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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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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하늘에 묻노라 정이란 무엇이길래 댓글:  조회:7078  추천:2  2014-03-08
하늘에 묻노라 정이란 무엇이길래   —경요의 애틋하고 눈물겨운 사랑이야기     대만의 저명한 작가 경요(琼瑶)는 원명이 진철(陈喆)이다. 경요외에 심여, 봉황 등 필명을 썼다. 1938년 4월 20일에 사천성 성도의 한 지식분자의 가정에서 출생한 그녀는 4남매중에 맏이로 태여났는데 큰 남동생과는 오누이쌍둥이였다. 아버지 진치평은 대학교수였고 어머니 원행서는 학자가문의 출신이였다. 경요는 어릴때부터 중국고전문학에 매우 큰 흥취를 가졌고 9살 때 처녀작 《불쌍한 소청》을 《대공보》아동판에 발표했다. 그녀는 1949년에 부모를 따라 대만으로 갔다. 경요는 18살 때 자신의 어문선생과 첫사랑을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보다 25살이나 년상인 선생님에게 빠졌고 선생도 재능있고 정열적인 녀학생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세속의 비난을 면치 못했고 부모의 견결한 반대를 받았다. 결국 그녀는 부모와 사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한다락의 첫사랑에 종지부를 찍었다. 대학시험에서 세번이나 미역국을 먹은후 경요는 대학을 갓 졸업한 영어선생 경균을 알게 되였다. 문학에 공동한 애호를 가지고있은 그들은 서로 사랑하여 자그마한 세집을 맡고 결혼까지 하였다. 얼마 안되여 경요는 임신하였는데 해산할 림박에 남편 경균은 류학을 떠나게 되였다. 1961년에 경요는 아들을 낳았는데 남편이 곁에 없어서 늘 한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손으로 장편소설을 쓰군했다. 그런데 외국에 가서 나쁜 습성에 물이 든 경균은 대만에 돌아오자 문학창작을 포기하고 도박에 빠져버렸다. 나중에 그는 가정의 생활비까지 모두 도박판에 밀어넣었다. 1963년 7월에 경요는 자신의 첫사랑이야기를 다룬 장편애정소설 《창밖》을 《환관》잡지에 발표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경균은 경요가 이따위 소설을 써서 자신을 망신시켜 친구들앞에서 얼굴을 들수 없게 했다고 질책했다. 1964년 봄에 경요는 경균과 리혼함으로써 고통스런 혼인을 결속지었다. 리혼후 경요는 창작에만 전념하여 또 한부의 장편애정소설을 《련합보》부간에 련재했다. 그 당시 그녀는 《환관》잡지사 사장이며 《련합보》부간의 주필인 평흠도를 알게 되였다. 그녀의 재주를 알아본 평흠도는 그녀를 이름난 녀류소설가로 배양하리라 마음먹었다. 그해 36살인 평흠도는 명망 높은 사장이며 큰 신문의 부간의 주필일뿐만아니라 편집, 번역, 음악 등 다방면에 정통한 다재다능한 인재였다. 평흠도의 고무를 받고 경요는 륙속 장편애정소설을 발표했다. 경요와 평흠도는 작품을 토론하고 인생을 담론하는 가운데서 서로 사랑의 감정이 움텄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이 감정을 가슴속에 깊이 감춰둬야만 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평흠도는 안해가 있는 세아이의 아버지였기 때문이였다. 경요는 남의 남편을 빼앗아 그 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싶지 않았다. 그녀와 평흠도는 모두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이 소중한 감정을 묵묵히 가슴속에 묻어두고만 있었다. 몇년후 경요의 자서전 장편애정소설을 각색한 영화 《창밖》이 방영되였다. 이 영화엔 경요의 부모가 딸의 첫사랑을 반대하는 장면이 그대로 묘사되여있었다. 이 영화를 보고난 그녀의 어머니는 몹시 노하여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내가 왜 이런 딸을 낳았나? 네가 책을 써서 부모를 욕하고도 부족하여 또 영화까지 찍어서 부모를 욕하느냐?”하고 노발대발하면서 그녀를 질책했다. 깜짝 놀란 경요는 무릎을 꿇고 어머니의 옷자락을 부여잡고서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곁에서 이 장면을 목격한 평흠도 역시 깜짝 놀라서 경요의 부모를 위안하는 한편 경요를 부축하면서 가슴아픈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괴롭고 서러우며 절망적인 복잡한 감정에 울먹이던 경요는 의지할 언덕을 만나듯 그의 몸에 얼굴을 묻었다. 그도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 시각 그들의 마음은 하나로 이어졌다. 어머니는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단식하는 방법으로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고 량심의 가책을 받게 했다. 어머니가 단식한지 닷새째 되자 온집안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5일동안이나 음식을 들지 않은 어머니는 몰골이 말이 아니였다. 이제 더 음식을 들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했지만 모두가 속수무책이였다. 이 위급한 시각에 평흠도가 왔다. 평흠도는 손자를 리용하는 묘한 방법을 썼다. 경요의 6살난 아들더러 외할머니께 우유를 권하게 하고 다 같이 어머니의 침대앞에 무릎을 꿇고 애걸하도록 했다. 어머니는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외손자가 권하는 우유를 마셨다. 평흠도가 아니 왔더라면 어머니가 정말 사망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근심했던 경요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긴장했던 경요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기위해 평흠도는 그녀와 그녀의 녀동생, 그리고 녀동생의 남자친구를 데리고 도심에 놀러갔다. 그러나 도중에 차사고가 나서 평흠도는 오른 쪽 발이 골절되여 오래동안 지팽이신세를 지게 되였다. 이 차사고로 하여 생명의 취약함을 느낀 두사람은 더는 사랑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경요는 기쁨과 고통의 모순속에서 늘 괴로와했다. 어느 한번 평흠도는 긴 사랑의 편지를 썼다면서 종이를 돌돌 말아서 경요에게 주었다. 그녀가 돌돌 만 종이를 풀어보니 종이의 길이가 3메터는 되였는데 종이에 아무런 글도 없었다. 다만 제일 아래끝에 서캐만큼 “평흠도”라고 썼을뿐이였다. 그녀는 하고싶은 말이 많고 많지만 쓸수 없는 그의 심정을 읽을수 있었다. 그녀는 해서는 안될 이 사랑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날 평흠도는 차를 몰고 경요를 데리고 대만의 저명한 풍경구인 우래로 놀러갔다. 차가 우래의 환산길을 천천히 달릴 때까지 묵묵히 앉아있던 경요는 긴 침묵을 깨뜨리며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영원히!”하고 자기의 결심을 말했다. 그러자 평흠도는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즉시 차를 급정거했다. 그리고 차문을 열고 “어서 내려가!”하며 그녀를 떠밀었다. 그녀는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그에게 떠밀려 차에서 내려왔다. 길 량옆은 모두 낭떠러지고 절벽이였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평흠도는 시동을 걸고 미친듯이 절벽을 향해 차를 몰려고 시도했다. 대경실색한 그녀는 황급히 달려가 팔을 벌리고 차를 막아섰다. 그러자 평흠도는 식은 땀을 흘리며 재빨리 차를 급정거시켰다. 차는 절벽의 끝에 가서 아슬아슬하게 멈추었다. 후날 경요는 그때의 정경을 자신의 수필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우리가 서로 창문유리를 사이두고 얼마나 오래동안 서로를 주시했는지 모른다. 내 의식속에서 그것은 100세기는 될 그렇게 오래고 긴 시간이였다. 그 순간 하늘도 없고 땅도 없고 세계도 없고 우주도 없었다. 오직 우리 둘만이 세상에 남아있을뿐이였다. 한 사람은 차안에서 내다보고 다른 한사람은 차밖에서 마주보고… 그리고 삶과 죽음만이 있을뿐이였다. 다음순간 그는 번개같이 차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이미 힘을 잃고 더는 몸을 지탱할수 없었다. 한발작만 더 뒤걸음치면 나는 절벽에 떨어질수 있었다. 그 시각 나는 아무런 고려도 없었다. 그가 절벽으로 차를 몬다면 내가 떨어져 그와 함께 죽은들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절벽으로 떨어지려는 찰나에 그는 힘있게 내 손을 잡아당겼고 나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겨버렸다… 낭떠러지에 서서 우리는 몸을 떨며 울었다. 그는 ‘당신이 없이 못살것 같았어. 차라리 죽는것이 낫다고 생각했지. 고통도 없이…’하고 말했다. 우리는 날이 어두워서야 차안으로 들어갔다. 그 다음 그는 조심스레 차를 몰았다.” 사랑으로 죽고 살고 하다가 경요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눈물을 흘리며 정을 끊어버렸다. 두 사람은 각자의 책임을 생각하고 래세에 다시 만날것을 약속하고 헤여졌다. 몇년이 지났다. 의연히 혼자 살고있는 경요앞에 양씨가 나타났다. 미국에 거주하고있는 양씨는 가문이 호화롭고 사람됨됨이가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경요가 리혼한지 얼마 안되였을 때 양씨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경요가 심정이 불쾌하여 의식적으로 그를 피했기에 그는 유감을 남기고 미국으로 떠났었다. 지금까지 양씨는 미혼으로 있었는데 다시 대만으로 왔다가 경요가 혼자사는것을 보고 용기를 내여 또 한번 그녀한테 사랑을 고백했다. 경요는 그의 진지한 사랑에 감동되였다. 그녀도 조용히 의탁할 곳을 갈망하고있었다. 양씨가 대만을 떠나려 할 림박에 그녀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들이 결혼하려고 서두르고있을 즈음에 갑자기 평흠도가 나타났다. 평흠도는 안해와 성격이 맞지 않아 리혼했다고 경요에게 알려주었다. 평흠도를 다시 보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있는것 같았고 그와 함께 했던 모든 기억들이 일시에 되살아나면서 자신들이 종래로 혜여진적이 없는것처럼 느껴졌다. 그때는 그들이 절벽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고통스럽게 헤여진지 8년이나 되는 해였다. 그들의 진지한 사랑에 감동된 양씨는 그들의 사랑을 축복해주고는 묵묵히 혼자서 미국으로 떠났다. 3년후 이미 41살인 경요와 50살을 넘긴 평흠도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로 되였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마침내 결합된것이다! 결혼후 그들은 늘 함께 있으며 그림자처럼 떨어질줄 몰랐다. 꿈을 찾는 소녀처럼 오래동안 헤매던 경요는 이제야 자신의 꿈을 찾은것만 같았다. 따라서 문학창작에서도 령감이 용암처럼 솟구쳐서 수많은 애정소설을 써냈다. 2002년에 평흠도는 백내장수술을 했는데 경요는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를 보살펴주었다. 2003년에 평흠도는 재차 병으로 앓아누웠는데 병독이 신경을 침입하여 안면신경이 마비되고 오른쪽 얼굴이 비뚤어지고 왼쪽 눈을 뜰수 없게 되였으며 입안이 부어서 음식을 먹기도 어려웠다. 그를 구하기 위해 경요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손수 얼굴에 붕대를 감아주기도 하고 눈에 약을 넣어주기도 하면서 살뜰하게 보살펴주었다. 그녀의 정성어린 간호가 있었기에 평흠도의 병세는 안정되였고 몸도 점차 회복되였다. 병세가 호전된 남편이 그녀에게 《당신이 있길래》란 노래를 불러줄 때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39    중국고대 4대재녀 댓글:  조회:6472  추천:5  2014-03-02
중국고대 4대재녀     중국력사에서는 채문희, 리청조, 탁문군, 상관완아를 중국고대 4대재녀(才女)라고 일컽는다.   기구한 운명을 헤쳐온 채문희 채문희(蔡文姬)는 후한3국시기의 저명한 문학가로서 이름이 염(琰)이고 자가 문희 또는 명희이다. 채문희의 아버지 채옹은 그 당시 이름 높은 학자, 문학기재로서 음률에 정통하고 서예와 회화에 아주 능하였다. 채문희는 아버지 영향을 받아 거문고를 잘 타고 지식이 풍부했으며 타고난 문학적재질을 가지고있었다. 아버지가 거문고를 타다 선이 끊어지면 몇번째 선이 끊어진것을 눈을 감고도 찾아내는 등 천부적인 음악재질을 타고났다. 채문희는 16세 때 하동의 세족인 위중도와 결혼하여 부부금실은 좋았지만 불행하게도 남편이 1년만에 각혈로 죽었다. 시댁에서는 그녀가 자녀를 낳지 못했다고 구박했다. 채문희는 하는수없이 본가로 돌아와 살았다. 그후 아버지 채옹은 감옥에서 숨지고 채문희는 홀로 살았다. 그 무렵 권력다툼으로 인해 동한북부의 유목민족 흉노가 남부로 쳐들어 와는데 그때 채문희도 랍치되였다. 흉노의 좌현왕은 절세미녀 채문희에게 반하여 그녀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채문희는 좌현왕의 왕비가 되여 2명의 자녀를 낳고 현지음악까지 배웠다. 건안13년(208년)에 채옹의 친구였던 조조는 채문희가 흉노의 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주근을 사자로 보내여 황금 천냥, 백벽 한쌍을 주고 채문희를 데려왔다. 그해 35세였던 채문희는 조조의 중매로 전교위 동사한테 시집을 갔다. 2년후 동사는 죽을죄를 범했는데 채문희는 조조의 승상부를 찾아가서 남편을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조조는 채옹과의 옛정을 생각하고 또 친구딸의 비참한 신세를 보고 동사를 죽이지 않았다. 채문희는 동사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은데 딸은 후에 사마의의 아들 사마사에게 시집을 갔다. 채문희는 일생에 세번 시집을 갔는데 운명이 기구했다. 그녀는 명문가문에 태여났지만 평생 류랑생활을 하였으며 그녀의 작품은 이 비분과 슬픔속에서 만들어 졌다. 그의 창작 작품 호가18박자와 비분시는 채문희의 비참한 조우에서 비롯 된 것이다. 채문희는 사람의 애간장을 끊게 하는 거문고곡 《호가18박(胡笳十八拍)》을 창작했고 동사가 죽은후 저명한 《비분시(悲愤诗)》를 창작하여 남편을 기렸다. 《호가18박》은 중국 고대 10대 명곡이고 《비분시》는 중국 력사상 첫 장편서사시이다.     남송의 걸출한 녀류작가 리청조 리청조(李清照)는1084년 3월 13일에 장구(지금의 산동성 제남)에서 출생했는데 호는 이안거사(易安居士)이다. 남송의 걸출한 사인(词人)인 그녀는 18살 때 우승상의 아들 조명성과 결혼했다. 그들 부부는 금슬이 좋았는데 함께 금석서화를 연구하면서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어느해 중양절에 리청조는 저명한 《취화음》을 써서 외지에서 벼슬하고있는 남편에게 부쳐주었다. 그 사를 본 조명성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문을 닫고 래방객을 사절하며 밤낮 사흘동안 침식을 잃으면서 답사를 써보냈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 1127년에 북방녀진족(금)이 쳐들어오자 리청조부부는 난민들을 따라 강남으로 피난을 가게 되였다. 그때 오래 모아두었던 금석서화를 대부분 잃어버린 리청조를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후 남편이 사망되자 리청조는 몹시 고독했다. 그 시기 그녀의 생활에 장여주란 남자가 뛰여들었다. 장여주는 리청조를 돈 많은 녀자로 알고 그녀한테 접근하여 달콤한 말로 유혹했다. 리청조는 장여주를 다정다감한 남자로 알고 그한테 시집을 갔다. 결혼후 장여주는 리청조에게 재산이 많지 않다는것을 알게 되였고 리청조도 장여주의 사랑이 거짓이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후 장여주의 관직이 돈을 주고 사온것임을 발견한 리청조는 남편을 고발했다. 당시에는 남편에게 죄가 있으면 안해도 함께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리청조의 부모가 옥졸을 매수하여 리청조는 9일만에 감옥에서 나올수 있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리청조의 두번째 혼인은 100일도 못되여 결속되고말았다. 리청조는 남편 조명성의 뜻을 잇기 위해 《금석록》을 편찬했다. 리청조는 《여몽령》, 《일전매》, 《영우락》, 《어가오》, 《무릉춘》 등 예술성이 높은 사작품을 세상에 남겨놓고 1155년 5월 12일에 사망되였다. 1959년에 제남시 박돌천공원에 리청조기념당을 세워는데 1999년에 대규모로 확건했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당조의 최고 재녀 상관완아 664년에 섬주(지금의 하남성)에서 태여난 상관완아(上官婉儿)는 용모가 아름답고 요염한데다가 남달리 총명하고 영특했다. 또한 문체가 뛰여나 한번 붓을 들어 글을 쓰면 문장이나 글씨체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상관완아의 할아버지 상관의는 섬세한 기교를 구사한 시풍인 상관체를 류행시키며 당태종때부터 널리 이름을 떨쳤고 당고종때에는 재상으로 되였지만 무측천의 페위를 도모하다가 처형되였다. 상관의의 가족도 모두 처형되였지만 갓난아기였던 상관완아와 어머니 정씨만은 외가쪽의 도움으로 살아남을수 있었다. 상관완아는 할아버지 상관의의 재능을 물려받아 시문에 능하고 천성이 총명했다. 그녀는 14살 때 궁의 노비로 들어가게 되였다. 무측천은 상관완아가 쓴 7언률시를 보고 글솜씨에 감탄하여 그녀를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비서로 삼았다. 그때로부터 상관완아는 무측천에 대한 복수심을 버리고 녀황제를 도와주었다. 그후 상관완아는 당대문화가 번성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무측천의 최측근으로  된 상관완아는 696년부터 조서를 담당하는 일을 맡아하면서 큰 권세를 누렸다. 상관완아는 시적 재능만 뛰여난것이 아니라 정치적 수단도 뛰여나 무측천의 조카인 무삼사와 애매한 관계로 가까이 지냈으며 698년에 다시 황태자가 된 중종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중종이 복위를 한 뒤에도 중종과 위황후의 신뢰를 받은 그녀는 황제의 명을 전담하며 대부분의 조칙을 꾸미였다. 그녀는 중종의 후궁으로서 소용(昭容)의 지위에 올랐으며 위황후와 무삼사 등과 련합하여 무측천때의 중신들과 무씨세력이 회복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중종에게 서관과 학사를 늘일것을 건의하고 조정을 대신하여 천하의 시문을 품평하였다. 710년에 중종이 죽고 위황후가 무측천처럼 스스로 황위에 오르려 하자 상관완아는 무측천의 딸인 태평공주와 련합하여 이를 견제하였다. 결국 리륭기가 태평공주와 힘을 합하여 위황후를 제거하고 아버지 리단(당예종을 말하는데 황제에 올랐으나 어머니 무측천이 녀황제로 되자 태자로 강등되였음)을 다시 황제로 옹립하였다. 하지만 리륭기는 상관완아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주변의 상관완아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리륭기는 710년에 상관완아를 처형하였다. 향년 46세였다. 그후 당현종이 된 리륭기는 상관완아의 글들을 모아서 20권의 문집으로 편찬하였다. 당시를 모아 편찬한 《전당시(全唐诗》에도 상관완아의 시 32수가 실려있다.     아름다운 사랑신화를 엮은 재녀 탁문군 탁문군(卓文君)은 서한시기의 림공(지금의 사천성 공래시)사람인데 미모가 뛰여나고 거문고와 문장에 능했으며 가문이 부유했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탁문군은 박학다식하여 시가사부(诗歌词赋), 음률 등 어느것 하나 정통하지 않은것이 없었다. 탁문군은 17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여 친정에 와서 살았는데 숱한 명문가문에서 그녀한테 청혼하였다. 하지만 탁문군은 가난한 서생인 사마상여한테 마음을 주었다. 탁문군은 거문고를 잘 타고 시에 능한 사마상여의 재능에 반하여 그를 사랑하게 되였다. 탁문군의 아버지 탁왕손은 딸이 가난한 사마상여와 만나는것을 반대했다. 그러자 탁문군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밤도와 도주했다. 그때로부터 탁문군은 주점을 차려놓고 술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생활은 힘들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사랑과 행복을 위해 밤도와 도주한 탁문군의 비범한 용기와 그들의 랑만적인 애정이야기는 후세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얼마후 탁왕손은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생각에 딸한테 거금을 대주어 주점을 그만두게 했다. 그후 사마상여는 경성에 들어가 벼슬하게 되자 기생집에 드나들고 첩을 맞아들일 생각을 하면서 환난을 함께 겪었던 안해를 버리려고 했다. 사마상여는 안해한테 “일이삼사오륙칠팔구십백천만”이란 13자 되는 편지를 보내왔다. 총명한 탁문군은 수자중에서 유독 “억(亿)”이 빠진걸 보고 “무억(无亿)”은 “무의(无意)를 암시한다는것을 알아차렸다. 탁문군은 눈물을 흘리면서 《원랑시》를 써보냈는데 그 시를 받아본 사마상여는 안해의 재주에 깜짝 놀라면서 자신의 행실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후부터 사마상여는 다시는 안해를 버리고 첩을 맞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38    왕궁에 갇힌 캄보쟈의 허수아비 왕 댓글:  조회:6173  추천:0  2014-03-01
