埃达)는 어느 무도회에서 젊고 전도가 유망한 외교관 치아노백작(齐亚诺伯爵)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1930년에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일순간에 전 이딸리아가 가장 부러워하는 한쌍의 부부가 되였다. 결혼후 에다는 남편 치아노를 따라 중국의 상해로 들어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안되여 에다는 남편이 밖에서 외도하는것을 발견했다. 에다는 “치아노가 아버지의 권력을 리용하려고 나와 결혼한것이 아닐가”하고 몹시 상심했다. 혼인위기가 발생되였을 때 상해의 국세가 악화되였다. 에다는 남편을 따라 이딸리아로 돌아왔다. 에다는 치아노가 비록 자신을 배신한 적이 있었지만 부부의 정을 생각해서 치아노를 살려달라고 아버지에게 애원했다. 무쏠리니는 딸을 가장 사랑했으나 사위만은 용서할수 없었다. 무쏠리는 딸의 눈물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위 치아노를 처형했다. 남편이 죽음을 당하자 에다는 두번 다시 아버지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무쏠리니의 안해 라켈레도 그를 떠나버렸다. 늙고 지친 허수아비독재자 무쏠리니에게는 오래동안 그만을 사랑해온 련인 클라라 페타치만이 위로가 되였다. 1945년 4월에 련합군과 남부 이딸리아의 유격대는 힘을 합쳐 북진했다. 무쏠리니는 스위스로 넘어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에스빠냐로 탈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알프스산맥의 가파로운 길에서 유격대에게 잡히고말았다. 그들은 메제그라라는 마을에서 무쏠리니를 처형했다. 전하는 말로는 유격대 대장이 권총을 겨누자 무쏠리니는 “여기, 가슴을 쏴!”라고 외치며 외투를 열어젖혔고 련인 페타치가 그를 몸으로 막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시체는 밀라노로 보내져 로레타광장(洛雷托广场)에 거꾸로 매달렸다. 이렇게 히틀러에 버금가는 독재자는 죄많은 일생을 마쳤다. 무쏠리니가 처음 파쑈국가를 세웠지만 오늘날에 파쑈이라고 하면 그보다는 히틀러를 먼저 떠올린다. 그가 군국주의를 내세웠지만 세계대전에는 소극적이였고 인종청소를 부르짖거나 대량학살을 벌리지도 않았기때문일것이다. 사실 그는 현대적인 독재자보다 고대의 폭군에 가까왔다. 로마황제처럼 그도 개인숭배와 화려한 볼거리로 계급분렬이나 지역갈등을 무마시키며 군림했다. 하지만 로마와는 달리 그의 군대는 허약했고 훨씬 강한 국가들에게 둘러싸여있었다. 히틀러가 현대사를 뒤흔든 대악당이라면 무쏠리니는 어리광대에 더 가까왔다.  
129    국공쌍방은 왜서 모두 담평산을 면직시켰는가 댓글:  조회:4521  추천:1  2015-11-01
국공쌍방은 왜서 모두 담평산을 면직시켰는가   (번역)     1886년에 광동성 고명에서 출생한 담평산(谭平山)은 담언상(谭彦祥), 담명겸(谭鸣谦), 담빙삼(谭聘三)이라고도 한다. 그는 중국근대사에서 공적이 뛰여나고 영향력이 있는 민주혁명가이다. 그는 신해혁명시기에 손중산을 따라 동맹회에 가입했고 5.4운동후 진독수의 도움을 받아 광동중공지부를 건립했으며 제1차국공합작과 농민운동, 남창봉기에서 불멸의 력사공적을 남겨놓았다. 그는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중화혁명당을 조직하고 3민주의동지련합회를 창건했으며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는 또 중국공산당의 새 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였으며 민주독립과 조국의 부강을 위해 평생의 정력을 이바지했다. 특히 중국공산당의 “5..1구호”에 호응하여 새 정협을 전개하는 운동에서 그의 주장과 영향력은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와 각 민주당파들이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접수하고 새 중국의 건설을 협상하는데 적극적인 작용을 일으켰다. 제1차국공합작시기에 담평산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풍운인물이였다. 담평산은 중국공산당 당원의 신분으로 국민당에 가입한후 1924년에 열린 중국국민당제1차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상무위원으로 당선되였고 중앙조직부 부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1927년 3월에 무한국민정부 위원 겸 농민부 부장직을 맡았다. 담평산은 성심성의로 손중산의 신3민주의를 옹호했다. 그는 손중산의 국민당개조를 도와준 국민당좌파의 중요한 령도인물중의 한 사람이였다. 더욱 관건적인것은 중국공산당의 일원인 담평산이 국민당내의 실권을 장악한것이다. 그는 국민당 제1기와 제2기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과 중앙조직부 부장의 신분으로 국민당내의 좌파세력과 민주인사를 령도하여 각종 농민운동을 조직했으며 농민운동간부를 양성했다. 그는 국공량당의 합작을 기초로 한 혁명통일전선촉진과 제1차국내혁명운동의 발전을 위해 불멸의 공적을 세웠다. 제1차국내대혁명이 실패한후 담평산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8.1남창봉기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며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의 명의로 국민당중앙위원, 각 성위, 특별시 등 대표련석회의를 주최하여 선거로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를 산생시켰다. 1927년 8월 8일에 무한국민당중앙에서는 담평산의 당적을 제명하고 일제직무를 박탈한다고 선포했다. 그후 담평산은 봉기부대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1927년 11월 9일에 중국공산당은 림시정치확대회의를 열고 담평산의 당적을 제명한다고 선포했다. 국민당좌파의 령도인물인 담평산이 숙당후의 국민당우파에 의해 당적을 제명당한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그는 그와 동시에 또 중국공산당중앙에 의해 당적을 제명당했다. 그 원인은 무엇이였을가? 주은래동지는 1944년 3월에 《당의 제6차대회에 관한 연구》중에서 담평산이 당적에서 제명당한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담평산이 당적에서 제명당한것은 장국도가 남창봉기를 반대했을 때 담평산이 한 사장을 보고 ‘장국도가 만약 봉기를 반대한다면 그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말했기때문이다. 당시 나는 전적위원회 서기직을 맡고있었는데 그 사장은 장국도살해여부에 대해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당내투쟁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대답했다. 후에 누군가 이 사실을 공산국제대표에게 알려주었는데 공산국제에서는 담평산의 당적을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결정이 타당한것이 아니였다.” 만약 담평산이 장국도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말한 일로 공산국제에 의해 당적이 제명했다면 이 처벌은 너무 과중한깃이며 도리에 맞지 않는것이다. 이 보다 더욱 설복력이 있는 설법은 1927년 11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림시정치확대회의에서 확정한 《정치규률결의안》에서 찾아볼수 있다. “담평산동지는 제5차대회후 국민정부의 농정부장직을 맡았는데 남창봉기전후의 그의 행동과 주장은 당을 떠난 자유행동이였다. 무한국민당과 정부에서 공산당을 제거하려는 행동을 시작할 때 담평산은 비밀리에 등연달 등과 련계하여 중국CP를 취소하고 따로 제3당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식분자동지들에게 중앙을 반대하고 따로 제3당을 조직해야 한다고 선전했으며 당의 결의를 무시하고 중앙의 동의도 없이 왕정위(汪精卫)한테 휴가를 맡았다. 그는 휴가신청서에 농민운동이 골치거리라고 욕을 퍼부었다… 그는 구강에서 중앙과 당을 무시하고 자유로 한다는 반당분위기를 불어넣었고 남창에서 계속 제3당에 대해 선전했다… 이는 본당조직의 행동과 위반되는것이기에 반드시 당적을 제명해야 한다.” 이 재료에서 볼수 있다싶이 담평산이 중국공산당에서 제명당한 원인은 당시의 중국공산당은 그가 엄중한 기회주의와 투항주의 착오를 범했다고 인정했기때문이다. 사실상 당시의 중국공산당의 이러한 관점은 공산국제의 영향을 받은것이였다. 제1차국내대혁명이 실패한후 공산국제는 즉시 국민당의 각파는 일률로 반동파라는 착오적인 판단을 내렸다. 1928년 2월에 공산국제집행위원회에서는 제9차전체회의에서 내놓은 《중국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원래 공산당원이였던 사람(례하면 담평산 등)들이 소위 ‘진정한 공산당’, ‘로농당’이라고 하는 새당을 창건하려고 하는것은 사실상 자산계급개량주의정당을 세우려는 시도이기에 중국공산당은 반드시 그들과 무정한 투쟁을 해야 한다.” 이 관점은 직접 중국공산당에 영향을 주었다. 중국공산당 제6차대회의 결의에서는 “중앙의 11월회의와 공산국제집행위원회 제9차전체회의에서 국민당 각파에 대해 내린 결정을 찬성한다고 하면서 그들은 모두 반혁명파벌이라고 확실하게 인정했다. 