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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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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어릴 때부터 바른 글씨체를... 댓글:  조회:2808  추천:0  2017-01-22
어릴 때부터 바른 글씨체를 익히게 하자!  어린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글씨 쓰기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쓰는 일이 귀찮아서이기도 하고, 자기 글씨가 예쁘지 않으니까 노트에 직접 쓰지 않는다고 한다. 또는 연필을 오랫동안 쥐고 글씨를 쓰면 손에 굳은살이 박히거나 팔이 아프기 때문에 글씨를 쓰지 않는 어린이들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 어린이들이 글씨를 쓰기 싫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어릴 때부터 컴퓨터로 글 쓰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는 고학년뿐만 아니라 저학년들도 일기를 컴퓨터로 쓰면서 수업 시간이나 시험 시간에만 글씨를 직접 쓰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서 어린이들은 점점 글씨 쓰는 일이 따분하고 소모적이라는 생각을 할 뿐, 글씨를 바르게 쓰는 일이 왜 중요한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글씨를 못 쓰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학교 교육이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현재 초등 학교에서는 말하기·듣기·읽기·쓰기 등으로 나뉘어 있지만, 쓰기 영역을 가르칠 때 글쓰기 연습보다는 글짓기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창의력을 키워 주는 글짓기도 중요하지만 먼저 바탕을 이루어야 하는 글씨 쓰기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체계적인 글쓰기 교재가 없어서 교사들조차도 특별한 글쓰기 지도를 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첫째, 글씨체를 바꾸기 위해서는 반복해서 쓰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가능하면 쓰기 연습을 많이 할 수 있도록 칸을 여러 개 만들었다.  둘째, 쓰는 칸의 크기는 각 학년 쓰기 교과서에 명시되어 있는 칸의 크기에 맞추었다.  셋째, 한글의 기본 모양을 정확하게 익힐 수 있도록 칸 안에 기본 모양을 나타내는 틀을 넣었다. 이 외에도 틀리기 쉬운 낱말이나 어려운 낱말 중심으로 문장을 만들어서 받아쓰기에 대비할 수 있게 하였고, 칸을 실제 원고지 모양으로 만들어서 원고지 사용법을 저절로 익힐 수 있게 하였다.  「국어 교과서 따라 글씨체 바꾸기」는 자기가 쓴 글씨도 못 알아보는 요즘 어린이들을 위한 효과적인 학습 교본서이다.    
129    [시문학소사전] - "오마주"란?... 댓글:  조회:4626  추천:0  2017-01-22
"오마주"란?ㅡ 프랑스어로 '존경'을 의미하는 단어. 일반적으로 타 작품의 핵심요소나 표현방식을 흉내내거나 인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사를 임명하는 주군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봉신이 두 손을 합장하고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가리키는 뜻이었으며, 존경이라는 의미답게 원작에 대한 존경심의 표출 그 자체가 목적이며, 타작품을 모방하며 대부분 단순 풍자나 개그 효과를 노리는 패러디와는 달리 딱히 개그 장면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원작의 개그요소를 오마주했다면 몰라도. 패러디와 표절이 구별하기 힘든 것처럼, 오마주는 단편적인 장면이 아닌 작품 전체에 걸쳐 반영되는 경우가 많기에 표절과는 종이 한 장 차이라 명확히 구별하기는 힘들다. 때문에 오마주 제작자가 원작에 대한 오마주라고 주장해도 원작자 쪽에서 자신에 대한 일종의 존경심을 느끼지 못했을 시 표절 논쟁으로 번지곤 한다. 다만, 오마주라는 뜻 자체가 '존경'이기 때문에 오마주의 대상로 인정받는 경우는 보통 세월이 인정한 거장의 작품이며, 오래된 작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처럼 마니악한 B급 영화들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놓고 인용했다는 티를 내며 작품들의 시기도 많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누구나 오마주라고 인정한다. 그러니까 배꼈다는 게 확실하게 보이면 오마주, 어설프면 너 표절. 또 한 가지 구별법이라면 오마주를 해서 만든 그 작품이 공들여 만든 티가 나면 오마주로 "인정"이 되고 아니라면 그냥 표절로 매도당한다는 구별법도 있다. 오마주를 하는 작가가 정말 공을 들여서 오마주를 빼고서라도 작품의 완성도가 뒤지지 않도록 만든 다음에 고전명작의 명장면을 사이사이에 끼워넣는다면 오마주이고 오마주를 빼면 아무것도 안 남는 대충 만든 저질인 주제에 고전명작을 참조한 장면들로만 주목을 받으려 한다면 표절이란 것이다. 정말 확실한 것은 원작자에게 오마주 허락을 받았느냐도 된다. 오마주 허락을 받았으면 확실히 오마주라고 칭할수 있다. 대표적으로 《킬빌》은 오마주를 위해 아예 원작자에게 허락을 받았다. 인용한 작품이 발표된 지 불과 몇 개월, 몇 년 차이 나는 상황에서 오마주 운운하는 것은 유행이나 인기에 편승한 표절의 변명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이비의 《유혹의 소나타》 뮤비처럼 대놓고 FF7 AC를 표절한 뒤 오마주였다고 주장해봤자 씨알도 안 먹힌다. 구별하기 힘든 탓에 정말 오마주하고도 표절로 오해받는 마당에... 사실 패러디는 그 코믹적 성격상 상대적으로 오마주보다는 구분이 쉽긴 하지만 패러디나 오마주나 표절과의 차이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선 비슷하다.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유명 캐릭터인 기동전사 건담의 샤아 같은 경우도 젝스 마키스나 라우 르 크루제 같은 경우는 오마주에 가깝다고 볼수 있지만, 단순히 빨간색이라서 세 배 정도 빠르다든가, 또 빨강에 집착하는 면모를 보이는 모습은[1] 패러디에 가깝다.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와 방드르디의 경우는 패러디나 오마주라 하지 않고 주로 안티테제라고 한다. 그리고 풀 프론탈 같은 경우는 자기표절인지 그냥 표절인지 논란이 많다.[2][3] 학계에서도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경우, 학문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대작의 제목에서 단어를 살짝 바꾸거나 문장배열을 그대로 따옴으로써 해당 저서와 학자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네이버 웹툰 《와라!편의점》에서 꺼벙이 오마주가 등장한다. 오마주가 무엇인지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일부 독자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그림체가 바뀌었다고 욕을 하기도 했다.세월의 흐름이여[4] 2001년작 영화 《진주만》에서는 아예 이 단어가 등장한다. 주인공인 미 육군 항공대 조종장교 매콜리가 곡예 비행을 펼치고 불려가 상관 둘리틀 소령에게 갈굼을 당하는데, 뛰어난 비행사인 둘리틀에게 영감을 받아 따라했다며 변명하는 대사가 "An homage, sir."이다. 이에 대한 둘리틀의 대답은 "That's BULLSHIT, McCawley!"(…)그러나 그 후에 즉시 마이클 베이답게 "But it's very, very good bullshit."이란 개드립을 친다 그 외의 용례로는 중세의 기사 서임식 과정 중에, 기사로 임명하는 주군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봉신이 두 손을 합장하고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말 그대로 주군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 자세인데, 그 이후에 서임을 받는 기사는 기사로 서임되기 위해서 피를 보아야 했기 때문에 주군에게 따귀를 맞고(..) 코피를 흘렸다. 보통 기사 서임식을 묘사한 영상물에서 칼을 어깨에 대는 것 같은 건 근세 이후에 만들어진 법식이고, 중세 때는 이렇게 따귀를 쳤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학생들이 책상 위에 올라가는 장면도 키팅 선생에 대한 학생들의 오마주라고 할 수 있다. 존경의 대상을 모방하는 행위니까. 물론 요즘 쓰이는 '오마주'에 대한 용례는 아니지만. 1.1. 오마주에 대한 오해[편집] 오마주와 관련해서는 나무위키에 잘못된 용례가 무척 많다. 같은 작가의 작품 사이에서 오마주(존경)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다. 백보 양보해서 '셀프 패러디'라는 단어(사실 이것도 이상한 말이지만)까지도 인정하더라도, 오마주는 정말 곤란하다. 자기가 자신을 존경하여 경의를 표한다고 말하는 거나 같다. 나무 위키도 일단 위키니까 올바른 어법을 준수하는 것을 권한다. 예를 들어,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작품 카이지에 아카기 시게루가 나오는 것 같은 경우에는 카메오라는 좋은 단어가 있다. 'CLAMP의 작품들은 전개가 다 비슷하다'같은 말을 하고 싶다면 '매너리즘'등의 어휘를 사용하자.  그리고 몇몇 작품의 평가란을 보면 오마주가 많은 것 그 자체만으로 호평 받을 점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혹시 위키러 중에서 영화 평론가 혹은 제작가 지망생이 있으면 명심하자, 오마주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영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혹은 의미있게 나오고, 영화 자체가 좋아야한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은 오마주가 넘쳐 나지만, 그 자체로 극찬을 받는게 아니라 그런 요소들을 영화속에서 잘 활용하고 소화해내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반면에 매트릭스 이후 워쇼스키 자매의 오마주 넘쳐나는 작품들이 어떤 평을 받고 있는가.  2. 오마주를 많이 하는 작가들[편집] 데즈카 오사무 - 이제는 오마주의 대상이 되는 일이 당연히 훨씬 더 많다. 워쇼스키 남매 이마가와 야스히로 쿠엔틴 타란티노 ZUN 라임어택: 1집 앨범명이 Hommage. 90년대 골든 에라에 대한 존경을 주제로 삼은 트랙이 많다. 좀비왕 : 본인이 기획을 맡은 플루토니움에서 다른 게임의 캐릭터 다수를 오마주라는 이름으로 외관 컨셉을 다른 게임들과 비슷하게 하다 표절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5] 3. 오마주의 대상이 자주 되는 작품들[편집] 소위 말하는 '거장'의 작품들, 이를테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들, 스탠리 큐브릭,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들이 많은 오마주 대상이 된다. 특히 구로사와는 동양인 감독으로는 이례적으로 할리우드에서 수많은 오마주의 대상이 된 것으로 유명하다.   007 시리즈 1984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별의 별 작품에서 다 오마주되기로는 본 목록에 있는 작품들 중에서도 최다일 듯. SF와는 생판 관련 없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 게임인 스포어에까지 등장. 메탈기어 솔리드 피스 워커에서도 나온다. AKIRA - 작중 시마 테츠오의 초능력은 《드래곤볼》의 에네르기파의 모티브가 되었고 시마 테츠오의 전체적인 외형은 베지터의 모티브가 되었다. 크로니클(영화)의 경우 감독이 배우들을 아키라 작중 인물 이름으로 별명 붙여 부를 정도로 완전 오마주했다. Warhammer Warhammer 40,000 - 스타크래프트가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가면라이더 시리즈 겨울 연가 근육맨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 시리즈가 늘면서 퍼스트 건담 이외의 오마주도 늘고 있다. 다만 최신작일수록 내용탓인지 시기 탓인지 오마주보다는 패러디가 많은 편. 물론 패러디도 오마주도 퍼건의 패러디를 책임지는 세 배 빠른 남자 덕분에 퍼스트 건담이 제일 많기는 하다. 내일의 죠 대부 수많은 마피아물의 클리셰를 제공하였다. 드래곤볼 드래곤 퀘스트 벤허 라이온 킹 람보 록키  주인공 록키 발보아가 뼈를 깎아가며 훈련하는 장면은 많은 스포츠 작품의 귀감이 되었다. 루팡 3세 마징가Z 매트릭스 모비 딕 몽테크리스토 백작 미션 임파서블 반지의 제왕 매드 맥스 북두의 권 블랙잭 삼국지연의 성경 세인트 세이야 스타쉽 트루퍼스 스타워즈 싸이코 아서 왕 전설 에일리언 시리즈 유년기의 끝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42 이소룡이 등장하는 절권도 영화 죠죠의 기묘한 모험 쥬라기 공원 시리즈 일본의 많은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두루두루 미쳤다. 천공의 성 라퓨타 철완 아톰 킹콩 타잔 터미네이터 시리즈 현기증 혹성탈출 시리즈 원피스   [1] 실제 샤아는 이러지 않았다.[2] 해당 캐릭터가 원본이 동일 세계관 내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등장하였고, 이전 캐릭터의 대사를 광고 같은 느낌으로 틈만 나면 발언하지만, 정작 캐릭터 자체의 매력이 없어서 그냥 프라팔이용 상업성 캐릭터라 느끼는 사람들에게 주로 나오는 비판이다.[3] 위 캐릭터들도 자기 복제 논란이나 표절 논란이 있었던 걸 생각하면 오마주를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4] 참고로 댓글 중에는 뚱딴지 아니냐는 글도 많이 보이는데, 해당 회차는 故길창덕 화백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그려진 것이므로 꺼벙이가 확실하다. 사실 그림체뿐 아니라 이야기 전개 및 개그 포인트까지 완벽하게 꺼벙이를 오마주하고 있어서 아는 사람은 척 보면 안다. 김우영 화백의 뚱딴지도 길창덕 화백이 확립한 개그만화 스타일의 영향권 아래 있는 작품이라 꺼벙이와 닮은 면도 있지만 분명히 다르다. 다만 꺼벙이가 오래 전에 완결된 데 비해 뚱딴지는 2016년 현재도 소년조선일보에서 연재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인지도가 높기 때문에 오해가 생겨난 듯.[5] 이후 표절을 인정하고 캐릭터 몇몇을 바꾸긴 했지만 다른 몇몇은 그대로 남아 있어 지금도 논란이 많다. ====================================   /////////////////////////////////////////////////////////// //////////////////////////////////////////////참고로 보기 = @@ 티치아노 베첼리오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 1553, 캔버스에 유채, 129.8x181.2cm 자, 이제 프라도 미술관 1층으로 올라가 보자. 베네치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그림을 베네치아보다 훨씬 알뜰하고(베네치아에서 유명한 작품들은 여러 교회나 중간 규모의 미술관에 흩어져 있는데, 베네치아의 모든 교회는 입장료를 내야만 한다) 알차게(티치아노, 베로네제, 틴토레토, 그리고 베네치아 출신은 아니지만 그들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 엘 그레코까지)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스페인의 왕이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세지만 황제가 왕보다 높은 호칭이기 때문에 황제의 호칭인 카를 5세라고 주로 부른다)부터 그의 아들 펠리페 2세(Felipe II)의 시기까지,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약 1488-1576)는 스페인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스페인에서 명실상부한 가장 중요한 화가였다. 잠깐, 0층에서 봤던 판 데르 베이던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다시 떠올려 보자. 큰 돋보기로 찬찬히 들여다봐도 절대 흐트러지지 않을 것 같은 옷감, 머리카락, 도자기처럼 매끈하게 그린 피부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눈, 인간의 시력으로 그렇게 모든 사물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자세히 볼 수 있을까? 아니다. 5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사람이 입고 있는 스웨터의 결을 하나하나 자세히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스웨터의 짜임이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눈은 그가 스웨터를 입고 있다는 것을, 색깔을, 매끈한 실로 짜인 옷인지 아니면 보풀이 이는 폭신한 실로 만든 옷인지 알아본다. 식탁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다 구분해서 볼 수는 없어도 그의 머릿결을 짐작할 수는 있다. 이런 식으로 티치아노는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대로 화폭에 표현했다. 그림 가까이에서는 뿌연 것 같아도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면 머리카락과 옷감이 매우 그럴듯해 보인다. 티치아노의 이러한 방식은 틴토레토나 베로네제 같은 베네치아 화가들은 물론이고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 그리고 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 이어졌다. 우리 앞의 이 여인의 이름은 ‘다나에’이고, 그리스 · 로마 신화에 등장한다. 다나에의 아버지는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우스(Acrisius)였는데, 다나에의 아들, 즉 자신의 외손자가 자기를 죽이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그리고 외손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변을 원천 봉쇄하고자 딸이 아예 남자를 만나지 못하도록 탑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던 유피테르(Jupiter,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탑 안에 있던 다나에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리하여 황금비로 변신한 유피테르와 다나에가 조우하게 되는데, 티치아노는 이 순간의 황금비를 금화처럼 동글납작한 모양으로 표현했다. 유피테르와 다나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페르세우스(Perseus)다. 다나에의 아버지는 이 모자(母子)를 광주리에 태워 바다에 던져버렸지만 우여곡절 끝에 페르세우스는 무사히 장성한다. 그는 여행 중 우연히 원반던지기 경기에 참여하는데, 그가 던진 원반이 경기를 관람 중이던 아크리시우스, 즉 자신의 외할아버지의 머리에 명중하여 외손자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신탁이 이루어졌다. 그림에는 등장하지만 신화 내용에는 나오지 않는 인물이 다나에 옆에 있는 노파다. 간혹 울룩불룩한 등 근육 때문에 남자가 아니냐는 질문도 있지만, 할머니가 맞다. 신화의 내용 전개에 필요하지 않은 이 사람을 굳이 그린 이유는 나이 많고, 피부는 시커멓고,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하고, 심지어 이 중요한 순간에 앞치마를 펼쳐서 떨어지는 금화를 받으려고 하는 주책 맞은 사람을 다나에 바로 옆에 그려서, 다나에를 최대한 젊고 뽀얗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못생긴 사람을 그려서 그림의 주인공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이 티치아노의 ‘트릭’ 중 하나다. 그러나 티치아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금화 중 몇 닢을 노파의 앞치마 안으로 떨어지게 해 주는 위트도 잊지 않았다. ==============================     출생일 1488?년 사망일 1576년   티치아노 베첼리오 / 자화상(1565~1570) / 캔버스에 유화 / 86×65cm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끈 베네치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와 동시대 화가로 그들 못지않은 실력을 뽐내며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카를 5세, 프랑수와 1세, 교황 바오로 3세를 비롯해 여러 군주들의 초상화를 그린 ‘군주의 화가’로 불린다. 1488년에서 1490년 사이에 베네치아 근처 도시 피에베 데 카도레에서 태어났다. 열 살 즈음 형과 함께 베네치아에 있는 삼촌 밑에서 견습 화가로 일했다. 이때 베네치아의 미술계를 이끌던 화가인 젠틸레 벨리니와 지오반니 벨리니에게 차례로 그림을 배웠다. 이외에 베네치아에서 촉망받는 젊은 화가였던 지오르지오네의 조수로 일하면서 작품 세계 형성에 영향을 받았다. 비평가들은 조수 신분이었던 티치아노의 작품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지오르지오네와 함께 베네치아의 회화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지목했다. 1510년 전염병으로 지오르지오네가 사망했고, 1516년 티치아노의 스승이었던 지오반니 벨리니도 사망했다. 그러나 이 시기 이미 티치아노는 벨리니와 지오르지오네의 양식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하고 있었다. 1516년 산타 마리아 데이 프라리 교회의 제단화 제작을 요청받고 〈성모승천〉을 제작했는데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베네치아에서 독보적인 화가가 되었다. 이 그림을 그린 이후 여러 교회에서 같은 주제로 그려달라고 의뢰했을 만큼 큰 화제를 모았다. 실제로 안코나와 브레시아에 있는 교회에 같은 주제의 작품을 그렸다. 후원자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보통의 화가들과는 달리 티치아노는 직접 후원자를 선택할 만큼 대단한 명성을 누렸다. 해외에까지 이름을 떨치면서 베네치아 화가 중에서 국제적으로 활약한 첫 화가가 되었다. 티치아노는 그의 고향 카도레에서 이발사의 딸과 1525년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삶을 살았으나 1530년 아내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무척 상심이 컸다. 이런 정서가 이 무렵 작품에 반영되어 한동안 어둡고 묵직한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렸다. 같은 해 티치아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알현하고 궁정 화가로 활약하며 그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다. 이외에도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 교황 바오로 3세를 비롯해 여러 군주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베네치아에 새로 취임하는 총독의 초상화도 맡아 그리게 되면서 ‘군주들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의 초상화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던 카를 5세는 그에게 기사 작위를 주었고, 그의 아이들 또한 귀족의 신분으로 상승시켜 주었다. 실제로 카를 5세를 그린 〈황제 카를 5세의 기마상〉은 티치아노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역사상 최고의 초상화로 손꼽히며 루벤스, 벨라스케스 등 17세기 바로크 시대 화가들에게 초상화의 교본으로 받아들여졌다. 1550년대 이후 주로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의 작품을 엄격한 잣대로 판단했다. 어떤 작품은 10년 동안 매달렸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기법들을 시도했다. 펠리페 2세를 위해서는 초상화 말고도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도 많이 그렸는데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실린 〈디아나와 악타이온〉, 〈디아나와 칼리스토〉는 바로 이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티치아노는 초상화, 풍경화는 물론 종교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르네상스 시기는 물론 이후의 서양 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역사가들은 그를 ‘별들 사이의 태양’을 비유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대략 여든 살 즈음인 1576년 베네치아에 유행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위 순위권 내 작품(2014년 기준) • 25위. 〈디아나와 악타이온〉 • 33위. 〈디아나와 칼리스토〉 • 34위. 〈알폰소 다발로스 후작의 초상〉  
128    현대시는 외형률보다 내재률을 통해 음악성을 강조해야... 댓글:  조회:3184  추천:0  2017-01-21
      ‘국제 전문 결혼식사진 협회’ (ISPWP)에서 2016년 한해동안 가장 아름다웠던 결혼식사진 공개, 그중 한컷...   시창작 강의-7(시의 운율)   김송배    ㅁ 시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 성탄절은 잘 보내셨는지요. 이제 2002년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잡다한 일상사를 정리하고 내년에는 반드시 무엇인가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시도 많이 쓰시고 이곳 ‘시창작교실’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그럼 전번에 이어서 운율에 대해서 좀더 알아 봅시다. ③ 음수율(syllabig system)   이 음수율은 각 시행의 음절수(音節數)를 일정하게 맞추는 운율입니다. 영시(英詩)에서는 음보(音步-metre)가 있고 한시(漢詩)에서는 다섯 글자로 맞추는 오언(五言)과 일곱 글자로 맞추는 칠언(七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형시인 시조나 가사, 기타의 신문학 초기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3 . 4조나 4 . 4조, 또는 7 . 5조 등으로 구성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조선조 중기의 문인이었던 양사언의 시조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렇게 시조처럼 일정한 글자수를 맞추는 형식인데 지금 현대시에서는 별로 중요시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김소월의 [먼 후일]이라는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글자수의 배열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시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시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어제도 오늘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   그리고 한시에서는 전형적으로 이러한 오언이나 칠언절구를 갖추고 있습니다. 참고로 만해 한용운의 [차영호화상(次映湖和尙)]이란 작품을 봅시다. 내용은 “시와 술로 시름하는 나입니다만 / 당신도 문장으로 늙으시네요 / 눈보라와 더불어 부쳐온 글월 / 속절없이 설레이네 오가는 두 정”이지만 우리는 오언절구라는 운율에 유념하여야 하겠습니다.   詩酒人多病 文章客亦老(시주인다병 문장역객로)   風雪來書字 兩情亂不少(풍설래서자 양정난불소)   역시 칠언절구도 마찬가지 입니다. 김삿갓의 시 [무제(無題)]를 보면   四脚松盤粥一器 天光雲影共徘徊(사각송반죽일기 천광운영공배회)   主人莫道無顔色 吾愛靑山倒水來(주인막도무안색 오애청산도수래) 라고 하여 일곱 글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은 김삿갓이 방랑을 하다가 어느 집에서 쉬어가게 되는데 주인이 너무 가난하여 죽 한 그릇으로 대접을 하면서 어쩔줄 몰라는 모습을 보고 지었다고 합니다. “네 다리 소반에 놓인 죽 한 그릇 속에 하늘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떠 있구나. 주인은 도리가 아니라고 쩔쩔 매지 마시오. 나 본래 청산과 물이 비치는 것을 무척 사랑한다오” 쯤으로 알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3-1-2. 내재율(內在律)   지금까지 외형율, 그러니까 외적으로 나타나는 운율을 살폈지만 지금부터는 안으로 내재되어 확인되는 않지만 현대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내재율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내재율은 한 마디로 시의 호흡이나 템포(tempo-속도, 박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형시에서의 외형율처럼 일정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있기는 있으나 분명히 지적할 수 없는 속으로만 생명처럼 존재하는 시인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의 저변을 흐르는 언어의 억양과 색조가 빚어내는 어떤 리듬입니다. 바로 현대시에서 언어가 갖는 속성이나 기능을 종합한 무형의 리듬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 내재율은 일정한 규칙이 없기 때문에 시를 쓰거나 읽으면서 스스로 체득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가령 윤동주의 [서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처럼 시의 외형상의 리듬은 보이지 않지만 속살로 흐르는 시인 특유의 맥박과 호흡니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시에서 필요로 하는 내재율입니다. 다시 산문시의 형태를 갖춘 나의 졸시 [사랑법 . 9-시인의 사랑]이란 작품을 읽어 봅시다.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솔바람곁에 뿌리는 라일락 향기로 그대는    내게 다가 왔다. 어느 후미진 언덕배기에서 안개 속 잡풀의 흔들림을    보거나 마알간 냇물이 흰구름을 안고 치억들을 어루만지거나 아니 서   해 바닷가 갈매기 울음을 듣거나 그대 눈빛은 항상 내 가슴 깊이 안   기어 촉촉하다. 더러는 연한 불꽃으로 타오르는 무지개였다가 별안간    이슬 한 모금 삼킨 주홍빛 꽃잎이었다가 스스로 앵두 입술 지그시 깨   물고 사유의 골짜기를 오르내리는 순한 바람이었다가 아아 그대여, 이   제 진실로 그대에게 들려줄 수 있는 한 마디 ‘사랑해’ 그 화음이 해뜰   녘이거나 저물녘이거나 늘 함께 푸른 강물로 젖어 있다. 멀고 가까움   이 이제 지워진 그 시인의 사랑 그리고 사랑법.   이런 작품을 언뜻 보면 산문처럼 생각되지만 산문시의 형태로 표현되어서 명심해서 읽어보면 시의 맥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대시는 외형율보다 내재율을 중시한는 점을 다시 강조합니다. 비록 자유시(현대시)라 할지라도 김소월과 김영랑 등 자연파 시인들은 음악성을 강조하는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는 점도 어찌보면 시는 음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시와 그림(繪畫-이미지)과의 관계를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       우편 4  ―장이지(1976∼ ) 내 간지러운 사춘기의 후미진 길목에는 지천으로 번진 채송화의 요염한 붉은빛 따라 남몰래 같은 학교 남학생을 쫓아다니던 축축한 꿈도 있지요만 그 기분 나쁜 미행의 꼬리를 나무라지 않은 안경잡이의 그 넉넉한 마음과도 아쉽게 갈라서버리고 실은 안경잡이의 쌍둥이 누나를 혼자 좋아했는데 안경잡이의 누나는 매정했고 나는 유서를 쓰고 죽는다든지 안경잡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파국의 장면 같은 것을 부질없이 준비했으나 시간은 늙어서 자연이 되고 쌍둥이 남매를 뒤쫓던 학교 앞 공지 공지 담장 위로 오르내리던 남매의 머리끝 같은 것의 리듬이 자아내는 파국 없는 애상을 종종 불러내어     내 현실의 때 묻은 창을 좀 투명하게 하고 가문 하늘에 비구름도 좀 보태어주고 해오던 것인데 그 자연사의 폐허에 서 있지 않고는 삶에 대해, 옅어진 삶에 대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없으리라고. 오늘은 내 자신 수취인 없는 개인적 기록으로 빛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세속도시를 지우고.     애티가 사라지고 그 곱던 얼굴에 여드름이 돋아난다. 몸처럼 마음도 한창 자라느라 활화산처럼 불안하다. 어떻게든 튀려 하거나 극심한 권태에 가라앉는다. 숙제를 발표할 때도 급우들을 웃기지 못하면 실패라 여기고, 한편 비극적 ‘파국의 장면’ 주인공을 꿈꾼다. 미처 경험 못한 사랑의 욕구가 끓어 넘치니 동성에게도 끌리고 이성에게도 끌리는데, 그 사랑은 대개 짝사랑으로 끝난다. 사랑에 대한 욕구가 아주 강한 시기가 용모가 썩 아름답지 못한 시기와 겹치는 게 사춘기의 비애라지. 미숙하고 어색하고 불안정한 사춘기. 독자는 화자가 불러내는 사춘기의 ‘파국 없는 애상’에 함께 젖는다. 장이지 시인에게 있어 사춘기를 비롯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는 시간은 ‘현실의 때 묻은 창을 좀 투명하게’ 하는 시간이다. 나이가 들어 매사 무덤덤한 것이 화자는 슬픈 것이다. ‘현실의 때’는 외부에 대해 보호기능을 하지만, 단절도 시킨다. 시인의 사춘기는 지난 세기의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였을 테다. 컴퓨터가 친구인 지금 청소년이 어른이 되면 어떤 추억으로 ‘현실의 때’를 벗을까. 끝내 ‘삶에 대해, 옅어진 삶에 대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없으리라’. 사춘기에도 삶이 옅었기에.
