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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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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와 그가 사랑했던 세 녀자
2014년 08월 10일 09시 32분  조회:7608  추천:1  작성자: 넉두리

팽덕회와 그가 사랑했던 세 녀자


 
(번역)




 
팽덕회(彭德怀)는 본명이 팽득화(彭得华)이고 호가 석천(石穿)이다. 그는 1898년 10월 24일에 호남성 상담현 석담진 오석채 팽가위자에서 출생했다. 그에게는 가슴에 지을수 없는 세 명의 녀자가 있었다.
팽덕회는 40살의 나이에 20살 년하이고 미모와 재주를 겸비한 포안수(浦安修)와 결혼했다. 팽덕회와 포안수는 감정을 중히 여기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화목한 부부였다. 부부라 하지만 상대방의 사업을 간섭하지 않고 저마다 맡은바 사업을 열심히 했다. 팽덕회는 국무원 부총리 겸 국방부 부장으로 사업했으며 포안수는 선후하여 경공업부 로동로임사사장, 북경사범대학당위 부서기로 사업했다.
그들은 일생동안 안정된 생활을 별로 보내지 못했다.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보낸것은 그래도 1953년부터 1958년까지의 5년간 중남해에 있은 시기라고 말할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항상 각자가 자기 일만 해왔다.
팽덕회에게는 첫사랑이 있었는데 그녀는 주서련(周瑞莲)이라고 부르는 외사촌녀동생(表妹)이였다. 비록 명의상으로는 외사촌녀동생이라고 하지만 사실 주서련은 팽덕회의 외삼촌이 부양한 고아였다. 주서련은 어려서부터 팽씨가문의 사랑을 받았으며 팽덕회와 소꿉친구였다. 외삼촌은 일찍 그들의 혼사를 결정지었다. 하지만 팽덕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출로를 찾아주려는 큰 뜻을 품고 미혼처 주서련의 곁을 떠나 참군했다.
1921년에 상군(湘军) 련장으로 승급한 팽덕회는 주서련과 결혼하려고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때 주서련이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왔다. 사연은 이러했다. 가난했던 팽덕회의 외삼촌은 마을의 지주놈한테 빚을 지게 되였다. 지주놈은 매일 팽덕회의 외삼촌을 찾아와 빚독촉을 했지만 외삼촌은 빚을 갚을 돈이 없었다. 지주놈은 젊고 예쁘게 생긴 주서련을 보더니 음심을 품고 빚대신 강제로 끌고가려고 했다. 하지만 주서련은 죽어도 굴복하지 않고 뒤산에 올라가 절벽에서 뛰여내려 자살했다. 이런 소식을 들은 팽덕회는 주먹을 쥐고 고향으로 달려갔다. 첫사랑을 잃은 팽덕회는 뒤산에 올라가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목이 메도록 통곡했다…
1922년에 24살인 팽덕회는 남의 소개로 황아장수의 딸 류세매(刘细妹)와 결혼했다. 결혼을 한후 팽덕회가 제일 먼저 해놓은 일은 류세매의 전족을 풀어준 일이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류곤모(刘坤模)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후에 팽덕회는 호남륙군강무당을 졸업하고 상군의 영장으로 승급했다. 팽덕회는 안해 류곤모를 상담으로 데려갔으며 그녀를 녀자직업학교에 보내여 공부하게 했다. 그때로부터 팽덕회부부의 생활이 새로 시작되였다. 하지만 그 좋은 시간도 오래 가지 못했다.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팽덕회는 부대를 거느리고 평강봉기를 일으켰으며 봉기군을 이끌고 정강산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팽덕회는 집을 떠나 혁명에 참가했다.
류곤모는 집에서 남편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여러해가 지났는데도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길이 없었다. 나중에 그는 남편을 기다리다못해 남의 소개로 무한에서 다른 남자와 가정을 이루었다.
항일전쟁이 폭발된후 다른 남자의 안해로 된 류곤모는 후방에서 팔로군이 평형관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 남편인 팽덕회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였다. 그는 즉시 팽덕회에게 편지를 써보냈는데 수신인 주소에 “평현관”이라고 적어놓았다. 마침 부대를 거느리고 산서에 도착한 팽덕회는 오대산에서 이 편지를 받았다. 팽덕회는 편지를 받고 아주 기뻐하면서 즉시 류곤모에게 회신을 하여 연안으로 오라고 했다.
