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중산에게는 림시경호원들이 많았다. 그런 경호원들중에는 일당백의 무당파무예를 정통한 윤예지(尹锐志)와 윤유준(尹维俊) 두 자매가 있었다. 그녀들은 10여번이나 손중산을 죽음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었는바 “혁명녀협객”이라고 불리운 추근과 함께 중국근대사에서 “3대녀걸”로 불리우고있다.
윤예지와 윤유준은 절강성 승현사람이다. 언니 윤예지는 1891년에 출생했고 녀동생 윤유준은 1895년에 출생했다. 윤씨가문은 대대로 무예를 련마해왔기때문에 윤예지와 윤유준은 어려부터 가문에서 전해온 무예를 익혔다. 소녀시절에 아버지는 그녀들을 청나라 산서성 태원부 무예총지도이며 강호에서 “오독극수(五毒殛手)”라고 불리우는 무술고수 리덕원한테서 무예를 배우게 했다. 리로오(李老五)라고 불리우는 리덕원은 윤씨자매에게 도가 무당파 태화문의 무예정화를 8년동안 가르쳤다.
사상이 진보적이였던 윤씨자매는 소녀시절에 여러번이나 혁명당을 위해 통신련략을 해주었으며 광복회에 참가했다. 그후 명도녀학당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선생 추근을 알게 되였다.
서석린, 추근의 환절봉기가 실패한후 윤예지도 체포대상이 되여 상해로 도망쳐 신물을 팔면서 신분을 숨다. 그녀는 요용침, 왕금발 등과 함께 비밀리에 혁명활동을 하면서 작탄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이듬해 여름에 윤예지는 소흥에 돌아와 녀자학교를 꾸리면서 왕금발과 합작하여 추근을 살해한 막후인물 호도남을 처단했다.
1911년 6월에 광복회의 령도자 도성장이 자금을 모으러 남양으로 가자 광복회의 일상사업은 사실상 윤씨자매가 주관했다. 그해 10월에 무창봉기가 폭발했는데 윤씨자매는 그에 호응하여 도성장의 명의로 상해의 각계인사들과 함께 혁명을 계획했다.
윤예지는 남경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작탄을 다그쳐 만들다가 부주의로 뒤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리하여 녀동생 윤유준이 녀자선봉대를 거느리고 남경을 공격했다. 우화대와 중화문을 점령하는 전역에서 윤유준은 앞장서 싸웠기에 표창을 받았다. 상해와 강소가 독립된후 절강순무 증온은 의연히 험준한 지형을 방패삼아 완강하게 저항했다. 이에 윤예지는 직접 부대를 거느리고 항주에 가서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중에 17살밖에 안되는 윤유준은 결사대를 거느리고 먼저 순무아문에 뛰여들어 첫번째 작탄을 던져 그번 전투를 승리에로 이끌었다.
윤예지와 윤유준 자매는 손중산의 경호원을 맡은 기간에 출중하게 임무를 완성했다.
무창봉기가 성공했을 때 손중산은 유럽에서 중국혁명을 선전하면서 자금을 모으고있었다. 무창봉기가 성공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은 손중산은 즉시 배를 타고 귀국했다. 1911년 12월 25일에 손중산이 상해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남경에 전해진후 각 성의 혁명당대표들은 일치하게 그를 림시대통령으로 추천하여 중화민국림시정부를 창건하여 청나라조정과 대항하자고 나섰다. 그때 혁명당인들에게 손중산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손중산이 상해에 도착한 그날 오후에 상해 갑북경찰서의 경찰들이 도적 한놈을 붙잡았는데 그 도적이 훔친 돈지갑에서 손중산이 각계인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손중산을 암살하려고 계획한 종이쪽지를 발견했다. 경찰서 서장은 즉시 그 쪽지의 내용을 호군도독부에 알렸다. 크게 놀란 호군도독 진기미는 윤씨자매에게 손중산의 신변경호를 맡기고 주위에 10여명의 경호원을 배치했다.
그날 오후 4시에 손중산은 원 계획대로 합동화원에 와서 상해의 각계인사들을 만났다. 윤예지는 녀비서차림을 하고 손중산의 뒤에 바싹 따라섰고 하녀차림을 한 윤유준은 손중산의 옆에 서서 주위를 경계했다. 연회가 결속된후 공연이 시작되였다. 손중산과 진기미는 나란히 앞줄에 앉았고 윤예지는 손중산의 뒤좌석에 앉았으며 윤유준은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동정을 살폈다. 공연이 고조에 올랐을 때 무대에서 무술배우로 위장한 한 자객이 고나도무술동작을 하여 장내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박수소리가 높아지자 기회를 노리던 그 자객은 손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자객의 의도를 눈치챈 윤예지는 순식간에 권총으로 무대우의 샹들리에등을 명중하여 꺼버렸다. 그와 동시에 번개처럼 무대우로 뛰여올라간 윤유준은 두손으로 암기를 날려 무술표연을 하는 자의 두눈을 명중했다. 이렇게 두 자매는 손쉽게 손중산을 암살하려던 자객을 붙잡았다.
