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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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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동시를 잘 지으려면?... 댓글:  조회:3175  추천:0  2017-02-08
    1. 글감 정하기 흥미있는 글감을  하나만 고릅니다. 2. 생각하기 자신의 생각을  적어봅니다. 3. 동시쓰기 동시를 적은 뒤,  몇번이고 고쳐봅니다. 5. 감상하기 마무리하여  감상해봅니다.     남의 동시를 흉내내어 쓰지 않습니다. 행과 연을 잘 나누어, 시의 멋과 맛을 아껴씁니다. 잘 고르고 다듬어 최대한 말을 아껴씁니다. 말하지 않고도 대신 말해줄 수 있는 알맞은 비유를 씁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씁니다. 느낌을 모습이나 형태로 바꾸어 씁니다.     ♡ 총 획득메달   추천추천 답변 동시를 쓰는 방법 ① 글감은 무엇이든 좋습니다. - 주위의 사물을 관심 있게 바라보며 지나쳐 버리기 쉬운 것에서 글 감을 찾아냅니다. 눈에 보이는 것, 마음을 스쳐 가는 짧은 생각, 늘 그 자리에 있는 자연 속의 일부분도 좋은 글감이 됩니다. 무엇을 쓸 것인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든 동시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둡시다. 착하고 고운 마음에서 동시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됩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찰력과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어린이다운 정서 속에서 글감을 찾아냅시다. ② 거짓없이 솔직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 동시는 맑고 깨끗한 마음의 글입니다. 억지로 기교를 부리거나 가식적으로 표현한다면 생명을 잃게 됩니다. 어린이의 마음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부끄러움이나 잘못도 정직하게 표현하고, 사물을 바라보는 착한 마음으로 동시를 씁니다. ③ 남의 글을 흉내내지 말아야 합니다. - 동시는 짧은 글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다른 사람의 것을 암기했다가 모방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경우, 습관이 되어서 창작활동에 방해가 됩니다. 스스로 생각해 내어서 나만의 글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낱말 하나도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 하나, 연 하나에 정성을 다해 자신의 표현을 찾아냅니다. ④ 리듬이 나타나게 씁니다. - 동시는 노래에서 비롯된 글입니다. 노래처럼 아름다운 리듬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짧게만 쓰면 된다는 생각에 운율을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음악처럼 율동을 가지고 노래를 부르듯이 쓰는 동시에서 동시의 참맛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설명하거나 이야기하듯이 쓰여서는 안 되며, 일정한 리듬과 흥겨운 가락이 숨어 있어야 합니다. ⑤ 연과 행을 바르게 나누어 씁니다. - 산문과 시의 구별은 연과 행의 구분에 있습니다. 동시는 산문과는 달리 글자와 글자가 효과적으로 이어져야 하며, 행과 연이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의성어나 의태어도 사용하고 반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됩니다. 의미가 비슷한 행들이 모여서 각 연을 이루고, 이 연이 모여 한 편의 동시가 완성됩니다. 제멋대로 나눈 행과 연은 호흡이 끊어지게 되므로 잘 짜 맞추어 나누어야 합니다. ⑥ 알맞은 비유를 사용합니다. - 짧은 글 속에서 많은 내용을 표현해야 하므로, 다른 것에 견주어 표현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비유를 사용하면 읽는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효과적으로 시를 표현하게 합니다. 직유는 두 개의 사물을 견주어서 '-같이, -처럼' 을 사용하는 것이며, 은유는 다른 사물로 그 의미를 대신 나타내어 원래의 의미를 감추는 것입니다. 이처럼, 비유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아름다운 의미를 찾아냅니다. ⑦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 동시는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의 감각이 모두 동원되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간직한 것이나 사물의 모습을 눈에 보이는 것 외에 더 새롭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감각을 표현하는 것을 자신의 느낌으로 새롭게 표현합니다.   좋은 동시를 쓰는 요령   ① 다른 사람의 시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 동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윗사람이나 친구들의 좋은 시를 자주 읽고 암기하여 그 의미를 파악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내 나름대로 그 시를 소화시켜서 자기의 감정으로 만들어 둡니다. ② 자주 써서 정리해 둡니다. - 동시의 글감이 될만한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써 둡니다. 막상 새롭게 쓰려면 안 되는 경우가 있으니, 계절이 지나기 전에 그 계절의 감상을 써두고, 기쁜 일, 슬픈 일 등을 겪고 난 뒤에 곧바로 동시로 표현합니다. 처음부터 잘 쓰려면 무리를 하게 되어, 좋을 글이 나오지 않습니다. 자주 메모하듯이 시의 구절을 써두면, 꼭 필요할 때 정리하여 좋은 동시를 쓰게 됩니다. ③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 계절이 변화하면, 온갖 자연의 모습이 바뀌며, 새 학년에 올라가면 친구들의 얼굴도 바뀝니다. 그러한 변화를 자주 찾아내어 자신의 감정으로 만들어 둡니다. 다른 사람이 찾지 못하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 동시 쓰기에 도움이 됩니다. 남들이 미처 찾아내지 못하는 자기만의 생각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면 좋은 동시가 됩니다
209    젓가락 두짝 = ㅣㅣ톡!.. ㅣ ㅣ톡!... 댓글:  조회:2443  추천:0  2017-02-08
둘이서 함께 밥을 먹기 전에 톡 반찬을 집기 전에 톡 젓가락 두 짝을 나란히 세워 보는 건 누구 키가 더 큰가 재보는 게 아니야 둘이서 함께 마음을 맞추고 둘이서 나란히 생각을 맞추라는 거야. ―문성란(1954~ ) 밥과 반찬을 집기 전에 젓가락을 밥상 위에 '톡' 나란히 세우는 건 마음과 생각을 맞추는 거란다. 무감각했어라. 젓가락질 의미가 이러한데도 아무 생각 없이 밥상 앞에서 그저 우적우적 먹는 데만 신경을 썼으니.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을 남달리 보고 그 의미를 캐낸 시인의 시선이 날카롭고 푸르다. 푸른 시선이 만든 동심의 젓가락질! '톡 톡' 맘 맞추기 젓가락질을 잘하는 어린이가 늘어났으면…. 설날엔 생각을 맞춰 지내는 형제와 자매, 이웃, 친구, 부모 자식이 '톡 톡' 불어났으면…. 어린이에게 이런 협력 의식을 심어 주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으리라.  /박두순 동시작가 |조선일보    
208    하늘 날던 새가 땅을 내려다보며 왈; ㅡ질서 공부 좀 해... 댓글:  조회:2388  추천:0  2017-02-08
겨울새 하늘을 나는 새를 봐 질서 공부 끝! ―윤삼현(1953~)   AI 즉 조류인플루엔자 때문에 겨울 철새의 인기는 하락했다. 주남저수지와 순천만, 시화호 등 철새 마을은 철새를 보려고 몰려든 이들로 얼마나 붐볐던가. 그랬던 것이 조류인플루엔자를 철새가 옮긴다는 소문에 그만 사람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발길을 끊어버렸다. 아, 인기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인기도 독감에 걸린다면 그 근처에 안 갈 것이다. 하하! 철새들의 춤, 그 장관의 군무에도 질서가 있다는 걸 어린이들은 본다. 어린이 시선이 어른보다 낫다. 고니, 기러기, 두루미, 백조 등 우리나라에서 보내는 겨울새들의 춤이 없다면 겨울 하늘이 얼마나 쓸쓸할까. 그들은 리더를 따라 약속처럼 줄지어 하늘길을 난다. 일사불란한 질서. '질서 공부/ 끝!' 이다. 이런 동심이 콕 박혀 시가 보석처럼 빛난다. 요즘 겨울새들도 우리 땅을 내려다보며 이 나라 질서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고 "질서 공부 좀 해"라고 할지 모른다. 우리는 신호등 잘 지켜 길 건너고 운전한 일을 이제 자랑스레 여겨도 좋을 것이다. 딱 넉 줄의 시가 전하는 메시지다.   ⓒ 조선일보 &박두순 동시작가
207    눈사람 왈; ㅡ느네집 따듯하니?... 댓글:  조회:2296  추천:0  2017-02-08
눈사람과 아기 ―아저씨, 우리 집에 좀, 놀러 와요! 아기의 말에 눈사람 아저씨가 반가워 묻습니다. ―느네집 따듯하니? ―권영상(1953~ ) 눈사람과 아기의 단 두 마디 대화에 따스함이 온몸에 살몃살몃 스민다. 아기는 눈사람 아저씨가 추위에 떨고 있는 게 안쓰럽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주저 없이 '우리 집에/ 좀, 놀러 와요' 초청한다. 눈사람 아저씨는 반갑다. '느네 집 따듯하니?' 현실에선 말도 안 되지만, 어린이 세계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때 묻지 않은 순진함이 마음을 데워준다. 유머러스한 짧은 동시가 '우리 집에 놀러 와요' 이 겨울 누군가를 초청하고 싶은 맘을 싹틔운다. 겨울은 이래서 좋다. 눈과 눈사람이 있어 좋다. 황량한 벌판을 적시는 눈발은 겨울 선물이다. 빈 겨울 마당은 눈사람이 채워준다. 눈사람은, 깨끗한 어린이가 깨끗한 눈으로 만든 깨끗한 사람이다. 눈사람처럼 깨끗한 사람은 어린이 가슴 속에 산다. 어린이들이 묻는다.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아저씨들, 먼저 눈사람 한번 만들어 보시지 않을래요?' ⓒ 조선일보 /박두순 동시작가
206    역술(易術), 학술(學術), 의술(醫術), 시술(詩術), 저술(著術)... 댓글:  조회:3474  추천:0  2017-02-08
중국 무협지로 유명한 화산파(華山派)의 도사 양성 커리큘럼을 보니까 고급 과정에 표주(漂周)가 있었다. 3년간 돈 없이 천하를 돌아다녀야 학점을 딴다. 방점은 '돈 없이'에 있다. 신용카드 가지고 다니면 유람이 된다. 카드 없이 돈 없이 다녀야 세상 공부가 된다. 두보는 54세부터 시작해서 59세에 죽을 때까지 표박(漂泊)을 하였다. 말년에 고생만 하다 간 것이다. 표(漂)는 떠돈다는 의미이다. 박(泊)은 배를 댄다는 뜻이다. 두보는 난리가 나자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나 중국 양쯔강 일대를 떠돌아다녔다. 혼자도 아니고 가족을 동반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두보는 폐병에다가 배를 타고 떠돌면서 중풍까지 왔다. 오른팔은 마비됐고 한쪽 귀도 들리지 않았다. 식구들 먹을 끼니도 없는 데다 습기 찬 조그만 배에서 쪼그려 잠을 자는 생활을 했으니 몸이 병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떠돌다가 그 유명한 후난성의 웨양루(岳陽樓)에 구경을 갔다. 몸은 병들고 가족은 배고파서 떨고 있는 상태에서도 호쾌한 둥팅호(洞庭湖) 풍광이 그의 심금을 울렸다. 이때 남긴 두보의 시가 '등악양루(登岳陽樓)'이다. 이 시에서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 乾坤日夜浮(건곤일야부)' 대목이 절창(絶唱)이다. '오나라와 초나라는 동쪽과 남쪽으로 열려 있고,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물 위에 떠 있다'는 의미이다. 둥팅호가 천하의 오나라와 초나라를 나누어 놓았고, 건곤이 그대로 물 위에 떠 있다는 상상력은 너무나 호쾌하다. 생활의 주름은 하나도 없다. 그 고생과 서러움과 고독을 겪으면서도 어떻게 이런 천지의 호탕함을 노래할 수 있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를 쓸 때 두보의 나이가 57세였다고 한다. 인간은 춥고 배고픈 고생을 해야 작품이 나오는 것인가! 화산파 도사들은 역술(易術), 학술(學術), 의술(醫術)을 익혀서 표주를 해도 밥은 굶지 않았지만, 두보는 무엇을 가지고 생계를 해결하였을까? 시술(詩術)이었을까. 조선의 김삿갓은 시술로 유랑 생활을 하였고, 이중환은 파직당하고 전국을 떠돈 방랑 끝에 저술(著術)을 남겼다. '택리지(擇里志)'가 그것이다. 필자는 칼럼술(術)을 가지고 전국을 떠돈다. /조용헌 삼국지의 오나라 군사령관 노숙이 수군을 열병하고 훈련시켰다던 열군루에서 비롯됐다는 중국 동정호의 악양루. 악양루는 무차으이 황학루, 남창의 등왕각과 더불어 3대 명누각이다. 못하나 박지 않고 맞추어 지었다는 이 악양루의 현판은 곽말약의 글씨요, 다락 3층에 걸린 두보의 "등악양루"시는 모택동의 글씨이다. /조선일보 DB =============================덤으로 더 보기=============               登岳陽樓(등악양루) ​악양루에 올라 ​ ​두보 ​ 예전부터 동정호를 소문으로 들었더니 오늘에야 악양루에 오르네   오나라, 초나라가 동쪽과 남쪽에 갈라섰고,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호수에 떠 있도다.   친한 벗에게선 편지도 한 장 오지 않고 늙고 병든 몸만 외로운 배 안에 있네.   고향 관산 북쪽에선 전쟁 일어났다니 그저 난간에 기대어 눈물 흘릴 뿐.   登岳陽樓    杜甫   昔聞洞庭水 석문동정수 今上岳陽樓 금상악양루 吳楚東南坼 오초동남탁 乾坤日夜浮 건곤일야부 親朋無一字 친붕무일자 老病有孤舟 노병유고주 戎馬關山北 융마관산북 憑軒涕泗流 빙헌체사류     [通釋] 예전부터 사람들이 동정호의 기상이 웅장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왔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악양루에 올라 완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과연 동정호의 물은 드넓어서 동남쪽으로 吳와 楚를 가르고 있는 것이 보이고, 호수 그 자체로 天地를 이루어 해와 달이 그 속에서 출몰하는 듯하다. 이러한 승경(勝景)을 보고 있자니 문득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른다. 친한 친구들은 소식이 끊어졌고, 나는 늙고 병든 채로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서 여기저기를 떠다닌다. 듣자니 장안과 낙양 부근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하는데, 언제쯤 이 전쟁이 그치고 나라가 평안해져서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난간에 기대어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자니 눈물과 콧물이 흘러내린다.       [解題] 이 시는 登臨詩(등림시)로 대력(大曆) 3년(768) 늦겨울에 지은 것이다. 당시 두보(杜甫)는 57세였다. 그해 正月에 그는 기주(夔州)를 떠났는데, 병란(兵亂)으로 인해 길이 막혀서 江陵·公安 등지를 표박(漂泊)하였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 공안(公安)을 거쳐 세모(歲暮)에 악양(岳陽)에 도착하였고, 이 시는 그때 악양루에 올라 지은 것이다. 악양루는 호남성(湖南省) 악양현(岳陽縣)의 서문(西門)에 있는 누대(樓臺)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동정호의 풍경은 예부터 절경으로 꼽혀왔다. 시의 전반부는 동정호의 경치를 묘사하였는데, 그 기세가 읽는 이를 압도하며 특히 ‘吳楚東南坼 乾坤日夜浮(오초동남탁 건곤일야부)’ 두 句는 천고(千古)의 절창(絶唱)이 되었다. 동정호에 대해 말로만 듣다가 악양루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는 분명 감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후반부 4구를 보면 당시 杜甫는 가련하고 슬프기 그지없다. 杜甫는 장안에서 곤궁하게 살 때 이미 폐병을 얻었고, 서남쪽으로 표박(漂泊)할 때 다시 풍비(風痹)를 앓은 까닭에 오른쪽 팔은 쓰지 못하게 되었고 왼쪽 귀는 멀었다. 당시 그의 온몸은 병들어 있었고 촉(蜀)을 나온 후에는 식구들이 모두 배를 타고 떠다니는 신세였다. 이렇듯 전쟁 통에 피란하여 늙고 초라한 모습으로 악양루에 올랐기 때문에 기쁨보다는 서글픈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이다. 시 전반부의 장엄함이 마지막 구의 서글픔을 증폭시키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그러나 杜甫는 자신의 불행에 대해 슬퍼하고 한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국가의 안위(安危)와 관련지으며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포부를 드러내고 있다. 杜甫의 시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이유 중 하나는 이처럼 그의 강렬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시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역주 역주1> 岳陽樓(악양루) :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악양시(岳陽市) 서쪽에 있는데, 당(唐) 개원(開元) 초 장설(張說)이 악주자사(岳州刺史)가 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송(宋)나라 때 중수(重修)했다. 악양루가 동정호(洞庭湖)를 내려다보고 있어 등람(登覽)의 명승지가 되었다.   역주2>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 : 동정호는 중국의 동남부에 걸쳐 넓게 퍼져 있는 호수이다. 오초(吳楚)는 지금의 江蘇(강소)·浙江(절강)·安徽(안휘)·江西(강서)·湖南(호남)·湖北省(호북성) 지역이다. 동정호의 동쪽 일대가 吳나라 방면이며, 남쪽 일대가 楚나라 방면이다. 坼(탁)은 ‘나누어지다’, ‘찢어지다’의 뜻이다.   역주3> 乾坤日夜浮(건곤일야부) :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과 더불어 동정호의 장활(壯闊)하고 웅위(雄偉)한 기세를 묘사한 것이다. ≪水經(수경)≫ 湘水注(상수주)에 “동정호의 물은 그 둘레가 500여 리에 이르며, 해와 달이 그 속에서 뜨고 지는 듯하다.[洞庭湖水廣圓五百餘里 日月若出沒其中]”고 하였다. 건곤(乾坤)은 天地이다.   역주4> 無一字(무일자) : 소식이 없다는 뜻이다.   역주5> 戎馬關山北(융마관산북) : 중원(中原)에 전쟁이 있음을 이른다. 대종(代宗) 대력(大曆) 3년(768) 8월에 토번(吐蕃)이 靈武(영무)·邠州(빈주) 등지를 자주 침략하였는데, 9월에 대종이 郭子儀(곽자의)에게 명하여 병력 5만을 이끌고 봉천(奉天)에 주둔하여 방어하게 했다.   -憑軒(빙헌) : 난간에 기대다 -涕泗流(체사류) : 눈물, 콧물을 흘리다   본 자료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 악양루에 대한 시는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楼記),유장경(劉長卿)의 악양루(岳陽樓), 양기(楊基)의 악양루(岳陽樓), 진여의(陳与義) 등악양루(登岳陽楼) 등이 있으며 이백은 與夏十二登岳陽樓(여하십이등악양루)를 지었다.   與夏十二登岳陽樓(여하십이등악양루) : 李白全詩   李白(이백)   樓觀岳陽盡 (루관악양진) 누각 경치로는 악양루가 그만 川逈洞庭開 (천형동정개) 강물 아득히 흐르고 동정호가 탁 트였네 雁引愁心去 (안인수심거) 기러기는 내 맘 속 근심 끌고 날아가고 山銜好月來 (산금호월래) 산은 둥근 달 머금고 다가서네     雲間連下榻 (운간연하탑) 구름 사이에 잠시 머물고 天上接行杯 (천상접행배) 하늘 위에서 술잔 주고 받네 醉後凉風起 (취후량풍기) 취하니 또 서늘한 바람 일어 吹人舞袖回 (취인무수회) 너울너울 춤추는 사람 옷소매 휘두르네         악양루(중국어 간체: 岳阳楼, 정체: 岳陽樓, 병음: Yuèyánglóu, 웨양러우[*])는 중국 후난 성 웨양 시의 고적 웨양고성 서문의 윗쪽에 있다. 아래 쪽으로는 둥팅 호가 보이며, 앞으로는 군산을 북쪽으로는 장강에 접한다. 악양루는 강남사대명루의 하나로 손꼽힌다. 웨양러우(악양루)의 전신은 삼국시대 동오의 명장 노숙이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누각이다. 당시 오나라는 촉나라의 유비와 형주를 다투고 있었는데, 215년 노숙은 동정호의 파구(巴丘)에 주둔하며 수군을 훈련시키고, 파구성을 세우면서 열군루(閱軍樓)라는 망루를 지어 수군이 훈련하는 모습을 참관하였다. 이것이 동정호의 시초이다. 716년 당나라 때 악주의 태수 장열(張說)이 이곳을 수리하여 다시 세우면서 악양루라고 이름을 고쳐짓고, 그때부터 문인재사들의 시를 읊는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1044년 송나라 때 등자경(藤子京)이 이곳 태수로 좌천되면서 퇴락해진 누각을 증수하게 되는데, 그때 범중엄을 초청하여 유명한 악양루기(岳陽樓記)를 짓게 한다. 현재의 건물은 1880년 청나라 광서제 때 다시 중건한 것으로 누각의 높이는 20미터에 삼층 목조 건물로 되어 있다.           동정호 : 둥팅 호(중국어: 洞庭湖, 병음: Dòngtíng Hú, 동정호[*])는 후난 성(湖南省)에 위치한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담수호이다. 한 때 중국 최대의 담수호였으나, 4개의 하천에서 흘러드는 퇴적물과 장강의 진흙 및 모래의 유입으로 수염이 점차 축소되어 포양 호에 이어 이제는 제2의 담수호로 바뀌었다. 후베이(湖北)와 후난(湖南)은 둥팅 호를 기준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수원은 남쪽에서 유입되는데, 굴원이 빠져죽은 상수(湘水)와 자수(資水), 원수(沅水), 예수(澧水) 네 곳의 지류에서 유입이 된다.              [출처] [당시삼백수]등악양루(登岳陽樓)-두보(杜甫)|작성자 swings81  
205    시인은 시작에서 첫행을 어떻게 잘 쓸것인가를 늘 고민해야... 댓글:  조회:2716  추천:0  2017-02-08
5-4. 행(行)과 연(聯)에 대하여 5-4-1. 시의 첫 행 모든 일이 처음이 잘 되면 끝까지 순조롭게 잘 풀려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 쓰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의 첫 행은 시 쓰기의 성공에 대단히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들이 첫 행을 쓰는데 많은 고심을 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산문에 있어서는 서두의 글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중요합니다. 논문이나 설명문, 보고서, 평론문 등에서는 기승전결(起承轉結) 구도에서 서론에 해당하는 서두로서 산문의 개요를 파악하거나 주제에 대한 상황이 설정되는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시의 첫 행도 이와 같이 시의 출발이며 시작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시의 첫 행을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표준이라고 할까, 무슨 원리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는데 시창작에는 뚜렷한 공식이 없는 것처럼 결국 시인들 각자의 개성이나 관습되어진 체질에 맞도록 연습하면서 숙달시키는 도리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의 첫 행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 나타내고자 하는 주변 상황부터 주의 깊게 표현한다. ② 주제가 되는 글귀나 주제를 포괄하는 말이 되도록 주의 깊게 써 본다. 이러한 두 가지의 방법 말고도 더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시 쓰기의 혼란을 초래할 수 도 있기 때문에 우성 이 두 가지 방법만으로 연습을 하면 시 쓰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① 번처럼 사물의 주변 상황을 시의 첫 행으로 나타낸 작품들을 살펴봅시다.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알으고 있는 나뭇잎                          -- 정한모의 [가을에] 첫 연중에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노천명의 [사슴] 첫 연 지금 가시(可視)거리엔 밀려온 안개뿐이다                          --졸시 [근시안] 첫 연 이 세상 마지막 날 저녁처럼 붉은 노을이 무겁게 떨어지던 오후 유채꽃 가득 핀 들판을 걷다가                          --尹石山의 [유채꽃 가득한 들판에서] 첫 연 오늘도 어머니는 강물을 훔쳐 와 한 자락씩 줄에 너신다 누런 호박오랭이 썰어 말리듯이                           --서지월의 [江물과 빨랫줄] 첫 연 무량수불전 앞 댓돌 밑을 눈 비비며 기어 나온 꽃뱀 한 마리                            -- 김원길의 [개안(開眼)] 첫 연 이처럼 위의 작품들에서 보면 ‘가을’이나 ‘사슴’, ‘안개’, ‘유채꽃’, ‘빨래’ 그리고 ‘개안’이라는 시적인 소재나 주제의 주변을 먼저 접근하기 위해서 시작하는 말이 첫 행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게 시 쓰기에서 이런 방법으로 첫 행을 꾸미는데 첫 행 쓰기의 부담을 줄일 수 있지만 시 전체가 길어질 염려도 함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 행으로부터 시적인 상황을 열거하고 주제를 접근하기 때문에 진술이 늘어질 요소를 갖고 있다는 점에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사물의 주변이나 상황의 설정만 뚜렷하게 나타난다면 시가 짧아질 수도 있으므로 크게 걱정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러면 다른 시인들은 첫 행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예를 들어 봅시다. 아아, 사람은 약한 것이다. 여린 것이다. 간사한것이다.(한용운의 [이별]) 개구리 울음만 들리던 마을에(박남수의 [밤길] 나 하늘로 돌아가리(천상병의 [귀천]) 진주 장터 생어물전에는(박재삼의 [추억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김춘수의 [꽃]) 뭐럭커노, 저 편 강기슭에서(박목월의 [이별가])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이육사의 [절정] 강은 흐르면서 산다(박명용의 [은총]) 마을이 떠나가도록 쓰르라미야 울든말든(이상호의 [증인]) 한편 ②번과 같이 주제나 이미지가 포괄되는 말을 시의 첫 행으로 하는 경우에는 상당한 시창작의 단계에 까지 발전했을 때 흔히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시의 첫 행이 어떤 이미지나 상징으로 강하게 나타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理念의 푯대 끝에 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 안 그대는                              -- 유치환의 [깃발] 골목은  흔들리는 木船이다 잠들은 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빠져 나가지 못한 매운 바람은 미친 듯 회오리치다가 그대로 나자빠진다                               -- 문덕수의 [골목] 첫 연 온몸이 뜨거워질 때 책 속으로 길을 찾고 聖 . 프란체스코가 걸어간 길엔 눈물이 빗줄기로 때려치고 세찬 눈보라  온몸을 마비시키더라도 조용히 맞아드리리라                              -- 장윤우의 [꿈과 겨울의 詩 . 1] 첫 연 시작과 끝이 없는 신비의 발자국 상처 깊은 가슴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끝                               -- 박후자의 [하늘은] 첫 연 얼마나 바램이 깊어야 맞닿을까 한 방울씩 떨어진 시간이 싹터 그 싹이 자라는 동안 태고의 얼굴은 먼 여로에 올랐다                               -- 백경애의 [온달동굴에서] 첫 연 이 작품들의 제재는 ‘깃발’과 ‘골목’, ‘꿈, 겨울, 시’, ‘하늘’, ‘온달동굴’이지만 맨 처음 착상되거나 발상된 이미지 혹은 여러 이미지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소리 없는 아우성’이며 ‘골목은 / 흔들리는 목선’입니다. 그리고  ‘온몸이 뜨거워질 때 / 책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이며 ‘시작과 끝이 없는 / 신비의 발자국’이요 ‘얼마나 바램이 깊어야 맞닿을까’하는 의문입니다.  이 중에서 문덕수, 장윤우, 박후자 시인의 경우는 둘 째 행까지 첫 행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창작의도가 한 개의 낱말이나 한 행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입니다. 아무튼 시의 첫 행은 시의 내용을 파악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기 때문에 작품의 전체적인 구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     령(零)  ―이현호(1983∼ ) 시간들이 네 얼굴을 하고 눈앞을 스치는 뜬눈의 밤 매우 아름다운 한자를 보았다 영원이란 말을 헤아리려 옥편을 뒤적대다가 조용히 오는 비 령(零) 마침 너는 내 맘에 조용히 내리고 있었으므로 령, 령, 나의 零 나는 네 이름을 안았다 앓았다 비에 씻긴 사물들 본색 환하고 넌 먹구름 없이 나를 적셔 한 꺼풀 녹아내리는 영혼의 더께 마음속 측우기의 눈금은 불구의 꿈을 가리키고 零, 무엇도 약정하지 않는 구름으로 형식이면서 내용인 령, 나의 령, 내     영하(零下) 때마침 너는 내 맘속에 오고 있었기에 그리움은 그리움이 고독은 고독이 사랑은 사랑이 못내 목말라 한생이 부족하다 환상은 환상에, 진실은 진실에 조갈증이 들었다 령, 조용히 오는 비 밤새 글을 쓴다 삶과의 연애는 영영 미끈거려도                   피란길에 부모를 잃은 꼬마소녀가 임시로 보호받고 있던 한 농가에서 군인에게 인계돼 기차역에서 저를 실어갈 기차를 기다리다가 인파 속으로 달려가 사라지던 프랑스 영화 ‘로망스’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다. 어디선가 들리는 “미셸!” 소리에 “미셸!?” 중얼거리며 두리번거리다 순식간에 튀어나간 것이다. 미셸은 그 마을에서 소녀를 보살피고 사랑하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소년의 이름이다. 소녀가 ‘미셸’이라는 소리에 반응한 것처럼, 문득 감정을 민감하게 자극하고 영혼을 움직이는 글자가 있다. 상상력을 건드리고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말의 힘! 화자는 ‘영원이란 말을 헤아리려 옥편을 뒤적대다가’ 우연히 ‘조용히 오는 비 령(零)’을 발견하고 그 글자에 홀린다. 영(零)은 ‘떨어지다, 부슬부슬 내리다, 비 오다, 숫자 0’을 뜻하는 한자다. 첫 글자를 ‘ㄹ’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현재 우리글 문법의 두음법칙을 무시하고 굳이 ‘령’이라 함은, ‘영’보다 ‘령’이라는 발음이 더 생동감 있고 음악적이어서일 테다. 어쩌면 화자로 하여금 ‘시간들이 네 얼굴을 하고 눈앞을 스치는/뜬눈의 밤’을 보내게 하는 사람의 이름이 ‘령’으로 끝나는지도 모른다. ‘네 이름을 안았다 앓았다’ 하는 사랑하는 자의 고독이, 언어에 대한 섬세한 감각으로 자우룩이 펼쳐진다.  
204    시의 제목에서도 이미지가 살아 있어야... 댓글:  조회:2725  추천:0  2017-02-08
먼저 주제를 제목으로 한 예를 살펴 보기로 합니다. 이끼 앉은  들길 토담집 지붕 달빛 치렁치렁 내리는 마당귀 지렁이 울음 우럼마 손때 묻은  장독대에 방울방울 맺힌 이슬 바람같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                            -- 차한수의 [그리움] 전문 차한수 시인의 이 [그리움]은 주제를 제목으로 하였지만 내용에서 ‘그립다’든지 ‘그리움’에 대한 직접 언급이 없다. 이것은 주제가 온전히 무르녹아서 짙게 배어있음을 말해 준다. 또한 주제가 잘 형상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의 흐름으로 보아 ‘우럼마 손때 묻은 / 장독대에’서 곧 ‘그리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끼 앉은 / 들길’이나 ‘토담집 지붕’과 ‘달빛 치렁치런 내리는 / 마당귀’ 그리고 ‘바람같이 다가오는 / 발자국 소리’ 등 어느 것 하나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와같이 주제가 시의 제목으로 붙여지면 시 읽기의 묘미가 더욱 감칠 맛이 솟아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음은 주제를 내용 속에 깊이 감추고 있는 구절을 제목으로 붙인 경우를 보기로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제목 자체가 시의 맛을 내는데 큰 몫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ㅎ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영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蓮꽃 만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의 [蓮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전문 미당 서정주 시인의 이 시는 이 제목이 작품의 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도 살아 있고 숨겨진 의미가 대단히 넓고 깊음에 감동할 수 있게 합니다. 여기에서 ‘연꽃’은 불교에서 신성시하는 꽃이라는 비유와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과의 연관성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내용에 함축된 맛이 제목과의 연결은 시의 격을 한결 높혀주고 친근감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의 제목들을 찾는 거은 시 쓰기에서 필수적인 과정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제목들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김경린) (유치환) (조병화) (김수영) (신석정) (이상화) (박태진) (김윤성) (김연대) (박부경) 다음은 소재를 제목으로 붙인 것으로서 누구나 이런 경우를 제일 많이 취하는 경향이 있다. 시인들이 소재를 바로 제목으로 즐겨 붙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의 졸시 [종점에서]를 읽어 보면 ‘종점’이라는 소재가 바로 시의 제목으로 등장하여 ‘종점’의 허전함과 설레임이 처음부터 끝까지 시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도착하는 언어들이 어둠 속에서 비워진다 슬픈 것들은 실려 보내고 불이 꺼진 종점 만남과 떠남이 늘 내 마음에서 뒹구는 바람 소리 달빛도 무디어진 이 밤 어디선가 실려 올 몇 개의 환희를 기다리며 한 아름 어둠을 지우고 마지막 설레임으로 종점은 휴식이었다. 이렇게 소재를 제목으로 쓰는 시인을 김춘수 시인은 시의 문체나 형태에 대한 자각이 없거나 모자라는 사람으로 격을 낮추어서 몰아붙이면서도 내용에는 결백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시의 문체나 내용이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으며 시의 소재를 취하는 순간에 시의 주제나 언어가 즉시 동원되어 질 수 있다는 장점으로 보아서 시 쓰기의 초보자들이나 습작에 임하는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시 쓰기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제목들은 김소월의 [진달래꽃], 이육사의 [황혼], 모윤숙의 [겨울나무], 한하운의 [보리피리], 한기팔의 [어느 비오다 갠 날의 풍경], 허형만의 [하동포구에서], 조유금의 [젖은 새] 등등 일정한 사물이나 지명을 제목으로 붙이는가 하면 이수영의 [죽음 혹은 사라에게], 조의홍의 [꿈], 배경숙의 [무엇으로 사는가], 고경희의 [그림자는 삶보다 확실하다]처럼 관념적인 소재를 시인들이 즐겨 쓰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소재도 주제도 아닌 그 무엇을 제목으로 붙이는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는 않지만 시의 어떤 형태의 실험이나 관념을 의도적으로 탈피하려 할 때 드물게 쓰고 있으나 좋은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목을 아예 붙이지 않는 경우도 예외이는 하지만 제목이 마땅하지 않거나 붙이기 힘들 때는 [무제]나 [실제]라고 하는 수도 있으나 이것 역시 요즘 현대시에서는 보기 드문 일입니다. 다음 시는 이창년 시인의 [失題]입니다. 나서기도 어정쩡하고 가만 있기도 뭣하다 혼자 있을 때는 철저하게 혼자라야 좋다 뭔가 아쉽다 싶으면 구멍이 뻥 뚫려 바람 소리가 난다 차라리  털털털 경운기 소리면 제 소리만 질러대고 제 소리만 듣지만 이럴 때 무슨 수작이든 부릴 법도 한데 힘겨운 세상이라고 맞장구 칠 수도 없고 빙긋이 한번 웃으면 그만일까 앰뷸런스는 다급하게 싸이렌을 울리며  지나간다  어느 시간 위에 은빛 물고기들이 별빛으로 뛰고 있다 언제쯤 온갖 소리들이 사라지고 내 심장 뛰는 소리 들을 수 있을까.     이 시는 독백의 범주는 이미 넘어서 있고 그러나 무엇인가 거창한 주제를 추적하였지만 마땅한 시적인 형상화를 도모하지 못하면서 주제와 함께 제목을 달기에는 애매한 경우인 것 같습니다.  이와같은 경우에는 고도의 철학적인 개념이나 너무나 심오한 상념에서도 유발될 수 있는 현상으로 이해해야겠지만 중요하면서도 드문 일입니다.   ========================================================================   앨범 속의 방 ―허혜정(1966∼)     검은 마분지로 만들어진 갈피마다 하얀 습자지로 덮여 있는 빛바랜 사진들. 하나의 방처럼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모여든 얼굴들이 기억의 영사기에 비춰오듯 흐릿하다. 딱히 언제 사진인지 짚어낼 순 없어도 앨범 속에 죽어 있던 풍경이 스며드는 방. 산 자와 죽은 자의 장소는 다르다고 믿어왔지만 사진 속의 일몰은 나의 창에 물들고 있다. 푸르게 젖어가는 옥양목 마당 너머에는 바라볼수록 여백이 넓어지는 하늘. 늦가을 바람에 창살은 구슬픈 울음소리를 낸다. 녹이 먹어버린 문고리와 발바닥에 닳아 얇게 패인 문턱들. 몇 세대가 머물다 간 낡은 집으로 그들은 바람처럼 돌아와 바스락댄다. 슬픈 아이가 잠결에 따스한 체온을 느끼듯이 혼자가 아닌 것 같아. 세대의 눈빛 안에 고여 있는 나의 눈이 어떤 슬픔을 꺼내놓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비워낸 시공간을 옮겨 적는 것. 잊었던 말들이 밀려온다. 스쳐가는 그림자의 방에서. ‘검은 마분지로 만들어진 갈피마다 하얀 습자지로 덮여 있는 빛바랜 사진들’, 사진 한 장 한 장을 소중히 갈무리한 이런 앨범이 집집마다 다락이나 장롱 깊은 곳에 있었다. 가족 앨범은 대개 스냅사진으로 채워진다.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흘러갈 시공간을 찰칵찰칵 잡아채서 우리는 기억을 닳고 바래게 하는 시간의 물살에 대처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진으로 남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현재 삶이 살아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인생은 저마다 기록해 남길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리라.     화자는 낡은 앨범을 보고 있다. 검은 마분지도 하얀 습자지도 바싹 말라 화자는 조심스레 앨범을 넘길 테다.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모여든 얼굴들’, 오래된 과거와 가까운 과거가 모여 있는 앨범이다. ‘몇 세대가 머물다 간 낡은 집’, 조부모님의 젊은 모습, 아버지나 고모 삼촌의 어린 모습…, 잘 모를 사람의 모습도 있겠지만 모두 화자의 혈족일 테다. ‘세대의 눈빛에 고여 있는 나의 눈’, 당연히 그럴 테다. 이미 작고하셨건 구존해 계시건 그들은 어딘가 화자와 닮았을 테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장소는 다르다고 믿어왔지만 사진 속의 일몰은 나의 창에 물들고 있’단다. 사진 속의 풍경이 화자의 회상과 포개지며 현재 공간을 아스라이 물들인다. 오래된 가족 앨범을 보면서 제가 세상에 불쑥 던져진 돌멩이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힘을 얻는 화자다.    
203    두보, 그는 두보, 두보인거야... 댓글:  조회:4014  추천:0  2017-02-08
두보 자미(子美), 소릉(少陵), 두소릉(杜少陵), 두릉(杜陵), 두습유(杜拾遺), 두공부(杜工部)杜甫|   동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직시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잘 알려진 현종의 치세(712~755)는 당나라 문화가 가장 찬란하게 빛을 발하던 시기이다. 그러나 그 절정에는 동란의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안녹산의 난으로 태평성대는 허무하게 무너졌고, 양귀비는 마외(馬嵬)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현종은 퇴위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이어진 전란 때문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말았다. 두보는 현종이 즉위한 해인 712년에 태어나 44세가 되던 755년에 안녹산의 난을 맞이하고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종의 시대를 살기는 했으나 그 삶의 중심은 전반기보다는 동란이 일어났던 후반기에 있다. 지상에 얽매인 인간 생활을 직시하고 우울과 걱정으로 가득한 두보의 시 세계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운명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있다. 두보는 7세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해 14~15세 때 문인들과 교류했다. 당나라 초기의 유명한 시인 두심언(杜審言)의 손자이기도 한 그는 저명한 유학자 가문에 태어나 시인 · 유학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뒷날 그는 청년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위좌승장(韋左丞丈)에게 보내는 22운」 (일부) 自謂頗挺出 내 재주 뛰어난 줄 일찍 알아서 立登要路津 당장 주요 관직에 올라 致君堯舜上 황제를 보필하여 요 · 순의 시대처럼 만들고 再使風俗淳 세상의 풍속을 바로 세울 수 있으리라 믿었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정치적 포부를 실천할 기회가 오지 않았다. 중국 각지를 유람하면서 수양을 쌓고 명사(名士)들을 만나 글로 이름을 날렸지만 추천을 받아 시험만 봤다 하면 낙방했다. 그 무렵의 재상 이임보가 그런 수험생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결혼을 하여 자식이 태어났고, 이윽고 40세가 넘어서 안녹산의 난을 맞이했다. 그는 정통성을 가진 숙종(肅宗)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반란군에게 사로잡혀 장안에 연금되고 말았다. 이 시기에 그는 생이별을 하게 된 처자식을 생각하고 전란으로 황폐해진 세상을 염려하며 많은 시를 지었다. 다음은 그 대표작이다. 「춘망(春望)」 國破山河在 나라는 무너졌으나 산하는 그대로이네. 城春草木深 장안에 봄이 오니 초목은 무성한데 感時花濺淚 이 시절 생각하니 꽃을 보고도 눈물 흐르네. 恨別鳥驚心 이별이 한스러워 새를 보고도 놀라는 가슴 烽火連三月 전란은 해가 바뀌어 삼월이 되어도 끝나지 않으니 家書抵萬金 만금을 주어서라도 가족 소식 듣고 싶구나. 白頭搔更短 백발이 된 머리를 긁으면 눈에 띄게 빠지니 渾欲不勝簪 이래서야 머리칼에 쪽이라도 꽂을 수 있을까. 여름이 되자 두보는 겨우 기회를 얻어 반란군이 지배하는 장안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서쪽의 봉상(鳳翔)으로 나아갔다. 거기에는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의 조정이 있었다. 두보는 목숨을 걸고 탈출한 공을 인정받아 좌습유(左拾遺)에 임명되었다. 천자의 곁에서 그 과실을 지적하는 직책이었다. 유가적 이상을 불태우고 있던 두보에게는 더 바랄 게 없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취임하자마자 어떤 인물을 변호하는 데 힘을 쏟다가 숙종의 비위를 건드리고 말았다. 파면은 면했지만 그 이후로 두보의 마음은 밝지 못했다. 장안이 수복되고 퇴위한 현종도 돌아와 이중의 권력 구조가 성립된 것도 두보의 마음을 무겁게 했으니 현실의 정치에 빠져들면 들수록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곡강(曲江) 2수의 2」 (후반부) 朝回日日典春衣 근무를 마치면 봄옷을 잡혀 몇 푼을 거머쥐고 每日江頭盡醉歸 매일 곡강(曲江)에 나가 술에 취해 돌아온다. 酒債尋常行處有 가는 곳마다 외상값뿐이지만 人生七十古來稀 덧없는 이 인생 그 무슨 걱정인가. 천성이 성실하고 진지했던 두보가 퇴폐적인 생활에 얼마나 젖어 지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대로 숙종 정권에 협력한다 한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때 반대 세력의 책동도 있었던 듯, 두보는 중앙 관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758년, 47세 때의 일이다. 장안에서 가까운 화주(華州)의 지방 관리가 된 두보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시로 표현하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갔다. 이 시기에 이른바 ‘삼리삼별(三吏三別)’을 지었다. 「신안리(新安吏)」, 「동관리(潼關吏)」, 「석호리(石壕吏)」, 「신혼별(新婚別)」, 「수로별(垂老別)」, 「무가별(無家別)」이 그것이다. 「석호리」 暮投石壕村 저녁 어스름에 석호촌의 농가에 머무르니 有吏夜捉人 밤이 되자 관리가 사람을 징발하러 왔다. 老翁踰墻走 노인은 담을 넘어 도망치고 老婦出門看 할머니는 문을 따러 나간다. 吏呼一何怒 관리는 버럭 고함을 지르고 婦啼一何苦 할머니는 훌쩍이며 운다. 시는 계속해서 할머니가 관리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아들 셋은 전장에 끌려갔다. 얼마 전, 한 아들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다른 두 아들은 전사했다는 내용이었다. 살아남은 아들은 어떻게든 당분간은 살아가겠지만 죽은 아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집에는 젖을 빠는 손자 외에 남자라고는 없다. 손자의 어머니는 아직 이 집에 있지만 바깥에 나가고 싶어도 제대로 된 옷이 없어 나갈 수도 없는 형편이다. 할머니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한다. 老嫗力雖衰 비록 쇠약한 늙은 몸이지만 請從吏夜歸 원한다면 따라가겠습니다. 急應河陽役 빨리 하양(河陽)의 전장으로 가면 猶得備晨炊 아침밥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할머니는 징발되었다. 결말에서 두보는 이렇게 노래한다. 夜久語聲絶 밤이 깊어 사람 소리도 끊어졌는데 如聞泣幽咽 어디선가 울음소리 들려오는 것만 같구나. 天明登前途 날이 밝아 집을 나서는데 獨與老翁別 노인 홀로 작별 인사를 한다. 분노를 감춘 그 표현이 오히려 효과를 높이고 있다. 울먹이며 애원하는 할머니를 징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 묘사는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그 뒤 두보가 살아간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전란이 계속되고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든 세상이었다. 마침내 두보는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친족에게 의지하기 위해 유랑길에 오른다. 저 멀리 감숙(甘肅)을 지나 촉[蜀, 지금의 사천(四川)]으로 가서 두보가 자리 잡은 곳은 성도(成都)였다. 친구와 친척의 도움을 받아 성도 교외의 완화계(浣花溪)에 초가집을 지었다. 그 집을 ‘완화초당(浣花草堂)’이라 한다. 한때 촉 지방을 방랑한 적도 있었지만 이후 5년 정도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정치적 입신의 꿈은 벌써 접은 뒤였고, 시를 짓는 일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다양한 대상을 시의 소재로 삼았다. 다음의 오언절구는 이 시기의 작품이다. 「절구 2수의 2」 江碧鳥逾白 강물 깊어 파랗고 새는 더욱 하얗고 山靑花欲然 산은 푸르고 꽃은 불타는 듯하다. 今春看又過 이렇게 봄은 눈앞에서 지나가는데 何日是歸年 아, 언제나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까. 두보의 나이 벌써 쉰을 넘었다. 덧없이 흘러간 세월 속에, 그는 나이가 들면서 지나가는 봄을 애달파한다. 청춘의 감상과는 다른 깊은 애수가 감돈다. 촉에서 그는 친구 엄무(嚴武)의 간청으로 그의 참모가 되지만, 다른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하루하루가 고달팠다. 엄무가 세상을 뜨자 두보는 그 직책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성도를 떠나 양자강을 따라 내려간다. 「여야서회(旅夜書懷)」 細草微風岸 실바람에 살랑대는 가느다란 풀 언덕 危檣獨夜舟 높이 돛 단 외로운 밤배 星垂平野闊 너른 들에 별은 가득한데 月湧大江流 흐르는 강에 달은 샘처럼 솟구쳐 오르고 名豈文章著 나 어찌 문장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으리. 官應老病休 늙고 병든 이 몸 출세는 꿈이어라. 飄飄何所以 바람처럼 떠도는 이 몸 天地一沙鷗 천지간 백사장에 홀로 앉은 갈매기여라. 이윽고 초의 출구라 할 수 있는 삼협에 도착해 삼협의 하나인 구당협(瞿塘峽)에 가까운 기주(蘷州)에 2년을 머문다. 보잘것없는 오두막을 지어 닭을 기르고, 채소를 가꾸며 생활을 꾸렸다. 아는 사람도 없는 고독한 생활 속에서 장안을 회상하고 지난날을 추억한다.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 뜻을 묻는 것이다. 「등고(登高)」 風急天高猿嘯哀 세찬 바람 하늘 높은데 원숭이 울음소리 구슬프고 渚淸沙白鳥飛回 맑은 흰 모래톱에 새들이 날아든다. 無邊落木蕭蕭下 낙엽은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不盡長江滾滾來 도도한 장강은 끝없이 흐른다. 萬里悲秋常作客 먼 타향 떠도는 나그네의 슬픈 가을 百年多病獨登臺 아픔 많은 내 인생 홀로 누대에 오른다. 艱難苦根繁霜鬢 아프고 힘든 인생, 머리에는 찬 서리 내렸는데 潦倒新停濁酒杯 늙고 병든 이 몸 막걸리 사발마저 들 수 없구나. 두보는 수도 장안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품고 다시 양자강을 내려왔다. 그리고 동정호 주변에 2년간 머무르다가 770년 59세의 일기로 그 생애를 마감했다. 일설에 따르면, 누가 보내 준 술과 고기를 먹다가 갑자기 죽었다고도 한다. 어디까지나 전설에 지나지 않겠지만, 달을 잡으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백에 비한다면, 너무도 힘든 지상의 삶에서 결코 눈을 떼지 않았던 두보다운 죽음이라 할 것이다. 두보(712~770)는 열한 살 위인 이백과 더불어 당나라 때의 시인 가운데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자연스러운 평가이기는 하지만 이백과 두보의 시 세계는 서로 너무 대조적이어서 이 점이 두 거봉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지상 세계에 얽매여 삶의 고통을 노래하며 유가적 사상을 가졌던 두보와, 천상적이며 평이하고 도가적인 세계를 노닐었던 이백이 동시대에 살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이 거의 농담처럼 들릴 정도이다. 인생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두보가 표현한 시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존하는 두보의 시는 1,456수에 달하며 시대순으로 정리되어 있어 그 생애를 살피는 데 매우 편리하다. 두보
202    가난은 시로 가난을 못막는다?... 댓글:  조회:3788  추천:0  2017-02-08
번역하기 전용뷰어 보기     羌村 강촌 五言古詩      杜甫 두보 (중국 盛唐 712-770) ​ 崢嶸赤雲西  쟁영적운서    높이 솟은 해거름 낀 구름 서쪽에서  日脚下平地  일각하평지    태양은 길다랗게 평지에 내리비치고 있다.  柴門鳥雀噪  시문조작조    우리 집의 쓰러질 것 같은 싸리문에서는 참새들이 지저귀고 歸客千里至  귀객천리지    길을 떠났던 나는 천 리 먼 곳에서 지금 돌아왔다. 妻孥怪我在  처노괴아재    아내와 아들 아이는 무사한 내 모습을 보고 이상히 여기고 驚定還拭淚  경정환식루    믿을 수 없는 놀라움에서 깨어나자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世亂遭飄蕩  세란조표탕    세상이 혼란하여 떠돌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고 生還偶然遂  생환우연수    지금 살아서 가족에게 돌아온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鄰人滿牆頭  인인만장두    어느새 이웃 사람들이 흙담 부근에 모여들어 感歎亦㱆欷  감탄역희희    우리 집의 기적 같은 재회에 감탄하여 흐느껴 울고 있다. 夜闌更秉燭  야란갱병촉    밤이 깊어 다시금 촛불을 켜고 相對如夢寐  상대여몽매    아내와 마주 앉아 지금 여기 있는 것이 꿈을 꾸는 것 같다. ​ [말뜻] *崢嶸 높이 솟은 모습. *赤雲 저녁 놀이 낀 구름. *日脚 태양의 속도. *柴門 사립문. *歸客 돌아온 나그네. 여기서는 杜甫. *千里至 천 리 먼 곳에서 오다. *妻孥 아내와 어린 아들. *飄蕩 여기 저기 표박함. *牆頭 흙담 부근. *㱆欷 흐느껴 울다. *夜闌 밤이 깊어짐. *秉燭 새로 촛불을 켬. *夢寐 꿈. '寐'는 잠자는 것.  ​ [해설] 至德 2(757)년, 杜甫 46세의 작품. 그 해 4월, 반란군에게서 도망한 杜甫는, 鳳翔(봉상. 산시 省 鳳翔縣)의 관청으로 가서, 5월에 左拾遺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房琯(방관)을 변호하였다 하여 肅宗의 노여움을 사게 되자, 8월에 사직하고 가족이 있는 羌村(산시 省 鄜縣)으로 돌아왔다. 이 詩는 그 때 지은 3수 連作 중 제1수. '羌村' 3수 중 총론에 해당하는 제1수는, 재회의 장면과 처자 및 이웃 전원이 등장한다. 제2수는 "아이는 내 무릎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하고 아이를 중심으로 노래한 후, "이제 술을 마실 수 있으니, 그 술을 마시고 晩年을 위로하자" 하고 끝맺는다. 제3수는 이웃의 父老(부로) 너덧 명이 위로차 방문한 것을 말하고, "노래가 끝난 후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니,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하고 戰亂을 슬퍼하며 우는 것으로 끝맺어진다.   江村 강촌 七言律詩 ㅡ杜甫 두보 ​ 淸江一曲抱村流  청강일곡포촌류    맑은 강은 한 굽이 마을을 안고 흐르고  長夏江村事事幽  장하강촌사사유    기나긴 여름날 강변 마을은 모든 일이 고요하고 그윽하다. 自去自來梁上燕  자거자래양상연    집의 들보 위에 둥지를 튼 제비는 자유롭게 드나들고 相親相近水中鷗  상친상근수중구    물 속을 헤염치는 갈매기는 겁없이 내게로 다가온다. 老妻畵紙爲棊局  노처화지위기국    늙은 아내는 종이 위에 바둑판을 그리고 있고  稚子敲針作釣鉤  치자고침작조구    어린 아이는 바늘을 두드려 낚시 바늘을 만들고 있다. 多病所須唯藥物  다병소수유약물    온갖 병을 앓고 있는 내게 필요한 것은 약뿐이니 微軀此外更何求  미구차외갱하구    하찮은 내 몸은 그 외에 무엇을 구할 것이랴. ​ [말뜻] *一曲 한 굽이. *長夏 긴 여름날. *事事 모든 일들. *幽 고요하고 차분하다. *自去自來 자유롭게 들고 나고 한다. *相親相近 친근하게 가까이 다가온다. *棊局 바둑판. *稚子 어린 아이. *釣鉤 낚시 바늘. *微軀 별볼일없는 하찮은 몸. ​ [해설] 제목은 '강마을(江村)'. 上元 원(760)년, 杜甫 49세의 작품. 오랜 유랑 생활을 한 이후였기 때문에, 成都 浣花 草堂에서의 생활은 杜甫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들도 모처럼 안정된 평화로운 일상 생활을 하였다. 이 詩는 완화 초당에서의 생활의 한 장면. 그러나 이 안정된 생활도 3년으로 끝나고, 杜甫는 다시 유랑의 길에 나서야 하게 된다. 제4구 "相親相近水中鷗"는 에 나오는 故事. 해변에 사는 한 사람이 매일 갈매기와 놀았다. 어느 날 갈매기를 잡아오라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해변으로 나갔더니, 그 사람의 마음 속을 알고 갈매기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사특한 마음이 없으면, 갈매기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온다고 하는 것을 말한 것으로서, 두보의 심정을 표백(表白)하고 있다.    客至 객지 七言律詩 ㅡ杜甫 두보 ​ 舍南舍北皆春水  사남사북개춘수    우리 집 남쪽이나 북쪽에는 한결같이 봄철의 물이 흘러서    但見群鷗日日來  단견군구일일래    이 계절에는 매일 매일 오직 갈매기의 무리를 볼 뿐이다. 花徑不曾緣客歸  화경부증연객귀    꽃 피는 오솔길도 손님을 위하여 깨끗이 비질을 한 일이 없었으나 蓬門今始爲君開  봉문금시위군개    당신을 맞이하기 위하여 쑥으로 엮은 문을 처음으로 열었소. 盤飧市遠無兼味  반손시원무겸미    접시에 담은 음식은 시장이 멀기 때문에 한 가지뿐이고 樽酒家貧只舊醅  준주가빈지구배    술도 집이 가난하기 때문에 단지 탁주만 있을 뿐이오. 肯與隣翁相對飮  긍여인옹상대음    찬이 없는 음식이지만 이웃 어르신과 함께 드십시다. 隔籬呼取盡餘杯  격리호취진여배    울타리 너머로 불러서 남은 술을 모두 마십시다. ​ [말뜻] *花徑 꽃이 피어 있는 오솔길. *蓬門 쑥으로 엮은 문. 초라한 문. *盤飧 접시에 담은 음식. *兼味 두 종류 이상의 맛있는 으식. *舊醅 오랜 탁주. *籬 울타리. ​ [해설] 제목은 '손님(客)이 오다(至)'. 上元 2(761)년, 杜甫 50세의 작품. 成都 교외 浣花 草堂에서의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하루 하루의 생활 중에 손님을 맞이하여 노래한 詩.                                                   [출처] 羌村 강촌, 江村 강촌, 客至 객지|작성자 고전지기    
201    담시(談詩)란 서사시 범주에 속하는 이야기시이다... 댓글:  조회:2542  추천:0  2017-02-07
문학만필 담시에 대하여 한오백년       담시라는 시의 한 형태가 있다. 그러나 요즘은 시인들조차 그런 시가 있다는것을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사전에서는 중세 유럽에서 형성된 자유로운 형식의 짧은 서사시를 담시라 풀이하고있다. 한국의 경우 김지하가 판소리를 현대적으로 계승하여 새로운 형식으로 쓴 시를 특히 이르기도 한다. 담시(談詩)는 말 그대로 이야기시이다. 서정시가 시인의 주관적인 주정토로를 주로 한다면 그에 반해 담시는 이야기가 반드시 들어있어야 한다. 물론 그 스토리가 완정할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소설이나 서사수필에서처럼 상세한 묘사를 요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야기를 시적인 형태로 표현하며 그런 기술을 빌어 사회현실을 반영하거나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는것이다. 서정서사시, 담시, 설화시(說話詩), 구어시(口語詩), 미소설시(微小說詩) 등은 그 제기법에 따라 조금씩 뉘앙스가 다르지만 크게 분류할 경우 같게 분류되여야 할것이다. 우리 조선족시단에서 서정서사시라고 타이틀을 붙인 시를 썼던 시인들로는 김성휘, 조룡남, 김파 등을 들수 있고 80년대 후반을 장식해준 담시들은 대부분 박문봉시인이 썼었다. 그때 박문봉시인의 담시들은 중국의 이야기시를 많이 빼닮아있지만 조선족시단의 한 공백을 메우고있다는 점에서 그 행보는 치하할만한것이다. 김성휘시인의 경우 문화대혁명기간 감옥에 갇힌 아버지한테 도시락을 갖다드리려다가 달리는 트럭에 치여 숨진 한 소녀의 운명을 리얼하게 시화한 서정서사시가 있다. 로 시작되는 시는 이야기에 중점을 둔것이 아니지만 독자들은 한 아이가 감옥에 갇힌 아버지한테 도시락을 가져다주는 길에서 달리는 트럭에 치여 숨지는 모습을 얼마든지 상상해볼수 있다. 당시 너도나도 다투어 상처문학을 할 때였고 그런 형세는 시인더러 시붓을 꼬나들고 그런 시를 창작하게 했던것이다. 박문봉의 경우 이라는 담시를 쓴적이 있다. 지난 세기 80년대말 90년대초 개혁개방으로 사람들이 한껏 들떠있던 그무렵 자유로운 사랑을 찾은 한 녀인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몰리해와 질시는 그 녀인더러 마침내 빨간 꽃신을 벗어둔채 물에 뛰여들게 만든다. 이 담시는 절제된 호흡법으로 요란한 소리 하나 없이 사회악의 하나인 요언과 그런 요언을 즐기고 거기에 안주하고 소일하는 인간들의 추태상을 폭로하고있다. 물론 21세기에 와서 다시 이와같은 시작법을 조심스레 시도해보는 시인도 있으니 바로 한영남시인이다. 그의 서정서사시 는 부모의 리혼으로 할머니에게 넘겨진 한 소녀가 앓는 할머니를 구하려고 기억속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다가 아동유괴범한테 끌려가는 내용을 다루고있다. 가슴절절한 시구들은 김성휘시인의 서정서사시와 비슷한 부분이 있고 이야기를 다 들려주지 않고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는 면에서는 박문봉의 담시와 통하는데가 있으며 거기에 한영남시인은 시어사용과 시적흐름 등에서 모더니즘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들을 소스로 얹어주고있어 새로운 맛을 더해준다.   담시를 산문시와 헷갈려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다. 분류법을 잘 따져보면 금방 알수 있는 문제이다. 산문시는 그것이 서사시든 서정시든 산문투로 씌였다는게 특징이고 담시는 반드시 서사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산문시와 담시는 확연이 구분되는 시의 두가지 기술방법이라 하겠다.
