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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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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일세를 풍미한 단기서 댓글:  조회:5173  추천:2  2015-06-28
일세를 풍미한 단기서   단기서(段祺瑞)는 왕사진(王士珍), 풍국장(冯国璋)과 더불어 “북양삼걸(北洋三杰)”이라고 일컬어진 인물이다. 1865년에 안휘성 합비에서 출생한 단기서는 환계군벌의 사령관으로서 본명은 계서(启瑞)이고 자는 지천(芝泉)이다. 1889년에 천진무비학당 포병과를 졸업한 단기서는 독일에서 군사학을 공부하고 이듬해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1896년 천진으로 가서 신건륙군(新建陆军) 좌익포대 제3영 통대(统带) 겸 무위우군 각 학당의 총책임자직을 력임하였다. 1903년에 청나라 조정에서 군사훈련소를 설립하자 단기서는 원세개가 확대하여 개편한 북양군의 중요한 참모로 되였다. 1911년에 무창봉기가 일어나자 단기서는 칙명을 받들어 호북으로 달려가서 혁명을 진압하였다. 남북회담기간인 1912년초에 그는 원세개의 의향에 따라 청나라 조정에 두번의 전보를 보내 황제퇴위를 독촉하였다. 그해 3월에 원세개는 손중산으로부터 중화민국대통령직을 이어받았고 단기서는 륙군총장에 임명되였다. 1913년에 단기서는 한동안 국무총리대리직을 력임하다가 군대를 동원하여 2차혁명을 진압하였다. 원세개는 1916년 3월 22일에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황제의 년호를 취소하고 단기서를 재등용하여 참모총장직에 임명하였다. 그해 4월에 단기서는 서세창(徐世昌)을 대신하여 국무경 겸 륙군총장직을 력임하였다. 그해 6월에 원세개가 사망되자 려원홍(黎元洪)이 대통령직을 계승하였고 단기서는 국무총리 겸 륙군총장직에 임명되여 북경정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북양군벌은 점차 직계군벌과 환계군벌의 두파로 분렬되였으며 단기서는 환계군벌의 사령관이 되였다. 1917년에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문제로 충돌이 생기자 려원홍은 단기서의 총리직을 해임하였다. 이에 단기서는 각 성의 군사장관들을 책동하여 려원홍을 타도하였다. 1917년 6월에 장훈(张勋)은 려원홍과 단기서의 충돌을 화해시킨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북경에 진입하여 청나라의 마지막황제 부의의 확제복위를 시도했다. 장훈의 복벽음모가 실패되고 려원홍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단기서는 부대통령이였던 풍국장을 대통령대리로 맞이하고 자신은 다시 총리직을 맡았다. 그러나 《림시약법》과 국회의 부활을 거부하였다. 그해 9월에 손중산이 광주에서 림시약법을 수호하는 군사정부를 세웠다. 단기서는 무력통일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으나 풍국장이 사령관으로 있는 직계군벌의 저지를 받았다. 그해 11월에 단기서는 강요에 의해 국무총리직과 륙군총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단기서의 사주를 받은 각 성의 군사장관들이 풍국장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리하여 단기서는 다시 복위되여 남방정벌에 군대를 동원하였다. 북양군이 호남성 형양을 점령한 후에 직계군벌 우두머리 오패부가 1918년 8월에 휴전통신문을 련속적으로 보내고 단기서정부의 친일매국정책을 공격하였다. 이로써 직계군벌과 환계군벌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되였다. 1918년 9월에 풍국장이 대통령대리직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자 안복국회(安福国会)에서는 서세창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단기서도 총리직에서 물러나 참전감독직만을 전담하였다. 1920년 7월에 직계군벌과 환계군벌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환계군벌이 패배하자 단기서는 직위에서 물러나 천진으로 이주했다. 그후 단기서는 봉계군벌 장작림, 남방의 손중산과 련합하여 직계군벌의 통치를 반대하였다. 1924년 10월에 이르러 봉계군벌은 풍옥상의 부대와 련합하여 직계군벌을 물리쳤다. 단기서는 중화민국림시집정직에 추대되였다. 그는 “선후회의(善后会议)”를 소집하여 손중산이 주장하는 국민회의를 배척하였다. 1926년 3월 18일에 단기서는 갑자기 집정부호위대를 시켜 북경의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반제국주의청원대렬을 향해 총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3.18학살사건”에서 사상자는 100여명이나 되였다. 1926년 4월에 단기서는 다시 봉계군벌, 직계군벌과 련합하여 풍옥상의 국민군을 공격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사전에 루설되여 동교민항사관구로 도망쳤다. 이로 인하여 오패부, 장작림의 신임을 잃게 되자 단기서는 결국 천진의 조계지로 물러나 도피생활을 하면서 자호를 정도거사(正道居士)라고 하였다. 1933년 2월에 단기서는 상해로 이주하였다가 1936년 11월 2일에 상해에서 병사했다.        
119    국민당은 대륙의 국보를 어떻게 대만으로 옮겼는가? 댓글:  조회:5243  추천:0  2015-06-21
국민당은 대륙의 국보를 어떻게 대만으로 옮겼는가?   (번역)     1948년 12월 27일에 국민당의 제1차 문화재가 대만의 기륭(基隆)에 도착했다. 당시 남경에서 대만으로 옮겨온 문화재는 3차로 나누어졌는데 제2차, 제3차는 각각 다음해 1월 9일과 2월 22일에 도착했다. 이 문화재는 주로 당시 북경고궁박물원, 중앙박물원, 중앙도서관, 북평도서관의 서화, 자기, 옥기, 선본도서, 외교부조약자료 등 합계5000여상자였다. 대만정부는 이 문화재를 기초로 “대북고궁박물원”을 건립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남북 2개의 “고궁박물원”이 존재하는 국면이 형성되였다. 문화재의 이전은 먼저 항일전쟁으로 남쪽으로의 이전이 이루어지고 나중에 해방전쟁으로 대만으로의 이전이 이루어졌다. 1948년 11월에 서주회전이 끝난후 장개석은 남경이 위험하다고 느꼈다. 그는 나중에 몸을 피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대만을 장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량의 황금, 기계설비, 심지어 공장까지 대만으로 이전시켰다. 그리고 전쟁시기에 남경고궁박물원에 보관하고있던 문화재정품(원 북경고궁에서 남으로 이전시킨것)과 남경중앙박물원, 국립중앙도서관, 중앙연구원의 수장품을 대만으로 이송시켰다. 1931년에 일본침략군이 동북지역을 장악하자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하여 국민당정부는 문화재남쪽이전계획을 세웠다. 1933년부터 문화재대이전이 시작되였는데 주로 고궁에서 소장하고있던 문화재가 중심이였다. 진품은 12년에 걸쳐 북경에서 상해, 남경을 거쳐, 사천, 귀주 등 후방으로 이송되였고 항일전쟁이 끝났을 때 다시 남경으로 옮겨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전쟁이 폭발되여 남경으로 옮겨왔던 문화재들은 북경으로 되돌아가기전에 그중 정품들이 국민당의 기밀자료와 함께 대만으로 보내졌다. 제1차 문화재는 1948년 12월 20일에 남경을 떠났다. 운송을 책임진 해군상륙정은 “중정함(中鼎舰)”이였다. 당시의 국면은 이미 아주 불안정했기에 많은 국민당방면의 사람들은 배를 타고 대만으로 피할 생각을 하고있었다. 고궁박물원에서 70여년간 일했던 나지량(那志良)로인의 회고에 의하면 “중정함”이 기륭으로 떠날 때 사람들은 가족과 짐을 들고 배를 타려고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배는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였다. 이렇게 되니 문화재의 안전이 위협을 받게 되였다. 책임자인 항립무는 이런 혼란을 해결할 좋은 방법이 없어 해군사령관 계영청을 찾아갔다. 계영청이 나서서  사람들에게 다른 배를 마련해서 가족들을 태워주겠다고 해서야 겨우 혼란이 진정되였다. 제3차문화재를 운송할 때는 이미 1949년 1월말이였다. 도망치는 사람들은 두달전보다 더욱 급했다. 이번에 운송을 책임진것은 “곤륜호”였다. 이 군함이 도착하자 해군부의 가족들은 앞다투어 배에 올랐다. 문화재상자를 실을 때 이런 사람들과 뒤섞였다. 항립무는 이전의 방법을 사용하려고 또 총사령관 계영청을 찾아갔다. 계영청이 다음의 배에 타라고 하자 배에 탔던 사람들은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정경을 보고 계영청도 눈물을 흘렸다. 계영청은 할수없이 문화재의 안전이 약간 문제가 되더라도 그들을 모두 태우고 떠났다. 그때문에 일부 문화재를 싣지 못해서 대륙에 남겨두게 되였다. 문화재가 대만에 도착한후 먼저 대중시의 사탕공장창고를 빌려서 보관했다. 때마침 사탕을 만들지 않는 계절이여서 거기에 놔둔것이다. 보관조건은 아주 나빴다. 1950년 4월이 되여서 대중시 교외의 무봉향 길봉촌의 창고가 완성되여 문화재는 새로운 창고에 보관되였다. 1965년 11월 12일에 대북고궁박물원이 정식으로 건립되면서 국보는 마침내 적당한 보존과 전람장소를 갖게 되였다.    
118    윁남독립의 아버지 호지명 댓글:  조회:5027  추천:0  2015-06-13
윁남독립의 아버지 호지명     1930년 2월 3일에 향항의 로동자마을의 한 작은집에 윁남의 공산주의운동가들이 모였다. 국외에서 활동하고있는 윁남의 혁명세력은 세 분파로 나뉘여 갑론을박하고있었다. 이에 윁남혁명세력의 실질적인 지도자 호지명(胡志明, 1890년 5월 19일 출생)이 회의를 소집한것이다. 먼저 자신을 소개한 호지명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분렬되여있는 혁명세력을 하나의 당으로 뭉쳐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프랑스제국주의와 싸울수 있습니다.”   호지명의 말에는 거역할수 없는 힘이 실려있었다.   혁명가들은 통합정당의 이름에서부터 하나하나 의견을 좁혀나갔다. 그리하여 윁남공산혁명세력의 공식적인 통합정당인 “윁남공산당”이 탄생되였다. 안전을 위해 장소를 옮겨가며 회의를 하는 동안에 호지명은 지나온 세월을 반추하면서 감회에 젖군 했다. 그의 나이 이제 40이 넘었으니 고국을 떠난지 20년이 다 되였던것이다. 오직 조국 윁남의 백성들에게 행복을 되찾아주리라고 결심하고 떠난 길이였다. 경찰에 쫓기면서 하루도 편안하게 눈을 붙일수 없었던 세월, 아직도 갈길은 멀었지만 이제 초석을 다져놓았다는 마음에 호지명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엄밀히 말해 호지명이 지도한 윁남공산당은 레닌의 공산국제나 중국공산당과는 질적으로 다른것이였다. 호지명에게는 식민지배를 받고있는 윁남의 현실을 타개하는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호지명은 프랑스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윁남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지식인, 중농, 소자산계급만이 아니라 의식이 있는 부르죠아민족주의집단도 혁명세력에 참여할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공산주의자기전에 먼저 민족주의자임을 말해주는 호지명의 이러한 생각은 새통합정당의 강령에 반영되였다. 그러나 윁남공산당의 2월강령에 대해 공산국제는 부분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했다. 강령의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문제였다. 10월에 소집된 회의에서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제거한 새로운 강령이 채택되였고 그에 따라 당명도 “인도지나공산당(印度支那共产党)”으로 바뀌였다.   이는 윁남뿐만아니라 캄보쟈나 라오스 등 인도지나를 형성하는 세 나라의 혁명을 함께 추구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는것이였다. 민족독립을 우선으로 하고 이를 위해 중간계급의 협조를 구하려고 했던 호지명의 전략은 묵살되였지만 호지명은 새로운 강령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받아들일것은 군말없이 받아들이고 확신이 서면 단호하게 실천에 옮기는것, 그것이 호지명의 크나큰 장점이였다.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고 단호하면서도 넓은 그의 성품이야말로 성공의 일등공신이였다.   호지명을 영웅으로 만든것은 시대상황이였다. 19세기중반의 프랑스인들은 윁남의 가톨릭교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윁남을 침략하여 식민지 인도지나를 건설했다. 윁남에 들어온 프랑스인들은 자본주의방식에 따라 대규모의 고무농장에 자본을 투입하여 윁남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려고 했다. 불교와 유교를 중시하는 공동체적인 생산방식을 존중하는 윁남사람들에게 자본주의는 야만적인것이였다.   일찍 부모를 여읜 호지명의 아버지는 어렵게 공부하여 2급박사학위를 땄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관료체제에 들어가고싶지 않았다. 호지명의 아버지는 안해의 죽음을 핑계로 조정의 관직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러한 성격이 아들 호지명에게도 그대로 이어졌음은 물론이였다.   11살의 호지명은 아버지한테서 고전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의 친구가 가르치는 학교로 가게 되였다. 아버지의 친구는 학생들에게 윁남의 독립을 옹호하는 정신을 불어넣었다. 호지명은 새로운 스승밑에서 너무도 즐거왔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슬픔에 피가 끓어오른 스승은 결국 독립운동에 합류하기 위해 학교문을 닫고 떠났다. 호지명은 다시 아버지한테로 돌아와 고전공부를 계속했다. 아버지는 한문을 공부하여 무작정 공직에 나가려고 하지 말고 고전의 속뜻을 리해하고 사람들을 리롭게 할 방법을 찾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호지명은 이 무렵에 유학의 경전보다는 중국의 《3국연의》와 《서유기》 같은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호지명은 또 마을의 힘센 아이 지엔을 좋아했는데 그에게서 용광로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하고 그를 따라 새사냥을 가기도 했다. 저녁이면 지엔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엔은 독립운동가들이 오랑캐를 몰아내려다가 실패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해주었다.   호지명은 동네에서 구할수 있는 책이 대부분 윁남력사가 아니라 중국력사를 다루고있다는것을 확인하고 조국의 력사를 알기 위해 성소재지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그는 서점에서 윁남력사서적을 탐독하고는 중요한 구절들을 암기해두었다가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사실 호지명을 영웅으로 만든것은 용기였다고 해야 옳다. 그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데 신중하기는 했지만 확신이 서면 항상 과감했다. 어렸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납세거부시위에 참여하여 국학에서 퇴학당한후에도 결코 락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돌리는 계기로 삼았다.   1911년 6월에 그는 드디여 프랑스의 기선에 주방보조로 취직하여 윁남을 떠난다. 이제 호지명에게 본격적인 떠돌이생활이 시작되였다. 중국, 프랑스, 미국, 영국, 로씨야가 호지명의 무대였다. 당시의 미국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자 호지명은 윌슨에게 편지를 쓰고 윁남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들고 련합국지도자들을 직접 찾아갔다.   세계를 돌아다니는 동안에 호지명은 프랑스와 영국에도 힘들게 살아가는 로동자가 존재하고 또 량심적인 지식인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이 그를 차츰 사회주의운동에 몸담게 하는 정당성을 제공했다. 1924년 6월에 호지명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5차공산국제대회에 프랑스공산당대표로 참석하여 세차례에 걸쳐 연설을 했다. 그는 아시아의 식민지문제와 농민의 역할에 대해 힘주어 강조했다. 이 인상적인 연설은 화제가 되였지만 농민의 역할을 강조한것이 이단적이라는 리유로 나중에 제재를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새로운 공산주의지도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무엇보다도 호지명을 성공으로 이끈 힘은 열정이였다. 그는 윁남민족해방의 열망 하나로 한평생 꿈속에서도 꿈을 꾸었다. 그 꿈은 1945년에 정말 꿈처럼 찾아왔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후 인도지나공산당은 전국인민대회를 소집하여 하노이를 점령했다. 민족해방위원회를 소집하여 호지명을 주석으로  내각을 구성한 혁명세력은 그해 9월 2일에 독립선언서를 랑독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여났다. 그들은 조물주로부터 누구에게도 양도할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바로 그 권리이다.”   독립선언서를 랑독하는 호지명의 목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꿈같은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윁남독립은 사실상 반토막이 되고말았다. 1954년에 제네바협정에 의해 윁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라지게 된것이다. 이제 호지명의 열정은 독립이 아니라 통일쪽으로 향해졌지만 통일 또한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렬강으로부터 진정으로 독립하는것이였다. 리해관계가 대립된 이상 전쟁은 필연이였는지 모른다. 1964년 8월에 시작된 윁남전쟁은 1975년까지 윁남을 온통 피로 물들인 현대사 최고의 비극이였다.   현대사에서의 최고비극이 진행되는 동안에 페결핵이 호지명의 건강을 위협하고있었다. 호지명은 죽음에 대비하여 유언장을 작성했다. 1965년에 처음 작성하고 이어 1968년과 1969년에 손으로 고쳐 쓴 유언장에는 “윁남인민의 생활수준을 높이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함께 추구하는것이 필요하다”고 씌여져있었다. 1969년 9월 2일에 호지명은 그토록 열망했던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일생동안 힘차게 쉬였던 숨을 멈추었다.   실로 호지명의 일생은 조국의 운명과 함께한것이였다. 조국이 노예상태였기에 그는 외국을 돌아다니며 온갖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참고 때를 기다렸으니 그의 일생이야말로 성공의 교과서와도 같은것이였다.   호지명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전세계의 언론이 그에 관한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우루과이의 한 신문은 “그는 우주만큼 넓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였으며 아이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을 지닌 사람이였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소박함의 모범이였다”고 극찬했다. 분명히 그는 권력을 통해 어떠한 부귀영화도 누리지 않았고 조금의 안락함도 추구하지 않았다.   호지명이 유언장에서 “내가 죽은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랑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달라”고 당부한것은 그의 인품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권력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았던 인품속에서 그의 탁월한 정치력과 추진력이 솟아나왔는지도 모른다.    
