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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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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2월 08일 09시 29분 ]     감숙(甘肃)성 어느 한 농가에서... 감상에 대하여  작품을 감상할 때, 부질없는 선입관념에 사로잡혀서는 아니 된다. 더구나 그것에 무슨 뜻을  캐려 하거나, 작품을 해석하려고 들면, 시가 지니는, 가장 소중한 생명을 손상하게 된다.  다만 그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게 하라. 작품에서 빚어 놓은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읽는 자의 내면에 그것을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작품(시)의 완전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비비새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  멀리 떨어진,  논 벌로 지나간  전선줄 위에,  혼자서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한참을 걸어오다  되돌아 봐도,  그 때까지 혼자서  앉아 있었다.  < 돌아오는 길·박두진>  이것은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박두진 씨의 작품이다. 이 작품을 감상하는 가장 옳  은 방법은 의 모양을 독자가 머릿속에서 그려내는  일이다. 그리고, 비비새를 뒤돌아보며 길을 가는 소년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일이다.  시에서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은 이 이미지에서 받게 되는 감동이다.  요는 시작품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작자가 인생 체험 속에서 발견된 그들의 절실하  고 진실한 것을 이미지를 통하여, 형상화시켜 놓은 세계이다. 물론 말이 매개체가 되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이와 같이 그들의 진실을 이미지로서 형상화한다는 것이 그  작자의 상상력이며 또한 문학작품이 창조물인 이유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작품을 올바르게 감상시키려면 작품 속에 빚어 놓는 이미지를 어린 그들의 머  릿속에 보다 선명하게 떠올리게 하는 일이다.  박두진 씨의 가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가. 그것은 감상을 지도하는 자가 미리 설  명할 것이 못 된다. 오히려 설명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이 작품의 참된 아름다움이나 가치  가 사라져 버리게 된다.  만일 어린 그들의 머릿속에 의 영상이 선명하게 떠오르면  그들은  ―참 쓸쓸하다.  ―외롭다.  ―외롭고 쓸쓸하고도 서럽다.  라는 감탄이 쏟아져 나올 수 있다.  작품을 감상한다는 행위는, 직접 경험의 세계다. 말하자면 직관적 행위라 할 수 있다.  잘 자는 우리 아기  꼭 감은 눈에  엄마가 사알짝  입맞춰 주고.  잘 자는 우리 아기  꼭 감은 눈에  달빛이 살며시  입맞춰 주고.  잘 자는 우리 아기  꼭 감은 눈에  포도넝쿨 그늘이  입맞춰 주고.  필자가 어릴 때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을 감상할 때에는 달빛이 새어드는 밤에 두 눈을 꼭  감고 잠드는 아기 ―그 아기의 평화스러운 얼굴에 포도넝쿨 그늘이 아른거리고,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아기의 볼에 입을 맞추는 이 꿈에서처럼, 독자의 머릿속에 떠오  를 때 비로소 넉넉한 이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공감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 동시 감상의 구체적인 방법 >  교실 안에서 작품(동시)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시를 감상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는 것이 일정해 있을 리가 만무하다. 다만 교실의 분위기를 보아서 지  도자가 그 방법을 택할 도리밖에 없다. 혹은 시의 성질에 따라 그 방법도 달라질 수 있다.  위에서 동시를 감상하는 최상의 길은 이미지를 어린 그들의 머릿속에 떠올리게 하는 일이라  했다. 그러므로 작품에서 빚어놓은 이미지를 쉽사리 떠올리도록 유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며, 그것은 얼마든지 방법을 달리할 수 있다.  만일, 낭송하여 더욱 효과적인 작품이라면, 낭송을 시킬 것이며, 묵독하여 효과적인 작품은  묵독하게 할 것이다. 묵독을 시킬 때, 은 졸렬한 방법이다. 이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말에서 울림이 죽어지면, 그것은 감정이 죽은 말이다. 비록  소리를 내지 않는다더라도, 입안에서 읽게 되면, 그 울림이 이것은  시를 읽을 때,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이것이 언어의 뉘앙스를 베풀고, 감정을 움직이게 한  다.  또, 정확하게 읽힐 것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시에서 한 줄 한 줄은 호흡을 조절하고, 쉼표  는 감정의 굴절을 표시한다.  아아,  우리집을  그려보자.  라는 시귀가 있다면, 다음에 잠시 쉬게하고, 라고 읽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처럼 한줄로 줄줄 흘려 버리는 감정이 아니기 때  문이다.  또 되도록, 나직하게 읽혀야 한다. 목청을 돋구어 버리면, 작품 속에 담겨 있는 이미지를 머  릿속에 그릴 겨를이 없다.  ―읽히는 문제에만 치우친 것 같다. 그러나, 마음속에 스미도록 읽히는 방법이 시를 올바르  게 감상시키는 최상의 길이며, 그 이외 다른 방법은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다. 정, 작품이 복  잡한 것이라면 지도자가 그 시의 이미지를 미리 설명해 주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해서 설명이 지나쳐 버리면, 그 작품에서 빚어 놓은 것과는 엉뚱한 것이 되어 버릴  우려가 있다.  ====================================================================     시월에 ― 문태준(1970∼ )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무더기 헤죽, 헤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 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돈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10월이 되면 이 시가 꼭 첫머리로 떠오른다. 10월과 문태준 시인의 조합은 지극히 옳은 만남이라고 생각된다. 시인은 비어 있음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비어 있으면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시인은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고 알려준다. 말이 좀 어렵지만 진짜 그렇다. 비어 있음 안에는 비어 있음의 쓸쓸함과 풍경과 느낌들이 들어 있다. 그의 시를 읽으면 그런 비어 있음과 채워져 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참 좋다. 좋은 만큼 지극히 쓸쓸한 것은 그의 시를 읽을 때 함께 담아야 하는 덤이다.   10월은 텅 비어가는 시절의 첫머리에 해당한다. 우리는 덜어내고, 비워내고, 털어내야 할 때가 오고 있음을 본다. 그러기에 풍성함은 더욱 감사하고, 사그라드는 것은 더욱 애잔하다. 그것을 이 시인은 어쩜 이렇게 딱 그려냈을까. 시인은 시든 오이나 꽃빛처럼, 10월의 운명에 처한 상실의 대상들을 잘 포착하고 있다.   뭔가 다 사라지고 있구나, 이런 상실을 너무나 잘 깨닫는 이유는 이미 상실을 너무나 잘 경험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집에 와서 혼자서 찬밥을 물에 말아 먹었다고 썼다. 반찬 없는 것도 속상한데 온기도, 식구도, 사랑도 없다. 아무리 ‘혼밥’ ‘혼술’이 대세라지만 시월은 원래가 쓸쓸한 계절이기 때문에 이 시기의 혼자는 더 쓸쓸하다. 반대로 생각하자면 아마도 10월은 역시 사람의 온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9    시, 작문써클선생님, 그리고 아이들 미래... 댓글:  조회:3131  추천:0  2016-12-07
시를 통해 아이의 마음을 열다   곽영화(창녕 대지초)   5년 전 2학년 담임을 맡았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는 것처럼 맡은 아이들 모두가 나름의 사랑스러운 점을 가지고 있겠지만 처음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아이가 있다. ○○이가 바로 그런 아이였다. 선생님들 말을 들어보니 엄마가 아빠 때문에 집을 나갔단다. ○○이는 어려운 환경 탓인지 또래들보다 성숙한 면이 있었다.그런데 자주 감정조절을 못해 화를 터뜨리기도 했고 반항도 했다. 나는 불러다가 학교에서라도 엄마가 되어주고 싶으니 잘 지내보자고 타일렀다. 나는 그 아이가 걱정되어 다른 아이들보다 자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그럴 때마다 그 아이는 엄마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생각도 하기 싫다.’라는 표정이 아니라 ‘정말 기억이 안 난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물론 그 아이의 말은 진심이 아니고 아직 나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는 영리한 아이였다. 한 달 정도 시를 공부하고 나니 시가 뭔지 감을 잡는 눈치였다. 아님 나의 의도를 눈치 챘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가 엄마 얘기를 꺼내길 바라면서 슬펐던 이야기를 주제로 시를 써보게 했다. ‘팔려가는 소’를 공부하고 시를 쓸 때 옆에 가서 살짝 엄마 이야기를 써도 된다고 힌트까지 줬다. 그런데 ○○이는 자기 집 강아지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게다가 시에 담긴 아이의 마음이 솔직한 마음인지도 궁금했다. ○○이가 아버지를 훌륭하다고 느낄 만한 환경 속에 살고 있지는 않았기에 조금 의아했고 보여준 시와 비슷하게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자세히 읽어보니 엄마에 대한 마음이 엿보였지만 아이 자신은 그냥 강아지 이야기를 쓴 거다.그 다음 쓴 시도 그냥 자신이 최근 경험한 이야기를 썼다.   팔려간 강아지   저번에 아빠가 통닭을 사와서 먹고 내가 뼈다귀를 예삐한테 줬다. 그런데 그 날 예삐가 강아지를 낳았다.   7개월 후, 내가 밥을 주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새끼를 살라고 왔다. 강아지를 갖고 갈라고 “우리 예쁜 새끼!” 그러면서 잡았다. 그 때! 예삐가 물었다. 새끼보고 가지말라고 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이 망할년!” 하며 몽둥이로 때렸다. 아빠가 “아이고, 진짜 그만 하이소.”라고 했다. 나는 아빠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2009.4.13)   개구리 두 마리   물을 뜨러 갈 때 뭐를 밟은 것 같았다. 미끌미끌했다. “뭐지?” 발을 들었는데 개구리였다. 개구리 두 마리 폴짝 간다.   고양이가 장애물을 뛰어 넘는 것 같다. (2009.5.29) ‘이 아이는 정말 엄마가 그렇게 그립지는 않은 걸까? 이 아이에게 별 문제 아닌 것을 내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있는 꼴은 아닐까?’ 생각할 즈음 ○○이는 드디어 조금씩 속내를 드러냈다. 우산을 쓰고 밖에 나갔다 온 뒤 시를 썼는데 생각도 못한 엄마 이야기를 시로 쓴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신나게 놀다 들어와 밖에서 보았던 것을 썼다. 이 시를 읽으니 그동안 ○○이가 ‘엄마 생각 안 한다.’는 말이 다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아이는 엄마가 무척 그리웠던 것이다. 그 이후로 ○○이는 내게 엄마 이야기도 하고 속에 있는 이야기를 억지로 숨기지는 않았다.   비는 어머니 눈물이다   우산은 비를 맞는다.   우산을 내리니 어머니 생각이 난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가려고 하셨다. 그 때 어머니는 내 머리 위에 눈물을 쏟았다. 내가 “엄마, 왜 울어?”하니 “아니야.”라고 하셨다.   지금 비는 그 때 내 머리 위 눈물이다. (2009.06.22)     너구리   찻길 옆에 너구리가 죽어있었다. 어젯밤에 차에 박은 것 같다. 죽기 전에는 행복했을 텐데. 부모님이랑 행복하게 살면 좋았을 텐데. (2009.09.22)   2학기 말이 되자 ○○이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자신을 드러냈다. 그만큼 나를 편하게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하니 기뻤지만 또 한편으론 그 아이의 진짜 마음을 알고 나니 참 안쓰러웠다. 최근에 가장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걸 시로 써 보자 했는데 ‘공개수업’이란 시를 썼다. 얼마나 속에서 터져 나왔으면 망설임 없이 줄줄 쓰더니 마지막 말은 그동안 어찌 참았나 싶을 정도로 정곡을 찌른다.     공개수업   금요일에 공개수업을 한다. 조회시간에 교장 선생님께서 “내가 산에 있는 감나무 밭에 감보다 못하냐고 하루 농사 쉬고 오시라고 말씀드려라.”하셨다. 나는 그 말이 싫었다. 아빠에게 “아빠, 금요일에 오셔야 해요.”하니까 아빠가 “금요일에 못 가는데.” 그래서 내가 “안 오셔도 되요…….” 라고 했다. 근데 마음속으론 ‘이래서 엄마가 꼭 있었음 좋겠고 다른 친구들이 그저 부럽기만 하다.’ (2009.11.24)   지금 돌아보면 그 때 아이들에게 시를 쓰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아이의 진짜 마음을 1년이라는 시간동안은 절대 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시를 쓰려면 돌아보지 않던 자신의 마음을 열어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시를 쓸 수 없다. 그렇게 열린 마음은 내게만 열리는 게 아니라 그렇게 쓴 시를 읽는 사람에게도 열린다. 1년 쯤 뒤 ○○이는 내가 더 이상 담임이 아닌 내게 선물을 하나 주었다. “그냥 선생님 가지세요.” 다른 말은 없었지만 그 어떤 말보다 많은 말들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아이의 시를 볼 때 그 아이를 생각한다.     