왕궁에 갇힌 캄보쟈의 허수아비 왕     해가 지고 마지막 남은 관광객들마저 떠나면 노로돔 시아모니 캄보쟈(캄보디아)국왕은 동화속에서나 나올것 같은 왕궁에서 쓸쓸히 혼자가 된다. 한 나라의 국왕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만 자리이다. 하지만 시아모니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안해도 없고 자녀도 없다. 원하지 않았던 왕위에 올라 아무런 권력도 없는 허수아비 왕으로 하루하루를 고독하게 보내고있는 그는 왕궁에 갇힌 “죄수”나 다름없다. 혼자가 된 이 시간에 그에게 남은것은 마지못해 왕이 되기전에 보냈던 행복한 시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전부일것이다. 노로돔 시아모니는 1953년 5월 14일에 캄보쟈의 수도 프놈뻰(프놈펜)에서 노로돔 시아누크 전임국왕과 여섯번째 왕비인 모니니아트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여났다. 1965년에 프놈뻰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체스꼬의 수도 쁘라하의 한 중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후 1975년까지 쁘라하음악예술박사학원에서 고전음악과 고전무용을 전공하였다. 1976년에 조선에 가서 영화촬영에 대해 공부하고 1977년에 캄보쟈로 돌아왔다. 그러나 크메르루주정권에 의해 1979년까지 다른 왕실가족과 함께 가택연금을 당하였다. 1981년 발레를 가르치기 위해 프랑스의 빠리로 갔고 그곳의 모자르트음악학원에서 고전무용과 고전음악을 가스치는 교수로 활동하면서 거의 20년동안 프랑스에서 지냈다. 1993년에 빠리에 본부를 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의 캄보쟈대사로 임명되여 국왕즉위 직전까지 활동하였다. 2004년 10월에 60년이상 왕위에 있으면서 캄보쟈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노로돔 시아누크국왕이 건강상의 리유로 양위할 뜻을 밝히자 국왕선출위원회에서 시아모니를 새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그해 10월 29일에 그는 프놈뻰에 가서 캄보쟈의 국왕으로 되였다. 시아모니의 아버지 시아누크는 다재다난(多灾多难)했던 캄보쟈와 함께 파란곡절을 겪어온 인물이다. 캄보쟈에서는 1~6세기에 부남왕국이 섰고 9세기초에 자야바르만 2세가 전국을 통일하여 앙코르왕국을 세웠다. 앙코르왕국은 14세기부터 세력이 약해져 주변국가들의 영향을 받다가 1863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였으며 왕의 제도는 계속 존속되였다. 시아누크는 1941년 4월에 조부인 국왕 모니본이 사망되자 왕위에 즉위하였다. 당시 캄보쟈는 프랑스의 보호국이였다. 캄보쟈의 독립을 념원하고있던 그는 1945년에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1949년에 프랑스련합내에서 캄보쟈독립을 획득하였다. 1955년 3월에 왕위를 아버지 수라마리트에게 양위하고 9월에 총선거에서 압승하여 수상 겸 외무장관으로 취임했다. 그는 국내적으로는 정치를 쇄신하고 대외적으로는 중립주의 외교를 표방하였다. 1960년에 국왕인 아버지가 사망하였을 때 왕위계승을 하지 않고 국가원수로 취임했다. 그렇게 되여 캄보쟈는 립헌군주국이지만 왕이 없는 상태로 되였다. 시아누크는 1961년에 라오스국제회의를 제창하고 중립화에 공헌하였다. 1970년 3월에 그가 외국방문을 가났을 때 우파인 론놀 등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그의 국가원수직을 박탈했다. 중국으로 망명간 그는 그해 5월에 북경에서 캄보쟈민족련합정부를 세우고 망명정권의 수반이 되였다. 1975년에 크메르루주군(軍)이 내전을 일으키고 캄보쟈를 장악했다. 그해 9월에 시아누크는 그들의 지지을 받고 귀국하여 국가원수직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1976년 4월에 크메르루주가 독재를 강화하자 피박에 못이겨 사임하고 다시 중국과 조선에 들어가 망명객으로 머물렀다. 1979년 2월에 윁남군은 헹 삼린정권을 앞세우고 캄보쟈를 장악했다. 시아누크는 윁남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1982년에 반윁남파가 집결하여 수립한 민주캄보쟈련합의 불안정한 망명련립정부의 대통령이 되였다. 국외에서 국가회복운동의 지도자로서 투쟁을 계속해오다가 1991년에 귀국하여 과도정부인 캄보쟈민족평의회의 의장에 선출되였다. 1993년 9월에 립헌군주제로 환원하는 헌법개정을 하자 그는 다시 왕위에 복귀하여 캄보쟈의 국왕이 되였다. 하지만 망명객이 된후부터 시하누크에게는 실권이 없었다. 시아누크가 실질적인 권한을 통치한 기간은 캄보쟈가 독립한 1953년 11월 9일부터 1970년 3월 18일까지였다. 1993년 5월 총선에서 시아누크의 둘째 아들 라나리드가 제1총리로 선거되여 권력을 쥐였으나 1997년에 제2총리인 훈센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라나리드를 국외로 추방하고 단일 총리가 되여 현재까지 실권을 장악하고있다. 훈센은 2004년 10월에 시아누크국왕이 건강상의 리유로 양위할 뜻을 밝히자 국왕선출위원회로 하여금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고 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는 시아모니를 새 국왕으로 선출하게 했다. 시아모니는 왕위서렬로 보면 아홉번째였으나 정치에 관심이 없고 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다는 리유로 순조롭게 새 국왕으로 선출되였다. 하지만 시아모니는 즉위한 날부터 왕궁에 갇힌 “죄수”나 다름없었다.  그를 가둔 장본인은 다름아닌 명민하고 술수에 능하며 무자비한 정치인으로 소문난 훈센총리라고 할수 있다. 캄보쟈의 모든 실권을 손에 쥔 훈센총리의 권력은 왕궁에까지도 뻗쳐있다. 시아모니는 즉위 다음날에 성명을 발표하여 “나는 립법, 행정, 사법 등에 관여하지 않고 정치에서 중립을 지키며 어떤 정치인물이나 정당의 편에도 서지 않을것이다”고 선포했지만 훈센은 그에 대한 감시를 줄곧 늦추지 않았다. 시아모니국왕은 정부가 파견한 감시인들에게 둘러싸여있다. 왕실담당장관인 콩솜올은 훈센의 측근인데 감시인들을 총괄지휘하고있다. 국왕은 왕궁담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하며 어쩌다 나갈 경우에도 감시인들이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 또 언론의 접근은 일체 차단되여있다. 캄보쟈헌법은 왕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고있지만 실제로는 이 권한이 전혀 주어지지 않고있다. 야당의원으로 캄보쟈에서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몇사람중의 하나인 손치헤이는 “왕의 권한은 아무것도 없다. ‘허수아비왕’이다”라고 말했다. 캄보쟈에서 왕의 위상이 언제나 이랬던것은 아니다. 시아모니국왕의 부왕인 노로돔 시아누크는 수십년동안 이 나라에서 거인처럼 군림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고 그의 생일 같은 특별한 날이면 불꽃놀이행사를 보기 위해 수만명이 왕궁앞광장에 몰려들군 했다. 아마도 이런 시아누크의 존재로 하여 훈센은 아무런 정치적 야심도 없는 시아모니이지만 안심하지 못하고 항상 경계하고있는지로 모른다. 시아모니가 국왕에 즉위한지도 7년이 지났다. 지금 캄보쟈국민들은 시아모니국왕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슬프고 외로우며 버림받았다”와 같은 말로 국왕에 대한 측은한 감정을 내비치고있다. 시아모니국왕은 58세로 매일 매일을 서류를 결재하고 손님들을 접견하는 일상적 업무로 보내고있다. 그런 다음 식사하고 책을 읽는것이 생활의 거의 전부이다. 6명의 부인과 수많은 정부를 뒀던 부친과 달리 시아모니국왕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왕위계승자를 남길것 같지도 않다. 최근에 있었던 그의 생일은 거의 누구도 모른채 조용히 지나갔으며 궁안에서조차 특별한 행사가 없었다. 왕궁에 있는 젊은 시종인 신치헤이는 “국왕이 선량하고 점잖으며 캄보쟈의 상징이지만 문제는 아무런 권력이 없다는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훈센이 캄보쟈의 실질적 왕이라고 말할수 있다”고 했다. 시아모니는 모국어외에 프랑스어, 체스꼬어, 영어, 로어에 정통했다. 여러 나라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국왕이 손님들과 현지어로 대화를 나눌 때면 이를 엿들으려는 주변감시인원들은 짜증을 낼 정도라고 한다.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권력에 대한 야망이 전혀없는 시아모니가 왜서 왕위에 순순히 올랐을가? 내막을 하는 사람들은 시아모니국왕은 왕실을 계속 존속시키려는 부모의 뜻에 따라 이때 어쩔수 없이 왕위를 계승했다고 말했다. 시아모니는 2005년 8월에 중국에 국사방문을 왔고 2008년 8월에 제29기 북경올림픽운동대회의 해당활동에도 참석했다. 그후 해마다 중국방문을 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감시일군들이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는 2천년에 달하는 캄보쟈왕실의 마지막 계승자가 될지도 모른다. 발레무용수였던 그에게는 거칠고 험난한 조국의 정치무대보다 유럽의 예술무대가 더 적합했을것이다. 시아모니는 어릴 때부터 누나인 보파데비공주(시아누크의 맏딸)와 함께 고전무용을 배웠고 14살 때에는 아버지 시아누크가 제작한 영화 《꼬마왕자》의 주인공역을 맡기도 했다. 시아모니는 그때를 회상하며 예술무대에서 활동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37    남자를 자르고 천년을 산 사마천 댓글:  조회:5720  추천:2  2014-02-23
남자를 자르고 천년을 산 사마천     지혜롭고 용병에 능하였던 두릉장군은 겨우 5000명의 보병을 거느리고 북방의 흉노를 토벌하러 떠났다. 두릉장군은 계속되는 전투에서 적들을 격파하고 적진 깊숙히 들어갔다. 용맹스럽게 전투에서 많은 적을 무찌르고 돌격한 두릉장군은 적진에 너무 깊숙히 들어갔기때문에 끝까지 잘 싸웠으나 말에서 떨어져 포로가 되고말았다.   이 소식이 왕에게까지 전해지는 동안 그는 장렬히 전사한것으로 전해졌고 많은 사람들은 이에 애도하였으며 어떤 부하는 따라서 자결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봄이되자 두릉장군이 사실은 전사한것이 아니라 포로가 되여 오히려 적군의 장군으로 쓰이고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에 패배한일이 없기로 유명한 왕이 이를 듣고 격노하였다. 그리고 즉시 신하들을 소집하였다. 신하들은 왕앞에서 두릉장군을 욕하기 시작하였다.   “페하, 그자는 혼자서 부대를 벗어났다는것부터가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맞습니다. 페하, 그자는 전에도 충동적인 행동으로 고집이 세고 잘난척을 하던 그런 사람이였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부하로 있었던 자들까지 입을 모아 욕을 하였다. “페하, 잠시나마 그자와 같이 있었다는것이 수치스럽습니다. 그자의 구족을 멸하여 후세에 교훈으로 삼아야 할것입니다.”   고집불통에다 신하의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는 왕이 이미 두릉장군의 일에 화가 난것을 보고 신하들은 감히 반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왕의 눈치만 보면서 왕에게 아부하기만 했다. 이때 말석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 하나가 불쑥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하였다.   “페하, 두릉자군이 전투에 나간지 겨우 반년밖에 안되였습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 신하들은 그가 전투에 나갈때 마중을 나가며 장군의 지략을 찬양했고 장군을 전도유망한 분이라고 칭찬들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반년도 안되여 장군의 사정을 알지도 못한채 장군을 역적이라고 모두들 비난하는데 이것이 믿을수 있는 인간의 마음입니까? 평소 그의 품성과 충성심을 보건데 그는 분명 적진에 홀로 남은 리유가 있을것입니다. 그 진실을 확인하기전에는 장군을 결코 나무랄수 없는줄로 아뢰옵니다.”   이 사람은 사마천이였다. 그 말에 격노한 왕은 사마천에게 궁형이라는 남자로는 치욕적인 형벌을 내렸다. 사람들은 남자도 아니고 녀자도 아니게 수치스럽게 사는것보다 남자답게 죽는것이 어떠냐고 말하였다. 사마천은 어디로 가나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러던중 임안장군이라는 사람이 사마천을 찾아왔다.   “더이상 수치수럽게 살아가지 말고 이 독약으로 자결하시오.” “싫소.” “사내가 죽는것이 그렇게 무섭나? 깨끗하게 죽으시오.” “싫소. 난 끝까지 살겠소.” “왕에게 직언하는것을 주저하지 않던 자네가 왜 목숨에는 연연하는것인가?” “앞으로 10년이나 20년이 지난후에 말하리다.” “아니, 그때까지 살아있겠다는 말인가? 내가 사람을 잘못보았군.”   그후 몇년후 임안장군은 억울한 루명을 쓰고 역적으로 몰려서 사형을 당하게 되였다. 그가 죽기전에 사마천이 그가 갇힌 감옥에 몰래 찾아갔다.   “마지막으로 만나고싶었습니다.” “난 사내답게 죽겠소, 당신처럼 그렇게 비겁하고 수치스럽게 연명하지 않겠단말이요.” “보십시오. 임안장군은 내가 왜 연명하고 사는지 아시오? 나는 살아서 력사를 쓸것이오. 이 나라의 간신배들이 어떻게 나라를 망쳐놓았고 임금이 어떻게 어리석었으며 백성들이 어떻게 고통받고 살았는지 하는것을 나는 살아서 력사에 남길것이요. 난 살아서 수치스러웠지만 이 나라의 어리석은 임금과 간신들은 력사속에서 두고두고 지탄을 받을것이오.”   이말을 들은 임안장군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형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사마천은 후날 력사저서를 완성하였는데 그 책이 바로 유명한 《사기》였다.    
36    칭키스칸의 관을 열어본 유일한 사람 댓글:  조회:6697  추천:0  2014-02-23
칭키스칸의 관을 열어본 유일한 사람     칭키스칸(칭기즈칸—成吉思汗)은 몽골족의 걸출한 정치가, 군사가이며 원나라를 건립한 민족영웅이다. 그는 기원 1277년 서하로 진격하던 도중 65세를 일기로 돌연 병사했다. 칭키스칸이 죽은 뒤 부하들은 몽골족의 풍속에 따라 그의 시신을 밀장했는데 오늘날까지도 칭키스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후 사람들은 력사기록에 따라 여러군데를 조사하다가 오늘날의 성릉(成陵)을 칭키스칸릉으로 정했다. 항일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은 칭키스칸릉이 일본 침략군에게 도굴될것을 우려하여 칭키스칸의 릉침을 성릉으로부터 꺼내어 유림, 연안 등지를 거쳐 섬북고원남측에 위치한 황제릉에 암장해놓자는 비밀결정을 내렸다. 이 작업은 치밀한 안배끝에 극비리에 안전하게 진행되였다.   칭키스칸 릉침은 그후 몇년동안 황제릉에 암장돼있다가 항일전쟁승리후에야 다시 오늘날의 성릉으로 옮겨오게 된것이다. 이는 당시 국가 최고기밀의 하나로 몇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50년대 초, 우란후(울란부—乌兰夫)국무원 부총리(몽골족)가 칭키스칸릉을 참배하던 중 문뜩 릉을 지키고있는 수위에게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수 있느냐고 물었다. 수위는 부총리의 부탁이면 모두 들어줄수 있다고 깎듯이 말했다. 이때 우란후부총리는 잠깐 망설이다가 “칭키스칸의 관을 열어봐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불의의 질문에 흠칫 놀란 수위는 조금 주저하다가 “물론 볼수 있습니다. 오늘날 당신도 역시 몽골인의 칸이니깐요!”라고 대답했다. 이어 우란후부총리는 관이 안치된 밀실로 들어갔다.   칭키스칸릉 밀실내의 관에 칭키스칸본인의 유골이 담겨져있는지, 아니면 단지 칭키스칸의 의관뿐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민간에서는 또한 칭키스칸 관내에 두개의 말등자가 놓여있다는 소문도 떠돌고있었으나 이 모든것은 단지 세인들의 추측일뿐이지 실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 우란후부총리는 관을 연후 무엇을 보았을가? 정말로 칭키스칸의 유골은 존재했을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수위가 밝힌데 따르면 밀실에서 걸어나오는 우란후부총리의 표정은 매우 엄숙했다고 한다. 무엇이 있었는가 하는 수위의 질문에 우란후부총리는 일언반구의 말도 하지 않았고 수위도 더이상 감히 묻지 못했다고 한다.    