117    홍수전과 그가 거느린 녀인들 댓글:  조회:6772  추천:0  2015-06-07
홍수전과 그가 거느린 녀인들   (번역)     홍수전은 청정부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태평천국봉기군의 령수였지만 눈앞의 승리에 도취되여 주색에 빠진 졸장부로 변해버렸다. 홍수전의 눈에 녀인들은 모두 그의 노리개이고 노예였다. 그는 녀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천왕의 권력을 13세밖에 되지 않았으나 이미 색에 빠진 맏아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태상황으로 되였다. 홍수전은 도광23년(1843년)에 배상제회(拜上帝会)를 조직한 때로부터 “천하의 남자들은 모두 형제이고 천하의 녀자들은 모두 자매이다”라는 평등사상을 들고 나와서 농촌의 가난한 녀성들이 많이 참가했다. 홍수전은 또한 “사람을 한명 죽이는것은 내 아버지를 죽이는것과 같이 처리하고 녀인을 한명 간음하면 내 처를 간음한것과 같이 처리하겠다”는 말도 한적이 있다. 이리하여 태평천국의 초기에는 태평군내에 녀성들로만 구성된 녀군도 있었다. 그들은 남자들과 함께 용감하게 전투에 참가했고 무한까지 밀고 올라올 때까지만 하여도 남녀는 모두 같이 직위를 받고 같이 벼슬을 지냈다. 남경을 함락시킨후 태평군이 동쪽으로 향할 때에도 녀군은 여전히 선봉에 섰다. 그러나 자그마한 승리를 얻은후에 홍수전은 이미 강산의 절반은 손에 넣었고 대국은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해서인지 문을 닫아걸고 태평천자노릇을 하려고 하였다. 동시에 차지한 지역의 녀인들을 자신의 노리개로 삼으려고 하였다. 홍수전은 소년시절부터 후궁을 가득 둔 제왕의 궁정생활을 그리워하였다. 금전봉기때에 그는 이미 비(妃)를 15명이나 두고있었다. 1년후 광서에서 포위전을 벌릴때에 홍수전에게는 이미 36명의 녀인이 있었다. 광서땅을 얻고 호남에 도착했을 때 현지에서 헌납한 미녀 4명을 받아들였다. 무창을 점령한후에 홍수전은 첫번째 왕비선발을 통해서 민간녀자중 자색이 뛰여난 60명을 뽑았다. 남경에 도착한후 홍수전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녀인을 거느렸는가? 홍수전이 모두 얼마나 많은 녀인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통계를 낼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것이다. 청왕부에는 2000~3000명의 미녀들이 있었는데 남자는 태감을 두지 않고 홍수전 1 명이 살았다. 그리고 이런 미녀들은 모두 낮에는 홍수전을 시중들고 밤에는 홍수전을 침대에서 모시는 녀인들이였다. 이것은 고대의 군왕이 3000궁녀를 둔다는것과 비슷했다. 미시적으로 보면 홍수전의 맏아들이며 후계자인 유천왕(幼天王) 홍천귀복(洪天贵福)이 1864년 10월 25일에 강서성 석성황산에서 포로로 잡혀서 쓴 진술서를 보면 앞부분에 자신을 소개하는 글이 나오는데 “현재 나이는 16세이고 로천왕이 나의 부친이다. 그는 88명의 모후를 두었는데 내가 9살때 4명의 처를 두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이 아마도 믿을만한 기록일것이다. 이와 비교하자면 호색하기로 유명했던 함풍화제도 겨우 18명의 비빈만을 두었으므로 홍수전에는 미치지 못했다. 홍수전은 41세에 남경에 들어가서 52세에 자결할 때까지 미녀들만으로 둘러싸인 천왕부에서 11년을 보내면서 천경의 성문을 한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그는 전투를 지휘한적도 없고 조정의 일에 대하여 물어본적도 없다. 그당시 그는 장년이였고 체격이 건장하였는데 11년동안 겨우 25편의 조서만을 내려보냈다. 그리고 함풍 4년부터 함풍8년(1854~1848년)까지는 비여있다. 이 5년간 단 1편의 조서도 내리지 않은것이다. 그동안 그는 무슨짓을 한것일가?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비빈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색에 빠져있었던것이다. 홍수전은 글을 얼마 읽지 않았다. 그가 지었다는 소위 “부시(赋诗)”는 그저 말나오는대로 쓴것에 불과하다. 함풍 7년(1857년)에 태평천국에서 인쇄하여 발행한 “관서(官书)”중의 하나인 《천부시(天父诗)》에 수록된 500수의 시를 보면 대부분이 홍수전이 천경에 진입한 초기 3년동안 궁중생활을 하면서 후궁들에게 보라고 쓴 남자와 남편의 권리에 관한 내용이였다. 례를 들어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비빈, 녀관들은 아침마다 천왕을 위하여 몸을 씻고 옷을 입고 머리칼을 다듬으며 주인의 고민을 잘 풀어주어야 한다. 주인이 존엄이 높고 바르게 지켜지면 강산에서 영원히 위엄을 누릴수 있다. 그후에 천왕에게 문안인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천왕에게 차와 가래침통을 올려야 한다: 차를 바칠 때에는 바르게 해야 한다. 침통을 제대로 받치지 않으면 용서할수 없다. 이런것을 보더라도 홍수전의 위엄과 황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만할것이다. 그가 4번이나 과거를 보았음에도 합격하지 못한 원인도 쉽게 알수 있다. 남경에 온 천왕 홍수전은 처음에는 광서에서 그를 따라온 옛날 녀인들의 거친 성격과 더러운 습관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어떤 녀인이 큰 소리로 얘기하는것을 듣고는 바로 시를 지어 질책했다. “아름다운 녀인의 가는 목소리가 귀한것이다. 어찌 개가 짓는것같은 소리를 내느뇨?” 어떤 녀인이 이발을 닦고 분을 바르고 향수를 뿌릴줄 모르는것을 보고 그는 아주 심하게 놀려주었다. “주인을 따라 오르지 못하면 영원히 오르지 못하고 영원히 태양을 볼수 없다. 얼굴은 튀여나와 시꺼멓고 몸에서는 악취가 난다. 입에서는 류황을 태우는 냄새가 난다.” 홍수전은 꺼리낌없이 새 녀자를 좋아하고 이미 데리고 놀던 녀인을 싫어하는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재수없는 녀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벌할지도 규정했다. “첫째, 나를 모시는데 경건하지 않으면 맞아야 한다. 둘째, 고개를 빳빳이 하고 가르침을 듣지 않으면 매를 맞아야 한다. 셋째, 눈을 들어 남편을 바로 처다보면 매를 맞아야 한다. 넷째, 천왕에게 경건하지 못하게 물어보면 매를 맞아야 한다. 다섯째, 기가 바르지 못하면 매를 맞아야 한다. 여섯째, 말을 큰 소리로 하면 매를 맞아야 한다. 일곱째, 입이 있으면서 대답하지 않으면 매를 맞아야 한다. 여덟째, 얼굴에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면 매를 맞아야 한다. 아홉째, 눈을 좌우로 돌리면 매를 맞아야 한다. 열째, 말하는것이 침착하지 않으면 매를 맞아야 한다." 이외에 또 하나의 기괴한 규정이 있다. “주군을 쳐다볼 때는 어깨까지 보아야 한다, 가장 좋은것은 가슴앞을 보는것이다; 감히 눈을 우로 드는것은 왕을 태만히 한것이고 하늘을 태만히 한것이다.” 부녀들이 형벌을 받을 때 억울하더라도 변명해서는 안된다. 그저 때리는대로 맞아야 하고 그렇지 않았다가는 처벌이 배가된다. “때리면 잘못을 아는것은 한 죄이고 때려도 잘못을 모르는것은 두 죄이다; 한 죄는 맞음으로써 소멸되지만 두 죄는 절대 용서할수 없다.” 알려진 바로는 최소한 3명의 녀인이 천왕부에서 처벌받을 때 억울하다고 하며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가 피살당했다. 피살당한 사람중에는 죽을 때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홍수전에게까지 대들었다가 결국 오마분시(五马分尸)의 혹형을 당했다. 이 점만 보더라도 홍수전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알수 있다. 태평군이 남경에 들어온 이후에 가장 먼저 동왕 양수청의 명령을 받아 주민들은 군영을 따를 사람은 군영으로 복귀하고 군영을 따르지 않을 사람들은 각자 민가로 복귀했다. 나중에 북왕 위창휘가 병이 든 양수청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았는데 일체의 공상업을 몰수하고 남녀를 분리거주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남자들은 군영에 들어가 병사가 되고 녀성들은 려관에 들어가 로동에 참가한다는것이다. 당시 천경에는 토목공사를 많이 벌렸는데 녀성들은 모두 천왕부의 건축에 참가했다. 천왕부주위의 담장은 높이가 2장이고 넓이가 4척이였다. 성벽우에는 갈라진 도자기조각을 추가했고 성밖에는 붙잡혀온 녀성들이 도랑을 팠다. 어떤 사람은 집을 짓는데 동원되였다. 이 점을 보더라도 홍수전은 자신의 향락을 위해서 백성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는것을 알수 있다. 태평군이 민심을 얻어 남경을 점령하였다가 민심을 잃어 민중들이 대거 떠나게 되는데까지 겨우 몇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태평군이 성에 진입하기전에 남경에는 원래 80만명이 살았는데 봄에 태평군이 들어온후 9개월만에 등기인구를 조사해보니 15만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 로약자인 남자가 4만명, 부녀가 11만명이였다. 홍수전이 스스로 “작은 천당”이라고 부른 천경이 사실은 인간지옥이였던것이다. 홍수전은 수천수만의 녀성을 동원해서 집을 짓고 도랑을 파고 성벽을 만들었다. 비바람이 불거나 눈이 내려도 계속 일하도록 핍박했다. 사람을 때려서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홍수전은 천왕부의 미녀들속에서 11년의 제왕생활을 보냈다. 동치 3년(1864년)에 홍수전은 증국전(曾国荃)이 거느린 호남군이 공격해오자 말일이 다가왔음을 알고 2000여명의 미녀들을 버리고 52세의 나이에 자살했다. 그가 죽은후 48일후에 천경이 함락되였고 태평천국이 멸망되였다.     
116    혁명근거지 정강산과 홍군의 형성 댓글:  조회:5295  추천:0  2015-05-31
혁명근거지 정강산과 홍군의 형성     1927년의 제 1차 국공합작은 국민당우파의 공산당축출로 끝났다. 공산당은 이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룡, 엽정, 주덕 등 공산당지도자들은 약 2만여명의 홍군을 동원해 남창에서 봉기했다. 그들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남창을 점령하여 혁명위원회를 설립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건군기념일은 이 남창봉기일인 8월 1일로 정했다. 그러나 남창봉기에 의해 수립된 남창혁명위원회는 얼마 가지 못했다. 국민당군이 남창을 압박해오자 혁명위원회는 남창을 버리고 광주로 내려갔다. 국민당군이 계속 추적하였기에 무장봉기를 통한 해방구건설로선은 광동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927년 12월에 엽검영이 거느린 부대 및 로동자 수천명이 광주에서 무장봉기하여 광주로농민주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대로 포위공격하는 국민당군대와 3주간의 치렬한 전투끝에 대부분은 죽음을 당하고 몇명만이 간신히 탈출하여 또 다른 해방구인 해륙풍으로 피했다. 쏘련의 성공경험을 본받아 무장봉기를 통해 도시중심의 거점을 확보하려던 공산당의 전략과 공산국제(제3국제)의 지시는 결과적으로 잘못된 로선이였음이 드러났다. 당시 이 로선에 반대한 모택동은 농촌을 먼저 장악하여 도시를 포위한다는 중국실제에 알맞고 정확한 로선을 선택했다. 그는 전쟁터에서 패한 군대를 끌고 정강산으로 들어갔다. 이 정강산이 바로 중국공산당의 혁명근거지였다. 여기에서 홍군의 기본적인 조직이 짜여졌다. 모택동은 자신이 이끌고 들어온 부대를 정리하여 로농혁명 제 1군 제 1사단 제 1련대로 이름을 붙였다. 부대대원들은 국민당의 소탕작전에서 살아남은 약간의 로동자들, 이 지역출신의 젊은 광부, 철도원 및 농민으로 구성되였다. 그 뒤 주덕, 림표, 진의 등이 이끌고 들어온 부대를 재편성하여 홍군 제 4군(로농혁명 제 4군)이 창설되였다. 군장은 주덕이고 당대표(정치위원)는 모택동이였다. 당시의 홍군은 약 5만명정도였다. 그후 많은 부대들이 정강산으로 모였는데 그 부대들을 중심으로 홍군 제 5군이 편성되였으며 팽덕회가 지휘했다. 정강산은 몇개의 부락이 있는 오지였고 지역은 넓지만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지 않은 지역이였기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자 의복, 식량 등이 매우 부족했다. 그러나 홍군은 혁명정신에 투철했다. 혁명을 위해서 홍군의 행동수칙이 정해진것도 이곳에서였다. 공산당은 정강산을 근거지로 하여 주변지역인 호남, 강서, 광동 3개성의 경계지역에 6개현으로 구성된 쏘베트를 건설할 계획이였다. 혁명근거지를 확대하기 위해 채택된 방법은 첫째, 무력투쟁의 방식이였다. 이것은 이전까지의 투쟁이 군사력이 강하지 못했기때문에 패했다는 경험에서 비롯된것이다. 둘째, 도시보다는 농촌을 중심으로 점령하고 세력확대의 주요대상을 농민으로 삼는는것이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토지개혁이 중심적인 정책으로 되였다. 그리고 지역별로 쏘베트를 건설해야 하며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또한 홍군의 유력한 전투방식은 유격전술이였다. 이것 역시 무기와 수자 등 모든 면에서 약세인 조건에서 나온 전술이다. 유격전술의 원칙은 모택동에 의해 제시되였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물러선다. 둘째, 적이 멈춰서면 우리는 적을 교란시킨다. 셋째, 적이 전투를 피하면 우리는 공격한다. 넷째, 적이 물러서면 우리는 추격한다. 그후의 실천과정에서 이 원칙은 올바른것이였음이 판명되였다.    