윤의섭의 포에티카 4 시를 쓰고 읽고 사랑하는 방식     1. 쓰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아우슈비츠에 대해서는 리오타르, 라바르트, 아렌트 등이 철학적 책임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알랭 바디우는 왜 철학이 아우슈비츠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하는가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판단은 그것이 역사이므로 정치에 맡겨야 한다는 말이다. 주지하듯 알랭 바디우는 정치와 봉합된 철학의 분리를 주장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아도르노는 왜 아우슈비츠를 서정시의 종언을 선언하면서까지 시와 관련짓고 있는 것일까. 아도르노의 발언은 서정시를 쓰지 않는 행위를 통해 시가 아우슈비츠를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도르노의 계몽적 의도는 서정시의 종언에 있지 않다. 아도르노는 그 끔찍한 역사 이후에 인류가 행해야 할 반성적 사유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시를 쓴다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혹시 아도르노는 서정시를 아름다움이라는 말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슈비츠라는 공분의 사건을 겪은 이후의 인류로서는 더 이상 서정시-아름다움을 거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서정시는 아름다움과 동일어가 아니다. 이 점은 서구에서 말하는 ‘lyric’의 의미를 고려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 잘못된 대전제로 인해 아도르노의 발언은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되었다. 오히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는 더 쓰여야 할 것이었다. 서정시는 아름다움을 포함하여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서정시는 시의 한 장르로 인식된다. 그런데 시는 그 자체가 서정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서정시가 있어서 서정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정이 있어서 서정시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서정으로 우리는 많은 시를 써왔다. 서정이란 한자 그대로 보면 감정을 풀어낸다는 뜻이지만 우리는 이 말에 보다 더 많은 의미가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정’이 다양하다는 것에서만이 아니라 ‘서’라는 행위에 의해 그러하다. 감정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서정은 무궁무진하게 나타난다. 결국 감정을 어떻게 풀어내는가 하는 문제는 감정을 어떻게 써내는가 하는 문제이다. 시를 쓴다는 행위는 각양각색의 양태로 감정을 펼치는 것이고, 따라서 서정은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시를 ‘쓴다’는 행위는 시가 제작이라는 전통적 인식을 염두에 둔다면, 감정이 보다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해 표현을 만들어 가는 행위인 것이다. 잘 만들려면 대상을 명확히 꿰뚫고 있어야 하며,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고, 통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영역을 벗어나면 통제할 수 없는 감정만이 난무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쓴다는 것은 감정이라는 대상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안에서 그것을 주무르고 마음 가는대로 조각해 나가야 한다. 시는 ‘쓴다’는 행위가 즐거운 고통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 그것을 갖고 창조해 내는 과정은 즐거운 것인 동시에 마냥 쉽지 많은 않기에 고통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쓴다는 말과는 전혀 다르다. 다만 우리는 서정을 드러낼 뿐이다. 이 행위가 어떠한 이유로든 ‘불가능’하다면 다른 ‘가능’은 무엇인가.   2. 읽다 시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읽는다는 것은 수직으로 펼쳐진 바다의 절벽을 미끄러지듯 떨어지다 갑자기 대지 위에 부딪치고 마는 과정이다. 그것은 황홀한 추락이지만 추락의 그 순간마저 비상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면, 시 읽기라는 것은 행복이다. 그런 시를 읽게 된다면 행운이다. 행복과 행운을 거머쥐기 위해 우리는 시를 찾아 읽는다. 저버리기 위해 읽지는 않는다. 한 번 보고 다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읽기를 저어한다. 그러므로 시 읽기는 노력이다.   시를 읽을 때 절벽을 타고 떨어지기를 거부하거나, 혹은 무서워서, 혹은 위에서 내려다만 보고 그 깊이를 짐작만 하고 마는, 겉핥기의 행위를 하는 부류도 있다. 단지 바다 위로 드문드문 솟은 섬이나 튀어 오르는 고래의 등만을 보고 다 맛보았다는, 아니면 뛰어내리긴 했으나 전혀 엉뚱한 경로로 무사착륙만을 시도하는 읽기는 어떤 결과의 매도를 가져오는가. 시는 매도될 대상이 아니다. 시는 주마관산하듯 스쳐 볼 대상이 아니다. 시는 자신의 품속으로 들어오고자 애쓰는 자에게만 자신의 품을 연다.   시라는 원천에서부터, 시라는 바다에 대한 한없는 밀착에서부터 제대로 된 읽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겉핥기식 읽기는 다시 겉핥기식 읽기에 대한 겉핥기식 읽기로 이어지고, 이 과정은 되풀이 되며, 결국 시라는 원천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원천과 전혀 관계없는, 겉만 핥은 읽기가 퍼트린 지독한 바이러스만이 남는다. 이 바이러스는 곳곳에 전염되어 알 수 없는 아성을 쌓아가고 그리하여 시가 아니라 시를 읽은 자의 생각만 복제된다. 이 원본 없는 복제 공화국에서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시를 읽는 행위는 정말로 고투다. 이 행위에 돌이 날아든다. 이 행위에 비난이 쏟아진다. 그것은 틀렸다고. 그것은 구구절절하다고. 그것은 과거의 것이라고. 그러나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상투적인 요구에서가 아니라, 진정 시는 시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문자로 기록된 현대의 시는 대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읽는 방식을 취한다. 이는 문자의 배열과 구성방식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는 전반적으로 지그재그의 방향으로 의미를 전달한다. 우리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읽어가는 과정을 거치며 시의 의미를 누적시켜 나간다. 그러나 이 방향성은 일차원적인 것이다. 시를 읽는 과정에서 우리는 행과 연을 사이에 두고 서로 동떨어진 왼쪽과 오른쪽이, 위와 아래가 서로 교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교류를 통해 형성되는 교직으로 인해 의미의 그물망은 세포 크기만큼이나 촘촘해진다. 그뿐이 아니다. 그물망은 이제 의미의 저층위까지 내려가 입체로 변한다. 실타래가 연상된다. 종횡무진 교류하는 의미망으로, 그 현란한 춤사위로 정신이 아뜩해진다. 우리는 시를 읽으며 춤을 추다 읽기를 멈추고서도 계속 춤을 춘다. 이것이 시 읽기의 방식이다. 시는 우리를 춤추게 한다.   3. 사랑하다 학생들에게 시에 대한 얘기를 한다. 다 그렇듯이 시를 가르치고 익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선 보다 많이 시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동시에 시를 진정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아무리 좋게 평가하기 어려운 시가 있다 하더라도, 그조차도 시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좋지 않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무궁무진해야 한다. 어떤 시간엔 그것을 음독하다가 평소 눈여겨보지 않았던 시인의 시가 새롭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내가 편식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점이었다. 물론 깊이 없는 강요, 표피만 있고 살은 없는 번지르르함, 식상한 어투, 모방적 표현 등등으로 일부 저평가할 수밖에 없는 시들이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이 늘 그렇게만 쓰리라는 보장도 없고, 또 내가 보는 방식이 나만의 방식일 수도 있으며, 일부러 그렇게 쓰진 않았을진대, 그러한 시 안에 들어 있는 시인의 마음은 감히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애정을 갖고 다시 들여다본다. 잘잘못이 있다면, 그것이 나아가야 할 방향쯤 지적할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된다면, 학생들에게 타산지석의 지표로 가감 없이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 시를 사랑하는가. 그리고 시를 쓰는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부족하므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므로, 나는 시를 , 그리고 시를 쓰는 나를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이미 그래왔었겠지만 다시 한 번 결심한다. 처음 시를 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시를 쓸 때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시로써 세상을 담아내고자 할 때의 자신감과 설렘이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믿는다. 시인이라면 무릇 그래야 할 것이다.   올 한 해에도 수많은 시가 발표되었다. 한 문예지를 통해 재수록 시에 대한 작품평을 다달이 하고 있는 중이다. 그 많은 시 중에서 한 편만을 얘기해야 한다는 것은 부당한 방식이긴 하지만, 그 많은 시 중에서 한 편만을 얘기해야 한다는 것은 타당한 방식이기도 하다. 시는 부단한 자기발전을 통해 진화해야 한다. 새롭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 시라는 장르가 규정될 수 있는 가장 큰 조건은 이전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으로 시는 수 천 년을 넘게 꾸준히 창조되어 오고 있다. 시가 어제와 같다면, 어제의 시를 그대로 복사해 놓으면 그만인 것 아닌가. 동시에 이 새로움이라는 전통이 있기에 시는 수 천 년을 이어오며 전통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 연속과 불연속의 과정 속에서 우리의 시는 진화하고 있다. 자신에게서 가장 진화한 시가 나오기를, 그리하여 다른 시들도 그 길을 눈여겨보게 되기를   바란다. 이 땅에 어제를 능가하는 훌륭한 시편이 가득 차오르고 더 많은, 더 좋은 시가 끊임없이 탄생하여 시의 화엄이 펼쳐지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말은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이다. 좋으면 좋을수록 많아진다. 무엇이?   시에 대한 사랑과 시의 사랑과 시에 의한 사랑이.     윤의섭∙1968년 경기도 시흥 생, 1994년 ≪문학과 사회≫로 시 등단, 21세기 전망 동인. 시집 , , , . 대전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부 교수.                    
시를 읽지 않는 자, 모두 야만인! 강신주 철학자       김용규의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말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아우슈비츠! 1940년 폴란드 남부에 나치가 설치한 대략 10만 명가량을 감금할 수 있었던 강제 수용소였다. 이곳에서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대략 400만 명의 인간들이 무참하게 학살된다. 그렇다. 인간은 이토록 잔인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보다 역겨운 허영이 또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인간의 잔혹성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러니 시를 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름다운 찬가라기보다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유럽 대륙의 반대편 한반도에서도 동일한 비극이 발생한다. 400만 명의 이상의 애꿎은 생명을 앗아간 한국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사용되었던 동일한 양의 폭탄들이 이 작은 반도에 모두 쏟아 부어졌으니 그 피해는 미루어 짐작이 가는 일이다. 잊지 말자.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제2차 세계 대전은 마무리가 되었지만, 한반도의 전쟁은 아직도 계속 중이다. 단지 휴전일 뿐, 냉전은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일까. ...양측 모두 정권에 대한 비판은 이적 행위로 간주되어 엄청난 탄압을 감내해야만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냉전 중에 또 희생되었는가. 그렇다. 나는 말하고 싶다. "6·25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슬프게도 우리는 너무나도 남루하다. 아니 비루하기까지 하다. 한국 전쟁 이후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서정시가 쓰였기 때문이다. 마치 전쟁이 없었다는 듯이, 그리고 냉전도 없었다는 듯이, 정치는 나와는 무관하다는 듯이, 서정시는 오늘도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다. 1966년 시인 김수영이 우리 시단을 비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고통이 모자란다고! '언어'에 대한 고통이 아닌 그 이전의 고통이 모자란다"고 말이다. 분단과 독재 그리고 이어지는 삶의 피폐함을 응시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어찌 하겠는가. 직면하고 부딪힐 수밖에. 그래서 온 몸으로 고통을 겪고 그것을 노래할 수밖에. 그럴 때에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흉내 내지 않은 글, 즉 진정한 시가 탄생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6·25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김수영의 입장에 나는 동감한다. 하지만 어느 시인으로부터 배운 가르침이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수영을 언급하며 시단을 비판했던 적이 있다. 그때 동석했던 시인 한 분이 웃으며 내게 말했다. "하지만 강 선생님. 그게 무슨 시였든 간에 시를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을 해치지 않습니다." 옳은 말이다. 시는 자신이니까 쓸 수 있는 글이다. 당연히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나와는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타인의 속내와 그 삶을 읽는다는 것이다. 타인의 내면을 읽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해칠 수 있다는 말인가. 누군가의 목을 조르려면 우리는 그의 고통을 느껴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 그렇다. 이제 아도르노의 명제는 수정될 필요가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그렇지만 시를 읽지 않는 것도 야만이다"라고. 전쟁과 갈등 그리고 경쟁은 우리에게 사랑과 신뢰의 힘을 앗아간다. 제2의 아우슈비츠 그리고 제2의 6·25를 막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의 힘을 되찾아야만 한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시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시를 읽는 것은 소설이나 산문을 읽는 것보다도 힘든 일이다. 한 사람의 속내를 완전히 안다는 것이 어떻게 쉬울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혹은 신뢰한다는 것은 그를 알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사랑과 신뢰는 원하는 것을 해주고, 그렇지 않은 것을 꺼리는 감정이니까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사랑한다고 자임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아무래도 시는 어려운 법이다. 너무나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구체적인 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바로 저 사람은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바로 그 사람이다. 1000년 전에도 없었고, 1000년 뒤에도 없을 바로 그 사람이다. 바로 이 사람이 자기니까 쓸 수 있는 글, 즉 시를 쓸 때, 그는 시인이 된다. 그러니 시는 소설이나 산문보다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 우리를 시의 세계로 친절하게 안내할 수 있는 좋은 가이드가 있으니까. 전작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서 철학자 김용규는 문학에 대한 섬세한 감성과 냉철한 이성을 동시에 보여준 적이 있다. 애독자 중의 한 사람으로 나는 그가 언젠가 시에 대한 글을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마침내 내 손에 그토록 바라던 책이 한 권 들려 있다.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 (김용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나는 시란 무엇인가를 다루는 첫 장에서부터 시인이란 누구인가를 고민하는 마지막 장까지 한 달음에 읽어 내려갔다. 책을 읽는 내내 너무 기분 좋았다. 시와 시인의 존재 자체에 사랑의 논리가 깔려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용규의 책에서 사랑과 관련된 테마가 다채롭게 그리고 다양하게 펼쳐져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다시 한 번 탄복했다. 우리 시대에 저자만큼 인문학적으로 박식하고 성숙한 사람이 또 있을까.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라는 출판사의 약간의 낯 뜨거운 홍보도 결코 허언은 아닌 셈이다. 덤으로 확인한 사실이 한 가지 더 있다. 김용규는 나만큼이나 김수영을 좋아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저자와 그의 글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 쪽을 넘길 때쯤 내게는 약간 아쉬운 마음이 남았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김수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통이 부족하다"는 인상이 들었던 탓이리라. 