이로부터 당시의 중공중앙이 담평산의 당적을 제명한것은 공산국제의 영향을 받은 좌경사상의 착오적인 후과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평정산은 국민당과 공산당에게 모두 당적에서 제명당한후 적극적으로 국민당좌파와 중국공산당과 련계를 잃은 일부의 공산당원들을 조직하여 국민당, 공산당 이외의 새로운 혁명의 길을 개척하려고 시도했다. 1928년 3월에 담평산은 상해에서 일부분 국민당좌파, 애국지식분자들과 함께 등연달 등이 발표한 《모스크바선언》에 호응하여 중화혁명당을 조직했으며 장개석을 위수로 한 국민당우파들이 손중산의 3대정책을 포기한 내막을 폭로했다. 그는 또 중국공산당이 폭력투쟁을 강조하는것을 반대했다. 때문에 중화혁명당은 사람들에게 “제3당”이라고 불리웠다. 중화혁명당은 또 《돌격》, 《등탑》 등 주간을 출판하여 중화혁명당의 주장을 선전했는데 당시의 사회에서 일정한 영향력이 있었다. 1930년 봄에 담평산과 해외에서 돌아온 등연달은 계속 국민당명칭을 사용할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분기가 있었다. 그리하여 등연달은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림시행동위원회로 고치기전에 령도기관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평산은 의연히 농공민주당의 중요창시인의 한 사람으로 되였다. 그후 담평산은 비록 “제3당”을 떠났지만 의연히 혁명을 견지하고 조국의 독립과 부강을 위해 이바지하려는 립장은 한평생 변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끈질긴 추구정신이 있었기에 담평산은 다시 중국공산당과 점점 더 가까와졌으며 결국 같은 혁명의 길을 걷게 되였다. 1949년 9월에 그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전체회의에 참가하여 전국정협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그는 또 1949년 10월 1일의 개국대전에 참가했으며 건국후 중앙인민정부 위원, 정무원 정무위원, 정무원인민감찰위원회(감찰부의 전신) 주임 등 직을 력임했다. 그리고 1954년에 제1기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제2기전국정협위원에 당선되였다. 또 1965년 2월에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 제3기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여 대만을 평화적으로 해방하기 위해 분투하자고 호소했으며 3월에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 제3기의 중앙부주석으로 당선되였다. 그해 4월 2일에 북경에서 사망되였다. 《인민정협보》      
128    연안미녀들의 운명 댓글:  조회:6389  추천:2  2015-10-25
연안미녀들의 운명 (번역)   연안의 3대 미녀배우   당년에 상해에서 연안으로 온 미녀배우가 3명이 있었는데 그녀들로는 강청(江青), 소비(苏菲), 리려련(李丽莲)이였다.   강청은 1937년 8월말에 연안에 도착하여 이듬해에 모택동과 결혼했다.   강청과 함께 연안에 온 리려련은 몸매가 늘씬하고 용모가 아름다왔다. 무도회에서 리려련은 영어로 리덕(李德)에게 인사했는데 리덕은 아름다운 녀자가 영어를 할줄 아는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리덕의 본명은 오토 브라운(奥托·布劳恩)이고 리덕은 오토 브라운의 중국이름이다. 독일사람인 리덕은 1932년봄에 공산국제의 파견을 받고 중국에 와서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군사고문을 맡았다. 리려련에게 홀딱 반한 리덕은 곧 그녀에게 청혼했고 그녀는 리덕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결혼후 그들은 늘 함께 춤추러 다니고 산보도 함께 하면서 그림자처럼 떨어질줄을 몰랐다.1939년 8월말에 공산국제의 요구에 의해 리덕은 쏘련으로 갔는데 그후부터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리려련은 해방후 전국부녀련합아동사업부와 대외련락부 부장직을 담임하다가 1965년 4월에 북경에서 사망했다.   소비(본명은 주소진-周素珍)는 1920년 5월 19일에 출생했다. 당년에 연안최고미녀라고 불리웠던 소비는 1939년 10월에 연안에 와서 로신예술학원에 들어갔는데 강청, 조단과 함께 상해무대에서 연극 《대뢰우》를 공연한적이 있었다. 그녀가 온 이튿날에 람평(蓝苹)이 그녀를 보러 왔는데 그 시기에 람평은 “강청”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옛친구는 만나자마자 서로 포응하면서 매우 반가와했다. 소비는 1940년에 미국의학박사 마해덕(马海德)과 결혼했다. 마해덕의 본명은 조지 하이더무(乔治·海德姆)이고 마해덕은 조지 하이더무의 중국이름이다. 마해덕은 문화대혁명기간에 억울하게 특무모자를 썼는데 소비도 련루되여 함께 감옥에 갇혀 박해를 받았다. 소비는 현재 마해덕기금회 명예 리사장을 맡고있다.     연안의 3대 미녀 연안에는 3대 미녀배우외에 또 3대미녀라고 불리운 류지란(刘志兰), 포안수(浦安修), 엽군(叶群)이 있었는데 그녀들은 모두 고급지도자의 부인으로 되였다.   포안수는 1918년에 북경에서 출생했는데 청년시절에 “12.9”애국학생운동에 참가했다. 1938년 4월에 연안으로 온 포안수는 20세의 나이에 팽덕회한테 시집을 갔다. 전국이 해방된후 포안수는 경공업부로동로임사(轻工业部劳动工资司) 사장, 북경사범대학 당위 부서기 등 직을 력임했다. 1959년 7월 2일부터 8월 16일까지 열린 “려산회의”에서 팽덕회가 억울하게 반당집단의 두목으로 몰리우게 되자 포안수는 정신상에서 거의 붕괴될 지경이였다. 그녀는 늘 울면서 무섭다고 했다. 그녀는 편지를 써서 “구군대의 출신이여서 경솔하게 행동하고 모주석을 존중할줄을 모른다”고 남편 팽덕회를 원망하고 질책했다. 그녀는 북경시 당위 제2서기 류인에게 편지를 써서 평덕회와 리혼하겠다고 표시했다. 팽덕회가 서거된후에 억울한 루명을 벗고 추도회를 준비하는 기간에 팽덕회의 가족에서는 포안수가 “부인”의 신분으로 추도회에 참가하는것을 견결히 반대했다. 그러나 중공중앙에서는 리혼보고가 비준을 받지 못했다는 리유로 포안수를 팽덕회의 부인으로 인정했다. 1991년 5월 2일에 포안수는 유선암으로 북경에서 사망되였다.   류지란과 포안수는 북경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 함께 다닐 때부터 딱친구였다. 류지란은 사람들에게 공인된 “령수부인중의 최고미녀”였다. 1917년에 북경에서 출생한 그녀는 1939년 4월 16일에 좌권(左权)장군과 결혼하여 딸 좌태북(左太北)을 낳았다. 그러나 결혼한지 얼마 안되는 1942년 5월 25일에 좌권은 부대를 지휘하여 중앙기관을 엄호하다가 사망되였다. 좌권이 사망된지 6년이 지나 그녀는 31세의 나이에 재가했으며 1992년에 사망되였다.   엽군은 1942년에 연안에서 림표와 결혼했다. 엽군보다 먼저 림표와 함께 살았던 림표의 전처 장매(张梅)는 “섬북의 한송이꽃”이라고 불리우는 미녀였다. 림표는 1937년에 《항일군정대학》의 교장직을 맡고있을 때 대학의 최고미녀라고 불리우는 장매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조용한것을 좋아했던 림표는 활동적이였던 장매와 성격이 맞지 않았기때문에 1942년 1월에 쏘련에서 리혼했다. 그리고 엽군과 후반생을 같이 했다.     인생풍파를 많이 겪은 미녀 범원견 범원견(范元甄)은 강청, 엽군, 손유세(孙维世)와 함께 “연안4대미녀”로 불리웠다. 범원견은 학생운동시기에 왕명의 찬양을 한몸에 받았다. 그녀가 연안마레주의학원에 왔을 때 모택동도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였다. 모택동은 길에서 그녀를 만나면 “소범(小范), 먼저 가오”하고 길을 양보했다. 그녀의 남편 리예는 나중에 범원견의 능력은 자신보다 뛰여나다고 직접 딸에게 말했다. 1939년에 범원견은 중경팔로군판사처에서 리예(李锐)와 결혼했다. 결혼후 두 사람은 함께 연안으로 갔다. 1943년 봄에 연안에서 구조운동을 할 때 리예는 특무혐의로 보안처에 갇혔다. 범원견도 이 운동에서 구조대상이였다. 정치연구실에서 그녀를 구조하기 위해 파견된 한 간부는 그녀를 도와 구조한다는것이 함께 뜨거운 밤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후 리예와 범원견은 리혼했지만 리예가 출옥한후 재결합했다. 해방후 범원견은 중용을 받았다. 그러나 1959년에 다시 리예가 “팽덕회(彭德怀), 황극성(黄克诚), 장문천(张闻天), 주소주(周小舟) 반당집단”의 추종자로 련루되였다. 두 사람은 1961년에 또 리혼했다. 그후의 각종 운동중에 범원견은 미친듯이 리예와 친인을 적발했다. 그녀는 당시 그렇게 하는것이 당성(党性)이라고 믿었기에 인성도 몰랐다. 결국 친인들을 배반한 그녀는 뭇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후날 딸 리남앙(李南央)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1979년에 억울한 루명을 벗은후 엄마와 또 재결합을 할 생각이라고 하면서 저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좀더 오래 살면서 행복한 만년을 보내시려면 재결합을 하지 않는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범원견은 2008년에 사망되였다. 향년 87세였다. 그녀의 비극은 그 시대의 비극이였다.      
