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중국인의 복지 위해 바다를 헤염쳐 건넌 경제학자
— 세계은행 부총재이며 저명한 경제학자인 림의부의 인생려정
(번역)
본명이 림정의인 림의부는 원 북경대학중국경제연구중심 주임, 교수, 박사생도사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제7, 8, 9, 10기 정협전국위원회 위원, 전국정협경제위원회 부주임, 중화전국공상련합회 부주석인 림의부는 2005년에 제3세계과학원원사로 당선되였고 현재 세계은행 수석경제학가 겸 발전경제학을 책임진 고급부행장직을 맡고있다.
1979년 5월16일에 대만에서는 금문도선전방송전방초소의 련대장 림정의가 바다에서 신비하게 실종된 사건이 발생되였다. 1년지 지난뒤 대만측은 림정의가 실종된후 사망되였다고 발표하고 유가족에게 위로금을 주었다.
가족과 친척들은 모두 림정의가 세상을 떠난 줄로만 알고 묘비까지 세웠다. 하지만 림정의의 부인 진운영은 눈물로 지새우면서도 결코 그가 죽였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당시 그녀에게는 세살된 아들이 있었고 또 임신중이였다. 몇년이 흐른뒤의 어느날 진운영은 림정의가 미국에서 류학을 하고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이 기쁜 소식에 그녀는 울면서 곧장 미국으로 달려갔다. 마침내 온가족이 극적으로 다시 만날수 있었다.
림정의는 왜서 실종되였는가?
림정의는 어릴 때부터 손중산의 “제군들에게 바라는것은 오직 중국진흥의 책임을 자신의 어깨에 지는것일뿐이다”라는 유훈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살았던 청년이였다. 그는 자신이 10억(당시의 기준)중국인들의 복지를 위해 할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자신의 몸을 던져 기여하리라 결심하고있었다. 후날 림정의는 이렇게 말했다.
“아편전쟁후 중국은 제국주의렬강에게 릉욕당하는 력사를 겪어야 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중국이 하루 빨리 부강해질수 있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 골몰했었다. 닉슨의 중국방문이후 나는 대륙을 중시하게 되였고 중일수교, 중미수교후에는 중국부강의 희망을 중국대륙쪽에 두게 되였다. 한명의 중국인으로서 국가를 위해 공헌을 하려면 반드시 대륙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륙으로 가려고 마음먹은 그는 곧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금문도선전방송전방초소의 련대장이였던 그는 1979년 5월16일에 부대의 부하들에게 거짓으로 “훈련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야간점검후 반드시 자기의 방에서 머물고있어야 한다. 만약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을 발견해도 사격을 해서는 안된다. 이는 엄명이다.”
그날 부대의 대원들은 정말로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림정의였다. 림정의는 그렇게 “실종”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였다.
대만군대측은 림정의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이미 림정의는 중국대륙에 성공적으로 상륙해있었다. 하지만 중국측이 림정의의 상륙사실을 대외적으로 밝히지 않았기때문에 대만측도 그가 “반역죄를 저지르고 중국에 탈출한” 증거를 가지고있지 못했다. 림정의는 대륙으로 건너간후 이름을 림의부라고 고쳤다.
그런데 당시까지 림의부가 중국대륙으로 탈출할 때 롱구공 2개를 품고 해협을 헤염쳐 건넌것으로 알려지고있였다. 그러나 그 소문은 2008년에 림의부부부의 기자회견이 열렸을 때 림의부가 수영실력이 뛰여나 2000메터정도는 충분히 수영할수 있다는 부인의 증언에 의해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림의부의 부모는 계속 대만에서 살고있었다. 1996년에 림의부의 어머니가 불행하게 사망되엿다. 대만정부에서 림의부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기때문에 림의부는 어머니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것이 평생의 유감으로 되였다. 2002년에 또 림의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림의부는 대만정부에 장례식에 참석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인권과 민주”를 내세우던 민진당정부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만국방부는 대륙에 “투항”한 죄목을 들어 그의 대만방문을 반대했다. 심지어 국방부장관은 만약 림의부가 온다면 반드시 체포해 조사할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림의부의 부친장례식참석을 둘러싸고 대만사회는 찬반으로 나뉘어 의견이 분분해졌다. 결국 림의부는 대만방문을 포기하고 대신 부인을 장례식에 참석하게 했다.