우리가 겪는 고통은 자신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 사이의 잘못된 만남으로부터 발생하는 법이다. 그래서 고통을 없애는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환경을 바꾸거나 아니면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전자는 힘들고 후자는 쉽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꾸면서 고통을 우회하려고 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나만 바뀌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물론 김용규는 7장과 8장에서 환경이 주는 고통, 즉 소비 사회와 위험 사회를 응시하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조금은 절정에서 비껴나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숨길 수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김용규의 책이 시의 세계로 우리를 제대로 안내해줄 수 있는 최상의 책이라는 사실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   ====================     ▲  별을 헤아리는 시인에게 일제강점기의 세상은 수용소나 다름없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이라고 말했다. 서정시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의 내면과 고통을 외면화시키는 것이 시다. 도축장 같은 수용소에 수백만 명을 몰아놓고 학살하는 것 역시 인간이라면, 그 참혹한 내면을 대체 어떻게 시어로 표현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에 시인의 선택은 두 가지로 나뉜다. 엄혹한 세상과 무력한 시를 부끄러워하며 펜을 꺾거나, 그 부끄러움마저 시의 재료로 삼아 어찌됐건 시를 쓰거나. 몽규의 세상과 동주의 세상 영화 는 시인 윤동주(강하늘)와 송몽규(박정민)의 관계를 통해 윤동주의 선택을 재구성한다. 두 사람은 사촌이자 가장 친한 친구로서 서로 관계하며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영화가 소개하는 윤동주와 그의 선택에는 언제나 송몽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있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도 '시인 윤동주'나 '윤동주'가 아니라 다. 누구보다 애정을 담아 그를 '동주'라고 부르는 몽규를 이해하지 않으면 동주도 이해할 수 없다. 몽규는 동주에게 부끄러움이다. 영화 속에서 동주는 세상이 시로 바꿀 수 없을 만큼 참담하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행동하지 않고 시를 써야만 한다는 사실에도 부끄러움을 느낀다. 발표하지도 않은 시 속에 은밀히 적었을 그 부끄러움이 영화에서는 몽규와의 대조를 통해 외면화한다. 몽규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매사에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행동한다. 그 또한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문예지를 만들고 산문을 쓰지만, '인민의 의식을 고취'시키지 못할 시는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생각만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영화는 이 때 몽규가 이중스파이 이웅을 암살했다는 픽션을 덧대는데, 영화가 그의 손에 쥐여준 권총은 생각을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시만 쓰는 동주의 부끄러움을 형상화한다. 그러나 몽규는 동주에게 권총을 쥐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독립운동에 좌절하고 지쳐서 돌아올 때마다 창밖에서 동주를 찾는다. 세파에 지친 몸은 집 안에 들여놓지 않은 채 "동주야" 하고 밖에서 부른다. 나아가 동주가 "너는 왜 나한테는 (독립 운동 하러) 같이 가자고 하지 않느냐" 물어도 끝내 동주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지는 않는다. 이 대비는 몽규가 조선인유학생들을 규합해 무장봉기를 계획하던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몽규는 함께 가겠다는 동주를 떼어놓고 조선인유학생들의 회합 장소로 떠나지만 곧 일본 경찰들의 습격을 받는다. 가까스로 몸만 빼낸 그가 하숙방 창문 앞에서 다시 동주를 불렀을 때, 동주는 "너 먼저 (고향으로) 가라"고 말한다. 그는 일본인 친구 쿠미(최희서)가 영어로 번역해준 자신의 시집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함께 도망칠 수 없다. 국가가 국가를 수탈하고 민족이 민족을 핍박하는 몽규의 세상과 동주가 시를 쓰는 세상은 이처럼 끝내 다르다. 시는 전체를 해체한다     ▲  동주와 몽규는 평생 바로 옆에서 살아가지만, 그만큼 경계도 뚜렷하다     동주의 시는 정말 틀린 것이었을까. 영화 는 동주의 짙은 부끄러움과 회한으로 영화를 끝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시를 긍정하고 있기도 하다. 동주는 개인주의를 억누르는 전체주의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과 조선 민족을 억누르는 세상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동주는 개인을 억누르는 모든 폭력과 제도에 저항하려는 마음이 더 크다. 몽규가 이화여전 학생 이여진(신윤주)과의 인연을 독립운동 자금줄로 이용하려 하자 동주는 반감을 드러낸다. '민족을 위해' 개인의 감정을 이용하고 매몰시키는 것 역시 전체주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주가 부끄러움을 고백하면서도 끝끝내 시를 쓰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시는 산문처럼 '인민의 의식을 고취'시키지는 못하지만, 개개인을 제 안으로 침잠케 함으로써 전체를 해체한다. 전체주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 에서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에롤 페트리지(숀 빈)가 예이츠의 시집을 읽다가 죽어가는 모습은, 시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개인을 구원하는지를 알게 한다. 동주의 시 역시 식민지 조선과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전체'라는 망령을 몰아내고 개인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낭만적인 생각으로 볼 수만은 없다.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며 독립을 부르짖는 과정에서 각 진영이 강조했던 '민족'과 '이념'은 독립 후 분단의 단초가 됐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던 유대감은 온데간데 없고 오히려 일본인들에게도 하지 않은 잔인한 학살을 민족 간에 일삼았다. 일껏 일본의 전체주의를 해체했더니 '둘 이상의 전체'가 생겨나 상반된 이상향을 제시하며 도처에서 개인을 학살했던 것이다. 그 때 이 땅은 어디 하나 가릴 곳 없이 아우슈비츠였다. 너는 시를 쓰라 결국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는 가능한가' 하는 질문에 앞서 동주는 '시가 가능한 세상이라야 또 다른 아우슈비츠를 막을 수 있다'고 봤을 것이다. 그는 시로 세상을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야심찬 시인이었다. 동주가 연희전문 시절 펴낸 시고집 의 원제도 이었다. 영화 가 묘사한 시인 윤동주의 마지막이 일제강점기를 다룬 그 어떤 이야기보다 처참하고 잔인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바닷물 주사로 추정되는 주사를 맞는다. 정신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에게 일본인 의사가 산수 문제가 적힌 종이를 던져준다. 임상실험의 경과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듯 전체주의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개인을 찾아내려던 문재(文才)는, 일제의 알량한 실험을 위해 정신이 마비된 가운데 숫자를 헤아리면서 죽어갔다. 식민지 조선의 에필로그이자 분단 조국의 프롤로그로 기록된 뼈아픈 야만이었다. 그 야만에서 헤쳐나왔다고 확신할 수 없는 오늘, 동주의 마음을 제 마음처럼 헤아렸던 몽규처럼 담담하게 한 마디 전하고 싶어진다. 동주, 너는 시를 쓰라.     ▲  서로의 그림자였던 두 사람의 인연은 사물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흑백 영화 속에 가득하다
6    동시를 쓸 때 "죽은 비유"는 절대 금물!... 댓글:  조회:2793  추천:0  2016-12-07
동시의 지도와 감상   시인 박목월  동시를 어떻게 지도하느냐?  시도 우리의 생활을 밝히는 불빛이다. 그리고 시의 지도는 그들이 자기들의 초롱에 불을 켜  게 하는 일이다. 이것은 어린 아동들에게도 다를 바가 없다. 어린 아동들은 그들대로의 생활  이 있다. 그들의 위축되고, 시들고, 막히고, 답답한 생활의 구석구석마다 싱싱한 생명감과 풍  성한 삶의 의미와 높고 넉넉한 감정세계를 베풀어 자기들의 초롱에 불을 밝히게 하라.  새들은 노래하고  나비는 춤추고  꽃은 방긋방긋 웃는다.  이런 허황한 세계로 몰아 넣어서는 안 된다. 이 근거 없이 아름다운 낙원은 이미 오늘날의  그들의 생활과는 먼, 시들어 버린 낙원이다. 혹은 무늬가 낡아 버린 치사스럽게 화려한 옷감  이다. 동심이라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티없이 맑은 눈은 결코 허황한 아름다움  (그것도 아무런 실감이 없는 겉치레에 불과한)을 꿈꾸기 위하여 환하게 밝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천진난만하고 맑은 눈은 사물의 본질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강철같은 투시  력을 가졌으며, 어른들의 통속적인 지각으로 가려진 모든 존재의 참된 모습을 보게 하는 것  이다.  시는 그것을 갈구하는 절실한 정신이 빚어 놓은 꿈의 세계다.  또는 구속에서 해방을, 절망에서 구원을 희구하는 간절한 소망이 빚어 놓은 기도다.  외로운 자의 혼자서 지껄이는 다.  요는 이 깃들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  시는 우리의 생활의 구석구석마다 막힌 것을 뚫는 착공기이다. 그 강철도 뚫어내는 의지. 날  카로운 비명, 튀는 불꽃,―그 치열한 노력.  삶에 대한 끝없는 성의와 인내력, 그것이 터지는 폭발력, 그 횡폭한 감정의 울림.  시는 달콤한 것이 아니다.  시는 무기력한 것이 아니다.  붓을 잡아, 어린이들을 외치게 하라.  붓을 잡아, 어린이들의 절실한 소망을 노래하게 하라.  붓을 잡아, 신비스러운 어린이의 체험을 떠올리게 하라.  붓을 잡아, 생각하게 하라.  붓을 잡아, 절실한 것만 쓰게 하라.  붓을 잡아, 절실한 문제을 꿈꾸게 하라.  시로써 그들의 생활에 불을 밝히게 하라.  무엇을 쓰게 할까?  무엇을 노래하게 할까?  그것은 밑도 끝도 없는 수작이다. 어린 그들의 의식 아래 잠재한 체험 세계의 신비로운 심  연을, 또한 시시각각으로 모습을 달리하는 그들의 염원을, 출렁이는 감정세계는 옆 사람이  어떻게 헤아려 알 수 있느냐.  다만 그가 잡은 붓에 적절한 것만이 깃들게 하라.  길은 그들이 스스로 찾아서 열게 될 것이다.  말에 대하여  말은 어린 그들이 꿈을 짜올리는 유일한 재료다.  말은 어린 그들이 자기의 감정을 나타내는 유일한 길이다.  말은 어린 그들의 약동하는 생명의 모습니다.  말은 어린 그들이 자기들의 생각을 자아올릴 수 있는 밧줄이다.  말소리가 수그러지면 그들의 감정도 수그러진다.  말소리가 거칠면 그들의 감정도 거칠다.  말소리가 잔잔하면 그들의 감정도 잔잔하다.  꿈꾸는 말은 부드럽고,  기쁨에 우쭐거리는 말은 신나고,  슬픔에 젖은 말은 무겁다.  감정이 설레이면 말도 설렌다.  아, 버, 지와 아버지가 다르다.  < 콤마>를 마디마디 단 아버지는 대목대목 생각하는 요, 는 생각 없  이 부르는 다.  아  버  지  와 한 줄로 흐르는 는, 공간을 넓게 차지한 화면 속에 오뚝하게 선 한 그루의 포  플러와 온통 화면을 다 차지한 한 그루 포플러는 다 같은 포플러이지만 그 인상이 다르지  않느냐.  < 흰꽃>과 은 다 같이 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그러나 , 의 이라  는 말과 의 이라는 말은 서로 다른 말이다. 속에 들어있는 은  흰의 이요, 의 은 빨강이다. 이라는 한 개의 낱말은 하  나의 문맥 속에 짜여지면 그것은 구체화되고, 이미 낱말 하나로 따로 있을 때와는 다른 것  이 된다.  그러므로 이라는 낱말은 우리가 우리들의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할 때마다 다른 것이  된다.  ① 교실 앞에 피어 있는 노란 채송화는 아름답다.  ② 쨍쨍하게 햇볕이 쬐는 교실 앞에 피어 있는 노란 채송화는 아름답다.  ③ 구름 한 점 없다. 호수같이 맑은 하늘, 쨍쨍하게 햇볕이 쬐는 교실 앞에 피어 있는 노란  채송화는 아름답다.  이 세 대목의 문장에 는 말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 다른  느낌을 주고, 아름다움을 달리한다. 이 세 대목의 문장이 표현한 를 머릿속에  그려 보라.  ① 막연하게 교실 앞에 피어 있는 채송화와,  ② 을 배경한 채송화는  ③ 의 배경이 깃든 는 각각 그 인상을 달리하는 것이다. 인상이 다른 것이 같은 사물일 수 없다.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말은 뜻을 전하지만 시에서의 말은 사물(존재) 그것을 전하다. 시의 말  과 일상생활의 말은 같은 말이지만 그 구실이 다르다.  시는 말이 유일한 재료다.  말이 없으면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의 아름다움은 시의 아름다움이요, 말의 생명이 시의 생명이다.  어린 그들에게 말을 주라.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그 어둡고 답답한 감정에 말을 주어 하  나하나 밝히고, 선명하게 하라.  친구와 의사를 나누고, 사무적인 용무를 치르는 말 외에 참된 그들의 감정을 나타내고, 꿈을  ―그런 말을 주라.  비유에 대하여  우리 선생님은 무엇처럼 아름답다.  우리 교실은 무엇처럼 넓다.  봄바람은 무엇처럼 따뜻하다.  가을바람은 무엇처럼 선선하다.  가령, 이런 글에 을 한 가지씩 비유로 채워 보라. 열 사람에게 물어서, 열 사람  이 꼭 같은 대답이 나오면 그것은 죽은 비유다. 싱싱한 생명을 못 가진 비유라는 뜻이다. 이  것들은 전혀 가치가 없는 낡아빠진 것들이다. 그러나, 열 사람에게 물어서, 열 사람이 전부  다른 것이라면, 또 그 다른 것이 특수하고 도저히 우리가 상상 못할 것이라면 그럴수록 좋  은 비유다. 열 사람이 똑같은 대답이 나올 수 있음은 누구나 쉽게 머리에 떠오르는 유형적  인 것이다. 따스하다면 봄바람, 차다면, 얼음, 뜨겁다면 불 등등, 이런 비유에는 그 사람만의  생생한 체험이 실려 있지 않는 것이다.  비유야말로 그 작자마다의 참되고 특수한 체험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길이다.  선생님은 여치처럼 엉거주춤 앉아 계신다. ―라는 비유는 새롭다. 풀 냄새가 풍기는 비유다.  풀밭에서 여치를 가지고 놀게 된 경험이 없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도저히 떠오르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멀끔하게 대머리가 된, 이마가 길다란 여치의 모습은 그것대로 이미 유머  러스한 것이지만, 얼굴이 길고 대머리가 진 선생님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 마름 속살처럼 하얀> ―이라는 구절도 그 작자만의 체험이 뒤받이해 주는 비유다. 흔히  희다면 눈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러나 면, 이미 검은 마름의 새하얀  속살에 특수한 감동을 느낀 경험이 살아나는 것이다.  < 고사리 같은 아기 손>은 속되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비유면, 누구나 알기 때문에 새로운 감동을 자아낼 수 없다.  어린 그들에게 자기의 의식 아래 접혀 있는 그들만의 체험 세계를 표현하게 하라. 그들은  도저히 우리가 상상도 못할,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유뿐만 아니다.  그들의 놀랍고도 싱싱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들의 꿈을 피어 올리게 하는 것은 자기마다  특수한 체험세계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의 꿈은 이성적인 제약이 약하고 미약하기 때문에 더욱 자유롭고도 신비롭게 뻗  을 수 있다.  다만 어린 그들이 자기들의 꿈꾸는 세계에 대한 신뢰감을 획득할 수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낄 수만 있으면 그들은 무한량의 시를 빚어 놓을 것이다.  이들이 빚어 놓는 작품을 어른들이 그 빈약한 평가와 몇 푼 되지 않는 지식으로 우열을 속  단하고 어설픈 교시를 베풀기 때문에 그들의 세계를 오히려 협소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어린 그들에게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라.  =============================================       사랑 ― 양애경(1956∼ ) 둘이 같이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문득 정신 차려 보니 혼자 걷고 있습니다 어느 골목에서 다시 만나지겠지 앞으로 더 걷다가 갈증이 나서 목을 축일만한 가게라도 만나지겠지 앞으로 더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참 많이도 왔습니다 인연은 끝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간다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온 길을 되짚어 걸어가야 합니다     많이 왔을수록 혼자 돌아가는 길이 멉니다.      이 시의 제목은 ‘사랑’이지만 본문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도 시를 읽으면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사랑에 대한 시가 맞다.   시인이 말하기를 사랑이란 둘이 함께 걸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와는 반대로, 둘이 걷다가 어느새 혼자 걸어가게 되는 것을 일러 우리는 ‘이별’이라고 부른다. 사랑과 이별을 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일로 바꾸니 그 뜻이 참으로 잔잔하다. 잔잔함 속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별 또한 사랑의 일부라는 이 시의 메시지에 있다. 헤어진다고 해서, 이 길을 혼자 걷는다고 해서 사랑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사랑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 시의 화자는 혼자 걷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지 몰라서 사랑의 길을 쉽게 이탈할 수 없었다. 이렇게 사랑의 여운을 혼자 걷는 것도 ‘사랑’이다. 또한 다시 만날 수 없대도 사랑은 쉽게 끝나지지 않는다. 사랑하면서 걸었던 길을 왔던 만큼 되짚어 가야만 사랑은 비로소 끝이 날 수 있다. 그러니까 외롭게 돌아가는 마음의 복귀까지도 ‘사랑’이다.   세상에는 이별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성급해지지 말 것을, 이 시는 당부한다. 헤어지면 둘이 같이 만든 길을 혼자서 지워야 하니까 당연히 힘이 든다. 힘이 들면 원망이 생겨 난폭해지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까지 사랑의 일부라고, 이 시는 이야기한다. 사랑은 소중한 것, 그렇다면 예의를 갖추어 가는 길까지 정중하게 배웅해 주어야 한다.  