127    주덕의 부인 오약란이 사망된 내막 댓글:  조회:5693  추천:0  2015-10-24
주덕의 부인 오약란이 사망된 내막   (번역)   1903년 8월에 호남성 뢰양현의 한 소지식분자의 가정에서 출생한 오약란(伍若兰)은 192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리고 1928년 3월에 주덕과 결혼했다. 1928년 4월 하순에 주덕의 부대를 따라 정강산에 오른 오약란은 군정치부 선전부장직을 맡았다. 그녀는 선전대원들과 함께 근거지의 매 지방마다 선전표어를 붙이면서 군중들을 동원하여 혁명정권을 건립하고 토지혁명과 무장투쟁을 조직하는 일을 도왔다. 현재 정강산우의 모평촌, 당남촌 등지의 담벽에는 아직도 그녀가 석회물로 썼던 굵직한 표어가 그대로 남아있다. 당지에서는 지금도 그녀가 군중들을 도와 토지를 나누어주던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1929년 1월에 광서와 강서의 국민당이 제3차포위토벌을 실시했을 때 오약란은 전적위원회(前敌委员会)의 명령대로 홍4군주력을 따라 포위를 뚫고 산에서 내려와 강서 남부를 향해 출발했다. 그 시기에 홍4군 로농운동위원회 부녀운동회 과장직을 맡고있던 오약란은 험난한 후퇴길이였지만 앞장서서 전사들을 이끌고 선전표어를 붙이기도 하고 자체로 글을 써서 선전하기도 하면서 전체 관병들의 투지를 고무격려했다. 부대는 심오현 수하촌으로 전이할 때 국민당군에 포위되였다. 긴급한 상황에서 그녀는 군부를 엄호하기 위해 주동적으로 권총패를 거느리고 적들에게 반격을 가했다. 그러다가 불행하게도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적들의 손에 붙잡히게 되였다. 국민당군은 주덕의 부인을 포로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서 그녀를 강서성의 강주로 호송했다. 적들이 높은 벼슬과 금전으로 유혹하기도 하고 온갖 혹형을 다 가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죽어도 굴복하지 않았다. 적들은 또 주덕과 관계를 끊겠다고 선포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구슬렸다. 그러자 오약란은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해가 서쪽에서 뜨고 강물이 꺼꾸로 흐르지 않는 한 주덕과 나를 갈라놓을 꿈도 꾸지 말라”고 소리쳤다. 적들은 그녀의 입에서 한마디도 알아내지 못하자 그녀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해 그녀는 26살이였는데 세상에 사진 한장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영웅적 이야기와 그녀의 이름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을것이다.      
126    조자룡에 대한 력사적 진실 댓글:  조회:5470  추천:0  2015-10-18
조자룡에 대한 력사적 진실     《삼국연의》의 내용에는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있다. 만일 허구를 벗겨내버린다면 가장 먼저 신화에서 끌어내려질 사람은 아마도 제갈량일것이다. 그러나《삼국연의》에서 신격화된 사람은 제갈량뿐이 아니다. 두번째로 허구가 많이 포함된 사람은 아마도 관운장 즉 관우일것이다. “술이 아직 따뜻할 때 화웅을 베였다”는것은 사실이 아니였다. 또 관운장은 안량을 죽인것은 사실이였지만 문추는 죽이지 못했고 “다섯 관문을 넘으면서 여섯장수를 베였다”는것도 허구였다. 그리고 “화용도에서 조조를 붙잡았다가 풀어준 사실”도 없었다. 제갈량과 관운장 두 사람만큼은 아니지만《삼국연의》에서 신격화되였으나 진면모에 대하여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조자룡 즉 조운이다. 조운은 원래 공손찬의 부하였는데 공손찬이 류비에게 보내여 전해와 함께 원소와 싸우게 하였다. 조운은 류비에게 의탁한 이후로 천하에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장군으로 되여 여러가지 활약을 하였다. 정사에 나오는 그의 활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이다. 첫째, 장판교에서의 활약이다. 장판교에서 있은 일에 관하여 여러 사적에 있는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 《삼국지.조운전》: 선주(류비)는 조공(조조)에게 쫓겨서 당양의 장판에 이르러 처자를 버리고 남으로 도망쳤다. 조운이 류비의 어린 아들을 안았는데 바로 후주(류선)이다. 그리고 감부인을 보호하였는데 바로 후주의 모친이다. 조운의 보호로 모두 란을 벗어날수 있었다. 조운은 아문장군으로 승진하였다. ▲ 《운별전》: 운별전에 이르기를 선주가 패하자 어떤 사람이 조운은 이미 북으로 갔다고 말했다. 선주는 손으로 극을 잡고 긁으면서 “자룡은 절대 나를 버리고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조운이 도착하여 류비를 구했다. ▲ 《삼국지. 장비전》: 류표가 죽었다. 조조가 형주로 들어왔고 류비는 강남으로 도망쳤다. 조조가 추격했다. 류비는 쫓겨서 당양의 장판에 이르렀다. 류비는 조조의 병사가 다가왔다는 말을 듣고 처자를 버리고 도망쳤다. 조운이 류비의 아들과 부인을 보호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삼국연의》에 묘사된것처럼 조운은 아두(류선)를 안고 수십만 조조의 군중에서 일곱번 들어갔다 일곱번 나오면서 50여명을 베였다는 소설내용은 많이 과장되고 윤색된것임을 알수 있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실제의 상황은 조조의 군대가 몰려오자 류비는 처자식은 돌보지 못하고 주변에 있던 부하장수 수십명과 함께 먼저 도망치고 류비의 처자식을 돌보던 조운은 류선을 안고 감부인을 태워서 바로 뒤쫓아간것임을 알수 있다. 운별전에서 “조운도 곧 도착했다”는 문구가 이를 의미한다고 할것이다. 그리고 조조의 군대도 수십만대군이 아니라 하루만에 300여리를 추격해 피로해진 기병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우의 기록에 의하면 조운이 적의 목을 베였다든지 하는 점에 대하여는 전혀 기록이 없는것으로 보아서 조운이 류선을 안고 감부인을 태운채 계속 도망을 친것이지 적군의 목을 벤 전공을 세운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둘째, 손부인이 류선을 오나라로 데려가려는것을 막았다 손권은 류비가 서쪽으로 익주에 들어가려 한다는것을 알고 선박을 보내여 녀동생(손부인)을 맞이하려고 하였다. 손부인은 류비의 아들인 류선을 데리고 오나라의 친정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는데 장비, 조운이 부대를 이끌고 장강에서 손부인의 배를 막았다. 그리하여 류선을 데리고 되돌아올수 있었다.   셋째, 익주를 취할 때 조운이 두 성을 취했다 제갈량이 장비, 조운 등 장병을 이끌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백제, 강주, 강양을 평정했다. 제갈량은 관우만 남겨서 형주를 지키게 했다. 조운은 외수에서 강양, 건위를 평정했고, 장비는 파서, 덕양을 평정했다. 넷째, 공영계(空营计)이다. 조조는 쌀을 북산의 아래로 옮겼다. 황충이 병사를 이끌고 나가서 쌀을 빼앗으려고 하였는데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조운이 수십기를 이끌고 군영을 나가 살펴보았다. 마침 조조가 병사를 대거 이끌고 나와서 조운은 황급히 그들과 맞부닥쳤다. 조운은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퇴각했다. 위나라병사들은 흩어졌다 다시 모이면서 군영아래로 몰려왔다. 조운은 군영에 들어간후 대문을 크게 열고 기발을 흔들고 북을 쳤다. 위나라병사들은 조운이 매복을 두었다고 의심했다. 조운은 북소리를 크게 울리면서 강한 활로 위나라병사들을 쏘았다. 위나라병사들은 깜짝 놀라서 서로 짓밟았고 한수에 떨어져 죽는자가 많았다. 류비가 다음날 아침에 조운의 군영으로 와서 전날에 전투했던 곳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자룡은 온 몸에 담력을 지닌 장수이다”라고 칭찬했다. 다섯째, 기곡(箕谷)이다. 제갈량이 병사를 일으켰을 때 겉으로 사곡도를 통하여 공격한다고 말하고는 조운, 등지를 의군(疑军)으로 보내여 기곡을 지키게 하였다. 위나라 대장군 조진이 무리를 이끌고 이들을 상대했다. 조운, 등지는 약한 병사로 강한 적에 대응하다보니 기곡을 잃었다. 그래도 무리를 모아서 잘 지키는 바람에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 일로 조운은 진군장군으로 강등되였다. 조운이 활약한 정사상의 이 다섯번의 전투를 보면 성을 공격하여 취한것은 단 한번이다. 그것도 이미 피페해진 익주의 두 군현이다. 이때 류비는 이미 면죽을 격파했고 장비는 또 다른 로선을 따라 공격하고있어서 성 두개는 거의 거저 주운것이였다. 나머지 네번은 그저 패전하였거나 패전중에 어찌어찌하여 겨우겨우 대패를 면하게 되는 경우에 기여하거나 주요인물을 구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정도이다. 기록상 조운은 적군의 유명한 장수를 죽인 적도 없었고 군사상 요새를 공격하여 격파한 사례도 없었으며 대형전투를 승리로 이끈 적도 없었다. 조운이 비록 무장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정치적인 안목은 아주 뛰여났던것으로 보인다. 첫째, 류비가 사천(익주)을 얻은후에 성도의 전답을 여러 장수에게 분배하려고 하였다. 이때 조운은 “곽거병은 흉노를 아직 소멸시키지 못하였으므로 집안을 위하여 쓸수 없다고 한적이 있는데 지금 우리의 적은 흉노뿐이 아닌데 어찌 편안함을 구하겠습니까. 천하를 평정한 후에나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익주인민은 오래동안의 전란으로 고통을 겪어왔으니 전답을 그들에게 돌려주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고 나중에 다시 징용하여야 그들의 환심을 살것입니다. 그들이 아끼는것을 빼앗아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류비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둘째, 류비가 관우가 죽은후에 손권을 치려고 하자 익군장군이였던 조운은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적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닙니다. 만일 위나라를 먼저 멸한다면 손권은 알아서 항복할것입니다. 이제 조조는 비록 죽었지만 그 아들인 조비가 자리를 차지하고있습니다. 민심을 따라 하루빨리 관중을 취하고 황하와 위하의 상류를 차지하여 역적을 토벌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관동의 사람들도 왕의 군대를 맞이할것입니다. 위나라를 놔두고 오나라와 먼저 싸워서는 안됩니다.” 셋째, 조운의 군사물자에 여유분이 있었다. 제갈량은 장사들에게 나눠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운은 “군사적으로 실적이 없는데 어찌 하사할수 있겠습니까? 이 물건을 창고에 모두 넣어두었다가 10월이 된후 겨울에 하사품으로 내려야 합니다”고 말했다. 제갈량이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받아들였다. 이러한 기재를 보면 조운은 대국관과 정치적판단력이 뛰여났던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바로 전후좌우 4대장군(관우, 장비, 마초, 황충)에게 결핍된것이다. 그러다보니 그는 비록 군사적으로 큰 업적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큰 잘못이나 참패도 없었던것이다. 류비가 그에게 군대를 지휘하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신변에 둔것은 그의 이런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있었기때문일것이다. 어떠한 위기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랭정하게 대처하는 능력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대국관과 장기적인 정치적안목이 있어 곁에 두고 의견을 듣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성도의 무후사(武侯祠)에 가보면 순평후(顺平侯) 조운이 무관자리가 아니라, 문관자리에 앉아있는것을 볼수 있다.    