35    알몸으로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던 할리우드 녀배우 댓글:  조회:7349  추천:1  2014-02-16
알몸으로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던 할리우드 녀배우     마를렌 디트리히는 세계에서 수입이 제일 높은 영화배우였다. 그녀는 1901년 12월 27일에 베를린 교외의 황가경찰가문에서 막내딸로 출생했다. 1923년부터 1929년사이에 디트리히는 18부의 무성영화에 출연했다. 디트리히는 29세때인 1930년에 할리우드 감독 스턴버그에게 발탁되여 영화 《푸른 하늘 천사》에 출연하게 되면서 국제적 명배우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다. 《푸른 하늘 천사》에서 그녀는 요염한 술집접대부역을 맡아 그녀특유의 매력을 충분히 발산하면서 인기를 얻자 할리우드로 넘어갔다. 그후 스텐버그가 감독한 영화 《마로끄》로 일약 명배우로 되여 세계 남성들의 육감적인 우상으로 각광을 받았으며 당대 최고의 곡선미 소유자로 유명해졌다. 디트리히의 아름다움에 반한 히틀러는 그녀를 위해 베를린부근에 영화기지를 세워놓고 독일의 할리우드를 만들려고 준비했다. 히틀러는 여러번이나 디트리히에게 청혼했지만 번마다 거절을 당했다. 1937년에 디트리히가 영국에서 영화 《천명》을 찍을 때 갑자기 여러명이나 되는 히틀러의 특사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들은 공백지표를 내밀면서 그녀가 독일로 돌아가기만 하면 부르는 값을 모두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그녀를 독일 최고의 배우로 만들어주겠다고 대답했다면서 나치스정권의 선전부장 파울 괴벨스를 파견하여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디트리히는 단마디로 거절했다. 그녀는 친구에게 독일로 돌아가기를 거절한 리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난 히틀러를 위해 선전하고싶지 않았어. 만약 눈앞의 영예를 위해 독일로 돌아가면 난 인류의 죄인으로 되는거야.” 그날밤 디트리히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는데 자신의 계획을 애인 페어뱅크스에게 알려주었다. “난 히틀러를 침대우에서 죽여버리겠어요. 난 진심으로 히틀러를 사랑하는척 할거예요. 난 파울 괴벨스에게 독일로 돌아가겠다고 대답하겠어요. 그들은 몸을 수색할것이니깐 난 알몸으로 히틀러의 침대에 오르겠어요. 그리고 히틀러가 잠들었을 때 독약으로 그를 죽여버리겠어요!” 하지만 파울 괴벨스는 히틀러의 안전이 근심스러워던지 디트리히가 독일로 돌아오는것은 환영한다고 말했지만 히틀러와 단독으로 만나겠다는 그녀의 요구는 들어줄수 없다고 했다. 디트리히는 1937년 3월 6일에 미국국적을 획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과 1945년에 그녀는 미군의 옷을 입고 알제리, 이딸리아, 벨지끄, 프랑스 등 나라의 전선에 나가 련합군위문공연을 다녔다. 그녀는 BBC방송에 출연하여 “청년들, 희생하지 마세요. 전쟁은 미친짓이고 히틀러는 멍청이니깐요!”라고 웨쳤다. 1947년에 그녀는 미국 최고의 공민상인 “대통령자유훈장”을 획득했다. 1950년에 프랑스정부에서는 그녀한테 “프랑스영예군단훈장”을 수여했다. 20세기 미국문학의 거장인 헤밍웨이는 그녀의 목소리만으로 가슴이 무너질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쉰듯한 감성적인 목소리는 제2차 세계대전중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향수를 부르는 애절한 노래가 방송되는 저녁 9시55분이면 나치스병사도 련합군도 모두 총을 내려놓고 그녀의 노래에 귀를 귀울였다고 한다. 그녀의 사생활은 평탄치 않았으나 남편과의 관계는 끝까지 유지되였다. 그러나 남편과는 성관계를 갖지 않는 부부생활을 했고 동성련애자로 소문나기도 했다. 헤밍웨이는 그녀와 한번도 잠자리를 가지지 못했지만 그녀와의 사랑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1934년 려객선안에서 만난 이후 헤밍웨이는 디트리히에게 열렬한 련애편지를 써보냈다. 1949년부터 약 10여년동안 보낸 편지들이 디트리히의 딸 마리아 리바를 통해 2007년에서야 공개되였다. 결국 헤밍웨이는 1961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디트리히는 1992년까지 90세에 이른 삶을 살다가 빠리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34    영국청년과 6년동안 정사 나눈 자희태후 댓글:  조회:7959  추천:1  2014-02-05
영국청년과 6년동안 정사 나눈 자희태후   (번역)   청나라말기 중국을 통치한 자희태후(慈禧太后)와 영국귀족청년의 은밀한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 《태후와 나》가 최근에 영문판과 중문판으로 출판됐다. 이 책의 저자는 청나라말기에 영국외교부통역으로 청나라황실을 드나들었던 영국인 에드번드 백하우스남작이다. 《태후와 나》는 저자가 황궁에서 보고 들은 특별한 이야기를 주축으로 하여 저친왕과 군기대신, 후비사이의 은밀한 사랑이야기 및 저자와 자희태후사이에 있었던 6년간의 정사이야기를 담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주로 29세의 영국귀족청년(저자 본인)과 67세의 자희태후와의 은밀한 사랑이야기를 썼다. 에드번드 백하우스(埃蒙德·巴恪思)는 1873년에 영국 요크의 명문가문에서 출생했다. 남작작위를 물려받고 옥스포드대학을 졸업한 에드번드는 1898에 북경으로 왔다. 그는 영어외에 일어, 라틴어, 로어, 중국어, 만족어, 몽골어 등 여러가지 언어에 정통했기에 영국외교부의 통역을 맡았다. 1903년에 청정부에서는 그를 경사대학당(지금의 북경대학)의 법률과 문학교수로 초빙했다. 1년후에 그는 영국외무 전원으로 되였다. 1944년 1월에 71세의 에드번드 백하우스는 북경에서 사망되였다. 사망되기 1년전에 그는 회고록의 형식으로 유럽에 있을 때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기록한 《지나간 일들》과 청나라말기에 중국황실을 드나들면서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 《태후와 나》를 썼다. 그러나 전쟁시기이고 내용이 자희태후와의 은밀한 정사를 담은 책이였기때문에 출판되기 어려웠다. 에드번드 백하우스가 사망된후 그의 원고를 도와주었던 스위스의사는 원고를 여러부로 복제하여 영국박물관, 빠리국립도서관, 미국 하부트학원도서관에 전해주었다. 그가 1973년에 사망되자 그의 친구는 원고를 원 저자 에드번드 백하우스가 생전에 공부했던 옥스포드대학도서관에 전해주었다. 2007년에 북경텔레비죤방송국 《과학교육관찰》프로에서 북경고궁박물원도서관 부관장 향사는 처음으로 자희태후가 영국귀족청년과 6년동안 정사를 나누었다고 밝혔다. 북경텔레비죤방송국의 이 보도로 하여 사람들은 영국귀족청년 에드번드 백하우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태후와 나》를 번역한 왕소가는 저자 에드번드 백하우스에 대해 감탄하면서 이렇게 소개했다. “저자는 보기 드문 언어천재입니다. 이 책은 영문으로 씌여졌는데 중간에 프랑스어, 라틴어, 로어, 그리스어, 일어, 중국어를 끼워넣었습니다. 더욱 사람을 탄복시키는것은 저자가 여러가지 언어사이에 자유자재로 경전을 인용하여 자연스럽게 전환했으며 여러나라의 력사, 전고, 기문, 일사 등을 아주 재치있게 채택한것입니다. 이 책은 1943년에 씌여졌고 그 시기 저자는 70세의 고령이였습니다. 어떠한 참고자료도 없었고 인터넷과 검색을 할수 없는 당시의 정황에서 전부 기억에 의해 썼다는것은 정말 경탄하지 않을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이 책을 번역하기 매우 어려웠습니다. 미국편집의 도움을 받아서 먼저 여러가지 언어를 전부 영어로 정리한후 다시 제가 중문으로 번역했습니다.” 에드번드 백하우스는 자희태후가 사망된 2년후인 1910년에 《태후통치아래에서의 중국》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은 독특한 시각으로 독자들에게 중국봉건력사에서 최후로 강권통지를 해왔던 자희태후와 그녀의 통치아래에서 몰락하는 청나라의 부패상을 보여주었다. 에드번드 백하우스가 쓴 《북경궁정회고록》은 학술계의 칭송을 받고있다. 또 그는 20세기초의 학술계에서 중국력사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남긴 괴짜동양학자로 알려져있다. 그는 서방기자들과 접촉하지 않고 조용히 은거해 지낸것으로 하여 더욱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저자가 사망된후 67년만에 《태후와 나》가 출판되여 물의를 빚었다. 저자는 책에서 자신이 자희태후와 6년동안 맺은 성관계를 상세히 묘사했다. 1835년 11월 29일에 출생한 자희태후는 함풍황제의 비였고 동치황제의 생모였는데 함풍황제가 사망된후 황태후의 신분으로 수렴청정하면서 1861년부터 죽을 때(1908년 11월 15일)까지 대청제국의 실제 통치자로 되였다. 26세때인 1861년 8월에 함풍황제가 사망되자 청상과부로 된 자희태후는 수많은 남자들과 성관계를 맺었다. 최근에 《태후와 나》가 출판되면서 자희태후가 정말로 영국귀족청년과 정사를 가졌을가 하고 이 책의 진실성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미 1976년에 영국의 저명한 력사학자 휴 트레버 로퍼(休·特雷弗·罗珀)는 《숨겨진 일생: 에드번드 백하우스의 비밀》이란 책을 출판하여 에드번드 백하우스남작을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증거를 조작해 세상을 속인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또 그의 작품은 “한 자페증동성련애자의 음란한 상상으로서 허구해낸 억압되고 비틀린 성욕의 최후배설”이라고 질책했다. 하지만 학자들은 한 사람의 견해로 이 책의 모든 가치를 말살한다는것은 음식을 먹다가 목이 멘다고 그 음식을 다시 먹으려 하지 않는것과 같다고 반박했다. 이 책을 번역한 왕소가는 “자희태후와 이 책의 저자와의 정사에 대해 어떻게 리해하는가”하는 기자의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책에 언급된 력사재료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사실이다’거나 ‘거짓이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저자와 자희태후와의 사이에 정사가 있었다는것은 사실이겠지만 책에서 묘사한것처럼 그렇게 빈번하고 그처럼 뜨거웠겠는가 하는것은 알수 없는 일입니다. 이 책에서 광서황제는 자희태후가 보낸 하수인에게 목이 졸려 죽음을 당했고 자희태후는 원세개의 총에 맞아죽었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 중대한 사실은 다른 사람한테서 들은대로 썻을수 있기에 사서(史书)와 다를수 있습니다. 하지만 궁정귀족들의 생활에 대한 묘사는 세절이 매우 상세하고 진실하여 꾸며낸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 책에는 허구의 성분이 있을수 있지만 저자를 ‘증거를 조작해 세상을 속인 인물’이라고 질책하는것은 공정하지 못한 평가입니다.” 이 책에 60여세의 자희태후의 피부가 20세의 소녀와 같다고 묘사했는데 이는 사실일가? 청나라연구전문가이며 청동릉문물관리처 전임 부주임 우선포는 이렇게 소개했다. “자희태후는 27세에 과부로 되였는데 몸보양에 대해 매우 중시했습니다. 미용술에 대해서는 더욱 중시했습니다. 1902년전후 자희태후의 신변에는 갓 프랑스에서 돌아온 덕령과 용령자매가 있었는데 그녀들은 자희태후의 목욕시중을 들 때 직접 자희태후의 몸을 만져보았는데 몸매가 풍만하고 살결이 아주 곱고 부드러웠다고 했습니다. 덕령은 《어향표묘록》에서 자희태후는 60여세이지만 20세의 소녀와 같았다고 하면서 그야말로 미인이였다고 찬탄했습니다. 덕령은 또 《태후의 화장대》와 《옥체진렬》이란 글에서 자희태후가 진주분을 먹고 닭알흰자위를 바르고 사람젖을 먹는 등 방법으로 피부를 보양하고 얼굴을 아름답게 가꿨다고 썼습니다.” 자희태후가 사람젖을 먹는것으로 얼굴미용을 했다는데 대해 의심하는 견해도 있었지만 우선포는 북경제1력사서류관에서 청나라서류를 읽다가 무의식중에 황궁에서 자희태후에게 젖을 공급한 녀자들의 명단이 적혀있는것을 발견했고 말했다. 덕령은 또 글에서 자희태후가 갓 출산한 젖이 잘 나오는 젊은 녀자들을 황궁에서 거주하게 했는데 밤중에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썼다. 당시 자희태후가 몰래 사생아를 낳았다는 추문도 돌았다. 그전에 이미 자희태후가 15세에 갓 입궁하여 함풍황제를 만나기전에 이미 공친왕과 몰래 정사를 나누었다는 추문이 돌았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동치황제의 신분에도 의문을 가지면서 동치황제는 함풍황제의 친아들이 아니라 자희태후가 공친왕과 사통하여 낳은 사생아라고 인정했다. 야사의 기재에 의하면 자희태후는 영록을 몹시 총애했는데 함풍황제 몰래 두 사람은 경상적으로 사통했다고 한다. 또 자희태후는 수렴청정을 한후에는 공개적으로 영록을 자신의 침대에 불러들여 뜨거운 밤을 보냈다고 한다. 그외에도 자희태후는 잘 생긴 젊은 남자만 보면 궁에 한달씩 묵게 하면서 밤마다 정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모두 《문진우기(闻尘偶记)》와 같은 야사에 기재되여있다. 야사에는 있고 정사에는 없다고 하여 사실이 아니라고 할수 없다. 자희태후의 음란한 생활이 정사에 기재될 가능성이 매우 적기때문이다. 그외 고궁박물원도서관에서 소장한 자희태후의 사진(1904년에 찍음)을 보면 자희태후가 로년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눈동자가 맑고 아름다왔으며 용모가 예뻤다는것을 알수 있다.      
33    영예와 치욕이 엇갈린 사부치의 인생 댓글:  조회:6258  추천:2  2014-02-04
영예와 치욕이 엇갈린 사부치의 인생   (번역)     새 중국이 탄생되여서부터 무수한 혁명가, 정치가, 군사가, 과학가들이 서거된후 유골이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 안치되였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의 력사에서 사부치 한 사람만이 전반생에 공로가 탁월했지만 죽은후 도리여 추도사가 취소되였고 당적이 제거되였으며 유골함이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서 내쫓기는 치욕을 당했다. 1909년 8월에 호북성 황안현(지금의 홍안) 봉강향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사부치는 어릴 때 부모의 농사일을 도우면서도 부지런히 공부했다. 1927년 11월 13일에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황마봉기에 고무된 사부치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무장투쟁에 참가했다. 사부치는 싸움에서 점차 군사재능을 보여주어 홍군의 련지도원으로부터 퇀정치처 주임, 사정치부 주임, 군정치부 주임으로 승진했다. 30살전에 홍군의 고급장교로 된 사부치는 악예환쏘베트구역을 창립하고 공고하게 하는데 힘썼으며 반포위토벌전투에서도 일정하게 공헌했다. 장국도는1930년대초에 사업을 주최하는 기간에 악예환쏘베트구역에서 “좌경”정책을 실시했다. 내부일군에 대해 심사하는 과정에서만 수많은 홍군간부들이 박해를 받았다. 그 시기에 사부치는 장국도를 바싹 따라 “숙반(肃反)”과정에 맹목적으로 사람을 의심하면서 검은 재료를 만들어 간부들을 심문했다. 그때문에 악예환쏘베트구역의 수많은 간부들이 배척되고 타격받고 강직되였다. 심지어 몇몇 간부들은 억울한 죄로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그런 “공로”로 사부치는 홍군 4방면군 총정치부 조직부장으로 승직되여 인사대권을 장악했다. 물론 사부치가 홍4방면군의 발전에 일정한 공헌을 한것은 사실이다. 그는 홍4방면군의 반포위토벌전투중에서 유격전으로 국민당군을 소멸하였고 부대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적지 않은 승전고를 울려 사천군벌무장을 벌벌 떨게 했으며 부대가 좌절을 당했을 때 전사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정치사상사업을 틀어쥐였다. 그는 장정에 참가하면서 장국도의 로선이 그릇되다는것을 알고 장국도가 분렬하여 따로 중앙을 세우려는것을 반대했고 태악지구에서 8년동안 활동하면서 항일전쟁의 승리와 아군의 발전에 공헌했으며 류백승, 등소평수하의 장군으로 되여 해방전쟁에서 혁혁한 공헌을 세웠다. 건국후 사부치는 중공운남성 당위제1서기, 곤명군구 사령원 겸 정위로 임명되여 운남성의 당정군을 모두 장악했다. 그 시기 사부치는 운남봉기부대의 개편사업을 조직했고 운남의 토지개역을 지도했으며 크고 작은 토비무장을 소멸하여 운남지구의 사회질서와 생산을 회복했다. 그 시기 그의 가장 큰 공헌은 마약금지선전사업을 틀어쥐고 마약밀매조직을 타격하여 운남에서 장기간 마약흡입과 마약밀매현상이 근절되게 한것이다. 사무치는 1955년에 상장계급을 수여받았고 1959년에 공안부 부장, 인민무장경찰부대 사령원 겸 정위로 임명되였으며 1965년에 공안부 부장을 겸하면서 국무원 부총리로 승직했다. 문화대혁명기간에 사부치는 등소평을 비판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자신의 직접 상급이였던 등소평에 대해 사정없이 모함하여 강청의 호감을 샀다. 강청의 눈에 든 사부치는 문화대혁명기간에 중앙령도서렬 21위로부터 9위로 상승되였다. 1966년 12월 18일부터 “왕광미특별사건심사소조” 조장을 맡은 사부치는 강청, 강생 등과 결탁하여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며 국가주석인 류소기를 “미국특무”로 모함하여 타도하는데 앞장섰다. 1968년 9월에 사부치는 조작해낸 류소기의 “죄증재료”를 강청에게 보내주었다. 강청, 강생, 사부치는 “죄증재료”를 “반역자이고 내부간첩이며 로동자역적인 류소기의 죄행에 대한 조사보고”로 고쳤다. 10월 13일부터 31일까지 열인 중국공산당 제8기 확대회의인 12중전회에서 이 보고를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류소기는 억울하게 당내외 일체직무를 철소당하고 영원히 출당되였다. 사부치는 1967년 2월부터 시작하여 강청, 강생, 진백달 등과 결탁하여 “자산계급복벽역류(후에 2월역류라고 했음)라는 죄명으로 담진림, 진의, 엽검영, 리부춘, 리선념, 사향전, 섭영진 등 로간부들을 무함하고 박해했다. “2월역류”를 비판하면서 4명의 원수와 3명의 부총리가 충격을 받았거나 물러나지 않으면 타도되였다. 게다가 류소기, 등소평, 도주, 하룡이 이미 타도되였고 주덕, 진운이 배척되였으며 류백승은 병으로 몸이 쇠약하여 작용을 발휘할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 정치국위원중에 모택동, 림표, 주은래, 진백달, 강생 다섯 사람만 남았고 정치국 후보위원은 사부치 한명만 남아있었다. 이렇게 되자 중앙문화대혁명령도소조가 중앙정치국을 대체하는 류례없는 당의 령도기구인 “중앙문화대혁명팽두회의(碰头会)”가 나타났다. 이 “팽두회의”는 중앙문화대혁명령도소조 전체성원인 진백달, 강생, 강청, 장춘교, 요문원외에 주은래, 사부치, 황영승, 오법헌, 엽군, 왕동흥, 온옥성이 렬석했다. 사부치는 로간부들을 타도하는데 앞장섰기때문에 계속 중용되였다. 1970년 4월에 중공중앙에서는 정당건당사업좌담회를 열고 강생, 장춘교, 사부치 세 사람이 소조의 책임지도자로 결정되였다. 림표사건이 발생된후 사부치는 계속 새로운 군사위원 사무회의 성원으로 되였다. 사부치의 사업은 주요하게 공안계통이였는데 그가 공안계통에 조성한 위해는 가장 컸다. 1966년 5월부터 사부치는 공안부 부장의 직권을 리용하여 선후로 313명의 련합공작소조를 북경시공안국에 파견하였다. 그후 그는 북경시공안국의 원 지도부를 자신의 측근들로 갈아치우고 전임 국장과 기타 지도성원들을 반당분자로 몰아 타격했다. 그 바람에 북경시공안국에서는 1600여명이 피해를 입었고 72명이 감옥살이를 하게 되였다. 사부치는 또 강생과 함께 13명의 북경시지도간부를 모함했다. 원 북경시당위 제2서기 류인, 당위서기 등척, 부시장 오함 등은 핍박에 의해 사망되였다. 사부치는 또 반란파들을 선동하여 공안사무를 접수하여 관리하게 했다. 1967년 2월 11일에 북경시공안국은 군사관제를 실행했다. 사부치의 중용을 받고있는 군사관제위원회 부주임 류전신은 군사관제위원회의 실권을 장악한후 사부치의 뜻때로  북경시공안국의 10명의 정부국장과 117명의 정부처장, 분국 국장을 모두 특무, 반역자라고 무함했다. 1968년 4월에 사부치는 북경시공안국 군사관제위원회의 명의로 《구북경시공안국반혁명집단이 미국, 장개석특무와 결탁해 특무간첩활동을 한 일부 정황보고》를 써서 북경시공안국을 장기간 미국, 장개석특무와 결탁하여 간첩활동을 하면서 목숨을 걸고 미국과 장개석에게 충성을 한 반혁명집단이라고 무함했다. 사부치는 보고에서 “북경시공안국의 특무활동은 류등(류소기, 등소평)사령부의 지지를 받았고 “대특무 팽진, 라서경, 류인의 지휘하에 미국과 장개석의 뜻을 받들어 진행되였다”고 억울한 사건을 조작했다. 사부치의 선동과 지지하에 “공안기관, 검찰기관, 법원을 짓부시자”는것이 반란파들의 구호로 되였다. 이렇게 되여 홍위병들이 사람을 때려죽여도 관계하지 못하는 등 전국의 공안기관은 마비상태에 빠졌다. 1970년 12월부터 1971년 2월 11일까지 주은래의 지시에 따라 공안부에서는 제15차 전국공안회의를 열었다. 주은래는 사부치에 대해 엄하게 비판하고 새 중국의 첫 17년의 공안사업을 긍정하면서 절대 대부분의 공안간부들은 좋거나 비교적 좋다고 했다. 주은래의 강화가 전달된후 일부분의 지도간부와 업무골간들은 륙속 공안부에 돌아왔고 공안부도 지방공안기관과 련계와 그들에 대한 업무지도를 회복했다. 그후 사부치는 위암진단을 받으면서 나쁜 일을 계속할수 없게 되였다. 1972년 3월 26일에 사부치는 북경에서 위암으로 사망되였는데 향년 63세였다. 3월 29일에 사부치의 추도회대회가 거행되였는데 천안문, 신화문 등 곳에 그를 애도하는 반기가 내걸렸다. 추도사에서는 사부치의 죽음은 “우리 당과 우리 군의 중대한 손실”이라고 했다. 1978년 12월에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의에서 사부치, 강생에 대해 심사했다. 1980년 10월에 중공중앙에서는 강생, 사부치의 반혁명죄행을 전당에 공포하고 두 사람의 “추도사”를 취소함과 동시에 당적을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 안치되였던 사부치의 유골함도 덮었던 당기를 벗겨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했다. 1981년 1월 23일에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판결서 특법자(特法字) 제1호는 사부치를 림표, 강청반혁명집단사건의 16명 주범중의 하나라고 밝혔다.  