5    작문이란 우리의 생활을 그대로 나타내는 글이다... 댓글:  조회:2997  추천:0  2016-12-07
왜 동시를 써야 하나?  아무도 오지 않는 교실  말끔히 닦은 칠판이  아침 햇살에 환하다.  책상도 걸상도  얌전히들 앉아 있다.  가방을 풀고  책에 넣고  나는 드르륵  유리창을 열었다.  바람이 시원스럽다.  아침교실·김미숙  서울 종로초등학교 6학년생이 지은 작품이다. 놀랍게 잘 지은 노래다. 아무도 오지 않는 아침 교실은 샛밝은 햇살만 쪽 펴졌는 이상한 신선함과 고요함이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선 것 같다. 참으로 이 시에는 그 신선함과 고요가 어려서 밝고 맑다.  이 아침 교실의 신비스러운 고요함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랴. 여러분의 마음이 갈앉고 조용해진다.  아침교실의 신선하고 고요한 것을 체험한 탓으로 비로소 무엇을 깊이 찬찬히 생각할 힘을 얻고 기르게 된다.  더구나, 아침 햇살에 환한 칠판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 칠판에 쓰여질 선생님의 말씀이나 글씨가 마음 깊이 스미게 될 것이다.  또한, "책상도 걸상도 얌전히들 앉아 있다"는 구절에는 "다만 빈 책상과 걸상이 얌전히 앉아 있다"는 뜻만이 아니다. 그 걸상과 책상의 임자들의 모습도 하나하나 머리에 떠 올랐으리라. 이처럼 조용히 친구들을 생각해 보고, 비로소 그 친구를 올바르게 친구로서 깨닫게 되리라.  이 조용한 교실에서 참된 마음으로 친구를 생각해 보고, 비로소 "가방을 풀고 책을 넣고" 그 날 하루의 일을 시작한다. "가방을 풀어 책을 넣고"가 아니다. "가방을 풀고 책을 넣고"로써 이 학생이 자기의 행동 한 가지 한 가지를 깊이 살피고 생각하는 것을 보라.  그리고, 유리창을 드르륵 연다. 드르륵 하는 유리창 소리가 얼마나 신선했으랴. 그 날, 자기의 참된 마음의 하루를 향해서 여는 마음의 창문이요, 그 드르륵 소리다. 비로소 여러분은, 이시의 끝을 맺는 "바람이 시원스럽다"라는 말이 얼마나 엄청나게 깊은 느낌에서 울어나는 소리라 함을 알게 되리라.  왜 동시를 써야 하나, 혹은 우리가 왜 시를 깊이 감상해야 하나?  그것은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스쳐가는 느낌이나 감동을 종이쪽에 기록함으로써 느낌을 넉넉하게 지닐 수 있고 또한 생각을 바르게, 참되게 기를 수 있다.  이 자기의 느낌이나 생각을 소홀히 하지 않음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다.  늘 자기의 마음을 살피고, 느낌과 뜻과 생각을 뚜렷이 헤아려 아는 힘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참된 사람, 참된 생활을 이룰 수 있게 한다.  이것을 역시 장만영 선생은 좀 어려운 말이나 자기 완성이라 했다. 참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가을 밤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달빛을 보고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란 처음부터 얘기가 되지 않는다.  예쁜 꽃을 보고도 그 냄새를 탐낼 줄 모르는, 이런 예외의 사람을 가지고 말할 것은 더욱 아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은 누구나 다 느낄 수 있는 것인즉 이만한 정서 감정만 있다면 그 다음은 앞에서 말하였듯이 오직 노력만이 남을 따름이다. 작품의 우열은 별문제로, 우선 시를 쓸 수 있음은 자기 완성에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고 본다.  왜 자기 완성에의 노력이 필요한가? 모든 시는 그 작가의 올바른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이라면 좋은 시를 쓸 것이요, 나쁜 사람이라면 나쁜 시를 쓸 것이다. 무서울만치 이것은 진리이다. 그리고, 진리는 영원한 것이기에 아무런 흐림이 없이 좋은 작품에 그대로 빚어 나오는 법이다.  시작법에서·장만영  여러분이 자기 마음(생각, 느낌, 뜻)의 움직임을 맑은 눈으로 자세히 살필 수 있게 되는 것이 시를 써야 하는, 시를 씀으로써 얻는 큰 보물이다. 그러나, 이 보물을 얻는 까닭은 우리가 자기의 생활을 좀더 깊고 넉넉하게 이루려 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생할"이라는 말을 아느냐? 여러분이 아는 말 중에 가장 소중한 말의 하나다. 생활이란 놀고, 친구를 사귀고, 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고,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다 생활이라 한다. 더구나, 생각하고 뜻을 지니는 것을 정신 생활이라 한다.  삐익,빵.  덜컥덜푹, 덜컥덜푹, 덜컥덜푹.  새끼차가 골목안을 갑니다.  새끼차는 엄마 마중 가는 차  젖 먹고 싶은 사람 모두 타지요.  새끼차는 아빠 마중 가는 차  장난감 얻고픈 사람 모두 타지요.  삐익, 빵.  덜컥덜푹, 덜컥덜푹, 덜컥덜푹.  새끼차가 골목안을 갑니다.  새끼차·박노춘  골목 안에서 기차놀이한 일이다. 나들이 가신 엄마를 기다리면서 동무끼리 모여, 삐익, 빵. 하고 새끼로 줄을 한 새끼차가 달린다. 여러분의 소망이 가득한 하루가 엿보이는 노래다. 이렇게 뛰고 논 일을, 책상 앞에 마음을 모아 조용히 적어 보라. 얼마나 여러분 머리에 그 때의 놀음놀이가 확실히 떠오르며, 또 놀음놀이하면서 느꼈던 생각들이 새롭게 또록또록한가. 이 마음에 새롭게 느껴지는 생각들을 다시 살펴, 그 날 하루의 자기를 살필 수 있고, 자기와 남 사이에 넉넉한 사랑과 너그러운 마음을 지닐 것이다.  여러분의 교과서를 엮어주시는 홍웅선 선생은 "작문교실"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문이란 우리의 생활을 그대로 글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매일 매일의 생활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여러분의 작문입니다. 우리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생활의 발전을 위하여, 우리들의 생활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작문교실에서·홍웅선  햇빛은 쨍쟁 모래알은 반짝  모래알로 떡해 놓고  조각돌로 소반지어  누나 엄마 모셔다가  맛있게도 나음나음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호미 들고 광이 메고  뻗어가는 메 캐어서  엄마 아빠 모셔다가  맛있게도 나음나음  햇빛은 쨍쨍·최옥란  소꼽장난 놀이다. 소꼽놀이할 때 저절로 어린이 여러분의 마음을 울려서 나오는 노래… 얼마나 아름답고 맑고 귀한 것이랴. 그 때 어린이 마음 속에 고이는 생각은 너무나 깨끗하기 때문에 30 년을 두고, 동요만 지으신 윤석중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늙을수록 젊어지는 게 뭐냐?"  "꼬추!"  이런 수수께끼가 있다.  라는 예를 들어, 늙을수록 젊어지는 것은 어린이의 그 귀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라 했다. 그것을 시로써 기르면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다. 윤 선생은 말했다.  오래오래 살 수 있는 길은 나이를 많이 먹는 것이 아니고, 언제까지든지 어린이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어깨동무》에서·윤석중  자주꽃 핀건 자주 감자,  파 보나마나 자주 감자  하얀꽃 핀건 하얀 감자,  파봐나마나 하얀 감자.  감자·권태응  자주빛 감자꽃에는 으레 자주빛 감자가 달렸고 하얀꽃이 폈는 감자는 하얀 감자가 열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그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주꽃이 쫑긋이 폈는 긴 감자줄기 아래는 어두운 흙덩이 속에 자주빛 감자 형제들이 조롱조롱 살고, 하얀꽃이 폈는 감자 줄기 아래 흙덩이 속에는 하얀 감자 열 두 형제가 오손도손 산다. 혹은 그 어두운 흙덩이 속에 사는 자주빛 감자 형제들이 줄기 위에 폈는 자주빛 감자 꽃송이를 통해서, 해님과 바람과 이슬과 별과 얘기를 하게 되고, 또한 햐얀 감자 형제들은 땅 위에 하얀 꽃을 피우게 해서, 하얀 감자 형제들끼리의 그 정다운 뜻과 사랑을 나타내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하얀 감자꽃도 땅 속에 사는 하얀 감자 형제들의 막내동생이나 맏형님인지도 모르리라…. 그래서 자주빛 감자꽃은 "파 보나마나" 자주빛 감자라는 것이다.  이 노래는 자기가 참으로 감자 농사를 지으면서, 못 생겼으나, 어딘지 모르게 귀염성이 있는 감자알 한 개마다, 혹은 감자 형제들이 오롱조롱 달렸는 감자 포기마다 친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감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참으로 자연에 대하여 가슴을 열고, 친하려는 뜻만 지니면 자연도 가슴을 열어젖히고, 그의 오묘한 온갖 모습을 보여주고, 뜻을 나타내 보인다.  우리가 시를 쓴다는 사실은, 우리를 에워싼 꽃송이와 바람과 돌과 흙덩이와 감자와 콩과 강아지와 당나귀와 쥐와 서로 이야기하고 속삭인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그들과 속삭이느냐고.  새양쥐 새양쥐  왜 안 자고 나왔나  화롯불에 묻은 밤  줄까 하고 나왔지.  새양쥐 새양쥐  왜 저렇게 뿌연가  밤 한 톨이 탁 튀어  재를 홈빡 뒤썼지.  새양쥐 새양쥐  어따 머리 감았나  부엌으로 들어가  뜨물에다 감았지.  새양쥐 새양쥐  밤새도록 뭐했나  자는 아기 얼굴로  살살 기어 다녔지.  새양쥐 새양쥐  왜 또 벌써 나왔나  세수하나 안 하나  구경하러 나왔지.  새양쥐·윤석중  아기가 화롯불에 밤을 묻어두고, 우두커니 앉았으니 구석진 데 새양쥐란 놈이 그 또록한 눈을 요리조리 굴리며 쪼붓한 얼굴을 쏙 내밀었다. 참으로 쥐란 놈은 언제 보아도 늘 낯설은 얼굴을 하고 있다. 당나귀나 송아지는 언제 보아도 어디서 본 듯하고 친한데, 쥐란 놈하고는 마음을 턱 놓고 친할 수 없는 그런 얼굴이다.  그래서, 아기가  "새양쥐 새양쥐  왜 안 자고 나왔나?"  물어 보았더니, 새양쥐가  "화롯불에 묻은 밤  줄까 하고 나왔지."  염치도 없는 소리를 한다. 그래서, 아기와 새양쥐는 한참 정답게 얘기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아기가 깨어 보니, 또 새양쥐가 얼굴을 쏙 내밀고 나타났다.  (저게 왜 또 나왔어?)  아기는 놀라면서  "새양쥐 새양쥐  왜 또 벌써 나왔나?"  하고 물어보았더니 또 염치없는 대답을 한다.  "세수하나 안 하나  구경하러 나왔지."  그래, 아기는 세수를 안 할 도리가 없다.  이 노래를 보면 알다시피 아기가 새양쥐와 버젓이 얘기를 하고 있다. 이 새양쥐와 말을 할 수 있고, 그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슴에 지니는 사랑이다. 새양쥐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없다.  이 말은 우리가 깊은 사랑을 지니면 지닐수록 자연과 동물의 온갖 모습에서 오묘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이 사랑만큼 우리를 참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이루게 하는 것은 없다. 왜 동시를 써야 하고, 감상해야 하는 까닭의 하나는 시를 쓰고 감상함으로써 이 귀한 사랑을 넉넉하게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노래하는 시·생각하는 시  아롱다롱 나비야  아롱다롱 꽃밭에  아풀나풀 오너라.  붉은꽃이 웃는다.  노랑꽃이 웃는다.  앞뜰위에 홀로핀  복사꽃이 웃는다.  너를보고 웃는다.  아롱다롱 나비야  아롱다롱 꽃위에  사쁜사쁜 앉아라.  송이송이 꽃속에  고이고이 잠들어  붉은꿈을 꾸어라.  노랑꿈을 꾸어라.  오색꿈을 꾸어라.  아롱다롱 나비야·목일신  글자를 4·3씩 꼭꼭 맞추었다. 이것을 4·3조라 한다. 목청을 돋구어 부르기 좋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 나라에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동요가 많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도 "새야새야 파랑새야"도 옛날 동요다. 그것은 글자가 네 개씩, 4·4조다. 그래서, 동요라는 것들에라도 나가서, 즐겁게 뛰며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노래이기 때문에 가락을 고르고, 다듬어야 한다. 그러므로, 글자를 4·3으로 꼭 맞추어 그 가락을 다듬고 골랐다.  그러나, 동시는 단정하게 가락을 다듬을 필요가 없다. 여러분 가슴에 이는 느낌을 따라, 그윽한 생각의 물결을 속삭이듯 나타내면 된다. 