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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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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남편과 젊은 부인의 랑만적인 사랑 (1)
2014년 08월 02일 09시 44분  조회:7857  추천:0  작성자: 넉두리

늙은 남편과 젊은 부인의 랑만적인 사랑 (1)

 
(번역)



 
 
2004년에 82세 되는 양진녕은 28살밖에 안되는 옹범과 결혼하여 화제를 모았다.
1976년 7월에 광동성 조주시에서 출생한 옹범(翁帆)은1994년에 산두대학 외국어언문학부 영어B반에 입학했다. 1995년 여름방학에 산두대학에서는 첫 세계화교물리학대회를 열었는데 양진녕이 부인 두치례와 함께 이 대회에 참석하게 되였다. 학교에서는 옹범을 선발하여 양진녕과 두치례를 영접하는 일을 책임지게 했다. 청순한 19살 처녀였던 그녀는 당시 저명한 과학자부부를 매우 흠모했다. 그후 그녀는 여러해동안 양진녕부부와 서신거래가 있었다. 옹범은 양진녕을 만나기전에 책과 인터넷을 통해 노벨상을 수여받은 이 과학자에 대해 얼마간 알고있었다.
위대한 물리학가로서 양진녕은 리론물리학에 거대한 기여를 했다. 그런 기여로 하여 중국인출신으로는 처음 리정도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
양진녕(杨振宁)은 1922년 10월 1일에 안휘성 합비시에서 태여났다. 중학교때 양진영은 매우 총명했는데 특히 수학천재였다. 어느날에 양진녕은 아버지를 보고 “아빠, 난 커서 꼭 노벨상을 수상할테야!”하고 말했다. 아들이 큰 포부를 품은것을 본 양무지는 매우 기뻐하며 공부를 잘하라고 고무해주었다. 양진녕의 아버지 양무지교수는 서방의 근대수학을 제일 먼저 중국에 인입한 선구자의 한분이다. 1923년에 양무지는 미국류학시험에 합격되여 먼저 미국서부의 스텐폴드대학에서 1년간 학습하였다. 1년후 양무지는 미국 중부의 시카코대학에 진학하여 석사와 박사학위를 따냈다. 20세기 30년대에 양무지는 청화대학 수학교수로 있었는데 그때 청화대학 수학계에서는 많은 세계급 수학가를 양성해냈다. 그 중에서 가장 걸출한 사람은 화라경과 진성신이다.
양진녕은 고중시절에 화학만 공부했을뿐 물리를 배우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련합대학에 들어갈 때 화학학부를 지망했다. 그러나 련합대학에 입학한 후 자신이 물리학에 매우 큰 흥취를 가지고있는것을 발견한 그는 물리학부로 들어갔다. 그때 그가 중학교때 노벨상을 수상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말이 온 련합대학교에 퍼졌다. 사람들은 “양무지의 아들이 수학을 매우 잘하는데 왜서 아버지처럼 수학을 전공하지 않고 물리학부를 선택했는가 했더니 원래는 수학부문에 노벨상이 없었기때문이였군”하고 말했다.
옹범이가 인터넷에서 양진녕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던 2004년 2월의 어느날에 양진녕한테서 전화가 왔다. 양진녕은 중문대학에서 만나자고 요청했다.
1998년에 산두대학 영어학부를 졸업한후 옹범은 먼저 산두의 한 기업에서 사업하다가 1개월후 심수의 한 골프구락부에 가서 사업했다. 그 시기에 한 향항청년과 2년동안의 혼인경력이 있었지만 감정이 맞지 않아 헤여진후 2002년에 다시 광동외국어대외무역대학 번역학부의 석사반에 들어가 연구생공부를 시작했다.
2003년말에 광동외국어대외무력대학에서 연구생공부를 하고있는 옹범은 향항려행을 떠났다. 2011년에 청화대학 건축학원에 들어가 박사공부를 했다.
2003년에 양진녕의 부인 두치례가 미국에서 사망되였는데 광주에 있던 옹범은 그 소식을 모르고있었다. 양진녕의 결발부인은 저명한 항일명장이며 국민혁명군 륙군 중장이였던 두률명장군의 딸 두치례이다. 양진녕은 1949년의 크리스마스 휴가일에 한 호텔에서 두치례를 만났다. 두치례는 이전에 그가 련합대학부속중학교에서 교학할 때의 학생이였다. 그들은 1950년 8월에 결혼했다. 결혼후 그들은 푸린스둔에서 행복하게 살면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보았다. 1951년에 맏아들 양광락(현재 컴퓨터공정사)이 태여났고 1958년에 둘째아들 양광우(현재 화학가)가 출생했으며 1961년에 딸 양우례(의사)가 출생했다. 현재 세 자녀는 모두 미국에 거주하고있다. 두치례는 2003년 10월에 병으로 사망되였다.