32    모안영이 사망된 진실을 현장에서 목격한 견증인 댓글:  조회:8101  추천:1  2014-01-26
  모안영이 사망된 진실을 현장에서 목격한 견증인   (번역) 모안영     모안영은 1922년 10월 24일에 호남성 장사시에서 모택동과 양개혜의 맏아들로 태여났다. 8살 때 양개혜가 체포된후 어머니를 따라 감옥살이도 했고 어머니가 희생된후 거리에서 넝마주이도 하고 신문도 팔면서 어린 나이에 온갖 고생을 다하다가 1936년에 동생 모안청과 함께 쏘련에 가서 공부했다. 그후 쏘련군사학원에서 학습했고 쏘련조국보위전행에 참가했으며 총탄이 비발치는 유럽전쟁에도 참가하여 용감히 싸웠다. 1946년에 연안에 돌아온 모안영은 그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50년 10월에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가했다. 성보는 모안영의 사망을 현장에서 목격한 견증인이다. 아래의 사실은 성보의 회상에 근거하여 기록된것이다. 압록강북안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도강하여 조선으로 건너온 중국인민지원군은 팽덕회의 지휘에 따라 1950년 11월 5일에 적군 1만 5800여명을 소멸하고 제1차전역을 결속지었다. 이번 전역에서 아군의 차단부대가 지정된 위치에 도달하지 못하였기에 미국 기병 제1사와 영련방사가 도주하여 이 전역에서 한국군밖에 치지 못하였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장군은 중국이 “상징적으로 출병”할것이라고 잘못 판단하고 중국인민지원군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는 꼭 1950년 성탄절전에 조선전쟁을 결속짓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1950년 11월 19일 오전에 조선 대유동의 중국인민지원군 총부에서 지원군당위 상무위원회들이 중요한 작전회희를 열고있었다. 팽덕회는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번엔 먼저 후퇴해야겠습니다. 맥아더더러 우리가 그를 무서워하는것처럼 착각하게 하여 그가 더욱 미친듯이 진군하게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기회를 찾아 적을 섬멸해야 합니다!” 그 말을 듣던 모안영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 지도앞으로 다가가더니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생각엔 응당 적군을 향해 공격해야 한다고 봅니다. 적은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린 왜서 승승장구로 진군하지 않고 후퇴해야 합니까?” 모안영의 직접 상급이며 작전실 주임인 성보는 모안영의 말을 듣고 손에 땀을 쥐였다. 그는 (안영아, 네가 처음 전선에 나와 용감한 정신은 좋지만 어찌 감히 팽총사령에게 반대의견을 제출할수 있단 말이냐? 팽총사령의 성격을 너도 모르는건 아닐텐데. 며칠전에 열린 첫번째 작전회의에서 팽총사령은 제때에 적을 차단하지 못한 그 부대의 군지휘원에게 “거기에 적의 빈틈이 있었는데 당신들은 왜서 꾸물거리면서 그렇게 늦었단 말이요? 제때에 지정한 지점에 도착하지 못한것이 무슨 행위인지 모른단 말이요? 그건 군령을 어긴 행위란 말이요.  적을 소멸할수 있는 기회를 그르쳤으니 법에 따라 참형에 처해야 하는거요! 난 지원군의 총사령 겸 정위로서 일체 군령군기를 위반한 사람에 대해 징벌할 권리가 있소! 난 다른 재간은 없어도 제갈량처럼 마속을 참형할 담력만은 있소!”라고 한바탕 욕설을 퍼붓는걸 너도 보지 않았더냐? 너 지금 어떤 벌을 받으려고 그러는거냐?)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보의 추측은 빗나갓다. 팽덕회의 반응은 모든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것이였다. 팽덕회는 모안영의 의견을 끝까지 들은후에 평온한 어조로 좌우를 둘러보며 물었다. “당신들이 보기에는 모안영동지의 의견이 어떻소?” 등화부사령은 “적의 기세가 사납습니다. 한번 얻어맞았다고 기가 꺾일 적이 아닙니다. 만약 전면 공격을 한다면 우리가 손실을 볼것입니다. 난 팽총령사의 작전에 동의합니다. 먼저 적을 무서워하는척 후퇴했다가 장계취계하여 적을 타격해야 합니다!” 팽덕회는 또 기타의 부사령에게 의견을 물어본후 “좋습니다. 우리는 먼저 30킬로메터를 후퇴합시다. 후퇴하면서 운동중에 기회를 보아 적을 섬멸합시다. 싸울 때 옛 방법을 한번 더 쓰려고 합니다. 그 부대로 하여금 다시 적진을 차단하게 하여 립공속죄할 기회를 주겠습니다.” 회의가 끝난후 팽덕회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점심시간이 되지 않은걸 본 팽덕회는 “누가 나하고 장기 한판을 두겠소?”하고 물었다. 지원군총부에는 팽덕회와 장기를 둘수 있는 사람은 홍학지, 성보, 모안영 세사람이였다. 팽덕회는 다른 취미는 없었지만 한가할 때에는 장기를 두기 좋아했다. 그는 장기를 잘 두지 못하여 늘 세 사람에게 패하군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가지 묘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한번만 물려주오”였다. 적수가 그의 기물중의 “포”나 “차”를 먹으려고 하면 그는 제꺽 “포”나 “차”를 꼭 잡고 놓지 않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쓴 기물을 원자리에 놓고 잡혔던 기물을 살리군 했다. 말이 한번이지 그런 일은 여러번 반복되군 했다. 팽덕회가 물려달라고 할 때에는 세사람의 태도가 모두 달랐다. 홍학지는 “하하하”하고 웃으면서 “로총께서 또 물려달라시네”하면서 막지 않았다. 성보는 감히 아무말도 못하고 팽덕회가 하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모안영만은 팽덕회의 체면을 봐주지 않고 자신이 먹게 될 장기쪽을 팽덕회의 손에서 빼앗군 했다. “제가 한판 겨루어보겠습니다.” 모안영이 먼저 나섰다. 장기쪽을 다 배렬한후 모안영은 “로총, 이번엔 우리 한번 쓴 장기쪽은 다시 물리지 못한다고 약정합시다”고 말했다. 팽덕회도 그렇게 하자고 통쾌하게 대답했다. 장기가 시작되여 얼마후 팽덕회가 불리하게 되였다. 게다가 팽덕회는 모안영의 "말"이 자신의 "차"를 먹게 된것도 보지 못했다. 모안영은 주저하지 않고 팽덕회의 '차"를 먹어버렸다. “안돼. 안돼. 난 그렇게 쓰지 않겠소.” 팽덕회는 자신의 "차"를 빼앗아왔다. 그것은 두번째로 물리는것이여서 모안영은 불쾌하여 “제미랄, 로총은 왜 또 물립니까?”라고 소리쳤다. 곁에서 지켜보던 홍학지는 개의치 않고 “하하하”하고 웃었지만 성보는 이마살을 찌프렸다… 점심을 먹을 때 성보는 모안영을 조용히 불러놓고 말했다. “쏘련군대의 규정에는 참모장은 작전을 결정할 때 총사령에게 3번밖에 의견을 제기할수 없다고 했어. 그리고 우리 같은 참모들은 수장의 작전결정에 간섭할 권리가 없어. 우리의 직책은 정황만 제공하는것이야. 난 오전에 네가 한 발언이 우리 참모의 범위를 초과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부사령들도 아직 발언하지 않았는데 네가 먼저 의견을 발표한건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니냐?” “아. 성처장, 그때 난 미군을 빨리 물리칠것만 생각하다보니 후퇴하겠다니 너무 급했던거요.” “네 심정을 난 리해해. 그러나 지금은 미군이 매우 강대해. 그들의 무기는 우리보다 더 선진적이기에 정면으로 맞섰다가는 손해만 보게 돼.” 모안영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성처장의 말이 옳소. 회의때 나의 행위는 잘못된것이요!” “그리고 장기를 둘 때도 말인데 팽총사령은 긴장하게 사고한후 장기를 노는 습관이 있는걸 너도 알잖아? 팽총사령은 긴장을 풀기 위해 오락삼아 노는것이니 정식경기처럼 생각하지 말아라. 홍부사령은 늘 져주지 않니? 그건 팽총사령을 기쁘게 하여 긴장을 풀게 하려는거야. 그런데 너는 ‘제미랄’하는 욕까지 하였으니 참…” 모안영은 눈을 크게 뜨더니 말했다. “정말 내가 그렇게 말했소? 참 ‘제미랄’이란 말은 나의 입버릇이 돼서…” 1950년 11월 25일에 모안영은 북쪽벽의 난로앞에서 3개의 “A”자가 있는 전투전보를 등기하고있었다. 모안영은 지원군사령부의 로어번역이여서 일이 많지 않았기에 주동적으로 전보를 등기하고 발송하는 임무를 맡아서 했다. 팽덕회는 모안영의 옆칸에 있는 작은 방의 행군침대에 누워있었다. 전날 오전에 미군정찰기가 지원군총부의 상공에서 약 1시간동안 선회했는데 이 이상한 현상은 총부의 주의를 일으켰다. 미군이 가능하게 이 폭격목표를 발견한것이라고 예견했기에 등화, 홍학지와 당직이 아닌 참모들은 모두 오늘에 있을지 모르는 공습을 방지하기 위하여 나무판자집에서 멀리 않은 동굴에 피신했다. 작전실에는 실제로 떠날수 없는 총사령과 몇몇 당직 참모들만 남아있었다. 오전 11시경에 4대의 미군폭격기가 지원군총부의 상공으로 날아왔다가 북쪽으로 날아갔다. 작전실에 남아있는 참모들은 미군폭격기가 북쪽의 어느 목표를 폭격하러 간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팽덕회총사령의 안전에 대해 걱정한 성보는 총망히 팽덕회가 잠든 작은 방으로 뛰여들어갔다. 마침 홍학지도 달려와서 팽덕회를 데리고 모안영이 있는 방옆을 돌아서 문밖의 동굴쪽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성보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런데 적기는 또 북쪽에서 날아와 다시 작전실상공에서 선회했다. 그것을 본 성보는 “적기가 방금 북쪽으로 갔는데 왜 또 돌아왔을가? 그들이 찾고있는 목표가 중국인민지원군총부인 이곳이 아닐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성보는 하늘에서 곧 작탄이 떨어지려는것을 보고 큰소리로 “위험해, 빨리 뛰여라!”라고 소리치면서 모안영과 고서흔이 빨리 작전실에서 뛰여나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폭탄이 옹근 작전실을 명중하여 나무판자집이 전부 무너졌다. 이렇게 되여 모안영과 고서흔은 불속에서 사망되고말았다. 모안영의 묘지는 조선 평안남도 회창군의 중국인민지원군렬사릉원에 안치되였다.   
31    중국력사상 가장 잔인한 10대 살인백정 댓글:  조회:10335  추천:1  2014-01-25
중국력사상 가장 잔인한 10대 살인백정     중국고대사에 나타난 10명의 살인미치광이들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피빚을 얼마나 졌는지 모른다. “살인백정”이라는 네글자로 그들을 형용하는것이 가장 적절할것이다. 그럼 아래에 력대 10명살인백정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철혈살인백정 백기   공손계라고도 불리운 백기(白起)는 전국시기의 진나라 대장군이였다. 싸움판에서 백기가 어찌나 무자비했던지 6국의 군대들은 백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는 말만 들어도 혼비백산할 지경이였다. 기원전 294년에 백기는 군사를 거느리고 한나라와 위나라의 련합군을 치면서 적군의 수급을 벤것만도 24만개였고 기원전 273년에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와 연나라의 련합군을 공격하면서 그가 벤 수급만도 13만개였다. 후에 또 조나라장군 가언과 일전을 벌리면서 물을 리용해 조나라병사 2만명을 익사시켰고 기원전 264년에 한나라를 공략하며 5만여명의 목을 전부 베였다. 전쟁터에서 적군의 목을 벤것을 살인백정이라고 할수 없다고 해도 백기는 기원전 278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공략할 때 물을 터뜨려 언성(지금의 하북성 의성 동남쪽)이 잠기게 함으로써 사망자수가 수십만명에 이르게 하였는데 사망자중에는 10여만명에 달하는 백성들도 있었다. 또 기원전 260년에 조나라와의 장평전투에서 백기는 생포한 조나라군사 40만명을 생매장하고 겨우 240명의 소졸을 돌려보내 소식을 전하게 했다.     잔인한 살인백정 조조   3국시기 저명한 정치가이며 군사가일뿐만아니라 시인인 조조(曹操)는 란세의 영웅일뿐만아니라 잔인하기 그지없는 살인백정이였다. 193년에 도겸을 공략할 때 서주대도살을 감행했는데 기재에 따르면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10만여명을 살해했을뿐만아니라 개든 닭이든 짐승조차도 가만놔두지 않고 닥치는대로 죽였다. 당시 시체가 도처에 널린 까닭에 사수하까지 막혀 흐르지 못하는 정도가 되였다. 그밖에 조조는 장막을 치면서 옹성토벌을 감행했고 려포를 치면서 팽성토벌을 감행했으며 원상을 치면서 업성토벌을 감행했다. 또 오환을 치면서 류성토벌을 감행했는데 조조는 토벌을 감행할 때마다 모조리 죽이는 정책을 실시하여 그 수단이 극히 잔인함을 보여주었다.     식인살인백정 황소   당조말년의 농민봉기군 수령 황소(黄巢)는 횡포하고 지독하기로 소문났다. 황소는 장안성을 함락한후 사람을 어찌나 많이 죽였는지 시체가 온 거리에 널려있을 정도였다. 후에 관군이 다시 장안성을 수복한후 백성들은 완전히 관군의 립장에 서서 “황소가 사람을 마구 죽여 피가 온 성안에 질벅했다”고 공소했다. 《구당서》의 기재에 따르면 “황소가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를 1년간 포위하고있었는데 량초가 다 떨어지자 수백개의 대형돌절구를 만들어놓고 펀히 살아있는 백성들과 포로들을 남녀로소 구분없이 돌절구에 넣고 찧어서 그 고기를 병사들이 먹게 했다. 진주 4개주의 백성들을 다 잡아먹고나자 황소는 또 하남, 허, 당 등 10개주의 백성들에게도 마수를 뻗쳤다. 황소는 또 광주 대사에서 학살을 감행했는데 아랍 등 무슬린상인들을 20여만명 살해했다. 과연 그 미친듯한 살인행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해지게 하였다.     야만살인백정 테무진   테무진(铁木真) 칭키스칸(成吉思汗)은 세계력사상 걸출한 정칙가이며 군사가이지만 그가 세운 몽골제국의 패업은 가히 수많은 사람의 백골로 세운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1215년에 테무진은 금나라의 도성 중도(지금의 북경)를 함락했는데 성안의 백성들을 한달동안이나 대도살했다. 당시 100만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그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221년에 테무진은 한차례의 유럽정벌에서 대도살을 감행했는데 당시 몽골병사 5만명이 매인 평균 24명의 백성을 도살했다. 그 당시 도합 120만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최악의 살인백정 구비라이   칭키스칸의 손자 원세조 구비라이(忽必烈)는 원나라를 건립한 영웅이지만 종족멸종의 정책을 시행하여 한족들을 대거 학살했는데 그 사망자는 1800만명이 넘었다. 중국 북방의 90%에 달하는 한족평민들은 대부분이 그 종족멸종참극의 희생양이 되고말았다. 구비라이가 사천에서 대도살을 감행하기전에 300만~2000만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도살후 80만명도 남지 않았다. 이 인간성을 상실한 종족멸종행위는 기니스세계기록대전에 수록(1985년)되였다.       랭혈살인백정 주원장   명나라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은 황제가 된후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공신들을 마구 학살했다. 사서에 기재된데 의하면 호유용, 리선장, 란옥삼 사건에서 도합 1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원장은 재위 30년간 20만명을 살해했는데 공신들을 기본상 다 죽여버렸다. 주원장은 개국명장 상우춘(常遇春)에게 이쁜 녀인을 주어 첩으로 삼게 했다. 그런데 상우춘의 안해가 질투하여 그 첩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이를 알게 된 주원장은 즉시 사람을 보내여 상우춘의 안해를 죽여버리고 그 갈비뼈를 삶아서 상우춘 및 대신들이 식용하게 하였다. 주원장은 또 사람의 가죽을 바르는 형벌을 만들어 잔인한 본색을 세상에 알리였다.       변태살인백정 주체   주원장의 넷째아들인 명성조 주체(朱棣)는 애비 주원장에 비해 손색이 없는 살인백정이였다. 그는 1402년에 친조카 건문제의 황위를 빼앗은후 건문제궁의 녀관, 태감 등 모든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는데 한번에 1만 4000명이나 학살했다. 그는 또 건문제에게 충성하던 옛신하 방효유 등을 전부 살해했는데 “9족”이 아니라 “10족”까지 멸했다. 그리고 방효유의 안해 및 그 가족중의 녀자들은 군영에 가두어놓고 병사들이 마음껏 즐기게 했는데 한명의 녀자가 밤낮이 따로 없이 20여명 사내들의 수욕을 만족시켜야 했다. 그러다가 육신이 지쳐서 죽는 녀자는 시체를 가져다 개에게 먹이게 했다. 영락말년에 주체는 또 한번 궁녀, 환관들에 대한 대도살을 감행했는데 그번 대참사에서 살해된 궁녀만도 근 3000명에 달했다. 림종을 앞두고도 학살본성을 잊지 않은 주체는 바로 죽는 날에도 30여명의 궁녀들을 교살하여 자기와 함께 묻게 했다. 과연 명실상부한 변태살인백정이였다.       야성살인백정 장헌충   명나라말년의 봉기군 수령이였던 장헌충(张献忠)은 군사를 거느리고 성도를 함락한후 3일동안이나 대학살을 명령했다. 대학살을 그만둔후에도 장헌충은 의연히 날마다 100여명씩 살해했다. 그러다가 청나라군이 몰려오자 곧바로 도망쳤다. 바로 대군이 성도에서 도망치기전에 그는 참혹한 “4광정책”을 실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천인을 모조리 죽이고 일반백성으로부터 군인가족(로약자와 환자, 부상자)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자기의 군사들중에 섞여있는 호북병사와 사천병사들 그리고 최초에 자기를 따르며 사선을 넘나들던 친병들까지 모조리 죽여 그 고기를 베여 군량으로 했다. 기재에 따르면 어느날 저녁에 장헌충은 자기가 부르는데 대답하지 않았다는 리유로 명령을 내려 자기의 어린 아들까지 죽여버렸다. 그리고는 이튿날에 후회되여 처첩들을 불러 왜 아들을 구하지 않았느냐고 문책하고나서 처첩들과 자기 아들을 죽인 도부수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흡혈살인백정 누르하치   녀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립한 청태조 누르하치(努尔哈赤)는 군사를 거느리고 료동지구를 점령한후 당지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난으로 반란이라도 일으킬가봐 료동지구의 빈민들을 모조리 붙잡아다 죽여버렸다. 후에 또 료동의 부자들이 압박에 못이겨 반항할가봐 두려워 료동지구의 부자들도 대부분 다 죽여버렸다. 누르하치는 료동백성 도합 300여만명을 살해했는데 료동지구의 한족들은 기본상 다 화를 면치 못했다. 이는 피를 보기 좋아하는 누르하치의 본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지옥살인백정 다탁   누르하치의 열다섯째 아들이며 청나라 예친왕(豫亲王)인 다탁(多铎)은 1645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양주를 포위한후 대포를 쏘아 성문을 열고 양주성으로 짓쳐들어갔다. 다탁은 련속 10일간 대도살을 감행해 양주백성 80만명을 살해했다. 이로써 번화하던 양주성은 순식간에 인간지옥으로 변했다. 청나라군이 양주백성들을 보는대로 살해하다보니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였는데 어린애들도 재화를 피하지 못했다. 나중에 련못도 피로 물들어 벌겋게 되였는데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다탁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지옥백정임에 틀림없다.   
