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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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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장개석의 목숨을 구해준 진갱 댓글:  조회:7318  추천:1  2014-10-11
장개석의 목숨을 구해준 진갱   (번역)     본명이 진서강(陈庶康)인 진갱(陈赓)은 1903년 2월 27일에 호남성 상향시 룡동향 천호촌에서 출생했다. 중화인민공화국 10대 원수 다음으로 가는 10대 대장중의 한분인 진갱은 1961년 3월 16일에 58세의 나이로 상해에서 사망되였다. 황포군관학교 제1기 졸업생인 진갱은 고향친구 장선운(蒋先云), 하충한(贺衷寒)과 함께 “황포3걸”로 불리웠는데 장개석은 이 셋에 대해 인재라고 매우 높게 평가했다. 졸업후 재능이 뛰여난 진갱은 학교에 남아 선후로 제2기 입학생들의 련장, 제3기 입학생들의 부대장직을 맡았다. 1925년 10월에 국민혁명군인이 제2차로 군벌 진형명을 동정할 때 황포군관학교 교장 겸 국민혁명군 제1군 군장이였던 장개석은 총지휘를 맡았다. 그 시기에 22살밖에 안된 진갱은 제1군 제2사 제4퇀에서 련장직을 맡았다. 그번 전투에서 진갱이 용감하게 싸운것을 본 장개석은 그의 련을 전부 자신의 총지휘부로 전이시키고 진갱을 자신의 경호원으로 두었다. 그번 전쟁에서 제3사 사장의 착오적인 지휘로 화양에서 반란군 림호의 주력부대에 포위되였다. 총지휘인 장개석은 전황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여 직접 화양전선으로 달려갔다. 그때 사장 담서경은 아무런 방법도 없어 쩔쩔 매고있었다. 망원경으로 그 정황을 지켜도던 장개석은 급하여 “진갱은? 진갱은 어디 있어?”하고 소리쳤다. “전 여기에 있습니다. 교장님!” 진갱이 부근의 방공호에서 뛰쳐나오며 장개석의 앞으로 다가갔다. “자네가 즉시 달려가 담서경에게 철퇴해서는 안된다는 나의 명령을 전달하게!” 진갱은 번개같이 달려가 담서경에게 장개석의 명령을 전달했다. 그런데 담서경은 이미 부대를 명령할 능력이 없었다. 수하병사들은 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진갱은 장개석의 명령을 전달한후 신속히 총지휘부로 돌아왔다. 망원경으로 모든 정황을 살펴본 장개석은 진갱을 보고 “혁명군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난 자네에게 제3사의 대리사장직을 맡아서 즉시 적들을 물리칠것을 명령하네”하고 말했다. 군령을 받은 진갱은 총을 들고 산우로 올라가서 총을 쏘며 “후퇴하지 말고 나의 지휘를 들엇”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명령을 듣는 자가 없었다. 진갱은 하는수없이 지휘부로 되돌아 상황을 회보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혁명군인은 후회하지 않아”하면서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림호의 부대가 가까이 달려오자 진갱은 장개석을 끌고 총탄을 무릅쓰고 후퇴했다. 어렵게 산에서 내려왔는데도 장개석은 바위우에 앉아서 “난 도망치지 않겠어. 내가 무슨 낯으로 돌아가겠는가? 힘들게 혜주를 점령했는데 여기서 망할줄은 몰랐어”하고 말했다. 림호의 부대가 추격해오는데도 장개석은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진갱은 급하여 장개석을 업고 퇴로를 뚫고 화살같이 달려갔다. 그들은 황혼무렵에야 림호군의 추격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위급한 시각에 장개석을 구해준 진갱의 이야기는 날개라도 돋힌듯 온 국민혁명군에게 알려졌다. 당시 황폭군관학교의 동학들은 “황포3걸중에 장선운의 필재와 하충한의 말재주도 진갱의 다리만 못하네”라고 탄복했다. 그후 진갱은 장개석의 수종참모로 되여 장개석의 사무실을 마음대로 출입할수 있었다. 처음에 진갱은 “보고(报告)”하고 들어갔다. 그런데 장개석은 “이후부터는 직접 들어오게. 자네마저 믿지 못하면 내가 누굴 믿겠는가?”하고 말했다. 이 사실로부터 장개석이 진갱을 얼마나 믿었는지 알수 있다. 그런데 장개석은 황포군관학교중의 공산당명단에 진갱의 이름이 있는것을 발견하고 비탄에 빠져 진경의 이름밑에 “이 사람에게 부대를 맡기지 말라”고 썼다. 장개석의 신변에 오래 남을수 없게 되였다는것을 알게 된 진갱은 어머니의 병을 핑게로 휴가를 맡았다. 장개석은 진갱의 속셈을 알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생각해서 휴가를 주었을뿐만아니라 배표와 로비를 대주고 “진갱을 중앙군사정치학교의 중좌 대장으로 임명한다”는 위임장까지 보내주었다. 그러나 진갱은 장개석의 “호의”를 거절하고 광명의 길을 찾아갔다. 1927년 4월에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한후 진갱은 즉시 장개석의 수하에서 벗어난다고 선포한후 8.1남창봉기에 참석했다. 그 일을 알게 된 장개석은 여러번이나 측근들을 보고 “진갱은 인재야. 그는 나의 목숨을 구해주었기에 난 그를 중하게 쓰려고 했네. 그런데 그는 어리석게도 공산당을 따라갔어”라고 말했다. 1933년 3월에 진갱은 다리를 상하여 비밀리에 상해에 호송되여 치료를 받게 되였다. 그런데 그는 반역자 진련생의 밀고로 불행하게 국민당에 체포되였다. 그해 4월 1일에 그는 남경에 압송되여 중앙헌병사령부에 감금되였다. 당시 남창에서 중앙쏘베트구역의 포위토벌을 지휘하던 장개석은 진갱을 붙잡았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장개석은 진갱을 남창으로 압송해오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전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적이 있는 진갱을 직접 만나서 “은혜에 보답”하는척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진갱을 만난 장개석은 실망하면서도 동정하는 말투로 말했다. “자넨 나의 훌륭한 학생이였어. 내가 교장직을 맡은 황포군관학교의 걸출한 학생이였지. 자네가 비록 정치상에서 착오를 범했지만 교장은 언제나 학생을 애호하기때문에 용서해줄수 있어.” 장개석의 말에 진갱은 랭소했다. “난 당신이 용서해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 맘대로 처리하십시오!” 장개석은 진갱을 자기편사람으로 끌어오려던 일이 허사로 되자 크게 실망했다. 이렇게 되여 진갱은 다시 남경으로 압송되여갔다. 그 시기에 중공당조직과 송경령은 진갱을 구원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 때문에 국민당은 진갱을 살해하지 못했다. 장개석도 배은망덕이란 오명을 쓸수 없었다. 국민당은 진갱을 계속 감화시켜 자기편으로 끌어오기 위해 진갱을 어느 한 저택에 전이시켜 특수대우를 향수하게 했다. 비록 위병들이 지키고있었지만 진갱은 “자유롭게” 거리를 다닐수 있었다. 이는 진갱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었다. 그는 장계취계하여 국민당에 합작하는척 했다. 그러자 국민당은 진갱에 대한 경계를 점차 늦추었다. 국민당은 어느날밤에 갑자기 진갱이 사라진것을 발견했다. 진갱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 순리롭게 남경에서 탈출했던것이다. 4개월동안의 철창생활을 마치고 그는 다시 당의 품으로 돌아왔다.  
79    장개석과 모인봉을 골려준 리극농 댓글:  조회:7607  추천:1  2014-10-04
장개석과 모인봉을 골려준 리극농   (번역)     새 중국이 성립된후 병사를 거느린 적도 없고 전쟁터에 나간적도 없는 리국농(李克农)은 상장계급을 수여받아 특수한 장군으로 되였다. 모택동은 어느 한번 외빈을 접견할 때 “리극농은 중국의 대특무입니다. 하지만 우리 공산당의 특무이죠”라고 말했다. 1962년에 리국농은 병으로 사망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미국정보부문에서는 사흘동안 휴식하면서 강적이 사라진것을 경축했다. 모택동의 찬탄을 받고 적들을 벌벌 떨게 한 리극농은 누구인가? 아래에 리극농이 적들과 지혜와 용기를 겨룬 부분적인 력사사실을 소개한다.   장개석의 코를 꿰고 다닌 리극농 항일전쟁이 승리하게 되자 생각밖에도 장개석은 모택동을 중경에 청해 평화담판을 하자고 요구했다. 리극농은 이것은 분명히 평화의 허울을 쓰고 모택동을 암해하려는 음모이며 장개석의 속임수라고 인정했다. 모택동도 리극농의 분석에 일리가 있다고 여기고 잠시 장개석의 요청에 대답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국민당은 연안에 련락소를 세웠는데 국민당특무 주려무와 라백륜이 무전을 책임졌다. 리극농은 오래전부터 그들을 중점적으로 감시하고있었다. 국민당에 대해 잘 알고있는 리극농은 장개석이 전보로 모택동을 청하는 동시에 대립이 꼭 특무들에게 연안방면의 정보를 수집하라고 명령했을것이라고 판단했다. 과연 주려무는 여러번이나 모택동을 만나겠다고 리극농에게 제기했다. 번마다 거절하던 리극농은 모택동에게 주려무와 라백륜을 역리용하는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모택동은 좋은 방법이라고 하면서 1945년 8월 16일에 주려무와 라백륜을 접견하고 자신은 중경으로 갈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련락소로 돌아간 주려무와 라백륜은 급히 중경에 무전을 쳐서 이 소식을 전했다. 그 전보문을 받아본 장개석은 모택동이 중경으로 올 담량이 없다고 단정했다. 이렇게 되면 공산당측에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죄명을 씌울수 있다고 여긴 장개석은 20일과 23일에 련속 모택동을 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모택동은 리극농과 상의한 계책에 따라 장개석에게 회신을 한 동시에 두번 다 주려무와 라백륜을 접견하여 그들의 손으로 중경에 전보를 보내게 했다. 모택동과 리극농의 생각대로 장개석은 모택동이 중경으로 담판하러 오지 못할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8월 24일에 중경 《신화일보》는 공개문장을 실어 장학량과 양호성이 구류당하고 엽정과 료승지가 감방에 갇힌 사실을 증거로 삼아 장개석을 믿을수 없는 사람이라고 폭로했다. 그리고 모택동이 중경회담에 가지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장개석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이리하여 장개석은 인격과 도의에서 모두 극히 피동적인 곤경에 처하게 되였다. 신문은 읽은 장개석은 크게 화가 나서 “냥시피(娘希匹)”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모택동에게 “안전보장”을 주지 못하고 “특무들이 횡행”한다는 헛점을 주지 않기 위해 “모택동이 중경에 오기만 한다면 그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보장하겠다”고 표시했다. 그리고 대립을 불러 “부하들을 엄하게 단속하여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게 하게. 만약 조금이라도 차실을 빚는다면 엄하게 다스릴거야”하고 엄령을 내렸다. 장개석은 또 헌병사령 장진을 불러 “중경치안을 잘 유지하게. 위반하는 자는 먼저 처리하고 후에 보고하게”라고 명령했다. 장개석이 상술한 조치를 댔다는 정보를 장악한 리극농은 이번에는 장개석이 절대로 모택동을 암해하지 못할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즉시 모택동에게 해당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중경담판”에서 피동을 주동으로 바꾸어 장개석의 평화담판의 사기극을 까밝히기 위해 모택동은 반복적인 심사숙고를 거친후 마침내 중경으로 갔다.         장계취계하여 국민당특무를 골려준 리극농 1946년 1월에 미국대통령 트루먼(杜鲁门)이 파견한 “특사”이며 륙군상장인 마셜(马歇尔)의 참여하에 국공쌍방은 협상을 거쳐 《국내군사충돌을 중지할 방법에 관한 협의》를 달성했다. 쌍방의 협의에 따라 북평에 군사협조처집행부를 성립하여 국공쌍방의 군사충돌을 방지하고 쌍방의 정전령집행상황을 감독하게 했다. 당시 중공중앙정보부 부부장이였던 리극농은 중공대표단 비서장의 신분으로 중공대표단과 함께 북평으로 갔다. 리극농은 기요부문과 방송국의 동지들과 함께  취명장청사에 거주했다. 취명장내의 사업일군은 대부분 국민당특들이 맡았다. 중공대표단의 행동은 국민당특무들의 감시와 통제를 받고있었다. 군사협조처의 사업이 시작됨에 따라 중공대표단은 중앙과 각 근거지와의 전신련계를 크게 강화할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특무들의 감시로 무전과 기요사업은 매우 큰 압력을 받게 되였다. 정보사업은 국민당특무들의 중점파괴대상이였고 중국공산당방면의 난제였다. 국민당특무들의 감시에 대해 리극농은 일련의 방지조치를 취했다. 첫째, 무전과 기요과를 취명장의 남쪽방에 집중시키고 전문일군이 지키면서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둘째, 모든 사업일군들이 일률로 자체로 생활을 책임지고 식당의 “복무원”들이 마음대로 청사내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복무원”들이 진입할수 없게 되자 복무원으로 가장한 특무들은 갖은 핑게를 대고 청사내로 들어가려고 시도했다. 리극농은 딱 거절할수 없는 상황이라면 진입을 허락하되 어디를 가다 전문일군이 따라 다니면서 자유행동을 할수 없게 하라고 명령했다. 중공대표단의 준둔지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복무원으로 가장한 특무들은 방안청소, 빨래 등 잡일을 열심히 했다. 그들은 방안에 떨어진 종이나 호주머니안에 넣어둔 종이에서 가치가 있는 정보를 발견할수 있기를 바랐다. 국민당특무들의 그런 잔꾀에 대해 잘 알고있은 리극농은 동지들에게 모르는척 하고 일부러 종이에 아무 수자거나 이름같은것을 써서 호주머니에 넣어두는것으로 특무들을 골려주라고 했다. 그후 여러 사람들이 “특무들이 호주머니의 종이를 가져갔다”고 보고하자 리극농은 “국민당특무들이 그런 방면에 취미가 있다면 좀 어렵게 수자를 써서 그들더러 천천히 연구하라고 하지요. 그들이 할일이 없어서 그러는데 일감을 줘야지요”하고 말했다.   빈틈없는 계책으로 모인봉과 승패를 겨룬 리극농 1949년 12월에 모택동이 처음으로 쏘련을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모인봉은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모택동의 전용렬차가 출발한후 모인봉과 미국고문 브래드(布莱德)는 두분째 “황고둔사건(皇姑屯事件)”을 모방한 두가지 방안을 제정했다. 첫번째 방안은 대륙의 동북에 잠복한 국민당특무조직인 동북지하기술종대에 명령하여 모택동의 전용렬차를 량쪽에서 포위하여 가로막고 장춘 14호철교를 파괴하며 할빈역에 시한폭탄을 가설하는것이다. 두번째 방안은 북경천안문부근의 남지자에 잠복한 “만능잠복대(潜伏台)를 리용하여 기회를 엿보아 행동하는것이다. 그와 동시에 북경중앙사회부의 회의실에서는 리극농이 해당일군들을 소집하여 회의 열고 “만능잠복대”를 찾아내여 붙잡을 문제와 구체적인 방안을 연구했다. 얼마후 홀로 전신업무책임자, 전보업무, 정보, 전보문해석 4가지직무를 맡은 계조상을 붙잡았다. 리극농은 계조상에게 원래의 지법대로 아래와 같은 내용의 전보를 모인봉에게 쳐보내라고 명령했다. “모인봉선생, 당신들이 반복적으로 큰소리치며 자랑하던 ‘만능잠복대’는 이미 우리 손에 들어왔고 소좌 전신책임자 계조상도 우리가 잘 ‘돌보고’있소. 앞으로 당신들이 파견한 특무들은 우리가 잘 돌볼테니 안심하오. 그저 직접 만나서 감사를 드리지 못할뿐이요. 당신에게 전보문을 보내는이는 바로 리극농이요. 당신들은 지금 ‘남에게 얹혀’사니 좋은 날이 오래가지 못할것이요. 당신이 정보국을 거느리고 온다면 나 리극농은 당신의 안전을 보장해줄것이요. 이 전보업무담당일군은 당신의 수하특무 계조상이라는것을 알아두오.” 대북에서 그 전보문을 받아본 모인봉은 깜짝 놀랐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수 없어 두번이나 다시 읽어보았다. 화가 난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한마디 말도 못했다. 늙은 소 콩밭으로 간다고 모인봉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아직 “동북기술종대”라는 왕패가 있었기때문이다. 그는 전보원에게 “리극농아, 어디 기다려봐, 누가 최후의 승자인가를”라는 회답전보문을 쳐보내도록 명령했다. 며칠후의 어느날밤에 국적표시가 없는 비행기가 할빈에서 멀지 않은 산림의 상공에서 낮게 선회하고있었다. 비행기에서는 두명의 특무가 락하산을 타고 뛰여내렸다. 락하산이 땅바닥에 닿자마자 지면에 매복했던 우리측 감시일군들이 그들을 꼼짝달싹못하게 붙잡았다. 그 두명은 동북기술종대의 암살행동을 지도하라고 모인봉이 파견해보낸 특파원이였다. 그들은 “우리는 래일 오전에 할빈 송화강호텔에서 동북기술종대와 접속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국민당보밀국을 대표하여 해당조직원들에게 위임장을 수여하는것으로 반공(反共)에 공로가 있는 조직원들을 고무격려하려고 했습니다”하고 털어놓았다. 이튿날 아침에 송화강호텔의 고급방에서 모인봉이 파견한 특파원 장대평과 우관군은 동북기술종대 사령원 마내와 접속했다. 하지만 마내와 접속한 장대평은 원래의 장대평이 아니라 우리측의 정보원이 가장한 가짜 장대평이였다. 몇마디의 대화가 오간후 동북기술종대 사령원 마내는 170명의 명단을 내놓았다. 이렇게 모인봉의 다른 한장의 “왕패”는 리극농의 손에 들어갔다. 판문점막후에서 기묘하게 지휘하여 미국을 굴복시킨 리극농 중미쌍방이 조선전쟁을 끝내려고 판문점에서 담판을 할 때 모택동은 담판대표로 리극농을 생각했다. 담판대표는 1선, 2선, 3선으로 나뉘였는데 2선에 숨어 모든것을 장악한 리극농은 직접 모택동, 주은래와 김일성의 전보문을 오가게 했다. 우리측의 대표가 상대방의 황당한 관점에 대해 반박할 때 상대방의 대표는 발언을 거절했다. 이렇게 담판은 대치국면에 들어갔고 쌍방은 모두 상대방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담판석의 공기는 굳어졌다. 이는 고도로 긴장한 심리전이였다. 의지력, 인내력, 자제력을 겨루는 무언의 싸움이였다. 1선담판대표 자성문이 회의장소를 떠나 리극농에게 어떻게 하겠는가고 지시해줄것을 요청했다. 이때 묵묵히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리극농은 종이우에 “앉아 기다립시다”고 써서 주었다. 그 종이쪽지는 몰래 중조대표들의 손에 전달되였다. 그제야 조급정서가 가라앉은 대표단 성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부동의 자세로 앉아서 기다렸다. 침묵이 132분간 지속되였다. 미국인들은 더 버틸수 없어 휴전을 선포했다. 무언의 132분은 담판력사에서 침묵이 가장 긴 기록을 창조했다. 중조대표가 회담을 주최할 차례가 돌아왔을 때 리극농은 미국측에서 빈번하게 휴회하는 방책에 대처하여 불의에 허를 찌르는것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쌍방대표가 갓 자리에 앉았을 때 리극농은 즉시 휴회를 선포했다. 그 시간은 25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어찌할바를 몰랐다. 시간을 끄는것과 빨리는것은 담판중의 기교였다. 리극농은 이 두가지의 방법을 절묘하게 운용하였다. 미국인들은 리극농의 담력과 식견, 기민에 대해 감탄해마지 않았다. 정전협정을 체결할 계단에 들어섰을 때 쌍방의 파괴활동을 피면하기 위해 리극농은 절묘한 방법을 제기했다. 즉 쌍방의 사령관이 현장에서 서명하지 말고 쌍방의 수석대표가 서명하기만 하면 즉시 효력을 발생하며 그후 각자가 자신의 사령관에게 보내여 서명을 받은후 원본을 교환하는것이다. 이 방법은 중조량국의 최고지도층의 허락을 받았고 미국측도 이런 교묘한 조약체결형식에 대해 기껍게 접수했다. 이렇게 “조선정전협정”은 순조롭게 체결되였다.  