127    시인은 "버려진 집"에서 살며 시작해야... 댓글:  조회:2502  추천:0  2017-01-20
      ‘국제 전문 결혼식사진 협회’ (ISPWP)에서 2016년 한해동안 가장 아름다웠던 결혼식사진을 공개, 그중 한컷... 시창작 강의-5(시인과 현대 사회)   김송배    어떻습니까? 지난 주까지의 강의는. 꾸준하게 경청해 봅시다. 무엇인가 새로운 마음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시작합시다.    인간은 누구나 감수성이 강하게 작용하는 때가 있다. 막연하나마 어떤 정신적인 동경이나 갈망이 솟구쳐서 이를 표현해 보려는 의욕이 일어나서 종이에 낙서를 하거나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되는데 이러한 표현 욕구는 시를 쓰는 목적이나 그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다만, 마음의 공허를 채우기 위한 습작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씌어진 시란 다분히 자기 본위의 일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앞날의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청춘의 감성은 대체로 자기자신의 내부적인 세계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인 세계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불안감의 표시로 봐야하며 이러한 표현의 욕구는 언젠가는 새롭게 발견되어질 미(美)의 세계에 대한 예술적 탐구정신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시인으로서 살아간다.’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시적인 표현 욕구는 시를 쓰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 속에 깊이 잠재한 내외적 세계의 조화로서 표현의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일은 사회적 불안이나 내 자신의 불안 등 여러 형태의 모순들이 보다 안정되고 보다 차원 높은 세계의 강망이나 희구, 또는 향수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시를 쓰는 즐거움의 뒤안에는 이러한 욕구나 동경에 대한 충족감이 깃들어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적어도 시를 쓰고자 하는 의지로 창조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참된 보람과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요즘 시인들의 시창작 경향을 살펴보면 대체로 현실의 비합리성에 따른 위기의식의 극복과 절박한 갈증의 해소가 시적인 동기로 나타나는 예가 많은데 이는 시창작을 통해서 화해나 조화를 모색하고 정신세계의 안온을 위한 기원의 의지를 추구하려는 시의 목적의식이라고 생각됩니다. 방지원 시인의 작품 [해뜰 무렵]도 이러한 인식이 깊게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밤새 불을 밝히던 고깃배가   놀란 물살을 바쁘게 가르고   느린 듯 빠르게   그 찬란한 불덩이를 들어올릴 때   바다 한가운데 검게 앉은 그 사람도   바닷가의 사람들도 모두 한마음이었을까   연한 살점 태워 하늘에 올리는 소지(燒紙)   오존층까지 오르고   그 불덩이가 세상을 돌아   노을이 될 때   우리는 눈부신 황금빛으로 남기를 바란다.      과연 시는 무엇 때문에 쓰는가? 말할 필요도 없이 시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진솔한 목소리를 듣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리하여 자기의 정갈한 세계를 구축하고 시를 쓰는데서 지적인 만족을 획득하는 또다른 희열을 느낄 수 가 있를 것입니다. 매슈 아놀드의 말대로 ‘시는 인생 비평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2-3. 시인과 현대 사회   현대 사회는 대단히 복잡다단한 사회입니다. 살아가는 일마저 다양한 형태이지만 물질문명의 팽창으로 어쩌면 정신의 활폐화가 극도에 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살아가는 시인들은 남다른 능력을 가졌거나 탁월한 그 무엇을 소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시인을 예언자나 초자연적인 느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행각한 적 있었습니다.   영국의 시인 C. D 루이스는 구약성서에서 히브리의 많은 예언자들은 시인이었으며 그리스의 사람들은 시인들이 시를 쓸 때에는 어떤 신(神)에게 홀렸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접신(接神)의 경지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고도로 발달된 과하문명이나 자본주의의 자유경쟁이라는 생활방식에서 시는 그 가치가 축소되고 그 기능이 감소되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척박한 사회일수록 시의 가치성과 기능을 더욱 공고히 해야한다는 역설적인사실을 중시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문덕수 시인의 시론을 들어 봅시다.   그것은 마치 일반적으로 종교와는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되는 과학문명이 발달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그만큼 우주의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영역이 넓어져 가고 따라서 신에 대한 믿음이 더욱 증대되어 가고 있는 현상과 같다고 하겠다. 현대는 산문의 시대, 곧 소설의 시대라고도 하지만 시의 기능이 점점 중요시되어 가고 있고 시인의 존재 이유가 더욱 절실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시인은 복합적이면서 다원화된 현대 사회를 어떤 시각으로 보면서 어떻게 그 기능을 살릴 수 있을까하는 문제들을 심각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마치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과 같은 존재로 인격이 전락하여 인간관계는 바로 물질적 관계로 변형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인간과 인간이 단절되고 사회의 분열현상마저 초래되고 있는 서글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들의 혹독한 아픔이며 비극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격의 파괴나 인간의 소외, 도덕의 소멸 등으로 현대인들은 불안하고 또한 고뇌의 원인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현대 사회가 고뇌의 늪으로 빠질수록 우리는 일찍이 예감할 구 없던 새로운 인류의 공동운명을 느낄 수 있게 되어 자연의 파괴나 전쟁의 위험, 빈부의 차이, 이데올로기의 대립 등 더욱 큰 고뇌를 인류 전체의 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인가 먹구름 홀연히 천지를 덮는다    지구 저쪽에서 날아온 조전(弔電)    펼친다, 펼치면서 꿈꾼다    먹구름 속 유영하던 꿈    깨진 꿈 껍질이 풀풀한 지상에는    오오, 누군가 온몸으로 오열하는    거기, 그곳에는 찌그러진 언어 몇 개만    막숨을 몰아 쉬고    이제 피와 눈물과 마지막으로 섞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먹구름은 저승쪽으로만 몰려가고    무방비의 이 지상에서    가녀린 기원마저    시름시름 무너지고 있다    --그래, 우리 살아남을 수 있겠나.   이 시는 졸시 [不在中 . 12]의 전문입니다. 참으로 암담한 지구상의 존재들을 나름대로 고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인은 현대 문명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이를 조화와 예지로서 화해의 가교 역할과 함께 비판적이면서도 통합하는 기능을 보유하지 않으면 언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시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안녕히... ==============================================================   버려진 집에서  ―복거일(1946∼ ) 입 다문 소설(小雪)의 하늘 돌쩌귀 하나로 걸린 문짝의 나섬, 테만 남은 물동이가 대담하게 소묘해주는 목적의 틀, 마른 풀줄기들 사이 팔 없는 펌프의 좀 어색한 단아함― 재생의 단계를 넘어선 것들의 자부심에 가까운 몸짓들 앞에선 늙어가는 목숨이 아니더라도 경외의 몸짓이 어색하지 않으리라. 사람은 깊은 자국을 남긴다. 벌써 지붕을 뚫은 황무(荒蕪)는 결국 이기겠지만 사람의 자취를 말끔히 지울 수 있을까? 숨결을 불어넣는 것처럼 사람은 만진 것들에 완강함을 남긴다. 그 생각은 어쩐지 위안보다는 절망을 불러낸다. 그래도 절망은 지녔다 허무의 흐릿한 선과는 다른, 든든할 만큼 단단한 얼굴을. 나에게선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 허물어진 돌담 한구석 덜 불편한 자세로 돌아눕는 돌의 과묵한 소리가 들린다. 하긴 새로워질 수 없을 만큼 짙은 절망은 없다. 믿음의 따스함이 없이 나이 들어가는 이 허름한 풍경 그래도 햇살은 새로운 욕망들을 깨워서 그림자 문득 또렷해진다. 전아한 산문으로 그림과 시를 이끄는 3중주(三重奏) 같은 책, 복거일의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들’은 페이지마다 깊고 아름다운 생각과 마음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렇다, 삶은 이어진다. 아무리 재앙의 골짜기가 깊어 보여도, 삶은 그 골짜기를 지나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어려운 시절에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면, 멀리 보아야 한다’ 같은 문장이 대표적이다. 선생은 문제에 매이기보다 그걸 풀 방도를 생각하는, 과거보다 미래를 지향하는 이성적인 현실주의자다. 그런데 미래를 소중히 생각한다는 건, 당장 현재만 움켜쥐고 있는 현실주의자가 득세하는 부박한 현실에서 얼마나 이상주의적인가. 이 독특한 현실주의자가 ‘현실’을 옹호하는 전망을 발랄한 지성으로, 그러나 완강히 보여주는 사회비평 산문만 읽은 이들은 그의 시에서 배어나는 페이소스가 색다를 테다.      남자들은 오십 줄에 들어서면서 제 늙음을 느끼는 것 같다. 늙은 것도 서럽거늘 생활의 안정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주위를 둘러보면 거의 찌그러져 있다. 어르신들은 병들고 아이들 앞날은 불안하고, 제 노후도 대책 없는 우리들 오십대.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의 따스함이 없이 나이 들어가는’ 화자의 절망감이 버려진 집의 허름한 풍경에 버물린다. 젊은 날 열심히 산 이들은 그 자부심으로 단단할 수 있으리라.
126    시는 목적없이 그 무엇을 "찾는" 행동이다... 댓글:  조회:2588  추천:0  2017-01-20
      ‘국제 전문 결혼식사진 협회’ (ISPWP)에서 2016년 한해동안 가장 아름다웠던 결혼식사진을 공개, 그중 한컷... 2. 시는 무엇 때문에 쓰는가   이 바쁜 세상을 살아가면서 시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쓰는가?  이런 우둔한 질문은 시인들 스스로가 품을 때도 있지만, 일반 사람들로부터 흔히 질문을 받게 됩니다. 분명히 시는 모든 예술의 중심되는 꽃입니다.  그러나 물질문명의 발달과 함께 때로는 무용지물로 낙인이 찍히기도 하는 서글픈 시대에 시인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적정 시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러한 염녀를 조금이라도 해소시키고 있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생에 대한 불타오르는 시인의 창조적 정신에서 결실되는 것이니, 대상하는 인생을 보다 아름답게 영위하려고 의욕하고 그것을 추구, 갈망하는데서 제작된다면 그 시인의 한 분신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되었거나 이땅에는 시인이 시를 쓰고 시를 읽는 독자가 있습니다. 이런 말이 시를 쓰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마는 그림은 무엇 때문에 그리느냐, 노래는 왜 부르느냐라는 질문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임니다. 2-1. 시인과 독자   눈을 뜨면 나에겐 풍경이 보인다   눈을 감으면 나에겐 사랑하는 당신의 얼굴이 보인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필립 샤보네의 시입니다. 당신의 사랑스런 얼굴로 변하는 풍경이 눈을 감고 뜨는 순간의 차이가 바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느끼는 시인과 독자의 마음은 무엇이겠습니까.   황폐되고 삭막한 세상일수록 그 무엇인가가 내 가슴을 데워주고 위무해주는 따스함이 그립습니다. 그림도 있어야 하고 노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문학, 특히 시가 차지하는 그리움의 비중은 상당합니다.   [말테의 수기]를 쓴 릴케는 아무것도 더 쓸 것이 없는 허탈에 사로잡혀 이 상태를 벗어나 보려고 두이노 성(城)을 찾아 갔습니다. 추운 겨울날 이 성에서 방파제를 왔다갔다 하던 중 그의 머리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고 그는 수첩을 꺼내어 "누군가가, 설령 내가 외친다고 해도 천사들들의 서열 속에서 그것을 들어줄 것인가?"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것이 그날 밤 완성한저 유명한 라는 작품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릴케도 절망과 허탈의 극한 상황에서 천사를 통해서 정신의 폭풍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하듯이 시를 쓰는 이유라고 할까, 시가 있어야 하는 이유를 나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이야기로 풀어 보고자 합니다. ①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말하고 싶습니다.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감상함으로써 마음 속에 솟아 오른 슬픔이나 공포의 기분을 토해내고 마음을 정화(淨化)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가 지은 에서 '비극은 어떤 행위를 모방한 것으로서 애련(哀憐)과 공포에 의하여 이것들의 정서 특유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고 말한데서 유래되었지만, 시를 쓰고 때로는 시를 읽음으로써 자신의 정서를 정화하는 것입니다. ② 나르시스(또는 나르시시즘-narcissism)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르시소스라고 하는 미청년이 산의 요정 에코의 사랑을 받게 되면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샘물에 비춰지는 자기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여 영원히 뜻을 이룰 수 없는 운명이 주어졌고 마침내 샘물에 빠져 죽어서 수선화가 되었다는 신화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자신의 용모나 능력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황홀해 있는 마음의 경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도취(陶醉)입니다.   이렇게 시를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 모두가 시를 통하여 정화하거나 도취에서 어떤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시가 이 시대에 필요하거나 또 시를 써야 한다는 어눌한 생각에서 시쓰기의 출발은 시작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이탈리아에서는 사분오열(四分五列)된 땅덩어리가 통일을 갈망하는 그 나라 국민에게 '이탈리아 자신'이라고 외친 단테(유명한 의 저자) 뿐만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때 러시아가 독일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풍전등화(風前燈火)가 되었을 때 스탈린은 반동 시인으로 낙인을 찍었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푸쉬킨의 애국 시집을 황급히 인쇄하여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읽게 하여 병영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는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시인들도 일제 강점기때 장한 모습들을 살필 수 있습니다. 잘 아는 바와같이 '황홀한 천재' 이상(李箱)과 뮤우즈의 사도(使徒) 운동주는 이름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왜경에게 피검되어 옥중에서 조국의 제물이 되었으며 이상화의 피끓는 애국시는 당시 나라를 잃은 국민들에게 꿈을 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돈도 되지 않고 명예도 되지 못하는 시쓰기는 여러 가지 악조건에서도 여전히 시를 버리지 못하고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큰 보람과 희열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2-2. 시의 목적   시는 아름다움이나 진실, 나아가서는 구원을 찾는 인간의 순수하고 진솔한 표현입니다. 시는 그만큼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시를 쓰는 사람은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두고 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사회의 병폐를 '뿌리 뽑기 위해서'라든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라든지 하는 거창한 목표를 내걸고 시를 쓰는 사람이 간혹 있을지 몰라도 만약 있다면 이는 정치인이나 종교인이 되었어야지 굳이 시인이 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는 어디까지나 시적인 감동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어서 쓰게 되는데 이 감동은 바로 표현의 의욕을 자아내게 되며 한 편의 시가 씌어졌을 때 비로소 이 표현 의욕은 충족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쯤에서 김광균의 시 [설야](雪夜) 한 편을 읽어 보면서 다음 이야기를 계속 합시다.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함밤 소리 없이 흩날리뇨 처마끝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자췬 양 흰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졸로 가슴이 메어 마음 공허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라 밤 사이 흰 눈이 내리는 것을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과 '서글픈 옛자췬 양' 감동하기도 하고 '머언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로' 감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눈'이라는 통속적인 소재가 시인의 감동과 만나면 무한대의 신비한 표현의 의욕과 그 표현을 통한 우리의 정신적인 충족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함께 이야기해 보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안녕히.    ==============================================================================       찾습니다  ―이영혜(1964∼ ) 부풀린 어깨에 가끔씩 포효 소리 제법 크지만, 낮잠과 하품으로 하루를 때우는, 허세의 갈기 무성한 수사자 말고 해만 넘어가면 약한 먹잇감 찾아 눈에 쌍심지 돋우는, 뱃속까지 시커먼, 욕망의 윤기 잘잘 흐르는 음흉한 늑대 말고 훔친 것도 좋아, 높은 놈 먹다 버린 것도 좋아, 패거리로 몰려다니길 즐겨 하는, 웃음도 비열한 하이에나 말고 수천 권 뜯어먹은 지성인 척 턱수염 도도하게 으스대지만, 강자 앞에선 아첨의 목소리로 선한 초식동물인 척하는, 이중인격 비굴한 염소도 말고     아무 데서나 혀 빼고 군침 흘려 대며, 할 소리 안 할 소리 쓸데없이 짖어 대거나 아무나 물어뜯는, 날카로운 야성의 송곳니는 유전자에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래인,잡개는 더욱 말고 높은 하늘 향해 한 자세로 한 몸 꼿꼿이 세운 한 향기 한 품위로 천지를 채운 저 키 큰 금강송 같은 식물성 남자 하나 찾습니다 평생 배필로 삼아 생을 다해 자취도 없이 사라져 그 몸 이룬 탄소 원자 소멸할 때까지 한마음으로 사랑하겠습니다     연락 주시면 후사하겠습니다 배필을 구하는 광고 형식으로 남자들의 지질함을, 행갈이 하기도 아깝다는 듯이 줄줄이 산문으로 성토하는, 아니 한탄하는 화자다. 숫기라고는 하초에만 몰려 있지, 그 무책임과 허세와 위선과 비열함과 약삭빠름이라니! 멀쩡한 여자는 많은데 멀쩡한 남자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결혼을 원하면서 미혼으로 서른을 훌쩍 넘긴 여자 후배에게 마땅한 상대가 없나 머리를 모으는 자리에서 나온 우리 여자들의 중론이다. 일찍이 소설가 우선덕 선생님의 할머니께서도 “세상에 여자만 한 남자는 없다”고 하셨다지. 그럼 이 세상에 멀쩡한 남자는 아주 없단 말인가? 있긴 있으나 일찌감치 ‘여우들’이 낚아채 갔다. 화자가 운문으로 각별히 흠모의 정을 바치는 ‘저 키 큰 금강송 같은 남자’도 이미 장가를 갔을 테다. ‘동물의 왕국’ 인간사여라. 여자들은 다 멀쩡하냐고 입술을 삐죽거리고 실룩거릴 남자들이여, 물론 그렇지 않다. ‘남자 같은’ 여자도 드물지 않다. 뭐, 우리들 여자끼리의 지나가는 이야기.
