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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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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원수 라영환과 림월금의 전기적 사랑이야기
2014년 09월 21일 08시 38분  조회:6627  추천:1  작성자: 넉두리

개국원수 라영환과 림월금의 전기적 사랑이야기

 
(번역)




 
 
중화인민공화국의 개국원수인 라영환은 1902년 11월 26일에 호남성 형산현에서 태여났다. 공화국의 건립을 위해 라영환은 사선을 넘나들며 큰 공을 세웠다. 전기적인 색채를 띤 그와 림월금의 사랑이야기는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 전중국에 광범하게 전해졌다.
림월금은 1930년 1월에 중국로농홍군에 참가하여 홍4방면군 정치부선전대 선전원으로 되였다. 그녀는 1935년 1월에 홍4방면군주력부대를 따라 2만 5000리장정에 참가했고 1937년에 라영환과 결혼했다.
1937년 1월에 중공중앙과 홍군총부는 연안으로 들어갔는데 라영환도 당중앙을 따라 연안에 가서 후방정치부 주임직을 맡았다. 그해 음력설에 라영환의 전우 허건국은 연안당학교에서 공부하고있는 류계란과 결혼했다. 결혼한 이틑날에 허건국과 류계란은 35살이 되도록 홀아비로 있는 라영환에게 녀자를 소개해주자고 상의했다. 류계란은 당학교에서 함께 공부하고있는 림월금을 라영환에게 소개해주었다.
개인혼인문제에 대해 고려하지 않던 라영환은 림월금과 몇번 만난후 자신이 그 녀인을 사랑하고있다는것을 발견했다. 당시 림월금이 공부하고있던 중앙당학교는 연안 소변구의 한 교회당에 자리잡고있었는데 라영환이 사업하고있는 홍군후방정치부와 연하(延河)를 사이에 두고있었다. 평소에 연하강은 10메터너비밖에 안되여 걸어서 건널수 있었지만 봄철에 들어서면 얼음이 녹아 물이 붓기에 도보로 건널수 없었다. 이렇게 연하는 라영환과 림월금이 만나는데 천연적인 장애로 되였다. 어떤 사람은 롱담으로 연하는 은하수이고 라영환과 림월금은 견우직녀라고 말했다.
견우와 직녀는 서로 만나러 갈 때 까치다리를 리용하였지만 연하에는 까치다리가 없었을뿐만아니라 나무다리도 없었다. 25군 6퇀의 정위 왕평은 연하를 거너는데 사용하라고 백마 두필을 골라 라영환에게 보내주었다. 그후 라영환은 저녁을 먹은후 말을 타고 강을 건너 림월금을 만나러 갔다. 라영환은 경호원과 마부도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어떤 사람은 저녁후 라영환이 보이지 않으면 경호원에게 라주임이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다. 그러면 경호원은 웃으면서 “말타기련습을 하러 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라주임은 정강산에서 내려온 사람인데 말을 탈줄을 모르다니?”라고 어리둥절해했다.
림월금은 한필의 백마가 연하를 건너오는것이 보이면 살그머니 학교문을 나섰다. 그들은 당학교밖의 작은 수림속과 보탑산아래, 연하강뚝을 거닐면서 사랑을 속삭이군 했다.
라영환과 림월금은 모두 초혼이 아니였지만 혼인문제에 있어서 서로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영환이 17살이 되던 음력설이였다. 라영환의 아버지 라국리는 음력설을 쇠는 기회에 라영환을 두살 년상인 안월아와 결혼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 시기에 라영환은 고향과 멀리 떨어진 장사협균중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한지 2년이 되였다. 그 중학교는 “서양학당”이라고 불리우는 신식학교였다. 라영환은 그 학교에서 민주와 자유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가 안월아와 결혼해야 된다고 통지했을 때 그는 부모가 도맡아하는 봉건식혼사를 반대했다. 그러나 라국리는 아들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부자관계를 끊겠다고 위협했다. 17살밖에 안된 라영환은 가정과 결렬할 결심을 내릴수 없었다. 그의 공부비용은 모두 아버지가 대주었기에 라영환은 마음에도 없는 “신랑”으로 되는수박에 없었다. 민간에는 결혼하여 사흘째 되는 날에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처가집으로 가는 풍속이 있었다. 라영환은 이 기회를 타서 중도에 도주하면서 안월아에게 “미안하지만 난 다른 방법이 없소. 용서하오”라는 말을 남겼다. 결혼 3일만에 도망친 라영환은 장사에 가서 계속 공부했다. 그는 다음학기의 학비와 생활비를 얻기 위해 방학때만 집에 돌아갔다. 1927년에 4.12반혁명정변이 발생된후 그는 고향을 떠나 혁명에 참가했다.