얼마후 양진녕을 만났을 때 옹범은 매우 격동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다. 9년만에 다시 만나서 이미 82세로 된 양진녕교수를 앞으로 달려가 부축해 되는지 어째야 되는지 결단을 내릴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눈앞의 양진녕교수가 매우 정정하고 사유와 행동이 매우 민첩한것을 보고 놀랐다. 옹범은 양진녕교수가 9년전처럼 정력이 왕성한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그번의 상봉에서 두 사람은 매우 즐어워했다. 옹범이 양진녕교수앞에서 리과학생이 학술계의 거인을 대하는것처럼 그렇게 긴장하고 어색해하지 않았기때문에 편하고 친근하게 대화를 나눌수 있었다. 양진녕은 자신의 지난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매우 총명했던 양진녕은 중학교도 채 졸업하지 않은 16살 되는 나이에 서남련합대학에 들어갔으며 20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서남련합대학의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1945년에 미국에 건너가 시카고(芝加哥)대학에 들어간 그는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49년에 프린스턴(普林斯顿)대학연구원에 들어가 박사후공부를 하면서 리정도와 합작하기 시작했다.
1957년에 양진녕은 리정도와 함께 공동히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들 두 사람은 가장 먼저 노벨상을 수상한 중국인출신이다. 후에 향항의 한 방송국에서 양진녕을 방문했는데 그들은 양진녕게 일생에서 가장 큰 기여가 무엇인가고 물었다. 양진영은 그때 “나의 가장 큰 기여는 중국사람들을 도와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는 심리를 극복하게 한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후 양진녕과 리정도는 누구의 이름을 앞에 놓겠는가 하는 문제때문에 다투었다. 1962년에 《뉴욕의 손님》이란 한편의 글 때문에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렬했다. 그 당시(두 사람이 서로 자신의 이름을 앞에 놓겠다고 다툴 때) 7살 되는 양진녕의 아들 양광락은 “난 앞으로 혼자서 노벨상을 수상하겠어”하고 말했다.
1977년에 양진녕은 량은좌 등과 함께 “미국화교협회”를 창립하여 중미관계를 촉진했다. 양진녕은 프린스턴대학연구소 교수, 뉴욕주립대학 석계분교 아이스탄강좌 교수와 리론물리연구소 소장을 력임했다. 또 1986년부터 향항중문대학 박문강좌 교수로 있었고 1995년에는 국립화교대학명예교수로 초빙되였으며 1997년에는 청화대학 고등연구중심 영예주임을 맡았고 1999년에는 정식으로 영예퇴직을 하고 청화대학 교수를 맡았다. 2003년말에 북경에 들어와 거주하면서 선후로 중국과학원, 미국국가과학원, 영국황가학회, 로씨야과학원, 대만중앙연구원, 로마교황학원 및 유럽 여러 나라와 남아메리카주의 과학원 등의 원사 영예직함과 영예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광동동관리공학원 명예교장을 맡고있다.
새 중국이 성립된후 양진녕은 등가선 등처럼 귀국하여 나라를 위해 일하지 못했다. 1971년부터 양진녕은 여러차례 중국에 와서 친척방문을 하고 강좌를 했으며 중미과학기술교류와 합작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시기 주은래가 그더러 조국에 돌아와 사회주의건설에 힘을 이바지하라고 청하였지만 그는 중국의 조건이 차하다는 리유로 거절했다. 2000년이후 양진녕은 자기가 자라난 조국으로 돌아왔다. 양진녕은 자기의 령혼심처에서 고려가 가장 많았던 문제는 자신의 중국뿌리와 미국국적에 관한 문제였다고 말했다. 양진녕이 미국국적에 가입할 때 그의 아버지는 반대하면서 그와 부자관계를 끊겠다고 성명을 발표하면서 죽어도 양진녕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 일은 절대다수 국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몸부림일것이다. 지금 양진녕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것은 그가 조국으로 돌아왔기때문이다…
그번 만남이 있은후 양진녕은 밤낮 옹범의 생각에 빠져버렸다. 그녀의 청순한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떠오르며 잠을 이룰수 없었다. 그의 고독한 마음을 진솔하고 사랑스러운 녀인이 따뜻하게 해주었던것이다. 양진녕은 짬이 있을 때마다 그리움을 참지 못해 옹범한테 전화를 걸군 했다. 옹범은 과외시간에 양진녕의 전화를 받는것이 점점 습관되였다. 과학할아버지의 전화를 받는것은 이미 그녀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으로 되였다. 그녀는 늘 전화가 오던 그 시간이 되여도 양진녕의 전화를 받지 못할 때는 허전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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