동시는 노래하기보다는 생각하고 조용히 속삭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난 것은  활짝 펼친 공작의 꼬리 위에 피어난  한 송이 장미꽃  불·막스 짜곱·박용혁 옮김  "불이났네 불이났네"  하고 노래하지 않았다.  "불난 것은…"  하고, 자기의 느낌을 살며시 폈다. 다시 말하면 느낌을 조용히 마음 속에 모아서, 천천히 생각하며, 살피며, 한 가닥씩 풀어 본 것이다.  그러므로, 동요는 가슴에 설레는 즐겁고, 슬픈 생각들을 노래로 뽑았다. 노래로 뽑았기 때문에 동시처럼 시 속에 담겼는 느낌이나 뜻이나 생각을 깊이 넉넉하게 담으려는 것이기보다 박자의 아름다움을 더욱 중히 여긴다.  어느 외국 시인은 동요와 동시를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  동 요  동 시  。 노래한 것  。 가락을 고르게 뽑아, 노래하기를 주로 한 것.  。 느낌이나 생각이 밖으로 나타난다.  。 박자의 아름다움  。 속삭인 것.  。 그윽한 감정의 가는 물결을 속삭이듯 나타낸 것.  。 안으로 생각하는 힘이 세다.  。 생각의 흐름이 그윽하게 펼쳐짐.  그러나, 여러분은 동요를 쓸까, 동시를 쓸까 망설일 필요는 없다. 다만, 자기의 느낌이나 생각을 찬찬히 올바르게 기록하려는 뜻에서 붓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되도록 동요보다 동시를 써야 한다. 왜냐 하면, 동요는 가락이 4·4조, 3·4조, 7·5조로 잡혀 있기 때문에 참된 자기의 생각을 깊이 살펴서 담기보다는 곁으로 흘려 버리기 쉽다.  더구나, 여러분이 가락을 잡는다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다.  왜냐 하면, 잡혀진 가락(정형) 속에 새로운 느낌이나 생각을 담기가 가장 힘이 들고, 능란한 솜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책상 걸상을 죽 뒤로 밀어 놓고  먼지털이로 구석구석 먼지를 떨고  비로 박박 마루를 쓸고  물로 좍좍 걸레질을 하고  책상 걸상을 제 자리에 나란히 해 놓고  맑은 물을 길어다가  교탁과 교단을 다시 닦는다.  비뚜러 놓인 교탁을 바로 놓다가  나는 문득 선생님이 되어 보고 싶었다.  "강웅구, 수고했소.  오늘 청소는 만점이요.  인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언제 와 계셨는지 교실 문 앞에  담임 선생님이 서 계셨다.  나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다가  "선생님 청소를 다 했습니다."  선생님도 빙그레 웃으시며  "강웅구, 수고했소.  오늘 청소는 만점이요.  인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그리고 선생님은  교사실로 가신다.  복도를 쓸던 동무들과  유리를 닦던 동무들이  한꺼번에 "와아"하고 웃어 버렸다.  교사실로 가시던 선생님도  뒤돌아 보시며  다시 한번 빙그레 웃으시었다.   청소를 끝마치고·강소천  이 시를 읽어 보라. 붓을 잡은 마음이 얼마나 수월하고 겸손하냐. 이런 마음에서 여러분도 붓을 잡고,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살펴서 시를 지어 보라. "청소를 끝마치고"에서는 그처럼 평범하고 수월하면서, 야단을 치시지 않고, 빙그에 웃으시며, 교사실로 가시는 인자하신 선생님의 모습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게 한다.  ==================================================================================     파타고니아의 양 ― 마종기(1939∼ ) 거친 들판에 흐린 하늘 몇 개만 떠 있었어. 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은 믿어보라고 했지? 그래도 굶주린 콘도르는 칼바람같이 살이 있는 양들의 눈을 빼먹고, 나는 장님이 된 양을 통째로 구워 며칠째 먹었다. 어금니 두 개뿐, 양들은 아예 윗니가 없다. 열 살이 넘으면 아랫니마저 차츰 닳아 없어지고 가시보다 드센 파타고니아 들풀을 먹을 수 없어 잇몸으로 피 흘리다 먹기를 포기하고 죽는 양들. 사랑이 어딘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으면, 혹시 파타고니아의 하늘은 하루쯤 환한 몸을 열어줄까? … 남미의남쪽변경에서만난양들은계속죽기만해서 나는 아직도 숨겨온 내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세계 지도에서 파타고니아를 찾아본다. 남아메리카 중에서도 아래, 나라로는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있고 지형으로는 안데스 산맥이 있는 그곳이 파타고니아이다. 예전에 거대한 사람들이 살았다고 전해 오는 곳이며 지금은 빙하와 초원이 펼쳐져 있는 곳. 파타고니아는 우리에게 그다지도 낯선 지명이지만 이미 많은 소설가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곳이라고 한다.   짐작건대 그곳은 세상의 정적을 들을 수 있는 장소일 것이다. 휴대전화보다 바람에 귀를 기울이고, 사람보다 자연을 더 많이 접할 수 있는 곳일 것이다. 그런 곳이라면 내가 아닌 모든 것들과 결별하고 가슴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바로, 마종기 시인의 시도 그런 가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인은 자기의 세상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파타고니아에 와 있다. 믿었던 가치가 흔들리고 삶에 회의가 들어서 해답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찾기 어려운, 소중한 가치라면 아마도 가장 먼 곳에 숨겨져 있겠지. 그곳에서 시인은 들풀을 먹는 양을 보고, 그 양을 먹는 콘도르를 보고, 죽어가는 양도 보았다. 이 모든 것 사이에서 시인은 아직도 흔들리고 상처받고 있는데, 특히 이 흔들림과 상처가 스산하여 이 시가 더욱 좋아진다. 아마 모든 상처가 회복되었다면 그곳은 쓸쓸해서 소중한 파타고니아일 수 없다. 여행에서 고통이 다 해소되었다면 그 해소는 진실이 아닐 수 있다.   이 시는 쓸쓸하고, 묵직하게 우리의 심장을 두드린다. 누구의 것도 아닌, 너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너의 파타고니아를 찾으라고 말이다. 
4    [시문학소사전] - 초현실주의란?... 댓글:  조회:4212  추천:0  2016-12-05
  요약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반예술 운동인 초기 다다이즘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처럼 부정 그 자체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을 강조했다. 초현실주의는 특히 회화에서 많은 공적을 이루었다. 초현실주의 미술은 다다이즘뿐만 아니라 프란시스코 고야와 마르크 샤갈 같은 화가들의 환상적이고 기괴한 이미지의 영향을 받았다. 장 아르프, 막스 에른스트, 앙드레 마송,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피에르 루아, 호안 미로 등이 대표적인 화가이다. 초현실주의는 내용적 측면과 자유로운 형식을 강조함으로써 형식주의로 치우치고 있던 당시 입체파 미술의 대안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내용을 강조하는 회화적 전통을 현대 미술에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반예술 운동인 초기 다다이즘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처럼 부정 그 자체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을 강조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과거 유럽 문화와 정치를 주도해왔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공포 속에서도 절정을 이루었던 이성주의가 결국은 파괴를 야기시켰다고 보고 그에 대한 반대를 표방했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브르통은 이 운동의 대변자로서 1924년에 '초현실주의 선언'을 공표했다. 브르통 (André Breton) 프랑스의 시인, 수필가, 평론가 그에 따르면 초현실주의는 경험의 의식적 영역과 무의식적 영역을 완벽하게 결합시키는 수단이며, '절대적 실재, 즉 초현실' 속에서는 꿈과 환상의 세계가 일상적인 이성의 세계와 결합될 수 있다고 한다. 주로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을 원용하면서 무의식의 세계를 상상력의 원천으로 간주했다. 또한 시인이나 화가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천재성은 일반적으로 미개발된 무의식의 영역에 대한 접근가능성으로 규정했다.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피에르 르베르디 등의 시는 전과정에 걸쳐 논리적이 아닌 심리적인, 즉 무의식적인 것에 의해 결정된 생경한 단어들의 병치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초현실주의는 특히 회화에서 많은 공적을 이루었다. 초현실주의 미술은 다다이즘뿐만 아니라 히에로니무스 보스, 프란시스코 고야 등 전 시대의 화가들과 오딜롱 르동, 조르조 데 키리코, 마르크 샤갈 등 동시대 화가들의 환상적이고 기괴한 이미지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예술작품이 인간심리의 탐구와 그 표현을 촉구하는 수단임을 강조하면서, 방법론적 연구와 실험을 매우 중시한다. 그러나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1925년 파리에서 전람회를 열었으나 초현실주의의 역사는 제명과 탈퇴, 인신공격 등으로 얼룩졌다. 장 아르프, 막스 에른스트, 앙드레 마송, 르네 마그리트, 이브 탕기, 살바도르 달리, 피에르 루아, 폴 델보, 호안 미로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호안 미로 (Joan Miró) 스페인의 화가, 조각가 그들의 작품은 매우 다양하여 초현실주의적 양식으로 범주화해서 요약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각자 나름대로 자기탐구의 수단을 모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의식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무의식의 세계를 즉흥적으로 표현하려는 1가지 목표만을 추구했다. 한편 미로를 비롯한 화가들은 지고미(至高美)를 형식적 수단으로 해서 개인의 환상, 무의식과 의식을 탐구했다. 이 두 극단은 그 발전가능성의 영역면에서 구별된다. 장 아르프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한쪽 극단은 추측할 수는 있지만 불확정적인 생물형태적인 이미지를 창조한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무의식적인 연상작용을 일으켜 그 끝없는 탐구과정을 통해 창조적 상상력이 스스로 발언하게 하는 것이다. 에른스트·마송·미로 등도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이와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태도를 일컬어 유기적·상징적·절대적 초현실주의라고도 했다. 이와 반대되는 극단에서는 명확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었으나 비합리적인 세계를 접하게 된다.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인식 가능한 이미지는 일상적인 맥락으로부터 분리되어 모호하고 역설적이며 충격적인 구조로 재구성된다. 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논리에 의해서는 드러나지 않는 비이성적인 선천적 감각을 받아들이게 하고, 이에 대한 공감을 유발시킨다. 르네 마그리트는 햄 한 조각이 담긴 접시가 놓여 있는 보통 테이블 하나만 그리는 등 단순하면서도 힘이 있는 표현을 하여 그러한 접근의 가장 직접적인 형태를 보여주었다. 살바도르 달리, 피에르 루아, 폴 델보 등도 이와 유사하지만 좀더 복잡한 형상으로, 현실세계에 꿈처럼 기이한 장면을 결합시켜 표현했다. 그들은 심리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몇 가지 특수한 기법을 고안했다. 나무 등 요철이 있는 재료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 등으로 문지르는 프로타주, 캔버스를 긁어 자국을 만드는 그라타주 등은 에른스트가 개발한 것으로 그 불완전한 이미지가 보는 이의 마음속 에서 완성되도록 하는 것이다. 작가의 무의식으로부터 분출하는 혼돈의 이미지를 다듬지 않고 즉흥적으로 기록하는 자동기술적 소묘(→ 자동기술법), 일상 생활에서 취한 오브제 등도 주요기법에 속한다. 