115    등소평에 대한 7번의 암살시도사건 댓글:  조회:7170  추천:1  2015-05-24
등소평에 대한 7번의 암살시도사건   (번역)     호금도는 2개의 비밀기록자료를 비밀해제하였는데 그중의 하나는 “절대기밀”로 분류된 자료로서 이미 사망된 국가지도자가 건국후에 맞은 폭력공격, 암살, 상해사건의 기록자료이다. 이 기밀해제문건에는 건국후에 이미 사망된 당, 정, 군의 국가지도자에 대한 암살시도사건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그중에는 등소평에 대한 7번의 암살시도에 대한 자료가 있었다.     첫째, 1969년에 등소평거처가 총격을 당한 사건   1969년 10월 21일에 등소평은 억울한 루명을 쓰고 중공중앙의 제1호명령을 받아 강서성 신건현 망성강의 버려진 한 보병학교에 연금되여있었다. 3일째 되던날(10월 23일 새벽)에 여러명의 무장”민병”들이 보병학교에 란입하여 등소평의 거처에 향하여 총을 쏘아댔다. 그러나 목표를 잘못잡아서 총기란사를 당한 곳은 등소평을 감시하던 경비들이 머무는 곳이였다. 경비들은 즉각 반격하였는데 여러명의 무장”민병”들은 총을 맞고 죽었다. “9.13”의 림표사건후에 내부에서는 “이 사건은 림표가 강서성 군구에 지시하여 이루어진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80년대초에 림표집단을 조사할 때 림표가 꾸몄거나 지시한것이 아님이 립증되였다.     둘째, 1973년에 등소평전용기가 공중해체된 사건   1973년 2월 20일에 중공중앙 판공청은 구쏘련제 비행기를 강서로 보내여 등소평을 북경으로 되돌아오게 하여 업무를 맞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강서성군구는 등소평을 기차에 태워서 북경으로 보내라는 긴급통지를 다시 받았다. 군구의 참모장이 직접 경비를 이끌고 기차 한칸을 붙여서 북경으로 보냈다. 결과 등소평이 타려고 했던 구쏘련비행기기는 북경으로 돌아가던중 안휘상공에서 공중해체되였다.     셋째, 1975년에 산보를 하다가 총격을 받은 사건   1975년 9월의 어느날에 산서성의 어느 지역으로 갔던 등소평, 강청 등의 일행이 경비와 함께 언덕에서 산보를 하는데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왔다. 경비는 곧 총을 쏜 방향을 향하여 반격했다. 그러자 총을 쏜 자는 도망쳤다. 이 사건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넷째, 1976년에 등소평이 연금된 초대소에 갑자기 화재가 발생된 사건   1976년 4월의 어느날에 등소평은 당내외의 모든 직무를 박탈당했다. 그리고 북경군구의 옥천산초대소 5호청사의 1층에 연금되였다. 저녁에 등소평이 연금된 1층에 갑자기 전원합선이 일어나 불이났고 1층의 101호방에서 10호방까지 전부 불에 타버렸다. 그날 저녁에 등소평은 학습이 예정되여있었다. 그런데 그 후에 경비와 함께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는 바람에 화를 면하였다. 나중에 등소평은 북경성내의 주택으로 옮겨졌는데 내부기록에는 이것이 엽검영이 보낸 경비가 등소평의 안전을 보호한것이고 암살의 위험을 피하게 하였다고 적었다.     다섯째, 1976년에 등소평이 탄 차의 차축이 부러진 사건   1976년 7월의 어느날에 등소평은 하북성 승덕의 피서산장으로 가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등소평은 건강을 리유로 병원에서 검사를 한다고 하고 가지 않았다. 등소평을 승덕으로 보래려고 준비했던 작은 일제차량은 나중에 국방부로 보내졌다. 국방부에서는 사용하려고 검사를 했는데 결과 전륜축이 이미 부러져있었다. 만약 도로를 달렸다면 언제든지 차가 뒤집히고 불이 날수 있었다. 나중에 왕동흥은 등소평이 화를 면한것은 자신이 세운 공이라고 줄곧 자랑하였다. 그는 당시 등소평에게 승덕으로 가지 말라고 통지했다.     여섯째, 1980년에 등소평이 회의좌석에서 총격을 받은 사건   1980년 3월의 어느날에 등소평이 제남군구에서 부대를 시찰할 때의 일이다. 등소평이 군구의 회의에서 보고를 마치고 좌석으로 돌아왔을 때 회의장의 당번경비가 “모주석의 혁명로선을 보위하자! 등소평을 타도하자! 강청을 위하여 복수하자”는 구호를 웨치면서 등소평의 좌석을 향하여 련속 몇발을 발사하였다. 등소평의 신변에 있던 경비가 막아주어 등소평은 위험을 피하였다. 총을 쏜 자는 나중에 제압당하였다.     일곱째, 1988년에 등소평이 일곱번째 암살을 모면한 사건     1988년 2월의 어느날에 등소평, 진운, 양상곤 등이 상해의 서교빈관에서 설명절을 보내고있었다. 그런데 “모택동주의전투대”라고 자칭한 4명의 총을 든 무장분자들이 서교빈관으로 진입하여 당번을 서고있던 무장경찰들과 전투를 벌렸다. 3명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1명은 체포되였다. 그들의 몸에서는 등소평을 암살하는데 사용하기 위한 거주지의 지도, 폭파약, 소음총, 발화기재 등이 발견되였다.       
114    장개석의 본부인 모복매의 처량한 일생 댓글:  조회:5970  추천:2  2015-05-17
장개석의 본부인 모복매의 처량한 일생      장개석의 본부인이며 장경국의 모친인 모복매는 1882년 11월 9일에 절강성 봉화현에서 출생했다. 장개석과 모복매(毛福梅)는 1901년에 부모의 명과 중매를 거쳐 결혼했다. 두 집안은 모두 사업을 자그마하게 꾸리는 집안들이여서 집안이 서로 맞았다. 그해에 장개석은 14세이고 모복매는 18세였다. 당시 절강일대의 민속으로는 녀자가 나이많은것이 일반적이였으며 “ 4년차이가 가장 좋은 짝이며 아주 길하고 리롭다”고 했다. 결혼식때 장난꾸러기였던 장개석은 우스개거리를 만들어냈다. 원래 신부의 꽃가마가 남편의 집안에 도착하면 폭죽을 터뜨린다. 그때 놀이를 즐기던 아이나 결혼식에 참가한 아이들은 모두 물려나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폭죽을 줏군 했다. 신랑인 장개석은 원래 집안에서 결혼식을 준비해야 했는데 이 광경을 보고는 자기가 지금 무슨 립장인지도 모르고 곧 아이들틈으로 달려나가서 땅바닥에 떨어지는 폭죽을 줏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친구들과 손님들이 이를 보고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고 한다. 봉화현에는 “신랑이 폭죽을 주으면 부부는 끝까지 가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었으므로 이런 행위는 금기에 해당되는 일이였다. 장개석의 모친 왕채옥(王采玉)은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면서 욕을 했다. 신부도 가마속에서 그 말을 듣고 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최종결과는 역시 이 말대로 되였다. 첫날밤에 장개석은 신방에서 달아나 어머니의 침대에서 잠을 잤다. 그 말을 들은 모복매는 서럽게 울다가 새벽이 되여 수탉이 울어서야 잠들었다. 봉화의 풍속에 따르면 남녀가 결혼후 정월 초이틀이 되면 신랑은 처가집에 가서 세배를 드려야 한다. 왕채옥이 재삼 권고해서야 장개석은 례물을 꾸려가지고 처가집으로 갔다. 그날에 장개석의 장인과 장모도 닭을 잡는다, 오리를 잡는다, 탕원(汤圆)을 만드다 하며 바삐 돌아쳤다. 하지만 반나절이 지나도 사위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장개석의 집에서 처가까지는 걸어서 3시간이면 닿을만한 거리이지만 해가 서산에 질 때가지 기다려도 사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손님들이 돌아가겠다고 하자 장개석의 처가에서는 난처해서 어쩔바를 몰랐다. 그때 모복매의 사촌동생 모홍방(毛鸿芳)이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와서 사위가 왔는데 모가사당에서 등불놀이를 하고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들은 장개석의 장인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9년동안이나 글을 읽은 사람이 규칙도 모르다니? 모정화(毛鼎和)는 급히 곁에 있는 큰아들을 보고 말했다. “무보야, 빨리 가보아라. 정말 너의 매제라면 그 보고 돌아가라고 해라. 오늘은 찾아오지 말라고 해라.” 모무보가 달려가려고 했지만 한발 늦었다. 문밖에서 징소리와 폭죽소리가 울리면서 등불대오가 다가오고있었다. 제일 앞에 선 소년이 바로 장개석이였는데 신이 나서 폭죽이 불을 붙이고있었다. 그 광경을 본 모정화는 화가 나서 사위인 장개석을 막아서서 대통으로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너, 너 변변치 못한 놈아! 무슨 낯짝으로 찾아와서 이런 꼴을 보이느냐? 장씨와 모씨 두 가문을 네놈이 더럽히는구나!”  장인에게 욕을 얻어먹은 장개석은 난처하여 아무말도 못하고 몸을 돌려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달아났다. 결혼후 처음 몇년간은 장개석이 현소재지와 녕파에 가서 공부를 하였는데 모두 모복매가 동행했다. 두 사람은 수년을 함께 생활했다. 그때 장개석은 10여세여서 이미 다 컸지만 모복매가 모든것을 돌봐주었다. 모복매에게 있어서 장개석은 남편이라기보다는 성격이 나쁜 동생과 같았다. 한번은 두 사람이 싸워서 장개석이 그녀의 배를 발로 찼기에 그녀는 류산을 했다. 장개석은 18세가 되자 우국우민의 의식이 있었기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장개석은 귀국하여 여름방학을 보내군 했는데 상해에서 머물렀다. 장개석의 모친은 모복매를 보내서 장개석을 돌봐주게 하였다. 모복매는 교육을 받지 못하고 전족을 한 전통녀인이여서 장개석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 많았다. 장개석은 여러번이나 모복매에게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으며 오래동안 그녀를 본체만체하기도 했다. 하늘의 뜻인지는 몰라도 모복매는 집으로 돌아간후에야 임신한것을 깨달았고 다음해 봄에 장경국을 낳았다. 모복매는 그때부터 정신적인 의지처가 생겼다. 그녀는 전력을 다해서 아들을 돌보았다. 그때 장개석의 풍류는 점차 장개석의 모친의 귀에도 들려왔다. 장개석의 모친은 아들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모복매를 잘 대해주라고 엄명했다. 장개석은 모친의 말을 잘 따라서 하나하나 모두 응낙했다. 모복매가 장씨집안에 시집온지 20년이 지난 1921년에 그녀가 친어머니처럼 따르던 장개석의 모친이 갑자기 사망되였다. 모복매는 의지처를 잃었다. 장례식을 끝낸후 반년도 되지 않아 장개석은 모복매의 오빠에게 서신을 보내여 모복매와 리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서신의 내용은 내개 이러했다. “10년동안 발걸음소리만 듣거나 사람그림자만 보아도 자극을 받았다. 내가 이제 결심을 했는데 이는 10년의 고통이다. 10년동안의 자극을 거쳐 이루어진것이며 또한 침통하고 비감한 심정이다.” 이로써 볼 때 리혼할 생각을 가진것은 오래전부터라는것을 알수 있다. 장개석은 먼저 상해에서 요야성(姚冶诚)을 품었고 나중에 진결여를 취했다. 그리고 원래의 부인에게 리혼서를 보낸것이다. 모복매에게 있어서 이것은 청천벽력이였다. 그와 아들은 함께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고 더이상 살고싶은 마음이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왔다. 게다가 또 하나의 타격이 뒤를 이었다. 장개석이 아들에게 상해로 와서 공부하라고 한것이다. 계구의 옛날 집에는 모복매만이 홀로 남았다. 3년후인 1925년에 장경국이 구쏘련으로 류학을 갔기에 모자간은 그후 12년간을 떨어져서 지낸다. 첫2년간은 서신이 왕래되였지만 나중에 장경국이 쏘련신문에 “장개석을 성토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후 집안에서의 일체서신이 단절되였다. 1927년이 되여 장개석은 송미령에게 청혼했는데 송씨집안에서는 반드시 원부인과 공개적으로 리혼을 선포하도록 요구했다. 장개석은 계구로 돌아가서 모씨집안에 자기의 뜻을 밝혔다. 모씨집안에서는 례에 근거하여 “모복매는 이미 장씨집안에 시집갔으니 살아도 장씨의 사람이요, 죽어도 장씨의 귀신”이라고 답변했다. 장개석은 이 말을 듣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잘못처리하면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였다. 어느날에 장개석은 몰래 옛집으로 모복매를 찾아갔다. 모복매는 마침 불상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기도를 하고있었다. 장개석은 그녀의 눈빛이 멍하고 비통해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영 언짢았다. 그는 그녀에게 리혼후에도 그녀가 여전히 옛집의 녀주인으로 남게 해줄것이며 주변사람들에게 그녀를 “대사모(大师母)”로 부르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생활의 모든 필요한것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하였다. 모복매는 어쩔수 없이 리혼서에 서명하였다. 10년후에 장경국은 로씨야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모복매는 마침내 아들을 만나게 된것이다. 모복매가 며느리의 중국이름을 묻자 장경국은 부친이 중국이름을 “방랑(方娘)”으로 지어주었다고 말했다. 모복매는 “랑(娘)”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하였다. 그녀보다 배분이 높은 사람들마저 그녀를 모두 “랑(娘)”이고 부르면 복이 달아날것이니 “방량(方良)”으로 고치는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 량(良)은 어질고 현명하다는 뜻이니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후 장방량(蔣方良)이란 이름을 계속 쓰게 되였다. 아들, 며느리, 손자와 함께 한 기간이 모복매에게는 여러해동안 가장 즐거왔던 기간이다. 그녀는 아들과 손자를 데리고있으면서 그들이 좋아하는 고향음식을 많이 만들어 먹였다. 아들도 생활이 안정되면 모친을 모시고 함께 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것은 아들과의 이 만남이 그녀와 아들의 마지막 만남이 되였다는 점이다. 반년후에 일본군의 비행기가 계구를 폭격했고 모복매는 불행히도 총알을 맞고 무너진 담장에 깔려 사망되고말았다. 그녀의 나이 58세때의 일이다. 1947년에 장개석이 고향집으로 돌아와 성묘를 했다. 아침에 그는 홀로 모복매의 묘에 가서 묵묵히 세번 절을 했다. 이것이 그녀에 대한 그리움인지 미안함인지 작별인사인지 장개석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수 없을것이다. 모복매는 어려서부터 어려 사람들이 그녀의 명을 점쳐 주었다.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모두 크게 부유하고 크게 귀하게 될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다만 점쟁이는 남편과 아들의 부귀가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것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던것이다. 그녀의 일생은 더할수 없이 외롭고 처량하였다.  
113    모택동의 전용렬차 피습사건 댓글:  조회:6013  추천:0  2015-05-10
모택동의 전용렬차 피습사건    (번역)   1955년에 소산현(萧山县)에서 모택동의 전용렬차피습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당시에 “통천대안(通天大案)”이라고 불리웠다. 1955년 6월 18일 19시 10분에 모택동주석과 중국남방을 방문하던 구쏘련의 부장회의 주석 마린꼬브(马林科夫)를 태운 전용렬차는 천천히 항주기차역에서 출발했다. 19시 45분에 렬차가 소산현의 서문도구(西门道口)를 지날 때 갑자기 “펑”하는 소리가 울렸다. 모택동을 수행하면서 안전을 책임지고있던 성공안청의 왕방(王芳)청장은 깜짝 놀라서 식은땀을 흘리면서 전용렬차를 신속히 검사했다. 그는 놀랍게도 여섯번째 차량칸의 오른쪽의 유리창에 구멍이 하나 나있는것을 발견했다. 구멍의 크기는 엄지손가락정도였다. 왕방과 경호일군들은 모두 식은 땀을 흘렸다. 렬차가 제기현(诸暨县)기차역에 정차했을 때 즉시 기차에서 내린 왕방은 기차역장실로 가서 성공안청 부청장 려검광(吕剑光)과 통화를 하여 전용렬차에서 발생한 상황을 알려주었다. 이 사건의 심각성은 이미 하늘끝에 닿을 정도였다. 려검광은 즉시 소산현공안국의 반진탁(潘振铎)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전용렬차가 피습된 상황을 알려주고 소산현공안국에서 즉시 사건을 해결하도록 지시한다. 전화를 마친 려검광은 즉시 밤을 새워 소산까지 갔다. 려검광은 반진탁과 함께 사건을 조사한후 함께 항주로 가서 절강성당위서기 강화(江华)와 담진림(谭震林)에게 보고하려고 했다. 담진림은 당시 중공중앙 정치위원이고 국무원 부총리 겸 화동국 제1서기직을 맡고있었는데 항주에 시찰을 내려왔던것이다. 강화서기의 거처에 도착한후에야 그들은 객실의 쏘파에 앉아있는분이 공안부 부부장 허건국(许建国)인것을 발견했다. 허건국은 담진림과 함께 왔던것이다. 려검광은 즉시 사건을 허건국에게 상세하게 보고했고 반국장이 보충하여 보고했다. 허건국은 다음날 아침에 담진림에게 이 사건을 보고한후 즉시 제기현기차역으로 가서 전용렬차에 뚫린 구멍을 살펴보았다. 자세히 조사한후 하건국은 이 구멍이 총격으로 생긴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총격이라면 렬차의 다른쪽 유리체도 구멍이 나야 할것이기때문이였다. 이를 기초로 적이 모주석과 마린꼬브를 암살하려 했을 가능성은 아주 적다고 보았다. 오히려 현지민중들이 던진 돌이 전용렬차에 잘못 맞아서 그 구멍이 생것을 가능성이 컸다. 허건국은 수사의 중점을 안교향의 조가교촌으로 할것을 제안하였다. 왜냐하면 이곳의 철로는 마을을 가로질러 지나가기때문에 사건이 아마도 그 곳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들은 그 곳의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쁜분자, 력사문제가 복잡한 분자들이 그날 저녁 19시부터 20시사이에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자세히 조사했다. 하지만 그 사건은 4류분자가 저지른것이 아니였다. 1955년 6월 23일 오후에 소산현공안국에서는 수사상황을 종합하여 분석한 결과 촌민 조문생(曹文生)을 혐의자로 인정하고 중점적으로 조사했다. 예상했던대로 조가교촌의 시골농민 조문생은 공안국으로 잡혀와서 사실을 그대로 실토했다: “기차가 오기전인 6월 18일 저녁에 우리 5~6명은 철로서쪽에 서서 얘기를 나누고있었습니다. 나는 철로에서 주운 돌을 손안에 쥐고 놀고있었는데 그때 아주 멋있는 렬차가 달려오고있었습니다. 나는 그냥 돌을 던졌는데 기차의 차창유리에 맞았습니다.” 조문생이 한 말은 현장에 있던 다른 농민 조배흥의 증언과도 일치했다. 진상이 규명되자 수사에 참가했던 모든 일군들은 큰 짐을 벗은것 같았다. 려검광은 현장에 있던 공안일군들에게 말했다: “이 사건이 마침내 해결되였습니다. 왜 허건국부부장이 이렇게 중시했고 친히 현장까지 나와서 살펴봤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그날 그 전용렬차에 누가 타고있었는지 압니까? 바로 모주석과 쏘련부장회의주석 마린꼬브입니다. 이런 렬차가 피습받았으니 전국에서 최대의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그자리에 있던 공안일군들은 모두 놀라서 혀를 내밀었다. 사건은 해결되였는데 이 “통천대안”을 저지른 자를 어떻게 처리할것인가를 놓고 소산현공안국의 지도자들은 어찌 할지를 모르고있었다. 현공안국에서는 성공안국으로 사건기록을 보냈고 성공안국에서는 그 사건기록을 공안부로 보냈다. 진술록음자료와 증언진술기록도 모조리 함께 보냈다. 허건국은 보고를 받은후 “조문생이 철로교통안전을 파괴한것은 범죄행위이다. 조문생이 빈곤농민인 점을 감안하여 철저히 교육하고 경하게 처리하라. 집행유예면 괜찮겠다”고 지시했다. 중앙의 지시는 성으로 내려왔다. 성공안청 왕방청장은 조문생의 사건기록에 친히 처리의견을 적었다. 조문생은 구금된지 23일후에 석방되여 가족들과 만났다.  