200    패러디할 때 원작을 충분히 존중해야... 댓글:  조회:3029  추천:0  2017-02-07
문학만필 패러디에 대하여 (할빈) 해주       패러디라는 말이 있다. 알듯 한데 분명하게는 모른다. 그래서 모방이나 도작과 혼돈하기도 한다. 사전식 풀이를 보기로 하자. 패러디란 전통적인 사상이나 관념, 특정 작가의 문체를 모방하여 익살스럽게 변형하거나 개작하는 수법이라고 한다. 또 기성작품의 내용이나 문체를 교묘하게 모방하여 과장이나 풍자로 재창조하는것을 말하며 때로는 원작에 편승하여 자신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수법이라고 한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그러니 패러디를 하려면 기성작품의 문체를 모방해야 한다. 형식을 본딴다는 말이다. 그런데 형식을 본따는 리유는 그런 형식을 빌어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또 익살이나 풍자가 들어가야 한다. 환언하면 웃으면서 볼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형식을 빌려왔기에 내것이 아니고 그래서 장난기가 다분해진다. 통채로 가져오는 도작이 아니라 모방이다. 단순한 모방은 다른 사람 흉내내기에 그치지만 패러디는 한술 더 떠서 그것에 익살이 섞여야 하고 그래서 보는 사람이 이것은 누구의 작품을 모방했구나 하는것을 대번에 알수 있도록 하면서도 새로운 맛이 있어야 하는것이다. 시를 례로 들어보자. 저 유명한 김춘수(한국)의 에서는 이렇게 읊조리고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략)   소설가이며 시인인 장정일(한국)은 라디오를 쓴 시에서 이렇게 쓰고있다.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과 를 쓰고있다. 와 로 시작된다. 은 가 되고 (꽃의 경우)가 (라디오의 경우)에 대한 비판풍자로 환원되고있다. 이와 같이 패러디는 원작에 대한 비판적 읽기가 선행되여야 하고 원작의 문학적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해주어야 한다. 도작은 원작을 그대로 가져오는것이고 모방은 원작과 비슷하게 쓰는것이며 패러디는 원작의 형식을 빌어 전혀 다른 내용으로 쓰는것이다. 패러디 역시 작품이고 창작이다. 패러디는 보는 독자가 그게 패러디라는것이 알리게 써야 하며 원작을 충분히 존중해야 한다. 원작에서 한두구절이나 핵심적인 단어만 따오면 그것은 도작이고 모방이지만 패러디는 두 작품이 전체적으로 닮은 꼴이여야 한다.   패러디 수법으로는 시공간적 배경 바꾸기, 인물의 성격 바꾸기, 등장인물 바꾸기, 사건 바꾸기 등이 있다. 더 많을수도 있지만 그것은 이제 시창작자들이 스스로 탐색해서 넓혀가야 할 분야이다.    
199    시의 제목을 무제(無題) 혹은 실제(失題)라고도 달수 있다... 댓글:  조회:2592  추천:0  2017-02-07
먼저 주제를 제목으로 한 예를 살펴 보기로 합니다. 이끼 앉은  들길 토담집 지붕 달빛 치렁치렁 내리는 마당귀 지렁이 울음 우럼마 손때 묻은  장독대에 방울방울 맺힌 이슬 바람같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                            -- 차한수의 [그리움] 전문 차한수 시인의 이 [그리움]은 주제를 제목으로 하였지만 내용에서 ‘그립다’든지 ‘그리움’에 대한 직접 언급이 없다. 이것은 주제가 온전히 무르녹아서 짙게 배어있음을 말해 준다. 또한 주제가 잘 형상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의 흐름으로 보아 ‘우럼마 손때 묻은 / 장독대에’서 곧 ‘그리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끼 앉은 / 들길’이나 ‘토담집 지붕’과 ‘달빛 치렁치런 내리는 / 마당귀’ 그리고 ‘바람같이 다가오는 / 발자국 소리’ 등 어느 것 하나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와같이 주제가 시의 제목으로 붙여지면 시 읽기의 묘미가 더욱 감칠 맛이 솟아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음은 주제를 내용 속에 깊이 감추고 있는 구절을 제목으로 붙인 경우를 보기로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젬목 자체가 시의 맛을 내는데 큰 몫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ㅎ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영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蓮꽃 만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의 [蓮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전문 미당 서정주 시인의 이 시는 이 제목이 작품의 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도 살아 있고 숨겨진 의미가 대단히 넓고 깊음에 감동할 수 있게 합니다. 여기에서 ‘연꽃’은 불교에서 신성시하는 꽃이라는 비유와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과의 연관성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내용에 함축된 맛이 제목과의 연결은 시의 격을 한결 높혀주고 친근감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의 제목들을 찾는 거은 시 쓰기에서 필수적인 과정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제목들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김경린) (유치환) (조병화) (김수영) (신석정) (이상화) (박태진) (김윤성) (김연대) (박부경) 다음은 소재를 제목으로 붙인 것으로서 누구나 이런 경우를 제일 많이 취하는 경향이 있다. 시인들이 소재를 바로 제목으로 즐겨 붙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의 졸시 [종점에서]를 읽어 보면 ‘종점’이라는 소재가 바로 시의 제목으로 등장하여 ‘종점’의 허전함과 설레임이 처음부터 끝까지 시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도착하는 언어들이 어둠 속에서 비워진다 슬픈 것들은 실려 보내고 불이 꺼진 종점 만남과 떠남이 늘 내 마음에서 뒹구는 바람 소리 달빛도 무디어진 이 밤 어디선가 실려 올 몇 개의 환희를 기다리며 한 아름 어둠을 지우고 마지막 설레임으로 종점은 휴식이었다. 이렇게 소재를 제목으로 쓰는 시인을 김춘수 시인은 시의 문체나 형태에 대한 자각이 없거나 모자라는 사람으로 격을 낮추어서 몰아붙이면서도 내용에는 결백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시의 문체나 내용이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으며 시의 소재를 취하는 순간에 시의 주제나 언어가 즉시 동원되어 질 수 있다는 장점으로 보아서 시 쓰기의 초보자들이나 습작에 임하는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시 쓰기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제목들은 김소월의 [진달래꽃], 이육사의 [황혼], 모윤숙의 [겨울나무], 한하운의 [보리피리], 한기팔의 [어느 비오다 갠 날의 풍경], 허형만의 [하동포구에서], 조유금의 [젖은 새] 등등 일정한 사물이나 지명을 제목으로 붙이는가 하면 이수영의 [죽음 혹은 사라에게], 조의홍의 [꿈], 배경숙의 [무엇으로 사는가], 고경희의 [그림자는 삶보다 확실하다]처럼 관념적인 소재를 시인들이 즐겨 쓰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소재도 주제도 아닌 그 무엇을 제목으로 붙이는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는 않지만 시의 어떤 형태의 실험이나 관념을 의도적으로 탈피하려 할 때 드물게 쓰고 있으나 좋은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목을 아예 붙이지 않는 경우도 예외이는 하지만 제목이 마땅하지 않거나 붙이기 힘들 때는 [무제]나 [실제]라고 하는 수도 있으나 이것 역시 요즘 현대시에서는 보기 드문 일입니다. 다음 시는 이창년 시인의 [失題]입니다. 나서기도 어정쩡하고 가만 있기도 뭣하다 혼자 있을 때는 철저하게 혼자라야 좋다 뭔가 아쉽다 싶으면 구멍이 뻥 뚫려 바람 소리가 난다 차라리  털털털 경운기 소리면 제 소리만 질러대고 제 소리만 듣지만 이럴 때 무슨 수작이든 부릴 법도 한데 힘겨운 세상이라고 맞장구 칠 수도 없고 빙긋이 한번 웃으면 그만일까 앰뷸런스는 다급하게 싸이렌을 울리며  지나간다  어느 시간 위에 은빛 물고기들이 별빛으로 뛰고 있다 언제쯤 온갖 소리들이 사라지고 내 심장 뛰는 소리 들을 수 있을까.     이 시는 독백의 범주는 이미 넘어서 있고 그러나 무엇인가 거창한 주제를 추적하였지만 마땅한 시적인 형상화를 도모하지 못하면서 주제와 함께 제목을 달기에는 애매한 경우인 것 같습니다.  이와같은 경우에는 고도의 철학적인 개념이나 너무나 심오한 상념에서도 유발될 수 있는 현상으로 이해해야겠지만 중요하면서도 드문 일입니다.   ========================================================================   앨범 속의 방 ―허혜정(1966∼)     검은 마분지로 만들어진 갈피마다 하얀 습자지로 덮여 있는 빛바랜 사진들. 하나의 방처럼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모여든 얼굴들이 기억의 영사기에 비춰오듯 흐릿하다. 딱히 언제 사진인지 짚어낼 순 없어도 앨범 속에 죽어 있던 풍경이 스며드는 방. 산 자와 죽은 자의 장소는 다르다고 믿어왔지만 사진 속의 일몰은 나의 창에 물들고 있다. 푸르게 젖어가는 옥양목 마당 너머에는 바라볼수록 여백이 넓어지는 하늘. 늦가을 바람에 창살은 구슬픈 울음소리를 낸다. 녹이 먹어버린 문고리와 발바닥에 닳아 얇게 패인 문턱들. 몇 세대가 머물다 간 낡은 집으로 그들은 바람처럼 돌아와 바스락댄다. 슬픈 아이가 잠결에 따스한 체온을 느끼듯이 혼자가 아닌 것 같아. 세대의 눈빛 안에 고여 있는 나의 눈이 어떤 슬픔을 꺼내놓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비워낸 시공간을 옮겨 적는 것. 잊었던 말들이 밀려온다. 스쳐가는 그림자의 방에서. ‘검은 마분지로 만들어진 갈피마다 하얀 습자지로 덮여 있는 빛바랜 사진들’, 사진 한 장 한 장을 소중히 갈무리한 이런 앨범이 집집마다 다락이나 장롱 깊은 곳에 있었다. 가족 앨범은 대개 스냅사진으로 채워진다.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흘러갈 시공간을 찰칵찰칵 잡아채서 우리는 기억을 닳고 바래게 하는 시간의 물살에 대처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진으로 남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현재 삶이 살아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인생은 저마다 기록해 남길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리라.     화자는 낡은 앨범을 보고 있다. 검은 마분지도 하얀 습자지도 바싹 말라 화자는 조심스레 앨범을 넘길 테다.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모여든 얼굴들’, 오래된 과거와 가까운 과거가 모여 있는 앨범이다. ‘몇 세대가 머물다 간 낡은 집’, 조부모님의 젊은 모습, 아버지나 고모 삼촌의 어린 모습…, 잘 모를 사람의 모습도 있겠지만 모두 화자의 혈족일 테다. ‘세대의 눈빛에 고여 있는 나의 눈’, 당연히 그럴 테다. 이미 작고하셨건 구존해 계시건 그들은 어딘가 화자와 닮았을 테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장소는 다르다고 믿어왔지만 사진 속의 일몰은 나의 창에 물들고 있’단다. 사진 속의 풍경이 화자의 회상과 포개지며 현재 공간을 아스라이 물들인다. 오래된 가족 앨범을 보면서 제가 세상에 불쑥 던져진 돌멩이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힘을 얻는 화자다.
198    시의 제목은 바로 시의 얼굴... 댓글:  조회:2926  추천:0  2017-02-07
5-3. 제목(題目)에 대하여 시 쓰기에서 시의 제목(title)을 붙이는 일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시의 제목은 바로 시의 얼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맨 먼저 얼굴에서 첫 인상을 보는 것과 같이 한 편의 시를 볼 때 첫 눈에 띄는 것이 시의 제목입니다. 이 제목만 보고도 그 시의 내용을 미리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비추어 본다면 시의 제목은 그 작품의 주제와 일치하거나 주제를 암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황무지』로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영국의 시인 엘리어트(Eliot)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의 문화적, 정신적으로 황폐한 모습을 재생한 것을 암시한 것이 바로 작품 이며 단테의 『신곡(神曲)』은 인간의 영혼이 죄악의 세계로부터 회오(悔悟)와 정화(淨化)에 이르고 다시 천국으로 다다르는 경로를 다양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현대시들의 제목을 보면 사물이나 관념에서 옮겨와 단순하게 한 단어로 된 명사형이 있는가 하면, (김송배) (차한수) (윤동주) (유치환) (방지원) 등과 같이 단순 명사형이 아닌 한 문장의 제목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찌보면 단순 명사형에서 시인들이 사유(思惟)할 수 있는 의식의 한계가 이미지로 전환되는데는 너무 광범위하거나 아니면 이미 기존의 시인들이 동일한 제목으로 시를 창작했다는 유추도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시를 쓰는 과정에서 제목을 정하는 방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ㅇ 제목을 미리 정해 놓고 작품을 쓴다. ㅇ 작품을 써가는 도중이나 완성한 다음에 제목을 붙인다. ㅇ 제목이 없이 그냥 일련번호를 매겨서 구분한다.(적당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으면 또는 라고 붙이는 경우가 옛날에는 가끔 있었습니다.) ㅇ 작품 내용 중에서 한 행을 뽑아다가 제목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어떤 제목이 좋은 제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시의 형태나 내용에 따라서 결정될 문제이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살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사항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① 제목은 함축성(含蓄性)이 있어야 한다     시 전체를 대신하여 이를 암시할 수 있는 것, 어떤 상징성이나 이미지를 띄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② 제목은 신선미(新鮮味)가 있어야 한다.     낡고 진부한 것을 버리고 독창성이 있어야 합니다. ③ 제목은 간명해야 한다.     제목 자체가 지저분하다든지 너무 엉뚱하면 시를 읽기 전에 벌써 혐오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④ 제목은 겸손해야 한다.     시를 배우거나 처음 시 쓰기에 임하는 사람은 특히 유념해야 합니다. 이해가 빠르고 가벼운 제목으로 시작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⑤ 제목은 멋과 재치가 넘치면 더욱 좋다.     이렇게 시의 제목은 잘 붙이면 경우에 따라서 평범하게 머물고 말 작품이 매우 의미있는 것으로 끌어 올릴 수도 있고 내용이 엉뚱하거나 단조로운 것이라도 그 질서 위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의 제목은 대체로 어떻게 붙이면 될까요 - 소재를 제목으로 한다. - 주제를 제목으로 한다 - 소재도 주제도 아닌 다른 그 무엇을 제목으로 한다. - 제목을 아예 붙이지 않는다.      ========================================================================       신경의 통로  ―채호기(1957∼)     산에 있다. 검은 나무둥치와 검은 가지, 녹색의 잎들 사이로 신경이 엿보이는. 그 신경을 바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람이 불고, 잎이 손바닥을 뒤집고 나무의 머리칼인 푸른 살덩이가 송두리째 휘어지고 뒤집히며 얼굴 뒤의 가면을 보여준다. 비가 내린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다. 눈앞에 비의 블라인드가 쳐지고 눈은 갇힌다. 비는 물방울 방울이었다가, 선이 되고 선이었다가 면이 되고 입체가 된다. 물줄기가 된다. 신경의 통로 물속에, 격렬한 역류 속에, 돌의, 풀잎의, 수피의, 잎의, 덩굴줄기의 신경이 하늘의 검은 공기 덩어리의 신경에 연결된다. 비가 온몸에 부닥친다. 심장충격기가 피를 가격하듯 대지의, 하늘의 신경이 맨살을 파고든다. 땀도 아니고 비도 아닌 언어가 몸에서 흘러나온다. 끈적끈적하고 무색의 번쩍이는 언어에 신경이 파고든다. 무의식의 검은 심연을 파고드는 뱀장어처럼 번개가 언어에 접속되고 신경 덩어리가 되는 언어들. 흙, 돌, 풀잎, 수피, 잎, 덩굴, 공기, 빗줄기 등의 단어들이 송두리째 산이 된다. 몸은  산에 있다. 화자는 산에 있다. 바위 능선이 아니라 ‘검은 나무둥치와 검은 가지’가 울창한 숲 속이다. 바람이 예사롭지 않게 불더니 나무들이 ‘얼굴 뒤의 가면’을 보여준다. 가면은 의도를 암시하는 얼굴, 과장된 표정의 무서운 얼굴이다. 아니나 다를까 ‘방울이었다가, 선이 되고/선이었다가 면이 되고 입체가 된’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다. 물기둥으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돌의, 풀잎의, 수피의, 잎의, 덩굴줄기의 신경이/하늘의 검은 공기 덩어리의 신경에 연결’되는 ‘신경의 통로’란다. 호된 충격을 느낄 정도로 거세게 몸을 때리는 비! ‘하늘의 신경이’ 화자의 맨살을 파고든단다. 찌릿찌릿 전기를 방출하며 천둥이 울고 번개가 날아다니나 보다. 코를 찌르는 비리고 매캐한 냄새 속에서 ‘무의식의 검은 심연을 파고드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도 화자의 몸에서는 ‘언어가 흘러나온다’. ‘흙, 돌, 풀잎, 수피, 잎/덩굴, 공기, 빗줄기 등의 단어들이/ 송두리째 산이’ 된단다. 독자의 몸도 그 산에 있는 듯하다. 산속의 폭우를 강렬한 언어로 생생히 그렸다. 깊은 산에서 폭우를 만나면 무섭기도 하지만 장쾌하기도 할 테다. 산행에는 비옷을 챙기세요!  
197    [이것이 알고싶다] - "아버지"와 "어머니" 유래 댓글:  조회:2845  추천:0  2017-02-05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는 '알받이'라고 하고, 어머니는 '얼 주머니'라 합니다. 우리말에서 '알'은 어떤 존재가 생기기에 앞서 이미 존재하는 최초의 씨앗이고 '얼'은 어떤 존재가 없어져도 남게 되는 그 무엇으로 '넋'또는 '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주 말에서도 컁펑는 한자로 양(陽)이고 '어'는 음(陰)이 됩니다. 즉 알은 둥근 모양의 씨알을 말하고 얼은 불변하는 정신적 존재를 말합니다. 우리말을 풀어 보면 알지 못했던 많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 : 한(桓;클한) + 알 + 받이 할 머 니 : 한(桓;클한) +얼 + 주머니 아주머니 : 아기 주머니가 있는 사람 아 내 : 집 안의 해(태양) 애기(愛己) : 사랑스런 나의 몸 사 나 이 : 산 아이 (山 + 人) = 仙 = 산에서 선 공부하는 사람     출처 :月刊 詩와 詩人 / 글쓴이 : 천명운 서청학 시인
196    [이것이 알고싶다] - "~습니다"의 유래 댓글:  조회:2871  추천:0  2017-02-05
  '~읍니다' 에서 '~습니다' 로 바뀐 유래       옛날 책에 보면 대부분 읍니다 로 써 있는 것이 많은 데요. 그 유래는 무엇이며 바뀐 유래는 무엇인지..  옛날을 배경으로 한 사극 드라마를 보면 '~했사옵니다' 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죠. 여기에 나오는 '사'는 상대를 높이는 말이고, '옵'은 자기를 낮추는 말입니다. 이 '사'가 변해 현대어의 '스'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1980년대 이전의 문법(필자 注: 중국 조선어문 문법에는 이와 같은 규칙이 없음.)은 '습'이 아니라 '읍'이었습니다. '있습니다' 가 아니라 '있읍니다'로 썼지요. 표준어를 정하는 과정에서 '있' 의 ㅅ이 뒤로 가는 것으로 착각해서 잘못된 표준어를 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표준어 규칙을 개정하면서 원래의 모양을 살려 '습'으로 바꾸게 된 것입니다.     출처 :月刊 詩와 詩人 /글쓴이 : 천명운 서청학 시인
    »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시를 쓰는 사람은 많지만 시를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창동의 를 통해 본 ‘시를 쓴다는 것’… 시는 진심과 더불어 써야 한다는 본래 정의를 기억하라   *영화 에 대한 치명적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지난주부터 어떤 사설교육기관에서 시에 관한 강의를 시작했다. 흔히 아방가르드라 불리는 시인들의 어려운 시를 함께 읽는 수업이다. 시를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많다고 투덜거리는 것으로 첫 강의의 말문을 열었다. 시를 쓰고 싶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표현 욕구일 텐데, 그것은 많은 경우 자기애나 자기만족으로 귀결되고 만다고, 그러나 예술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다. 어설픈 창작자들보다는 고급 수용자들이 더 필요한 사회라고도 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시를 공부한 이의 엘리티즘이 얼마간 개입했을 것이다.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허다한 시창작교실에 대한 근거 없는 불신과 냉소가 나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를 봤다. 나는 후회했다. 개강하기 전에 이 영화를 먼저 보았더라면 첫 수업을 다르게 시작했을 것이다.     시가 삶을 피하자 삶이 시 안으로 들어오네   초반 20~30분 정도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전형적이어서 오히려 불편했다. 66살의 할머니 양미자(윤정희)를 소개하는 도입부는 그녀를 ‘시창작교실에 다니는 할머니’에 대한 선입견에 얼추 부합하는 인물로 그린다. 화려한 옷을 입고 소녀 같은 말투로 “내가 시인 기질이 좀 있잖니”라고 말한다. 손자를 대신 키워주고 있으면서도 딸에게조차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것도, 그러면서 남들에게는 “우리 모녀는 친구처럼 지내요”라고 관계를 포장하는 것도 그 기질 때문이다. 문화센터 강사 김용탁(김용택) 시인의 강의 내용 역시 예상대로다. 초반 두 번의 강의에서 그는 말한다. 보는 것이 중요하다, 시인은 잘 보는 사람이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사람이다, 당신 마음속에 있는 시를 해방시켜라 운운. 맞는 말이기는 하겠지만 상투적인데다 막연하기 짝이 없다.   사람들은 시에 대해 양가감정을 느낀다. “왜요, 시 쓰시게요?” 대견하지만 한심하다는 뉘앙스. 아름다움을 다루는 고상한 일이지만 그곳은 삶의 참혹한 실상과는 무관한 세계가 아닌가 하는 감정. 그리고 저 학생과 교사는 그런 통념에 착실히 부합한다. 아직까지 그녀에게 시를 배운다는 것은 거실에 그럴듯한 화분 하나 갖다놓는 일과 다르지 않다. 시 한 편 써오라는 숙제를 받고는 사과를 만져보고 나무 그늘에 앉아보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삶을 들여다보지 않기 위해서 할 만한 일들이다. 손자가 집단 성폭행에 가담해 한 소녀를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다른 학부형들을 통해 알게 되는 자리에서도 아직은 그랬다. 충격적인 사실을 듣고 그녀는 그 자리를 피하고 꽃의 아름다움 속으로 숨어버렸으니까.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시가 삶을 피하자 삶이 시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 양미자는 시인 기질이 있는 소녀 같은 할머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손자 앞에서, 양미자가 시를 쓰는 일은 속죄의 완수와 포개진다.         “시를 쓴 사람은 양미자씨밖에 없네요” 이어지는 세 개의 장면이 그렇다. 양미자는 죽은 소녀의 추모 미사에 참석하고, 샤워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손자를 붙들고 신음한다. 그러면서 이 일들과 별개로 시를 쓰는 일이 불가능함을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깨달아간다. 이제 시를 쓰는 일(아름다움의 발견)과 삶을 사는 일(속죄의 완수)이 하나로 포개진다. (이쯤 되면 이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전작 을 반대로 뒤집어 다시 찍은 영화처럼 보인다. 한 번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또 한 번은 가해자의 입장에서. 한 번은 종교를 통해, 또 한 번은 예술을 통해. 한 번은 용서의 문제를, 또 한 번은 속죄의 문제를.) 이제 그녀는 진실한 시를 얻으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공간이 아니라 장소를, 풍경이 아니라 인간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성폭력이 일어난 학교를 방문하고 소녀의 주검이 발견된 강가로 간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또 한 번의 결정적인 도약이 필요하다. 소녀의 주검이 발견된 그 강가에서 그녀가 수첩을 꺼내 시를 적으려 할 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백지를 적시는 장면이 결정적이다. 시는 글자로 쓰는 게 아니라 몸으로 쓰는 거라고 저 비는 말한다. 시창작교실의 강사는 말했었다. 백지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라고. 그러나 젖어버린 백지는 양미자에게 다른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가 삶을 피했더니 삶이 시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제 남은 단 하나의 과제는 시와 삶을 일치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소녀’ 미자는 합의금 500만원을 위해 옷을 벗는 수치를 감내하고, 그 과정에서 타인(‘회장님’)의 서글픈 욕망에 연민을 느끼고, 시창작교실에서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고백하면서 아름다움이 고통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녀는 정말 시인이 되어간다.         » 시가 삶을 피하자 삶이 시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양미자는 몸으로 쓴 시 한 편을 남겼다.       우리는 그 뒤에 그녀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다. 그녀는 몸으로 쓴 시 한 편을 남겼다. 진실하고, 그래서 고통스럽고, 그래서 아름다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시를 읽으면서 나는 그제야 알았다. 시인은 보는 사람이고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사람 운운하던 강사의 따분한 말이 틀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니, 오로지 그 길로만 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양미자는 모두가 회피하는 어떤 심연을 들여다보았고 죽음을 대가로 지불하고 그로부터 어떤 아름다움을 끌어낸다. 양미자의 윤리적 급진성이 거기에서 나온다. 그녀는 ‘문자 그대로’ 행하는 인물이다. 강사는 자신의 말이 도대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몰랐을 것이다. 대신 그녀만 유일하게 과제를 제출했다는 사실은 안다. “시를 쓴 사람은 양미자씨밖에 없네요.” 나는 이 말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일종의 선언이라고 받아들였다. 양미자밖에 없다.     영화의 결말에서 나는 다시 한번 을 떠올렸다. 에서의 기독교 공동체와 에서 시낭송 모임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닮아 있는데, 그 시선은 어딘가 분열적으로 비틀려 있다. 그것은 종교와 예술의 세속화를 증명하는 그 집단을 부정하고 싶지만 종교와 시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어서 생겨난 균열일 것이다. 말하자면 두 영화에서 이창동의 목표는 같다. 제도로서의 종교와 제도로서의 예술로부터 종교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 그 자체를 구원해내기. 그는 희망에 냉혹하지만 덕분에 그가 말하는 희망에는 토를 달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이창동의 다음 영화의 소재는 정치가 될까? 제도로서의 정치로부터 정치적인 것 그 자체를 구원해내는 영화? 그러나 그는 찍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의 양미자에게서 삶과 정치를 일치시키기 위해 1년 전에 목숨을 끊은 한 정치인을 떠올린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면 말이다.     제도로서의 예술로부터 예술을 구해내라   이 영화는 시를 다시 정의하는 영화가 아니라 우리가 다 잊어버린 시의 본래 정의를 환기하는 영화다. 시는 진실 혹은 진심과 더불어 써야 한다는 것. 너무나 당연해서 대개 다들 잊어버렸고 이제는 오히려 우스워진 그 정의.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우리는 누구이고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를 묻는 영화처럼 보였다. 감독이 ‘시’라고 지칭한 것을 진정성(authenticity) 일반의 은유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말이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기를 추구하는 이 윤리적 태도는 오늘날 낡은 것이 되었고 별 뜻 없이 남용되면서 이제는 이 말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조차 생겼다.) 이 영화는 말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본래 어려운 일이고 오늘날 시를 쓴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라고. 그러니 시를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많다고 투덜거렸던 첫 수업을 다시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하면 좋을 것이다. 시를 쓰는 사람은 많지만 시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_한겨레21
194    시는 벼락치듯 독자들을 전률시켜야... 댓글:  조회:2776  추천:0  2017-02-05
109명의 시인들이 뽑은 벼락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 에 이어..     전율, 비극적 황홀, 위반   정    효    구 1. 대사저인大死底人의 활인活人 죽으려면 크게 죽어야 한다. 그래야 ‘한 소식’이 오면서 크게 살아난다. 이른바 대사저인大死底人을 통한 활인活人의 상태가 오는 것이다. 감전感電이 되더라도 강력하게 내전內電되어야 한다. 그래야 불순물이 일시에 하얗게 타버린다. 이른바 육탈肉脫과 탈각脫殼을 통한, 해탈解脫의 법열이 이런 때에 내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게 쉬운가. 우리는 다 죽지 못하여 진속眞俗의 경계를 넘나들며 허둥댄다. 또한 우리들은 심장의 중심부까지 내전시킬 용기가 없어서, 겨우 손끝만 쩌릿쩌릿한 채 3촉짜리 불빛 하나를 달고 덜 절은 김장배추처럼 피둥피둥한 몸으로 밤 속을 헤쳐간다.  여기 100여 명의 시인들이, 사구死句로 가득 찬 진부한 세상에서 그들의 시적 공안이자 활구活句를 붙들고 자신들만의 비밀스런 사생담死生談을 진솔하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모든 인간들이 다르게 살고 죽듯이, 이들 또한 시인으로서의 삶을 통해 만인만색으로 살고 죽은 한 순간의 실상實相을 여기에 고스란히 내어놓고 있다. 2. 감동, 전율 그리고 법열 감동과, 전율과, 법열은 다르다. 감동이 우리의 몸속에 촉촉한 물기와 따스한 열기를 가져다준다면, 전율은 차가운 한기와 탈습한 건기를 전해준다. 그런가 하면 법열은 한열조습寒熱燥濕의 인간적이며 현상계적인 기운을 일체 무화시키고, 무색의, 무취의, 무감의 환한 진경을 경계 없이 열어 보인다.   감동이 봄과 여름을 상징하는 음양오행의 목성木性과 화성火性의 내질인, 이른바 생장生長과 생기生氣의 힘이 작용하는 에로스의 세계라면, 전율은 가을과 겨울이 상징하는 금성金星과 수성水性의, 이른바 수장收藏과 살기殺氣의 힘이 불러일으키는 공의公義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법열은 어떠한가. 그것은 생장과 수장, 생기와 살기를 모두 통합하며 넘어선 토성土性, 그러니까 중화中和의 핵심과 한몸이 된 상태이다.  감동할 때 우리의 몸은 뜨겁고 촉촉해지면서 몸에서 눈물과 화기가 흘러나온다. 그것은 생명감이 살아나는 눈물이고 화기다. 그에 비해 전율할 때 우리의 몸은 차갑고 건조해지면서 소름이 돋는다. 그것은 내성의 응축이 빚어낸 자아단속의 모습이다. 전자는 이완이고 후자는 수축이다. 이완도 수축도 다 그 나름의 의미를 갖고 우리 존재의 항상성恒常性에 이바지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느 것이든 우리는 이런 이완과 수축의 드라마 속에서 묵은 존재의 때를 홀연히 벗고 새로운 존재로 중생重生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열의 순간엔 어떠해지는가. 법열의 순간에 우리는 공空의 백금처럼 무애無碍하고 자재自在해진다. 내면이 그대로 청정한 공의 상태로 들어서는 최고의 중생을 체험하는 것이다. 100여 명의 시인들이 보여준 감전의 체험 가운데는 감동도 있고, 전율도 있고, 법열도 있다. 감동의 감성과, 전율의 지성, 그리고 법열의 영성이 함께 자리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배적인 것은 아무래도 지성의 전율 쪽이다. 전율도 크게 보면 감동의 일종이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를 안으로 죽비처럼 치는 수렴과 수장의 살기殺氣, 즉 반성적, 지적 사유가 심층에 내재한 감동이다. 다시 말하면 감동의 자연성, 동일성, 상생성과 비교할 때, 그리고 법열의 초월성, 무비성, 절대성 등에 비할 때, 전율은 비동일성의 세계를 대면하는 지적 행위를 숨기고 있다.   우리의 시인들에게 감동이나 법열보다 특별히 전율이 그들의 생을 바꾼 감전체험의 절정으로 엄습한 것은 이 땅의 근대 및 현대시의 정신이 요구한 지성과 부정의식이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 인간의 삶이란 그 개인의 개별의식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집단의식 사이에서 창조되는 것이라 할 때,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가 일반인이든 시인이든 간에 그 자신의 개인의식은 물론 시대가 가진 집단의식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한 인간의 감전 체험이란 것은 바로 이런 의식 전체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감전체험이란 시공을 초탈하여 영원불변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을, 또는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관념, 의식, 가치관 등등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땅의 근대 및 현대, 그리고 이들 속에 내재된 집단의식, 더 나아가 근대 및 현대시가 지향한 집단의식으로서의 지성과 부정의식은 시인들로 하여금 전율의 체험을 갖게 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응답 시인들은 김수영, 이상, 정지용, 김종삼, 이성복, 기형도, 최승자 등과 같은 시인들에 많이 이끌렸다. 특히 김수영은 압도적이었고, 이상과 정지용과 김종삼도 상당한 정도로 감전의 원인을 제공한 조사祖師들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지적인 시인에 속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서정을 말하더라도 반성적, 지적 사유가 내재된 서정을 말함으로써 그 서정에 가을과 겨울이 상징하는 냉정한 살기殺氣를 내재시키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그 서정이 고전적인 서정과는 구별되는 현대성을 갖게 하였다. 이런 세계는 일면 불편하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한 불편’이어서 ‘불쾌의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신비를 갖고 있다. 시인들은 이런 시적 풍경 앞에서 ‘서늘한 감동’이라 부를 수 있는 전율을 느끼며, 느슨해진 허리끈을 졸라매듯,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듯, 지저분한 방안을 정리하듯, 진부해진 내면을 긴장시키고 시의 길을 향해 분발하였던 것이다.  3. 동일성, 비동일성, 비극적 황홀 동일성이란 자아와 세계 사이에 틈 없이 전일성이 부드럽게 성취되는 일이다. 그때 자아와 세계는 갈등 없는 연인 사이 같기도 하고, 우정이 넘치는 친구 사이 같기도 하다. 그것이 연인 사이 같을 때 상황은 에로스적 합일의 그것과 같고, 친구 사이 같을 때엔 동지애와 같다. 또 있다. 그것이 부모 자식 같은 사이일 때, 거기에는 포용으로 하나 된 연속의 아우라가 감돈다. 세상과 존재 사이의 관계가 이와 같다면 굳이 다른 무엇을 꿈꾸거나 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소박해도, 심오해도, 미숙해도 다같이 사랑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순간은 드물다. 세상은 언제나 분열돼 있고, 파편들로 가득차 있고, 자아와 세계는 단절의 골을 건너지 못한다. 이와 같은 세계를 비동일성의 장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비동일성의 장은 인간적 계산법으로 산뜻하게 풀리지 않는 모순과 아이러니의 얼룩덜룩한 장이다.   이런 비동일성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한 인간을 성숙에로 이끈다. 그러나 거기엔 불쾌감이 늘 따라다닌다. 불쾌감의 다른 이름은 무한하다. 불안, 불행, 소외, 좌절, 분노, 시기, 우울 등등 그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런 불쾌감 속에서도 궁극적으로 살고자 하고, 살아내고자 한다. 그것도 잘 살고자, 더욱더 잘 살아내고자 한다. 그런 살고자 하는 마음, 더 잘 살거나 살아내고자 하는 마음을 에로스적 소망이라고 부른다면, 모든 타나토스적 행위도 실은 그 안에 에로스적 소망을 품고 형태만 바꾸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 시인들이 시를 쓴다는 것은 이와 같은 에로스적 소망의 적극적이며 발효된 고차원의 표현양식이다. 그들은 시를 씀으로써 사는 것이다. 그들이 죽음을 말할 때에도 그들은 에로스적 행위를 적극적으로, 의미있게 전개해 나아가는 것이다. 에로스적 열정과 의지의 다른 이름인 이 같은 시작 행위 속에서, 시인들은 비동일성의 세계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비극적 황홀’이라는 일종의 특수한 심리적 기법을 터득하고 활용한다. 비극적 황홀이란 현실이 비극적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범접할 수 없는 에로스적 절정의 유토피아적 지점을 상정하는 것이다. 그 지점의 도달 가능성이나 현실적 구현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을 이끌며 그들로 하여금 비극적 현실을, 비동일성의 현장을 넘어서게 하는 어떤 힘으로 작용한다. 황홀의 다른 이름인 황홀경이라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세계, 그것은 인간이 죽음을 지연시키고 살아갈 수 있는 상상의 세계이자 그리움의 세계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이 비동일성의 세계에서 질식하여 일찍이 생을 중단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비동일성의 어긋남 속에서도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는 힘, 그런 것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 이 황홀경의 힘이자 상상이 아닌가 한다. 비극적 황홀은 현실이 비극적일수록, 그런가 하면 황홀경이 드높을수록 그 울림과 떨림이 크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라는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의 한 구절이 잘 말해주듯이, 비극과 황홀경 사이의 거리, 그 거리 좁히기의 안간힘에 비례하여 울림과 떨림은 진폭을 달리한다.  우리의 시인들을 감전시킨 ‘비극적 황홀’의 체험은 그 울림의 정도가 상당히 진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세계인식이 그만큼 비극적이었고, 그에 반해 그들의 순수성, 순정성, 진정성을 향한 꿈도 또한 강렬했다는 뜻이 된다. 적어도 고전적인 시학의 시각에서 본다면, 순수하지 않은 자, 순정하지 않은 자, 진정하지 않은 자는 시적 순간을, 그것도 비극적 황홀이라는 시적 순간을 맞이하기 어렵다. 방금 열거한 순수, 순정, 진정은 비극적 황홀의 필수조건이다. ‘비극적 황홀’이란 김지하가 미학적 양식으로 주장하는 ‘흰 그늘의 미학’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앞장에서 말한 근대 및 현대시의 부정의식과 맞물리면서 더욱 시인들을 사로잡은 체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정은 언제나 그 심저나 고처에 이상적 지점을 설정하고 있으며, 그것을 상상하고 그리워할 때, 우리에겐 부정을 통한 깊이의 초월과 높이의 초월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천양희는 “시라는 위독한 병을 철저히 앓을 수 있었던” 것에 안도하며 감사하고 있다. 이것은 비극적 황홀을 몸으로 살아낸 일의 고백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비극적 황홀의 끝 지점에서 펼쳐지는 세계는 어떤 것일까? 그 하나는 비극적 황홀을 무심하게 관조하는 일이다. 그 둘은 비극적 황홀 너머의 도심道心에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그 셋째는 반성과 성찰을 스스로 거부하는 노마드적 포스트모던의 파편들을 즐기는 일이다.  우리 시단의 대부분의 시인들은 비극적 황홀 이후에서 첫째나 둘째의 단계를, 그 중에서도 특히 둘째의 단계를 꿈꾸거나 그 길로 접어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최근 황병승, 김행숙 등을 비롯한 새로운 의식과 상상력의 젊은 주인공들이 빚어내는 세계는 세 번째의 세계를 예고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문제적인 한 징후이기도 하다. 4. 위반과 순응 위반의 파트너는 금기이다. 순응의 파트너도 금기이긴 마찬가지이나, 그때의 관계는 불화가 아닌 화해의 관계이다. 우리의 시인들이 감전을 체험한 내용은 순응보다 ‘위반’ 쪽이 훨씬 많다. 순응은 그것이 우주의 섭리에 관한 것이든, 자연의 흐름에 관한 것이든, 사회의 규범에 관한 것이든, 에너지의 소모가 적다. 그런 만큼 그것은 보수적이나 유익하다. 그러나 간혹 시인들은 우주와 자연의 섭리에는 순응의 흔적을 보이면서도, 유독 사회적 규범에 대해서는 강력한 위반의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때로 그것은 충동만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로 나타난다.  사회란 우주 혹은 자연과 달리 인간이 만든 하나의 인공적 구성물이다. 그러나 그 견고성은 시멘트처럼 딱딱하여 사회는 언제나 홈패인 구조를 지향한다. 그 홈패인 구조에 순응하는 모범생을 제외한다면, 사회는 일탈의 충동을 자극하는 원천이다. 시인들은, 그것이 현대시인일수록 일탈과 위반 속에서 그들만의 ‘일인 단독정부’를 꿈꾼다. 그들은 그들만의 범접할 수 없는 ‘자유의 땅’을 내부지대에 건설하고, 자발적 패배자가 되어 혼자만의 놀라운 쾌감을 만끽한다. 가령 허연은 김종삼의 「시인학교」를 언급하면서 “제외된 자들이 주는 눈부심”을 알았다고, “시를 씀으로써 세상에서 제외되고 싶었다”고 말하였다. 그런가 하면 안도현은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언급하면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는 백석의 시구에 그의 온몸을 동의의 표시로 기대고 있었다. 자발적 제외, 자발적 은일, 자발적 일탈은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위반이고 강력한 성공이다. 위반은 역시 근대 및 현대시사의 부정의식과 깊이 닿아 있다. 시가 개인의식과 자유정신의 산물이라는 그 전제는 시인들로 하여금 순응보다 위반을 지향하게 하였다. 위반에는 고독과 위험이 따른다. 그러나 그 고독과 위험을 선택된 예술가의 고고한 행위라고 인식할 때, 더욱이 사회가 그것에 동의할 때, 그들의 위반 행위는 매우 가치 있는 일이 된다. 틈 없이 돌아가나, 진부하기 그지없는 사회적 삶은, 위반을 통하여 중생重生하는 균열의 시간을 맞이하고, 최후의 지성소인 그들만의 생체리듬으로 숨쉴 공간을 확보하게 한다. 사회란 공공의 이름으로 난폭함을 합리화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경직되고 박제된다.  위반의 환희는 이런 맥락 위에 놓여 있다. 금기를 자발적으로 벗어났을 때, 시인들은 위험한 지대의 아슬아슬한 쾌감을 독자적인 정부 안에서 만끽하는 것이다. 5. 마치며 정말 크게 죽는 대사저인大死底人의 상태가 되면 시 같은 것은 쓰지 않아도 된다. 오도송 한 편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할 수 있다. 그러나 ‘지예至藝’와 ‘지도至道’의 거리는 가까운 듯 먼 것이어서 시인들은 인간적인 번뇌망상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이 벼락 같은 감전의 경험 속에서 중생의 시간을 맞이하는 것은, 그들의 내적 심해 속에 현상계적 그리움은 물론 반야의 진제적眞言帝的 그리움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뭉친 것이 풀리면 길이 트인다. 얽힌 것이 풀리면 길이 보인다. 감전의 체험은, 어찌보면 이 둘의 기미가 보였을 때, 다가온 황홀한 감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식과의 상호작용 속에 있다. 의식이란, 굳이 유식론唯識論을 언급하지 않아도,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연기緣起의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들이 보여준 감전의 경험은 20세기 근대 및 현대시의 의식 내용을 성실히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고, 의식이 바뀌는 시대가 온다면, 그들의 이런 경험내용은 동의를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본 시적 감전들의 내용은 한국근현대시사 100여 년의 심층의식을 상당히 잘 반영한 하나의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정효구   충북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서울대학교 국문과 석사, 박사학위 받음. 1985년 《한국문학》에 문학평론으로 등단. 저서 『존재의 전환을 위하여』 『시와 젊음』 『몽상의 시학: 90년대 시인들』 『한국현대시와 자연탐구』 『시 읽는 기쁨』 등 다수 있음. 현재 충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황    상    민 |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시인에게 ‘시’란 무엇일까? 평생 잊혀지지 않는 ‘벼락치듯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는 이들에게 무엇일까? 마음을 흔들어 놓은, 인생의 빛나는 순간을 나타내는 시구는 무엇인가?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들의 삶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을까? 각기 다른 100명 이상의 시인이 말하는 최고의 시구를 통해 시인의 마음을 그려낼 수 있을까? 시인이 꼽았던 명시의 한 구절을 통해 ‘시의 존재’, ‘시인의 존재’, 그리고 그들의 ‘존재 이유’와 삶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시인의 심리를 분석한다.   최고의 순간, 황홀한 절정을 맛보게 하는 시구란 ‘한 줄의 시구’가 만들어내는 마음의 작용이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다. 그것은 시인이 살았던 시대의 반영이자 시인이 그토록 찾았던 ‘그 무엇’이다.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어떻게 형상하느냐에 따라 그 ‘무엇’은 시인에게 다양한 시구로 각인된다.  한 폭의 그림이 전경과 배경으로 구성되듯이 때로 시는 시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대상이 되기도 하고,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주는 화폭이 된다. 시인이 그려내는 시는 때로 심리학자가 분석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인간의 마음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나와 공감할 수 있는 인간 마음의 상응이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던져진 것이 아니라, 나를 울리고 나를 힘내게 하는, 아니 나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시인이 아닌 심리학자의 호기심은 한 줄의 시구를 통해 시인이 체험하고 드러내었던 감정과 생각, 그리고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한다. 그것은 바로 시인이 그려내었던 자신의 마음의 지도이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행위는 내용물이 아니다. 그 내용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감정과 판단, 행동을 낳는 마음의 작용이다’. 이제 시구가 사라지고 인간의 감성과 사고, 행동만 남았을 때, 우리는 시인이 그려내었던 시의 세계에 어떤 마음의 지도가 드러나는지를 보게 된다.   60년이 넘도록 청소년기에 읽은 시는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돌”에 관한 시의 기억은 “바위”에 관한 시를 쓰게 한다. 분노에 차, 별을 보지 못한 시인에게 “캄캄한 교실에서 끝까지 남아 바라보던 별 하나”라는 시구는 바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을 쓰는 단초가 된다. ‘시’는 마음을 달래주는 무엇이 아닌 마음을 키워내는 역할을 했다. 삶의 목표가 되고, 또 시구와 교감하는 마음을 창조하는 에너지이다. 그렇기에, 시는 시인이 살고 있는 세상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시인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 한국 시인 100인에게 벼락치듯 자신을 전율시킨 시구는 바로 자신의 삶과 감응하는 절대자 그 자체였다.  절대적 그 무엇으로 형상화되는 ‘시’는 한국의 시인에게 하나의 역병처럼 다가온다. “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움직이는 비애가 내면을 훑고 지나갈 때 시인은 위독한 병을 철저히 앓는다. 시구는 정신의 지문指紋처럼 남고, 또 다른 절망 같은 시작詩作이 시작된다. “지난 여름은/ 줄곧 난행亂行만 당하고/ 겨우 한 줄의 시를 써서 수습하고……/ 빈자貧者로다. 빈자로다. 나 이 땅의 1등 가는 빈자로다.” 젊은 시절 외웠던 한 구절의 시구는 바로 생활의 자화상이다. 빈취貧臭, 그것을 좋아했지만, 단지 한 동네에서 같이 살았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하고 싶지만, 현실의 삶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한 구절의 시가 있었기에 살 만했던 그런 시기로 기억할 뿐이다.  “무의식은 의식에 도달하지는 못하지만 인간의 판단과 감정, 혹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정신의 작용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도 일부는 무의식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무의식이지만 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일에는 바로 “우리가 어느 정보에 관심을 줄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 정보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자신을 위해 목표를 설정하는 일”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시인의 마음은 아주 놀랄 정도로 정교하고 효율적인 도구처럼 움직인다.  우리의 ‘의식적 마음’이 삶의 다른 일로 바쁠 때조차도 우리의 무의식은 다른 정보들을 해석하고 평가하여 우리의 목적에 부합하는 정보를 골라낸다. 이것이 ‘적응무의식’이다. 시인에게 최고의 시구로 남아있는 시의 구절은 바로 시인이 보여주는 ‘적응무의식’이다. 엄청나게 밀려오는 많은 정보들을 순식간에 비의식에서 분석하고 그 정보에 효과적으로 반응하는 마음의 능력이다. 인간은 적응무의식을 통해 이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파악하고, 위험에 대해 경고를 발하고, 목표를 설정하고, 세련되고 효율적인 행동을 시작한다. 아니, 이런 임무를 탁월하게 수행해 낸다. 적응무의식은 사람들이 자각하지 않는 느낌과 편애를 만들어낼 수 있다. ‘벼락치듯 시인을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는 바로 시인의 적응무의식이 작용한 결과물이다.  “싱그러운 거목巨木들 언덕은 언제나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나 한번 가는 길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 시인이 고민했던 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사물의 이면에 존재하는 복합적 의미를 은연중에 담아내고 싶었다고 한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얻고 싶었을 것이다. 시인의 ‘적응무의식‘은 어떤 이유로 이런 유혹을 받았을까?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인에게 고민했던 화두였다. ‘이 세상에 시 아닌 것은 없다. 네가 쓰는 모든 것이 시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에 대해, 삶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버릴 때 시인은 우리의 마음이 알려주는 적응무의식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스스로 ‘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바로 시로 만들 수 있을 때, 시인은 시구를 붙잡고 날아오르게 된다. “무수한 정적”이 “와글와글거리는” 상황일지라도. 시인은 수많은 사람과 묘한 정서적 일체감을 가진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세계와 삶에 대한 각성이다. 시인들이 지나온 시대가 어두웠기에 시인은 시를 통해 생존의 힘을 얻고 또 다른 방식으로 적응하게 된다.    “캄캄한 공기를 마시면 폐에 해롭다.” 병든 내면은 항상 나 자신의 내면이 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모두 정신적 가족이 된다. 어둡던 가정, 나약한 감성, 우울한 사춘기의 은유는 시를 통해 밤으로 표현되지만, 그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 그리고, 이런 밤은 지금도 계속된다.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는 시인이 살았던 시대의 상징이었다. 양심만으로 양심을 지킬 수 없었고, 용기만으로 승리할 수 없었던 시절의 마지막 세대가 자신이라고 믿었던 시인에게 ‘시‘는 바로 자신이 지켜야 할 무엇이었다. 그랬기에, 시인은 자기에게 끊임없이 “내 길은 문학에 있으며, 언젠가는 누구의 의지도 아닌 내 의지로 그 길을 가게 되리라”는  암시를 해야 한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기 확신이다. 시는 자신에 대한 세뇌였다. 물론, 상황에 따라 쉽게 바뀌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에 시인이 되고 싶은 자신의 삶의 경로는 흐르는 물결처럼 움직이기도 했다.  한국의 시인이 표현하는 시는 자신의 분신이었다. “세월이 흘러 풍경이었던 설움은 나의 분신이 된다”. “애틋한 그리움, 아직도 이런 시구를 쓰지 못한 부끄러움을 나는 항상 느끼고 있다”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시는 항상 캄캄하고 외로웠던 문청 시절의 또 다른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 장소가 부산이든 서울이든 아니면 탄광촌이든, 시인은 혼자 어두운 유적지에 남아 있는 유물이 된다. 시인의 호주머니 속에는 언제나 죽음과 연결되는 부스러기가 있다. 이런 경우 항상 자신의 마음에 투사되는 한 줄기 불빛은 바로 시詩였다.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새들은 무리지어 지나가면서 이곳을 무덤으로 덮는다//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널 안에 매장된 자신을 보는 시인은 막연하게 슬픔에 기댄 자화상을 그려낸다. 물론, 시는 관 속의 시체를 부활시키는 몰약이다.  “덜컹대는 직행버스 안에서 시집을 읽었고, 다시 살고 싶었다. 그날 난 아주 나른한 계시를 받았다. 통닭 냄새를 맡으며 제외된 자들이 주는 눈부심을 알았다. 절창絶唱은 제외된 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시를 씀으로써 세상에서 제외되고 싶었다.” 군대라는 척박한 상황에서도, 육체적·정신적인 피폐한 시기라는 기억마저도 습작의 시기로 변신시킨다. 군대의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시집을 읽는 모습은 바로 스무 살 무렵의 비감한 심정으로 감응한다. 비록 이제는 정신이 백골처럼 무심한 시점이 되었더라도 시인에게 시는 자신을 일깨우는 자명종이 된다.   시는 시인의 마음의 표식일 뿐 아니라 시대와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상징이다. ‘어쩌면 이리도 내 마음 그대로일까.’ 마음을 대신해 표현해주고 또 마음을 흔들어주는 것이 시의 체험이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시인이 기억하는 그때는 ‘너무나 어리고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시는 바로 그때 희열의 근원이자 삶의 목표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적산가옥으로 남겨진 썰렁한 다다미방 하숙집에서 겨울을 나며 입학시험 준비를 하던  소년에게 한 편의 시는 어린 영혼을 흔들어주었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법대로 가기를 권하신 아버지의 명령을 배반(?)하고 시인이 되기 위해 국문과를 택한 소년의 삶은 모험이다. 자신이 재가 되는 경험을 한다. 우울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순간에 알 수 없는 시에 대한 희열을 맛보는 순간이다.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난독의 시절이자 남독의 시절이었고 사춘기로 접어들까 말까 한 시기, 이 구절은 야한 비디오 화면처럼 자꾸만 떠올려진다. 몰래 혼자 설레어하며 부끄러워하면서도 계속 이 구절을 읊조리기도 한다. 삶에 대한 비극적인 예감으로 오랫동안 괴로워하지만 한편 그 괴로움을 즐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이 누구의 발자취인지 알 수 없지만, 시란 놈은 그렇게 시인에게 엄습했다. ‘처음에는 싱겁고 무덤덤했던 글귀가 어느 날 하루 종일 입술에 붙어서 팔딱인다’. ‘번개가 치고 온몸의 혈류가 범람하는 전율’을 만들어낸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시구를 막 ‘느끼기’ 시작한다. 지금은 “영원한 루머”보다 저 ‘물질적인 손’에 끌리지만, 그래도 시인에게 영원한 루머는 삶의 다양한 종류의 질문이다. 비록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고 해도 좋다. 자신에게 했던 맹세, 까무라칠 것 같았던 느낌, 부르다가 죽어도 좋을 이름 하나는 갖고 싶다. 나에게도 내 이름을 부르다 죽을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 시인에게 시는 짝사랑의 열병이었다.  청춘과 삶의 모습은 연애였다. 그것은 수없이 내 안에 떠 있던 섬으로 인해 좌초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떠나간 사랑을 탓하느라 청춘을 소비했지만, 섬은 내게 사랑의 은유처럼 남았다. 끝없이 미끄러지는 운명을 반복하는 어떤 실현 불가능한 욕망의 치환이었다. 나 사이에 섬이 있었고, 그래도 아직도 그 섬에 가고 싶은 것이 시인의 마음이다.  “어느날에사, 어둡고 아득한 바위에, 절로 임과 하늘이 비치리오” 이런 싯구를 통해 시인은 ‘천둥의 빗금이 가슴을 쫙 후비듯 금을 긋는’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상상할 수 없었던 그것, 백일기도 끝에도 닿지 못할 것 같은 이미지이지만 손쉽게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는 무거운 의미의 밀착이라고 표현할 때, 과장과 부정을 통한 마음의 충격을 나타낸다. ‘지금도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고 그대로 살아 있다’는 그 충격이 시인에게 어떤 사리 같은 결정물을 만들어낼지 궁금하다.   시인에게 항상 삶이란, 아니 인생이란 거창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이렇게 한가하고 게으르고 그러면서 목숨이라든가 인생이라든가 하는 것을 정말 사랑할 줄 아는 그 오래고 깊은 마음들이 참으로 좋고 우러러진다.” 저리 순연하게 ‘우러러’ 볼 수 있는 시구에서 ‘참 인간으로서도 잘 살았다’ 싶은 부러움과 찬탄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한 줄의 시구를 애틋하고 뜨겁게 느끼는 시인들에게 삶은 항상 녹록치 않은 시간의 연속이다.  시인의 삶의 고백은 계속된다. ‘사는 게 무엇인지, 신념이 무엇인지 모르던 시절’ 시인은 데마( 참고)처럼 세상으로 나가 보고 싶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 오랜 방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방황하는 곳이 그 어디든 밤마다 허공에서 푸른 목소리가 울려왔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길모퉁이에서 불안스레 듣던, 저 맑고 뜨겁고 목 타는 울림, “어서 너는 오너라.”  시인이 노래하는 삶의 모습은 그 자체로 처절하다.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나의 존재가 사라지고, 타인이 나의 하늘이 된다. ‘밥줄’이라는 말에 가슴은 아려지고, 밥줄 때문에 자존심은 사라진다. ‘세상 앞에서 허리를 굽실거려야 하는’ 반길 수 없는 시간이 계속된다. 삶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새처럼 날아가는 것을 꿈꾼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어깨에 힘 빼고, 혀 꼬부리지도 않고 그저 한 마디 툭, 던져지는 이 말을 통해 자신을 들어 올려 놓고 싶어했다. 삶 속에서 시인은 쉽게 맥없이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고 만다. 왈칵 저 새떼의 일원이라도 되고 싶지만, 그것은 시구로 남을 뿐이다.    하릴없이 나이를 꺼내 먹으며 늙어 가는 어느 시인에게 “집은 벽 속의 곳간에서 제 나이를 꺼내 먹으며 늙어간다. 집은 저 벽을 부수고 나와야 한다.”는 시구는 바로 ‘벽을 부수고 나오라’는 소리이다. 하지만, ‘덩굴을 걷어내고, 벽을 부수는 일’은 쉽지 않다.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에게 갇힌’ 마음의 감옥 속에 숨어 있었기에, 변화란 항상 죽음과 친구가 된다.  숨어 있고, 갇혀 있는 시인은 “너는 해바라기처럼 웃지 않아도 좋다. 배고프지 나의 사람아 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라”라고 노래한다. 모든 것이 다 엉망진창인 시절의 계시이다. 돌아가신 엄마가 꿈속에 찾아와서 밥을 해주시는 장면, 옥탑방에 누워 천장에 드리워진 두꺼운 구름장들을 쳐다보면서도 울지 않으려고 했다. 울면 지는 거니까. 하지만, 울어야 했다. 이 시구를 되뇌이면서.  삶을 노래하는 시인에게 삶은 항상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또 다른 세상을 꿈꾸게 된다. “아, 갈 수 있을까/ 언제는/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로” 아버지 없는 집에 늘 앓아누워 있는 엄마를 보며 시인이 꿈꾸기도 한다. “갈 수 있을까. 언제는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로”는 바로 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다.  시는 때로 우연히 만들어내는 삶의 단편을 보여준다. 삶의 모순과 의미는 시가 만들어내는 생생함과 실재감으로 되살아난다. 왼손잡이, 안경잡이에다 소위 말하는 결손가정의 병약한 소녀에게 독백 같은 습작시는 이상한 시인의 이상한 시가 되기도 했다. “‘거울속의나는왼손잽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 소녀의 독백은 “거울 속의 나는 정상/ 왼손잡이 아냐, 풀 같은 머리칼/거울 속에서 나는 두 개의 눈동자”였다. 감옥의 간수 같은 국어선생은 화부터 냈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베끼고 난리야!” 출석부로 머리를 얻어 맞으면서 증거물로 내민 이상의 시집은 정말 난생 처음 본 것이었다.  ‘시를 쓸 종이가 없어 날 지난 신문지 한 귀퉁이에 몇 줄을 끄적거려 그것을 천금인양 가슴 한편에 감추던 시절’ 한 줄의 싯구는 바로 시인의 마음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한국의 시인에게 시는 가난하고 외로웠으나 높고 뜨거울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 얄궂게도 그렇게 진저리를 쳤던 가난과 외로움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다지 가난하고 외롭지 않게 된 지금에서야 시를 만들게 했던 자양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제는 더 이상 가난하지도 않고, 또 외롭지도 않기에 더 이상 시인의 마음이 그다지 높고 뜨겁지도 않다. 원하였던 일이지만, 한편으로 두렵고 절망스러운 삶의 변화이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스무 살의 ‘그 어떤 포스와 비전’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에 울고 사람에 울고 신에 울고 최루탄에 울고 술에 울었던’ 어떤 시기였다. 비장한 ‘포스’를 내뿜으면서 확고한 ‘비전’이기를 바랐던 그 마음이 지금도 그대로 간직되기만을 기대한다. “고한읍 어딘가에 고래가 산다는 걸, 나는 몰랐다.” 이 시구가 척추를 지나 심장으로 파고들 때 시인은 이제 나도 고래를 잡으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황상민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박사. 저서 『대한민국 사람이 진짜 원하는 대통령』 『세상이 변해도 성공할 아이로 키워라』, 공저 『한류와 아시아의 대중문화』 『현대 심리학 이해』 『인간행동의 이해』 등과 번역서 『인터넷 심리학』 『적응을 위한 지식의 기능: 산다는 것과 안다는 것』 등 다수 있음.     출처 : 문학저널21