78    명조 개국황제 주원장 댓글:  조회:7686  추천:1  2014-09-27
명조 개국황제 주원장     미국 워싱톤대학교의 저명한 중국력사학자인 패트리셔 에브리는 “중국 력사상 한 개인이 력사에 큰 영향을 미친 례로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보다 더 두드러진 례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또 청나라의 학자 조익은 “명태조는 성현의 면모, 호걸의 기풍, 도둑의 성품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였다”고 말했다. 1328년에 호주(濠州)의 종리(钟离—지금의 안휘성 봉양현)에서 출생한 주원장은 도적과 같이 먹고 살아야 할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호걸처럼 살 기회를 잡음으로써 출세할수 있었고 마침내 몽골족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시킬수 있었다. 주원장은 본명이 주중팔(朱重八)이였는데 후에 흥종(兴宗)이라고 고쳤다. 소년시절에 주원장은 하루 한끼도 먹기 어려운 생활을 견디다못해 승려가 되기로 하고 황각사라는 절에 들어갔지만 절이라고 끼니가 충분할리 없었다. 두달만에 그는 탁발승이 되여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는데 거지와 다름없는 생활을 4년 남짓이 했다. 하지만 란세란 특별한 절망과 함께 특별한 희망도 주는법이다. 주원장은 25살 때 안휘성에서 봉기한 홍건군 두령 곽자흥(郭子兴)의 수하로 들어갔다. 그후 주원장의 숨은 재능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서 몇년 안되여 곽자흥군의 2인자위치까지 올라갔다. 곽자흥의 양녀인 마씨처녀와 혼인도 치렀는데 그녀는 후일에 지혜롭기로 유명한 마황후로서 주원장의 정치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주원장은 곽자흥이 죽은후 그 아들을 명목상 받들며 실질적인 두목노릇을 하며 세력을 키운 주원장은 1356년에 집경(지금의 남경)을 점령한후 그곳을 “응천부”로 개명하고 본거지로 삼았다. 이로써 주원장은 당시 홍건봉기군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3대세력(장사성, 진우량, 주원장)의 하나로 발돋움했다. 주원장은 원나라에서 천대받으며 묵묵히 학문에만 정진해온 강남의 선비들의 힘을 중시한 덕분에 천하쟁패의 싸움에서 최종적 승리자가 될수 있었다. 송렴, 유기, 장일, 섭침 이 “4대선생”을 비롯한 선비들은 주원장에게 명분을 뚜렷이 내세우고 민심을 잡으라는 조언을 했다. 주원장은 “절대로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라. 백성을 괴롭히는 자는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처단하겠다”는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북방오랑캐의 압제를 물리치고 중화를 회복한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주원장은 “당장 원나라조정과 맞싸울것이 아니라 우선 강남을 평정해야 한다”는 선비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10년이 넘도록 다른 홍건봉기군들의 북벌에는 동참하지 않고 오직 강남에서 세력을 늘이는데만 힘썼다. 그 사이에 원나라는 홍건봉기군을 격파했지만 지칠대로 지쳐서 주원장이 본격적으로 북벌에 나서자 막을 힘이 없었다. 그후 주원장은 진우량을 쳐서 승리를 거두었고 1367년에 강남을 평정하는데 성공했다. 주원장은 얼마후 소명왕 한림아가 죽자(주원장이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마침내 1368에 남경에서 황제의 보좌에 앉고 국호는 대명(大明), 년호는 홍무(洪武)라고 했다. 칭키스칸이 금나라를 격파하고 북경을 점령한지(1215년) 150여년만에 북경이 다시 한족의 땅이 된것이다. “중화의 회복”은 단지 군사적, 정치적인것에 그쳐서는 안된다는것이 명태조가 된 주원장의 신념이였다. 그는 수백년동안 북방민족의 지배가 남긴 사회적, 문화적 영향을 말끔히 청소하려 했다. 그래서 먼저 한족고유의 옷차림과 머리모양을 하도록 했다. 또한 유교의 가르침을 장려하고 과거제를 실시해 사대부들이 다시 관료로서 국가를 경영하도록 했다. 그리고 국가가 나서서 개간과 둔전사업을 적극적으로 벌리고 치수와 관개사업 역시 힘썼다. 이렇게 농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농업을 기반으로 국가를 운영하도록 했으며 상업은 최소한으로만 허용한다는 뜻에서 화페류통을 대부분 금지시키고 대외무역 역시 금지해 “한쪼각의 널빤지조차 바다에 띄우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명태조는 정부조직과 법령 역시 새롭게 바꾸었다. 승상제도를 페지하고 륙부를 황제에게 직속시켰으며 군사행정의 핵심인 대도독부를 다섯으로 나눈 다음 륙부와 마찬가지로 황제에게 직속되도록 해서 문무의 최고통치권을 한손에 거머쥐였다. 지방에는 아들들을 포함한 황족들을 왕으로 봉하여 두루 파견했다. 겉으로는 황족들을 각 행성에 파견했던 원나라와 비슷해 보였지만 명나라의 분봉왕들은 원나라때와는 달리 독자적인 행정권, 조세징수권을 일체 갖지 못했고 단지 그 지역의 군사지휘권만을 가졌다. 말하자면 아직 국가적 통합이 덜 된 변방을 잠시 군사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의미일뿐 사실상 모든 권력은 황제인 명태조에게 집중되여있었다. 명태조가 많은 업적을 이룩하고서도 후대의 평판이 별로 좋지 않은 까닭은 이처럼 독재체제를 구축하고는 그것이 조금이라도 훼손될가봐 두려워 끊임없이 피바람을 일으켰기때문이다. 1380년에 개국공신이던 승상 호유용이 역모를 꾀했다 하여 처형되였다. 명태조는 이를 승상제도페지의 핑게로 삼았는데 문제는 호유용의 역모라는것이 이렇다 할 증거가 전혀없이 고문에 의한 자백만으로 확정되였다는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련루되여 함께 처형된 사람이 무려 1만 5000명에 달했다는것이다. 이어서 1384년에는 역시 개국공신인 리문충이 독살당했고 그 다음해에는 강남평정과 북벌통일의 전쟁에서 둘도 없는 공헌을 했던 로장 서달이 독살되였다. 그리고 1390년에는 리선장 등 1만 5000명이 호유용의 역모에 련루된 혐의를 다시 받아 처형되였고 1393년에는 남옥이 호유용처럼 사실여부가 의심스러운 역모혐의를 받고 2만여명의 련루자들과 함께 처형되였다. 주원장에게 천하제패의 계책을 알려주었던 “4대선생” 역시 좋은 끝장을 보지 못했다. 유기는 락향해 있다가 독살되였고 송렴은 류배지에서 죽었다. 한마디로 명태조는 개국공신을 한사람도 살려두지 않았다. 공신뿐만아니라 조금이라도 권세를 가진 신하는 항상 의심의 대상이 되였다. 명태조는 검교라고 하는 첩보조직을 키워 그런 신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살펴보게 했다. 이처럼 공포와 불신만이 가득한 군신관계는 문제가 있다고 여긴 사람중에는 황태자인 주표(朱标)도 있었다. 그가 신하들을 의심하고 죽이는 일을 그만두라고 청하자 명태조는 가시가 잔뜩 박힌 막대기를 가져오게 해서 주표에게 집어보라고 했다. 주표가 “가시때문에 잡을수 없습니다”고 하자 명태조는 “그러면 내가 너를 위해 가시를 말끔히 잘라내주겠다. 지금 내가 하고있는 일이 바로 그런것이니라. 어째서 그뜻을 몰라주느냐?”라고 말했다. 사실 애써 세운 왕조가 강력한 공신들때문에 힘을 잃고 결국 멸망한 례는 중국력사에 흔했다. 명태조는 자신의 숙청에 왕조의 기반을 다진다는 정치적 의의를 찾고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신뿐만아니라 그 관계자들까지 수만명씩 살해하는 일은 아무래도 정당화될수 없었을것이다. 아울러 명태조는 “문자옥(文字狱)”이라는것까지 일으켰다. 누가 자신을 비웃는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고 불우했던 옛시절을 부끄러워했던 그는 상소문이나 공문서 등에 “광(光)”, “승(僧)”, “적(贼)”자가 들어가 있으면 그것을 쓴 사람을 가차없이 처형했다. “광”은 승려였던 자신의 깎은 머리를 련상시켰고 “승”은 승려를, “적”은 도적을 뜻하기때문이라는것이였다. 이런 터무니없는 “문자옥”은 갈수록 심해져서 “적(贼)”과 발음이 비슷한“칙(则)”, “도(盜)”와 발음이 같은“도(道)”, “승(僧)”과 발음이 같은 “생(生)”자 등이 계속 금기어가 되였을뿐만아니라 조금만 황제를 거스르는듯한 글을 쓰면 모두 처형장으로 보냈다. 법률자체도 엄해져서 그가 집대성해 반포한 대명률(大明律)은 과거의 법률에 비해 한층 엄격했으며 잔인한 처형방식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스물 여섯명의 아들과 열여덟명의 딸을 둔 명태조는 30년동안의 치세를 끝내고 1398년에 70세로 숨을 거두었다. 죽기직전에 그는 “짐은 그동안 모든것을 오직 혼자서 담당해왔다. 돌이켜보면 이는 너무 괴로운 일이니 다음대를 이을 사람은 좀 더 신하를 믿고 일해야 할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분명 북방민족의 천하를 중화의 천하로 바꿔놓았다. 그러나 애써 과거제를 부활시켜 지식인을 우대하는 세상을 만들었지만 그 지식인들은 형식화된 시험제도와 글 한글자를 잘못쓰면 목숨을 잃는 정치때문에 마음껏 기를 펴지 못하고 기회주의적인 소인배가 되여갔다. 그가 만든 세상에서 중국인들은 몽골인들에게 날때부터 차별을 받지 않고 자유로울수 있었지만 동시에 도처에서 사슬에 묶여있어야 했다.    
77    개국원수 라영환과 림월금의 전기적 사랑이야기 댓글:  조회:6626  추천:1  2014-09-21
개국원수 라영환과 림월금의 전기적 사랑이야기   (번역)     중화인민공화국의 개국원수인 라영환은 1902년 11월 26일에 호남성 형산현에서 태여났다. 공화국의 건립을 위해 라영환은 사선을 넘나들며 큰 공을 세웠다. 전기적인 색채를 띤 그와 림월금의 사랑이야기는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 전중국에 광범하게 전해졌다. 림월금은 1930년 1월에 중국로농홍군에 참가하여 홍4방면군 정치부선전대 선전원으로 되였다. 그녀는 1935년 1월에 홍4방면군주력부대를 따라 2만 5000리장정에 참가했고 1937년에 라영환과 결혼했다. 1937년 1월에 중공중앙과 홍군총부는 연안으로 들어갔는데 라영환도 당중앙을 따라 연안에 가서 후방정치부 주임직을 맡았다. 그해 음력설에 라영환의 전우 허건국은 연안당학교에서 공부하고있는 류계란과 결혼했다. 결혼한 이틑날에 허건국과 류계란은 35살이 되도록 홀아비로 있는 라영환에게 녀자를 소개해주자고 상의했다. 류계란은 당학교에서 함께 공부하고있는 림월금을 라영환에게 소개해주었다. 개인혼인문제에 대해 고려하지 않던 라영환은 림월금과 몇번 만난후 자신이 그 녀인을 사랑하고있다는것을 발견했다. 당시 림월금이 공부하고있던 중앙당학교는 연안 소변구의 한 교회당에 자리잡고있었는데 라영환이 사업하고있는 홍군후방정치부와 연하(延河)를 사이에 두고있었다. 평소에 연하강은 10메터너비밖에 안되여 걸어서 건널수 있었지만 봄철에 들어서면 얼음이 녹아 물이 붓기에 도보로 건널수 없었다. 이렇게 연하는 라영환과 림월금이 만나는데 천연적인 장애로 되였다. 어떤 사람은 롱담으로 연하는 은하수이고 라영환과 림월금은 견우직녀라고 말했다. 견우와 직녀는 서로 만나러 갈 때 까치다리를 리용하였지만 연하에는 까치다리가 없었을뿐만아니라 나무다리도 없었다. 25군 6퇀의 정위 왕평은 연하를 거너는데 사용하라고 백마 두필을 골라 라영환에게 보내주었다. 그후 라영환은 저녁을 먹은후 말을 타고 강을 건너 림월금을 만나러 갔다. 라영환은 경호원과 마부도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어떤 사람은 저녁후 라영환이 보이지 않으면 경호원에게 라주임이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다. 그러면 경호원은 웃으면서 “말타기련습을 하러 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라주임은 정강산에서 내려온 사람인데 말을 탈줄을 모르다니?”라고 어리둥절해했다. 림월금은 한필의 백마가 연하를 건너오는것이 보이면 살그머니 학교문을 나섰다. 그들은 당학교밖의 작은 수림속과 보탑산아래, 연하강뚝을 거닐면서 사랑을 속삭이군 했다. 라영환과 림월금은 모두 초혼이 아니였지만 혼인문제에 있어서 서로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영환이 17살이 되던 음력설이였다. 라영환의 아버지 라국리는 음력설을 쇠는 기회에 라영환을 두살 년상인 안월아와 결혼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 시기에 라영환은 고향과 멀리 떨어진 장사협균중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한지 2년이 되였다. 그 중학교는 “서양학당”이라고 불리우는 신식학교였다. 라영환은 그 학교에서 민주와 자유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가 안월아와 결혼해야 된다고 통지했을 때 그는 부모가 도맡아하는 봉건식혼사를 반대했다. 그러나 라국리는 아들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부자관계를 끊겠다고 위협했다. 17살밖에 안된 라영환은 가정과 결렬할 결심을 내릴수 없었다. 그의 공부비용은 모두 아버지가 대주었기에 라영환은 마음에도 없는 “신랑”으로 되는수박에 없었다. 민간에는 결혼하여 사흘째 되는 날에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처가집으로 가는 풍속이 있었다. 라영환은 이 기회를 타서 중도에 도주하면서 안월아에게 “미안하지만 난 다른 방법이 없소. 용서하오”라는 말을 남겼다. 결혼 3일만에 도망친 라영환은 장사에 가서 계속 공부했다. 그는 다음학기의 학비와 생활비를 얻기 위해 방학때만 집에 돌아갔다. 1927년에 4.12반혁명정변이 발생된후 그는 고향을 떠나 혁명에 참가했다. 림월금의 전남편은 사천에서 홍군에 참가한 그녀의 직속상급이였다. 두 사람은 장정길에서 서로 알게 되여 결혼했다. 장정이 결속된후 림월금은 연안의 중앙당학교에서 공부했고 그녀의 전남편은 2만 1000명의 서로군 전사들과 함께 황하를 건너 고군분투하는 간고한 로정에 나섰다. 어느날에 림월금의 중매를 섰던 강극청이 찾아와 “서로군(西路军)이 적들에게 포위되여 지금 당중앙과 련계가 중단되였소. 진정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하오”라고 불길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소식을 들은 림월금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애써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그녀는 서로군이 꼭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올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2만여명의 서로군이 전멸되였다는 비보가 전해왔다.  그속에 포함된 그녀의 전남편도 적들에게 살해되였을것은 뻔했다. 비보를 접한 림월금은 장승처럼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그후 그녀는 고통을 잊으려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상대방의 불행한 과거를 알게 된 라영환과 림월금은 더욱 감정이 깊어졌다. 라영환의 혼사는 중앙의 동의를 거쳐 1937년 5월 16일에 거행하기로 결정되였다. 림월금은 라영환의 낡은 개가죽이불을 빨래줄에 널어 해볕쪼임을 시키고 담요도 소금물에 깨끗이 씻었다. 토굴집에 쌍인용침대와 백성들의 집에서 빌려온 낡은 책걸상을 들여다놓으니 신방이 다 꾸려진 셈이였다. 서안에서 사업하고있는 라영환의 로전우가 소식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밀가루 한 주머니를 보내왔다. 라영환은 취사반전사들을 청해 밀가루국수를 만들어 초대한 손님에게 주식으로 대접했다. 라영환과 림월금은 중매를 서준 동지들을 모두 청해 흥성흥성한 분위기를 돋구었다. 오후 5시에 간사, 경위원, 마부를 비롯한 후방정치부의 동지들이 모두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외 10명의 동지들도 함께 결혼식에 참석하여 라영환과 림월금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라영환은 림월금과 결혼한지 며칠 안되여 명령을 받고 전선으로 나갔다. 공교롭게도 이때 전투에서 사망되였다고 했던 림월금의 전남편이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연안으로 돌아왔다. 전남편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림월금은 매우 난처한 립장이 되였다. 모택동도 깜짝 놀랐다. 이는 두 남자와 한 녀자의 분쟁일뿐만아니라 정치대국면에 관계되는 일이였다. 모택동은 신중하게 고려한후 당사자인 림월금을 불렀다. 림월금은 불안한 심정으로 모택동의 거처로 찾아갔다. 모택동은 친절하게 쏘파에 앉으라고 권한후 차까지 따라주면서 말했다. “월금동지, 당신들이 결혼한지 얼마 안되였는데 영환을 전선에 파견했다고 날 원망하지 않겠지?” 모택동의 따뜻한 말에 감동된 림월금은 눈물을 흘리며 격동되여 말했다. “주석님, 제가 어찌 주석님을 원망하겠어요? 항전은 전민족의 대사인데 어찌 가족의 사정을 고려할수 있겠어요?” 모택동은 련신 머리를 끄덕이더니 담배불을 붙인후 웃으면서 물었다. “월금동지의 전남편이 연안에 돌아왔는데 동지는 그와 다시 결합할 생각인지? 이는 월금동지의 일이기때문에 중앙에서는 월금동지 자신이 결정하기를 바라오.” 모택동은 따뜻한 눈길로 림월금을 바라보면서 간곡하게 말했다. “월금동지의 태도가 곧 나의 태도요. 난 월금동지가 그를 만나보기를 바라오. 그리고 라영환과 상의한후 다시 나에게 알려주오. 이렇게 하면 당신들 세사람에게 모두 공정하고 공평하리라고 생각되오.” 모택동의 말을 들은 림월금은 전남편을 만나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으려고 결정했다. 이 모든것은 전쟁이 조성한것이다. 비보가 잘못 전해진것을 탓할수밖에 없었다. 림월금은 모택동을 보고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주석님, 그는 다른 사람을 통해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저와 영환동지의 영원한 행복을 축하한다고 했어요. 그가 이미 자신의 뜻을 밝혔는데 제가 그를 만나야 하나요?” 림월금의 얼굴에는 모택동이 나서서 이 난처한 일을 처리해주기를 바라는 표정이 력력했다. “그 등지는 포기해야 할 일은 포기할줄을 아는 좋은 동지군. 하지만 구두로 하는것은 증거로 쓸수 없소. 월금동지, 그더러 마음속의 말을 글로 쓰게 해서 영원히 뒤집지 못하게 하는게 어떻겠소? 모택동의 말을 듣고 확신이 있게 된 림월금은 련신 머리를 끄덕였다. 유쾌한 심정으로 모택동의 판공실에서 나온 그녀는 전남편을 만나 자신의 태도를 설명했다. 이렇게 그녀는 전남편과 매우 우호적으로 헤여졌다. 라영환부부는 선후로 4명의 자녀를 보았지만 전쟁시기에 환경이 간고했기때문에 두 자녀밖에 살지 못했다. 라영환원수는 1963년 12월 16일에 북경에서 사망되였는데 10대원수중에서 가장 먼저 사망된 분이다. 림월금은 1955년에 대좌계급을 수여받았는데 그녀는 전군에서 유일한 녀대좌였다. 그녀는 2003년에 89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는데 급별은 부병퇀급이였다. 
76    장개석은 어떻게 대륙을 떠났는가 댓글:  조회:6770  추천:1  2014-09-14
장개석은 어떻게 대륙을 떠났는가   (번역)     장개석이 1949년 12월에 성도를 떠난 비밀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되고있다. 대만학자 리오가 저술한 《장개석연구》중에는 장개석이 어떻게 위급한 시각에 위험에서 벗어났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의 말을 빌어 국민당특무두목 모인봉이 특종기술을 리용하여 령수를 안전지대까지 모셨다고 했다. 리오는 “나는 모인봉이 말한 특종기술이 전차(战车)인지는 모른다. 전차가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는가?”하고 말했다. 그렇다면 장개석이 성도를 떠난 비밀은 풀수 없는 수수께끼란 말인가? 아래에 해당력사재료에 따라 분석해보기로 하자. 장개석이 성도를 떠난 비밀의 초점은 장개석이 구경 어느때, 어느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성도를 떠나 대만으로 날아갔는가 하는 문제이다. 당시의 뉴스보도에서는 시간에 대해서는 8일, 10일, 13일 등 여러가지 설이 있었고 지점에 대해서는 주요하게 봉황산공항이라거나 신진공항이라는 두가지 설이 있었다. “8일”이라고 하는 설은 주요하게 성도에서 발행량이 가장 많은 각 석간에 실렸는데 “장총재는 오늘 새벽에 중미호(中美号)전용비행기를 타고 성도를 떠났다. 사전에 통지하지 않았기에 왕주석 등은 장총재를 바래주지 못했다”고 했다. 이 소식은 전쟁시기의 성도에 거대한 진동을 일으켰다. 필자가 최근에 그 당시에 성도에 있었던 로인들을 취재했을 때 그들은 긍정적인 말투로 장개석이 8일에 성도를 떠났다고 했다. “그날은 대설(음력 10월 19일)절기의 이튿날이여서 함박만한 눈송이가 장개석을 바래주었지. 그렇게 백군(白军)이 달아나고 홍군(红军)이 왔다우.” 그 시기에 여러번이나 북교장에서 장개석의 접견을 받은적이 있는 국민당 제16병퇀 사령 진극비는 1962년에 발표한 회상록에서 여러번 장개석이 1949년 12월 8일에 성도를 떠났다고 언급했다. 필자가 당시에 “장개석잡기결사대”에 선발되였던 대원들을 취재할 때 그들도 몹시 아쉬워하는 말투로 “우리는 10일쯤에 행동하기로 계획했는데 장개석은 8일에 달았다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8일이란 설은 잘못된것이였다. “10일”이란 설은 12월 11일의 《신신뉴스보》에 실린 “장총재가 성도를 떠나 대만으로 날아가다”란 글에서 언급되였다. 구제척인 시간은 10일 점심 12시 30분이였다. 국민당 사천성 주석 왕릉기는 1965년의 회상기에서 장개석이 성도를 떠난 시간은 10일이라고 언급했는데 구체적인 시간은 아침을 먹은후 얼마되지 않아서 떠났고 했다. 그는 “그날 새벽에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장개석이 떠난다는 말을 듣고 즉시 일어나 차를 몰고 봉황산공항에 갔다. 장개석은 몇마디의 말을 남기고 비행기에 앉아 대만으로 날아갔다”고 썼다.  성도부근의 지형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북교장에서 봉황산공항까지 가려면 소형차로 30분을 초과하지 않는다는것을 알것이다. 왕릉기의 말대로라면 장개석이 리륙한 시간은 오전 9시를 초과하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명의 당사자인 장경국의 “일기”에서는 그들 장씨부자가 10일 오후 2시에 봉황산공항에서 리륙했다고 썼다. 오전 9시정도, 점심 12시 30분, 오후 2시 이 세가지 설에서 어느것이 맞을가? 장경국의 “일기”는 11일이 공백히고 12일의 일기에는 “어제 저녁에 성도에 있었다”고 썼다. 이는 장씨부자가 11일에 성도에 있었다는것을 설명해준다. 다른 많은 회상기에서는 장개석이 류문휘, 등석후, 반문화의 봉기소식과 의빈에 주둔한 국민당 제72군 군장 곽여괴가 봉기했다는 전보를 받은후에야 성도를 떠나기로 결정했다고 썼다. 장경국의 10일의 “일기”중에는 “아버지가 대만으로 떠나려고 한 날은 류문휘, 등석후가 공개적으로 무전을 통해 공산당에 넘어간다고 선고했을 때였다”고 언급했다. 국민당 국방부 2청 6처 처장 서문산은 “장개석은 성도에서 곽여괴가 의빈에서 봉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고 그때의 일을 회상했다. 그렇다면 류, 등, 반과 곽여괴가 전보를 쳐서 봉기한 시간은 어느때인가? 력사재료가 증명하다싶이 류, 등, 반이 봉기한다고 선포한 시간은 12월 9일이였다. 그러나 전보를 쳐서 선포한 시간은 11일 깊은 밤이였다. 당사인의 말에 따르면 시간이 11일이 아니고 9일이라고 한것은 9일에 전보를 쳐서 봉기한 운남성의 로한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일에 관에서 전문 론술한 글이 있다. 이는 또 장개석이 류, 등, 반의 봉기소식을 들은것은 일러도 12일의 새벽이란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볼때 장경국의 “일기”는 날자문제에서 매우 큰 문제가 존재한다. 특히 력사재료와 대조해보면 장경국은 장개석이 성도를 떠난 일에 대해서 뭔가 숨기려고 한 흔적이 엿보인다. 곽여괴가 정식으로 전보를 쳐서 봉기한 시간은 9일이거나 11일이 아니라 12일이라는것이 당시 의빈을 해방한 중국인민행방군 제18군의 전투일지와 전쟁력사재료에 의해 증명되였다. 당시의 력사재료에는 “우리군의 주력은의빈에 도착한후 적군과 접촉하여 담판했는데 곽여괴군은 12월 12일 12시에 봉기했다”고 기재되여있었다. 이는 장개석이곽여괴가 봉기한 소식을 일러도 12일의 오후에 접했다는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장개석이 성도를 떠난 시간은 12일 저녁후라는것이 뚜렷하다.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부대가 성도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장개석은 부득불 성도를 떠나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시종들은 구체적인 시간과 기술세절에 대해 머리를 쥐여짰다. 장개석이 성도를 떠나는 방안이 정해진후 호종남이 첫번째로 해야 할일은 공항으로 가는 길에 박혀있는 “못”을 뽑아버리는것이였다. 그는 급히 부대를 불러와 성남교통요도에 있는 무후사(武侯祠)를 공격했다. 무후사는 성도시 남쪽 성밖의 명승고적으로서 3국시기 류비의 묘지와 후세사람들이 제갈량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 있었다. 해방될 무렵에 여기에는 류문휘의 제24군봉기부대소속인 한개 퇀이 주둔하고있었다. 장개석일행이 군사학교 제23기 2총대(总队)에 속한 한개 대대의 호송을 받으며 군사학교정문에서 나왔다. 그러자 군사학교문앞에서 기다리고있던 장갑차와 땅크는 장개석일행을 보호하며 성남(城南)방향으로 달려갔다. 이 이틀사이에 거리에는 늘 장갑차와 땅크가 나타났기에 시민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후사에서 총포성이 울려서야 시민들은 그날밤이 방상하지 않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무후사전투는 당시 성도의 여러 신문에 모두 보도되였다. 시민들은 그날밤에 격렬한 총소리와 포소리를 들었는데 그 일대의 몇몇 주민들은 자다가 지붕을 뚫고 들어온 류탄에 부상을 당하기까지 했다. 오늘까지도 당시 무후사부근에 거주하고있던 주민들은 의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있다. 왜서 장갑차와 땅크가 무후사입구에 멈춰서서 공격하지 않고 보병들의 돌격도 기다리지 않은채 급급히 신진방향으로 달려갔을가? 사실 호종남의 임무는 이 한개 퇀을 쳐서 없애는것이 아니라 장개석이 안전하게 공항으로 갈수 있도록 엄호하는것이였다. 호종남은 무후사를 공격하는 동시에 사람들의 이목을 돌리기 위해 류문휘공관(公馆)을 지키고있는 한개 영을 치도록 명령했다. 장개석일행의 차량은 장갑차와 탕크의 사이에 숨어서 무후사를 지나 서경으로 향해 달려갔다. 차량들이 신진공항에 거의 도착했을 때 갑자기 지방무장대오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경호임무를 맡은 군관학교의 학생들은 즉시 반격했는데 전투는 비교적 격렬했다. 한 학생이 총에 맞아 죽으면 즉시 다른 학생이 뛰여나가 그 자리를 지키면서 장개석의 안전을 지켰다. 군사학교의 학생 포검홍은 1987년에 그때의 일을 돌이켜보며 필자에게 “우리는 트럭우에서 총을 쏘며 앞으로 달렸는데 장개석이 앉은 승용차는 우리뒤에서 바싹 따라 왔소. 차대오는 일각도 멈추지 않고 화력망을 뚫고 나가 곧바로 신진공항으로 달려갔소”라고 말했다. 장개석은 승용차에서 내린후 트럭우의 군사학교학생들에게 손을 젓고는 뒤의 차를 기다리지 않고 중미호전용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 오른후 장개석은 몸을 돌려 비행기옆에 서있는 호종남 등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중미호전용비행기는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밤장막속에 사라졌다. 1975년 4월 5일 11시 50분에 장개석은 심장병이 돌발하여 대만에서 사망되였다. 장개석은 1949년 12월에 성도에서 떠나 대만으로 도망친후 다시는 대륙땅을 반보도 밟아보지 못했다.   