30    등소평의 계모 하백근 댓글:  조회:6365  추천:2  2014-01-19
등소평의 계모 하백근     사천성 광안현 협흥진 패방촌은 등소평의 고향이다. 어려서 고향을 떠났던 등소평은 나이 들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량친부모는 이미 사망되였고 고향에는 계모와 두 녀동생이 살고있었다. 등소평은 계모를 중경으로 모셔왔다. 물론 두 녀동생도 함께 데려왔다. 그때로부터 계모 하백근은 줄곧 등소평과 함께 반세기를 살았다. 하백근은 등소평과 5년 년상밖에 안되였다. 선박공의 딸이였던 그녀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0여세에 시집을 갔는데 얼마 안되여 남편이 병사했다. 그후 그녀는 다시 등소평의 아버지 등소창한테 시집을 갔다. 1936년에 등소창이 병으로 사망된후 하백근은 줄곧 혼자서 두 딸을 데리고 과부생활을 했다. 그녀는 글은 읽지 못했지만 대의명분을 잘 알고 사리에 밝고 활달한 성격이였다.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아들 등소평이 사람을 파견하여 모시러 왔을 때 하백근은 작은 보따리만 들고 문을 잠근후 중경으로 갔다. 중경에서 보따리를 내려놓은 순간부터 하백근은 등씨집안에서 생활했는데 중요한 가족구성원으로 되였다. 그녀는 등소평부부에게 맛있는 료리를 해주었을뿐만아니라 손자손녀들도 손수 키워주었다. 등용은 《강서에서의 나날들》이란 글에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된후 할머니(하백근)와 우리 몇몇 아이들은 함께 집에서 쫓겨났다. 그때 할머니는 의연히 역경속에서 온가족의 생존을 위한 중임을 떠멨다. 어렵던 그 시기에 할머니는 굴욕을 받을대로 받아왔지만 머리를 숙이지 않고 굳세게 생활하면서 우리 몇몇 아이들의 버팀목이 되여주었다”고 썼다. 그 특수한 시기에 하백근로인은 완강하였을뿐만아니라 시비도 명백하게 갈랐다. 그녀의 딸 등선군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그 시기 많은 사람들이 계선을 나누었어요. 우리 엄마는 올케를 보고 ‘탁림아, 넌 정신을 차려야 한다. 너희들 부부가 많은 세월을 함께 살아왔으니 넌 그(등소평)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알고있을거야. 그러니 그와 계선을 나누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아야 해’라고 말했어요. 그때 올케는 우리 어머니를 보고 ‘전 그이를 잘 알고있어요. 마음놓으세요. 그런 일은 없을거예요’라고 대답했어요”라고 말했다. 1969년 10월에 등소평이 강서에 내려가서 로동을 할 때 등소평의 부인 탁림과 하백근도 함께 생활했다. 매일 아침마다 등소평과 탁림은 공장까지 걸어가서 로동했는데 하백근은 집에서 밥을 짓고 빨래 하는 등 집안일을 도맡아했다. 하백근은 딸이 아이를 낳은 기간에 잠간 떠나 있은 외에 줄곧 등소평부부와 함께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다. 1997년 2월 19일에 등소평이 위대한 일생을 마쳤을 때 97세의 고령이였던 하백근은 이미 로년치매증에 걸렸지만 특수한 방식으로 자신보다 먼저 간 아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표시했다. 2001년봄에 하백근은 사망되였는데 향년 101세였다.       
29    등소평의 집안래력 댓글:  조회:5909  추천:0  2014-01-19
등소평의 집안래력     본적이 사천성 광안현인 등소평은 집안도 아주 훌륭한 편이였다. 조상들중에 진사에 합격한 인물도 있고 대리사정경(지금의 사법부 부장)을 력임한 사람도 있다. 1989년에 사천성 광안현 협흥향 패방촌(등소평의 고향)에 있는 등소평의 사촌집에서 “등씨가보”라는 족보가 발견되였다. (이 족보에는 적장자 직계혈통만 있기때문에 방계인 등소평집안의 직접적인 족보는 아님) “등씨가보”와 “광안주신지”의 기록에 의하면 등소평의 집안은 명대초기부터 시작되였다. 그의 조상은 명대초기의 병부원외랑 등학헌이고 원적은 강서성 길안부(吉安府) 여릉현이다. 명태조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였을 때 사천 등 서남지역은 여전히 평정되지 않고있었다. 등학헌은 홍무13년(1380년)에 황명을 받들고 사천지역에 들어갔다. 전란이 평정된 후에 사천지역의 인구는 줄어들고 토지는 피페하여 주원장은 많은 사람들을 사천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이에 등학헌도 가족들을 데리고 사천으로 이주하여 광안의 요평리(지금의 광안현 패방촌)에 정착하였다. 등소평의 딸 등용이 지은 《나의 아버지 등소평》에서는 상술한 “등씨가보”와 “광안주신지” 를 고증한 결과 명대에 등씨집안조상중 8대조 등사렴과 그의 형제 등사창이 진사출신이라 밝혔다. 등사렴은 명조말기 숭정년간에 진사에 합격하여 광동해양령과 리부시랑을 력임하였으며 명조말기에 청나라군대가 중원을 점령하여 명나라의 잔존세력이 서남으로 갔을 때에는 주계왕을 따라 운남으로 갔다. 18년후 그는 다른 41명의 대신들과 함께 순국하였다. 등사창은 명대 만력년간에 진사에 급제하여 남경호부주사를 력임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절강처주부의 지부로 승진되였다. 그후 다시 호광안찰사부사로 발탁되였다가 탄핵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청대에 이르러 등씨집안은 극도로 기울어졌다. 건륭원년에 진사에 급제한 등시민외에 벼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등시민은 진사에 급제한 후에 한림원에 들어가 편찬을 맡았다. 그후 그는 시강학사, 통정사부사를 거쳐 건륭10년에는 대리사정경에 올랐다가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66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아마도 명청시기를 통털어 등씨집안에서 관직이 가장 높았던 사람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그후로 등씨집안은 점점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더욱 기울어져갔다. 등소평의 아버지 등소창은 두명의 소작농을 거느린 소지주였다. 등소창은 일찍이 사천의 비밀단체 “가로회”의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지방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있었는데 항상 마을사람들의 어려움과 근심을 해결해주군 하였다. 당시에 사천지역에서 일어난 많은 반청운동은 그곳의 최대세력이였던 “가로회”가 주동하였으므로 등소창도 단장의 한사람으로 그 운동에 가담하였을것이다. 등용의 기록에 의하면 등소창은 1914년에 광안현 단련국장을 력임하였다가 사직한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향장을 력임하였다고 한다. 등소창은 등씨집안의 3대독자였기때문에 4명의 안해와 결혼하여 9남매를 두었으나 4남 3녀만 살아남았다. 등소창은 13세때 첫째부인 장씨와 결혼하였으나 장씨가 병사하여 후손을 보지 못하였다. 15세때 다시 둘째부인 담씨와 결혼하였는데 이 담씨가 바로 등소평의 생모이다. 담씨는 모두 3남 2녀를 낳았는데 첫째가 장녀 선렬, 둘째가 큰아들 선성(즉 등소평), 셋째가 둘째딸 선진(10여세 때 병사했음), 넷째가 둘째아들 선수(즉 등간), 다섯째가 셋째아들 선치(즉 등촉평)이다.   1926년에 등소평이 프랑스로 간 뒤 아무런 소식이 없자 담씨는 자식생각에 세월을 보내다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등소창의 셋째부인 소씨는 등씨집안의 여섯째인 넷째아들 등선청을 낳은 뒤에 병사하였다. 그후 등소창은 다시 넷째부인 하백근과 결혼하여 3명의 딸을 낳았는데 일곱째가 셋째딸 선부, 여덟째가 넷째딸 선용(10여세 때 병사했음), 아홉째가 다섯째딸 선군이다. 하백근은 49년부터 줄곧 등소평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등소창자녀의 실질적인 어머니나 다름없었다. 등소평의 형제자매들은 대부분 각급 정부나 군대에서 요직을 맡았다. 등소평의 동생 등간은 1937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기자를 력임하였고 49년이후에는 중경시 부시장, 무한시 부시장, 호북성 부성장을 력임하였다. 등소평의 녀동생 선부는 국가기관의 기밀사업에 종사하다 퇴직한 후에는 사천성 정협위원을 력임하였다. 그녀의 남편 장중인은 사천성당안국 국장을 력임하였다. 등용의 말에 의하면 그는 충직하면서도 근면성실하여 장모 하백근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 등소평의 막내 녀동생 선군은 할빈군사공정학원을 졸업한 후에 줄곧 군대에서 근무하면서 해방군총정치부 공작부 부장을 력임하였다. 그녀는 몇명 안되는 녀자소장중의 한 사람으로 남편 률전명과는 할빈 군사공정학원의 동기생이다. 률전명은 해방군 제2포병부대의 부사령관을 력임한 소장이다.     
28    등소평의 결혼생활과 그의 가족 댓글:  조회:7309  추천:2  2014-01-19
등소평의 결혼생활과 그의 가족     등소평은 개인적으로 세번이나 결혼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치무대에서 “세번 밀려났다가 세번 일어선”것과 함께 결혼생활에서도 세번의 파란곡절이 있었다. 그가 세번째복권으로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성공적인 정치가가 되였다고 한다면 세번째결혼으로 화목한 가정을 이룩한 성공적인 가장이 되였다. 등소평의 첫번째 부인은 장석(또는 장천원)인데 하북성 방산현출신이다. 장석의 아버지 장경해는 철도로동자로서 1922년 “2.7대파업”때 로동자대표로 지명수배를 받기도 하였다. 1925년 장석은 모스크바중산대학 류학생으로 추천되였다. 그때 그녀는 프랑스에서 경찰의 지명수배를 피해 모스크바로 와서 류학하고있던 등소평을 만났다. 1927년에 두 사람은 중국에 돌아가 상해의 중앙비서처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사랑이 싹터 1928년초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2년후인 1930년에 장석은 난산으로 상해에서 숨을 거두고말았다. 그때 등소평은 광서에서 한창 “백색봉기”를 조직하고있었다. 장석의 사망으로 등소평의 첫번째 결혼생활은 불과 3년도 못되여 끝나고말았던것이다. 등소평의 두번째 결혼도 비극으로 끝났다. 비극의 녀주인공은 김유영으로서 사람들은 그녀를 아김(阿金)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절강성 대산출신으로서 등소평과는 동갑내기였는데 두 사람은 상해에서 서로 알게 되여 1931년에 함께 강서로 간후 결혼하였다. 김유영은 쏘베트구의 도현과 승리현에서 현위원회 서기를 력임한 당시에 많지 않던 녀성간부중의 한사람이였다. 그러나 1933년에 등소평이 강서 회창현 현위원회 서기로 있을 때 김유영도 함께 타도되여 신변에 위험이 닥치자 그녀는 그만 등소평과 리혼하고 당시 등소평을 책임지고 조사하던 조직부장 리유한(중화인민공화국 수립후 중앙통전부장 력임)과 가까운 사이로 되였다. 리유한과 김유영은 그 이듬해에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국무위원을 력임한 리철영이다. 1935년에 등소평은 김유영과 함께 홍군장정에 참가하여 같은 부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김유영은 1936년에 연안에 도착하여 리철영을 낳은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병에 시달리다 못해 모스크바로 가서 정신병치료를 받았다. 그후 1941년에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독일군비행기가 폭발되였을 때 실종되였다.   등소평의 세번째 결혼상대자는 그의 마지막 동반자 탁림이다. 탁림의 본명은 포경영으로서 1916년 4월에 운남성 선위에서 태여났다. 그녀는 1936년에 북경대학 물리과에 입학하여 운남성 최초로 북경대학에 입학한 녀성이 되였다. 등소평의 딸 등용의 말에 의하면 등박방, 등남과 등질방이 모두 어머니 탁림의 영향으로 북경대학 물리과에 들어갔다고 한다. 1937년 7월에 일본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탁림은 그녀의 언니 석영과 함께 혁명성지 연안으로 찾아갔다. 연안에서 탁림은 간부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섬북공학에 들어갔다. 1939년 여름에 탁림은 다른 사람의 소개로 등소평을 알게되여 그해 9월초에 결혼을 하였다. 모택동, 강청, 류소기, 장문천부부, 왕명 등 중국공산당 군정핵심요원들이 모두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당시 등소평은 36세, 탁림은 24세였다. 탁림은 등소평이 이끄는 북방국 부녀촉진회에서 일하고있었다. 등소평과 탁림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녀 등림, 장남 등박방, 차녀 등남, 3녀 등용(모모라고도 함)과 막내 등질방이 있다. 등소평의 자녀들은 모두 산아제한정책의 옹호자들이다. 등박방은 불구의 몸이 되여 후사가 없지만 그 나머지 네사람은 모두 한명의 자녀만 가지고있으며 그중 등질방만 아들이 있다. 문화대혁명시기에 등소평은 당시 국가주석 류소기의 당내주자파 2인자로 지목되여 모든 당직에서 파면된후 강서성의 뜨락또르공장으로 추방되여 육체로동에 종사하였다. 이때 그는 부인 탁림과 계모 하백근만 데리고갔다. 그의 다섯 자녀들도 모두 각지로 추방되거나 남아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그 중에서 장남 등박방의 운명이 가장 비참하였다. 1944년에 태여난 등박방은 1962년에 북경대학 물리과에 입학하여 문화대혁명초기에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았지만 1968년에 등소평이 비판받은후 그도 반대파에 의해 방사성물질에 심각하게 오염된 실험실에 갇혔다. 그곳에 오래있다가는 꼼짝없이 죽을수밖에 없는 다급한 상황에서 그는 4층에서 수도관을 따라 탈출하려 하였지만 불행히도 땅에 굴러떨어져 그만 척추에 중상을 입고말았다. 그러나 등소평의 아들이라는 리유로 그는 당시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여 결국 반신불구의 몸이 되였다.   1981년에 카나다로 가서 유명한 정형외과 전문의로부터 치료를 받았지만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되여있던 상태에서 별효과를 보지 못했다. 귀국한후 등박방은 중국의 장애자복지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983년에 “중국장애자복지기금협회”를 설립하였다. 중국 장애자의 사회적 지위를 제고시킨 그의 공헌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것이다. 현재 등박방은 흉부이하가 완전히 마비되여 휠체어에 의존하고있으나 다행히도 정형외과 전문의사 고소녕이 그와 결혼하여 함께 가정을 꾸려가고있다. 등질방은 형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한 편이다. 그는 북경대학 물리과를 졸업한후 뉴욕 맨체스터대학에서 양자물리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미국에서 2년간 근무하다가 1988년에 생물학박사학위를 취득한 안해 류소원 그리고 미국에서 태여난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 중신(中信)의 부사장을 력임하였다. 1992년에 상해 사방부동산실업회사를 설립하여 부동산업에 종사하고있다. 장녀 등림은 수묵화화가이면서 중국 “동방미술교류협회” 회장이다. 1941년 산서성 태항산군부대에서 태여났으며 후에 북경중앙미술대학 중국화과에 입학하여 화조도를 배웠다. 문혁시기에는 남창으로 추방되여 남편 오건상을 만났다. 그후에 등소평을 따라 북경에 돌아가서 “동방미술교류협회”를 설립하고 회장이 되였다. 등림은 여러차례에 거쳐 해외전시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그녀의 남편 오건상은 중국 유색금속수출입회사와 여러개의 상장회사를 관리하고있다. 현재 국가과학위원회 부주임으로 있는 등남은 1992년에 등소평의 남방순시를 기획한 인물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등남은 1964년에 북경대학 물리학부에 입학하여 문화대혁명시기에는 안휘성 황산으로 추방되였다. 등소평이 정권을 장악한후에 그녀는 다시 과학위원회 과학기술정책국 부국장으로 되였다. 그녀의 남편 장굉은 국가과학위원회 과학기술개발국 국장이다. 지난 수년동안 등소평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자녀는 셋째딸 등용이다. 등소평의 개인비서인 그녀는 등소평의 귀와 입이 되는 역할을 하였으며 등소평을 대신하여 정보를 듣고 지시를 하달하였다. 아명이 모모(毛毛)이기도 한 등용은 어릴 때부터 성격이 명랑하고 령리하여 부모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기도 하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 북경사범대학 부속고중 2학년에 재학중이던 그녀는 섬서성 부현으로 추방되였다. 당시에 그녀는 갖은 랭대를 받았으나 현재의 남편 하평만은 그녀를 잘 대해주었다. 얼마후 두 사람은 결혼하였다. 등소평이 두번째 복위되였을 때 등용은 북경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977년에 북경의과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해방군총정치부로 발령받았다가 1979년에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파견되였다. 그녀는 4년후에 귀국하여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정책연구실 부주임에 임명되였다. 등용은 등소평의 개인비서를 충실히 리행하였다. 그녀의 남편 하평은 해방군 최대의 무기회사인 보리회사 사장을 력임하였다. 그녀는 《나의 아버지 등소평 - 문화대혁명세월》이란 책을 출판하여 국내외의 많은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27    강청때문에 말에서 떨어져 오른팔을 다친 주은래 댓글:  조회:7149  추천:0  2014-01-13
