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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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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배반한 제1부인
2013년 12월 29일 09시 57분  조회:7560  추천:2  작성자: 넉두리

미국을 배반한 제1부인



 
 
20세기의 가장 축복받은 행운의 녀인이면서도 재앙의 녀인이였던 재클린은 1929년 7월 28일에 주식투자가인 아버지 부비에와 뉴욕중앙은행 행장의 딸인 어머니 쟈넷사이에서 태여났다.

재클린은 소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내내 우등생이였고 프랑스류학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후 그녀는 기자로서 활약하면서 뉴포트사교계연회에 참석해 1951년에는 사교계의 녀왕이 되였다. 그무렵 그녀는 친구의 소개로 미래의 대통령 존 케네디를 만났다. 명문가의 아들과 빠리류학에서 갓 돌아온 미녀, 보기에도 두 사람은 어울리는 부부가 될것 같았다. 케네디를 만나는 순간부터 재클린은 그가 자신에게 있어서 운명의 남자로 될것이라고 직감했다. 그것은 적중하여 그로부터 2년뒤인 1953년 9월 12일에 그녀는 25세의 나이로 당시 37세였던 케네디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의 결혼식이 얼마나 성대했던지 마치 대관식같았다. 이 결혼으로 재클린은 부와 권력의 품에 안기게 되였다.

그로부터 8년후인 1961년 1월에 케네디가 미국 제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재클린은 일약 제1부인으로 되여 세계가 주시하는 인물이 되였다. 43세의 젊은 대통령과 33세의 미모의 부인, 마치 동화와 같은 부부가 미국에 등장했다. 전 미국의 녀자들이 재클린의 일거일동을 흉내냈고 그녀가 몸에 걸친 드레스나 액세서리는 곧 전국에 퍼졌다.

제1부인이 된 재클린은 세상의 녀자가 바랄수 있는 모든것을 손에 넣게 되였다. 그러나 케네디와의 결혼은 행이였던가, 불행이였던가?

사실 그녀와 케네디의 결혼생활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있었던것처럼 그렇게 행복한것은 아니였다. 대통령은 그녀 혼자의것이 아니였다. 그건 그래도 좋았다. 그녀가 참을수 없은것은 남편도 그녀 혼자의것이 아니였기때문이다. 케네디는 선천적으로 바람둥이였다. 남편이 누군지도 모르는 녀자와 자취를 감춰버리면 재클린은 혼자서 뒤에 남겨진 비애를 얼마나 맛보아야 했던지 모른다.

케네디는 밖에서 녀색을 즐겼을뿐만아니라 재클린의 눈을 피해 백악관에까지 녀자들을 끌어들였다. 상대도 가지리 않았다. 이름난 녀배우가 있는가 하면 하찮은 청소부녀자도 있었고 10대의 처녀가 있는가 하면 40대의 그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더 많은 녀자도 있었다.. 시간,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때론 회의도중에도 화장실로 간다고 속여놓고 몰래 녀자와 즐긴다음 다시 회의장소로 가군했다. 한번은 제인 맨스필드라는 녀자가 임신중이여서 안된다고 했지만 “여기 배속에 당신 남편의 씨가 있다구? 묘한 기분인데”하면서 다짜고짜로 올라탔다. 또 한번은 재클린이 집에 없을 때 녀배우 소피아 로렌을 자택으로 데리고와서 즐겼는데 그녀가 어쩌자고 그랬는지 돌아갈 때 팬티를 두고갔다. 그 팬티를 발견한 재클린은 남편이 녀자를 자신의 침대에까지 끌어들이자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남편이 저명한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와 깊은 사이가 되였을 때 몹시 허탈감을 느꼈다. 마릴린 먼로는 직접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부인자리를 내놓으라고까지 했던것이다. 그녀는 대통령부인이라는 허울좋은 겉치레만으로 살아가고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간이였다. 1963년은 그녀에게 있어서 재앙의 한해였다. 그해봄에 둘째아들 페트릭이 태여난지 불과 이틀만에 죽어버리자 그녀는 너무 힘들어했다. 같은해 11월 22일, 미국 남부 댈레스거리에서 소리높이 울린 “오, 아니야!”의 절규는 순식간에 그녀를 대통령부인으로부터 과부로 만들어놓았다. 그날 울려퍼진 총성은 미국인들에게서 대통령을 앗아갔고 그녀에게서 남편을 앗아갔다.

케네디가 암살당한후 미국인들은 재클린이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조용히 두 자녀를 키우며 살아가는 미국의 영원한 제1부인이 되여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재클린이 케네디가문의 모범며느리가 되여 망부의 동생들이 대통령이 될수 있도록 협력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재클린은 그런 미국인들의 기대와 소망을 깨뜨려버리고 1968년에 예전부터 알고 지내오던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했다. 그러자 온 미국이 격분했다.