75    장개석은 왜서 “양”만 죽이고 “장”을 죽이지 않았는가 댓글:  조회:8310  추천:3  2014-09-07
장개석은 왜서 “양”만 죽이고 “장”을 죽이지 않았는가   (번역)     1936년 12월 12일에 발생된 “서안사변”은 평화적으로 해결되였다. 그후 장학량은 장개석을 모시고 남경으로 돌아갔다. 당시 송자문과 송미령은 장학량의 안전을 담보하겠다고 승낙했다. 그런데 왜서 양호성의 안전은 담보되지 못했는가? 양호성은 장개석을 따라 남경으로 가지 않았을뿐만아니라 장개석을 남경으로 돌려보내서는 안된다고 장학량과 크게 다투기까지 했다. 양호성은 원래 장개석이 보증서를 써야 한다고 하면서 보증서를 쓰지 않으면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고 했다. 장개석은 “난 보증서를 쓰지 않겠다. 내가 국가최고령도자의 인격으로 담보할것이다”고 했다. 나중에 주은래가 나서서 화해시켜서야 양호성은 장개석을 남경으로 돌려보내는데 동의했다. “서안사변”후 양호성은 핍박에 의해 사직하고 출국했다. 양호성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항일주장을 선전했다. 1937년 11월말에 장개석은 군통두목 대립을 통해 유럽으로 간 양호성을 유혹하여 귀국하게 한후 붙잡아서 감금시켰다. 하지만 그후 12년동안 양호성을 여러곳을 옮겨 감금시키면서 죽이지는 않았다. 죽일 마음이 있었다면 처음에 붙잡았을 때 죽였을것이다. 그런데 왜서1949년 9월에 가서야 죽이려는 마음이 생겼을가? 사실 장개석이 양호성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증거는 없지만 장개석의 명령이 없이 양호성을 직접 죽였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력사학자들은 마지막에 양호성을 죽일 결정을 내린것은 장개석의 뜻이라고 분석했다. 장개석은 양호성을 죽이지 않으면 양호성이 공산당편으로 넘어가 자신에게 화근으로 될것이고 그렇다고 죽이지 않고 대만으로 데리고간다고 해도 매우 시끄울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중경이 해방될 무렵에 화근을 뿌리채 제거하기 위해 양호성을 죽여버린것이다. 장개석이 장학량을 죽이지 않은 원인은 송자문과 송미령의 담보도 있었지만 “서안사변”전에 장학량과의 관계가 매우 좋았기때문이다. 1930년초에 왕정위는 북경에서 “중국국민당중앙당부확대회”를 조직했는데 그번 회의에서 왕정위는 “확대회의”의 령수로 임명되였다. 그후 왕정위, 염석산 등은 장개석을 반대하는 국민정부를 세웠다. 이 때문에 력사상에서 두개의 “국민정부”가 나타났다. 하나는 북경의 왕정위정부이고 다른 하나는 남경의 장개석정부였다. 그후 북방의 국민당과 북방의 국민정부가 와해된데는 장학량의 공헌이 매우 컸다. 당시 왕정위와 장개석은 모두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고있는 동북군을 쟁취하려고 했다. 누가 동북군을 쟁취하느냐에 “두 국민정부”의 승패가 달려있었다. 왕정위는 여러차례나 동북군 통수 장학량한테 전화를 하고 사람을 파견해보내면서 우월한 조건을 내걸고 장학량의 자신의 편으로 끌어오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하지만 장학량은 결국 장개석의 편에 섰다. 장학량이 수십만대군을 거느리고 산해관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염석산과 왕정위는 북경에서 쫓겨나 산서로 도망쳤다. 남경국민정부가 생사존망의 시기에 처해있을 때 장학량의 공헌이 컸기에 장개석은 장학량을 로해공(路海空) 3군 부총사령으로 임명했다. 장개석은 장학량을 후계자로 배양하려고 마음먹었다. “서안사변”후 장학량은 군사법정에서 유기형 10년에 공민권박탈 5년의 판결을 받았고 후에 또 무죄석방으로 풀려났지만 40년동안 연금(软禁)되였다. 대만에 간후 장개석은 장학량에 대한 연금에 대해 점차 풀어놓는 태도를 취했다. 처음에는 장학량에 대한 연금을 고웅에만 국한시키던것이 신죽까지 풀어놓고 나중에는 대북에 들어와 거주하도록 허락했다. 
74    장개석과 진립부의 조카딸 댓글:  조회:6953  추천:3  2014-09-06
장개석과 진립부의 조카딸   (번역)     1946년 초의 어느날에 장개석은 대립과 함께 진립부의 집에 초대되였다. 장개석과 대립이 객실의 쏘파에 앉아 진립부와 한담을 하고있는데 미색치파오(旗袍)를 입은 풍만한 몸매의 아릿다운 처녀가 사뿐사뿐 걸어나와 그들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처녀를 보자 장개석은 사춘기의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아이는 누구시오?” “이 아이는 나의 조카딸인데 진영이라고 부릅니다. 미국류학을 나갔다가 방금 돌아왔습니다.” 진립부의 소개를 들은 장개석은 차를 마시면서 손가락으로 차탁에 진영이라는 “영(颖)”자를 썼다. 곁에서 지켜보던 군통(军统)특무두목 대립은 주인의 뜻을 알고 진영을 장개석의 영문비서로 추천했다. 진립부는 자신이 장악한 중통(中统)이 총애를 잃자 진작부터 장개석의 비위를 맞추려고 생각했다. 중통은 “중국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조사통계국”의 간칭이다. 중통은 국민당C.C계의 령도자인 진과부, 진립부형제가 통제하는 전국성적인 특무조직이였다. 중통은 국민당당무부문이 통제하는 특무기구로서 군통과 함께 국민당의 량대특무조직을 이루고있었다. 진립부는 대립의 말을 듣고 바로 자기가 생각하는 바와 꼭 들어맞자 그 즉석에서 동의했다. 이렇게 되여 진립부의 조카딸 진영은 장개석의 사인비서로 되였다. 장개석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진영을 영문비서로 임명한것은 가짜이고 그녀와 즐기려는것이 진짜였다. 장개석은 경상적으로 송미령의 눈을 피해 진영과 함께 동거했다. 벽에도 귀가 있다고 장개석이 진영과 비밀리에 동거하고있다는 말이 송미령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송미령은 방안에 있는 가장집물을 마구 집어던졌다. 송미령은 원래 장개석과 진영이 간통하는 현장을 잡아 한바탕 해내려고 했지만 장개석의 지위와 명성을 생각해서 분을 참았다. 그러나 송미령은 평범한 아낙네가 아니였다. 그녀는 소문을 자자하게 내지 않고도 장개석과 진영의 관계를 끊어놓는 계책을 생각했다. 진영은 송미령이 자신과 장개석의 비밀을 알고있다는 말을 듣고 두렵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어느날에 송미령은 진영을 자신의 거처로 불러들었다. 송미령은 짐짓 진영과 장개석의 관계를 모르는척하면서 관심조로 말했다. “진영아, 넌 아직 어려. 이제 스무살밖에 안되는 한창 나이야. 특히 넌 남달리 예쁜 녀자야. 미인은 박명이라는 말이 있는데 녀자는 가정이 있는 남자를 잘못 만나면 일생을 망치게 되는거야. 때문에 우리 녀자들은 더욱 자신을 아껴야 하는거야. 넌 앞길이 구만리같기에 눈앞만 보지 말고 먼 앞날을 생각해야 돼.” 그 말을 들은 진영은 감동되기도 하고 가책되기도 했다. 그녀는 송미령의 품에 안겨 울면서 말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송미령은 가방에서 지표를 꺼내 주면서 말했다. “여긴 네가 있을 곳이 못되니 미국으로 가거라. 이건 내가 미국의 화기은행에 저금한 50만딸라야. 나의 자그마한 성의이니 받아라. 너의 려권과 비행기표는 내가 이미 수속해놓았으니 래일 아침에 떠나거라.” 진영은 이틑날 아침에 중경을 떠나 워싱톤으로 갔다. 장개석의 정부 진영은 이렇게 송미령에 의해 소리없이 떠났다. 진영이 신비하게 “실종”되자 장개석은 화가 나서 펄펄 뛰였지만 내놓고 말할수도 없어 벙어리 랭가슴 앓듯 했다. 송미령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척 하면서 장개석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로 그리 화를 내세요? 살점을 떼낸것처럼 가슴아파하면서 말이예요.” 장개석은 송미령의 말속에 뼈가 있는것을 알아차렸지만 내놓고 대답할수도 없었다. 송미령은 장개석을 곱게 흘겨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총명한 사람인데 저의 처사를 리해하지 못하겠어요? 제가 꼭 사람들앞에서 까밝혀 령수의 명예를 떨어뜨려야 하겠어요?” 장개석은 송미령과 해낼수도 없었다. 이렇게 되여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장개석과 진영의 풍류사는 일단락을 지었다.     
73    1963년 류소기암살사건의 시말 댓글:  조회:7727  추천:2  2014-08-31
1963년 류소기암살사건의 시말   (번역)     1960년 5월에 주은래는 캄보쟈를 방문하여 시하누크친왕과 캄보쟈인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중국과 캄보쟈가 우호적인것을 보고 중국의 최고령도자가 꼭 프놈뻰을 방문하리라고 단정한 미국과 대만당국(当局)은 북경의 동향을 면밀히 주시했다. 1961년 9월에 대만정보국에서는 류소기가 1963년에 중국대표단을 거느리고 캄보쟈 등 나라를 방문할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런데 대만정보국에서 정보를 입수한 정황을 중국안전부문에서 알게 되였다. 그해 10월에 대만에서는 상좌급 특무 장패지를 호지명시의 제3사업지휘소에 파견하여 류소기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게 했다. “지리적으로 놓고볼 때 미얀마나 라오스에서 손을 쓰기보다 캄보쟈에서 손을 쓰는것이 더 유리할것이요. 만약 시하누크와 류소기를 함께 암살하면 더욱 좋고 그중 한 사람을 죽여도 중국과 캄보쟈의 관계는 악화될것이요.” 그들은 이번 행동을 “상강(湘江)계획”이라고 하고 프놈뻰소조를 세운후 구체적인 암살임무를 포치했다. 류소기의 고향이 호남성이라는 리유로 호남성에 있는 상강이란 강이름을 붙였던것이다. 원적이 광동성 학산시인 장패지는 7살 때 부모를 따라 윁남으로 이민했는데 18살에 화교인 리박생을 만났다. 리박생의 소개로 대립의 군통에 들어간 장패지는 전문정보훈련을 받았으며 직접 저명한 일본미녀갑첩 가와시마 요시꼬(川岛芳子)를 붙잡기도 했다. 가와시마 요시꼬는 만주인이며 본명이 아이신줴러 현우(爱新觉罗·显玗), 한족이름이 김벽휘(金壁辉)이다. 장패지는 윁남화교이기에 동남아일대에 대해 손금보듯 잘 알고있었다. 30여년후 그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캄보쟈에 가서 류소기암살계획을 집행하라는것은 당시 장경국이 특별히 우리를 불러놓고 직접 말한것입니다. 나와 농임상, 량명, 문석령 넷은 작탄, 수류탄, 독약 등을 준비해놓고 목숨을 바칠 각오를 했습니다. 암살과정은 전부 사전에 세심한 실험을 거쳐 작성한것인데 비밀이 새여나갈줄은 몰랐습니다”라고 말했다. 남부윁남에 자리잡은 대만제3사업지휘소의 계획에 따라 1962년 2월 1일에 대만특무들은 캄보쟈의 수도 프놈뻰에서 장패지를 조장으로 하고 농임상을 부조장으로 하는 프놈뻰소조를 세우고 40여명의 행동대를 조직했다. 그들은 여러가지 행동방안을 세웠다. 첫째, 시하누크가 꼭 프놈뻰에서 제일 큰 현대나이트클럽에 류소기를 청해서 연회를 베풀것이라는 정보에 따라 부근에 매복해있거나 호텔복무원으로 가장하여 잠복해있다가 기회를 타서 류소기가 앉은 자리에 수류탄을 던진다. 둘째, 류소기가 영화거나 공연을 관람할 때 류소기에게 수류탄을 던진다. 세째, 독약을 류소기가 식사하게 될 음식에 넣는다. 그들은 여러명의 료리사를 접촉해보았지만 믿음직하지 못하다고 인정되여 세번째방안을 포기했다. 첫번째방안과 두번째방안도 위험이 크고 명중률이 높지 않으며 도망칠 뒤길이 없기에 부결되였다. 나중에 류소기가 캄보쟈로 방문할 때 꼭 지나야 할 길에 갱도를 파고 작탄을 가설하는 방안을 새로 내오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중국지도자의 출국방문안전보장사업은 중공중앙 부비서장이며 중앙사무청 주임인 양상곤이 책임졌다. 이미 대만특무들의 음모활동을 눈치채고 사태의 엄중성을 느낀 중국안전부문에서는 1963년 3월 28일에 중앙안전지도소조를 성립하고 양상곤을 조장으로 임명하여 류소기의 출국방문안전을 보장하도록 했다. 4월중순에 류소기는 인도네시아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중국안전부문에서는 대만특무들이 동남아시아에서 빈번하게 활동하고있다는것을 발견하고 대만특무들이 꼭 암살음모를 꾸미고있는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식과 방법에 대해서는 똑똑히 알지 못했다. 적들의 암살음모를 똑똑히 알아내기 위해 중앙안전지도부에서는 조사부의 원경, 국무원화교위원회 오제생 사장(司长)과 공안부 양세서 등으로 조성된 선견소조를 세워고 캄보쟈에 가서 류소기의 캄보쟈방문안전보위사업을 책임지게 했다. 4월 7일에 원경 등 선견소조성원들은 전용비행기를 타고 프놈뻰으로 날아갔다. 프놈뻰에 도착한 선견소조성원들은 화교골간들을 만나서 화교적극분자대오를 조직하여 대만특무들을 미행하고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 깡패조직들의 자료를 수집했다. 4월 11일에 대만특무 진해통은 변계에서 초성에게 “무선전부속품”이라고 하면서 뢰관(雷管)을 2개 넣은 두꺼운 종이함을 넘겨주었다. 진해통은 그 물건을 농임상에게 가져다주라고 부탁했다. 초성은 정말로 무선전부속품인줄로 알고 들고가다가 조심하지 않아 하나를 떨궈버렸다. 그때문에 농임상이 노발대발하면서 욕설을 퍼붓자 초성은 몇푼도 되지 않는 무선전부속품을 가지고 화를 낸다고 두덜거렸다. 4월 16일에 초성은 진양, 원경 등에게 그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경험이 풍부한 원경은 그것이 무선전부속품이 아니라 국내에서 이틀전에 전화로 통지한 미국제 군용뢰관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대호 P021인 정보원과 만나서 뢰관에 대해 알아보았다. 결과 의심스러운 여러통의 비밀암호편지를 발견했다. 캄보쟈측과 중국측에서는 함께 그 비밀암호편지를 해독했다. 대만특무들의 편지내용은 주요하게 공항에서 캄보쟈왕궁으로 가는 길에서 작탄을 폭발하려는 계획과 행동에 참가한 20여명의 특무명단이였다. 선견소조에서는 장달창 등 두 사람을 붙잡았다. 장달창은 전부의 암살계획을 털어놓았고 작탄4개, 뢰관 1개, 수류탄 6개를 바쳤다. 1963년 4월에 이미 특무들의 암살음모를 알게 된 중앙안전지도부에서는 사람을 향항에 파견하여 료시량을 만나게 했다. 그 목적은 첫째로 그를 쟁취하려는것이고 둘째는 “산을 울려 호랑이를 놀라게(敲山震虎)”하는 방법으로 그에게 경고를 하여 “암살계획”을 포기하게 하려는것이였다. 료시량은 1939년에 국민당 군통국에 들어갔고 1949년 10월에 중국인민해방군의 포로로 되였다가 도주하여 향향을 통해 대만으로 건너갔다. 그는 1955년에 호지명시주재 대만 “대사관”에 파견되였는데 공개적인 신분은 “외교관”이고 실제로는 정보소 소장이였다. 그는 이번 “암살계획”의 직접적인 지휘자였다. 료시량의 활동에 대해 감시하고있던 중국공안부에서는 료시량과 한고향 사람이며 대학동창생인 라형림을 물색해놓고있다가 료시량이 향항에 도착했을 때 라형림을 파견했다. 1963년 4월 23일에 라형림은 계덕공항에서 료시량을 만났다. 라형림이 우리측에서 이미 대만특무들의 암살음모를 알고있다는 경고신을 가져왔다고 하자 료시량은 정황이 매우 엄중하다는것을 의식했다. 편지를 읽어본 료시량은 라형림을 보고 “난 힘이 닫는 범위내에서 사건이 벌어지지 않도록 힘써 보겠어. 하지만 다른 방면의 행동은 보장할수 없어. 난 대만에 미련이 없지만 공산당에 대해서도 믿을수 없어. 난 생각은 해보겠지만 믿음직한 보장이 없으면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을거야”하고 말했다. 사실이 증명하다싶이 료시량은 개 똥먹는 버릇을 못고친다고 갱도를 파서 차량을 폭발하는 외에 또 두번째 방안을 획책했다. 즉 시하누크친왕이 류소기와 함께 메콩강에서 룡선경기(龙舟赛)를 구경할 때 소음보총으로 암살하려는것이였다. 이 두번째 방안은 료시량 한사람이 획책한것으로서 극히 비밀적이였는데 사전에 오직 엽상지 한사람만 알고있었다. 료시량은 단독으로 “프놈뻰소조”의 특무 무문수와 련계하여 무문수더러 접이식소음보총 3자루를 넣은 상자를 주조명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주조명은 애국화교내부에 잠입한 대만간첩이였다. 그는 캄보쟈의 애국화교 엽무극의 딸 엽서미와 련애한다는 명의로 애국화교들과 접촉하면서 류소기가 캄보쟈를 방문하는데 대한 정보를 알아냈다. 1963년 4월 28일에 주조명은 캄보쟈—윁남변경에서 직접 암호편지로 “총격암살계획”을 제3사업지휘소에 올려보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편지를 대호 G105인 우리측의 전략관찰원이 받아보게 되였다. 그날에 우리측의 심수양국장이 일찍 변경에 와서 G105와 접선했다. 주조명의 친필편지는 급히 캄보쟈주재 중국사무기관에 전해졌다. 요량준이 암호를 풀어보니 “내가 류소기의 방문로선을 따라 관찰해보니 방비가 엄밀하기에 나루터, 메콩강관람대의 대안에 매복해있다가 류소기와 시하누크가 나타나면 소음보총으로 쏘아죽이는것이 상책이라고 생각됩니다”라는 내용이였다. 사무기관일군들은 즉시 그 암호편지를 캄보쟈왕국정부에 보냈다. 그날 깊은 밤에 10여명의 캄보쟈경찰들이 주조명의 집으로 돌격해들어갔다. 당시 주조명은 무문수와 함께 총을 아원이란 살수(杀手)한테 넘겨줄 일을 토론하고있었다. 경찰들은 주조명과 무문수의 손목에 쇠고랑을 채웠다. 캄보쟈안전부에서는 장패지와 농임상 등 46명을 붙잡았는데 그중 한명은 윁남인이고 한명은 인도인이였다. 경찰국에서는 농임상의 집에서 류소기를 독살하는데 사용하려고 준비했던 농약 한병과 MK2작탄 2개, 시한폭탄 1개를 수색해냈다. 그때는 류소기가 캄보쟈방문을 48시간 앞두고있을 때였다. 시하누크친왕은 특무를 잡고 폭파물을 수색해냈다는 보고를 받고 놀라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다. 그는 류소기의 안전문제를 고려하여 중국측에 류소기의 방문을 늦추는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에 류소기는 원 계획대로 캄보쟈를 방문하겠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시하누크친왕은 감격하여 “중국국가주석은 생명으로 량국의 친선을 보여주었소”하고 말했다.    