125    기념비의 시계와 같은 장개석과 리종인의 관계 댓글:  조회:5311  추천:0  2015-10-11
기념비의 시계와 같은 장개석과 리종인의 관계   (번역)     내우외환의 처지에 놓인 장개석(蒋介石)은 깊은 밤에도 잠을 이룰수 없었다. 1949년 11월 20일 오후 3시 30분에 백숭희(白崇禧)는 리종인(李宗仁)의 명령을 받고 중경에 와서 리종인이 이미 오전에 비행기를 타고 향항으로 날아갔다고 장개석에게 보고했다. 리종인이 직권도 인계하지 않고 위병이 재발했다는 리유로 병을 치료하러 향항으로 갔다는것이다. 장개석은 그날 저녁에 중경에 있는 국민당상무위원들과 상의한후 먼저 향항으로 사람을 파견하여 리종인을 중경으로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장개석이 무엇때문에 그토록 급히 리종인을 중경으로 데려오려고 했을가? 겉보기에는 대통령자리를 내놓은 장개석이 도량이 넓어서 애써 리종인대통령대리의 사업을 협조하는것처럼 보였다. 장개석자신도 대외에 그렇게 선전했고 시국을 똑똑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장개석이 리종인을 중경으로 불러오려는것은 공동히 군사계획을 상의하려는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것이 아니였다. 리종인이 중경에 가는것을 재삼 거절한데는 그로서의 도리가 있었다. 내부의 사람들은 리종인이 중경에 온다고 해도 군사지휘권은 장개석에게 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자리를 내놓았다는것은 자리에서 물러났다는것이 아니다. 리종인은 장개석의 조종을 받는 괴뢰대통령이 되기 싫었던것이다. 또한 장개석에게 끌려 낭떠러지로 떨어지고싶지 않았다. 열흘전에 장개석은 대만에서 리종인의 일로 국민당원로 오치휘(吴稚晖)에게 고견을 물었을 때 오치휘는 “절대 리종인으로 하여금 정치상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장개석은 이 말을 정중하게 일기에 써넣었다. 지금 대세가 기울어지고 중경이 함락될 위험이 눈앞에 닥쳐오게 되자 장개석은 리종인을 끌어다가 희생양을 삼는것보다 더 합당한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리종인도 장개석의 이런 의도를 간파하고 중경으로 오지 않았던것이다. 그날 오전에 장개석은 또 백숭희를 만나서 자신이 다시 리종인의 대통령직을 빼앗을 뜻이 없으니 리대통령대리를 중경에 청해 함께 국가대사를 상의할것을 간곡하게 요구한다고 표시했다. 리종인의 대표로서 “제갈량”이라고 불리우는 백숭희는 장개석의 앞에서 대답도 하지 않고 묻지도 않았으며 모든 문제에 대해 태도표시를 하지 않았는데 그 뜻은 아주 명백했다. 자신은 다만 말을 전하는 전달자일뿐이라는것을 말해주려는것이였다. 혀바닥이 마르도록 설득하던 장개석은 백숭희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자 화가 나서 나중에는 리종인을 국가가 혼론에 처한 사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마구 질책했다. 그러면서 국가원수의 명의로 병치료를 하기 위해 출국하지 말아야 한다고 꾸짖었다. “리대통령대리는 개인의 신의와 인격을 다 말아먹었으니 대체 무슨 심보란 말이요? 리대통령대리가 해외에서 추태를 보이는것을 피면하기 위해 꼭 중경으로 돌아오게 해야 하오. 그가 와서 대내외의 대계를 책임져야 할것이요. 그 다음에 출국해도 될것이요. 그러나 반드시 행정원장이 대통령직을 대행해야 되오. 이는 헌번규정에도 부합되는것이요.” 장개석의 뜻은 아주 명백했다. 리종인이 출국은 할수 있지만 반드시 “대통령”직을 내놓아야 한다는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장개석은 다른 사람이 대통령권자를 점하고있는것이 마음 편하지 않았던것이다. 옹근 국민당청사가 모두 넘어지게 되였는데도 장개석은 의연히 썩은 나무에 걸어놓은 “대통령간판”을 항상 마음에 두고있었다. 지혜가 풍부하고 계략이 많은 백숭희는 장개석의 히스테리에도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대신해 욕을 먹으면서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배역”을 성공적으로 연기했다. 침묵을 지키는 백숭희의 책략은 원래 더 큰 화를 내려는 장개석에게 다시 분통을 떠뜨릴 상대를 찾지 못하게 했다. 장개석은 혼자서 욕설을 퍼붓다가 제풀에 뭣해서 화를 가라앉히였다. 후에 장개석은 또 국민당중앙의 명의로 거정(居正),  주류선(朱骝先), 홍란후(洪兰友) 등 원로들을 대표로 파견하여 자신이 리종인에게 주는 친필편지를 향항에 가지고가서 리종인을 중경에 돌아오도록 권고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장개석은 대통령대리직을 가지고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자기의 주장을 말하는 리종인이 매우 못마땅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장개석은 그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덕린(리종인의 자)은 출국했는데 사직도 하지 않고 자리를 내놓을 뜻도 없이 대통령대리의 명의로 미국에 지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지원요청을 이루지 못했는데도 국외에 머물면서 돌아오려고 하지 않는다. 당국(党国)의 존망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해타산만 앞세우는 그의 행위는 비렬하고 무치하기 짝이없다!” 장개석은 리종인에 대해 큰소리로 욕설을 퍼부었지만 리종인은  그 일에 관해 《회억록》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국가대사를 관심하지 않은것이 아니였지만 나는 어려운 형세를 되돌릴 힘이 없었다. 내가 개인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국내에 남아있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일단 나라가 망하고 이 몸이 죽는다면 그런 희생은 홍모보다 가볍다. 그럴바에는 빨리 병을 치료하여 목숨을 건지는것이 나을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가 있을것이다. 때문에 나는 미국에 가서 병을 치료하기로 결정했다.” 리종인은 여기서 그와 장개석간의 정치투쟁중의 진실한 의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중경에 돌아가지 않은 원인을 “미국에 가서 병치료를 했기때문”이라고만 썼다. 장개석이 중경에 있는 기간에 리종인은 한번도 중경으로 가지 않았다. 당시의 중경신문에는 “두 대통령이 앞으로 제2의 수도에서 함께 일하게 될것이다”는 글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는데 그런 예언은 현실로 되지 못했다. 중경에 세워진 해방비는 처음에 “정신보루(精神堡垒)”라고 불리웠는데 항전중국민정부가 중경에 옮겨온후에 건조된것으로 “국민정신총동원”이란 뜻이 있다. 건축물은 정방형인데 3층높이의 포루이다. 일본비행기의 폭격을 방지하기 위해 겉에 검은칠을 했고 꼭대기에는 한폭의 기대(旗杆)를 세웠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부루를 “항전승리기념비”로 고쳐 지었는데 비의 몸체는 8각기둥형이고 외부는 부각(浮雕)으로 장식되였다. 건물안에는 꼭대까지 닿는 회전계단이 있으며 꼭대기에는 4개의 방향으로 향한 4개의 “표준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계들의 시간은 정확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항간에 “기념비의 시계는 제 각기 간다”는 말이 나돌았는데 그 뜻은 장개석과 리종인의 불합작관계를 의미한것이였다.                  장개석의 국민당은 왜서 실패했는가 일본이 투항한후 국민당과 공산당이 중경담판을 할 때 민주와 자유를 바라는 지식분자들은 중국에서 응당 서방식의 자본주의길을 걸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후 그들은 모두 공산당을 지지했다. 이는 무엇때문인가? 항일전쟁이 승리한후에 대부분의 중국인은 3가지 요구를 가지고있었다. 첫째는 내전을 중지할것을 요구한것이다. 여러해동안 전쟁에 시달렸기에 더는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것, 중국인끼리 싸워서는 안된다는것이다. 둘째는 련합정부를 성립할것을요구한것이다. 국민당이 혼자서 집권하는 국면을 개변하여 각 당파가 모두 국가정치에 참가하는 정부를 성립해야 한다는것이다. 셋째는 국가민주화와 군대국가화를 요구한것이다. 즉 국가는 응당 민주의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고 군대는 당파의 소유가 되지 말고 응당 국가소유에 귀속돼야 한다것이다. 그러나 국민당은 이 3가지요구를 하나도 실행하지 못했다. 첫째, 항일전쟁이 끝나자마자 곧 국공내전이 시작되였다. 둘째, 국민당은 모든 당파를 단합하여 하나의 련합정부를 성립하지 못했다. 후에 작은 당파인 민사당(民社党)과 중국청년당이 국민당을 따라 국민당의 국민대회에 참가하였지만 더욱 많은 민주당파와 무당파인사들은 공산당과 합작했다. 셋째, 국민당의 군대는 이름을 바꿨으나 성질은 개변되지 않았다. 북벌초기에 “당군(党军)”이라고 불렀고 1944년후에 “국민혁명군(国民革命军)”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1945년후에 “국군(国军)”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국군은 국민당정책을 집행하는 군대였다. 국민당이 실패한 원인중의 하나는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전국인민의 3가지요구 즉 내전을 중지하고 련합정부를 건립하며 국갑민주화와 군대국가화를 실행하는 요구를 위반했기때문이다.        
