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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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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50여년전에 2억명의 목숨을 앗아갈번 했던 꾸바미사일위기 댓글:  조회:5662  추천:0  2015-02-08
50여년전에 2억명의 목숨을 앗아갈번 했던 꾸바미사일위기     미국과 구쏘련이 핵무기를 손에 쥔채 기세싸움을 벌리던 40여년 랭전기간중 가장 긴박했던 사건이 1962년의 “꾸바미사일위기”이다. 1962년은 미쏘간에 심각한 대립과 긴장관계에 처해있던 한해였다. 랭전의 전성기에 발생된 꾸바미사일위기는 미쏘간의 핵전쟁위험조차 포함한것이였다. 꾸바미사일위기는 1962년 10월 22일부터 11월 2일의 11일동안 중거리핵미사일을 꾸바에 배치하려는 구쏘련의 시도를 둘러싸고 미국과 구쏘련이 대치하여 핵전쟁직전까지 갔던 국제적 위기이다. 구쏘련이 미국을 겨냥한 중장거리핵미사일발사기지를 꾸바의 곳곳에 비밀리에 건설하고있음을 알아낸 미국이 이를 즉각 철거하라고 모스크바에 요구하고 관련장비와 인력을 실은 구쏘련배들이 더는 꾸바를 드나들지 못하도록 함정(舰艇)을 동원해 해상을 전격봉쇄했던 사건이다. 제3차세계대전, 그것도 두 강대국이 전면 핵전쟁직전까지 감으로써 온 세계가 숨을 죽였던 이 위기가 지난지 50년이 됐다. 1962년 10월 16일에 미국중앙정보국이 몇달전부터 첩보수준으로 떠돌던 문제의 핵미사일발사기지건설을 항공정찰을 통해 확인하고 이를 케네디(肯尼迪)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극비의 국가안전보장회의를 6일동안 잇달아 연 끝에 10월 22일에 케네디가 텔레비죤방송에 나섰다. 케네디는 그때까지 국민이 전혀 모르던 꾸바상황을 설명하고 “당장 해상봉쇄에 들어간다”는 중대발표를 했다. 당사자인 구쏘련에도 사전경고가 없던 돌연적인 발표였다. 그다음 날부터 미국학교와 직장은 민방공훈련에 들어갔다. 어린이들은 선생들의 지시에 따라 책상밑으로 숨고 팔로 머리를 감싸는 실습을 했다. 실제효과가 있을지 의심습지만. 케네디의 성명에 이어 핵무기를 관장하는 미군부대들은 전면적인 핵전쟁을 준비했고 구쏘련도 비슷한 조치를 취하고있었다. 온 인류의 운명이 걸린 도박이였지만 어떤 나라도 개입하거나 중재할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다. 그저 전세계는 공포와 긴장속에서 숨죽이며 사태의 전개를 바라보고있었을뿐이였다. 긴장은 10월 24일에 미사일은 운반하던 16척의 구쏘련화물선이 해상봉쇄작전을 펼치고있던 미국해군함정에 다가서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미군에 비상이 걸린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비상은 처음 경계상태 3 단계에서 시작해 며칠뒤에는 전쟁직전에 발령되는 최고 단계인 2단계로 격상됐다. 그와 동시에 핵탄두를 싣고 갈 대륙간탄도미사일 145기가 발사대기에 들어갔고 핵폭탄을 실을 중(重)폭격기 23대, 핵폭탄을 장착할 요격기 161대가 출격준비를 마쳤다. 이런 핵무기목적지는 꾸바가 아닌 구쏘련이였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각각 한발씩 투하된 원자탄이 두 도시를 초토화했던 점과 그 뒤로 핵무기성능이 훨씬 강화된 점을 고려하면 이런 무기의 파괴력을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이와는 따로 재래식무기로 꾸바를 타격할 상황에 대비해 폭격기 1400대가 8개조로 나뉘여 1개조는 항시 공중에 떠있는 공중준비상태에 돌입했다. 꾸바미사일위기는 그 전해에 일어났던 피그스만사건(猪湾事件)과 련관되여있다. 꾸바는 미국 플로리다반도에서 140여킬로메터 떨어졌다. 1959년에 부패한 바티스타정권을 몰아낸 꾸바에 사회주의정권이 탄생하자 미국과 꾸바의 관계는 급속도로 랭각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바티스타정권의 든든한 뒤배였던 미국은 코앞의 나라에 새로 들어선 피델 카스트로(菲德尔·卡斯特罗)정권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겼다. 결국 미국중앙정보국은 이를 전복시킬 작업에 들어갔다. 꾸바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난민 1500여명을 훈련시킨 뒤 꾸바 피그스만에 상륙시킨것이다. 이들이 현지에서 활동을 시작하면 민중봉기가 일어날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공작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비밀이 루설되여 상륙대원들이 바로 제압당한것이다. 구쏘련은 이 사태를 앞세우며 카스트로를 설득해 문제의 핵미사일발사기지건설에 들어갔다. 미국에 한참 뒤처진 핵전력상황때문에 압박을 느끼던 크레물리궁은 이 기회에 미국에 린접한 곳에 핵을 배치하면 어느 정도 만회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미국대통령 케네디의 대국민발표직전까지 미국국가안보회의에서 론의된 대응방안은 다양했는데 구쏘련에 대한 외교적압박, 전투기를 활용한 꾸바내에 있는 문제의 기지를 폭격, 미군상륙을 통한 카스트로정부를 무너뜨리기 등이였다. 합참회의쪽 사람들은 꾸바에 대한 전면침공이 최선이라는 강경론을 내세웠다. 반면에 미국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罗伯特·纳马拉)는 “이번 사태를 모르는척하고 그냥 넘어가자”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는 “핵폭탄보유량이 미국은 5000개, 구쏘련은 300개에 불과한 상황에서 꾸바에 핵미사일 몇십기가 추가된다고 해도 힘의 비례에는 변동이 없을테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자”는것이였다. 케네디대통령의 대국민발표후 첫 나흘동안 량국정상간에 전보를 리용한 몇차례의 교신이 있었다. 하지만 구쏘련의 최고지도자 흐루쑈브(赫鲁晓夫)는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쏘련선박은 미국의 해상봉쇄를 묵살할것이라 밝혔다. 실제로 그사이에 미사일과 관련된 구쏘련선박 수십척이 봉쇄선을 향해 점점 다가오고있었다. 미국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주전파의 목소리가 커가고 일촉즉발의 충돌위험이 높아질무렵에 구쏘련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미국이 꾸바를 더는 침공하지 않을것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미국이 구쏘련을 겨냥해 토이기에 배치해놓았던 미사일을 철수할 경우 구쏘련도 꾸바내의 미사일을 철수하겠다”는 내용이였다. 이 타협안을 받은 미국은 곧바로 수정안을 구쏘련에 보냈다. 수정안은 “미국이 꾸바불침공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되 토이기내의 미국미사일철수는 두 정상간의 비밀약속으로 덮어뒀다가 꾸바내의 미사일이 철수된 직후 미국의 자발적조치형식으로 리행한다”는 내용이였다. 이는 미국의 체면을 세워줄 눈가림으로서 미국국무장관 데이비드 딘 러스크(迪安·拉斯克)가 낸 고안이였다. 1962년 10월 28일에 흐루쑈브가 이 수정안을 받아들였다. 미국의 첫 국가안전보장회의 이후 13일간 이어진 련속극은 이렇게 일단락을 맺았다. 사람들은 숨을 다시 내쉬였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이 사태를 망각했다. 꾸바미사일위기를 일단락한 직후 가장 단순화된 평가는 “케네디의 배짱이 구쏘련을 꺾었다”였다. 이는 세월이 지나면서 정론으로 굳어졌다. 미국의 다른 한가지 양보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이런 평가가 나올만도 했다. 카나다군사대학 교수 도언은 먼지가 쌓인 문서보관소를 뒤진 끝에 꾸바미사일위기의 해결과정에서 케네디와 흐루쑈브외에 또 한명의 주역을 발굴해 최근에 한 학술잡지에 발표했다. 당시에 제3대유엔사무총장 우탄트(吴丹)가 막판 며칠간에 눈부신 구실을 했다는 내용이다. 당시에 미국과 구쏘련의 대표부는 뉴욕유엔본부건물 38층에 각각 자리잡았다. 도언교수는 “우탄트가 두방을 숨가쁘게 오가며 중재한끝에 타협이 이뤄졌다”고 했다. 한번은 미국대표가 심야에 우탄트를 깨워서 미국이 최소한의 체면을 세울수 있도록 구쏘련측을 설득해달라고 간청했다는 일화도 찾아냈다. 꾸바미사일위기에 관해 훨씬 뒤에 밝혀진 또 하나의 섬뜩한 사실이 있다. 당시에 꾸바에는 문제의 전략핵무기와는 따로 전술핵폭탄 100여개와 이를 운용할 구쏘련군병력도 주둔해있었다는것이다. 전략핵무기란 대형핵폭탄 혹은 이를 실어나를 미사일을 말한다. 이는 실전에 사용하기보다 힘을 과시해 상대로 하여금 공격할 엄두를 못내게 하는것이 주목적이다. 이에 비해 소형인 전술핵폭탄은 실전에서 사용할것을 전제로 배치된다. 전략핵무기는 군통수권자만이 발사명령을 내리지만 전술핵폭탄은 일선의 지휘관도 발사명령을 내릴수 있다. 만약 당시에 미국이 꾸바를 상대로 군사행동에 들어갔더라면 꾸바주둔 구쏘련군이 방어를 위해 전술핵무기를 썼을 가능성이 높고 그 결과는 생각하기조차 아찔한 상황으로 치달았을것이다. 미국 하버드대학 안전보장전문가 앨리슨교수는 최근에 외교안전보장분야의 전문잡지에 발표한 글에서 “만약 당시에 전면핵전쟁으로 갔더라면 미국인 1억명, 구쏘련인 1억명이상이 사망됐을것”이라고 추산했다. 군사전문가들은 당시에 케네디의 대응에 칭찬할만한 점이 있다면 벼랑끝전술을 들고나온 담력보다 강경론자의 큰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고 균형을 잘 잡은 점이라고 분석했다.    
99    력대 중화민국 1급상장들 (2) 댓글:  조회:6836  추천:0  2015-02-01
력대 중화민국 1급상장들 (2)   (번역)     사망된후에 1급상장 군사계급을 수여받은 국민당 장군들   ◆ 류상(刘湘): 류상은 원훈(元勋)이라고도 하는데 자는 보징(甫澄)이다. 중화민국시기에 사천군벌이였던 그는 1888년 7월 1일에 사천성 대읍현 안인진에서 출생했다. 1932년 6월 4일에 군사위원회에서는 류상을 제7로군 총지휘 겸 륙군제21군 군장으로 임명했다. 1934년 12월 18일에 행정원에서는 사천성정부를 개조하기로 결의하고 류상을 사천성정부주석으로 임명했다. 1937년 12월 3일에 사천군을 제23집단군으로 재편했는데 류상이 총사령을 겸했다. 1938년 1월 20일에 류상은 “항일전쟁을 끝까지 진행해야 하며 적군이 국경밖으로 물러가지 않으면 전선에서 싸우고있는 사천군은 절대 고향으로 돌아오지 말아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한구에서 영영 눈을 감았다. 1월 20일에 국민정부주석 림삼은 공적에 따라 류상에게 륙군1급상장계급을 추증(追赠)한다고 명문화하여 공포했고 2월 14일에 정식으로 1급상장계급을 수여했다. 1939년 9월 19일에 성도에서 류상의 국장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문화대혁명시기에 류상의 묘는 반란파들에 의해 파혀쳐졌다. 1980년중기에 류상의 묘는 다시 수건되였으나 유골은 찾을수 없게 되였다. ◆ 조곤(曹锟): 중화민국초기 직계군벌(直系军阀)의 수령인 조곤은 자가 중산(仲珊)이다. 1862년 12월 12일에 천진 대고구에서 출생한 그는 1923년 6월에 직계군벌은 려원홍을 핍박하여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조곤은 의원들을 매수하는 방법으로 중화민국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1927년 2월에 국민혁명군이 북벌하면서 하남에 도착하자 조곤은 천진으로 도주했다. 1937년의 7.7사변후 일본특무두목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贤二)가 여러번이나 조곤을 찾아와 괴뢰조직의 두목으로 되여달라고 요청했으나 조곤은 번마다 완강하게 거절하여 민족의 절개를 지키기도 했다. 1938년 5월 17일에 조곤은 병으로 천진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76세였다. 1939년 12월에 국민정부에서 조곤에게 륙군1급상장계급을 추증했다. ◆ 오패부(吴佩孚): 오패부는 자가 자옥(子玉)이고 1874년 4월 22일에 산동성 봉래현 북구진 호가촌에서 출생했다. 1917년 7월에 역적토벌군의 서로선봉에 임명되여 장훈의 복벽을 토벌하는 전투에 참가했으며 손중산을 도와 호법군정부를 세우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1919년 12월에 풍국장(冯国璋)이 병으로 사망되자 조곤과 오패부는 직계군벌 수령의 지위를 계승했다. 1925년 10월에 적군토벌련군 총사령으로 임명되여 하남을 공격하여 봉계군벌을 쳤으나 후에 봉계군벌과 련합하여 남북으로 국민군을 협공했다. 1926년 10월에 북벌군의 공격으로 오배부의 주력은 섬멸되였는데 그후부터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1932년에 북평(지금의 북경)에 돌아온 오패부는 괴뢰두목이 되여달라는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1939년에 오패부는 이앓이로 열이 몹시 났다. 그해 12월 4일에 일본치과의사는 일본특무두목  도이하라 겐지의 명령을 받고 오패부의 이를 치료해주는척 하면서 칼로 오패부를 찔러죽였다. 향년 65세였다. 1939년 12월 9일에 국민정부에서 오패부에게 륙군1급상장계급을 추증했다. ◆ 송철원(宋哲元): 송철원은 자가 명헌(明轩)이고 1885년에 산동성 악릉현(지금의 악릉시)에서 출생했다. 1926년에 국민군북로총지휘, 서로총사령으로 임명되였고 1927년 11월에 섬서성정부 주석으로 임명되였다. 1933년에 송철원은 제29군을 지휘하여 장성요새의 희봉구, 라문욕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렸다. 제29군의 대도대(大刀队)는 일보군과 박투를 벌려 일본군 6000여명을 소멸했다. 1935년에 평진위수사령,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겸 하북성정부 주석에 임명되였다. 1940년 4월 5일에 병으로 사망되였다. 1940년 5월 18일에 국민정부에서 송철원에게 륙군1급상장계급을 추증했다. ◆ 진조원(陈调元): 진조원은 자가 설훤(雪暄)이고1886년 11월 12일에 하북성 안신현 동구진 동구촌에서 출생했다. 1930년 9월 5일에 국무회의에서는  안휘성정부를 개조하기로 결정하고 진조원을 안휘성정부 주석 겸 안휘성 당무정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여 부대를 지휘하여 홍군과 싸우게 했다. 1934년 12월 5일에 국민당중앙정치회의에서는 진조원을 군사위원회 군사참의원 원장으로 임명했다. 1936년 12월 4일에 장개석은 서안에 도착하여 공산당을 토벌할데 관한 군사회의를 열려고 준비했다. 10일에 진조원도 서안에 도착했다. 12일에 “서안사변”이 일어나자 진조원은 장학량, 양호성에게 구류당했다. 구류기간에 진조원은 제25군 군장 만요황의 이모를 희롱했다. 장학량은 진조원을 심판할 때 그를 “늙은 색마”라고 질책했다. 1937년 7월에 항일전쟁이 폭발된후 진조원은 줄곧 군사위원회 군사참의원 원장직을 맡으면서 부상병들의 귀대사업을 책임졌다. 1943년 12월 18일에 진조원은 인후암으로 중경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58세였다. 1944년 2월 2일에 국민정부에서는 진조원에게 륙군1급상장계급을 추증했다.     항일전쟁 승리후에 1급상장군사계급을 수여받은 국민당 장군들   ◆ 백숭희(白崇禧): 백숭희는 자가 건생(健生)이고 회족이며 1893년 3월 18일에 광서 림계현에서 출생했다. 사람들은 리종인과 백숭희를 “리백”이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국민당내에서 가장 실력이 있는 지방군사세력인 계계(桂系)의 중심으로서 다년래 줄곧 변함없이 합작했다. 1937년 7월에 항일전쟁이 일어난후 백숭희는 국군부참모총장 겸 군사훈련부장으로 임명되였다. 1938년에 리종인과 백숭희는 대아장회전(台儿庄会战)을 지휘하여 국군항전중 첫 중대한 승리를 취득했다. 그해 6월에 백숭희는 무한회전을 지휘하여 일본군 15만명을 소멸했고 1940년 2월에 계남전역을 지휘하여 두번이나 일본군을 패배시켰다. 1945년 10월 3일에 백숭희는 륙군1급상장계급을 수여받았다. 1946년 5월 15일에 국방최고위원회의 결의로 백숭희는 국방부장으로 임명되였다. 1949년 12월 30일에 백숭희는 해남도에서 대만으로 건너갔다. 리종인의 말에 의하면 백숭희는 국방부장직을 주겠다는 장개석의 승낙을 받고 대만으로 간것이다. 그러나 백숭희는 대만으로 간후 대통령부전약고문위원회 부주임, 중국회교협회리사장 등 실권이 없는 한가한 직에만 위임되였다. 리종인이 미국에 가서 있었기에 장개석은 또 백숭희를 리용하여 리종인을 견제하려고 했다. 보밀국에서는 백숭희공관의 맞은켠에 파출소를 세워놓고 백숭희의 일거일동을 엄밀하게 감시했다. 1965년에 리종인부부는 온갖 장애를 물리치고 북경으로 가서 중공당정군 지도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리종인이 대륙으로 돌아가자 장개석이 백숭희를 리용하여 리종인을 견제하려던 일은 가치가 없게 되였고 백숭희도 제몸을 보전하기 어렵게 되였다. 리종인이 대륙으로 돌아간후 백숭희를 이가 갈리도록 미워한 장개석은 보밀국의 두목 모인봉에게 명령하여 백숭희에 대해 직접 제재행동을 취하라고 했다. 백숭희는 1966년 12월 1일에 대북에서 사망되였다. 사후 시신이 푸르게 변하고 입에 거품을 물었으며 침대깔개는 여러곳이 찢겨져있었다. 장개석이 특무를 파견하여 백숭희를 암살했을 가능성이 매우 많은데 사망원인은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되고있다. ◆ 진성(陈诚): 진성은 자가 사수(辞修)이고 1898년 1월 4일에 절강성 려수시 청전현 고시향 외촌에서 출생했다. 1943년에 중국원정군 사령장관, 1944년 11월에 군정부 부장, 1945년 1월에 후근부 총사령, 1946년 6월에 국방부 참모총장 겸 해군총사령직을 력임했다. 1947년 2월 21일에 진성은 륙군1급상장계급을 수여받았다. 1947년 8월에 장개석은 진성을 동북군영주임으로 위임하여 동북전쟁에 파견했지만 진성은 림표에게 패하고말았다. 1948년 10월에 장개석의 파견으로 대만정무를 주최하게 된 진성은 선후로 대만성 주석 겸 대만경비 총사령, 국민당부총재, 행정원 원장 등 직에 임명되였다. 1954년에 대만정부의 “부대통령”에 당선되였고 1965년 3월 5일에 간암으로 대북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67세였다.      