72    방탕한 녀인을 달갑게 안해로 맞아들인 모인봉 댓글:  조회:9691  추천:3  2014-08-24
방탕한 녀인을 달갑게 안해로 맞아들인 모인봉   (번역)     대립(戴笠)이 죽은후 그 뒤를 이어 국민당 군통특무조직의 1호인물로 된 모인봉(毛人凤)은 녀색이라면 오금을 못쓰는 위인이였다. 그는 1940년 11월에 미모의 녀인 향영심(向影心)과 결혼했다. 향영심은 비록 자색이 뛰여났지만 수많은 사내들과 마구 놀아난 방탕한 녀인이였다. 서안사변이 일어나기전에 군통국 1호인물 대립은 모인봉을 서안행영사무청에 파견하여 정보사업을 하게 했다. 모인봉이 떠나기전에 대립은 “서안에 간후 특히 장학량과 양호성의 행동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서북군내에서 어느 군관이 원망정서를 가지고있으며 공산당토벌에 소극적인가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서안은 원래 양호성이 거느리는 17로군의 지반(地盘)이였는대 장학량의 동북군이 입주하면서 두갈래의 군사가 함께 주둔하게 되였다. 누구를 통해 서북군내부의 정보를 얻을수 있을가고 골머리를 썩이던 모인봉은 호일민(胡逸民)을 돌파구로 선택했다. 국민당사법사에서 세번 감옥을 짓고 감옥장직을 맡으며 네번 감옥살이를 하여 이름을 날린 호일민은 당시 17로군의 고급참모였다. 조사를 거쳐 모인봉은 호일민이 새로 맞아들인 첩 향영심이 경상적으로 다른 사내들의 침대에 기여든다는것을 발견했다. 그녀를 군통조직에 끌어오면 서북군의 정보도 베개를 통해 술술 알아낼수 있을것이라고 확신한 대립은 가장 유력한 부하 모인봉에게 이 일을 맡겼다. 모인봉은 며칠동안의 조사를 거쳐 호일민과 향영심의 정황을 똑똑히 알아냈다. 고향에 결발부인을 두고온 호일민은 향영심을 첩으로 맞아들인후에도 밖에서 비밀리에 목씨성을 가진 아가씨와 동거하고있었다. 이에 불만을 느낀 향영심은 경상적으로 다른 사내들을 찾아다니며 염문을 뿌렸던것이다. 모인봉은 이 정황을 대립에게 회보했다. 대립은 즉시 모인봉에게 무한에 내려가 향영심을 낚으라고 명령했다. 무한에 내려간 모인봉은 무한주둔 군통소 소장 주위룡과 무한경찰국 국장 채맹견과 함게 향영심을 군통조직에 끌어들일 방법에 대해 상의했다. 한구(汉口)에서 제일 이름난 대세계가무청에서는 숱한 남녀들이 떼를 지어 향락을 즐기고있었다. 하지만 모인봉과 주위룡은 이런 빙글빙글 돌아가는 남녀들의 춤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호일민을 감시하던 한 군통특무의 보고에 의하면 호일민의 첩 향영심이 오늘 저녁에 춤을 추러 대세계에 온다는것이였다. 모인봉과 주위룡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가무청밖에서 향영심이 나타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있었다. 얼마후 키가 크고 화려한 옷을 입은 녀인이 나타났다. 주위룡은 모인봉에게 “저 녀인이 바로 향영심입니다”라고 알려주었다. 그 녀인이 가까이 다가오자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감을 느낀 모인봉은 저도모르게 “와, 정말 예쁜 녀인이군! 탄력있는 몸매가 죽이는데”하고 감탄했다. 모인봉은 향영심을 따라 가무청으로 들어가자마자 주위룡이 웃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금 쏘파에 앉아 휴식하려고 하는 그녀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숙이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가씨, 저하고 한번 춤을 출수 없겠습니까?”하고 간곡하게 청했다. 그런데 머리를 들어 모인봉을 바라보던 향염심은 “당신은 누구예요? 제가 왜서 당신과 춤을 춰야 되죠?”하고 거절했다. 그날 호일민이 외출한 기회에 향락을 즐기려고 춤을 추러 나온 그녀가 모인봉처럼 못생긴 남자를 눈에 들어할리 없었다. 그녀는 모인봉이 가지 않고 그냥 서있는것을 보고 말했다. “이 대세계에서 저에게 춤을 청하는 사람은 두가지 부류예요. 한가지는 멋지고 잘 생긴 부자집 도련님이고 다른 한가지는 허리춤에 돈을 가득 차고 다니는 상업계의 거두들이죠. 선생은 아마 두번째 부류에 속하겠죠?” 이는 분명히 모인봉을 못생겼다고 비웃는 말투였다. 그러나 모인봉은 화를 낼 대신 빙그레 웃으면서 “아가씨, 나는 무슨 부자가 아니요. 오늘 아가씨를 청한것은 아가씨가 너무 예쁘게 생겨서 자신을 억제할수 없었기때문이요. 만약 아가씨가 나의 체면을 세워주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후날에 다시 만나는게 어떻겠소?”하고 말했다. 그제야 향영심은 웃으며 말했다. “제가 대세계에 오래동안 드나들었지만 당신처럼 직방배기이고 또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예요. 좋아요. 우리 한곡 춥시다.” 모인봉은 방탕한 미녀를 안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때 군통특무들이 나타나 향영심을 강제로 끌고 대립한테로 데려갔다. 처음에는 남편의 지위를 믿고 큰소리 치던 향영심은 눈앞의 사내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는 대립이라는것을 알게 되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대립은 그녀를 달래서 군통특무조직에 받아들였다. 그때로부터 17로군과 서안방면의 정보는 끊임없이 대립의 손에 들어왔다. 무슨 일에서나 신중한 대립은 향영심과 직접 련계하지 않았다. 그는 중간에 모인봉을 유일한 교통원으로 두었다. 향영심은 모인봉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비밀사업을 출중하게 완성하여 자주 상금을 받았다. 이에 향영심은 상관인 모인봉에게 순종하고 감격해하면서 그를 침상에 끌어들여 “정복”하는 쾌감을 느꼈다. 대립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향영심을 색정간첩으로 리용하기도 했다. 모인봉은 사랑하는 녀인이 다른 남자의 침대에 오르는것이 싫었지만 감히 반대한다는 말을 할수 없었다. 향영심이 미인계를 써서 임무를 완성하고 돌아오자 모인봉은 그녀를 꼭 껴안고 결혼하자고 고백했다. 향영심이 동의하자 모인봉은 기뻐서 결혼식준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에는 두가지 장애가 있었다. 하나는 향영심이 호일민과 리혼하지 않은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통내부에서 반대가 심한것이였다. 그것은 대립이 이미전에 “항일전쟁이 결속되기전에는 조직원들이 결혼하지 못한다”는 규정을 세웠기때문이다. 향영심이 여러번이나 리혼하자고 찾아갔지만 호일민은 동의하지 않았다. 대립은 호일민의 약점을 잡아 향영심과 리혼하도록 핍박했다. 첫번째 장애를 제거한후 대립은 군통내부에서 모인봉의 결혼을 제일 반대하는 왕춘천을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왕춘천은 대립의 호위병이였는데 재정부의 리아가씨와 결혼하려고 여러번이나 신청했다. 그러나 대립의 규률이 엄하여 번마다 거절당했다. 이번에 모인봉이 결혼한다고 하자 왕춘천은 “대립은 모인봉을 편애해. 모인봉이 결혼하는데 난 왜 결혼하지 못하는가?”하면서 사사로이 리아가씨와 결혼했다. 그는 결혼할 때 숱한 빚을 졌는데 빚을 갚기 위해 중경의 한 상인에게 밀수품을 가져다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 상인은 왕춘천이 대립의 호위병이기때문에 밀수품을 들여오는것은 문제가 없을것이라고 생각하고 거액의 선불금을 지불했다. 하지만 대립이 엄하게 관리했기때문에 왕춘천은 밀수품을 들여올수 없었다. 그 상인은 여러번이나 재촉해도 대답이 없고 선불금도 돌려주지 않자 군통조직에 왕춘천을 신고했다. 왕춘천을 처단하려고 해도 기회가 없어 손을 쓰지 못하고있던 모인봉은 그 상인의 신고를 받는 즉시 재료를 작성하여 대립에게 보내주었다. 대립의 명령에 의해 모인봉은 왕춘천을 총살했다. 사실 군통에는 직권을 리용해 장사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왜서 왕춘천만 재수없이 걸려들었는가? 그 원인에 대해 군통내부에서는 모두 잘 알고있었다. 그후 누구도 감히 나서서 모인봉과 향영심의 혼사를 반대하지 못했다. 대립은 시기가 성숙된것을 보고 즉시 모인봉과 향영심이 결혼한다는것을 선포했다. 1940년 11월에 모인봉과 향영심은 중경의 양삼공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사람들은 이번 기회를 빌어 이전보다 지위가 높아진 모인봉주임에게 잘 보이려고 묵직한 뢰물을 들고왔다. 모인봉은 산더미처럼 쌓인 재물을 보면서 “내가 이전에는 작은 인물이였지만 지금은 이렇게 영향력이 커지다니? 정말 사람을 잘 찾았어)라고 흐뭇해했다. 얼마 안되여 대청에 손님들이 가득 찼다. 대부분이 중경의 군정요원들이였는데 모인봉과 대립은 그들을 접대하느라고 바삐 돌아쳤다. 첫날밤에 모인봉의 곁에 누운 향영심은 속으로 (이 남자에게는 잠재력이 있어. 내가 이 남자와 결혼했으니 앞으로 꼭 귀하게 될거야. 그러니 그가 더 크게 출세할수 있도록 내조를 잘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편의 출세를 위해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바치는것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향영심은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모인봉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녀는 정신병환자로 몰리워 청도시 교외에 있는 봉페식정신병원에 들어갔다. 새 중국이 성립된후 향영심의 가족들은 그녀를 향항으로 데려갔다. 대만으로 쫓겨간 장개석은 어느 한번 모인봉과 한담을 할 때 “자네의 부인이였던 그 미녀간첩 있잖아? 간단한 인물이 아니였지. 그녀가 ‘당국(党国)’을 위해 많은 공을 세웠어”라고 말했다. (진달맹이 쓴 《4대특무서류》에서)    
71    폭군이 만든 경국지색 댓글:  조회:9594  추천:2  2014-08-17
폭군이 만든 경국지색     력사는 반복된다. 상조(商朝)에 폭군 주왕(纣王)이 있었다면 주나라엔 유왕(幽王)이 있었다. 주왕에게는 달기(妲己)라는 희첩이 있었고 유왕에게는 포사(褒姒)라는 희첩이 있었다. 달기와 포사는 모두 나라를 멸망시킨 희대의 요녀라고 불리운다.     주왕을 주지육림에 빠지게 한 소달기     소달기(苏妲己)는 기주후(冀州侯) 소후(苏护)의 딸로서 은(殷)나라(상조를 은상이라고도 불렀다)의 유소 소장 (有苏苏庄—지금의 하남성 초작시 온현 소왕촌)에서 출생했다. 달기는 용모가 선녀와 같고 노래와 춤에 능했는데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의 애비(爱妃)가 되였다고 전해진다. 주왕이 소유씨(有苏氏—지금의 하남성 무척동)를 정복했을 때 소유씨는 주왕에게 미녀 달기를 바쳤다. 주왕은 원래 문무를 겸비한 현명한 군주여서 동남을 통일한후 동이(东夷)와 평원통일을 공고히 하였고 사회진보와 경제발전을 추진하였지만 재위말기에 자고자대하며 폭군으로 되였다. 주왕은 천하의 절색인 달기를 보자 한눈에 반하고말았다. 달기는 소문이 무색할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왔다. 주왕은 달기에게 완전히 넋을 잃었다. 갸름한 얼굴과 신비스럽게 반짝이는 눈, 도화처럼 붉은 입술, 봉긋한 유방과 버들가지처럼 하늘거리는 허리, 풍만한 둔부는 주왕이 그동안 본 어떤 미인보다 백배나 더 아름다왔다. 주왕은 밤마다 달기에게 달려들었고 달기는 기기묘묘한 방중술로 주왕을 사로잡았다. 달기는 사내를 녹일 요부의 기질을 갖고있었다. 주왕은 달기와 음락에 빠져 석달이나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달기는 지상의 녀자가 아니라 하늘이 내게 보낸 선녀이다!” 주왕은 달기에게 깊이 빠져들어갔다. 주왕은 달기가 기뻐하는 일이면 무슨 짓이든 서슴치 않았다. 그는 사구(沙丘)에 큰 놀이터와 별궁을 지어두고 많은 들짐승과 새들을 거기에 놓아 길렀다. 그는 또 위주(卫州—지금의 하남성 기현)에 술로 못을 만들어 주지(酒池)라 하고 고기를 매달아 숲을 만들어 육림(肉林)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이다. 그는 이 주지육림에서 매일 연회를 차렸놓고 즐겼는데 많을 때에는 3000명의 남녀가 발가벗고 그 사이에서 밤낮없이 술을 퍼마시며 즐겼는데 눈을 뜨고 볼수 없을 지경이였다고 한다. 봉지가 지금의 하남성 림장현에 있는 구후(九侯)에게는 매우 예쁜 딸이 있었는데 입궁하여 궁녀로 되였다. 구후의 딸은 달기의 음탕한 행위를 보다못해 몇마디 했다가 당장에서 죽음을 당했다. 주왕은 달기가 시키는대로 궁녀의 아버지 구후도 죽인후 고기를 잘게 썰어 젓갈을 만들어 제후들어게 나누어주었다. 주왕은 폭정(暴政)을 그만두도록 간하는 충신들의 말은 듣지 않고 달기의 말만 잘 들었다. 달기는 사람들에게 잔인한 형벌을 가하는것을 즐겼는데  구리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우에 걸쳐놓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우를 걷게 하여 미끄러져서 타죽게 하는 포락의 형(炮烙之刑)을 구경하면서 즐기거나 너비 10메터, 깊이 3메터 되는 구뎅이를 파놓고 독사와 전갈을 집어넣은후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을 그 구뎅이에 떨어뜨리는 돈분(趸盆)이란 형을 구경하기를 즐겼다. 달기가 사람들이 타죽거나 독사에게 물려 괴로워하며 죽는것을 보고 웃었다. 그후 주왕은 달기가 웃는것을 보기 위해 아무 사람이나 불러서 포락의 형이거나 돈분의 형에 처했다. 충신 비간(比干)이 여러번이나 간언했지만 주왕은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비간은 승상에 해당되는 관직소사(官职少师)였으며 주왕의 숙부이기도 했다. 주왕이 간언을 듣지 않았지만 비간은 “신하는 죽더라도 임금께 충간해야 한다”며 계속 주왕에게 간언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달기는 주왕에게 자신의 심장병이 나으려면 비간의 심장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후 비간이 또 간언을 하자 주왕은 화를 내며 “성인(圣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개나 있다고 들었다. 너의 충심이 진짜인지를 확인하겠다”고 하며 그를 해부하여 심장을 꺼내 달기에게 주었다. 주무왕(周武王)이 조가(朝歌)를 공격해오자 주왕은 록대(鹿台)에서 뛰여내려 분신자살했다. 달기는 주무왕에 의해 살해되였다는 설도 있고 주무왕이 달기를 취하여 시녀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주유왕에게 거짓봉화를 올리게 한 포사     주선왕(周宣王)은 재위 46년동안 주나라를 반석에 올렸지만 그의 아들 주유왕(기원전 795년~기원전 771년)의 대에 와서 주나라가 망하고말았다. 주선왕이 죽고 주유왕 희궁열(姬宫涅)이 즉위한지 2년째 되던 어느날에 지진이 일어나자 당시 백양보(伯阳甫)란 대부가 “양기가 자리를 잃고 음기아래에 있으면 반드시 근원이 막히고 그 근원이 막히면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면서 방법을 대지 않으면 10년내에 주나라가 멸망된다고 예언했다. 그러나 폭군의 기질이 다분했던 유왕은 그런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재위 3년이 되던 해에 포사라는 천하절색의 희첩이 생기자 그는 주지육림에 빠져들었다. 포사는 포나라(褒国)의 미인이다. 이 미인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 계기에 대해 사마천은 매우 신비적으로 그려냈다. 하왕조의 뒤를 이어 은나라가 등장하고 다시 주나라의 주려왕(周厉王)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전해내려온 한 상자가 있었는데 그 속에는 소장하고있으면 나라에 길조가 든다는 룡의 침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함부로 열어보아서는 안된다는 금기사안이 있었다. 그런데 서주의 제10대 왕(재위기간 기원전878년~841년)이였던 주려왕 희호(姬胡)가 말년에 이 상자를 열었다. 려왕이 상자를 여는 순간 룡의 침이 궁궐의 뜰로 흘러들어왔는데 아무리 없애려 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것에 개의할 려왕이 아니였다. 려왕이 녀자들을 발가벗겨 큰 소리로 떠들게 하자 침이 문득 검은 자라로 변해 후궁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후궁에 있던 17살가량의 어린 계집이 그 검은 자라와 마주쳤는데 시집갈 나이가 되여 남자도 없이 아이를 잉태했다. 그때는 려왕이 죽고 그의 아들 주선왕 희정(姬静)이 왕위에 올랐을 때였다. 그후 아이를 낳은 후궁은 두려워 아이를 아무도 모르게 내다버렸다. 그 무렵에 선왕은 어린 녀자애들이 부르는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콩대로 만든 화살통이 주나라를 망하게 하리라”는 동요를 듣게 되였다. 뒤이어 길에서 활과 화살통을 파는 부부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왕은 신하들을 불러 그들을 즉시 죽이라고 명령했다. 활과 화살통을 파는 부부는 도망을 치다가 우연히 길에서 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들 부부는 그 녀자아이를 불쌍하게 여겨 업어다가 길렀다. 그 아이가 바로 후궁이 버린 아이였다. 그후 그들 부부는 포나라에 숨어살면서 녀자아이의 이름을 포나라에서 성장했다고 하여 “포사”라고 지었다. 포사가 자색이 뛰여난 처녀로 자랐을 때는 주선왕이 죽고 그의 아들 주유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였다. 어느날에 포사의 양부모는 자신들이 지은 죄값으로 포사를 유왕에게 바쳤다. 녀색을 특별히 좋아한 유왕은 포사를 보자마자 반하여 넋을 잃을 지경이였다. 밤낮으로 포사와 붙어살다가 어느새 백복(伯服)이란 아들을 얻었다. 기쁜 마음에 왕후를 페위하고 포사를 왕후로 삼더니 태자 의구(宜臼)마저 페위하고 백복을 태자 자리에 두었다. 이에 주나라 태사인 백양(伯阳)이 력사책의 기록을 들어가며 주나라가 망할것이라고 탄식했다. 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포사는 잘 웃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려고 유왕은 온갖 방법을 다 썼으나 끝내 웃길수 없었다. 유왕은 포사를 웃게 하기 위해 거짓으로 봉화를 올리고 북을 쳐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러자 사방의 제후들이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섰다가 헛걸음을 쳤다. 그런 장면을 본 포사는 마침내 웃었다. 포사의 웃는 모습에 넋을 잃은 유왕은 이런 짓을 여러차례나 일삼았다. 더구나 유왕은 아첨만 일삼는 괵석보에게 나라의 정사를 맡기고 밤낮 포사를 안고 즐겼다. 그러자 민심이 들끓었다. 결국 무너진 민심을 등에 업고 신후가 적국인 증나라(缯国),서이(西夷),견융족과 함께 유왕을 공격했다. 급해난 유왕이 봉화를 올리고 북을 쳐 군대를 소집했으나 제후들은 유왕이 또 포사를 웃게 하기 위해 거짓봉화를 올리는 줄로 알고 도우러 오지 않았다. 결국 신후는 려산(骊山)아래에서 유왕을 살해하고 포사를 사로잡았으며 페위된 태자 의구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의구가 바로 평왕(平王)이다.    
