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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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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과 모인봉을 골려준 리극농
2014년 10월 04일 14시 13분  조회:7582  추천:1  작성자: 넉두리

장개석과 모인봉을 골려준 리극농

 
(번역)




 
 
새 중국이 성립된후 병사를 거느린 적도 없고 전쟁터에 나간적도 없는 리국농(李克农)은 상장계급을 수여받아 특수한 장군으로 되였다. 모택동은 어느 한번 외빈을 접견할 때 “리극농은 중국의 대특무입니다. 하지만 우리 공산당의 특무이죠”라고 말했다.
1962년에 리국농은 병으로 사망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미국정보부문에서는 사흘동안 휴식하면서 강적이 사라진것을 경축했다. 모택동의 찬탄을 받고 적들을 벌벌 떨게 한 리극농은 누구인가? 아래에 리극농이 적들과 지혜와 용기를 겨룬 부분적인 력사사실을 소개한다.
 

장개석의 코를 꿰고 다닌 리극농

항일전쟁이 승리하게 되자 생각밖에도 장개석은 모택동을 중경에 청해 평화담판을 하자고 요구했다. 리극농은 이것은 분명히 평화의 허울을 쓰고 모택동을 암해하려는 음모이며 장개석의 속임수라고 인정했다. 모택동도 리극농의 분석에 일리가 있다고 여기고 잠시 장개석의 요청에 대답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국민당은 연안에 련락소를 세웠는데 국민당특무 주려무와 라백륜이 무전을 책임졌다. 리극농은 오래전부터 그들을 중점적으로 감시하고있었다. 국민당에 대해 잘 알고있는 리극농은 장개석이 전보로 모택동을 청하는 동시에 대립이 꼭 특무들에게 연안방면의 정보를 수집하라고 명령했을것이라고 판단했다. 과연 주려무는 여러번이나 모택동을 만나겠다고 리극농에게 제기했다. 번마다 거절하던 리극농은 모택동에게 주려무와 라백륜을 역리용하는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모택동은 좋은 방법이라고 하면서 1945년 8월 16일에 주려무와 라백륜을 접견하고 자신은 중경으로 갈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련락소로 돌아간 주려무와 라백륜은 급히 중경에 무전을 쳐서 이 소식을 전했다. 그 전보문을 받아본 장개석은 모택동이 중경으로 올 담량이 없다고 단정했다. 이렇게 되면 공산당측에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죄명을 씌울수 있다고 여긴 장개석은 20일과 23일에 련속 모택동을 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모택동은 리극농과 상의한 계책에 따라 장개석에게 회신을 한 동시에 두번 다 주려무와 라백륜을 접견하여 그들의 손으로 중경에 전보를 보내게 했다. 모택동과 리극농의 생각대로 장개석은 모택동이 중경으로 담판하러 오지 못할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8월 24일에 중경 《신화일보》는 공개문장을 실어 장학량과 양호성이 구류당하고 엽정과 료승지가 감방에 갇힌 사실을 증거로 삼아 장개석을 믿을수 없는 사람이라고 폭로했다. 그리고 모택동이 중경회담에 가지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장개석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이리하여 장개석은 인격과 도의에서 모두 극히 피동적인 곤경에 처하게 되였다. 신문은 읽은 장개석은 크게 화가 나서 “냥시피(娘希匹)”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모택동에게 “안전보장”을 주지 못하고 “특무들이 횡행”한다는 헛점을 주지 않기 위해 “모택동이 중경에 오기만 한다면 그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보장하겠다”고 표시했다. 그리고 대립을 불러 “부하들을 엄하게 단속하여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게 하게. 만약 조금이라도 차실을 빚는다면 엄하게 다스릴거야”하고 엄령을 내렸다. 장개석은 또 헌병사령 장진을 불러 “중경치안을 잘 유지하게. 위반하는 자는 먼저 처리하고 후에 보고하게”라고 명령했다.
장개석이 상술한 조치를 댔다는 정보를 장악한 리극농은 이번에는 장개석이 절대로 모택동을 암해하지 못할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즉시 모택동에게 해당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중경담판”에서 피동을 주동으로 바꾸어 장개석의 평화담판의 사기극을 까밝히기 위해 모택동은 반복적인 심사숙고를 거친후 마침내 중경으로 갔다.
 