강청때문에 말에서 떨어져 오른팔을 다친 주은래   (번역)       1939년 7월 10일 아침에 모택동은 갑자기 두곳의 청첩장을 받았는데 하나는 연안마레학원에서 보낸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공중앙당학교에서 보낸것이였다. 모택동은 주은래를 보고 말했다. “은래, 당신은 대후방에서 왔으니 바깥형세에 대해 잘 알고있잖소. 모두들 당신의 보고를 듣고싶어 할거요. 당신이 나를 도와 한곳으로 가주오. 내가 마레학원에 가겠으니 당신은 당학교로 가오.” 그때 곁에 있던 강청도 따라가겠다고 졸라댔다. 모택동은 “당신은 조건이 안되오!”라고 막아버렸다. 그러자 강청은 애교를 부리면서 “나도 가서 배우자고 그래요. 가게 해주세요. 네?”라고 말했다. 모택동은 하는수없이 양보하면서 말했다. “그럼 당신은 나를 따라 마레학원으로 가자구.” “당학교에서는 회의후에 문예공연이 있다던데 전 보고를 들은후 문예공연을 구경하겠어요.” 영화배우출신인 강청은 문예공연을 매우 좋아했다. 모택동은 시끄럽다는듯이 손을 흔들면서 “그럼 당신은 주부주석과 함께 가오”라고 말했다. 중앙당학교로 가려면 연하를 건너야 했다. 그 시기 연하에는 다리가 없었다. 그날은 간밤에 내린 비로 하여 강물이 불어서 자동차가 강을 건널수 없었다. 모택동은 왕래음을 불러 자신이 타던 대청마를 가져와 주은래를 타게 했다. 이 대청마는 모택동을 따라 2만 5000리장정을 했기에 산길을 걷고 강을 건너는데 매우 경험이 있었다. 모택동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자신의 경호참모 장택민을 불러 주은래를 보호하게 했다. 원래 장택민에게도 말이 있었지만 강청에게 양보했다. 연하를 건널 때 물은 무릎을 넘어왔다. 왕래음은 주은래의 말고삐를 잡고 앞에 서고 강청은 말을 타고 뒤를 따랐다. 장택민은 맨 뒤에서 앞사람들을 살피면서 걸어갔다. 무사하게 강을 건넌 왕래음은 주은래의 말고삐를 놓고 모래톱에서 신을 신었다. 그때 갓 강을 건넌 강청은 갑자기 사기가 나서 두발을 힘껏 모으면서 말에 채찍질을 했다. 그러자 말은 맹렬한 속도로 네굽을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대청마와 강청이 탄 말은 원래 한쌍이였다. 강청의 말이 달리자 대청마도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주은래는 말고삐를 꽉 잡았다. 강청의 말과 주은래의 말은 강가로 나는듯이 달려갔다. 강청의 말은 방향을 돌려 강안의 골목으로 달렸다. 말이 달리는 소리에 놀란 마을의 개들이 미친듯이 짖어대며 달려왔다. 대경실색한 강청은 말에 채찍질을 가했다. 말은 급한 김에 밭사이의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주은래가 탄 말도 강청의 말을 뒤따라 달렸는데 속도가 빨라 앞의 말과 부딪칠 기세였다. 이 아슬아슬한 순간에 주은래는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대청마는 눈앞에 큰 구덩이가 보이자 급히 피하려다가 주은래를 말에서 떨어뜨렸다. 주은래는 말에서 떨어지면서 땅바닥에 돌이 보이자 급히 오른손을 내밀어 땅을 짚었다. 결과 오른팔이 골절되였다. 부상을 당한후 주은래는 극심한 동통을 참으면서 당학교의 회의실까지 걸어가서 중앙위생처에서 파견해온 의사한테서 간단한 응급처치를 받았다. 주부주석이 달을 타고 강을 건너오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는다는 소식이 중앙당학교에 쫙 퍼졌다. 모두들 이 소식을 듣고 의논이 분분했다. 특무, 한간의 공격을 당한것일가? 여태껏 공산당과 홍군의 령도자들은 종래로 이처럼 큰 사고를 당한적이 없었다. 중앙당학교의 고급반(이 반의 학원들은 모두 퇀급이상의 간부임)의 학원들은 모두 주부주석을 청한것을 후회했다. 주은래는 당학교의 병상에 누워있었는데 모택동은 그때까지 소식을 모르고있었다. 가장 급해난것은 주은래와 함께 당학교로 갔던 왕래음과 장택민이였다. 주부주석이 부상당한것을 모주석께 회보해야 하는데 강청이란 이 특수한 지위에 있는 인물이 중간에 끼이다보니 보고하기도 어렵고 보고하지 않을수도 없었다. 하지만 원칙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 왕래음은 말을 타고 양가령으로 돌아가 사실대로 모주석께 보고했다. 사실을 알게 된 모택동은 급히 비서 엽자룡을 불러서 함께 당학교로 가서 주은래를 만나보고 치료를 잘하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강청을 불러서 “당신이 얼마나 큰 일을 저질렀는지 알아?”하고 꾸짖었다. 강청은 자신이 잘못했는지라 찍소리도 못하고있다가 멀리 피해 달아났다. 그후 강청은 오래동안 감히 양가령에게 가서 모택동을 만날 엄두를 못냈다. 주부주석이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은 삽시에 연안성에 쫙 퍼졌다. 각 부문의 령도들과 주은래의 로전우들은 선후로 주은래의 병문안을 왔다. 주은래는 부상당한 팔이 몹시 아팠지만 참으면서 그들을 일일이 접대하면서 말했다. “내가 말을 타고 당학교로 가던 도중에 강을 건넌후 말이 구덩이에 빠지면서 말에서 떨어져 오른팔을 다쳤습니다. 지금은 치료를 받고있는중이니 곧 나을겁니다. 그러니 마음을 놓으십시오.” 그 길에 확실이 일본비행기의 폭격으로 생긴 구뎅이가 있는지라 그들은 믿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미심쩍어서 중앙경위퇀에 이번 교훈을 참답게 섭취하라고 엄숙하게 요구했다. 왕래음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 중앙교도대대의 령도들은 다음부터는 수장이 말을 타던 걸어서 가던 경위원들은 반드시 말고삐를 잡고 걸어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당시 연안의 의료조건은 매우 차하여 접골할수 없었다. 1939년 8월 18일에 중국공산당을 지원하러 온 인도의료대가 다시 주은래의 팔을 검사해본 결과 골절부위가 잘 잇기지 않은것을 발견했다. 주은래의 팔꿈치부분은 이미 굽혔다 폈다 할수 없게 되였고 오른팔근육은 수축되기 시작했다. 안마와 찜질을 했지만 오른팔은 쭉 펼수 없게 되여 절반 굽힌 상태에 처해있었다. 이에 중공중앙에서는 주은래를 쏘련 모스크바에 보내여 치료를 받도록 결정했다. 쏘련정부에서는 많은 고명한 의사들을 배치하여 주은래의 오른팔을 치료하게 했다. 선후로 3번 상세하게 검진한후 두가지 치료방안을 내왔다. 하나는 주골(肘骨)을 떼여내여 다시 잇는것인데 이렇게 하면 팔을 자유롭게 움직일수 있게 되지만 수술을 두차례 해야 되기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된다. 이 방안대로 하면 만약 원래의 상태대로 회복되지 못한다고 해도 효과를 볼수 있는것은 긍정적이였다. 두번째 방안은 수술을 하지 않고 이미 아문 근육을 힘껏 당겨서 펴는 방법인데 치료를 마친다고 해도 결국에는 팔을 40~60도밖에 더 펼수 없게 된다. 이 방안은 비록 치료시간은 짧지만 아무는 효과는 좋지 않은것이다. 쏘련의사들은 첫번째 방안대로 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자존심이 있었기때문에 환자가 굽은 팔을 하고 퇴원하는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은래는 두번째 방안을 선택했다. “나는 지금 국외에서 오래동안 치료를 받을수 없습니다. 국내에서 해야 일이 매우 많기때문입니다. 원래상태로 회복되지 못한다고 해도 그저 사업과 생활을 할수 있는 정도이면 난 만족합니다.” 주은래는 9월 19일에 크레물리궁(克里姆林宫-크렘린궁)병원에서 툭 튀여나온 작은 뼈를 잘라버리는 작은 수술을 받았다. 일주일후에 상처는 전부 아물었다. 실밥을 푼 이튿날부터 안마, 전기치료, 운동, 목욕료법 등 재활치료를 받았다. 결과 주은래는 오른팔을 45도로 굽힐수 있게 되였지만 절반 장애가 되고말았다. 주은래는 2개월동안 입원해있다가 새해가 되기 며칠전에 퇴원했다.   주은래는 1939년 9월부터 1940년 3월까지 6개월동안 쏘련에 체류하면서 많은 활동을 했다. 공산국제는 당시에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는 모택동의 혁명리론을 믿지 않았다. 주은래는 모택동이 1939년 9월 1일에 한 《국제형세에 대한 신화일보기자와의 담화》를 공산국제에 가져다주었다. 공산국제에서는 이에 찬성을 표시했고 모택동이 정확하다고 하면서 매우 큰 지지를 해주었다. 주은래는 쏘련에 있는 기간에 임필시와 함께 중국공산당제7차대회를 열게 될 시간, 새 중앙의 선발인원 및 일부 인사문제에 대해 신중하고도 전면적으로 연구했다. 그들의 의견은 중공중앙의 원칙적인 동의를 얻었다. 모스크바에서 주은래는 모택동을 대표하여 리덕이 30년대에 중국에서 중국혁명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범한 일련의 착오에 대해 성토하면서 리덕을 제3국제에서 축출해달라는 모택동의 요구를 전달했다. 또 주은래는 쓰딸린과 만나서 쏘련에서 공부하고있는 중국렬사자녀들을 전선에 보내지 말고 잘 보호해줄것을 요구했다. 모택동은 친인에게 보내는 두통의 편지를 주은래한테 부탁했다. 한통은 아들 모안영과 모안청에게 보내는 편지였고 다른 한통은 2년전에 모택동과 다투고 쏘련에 가서 병치를 받고있는 하자진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편지에서 모택동은 “이후 우리는 동지사이요…”라고 썻다. 그해 하자진은 30살이였다. 1940년 봄에 주은래는 양복을 입고 귀국했는데 영화방영기 한대와 5부의 쏘련영화필림을 가지고왔다. 말에서 떨어져 오른팔이 장애로 된 진상에 대해 주은래는 생전에 등영초한테마저 털어놓지 않았다. 이 력사의 비밀은 38년동안 묻혀있다가 주은래가 서거된후에야 강청과 관계가 있다는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26    중국고대 4대 추녀 댓글:  조회:7056  추천:1  2014-01-11
중국고대 4대 추녀 번역     중국고대력사에는 서시(西施), 초선(貂蝉), 양귀비(杨贵妃), 왕소군(王昭君) 4대미녀가 있었을뿐만아니라 모모(嫫母), 종리춘(钟离春), 맹광(孟光), 완씨(阮氏) 4대추녀도 있었다.   원고시대 황제(黄帝)의 넷째부인 모모     5000년전에 황제는 치우와 싸워 이겼고 신농을 항복시켜 3대부락을 통일했다. 그때로부터 인류는 야만시대를 결속짓고 문명사회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시기에 살았던 모모는 외모가 매우 추하여 낯선 사람들이 그녀를 한번 보기만 하면 놀라서 몸을 돌려 달아났다고 한다. 가련한 모모는 어려부서부터 남들에게 우롱을 당하고 부모에게 내버려지고 이웃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자매들이 피해다녔지만 선량하고 부지런하고 사리에 밝고 진심으로 사람을 대했을뿐만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것을 락으로 여겼기때문에 사람들은 점차 그녀를 좋아하게 되고 그녀와 가깝게 지내게 되였다. 그녀가 20살이 되여도 데려가려는 남자가 없는것을 보고 사람들은 “저 불쌍한 못생긴 처녀가 한평생 시집을 못가게 되겠구나”하고 탄식했다. 어느날에 황제가 지방을 순시하다가 녀성들이 뽕을 따고있는것을 보게 되였다. 그런데 갑자기 한 녀성이 “아이구”하고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더니 울음을 터뜨리는것이였다. 원래 그 녀성은 뱀에게 물렸던것이다. 숱한 녀성들은 곁에서 구경만 할뿐 누구도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했다. 그때 저쪽켠에서 뽕을 따고있던 처녀가 고함소리를 듣고 달려오더니 신속하게 두 녀성에게 맑은물을 떠오라고 이르고 다른 녀성들에게는 몇가지 약초이름을 알려주면서 약초를 캐오라고 시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치마자락을 찢어서 뱀에게 물린 녀성의 다리 상처웃쪽을 꽉 동여맨후 머리에 꽂았던 비녀로 상처를 벌려놓았다. 다음 엎드려서 입으로 상처의 독을 빨아내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 처녀가 외모는 몹시 추하게 생겼으나 용감하게 나서서 남을 도와줄뿐만아니라 조직능력이 강한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그녀가 누군가를 알아오게 했다. 신하들이 달려가 물어보더니 그 처녀가 추녀 모모라고 알려주었다. 황제는 온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을 했다. 황제는 모모를 궁으로 데리고가서 비로 맞아들이고 그녀더러 후궁의 모든 비빈들을 관리하게 했다.     제나라 제선왕의 왕후 종리춘     종리춘의 이야기는 서한 류향이 쓴 《렬녀전》중의 《변통전》에 기록되여있다. 종리춘은 춘추전국시기의 제나라 무염현 사람이였기때문에 이름을 종무염이라고도 불렀다. 그녀는 덕행과 재주를 겸비했지만 외모가 너무 못생겨서 마흔살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다. 그녀의 이마와 두눈은 모두 아래로 오목하게 들어갔고 상하비례가 맞지 않았다. 코구멍은 우로 잔뜩 치켜졌고 목에는 남자보다 더 큰 울대뼈가 자랐으며 머리가 큰데다가 머리카락은 몇오리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피부는 숯보다 더 검었다. 종리춘은 비록 보기 흉하게 생겼지만 원대한 지향을 가지고있었다. 당시 제나라를 집정하고있는 제선왕은 정치상에서 부패했고 나라일을 잘 돌보지 못했으며 성질이 불같았다. 종리춘은 나라와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위험을 무릎쓰고 제선왕을 만나서 “지금 제나라는 사방에서 위험에 처해있나이다. 빨리 정신을 차리고 돌아서지 않는다면 나라가 멸망되고말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위험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제선왕은 나라를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에 감도되여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렷다. 그리고 그녀를 왕후로 봉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정력을 몰부었다. 그후 제선왕은 나라가 위급할 때에는 추녀 종리춘을 총애했고 나라가 태평할 때에는 미모가 뛰여난 하영춘을 총애했다. 종리춘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 연나라와 싸워서 이기기도 했다.     동한시기 현사 량홍의 안해 맹광   맹광은 거안제미(举案齐眉)라는 성어의 주인공이다. 거안제미는 안해가 남편을 깍듯이 존경하다는 뜻이다. 맹광은 남편 량홍이 집에 돌아올 때마다 밥상을 눈섭우까지 치켜올릴 정도로 존중했다고 한다. 동한 평릉사람인 맹광은 뚱뚱하고 피부가 검고 매우 못생겼지만 힘이 매우 세서 돌절구를 머리우까지 들어올렸다. 숱한 사람들이 중매를 서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모두 거절했다. 그러다보니 나이 서른살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다. 맹광의 부모는 딸한데 “왜서 시집을 가지 않으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맹광은 오래전부터 마음에 둔 남자가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원래 맹광은 량홍이라는 선비가 비록 집은 가난하지만 품행이 고상하고 박학다식하다는 말을 듣고 량홍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것이다. 량홍도 청혼하는 처녀들이 많았지만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절했다. 그러다가 맹광의 말을 전해드고 그녀의 뜻이 기특해 맹광과 결혼을 하였다. 결혼한 첫날밤부터 맹광은 못생긴 얼굴이 근심되여 옷치장과 얼굴화장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량홍이 며칠이 지나도 신부와 잠자리를 같이하려고 하지 않았다. 맹광은 궁금하여 그 까닭을 물었다. 이에 량홍은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을 걸치고 짙은 화장을 하는 녀자가 아니라 누더기옷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깊은 산속에서라도 살수 있는 녀자였소”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맹광은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후부터 맹광은 화장도 않고 누더기차림으로 생활하다가 남편의 뜻에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면서 살았다. 맹광이 남편의 인품을 존경하고 그의 의지를 따르며 극진한 내조로 집안을 화목하게 꾸렸기에 량홍이 마음놓고 학문을 파고들어 수많은 명작을 저술할수 있었다.     동진시기 명사 허윤의 안해 완씨   조위(曹魏)의 허윤은 완덕위의 딸을 안해로 맞아들였다. 첫날밤에 화촉동방을 밝히려고 신부가 머리에 쓴 붉은천을 벗긴 허윤은 신부의 못생긴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서 달아났는데 다시는 신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후 허윤의 친구 환범이 놀러왔다가 허윤을 보고 “완씨가 추한 외모로 자네한테 시집을 온데는 반드시 연고가 있을거야. 그러니 잘 관찰해보게”라고 말했다. 허윤은 환범의 말을 듣고 그날밤에 신방으로 들어가보았다. 그러나 신부의 못생긴 얼굴을 보자 또 달아나려고 했다. 그때 신부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허윤은 못생긴 안해한테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면서 말했다. “녀인에게는 부덕(妇德), 부언(妇言), 부용(妇容), 부공(妇功) 4덕이 있어야 하는데 당신은 어느 조건에 부합되오?” 그러자 신부가 말했다. “저에게 모자라는건 용모뿐이예요. 그런데 선비한테는 백행(百行)이 있어야 한다는데 당신은 어느 조건에 부합되는가요?” “난 백행이 모두 구비되였소.” “백행에서 첫번째로 구비되여야 할것은 덕행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색을 좋아하고 덕을 좋아하지 않으니 어떻게 덕행이 구비되였다고 할수 있어요?” 허윤은 말문이 막혔다. 그때로부터 그들 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서로 사랑하는 금슬이 좋은 부부로 되였다. 허윤이 리부랑이 되였을 때 등용한 지방관리는 모두 그와 한고향사람이였다. 그때문에 위명제는 사람을 파견하여 그들을 붙잡아갔다. 허윤이 무사에게 끌려갈 때 완씨는 맨발바람으로 뛰여가서 “명군에게는 사정을 보아달라고 애걸하지 말고 도리로 설득해야 해요”라고 부탁했다. 허윤이 잡혀간후 시댁식구들이 우는것을 보고 완씨는 “별일 없을거예요. 그이는 인차 돌아올거예요”라고 위로하면서 좁쌀죽을 끓여놓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허윤은 위명제가 아는 사람만 등용한 일을 따져묻자 안해의 부탁대로 “페하, 나라를 위해 인재를 등용하려면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나이다. 신이 한고향사람을 쓴것은 신이 그들에 대해 잘 알고있기때문입니다. 페하께서 알아보고 그들이 그 직위에 알맞지 않다고 한다면 신은 죄를 달갑게 받겠나이다”라고 아뢰였다. 위명제가 알아본 결과 허윤이 등용한 그의 고향사람들이 모두 직위에 알맞는 인재들이였다. 허윤은 정말로 완씨의 말대로 인차 풀려나서 집에 돌아와 좁쌀죽을 먹게 되였다. 그후 허윤은 진북장군으로 승진했다. 허윤은 기뻐서 부인을 보고 “이제는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걱정이 없이 자게 되였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완씨는 “기쁜 일이 온 뒤엔 화가 따를수 있으니 조심해야 돼요”라고 주의를 주었다. 과연 그후 사마사는 허윤이 가까운 관리들과 밀모하여 반역음모를 꾸민다고 의심했다. 사마사는 없는 죄를 씌워 허윤을 악양으로 귀양을 보낸후 도중에 죽여버렸다. 사마사는 부하를 시켜 허윤이 아들이 허윤처럼 총명하면 죽여버리라고 명령했다. 완씨는 허윤의 부하한테서 사마사의 부하가 찾아온다는 말을 전해듣고 급히 두 아들을 불러놓고 “너희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거나 분개하지도 말고 조정일에도 관심이 없는척 해야 한다”고 부탁했다. 사마사의 부하가 허윤의 두 아들을 만나보고 사마사한테 “허윤의 두 아들은 평범하여 후환이 없겠다고 아뢰였다. 그리하여 허윤의 두 아들은 살아남게 되였다.      