125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 외래어도 알고 쓰자... 댓글:  조회:2481  추천:0  2017-01-20
...몇글자 써봅니다.    " 담배 한보루 사와~"라는 심부름 한번즘 들어보셨죠??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사는 내게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을 화두로 정해서 생활하다 보면 매우 재미나단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담배라는 말은 타바코에서 담방고 담배 이렇게... 한 보루의 보루는... "보드" 즉 한 보드를 달라는 말이 보루로 변했단 거 아는 분 많지 않을 겁니다.   담배라는 말처럼 우리가 쓰고 있는 단어중에 외래어는 얼마나 될까요??   자~ 이제부터 외래어 여행으로 출발~~ 고고씽   우리나라에서 쓰고 있는 외래어는 크게 세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제일 많이 쓰고 있는  외래어인 "중국어"와 그 다음 "영어"와 일본어에서 유래한 외래어입니다. 중국어가 외래어라고?? 잘 모르고 계셨던 중국어 "감자, 시금치, 상추,수수,배추.............." 이게 다 중국어 외래어입니다. 중국 외래어는 너무 많아서 나중에 제가 따로 글을 쓰겠지만 맛배기로 윗글에 언급한 곡식이 왜 중국 외래어인가~ 말씀드리겠습니다.   "# 감자" 감자는 한자로 감저 [ 甘藷 ]라고 씁니다만 중국사람 발음으로는 [감~자]가 됩니다.지금 우리도 감자로 발음하고 있구요~  원산지가 남미의 안데스산맥쪽 페루나 칠레라고 하니 우리나라에는 문익점 선생처럼 갖고 들여온 사람이 있을텐데.. 한국에는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따르면, 1824∼25년 사이에 명천의 김씨가 북쪽에서 가지고 왔다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가 즐겨먹는 감자를 먹기 시작한 것이 불과 200년이 채 안됩니다.   # 시금치 시금치는 뿌리가 붉다하여 "적근채" [赤根菜]라고 씁니다. 중국어로 발음하면 [시-근차이]가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시근차이]를 듣고 [시금치]로 발음했던 것입니다.   #상추,상치 상추란 말은 주로 날로 먹기 때문에 생채 [生菜]로 쓰엿습니다. 이 것이 중국어로는 [샹차이]가 되고 상추나 상치로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상추]가 표준어로 되었죠^^   #수수 수수를 한자로 쓰면 "고량"이 됩니다. 중국집에 가면 먹는 고량주~ 바로 수수로 만든 술입니다.^^ 고량이 왜 수수로 변했을까^^ 고량 [ 高粱 ]을 중국 표준어로는 [가오량~]이라 읽지만 중국 남부 광동지방 어로는 [슈슈]로 읽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 [슈슈]에서 [수수]로 변했던 것입니다.   발음이 전혀 다르다구요?? 광동어와 북경어는 많이 다릅니다. 일례로 낮에 먹는 밥을 점심 [ 點心 ]이라 하는데 북경어로는 [젠-신]이 되고 광동어로는 [딤-섬]이 됩니다 우린 [딤섬]을 새우만두로 더 많이 알고 있죠^^   #배추 배추는 한자로는 색이 희다하여 백채[白菜]로 씁니다. 중국어로는 [바이차이]라 발음됩니다. 우리 조선사람 발음으로는 [배-차]라 불렸고 저 역시 시골에서[배차]라 부르며 살았습니다. 바이차이 -> 배차에서 지금은 배추가 표준어가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엄청 많지만 다음에 또 적어보겠습니다^^ ...^^ 쉐쉐~니!!     이젠 영어 등등의 외래어 대표적인 몇 단어만 알아보겠습니다. # 빵 , 가방, 깡패 ,  섭씨,  화씨 , 양재기 ,액기스, 을씨년, 뗑깡, 돈가스, 노다지   # 빵 빵이란 말은 포르투갈어 팡(po)에서 왔다고 합니다. 일본과 무역이 빈번했던 포르투갈, 네델란드에서 [팡]이란 단어를 전수해주고~ 일본은 우리나라에 [빵]이란 단어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고맙다고 해야하나~ㅋ   #가방 가방이란 단어는 네덜란드어 카바스(kabas)에 어원이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일본어로도 [가방]이라 읽는데 일본어로는 벤토가와방(弁當皮盤: 도시락통)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와방(皮盤: 가죽쟁반)을 따왔는데 이것이 가방으로 변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어쨌든 가방은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단어로 발음이 되고 있습니다. 괴나리봇짐 (개나리봇짐은 틀린말 ^^..) 뭐 이런 단어가 정감이 가고 좋습니다만...   #깡패 영어의 갱(gang)과 한자의 패가 만나 만들어진 합성어입니다 갱패 ->깡패   # 섭씨, 화씨 온도를 뜻하는 이 섭씨 화씨의 유래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겁니다. 섭씨온도를 발명한  " 쎌시우스"를 한자 이름으로 "섭"이란 성씨를 지어 주고 그 온도를 "섭씨" 온도로고 명명하였습니다. 화씨온도는 화씨온도 발명가 "화렌화이트"를 한자로 성시를 지어주다 보니 "화"씨를 주었습니다. 에전에  대학교 열역학시간에 섭씨온도 = (화씨-32)/1.8 하는 공식을 배운 것이 생각나는군요^^   #양재기 시골에는 아직 집에 있는 그릇을 " 양재기"라고 하는데 "양재기"란 "洋 + 磁器" 즉 서양 자기란 뜻입니다. 쇠그릇 사기그릇 .. 다 양재기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액기스 녹용 액기스!! 액기스란 단어는 액 液 과 기스라는 말의 합성어인 듯 하지만 사실은 영어 extract [엑스트렉트] 의 일본어 발음입니다. 일본사람들이 액기스~ 한다고 액기스라고 하면 안되겠죠^^   #을씨년 날씨가 을씨년스럽다~ 을씨년은 우리나라 조선이 일본놈들한테 외교권을 배앗긴..을사조약이 맺어지던 1905년 을사년스럽다에서 나왔습니다. 최근에 을사조약 체결 후 고종황제가 독일 빌헬름2세에게 보낸 글도 인터넷에 공개 되었습니다만 누구보다 똑똑했던 대한제국의 개혁군주 고종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뗑강 어디서 뗑깡일 부려!! 여기서 뗑강은 일본어 [ 돈간 ]즉 간질 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간질을 뜻하는 [지 랄]이 있는데 우리말 [지랄]과 일본어  [뗑깡]은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지요^^ 우리말 [지랄]이 압도적으로 파워가 셉니다 ㅋㅋㅋ   #돈가스 경양식집에 가보면 돈가스, 비후가스,... 등등 많죠 돈가스란 말은  돼지돈 豚 + 커틀릿 (cutlet)의 합성어입니다. 돈커틀릿?? 아닙니다 커틀릿은 일본사람들이 발음이 안되서 이렇게 발음합니다. 카스레스!! 그래서 돈가스란 말은 [ 돈 + 카스레스 ]의 줄임말 입니다   #노다지 최근에 생간 외래어로 no touch!!에서 나온 말임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조선말 세계열강들이 조선의 철도부설권 금광 채굴권 등등을 빼앗아 갑니다. 미국은 함경도 지방의 금광채굴권을 획득했는데 임금이 싼 조선은 들을 고용했습니다. 금맥이 발견되자마자 미국놈들이 지른 한마디  " 내 꺼야 손대지마 {no touch} !! " 영어를 모르는 조선 사람은 귀한 것은 노다지인 줄 알고 산삼을 캘 때도 "노다지!!"라 외치는 분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다들 알고 계신 이 노다지의 어원~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이 한일합병을 하면서 미국에게 금광 채굴권을 넘겨받아 친일정권 운영에 쓰기 위해 금광을 개발합니다. 그래서 마을 지명에 "금"자가 들어간 조선의 산하를 마구 파헤칩니다. (제 고향 원주에 금대리란 마을에도 금광을 채굴하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런 일본놈들이 운영하던 금광을 넘겨받아 친일정권의 앞잡이와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언론기관이 일부 세력의 기관지 역할을 하고 있고.. 이런 정부기관에 빌붙어  과거에 대해 속죄를 하지 않은 언론에 대해 관대한 시민이 많아.... 많이 안타깝습니다.  
124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 한글과 일본어 대조표 댓글:  조회:2890  추천:0  2017-01-20
 일본어의 가나와 한글 대조표 가나 어두 표기 어중, 어말 표기 ア イ ウ エ オ 아 이 우 에 오 아 이 우 에 오 カ キ ク ケ コ 가 기 구 게 고 카 키 쿠 케 코 サ シ ス セ ソ 사 시 스 세 소 사 시 스 세 소 タ チ ツ テ ト 다 지 쓰 데 도 타 치 쓰 테 토 ナ ニ ヌ ネ ノ 나 니 누 네 노 나 니 누 네 노 ハ ヒ フ ヘ ホ 하 히 후 헤 호 하 히 후 헤 호 マ ミ ム メ モ 마 미 무 메 모 마 미 무 메 모 ヤ イ ユ エ ヨ 야 이 유 에 요 야 이 유 에 요 ラ リ ル レ ロ 라 리 루 레 로 라 리 루 레 로 ワ (ヰ) ウ (ヱ) ヲ 와 (이) 우 (에) 오 와 (이) 우 (에) 오 ン ㄴ ガ ギ グ ゲ ゴ 가 기 구 게 고 가 기 구 게 고 ザ ジ ズ ゼ ゾ 자 지 즈 제 조 자 지 즈 제 조 ダ ヂ ヅ デ ド 다 지 즈 데 도 다 지 즈 데 도 バ ビ ブ ベ ボ 바 비 부 베 보 바 비 부 베 보 パ ピ プ ペ ポ 파 피 푸 페 포 파 피 푸 페 포 キャ キュ キョ 갸 규 교 캬 큐 쿄 ギャ ギュ ギョ 갸 규 교 갸 규 교 シャ シュ ショ 샤 슈 쇼 샤 슈 쇼 ジャ ジュ ジョ 자 주 조 자 주 조 チャ チュ チョ 자 주 조 차 추 초 ヒャ ヒュ ヒョ 햐 휴 효 햐 휴 효 ビャ ビュ ビョ 뱌 뷰 뵤 뱌 뷰 뵤 ピャ ピュ ピョ 퍄 퓨 표 퍄 퓨 표 ミャ ミュ ミョ 먀 뮤 묘 먀 뮤 묘 リャ リュ リョ 랴 류 료 랴 류 료 あ 아 い 이 う 우 え 에 お 오   か 카 き 키 く 쿠 け 케 こ 코 きゃ 캬 きゅ 큐 きょ 쿄 さ 사 し 시 す 수 せ 세 そ 소 しゃ 샤 しゅ 슈 しょ 쇼 た 타 ち 티 つ 투 て 테 と 토 ちゃ 탸 ちゅ 튜 ちょ 툐 な 나 に 니 ぬ 누 ね 네 の 노 にゃ 냐 にゅ 뉴 にょ 뇨 は 하 ひ 히 ふ 후 へ 헤 ほ 호 ひゃ 햐 ひゅ 휴 ひょ 효 ま 마 み 미 む 무 め 메 も 모 みゃ 먀 みゅ 뮤 みょ 묘 や 야   ゆ 유   よ 요   ら 라 り 리 る 루 れ 레 ろ 로 りゃ 랴 りゅ 류 りょ 료 わ 와 ゐ 위   ゑ 웨 を 워   っ ㅅ ん ㄴ   が 가 ぎ 기 ぐ 구 げ 게 ご 고 ぎゃ 갸 ぎゅ 규 ぎょ 교 ざ 자 じ 지 ず 주 ぜ 제 ぞ 조 じゃ 쟈 じゅ 쥬 じょ 죠 だ 다 ぢ 디 づ 두 で 데 ど 도 ぢゃ 댜 ぢゅ 듀 ぢょ 됴 ば 바 び 비 ぶ 부 べ 베 ぼ 보 びゃ 뱌 びゅ 뷰 びょ 뵤 ぱ 파 ぴ 피 ぷ 푸 ぺ 페 ぽ 포 ぴゃ 퍄 ぴゅ 퓨 ぴょ 표
외래어 남용과 국제화 시대 남애균| 대전     최근,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병폐현상 중에서 무분별한 외래어의 남용 풍조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이제는 아예, 단순한 외래어 남용 수준을 넘어서 소위, 제 나라 말로 하면 속되거나 촌스런 것이고, 외래어로 하면 고상하고 세련된 것이라는 근거 없는 생각까지 아무거리낌 없이 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생각은 이제 너무나도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아서 누군가가 그러한 생각의 부당성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지적을 해 줄라치면 되려 ''''국제화 시대 역행'''' 운운하는 말로 물리쳐 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그런 ''''국제화 시대 역행'''' 운운하는 주장들이 내포하고 있는 이론의 정당성에 대하여 가장 사소한 것까지 다시 한번 더 살펴보고, 그 때에 가서도 정녕 그들의 주장이 정말 타당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우선 먼저 그들에게로 향했던 자신의 사려 깊지 못한 성급함에 대하여, 미련 없이 반성의 마음을 표해야 할 것이다. 그럼 먼저,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 해 있는 외래어 남용의 실태들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고 넘어가자. 첫 째로 연예계 특히, 가요계의 현실을 보자. 지금, 한국의 신세대 가수 들 중의 일정 부류는 별 거리낌 없이 영 미식 철자나 발음으로 된 예명을 지어 가지고 있고, 그에 더하여 가요의 제목을 아예, 영 미식 철자나 발음으로 지어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가요의 가사 또한, 일정부분 영 미식 철자나 발음으로 된 구절까지 지어 넣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렇게 구태여 영 미식 철자나 발음으로 된 제목이나 가사를 가요에 지어 넣고 있는 것일까? 그러한 의문에 대하여 사람들은 가끔, 질문을 한다. 그러면, 그럴 때마다 그들은 언제나 앵무새처럼 다음과 같은 말로 변명을 하곤 한다."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우리 또한,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을 할 때도 있긴 하지만, 그렇게 안 하면, 대중들이 자꾸 외면하는 것 같아요. 따라서 우리의 책임도 책임이지만, 가요 팬들도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솔직히 외래어를 집어넣어서 부르면 왠지 모르게 촌스럽지가 않잖아요. 그리고 또, 국제화시대 추세이기도 하고...... "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대답은 도대체 정말, 합당하기나 한 것일까? 자신들부터 먼저, 솔선수범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선 해 볼 생각은 없이, 그저 자신의 책임한계나 좀 줄여보자는 얄팍한 생각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주장 할 수 있을까? 또한, 외래어로 지어 부르면 촌스럽지 않다는 생각도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지 그 것이 본래부터 내포하고 있던 절대적 진리일 수도 없는 것이다.
[이래서야] = 구시대적 외래어 언제까지 쓸 건가                                                             /배연일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 외래교수   기사 인쇄 이메일로 기사공유 기사 스크랩 글꼴 선택 글자 크게 글자 작게   100자평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본식 한자어, 일본어, 한자, 영어식 표기가 적지 않다. 그런데도 습관처럼 쓰니 안타깝다. 이를테면 절취선(切取線)은 자르는 선, 시말서(始末書)는 경위서, 가처분(假處分)은 임시 처분, 견습(見習)은 수습, 경어(敬語)는 높임말, 곤색은 감색, 노견은 갓길, 다반사는 예삿일, 단서는 실마리, 망년회는 송년회, 선착장은 나루터, 수속은 절차, 요지는 이쑤시개, 지분은 몫, 출산은 해산, 매장은 판매장, 역할은 할 일(소임), 할증료는 웃돈, 택배는 집 배달, 담합은 짬짜미, 거래선(去來先)은 거래처, 행선지(行先地)는 목적지(가는 곳), 내구연한(耐久年限)은 사용 가능 기간, 음용수(飮用水)는 먹는 물, 잔반(殘飯)은 남은 음식, 식비(食費)나 식대(食代)는 밥값, 인수(引受)하다는 넘겨받다, 인계(引繼)하다는 넘겨주다, 차출(差出)하다는 뽑다, 호출(呼出)하다는 부르다, 회람(回覽)은 돌려보기, 잔업(殘業)은 시간 외 일, 절수(節水)는 물 절약, 납기(納期)는 내는 기간, 납부(納付)하다는 내다로 쓰면 된다. 또 독거노인은 홀몸노인, 행락 철은 나들이 철, 소정 양식은 정한 양식, 연면적은 총면적, 시운전은 시험 운전, 시건 장치는 잠금장치, 뉴스레터는 소식지, 가드레일은 보호 난간, 시너지는 상승효과, 체크 리스트는 점검표, 과년도와 익년도는 지난해와 이듬해로 써야 하며, 개찰구와 매표소는 표 내는 곳과 표 사는 곳, 고수부지는 둔치나 강턱, 복명서는 결과 보고서, 복토는 흙덮기, 적의 조치는 알맞게 처리, 하절기와 동절기는 여름철과 겨울철로 바꾸어 쓰도록 해야 한다. 한편 일본말 찌꺼기인 기라성(綺羅星)은 빛나는 별, 기스는 흠(집), 노가다는 막노동, 다마는 구슬, 다마네기는 양파, 단도리는 채비나 단속, 사라는 접시, 사시미는 생선회, 앗사리는 깨끗이, 에리는 깃, 오뎅은 꼬치나 어묵, 우동은 가락국수, 지라시는 선전지나 광고지, 후로쿠는 엉터리, 오봉은 쟁반으로 바꿔 씀이 옳다. 이렇듯 우리말이나 쉬운 표현이 있으니 순화에 나서자. 언론과 교육·행정기관·군(軍)도 앞장서주기 바란다.   ⓒ 조선일보
121    시작에 공부 좀 하이쏘.. 댓글:  조회:5220  추천:0  2017-01-18
낙서 실험실 사이톰블리(Cy Twombly)의 추상화 안양/평촌 취미화실 Cy Twombly, Leda and the Swan, 1962 안녕하세요? 고급스러운 성인들의 놀이터 취미미술 화실 "그림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그린지 알 수 없지만 무심하게 그어진 선들과 오묘한 색채의 화이트 등의 요소로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이 톰블리의 그림을 보여드리고자 해요. 사이 톰블리(Cy Twombly 1928-2011)은 미국의 추상주의 화가 입니다. 그림과 낙서, 드로잉을 장난스럽게 결합하는  독창적인 양식을 만든 전위적인 그림 작가입니다. 특유의 선묘와 상징적인 기호들, 서투른 글자체와 숫자 등이 어우러져  때로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으로,  때로는 폭발할 것 같은 강렬함으로 색다른 시각적 경험을 선보이지요^^             사이 톰블리는 무심한 선과 색채, 그리고 기호들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가 무엇인지 그림의 프레임 안에서 감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의 반복적이거나 장난스러운 드로잉 동작이  저절로 연상되지 않나요? 이러한 태도가 감상자들에게는 매우 편안하면서 위트있게 느껴진답니다. 그림 속에는 이를 만든 예술가의 에너지가 담겨 있으니까요^^ 어떤 일이든, 그 일을 즐기는 사람이 최고 인 것 같아요. 우리 안양/평촌 화실 식구들도 그림으로부터 행복한 에너지 많이~많이 얻어가시길 바랍니다~!               행복을 그리는 곳 성인 취미미술 학원 그림이 좋은 사람들 평촌점     [출처] [안양/평촌 취미화실] 낙서 실험실, 사이 톰블리(Cy Twombly)의 추상화|작성자 그림이좋은사람들
120    시작의 길잡이는 오로지 "나도 시를 쓸수 있다" 이다... 댓글:  조회:2929  추천:0  2017-01-18
      ‘국제 전문 결혼식사진 협회’ (ISPWP)에서 2016년 한해동안 가장 아름다웠던 결혼식사진을 공개, 그중 한컷... 시창작 강의-3(시 쓰는 연습을 많이 해 보자)  / 김송배    1-4. 시 쓰는 연습을 많이 해 보자 처음부터 시라는 틀에 얽매이지 말고 아주 자유스러운 마음으로, 그냥 메모하는 식으로 써야 합니다. 자신이 경험한 일에 대하여 감동했던 것이나 마음 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일들부터 자신의 생각으로만 하나씩 적어 봅니다. 어떤 형식에는 구애받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문체나 형식이 일기문이 되거나 편지글이 되거나 상관 없이 글로 옮겨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전번 시간에도 말한 바와같이 다른 사람의 시를 읽고 난 후에 내 생각을 가미하여 모방해보려는 의지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에 부딪치는 어려운 점은 언어의 부족입니다.(이 언어문제는 다음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물론 언어뿐만 아니라 표현반법이 여러모로 서툴지만 읽고 생각한 자신의 진실을 글로 적어봄으로써 자기 세계가 열리고 시 쓰기에 대한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옛날 선배 시인들은 시인이 되기 위하여 습작 원고지 3만장 정도를 휴지가 되도록 썼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의 쓰라린 습작기를 거쳤던 것입니다. 시 쓰기에는 유형(有形)적인 소재이거나 무형(無形)적인 소재이거나 간에 많이 느껴본 습성이 중요하지만 이 느낌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는 느낌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느낌이란 많은 형태의 감정으로 나타납니다. 이 느낌이 깊은 곳에서 받아들여 미적인 감정과 미적인 언어의 조화로 한 편의 시 작품이 창작되는 것입니다. 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 앞에서 하는 속임없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구약성서의 시편만이 아니라, 무릇 시는 시인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시에서 거짓말을 하야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신을 기만하는 것이라는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의 말처럼 어떤 소재에서 느낀 솔직하고 진지한 나의 진실이 글로 표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는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시입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어떻습니까. 어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유유히 갈 길을 가는 나그네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밤 하늘에 뜬 구름 사이로 흘러가듯 떠 있는 달의 모습은 얼마나 고적하고 유유합니까. 이런 달의 형상이 작품 속에서 나그네와 연관됨으로써 다른 사람이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며 나그네의 구체적인 모습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옛말에 시이도지(詩爾志)란 말이 있습니다. 시를 쓰거나 읊조리는 것은 자기의 지닌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감정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종호 교수는 정규 문과 대학생 조차도 우리 근대시의 고전인 (박목월, 조지후, 박두진 3인 시집)을 읽어본 경우가 희소하다고 개탄하면서 우리 문학 교육의 현실을 말하고 있어서 위의 [나그네]같은 작품은 겨우 교과서에 수록된 것을 읽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옛날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시 쓰기에는 이런 일도 있구나하는 도움이 될까해서입니다. 고려 때 문신인 정지상과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과는 서로 시적(詩敵)이었습니다.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의 사령관이었던 김부식은 정지상이 이 난에 관련되었다하여, 평소에 시 쓰기에 있어서 숙적이었던 정지상을 처형해 버렸습니다.  그 뒤 어느 봄날 김부식은 시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지었습니다. 봄의 정경을 잘 표현한 아름다운 시입니다. 버들은 일천 가지로 푸르고(楊柳千絲綠-양류천사록) 복숭아는 일만 송이로 붉구나(桃花萬點紅-도화만점홍) 그런데 문득 공중에서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서 김부식의 빰을 갈기며 호령했습니다.  "이놈아, 버드나무가 일천 가지인지, 복숭아가 일만 송이인지 네가 세어 보았느냐? 왜 버들은 실실이 푸르고 복숭아는 송이송이 붉다(楊柳絲絲綠-양류사사록, 桃花點點紅-도화점점홍)라고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나중에 김부식은 어느 절간 화장실에서 정지상의 귀신에게 불알을 잡아당겨 죽었다는 일화가 라는 책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참 절묘한 표현의 차이입니다. 다시 말하면 버드나무 가지의 표현이 일천 개보다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표현이 더욱 좋다는 것입니다. 복숭아꽃의 일만 송이보다는 점점이 그러니까 송이송이 이것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요. 이와같이 시 쓰기의 연습에서는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정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언어를 매체로 해서 표현하는 일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결국 많이 읽어보고 많이 생각하며 많이 써보는 것만이 '나도 시를 쓸 수 있다'는 신념을 실천하는 길일 것입니다. 앞으로 강의하는 시의 모든 것과 시 쓰기의 모든 것은 나도 시를 쓸 수 있도록 안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며 기필코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역량을 길러 줄 것입니다. 지금부터 시의 형상과 그 길이 겨우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음 시간에...... ======================================================================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1960∼1989)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근 25년 만에 기형도 시집을 다시 읽는다. 푸른, 누추한, 구름, 희망, 고통, 불안, 사랑, 청춘, 머뭇거리다, 헤매다, 저녁, 탄식, 죽음…. 이런 시어들이 구름처럼 시인 기형도 형상을 이루며 흘러간다. 내 세대 시인들에게 ‘우리들 청춘은 끝났다’는 고지(告知)이기도 했던 기형도의 죽음.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기형도 시 ‘빈 집’) 그를 묻은 날, 간소한 추도식에서 시인 하재봉이 송별사로 이 시를 읽었다. 그렇게 그는 청춘으로 남고 우리는 나이를 먹었다. 어떤 소설엔가 이런 구절이 있다. ‘죽은 사람은 외롭다. 아무도 그와 사귀려들지 않아.’ 기형도가 살아 있으면 킬킬 웃으며 이런 대구를 지었을 테다. ‘늙은 사람은 외롭다. 아무도 그와 사귀려들지 않아.’ 수많은 독자와 후배 시인이 그의 시를 사랑하고 사귀기 원하니 지금 기형도는 그리 외롭지 않으리라.      화자는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머뭇거리고 헤맨다. 몸은 지상에서, 영혼은 공중에서. 왜? 기형도에게 청춘의 화두랄까 상투어는 ‘사랑’이었던 듯하다.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나’ 그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인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그런데 사실 자기조차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는 자조와 탄식이 자욱하다. 질투밖에 허락되지 않은 사랑에 대해, 어떤 인생에 대해 젊은 시인에게 늙은 내가 들려줄 말이 있을 듯하네….