프로타주(frottage) 동전 프로타주 초현실주의는 내용적 측면과 자유로운 형식을 강조함으로써 형식주의로 치우치고 있던 당시 입체파 미술의 대안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내용을 강조하는 회화적 전통을 현대 미술에 이어준 공로가 크다. 특히 유기적 초현실주의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비재현적인 형태로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반예술 운동인 초기 다다이즘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처럼 부정 그 자체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을 강조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과거 유럽 문화와 정치를 주도해왔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공포 속에서도 절정을 이루었던 이성주의가 결국은 파괴를 야기시켰다고 보고 그에 대한 반대를 표방했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브르통은 이 운동의 대변자로서 1924년에 '초현실주의 선언'을 공표했다. 그에 따르면 초현실주의는 경험의 의식적 영역과 무의식적 영역을 완벽하게 결합시키는 수단이며, '절대적 실재, 즉 초현실' 속에서는 꿈과 환상의 세계가 일상적인 이성의 세계와 결합될 수 있다고 한다. 주로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을 원용하면서 무의식의 세계를 상상력의 원천으로 간주했다. 또한 시인이나 화가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천재성은 일반적으로 미개발된 무의식의 영역에 대한 접근가능성으로 규정했다.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피에르 르베르디 등의 시는 전과정에 걸쳐 논리적이 아닌 심리적인, 즉 무의식적인 것에 의해 결정된 생경한 단어들의 병치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초현실주의는 특히 회화에서 많은 공적을 이루었다. 초현실주의 미술은 다다이즘뿐만 아니라 히에로니무스 보스, 프란시스코 고야 등 전 시대의 화가들과 오딜롱 르동, 조르조 데 키리코, 마르크 샤갈 등 동시대 화가들의 환상적이고 기괴한 이미지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예술작품이 인간심리의 탐구와 그 표현을 촉구하는 수단임을 강조하면서, 방법론적 연구와 실험을 매우 중시한다. 그러나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1925년 파리에서 전람회를 열었으나 초현실주의의 역사는 제명과 탈퇴, 인신공격 등으로 얼룩졌다.   장 아르프, 막스 에른스트, 앙드레 마송, 르네 마그리트, 이브 탕기, 살바도르 달리, 피에르 루아, 폴 델보, 호안 미로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들의 작품은 매우 다양하여 초현실주의적 양식으로 범주화해서 요약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각자 나름대로 자기탐구의 수단을 모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의식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무의식의 세계를 즉흥적으로 표현하려는 1가지 목표만을 추구했다. 한편 미로를 비롯한 화가들은 지고미(至高美)를 형식적 수단으로 해서 개인의 환상, 무의식과 의식을 탐구했다. 이 두 극단은 그 발전가능성의 영역면에서 구별된다. 장 아르프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한쪽 극단은 추측할 수는 있지만 불확정적인 생물형태적인 이미지를 창조한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무의식적인 연상작용을 일으켜 그 끝없는 탐구과정을 통해 창조적 상상력이 스스로 발언하게 하는 것이다. 에른스트·마송·미로 등도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이와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태도를 일컬어 유기적·상징적·절대적 초현실주의라고도 했다. 이와 반대되는 극단에서는 명확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었으나 비합리적인 세계를 접하게 된다.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인식 가능한 이미지는 일상적인 맥락으로부터 분리되어 모호하고 역설적이며 충격적인 구조로 재구성된다. 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논리에 의해서는 드러나지 않는 비이성적인 선천적 감각을 받아들이게 하고, 이에 대한 공감을 유발시킨다. 르네 마그리트는 햄 한 조각이 담긴 접시가 놓여 있는 보통 테이블 하나만 그리는 등 단순하면서도 힘이 있는 표현을 하여 그러한 접근의 가장 직접적인 형태를 보여주었다. 살바도르 달리, 피에르 루아, 폴 델보 등도 이와 유사하지만 좀더 복잡한 형상으로, 현실세계에 꿈처럼 기이한 장면을 결합시켜 표현했다.   그들은 심리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몇 가지 특수한 기법을 고안했다. 나무 등 요철이 있는 재료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 등으로 문지르는  프로타주, 캔버스를 긁어 자국을 만드는 그라타주 등은 에른스트가 개발한 것으로 그 불완전한 이미지가 보는 이의 마음속 에서 완성되도록 하는 것이다. 작가의 무의식으로부터 분출하는 혼돈의 이미지를 다듬지 않고 즉흥적으로 기록하는 자동기술적 소묘(→ 자동기술법), 일상 생활에서 취한 오브제 등도 주요기법에 속한다. 초현실주의는 내용적 측면과 자유로운 형식을 강조함으로써 형식주의로 치우치고 있던 당시 입체파 미술의 대안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내용을 강조하는 회화적 전통을 현대 미술에 이어준 공로가 크다. 특히 유기적 초현실주의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비재현적인 형태로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3    동시, 그림, 그리고 어린이 댓글:  조회:2689  추천:0  2016-12-05
  할머니의 방치질소리와 물놀이로 신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리운 강변. / 李长森 摄 연꽃은  해만 뜨면 부시시 깨지요.  연꽃은 연꽃은  세수를 안 해도 곱지요.  연꽃 ·윤석중  윤석중 선생은 우리 나라의 유명한 동요 시인이다. 이분은 30년 동안 동요와 동시만 쓰고 사신 분이다.  이 "연꽃"을 자세히 읽어 보면, 여러 가지 재미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이 노래를 풀이해 보면, "연꽃은 해만 뜨면 부시시 깨지요"라는 구절은, "연꽃은 해만 뜨면 꽃송이가 살며시 벌어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연꽃은 연꽃은 세수를 안 해도 곱지요"라는 것은, "연꽃은 물로써 씻지도 않았는데, 그야말로 세수를 말끔히 한 것처럼 맑고 깨끗하게 곱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노래를 쉽게 풀어 보면, "연꽃은 해만 뜨면 꽃송이가 펴나고, 물로써 씻은 듯이 아름답다"는 것에 지나지 않다.  이런 것은 누구나 다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아주 대수롭잖은 이야기다. 그런데도 왜 이 작품이 좋은 동시가 될까? 여러분은 스스로 의심스럽게 여기리라.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그런 의심을 갖는다며는,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해 보리라.  첫째 질문,  여러분은 연꽃이 해만 뜨며는 부시시 깨는, 그 "부시시 깬다"는 말을 아느냐?  둘째 질문,  "세수를 안 해도 곱다"는 말과 "물로써 씻은 듯이 아름답다는 말이 어떻게 다른가?  셋째 질문,  첫째 줄에는 "연꽃은 해만 뜨면…" 이라 하고, 셋째 줄에는 "연꽃은 연꽃은, 세수를 안 해도…" 하고 연꽃을 두 번 거듭 부른 까닭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따로 간추려 보면,  (1) "부시시 깬다" 는 뜻이 뭐냐?  (2) "세수를 안 해도 곱다" 는 뜻이 뭐냐?  (3) "왜 첫 줄에는 "연꽃은" 해 놓고, 셋째줄에는 "연꽃은 연꽃은" 하고 거듭 썼을까?  여러분이 이 세 가지 질문을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생각해 보라. 이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이 시가 왜 좋은 작품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되리라.  우리 나라에서 시인으로 유명하고, 더구나, 맑고 따뜻한 동시도 많이 쓰시는 장만영 선생의 작품 중에 "물방울"이라는 것이 있다.  소나기 지나가고  먼 하늘 동트듯 환해지자,  지붕 추녀를 타고 내려오는 빗물이  마당에 조그마한 여울을 만든다.  그러면 그 여울 위에는  수없이 많은 물방울이 생겨 흐르는 물을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주하듯 떠내려 간다.  물방울은 우리의  귀여운 어린이.  물방울·장만영  소나기가 지나가고, 마당에 흐르는 물을 따라 경주하듯 떠내려가는 물방울들을 "우리의 어린이"라 했다. 초등학교 일학년생들이 교정에 모여 술래잡기도 하고, 뜀질도 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 느끼는 사랑스러운 마음을 물방울에서 느낀 것이다.  장 선생의 마음이 얼마나 맑고 아름다운가! 그 장 선생님이 쓰신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바위 틈으로 흐르는 샘물 같은, 조금도 흐리지 않는 마음만이 시를 낳는다. 《현대시 감상》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이다. 이 말 중에 두 가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시를 쓴다" 혹은 "시가 된다" 하지 않고, 왜 "시를 낳는다" 했을까? "쓴다"는 것과 "낳는다"는 것이 어떻게 다를까?  만일 우리가 일기를 쓰려면, 그 날 겪은 일, 혹은 당한 일, 느낀 것을 찬찬히 사실대로 기록하면 된다. 그러나, 시는 일기를 쓰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일기를 쓰듯, 어떤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쓴다는 것은 깊이 느낀 것이 없더라도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면 된다. 그러나, 시는 사실을 기록하기보다 더 깊은 마음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깊은 느낌을 감동하라 한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시를 "마음의 음악"이라고 했다.  또한 불란서의 어느 시인은 시야말로 "감탄사에서 피어 난 것"이라고 말했다.  "오오 하늘은 푸르다."  "아아 아버지가 오시네!"  우리가 무엇에 깊은 느낌을 나타내는 "오오!"나 "아아"가 감탄사다.  모자야, 모자야,  오 모자는  저기 저 못에 걸려 잘 있다.  공아, 공아,  오 공은  누나 반짇고리 속에 잘 있다.  딱지야, 딱지야,  오 딱지는  내 호주머니 속에 잘 있다.  나 잔 동안  다 잘 있다. 다 잘 있다.  잠깰 때·윤석중  얼마나 여러분 마음을 용하고 묘하게 노래한 시이냐! 어린이의 하룻밤은 어른들의 하룻밤처럼 너절한 꿈으로 가득한 밤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잠선녀만큼 얘기도 잘하고, 얘기를 많이 아는 분은 둘도 없습니다.  밤이 되면, 아기들이 얌전히 밥상 앞에 앉았거나, 또한 걸상에 앉았으면 잠선녀가 옵니다. 사쁜사쁜 층층계를 밟고 올라옵니다. 버선발로 올라오기 때문에 부시럭 소리도 없습니다.  그리고, 살푼 문을 열고… 아기들 눈에 밀크를 한 방울 똑 떨어뜨립니다. 참으로 한 방울 넣는데도 아기들은 껌벅껍벅 졸음이 와서 눈을 못 뜹니다. 그래서, 아기들은 잠선녀를 본 사람이 없습니다.  잠선녀는 아기들 등 뒤에 나타나, 머리 뒤통수에 후하고 가볍게 입김을 붑니다. 그러면, 아기들은 머리가 아리숭해지며, 졸음이 옵니다.  잠선녀는 아기들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다만, 아기들이 떠들면 얘기를 들려 줄 수 없어서 조용히 누웠도록 재워 놓는 것입니다.  아기들이 잠이 들면 그 머리맡에 잠선녀는 앉습니다.  잠선녀는 아름다운 비단옷을 휘감고 있습니다. 그 빛깔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빨갛기도 하고, 초록빛이 되고, 혹은 퍼렇게 보입니다. 