112    일본군의 폭격속에서 열린 모택동과 강청의 결혼식 댓글:  조회:7174  추천:1  2015-05-03
일본군의 폭격속에서 열린 모택동과 강청의 결혼식   (번역)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하자 가는 곳마다 초연이 자욱했으며 피비린 냄새가 넘쳐났다. 하지만 “붉은 수도” 연안은 평온한 세계였다. 이 황토세계에 자리잡은 옛성에서 높이 울려퍼진 항일구호는 일본군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1938년 12월 20일에 아침식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자기 공중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오더니 날개에 붉은색의 “대병(大饼)”표식을 칠한 10여대의 비행기가 나타났다. 일본군이 비행기는 100여매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폭격소리는 고요한 연안의 평온을 깨뜨렸다. 비록 연안사람들이 거주하는 요동(窑洞)을 천연적인 방공동이라고 하지만 연안성의 광범한 지역은 폭탄의 위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파손되였으며 어떤 요동은 작탄의 충격에 무너지고말았다. 일본군의 첫 공습에 수명명의 사상자가 발생되였다. 그날에 중공중앙조직부, 광화서국 등을 포함한 서북려관일대가 가장 엄중한 손실을 당했다. 진운은 폭격에 출입문이 봉해진 요동안에 갇혀있다가 7~8명의 전사들이 흙을 파혀쳐서야 구원되였다. 그때로부터 연안에서는 공습경보를 울리기 시작했다. 기자는 당시 연안에서 살았던 왕관란의 부인 서명청을 찾아가서 취재했다. 중공중앙농촌사업위원회 주임직을 력임한적이 있는 왕관란은 모택동과도 친하게 지냈다. 서명청의 회상에 따르면 일본비행기의 폭격이 있은 그날 저녁에 그녀와 남편 왕관란은 초청을 받고 연안성의 봉황산 아래에 있는 모택동의 요동으로 향했는데 모택동의 요동도 폭격을 맞았다. 그러나 모택동은 그 요동에서 주연을 베풀어 손님을 대접했다. 그 연회에는 장문천, 리부춘, 채창, 라서경 등이 참석했다. 그번 연회는 왜서 베풀었는가? 주인은 말하지 않았지만 손님들은 마음속으로 알고있었다. 상해에서 온 24살에 나는 한 녀인이 빈번히 손님들에게 술을 권했다. 그녀가 바로 상해에서 영화배우로 활약하다가 연안으로 찾아온 강청이였다. 모택동은 그날 강청과 결혼했던것이다. 송미령은 장개석보다 10살 년하였고 강청은 모택동보다 21살 년하였다. 공교롭게도 국공량당의 령수가 결혼할 때 모두 “약법삼장(约法三章)”이 있었다. 장개석과 송미령이 결혼할 때의 “약법삼장”은 송미령이 제출한것이다. 그 “약법삼장”은 아래와 같다. 첫째, 장개석은 반드시 하느님을 믿어야 하며 세례를 받고 기독교신도로 되여야 한다. 송미령이 독실한 기독교신자였기때문에 두 사람은 반드시 공동한 종교를 믿어야 한다. 둘째, 송미령은 아이를 낳지 않는다. 훌륭한 몸매를 유지하여 중국혁명사업을 위해 더욱 많이 분투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송미령은 그 어떤 정부공직도 맡지 않으며 공식적인 고위급결책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 송미령은 장개석의 개인비서신분을 가지고 대외정치활동에 종사한다. 장개석과 송미령이 결혼할 때의 “약법삼장”에 대해 전해진 판본이 아주 많은데 이상은 향항광각경출판사에서 출판한 《장씨3대의 로맨스》란 책에서 인용한것이다. 모택동과 강청이 결혼할 때에도 “약법삼장”이 있었다. 모택동과 강청의 “약법삼장”은 모택동이 제출한것도 아니고 강청이 제출한것도 아니다. 그것은 중공중앙정치국에서 제출한것이다. 이 “약법삼장”의 판본도 매우 많은데 “약법삼장”의 내용도 서로 일치하지 않다.  
111    과부를 서로 취하려고 싸운 북송의 두 재상 댓글:  조회:5673  추천:1  2015-04-25
과부를 서로 취하려고 싸운 북송의 두 재상     송태조 조광윤(赵匡胤)은 960년에 5대 10국의 전란을 결속짓고 송조를 건립했다. 976년 11월 14일에 송태조(宋太祖)가 갑자기 사망되자 송태조의 친동생 조경(赵炅)이 황위를 계승했다. 조경이 바로 송태종(宋太宗)이다. 송태종은 본명이 조광의(赵匡义)였는데 형님 조광윤의 이름을 회피하느라고 조광의(赵光义)라고 고쳤다가 황위에 오른후 조경이라고 개명했다. 송태종이 997년에 사망되자 그의 셋째아들 송진종(宋真宗)이 황위를 계승했다. 송진종의 이름은 조항(赵恒)이다. 송진종은  송태종의 맏아들도 아니고 황후의 아들도 아니여서 원래는 황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었다. 송진종의 큰 형님 조원좌(赵元佐)가 정신병에 걸리고 둘째 형님 조원희(赵元僖)가 비명횡사를 했기때문에 행운스럽게도 태자로 되였다. 송태종이 죽은후 송진종은 태감 왕계은(王继恩)과 태후가 짜고 든 궁정정변음모에 걸려들었는데 승상 려단(吕端)이 제때에 구원해주었기때문에 무사히 황제의 자리에 오를수 있었다. 두 승상과 과부의 이야기는 바로 이 송진종시기에 발생된것이다. 북송 함평5년(1002년) 10월에 송조의 세번째 황제 즉 송태종의 셋째아들 송진종이 조서를 반포했다: 좌승상(左丞相) 향민중(向敏中)을 재상의 자리에서 파직하고 호부시랑으로 삼는다. 우승상(右丞相) 장제현(张齐贤)을 태상경(太常卿), 분사서경락양(分司西京洛阳)으로 좌천시킨다. 이 조정의 대지진을 몰고온 연유를 따져보면 실로 민망스럽기 그지없다. 이 당당한 좌우승상은 과부 한명을 서로 취하겠다고 싸워서 일어난 일이기때문이다. 그 과부는 좌령군위장군(左领军卫将军) 설유길(薛惟吉)의 미망인인 시씨(柴氏)이다. 설유길의 부친은 송태조시기의 재상인 설거정(薛居正)이다. 설거정은 우리가 지금 볼수 있는 24사(二十四史)중 《구오대사(旧五代史)》의 편찬자이니 재상이면서 재자(才子)라고 할수 있다. 이 재자는 아주 사나운 부인을 두었다.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했을뿐만아니라 그가 시비나 첩을 가까이 하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할수 없이 설유길을 양자로 들이게 되였다. 설거정은 설유길을 지나치게 귀여워했다. 그리하여 설유길은 하루종일 문제아이들과 어울려서 축구를 하고 술마시고 놀기를 즐기는 불효자식이 되였다. 설거정이 죽은후에 송태종이 친히 문상을 갔다가 설유길에게 물어보았다: “불초자식은 잘 있는가? 지금은 버릇을 고쳤는가? 아마도 부친의 위업을 이어받지 못할것같은데 어찌하면 좋은가?” 설유길은 곁에서 두려움에 감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후로 잘못을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였다. 그는 아래사람들에게도 잘 대해주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베풀기를 좋아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결국 그가 죽은후에 그의 안해로 인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과부사건이 벌어진것이다. 시씨는 설유길의 후처이다. 나이가 젊어서 과부가 되였고 자식도 없었다. 그리고 평소에 설유길의 두 아들인 설안상, 설안민과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그녀는 개가를 하려고 했다. 시씨가 고른 사람은 당시 유명한 배불뚝이 재상 장제현이였다. 이 제상은 몸이 비대하고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 그는 시씨와 남몰래 혼약하기로 하고 사람과 수레를 보내여 그녀를 맞이하려고 했다. 그러자 설안상이 개봉부에 고발했다. 그는 계모가 조부와 부친 2대에 걸쳐 모은 거액의 재산을 가지고가려고 한다고 하였다. 개봉부는 사건에 관계된 사람이 재상이다보니 감히 혼자서 결정하지 못하고 송진종에게 보고했다. 송진종은 사건을 크게 벌리고싶지 않아서 관리를 보내여 조용히 시씨에게 물어보게 했다. 그런데 시씨의 주장과 설안상의 고발장은 차이가 컸다. 송진종은 부득불 이 사건을 어사대에서 심리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극적인 장면이 나타났다. 피고인 시씨가 오히려 원고로 되여 거꾸로 고발했다. 그녀가 고발한 사람은 또 다른 재상인 향민중이였다. 항민중이 설씨집안의 옛집을 헐값에 사들였고 자기에게 구혼을 했다는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응하지 않으니 수치가 분노로 바뀐 항민중이 설안상을 시켜 사실을 날조하여 자신을 고발했다는것이다. 이전에 설안상형제가 제대로 구실을 하지 못하자 송진종이 그들에게 조부와 부친의 재산을 팔아먹지 못하도록 명을 내린바 있었다. 향민중까지 련루되여버리니 송진종은 그에게도 물어보지 않을수 없었다. 향민중은 확실히 500만을 들여 설씨의 집을 사들인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최근에 상처했지만 재혼할 생각은 없으며 시씨에게 구혼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향민중이 설씨의 집을 사들인것은 황제의 조서를 어긴것이기는 하지만 일을 적당히 마무리짓고싶어했던 송진종은 끝까지 추궁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시씨는 끝까지 고집했다. 다시 북을 두드리며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다시 어사대에서 심리하게 되였다. 사건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염철사(盐铁使) 왕사종(王嗣宗)은 향민중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때 그가 나서서 폭로했다. 향민중이 최근에 이미 고인이 된 부마도위(驸马都尉) 왕승연(王承衍)의 녀동생을 취하려고 했다는것이다. 밀약은 이미 이루어졌으나 납채는 아직 하지 못했다고 했다. 송진종은 왕씨에게 물어보고 나서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다는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송진종은 향민중에 대하여 불만을 갖게 되였다. 그리하여 그를 불러서 면전에서 그가 솔직하지 못하며 몰래 재혼에 관한 일을 추진하고있으면서 황제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다고 얘기하였다고 힐난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생각해보니 향민중이 시씨에게 구혼하지 않았다는 말도 믿기 힘들다고 말했다. 장제현도 일이 자기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어사대에서 장제현을 조사하다가 시씨의 고발장이 원래 장제현의 아들이자 당시 태자중사의 직위에 있던 장종회(张宗诲)가 시씨를 시켜서 쓰게 한것이라는것을 밝혀냈다. 장제현도 이 사건에서 무관할수가 없었다. 어사대에서 다시 시씨의 심복인 종을 심문해보니 시씨가 금은보화 약 2만민(缗)을 매장했다는것을 발견했다. 얼마후에 송진종이 친히 심문하였다. 심문결과 다음과 같이 처분했다. 향민중은 재상에서 파면하고 호부시랑이 되였다. 장제현은 태상경이 되여 서경으로 갔다. 장종회는 해주별가로 강등되였다. 설안상은 황제의 조서를 위반하여 주택을 팔았으므로 태형에 처하며 팔아버린 집은 되사들이도록 했다. 그리고 어사대와 개봉부에 분부하여 수시로 감독하게 시켰다. 재상에 대한 처리의견은 송진종의 명의로 제서(制书)를 작성했는데 제서를 작성하는 한림원학사 송백은 원래 향민중에게 원한이 있었다. 그는 예전에 향민중에게 10덩이의 은자를 빌리려고 했는데 향민중이 이를 거절했었다. 그리하여 송백은 제서를 초안하면서 글을 더욱 악독하게 썼다. 내용중에 “대짐식언 위신자매(对朕食言,为臣自昧)”와 같은 말이 들어갔다. 향민중은 제서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 시씨는 마음먹은대로 장제현에게 시집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벌금으로 구리 8근을 내야 했다. 그리고 설씨주택을 재매입하는 돈은 그녀가 매장해둔 금은보화를 썼다. 결국 “남편도 잃고 돈도 잃은 격”이였다. 시씨에게 다른 어떤 좋은 점이 있어서 두 재상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그들이 그녀를 취하려고 서로 싸운 리유중의 중요한 원인이 그녀에게 돈이 많았기때문이란것이다. 리학자인 정이(程颐)는 직방배기로 이렇게 말했다. “두 재상이 한 녀인을 서로 취하려고 싸운것은 그녀의 10만이나 되는 호주머니속의 재산때문이였다.” 그렇다면 과부 시씨에게는 도대체 돈이 얼마나 있었을가? 고증에 의해 알려진바에 의하면 당시의 물가는 다음과 같았다. 희녕5년(1072년)에 경사(지금의 개봉) 등지의 밭을 팔려면 1등의 토지는 1무당 3관(贯) 내지 2관 500문(文)이였다. 개봉지역의 집임대료는 외지보다 비쌌다. 천희원년의 임대료는 1칸에 1일당 164문이였고 매월당 4관 491문이였다. 이상의 토지가격과 주택임대가격을 참고해보면 시씨가 매장한 2만관의 자금은 6666무의 좋은 밭을 살수 있는 돈이였다.