119    시는 시시한 물건짝이 옳다?... 아니다!... 댓글:  조회:2646  추천:0  2017-01-18
시창작 강의-2 (많이 읽기와 모든 것들에 대한 사유) / 김송배 1-2. 詩를 많이 읽어 보자 시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독자로서의 시읽기가 아니라 시에의 올바른 접근을 위한 정독(精讀)을 말합니다. 하루에 몇 권의 시집을 독파하는 것이 아니라, 시 속에 무르녹은 의미와 시어에 유의하면서 음미해보는 것이 시와의 만남을 더욱 가깝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 읽기에서 다음 몇 가지 사항을 유의하면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요.           ① 시를 정독하라 시는 의미의 전덜이 아니라, 시 속에 함축된 의미의 암시나 상징. 그리고 의미의 변용을 통해서 정서적, 감각적인 미적 감동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 시인의 시를 통해서 시인의 미적 감동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떤 독서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책을 읽고 간접적인 체험으로 지식과 인격을 느끼면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의식으로 지식을 넓혀나가는데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정독은 시를 이해하는데는 가장 효과적이며 적절한 방법입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미 속에 감춰진 함축적 의미의 발견이나,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는 무엇인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감명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② 감명을 받았거나 감동을 준 부분은 다시 읽고 재해석을 해보라   시집 한 권을 읽다보면(시집 한 권에는 60~70편의 시가 수록됨) 그 중에 유독 몇 편은 친근감이 가고 감동을 받는 시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일은 내가 직접 쓴 것 같은 것이거나 내가 간직한 시적 상상력, 또는 체험 속에 곰삭은 어떤 의지가 유사하게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이 유사성은 시와의 친숙한 정감을 불러 일으켜서 시인이 그런 체험을 어떤 방법으로 해서 시창작을 성공시키고 있느냐하는 관심입니다. 이러한 관심은 시가 마치 스스로 쓴 듯이 뜯어보고 분석해보며 음미하는 일이 계속되면 스스로 자신이 시작과정을 재구성해 본 것과 같이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이때 자신의 상상력이나 사물을 보는 시각, 그리고 표현하는 방법 등이 부족함을 절감하면서도 이렇게 쓰는 것이 감동을 주는 시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바로 나도 시를 쓸 수 있겠구나하는 잠재력이 이미 발산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입니다. ③ 마음에 새겨지는 시의 행(行)이나 연(聯)은 그냥 음미로 그칠 것이 아니라, 노트에 옮겨 써보는 일도 중요하다.   물론 외워버리면 더욱 좋겠지만 이때 옮겨 적는 과정에서 문득 새로운 무엇을 발견할 수도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옮겨 적는 일이 많아지면 자신이 생각했던 시어(詩語)들을 동원하여 바꾸어 본다든지, 몇 마디를 생략해 본다든지, 또는 새로운 이미지(image)를 첨가해주는 일 등은 시창작 연습의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한편 이런 것들이 모작(模作)이건, 창작(創作)이건 간에 시 쓰는 행위가 될 것이며 이 행위야말로 바로 시 쓰기의 경험으로 연결되는 시적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시편들도 그냥 던져버릴 것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꾸준한 노력이 항상 필요합니다. 어떤 형태의 해석이든 자신의 의식으로 접근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인내가 따라야 합니다. 1-3. 모든 것들에 대한 많은 사유(思惟)가 필요하다. 시는 어쩌면 많은 사유에서 탄생되는지도 모릅니다. 많이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곧 사유하고 사색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다양한 상상력이 동반하게 됩니다. 조그마한 일상생활에서부터 차원 높은 우주관에 이르기까지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은 사유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유 속에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하는 인생관이 있으며 일생동안 기필코 성취되어야 할 목표인 꿈과 희망도 있습니다. 시 쓰기에서 많은 사유가 필요한 점도 시인의 정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많이 사유한다는 것은 많은 상상력을 빚어낸다는 뜻입니다. 이 상상력도 진실된 인생의 고민이 담겨져야 합니다. 상상은 결국 나 자신의 정서와 밀접한 관계에 놓입니다. 정서는 모든 사상(事象)에 부딪혀을 때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을 말합니다.   심리적으로는 자극이 되는 대상에서 강하게 일어나는 감정으로서 또는 신체적인 변화가 뚜렸한 것으로서 일정한 상태로 지속되다가 끝나거나 다른 정신상태로 옮겨가는 의식의 과정을 말합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희노애락(喜怒哀樂)과 애오욕(愛惡慾)의 칠정(七情)이 우리의 오관(五官-눈, 귀, 코, 혀, 피부. 우리 몸에서 감각을 일으키는 다섯 개의 기관)을 통하여 경험하는 정신적인 산물이 됩니다. 이러한 정서의 올바른 비축을 위한 사유는 창조적인 상상력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르테면 '겨울나무'를 응시하면서 시적인 사유로 발전하려면 그 추운 겨울을 인내하면서 새봄의 루르름을 꿈꾸는 희망으로 바꾸어보는 사유, 즉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과 미래의 유추로 연관짓는 사유가 필요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잠시 조병화 시인의 말을 들어 봅시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내면의 고독과 싸워 왔다. 그 생(生), 애(愛), 사(死) 그 존재와 생존, 그 순수허무와 그 순수고독과 싸워 왔다. 항거와 순응, 그걸 살아오고 있는거다. 그게 나의 시이며 시론이며 존재 양상인 거다. 인간은 누구나 한정된 자기 수명을 살다 가는 거다. 그 한정된 시간을 견디고 살다간, 또 다른 세계로 이사를 가야하는 거다.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 죽음이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이 나의 테마이며 나의 작업인 거다 때문에 나는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나를 철학하기 위해서 오로지 사색해 왔을 뿐이다. 나를 세우기 위한 철학, 그 발견과 창작의 철학 속에서 시를 배회했고 시의 이치를 찾았고 그것으로써 시를 써 왔다. 이와같이 어떤 사물이건 관념이건 간에 모든 것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하고 의미를 찾아보는 사유, 이러한 사유야말로 시를 쓰기 위한 사유가 아닐까 싶다 ======================================================================       애가(哀歌) 제14  ―프랑시스 잠(1868∼1938) “나의 사랑하는 이” 너는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이” 나는 말했다. “눈이 오네.” 너는 말했다. “눈이 오네.” 나는 말했다. “좀더, 좀더” 너는 말했다. “좀더, 좀더” 나는 말했다. “이렇게, 이렇게” 너는 말했다. “이렇게, 이렇게” 나는 말했다.     그런 뒤, 너는 말했다. “난 네가 정말 좋아.” 그리고 나는 말했다. “난 네가 더 정말 좋아.” “여름은 갔어.” 너는 말했다. “가을이 왔어.” 나는 답했다. 그 뒤 우리의 말은 처음처럼 비슷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너는 말했다. “내 사랑아, 네가 참 좋아.” 매맑고 숭고한 가을날의 노을 눈부신 저녁빛을 받으며. 나는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해주렴.”     조흔파 선생의 한 명랑소설에 이 시의 첫 연이 실려 있었다. ‘이게 다야? 별 싱거운 시도 다 있네’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내 감상이었다. 그런데 그 시구가 오래도록 머리에 남았다. ‘나의 사랑하는 이, 너는 말했다./나의 사랑하는 이, 나는 말했다.’ 짧고 쉽기도 했지만 뭔가 새콤달콤한 맛이 감돌았기 때문이리라. 제목도 지은이도 몰랐던, 내 어린 날의 사랑의 시여라.  사랑에 빠진 두 사람에게 ‘너를 사랑해’ ‘내가 더 사랑해’ 이런 말 외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좀더, 좀더” “이렇게, 이렇게” 연인 둘이 동시에 같은 말을 웅얼거린다. 보는 이가 수줍어지도록 숨 가쁘게 펼쳐지는 사랑의 정경을 시인은 간결하게, 그러나 선명하게 처리한다. 그런데 제목이 왜 애가일까? 그러고 보니 둘째 연에서는 눈이 온단다. 시의 배경은 이제 막 여름이 지난 가을인데 눈이 오다니…. 베개라도 터진 걸까? 아니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횡설수설일까? 어떤 말도 맞장구치던 연인들이 제가끔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하는 건 사랑이 기우뚱거리는 조짐일지도. 그러다 할 말이 뚝 끊기겠지. 사랑의 조락(凋落)을 암시하듯 때는 가을날 저녁, 창밖 하늘에 진홍빛 노을이 가슴을 죄며 퍼져 나가네. 내 사랑아, 다시 한 번 사랑한다고 말해주렴!
118    [시문학소사전] - "벽화"와 "그래피티" 차이점?... 댓글:  조회:3844  추천:0  2017-01-16
  벽화의 영어가 그래피티 개념입니다. 그래피티(graffiti)의 어원은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graffito'와 그리스어 'sgraffito'이다. 분무기(스프레이)로 그려진 낙서 같은 문자나 그림을 뜻하는 말로 'spraycan art' 'aerosol art'라고도 한다. 유럽에서는 '거리의 예술(street art)'로서 자리를 잡았다.   기원은 고대 동굴의 벽화나 이집트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낙서에 가까운 그림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피티가 예술로서 등장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부터이다. 사이 톰블리(Cy Twombly)·잭슨 폴록(Jackson Pollock) 등은 낙서의 표현법에 관심을 보였고 장 뒤뷔페(Jean Dubuffet)는 아웃사이더 아트로서의 낙서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래피티 아트 [graffiti art] (두산백과)   답변 그래피티란?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으로 고대 동굴벽화,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현대적 의미는 1960년대 후반 미국의 흑인 젊은이들이 스프레이 페인트로 저항적 구호나 그림을 그리면서 시작되었다. 태깅이라고도 한다. 이후 힙합 문화와 결합하면서 확대, 발전되었다. 인종주의· 고립· 환경오염· 정체성 상실 같은 사회 비판에 뿌리를 두었지만, 최근에는 작품 영역이 확장되어 1980년대 이후 거리 미술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예술로서 뿌리를 내린 데는 천재적 낙서화가 바스키아의 공이 컸다. 그밖에 키스 헤링, 장 뒤뷔페 등이 이 분야의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즉 그래피티는 벽화의 일종이죠.   벽화는 건물이나 무덤의 벽에 그린 그림입니다.   차이점은 '벽화'가 큰 개념이라는 것이죠.   출처 :그라피티 - 백과사전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으로 고대 동굴벽화,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현대적 의미는 1960년대 후반 미국의 흑인 젊은이들이 스프레이 페인트로 저항적 구호나 그림을 그리면서 시작되었다. 태깅이라고도 한다. 이후 힙합 문화와 결합하면서 확대, 발전되었다. 인종주의· 고립· 환경오염· 정체성 상실 같은 사회 비판에 뿌리를 두었지만, 최근에는 작품 영역이 확장되어 1980년대 이후 거리 미술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예술로서 뿌리를 내린 데는 천재적 낙서화가 바스키아의 공이 컸다. 그밖에 키스 헤링, 장 뒤뷔페 등이 이 분야의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 그라피티는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graffito'에서 유래했으며, 고대의 동굴벽화,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현대적 의미의 그라피티는 1960년대 후반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미국의 흑인 젊은이들이 뉴욕의 브롱크스를 중심으로 건물 벽이나 지하철 등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구호 벽화 - 백과사전건물이나 무덤의 벽에 그린 그림. | [개설] 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새기는 것은 후기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무덤의 벽화는 이집트 고왕조시대(古王朝時代, 서기전 2000년대)에서 시작되어 에트루리아(Etruria)의 고분 벽화(서기전 7∼5세기경)를 거쳐 중세 기독교도들의 카타콤(Catacomb)으로 계속되고 있다. 궁전이나 신전(神殿)의 벽화로는 이집트의 고왕조시대 유적인 히에라콘폴리스벽화(Hierakonpolis 壁畫)와 크레타섬의 미노아왕조 궁전 벽화(서기전 1800년∼1400년경)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폼페이 유적의 건물 벽화들(1세기경)은 로마시대의 일반 벽화의 유행을 보여 주고 있다. 동양에서는 인도의 아잔타 석굴(Ajanta 石窟)의 벽화(서기전 2세기∼서기 7세기경)가 가장 오래되었다. 이러한 벽화의 전통이 중앙아시아의 여러 석굴, 즉 바미얀(Bamiyan)·호탄(Khotan)·미란(Miran)·키질(Kizil)·투르판(Turfan) 등의 석굴 벽화로 전해져   추천 답변 그래피티는 락카 스프레이 페인트 등등을 이용해 공공 장소의 벽에 무단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자 및 기타 흔적을 남기는 문화의 한 종류. 경범죄처벌법상에서는 '광고물 무단부착'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이 경우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경범죄처벌법의 규정을 받는 것은 그래피티가 해당된다.   벽화(壁畫·壁怜)는 글자 그대로는 "벽에 그린 그림"을 가리키지만, 실질적으로는 벽, 천장, 기둥 등 커다란 표면에 직접 인공적으로 그린 예술 작품을 가리킨다. 궁전, 사원, 교회, 동굴, 무덤 따위의 벽에 그린 그림을 가리키기도 한다.  
117    시작(詩作)의 비법 = 다독(多讀), 다사(多思), 다작(多作)... 댓글:  조회:2932  추천:0  2017-01-16
시창작 강의-1 (나도 시를 쓸 수 있을까...)   ㅁ 강의를 시작하면서   안녕하십니까? 김송배 시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삶에 있어서 가장 값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이러한 의문은 한번쯤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21세기 과학과 물질문명 그리고 황금만능의 참 살기좋은 세상에서도 우리는 무엇인가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저 답답하다고 한탄만 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마음 한쪽에 응어리진 그 무엇을 풀어봅시다. 여기 문학이라는 약발 좋은 처방이 있으니 이리로 오십시오. 우리는 그토록 쓸모 없을 것이라고만 여겼던 시 한편이 우리의 쳇증을 맑끔히 씻어내리는 비방이 숨어 있었음을 미처 몰랐습니다.   오늘부터 cyan,co.kr에서 새롭게 기획하는 '시창작 강의'에 동참하여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향유할 수 있는 시창작의 세계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지 않으시렵니까? 시창작에 대한 의문점을 하나씩 풀어서 나도 시를 쓸 수 있게 되고 나아가서는 시인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향제시와 그 비법을 공개하리다.   이제부터 차근차근하게 그리고 열과 성으로 강의를 경청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맞게될 것을 확신하면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같이 본인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수료하고 박목월 선생님이 주관하신 월간 에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등의 시집과 시선집과 등 시론집, 등 산문집 그리고 는 시창작법을 간행하고 제6회 윤동주문학상과 제1회 탐미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현재는 한국예총에서 발간하는 월간 주간직을 맡고 있으면서 KBS방송문화센터 시창작반에서 강의를 6년째 계속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함께 시창작에 대한 문제들을 풀어봅시다.   1. 나도 시를 쓸 수 있을까   나도 과연 시를 쓸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시를 처음 배우고자하는 시람이나 시를 처음 쓰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공통된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한 마디로 이것이다하고 명쾌한 해답을 제시할 사람을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시 쓰는 일이 수학문제를 풀 듯이 어떤 공식이 있거나 어떤 일정한 틀에 맞추어 넣는 그런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선 다음과 같은 말에 귀를 기울여 유심히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시인이었다.(C.D 루이스)   젊어서 시인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R.M 릴케)   인간은 사랑을 할 때 누구나 시인이 된다(플라톤)   이렇게 본다면 누구나 시적인 자질을 천부적으로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이 됩니다. 사실 젊을 때에는 시적인 감성이나 정서 또는 시적인 상상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넘쳐나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이라고 해서 특이한 감정을 가지고 태어났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보다 좀 다른 정서의 반응은 있을지 몰라도 시적인 관심으로 정서를 쌓아서 집중시키면서 성숙되기까지는 많은 수련과 노력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면 나도 시를 쓸 수 있다는 강한 의지와 집념으로 몇 가지 단계를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1-1. 詩 쓰기에 앞서서   시를 배우고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다음 유형에 심리적인 취향이 발동해야 할 것입니다.   ① 시를 우선 좋아해야 한다.   ② 시를 써 보고 싶은 충동이 있어야 한다.   ③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 꾸준한 학습이 필요하다.       ④ 모든 사물을 보는 것이나 느낌 등이 아름답고 인간적인 측면에서 올바르게 사유(思惟)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전제가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심성에 가득 차 있어야 할 것입니다.이런 것들은 막연한 동경 속의 낭만이나 취향, 그리고 멋이나 사치가 아니라 아주 절실한 표현의 욕구로 인생을 풍요롭게 충족시키는 일생의 각오로 출발되져야 합니다.   흔히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시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시에 흠뻑 빠져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를 가까이 하다보면 시의 모습도 이해하게 되고 시의 내용이나 진실에 대하여 쉽게 친근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일종의 믿음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믿음은 진실에 대한 시적인 약속이며 시에 대한 약속의 이행으로써 상호 신뢰의 바탕에서 출발하는 시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시적인 관심이나 시적인 생활이 없이는 시에의 접근이 어려우며 또한 친숙해 질 수도 없다는 말이 됩니다.   또한 시를 쓰기 위해서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시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에 대한 많은 사유(思惟)가 필요하며 그후에는 시 쓰는 연습을 많이 해 보는 것 뿐입니다. 글 쓰기에서 공통으로 제시하는 다독(多讀), 다사(多思), 다작(多作)이 시 쓰기에의 절대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얘기를 나누어 봅시다. 첫 시간이라 어리둥절할지도 모르겠는데 끝까지 인내하는 자에게만 그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안녕히.  =======================================================================     바람 ―신경림(1935년∼ ) 산기슭을 돌아서 언 강을 건너서 기름집을 들러 떡볶이집을 들러 처녀애들 맨살의 종아리에 감겼다가 만화방도 기웃대고 비디오방도 들여다보고 큰길을 지나서 장골목에 들어서서 봄나물 두어 무더기 좌판 차린 할머니 스웨터를 들추고 마른 젖가슴을 간질이고 흙먼지를 날리고 종잇조각을 날리고 가로수에 매달려 광고판에 달라붙어 쓸쓸한 소리로 축축한 소리로 울면서 얼어붙은 거리를 녹이고 팍팍하게 메마른 말들을 적시고 ‘시인 신경림’ 하면 시 ‘농무(農舞)’를 떠올리는 독자가 많을 테다. 특히 ‘민족문학권’ 후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농무’를 비롯한, 기층 서민들의 한과 애환을 ‘우리끼리 퍼질러 앉으면 삶은 편하고/더러는 훈훈하기도 해서’(시 ‘진도 아리랑’에서)의 정조로 꽹꽹 울리는 농악 리듬이나 남도민요 가락에 담은 선생의 시편들은 ‘원한도 그리움이 되던가?’(시 ‘연어’에서), 그 삶을 지긋지긋하게 잘 아는 이들에게는 물론이고 모르는 이들에게도 가슴 시큰하거나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바람은 안 가는 데 없겠지만 시인의 바람은 나지막하고 허름하고 흔한 곳, 이름 없는 곳으로 간다. 시인의 마음 가는 곳 따라, 돌아서, 건너서, 들러, 감겼다가, 기웃대고, 들여다보고, 지나서, 들어서서, 들추고, 간질이고, 날리고…. 종결 어미 없는 동사(動詞)들로 이어지는 바람의 행로에 재개발이 되려다 만 우리 동네같이 친근한 풍경이 펼쳐진다. 오래도록 비어 있는 점포 유리문에는 지금도 ‘비디오’라는 글자가 적혀 있지. 윤기 없이 까칠한 거리를 ‘흙먼지를 날리고 종잇조각을 날리고’ 달리는 바람. 그러나 봄바람이다. ‘봄나물 두어 무더기 좌판 차린 할머니 스웨터 들추고 마른 젖가슴을 간질이는.’ 삶의 모든 습기 다 거둬가 먼지처럼 가벼이 말라가게 하는 바람, 언젠가부터 선생 시에서 종종 만나는 바람이다. 허무가, 따뜻한 허무가 깃든 바람…. 그러나 인생무상이거나 말거나 삶은 무상하지 않다고, 선생의 시는 그침 없이 거침없이 ‘쓸쓸한 소리로 축축한 소리로’ 우는 바람처럼 ‘팍팍하게 메마른’ 세상을 적신다.  