98    력대 중화민국 1급상장들 (1) 댓글:  조회:6570  추천:2  2015-02-01
력대 중화민국 1급상장들 (1) (번역)     1급상장은 4성상장(四星上将)이라고도 한다. 국민당의 1급상장은 유일한 특급상장(5성상장)인 장개석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군사계급이다. 항일전쟁이 승리하기전에 국민당군 특급상장, 1급상장, 2급상장의 계급표식은 모두 군복의 금판령장우에 3개의 3각별을 달았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령장우에 달았던 계급표식을 견장우에 달았는데 특급상장은 5개의 5각별을 견장우에 달았고 1급상장은 견장우에 4개의 5각별을 달았으며 2급상장은 3개의 5각별을 견장우에 달았다. 당연히 중장은 2개의 5각별, 소장은 1개의 5각별.   1935년 4월 2일에 1급상장군사계급을 수여받은 국민당 장군들 ◆ 풍옥상(冯玉祥): 풍옥상장군은 본명이 풍기선(冯基善)이고 자가 환장(焕章)이다. 1882년 11월 6일에 출생한 풍옥상은 본적이 안휘성 소현(巢县—지금의 안휘성 소호시 하각진 죽가촌)이고 기적(寄籍)이 하북성 보정시이다. 1927년 4월에 풍옥상은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 총사령을 맡았고 1928년에 부대를 거느리고 제2차북벌에 참가했으며 10월에 행정원 부원장 겸 군정부장으로 임명되였다. 1935년 12월에 남경에서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였다. 1936년후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제3전구와 제6전구 사령장관직을 맡았다. 1946년에 핍박에 의해 강제로 퇴역한후 수리고찰의 명의로 미국으로 가게 되였다. 반세기동안 부대를 거느리고 전쟁터를 누비였던 풍옥상은 1948년 9월 1일에 선박화재사고로 여섯째딸 풍효달(冯晓达)과 함께 사망되였는데 그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되고있다. ◆ 주배덕(朱培德): 주배덕은 1888년에 출생했는데 자가 익지(益之)이다. 1930년 4월에 중원대전이 폭발했을 때 제1로군 총지휘로 임명된 주배덕은 장개석을 도와 각파의 군벌을 굴복시켜 전국통일을 실현했다. 1931년 6월에 국민정부 위원으로 당선되였고 12월에 군사위원회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였다. 1937년 2월 15일에 병에 걸린 주배덕은 독일에서 수입한 항빈혈약물을 주사받았다. 17일밤 11시에 주사로 인한 혈액중독으로 사망되였다. 향년 49세였다. ◆ 리종인(李宗仁): 리종인은 자가 덕린(德邻)이고 1891년 8월 13일에 광서 림계에서 출생했다. 1926년에 좌익군 지휘관, 강좌군 총지휘, 국민당호북성림시정치회의 위원, 안휘성정부 주석, 국민정부위윈과 국민정부군사위원회 위원 등 직을 력임했다. 1948년 4월에 리종인은 중화민국 부대통령으로 당선되였고 1949년 1월 21일에 장개석이 은퇴한후 중화민국 대리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49년 11월 20일에 의사를 찾는다는 명의로 미국으로 가서 16년동안의 망명생활을 했다. 1956년 4월부터 1965년 6월까지의 기간에 리종인은 선후로 다섯번이나 정사원을 북경에 파견하여 주은래를 만나 그가 대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게 했다. 1965년 7월에 리종인은 겹겹의 장애와 위험을 무릅쓰고 안해와 함께 조국 대륙으로 돌아왔다. 1969년 1월 30일에 그는 페염으로 북경에서 사망되였다. ◆ 하응흠(何应钦): 하응흠은 자가 경지(敬之)이고 1890년 4월 2일에 귀주성 흥의에서 출생했다. 황포계에서 장개석의 제2호인물이였다. 1931년의 9.18사변후 국민당중앙정치회의 특별사무위원회 위원직을 맡았고 1933년에 북평군분회 대리위원장직을 맡았다. 1938년에 군사위원회 참모장, 1944년에 중국륙군 총사령, 1948년에 국방부 부장직을 력임했고 1987년 10월   21일에 병으로 대만에서 사망되였다. ◆ 장학량(张学良): 장학량은 1901년 6월 3일에 료녕성 태안현 구간향 악가촌 장가보둔에서 봉계군벌 수령 장작림의 장자로 출생했다. 자는 한경(汉卿), 호는 의암(毅庵), 유명은 쌍희, 소륙자이고 풍류를 즐기는 국민당4대미남자중의 하나였다. 1928년 6월 4일에 발생된 세상을 놀래운 황고둔사건으로 아버지 장작림이 일본인에 의해 폭사(炸死)된후 동북보안 총사령직을 이어받아 동북3성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1931년 9월 18일에 일본관동군이 세상을 놀래운 “9.18”사변을 일으키자 장학량은 동북을 일본군에 내주고 도망쳤다. 1934년 2월에 예악환3성초총 부총사령, 무창해영주임, 서북초총 부총사령 등 직을 력임했다. 1936년 12월 12일에 양호성과 함께 세상을 놀래운 “서안사변”을 일으켜 공산당과 련합하여 항일하도록 무력으로 장개석을 핍박했다. 그 일로 줄곧 장개석에게 연금되였다가 1990년부터 점차 인신자유를 회복하여 1993년 4월에 동북대학 명예교장, 5월에 할빈공업대학 명예리사장으로 초빙되였으며 1995년에 대만을 떠나 미국 하와이에 거주했다. 2001년 10월 14일에 병으로 사망되였다. 향년 101세였다. ◆ 진제당(陈济棠): 진제당은 자가 백남(伯南)이고 1890년 2월 12일에 광동성 동흥마로진에서 출생했다. 1929년 3월에 국민당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고 1937년 9월에 국민정부위원회 위원, 최고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였다. 1946년에 해남특구 행정장관 겸 경비사령으로  임명되였고 1949년에 해남행정장관 겸 해남경비사령직에 임명되였다. 1950년 4월에 대만으로 도주한후 대만 “대통령부” 정치전략고문직을 맡았다. 1954년 11월 3일에 대만에서 사망되였다. ◆ 당생지(唐生智): 당생지는 1889년에 호남성 동안에서 출생했는데 자가 맹소(孟潇)이다. 북벌전쟁시기에 국민혁명군 제8군 군장, 전적총지휘, 제4집단군 총사령, 호남성 주석 등 직을 맡았다. 1929년에 국민당정부 군사참의원 원장, 제5로군 총지휘에 임명되였다. 1937년 11월에 남경위수사령장관으로 임명되였고 남경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한후 조직과 련계를 잃은 그는 장기간 한가롭게 호남성에 거주했다. 1949년에 호남평화봉기에 참가했고 건국후 전국인민대표대회 제2, 3기 상무위원, 정협전국위원회 제1기, 2기, 3기, 4기 상무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호남성인민정부 부주석, 부성장, 중남군정위원회 위원, 중남행정위원회 위원 등 직을 맡았다. 1970년 4월 6일에 장사에서 암으로 사망되였다. 향년 82세였다. ◆ 염석산(阎锡山): 염석산은 자가 백천(百川)과 백천(伯川)이고 1883년 10월 8일에 산서성 오태현 하변촌(지금의 정양현 하변진)에서 출생했다. 그는 1911년에 무창봉기후 산서성도독(都督)으로 추천되였고 북양정부기간에 원세개를 지지하여 산서성 성장으로 임명되였다. 1927년에 국민혁명군 북방총사령으로 임명되였고 이듬해에 제3집단군 총사령으로 임명되였다. 1929년에 당생지를 토벌하는 전쟁에 참가했으며 장개석에 의해 륙해공군 부사령으로 위임되였다. 1949년 4월에 중국인민해방군이 태원을 점령한후 산서에서 도주했으며 그해 6월에 광주에서 국민정부 행정원장 겸 국방부장으로 취임했다. 후에 대만으로 건너가서 행정원장, 국민당중앙평의위원에 임명되였다. 1960년에 병으로 대북에서 사망되였다. ◆ 진소관(陈绍宽): 진소관은 자가 후보(厚甫)이고 1889년 10월 7일에 복건성 민현에서 출생했다. 1932년 1월에 해군부장으로 임명되였고   1938년에 해군총사령에 임명되였다. 1949년 8월에 부분적 국민당해군봉기에 참가했고 복주가 해방된후 복건성인민정부 부주석, 부성장, 국방위원회 위원, 화동군정위원회 위원 등직을 력임했다. 1969년 7월 30일에 복주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80세였다.   1939년에 1급상장군사계급을 수여받은 국민당 장군   ◆ 정잠(程潜): 정잠은 자가 송운(颂云)이고 1882년 3월 31일에 호남성 례릉에서 출생했다. 일본륙군사관학교 제6기졸업생인 정잠은 상군도독부 참모장, 비상대통령부 륙군총장, 광동대본영 군정부 부장 등직을 력임했다. 1938년부터 제1전구 사령장관 겸 하남성주석직을 맡았고 란봉회전 등 대전역을 지휘했다. 1939년 5월 13일에 국민정부에서는 정잠에게 륙군1급상장계급을 수여했다. 1940년에 군사위원회 부총참모로 임명되였고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무한행영주임으로 임명되여 화중(华中)의 군정(军政)을 관할했다. 1949년에 7월 22일에 정잠과 진명인은 대표를 파견하여 공산당과 평화담판을 했다. 8월 4일에 정잠과 진명인은 호남성 보안부 및 국민당제1병퇀의 전체관병들을 거느리고 장사에서 봉기를 거행했다. 중국공산당의 지도부에서는 장사에서 봉기한 정잠과 진명인에게 중임을 맡겼다. 1949년후 정잠은 선후로 중앙인민정부 위원, 전국인대 상무부위원장, 호남성 성장, 민혁중앙부주석 등 직을 력임했다. 문화대혁명시기에 주은래의 특별보호로 박해를 받지 않았다. 1968년 4월 5일에 북경에서 사망되였다.    
97    장개석을 대신하여 공개장소에서 활동한 비밀인물 댓글:  조회:7296  추천:0  2015-01-25
  장개석을 대신하여 공개장소에서 활동한 비밀인물   (번역)     1934년에 홍군을 포위토벌하기 위해 장개석(蒋介石)은 직접 사천, 운남, 귀주에 가서 장병들을 위문하기로 결정했다. 진립부(陈立夫)는 뜻밖의 화를 방지하기 위해 장개석을 대신하여 공개장소에 나설 인물(替身)을 선택하여 동행하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진립부가 장개석을 닮은 몇명을 추천했지만 장개석은 모두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나중에 장개석은 결의형제 하운(何云)이 생각났다. 1880년에 절강성에서 출생한 하운은 장개석보다 7살 년상이였다. 하운은 상해에서 록영병(绿营兵)으로 있을 때 오장(伍长)과 함께 물건을 사러 거리에 나간적이 있었다. 그때 오장이 담배가게에서 권연을 가지고도 돈을 주지 않았다. 가게주인이 돈을 달라고 하자 오장은 오히려 제쪽에서 화를 내면서 주인을 마구 때렸다. 하운은 보다못해 오장을 말리면서 돈을 주라고 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장개석이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다. 장개석은 하운이 자기와 똑같이 생긴것을 보고 놀랐다. 또 하운이 부패한 청정부를 증오하는것을 보고 그를 쓸모 있는 인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하운과 결의형제를 맺었다. 하운은 장개석의 소개로 동맹회에 가입했고 후에 장개석의 부관으로 되였다. 진립부가 하운의 사진을 보니 과연 생김새가 장개석과 비슷했다. 진립부는 즉시 차를 항주에 보내 하운을 데려오게 했다. 하운이 남경에 도착한 그날밤에 대통령부에서 연회가 있었다. 연회석에서 장개석과 하운은 지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운은 장개석의 은혜에 몹시 감격해하고있었다.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 교장직을 맡은후 전례를 깨고 파격적으로 학교문에도 다녀보지 못한 하운을 황포군관학교 제1기학원으로 받아들였다. 또 북벌군이 항주를 공격한후 장개석은 하운을 항주시공안국 국장 겸 절강성군사청 부청장으로 임명했다. 식사가 끝난후 진립부는 하운을 밀실로 안내했다. 진립부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번에 당신을 남경에 청해온것은 한가지 중요한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귀주의 정황은 매우 복잡하여 장위원장의 안전을 보장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장위원장을 대신하여 공개장소에 나설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당신이 이 일을 맡는것이 어떻겠습니까?”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저를 선택한것은 장위원장과 진주임이 저를 믿기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꼭 장위원장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하운이 시원스럽게 대답하자 진립부는 하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장위원장을 대신하려면 생김새가 흡사해야할뿐만아니라 본질적인 면도 비슷해야 합니다. 크게는 군정대사를 처리하는데서부터 작게는 음식습관에 이르까지 당신은 반드시 위원장님과 똑같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조그마한 허점도 보아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후부터 하운은 시시각각 장개석의 곁에 붙어서서 장개석의 하나하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면서 그대로 따라했다. 화를 내는 행동과 웃는 모습까지 그대로 따라했다. 그리고 밤이면 밀실에 돌아가 낮아보았던 장개석의 말과 행동을 반복적으로 련습했다. 장개석을 모방하기는 결코 쉬운일이 아니였다. 하운의 고향은 절강성 서남부였기때문에 습관과 발음이 장개석과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장개석은 고기를 적게 먹고 고기를 먹을 때 반드시 생선이 있어야 했지만 하운은 고기와 남새를 구분하지 않고 많이 먹고 빨리 먹었다. 하지만 하운은 장개석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련습했다. 1934년 12월초에 장개석은 중산릉에서 위병대를 검열할 때 일부러 하운을 내보내여 효과를 시험해보기로 결정했다. 일본식 짧은 수염을 기른 하운은 가슴에 훈장과 메달을 가득 단 특급상장군복을 입은후 검은색외투를 걸치고 위병대앞에 나타났다. 위병대는 주석대를 지날 때 일제히 경례를 군례를 올리면서 “위원장님, 안녕하십니까?”하고 높이 웨쳤다. “장개석”은 주석대우에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사병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서 “형제들, 안녕하십니까?”하고 소리쳤다. 검열이 결속된후 “장개석”은 강의를 하지 않았다. “장개석”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주석대의 요원들과 일일히 악수를 하고 나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그때 송미령이 걸어나오며 매우 기쁜 심정으로 “장개석”의 손을 잡고 “친애하는이, 위병대의 장비와 정신상태가 모두 좋군요. 하지만 약간의 문제가 있군요”하고 말했다. “장개석”은 대번에 얼굴이 붉어지면서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참후에야 그는 “부인은 어떤 고견을 가지고있는지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송미령은 의아해서 되물었다. “친애하는이, 설마 보아내지 못한건 아니겠지요?” “장개석”이 머리를 가로 젖자 송미령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두 참, 귀인은 잊음이 헤프다더니…됐어요. 돌아가 다시 말해주지요.” 송미령은 “장개석”의 손을 잡아끌었다. “장개석”은 고분고분 따라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진립부는 급해났다. 만약 “장개석”이 정말로 송미령과 함께 승용차에 올라 대통령부로 직통한다면 일이 매우 시끄럽게 될판이였다. 진립부는 급히 “장개석”에게 눈짓을 했다. 그제야 “장개석”은 급히 멈춰서서 “부인, 난 먼저 화장실에 가야겠소”하고 말했다. “장개석”이 화장실쪽으로 걸어가자 그제야 여러 군정요인들은 주석대에서 내려와 송미령을 보고 인사했다. 진립부는 몰래 진땀을 흘리다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가짜장개석 하운이 겨우 사람들을 속여넘겼던것이다. 하운의 성공적인 연기에 매우 만족을 느낀 장개석은 장기적으로 그를 시종실에 남겨두었다가 필요할 때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후 하운은 장개석을 대신해 많은 공개장소에 나타났다. 기념식이나 기념사진을 찍을 때에는 대부분 하운이 장개석을 대신하여 활동했다. 1935년에 귀주로 갔을 때 처음에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일부 연회에만 참석했다. 일은 장개석이 비밀리에 비행기를 타고 곤명으로 날아온후에 생겼다. 귀주에서 장개석을 대신하여 활동하던 하운은  자기 마음대로 병력을 이동시키고 장수를 파견하였다. 그때문에 병력이 부족되여 무의식중에 홍군에게 한갈래의 길을 내주게 되였다. 홍군이 봉쇄에서 벗어나자 장개석은 대노했다. 하운은 남경에 돌아온후 진립부의 요청을 받았다. 진립부는 하운을 당산汤山아래에 있는 별방에 연금시켰다. 하운은 별장에서 하루를 일년같이 보내면서 항주에 있는 안해와 아이들을 그리워했다. 그 시기의 장개석은 공산당포위토벌에 혈안이 되여 그를 대신하여 천군만마를 지휘했던 결의형제를 한쪽에 버려두었다. 그러다가 1935년 11월에 열린 국민당6중전회에서 왕정위에게 총알이 날아오자 장개석은 위험한 장소에서 자신을 대신할 하운을 생각하게 되였다. 그러나 송미령이 견결히 반대했다. 하운이 장개석과 너무 똑같았기에 송미령은 늘 진짜 장개석과 가짜 장개석을 알아보지 못한데서 불필요한 시끄러움이 생겼기때문이다. 게다가 하운은 문화수준이 낮아 여러가지 소질이 차하였고 사투리를 섞어서 말했기에 장개석을 대신하여 공개장소에 나설 합격된 인물이 아니였다. 장개석은 하운에게서 절대로 비밀을 루설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은후 하운의 자유를 회복해주었다. 1937년 5월에 장개석은 하운에게 소장계급을 수여하고 국민정부군사참의원 참의직을 맡겼다. 하운에 남경에 출근하지 않고 항주에 앉아서 진립부의 보살핌으로 높은 로임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군이 남경, 상해, 항주를 점령하자 처지가 어렵게 된 하운은 장개석을 찾아 중경으로 갔다. 장개석은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고 명령을 기다리고있으라고 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하운은 장개석의 명령을 받고 항주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시기에 장개석은 내전을 하느라고 바삐 보낸데다가 자신을 반대하던 군벌들도 하나하나 굴복시켰기에 위험한 장소에 대신 나갈 인물이 수요되지 않았다. 생활형편이 어려웠던 하운은 여러번이나 장개석과 진립부에게 편지를 써서 공직을 회복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줄곧 회답을 받지 못했다. 하운은 병상에서 “내가 ‘위원장’을 대신해주었지만 위원장은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구나!”하고 탄식했다. 1947년 6월에 장개석은 자신에게 충성하고 목숨을 걸고 싸운 애장들에게 계급을 수여했다. 그때에야 장개석은 갑자기 하운이 생각나서 군사위원회에 부탁해서 다시 하운에게 소장계급을 수여하게 했다. 하운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병세가 중해서 말도 할수 없었다. 하운은 힘들게 한번 웃었을뿐이였다. 1947년 9월에 하운은 병으로 고향 건덕현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67세였다.  