124    림립과가 모택동을 암살하려고 했던 내막 댓글:  조회:5436  추천:3  2015-10-03
림립과가 모택동을 암살하려고 했던 내막   (번역)   1971년 8월 16일에 모택동은 무한에 도착했다. 무한에서 모택동은 선후로 호북성, 호남성 등지의 당정군 책임자들과 5차례의 담화를 나누었다. 모택동은 진백달(陈伯达), 황영승(黄永胜), 오법헌(吴法宪), 엽군(叶群), 리작붕(李作鹏), 구회작(邱会作) 등의 려산회의에서의 표현에 대해 비판하면서 림표(林彪)도 일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림표는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모택동의 남방순시담화내용을 알게 되였다. 당황해난 림표는 엽군을 시켜 선후로 황영승, 오법헌, 리작붕, 구회작 등을 찾아가 밀담하면서 대책을 상의하게 했다. 당초 림표의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데도 가지 않는것이였다. 림표가 운명을 하늘에 맡기려는 생각이 든것은 형세를 분석한후 정치생명을 내걸고 모택동과 이판사판으로 싸우려고 해도 승산이 적다는것을 알게 되였기때문이다. 림표는 자신의 행동이 자식들에게 련루될가봐 겁이 났다. 엽군의 생각은 림표와 달랐다. 모택동의 남방순시담화내용중에 자신의 이름도 있다는것을 알게 된후 혼비백산하여 림표를 보고 온 가족이 함께 외국으로 도망치자고 했다. 그러나 림립과(林立果)는 도망치자는 어머니 엽군의 주장을 반대했다. 그는 자신이 장악한 “련합함대”를 거느리고 주동적으로 모택동과 해보려고 했다. 림립과는 누나 림립형(林立衡)과의 담화중에 이런 생각을 드러낸적이 있었다.  “누나, 어차피 형세는 수장(림표를 가리킴)에게 매우 불리하니깐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고있기보다 주동적으로 출격하면 일루의 희망이 있을지도 몰라. 난 형세의 발전을 기다려볼 생각이야. 정 안되면 목숨을 걸고 모택동과 한바탕 해보거나 광주에다 따로 중앙을 세울거야. 그래도 안되면 산에 올라 유격전을 하는거지. 수장께서는 수십년동안 군대를 지휘했기에 위망이 높아. 시기가 되면 수장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모택동이 한 나쁜 짓을 만천하에 공개할거야.” 100만대군을 거느린 통수였던  림표는 긴요한 관두에 우유부단하면서 말설이였다. 상대는 전국인민들에게 신으로 떠받들리우고있는 모택동이였기때문이다. 림표는 당내의 합법적인 투쟁을 통해 정면으로 대응할수 없었다. 비상적인 수단중에서도 신세를 망치지 않고 가족에게 련두되지 않을 빈틈없는 계책을 찾을수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림표는 마음을 다잡고 모택동을 먼저 해치우자는 립립과의 제의에 동의했다. 림표는 이것이 위험한 행동이라는것을 알고있었지만 궁지에 몰린 처지인지라 이판사판으로 모험을 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9월 8일에 림립과는 림표가 쓴 “림립과, 주우치(周宇驰)동지가 전달하는 명령대로 하시오”라는 명령서를 지니고 몰래 북경으로 돌아가 급히 모택동을 암살할 행동계획을 선포했다. 모택동의 기요원(机要员) 사정의(谢静宜)의 남편은 공군당위사무실에서 사업하고있었다. 남방순시를 떠나기전에 모택동은 사정의를 통해 림립과가 공군에 비밀조직인 “련합함대”를 성립하고 무장으로 정권을 탈취할 준비를 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리하여 남방순시도중에 모택동은 로정에 대해 엄밀하게 비밀을 지키면서 가는 곳마다 방비를 강화하였다. 그는 림표의 반혁명정변을 방지하기 위해 각지의 당, 정, 군의 책임자들에게 군사정변을 일으키려는 자들이 있다고 공개했다. 력사상에서 림표거나 황영승과 깊은 연원이 있었던 일부 대군구에 대해 모택동은 강건책과 유화책을 함께 쓰면서 상대방을 와해시켰다. 어느 한번 모택동은 여러 사람앞에서 광주군구 사령원 정성(丁盛)과 광주군구정위 류광원(刘兴元)을 불러놓고 말했다. “당신들은 모두 나의 홍1방면군이였지. 그럼 《3대규률8항주의》를 불러보시오. 당신들은 보조를 맞추어 일체 행동은 지휘에 복종해야 하지요.” 모택동의 이 방법은 매우 효과적으로 림표일당의 심리담벽을 파헤쳐 그들의 부서를 혼란시키고 원래의 계획을 전부 수포로 돌아가게 하였다. 모택동의 이 거동은 당과 군대내의 림표세력을 견제하여 그들로 하여금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했다. 또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돌려 모택동에게 림표의 문제에 대해 반영하게 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중 몇가지 문제는 모택동의 경각성을 불러일으켰다. 모택동은 원래 림표에 대해 경계하고있었기에 가는곳마다 방비하고있었다. 이미 항주에 머물고있던 모택동은 의심스러운 상황을 보고받은후 불길한 징조가 잠복되여있다고 단정했다. 그리하여 림립과가 림표의 친필명령서를 지니고 북경으로 달려간 9월 8일 저녁에 모택동은 길을 재촉하여 속히 북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모택동은 자신의 행적에 대해 철저하게 비밀에 붙였다. 심지어 북경에서 중앙의 일상사업을 주체하고있는 주은래마저도 아무것도 모르고있었다. 모택동은 또 상대방을 현혹시키기 위해 자신의 전용렬차를 여기여기 움직여놓으면서 대외에 자신이 10월 1일전날밤에야 북경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있다는 가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나서 이틀후에 갑자기 항주를 떠나 상해를 거쳐 북경으로 돌아갔다. 그후의 사실이 증명하다싶이 모택동의 미혼진이 확실히 림립과일당을 미혹시키는 효과를 일으켰다. 원래 모택동암살행동은 모헙적인것이여서 심리상에서나 기술상에서 모두 극복하기 힘든 장애와 난제가 존재했다. 모택동은 신같은 존재이고 전국인민이 숭배하는 우상이여서 모택동에게 불충한 털끝만한 생각도 대역부도한 죄로 취급되고있었다. 그런 모택동을 직접 살해한다는것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모험이 아닐수 없었다. 게다가 모택동의 행적이 수시로 변하고 거주지도 경계가 삼엄하여 암살행동이 더욱더 어렵게 되였다. 이런 정황에서 림립과의 수하들이 비록 9월 8일밤부터 시작하여 이틀동안 머리를 쥐여짜며 각종 암살행동방안을 꾸몄으나 시종 손을 쓸 확실한 방법을 찾을수 없었다. 골간성원들은 비록 림씨부자한테 충성을 맹세했지만 정작 일이 닥쳐오자 “련합함대”의 성원 대부분은 겁이 나서 모택동의 행적을 알수 없다는 리유로 앞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정황에서 암살행동을 책임진 림립과도 멈춰야 할지 게속 해야 할지 견단을 내리지 못해 동요하기 시작했다. 림립과는 제1선에서 지휘하고있는 강등교(江腾蛟)에게 “잠시 포치하지 말고 기다려라. 그렇잖으면 수습할 여지가 없다”고 통지했다. 그런데 이것이 시간을 벌기 위한 모택동의 계책과 맞아떨어졌다. 림립과가 잠시 손을 쓰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것과 동시에  9월 10일 오후에 모택동은 갑자기 항주를 떠나 상해로 달려갔다. 그전에 모택동은 자신이 항주를 떠난다는 사실과 상해를 거친다는 사실을 당지의 책임자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령했다. 상해역에 도착한후 모택동은 상해의 고가화원을 돌아보던 이왕의 관례대로 하지 않고 전용렬차에서 밤을 보냈다. 모택동은 북경으로 돌아오기전에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해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도망(金蝉脱壳)치는 계책을 썼다. 모택동은 반란파출신의 상해시혁명위원회 부주임 왕홍문더러 자신을 대표하여 금강호텔에 허세우를 청해 식사대접을 하게 했다. 왕홍문은 또 모택동의 지시대로 림립과의 패거리이며 공군제4군의 제1정위인 왕유국(王维国)도 함께 청했다. 이는 허세우더러 왕유국을 견제하기 위함이였다. 이렇게 배치를 해놓은후 모택동은 간다는 말도 없이 몰래 기차를 타고 상해를 떠났다. 모택동은 가는 길에 모두 푸른등을 켜놓게 하고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20일 오후에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으로 돌아온후 모택동은 안전을 위해 인차 중남해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먼저 봉태역에서 북경시 당정군의 제1책임들을 불러놓고 동향을 알아보았다. 모택동은 북경안팎에 이상한 움직임이 없는것을 확인했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북경군구사령원 리덕생에게 공정병을 집결해 남구에 들어서도록 분부했다. 그렇게 한후에야 모택동은 중남해의 거처로 돌아갔다.    