116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딸님"과 "따님" 댓글:  조회:2765  추천:0  2017-01-15
"ㄹ" 탈락 단어를 적을 때는 어떻게 할까요?  【제28항】끝소리가 ‘ㄹ’인 말과 딴 말이 어울릴 적에 ‘ㄹ’ 소리가 나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 나는 대로 적는다고 하였습니다. ( )안에 것은 버림.  예) 다달이(달-달-이), 따님(딸-님), 마되(말-되), 마소(말-소), 부손(불-손)  무자위(물-자위), 바느질(바늘-질), 부나비(불-나비), 부삽(불-삽)  소나무(솔-나무), 싸전(쌀-전), 여닫이(열-닫이), 우짖다(울-짖다),  화살(활-살) 등.  ♣자세하게 풀어드릴 게요.  ※[ㄹ] 받침이 탈락하여 소리가 나지 않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ㄹ] 받침이 [ㄴ, ㄷ, ㅅ, ㅈ] 소리 위에서 탈락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  ‣ ‘ㄴ’ 앞에서는 딸+님이 → [따님]으로 소리납니다.  ‣‘ㄷ’ 앞에서는 달+달+이가 → [다달이]로 소리납니다.  ‣‘ㅅ’ 앞에서는 말+소가 → [마소]로 소리납니다.  ‣‘ㅈ’ 앞에서는 물+자위가 → [무자위]로 소리납니다.  ‣무자위란 낮은 곳에 있는 물을 높은 곳의 논이나 밭으로 자아올리는 농기구를 가리킵니다.  2. 한자 '불(不)'의 끝소리 [ㄹ]이 그 다음 음절의 첫소리 [ㄷ, ㅈ] 앞에서 탈락하는 경우도 있구요.  예) 부당(不當), 부덕(不德), 부득이(不得已), 부자유(不自由), 부정(不正), 부족(不足)  3, 그러나 ‘ㄹ’ 받침이 [ㄴ, ㄷ, ㅅ, ㅈ] 글자 앞에서 다른 소리로 변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  ‣‘ㄴ’ 앞에서:물+난리, 불+놀이, 칼+날   ‣‘ㄷ’ 앞에서:물+동이, 발+등   ‣‘ㅅ’ 앞에서:철+새, 물+새   ‣‘ㅈ’ 앞에서:물+지게 술+잔  4. 끝소리 [ㄹ]이 그 다음 음절의 첫소리 [ㄷ, ㅈ] 앞에서 탈락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 발달(發達), 몰지각(沒知覺), 울지, 불지(바람도 불지 마라), 볼지(언제 볼지) 등.  /김용복 한말글 사랑 한밭모임 회원 
115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부딪히다"와 "부딪치다" 댓글:  조회:3123  추천:0  2017-01-15
    ▲ 게티 이미지 뱅크   접미사들이 붙어서 이루어진 말들은 어떻게 적을까요? (어간(語幹)을 밝히어 적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동, 피동접미사가 붙은 말에 대한 적기입니다.  [제22항]용언의 어간에 다음과 같은 접미사들이 붙어서 이루어진 말들은 그 어간을 밝히어 적는다.  1.‘-기-, -리-, -이-, -히-, -구-, -우-, -추-, -으키-, -이키-, -애-’가 붙는 단어들입니다.  예) ‘기’가 붙는 말들⟶맡기다, 옮기다, 웃기다, 쫓기다, 벗기다, 씻기다 등  ‘리’가 붙는 말들⟶뚫리다, 울리다 등.  ‘이’가 붙는 말들⟶낚이다, 쌓이다, 높이다. 핥이다 등.  ‘히’가 붙는 말들⟶굳히다, 굽히다, 넓히다, 앉히다, 얽히다. 잡히다 등  ‘구’가 붙는 말들⟶돋구다, 솟구다 등.  ‘추’가 붙는 말들⟶갖추다 곧추다, 맞추다 등  기타⟶ 돋우다, 일으키다, 돌이키다, 없애다 등  다만, ‘-이-, -히-, -우-’가 붙어서 된 말이라도 본뜻에서 멀어진 것은 소리대로 적는다.  예) 도리다(칼로∼), 드리다(용돈을∼), 고치다(새 것으로~), 바치다(세금을∼)  부치다(편지를∼) 거두다(세금을~), 미루다(뒤로~), 이루다(뜻을~) 등.  2. ‘-치-, -뜨리-, -트리-’가 붙는 것( 모두 표준말입니다.)  예) ‘치’가 붙는 말들⟶놓치다, 덮치다, 떠받치다, 받치다, 밭치다, 부딪치다, 뻗치다, 엎치다  =@@= 부딪치다: 차와 차가 마주 부딪쳤다. (능동, 의도적, 주체 스스로, 움직이거나 작용한 현상 그대로 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부딪히다 : 마차가 화물차에 부딪혔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거나 당했을 때 주로 다른 힘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을 나타냅니다.)  ‘뜨리’와 ‘트리’가 붙는 말들⟶부딪뜨리다/부딪트리다, 쏟뜨리다/쏟트리다  젖뜨리다/젖트리다, 찢뜨리다/찢트리다, 흩뜨리다/흩트리다  ♣위에 제시된 접미사는 ‘-기-, -리-, -이-, -히-, -구-, -우-, -추-, -으키-, -이키-, -애-’입니다. ‘-기-, -리-, -이-, -히-’는 사동접미사도 되고, 피동접미사도 되지만 ‘ -구-, -우-, -추-, -으키-, -이키-, -애-’는 사동접미사로만 쓰입니다.  [붙임] ‘-업-, -읍-, -브-’가 붙어서 된 말은 소리대로 적는다.  예) 미덥다, 우습다, 미쁘다 등  ♣이런 단어는 무슨 뜻일까요?  곧추다‣(곧게 세우다) / 받치다‣(어떤 물건의 밑이나 안에 다른 물체를 대다'란 뜻으로 "항아리 아래에 벽돌을 받쳐 기울어지는 걸 막았다. 옷에 안감을 받치다.)  밭치다‣(항아리에 담근 술을 체에 밭치다)  받히다‣(받히다: 염소뿔에 받혔다)  젖뜨리다/젖트리다‣(힘을 주어 뒤로 기울이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뜨리다)  찢뜨리다/찢트리다‣(무심결에 찢어지게 하다)  흩뜨리다/흩트리다‣(흩어지게 하다)  /김용복 한말글 사랑 한밭모임 회원  /////////////////////////////////////////////////////////////////////////// 우리말에는 같거나 비슷한 소리를 보이면서 뜻이 다른 단어가 많이 있다. 이번 호에서 알아볼 '부딪치다'와 '부딪히다'도 같은 경우이다. 이 두 단어는 소리가 같은데 표기와 뜻이 다른 경우이다. 이들 은 소리가 같아서 표기할 때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은 이 두 단어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먼저, '부딪치다'는 '부딪다'에 강세를 뜻하는 접미사 '-치-'가 어울린 단어이다. 그래서 '부딪다'의 뜻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부딪다'는 '무엇과 무엇이 힘 있게 마주 닿거나 마주 대다, 또는 닿거나 대게하다'의 뜻을 갖고 있다. '부딪치다'는 '부딪다'와 기본적인 의미는 같으면서 좀 더 강조하는 의미를 갖는다. (1) 파도가 바위에 부딪쳤다. / 한눈을 팔다가 길가의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쳤다. '부딪치다'는 이 외에도 '눈길이나 시선 따위가 마주치다, 뜻하지 않게 어떤 사람을 만나다, 의견이나 생각의 차이로 다른 사람과 대립하는 관계에 놓이다, 일이나 업무 관계에 있는 사람을 문제 해결을 위하여 만나다.' 등의 의미로도 쓰인다.  (2) 김 과장은 박 국장과 눈길을 부딪치기를 꺼려했다. (3) 나는 학교 정문에서 그와 부딪쳤다. (4) 형은 진학 문제로 부모님과 부딪치고는 집을 나가 버렸다. (5) 이 문제는 당사자들끼리 부딪쳐야만 해결이 날 것 같다. 반면, '부딪히다'는 '부딪다'에 피동을 뜻하는 접미사 '-히-'가 어울린 단어이다. 그러므로 '부딪히다'는 주체의 힘에 의해 부딪는 행위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다른 힘에 의해 부딪는 행위를 당한 것이 된다. 예를 들어, (6) 파도가 뱃전에 부딪히다. / 배가 빙산에 부딪혀 가라앉았다. 등과 같이 쓰일 수 있다. '부딪히다'는 또한 '예상하지 못한 일이나 상황 따위에 직면하다'의 의미로도 쓰인다.  (7) 경제적 난관에 부딪힌 회사는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결국 '부딪치다'와 '부딪히다'를 쉽게 구별하는 방법은 주어의 행동이 능동인지 피동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주어가 능동적으로 누군가와 부딪는 행위를 한 경우라면 '부딪치다'가 맞고, 반대로 주어의 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힘에 의해 부딪는 행위를 당한 경우라면 '부딪히다'가 써야 한다. / 장충덕 충북대학교 국어문화원 책임연구원
114    [쉼터] - 사랑의 노래는 학습되지 않는 막무가내의 모든 것... 댓글:  조회:3135  추천:0  2017-01-15
[이주엽의 이 노래를 듣다가] =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양희은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중   이미지 크게보기양희은 앨범 ‘1991’ 사랑은 짧고 슬픔은 길다. 생(生)의 대부분은 그 짧았던 사랑의 후일담이다. 사랑은 생의 가장 높은 곳까지 치솟았다가 슬픔의 가장 깊은 바닥으로 떨어져야만 하는 비극적 운명에 닿아 있다. 한순간 불꽃처럼 확 타오르는 것, 그 뜨거움에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것, 그 짧은 순간에 전 생애를 걸고 싶은 것, 그 간절하고 아름다운 '헛것'이 사랑이다. 사랑에 취해 우린 덧없고 가여운 이승을 겨우 건너간다. 가수는 노래한다.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난다"고. 그렇다. 사랑이 지나간 뒤에 도대체 무엇이 남을 것인가. 목젖이 뜨거워지는 이 처연한 고백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다. 비루하고 너절한 일상을 견딜 수 없을 때, 문득 구원처럼 사랑은 온다. 그때 세상은 은밀히 숨겨둔 황금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른다. 사소했던 모든 풍경이 "날 위해 빛나기" 시작하며, 사랑의 힘으로 세상은 재구축된다. 그러므로 사랑과 혁명의 낭만성은 같은 것이다. 실패한 혁명가처럼, 사랑이 끝난 뒤엔 찬란했던 영지(領地)를 잃고 망명객이 되어 떠돈다. 그 눈물겨운 폐허 위에서 가수는 탄식한다. "모든 것이 그 빛을 잃어버렸다"고. 사랑은 전부(全部)이거나 전무(全無)다. 양희은이 나이 마흔에 발표한 이 불후의 연가는, 처연하나 슬픔을 터뜨리지 않고 꾹꾹 눌러 노래한다. 음악 평론가 강헌의 표현대로 "청승의 습기가 제거된" 목소리로 사랑의 황홀함과 허망함, 그리고 사랑이 남긴 폐허의 쓸쓸함을 담담하게 얘기한다. 노래는 귀로 들어와 가슴 한쪽에 슬픔의 웅덩이를 남긴다. 그것을 들여다보며 우린 밤새 술잔을 기울여야 한다. 이 노래의 주인공 또 한 명은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 이병우다. 양희은의 가사와 노래도 아름답지만, 이병우의 고전적 멜로디와 유려한 연주는 단연 발군이다. 지금은 영화 음악가로 더 유명하지만, 조동익과 함께 결성했던 '어떤날' 시절부터 보여준 그의 작곡·연주 능력은 시대를 앞서간 비범한 것이었다. 기타 한 대와 목소리만으로 이뤄진 미니멀한 편곡이지만 노래는 더없이 충만하다. 기타가 음을 조심스럽게 풀어놓으면 보컬은 그 속으로 침잠한다. 보컬이 격정으로 치달으면 기타가 그 슬픔을 앞질러 가 공간을 넓힌다. 둘의 조밀한 대화로 만들어 낸 이 음악적 비경(秘境)은 깊고도 아늑하다. 이후에 많은 일급 가수와 성악가가 앞다퉈 리메이크 버전을 발표했지만, 그 누구도 원곡의 성채 근처에 이르지 못했다. 이 노래가 실린 양희은의 앨범 '1991'은 발표한 해를 제목으로 삼았다. 그때 양희은은 성공의 정점을 지나 세속의 기대와 시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마흔 나이였고, '어떤날'의 음악적 성과를 뒤로하고 해외 유학 중이었던 이병우는 거칠 것 없던 스물일곱 나이였다. 발라드와 댄스뮤직이 음악 시장을 양분하던 그해에, 보컬과 어쿠스틱 기타 단 두 소리만으로 채운, 시대를 역행한 명반 하나를 우리에게 선물했다. 모든 트랙이 투명한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이 음반은, 노래의 본령이 쇼가 아니라 자기 성찰임을 새삼 일깨웠다. 사랑은 영원히 치정이다. 학습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 막무가내의 것이다. 노래처럼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에 이르는 길은 아득하고 멀다. 누군가의 곁에 있어도 외롭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이다.     ⓒ 조선일보 /이주엽 작사가
113    [쉼터] - 그림자 이끌고 떠나가야겠네... 댓글:  조회:2491  추천:0  2017-01-15
[이주엽의 이 노래를 듣다가] = "그림자 이끌고/ 떠나가야겠네/ 이 비를 몰고 온/ 구름을 따라" ―장필순 '그리고 그 가슴 텅 비울 수 있기를' 중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무를 것만 같은 날들이 있었다. 태양은 중천으로 향하고 시간은 미지의 설렘을 담아 반짝이던 그때, 웃음과 노랫소리는 높았다. 막 벙그는 꽃처럼 마음은 붉게 흐드러졌다. 그 뜨겁고 화려한 날이 모두 지난 뒤엔 무엇이 남는가. 가수 장필순은 '그 이후'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퇴락의 긴 그늘을 조용히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가슴이 생기를 잃고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어 삶이 하찮게 느껴질 때, 불 꺼진 방에서 홀로 이 노래를 들어보라. 애써 밀쳐뒀던 쓸쓸함이 살아와, 볼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질지 모른다. 28년 전, 시간에 대한 관조적 시선을 담은 '어느새'로 화려하게 데뷔한 장필순은 이제 인생의 늦은 오후 어디쯤에 서 있다. 목소리엔 그녀의 오래된 거처, 제주도의 고적한 풍경이 스며 있다. 잠결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몽환적 키보드 사운드 위로 나직하게 시작하는 노래는, 이렇게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다. "외롭지 않니?/ 귓가를 스쳐가는/ 젖은 바람이 물어온다." 제주의 어느 철 지난 포구와 인적 없는 한라산 자락을 돌아왔을 젖은 바람이, 문득 외롭지 않으냐고 묻는다. 관계의 타성과 아늑함에 빠져 잠시 잊고 있었을 뿐, 외로움은 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장필순은 삶을 조용히 응시하며, 스스로 맞아들인 외로움이 견딜만한 것인지 묻는다. 그 물음은 쓸쓸하면서도 애틋하다. "외로워도 괜찮지 않니?"라고 마음을 어루만지기 때문이다. 질문은 이어진다. "슬프지 않니?/ 우산을 두드리며/ 빗방울들이 물어온다." 외로움을 숙명으로 감당해야 하는 인간에겐, 우산을 써도 가릴 수 없는 슬픔이 있다. 바람과 빗방울은 외로움과 슬픔이라는 저 오래된 가계(家系)의 자손들이리라. 노래는 달빛, 새벽, 안개, 침묵과 같은 고즈넉한 단어들을 불러내며 침잠한다. 가수는 그 단어들이 달아날까 봐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가만가만 노래한다. 그리고 존재는 정처 없이 흐르는 것이므로 "그림자 이끌고" 어디론가 떠나려 한다. 그곳은 "이 비를 몰고 온 구름을 따라" 가는 길이거나 "안개가 씻어낸 길"이다. 구름이 가는 길은 덧없고, 안개가 씻어낸 길은 아스라하다. 곁엔 낡고 해진 구두처럼 오래 묵은 그림자가 하나 있을 뿐이다.   장필순은 윤기가 빠져나간 가슴에 희망을 다시 채우듯, 봄의 기억들을 호출한다. "우리 가슴 속에/ 씨가 퍼져 날리길/ 꽃이 피기를/ 새들이 날아들기를" 낮은 음성으로 간절하게 노래한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인생의 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해가 이미 기울기 시작했으므로. 노래의 마지막 당부에 이르면 눈이 아려온다. "우리 가슴속에 강물 흐르길/ 늘 살아있기를/ 늘 깨어있기를." 부디 모두 그럴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노래는 그 모든 소망마저 버리고 마침내 무욕의 바다로 흘러들으려 한다. 제목이자 노래를 맺는 가사는 이렇다. "그리고 그 가슴 텅 비울 수 있기를." 삶의 뜻 없음과 덧없음을 서정적 언어로 교직해낸 노래는 아름답고도 슬프다. 노래가 끝나면 가수의 바람과 달리 가슴엔 아릿한 무언가가 가득 차온다. 노래가 실린 장필순 7집 앨범은 2013년에 나온 비교적 근작이다. 6집 발표 후 11년 공백을 깨고 발표한 이 앨범은 충분히 오래 걸어온 사람의 향기가 곳곳에 스며 있다. 외로운 방랑의 길마다 그 향기가 퍼져나갈 것이다. 노래가 마지막에 이른, 외로움도 슬픔도 희망도 없는 저 먼 무욕의 바다에서 삶은 마침내 자유를 얻을 것이다.                                                                                     ⓒ 조선일보/이주엽 작사가
112    살맛나는 세상과 무서운 세상, 그리고 "거짓 글" 댓글:  조회:3416  추천:0  2017-01-14
인터넷 게시판 '거짓글' 판친다는데…   이미지 크게보기온라인 게시판에서 소위 ‘판춘문예 레전드’라고 꼽히는 게시물들. 오른쪽 카카오톡 대화도 거짓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시댁 욕부터 ‘아내가 온라인 상에서 결혼을 했다’는 고민까지 내용도 다양하다. /네이트판 캡처 회사원 김호민(46)씨는 최근 한 인터넷 게시판에서 변호사라는 40대 남자가 올린 글을 읽고 크게 격분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은 그 남자의 아내와 전날 주고받은 카톡 내용이라고 했다. 아내는 이 대화에서 일방적으로 '갑자기 지방에서 올라온 시어머니를 모시고 저녁을 먹기 싫다. 나는 그냥 피부과에나 가겠다'고 퍼붓고 있었다. 김씨는 글을 읽다가 화가 나서 '어떻게 이런 아내와 사느냐'는 댓글을 달려다가 움찔했다. 다른 사람들이 쓴 댓글에 이렇게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판춘문예네요.' 판춘문예란 인터넷 커뮤니티 '네이트판'과 '신춘문예'의 합성어. 인터넷상에서 다른 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지어서 쓴 글이나 지어서 쓴 것으로 의심되는 글을 일컫는다. 김씨는 "남의 관심과 댓글을 얻기 위해 거짓 글을 게시판에 올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고 했다. 네이트판·MLB파크·오늘의유머·일일베스트 같은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는 최근 글 중에는 이렇게 관심을 얻으려고 지어낸 글이 적지 않다. 네티즌들은 이를 두고 '주작(조작을 뜻하는 인터넷 용어)' 또는 '판춘문예'라고 부른다. 인터넷에 '판춘문예 레전드'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수백여 건 게시물이 검색된다. 여성이나 남성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을 모으기 위한 글, 특정 대학이나 직장을 향한 비아냥을 부르는 글, 시댁을 향한 욕을 부르는 글…. 주제는 다양하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의견을 모으기 위한 글이 많다. 이런 '판춘문예'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거짓으로 메신저 대화를 한 것처럼 만들어낼 수 있는 '주작톡' '주작앱' 같은 애플리케이션도 여럿 등장했다. 황당한 주제가 많은 것도 판춘문예의 특징이다.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폭발적 조회 수와 반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일 선물로 남자 친구가 화장 솜을 줬어요' '여동생이 저를 자꾸 남자로 봐요' '시어머니가 예단 받더니 파혼하자네요' 같은 내용이 대표적이다. 여성학을 전공하는 황은영(35)씨는 "남의 관심을 끌기 위한 단순한 거짓 글도 있겠지만, 잘 뜯어보면 여성이나 장애인, 시댁처럼 어떤 특정 계층이나 집단에 대한 혐오를 전파하는 글이 많다. 혐오를 재미로 소비하는 셈"이라고 했다. 작년 말 한 온라인 여성 커뮤니티에는 '남자 친구 살인 인증글'이 올라와 경찰이 비슷한 실제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판단하고 수사에 나섰으나 이 역시 지어낸 글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해당 글을 쓴 여성은 경찰 조사에서 "재미로 글을 썼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몇몇 온라인 커뮤니티 운영진 측은 이제 아예 대놓고 '판춘문예 온라인 글짓기 대회'를 열기도 한다. 장원·장려상을 네티즌 댓글과 반응을 고려해 뽑는다. 고려대 사회학과 이명진 교수는 "오랫동안 인터넷 게시글은 '진짜 체험담' '숨겨진 목소리'의 역할을 해왔지만, 이런 거짓 글짓기가 늘어날수록 온라인 게시글의 진정성도 점점 희미해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111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글쓰기, 토론식 례찬 댓글:  조회:2820  추천:0  2017-01-14
[창의 교육 프런티어들] = 서울대 심리학과 박주용 교수의 글쓰기·토론 예찬 매주 쓰고 토론하는 전공 수업 학생들 "힘들지만 남는게 많아" 朴교수 "철학자 베이컨이 말했죠 토론은 준비된 사람을 만들고 쓰기는 정밀한 사람을 만든다 대학서 이 두가지는 꼭 가르쳐야"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전공 탐색 수업인 '심리학: 인간의 이해'는 학생들 사이에 "어렵지만 도전해볼 만한 수업"으로 알려져 있다. 1학년 대상 수업인데 타과 2~3학년들이 일부러 찾아와 들을 만큼 인기가 높다. 동시에 수강 신청자 절반이 학기 초에 수강을 취소할 만큼 학습량이 많고 어려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담당 교수인 심리학과 박주용 교수는 "매 학기 40~50%는 수업을 포기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심리학과 박주용 교수가 학생들의 창의성 발현을 위한 글쓰기 교육의 중요성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창의성 교육을 위한 교수 모임'의 일원인 박 교수는 "대학 교육은 토론과 글쓰기 위주로 이뤄져야 한다"는 지론하에 본인 강의를 그렇게 하고 있다. 박 교수는 매주 수업 시간마다 학생들에게 다음 주에 토론할 주제를 제시한다. 예컨대 '대입 시험을 지능검사 시험으로 대체하면 어떨까'라는 주제와 함께 '사이언스' 같은 잡지 기사 스크랩 등 관련 읽을거리를 준다. 정답이 있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에 학생들은 며칠씩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A4용지 한 장 정도로 답안을 작성해 온라인 강의 시스템에 올리면, 다른 학생들이 읽고 평가하는 방식이다. 모든 학생이 각각 임의로 배정된 다른 학생 서너 명의 글에 대해 평가를 남긴다. 박 교수는 "매주 쓰기 과제가 있으니 각 학생은 한 학기에 12~13장 분량의 글을 쓰는 셈"이라며 "암기 위주의 입시 교육만 받아온 우리 학생들에게 쉬운 과제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수업 당일에는 학생들이 3~4명 규모의 소그룹별로 토론을 벌인다. "타고난 지능에 의한 위계질서를 조장할 것"이라거나 "이미 우리 대학 제도가 그런 사회를 만들었다" 같은 갑론을박이 오간다. 박 교수는 학생들이 올린 글 중에 좋은 것 몇 가지를 수업 시간에 소개할 뿐이다. 이따금 학생 사이를 오가며 어떤 토론이 오가는지 귀를 기울이기도 하지만 개입은 최소한만 하고 있다. 창의성 계발에 왜 '쓰기'를 강조할까. 박 교수는 철학자 베이컨의 말을 인용해 "독서는 완전한(full) 사람을, 토론은 준비된(ready) 사람을, 쓰기는 정밀한(exact) 사람을 만든다"며 "독서와 토론과 쓰기는 창의적 사고를 위해 갖춰야 할 기본"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교육은 '입시'라는 괴물로 인해 토론과 쓰기 교육이 거의 배제되고 있다"며 "대학에서 늦게라도 토론과 쓰기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했다. 효율적인 토론을 위해 생각을 정리하도록 쓰기 과제를 많이 내주는 것이다. "글을 써봐야 생각이 정리되고 무엇보다 '내가 어디까지 정확히 알고 있는가'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말로는 안다고 하는 내용도 글로 옮기려면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극명하게 나타나죠. 그제야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명확히 파악하고 그때부터 새로운 생각, 즉 창의성이 발현하는 것입니다." 수강을 취소하지 않고 한 학기 내내 완주한 학생들 사이 평가는 매우 좋은 편이다. 수강생 김서연(경제학부)씨는 "통상적인 강의·암기 위주 수업과 다르게 학생 스스로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수업이었다"며 "매주 쓰기 연습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학기 강의 평가에서 학생들은 이 수업에 평균 4.2점(5점 만점)을 매겼다. 4.0점 이상이면 선호하는 강의라는 평을 받는다. 학생들은 강의 평가란에 "힘들어요!" "그래도 이런 수업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글쓰기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같은 평을 남겼다. 박 교수는 "현재 대학에서 글쓰기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말했다. / 조선일보 박승혁 기자 ================================== [창의 교육 프런티어들] = 글 잘쓰는 人材 키우는 美대학들   미국 대학들은 글쓰기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대부분 대학에 '글쓰기 센터(Writing Center)'가 있어 학생들에게 글쓰기 교육을 체계적으로 시킨다. 그중 하버드대의 글쓰기 교육은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모든 학생이 의무적으로 글쓰기 수업을 들어야 하고, 대부분 과목에서 글쓰기 숙제를 내준다. 글쓰기 센터에서는 학부, 대학원 학생들을 위해 단계별로 다양한 글쓰기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1대1 첨삭도 철저하게 해준다. 