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하반년에 국민당군대는 해방구에 대한 전면적인 진공을 중점진공으로 전이시켰다. 염석산은 근 1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진중지구에 대해 소탕을 감행했다. 염석산수하부대의 72사 소장 사장 애자겸은 3개퇀의 병력을 거느리고 산서성 문수현으로 쳐들어왔다. 정황이 악화되자 당시 중공문수현당위에서는 류호란을 부분적 간부들과 함께 산으로 전이라고 통지했다. 하지만 류호란은 “저는 어리기때문에 적들이 주의하지 않을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지의 정황에 대해 익숙하니 남아서 투쟁을 견지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직에서는 류호란의 요구대로 그녀를 운주서촌에 남도록 비준했다.
염석산수하부대가 쳐들어오면서 석패회(아명 석대성)는 운주서촌의 첫 괴뢰촌장으로 되였다. 석패회는 적극적으로 염석산군대에 량식과 자금을 공급해주고 정보를 제공해주면서 중국공산당을 위해 사업하는 해당일군들을 와해했다. 류호란은 지하교통원을 통해 괴로촌장 석패회의 정황을 구장 진덕조에게 회보했다. 진덕조는 또 이 일을 상급인 문수현 현장 허광원에게 보고하면서 처리방법을 물었다. 허광원은 석패회를 처단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진덕조가 무공대원들을 데리고 서산에서 내려와서 개다리촌장 석패회를 죽일 때 류호란은 망을 보면서 엄호했다.
다음날 오후에 운주서촌괴로촌공서 서기 장덕윤은 개다리촌장이 피살된 경과를자신의 추측에 근거하여 대상진에 주둔하고있는 애자겸소속부대 1영 영장 풍효익에게 보고했다.
“석촌장은 팔로군 2구 구장 진덕조, 진덕조의 동생 진덕례, 운주서촌 녀공산당원 류호란 등에 의해 살해되였습니다.”
영장 풍효익과 부영장 후우인은 비밀리에 운주서촌에 내려왔다. 장덕윤은 지주 석정박의 집에서 풍효익과 후우인에게 류호란, 장년성, 석륙아, 석오칙, 장생아, 한랍길, 매란칙, 김선아 등 간부와 적극분자들을 고발했다.
운주서촌의 공산당측 농회비서였던 석오칙은 적에게 투항하면서 운주서촌의 당조직성원의 명단을 전부 알려주었다.
1947년 1월 8일 새벽에 려덕방이 거느린 복수자위대와 염석산수하부대의 1영 2련 련장 허득승이 거느린 부대는 운주서촌을 돌연적으로 습격하여 석삼괴, 석오칙, 석륙아, 장생아, 한랍길을 붙잡았다. 이미 변절자로 된 석오칙은 자신을 가짜로 붙잡는다는것을 알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랍길도 석오칙을 따라 적들앞에 무릎을 꿇고 촌의 당원과 적극분자의 정황을 밀고했다.
그날 저녁에 1영 영부에서는 석패회가 갑자기 암살된것은 운주서촌의 녀공산당원 류호란, 공산당측의 구장 진덕조, 진덕조의 동생 등이 손을 쓴것이라고 215퇀 퇀부에 보고했다. 이 보고를 받은 퇀부에서는 붙잡은 공산당원과 적극분자들을 모두 죽여버리기로 결정했다.
1947년 1월 11일밤에 염석산 수하부대 72사 215퇀 1영 영장 풍효익, 1영 특파원 겸 기관총련 지도원 장전보, 부영장 후우인, 복수자위대 대장 려덕방, 새로 부임된 운주서촌 촌장 맹영안, 1영 2련 련장 허득승, 기관총련 련장 리국경 등은 공산당원과 적극분자들을 처단할데 관한 회의를 열었다.
1947년 1월 12일 오전에 애자겸, 장전보, 려덕방, 허덕승 등은 부대를 거느리고 운주서촌에 들어와 모든 길목을 봉쇄했다. 석삼괴, 석륙아, 장년성, 석세휘, 진수영, 류수산은 선후로 적들에게 붙잡혀서 남관음사당밖 서쪽광장으로 끌려왔다. 적들은 촌의 군중들도 마구 광장으로 내몰았다. 류호란은 촌의 공산당원들이 적들에게 잡혀가자 급히 갓 아이를 출산한 이웃집 김종아주머니의 집에 들어가 숨었다. 그런데 거기에 여러사람이 숨어있자 류호란은 그들에게 련루될가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용감하게 남관음사당광장으로 걸어나갔다. 복수자위대 분대장 무금천은 군중들속에 류호란이 있는것을 발견하고 백점림, 온악덕과 함께 류호란을 붙잡아서 기타의 여섯사람과 함께 묶었다.
1영 특파원 겸 기관총련 지도원 장전보는 석삼괴 등 여섯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한후 류호란을 보고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자백하면 살려준다”고 했다. 그러나 류호란은 “나는 죽어도 굴복하지 않는다. 절대 투장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화가 난 장전보는 작두로 15살밖에 안되는 나젊은 녀공산당원 류호란의 목숨을 빼앗았다.