“재클린은 돈과 결혼햇다!”
“재클린은 미국을 배반했다!”

재클린은 케네디가 죽은후 5년이 지나서 재혼했지만 사실 그녀가 오나시스를 만난것은 케네디가 아직 살아있을 때였다. 1963년봄에 둘째아들 패트릭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재클린에게 그리스의 선방왕인 오나시스가 요트로 놀러오라는 초대장을 보내왔다. 일찍이 케네디와 함께 초청을 받았던 적이 있는 호화롭기 그지없는 요트 《크리스티나호》로 놀러오라는 초대장을 받자 그녀는 주저없이 그리로 날아갔다.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는 돈을 종이장으로 알고있는 대부호였다. 그는 250만딸라의 돈을 들여서 세계제일의 호화요트를 만들고 귀여운 딸의 이름으로 《크리스티나호》라고 명명했다.


아버지벌 되는 오나시스와 함께 40일간의 선박려행을 하면서 재클린은 남편의 바람기로 인한 고민도 아들의 죽음으로 받은 고통도 말끔히 잊어버리고말았다. 하지만 근심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였다. 그것은 사랑의 적수때문이였다. 오나시스에게는 또다른 련인이 있었다. 바로 세기의 명가수 마리아 칼라스였다. 오나시스는 선박의 호화로운 방에서 재클린과 칼라스를 번갈아 끌어들이면서 즐겨댔다.

1968년에 40세의 재클린은 70세의 오나시스와 결혼했다. 하지만 오나시스의 딸 크리스티나는 계모를 몹시 미워했다. 크리스티나는 재클린이 자신의 계모로 되자 친구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재클린은 재앙의 녀인이야. 아들과 남편이 죽고 또 남편의 동생마저 죽었어. 그녀는 재앙을 우리 집에도 가져올거야.”

과연 오나시스의 가문에 재앙이 련달아 들이닥쳤다. 재클린과 결혼하면서부터 오나시스의 사업은 불황에 직면해 어려움을 겪었으며 1973년에는 오나시스가 가장 아끼는 아들 알렉산더가 비행기사고로 죽고말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74년 10월에는 크리스티나의 어머니인 티너가 빠리에서 급사했고 또 그 이듬해인 1975년 3월 15일에는 오나시스가 세상을 떠났다. 크리스티나는 오나시스가문에 덮친 불행은 모두 재클린의 원인이라고 믿고있었다.

만년에 오나시스는 재클린을 미워했던 때문인지 유서를 다시 작성했다. 10억딸라의 유산이 대부분이 크리스티나에게 남겨지고 재클린에게는 1000만딸라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분개한 재클린은 유산을 둘러싸고 크리스티나와 장장 18개월에 거친 싸움을 벌렸다. 재클린이 돈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수 있다. 결국 오나시스일가와의 일체관계를 끊는다는 조건으로 그녀는 2600만딸라를 상속받았다. 크리스티나는 죽기 얼마전에 기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재클린은 내가 알고있는 사람중에 가장 돈을 밝히는 사람이였어요. 그녀가 한가지 깨닫지 못한 점은 내가 그녀를 보지 않을수만 있다면 그녀에게 4억딸라라도 지급할 작정이였다는 사실이였어요. 그녀의 주위사람들이 모두 죽어가는데 그녀만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해요. 그녀는 위험스럽고도 무서운 존재예요. 재클린은 케네디가문과 오나시스가문의 가족을 모두 잡아먹었어요.”

오나시스가 죽은후 재클린은 뉴욕에 머물면서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 1975년 9월에 《바이킹》출판사의 편집위원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바이킹》출판사가 케네디암살사건을 다룬 책을 출판하자 그곳을 그만두고 《더불데이 북스》출판사로 옮겼다.

1976년이후 그녀는 5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수많은 남자들과 사귀면서 과부의 적적한 밤을 즐기기도 했다. 그중에는 《바이킹》출판사의 긴저버그, 방송국 리사인 칼 킬링스위스, 칼럼작가인 해밀, 작가인 피터 데이네스, 건축가인 페이 등 인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재클린이 66세의 나이로 죽는날까지 미망인의 외로운 밤을 한침대에서 보내면서 위로해준 인물도 있었다고 한다.

재클린은 만년에 암에 걸렸다. 행운의 녀인이면서도 재앙의 녀인이였던 재클린,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남자의 안해였다가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남자의 안해로 되였던 그녀는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994년 5월 20일에 끝내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죽는날까지 염문을 뿌리가간 그녀, 실로 화려하고 파란만장한 인생력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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