매사추세츠공대(MIT) 역시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강조하고 있다.   미국 대학들이 이렇게 글쓰기를 강조하는 것은 글쓰기가 깊이 있게 사고하는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해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버드대 낸시 소머스 교수가 신입생들의 글쓰기 경험을 조사한 연구에서 학생들은 "글쓰기가 깊이 있는 생각을 하게 했다"고 밝혔다. 이 연구에서 한 학생은 "만약 글을 안 썼다면 그냥 정보만 가득 집어넣었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글 쓰면서 생각하고, 남과 다른 내 의견을 말해보는 기회도 가졌다"고 말했다. 1996년 노벨 의학상을 받은 피터 도허티 교수도 "과학을 연구하려면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생각도 명확해 연구를 더 잘한다"고 말했다. 글쓰기가 중요하다는 인식은 대학 졸업 후에도 계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버드대 로빈 워드 박사가 1977년 이후 하버드를 졸업해 40대에 접어든 졸업생 1600명을 대상으로 '당신의 현재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90% 이상이 '글쓰기'라고 답했다. 그만큼 사회에 나가서도 글쓰기 능력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꾸준히 글쓰기 교육을 하는 천안동성중 한경화 수석교사는 "아이들을 창의성과 인성을 갖춘 인재로 키우려면 반드시 글쓰기를 시켜야 한다"며 "아이들이 글을 통해 생각과 느낌, 가치관, 정서 등 복합적인 것들을 정리하고 표현하면서 생각하는 힘이 길러지고 창의성도 발현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김연주 기자   ========================== [창의 교육 프런티어들] 서평·기행문 중 한편 완성해야… 5년째 진행, 휴대폰·노트북 금지 "긴 글 써보며 비판·철학적 사유"   지난 6일 오후 2시 이화여대 ECC 극장. 학생 100여명이 책상 위에 앉아 하얀 A3 종이 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노트북도, 스마트폰도 없이, 오로지 연필과 지우개로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시간이다.   지난 6일 이화여대 ECC 극장에서 열린‘2017 이화 에크리’에 참여한 학생들이 글을 쓰고 있다. 에크리는 지난 2012년부터 진행해온 백일장으로, 에크리는 프랑스어로‘글을 쓰다’라는 의미다. /이화여대 '2017 에크리'라는 이 행사는 이대의 교양교육 전담 기구인 '호크마교양대학'이 학생들에게 비판적 사고력과 인성, 창의성 등을 키워주기 위해 지난 2012년부터 진행해온 백일장이다. '에크리(écrire)'는 프랑스어로 '글을 쓰다'라는 의미. 지난해부터 기존의 서평에 기행문 부문을 추가했다. 원하는 학생들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데, 매년 100명 이상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김정선 호크마교양대학장은 "글을 쓴다는 것은 흔히 산고의 고통에 비유되는데, SNS를 이용해 초 단위로 소통하는 데 익숙한 학생들이 '이화 에크리'에서 오랜만에 긴 호흡의 글을 쓰는 기회를 갖는다"며 "비판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를 해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평 부문 참가자들은 대학이 제시한 5권의 필독서 중에 한 권을 미리 읽고 서평을 작성했다. 올해 필독서는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 제인 구달의 '인간의 그늘에서' 등이다. 기행문을 선택한 학생들은 국내외 여행 경험을 자유롭게 썼다. 이화여대는 "글 쓰는 행위 자체가 매우 창의적인 노력이기 때문에 학생들 창의성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대회에 참가한 최유진(문헌정보학 4년)씨는 "에크리에 나가 서평을 쓴다는 생각으로 추천 도서를 읽다 보니 더 깊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내 의견을 정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김연주 기자
110    문학은 "퇴고, 다시 퇴고"의 련마작업을 거치는 고된 작업... 댓글:  조회:2794  추천:0  2017-01-14
퇴고와 관련, 이우걸 시인의 고백을 들어보기로 하자.  ● 외우면서 퇴고하기 / 이우걸    내게도 비밀한 나만의 시조작법이 있다. 그것은 외우기이다. 시조에 접하게 된 계기도 외우는 과정에서 이루어졌고, 좋은 시조를 쓰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도 외우면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외우는 것이 어떤 면에서 좋은 방법이 되는가. 또, 외우면서 무엇을 고치는가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 2>  나는 초 중학교 시절에 늘 어머니를 위해 고시조를 붓글씨로 써야 했다. 어머니는 그걸 외우시는 것이 당신의 낙이었다. 그 낙은 마치 옛 여인들이 기구한 그들의 한을 노래에 실어 물레를 잣듯 시간을 자아가며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고시조 두루말이는 그 당시 우리 집에선 어머니의 교과서로 여러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 교과서를 외우시는 어머니 곁에서 우리 식구들은 혹시 어느 구절이 틀리나 하고 듣고 있었지만 틀리시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이제 나 스스로도 시조를 외는 버릇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시조를 자꾸 외우다 보면 3장 12음보의 형식미를 자연스레 알게 될 뿐 아니라 그 작품이 그려보이는 정경까지도 상상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시조를 쓰는 시인이 되었다. 어쩌면, 어머니의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시조감상 방법대로 지금은 내 시조를 감상하는 것이다. 그 감상 과정에서 문제점이 생기면 손질을 다시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나의 퇴고 방법이다. 그렇다면 내가 발견할 수 있는 문제점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얘기해야 할 순서가 된 것 같다.  첫째로는 형식에 대한 점검이다. 시조는 두루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정형시다. 특히, 자수로 해결되지 않는 운율의 미학을 시조는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자수는 맞으나 시조가 아닌 작품이 있는가 하면 자수로는 넘쳐나는 듯한 데도 시조의 형식미를 잘 갖춘 시조가 있다. 이에 대한 감식안은 시조를 많이 외운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법이 아닌 비법이다.  두번째로는 동원된 언어에 대한 점검이다. 가령, 격을 낮춘 비어를 발견했을 때 이 비어를 동원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된다. 또 모음의 지나친 반복이나 받침 사용의 문제점, 동어반복의 문제점 등을 따지는 것이다. 지나치게 율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 가벼운 서정시로서는 장점이 될 것이고 무거운 서정시의 경우는 단점이 될 것이다. 또 모음의 반복이 리듬감을 살리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지루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받침의 경우 발랄한 서정시의 분위기를 필요로 할 때는 어휘를 바꿀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로는 내용에 대한 점검이다. 여기에서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은 구조의 완결성이다. 시조는 초, 중, 종장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어떤 방법으로든 시적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초, 중, 종장은 서로 관계해야 한다. 또, 연시조의 경우 첫 수와 둘째 수 혹은 샛째 수는 독립해 있으면서도 서로 한 시세계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서로 관계없는 연시조라면 함께 묶어 같은 제목을 붙일 이유가 없다.  < 3>  이제 나의 시조 쓰기 방법을 보이기 위해 몇 편의 작품을 들어보고 싶다.  어릴 때 누나는 창녕에서 자랐고  자라서 누나는 파주에서 살지만  당신은 우리 누나를 욕하지 못한다.  강도 산도 해도 달도 산 자의 인연일 뿐  핏줄처럼 엉켜붙은 잡초들을 후벼파다가  사변이 나던 이듬해 밤차를 타고 떠났다.  이따금 엽서에다 누나는 소식을 쓴다  성한 그, 다리로는 밟지 못할 고향땅에  어머니 추우실까 봐 털옷도 짜 보낸다.  ‘우리 누나 - 6·25'  유월 어느 날이었다. 반공 구호가 신문이나 방송 채널에서 계속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신문이나 TV 채널의 도식적이고 의례적인 행사에 식상해서 몸서리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시인인 나는 6·25를 어떻게 노래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내용을 시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글을 써 본 사람이면 경험하곤 하지만 정말 막막했다. 그 때 얼른 머리 속을 스쳐 가는 상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릴 때 아랫동네 한 처녀에 관한 것이었다.  즉, 그 처녀는 6·25 이후 너무 가난해서 거리의 여인이 되어 파주에 살고 있는데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엔 고향 땅 발 못 디딘다."고 외치던 그 처녀 아버지가 죽은 이듬해에 노랑머리 남자 아이와 얼굴이 검은 아이를 데리고 몰래 밤에 고향에 왔다가 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6·25의 참상 중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가장 아픈 사건은 바로 죄 없는 이 처녀의 인생사다. 따라서, 실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우리 누나'의 일로 바꾸어 써 본 것이다. 처음엔 제목을 ‘6·25'로 했다가 다시 '편지'로 했다가 최종적으로 '우리 누나'로 바꾸었다.  나는 그대 이름을 새라고 적지 않는다  나는 그대 이름을 별이라고 적지 않는다  깊숙이 닿는 여운을  마침표로 지워버리며.  새는 날아서 하늘에 닿을 수 있고  무성한 별들은 어둠 속에서 빛날 테지만  실로폰 소리를 내는  가을날의 기인 편지.  - ‘비’  어느 가을날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나는 어떤 사람에게 열심히 사랑의 편지를 썼다. 그러나, 한번도 부치지는 못했다. 그 때 내가 하숙한 집은 일본식 가옥이었다. 그 지붕 끝에 양철 물받침이 있었다. 그래서 물이 떨어지면 실로폰 소리 같은 게 났다.  대학 2학년 어느 가을날, 나는 다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위의 시조를 썼다. 비상과 하강의 이미지 배치, 그리고 사랑의 감정 - 어쩌면 가을에 내가 만난 비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썼던 완성되지 못한 편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 작품은 씌어진 것이다. 제목도 ‘편지', ’가을 비', ‘비'를 두고 많은 시간을 보낸 뒤 ’비'로 정했다. 고심한 덕분으로 이 작품이 중앙시조대상 신인상의 영광을 차지했다.  < 4>  이제 다시 좋은 시조를 쓰는 방법으로 돌아가서 얘기해 보자. 나는 그 비법으로 외우기를 들었다. 그렇다. 시조는 특히 외우면서 퇴고해야 한다. 퇴고 기간은 길게 잡을수록 좋다. 어떤 작품의 경우는 창작할 때부터 수작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많은 모순을 안고 태어난다. 그 모순은 퇴고라는 작자의 애프터 서비스를 통해 말끔히 지워지게 된다. 어제까지 몰랐던 작품의 문제점을 오늘 다시 발견하고 그 문제점을 잘 고치면서 느끼는 희열 또한 작은 것이 아니다. 과작이라도 좋다. 시인은 완결된 한편의 작품을 묘비명에 새기기 위해 생애를 투자하는 사람이 아닌가!  외우면서 퇴고한다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시조시인 백수 정완영(鄭椀永) 선생 같은 분은 시상(詩想)의 발상에서부터 탈고(脫稿)까지 전과정을 머릿속에서 외우면서 처리한다고 한다. 그 시조에 걸맞는 시어(詩語)를 취사선택하고 이미지를 풀어내는 언어의 조립, 짜집기, 군더더기 제거, 결구 작업 등 모든 창작 공정을 머릿속에서 처리한다고 한다. 컴퓨터 두뇌처럼 머릿속에서 정리·정돈한 글을 원고용지에 옮겨 적는 정서 작업을 끝내면 한 편의 완결된 시조가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완영 선생은 ‘컴퓨터 두뇌'로, 당신이 창작한 모든 시조를 줄줄 외운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창작한 모든 작품을 줄줄 외운다고 하여 천재시인이나 ‘위대한 문인'으로 추앙받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컴퓨터 두뇌 백수 선생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일일 것이다.  중국 당나라 중엽의 시인 이백(李白 자 太白)은 천성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한 나머지 흥이 나면 곧 시를 창작하는 천재 시인이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씩을 읊었다고 하니 천재는 천재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태백이 놀았던 당나라 때와 오늘의 21세기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백낙천과 방석에 얽힌 에피소드나, ‘노인과 바다'를 200번이나 고쳐 쓴 헤밍웨이의 이야기, 그리고 작가 이외수, 시조시인 이우걸의 창작 비결(秘訣)은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시나 시조를 포함하여 모든 문학작품을 창작한다는 일은 입에 단내가 나도록 고치고 또 고치는 퇴고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된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자기가 구상하고 있는 시조의 미진한 대목을 수정하고, 보완하고, 꿈속에서도 시조와 씨름하는 절차탁마의 노력 없이는 훌륭한 문학작품을 얻어내기란 지극히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퇴고, 다시 퇴고를!’ 이 말을 늘 염두에 두고 작업에 매달려야 할 것이다.  =========================================================================     해남에서 온 편지  ―이지엽(1958∼ ) 아홉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꾹꾹 쑤신다 아가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쪼간 부친다 비민하것냐만 그래도 잘 챙겨묵거라 아이엠 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딸랑 하고 지난 설에도 안 와브럿다 애비가 알믄 배락을 칠 것인디 그 냥반 까무잡잡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릉 따라 나서야 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안 그냐. 쑥 한 바구리 캐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잔 혔다 지랄놈의 농사는 지먼 뭣하냐 그래도 자석들한테 팥이랑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할코 종신서원이라니… 그것은 하느님하고 갤혼하는 것이라는디… 더 살기 팍팍해서 어째야 쓸란가 모르것다 너는 이 에미더러 보고 자파도 꾹 전디라고 했는디 달구똥마냥 니 생각 끈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     종이에 꾹꾹 눌러 쓴 낯익은 글씨에 벌써 딸은 와락 그리움이 치밀 테다. 어머니만의 말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편지에 어머니의 모습과 목소리가 아른거리리. 삭신은 꾹꾹 쑤시고 마음은 질컥거리고, 그래서 사는 게 팍팍하단다. 하나 있는 아들이 ‘지난 설에도 안 와브럿다’고 딸에게 일러바치며, 그리움과 외로움과 서운함을 알뜰히 전하신다. 딸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각별하신 듯하다. 그만큼 살갑고 미더운 딸이 수녀 종신서원을 했으니, 알지 못할 세계로 가버린 듯 가슴이 휑하실 테다. 보고자파라, 내 딸! 편지로 미루어 시원시원한 성격인 어머니시지만 눈 밑 주름 고랑을 타고 ‘달구똥(닭똥)’ 같은 눈물이 흐르셨을 테다. 그 마음 감추고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라신다. 아, 그리운 어머니, 그리운 복사꽃! 곡식을 거둘 때도 자식 생각, 복사꽃이 피어도 자식 생각.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이 생기면 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일래라. 길지 않은 시에 홀로 농촌을 지키는 노인이며 한 집안의 서사가 담겨 있다. 구어체 편지 형식의 맛깔스러운 사투리가 시를 생생히 전한다.
109    詩作에서의 퇴고, 퇴고, 퇴고 끝에 탈고와 등고의 희렬!~~~ 댓글:  조회:2964  추천:0  2017-01-14
  퇴고(推敲), 퇴고(推敲)를  # ‘기다림의 미학’ 터득해야  소설가 이호철 선생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단편소설 ‘닳아지는 살들’을 집필할 때였다. 소설의 도입부(導入部)를 20장 정도 초안하고 나서 더 이상 다음 줄거리를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상상력이 바닥나고 영감(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의 고갈 현상에 부딪쳤다. 며칠 동안 밤을 지새워가며 끙끙거렸지만 ‘줄거리의 가닥’이 잡히지 않았고 이야기의 진척이 전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소설 집필을 중단, 초고 노트를 덮어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1년쯤 지난 후에 문득 ‘닳아지는 살들’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고, 마치 신 들린 것처럼 소설의 가닥이 술술 풀려 나갔다. 책장 서랍 깊숙이 묵혀 두었던 초고 노트를 다시 꺼내 단숨에 소설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나중에 저 유명한 동인문학상(東仁文學賞)을 거머쥐게 된 동인(動因)이었고, 그 작품이 바로 ‘닳아지는 살들’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작가 이호철 선생이 고백한 대로 소설은 물론 시나 시조 등 문학작품의 주제·소재에 대한 충분한 취재 및 방계 자료(傍系 資料) 수집을 게을리 하거나, 쓰고자 하는 ‘그 무엇’ 즉 내용이 청국장처럼 충분히 곰삭는 숙성(熟成)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경우 집필(執筆) 작업은 힘 겨울 수밖에 없고 작품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없는 일이요, 좀체 창작 진척에 가속도가 붙을 수 없는 노릇이다.  판소리 ‘심청전’에 나오는 아니리 한 대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사람의 설움이 어지간 해야 눈물이 나오는 법이지, 기가 차고 멱이 꽉 차면 뛰고 미치고 환장을 하는 법이렸다.’ 뛰고 미치고 환장을 하는 경지. 이것이 바로 쓰고자 하는 시조작품이 충분히 곰삭아서 저절로 ‘꼭지가 떨어지는’ 경지가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뛰고 미치고 환장할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미학’을 터득해야 하는 일이고, ‘인내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쓰고자 하는 대상(시조)에 대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그것이 숙성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도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취사 선택한 주제나 소재에 대해서 인터넷을 뒤지고 방계 자료를 찾고, 때로는 관련 책자를 읽고 때로는 관련 영화나 비디오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며, 꿈 속에서 헛소리를 하며, 입술이 다 부르트는 산고(産苦)를 겪으며, 그것을 숙성시키는 것이다.  ‘기다림의 미학’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좀체 실감을 못할 수도 있다. 글쓰기란 하얀 원고지를 메워야 하는, 피 말리는 작업이라 하여 ‘백색 공포’라고 했을까.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인ㆍ작가는 모니터의 깜박이는 커서가 마치 “빨리 글을 쓰라고 재촉하며 윽박지르는” 강박감마저 느끼는 수가 있다.  개인에 따라, 그 작품의 주제 및 소재에 따라 천차만별 시차(時差)가 있게 마련이지만, 시조 한 편을 구상하여 손을 털기까지 소요되는 기간은 1주일도 걸리고 한 달도 걸린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조 한 편을 하룻밤 사이에 완성, 쾌재를 부르는 수도 있으나 대체로 1주일 혹은 한 달, 심하면 1년도 가고 2년도 간다. 그러면서 그 작품이 완전히 곰삭아서 꼭지가 떨어지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인내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불안ㆍ초조ㆍ조바심 때문에 버둥대는가 하면, 때로는 조그마한 일에도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며 ‘기다림의 미학’을 터득하는 것이다.  인스피레이션이 떠오르고, 떠오른 이미지가 숙성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리는 머릿속에서, 혹은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 무수한 정보(情報)를 입력(入力)하고 수정·가필(加筆)하는 작업을 되풀이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작품을 줄줄 외우게 마련이다.  드디어 마지막 탈고했을 때의 희열이란! 밤을 꼬박 새워도 성취감에 젖어 절로 신명이 나고 창작 복무 때문에 겹친 피로가 한꺼번에 가시는 것이다. ‘뛰고 미치고 환장할 경지’를 이런 때 맛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작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기 카타르시스’인 것이다.   ===================================================================     약초 캐는 사람  ―이동훈(1970∼ ) 언젠가 일 없는 봄이 오면 약초 캐는 산사람을 따라가려 해. 짐승이 다니는 길로만 가는 그를 안간힘으로 따라붙으면 물가 너럭바위 어디쯤 쉬어가겠지. 버섯이나 풀뿌리 얼마큼을 섞어 근기 있는 라면으로 배를 불리면 마른 노래 한 소절이라도 읊게 될 것만 같아. 볕에 그을린 몸이 단단해지고 비탈을 평지처럼 걷게 되면 약초 이름도 더러 외게 되겠지. 외운 만큼 곁을 주는 건 산 아래와 다르지 않을 거고. 장마 지는 날엔 화전민 움막에 나란히 앉아 그리운 것들을 빗물로 내려 보내고 산안개 따라 도리바리 울음이라도 들릴라치면 경건한 묵상에 빠지기도 하겠지. 이따금 장터에 내려서서 도매로 물건을 넘길 때 축농증 앓는 둘째를 위해 효험 있다는 약초를 따로 챙길 것이고 어디론가 송금이 끝난 그도 술 한 잔 받아줄 것이기에 한나절, 구름처럼 둥둥 떠 있게 될 거야. 언젠가 일 놓는 봄이 오면 그 누군가를 위해 약초 캐는 사람이고 싶어. 이 시가 실린 이동훈 시집 ‘엉덩이에 대한 명상’의 시편에서는 여린 마음과 정 깊고 선한 기운이 담뿍 배어난다. 문학평론가 이성혁은 해설을 ‘어떤 시는 시를 쓴 사람의 인간됨을 느끼게 해준다’라고 시작한다. ‘이 시인이 참 성실하고 진실한 사람일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는 것이다. 사람의 느낌이라는 게 참 비슷하구나!  아직 일할 나이로 직장인인 화자가 봄날에 펼쳐보는 낭만적인 꿈이다. 일장춘몽이 아니라 건강하고 싱그러운 장래의 꿈. ‘언젠가 일 없는 봄이 오면’ ‘언젠가 일 놓는 봄이 오면’, 즉 은퇴한 뒤에는 이렇게 살아보리라. ‘장마 지는 날엔/화전민 움막에 나란히 앉아/그리운 것들을 빗물로 내려 보내고/산안개 따라 도리바리 울음이라도 들릴라치면/경건한 묵상에 빠지기도 하겠지.’ 도리바리는 호랑이를 이르는 심마니(산삼 캐는 사람) 은어라고 한다. 호랑이만 울까, 고라니도 울고 산새도 울고 뱀도 울겠지.  약초 캐는 산사람의 건강하고 떳떳하고 단순한 삶이 그 험함과 고됨과 외로움까지 살갑게,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독자도 한번쯤 따라다니고 싶다. 노년을 ‘그 누군가를 위해 약초 캐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니, 화자의 각박하지 않은 현재 삶이 짐작된다. 약초 캐는 산사람을 따라다닐 근력을 착실히 키우시길.  