25    류호란을 작두로 살해한 흉수의 끝장과 그 진실한 내막 댓글:  조회:10124  추천:0  2014-01-04
류호란을 작두로 살해한 흉수의 끝장과 그 진실한 내막 (번역)   1946년 하반년에 국민당군대는 해방구에 대한 전면적인 진공을 중점진공으로 전이시켰다. 염석산은 근 1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진중지구에 대해 소탕을 감행했다. 염석산수하부대의 72사 소장 사장 애자겸은 3개퇀의 병력을 거느리고 산서성 문수현으로 쳐들어왔다. 정황이 악화되자 당시 중공문수현당위에서는 류호란을 부분적 간부들과 함께 산으로 전이라고 통지했다.  하지만 류호란은 “저는 어리기때문에 적들이 주의하지 않을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지의 정황에 대해 익숙하니 남아서 투쟁을 견지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직에서는 류호란의 요구대로 그녀를 운주서촌에 남도록 비준했다. 염석산수하부대가 쳐들어오면서 석패회(아명 석대성)는 운주서촌의 첫 괴뢰촌장으로 되였다. 석패회는 적극적으로 염석산군대에 량식과 자금을 공급해주고 정보를 제공해주면서 중국공산당을 위해 사업하는 해당일군들을 와해했다. 류호란은 지하교통원을 통해 괴로촌장 석패회의 정황을 구장 진덕조에게 회보했다. 진덕조는 또 이 일을 상급인 문수현 현장 허광원에게 보고하면서 처리방법을 물었다. 허광원은 석패회를 처단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진덕조가 무공대원들을 데리고 서산에서 내려와서 개다리촌장 석패회를 죽일 때 류호란은 망을 보면서 엄호했다. 다음날 오후에 운주서촌괴로촌공서 서기 장덕윤은 개다리촌장이 피살된 경과를자신의 추측에 근거하여 대상진에 주둔하고있는 애자겸소속부대 1영 영장 풍효익에게 보고했다. “석촌장은 팔로군 2구 구장 진덕조, 진덕조의 동생 진덕례, 운주서촌 녀공산당원 류호란 등에 의해 살해되였습니다.” 영장 풍효익과 부영장 후우인은 비밀리에 운주서촌에 내려왔다. 장덕윤은 지주 석정박의 집에서 풍효익과 후우인에게 류호란, 장년성, 석륙아, 석오칙, 장생아, 한랍길, 매란칙, 김선아 등 간부와 적극분자들을 고발했다. 운주서촌의 공산당측 농회비서였던 석오칙은 적에게 투항하면서 운주서촌의 당조직성원의 명단을 전부 알려주었다. 1947년 1월 8일 새벽에 려덕방이 거느린 복수자위대와 염석산수하부대의 1영 2련 련장 허득승이 거느린 부대는 운주서촌을 돌연적으로 습격하여 석삼괴, 석오칙, 석륙아, 장생아, 한랍길을 붙잡았다. 이미 변절자로 된 석오칙은 자신을 가짜로 붙잡는다는것을 알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랍길도 석오칙을 따라 적들앞에 무릎을 꿇고 촌의 당원과 적극분자의 정황을 밀고했다. “부녀아동구조회의 비서 류호란, 진덕조, 석세방은 공산당원입니다. 석삼괴는 팔로군쪽 사람이고 석륙아는 팔로군의 민병입니다!” 장생아도 적들앞에서 자신이 알고있는 일부 정황을 털어놓았다. 그날 저녁에 1영 영부에서는 석패회가 갑자기 암살된것은 운주서촌의 녀공산당원 류호란, 공산당측의 구장 진덕조, 진덕조의 동생 등이 손을 쓴것이라고 215퇀 퇀부에 보고했다. 이 보고를 받은 퇀부에서는 붙잡은 공산당원과 적극분자들을 모두 죽여버리기로 결정했다. 1947년 1월 11일밤에 염석산 수하부대 72사 215퇀 1영 영장 풍효익, 1영 특파원 겸 기관총련 지도원 장전보, 부영장 후우인, 복수자위대 대장 려덕방, 새로 부임된 운주서촌 촌장 맹영안, 1영 2련 련장 허득승, 기관총련 련장 리국경 등은 공산당원과 적극분자들을 처단할데 관한 회의를 열었다. 1947년 1월 12일 오전에 애자겸, 장전보, 려덕방, 허덕승 등은 부대를 거느리고 운주서촌에 들어와 모든 길목을 봉쇄했다. 석삼괴, 석륙아, 장년성, 석세휘, 진수영, 류수산은 선후로 적들에게 붙잡혀서 남관음사당밖 서쪽광장으로 끌려왔다. 적들은 촌의 군중들도 마구 광장으로 내몰았다. 류호란은 촌의 공산당원들이 적들에게 잡혀가자 급히 갓 아이를 출산한 이웃집 김종아주머니의 집에 들어가 숨었다. 그런데 거기에 여러사람이 숨어있자 류호란은 그들에게 련루될가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용감하게 남관음사당광장으로 걸어나갔다. 복수자위대 분대장 무금천은 군중들속에 류호란이 있는것을 발견하고 백점림, 온악덕과 함께 류호란을 붙잡아서 기타의 여섯사람과 함께 묶었다. 1영 특파원 겸 기관총련 지도원 장전보는 석삼괴 등 여섯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한후 류호란을 보고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자백하면 살려준다”고 했다. 그러나 류호란은 “나는 죽어도 굴복하지 않는다. 절대 투장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화가 난 장전보는 작두로 15살밖에 안되는 나젊은 녀공산당원 류호란의 목숨을 빼앗았다. 1947년 2월 2일에 왕진장군의 수하부대 359려가 문수현을 공격하자 염석산의 수하부대는 전부 무기를 던지고 투항했다. 류호란렬사를 살해한 주범중의 하나인 려덕방은 상인으로 변장하여 도망치다가 팔로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무금천은 1947년 2월 5일에 체로되여 류호란이 희생된 곳에서 처형되였고 백점림은 2월 18일에 체포되여 공안부문에 넘겨진후 처형되였다. 온악덕은 1951년에 법에 의해 관제되였다. 석희옥은 체포된후 류호란을 밀고한 죄를 승인하지 않았다.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에 그는 1948년에 석방되였다. 맹영안은 1947년 7월에 체포된후 병으로 감옥에서 죽었다. 한랍길은 괴뢰향공서의 지도원를 질투하다가 1947년 l 2월에 적들에게 맞아죽었다. 염석산 수하부대 215퇀 퇀장 관기화와 1영 영장 풍효익은 1948년 6월 21일에 “장란전역”에서 해방군의 총에 맞아죽었다.  1영 2련 련장 허득승은 1951년에 공안부문에 체포된후 그해 4월 4일에 처형되였다. 류호란을 작두로 살해한 원흉인 장전보는 전투에서 포로되여 로동개조를 했는데 류호란 등 7명 렬사를 살해한 사실을 숨겼기에 1950년 7월 25일에 석방되였다. 그해 겨울에 운성에서 가극 《류호란》을 공연했는데 신분을 숨기고 담배가게를 차려놓았던 장전보는 사람들의 의론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변장을 하고 극장에 들어가 가극 《류호란》을 끝까지 보았다. 가극을 보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그는 웃음을 금할수 없었다. 원래 가극중에 류호란 등 렬사를 작두로 살해한 “긴수염”을 허련장(허득승)이라고 불렀던것이다. 가극에서도 진상을 똑똑히 모르는것을 보고 그는 자신의 죄를 숨길수 있게 되였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감옥에 갇혀있던 염석산 수하부대 72사 215퇀 1영 기관총련 문서 옥련성과 215퇀 2영 부영장 부영청은 류호란을 살해한 원흉인 장전보가 신분을 숨기고 숨어있는 사실을 자백했다.  1951년 5월 8일에 운성현공안국에서는 장전보를 붙잡아서 만천현공안국에 넘겼다. 류호란을 살해한 또 다른 흉수 후우인은 반혁명분자들과 함께 폭동을 조직하다가 1951년 5월 11일에 정산현공안국 경찰들에게 체포되여 만천현공안국에 넘겨졌다. 1951년 6월 22일 오후에 장전보와 후우인은 처형되였다. 1958년 9월에 호남성에서 사업하는 진덕린(진덕조의 여섯째 동생으로서 당시에 호남성 길수현당위 조직부장으로 임명되였음)과 기타의 수난자가족에서는 공안기관에 과거 석오칙의 수상한 행위에 대해 신고했다. 공안기관에서는 신고된 재료에 대해 자세히 분석한후 그해 12월에 공안일군을 운주서촌에 파견하여 조사하게 했다. 12월 19일에 문수현공안국에서는 조사결과를 분양현(당시 문수, 분양, 교성을 합병하여 분양현이라고 했음)정법판공실에 보냈다. 1959년 6월에 중공산서성당위 서기처 서기이며 부성장인 정림이 운주서촌에 내려와 시찰할 때 이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할것을 정법기관에 지시했다. 현당위 서기는 해당일군들을 불러  연구한후 지구당위에 회보했다. 지구당위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연구한후 유능한 간부를 려순, 태원 등 10개의 주요지구에 파견하여 2개월동안 조사하여 석오칙 등 3명을 중점혐의대상으로 삼았다. 1959년 9월에 문수현의 공안일군들은 운주서촌에서 석오칙, 장생아, 석희옥을 붙잡았다. 이듬해 8월에 공안국에서는 또 밀고재료를 쓴 장덕윤을 붙잡았다. 공안부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매우 중시하면서 성, 지구, 현에서 련합으로 특별사건수사소조를 무어가지고 철저하고도 똑똑하게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60년 5월 30일에 특별사건수사소조에서는 6개월 남짓한 조사를 거쳐 마침내 석오칙, 한랍길, 장생아가 류호란을 밀고한 전부의 진상을 밝혀냈다. 1962년에 법원에서는 장생아를 유기형 10년에 처하고 석희옥을 사형에 처한다고 판결했다. 류호란렬사를 붙잡았던 온악덕은 1959년 12월 23일에 대상진에서 체포되였는데 1962년에 유기형 7년 판결을 받았다. 문수현감옥는 또 원 염석산부대 72사 정치부 주임 장칭부, 215퇀 정치실 주임 하가정, 정치실 비서 리천과, 1영 기관총련 련장 리국경, 1영 2련 3패 패장 신조승, 1패 패장 우지의 등이 압송되여왔다. 그들은 모두 응당한 처벌을 받았다. 염석산부대 215퇀 1영 2편 4패 패장 리보산은 1960년 7월 21일에 징벌이 두려워 자살했다. 1963년 2월 14일에 문수현인민정부에서는 석오칙을 총살했다. 이로써 류호란 등 7명렬사학살사건에 대한 수사와 처리사업은 전부 결속되였다.     
24    대만에서 건너 온 천재학자 림의부 댓글:  조회:5211  추천:0  2014-01-04
전체 중국인의 복지 위해 바다를 헤염쳐 건넌 경제학자 — 세계은행 부총재이며 저명한 경제학자인 림의부의 인생려정   (번역)   본명이 림정의인 림의부는 원 북경대학중국경제연구중심 주임, 교수, 박사생도사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제7, 8, 9, 10기 정협전국위원회 위원, 전국정협경제위원회 부주임, 중화전국공상련합회 부주석인 림의부는 2005년에 제3세계과학원원사로 당선되였고 현재 세계은행 수석경제학가 겸 발전경제학을 책임진 고급부행장직을 맡고있다. 1979년 5월16일에 대만에서는 금문도선전방송전방초소의 련대장 림정의가 바다에서 신비하게 실종된 사건이 발생되였다. 1년지 지난뒤 대만측은 림정의가 실종된후 사망되였다고 발표하고 유가족에게 위로금을 주었다. 가족과 친척들은 모두 림정의가 세상을 떠난 줄로만 알고 묘비까지 세웠다. 하지만 림정의의 부인 진운영은 눈물로 지새우면서도 결코 그가 죽였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당시 그녀에게는 세살된 아들이 있었고 또 임신중이였다. 몇년이 흐른뒤의 어느날 진운영은 림정의가 미국에서 류학을 하고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이 기쁜 소식에 그녀는 울면서 곧장 미국으로 달려갔다. 마침내 온가족이 극적으로 다시 만날수 있었다. 림정의는 왜서 실종되였는가? 림정의는 어릴 때부터 손중산의 “제군들에게 바라는것은 오직 중국진흥의 책임을 자신의 어깨에 지는것일뿐이다”라는 유훈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살았던 청년이였다. 그는 자신이 10억(당시의 기준)중국인들의 복지를 위해 할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자신의 몸을 던져 기여하리라 결심하고있었다. 후날 림정의는 이렇게 말했다. “아편전쟁후 중국은 제국주의렬강에게 릉욕당하는 력사를 겪어야 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중국이 하루 빨리 부강해질수 있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 골몰했었다. 닉슨의 중국방문이후 나는 대륙을 중시하게 되였고 중일수교, 중미수교후에는 중국부강의 희망을 중국대륙쪽에 두게 되였다. 한명의 중국인으로서 국가를 위해 공헌을 하려면 반드시 대륙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륙으로 가려고 마음먹은 그는 곧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금문도선전방송전방초소의 련대장이였던 그는 1979년 5월16일에 부대의 부하들에게 거짓으로 “훈련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야간점검후 반드시 자기의 방에서 머물고있어야 한다. 만약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을 발견해도 사격을 해서는 안된다. 이는 엄명이다.” 그날 부대의 대원들은 정말로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림정의였다. 림정의는 그렇게 “실종”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였다. 대만군대측은 림정의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이미 림정의는 중국대륙에 성공적으로 상륙해있었다. 하지만 중국측이 림정의의 상륙사실을 대외적으로 밝히지 않았기때문에 대만측도 그가 “반역죄를 저지르고 중국에 탈출한” 증거를 가지고있지 못했다. 림정의는 대륙으로 건너간후 이름을 림의부라고 고쳤다. 그런데 당시까지 림의부가 중국대륙으로 탈출할 때 롱구공 2개를 품고 해협을 헤염쳐 건넌것으로 알려지고있였다. 그러나 그 소문은 2008년에 림의부부부의 기자회견이 열렸을 때 림의부가 수영실력이 뛰여나 2000메터정도는 충분히 수영할수 있다는 부인의 증언에 의해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림의부의 부모는 계속 대만에서 살고있었다. 1996년에 림의부의 어머니가 불행하게 사망되엿다. 대만정부에서 림의부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기때문에 림의부는 어머니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것이 평생의 유감으로 되였다. 2002년에 또 림의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림의부는 대만정부에 장례식에 참석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인권과 민주”를 내세우던 민진당정부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만국방부는 대륙에 “투항”한 죄목을 들어 그의 대만방문을 반대했다. 심지어 국방부장관은 만약 림의부가 온다면 반드시 체포해 조사할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림의부의 부친장례식참석을 둘러싸고 대만사회는 찬반으로 나뉘어 의견이 분분해졌다. 결국 림의부는 대만방문을 포기하고 대신 부인을 장례식에 참석하게 했다. 1952년10월 15일에 대만 의란현에서 태여난 림의부는 대만대학에 다니다가 대학을 포기하고 대만륙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75년 2등으로 륙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학생련대장을 맡았다. 다음해에 그는 대만의 정치대학 기업관리연구소 석사과정에 국방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1978년에 기업관리학 석사학위를 받은뒤 그는 다시 군인으로 돌아가 금문도선전방송 전방초소의 련대장을 맡아 외빈들의 참관을 접대하는 임무를 책임졌다. 이 부대는 전 사단에서 가장 중요한 부대로서 우수한 병사들만 선발될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장비와 복지의 수준도 가장 좋은 부대였다. 특히 이곳은 금문도에서 중국대륙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서 썰물 때가 되면 그 거리가 고작 2300메터에 불과했다. 림의부는 바로 이 기회를 리용하여 바다에서 헤염쳐서 대륙으로 건너갔던것이다. 그후 림의부는 북경대학에서 공부했다. 서방경제학리론을 거의 암송하고 능숙한 영어실력을 갖춘 그는 이미 유명한 학생으로 되였다. 1980년에 대외개방을 시작한 중국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1979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시카고대학 명예교수 슐츠였다. 당시 슐츠는 북경대학에서 강연을 하게 되였는데 그때 통역을 한 사람이 바로 림의부였다. 림의부의 통역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던 슐츠는 귀국후 곧바로 림의부를 시카고대학에 추천했다. 북경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림의부는 1982년에 꿈에도 그리던 시카고대학에 가서 류학하게 되였다. 1987년에 귀국한 림의부는 개혁개방이후 해외에서 귀국한 중국 최초의 경제학박사였다. 귀국후 국무원 발전연구중심 부소장직을 맡았던 그는 4년 뒤 북경대학 중국경제연구중심 주임으로 되였다. 북경대학 중국경제연구중심은 이제까지 중국경제학연구의 중심지로 되였다. 뿐만아니라 림의부는 장성금융연구소를 설립해 중국에서의 금융체제개혁과 민영은행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있었다. 2008년 2월 4일에 세계은행 행장 로버트 졸릭은 북경대학경제학교수인 림의부를 세계은행 부행장 겸 수석경제학자로 임명했다. 림의부는 중국경제와 세계경제에 탁월한 공헌을 했다. 한 국가의 1인당 국민소득이 중등수준에 이르게 되면 경제발전방식의 전환을 순조롭게 실현할수 없게 되여 경제장성의 동력이 부족하게 되고 결국 경제가 정체된다. 이것을 이른바 “중등소득의 함정”이라고 한다. 세계은행 부총재이자 중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림의부는 정책과 발전방식이 타당하기만 하면 중국은 그러한 상황을 충분히 피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단기적으로 중국경제가 직면한 통화팽창의 압력과 부동산거품위기 등의 문제를 적절한 거시경제정책을 조정하는것으로 해결해나가면서 동시에 장기적으로 기술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서 경쟁력을 높이고 소득재분배문제를 잘 해결해야 하며 경제장성과 환경의 관계를 잘 처리해나가야 한다고 권고했다. 림의부는 주용기총리로부터 온가보총리에 이르기까지 줄곧 중국경제정책결정에서 핵심적인 두뇌역할을 하고있다. 특히 농업경제와 국유기업개혁 등의 분야에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큰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또 오랫동안 대만의 재계 및 정계인물들과 중국대륙을 련결해온 핵심인물이였다. 림의부는 2011년 7월 3월에 중국경제가 향후 20년동안에도 8%의 고속장성을 지속해 2030년이 되면 중국의 경제총량은 구매력기준으로 미국경제의 2배가 될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은바 있다. 림의부는 현재 중국에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에 가장 접근한 인물로 평가받고있다. 그는 “군인은 말가죽에 싸여 시체로 돌아오는것을 영광으로 삼는다. 나의 가장 큰 소망은 바로 과로로 책상우에서 죽는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하는 학자로서 언론접촉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국제경제학술지에 가장 많은 론문을 발표한 중국경제학자이기도 하다.     
23    강유위와 그의 부인들 댓글:  조회:7464  추천:0  2014-01-04
강유위와 그의 부인들 (번역)       강유위(康有为)는 모순된 사람이였다. 그는 “1부1처제”를 주장했지만 자신은 본 부인 장운주외에 둘째부인 량수각, 셋째부인 하전리, 넷째부인 세즈코, 다섯째부인 료보미, 여섯째부인 장광을 선후로 맞아들였다. 1858년 3월 19일, 광동성 남해에서 출생한 강유위는 중국 근대사에서 저명한 정치가이고 사상가이며 사회개혁가일뿐만아니라 서법가이며 학자였다. 그는 외래침력자들이 다투어 중국의 령토를 강점하자 강유위는 여러번이나 광서황제에게 글을 올려 변법을 실시할것을 요구했다. 광서황제는 강유위의 글에 깊은 감동을 받고 1898년 6월 11일에 :무술변법:을 실시했지만 자희태후를 위수로 한 완고파들의 반대로 103일밖에 실시되지 못하고말았다. 강유위는 “무술변법”이 실패하자 향항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후에 또 미국으로 넘어갔다. 그는 자신의 정치주장을 선전하기 위해 미국서부로 갔다. 당시 해외화교들은 강유위가 나타나는 곳이기만 하면 떼를 지어 모여들었다. 1907년, 강유위가 강연한다는 소식이 몇십리밖에 있는 종식원에까지 퍼졌다. 종식원의 주인은 로화교였는데 슬하에 10여명의 자녀를 두고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총명하고 미모가 뛰여난 딸은 하금란이였다. 하금란은 하전리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학식이 깊은 유생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란 그녀는 4개 나라의 언어를 통달하였을뿐만아니라 중국문화에 대해서 익숙했으며 춤과 노래에 능했다. 하전리는 오래전부터 강유위의 전기적경력을 듣고 흠모해오던터라 강유위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 동생들을 데리고 강유위의 구국론설을 들으러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날 강유위는 화교수령의 안내하에 강단에 올라 손을 흔들면서 2시간에 달하는 격정적인 연설을 했다. 그는 격정적으로 손을 흔들며 웨쳐댔다. “동포들! 제국주의 렬강들은 우리 나라를 나누어 삼키려고 발광하고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약하고 힘이 없기때문입니다. 변혁하지 않았기때문에 우리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변혁해야 합니다! 반드시 변혁해야 합니다! 변법을 실시하는것만이 나라를 멸망으로부터 구원하는 유일한 출로입니다!” 하전리는 강유위의 청산류수같은 말재주와 박학다식하고 우아한 기품에 홀딱 반해버렸다. 강유위의 연설이 끝나자 그녀는 강유위의 앞에 다가가서 공경스럽게 인사를 하면서 흠모의 마음을 토로했다. “선생님의 론술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듣고싶습니다.” 강유위는 놀란 눈길로 눈앞의 예쁘장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한떨기 해당화처럼 곱게 피여난 소녀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그날밤, 강유위는 해당화처럼 탐스럽게 피여난 하전리의 얼굴이 눈앞에 삼삼거려서 도무지 잠들수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박식하고 어여쁜 소녀에게 정이 들었던것이다. 이튿날 그는 다른 곳으로 연설하러 떠나야 했다. 그가 짐을 꾸려가지고 주숙집문을 나서는데 놀랍게도 하전리가 문앞에 서있었다. 하전리는 그를 송별하려고 새벽이슬을 차고 몇십리길을 달려온것이였다. 강유위는 기쁨과 감격으로 하여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전리, 전리…”하고 그녀의 이름만 부를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도 눈물을 머금고 강유위의 손에 자신의 주소를 적은 쪽지를 쥐여주었다. 강유위는 17세의 소녀 하전리와 애틋한 작벽을 하였다. 그후 미국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설을 하면서도 강유위는 하전리를 잊은적이 없었다. 밥을 먹을 때도 그녀의 얼굴이 눈에 삼삼거리고 잠을 잘 때에도 그녀의 얼굴이 눈에 삼삼했다. 그는 사흘이 멀다하게 하전리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젊은이처럼 글줄마다 끓어넘치는 사랑을 토로했다. 하전리도 그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사랑의 뜻이 담긴 회신을 보내왔다. 이렇게 50세의 로인과 17세 소녀는 편지로 불타는 사랑을 주고받았다. 청정부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정부가 일떠서자 강유위는 귀국을 서둘렀다. 그는 떠나기전에 하전리와 만났다. 교교한 달빛아래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은채 떨어질줄을 몰랐다. 소녀는 물기어린 그윽한 눈으로 강유위를 바라보더니 무엇인가 갈망하는듯 사르르 눈을 감았다. 강유위는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소녀의 입술우에 포갰다. 격렬한 키스를 나누던 두 사람은 잠시 떨어졌다. 하전리는 갑자기 옷을 벗으면서 말했다. “강선생님, 오늘밤 저는 이 몸을 선생님께 바치겠어요! 전 선생님의 녀자로 되겠어요!” 17세 소녀의 하얗고 탱탱한 가슴이 달빛아래 반짝거렸다. 강유위는 온몽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리지를 잃지 않고 끓어오르는 정욕을 참으면서 소녀의 옷을 도로 입혀주었다. “전리, 난 널 사랑해. 하지만 우린 나이 차이가 많아서 결합하려면 저애력이 많을거야. 만약 우리 둘이 결혼하지 못한다면 난 전리를 해친것으로 되는거야.” 집에 돌아간 하전리는 부모앞에서 강유위와 결혼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의 부모와 오빠, 언니들은 깜짝 놀랐다. 새파란 처녀가 처첩이 있는 로인한테 시집을 가겠다니! 부모와 오빠, 언니들이 견결하게 반대했지만 하전리는 울고불고 떼를 쓰면서 강유위가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노라고 야단쳤다. 부모는 하는수 없이 이 혼사에 동의하고말았다. 며칠후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렇게 하전리를 셋째부인으로 맞아들인 강유위는 1913년 12월에. 해외에서의 15년이란 망명생활을 결속짓고 귀국했다. 정처없이 떠돌던 그들의 류랑생활은 금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이제는 행복하게 살아갈 일만 남았다. 그런데 미인은 박명하다고 하전리는 성홍렬증에 걸려 1914년에 행가의 화원에서 불행하게도 24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되고말았다. 강유위는 사랑하는 셋째부인을 잃자 너무도 비통하여 밥술도 뜨지 않고 울기만 했다. 1912년, 강유위는 일본에 건너가 어느 한 별장에 거주하였는데 그때 그는 중개인의 소개로 16세 되는 일본 소녀를 하녀로 두었다. 세쯔꼬라고 부르는 일본 소녀는 신비스러운 감을 품고 중국인의 집에 들어섰다. 그녀는 병장의 호화로운 장식을 보면서 이 집의 주인이 범상하지 않은 인물이란걸 느꼈다. 일본인의 전통적인 복장인 화복을 입고 게다짝을 신은 그녀는 강유위의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가서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곱게 인사했다. 강유위가 일본소녀를 찬찬히 바라보니 눈은 좀 작은 편이였지만 입술은 앵두같고 얼굴이 하야말쑥했다. 미인은 아니지만 부끄러움을 머금은 표정이라든가 방금 피여난 꽃봉오리같은 얼굴이 매우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강유위는 일본녀성 특유의 온화함과 유순함을 가진 착하고 사리밝은 소녀를 날이갈수록 사랑하게 되였다. 어느날밤, 강유위는 소녀의 방에 가서 그녀와 후지산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가 중국의 만리장성과 황하, 장강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소녀가 신비함과 호기심에 도취되였을 때 강유위는 소녀를 끌어안고 연신 사랑한다고 말했다. 소녀는 놀란듯 몸을 떨었으나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온몸이 화끈 달아오른 강유위는 소녀를 끌어안고 침대우에 올라갔다…그후 한달동안 강유위는 하전리를 빈방에 둔채 하녀의 방에서 일본소녀를 안고 즐겼다. 강유위는 1913년에 귀국하여 상해에 돌아와서도 세쯔꼬를 잊을수 없었다. 그는 즉시 세쯔꼬를 초정한다는 편지를 써보냈다. 절절한 사랑이 담긴 편지를 받아쥔 세쯔꼬는 주저없이 바다를 건너 강유위의 곁으로 찾아왔다. 강유위는 너무도 기뻐서 잔치를 차리고 세쯔꼬를 넷째부인으로 맞아들인다고 선포했다. 1920년, 강유위는 항주 서호강반에 30무나 되는 “일천원”를 일떠세웠다. 그해 봄날 강유위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수려한 경치를 감상하면서 시를 읊조리다가 풍령사앞부두에서 고기그물을 씻고있는 농가의 처녀를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그 처녀는 타고난 아름다움에 매력적인 건강미가 흐르고있었다. 항주처녀가 천하미인이란 소문을 들은 강유위는 그날로 매파를 보내 혼사를 성사시켰다. 그 처녀의 이름은 장광이고 아명은 아취로서 당시 19살이였다. 5월의 푸른 계절에 강유위는 장광을 여섯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강유위와 장광은 결혼후에 서호 거룡교 18호에서 한동안 살았는데 63살의 신랑과 19살의 신부는 아침이면 배를 타고 서호를 유람했고 저녁이면 산에 올라 항주의 경치를 감상했다. 장광은 강유위가 마지막으로 총애한 부인이였다. 강유위가 1927년 3월 31일에 70세를 일기로 청도에서 세상을 떠나자 장광은 과부로 되였다. 강유위는 서예작품을 비롯한 귀중하나 물품을 만년에 총애하고있던 장광에게 맡겼다. 장광은 강유위의 유물을 목숨처럼 귀중히 여기고있었다. 그런데 장광은 1945년에 자택에서 강유위의 유물을 도적맞히자 그 충격으로 병이 들어 사망되였다.     