193    109명 현역시인과 "최고의 시구"(2) 댓글:  조회:2921  추천:0  2017-02-05
  109명의 현역시인이 뽑은 '최고의 시구'(2)       계간 시인세계      이재무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 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 김수영, 「강가에서」에서 지금 읽어보면 지극히 평범한 진술이다. 하지만 30년 전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물 묻은 손으로 전선을 만진 듯 전율하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것은 이 시가 김수영의 다른 시편들에서도 보이고 있듯이(일테면 「거대한 뿌리」 「성」 같은 시편들) 시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크게 위반했기 때문이다. 시라면 응당 고상하고 아름답고 선하고 우아해야 한다는 고루한 생각에 갇혀 있던 내게 그의 시편들 속의, 정도를 넘어선 과감한 시적 표현들(비속어, 욕설 등 일상 언어의 과감한 창조적 차용)은 당혹감을 넘어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전복과 위반의 진술들은 막힌 것이 확 터지는 해방감을 가져다주었다. 제도와 이념의 금기를 훌쩍 뛰어넘으려는 시인의 고투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계의 발견과 개진에 뒤따른 기법과 표현에서의 그의 이러한 과격한 도전과 실험이 있었기에 우리 현대시는 그만큼 영토를 실질적으로 확장해 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정록 나무를 베면 뿌리는 얼마나 캄캄할까     ―― 이상국, 「어둠」 전문 가장 최근에 친 벼락이다.  봄이 되면, 나무는 깜깜한 어둠을 딛고 새싹을 밀어 올릴 것이다. 맨 처음, 씨앗 속의 어둠을 송두리째 끌어올려 초록지붕을 지었듯이, 다시 초록의 일주문 하나 세울 것이다. 발밑 어둠의 실뿌리를 더 깊게 박을 것이다. 잘려나간 그루터기의 겹눈, 칠흑 중의 칠흑은 발밑 어둠이다. 발바닥에 눈을 달고 세상을 읽자. 똥독에 빠진 쥐의 눈이 가장 반짝인다. 연필심은 종이보다 깜깜하다. 어둠의 핵에서 글이 나온다. 아버지가 누워 있는 방이 가장 어둡다. 새벽 일찍 쌀을 안치던 어두운 솥단지, 깜깜하기에 쌀보리는 더욱 희게 눈뜬다.    이진명 몸은 왜 있을까    ―― 김정환, 미상 김정환 시인의 시 구절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책장을 뒤졌으나 80년대에 읽으며 줄쳐 놨던 옛 시집을 찾을 수 없었다. 여러 사람한테 문의하였지만 이 시구가 있는 시집과 시의 제목을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채로 이 시구를 만났을 때의 나를 불러보련다. 데뷔 이후 1992년 첫시집을 얼굴도 본 적 없는 김정환 시인께 부쳤다. “몸은 왜 있을까” 오직 이 한 구절을 허락도 없이 품고 있었던 오랜 빚을 갚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아아, 탄식의 수긍을 몸을 궁글리며 할 수 밖에 없게 만든 “몸은 왜 있을까”.   모든 오욕칠정과 생로병사와 살아 있다고 들고나는 이 물질적 숨의 현재, 이런 모욕이, 이런 치욕이 어디 다시 있을 수 있을까.  그때 내 나이 삼십 중반. 무슨 제1의 대문짝이라도 되는 양 모가지 위에 얼굴을 올리고, 걸음 같지도 않는 걸음을 끌며 길거리를 헤매고 직장으로 십수 년을 흘러다녔다. 왜 이토록 피로하게 밥을 벌어야 하는지 돈을 벌어야 하는지를 도무지 알아낼 재간이 없는 채. 그런데 답이 온 것이다. 몸은 왜 있을까, 질문이며 답인 이 시구를 받아올리자, 온 세월의 체증이 슬픔도 없이 녹아내리며 화장실에서 두루마리 화장지를 두 손 받쳐 지심으로 풀어 내리는 나를 보았다. 이 지난한 밥벌이의 되풀이가 똥 닦을 두루마리 화장지(세상 어디에 똥 닦을 휴지 하나를 거저 주는 데 있으랴) 한 뭉치를 사기 위해서라고 겨우 깨닫게 되자 화장실에서 돌아와 책상에 앉아 그날 오후의 나머지 일을 고요하게 마칠 수 있었다.  이   탄 아아, 늬는 산山ㅅ새처럼 날러 갔구나!    ―― 정지용, 「유리창」에서 정지용의 시 「유리창」의 끝연 10째줄이다. 이 시의 “산ㅅ새처럼 날러 갔구나”처럼 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사라진 정황을 볼 수 있다. 이 시는 정지용이 죽은 아이를 보고 지었다고 한다. 9째줄의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만 보더라도 불길한 상징이 잘 되어 있다. 정지용은 시를 지을 때 아무리 슬퍼도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한다. 슬퍼도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일까. “날러 갔구나!” 이 한 구절이 내 마음 속에 오랫동안 맺히게 된 것은 내가 1960년대에 《새소년》 잡지를 만들 때부터였다. 잡지 《새소년》이 잘 나갈 때 마음 속에서 부정을 타서 《새소년》이 안 팔리면 큰 충격을 받을 것 같은 우려와 함께 “날러 갔구나!”와 같은 암시는 항상 내 마음을 불안케 했다. 새시대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암시해준 시구였다.   이태수 저 금박金箔 바람,  저린, 낯선, 눈부신…    ―― 황동규, 「사라지는 마을」에서 우울하게 헤매면서 시에 이끌려 다니던 문학청년 시절, 유치환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그리움」)라는 ‘절규’에 빠져들곤 했다. 현실과 꿈의 동떨어짐, 방황과 갈등 때문이었다. 그 뒤 박목월의 빼어난 언어감각과 조지훈의 의젓한 지사적 풍모에 매료되고, 김춘수와 황동규를 가까이 느끼게 됐다. 스승인 김춘수의 ‘꽃’을 노래한 시편들, 서정의 옷을 입은 그 인식론(또는 존재론)의 세계는 매력적이었다.  이어 황동규의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시편들은 부러움과 극복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황동규는 여전히 저만큼 가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감들이 황금빛 불을 켜고 있으며 그 금박 바람이 “저린, 낯선, 눈부신…”으로 읽는 그 황홀하고 서늘한 정신의 불빛이 전율을 안겨주고 있는 것 같다.    이하석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 한용운, 「알 수 없어요」에서 이 시구는 ‘한심하게 어둡고 쓸쓸했던’ 고등학생 시절에 ‘문득 내게 왔다’. 참 많이도 이 시구를 중얼중얼대며 다녔다. “시의 언어는 필연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는 예이츠의 말마따나 이 구절은 한용운이 살았던 삶의 한복판에서 필연적인 목소리로 나타났다고 믿으면서. “그래, 재는 불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지. 그건 다시 타오를 수 있는 것. 마치 이별이 끝이 아니라 만남의 시작인 것처럼 말이다”라고 믿으면서. 이 놀라운 전환, 끊임없는 부정으로 인해 열리는 큰 긍정의 꿈의 실현의지야말로 ‘한심하게 어둡고 쓸쓸했던’ 나를 밀어올리는 힘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장석남 산山에/산에/피는 꽃은/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 김소월, 「산유화」에서 미인이 좋은 건 그저 좋은 것이지 까닭이 있지 않다. 늘 명확한 그 사실 앞에 엉뚱한 까닭들을 늘어놓는다. 좋은 시가 왜 좋으냐고 하면 어떠한 답이 나와도 그 시가 가지고 있는 함량에 미달인 채로 구차하다.  뼈가 굳기 전부터 이 시가 좋았다면 거짓일 공산이 크다. 확실히 이 시는 천재의 산물보다는 달관의 산물이다. 이십대 후반쯤일까 이 시가 막 쳐들어왔다. 좋은 시는 막 달려 들어오는 것이다. 저 꽃은 하나의 절간이기도 하고 백골이기도 하다. 때로는 남모르는 연애이기도 하고 도피이기도 하다. 그래서 좋다. 흔히 도피를 현실 망각의 행태로 간주해 버리고 마는 경우가 있다. 예술이 현실 도피라는 걸 모르는 탓이다. 도피가 아니라 초월이라고 하면 책망에서 면할까? ‘저만치’ 피어 있으니 목마름이요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늘, 궁극적으로는 저만치 혼자서 피다 지고 싶었다. 다시 구차하다!    장석원 날아간 제비와같이 자죽도 꿈도 없이/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어디로이든 가야 할 반역反逆의 정신//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시를 반역한 죄로/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 김수영, 「구름의 파수병」에서 여름의 산정에 삐쩍 마른 해골이 있다. 겨울 설산이 보낸 엄혹한 마른 바람이 보인다. 뽀개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온다. 시가 두려워질 때마다 김수영을 읽는다. 비애의 정점에 다다른 시인을 본다. 그의 얼굴은 구름에 먹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곧 산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 그는 다시 시를 쓸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반역할 것이다. ‘가장 높은 정신’(조정권)의 거처, 산정에 서 있는 반역자, 시인. 그의 정신과 구름의 방향.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디로든 가야 한다. 청빈과 쓸쓸함이 노래가 되는 순간. 이 염결성이 시인을 지키는 도덕이라는 것을 안다. 사랑의 끝이 보인다. 고요하다.   장석주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 김수영, 「비」에서 이 시구가 마음에 화살처럼 꽂혔다. 시인은 제 아내에게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놀라워라, “움직이는 비애”라니! 비와 비애의 음가音價가 겹쳐지며 한 순간에 눈이 번쩍 뜨인다. 비의 운동역학에 “비애”를 슬쩍 얹는 솜씨라니 ! 비애에 비의 운동성이 합쳐짐으로써 돌연 비애의 동학動學이 발생한다. 김수영은 아무런 운동성을 갖지 않은 정적인 것에 비의 운동성, 비의 속도를 부여한다. 대상적으로 존재하던 “비”라는 사물은 돌연 경계를 넘어 “움직이는 비애”라는 현존을 품는다.  시인은 음과 양이 하나로 포개지듯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하나로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식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가 지워질 때 움직이는 “비”는 움직이지 않는 “비애”를 품고 떨어지는 그 무엇으로, “비”라는 보편다수의 존재자에서 “움직이는 비애”라는 일자, 혹은 초월자로, 그리고 세계의 중심이 사물에서 사건으로 옮겨 간다.    장인수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 한용운, 「알 수 없어요」에서 시라는 놈이 나에게 기습한 경로는 아주 평범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국어 선생님은 교과서에 시가 나오면 무조건 외우라고 하셨다. 지금도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수십 편의 시를 달달 암송하고 있는 것은 그 분 덕분이다. 달달 외우기 위해서는 밥 먹다가도, 똥 싸다가도,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하면서도 혀에 가시가 돋도록 연습해야 한다.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라는 시를 암송하면서 “수직垂直의 파문波紋”,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라는 글귀가 서서히, 자꾸 미꾸라지처럼 꿈틀거렸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렇게 시는 내게 엄습했다. 처음 읽을 때에는 싱겁거나 무덤덤했던 글귀였는데 어느 날 하루 종일 입술에 붙어서 팔딱이더니 전압이 세지면서 번개가 치고 온몸의 혈류가 범람하는 전율을 받게 된 것이다. 미토콘드리아 수천만 개가 새우 떼처럼 튀었다. 그 이후 장석주의 시편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전윤호 고한읍 어딘가에 고래가 산다는 걸, 나는 몰랐다.    ―― 이건청, 「폐광촌을 지나며」에서 이 나라에서 석탄이 가장 많이 나던 동네에서 자라며 광부의 아이들과 학교를 다니고 검은 산과 검은 강을 보며 자란 나였지만 나도 몰랐다. 고래를 잡으려면 동해바다로 가야 하는 줄 알면서 살았다. 내 친구가 고한초등학교에서 선생을 하고 가끔 도박에 미친 놈들이 손을 끌고 올라가 카지노를 찾을 때도 나는 몰랐다. 그곳에 고래가 있는지, 그곳에 있는 고래를 누군가 보고 있는지. 가끔은 내가 뭔가를 놓고 사는 게 아닐까 하는 허전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이 시를 읽으면 그렇다. 시인은 내 척추를 지나 심장으로 파고든다. 이젠 나도 고래를 잡으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정끝별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에서 내 스무 살의 ‘그 어떤 포스와 비전’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 스무 살 무렵, 학관의 전용(!) 화장실 벽에는 “님은 갔습니다. 지가 갔습니다. 그놈은 붙잡아도 갈 놈이었습니다”가 새겨져 있었다. 읽고 또 읽었으리라. 역시 그 무렵, 일요일의 나는 교회를 들락거렸고, 일요일을 뺀 허구헌날의 오전은 시와 사회과학을 한답시고 써클룸을 들락거렸고, 나머지 허구헌날의 오후는 술집을 들락거렸다. 시에 울고 사람에 울고 신에 울고 최루탄에 울고 술에 울었다. 초월과 역사와 현실 사이를 들락거리며 징징징 울던 그 무렵,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구절은 얼마나 비장한 ‘포스’를 내뿜었던가. 얼마나 확고한 ‘비전’이었던가. 당신만 당신이 아니라 기리운 것이 다 당신이라는데……    정병근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 김수영, 「눈」에서 기침을 하자고?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나는 시인이 폐병쟁이인 줄 알았다. 마른 얼굴에 유난히 퀭한 눈을 가진 시인의 사진을 보면서 나도 기침을 하고 싶었다. ‘기침’은 살아 있고자 하는 자유의 분명한 언표임을, ‘눈雪’과 ‘눈目’이 다르지 않음을 지나오면서 더 절절히 공감하게 되었지만. 나는 기침을 자주 했다. 새벽녘 기침소리로 할아버지는 그 높은 존재를 알렸고, 아버지는 헛기침 끝에 우리를 나무랐다. 할 말이 없을 땐 자꾸 기침이 나왔다. 침묵이 나를 가로막을수록 기침은 더 날카롭게, 더 깊이 내장되었다.  기침은, 타성과 혼곤의 등짝을 후려치는 나 스스로의 죽비이면서 부조리와 억압에 항거하는 ‘한소리’일 것이다. 보라는 듯이. 들으라는 듯이. 하여, 기침은 지금도 저 희고雪, 퀭한目 ‘눈’과 함께 여태껏 내 폐부 속에 칼날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정일근 캄캄한 교실에서 끝까지 남아 바라보던 별 하나    ―― 김명인, 「동두천 2」에서 시인이 되고 국어선생이 되어 김명인 시인의 처녀시집 『동두천』을 다시 읽었다. 그 시절 나는 주당 45시간의 수업을 하는 교육노동자였고, 교실에서 교실을 떠도는 유목민이었다. 야학선생을 오래 한 나는 야학과 다른 분위기인 제도교육의 폭력에 가까운, 불합리한 제도에 적응하지 못했다. 대학 시절 필사를 하며 공부를 한 시집 『동두천』을 다시 읽으며 “캄캄한 교실에서 끝까지 남아 바라보던 별 하나”란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그때까지 나는 미래의 ‘별’인 학생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주장자처럼 나를 쳤다. 단지 분노에 차, 별을 보지 못한 나에게 별을 보게 만든 그 한 구절 덕분에 나는 「바다가 보이는 교실」 연작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후 그 연작시가 내 처녀 시집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정재학 캄캄한 공기를 마시면 폐에 해롭다. 폐벽에 끌음이 앉는다.    ―― 이상, 「아침」에서 폐병을 앓았던 시인의 재미있는 구절이다. 결국 폐결핵으로 자신의 목숨까지 잃었지만 이상에게 폐병으로 인한 고통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시는 찾을 수가 없다. 과거로부터, 앞으로도 시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이 있겠지만 이상은 ‘시는 결국 이미지이며 유희’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듯하다. 그것이 1930년대 시인들 중 그가 고립적인, 독자적인 위치를 갖는 이유일 것이다. 삶 혹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진정성의 척도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 답답하고 재미없는 일이다. 시인은 스스로 환자이자 의사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안목을 가진 시인이라면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이상은 보여주었다. ‘시에서의 진정성’과 ‘시에 대한 진정성’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 둘의 사이가 그리 먼 것은 아닐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에 나오는 어느 대사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잘 요약해 주는 것 같아 말미로 대신한다.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아. 그래서 더욱 잊혀지지가 않아.”    정진규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운 눈썹을/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서정주, 「동천冬天」 전문 1연으로 되어 있다. 그것도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전문을 다 옮길 도리밖에 없다. 이미 분석이 완벽하게 끝나 있는 시랄 수 있겠으나, 오히려 오독誤讀이 내게는 정독正讀이 된 경우가 많다. 그만큼 벼락으로 다가왔다는 이야기다. 이 시도 내게는 그런 범주에 속하는 시가 아닌가 한다. 이 시의 벼락의 정체는 마지막 쉼표(,)다. 이토록 호흡(리듬)과 의미와 리듬에 모두 걸려 영향하고 있는 부호를 나는 여기서 처음 만났다. 마침표로 마감하면 이 시는 형식상의 리듬이 단절되고 산문적인 설명이 되어버린다. 꿈으로 맑게 씻는 이미지의 행위도 불가능해진다. 눈썹의 의미도 사실로 끝나고야 만다. 일거에 하나의 사물(반달)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개벽開闢이 벼락으로 왔다.    조말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 윤동주, 「길」에서 열일곱 살 때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가 도로道路로 질주疾走하’(이상)느라 막다른 골목이 좋았고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도 좋았다. 재미없는 교과서 속에서 이상은 이상해서 좋았다. 그는 열둘이라는 딱 맞춤에서 벗어나고 싶은 나에게 그럴듯한 근거를 제시했다. 많은 제십삼 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항상 줄을 잘 서는 학생에게 도주하기 좋은 막다른 골목은 쾌감이기에 충분했다. 윤동주는 너무 반성적이어서 거리를 두었다. 좀 쓸쓸해 보이기는 하였으나 그는 너무 정직했다. 그래서 얼마 전 드라마 자막에 떠오른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는 신선했다. 그것은 반성적이었으나 막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한창 길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아침에도 걸었고 저녁에도 걸었다. 그것은 막다른 길이었으나 아스라이 멀어서 내가 걸어가고 걸어오는 길이 한없이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조정권 지난 여름은 줄곧 난행亂行만 당하고 겨우 한 줄의 시를 써서 수습하고…‥ 빈자貧者로다. 빈자로다. 나 이 땅의 일등 가는 빈자로다.”     ―― 정진규, 「곳곳에 가을이 당도하였으매」에서 젊은 시절 내가 외우고 다닌 구절이다. 이 시의 빈취貧臭를 좋아했다. 그와 나는 한동네에서 살았다. 거나해지면 그 앞에서 나는 이 시를 낭송했다. 아름다웠던 시절이다. 한국 가톨릭의 빈승貧僧 구상도 그의 시엔 쇠락성이 있다고 말했다. 시에 매달려 있음의 세상! 우리가 추구했던 순수시의 빈취성貧臭性에는 상처받을 수 없는 순결과 도도한 처녀성이 자만심으로 살아 있었다.  누가 일등 가는 빈자라 자부할 수 있겠는가. 시인은 빈자로 남는다. 시인은 상처받을 뿐 훼손되지 않는다.  조창환 누군가 목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다 흥건하게 흘러 번진 피 그 자리에 바다만큼 침묵이 고여 있다    ―― 이형기, 「황혼」에서 어느 위대한 영웅의 비장한 죽음과 그 자리에 흥건하게 흘러넘친 피를 연상시키는 황혼의 짙붉은 색감은 극한에 다다른 순수의 모습이다. 피와 죽음의 장면에 배음背音처럼 깔리는 절대침묵을 느끼는 순간, 나는 저 무서운 소멸과 황량한 무화無化에 대한 두려움 섞인 전율에 사로잡혔다. 일체의 잡음이 제거된 순수 그 자체인 죽음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는 공포보다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시인의 내면에 깃든 극한적 순수지향의 의지가 빚어낸 이 장면의 미학적 전율은 내 심리의 저층에 잠들었던 원색적 비장감을 깨워 일으켰다. 이형기 시 「황혼」이 보여준 환상과 꿈의 실재화實在化에 대한 치열한 탐닉은 한때 이미지의 감각적 형상화를 추구하는 내 시의 지향점이 되기도 하였다.    조현석 귓속에/복숭아꽃 피고/노래가/마을이 되는/나라로/  갈 수 있을까/어지러움이/맑은 물/흐르고/  흐르는 물 따라/불구의 팔다리가/흐르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죽은 사람도 일어나/  따뜻한 마음 한 잔/권하는 나라로/  아, 갈 수 있을까/언제는/몸도/마음도/안 아픈/나라로    ―― 이성복, 「정든 유곽에서」에서 엄마는 늘 아팠다. 시도 때도 없이 무릎 관절이 쑤셨고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했고 당뇨에 고혈압도 있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도를 낸 아버지가 근 1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그 기간 중 엄마는 몇 개월 동안 병석에 있었다. 예전에 앓았던 결핵성뇌막염이 다시 도졌다는 말을 이모에게서 들었다. 그때 나는 숱한 밤을 앉은뱅이책상에서 울다가 지쳐서 엎드려 잠들었다. 커다란 이불짐과 옷보따리를 지고 메고 판자촌이 즐비한 청계천 옆 왕십리로 이사를 했다. 그 시절 아버지 없는 집에 앓아누운 엄마를 보며 “갈 수 있을까. 언제는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로”를 생각하며 병이 낫기를 기원했다.  지금은 15년 전 돌아가신 엄마가 “일어나 따뜻한 마음 한 잔 권하는 나라”를 떠올린다. 딱히 마음 한 잔이 아니더라도 찬 술 한 잔이라도 권하기를.   천양희 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 김수영, 「비」에서 “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릴케)”는 말 앞에서 오래 마음이 들리던 시절, 움직이는 비애란 말은 “내 속엔 언제나 비명이 살고 있다(실비아 플라스)”라는 구절과 함께 내 정신을 내리치는 죽비였다. 움직이는 비애가 내면을 훑고 지나갈 때 나는 시詩라는 위독한 병을 철저히 앓을 수 있었다. 정신의 지문指紋 같은 이 한 구절은 내가 초극해야 할 또 다른 절망이며 시작詩作에 가해야 할 박차이다. 오늘도 시가 내게 묻는다.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고.    최영철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시를 쓸 종이가 없어 날 지난 신문지 한 귀퉁이에 몇 줄을 끄적거려 그것을 천금인양 가슴 한편에 감추던 시절이 있었다. 시를 쓸 필기구가 없어 부러진 연필을 황급히 깎아 침 묻혀가며 눌러 쓰던 시절이 있었다. 멀쩡한 팔다리를 떼내어 버릴 수는 있어도 그렇게 얻은 시 몇 줄은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시절이 있었다. 호주머니에는 잘 해야 천 원 지폐 한 장이 고작이었다. 그것으로 낱담배를 사고 가락국수로 허기를 넘기고, 잔술 두어 잔이라도 마신 날은 찬바람이 씽씽 들어오는 어깨를 구부리고 두어 시간 집까지 걸어야 했다. 그리고 새롭게 뜬 아침 햇살 아래 지난밤의 모든 기대와 몽상을 찢고 불태워야 했다. 가난하고 외로웠으나 높고 뜨거울 수 있었던 동력은 얄궂게도 그렇게 진저리를 쳤던 가난과 외로움이었다. 그다지 가난하고 외롭지 않게 된 지금, 나는 그래서 그다지 높고 뜨겁지도 않게 되었다.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그것이 두렵고 절망스럽다.    최종천 그러나 누구하나 정작 보면서도 보지 못할 아득한 헤루크레스 성좌 부근 광막한 시공 속에 이미 환원한 나를    ―― 유치환, 「모년某年 모월 모일」에서 시를 읽다 보면 놀라우리만큼 닮은 구절을 만나게 된다. 청마 선생의 위 구절은 T.S. 엘리어트의 「게론쫀」의 끝에 나오는 다음 구절과 많이 닮았다. “바스러진 원자로서, 떨리우는 곰좌의 궤도 저편에 회오리치는 벨라슈 프레스카 캐멀부인은” 한창 시를 공부하던 시절 내가 좋아하는 시를 모아 놓고 보니, 박목월의 「하관」, 유치환의 「모년 모월 모일」, 정지용의 「유리창」 등으로 모두 죽음을 다루고 있는 시였다. 청마 선생의 이 작품은 우리 시단에서 보기 드물게 드높고 명료한 정신의 영역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닮은 상상력과 감수성을 만날 때는 경이와 전율을 느끼게 된다. 그 전율은 청년으로서 느끼는 좌절과 고독을 달래 주었던 것 같다. 나는 엘리어트의 시를 좋아해서 어느날 교보로 시집을 사러 갔다가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고도 훔쳐 가지고 나오다가 교보 직원에게 들킨 적이 있다. 내 호주머니 속에 든 것을 모두 꺼내놓으라고 하여 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책을 주면서 다음에 오면 갚으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다음에 가서 책값을 갚으려고 하니 없었던 일이 되어 있었다. 탐구당 문고판 엘리어트 시집 당시 값은 2천 원이었다. 1978년의 일이었다.   최창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내 삶의 길을 크게 벗어났거나, 너무 멀리 나왔다는 생각이 들 때에 백석의 시는 엄하고도 얼마나 정감 어렸던지, 나는 그대로 꼭 따라 했던 것이다. 아궁이에서 불씨를 화로에 담아, 꼭같이 무릎을 꿇고…… 시를 쓰거나보다, 시를 빚거나보다, 시를 산다는 일이 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줄곧 내 우매한 정신의 불씨를 살려주는 싯구는 참으로 많으나, 일일이 열거하지 못하고 저 백석이 다가 낀 화로의 불씨로 보태보는 것이다.    최치언 너는 해바라기처럼 웃지 않아도 좋다 배고프지 나의 사람아 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라    ―― 이용악, 「장마 개인 날」에서 모든 것이 다 엉망진창인 시절이 있었다. 엄마는 자꾸 꿈속에 찾아와 밥을 해주시며 ‘배고프지 않니, 배고프지 않니’ 그랬다. 그런 날이면 북쪽으로 머리를 둔 옥탑방에 누워 천장에 드리워진 두꺼운 구름장들을 보았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울면 지는 거니까. 그러나 울었다.“배고프지 나의 사람아/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라” 되뇌이며 울었다.    한명희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 김광균, 「설야」에서 김광균의 「설야」와 신경림의 「갈대」를 놓고 망설인다. “머언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와 “산다는 것은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본다. 난독의 시절이자 남독의 시절이었고 사춘기로 접어들까 말까 한 시기였다. 눈 내리는 소리가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들리다니! 이 구절은 야한 비디오 화면처럼 저절로 자꾸만 떠올랐고 나는 몰래 혼자 설레어하며 부끄러워했고 그러면서 몰래 이 구절을 계속 읊조렸다. 「갈대」를 읽고는 산다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인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나는 내 삶에 대한 비극적인 예감으로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한편 그 괴로움을 즐겼다.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괴로웠던 기억보다는 설레고 부끄러웠던 기억에 한 표를 던지기로 한다. 세상에, 눈 내리는 소리가 옷 벗는 소리로 들리다니!      한미영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섬」 전문 스무 살이었다. 새내기 문학도였던 내게 정현종의 「섬」은 알 수 없는 힘으로 오롯이 내 가슴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알베르 까뮈에 심취해 있었고 까뮈가 스무 살에 읽었다던 그의 스승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섬』을 읽은 것도 스무 살, 그 무렵이었다. 가슴에 섬을 품고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연애는 수없이 내 안에 떠 있던 섬으로 인해 좌초했다. 떠나간 사랑을 탓하느라 청춘을 소비했다. 돌이켜보면 연애가 실패한 건 내 책임이었다. 섬은 내게 사랑의 은유와도 같았다. 왜냐하면 나의 연애는 끝없이 미끄러지는 운명을 반복하는 어떤 실현 불가능한 욕망의 치환이었으므로. 나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아직도……    함성호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 윤동주, 「별 헤는 밤」에서   따는, 나는 내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생명의 존귀함이 아니라 나라는 우주에 갇혀 있었다는 말이다. 그때 문득 이 한귀절로 나는 나라는 닫힌 우주에서 나라는 열린 우주로 귀환했다. 귀환이라는 것은 본래 그랬다는 말이다. 불가에서는 이 본래의 모습을 깨닫는 것을 ‘견성’이라고 한다. 견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러고 보니 나는 참 못생긴 얼굴이었다. 폭력 앞에서 비겁하며, 이익 앞에서 이기적이고, 공동의 선 앞에서 게을렀다. 이것이 나의 본래의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이후 내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단지 이 본래의, 못생긴 내 얼굴을 보고 난 후 나는 비로소 내 시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공자는 시경 삼백 수의 뜻을 한 마디로 말했다. “사무사思無邪!” ―생각에 삿됨이 없다는 이 말을 나는 시는 솔직해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 이 부끄러움을 통하지 않고 시는 없다.    허만하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 정지용, 「백록담」에서   망설임 끝에 시인 정지용의 「백록담」의 이 구절과 「향수」의“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울음 우는 곳…” 중에서 「백록담」 쪽 구절을 고른다. 의예과 학생시절 다방에서 문리대 친구가 읽던 시집을 어깨 너머 훔쳐 읽었을 때 만난 추억의 구절이다. “꽃도/귀향 사는 곳”(「구성동九城洞」)도 좋지만, 이 구절은 「백록담」 구절에 비해서 색채감이 덜하고 앞연에 기대어 비로소 그 빛남이 더해지는 듯해서, 홀로서기로도 반짝반짝하는 인용문을 든다. 도체비꽃이 어떤 꽃인지 모르지만, 어릴 때 아버지의 고향 뒷산에서 처음 보았던 도라지꽃의 신선한 푸름보다도 더 새파란 꽃인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릴케가 그의 「두이노의 비가」에서 말한 용담꽃도 이렇게 새파랄 수 없는, 나에게는 환상의 꽃이다. 도체비꽃이란 말이 그 앞 구절 “귀신鬼神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와 내통하는 것도 얄밉다.  “아름다움이란 무서움의 시작이다.”    허   연 교실내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계    ―― 김종삼, 「시인학교」에서   한 손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통닭 10마리를, 다른 한 손에는 김종삼의 시집을 들고 터미널에 서 있었다. 살기 싫은 휴가병이었다, 나는.  첫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던 날 김종삼 시집 『북치는 소년』을 샀다. 덜컹대는 직행버스 안에서 시집을 읽었고, 다시 살고 싶었다. 그날 난 아주 나른한 계시를 받았다.  통닭 냄새를 맡으며 제외된 자들이 주는 눈부심을 알았다. 절창絶唱은 제외된 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시를 씀으로써 세상에서 제외되고 싶었다.    허영자 서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 서정주, 「추천사?韆詞」에서 열일곱 살 때 처음 읽은 미당의 이 시구는 지금 읽어도 나의 고개를 떨구게 만든다. 아니 절벽에서 툭 떨어지듯이 나의 고개를 절망적으로 꺾어지게 한다고 함이 더 옳을 것이다. 그만큼 이 구절은 비극적인 메시지를 나에게 전하는 시구이다.  인간의 한계― 유한한 목숨과 의욕에 못 따르는 능력의 한계, 찬란한 꿈에 비한 현실의 초라함 등을 이 한 구절은 절실히 감지케 하기 때문이다.  이 시구에서 역으로 읽어낼 수 있는 간절함 때문에 나는 수십 번, 수백 번 이 구절을 읊조려 왔으며, 아마 앞으로도 여러 번 같은 일을 되풀이하리라 생각한다.    허형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 한용운, 「알 수 없어요」에서   60년대 중반, 법대로 가기를 권하신 아버지의 명령을 배반(?)하고 시인이 되기 위해 국문과를 택하여 상경한 서울은 참으로 우울의 극치였다. 날마다 흑석동 연못시장 안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지지고 볶은 문학론만 해도 하룻밤이면 족히 서너 말은 될 성싶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정치사상사, 중소기업론, 동양철학 등 전공과 관련 없는 과목을 공부하면서도 청계천 헌책방을 뒤지며 시집은 닥치는 대로 사서 읽어 제쳤던 시절, 밤새 미당의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울고 있던 어느 날 밤, 만해가 내게 와 나의 정수박이에 기름 한 바가지를 붓고 떠났다. 알 수 없는 시에 대한 희열을 맛본 순간이었다. 아마, 네루다의 시처럼 “사람은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는 신념은 그 뒤의 일이지 싶다.    홍신선 귀신鬼神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 정지용, 「백록담」에서 막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였다. 그때까지도 문청 기분을 완전히 청산 못한 나는 천둥벌거숭이로 살았다. 대학 시절의 글 친구인 박제천이나 한국시 동인인 오규원 등등 숱한 사내들과 어울려 술과 시 이야기로 시간을 죽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절제한 술과 젊음, 그리고 독서로 지새운 시절이었다. 학생들에게 어쩌다 그 시절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지금도 거침없이 ‘화류계 뜬 시절’이라고 말한다. 화류계라니?  말 그대로 술과 책에 빠져 살던 황음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절 한편으로는 청계천 8가를 곧잘 혼자 헤매었다. 끼니도 거른 채 고서점, 헌 책방이 늘비한 그곳을 헤매며 책 구경 내지 낡은 책들을 열심히 사 모았다. 그렇다. 헌책더미에서 마침 해방 직후 을유문화사에서 낸 『지용시선』를 찾았던 날의 그 득의양양함이라니. 지금도 그날의 째지던 기분은 마냥 생생할 밖에…… 집에 돌아와 풍문으로만 듣던 지용의 시를 나는 감격에 겨워 읽었다. 그때만 해도 정지용은 풍문 속의, 이름 석 자조차도 복자로 표기해야 했던 때가 아니던가. 작품 「백록담」을 읽어가다 4번에서 만난 이 한 구절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쓸쓸함’이, ‘홀로됨’이 말 그대로 ‘파랗게 질려야 하는’ 공포 자체라니. 그러나 정신의 도저한 경지는 이 공포를 극복한 자만의 것임을 나는 이즈음 체감으로 새삼 깨닫는다. 어즈버, 나도 이미 별수없이 늘그막에 들어선 것이다.    황병승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 기형도, 「기억할 만한 지나침」에서 축축한 손길이 다가와 나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짓누르는 밤의 숲처럼. 처음 이 시를 읽어내려가던 스물일곱, 겨울, 나의 12월. 춥고 큰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서기와 유리창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내의 고통스러운 침묵이 나의 입을 틀어막았고, 그것은 등 뒤의 짐승처럼 나를 두렵게 했었다. 그리고 다시 펼쳐든 페이지, ‘거의 고통스러웠다’고 말하던 그때의 사내는 여전히 축축한 손을 내밀어 스물일곱, 겨울, 12월 쪽으로 나를 질 질 질 끌고 간다.    황인숙 하늘나라 다가올 때마다 맑은 물가 다가올 때마다 라산스카 나 지은 죄 많아/죽어서도/영혼이/없으리    ―― 김종삼, 「라산스카」에서   그냥 하염없이 좋다. 김종삼 선생의 모든 시를 좋아하지만 내 머리와 혀에 그 맛이 가장 짙게 감도는 시는 이 「라산스카」다. 끝없이 울려 퍼지는 조종소리처럼 사무쳐서 온몸이 저리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에서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를 얘기했는데, 「라산스카」는 아름답도록 슬픈 시다.     출처 :정자나무 그늘 아래 
192    109명 현역시인과 "최고의 시구"(1) 댓글:  조회:2936  추천:0  2017-02-05
  109명의 현역시인이 뽑은 '최고의 시구'(1)       계간 시인세계     한국의 현대시사가 어느덧 100년을 넘었다. 우리 시문학사 100년을 수놓았던 수많은 시인들 가운데 불멸의 명시名詩를 남긴 시인은 얼마나 될까. 작고시인·현역시인을 통틀어 ‘명시’의 반열에 드는 그 문학작품을 읽고 오늘의 우리 시인들은 어떤 영향과 자극을 받았을까. ‘명시’의 한 구절, ‘벼락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에 밑줄을 그은, 오늘의 우리 시인들에게 가슴 깊이 와닿은 시의 진정성과 고백을 기획 특집으로 싣는다. -편집자-     벼락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 한국을 대표하는 109명의 현역 시인들이 뽑은 ‘최고의 시구’  우리나라 현역 시인들이 ‘최고의 시구’로 가장 많이 언급한 10명의 시인과 시   ●김수영 (14명)   「강가에서」 이재무 / 「거대한 뿌리」 김상미, 김중식 / 「거미」 권현형, 이선영 / 「구름의 파수병」 장석원   「그 방을 생각하며」 고영민 / 「꽃잎 2」 강은교 / 「눈」 정병근 / 「말」 김언 / 「비」 천양희, 장석주   「사랑의 변주곡」 나희덕 / 「헬리콥터」 강정   ●서정주 (9명)   「기인 여행가」 이근배 / 「동천冬天」 정진규 /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문정희 / 「부활」 이유경    「시론」 김남조 / 「자화상」 고두현, 이승하 / 「추천사」 허영자 / 「화사花蛇」 이수익   ●정지용 (7명)   「고향」 이가림 / 「말 1」 김종길 / 「백록담」 허만하, 홍신선 / 「유리창」 이탄 / 「장수산」 박제천 / 「홍역」 오탁번   ●이  상 (6명)   「거울」 길상호, 김이듬 / 「꽃나무」이수명 / 「아침」 이승훈, 정재학 / 「오감도 시제십오호詩第十五號」 김참   ●백  석 (6명)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안도현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최창균, 박주택 / 「모닥불」 이동순   「조당에서」 이병률 / 「흰 바람벽이 있어」 최영철   ●윤동주 (5명)   「길」 조말선 / 「별 헤는 밤」 함성호 / 「서시」 김정인, 김종철 / 「쉽게 씌어진 시」 심재휘   ●김종삼 (5명)   「라산스카」 황인숙 / 「묵화」 고진하 / 「미사에 참석한 이중섭씨」 노향림 / 「시인학교」 허연 / 「풍경」 송승환   ●김소월 (4명)   「가는 길」 김광규 / 「산유화」 장석남 / 「초혼」 김행숙, 유안진   ●한용운 (4명)   「알 수 없어요」 이하석, 장인수, 허형만 / 「당신을 보았습니다」 정끝별   ●이성복 (4명)   「그날」 이대흠 / 「아주 흐린 날의 기억」 문태준 / 「정든 유곽에서」 조현석 / 「모래내·1978년」 박형준 강은교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苦惱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時間을 위해서       ―― 김수영, 「꽃잎 2」에서 김수영, 이상한 모더니스트. 그에게 나는 참 많이 빚지고 있다. 그에게서 리듬이 왔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새벽 어떤 때, 리듬은 모든 것이니까, 형식이면서 내용이니까. 그의 시는 매끄럽지 못하나, 그러므로 그의 시에는 ‘터억 걸리는’ 그런 리듬의 구절들이 있고, 그런 리듬들은 가끔 나를 시로 이끌곤 한다. 그 중의 하나.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꽃잎 (2)」 중에서) ‘구체 추상’의 실마리, ‘리얼 모더니즘’의 실마리, 결국 ‘상황 서정’의 실마리…… 그가 던져준 셈이다.   강   정 사람이란 사람이 모두 고민하고 있는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우매한 나라의 어린 시인들이었다     ―― 김수영, 「헬리콥터」에서 자유는 대개 비상과 통한다. 그러나 자유를 꿈꾸는 마음은 늘 비상에 대한 불가능성을 인지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 영원불멸하는 모순이 아니라면 나는 자유에 대해 아무 할 말도 없다. 시적 자유와 삶의 자유를 등가로 봤던 김수영에게 자유란 늘 새롭게 돌이켜야 하는 양심의 나침반이자 그 처참한 결론이어야 했다. 그럼으로써 시는 언제나 미완의 결론으로 남는다. 시인에게 정작 두려운 건 자유의 결핍이 아니라 자유의 완성이었다. 자유는 관념인 동시에 행동인 모종의 음험한 도덕률이다. 자유는 구속을 전제로 했을 때만 날아오를 수 있는 불구의 정신이다. 그 불구를 불구 자체로 인식했을 때 정신은 불굴의 것이 된다. 자유는 이렇듯 정신이 노정하는 궁극의 말장난과도 통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가 ‘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시인들은 ‘우매’하고 ‘어린’ 종족일 수밖에 없다. 자유라는 관념은 인간을 전혀 해방하지 않는다. 해방 다음의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혁명 다음의 꿈이 정치적 자족과 기만뿐이듯, 시인에게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 일이라면 자유는 유보되어야 한다.   고두현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 서정주, 「자화상」에서 어디 ‘스물세 해 동안’뿐이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던 청춘 시절부터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캄캄한 절망조차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듯이……   고   영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에서 은행원을 꿈꾸던 학생이 있었다. 어려운 가정을 일으켜 세우고자 마음먹고 스스로 상고에 입학해 책만 파던 학생이었다. 학교 밖은 시끄러웠다. 시국이 그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학생에게 운명이 바뀔 만한 일대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형이 유인물을 나눠주기 시작했는데 얼떨결에 받아든 유인물에는 군부독재니, 민주화니 하는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그 유인물 내용 중에 학생의 마음을 벼락처럼 휘어잡은 글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였다. 아무튼 그 다음날 스스로 문예반을 찾아갔던 학생은 이후부터 교과서 대신 시집과 『노동법 해설』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그리고 은행 근처에는 평생 가보지 못했다.    고영민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 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에서 그 방을 생각한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스무 살 문청시절, 우리는 문학을 한답시고 그 컴컴한 방에 모였다. 놀란 눈으로 미제침략사를 읽고 어느 날은 하얗게 최루탄가루를 뒤집어쓴 채 가두에 나갔다가 돌아와 그 방의 차가운 바닥에 눕곤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며칠을 낯선 방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당시 우리의 교과서는 '형상과 전형'이라는 루카치의 문예미학서였다. 그리고 시를 사랑하던 한 친구 녀석은 새벽, 그 방을 걸어 나와 취한 채 술을 사러 나갔다가 차에 공중으로 들려져 영영 그 방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의 우리들은 지금 아무도 없다. 모두 그 방안에서 전사했다. 혁명은 안되고 방만 바꿔버렸던 우리가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다.   고운기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서 1978년 가을이었다. 군부독재의 단말마斷末魔가 가까이 들리던 무렵, 나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국어 시간이면, 작은 키에 단아한 모습, 눈빛이 맑은 선생님 한 분을 나는 기다렸다. 정희성. 그러나 그가 좀체 시국을 입에 올린 적은 없었다. 3학년의 한 선배가 어느 문학지에 실린 시를 보여주었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였다. 처음 넉 줄을 읽었을 때 ‘물’과 ‘삽’과 ‘슬픔’이라는 세 단어가 주는 울림에 떨었던 기억이, 30년도 넘은 오늘까지 선연하다. 그보다 먼저 정희성은 “흐를 수 없는 것은 우리뿐 아니라/저문 강 언덕에 떠도는 혼이여”(「유전流轉」)라고 노래한 적이 있었다. 몇 년의 정치적 신난辛難을 겪으며, 정희성에게저문 강 흐르는 물은 어느새 자기화自己化되어 있었다.     고진하 물 먹는 소 목덜미에 /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 「묵화」 전문 시인 김종삼의 「묵화墨畵」 전문이다. 언제 읽었는지 정확치 않지만, 이 시가 내게 벼락치듯 다가왔던 것 같지는 않다. 시를 읽고 나서 그냥 멍했던 것 같다. 하여간 이 시 때문에 나는 김종삼의 ‘시인학교’를 자주 드나들었다. 사물과 우주와의 교감을 이토록 짧은 시구로 표현하기가 어디 쉽던가. 진정한 교감은 신생의 통로이며, 자아 발견의 불꽃이다. 평화로운 풍경의 한 컷이지만, 삶의 비애와 슬픔과 적막이 부은 발잔등의 아픔처럼 스며 있다. 그 스밈은 치밀하여 시의 화자와 대상 사이에 ‘사이’가 없다. 그 사이 없음의 깊이와 넓이를 획득하는 일이 시의 지향이라면, 내가 가야 할 길은 얼마나 먼가.     권현형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 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 김수영, 「거미」에서 “너무 시퍼래서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르는 저 스무살!”(김영태) 무렵에 만난 김수영의 문장은 강렬했다. 달디달았다. 빛과 어둠을 등에 짊어지고 다녔던 시절, 시지프스처럼 세계의 무게를 등짐지고 다녔던 시절, 갓 성인식을 치룬 내게 밖은 어쩐지 의뭉스러웠다. 의심스러웠다. 김수영의 설움이 나의 설움인 듯했다. 시퍼렇게 순결한 염결성을 무기로 지니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팔십년대 중후반. 왜 노랫말이 슬프냐고, 왜 행복하지 않느냐고 개인의 자의식을 검열받던 시기였다. 그때, 건전가요가 눈발 날리는 겨울 거리의 레코드 가게에서 불안하게 흘러나왔다. 하나, 어두울수록 환하고 싱그러운 문청 시절에 받아들인 설움은 외연일 수밖에 없다. 세월이 흘러 풍경이었던 설움은 육체성을 내면성을 띠기 시작한다. 시의 원천으로, 소금을 뿌린 듯 아린 자의식으로 내부에 굵은 똬리를 틀기 시작한다.    길상호 거울속의나는왼손잽이요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 악수를모르는왼손잽이요    ―― 이상, 「거울」에서 악수를 모르는 세상에 서 있었다. 그 세상은 다름 아니라 내가 만든 세상이었다. 볼 수는 있지만 손끝 하나 닿을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언제나 나와 표정을 맞추면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걷고 있었다. 그 중 내가 실체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의심하기 시작했다. 넌 왠지 허깨비 같아, 넌 너무 가득 차 보이니 실체가 아닐 거야,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을 의심해가다 보니 결국 손가락은 스스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것도 파악해내지 못하는 너도 아닐 거야. 이제는 만나는 얼굴마다 주먹질이 시작됐다. 거울 속에 갇힌 얼굴은 깨져버릴 테니까. 그렇게 깨가다 보면 결국 남는 하나의 얼굴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주먹의 핏물 든 상처마다 박혀든 거울조각이, 조각마다 깨져 있는 얼굴이 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도 실체야! 나도 실체야! 머리는 그들의 괴성으로 날마다 시끄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머리 속이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꼭 그 손을 잡으려 했던 것일까? 가만히 손을 거둔다.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마음이 참 편하다. 거울을 뒤로하고 걷는다. 가끔 돌아볼 때에도 거울 속 너는 뒷모습을 보이지 않아 좋다. 그때서야 와장창 냉담하던 거울이 깨진다.    김광규 그립다 / 말을 할까 / 하니 그리워 //  그냥 갈까 / 그래도 / 다시 더 한 번 //    ―― 김소월, 「가는 길」에서 1950년 정음사에서 나온 『작고시인선』(서정주 엮음)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한국 시선집이다. 책이 귀하던 50년대 초반기에 일금 오백 환을 주고 샀다. 김소월, 윤동주, 한용운 등 한국 신시의 선구자 열 분의 대표작품들이 실려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특별히 사사한 시인이 없으므로, 이 얄팍한 책이 문학수업의 첫 번째 스승이었다. 여기에 수록된 김소월의 시 「가는 길」은  사춘기 청소년의 민감한 정서에 호소하는 바 크고, 3음보 율격도 친근한 매력을 풍겨 저절로 암송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내 문학교양의 기반으로 자리잡았다고 할까. 애틋한 그리움을 이처럼 짧은 3행 시연에 담은 예를 달리 본 적이 없다. 전통적 서정시의 전범은 오늘날 흔히 잊혀지거나 무시되기 일쑤다. 하지만 아직도 이런 시구를 쓰지 못한 부끄러움을 나는 항상 느끼고 있다.    김광림 온길 눈이 덮여 갈길 눈이 막아 이대로 앉은 채 돌 되고 싶어라    ―― 박경수, 「눈」  해방 직후 향토(원산) 시인들이 펴낸 『응향』 시집 속에 수록된 것. 이 작자는 시인이기 전에 사학자였다. 당시의 암담한 현실과 사회상을 이렇게 표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집을 가장 악랄하고 혹독하게 비판하고 나선 평자는 백인준이었다. 근자에 알았지만 그는 일제 말기 윤동주 시인과 친구였다고? 60년이 넘도록 청소년기에 읽은 이 시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뿐더러 ‘돌’에 관한 ‘바위’시까지 쓰게 만들었다.  “너에게 걸터앉으면/탐나는 것 부러운 게 없어져/벼슬자리 꽃자리 내갈겨 둔 채/듬뿍 술 한 잔 들이켜고/너마냥 잠들고 싶어져” 세상사 돌아가는 꼴이 돌 되고 싶은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간혹 돌마냥 잠들고 싶은 심정임을 어쩌랴.    김규동 3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김기림, 「바다와 나비」에서 경성고보 시절 영어시간에 기림 선생이 누차 당부하던 말이 생각난다. 담배 피우지 말아라. 책을 선택해서 읽어라. 새로운 문명에 접하는 생활태도를 중히 여겨라. 지금은 수학 영어 물리 화학 지리 기하, 이것을 공부 잘하고 글쓰는 일 같은 것은 기초학문을 마친 다음에 해도 충분하다. 대성하는 길이 그것이다. 이런 교훈만 하고 우리들이 만든 ‘동인지’ 따위는 봐주려 하지 않는 선생이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빨리 시인이 되고 싶은데, 하지만 시인 스승은 그것을 절대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위 시구는 센티멘털·로맨티시즘의 시 풍토에서 지성을 건져올린 시작품의 한 보기다. 이미지 예술로서의 시가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 즉물적 객관적 회화적 구성적인 요소가 그것들이다. 이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이 시가 나라를 잃은 암울한 시기에 씌어진 작품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규성 이슬은 하늘에서 내려온 맨발 풀잎은 영혼의 깃털    ―― 정진규, 「화和」에서 내 침실 겸 서재에는 한 편의 시가 수채화처럼 걸려 있다. 예의 ‘활달한 유연柔然’이 특징인 경산체絅山體가 빚어놓은 우주시 속의 액자시이다. 그 도입부가 위 구절인데 혼의 상징적 거처인 하늘을 육감적으로, 몸의 텃밭인 대지를 정령적精靈的으로 탈바꿈한 전경화가 행여 낯설지 않다. 화급하게 “맨발”로 달려온 “이슬”을 “깃털”처럼 부드러운 설렘으로 맞는 “풀”의 조응은 원초적이면서도 그지없이 순결한 상생의 축제로, 그 정경유착情景癒着의 절경絶景이 볼수록 황홀하고 환하다.  산문시조차도 여느 정형시보다 더 맛깔스런 리듬을 자랑하는 정진규 시인의 시는 한 마디 오해도 허락지 않을 듯 수고롭지 않게 읽히면서도, 구구절절이 감미롭고 유장한 울림으로 청자聽者의 몸 속 깊숙이 녹아 흐르는 게 압권인데 위의 천지공사天地工事는 그 중에서도 백미이다. 각별한 인연일수록 ‘객관적 시 읽기’가 예의이겠지만 그런 상식과 기우쯤 무색하게 압도하는 두 행의 벅찬 은유가 내 일상의 삭막한 직유와 동거한 지도 꽤 날수가 찬 셈이다.    김남조 바다에두고 바다바래여 시인인것을……    ―― 서정주, 「시론詩論」에서 “바다속에서 전복따파는 제주해녀도 제일좋은건 님오시는날 따다주려고 물속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 시의전복도 제일좋은건 거기두어라 다캐어내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요? 바다에두고 바다바래여 시인인것을……” 명시, 명구절은 허다하련만 그 중에서 위의 6행시 한 편을 가려 뽑았다. 앞의 3행은 전치사인 셈이고 뒷부분 3행에 있어서도 끝줄이 나의 일상에 거의 유착되어 온다. 시인이 한 편의 새 작품을 마무리짓고 나면 흔히 존재의 공동空洞현상에 빠져 무력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 까닭은 일상의 수심이 얕았거나 비축해 둔 곡물창고가 가난했기 때문인 듯하다. . 나는 내 시정신의 빈혈현상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자주 있어오는 이 증상을 우려하고 겁먹어왔다. 한 편의 시를 얻었을 때 더 좋은 다음 시가 물속 바위에 그대로 남아 있는 그런 풍요로움이야말로 내 평생의 황홀하고 과분한 희구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시인에게 있어서도 시의 샘물이 다시금 그 전량으로 남아 부풀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바랄 것이랴.   김병호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 송기원, 「시」에서 시와 삶이 하나였던 시절, 오히려 생활이 시를 빛내 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재수 끝에 들어온 대학교에서 난생 처음 입어본 과티. 그 가슴팍에 찍혀, 시보다 먼저 옷으로 입었던 시구.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스무 살의 우리들은 시를 입고 명동과 남대문시장, 평택역을 뛰어다녔다. 가슴팍에 찍힌 화인처럼, 남몰래 어루만지거나 조용히 읊조리기만 하여도 척추가 꼿꼿해지곤 했다. 양심만으로 양심을 지킬 수 없었고, 용기만으로 승리할 수 없었던 시절의 마지막 세대였다. 심판의 날 소돔을 탈출할 때, 유황 불벼락 속에 죽어가는 이웃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뒤돌아본 채 죽어, 빛나는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시인의 삶이란 그러해야 한다고 아직 믿는다. 그리고 여전히 한 편의 시가 천만인의 가슴을 격동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김상미 나도 감히 상상想像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김수영, 「거대한 뿌리」에서 여고 시절, 나는 차비를 아껴 민음사에서 나오는 시집들을 한 권씩 사 모으는 게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그때 산 김수영의 시집 『거대한 뿌리』를 읽었을 때, 나는 시라는 운명이 기지개를 켜며 힘차게 내게로 달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알았다. 내 길은 문학에 있으며, 언젠가는 누구의 의지도 아닌 내 의지로 그 길을 가게 되리라는 걸. 그 이후부턴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나는 내 안에서 자라나는 ‘문학’으로 인해 쉽게 기가 꺾이지 않았다. 남들이 볼 땐, 허허벌판 한복판에 혼자 꽃피우며 서 있는 이상의 「꽃나무」처럼 이상해 보였겠지만. 그 모든 세상일은 ‘나도 감히 상상想像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능히 견딜 만했으며, 스스로 힘이 되어 나를 지켜주었다.    김선태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중학교 1학년 시절, 시골집 형의 골방에는 달랑 책이 한 권 있었는데, 내 고향 강진 출신인 김영랑의 시집이었다. 달리 읽을 책이 없었거니와 당시 짝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던 나는 수십 번이나 그 시집을 읽어서 송두리째 외울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시라는 걸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김영랑 시인과 그의 시집은 맨 처음 나를 시의 길로 인도한 운명적인 스승이요 텍스트가 된 셈이다. 특히 그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나오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라는 역설의 시구는 지금도 나를 경탄과 전율에 떨게 한다. 슬픔의 빛깔이 어쩌면 이토록 찬란할 수 있단 말인가. 애이불비의 촉기를 머금고 있는 이 시구로 인해 영랑의 시가 저급한 감상으로 떨어지지 않았듯이, 나의 시도 어두운 과거사를 잘 다스려 승화된 시세계를 열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구는 아직도 내겐 불상의 광배光背처럼 환하게 남아 있다.   김   언 이 무언의 말/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 김수영, 「말」에서 여름밤이었나 겨울밤이었나. 흥건히 술에 취해 소설 쓰는 형의 집에 가서 보았던 말. 한동안 얼이 빠져서 보았던 말. 나무액자에 고이 걸려 있던 누구의 것도 아닌 그 말. 김수영의 말. 말에 대한 말. 말이 아닌 모든 것에 빚진 말. 빛이면서 우연이고 우연이면서 죽음을 꿰뚫는 말. 만능의 말이면서도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시인의 말이면서 범인의 말. 