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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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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청년과 6년동안 정사 나눈 자희태후
2014년 02월 05일 15시 48분  조회:7961  추천:1  작성자: 넉두리

영국청년과 6년동안 정사 나눈 자희태후

 
(번역)

 
청나라말기 중국을 통치한 자희태후(慈禧太后)와 영국귀족청년의 은밀한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 《태후와 나》가 최근에 영문판과 중문판으로 출판됐다. 이 책의 저자는 청나라말기에 영국외교부통역으로 청나라황실을 드나들었던 영국인 에드번드 백하우스남작이다.

《태후와 나》는 저자가 황궁에서 보고 들은 특별한 이야기를 주축으로 하여 저친왕과 군기대신, 후비사이의 은밀한 사랑이야기 및 저자와 자희태후사이에 있었던 6년간의 정사이야기를 담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주로 29세의 영국귀족청년(저자 본인)과 67세의 자희태후와의 은밀한 사랑이야기를 썼다.

에드번드 백하우스(埃蒙德·巴恪思)는 1873년에 영국 요크의 명문가문에서 출생했다. 남작작위를 물려받고 옥스포드대학을 졸업한 에드번드는 1898에 북경으로 왔다. 그는 영어외에 일어, 라틴어, 로어, 중국어, 만족어, 몽골어 등 여러가지 언어에 정통했기에 영국외교부의 통역을 맡았다. 1903년에 청정부에서는 그를 경사대학당(지금의 북경대학)의 법률과 문학교수로 초빙했다. 1년후에 그는 영국외무 전원으로 되였다.

1944년 1월에 71세의 에드번드 백하우스는 북경에서 사망되였다. 사망되기 1년전에 그는 회고록의 형식으로 유럽에 있을 때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기록한 《지나간 일들》과 청나라말기에 중국황실을 드나들면서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 《태후와 나》를 썼다. 그러나 전쟁시기이고 내용이 자희태후와의 은밀한 정사를 담은 책이였기때문에 출판되기 어려웠다. 에드번드 백하우스가 사망된후 그의 원고를 도와주었던 스위스의사는 원고를 여러부로 복제하여 영국박물관, 빠리국립도서관, 미국 하부트학원도서관에 전해주었다. 그가 1973년에 사망되자 그의 친구는 원고를 원 저자 에드번드 백하우스가 생전에 공부했던 옥스포드대학도서관에 전해주었다.

2007년에 북경텔레비죤방송국 《과학교육관찰》프로에서 북경고궁박물원도서관 부관장 향사는 처음으로 자희태후가 영국귀족청년과 6년동안 정사를 나누었다고 밝혔다. 북경텔레비죤방송국의 이 보도로 하여 사람들은 영국귀족청년 에드번드 백하우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태후와 나》를 번역한 왕소가는 저자 에드번드 백하우스에 대해 감탄하면서 이렇게 소개했다.
“저자는 보기 드문 언어천재입니다. 이 책은 영문으로 씌여졌는데 중간에 프랑스어, 라틴어, 로어, 그리스어, 일어, 중국어를 끼워넣었습니다. 더욱 사람을 탄복시키는것은 저자가 여러가지 언어사이에 자유자재로 경전을 인용하여 자연스럽게 전환했으며 여러나라의 력사, 전고, 기문, 일사 등을 아주 재치있게 채택한것입니다. 이 책은 1943년에 씌여졌고 그 시기 저자는 70세의 고령이였습니다. 어떠한 참고자료도 없었고 인터넷과 검색을 할수 없는 당시의 정황에서 전부 기억에 의해 썼다는것은 정말 경탄하지 않을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이 책을 번역하기 매우 어려웠습니다. 미국편집의 도움을 받아서 먼저 여러가지 언어를 전부 영어로 정리한후 다시 제가 중문으로 번역했습니다.”

에드번드 백하우스는 자희태후가 사망된 2년후인 1910년에 《태후통치아래에서의 중국》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은 독특한 시각으로 독자들에게 중국봉건력사에서 최후로 강권통지를 해왔던 자희태후와 그녀의 통치아래에서 몰락하는 청나라의 부패상을 보여주었다. 에드번드 백하우스가 쓴 《북경궁정회고록》은 학술계의 칭송을 받고있다. 또 그는 20세기초의 학술계에서 중국력사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남긴 괴짜동양학자로 알려져있다. 그는 서방기자들과 접촉하지 않고 조용히 은거해 지낸것으로 하여 더욱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저자가 사망된후 67년만에 《태후와 나》가 출판되여 물의를 빚었다. 저자는 책에서 자신이 자희태후와 6년동안 맺은 성관계를 상세히 묘사했다.