123    전설의 조선족영웅 무정장군 댓글:  조회:8552  추천:0  2015-07-19
전설의 조선족영웅 무정장군     “무정(武亭)장군이 엄지손만 척 꺼내들고 어디를 겨냥하면 그곳에 백발백중의 포탄이 떨어져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겼다.” 이는 지난 세기 20년대로부터 40년대를 걸치면서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제국주의침략자를 반대하여 싸우고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운 중국조선족의 걸출한 대표이며 전설의 영웅인 무정장군에 대한 전설적 이야기이다. 1905년에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여난 무정(본명 김무정)은 서울에서 가난한 고학시절을 보내면서 나라를 잃은 비애를 온몸으로 겪었다. 혁명에 뜻을 두고 청년운동과 로동운동에 종사하던 그는 일제에 체포되여 세번이나 옥살이를 하면서 갖은 혹형을 받았다. 1923년에 18세에 나는 무정은 조선공산주의자 려운형의 영향으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듬해에 하남보정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하고 국민당부대에서 포병중좌로 활약하던 그는 군벌혼전에 실망하고 1925년에 장가구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후 무한, 상해에서 지하투쟁을 하다가 두차례 체포감금되였으나 조직의 구명운동으로 석방되여 향항으로 망명했다가 1930년 6월에 중앙쏘베트근거지로 찾아갔다. 거기서 무정은 팽덕회수하의 홍군제3군단 포병련 련장으로 임명되여 남정북전을 시작했다. 그해 7월에 미, 영, 일 제국주의 군함은 동정호반의 악주성을 미친듯이 포격하였다. 격분한 무정은 팽덕회에게 반격을 제의하였다. 팽덕회장군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본때를 보여주라고 고무하였다. 당시 홍군내에는 포를 쏠줄 아는 사람이 팽덕회와 무정뿐이였다. 수중의 야전포 4문과 산포 2문으로 전사들을 지휘하여 다가오는 적함을 겨누고 포격하자 10여척의 적함이 삽시에 불에 탔다. 홍군전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소리높이 웨쳤다. 이는 중국인민해방군력사상의 첫 대포소리였다. 이로부터 무정의 이름과 함께 조선인의 명성이 홍군내에 널리 알려졌다. 1931년에 홍군중앙군사위원회 직속포병퇀이 창건되면서 무정은 제2임퇀장에 부임되였고 1933년 10월에 홍군대학 특과학교가 세워지면서 교장을 겸임하여 홍군내의 최초포병인재들을 키워내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홍군의 2만 5000리장정이 시작되자 무정은 중앙군위기관으로 편성된 제1종대 제3지대 사령원 겸 정위로 임명되여 장정에서 가장 치렬한 상강나루터점령임무를 수행했다. 장정도중에 당중앙의 북상항일을 반대한 장국도의 음모로 각 군단과 군위, 모택동과의 련계가 끊어진 상황에서 무정은 팽덕회의 지시를 받들고 목숨걸고 비밀전신번호를 제1군단에 전해줌으로써 당중앙과 홍군을 위기에서 만회했다. 무정은 주덕총사령, 팽덕회부총사령 등 중앙군위지도자들의 가장 신임받는 장군의 일원으로 되여 장정을 마치고 연안에 도착했다. 1936년 6월에 무정은 홍군사단급이상 38명으로 조직된 연안항일군정대학 제1기고급간부과 학원으로 해당학과를 배우면서 강의도 하고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한 뒤 홍군총부작전과 과장, 팔로군총부작전과 과장으로 되였다. 1937년 8월 25일에 중국공농홍근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되였다. 그해말에 항일전쟁의 새로운 수요에 따라 팔로군총부에서는 포병퇀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중앙군위에서는 포병퇀건립임무를 무정에게 맡겼다. 원 소속병력에 유격 제2대를 포함하여 총 1000여명을 6개 련으로 편성했다. 그외에 기관련, 관통대 및 선전대를 가진 포병퇀을 건립하였다. 1938년 1월 28일에 산서성 림분부근의 한 광장에서 포병퇀건립의식이 성대히 치러졌다. 대회에서는 팔로군판사처 주임 팽설풍이 중공중앙군사위원회의 임명서를 랑독하면서 무정을  우리 군 첫 포병퇀 퇀장으로 선포했다. 포병퇀건립초기에 해당군사장비도 없고 간부와 기술골간도 없었다. 무정은 우선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계획있게 정치사상교육을 진행한 기초에서 제4련을 전문 간부를 양성하는 련으로 삼고 각 련에서 우수한 골간을 뽑아 단기훈련반을 열었다. 그때 훈련반에서 무정은 직접 강의를 하면서 엄지손을 척 꺼내들고 알기 쉽게 통속적으로 포사격원리와 포를 조종하는 요령을 가르쳤다. 훈련반을 나온 동지들은 기술골간으로 되여 당시의 긴급수요를 해결하였을뿐만아니라 인재로 되여 그후의 포병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포병퇀은 건립되면서 일제와 싸우는 전투에 참가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포병퇀 건립 1돐을 기념하여 모택동은 “포병퇀은 항일전쟁가운데서 주력병퇀이 되여 민족을 위해 영광을 떨치고 팔로군의 모범이 되여야 한다”는 제자를 써주고 금기를 증정하였다. 1940년에 중외를 진감하는 백퇀대전이 일어났다. 무정은 포병퇀을 인솔하여 될수록 적진지와 가까운 거리에 포를 걸어놓고 직접 사격을 지휘함으로써 적의 또치까를 백발백중하여 보병들의 작전을 엄호하고 진격로를 열어놓음으로써 아군의 승리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백퇀대전이 끝난후 무정은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포병퇀을 떠나 관내 조선인항일단체를 통일하고 련합하는 조직사업에 나섰다. 워낙 1939년부터 무정은 섬북조선청년련맹의 서명편지로 관내의 조선혁명동지들은 일치단결하여 공동히 항일할것을 호소하였다. 1941년 1월 10일에 태항산항일근거지의 진동남팔로군전선 총사령부소재지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제1차대표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 회장으로 당선된 무정은 화북조선쳥년련합회 행동강령과 과업을 진술하면서 간부양성과 조선혁명단체의 통일을 언급하면서 화북 20만조선동포들은 항일투쟁에로 뭉쳐야 함을 강조하였다. 제1차대표대회후 조선청년대표들은 무정의 파견을 받고 락양, 서안 등지로 가 조선의용대의 북상을 조직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에 무한에서 창립된 첫 조선인항일무장대오로서 100여명의 의용대 대원들은 전국 6개 전구(战区)에서 항일무장선전사업을 하고있었다. 몇개월간의 간난신고끝에 조선의용대 대부분 전사들은 국민당통치구역을 벗어나 태항산근거지로 집중되였다. 그들은 1941년 6월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편성되였다. 1942년 7월 11일부터 3일간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제2차대표대회가 청장하기슭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서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칭되였고 이 부대는 조선독립동맹에 소속된 부대로 결정되였다. 대회에서는 김백연, 무정, 박효삼 등 11명을 집행위원으로 선거하였고 당중앙에서는 무정을 조선의용군 총사령으로 파견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의 령도와 팔로군의 통일지휘하에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조선인무장부대로 확정되였다. 조선의용군 총사령으로 임명되여 태항산근거지에 이른 무정장군은 1942년 12월 1일에 섭현 곡원촌에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세우고 직접 교장을 담임하면서 학원들에게 정치사상교양과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적점령구로부터 찾아오는 조선청년들을 교육시켜 조선의용군에 참가시켰다. 1943년말부터 조선의용군은 당중앙의 호소에 따라 혁명의성지 연안에 가 군정훈련을 하게 되였다. 1945년 7월에 연안에 이른 무정장군은 8월 11일에 주덕총사령이 내린 연안총부 제6호명령을 받들고 9월에 조선의용군을 거느리고 팔로군 및 원 동북군 각 부대를 따라 동북으로 진출하였다. 《조선의용군행진곡》을 부르며 각 항일근거지에서 심양으로 모여온 조선의용군은 1000여명에 달하였다. 무정장군은 심양에서 조선의용군 전체회의를 열고 당면의 정세와 금후의 과업에 대해 연설하고 조선의용군을 3개 지대로 개편하였다. 1지대는 남만에 남고 3지대는 북만으로, 5지대는 동만으로 진군하여 대오확군사업을 벌리면서 동북각지에서 적잔여세력을 소멸하는 투쟁에 뛰여들었다. 당면의 형세하에서 무정장군과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주요지도자들은 개인신분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나갔다. 조선에 진출한후 무정장군은 조선림시인민위원회 중앙위원, 로동당 제2서기, 보안간부훈련대 포병사령관 등 직무를 력임하였다. 무정장군은 1952년 10월에 조선의 한 자그마한 병원에서 사망되였는데 사망원인은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일생동안 자신의 일체를 헌신해온 전설의 영웅 무정장군은 우리 조선민족의 지지 않는 전설로 오늘도 우리와 함께 새 세기속을 살아가고있다.  