평범한 말이면서 죄를 짓는 말. 모두를 겨냥하면서 누구도 귀기울이지 않는 말. 저 혼자서 맴돌고 저 혼자서 죽음을 목격하는 말.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버려도 탄생하는 말. 아무도 목격하지 않는 밤의 말. 이 무언의 말이자 유언의 말. 시체의 말이자 정확히 생명의 말. 감각의 말이자 침묵의 말.   김언희 벗겨내주소서아버지 나를아버지 콘돔처럼아버지 아버지의좆대가리에서아버지!”    ―― 김언희, 「벗겨내주소서」에서 한국현대시사 100년이거나 말거나, 가장 빛나는 표현이거나 말거나, 최근에 나로 하여금 ‘절정의 순간을 체험케’ 한 것은 위의 구절이었다. 십수 년 전의 글을 뜻밖에, 그것도 토막으로 지면에서 대면한 순간, 내장 속으로부터 차디찬 전율이 번져나왔다. 감동이 아니라 전율이, 살갗을 기는 지네 같은 전율이. 쓸 때는 무엇을 왜 쓰는지 모르고 썼던, 써 놓고서도 여직 깨닫지 못했던, 이 구절은 이상의 “義足을담은軍用長靴가내꿈의白紙를더럽혀놓았다”의 대구對句였으며, 김수영의 “한 가지를 안 속이려고 모든 것을 속였다.”의 대구였다. 나의 대구였으며, 나의 대꾸였던 것이다. 나의 온 몸과 마음, 온 생활을 건!   김왕노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    ―― 기형도, 「밤눈」에서 시인의 눈이 미모사보다 더 예민하고 말미잘보다 더 감각적인 촉수를 가졌음을 그리하여 내가 그보다 더한 감각체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고 내통해야 함을 일러 준다. 시인은 누구나 쉽게 간과해가는 하찮은 것에서부터 미세한 것을 영혼의 세포 하나하나로 읽어간다. 뒷전에 있거나 잊혀지거나 소외된 존재를 인정하고 사랑한다. 그러므로 시인의 위대함은 완성된다. 나는 언제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을 읽어내고 노래할 수 있나. 시인이 예민한 감각의 영혼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상처를 쉽게 입고 존재가 불안하다. 하지만 예민한 감각을 가졌기에 세상의 모든 어둠을 감지하며 어둠에 대해 고발해 온다. 그러므로 시인은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임이 입증된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에서……   김이듬 거울속의나는왼손잽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잽이오    ―― 이상, 「거울」에서 ‘하루만 더, 하루만 더’ 중얼거리며 버티던 때였다. 나는 왼손잡이, 안경잡이에다 소위 말하는 결손가정의 병약한 소녀였다. ‘거울 속의 나는 정상/왼손잡이 아냐, 풀 같은 머리칼/거울 속에서 나는 두 개의 눈동자’. 나름 신경 쓴 몇 문장 때문에 국어선생은 화를 내셨다.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베끼고 난리야!’ 출석부로 머리를 탕탕 치셨다. 증거물로 내민 이상의 시집이야말로 난생 처음 보았다고 아무리 해명해도 믿어주지 않았다. 나는 이름도 시도 이상한 이상이 나보다 빨리 태어나서 내가 할 말을 선수친 것에 분개했지만,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를 처음으로 당혹케 안절부절 못하게 한 시였으니까. (“벼락 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최고’는 없다. 그런 게 있다면 오라! 네 천둥벼락을 내 심장에 꽂아서 제발 나를 잠잠하게 해줘.)      김정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 윤동주, 「서시」에서 단발머리 시절의 어느 여름밤, 툇마루에 누워 본 하늘의 별빛이 청명하게 가슴속을 파고든다. 바람에 스치는 별, 나의 별, 나의 존재, 불현듯,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별빛 쏟아지듯 내 몸을 덮친다. 모공마다 솜털 일제히 일어선다. ‘흔들리는 바람은 씨앗을 퍼뜨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이후,「서시」의 날카로운 반성의 언어는 불안한 성취마다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낱낱의 길목에서 함께 서성이던 그 불안은 어느 극점에서 시를 엿보게 하고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만화경을 흔들어 섞어 놓은 듯 미로를 헤매는 나의 시 쓰기. 지금도 나는 처음 감격 그대로 「서시」를 통해 끊임없이 채널링하고 있다.   김종길 이 말은 누가 난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 데 달을 보며 잔다.    ―― 정지용, 「말 1」에서 지용의 「말 1」은 동시풍의 작품인데 앞에서 인용한 두 행으로 끝난다. 나는 이 두 행을 지용시 가운데서 최고의 순간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해왔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한국 현대시를 통틀어서도 시적으로는 최고의 시구일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같은 경우 그 이유를 이야기하기란 지난하다. 엘리엇이 젊었을 때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좋은 시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올 여름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된 비엔나미술사박물관 소장 합스부르크 왕가 수집 작품들을 둘러보고 제일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 책을 읽는 자기의 아들을 그린 렘브란트의 그림이었을 때도 그러했다. 그 화폭에 신운神韻이 감돌듯이 지용의 그 두 행에도 신운이 감돈다고나 할까.    김종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윤동주, 「서시」에서 중학교 까까머리 시절에 만난 시입니다. 스무여덟 살에 옥사한 그는, 시인으로서 시를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습니다. 다만 유고 시집이 나오고 난 후 우리는 그를 시인으로 기리고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그래서 더욱 정갈하고 곡진하게 내 마음 속에 와 닿는지 모르겠습니다. 단 한 줄의 표현에 괴로워했던 철없던 시절, 나도 윤동주의 잎새처럼 괴로워했습니다 ‘한 점 부끄럼’ 없었던 까까머리의 문청 시절이 바로 나의 서시입니다.     김종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에서 캄캄하고 외로웠던 문청 시절, 부산은 어두웠다. 나는 혼자서 그 어두운 유적지에 남아 있었다. 내 호주머니 속엔 언제나 청산가리, 죽음도 무섭지 않았다. 그때 내게 투사되었던 한 줄기 불빛, 시詩였다. 칼릴 지브란은 속삭였다.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아 주지 않으리라.” 그의 음성은 나를 시에 눈뜨게 했다. 칼릴 지브란과 함께 김춘수의 시 「꽃」이 왔다. 「꽃」은 나를 적대적이었던 세상 속으로 부드럽게 연착륙시켰다. ‘세상 사는 법’과 ‘사랑하는 법’까지. 나는 당당하게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까지 부르게 되었다. 끊임없이 스스로 그 이름을 불러보고 각인시켜 보라. 어쨌든 “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김중식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 김수영, 「거대한 뿌리」에서 한갓 변명에 불과하겠지만, 1980년대 중반, 나의 습작시절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브레히트)였다. 짐승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었다. 혼의 절창絶唱들인 소월과 미당은 너무 아름다웠으므로 욕이 나왔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아도르노)는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나의 두개골을 반쪽으로 쪼갠 섬광 같은 시구가 어찌 한둘이겠는가. “날카로운 첫 키스”는 지금까지도 내 삶의 화두다. 그 가운데 “미국놈 좆대강”을 들이민 이유는 내 시의 화두이기 때문이다. 외우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외워지는 글, 남들이 지금껏 하지 못한 말이 시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금까지 나의 시는 모두 그 구절의 표절이자 변주이다.   김   참 내왼편가슴심장의위치를방탄금속으로엄폐하고나는거울속의내왼편가슴을겨누어권총을발사하였다. 탄환은그의왼편가슴을관통하였으나그의심장은바른편에있다.    ―― 이상, 「오감도 시제15호烏瞰圖 詩第十五號」에서 고등학교 때 아주 두꺼운 시선집에서 이상의 시를 처음 읽었다. 그의 시는 시선집에 수록된 다른 시인들의 시와는 달리 무척이나 강렬했다. 지금까지 읽어본 수많은 국내외의 시 가운데 인상적인 작품들은 적지 않지만, 거울을 소재로 이상이 쓴 시만큼 독특한 느낌을 주는 시는 그리 많지 않다.  거울을 소재로 쓴 시도 그렇지만 나는 이상의 다른 시들도 대부분 꿈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잘 몰랐던 습작시절, 나는 간밤에 꾼 꿈을 노트에 옮겨두곤 했다. 그때 내가 옮겨둔 내 꿈들은 내 시의 일부가 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은 한갓 백일몽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꾼 꿈은 내 삶의 절반이다. 내가 꾼 꿈과 내가 쓴 시는 내 삶을 거꾸로 비추는 거울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꿈꾸는 사람이니, 그가 꾼 꿈들은 시가 아닌가?   김행숙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김소월, 「초혼」에서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소월의 이 구절이 아직까지도 내게 그 진동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산산이 부서진 이름,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 그것은 이름이랄 수도 없는 울림이자 파동 자체로 변용되어 내게 무한한 가능성의 지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시쓰기는 사라지는 중이면서 동시에 구성되는 과정인 그러한 상태를 체현하는 특이한 신체가 되는 일이다. 이제 내게 소월의 「초혼」은 절대적인 이별 앞에서 슬픔과 격정의 최대치를 실연하는 연인의 노래가 아니라, ‘하늘과 땅 사이’, 그 너무 넓은 공간 속에서 비껴가는 것, 희박해지는 것, 조밀해지는 것, 그러한 이질적인 흐름과 리듬을 부르는 행위와 연관되어 있다. 하늘과 땅 사이, 그 과도한 넓이를 몸으로 품은 이상한 내부에서 그 내부를 찢으면서 폭발하는 기쁨을 나는 부르고 싶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나태주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에서 중학교 3학년 때. 열다섯 살 때. 적산가옥으로 남겨진 썰렁한 다다미방 하숙집에서 겨울을 나며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하던 때. 함께 하숙하고 있던 동급생으로부터 얼핏 전해들은 한 편의 시, 그리고 그 첫 구절은 나의 어린 영혼을 흔들어주기에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가슴속이 쩌르르했다. 어쩌면 이리도 내 마음 그대로일까. 시란 이렇게 다른 사람 마음을 대신해서 표현해주고 또 그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주는 것인가 보구나. 막연히, 참으로 막연히 나는 이 한 편의 시를 앞에 두고 시인이 되어보고 싶었다. 만약 내가 중학교 시절 이 시를 만나지 않았다면 모르면 몰라도 나는 시인이 되지 않았어도 충분히 좋았을 것이다. 한 사람의 생애를 바꾸어 버린 한 편의 시, 그리고 한 구절. 그 사무치는 풋내기 소년의 감동 앞에 다시 한번 선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희덕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에서 김수영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월리스 스티븐즈의 시 「혼돈의 감정가」에 나오는 두 개의 명제를 떠올리게 된다. “A.폭력적 질서는 무질서이다”와 “B.위대한 무질서는 질서이다”라는 명제가 그것이다. 김수영에게 있어서도 폭력적 질서란 낡고 고정된 질서를 의미하고, 위대한 무질서란 무한대의 운동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김수영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예민한 혼돈의 감별사이자 창조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진정한 혼돈의 진원지를 ‘욕망’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는 욕망의 검은 입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고 선언한다. 결국 이 구절은 거대한 뿌리, 또는 고요한 사랑의 발견에 도달하는 김수영의 시적 도정을 압축하고  있는 셈이다. 욕망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고서는 사랑을 발견할 수 없다는 그의 전언은 혼란도가 낮은, 그리하여 폭력적 질서에 갇혀 있는 나의 시들을 화들짝 깨우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노향림 내가 많은 돈이 되어서 선량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맘놓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리니     ―― 김종삼, 「미사에 참석한 이중섭 씨」에서 김종삼 시인은 한 시대를 불행하게 살다 간 시인이었다. 가난과 알코올 중독으로 시달리다 끝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시를 발표할 무렵도 시인은 늘 소주병을 뒷주머니에 넣고 조선일보 뒷골목 지금은 없어진 아리스 다방에 나타나곤 했다. 차를 시키진 않고 컵을 달래서 소주를 마시곤 했다. 시는 이렇게 아름답고 황홀하게 읽혀도 과음에서 오는 자신의 육신의 망가짐을 미처 알지 못했을까. 그토록 버티기 어려운 환경에서 이처럼 놀라운 시를 쓰다니, 나는 이 시를 읽는 순간 번쩍 정신이 들었다. 병들고 가진 것 없는 자의 시혜를 말하기 위해 불행하게 살다간 이중섭의 혼을 빌어 시인은 말하고 있었다. 선택하지 않아도 불행은 예고되듯이 시인은 끝내 술로 세상을 떠났다. 육신의 스러짐을 알고도 오히려 시로써 우리에게 시혜를 베풀고자 했을까.   마경덕 집은 벽 속의 곳간에서 제 나이를 꺼내 먹으며 늙어간다 집은 저 벽을 부수고 나와야 한다     ―― 손순미, 「담벼락 속에 집이 있다」에서 집은 담쟁이덩굴 속에 갇혀 있다. 고집이 센 덩굴은 스스로 손을 풀지 않는다. 덩굴은 담벼락을 옥죄며 더 깊이 뿌리를 묻는다.  나는 그때 그 담쟁이 속에 갇혀 있었다. 담쟁이는 날로 그늘을 넓히고 오래된 몸은 자주 삐걱거렸다. 낙심이란 마음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바닥을 친 마음은 좀처럼 일어설 수 없었다. 나를 포기하고 나니 어느 날 그늘이 되어 있었다. 하릴없이 나이를 꺼내 먹으며 늙어 가는 그때 이 시구詩句가 내게 왔다. 벽을 부수고 나오라고 했다. 덩굴을 걷어내는 일은 벽을 부수는 일, 생각을 깨뜨리지 않고는 나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나를 붙잡고 늘어지던 덩굴손의 마디가 툭툭 끊어지고 벽 속에서 새로운 내가 태어났다. 나는 오랫동안 나에게 갇혀 있었다.    마종하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    ―― 이육사, 「절정」에서 뼈를 추리자니 한 뼈로 순수한(!) 저항 시인 이육사를 떠올렸는데, 예수보다 짧게 주기의 「절정」을 밝힌 그와 더불어, 썩지 않은 육질로도 발라 일컫자면 유약한 김영랑의 “찬란한 슬픔”이 김현승의 견고한 “절대고독”으로, 박노해의 유연한 “강철의 풀잎”으로 맥을 잇는 것이다. 자리끼가 얼어붙는 오막살이에서 “강철로 된 무지개”는 섬광처럼 번개치는 작렬로 미친 듯이 나를 솟구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1 때 나는 투쟁의 앞장에서 모든 부정한 봄(3·15)을 「절정」의 꽃(4·19) “무지개”로 터뜨렸던 것이다. 절대로 자랑일 수 없는 기름 뺀 당위로써. 그 시대의 친일파나 다름없는 낭만적 낭인들에게 “시인이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 이른 유치환의 촌철살인도 자못 서릿발 같은 결기가 서린 “소리 없는 아우성”의 「깃발」로서, 그들의 핏맥은 오늘도 단단히 눈부신 다리로 질러 우리를 둥글게 감싸고 있다.    맹문재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 박노해, 「하늘」에서 나는 아직도 ‘밥줄’이라는 말에 가슴이 아리다. 밥줄 때문에 자존심을 버리고 얼마나 세상 앞에서 허리를 굽실거렸던가. 내가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에 들어 있는 시들에 감동한 것도,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다가 눈물을 흘리는 것도, 해진 신발 같은 인상으로 구걸하는 사람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것도, 바닥에 드러누워 농성하는 노동자들을 옹호하는 것도, 밥을 남기지 않고 악착같이 먹는 것도 밥줄 때문이다. 내가 문학의 지향점으로 삼는 근거이기도 하다. 밥줄을 쥐려고 몸부림쳤던 순간들,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밥줄의 운명에 당당히 맞서자. 밥줄을 쥐지 못한 사람들을 품자.    문인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새떼는 계절풍, 바람에게서 몸을 배웠다. 새떼는 일체다. 새떼 속의 새는 그 한 마리 한 마리가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공중에 거구를 두는 일군의 세포, 세포다. 그것이 아니라면 군무는 없다. 산 너머 바다 건너 확신의 땅, 거기로 가는 길도 없다. 새떼는 바람을 입는다. 어깨에 힘 빼고, 혀 꼬부리지도 않고 그저 한 마디 툭, 던진 이 말이 자주 날 들어올리곤 했다. 나는 늘 맥없이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으면서도 욕망은 왈칵, 저 새떼의 일원이었다. 그야말로 서러운, 저 ‘새떼에게로의 망명’이었다. 그렇게 곧 그 바닥을 뜨고 싶었다. 이 시를 낳게 한 80년대 상황에 관해선 나는 할 말 없다. 다만, 시인이 발견한 이 한 마디 말, 그 힘이 굉장해서 놀라웠다. 늦깎이, 내가 절망하고 분발한 첫 구절이다.    문정희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 서정주,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에서 불행히도 나에게 “벼락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는 없다. 나는 너무 어린 시절부터 시 애호가가 아니라 시 창조자가 되어버렸다. 눈부신 시구를 보면 감동과 전율보다는 질투에 온 입술이 파래지기 일쑤였다.  10대 때는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라는 발레리의 시구와 함께 미당의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라는 시구를 좋아했다. 그러나 후에 보니 미당에게는 황홀한 시구가 너무 많았다. “문열어라 꽃아”(「꽃밭의 독백」)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문둥이」) 등…… 나는 오늘도 기다린다. 내가 나를 전율시킬 한 줄의 시구를……    문태준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 이성복, 「아주 흐린 날의 기억」에서 이성복 시인의 시집 『그 여름의 끝』이 출간된 1990년 5월에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다. 내 기억으론 이 시집을 몇 차례 산 것 같다. 나눠준 것도 있고 분실한 것도 있는데, 내가 지금 소중하게 갖고 있는 시집은 휴가를 나왔다 화천에 있는 군부대로 복귀하면서 산 것이다. 동보서적에서 구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이 시집을 사서 군복 속에 감춰 넣고 부대 위병소를 통과했던 것 같다. 위병소에서 물품 검사를 했었고 또 시집 같은 것을 부대로 갖고 들어가기가 그때는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시집을 또 군복 속에 감춰 넣어 주로 부대의 재래식 화장실에서 즐겨 읽었다. 검열을 피하느라 이 시집을 땅속에 몇 날을 묻어두기도 했다. 여름장마가 지나가던 때여서 나중에 땅을 열고 꺼내보니 흙물이 들었다. (사실 이 시집은 검열을 피해야 할 책은 아니었는데 나는 어쨌든 노루처럼 겁이 있었다.)  실탄사격을 하고 와서도 읽고, 행군을 마치고 와서도 읽었다. 강한 군대에 살면서 나는 여린 속잎 같은 이 시집을 꺼내 읽었다. 시 「아주 흐린 날의 기억」은 짧다. “새들은 무리지어 지나가면서 이곳을 무덤으로 덮는다//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이 시구를 읽으면서 나는 널 안에 매장된 나를 보았다. 막연하게 슬픔에 기대게 되었다. 군대 가서 나는 시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곳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시집을 읽다가 이 일구를 만났다.    박남철 “아, 참, 그리고 선생님, 벌써 한 두어 달 됐네요? 저, 요즘 회사 못 나가고 있습니다.” “왜에?” “저, 위암 수술했습니다.” “요일아…… 너 지금 ‘위염’이라고 그랬니, ‘위암’이라고 그랬니?” “선생님, 저 ‘위암’ 수술했습니다.” “……”   ―― 2007년 8월 31일 저녁; 정병근 시인의 근황 때문에 해본 전화에서                                           흘러나온 김요일 시인의 육성시 갑자기, 눈물이 비오듯이 흘러내려서, 더 이상 말을 잇지도 못했었다. 어머님 타계 소식을 두어 달이나 지난 뒤에 법원에서 날아온 우편물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때도 눈물은 나오지도 않았었건만…… 지난 6월에 있었던 ‘시작문학상’ 뒤풀이에, 뒤늦게 참석해서는, 갑자기 뒤에서 나를 껴안고 볼을 부벼대면서, 처음으로, “사랑의 스킨십”을 다 표현해주었던 녀석이…… 고은경 시인은 《문학과사회》로 등단한 지 두어 달만에 위를 들어내서 나를 절망케 해주더니, 너는 이제 《세계의문학》으로 등단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니, 또 나를 절망케 해주는구나……     박제천 오오 견디련다  차고 올연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 정지용, 「장수산」에서 한때 유엔 고지 밑에서 군생활을 하였다. 산으로 둘러싸여서 하늘이 손바닥만큼 보이는 분지였다. 어느 날 밤 동초를 서다가 정지용의 「장수산」이 떠올랐다. 그리고 누군가 내가 말해주듯 “오오 견디련다/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가 들려왔다. 그때나 이제나 시를 외지 못하는데 그냥 탄식처럼 내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아마도 중학생 무렵에 읽었던 시, 그때는 그냥 그저 덤덤한 구절이 내 가슴 어디에 잠복되었다가 나타난 것이다. 이 시를 쓸 무렵의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폐했다 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40년 뒤, 또 이 구절이 떠오른다. 스무 살 무렵에는 비감하였다면, 늙마의 이제는 정신이 백골처럼 무심하여선가, 그냥 그저 무심한 내 자신에게 일러주는 말이 되었다.   박주택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백석의 시는 아련한 그리움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고향 같기도 하고 꿈 속 같기도 하고 태반 같기도 한 백석 시를 읽고 있노라면 아득한 시간의 수염을 만지며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는 아내도 없고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부모며 동생들과도 떨어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을 헤매이다 가슴이 메여오고 눈에 뜨거운 것이 괴여 오는 것을 적막하면서도 낮게 노래한다.  크고 높은 것을 생각하며 눈을 맞는 정한 갈매나무는 그러나 나의 가슴에 자라며 쌀랑쌀랑 생애의 문창을 친다.    박형준 선량한 아버지와 볏짚단 같은 어머니, 티밥같이 웃는 누이와 함께 거기서 너는 살았다    ―― 이성복, 「모래내·1978년」에서 내가 이성복의 시를 처음 읽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1982) 겨울이었다. 어느 날 인천 대한서림에서 계간 《세계의 문학》을 한 권 샀다. 페이지를 넘기다 김수영이 자기의 자화상 밑에 “시는 나의 닻(錨)이다’라고 써놓은 문장을 보고 석쇠에 올려진 생선구이처럼 온몸이 막대기로 관통당한 느낌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김수영의 자화상과 그의 단 한 문장에 이끌려 제2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인 이성복의 시를 읽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나는 김수영 때문에 이성복의 시에 빠졌고, 이성복이 김수영의 이름으로 상을 받은 덕분에 김수영의 시를 탐독했다. 한동안 《세계의 문학》에 실린 이성복의 대여섯 편의 시를 뜯어내 호치키스로 찍어 수업시간에도 읽고 집에 와서도 읽었다. 그리고 나는 위의 시구절을 통해 내 가족 이야기를 시로 쓸 수 있게 되었다.   박후기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 박남수, 「새」에서 일곱 살, 글을 깨치면서 가장 먼저 읽은 시가 박남수의 「새」라는 작품이다. 문학청년이었던 큰형님이 솜씨 좋게 그림까지 곁들여 마루에 떡하니 걸어놓았으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냥 외워져 버린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시원찮은 발음으로 종알종알!  다시, 「새」를 생각한다. 한 덩이 납의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늘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 역할에 익숙해져 있는 나를 들여다보면, 참 우습다. 사랑이 떠나갔다. 납의 마음을 버리는 순간, 나는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로 남겨진다.    반칠환 비비새가 혼자서/앉아 있었다.  //(중략) 한참을 걸어가다/되돌아봐도  그 때까지 혼자서/앉아 있었다.    ―― 박두진, 「돌아오는 길」에서 엄마 품에서 떨어진 꿩에병아리 같던 때였다. 귀 기울이면 달맞이꽃 씨앗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던 적막한 산골이었다. 해종일 외딴집 홀로 지키다 집안에 뒹굴던 형아들 초등학교 국어책을 읽던 일곱 살 무렵이었다. “마을에서도/숲에서도/멀리 떨어진/논벌로 지나간/전봇줄 위에 //혼자서 동그마니” 앉아 있던 ‘비비새’가 내 가슴으로 날아왔다. 젖은 손으로 피복이 벗겨진 전깃줄을 만진 듯하였다. 어린 속으로도 그렁그렁하여 중얼거렸다. ‘비비새도 혼자서 앉아 있구나.’ 머리 굵으며 나는 생각했다. ‘비비새가 혼자 있는 걸 아는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시인이 되었다.    서규정 너는 살고 나는 죽고  이것으로 이번 생에서 우리는 비겼다    ―― 최영철, 「아버지와 아들」에서 초등학교 무렵 우연히 읽은 《아리랑》이란 대중잡지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시구는 어린 심중에 말뜻은 몰라도 그 한 줄은 스물여덟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까지 주문처럼 따라다녔다. 현실은 늘 불안하고 불만스럽고 불순한 것처럼 느껴졌다. 시인들의 공적지평이란 생활의 역경과 고통을 주변부에 두었을 땐 중창단의 합창처럼 한번 부르고 잊어버리는 일이 아니라 끝까지 각인인 것이다. “너는 살고/나는 죽고//이것으로 이번 생에서 우리는 비겼다” 윌슨병 앓는 오십대 아버지가 윌슨병 앓는 아들의 부탁을 받고 아들을 목졸라 죽였다는 처연한 단언이다. 위 시구가 아찔하고 아리고 섬뜩한 것은, 당뇨와 고혈압 거기다 신경계 질병을 앓는 팔십이 훌쩍 넘은 어미를 두고, 역시 수발을 들어줄 사람 하나 없이 당뇨와 고혈압을 안고 있는 내가 잘못되어 먼저 떠난다면…… 가족을 베고 황산벌로 나서는 계백처럼 나는 틀림없이 분기탱천하겠지만, 하여 빛나는 시구는 아포리즘적인 사유를 내포하기도 하지만 결국 삶은 견성이고 발견인 것이다.    성찬경 백금처럼 빛나는 노년을 살자.    ―― 구상, 「노경老境」에서 한국 현대시에 명시 명구도 많지만 문자 그대로 나를 벼락치듯 전율시키는 시구는 바로 이 구절이다. 이 시구를 처음 보았을 때도 그러하였지만 내가 노년이 된 지금에 와서는 더욱 그러하다. 백금은 무게가 나가는 귀금속 중의 귀금속이다. 황금보다 더 귀하다. 그러나 그 빛은 황금처럼 요란하지 않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흰색이다. 노년의 은유로 이보다 더 들어맞는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소리 높이 읊으며 아로새기는 것이다. 그렇다. 백금처럼 빛나는 노년을 살자!   손세실리아 여자는 함께 있으면 계집이 되고 헤어지면 어머니가 된다    ―― 정진규, 「이별」에서 나는 아직 이보다 슬픈 시구를 본 적이 없다. 한때, 누군가의 ‘계집’이었으나 이제는 헤어져 ‘어머니’로 돌아간 ‘계집’의 비애가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시인의 별사別辭는 매정하기도 뭉클하기도 하다. ‘어머니’이기보다는 ‘계집’으로 남고 싶은 여자의 마지막 염원마저 꺾어버리는 단호한 이별통보인 까닭이다. 함께 있을 때 계집일지라도, 헤어지면 그 즉시 어머니가 되는 게 여자의 몸이라고 남자는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며 위안을 삼고 싶은 건지도 모를 일이겠다. 남자와 여자는 이렇게 서로 다르다. 여하튼, 살아오면서 지금껏 ‘계집’일 뻔했던 시절 나라고 왜 없었겠는가. 이 한 줄 시구로 말미암아 ‘계집’과 ‘어머니’ 중 후자를 택했을 뿐.    손현숙 그 누구도, 하느님도 따로 한 봉지 챙겨 온전히 갖지 못한 하루가 갔다    ―― 문인수, 「최첨단」에서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일 뿐이다. 어제의 당신이 오늘의 당신이 아니듯이,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원이라는 말. 변치 않겠다는 맹세. 이런 것들에 모든 것을 걸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지나간다. 시간은 누구의 울 안에도 갇히는 법이 없다. 달이 해를 따라가듯 언제나 시작 안에는 끝이 존재하는 거다.  봐라! 시인은 하느님도 하루는 온전히 챙겨 갖지 못한다고 일갈한다. 그러나 그 하루는 목숨이 끝나지 않는 한은 또다시 싹트는 미물, 송곳 끝 같은 느낌으로 가고, 또 온다. 가난도, 부귀도, 사랑도. 오랜 백수白手가 빚어낸 시간의 철학! 해일이다. 지진이다. 쓰나미다.       송승환 싱그러운 거목巨木들 언덕은 언제나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나 한번 가는 길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   ―― 김종삼, 「풍경」에서 등단 전에 나에게 주어진 화두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이면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복합적 의미를 은연중에 담아내고 싶었다. 그 화두가 제기된 것은 해안의 저녁 노을 때문이다. 노을은 왜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으면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안겨주는가, 라는 의문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진술과 묘사의 구분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노을의 아름다움과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다시 읽은 김종삼의 시는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내가 써야 할 시의 스타일과 그  방향성을 제시해주었다.    송재학 새벽에 쫓아나가 빈 거리를 다 찾아도  그리운 것은 문이 되어 닫혀 있어라.   ―― 고은, 「작은 노래」에서 스무 살 미만의 고 3짜리가 이 구절을 섬광으로 문득 만났다. 만상은 물질이다. 개념과 추상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만지고 구부리고 맛볼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이 된 것은 그 이후. 아마 처음 내 머리의 골통 물질에 들어왔던 희미한 자각은 범신론이거나 정령주의 주변이었을 것이다. 아니다, 라고 생각한 것은 고은의 시선집 『부활』을 몇 번 거친 후였다. 범신론이나 정령주의는 신비적 세계관, 대상을 만지고 씹어먹고 뱃속에 오래 삼켰다가 다시 똥을 누려면 시적 대상은 지척지간 친밀한 물질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뻔뻔한 물질들! 비의 속에 자신을 자꾸 숨기는 시/물질은 철면피하기도 하다.    신달자 어느날에사 어둡고 아득한 바위에  절로 임과 하늘이 비치리오    ―― 박목월, 「임」에서 천둥의 빗금이 내 가슴을 쫙 후비듯 금을 긋는 싯구는 결코 한 시인이나 한 구절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젊은날에 속절없이 시가 부풀어 올라 하루살이도 푹푹 빠지기만 했던 앳되고 물렀던 내 가슴에 쾅하고 천둥이 내려치던 시들 때문에 나는 각혈을 하지 않고서도 젊은날을 잘 보냈는지 모른다. 그 많은 시구 중에 만난 박목월의 시 「임」의 마지막 구절에서 나는 혼절할 뻔하였다.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그것은 내가 무슨 백일기도 끝에도 닿지 못할 것 같은 선명한 이미지요, 손쉽게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는 무거운 의미의 밀착이었다. 언제 나는 저기에 닿을 수 있나! 그 충격은 지금도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고 그대로 살아 있다.   신대철 어서 너는 오너라    ―― 박두진, 「어서 너는 오너라」에서 어떤 기운이 갑자기 핏속을 흔들 때 나는 문득 시성을 느낀다. 그 시성은 물론 기발한 시구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억누를 길 없는 죄악에 몸부림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에게서도 온다. 이젠 차가운 대기처럼 온몸을 스쳐가는 시 전체에 집중하지만 그 순간이 오면 끝없는 갈망과 끝없는 결핍이 하나로 뭉쳐져 나는 잠시 정신의 균형을 되찾는다. 사는 게 무엇인지, 신념이 무엇인지 모르던 시절, 나는 데마(디모데후서 4:10 참고)처럼 세상으로 나가 보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래 방황했다. 방황하는 곳이 그 어디든 밤마다 허공에서 푸른 목소리가 울려왔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길모퉁이에서 불안스레 듣던, 저 맑고 뜨겁고 목 타는 울림, “어서 너는 오너라”.    심재휘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에서 윤동주 시의 이 구절은 나에게 벼락처럼 왔다고 할 수 없다. 그의 시는 평범했고 안이했다. 그리고 나는 시인이 되었다. 시를 쓰는 일은 시를 읽는 일과 같거나 달랐다. 가장 고통스럽게 정직할 때 최고의 절창이 나온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는 세상에서 진짜 부끄러워할 수 있는 사소한 능력은 시 쓰기의 전부가 되었다.    “최후의 나”를 만나본 적이 있는가?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를 해 본 적이 있는가? 언젠가부터 이 너무나 평범한 구절이 나에게 벼락이 되었고, 시를 쓸 때마다 갈수록 더 강한 벼락을 치고 한다. 잘 보면 ‘부끄러운’이라는 말에 피가 비친다.     안도현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사랑하기 때문에 푹푹 눈이 내린다는, 이 말도 안 되는 구절 때문에 나는 백석을 좋아한다. 분명히 문장구조의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충돌이거나 모순이다. 연애의 달인답다. 여기에 넘어가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우주에 눈이 내린다니! 그리하여 나는 가난하고, 너는 아름답다는 단순한 형용조차 찬란해진다. 첫눈이 내리는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30년대에 이미 죽은 문장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연인에게 산골로 가서 살자고 하면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줄 아는 사내는 백석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듯하다.    오탁번 눈보라는 꿀벌 떼처럼  닝닝거리고 설레는데,  어느 마을에서는 홍역紅疫이 척촉??처럼 난만爛漫하다    ―― 정지용, 「홍역」에서 정지용이야말로 한국 현대시사의 본문本文이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시답잖게 읽는 시러배들이야 알 수 없겠지만, 우리 말의 영혼에 가슴 저려본 이는 아무도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내가 현대시를 전공하면서 딱 맞닥뜨린 시인이 정지용인데 그것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형벌과도 같았다. 와 으로 벼락치듯 섬광을 일으키는 언어의 막강한 힘은 쓰나미와도 같고 화산과도 같고, 내 운명의 바늘을 홱 돌려놓고는 무명無明 저편에 숨어서 ‘용용 죽겠지’ 나를 울리는 시의 여신의 잉걸불보다 뜨거운 젖꼭지와도 같다.    유안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김소월, 「초혼」에서 시인 아닌 아무것도 안되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던 중학생 적에는, 하교길 오뉴월 땡볕을 이고 걸으면서도 구르몽의 시구였던가 “시몽, 너는 좋아하니 낙엽 밟는 소리를” 이 구절이 알사탕처럼 입안에 굴러다니곤 했는데, 대전시를 가로지르는 목척교를 건널 때는 영락없이 입 속에서 굴러다니는 구절은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네 사랑도 흐르네”였다고 기억되는데― 그 맹목과 무지와 순백의 백지 같은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해서 소월의 「초혼招魂」과 마주치게 되었던가? 분명하게 기억되진 않지만, 소월의 「산유화」에서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를 두고 계절의 순서가 바뀐 까닭을 질문했다가 문예반 선생님께 망신을 당하고, 「산」이라는 시에서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에서 “산새도”의 “도”와, 왜 하필 “오리나무”였을까를 혼자 곰곰 생각하던 때와 거의 같은 때였을라?! 소월에 미쳤던 여중학생은 「초혼」을 만나자마자 까무라칠 것만 같았지. 부르다가 죽어도 좋을 이름 하나를 갖고 싶었고, 나에게도 내 이름을 부르다 죽을 누군가가 있었으면 소원했지.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붉은 피가 솟구치는 이 뜨거운 한 구절로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기로 혼자서 약속하고 굳게굳게 맹세했는데― 성적이 올라가자 스스로 그 맹세를 깨뜨려버렸지만.    유영금 그러나 그보다는 차라리 빨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 최승자, 「오 모든 것이 끝났으면」에서  내가 나를!!, 찔러 죽이거나 목을 매달아 죽이거나 청산가리를 먹여 죽이거나 가스를 마시게 해 죽이거나 총으로 두개골을 쏴 죽이거나 달리는 열차 바퀴에 던져 죽이거나 고층건물 위에서 떨어뜨려 죽이거나 손목의 동맥을 잘라 죽이거나 신나를 뿌려 태워 죽이거나…… 그 중 빠르게 죽여 버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 선택 때문에 분열에 시달리던 오래 전의 내게 최승자의 시 “그러나 그보다는 차라리/빨리 나를 죽여주십시오”는 내가 죽음에 성공한 것처럼 황홀했다. 실패에 짓밟혀 구차스러운 숨을 끌고 가고 있지만 벼락같이 섬뜩한 이 시구는, 눈을 떠야만 하는 매일 아침의 나를 희망의 도가니로 밀어 넣는다. 누군가 나를 죽여 버리는 것이 더 빠르다.            유홍준 무수한 정적은 와글와글거린다    ―― 문인수, 「무수한 정적은 와글와글거린다」에서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고 할 무렵의 문인수는 한동안 내 텍스트였다. 글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문인수의 『뿔』이라고 하는 시집을 나는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내 안목이 그랬다. 그러니까 아직 늦깎이 시인 문인수가 뜨기(?) 전의 일이었다. 믿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문인수는 나와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말로는 할 수 없는 어떤 것, 묘한 정서적 일체감이었다. 하여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좌우지간 쓸데없는 말 필요 없고, 언제 시인과 매운 고추 다대기 왕창 푼 순대국밥이나 한 그릇 했으면 좋겠다. 무수한 정적은 와글와글거리는 것처럼,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처럼, 겸상을 해 보았는데 문인수와 나에게 짜고 독하고 매운 것은 속이 다 시원한 것이다. 역설이다. 하여간……    이가림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 정지용, 「고향」에서 지금으로부터 45~6년 전, 그러니까 내가 전주고교에 다니던 시절, 국어를 가르치시던 신석정 선생으로부터 처음으로 정지용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 당시 월북시인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탓에, 정○○으로 부르며 금기시했음에도, 석정 선생께서는 수업시간 중에 「유리창」,「고향」,「바다」 같은 작품을 받아쓰게 했다. 특히 「고향」에 나오는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이란 구절은 그때 이래 “바람 먹고 구름똥 싸는” 방랑아의 꿈을 늘 내 가슴에 심어주는 벅찬 출발의 신호가 되었다. 내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한답시고 파리를 어슬렁거린 것도, 최소한 5년 주기로 이국땅을 떠돌아다니게 되는 것도 다 이런 낭만적 역마살의 노래를 좋아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 번 고향을 떠난 자는 항상 이곳이 아닌 저 먼 미지의 나라에 마음을 빼앗기기 마련인가 보다.    이건청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에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박재삼의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의 제목이 되어 있기도 하고 곡진하기 이를 데 없는 절창,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시를 읽다가 보면 공들여 힘들게 쓴 흔적이 나타나 있는 시가 있기도 하고, 시인의 내면에서 충분히 무르익어 저절로 흘러나온 듯하면서도 치밀한 구조를 이룬 시를 만날 수도 있다. 나는 물론, 뒤의 경우의 시를 훨씬 윗질로 보는 사람이다. 박재삼의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자신의 심적 정황을 ‘저물녘 노을 속으로 흘러가는 강물’로 치환하면서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으로 슬픔의 깊이를 인식해내고 있으며, “첫사랑 산골물소리”가 “사랑 끝 울음”을 거쳐 “미칠 일 하나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정서의 고양 과정을 치밀하게 끌어 담고 있다. 이렇게, 격정의 정서를 모두 포용하고 있으면서도 ‘소리 죽은 가을 강’이 되어 흘러간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그런 심회의 절정에서 만나게 되는 진한 감동의 언어이다.   이근배 나는 지낸 밤 꿈속의 네 눈썹이 무거워 그걸로 여기 한 채의 절간을 지어 두고 가려 하느니    ―― 서정주, 「기인 여행가」에서 영혼의 작은 숨결도 그려낼 수 있는 내 어머니의 나랏말씀은 어떻게 짚어 내야 시가 되는가? 이 물음 앞에서 나는 서정주 선생을 먼저 머리에 떠올린다. 해묵은 것이려니 하고 오래 덮어두었다가도 여기저기 자주 들춰지는 미당 시에 눈이 가면 내 머릿속은 회오리바람이 분다.  첩첩한 미당 시의 산맥 어디를 기웃거려도 마치 신들린 듯이 쏟아내는 낱말 하나 시구 하나에 내가 가진 말들은 삽시간에 꼬리를 감춘다.  미당이 시 속에 감추고 있는 ‘눈썹’은 우리 시문학사의 화두가 되고 있다. 「수대동시」(1941) 「동천」(1966) 「추석」(1966) 등에 나오는 ‘눈썹’의 절정은 아무래도 이 「기인 여행가」에서 보게 된다. 미당에게 있어 ‘눈썹’은 우주만큼이나 크고 영원한 사랑의 표상이다. 꿈 속에서 만난 ‘눈썹’으로 절간을 세웠으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향을 피우고 사랑의 공양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지금 그 절간의 풍경소리가 자꾸 귀속에서 울리는 것을 듣고 있다.    이대흠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이성복, 「그날」에서 “내가 없었을 때 세상은 짐승들의 것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세상은 짐승들의 것이었다. 오래도록 세상은 젓갈처럼 깊어가고 나는 아무런 문을 열지 않았다. 나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고, 한 나라를 이루지도 못했다. 지네인 듯 발이 많은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고, 처음보다 부피만 더 커진 몸뚱이로 나는 외길에 서 있”었다. (졸시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에서 인용) 짐승들은 제 입으로 짐승이라 하지 않았고, 피 묻은 입을 다른 피로 닦았다. 미친 자들이 지배하였으므로 미치지 않는 자가 미친 것처럼 보였던 1980년대. 극약을 가지고 다녔지만, 순교할 기회조차 없었다. 미친개가 미친개를 물어 모두 미쳐갔던,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던, 이동순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백석, 「모닥불」에서 1980년대 초반, 그 엄혹하던 시절에 나는 이름이 낯선 한 시인의 작품에 푹 빠져 있었다. 백석白石, 우리 문학사에서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특이한 존재였다. 하지만 뒤에 알고 보니 이미 1930년대의 찬란한 별이었다. 분단의 폭풍 속에서 가랑잎처럼 흩어진 그분의 작품을 하나 둘 모으고 정리하던 중 시 「모닥불」과 만나게 되었는데, 내 가슴 속은 그야말로 번개가 치는 듯 수백만 볼트에 감전이 된 듯 무서운 전율이 왔다. 모닥불 속에서 우리 민족사의 상처와 불구성을 읽어내다니…… 나는 미친 듯이 백석의 작품을 모았고, 마침내 분단 이후 최초로 한 권의 전집을 발간하였다. 이제 그분의 문학은 우리 문학사에서 당당한 위상으로 복원되었다. 백석과의 만남은 나의 감격이었고, 나의 행운이었으며, 이젠 나의 자부심으로 살아 있다.    이병률 나는 이렇게 한가하고 게으르고 그러면서 목숨이라든가 인생이라든가 하는 것을 정말 사랑할 줄 아는  그 오래고 깊은 마음들이 참으로 좋고 우러러진다    ―― 백석, 「조당?塘에서」에서 이상하다. 아직도 따뜻한 것에 연연해함은, 밋밋하게 편편하게 살아도 살아지는 세상에 자꾸 목 뒤에 뭔가가 켕긴 것이 있는 사람처럼 따뜻한 것을 찾아 자꾸 뒤돌아보게 됨은 부끄럽기조차 하다. 그래도 이 한 줄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다 보면 나아진다. 목욕이라도 한 기분이 된다.  삶을, 인생을 저리 순연하게 ‘우러러’볼 수 있다니 백석은 참 인간으로서도 잘 살았다 싶다. 이 땅의 전부를 담고 있으며 한 생의 궁극을 집어낸 이 한없이 느리고 미쁘며 태연하고도 갸륵한 한 줄이여. 나는 이 한 줄이 참으로 애틋하고 뜨겁다.     이선영 가을 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 버렸다.   ―― 김수영, 「거미」에서 ‘바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기에, 또한 얼마나 절절하기에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그러다 ‘까맣게 몸이 타 버’린 김수영의 ‘거미’는 이후 내 뇌리에 각인된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였다. 본시 거미에 대해 생명으로서의 한치의 외경심이나 일말의 연민조차 가져본 적이 없던 나에게 김수영의 ‘거미’는 그대로 섬광 같은 시인의 실존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시인의 길을 가려던 나의 실존에 대한 섬뜩한 예감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성부 먼 길에 올 제  호을로 되어 외로울 제  푸라타나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 김현승, 「푸라타나스」에서 열여섯 살의 여드름 투성이였던 소년에게 이 시구는 충격이라기보다 큰 그리움의 하나로 다가왔다. 그때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먼 길’과 ‘외로움’의 실체가 눈에 선하게 잡혀지는 것 같았다. 집을 떠나 어디론가로 가고 싶다는 여행에의 욕망, 그 여로에서 터득하게 될 고독의 본질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런 생각들 때문에 나는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는데, 세계와 삶에 대한 어떤 각성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정지된 나무가 하나의 영혼으로, 그리고 한 고독한 인간을 고독하지 않게 위무하는 손길로 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수명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    ―― 이상, 「꽃나무」에서 이것을 읽었을 때, 시가 무엇인지 알았던 것 같다. 욕망과 함께 욕망의 불가능함을 말이다. 시는 이 불가능으로 시작된다.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는 또 다른 자아일까, 타자일까. 이상은 양자가 하나가 되는 어느 지점이 시의 뇌관임을 보여준다. 시인들은 안에, 혹은 밖에 꽃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겠지만. 그곳에 “갈 수 없”다는 것, 거리감을 직관하는 것이 시이다. 그것을 채우는 것이 시이고, 또 내버려두는 것이 시이다. 나는 시의 이러한 운명을 사랑한다. 시는 “갈 수 없”음으로 도달하기 때문이다. 관통하기 때문이다.    이수익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 서정주, 「화사花蛇」에서 서정주 초기 시편의 휘황한 원초적 생명력은 나의 10대 문학소년 시절을 뜨거운 피로 세례하였다. 그 중에서도 원죄의 달콤한 유혹과 관능을 징그러운 배암으로 육화시킨 「화사花蛇」는 언제나 그 절정에서 나를 숨가쁘게 조여 왔다. 내 몸 안의 피의 유전자와 상통하는 ‘어떤 무엇’이 있었음이 틀림없었으리라. 특히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라는 구절에 이르면 나는 늘 숨막히는 희열을 전신으로 감싸 안곤 했다. 그런 내면적 뜨거움이 이후 나의 시에서 피, 절정, 죽음, 황홀, 비애 등의 언어로 채색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승하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서정주, 「자화상」에서 미당은 23세 되던 해 가을에 「자화상」을 썼다. 나는 바로 그 나이에 미당 선생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수업 시간에 스승은 호되게 꾸중을 하셨다. “이건 시가 아닐세!”라고. “이런 시는 앞으로 쓰지 말게!”라고. 스승의 시 수십 편을 이마 위에 얹고 있던 나는 스승의 몰인정에 학교 앞 주점 왕개미집에서 오랜 날을 살았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전시 체제로 바뀌어 가던 1937년, 스승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간질병 환자인 양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나 역시도 1982, 83년 그 언저리에서 분신자살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치를 떨고 있었다. 시대가 참으로 어두웠기에, 스승의 말마따나,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을 남몰래 꿈꾸며 시를 쓰고 있었다. 스승은 말더듬이 환자였던 나의 자화상인 「화가 뭉크와 함께」를 등단작으로 뽑아주셨다. 스승의 파안대소가 미치도록 듣고 싶은 2007년 9월의 어느 아침이다.    이승훈 캄캄한 공기를 마시면 폐에 해롭다    ―― 이상, 「아침」에서 고교 시절 처음 이상의 시를 읽고 충격을 받는다. 세상에 이런 시가 있다는 것도 충격이고 이런 시인이 있다는 것도 충격이고 이런 시인과 만난 것도 충격이다. 그가 노래하는 병든 내면은 당시의 나의 내면이고 그 후 나는 이상의 정신적 가족이 된다. 그는 폐결핵으로 시달리는 밤을 노래하고 이런 밤은 당시의 어둡던 가정, 나약한 감성, 우울한 사춘기의 은유가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결국 고독한 체념과 말라버린 사유와 초췌한 감성이 있을 뿐이다. 사는 건 병드는 것. 그렇게 고교 시절을 보냈다.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 이런 밤은 지금도 계속된다    이   원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 오규원, 「버스정거장에서」에서 1987년 3월 서울예대 문창과에 들어갔고, 1987년 10월 명동의 서점에서 오규원 선생님의 새 시집을 샀다. 「버스정거장에서」의 첫 구절인, 이 시구를 보는 순간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습작을 하던 1991년, 밥그릇을 소재로 시를 쓰게 되었다. 이런 것도 시가 되나요, 하고 여쭈었다. 이 세상에 시 아닌 것은 없다. 네가 쓰는 모든 것이 시다, 오규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 순간 즉각적으로 이 시구가 다시 떠올랐고, 이 시구를 처음 보았을 때 무너져 내렸던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짐짓 태연해 보이는 이 진술은 내가 시에 대해, 삶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한 번에 무너뜨렸던 것이다(내가 안다고 믿고 있던 것들은 내가 가장 모르는 것들이었다). 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시다, 언어도 삶도 벼랑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나는 언어가, 삶이 균형을 잡으려고 할 때마다 이 시구를 붙잡고 날아오르며 벼랑을 만든다.    이유경 내 너를 찾아 왔다. 순아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 서정주, 「부활」에서 ‘벼락치듯 나를 전율시킨…’은 아니지만, 최초로 나를 감동시킨 시 한 구절은 서정주의 「부활」의 도입부였다.  이 시를 처음 대한 것은 고교에 입학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 공부를 한답시고 서정주 조지훈 박목월 공저의 『시창작법』(1954)이란 책을 사 읽으면서였다. 미당의 란 글에 시 전문이 실려 있었다.  열여섯 일곱의 사춘기를 갓 지난 나의 감성에 ‘순아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는 황홀한 사랑의 풍경을 전개해 주던 것이었다. 슬프고 쉬운 시였기에 감동이 더했던 모양이다.    훗날 성인이 되어서도 한동안 나는 술에 취하면 노래 대신 이 시 전문을 소리쳐 외곤 했다.   이윤학 아침마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씩씩하고 활기차게 ‘필승’ 또 ‘필승’/경례를 하는 사람이 있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그렇게 인사를 하십니까// 네, 저기 있는 까치를 보고 인사합니다/필승!    ―― 정용주, 「필승」 전문 3,4년 전 이 시를 처음 읽게 되었다. 한 남자가 아침마다 창문을 열어놓고 까치가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남자는 부동자세로 까치가 날아올 나무를 아니면 지붕을 또는 전봇대를 힘주어 바라보았다.  왜 반드시 이겨야 하나, 왜 반드시 이겨야 하나, 왜 반드시 이기지 않으면 안 되나? 씩씩하고 활기차게 ‘필승’ 또 ‘필승’을 외치지 않으면 안 되나? 왜 하필 까치에게, ‘필승’ 또 ‘필승’ 경례를 붙이지 않으면 안 되었나?  처음에는 화자 자신에게 퍼붓는 ‘냉소冷笑’로 읽히더니, 종내는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자기 암시暗示로 옮겨갔다. 까치를 보면 이 시가 생각나더니, 나무나 지붕이나 전봇대만 봐도 ‘필승必勝’이 들려왔다.  “……오직 하나, 나는 나 자신에게 승리했을 뿐이다.” 김산 평전에서 읽은 구절과 함께.     이윤훈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포근한 봄의 졸음이 떠돌아라.//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 이장희, 「봄은 고양이로소이다」 이 시는 젊다. 여든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초월하여 신선한 감각이 살아나  시의 자장을 잃지 않고 있다.  이 시 속에서는 야사 하이페츠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가 아련하다. 극도로 절제된 감정과 섬세한 감각이 어우러진 고즈넉한 시의 공간이 있다. 그 속에 고양이로 현현된 생생한 봄을 만난다. 나른한 아침 봄볕 속 이 시를 진언처럼 읊조리면 이 시와 내 시의 한 접점에서 모를 새 한 마리 고양이로 변한 나를 발견한다.        출처 :정자나무 그늘 아래 
191    시인에게시를 묻다... 댓글:  조회:2611  추천:0  2017-02-05
시인에게 시를 묻다 2008-08-14      [동아일보] ■ 계간 시인세계 ‘시인 44명의 한마디’ 가을호 특집 《시란 무엇인가.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 시를 정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시를 무엇이라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시를 사랑하고 시를 아끼는 이들이라면 실마리라도 이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지 않을까. 20일 발행되는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 가을호(25호)는 이 궁금증에 대해 조금이나마 해갈이 될 만하다.  한국 문단을 움직이는, 현재 활동 중인 시인 44명이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 각자의 깨달음을 내놓았다.  물론 몇몇 시인은 “시가 뭔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숱한 낮밤, 시를 쓰고 찢은 이들에게 묻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물어볼 것인가.》 ‘못 견뎌서 해보는 거외다. 가슴에 뭔가 이리도 넘쳐서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실컷 울고 싶을 때 그러한 처지에 놓였을 때 그것, 시라는 물건을 몇 줄 적어본답니다요. 병신같이 쭈그리고 앉아 끼적거려 보는 겁니다요, 하하.’(원로시인 김규동) 시는 만든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슴에 뭔가 이리도 넘쳐서’ 토해낸다. 그러니 뭐라고 대답해도 좋다. 김종철 시인은 그래서 ‘똥’이라 했다. “미아리 낡은 강의실에서 목월도 말했고 미당도/말했고 김구용도 학생들에게 담배를 빌려 피우며/말했고 소설 창작을 가르치는 동리도 불쑥 한마디/했던 그것! 오늘은 나도 한마디 할란다, 똥이야!” 이는 이근배 시인의 ‘개똥참외론’과도 다르지 않다. “굳이 들이대자면 ‘개똥참외’란 생각이 든다. 누구든 먼저 본 사람이 따먹는다.…개똥참외는 콩밭을 매다가 우연히 눈에 띈다지만 시라는 개똥참외는 어디 가서 찾지? 먼저 따먹은 시인들이 밉다.” 그 때문에 문정희 시인은 “시는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든 속성 탓에 시에 대한 정의는 언제나 완벽한 정의가 아니기 쉽다”고 했다. 웬만했으면 박남철 시인은 “손을 턱에다 괴고 사진 찍어서 잡지에 발표해보기”라고 정의했을까. 시인들의 정의는 그들의 시만큼 넓고 깊다. ‘내 뼈 안에서 울리는 내재율’(신달자 시인)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오탁번 시인)라고 했다. ‘전달을 바라면서도 대중성을 경멸하는 아름다운 양면성’(허만하 시인)이며 ‘너무나도 확실한 물증’(이수익 시인)이기도 했다. 이렇게 복잡하니, “요즈음 시는 내게 어제 심은 작약 다섯 그루”라는 정진규 시인의 말도 일견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 속엔 긍정과 희망의 햇살 또한 함께 숨쉰다. 허영자 시인이 “자기 존재의 확인이며 자기 정화의 길”이라 하는 것도, ‘빈방에 꽂히는 햇빛’(강은교 시인)이며 ‘삶에 낙관주의를 심어주는 것’(이성부 시인)이라 시를 부르는 것도 그 이유다. 하지만 결국 시인들에게 시란 자신과 이음동의어였다. “살아 있는 시의 혼을 담아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시인의 몫”(김종해 시인)이기 때문이다. 시는 시인에게 ‘나 이상도 나 이하도 아닌’(정일근 시인), ‘높이 뜨는 느낌으로 얻는 깨달음과 깨침’(김종길 시인)이었다. 그렇게 시는 ‘내 삶의 단독정부’(천양희 시인)가 된다. /정양환 기자
190    좋은 시의 조건 10 댓글:  조회:2930  추천:0  2017-02-05