110    송자문은 정말 세계최고부자였는가? 댓글:  조회:5401  추천:1  2015-04-18
송자문은 정말 세계최고부자였는가?   (번역)     중국인민해방군이 도강을 하자 송자문(宋子文)은 사직하고 미국으로 갔다. 하지만 당시의 미국여론은 그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미국여론은 송자문이 미국원조과정에서 사사로이 재산을 개인적으로 챙긴 일을 대거 보도했다. 심지어 송자문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까지 보도되였다. 사실 송자문이 세계최고부자라는 소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온것이였다.   비록 송자문은 “량조국구(两朝国舅-누나인 송경령이 손중산의 부인이고 녀동생인 송미령이 장개석의 부인이기에 그렇게 불리웠음)라는 대단한 신분을 가지고있었고 오래동안 중화민국의 재정부장의 요직을 맡았지만 1930년대까지는 송자문의 개인재산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1930년대중반이후부터 사람들은 송자문의 재산에 대해 흥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후의 력사를 뒤져보면 그의 재산에 관한 각종 자료, 전설이 물밀듯이 나타났다. 그 시기는 바로 송자문의 재산이 급격히 증가된 시기였다.   1933년 가을에 군사비문제로 장개석과 심각한 의견차이가 나타나자 송자문은 다시 한번 국민당정부 재정부장의 직위를 사직했다. 동시에 중앙은행 총재, 행정원 원장의 요직도 사직했다. 그는 잠시 중화민국의 권력핵심에서 물러나 있었다. 정치적인 실의는 오히려 그에게 사업상의 흥취를 불러일으켰다. 그 시기에 그는 전국경제위원회 상무위원직은 사직하지 않았기에 그 직을 리용하여 전국경제건설에 열정을 나타냈다. 새로운 경제건설계획을 추진하려면 대량의 자금이 필요하다는것을 송자문은 잘 알고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강대한 실력을 지닌 투자집단인 중국건설은회사(中国建设银公司)를 설립했다.   중국건설은회사가 성립된후에 송자문은 경제령역에서 계속 호풍환우하려면 절대로 대재벌의 지원을 벗어날수 없다는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당시 중국금융계의 배경을 보자면 중국은행이 가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력사적인 원인으로 중국은행의 력대총재는 모두 한간들이였다. 1935년에 장개석, 송자문, 공상희 등이 한구에서 비밀리에 모의하여 중국은행에 대한 개조계획을 통과시켰다. 이 계획의 기밀유지는 아주 잘되였다. 사전에 장가요가 알지 못하게 하고 왕정위 등의 한간거두들도 모르게 하였다. 행정원장을 맡고있던 왕정위가 소식을 들었을 때는 모든 문건이 이미 완성된 후였다. 이것은 한간들에게 청천벽력이였다.   중국은행 리사장직를 맡은 송자문은 실력이 강대한 금융기관의 지원을 바탕으로 송자문은 마침내 중국정계, 공상실업계, 금융계에서 모두 존경하는 인물이 되였다. 그때부터 송자문은 자신이 장악한 경제위원회, 중국건설은회사, 중국은행의 3대도구를 통하여 계속 민족공상업, 금융업에 침투하고 지배하고 합병하는 활동을 벌렸다.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송씨가족을 핵심으로 하는 관료매판집단과 독점왕국을 건설했다. 이를 통하여 송자문은 신속히 재부를 축적했다.   송자문이 경제건설계획과 개인재산추구의 측면에서 잘 나가고있을 때 영미파의 령수라는 배경과 대일강경파의 대표인물이라는 명성으로 인하여 그는 일본측과 국내한간들로부터 적대시당하게 되였다. 일본인들은 재주를 있고 일처리는 서방자유주의자와 같은 송자문을 심지어 그들의 최대적수인 장개석보다 더 싫어하게 되였다.   일본측과 왕정위일파의 반격으로 하여 송자문의 재산이 세계에서 제일 많다거나 그가 미친듯이 재산을 긁어모은다는 소문이 줄을 이었다. 1939년에 일본간첩은 “국민당정부의 고급급관리예금상황에 대한 비밀조사보고서”에 송자문 한사람만 5000여만원의 재산을 상해의 외국은행에 예금해두었다고 실었다. 그리고 전쟁기간동안에 일본은 송자문이 대통국민은행과 뉴욕의 화기은행에 7000만딸라의 예금을 해놓았다고 지적했다. 그와 동시에 송자문은 세게최고부자라는 소문이 소리없이 퍼져갔다.   력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이런 정보는 모두 전시에 일본의 정치선전수단의 하나로 밝혀졌다. 당시 인용된 작자도 그다지 믿고있지 않았지만 그때로부터 송자문의 재산에 대한 소문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송자문이 당시 경제건설에서 종횡으로 활약하고있었고 금융계에서 호풍환우하였으며 그의 가족들이 권력을 장악하고있었기때문에 더더욱 널리 퍼져갔다.   두터운 금융자본을 가지고있었기에 송자문은 경제분야에서 확장하는것은 식은죽먹기처럼 쉬웠다. 광동은행을 례로 들자면 남방에서 광동은행은 영향이 큰 화교자금계은행이다. 1935년 가을에 채무가 많아서 위기에 처하자 송자문은 자신의 권력과 영향을 리용하여 자금을 투입하여 개조했다. 그는 20만주를 사들여 비록 최대주주는 아니였지만 아무도 그와 감히 싸우려고 할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개조후의 리사장은 모든 사람의 만장일치로 송자문이 맡았다. 송자문은 자신의 심복에게 총경리직을 넘겼다. 그때로부터 광동은행은 송씨가족의 개인은행으로 바뀌였다.   남양형제연초회사를 놓고보면 원래 중국최대의 담배회사였다. 회사사장인 간씨형제는 “연초대왕”으로 불리웠다. 이 회사는 1930년대에 경영과 재무에서 사면초가의 처지에 처했다. 이때 송자문은 겨우 70만원의 대가로 이 회사의 52%주식을 사들였다. 그리고 70만원도 광동은행이 대신 납부했다. 송자문은 한푼도 내지 않고 남영형제연초회사를 자신의 산하에 넣어버렸다.   그외에도, 송자문은 신화은행, 중국국화은행, 중국보험회사, 상해은행등에 모두 투자를 했다. 송자문은 공업에도 적지 않게 투자하였다. 일부분 금융기관을 차지한후 그는 은행의 자금으로 공장, 광산과 철로건설에 투자했다. 중국건설은회사가 몇몇 철로와 공장, 광산에 투자한외에 송씨집안은 사천사업회사, 진화종이공장, 민생회사, 화풍화기방직포공장, 대중화화시회사, 화풍화기면분공장, 중화서국 등 공업, 광업기업에 일정한 주식을 차지했다. 송자문과 송자량은 이런 기업의 리사장 혹은 리사를 맡았다. 서북 섬서, 감숙 두곳의 10여개의 방직, 면분, 제약, 인쇄, 양조, 석탄채굴, 성냥 등 공장도 송씨가족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송자문은 상업분야에서도 아주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가 친히 경영하는 중국면업회사는 몇달만에 자본이 갑절로 뛰여올랐다. 화남미업회사는 독점적으로 “외국쌀”의 수입업무를 수행하여 리윤이 엄청났다. 항전후 상해에 부중무역회사, 중국수출입무역회사, 통일무역회사, 금천무역회사, 등을 설립하여 물자부족, 물가상승을 틈타서 큰 돈을 벌었다.   경제분야에서 이처럼 활약이 컸기에 그의 재산에 대하여 당연히 관심이 집중되였다. 당시 글을 보면 “송씨의 경제활동은 우에 언급한 7개은행, 12개 류통회사, 22개 큰 공장, 1개의 운수회사이다. 주식은 모두 얼마일가? 송자문자신도 재산수자를 몰랐을것이다”라고 했고 또 다른 글에서는 “그 당시 독자적으로 6억원을 가지고있었다”고 밝혔다. 또 4대가족이 여러 분야에서 독점하고있는 재산 및 그들이 가진 예금과 사업은 통계를 내보면 최소한 200억딸라가량이다”고 하기도 했다.   정말 이러한 수자라면 4대가족중 어느 한명만 하더라도 세계최고부자의 반렬에 오를수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가? 사료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전국에는 3개의 국가독점자본집단이 있었다. “4행2국(중앙은행, 중국은행, 교통은행, 중국농업은행, 중국신탁국 및 우정저금회업국), 자원위윈회 및 중국방직건설회사이다. 합계는 겨우 62,972억원이였다. 1947년의 환률로 계산하면 100억딸라에 미치지 못했다. 만일 당시 국민정부가 관할하는 모든 자산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200억딸라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를 보면 우에서 얘기한 “4대가족”의 재산이란 단순히 장개석, 송자문, 공상희, 진립부와 진과부의 개인재산을 얘기하는것이 아니라 국민당 및 국민당정부 통치하의 “국가독점자본”의 재산을 의미한다고 한것이다. 단순히 송자문만을 본다면 비록 그가 장악한 공상금융기관이 많지만 전부 점유하는것은 아니고 일부 투자하거나 요직을 맡고있었을뿐이다. 그의 개인재산은 이런 기업의 총자산보다 적을수밖에 없다. 대략 1000만딸라정도일것이다. 송자문이 정계에 있을 때 국가은행 혹은 재정부에서 투자하여 설립한 기업은 송자문의 개인재산으로 볼수 없다. 미국학자 대홍초(戴洪超)가 한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가 오래동안 회사의 중요요직을 겸직하였고 회사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의심을 하는것도 아주 자연스럽다.” 송자문은 비록 재산이 엄청 많았지만 소문에서처럼 억만부호는 아니였다. 그러나 어찌되였건 당시 관료자본의 제도하에서 그가 재물을 취득한 경로는 정치특권을 리용하는것에서 벗어날수 없었고 권력을 가지고 재물을 긁어모았다고 말할수도 있다.    
109    장개석은 누구에게 대륙을 잃은 죄명을 씌웠는가? 댓글:  조회:5755  추천:1  2015-04-12
장개석은 누구에게 대륙을 잃은 죄명을 씌웠는가?   (번역)     대륙에서 쫓겨나 총망히 비행기를 타고 대만에 내린후 장개석은 어디에 거주할것인가에 신경을 썼다. 그러다가 결국 양명산아래에 있는 사림(士林)을 선택했는데 이 동을 사림관저(士林官邸)라고 불렀다. 그후 30년동안에 사림관저는 대만정치권력을 다투는 무대로 되였다. 그때의 장개석으로 말하면 자기의 권력을 회복하고 국민당을 재정돈하는것이 가장 급히 처리해야 할 사무였다.   1950년 1월에 송미령이 미국에서 대만으로 날아왔는데 이는 저조상태에 있던 장개석에게 큰 위안이 되였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영어에 능한 송미령은 줄곧 장개석의 외교고문으로 있었는데 이는 장개석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였다.   송미령이 대만에 도착한후 장개석은 곧 부인을 동반하여1950년 3월 1일에 직무를 다시 회복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렇게 장개석은 다시 대통령의 보좌에 앉게 되였다. 대만을 견고하게 하는것은 당시 장개석과 전체 국민당에 있어서 모두 중점중의 중점이였다. 그러나 장개석의 옆에서 지켜보던 진성은 매우 똑똑히 알고있었다. 그 시기 대만환경은 그 자신이 장개석의 파견으로 대만성주석 겸 대만경비 총사령직을 맡고있던 1948년보다 더 복잡했던것이다. 진성의 아들 진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대만에 올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장위원장과 연원이 있는 사람이였지요. 원래부터 장위원장과 불화가 있었던 사람은 자연히 오지 않았지요.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인연관계였습니다. 장개석이 대만에 온후 모두 그의 말을 들었고 그가 다시 나서서 령도해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상 그렇게 되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를 놓고 말하면 원래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으니 의견도 달랐고 원래 대륙에 있었을 때의 파벌도 그대로 대만에 옮겨오게 되였지요.”   장개석이 직무를 회복하는 의식은 유쾌한 기분속에서 행해졌지만 어색한데가 있었다. 그것은 “부대통령”이 없는 장소였고 전임대통령대리였던 리종인이 이미 미국으로 갔기때문이다. 리종인은 곧 검찰원의 탄핵제안을 받아 대만당국(当局)의 책임추궁목표로 되였다. 이어 장개석은 개조위원회를 성립했다. 16명위원의 명단중에 진과부, 진립부형제의 이름을 찾아볼수 없었다.   대만력사학자 류유개는 이렇게 말했다. “대만에 도착한후 대륙을 잃은 책임을 찾아서 분석하게 되였습니다. 누가 대륙을 잃게 했는가? 모두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때문에 그때에야 당을 개조하자고 말하면서 CC파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CC파는 진씨형제를 위수로 한 중앙구락부조직을 가리키지요. 이는 국민당내부의 중요한 파벌인데 진씨형제 성씨의 첫자모를 따서 지은것입니다.”   CC파는 내전시기에 매우 활약했는데 핵심인물은 진과부와 진립부형제였다. 그들 형제는 장기적으로 국민당을 조종했기에 사람들은 “장가천하에 진씨당”이라고 형용했다. 국민당개조가 시작되자 진씨형제가 제일 먼저 그 대상이 되였다. 개조위원회가 성립된후 얼마 안되여 진립부는 곧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러나 대만에 남아있던 진과부는 얼마 안되여 병으로 사망되였다.    
108    항전초기에 장개석은 왜서 미친듯이 공산당을 토벌했는가? 댓글:  조회:6896  추천:2  2015-04-06
항전초기에 장개석은 왜서 미친듯이 공산당을 토벌했는가?   (번역)   항전초기에 장개석은 모든 력량을 집중하여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농촌근거지와 홍군을 대처하기 위해 일본침략자와 타협했다. 그는 “항일을 입에 담는 자는 용서하지 말고 죽이라”는 반동명령을 내리는 한편 친일파두목 황부를 파견하여 일본군과 담판을 하게 함으로써 다시 타협했다. 1933년 5월 31일에 국민당정부는 일본제국주의와 “당고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는 주권을 잃어 나라를 욕되게 하는 매국협정이였다. 일본군이 대거 침입하고 장개석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부저항정책을 집행하여 조국의 령토를 순순히 일본군에게 넘겨준 행위는 전국인민의 지대한 분노를 일으켰다. 중국공산당은 중화쏘베트공화국림시중앙정부, 중국공농홍군혁명군사위원회(즉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명의로 1933년 1월 11일에 선언을 발표하여 중국공농홍군은 “즉시 쏘베트구역에 대한 진공을 정지하고 민중의 민주권리를 보장하며 민중을 무장하여 항일한다는 3가지조건을 지키는 무장부대라면 어떠한 무장부대와도 정전하고 공동으로 일본에 대항하는 작전협정을 체결하기를 바란다”고 제출했다. 1933년 6월 1일에 중국공산당은 또 중화쏘베트공화국림시중앙정부의 명의로 《국민당이 평진화북을 팔어먹는것을 반대하기 위한 선언》을 발표하여 국민당정부가 일본제국주의와 함께 체결한 《당고협정》을 반대했고 장개석반동집단이 전력을 다해 인민을 진공하고 일본제국주의에 투항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죄행을 폭로했다. 그리고 전국인민이 일치 단결하여 빼앗긴 땅을 도로 찾고 중국을 보위하며 중화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자고 호소했다. 광대한 인민군중들이 적극적으로 중국공산당의 호소에 따라 홍군과 일체 항일애국력량이 항일하고 장개석을 반대하는 행동을 대량으로 지원했는데 이런 형세는 중국혁명의 발전에 매우 유리했다. 전국인민이 일치 단결하여 항일하는 고조가 일어나자 국민당군대 내부의 일부 관병들도 공산당토벌을 중지하고 일치 항일할것을 요구했다. 장성의 각 입구를 지키는 중국군도 전국민민의 항일열정에 고무되여 장성내외의 민중의용군과 배합하여 자발적으로 일본군과 싸웠다. 국민당장군 송철원이 거느린 제29군은 장성 희봉구에서 영용하여 항전하여 일본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장광내와 채정개는 19로군을 거느리고 국민당정부에 전군이 북상하여 항일할것을 요구하면서 선발대를 조직하여 북상하여 항일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19로군의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고 선발대를 되돌려 계속 공산당을 토벌하라는 엄령을 내렸다. 이는 분개한 19로군관병들이 후에 “복건사변”을 발동한 원인으로 되였다. 풍옥상, 길홍창, 방진무 등을 위수로 한 항일애국장군들은 장개석의 매국투항정책에 불만을 품고 적극적으로 중국공산당의 호소에 따라 합작하여 항일할것을 표시했다. 1933년 5월 26일에 그들은 장가구에서 찰수항일동맹군(察绥抗日同盟军)을 성립했다고 전국에 선포하면서 련합하여 항일할것을 주장했다. 이 대오는 몇천명으로부터 10여만명으로 발전했다. 그해 6월중순에 항일동맹군은 출병하여 북쪽으로 공격했다. 7월하순에 선후로 강보, 고원, 다륜을 수복했으며 괴뢰군을 차하얼성(察哈尔省)에서 완전히 쫓아냈다. 그리고 장가구에서 동북4성을 수복할 계획위원회를 성립하고 진일보 대일작전을 준비했다. 일순간에 전군인민들이 항일동맹군을 지원하는 열조가 일어났다. 장개석은 이런 항일행동이 자신의 공산당토벌대업에 영향을 끼친다고 인정하면서 매우 적대시했다. 그는 수하의 량대특무조직인 “CC단”과 “람의사(蓝衣社)”에 비밀명령을 내려 국민당통치구내에서 인민의 항일민주운동을 미친듯이 진압했으며 공산당과 항일분자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1933년 7월부터 1934년 7월까지 1년사이에 “CC단”에 붙잡히고 살해된 공산당원만 해도 4500여명이나 되였다. 그리고 장개석은 항일동맹군의 항일을 허락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국책을 파괴했다”는 죄명으로 10여개 사의 병력을 출동시켜 항일동맹군을 포위하고 일본군과 배합하여 미친듯이 동맹군의 대본영 장가구를 포위공격했다. 그해 9월말에 찰수항일동맹군(察绥抗日同盟军)은 탄약과 량식이 떨어져 실패했다. 풍옥상은 핍박에 의해 직무를 내놓았고 방진무는 국외로 망명했으며 길홍창은 장개석에게 살해당했다. 장개석은 1933년 5월 8일에 각급 군관들앞에서 장편연설을 발표했다. “옛사람들이 외적을 물리치려면 먼저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했는데 그 뜻은 먼저 내란을 평정한 다음에야 외국의 침략을 막아낼수 있다는것입니다.”  