1835년 11월 29일에 출생한 자희태후는 함풍황제의 비였고 동치황제의 생모였는데 함풍황제가 사망된후 황태후의 신분으로 수렴청정하면서 1861년부터 죽을 때(1908년 11월 15일)까지 대청제국의 실제 통치자로 되였다. 26세때인 1861년 8월에 함풍황제가 사망되자 청상과부로 된 자희태후는 수많은 남자들과 성관계를 맺었다. 최근에 《태후와 나》가 출판되면서 자희태후가 정말로 영국귀족청년과 정사를 가졌을가 하고 이 책의 진실성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미 1976년에 영국의 저명한 력사학자 휴 트레버 로퍼(休·特雷弗·罗珀)는 《숨겨진 일생: 에드번드 백하우스의 비밀》이란 책을 출판하여 에드번드 백하우스남작을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증거를 조작해 세상을 속인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또 그의 작품은 “한 자페증동성련애자의 음란한 상상으로서 허구해낸 억압되고 비틀린 성욕의 최후배설”이라고 질책했다.

하지만 학자들은 한 사람의 견해로 이 책의 모든 가치를 말살한다는것은 음식을 먹다가 목이 멘다고 그 음식을 다시 먹으려 하지 않는것과 같다고 반박했다.

이 책을 번역한 왕소가는 “자희태후와 이 책의 저자와의 정사에 대해 어떻게 리해하는가”하는 기자의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책에 언급된 력사재료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사실이다’거나 ‘거짓이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저자와 자희태후와의 사이에 정사가 있었다는것은 사실이겠지만 책에서 묘사한것처럼 그렇게 빈번하고 그처럼 뜨거웠겠는가 하는것은 알수 없는 일입니다. 이 책에서 광서황제는 자희태후가 보낸 하수인에게 목이 졸려 죽음을 당했고 자희태후는 원세개의 총에 맞아죽었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 중대한 사실은 다른 사람한테서 들은대로 썻을수 있기에 사서(史书)와 다를수 있습니다. 하지만 궁정귀족들의 생활에 대한 묘사는 세절이 매우 상세하고 진실하여 꾸며낸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 책에는 허구의 성분이 있을수 있지만 저자를 ‘증거를 조작해 세상을 속인 인물’이라고 질책하는것은 공정하지 못한 평가입니다.”

이 책에 60여세의 자희태후의 피부가 20세의 소녀와 같다고 묘사했는데 이는 사실일가?

청나라연구전문가이며 청동릉문물관리처 전임 부주임 우선포는 이렇게 소개했다.
“자희태후는 27세에 과부로 되였는데 몸보양에 대해 매우 중시했습니다. 미용술에 대해서는 더욱 중시했습니다. 1902년전후 자희태후의 신변에는 갓 프랑스에서 돌아온 덕령과 용령자매가 있었는데 그녀들은 자희태후의 목욕시중을 들 때 직접 자희태후의 몸을 만져보았는데 몸매가 풍만하고 살결이 아주 곱고 부드러웠다고 했습니다. 덕령은 《어향표묘록》에서 자희태후는 60여세이지만 20세의 소녀와 같았다고 하면서 그야말로 미인이였다고 찬탄했습니다. 덕령은 또 《태후의 화장대》와 《옥체진렬》이란 글에서 자희태후가 진주분을 먹고 닭알흰자위를 바르고 사람젖을 먹는 등 방법으로 피부를 보양하고 얼굴을 아름답게 가꿨다고 썼습니다.”

자희태후가 사람젖을 먹는것으로 얼굴미용을 했다는데 대해 의심하는 견해도 있었지만 우선포는 북경제1력사서류관에서 청나라서류를 읽다가 무의식중에 황궁에서 자희태후에게 젖을 공급한 녀자들의 명단이 적혀있는것을 발견했고 말했다.

덕령은 또 글에서 자희태후가 갓 출산한 젖이 잘 나오는 젊은 녀자들을 황궁에서 거주하게 했는데 밤중에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썼다. 당시 자희태후가 몰래 사생아를 낳았다는 추문도 돌았다. 그전에 이미 자희태후가 15세에 갓 입궁하여 함풍황제를 만나기전에 이미 공친왕과 몰래 정사를 나누었다는 추문이 돌았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동치황제의 신분에도 의문을 가지면서 동치황제는 함풍황제의 친아들이 아니라 자희태후가 공친왕과 사통하여 낳은 사생아라고 인정했다. 야사의 기재에 의하면 자희태후는 영록을 몹시 총애했는데 함풍황제 몰래 두 사람은 경상적으로 사통했다고 한다. 또 자희태후는 수렴청정을 한후에는 공개적으로 영록을 자신의 침대에 불러들여 뜨거운 밤을 보냈다고 한다. 그외에도 자희태후는 잘 생긴 젊은 남자만 보면 궁에 한달씩 묵게 하면서 밤마다 정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모두 《문진우기(闻尘偶记)》와 같은 야사에 기재되여있다. 야사에는 있고 정사에는 없다고 하여 사실이 아니라고 할수 없다. 자희태후의 음란한 생활이 정사에 기재될 가능성이 매우 적기때문이다.

그외 고궁박물원도서관에서 소장한 자희태후의 사진(1904년에 찍음)을 보면 자희태후가 로년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눈동자가 맑고 아름다왔으며 용모가 예뻤다는것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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