70    팽덕회와 그가 사랑했던 세 녀자 댓글:  조회:7622  추천:1  2014-08-10
팽덕회와 그가 사랑했던 세 녀자   (번역)   팽덕회(彭德怀)는 본명이 팽득화(彭得华)이고 호가 석천(石穿)이다. 그는 1898년 10월 24일에 호남성 상담현 석담진 오석채 팽가위자에서 출생했다. 그에게는 가슴에 지을수 없는 세 명의 녀자가 있었다. 팽덕회는 40살의 나이에 20살 년하이고 미모와 재주를 겸비한 포안수(浦安修)와 결혼했다. 팽덕회와 포안수는 감정을 중히 여기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화목한 부부였다. 부부라 하지만 상대방의 사업을 간섭하지 않고 저마다 맡은바 사업을 열심히 했다. 팽덕회는 국무원 부총리 겸 국방부 부장으로 사업했으며 포안수는 선후하여 경공업부 로동로임사사장, 북경사범대학당위 부서기로 사업했다. 그들은 일생동안 안정된 생활을 별로 보내지 못했다.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보낸것은 그래도 1953년부터 1958년까지의 5년간 중남해에 있은 시기라고 말할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항상 각자가 자기 일만 해왔다. 팽덕회에게는 첫사랑이 있었는데 그녀는 주서련(周瑞莲)이라고 부르는 외사촌녀동생(表妹)이였다. 비록 명의상으로는 외사촌녀동생이라고 하지만 사실 주서련은 팽덕회의 외삼촌이 부양한 고아였다. 주서련은 어려서부터 팽씨가문의 사랑을 받았으며 팽덕회와 소꿉친구였다. 외삼촌은 일찍 그들의 혼사를 결정지었다. 하지만 팽덕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출로를 찾아주려는 큰 뜻을 품고 미혼처 주서련의 곁을 떠나 참군했다. 1921년에 상군(湘军) 련장으로 승급한 팽덕회는 주서련과 결혼하려고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때 주서련이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왔다. 사연은 이러했다. 가난했던 팽덕회의 외삼촌은 마을의 지주놈한테 빚을 지게 되였다. 지주놈은 매일 팽덕회의 외삼촌을 찾아와 빚독촉을 했지만 외삼촌은 빚을 갚을 돈이 없었다. 지주놈은 젊고 예쁘게 생긴 주서련을 보더니 음심을 품고 빚대신 강제로 끌고가려고 했다. 하지만 주서련은 죽어도 굴복하지 않고 뒤산에 올라가 절벽에서 뛰여내려 자살했다. 이런 소식을 들은 팽덕회는 주먹을 쥐고 고향으로 달려갔다. 첫사랑을 잃은 팽덕회는 뒤산에 올라가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목이 메도록 통곡했다… 1922년에 24살인 팽덕회는 남의 소개로 황아장수의 딸 류세매(刘细妹)와 결혼했다. 결혼을 한후 팽덕회가 제일 먼저 해놓은 일은 류세매의 전족을 풀어준 일이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류곤모(刘坤模)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후에 팽덕회는 호남륙군강무당을 졸업하고 상군의 영장으로 승급했다. 팽덕회는 안해 류곤모를 상담으로 데려갔으며 그녀를 녀자직업학교에 보내여 공부하게 했다. 그때로부터 팽덕회부부의 생활이 새로 시작되였다. 하지만 그 좋은 시간도 오래 가지 못했다.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팽덕회는 부대를 거느리고 평강봉기를 일으켰으며 봉기군을 이끌고 정강산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팽덕회는 집을 떠나 혁명에 참가했다. 류곤모는 집에서 남편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여러해가 지났는데도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길이 없었다. 나중에 그는 남편을 기다리다못해 남의 소개로 무한에서 다른 남자와 가정을 이루었다. 항일전쟁이 폭발된후 다른 남자의 안해로 된 류곤모는 후방에서 팔로군이 평형관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 남편인 팽덕회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였다. 그는 즉시 팽덕회에게 편지를 써보냈는데 수신인 주소에 “평현관”이라고 적어놓았다. 마침 부대를 거느리고 산서에 도착한 팽덕회는 오대산에서 이 편지를 받았다. 팽덕회는 편지를 받고 아주 기뻐하면서 즉시 류곤모에게 회신을 하여 연안으로 오라고 했다. “곤모씨, 탄알이 비발치는 전방에서 당신이 보낸 편지를 받아보았소. 정말 흥분되고 기뻤소. 당신이 연안으로 오고싶으면 서안팔로군판사처의 림백거주임을 찾아가오.” 류곤모는 이 편지를 가지고 남편을 찾으려고 북상하여 연안으로 떠났다. 때마침 팽덕회는 급한 회의때문에 전선에서 연안으로 돌아왔다. 하여 헤여져서 10년만에 팽덕회부부는 연안에서 만날수 있었다. 유감스러운것은 이들 부부는 다시 결합하지 못한것이였다. 팽덕회는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이렇게 되풀이하군 했다. “그 일은 나의 잘못도 아니거니와 그녀의 잘못도 아니요.” 1938년 10월 10일에 40살인 팽덕회는 20살의 처녀 포안수와 결혼했다. 포씨3자매도 송씨3자매처럼 유명했다. 큰언니 포결수는 독일류학을 한 화학가이고 둘째언니 포희수는 유명한 기자였으며 포안수는 북경사범대학 력사학부를 졸업했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학생당원이였다. 두 사람의 결합은 영웅이 미녀를 사랑한 한단락의 전통적인 이야기였다. 결혼후 팽덕회는 안해를 몹시 사랑해주었다. 년령차이와 교육차이 그리고 생활습관차이와 개성차이는 모두 항전의 포성에 감추어졌다. 포안수는 팽덕회와 결혼한후 여전히 지식분자의 특유한 자중성과 독립성을 지켰으며 자신의 사업을 충실히 했다. 그들 부부도 다른 간부부부들처럼 “토요일부부”생활을 했다. 1918년 7월에 북경에서 출생한 포안수는 해방형(解放型)의 신녀성이였다. 포안수는 청년시절에 중외를 뒤흔든 “12.9”애국학생운동에 참가하였고 1936년에 중화민족해방선봉대와 녀성구국회에 참가하여 항일구국활동에 종사했다. 그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녀는 산서성의 항일전선에 뛰여들었고 연안에 가서 대중을 조직하여 항일근거지를 보위하고 공고히 하는데 공헌했다. 해방전쟁시기에 그녀는 선후로 섬감녕변구 롱동의 토지개혁사업단과 진서북의 토지개혁사업단에 참가했다. 그후 서북야전군 사령부에 들어가 사업했다. 전국이 해방된후 그녀는 선후로 방직공업부 기술사 부사장, 경공부 로동공자사 사장, 북경사범대학 당위 부서기 등 직을 맡았다. 포안수는 종래로 높은 자리에 있는 남편의 득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종 독립적이였다. 중남해에 있는 동안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이 포안수로 하여금  독립적인 개성을 더욱 돌출히 표현하게 했다. 포안수는 집안일을 할줄 몰랐다. 평소에 식사할 때에도 경호원이 큰 나무상자를 들고 밥을 타왔다. 포안수가 밥을 직접 한적이 딱 한번 있었는데 고압가마에다 쌀과 남새를 함께 넣어 지은 남새밥이였다. 당시 포안수는 남새밥을 지어놓고 임필시의 부인을 청해 함께 식사를 했는데 팽덕회는 식사를 하면서 “오늘 누가 하였는지 밥맛이 참 좋구만. 아주 맛있소”라고 연신 칭찬까지 했다. 팽덕회는 집에서 한번도 큰소리를 친적이 없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리해하지 못할것이다. 외부사람들은 팽덕회가 성격이 아주 센 사람이라고 보지만 집안에선 안해의 말을 무조건 들어주는 애처가였다. 한사람은 천군만마를 호령한 전형적인 군인이고 한사람은 전형적인 강남숙녀형녀성이여서 두 사람을 정반대되는 량극이라 볼수도 있지만 두 사람은 결합한후 아주 잘 어울리여 한번도 얼굴을 붉힌적이 없었다. 1958년전까지 팽덕회의 가정생활은 아주 소박하고 평온했으며 행복했다. 그해 려산회의후 팽덕회부부의 감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1962년에 팽덕회의 “8만자편지”가 재차 비판을 받으면서 포안수의 정신세계도 철저히 무너졌고 화목하던 가정도 충격을 받았다. 상상도 못할 정치적인 압력하에 포안수는 절망을 느끼고 리혼을 선택했다. 팽덕회도 안해의 심정을 리해해주고 리혼하는데 마지못해 동의했다. 갈라질 때 팽덕회는 칼로 배(梨)를 두쪼각으로 베여서 한쪽을 포안수에게 주면서 “헤여짐”을 선포했다. 포안수의  리혼보고서가 양상곤에게 전달되였다가 나중에 주은래의 손을 거쳐 등소평에게 전해졌다. 등소평은 리혼보고서를 받아본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종래로 남의 집안일을 관계하지 않소.” 하여 이 리혼보고서는 감감 무소식으로 되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 “4인방”의 박해를 받은 팽덕회는 1974년 11월 29일 14시 25분에 북경에서 억울하게 사망되였다. 이는 한 시대의 비극이였다. 거대한 정치적압력하에 개인의 힘은 보잘것없이 약하고 무력했다. 포안수는 1991년 5월 2일에 북경에서 사망되였다. ※주: 1962년에 포안수가 비록 리혼를 제기했지만 어느 기관에서도 그들의 리혼을 비준하지 않았다. 하여 팽덕회와 포안수는 명예상 여전히 합법적인 부부였다. 팽덕회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69    늙은 남편에 젊은 부인의 랑만적인 사랑 (3) 댓글:  조회:7668  추천:3  2014-08-02
늙은 남편에 젊은 부인의 랑만적인 사랑 (3)   (번역)     남편이 출근한 후면 옹범은 집에서 책을 읽고 론문을 수개했다. 12시면 그들 부부는 점심을 먹고 휴식했다. 오후 2시면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의 사업을 하다가 저녁 6시에 저녁을 먹었다. 북경의 집에는 가정부가 있었기때문에 옹범은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되였지만 향항에 오면 직접 때시걱을 준비해야 했다. 그들 부부는 대부분 시간 밖에서 먹었다. 저녁을 먹은후 그들 부부는 학교정원에서 손을 꼭 잡고 산책했다. 손을 잡을 때면 언제나 열손가락을 서로 꽉찌끼군 했다. 산책하면서 양진녕은 젊은 안해에게 국제 저명한 물리학가들의 이야기거나 세계각지를 려행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옹범은 얌전하게 듣고있었는데 보기에 매우 만족해하는것 같았다. 산책하고 돌아오면 두 사람은 쏘파에 앉아 음악을 듣지 않으면 비디오를 보군 했다. 그들은 력사극을 보기 좋아했다. 옹범은 《효장비사》를 본적이 있는데 재미있다고 양진녕에게 추천하여 함께 보았다. 신혼의 나날에 그들은 고전음악을 들으며 쏘파에 나란히 앉아 인기도서 《다빈치비밀번호》를 보기도 하고 함께 모험적인 장면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양진녕은 젊어보이기 위해 연한 황색이거나 연분홍색의 티샤쯔를 입었고 옹범은 나이들어 보이기 위해 정중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그들의 아빠트가 향항 중문대학의 산 저쪽에 있었기때문에 외출할면 자체로 차를 몰아야 했다. 그들이 운전하는 차는 1980년에 양진녕이 산 닛산(日产)승용차였는데 영화 《헨리전기》에서 나오는 낡은차와 흡사했다. 20여년을 사용한 차는 소리가 나서 길에서 돌아다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향항에서는 이런 낡은차를 모는 사람이 없었기때문이다. 양진녕은 직접 차를 몰기를 즐겼다. 그는 반응이 매우 빨랐고 운전기술도 매우 높았다. 향항 석오의 옆에는 작은 섬이 있었는데 양진녕과 옹범은 한가할 때면 차를 몰고가서 산책하군 했다. 양진녕이 차를 몰 때면 옹범은 언제나 양진녕옆의 조수석에 앉아 온정이 넘치는 눈길로 남편을 바라보군 했다. 양진녕은 옹범의 눈길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옹범의 따스한 시선을 받을 때마다 하나의 온화한 등빛이 자신의 몸을 비추는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가슴이 따뜻했다. 옹범의 친구는 “옹범이가 양진녕을 바라보는 눈길은 정말로 따뜻했습니다. 저는 그런 눈길을 다시 본적이 없습니다”고 말했다. 옹범은 더욱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남편을 보살피고 남편의 학술자료와 강의원고를 정리하는데 바치겠다고 말했다. 친구들이 옹범을 보고 아이를 낳을 타산이 있느냐고 물을 때 옹범은 순리에 따르겠다고 대답했다. 2005년 4월에 양진영과 그의 동생 양진한, 양진평은 함께 부인들을 동반하여 황산에 올랐다. 양진녕은 비록 83세였지만 산으로 오를 때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오히여 뒤에 선 옹범의 손을 놓지 않고 잡아끌끼까지 했다. 양진녕은 웃으며 말했다. “옹범이, 비록 나의 다리가 매우 민첩하지만 난 당신의 손을 잡는걸 좋아하오. 웬지 알겠소? 그건 당신의 손을 잡으면 내 마음이 매두 든든해지기때문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옹범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북경표준말속에 영어도 끼여서 말하는 그녀의 말속도는 매우 늦은편이였다. 양진녕은 늘 조주사투리가 약간 섞인 그녀의 표준말을 놀려주군 했다. 황산려행을 마친후 옹범은 친구들에게 “내가 이번 려행에서 가장 크게 느낀것은 건강한 몸을 보장하는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것이였어”라고 말했다. 그는 양진녕의 3형제는 모두 70고개를 넘었지만 신체가 매우 건강하여 황산을 매우 쉽게 올랐다고 말했다. 옹범은 양진녕의 자녀들과도 화목하게 지냈다. 양진녕의 자녀들이 미국에서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그녀는 몇마디씩 대화를 하군 했다. 2005년 6월초에 옹범의 석사졸업론문은 순조롭게 통과되였다. 북경에 돌아온후 그녀는 프랑스어반에 참가하겠다고 신청했다. 그녀는 또 피아노를 사서 남편과 함께 정원의 꽃향기를 맡으며 피아노를 치는 달콤하고 조용한 나날을 보내려고 준비했다. 그들이 결혼한지 1년 남짓이 지난 2006년 1월 22일에 대만전문란 녀작가 로평은 《아시아주간》에 《늙은 남편에 젊은 안해는 랑만적인것이 아니다》는 문장을 발표했다. 로평은 글에서 “늙은 남편에 젊은 부인은 어떻게 지낼가? 눈앞에 작은 모기가 날아가는것 같고 시신경에는 구멍이 나고 무릎에는 신경통이 쑤시고 밤중에 자다가 오줌누러 일어나서 서보지만 오줌발은 잘 나오지 않고…나이든 남자의 밤은 사실 예이츠의 시편 《비진틴으로의 항해》와 같을가?”라고 썼다. 이어 “서로의 체온으로도 고독을 해결할수 없다. 양진녕이 옹범을 만난것은 로년의 고독이 청춘의 고독을 만난것이다. 둘을 합하면 아마도 소설가 마르케스가 말한 《백년간의 고독》이 아닐가? 뛰여넘을수 없는것은 또한 두 사람의 두개 갑자(60년)에 걸친 시대이다. 시대감각은 뛰여넘기 어려울것이다”고 했다. 로평은 또 “비록 두 사람이 때때로 안온한 때도 있을것이나 그것이 고양되거나 찬란한것은 아닐것이다. 그저 저녁 황혼의 마지막 빛 아래에서 담담한 슬픔을 안고 혹은  기쁨으로 인하여 슬퍼지거나 슬픔으로 인하여 기뻐진것일것이다”고 쓰고 나서 “사실 그들은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만나고 사귀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재주있는 남자와 미모의 젊은 녀자와의 만남이고 어떤 점에서 보면 각자 얻으려고 하는것을 얻은것이다. 사실 그것은 또다른 형태의 사랑은 아니다. 고난끝에 얻어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도 아니다. 과정도 놀랄만한것도 없다. 나중의 혼례는 과연 성대했다. 만일 당사자들이 용기있다고 한다면 그와 그녀의 용기를 합친다고 하더라도 결혼식에 참석했던 한 사람의 용기만도 못할것이다”고 썼다. 로평의 글을 보고 화가 난 양진녕과 옹범은 《아시아주간》에 처음으로 공동명의의 반박문을 실어 로평이 그들을 욕했지만 그들은 그런 욕에 무너지지 않을것이라고 하면서 로평에게 반성과 사과를 할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로평은 지금은 문자옥(文字狱)시대가 아니라면서 사과를 거부했다. 로평은 《랑만인가 아닌가?》라는 제목으로 늙은 남편에 젊은 부인의 결합이 랑만적인이 아닌지에 의문을 나타냈다. 양진녕부부는 급히 이를 반박하여 자기들의 혼인생활은 고독하지도 않고 두 사람의 관계는 로평이 말한것과 같이 늙은 남편과 젊은 부인이 해결하지 못하는 고독이 있는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결혼은 천생배필이라고 하였다. 양진녕부부의 글이 실린후 로평은 즉시 《랑만인가 아닌가?(속편)》으로 답변했다. 로평은 글에서 자신은 늙은 남편에 젊은 부인을 반대하는것은 아니고 단지 명예, 지위, 재산, 용모 등 표면적인 아름다움을 행복에 이르는 탄탄대로라고 생각하는것을 반대할뿐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세속적인 생각은 소위 랑만을 거짓으로 만들었으며 사람의 밝은 눈과 인생의 진실에 대한 느낌을 은페한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늙은 남편에 젊은 부인의 사랑에 대해 한마디로 “랑만이다, 아니다”라고 말할수 없으며 부정해서도 안된다. 양건업이 저술한 신판 《양진녕전》에서는 약 1만자의 편폭으로 양진녕과 옹범의 사랑을 서술했다. 양건업은 《하느님의 선물》이란 장절에서 전문 양진녕과 옹범이 알게되여서부터 결혼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서술했다. 여러사람들이 프랑스의 대작가 빅또르 유고와 에스빠냐의 대화가 피카소가 80여세에 18살의 소녀와 사랑을 나눈 이야기를 할 때 양진녕은 “난 피카소와 다릅니다. 피카소는 여러번 리혼하고 여러번 결혼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양진녕은 또 “오, 달콤한 천사여! 넌 바로 하느님이 내리신 최후의 선물이며 나의 창백한 령혼이 다시 청춘으로 돌아올수 있도록 한 기쁨의 극치이다”고 말했다.  