107    력사상 가장 많은 남편을 두었던 산음공주 댓글:  조회:8386  추천:3  2015-03-29
력사상 가장 많은 남편을 두었던 산음공주     중국의 황제는 아마도 가장 편안하게 살면서 향락을 누렸을것이다. 그들은 삼궁륙원에 수천명의 궁녀를 거느릴수 있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자만이 절대적인 향락을 누릴수 있었다. 중국남북조시대의 송(宋)나라에는 산음공주(山阴公主)라고 불리우는 녀인이 있었는데 이름이 류초옥(刘楚玉)이다. 그녀는 이런 남자들만의 특권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삼궁륙원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수많은 남자들을 남편으로 두고 마음껏 향락을 누렸다. 산음공주의 모친은 문목황후(文穆皇后) 왕헌원(王宪嫄)이다. 왕헌원은 효무제와의 사이에 2남 4녀를 낳았는데 각각 다음과 같다. 페제(废帝) 류자업(刘子业), 예장왕(豫章王) 류자상(刘子尚), 산음공주 류초옥, 림회강애공주(临淮康哀公主) 류초패(刘楚佩), 황녀 류초수(刘楚琇), 강락공주(康乐公主) 류수명(刘修明)이다. 문목황후는 미녀였고 그녀가 낳은 딸들도 모두 그녀를 닮아 미녀들이였다. 이 네명의 딸중에서 가장 자색이 뛰여나고 음탕하기로 유명한 딸이 바로 산음공주이다. 대명8년(464년) 5월에 산음공주의 16살된 남동생 류자업이 황위를 계승했는데 력사에서 전폐제(前废帝)로 불리우는 인물이다. 류자업은 황음무도한 호색한이였다. 아마도 중국력사상에서 가장 호색한 황제일것이다. 그는 민간에서 미녀를 많이 뽑아들였을뿐아니라 부친의 후궁, 심지어 자신의 친고모, 친누나까지 침상에 끌여들여 향락을 즐겼다. 그에게 강점당한 고모는 력사상에서 신채공주(新蔡公主)라고 불리우는 녀인이다. 신채공주는 일찌기 장군 하매(河迈河邁)에게 시집갔었는데 류자업은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궁녀를 죽인후 그 시신을 하매의 집으로 보내면서 신채공주는 이미 죽었다고 거짓말을 말했다. 하매는 이 치욕을 견디지 못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사전에 루설되는 바람에 류자업에게 살해되고말았다. 신채공주는 그때부터 성을 사(谢)씨로 바꾸고 궁중에 남아 황제인 조카의 녀인으로 되였다. 류자업은 심지어 신채공주를 황후로 세우려고 까지 하였으나 신채공주가 스스로 거절했다. 산음공주는 고모와는 달랐다. 그녀는 남동생과 서로 마음이 잘 맞았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산음공주는 자주 궁중에 들어와서 류자업과 함께 먹고 한침대에서 함께 잤으니 부부와 같았다. 류자업은 이 누나가 하는 말이면 뭐든지 들어주었다. 한번은 산음공주가 류자업에게 말했다: “저와 페하는 모두 선황의 자손인데 페하는 삼궁륙원을 거느리는데 첩은 부마 1명뿐이니 이것은 너무 불공평합니다. 어찌 이럴수 있습니까?” 이것은 기원 5세기경에 한 중국공주가 내뱉은 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말이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그녀가 주장하는 리치는 이렇다. 공주와 황제는 모두 한 부친에게서 태여났는데 왜 황제는 후궁을 만명이나 거느리고 공주는 겨우 부마 1명만 둘수 있는지? 류자업은 누나의 이 말을 듣고는 즉시 누나의 뜻을 받아들였다. 류자업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이 일은 신속히 처리했다. 그는 즉시 30명의 잘생긴 미소년들을 뽑아서 산음공주의 집으로 보내주었다. 산음공주는 이들을 모두 남첩으로 받아들였다. 산음공주의 남편이였던 부마 하집(何戢)이 갑자기 이렇게 30명이나 남첩이 생긴데 대하여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사서에 기재되여있지 않다. 그러나 기분이 좋지 않았을것임은 분명하다. 하집은 원래 명문가출신이고 아주 잘생겼을뿐만아니라 풍채가 름름했다. 어린 남자들을 많이 가지게 되자 산음공주는 다시 성숙한 남자들에게 눈을 돌렸다. 당시 송나라의 조정에는 두명의 미남자가 있었다. 한명은 바로 산음공주에 장가든 하집이였고 다른 한명은 남군공주(南郡公主)에게 장가든 저연(褚渊)이였다. 저연의 자는 언회(彦回)이다. 배분으로 따지자면 저연은 산음공주의 고모부였다. 이 사람도 풍채가 뛰여나고 아주 준수하였다. 그리하여 산음공주는 이 저연을 마음에 두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류자업을 찾아가 저연으로 하여금 자신과 며칠을 놀아주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류자업은 저연의 품행이 단정하다는것을 알고있기에 그에게 아무 리유없이 산음공주와 며칠을 놀아달라고 얘기할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그에게 공주집으로 가라고 조서를 내렸다. 저연이 공주집에 도착한 후에 어떻게 하는지는 산음공주의 능력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산음공주는 신경을 써서 매일 화장을 하고 온 정성을 다해서 저연을 유혹하였다. 그러나 10일이 지나도록 저연은 나무조각같았고 교태를 부리는 산음공주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공주는 마음이 급해졌으나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산음공주는 “그대는 구레나룻이 철극과 같이 강한데 어찌 조금도 사나이답지 못한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저연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언회는 비록 똑똑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정리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산음공주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강온의 온갖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저연은 전혀 동하지 않고 이렇게 응수했다. “당신은 공주이니 당신을 어떻게 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주님이 이렇게 계속 를 핍박한다면 소인은 자살로서 끝낼수밖에 없나이다.” 이 지경이 되자 산음공주도 더이상은 어찌하지 못했고 저연을 곱게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산음공주의 좋은 시절은 결국 끝이 날수밖에 없었다. 경화원년 11월 29일(466년 1월 1일)에 류자업은 궁중의 반란으로 목이 달아났다. 다음날에 다른 황제가 등극했는데 구정치를 일소하기 위하여 류자상과 산음공주를 죽였다. 산음공주 류초옥이 죽었을 때 나이가 22살 내지 23살이였다. 젊은 나이에 죽은 그녀도 가엾지만 진정으로 불행한것은 그녀가 거느리던 30여명의 남첩들이였다. 산음공주가 피살될 때 그들도 산음공주와 함께 순장되였다.     
106    류소기의 “살인멸구사건”은 어떻게 조작되였는가? 댓글:  조회:5652  추천:1  2015-03-22
류소기의 “살인멸구사건”은 어떻게 조작되였는가?   (번역)     문화대혁명기간에 당시 국가주석이였던 류소기는 참혹하게 박해를 받았다. 강청, 강생, 사부치 등이 조직한 전문사건조사소조에서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죄명을 만들어 냈다. 바로 “류소기가 사람을 죽여 입을 막았다”는 사건을 조작했던것이다. 아래에 조작한 내용을 보기로 하자.   “5.30운동이후에 계급투쟁이 격화되면서 당시 상해총공회의 책임자였던 류소기는 적들에게 붙잡힐가봐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업무를 다 팽개치고 홀로 상해에서 도망쳐 장사로 갔다. 하지만 그는 1924년 12월 16일에 장사계엄사령부에 체포되였다. 호남성의 성장인 군벌 조항석은 직접 나서서 류소기를 즉시 처결하라고 지시했다. 류소기는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비겁하게 조항석이 제출한 조건을 받아들였고 국민당에 항복하였다. 1950년에 양검웅(楊劍雄)이라는 자가 류소기가 항복한 내용을 알고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류소기는 적에게 항복한 일이 들통날가봐 두려워 1953년에 양검웅을 죽여버리라는 비밀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류소기는 양검웅을 총살하고 살인멸구(杀人灭口)를 하였다.”   그럼 양검웅은 어떤 사람인가? 양검운은 원래 호남성 영향현 칠복교향의 철라충 사람이였다. 소학교를 다닐 때 양검웅은 류소기와 함께 녕향현의 옥담고등소학당을 다녔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반에 있지는 않았다. 바로 이 리유때문에 50년이 지난후에 류소기는 억울한 루명을 쓰게 되였다.   양검운은 나중에 장사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상해의 대하대학을 졸업했다. 양검웅의 이모부가 조항석이였는데 조항석은 그 시기에 군벌혼전중에 두각을 나타내여 호남성의 성장 겸 독군직을 지내고있었다. 양검웅은 공부를 그만두고 장사성에서 회계를 맡았다. 조항석을 업은 양검웅은 배경이 든든하였기에 많은 돈을 몰래 고향집으로 빼돌렸다. 비록 나중에 조항석이 물러나기는 하였으나 양검웅의 집안은 이미 고향에서 논밭을 사서 현지에서 가장 큰 부자로 손꼽혔다.   중국인민해방군은 1949년 4월에 장강을 건넜고 장개석정권은 와해되였다. 이때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유격부대 하나가 신속히 성장하였는데 녕향현이 그 유격부대가 활동하는 중심무대였다. 국민당정부는 중앙군 778사단을 녕향현에 보내여 유격대를 소탕하려고 했다. 양검웅은 구원병이 왔다고 생각하고 동네사람을 이끌고 778사에 량식이며 땔감을 보내주었다. 양검웅은 또 현지에서 누가 공산당이라는것을 밀고하여 10여명의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에 붙잡혀 살해되는 비극을 빚어냈다.   그후 국민당이 계속 패배하자 양검웅은 도박하는 심정으로 현성과 고향을 왔다갔다 하였는데 자신이 공산당을 밀고한 사실이 알려질가봐 몹시 두려웠다. 만일을 대비하기 위하여 그는 몸에 두자루의 총을 지니고 다녔고 한구에서 사귀였던 두명의 무술고수를 개인경호원으로 두었다. 이 무술고수는 하남성 광산현 사람인 곽기풍과 팽옥린이였는데 그들은 낮에는 양검웅의 곁에서 한걸음도 떨어지지 않았고 밤에는 한명씩 번갈아 당번을 서며 양검웅을 지켰다.   1949년 8월 5일에 호남성이 해방되자 양검웅은 얼음구덩이에 빠진것 같은 심정으로 절망을 느꼈다. 그해 10월 1일에 개국대전이 북경의 천안문에서 거행되였는데 양검웅은 천안문의 성루에서 모택동과 함께 서서 군중의 환호를 받고있는 낯익은 사람을 알아보았다. 그가 바로 탄자충(炭子冲)사람인 류소기였다. 탄자충은 양검웅의 고향인 철라충(铁锣冲)과는 3~5리 떨어져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 사이였다. 양검웅은 내심 기뻐서 이 옛동창을 찾기만 하면 자신이 편안하게 살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양검웅은 류소기에게 요행을 바라는 심정으로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양검웅은 자신의 처지를 전혀 말하지 않고 두 경호원을 류소기에게 추천한다는 내용만 썼다. 그들이 무술전문가로서 뛰여나고 사상도 괜찮다는 내용을 적었다.   편지를 보내기는 했으나 회신은 없었다. 얼마후 청비반패(清匪反霸)운동이 시작되였다. 청비반패란 토비를 숙청하고 악패지주를 반대한다는 뜻이다. 청비반패운동이 시작되자 양검웅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현지의 사람들은 정부에 그를 잡아달라고 요청했고 공안부문에서는 계속 그를 찾아다녔다. 1952년 10월 28일에 귀주의 깊은 산속에 3년가량 숨어있던 양검웅은 끝내 체포되였다. 1953년 1월 24일에 호남성정부에서는 양검웅의 사형을 비준했다.   양검웅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살려고 아득바득 애를 썼다. 그는 온갖 방법을 다해 머리를 짜내여 살구멍을 찾았다. 마침내 좋은 방법을 생각해낸 그는 법정에서 1924년에 류소기가 장사에서 체포되였다고 말한후 자신이 성장이였던 이모부 조항석에게 보증을 서서 류소기를 감옥에서 나오도록 해주었다고 얘기했다. 당시 공산당은 8가지의 관용정책을 내왔는데 그중의 하나가 “지하공작을 하던 혁명자를 구해주는데 도움을 준 사람은 처벌을 한단계 낮추어준다”는것이였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양검웅은 사형을 당하지 않을수 있었다.   녕향현공안국 국장이며 이 사건의 부심판장이였던 곽건국은 당시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던 류소기에게 급히 서신을 써서 확인을 요청했다. 곽건국의 서신은 3일후에 류소기의 책상에 올라왔다. 류소기는 양검웅과 소학교 동창이기는 하지만 그후 련락을 해본적이 없었다. 1949년 11월중순에 류소기는 양검웅으로부터 편지는 받았으나 답변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후 얼마 안되여 고향에서 온 친구들이 북경으로 찾아왔을 때 류소기는 양검웅에 대하여 물어보았고 그들로부터 양검웅이 그동안 저지른 일을 모두 듣게 되였다. 그리하여 그를 경계했던것이다. 류소기는 양검웅과 확실히 동창관계였다. 그러나 녕안현공안국의 공문에 의하면 양검웅은 큰 죄를 지었고 다시 개조하기 힘들다고 되여있었다. 이에 류소기는 다음과 같이 회신했다.   호남성 녕향중공현당위 공안국 곽건국동지: 1월 26일에 보낸 서신은 잘 받았음. 양검웅은 나와 소학교에서 같이 공부한적이 있으나 그후 30여년간 아무런 관계도 없었음. 그가 말하는 1924년에 장사에서 나를 감옥에서 구해냈다는 등의 말은 허튼소리로서 그런 사실이 전혀 없었음. 나는 1925년에 장사에서 체포되였었고 많은 사람들이 구해주었기에 감옥에서 2개월후에 나올수 있었음. 그러나 양검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음. 양검웅의 범죄는 당신들의 판결에 따라 처리할것. 류소기 1월 29일.   그러나 양검웅에 대한 판결은 문화대혁명기간에 류소기가 살인멸구한것으로 모함되였다.   척본우는 1967년 4월 1일에 《애국주의이냐 아니면 매국주의이냐? 반동영화 〈청궁비사〉를 평함》이란 글에서 창끝을 류소기에게 향했다. 그 글이 나와 며칠이 지났을 때 북경에서 내려온 몇몇 사람들이 녕향현소재지와 화명루향에서 사람을 찾아 얘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고는 손도장을 찍게 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왜 그러는지 몰랐다. 나중에야 그들은 이 몇몇 사람들이 사부치가 책임진 전문사건조사소조에서 파견된 사람들이고 그들의 목적은 자료를 만들어 류소기가 녕향에서 살인멸구했다는것을 립증하기 위한것이라는것을 알았다.   1990년대초에 녕향현정협상무위원을 맡았던 주석선에 의하면 당시 전문사건조사소조는 그에게 서류를 써라고 했고 류소기가 살인멸구했다는것에 대한 증거로 삼으려고 했다. 주석선은 전문사건조사소조의 요구를 강하게 거절하였다. 그러자 전문사건조사소조의 성원들은 사람들을 불러 그를 비판하고 그의 륵골을 세 개나 부러뜨렸다.   전문사건조사소조는 주석선이 말을 듣지 않자 당시 양검웅사건의 심판원직을 맡았고 나중에 공사의 당위부서기직을 지냈던 종진기를 찾아갔다. 전문사건조사소조는 종진기에게 가짜증명을 요구했다. 그는 “양검웅은 현법원에서 사형을 판결받았고 성정부에서 심사하여 비준했습니다. 전체 사건처리과정에 대해 류소기동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류소기동지가 어떻게 양검웅을 살인멸구하였겠습니까?”하고 반박했다. 전문사건조사소조는 “이건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더러 류소기가 양검웅을 살인멸구한 증인을 서달라고 강요했다. 오전 8시반부터 한밤중까지 세 사람이 그를 둘러싸고 돌아가면서 핍박했다. 그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증명자료우에 “살인멸구”라고 네글자를 적었다. 량심의 가책에 시달려왔던 종진기는 지금도 자기의 유약함과 비겁함을 부끄러워 하면서 “그것은 내가 일생동안 저지른 가장 비겁한 짓이였다”고 자신을 질책했다.  