96    전기적인 잠복영웅 전장비 댓글:  조회:5508  추천:0  2015-01-18
전기적인 잠복영웅 전장비   (번역)     1895년에 절강성 호주의 한 상인가정에서 출생한 전장비(钱壮飞)는 본명이 전장추(钱壮秋)이다. 1919년에 국립북경의과전문학교(지금의 북경대학의학부)를 졸업한 그는 북경에 남아 의사사업을 하면서 미술과 해부학을 가르치기도 했고 영화감독과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또 서예와 무선전기술에 능하기도 했다. 1925년에 그는 부인 장진화(张振华)와 함께 북경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7년에 대혁명이 실패한후 전장비는 풍옥상의 서북군에 들어가 군의(军医)로 있다가 봉급을 제때에 주지 않기에 상해로 들어가면서 조직과 잠시 련계를 잃게 되였다. 이듬해 8월에 전장비는 무선전훈련반초생광고를 보고 시험을 쳐서 수석으로 합격되였다. 이 훈련반은 국민당이 새로 세운 특무조직에 속했다. 전장비는 일이 중대한것을 느끼고 여러가지 경로를 거쳐 리국농을 찾아갔다. 주은래는 이 소식을 들은후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여 전장비에게 잠복임무를 맡겼다. 1929년말에 전장비는 리극농(李克农), 호저(胡底)와 함께 당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의 최고정보기관에 잠복해 들어갔다. 재능이 넘치고 총명한 전장비는 국민당중앙조직부 당무조사과 특무두목 서은증(徐恩曾)의 기요비서로 임명되였다. 주은래는 해방후에 “그들 세 사람(리극농, 전장비, 호저)은 범의 굴에 깊숙히 잠입해들어갔는데 룡담3걸(龙潭三杰)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만약 룡담3걸이 없었더라면 중국공산당의 력사는 다시 써야 할것입니다”라고 감탄조로 말한 적이 있다. 1928년 8월에 전장비는 국민정부건설위원회 무선전관리처 상해주재판사처에서 꾸린 훈련반에 수석으로 합격되여 들어갔다. 그후 무선전관리처의 상해영업처에 배치된 그는 그 당시에 무선전관리처의 영업과장 겸 상해영업처주임직을 맡고있던 서은증의 눈에 들었다. 진립부의 직계사촌동생인 서은증은 전장비가 업무에 능하고 자기와 한고향인것을 보고 자신의 업무관리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당시에 서은정에게는 정부가 있었는데 합당한 거처가 없었다. 공산당조직에서는 그녀를 전장비의 집에 거주하게 했다. 그렇게 되여 전장비의 집은 더욱 안전하게 되였다. 서은정은 자신의 처가 모르도록 정부를 숨겨준 전장비의 “의로운 행위”에 대해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 1929년 12월에 서은정은 국민당중앙조직부 총무부 주임 겸 당무조사과 주임대리직에 임명되였다. 서은정은 주동적으로 전장비를 기용비서로 추천했다. 중공중앙특수과에서는 리국농, 전장비, 호저에게 특별당소조를 세우고 함께 국민당특무기관에 잠복해들어가라고 지시했다. 국민당고위급관원들은 암호문을 가지고 오가는 정보내용을 알아보군 했다. 장개석과 진립부의 지시에 따라 당무조사과의 암호문은 서은증이 혼자서 직접 보관했다가 혼자서 사용하고있었다. 전장비는 몰래 보험궤안에 들어있는 암호문을 꺼내여 특무용카메라로 찍어두었다. 전장비는 이 암호문을 통해 국민당최고위급내의 핵심기밀을 장악했다. 1930년 겨울부터 1931년 2월까지의 기간에 장개석은 혁명근거지에 대해 제1차포위토벌과 제2차포위토벌을 감행했는데 전장비는 해당병력부서와 중요한 정보를 알아내여 리극농, 진갱(陈赓) 등을 통해 당중앙에 보내주었다. 1931년 4월에 장기간 중공중앙기관의 보위사업을 책임졌던 고순장(顾顺章)이 무한에서 적들에게 붙잡힌후 반변했다. 고순장은 상해의 중공중앙비밀을 전부 적들에게 털어놓았다. 위급상황에서 전장비는 자신이 장악한 비밀암호로 6통의 특급비밀전보문을 풀어서 제때에 정보를 리극농에게 보내주었다. 리극농은 이 정보를 진갱에게 전해주었고 진갱은 또 이 위급한 상황을 주은래에게 보고했다. 주은래는 상해의 중공중앙과 강소성위, 공산국제원동국의 기관을 지휘하여 긴급히 전이하게 했다. 4월 27일밤에 고순장과 련계가 있는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주은래, 구추백, 왕명, 박고, 등영초, 등소평, 진운, 진갱, 섭영진 등 지도동지들과 지하교통원들이 순리롭게 위험에서 벗어났다. 전국이 해방된후 주은래는 여러번이나 “전장비동지가 아니였더면 우리는 모두 국민당반동파의 손에 죽었을것입니다”라고 감탄해마지 않았다. 1934년 10월에 전장비는 장정에 참가했고 1935년 1월에 열린 준의회의후 홍군총정치부 부비서장으로 임명되였다. 그해 4월에 전장비는 귀주성 금사현 후산향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39세였다. 백색구역에서 퇴각하여 쏘베트구역으로 돌아온후 전장비는 홍1방면군을 따라 기나긴 장정길에 발자국을 남겼지만 불행하게도 귀주성 오강변에서 기이하게 실종되였다. 전장비는 서쌍영(徐双英)과 결혼하여 1914년에 맏딸 전초(钱椒)를 보고 1915년에 둘째딸 전진진(钱蓁蓁)을 보았다. 전진진은 려리리(黎莉莉)라고도 한다. 전장비는 1915년에 장진화를 알게 되여 1919년에 그녀와 결혼했다. 장진화는 아들 전강(钱江)과 전굉(钱锽)을 낳았다. 전굉은 후에 전일평(钱一平)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전일평은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것은 1931년 4월 26일 깊은 밤이였다. 그 시기에 우리는 상해 성도로에 거주했다. 밤중에 어머니가 이불속에서 자는 나를 잡아일으켰다. 아버지가 낮은 소리로 ‘빨리, 빨리 일어나라. 다른데 가서 자야한다’고 하는 말밖에 안들렸다. 그때 나는 일곱살이였다. 아버지는 미처 어머니에게 몇마디 부탁도 못하고 급히 상에 엎드려 편지 한통을 썼다. 그리고 곤난이 있으면 조직에서 관심해줄것이니 어머니더러 할머니와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라고 하면서 만약 서은증徐恩曾이 우리를 난처하게 굴면 그 편지를 공개하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편지를 어머니에게 넘겨준후 급히 나갔다. 어머니는 사태의 엄중성을 알고 아버지를 붙잡고 시집올 때 가지고왔던 장신구를 아버지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잠간동안 본후 우리는 그와의 련계를 잃게 되였다. 아버지가 떠난후 과연 서은증은 나의 누나 전초(钱椒)를 붙잡아 남경경비사령부에 가두었다. 그후 그는 아버지가 그의 탐오부패를 적발할가봐 두려워 누나를 풀어주었다. 나는 아버지의 막내아들이였다. 나의 누나 전초는 아버지를 따라 정보사업의 제1선에서 사업했다. 형님 전강(钱江)은  영화 《중화의 아들딸》을 찍은 저명한 촬영사이며 감독이였다. 둘째 누나 려리리는 1930년대 중국의 저명한 “무성영화황후”였다. 나는 형님과 누나의 문예재능은 모두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은것이라고 생각된다. 국립북경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아버지는 의술을 정통했을뿐만아니라 서예, 미술, 조각, 만화와 가곡창작에 능했으며 《홍색간첩》,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가》 등 극본을 쓰고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음력설을 쇨 때 아버지는 빈센트로 약솜을 집어서 주련을 썼는데 그 정경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기억속에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전장비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모택동은 전장비의 실종에 대해 매우 큰 중시를 돌리면서 홍5군퇀에 통지하여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꼭 전장비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홍5군퇀은 명령을 받은후 이 임무를 군퇀 보위국장 구양의(欧阳毅)에게 맡겼다. 구양의는 신속하게 부대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가서 전장비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림속과 마을을 샅샅이 뒤졌으나 전장비의 종적을 찾지 못했다. 특수한 전선의 전기적 영웅 전장비는 이렇게 우연하게 혁명대오에서 소실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그의 실종경과에 대해 알게 되였다. 원래 그가 군위2국의 부국장에 임명되였을 때 군위수장이 많았기때문에 그에게 당나귀밖에 차려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행군속도가 늦어져 오강을 건너갈 때 대부대와 뒤떨어지게 되였다. 그때 적기가 폭격을 하는 바람에 피해서 수림속으로 들어갔던 그는 토비들에게 발견되여 붙잡히게 되였다. 토비들은 그가 홍군의 고급간부인것을 보고 그를 인질로 삼아 재물을 협박하려고 했다. 그때는 이미 부대가 멀리 떠났기때문에 련계할수 없었다. 전장비는 상해에 있는 안해에게 편지를 써서 방법을 대여 돈을 가지고 자신을 구하러 오라고 했다. 그의 안해는 편지를 받았지만 길이 멀고 또 국민당통치구역이였기때문에 남편을 구하러 갈 방법이 없었다. 결과 전장비는 토비들에게 살해되였다. 하지만 이는 추측에 불과하고 전장비의 진정한 사망원인은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95    권세를 위해 10명의 친혈육을 죽여버린 무측천 댓글:  조회:7282  추천:1  2015-01-11
권세를 위해 10명의 친혈육을 죽여버린 무측천 (번역)   중국력사상에서 유일한 녀황제인 무측천은 잔인함과 총명, 광적인것과 랭정함을 한몸에 지닌 형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녀는 초인간적인 지혜와 정치수단을 가진 동시에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악렬했을뿐만아니라 잔인한 관리들을 등용하여 강경한 수단으로 자신의 무주왕조(武周王朝)를 다스렸다. 그녀는 심지어 포대기속의 친딸마저 목을 졸라 죽였다. 무측천은 예쁘고 책략이 뛰여났으며 권세를 탐하여 온갖 계략을 꾸며댔다. 그녀는 또 불교를 신봉했지만 황음무치했다. 그녀는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잔인하고 무정하게 권력과 리익을 위해 다투었으며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면 사랑도 혈육도 모두 버릴수 있었다. 조숙한 무측천은 14살에 남녀의 일에 대해 알고있었다. 그해(정관 11년 즉 기원 637년)에 당태종은 미녀선발을 했는데 결과 무측천은 후궁으로 선발되여 입궁했다. 입궁하기전에 어머니 양씨가 통곡했지만 그녀는 매우 평온한 어조로 “천자를 만나면 복이 넝쿨째로 굴러들어오겠는데 슬퍼하게 뭔가요?”하고 말했다. 과연 당태종은 무측천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홀딱 반하여 사흘만에 “재인”으로 봉했다. 당조초기의 후궁제도에 따르면 재인은 정5품으로서 황제의 121명 처첩중에서 서렬 30위에 속하여 높지는 않았지만 낮지도 않았다. 더구나 이는 관례를 깨고 월급하여 승급시킨것이다. 당태종 리세민(기원 599년 1월 23일~ 기원 649년 7월 10일)은 나이가 무측천(기원 624년 2월 17일~기원 705년 12월 16일)의 아버지벌이 되였기에 무측천은 당태종과 한평생을 함께 보낼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처음에는 당태종의 총애를 받다가 점점 랭대를 받게 되자 무측천은 기타의 계략이 있는 비빈들처럼 당태종이 죽은후의 준비로 황자들중에서 뒤배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황자들중에서 가장 당태종의 총애를 받은 황자는 위왕 리태였다. 궁중에서 적지 않은 비빈들이 모두 리태의 비위를 맞추며 암암리에 그와 사통했지만 무측천만은 그녀들과 달리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무측천은 나약하고 성실한 진왕 리치를 선택했다. 리치라면 앞으로 마음대로 조종할수 있을것이였기때문이다. 어느날에 무측천은 뒤간으로 가는 리치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금대야에 담은 물을 두손으로 받쳐들고 손을 씻으라고 했다. 반쯤 무릎을 꿇고 애교가 넘치고 매혹적인 자태로 추파를 보냈다. 리치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욕정을 억누를수 없어 손을 씻는다는것이 그만 더운물을 무측천의 얼굴에 튕겨놓았다. 그 일이 있은후 “모자”는 당장에서 마른 장작에 불이 붙은것처럼 걷잡을수 없이 한몸으로 되여 붙어버렸다. 얼마후 무측천은 리치의 아이를 임신하였다. 때문에 《정사(情史)》에서는 리치를 “증(烝)”이라고 했다. 그 뜻은 아버지의 녀자와 성관계를 발생했다는것이다. 무측천은 당태종의 습성을 꿰뚫어보았다. 무측천의 계략에 따라 리치는 아버지 당태종에게 잘보이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당태종은 결국 리치를 태자로 봉했다. 당태종이 죽은후 리치가 황위를 이었는데 그가 곧 당고종이다. 당대후궁의 규정에 따라 무측천은 후궁을 떠난후 장안의 감업사 수선암에 출가하여 5년동안 녀승으로 되였다. 당시 25~26세였는데 한창 청춘이 발랄한 나이였다. 그해 당고종과 후비일행은 당태종의 사망5돐에 맞춰 감업사에 찾아와서 분향하고 복을 기원했다. 황제에게 총애를 받고있는 소숙비를 질투하고있던 왕황후는 무측천을 본후 몰래 사람을 파견하여 그녀를 다시 입궁시켰다. 그리고 무측천을 곱게 단장시켜 슬그머니 당고종의 침상으로 보냈다. 무측천의 힘을 빌어 소숙비를 견제하려는것이였다. 처음에 무측천은 겸손하게 례절을 지키면서 천방백계로 왕황후에게 아부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소숙비를 물리쳐버렸다. 하지만 무측천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온갖 방법을 다하여 왕황후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다. 무측천은 재물로 궁중의 태감과 궁녀들을 매수하여 왕황후의 일거일동을 살피게 했다. 무측천은 당태종의 재인으로 있을 때 독한 녀자로 소문났다. 그때 서역에서 당나라에 보마(宝马) 한필을 보내왔는데 매우 사나와서 젊고 힘센 남자들도 길들일수 없었다. 말을 잘 타기로 소문난 당태종도 그 말을 타다가 굴러서 땅바닥에 떨어졌다. 모두들 속수무책으로 있을 때 무측천이 나서서 말했다. “천첩에게 세가지 물건만 주면 그 말을 다스릴수 있습니다.” “무슨 세가지인가?” 당태종이 묻자 무측천이 대답했다. “쇠채찍, 쇠망치, 칼입니다. 먼저 쇠채찍으로 가죽이 찢기도록 때리는것입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쇠망치로 죽도록 대갈통을 내리쳐야 합니다. 그래도 굴복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칼로 숨통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당태종은 비록 전쟁터에서 반생을 보내면서 사람과 말을 수없이 죽였지만 무측천처럼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악렬한 녀자는 처음 보았다. 그래서 암암리에 무측천을 경계하였다. 사실 무측천은 사악하고 잔인했을뿐만아니라 독사같은 녀인이였다. 속담에 범도 제 새끼를 잡아먹지 않는다고 했지만 무측천이란 흉악하고 잔인한 암펌은 자식을 잡아먹을었을뿐만아니라 뼈도 남기지 않고 삼켜버렸다. 무측천은 왕황후를 제거해버릴 한가지 독한 계략을 생각해냈다. 그 당시 무측천은 딸을 낳았는데 매우 령리하고 예쁘게 생겨 고종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왕황후도 아이를 낳지 못해 무측천의 딸을 매우 좋아했다. 어느날에 왕황후가 무측천의 거처로 찾아왔는데 무측천은 일부러 친절하게 황후와 한담을 하는척 하면서 기회를 타서 궁녀에게 꼬마공주를 안고오라고 시켰다. 왕황후는 기뻐서 아이를 안고 놀다가 아이가 잠이 들어서야 돌아갔다. 황후가 방금 문을 나섰을 때 궁녀가 달려들어와 황제가 온다고 아뢰였다.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여긴 무측천은 잔인하게도 포대기속에서 자고있는 친딸의 목을 졸라죽였다. 그리고 어린 딸의 시신을 바라보며 “너는 제왕의 집에서 태여났지만 아쉽게도 이 에미의 전도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고 말한후 이불을 덮어버렸다. 그때 고종이 들어와서 이불을 열어보고 딸이 숨이 막혀 죽은것을 보게 되였다. 고종은 방금 누가 왔다갔는가고 물었다. 무측천은 울면서 황후밖에 왔다간 사람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고종은 비분하여 “황후가 내 딸을 죽였다!”고 소리쳤다. 고종은 즉시 조서를 내려 왕황후를 페위시키고 무측천을 황후로 봉했다. 얼마 안되여 무측천은 또 황제를 충동질하여 왕황후와 소숙비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다. 황후가 된후 무측천은 자기의 네 오빠를 제발하여 높은 벼슬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네 오빠는 그녀의 작법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녀가 마음대로 조정을 뒤흔든다고 책망했다. 무측천은 대노하여 그들을 변방으로 류배시켰다. 그리고 도중에 핍박하여 그중 두 오빠를 자살하게 했다. 나머지 두 오빠도 하마트면 독해를 당할번 했다. 무측천의 친언니 한국부인은 남편을 잃은후 딸을 데리고 황궁으로 찾아왔다. 고종은 미모의 모녀를 보고 홀딱 반하여 후궁으로 들인후 무측천을 전보다 랭담하게 대했다. 어렵게 황후가 되여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 하던 무측천이 어찌 다른 녀자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것을 보고만 있을수 있겠는가? 그 상대가 친언니고 외조카딸이라고 해도 용서할수 없는 일이였다. 한달후 한국부인은 갑자기 영문을 알수 없이 죽어버렸다. 고종은 무측천이 한 짓이라고 의심했지만 증거를 찾을수 없었다. 그래서 소홀함이 없이 한국부인의 딸 위국부인을 보호했다. 그후 다행히 죽을 고비를 넘긴 무측천의 두 오빠가 황궁으로 찾아오게 되였다. 무측천은 후궁에서 한상 차려놓고 두 오빠를 초대했는데 그 자리에는 고종과 위국부인도 있었다. 무측천은 직접 주방에 내려가 두 오빠가 가져온 물고기안에 독약을 넣었다. 그리고 그 물고기를 고종의 총애를 받고있는 위국부인에게 주었다. 그 물고기를 먹은 위국부인은 당장에서 일곱구멍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었다. 이렇게 자신에게 장애가 되는 외조카딸을 제거한 무측천은 두 오빠를 무함했다. 그녀는 두 오빠가 가져온 물고기에 독약이 들어있다고 하면서 시위에게 명령하여 두 오빠의 목을 베여버렸다. 이번에 그녀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본것이다. 눈앞의 련적을 제거하고 또 자신이 하는 행동을 반대할것이 뻔한 두 오빠를 처리해버린것이다. 당고종은 만년에 몸이 병약하여 황위를 무측천에게 양위하려고 했지만 군신들이 견결히 반대하는 바람에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고종은 무측천을 격노시킬수 없어 황위를 무측천이 낳은 아들 리홍에게 양위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무측천은 곧 실현하게 될 황제꿈이 깨여지는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녀황제로 되기 위해 친아들 리홍에게 독주를 먹여 죽여버렸다. 그후 고종은 무측천의 둘째아들 리현을 황태자로 봉하고 리현에게 국사를 맡겼다. 먼저 손을 쓰는것이 유리하다고 생각된 무측천은 또 하나의 친아들 리현을 핍박하여 죽여버렸다. 고종이 죽자 무측천은 혼자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할수 있게 되였다. 중종과 예종은 모두 선후로 각각 55일과 6개월의 상징적인 황제노릇밖에 못하고 무측천에 의해 페위당했다. 무측천은 당(唐)을 주(周)로 고치고 녀황제로 되였다.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무측천은 선후로 모두 딸 하나, 아들 둘, 오빠 넷, 언니 둘, 외조카딸 하나를 죽였다. 이 모든것은 황제의 총애를 받고 권력을 다투고 녀황제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무측천은 음험하고 잔인하기를 극에 달했지만 공정하게 평가하면 녀황제로 된후 확실하게 진보적인 개혁조치를 취했다. 
94    마지막 황제 부의의 사랑이야기 댓글:  조회:7525  추천:3  2015-01-04
마지막 황제 부의의 사랑이야기   (번역)     아이신줴러 부의(爱新觉罗·溥仪)는 중국력사상의 마지막 황제였다. 부의는 광서 32년(1906년) 1월 14일에 순왕부(醇王府)에서 출생했다. 부의는 도광황제의 증손이며 광서황제의 친동생 재풍(载沣)의 장자였다. 1908년 10월에 자희태후와 광서황제는 동시에 중병에 걸렸다. 자희태후는 중남해에서 군기대신들을 불러놓고 후사를 상의했다. 광서황제에게 후대가 없었고 청나라의 내외정세가 혼란에 빠져있었기때문에 군기대신들은 나이가 든 사람을 황위에 올려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자희태후는 대노했다. 결국 3살인 부의를 황위에 올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후 광서황제와 자희태후는 이틀을 사이두고 사망되였다. 15일후에 부의는 태화전에서 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광서황제의 황후 륭유와 재풍이 섭정했다. 이듬해 년호를 선통(宣统)이라고 고쳤다. 선통 3년(1911년)에 신해혁명이 폭발했고 이듬해 2월 12일에 륭유태후는 핍박에 의해 “퇴위조서”를 내렸다. 그후 부의는 1934년부터 1945년 일본이 투항하기까지 위만주국황제로 되였는데 년호를 강덕(康德)이라고 했다. 황제로부터 백성으로 되기까지 부의의 인생은 전기적 색채를 띠였다. 그의 혼인 또한 매우 복잡하고 곡절적이였다. 그는 일생에서 선후로 1명의 황후, 1명의 황비, 두명의 귀인과 1명의 안해를 맞았는데 두번 리혼했고 두번 상처했으며 자녀가 없었다. 그러면 5명의 녀인과의 혼인생활은 어떠했을가? 매 녀인이 그에게 끼친 영향은 어떠했으며 그가 매 녀인에게 어떠한 생활을 가져다주었을가? 최근에 위만주국황궁박물관의 연구원이며 길림성민속학회 부리사장인 심연은 장춘도서관에서 광대한 독자들에게 말대황제 부의의 혼인생활과 애정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의의 운명중 행운과 비애는 늘 부동한 배경하에 재현하군 했다. 그는 일생에서 3번 제위에 올랐다. 부의와 완용의 혼인은 행복으로 시작되였다가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부의와 완용의 혼인은 24년동안 지속되면서 중국사회의 가장 혼란스러운 년대를 경험했다. 부의는 황궁에서 쫓겨나고 피해다니고 괴뢰황제로 되는 굴곡적인 길을 걸었다. 부의와 완용 개인의 전도와 운명은 국가의 전도와 운명과 긴밀히 련결되여있었다. 1922년에 17살의 부의는 왕공대신들과 상의하여 내무부 대신 영원의 딸 완용(婉容)을 황후로 책봉했다. 17세에 황후가 된 완용은 시체를 따르는데다가 재능이 있고 다정하여 부의에게 새로운 생활을 가져다주었다. 완용은 늘 부의에게 영어를 배워주었고 서양음식에 대해 알려주었다. 부의는 완용에게 엘리자베스(伊丽莎白)란 영문이름을 지어주었다. 어릴 때부터 황궁에서 살아온 부의는 완용의 덕에 서양문화를 접수하게 되였고 사랑과 활력을 감수했다. 하지만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완용과 부의의 관계가 파렬된 주요원인은 그들의 정치견해가 달랐기때문이다. 완용은 정치리상과 포부가 있는 녀인이였다. 그녀는 줄곧 부의를 도와 “복벽대업”을 완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9.18”사변후 부의가 일본인의 품에 안기자 완용은 부의가 일본인의 괴뢰황제가 되는것을 극력 반대했다. 이에 부의는 완용을 자신이 복벽의 꿈을 실현하려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인정하면서 몹시 미워했다. 괴뢰황제의 황후가 되는것을 원하지 않았던 완용은 두번이나 “황궁”에서 도망치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완용은 초조하고 불안해하면서 화를 잘 냈다. 그러다가 아편인이 박혔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그녀는 임신하게 되였다. 그후 29세일 때 완용은 부의에 의해 랭궁(冷宫)에 들어가게 되였다. 완용은 40세에 사망될 때까지 랭궁에서 살았다. 부의와 완용의 혼인비극은 그들의 운명처럼 력사의 희생품과 식민통치의 희생품으로 되였다. 1922년 11월 30일에 13세의 문수(文绣)는 숙비(淑妃)로 책봉되여 황후인 완용보다 하루 먼저 황궁에 들어가 부의와 혼레식을 치루었다. 그러나 문수는 황비로서의 즐거움과 행복을 얻지 못했다. 이 혼인은 그녀의 비극적인 인생의 시작으로 되였다. 서양의 교육을 받은 황후 완용은 1부1처제를 견결히 주장하면서 천진에 있는 7년동안에 늘 문수와 다투었다. 문수는 완용만 감싸주는 부의에게 몹시 실망했다. 불평등한 대우를 참을수 없었던 문수는 1931년 가을에 부의와 리혼하기로 결정하고 법에 리혼소송을 걸었다. 이 황제와의 리혼풍파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중국력사상에서 황제가 리혼하는 일은 처음이였다. 1937년에 완용이 랭궁으로 쫓겨난후 부의는 완용에게 보복하기 위해 당시 북경중학교에서 공부하고있던 녀학생 담옥령을 “상귀인(祥贵人)”으로 맞아들였다. 17살의 담옥령은 홀로 장춘으로 와서 부의와 결혼했다. 담옥령은 젊고 예쁜데다가 온화하고 현숙하여 주위사람들과의 사이가 매우 좋았다. 입궁후 그녀는 부의와의 관계도 매우 좋아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담옥령은 북경에서 공부할 때 진보사상의 교육을 받았고 기차에 앉아 동북으로 오면서 일본군의 침략폭행을 목격했기때문에 부의의 처지를 리해할수 있었다. 부의에게 담옥령은 한줄기의 따뜻한 해빛과도 같았기때문에 그녀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다. 하지만 홍안박명이라고 담옥령은 부의와 결혼한지 5년만에 22살의 나이로 병으로 사망되였다. 담옥령이 병으로 앓는 기간에 부의는 줄곧 곁에서 보살펴주었다. 담옥령의 사망은 부의에게 매우 큰 타격을 주었다. 담옥령을 기념하기 위해 부의는 명령을 내려 담옥령에게 “명현귀비”라는 시호를 내려 청왕조 귀비의 신분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담옥령이 사망된후 부의는 죽을 때까지 그녀의 사진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 사진의 뒤면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옥령”이라고 씌여져있었다. 담옥령(谭玉龄)이 죽은후 일본관동군은 부의를 통제하기 위해 부의에게 일본녀자를 부인으로 맞아들이라고 했다. 비록 부의는 괴뢰황제였지만 혼인문제에서는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생활이 일본인의 감시를 받는것이 두려웠기때문에 일본녀자를 부인으로 맞지 않겠다고 강하게 나섰다. 결국 부의는 위만주국의 녀학생 리옥금(李玉琴)을 “복귀인(福贵人)”으로 맞아들였다. 리옥금은 출신이 가난했고 나이가 어렸기때문에 입궁후 멸시를 받았다. 부의는 “21조”를 제정하여 리옥금에게 반드시 청왕조의 례법을 지키고 사상상에서 자신에게 절대 복종하도록 얽매여놓았다. 그리하여 리옥금은 황궁에서 평등과 자유가 없이 부의의 놀이개로만 살아야 했다. 1945년 8월에 일본의 투항과 함께 위만주국이 해체되자 리옥금은 부의를 따라 위만주국의 황궁에서 나와 통화 대률자로 갔다. 새중국이 성립된후 리옥금은 정부의 도움을 받아 장춘도서관에서 사업했다. 1955년에 리옥금은 무순에서 부의를 만났을 때 리혼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일본이 투항한후 부의는 일본군과 함께 도꾜로 도망치려다가 공항에서 구쏘련군에게 붙잡혔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후 모택동은 부의를 사면해주었다. 부의는 특별사면을 받은후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였다. 1960년 3월에 부의는 보통공민의 신분으로 난생처음 북경식물원의 원예사직업을 얻었다. 1962년에 부의는 북경관상병원의 간호원 리숙현(李淑贤)과 결혼했다. 그는 보통백성으로서의 진정한 가정이 있게 된것이다. 결혼후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 사랑하여 떨어져서는 살수 없는 사이가 되였다. 어느날에 부의는 리숙현을 껴안고 “이전에 내가 황궁에 있을 때는 근본 부부지간에 응당 있어야 할 관심과 사랑에 대해 모르고있었소. 황후나 황비는 나의 노리개일뿐이였소. 기분이 좋으면 같이 자고 기분이 나쁘면 외면하였소. 당신을 만나기전에 나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몰랐소. 당신을 만나서야 나는 인간세상에 이렇게 달콤한 남녀간의 사랑이 존재한다는것을 깨닫게 되였소”라고 말했다. 부의는 말과 같이 안해 리숙현을 끔찍히 사랑했다. 1963년 여름의 어느날이였다. 그날은 폭우가 많이 내려 공공교통이 저애를 받았다. 그날에 부의는 퇴근하여 안해가 돌아오지 않자 급히 우산을 찾아들고 안해의 마중을 나갔다. 반나절이나 기다려도 리숙현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그는 도로의 하수도덮개가 열려있는것을 발견했다. 그는 혹시 안해가 오다가 하수도에 빠질가봐 하수도앞에서 안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부의와 리숙현은 5년동안 행복한 부부생활을 했다. 부의가 사망될 때까지. 부의가 1967년 10월 17일 새벽 2시 30분에 사망된후 골회는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 안장되였다. 1980년 5월 29일은 부의가 사망된지 13돐이 되는 날이였다. 그날 당과 정부에서는 부의를 위해 추도회를 거행했다. 1995년 1월 26일에 부의의 골회함은 청서릉내의 숭릉(광서릉)부근의 화룡황가릉원에 매장했다. 이는 리숙현이 직접 처리한것이다. 부의가 사망되여 30년이 지난후인 1997년 6월 9일에 리숙현은 페암으로 사망되였다. 향년 72세였다.     