  좋은 시의 조건 10가지       박남희       1. 함축성이 있고 입체적인 시를 써라  시와 산문이 다른 점은 시가 지니고 있는 함축성 때문이다. 시는 평면적인 글을 의미전환 시키거나 이미지화해서 그 속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해준다. 시에서 다양한 수사법(은유, 상징, 역설, 알레고리, 아이러니 등)을 사용하는 것도 평면적인 글을 입체적이고 함축적인 글로 만들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이나 사회의 어떤 현상과 연결시켜서 바라보고, 그것을 새롭게 인식하고 재해석해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가 시를 쓸 때 세계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고(동화-assimilation) 자아 속에서 세계를 발견하려는 것(투사-projection)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동화는 세계(사물)를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여 동일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이를 다른 말로 세계의 자아화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투사는 자아의 감정을 세계(사물)에 이입시켜서 자아를 세계와 동일화시키는 것을 말하며, 이를 요약해서 자아의 세계화라고 말한다. 동화는 대상을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자아에 중점이 주어지는데 반해, 투사는 이와 반대로 자아를 대상에 상상적으로 감정이입 시켜서 자아와 세계가 일체감을 갖도록 하는 방법으로 세계(사물)에 중점이 주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자아와 세계를 동일화하려는 것은 서정시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이다.  나는 가끔 주머니를 어머니로 읽는다 / 박남희  어머니를 뒤지니 동전 몇 개가 나온다  오래된 먼지도 나오고  시간을 측량할 수 없는 체온의 흔적과  오래 씹다가 다시 싸둔  눅눅한 껌도 나온다  어쩌다, 오래 전 구석에 처박혀 있던  어머니를 뒤지면  달도 나오고 별도 나온다  옛날이야기가 줄줄이 끌려나온다  심심할 때 어머니를 훌러덩 뒤집어보면  온갖 잡동사니 사랑을 한꺼번에 다 토해낸다  뒤집힌 어머니의 안쪽이 뜯어져  저녁 햇빛에  너덜너덜 환하게 웃고있다    팽이/ 최문자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하나님,  팽이 치러 나오세요  무명 타래 엮은 줄로 나를 챙챙 감았다가  얼음판 위에 휙 내던지고, 괜찮아요  심장을 퍽퍽 갈기세요  죽었다가도 일어설게요  뺨을 맞고 하얘진 얼굴로  아무 기둥도 없이 서 있는  이게,  선 줄 알면  다시 쓰러지는 이게  제 사랑입니다 하나님  2. 관점과 표현이 새로워야 한다- 다르게 보기와 낯설게 하기  좋은 시는 시인이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것을 얼마나 신선하고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미 너무나도 낯익은 것들에 길들여져 있어서 낯익은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지 못하고 기계적이고 관습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시인은 이처럼 관습적이고 기계적인 것들을 일깨워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재창조해내는 자이다. 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 중의 하나인 상상력이나 창의력은 대상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바라보고 이것을 자신의 표현법으로 낯설고 새롭게 표현해 내는데서 생겨난다.  이처럼 시를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표현법으로 창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정관념을 없애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무수한 사람과 사물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주체나 대상이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을 없애고 자유로운 상상력이나 사유(생각)를 통해서 그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재해석해서 새롭게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문학사를 더듬어 볼 때, 실험시나 해체시가 반복적이고 주기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도 시적 ‘새로움’에 대한 시인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인 것이다.  우리가 고정관념의 틀에서 빠져나오려면 우리의 정신과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분열된 몽고의 부족을 결집하여 중국과 유럽을 정복한 징기스칸이 만약에 유목민의 후예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런 큰 역사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유목을 뜻하는 노마드(nomad/nomade)는 들뢰즈가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1968)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 철학의 한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유목의 개념은 현대에 이르러서 어떤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일컫는 말로 정착되면서 새로운 문화적 트랜드로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노마드적인 정신은 시를 쓸 때도 필요하다. 좋은 시를 쓰려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부수고 자아와 사물의 고정적인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상상력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상상력은 자유로운 정신에서 나오고, 이것이야말로 새롭고 좋은 시의 원천이 된다  둥근 발작 / 조말선  사과 묘목을 심기 전에  굵은 철사 줄과 말뚝으로 분위기를 장악하십시오  흰 사과 꽃이 흩날리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신경증적인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곁가지가 뻗으면 반드시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기성향이 굳어지기 전에 굴종을 주입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억제입니다  원예가의 눈높이 이상은 금물입니다  나를 닮도록 강요하세요  나무에서 인간으로 퇴화시키세요  안된다, 안된다, 안된다 부정하세요  단단한 돌처럼 사과가 주렁주렁 열릴 것입니다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억누르세요  뺨이 벌겋게 달아오를 것입니다  극심한 감정교차는 빛깔을 결정합니다  폭염에는 모차르트를  우기에는 쇼스타코비치를 권합니다  한 가지 감상이 깊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세요  나른한 태양, 출중한 달빛, 잎을 들까부는 미풍  양질의 폭식은 품질을 저하시키는 원인입니다  위로 뻗을 때마다 쾅쾅 말뚝을 박으세요  열매가 풍성할수록 꽁꽁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둥근 발작을 유도하세요  거리에서 / 이원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  빠져나와 있다  탯줄같은 그 플러그들을 매단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비린 공기가  플러그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몸 밖에 플러그를 덜렁거리며 걸어간다  세계와의 불화가 에너지인 사람들  사이로 공기를 덧입은 돌들이  둥둥 떠다닌다  3. 현실의 구체성과 진정성에 토대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라  좋은 시는 우선 허황되지가 않다. 집도 토대가 튼튼해야 좋은 집이 될 수 있듯이, 시도 체험의 구체성이나 진정성 위에 서 있어야 감동을 줄 수 있다. 관념이나 허황된 상상만으로는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관념도 시의 소재가 될 수는 있으나 그것을 객관적인 상관물로 사물화하지 못하면 독해가 불가능한 난해시나 주관적이고 피상적인 시 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발한 상상력이 나타나 있는 시라 할지라도 현실과의 연관성이 아주 없거나 너무 희박해서는 곤란하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 가운데 객관적으로 독해가 불가능한 시가 종종 보이는 것은 이러한 부분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체험이나 기억에 의존한 시를 쓰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좋은 시는 체험과 기억과 상상력이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의 경험이나 감동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시켜줄 수 있는 시이다. 우리가 시를 읽고 공감하게 되는 것은 시의 내용이나 주제가 현실과 일정한 소통의 통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표현이나 상상력, 시적 사유 등이 현실과 연결되어있으면서도 현실에 매몰되어 있거나 잠들어 있는 부분을 일깨워줄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을 지니고 있는 시가 좋은 시이다. 우리가 좋은 시를 읽으면서 우리 안에 잠들어있던 생각이나 상상력이 새로운 충격으로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도 좋은 시 속에 들어있는 신선한 감각의 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땡볕 / 허수경  소나무는 제 사투리로 말하고  콩밭 콩꽃 제 사투리로 흔드는 대궁이  김 매는 울 엄니 무슨 사투리로 일하나  김 매는 울 올케 사투리로 몸을 터는 흙덩이  울 엄니 지고 가는 소쿠리에  출렁 출렁 사투리 넌출  울 올케 사투리 정갈함이란  갈천 조약돌 이빨 같아야  물 만드는 여자 / 문정희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간통 / 문인수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선무당네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이녁은 또 샐 녘에사 들어왔다.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김에 허둥지둥 선무당네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왔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 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 듯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년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4. 전체적인 통일성과 내용과 형식의 조화에 유념하라  시를 쓰다보면 처음과 끝의 발상이나 주제가 다르고 형식적인 통일성도 없이 산만하게 시가 써지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과오는 초보자일수록 더욱 자주 범하게 되는데, 그것은 아직도 자신만의 시작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시에 대한 막연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처음 읽을 때는 어렵게 느껴질지라도 꼼꼼히 읽어보면 낯선 표현 속에서 일정한 시적 문맥과 흐름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시들은 시 속에 텐션(긴장)이 들어있어서 시를 읽는 맛이 새로운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중적 구조를 지닌 다층시와 독해 불가능한 난해시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전체적인 통일성이 결여되고 내용과 형식의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시는 난해시라기보다는 미숙한 시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시를 쓴 자신도 설명 불가능한 난해시도 역시 시적 숙련도가 덜된 시에 포함된다.  요즘의 젊은 시인들의 시가 난해시나 환상시, 해체시의 포즈를 취하면서 지극히 주관적인 난해시로 빠져들고 있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요즘은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모든 지식들이 인터넷으로 공유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유독 시만이 소통불가능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좋은 시는 익숙함과 새로움, 경험과 상상력, 자유로움과 질서, 모호성과 선명성, 자아와 세계가 서로 소통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이다  아름다운 수작 / 배한봉  봄비 그치자 햇살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던가  잠시 꽃술이 떨렸던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수억 겁 싱싱한 사랑으로 살아왔을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  나는 오늘  그 햇살 그물에 걸려  황홀하게 까무러치는 세상 하나 본다  풍향계 / 이덕규  꼬리지느러미가 푸르르 떨린다  그가 열심히 헤엄쳐가는 쪽으로 지상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그 꼬리 뒤로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사라져가는  초고속 후폭풍後爆風의 뒤통수가 보인다  그 배후가 궁금하다  흉터 속의 새 / 유홍준  새의 부리만한  흉터가 내 허벅지에 있다 열다섯 살 저녁 때  새가 날아와서 갇혔다  꺼내 줄까 새야  꺼내 줄까 새야  혼자가 되면  나는 흉터를 긁는다  허벅지에 갇힌 새가, 꿈틀거린다  5. 장식적인 수사를 피하고 명징한 이미지와 행간의 미학에 유념하라  시만큼 언어적 수사에 민감한 장르도 찾아보기 힘들다. 시에서 언어적 수사는 옷과 같다.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달라보이듯이, 시 또한 수사적 표현에 따라 느낌이나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화려한 옷이 모든 사람의 몸에 맞는 것이 아니듯이 불필요한 장식적인 수사법이 때로는 그 시를 망칠 때가 있다. 시에서는 화려한 수사법보다는 오히려 명징한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 시에서 명징한 이미지는 그 시의 구심점이 되어서 단순한 주제를 중의적으로 전경화 시켜준다. 대부분의 좋은 시에는 명징한 중심 이미지가 존재한다. 좋은 시는 그러한 중심 이미지를 구심점으로 체험과 상상력을 짜임새 있게 조화시키고 확장시켜나간다. 이미지는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을 간접화시켜서 보여줌으로써 설명에 갇히기 쉬운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와 함께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항은 시의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산문적 진술은 화자가 대부분의 상황을 직접 진술하기 때문에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이 없다. 하지만 시는 생략과 침묵과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을 높인다. 이러한 시적 긴장감은 시적 화자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들이 행간 사이에 무수히 숨어있다는 것을 의미해준다. 고급 독자는 시인이 설명하지 않고 행간 사이에 감추어놓은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서 시의 묘미를 느낀다. 압축과 생략이 시가 지니고 있는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로 꼽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섬 / 함민복 물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섬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꽃 먼저 와서 / 류인서  횡단보도 신호들이 파란불로 바뀔 동안  도둑고양이 한 마리 어슬렁어슬렁 도로를 질러갈 동안  나 잠시 한눈팔 동안,  꽃 먼저 피고 말았다  쥐똥나무 울타리에는 개나리꽃이  탱자나무에는 살구꽃이  민들레 톱니진 잎겨드랑이에는 오랑캐꽃이  하얗게 붉게 샛노랗게, 뒤죽박죽 앞뒤 없이 꽃피고 말았다  이 환한 봄날,  세상천지 난만하게  꽃들이 먼저 와서, 피고 말았다  6. 계산된 논리보다는 자유로운 연상(상상력)을 활용하라  시의 길은 쭉 뻗은 고속도로나 아스팔트길 같은 것이 아니다. 시의 길은 오히려 꾸불꾸불한 시골길이나 출렁이는 물길과 흡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한눈에 빤히 보이거나 쉽게 측량되지 않는다. 현대화된 길은 이미 계획된 설계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길이지만 시골길이나 물길은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길이다. 시의 길 역시 자연에 가까운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시는 친자연적이다. 우리는 종종 이미 계획된 논리를 바탕으로 시를 쓰려고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씌어진 시는 너무 논리적이어서 풍부한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이 빤한 알레고리 시에 머물거나, 머리로 쓴 작위적인 시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논리적인 시는 새로움과 놀라움이 없다. 물길은 늘 요동하면서 수시로 변화무쌍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의 마음도 물길과 같다. 인간의 마음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어쩌면 마음은 물길보다도 더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마음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그러므로 시를 쓸 때는 계산된 논리를 버리고 시상을 자유로운 연상에 맡겨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자연 속에는 무한한 상상력이 숨어있다. 시를 쓰는 작업은 이러한 숨어있는 상상력을 캐내어 자아와 타자 사이의 동질성을 발견하고 이를 중심적인 주제나 이미지로 응집시켜나가는 것이다. 상상력이 깊고 넓은 시는 바다와 같은 심호함이 있다. 작은 냇물은 가뭄에 말라서 없어지지만 바다는 죽지 않는다. 바다 속에는 무수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시작법을 위한 기도 / 박현수  저희에게  한 번도 성대를 거친 적이 없는  발성법을 주옵시며  나날이 낯선  마을에 당도한 바람의 눈으로  세상에 서게 하소서  의도대로 시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옵시며  상상력의 홀씨가  생을 가득 떠돌게 하소서  회고는  노쇠의 증좌임을 믿사오니  사물에서 과거를  연상하지 않게 하옵시며  밤벌레처럼 유년을  파먹으며 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거짓 희망으로  시를 끝내지 않게 하옵시며  삶이란 글자 속에  시가 이미 겹쳐 있듯이  영원토록  살갗처럼 시를 입게 하소서  거리 / 문태준  오늘 풀뱀이 배를 스쳐 여린 풀잎을 눕힌 자리같이  거위가 울며 울며 우리로 되돌아가는 저 저녁의 깊이와 같이  거위를 따라 걷다 문득 뒤돌아볼 때 내가 좀 전에 서 있었던 곳까지  한 계절 전 눈보라 올 때 한 채의 상여가 산 밑까지 밀고 간 들길같이  그보다 더 오래 전, 죽은 지 사흘 된 숙부의 종아리가 장맛비처럼 아직 물렁물렁할 때  누구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거리距離  이동식 화장실에서 / 이대흠  사각의 공간에 구더기들은  활자처럼 꼬물거린다  화장실은  작고 촘촘한 글씨로 가득 찬  불경 같다  살아 꿈틀대는 말씀들을  나는 본다.  7. 어떤 것을 위한 도구인 시보다는 스스로가 존재인 시를 쓰라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은 무수히 많다. 그것들은 자신만의 모습과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식물이건 동물이건 간에 자신만의 존재방식이 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신의 피조물이라면 시는 시인이 창조해낸 새로운 언어적 피조물이다. 이는 1930년대 박용철로부터 현대에 이르고 있는 유기체시론의 맥락에서 시를 바라보는 것과 동일한 것이지만, 에이브람스가 말한 문학의 효용론과 존재론의 범주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효용론의 관점에서 보면 시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교훈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격동기나 시대적 전형기와 같은 불안정한 상황 속의 시들은 교훈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종교시와 연시(연애시), 행사시 등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파악된다. 이런 시들은 시 자체의 존재성보다는 어떤 것을 위한 도구로 시가 사용되기 때문에 문학적인 차원에서 보면 비본질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시들은 시대적 상황이나 시간적 흐름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문학의 영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시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론적인 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존재론적인 시란 어떤 관념이나 생각도 배제하고 오직 시 자체의 존재성만 추구한 김춘수류의 무의미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시는 의미하면서도 존재할 수 있다. 다만 그 의미하는 바가 문학 외적인 목적성에 치우친 시는 순수한 의미의 존재론적인 시라고 말할 수 없다. 문학은 종교나 철학이 아니다. 물론 문학 속에도 종교나 철학이 들어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문학은 문학성이 주가 되어야 한다. 문학의 본령은 아름다움과 새로움에 있다. 그런데 문학에서의 아름다움은 형태적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언어적 아름다움이다. 시인은 시 속에 창조된 새로운 언어적 공간을 통해서 시적인 전율을 느낀다. 그러므로 시인이 시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낯선 아름다움이다. 현대시의 낯선 아름다움은 감각으로 느끼기 보다는 직관으로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 어떤 사물을 바라보고 그 사물을 통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유추해내는 직관의 힘이야말로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중요한 덕목이다  시학 / 매클리시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낡은 훈장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맷자락에 붙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약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시는 비등해야 하며  진실을 나타내지 않는다  슬픔의 모든 역사를 표현함에  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  사랑엔  기운 풀과 바다 위의 등대불들  시는 의미해선 안 되며  존재해야 한다  (부분인용)  갈대는 배후가 없다 / 임영조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禪門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老後여!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反骨의 同志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8. 남의 것을 모방하지 말고 자연을 잘 활용하라  자연은 생명의 터전이고 원천이다. 모든 것은 자연 속에서 순환하고 생멸한다. 그러면서 자연 속에 있는 것들은 서로 닮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자연의 여러 사물들이 둥근 것이나, 부서져서 다른 것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나, 아름답고 싶어 하는 것이나, 소통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몸에도 둥근 것이 있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으며,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처럼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닮아있다.  우리가 시를 쓸 때에 자연을 등장시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연과의 친연성(親緣性)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시 역시 자연을 떠나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특히 시는 비유적 언어를 생명으로 하고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비유의 원천인 자연을 배제하고는 시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이야말로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근원이며 시적 소재의 보고이다. 시를 쓰는 초보자들이 종종 남의 시를 모방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 속에 들어있는 무궁무진한 말의 광맥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연을 보면 인간이 보인다. 이와 반대로 인간을 보면 자연이 보인다. 자연을 통해서 인간을 보든, 그 반대이든 그것은 시인의 몫이다. 남의 것을 모방하는 것은 표절이지만, 자연을 모방하는 것은 창조이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 강은교  무엇인가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륵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울음이 타는 가을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중심의 괴로움 / 김지하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9.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발견의 눈을 길러라  시인은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남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아내는 자이다. 그것은 시인이 창조적인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면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보인다. 이런 것을 어떤 시인은 발견의 눈이라고 하기도 하고 직관의 눈이나 마음의 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표현은 각자 다 다르지만 시인은 남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은 대상을 새롭게 바라볼 뿐만 아니라 대상 속에 숨어있는 것들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력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시인은 끊임없이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그 속에 숨어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새로운 언어로 재창조해 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재창조 과정에서 주의할 점은 대상을 바라보는 창조의 눈과 언어가 일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대상을 새롭게 보았더라도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시인의 상상력은 한 개체의 내면뿐만 아니라 광활한 우주까지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시인은 이러한 상상력을 순간의 언어로 일체화시켜서 표현해내는 자이다. 이렇듯 시를 쓰는 행위는 사진 찍기와는 달라서 시를 쓰는 과정에서 창조적 상상력이 발현되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관념이나 생각까지도 구체적인 이미지나 묘사를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순간적인 발견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시상(詩想)은 기독교에서 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에피파니(epiphany), 즉 현현’(顯現)개념과 서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에피파니는 겉으로 보이는 현상의 옷을 벗고 사물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발견의 시학에 맥락이 닿아있다. 시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시학적 의미의 에피파니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시인이 사물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시의 신이 열린 시인의 마음 문을 통해서 사물 속에 숨어있던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이렇듯 시는 이미 사물 속에 숨어있던 것이 시인의 언어적 에피파니를 통해서 구조화되어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나면서 못 만나는/ 유안진  꽃은 소리 없이 피고  바람은 모습 없이 불어도 당연하게 여기면서  소리 안에 갇힐 수 없는 음성이  소리로 안 들린다고  모습 안에 갇힐 수 없는 모습이  모습으로 안 보인다고  없다고 한다  별이기도 눈물이기도 한잔의 생수이기도 하는 온갖 모습인 줄 몰라,  언제 어디서나 마주치면서도 알아보지 못한다  풀벌레 소리이기도 아기 옹아리 소리이기도 하는 온갖 소리인 줄 몰  라, 언제 어디서나 들려오는데도 알아듣지 못한다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고, 메뚜기가 내년을 몰라도, 내일과 내년이  있는 줄은 알면서  모습은 귀로 들으려 하고  소리는 눈으로 만나려다가  늘 어긋나고 만다  아무리 마주쳐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신神을 닮았어도 모품(模品)은 이렇다  지평선 / 위선환  삽시간이었다  한 사람이 긴 팔을 내려 덥석 내 발목을 움켜쥐더니 거꾸로 치켜들고는 털털 털었다  부러진 뼈토막들이며 해묵은 살점과 주름살들이며 울컥 되넘어오는 욕지기까지를 깡그리 내쏟았다  센 털 몇 올과 차고 작은 눈물 한 방울도 마저 털고 나서는  그나마 남은 가죽을 맨바닥에 펼쳐 깔더니 쿵! 키 높은 탑신을 들어다 눌러놓았다  그렇게 판판해지고 이렇게 깔려 있는데  뿐인가  하늘이 살몸을 포개고는 한없이 깊숙하게 눌러대는 지경이다  (탑 뿌리에 잘못 걸렸던 하늘의 가랑이를 그 사람이 시침 떼고 함께 눌러둔 것)  잔뜩 힘쓰며 깔려 죽는 노릇이지만  이건,  죽을 만큼 황홀한 장엄(莊嚴)이 아닌가  사지에서 구름이 피고 이마 맡에서 별이 뜬다  달북 /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그리고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10. 개성적인 문체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시를 쓰라  흔히 문체라고 하면 소설의 문체를 떠올리지만 시에서도 엄연히 문체가 존재한다. 전통적인 7?5조의 운율을 보여주는 김소월의 시나, 평북 방언을 중심으로 정감어린 산문시적 회고체의 시형을 보여주는 백석의 시는 물론, 서정적 울림이 큰 반복적인 운율을 바탕으로 체험적 진정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문태준이나, 주로 개인적인 의식 세계를 분열적이고 도착적인 어법으로 유니크하게 보여주는 황병승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인들은 그들 나름의 문체가 있다.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시의 문체들을 유형화시켜서 종류별로 나누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문체는 언어적 산물이면서 동시에 의식과 무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의 문체는 산문의 문체와는 달리 시 문맥의 일차적인 의미에 기여하기보다는 그 뒤에 숨어있는 의미나 상상력을 다층적이고 창조적으로 도출해내는데 기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문체는 시인의 어법이나 운율만으로는 그 윤곽이 쉽게 잡히지 않는다. 시의 문체는 상상력과 결합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창출해내는데 기여한다. 그것이 서정적 공간인지, 아니면 분열적이거나 해체적 공간인지, 환상적 공간인지, 현실적 공간인지는 시인의 문체와 상상력의 유기적 결합의 양상에 따라 달라진다. 시의 문체는 시인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일정한 윤곽을 드러낸다.  하지만 시인의 문체는 한 가지로 고정되어서는 안된다. 옥타비오 파스는 『활과 리라』에서 “스타일(문체)은 모든 창조적 의도의 출발점”이지만 “시인이 스타일을 획득하면 시인이기를 그만두고 문학적 인공물을 세우는 자로 변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어떤 시인의 스타일이 관습화되면 더 이상 그것은 톡특한 스타일이 될 수 없다는 경계의 말로 들린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자신의 문체를 고집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시세계를 창조해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때 우리가 유의할 점은 개성과 보편성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시적 개성을 강조하다보면 보편성이 약해져서 자칫 난해 시에 빠질 우려가 있고, 반대로 보편성에 치우치다보면 통속성과 대중성에 영합하는 몰개성적인 시가 되기 쉽다. 시적 언어는 산문적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곳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산문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별처럼 빛난다. 그곳은 시인 각자의 상상적 공간이다. 산문이 낮의 공간에 적합한 것이라면 시는 밤의 공간에 더 어울린다. 밤은 그 속에 무궁무진한 빛을 숨기고 있다. 밤하늘에 별이 아름다운 것은 그 주위에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묽다 / 문태준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가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들어가  차고 어두운 물이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어  뒤섞이고 허물어지고  밀고 밀렸다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도록 너무  늦지는 않아 벌써  새가 묽다    사산(死産)된 두 마음 / 황병승  땅속에 거꾸로 처박힌 광대처럼  열 두 살, 사탕을 너무 먹어서  두 발은 계속 허공을 걷는다  시간은 좀도둑처럼 죽어가고  딸꾹 딸꾹 조금씩 죽어가고  참새들은 그것을 재밌어 한다  서른 여섯 살의 악마가 다가와 열두 살의 나를 지목할 때까지  (딸꾹거리며)  검은 칼을 든 악마가 열두 살의 내 목을 내리칠 때까지  (딸꾹, 딸꾹거리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이 땅속의 자식아!  흙 속에 처박힌 열두 살,  귓속의 매미는 잠들지 못한다.       ------------- 박남희 / 1956년 경기 고양 출생.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폐차장 근처』『이불 속의 쥐』『고장 난 아침』. 현재 계간《시산맥》주간.  
189    "사랑하라 그러면 시는 써질지니..." 댓글:  조회:2533  추천:1  2017-02-05
사랑하라 그러면 써질지니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 /   몇몇 시인들이 들려주는 시작법     “시인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중국의 현대시인 아이칭의 에 나오는 제일 첫 문장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언어를 다는 저울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므로 시인은 양심을 속이거나 거짓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표연히 흩어지거나 순간에 지나가버리는 일체의 것을 고정시켜 선명하게, 마치 종이 위에 도장을 찍듯이 또렷하게 독자의 면전에 드러나게” 하는 시의 기교를 함께 강조한다.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중시하는 이러한 견해는 오래 전부터 내려온 중국 시론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경융합론’을 펼친 왕부지의 시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정(情)과 경(景)은 이름은 둘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분리될 수 없다. 시를 묘하게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양자를 자연스럽게 결합시킬 수 있어 가장자리를 남기지 않는다. 정교한 시는 정 가운데 경을 나타내고, 경 가운데 정을 나타낼 수 있다.” (류워이 지음, 이장우 옮김, )고 했다.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도 문장이란 “굳세면서도 막힘이 없고, 시원스럽게 통하면서도 넘치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뼈가 드러나지 않고, 상세하면서도 살찌지 않아야 한다”()는 말로 조화와 통합의 문장론을 내세웠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시적인 언어를 “내적인 경험, 감정 및 사고들이 마치 외적 세계에서의 감각적 체험과 사건들인 것처럼 표현된 언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마음/말, 진실/기교, 내용/형식, 정/경, 강함/부드러움, 내적 경험/외적 표현 등 모든 이항대립적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조화와 결합을 이룰 때 좋은 시가 태어나는 법이다. 심지어 시인의 재능/노력도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하는 유동적인 것이지 어느 한 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한 편의 시는 이처럼 시인들의 고뇌의 집적이며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일상속 느낌 그냥 흘리지말고  어린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기     그렇다면 시인들은 시를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시를 쓰라고 말하고 있을까? 시작법에 관한 현역 시인들의 조언을 몇 가지 경청해 보자.   강은교 시인은 첫째, 장식 없는 시를 쓰라고 한다.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으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하라고 한다. 둘째,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시적 경험이라는 것은 ‘나’를 넘어선 ‘나’의 시를 쓸 때 발현된다는 것. 셋째, 시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가 처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며 시작에 대해 믿음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넷째, 좋은 시에는 전율을 주는 힘이 있으므로 늘 세상을 감동 어린 눈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다섯째, 자유로운 정신(Nomade)을 가질 것을 당부한다. 정신의 무정부 상태, 틀을 깬 상태, 즉 완전한 자유에서 예술의 힘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을 익히라고 제안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 것, 무엇보다 많이 쓰고 또 그만큼 많이 지우라고 한다.(시인이 에서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이라고 노래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끝으로 ‘소유’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이 남달라야 한다고 매우 이색적인 의견을 제출한다. 즉 시의 성취를 맛보려면 약간의 결핍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사 풍요한 상태에선 시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것! 강은교 시인다운 비결이라 하겠다.                 최영철 시인은 시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느낌’이므로 이런 느낌들을 그냥 흘려버리지 말고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는 게 시창작의 첫 단계라고 한다.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면 속으로 ‘바람이 시원하다’고 한번 중얼거려 보라고, 그 다음 단계는, 바람이 어떻게 시원한지를 느껴 보라고 한다. ‘막혔던 가슴속 응어리를 뚫어 주듯이 시원하다’ ‘바람에 실려 그리운 사람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처럼.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 모두에게 어떤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하다가 보면 그것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생명을 부여하는 시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글을 남과 다르게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라고 권한다. 그 또한 자신감을 강조한다. 글감을 먼 곳에서 찾지 말고 주변에서부터 찾을 것이며,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부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미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숨김없이 보여주어야 독자는 흥미와 감동을 느낀다고 말한다. 좀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잡념이 많은 것도 괜찮은 일이며, 연속극이나 신문기사 한 줄에도 쉽게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이 오히려 시를 쓸 자격이 있다고 등을 두드린다. 대상을 향한 열린 시각, 치우침 없는 균형 감각, 부분을 보더라도 전체 속에서의 관계를 조망하는 태도, 그리고 세계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무엇보다 앞세운다. 늘 보게 되는 밤하늘의 달과 별도 시인의 눈에 붙잡히면 다음과 같은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하늘로 가 별 닦는 일에 종사하라고   달에게 희고 동그란 헝겊을 주셨다     낮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밤에 보면 헝겊 귀퉁이가   까맣게 물들어 있다     어두운 때 넓어질수록   별은 더욱 빛나고     다 새까매진 달 가까이로   이번에는 별이 나서서   가장자리부터 닦아주고 있다.   -최영철, 전문     장옥관 시인은 시적 발상을 획득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붙잡아야 감수성 훈련이 된다. 둘째, 사물들이 항복을 할 때까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셋째, 어린아이의 눈처럼 사물과 현상을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상상력이 커진다. 나의 관점을 버리고 대상의 눈으로 나를 보라는 것. 넷째, 자신의 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섯째, 가까운 곳에서 시를 찾는 눈이다.     ‘어떡하면 다르게 쓸 수 있을까’  자신의 숨기고픈 얘기서 출발     실제로 장옥관 시인이 시로 형상화하는 소재는 대단히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이를테면 벚꽃 아래로 지나가는 개, 자신이 누는 오줌, 포도를 껍질째 먹는 일, 아스팔트에서 본 죽은 새, 옛 애인에게서 걸려온 보험 들어 달라는 전화……. 그러나 이것들이 시인의 눈에 포착되면 경이로운 존재의 실감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빛을 뿜는다. 시인은 길을 걷다가 장애인을 인도하는 노란 안내선을 보며 놀랍게도 밑창으로 하나하나 핥으며 걷는 길의 등뼈를 발견한다. 신발의 밑바닥이 길을 핥는다는 통찰을 통해 시적 발상이 어떻게 발화하는지 보여주는 시다.     길에도 등뼈가 있었구나 차도로만 다닐 때는 몰랐던 길의 등뼈 인도 한가운데 우둘투둘 뼈마디 샛노랗게 뻗어 있다 등뼈를 밟고 저기 저 사람 더듬더듬 걸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밑창이 들릴 때마다 나타나는 생고무 혓바닥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남김없이 일일이 다 핥아야 한다 비칠, 대낮의 허리가 시큰거린다 온몸으로 핥아야 할 시린 뼈마디 내 등짝에도 숨어 있다 -장옥관, 전문
188    중국 唐代 녀류시인들 思夫曲 알아보다... 댓글:  조회:2837  추천:0  2017-02-05
중국 唐代 여류시인들의 사부곡思夫曲               --당대唐代, 이야, 설도, 어현기의 사랑과 이별과 그리움                                                                                                                                           이 을   Ⅰ.  중국은 성당盛唐 이래 국내외적으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사회구조가 발달하자, 경제적 상황은 여유로움이 생겨나 유흥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안사지란 安史之亂(755~763) 이후에는 농촌경제가 피폐해지고 수많은 아녀자들이 도시로 유입되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기생妓生으로 전락했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노비와 다를 바가 없었으며 매매도 가능했다. 소위 최하위의 천민계급, 부호나 권세가, 문인, 관료들의 성적인 노리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시대가 강요했던 유교의 예법에서 벗어나 보다 많은 남성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고 문학사적으로도 비교적 풍부한 작품을 남겼다.    그 당시 여성들은 사회 통념상 남성들의 부속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대개가 불행한 삶을 살다가는 비련의 여성들이었다. 비록 노리개 정도로 하찮은 여성, 그 속에서도 천한 여성들이었지만 문학사적인 측면, 특히 부녀시가婦女詩歌 쪽에서는 전례 없는 명성을 남기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는 중국의 당시를 모은『전당시全唐詩』가 입증하고 있다. 모두 9백 권이나 되는 이 책은 강희康熙 4년(1705) 칙명勅命을 받들어 팽정구彭定求 등이 그 이듬해에 완성, 1707년 성조聖祖의 서문을 붙여 간행되었다. 작자의 수 2천2백여 명, 시의 수는 약 5만 수로 작자의 선후에 따라 배열하고 약전略傳을 첨부했다. 이 속에 당대 여류시인의 작품도 상당히 많다. 여황제였던 무칙천武則天의 작품에서 일반 가정의 부녀자, 기생, 여도사에 이르기까지 2백여 명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작품의 수가 비교적 많고 내용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여류시인으로, ‘이야李冶, 설도薛濤, 어현기魚玄機’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특수한 신분이라서 궁중이나 일반 규중의 여인들과는 달리, 규범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대체로 자유롭게 남성들과의 교류가 풍부했다. 그래서 자유 분망한 사고를 지녔고, 소재 역시 다양하게 취하여 자신의 감정을 대담하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당시』에는 이야 18수, 설도 87수, 어현기 50수가 실려 있다.    중국문학사에서 당대는 시의 황금시대였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다. 거개가 중국을 일컬어 ‘시의 나라’라고 한다. 생활의 윤곽과 심미審美경험을 가장 아름답게 응축시킨 중국인 만큼 시를 사랑하고 즐겨 지은 민족도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당시를 두고서 ‘거울 속의 꽃과 같고 물속의 달’과 같다고 칭송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초당初唐(618~712)에서 힘차게 열린 당시는, 성당盛唐(713~765)에 접어들어 찬란하게 꽃을 피우게 되었다. 맹호연孟浩然과 왕유王維의 시에서는 삶에 대한 관조는 물론 산수시의 진수를 체험하게 된다. 이백李白(701~762)의 시에서는 웅혼한 기상과 진취적인 정신이 깃들어 있고, 시성으로 알려진 두보杜甫(712~770)의 시에서는 성당인의 기백으로 묘사한 안사의 난 전후의 사회상과 민중의 질고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불세출의 대시인들이 끊임없이 출현, 당이라는 다양하면서 광대무변한 시세계를 형성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세사世事에 초연한 시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시대가 드리우는 암류暗流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듯이, 시대의 흐름과 거기에서 건져 올린 다양한 감흥은 시인의 뇌리에 각인되어 시詩로써 표출되기 마련이다. 이중에는 모순투성이의 시대를 아파한 시, 회재불우적懷才不遇的 정서를 읊은 시, 또는 정체된 역사의 비극,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을 가슴 아파하는 심정에서랄까. 때로는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私道가 횡행하고 용기보다 비겁이 고상한 척도로 저울질 되는, 종내에는 인간성 상실로부터 시작하여 포근한 인간애와 깨끗한 양심이라는 것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 절망감에 이르기까지 비정상적인 세태가 역사의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기에 예나 지금이나 시인의 가슴앓이는 여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동양의 전통사상에 있어 이상理想은, ‘천인합일天人合一’과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 말한다. 천인합일은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을 천도天道와 하나 되게 함이다. 즉 이기적인 탐욕을 극복하고 하늘이 준 인심人心을 바탕으로 인덕人德을 세움이다. 수기치인은 먼저 나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고 다음에는 남들을 사랑으로 품고 가르치고 그들도 인격자가 되게 함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상도 남녀평등에 있어서는 크게 이바지하지 못했다. 당대 여류시인들은 남성에 대해 공세적인 대담성으로 남성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적극적인 교류를 가졌다. 현대적 시각에서 평가하자면, 여권주의女權主義(feminism)를 선각한 초유의 페미니스트들이 아니었을까. 천으로 멀쩡한 발을 옥죄었던 전족纏足을 풀어 헤친 지 1세기도 채 안 되는 중국에서…….    서양의 평등권 형성과정의 뿌리 역시 그리 오래지 않다. ‘인류의 보편적 행복을 방해하는 것은 신분과 계급의 대립 및 국가와 교회의 권력 구조적 형태이다. 이런 문화적 산물은 본질적인 인간과 인간을 사랑하는데 이바지하려는 선하고 자연스런 소질을 가려버린다. 그래서 투쟁해야 할 대상은 문화 전체이며 그 사회 전체이다. 이 모든 것은 악惡이다. 그래서 자연으로 돌아가라. 이 자연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간이다.’라고 한 칼뱅주의자(calvinist)나 루소(rousseau)의 계몽주의啓蒙主義는 미국의 독립 전쟁에 힘을 가해주고, 나아가 로크(locke)의 사상을 전재로 한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가들에게 하나님도 없고, 주인도 없으며 그러므로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상과 인간만을 만물의 척도로 보는 인본주의 사상을 주지시켜 프랑스 혁명을 완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얻어진 미국의 독립은,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므로 생명, 자유 및 행복을 추구한다’라는 독립선언문을 만들었고, ‘프랑스 구제도의 모순에 대한 혁명도 인간은 권리에 있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 당대에는 기생 이외에도 도사道士라는 특수한 신분이 있었다. 시대가 어지러워 민심이 동요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사람들은 유교 예법에서 벗어나 불교나 도교 등에 귀의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승려나 도사가 생겨났다. 그것이 유일한 피난의 수단이 된 것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속박과 법망을 피해 비교적 자유롭고 방탕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충실히 수도에 임하며 종교 계율을 엄수하는 불가佛家나 도가道家의 수도자들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극소수의 여인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대체로 개방적이었던 당대의 특수한 역사와 사회적 조건 덕분에 일종의 새로운 부녀자 계층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이들이 바로 기생 혹은 도사라는 평범하지 않은 신분을 가진 소외계층의 여인들이었다. 남성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적인 소양을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당대의 기생들은 언변에 능하고 시를 잘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모는 그 다음이었다.    당대에 있어 남성 못지않게 여류 시인들의 활약도 대단했다. 하지만 그들의 지위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아내는 오로지 남편을 위하여 희생과 충성을 다해야만 칭송을 받을 수 있었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은 무죄였고 만약 아내가 남편을 때리면 1년 동안 노역을 시킬 정도로 불합리한 구조였다. 그러므로 여기 이 세 여인은 기생 혹은 도사라는 신분으로 특수한 인생을 살았음이 분명하다. 신분 탓인지 생몰연대도 정확하지 않고 비참한 삶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온다. 여인으로서 일반적인 가정생활을 하지 못한 것이 어찌 보면 불행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적 재능은 그대로 작품으로 남았다. 그들이 남긴 처절한 삶의 대가라고 할까. 오로지 삶의 무게와 깊이를 시에 의존했던 것일까. 여하튼 중국의 여류문학 사상 길이 남을 만한 명작이므로 이들의 시세계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Ⅱ.  이야李冶의 자는 계란季蘭이며 중국절강성 서북에 있는 오흥吳興 출신으로 천보天寶 연간(742)경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망년도는 대략 784년이라고 전한다. 어려서부터 거문고를 잘 타고 미모가 뛰어났으며 시적 재능도 뛰어나, 5~6세 어느 날 부친이 이야를 안고 있었는데, 뜻밖에 시를 읊조렸다는 것이다.…때가 지나도/채워지지 않는 바구니/이내 마음/어지럽기만 하다(經未架却 心緖亂縱橫)…「장미를 읊다(詠薔薇)」라는 것이었다. 대번에 놀랜 부친은 부녀자답지 못한 행동이라며 내심 출가시키려고 결심을 했으나 이야는 가정에 매이는 것이 싫었다. 그 당시로서는 유교적인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도교道敎의 여도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야는 스스로 그 길을 택했다.    도교는 황제黃帝, 노자老子를 교조로 하는 중국의 다신적 종교이다. 무위無爲 자연을 주지主旨로 하는 노장철학老莊哲學의 류流를 받들어, 음양오행설과 신선사상神仙思想을 가미加味하여서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술術을 구하고, 부주符呪, 기도 등을 행한다. 이러한 도교를 믿고 수행하는 사람을 일컬어 ‘도사’라고 한다. 이야는 도교를 구실삼아 도사가 된 뒤에 여러 남성들과 접촉하면서 자유 분망한 생활을 시작했다. 여성이라는 속박과 유교라는 관습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보다 자유롭고 당당해 보이고 싶었을까. 아니면 애욕의 화신이 되어 방탕하길 작심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관습을 거부하고 모든 속박에서 일탈하고 싶었을까.    가까이했던 고중무高仲武라는 남성은 이야를 평하길, ‘선비에게는 백 가지 행실이 있고, 여인에게는 오직 네 가지 덕이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계란[이야]은 그렇지 못하다. 겉모습은 웅장한 듯하나, 쓴 시는 방탕할 뿐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야의 품행이 시에 비하여 미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생각이 남성을 뛰어넘었던 것일까. 사덕四德, 즉 부덕婦德, 부용婦容, 부언婦言, 부공婦工을 지키지 못한 여인. 이야와 친했던 남자는 육우陸羽와 유장경劉長卿이었다. 육우는 차를 무척 좋아해서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다선茶仙’이라고 불렀으며, 그가 다경茶經』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야가 생활에 어려움이 있거나 병들어 누웠을 때마다, 이야를 찾아갔던 사람이 바로 육우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유장경은 이야를 가리켜, ‘여류시인 중의 호걸이다(女中詩豪)’라며 추켜세우기도 했다. 그들 사이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여러 문사들이 모인 연회가 열렸다. 당시 유장경이 몹쓸 병에 걸려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이야가 먼저 운을 띄웠다. ‘산 기운은 해질 무렵이 아름다운가요(山氣日夕佳)?’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장경이 이를 받아, ‘온갖 새들이 기탁할 곳이 있어 기뻐한다네(衆鳥欣有托).’라고 답했다. 그러자 좌중에 있던 문사들이 박장대소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주고 받은 두 구절은 모두 도연명陶淵明(365~427, 진나라 시인)의 각각 다른 시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엄격한 사회에서 여성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남성들과 어울릴 수 있는 배짱과 즉흥적인 시흥詩興이 얼마나 호방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되자, 이야의 명성이 널리 펴져 궁궐에까지 알려졌다. 궁궐에 들어가서 후한 대접도 받았다. 그러나 이야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을 남겼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 반란군에 잡혀갔다는 설도 있다. 이 반란은 당나라 현종 말엽에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천보 14년(755) 안록산이 먼저 군대를 일으키고, 사사명이 이를 계승하여 숙종肅宗의 광덕원년廣德元年에 사사명의 아들, 조의朝義가 죽을 때까지 전후 9년간이나 계속된 중국 역사상 유명한 큰 반란이었다. 현종은 촉나라에 망명하여 퇴위하고, 반란군도 내부 분열을 일으켜, 763년에 평정되었다. 이로써 당의 중앙집권제는 파탄에 빠졌고, 중국 고대사회의 종말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야가 이때 반란군의 장수에게 시를 지어 올린 것이 발각되어 덕종德宗에 의해 매 맞아죽었다고 한다. 사실여부를 떠나 참으로 기구한 종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이야가 남긴 시 가운데 5편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리움, 그리고 원망 (상사원相思怨)   人道海水深 不抵相思半 海水尙有涯 相思渺無畔 携琴上高樓 樓虛月華滿 彈著相思曲 弦腸一時斷   사람들은 바닷물이 깊다고 말하지만 내 그리움은 반에도 미치지 못하리 바닷물은 끝이라도 있을진대 내 그리움은 까마득히 끝도 없구나 거문고 옆에 끼고 누각에 오르니 누각에는 외로운 달빛만이 가득 하구나. 상사곡을 켜노라니 애타는 간장은 한순간에 끊어지구나        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은 한없이 뻗어 나가, 그 깊이와 넓이가 바다보다도 더 막막해옴에 전율한다. 이야의 사모의 정은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무한성을 지향하고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불가항력不可抗力, 형언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사로잡힌다. 모든 것이 그리움에 압도되어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야는 가슴 가득한 그리움의 속앓이를 하면서도 그 그리움의 울타리에 갇혀있다. 마침내…거문고를 옆에 끼고 누각에 올라…주체할 수 없는 심경을 달래려고 한다. 하지만 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지우기는커녕 되레 달빛은 더욱더 외로움만 북돋울 뿐 천지가 공허하게 느껴진다. 인용한 시에서는 이야는 그리움의 포로가 되어 자신의 힘으로는 무엇 하나 감내할 수없이 몸부림친다. 임에게 의탁할 수  없는 그녀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임에게 기대고 싶어도 기댈 수 없는, 사랑받고 싶어도 사랑받을 수 없는 심화心火. 임을 그리워하는 나머지 생긴 화풍병花風病, 미칠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상사곡을 연주해 보지만 애간장만 태운다. 오지 않는 임이 정녕 이야의 임인가. 이 시는 이러한 그리움과 원망이 축을 이루고 있다. 극도의 사랑이 극도의 증오가 된다. 사랑의 늪에 빠진 여인의 일편단심이 전편에 흐르고 측민惻憫의 정情을 자아내는 힘, 즉 파토스(pathos)가 아주 굵게 역동하고 있다. 그리고 측은지심이나 연민이나 공감적 비애를 자아내는 정황을 짜임새 있게 묘사하고 있어 애상감哀傷感을 더해준다.   부부 (팔지八至)   至近至遠東西 至深至淺淸溪 至高至明日月 至親至蔬夫妻   지극히 가깝고도 멀기 만한 동쪽과 서쪽이여 지극히 깊고도 얕은 푸른 계곡이여 지극히 친하고도 소원한 부부관계여    위 시는 부부관계를 간단명료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1행 6언 4행으로 구성된 이 시는 ‘至(이를 지)’가 8자가 들어 있어 시제詩題를 ‘팔지八至’라고 한다. 부부는 촌수가 없는 남남이면서 특별하고 친밀한 이성異姓 관계로서, 낯익은 것 같으면서 낯설고, 속이 깊은 것 같으면서 얕고, 높은 것 같으면서 밝고, 다정한 것 같으면서 소원한 관계임을, 가까움과 멈, 깊음과 얕음, 친함과 소원함으로 매우 역설적이고 상대적이며 모순적인 상극 관계를 비유하고 있다. 