22    미국을 배반한 제1부인 댓글:  조회:7559  추천:2  2013-12-29
미국을 배반한 제1부인     20세기의 가장 축복받은 행운의 녀인이면서도 재앙의 녀인이였던 재클린은 1929년 7월 28일에 주식투자가인 아버지 부비에와 뉴욕중앙은행 행장의 딸인 어머니 쟈넷사이에서 태여났다. 재클린은 소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내내 우등생이였고 프랑스류학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후 그녀는 기자로서 활약하면서 뉴포트사교계연회에 참석해 1951년에는 사교계의 녀왕이 되였다. 그무렵 그녀는 친구의 소개로 미래의 대통령 존 케네디를 만났다. 명문가의 아들과 빠리류학에서 갓 돌아온 미녀, 보기에도 두 사람은 어울리는 부부가 될것 같았다. 케네디를 만나는 순간부터 재클린은 그가 자신에게 있어서 운명의 남자로 될것이라고 직감했다. 그것은 적중하여 그로부터 2년뒤인 1953년 9월 12일에 그녀는 25세의 나이로 당시 37세였던 케네디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의 결혼식이 얼마나 성대했던지 마치 대관식같았다. 이 결혼으로 재클린은 부와 권력의 품에 안기게 되였다. 그로부터 8년후인 1961년 1월에 케네디가 미국 제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재클린은 일약 제1부인으로 되여 세계가 주시하는 인물이 되였다. 43세의 젊은 대통령과 33세의 미모의 부인, 마치 동화와 같은 부부가 미국에 등장했다. 전 미국의 녀자들이 재클린의 일거일동을 흉내냈고 그녀가 몸에 걸친 드레스나 액세서리는 곧 전국에 퍼졌다. 제1부인이 된 재클린은 세상의 녀자가 바랄수 있는 모든것을 손에 넣게 되였다. 그러나 케네디와의 결혼은 행이였던가, 불행이였던가? 사실 그녀와 케네디의 결혼생활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있었던것처럼 그렇게 행복한것은 아니였다. 대통령은 그녀 혼자의것이 아니였다. 그건 그래도 좋았다. 그녀가 참을수 없은것은 남편도 그녀 혼자의것이 아니였기때문이다. 케네디는 선천적으로 바람둥이였다. 남편이 누군지도 모르는 녀자와 자취를 감춰버리면 재클린은 혼자서 뒤에 남겨진 비애를 얼마나 맛보아야 했던지 모른다. 케네디는 밖에서 녀색을 즐겼을뿐만아니라 재클린의 눈을 피해 백악관에까지 녀자들을 끌어들였다. 상대도 가지리 않았다. 이름난 녀배우가 있는가 하면 하찮은 청소부녀자도 있었고 10대의 처녀가 있는가 하면 40대의 그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더 많은 녀자도 있었다.. 시간,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때론 회의도중에도 화장실로 간다고 속여놓고 몰래 녀자와 즐긴다음 다시 회의장소로 가군했다. 한번은 제인 맨스필드라는 녀자가 임신중이여서 안된다고 했지만 “여기 배속에 당신 남편의 씨가 있다구? 묘한 기분인데”하면서 다짜고짜로 올라탔다. 또 한번은 재클린이 집에 없을 때 녀배우 소피아 로렌을 자택으로 데리고와서 즐겼는데 그녀가 어쩌자고 그랬는지 돌아갈 때 팬티를 두고갔다. 그 팬티를 발견한 재클린은 남편이 녀자를 자신의 침대에까지 끌어들이자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남편이 저명한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와 깊은 사이가 되였을 때 몹시 허탈감을 느꼈다. 마릴린 먼로는 직접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부인자리를 내놓으라고까지 했던것이다. 그녀는 대통령부인이라는 허울좋은 겉치레만으로 살아가고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간이였다. 1963년은 그녀에게 있어서 재앙의 한해였다. 그해봄에 둘째아들 페트릭이 태여난지 불과 이틀만에 죽어버리자 그녀는 너무 힘들어했다. 같은해 11월 22일, 미국 남부 댈레스거리에서 소리높이 울린 “오, 아니야!”의 절규는 순식간에 그녀를 대통령부인으로부터 과부로 만들어놓았다. 그날 울려퍼진 총성은 미국인들에게서 대통령을 앗아갔고 그녀에게서 남편을 앗아갔다. 케네디가 암살당한후 미국인들은 재클린이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조용히 두 자녀를 키우며 살아가는 미국의 영원한 제1부인이 되여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재클린이 케네디가문의 모범며느리가 되여 망부의 동생들이 대통령이 될수 있도록 협력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재클린은 그런 미국인들의 기대와 소망을 깨뜨려버리고 1968년에 예전부터 알고 지내오던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했다. 그러자 온 미국이 격분했다. “재클린은 돈과 결혼햇다!” “재클린은 미국을 배반했다!” 재클린은 케네디가 죽은후 5년이 지나서 재혼했지만 사실 그녀가 오나시스를 만난것은 케네디가 아직 살아있을 때였다. 1963년봄에 둘째아들 패트릭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재클린에게 그리스의 선방왕인 오나시스가 요트로 놀러오라는 초대장을 보내왔다. 일찍이 케네디와 함께 초청을 받았던 적이 있는 호화롭기 그지없는 요트 《크리스티나호》로 놀러오라는 초대장을 받자 그녀는 주저없이 그리로 날아갔다.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는 돈을 종이장으로 알고있는 대부호였다. 그는 250만딸라의 돈을 들여서 세계제일의 호화요트를 만들고 귀여운 딸의 이름으로 《크리스티나호》라고 명명했다. 아버지벌 되는 오나시스와 함께 40일간의 선박려행을 하면서 재클린은 남편의 바람기로 인한 고민도 아들의 죽음으로 받은 고통도 말끔히 잊어버리고말았다. 하지만 근심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였다. 그것은 사랑의 적수때문이였다. 오나시스에게는 또다른 련인이 있었다. 바로 세기의 명가수 마리아 칼라스였다. 오나시스는 선박의 호화로운 방에서 재클린과 칼라스를 번갈아 끌어들이면서 즐겨댔다. 1968년에 40세의 재클린은 70세의 오나시스와 결혼했다. 하지만 오나시스의 딸 크리스티나는 계모를 몹시 미워했다. 크리스티나는 재클린이 자신의 계모로 되자 친구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재클린은 재앙의 녀인이야. 아들과 남편이 죽고 또 남편의 동생마저 죽었어. 그녀는 재앙을 우리 집에도 가져올거야.” 과연 오나시스의 가문에 재앙이 련달아 들이닥쳤다. 재클린과 결혼하면서부터 오나시스의 사업은 불황에 직면해 어려움을 겪었으며 1973년에는 오나시스가 가장 아끼는 아들 알렉산더가 비행기사고로 죽고말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74년 10월에는 크리스티나의 어머니인 티너가 빠리에서 급사했고 또 그 이듬해인 1975년 3월 15일에는 오나시스가 세상을 떠났다. 크리스티나는 오나시스가문에 덮친 불행은 모두 재클린의 원인이라고 믿고있었다. 만년에 오나시스는 재클린을 미워했던 때문인지 유서를 다시 작성했다. 10억딸라의 유산이 대부분이 크리스티나에게 남겨지고 재클린에게는 1000만딸라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분개한 재클린은 유산을 둘러싸고 크리스티나와 장장 18개월에 거친 싸움을 벌렸다. 재클린이 돈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수 있다. 결국 오나시스일가와의 일체관계를 끊는다는 조건으로 그녀는 2600만딸라를 상속받았다. 크리스티나는 죽기 얼마전에 기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재클린은 내가 알고있는 사람중에 가장 돈을 밝히는 사람이였어요. 그녀가 한가지 깨닫지 못한 점은 내가 그녀를 보지 않을수만 있다면 그녀에게 4억딸라라도 지급할 작정이였다는 사실이였어요. 그녀의 주위사람들이 모두 죽어가는데 그녀만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해요. 그녀는 위험스럽고도 무서운 존재예요. 재클린은 케네디가문과 오나시스가문의 가족을 모두 잡아먹었어요.” 오나시스가 죽은후 재클린은 뉴욕에 머물면서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 1975년 9월에 《바이킹》출판사의 편집위원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바이킹》출판사가 케네디암살사건을 다룬 책을 출판하자 그곳을 그만두고 《더불데이 북스》출판사로 옮겼다. 1976년이후 그녀는 5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수많은 남자들과 사귀면서 과부의 적적한 밤을 즐기기도 했다. 그중에는 《바이킹》출판사의 긴저버그, 방송국 리사인 칼 킬링스위스, 칼럼작가인 해밀, 작가인 피터 데이네스, 건축가인 페이 등 인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재클린이 66세의 나이로 죽는날까지 미망인의 외로운 밤을 한침대에서 보내면서 위로해준 인물도 있었다고 한다. 재클린은 만년에 암에 걸렸다. 행운의 녀인이면서도 재앙의 녀인이였던 재클린,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남자의 안해였다가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남자의 안해로 되였던 그녀는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994년 5월 20일에 끝내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죽는날까지 염문을 뿌리가간 그녀, 실로 화려하고 파란만장한 인생력정이였다.     
21    이승만대통령과 프란체스카 댓글:  조회:6347  추천:0  2013-12-29
리승만대통령과 프란체스카     한국의 초대대통령 리승만(李承晩)의 호는 우남(雩南)이고 1875년에 황해북도 평산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1897년에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4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1907년에 워싱톤대학을 졸업하였다. 1908년에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10년에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란 론문으로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리승만은 1895년에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자 친일정권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렸고 1896년에 서재필이 미국에서 돌아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자 거기에 가담하였다. 리승만은 《협성회보》와 《매일신문》의 주필을 지내면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개화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고 중추원설치를 주장하다가 1898년에 황국협회의 무고로 체포되여 투옥되였으나 1904년에 출옥하였다. 그해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에 건너가 루스벨트대통령을 만나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협력해줄것을 요청하였다.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당한후 귀국해 리상재 등과 조선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후진을 양성하다가 1912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4년에 《한국태평양》지를 발간하였고 1919년에 상해대한민국림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국무총리로 추대되였다. 림시정부의 직제를 대통령제로 바꾸고 1920년에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1921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돌아오지 않자 의정원의 불신임을 받았다. 그뒤 워싱톤, 하와이 등지에서 항일외교활동을 벌리다가 광복후 귀국했다. 리승만은 독립촉성중앙위원회 총재,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지냈고 1948년에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이어 초대국회의장, 대통령이 되였다. 정부가 부산에 피란해있던 1951년에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자유당을 창당했고 이듬해에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제2대 대통령에 재선되였다. 1954년에 초대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조항철폐를 골자로 한 사사오입개헌으로 제3대 대통령에 세번재로 당선되였고 1960년에 제4대 대통령에 4번재로 당선되였으나 “4․19”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1960년 4월 19일에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학생과 고등학생을 비롯하여 서울시민 10만여명이 대통령의 관저인 경무대로 향하였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서울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경찰은 시위군중에게 무력진압에 나서 이날 하루동안 전국에서 186명이 사망되고 6천여명이 부상당하였다. 리승만은 리기붕을 사임시키고 자유당총재직을 버리는 등 자구책을 마련했으나 국민의 분노를 잠재울수는 없었다. 1960년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 300여 명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판을 들고 서울시내를 행진하며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면서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미국도 사태를 수습하려면 리승만의 퇴진이 절대적이라고 권고하였다. 결국 1960년 4월 26일에 리승만은 퇴진성명을 발표하고 4월 29일에 하와이로 망명했으며 리기붕일가는 자살함으로써 자유당정부는 종말을 고했다. 하와이로 망명한 리승만은 1965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 《독립정신》, 《일본폭로기》 등이 있다. 리승만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는 뛰여난 속기와 타자능력 그리고 국제자격증을 보유한 영어통역능력 등으로 당시 비서실체제가 약했던 경무대에서 실질적인 비서실장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리승만대통령의 건강과 신변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져 음식뿐아니라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는 “과잉내조”로 리대통령의 정치적 시야를 좁게 만든 “우물안 내조”에 그쳤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함께 받고있다. 프란체스카녀사는 1900년에 오스트리아에서 태여나서 1934년에 뉴욕에서 리승만과 결혼했다. 리승만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리기붕의 아들인 리강석을 양자로 삼았다. 리승만을 업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리기붕(李起鵬)은 1896년에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후산리의 몰락한 량반가정에서 독자로 태여났다 그는 1923년에 미국 아이오와주 데이버주립 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졸업직후 류학생 박마리아를 알게 되여 1935년에 결혼하였다. 부인 박마리아와의 사이에 큰딸 리강희와 리강석, 리강욱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딸 리강희는 중학교때 사망됐기에 자녀들은 두아들만 남았다. 1945년에 리승만의 비서로 정계에 들어갔으며 윤보선의 뒤를 이어 1949년 6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서울특별시 시장을 지냈다. 1949년 8월부터 1951년 5월 8일까지 다시 서울시장에 재선되였다. 1951년에 국방부장관이 된 그는 리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했고 2년후에 리범석의 세력을 축출하고 자유당중앙위원회 의장에 올라 명실공히 자유당의 제2인자가 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1954년 5월에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여 민의원 의장이 되였고 1956년에 부대통령경쟁에 나섰으나 락선되였다. 1957년에는 자기 아들 리강석을 리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1960년 3월 15일에 공개부정선거로 부대통령에 당선되였다. 그러나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혁명이 일어나 결국 부대통령을 사임하고 경무대관사 36호실에 피신해 있었다. 1960년 4월 28일 새벽 5시 40분에 당시 륙군장교였던 큰아들 리강석이 권총으로 아버지 리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동생 리강욱을 차례로 쏘아죽이고 자살하였다. 리기붕일가족자살에 대해서는 의혹과 론란이 되였는데 당시 곽영주가 리승만의 퇴진을 막기 위해 여론을 무마시키려고 그를 비밀리에 살해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것이 진실인지 알수 없다. 리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는 자식을 낳지 못했지만 외교활동 즉 미국과의 관계가 두드러졌다. 그녀는 사적인 친분관계는 물론 타고난 사교술로 워싱톤정가의 실력자들부인과 친밀한 교분을 유지하였다. 특히 루즈벨트대통령 부인과의 관계는 돈독하였다. 그녀는 한국을 워싱톤정가의 관심거리로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그녀는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자존심과 고집이 강한 편이였다. 그녀는 경무대내에서 대인관계에 대한 불쾌감을 대통령에게 솔직하게 표현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정부인사에 개입하고 국정에 간여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녀는 리승만의 건강과 신변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졌다. 음식뿐아니라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였다.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대통령의 만남을 의도적으로 방해하였다. 물론 그것은 고령의 대통령을 편안하게 보필하고싶은 안해의 순수한 마음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공인으로서의 대통령책무를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정도로 철저한 통제였다. 이런 그녀의 “우물안내조”는 국내정세에 어두웠던 대통령의 정치적 시야를 더더욱 좁게 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카의 이 모든 행동들과 개입이 정치적관심으로 야기된것이 아니라 단지 대통령의 건강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애정으로부터 야기된 결과였다는 점은 상당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프란체스카는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상당한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대통령에게 행사하였다. 고집스럽게 남편의 건강을 위해 노력한 결과가 오히려 리승만대통령의 장기독재와 말년의 정치부패, 뒤이은 망명생활을 가져오게 했다. 리승만과 그녀의 경우는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깊이 의존하는 애정의 관계를 가졌지만 정치지도자와 그 안해로서의 적합하고 건강한 긴장관계를 갖지 못하여 국가와 지도자의 발전적 동인을 제공하지 못한것으로 평가할수 있다. 그러나 사실 프란체스카는 경무대시절 양말을 직접 기워신는 등 절약생활을 몸소 보여준 모범적인 대통령부인이였다. 프란체스카는 자신이 입는 옷마다 뒤목이 닿는 부분에 명주를 대놓아 빨리 닳지 않도록 했고 긴양말도 늘 기워서 신을 정도로 검소했다. 그녀는 대통령부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집와서 평생동안 단 한벌의 례복으로 지냈다. 그녀는 1960년 “4․19”혁명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리승만대통령과 함께 하와이로 망명을 갔고 1965년에 리승만박사가 타계하자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프란체스카녀사는 1970년에 영구귀국하여 양아들 리인수내외와 함께 리화장에 정착했고 1992년 3월 19일에 동성동국립묘지 리승만박사묘소옆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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