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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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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예와 치욕이 엇갈린 사부치의 인생
2014년 02월 04일 13시 13분  조회:6255  추천:2  작성자: 넉두리

영예와 치욕이 엇갈린 사부치의 인생

 
(번역)



 
 
새 중국이 탄생되여서부터 무수한 혁명가, 정치가, 군사가, 과학가들이 서거된후 유골이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 안치되였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의 력사에서 사부치 한 사람만이 전반생에 공로가 탁월했지만 죽은후 도리여 추도사가 취소되였고 당적이 제거되였으며 유골함이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서 내쫓기는 치욕을 당했다.

1909년 8월에 호북성 황안현(지금의 홍안) 봉강향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사부치는 어릴 때 부모의 농사일을 도우면서도 부지런히 공부했다.

1927년 11월 13일에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황마봉기에 고무된 사부치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무장투쟁에 참가했다. 사부치는 싸움에서 점차 군사재능을 보여주어 홍군의 련지도원으로부터 퇀정치처 주임, 사정치부 주임, 군정치부 주임으로 승진했다.

30살전에 홍군의 고급장교로 된 사부치는 악예환쏘베트구역을 창립하고 공고하게 하는데 힘썼으며 반포위토벌전투에서도 일정하게 공헌했다.

장국도는1930년대초에 사업을 주최하는 기간에 악예환쏘베트구역에서 “좌경”정책을 실시했다. 내부일군에 대해 심사하는 과정에서만 수많은 홍군간부들이 박해를 받았다. 그 시기에 사부치는 장국도를 바싹 따라 “숙반(肃反)”과정에 맹목적으로 사람을 의심하면서 검은 재료를 만들어 간부들을 심문했다. 그때문에 악예환쏘베트구역의 수많은 간부들이 배척되고 타격받고 강직되였다. 심지어 몇몇 간부들은 억울한 죄로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그런 “공로”로 사부치는 홍군 4방면군 총정치부 조직부장으로 승직되여 인사대권을 장악했다.

물론 사부치가 홍4방면군의 발전에 일정한 공헌을 한것은 사실이다. 그는 홍4방면군의 반포위토벌전투중에서 유격전으로 국민당군을 소멸하였고 부대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적지 않은 승전고를 울려 사천군벌무장을 벌벌 떨게 했으며 부대가 좌절을 당했을 때 전사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정치사상사업을 틀어쥐였다. 그는 장정에 참가하면서 장국도의 로선이 그릇되다는것을 알고 장국도가 분렬하여 따로 중앙을 세우려는것을 반대했고 태악지구에서 8년동안 활동하면서 항일전쟁의 승리와 아군의 발전에 공헌했으며 류백승, 등소평수하의 장군으로 되여 해방전쟁에서 혁혁한 공헌을 세웠다.

건국후 사부치는 중공운남성 당위제1서기, 곤명군구 사령원 겸 정위로 임명되여 운남성의 당정군을 모두 장악했다. 그 시기 사부치는 운남봉기부대의 개편사업을 조직했고 운남의 토지개역을 지도했으며 크고 작은 토비무장을 소멸하여 운남지구의 사회질서와 생산을 회복했다. 그 시기 그의 가장 큰 공헌은 마약금지선전사업을 틀어쥐고 마약밀매조직을 타격하여 운남에서 장기간 마약흡입과 마약밀매현상이 근절되게 한것이다.

사무치는 1955년에 상장계급을 수여받았고 1959년에 공안부 부장, 인민무장경찰부대 사령원 겸 정위로 임명되였으며 1965년에 공안부 부장을 겸하면서 국무원 부총리로 승직했다.

문화대혁명기간에 사부치는 등소평을 비판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자신의 직접 상급이였던 등소평에 대해 사정없이 모함하여 강청의 호감을 샀다. 강청의 눈에 든 사부치는 문화대혁명기간에 중앙령도서렬 21위로부터 9위로 상승되였다. 1966년 12월 18일부터 “왕광미특별사건심사소조” 조장을 맡은 사부치는 강청, 강생 등과 결탁하여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며 국가주석인 류소기를 “미국특무”로 모함하여 타도하는데 앞장섰다. 1968년 9월에 사부치는 조작해낸 류소기의 “죄증재료”를 강청에게 보내주었다. 강청, 강생, 사부치는 “죄증재료”를 “반역자이고 내부간첩이며 로동자역적인 류소기의 죄행에 대한 조사보고”로 고쳤다. 10월 13일부터 31일까지 열인 중국공산당 제8기 확대회의인 12중전회에서 이 보고를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류소기는 억울하게 당내외 일체직무를 철소당하고 영원히 출당되였다.

사부치는 1967년 2월부터 시작하여 강청, 강생, 진백달 등과 결탁하여 “자산계급복벽역류(후에 2월역류라고 했음)라는 죄명으로 담진림, 진의, 엽검영, 리부춘, 리선념, 사향전, 섭영진 등 로간부들을 무함하고 박해했다. “2월역류”를 비판하면서 4명의 원수와 3명의 부총리가 충격을 받았거나 물러나지 않으면 타도되였다. 게다가 류소기, 등소평, 도주, 하룡이 이미 타도되였고 주덕, 진운이 배척되였으며 류백승은 병으로 몸이 쇠약하여 작용을 발휘할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 정치국위원중에 모택동, 림표, 주은래, 진백달, 강생 다섯 사람만 남았고 정치국 후보위원은 사부치 한명만 남아있었다. 이렇게 되자 중앙문화대혁명령도소조가 중앙정치국을 대체하는 류례없는 당의 령도기구인 “중앙문화대혁명팽두회의(碰头会)”가 나타났다. 이 “팽두회의”는 중앙문화대혁명령도소조 전체성원인 진백달, 강생, 강청, 장춘교, 요문원외에 주은래, 사부치, 황영승, 오법헌, 엽군, 왕동흥, 온옥성이 렬석했다.