 
 
 
장계취계하여 국민당특무를 골려준 리극농

1946년 1월에 미국대통령 트루먼(杜鲁门)이 파견한 “특사”이며 륙군상장인 마셜(马歇尔)의 참여하에 국공쌍방은 협상을 거쳐 《국내군사충돌을 중지할 방법에 관한 협의》를 달성했다. 쌍방의 협의에 따라 북평에 군사협조처집행부를 성립하여 국공쌍방의 군사충돌을 방지하고 쌍방의 정전령집행상황을 감독하게 했다. 당시 중공중앙정보부 부부장이였던 리극농은 중공대표단 비서장의 신분으로 중공대표단과 함께 북평으로 갔다.
리극농은 기요부문과 방송국의 동지들과 함께  취명장청사에 거주했다. 취명장내의 사업일군은 대부분 국민당특들이 맡았다. 중공대표단의 행동은 국민당특무들의 감시와 통제를 받고있었다. 군사협조처의 사업이 시작됨에 따라 중공대표단은 중앙과 각 근거지와의 전신련계를 크게 강화할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특무들의 감시로 무전과 기요사업은 매우 큰 압력을 받게 되였다. 정보사업은 국민당특무들의 중점파괴대상이였고 중국공산당방면의 난제였다.
국민당특무들의 감시에 대해 리극농은 일련의 방지조치를 취했다. 첫째, 무전과 기요과를 취명장의 남쪽방에 집중시키고 전문일군이 지키면서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둘째, 모든 사업일군들이 일률로 자체로 생활을 책임지고 식당의 “복무원”들이 마음대로 청사내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복무원”들이 진입할수 없게 되자 복무원으로 가장한 특무들은 갖은 핑게를 대고 청사내로 들어가려고 시도했다. 리극농은 딱 거절할수 없는 상황이라면 진입을 허락하되 어디를 가다 전문일군이 따라 다니면서 자유행동을 할수 없게 하라고 명령했다. 중공대표단의 준둔지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복무원으로 가장한 특무들은 방안청소, 빨래 등 잡일을 열심히 했다. 그들은 방안에 떨어진 종이나 호주머니안에 넣어둔 종이에서 가치가 있는 정보를 발견할수 있기를 바랐다.
국민당특무들의 그런 잔꾀에 대해 잘 알고있은 리극농은 동지들에게 모르는척 하고 일부러 종이에 아무 수자거나 이름같은것을 써서 호주머니에 넣어두는것으로 특무들을 골려주라고 했다. 그후 여러 사람들이 “특무들이 호주머니의 종이를 가져갔다”고 보고하자 리극농은 “국민당특무들이 그런 방면에 취미가 있다면 좀 어렵게 수자를 써서 그들더러 천천히 연구하라고 하지요. 그들이 할일이 없어서 그러는데 일감을 줘야지요”하고 말했다.

 
빈틈없는 계책으로 모인봉과 승패를 겨룬 리극농

1949년 12월에 모택동이 처음으로 쏘련을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모인봉은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모택동의 전용렬차가 출발한후 모인봉과 미국고문 브래드(布莱德)는 두분째 “황고둔사건(皇姑屯事件)”을 모방한 두가지 방안을 제정했다. 첫번째 방안은 대륙의 동북에 잠복한 국민당특무조직인 동북지하기술종대에 명령하여 모택동의 전용렬차를 량쪽에서 포위하여 가로막고 장춘 14호철교를 파괴하며 할빈역에 시한폭탄을 가설하는것이다. 두번째 방안은 북경천안문부근의 남지자에 잠복한 “만능잠복대(潜伏台)를 리용하여 기회를 엿보아 행동하는것이다.
그와 동시에 북경중앙사회부의 회의실에서는 리극농이 해당일군들을 소집하여 회의 열고 “만능잠복대”를 찾아내여 붙잡을 문제와 구체적인 방안을 연구했다. 얼마후 홀로 전신업무책임자, 전보업무, 정보, 전보문해석 4가지직무를 맡은 계조상을 붙잡았다.
리극농은 계조상에게 원래의 지법대로 아래와 같은 내용의 전보를 모인봉에게 쳐보내라고 명령했다.
“모인봉선생, 당신들이 반복적으로 큰소리치며 자랑하던 ‘만능잠복대’는 이미 우리 손에 들어왔고 소좌 전신책임자 계조상도 우리가 잘 ‘돌보고’있소. 앞으로 당신들이 파견한 특무들은 우리가 잘 돌볼테니 안심하오. 그저 직접 만나서 감사를 드리지 못할뿐이요. 당신에게 전보문을 보내는이는 바로 리극농이요. 당신들은 지금 ‘남에게 얹혀’사니 좋은 날이 오래가지 못할것이요. 당신이 정보국을 거느리고 온다면 나 리극농은 당신의 안전을 보장해줄것이요. 이 전보업무담당일군은 당신의 수하특무 계조상이라는것을 알아두오.”
대북에서 그 전보문을 받아본 모인봉은 깜짝 놀랐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수 없어 두번이나 다시 읽어보았다. 화가 난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한마디 말도 못했다.
늙은 소 콩밭으로 간다고 모인봉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아직 “동북기술종대”라는 왕패가 있었기때문이다. 그는 전보원에게 “리극농아, 어디 기다려봐, 누가 최후의 승자인가를”라는 회답전보문을 쳐보내도록 명령했다.
며칠후의 어느날밤에 국적표시가 없는 비행기가 할빈에서 멀지 않은 산림의 상공에서 낮게 선회하고있었다. 비행기에서는 두명의 특무가 락하산을 타고 뛰여내렸다. 락하산이 땅바닥에 닿자마자 지면에 매복했던 우리측 감시일군들이 그들을 꼼짝달싹못하게 붙잡았다. 그 두명은 동북기술종대의 암살행동을 지도하라고 모인봉이 파견해보낸 특파원이였다. 그들은 “우리는 래일 오전에 할빈 송화강호텔에서 동북기술종대와 접속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국민당보밀국을 대표하여 해당조직원들에게 위임장을 수여하는것으로 반공(反共)에 공로가 있는 조직원들을 고무격려하려고 했습니다”하고 털어놓았다.
이튿날 아침에 송화강호텔의 고급방에서 모인봉이 파견한 특파원 장대평과 우관군은 동북기술종대 사령원 마내와 접속했다. 하지만 마내와 접속한 장대평은 원래의 장대평이 아니라 우리측의 정보원이 가장한 가짜 장대평이였다. 몇마디의 대화가 오간후 동북기술종대 사령원 마내는 170명의 명단을 내놓았다. 이렇게 모인봉의 다른 한장의 “왕패”는 리극농의 손에 들어갔다.