이 시의 밑그림은 부부의 사랑을 막연하게 가깝고 깊고 높고 밝고 친한 것 같이 긍정으로 부각시킨 것이 아니라, 되레 멀고 얕고 소원한 것 같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마치 부부의 사랑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 한 심상을 내비치고 있다.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못하는 이야의 자격지심自激之心에서랄까. 다소 빈축이 엿보인다.   달밤의 이별 (명월야유별明月夜留別)   離人無語月無聲 明月有光人有情 別後相思人似月 雲間水上到層城   떠난 사람은 말이 없고 달은 소리가 없건만 밝은 달엔 빛이 있고 사람에겐 정이 있습니다 이별 뒤엔 임 생각이 달과 같건만 물 건너 구름을 뚫고 하늘에 이르렵니다.                            *층성層城 : 곤륜산崑崙山의 정상, 즉 하늘을 뜻함.     현대적 시각에서 이 시는, 시인의 삶과 사실들과 은밀한 경험을 다룬 서정시의 한 유형인 고백시(confessional poetry)이다. 고백 시인은 자기 자신에 관한 충격적인, 또는 임상적인 세부사항을 부끄러움 없이 솔직 담백하게 털어 놓는다. 시의 주제는 형상화된 중심사상이요, 그 의미를 뜻한다. 그러므로 주제는 시를 벗어나 존재하지 않는 불가결한 것이다. 인용한 시의 주제는 석별의 정이다. 유난히 달이 밝은 밤, 이별을 서두르는 사람은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임에 대한 여운은 애달프다. ‘밝은 달빛’과 ‘사람의 정’을 빗대면서 강력한 효과의 압축 은유로 이미지를 확장시킨다. 언제 만날지 기약 없는 이별이기에 더욱 간절한 마음은 달이 되어 임 계신 곳 어디인지 그리움으로 뒤덮고 싶은 심정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아마 이야는 지금도 달이 되어 밤마다 임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봄날의 회한 (춘규원春閨怨)   百尺井樓上 數株桃己紅 念君遼海北 抛妾宋家東   백 척 난간 위에 붉게 물든 복사꽃 아득한 북녘의 임 그리는 신세 홀로 버려진 몸이로다.                          * 요해북遼海北 : 요해, 요동의 남쪽으로, 먼 북방.                     * 송가동宋家東 : 이야 자신을 초사의 대가인 송옥에게 버러진 여인에 비유.    봄이 되어 누각에 오른다. 여러 그루의 복숭아 나뭇가지엔 어느새 붉은 복사꽃이 사방에 가득한데 떠난 임은 소식이 없다. 봄이 되니 임 생각이 간절하다. 고독한 외톨이, 임에게 버림받은 신세가 아닌가 하면서 한탄하고 있다. 특히 이 시에서 종결 부분이 ‘송가동’이란 표현은 예사롭지 않다. 이야 자신이 마치 송옥宋玉(BC290?~222?, 기원전 3세기 중국 전국戰國시대말, 楚의 문인, 작품형식, 내용 모두 굴원의 계승자로 불린다.)에게 버림받은 여인에 비유하고 있다. 일종의 패러디(parody)이다. 기교로 치면 상당한 기교인 셈이다. 여하튼 이야는 적어도 이 시에서는 자신보다 1천 년여 전의 시인이었던 송옥에게 버림받은 여인에 비유하여 처량한 신세를 읊고 있다.   버들 (류柳)   最愛纖纖曲水濱 夕陽移洞過靑蘋 東風又染一年線 楚客更傷千里春 低葉己藏依岸櫂 高枝應閉上樓人 舞腰慙重煙光老 散作飛錦惹翠裀                           * 청빈靑? : 부평초.                           * 연광煙光 : 좋은 시절의 아름다운 경치를 뜻함.   연하디 연한 사랑스런 버들가지 굽이도는 물가로 늘어지고 석양으로 옮겨진 그림자 부평초 사이로 지나간다 동풍은 다시 한 해의 푸름을 물들여 주고 초객은 아득한 봄에 더욱 서글퍼진다 바닥의 잎새들은 물가의 노를 숨겨주고 높은 가지는 누각 위의 사람마저 가리운다 가늘고 연한 버들가지도 굵어만 가고 아름다웠던 시절도 다 지나가는데 흩어져 날린 솜 비단자락을 휘감아 도누나     여인의 가는 허리의 아름다움을, 그 하늘거림을 버들가지에 빗대어 ‘세류미細柳美’라고 일컬었던가. 푸른 버들가지가 가는 허리를 뽐내며 물결 위에 미풍에 살랑거린다. 그처럼 싱그러운 자태로 젊음을 자랑이라도 하듯, 한때 이야도 많은 남성을 두루 차지하면서 당당했었다. 하지만 가는 세월 무엇으로 막으랴. 회한과 탄식만 가득하다. 이야는 쇠락해진 자신의 늙음을 버들가지에 빗대어 비관하면서 읊은 시다. ‘석양으로 옮겨진 그림자’에서 이미 절망의 늪에 빠진 비극적인 처지를 형상화하고 현실적 상황을 ‘부평초’ 같은 삶, 의지할 데 없는 절대고독을 표출하고 있다. 동부새[東風]가 불어와 산과 들은 모두 푸름으로 물들었지만 옛 초나라의 나그네처럼 외려 봄날은 아득하고 서글프다. 물가에 풀잎들은 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랐고 높은 가지는 이제 사람마저 업신여기는 듯 가린다.…버들가지도 굵어만 가고/아름다웠던 시절도 다 지나는데…에서처럼 시의 바탕이 온통 무채색이다. 절망이다. 세월을 원망한다. 초연하게 세월을 받아들이기보다는 탄식과 회한으로 자책한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갈망의 끈은 놓지 않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그대로 잘 드러내고 있다.   Ⅲ.  인명사전에 설도薛濤(770~850)는 중국 당대의 명기名妓, 여류시인, 만년에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초당으로 유명한 성도成都 서쪽의 완화계浣花溪 근처에 은거, 그곳에서 많이 나는 양질의 종이에 붉은 빛깔로 부전附箋을 만들어 촉蜀의 명사들과 시로 증답贈答했는데, 이런 식의 전지가 후세에 내려오면서 ‘설도전’으로 유명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설도에 대한 기록은 현재 부분적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의견이 분분하고 정확한 생몰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대략 대력大曆 연간(768 혹은 770)에 태어났고 대화大和 6년(832)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자면 거의 60세 이상을 산 것 같다. 설도의 자는 홍도洪度(혹은 弘度)이며 원적은 장안長安으로 되어 있다. 어려서 관리직에 있었던 부친을 따라 여러 곳으로 옮겨 살다가 부친이 일찍 사망하자, 의지할 곳이 없었던 설도는 16세에 관가의 기생이 되어 기적妓籍에 들어갔다. 설도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했다. 8세에 이미 시를 읊고 지울 줄 알았다. 시적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설도의 명성은 날로 유명해져 꽃을 찾는 벌들처럼 사방에서 남정네들, 특히 문인들이 몰려들었다.    설도와 가깝게 문인들은 원진元?, 백거이白居易(772~846), 유우석劉禹錫(772~842), 왕건王建(768~830), 장적長籍 등이었고, 장수들은 위고韋皐, 고숭문高崇文, 무원형武元衡, 은문창殷文昌, 이덕유李德裕 등 20여 명이 넘었다. 서천 절도사였던 위고는 설도를 기생으로 인도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설도를 ‘여교서女校書’라 칭하며, ‘재색을 겸비한 여인’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원형은 설도의 시문의 재능을 높이 사서 ‘교서랑校書郞’이란 벼슬을 내려달라고 조정에 건의했지만 기생에게 벼슬을 줄 수 없다며 거절당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사람들은 설도를 여교서고라 불렀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이 기생을 ‘교서’라 부르게 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설도의 미모에서랄까 시적 재능에서랄까, 그녀의 주변에는 많은 연인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그리고 연가戀歌를 읊었다. 왕건은「설도에게(寄蜀中?濤校書)」라는 시를 통해…먼 곳 교변에 있는 여교서 설도/비파 꽃 안에서 문 닫아 걸고 살아가는가./재색을 겸비한 그대 이제는 보기 힘드니/봄바람 다스리는 자도 모두 그대만 못하구나(萬里橋邊女校書 枇杷花裏閉門居 掃眉才子干今小 管領春風總不如)…라고 하며 사모의 심정을 그렸다. 설도가 기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리를 다했을까. 청대淸代 건강乾降 연간에 성도成都 통판通判 왕준汪雋(?)은 이 시를 벽도정?濤井의 돌비석에 새겼고, 그 비석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이는 설도가 당시 대단한 여류시인이면서 명기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 아닐까. 원진 역시「설도에게(寄贈薛濤)」라는 시를 통해…임의 말 아름답기가/앵무새 입술을 훔친 듯하고/문장은 봉황의 털을/나눈 듯하다(言語巧倫鸚鵡舌 文章分得鳳凰毛)…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설도는 그런 원진에게 시를 보내어 정을 통했다. 원진보다 10여 살 연상의 여인. 설도가 원진을 만난 시기는 이미 중년의 나이를 넘긴 때였다. 특히 설도의 시 중에는 이별 노래의 연작이 대단히 유명하다. 수많은 남자들과의 짧은 만남, 그리움과 원망, 이별의 슬픔들이 여기에 녹아 있다.    설도는 시를 지어 종이에 적어서 틈틈이 여러 연인들에게 보내곤 했다. 지극한 정성이 깃든 시를, 그 종이는 자신이 직접 만든 붉은 색종이였다. 그리고 당시 이 종이를 ‘설도전薛濤箋’이라고 부를 정도로 이름을 떨쳤다. 비록 비천한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자기 관리에 있어 충실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한 평생 가정을 가져 보지 못하고 혼자서 살다간 여인, 그러나 많은 문인이나 풍류객들과 시문을 주고 받으며 자유 분망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만년에는 기적妓籍에서 나와서 완화계에 은거하며 지내다가 여도사로 변하여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연인 중 마지막이었던 단문창이 설도의 묘를 썼다고 전해지고 있다.       설도의 생몰년대나 사적이 각기 다르게 기록되어 있음은 기생이라는 평범하지 못했던 비운의 결과가 아닐까. 지금도 성도에는 설도정이라는 우물이 있어서 이 우물에서는 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붉은 종이, 설도전도 이 물로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설도의 시는 주로 남자들과의 음풍농월, 자유로운 사생활, 그런 반면에 신세 한탄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을 담고 있다.   봄날의 그리움 (춘망사사수春望詞四首)   花開不同賞 花落不同悲 欲間相思處 花開花落時   攬草結同心 將以遺知音 春愁正斷絶 春鳥復哀吟   風花日將老 佳期猶渺渺 不結同心人 空結同心草   那堪花滿枝 飜作兩相思 玉箸垂朝鏡 春風知不知                      * 결동심結同心 : 중국 고대에 사람의 징표로 비단 띠를 허리에 두르는 것.                      * 지음知音 : 자기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한 친구로 그리운 임을 뜻함.                      * 옥저玉? : 옥으로 만든 젓가락으로 미인의 눈물에 비유.   꽃 피어도 함께 즐길 수 없으며 꽃 져도 함께 슬퍼할 수 없어라 묻고 싶구나 어디에 계시는지 꽃 피고 꽃 지는 이 계절에 사무치게 그리운 마음 임에게 전하려했던가 봄날 그리움을 이제는 접으려하니 저 꾀꼬리조차 서글피 지저귀는 구나 바람에 꽃은 시들고 또 시드는데 만날 기약은 아득하기만 하구나 임과 함께 사랑 나눌 수 없어 실없이 홀로 이 마음 달래본다 날마다 방울지는 쓰라린 눈물을 살랑대는 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모질게 추운 겨울이 지나고 어느덧 봄날을 맞이하여, 피고 지는 꽃을 바라보면서 사랑과 그리움의 정취를 읊은 시다. 예나 지금이나 시인들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사계 중에서도 특히 가을을 많이 읊었고 다음으로는 봄을 많이 읊었다. 가을은 주로 낙엽을 보면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삶의 유한성에 대한 우수와 고뇌를 읊었다면, 봄에는 인동忍冬 내지 염정과 그리움을 주로 읊었다. 설도는 이 시에서 그리움, 외로움, 회한, 실망, 비애 등 다양한 심경을 그렸다. 자연현상을 빌려, 봄날에 꽃이 피고 지고, 새가 지저귀고, 봄바람이 살랑대는 변화 속에 투영된 설렘이 기약 없이 떠난 임, 그리움의 대상과 아울러 절대고독을 고조시킨다. 이 시는 상당하게 감성에 빠져 있는 듯하다. 보들레르(1821~1867, 프랑스 시인, 소설가)의 말을 빌리자면, 아동과 회복기의 환자와 예술가가 공통적으로…‘사물에 대하여, 지극히 사소하게 보이는 것까지도, 생생하게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서 모든 것이 새롭게 본다고 했다. 그래서 감성은 오관을 통해 사물의 체험을 생생하게 느끼는 데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서의 능력이라기보다 감각적 체험의 능력이다. 진정한 시인은 이성과 감성, 지성과 감각이 혼합된 심상을 지녀야 한다. 이 시는 지나친 감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만 비애만 증폭시킨다.   연못가 연정 (지상쌍조池上雙鳥)   雙樓綠池上 朝暮共飛還 更憶將雛日 同心蓮葉間   푸른 연못가 오리 한 쌍 아침저녁 함께 노닙니다   아기오리 탄생할 날 생각하고 생각하며 연꽃 사이에서 마음을 함께 합니다.    연못가에서 노는 한 쌍의 정겨운 오리를 바라보며 자신의 외로움과 기생으로서의 앞날을 탄식하며 읊은 시다. 설도는 많은 남성을 상대하면서 지내던 신분이라, 오직 한 남자만 섬기며 살아가는 여염집 여성들과는 사뭇 다른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대수롭지 않은 미물들도 모두 제 짝을 이루는데 설도는 그렇지 못하다.…아침저녁/함께 노닙니다…에서는 부러움이 가득 찬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쌍의 오리보다 더 못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자탄하듯 후회가 서려있기도 하다. 물가에 오리도 보금자리를 틀고 제 새끼를 낳고 기를 수 있는 처지에 비해 설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님을 탄식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여느 부부들처럼 정녕 살가운 가정을 갖고 싶은 것이다.    정상적인 인생살이는 결혼을 통하여서 생명과 삶의 구실을 실천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천도천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예기禮記』에,…‘혼례는 모든 문화와 예절의 근본’…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말하는 예禮는 내면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도리지만 설도에겐 먼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는 곤순坤順의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여성들을 부러워하는 심리가 밑그림으로 깔려 있다.    능운사 (賦陵雲寺二首)   聞設凌雲寺裏苔 風高日近絶織埃 橫雲點染芙蓉壁 似待詩人寶月來   聞設凌雲寺裏花 飛空撓噔逐江斜 有時鎖得嫦娥鏡 鏤出搖臺五色霞                      * 능운사凌雲寺 : 사천성 樂山縣에 있는 절.                       * 상아0娥 : 달 혹은 달에 사는 선녀.                      * 보월寶月 : 당 개원 때의 詩僧으로 無畏法師와 더불어 불경을 번역했다고 함.                      * 요대搖臺 : 중국 신화에 나오는 곤륜산 위에 있는 단상. 그곳에서 신선이 살고 있으며 해와 달이 나온다고 함. 여기서는 능운사 달빛 아래 흩날리는 꽃을 형용하고 있음.   능운사의 이끼 센바람 따가운 햇살에 온갖 먼지 털어낸다 가로 놓인 구름 부용벽을 물들이고 시인 보월을 기다리는 듯하다   능운사의 꽃 하늘에 날아 비탈길 감아 돌아 강가로 달려 간다 때로는 달빛 거울 잡아 놓은 듯하고 하늘의 오색 무지개 새겨 놓은 듯하다       세월 속에 단아한 자태를 지니고 있는 능운사의 경내를 둘러보다가 임의 숨결을 느끼면서 읊은 시다. 능운사는 설도가 사모하는 장수, 위고가 완성한 절이다. 그래서 설도에게 있어 능운사는 예사로운 절이 아니다. 능운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임, 그 자체이다. 위고의 흔적 속에 그의 체취까지 느껴지기 때문이다. 능운사의 이끼, 구름, 꽃, 달, 바람 등등은 영원히 버릴 수 없는, 아주 소중한 사랑의 일부이다. 그리움이고 기다림이며 속삭임이다.…때로는 달빛 거울/잡아 놓은 듯하고/하늘의 오색 무지개/새겨 놓은 듯하다…에서 설도는 능운사에 압도당했다. 그녀가 능운사를 대함은 곧 오매불망寤寐不忘, 그 꿈이 현실 같기 때문이다.    비유比喩는 시인의 특수한 직관능력이다. 직관이 없이는 시를 쓸 수가 없듯이 그 직관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이미 부여받은 천부적 소질이다. 그리고 시에 있어 여타 기교는 여벌이다. 문법과 수사학修辭學을 파고든다고 모두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사학은 말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말을 꾸미는 방법에 불과하다. 그래서 수사학은 천재의 능력이 아니고 누구든지 배우면 터득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시를 가르친다고 해서 시인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수사학적 비유는 명백한 유사성類似性을 근거로 하여 한 낱말을 다른 말로 대치代置하면 끝나는 것이지만, 시작 비유는 그러한 대치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 낱말이 각각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의미의 배경이 그대로 강하게 느껴지도록 남아 있다. 시「능운사」는 이 점이 돋보이는 수작秀作이라고 하겠다.      멀리 계신 임에게 (증원이수贈遠二首)   芙蓉新落獨山秋 錦字開緘到是愁 閨閣不知戎馬事 月高還上望夫樓   擾弱新蒲葉又齊 春深花落塞前溪 知君未轉秦關騎 月照千門掩袖啼               * 금자錦字 : 비단에 짜 넣은 글씨로, 아내가 남편을 사모하여 띄우는 편지를 뜻함.                * 융마戎馬 : 전쟁, 軍事.                * 진개秦開 : 진나라의 관문을 뜻함. 이 시에서는 장안 일대를 듯함.   연꽃 피고 지니 촉산에 가을 젖어 들고 비단 편지 열어보니 온통 그리움뿐 입니다 아녀자 전장의 일, 알 수 없어 달 밝은 밤 망부루에 오릅니다   여린 부들 새싹 가지런히 돋아 오르고 봄 깊어 떨어진 꽃 앞개울을 막았습니다 임은 여직 변방에서 돌아올 수 없으니 달빛 가득 문에 비출 때 눈물로 옷소매만 적십니다   설도는 많은 남성을 임으로 삼았다. 그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게 되면 으레 붉은 색종이나 비단에 시를 지어 보내곤 했다. 여기서는 인용하지 않았지만, 설도의 시에 있어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연작시「이별노래, 十離詩十首」는 수많은 짧은 만남 속에서 이별이 설도의 생활이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시는 원진元?에 대한 사랑을 그린 시다. 10가지의 소재로 10가지 이상의 비유로 간절함과 쓰라림으로 전율하고 있는 여인의 심중을 그렸다. 설도가 중년에 마난, 원진은 10 살이나 어린 연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나이를 뛰어넘어 절실한 사랑에 빠졌다.    원진이 809년(元和 4년)에 지방의 감찰어사로 파견되었을 때, 설도를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원진은 조정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여러 곳으로 자리를 옮겨 다녔기에 둘은 이따금 만나곤 했다. 서로 이성에 대한 각별한 심정과 시를 주고받았다. 위 시는 설도가 많은 임들 중에 원진을 유달리 사랑했고, 그에게 보낸 시 중에서 가장 애틋한 그리움을 담은 작품이다.…비단 편지 열어보니/온통 그리움뿐 입니다.…에서는 여직 참고 견디어온 그리움이 활화산의 마그마처럼 뜨겁게 용솟음치며,…달 밝은 밤/망부루에 오릅니다…그 외로움을 달래려고, 임을 기다리던 망루에 올라, 임을 향해 바라본다. 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려도 임은 오지 않는다.…봄 깊어 떨어진 꽃/개울을 막았습니다.…는 가까이하길 소망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음을, 탄식괴 체념으로 답답함을 대신한다.…달빛 가득 문에 비출 때/눈물로 옷소매만 적십니다…에서는 감정이 고조되어 눈물로 변한다. 이 시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외로움의 한이 짙게 서려 있다.    가을 샘 (추천秋泉)   冷色初澄一帶煙 函聲遙瀉十絲弦 長來枕上牽情思 不使愁人半夜眠   서늘한 빛 맑은 샘에 한 줄기 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열 줄 현의 그윽한 소리가 아득히 울려 퍼집니다.   베갯머리에 길게 드리운 한없는 그리움에 임 그리워 긴긴 밤 잠 못 이뤄 뒤척입니다    쓸쓸한 가을밤, 끊임없이 솟아나는 맑은 샘,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는 설도는 또다시 외로움에 젖어든다. 샘에서는 서늘한 기온에 아랑곳하지 않고 , 마치 설도를 비웃기나 하듯, 수증기를 피운다. 허허한 심정을 지우기 위해 거문고를 키니, 그 소리마저 구슬프다. 잠자리에 들지만 머리맡엔 그리움만 가득하다. 도대체 임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외로움을 달랠 수 없는데. 잠을 청해도 그리움이 몸부림치게 만든다. 이 시는 설도 자신의 외롭고 허전한 심경을 ‘가을 샘’에 비유하여 회화적繪畵的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긴긴 밤, 독수공방에 젖은 심경을 잘 드러내고 있다. 대개 시작에 있어 어떤 사물이나 상황도 본질적으로 어떤 정서의 공식이 아니라, 시인이 그 사물이나 상황을 표현하는 방식에 의해 그 정서적 의의와 효과를 얻는 것이 아닌가.        Ⅳ.  어현기魚玄機 역시 생몰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략 함통咸通 연간(844~868)으로 짧은 생애를 살다간 여류시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는 유미幼微, 별명은 혜란彗蘭인 어현기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남달랐다. 그녀는 미천한 집안의 출신이 아니었으나, 일찍 이억李億의 소실로 들어갔다가 본부인과의 마찰로 인하여 결국 이억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리고 도교의 여도사가 되었다. 하지만 유명무실한 도가에 불과했다. 그리고 수도생활에 관심도 없었다. 다만 여러 문사들과 풍류객 등과 교분을 나누면서 자유 분망한 생활에 여념이 없었다.    어현기는 많은 남성들 중에 특히 온정균溫庭筠(812~·870)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온정균은 이름은 기岐, 자는 비경飛卿이며 산서성山西城 출생이었다. 그가 여덟 번 팔짱을 끼면서 8운시 한 수씩 짓는다하여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온팔우溫八又’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는 화미염려華美艶麗한 만당晩唐 시풍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가사 창작에도 손을 댔다. ‘사詞’라 불리는 새로운 운문 양식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웃 여인에게 (증린녀贈隣女)   菓日遮羅袖 愁春瀨起粧 易求無價寶 難得有心郞 枕上潛垂淚 花間暗斷腸 自能窺宋玉 何必恨王昌          * 송옥宋玉 :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굴원屈原과 더불어 초사의 대가로 꼽힘. 후대 사람들이 실의한 문사文士를 비유할 때에 종종 사용함.          * 왕창王昌 : 당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임’을 상징하는 말로, 어느 시대 어떤 인물인지 불분명함.     가려진 해 소맷자락 덮고 근심스런 봄날 게을리 일어나 단장해본다 귀한 보석도 쉽게 구할 수 있는데 마음에 드는 임은 만나기 어렵구나   베갯머리에 남몰래 흘린 눈물 꽃잎 사이 어둡게 드리운 서러움뿐 스스로 송옥을 넘겨다본 탓인지 어찌 임을 탓할 수 있겠는가    이 시는 일명, ‘이억에게 부치는 시「기이억원외寄李億員外」’라고도 한다. 어현기가 이억(자는 子安)의 첩으로 살다가 이억의 본부인의 질투로 인하여 결국 버림을 받았다. 중국의 뿌리 깊은 사상 중에 아녀자가 질투를 하는 것은 시집온 아내라도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유교사상에서는 칠거죄악七去罪惡 중, ‘투기가 심하면 보낸다[妬去]’는 것이다. 삼종지도三從之道, 역시 남자는 양陽으로 보고 여자를 음陰으로 보는 사상을 바탕을 한 것이어서 남녀평등은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시대였다. 서양의 물질주의, 무력주의, 개인주의에 반하여 동양의 전통적 부녀관婦女觀이나 부녀도婦女道는 가족주의로 해석되었고 이를 우주의 도리道理, 즉 천도天道로 생활화를 강요한 것이었다.    어현기는 불행한 여건에서 가정의 버림을 받아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자의든 타의든 도교의 여도사를 자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격한 가족주의 사회로부터 외톨이가 되어 자신의 처지를 자탄하는 시를 읊었다. 일찍이 초왕에게 버림받았던 송옥을 자신에 대칭시키고, 왕창이란 역사속의 연인을 이억에 대칭시켰다. 이렇게 사실적 비유로 차명借名한 기교야말로 현대의 여류시인들의 시보다 훨씬 앞선 기교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 시에 나타난 송옥은 시의 내용이나 형식이나 모든 면에서 굴원의 계승자로 불린다. 굴원(BC 343?~283?)은 중국 전국시대의 시인이다. 초회왕楚懷王, 경이왕頃裏王때, 벼슬을 하다가 참소를 당하여 방랑생활 뒤에, 멱라강(호남성 상음현)에 빠져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시는 대개 울분의 정이 넘쳐 고대문학 중에서 보기 드문 서정성抒情性을 내포하고 있다.   늦은 봄날, 벗에게 (모춘유감기우인暮春有感寄友人)   鶯語驚殘夢 輕粧改淚容 竹陰初月薄 江靜晩煙濃 濕觜衡泥燕 香鬚采蕊蜂 獨憐無限思 吟罷亞枝松                           * 아지송亞枝松 : 소나무 가지의 끝.   꾀꼬리 노랫소리 단꿈을 깨우고 살며시 분바르며 슬픈 얼굴 고쳤지 엷은 초승달에 대나무 그림자 고요한 강가 저녁연기 가득하고 촉촉한 부리 진흙 머금은 제비들 향기로운 꽃술에 꿀을 따는 벌들 쓸쓸히 한없는 생각에 빠져 소나무 가지만 흔들어보았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어김없이 봄의 정취를 접하면서, 새삼 세월의 무상함 속에 자신의 무료함을 대치시켜 읊은 시이다. 어현기의 눈에 비친 몸은 시작이고 분주한 계절이다.…꾀꼬리소리, 꿀을 따는 벌, 초승달, 대나무 그림자, 해질 무렵의 강변, 진흙 머금은 제비, 향기로운 꽃술, 등 모두가 제 일을 찾아서 힘차게 움직이는 데 유독 어현기만이 이렇다 할 소일거리가 없이 외로움을 탄다. 일종의 심리공황일까. 그러한 봄은 더더욱 심란해진다.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전율하고 있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이며 신新프로이드파派라고 불리는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탐욕을 구성하는 것이 어떤 것이든 탐욕스러운 인물은 결코 충분히 가질 수는 없으며, 만족할 수가 없다. 공복감에 의한 육체의 생리적 욕구 충족으로 생겨나는 포만감과는 대조적으로 정신적 탐욕[가령 육체를 통해 만족될지라도 모든 탐욕은 정신이다.]의 충족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완전히 충족시켰다할지라도 그것이 극복해야 할 내적 공허감, 권태, 고독, 우울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인간 심리에 대하여 극복하기 어려움을 설명했다. 이 시에서도 그러한 불만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봄의 정취를 잘 그려내고 있다.       가을밤의 원망 (추원秋怨)   自歎多情是足愁 澤當風月滿庭秋 洞房偏與更聲近 夜夜燈前欲白頭   정도 많고 근심도 많음을 스스로 탄식했더니 뜰 가득 불어오는 가을바람 달빛마저 처량하구나   방안 곳곳 임의 소리 스며있는 듯한데 밤마다 등불 앞에 흰머리만 느는 구나         여름철 무성했던 푸름이 가을에 접어들어 나뭇잎 붉게 물들어 떨어지니, 사뭇 서늘해져 쓸쓸하다 못해 울적하다. 그래서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탄식한다. 그간에 바람처럼 스쳐간 많은 남성들에게 정을 주고 사랑을 나누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없다. 스산한 가을바람만 주위를 감돌고 달빛마저 차갑게 느껴지는 밤, 어현기의 가슴 속은 온통 고독과 한으로 가득해진다.…달빛마저 처량하구나.…는 절망적인 소외감, 견딜 수 없는 한계상황에 접어든 자신의 심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어현기는 이억에게 버림을 받아, 어쩔 수 없어 도교의 도사가 되었지만 애당초 수도생활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었다. 오직 임에 대한 정념밖에 없었다.…방안 곳곳/당신의 소리/스며있는 듯한데…처럼 임의 체취가 그립다. 하지만 임은 보이지 않고 늙음만이 찾아든다.…밤마다/등불 앞에/흰머리만 느는 구나.…에서 세월 무상에 대한 절망과 초라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겨울밤, 그대에게 (동야기온비경冬夜寄溫飛卿)   若思搜詩燈下吟 不眠長夜怕寒衾 滿庭木葉愁風起 透幌紗窗惜月沈 疏散未閑終遂願 盛哀空見本來心 幽樓莫定梧桐處 暮雀啾啾空繞林         * 온비경溫飛卿 : 온정균의 자字. 이상은李商隱과 더불어 ‘온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유명한 시인.            * 오동처梧桐處 : 오동나무가 자라는 곳, 즉 햇빛이 잘 드는 땅.   슬픈 생각 밀려와 등불 아래 시 한 수 읊조린다 긴긴 밤 잠 못 들고 차가운 이불 두렵기 만하여라 뜰에 가득한 낙엽 근심어린 바람에 일어나고 창문 사이 휘장에 비추어지는 애석한 달빛만이 침침 하구나 흐트러진 마음 한가롭지 못해도 끝내 소원 이루었어라 솟아났다 무너짐이 부질없음을 이제사 내 보았어라  외로운 이곳 오동 깃든 따스한 곳 마음 정할 길 없어 짹짹거리는 저녁 새 소리만이 공허하게 수풀 사이로 맴 돈다    어현기는 깊은 관계를 맺었던 온정균을 멀리 떠나보내면서 읊은 시이다. 온정균이 장안을 떠나 지방으로 부임되어 가자, 이 시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전했다고 한다. 온정균은 이상은李商隱(813~858)과 더불어 이름 난 시인이다. 이상은은 자는 의산義山이며, 하남河南출생이다. 시풍詩風이 정밀 화려하여, 송대宋代의 초기의 화려한 서곤체시西崑體詩의 기본이 되었다. 그의 시의 특징은 역사 사실을 빌려 시사時事를 풍자, 영탄詠嘆하였고, 영탄과 영물詠物의 형식으로 자신의 불우를 우의寓意하였으며 ‘무제無題’란 시체를 개발하여 순수한 애정과 실연의 고통을 승화시켰기에 중국 시가사詩歌史에 있어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상은처럼 온정균 역시 ‘사詞’라 불리는 새로운 운문양식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사고 있다. 온정균은 이상은보다 한 살이 맣은 동시대 두드러진 시인이다.    어현기는 삭막한 겨울을 맞아 떠나간 온정균을 그리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외로움에 젖어있다. 그의 체온이 사라진 이부자리가 낯설고 무섭기까지 하다.…근심어린 바람에/…/애석한 달빛만 침침하구나.…에서 뼈저린 외로움을 토로한다. 무엇 하나 의탁할 것도 위로받을 것도 없는 황량한 공간, 어현기는 그 비정非情 속에 갇힌다. 어현기는 고독의 정점에서…마음 정할 길 없어…극심한 불안과 초조에 잠긴다. 임과 함께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자위하려고 하지만, 점점 상사병相思病은 깊어만 간다.         반가운 임 소식 (문이단공수조회기증聞李端公垂釣回寄贈)   無限荷香染暑衣 阮郎何處弄船歸 自慙不及鴛鴦侶 猶得雙雙近釣磯                  * 완랑阮郞 : 여기서는 이단공을 뜻함.     한없는 연꽃향기 여름옷을 물들이고 임은 어느 곳에 배를 묶고 돌아 오셨나   원앙 같은 부부 인연 맺을 수 없음이 부끄러워 쌍쌍이 낚시터를 맴돌고 있구나    앞서 인용한 어현기의 시 중에는 거개가 짙은 고독감과 소외감 그리고 한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나, 이 시는 반가움과 설레는 기쁨과 그리고 부끄러움이 뭉클하다. 애타게 기다렸던 임, 그는 어현기의 연인 중에 한 사람인 이영李?이었다. 이영은 장안 사람으로 시어사, 속칭 단공端公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어현기도 이야나 설도처럼 연인들이 많았다. 이영이 낚시터로 어현기에게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에 어린애처럼 마냥 설렌다.…한없는 연꽃향기/…/원앙같은 부부 인연…처럼 다감다정하지만 왠지 부끄러움마저 든다. 어현기는 이영에 대한 기다림과 흠모欽慕의 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Ⅴ.  동서고금, 남성이든 여성이든 인간은 개별적 존재이며 동시에 가족의 한 사람인 동시에 국가와 세계의 한 구성원이다. 안타깝게도 근세기 이전엔 동양사상에 있어 여성은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기보다 단순한 씨받이에 불과했다. 암울한 시대를 살다간 세 여류 시인이 남긴 흔적은, 모두 한 맺힌 사랑의 여운뿐이다.    고대 동양에서 이처럼 과격한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생겨나 많은 여성이 한 서린 일생을 보냈을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무제武帝(BC 141~87) 때, 어용학자 동중서董仲舒를 주목하게 된다. 광천廣川출신이며 호는 계암자桂巖子이다. 그는 춘추공양春秋公洋을 수학하여 하늘과 사람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했다. 무제는 동중서의 저서『춘추번로春秋繁露』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로 삼아, 과격한 남존여비 사상을 굳건히 하였다. 그러나 그의 과격한 남존여비 사상은 공자의 인애仁愛 사상과도 어긋나는 점이 많았다. 인륜지도人倫之道의 근본, 즉 공자는 인간의 본성을 인仁으로 보았다.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 사람다움이라는 뜻이다. 인을 행하는 방법은 효제孝悌로 나타나는데, 효는 어진 마음과 태도로 부모를 봉양하는 도리이고, 제는 어진 마음과 형제간에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교는 남성을 중심으로 한 도덕정치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므로 정치의 표면에 여성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가정이나 부부를 소홀히 보진 않았다.『시경詩經』의 일부가 왕비의 덕을 칭송한 시라는 점에서 더욱 아이러니컬한 뉘앙스를 풍긴다.    동중서는 노골적으로 남존여비 사상을 합리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이론을 주장했다. ‘귀한 것은 양이고 천한 것은 음이다.(貴陽而賤陰也)’라고 했으며, 또한 ‘장부는 비록 신분이 천해도 양적인 존재이고, 부인은 비록 신분이 고귀해도 음적인 존재다.(丈夫賤皆爲陽 婦人雖 貴皆爲陰)’라고 했다. 이렇듯이 가부장 중심의 가족제도가 확립됨에 따라 여성의 위치가 낮아지고 차츰 예속화된 제도가 악용되어 악한 사람들에 의해 굳어졌던 인습이었다. 굳이 동중서를 들추어 내지 않아도 중국에는 오랜 역사와 더불어 남존여비 사상이 생활 구석구석에 스며 있었다. 한자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기원전 10여 수세기의 은나라 때,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상용문자인 중국의 고유문자, 그 한자에서도 쉽사리 발견할 수가 있다. 몇 가지 그 예를 찾아보기로 하겠다.    한자의 ‘여女(계집 녀)’는 여자가 앉은 모양을 나타낸다. 그러나 소리와 뜻이, ‘너 여(汝)’, ‘같을 여, 쫓을 여(如)’와 같다. 여기서 ‘계집녀는 좇을 여의 뜻, 남자의 가르침을 따르고 좇는다.(女子如也 如男之敎也)’는 뜻이다. ‘모母(어미 모)’는 여자의 젖무덤을 그린 문자다. 자식에게 젖을 먹여 키우는 사람의 뜻으로, ‘기를 목(牧)’의 뜻과 소리가 같다. ‘부婦(아내 부)’는 여자가 손에 비를 들고 있는 모양을 나타낸 문자다. 그러나 소리와 뜻이, ‘복종할 복(服)’, ‘엎드릴 복(伏)’과 같다. 아내는 어른에게 복종하고 섬김을 주로 한다(婦, 主服事人者也), ‘처妻(아내 처)’는, ‘여자는 손에 비를 들고 집안일을 다스린다(妻者齊也 治內職也).’는 뜻이다. 이렇듯이 태곳적에 불평등한 부녀의 계율이 숨어 있는 문자가 아직도 통용되고 있으니 결코 웃을 일은 아닌 듯하다.    여도사였던 이야, 기생이었던 설도, 첩이 되어 살다가 버림받아 여도사가 되었던 어현기는 불행한 일생을 마쳤지만 그들이 남긴 시는 아직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지금까지 한시의 정형적인 5언 또는 7언으로 되어있는 세 사람의 많은 시 가운데 각각 다섯 편을 살펴보았다. 이들 시의 주제이자 공통분모는 무상한 계절의 변화와 그 속 화조월풍花鳥月風에 깃든 아주 특별한 외로움의 정한情恨이다. 이 정한의 질감은 겉보기엔 따스하고 부드러운 솜처럼 느껴지는 듯하지만, 실상은 차갑고 까칠까칠한 서리처럼 느껴진다. 이면에 숨어 있는 이미지는, 싸늘한 여심女心이 두껍게 깔려 있다.    임(특정 또는 불특정)을 향해 손짓하며 전율하거나 절규하는 듯 한 애상감哀傷感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각자의 목소리로 연모의 심정을 자유로이 드러낸다. 더러는 우아함과 온화함을 담은 정감에 젖어 있으나 대개가 회색 바탕에다 먹물로 채색되어, 안전감과 정지감에서 벗어나 독자로 하여금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시가 그들 생활의 일부이고 삶, 그 자체여서 불안으로 인해 균형을 상실한 탓일까. 웃음보다 울음이,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사랑보다 원망이 그들의 일상이었을까. 겉으론 화려했을지 모르나 그들의 삶이 낭만적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비애悲哀였으리라. 외려 단기간의 자유로움과 활기 넘치는 의욕으로 인해 죽음을 자초했을지도 모른다. 맞아 죽었다는 이야나 처형을 당했다는 어현기, 설도의 말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속단할 수는 없지만 그 당시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하여 경직된 관습을 허물기 위해 몸부림쳤던 중국 초유의 여권주의자는, 이야, 설도 어현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도 아니면 자신들의 의지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여성들이 아니었을까.    루마니아의 소설가 게오르규(gheorghiu, 1916~1992)는 수차례 한국을 방문했었다. 그는 ‘한국찬가韓國讚歌’라는 글을 통해, ‘지상에서의 시인의 운명은-암癌에 걸린 조개의 운명-과 같은 것’이라고 전제하고서, ‘마치 암에 걸린 조개만이 진주眞珠를 만들 수 있듯이, 일생을 신음하며 고통 겪는 이가 바로 시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는 그다지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시인들에겐 의미심장한 것이다. 바닷가 모래밭에 수없이 많은 빈 조가비들이 모래톱에 널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모르긴 해도 그중에 극히 일부는 암에 걸려 속앓이를 하지 않았을까. 정상이 아닌 이상한 분비물의 결정체인 진주를, 찬란한 슬픔의 시를 품지 않았을까.    소[牛]를 생각해 보자, 속앓이를 하면서도 성자마냥 조용한 소를, 담낭이나 담관膽管에 결석結石이 생겨 일어나는 병을…돌같이 단단한 고형물을…뜻하지 않게 담석증으로 고통을 받았던 소가 우황을 남기는 것처럼, 조개에서 진주 또는 소에서 우황의 성인成因이 심각한 아픔 속에서 잉태되었다면, 지금의 시인들은 얼마만큼의 고통 속에서 한 편, 아니 한 줄의 시를 성인하기 위해 전율하고 있는가. 아픔이 몽치고 굳어져 찬란한 구상球狀의 보물, 진주가 그처럼 아름답다면, 고뇌의 산물이자 정조의 결정체인 시는 적어도 목젖을 달래주는 정안수이거나 시대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시가 바로 시인의 보물이라면 시인은 모두 병들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187    [자료] - 중국 현대시의 일단면 /이육사 댓글:  조회:3643  추천:0  2017-02-05
  중국현대시의 일단면 저자: 이육사   1941년 6월 《춘추》(春秋)에 발표   이런 문제(問題)를 우리가 생각해볼 때 무엇보다도 먼저 머리우에 떠오르는 것은 중국(中國)의 현대문학(現代文學)이란 전면적문제(全面的問題)를 위선 염두(念頭)에 두고서 고찰(考察)해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혁명문학(革命文學)}에란 중국현대문학(中國現代文學)의 일대전환(一代轉換)이었던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민국 사십년(民國 四十年)의 [五州事件]이 일어나기까지는 소위(所謂) [문학건설(文學建設)]의 시세였으므로 자연히 기교방면만을 중시하게 되었지만 이때부터는 문학이란 그 자체의 내용이 요구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때까지는 로-만티즘의 단꿈을 그리며 상아탑 속에 들어앉어 한일원(閒日月)을 노내던 문학인들도 이 시대적 격류(激流)에 휩쓸려서 십자가두(十字街頭)로 걸어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신문학건설의 시대로 올라가서 시대 시(時代 詩)의 발전과정을 더듬어보는 것이 현대중국시단(現代中國詩壇)을 이해하는 첩경일 듯 하다.   그러면 시대 중국시는 그 발전과정에 있어 어떠한 길을 밟어왔는야하면 먼저 시체(詩體)를 파괴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이절의 산문이 사육병체(四六騈體)를 무시한 것과 같이 현대시는 이때까지의 중국시가 가지고 온 생명이며 전통인 오언칠률(五言七律)의 형식을 완전히 말살하는데 있었다. 시체(詩體)의 해방이란 중국의 신문학건설의 초기에 있어서 주요한 문제의 한 개였던만큼 신믄딘에서 그 생장도 소설이나 희곡에 비할여 훨씬 더 빨랐다. 그러나 그 당시의 신시즉백화시(新詩절卽白話詩)는 한 개 작품을 볼때는 어느것이나 유치한 것이였으니 그 예를 백화시(白話詩)의 수창자인 호적박사(胡適博士)의 [상시집(嘗試集)]에서 보거나 그뒤에 나온 호회침(胡懷琛)의 [大江集]이나 유대백(劉大白), 유복등(劉復等)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다 어찌 어색한 것이 마치 청조관리(淸朝官吏)가 대례복(大禮服)을 입고 여송련(呂宋煙)을 피우듯 어울리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공전무후한 태동기를 지나오면서 강백정(康白情), 유평백(愈平伯), 왕정지(汪靜之), 곽말약(郭抹若) 등의 무운시라거나 사완영(謝婉瑩), 종백화(宗白華), 양종대(梁宗岱) 등의 소설형식이 이 시대의 대표 작품이었고, 세체해방(詩體解放) 후에 가장 성공한 작품들인데도 불구하고 비록 오언절률의 시체는 파괴했다고는 할지언정 옛날부터 내려오던 사(詞)에 대한 취미(趣味)를 완전히 탈각하지는 못한 혐의는 사람마다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호씨의 [상시집]은 백화(白話)로 써진 최초의 시집인만큼 현대 중국시 남본(藍本)인 것이고 이와거의 동시에 시단에 등장한 것이 호회침(胡懷琛)의 [대강집(大江集)]이였는데 이것은 백화로 서진 구체시(舊體詩)라 문제가 되지 않으며 유대백은 [舊夢]이란 처녀시집이 있고 그 뒤 [풍운(風雲)] [화간(花間)] [홍색(紅色)]을 써서 4부작으로 되었으며 그 외에도 [중국문학사]가 있고 그 후 복단대학문과주임(復旦大學文科主任)을 거쳐 국민정부 교육차장이 되고는 시와는 인연이 멀어졌으며 유복은 [양편집(楊鞭集)] [와부집(瓦釜集)] 등의 잡품이 있으나 원내가 읍리대학의 문학박사인 만큼 국립북경대학중법대핟의 교수, 주임, 원장 등에 영달하였고 본시 그 작품보다도 그는 음성학의 전문가인만큼 그 방면의 공헌이 더 큰 것이다.   그러면지금부터 보다더 현대시를 진보시킨 무운파를 찾아보면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강백정, 유평백으로 강은 {초아(艸兒)}를 유는 [동야(冬夜)]를 내놓은 것이 이 파의 최초의 간물이고 또 시단에서 상당히 중시되었다.   그리고 이들 중에도 왕정지와 곽말약은 서정시로서 유명했는데 이 두시인은 어느 점으로나 대차적인 처지에서 볼 때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과말약의 [여신(女神)]이 전체의 운명을 위하여 모든 정세를 기울이는데 비해서 왕정지의 [혜적풍(蕙的風)]은 대담하게도 한 개인의 청춘에 정화를 분출하는 것이었는데 이 두 시인의 성공 불성공은 차치하고 하여간에 당당한 시대의 폭로자였다는 점에서 볼 때 어느 때나 공통된 [하-트]의 소유자였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와 무운시라는 말이 났으니 한말 더하면 둘것은 심윤묵(沈尹默)(1883)의 존재인 것이다. 그는 절강성오흥현 사람으로 나종북대 교수로 평대학교장까지 지냈지만은 그의 작품이 민국 6년에 [월야(月夜)]로 출판되었을 때 신체시로서 상당히 평가될 조건이 구비된 것이었으며 실로 무운시의 최초의 출판물이었다. 그리고 지금이야 유명한 조작인도 그 시대는 시를 써서 [소하(小河)]라는 당대의 명작을 발표하였고, 시집으로 [과거적 생명(過去的 生命)]이 있는 것은 기억해 둘바이나 그는 적시 유-모러스한 소작문에 장처가 있는 것이며 일본문학연구가로서 생명이 더 긴 것이다.   그 당시에 소시를 쓰던 사람으로는 누구보다도 윤수시인(閏秀詩人) 사영심(謝 心)을 찯아야 한다. 그는 1903년에 복건성 민조에 나서 연경대학을 마치고 아메리카의 웰즈레-대학인가 단일때 [신보부간(晨報副刊)]에 [기소독자]라는 아동통신문을 써서 유명해뎠고 시집 [춘수(春水) [번성(繁星)]이 있으며 때로는소설도 쓴다고 하나 본일이 없고 그의 고백에 들으면 자신 인도 시성 타-골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는 것이다. 시인으로 다른 시인의 영향을 받는 것이 옳고 그은 것은 그 자신이 아닌 이상에 말할 바 아니나 기왕 영향의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바로 파에 속하는 종백화야 말로 그 고백과 같이 [유운(流雲)]에도 꾀-테의 냄새가 적지않게 발산하는 것이다. 그런만큼 사장의 청신함을 높이 헤아리는 수 있으나 격조가 왕왕히 진부함은 이 시인이 얻는 것도 적지 않는 대신 잃은 것도 컸었다. 그 다음 [훼멸(毁滅)]과 [사적( 跡)]을 세상에 보내서 알려진 주자청(朱自淸)이 있다는 것은 잊어서 안될것이다···(이 시인을 위해서는 후일 구체적인 것을 써 볼가한다.)   이 시기에 누가 중요하니 어떠니해도 중국의 현대시를 시로서 완벽에 가깝도록 쓴사람은 서지마(徐志摩)는 (1899-1931) 절강성 해영현에 낳고 일찍 영국검교대학을 마치고 국립중앙대학과 북경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했고 작품으로는 [지마적 시비(志摩的詩翡)] [취냉적 일야(翠冷的 一夜)] [猛虎集] [雲遊集] 외에 산문집으로 [낙낙(落落)] [자부(自部)] [파리적인조(巴里的麟爪)]가 있으며 기부희곡(幾部戱曲)과 번역이있고 민국이십년 가을 상해서 북경으로 오는 도중 제남서 비행기의 고장으로 떨어져죽자 전국문단으로부터 비상히 애석해마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그의 생전에 있어 남들이 지목하기를 지마(志摩)는 한소능로 중국신시단을 정정한 [시철(詩哲)]이라고 했고 현대시의 동양이라고 한 것은 비록 과분한 평가일른지 모르나 그의 현대중국시단에의 위치는 누구나 부인치 못 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중국의 현대시단에 남긴것도 그 내용방면보다는 형식과 기교방면에 있는 것이니 용운이나 비예에 있서 신규율을 창조한 헌(獻)만이라도 중국시단 전체로 볼 떄에는 실로 역사적 공헌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상방면으로 보면 마침내 유한시인을 면치못했다는 것은 그의 생활환경과 사회적 지위가 그로하여금 한걸음도 실제사회의 진실면에 부다치게 못하고 개인주의 고성속에 유한시키고만 것이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보면 현실의 조대에 말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왕왕히 동정과 연민을 볼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이 시인의 환각만이 아니고 중국사회의 그 시대적 성격과 문단전체의 동향을 짐작해 볼때 이 시인의 휴머니티를 재여 볼 수 있는 것이다.   拜 獻   산아 네 웅장함을 찬미해서 무엇하며바다 네 광활함 을 노래한들 무엇하랴 풍파 네 끝없는 威力도 높이 보진 않으리라 길가에 버려지면 말할곳도 없는 고아과수(孤兒寡守) 눈속에도 간신히 피려는 적은 풀꽃들과 사막에선 돌 아가길 생각해 타죽은 어린제비 그를! 우주(宇宙)의 온갖 이름 못활 불행(不幸)을 어엽비해 나는 바치리 내 가슴속 뜨거운 피를 바치련다 힘줄에 흐르는 피와 영대(靈臺)에 어린 광명(光明)을 바처 나의시(詩)-노래 가락도 요량(  )한 그동안 만이라도 하늘밖에 구름은 그를위해 질기운 비단을 짜리 길-다란 무지개 다리가 이러나고 그 들로 끝끝내 소요(逍遙)할수 있다면야 요량(  )한 노래가락에 끝없는 괴롬을 살어지게하리.     再別康橋   호젔이 호젔이 나는 돌아가리 호젔이 호젔이 내가 온거나같이 호졌이 호졌이 내손을 들어서 서(西)쪽 하늘가 구름과 흐치리라 시내ㅅ가 느러진 금빛 실버들은 볕에 비껴서 신부(新婦)냥 부끄러워 물결속으로 드리운 고흔 그림자 내맘속을 삿삿치 흔들어 놓네 복사 위에는 보도란 풋 나문잎새 야들야들 물밑에서 손질 곧하고 차라리 「강교(康橋)」 잔잔한 물결속에 나는 한오리 그만 물품이 될가 느름나무 그늘아래 맑은 못이야 바루 하늘에서 나린 무지갤러라 부평초 잎사이 고히 새나려와 채색도 영롱한 꿈이 잠들었네 꿈을 찾으랴 높은 돋대나 메고 물풀 푸른곳 따라 올나서 가면 한배 가득히 어진 별들을 실어 별들과 함께 아롱진 노래 부르리 그래도 나는 노래쫓아 못부르리 서러운 이별의 젓대소리 나면은 여름은 버레도 나에게 고요할뿐 내 가는 이밤은 「강교」도 말없네 서럽듸 서럽게 나는 가고마리 서럽되 서럽게 내가 온거나같이 나의 옷소맨 바람에 날여 날리며 한쪽 구름마저 짝없이 가리라 (年十一月六日中國海上)   이 이상더 지마를 역해본댔자 그것은 나의 정력의 허실외에 아무것도 아니란 것은 원래에 이 시인의 묘미가 백화를 구라파의 언어사용법과 같이 부단히 단어를 두치해 섰는데있고 백화로 읽을 때에 음률과 격조를 우리말로 이식하기는 여간 곤난한 것이 아니다. 이만하고 두기로하며 본의로는 좀더 많은 작품을 역해서 한사람의 시를 완전히 이해토록 하고저했으나 필자의 시간과 생활이 그다지 여유가 없는 것과 재능이 부족함을 심사해두며 이 외에도 주상(朱湘), 변지림(卞之淋), 왕독청(王獨淸) 等 유수한 시인들의 중국현대시단에 남겨준 공적과 작품에 대하여 대개나마 소개해보려던 것이 뜻대로 되지못했으나 다음 기회에 미루기로하고 이 고(稿)를 끝내지 않는 것이다.   ---(四月二十五日夜於元出臨海莊)-----
186    "한반도의 반쪽 반도"의 현대시 문제점을 알아보다... 댓글:  조회:2674  추천:0  2017-02-05
한국 현대시의 문제점 / 임보 시인  > 2011         “한국현대시의 연원을 신체시로 잡는다면 그 역사는 100년이 됩니다.   한국 현대시는 그 동안 괄목할 만한 발전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시는 공전의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수천 개의 문예지들이 앞을 다투어 발간되고, 수만 명을 헤아리는 시인들이 등장하여 매일 수천 편의 작품들을 생산해 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어느 곳에도 한국처럼 왕성한 시단을 가진 나라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은 지금 시인 공화국으로 시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기현상은 이처럼 시를 생산하는 시인들은 많은데 시를 읽는 독자들은 별로 없다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 들러 시집 코너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수천 평의 광활한 공간인데 시집들을 진열해 놓은 서가는 겨우 둬 평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한쪽 귀퉁이에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시집들이 그렇게 푸대접받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찾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독자들이 시를 외면하는 것일까요? 시가 재미없고 따분한 글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시가 아름답고 감동적인 글이라면 사람들은 읽지 말라고 해도 밤을 새워가며 다투어 읽을 것입니다. 도대체 시인들은 북적대는데 시가 외면당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왜 이런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시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문제점들 때문인지 따져보도록 합시다.   첫째, 자유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문제입니다.   자유시는 정형시와는 달리 정해진 틀에 구속됨이 없이 자유스럽게 쓰는 글입니다. 그런데 ‘자유스럽게’에 대한 인식이 ‘제멋대로’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자유시는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것처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시는 애매모호한 글이고, 비문장적인 표현도 허용되므로 산문보다 쓰기 쉬운 글이라고 얕잡아보는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시인이 되겠다고 시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넘쳐난 것이나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이처럼 시를 쉽게 생각하고 달려든 사람들에 의해 쓰인 글이라면 보나마나 조잡할 것이 뻔합니다.   둘째, 운율에 대해 경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유시가 등장하면서 시도 운율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운율이 시를 구속하는 굴레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운율이 시의 구속물이 아니라 시를 능률적으로 지탱케 하는 장치라면 운율의 경시야말로 크게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래가 인간의 정서 함양에 얼마나 소중한가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노래가 우리의 심금을 울린 것은 가사의 내용에 앞서 그 가락 때문입니다. 가수들의 노래를 듣고 청중들이 열광하는 것은 가사의 내용에 감동해서라기보다 리듬에 심취해서인 것입니다. 리듬 곧 율동적 요소는 정서를 움직이는 동력입니다.  시에서의 운율은 독자들의 가슴을 흔드는 원초적 장치입니다. 정형시의 형태는 정형적인 운율을 담기 위해 그렇게 자리잡은 틀입니다.   정형시의 각 행들이 일정하게 배행(配行)된 것은 가지런한 운율을 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행의 길이가 운율의 형태를 결정하는 바탕이 됩니다. 긴 행에는 유장한 운율이 짧은 행에는 촉박한 운율이 담기게 마련입니다.  자유시의 배행은 정형시처럼 일정하지 않고 들쭉날쭉 자유스럽습니다.   따라서 자유시는 행마다 다양한 운율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형시는 작품 전체가 통일된 운율로 일관되지만 자유시는 다양한 운율이 혼재한 상태인 것입니다. 시인들이 아무리 운율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작품을 쓴다고 해도 운율은 스스로 행들 속에 자리를 잡습니다. 비록 산문일지라도 분행하여 배열하면 운율이 살아납니다. 그 운율이 조화와 균형을 지닌 미적 구조를 갖춘 것이든 아니든 간에 말입니다.   셋째, 소통을 거부하는 독선적 발언이 문제입니다.    모든 발언은 들어줄 상대를 전제로 해서 시도됩니다.   독백조차도 자신을 청자로 설정된 담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시가 독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난해성’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시를 가까이 하려 하지 않습니다. 현 시단에는 독자를 아예 무시한 독선적 발언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이해되기를 거부하며 쓰인 작품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심층심리를 작품화하려는 초현실주의의 시와 대상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무의미 혹은 비대상의 시들입니다. 여기에 크게 기여한 시인이 김수영 시인과 무의미시를 쓴 김춘수 시인입니다. 초현실주의의 시는 소위 자동기술법에 의해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와 상념들을 아무런 여과도 없이   그대로 쏟아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는 질서도 논리도 규범도 없습니다. 어떠한 윤리의식이나 이념의 규제도 받지 않은 혼돈된 언어의 토사물인 셈입니다. 그야말로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 일방적인 배설입니다.  무의미시의 시 쓰기는 미술에서의 비구상화가 그렇듯이 대상으로부터의 자유를 모색합니다.   그러나 언어 구조물인 시는 비구상화처럼 대상을 완전히 떠날 수 없으므로 대상 자체를 변형시키거나 이질적인 대상들을 낯설게 결합시킴으로 관습적인 기존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합니다. 이 역시 의도적으로 수신자와의 의사소통을 거부하는 일방적인 발언입니다. 오늘의 한국 현대시가 독자를 무시한 독선적 발언들로 넘친 것은 앞에 얘기한 두 경향과 더불어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서구적 풍조의 영향 때문이라고 판단됩니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지만 시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자꾸 모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시문학의 지평을 넓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가 긍정적인 것이 아닐 경우엔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자신의 시를 세상에 내놓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할 때는 내놓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시라야 합니다.   넷째, 아름다운 생각을 담던지 아름다움을 표현해야 예술의 반열에 선다고 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만스런 것들에 대한 비난, 질시, 혐오의 감정을 노래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이를 시정하기 위해 규탄, 선동, 저항의 수단으로 시가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격한 감정을 노래하는 경우라도 그것이 시라는 이름의 글로 불리기를 바란다면 아름다움, 미적장치를 통하여 표현해야합니다. 시는 격렬한 감정을 그대로 쏟아낸 구호나 격문이나 욕설과 같은 생경한 글일 수는 없습니다.   위트 풍자 역설 비유 상징 등 시적 장치의 여과를 통해 순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속을 벗어나 시의 품격을 갖춘 글이 되고, 동양의 전통적 시관인 소위 온유돈후(溫柔敦厚)를 지니게 됩니다. 유연함이 시의 덕목이며, 힘이며 또한 아름다움입니다.  요즈음 자극적인 감정을 중요시 하는 작품이 많은 것 같습니다.   미사여구를 많이 써서 지나치게 억지로 치장해서 꾸민 시는 격을 잃게 됩니다. 시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창조해내는 아름다움을 찾아내야 합니다.   다섯째, 시정신의 퇴락이 문제입니다.   시인의 의도, 시속에는 우리의 욕망이 담겨 있습니다. 훌륭한 시인의 유명한 작품에 담겨있는 욕망은 세속적인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것은 부귀나 명리를 지향하지 않는 맑고 깨끗한 승화된 욕망입니다. 진․선․미를 추구하고 염결(廉潔)과 절조(節操)와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입니다. 이는 우리의 전통적인 선비정신과 상통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이 ‘선비정신’을 이상적인 시정신으로 삼고자 합니다. 좋은 시는 시정신 밑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무의미 시를 쓴 김춘수 시인은 시정신 같은 것 생각 안합니다.   김춘수 시인이 2001년 현대시학 1월호에 건건녹초(蹇蹇錄抄)를 발표했는데 ‘시라는 것은 언어를 잘 다루는 기술만 있으면 된다.’라고 했습니다. 다음호에 나는 ‘어디 그럴수야 있습니까.’라고 반박 글을 냈지요. 3월호에 나의 반박 글에 대한 답으로 다시 김춘수 시인은 속건건녹초(續蹇蹇錄抄)를 발표했어요.   다음에 재반박 글 을 써놓고 발표하려다 원로시인에게 인사가 아닌 것 같아 접어두었다가 '미지의 한 젊은 시인에게'라는 나의 시론집에는 발표를 했지요. 시는 언어의 정련 못지않게 시정신의 정련을 필요로 합니다. 좋은 시를 쓰려면 품격을 닦고 수련하여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 요점은  현재 우리 시단을 시인이나 작품의 생산량으로 보아 공전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시의 전성기라고 하면서   오늘의 시가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것은 ‘난삽성’ 때문이라고 보았고, 그 난삽성의 요인을 다섯 가지 입장에서 비판했습니다.  첫째, 자유시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시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는 폐단입니다.   그리하여 함량미달의 조잡하고 불성실한 작품들이 생산됩니다.  둘째, 운율에 대한 등한시 하는 문제입니다.   운율은 시를 흥겹게 하는 무기인데 이를 소홀히 하여 시에서의 감동성이 상실되었습니다.  셋째, 독선적 발언이 문제입니다.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은 일방적인 발언이 시를 난해하고 역겹게 만들어 독자들로 하여금 시를 멀리하게 했습니다.   넷째, 미의식에 대한 문제입니다.   미의식에 대한 무관심으로 예술성이 부족한 작품이 생산되거나 혹은 저급한 미의식으로 진실성이 결여된 가식적인 작품들이 생산되기도 합니다.  다섯째, 시정신의 퇴락입니다.   진 선 미와 염결 절조 친자연을 추구하는 선비정신을 이상적인 시정신이라 할 수 있는데 이의 쇠퇴로 말미암아 시의 위의가 실추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현 시단에도 시인의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역작과 수작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긍정적인 작품보다는 부정적인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많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거론했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현 시단은 작품의 풍요한 생산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감동적인 작품은 흔치 않아 보입니다. 한마디로 풍요 속의 궁핍이라고 진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궁핍을 벗어나는 길은 분명합니다. 시가 다시 감동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시인들이 감동적인 작품을 만들어내기만 한다면 떠났던 독자들은 다시 되돌아올 것입니다.