122    서해동 중국군사지도자들중 가장 신비한 대장 댓글:  조회:6004  추천:2  2015-07-12
서해동 중국군사지도자들중 가장 신비한 대장   (번역)     “중국공산당의 군사지도자들중에 서해동(徐海东)보다 더 이름이 나고 신비한 군사지도자는 없을것입니다.” 이것은 1936년 여름에 미국기자 에드가 스노가 모택동과 홍군장군들을 취재하고 나서 내린 평가이다. 서해동은 중국인민해방군의 군사지도자이고 개국대장이며 걸출한 군사가였다. 건국후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그를 해방군의 36명군사가중의 하나로 인정했다. 모택동은 서해동을 “중국혁명에 큰공을 세운 사람”이며 “로동계급의 본보기”라고 높이 찬양했다. 서해동은 1900년 6월 17일에 호북성 대오현 하점구 서가요(지금의 대오현 신성진 서가요)에서 태여났다. 192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서해동은 1955년에 대장계급을 수여받았으며 1급8.1훈장, 1급독립자유훈장, 1급해방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제1, 2, 3기의 국방위원회 위원, 중국공산당 제8, 9기의 중앙위원을 력임했다. 그는 1970년 3월 25일에 림표, 강청반혁명집단의 잔혹한 박해를 받아 억울하게 하남성 정주시에서 서거했다. 1925년에 광동에 도착한 서해동은 국민제4군소속의 사장 장발규수하의 패장대리로 임명되였다. 첫전투는 정사교에서 벌어졌는데 서해동이 거느린 패는 오패부수하의 4개 포병련을 소멸하고 12문의 포를 로획했다. 장발규는 몹시 기뻐서 전체 사를 집합시킨후 서해동을 앞에 불러놓고 칭찬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서해동을 소위 패장으로 승직시켰다. 정사교전투이후 서해동은 북벌군을 따라 하승교, 남창, 정주의 전쟁터를 누빈후 다시 무창으로 돌아왔다. 그 시기는 1927년의 “4.12”반혁명대도살이 시작되였을 때였다. 당조직에서는 장개석이 공산당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서 서해동에게 속히 부대를 떠나라고 통지했다. 서해동은 총 한자루에 탄알 여덟발을 가지고 명부를 던져버린후 부대를 떠났다. 그후 서해동은 황파에 가서 군사부장직을 맡았다. 처음에 13명에 총 한자루, 탄알 여덟발이였다. 서해동은 홍군에서 싸움에 능하다고 소문이 났다. 어느 한 전투에서 그는 2000명의 병력으로 적의 한개 사를 섬멸하고 적군 사장을 생포했다. 그번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된 국민당 사장은 자신이 어떻게 되여 졌는지 몰라서 서해동을 보고 “당신은 황포군관학교 몇기를 졸업했습니까?”하고 물었다. 서해동이 “나는 ‘청산대학(青山大学)’을 나왔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악예환(鄂豫皖)근거지는 점차 전국의 제2대쏘베트구역으로 발전했다. 홍군창건초기에 국민당에서 내건 체포명단중에 현상금이 가장 높은 세 사람은 모택동, 팽덕회, 서해동이였다. 당시에 미국기자 에드가 스노는 15군단주둔지로 가는길에서 가는 곳마다 국민당이 비행기로 뿌린 삐라를 보았는데 삐라에는 “무릇 팽덕회거나 서해동의 목숨을 끊어놓는 자에게는 현상금 10만원을 준다”는 내용이 찍혀있었다. 서해동은 전쟁터에서는 아주 무서운 사람이였지만 평소에는 아주 친절한 지휘관이였다. 서해동은 성질이 급하여 전쟁터에서는 두번 말하는 일이 없었다. 한번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리면 즉시 달려가야지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채찍으로 때리군 했다. 전군에서는 모두 서해동이 엄격하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장정도중에 어느 한번은 국민당부대와 갓 싸우고 난후라 매우 피로한 상태여서 호르래기를 불어도 모두 듣지 못했다. 급해난 서해동은 방마다 찾아다니면서 몽둥이로 200여명을 때려서 깨웠다. 당시 만약 조금만 늦었더라면 모두 국민당군에게 붙잡혔을것이다. 또 한번은 우가하전투에서 탄알이 서해동의 얼굴을 스치고 나갔다. 경호원이 “군장님이 부상을 입었습니다”하고 급히 소리쳤다. 그러자 서해동은 경호원을 무섭게 노려보며서 “누가 부상을 입었다구 그래? 입다물어!”하고 고함쳤다. 그는 자신이 부상을 입은것을 전사들이 알게 되면 군심이 동요될가봐 그랬던것이다. 사후에 그는 경호원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서해동은 아홉번 부상을 입었는데 여덟번은 총상이고 한번은 “홍창회(红枪会)”에서 엉뎅이를 찔러서 난 상처였다. 어느 한번 그가 서른살 때 부상을 입었는데 한 사람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그때 그는 몹시 섭섭했다. 그런 경력이 있었기에 그는 부상병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위문하군 했다. 1932년에 국민당군은 악예환근거지를 4번이나 포위토벌했는데 장국도는 핍박에 의해 홍4방면군 주력을 거느리고 쏘베트구역을 떠나 장정을 시작했다. 홍25군의 일부와 제75사, 제27사는 쏘베트구역에 남아서 투쟁을 견지했다. 그들앞에 놓인것은 20만명의 국민당대군과 엉망진창이 되고 날로 줄어드는 근거지였다. 서해동은 그토록 험한 환경에서 홍25군을 거느리고 연안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도중에 악예섬(鄂豫陕)혁명근거지를 창건했다. 당시 서해동이 거느린 홍25군은 평균년령이 18세였다. 로혁명근거지에서 사망된 전사들이 매우 많았고 후에 참군한 병사들은 모두 청소년들이였다. 당시에 홍25군의 전투부대는 모두 18세이하의 전사들이 위주였다. 서해동의 부인이 장정에 참가했을 때 만 16세밖에 안되였다. 이런 연유로 하여 후에 구쏘련에서 《서해동과 그의 동자군》이란 책까지 나왔다. 서해동의 부대는 매우 젊었지만 싸움에서는 아주 용맹했다. 25군에는 한가지 전통이 있었는데 무릇 25군에 참가하려는 군인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으냐? 만약 죽음이 두렵다면 우리 25군에 올수 없다”라고 묻군 했다. 이리하여 25군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인들만 모여들었다. 서해동은 25군을 거느리고 겹겹의 포위를 뚫고 섬북으로 진군하여 1935년 9월에 류지단과 회합했다. 1935년 11월초에 서해동은 마침내 중공중앙과 모택동을 만났다. 서해동의 일가친척중 66명의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27명이 가까운 친척이고 39명이 먼 친척이였다. 악예환전투가 벌어졌을 때 서해동은 어머니를 만난적이 있었다. 그러나 서해동의 명성이 높아지자 장개석은 서씨가문을 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30년부터 시작하여 국민당은 서씨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죽이는 바람에 서해동이 악예환을 떠나 장정에 참가했을 때는 이미 일가친척 66명이 살해당했다. 1932년에 홍4방면군이 떠난후 서해동은 23일동안에 어떤 때 잠시 선잠을 잤을뿐 대부분 잠을 자지 못했다. 그때문에 적을 물리친후 서해동은 련속 사흘동안 잠을 잤다. 결과 잠을 깼을 때 그는 피를 토했다. 그것은 서해동이 사장직을 맡고있는 시기였다. 여러번이나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돌아온 서해동은 자신의 건강에 매우 자신감을 가지고있었다. 1939년에 서해동은 화중에 파견되여 신4군 강북지휘부의 부총지휘직을 맡게 되였다. 처음으로 일본괴뢰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후 서해동은 또 피를 토했다. 서해동은 주가강전투에서 일본괴뢰군 160여명을 소멸하고 일본 소좌 한명을 사로잡았다. 원래 일본군이 너무 강대했기때문에 신4군은 감히 화중에서 일본군과 싸우려고 하지 못했다. 그때문에 그번 승리는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1940년 1월 28일에 서해동은 앓아누웠다. 그는 페가 부어서 이불도 덮을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사업을 견지하겠다고 했다. 당시에 신4군의 지도자 진의와 장운일이 모두 중앙에 “서해동동지의 병세는 매우 위중합니다. 그런데도 그가 사업을 견지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보고를 올렸다. 모택동은 서해동한테 전보를 보냈는데 후에 서해동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전보문은 200여자였는데 주석께서 연안에 계시기에 나의 병문안을 갈수 없다는 내용이였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서해동동지가 사업을 견지하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여덟글자를 보냅니다”라는 내용도 있었다면서 그 여덟글자는 바로 “하늘이 무너져도 관계하지 말고 병치료에만 전념하십시오(静心养病,天塌不管)”라는것이였다고 말했다. 당시 그 전보문을 본 서해동은 눈물을 흘렸다. 《문회보》       
121    청태종 황태극의 특이한 혼인관계 댓글:  조회:7133  추천:3  2015-07-05