68    늙은 남편에 젊은 부인의 랑만적인 사랑 (2) 댓글:  조회:7302  추천:0  2014-08-02
늙은 남편에 젊은 부인의 랑만적인 사랑 (2)   (번역)     한번은 그녀가 친구와 함께 거리에 나갔는데 또 양진녕한테서 전화가 왔다. 옹범이는 핸드폰을 들고 말했다. “저는 지금 전번에 여러번이나 말했던 그 친구와 함께 거리에 나왔어요.” 곁에서 듣고있던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양교수가 널 사랑하는게 아니야? 그분처럼 신분과 지위가 있는 사람이 널 사랑하지 않으면 그렇게 빈번하게 전화를 하지 않을거야.” 옹범은 부끄러워 얼굴이 홍당무우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꽃피는 5월에 양진녕은 옹범에게 함께 향항의 석오에 놀러가자고 청했다. 그날은 비가 내렸는데 석오촌에서 해변으로 통하는 길은 가파로왔다. 안전을 위해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았다가 그 길을 다 지나자 손을 놓았다. 그때에야 그녀는 양진녕이 자신의 손을 잡는 감각을 좋아한다는것을 깨달았다. 2004년 7월에 옹범은 친구들과 함께 내몽골려행을 떠났다. 그녀는 망망한 초원에서 또 양진녕의 전화를 받았다. 양진녕은 자신이 북경의 청화대학에 도착했다면서 놀러오라고 요청했다. 양진녕은 해마다 얼마간의 시간을 북경에서 지내다가  또 얼가간의 시간을 향항에서 보내군 했다. 며칠후 옹범은 북경에 도착했다. 양진녕은 이미 가정부에게 부탁하여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놓았다. 옹범은 양진녕이 미국에서 오래동안 살았지만 생활방식은 매우 전통적인것을 발견했다. 양진녕은 회양료리를 좋아하고 홍차를 즐겨 마셨다. 두 사람은 접촉이 많아지면서 서로 호흡이 잘 맞는것을 느꼈다. 북경에서 잠간 머무른후 옹범은 또 산서려행을 떠났다. 하지만 려행길에 그녀는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자꾸만 양진녕의 웃는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에 빠진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당황해졌다. 이것이 어찌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생각해보니 양진녕은 나이가 많은외에 남자에게 있어야 할 모든 매력을 가지고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매우 걱정되기도 했다. 필경 54살의 나이차가 있었기때문이다. 반세기도 더 되는 이 나이차이를 극복할수 있을가? 광주에 돌아온 옹범은 비록 몸은 광주에 있었지만 마음은 양진녕에게 가있었다. 그녀는 영문시를 써서 메일로 양진녕에게 보내군 했다. 양진녕은 꼭꼭 시를 수개해서는 다시 보내주군 했다. 후에 옹범은 자신이 지은 시를 인테넷에 올려는데 향항 중문대학 번역학부의 몇몇 박사들은 그녀의 영문시가 운률과 미감방면에서 확실이 천부적인 재능이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리움에 모대기던 두 사람은 2004년의 국경절련후일을 맞게 되였다. 양진녕과 옹범은 함께 광주에서 멀지 않고 사람들도 많지 않은 북해로 려행을 따나자고 약속했다. 옹범이가 사진찍기를 좋아한다는것을 알고있는 양진녕은 그녀에게 마쯔시다디지털카메라를 사서 선물했다. 그해 국경절련후에 북해에는 손을 꼭 잡은 82세와 28살의 련인이 나타났다. 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두둥실 떠오르는 바다사이에 나이를 잊은 련인은 발자국을 남겨놓았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쌍인자전거를 타고 야자숲의 좁은길로 달리기도 하면서 즐겼다. 북해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후 며칠이 지나서 양진녕은 전화로 옹범에게 청혼했다. 광주에서 청혼전화를 받은 옹범은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청혼하면서 장미꽃을 선물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하고 물었다. 양진녕은 황급히 웃으면서 “다음번에 꼭 보충하겠소”라고 승낙했다. 2004년 11월에 옹범은 부모가 있는 고향 조주로 돌아갔다. 옹범의 아버지 옹운광은 옹범을 매우 총애했다. 그날밤에 옹범은 부모한테 자신과 양진녕의 일을 털어놓았다. 28살의 젊디 젊은 딸이 80세를 넘은 할아버지와 결혼하겠다는 말을 들은 옹운광부부는 깜짝 놀랐다. 옹범은 참을성 있게 설복했다. 개명한 부모는 결국 딸의 선택을 막지 못했다. 부모가 동의한다는 뜻을 보이자 옹범은 즉시 이 기쁜 소식을 양진녕에게 전해주었다. 이틑날에 양진녕은 어디에서 결혼수속을 해주는가를 수소문했다. 그제야 그는 외국국적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녀자측의 호적이 있는 소재지에 가서 결혼등록수속을 밟아야 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양진녕은 옹범에게 전화를 걸어 결혼등록수속을 할 준비를 하라고있으라고 부탁했다. 그날 저녁에 그들은 각가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들의 편지를 받은 친구들은 모두 매우 격동되였다. 이틑날 아침에 향항 중문대학의 교수들은 신비하게 수군거리고있었는데 양진녕이 젊은 부인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옹범이라면 서른살도 되지 않은 처녀가 아닌가?” “그러게 말이네.” “하여튼 축하할 일이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부러워하는 축들이였고 “아니, 아무리 저명한 교수라도 그렇지? 나이가 얼마인데 주책이 없이…” “자신의 명성으로 젊은 아이를 꼬시다니?” 가당하지 않다는듯이 왼고개를 젓는 사람들은 질투하는 축들이였다. 어디서 소식이 흘러나갔는지 싱가포르언론에서 양진녕과 옹범이 곧 결혼하게 된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그 소식을 듣고 기자들이 물고늘어지는 바람에 옹범은 핸드폰을 받을 엄두도 못냈다. 2004년 12월 22일에 양진녕과 옹범은 옹범의 고향으로 날아갔다. 옹범의 부모는 이미 호텔에 자리를 마련해놓고 기다리고있었다. 양진녕은 자신의 자녀벌 되는 젊은 장인과 장모를 만나 인사했다. 12월 24일에 양진녕과 옹범은 양진한(양진녕의 동생)부부와 함께 가서 결혼등록수속을 밟았다. 이로서 82세의 늙은 할아버지와 28세의 젊은 녀인은 정식으로 부부로 되였다. 양진녕과 옹범은 2메터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선후로 민정국의 대문으로 들어갔다가 이윽하여 나란히 손을 잡고 나왔다. 82세의 할아버지와 28살의 젊은 녀인의 결혼은 세인들의 화제를 모았다. 무려 54세의 나이차가 나는 그들 부부는 금슬좋은 부부로 유명했다. 당시 양진영은 중국언론에 “지금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건간에 30년이 지나고 40년이 지나면 모두 우리의 결혼이 랑만적인 일이였다는것을 알게 될것이다”고 말했다. 음력설기간에 양진녕은 옹범을 따라 광주로 돌아가 광주에 있는 옹범의 친구를 청해놓고 연회를 베풀었다. 양진녕은 젊은 부인의 친구들을 특별히 잘 대해주었으며 그들과 잘 어울리였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젊은이들에게 자신과 옹범의 결혼을 어떻게 보는가고 물었다. 축복한다는 말을 들은 그는 이렇게 물었다. “그럼 자네들의 부모는 남자친구의 년령에 대해 제한하지 않는가 보군.” 결혼후 옹범은 자신의 졸업론문제목을 《허연충의 시학번역사상을 론함》이라고 고쳤다. 허연충은 북경대학의 저명한 교수인데 양진녕이 청화대학에 있을 때의 동창생이였다. 그녀는 론문을 쓰면서 허교수의 많은 작품을 읽었으며 허교수의 직접적인 가르침도 받았다. 졸업론문을 쓰는 시간이 매우 촉박했지만 옹범은 참답게 론문집필을 마쳤으며 지도교수의 호평을 받았다. 광동외국어대외무역대학에서는 연구생의 론문을 닉명의 형식으로 심사평의했다. 그리고 교내외에서 각각 한명의 전문가를 청해서 매 연구생의 졸업론문에 대해 심사평의했다. 두 전문가는 모두 옹범의 론문에 대해 비교적 높은 평가를 했다. 이전에 옹범의 생활방식은 서양식에 가까왔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기 좋아했고 한밤중에 친구들과 채팅하기를 즐겼으며 아침에 늦게 일어나군 했다. 결혼후 그녀는 점차 자신의 시간을 조절하여 남편과 같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는데 매우 규칙적이였다. 결과 그녀의 건강상태가 더 좋아졌고 얼굴혈색이 좋아지고 윤기가 흘렀다. 향항의 저택에는 가정부가 없었기때문에 옹범은 직접 두 사람의 아침을 준비했다. 두컵의 우유, 몇쪼각의 빵, 두개의 닭알지짐으로 간단한 아침을 먹은후 양진녕은 학교에 나가군 했다. 몇년래 양진녕의 주요한 사업은 자신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리용하여 향항의 중문대학과 북경의 청화대학에 정상급학술인재를 인입하고 자금을 모아 고등학술연구사업을 발전시키는것이였다. 근 1년사이 그는 청화대학에 1000만딸라의 자금을 모아들였고 미국의 프린스턴(普林斯顿)대학의 중국인후예학자이며 당대 계산기방면에서 세계적권위인 요기지교수를 청화대학에 초빙했다.  
67    늙은 남편과 젊은 부인의 랑만적인 사랑 (1) 댓글:  조회:7868  추천:0  2014-08-02
늙은 남편과 젊은 부인의 랑만적인 사랑 (1)   (번역)     2004년에 82세 되는 양진녕은 28살밖에 안되는 옹범과 결혼하여 화제를 모았다. 1976년 7월에 광동성 조주시에서 출생한 옹범(翁帆)은1994년에 산두대학 외국어언문학부 영어B반에 입학했다. 1995년 여름방학에 산두대학에서는 첫 세계화교물리학대회를 열었는데 양진녕이 부인 두치례와 함께 이 대회에 참석하게 되였다. 학교에서는 옹범을 선발하여 양진녕과 두치례를 영접하는 일을 책임지게 했다. 청순한 19살 처녀였던 그녀는 당시 저명한 과학자부부를 매우 흠모했다. 그후 그녀는 여러해동안 양진녕부부와 서신거래가 있었다. 옹범은 양진녕을 만나기전에 책과 인터넷을 통해 노벨상을 수여받은 이 과학자에 대해 얼마간 알고있었다. 위대한 물리학가로서 양진녕은 리론물리학에 거대한 기여를 했다. 그런 기여로 하여 중국인출신으로는 처음 리정도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 양진녕(杨振宁)은 1922년 10월 1일에 안휘성 합비시에서 태여났다. 중학교때 양진영은 매우 총명했는데 특히 수학천재였다. 어느날에 양진녕은 아버지를 보고 “아빠, 난 커서 꼭 노벨상을 수상할테야!”하고 말했다. 아들이 큰 포부를 품은것을 본 양무지는 매우 기뻐하며 공부를 잘하라고 고무해주었다. 양진녕의 아버지 양무지교수는 서방의 근대수학을 제일 먼저 중국에 인입한 선구자의 한분이다. 1923년에 양무지는 미국류학시험에 합격되여 먼저 미국서부의 스텐폴드대학에서 1년간 학습하였다. 1년후 양무지는 미국 중부의 시카코대학에 진학하여 석사와 박사학위를 따냈다. 20세기 30년대에 양무지는 청화대학 수학교수로 있었는데 그때 청화대학 수학계에서는 많은 세계급 수학가를 양성해냈다. 그 중에서 가장 걸출한 사람은 화라경과 진성신이다. 양진녕은 고중시절에 화학만 공부했을뿐 물리를 배우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련합대학에 들어갈 때 화학학부를 지망했다. 그러나 련합대학에 입학한 후 자신이 물리학에 매우 큰 흥취를 가지고있는것을 발견한 그는 물리학부로 들어갔다. 그때 그가 중학교때 노벨상을 수상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말이 온 련합대학교에 퍼졌다. 사람들은 “양무지의 아들이 수학을 매우 잘하는데 왜서 아버지처럼 수학을 전공하지 않고 물리학부를 선택했는가 했더니 원래는 수학부문에 노벨상이 없었기때문이였군”하고 말했다. 옹범이가 인터넷에서 양진녕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던 2004년 2월의 어느날에 양진녕한테서 전화가 왔다. 양진녕은 중문대학에서 만나자고 요청했다. 1998년에 산두대학 영어학부를 졸업한후 옹범은 먼저 산두의 한 기업에서 사업하다가 1개월후 심수의 한 골프구락부에 가서 사업했다. 그 시기에 한 향항청년과 2년동안의 혼인경력이 있었지만 감정이 맞지 않아 헤여진후 2002년에 다시 광동외국어대외무역대학 번역학부의 석사반에 들어가 연구생공부를 시작했다. 2003년말에 광동외국어대외무력대학에서 연구생공부를 하고있는 옹범은 향항려행을 떠났다. 2011년에 청화대학 건축학원에 들어가 박사공부를 했다. 2003년에 양진녕의 부인 두치례가 미국에서 사망되였는데 광주에 있던 옹범은 그 소식을 모르고있었다. 양진녕의 결발부인은 저명한 항일명장이며 국민혁명군 륙군 중장이였던 두률명장군의 딸 두치례이다. 양진녕은 1949년의 크리스마스 휴가일에 한 호텔에서 두치례를 만났다. 두치례는 이전에 그가 련합대학부속중학교에서 교학할 때의 학생이였다. 그들은 1950년 8월에 결혼했다. 결혼후 그들은 푸린스둔에서 행복하게 살면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보았다. 1951년에 맏아들 양광락(현재 컴퓨터공정사)이 태여났고 1958년에 둘째아들 양광우(현재 화학가)가 출생했으며 1961년에 딸 양우례(의사)가 출생했다. 현재 세 자녀는 모두 미국에 거주하고있다. 두치례는 2003년 10월에 병으로 사망되였다. 얼마후 양진녕을 만났을 때 옹범은 매우 격동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다. 9년만에 다시 만나서 이미 82세로 된 양진녕교수를 앞으로 달려가 부축해 되는지 어째야 되는지 결단을 내릴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눈앞의 양진녕교수가 매우 정정하고 사유와 행동이 매우 민첩한것을 보고 놀랐다. 옹범은 양진녕교수가 9년전처럼 정력이 왕성한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그번의 상봉에서 두 사람은 매우 즐어워했다. 옹범이 양진녕교수앞에서 리과학생이 학술계의 거인을 대하는것처럼 그렇게 긴장하고 어색해하지 않았기때문에 편하고 친근하게 대화를 나눌수 있었다. 양진녕은 자신의 지난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매우 총명했던 양진녕은 중학교도 채 졸업하지 않은 16살 되는 나이에 서남련합대학에 들어갔으며 20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서남련합대학의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1945년에 미국에 건너가 시카고(芝加哥)대학에 들어간 그는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49년에 프린스턴(普林斯顿)대학연구원에 들어가 박사후공부를 하면서 리정도와 합작하기 시작했다. 1957년에 양진녕은 리정도와 함께 공동히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들 두 사람은 가장 먼저 노벨상을 수상한 중국인출신이다. 후에 향항의 한 방송국에서 양진녕을 방문했는데 그들은 양진녕게 일생에서 가장 큰 기여가 무엇인가고 물었다. 양진영은 그때 “나의 가장 큰 기여는 중국사람들을 도와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는 심리를 극복하게 한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후 양진녕과 리정도는 누구의 이름을 앞에 놓겠는가 하는 문제때문에 다투었다. 1962년에 《뉴욕의 손님》이란 한편의 글 때문에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렬했다. 그 당시(두 사람이 서로 자신의 이름을 앞에 놓겠다고 다툴 때) 7살 되는 양진녕의 아들 양광락은 “난 앞으로 혼자서 노벨상을 수상하겠어”하고 말했다. 1977년에 양진녕은 량은좌 등과 함께 “미국화교협회”를 창립하여 중미관계를 촉진했다. 양진녕은 프린스턴대학연구소 교수, 뉴욕주립대학 석계분교 아이스탄강좌 교수와 리론물리연구소 소장을 력임했다. 또 1986년부터 향항중문대학 박문강좌 교수로 있었고 1995년에는 국립화교대학명예교수로 초빙되였으며 1997년에는 청화대학 고등연구중심 영예주임을 맡았고 1999년에는 정식으로 영예퇴직을 하고 청화대학 교수를 맡았다. 2003년말에 북경에 들어와 거주하면서 선후로 중국과학원, 미국국가과학원, 영국황가학회, 로씨야과학원, 대만중앙연구원, 로마교황학원 및 유럽 여러 나라와 남아메리카주의 과학원 등의 원사 영예직함과 영예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광동동관리공학원 명예교장을 맡고있다. 새 중국이 성립된후 양진녕은 등가선 등처럼 귀국하여 나라를 위해 일하지 못했다. 1971년부터 양진녕은 여러차례 중국에 와서 친척방문을 하고 강좌를 했으며 중미과학기술교류와 합작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시기 주은래가 그더러 조국에 돌아와 사회주의건설에 힘을 이바지하라고 청하였지만 그는 중국의 조건이 차하다는 리유로 거절했다. 2000년이후 양진녕은 자기가 자라난 조국으로 돌아왔다. 양진녕은 자기의 령혼심처에서 고려가 가장 많았던 문제는 자신의 중국뿌리와 미국국적에 관한 문제였다고 말했다. 양진녕이 미국국적에 가입할 때 그의 아버지는 반대하면서 그와 부자관계를 끊겠다고 성명을 발표하면서 죽어도 양진녕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 일은 절대다수 국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몸부림일것이다. 지금 양진녕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것은 그가 조국으로 돌아왔기때문이다… 그번 만남이 있은후 양진녕은 밤낮 옹범의 생각에 빠져버렸다. 그녀의 청순한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떠오르며 잠을 이룰수 없었다. 그의 고독한 마음을 진솔하고 사랑스러운 녀인이 따뜻하게 해주었던것이다. 양진녕은 짬이 있을 때마다 그리움을 참지 못해 옹범한테 전화를 걸군 했다. 옹범은 과외시간에 양진녕의 전화를 받는것이 점점 습관되였다. 과학할아버지의 전화를 받는것은 이미 그녀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으로 되였다. 그녀는 늘 전화가 오던 그 시간이 되여도 양진녕의 전화를 받지 못할 때는 허전함을 느꼈다.      
66    장개석과 대계도가 함께 사랑했던 일본녀자 댓글:  조회:6931  추천:1  2014-07-27
장개석과 대계도가 함께 사랑했던 일본녀자   (번역)     장개석에게는 정식으로 맞아들인 4명의 안해외에 정부가 많았는데 그중에는 일본녀자도 있었다. 1913년에 손중산이 령도한 제2차혁명이 실패했다. 손중산은 일본에 가서 망명생활을 했는데 원세개정부는 손중산을 위수로 하는 혁명당인을 잡아들이면서 일본정부에 손중산체포를 협조해줄것을 요구했다. 일본정부는 자신의 리익을 위하여 겉으로는 원세개정부의 요구를 들어주는척 했지만 암암리에 우익단체 “흑룡회”의 조직원들을 파견하여 손중산을 보호해주었다. 그무렵에 상해에서 제2차혁명에 참가했던 장개석(蒋介石)과 대계도(戴季陶)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들은 함께 일본으로 도망가서 손중산의 거처를 자주 드나들었다. “흑룡회”에는 신엔 미찌꼬(津渊美智子)라는 용모가 매우 아름다운 하녀가 있었다. 장개석이 올때마다 이 하녀는 매우 열정적으로 맞아주었다. 그렇게 여러번 접촉하면서 눈이 맞은 두 사람은 남몰래 동거하기 시작했다. 미치코는 장개석과 가까이 지냈지만 대계도와도 친했다. 그후 2년동안 장개석은 중국과 일본을 오갔는데 매번 일본에 체류하는 기간에는 늘 미찌꼬와 함께 있었다. 그러다가 1916년 6월에 원세개가 죽자 장개석과 대계도는 중국으로 돌아갔다. 1920년 가을에 생각지도 않았던 날벼락이 두 사람을 덮쳤다. 장개석의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미찌꼬가 서너살이 된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서있었다. 장개석은 반가움과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반가운것은 옛 사랑을 다시 만나서이고 당혹스러운것은 아이가 누구의 아이일가 하는것 때문이였다. 다행히 미찌꼬는 “대계도의 혈육을 데리고왔다”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개석은 밖으로 뛰여나갔다. 몇층만 올라가면 대계도의 집이였다. 장개석에게서 미찌꼬가 아이를 데리고왔다는 말을 들은 대계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누가 들을세라 장개석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건 우리 둘의 황당했던 과거의 일입니다. 한때의 풍류였는데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지금은 처자가 있잖습니까? 알다싶이 우리 집사람이 얼마나 사납습니까? 그 암펌이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난 끝입니다. 그러니 내 주소도 모르고 찾을 방법도 없다고 전해주십시오.” 장개석은 대계도가 시키는 대로 둘러댔다. 다 듣고 난 미찌꼬는 한바탕 울어댔다. “당신들은 다 형편없는 놈들이야. 자신의 혈육도 필요없다니 나도 필요없어!” 미찌꼬는 아이를 내려놓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장개석이 황급히 쫓아가 찾아보았지만 종적이 묘연했다. 장개석은 미찌꼬가 팽개치다싶이 두고간 사내아이에게 장위국(蒋纬国)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족보에도 올렸다. 생모가 누구인지는 적지 않았다. 고향에 보내 결발안해 모복매(毛福梅)와  첩 요야성(姚冶诚)이 3개월씩 돌아가며 키우게 했다. 부지런하고 현숙한 모복매는 14살밖에 안된 장개석에게 시집을 와서 내조를 잘하면서 장경국을 낳았지만 1927년에 장개석에게 리혼을 당했고 1939년 12월 12일에 불행하게도 폭탄에 맞아 사망되였다. 요야성은 남편이 아편중독자였기에 핍박에 의해 가무청에 들어가 사교계의 꽃으로 되였다. 그무렵에 장개석을 만나 첩으로 되였지만 봉건사상이 뿌리깊었던 장개석의 부모가 반대하였기에 장개석의 4명처첩중에서 유일하게 정식명분이 없었다. 장개석과 결혼한후 아이를 낳지 못했던 그녀는 모복매가 장개석과 리혼한후 장위국을 도맡아키웠다. 그녀는 1949년에 장위국을 따라 대만에 가서 1966년에 사망될 때까지 장위국과 함께 살았다. 그런데 사실 미찌꼬는 장개석과 대계도와 살면서 장위국외에 1916년 10월 16일에 둘째아들 대안국(戴安国)을 낳았고 1920년에 또 딸 안세방(颜世芳)을 낳았다. 이때문에 대안국과 안세방만 대계도의 자녀이고 장위국은 장개석의 아들이라는 설이 떠돌았다. 미찌꼬는 1977년에 사망되였다. 1989년에 장위국은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 나도 모른다. 궁금하지만 밝혀낼 방법이 없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어 “장개석의 아들이여도 좋고 대계도의 아들이여도 좋다”는 말을 했다. 사실여부를 증명해줄 사람들은 끝내 입을 열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65    모택동의 신변에 잠복한 군통특무 댓글:  조회:6403  추천:1  2014-07-19
모택동의 신변에 잠복한 군통특무   (번역)     1913년 2월 18일에 절강성 선거현 하각향 서륙촌에서 출생한 심지악은 공산당의 신분으로 자신을 감추면서 연안의 모택동신변에 잠복해있은 군통특무였다. 1933년에 22살 되는 심지악은 상해복단대학에서 공부하면서 공산당동학들의 영향을 받아 적지 않은 공산주의서적을 읽었고 로동자운동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후 공산당을 통해 포동석탄회사에서 로동자로 있으면서 로동자운동을 지도하다가 붙잡혀 국민당정부의 감옥에 들어갔다.  심지악은 비록 로동자운동을 동정하고 좌파청년들과 접촉했지만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대립은 한고향사람인 심지악이 총명하고 예민한것을 보고 호감을 가졌다. 대립은 심지악을 설복하여 비밀리에 국민당특무조직에 가입시키고 단선련계를 가졌다. 대립은 심지악에게 중국공산당조직에 가입하여 잠복해있으라고 지시했다. 심지악은 대립의 지시대로 로동자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을뿐만아니라 중국공산당조직의 정보를 얻기 위해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상해에서 공산당의 정보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1937년 봄에 서안사변이 결속된지 얼마안되여 국민당과 공산당이 2차합작협의를 맺었지만 국민당정부는 공산당에 대해 우려하면서 의연히 공산당을 심복지환의 대적으로 인정했다. 은페된 전선은 쌍방의 승부를 결정할수 있는 주요한 전장(战场)이였다. 대립은 장기적인 관찰을 거쳐 심지악이 성숙되고 신중하며 조심스럽고 빈틈이 없어 능히 중임을 담당할수 있다고 인정했다. 대립은 심지악에게 공산당조직의 심장인 연안에 깊이 잠복해있으면서 정보를 수집하라고 지시했다. 대립의 명령을 받은 심지악은 혁명의 성지인 연안에 있는 《항일군정대학(원 홍군대학)》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조직에 신청했다. 심지악은 상해에서 다년간 로동자운동을 지도했고 국민당감옥에 갇힌적이 있었으며 복단대학에서 맑스주의서적을 읽은적이 있었기에 공산당조직에서는 그의 신청을 곧바로 비준했다. 연안에 도착한 심지악은 항일군정대학 제2기생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심지악은 재치있고 로련하며 학습성적이 우수했기때문에 학교간부들의 호감을 샀다. 연안지도층에서는 조국의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진보청년들속에 적지 않은 국민당특무들이 혼입했을것이라고 단정했다. 엄밀하게 판별하고 고찰하는외에 돌연습격으로 방법으로 항일군정대학 학생들속에서 특무들을 사출해냈다. 어느날에 어느 교원이 수업강의를 하다가 갑자기 손으로 학생들을 가리키며 “저 보시오. 국민당이 파견한 특무놈을 좀 보시오!”하고 큰소리를 친다. 그러면 담이 작은 학생들은 몸을 떨면서 즉시 낯색이 파랗게 질린다. 그때 학생들속에 있던 사업일군들이 공포에 떨고있는 학생들을 붙잡으면 틀림없는 특무였던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황에서도 심지악은 태연자약했기에 신분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공산당요원들과 친하면서 중공중앙기관의 정보를 수집했다. 심지악은 성적이 우수했기때문에 졸업후 모택동의 신변에서 사업할 비서중의 하나로 선발되였다. 심지악은 신분을 감추고 깊이 잠복해있었다. 항일전쟁이 폭발된후 중공중앙에서 발부한 약간의 중요서류와 심지악이 수집한 중요정보들은 비밀리에 중경으로 전달되였다. 1933년에 대립의 설복에 의해 군통특무로 되여서부터 1941년 겨울에 중경으로 돌아가기전까지 심지악은 공산당핵심조직에 9년동안 잠복해있었다. 심지악과 함께 사업한 적이 있는 장애평은 심지악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었다. “심지악은 9년동안 공산당원으로 있는 기간에 7년은 모범당원이였다. 그는 개성이 주은래와 비슷했는데 내성적이고 온화하고 함축적이였다.” 1994년 2월에 심지악이 대북에서 사망되였을 때 대북 《중앙일보》에 실린 추모문장에는 “중공의 전임 국방부장 장애평은 심지악을 ‘지용이 겸비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두 주인을 섬기면서 량쪽이 모두 상하지 않게 했다’고 평가했다”는 구절이 있었다. 바로 이 “두 주인을 섬기면서 량쪽이 모두 큰 손실을 입지 않게 했다”는것은 사람들에게 무한한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숱한 사람들이 그 비밀을 알려고 심지악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누구도 심지악의 입에서 반마디의 해석도 듣지 못했다. 중국인민해방군이 도강을 시작하던 1949년 3월에 대량의 국민당군은 주산(舟山)으로 철퇴했는데 그 시기 심지악은 보밀국의 “소절정보소(苏浙情报站)”의 소장직을 맡고있였다. 심지악은 주산에서 정보소 소장직을 맡고있는 1년기간이 자신의 정치생명에서 전환점이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1950년 3월에 보밀국에서는 중국공산당 대만성사업위원회 서기 채효건의 공산당간첩사건을 해명했다. 채효건은 중공화동국에서 파견한 지하당 녀당원 주심지를 고발했다. “주심지는 대만전략방어도를 포함한 중요한 군사정보를 가지고 주산으로 달아났는데 곧 배를 타고 상해로 가려고 준비하고있습니다다.” 공산당의 변절자 채효건을 통해서 이런 정보를 장악한 대북보밀국은 주산의 정보소 소장 심지악에게 비밀전보를 보내 꼭 녀공산당원 주심지를 붙잡으라고 명령했다. 만약 주심지를 붙잡지 못하게 되면 중국인민해방군이 주심지가 전해준 정보를 리용하여 대만에 등륙할수 있다고 했다. 이 위급한 정황에서 조심스럽고 빈틈이 없는 심지악은 시간앞에서 달리는 정신으로 수색작업을 벌렸다. 그는 주산도(舟山岛)의 45만명 군민들속에서 주심지를 찾아내여 붙잡았다. 1905년에 절강성 진해현에서 출생한 주심지는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혁명렬사이다. 그녀는 본명이 주이음이고 애명이 주계봉였는데 혁명에 참가한후 이름을 주풍으로 고쳤다. 5.30운동후 혁명에 참가한 주심지는 194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49년 겨울에 대만에 파견되여 정보수집사업을 출중하게 완성하였다. 그녀는 반역자 채효건의 고발로 심지악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가 1950년 6월 10일에 대만 마장정 사형장에서 영용히 희생되였다. 2010년 12월 9일에 주심지렬사의 골회는 고향땅에 안치되였다. 2011년 7월 14일에 주심지렬사의 골회는 다시 절강성 진해혁명렬사릉원에 안치되였다. 심지악이 공을 세울 때는 바로 장경국이 특무계통을 정돈하려고 계획하고있을 때였다. 1950년 5월에 장개석은 심지악을 “대통령부자료소조” 석비훈련반 부주임으로 임명했다. 주요임무는 “대통령부자료소조” 주임인 장경국을 협조하여 석비훈련반의 툭무를 배향하는 일이였다. 이때는 또 심지악과 장경국의 관계가 밀접한 시기였다. 그후 심지악이 대진방위사령부 정치부주임을 맡은 4년남짓한 기간에 장경국은 대진에 자주 찾아오면서 심지악과 조석으로 만나서 심후한 감정을 쌓아갔다. 심지악도 에누리없는 “태자계(太子系)”의 사람으로 되였다. 1958년 봄에 심지악은 조사국(调查局) 부국장직을 맡았고 1964년에는 조사국 국장으로 승진되여 대만 “조사국의 아버지”로 불리웠다. 1979년 3월에 심지악은 리직했지만 장경국은 그를 자신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장경국은 그를 “대통령부 국책고문”으로 초빙하고 대통령부인 장경국판공실옆에 심지악의 사무실을 만들어놓았다. 장경국이 사망될 때까지 심지악은 줄곧 국민당정부에서 가장 신임하는 특무계통의 원로였다. 심지악은 1990년에 전위선암말기였는데 1993년 11월에 암세포가 페부에까지 확산되였다. 그 기간에 심지악은 안해 서로(徐露)의 권고대로 북경에 가서 명의를 찾았다. 북경에 체류하는 기간에 심지악은 북경조어대 국민관에 들었지만 대륙방면의 초대를 받지 않겠다고 고집하면서 주숙비를 포함한 전부의 비용을 자신의 돈지갑을 털어 물었다. 대륙의 최고층에서 심지악을 접견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저는 북경에 병을 보이러 왔을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하고 거절했다. 심지악의 옛 동창생인 장애평은 명나라의 명의인 리시진의 후대를 찾아서 심지악의 병치료를 해주도록 배치했다. 치료기간에 장애평과 심지악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 국가주석 양상곤은 심지악을 만나 대륙을 떠난후 대만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알려줄것을 바랐다. 대륙방면에서는 심지악이 대만에서 생활한 기간에 대한 기록이 공백이였기때문이였다. 1994년 2월에 심지악은 병으로 대북에서 사망되였다. 82세로 일생을 마치면서 그는 그 어떤 서류도 세상에 남기지 않고 수많은 력사의 비밀을 가지고갔다.    