185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침묵" 명언모음 댓글:  조회:2919  추천:0  2017-02-05
♣ 침묵의 명언 모음 ♣ 가장 깊은 감정은 항상 침묵 속에 있다.  토머스 무어  가장 무서운 사람은 침묵을 지키는 사람이다.  호라티우스  떠들지 않는 사람은 위험하다.  라 퐁테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기보다 침묵하는 쪽이 차라리  그 관계를 해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몽테뉴  말을 제대로 못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면  침묵을 지키지 못했던 것에는 백 번이라도  후회를 해야 합니다.  톨스토이  말하는 자는 씨를 뿌리고, 침묵하는 자는 거두어들인다.  J . 레이  말해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은 침묵해야 할 때도 안다.  아르키메데스  사람들은 만족 속에 침묵이 자리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거부와 반항과 경멸이 침묵 속에 자리한다고  그대에게 말하리라.  칼릴 지브란  사람이 잘 말할 수 있는 재능을 갖지 못하면  침묵을 지킬 줄 아는 지각이라도 있어야 한다.  만약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라 브뤼에르  성실하게 사랑하며 조용히 침묵을 지키다.  성실한 사람은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F. 제나인  시간을 잘 맞춘 침묵은 말보다도 좋은 웅변이다.  터퍼  어리석은 사람은 침묵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런 진리를 알고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사아디  여자에게 침묵은 훌륭한 장식물이 된다.  소포클레스  이 무한한 우주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나를  두렵게 한다.  파스칼  인간은 그가 말하는 것에 의해서 보다는  침묵하는 것에 의해서 더욱 인간답다.  카뮈  재치 있게 지껄일 수 있는 위트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침묵을 지킬 만큼의 분별력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커다란 불행인 것이다.  라 브뤼에르  진정한 창조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힐티  침묵은 경멸을 나타내는 가장 완벽한 표현이다.  조지 버나드 쇼  침묵은 어리석은 사람의 지혜이며  현명한 사람의 미덕이다.  보나르  침묵은 자신을 신용할 수 없는 자에게  가장 안전한 재치다.  라 로슈푸코  항상 자신을 조심하라. 침묵을 생활화하라.  남에 대한 말을 꺼낼 때에는 침묵 속에서  거듭 생각한 후에 좋은 말만을 골라서 하라.  그러나 역시 그 말도 침묵보다는  못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리라.  존 드라이든  현명한 사람이 되려거든 사리에 맞게 묻고  조심스럽게 듣고 침착하게 대답하라.  그리고 더 할 말이 없으면 침묵하기를 배워라.  라파엘로  ..................................... * 우정의 명언들/그도세상 * 만약 한쪽의 말만 듣는다면, 친한 사이가 갑자기  떨어짐을 볼 것이다.  명심보감  만일 친구가 남몰래 수근거리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이 비록 진지하게 사실 그대로를 말했다고 하더라도  우정은 거의 유지되지 않는다.  파스칼  많은 벗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의 진실한  벗을 가질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맹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악한 벗을 두려워하라.  맹수는 다만 몸을 상하게 하지만 악한 벗은  마음을 파멸시키기 때문이다.  아함경  명성은 화려한 금관을 쓰고 있지만 향기 없는  해바라기이다.  그러나 우정은 꽃잎 하나하나 마다 향기를  풍기는 장미꽃이다.  올리버 웬들 홈스  명성이나, 좋은 술이나, 사랑이나, 지성보다도 더 귀하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준 것은 우정이다.  헤르만 헤세  모든 사람에게 예절바르고, 많은 사람에게 붙임성 있고  몇 사람에게 친밀하고, 한 사람에게 벗이 되고  누구에게나 적이 되지 말라.  벤자민 프랭클린  모든 사람이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알게 된다면  누구든 이 세상에서 네 명 이상의 친구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파스칼  모험을 하지 않으면, 누구하고도 친구를 만들 수 없다.  데이빗 토머스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는 나와 뜻을 같이할 사람이  한 둘은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공기를 호흡하는 데는 들 창문  하나로도 족하다.  로망롤랑  물론 여자는 남자의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친구관계를 튼튼하게 지켜 가기 위해서는  약간의 생리적 반감이 이를 돕지 않으면 안 된다.  니체  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사는 고기가 없고  사람이 지나치게 비판적이면 사귀는 벗이 없다.  맹자  번영은 벗을 만들고, 역경은 벗을 시험한다.  페블릴리우스 시루스  벗과 교제하는 데에도 약자를 돕고 강자를 누르는  남아의 의기가 필요하다.  이로운 점이 있기 때문에 교제를 한다든가 또는  교제를 하면 손해를 볼 것이므로 절교하는 등  이해를 생각하는 교제는 건실한 교제라 결코 할 수 없다.  채근담  벗을 믿지 않음은 벗에게 속아넘어가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다.  벗은 제2의 자신이기 때문이다.  라로슈푸코  벗을 사귐에는 과하여 넘치지 말지니  넘치면 아첨하는 자가 생기리라.  채근담  벗을 사귐에는 모름지기 세 푼(三分)의  협기( 俠氣 )를 띠어야 하고,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한 점의 본마음을 지녀야 하느니라.  채근담  벗이 애꾸눈이라면 나는 벗을 옆얼굴로 바라본다.  슈베르트  *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공자  벗이 화내고 있을 때에는 달래려고 하지 말라.  그가 슬퍼하고 있을 때에도 위로하지 말라.  탈무드  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좋게 말하는 사람은  진정한 친구이다.  T. 풀러  불길처럼 불타오른 우정은 쉽게 꺼져 버리는 법이다.  토마스 풀러  불태우기 쉽기로는 오래된 장작이 제일 좋다.  마시는 데는 오래된 술, 신뢰하는 데는 오래된 친구  읽는 데는 오래된 저서가 좋다.  아미엘  불행은 진정한 친구가 아닌 자를 가려준다.  아리스토텔레스  불행을 함께 감수할 수 있는 친구를 찾아라.  그라시안  사람과 사람의 우정은 현자라도 맺기가 어려운데  어리석은 자는 너무나 쉽게 잃는다.  셰익스피어 사람들은 누구나 친구의 품안에서 휴식을 구하고 있다.  그 곳에서라면 우리들은 가슴을 열고 마음껏  슬픔을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괴테  사람들은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우리를 이용하려는 사람, 즉 원수이다.  둘째, 우리를 이용하려는 동시에 우리에게  이용되어지려는 사람, 즉 친지(親知)이다.  셋째, 우리가 존경하고 또 그를 위해 힘있는 대로  도우려고 하는 사람, 즉 친구이다.  소포클레스  사람은 친구와 한 숟갈의 소금을 나누어 먹었을 때  비로소 그 친구를 알 수 있다.  세르반테스  사람은 평생에 한 친구면 충분하다.  둘은 많고 셋은 문제가 생긴다.  헨리 아담스  삶은 우정에 의해서 보다 풍성해지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 받는 데 있다.  시드니 스미스  선물이 늘어나면 친구는 줄어든다.  칼릴 지브란  설사 친구가 꿀처럼 달더라도  그것을 전부 빨아먹지 말라.  탈무드  성실치 못한 벗을 가질 바에는 차리리 적을  가지는 편이 낫다.  천박한 벗처럼 위험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세상에는 기묘한 우정이 존재한다.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하면서도 헤어지지도 못하며  일생을 그대로 지내는 인간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세상에는 세가지 종류의 벗이 있다.  너를 사랑하는 벗, 너를 잊어버리는 벗,  너를 미워하는 벗이 그것이다.  장 파울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만이 인생의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그라시안  속으로는 생각해도 입밖에 내지 말며 서로 사귐에는  친해도 분수를 넘지 말라.  그러나 일단 마음에 든 친구는 쇠사슬로  묶어서라도 놓치지 말라.  셰익스피어  술이 빚은 우정은 술처럼 하룻밤밖에 가지 못한다.  F.V. 로가우  시종 변치않는 벗이란 온갖 재산 가운데서도  가장 큰 것이지만 사람들이 가장 등한시하는 재산이다.  라 로슈푸코  신뢰가 없는 우정은 있을 수 없고 언행일치가  안 되는 신뢰란 있을 수 없다.  새뮤얼 존슨  자신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잡아먹는 사람이다.  프란시스 베이컨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놓을 수 있는 친구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짓밟아 뭉개는 야수가 된다.  프란시스 베이컨  적을 한 사람도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친구도 만들 수 없다.  앨프리드 테니슨  좋은 벗을 삼는다는 것은 큰 자본을 얻는 것과 같다.  레에만  좋은 친구가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가  누군가의 친구가 되었을 때 행복하다.  러셀  주식(酒食)의 형제는 천명이나 되지만 위급하고  어려울 때의 친구는 한 사람도 없다.  명심보감  진실된 우정이란 느리게 자라나는 나무와 같다.  조지 워싱턴  진정으로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는 말이 필요 없다.  몇 년이 지난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도  그들 사이의 우정은 예전과 다를 바 없다.  도교  진정한 동지라면 오랫동안 불화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본래부터 짝이 맞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일치하려고 노력해도 소용없다.  언젠가는 헤어진다.  괴테  진정한 우정은 곤경에 처했을 때 나타난다.  형편이 좋을 때는 별별 친구들이 다 몰려오기 때문이다.  에우리피데스  진정한 우정은 앞과 뒤 어느 쪽에서 보아도  동일한 것 앞에서 보면 장미 뒤에서 보면  가시일 수는 없다.  리케르트  한 사람의 진실한 친구는 천 명의 적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그 힘 이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에센 바흐  항상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든지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다.  그라시안  현명한 친구는 보물처럼 다루어라.  인생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의 호의보다  한 사람의 친구로부터 받는 이해심이 더욱 유익하다.  그라시안  확실한 벗은 불확실한 처지에 있을 때 알려진다.  시세로        ............................ * 부모님께 명언들/그도세상 * 부모를 공경하는 효행은 쉬우나,  부모를 사랑하는 효행은 어렵다.  장자  우리가 부모가 됐을 때 비로소 부모가 베푸는  사랑의 고마움이 어떤 것인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다.  헨리 워드 비처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쁨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빛나는 기쁨은 가정의 웃음이다.  그 다음의 기쁨은 어린이를 보는 부모들의  즐거움인데, 이 두 가지의 기쁨은  사람의 가장 성스러운 즐거움이다.  페스탈로치  자식을 기르는 부모야말로 미래를 돌보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속 깊이 새겨야 한다.  자식들이 조금씩 나아짐으로써 인류와  이 세계의 미래는 조금씩 진보하기 때문이다.  칸트  자식이 효도하면 어버이는 즐겁고,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명심보감  질병으로 많이 아프거나 비참한 경우를  당했을 때 부모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은 없다.  잊어버리고 있던 부모를 생각한다.  이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것이다.  문장궤범  천하의 모든 물건 중에는 내 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몸은 부모가 주신 것이다.  이이  슬프도다!  부모는 나를 낳았기 때문에  평생 고생만 했다.  시경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멈추지 않고,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는다.  한시외전 내 자식들이 해 주기 바라는 것과 똑같이  네 부모에게 행하라.  소크라테스  내 집이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보금자리라는 인상을 어린이에게 줄 수 있는  어버이는 훌륭한 부모이다.  어린이가 자기 집을 따뜻한 곳으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모의 잘못이며, 부모로써 부족함이  있다는 증거이다.  워싱턴 어빙  내가 아버지께 효도하면 자식이 또한  나에게 효도한다.  내가 어버이께 효도하지 않는데, 자식이  어찌 나에게 효도하겠는가.  강태공  방안에서 자기 아이들을 위해 전기 기차를  매만지며 삼십 분 이상을 허비할 수 있는  남자는 어떤 남자이든 사실상 악한 인간이 아니다.  스트라비스키  부모 앞에서는 결코 늙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소학  부모는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희망을 억지로  떠다 맡겨서는 안 된다.  그것이 실패의 원인이다.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스무 살 전의 자녀들의  기본적인 성격이나 기질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고,  아이들이 가진 그대로, 그가 표현하고 싶은  그대로를 존중해서 여러 가지 분야가  모여 전체를 이룬 사회에 적응하도록  하는데 있다.  부모의 희망과는 다른 희망을 표시했다 하더라도  부모는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  찬성하고 반대하고에 따라 그 결과는  큰 차이가 있다.  찬성해 주면 자식은 용기를 얻을 것이며,  반대한다면 위축될 것이다.  로렌스 굴드  훌륭한 부모의 슬하에 있으면 사랑에  넘치는 체험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먼 훗날 노년이 되더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루드비히 베토벤  설사 자식에게 업신여김을 받아도 부모는  자식을 미워하지 못한다.  소포클레스 부모의 사랑은 내려갈 뿐이고  올라오는 법이 없다.  즉 사랑이란 내리사랑이므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을 능가한다.  C. A. 엘베시우스 아버지는 나를 강하고 곧고 날씬하게 키워주셨다.  어머니는 나를 기쁘고 건강하고 사랑스럽게  낳아주셨다.  나는 어머니 발에 입 맞춘다.  M. 월킨슨 사람이 바꾸려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자기의 부모이다.  유태인 격언 자녀에게 침묵하는 것을 가르치라.  말하는 것은 어느새 쉽게 배워 버린다.  B. 프랭클린 ============================== 새해를 맞아 야심차게 세우는 계획들 중에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있다. 바로 독서이다. 올해에는 한 달에 딱 한 권이라도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직장인들이 한 달에 평균적으로 독서에 들이는 비용이 술값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는 ‘웃픈’ 설문조사 결과가 씁쓸함을 안겨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스마트폰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SNS나 인터넷 기사 등 짧은 시간 안에 핵심만 파악할 수 있도록 정보전달의 큰 틀이 바뀌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골라내는 것으로 ‘읽기’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뇌는 새로운 읽기 방식에 적응해 가는데 독서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 읽는 과거의 읽기 방식을 고집하려고 하니 책 한 권 제대로 읽기가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 가운데 최근 발간된 도서 은 한 페이지를 읽는 데 5분이나 걸렸던 일본의 서평가 인나미 아쓰시 저자가 매일 책 한 권의 서평을 맡아 작성하게 되면서 터득한 연간 700권 독파의 기술이 나열돼 있어 흥미를 더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읽기’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바로 ‘글의 핵심을 담고 있는 한 줄을 발견’하는 것이다. 책은 한 권의 정보가 응축된 한 줄, 깊은 울림을 주는 한 줄을 만날 수 있느냐가 독서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1만 권 독파를 가능하게 하는 기적의 독서법으로 ▲정독의 강박에서 벗어난다.  ▲독서는 공부가 아니다.  ▲아침 기상 직후 10분간 책을 읽는다. ▲빨리 읽을 책과 천천히 읽을 책을 9:1의 비율로 읽는다.  ▲매일 다른 책을 읽는다.  ▲기억에 남는 한 줄을 기록한다.  ▲목적을 명확히 세우고 읽는다 등 총 7가지의 원칙을 제안했다.  
184    100명 詩民, 100년 詩人 노래하다... 댓글:  조회:2710  추천:0  2017-02-05
  100명 市民, 100년 詩人을 노래하다 2017년은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가 백세를 맞아 우리곁으로 찾아오는 해입니다.  온 겨레가 애대하는 시인의 백년탄생을 기념할수 있음은 모든 사람들의 자랑입니다. 돌아오는 2월 16일은 또 윤동주 옥사 72주기이기도 합니다.  이날  룡정.윤동주연구회에서는 2017년 윤동주탄생 100주년 계렬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라는 테마로 윤동주묘소를 찾아 묘소 경배활동을 펼칩니다. 윤동주를 사랑하는 모든 학부모, 가족,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환영합니다. 일시: 2017년 2월 16일(목요일) 시간: 오전 10시~11시 장소: 룡정 윤동주 묘소 명액: 150명 좌우 -통일로 전용차량으로 모십니다. -약간의 한정판 기념품 증정이 있습니다. *가족, 단체, 시민들의 적극적인 신청을 환영합니다. 주의사항: 룡정.윤동주연구회 사무국의 통일지휘에 협력하셔야 합니다. 묘소참배이고, 사진촬영과 텔레비 촬영을 하오니  가급적 화려한 색상의 복장을 삼가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신청전화:                      130 3933 1383(위챗동일)                  138 4433 0034(위챗동일)                  159 4331 9882(위챗동일)                  130 3909 1786(위챗동일) 룡정.윤동주연구회                     
183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덮혀"와 "덮여", "높히다"와 "높이다" 댓글:  조회:3162  추천:0  2017-02-04
덮혀(X) 있다가 아닙니다.  덮여(O) 있다가 맞습니다.   *초등학생을 위한 설명:=   -  ‘덮다’의 어간 ‘덮’의 받침은 ‘ㅍ’이다. 따라서, ‘히’가 붙을 수 없는 어간이므로 피동을 만들려면 ‘이’를 넣어 ‘덮이다’라고 표기해야 한다. 결국, ‘덮이다 → 덮이어 → 덮여’가 맞는 표기다. ‘높이다’도 마찬가지이므로 ‘높히다’라고 적으면 틀린다.     높히다 (X) 높이다(O) ⇒ 맞춤법 오류 중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예입니다.좋은아이들 여러분은 이제 틀리지 않겠죠?   *중,고생을 위한 보충 설명:=   이렇게 표기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면, ‘히’가 동사를 피동사나 사동사로 만드는 선어말어미라는 것을 알고 있는 데 있다. (먹다 → 먹히다) 그런데 ‘히’가 피동사나 사동사를 만들 수 있는 경우는 한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ㄱ․ㄷ․ㅂ․ㄺ․ㄵ’ 등의 받침을 가진 어간에 붙여서 피동을 만들며, 그 이외의 받침에서는 그런 기능을 하지 못한다.   @@= '높다'는 형용사이고 타동사가 '높이다'입니다. '높히다'는 틀린 말입니다. 우리가 많이 틀리는 말이니 잘 알아 두세요. 시험 문제에도 자주 나옵니다. 그리고, 부사도 '높이'이고 '높히'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것도 잘못 쓰이는 경우입니다. 우리가 잘못 쓰는 이유는 발음 나는 대로 쓰다 보니까 빚어 지는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파도가 높다' '높이 솟은 빌딩', '높이 평가하다' '언성을 높이다.', '사기를 높이다' 와 같이 쓰입니다.   ==================== [머니투데이 나윤정기자] "韓 신용등급 상향에 지수 상승폭 높혀" 우리말은 쩌엉~말 세밀합니다. 기본형을 정확히 아는 것도 어려운데 큰말 작은말 센말 거센말까지 있으니 일일이 구분해서 정확히 쓰기란 보통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즘 청소년들은 우리말 배우는 데 시간 들이느니 영어나 다른 외국어 공부가 더 쉽다는 이야기도 한다네요. 어떤 비교대상보다 많거나 길다, 명성 이름따위가 널리 알려져 있다란 의미의 형용사형이 높다란 건 다 아실 겁니다. 발음이 표기와 다르게 나는 것도 아니어서 잘못 쓸 확률이 가장 낮은 단어 중 하나죠. 그런데 이 높다란 형용사를 동사나 부사형의 활용형으로 쓸 때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높여 높이고 높이니 높이다....가 맞는 건지 높혀 높히고 높히니 높히다...가 맞는 건지 발음상으로는 '노피다'로 나니 혹 높혀 높히고 높히다가 맞는 거 아닌가? 하지만 높이다 높여 높이고...가 맞습니다. 기본형은 알겠는데 활용형으로 쓸 때는 다소 애매하다고 하시겠죠? 특히 'ㅇ'이나 'ㅎ'이냐 구분하는게 쉽지 않습니다. 한가지 알려드릴까요? 우리말에서 형용사형이나 동사형의 활용형으로 쓰일 때는 거의 'ㅎ'이 아닌 'ㅇ' 소리가 붙습니다. 높다=높여 높이고 높이니 높이다 썩다=썩여 썩이고 썩이니 썩이다 많다=많아 많으니 쏟다=쏟아 쏟으니 솟다=솟아 솟으니 같다=같아 같으니 한 가지 더...지수 상승'폭'이니만큼 상승폭이 높여진게 아니라 넓혀진게 맞겠죠? 실제로 기사 본문에서는 "...미국 S&P가 한국 외화표시채권 신용등급전망을 한단계 상향조정했다는 소식에 종합주가지수가 상승폭을 '넓혔다'. 오후 1시17분 현재 지수는 4.15포인트 오른 1094.75..."라고 썼군요. 기사를 쓴 증권부 모 기자 역시 "'높여, 넓혀'가 맞다는 건 알고 있는데...사실 특히 한줄짜리 스팟기사에는 오타가 빈번해요"라고 말꼬리를 흐립니다. 1초라도 먼저 기사를 독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속보성'과, 한자도 틀림없이 정확히 알려야 하는 '정확성'. 두 가지 모두를 만족시키는게 최선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게 머니투데이 기자들의 고민입니다. /나윤정기자
182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주락펴락"과 "쥐락펴락" 댓글:  조회:2628  추천:0  2017-02-04
의미가 똑같은 형태가 몇 가지 있을 경우, 그 중3) 어느 하나가 압도적으로 널리 쓰이면, 그 단어만을 표준어로 삼는다.                   (ㄱ을 표준어로 삼고, ㄴ을 버림.) ㄱ ㄴ 비고 -게끔 -게시리   겸사-겸사 겸지-겸지/겸두-겸두   고구마 참-감자   고치다 낫우다 병을 ~. 골목-쟁이 골목-자기   광주리 광우리   괴통 호구 자루를 박는 부분. 국-물 멀-국/말-국   군-표 군용-어음   길-잡이 길-앞잡이 ‘길라잡이’도 표준어임. 까다롭다 까닭-스럽다/까탈-스럽다   까치-발 까치-다리 선반 따위를 받치는 물건. 꼬창-모 말뚝-모 꼬창이4)로 구멍을 뚫으면서 심는 모. 나룻-배 나루 ‘나루[津]’는 표준어임. 납-도리 민-도리   농-지거리 기롱-지거리 다른 의미의 ‘기롱지거리’는 표준어임. 다사-스럽다 다사-하다 간섭을 잘 하다. 다오 다구 이리 ~. 담배-꽁초 담배-꼬투리/담배-꽁치/담배-꽁추   담배-설대 대-설대   대장-일 성냥-일   뒤져-내다 뒤어-내다   뒤통수-치다 뒤꼭지-치다   등-나무 등-칡   등-때기 등-떠리 ‘등’의 낮은 말. 등잔-걸이 등경-걸이   떡-보 떡-충이   똑딱-단추 딸꼭-단추   매-만지다 우미다   먼-발치 먼-발치기   며느리-발톱 뒷-발톱   명주-붙이 주-사니   목-메다 목-맺히다   밀짚-모자 보릿짚-모자   바가지 열-바가지/열-박   바람-꼭지 바람-고다리 튜브의 바람을 넣는 구멍에 붙은, 쇠로 만든 꼭지. 반-나절 나절-가웃   반두 독대 그물의 한 가지. 버젓-이 뉘연-히   본-받다 법-받다   부각 다시마-자반   부끄러워-하다 부끄리다   부스러기 부스럭지   부지깽이 부지팽이   부항-단지 부항-항아리 부스럼에서 피고름을 빨아내기 위하여 부항을 붙이는 데 쓰는, 자그마한 단지. 붉으락-푸르락 푸르락-붉으락   비켜-덩이 옆-사리미 김맬 때에 흙덩이를 옆으로 빼내는 일, 또는 그 흙덩이. 빙충-이 빙충-맞이 작은말은 ‘뱅충이’. 빠-뜨리다 빠-치다 ‘빠트리다’도 표준어임. 뻣뻣-하다 왜긋다   뽐-내다 느물다   사로-잠그다 사로-채우다 자물쇠나 빗장 따위를 반 정도만 걸어 놓다. 살-풀이 살-막이   상투-쟁이 상투-꼬부랑이 상투 튼 이를 놀리는 말. 새앙-손이 생강-손이   샛-별 새벽-별   선-머슴 풋-머슴   섭섭-하다 애운-하다   속-말 속-소리 국악 용어 ‘속소리’는 표준어임. 손목-시계 팔목-시계/팔뚝-시계   손-수레 손-구루마 ‘구루마’는 일본어임. 쇠-고랑 고랑-쇠   수도-꼭지 수도-고동   숙성-하다 숙-지다   순대 골집   술-고래 술-꾸러기/술-부대/술-보/술-푸대   식은-땀 찬-땀    신기-롭다 신기-스럽다 ‘신기하다’도 표준어임. 쌍동-밤 쪽-밤   쏜살-같이 쏜살-로   아주 영판   안-걸이 안-낚시 씨름 용어. 안다미-씌우다 안다미-시키다 제가 담당할 책임을 남에게 넘기다. 안쓰럽다 안-슬프다   안절부절-못하다 안절부절-하다   앉은뱅이-저울 앉은-저울   알-사탕 구슬-사탕   암-내 곁땀-내   앞-지르다 따라-먹다   애-벌레 어린-벌레   얕은-꾀 물탄-꾀   언뜻 펀뜻   언제나 노다지   얼룩-말 워라-말   에는 엘랑   열심-히 열심-으로   입-담 말-담   자배기 너벅지   전봇-대 전선-대   주책-없다 주책-이다 ‘주착 → 주책’은 제11항 참조. 쥐락-펴락 주락-펴락/펴락-쥐락   -지만 -지만서도 ←-지마는. 짓고-땡 지어-땡/짓고-땡이   짧은-작 짜른-작   찹-쌀 이-찹쌀   청대-콩 푸른-콩   칡-범 갈-범  
5-2. 주제에 대하여 오늘은 시를 쓸 때 가장 유의해야 할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기로 합니다. 시의 주제(thema)는 시 작품을 통해서 나타내려는 중심적인 주된 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주제는 보통 시를 쓰기 전에 선명하게 밝혀져야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시를 완성하고 나서 비로소 분명해지기도 합니다. 이 주제는 ‘시의 의미성’ 대목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시의 중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어서 사람이 지닌 보편적인 성격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시인이 살고 있는 인생관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시인들이 갈망하는 진실이 지성미와 함께 농축되어 작품 속에 버무려져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주제는 앞서 말한 소재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시의 발상이나 동기는 이미 주제와 밀접한 관계가 확인되면서 이미지나 상징 그리고 표현에 있어서 비유법 등으로 주제를 창출시키게 됩니다. 흔히들 처음 시 쓰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소재와 주제를 혼동하는 일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이런 일들은 시창작의 초기 현상으로서 많은 연습과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는 일이어서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한 예를 들어보면, 어느 백일장에서 [가을]이라는 시제(詩題)로 쓴 작품들을 심사하면서 느낀 점은 한결같이 ‘가을’이라는 소재에 매달려서 주제가 없거나 약하다는 것입니다. ‘가을’이라는 소재에 투영되는 의미성이 결여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작품은 미적인 감동은 있을 수 있지만 ‘가을’이 지니는 참된 모습이 의식 속에 나타나지 않고 있어서 시 쓰기에서 주제를 중시하는 현대시에서는 각별히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졸시 [황강(黃江) . 71-윷놀이]를 읽어 보기로 합니다. 윷이야 모야 처음부터 내가 떠나야 할 지점은 점지되어 있었다 무거운 등짐 지고 겨우 한 걸음 내 딛는 발걸음 갠가 걸인가, 윷판처럼 떨리는 한 생애가 질펀히 보인다 돌다릴 두들겨 건너가듯 먼저 가버린 발자국을 닮을거나 차들이 죽죽 빠져 나가는 새벽길 그 환희는 어느새 체증만 남고 어차피 가야하는 행보라면 석동무니 넉동무니 함께 업어 찌도까지라도 뛰어야 하리 도냐, 개냐? 뒤돌아보지 마라 시퍼런 칼날 세우고 쫓고 쫓기는 나 안찌로 피할 나무숲은 보이지 않는다 뒷도로 돌아가는 저 먼 길 한 생애의 종말 지점도 그렇게 점지되어 있을지라도. 매우 간단하고 평범한 우리의 일상에서 느끼는 소재인 ‘윷놀이’는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를 깨닫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시인의 눈으로 확인한 ‘윷놀이’는 전쟁터 같기도 한 생존경쟁의 처절한 현실이 깊게 깔려 있습니다. 윷말을 윷판에 놓아서 경쟁하는 일은 어쩌면 우리 인간들이 ‘시퍼런 칼날 세우고 쫓고 쫓기는’ 현상이며 ‘무거운 등짐 지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현실적인 고뇌가 진하게 배여 있습니다. 이처럼 ‘윷놀이’라는 단순한 소재에서 시인의 시각으로 정제한 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생존경쟁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미세한 부분에서도 커다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시인들이 겪지 않으면 안 되는 위대한 예술정신의 행적이며 가장 근원적인 시의 주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의 주제는 시인에 따라 다양하게 표징 되고 있습니다. 시인의 내면의식에 어떤 가치관을 포용하고 있느냐, 어떤 체험에서 지적인 자양을 농축하고 있느냐, 또는 어떤 염원과 갈망의 깊은 사상을 소유하고 있느냐는 등등의 정서나 정신(시정신)의 사유향방에 따라서 그 주제의 모습은 변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시인이 간직한 의식의 감도나 척도에서 서로 다른 모습의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쨌거나 시의 주제는 모든 사물들의 참된 모습이나 진실이 은폐되고 망각되는 현상에서 ‘존재’라는 커다란 등불을 밝혀서 확인하고 감지하게 되는데 그 발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현실의 불행이나 암흑에서 어찌 보면 탈출의 의미도 있으며, 한편으로는 부당하거나 모순된 실상에 대한 항거로서의 진실을 탐구하는 열정으로 유도하는 역할이 시의 주제가 갖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horatius)의 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라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으며 읽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하는 것이 바로 주제의 선명성을 강조하는 연유입니다. 이렇게 주제의 명확한 표징(명징한)은 앞에서 말한(시의 의미성) 바와 같이 인생의 강렬한 체험의 소산물임을 더욱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시의 ‘제목’을 어떻게 붙이는가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   늦여름 오후에 -홍신선(1944~ ) 오랜만에 장마전선 물러나고 작달비들 멎고 늦여름 말매미 몇이 막 제재소 전기톱날로 둥근 오후 몇 토막을 켜 나간다 마침 몸피 큰 회화나무들 선들바람 편에나 실려 보낼 것인지     제 생각의 속잎들 피워서는 고만고만한 고리짝처럼 묶는 집 밖 남새밭에 나와 나는 보았다, 방동사니풀과 전에 보지 못한 유출된 토사 사이로 새롭게 터져 흐르는 건수(乾水) 투명한 도랑줄기를. 지난 한 세기의 담론들과 이데올로기 잔재들을 폭파하듯 쓸어 묻고는 천지팔황 망망하게 그러나 자유롭게 집중된 힘으로 넘쳐흐르는 마음 위 깊이 팬 생각 한 줄기 같은 물길이여 그렇게 반생애 살고도 앎의 높낮은 뭇 담장들 뜯어치우고는 범람해 흐르는 개굴창 하나를 새로 마련치 못했으니 다만 느리게 팔월을 흐르는 나여 꼴깍꼴깍 먹은 물 토악질한 닭의장풀꽃이 냄새 기막힌 비누칠로 옥빛 알몸 내놓고 목물 끼얹는 이 풍경의 먼 뒤꼍에는     두께 얇은 통판들로 초저녁 그늘 툭툭 쌓이는 소리.  툭하면 쏟아지던 작달비들 멎은 긴 장마 뒤, 말매미 몇이 울어댄다. 흡사 제재소 전기톱날 돌아가는 소리, 모처럼의 ‘둥근 오후’를 토막토막 켜는 듯하다. 화자는 ‘집 밖 남새밭에 나와’ 있다. ‘몸피 큰 회화나무들’이 둘러서 있다. 그 옛날 과거를 보러 가거나 합격하면 집에 심었다는 회화나무는 학자수(學者樹), 혹은 선비나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 유교 관련 유적지에서는 거의 회화나무가 있다는데, 퇴계 이황이 모델인 천 원짜리 지폐 뒷면의 도산서원을 둘러싼 무성한 나무도 회화나무란다. 화자는 학자를 많이 낸 집안 후손인가 보다. 화자는 남새밭 농부가 아니다. ‘제 생각의 속잎들 피워서는/고만고만한 고리짝처럼 묶는’ 회화나무는 지식노동자인 화자의 반영이다. 잦은 비에 씻겨 사위가 깨끗한 늦여름 오후, 방동사니 우거진 밭에 ‘건수 투명한 도랑줄기’ 졸졸 흐르는 걸 보며 화자는 ‘지난 한 세기의 담론들과 이데올로기 잔재들을 폭파하듯 쓸어 묻은’ 세상이며 ‘반생애 살고도 앎의 높낮은 뭇 담장들 뜯어치우고는/범람해 흐르는 개굴창 하나를 새로 마련치 못한’ 자신을 돌아본다. 이번 세기 초에 쓰였을 시다. 정치이념에서 비껴 살던 사람들도 충격이 없을 수 없었던 냉전 종식 이후, 세기가 바뀌는 ‘밀레니엄’ 여파로 벅차기도 하고 뒤숭숭하기도 했던 그때. 시대의 풍경 ‘먼 뒤꼍’을 기웃거리는 한 지식인의 내면이 장마 뒤 남새밭 풍경과 함께 ‘자유롭게 집중된 힘으로’ 그려졌다.
180    그 무슨 사건, 그 무슨 혁명, 그 무슨 전쟁과 詩는 싸워야... 댓글:  조회:2916  추천:0  2017-02-04
시창작 강의-15(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 소재)   김송배   * 안녕하십니까.  5.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시를 어떻게 쓰느냐에 대해서는 어떤 특별한 비결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쓰는데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살펴본다면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단편적이나마 답변의 실마리가 풀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5-1. 소재에 대하여 시의 소재란 작품에서 다루는 재료를 말합니다. 이 재료는 자연일 수도 있고 일상샐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뿐만 아니라, 시인의 감정 흐름과 변화 등의 내부적인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시의 소재는 무엇이든 관계없이 무한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주변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현상들 가운데서 특히, 우리 인생이나 삶을 아름답게 한다든지, 아니면 어렵게 한다든지 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절실한 것들이 언제나 시의 소재가 될 요소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C.D루이스가 ‘시인은 사물을 응시(凝視)함으로써 시적인 능력을 기른다’고 말하였듯이 우리에게 나타난 내외의 현상들을 관심있게 살펴보면 반드시 어떤 의미를 가지고 나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시적인 능력’이 바로 ‘어떤 의미’를 두고 사물과 자신과의 사이에 새로운 질서나 관계가 성립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상상력(상상력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것입니다)이 빚어내는 이미지의 연쇄반응도 언제부터인가 사물을 응시한 기억이 쌓이고 쌓여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졸시 [담쟁이] 한 편을 읽어 보기로 합니다. 나는 지금 이쯤에서 망설여야 하리라 붉은 벽돌 틈새로 아직 여물지 못한 희망은  잠시 창문으로 흐르는 불빛으로 말려야 한다 구름처럼 떠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못내 아쉽게 되돌아 보는 행적이지만 용케도 기어오른 삶의 줄기가 현기증으로 나불댄다 뻗어나간 욕망만큼 무거운 사색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조심스러이 다시 기어올라야하는 창살에는 불이 꺼졌다 아아, 지금쯤에서 지혜를 예비하는 옷깃을 잠시 손질하고 태초의 씨앗으로 묻혔던 땅바닥을 돌아볼거나 그대 머리 위 내리는 한 줌 별빛만 줏으며 끝내 돌아보지 말아야 할 어지러운 벼랑 끝 아스라한 저 바람 소리. 비록 하찮은 ‘담쟁이’ 넝쿨이라도 응시함으로써 상상력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시를 창작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작은 돌멩이, 강물, 달빛, 산, 낙엽 등등 어떠한 대상으로도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으며 또한 살아가면서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사건들, 예를들면 6. 25전쟁이라든가, 4. 19 민주혁명, 3. 1절,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서 실연을 했다던가, 가족의 죽음이 있었다는 등등이 시적인 감동으로 연결될 때 이들은 모두 시의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하듯이 시 쓰는 사람의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내면적인 생활이 그만큼 넉넉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다음 시간에는 주제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       독(毒)을 차고 ―김영랑(1903∼1950)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이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훑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고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 마주 가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얼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김영랑 시집’(범우)에 실린 시인 연보를 훑어보다가 ‘1926년 장녀 애로(愛露) 출생’에서 입 끝이 빙긋 올라갔다.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딸 이름을 정성껏 짓는다면, 요조하고 현숙한 여인을 기원하는 마음이나 인생의 심원한 뜻을 담던 시절에 ‘애로(사랑의 이슬)’라니! 세상 눈치 보지 않는 자유로운 의식, 그리고 사랑과 아름다움과 쾌락을 추구하는 찬란한 감각이 엿보인다.      선생의 시는 ‘서구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전통적인 시형을 현대시 속에 끌어들여 전통적인 것과 현대 서구적인 것의 접목 작업에 성공하고 있다. 특히 호남지방의 토착적인 언어를 탄력적으로 구사하여 언어예술로서 시의 참맛을 살려나간다’(평론가 김우종). 쉽고 친근한 시어로 시심을 불러일으키는 선생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내 마음을 아실 이’ ‘오― 매 단풍 들것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에 공감하고 애송하는 독자가 많을 테다.  ‘독을 차고’는 선생이 나긋나긋한 감성의 ‘초식남’이기만 한 게 아니라 강건한 뼈와 근육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짧은 인생 그냥저냥 살고지고, 하는 친구에게 설핏 경멸의 독기를 뿜으며 끝내 독을 차고 가련다는 이 기개! 의당한 독을 버리고서야 어찌 사람이겠는가. 이 슬픔의 독, 분노의 독을 차고 가리라! 이 시는 식민지 시대 말기의 반항의식을 나타낸다고 한다. 선생이 6·25전쟁을 무사히 넘기셨으면 이후 어떤 시를 쓰셨을까…. ================= @@= "나는 주어(主語)가 곧잘 지워져도 무방한 한국어 속에 자주 숨거나 지워진 1인칭 화자(話者)로서 살아온 시의 세월 60년을 채우고 있다. 이제 시가 귀신의 일인지 허공의 일인지를 터득할 만 하더라도 도리어 시를 정의하는 나 자신은 어디에도 없다"라며 "시인이 되면 될 수록 시인은 자신의 뒷모습을 모르는 것처럼 시를 모르게 된다. 다만 나에게는 노래하는 자와 노래를 듣는 자의 실재(實在) 사이에서 영혼의 대칭(對稱)이 이루어지는 체험이 있다." "나의 시는 첩첩이 고난을 견뎌온 한국어 속에서 태어났고 한국어는 거의 기적처럼 연면(連綿)이 이어와서 오늘에 이르렀다."    ---고은 시인  
179    [시문학소사전] - "판타지"란?... 댓글:  조회:4138  추천:0  2017-02-04
판타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판타지 매체 애니메이션 예술 환상적 화가 작가 만화 영화 문학 잡지 텔레비전 웹코믹 장르 연구 현대 판타지 생물 판타스틱 프랑스 판타지 역사 러브크래프트 공포 마법 마법사 종족 종교적 주제 기원 톨킨 팬덤 비유와 관습 세계 분류 판타지 상 하위 장르 텔레비전 비유   포털 v • d • e • h 판타지(Fantasy)란 공상 혹은 상상, 상상의 산물을 뜻하는 단어이다.[1]   목차   [숨기기]  1여러 분야에서의 판타지 1.1문학 1.1.1장르문학 1.1.2보편적 특성 1.2심리학 1.3음악         여러 분야에서의 판타지[원본 편집] 판타지는 여러 분야에서 다른 의미로 통용된다. 문학[원본 편집] 장르문학[원본 편집] 문학에서의 판타지는 장르문학의 한 형식을 일컫는 용어이다. 또한 판타지 소설을 축약하는 말로도 쓰인다. 보편적 특성[원본 편집] 문학에서의 판타지는 문학의 보편적 특성중 하나를 일컫는 용어이다. 이 때의 판타지는 모방과 함께 문학을 이루는 근본 본성의 하나라고 여겨지며, 현실을 모방한 것이 아닌 상상력이 작용하는 모든 것으로 파악된다.[2] 심리학[원본 편집] 심리학에서의 판타지는 의식적, 무의식적이건 마치 이야기처럼 전개되는 정신작용을 일컫는 용어이다.[3] 음악[원본 편집] 음악에서의 판타지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악상이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작곡하는 기법을 일컫는 용어이다.[4]   ================================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린 일종의 장르문학. 장르문학이란 각 장르별로 독자적이고 고유한 서사규칙과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독자가 책을 펼치자마자 그 작품이 무협소설 혹은 추리소설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그 성격과 정체가 분명한 작품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판타지는 영상(映像)·상상을 뜻하는 그리스어. 일반적으로 환상이나 공상을 뜻하며, 문학에서는 몽상적 이야기를 가리킨다. 15세기 영어에서는 팬시라는 말이 파생되어 심상(心象) 형성능력으로서 이 공상력이 상상력과 함께 쓰이자, 18세기 말 영국 시인·비평가 S.T. 콜리지는 상상력이란 대상과 융합·통일하는 시적 창조력이고 공상력은 대상을 단순히 결합하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뚜렷이 구별지었다. 이는 이야기의 가공성을 허구라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여러 원리를 대신하여 이야기의 질서를 잡아주는 규칙으로 보아 판타지의 문학적 의의를 성립한 것이다. 19세기 말 E. 네즈비트는 마술적 존재를 그린 아동문학을 발표하면서, 이러한 주제들을 <일상의 마술>이라 하여 판타지라는 이름을 붙여 처음으로 명확한 정의를 내렸다. 오늘날에는 환상문학 가운데 괴기와 공포를 주제로 하지 않는 작품, 공상과학소설(SF) 가운데 과학이론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에 의한 작품, 현실과 전혀 다른 가공의 신화적 세계를 무대로 영웅모험담을 그린 작품 등을 가리킨다. 판타지는 우리의 경험 현실과는 다른 시공간에서 초자연적 존재들에 의해 펼쳐지는 초자연적 사건을 다루는 일종의 가상소설(假想小說)이라 할 수 있다. 토도로프는 판타지를 망설임의 문학으로 정의한다. 이를테면 현실의 질서와 논리에서 벗어나 있는 황당무계하고 초자연적인 이야기 앞에서 자연법칙과 상식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들이 마음속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 망설임과 갈등이야말로 다른 장르와는 구별되는 판타지만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판타지의 독자적인 뜻이 인정되어 문학의 최고 형식이라 불리는 동화와 함께 문학적으로 성숙하였고, 프랑스에서는 18∼19세기에 걸쳐 요정이야기가 유행하였지만 괴기소설·암흑소설에 밀려 A.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1943)》 등을 제외하고는 공포이야기가 판타지로 불리는 예가 많았다. 따라서 판타지 걸작은 앵글로색슨 및 북유럽권에서 많이 나왔으며 L.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 L.F. 봄의 《오즈의 마법사(1900)》 등이 대표적이다. 판타지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톨킨(1892∼1973)의 《반지의 제왕》도 모든 판타지의 효시라기보다는 현대 장르 판타지, 곧 모험형 장르 판타지의 공식과 문법을 처음으로 제시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판타지는 흔히 도피문학이라고 비판되지만, 1938년 발표된 평론 《요정이야기에 대하여》에서 J.R.R. 톨킨이 도피를 용기있는 행위로 평가한 뒤 인식이 바뀌어 오늘날에는 문학의 한 장르로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특히 근대의 아동용 공상이야기를 전승문학으로부터 구별하는 장르로서 <판타지>를 쓰고 있으며, 이에 비하여 성인용 공상이야기는 <애덜트 판타지>라 하여 구별한다. 한편 심리학 용어로서 판타지는,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일을 떠올려 욕망의 충족을 꾀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최근 심층심리학·정신분석학은 공상력의 작용이 무의식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발견, 판타지문학과 심리학을 연관시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178    동시의 상상력과 그리고 동시의 "판타지" 세계 댓글:  조회:2976  추천:0  2017-02-04
시와 상상력과 판타지                          /김진광         새해가 밝아온다. 지난 해에는 열심히 달렸는지? 잘못된 방향으로 달린 일은 없는지? 반성하고, 희망찬 새해에는 다시 열심히 살아야겠다.           이번에는 주제를 좀더 좁혀 '판타지 동시'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신현득은 2014년 창원 세계아동문학대회에 앞서 한국아동문학이 판타지 분류를 해두자는 의미에서 동시의 판타지를 분류하였다. 는 일반적이 상상의 세계 즉, 그리움이나 경험을 통한 상상력의 세계, 는 자연물, 인공물을 인격화한 상상의 세계. 는 상상을 넘어선 세계인 초현실의 세계 즉, 짐승에서 사람이 되거나, 새에서 물고기나 벌레가 돼 보는 몸 바꾸기, 과거와 미래를 오늘에 놓아보는 시간 바꾸기 등이 있다. 신현득은 3차원 세계(점, 선, 원)과 4차원 세계(점, 선, 원+시간)까지만 문류를 하였다. 필자는 여기에 시공간을 초월한 5차원 세계 이사, 예를 들면 '룰랙홀'을 문으로 하여 들어가고 나오는 우주공간의 세계, '초끝이론'(우주를 구성하는 단위가 입자가 아니라 아주 작은 끈으로 보는 이론)과 관련된 우주의 세계, 5~11차원 세계를 기법으로 하나 더 보태어 본다. 판타지 기법은 소재 확장과 새로운 창조 세계의 출발에 도움이 될 거이다.   살펴볼 작품은 「어제 나와 만났지」(신현득), 「효도 일기」(허일), 「타자왕」(추필숙), 「함께 가기」(장승련), 「억새」(박숙희), 「메밀꽃밭에서」(정광덕),「너도바람꽃」(이성자)이다     ----- 중략 -----   할아버지가 바람나서 낳아 온 막내 고모 할머니 눈칫밥에 만날 눈물짓더니 작년 겨울 결혼했어요.     이른 봄, 고모가 자주 오르던 뒷산에 할머니와 함께 들렀는데, 진눈깨비 맞으며 너도바람꽃 한 송이 피었어요. 그래도 할머니가 보고 싶어 고향을 찾아왔나 봐요.     너도 바람꽃 어루만지던 우리 할머니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고이네요.     -이성자「너도바람꽃」전문,《시가 자라는 바다》한국불교아동문학회2014연간집         이성자는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동문학평론 동시부문 신인상과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와, 계몽아동문학상, 눈높이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우리나라좋은동시문학상, 오늘의동시문학상(2014) 등을 수상하였다. 지은 책으로는 동시집『손가락 체온계』등 다수가 있으며, 현재 광주대문예창작과와 광주교육대에서 아동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이론과 창작 부문 모두 갖춘 좋은 작품을 쓰고 있는 동시인이다.  「너도바람꽃」은 그가 쓰고 있는 연작동시 ‘꽃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중 한 편이다. 그가 펴낸 동시집『손가락 체온계』(2013년, 청개구리)에도 닭의난초, 망초꽃, 광대수염꽃 등 13편이 실려 있다. ‘꽃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연작동시는 꽃말이나 들꽃이 들려주는 재미있거나 슬픈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하여 쓴 동시들이다. 동시집에 실린「망초꽃」은 아들이 죽고 며느리가 데려다 놓은 손자 키우느라 묵밭이 된 텃밭에 떨어뜨린 눈물 자국인 것이다. -. 위의 시 「너도바람꽃」은 할아버지가 바람 피워서 낳아온 막내고모를 너도바람꽃에 비유하여 쓴 이야기가 있는 동시다. 바람둥이 할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낳아서 데려온 고모는 바람이 결실한 꽃인 ‘(너도)바람꽃'이다. 그런 막내고모가 할머니 눈칫밥을 먹으며 만날 눈물짓다가 결혼을 하였는데, 할머니와 함께 뒷산에 오르니, 고향과 할머니가 보고 싶어 너도바람꽃이 피어 있다. ’너도바람꽃 어루만지던 우리 할머니,/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 고이네요.’ 맨 마지막 구절이 감동적이다. 너도바람꽃은 ‘봄의 바람을 몰고 온다’하여 이름 붙여진 바람꽃의 한 종류로 너도바람꽃의 꽃말은 ‘사랑의 괴로움, 사람의 비밀’이라 한다. ‘너도바람꽃’의 꽃말을 이야기가 있는 동시로 확대하고 재구성하여 감동적으로 형상화한 점이 돋보인다.   연간집에 함께 발표한「쇠비름」에서도 ‘용용 할머니 약 올리며/어깃장을 부리던 쇠비름.//할머니 돌아가시자/마디마디 노란 눈물 달고/서럽게 피네요.’ -속 썩이던 쇠비름이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반성의 눈물(노란꽃)을 흘리는 감동적인 내용으로 앞의 작품과 시적 형상화가 비슷하다. 소개한 두 작품 모두 사물(식물)을 의인화하고 상상력을 동원한 동시라고 본다면 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동화에서 전용되는 판타지를 상상력을 동원한 동시에서의 도입은 동시의 소재 확장과 동시의 활성화와 어린이의 창의력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 본다.   신현득이 2014 창원 세계아동문학대회에 앞서 세계에서 처음 판타지를 분류한 것을, 필자가 그 분류 방법에 준하여 또한 처음으로 신현득의 판타지동시집「분홍눈 오는 나라」의 판타지 분석과 이번에 소개한 몇 사람의 작품을 분석해 보았다. 혹 동시의 판타지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작은 자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177    시적 상상력으로 즐거움을 찾기... 댓글:  조회:3973  추천:0  2017-02-04
상상을 하면 현실이 된다 전병호     1 시적 상상력을 정의하는 말은 수없이 많다. 그 말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상상력이란 한 편의 훌륭한 시를 빚어내는 근원적인 힘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현실을 바라보라. 결핍되어 있는 것이 너무 많다. 만약 이 결핍이 채워진다는 상상을 해보라.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그려보라. 현실에는 나를 얽어매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것들을 과감하게 벗어나는 상상을 펼쳐보라. 다음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가. 현실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것들을 흡족할 수 있도록 과감하게 고쳐보라.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상상하라.   가질 수 없는 것, 벗어나고 싶은 것, 얻을 수 없는 것들로 인해 시인은 항상 마음 속에서 갈등을 느낀다. 이때 상상 속에서나마 잠시 갈등을 풀어주자. 나중에는 그것이 정말로 현실로 되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라게 된다. 이것이 상상의 기능이 아닐까 싶다. 이 기간에도 많은 시들이 발표되었다. 그중에서 낯선 상상력을 펼치는 시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2   창조적 상상이란 인습적 시각을 버렸을 때 얻어질 수 있다. 그래야 사물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기존의 의미를 버리고 사물을 새로운 의미로 만난다는 것,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무가 가지마다/한 잎 두 잎 걸어두었던 신발//뿌리한테 신기려고/한 켤레 두 켤레 내려놓는다. - 추필숙, 「나뭇잎 신발」 전문( 2013. 여름)     나뭇잎과 신발의 유사성이 얼마나 높으냐가 이 시의 성패를 가늠하게 될 것이다. 나뭇잎을 신발에 비유하려면 꽤 넓은 잎이어야 한다. 활엽수 잎이 적당하다. 그렇다고 해도 나뭇잎과 신발이 딱 맞아떨어지는 비유는 아니다. 하지만 상당한 유사성이 인정된다. 그래서 나뭇잎은 나무의 신발이란 비유를 받아들이고 나니까 신선한 감각이 느껴진다. 새롭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은 나무가 뿌리한테 신발을 신기려고 내려놓은 것이다.왜 신발을 신기려고 했을까? 아마도 날이 추워지니까 나무가 발 시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 시는 이렇게 나뭇잎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호박꽃도/ 가렵나?//꿀벌이/꽃 속에서/노란 귓밥/들고 나온다.//농부 말 잘 듣겠다. - 오윤정, 「호박꽃」 전문( 2013. 여름호)     농촌에서 나고 자란 어른들은 호박꽃에 대한 추억이 많다. 그중 하나가 호박꽃에 벌이 들어가면 꽃잎 끝을 모아 잡고 꽃을 따는 일이었다. 이 호박꽃을 햇빛에 비춰보거나 귀에 대고 벌이 날갯짓하는 소리를 들으면 갖은 상상이 다 떠올랐다. 호박꽃이 노래한다고도 했고 호박꽃 태양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호박꽃에 대한 이런 추억을 갖고 있는 필자는 지금도 호박꽃이 다른 식으로 표현이 잘 안 된다. 그런데 이 시는 꿀벌이 호박꽃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귓밥을 파는 것으로 표현했다. 이색적인 상상력이다. 그러니까 낯선 느낌으로 읽는 시가 되었다. 귓밥을 파내는 행위가 “농부 말 잘 듣겠다.”라는 구절과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농부가 하는 말이란 듣지 않아도 안다. 열매를 잘 맺으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호박이 잘 달릴 거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된다.     쏘니까 날아갈 수밖에요 난 폭탄이니까요//한참 날아가다 깜짝 놀라 멈칫 했어요//정부군 버스 안에 아이들이 한 가득//정부군 탱크 옆에 아이들이 한 가득//방패가 된 아이들 해바라기로 피었어요//난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어요//그냥 공중에서 쾅 울어버렸어요. - 이병승, 「미사일」 전문( 2013. 여름)     이 시 끝에 “시리아 독재 정부는 반정부군의 폭격을 막기 위해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을 방패로 삼았다”라는 주를 달아놓았다. 시에서는 설명이 필요 없지만 그걸 알면서도 시인이 주를 달아 놓은 것은 그만큼 하고 싶은 말이었다는 이야기다. 시인은 시리아 독재정부를 고발한다. “정부군 버스 안에 아이들이 한 가득//정부군 탱크 옆에 아이들이 한 가득”에서 보듯 시리아 독재 정부는 어린이들을 전쟁 방패로 삼고 있다. 비열한 짓이다. 그러니 폭탄인들 어찌 무심하겠는가. 그냥 공중에서 쾅 울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폭탄이 ‘터졌어요’라고 하지 않고 ‘울어버렸어요’라고 쓴 시인의 마음에 크게 공감한다. 시리아 독재정부가 어린이를 전쟁의 방패로 삼는 일은 전 세계가 나서서 규탄해야 할 일이다. 동시인, 동화작가가 어찌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있을 것인가. 비록 지구 저쪽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규탄의 목소리를 높일 일이다.   이 시는 몇 가지 시적 장치를 숨겨놓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폭탄을 의인화했다는 것, 폭탄에 투사된 시인의 복잡한 마음을 의식의 흐름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 한 행으로 한 연을 구성하고 시 끝에만 마침표를 찍어 시적 긴장감을 높였다는 점. 현실에 대한 발언이 국경을 넘는 어린이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점 등이 눈길을 끈다.   그런가 하면 종교적 상상력의 발휘해서 색다른 감동을 주는 시도 있다.     하나/둘/셋/·/·//가부좌/틀고 앉아//아무나/징검징검/밟고 다녀도/묵묵히/머리를 내미는/물 속/부처님 - 박방희, 「징검돌」 전문( 2013. 여름)     징검돌은 개울을 건너기 위해 건너뛸 수 있는 너비만큼 떨어져 놓은 큰 돌이다. 이제까지 징검다리를 소재로 쓴 시는 많다. 하지만 박방희 시인에 의하니까 징검돌이 부처님 머리란다. 그것도 아무나 밟고 다니도록 물속에 앉아 가부좌한 부처님 머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생들은 이제까지 부처님 머리를 밟고 다닌 것이 아닌가. 높고 귀한 부처님의 머리를 밟고 다녔다니 이처럼 불경스러울 수가 있는가. 하지만 부처님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중생들을 위해 공양하고 계셨던 것이다.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는가.     소나기가/세례를 줍니다//떡잎 배추/벌레 먹은 배추/앉은뱅이 배추//줄 선 배추에게/골고루 줍니다//배추밭이 살아납니다 - 김이삭, 「배추」 전문( 2013년, 여름)     「배추」는 천주교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쓴 시다. 핵심 단어는 세례이다. 세례는 죄를 씻기 위한 종교 의식이다. 그렇다면 “떡잎 배추/벌레 먹은 배추/앉은뱅이 배추”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세상 사느라고 죄 많이 짓고 버림받은 영혼들이다. 이들이 줄을 서서 세례를 받는단다. 그러니까 마치 종교의식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한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서 축 늘어진 배추가 소나기를 맞고 푸르게 되살아나는 모습을 종교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한 시다. 배추밭에 소나기 오는 모습은 많이 보았지만 그것을 세례 받는 것으로 상상력을 발휘한 것은 김이삭 시인뿐이다. 새롭다. 남들과 차별되는 독특한 상상력을 가진 시인이다.   다음 시는 또 다른 낯선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오늘은 가족놀이 닷컴에서/언니를 주문했어요//말도 잘하고/나를 데리고 백화점에도 가는/내 친구 희수 언니처럼/그런 똑똑한 언니로요//한참을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언제 내 방에 들어왔을까요/우리 언니,/두 눈에 눈물 그렁그렁 달고/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네요//-언니, 미안해!/사과는 했지만/가슴이 두근두근/얼굴이 화끈화끈//우리 언니는 지체장애 2급이에요. - 이성자, 「언니, 미안해」 전문( 2013. 여름)     가족놀이 닷컴에서 언니를 주문하다니! 미래의 어느 날에 일어날 일을 상상력을 발휘해서 쓴 것 같다. 정말이다. 미래의 어느 날에는 언니를 주문하게 될까.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로 세상이 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한다. 한편으로 이 시는 어린이들이 즐겨하는 게임 속의 세계를 시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시가 제기하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자기에게 도움이 주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존재마저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언니, 미안해” 하고 시적화자가 사과하고 있지만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이런 일이 재발될 거라는 우려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더라도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요 장애우에 대한 사랑임을 이 시는 역설하고 있다.     간장종지 나는/사발과 대접 사이, 큰접시, 작은접시,/보시개와 뚝배기 사이에서//젤 키작고/쬐그많지만/상차림 한 가운데가 내 자리야.//내가 간장을 담았거든/밥그릇에 갔던 숟가락, 국그릇 갔던 숟가락이//굽신거리며 다녀가지,/부지런히 다녀가./“에헴!”//젓가락이 부침개 하나 집고/다녀가지/콩나물 하나 집고도/다녀가지.//뽐내지 않을 수 없지./“에헴 에헴!”/나는 키 작은 임금이야! - 신현득, 「키 작은 임금」 전문( 2013. 여름)     간장종지의 재발견이 이 시를 쓰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간장종지는 자신의 말 대로 “젤 키작고/쬐그많”다.큰 접시, 작은 접시, 보시개, 뚝배기와 비교하면 간장종지의 존재는 더 왜소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상차림 한 가운데가 내 자리”라거나 간장을 담고 있기 때문에 숟가락, 젓가락이 굽신거리며 다녀간다는 사실의 발견이 간장종지에게 높은 수준의 자신감과 존재감을 안겨주고 있다. 시인이 발견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관심두지 않는 쪼그맣고 볼품없는 간장종지에 대한 재발견이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소한 사물도 애정을 갖고 바라보는 시인의 따듯하고 배려 깊은 마음 때문이다. 시를 읽는 것은 시인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상상력을 갖고 있는 시인은 시인으로서 참 행복할 것 같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독특한 눈을 갖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것은 남들이 찾아내지 못하는 자신만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시인으로서 이처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문학가 한무숙의 육필 아들 용기 영전에 내놓은 원고