93    천하영웅들을 무릎 꿇게 한 절세미녀 댓글:  조회:7942  추천:1  2014-12-28
천하영웅들을 무릎 꿇게 한 절세미녀   (번역)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황제는 전귀비를 몹시 총애했다. 이 때문에 황후는 전귀비를 몹시 질투했다. 그날밤도 전귀비한테로 가버린 황제를 생각하며 황후는 질투와 고민에 모대기고있었다. 그때 딸의 거처로 황후의 부친 가정백이 찾아왔다. 요즘 딸이 고민하고있는 영문을 알고있는 가정백이 한가지 계책을 드렸다. “황후마마, 차라리 예쁜 기생을 하나 사서 황제페하께 드리면 황제페하는 그 기생에게 빠져 더는 전귀비를 총애하지 않을겁니다. 그리고 그녀는 한낱 기생출신이니까 황제페하께서 아무리 총애한다하더라도 황후마마께는 아무런 위험이 없을 줄로 아뢰옵니다.” “그 계책이 괜찮기는 하나 어디 황제페하를 홀딱 반하게 할만한 기생이 있겠어요?” “황후마마, 소신이 전귀비보다 백배는 더 미모가 출중한 기생 하나를 알고있사옵니다.” 가정백은 지난밤, 자기의 혼을 송두리째 뽑아놓던 그 아릿다운 기생을 생각하니 지금도 온몸이 나른해나며 황홀경에 빠져있는듯 했다. 황후는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도가 없는지라 그 기생을 데려오로록 부친에게 명령했다. 가정백은 이튿날 곧 기녀원에 가서 그 예쁜 기생을 사서 숭정황제께 올렸다. 그 기생을 본 황제는 그 자리에서 혼이 빠져 달아나는듯 했다. 그 기생의 눈섭과 눈동자는 그린듯이 수려하고 용모는 말로 형용할수 없이 아름다왔다. 두 눈동자는 호수에 물결치듯 찰랑거리고 입술을 살짝 벌리고 웃는데 그 아름다운 자태는 양귀비도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울 지경이였다. 이 경국지색의 미녀가 바로 중국고대력사에서 4대 명기중의 하나로 불리는 진원원(陈圆圆)이였다. 진원원의 본명은 형원(邢沅)이고 자는 원원(圆圆), 원방(畹芳)이다. 어릴 때부터 양모 진씨의 슬하에서 자랐기에 성을 진씨로 고쳤다. 진원원은 명말청초인 1623년 4월 3일에 강소의 무진(지금의 상주)에서 출생해 1695년 5월 16일에 사망되였다.   “아아,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미녀로구나!” 진원원의 화용월태에 첫눈에 반한 황제는 연신 감탄하면서 가정백이 물러나기 바쁘게 진원원을 끌어안고 침대에 올랐다. 한편 황후는 황제가 더는 전귀비의 거처로 찾아가지 않으니 몹시 기뻐서 진원원을 불러들였다. 진원원의 용모가 선녀같이 아름다운것을 보고 황후는 깜짝 놀랐다. 진원원의 옥같은 손을 잡자 황후는 온몸이 나른해지고 취해서 정신이 몽롱해졌다. (같은 녀자인 나도 이렇게 취하는데 하물며 남자들이야 더 말해 뭣하랴.) 황후는 이런 생각을 하며 질투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진원원을 맞아드린 숭정황제는 제정신이 아니였다. 진원원한테 넋을 송두리째 빼앗긴 황제는 진원원의 곁을 한시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조정으로 나가 정사를 돌보지 않고 침실에서 진원원을 안고 즐기며 그녀에게 연지를 발라주고 눈섭을 그려주기도 하고 그녀의 발을 씻어주고 혀바닥으로 그녀의 오이씨같은 발을 핥아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를 곧 귀비로 봉했다. “짐의 보배 진귀비여! 짐은 앞으로 그대를 황후로 봉하겠소. 이제부터는 황후나 다른 귀비들 그리고 비빈이나 귀인들 가운데 한사람도 눈에 차는 녀인이 없소. 그대를 봉황이라 한다면 이 궁안의 아니, 이 세상의 다른 녀자들은 모두 오리나 거위와 다름없소. 짐은 봉황같은 그대와 더불어 천년만년 살겠소!” 하지만 숭정황제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천하의 영웅 리자성이 맹렬한 기세로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자꾸만 날아들었다. 진원원을 아쉽게 품에서 놓아주고 조정으로 정사를 돌보러 나갔다가 정오무렵에 들어온 황제는 안색이 창백했고 눈살을 찌푸리고있었다. 황제는 갑자기 진원원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너때문에 나라일을 망치게 되였어. 네가 궁안에 머무는 며칠동안 역적 리자성이 3채의 성을 함락했어. 넌 나라를 망치는 요녀야! 짐은 녀색에 빠진 못난이가 될수 없어. 즉시 너를 궁에서 내보내고 정치를 새롭게 해야겠어. 아아, 그 리씨 도적놈은 정말 무서운 놈이야!” 진원원은 생각했다. (도데체 리자성은 어떻게 생긴 분일까? 황제마저 무서워 벌벌 떨다니. 그분은 꼭 영웅호걸일거야.) 진워원은 황제마저 벌벌 떨게 한 리자성을 영웅이라고 속으로 흠모했다. 진원원은 황궁에서 나온 후 주국장 저택으로 갔다. 어느날 주국장은 잔치를 크게 차려놓고 손님을 청했다.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은 꾀꼴새같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나비처럼 춤을 추는 진원원을 보고 모두 넋을 잃었다. 그중에서도 정욕으로 이글이글 타는듯한 오삼계의 눈동자가 제일 로골적이였다. 오삼계는 그 즉석에서 주국장에게 진원원을 달라고 요구했다. 주국장은 진원원을 내놓기 싫었으나 오삼계의 권세가 무서워 찍소리 못하고 진원원을 내주었다. 진원원을 얻은 오삼계는 천하를 통째로 얻은듯 너무도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다. 진원원에게 혼을 송두리째 빼앗긴 오삼계는 밤낮 진원원을 끌어안고 황홀경에 빠져버리는 재미에 제정신이 아니였다. 그러다가 숭정황제의 명령을 받고 만주의 군사들이 쳐들어오는것을 막으러 산해관으로 갔다. 떠나면서도 오삼계는 진원원과 떨어지기가 아쉬워 출발시간을 지체하기까지 했다. 1644년 3월 19일, 리자성이 북경을 점령했고 숭정황제는 매산우에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리자성의 부하가 오삼계의 집을 뒤지다가 천하미녀 진원원을 발견하고 곧 붙잡아서 리자성에게 바쳤다. 천하제일미녀를 본 리자성은 미칠지경으로 기뻤다. 그는 매일밤 진원원과 잠자리를 같이 하며 즐거운 신음을 뽑아냈다. 진원원은 이처럼 정력적인 남자를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영웅에게 기꺼이 몸을 내맡겼다. 한편 오삼계는 리자성이 북경을 점령하고 자기의 미녀를 가로채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분하여 만주사람들과 련맹하여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리자성은 싸움에서 패하였지만 진원원을 끌어안고 호탕하게 웃었다. “나의 보배 진원원이여! 짐은 한평생 세가지 자랑할만한 큰일을 했어. 첫째는 명나라 황제를 핍박하여 죽게 만든것이고 둘째는 짐이 대순국의 황제가 된것이고 셋째는 천하제일미녀 진원원을 데리고 잔것이야. 이 세가지 일중에서 짐이 가장 의기양양하게 여기는것은 세번째 일이야. 진원원이여! 짐이 너를 안고 자봤으니 이제 죽어도 원이 없노라!” 리자성은 오삼계에게 패하여 도망치다가 눈물을 뿌리며 진원원과 혜여졌다. 오삼계의 부하는 진원원을 발견하자마자 그녀를 데리고 가서 오삼계에게 바쳤다. 진원원을 다시 안은 오삼계는 너무도 기뻐서 미칠지경이였다. 오삼계는 진원원의 속살을 파고들며 말했다. “나의 귀염둥이 진원원이여!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매국노라고 욕하지만 너를 다시 얻었으니 그와 같은 악명을 듣는것도 보람있는 일이야!” 진원원은 오삼계의 정에 감격하여 그가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역적이라는것도 잊고 기꺼이 그에게 몸을 내맡겼다. 그후 오삼계는 청나라의 평서왕으로 봉해졌다. 그때 천하제일의 무림고수라고 불리우는 호일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당시 이름난 영웅호걸이였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사천성 성도에서 진원원을 보게 되였다. 아름다운 녀인은 소매자락속에 있는 옥과 같은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방긋 웃고있는데 온갖 교태가 뚝뚝 떨어졌다. 호일지는 온몸이 나른해지고 취해서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지경이였다. 진원원은 천하의 모든 남자들이 자기를 보기만 하면 하나같이 넋을 잃는 광경을 수없이 많이 보아서 호일지가 자기를 보자마자 얼이 빠지는것을 보고도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호일지는 그후부터 혼백을 빼앗겨 정신을 차릴수도 없게 되였다. 몰래 진원원일행을 따라 운남에까지 간 그는 곧 신분을 감추고 평서왕부에서 원예사노릇을 하며 진원원을 위해 꽃을 심고 잡초를 뽑아주곤 했다. 그는 진원원의 미색에 빠져 기꺼이 그녀의 하인노릇을 하며 그녀를 위해 채소를 가꾸고 땅을 쓸며 나무를 하고 물을 길었다. 그는 매일매일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수 있는것만으로도 무상의 쾌락을 느꼈다. 그는 이렇게 줄곧 23년동안 진원원의 하인노릇을 하며 아침저녁으로 그녀를 보기만 하면 만족할수 있었다. 이 23년동안 진원원은 그에게 쉰다섯마디를 건넸을 뿐인데 그는 진원원이 자기에게 한 말을 한마디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했다. 어느날 진원원은 그를 보고 꽃을 꺾어오라고 했다. 그는 너무도 행복했다. 진원원을 위해 꽃을 꺾는 일이 그의 일생에서 제일 행복한 일이였다. 그는 가슴을 들먹거리며 꽃중에서 제일 탐스럽고 제일 예쁜 꽃을 꺾어왔다. 그가 넘겨주는 꽃을 봤던 진원원은 무심결에 그의 손목을 잡았다가 놓았다. 그 순간 호일지는 너무도 감격스럽고 행복하여 넋을 잃을 지경이였다. 그후 호일지는 천하제일미녀의 섬섬옥수가 닿았던 자리에 코를 대고 미녀의 향기를 맡으며 련 사흘동안 흥분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아, 천하제일미녀 진원원이여!”하고 크게 부르짖고는 곧 숨을 거두었다.    
92    전기적 홍색녀간첩 황모란 댓글:  조회:6707  추천:1  2014-12-21
전기적 홍색녀간첩 황모란   (번역)   1907년에 호남성 류양시의 명문가문에서 출생한 황모란(黄慕兰)은 본명이 황창정이며 황숙의, 황정혜라는 이름도 가지고있었다. 그녀는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황모란의 첫번째 결혼은 불행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자신의 친구아들과 강제로 결혼시켰다. 그런데 이 첫번째 남편은 술주정뱅이에 도박군이며 바람둥이였다. 황모란은 결혼한지 1년도 안되여 탈가하여 도망쳤다. 당시 그녀는 18세였다. 그후 그녀는 중공중앙기관보인 《민국일보》의 주필, 중공중앙군사위원회 기요처 주임비서, 경위퇀 정치지도원직을 맡았던 완희엄을 알게 되여 1927년 “3.8절”에 결혼했다. 1927년에 국민당과 공산당이 분렬된후 황모란은 남편과 함께 지하사업을 하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황모란의 잠복생애가 시작되였다. 황모란은 처음에 강서성위 비서와 기밀교통원사업을 했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한밤중에 성위서기 진담추한테서 성경에 미음으로 비밀문서를 쓰는 방법, 려관에 나가 련락암호를 주고받는 방법, 부두에서 교통선박을 기다리는 방법 등을 배웠다. 1928년에 아들 완창걸이 태여난지 3일만에 그녀의 남편 완희엄은 강서의 서남으로 파견되여 토지혁명과 무장투쟁을 지도하게 되였다. 그녀는 남편을 보내면서 다시 만날 날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적에게 체포된 완희엄은 4개월후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1928년 12월에 황모란은 지하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비밀리에 상해에 들어가 중앙위원회 기요비서직을 담임하면서 중국공산당중앙특별행동과의 성원으로 되였다. 그녀는 또 중앙의 기요교통원을 겸임하면서 늘 전국각지에서 중앙과 련계하러 상해로 찾아온 지하교통원들을 맞아들이군 했다. 황모란은 1929년에 주은래의 비준을 맡고 상해에서 중앙위원 하창과 결혼했다. 하창은 1931년에 비밀리에 소주에 들어가 유격전쟁을 하다가 1935년에 29살의 나이로 희생되였다. 선후로 두 남편을 잃은 황모란은 중국인민혁명 호제총회의 구조부장직을 맡았다. 그녀는 중공지하사업 원로 반한년과 단선련계를 가지고 체로된 동지들을 구조하는 임무를 담임했다. 그녀가 맡은 첫번째 임무는 체포된 공회련합회 지도자 관향응을 구조하는 일이였다. 그녀는 상해조계지의 진보적인 변호사 진지고를 통하여 성공적으로 관향응을 구조했다. 그녀는 상해 사교계에 진입하여 많은 정보를 얻었다. 1930년 6월의 어느날 오후에 황모란은 커피점에서 진지고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프랑스조계지의 순포방에서 번역사업을 하고있는 조병생을 만났다. 조병생은 진지고의 동창생이였다. 조병생은 진지고를 보자 반갑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상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였는데 진지고가 조병생을 보고 물었다. “요즘은 또 어떤 인물을 잡아들였나?” 그러자 조병생은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며칠전에 현상금 10만원을 내건 공산당두목을 잡아들였네. 호북사람이고 나이는 60세정도인데 주홍코에 금이발이고 손가락이 아홉개라네.” 황모란은 긴장하게 들으면서 머리속으로 조병생이 묘사한 특점에 부합되는 인물이 누굴가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 인물이 정치국주석 향충발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향충발이 당을 배반하는 경우에는 중앙의 중요인물들이 체포될 위험이 있었다. 황모란은 즉시 이 정보를 반한년에게 알려주었다. 반한년은 급히 주은래한테 이 정황을 반영하였다. 주은래는  신속히 리부춘, 채창 등 사람들을 전이시켰다. 과연 그날밤에 향충발은 순포방의 경찰들을 데리고와서 직접 열쇠를 열고 주은래 등이 거처했던 방으로 뛰여들었다. 황모란이 이번 정보를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상해의 중공 중추기구가 순식간에 화를 입었을것이다. 주은래는 그녀를 “당의 백과전서”라고 칭찬했다. 1933년에 진지고가 황모란에게 청혼했다. 당조직은 당시의 복잡한 백색공포환경에서 황모란이 진지고와 결혼하면 사업에 유리하다고 인정했다. 왕모란은 조직의 말을 듣고 진지고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1935년에 5월에 황모란은 상해의 중화예술사에서 진지고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1942년 12월 2일에 황모란은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불행하게 요절되였다. 1950년에 진지고는 상해를 떠나 향항으로 갔는데 그후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황모란의 일생은 곡절적이였다. 그녀는 여러번이나 감옥살이를 했다. 그중 두번은 국민당감옥에 갇혔고 한번은 해방후 반한년사건에 련루되여 17년동안이나 진성감옥에서 징역살이를 했다. 1980년에 황모란의 억울한 사건은 해명되였다. 그후 그녀는 상해시정부에서 사업하다가 퇴직했다. 황모란은 1993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항주에 거주했다. 2011년은 황모란이 105돐을 맞은 해이며 그녀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지 85년이 되는 해였다. 최근에 기자가 황모란의 집에 전화를 걸었을 때 그녀의 집 가정보모가 “황로인님께서는 낮잠을 주무시고있습니다. 어떤 기자든지 로인님의 따님을 통해야만 취재를 할수 있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얼마후 기자와 만난 황모란의 딸 진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은 년세가 많아서 기자의 취재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 어머니의 일생은 당의 사업에 모든것을 바친 빛나는 일생이였습니다.” 