퇴고(推敲), 퇴고(推敲)를    < 전문 생략>  풋풋한 기력으로 살아 튀는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눈 돌하루방 눈빛 저리 삼삼하고  꽃 멀미 질퍽한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  웅웅웅 신음 같은, 한숨 같은 노랫가락 이어도 이어도 사나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가고.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다금바리 오분재기  상한 그물 손질하며  급한 물길 물질하며  캄캄한 침묵의 수렁,  산호초 덤불 숲을 넘어.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네.  천리 남쪽 바당밖에 꿈처럼 생시처럼 허옇게 솟은 피안의 섬, 제주 어부 입에서 입으로 굴려 내려온 오랜 세월 전설의 섬,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이 눈에 밟히는 수수께끼 섬, 고된 이승의 생이 끝난 후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리는 구원의 섬, 한번 보면 이내 거기 가서 돌아 오지 않는, 영영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는 동경의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밀물 들면 수면 아래 뉘엿이 가라앉고  썰물 때면 건듯 솟아 푸른 허우대 드러내는  방어빛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그해 겨울  모슬포 바위 벼랑 울타리 없는 서역 천축 머나 먼 길 아기작 걸음 비비닥질 수라의 바당 헤쳐 갈 때 꿈결에 떠오른 이어도, 수평선 훌쩍 건너 우화등선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산등성이를 하얗게 하얗게 물들였네.  *이어도 사나 = 제주 민요의 한 구절.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말.  < 6>  < 전문 생략>  등지느러미 나풀대는, 기력 풋풋한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눈 돌하루방 눈빛 저리 삼삼하고  꽃멀미 질퍽한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  웅웅웅 신음 같은, 한숨 같은 노랫가락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가고.  다금바리 오분재기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상한 그물 손질하며  급한 물길 물질하며  산호초 꽃덤불 넘어,  캄캄한 침묵 수렁을 넘어.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네.  천리 남쪽 바당밖에 꿈처럼 생시처럼 허옇게 솟은 피안의 섬, 제주 어부 입에서 입으로 굴려온 오랜 세월 전설의 섬,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이 눈에 밟히는 수수께끼 섬, 고된 이승 생이 끝난 후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리는 구원의 섬, 한번 보면 이내 거기 가서 돌아 오지 않는, 영영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는 동경의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밀물 들면 수면 아래 뉘엿이 가라앉고  썰물 때면 건듯 솟아 푸른 허우대 드러내는  방어빛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그해 겨울  모슬포 바위 벼랑 울타리 없는 서역 천축 머나 먼 길 아기작 걸음 비비닥질 수라의 바당 헤쳐 갈 때 물이랑 뒤척이며 꿈결에 떠오른 이어도 이어도, 수평선 훌쩍 건너 우화등선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산등성이를 하얗게 하얗게 물들였네.  *이어도 사나 = 제주 민요의 한 구절.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말.  < 7>  - 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 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 섬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다시 섬을 떠나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  - 이청준 소설 ‘이어도'에서  지느러미 나풀거리는, 기력 풋풋한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눈 돌하루방 눈빛 저리 삼삼하고  꽃멀미 질퍽한 그곳,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  웅웅웅 신음 같은, 한숨 같은 노랫가락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가고.  다금바리 오분재기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상한 그물 손질하며  급한 물길 물질하며  산호초 꽃덤불 넘어,  캄캄한 침묵 수렁을 넘어.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네.  천리 남쪽 바당밖에 꿈처럼 생시처럼 허옇게 솟은 피안의 섬, 제주 어부 노래로 노래로 굴려온 세월 전설의 섬,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이 눈에 밟히는 수수께끼 섬, 고된 이승 접고 나면 저승 복락 누리는 섬, 한번 보면 이내 가서 오지 않는, 영영 다시 오지 않는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밀물 들면 수면 아래 뉘엿이 가라앉고  썰물 때면 건듯 솟아 푸른 허우대 드러내는  방어빛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그해 겨울  모슬포 바위 벼랑 울타리 없는 서역 천축 머나 먼 길 아기작 걸음 비비닥질 수라의 바 당 헤쳐 갈 때 물이랑 뒤척이며 꿈결에 떠오른 이어도 이어도, 수평선 훌쩍 건너 우화등선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굽은 산등성이 하얗게 물들였네.  *이어도 사나 = 제주 민요의 한 구절.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말.  - 윤금초의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를 ‘문학사상’에 발표할 때 이런 시작(詩作) 노트를 쓴 적이 있다.  '나는, 오늘의 시조문학은 ‘윤회’만 있지 ‘변화’는 없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외중내졸(外重內拙). 밖을 중시하면 속이 쪼잔해진다. 형식에 치중하면 내용이 치졸해진다는 말이다.  사설시조를 기피하는 몇몇 인사의 사설시조 부정론이 거센 줄 알고 있다. 내가 외면하니까 너도 하면 안 된다? 이만저만한 논리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시조 형태 가운데 사설시조 엇시조가 엄존해 왔음에도 굳이 평시조만을 고집하는 것은 사설시조 부정론자의 아킬레스건을 호도하기 위한 비겁한 술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표현의 다양성을 짓누르는 것은 가치 중립의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 없다. 예술의 가장 큰 적인 도식성을 멋지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윤회'가 아닌 ’변화'를 꿈꾸는 일이다. ‘이어도 사나…'는 이른바 옴니버스시조다. 시조의 각종 형식미학을 두루 아우르면서 서사구조를 갖추는 등 ’윤회'가 아닌 ‘변화'를 모색한 것이다.'  사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는 보기 드물게 형식실험을 모색한 작품이다. 하나의 소재 및 주제를 가지고 평시조+양장시조(2장시조)+엇시조+평시조+사설시조+평시조+사설시조 등 일곱 수로 마무리한 혼작(混作) 연형시조(連形時調)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의 과 , 와 , 과 … 등 글의 변천 과정(퇴고 과정)을 면밀하게 분석해 보라. 과 사이에는 엄청난 변화와 수정·가필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도 사나…’의 일곱 번에 걸친 변천 과정을 순서대로 열거했지만, 여기에 나타나 있지 않은 수정작업과 퇴고작업이 무수히 뒤따랐다는 점을 밝혀 두고 싶다. 대장간에서 다루는 쇠붙이만 담금질을 거듭하고 연찬(硏鑽)을 거듭하면 시우쇠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학도 마찮가지다. 얼마만큼 끈기를 가지고 연찬작업을 거듭했느냐에 따라 그 작품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박목월(朴木月) 선생은 일단 탈고한 시 작품을 원고지에 정서(淨書)한 다음, 한 자 한 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그 시어(詩語)의 생사 존망(生死 存亡) 문제를 따졌다는 것이다. 이 시어가 여기에 꼭 필요한 것인지, 이 조사(助詞)가 여기에 꼭 있어야 하는지 일일이 따졌고, 필요 없는 군더더기나 조사(토씨)는 가차없이, 그리고 잔인하게 솎아내고 잘라냈다는 것이다.   =============================================================       고구마, 고구마들  ―이경림(1947∼) 자, 이 고구마를 먹어치우자 불그죽죽한 껍질을 벗기고 노오란 속살을 먹어치우자 속살같이 들큰한 시간을 먹어치우고 허벅한 뒷맛도 먹어치우자 뽀오얀 접시 위에 놓인, 아니 넓적한 탁자 위에 놓인, 아니 더러운 마룻장 위에 놓인, 아니 컴컴한 구들장 위에 놓인, 아니 수천 겹 지층 위에 놓인, 아니 수끌거리는 용암 위에 놓인 이, 뜨거운 고구마를 먹어치우려고 나는 저 뜨거운 해에서 생겨나 번쩍이는 수천만의 별 사이를 흘러내려 묵 같은 허공을 수세기 떠돌다가 이 비스듬한 지붕 밑 넓적한 탁자 옆 볼기짝만한 의자에 앉아 있는 것     보라,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한 섬광이 지금 고구마만한 불덩이를 먹어치우고 있다 보라, 이 불덩이가 식도를 태우며 저수만리용암의길로쏜살같이 달려가는장관을, 이 장엄한 불의 식사를!     먹어치우다…. 화자는 고구마를 좋아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고구마가 더 이상 방치하면 못 먹게 될 상태라서 ‘치우자’고 얼른 솥에 올려놨던 걸까. 둘째 연으로 미루건대 현재 화자는 고구마가 썩 당기지 않나 보다. ‘불그죽죽한 껍질’, ‘들큰한’ 속살, ‘허벅한 뒷맛’이란다. 화자와 고구마, 그 뜬 사이가 뜨거운 고구마를 먹는 시간을 ‘장엄한 불의 식사’로 만든다. 고구마가 맛있었다면 딴청을 부리지 않았을 테다. 딴청을 부리지 않았으면 ‘저 뜨거운 해에서 생겨나/번쩍이는 수천만의 별 사이를 흘러내려/묵 같은 허공을 수세기 떠돌다가’ 몸을 얻어 ‘볼기짝만한 의자에 앉아 있는’ 제 생명의 신비를 새삼 깨닫지 못했을 테다. 화자는 혼자서 고구마 하나를 먹을 때도 갓 쪄낸 것을 ‘뽀오얀’ 접시에 담아 탁자 위에 놓는구나. 단정하게 사는 사람이다. 방바닥에 쪼그려 앉아 와사비 발린 완두콩을 깡통째 끼고 오독오독 깨물어 먹으며 추리소설을 읽다가, 전부 들고 침대로 자리를 옮기곤 하는 나와는 대조적인 삶의 자세다. 눈을 뜨면 깡통에서 쏟아진 완두콩이 등짝 아래 즐비하고 목덜미에도 붙어 있지. 동화 속 어떤 공주는 스무 장 매트리스 아래의 완두콩 한 알 때문에 잠 못 이뤘다는데, 둔해도 너무 둔하고 추해도 너무 추하다. 이경림은 자다가도 시가 나오고 먹다가도 시가 나오는 시인!    
주인 장례식에서 슬피 우는 말, 감동! [ 2017년 01월 09일 03시 09분 ]     주인의 장례식장에서 관에 얼굴을 기댄 채 슬퍼하고 있는 말 '세레노'의 모습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브라질 파라이바(巴西帕拉伊巴)에 살고있던 세레노의 주인 와그너 피게이레두 드 리마(34)는 지난 1일 오토바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와그너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슬픔을 나눴다.   그런데 이중 눈에 띄는 조문객이 있었다. 바로 그가 키우던 말 '세레노'였다. 세레노는 주인의 관을 보고 주변을 맴돌며 냄새를 맡았다. 이내 주인의 죽음을 알아차린 듯 슬픈 표정을 지으며 관에 머리를 기댔다. 가족과 친구들은 "말의 행동을 믿을 수 없었다"며 "주인과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안 듯 울었다"고 설명했다. / 외신 퇴고(推敲), 퇴고(推敲)를  다음은 옴니버스시조를 시도한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를 보자.  < 1>  - 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 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가 섬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다시 섬을 떠나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  - 이청준 소설 ‘이어도'에서  풋풋한 활력으로 살아 튀는, 살아 튀는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에 노역의 햇살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 눈 돌하루방이 부릅뜬 눈 굴리고 굴리는  꽃멀미 부르는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하늘과 바당 모래 기슭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살 섞는 곳  빛은 골 깊은 어둠 만들고  어둠은 다시 빛을 드러낸다  캄캄한 침묵의 수렁,  수렁같은 침묵 속에.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서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서  한숨 짓는 것도 같고  웅웅웅 울음 우는 것도 같은  이어도 노랫가락 소리,  그렇게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오고.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고  천리 남쪽 바당밖에 파도 뚫고 꿈처럼 꿈처럼 하얗게 솟아 있는 피안의 섬,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내려온 전설의 섬, 본 사람 아무도 없지만 상상의 눈에는 언제나 선 명한 자태 드러내는 수수께끼의 섬, 이승의 고된 삶이 끝나고 나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 리게 되는 구원의 섬, 그 섬을 한 번 본 사람은 이내 그 섬으로 가서 영영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아, 영영 돌아 오지 않아, 그 모습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이는 아직 아무도 없 는 섬, 그런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썰물 때만 잠시 잠깐 모습 드러냈다가  밀물 때면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 앉는,  청동색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쌀쌀한 마파람이 마른 낙엽 몰고 가는 어느 겨울날  눈앞에 떠오른 이어도, 수평선 훌쩍 넘어가버리고  억새풀 산등성이만 하얗게 하얗게 물들이고….  < 2>  < 리드(전문) 생략>  풋풋한 기력으로 살아 튀는, 살아 튀는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햇살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눈 돌하루방이 부릅뜬 눈 굴리고 굴리는  꽃 멀미 부르는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하늘과 바당 모래 기슭  나직한 목소리로 살 섞는 곳  빛은 골 깊은 어둠 만들고  어둠은 다시 빛을 드러낸다  캄캄한 침묵의 수렁,  수렁같은 침묵 속에.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서,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서  신음 같은, 한숨 같은, 웅웅웅 우는 것도 같은 이어도 노랫가락 소리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오고.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고  천리 남쪽 바당밖에 파도 뚫고 꿈처럼 꿈처럼 하얗게 솟아 있는 피안의 섬,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전설의 섬, 본 사람 아무도 없지만 상상의 눈엔 언제나 선명한 자태 드러내는 수수께끼 섬, 이승의 고된 삶이 끝난 후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리게 되는 구원의 섬, 그 섬을 한 번 본 사람은 이내 그 섬으로 가서 영영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아, 영영 돌아 오지 않아, 그 모습 분명하게 증언할 이는 아직 아무도 없는 섬, 그런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썰물 때면 건듯 건듯 등 모습 드러냈다가  밀물 때면 수면 아래로 뉘엿이 가라앉는,  청동색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어느 겨울날  눈앞에 떠오른 이어도, 수평선 훌쩍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산등성이를 하얗게 하얗게 물들였네.  < 3>  < 전문 생략>  풋풋한 기력으로 살아 튀는, 살아 튀는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돌하루방 퉁방울눈 부릅뜬 눈빛 저리 삼삼하고  꽃 멀미 질퍽한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하늘과 바당 모래 기슭  나직한 목소리 살 섞는 곳  빛은 골 깊은 어둠 만들고  어둠은 다시 빛을 드러낸다  캄캄한 침묵의 수렁,  수렁같은 침묵 속에.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서,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서  신음 같은, 한숨 같은, 웅웅웅 우짖는 것 같은, 이어도 이어도 노랫가락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오고.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고  천리 남쪽 바당밖에 꿈처럼 꿈처럼 하얗게 솟아 있는 피안의 섬,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오랜 세월 전설의 섬,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이 상상의 눈엔 훤하게 훤하게 자태 드러내는 수수께끼 섬, 고된 이승의 생이 끝난 후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리는 섬, 구원의 섬이어라. 한번 보면 이내 거기 가서 영영 다시 돌아 오지 않아, 영영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아, 그 모습 또렷이 증언할 이 아무도 없는 섬,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밀물 들면 수면 아래 뉘엿이 가라앉고  썰물 때면 건듯 솟아 등 모습 드러내는,  청동색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어느 겨울  꿈길처럼 떠오른 섬, 훌쩍 수평선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산등성이를 하얗게 하얗게 물들였네.  *이어도 사나 = 제주 민요의 한 구절.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말.  < 4>  < 전문 생략>  풋풋한 기력으로 살아 튀는, 살아 튀는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한 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눈 돌하루방 눈빛 저리 삼삼하고  꽃 멀미 질퍽한 그곳, 그 가멸진 유채꽃 한나절.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  신음 같은, 한숨 같은, 웅웅웅 우짖는 것 같은, 이어도 이어도 노랫가락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가고.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다금바리 오분재기  상한 그물 손질하며  물길 급한 물질 하며  캄캄한 침묵의 수렁,  수렁같은 침묵을 넘어.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네.  천리 남쪽 바당밖에 꿈처럼 생시처럼 허옇게 솟아 있는 피안의 섬,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오랜 세월 전설의 섬,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이 상상의 눈엔 언제나 언제나 훤하게 자태 드러내는 수수께끼 섬, 고된 이승의 생이 끝난 후면 거기 가서 저승 복락 누리는 섬, 구원의 섬이어라. 한번 보면 이내 거기 가서 돌아 오지 않아, 영영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오지 않아, 그 모습 또렷이 증언할 이 아무도 없는 섬, 동경의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밀물 들면 수면 아래 뉘엿이 가라앉고  썰물 때면 건듯 솟아 등 모습 드러내는  청동색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어느 겨울  꿈길처럼 떠오른 섬, 훌쩍 수평선 넘어가버리고  섬억새 산등성이를 하얗게 하얗게 물들였네.  *이어도 사나 = 제주 민요의 한 구절.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말.   =====================================================================     삼솔 뜨기  ―정영주(1952∼ ) 1 가장 깊은 그늘을 꿰매는 거야 깜깜한 무늬와 질감을 찔러 실로 음각을 뜨는 거야 흰 머리카락을 뽑아 바늘에 꿰어 깊은 우물 속, 두레박이 새지 않게 물을 깁는 거야 바느질이 목숨이었던 어머니, 실 떨어지면 명주 올처럼 길고 흰 머리카락을 뽑으셨지 어룽이다 꺼져가는 그늘과 찢어진 가족의 무늬와 식탁을 바늘로 이어 가셨지 2 어머니가 가셨던 길처럼 한 올 한 올 바늘로 쪽빛 모시를 꿰맬 때마다 멀리 떠난, 더는 깁을 것이 없는 어머니를 떠올리지 평생 바늘과 옷감을 놓지 않으신 어머니 그것으로 가족을 기워 둥근 띠를 엮으셨던 어머니 아버지 없는 둥근 밥상에 오글오글 새끼들만 모여 밥상까지 통째로 먹는 허기진 아이들 명주에 들어간 바늘이 실을 끌고 다닐 때 천이 제 몸들을 꼬옥 껴안지 못하면 바늘은 성글게도 허공과 손가락만 꿰매 놓곤 했지 둥근 밥상 앞에서도 새끼들 입에 당신 몫까지 다 내어 주고 등 돌려 바느질만 하시던 어머니, 그 시린 등을 이제사 껴안고 난 쪽빛 모시 안으로 들어가고 있어 장성한 아들도 없는데 가장인 남자어른이 바깥으로만 떠돌거나 재산 없이 세상을 뜨면, 일가족의 먹고살 길이 막막하던 시절이 있었다. 여자는 집안일이나 해야지 경제활동을 하는 건 흉이 되던 시절, 그래서 딸에게 돈벌이를 할 만한 교육을 애초에 시키지 않던 시절. 시골이라면 농사라도 지을 테지만, 도시에서 여자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처지에 놓이면 속수무책이기 쉽다. 화자의 어머니는 다행히도 바느질 솜씨가 있으셨나 보다. 여자에게 허락된 얌전하고 깨끗한 일감, 바느질. 하지만 ‘밥상까지 통째로 먹는 허기진 아이들’을 먹이기엔 그 삯이 참으로 소소했을 테다. 그래서 어머니는 때로 끼니를 거르고 바느질만 하셨단다. 그렇게 ‘찢어진 가족의 무늬와 식탁을 바늘로 이어가신 어머니’를 화자는 바느질을 할 때마다 떠올리는데, 화자 역시 ‘어머니가 가셨던 길처럼/한 올 한 올 바늘로 쪽빛 모시 꿰매는’ 일을 하니 어머니는 늘 화자의 기억 속에 살아 계실 테다.  ‘가장 깊은 그늘을 꿰매는 거야’는 화자의 바느질 철학일 테다. 어머니에게서 화자에게 전해진 것이 바느질 솜씨뿐 아니라 ‘깜깜한 무늬와 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삶인 듯도 해 울컥해진다. 하지만 화자는 어머니의 ‘시린 등을 껴안고 쪽빛 모시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시를 맺는다. 모녀의 삶이 한 쌍 쪽빛 나비로 우화(羽化)하는 듯, 아름다이 시린 바느질이다.