176    시에서 아이디어를 얻을수 없다?... 있다!... 댓글:  조회:2520  추천:0  2017-02-04
황인원 경기대 국문과 대우교수, 펴내 "우리가 잘 아는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는 시집을 곁에 두고 수시로 읽습니다. 잡스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기업의 리더 중에 시를 즐겨 읽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시간이 남아돌아서 시집을 펼쳐 드는 것일까요?” ‘건물은 악기다’라는 은유를 도입한 건물.   시를 통해 얻는 상상과 깨달음  해답은 “시를 읽으면서 다양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만나고, 이를 자신의 기업이나 삶의 경영에 활용하기 위함”이다. 황인원 경기대 국문과 대우교수(문학경영연구원장)는 “시를 읽으면 밥이 나오고 떡이 나온다”고 외친다. 시와 경영이라는 이질적인 분야의 접목을 시도해 온 그가 (흐름출판)란 책을 새로 펴냈다. 2008년에 출간한 를 업그레이드해 유명한 시 46편을 놓고 그 시에서 어떤 방식으로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얻을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황진이의 시조 가운데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꼽히는 을 예로 들어 보자. “동짓달 기나긴 한 밤 허리를 베어내어/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어른 님 오시는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저자에 따르면 이 시조가 훌륭한 이유는 시간을 잘라내고, 그것을 다른 계절에 붙인다는 기막힌 상상력 때문이다. 혼자 견디기 힘든 동짓달 밤의 시간을 뭉턱 잘라다가 님이 오실 지도 모르는 짧은 봄밤에 붙여 재회의 밤을 길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시적 상상력은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존재를 서로 만나게 한다”면서 “상상력이 개인의 성공이나 기업 경영에서 중요한 요소로 떠오른 시대에 시를 읽는 게 도움이 되는 이유”라고 말한다. 의인화 수법을 이용한 춤추는 의자. 세밀한 관찰로부터 탄생한 지퍼 연못. 그는 시를 통해 관찰, 통찰, 상상,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차례로 설명한다. 먼저 관찰은 발견이나 창조에 이르는 첫 단추로서 매우 중요하다. 관찰은 단순히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지닌 남다른 특징을 찾는 일이다.   대상이 지니고 있는 특징을 찾아야 무엇을 생성하거나 다른 것과 연결해 제3의 것을 창출할 수 있다. 관찰을 잘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의도적으로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전체를 먼저 봐서 편견을 없애야 하고, 남들이 못 본 사소한 것에 집중하며, 항상 물음표를 마음에 담아야 한다.  “퇴약볕이 쬐는/한낮입니다//아기 방 앞에/바람이 찾아왔습니다//‘아기야,/혼자 심심했지?’/그러나 방에선/대답이 없습니다.”(김원기, ‘아기와 바람’ 일부) 단순한 동시이지만 ‘왜’라는 발상의 전환이 들어있다. “바람이 저절로 부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아기를 찾아온다는 설정인데, 여기에는 ‘바람이 왜 불지’라는 의문이 들어 있다”는 저자는 “당연한 현상을 질문하다 보면 새로운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전업계의 효자 상품인 김치냉장고의 경우 “프랑스에는 와인저장소가 있고 일본에는 초밥저장소가 있는데 우리는 ‘왜’ 김치저장소가 없을까”라는 질문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저자 황인원 교수. 한편 통찰은 관찰에다 생각이 더해져 생긴다. 통찰이 뛰어날 때 발견이 이뤄진다. 그렇다면 통찰은 어떻게 나올까. “시인들이 어떤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시도하는 세 가지 생각법, 즉 의인화·의미부여·단순생각법에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 김수영의 시 ‘풀’은 의인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사물을 인간이 아닌 사물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습관을 들일 때 ‘춤추는 다리를 가진 의자’나 ‘스위치를 켜면 표정을 찡그리는 플레이트’ 같은 아이디어 상품이 나온다. 새로운 호칭 찾기, 치환, 재해석 등을 통한 의미 부여나 사물을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도 색다른 아이템으로 이어진다. 일본에서 폭풍우를 이겨 낸 사과를 10배나 비싼 가격에 ‘합격사과’란 이름으로 판매해 성공을 거둔 것은 재해석 방식을 적용한 것이다. 시를 읽는 방법 “시를 어떻게 활용할까”  상상과 깨달음은 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경지다. 뛰어난 상상을 하기 위해서는 에스프레소 커피나 감초처럼 다른 것과 쉽게 접목이 이뤄져야 하고, 상상력의 한계를 깨는 직유나 사물을 재발견하는 은유를 과감하게 발상에 도입해야 한다. 기이한 것끼리, 모순되는 요소끼리의 접목은 시에서 즐겨 쓰는 수사법이다. “오늘 광화문에서 만난/너는 꽃잎 같고/너무 고요해/귀가 떨어질 것만 같고//아니 번쩍이는 물고기 같고/물이 철철 흐르는 물병 같고/혹은 깊은 밤/문득 변하는 날씨 같고//바람은 불지 않는데/바람만 하루 종일 불고/너를 만난 시간은/봄날 같다 아아 기적 같다.”(이승훈, ‘어느 조그만 사랑’)  일상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도 시에서 배울 것이 많다. “나뭇잎 하나/바다에 가 닿았어요//바다 속이 와글와글/-처음 보는 물고기가 왔어//왕관가시불가사리랑/친척인가 봐//빨간수지맨드라미산호랑/친척일 거야//꼬리 흔들며/나뭇잎이 뭐라고 했을까요?”(추필숙, ‘나뭇잎물고기’)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감탄사를 쏟아내며 동심과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시인들이 시를 통해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기이한 접목의 사고법을 적용한 닌텐도 게임보이 부츠. 라는 시집을 펴낸 시인이기도 한 저자는 “사람들은 시에서 아름다운 표현만을 보고 감동하거나 베껴 쓴다. 그러나 그 표현이 왜 나왔는지를 생각해 보면 시를 더 깊이 이해할 뿐만 아니라 시를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사고의 혁신이 필요한 경영 분야에 시를 접목시키면 많은 아이디어와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강조한다. 버려야 채워진다는 ‘공경영’, 유연한 사고로 차이를 연결하는 ‘틈경영’, 마음을 어루만지는 사투리로 공감을 부루는 ‘사투리경영’, 한 번 웃으면 생산성이 3배로 늘어나는 ‘유머경영’, 말이 아니라 몸으로 말하는 ‘신뢰경영’,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기다리는 ‘기다림의 경영’ 등 다양한 경영 아이디어와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구체적인 감(感)을 시로부터 배울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를 읽는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갈래는 서정시·자유시, 성격은 서정적·자연친화적, 운율은 내재율, 주제는 인간과 자연의 교감, 수사법은 의인법…. 이것이 우리가 학교에서 시를 배운 공식이었지요. 물론 틀린 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것이 빠져 있어요. ‘나를 위해 무엇이 이 시에 담겨 있는가’ ‘내가 시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한윤정 기자 
175    "립춘대길" = <봄맞이 시모음> 댓글:  조회:2559  추천:0  2017-02-04
      봄의 서곡   누가 오는데 이처럼들 부산스러운가요 목수는 널판지를 재며 콧노래를 부르고 하나같이 가로수들은 초록빛 새 옷들을 받아들었습니다 선량한 친구들이 거리로 거리로 쏟아집니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더 야단입니까 나는 鋪道에서 현기증이 납니다 삼월의 햇볕 아래 모든 이지러졌던 것들이 솟아오릅니다 보리는 그 윤나는 머리를 풀어 헤쳤습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붙잡고 속삭입니다 어디서 종다리 한 놈 포루루 떠오르지 않나요 꺼어먼 살구남기에 곧 올연한 분홍 베일이 씌워질까 봅니다   (노천명·시인, 1912-1957)         + 봄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 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아 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윤동주·시인, 1917-1945) +           봄을 위하여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화사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 했는데 내가 어찌 이 말을 잊으랴? 봄이 오면 생기가 돋아나고 기운이 찬다. 봄이여 빨리 오라.   (천상병·시인, 1930-1993) +           無言으로 오는 봄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 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보게나   (박재삼·시인, 1933-1997)               + 봄   불타버린 낙산사에서 나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기념사진을 찍다가 이렇게 웃어도 되는가? 날이 저물어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연둣빛 촉을 틔운 봄이 낙산사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바늘구멍을 통과한 낙타가 쉬는 것처럼 편안한 얼굴 나는 그 모습이 좋아 폐허의 낙산사에서 미소 지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맹문재·시인, 1963-)         + 봄 일기   봄이 일어서니 내 마음도 기쁘게 일어서야지 나도 어서 희망이 되어야지 누군가에게 다가가 봄이 되려면 내가 먼저 봄이 되어야지 그렇구나 그렇구나 마음이 흐르는 시냇물 소리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봄맞이   바람이 들판으로 봄 마중 갔다. 흙 묻은 비닐 조각 병 조각 널려 있다. 새싹이랑 겨울잠 깬 친구들 터억 막고 있다. 아차, 봄맞이 들판 대청소를 깜빡했다.   (추필숙·시인)         + 매화와 산수유 입술 터졌다   처마 밑 고드름 끝에선 송알송알 땀 영그는 소리 눈 덮인 텃밭에선 쫑긋쫑긋 마늘순 기지개 켜는 소리 깨어진 얼음 사이론 낮게 흐르는 피아노 소리 강바람에 실려오는 산까치 짝꿍 부르는 소리에 매화와 산수유 입술 터졌다.   (강대실·시인, 1950-)         + 강철 새잎 저거 봐라 새잎 돋는다 아가 손마냥 고물고물 잼잼 봄볕에 가느란 눈 부비며 새록새록 고목에 새순 돋는다 하 연둣빛 새 이파리 네가 바로 강철이다 엄혹한 겨울도 두터운 껍질도 제 힘으로 뚫었으니 보드라움으로 이겼으니 썩어가는 것들 크게 썩은 위에서 분노처럼 불끈불끈 새싹 돋는구나 부드러운 만큼 강하고 여린 만큼 우람하게 오 눈부신 강철 새잎   (박노해·시인, 1958-)           + 봄 풍경   싹 틀라나 몸 근질근질한 나뭇가지 위로 참새들 자르르 내려앉는다 가려운 곳을 찾지 못해 새들이 무작위로 혀로 핥거나 꾹꾹 눌러 주데 가지들 시원한지 몸 부르르 떤다 다시 한 패거리 새 떼들 소복이 앉아 엥엥거리며 남은 가려운 곳 입질 끝내고는 후드득 날아오른다 만개한 꽃 본다   (신달자·시인, 1943-)         + 봄   겨울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의 작별 의식인 듯 봄빛 담은 햇살 사이로 한바탕 함박눈이 뿌렸다 기나긴 겨울 한철 죽은 듯 말없이 있더니 어느새 파릇한 봄기운 살그머니 풍기는 저 여린 가지들 너희들 살아 있었구나 살아 봄을 잉태하고 있었구나 오! 작은 생명의 신비한 힘이여 봄은 거짓말처럼 지금 눈앞에 와 있다   (정연복·시인, 1957-)         + 꽃말 하나를   봄이 오면 작은 화단에 이름 모를 꽃들이나 심어야지. 그리고선 내 맘대로 순이, 덕이, 점례, 끝순이 같은 이름이나 지어 줘야지. 지친 저녁달이 마른 감나무에 걸터앉아 졸 즈음엔 이름이나 한 번씩 불러 봐야지. 촌스러워, 촌스러워, 고개를 흔들어도 흠, 흠, 모른 척 해야지. 그래놓고 나 혼자만 간절한 꽃말 하나 품어야지 당신 모르게, 당신은 정말 모르게   (이시하·시인, 1967-)  
174    "동시집"을 돗자리로 깔고 "동시놀이" 알콩달콩 하자야... 댓글:  조회:2495  추천:0  2017-02-04
시험지 다 풀고 / 추필숙       다 풀고 뒤집어 놓은 시험지   엉덩이만한 시험지 돗자리처럼 깔고 앉아 공기놀이하고 싶다. 정답과 오답이 답답하다고 소리치겠지. 공깃돌 하나씩 집을 때마다 오답 하나가 정답 하나로 바뀌어 1점씩 들어나 100점을 훌쩍 넘으면 어쩌지 어쩌지…   종이 울리자 걱정까지 걷어간다. ----------------------------- 발표공포증 / 추필숙      ―발표해볼까요?   성교육 시간 선생님이 질문하자마자   쏙 머릴 집어넣고   두 손 두 발 넣고   폭 엎드리는데   ― 거기, 건욱이!   내 이름 듣자마자 고개 드는   우리반 거북이들.   -------------------------------------   /추필숙 시인 동시집          이 글은 시평도 발문도 평론도 아닌 같은 동시작가로서의 개인적인 감상문임을 밝혀둔다. 하여 동시평의 일반적 서론을 생략하고 추필숙 제2동시집 의 특징 몇 가지만 짚어보려 한다.    2집은 1집과 많이 달라져 있다.      그 첫 번째는 구성이 간결해졌다.    어느 심사평 일부를 옮긴다. ‘시는 보태기가 아니라 빼기 작업이라는 말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한 단어 만 빠져도 시 전체가 와해 될 정도로 정제된 시어로 간결하게 구성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군더더기가 없 다는 것은 시 쓰기가 어느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며 퇴고에도 심혈을 기우렸다는 얘기다. 그 퇴고도 뭘 알고 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함축성이 뛰어나다.    나도 그랬지만 대부분 초기 단계에는 ‘독자가 내 의도를 모르면 어쩌지?’하는 마음에 자꾸 친절해 진 다. 의도를 빨리 알아차리도록 설명을 하고 싶어진다. 2집의 대부분의 시편들은 설명은 행간에 묻어두 고 시적 맵시에 정성을 들렸다. 여기서 시적 맵시란 치장을 말함이 아니고 함축, 상징, 은유 등 시적 기 본에 충실해졌다는 얘기다.      세 번째,    어쩌면 현대시의 최대 화두인 새롭게 생각하기(낯설게 보기)에의 성과이다. 사실은 이 부분이 모든 예술 창작 성패의 바로미터가 된다. 낯설게 보기는 아이 같은 직관이 필요한 부분이다. 바꾸어 말하면 기존의 관습적 사고를 버리지 못하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다. 그러면 아이 아닌 어른이 어떻게 아이 같은 직관을 자질 수 있을까? 선천적인 부분도 있겠으나 이것은 훈련에 의해 어느 정도 도달할 수 있기 도 하다.    어떤 사물을 볼 때 관찰은 세밀하게 하되 표현은 단순하게 한다. 예로 을 보자     산 속에 몰래 걸어 둔 웨딩드레스        폭포는 흰색이다. 물보라가 꼭 장식 같다. 수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서 있는 자세이다. 여기까지는 관찰이다. 관찰의 결과로 스치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이 직관이다. 여기서 직관으로 얻은 결과는 웨딩 드레스다. 단지 쇼윈도가 아니기에 ‘산 속에 몰래 걸어 둔’ 것이 된다. 1집에 비해 직관으로 길어 올린 작품이 많다는 것은 어떤 훈련에 의해 도달한 성과이지 싶다.    그런 점에 비추어 추필숙 제2동시집 는 우수한 작품집 군에 속하며 성공적 작품집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누차 하는 얘기지만 작품집 한 권을 읽고 나면 그저 고만고만하다는 생각으로 지나쳐 버리기 일수 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뭔가 느낌이 팍, 오는 경우가 있다. 그때는 나같이 문외한도 감상문 한 줄 정도 쓰고 싶어진다. 지금처럼.    다만 존경하는 전병호 선생님께서 아주 훌륭한 발문을 써 주셨기에 나는 중복을 피하여 다루지 않은 작품에서 독후 생각의 번짐을 적어보려 한다.     반딧불이     꽁무니에 불 켜들고 반딧불이야, 뭐하니?     어둠을 지우려고 깜깜한 밤 닦고 있지.     그래야, 날이 새거든 아침이 오거든.        이 시를 읽는 순간 전율 같은 것이 전해 왔다.    시란 어떤 사물에 관해 새로운 해석 또는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지 싶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서 우 주의 섭리를 찾아 내는 작업이 시인에게 주어진 책무이지 않을까. 그렇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하지만 위의 시편을 보자.    반딧불이 꽁무니 불로 어둠을 지우므로 아침이 온단다. 바꾸어 말하면 아침이 오는 것은 반딧불이 때 문이라는 얘기다. 일반인들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시인이라면 이 대목에서 무릎을 칠만하지 않는 가.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는 등의 우주 섭리는 하느님의 영역이다. 그 하느님의 자리에 반딧불이를 앉힐 수 있는 사람은 시인 밖에 없다.    어떤 시인은 ‘떨어지는 한 잎 나뭇잎에서 우주의 무게를 느낀다’고 했다. 공감은 가지만 당위성의 확보 에서는 다소 막연한 느낌이 있었지만 는 구체적 묘사에서 당위성은 물론이고 합리성과 시적 서정성까지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이 시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다만 ‘꽁무니에 불 켜들고/반딧불이야, 뭐하니?’는 자칫 꽁무니에 불을 켜든 누군가가 반딧불이야, 뭐 하니? 하고 묻는 것으로 오해 할 수도 있어 ‘반딧불이야, 뭐하니?/꽁무니에 불 켜들고’처럼 1행과 2행을 바꾸면 도치법의 효과와 함께 그런 문제점은 확실하게 정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비     빗방울 후드득―     땅 위의 모든 것들이 마냥, 젖습니다.     사람들 후다닥― 우산을 펼쳐     비를, 밀어냅니다.        이 한편의 시에서 대단한 시의 힘을 느낀다. 그것은 이 시가 마련해 두고 있는 엄청난 후경(숨은 뜻) 때문이다.    현재 인류가 직면한 제일 큰 문제는 지구 환경이다. 극지의 빙하는 녹아내리고 적도 해양에서는 엘니 뇨현상이 잦아지는가 하면 광범한 지역이 사막화 되고 있다. 지구 곳곳에서는 여름에 폭설이 내리고 때   아닌 홍수로 난리를 치는 등 계절성마저 흐릿해 진다. 한편 에이즈, AI, 샤쓰 등 옛날에는 듣도 보도 못 했던 무서운 유행성 질환이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어딘 가서 읽은 한마디가 생각난다. 우연히 지구에 들렀다 떠나는 우주소년이 지구 친구에게 “참 아름 다운 별이야. 하지만 언젠가 이 지구가 멸망한다면 그것은 아마 인간 때문일 거야.”    그렇다. 이 모든 현상의 원인제공자는 인간이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조화이다. 빗방울이 후두둑 하면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조화이다. 땅 위의 모든 것은 수용하지만 거부하는 것은 아니 거부 할 줄 아는 것은 인간 밖에 없다.    우산이 무엇인가? 인간이 만들어 낸 문명의 이기이다. 이 문명의 이기를 자랑이나 하듯 후다닥-(후다 닥은 경망스럽고 신중하지 못한 행동에 대한 부사일 터) 펼쳐들고 비를 밀어내는 것이다. ‘이제 비에 좀 젖어 보아요’란 싯귀가 생각난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시를 쓸 수가 없다. 황사, 미세먼지, 납 등 온갖 유 해물질을 함유한 비는 젖을 수 있는 낭만마저 빼앗아버린 것이다. 아니 빼앗긴 것이 아니고 자업자득이 다. 자신이 만든 유해물질로 인해 점차 낭만은 사라지고 사회는 건조해 지는 것이다.    안락하고 편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지구는 병들어 가고 그 결과가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 온다는 사실을 이 시는 행간에 숨겨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사막     처음엔 산이었을지 몰라.     1마리, 23마리, 456마리, 7890마리 낙타가 발자국을 찍고, 찍고, 찍고, 찍고, 찍고,     찍어서 모래땅이 된 건지 몰라.        시인은 일망무제 사막을 보며 압도당하였을 것이다. 그를 압도하는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거대한 시간과 공간이다. 그 거대한 느낌을 시인은 참 재치 있게 풀어놓았다.    상전벽해란 말이 있고, 천지개벽이란 말도 있다. 산이 사막이 되는 현상을 이렇게 간단히 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시인이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세월동안 헤아릴 수 없는 낙타의 발들이 산을 부수어 사막을 만들었다? 이 얼마나 기 상천외한 발상인가!    우리가 영원에 가까운 긴 시간을 말할 때 억겁이라 한다. ‘겁’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시간 단위이다. 1겁 이란 사방 십리 되는 큰 바위에 일 년에 한번 선녀가 내려 와 바위를 돌 때 하늘하늘한 옷자락에 쓸려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말함이다. 아마 낙타의 발에 찍혀 산이 사막이 되는 세월도 1겁 쯤 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사막의 생성원인 치고는 기발하다. 이런 엉뚱함이야말로 동시를 쓸 수 있는 기본이다. 1단위, 10단위, 100단위, 1000단위씩 기하급수로 늘어가는 숫자의 표현도 1에서 0까지 열 개의 숫자를 1, 23, 456, 7890 이렇게 차례로 잘라 배열 시킨 것도 참 재미있는 착안이다.       피아노 치는 꽃게     피아노 치는 언니 손은 두 마리 꽃게     옆으로만 가다 서다 살짝 뒷걸음도 치는     건반 위에서 파도치는 꽃게 두 마리        이 시를 읽으면 하나의 그림이 그려진다. 자신의 연주에 취한듯 무아지경에 빠져 음악의 흐름을 따라 가는 언니와 그런 언니를 경이와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동생, 그러다 문득 좌우로 움직이는 다섯 손가 락. 꽃게의 다섯 발가락. 이렇게 詩作은 始作되는 것이다.    피아노 연주를 소재로 한 시 작품은 참 많다. 그 비유도 ‘파도를 베는 칼’에까지 왔지만 피아노 치는 손 을 꽃게에 비유한 것은 처음이지 싶다. 또한 동시의 비유로서 너무 잘 어울린다.    발발발발 기어가다 멈추는 듯 또 기어가는...    기어가는 게의 행동을 건반 위를 미끌어지는 손 위에, 반대로 건반 위 손 움직임을 갯바위를 기어가는 게의 모습에 오버랩 시켜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만큼 비유가 적절하다는 얘기다. 여기에 또 하나 재미 있는 부분, ‘살짝 뒷걸음도 치는’.    악보에서 긴 쉼표가 있을 때는 손을 잠시 피아노에서 내린다. 이것을 뒷걸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오른 쪽 고음, 왼쪽 저음, 뒤로 쉼표, 파도는 아마 클라이맥스 아니면 스타카토 부분일 것이다. 이로서 음악은 완성되는 것이다.    이 시를 읽고 난 후 바닷가에 기어가는 게를 만나면 피아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길을 가다 피아노 소리가 들리면 파도 사이로 기어가는 게를 만날지 모른다.             둘이서     할아버지와 누렁소 벼농사 지어     낱알은 할아버지가 볏짚은 소가     오물오물 쌀밥 우물우물 여물     꼭꼭 씹고 되새겨 씹고.        이 시를 읽는 순간 김종삼의 라는 시가 떠오른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평생 농사를 지으며 동고동락한 할머니와 소. 운명적인 동행이 한 폭의 묵화처럼 그려져 있다. 목덜미 에 얹힌 할머니 손은 동반자에 대한 애틋함이며 동병상련적 측은지심의 발현이다.    는 비록 동심적 언어를 썼지만 위의 시에서 느끼는 뭉클함이 있다.    비록 사람은 알맹이를 먹고 소는 껍질을 먹지만 공동작업의 과실을 공평(?)하게 나누는 풍경이 흐뭇하 고 정겹고 평화롭지 않은가.    온갖 비리와 불법과 사술로 자신들은 수백억, 수천억의 치부를 하면서 선원들의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부적격자와 임시직을 채용하여 쥐꼬리 월급을 주고 불법개조와 과적 등으로 개인의 배만 불리다 결국 무 수한 생명을 회생시킨 세월호의 탐욕이 이 시의 의미에 대비 된다.         빨강 신호등이 한 일     뚝,   길을 끊었다.     뚝,   길을 붙였다.     그 애가 건너편에 서 있다.        추필숙 시인은 독자를 가지고 논다.    길을/ 끊었다. 길을/ 붙였다. 여기까지만 읽을 때는 너무 뻔한 얘기여서 ‘뭐야? 장난치나?’ 싶다. 빨간 등이 들어오면 이쪽 길과 저쪽 길이 끊긴다. 빨간등이 나가면 이쪽 길과 저쪽 길이 연결된다. 이걸 누가 모르냐? 하다가 그 애가/ 건너편에 서 있다. 와 만나면 머릿속에서 뭔가 열심히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건너편 아이가 내가 좋아하는 아이라면 가슴이 뛰기 시작할 것이다. 하여 길을 붙여준 신호등이 고마 울 것이고 내가 싫어하는 아이라면 길을 붙여준 신호등이 미울 것이다. 아니면 그 아이는 환상속의 아이 일 수가 있다. 보고 싶지만 지금은 볼 수 없는 아이, 어쩌면 그 아이는 빨간등 때문에 지금은 볼 수 없는 아이일지 모른다. 2연과 4연과 5연은 경우에 따라 다양한 함수 관계를 형성하며 끝없는 사연을 만들어 낸다. 시인은 그 사연을 만드는 일을 독자에게 떠넘겼다.    밑도 끝도 없는 몇 마디에 독자는 한없이 바쁘다. 시인은 단수가 높다.         개미 열쇠     열쇠 구멍만한 개미집 입구     열쇠가 개미라서     대문도 없고 초인종도 없다.     그 많은 식구 나눠 줄 열쇠 다 만들 수 없어     개미 몸이 열쇠다.        추필숙 시인은 연상력이 뛰어나다.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의 힘이 강하다는 말 아다. 폭포를 서 있는 강으로, 피아노 치는 손을 꽃게로, 낙엽을 나무의 신발로, 여기서는 개미를 열쇠로  보고 있다. 그것도 자기집 열쇠로. 어느 누구는 깜깜한 밤 하늘의 달을 열쇠구멍이라 했는데 추필숙 시인 도 어지간 하다.    개미의 행렬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듯 연상은 연상을 낳는다. 개미집 입구는 열쇠구멍이 되고 개미는 열 쇠가 되고, 지 몸이 열쇠니 대문도 초인종도 필요 없단다. 지몸이 열쇠가 된 것은 식구가 너무 많아 열쇠를 다 만들어 줄 수 없어서란다.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으로 끝 없이 흘러간다. 단어는 단어를 낳고 그 단어 는 행을 낳고 행은 연은 낳고... 연은 다시...                위에서 보듯이 추필숙 제2동시집 에 수록된 거의 모든 시편들은 그 구성이 간결하고 함축적이다. 전병호 선생님의 말을 빌리자면 ‘앙상한 가지’ 같다. 단순 명료하다. 잎이나 꽃은 가지 속에 숨겨 두었다. 독자는 어떤 잎과 꽃을 숨겨놓았는지 찾아야 한다.    이 시집에서 제일 두드러진 부분은 와 이다. 여기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편들 이 참신하고 기발하다. 한편 단순한 은유에 머물지 않는다. 등에서 보듯이 반딧불 이, 비, 사막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전혀 다른 얘기, 즉 우주섭리에 대한 또 다른 해석, 편의주의 또는 탐욕적 문명비판, 거대한 시공에 대한 철학적 관조 등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알레고리의 전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는 동시의 지평을 넓히는 데 성공한 작품집이라 하겠다.    다만 동시는 아이들을 위해 쓰여 진 것이고 1차 독자 또한 아이들이라고 볼 때 위의 여러 시적 장치들 이 아이들이 읽어 내기엔 적합지 않다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동시도 시일진대 시가 갖추어야 할 제요소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요즘 아이들의 지적 감수성과 이해력 또한 가볍게 볼 일 도 아니다.    쉬운 시어로 짧고 간결하게 리듬감을 살린 점만 하여도 충분히 아이들을 배려한 동시가 아닌가 생각 한다. 추필숙 시인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기에 이 부분에 대해 더 많은 이해나 배려, 즉 어느 정도가 아이들에 적절한 수준인지를 고민하였으리라 믿는다.             출처 / 글쓴이 : 하빈 ///////////////////////////////////////////////////////////////////////////////////   알모책방 동시모임은 동시를 읽고 즐기는 독자들의 모임이다. 한 달 동안 각자 읽은 동시(시) 중에서 좋았던 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번 모임에서는 각자 읽은 시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에 대한 이야기와 추필숙 동시집 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시모임에 대한 이야기는 연어알님이 후기에 정리할 것이므로 나는 추필숙 동시집 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 시집에 대해서 굳이 얘기할 생각은 없었는데 동시마중 까페에 하빈님이 올린 글을 보고 나와 동시모임 친구들이 읽은 느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동시마중 까페에 하빈님이 올린 글을 읽고 무척 놀랐다. 한 권의 시집을 읽은 느낌이 이렇게도 다를 수 있구나 하는 놀라움이다. 하빈님은 시인이라니 어쩌면 그분이 읽은 느낌이 더 보편적일 수도 있겠다. 나는 시를 써보기는 커녕 작년 가을부터 동시를 제대로 읽기 시작한 말 그대로 동시에 있어서 왕초보자이다. 하빈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추필숙이라는 시인도 처음 만났다. 다른 시인들 역시 시로 처음 만났을 뿐 어떤 분들인지는 거의 모른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추필숙 동시집 에 실린 시 몇 편을 읽고 느낀 내 생각을 위주로 정리를 하겠다.   문학 작품에는 어쩔 수 없이 작가의 사상이나 세계관 등이 담기기 마련이다. 시집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시 한 편을 봤을 때는 모르겠지만 시집 한 권을 다 읽었을 때는 시인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동시집에 실린 시를 읽고 나는 이 시인이 굉장히 관념적인 시를 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이나 생명에 대한 배려심이 있는 사람인가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내가 주목한 시를 읽어보자.     봄 낚시   낚 싯 대 끝 에   사과나무는 사과꽃을 배나무는 배꽃을 대추나무는 대추꽃을   매 달 아 놓 고   기다린다, 나비와 벌이 낚싯밥을 물 때까지.     이 시는 아래에 본문 삽화를 함께 올린다. 봄은 시인들이 즐겨 노래하는 소재이다. 이 시인은 봄을 낚시에 비유했다. 꽃이 핀 나무에 사과꽃을 미끼로 배꽃을 미끼로 대추꽃을 미끼로 매달아놓고 나비와 벌이 물 때까지 기다린다고 표현했다. 아마 '낚시' '낚싯밥'이라는 흔히 쓰는 표현을 나무에 달린 꽃의 유혹을 받는 나비와 벌과 함께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낚시, 낚싯밥이 어떤 것인지 한 번만 더 생각했다면 그런 표현을 써서 봄과 나무와 꽃과 나비와 벌의 관계를 노래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낚싯밥에 대해서는 멀리 가서 찾아볼 것도 없다. 친절한 삽화가께서 적나라하게 그림을 그려주셨으니까.   낚시에 미끼를 끼우려면 저렇게 살벌한 바늘을 미끼의 살을 찢어가며 끼워야 한다. 단순히 걸어놓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일단 낚싯밥을 문 물고기는 입이며 아가미가 죄다 찢겨나가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낚싯대를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바늘은 더 깊이 물고기의 살로 파고들어 물고기를 고통스럽게 한다. 시인이 낚시와 낚싯밥을 생생하게 떠올렸어도 '나비와 벌이 낚싯밥을 물 때까지'라는 표현을 쓸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   봄은 생명의 계절이다. 낚시는 고통과 죽음의 자리이다. 낚시는 피 튀기는 모습이 덜 느껴져서 그렇지 덫이나 올무와 다르지 않다. 나비와 벌이 찾아드는 사과꽃 배꽃 대추꽃은 생명의 자리이다. 나무와 꽃과 나비와 벌과 봄이 어우러져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는 아름답고 숭고한 자리란 말이다. 낚시가 봄을 '낯설게보기' 위해 사용한 참신한 소재라면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게다가 정말이지 리얼하게 낚시바늘에 꽂힌 꽃을 그린 삽화를 시와 함께 보면서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시를 살펴보자.   팝콘     씨앗 되려던 옥수수 알맹이   - 제발,    땅으로 보내 줘!   전자레인지 안에서 소리친다.   팝팝팝 튀어 오른다.   줄기도 싹도 없이 3분 만에 옥수수 꽃 핀다.     이 시를 읽고 어떤 사람이 한마디 했다. 미친 거 아냐? 이 시를 읽고 동심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씨앗 되려던 옥수수 알맹이의 "제발, 땅으로 보내 줘!" 호소를 듣고 전자레인지에 팝팝팝 튀긴다니. 씨앗 되려던 소망도 못 이룬 옥수수의 죽음을 '꽃'으로 표현하다니.   땅으로 보내달라는 옥수수의 호소가 담긴 앞부분이 없었다면 그냥 팝콘에 대한 재미있는 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옥수수의 소리를 듣고도 전자렌지에 넣고 팝팝팝 튀길 수 있는 것은 동심이 아니다. 혹시 동심이라고 주장한다면 삐뚤어진 동심이다. 제발 땅으로 보내 달라는 옥수수의 호소를 들었다면 땅으로 보내주는 것이 동심이다. 옥수수의 호소를, 그것도 '제발~'이라 부탁하는 간절한 호소를 듣고도 그것을 전자렌지에 돌리고 옥수수의 죽음을 목도하고도 그것을 꽃으로 미화시키는 이 시를 나는 도대체 어떻게 봐야할 지 모르겠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해 이 시인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현충일     오전 10시 우우우웅 사이렌 울면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모두 경례   국립묘지에 묻혀서 절 받는 병사들   이 날만큼은  장군도 부럽지 않다.     이미 철저한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한 시이다. 대통령 밑에 국회의원, 국회의원 밑에 장군, 장군 밑에 병사. 일개 죽은 병사가 대통령 국회의원 장군에게 절 받는 영광을 누리니 부러울 것 없다는 말인가. 이 시를 읽으니 나라와 국민을 위해 죽어 땅에 묻혀서도 계급이라는 수직적인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병사의 영혼이 가엽게 느껴진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따위에게 절을 받아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병사는 자랑스러워야 한다. 죽은 병사가 장군 따위를 부러워하게 해서는 안된다.   암묵적으로 상대방을 내려다보는 시각은 바로 옆에 실린 시 '기념 촬영'에서도 드러난다.     기념 촬영     사진사 아저씨 내시 목소리로 말한다.   - 입궐하신 6학년 나으리들 모이시오. - 궁궐 잘 보이게 쪼그리게 앉으시오.   사람보다 더 대접받는 경복궁 여덟팔자 지붕 꼬리가, 에헴!     '내시 목소리'를 내는, 은근한 폄하 대상이 된 사진사 아저씨의 나으리들 모이시오 부름에 아이들이 제대로 모이기나 할까. 궁궐 잘 보이게 앉아 사진을 찍는 게 사람보다 더 대접받는 경복궁에 대한 비유로 적절할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읽게 되는 시이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지친다. 한 편 한 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끝이 없을 테니 이 정도로 줄여야겠다. 덕분에 생각이 많았다.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이 글은 하빈님이 올린 글이 동력은 되었지만 그에 대한 답글이 아님을 밝힌다. 그분이 올린 글이 아니었어도 이 시집에 대한 생각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좋은 시를 읽고 친구들과 나누는 글쓰기에도 부족한 에너지를 굳이 이 시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밀쳐두고 있었을 뿐이다. 이 시집을 읽고 전율을 느낄 정도로 좋았다는, 동시의 지평을 넓히는데 성공한 작품이라는, 하빈님의 생각을 존중한다. 다만 그와는 다른 면에서 전율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었다. 이 시집을 한 권이라도 팔기 전에 먼저 읽어서 다행이다.             출처 / 글쓴이 : 알모 ======================     ‘낯설게 하기’ 또는 ‘다르게 보기’   전 영 관(동시인)   “요즘에 읽는 동시들은 새로움이 없는 것 같아요. 그 내용이 그 내용이어요.” 얼마 전에 어느 문학모임에서 연세가 있으신 어느 여류시인이 내게 한 말이다. 내가 구독하고 있는 아동문학지에 발표되는 동시들을 읽어보면 그 여류시인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흔한 비유, 새롭지 않은 발상, 상투적인 표현 등은 어린이 독자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동시와의 거리감을 넓히게 되는 계기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게 된다. 러시아의 문학비평가이자 소설가인 슈클로프스키는(Shklovsky, Viktor Borisovich)는 ‘문학은 언어와 문자에 의한 예술이므로 표현에 있어서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가 요구된다. 예술은 삶의 경험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하는 것이기에, 습관적이고 일상적인 것을 탈피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하였다. 친숙하거나 인습화된 사물이나 관념을 특수화하고 낯설게 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을 갖도록 표현하는 방법인 ‘낯설게 하기’는 ‘다르게 보기’ 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시적 형상화, 비유, 구성 등 다양한 장치와 표현방법을 통해서 느낌이나 생각을 새롭게 하여 표현할 때, 어린이 독자들은 일상 세계를 새롭게 경험하고 자신의 생활 방식이나 사고방식에 관해 새롭게 지각하게 된다. 2013년 『오늘의 동시문학』 여름호에 발표된 ‘이 작가를 주목한다.’와 ‘여름을 여는 22인의 신작동시’를 중심으로 ‘낯설게 하기’ 또는 ‘다르게 보기’ 와 관련하여 다음 몇 편을 대상으로 살펴본다.   낚/ 싯/ 대/ 끝/ 에// 사과나무는 사과꽃을/ 배나무는 배꽃을/ 대추나무는 대추꽃을// 매/ 달/ 아/ 놓/ 고// 기다린다./ 나비와 벌이/ 낚싯밥을 물 때까지. - 추필숙, 「봄 낚시」 전문   사과꽃이나 배꽃, 대추꽃이 가지 끝에 피어있는 모습을 보고 ‘낚싯대 끝에 낚싯밥’ 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나비와 벌’을 물고기로 표현하고 있다. 아주 재미있는 비유이고, 발상이다. 그동안 흔하게 표현하여 왔던 사과 꽃과 배꽃, 대추꽃이 아니다. ‘낚싯밥’이란 표현으로 낯설게, 다르게 독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의 세계를 느끼게 하고 있다. 특히 ‘ 낚/ 싯/ 대/ 끝/ 에/’ 와 ‘매/ 달/ 아/ 놓/ 고’ 와 같이 한 글자를 바로 한 행으로 나타내어 ‘행 나누기의 낯설음’ 효과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낚싯대와 비슷한 모양의 시각적 이미지를 통한 시적 형상화를 꾀하고 있다.   참나무 소나무 잣나무의/ 울퉁불퉁한/ 나무 등걸// 다람쥐들 오르내릴 때/ 미끄러지지 않게/ 발받침이 돼 준다.// 산개미들 오르내릴 때/ 미끄러지지 않게/ 손잡이가 돼 준다.// 추위에 껍질 터져 울퉁불퉁/ 비바람에 속 터져 생긴 울퉁불퉁/ 나무의 그 상처들이. - 문성란, 「울퉁불퉁 계단」 전문   ‘추위에 껍질 터져 울퉁불퉁/ 비바람에 속 터져 생긴 울퉁불퉁/’한 참나무, 소나무, 잣나무의 나무 등걸은 바로 나무의 상처들로서 다람쥐와 산개미들이 오르내릴 때의 발받침과 손잡이가 되어 준다는 재미있는 발상의 동시이다. ‘울퉁불퉁한/ 나무 등걸’은 자신도 상처를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람쥐, 산개미들에게 발받침, 손잡이가 되어 준다는 자기희생과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가 새로운 비유로 신선하게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울퉁불퉁한/ 나무 등걸’을 나무의 상처로 본 시인의 시선이 낯설음에서 낯익음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곱슬머리 세탁소 아저씨/ “세에탁~ 세에탁~”/ 아침마다 동네 한 바퀴// 아버지 때 묻은 양복/ 어머니 구겨진 저고리/ 세탁소 자전거에 실려간다.// 묵은 때가 말끔하게/ 구김살이 반듯하게 되돌아오듯// 욕심 때. 가뭇가뭇 묻어 있는 나/ 게으름 때, 다닥다닥 늘어나는 나// “세에탁~ 세에탁~”/ 마음 세탁소 하나 생겼음 좋겠다. - 김완기, 「세탁소」 전문   마음의 세탁소가 생겨 구겨진 옷을 세탁하듯 마음을 깨끗이 세탁한다면 참 좋을 것이다. “세에탁~ 세에탁~” 하는 세탁소 아저씨의 음성을 들으며 ‘묵은 때가 말끔하게/ 구김살이 반듯하게 되돌아오듯’ 시인은 ‘욕심 때. 가뭇가뭇 묻어 있는 나/ 게으름 때, 다닥다닥 늘어나는 나’를 깨끗하게 없애주는 ‘마음의 세탁소’가 있다면 좋겠다는 재미있는 생각을 한 것은 바로 ‘세탁소’를 ‘마음 세탁소’로 다르게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고정관념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없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 창작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을 없애고 하얀 백지 상태에서 출발한다면 사물이나 현상 등이 새롭게 인식되어진다. 새로움을 찾는 일이 바로 ‘낯설게 하기’ 이며 ‘다르게 보기’이다.   달님이 내려와/ 놀다 가는 우리 동네// 지팡이가 오르고/ 연탄이 오르고/ 채소장사 쉰 목소리 오르다 마는 곳// 대학생 형 누나들이 다녀간 뒤/ 담벼락에선/ 너울너울 새가 날고/ 알록달록 꽃이 피고// 매일 아침/ 갈라진 벽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면// 사람들은/ 골목골목 그림책을 넘기며/ 꽃 계단을 오르내린다. - 이유정, 「벽화마을」 전문   고정관념을 없애고, 하얀 백지 상태로 출발해야 새로움을 찾을 수 있으며 그 새로움이 바로 ‘낯설게 하기’ 이며 ‘다르게 보기’ 라고 앞에서 언급하였다. 위 동시 「벽화마을」은 ‘달님이 내려와/ 놀다 가는 우리 동네’ 는 달님 대신 그 빈자리를 ‘지팡이’, ‘연탄’, ‘채소장사의 쉰 목소리’ 가 채운다. 또 ‘대학생 형 누나들이 다녀간 뒤/ 담벼락’ 그 빈자리는 ‘새’와 ‘꽃’, ‘햇살’이 채워 마을 사람들은 ‘골목골목 그림책을 넘기며/ 꽃 계단을 오르내린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고정관념’을 ‘달님’으로 비유를 한다면, 달님이 떠나 하얀 백지상태에서 새로움으로 찾아온 것들이 ‘지팡이’, ‘연탄’, ‘채소장사의 쉰 목소리’ 이다. 또 역시 ‘고정관념’이 바로 ‘대학생 형 누나들’이라 비유한다면, 그들이 떠나 하얀 백지상태에서 새로움으로 찾아온 것들이 ‘새’와 ‘꽃’, ‘햇살’이다. 이렇게 고정관념을 없애고, 하얀 백지상태로 두어야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르고, 모든 것들을 새롭게 인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인식들이 바로 낯설고 다르게 보이게 함으로써 어린이 독자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해 주고,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에 관해 새롭게 지각할 수 있게 해준다.   사과나무 배나무를/ 흔들어대더니/ 하얀 바람은/드디어 하얀 꽃을 피웠다.// 개나리 가지 똑똑/ 흔들어 깨우더니/ 노오란 바람은/ 노오란 꽃을 피워/ 활짝 웃는다.// 장미나무 가시 피해/ 봉숭아 꽃잎간질이더니/ 화장을 한 빨간 바람은/ 빠알간 꽃을 피운다.// 천연색 바람은/ 꽃 이름 불러 물들이고/ 봄부터 사계절을 만든다. - 조무근, 「천연색 바람은」 전문   ‘하얀 바람’, ‘노오란 바람’, ‘빨간 바람’, 바람이 어떻게 색깔을 가지고 있으며, 천연색 바람은 또 무엇일까? 어린이 독자들은 궁금해 할 것이다. 이 ‘낯섦’이 시적 긴장을 가져오고, 그 시적 긴장은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진다. 위의 동시 내용을 다음과 같은 구도로 재미있게 요약할 수 있다.   하얀 바람 → 사과나무 배나무 → 하얀 꽃 노오란 바람 → 개나리 → 노오란 꽃 빨간 바람 → 봉숭아 → 빠알간 꽃 천연색 바람 → 꽃물 → 사계절   ‘다르게 보기’란 단지 시각적인 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의 감각 기관 중 시각, 즉 눈은 대단히 중요하다. 모든 지식은 눈을 통해서 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바라볼 때, 우리 눈에 ‘있는 그대로’ 보아서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기보다는, 그에 앞서 들어와 있는 어떤 경험이나 지식에 의해 재해석된 모습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사람마다 재해석된 모습들이 모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르게 보기’는 시적 다양성으로 인해 흥미롭게 독자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다음 동시 「기와지붕처럼」 은 기와지붕의 모습을 의인화하여 기와지붕의 일상의 모습들을 시인의 눈을 통하여 새롭게 형상화시키고 있다. ‘다르게 보기’의 결과이다.   너랑/ 친구했으면 좋겠다.// 땡볕 아래서/ 함께 땀을 흘리던// 천둥 속에서/ 나란히 비를 맞던// 달빛 한 장 끌어 덮고/ 팔베개를 나누던// 서로 등 기대고/ 한 하늘을 바라보던// 순이네 집/ 기와지붕처럼. - 조기호, 「기와지붕처럼」 전문   지금까지 『오늘의 동시문학』 여름호에 발표된 ‘이 작가를 주목한다.’와 ‘여름을 여는 22인의 신작동시’를 중심으로 ‘낯설게 하기’ 또는 ‘다르게 보기’ 와 관련하여 몇 편을 대상으로 살펴보았다. 어린이 독자들에게 일상의 세계를 새롭게 경험하고, 자신의 생활이나 사고방식에 관해 새롭게 지각시키기 위해서는 ‘낯설게 하기’와 ‘다르게 보기’를 통한 동시 창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시적 형상화, 비유, 구성 등 다양한 장치와 표현방법을 통해서 느낌이나 생각을 새롭게 하여 표현할 때 가능하다. 위에서 거론한 몇 편 외에 다른 동시작품들 모두 여기에서 함께 거론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지면관계로 다음 기회로 미룬다.(*)        
173    쇠사슬은 노예의 령혼까지 묶어 놓는다... 댓글:  조회:2709  추천:0  2017-02-04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상호 계기적인 주체다   늘샘의 명시단평:                 -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김상천 문예비평가               ▲ 김상천     ©브레이크뉴스   노예로 살 것인가? 주인으로 살 것인가? 나는 시인 백석에게서 주체의, 욕망의 변증법을 본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노예는 쇠사슬에 묶인 존재다. 쇠사슬은 노예의 영혼까지 묶어 놓는다. 이런 불행은 자본이라는 ‘물적’ 현실이 그 지배적 폭력의 형식으로 현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이 시의 화자도 마찬가지다. 즉 시적 화자는 지금 일제 치하라는 폭력적 현실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채, 아내도 집도 모두 잃고 부모와 가족과도 멀리 떨어져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한없이 외로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물적, 지배적 현실에서 소외된 이상 그는 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여 그는 어느 목수네(박시봉)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서 쥔을 붙일 수밖에 없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방(方)은 방(房)이다. 즉 그는 남의 집에 세를 얻어 기거하게 된 기생적 존재, 잉여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잉여적 존재가 꾸는 ‘너무도 많은 생각들’은, 무의미한 기표에 불과하고, 뜻없는 글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그는 이렇게 환멸적 자기애라고 할 수 있을 상상적 거울에, 자폐적 기호놀이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환멸적 자기애의 끝은 죽음이다. 여기, 환멸적 자기애의 끝이 죽음이라는 것에서 우리는 '거세와 좌절, 박탈은 모두 주체의 소외'라는 정신분석학자 라캉Lacan의 전언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나’다. 예술은 해방을 그 고유의 존재 조건으로 하는- 왜냐하면 체계는 인간과 예술의 적이기 때문이다-본질적으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지향한다. 주체의 자기소외는 자기도취다. 죽음에 이르는 나르시시즘이다. 자기도취에 출구는 없다.    그러나 여기, 고개를 들어 주위를 바라보고 나와 주위를 인식의 대상으로 설정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나’이기를 그치고 나는 타자가, 네가 될 수 있는- 왜냐하면 나는 너의 욕망의 구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전이displacement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단순히 나이고만 한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더 크고 높은’ 어떤 존재와 관련되어 있다는 연대의식solidarity consciousness에 다다르는 순간, 나는 결코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매개적 지평의 세계로 넘어간다. 그리하여 점차 '고립된 자아'의식에서 벗어나 보다 확장된 '열린 자아'의 단계로 의식이 전화하는 순간, 그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상징'이라는 세계 이미지다.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다. 가령, 김수영이 '귀족'이라는 자기도취의 거울적 상상의 단계를 벗어나 ‘풀’이라는 상징에서 거대한 뿌리라는 역사의 주체를 발견하게 된 과정처럼.       그것은 분명 자신과는 다른 존재(타자)이지만 동시에 이 ‘크고 높은’ 그 무엇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다시 말해 외롭고 춥고 고독한 가운데서도 굳고 정하게 버티고 서 있는 '갈매나무'라는 존재들에 대한 유적 인식의 전화이다.     이런 인식의 전환과 관련하여, 주목해 볼 수 있는 것은 문체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문체는 단순한 기술의,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관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우리는 또한 ‘언어도 무의식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는 라캉의 금칼 같은 명제를 마주한다. 그리하여 여기, 구조화된 형식으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바로 콤마 ‘,’의 빈번한 사용이다. 이는 의식, 무의식 중에 물적, 폭력적 현실이 압도하는 현실에서 무의미의 나락으로 떨어진 시적 화자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조급하고 간절한 염원처럼, 의미있는 세계에 대한 매우 강렬하고도 집요한 열망에 휩싸였다는 것을 방증한다. 즉 여기서, 쉼표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물적 현실이 압도하는 현실에서 그 물적 현실을 넘어 새로운 욕망을 실현하려는 끈질긴 의미화 기제mechanism라고 볼 수 있다.       서술narrative 또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서술은 산문정신, 즉 실용적 목적으로 현실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를 그 핵으로 하는 표현방식이다. 즉 그는 서술을 통해 자신이 처한 외적, 지배적 현실을 정확하게 파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현실을 서술을 통해(나는~헤매이었다.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외로운 생각이 드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즉, 자신의 지리멸렬한 삶을 개념화함으로써 그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의 전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희망의 지렛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 새로운 관점의 전이의 정점에서 우리는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루’를 만나다.     더욱 중요한 것은what matters more '그'다. '그the'는 선험적 기표다. 즉 ‘그’는 그가 익히 갈매나무를 알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다시 말해 ‘그’는 기억이고, 대치이고, 욕망에 다름 아니다. '그'는 하나의 변형, 이형으로서의 반복이자 새로운 전망으로서의 차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그를 통해 환기된 갈매나무로 인해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한 줄기 희망의 빛a ray of hope을 본다.
172    시를 말하는 산문, 산문으로 된 시 댓글:  조회:2333  추천:0  2017-02-04
: 2017.02.04 03:02   고독한 대화ㅣ함기석 지음ㅣ난다ㅣ444쪽ㅣ 이 책의 장르는 '시산문'. 시를 말하는 산문이면서 동시에 산문으로 된 시다. 나름의 시론(詩論)으로도 읽힌다. 부제는 '제로(0), 무한(∞), 그리고 눈사람'. 이 연쇄적 동그라미가 수학도이면서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인 저자의 정체를 드러낸다. 책에 담긴 208편은 시에 대한 비장한 은유로 점철돼 있다. "시는 마침표 없는 육체다."(시) "시인은 자신의 일생을 죽음 쪽으로 던져 삶에 닿으려는 격렬한 폭포다."(시인) 시와 수학을 연결하는 사유도 흥미롭다. "수학은 물리적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든 불변하는 진리의 핵심을 담아내려는 최소한의 언어를 지향한다. 극소를 지향하여 극대의 효과를 노린다는 점에서 시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수학은 꿈의 언어이자 존재의 언어다. 천국과 지옥, 존재와 무가 공존하는 추상의 시다."(추상의 시) 현재 시단(詩壇)에 대한 날 선 시각도 번뜩인다. "난해하지 않은 난해한 시는 가차없이 공해다. 인식의 깊이, 사유의 진폭, 반성적 통찰 그 어느 것도 내장되지 못한 난해를 가장한 난해 시는 전혀 난해하지 않다. 난해한 전통 해체의 시에도 짝퉁이 많지만 난해하지 않은 전통 서정시에는 더 짝퉁이 많다."(난해 시) 책 말미엔 희곡도 실었다. 저자가 유령과 대화하는 2인극이다. 실제와 재현, 인간과 언어의 비극적 간극을 얘기하면서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누구인가 자문한다. 유령 : 당신은 누구요? 함기석 : (잠시 침묵한다)             그림자요…             실재하는 환영의 숲이오...   /ⓒ 조선일보 정상혁 기자
171    모든 시관(詩觀)은 그 시인의 우주관에서 비롯된다... 댓글:  조회:2547  추천:0  2017-02-04
   ▒詩에 대한 각가지 정의 시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삶이란 무엇인가?" 와 같은 어렵고도 정의 내리기가 힘들 것 같네요. 모든 시인은 자신이 내린 詩觀(시관)에 입각해 작품을 세계를 형성했고, 문학가나 비평가는 그의 시관에 의해 시를 비평하고 연구했기 때문입니다. 시의 정의가 여러 가지가 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대상을 보는 시인의 안목이 여럿이기 때문이라고 생각 됩니다. 시를 보는 각도가 상이하고 방법이 달라서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조지훈님은 시관과 우주관의 관련에 대해 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오트(T.S.Eliot)는 라고 말했습니다. 시인이나 문학자라고 일컬을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 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기록했으니, 많은 정의가 범람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정의 중에서 몇 가지를 적어 봅니다. 1. 시는 율어에 의한 모방이다..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2. 시는 미의 운율적 창조다..포우(A.Poe) 3. 시란 상상 위에 환상을 불러 일으키는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기술, 즉 화가가 색채로 하는 일을 언어로 하는 기술을 말한다..매콜리(Macaulay) 4. 시는 정서의 표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 도피요,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 도피다..엘리오트(T.S.Eliot) 5. 시를 구성하는 두 개의 주요한 원리는 격조의 은유다..웰렉(R.Wellek) 6. 시는 언어의 비평이다..스펜더(S.Spender) 7. 시는 언어의 건축이다..김기림(金起林) 8. 시는 위대하고 겸손한 것이다..키이츠(Keats) 9. 나의 시는 나의 커다란 참회다..괴테(Goethe) 10.시는 강한 감정의 자연적 발로다..워즈워드(Wordsworth) 11.시는 가장 행복한 심성의 최고 열락의 순간을 표현한 기록이다..셸리(Shelley) 12.시는 유용하게 즐거이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보왈로(Boileau) 13.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이다..허드슨(W.H.Hndson) 14.시는 체험이다..릴케(Rilke) 15.우리들은 음악적인 사상을 시라고 부른다..카라일(Carlyle) 16.시는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다..시드니(P.Sidney) 17.시는 시적 진리와 시적 미의 법칙에 의한 비평에 알맞는 상태에 있는 인생의 비평이다..아놀드(M.Arnold) 18.시는 인간 사상, 감정을 율동적인 운문으로 표현한 문학의 한 장르다..김용호(金容浩) 19.우주의 생명적 진실이라는 시의 본질이 사상의 정서적 감동이라는 시의 작용을 통하여 언어의 율동적 조형이라는 시의 표현을 갖출 때, 여기 한 편의 시가 나타나는 것이다..조지훈(趙芝薰) 20.시는 고상한 정서의 고상한 영역을 상상에 의하여 음악적 형식으로 암시한 것이다..러스킨(Rnskin) 21.시는 영감을 받은 일종의 산술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추상적인 수나 삼각이나 구형같은 방정식이 아니고, 인간 감정의 방정식을 주는 것이다..파운드(E.Pound) ▒시의 종류 1. 형식상의 분류 (1)정형시..일반적을 정형시란 시의 형식이 일정한 규칙에 의해 이루어진 시 시인 서정주는 이라고 말하였다. (2)자유시..자유시는 정형시가 지닌 형식적인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형식을 창조한 시 여기서 자유란 형식을 창조적으로 자유롭게 만드는 자유 전통적으로 내려 오던 정형시의 형식과 맞설 수 있을 정도의 참신한 형식을 자유롭게 만들어 내는 것. 자유시는 19세기의 미국 시인 휘트먼이라든지,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들의 시험을 거쳐서 이루어 졌다고 한다. (3)산문시..산문시는 시적인 내용을 산문으로 나타낸 시. 산문시와 산문의 차이..산문시와 산문은 모두 리듬을 갖지 않는 면에서는 일치하나 산문시에는 산문에 없는 그 무엇, 즉 시정신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2.내용상의 분류 (1)서사시..서사시의 특색은 객관적이고 설화적인 것 서사시를 의미하는 epic(영)은 라틴말의 epicus, 그리스 말의 epikos 곧 epos에서 온 말로서, 이것은 ,,를 뜻함. 서사시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을 이야기한 또는 음송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예)호머의 , 우리나라 김동환의 , 김용호 등이 서사시라고 말해지고 있다. (가)성장의 서사시(epic of growth):이 시는 고대 및 중세의 서사시로서 민족적 서사시 라고도 할 수 있다. 영웅호걸이나 집단적 운명을 그린 것 (나)예술의 서사시(epin of art):이 시는 르네상스 때의 서사시로 단테의 , 탓소의 , 밀턴의 과 등이 속함 (다)인생의 서사시(epic fo human):롱펠로우의 이란든지, 테니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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