91    장학량의 첫번째 녀자는 외사촌형수였다 댓글:  조회:11730  추천:6  2014-12-14
장학량의 첫번째 녀자는 외사촌형수였다   (번역)     장학량의 외사촌형수는 장학량(张学良)보다 10년 년상이였으며 성이 림씨였다. 장학량과 외사촌형수의 연분은 빠나나로부터 시작되였다. 그 시기의 봉천(奉天)에서는 빠나나를 본 사람이 몇이 되지 않았다. 조이손이 총독직을 맡았을 때 그의 집식구가 쓰레기통에 한더미의 빠나나껍질을 던졌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개가 뼈다귀를 발견한듯 그 빠나나껍질을 주어다가 벗겨진 껍질을 원 모양대로 회복시켜 보았다. “이것이 원래는 가지처럼 생겼는데 밭에서 달리는걸가? 장작림(张作霖)도 빠나나를 보지 못했다. 장학량의 외사촌형수가 장작림의 집에 빠나나를 선물로 들고왔을 때 장작림은 냄새를 맡아보고 “이게 무슨 물건일가? 먹는걸가?”하고 중얼거렸다. 외사촌형수는 공손하고 례의가 발랐지만 말은 거칠었다. “이건 귀한 물건이예요. 남방사람만이 먹을수 있는거죠. 듣자니 180년만에야 이렇게 크게 잘한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장작림은 신기하여 빠나나를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면서 말했다. “제길할, 180년에만에 이렇게 자란다니? 장백산의 산삼처럼 진귀하구나.” 외사촌형수는 별게 아니라는 말투로 말했다. “뭐 진귀한것도 아니예요. 만리밖에서 나다보니 얻기가 쉽지 않을뿐이예요. 이는 우리 그이가 특히 대원수님께 드리는겁니다.” 사실 당시 장작림은 륙군27사의 중장 사장이여서 대원수급이 아니였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는데 장작림 자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장작림은 손에 쥐였던 빠나나를 도로 놓으면서 아이들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이렇게 빠나나는 장학량의 손에까지 들어가게 되였다. 장학량은 빠나나에서 향기가 나는것을 보고 누가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하인이 외사촌형수가 가져온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장학량은 생각났다. 그 외사촌형수는 장학량의 집에 몇번 놀러왔는데 집의 몇몇 엄마(장작림의 첩)들은 그녀를 피하면서 접대하지 않았다. 장작림의 셋째첩 대헌옥(戴宪玉)은 그녀가 구미여우처럼 생겼다고 했고 장작림의 넷째첩 허주양(许澍旸)은 그녀가 날때부터 남자들의 혼을 빼앗아가는 눈을 가지고있어 당승이 그녀를 보아도 파계(破戒)할것이라고 했다. 장학량은 구미여우라는게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혼을 빼앗아간다는 말은 알만했다. 그는 도사가 구혼대법(勾魂大法)을 연기하는것을 보았는데 그 도사가 악한 매같은 눈길로 누군가를 바라보면 그 사람은 머리속이 웅웅거린다고 했다. 장학량은 처음 외사촌형수를 볼 때 머리속이 웅웅거렸다. 하지만 외사촌형수의 눈은 악한 매같은것이 아니라 수정같이 맑고 아름다왔는데 눈동자가 움직일 때마다 웃는것 같았다. 빠나나는 다섯개밖에 되지 않았다. 큰누나 장관영(张冠英)은 남동생 장학량, 장학명(张学铭), 장학증(张学曾)과 녀동생 장회영(张怀英), 장회동(张怀曈)에게 하나씩 나누어주고 자신은 이가 아파서 먹지 못하겠다고 했다. 장학량은 누나가 일부러 양보한다는것을 알고 자신의 몫을 누나에게 주었다. 장학명은 빠나나의 뿌리부분을 한입 떼여 씹어보고는 도로 뱉아버렸다. 아이들은 이 물건이 생것으로 먹는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외사촌형수에게 어떻게 먹는것이냐고 물어보자니 촌놈이라고 웃을가봐 겁이 났다. 아이들은 불에 구워서 먹어보기로 상의했다. 빠나나를 화로우에 놓으니 쯔륵쯔륵 소리가 났다. 30분이 지나 소리가 거의 사라지려고 할 때 불과 가장 가까운 부분에 닿은 빠나나에서 연기가 났다. 장회영은 갈구리로 빠나나를 끌어왔다. 장학명이 손을 내밀자 장관영은 그의 손을 탁 쳐놓으면서 말했다. “야, 좀 기다려서 먹어. 뜨거워!” 빠나나는 이미 마르고 까맣게 모양이 변해버렸다. 장학명은 빠나나를 보다가 갑자기 웃었다. “형, 저 빠나나가 뭐 같아?” 장학량은 연기가 나는 빠나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뭐 같니?” 장학명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개똥같아! 방금 싸놓은 개똥말이야.” 장관영은 화를 내면서 말했다. “넌 역겹지 않니? 그런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이 그걸 어떻게 먹니?” 장학명은 한입 뚝 떼여서 질근질근 씹어먹었다. 아주 맛있게 먹는것처럼 하던 그는 갑자기 빠나나를 토해내며 울상을 지었다. “형, 정말 개똥같아!” 장학량은 장학명의 손에서 빠나나를 빼앗아 먹어보다가 “웩”하고 뱉아버렸다. 다른 아이들도 먹어보다가 모두 토해내며 낯을 찡그렸다. 며칠후 장학량이 외사촌형수를 만났을 때 외사촌형수가 “빠나나를 먹은 감각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때 장학량은 장학명이 빠나나를 개똥같다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선녀같이 아름답고 정이 넘치는 외사촌형수의 앞에서 장학량은 그런 더러운 말을 옮기고싶지 않았다. 더구나 빠나나는 그녀가 선물한것인데 례절상 사실대로 말할수 없었다. 그래서 장학량은 “빠나나가 맛있었어요.. 정말 맛있었어요. 여태껏 그처럼 맛있는 과일은 처음 먹어보았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날 장학량은 선물을 가지고 외사촌형수의 집으로 갔던것이다. 장작림은 평생 남에게 인정빚을 지는것을 원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뢰물을 받았거나 은혜를 입었다면 후에 꼭 갚아주군 했다. 마침 길림에 갔던 오준승이 10여병의 인삼고를 가지고왔다. 장작림은 장학량을 시켜 장학량의 외사촌형수에게 인삼고 몇병을 가져다 주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이런 일은 장작림자신이 나설수 없었고 몇몇 첩들도 그 구미여우한테 가기 싫어했다. 장작림은 이런 심부름을 아들 장학량한테 시키는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장학량은 그번 걸음에 인삼고와 함께 그 자신까지 외사촌형수에게 선물하게 될줄을… 외사촌형수의 집은 조양가의 동쪽 만주철도가 있는 고려회관(지금의 심양소년아동도서관)옆에 있는 청기와집이였다. 때는 바로 양춘가절이여서 온 정원에 느티나무꽃이 만발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윽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외사촌형이 외출하고 집에는 외사촌형수와 하녀 하나만 남았다. 이 외사촌형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장학량은 몰랐다. 장작림의 셋째첩 대헌옥은 그가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 붙어서 바라올라온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장작림의 넷째첩 허주양이 한마디 보충했다. “담장밖의 담쟁이덩굴을 보았지? 누가 오줌을 쌌는데 거기서 담쟁이덩굴이 자라서 담장을 타고 올라온거지.” 그날 저녁에 발생된 일을 장학량은 몇년후에 풍용에게 말해주었다. 풍용은 장작림의 의형제 풍덕린의 아들로서 장학량과 동갑이였다. 장작림과 풍덕린은 권력과 세력다툼을 했지만 두 사람의 아들은 형제처럼 친했다. 그날 장학량이 오리라고 생각도 못했던 외사촌형수는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다. 그녀는 장학량의 손을 잡아 자기의 옆에 앉혔놓고 꾸짖듯이 말했다. “쬐꼬만 녀석이 왜 외사촌형수를 보러 자주 오지 않느냐?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할가봐 그러냐?” 모르는 사람이 그 말을 들으면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가까운줄로 알것이다. 사실 장학량은 이 외사촌형수를 두번밖에 만나보지 못했고 한마디 말도 건너보지 못했다. 장학량은 인삼을 꺼내놓고 어물거리면서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우리 아빠가…형수한테 주라고 한건데…장백산의 인삼고예요.” 외사촌형수는 인삼고를 받아가지고 과장하여 말했다. “이건 나를 주는거냐? 와아, 정말 좋아. 꼬맹이야, 넌 인삼고가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아느냐?” 장학량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외사촌형수는 장학량의 얼굴에 입을 붙이다싶이 하고 말했다. “넌 장백산의 선녀라는 말을 들어보았느냐? 천지선녀라고도 하지. 바로 그 선녀가 인삼고를 바르고난후 누구나 한번 보면 한평생 잊지 못하게 되는 미인으로 되였지.” 장학량은 외사촌형수의 뜨거운 눈길을 피하여 고개를 숙였다. “전 몰라요. 전 장백산선녀를 본적이 없어요.” 말이 끝나자 외사촌형수는 바람같이 문을 열고 나갔다. 장학량은 무거운 짐을 벗은듯 홀가분했다. 그는 고개를 들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문이 열리더니 진한 향기가 침습해왔다. 장학량은 머리를 숙이고있었으나 외사촌형수가 눈앞에 다가온것을 느꼈다. 겉옷을 다 벗은 외사촌형수가 장학량을 껴안았다. 장학량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나의 외사촌형수입니다. 아빠가 알면 나의 다리를 분질러놓을것입니다.” 외사촌형수는 장학량을 더욱 힘주어 껴안으며 말했다. “넌 기효람(纪晓岚)을 아느냐? 그 청나라의 대재자(大才子) 기효람을 말이야?” 장학량은 머리를 끄덕였다. “알아요. 선생님이 알려주었어요.” 외사촌형수가 말했다. “기효람은 ‘날 낳은 엄마와 내가 낳은 딸을 내놓고 다른 녀자는 모두 범할수 있다’고 말한적이 있지. 넌 이 말의 뜻을 알겠느냐?”. 장학량은 외사촌형수를 한번 바라보다가 머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전 몰라요.” “모른다구? 그럼 내가 알려주지. 오너라, 요 꼬맹이야!” 장햑량이 인삼을 들고 들어와서부터 외사촌형수가 전등을 끄기까지는 불과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장학량은 어리벙벙하여 외사촌형수의 치마밑에 빨려들어갔다. 그해 장학량은 13살밖에 안되였다.  
90    송미령의 생일비밀 댓글:  조회:7274  추천:0  2014-12-07
송미령의 생일비밀   (번역)   중국인의 생일은 때론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자아내여 당사자를 난처하게 한다. 어떤 사람은 음력으로 생일을 쇠고 어떤 사람은 양력을 기준한다. 더우기 조대가 교체되는 년대에 출생한 사람들이 그렇다. 민국초기에 출생한 사람들은 대부분 음력을 기준으로 하여 자신의 생일을 신고한다. 송미령의 생일에도 이런 비밀이 숨어있다. 송미령이 처음 미국으로 갈 때(1907년) 휴대했던 려권에는 그녀의 출생일이 청나라 광서 24년 2월 12일(음력)로 되여있다. 중앙연구원의 2000년중서력전환표에 따르면 이날은 기원 1898년 3월 4일이다. 송미령에 관한 여러 문헌과 서적을 뒤져보아도 그녀의 생일은 서로 다르다. 현재 류행되는 서적 《송가왕조》에는 송미령이 기원 1897년 3월 5일에 출생했다고 했는데 이는 려권에 비해 1년이 더 빠르다. 2003년 10월 24일의 뉴욕시보에 실린 송미령의 부고문에는 그녀가 1898년 3월 5일에 출생했다고 밝혀져있는데 이는 려권에 비해 하루의 차이가 난다. 최근에 상해에서 출판한 손중산, 송경령의 문물사진록에는 송미령의 출생일이 “1897년 3월 14일(청나라 광서 정유년 2월 12일)로 되여있는데 이는 편자가 정유년 2월 12일을 꺼꾸로 계산하여 1897년 3월 14일이라고 한것 같은데 년도와 날자가 모두 맞지 않다. 그외 이 책에는 송미령의 사망일을 2003년 10월 24일이라고 했는데 이는 하루가 늦어진것이다. 더욱 흥미있는것은 미국 뉴욕주에 있는 공원묘지의 묘비에 송미령의 출생일을 1898년 2월 12일이라고 새겨넣은것이다. 이 날자는 음력을 양력으로 쓴것이거나 “중서합벽(中西合壁)”일것이다. 년도는 서력(西历)의 기원으로 계산하고 월과 일은 음력으로 쓴것이다. 이런 현상은 그곳의 적지 않은 중국인에게 존재했다. 비석을 세울 때 출생일은 음력으로 하고 사망일은 양력으로 했던것이다. 이런것은 중국인들이라면 한참 생각해보면 알수 있지만 서양인들이라면 도무지 영문을 몰라 얼떨떨해할것이다. 일반인의 생일날자가 정확하지 않다면 큰일이 아닐것이다. 하지만 송미령같은 영향력이 있는 력사인물의 생일이 정확하지 않다면 응당 바로잡아야 할것이다. 서양인의 출생일은 모두 양력을 사용하기에 정확하지 않은 현상이 매우 드물게 존재한다. 생일은 병원이거나 지방정부에서 내여준 출생증명에 따르는데 송미령의 출생증명이거나 세례를 받은 증명은 현재까지 어떠한 기록도 나타나지 않았다. 1907년에 발급한 송미령의 려권은 가장 이른 공식서류로서 현재 시아틀(西雅图)의 미국국가서류보관실에 보존되여있다. 더욱 이르고 더욱 유력한 증거를 발견하기전에 송미령의 출생일은 반드시 이 려권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그렇게 계산하면 송미령의 출생일은 1898년 3월 4일이고 사망일은 2003년 10월 23일이다.     
89    총을 휴대하고 장개석거실을 자유로 출입한 엽검영 댓글:  조회:7396  추천:0  2014-11-30
총을 휴대하고 장개석거실을 자유로 출입한 엽검영   (번역)     전국정협위원이며 국제유학련합회보급위원회 부주임인 엽향진(叶向真)은 개국원수 엽검영(叶剑英)의 둘째딸이다. 엽향진은 “아버지 엽검영은 총을 휴대하고 장개석의 거실을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부터 짚신을 신고 혁명에 참가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1897년 4월 28일에 광동성 매현에서 출생한 엽검영은 1920년 여름에 손중산이 조직한 계계군벌(桂系军阀)을 몰아내는 전역에 참가했다. 1922년 6월에 월계(粤系)군벌 진형명(陈炯明)이 손중산을 배반하자 해군륙전대 영장직을 맡았던 엽검영은 부대를 거느리고 손중산을 보호하여 위험에서 벗어나게 했다. 1924년초에 건국월군 제2사 참모장직을 맡았던 엽검영은 료중개선생의 요청으로 황포륙군군관학교창건에 참가하여 교수부 부주임직을 맡았는데 당시에 매우 위망이 있는 교관중의 한분이였다. 엽향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는 그 시절에 손중산선생을 보호했으며 후에 황포군관학교를 건립할 때 20명 건교인중의 한명이였다. 황포군관학교가 건립되였을 때 아버지는 부교육장으로 임명되였다. 그 당시에 황포군관학교의 수업과목은 전부 아버지가 제정했다. 아버지는 황포군관학교의 모든 수업과목을 제정한후 동정(东征)을 하러 갔기에 개학의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1925년에 광동성 동강일대에 도사리고있던 월계(粤系)군벌 진형명(陈炯明)은 반혁명무장을 동원하여 광주혁명정부를 와해하고 뒤엎으려고 시도했다. 광동혁명근거지를 공고히 하고 진형명의 반동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의 창의와 호소하에 광주혁명정부는 진형명을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1월 15일에 동정을 선언하고 2월 1일에 진군하기 시작했다. 엽향진은 엽검영한테서 들었던 그때의 이야기를 이렇게 언급했다. “아버지는 황포군관학교건립과 동정에 참가했기때문에 장개석과 매우 깊은 우의를 맺게 되였다. 또 그때문에 장개석은 엽검영을 제일 신임했다. 누구나 검과 총을 휴대하고 장개석의 거실로 들어갈수 없었다. 그러나 유독 엽검영만은 검과 총을 휴대하고 장개석의 거실로 자유롭게 드나들수 있었다.” 장개석은 엽검영을 가장 중하게 여겼다. 후에 장개석은 엽검영을 제2사의 사장에 임명하고 겸하여 광동과 광서의 염무관리를 책임지게 했다. 1925년에 엽검영은 진형명을 토벌하는 동정에 두번이나 참가해 용감하게 싸우고 과단하게 지휘하여 출중한 군사재능을 보여주었다. 1926년 7월에 북벌전쟁에 참가한 엽검영은 초기에 국민혁명군 제1군 총예비대 지휘부 참모장직에 임명되였다. 남창을 공략한후 그는 국민혁명군 신편 제2사 사장직에 임되였다.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이 반혁명정변을 발동한후 엽검영은 단호하게 장개석을 반대하여 무한으로 가서 국민혁명군 제4군 참모장직을 맡았으며 그해 7월에 백색공포속에서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엽향진은 이렇게 말했다. “광동과 광서의 소금을 관리하는 직무는 힘들이지 않고 돈을 많이 벌수 있는 자리였다. 아버지는 6개월사이에 100만딸라의 수입이 있게 되였다. 당시 사장인 아버지가 외출할 때면 말을 탔는데 뒤에서 가마가 따랐으며 사병이 단마르크에서 수입해들인 과자와 정제우유를 지게에 메고 따라갔다. 당시 정제우유는 모두 수입제여서 매우 비쌌다. 뒤에서는 또 사병이 위스끼(威士忌)와 브랜디(白兰地)를 가지고 따라갔다. 아버지는 말을 타고싶지 않을 때에는 가마에 앉아다녔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아버지의 지위를 부러워하며 하루만이라도 그런 자리에 앉고싶어했다. 당시에 아버지는 자신만 생각한것이 아니라 광대한 로고대중들을 위하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 분발하려고 했던것이다. 그랬기때문에 후에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하고 ‘4.12’대도살을 일으켰을 때 아버지는 외래침략자에 대항하지 않고 자기의 동포와 공산당을 살해하고있는 장개석을 계속 따르는것은 진정한 애국자가 할일이 아니고 출로가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하여 아버지는 단호하게 구두를 벗어놓고 짚신을 신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정강산으로 찾아갔다. 아버지는 정강산에서 많은 혁명선배들과 함께 인민과 조국을 해방하는 대업을 위해 어깨곁고 싸웠다. 당시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중에는 관리들의 핍박에 의해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도 있고 백성을 위해 청원하러 온 사람들도 있고 아버지처럼 높은 벼슬과 많은 록봉을 포기하고 리상을 위해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도 있었다. 아버지의 리상은 높은 직위와 명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로고대중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한것이였다. 만약 자신을 위한것이였다면 아버지가 장개석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도 재산을 가지고 미국으로 갔을것이다. 당시의 100만딸라는 지금의 10억딸라에 맞먹을 거액이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하지 않고 많은 애국지사들처럼 인민과 조국에 충성하고 손중산선생처럼 전국의 압박받고 천대받는 인민을 각성시켜 3개의 큰 산을 뒤엎고 중국인민의 공화국을 건립하려고 했던것이다. 이것은 당년에 혁명에 참가한 공산당원과 우리 선배들의 공동한 리상이였다.”      