림월금의 전남편은 사천에서 홍군에 참가한 그녀의 직속상급이였다. 두 사람은 장정길에서 서로 알게 되여 결혼했다. 장정이 결속된후 림월금은 연안의 중앙당학교에서 공부했고 그녀의 전남편은 2만 1000명의 서로군 전사들과 함께 황하를 건너 고군분투하는 간고한 로정에 나섰다. 어느날에 림월금의 중매를 섰던 강극청이 찾아와 “서로군(西路军)이 적들에게 포위되여 지금 당중앙과 련계가 중단되였소. 진정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하오”라고 불길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소식을 들은 림월금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애써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그녀는 서로군이 꼭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올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2만여명의 서로군이 전멸되였다는 비보가 전해왔다.  그속에 포함된 그녀의 전남편도 적들에게 살해되였을것은 뻔했다. 비보를 접한 림월금은 장승처럼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그후 그녀는 고통을 잊으려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상대방의 불행한 과거를 알게 된 라영환과 림월금은 더욱 감정이 깊어졌다.
라영환의 혼사는 중앙의 동의를 거쳐 1937년 5월 16일에 거행하기로 결정되였다. 림월금은 라영환의 낡은 개가죽이불을 빨래줄에 널어 해볕쪼임을 시키고 담요도 소금물에 깨끗이 씻었다. 토굴집에 쌍인용침대와 백성들의 집에서 빌려온 낡은 책걸상을 들여다놓으니 신방이 다 꾸려진 셈이였다.
서안에서 사업하고있는 라영환의 로전우가 소식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밀가루 한 주머니를 보내왔다. 라영환은 취사반전사들을 청해 밀가루국수를 만들어 초대한 손님에게 주식으로 대접했다. 라영환과 림월금은 중매를 서준 동지들을 모두 청해 흥성흥성한 분위기를 돋구었다.
오후 5시에 간사, 경위원, 마부를 비롯한 후방정치부의 동지들이 모두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외 10명의 동지들도 함께 결혼식에 참석하여 라영환과 림월금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라영환은 림월금과 결혼한지 며칠 안되여 명령을 받고 전선으로 나갔다. 공교롭게도 이때 전투에서 사망되였다고 했던 림월금의 전남편이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연안으로 돌아왔다. 전남편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림월금은 매우 난처한 립장이 되였다. 모택동도 깜짝 놀랐다. 이는 두 남자와 한 녀자의 분쟁일뿐만아니라 정치대국면에 관계되는 일이였다.
모택동은 신중하게 고려한후 당사자인 림월금을 불렀다. 림월금은 불안한 심정으로 모택동의 거처로 찾아갔다. 모택동은 친절하게 쏘파에 앉으라고 권한후 차까지 따라주면서 말했다.
“월금동지, 당신들이 결혼한지 얼마 안되였는데 영환을 전선에 파견했다고 날 원망하지 않겠지?”
모택동의 따뜻한 말에 감동된 림월금은 눈물을 흘리며 격동되여 말했다.
“주석님, 제가 어찌 주석님을 원망하겠어요? 항전은 전민족의 대사인데 어찌 가족의 사정을 고려할수 있겠어요?”
모택동은 련신 머리를 끄덕이더니 담배불을 붙인후 웃으면서 물었다.
“월금동지의 전남편이 연안에 돌아왔는데 동지는 그와 다시 결합할 생각인지? 이는 월금동지의 일이기때문에 중앙에서는 월금동지 자신이 결정하기를 바라오.”
모택동은 따뜻한 눈길로 림월금을 바라보면서 간곡하게 말했다.
“월금동지의 태도가 곧 나의 태도요. 난 월금동지가 그를 만나보기를 바라오. 그리고 라영환과 상의한후 다시 나에게 알려주오. 이렇게 하면 당신들 세사람에게 모두 공정하고 공평하리라고 생각되오.”
모택동의 말을 들은 림월금은 전남편을 만나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으려고 결정했다. 이 모든것은 전쟁이 조성한것이다. 비보가 잘못 전해진것을 탓할수밖에 없었다. 림월금은 모택동을 보고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주석님, 그는 다른 사람을 통해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저와 영환동지의 영원한 행복을 축하한다고 했어요. 그가 이미 자신의 뜻을 밝혔는데 제가 그를 만나야 하나요?”
림월금의 얼굴에는 모택동이 나서서 이 난처한 일을 처리해주기를 바라는 표정이 력력했다.
“그 등지는 포기해야 할 일은 포기할줄을 아는 좋은 동지군. 하지만 구두로 하는것은 증거로 쓸수 없소. 월금동지, 그더러 마음속의 말을 글로 쓰게 해서 영원히 뒤집지 못하게 하는게 어떻겠소?
모택동의 말을 듣고 확신이 있게 된 림월금은 련신 머리를 끄덕였다. 유쾌한 심정으로 모택동의 판공실에서 나온 그녀는 전남편을 만나 자신의 태도를 설명했다. 이렇게 그녀는 전남편과 매우 우호적으로 헤여졌다.
라영환부부는 선후로 4명의 자녀를 보았지만 전쟁시기에 환경이 간고했기때문에 두 자녀밖에 살지 못했다. 라영환원수는 1963년 12월 16일에 북경에서 사망되였는데 10대원수중에서 가장 먼저 사망된 분이다.
림월금은 1955년에 대좌계급을 수여받았는데 그녀는 전군에서 유일한 녀대좌였다. 그녀는 2003년에 89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는데 급별은 부병퇀급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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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작성자 : 넉두리
날자:2014-09-24 20:14:32
아래 작가님께

저의 메일주소는 zhuzhu_216@163.com 입니다.
1   작성자 : 작가
날자:2014-09-24 09:55:22
희수선생, 글 잘보고 있습니다. 멜주소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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