1947년 2월 2일에 왕진장군의 수하부대 359려가 문수현을 공격하자 염석산의 수하부대는 전부 무기를 던지고 투항했다. 류호란렬사를 살해한 주범중의 하나인 려덕방은 상인으로 변장하여 도망치다가 팔로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무금천은 1947년 2월 5일에 체로되여 류호란이 희생된 곳에서 처형되였고 백점림은 2월 18일에 체포되여 공안부문에 넘겨진후 처형되였다. 온악덕은 1951년에 법에 의해 관제되였다.
석희옥은 체포된후 류호란을 밀고한 죄를 승인하지 않았다.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에 그는 1948년에 석방되였다. 맹영안은 1947년 7월에 체포된후 병으로 감옥에서 죽었다. 한랍길은 괴뢰향공서의 지도원를 질투하다가 1947년 l 2월에 적들에게 맞아죽었다. 염석산 수하부대 215퇀 퇀장 관기화와 1영 영장 풍효익은 1948년 6월 21일에 “장란전역”에서 해방군의 총에 맞아죽었다. 1영 2련 련장 허득승은 1951년에 공안부문에 체포된후 그해 4월 4일에 처형되였다.
류호란을 작두로 살해한 원흉인 장전보는 전투에서 포로되여 로동개조를 했는데 류호란 등 7명 렬사를 살해한 사실을 숨겼기에 1950년 7월 25일에 석방되였다. 그해 겨울에 운성에서 가극 《류호란》을 공연했는데 신분을 숨기고 담배가게를 차려놓았던 장전보는 사람들의 의론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변장을 하고 극장에 들어가 가극 《류호란》을 끝까지 보았다. 가극을 보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그는 웃음을 금할수 없었다. 원래 가극중에 류호란 등 렬사를 작두로 살해한 “긴수염”을 허련장(허득승)이라고 불렀던것이다. 가극에서도 진상을 똑똑히 모르는것을 보고 그는 자신의 죄를 숨길수 있게 되였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감옥에 갇혀있던 염석산 수하부대 72사 215퇀 1영 기관총련 문서 옥련성과 215퇀 2영 부영장 부영청은 류호란을 살해한 원흉인 장전보가 신분을 숨기고 숨어있는 사실을 자백했다. 1951년 5월 8일에 운성현공안국에서는 장전보를 붙잡아서 만천현공안국에 넘겼다.
류호란을 살해한 또 다른 흉수 후우인은 반혁명분자들과 함께 폭동을 조직하다가 1951년 5월 11일에 정산현공안국 경찰들에게 체포되여 만천현공안국에 넘겨졌다. 1951년 6월 22일 오후에 장전보와 후우인은 처형되였다.
1958년 9월에 호남성에서 사업하는 진덕린(진덕조의 여섯째 동생으로서 당시에 호남성 길수현당위 조직부장으로 임명되였음)과 기타의 수난자가족에서는 공안기관에 과거 석오칙의 수상한 행위에 대해 신고했다. 공안기관에서는 신고된 재료에 대해 자세히 분석한후 그해 12월에 공안일군을 운주서촌에 파견하여 조사하게 했다. 12월 19일에 문수현공안국에서는 조사결과를 분양현(당시 문수, 분양, 교성을 합병하여 분양현이라고 했음)정법판공실에 보냈다.
1959년 6월에 중공산서성당위 서기처 서기이며 부성장인 정림이 운주서촌에 내려와 시찰할 때 이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할것을 정법기관에 지시했다. 현당위 서기는 해당일군들을 불러 연구한후 지구당위에 회보했다. 지구당위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연구한후 유능한 간부를 려순, 태원 등 10개의 주요지구에 파견하여 2개월동안 조사하여 석오칙 등 3명을 중점혐의대상으로 삼았다.
1959년 9월에 문수현의 공안일군들은 운주서촌에서 석오칙, 장생아, 석희옥을 붙잡았다. 이듬해 8월에 공안국에서는 또 밀고재료를 쓴 장덕윤을 붙잡았다. 공안부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매우 중시하면서 성, 지구, 현에서 련합으로 특별사건수사소조를 무어가지고 철저하고도 똑똑하게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60년 5월 30일에 특별사건수사소조에서는 6개월 남짓한 조사를 거쳐 마침내 석오칙, 한랍길, 장생아가 류호란을 밀고한 전부의 진상을 밝혀냈다.
1962년에 법원에서는 장생아를 유기형 10년에 처하고 석희옥을 사형에 처한다고 판결했다. 류호란렬사를 붙잡았던 온악덕은 1959년 12월 23일에 대상진에서 체포되였는데 1962년에 유기형 7년 판결을 받았다.
문수현감옥는 또 원 염석산부대 72사 정치부 주임 장칭부, 215퇀 정치실 주임 하가정, 정치실 비서 리천과, 1영 기관총련 련장 리국경, 1영 2련 3패 패장 신조승, 1패 패장 우지의 등이 압송되여왔다. 그들은 모두 응당한 처벌을 받았다. 염석산부대 215퇀 1영 2편 4패 패장 리보산은 1960년 7월 21일에 징벌이 두려워 자살했다.
1963년 2월 14일에 문수현인민정부에서는 석오칙을 총살했다. 이로써 류호란 등 7명렬사학살사건에 대한 수사와 처리사업은 전부 결속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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