88    누가 장개석을 최고권좌에 올려놓았는가 (2) 댓글:  조회:6915  추천:0  2014-11-23
누가 장개석을 최고권좌에 올려놓았는가   (번역)   보로딘은 광주에 신선한 공기를 가져다주었다. 그의 풍격은 주위사람들을 깊이 감염시켰다. 그의 명성은 원동지구에 쫙 퍼졌다. 혁명자들은 그를 광주의 “레닌”이라고 불렀다. 상해조계지에서는 그를 “홍색수도”의 “홍색야수”라고 말했다. 이렇게도 령리하던 보로딘은 손중산이 사망된후 눈에 콩깍지가 씌웠던지 속마음이 씨꺼먼 장개석을 최고의 권좌에 앉도록 밀어주었던것이다. 당시 장개석이 강유력한 인물로 되려면 장애가 되는 세 사람을 제거해야 했다. 그 세 사람은 군사부장 허숭지, 외교부장 호한민, 재정부장 료중개였다. 일반적인 규률로 보면 장개석이 이런 장애를 제거하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러나 불가능했던 일이 몇개월내에 발생되였다. 1925년 8월 20일에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 국민정부위원회와 군사위원회에서는 긴급회의를 열었는데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보로딘에게 집중되였다. 손중산이 사망된후 몇달동안 보로딘은 광주정부에서 주요하게 정권을 장악한 인물로 되였다. 겉으로는 모든 결의가 몇몇 국민당지도자들이 공동으로 결정하는것 같았지만 사실은 보로딘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그가 거주하고있는 저택의 웃층에는 늘 광주정부의 부장들, 국민당중앙집행위원들과 중국공산당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고 아래층에는 번역일군들이 중문문서를 영어거나 로어로, 영어거나 로어를 다시 중문으로 번역하느라고 바삐 돌아쳤다. 각종 재료, 보고, 지시가 보로딘의 거처에서 끊임없이 전달되였다. 보로딘은 그번의 중요한 회의에서 왕정위, 허숭지, 장개석 세 사람으로 특별위원회를 세우고 정치, 군사와 경찰을 관할하는 권한을 주자고 건의했다. 이는 구쏘련의 “반혁명숙청및태업특설위원회”의 조직과 비슷했다. 보로딘자신은 특별위원회의 고문을 맡았다. 그의 건의가 곧 결의였기때문에 그 건의는 즉시 통과되였다. 정치, 군사와 경찰을 관할하는 대권을 틀어쥐고있는 특별위원 3인중에 왕정위는 국민당정부 주석이였고 허숭지는 국민당정부 군사부장이였지만 장개석은 월군참모장과 황포군관학교 교장이상의 직무를 맡은적이 없었다. 사실 그전에 보로딘은 장개석을 전도가 있는 인물로 보았다. 그때문에 구쏘련에서 파견되여온 국민혁명군군사총고문 가륜(加伦)과 많이 다투기도 했다. 가륜은 중국에서 쓴 이름이고 그의 본명은 와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瓦西里·康斯坦丁诺维奇·布柳赫尔)이다. 가륜은 마땅히 허숭지를 등용하여 황포와 대등한 군사력량을 배양해야 한다고 보면서 어느 개인이거나 어느 한 파가 중심이 되는 우환을 방지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보로딘은 허숭지의 월군은 구군대여서 큰 임무를 맡을수 없다고 여기면서 장개석의 황포군관학교 새 군인들이 혁명성질을 갖고있기에 큰 임무를 맡을수 있다고 인정했다. 7월에 국민정부가 성립되였을 때 가륜은 다시 군사독재를 방지하기 위해 허숭지를 위수로 하는 군사위원회제도를 건립하자고 제기했다. 그러나 보로딘은 동의하지 않으면서 장개석을 지지했다. 두 사람의 의견충돌이 갈수록 엄중해지자 모스크바에서 나서서 결정을 내릴수밖에 없었다. 보로딘은 청년시절부터 쓰딸린을 알고있었다. 때문에 보로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쓰달린은 장개석을 신임했다. 결과는 가륜이 광동을 떠나게 되였다. 군사고문인 가륜은 자못 정치의의가 있는 의견을 제기했지만 정치고문인 보로딘은 관건적인 시각에 장개석의 군사재능에 속아 개인정치시야의 사각에 빠져버렸다. 그는 직접 지극히 큰 권력을 장개석의 손에 쥐여주었다. 중국에는 “아무리 총명한 사람도 천번에 한번쯤은 반드시 실수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한번의 실수는 너무 크고 너무 관건적인것이여서 이미전에 쌓았던 999번의 성공이 이 한번의 실수로 훼멸되였다. 파스퇴르(巴斯德)는 기회는 준비된 자의 편이라고 말했다. 장개석은 이날을 위해 충분한 준비를 했다. 그는 갑자기 수중에 “정치, 군사, 경찰을 관할할수 있는 대권”이 쥐여졌을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군사조직을 즉시 움직여 먼저 허숭지를 억압했다. 1925년 8월 20일에 중국국민당집행위원회 위원, 국민정부위원회 위원, 군사위원회 위원, 황포군관학교 당대표인 료중개가 국민당중앙당부의 문밖에서 피살되였다.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이 사건은 일정한 정도로 력사방향을 개변시킨 돌발사건이였다. 장개석은 허숭지가 이 사건에 관련되여있다는 리유로 군대를 지휘해 그의 저택을 포위했다. 허숭지는 황망히 상해로 도주했다. 그 다음으로 제거해야 할 인물은 호한민이였다. 장개석은 호한민의 동생 호의생이 료중개의 암살사건에 관련된다는 리유로 호한민을 조사받게 한후 외교사절로 구쏘련에 보냈다. 료중개피살사건을 처리하면서 장개석은 권력쟁탈에 장애가 되는 세 인물을 깨끗이 쓸어버렸다. 6개월후에야 보로딘은 자신이 마귀병마개를 열어주었다는것을 깨달았다. 허숭지, 호한민, 료승지가 소실된후 보로딘은 이미 원래의 생각대로 장개석을 견제하지 못하게 되였다. 보로딘은 장개석의 능력을 너무 얕잡아보았다. 료중개를 매장하고 허숭지와 호한민을 쫓아버린후 장개석의 앞에서는 아직도 마지막 3개의 장애가 남아있었다. 그 3개의 장애는 바로 앞에 나서서 지휘하고있는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 막후에서 조정하고있는 국민정부정치고문 보로딘, 마음속의 철전지원쑤 중국공산당이였다. 장개석은 국민당조직의 전부력량을 자신의 손아귀에 틀어쥐기전에는 계속 보로딘의 힘과 영향을 리용해야 했다. 보로딘의 말은 왕정위와 장개석중에서 의연히 결정적인 작용을 놀았다. 장개석은 반복적으로 “보로딘의 의견은 곧 나의 의견입니다”라고 했던 손중산의 말을 인용하면서 보로딘을 춰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보로딘을 제거할 시기를 기다렸다. 드디여 시기가 다가왔다. 제2차동정(东征)에서의 대승은 장개석의 명성을 하늘을 찌를듯이 높여주었다. 광주로 돌아오는 도중에 자발적으로 모여든 남녀로소와 사회 각 단체들로 이루어진 환영대오가 길량옆에 쭉 늘어섰다. 대중들이 빼곡이 둘러싸서 폭죽을 터뜨리며 환영하고 군악대가 연주하는 가운데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는 장개석에게 광주의 왕정위, 담연기, 오조추, 고응분, 송자문이 련명으로 축전을 보냈고 국민정부요원들이 한줄로 서서 경의를 표시했다. 이렇게 군권을 틀어쥔 장개석은 위풍이 당당했다.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26년 1월에 광주에서 국민당제2차대표대회가 열렸을 때 장개석은 1표기권외에 전부찬성의 최고표수로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그 기권표는 장개석자신일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전부찬성표보다 더 강한것이였다. 그번 대회에 참석한 공산당대표 100명은 모두 장개석에게 찬성표를 던져주었다. 그해에 장개석은 40세였다. 송경령은 동정승리후의 광동형세에 대해 말할 때 “이 기간의 형세는 손중산선생이 계실때보다 더욱 좋았다”고 평가했다. “손중산선생이 계실때보다 더 좋았다”는 한마디가 송경령의 입에서 나왔다는것은 최고의 칭찬이였다. 국민당제1차대표대회에서 입장권도 얻지 못했던 장개석은 제2차대표대회에서 개인명성이 정점에 달했다. 이렇게 명성이 정점에 달하게 되자 손을 쓰기도 편리했다. 1926년 3월 20일에 발생된 “중산함사건”에서 장개석은 료중개, 허숭지, 호한민을 쓸어버릴 때처럼 일거삼득의 효과를 보았다. 이번에 타격할 목표는 중국공산당, 구쏘련고문단, 왕정위였다. 때마침 보로딘이 광주에 없었다. 구쏘련고문은 전부 장개석에 의해 연금되였다. 장개석은 또 “당무안정리”를 리용하여 암암리에 보로딘을 배척하여 실권을 잃어버리게 했다. 공산당원도 “당무안정리”후에 핍박에 의해 국민당중앙과 제1군에서 퇴출했다. 장개석은 왕정위를 밀어내고 군권을 장악했다. 1927년 7월 15일에 왕정위는 무한에서 “분공(分共)회의를 열고 중국공산당을 반대하겠다는 립장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이로서 대혁명은 완전히 실패했다. 장개석을 최고의 권좌에 올려놓은 보로딘은 1926년부터 1927년의 1년사이에 장개석에 의해 “손중산총리가 사망된이래 우리에게 이처럼 위대한 정치활동가가 없었다”고 높이 떠받들렸다가 “적색혁명을 선동하여 정권을 뒤엎으려고 시도한 음모가”로 되여 즉시 잡아들여 총살해야 될 운명에 처했다. 정치인물은 왕왕 순식간에 상전백해속에서 사람들이 짐작할수 없는 인물로 되여버린다. 보로딘은 장개석이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으며 장개석도 보로딘이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이전에 일본사관생이였던 장개석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아직도 자신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탄복하고있었고 자신을 리용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극도로 미워했다. 당년에 보로딘이 장개석을 권좌에 올려놓는것을 반대했던 가륜은 귀국후 1938년 10월에 있은 구쏘련의 반혁명숙청운동에서 체포되였다. 구쏘련주재 중국대사 양걸의 보고를 받은 장개석은 가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손과를 특사의 신분으로 구쏘련에 보내여 쓰딸린에게 가륜을 자신의 사인고문으로 파견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구쏘련의 반혁명숙청행동은 너무 빨랐다. 가륜은 체포되여 한달만에 총살되였다. 손과가 쓰딸린에게 장개석의 요구를 전달했을 때 쓰딸린은 가륜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자신을 반대했던 가륜의 목숨을 구하려고 했던 장개석은 도리여 자신을 최고의 권좌에 올려놓았던 보로딘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체포령을 내렸다.    
87    누가 장개석을 최고권좌에 올려놓았는가 (1) 댓글:  조회:5869  추천:0  2014-11-22
누가 장개석을 최고권좌에 올려놓았는가    (번역)     많은 사람들은 장개석을 손중산이 선정한 후계자인줄로 오해하고있다. 손중산은 림종시에 송경령과 왕정위의 이름을 부른적이 있지만 장개석의 이름을 부른적은 없었다. 그리고 림종시에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다. 1911년 10월 10일에  무창봉기가 일어났다. 손중산은 미국에서 그 소식을 듣고 12월에 귀국했다. 17개성의 대표들은 손중산을 중화민국 림시대통령으로 천거했다. 손중산은 1912년 1월 1일에 남경에서 정식으로 취임하고 중화민국림시정부를 세웠다. 1912년 2월 12일에 청나라의 선통황제(부의)가 핍박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되여 2000여년의 군주전제제도가 결속되고 공화국이 건립되였다. 1925년 3월에 손중산이 사망되고 그해 7월 1일에 중화민국국민정부가 광주에서 성립되였다. 소위 “총리의 유일한 후계자”인 장개석은 국민정부의 상무위원회 위원도 아니였고 위원도 아니였으며 국민당중당집행위원회 위원도 아니였다. 심지어 후보위원도 아니여서 큰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였다. 장개석은 1905년에 일본 도꾜에서 진기미(陈其美)의 소개로 손중산을 알게 되였다. 그러나 손중산이 의지할만한 군사인재로 본 인물은 처음에는 황흥(黄兴)과 진기미였고 후에는 주집신(朱执信), 등갱(邓铿), 거정(居正), 허숭지(许崇智), 진형명(陈炯明)이였다. 장개석이 유럽전쟁형세와 원세개를 반대하는 투쟁방책을 내놓아서야 손중산은 그에게 주의를 돌리게 되였다. 그후 장개석은 련속 손중산에게 “장래의 남북량군행동에 대한 판단”과 “월계군(粤系军)제2기작전계획” 등 견해를 써서 바쳤다. 하지만 손중산은 장개석을 괜찮은 참모인재쯤으로만 보았을뿐이다. 때문에 손중산은 장개석에게 참모장, 참군(参军)류의 실권이 없는 직무만 맡겼다. 장개석은 선후로 거정수하의 참모장, 손중산대통령부의 참군, 진형명수하의 작전과 주임, 허숭지수하의 참모장, 손중산대원수행영 참모장 등 직을 맡았다. 가장 먼저 장개석의 재능을 알아본것은 진형명이였다. 그는 장개석이 참모직에만 국한될 인물이 아니라는것을 발견했다. 진형명은 자신의 수하에서 작전과주임으로 있던 장개석이 사직을 하려고 하자 극구 만류하면서 “월군(粤军)이 백번 이겼다고 해도 자네 한 사람이 없어서는 안되네”라고 말했다. 진형명의 말은 옳았다. 나중에 진형명은 장개석의 손에 패했다. 1922년 4월에 손중산을 배반할 준비를 하고있던 진형명은 손중산에게 월군총사령직과 광동성 성장직에서 사직하겠다고 말했다. 손중산은 진형명의 사직을 비준했다. 진형명의 뜻을 모르는 장개석은 손중산을 찾아가서 진형명을 대신하여 통사정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통하지 않자 자신도 사직하고 진형명에게 환난을 같이하겠다는 편지를 써보냈다. 그러나 진형명이 손중산을 배반하자 장개석은 진형명과의 우의를 포기하고 자신에게 리익이 더 많을 손중산의 편에 섰다. 그 일로 손중산은 처음으로 장개석을 주의하기 시작했다. 손중산은 장개석의 성격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개석은 화를 잘 내서 주위사람들과의 사이가 늘 긴장했다. 걸핏하면 사직하겠다고 나섰고 비준도 받지 않고 옷소매를 뿌리치고 간후 전보를 쳐도 회답하지 않았다. 1922년 10월에 손중산은 장개석을 허숭지의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몇개월후 장개석은 군부의 일에 진전이 없다는 리유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손중산이 료중개(廖仲恺)를 파견하여 군부로 돌아오라고 하였으나 장개석은 외고집을 부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1923년 6월에 손중산은 장개석을 대원수행영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한달도 못되여 배척되는 화를 당하지 않겠다는 리유로 사직하고 계구(溪口)로 되돌아갔다. 1924년초에 손중산은 장개석을 황포군관학교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한달만에 장개석은 경비가 락착되지 않았다는 리유로 준비위원장직을 사직했고 그해 9월에 군관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사직서를 바쳤다. 1918년 7월에 진형명의 작전과 주임직을 사직해서부터 1924년 9월에 황포군관학교 교장직을 사직하기까지 6년사이에 장개석이 사직했다가 복직한 차수가 14번이나 된다. 손중산은 장개석이 다른 직무에서 사직한것은 참을수 있었지만 황포군관학교의 직을 사직한 일만은 용인할수 없었다. 1923년에 구쏘련전권대표 요페(越飞)는 손중산을 만나 《손문요페선언》을 체결한후 쏘련에서 경비와 무기, 군사교관을 보내주고 군관학교건립을 도와주겠다고 표시했다. 손중산은 몇십년동안 혁명을 하면서 자신의 군사가 없는 설음을 많이 맛보았고 손해도 많이 보았다. 이제 꿈에도 가지고싶었던 자신의 군대를 가질수 있게 되였는데 장개석이 또 사직하려고 하자 손중산은 장개석에 대해 몹시 실망했다. 병권을 매우 중하게 여겨온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의 중요성을 모를리 없었다. 그가 불만을 느낀것은 “경비가 락착되지 않아서”가 아니였다. 1924년 1월에 국민당제1차대표대회를 열었는데 손중산이 장개석을 대표로 선정하지 않았고 각 성의 당부에서도 장개석을 추천하지 않았다. 국민당당사에서 매우 중요한 그번 대회에서 장개석은 한장의 입장권도 얻지 못했다. 이때문에 장개석은 불만을 터뜨렸던것이다. 1924년 11월 13일에 손중산은 북상을 시작했는데 이틀전에 황포의 새 군대를 당군(党军)이라고 개칭하기로 하고 장개석을 군사비서로 임명했다. 이는 손중산이 마지막으로 장개석에게 임명한 직무였다. 손중산은 북상하여 사망되기까지 4개월사이에 장개석에게 그 어떤 편지거나 지시를 전한적이 없었다. 손중산은 장개석에게 높은 직위를 내려준적이 없었다. 그럼 누가 장개석을 높은 직위에 올려놓았을가? 그 공로는 구쏘련의 로씨야에서 온 미하일 보로딘(米哈依尔鲍罗庭)에게 속한다. 보로딘은 손중산의 수석고문 겸 중국주재 공산국제대표였다. 보로딘은 첫사람으로 장개석을 권력의 최고봉에 오르도록 해준 사람이다. 공산국제의 파견을 받고 중국에 온 보로딘은 중국혁명의 발전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손중산은 “보로딘은 내가 만나본 공산국제인원중에서 가장 탄복하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보로딘과 손중산을 만나게 해준 사람은 구쏘련 외교관 가리한(加拉罕)이였다. 하지만 가리한은 보로딘에게 국민당을 개조하라고 한적이 없었다. 보로딘자신도 중국에 와서 처음 한 일이 나중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국민당의 개조를 실시한 일이 될줄을 몰랐다. 보로딘전에 국민당은 정치상, 조직상, 리론상에서 한개의 정당이라고 할수 없었다. 강령이 없었고 조직이 없었고 장정이 없었고 선거가 없었고 정기적인 회의도 없었고 당원의 수자도 똑똑히 알지 못했다. 말로는 3만명이라고 했지만 등기된것은 3000명밖에 안되였다. 또 당비를 바친 사람은 6000명이였다. 입당도 손을 들고 손중산에게 충성한다면 가입될수 있었다. 손중산자신도 “당원”이 얼마나 되며 누구누구가 당원인지 알지 못했다. 보로딘은 손중산에게 “당을 개조하지 않으면 국민당은 존재할수 없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에 손중산은 큰 촉동을 받았다. 그전에 누구도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던것이다. 손중산은 이미 국민당에 대해 개조를 실행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중국국민당당강(中国国民党党纲)” 등 일련의 문서도 초안을 끝내놓고있었다. 이전에 손중산은 여러번이나 본당의 력량에 의해 당을 개조하려고 했지만 효과가 별로 없었다. 이번에 손중산은 보로딘에게 의거하고 구쏘련 무산계급정당의 건당경험을 운용하여 국민당을 개조하려고 결심했다. 보로딘은 구쏘련공산당의 조직방법에 따라 중국공산당원과 국민당좌파에 의거하여 국민당에 대해 철저한 개조를 하기 시작했다. 국민당제1차전국대표대회에서 통과된 그 중요한 “선언”은 바로 볼세비크당원인 보로딘이 직접 초안하고 중국공산당원 구추백이 번역하고 국민당원 왕정위가 윤색한것이다. 보로딘이 사망된후 근 40년이 지나서 대만의 리등휘가 국민당주석으로 되였다. 서방의 저명한 평론가는 리등휘가 국민당으로 하여금 레닌의 건당모식을 철저히 버리게 했다고 지적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그들은 몇십년동안 날마다 “공산당을 타도하자”고 웨치던 국민당이 레닌의 건당모식을 사용했을 줄은 모르고있었다. 보로딘을 만나본 사람은 모두 그의 인격적 매력에 끌려들었다. 그는 어떠한 기자를 만나든지 모두 자신의 탁월한 원견과 지식으로 그들을 정복했다. 그는 나타나기만 하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통제했다. 그리고 그는 곧 그들의 중심이 되군 했다. 그는 중국의 전통, 습관, 례절을 매우 중시했다. 그는 방에 레닌의 초상을 걸지 않고 손중산의 초상만 걸어두었다. 무릇 보로딘을 접촉한 사람은 모두 그의 비범한 기질과 청중을 정복하는 능력에 탄복하군 했다. 그는 부동한 파들을 화해시키는 능력이 매우 강했다. 그가 있기만 하면 광주의 여러 세력들은 아무 탈없이 화목하게 지냈다. 각 파의 사람들은 일이 있으면 모두 그를 찾아와 상의하려고 했다. 그때마다 그는 언제나 합당한 방법을 내놓아 찾아온 사람들이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그의 거처는 자연스럽게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중심으로 되였다.    