1952년10월 15일에 대만 의란현에서 태여난 림의부는 대만대학에 다니다가 대학을 포기하고 대만륙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75년 2등으로 륙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학생련대장을 맡았다. 다음해에 그는 대만의 정치대학 기업관리연구소 석사과정에 국방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1978년에 기업관리학 석사학위를 받은뒤 그는 다시 군인으로 돌아가 금문도선전방송 전방초소의 련대장을 맡아 외빈들의 참관을 접대하는 임무를 책임졌다. 이 부대는 전 사단에서 가장 중요한 부대로서 우수한 병사들만 선발될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장비와 복지의 수준도 가장 좋은 부대였다. 특히 이곳은 금문도에서 중국대륙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서 썰물 때가 되면 그 거리가 고작 2300메터에 불과했다. 림의부는 바로 이 기회를 리용하여 바다에서 헤염쳐서 대륙으로 건너갔던것이다.
그후 림의부는 북경대학에서 공부했다. 서방경제학리론을 거의 암송하고 능숙한 영어실력을 갖춘 그는 이미 유명한 학생으로 되였다. 1980년에 대외개방을 시작한 중국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1979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시카고대학 명예교수 슐츠였다. 당시 슐츠는 북경대학에서 강연을 하게 되였는데 그때 통역을 한 사람이 바로 림의부였다. 림의부의 통역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던 슐츠는 귀국후 곧바로 림의부를 시카고대학에 추천했다. 북경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림의부는 1982년에 꿈에도 그리던 시카고대학에 가서 류학하게 되였다.
1987년에 귀국한 림의부는 개혁개방이후 해외에서 귀국한 중국 최초의 경제학박사였다. 귀국후 국무원 발전연구중심 부소장직을 맡았던 그는 4년 뒤 북경대학 중국경제연구중심 주임으로 되였다. 북경대학 중국경제연구중심은 이제까지 중국경제학연구의 중심지로 되였다. 뿐만아니라 림의부는 장성금융연구소를 설립해 중국에서의 금융체제개혁과 민영은행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있었다. 2008년 2월 4일에 세계은행 행장 로버트 졸릭은 북경대학경제학교수인 림의부를 세계은행 부행장 겸 수석경제학자로 임명했다. 림의부는 중국경제와 세계경제에 탁월한 공헌을 했다.
한 국가의 1인당 국민소득이 중등수준에 이르게 되면 경제발전방식의 전환을 순조롭게 실현할수 없게 되여 경제장성의 동력이 부족하게 되고 결국 경제가 정체된다. 이것을 이른바 “중등소득의 함정”이라고 한다. 세계은행 부총재이자 중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림의부는 정책과 발전방식이 타당하기만 하면 중국은 그러한 상황을 충분히 피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단기적으로 중국경제가 직면한 통화팽창의 압력과 부동산거품위기 등의 문제를 적절한 거시경제정책을 조정하는것으로 해결해나가면서 동시에 장기적으로 기술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서 경쟁력을 높이고 소득재분배문제를 잘 해결해야 하며 경제장성과 환경의 관계를 잘 처리해나가야 한다고 권고했다.
림의부는 주용기총리로부터 온가보총리에 이르기까지 줄곧 중국경제정책결정에서 핵심적인 두뇌역할을 하고있다. 특히 농업경제와 국유기업개혁 등의 분야에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큰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또 오랫동안 대만의 재계 및 정계인물들과 중국대륙을 련결해온 핵심인물이였다. 림의부는 2011년 7월 3월에 중국경제가 향후 20년동안에도 8%의 고속장성을 지속해 2030년이 되면 중국의 경제총량은 구매력기준으로 미국경제의 2배가 될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은바 있다.
림의부는 현재 중국에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에 가장 접근한 인물로 평가받고있다. 그는 “군인은 말가죽에 싸여 시체로 돌아오는것을 영광으로 삼는다. 나의 가장 큰 소망은 바로 과로로 책상우에서 죽는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하는 학자로서 언론접촉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국제경제학술지에 가장 많은 론문을 발표한 중국경제학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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