64    세번 약속을 어겨 림표의 운명을 개변시킨 장개석 댓글:  조회:6068  추천:2  2014-07-13
세번 약속을 어겨 림표의 운명을 개변시킨 장개석   (번역)     손중산이 사망된후 왕정위와 장개석의 권력다툼은 점점 심해졌다. 장개석은 울적한 가슴을 달래려고 황포군관학교 마당에서 산책하다가 황포군관학교 4기학원들이 수업을 보고있는 교실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학생들은 전술과수업을 보고있었다. 장개석은 조용히 교실로 들어가 뒤쪽에 앉았다. 지도교원은 얼마전에 있었던 혜주공격전을 실례로 그번 전투가 승리할수 있었던 원인을 학생들에게 분석하게 했다. 마침 그번 전쟁은 장개석이 직접 지휘한것이였기때문에 장개석은 귀가 솔깃하여 듣고있었다. 학생들은 륜번으로 교단에 올라 자신의 견해를 털어놓았다. 장개석은 듣기만 하고 가타부타 태도를 표시하지 않았다. 림표의 차례가 되였다. 림표는 말은 몇마디 하지 않고 흑판에 혜주지형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림표는 정신을 집중하여 성곽과 민가, 지세와 지표, 산천과 하류를 자세하고도 정확하게 그렸다. 장개석은 그 다음을 보지 않아도 림표가 인재라고 단정했다. 림표는 이미 이번 과제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손금보듯 환하게 꿰뚫고있었다. 용병지도(用兵之道)는 계획을 세우고 싸움을 시작하는데 있다. 림표는 전쟁의 정수에 대해 독특한 리해를 가지고있었다. 그런 림표는 장개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교실에서 살그머니 나온 장개석은 수행일군에게 수업이 끝난후 림표를 교장실로 불러오라고 분부했다. 얼마후 장개석은 림표와 비교적 긴 담화를 나누었다. 그때 림표와 나누었던 담화내용을 장개석은 10여년이 지난후에도 세절마다 생생하게 기억하고있었다. 그 시기 림표는 비록 햇내기학생에 불과했지만 자신의 속셈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고 말을 천금같이 아꼈다. 이왕에 다른 사람들과 담화할 때 장개석은 늘 많이 물어보고 적게 대답하여 시종 주동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림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림표는 물음에 대답할 때 한마디 말도 더 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심사숙고한후 적당하게 내뱉은 말이였다. 장개석은 이상야릇한 감각을 느꼈다. 젊은이라면 응당 혈기가 넘치고 생기발랄해야 했다. 림표처럼 이렇게 어리지만 침착하고 어른스러우며 궁리가 깊은 사람은 처음이였다. 장개석은 직감으로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청년이 보기 드문 장군감이지만 다스리기 어렵고 예측할수 없는 사람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사생간에 일문일답을 하면서 시간이 퍼그나 많이 흘렀다. 그때 교장판공실 비서 진립부가 노크하고 들어오면서 왕정위가 황포군관학교에 도착했으니 교장께서 나가 공무를 상의하기를 바란다고 청했다. “냥씨피(娘希匹)!” 장개석은 몹시 분개하여 입버릇이 된 욕설을 퍼부었다. 료중개가 사망된후 군관학교의 당대표직을 이어받은 왕정위는 장개석의 세력범위를 파고들어오려고 하고있었다. 장개석은 화가 났지만 당시 왕정위가 광동정부의 제1책임자였기에 참으면서 겉으로는 공손한척 했다. 왕정위가 또 황포군관학교에 찾아오자 장개석은 화가 난김에 몸을 돌려 바삐 나가느라고 림표에게 다시 보자는 말을 하는걸 잊었다. 림표는 자존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였다. 그는 이 교장이 변덕스럽고 진정으로 자신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느꼈다. 방금전까지도 크게 등용하겠다고 고무격려하던 장개석이 일시에 낯색이 변하여 자신을 한쪽에 내 팽개친채 말도 없이 나가자 림표는 모욕을 당한 감을 느끼면서 그 일을 항상 마음에 품고있었다. 며칠후 장개석은 또 일부 학생들을 불러 개별담화를 했는데 그중에 림표도 있었다. 장개석은 림표에게 졸업하면 총사령부에 들어와 사업하도록 배치해주겠다고 승낙했다. 림표는 먼저번의 일로 장개석을 원망하고있었지만 이런 승낙을 받고나니 매우 격동되였다. 림표는 공산당조직의 사람이였기에 자신이 졸업하면 조직에서 배치해놓은 엽정독립퇀으로 가게 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혈기왕성하고 웅대한 포부를 실현하려는 마음이 매우 강렬했던 림표에게 총사령부는 매우 큰 흡인력이 있었다. 장개석은 림표를 보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좋네. 내가 지금 싸움터에 나가야 되기에 후에 자네한테 련계하겠네!” 북벌전쟁에 나간 장개석은 호남성, 호북성, 강서성까지 쳐들어갔다. 그가 광동성을 떠난지 몇달이 되여 황포군관학교 4기생들이 졸업을 앞두게 되였다. 장개석은 진립부를 불러 4기생들의 졸업배치정황에 대해 물었는데 그중 전문적으로 림표에 대해서 물었다. 진립부는 당시 북벌군총사령부의 기요과장 겸 비서처 처장이였고 장개석의 심복이였다. 진립부는 “전 교장님의 뜻을 알겠습니다. 림표에 대해 조사한적이 있는데 그는 공산당분자일 가능성이 높고 그의 일부 친척도 중공(中共)의 주요인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때문에 그를 교장님의 곁에 둔다는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난 장개석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 황포군관학교가 공산당의 대본영이 되다니? 림표의 일은 다시 언급하지 않겠어. 난 승냥이를 내 곁에 불러들일수 없어!” 장개석과의 담화가 있은지 얼마 안되여 림표는 중공황포당단서기(党团书记) 웅웅에게 정황을 회보했다. 당시 웅웅은 “당신은 꼭 장개석의 신변에서 사업할수 있도록 이번 기회를 쟁취해야 하오. 그러면 앞으로 더욱 큰 역할을 하게 될거요”하고 확실하게 지시했다. 이런 지시를 받은후 림표는 총사령부에 들어가 사업할수 있도록 힘을 쓰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장개석은 두번째로 약속을 어겨 희망을 가득 품고있던 림표의 가슴에 차디찬 실망을 안겨주었다. 황포군관학교의 모든 졸업생들이 배치를 받았을 때에야 림표는 자신이 두번째로 조롱을 받았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후 섭영진을 통해 림표는 결국 엽정독립퇀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림표의 휘황한 군인생활이 시작되였다. 림표는 수많은 전투를 지휘하여 승리하면서 천하에 이름을 날리게 되였다. 1941년 10월에 림표가 구쏘련에 가서 상처를 치료하고 귀국할 때 중공중앙에서는 국민당방면에 통지하여 림표가 서안을 통해 연안으로 돌아올수 있게 도움을 줄것을 바랐다. 그때는 제2차국공합작시기여서 큰국면을 위해 량당에서 서로 도움을 주는 일이 가능했다. 장개석은 림표라는 말을 듣고 몹시 중시를 돌렸다. 그는 림표를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려는 생각을 가지고있었기때문이다. 장개석은 호종남을 불러 주의사항을 말한후 대립과 배합하여 림표의 안전을 책임질것을 부탁했다. 장개석은 호종남에게 “림표를 접대할 때 열정적이고 살뜰하게 대해주게. 림표가 친절감을 느낄수 있게 말이네”라고 지시했다. 호종남은 자신이 선배이고 림표보다 급이 더 높았지만 장개석의 명을 어길수 없어 한달음에 림표가 있는 서안주둔 팔로군판사처 소재지 칠현장으로 달려갔다. 당시 호종남은 10만대군을 거느린 큰 인물이였지만 림표에게 탄복하면서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림표는 워낙 과묵한 사람이였지만 호종남의 태도에 감염되여 말이 많아졌다. “술은 지기를 만나 마시면 1000잔으로도 모자란다”고 두 사람은 몇년전에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운적이 있었던 적이였다는것도 까맣게 잊고 권커니 작커니 하며 흥미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종남은 림표와 이야기를 끝낸후 아무도 모르게 림표와 대립을 만나게 했다. 림표와의 담화를 마치고 관저로 돌아온후 대립은 흥분제를 먹은듯 흥분하여 문을 닫아걸고 림표와의 담화내용을 정리했다. 대립이 중경으로 돌아온후 장개석은 서안으로 갔던 일이 소득이 있는가고 물었다. 대립은 “위원장께서 분부한 일을 림표에게 전달했습니다”라고 간단하게 회보했다. 대립은 공을 세우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여서 밥이 다 되기전에는 뚜껑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밥이 다 되면 다른 사람들이 짐작하지 못하는 큰 “폭탄”을 터뜨리군 했다. 대립이 감추기를 좋아하는 성격때문에 장개석은 림표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은것이라고 여겨 그 일에 대해 다시 묻지 않았다. 림표도 장개석이 자신을 중시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1971년에 림표가 비행기추락으로 사망되였을 때 장경국은 장개석에게 림표에 대한 서류를 발견하였다고 보고했다. 그것은 대립이 서안에서 림표와 비밀담화를 했을 때의 서면자료였는데 몇십년동안 방치되여 먼지로 뒤덮여있었다. 그 서류를 가져오라고 해서 돋보기를 끼고 자세히 읽어본 장개석은 낯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두손을 부르르 떨면서 탄식했다. “우농(대립의 자)이 나의 큰일을 그르쳤구나!” 구경 대립이 어떻게 큰일을 그르쳤는지는 알수 없다. 그러나 결과로부터 볼 때 공을 세우기 좋아하는 대립의 성격이 군사천재 림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장개석의 계획을 다시 한번 허사로 되게 했던것이다.    
63    호색한 대립이 제일 총애한 군통미녀 댓글:  조회:7470  추천:2  2014-07-06
호색한 대립이 제일 총애한 군통미녀   (번역)     대립(戴笠)은 유명한 호색한이였는데 그가 일생중에서 범한 녀인은 부지기수였다. 녀색을 즐기기로 소문난 그의 친구 당생명마저 “대립은 괴짜야. 그는 한시도 녀자를 떠나서 살지 못한단 말이야”하고 개탄했다. 군통(军统)에는 미녀가 모자라지 않았기에 군통의 대두목 대립은 권세를 미끼로 수많은 꽃같은 미녀를 마음껏 품에 안을수 있었다. 군통은 국민정부군사위원회조사통계국(国民政府军事委员会调查统计局)의 간칭이다.     군통의 수많은 미녀중에 대립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녀인은 “화매(华妹)”라고 불리운 진화(陈华)였다. 진화는 군통에서 “꽃중의 꽃”이라고 불리운 미녀였다. 그녀는 남달리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을뿐만아니라 머리까지 총명하여 대립을 도와 적지 않은 큰일을 성사시켰다. 어느 한번 대립은 진화를 안고 꿀맛을 본후 감개무량하여 “진화, 나의 천하에서 절반은 네가 날 대신해서 얻어온거야”하고 말했다. 집안이 가난하고 출신이 비천했던 진화는 생활의 핍박에 의해 13살이 되던 때에 어린 기생으로 되였다. 그러다가 16살에 손중산의 휘하부대에 참군했다가 상해경비국 사령 양호의 눈에 들어 그의 정부로 되였다. 진화에게 있어서 양호라는 큰 나무는 여간만 든든한 뒤심이 아니였다. 양호는 일찌기 동맹회에 가입했다. 원세개가 황제로 칭하던 1915년에 손중산은 군대를 동원하여 원세개를 쳤다. 양호는 강소군 총사령, 해군륙전대 사령 겸 대리해군총사령에 임명되였다. 1922년에 광주비상대통령부 근위대장, 광주비상대통령부 참군(参军)에 임명되였고 1924년에 북벌토적군 제2군 제1사 사장을 력임했다. 손중산이 사망된후 양호는 장개석과 의형제를 맺고 1927년에 상해경비사령으로 되였다. 그해 4월 12일에 양호는 진군과 함께 백숭희(白崇禧)의 지휘하에 장개석이 상해에서 일으킨 반혁명정변을 구체적으로 집행했다. 5월 7일에 “숙당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된 양호는 “숙당”기회를 리용하여 선후로 상해, 항주, 녕파 등지에서 공산당원 진연년, 선중화, 하적화, 양미산, 왕곤, 선중선, 동자흥, 탁란방, 호초금, 오자형 등을 살해했다. 1932년에 진화는 우연한 기회에 대립을 만나게 되였다. 당시 대립은 군통의 전신인 복흥사(复兴社)특무처를 세우고있었는데 각 방면의 인재가 급히 수요되였다. 대립의 전도를 보면 양호를 릉가할것이라고 여긴 진화는 대립의 수하로 들어가 사방에 소문난 복흥사의 미녀로 되였다. 진화는 미모가 뛰여났을뿐만아니라 사업능력도 매우 강했다. 그녀는 대립을 위해 수많은 인재를 발굴해냈다. 그녀는 교묘하게 류과청, 리복양 등 9명을 설복하여 대립을 위해 일하게 했다. 이 9명은 그후 군통의 철혈자객으로 되였다. 특히 류과청은 군통 상해구역 행동조장으로 임명된후 왕정위괴뢰정부의 중요한 한간두목을 암살하는데 큰공을 세웠다. 이때문에 대립은 군통미녀 진화를 새로운 안목으로 보게 되였다. 대립은 뛰여난 미모에 총명한 두뇌까지 가진 나젊은 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였다. 대립은 그녀를 품에 안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했다. 하지만 대립이 어떻게 사랑고백을 하든 진화는 딱 잘라 거절했다. 이때문에 대립은 몹시 락심하면서 고민했다. 그후 진화는 대립이 어릴 때 매우 고생스럽게 살았다는것을 알게 되였고 또 대립이 이름을 고친 사실에 감동을 받았다. 가난했던 대립은 1926년에 황포군관학교에 신청할 때 가지고온 돈이 다 떨어졌다. 그날에 마침 큰비가 내렸는데 돈이 없어 려관비까지도 빚지게 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삿갓(斗笠) 하나를 주면서 빚진 려관비까지 물어주었다. 그 사람이 바로 후에 군통고위층으로 들어간 서량이였다. 이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 대립은 자신의 이름을 삿갓을 쓰다는 뜻으로 대립(戴笠)이라고 고쳤던것이다. 비스한 경력을 겪은 진화는 대립에게 호감을 가지면서 그의 품에 안겨버렸다. 그때로부터 진화는 대립의 일생에서 유일한 이성지기로 되였다. 대립은 왕정위, 손과 등 중요한 인물을 감시하는 임무를 그녀에게 맡겼다. 진화는 자신의 뛰여난 지혜와 비범한 능력으로 어떤 임무든지 훌륭하게 완성하여 대립의 총애를 받았다. 바로 당생명이 말한것처럼 대립은 괴상한 사람이였다. 국민당특무 두목인 대립은 일생에서 영화부귀를 누릴대로 다 누리였다. 그는 부동산과 자가용차는 많았지만 현금과 금은보석은 별로 없었다. 때문에 대립은 녀인을 돈으로 유혹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그저 녀인을 데리고노는것으로 그쳤다. 항일전쟁시기에 진화는 상해간첩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대립의 요청을 받고 중경 증가암지구에 있는 대립의 거처로 날아간 진화는 기쁨에 겨워 대립의 품에 안겼다. 대립은 진화의 공로를 축하하기 위해 술상을 차렸는데 4가지 료리에 국 한사발뿐이였다. 그것을 본 진화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립은 진화가 입은 담비외투와 그녀가 신은 목긴 구두가 모두 수입품인것을 보고 선물용으로 쓰겠으니 남겨놓으라고 했다. 이렇게 되여 진화는 이불짐만 싸가지고 향항에 있는 집으로 날아갔다. 당시는 항일전쟁시기여서 중경에 물자가 결핍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부의 물건마저 놓아주지 않았으니 여기서 거리낌없이 재물을 긁어내는 대립의 수단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대립은 장개석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점차 장개석이 자신에 대해 경계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토끼를 잡고나면 사냥개는 삶아먹힌다”는 말이 생각나서 개탄하면서 진화를 보고 자신의 앞날이 근심된다고 말했다. 1946년 3월초에 대립은 북평으로 가기전에 진화의 거처로 찾아가 뜨거운 밤을 보냈다. 그것은 진화와 대립의 마지막 만남이였고 마지막 정사였다. 격정의 순간이 지난후 대립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는데 진화는 그의 마음이 몹시 무거운것을 알수 있었다. 한참후 대립은 정중한 어조로 진화를 보고 말했다. “진화, 내가 솔직하게 알려줄테니 잘 들어. 령감(장개석을 가리킴)이 날 버리려고 해. 난 곧 죽을거야.” 진화는 그때 대립이 죽을 마음을 품고있다고 인정했다. 그 당시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특무조직인 군통국은 취소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때는 대립이 한창 득세할 때였는데 군통특무는 수십만이였고 미국의 지지까지 받고있었다. 대립은 먼저 경정부 부장으로 되고 다음 해군사령자리를 노리려고 했는데 이것이 장개석의 의심과 불만을 자아냈던것이다. 장개석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였다. 그는 사람을 쓸 때 늘 부하의 세력이 너무 커서 통제불가능하게 되는것을 방지했다. 장개석은 일생에서 간첩조직과 군사를 가장 중시하면서도 이 부문을 주관하는 부하의 권력이 너무 커지는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대립은 확실히 야심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할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여겼다. 그는 호종남과 함께 장개석의 권력을 이어받을 계획을 세운적이 있었다. 그러나 장개석이 살아있는 한 장개석을 뒤엎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장개석에게 기대여 세력을 키워야 했던것이다. 이튿날 아침에 대립은 진화와 작별하고 북평으로 들어갔다. 대립이 떠난후 불길한 예감이 든 진화는 줄곧 안절부절못했다. 그녀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력사는 대립이 죽은 소식을 이렇게 기재했다. “1946년 3월 17일 오후 1시 6분에 대립이 탄 비행기는 남경의 상공에 도착했다. 1시 13분에 작탄이 폭발되여 비행기가 남경시 강녕구 판교진 대산에 추락되였다. 대립을 포함하여 비행기안에 있던 13명이 전부 사망되였다.” 대립이 탄 비행기가 폭발된후 군통국의 조사일군들이 13명의 해골사진을 진화에게 보이자 그녀는 한눈에 대립을 가려냈다. 그녀는 익숙한 몇대의 금이외에 높이 들어올린 오른손이 주먹을 쥔 상태로 있는것을 보고 림종전의 대립의 모습을 상상할수 있었다. 그것은 대립이 사격후에 습관처럼 하던 동작이였다. 대립은 총을 쏜후에 멋있게 보이려고 늘 그런 동작을 했던것이다. 이런 원인으로 진화는 대립의 죽음을 자살로 인정했다. “주인(老板—대립을 가리킴)은 먼저 비행사를 쏘아죽여 비행기가 통제를 잃게 하였어요. 그래서 비행기가 산에 부딪쳐 폭발된것이예요.” 진화는 대립과 지냈던 마지막밤을 생각하면서 대립의 자살을 더욱 확신했다. 그후 향항으로 이주한 진화는 리발관을 꾸려 생계를 유지했다. 40여년후 82세가 되였을 때 진화는 회고록을 써서 대립이 자살한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녀가 쓴 《진화녀사회고록》은 상하책으로 되였는데 1988년 1월에 대만독가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얼마후 한때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군통의 꽃은 병으로 향항에서 지고말았다.     