105    국민당은 왜 남경을 수도로 정했는가? 댓글:  조회:6579  추천:2  2015-03-15
국민당은 왜 남경을 수도로 정했는가?   (번역)     1840년대부터 중국의 국가안전은 서방렬강의 위협을 받아왔다. 신해혁명후에 어느 곳을 중국의 새로운 정치중심으로 할것인가 하는 문제는 혁명당인들이 직면한 중대한 정치론쟁으로 되였다. 각파는 당시 무창을 새로운 정치중심으로 하는 파와 상해를 새로운 정치중심으로 하는 파로 갈라져 서로 다투었다. 무창은 신해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무창봉기가 일어난후인 1911년 11월 7일에 악군도독부는 신정부건립문제에 관하여 각지로 통지을 보냈다. 각성에서 전권위원을 무창으로 파견해서 림시정부를 구성하자는 내용이였다. 당시 혁명당인들의 정치적기반이 비교적 강한 곳은 동남연해지역이였다. 강소절강지역에서는 새로운 정치중심으로 상해를 주장했다. 강소도독 정덕전, 절강도독 탕수잠은 련명으로 호군도독 진기미에게 전보를 보내여 상해에 “림시회의총기관”을 설립하자고 요구했다.   중국의 새로운 정치중심을 어디에 둘것인가 하는 문제는 남경을 점령하면서 혁명당내부에서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했다. 1911년 12월 12일에 각성대표는 무한, 상해에서 남경으로 모였다. 그해 12월 29일에 각성의 대표회의가 남경에서 개최되였고 중앙림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1912년 1월 1일에 중화민국이 정식으로 성립되였다. 손중산은 남경에서 중화민국림시대통통에 올랐다. 혁명파는 잠시 론쟁을 거쳐 마침내 남경을 림시정치중심으로 결정했다. 이렇게 되여 당시 중국정치지리국면에서 두개의 정치중심이 생기게 되였다: 하나는 청왕조의 정치중심인 북경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당의 중치중심인 남경이였다.   손중산이 림시대통령직을 맡을 때에 “원세개가 공화제를 옹호하고 청나라황제를 퇴위시키면 나는 대통령자리를 양보하겠다”고 말한바 있다. 수도에 관하여 손중산은 남경이든 북경이든 모두 좋다는 립장이였지만 남경을 선호하는 편이였다. 1912년 2월 12일에 원세개는 청나라황제를 퇴위시켰다. 손중산은 사직하고 원세개로 하여금 그의 자리를 대체하게 했다. 그러나 손중산은 원세개에게 3개의 조건을 내밀었다. 그중의 2개조건은 남경을 수도로 하는것과 관련된다.   첫째, 림시정부는 남경에 둔다. 둘째 신임대통령은 남경에서 취임한다. 즉 원세개를 남방혁명파의 감독과 통제하에 두겠다는것이였다. 그외에 일본에 가있던 손중산에 대한 영향력도 회피할수 없는 문제였다. 신해혁명때 중국의 남북정권에 모두 영향력을 가지고있던 일본의 조정과 민간에는 중국의 정치중심을 남경에 두기를 원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일본의 생각은 아주 명확했다. 중국정치중심이 남으로 옮겨오는것을 리용하여 중국의 북방방어력을 약화시키자고 함이였다. 그렇게 해야 동북과 몽골에 대한 침략이 쉬웠기때문이다.   동맹회 회원들이 이 문제를 토론할 때에 북경을 수도로 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20명이고 남경을 수도로 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8명이였다. 나중에 손중산과 황흥이 남경을 수도로 하자고 견지하는 바람에 토론에 붙여 남경을 수도로 확정했다. 원세개는 자신의 세력권인 북방을 벗어나 남방으로 옮겨와서 혁명파의 견제를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북방의 군인집단도 정치중심의 남쪽이전을 바라지 않았다.   1912년 4월 2일에 원세개는 림시정부를 북경으로 옮기기로 결의했다. 손중산이 남경에 정치중심을 건설하려는 계획은 무산되였다. 원세개가 북경을 정치중심으로 고집한것은 그 나름대로의 음모가 있었다고 볼수 있다. 그렇지만 합리성도 있었다. 첫째, 북경을 선택하는 자체가 바로 각지역이 원하는 바였다. 둘째, 일본제국주의가 동북지방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상황하에서 북경의 정치중심을 유지하는것이 일본에 대응하는데 유리했고 황제복벽파를 막는데도 유리했다.   북경의 정치중심으로서의 지위는 1912년에서 1927년까지 유지되였다. 원세개의 통치기간동안 표면적으로는 강권정치였지만 원세개가 죽은후에는 북양군벌 3대파인 환계군벌, 직계군벌, 봉계군벌과 다른 지방군벌들이 할거하면서 정치중심으로서의 북경의 지위는 약화되였다.   1927년에 국민당이 북벌을 시작했다. 새로운 정치중심을 확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국민혁명군총사령관인 장개석은 처음에는 정치중심을 무한에 두는데 찬성했다. 나중에는 립장을 바꾸었는데 여기에는 두가지 리유가 있었다: 하나는 당생지가 기본적으로 량호(两湖)지역을 지배하게 되였기때문이다. 장개석은 당생지가 지배하는 호북과 호남지역에서는 자신이 총사령관의로서의 권위를 발휘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다른 하나는 북벌전에 광주지역은 홍색화되여있었기때문이다. 장개석이 무한으로 천도하는것에 동의했던것은 공산주의운동의 기반이 약한 량호지역을 선택하기 위함이였고 국민당내의 좌파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였다. 그러나 북벌로 무한을 점령한후에 무한의 홍색화정도는 광주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무한에 정치중심을 두는것은 국민당내의 좌파에 유리할것이 뻔했다. 이런 두가지 리유로 장개석은 남경을 수도로 정하게 되였던것이다.   장개석은 남경에 정치중심을 두었지만 당시에 무한에도 왕정위를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정치중심이 형성되였다. 얼마후에는 서산회의파가 상해에 또다른 국민당중앙당부를 결성했다. 이외에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군벌정권이 아직 소멸되지 않았다. 중국은 당시에 실제로 여러 정치중심이 병존하는 국면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면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7년 9월에 국민당내 각 세력은 타협을 이루어 특별위원회를 남경에 두기로 선포했다. 1928년 2월 2일에 국민당은 회의를 개최하여 상해, 무한, 남경에 3개의 당중앙이 있던 국면을 끝냈다. 같은해 6월에 장개석은 다시 북벌을 시작했고 북경을 함락시켰다. 곧 이어 동북의 장학량도 국민당에 합류하여 전국은 형식적인 통일을 이루게 되였다. 당시의 조건하에서 국민당은 중국의 정치중심을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기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북경의 전통적인 정치중심으로서의 개념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국민정부는 북경을 북평(北平)으로 개칭했다.   중국의 정치중심으로 된 남경은 중국에서 근 1000년동안 형성되였던 전통적인 정치지리국면을 뒤바꿔 버렸다. 중국은 력대이래로 국방요지인 장성이북지역에 대한 방어능력이 상당히 약화되였다. 중국의 정치중심이 남으로 이전된후 장개석은 중심지역의 통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됨에 따라 정부가 동남지역에서 상인들과 리권을 다투는 현상이 심해졌다. 이리하여 중국은 국가자본과 관료자본이 독점하는 기형적인 형태로 바뀌였다. 동남연해지역과는 달리 중국의 내륙지역에 대하여는 갈수록 덜 중시하게 되였다. 그 결과 농촌에 대한 국민당의 통치력이 갈수록 약화되였다.   정치중심을 남쪽으로 이전한것은 국가의 대외방어력에 빈틈을 생기게 한 실수였다. 이에 따라 국민당은 서방렬강과의 관계를 처리함에 있어서 영국과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일본에 대한 방어에 소홀하게 되였다. 일본은 제1차대전기간동안에 중국에 대한 침략을 확대하여 중국의 국가안전에 큰 위협을 미치는 상황이였다. 일본은 동북, 몽골을 점령하는것을 기본국책으로 정했다. 장개석이 군사력을 모아서 2차북벌을 시도할 때에 일본은 장개석더러 장강류역에 뿌리를 내리도록 요구하면서 북벌을 반대했다. 그 뜻은 중국이 통일되는것을 막겠다는것이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장개석이 남방에 수도를 정함으로써 북방에 대한 방어는 갈수록 약해졌다. 객관적으로 일본의 동북에서의 세력확장을 도와준 격이 되였다. 국민정부가 건립된후 5년의 기간내에 일본은 동북에 군대를 출병시키고 1937년에는 중국침략전쟁을 개시했다.   이 때문에 국민당은 큰 대가를 치렀다. 국민당의 정치중심남쪽이전과 소극적 항일은 일본군의 세력확장을 간접적으로 도와 결국은 국민당의 수도 남경까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는 참패를 겪게 했다. 장개석이 소극적으로 항일한것은 군사세력을 보존했다가 공산당을 소멸하기 위함이였다. 하지만 그것은 장개석의 오산이였다. 장개석은 조국땅을 짓밟은 외적은 못본척 하고 중국사람으로서 중국사람(공산당)을 쳤기때문에 인심을 잃었다. 수천년의 중국력사를 살펴보면 한때 세력이 아무리 강했더라도 인심을 잃으면 결국 력사의 무대에서 물러나는 꼴이 되였다. 물론 장개석도 그런 끝장을 면치 못했다. 만약 국민당이 정치중심을 북경으로 정하고 동북방어를 강화했더라면 일본은 쉽게 중국을 침범하지 못했을것이다. 
104    장경국의 부인 장방량의 파란 많은 일생 댓글:  조회:6133  추천:1  2015-03-08
  장경국의 부인 장방량의 파란 많은 일생   (번역)     2004년 12월 15일 점심에 장경국의 부인 장방량(蒋方良)은 대북에서 사망되였다. “중국의 제1가정”에 시집을 온 이 로씨야녀자는 대륙에서 란세의 시대를 겪었으며 대만에 쫓겨가서 적적한 일생을 보냈다. 이 세상과 고별할 때 그녀의 표정은 매우 평온했다. 1934년에 벨라루씨에서 구쏘련의 우라산으로 온 17세의 처녀 장방량은 중국에서 온 장경국을 알게 되면서부터 운명을 개변하게 되였다. 장방량은 본명이 분나였다. 부모를 여윈 그녀는 언니와 함께 살았다. 기술학교를 졸업한후 그녀는 우라산구의 중형기계공장으로 들어와 일하게 되였다. 그 시기에 그녀는 부공장장직을 맡고있던 니꼴라이를 알게 되였다. 이 니꼴라이가 바로 장경국의 로씨야이름이였다. 장경국과 장방량이 서로 알게 된 경과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가지 설이 있다. 한가지는 “영웅이 미녀를 구했다”는 설이다. 어느날에 장경국은 밤 11시가 넘을 때까지 연장근무를 하게 되였다. 일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서 장경국은 한 거구의 괴한이 처녀의 앞을 막고 희롱하는것을 목격했다. 장경국은 키가 크지 않았지만 용감하게 달려들어 몇주먹에 괴한을 넘어뜨렸다. 장경국이 구한 처녀가 바로 장방량이였다. 이렇게 되여 추운 겨울밤에 로씨야처녀는 중국청년을 사랑하게 되였다. 다른 한가지는 “미녀가 영웅을 구했다”는 설이다. 장경국은 씨베리아 알타이금광으로 찾아가는 도중에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다가 한 작은 역에서 앓아눕게 되였다. 작은 역에서는 오래동안 차가 통하지 않았다. 천리에 눈덮이고 사람이 희소한 이국땅에서 장경국은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되였다. 마침 그때 장방량은 기술학교에서 겨울방학을 하게 되여 집으로 돌아오다가 이 작은 역을 들리게 되였다. 그녀는 눈보라를 피하려고 물을 끓이는 방으로 들어갔다가 짚더미에 쪼르리고 누워있는 장경국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눈속에서 나무를 찾아 난로를 피운후 더운물을 끓여 장경국에게 마시게 했다. 그리고 자신이 휴대했던 빵을 주었다. 주린 배를 채운 장경국은 좀 기운을 차리게 되자 자신의 파란 많은 경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장방량은 이 중국청년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그후 우라산구의 중형기계공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였다. 1935년 봄에 장경국과 장방량은 우라얼중형기계공장의 로동자구락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년후에 중로혼혈아인 장효문이 태여났다. 아이가 있게 되자 황량한 씨베리아에서 고생하던 그들의 생활에 즐거움이 있게 되였다. 1937년 4월에 분나는 고향을 떠나 장경국과 함께 중국으로 왔다. 장경국은 그녀에게 “방량”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뿐만아니라 그녀더러 반드시 중국의 풍속습관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장방량은 “태자비”의 신분에 어울리도록 적응하느라고 매우 힘들었다. 정식으로 장씨가문에 들어서는 날부터 시작하여 장방량은 중국전통녀성의 미덕을 가진 녀성이 되도록 노력했다. 남편을 따라 중국에 오기전에는 비록 생활이 호화스럽지는 못했지만 매우 자유로왔다. 씨베리아는 비록 추웠지만 태여나서 자란 고장이였다. 그러나 중국에 온후에는 고국은 그저 꿈속에서만 나타나군 했다. 특수하고 관계가 복잡하며 례의격식이 번다한 대가정에서 매사마다 신중하고 말마디마다 조심해야 했다. 지난날의 분나는 자유로왔지만 중국에 시집온 장방량은 시부모와 남편의 뒤바지를 하며 참고 살아가야 했다. 그후 딸은 시집을 가고 관저내에는 두 로인만 남았다. 장방량은 적적하고 고독했지만 남편이 곁에 있어 의지가 되였다. 하지만 장경국이 사망되고 그후 8년내에 세 아들도 련이어 사망되는 바람에 그녀에게는 슬품만 남았다. 그녀는 늘 장경국의 사진과 네 아이의 사진만 멍하니 바라보군 했는데 한번 보기 시작하면 한나절이나 그렇게 시선을 사진에서 떼지 않았다.  
103    장씨 세습제를 종결지은 장경국 댓글:  조회:6127  추천:1  2015-03-01
장씨 세습제를 종결지은 장경국   (번역)     1975년 4월 5일 밤 11시 50분에 장개석이 사망된후 그의 맏아들 장경국(蒋经国)이 1975년 4월 28일에 국민당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75년에 장개석이 사망된후 송미령은 즉시 대만을 떠나 미국에 가서 장기적으로 거주했다. 외계에서는 모자간에 서로 응어리를 풀지 못했기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때의 장경국은 이미 실질적인 후계자였지만 중대한 일을 처리할 때마다 례모적으로 송미령에게 의견을 묻군 했다. 장경국이 “부대통령”을 선택할 때 송미령은 “신중하게 2인자를 선택하라”고 하면서 “우리 당의 종지를 진심으로 따르고 부흥대업의 집행을 견지”하는 사람을 선택할것을 권고했다. 후에 장경국이 선택한 “부대통령”은 리등휘였다. 송미령은 늘 사람들에게 “경국이가 국사를 처리하는데 나는 간섭하기 불편합니다”라고 말했다. 송미령은 리등휘에게 의견이 있었지만 결국 장경국의 선택을 존중했다. 정계에서는 장경국과 송미령이 화목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장경국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갔다. 1986년에 장개석의 탄생 100돐을 기념할 때 장경국은 송미령이 대만으로 오지 않으면 모자간의 불화설이 사실이란것을 증명해주게 되는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막내아들 장효용(蒋孝勇)을 미국에 파견하여 송미령을 대만으로 모셔오게 했다. 장경국으로 말하면 둘째아들 장효무는 성격이 충동적이고 딸 효장은 혼사때문에 장기간 미국에 숨어지녔기에 내성적인 장효용이가 가장 합당한 후계자감이였다. 장경국은 또 장효용을 자신의 정치사무를 협조해줄 적임자로 여겼다. 장경국의 부관 옹원의 화상에 따르면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은 장효용이 아버지에게 여러가지 사무에 대해 보고하는 날이였다. 민감한 정계의 인사들은 장경국의 그런 속셈을 알아내고 “태자”에게 잘 보이려고 모여들었다. 장경국도 많은 재주가 있는 청년들을 불러들여 장효용과 합작하고 교류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장경국은 만년에 “우리 장씨가문은 이후에 ‘대통령’선거에 참가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 말은 “장가왕조”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장경국이 장씨세습제도를 종결지은것은 력사학자들로부터 영명한 선택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8년 1월 13일에 장경국은 대북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78세였다. 중국지도자는 장경국의 불행한 서거에 심심한 애도를 표시하면서 1월 14일에 담화를 발표해 “장경국선생은 한개 중국원칙을 견지하고 “대만독립”을 반대하며 국가통일을 주장했으며 량안관계를 완화시키는데 공헌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중공중앙 및 해당인사와 대륙에 있는 장경국의 친척들도 모두 대북에 조전을 보냈다. 장경국은 행정원장임기내에 10대건설을 추진하여 대만경제를 신속하게 발전시킴으로써 대만을 “아시아의 네마리 작은룡”중의 하나로 되게 했다. 집정말기에 그는 민주개혁을 추진하여 대만정치를 민주화의 길로 이끌었고 “한개 중국”립장을 견지했으며 “대만독립”을 반대했다. 1987년 11월에 부분적 인사들이 대륙으로 나가 친척방문을 할수 있도록 개방하여 근 40년간 량안동포들이 서로 왕래를 못하던 국면을 결속짓게 했다. 1910년 4월 27일에 절강성 봉화에서 장개석과 모복매(毛福梅)의 맏아들로 태여난 장경국은 사실 대만인민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특히 기층민중들의 생활을 관심했다. 그는 매년 200차이상 농촌을 방문하여 지방의 진실한 정황을 료해했고 향촌건설을 중시했으며 수력발전 및 기초의료위생건설을 락실하여 도시와 농촌의 차별을 줄였다. 그는 지금까지 대만민중들에게 가장 환영받는 대통령으로 되고있다. 장경국의 동생 장위국(蒋纬国)과 장경국의 아들 장효용도 병으로 사망되자 송미령과 장방량(장경국의 부인)은 더욱 큰 타격을 받았다. 장씨가문은 모두 해외에 이민하여 다시는 정치사무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았다. 2003년 10월에 송미령은 뉴욕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106세였다. 송미령의 사망소식을 들은 전세계의 화교들은 추모활동을 벌렸다. 전국정협주석 가경림은 조전에서 “송미령녀사는 중국근대사에서 영향력이 있는 지명인사이다. 송미령녀사는 중국인민의 항일전쟁과 국가분렬을 반대하기 위하여 힘썼다”고 했다. 송미령은 유언을 남기지 않았고 구술로 력사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회억록도 남기지 않았다. 또한 개인의 비밀서류도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일생동안 중요한 력사사실을 많이 경험한 송미령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것은 중국력사에서 영원히 미봉할수 없는 손실이다. 이로써 장씨일가는 정식으로 력사무대에서 물러났다. 근 100년의 중국력사에서 장씨가문의 영향은 비범했다.      