“곤모씨, 탄알이 비발치는 전방에서 당신이 보낸 편지를 받아보았소. 정말 흥분되고 기뻤소. 당신이 연안으로 오고싶으면 서안팔로군판사처의 림백거주임을 찾아가오.”
류곤모는 이 편지를 가지고 남편을 찾으려고 북상하여 연안으로 떠났다. 때마침 팽덕회는 급한 회의때문에 전선에서 연안으로 돌아왔다. 하여 헤여져서 10년만에 팽덕회부부는 연안에서 만날수 있었다.
유감스러운것은 이들 부부는 다시 결합하지 못한것이였다. 팽덕회는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이렇게 되풀이하군 했다.
“그 일은 나의 잘못도 아니거니와 그녀의 잘못도 아니요.”
1938년 10월 10일에 40살인 팽덕회는 20살의 처녀 포안수와 결혼했다. 포씨3자매도 송씨3자매처럼 유명했다. 큰언니 포결수는 독일류학을 한 화학가이고 둘째언니 포희수는 유명한 기자였으며 포안수는 북경사범대학 력사학부를 졸업했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학생당원이였다.
두 사람의 결합은 영웅이 미녀를 사랑한 한단락의 전통적인 이야기였다. 결혼후 팽덕회는 안해를 몹시 사랑해주었다. 년령차이와 교육차이 그리고 생활습관차이와 개성차이는 모두 항전의 포성에 감추어졌다. 포안수는 팽덕회와 결혼한후 여전히 지식분자의 특유한 자중성과 독립성을 지켰으며 자신의 사업을 충실히 했다. 그들 부부도 다른 간부부부들처럼 “토요일부부”생활을 했다.
1918년 7월에 북경에서 출생한 포안수는 해방형(解放型)의 신녀성이였다. 포안수는 청년시절에 중외를 뒤흔든 “12.9”애국학생운동에 참가하였고 1936년에 중화민족해방선봉대와 녀성구국회에 참가하여 항일구국활동에 종사했다. 그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녀는 산서성의 항일전선에 뛰여들었고 연안에 가서 대중을 조직하여 항일근거지를 보위하고 공고히 하는데 공헌했다. 해방전쟁시기에 그녀는 선후로 섬감녕변구 롱동의 토지개혁사업단과 진서북의 토지개혁사업단에 참가했다. 그후 서북야전군 사령부에 들어가 사업했다. 전국이 해방된후 그녀는 선후로 방직공업부 기술사 부사장, 경공부 로동공자사 사장, 북경사범대학 당위 부서기 등 직을 맡았다.
포안수는 종래로 높은 자리에 있는 남편의 득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종 독립적이였다. 중남해에 있는 동안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이 포안수로 하여금  독립적인 개성을 더욱 돌출히 표현하게 했다.
포안수는 집안일을 할줄 몰랐다. 평소에 식사할 때에도 경호원이 큰 나무상자를 들고 밥을 타왔다. 포안수가 밥을 직접 한적이 딱 한번 있었는데 고압가마에다 쌀과 남새를 함께 넣어 지은 남새밥이였다. 당시 포안수는 남새밥을 지어놓고 임필시의 부인을 청해 함께 식사를 했는데 팽덕회는 식사를 하면서 “오늘 누가 하였는지 밥맛이 참 좋구만. 아주 맛있소”라고 연신 칭찬까지 했다.
팽덕회는 집에서 한번도 큰소리를 친적이 없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리해하지 못할것이다. 외부사람들은 팽덕회가 성격이 아주 센 사람이라고 보지만 집안에선 안해의 말을 무조건 들어주는 애처가였다. 한사람은 천군만마를 호령한 전형적인 군인이고 한사람은 전형적인 강남숙녀형녀성이여서 두 사람을 정반대되는 량극이라 볼수도 있지만 두 사람은 결합한후 아주 잘 어울리여 한번도 얼굴을 붉힌적이 없었다.
1958년전까지 팽덕회의 가정생활은 아주 소박하고 평온했으며 행복했다. 그해 려산회의후 팽덕회부부의 감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1962년에 팽덕회의 “8만자편지”가 재차 비판을 받으면서 포안수의 정신세계도 철저히 무너졌고 화목하던 가정도 충격을 받았다. 상상도 못할 정치적인 압력하에 포안수는 절망을 느끼고 리혼을 선택했다.
팽덕회도 안해의 심정을 리해해주고 리혼하는데 마지못해 동의했다. 갈라질 때 팽덕회는 칼로 배(梨)를 두쪼각으로 베여서 한쪽을 포안수에게 주면서 “헤여짐”을 선포했다. 포안수의  리혼보고서가 양상곤에게 전달되였다가 나중에 주은래의 손을 거쳐 등소평에게 전해졌다. 등소평은 리혼보고서를 받아본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종래로 남의 집안일을 관계하지 않소.”
하여 이 리혼보고서는 감감 무소식으로 되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 “4인방”의 박해를 받은 팽덕회는 1974년 11월 29일 14시 25분에 북경에서 억울하게 사망되였다. 이는 한 시대의 비극이였다. 거대한 정치적압력하에 개인의 힘은 보잘것없이 약하고 무력했다. 포안수는 1991년 5월 2일에 북경에서 사망되였다.
※주: 1962년에 포안수가 비록 리혼를 제기했지만 어느 기관에서도 그들의 리혼을 비준하지 않았다. 하여 팽덕회와 포안수는 명예상 여전히 합법적인 부부였다. 팽덕회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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