62    새 중국 개국10대원수 계급표준은 어떻게 정했는가 댓글:  조회:8764  추천:1  2014-06-29
새 중국 개국10대원수 계급표준은 어떻게 정했는가   (번역)     원수계급을 평가하여 결정하는 초보방안에는 모택동이 대원수로 되여있고 원수계급에는 주덕, 팽덕회, 림표, 류백승, 하룡, 진이, 라영환, 서향전, 섭연진, 엽검영 10명외에 주은래, 류소기, 등소평도 명단에 올라있었다. 당시 모택동은 중공중앙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중앙군위 주석, 전국무장력량 최고통수였기때문에 대원수로 되는것은 응당한 일이였고 모두가 기대하는 바였다. 주은래는 일찌기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직을 맡았고 1927년 5월에는 중앙군위 서기직에 임명되였다. 그후 하룡 등과 함께 8.1남창봉기를 령도했으며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혁명군대를 창건했다. 1931년말에 홍군총정치부 정위 겸 제1방면군 총정위,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혁명군 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임명되였고 모택동, 주덕 등과 함께 홍군의 반포위토벌작전을 지휘했다. 장정중에 중앙3인군사지휘소조의 성원으로 되였고 항일전쟁이 폭발된후 중공중앙군위 부주석직에 임명되였다. 해방전쟁초기에 모택동 등과 함께 전국해방전쟁을 지도했고 1947년 8월에 중앙군위 총참모장직을 겸임했다. 또 모택동을 협조하여 료심, 회해, 평진 3대전역을 지휘했고 북평, 호남, 수원, 신강 등지의 평화해방사업을 지도했다. 류소기는 1934년에 장정에 참가하여 선후로 홍8군단, 홍5군단중앙대표, 홍3군단정치부 주임직을 담임했다. 1935년 1월에 열린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 즉 저명한 준의회의에서 류소기는 모택동의 정확한 주장을 지지했다. 항일초기에 화북지구의 적후항전을 령도했고 1940년에 신4군과 8로군화중총지휘부 정위직을 력임했다. 1943년 3월부터 중앙군위 부주석직을 담임했고 항일전쟁승리후 모택동이 중경에 가서 장개석과 담판하는 기간에 중공중앙의 대리주석직을 맡았다. 해방전쟁시기에는 계속 중공중앙군위 부주석직을 담임하면서 총정치부 주임직을 겸임했으며 해방전쟁승리의 중대전략결책을 제정하는데 참여했다. 등소평은 1929년 12월에 백색봉기를 령도했고 홍7군 정위와 전위서기직을 담임했으며 1933년에 홍군총정치부 비서장직을 담임하기도 했다. 1934년에는 장정에 참가하였고 항일전쟁이 폭발된후에는 8로군정치부 부주임직을 담임했다.  1937년 12월에 8로군 129사 정위직을 맡으면서 사장 류백승과 함께 진기예(晋冀豫)항일근거지를 항일근거지를 창설하고 그 지역의 항일전쟁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개하였다. 1945년에 중공진기로예(晋冀鲁豫) 중앙국 서기, 진기로예군구 정위직을 력임했다. 항일전쟁승리후 등소평은 류백승과 함께 진기로예부대를 지휘하여 해방구를 공격하는 국민당군을 반격했으며 1947년 6월에 진기로예군구주력 12만대군을 거느리고 황하를 뛰여넘어 전략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1948년 5월에 중공중앙 중원국 제1서기, 중원군구 정위직을 력임했고 그해 11월에 회해전역총전위서기직을 맡으면서 류백승, 진이, 속유, 담진림과 함께 중원과 화동 2대야전군을 지휘하여 서회(徐淮)지구의 국민당군 주력과 결사전을 벌렸다. 회해전역승리후 제2야전군 정위직을 맡았고 1949년 4월에 제2야전군을 거느리고 도강전투을 지휘하여 남경을 점령했으며 류백승과 함께 부대를 거느리고 서남의 모든 성을 해방했다. 주은래, 류소기, 등소평은 모두 혁명전쟁시기에 인민군을 창건하고 무장력량을 령도하여 국민당군과 싸웠으며 전략결책에 탁월한 공훈을 세웠기에 원수계급에 오르는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1955년에 계급을 수여할 때 주은래는 국무원 총리직을 맡았고 류소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등소평은 중공중당 비서장 겸 국무원 부총리직을 맡았다. 그런데 계급을 수여하기전에 모택동이 대원수계급에 오르는것을 거절하면선 “현재 지방에서 사업하는 사람은 모두 계급에 오르지 않는것이 좋습니다”라고 건의했다. 그리하여 주은래, 류소기, 등소평도 원수계급에 오르는것을 거절했다. 1955년에 우리군이 실행한 계급제에서 원수계급표준은 매우 높았다. 그해 2월 8일에 제1기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6차회의에서 통과되고 국가주석 모택동의 비준으로 발부된 《중국인민해방군군관복역조례》중에는 인민무장력량을 창건하고 령도했거나 전역군단작전을 령도하여 탁월한 공훈을 세운 고급장령에게 중화인민공화국 원수계급을 수여한다고 밝혀놓았다. “홍군의 아버지” 주덕원수는 자격과 덕망이 높았고 “홍군의 강한 사자” 팽덕회원수는 용맹스럽고 강직했으며 “홍군의 날랜 매” 림표원수는 불패의 상승장군이였고 “군신(军神)” 류백승은 지략이 뛰여나고 판단이 정확했으며 “하수염(贺胡子)” 하룡원수는 “남창봉기”를 총지휘한 중국인민해방군 창시자였고 “시인” 진이원수는 문무를 겸비한 장군이였으며 “정치원수” 라영환원수는 군사와 정치에 모두 능했고 “북방사성(北方帅星)” 서향전원수는 우리군의 보기 드문 기재였으며 “유사(儒帅)” 섭영진원수는 학자기질이 다분한 영재였고 “엽참좌(叶参座)” 엽검영원수는 명실상부한 우리군의 총참모장이였다. 바로 이런 엄격한 표준에 의해 최종적으로 주덕(朱德), 팽덕회(彭德怀), 림표(林彪), 류백승(刘伯承), 하룡(贺龙), 진이(陈毅), 라영환(罗荣桓), 서향전(徐向前), 섭영진(聂荣臻), 엽검영(叶剑英)이 10대원수의 계급을 수여받았다. 원수라는 이 지위가 혁혁한 최고계급은 력사상에서 2가지 종류의 함의를 가지고있었다. 하나는 관칙명칭이였고 다른 하나는 군사계급칭호였다. 원수라는 명칭이 제일 먼저 사용된것은 기원전 633년의 춘추시기에서 부터였다. 당시에는 군대중의 자격과 경력, 위망과 전공이 가장 높은 사람에 대해 존중하는 칭호였지만 관직명칭은 아니였다. 사서 《좌전·선공(宣公)12년》과 《한서·조충국전》에 기재된 원수(元帅), 통수(统帅)는 모두 군대중의 최고급별의 지휘관을 가리키는 말이였다. 수, 당, 5대, 송조의 전쟁시기에는 모두 원수직무를 설치했는데 직권경중과 분공관리에 따라 관리명호도 달랐다. 례하면 “천하병마원수”, “병마대원수”, “행군(行军)원수”, “행영(行营)원수”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또 “도원수(都元帅)”, 원수, “부원수”의 등급차이가 있었다. 당태종 리세민은 황제의 보좌에 오르기전에 “서토원수(西讨元帅)”를 담임한적이 있었다. 금나라에 이르러 전쟁시기에 원수부를 설치하고 부동한 급별의 원수를 임명하여 전문적으로 토벌하는 일을 장악하게 했다. 원나라의 각 도(道), 주(道)에는 도원수부거나 원수부, 부원수부를 설치하여 부동한 이름의 원수를 임명하여 당지의 행정 및 군사대권을 장악하게 했다. 명나라에서는 추밀원아래에 제익(诸翼)원수부를 두고 원수, 동지(同知)원수 등 관직을 임명하여 군을 통솔하여 원정을 나가게 했다. 원수라는 이름을 군사계급칭호에 사용하여 최고계급을 표시한것은 16세기중엽의 프랑스군이였다. 당시 프랑스2세는 처음 4명의 고급장령에게 원수계급칭호를 수여했다. 프랑스에 이어 16세기의 게르만제국, 17세기의 오스트리아, 로씨야, 18세기의 영국, 19세기의 에스빠냐, 토이기, 이딸리아, 일본, 20세기의 구쏘련, 중국, 뽈스까, 로므니아, 유고슬라비아, 벌가리아, 핀란드, 인도, 타이, 조선, 몽골, 애급, 수단, 브라질 등 나라들이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원수구분을 다른 등급으로 나누었다. 원수급별을 가장 많이 나눈 나라는 구쏘련인데 쏘련대원수, 쏘련원수, 주수(主帅), 원수 4개급별로 나누었다. 제2차세계대전중 나치스독일의 원수구분은 제국원수와 군종원수(军种元帅) 2개급별이였다. 조선의 원수구분은 대원수, 원수, 차수 3개급별이다. 중화인민공화국 1955년의 법률문건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대원수와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2개급별로 나눈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원래 모택동에게 수여하기로 되여있던 대원수계급은 모택동의 거절로 비여있었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원수구분을 부동한 종류로 두었다. 일반적으로 륙군원수, 해군원수, 공군원수 3개종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원수계급을 수여받은 10대원수는 크게 4가지표준에 도달되였다. 첫째, 중국인민해방군창건시기의 중요한 무장봉기의 령도자거나 참여자였다. 둘째, 그들은 모두 아군의 각 시기의 중요한 령도자였다. 셋째, 그들은 아군의 중요한 전역군단작전을 령도하고 지휘하여 탁월한 공훈을 세웠다. 넷째, 그들은 원수계급을 수여받을 때 급별이 매우 높았다. 그중 주덕, 팽덕회, 림표 세 사람은 1952년에 전군이 평급을 할 때 제1등의 군위부주석급이였고 류백승, 하룡, 진이, 라영환, 서향전, 섭영진, 엽검영은 제2등의 대군구 사령원, 정위급이였다. 급별이 높은것은 그들이 영예롭게 원수계급에 오를수 있는 중요한 조건중의 하나였다.    
61    손중산을 죽음에서 구한 자매경호원 댓글:  조회:6280  추천:4  2014-06-22
손중산을 죽음에서 구한 자매경호원   (번역)     손중산에게는 림시경호원들이 많았다. 그런 경호원들중에는 일당백의 무당파무예를 정통한 윤예지(尹锐志)와 윤유준(尹维俊) 두 자매가 있었다. 그녀들은 10여번이나 손중산을 죽음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었는바 “혁명녀협객”이라고 불리운 추근과 함께 중국근대사에서 “3대녀걸”로 불리우고있다. 윤예지와 윤유준은 절강성 승현사람이다. 언니 윤예지는 1891년에 출생했고 녀동생 윤유준은 1895년에 출생했다. 윤씨가문은 대대로 무예를 련마해왔기때문에 윤예지와 윤유준은 어려부터 가문에서 전해온 무예를 익혔다. 소녀시절에 아버지는 그녀들을 청나라 산서성 태원부 무예총지도이며 강호에서 “오독극수(五毒殛手)”라고 불리우는 무술고수 리덕원한테서 무예를 배우게 했다. 리로오(李老五)라고 불리우는 리덕원은 윤씨자매에게 도가 무당파 태화문의 무예정화를 8년동안 가르쳤다. 사상이 진보적이였던 윤씨자매는 소녀시절에 여러번이나 혁명당을 위해 통신련략을 해주었으며 광복회에 참가했다. 그후 명도녀학당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선생 추근을 알게 되였다. 서석린, 추근의 환절봉기가 실패한후 윤예지도 체포대상이 되여 상해로 도망쳐 신물을 팔면서 신분을 숨다. 그녀는 요용침, 왕금발 등과 함께 비밀리에 혁명활동을 하면서 작탄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이듬해 여름에 윤예지는 소흥에 돌아와 녀자학교를 꾸리면서 왕금발과 합작하여 추근을 살해한 막후인물 호도남을 처단했다. 1911년 6월에 광복회의 령도자 도성장이 자금을 모으러 남양으로 가자 광복회의 일상사업은 사실상 윤씨자매가 주관했다. 그해 10월에 무창봉기가 폭발했는데 윤씨자매는 그에 호응하여 도성장의 명의로 상해의 각계인사들과 함께 혁명을 계획했다. 윤예지는 남경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작탄을 다그쳐 만들다가 부주의로 뒤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리하여 녀동생 윤유준이 녀자선봉대를 거느리고 남경을 공격했다. 우화대와 중화문을 점령하는 전역에서 윤유준은 앞장서 싸웠기에 표창을 받았다. 상해와 강소가 독립된후 절강순무 증온은 의연히 험준한 지형을 방패삼아 완강하게 저항했다. 이에 윤예지는 직접 부대를 거느리고 항주에 가서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중에 17살밖에 안되는 윤유준은 결사대를 거느리고 먼저 순무아문에 뛰여들어 첫번째 작탄을 던져 그번 전투를 승리에로 이끌었다.   윤예지와 윤유준 자매는 손중산의 경호원을 맡은 기간에 출중하게 임무를 완성했다. 무창봉기가 성공했을 때 손중산은 유럽에서 중국혁명을 선전하면서 자금을 모으고있었다. 무창봉기가 성공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은 손중산은 즉시 배를 타고 귀국했다. 1911년 12월 25일에 손중산이 상해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남경에 전해진후 각 성의 혁명당대표들은 일치하게 그를 림시대통령으로 추천하여 중화민국림시정부를 창건하여 청나라조정과 대항하자고 나섰다. 그때 혁명당인들에게 손중산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손중산이 상해에 도착한 그날 오후에 상해 갑북경찰서의 경찰들이 도적 한놈을 붙잡았는데 그 도적이 훔친 돈지갑에서 손중산이 각계인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손중산을 암살하려고 계획한 종이쪽지를 발견했다. 경찰서 서장은 즉시 그 쪽지의 내용을 호군도독부에 알렸다. 크게 놀란 호군도독 진기미는 윤씨자매에게 손중산의 신변경호를 맡기고 주위에 10여명의 경호원을 배치했다. 그날 오후 4시에 손중산은 원 계획대로 합동화원에 와서 상해의 각계인사들을 만났다. 윤예지는 녀비서차림을 하고 손중산의 뒤에 바싹 따라섰고 하녀차림을 한 윤유준은 손중산의 옆에 서서 주위를 경계했다. 연회가 결속된후 공연이 시작되였다. 손중산과 진기미는 나란히 앞줄에 앉았고 윤예지는 손중산의 뒤좌석에 앉았으며 윤유준은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동정을 살폈다. 공연이 고조에 올랐을 때 무대에서 무술배우로 위장한 한 자객이 고나도무술동작을 하여 장내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박수소리가 높아지자 기회를 노리던 그 자객은 손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자객의 의도를 눈치챈 윤예지는 순식간에 권총으로 무대우의 샹들리에등을 명중하여 꺼버렸다. 그와 동시에 번개처럼 무대우로 뛰여올라간 윤유준은 두손으로 암기를 날려 무술표연을 하는 자의 두눈을 명중했다. 이렇게 두 자매는 손쉽게 손중산을 암살하려던 자객을 붙잡았다. 사후에 진기미는 윤예지에게 “왜서 무술배우가 자객이란것을 발견하고서도 직접 총을 쏘아 죽이지 않고 먼저 무대우의 등부터 꺼버렸소? 어둠속에서 자객들이 활동하기 더 쉽지 않겠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윤예지는 웃으며 대답했다. “전 그자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자객이란걸 눈치챘어요. 배우라면 공연에만 정신을 집중하겠는데 그자는 자꾸만 무대아래를 곁눈질했어요. 그러다가 고난도동작으로 관중들을 끌면서 기회를 만들려고 했어요. 전 그자가 곧 손을 쓰려고 한다는것을 눈치챘어요. 만약 총으로 그자를 쏘아죽인다면 다른 자객들이 혼란한 틈을 빌어 손을 쓸수 있었어요. 그래서 무대우의 등을 명중하여 꺼버렸어요. 자객은 갑자기 어두워지면 그 시각에 아무것도 볼수 없기에 붙잡기 쉬웠어요. 또 다른 자객들도 갑자기 등불이 꺼지면 무슨 일인지 놀라서 경솔하게 손을 쓰려고 하지 못할거예요. 또 총소리를 들은 다른 경호원들이 총을 빼들고 사격준비를 하고있을테니깐 폭로되지 않은 자객들은 일이 잘못 된것을 알고 도망칠게 뻔하잖아요?” 1912년 1월 1일에 손중산은 상해에서 기차를 타고 남경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에 10시에 림시대통령취임식이 거행되였다. 이튿날 오후에 손중산은 부자묘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봉건등급, 례절, 호칭을 페지하고 “국민은 주인이고 관리는 공복”이라는 관념을 전파했다. 손중산이 연설을 한다는 말을 듣고 거리의 행인들은 너도나도 부자묘로 모여들었다. 그 시각 부자묘에 모여든 사람들속에는 광동에서 온 3명의 자객들이 숨어있었다. 그들은 청나라의 강남제독 장훈이 남경에서 도망치면서 남겨놓은 군인들이였다. 그들은 손중산이 연설을 한다는 말을 듣고 암살행동을 하려고 달려왔던것이다. 그들은 손중산을 암살하기만 하면 청나라 조정에서 큰 상을 줄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중에 관직이 제일 높은 사람은 초관(哨官—련장급)인데 회전식련발권총을 한자루 가지고있었다. 그 다음은 붕장(棚长—패장급)인데 장원매회필(일종 예리한 무기)을 가지고있었다. 다른 하나는 18반무예를 정통한 효용(보통 사병급)이였는데 각반을 두른 다리에 비수를 감추고있었다. 남경거리의 사람들이 광동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여긴 그들은 공개적으로 암살행동에 대해 상의했다. 효용이 암살행동을 실행하고 다른 두 사람이 엄호를 책임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윤씨자매가 처음부터 그들을 주의깊에 살피고있었으며 그들이 하는 광동말을 다 알아들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윤씨자매는 빠른 눈짓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윤예지가 초관과 붕장을 제어하고 윤유준이 효용을 맡기로 한것이다. 호용은 자신만만해서 동료들에게 눈짓하고 손중산이 연설하고있는 곳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호용이 떠나자마 윤예지가 번개같이 두손을 날려 초관의 회전식련발권총과 붕장의 장원매회필을 빼앗아냈다. 호용을 미행하던 윤유준은 호용이 무예에 능한것을 발견하고 그가 준비가 없는 틈을 타서 발로 넘어뜨리고 눈깜짝할사이에 그가 눈치를 차리지 못하게 그의 몸에서 비수를 빼앗아냈다. 얼마후 일어나서 사람들의 속을 비집고 손중산의 가까이에 다가간 호용은 다리에 감은 각반을 만졌다. 그런데 각반에 감추었던 비수가 보이지 않았다. 든든하게 꽂았던 비수가 보이지 않자 깜짝 놀란 그는 손을 쓸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도망쳤다. 림시정부 륙군부장 황흥은 이 소식을 들은후 기뻐서 윤씨자매를 “혁명녀협객, 민국공신”이라고 칭찬했다. 민국2년(1913년)에 윤씨자매는 가족을 만나러 북경으로 갔다. 그때 원세개는 그녀들을 금전과 벼슬로 유혹하여 자신의 경호원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그녀들의 거절을 받았다. 녀동생 윤유준은 1914년에 절강성의 한고향사람인 광복회 회원 구소와 결혼했다. 그후 5년후인 1919년 7월 16일에 산두에서 병으로 사망되였다. 언니 윤예지는 1916년에 광복회 회원 주아위와 결혼했다. 이듬해에 주아위는 일본륙군대학에 가서 공부할 때 윤예지와 함께 거주했다. 그들은 2년후에 북경에서 살았는데 여러해동안 정치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항일전쟁시기에 윤예지는 중경에서 선후로 부녀사업대 부대장, 항일군공렬사유족공장 공장장을 담임하면서 적극적으로 항일구국활동에 참가했다. 윤예지는 1948년 1월 10일에 중경에서 사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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