청태종 황태극의 특이한 혼인관계       청나라초기의 황제들은 혼인에서 정략결혼의 색채가 충만했다. 청태조(清太祖) 누르하치(努尔哈赤)의 처첩중 사서에 기록된 녀인은 모두 14명이다. 그중 7명의 처첩은 정략결혼의 결과였다. 나머지 처첩들도 대부분 서로 다른 부락에서 왔다. 청나라초기에는 만족과 몽골족의 정략결혼이 성행했다. 《청황실사보》 2권의 기록에 따르면 청태종(清太宗) 황태극(皇太极)은 몽골족 처가 7명으로서 그의 후비들중에서 절반을 차지했다. 순치황제 복림의 몽골족처는 6명으로서 그의 후비들중에서 1/3을 차지했다. 청나라의 황제중에 청태종 황태극의 혼인은 가장 기이했다. 황태극의 처첩중 명호가 있는 후비는 15명이였다. 이 15명의 후비들중에서 7명이 몽골초원에서 왔다. 후비들중 지위가 가장 높았던 “숭덕오궁후비(崇德五宮后妃)”는 모두 몽골족녀인이였다. 게다가 두명은 과부였다. 나머지 3명은 커얼친(科尔沁)부의 망구스집안의 고모조카관계인데 모두 청태종에게 시집을 왔다. 황태극의 혼인에서 기이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였다. 그는 이미 그와의 사이에 딸을 낳은 적이 있는 측비인 보얼지지터씨를 다른 사람에게 개가시킨 적도 있다. 그렇다면 천자의 고귀한 자리에 있던 청태종이 왜 과부를 두명이나 부인으로 받아들였을가? 원래 이 두 녀인은 신분이 특수했다. 그녀들은 모두 몽골부락의 맹주인 차하얼(察哈尔)의 린단칸(林丹汗)의 부인들이였다. 그녀들은 남편 린단칸이 죽은후에 청태종에게 투항하였고 천총8년과 천총9년에 차례로 청태종의 후궁으로 들어왔다. 1632년(후금천총6년)에 청태종은 8기대군을 이끌고 몽골의 여러부락을 공격했다. 린단칸의 차하얼로 진격하여 격전을 벌린 끝에 린단칸의 부대를 거의 절반이나 소멸했다. 린단칸은 대패후에 청해초원으로 도망갔다. 2년후인 1634년에 민심을 잃은 린단칸은 청해에서 병사했다. 그의 부하들은 점차 와해되였고 그의 부인들도 새로운 살길을 찾아나서게 되였다. 1634년 8월에 린단칸의 후비중 하나인 떠우투먼(窦土门) 푸진(福晋)이 도니쿠루크의 호송하에 일행을 이끌고 청태종의 군영으로 찾아와서 귀순했다. 그리고 무후르 이지야르지방에 머물며 목축을 했다. 사실 당시 떠우투먼은 청태종에게 시집을 가고싶어했으나 스스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있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대패륵 다이샨이 그녀가 온 뜻을 알아차리고 청태종에게 말했다. “이 녀인은 하늘에서 내린 녀인이니 그녀를 후궁으로 받아들여야 하옵니다!” 청태종은 그녀가 아주 예쁜것을 보고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외부에서 전쟁을 일으켜 다른 사람의 처를 빼앗았다는 악명을 들을가봐 우려했다. 그래서 계속 사양했다. 대패륵 다이샨은 이렇게 권고했다. “아니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몽골사람들의 투항을 얻어낼수 있고 몽골이 우리의 동맹군으로 될수 있사옵니다.” 다른 패륵들도 그렇게 하는것이 린단칸의 부하들의 투항을 받아내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미전에 마음이 움직였던 청태종은 사흘간 생각하는척 하고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청태종은 패륵들에게 자신이 겪은 기이한 일도  얘기했다. “짐이 행군도중에 나리트강에 주둔했는데 꿩 한마리가 짐의 군영막사안으로 날아들었소. 짐이 보기에 이는 미인이 들어올 길조였소. 떠우투먼 푸진이 짐에게 개가하는것은 바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생각되오. 하늘의 뜻이라면 받아들일수밖에 없소.” 떠우투먼 푸진을 모시고 청태종에게 귀순했던 도니쿠루크는 아주 기뻐하며 “신들이 온 목적은 바로 떠우투먼 푸진을 황상께 바치는것이였나이다”하고 아뢰였다. 도니쿠루크는 사명을 완수했고 청태종에게 충성을 다할것을 맹세했다. 청태종이 떠우투먼 푸진(窦土门福晋)을 받아들인후 1년도 되지 않은 1635년 3월에 린단칸(林丹汗)의 다라대푸진(多罗大福晋) 즉 정실부인인 낭낭태후(囊囊太后) 나무종(娜木钟)이 1500호의 무리를 이끌고 귀순했다. 그해 4월에 린단칸의 또 다른 다라대푸진인 소태태후(苏泰太后)가 그녀의 아들 어저(额哲) 즉 린단칸의 계승자를 데리고왔다. 또 1000호의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면서 전국옥새를 바쳤다. 두명의 존귀한 태후와 함께 온것은 또다른 두명의 측실인 백기푸진(伯奇福晋), 아이철의도(俄尔哲依图)푸진 그리고 린단칸의 녀동생인 태송공주(泰松公主) 등이 있었다. 이 녀인들중에서 자격이나 지위로 보면 낭낭태후가 가장 높다. 그녀는 몽골군왕의 집안에서 태여났을뿐만아니라 린단칸의 “정실부인”이였다. 그렇다면 누가 가장 존귀한 낭낭태후를 취해야 하는가? 당연히 지위가 가장 높았던 청태종이다. 청태종은 처음에는 이를 사양하는척 했다. 그러다가 여러 패륵들이 여러번 권하자 청태종은 그녀를 안해로 맞아들였다. 나무종의 지위가 고귀했으므로 청태종 숭덕원년인 1636년에 후비를 책봉할 때 그녀를 서궁 인지궁귀비에 봉했다. 그녀보다 1년이나 먼저 청태종에게 개가했던 두토문 푸진은 지위가 나무종에 미치지 못하여 차동궁연경궁숙비에 봉해졌다. 일찌감치 1625년에 이미 청태종에게 시집와있던 서궁비 부무부타이는 차서궁으로 밀려나서 영복궁 장비에 봉해졌다. 청태종의 후궁들중에서 지위가 가장 존귀한것은 “숭덕오궁후비”들이였다. 그녀들은 모두 몽골족녀인이였다. 상술한 두명의 린단칸의 미망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3명은 모두 몽골 커얼친부 망구스집안에서 나왔다. 이 세명의 비는 친고모조카간이다. 몽고의 커얼친부는 후금에 가장 먼저 귀순했다. 커얼친부 좌익의 수령인 밍안 패륵의 형인 망구스는 1614년에 딸을 청태종에게 보내여 처로 삼게 했다. 그녀가 바로 청태종의 중궁황후 효단문황후이다. 저저황후(哲哲皇后)로 불리운 녀인이다. 만몽간의 혼인은 정략결혼으로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다. 1629년에 청태종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쳤는데 커얼친부의 23명 패륵이 무리를 이끌고 뒤따르면서 명나라군대를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1625년(천명10년)에 커얼친 패륵 자이상의 아들인 오극선(吴克善)은 녀동생 부무부타이를 청태종의 비로 보냈다. 이 녀인이 나중에 그 이름도 유명한 장비(庄妃)로 된 인물이다. 장비는 중궁황후의 친조카딸이며 순치황제 복림의 생모이다. 그녀는 일생동안 청나라의 세 황제를 거쳤는데 바로 란세에서 태평성대로 들어서는 력사적 시기였다. 그녀는 황제를 보좌하여 청나라궁중내부의 갈등과 투쟁을 해결하여 청나라초기에 사회질서의 안정을 이루는데 기여했다. 후세에 그녀는 청나라의 국모라고 불리웠다. 1634년에 우크샨은 다시 녀동생 하나를 심양으로 보내여 청태종의 비가 되게 했다. 이번에 보내온 녀인은 장비의 친언니인 하이란주였다. 청태종은 그녀를 신비(宸妃)로 삼았다. 이렇게 되여 멍구스의 집안의 고모부터 조카까지 3명의 녀인이 모두 청태종에게 시집가게 되였다. 신비 하이란주는 청태종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 청태종은 《시경》에서 애정을 노래한 시구인 “관관조구 재하지주 요조숙녀 군자호구”에서 이름을 따서 하이란주가 거주하는 궁을 “관조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하이란주의 지위를 5궁중에서 2번째로 높은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하늘이 미인을 시기해서인지 신비 하이란주는 33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녀를 잃은 청태종은 비통해하며 침식을 페했다. 그러다가 혼절하기까지 했다. 청태종은 신비를 위하여 륭중한 장례식을 거행하고 민혜공화원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녀는 청나라의 후비들중에서 시호가 가장 긴 녀인이다. 신비를 잃은후부터 청태종은 조석으로 비통해하며 음식도 얼마 먹지 못했다. 신체가 갈수록 나빠졌고 하는 말에도 두서가 없어졌다. 나중에 여러 왕과 대신들이 그를 사냥하러 나가도록 권했다. 그런데 사냥터로 가는 길에 신비의 묘를 지나게 되였다. 청태종은 다시 가슴이 아파져서 대성통곡을 했다. 신비가 죽은후 2년도 되지 않아 청태종도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청태종의 신비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다. 이는 력대황제들중에서 보기 드문 경우였다. 청나라 초기에 통치자들은 유가의 사상에 완전히 물들지 않았다. 청태종의 후비중에 이미 그와의 사이에 딸을 둘이나 낳은 측비가 있었다. 그 측비는 바로 몽골 자루트부의 다이칭 패륵의 딸 보얼지지터씨였는데 청태종은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개가시켰다. 에허부의 더얼거이 타이지의 아들인 난추의 안해로 보낸것이다. 일대의 제왕인 청태종이 자신의 후비를 다른 사람에게 개가시킨 사실은 정말 리해가 되지 않는 일이고 중국의 봉건왕조에서 아주 보기 드문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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