잠선녀는 양손에 두 개의 우산을 들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 꽃우산은 마음씨가 착한 아기 머리맡에 펴 둡니다.  그러면, 그 아기는 밤새도록 재미나는 꿈을 꿉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개는 그림 하나 안 그려졌는 새까만 우산입니다. 그것은 마음씨가 곱지 못한 아기들 머리맡에 펴 둡니다. 그러면, 그 아기는 꿈 한 가지 못 꾸고 새근새근 자기만 합니다.  올 르기애·안데르센  안데르센의 동화에서처럼 찬란한 꿈이 펴진 하룻밤이다. 이렇게 여러분이 꿈의 나라의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동안 모자도 공도 하물며 딱지조차 제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 신기하다.  이 시에는 그런 여러분의 한량없는 꿈이 어렸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오오"의 느낌씨를 그냥 짜 넣었다.  이 "오오"나 "아아"의 감동을 역시 장만영 선생은 좀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엄마, 나비 봐!"  장다리 꽃 노오랗게 핀 들밭으로 날아드는 한 마리의 나비를 보고도 어린이는 찬탄의 말을 던진다. 극히 짧은 이 한 마디의 말은 짧은 대로 하나의 시다. 왜냐 하면, 그는 벌써 자연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시를 이미 체득한 커다란 감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찬탄이란 언제나 아름다운 것, 신기로운 것, 새로운 것, 그리고 최선의 것을 합하여 외치는 마음의 진실한 소리다.  《시작법》에서  여러분은 위의 글을 읽고, 시야말로 느낌, 깊은 감동에서 울어나는 것이라 함을 깨달았으리라. 그러나, 시를 빚게 하는 마음의 깊은 느낌(감동)이 이내 시가 되지 않는다.  그 느낌을 암탉이 알을 품듯, 마음에 두고 두고 간직하면, 그 감동이 시를 낳게 한다.  그러므로, 시는 짓는 것이나 쓰는 것이기보다 낳는다.  이것은 시를 쓰려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말이다. 시야말로 감동이 낳게 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오묘한 말이다.  그럼, 여러분의 동무가 지은 두 편의 시를 어느 것이 좋은 작품인가 살펴 보기로 하자.  장독 뒤에 숨었길래  불러 봤지요.  닭의 볏을 닮아서  깜짝 속았지.  맨드라미꽃·유인자  땅 속엔 땅 속엔  누가 있나 봐.  손가락으로  쏘옥 올려미나 봐.  쏘옥 모란꽃 새싹이 나온다.  쏘옥 할미꽃 새싹이 나온다.  땅 속엔 땅 속엔  누가 있나 봐.  커다란 솥을 걸고  물을 끓이나 봐.  모락모락 아지랑이  김이 나온다.  땅 속엔 누가 있나 봐·국정교과서에서  첫째치는 "새벗" 잡지에 실린 광주 수창초등학교 3학년생이 지은 것, 다음 것은 6.25 전에 "소학생"이라는 잡지에 실린 현상모집에 일등으로 뽑힌 것.  "맨드라미꽃"을 뽑은 선생이 다음과 같은 평을 했다.  "맨드라미꽃"은 꼭 껴안고 깨물어 주고 싶게 귀여운 작품입니다. 선자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어 보았습니다.  "장독 뒤에 숨었길래…"  첫 줄에 벌써 마음이 기뻐집니다.  과연 선생 말대로 "맨드라미꽃"이 닭의 볏 같아서 꼬꼬하고 불러보는 그 마음씨가 귀엽고, 비로소 깜박 속은 것을 깨닫는 그 사실이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이렇게 적은 느낌 한 가닥일지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그것으로서 그치고 만다.  자세히 보니, 닭의 볏이 아니고 맨드라미꽃이었군!  하고 돌아서면 잊어 버린다. "땅 속에 누가 있나 봐"는 그런 허술한 감동이 아니다.  새싹이 쏘옥쏘옥 나오고,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는 봄날 들판에 "누구가 땅 속에 있나 보다" 여기는 그 누구를 하느님이라 생각해도 좋고, 여러분을 어머니가 낳으셨듯, 겨우내 새싹을 품안에 부등켜 안고 있다가 봄날이 되어 날이 따뜻할 무렵에 땅 위에 쏘옥 내미는 "새싹의 어머니"라 생각해도 좋다. 그분에 대한 감탄과 감사의 뜻이 깊이 스몄다.  더구나,  쏘옥 모란꽃 새싹이 나온다.  쏘옥 할미꽃 새싹이 나온다.  라는 구절의 "쏘옥"이라는 말에 얼마나 깊은 느낌이 스몄는 것이냐. 그래서, "맨드라미꽃"에서 보다 감동이 크고 넓다.  이것은 중요한 일이다. 참으로 감동이 크면 클수록 깊으면 깊을수록 좋은 시가 된다.  어느 외국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야말로 사랑이다."  라고, 큰 감동은 사랑에서 울어나는 것이며, 감동 속에 사랑이 깃들여 있다.  시는 마치 우리들이 언제나 잊을 수 없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사랑과 같은 것이다. 시를 느낄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아름답고 맑은 것으로 포근히 싸안아 주는 듯한 느낌을 가진다.  시는 끊임없이 속삭인다.  시는 우리를 꿈꾸게 하고, 깊은 생각 속에 잠기게 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어린 우리를 안으시고 맑고 청명한 아침 절에 뜰을 서성거리며 혹은 어두운 밤에 머리맡에서 불러주시던 자장가와 같은 것이다. 그 자장가야말로 우리가 처음으로 이 세상에서 듣게 된,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시다.  시작법·무로오  위에서 동시야말로 어린이의 맑고 아름다운 마음에 가장 깊은 느낌― 감동이 낳는 것이며, 또한 감동이 크면 클수록, 깊으면 깊을수록 좋은 시가 되고 사랑이 크면 클수록, 깊으면 깊을수록 감동이 깊고 크다는 것도 알았으리라.  그럼, 첫 대목에서 "연꽃"을 두고 물은, 세 가지 질문을 살펴 보자.  첫째 "연꽃은 해만 뜨면 부시시 깨지요."라는 첫 줄에서  "부시시 깨지요"가 무슨 뜻이냐?  물론, "해만 뜨면 연꽃송이가 벌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을 왜 "부시시 깬다"고 표현했을까?  만일, 여러분에게 동생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밤새 칭얼거리거나. 보채는 일이 없이 색색 잘 자고, 아침에 해가 뜨자, 눈만 쓱쓱 부비며 슬며시 일어나는 그 귀여웁고 착한 모습을 보게 되리라. 그 때, 그 "슬며시 깨서 일어나는 것"을, "부시시 깨지요"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연꽃은 해만 뜨면 부시시 깨지요"라는 구절은, 그 귀엽고 착한 동생에게서만이 느낄 수 있는 사랑을 연꽃송이에서 느낀 것이다.  이 한 구절 속에 얼마나 "연꽃"을 지은 분의 넘치는 사랑이 깃들여 있는가. 그분에게는 "연꽃송이가 피는 것이 아니라, 귀엽고 착한 어린이가 해만 뜨면 슬며시 일어나듯 했다. "연꽃"이 좋은 시라는 까닭이 첫째 여기에 있다.  둘째, "연꽃은 연꽃은 세수를 안 해도 곱지요."라는 "세수를 안 해도 곱다"는 뜻이 뭐냐?  물론, "연꽃" 송이가 깨끗하게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것을 "세수를 안 해도 곱지요"라고 표현한 것에 어린이다운 느낌이 절실하다. 세수를 해야 비로소 얼굴이 참 예쁘다 하고, 아버지나 어머니의 칭찬을 받는 어린이만이 "세수를 안 해도 곱지요"라는 말의 그 놀랍게 고운 것을 짐작하게 되리라.  동시는 어린이 여러분의 시다.  그러므로, 이 "연꽃"에는 어린이의 생각과 느낌이 솔직히 나타나 있다. (아동들의 생활 감정이 여실하다)  시야말로, 자기가 느낀 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동시는 여러분의 시다. 여러분 마음에 느낀 것은, 어른들과 다르다. 다르면 다를수록 좋은 동시가 된다.  물아,  고마운 물아,  불을 꺼 주는  고마운 물아,  불아,  고마운 불아,  물을 데 주는  고마운 불아.  물과 불·윤석중  불을 꺼 주니 물은 고맙고, 물을 데 주니 불은 고맙다…. 이것을 어른들은 아주 싱거운 이야기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이 싱겁다고 여기는 것에 이처럼 깊은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어린이다운 높은 감동의 세계가 있는 것이며, 이 동시가 동시로서의 값어치가 있다.  우리 아기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울 때  맨드라미 빨강비로  앞마당을 쓸어라.  걸음마·윤석중  이 작품에 대해서, 나는 어느 글에 "안마당에 무지개가 어리도록 신비스럽게 아름다운 시"라고 말했다. 어린 아기들이 정성껏 맨드라미 빨강비로 쓴 마당의 정결함이란 비할 데 없다. 그 정결한 마당에 첫걸음을 배우는 아기의 아장거리는 모습과 첨으로 검은 흙에 발자국을 남기는 첫발자국의 깊은 뜻과 인상이 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움도 "맨드라미 빨강비"라는 어린이만이 느낄 수 있는 한 마디 말에 있다.  여러분은 자기의 느낌을 올바르게 헤아려, 자기 생활에서 느껴지는 것을 잡아야 한다.  셋째,  "연꽃은  해만 뜨면…"과  "연꽃은 연꽃은  세수를 안 해도…"  하고 어떻게 다르냐의 문제, 이것은 좀 여러분이 깨닫기 어려울 것이다. 연꽃은 보면 볼수록 더 아름다워 뵈고, 더욱 사랑스러운 마음이 높아지는 그 느낌과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해만 뜨면 부시시 깨는구나 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써 "연꽃"을 보면 볼수록, 아아 참으로 "연꽃은 연꽃은" 세수를 안 해도 맑고 깨끗하게 예쁘구나! 여겨지는 연꽃에 대한 감탄이 차차로 세차고 높아지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엄마,  엄마 엄마,  어느 것이 더 어머니를 간절히 부르는 소리냐? "연꽃은"과 "연꽃은 연꽃은"도 마찬가지 이치다.  그러나, 시야말로, 우리의 느낌을 느낌으로서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연꽃"에서도 연꽃의 아름다움에 대한 놀라움과 사랑스러운 마음이 차차로 세차게 높아지는 것을 첫 줄에는 '연꽃은"하고, 다음에 "연꽃은"을 되풀이해서 나타내었다.  세 가지 질문의 대답이 끝났다. 동시야말로, 어린이 여러분만이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그 맑고 아름다운 감동을 감동으로서, 느낌을 느낌으로서 나타내는 것이다.  ==========================================================================     감처럼―권달웅(1944∼ ) 가랑잎 더미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훤한 하늘에는 감이 익었다 사랑하는 사람아 긴 날을 잎피워온 어리석은 마음이 있었다면 사랑하는 사람아 해지는 하늘에 비웃음인듯 네 마음을 걸어놓고 가거라 눈웃음인듯 내 마음을 걸어놓고 가거라 찬서리 만나 빨갛게 익은 감처럼    이 시는 일종의 그림이다. 그림에서 아랫부분은 땅이다. 땅은 넓고 서리가 내려서 하얗다. 그림의 윗부분은 하늘인데 가을 하늘이라서 높고도 파랗다. 그리고 그림의 중간에, 땅과 하늘을 연결해주는 한 그루 감나무가 서 있다. 감나무에는 잎이 없고 오직 빨간 감만 매달려 있다. 잎이 없는 탓에, 하늘이 파랗고 땅이 하얀 탓에, 이 빨간 감은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이런 풍경에서 감나무는 사람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놓인 나무가 사람이라면, 감나무에 달린 감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한다. 시인은 가을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름의 부산했던 마음, 어리석고 미련했던 마음을 다 버려야 하는 계절인 것이다. 오직 하나의 감만 남는 것처럼 중요한 것을 되찾는 계절이어야 하는 것이다. 빨갛게 익어가는 과일처럼 눈길도 깊어지고 마음도 깊어져 세상의 진한 맛을 음미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시인은 단순한 풍경을 보여 주었지만 그 안에 가을의 진짜 의미가 꽉꽉 들어차 있다.       곧 서리가 내릴 것이다. 따뜻한 외투와 든든한 울타리가 부족한 상실의 시대에 벌써 추위가 다가온다니 걱정이 앞선다. 가뜩이나 마음도 춥고 스산한 시대라서 추위가 달갑지 않다.   그런데 이런 찌푸린 표정으로 가을과 겨울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세상과 마음에 서리가 내릴 것이라고 생각해서 지레 분노하고 움츠러들 수만은 없는 일이다. 원래 우리의 가을은 이렇게 서럽고, 반갑지 않고, 걱정스러운 가을이 아니었다. 시가 말하고 있듯이 우리의 가을은 가치 있었다. 품위 있는 국화가 향기를 전하고, 추수의 결실에 대해 감사하며, 깊어가는 세월에 고개 숙이던 시기였다. 이렇게 스산하고 쓸쓸한 것은 우리 가을의 탓이 아니다. 