86    속유장군은 왜서 원수계급을 수여받지 못했는가? 댓글:  조회:8369  추천:6  2014-11-16
속유장군은 왜서 원수계급을 수여받지 못했는가?   (번역)     저명한 군사가이며 전략가인 속유(1907년 8월 10일~1984년 2월 5일)는 중국인민해방군 10대 대장 순위에서 서렬이 1위이다. 1955년 9월 중순에 한단을 시찰하고 돌아온 모택동은 중남해 이년당에서 주은래, 주덕, 류소기와 함께 해방군고급장교들에게 군사계급을 수여할데 관한 문제를 토론할 때 “전공, 경력, 재능, 품덕을 놓고 볼 때 속유는 모든 방면에서 능히 원수계급을 받을수 있습니다. 해방전쟁에서 화동야전군의 통수 속유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었습니까?”하고 말했다. 하지만 속유는 원수계급을 사양했다. 그후 새로운 원수명단이 확정되여 정식으로 발표할 준비를 하고있을 때 당내의 몇몇 고위급간부들은 주은래, 류소기, 등소평이 군을 떠나 지방에서 사업했다는 리유로 원수계급수여명단에서 제외된 정황을 언급하면서 똑같이 지방에서 사업한 진의에게 원수계급을 수여하게 된데 대해 반대의견을 제기했다. 진의는 1954년 9월에 국무원 부총리 겸 과학원, 정법, 문화를 관할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였고 1955년 5월에 국무원에서는 진의에게 제1판공실, 제2판공실, 민족사무와 과학, 위생사업을 관할하게 했다. 만약 이런 문제로 진의가 원수계급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장기간 실제적으로 화동야전군을 지도하고 지휘하는 중임을 맡았던 속유를 다시 원수명단에 넣는것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물론 속유자신이 다시 사양한것도 예상하던 일이였다. 1955년 9월 27일 오후 2시 30분에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서는 인민해방군장군계급수여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국무원비서장 습중훈이 인민해방군군관계급을 수여할데 관한 주은래총리의 명령을 선독하고 국무원총리 주은래가 속유(粟裕), 서해동(徐海东), 황극성(黄克诚), 진갱(陈赓), 담정(谭政), 소경광(萧劲光), 장운일(张云逸), 라서경(罗瑞卿), 왕수성(王树声), 허광달(许光达) 10명에게 대장계급을 수여했다. 그날 오후 5시에 중남해회인당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원수계급수여의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였다. 원수는 한어사전에서 두가지의 뜻을 가지고있다. 하나는 군대중의 통수를 뜻하고 다른 하나는 장군보다 높은 계급을 뜻한다. 속유는 한개의 방면군인 화동야전군(제3야전군)을 거느린 통수로서 가장 많을 때에는 82만 5000여명의 군사를 거느렸다. 속유는 제4야전군 총사령이였던 림표를 제외하고 직접 제일 많은 군사를 지휘하여 작전한 고급장군이였다. 때문에 전자의 뜻을 놓고볼 때 속유는 원수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후자의 뜻을 놓고 볼 때 속유의 계급은 대장이였기에 원수라고 할수 없다. 비록 10대 대장의 서렬에서 첫순위라고 하더라도 속유는 필경 원수가 아닌것이다. 력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놓고 볼 때 대장은 원수가 향수하는 대우보다 차하였고 지명도도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겸손했던 속유는 “내가 대장계급을 수여받은것도 높다고 생각하는데 원수라니요? 나는 나의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지 낮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략이 출중하고 혁혁한 전공을 세운 화동야전군 통수였던 속유가 원수계급을 수여받지 못한 일은 당시에는 물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자아내고있으며 군사애호가들이 관심하는 초첨으로 되고있다. 인민일보사 기자 김봉은 1950년말에 류백승과 속유를 취재한후 “년령, 자격과 경력을 놓고 볼 때 팽덕회는 자연히 속유보다 앞서지만 전공과 군사재능을 놓고 볼 때 전군은 속유가 약간 낫다고 공인하고있다. 그러나 속유는 대장계급을 수여받았고 팽덕회는 원수계급을 수여받았다”고 서술하여 속유가 원수계급을 수여받지 못한 유감을 표달했다. 《개국장군일화》라는 책에는 “속유장군은 ‘7전7첩’, 로남, 맹량고, 사토집, 예동, 제남, 회해, 도강, 상해 등 중대한 전역을 지휘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웠지만 1955년의 계급평의에서 원수계급에 오르지 못한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또 《속유대장》이란 책에는 속유가 1948년 5월에 진의에게 화동야전군 사령원직을 양보하고 자신이 화동야전군 사령원대리직과 정위대리직밖에 맡지 않은 력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속유를 인격이 높고 절개가 곧다고 칭찬한 동시에 탁월한 군사가이며 전략가인 속유에 대해 아쉬움을 표시했다. 속유가 양보한것은 당시의 화동야전군 사령원 겸 정위직뿐만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원수계급이기도 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1948년에 모택동은 중원야전군과 협동작전을 하기 위해 화동야전군 사령원이였던 진의를 중원야전군 부사령원으로 파견하고 속유에게 3개 종대를 거느리게 하여 도강작전을 지휘하도록 결정했다. 그리하여 속유를 화동야전군 사령 겸 정위로 임명했다. 하지만 속유가 진의에게 속했던 그 직위를 사양하자 중공중앙에서는 진의의 화동야전군 사령원 겸 정위직을 보류하고 속유에게 화동야전군 사령원대리 겸 정위대리직을 맡겼다. 속유는 소수민족인 동족(侗族)이였지만 자신이 동족인것을 모르고있었다. 《속유대장》이란 책에는 이렇게 서술했다. “사학가와 민족학가들은 ‘만약 속유가 자신이 동족인것을 일찌기 알고있었더라면 1955년에 계급제를 실시할 때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에는 한분의 동족원수가 나타났을것이다’고 탄식하여 말했다.” 당시 28명의 군사위원회 위원중에서 속유는 서렬 15위였다. 나중에 원수계급을 받은 라영환은 이 명단에 들지 못했다. 서렬이 속유보다 앞섰던 군사위원회 위원은 모택동, 주덕, 류소기, 주은래, 팽덕회, 정잠(程潜), 하룡, 류백승, 진의, 림표, 서향전, 엽검영, 섭영진, 고강(高岗)이였다. 대원수립후보자(候选人)였던 모택동, 국민당군의 1급상장이였던 봉기장군 정잠 및 주요하게 지방사업을 책임졌던 류소기, 주은래, 고강을 제외하면 속유는 서렬 10위였다. 또 모택동은 속유를 10명의 원수명단중 제7위에 넣었다. 하지만 속유는 여러가지 원인을 고려하여 원수계급을 사양했다. 1948년에 모택동이 “속유에게 전역지휘를 책임지게 한다”고 지시했을 때 화동야전군 사령원 진의는 도량이 넓게 속유의 전역결책과 전역지휘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전역이 시작되였을 때 진의는 늘 지휘실을 떠나면서 “내가 여기를 떠나는것은 매우 필요하오. 속유사령이 번마다 나에게 보고하여 시간을 지체하는것을 피면할수 있기때문이요”하고 말했다. 그번에 모택동이 속유를 화동야전군 사령원 겸 정위로 임명하고 진의를 중원으로 보내 후근을 관할하게 했는데 속유는 후근사업이 진의의 특장이 아니라고 여겼다. 때문에 속유는 사양하면서 모택동에게 “진의동지는 화동야전군을 떠날수 없습니다. 그를 보내지 말아주십시오”라고 요구했다. 모택동은 “중앙에서 이미 결정한 일이요. 진의동지와 등자회동지는 중원국, 중원군구에 가서 사업하게 되니 동무가 화동야전군을 책임지오”라고 말했다. 속유는 하는수없이 마지막으로 “진의동지의 화동야전군 사령원 겸 정위직무를 계속 보류해주십시오”라고 요구했다. 모택동은 한참 생각해본후 속유의 요구를 동의했다. 그리하여 속유는 진의가 중원군구로 떠나간후 화동야전군 사령원대리 겸 정위대리직을 맡았다. 이는 속유가 후에 원수계급을 수여받는데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지적해야할것은 그번의 사양으로 정식사령원이란 명의가 없었기때문에 객관상에서 속유의 지명도가 떨어졌고 그가 세운 전공이 약화되고 전이되고 마멸된것이다. 이 사실은 명예를 탐내지 않는 속유의 고상한 정신을 말해준다. 계급을 수여할 때의 현임직무로 보아도 속유는 원수계급에 합당한 립후보자였다. 1954년 10월 31일에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 총참모장을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개칭했고 종속인민혁명군사위원회를 종속중공중앙군사위원회로 개칭했다. 총참부는 아래에 작전부, 정보부, 기술부, 통신부, 군무부, 장비계획부, 인민무장부, 군사운수사령부, 정치부, 간부처, 측량국, 행정경제관리부 등을 관할하는데 속유가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계급이 정식으로 선포되기전에 성격이 직방배기인 허세우는 자신의 계급이 상장밖에 안된것을 알고 주은래를 찾아가서 대장계급을 달라고 요구했다. 주은래는 “속유도 대장계급밖에 받지 못했소”라는 한마디말밖에 하지 않았지만 허세우는 더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속유가 화동야전군을 실제로 지휘하던 부사령직을 맡아서 맹량고전역의 기적을 창조했을 때 허세우는 그 휘하 9종대의 사령원이였다. 그리고 속유가 화동야전군 사령원대리 겸 정위대리직을 맡았을 때 허세우는 그 휘하에서 한개 성을 공격하는 총지휘를 맡았다. 허세우는 속유가 대장계급을 받게 되였다면 자신은 상장계급밖에 받을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었던것이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첫 원수계급수여의식은 이미 지나간 력사로 되였다. 하지만 후세사람들에게 약간의 유감도 남겨놓았다. 모택동은 속유를 보고 “당신은 대장계급을 수여받았지만 원수가 하는 일을 하고있소”라고 말한적이 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가장 우수한 장군의 한분인 속유는 비록 원수계급을 수여받지 못했지만 중국인민해방군의 높고도 영원한 기념비를 세워놓았다.  
85    제갈량과 그의 못생긴 안해 황월영 댓글:  조회:9252  추천:2  2014-11-08
제갈량과 그의 못생긴 안해 황월영     랑재녀모(郎才女貌)는 재능있는 남자와 미모의 녀자가 천생배필이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삼국시기의 정치가이자 전략가인 제갈량(诸葛亮)은 못생긴 안해를 얻은것으로 하여 력사에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제갈량의 안해 황월영(黄月英)은 면남(沔南)의 이름난 명사 황승언(黄承彦)의 딸이였다. 황월영은 3국시기에 형주(荆州)의 면남(沔南) 백수(지금의 호북성 양양시 황가만)에서 출생했는데 별명이 황석(黄硕), 황완정(黄婉贞), 아추(阿丑)이다. 본명은 력사기재에 없으며 월영은 민간에서 전해진 이름이다. 황월영은 어려서부터 령리하고 학문에 능했을뿐만아니라 병서에 정통했고 천문지리에 밝았으며 지략이 풍부했다. 하지만 키가 작고 머리가 노란데다가 얼굴이 검어 생김새가 매우 추했다. 하여 18살이 되였으나 혼사말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황승언은 일찍부터 제갈량이 마음에 들었지만 외모나 기량이 더없이 출중했던 그에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던차 하루는 제갈량을 만나서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군이 안해를 고른다면 몸은 루추하고 머리는 노란색이며 얼굴은 검지만 재능이 있는 녀자를 배필로 맞을수 있겠는가?” 제갈량은 좋다 싫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황승언이 찾아온 사실을 안 제갈량의 형수는 시동생에게 황월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생원도 인젠 장가갈 나이가 되였잖아요? 황승언이 자기 딸을 주고싶어하는데 생원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자 제갈량은 형수를 보고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들 그 녀자는 누런 머리에 얼굴은 검어 추하기 이를데 없다고 합디다. 저도 직접 만나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녀자가 쓴 시들을 본적이 있는데 그 뛰여난 재능에 놀랐습니다.” “그 녀자가 쓴 시가 마음에 들면 사람을 한번 직접 만나보는것이 어때요? 시를 잘 쓰면 학문도 있어야 하겠는데 안그래요?” “형수님이 그렇게 생각하면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형수의 권고로 제갈량은 황승언의 집에 한번 다녀오기로 했다. 그 당시 류비, 관우, 장비가 여러번이나 제갈량을 찾아와 힘을 합쳐 천하를 바로잡기를 원했는데 제갈량은 동의할지 말지 고민중이였다. 제갈량은 황승언을 찾아 상의도 할겸 겸사겸사해서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황승언의 안내로 집에 들어간 제갈량이 집안을 살펴보니 벽에 화법이 뛰여난 그림 한점이 걸려있었다. 제갈량이 벽화를 감상하고있는데 황승언이 딸이 그린것이라고 소개했다. “내 딸이 제멋대로 그린것이니 비웃지 말게.” 황승언은 또 창밖에 탐스럽게 피여난 꽃들을 가리키며 자랑했다. “저것도 내 딸이 심고 가꾼것일세. 어떤가? 꽃들이 아름다운가?” 제갈량은 황월영의 재능에 감탄했다. “따님이 재간이 많은가 봅니다. 그림도 잘 그리고 꽃도 잘 가꾸니 말입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 딸에게 그런 재주가 있는가 보오.” 이때 황월영이 방에서 나왔다. 제갈량은 그의 추한 외모에 대해서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제갈량은 황승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류비, 관우와 장비가 와룡산으로 여러번 저를 찾아온적이 있습니다. 그들을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데 나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릴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저에게 방향을 가리켜주십시오.” 황승언은 기뻐하며 되물었다. “류비가 과연 자네를 찾았었군. 사람보는 안목은 있단말일세. 먼저 자네생각부터 들어보고싶네.” 그러자 제갈량은 자기생각을 털어놓았다. “사실 저는 조용한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글이나 읽으면서 세상이 돌아가는것을 지켜보고싶습니다. 란세에 이름이 알려지기를 바라지도 않고 그냥 목숨이나 부지하면서 평화로운 삶을 살가 합니다.” 이때 옆에서 듣고있던 황월영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은 당신이 이름을 날리려는것이 아니라 세상이 당신을 필요로 하고있습니다. 이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란세에 세상에서 개인목숨이나 유지하려는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봅니다. 또 쉬운 일도 아닙니다. 공용이나 양수를 막론하고 예로부터 이런 생각을 품었던 문인들을 보면 결국에는 감금되지 않으면 살해당하고 아니면 류배를 떠나고…평화롭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신분이 계십니까?” 황승언은 딸이 자신의 마음속말을 하는지라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제갈량도 처녀의 대담함과 슬기로움에 또한번 놀라게 되였다. 황월영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건 마치 보석이 흙속에 파묻힌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깊이 감추려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듣고있던 제갈량의 얼굴에 미소가 비꼈다. 흥분의 기색이 력력했다. 그는 황월영을 한번 바라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말을 들으니 느끼는바가 많소. 사실은 나도 뜻을 펼쳐 크게 해보려고 했으나 험난한 과정과 실패가 두려웠소. 평생 밭과 씨름하자니 그것도 내키지 않았소. 녀자의 몸으로 이런 깊은 생각을 하다니 정말 탄복되오. 나도 생각을 고쳐 다음에 류비가 다시 찾아오면 얘기를 나누어보고 생각이 같다면 기꺼이 따라서 갈가하오. 흥망성쇠는 나 개인의 의지로 좌우지되는것이 아니기때문에 신경쓰지 않으려오.” 와룡산에 돌아온 제갈량은 황월영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그들의 혼인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결혼후 얼마 안되여 제갈량은 뜻을 이루기 위해 류비를 따라나섰다. 남편이 항상 전쟁터에 나가있었지만 황월영은 근면한 생활을 하면서 내조를 잘해 제갈량의 걱정을 덜어주는 훌륭한 안해가 되였다. 그녀는 제갈량의 친구들과 이웃들의 어려움을 만사를 제쳐놓고 도와주었으며 성품이 따뜻하고 친절했다.   그때로부터 “제갈공명이 마누라를 고르는것을 배우지 말아야 한다. 황승언의 딸과 같은 추녀를 얻을지도 모르니깐(不要学孔明选择妻子,只得到黄承彦的丑女儿)”하고 말하며 비웃던 사람들도 후에는 모두 그녀를 따르고 존경했다고 한다. 황월영은 재주가 비상했다. 후날 제갈량이 사마의와 싸울 때 군량운반장치인 “목우류마(木牛流马)”가 등장하는데 제갈량의 발명품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제갈량의 안해가 발명한것이였다고 한다. 제갈량이 륭중에 거주할 때 손님이 찾아왔는데 제갈량은 안해에게 가루를 내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안해가 잠간사이에 가루를 다 내가지고왔다. 제갈량이 그처럼 빠른 안해의 솜씨가 이상하여 알아보니 몇몇 나무인형(木人)이 신속하게 밀가루를 밀가루를 빻고있었다. 너무도 신기하게 생각된 제갈량은 안해에게서 해당기계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황월영은 세계에서 제일 처음 로보트(机器人)를 발명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황월영은 나무인형(木人)외에 나무개(木狗)와 나무호랑이(木虎)도 발명했다. 기원 231~232년에 제갈량은 료립, 두예, 호충 등 사람들을 소집하여 경곡현 서남 25리의 백마산에서 나무인형기계를 개진해 목우(木牛), 류마(流马) 두가지의 운수기구를 만들었다. 제갈량이 싸움터에까지 가지고다니던 거위털부채에는 안해가 가르쳐준 전략이 적혀있었다. 병사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제갈행군산”과 “와룡단”도 황월영이 만든것이라고 한다. 결혼할 때 황월영은 제갈량에게 거위털부채를 선물로 주었다. 부채에는 “성을 공격하여 땅을 빼앗고 나라를 잘 다스려 안정(攻城略地、治国安邦)”시키는 계책이 숨겨져있었다. 제갈량은 거위털부채를 금지옥엽처럼 애지중지하면서 춘하추동 손에서 놓치 않았다. 제갈량과 그의 부인은 금슬이 매우 좋았다. 그들은 슬하에 아들 제갈첨(诸葛瞻), 제갈교(诸葛乔—제갈량의 형 제갈근의 아들인데 제갈량이 양자로 삼았음), 제갈회(诸葛怀)와 딸 제갈과(诸葛果)를 두었는데 모두 머리가 비상하였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제갈첨은 17살에 촉나라의 공주와 결혼하였는데 용감무쌍한 장군으로 되였으며  전쟁터에서 등애와 싸우다가 영용하게 목숨을 바쳤다. 향년 37세였다. 황월영에 대해 일부 야사에서는 절세미인으로 소개했다. 시국이 어지러울 때라 황월영은 얼굴에 진흙을 발라 자기의 미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갈량의 앞에서만 경국지색의 미모를 드러냈다고 한다. 어찌됐건 지모가 뛰여난 제갈량과 재능이 탁월한 황월영은 그야말로 천하에 길이 빛날 천생배필임에는 의심할바가 없다.    
84    중국인민해방군 첫 녀장군 리정 댓글:  조회:8054  추천:1  2014-11-02
중국인민해방군 첫 녀장군 리정   (번역)     1907년에 호남성 류양현에 출생한 리정은 1926년에 혁명에 참가하여 이듬해 3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상감(湘赣)변계추수봉기, 상감과 상악천검(湘鄂川黔)근거지의 반포위토벌, 장정에 참가했다. 1927년 4월에 대혁명이 실패한후 백색공포가 호남성의 도시와 농촌을 휩쌌다. 적들은 사처에서 녀공산당원 리정을 붙잡으려고 날뛰였다. 리정은 상감변계의 심산밀림속에 들어간후 광주리를 메고다니며 숨어있는 공산당원들을 찾으러 다녔다. 며칠동안 뛰여다닌 결과 그녀는 마침내 공산당원 류선행, 류정원, 리회동을 찾았다. 4명의 공산당원은 함께 하나의 당지부를 세우고 리정이 서기직을 맡았는데 이는 류양현 영화구의 첫 지하당지부 서기였다. 혁명의 불씨는 또 류양대지에 지펴졌다. 공산당은 상감변계의 추수봉기를 일으키려고 준비하고있었다. 1927년 9월 11일에 추수봉기군 로농대오는 류양을 공격했다. 리정은 당지부의 동지들을 거느리고 즉시 전투에 뛰여들었다. 로농혁명군이 정강산에 들어간후 백색공포는 또 한차례 류양하 량안을 휩쌌다. 류소령을 대장으로, 안계초를 당대표로, 리정을 사병위원장으로 하는 류양유격대는 바로 이런 환경에서 성립되였다. 처음에 유격대는 몇명에 총 두자루밖에 안되였지만 대위산과 련운산에 의거하여 쳐들어오는 적들과 유격전을 벌리면서 교묘하게 숨어다녔다. 이렇게 적들의 총을 빼았아 유격대의 대오가 점점 크게 늘어나자 국민당은 당황해났다. 호남군벌 하건은 주한에게 한개 퇀을 거느리고 당지의 퇀방군(团防军), 련방군과 함께 류양의 유격대를 포위하여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리정은 유격대를 거느리고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적들의 수차례 되는 공격을 물리쳤다. 이튿날 저녁에 총성이 뜸해졌다. 대장은 리정이 임신 4개월인것을 고려하여 그녀더러 몇명의 육격대원들과 함께 먼저 진지에서 퇴각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리정은 “나는 공산당원입니다. 지방간부와 군중들이 먼저 퇴각하게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산우의 포위를 뚫고 나간 동지들이 산에서 내려가자마자 산아래의 적들이 미친듯이 사격하기 시작했다. 1명의 유격대원과 몇명의 지방간부가 성공적으로 포위를 뚫고 나간외에 기타의 동지들은 모두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적들은 홰불을 켜들고 수색하기 시작했다. 리정은 두려워하지 않고 유격대원들을 거느리고 완강하게 적들과 싸웠다. 그녀는 탄알이 다 떨어지자 돌을 들어 쳐들어오는 적들의 대갈통을 향해 내리던졌다. 뒤산으로 살금살금 기여오른 적들은 유격대원들을 포위했다. 리정과 4명의 유격대원들은 조사암의 벼랑쪽으로 퇴각했다. “산채로 사로잡아라!” 적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적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리정은 4명의 유격대원들을 보고 “적들에게 사로잡힐수 없습니다. 아래로 뛰여내립시다”하고 소리치고 나서 자신이 먼저 벼랑아래로 뛰여내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리정은 혼수상태에서 깨여난 그녀는 자신이 벼랑의 나무우에 걸려있는것을 발견했다. 복중태아는 불행하게도 류산되였다. 2명 생존자의 부축을 받으며 리정은 50~60리길을 걸어 마침내 적들의 포위구역을 벗어나 육격대로 돌아왔다… 새 중국이 성립된후 리정은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했다. 그후 1957년에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검찰원 군사검찰원 부검찰장에 임명되였고 1975년 10월에 총정치부 조직부 고문 등 직을 맡았다. 그녀는 1955년에 소장계급을 수여받아 중국인민해방군의 첫 녀장군으로 되였다. 그녀는 중국공산당 7차대회 후보대표, 13차 대표대회 특별초청 대표, 중앙고문위원회 위원 등 직을 맡았다. 1990년 3월 11일에 중국인민해방군의 첫 녀장군은 북경에서 사망되였는데 향년 83세였다.     
83    색을 탐하여 모택동에게 엄한 징벌을 당한 두 장군 댓글:  조회:7227  추천:1  2014-11-01
색을 탐하여 모택동에게 엄한 징벌을 당한 두 장군 (번역)     1928년 3월에 로농혁명군을 거느리고 계동 사전에 도착한 모택동은 군기를 바로잡으려고 “3대규률과 6항주의”를 반포했다. 후에 “3대규률과 8항주의”로 수정하여 1947년에 다시 반포했다. 그중 “8항주의”중에는 군인이 “녀성을 희롱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아군의 두 고급군관이 이 규률을 위반하여 한명은 목이 잘리는 처형을 받았고 다른 한명은 관직을 강직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참수”한 모택동   1911년에 강서성 남강에서 출생한 황극공은 소년시절에 중국로농홍군에 참가하였고 장정중에 대공을 세웠다. 홍군 1방면군과 2방면군이 회합할 때 황극공은 홍군려장직을 맡았다. 1937년에 연안항일군정대학 제6대 대장을 력임한 그는 문무를 겸임한 고급장령으로 되여 모택동의 칭찬까지 받았지만 류천과의 혼인문제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본명이 동추월인 류천은 태원시우인중학교의 진보적인 학생이였다. 로구교사변이 발생된후 적극적으로 공산당의 항일호소에 따라 연안에 찾아온 그녀는 항일군정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때 황극공을 알게 되였다. 단기간의 접촉을 거쳐 서로 호감을 가진 두 사람은 편지거래를 통해 련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황극공은 류천이 다른 남동창생과 래왕한다는 리유로 질투했다. 게다가 황극공은 떠도는 소문을 믿고 류천이 다른 남자를 사랑하며 자신을 배반했다고 책망하면서 즉시 결혼하자고 재촉했다. 류천은 황극공의 옹졸함에 반감을 가지면서 결혼을 거절했다. 그렇게 되자 화가 난 황극공은 1937년 10월 5일에 20세도 안된 류천을 연하의 강뚝에 데리고가서 총 두방을 쏘아 죽여버렸다. 항일군정대학 부교장 라서경은 중앙령도의 비준을 거쳐 황극공을 체포했다. 이 사건을 심사하는 과정에 연안의 각 단위에서 이 사건을 놓고 토론을 조직했다. 어떤 사람은 황극공은 홍군의 중요한 간부이고 당에 대한 공헌이 많기에 립공속죄의 기회를 주자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황극공은 비록 공이 있지만 규률을 무시하고 살인했기에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극공은 중앙에 편지를 보내여 만약 사형을 집행한다면 공산당의 법원에서 죽지 않고 전쟁터에 나가 적과 싸우다가 죽겠다고 요구했다. 그는 자신에게 기관총을 주면 집법대의 감독하에 적진에 돌격하다가 죽겠다고 했다. 하지만 고급군관이 그런 일을 범하여 영향이 나빴기때문에 모택동은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베듯이 황극공을 참형에 처하지 않을수 없었다. 모택동과 중앙의 지시를 받은 섬감녕변구(陕甘宁边区)고등법원에서는 황극공을 사형에 처한다고 최후판결을 내렸다.     안해를 버리고 처제를 취하려다가 관직을 강직당한 왕근산   1915년에 호북성 황안(지금의 홍안)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한 왕근산은 9살에 소몰이를 했고 13살에 품팔이를 했다. 성격이 강직한 그는 악패지주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홍군이 황안을 점령했을 때 15살밖에 안된 왕근산은 홍군에 참가했다. 그는 반장으로부터 제2야건군 제3병퇀 부사령원 겸 12군 군장과 정치위원으로 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후 그는 천동군구(川东军区) 사령원, 지원군제3병퇀 부사령원, 산동군구 부사령원, 사령원대릴, 북경군구 부사령원,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 부부장을 력임했다. 그는 1955년에 중장계급과 1급8.1훈장, 1급독립자유훈장, 1급해방훈장을 수여받았다. 팔로군 129사 부퇀장직에 임명되였을 때 부상당한 왕근산은 팔로군병원에 실려갔다. 당시 팔로군병원에는 “병원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간호원이 있었다. 그 간호원의 이름은 한수암이였다. 한수암의 살뜰한 간호덕분에 왕근산은 빨리 건강을 찾았다. 그렇게 알게 된 그들은 서로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그후 왕근산과 함께 입원했던 진석련의 중매로 왕근산은 한수암과 결혼하여 선후로 자녀 여덟을 보았다. 하지만 왕근산은 이미 새 중국이 성립된 초기부터 녀대학생인 자신의 처제를 사랑했던 왕근산은 안해를 버리고 처제와 재혼하려고 했다. 왕근산의 안해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당중앙과 모택동에게 편지를 써보냈다. 이 일은 당중앙과 모택동의 고도로 되는 중시를 받았다. 먼저 왕근산의 로상급 등소평을 파견하여 담화하게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후 주은래가 직접 찾아가도 마찬가지였다. 왕근산의 부하들도 찾아와서 가정을 지키라고 권고했다. 마지막에 모택동은 왕근산의 처리문제를 류소기에게 맡겼다. 결과 왕근산은 당적이 제명되고 강직을 당하여 중장으로부터 대좌로 떨어졌고 북경군구 부사령원 겸 공안부 부부장으로부터 하남성의 한 농장의 부농장장으로 떨어졌다. 왕근산은 1978년 5월 10일에 병으로 남경에서 사망되였다. 왕근산은 텔레비죤련속극 《량검(亮剑)》의 주인공 리운룡의 원형으로서 중국인민해방군의 저명한 장군이다.      