사후에 진기미는 윤예지에게 “왜서 무술배우가 자객이란것을 발견하고서도 직접 총을 쏘아 죽이지 않고 먼저 무대우의 등부터 꺼버렸소? 어둠속에서 자객들이 활동하기 더 쉽지 않겠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윤예지는 웃으며 대답했다.
“전 그자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자객이란걸 눈치챘어요. 배우라면 공연에만 정신을 집중하겠는데 그자는 자꾸만 무대아래를 곁눈질했어요. 그러다가 고난도동작으로 관중들을 끌면서 기회를 만들려고 했어요. 전 그자가 곧 손을 쓰려고 한다는것을 눈치챘어요. 만약 총으로 그자를 쏘아죽인다면 다른 자객들이 혼란한 틈을 빌어 손을 쓸수 있었어요. 그래서 무대우의 등을 명중하여 꺼버렸어요. 자객은 갑자기 어두워지면 그 시각에 아무것도 볼수 없기에 붙잡기 쉬웠어요. 또 다른 자객들도 갑자기 등불이 꺼지면 무슨 일인지 놀라서 경솔하게 손을 쓰려고 하지 못할거예요. 또 총소리를 들은 다른 경호원들이 총을 빼들고 사격준비를 하고있을테니깐 폭로되지 않은 자객들은 일이 잘못 된것을 알고 도망칠게 뻔하잖아요?”
1912년 1월 1일에 손중산은 상해에서 기차를 타고 남경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에 10시에 림시대통령취임식이 거행되였다. 이튿날 오후에 손중산은 부자묘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봉건등급, 례절, 호칭을 페지하고 “국민은 주인이고 관리는 공복”이라는 관념을 전파했다. 손중산이 연설을 한다는 말을 듣고 거리의 행인들은 너도나도 부자묘로 모여들었다.
그 시각 부자묘에 모여든 사람들속에는 광동에서 온 3명의 자객들이 숨어있었다. 그들은 청나라의 강남제독 장훈이 남경에서 도망치면서 남겨놓은 군인들이였다. 그들은 손중산이 연설을 한다는 말을 듣고 암살행동을 하려고 달려왔던것이다. 그들은 손중산을 암살하기만 하면 청나라 조정에서 큰 상을 줄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중에 관직이 제일 높은 사람은 초관(哨官—련장급)인데 회전식련발권총을 한자루 가지고있었다. 그 다음은 붕장(棚长—패장급)인데 장원매회필(일종 예리한 무기)을 가지고있었다. 다른 하나는 18반무예를 정통한 효용(보통 사병급)이였는데 각반을 두른 다리에 비수를 감추고있었다. 남경거리의 사람들이 광동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여긴 그들은 공개적으로 암살행동에 대해 상의했다. 효용이 암살행동을 실행하고 다른 두 사람이 엄호를 책임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윤씨자매가 처음부터 그들을 주의깊에 살피고있었으며 그들이 하는 광동말을 다 알아들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윤씨자매는 빠른 눈짓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윤예지가 초관과 붕장을 제어하고 윤유준이 효용을 맡기로 한것이다.
호용은 자신만만해서 동료들에게 눈짓하고 손중산이 연설하고있는 곳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호용이 떠나자마 윤예지가 번개같이 두손을 날려 초관의 회전식련발권총과 붕장의 장원매회필을 빼앗아냈다. 호용을 미행하던 윤유준은 호용이 무예에 능한것을 발견하고 그가 준비가 없는 틈을 타서 발로 넘어뜨리고 눈깜짝할사이에 그가 눈치를 차리지 못하게 그의 몸에서 비수를 빼앗아냈다. 얼마후 일어나서 사람들의 속을 비집고 손중산의 가까이에 다가간 호용은 다리에 감은 각반을 만졌다. 그런데 각반에 감추었던 비수가 보이지 않았다. 든든하게 꽂았던 비수가 보이지 않자 깜짝 놀란 그는 손을 쓸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도망쳤다.
림시정부 륙군부장 황흥은 이 소식을 들은후 기뻐서 윤씨자매를 “혁명녀협객, 민국공신”이라고 칭찬했다.
민국2년(1913년)에 윤씨자매는 가족을 만나러 북경으로 갔다. 그때 원세개는 그녀들을 금전과 벼슬로 유혹하여 자신의 경호원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그녀들의 거절을 받았다.
녀동생 윤유준은 1914년에 절강성의 한고향사람인 광복회 회원 구소와 결혼했다. 그후 5년후인 1919년 7월 16일에 산두에서 병으로 사망되였다. 언니 윤예지는 1916년에 광복회 회원 주아위와 결혼했다. 이듬해에 주아위는 일본륙군대학에 가서 공부할 때 윤예지와 함께 거주했다. 그들은 2년후에 북경에서 살았는데 여러해동안 정치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항일전쟁시기에 윤예지는 중경에서 선후로 부녀사업대 부대장, 항일군공렬사유족공장 공장장을 담임하면서 적극적으로 항일구국활동에 참가했다. 윤예지는 1948년 1월 10일에 중경에서 사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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