2    문학, 작가, 그리고 동인지... 댓글:  조회:3948  추천:0  2016-12-04
동인지[同人誌, little magazine] 1m 미만 남편과 1.7m 아내의 사랑 [ 2016년]     키가 1m가 안 되는 남편과 1.7m의 안해 결혼식...   산동(山東)성 쥐(莒)현에서ㅡㅡㅡ   흔히 전위적이며 비상업적인 순수문학작품을 다룬 다양한 소규모 정기간행물.     1880년경에 시작되어 20세기 상당기간에 걸쳐 발행되었으며,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유행했다. 프랑스   문인들(특히 1880~1900년경의 상징주의 시인과 비평가)도 종종 비슷한 형태의 출판을 했고, 1920년대    독일의 문학 발전도 이에 힘입은 바 크다. 동인지는 무엇보다도 비상업적인 형태의 편집·경영·재정 방식   을 뜻한다. 동인지는 대개 예술적 가치는 있으나 다음의 3가지 이유 또는 그중 1가지 이유로 상업적 잡지   가 받아들이지 않는 문학작품을 출판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즉 작가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모   험을 해볼 만하지 않거나, 작품 자체가 형식상 비관습적이거나 실험적인 경우 또는 작품이 도덕적·사회   적·심리적 행동에 대한 통념을 벗어났을 경우이다.         이러한 동인지 중 맨 먼저 나온 것은 2개의 미국잡지로, 〈포이트리 Poetry : a Magazine of Verse〉(창   간 1912)는 해리엇 먼로가 활발히 지도했던 초기에 특히 뛰어났으며, 마거릿 앤더슨의 〈리틀 리뷰 Little   Review〉(1914~29)는 좀더 별난 기사가 많았고 가끔은 좀더 선정적이었다. 1910년대 영국 잡지 중 가   장 두드러진 것은 〈에고이스트 Egoist〉(1914~19)·〈블래스트 Blast〉(1914~15), 그밖에 유진 졸라스   의 〈트랜지션 Transition〉(1927~38)이 있었다. 〈트랜지션〉을 제외한 모든 잡지의 정신적 구심점은   미국의 시인·비평가인 에즈라 파운드였다. 그는 〈포이트리〉와 〈리틀 리뷰〉의 '해외특파원'으로 일했   으며 원래 〈뉴 프리우먼 The New Freewoman〉(1913)이란 여성 해방 잡지로 시작했던 〈에고이스   트〉에 초기부터 참여하여 이를 전위문학 위주의 잡지로 만들었다. 또한 윈덤 루이스와 함께 2번의 〈블   래스트〉 발행을 후원했다. 대부분의 동인지들은 활동적인 한 인물의 개성을 여실히 나타냈다. 동인잡지   의 역사를 살펴볼 때 활발하고 헌신적이었던 다른 인물로 미국 시인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이런 저런 자격으로 수십 권의 동인잡지에 이름이 실렸다. 영국의 비평가   이자 소설가인 포드 매독스 포드는 〈트랜스애틀랜틱 리뷰 Transatlantic Review〉(1924~25)의 편집자   로, 다른 여러 잡지에도 기고했다. 구스타프 칸은 프랑스의 이류 시인이었으나 여러 권의 프랑스 상징주   의 정기 간행물의 발간에 관련한 아주 적극적인 편집자였다.           동인지의 전체 역사는 4단계의 중요한 시기를 거친다. 1890~1915년에 이르는 제1시기의 프랑스 잡지들   은 문학운동을 일으켜 자신들을 알리는 활동을 주로 했고, 영국과 미국 잡지들은 유럽의 문학과 문화에   대한 정보를 보급하고 받아들이도록 장려하는 역할을 했다. 1915~30년의 제2시기에는 다른 잡지들이,   특히 미국에서 현대문학의 거의 모든 변화를 주도했다. 이때 특히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미국과 영국의   젊은 비평가들과 작가들이 유럽의 여러 곳, 특히 프랑스에서 발행하던 해외거주자 잡지를 들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문학과 미학의 형식과 이론을 강조했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리틀 리뷰〉·〈포이트리〉·〈디   스 쿼터 This Quarter〉 등 기타 간행물에 실림), T. S. 엘리엇(〈포이트리〉·〈에고이스트〉·〈블래스   트〉에 실림), 제임스 조이스(〈에고이스트〉·〈리틀 리뷰〉·〈트랜지션〉에 실림)와 그밖에 여러 작가들   의 신선하고 독창적인 작품의 출판에 중점을 두었다. 제3시기인 1930년대에는 특정 이념의 신봉으로 시   작된 좌익 잡지가 많이 나왔고, 이는 종종 잡지의 편집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좌익계 잡지로 대표적   인 것은 미국의 〈파티전 리뷰 Partisan Review〉(1934)와 영국의 〈레프트 리뷰 Left Review〉   (1934~38)였다.         동인지 역사의 제4시기는 1940년쯤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대부분 대학이나   특수 전문학교에 재직중인 일군의 비평가들이 옹호·지지하던 비평들이었다. 이런 종류의 정기 간행물로   1939년 존 크로 랜섬이 만든 미국의 〈케니언 리뷰 The Kenyon Review〉와 F. R. 레비스가 1932~53년   에 편집한 영국의 〈스크루터니 Scrutiny〉가 있다. 출판인들이 그들 자신의 평론이나 그밖의 원고를 싣   는 식의 이런 후원은 일종의 조직 존중주의를 뜻하며, 이 점이 초기 동인지가 보여주었던 더 자발적이고   불규칙한 성격과 크게 차이가 나는 점이다.     鄭惠璟 옮김       한국 문단에서는 1908년 대중계몽을 목적으로 한 동인지 〈소년〉을 시작으로 1920년대까지 동인지를   중심으로 문인들이 활동했다. 도쿄 유학생인 김동인·주요한·전영택·김환 등이 본격적인 문학동인지 〈창   조〉(1919)를 펴낸 이후 김억·남궁벽·염상섭·황석우 등이 〈폐허〉를 펴냈고, 〈백조〉(1922)·〈금성〉   (1923)·〈영대〉(1924)·〈장미촌〉(1924)등이 잇달아 창간되었다. 이중 〈장미촌〉은 최초의 시전문 동   인지이다. 그뒤 해외문학파들이 창간한 〈해외문학〉(1927)은 외국문학을 국내에 번역·소개하여 신문학   운동에 이바지했다. 〈해외문학〉과 함께 이 시기에 종합문예지의 성격을 띤 〈조선문단〉(1924)·〈조선   문예〉(1929)·〈시문학〉(1930)·〈문예월간〉(1931) 등이 나왔으나 이들은 준(準)동인지 성격을 지닌다   고 할 수 있다. 동인지 중에는 재정난 등으로 불과 몇 호만에 폐간하거나 창간호만 내고 폐간한 것도 많   았다. 1930년대부터는 동인지보다는 종합지와 월간 문예지가 많이 창간되었다.               출처: 다음 백과사전 
1    문학, 비평, 그리고 쌍두마차... 댓글:  조회:3111  추천:0  2016-12-04
  비평의 유형과 인물 색인표  작성 목향 비평의 유형 비평가   비평의 유형 비평가 역사전기비평 생뜨뵈브 /정신적 박물관학/그 나무에 그 열매 랑송 /생뜨뵈브를 계승 테느인종, 환경, 시대 바우어즈 /원전확정과정/와전으로부터 텍스트 순수성 회복 그레브스타인 리온 이들 /포괄적 연대기,문학적 초상화,유기적 전기 로버트 스필러 /문학사적 기술방법 해리르빈 /문화적 관습 브엔티르 /문학 장르의 생성과 소멸 테리 이글턴/텍스트는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소산물   마르크스비평 마르크스/ 엥겔스 /리얼리즘 정의와 전형성/발자크 소설 높이평가 루카치/총체성/전형성/모더니즘비판 플레하노프/러시아 최초 마르크스주의 이론가/토대와 상부구조를 기계론적으로 파악하지 않음 프리체/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 경제 결정론 골드만/,세계관/상동성 아도르노/대중매체의 발전에 부정적 벤냐민/대중매체 발전에 긍정적 마르크스주의 비평 갈래/아도르도, 벤야민, 베르톨트 브레히트(p12),레이몬드 월리엄즈, 테리이글턴, 프레드릭 제임슨, 형식주의= 본체론적비평=맥락의 비평= 신비평 아리스토텔레스/, 형식주의 기원(비극 플롯),문예작품의 형식, 구조 ,스타일(문체)및 심리적 영향 등을 강조. 칸트/형식주의비평 성립에 영향 콜리지/,상상력의 이론 쉬클로프스키/러시아 형식주의 이론가, 낮설게 하기 로만 야콥슨/프라하학파: ‘신비평’과 ‘구조주의’를 비  롯 영미이론계에 지속적 영향을 끼침. 르네 웰렉/형식주의 대표적 이론가 엘리어트/, ,전통의식(역사의식).예술가의 정서와 개성은 다만 예술 작품 속으로 사라진다 리처즈/,,문학: 가장 완  벽한 양식의 발언(자족적), 존 크로 랜섬/신비평 명칭 부여 클리언스 브룩스/시는 시로서 다루어져야 하며 독립  적이고 자족적인 대상. 자크 바르장/본체론적 오류: 형식주의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 비어즐리와 윔저트/의도의 오류   구조주의 레비스트로스/,, , ,, 신화적인 체계연구로 프랑스 구조주의 확립, 신화체계 분석하여 초랑그인‘신화소’ 관계 꾸러미를 찾아냄. 피아제/전체성, 변이성, 자율성 소쉬르/언어를 기호들의 체계로 봄, 랑그에 관심. 야콥슨/시학의 발달에 공헌. 은유와 환유의 구별을 확실  히 함. 프라하 언어학파/야콥슨, 얀 무카르조프스키, 펠릭스 보  디츄카. 구조주의=기호학 퍼스/미국 기호학 창시자, 기호의 세 가지 분류 유리 로토르만(소련의 기호학자)/,,시적텍스트의 충진체계, 가장 복잡한 담론형식, 시적 텍스트는 체계들의 체계이며 관계들의 관계다, 블라디미르 프롭/,,.러시아 민담 속에서 연합적인 수평구조 발견, 민담에서 작용하는 기능은 31개 그레마스/프롭의 이론을 세련화 간소화: 세 쌍의 이항 대립과 패턴 츠베탕 토도로프/ ‘명제’와 ‘연쇄’라는 구조상의 두 기본 단위를 밝혀냄. 제라르 쥬네트/설화 분석의 다섯가지 범주 구분: 순서, 듀레이션, 빈도, 법, 태 롤랑바르트/이야기의 세가지 층위 분석-기능단위 층, 행위단위 층위 ,서술의 층위 탈구조주의 비평=후기 구조주의=해체주의 자크 데리다/차연. 텍스트의 밖이란 없다. 즉 우리는 텍스트를 벗어날 수 없다 푸코/,.기와 문명에서 권력이 어떻게 인간들을 합법적으로 속박해 왔나 보는 과정에서 권력이 행사해온 보호감호정책과 분리정책에 주목.(정신병원,환자,죄수).‘인식소’ 폴 드 망/모든 언어는 수사와 비유에 의해 움직이는 은유적인 것에 불과하다.’문학 스스로가 해체작용을 하여 수사적이고 허구적임을 드러낸다.   정신분석비평 프로이드/꿈의 작업의 두 개의 메카니즘: 압축과 전치 마리 보나파르트/.분석을 통해 작가의 억압된 무의식적 내용 특히 모성 고착증 문제와 직, 간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봄 어네스트 존즈/.오이디프스 콤플렉스로 햄릿 분석(작중인물의 무의식을 통해 분석) 라캉/‘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되어있다’.구조주의및 후기 구조주의 관점에서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을 재해석.(야콥슨:은유=유사성, 환유=인접성) 은유=대치현상=>프로이드의 압축현상과 연결. 환유=인접적 연결=>프로이드의 전치현상과 연결. 라이트/정신분석비평의 발전과정에 대해 설명. 신화 원형비평 프레이저/,인간에게는 영적인 통일성(신화 및 의식 또는 종교제식의 공통성)이 있다 -상관관계 칼 융/원형을 인간 체험의 원초적 근원으로 혹은 집단 무의식의 실재적 내용, 원형의 표현은 원초적 심상의 형태를 가질 수 있다 봄. 노드롭 프라이/자연신화에는 네가지의 문학 장르의 원형이 발생한다 주장, 추구신화는 신화의 대표적 유형이다. 보드킨/영시의 원형적 유형 휠라이트/시, 신화 그리고 실체   페미니즘 비평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페미니즘 이론에 관한 사상 최초여권옹호론 주장. 얼레인 쇼왈터/,,성의 차이에 대한 대부분의 토론에서 다루는 생물학, 경험, 언술, 무의식,사회경제적 조건의 다섯 가지 논쟁 스팩스/남성중심비평에서 여성문학 연구 중심으로 메리엘만/남성중심비평에서 여성문학 연구 중심으로 프랑스 페미니스트들/가부장적인 말의 독재로부터 갈라져 나온 혁명적 언어운동을 주장 안니 르클레르크: ‘여성의 말’에서 압제적이 아닌, 즉 혀를 풀어 주는 언어를 발명해 내도록 여성에게 촉구 독자중심비평(효용비평=수용미학 이론) 토마스 쿤/ 참조틀 게쉬탈트/심리학. 개별항, 관찰자의 능동적 역할강조 야콥슨(구조주의)/문학적 담론은 ‘메세지에 대한 관련항’을 가진다 볼프강 이저/빈자리, 가상적 독자, 실제독자 움베르트 에코/,열린 텍스트와 닫힌 텍스트 제럴드 프린스/청자. ‘실질적 독자’와 ‘이상적 독자’ 훗설/현상학: 의미를 결정하는데 있어 지각자의 중심적인 역할에 역점을 두는 현대의 철학적 경향 J. 힐리스 밀러/토마스 하디연구. 조르쥬 풀레와 장 스타로뱅스키가 주축이 된 제네바학파(테마비평)의 현상학적 이론에 영향 받음 하이데거/우리 의식은 사물을 투사하고 세계내 존재의 본성자체에 의해 종속된다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해석학.문학작품은 깔끔하게 포장된 꾸러미로 세상에 뛰어들지 않는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기대지평/지평의 융합 스탠리 피쉬/,.독자의 경험. 영향론적 문체론 미셀 라파테르/문학적 능력 조나단 컬러/독서 습관 노먼 홀랜드/독자심리. 어린이는 누구나 어머니로부터 ‘일차적 정체성의 흔적을 얻으며. 성인은 ’정체성 테마를 갖는다 데이비드 블레이치/.독자심리. 지식은 공동체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어린이는 언어 습득을 통해 경험을 주관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문화연구 레이몬드 월리암스/,,. 크리스 젠크스/.문화를 ‘역사가 있는 개념’으로 설명. 문화를 인지적 범주, 집단적 범주,기술적 범주, 사회적 범주로 설명 더글러스 켈러/대중문화1.2유형. 대중문화라는 용어 대신에 현대 문화의 생산, 분배양식을 잘 나타내는 ‘미디어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 폴 월리스/.문화를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재료, 즉 우리의 가장 일반적인 이해의 벽돌과 모르타르라고 정의 현대 버밍햄 문화 연구소/학제간 연구/1대소장 호가트:문학비평을 문화연구의 중심적 연구 방법으로 채택.2대소장 스튜어트 홀:대중문화와  대중매체에 관심, 마이클 그린/‘ 현대문화 연구’ 리처드 존슨/문화연구란 도대체 무엇인가 문화연구에 ‘의식’과 ‘주체성’에 구체적 주의를 기울일 것을 강조. 스튜어트 홀/,문화의 역사성, 실천성, 갈등을 강조. 메츄 아놀드/,,엘리트주의적 문학론에 기여. 콜린 맥케이브/,문화가 역사적인 사건에 의해서만 연구대상이 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게 되었다 알튀세르 마르크스주의/ 그람시/ 1980년대 문화연구/대처리즘. 레이거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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