82    야래향의 전설 리향란의 파란만장한 인생드라마 댓글:  조회:7062  추천:1  2014-10-26
야래향의 전설 리향란의 파란만장한 인생드라마   (번역)     리향란(李香兰)의 본명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이다. 리향란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는 바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던 위만주국시기였다. 리향란은 조국인 일본과 고향인 중국사이에서 운명의 희롱을 받으면서 청춘세월을 고뇌속에서 보냈다. 야마구치 요시코의 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한학(汉学)을 좋아했고 중국문화를 흠모했기때문에 1906년에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왔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1920년 2월 12일에 중국 료녕성 봉천(지금의 심양)에서 출생했다. 1932년에 야마구치 요시코의 아버지 야마구치 후미오(山口文雄)는 평정산(平顶山)사건에 련루되여 적과 내통했다는 죄명으로 구류되였다. 그후 야마구치 요시코일가는 심양으로 이사갔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13살때 아버지의 친구이며 심양은행총재인 친일파 리제춘을 알게 되여 그의 양딸로 되였다. 그때로부터 그녀는 양아버지의 성을 따라 리향란이란 듣기 좋은 중국이름을 가지게 되였다. 1934년 그녀는 반숙화(潘淑华)라는 이름으로 북평의 익교녀자중학교에 입학해 1937년에 그곳을 졸업했다. 동북을 침범하고 부의를 부축하여 위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가상을 보여주기 위해 1937년에 특별히 “만주영화촬영소”를 세웠다.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했기때문에 봉천방송국의 신만주가곡의 가수로 등용된 리향란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8년에는 만주국의 국책영화사, 만주영화진흥협회에서 중국인 전속녀배우 리향란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의 주제가도 큰 인기를 끌었기에 리향란은 가수 겸 영화배우로 일본과 만주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중국이름과 유창한 중국어로 인해 일본과 만주에서는 그녀를 중국인 명배우인줄로 여겼다. 그때 리향란은 저명한 간첩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와도 친밀하게 지냈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영화에도 많이 출연한 리향란은 만주진흥협회의 전업녀배우로 출연해 인기를 모았다. 리향란은 만주철도회사에서 자금을 내여 세운 이 영화촬영소에서 초빙한 첫기의 전직배우였다. 1941년 2월 11일에 니혼극장에서 “노래하는 리향란”으로 출연했을 당시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많은 팬들이 몰려들어 니혼극장바깥에도 사람들로 둘러싸였기에 소방차가 출동해 물을 뿌려 군중을 해산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1943년에는 아편전쟁에서 활약한 중국의 영웅 림측서를 묘사한 장편력사영화인 《만세류방(万世流芳)》에 참가한 그녀는 림측서의 제자인 심달년의 련인으로 녀주역을 맡았다. 전중국에서 이 영화가 개봉되자 극중 그녀가 부른 주제가인 매당가(卖糖歌)와 계연가(戒烟歌)는 중국영화사상 가장 큰 인기를 끌어 리향란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했다. 《만세류방》으로 인기를 얻은 그녀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려 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밝히지 못했다. 리향란이 주역을 맡은 첫부의 영화는 《밀월급행렬차(蜜月快车)》였다. 이 영화를 찍고 그녀는 “일본어를 아는 중국소녀배우”로 소문났다. 그후 그녀는 《지나의 밤(支那之夜)》, 《백란의 노래(白兰之歌)》 등 영화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되여 일본인을 꿈꾸는 중국인 녀성역을 맡았다. 이것은 그녀의 인기를 선전에 리용한 일본군부의 음모였다. 나중에 그녀는 “당시 나는 열몇살밖에 안된 소녀여서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역을 맡았다”고 말하면서 이 영화에 출연한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리향란은 일본 봉천방송국의 새 프로 “만주신가곡”에서 《어가녀(渔家女)》, 《소군원(昭君怨)》, 《맹강녀(孟姜女)》 등 중국가곡을 불렀다. 그녀는 《야래향(夜来香)》을 불러 명성을 크게 떨쳤다. 명가수 리향란은 이렇게 탄생되였다. 그녀는 명가수로부터 저명한 영화배우로 인기몰이를 하면서 연예계의 “슈퍼거성(超级巨星)”으로 높이 떠올랐다. 리향란은 크게 이름을 날린후에도 계속 일본군을 선전하거나 일본침략전쟁을 미화한 영화에서 주역을 맡았다. 나중에 리향란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전쟁년대에 생존을 위해 나는 결사적으로 성악과 연기를 배웠다”고 말했다. 그녀는 군국주의를 위해 선전하고 중국인을 멸시한 영화를 찍은것에 대해 매우 큰 자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리향란”이란 이름때문에 그녀를 중국인으로 오인했기에 일본군을 위해 영화를 찍는 그녀를 더욱 미워했다. 그녀는 중압에 견디지 못해 1944년에 “만주영화촬영소”에서 사직하고 상해에 거주했다. 1945년에 일본이 무조건 투항하고 위만주국이 멸망되자 전국에서 친일파 한간을 토벌하는 행동이 시작되였다. 국민당에게 매국노로 체포된 리향란은 군사법정에서 “한간죄”혐의로 심문을 받게 되였다. 그녀는 중국인으로 여겨져 상해경마장에서 총살될 운명이였다. 그러나 봉천시절의 친구가 야마구치가문의 일본호적을 제출하고 그녀가 일본인이라는것을 증명했기에 한간죄는 적용되지 않고 국외추방을 선고받았다. 재판당시 재판관은 그녀가 일본국적이라는것을 리유로 무죄를 선고했지만 그녀가 《지나의 밤》에 출연해 중국인을 일본인에게 굽실거리게 한 대목은 도의적으로 용서받을수 없는 죄라고 말했다. 그러자 요시코는 젊었을 적에 철이 없어 한짓이니 용서해달라고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1946년 2월 28일에 리향란은 평범한 가정주부차림으로 화장기없이 평복을 입고 귀국선에 올라탔지만 중국정부의 출국관리가 그녀를 알아보았기에 다시 감옥에 들어갔다. 하지만 10일후 오해가 풀려 3월에 다시 귀국선을 탄 리향란은 다시 투옥될가봐 선박화장실에 몸을 숨겼다. 그러다가 배가 항구를 출발하자 바깥으로 나왔는데 그때 라지오에서 그녀가 부른 “야래향(夜来香)”이 흘러나왔다. 일본으로 귀국한 리향란은 1947년에 본명인 야마구치 요시코로 일본영화계에서 활약했다. 주연작으론 1950년에 제작된 《황혼의 탈주》가 대표적이다. 1950년대에 그녀는 미국의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百老汇)에 들어가 선후로 적지 않은 무대극과 영화에 출연하여 거성이 의연히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시기에 뉴욕에서 일본계 미국인이며 저명한 조각가였던 이사무 노구찌(野口勇)와 결혼했지만 1955년에 리혼했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향항에서 영화 《금병매(金甁梅)》, 《신비한 미인(神秘美人)》, 《하루밤 풍류(一夜風流)》에서 주연으로 연기한 그녀는 중국이름인 리향란으로 다시 부활했다. 그녀는 향항의 100대 명판공사에서 10곡의 영화주제가를 불러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1958년에 일본으로 돌아간 그녀는 외교관인 오타카 히로시(大鹰弘)와 재혼했다. 그후 남편의 성을 따라 “오타카 요시코(大鹰淑子)”라고 이름을 고쳤다. 후에 그녀는 연예계에서 은퇴하고 전문 남편을 내조하는 외교관의 부인으로 살았다. 오타카 히로시는 2001년 4월에 73세로 사망되였다. 1969년에 50세가 눈앞인 그녀는 오래동안 마음속에 품었던 기자꿈을 실현하게 되였다. 텔레비죤방송국프로의 사회자로 된 그녀는 중동, 남아프리카 등지를 다니면서 아라파트, 만델라 등 풍운인물을 취재하기도 했다. 1974년에 당시의 수상이였던 다나까 가꾸에이(田中角荣)의 요청으로 자유민주당선거에 참가한 그녀는 처음으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였고 그후 1980년과 1986년에 재당선되였다. 그녀는 환경정치차관, 오끼나와 참의원 및 북방령토문제를 둘러 싼 특별위원회 고문직을 맡았다. 1992년에 정계에서 은퇴했는데 1993년 11월 3일에 2등보관훈장을 수여받았다. 퇴직후 그녀는 줄곧 “아시아녀성기금회” 부리사장직을 맡았다. 그녀는 이 직무를 리용하여 일본정부에 전쟁피해자 및 당년의 위안부들에게 사과하고 손해배상을 하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1990년대에 고래희의 나이로 일본우익세력의 압력을 무릅쓰고 북경대학, 남경대학 등 중국의 대학을 방문한 리향란은 “력사견증인”의 신분으로 광대한 학자들에게 “나는 ‘9.18사변’, ‘로구교사변을 겪었으며 ‘평정산사건’의 처참한 정경을 목격했습니다”고 말했다. 그녀는 《중국에서의 나날—리향란: 나의 전반생》이란 자서전을 써냈다. 연예계의 전설인 그녀는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81    장개석이 리종인을 암살하려고 한 내막 댓글:  조회:6293  추천:3  2014-10-18
장개석이 리종인을 암살하려고 한 내막   (번역)     1948년 11월 2일에 동북해방군은 료심전역에서 동북국민당군 47만여명을 섬멸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해방군의 사상자수는 6만 9000여명밖에 안되였다. 며칠후 국민당중앙정치위원회 비서장인 진포뢰(陈布雷)가 자살했다. 국민당의 제1문필가로 불리우는 진포뢰는 장개석의 모사였다. 장개석은 료심전역에서 참패당하고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진포뢰가 사망되자 주먹을 불끈 쥐고 탄식했다. 게다가 리종인(李宗仁)의 계계(桂系)세력이 점점 커지고있었다. 장개석은 재삼 생각하던끝에 가장 큰 장애인 리종인을 제거해버려리고 마음먹었다. 비록 리종인은 20여년을 금란지교(金兰之交)로 지내오던 절친한 사이였지만 장개석은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사정없이 제거해버릴 각오가 되여있었다. 얼마 안되여 국민당 국방부 보밀국 운남정보소 소장 심취는 보밀국 국장 모인봉이 보내온 긴급전보를 받았다. 즉시 남경에 와서 새로운 임무를 접수하라는 명령이였다. 심취가 남경에 도착한 그날 오후에 모인봉은 초대소에서 그에게 리종인을 암살하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다음 모인봉은 심취를 데리고 남경중앙군관학교에 있는 장개석의 저택으로 갔다. 장개석은 두 사람에게 임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말하고나서 비밀을 절대 밖에 루설해서는 안되며 행동을 시작하면 꼭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장개석은 왜서 리종인을 제거하려고 했는가? 원래 장개석과 계계(桂系)는 합쳤다 헤여졌다 하면서 여러가지 모순이 서로 겹겹하게 얽혀있었다. 1927년에 장개석이 남경정부를 건립한후 독제를 실시하면서 자기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는 바람에 다방면의 불만을 일으켰다. 그때로부터 장개석과 계계의 관계는 날따라 악화되였다. 당시 계계군은 남경사방의 세력을 통제하고있었다. 백숭희(白崇禧)는 공개적으로 장개석에게 대들면서 장개석이 하달한 무한작전명령을 거절했다. 장개석은 다시 일어선후 계계의 대부분 군사력량을 와해시켰다. 그후에도 장개석과 계계의 다툼은 끊임없이 계속 되였다. 계계는 광서일대에서 세력을 키우면서 다시 일어설 기회를 노렸다. 1930년에 풍옥상(冯玉祥)과 염석산(阎锡山)이 련합하여 장개석을 반대하자 계계도 풍옥상, 염석산과 합작하여 장개석을 반대했다. 하지만 후에 장학량이 봉계(奉系)군을 거느리고 와서 장개석을 돕는 바람에 성세호대하던 반장개석련맹은 실패하고 말았다. 1936년 6월에 광동에 둥지를 틀고있던 월계(粤系)군의 대표 진제당(陈济棠)은 장개석이 항일하지 않는다는 명의를 빌어 계계와 련합하여 장개석을 반대했다. 1937년에 전국에서 일치하게 항일해야 된다는 형세에 따라 계계는 장계석의 중앙군에 귀의했다. 1948년 3월에 위기를 맞은 국민당은 제2기국민대표대회를 열고 민주헌정(宪政)을 실시하기로 함과 아울러 헌법규정에 따라 대통령을 선거하고 대통령제를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대통령은 이미 장개석으로 정해놓았기에 대통령선거는 형식뿐이였다. 장개석은 “부대통령후보는 국민당중앙에서 지명한다”고 규정했다. 리종인은 중국주재 미국대사 스튜어트(司徒雷登)의 지지하에 부대통령선거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리종인이 부대통령선거에 참가하는데 대해 장개석은 처음에 태도가 애매했다. 리종인은 장개석이 동의했다고 오해하고 선거사무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런데 장개석은 갑자기 손과(孙科)를 부대통령후보로 지명했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국민당의 중요인물을 내세워 리종인이 선거를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리종인은 포기할수 없다고 강경하게 태도를 표시했다. 그러자 장개석은 직접 리종인을 찾아가서 선거를 포기하라고 말했다. 리종인이 그럴수 없다고 하자 장개석은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지하지 않으면 당신은 당선될수 없소. 그러니 주동적으로 포기하는게 현명한 선택이 될거네.” “그야 두고봐야 알지요. 제가 꼭 당선될겁니다!” 리종인은 강경한 어조로 대답했다. 장개석은 유명한 독재자여서 부하가 자기의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것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그런데 리종인은 장개석의 앞에서 언성을 높였을뿐만아니라 감히 그의 뜻을 어기기까지 했던것이다. 결국 리종인은 선거에서 4차의 투표를 통해 손과를 이기고 부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리종인이 당당하게 장개석과 맞설수 있은것은 미국의 지지가 있었기때문이다. 장개석의 반동통치가 곧 붕괴되려고 하는것을 본 미국은 중국이란 식민지를 잃지 않기 위해 새로운 괴뢰를 내세워 인심을 잃은 장개석을 대신하게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당시에 장강이남에서 의연히 비교적 큰 실력을 유지하고있는 계계를 선택했다. 미국은 계계수령 리종인을 지지하여 부대통령에 선거되게 한후 필요시에 장개석의 후계자로 되게 하려고 했던것이다. 계계가 기세가 등등하여 압력을 가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정치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리종인을 제거하려고 결정했다. 장개석이 직접 나서서 심취를 불러 암살임무를 포치한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리종인을 이가 갈리도록 미워했는가를 알수 있다. 장개석의 명령을 받은 특별행동소조에서는 리종인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주밀하게 세웠다. 당시 계계군의 일부분이 안휘에 있었다. 특별행동소조에서는 광화문외공항부근에 잡화점을 차려놓고 특무를 파견하여 감시하게 하면서 리종인이 비행기를 타고 남경을 떠날 경우 모인봉에게 즉시 보고하도록 했다. 그러면 모인봉은 준비해놓고있던 전투기로 공중에서 리종인의 비행기를 격추한후 비행기사고로 위장하기로 계획했다. 리종인 등이 기차를 타고가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특별행동소조에서는 강남역부근에 작은 판자집을 사놓고 특무를 파견하여 담배가게를 차려놓고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그외 항주로 통하는 탕산부근의 도로옆에 음식점을 차려놓고 도로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하게 했다. 특별행동소조에서는 또 리종인의 저택 맞은쪽에 작은 술집을 차려놓고 리종인의 일거일동을 감시했다. 그리고 모인봉은 리종인이 남경을 떠나려는 기미가 보이면 쫓으면서 도중에 저격할수 있도록 속도가 가장 빠른 차량 두대를 특별행동소조에 보내주었다. 장개석은 남경에서 손을 쓰게 되면 꼭 자신의 최후결정을 기다려야 하지만 남경이외의 지방에서 손을 쓸 경우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사격하라고 특별행동소조에 지시했다. 리종인은 비록 반대분자를 대하는 장개석의 음험한 수단에 대해 잘 알고있었지만 미국이 뒤에서 지지해주기에 장개석이 감히 자신에 대해 경거망동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개석의 본성에 대해 잘 알고있는 계계의 다른 요원들은 장개석의 음모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챘다. 12월 24일에 황소횡(黄少竑)은 상해에 가서 성탄절을 쇤다는 핑게를 대고 남경을 떠났다. 그는 떠나갈 때 정사원(程思远)을 보고 “내가 알건대 장개석과 계계의 관계는 특별히 긴장해지고있는 모양입니다. 만약 두률명(杜聿明)이 거느린 부대가 포위망을 뚫고 위험에서 벗어난다면 장개석은 정치위기를 맞게 될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덕공(德公—리종인을 가리킴)의 안전이 위험하게 될수 있습니다. 덕공에게 조심하라고 알려주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그 당시 정사원은 장개석이 그런 음모를 꾸미고있지 않을것이라고 여겼다. 1949년 1월에 해방군은 회해전역에서 장개석의 정예부대를 전부 소멸했다. 그러나 아직도 큰 세력을 가지고있는 리종인은 이 기회를 틈타 장개석에게 은퇴를 강요했다. 이때문에 특별행동소조는 가장 긴장한 단계에 진입했다. 그때 장개석은 잠시 은퇴하고 리종인에게 상태수습을 맡길것인지 아니면 리종인을 암살한후 자신이 계속 자리를 지킬것인지를 줄곧 고려하고있었다. 모인봉은 날마다 심취를 불러 장개석이 명령만 내리면 곧 손을 쓸수 있도록 만단의 준비를 하고있으라고 명령했다. 당시 심취와 진경천, 왕한문은 모두 독을 바른 탄알을 재운 두 자루의 권총을 준비하고있었다. 이런 탄알이 몸의 어떤 부위에 명중되든 상대는 혈액중독으로 사망될수 있었다. 오덕후도 자신이 세운 낡은 서점에서 암살행동을 엄호하기 위해 톰슨기관총(汤姆逊机枪)과 작탄을 준비하고 대기하고있었다. 만약 리종인이 외출하지 않을 경우에 암살명령이 내리면 그들은 리종인의 저택에 진입하여 저격하려고 계획했다. 만에 하나의 실수도 없도록 하기 위해 모인봉은 남경전등회사에서 일하는 특무 2명을 암살행동에 협조하도록 배치했다. 이 두 특무는 변압기를 수리한다는 구실을 대고 담장밖의 변압기우에 서서 가방에 휴대한 총으로 리종인의 침실, 주방 등을 향해 사격하고 담장안으로 진입하여 저격할 준비를 갖추고있었다. 1월 하순에 시국이 더욱 위급해지자 장개석은 내외압력을 이기지 못해 리종인에게 대통령대리직을 맡겨 국면을 지탱하게 하고 자신은 은퇴(隐退)하기로 결정했다. 장개석은 잠시 암살을 중지하라고 지시한후 자신은 옛집 봉화(奉化)에 은거하면서 막후에서 지휘했다. 1월 20일에 모인봉(毛人凤)은 심취(沈醉)를 불러서 특별행동소조의 암살행동을 결속지으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리종인을 암살하려던 음모는 막을 내리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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