102    허세우는 왜 두번째 안해를 용서해주지 않았는가 댓글:  조회:6803  추천:0  2015-02-22
허세우는 왜 두번째 안해를 용서해주지 않았는가   (번역)     허세우는 일생에 세번 결혼했다. 전쟁년대의 복잡하고 잔혹한 환경속에서 그의 혼인은 파란곡절을 겪었다. 허세우의 결발안해는 주석명(朱锡民)인데 허세우와 한고향사람이였다. 1901년에 출생한 주석명은 허세우와 네살 년상이였다.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한 주석명은 부지런하고 재간있고 천성적으로 착하여 일찍 허세우 어머니의 호감을 샀다. 허세우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주석명을 안해로 맞아들였다. 허세우는 결혼한지 사흘만에 작전명령을 받고 어머니와 신혼안해와 작별하고 전선으로 달려갔다. 전란으로 세상이 어수선한 세월에 허세우는 어쩌다가 밤중에 집에 가서 잠간동안 안해를 만나보았을뿐이다. 그후 황마봉기에 참가한 허세우는 봉기대오를 따라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후에는 홍군을 따라 장정길에 오른 허세우는 섬북에 도착했다. 허세우와 주석명은 아들 셋을 보았는데 맏이와 둘째는 모두 어려서 요절하고 셋째아들 허광만이 살았다. 허세우가 집에서 떠난후 가족들은 그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후에 허세우가 어느 한 전투에서 총에 맞아 사망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리밝고 대의명분을 잘 아는 허세우의 어머니는 며느리를 독수공방하게 할수 없었다. 허세우의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개가하라고 권고했다. 결국 허세우의 어머니주장으로 주석명은 성실하고 본분을 잘 지키는 농민한테 재가했다. 이렇게 잘못 전해진 소식때문에 허세우의 안해는 다른 사람의 안해로 되였다. 그 시기에 반동무장세력이 혁명가속에게 미친듯이 보복하기 시작했다. 허세우는 어머니가 보복을 피해 피난을 떠났고 안해와 아들이 살해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교롭게도 허세우도 잘못 전해진 소식때문에 다시 두번째로 안해를 맞아들이게 되였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몇십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백발이 된 허세우의 어머니는 아들이 살아있을거란 실날같은 희망도 버린지 오래 되였다. 바로 그때 전국이 해방되였고 허세우는 산동군구 사령원이 되였다. 허세우의 이름은 자주 신문에 실렸다. 허세우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주석명은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기쁜것은 자신이 날마다 그리던 전 남편이 살아있었다는것이고 슬픈것은 자신이 이미 다른 사람의 안해로 되여 허세우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수 없게 되였다는것이다. 그후 허세우는 어머니를 자신이 거주하고있는 제남으로 모셔왔다. 허세우의 어머니는 주석명이 효부였고 착한 며느리였는데 자신의 권고로 재가하였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 허세우는 탄식했다. 허세우가 두번째로 맞아들인 안해는 뢰명진(雷明珍)이다. 사천성 달현에서 출생한 뢰명진은 장정에 참가한 홍군전사이다. 뢰명진은 진보를 추구하고 일에서 박력이 있었기에 장정대오가 섬북에 도착한후 중앙조직부의 배치로 연안현에 내려가 부녀부장직을 맡았다. 허세우는 연안에 도착한지 얼마안되여 뢰명진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중매를 통해 서로 사랑하게 된 그들은 연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후 그들은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두터운 감정을 쌓았다. 세심한 뢰명진은 부대에서 양을 잡은후 버린 양털을 모아두었다가 실을 짜서 허세우에게 털옷을 떠주었다. 하늘의 조화는 알수 없다고 그들의 아름다운 인연은 장국도의 착오로선에 련루되여 좋은 결말을 보지 못했다. 1937년초에 허세우가 있는 홍군대학(후에 항일군정대학으로 개명했음)은 보안에서부터 연안으로 옮겨졌다. 항일군정대학에서 “장국도의 로선”을 청산할 때 투쟁을 확대화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때문에 항일군정대학에서 공부하던 홍군4방면군의 고급장령들도 련루되여 투쟁을 받았다. 홍군4방명군에서 온 학원들은 하나하나 모두 기가 죽어 머리도 들지 못했다. 허세우는 몹시 억울함을 느꼈다. “여기서 이 어른을 박대한다면 다른 곳으로 가야지. 이 어른을 받을 곳이 얼마든지 있을테니깐 우리 가자!” 원래 성질이 급하고 정치상에서 아직 성숙하지 못했던 허세우는 항일군정대학에서 공부하던 홍군4방면군의 고급장령들을 선동하여 비밀리에 사천에 돌아가서 유격전을 할 착오적인 생각을 했다. 그리고 떠날 준비를 하다가 일이 탄로가 나서 허세우 등 홍군4방면군의 수십명 고급장령들이 “반혁명집단을 조직한 죄”, “혁명을 배반한 죄”, “총을 가지고 도주한 죄” 등 죄명을 쓰고 갇히게 되였다. 허세우는 너무 억울하고 분했지만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는 처지가 되였다. 절망한 허세우는 죽기만을 바랐다. 그런 처지에서 그는 안해 뢰명진이 몹시 그리웠다. 그는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서 안해한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으니 한번 만나러 오라고 햇다. 안해한테 함께 백년해로 할수 없게 된것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것이다.    그런 부탁을 한후 이제나저제나 안해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허세우는 뜻밖에도 안해의 절교신을 받게 되였다. 편지에는 “허세우, 전 당신이 미워요. 전 절대 반혁명분자를 사랑하지 않을거예요. 우리 리혼합시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 편지는 허세우에게 청천벽력이 아닐수 없었다. 허세우는 자신이 곤경에 처하여 친인들의 위안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에 안해가 그토록 무정하게 배신할줄을 생각도 못했다. 이 일은 강철같이 억센 사내대장부인 허세우에게 일생동안 아물기 힘든 상처를 남겨놓았다. 후에 모택동이 친히 “장국도투쟁”을 확대화한 착오를 시정하였기에 허세우는 무사히 풀려날수 있었다. 그때에야 뢰명진은 자신의 일시적인 충동으로 경솔하게 내린 결정을 후회하면서 여러번이나 허세우를 찾아와서 잘못을 빌면서 재결합을 하자고 애원했다. 하지만 허세우는 용서해주지 않았다. 뢰명진이 주덕, 진갱, 진석련 등 허세우의 상급과 로전우들을 청하여 허세우의 마음을 돌려세우려고 했지만 허세우는 “안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허세우가 세번째로 맞아들인 안해는 전보(田普)였다. 1922년에 산동성 래양에서 출생한 전보는 허세우보다 17살이나 년하였다. 그들은 환난을 함께 한 진정으로 금슬이 좋은 부부였다. 허세우와 전보는 1941년에 결혼하여 2자 4녀를 낳아 키우면서 44년이란 세월을 함께 살았다. 1939년 가을에 허세우는 중공화북국 당학교에 가서 공부하게 되였다. 얼마후 주덕의 추천과 모택동의 비준을 받아 산동종대로 전근되여 제3려 려장직을 맡았다. 그때로부터 16년동안의 산동전투생활이 시작되였다. 또 거기서 허세우의 세번째이자 마지막 사랑이 시작되였다. 1941년에 허세우는 이미 36살이 되였지만 여전히 독신이였다. 늘 병사들을 거느리고 전투를 하느라 눈코뜰새 없었지만 곁에서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그의 생활은 엉망이였다. 그의 부하들은 그가 혼자서 고생하는것을 보다못해 그에게 배우자를 소개해주려고 상의했다. 후근부장 고대산은 근거지의 병기공장에서 일하는 품행이 단정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처녀를 허세우에게 소개해주려고 마음먹었다. 고대산은 허세우를 모시고 병기공장으로 선을 보러 갔다. 병기공장문앞에 도착하자 허세우는 고대산이 소개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안에서 일하는 처녀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내 보기에는 저 처녀면 좋겠소”라고 말한후 말을 타고 돌아갔다. 허세우가 가르킨 처녀는 전명란(田明兰)이였다. 전명란은 후에 전보라고 이름을 고쳤는데 그녀가 바로 고대산이 허세우에게 소개해주려고 했던 처녀였다. 당시는 항일전쟁이 가장 간고하던 세월이였기에 그들에게는 꽃그늘과 달빛아래의 랑만도 없었고 아기자기한 속삭임도 없이 번개식 결혼을 했다. 허세우의 말대로 “서로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가를 물은후 둘 다 동의한다고 해서 5분만에 통쾌하게 결혼”했던것이다. 허세우와 전보가 결혼한후 조직에서는 허세우의 생활을 보살펴주기 위해 정식으로 전보를 허세우의 생활비서로 배치했다. 전보는 허세우를 살뜰히 보살피며 최선을 다해 내조했다. 허세우와 전보는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44년이란 세월을 사랑했다. 전보는 허세우를 애틋이 추억하면서 “허세우의 수많은 전기적인 영웅적 사적은 나를 깊이 감동시켰습니다. 그이는 나의 엄한 스승이면서도 친구였습니다”라고 말했다. 허세우도 생전에 감탄하면서 “전보는 나의 일생에서 가장 충직한 동반자입니다. 래세가 있다면 나는 또 전보를 안해로 맞아들일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복건당사월간》
101    청년시절에 거지행세를 하며 돌아다닌 모택동 댓글:  조회:6191  추천:0  2015-02-16
청년시절에 거지행세를 하며 돌아다닌 모택동   (번역)     모택동의 사적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알고있지만 그가 청년시절에 동학 소유(萧瑜)와 함께 거지행세를 하며 돌아다닌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소유는 저명한 시인 소삼(萧三)의 형으로서 모택동과 함께 신민학회를 발기한 인물이다. 1916년 여름에 모택동과 소유는 몸에 1전한푼도 지니지 않고 천리길을 걸어서 장사, 녕향, 안화, 익양, 원강 5개현을 돌아다녔다. 1916년 7월에 장사제1사범학교에서 공부하고있던 모택동과 소유는 사회에 대해 료해하기 위해 여름방학기간을 리용하여 거지처럼 화장하고 호남성을 돌아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우산과 자그마한 헝겊가방을 하나씩만 휴대하고 길을 떠났다. 헝겊가방안에는 옷한벌과 세수수건, 종이, 펜 등 간단한 물건이 들어있었다. 그들은 몸에 1전한푼 지니지 않고 걸어서 길을 떠났다. 상강앞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첫번째 난관에 부딪쳤다. 돈이 없어서 강을 건널수 없었던것이다. 그들이 거듭 사정해서야 배사공은 그들을 배에 오르라고 했다. 강을 건넌후 그들은 장사에서 녕향현으로 가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걷다보니 시간이 가는줄도 몰랐다. 배가 고파서야 그들은 비럭질을 시작했다. 그들은 길옆의 농가를 찾아다니며 밥을 빌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배를 곯고있는 처지인지라 좀처럼 음식을 주지 않았다. 여러집을 돌아다녀서야 배를 절반쯤 불릴수 있었다. 그들은 밥을 빌어먹기가 쉽지 않다는것을 깨달았다. 후에 그들은 지식인의 집을 찾아가 보기로 결정했다. 어느날에 그들은 류씨성을 가진 로신사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들은 먼저 밥 한그릇을 달라는 뜻의 시 한수를 써서 로신사에게 드렸다. 그들의 재주에 탄복한 로신사는 그들을 청하여 한끼를 대접한후 려비로 쓰라고 40전까지 주었다. 류씨댁에서 나온 그들은 시내물을 따라 걷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강뚝아래에서 로숙하기로 마음먹었다. 피곤했던 그들은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모택동이 밤중에 깨여나보니 소유가 어느새 굴러갔는지 부근의 나무아래에서 자고있었다. 다시 잠을 자려던 모택동은 멀지 않은 곳에서 호랑이 한마리가 웅크리고있는것을 발견했다. 모택동은 몹시 놀라고 두려웠지만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생각나서 살금살금 소유한테로 기여갔다. 호랑이가 아직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했으니깐 소유가 깨여나서 소리지르는것을 방지하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모택동은 소유의 옆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지켰다. 그런데 날이 밝은후에 보니 호랑이로 보였던것은 원래 커다란 돌이였다. 두 사람이 방금 일어났는데 풀숲에서 뱀이 나타나서 그들한테로 다가왔다. 깜짝 놀란 그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여갔다. 그후부터 두 사람은 다시는 야회에서 밤을 자지 않기로 약속했다. 녕향현소재지에 도착한후 모택동은 며칠동안 거지생활에서 받은 감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총결지었다. “몸에 1전한푼도 없이 지내기는 매우 힘들지만 머리를 쓰면 끝까지 견지할수 있고 어떠한 곤난이든지 극복할수 있다.” 이튿날에 그들은 녕향현 소재지에 도착했다. 그때 그들은 동창생 진소휴와 하숙형이 이 부근에서 살고있다는 생각이 나서 찾아가보았다. 그들은 먼저 진소휴의 집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주위의 농가들에 대해 조사했다. 그들은 조사를 통해 농민들이 량식이 모자라고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다는것과 대부분 농민들이 50세까지도 살지 못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 기간에 그들은 농민들과 함께 물도 긷고 밭일도 하면서 생활체험을 했다. 다음 그들은 하숙형의 집으로 찾아갔다. 하씨댁은 자체로 돼지를 기르고 농사질을 하면서 자급자족하는 전형적인 농민이였다. 하숙형의 아버지는 자신의 농장, 돼지우리, 논밭을 참관시켰다. 그는 자신의 두손으로 분투하여 가업을 일떠세운 이야기를 하면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에 매우 만족하고있었다. 하로인이 열정적으로 만류했기때문에 모택동과 소유는 그의 집에서 이틀이나 묵다가 길을 떠났다. 길에서 모택동은 하로인과 함께 지냈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면서 감개가 무량했다. 얼마나 소박하고 선량한 로인인가? 자신의 하로인은 자신의 로동으로 자급자족하는 생활에 만족하고있었다. 그런데 불행한것은 헐벗고 굶주린 농민들이 많다는것이였다. 모택동은 무수한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가 없어 다른 사람의 머슴살이를 하는것을 보았다. 농민들은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서 밭에 나가서 죽도록 일하다가 밤늦게 돌아오지만 자신의 로동성과는 모두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사람마다 자신의 토지가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모택동은 그런 세상을 만들고싶었다. 두 사람은 안화에 도착한후 계속 익양으로 향했다. 현소재지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10시쯤 되였다. 아침식사를 하지 않았기때문에 체면을 무릅쓰고 차집으로 들어갔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소유가 남겠다고 했기때문에 모택동은 방법을 대여 돈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두개의 골목을 돌면서 구걸했지만 21전밖에 얻지 못했다. 두 사람은 상의한후 점포에 주련을 써주는것으로 소비돈을 해결하기로 했다. 모택동은 붓을 날려 주련을 써주었는데 모두들 글씨가 멋지다고 찬탄했다. 한번은 차집주인과 한담을 하게 되였다. 원래 차집주인은 선비였는데 생활의 핍박에 의해 차집을 경영하게 되였다. 주인은 자호감을 가지고 말했다. “나에게는 아들 셋이 있는데 두 아들에게는 장사를 하게 하고 한 아들에게는 글을 읽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니 가문에 긁읽는 기풍이 유지되고 넉넉하게 살수도 있게 되였죠.” 주인은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지만 모택동은 주인의 결정이 아주 리기적이라고 인정했다. 가정의 리익만 생각하고 아들들의 소원과 사회의 정체리익은 안중에도 없었기때문이다. 모택동은 소유를 보고 말했다. “중국인들은 가정관념을 매우 중하게 여기기때문에 민족감정이 결핍하지요. 훌륭한 국가는 인민을 보호하기때문에 인민은 국가를 보위할 의무가 있습니다. 인민은 마땅히 나라를 생각해야지 자기 가정의 리익만 생각해서는 안되지요.” 여기까지 말한 모택동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가장 중요한것은 강유력한 정부가 있어야 한다는것이지요. 훌륭하고 강유력한 정부를 세우기만 하면 인민은 능히 조직할수 있습니다!” 그들이 익양을 떠나려고 준비하고있을 때 벽에 붙은 현장고시를 보게 되였다. 그때에야 그들은 익양현 현장이 바로 제1사범학교의 화학선생으로 계시던 장강봉선생이란것을 알고 찾아가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대문을 지키는 위병이 그들이 거지라고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그들이 오래도록 버텨서야 위병은 하는수없이 장현장에게 아뢰였다. 장강봉은 그들의 이름을 듣고 모셔오라고 분부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장강봉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몇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거지가 현장의 귀빈으로 초대된것이였다. 이튿날에 그들이 떠날 때 장강봉은 위병을 시켜 그들을 성문밖까지 바래다주게 했다. 익양에서 다시 출발한 그들은 원강을 따라 걸으면서 장강봉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느날 저녁에 그들은 한 자그마한 려관에 도착했다. 다른 손님이 없었기때문에 녀주인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모택동은 “우리는 거지인데 장사로부터 걸어서 왔습니다. 이미 천리길을 걸었지요”하고 말했다. 녀주인은 크게 놀라면서 “제가 관상을 볼줄 아는데 한눈에 두분이 대단한 인물이란걸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거지라니요?”하고 말했다. 그 말에 두 사람은 웃고 녀주인도 따라 웃었다. 이튿날에 두 사람이 떠날 때 녀주인은 그들을 바래주면서 “저는 호여영이라고 불러요. 이후 모선생이 출세하면 제가 모선생의 참모노릇을 할게요”라고 롱담조로 말했다. 두 사람은 호여영과 작별하고 몇시간의 길을 걸어서 원강현에 도착했다. 그러나 미처 생각지 못한것은 빙설이 녹으면서 장강에 물이 넘쳐 원강현이 완전히 외계와 차단된것이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배를 타고 장사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장사로 돌아오는 배우에서 모택동은 옷을 잘 입은 두 사람이 아주 사소한 일로 손찌검을 하며 싸우는것을 목격했다. 모택동은 사람의 도덕수준을 가늠하는것은 금전이 아니라 지식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장사에 도착한후 두 사람은 이번의 경력을 기념하기 위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의 두 사람은 해여진 옷에 짧은 바지를 받쳐입었고 짚신을 신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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