판문점막후에서 기묘하게 지휘하여 미국을 굴복시킨 리극농


중미쌍방이 조선전쟁을 끝내려고 판문점에서 담판을 할 때 모택동은 담판대표로 리극농을 생각했다. 담판대표는 1선, 2선, 3선으로 나뉘였는데 2선에 숨어 모든것을 장악한 리극농은 직접 모택동, 주은래와 김일성의 전보문을 오가게 했다. 우리측의 대표가 상대방의 황당한 관점에 대해 반박할 때 상대방의 대표는 발언을 거절했다. 이렇게 담판은 대치국면에 들어갔고 쌍방은 모두 상대방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담판석의 공기는 굳어졌다.
이는 고도로 긴장한 심리전이였다. 의지력, 인내력, 자제력을 겨루는 무언의 싸움이였다. 1선담판대표 자성문이 회의장소를 떠나 리극농에게 어떻게 하겠는가고 지시해줄것을 요청했다. 이때 묵묵히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리극농은 종이우에 “앉아 기다립시다”고 써서 주었다. 그 종이쪽지는 몰래 중조대표들의 손에 전달되였다. 그제야 조급정서가 가라앉은 대표단 성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부동의 자세로 앉아서 기다렸다. 침묵이 132분간 지속되였다. 미국인들은 더 버틸수 없어 휴전을 선포했다. 무언의 132분은 담판력사에서 침묵이 가장 긴 기록을 창조했다.
중조대표가 회담을 주최할 차례가 돌아왔을 때 리극농은 미국측에서 빈번하게 휴회하는 방책에 대처하여 불의에 허를 찌르는것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쌍방대표가 갓 자리에 앉았을 때 리극농은 즉시 휴회를 선포했다. 그 시간은 25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어찌할바를 몰랐다. 시간을 끄는것과 빨리는것은 담판중의 기교였다. 리극농은 이 두가지의 방법을 절묘하게 운용하였다. 미국인들은 리극농의 담력과 식견, 기민에 대해 감탄해마지 않았다.
정전협정을 체결할 계단에 들어섰을 때 쌍방의 파괴활동을 피면하기 위해 리극농은 절묘한 방법을 제기했다. 즉 쌍방의 사령관이 현장에서 서명하지 말고 쌍방의 수석대표가 서명하기만 하면 즉시 효력을 발생하며 그후 각자가 자신의 사령관에게 보내여 서명을 받은후 원본을 교환하는것이다. 이 방법은 중조량국의 최고지도층의 허락을 받았고 미국측도 이런 교묘한 조약체결형식에 대해 기껍게 접수했다. 이렇게 “조선정전협정”은 순조롭게 체결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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