사부치는 로간부들을 타도하는데 앞장섰기때문에 계속 중용되였다. 1970년 4월에 중공중앙에서는 정당건당사업좌담회를 열고 강생, 장춘교, 사부치 세 사람이 소조의 책임지도자로 결정되였다. 림표사건이 발생된후 사부치는 계속 새로운 군사위원 사무회의 성원으로 되였다. 사부치의 사업은 주요하게 공안계통이였는데 그가 공안계통에 조성한 위해는 가장 컸다.

1966년 5월부터 사부치는 공안부 부장의 직권을 리용하여 선후로 313명의 련합공작소조를 북경시공안국에 파견하였다. 그후 그는 북경시공안국의 원 지도부를 자신의 측근들로 갈아치우고 전임 국장과 기타 지도성원들을 반당분자로 몰아 타격했다. 그 바람에 북경시공안국에서는 1600여명이 피해를 입었고 72명이 감옥살이를 하게 되였다. 사부치는 또 강생과 함께 13명의 북경시지도간부를 모함했다. 원 북경시당위 제2서기 류인, 당위서기 등척, 부시장 오함 등은 핍박에 의해 사망되였다.

사부치는 또 반란파들을 선동하여 공안사무를 접수하여 관리하게 했다. 1967년 2월 11일에 북경시공안국은 군사관제를 실행했다. 사부치의 중용을 받고있는 군사관제위원회 부주임 류전신은 군사관제위원회의 실권을 장악한후 사부치의 뜻때로  북경시공안국의 10명의 정부국장과 117명의 정부처장, 분국 국장을 모두 특무, 반역자라고 무함했다. 1968년 4월에 사부치는 북경시공안국 군사관제위원회의 명의로 《구북경시공안국반혁명집단이 미국, 장개석특무와 결탁해 특무간첩활동을 한 일부 정황보고》를 써서 북경시공안국을 장기간 미국, 장개석특무와 결탁하여 간첩활동을 하면서 목숨을 걸고 미국과 장개석에게 충성을 한 반혁명집단이라고 무함했다. 사부치는 보고에서 “북경시공안국의 특무활동은 류등(류소기, 등소평)사령부의 지지를 받았고 “대특무 팽진, 라서경, 류인의 지휘하에 미국과 장개석의 뜻을 받들어 진행되였다”고 억울한 사건을 조작했다.

사부치의 선동과 지지하에 “공안기관, 검찰기관, 법원을 짓부시자”는것이 반란파들의 구호로 되였다. 이렇게 되여 홍위병들이 사람을 때려죽여도 관계하지 못하는 등 전국의 공안기관은 마비상태에 빠졌다.

1970년 12월부터 1971년 2월 11일까지 주은래의 지시에 따라 공안부에서는 제15차 전국공안회의를 열었다. 주은래는 사부치에 대해 엄하게 비판하고 새 중국의 첫 17년의 공안사업을 긍정하면서 절대 대부분의 공안간부들은 좋거나 비교적 좋다고 했다. 주은래의 강화가 전달된후 일부분의 지도간부와 업무골간들은 륙속 공안부에 돌아왔고 공안부도 지방공안기관과 련계와 그들에 대한 업무지도를 회복했다.

그후 사부치는 위암진단을 받으면서 나쁜 일을 계속할수 없게 되였다.

1972년 3월 26일에 사부치는 북경에서 위암으로 사망되였는데 향년 63세였다. 3월 29일에 사부치의 추도회대회가 거행되였는데 천안문, 신화문 등 곳에 그를 애도하는 반기가 내걸렸다. 추도사에서는 사부치의 죽음은 “우리 당과 우리 군의 중대한 손실”이라고 했다.

1978년 12월에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의에서 사부치, 강생에 대해 심사했다. 1980년 10월에 중공중앙에서는 강생, 사부치의 반혁명죄행을 전당에 공포하고 두 사람의 “추도사”를 취소함과 동시에 당적을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 안치되였던 사부치의 유골함도 덮었던 당기를 벗겨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했다. 1981년 1월 23일에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판결서 특법자(特法字) 제1호는 사부치를 림표, 강청반혁명집단사건의 16명 주범중의 하나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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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넉두리
날자:2014-02-05 17:42:06
동원선생님, 과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원선생님께서도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글 많이 쓰시고 하시는 모든 사업이 잘 되기를 빕니다.
1   작성자 : 동원
날자:2014-02-04 22:51:10
잘 감상했습니다
선생님의 글 속에는 나보다 더 사명을 심은 듯합니다.
선생님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조글러 블러그에서 민족정신과 그리고 태동의 고취 속에서
역사의 한 모퉁이에 서서 묵묵히 필을 잡으면서
그려가는 언어의 기교를 넘어선 함양정신이 돋보입니다
늘 강건하시옵고 건필, 향필, 건승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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