[ 2017년 01월 11일 09시 15분 ]     이는 1월 9일 촬영한 하남성(河南省) 허창시(许昌市)지역의 상공에 나타난 수평기류안개 경관. 당일, 하남성(河南省) 허창시(许昌市)지역의 상공에 수평기류안개 경관이 나타나 안개속에 숨어진 건축물들이 보일듯 말듯 마치 선경과 같았다.   원문 출처:신통도(新通圖) 퇴고(推敲), 퇴고(推敲)를  사설시조 ‘할미새야, 할미새야'는 당초 ’가을비 한나절' 혹은 ‘햇볕이 계실까요'라는 제목으로 초고(草稿)를 잡은 것이다.  1997년 우리 사회에 몰아닥친 IMF라는 대형 경제변란(經濟變亂). 경축 국치(庚丑 國恥)라고 불리는 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외환위기사태에 몰린 우리 사회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휘청거리기 시작했고, 조선일보에 몸 담고 있었던 필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1998년 2월 우대퇴직이라는 이름 아래 20년 동안 청춘을 다 불태웠던 그 직장을 뒤로 한 채 마치 한 마리 노숙(露宿)하는 할미새가 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는 바로 평범한 소시민 윤금초로 읽어도 될 것이고, 서울역 지하도나 광화문 지하도, 서소문 공원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이름 모를 홈 리스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초고 제목을 를 상징하는 ‘가을비 한나절'이나 ’햇볕이 계실까요'라는 생각에서 사설시조 한 수(首)를 구상한 것이다.  ②에서는 초고 ①보다는 시적(詩的) 화자(話者)를 좀더 객관화시키고 어떻게 하면 보편적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하게 되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번민 끝에 ①의 초고에 한 수를 더 얹기로 한 것이다. 역시 시적 자아(自我)로 보아도 좋고, 고향을 벗어나 직장생활을 하는 어느 소시민을 떠올려도 될 것이다.  ③의 제목 ‘햇볕이 계실까요'는 이 작품을 구상할 당시의 시대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햇볕정책'라는 화두(話頭)가 그 무렵 정치적 수사(修辭)의 차원을 뛰어 넘어 우리 사회의 보편적 이데아로 자리잡아가고 성숙되어가는 분위기였다. '햇볕'은 모든 것을 따뜻하게 감싸안는, 그리하여 비에 젖어 등걸잠 자는 할미새나 까지도 아우르고 껴안고 오돌오돌 떨고 있는 우리의 영혼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아준다는 의미로 ’햇볕이 계실까요'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③에서는 이미지를 명료하게 부각시키는 데도 신경을 썼다. 가령 이라는 대목을 통째로 드러냈다. 이 대목을 통째로 드러내도 대세에 전혀 지장이 없다고 판단되었다.  시란 언어를 사용하되 언어를 초월하는 '그 무엇'이다. 시나 시조 짓기 작업은 군살 빼기 작업과 같은 것이다. 군더더기를 가차없이 걷어내는 것, 필요없는 너스레나 수다스럽게 지껄여 이미지를 산만하게 하는 요설(饒舌)을 삼가하는 것이다. 생략과 압축, 상징과 응축의 미학을 터득하는 것이 시조 짓기 작업의 요체(要諦)가 아니던가. 특히 사설시조에서는 필요 없는 수다나 너스레 때문에 마이너스 요인이 되는 것은 물론 '본전'을 못 찾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③에서는 둘째 수 종장 를→ 이라고 수정했다. ‘물안개'가 ’정동진'보다는 더 구체적 적시라는 점과 ‘정동진' 하면 해돋이를 연상할 수 있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으나, 정동진의 해돋이 분위기는 이제 이미 낡고 너무 흔해 빠진 정서가 되어버렸고 포괄성을 띠지 못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라는 이미지를 끌어옴으로써 희망의 메시지, 무엇인가 다양한 뉘앙스가 풍기는 결구(結句)를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④에 이르러 제목을 ‘할미새야, 할미새야'로 바꾸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할미새…'는 작자(作者)의 자설적(自說的) 진술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 시조다. 누구나 창작행위를 하면서 느끼는 바겠지만, 시나 시조는 작자의 체험 요소가 많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사사로운 체험을 가공(加工)하고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보편적 체험으로 확대촵재편했을 때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20년 직장을 하루 아침에 그만 두고 거리로 밀려난 심정을 한번 상상해 보라! 마치 한 마리 노숙하는 할미새가 된 느낌, 그 억장 무너지는 충격적 사건은 와 다를 바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목 '할미새야, 할미새야'는 작자가 체험한 IMF 환란(換亂)의 충격적 사건을 간접 화법(間接 話法)으로 토로한 자기 고백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처럼 사설시조 두 수로 이루어진 ‘할미새야, 할미새야'는 네 차례의 개작(改作) 과정, 달리 말하면 네번의 퇴고 작업을 거쳐 비로소 마무리한 작품이다. ’할미새…'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시간적 개작 순서를 열거하면 ①→②→③→④로 나뉜다. 여러 차례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써서는 또 개칠을 하는 등 퇴고와 퇴고의 되풀이과정 끝에 탄생한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기록상 네 차례의 퇴고 과정을 거쳐 ‘하나의 완성된 시조'로 태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착상(발상)→플롯 설정→얼개짜기→시어의 취사선택→이미지의 전개→서사(敍事) 구조 얽기→군더더기 제거 작업→시적 화자의 진술 등 작품 창작 배경을 설명하자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퇴고 과정'을 거친 것이다.  ③  흙으로, 흙의 무게로, 또아리 틀고 앉은 시간  고향 풀숲에서 반짝이던 결 고운 윤이슬이여, 어쩌자고 머나 먼 예까지 와 대끼고 부대끼는가. 밤새 벼린 칼끝보다 섬뜩한 그 억새의 세월,  갈바람 굴피집 울리는 죽비 소리만 남고….  등이 허전하여 등 뒤에 야트막한 산을 두른다.  빚더미 家長처럼 앞 산은 망연자실 누워 있고, 우부룩이 자란 시름 봄 삭정이 되었는가. 새야 새야 할미새야, 둥지 떠난 할미새야,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야. 앞내 뒷내 둘러 봐도 끕끕한 어둠 밀려 오고 밀려 간다. 물을 불러 제 몸 기슭 후비는 강물, 귀동냥 다리품 팔아 남루 한 짐 지고 오는 저 강물아. 핏줄같이 푸르게 푸르게 살아나는 들길 길섶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팝콘 같은 밥풀꽃 꽃등 하나, 눈빛 형형한 꽃등 하나 달아 놓고  물안개 거두어내는 애벌구이 해도 덩실 띄워 놓고….  - ‘햇볕이 계실까요'  ②  흙으로, 흙의 무게로, 똬리 틀고 앉은 시간  고향 풀숲에서 반짝이던 결 고운 윤이슬이여. 어쩌자고 머나 먼 예까지 와 대끼고 부대끼는가. 밤새 벼린 칼끝보다 더 섬뜩한 그 억새의 세월,  갈바람 굴피집 울리는 죽비 소리만 남고….  등이 허전하여 등 뒤에 야트막한 산을 두른다.  앞 산은 빚더미 家長처럼 망연자실 누워 있고, 우부룩이 자란 시름 봄 삭정이 되었는가. 새야 새야 할미새야, 둥지 떠난 할미새야.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야. 앞내 뒷내 다 둘러 봐도 끕끕한 어둠 밀려 오고 밀려 간다. 물을 불러 모아 제 몸 불려가는 강물, 다리품 팔고 귀동냥하고 한 짐 남루를 지고 오는 저 강물아. 소름 돋도록 차가운 우리네 헛헛한 이 가을비 한나절, 강물빛 한 생각 궁굴리고 또 궁굴리면 허리 가는 산등성이 저 바람결에 가 머물까. 시름도 때론 힘이 되는 모눈종이 한 세상을, 핏줄같이 푸르게 푸르게 살아나는 들길 길섶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팝콘 같은 밥풀꽃 꽃등 하나 달아 놓고, 눈빛 형형한 꽃등 하나 달아 놓고  정동진 불 타는 바다, 애벌구이 해도 덩실 띄워 놓고….  - ‘햇볕이 계실까요' 혹은 ’가을비 한나절'  ①  등이 허전하여 등 뒤에 야트막한 산을 두른다.  앞 산은 빚더미 家長처럼 망연자실 누워 있고, 우부룩이 자란 시름 봄 삭정이 되었는가. 새야 새야 할미새야, 둥지 떠난 할미새야.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야. 앞내 뒷내 다 둘러봐도 곤곤한 어둠 밀려 오고 밀려 간다. 물을 불러 모아 제 몸 불려가는 강물, 다리품 팔고 귀동냥하고 한 짐 남루를 지고 오는 저 강물아. 소름 돋도록 차가운 우리네 헛헛한 이 가을비 한나절, 강물빛 한 생각 궁굴리고 또 궁굴리면 허리 가는 산등성이 바람결에 가 머물까. 시름도 때론 힘이 되는 모눈종이 한 세상, 핏줄같이 푸르게 푸르게 살아나는 들길 길섶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팝콘 같은 밥풀꽃 꽃등 하나, 눈빛 형형한 꽃등 하나 달아 놓고,  정동진 불 타는 바다, 애벌구이 해도 덩실 띄워 놓고….  - ‘가을비 한나절' 혹은 ‘햇볕이 계실까요’  # 담금질 거듭해야 시우쇠가 된다 ========================================================================     한마디의 말  ―고트프리트 벤(1886∼1956) 한마디의 말, 한 편의 글―. 부호로부터 올라오는 삶의 인식, 의미의 돌출, 태양은 뜨고, 대기는 침묵하네. 모든 것들이 그 한마디에 몰리듯 굴러가네. 한마디의 말―. 한 개의 빛남, 한 번의 비상, 한 개의 불, 불꽃 한 번 튕기고, 흐르는 한 번의 별빛―. 다시 어둠이 오네, 이 세상과 내 둘레의 텅 빈 공간에 무섭게 내리네. 언어에 대한 엄격하고 명철한 정리! 허튼 말 한마디 없이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한 시구로 제가 정리한 바 그대로를 보여주는 시다. ‘삶의 인식, 의미의 돌출!’ 말 한마디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경건하게 되새기면서, 나도 이렇게 ‘태양은 뜨고, 대기는 침묵하고/모든 것들이 그 한마디에 몰리듯 굴러가는’, 그런 말을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해진다. 나는 시인이다. 시인은 언어의 기술자도 아니고 언어의 ‘파티맨’도 아니다. 언어의 경작자이며 파수꾼이며, 연금술사. ‘한 개의 빛남, 한 번의 비상, 한 개의 불’ 같은 언어를 향해 정진해야지!     대담집 ‘언어 감각 기르기’에서 요네하라 마리는 말한다. ‘아직 말이 되지 않은 상태가 있다.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이나 사고나 감정 같은 것이 희미하게나마 형태가 갖추어져, 간신히 그걸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나, 문장 형태, 혹은 표현, 스타일 같은 게 결정돼 소리로 나오는 게 말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말이 있다. 말이 탄생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말. 그런 말은 상대방 마음을 파고들 수 없다.’ 우선 평소에도 생각 없이 말하지 말자. 말을 귀하게 쓰자. 물 쓰듯 쓰지 말고, 돈 쓰듯 쓰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속담도 있고. 언어가 없다면 우리 인간이 무엇으로 서로의 존재를, 사물들을, 세상을, 삶을 깨달아 알겠는가? 한마디, 한마디, 소중한 말!
강서 어민 35kg짜리 초대형 물고기 잡아! 길이만 1m [ 2017년 01월 10일 02시 28분 ]     [인민망 한국어판] 1월 8일 오후 강서(江西)성 남창(南昌)시 향산(象山)진에 사는 한 어민이 35kg에 달하는 초대형 밤부사 옐로우치크(Elopichthys bambusa, 노란뺨잉어)를 잡아 화제. 물고기의 길이는 1m가 넘는 등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밤부사 옐로우치크는 ‘물속의 호랑이’라고도 불리며 주로 강이나 호수에서 서식. 또한 다른 종류의 물고기를 공격하거나 잡아먹는 등 아주 포악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 해당 물고기를 잡은 어민은 “밤부사 옐로우치크는 최근 그 개체수가 많이 줄어 희귀종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 /(번역: 은진호)   원문 출처: 중국신문망(中國新聞網) 퇴고(推敲), 퇴고(推敲)를  # 퇴고의 실제  ④  흙으로, 흙의 무게로 또아리 틀고 앉은 시간  고향 풀숲에서 반짝이던 결 고운 윤이슬이여. 어쩌자고 머나 먼 예까지 와 대끼고 부대끼는가. 밤새 벼린 칼끝보다 섬뜩한 그 억새의 세월,  갈바람 굴핏집 울리는 죽비 소리 남기고.  등이 허전하여 등뒤에 야트막한 산을 두른다.  빚더미 家長처럼 망연자실 누워 있는 앞산, 우부룩이 자란 시름 봄 삭정이 되었는가. 둥지 떠난 할미새야, 비 젖은 날개 접고 등걸잠 자는 할미새야. 앞내 뒷내 둘러 봐도 끕끕한 어둠 밀려오고 밀려간다. 물을 불러 제 몸 기슭 불리는 강물, 귀동냥 다리품 팔아 남루 한 짐 지고 오는 저 강물아. 파릇파릇 핏줄 돋는 길섶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밥풀꽃 꽃등 하나, 눈빛 형형한 꽃등 하나 달아 놓고  물안개 거두어가는 애벌구이 해도 덩실 띄워놓고….  - 윤금초의 ‘할미새야, 할미새야'  ‘할미새야, 할미새야'는 저자(著者)가 1999년 문학사상사 주관 제20회 ’가람시조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가람시조문학상 선고위원회(최승범 박철희 권영민)는 이 작품을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제20회 가람시조문학상 수상작으로 윤금초씨의 외 2편을 선정한다. 윤금초씨는 시조의 격조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시적 실험을 지속해온 시조시인으로서 특히 사설시조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하는 다양한 기법적인 추구 작업에 몰두해 오고 있다. 문학사상사 가람시조문학상 선고위원회에서는 윤금초씨가 도달하고 있는 사설시조의 새로운 미학이 한국 시조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여, 제20회 가람시조문학상 본상을 윤금초씨에게 수여하며 그동안 쌓아 올린 시적 성과에 찬사를 드린다'고.  심사를 맡은 최승범 교수는 심사평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 말 그대로, 난상토의 끝에 윤금초씨를 수상자로, 수상작은 등 3편을 올리기로 하였다. 윤금초 시인은 시력 30여년에 이른다. 그동안 꾸준한 작품 창작으로 시조시의 문학성을 드높였을 뿐 아니라 시조시의 저변 확대에도 많은 기여를 하여 왔다. 지난 1년에도 의욕적인 작품 발표와 더불어 젊은 시인들에게 시조시의 길을 넓힌 사화집을 엮어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번 수상작으로 올린 3편에서 시조시를 위해 그동안 기울여 온 윤금초 시인의 실험의식과 노력의 결정미(結晶美)를 볼 수 있다. 사실, 그동안 그는 시조시형의 전통성을 어떻게 이어 가꿀 것인가. 자유시가 추구하고 있는 현대성이나 표현 기교 문제를 시조시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에 많은 고심을 하여 온 시인이다. 윤금초 시인은 사설시조 시형의 연작(聯作)이나 평 엇 사설시조 시형의 연첩(連疊)에서 현대시조의 활로를 찾고 있다. 그러면서도 평 엇 사설시조형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인 율격의 묘미를 그 각각의 시형마다에 잘 살려냈다(시조의 율격을 정형(定型)이 아닌 정형(整形)이라는 가람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윤금초 시인의 시어 선택도 매력적이다. 어느 말엔 옛스러운 느낌이다가도 다시 보면 그 말에 겨레의 마음결이 일고 반작거린 새 정이 돋는다. 그가 취한 제재나 표현 기교 또한 현대 자유시의 어느 기준에 못미치고 퇴색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윤금초 시인을 수상자로 결정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박철희 교수는 이렇게 평하고 있다.  ‘… 윤금초의 시는 다양한 리듬과 대담한 실험성이 특색이다. 가 보여 주듯이 시조적 세련을 거친 그 분방한 가락은 시조를 낯설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오늘을 사는 내면(아픔)을 새로이 경험케 한다. 그만큼 타령과 육자배기, 잡가와 가사 그리고 민요의 장단을 두루 어울리게 하여 울려 주는 가락과 사설 속에 이 땅의 역사와 서민들의 애환이 정의되어 있다. 가 단순히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회한으로 머물지 않고 훼손된 우리의 삶과 도덕적 감수성의 시적 표현으로 나타난 것은 이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는 일찍부터 스스로 노래하는 지휘자요 창(唱)하는 감정의 조율사임을 자임하여 나섰다. 한결같이 시조의 확장과 변화의 실험에 그의 인식은 움직여 왔다. 이나 등은 탈놀이, 사물놀이와 같은 민중연희의 변이요, 변주다. 그러면서도 ‘시조성'의 핵이랄 수 있는 형식은 변함이 없다. 더구나 연작의 구절들이 보여 주듯이 거의 체질적으로 지녔다고 해야 할 입심이 돋보이고 강렬한 메시지를 서정성 속에 녹여내는 능력도 범상이 아니다.'  또한 권영민 교수는 ‘윤금초씨는 시조의 전아한 기품과 격조를 파괴하는 데에서 오는 긴장을 잘 살려낸다'고 전제하고 ’사설시조의 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그의 시적 상상력은 등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고 심사평에서 밝히고 있다. ‘적절한 어구의 반복, 자연스런 리듬 의식의 재현, 시적 심상의 확장과 응축 등은 윤금초씨의 시조에서 구축하고 있는 새로운 시조의 미학이다. 시조라는 정형의 틀을 지키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시적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최종적인 수상작 선정에서 심사위원 모두 윤금초씨의 작품을 제20회 가람시조문학상의 수상작으로 지목하는 데에 동의하였다'고 평가했다. ===================================================================   실없이 가을을 ―나해철(1956∼ ) 밥집 마당까지 내려온 가을을 갑자기 맞닥뜨리고 빌딩으로 돌아와서 일하다가 먼 친구에게 큰 숨 한 번 내쉬듯 전화한다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눈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니 좋다고 불현듯 생각한다 가을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와 있어서 그를 그렇게라도 보내게 한다 화자는 도시 직장인이다. 일터가 빌딩에 있고, 근무 중에 친구에게 전화 걸어 잡담을 나눌 수 있는 정도 지위는 된다. 오늘을 향해 매진하며 성실히 살아왔을 것이다. 시에 ‘아무것도 아닌’이 세 번 나온다. ‘아무것도 아닌’의 반대말은 ‘가치 있는’일 것이다. 예컨대 능력, 매력, 쓸모, 근면, 이익, 부귀, 영화, 명성, 권력 등등의. 뭇사람이 이 말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획득하려 애쓰는 건 다행한 일이다. 그 지향과 노력으로 이 세상이 무사히, 믿음직스럽게 굴러가는 것일 테다.     그런데 쓸쓸하고 가슴이 허전할 때, 우리의 마음은 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기우는 것일까?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와 있’는 가을한테 들어보자. 화자가 친구와 나눈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는 필경 유쾌하거나, 은근하고 다정했을 테다.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침울하고 암담하게 나누고 있을 사람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매우 드물 것이다.  
104    "선생님은 퇴고를 하십니까, 안 하십니까?..." 댓글:  조회:2478  추천:0  2017-01-08
퇴고(推敲), 퇴고(推敲)를  # 퇴고란 무엇인가  시문(詩文)을 창작할 때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치거나, 문장을 갈고 다듬는 일을 퇴고(推敲)라고 한다.  퇴고라고 하는 말은 중국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로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의 ‘밀다(推)'를 ’두드린다(敲)'로 바꿀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대문장가 한유(韓愈)를 만나 그의 조언으로 ‘두드린다'로 고쳤다는 고사에서 추고(推敲)가 아닌, 퇴고(推敲)가 유래했다고 한다.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백거이(白居易·772~846)는 당대를 풍미했던 문장가였다. 통속적인 언어 구사와 풍자에 뛰어났으며 평이하고 유려한 시풍(詩風)은 원진(元稹)과 함께 원백체(元白體)로 유명하다. 그의 자(字)는 백낙천(白樂天)으로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등이 있으며, 시문집에 ‘백씨 문집(白氏 文集)'이 있다.  이 얘기는 백낙천과 얽힌 에피소드의 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하루는 백낙천이 이웃 친지들, 즉 문인묵객(文人墨客)들을 불러모아 시회(詩會)를 열었다. 칠현금(七絃琴)을 뜯어가며 시를 짓거나 시에 대한 토론·감상·연구 등을 위한 이 모임에서 한 제자가 백낙천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화선지에 붓만 대시면 절창(絶唱)인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선생님은 퇴고를 하십니까, 안 하십니까?"  “퇴고는 무슨 놈의 퇴고! 자고로 시란 즉흥적(卽興的)이고 즉물적(卽物的)인 게야. 대상을 있는 그대로 포착해내는 것이지. 모름지기 시란 순간의 포착이 중요한 것이야. 순발력이 없으면 아예 시를 짓거나 흉내내려고 덤비지 말아야지."  술잔이 여러 순배 돌고 흥취가 일 만큼 거나해진 백낙천이 화장실에 간 뒤였다. 백낙천이 깔고 앉은 방석이 유난히 도도록 불거져 있었다. 시회에 참가한 문하생(門下生)이 백낙천이 깔고 앉은 그 방석을 들추자 아뿔싸! 그가 깔고 앉은 방석 밑에는 그날 발표한 백낙천의 시문 초벌 원고(草稿)와 무수히 개칠을 거듭했거나 고쳐 쓴 흔적이 역력한 파지(破紙)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던 것이다.  천하의 백낙천도 남몰래, 그리고 무수하게 퇴고를 했다는 일화 한 토막이다.  ‘오발탄(誤發彈)' ‘학마을 사람들’의 작가 이범선(李範宣·1920~1982) 선생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의 작가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키 높이 만큼의 습작 원고를 써야 한다"고. 그만큼 절차탁마(切嗟琢磨)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칼' ‘들개’ ‘금오벽학도' ‘황금비늘' ‘장수하늘소' 등을 발표한 작가 이외수(李外秀)씨는 유창하고, 아름답고, 적확한 문장으로 유명하다. 장편소설 한 편이면 대략 1200장 내지 1500장의 원고지가 소요되는데, 그는 장편소설 한 편을 막 탈고(脫稿)하고 나면 그 소설의 내용을 토씨(助詞) 하나도 안 틀리고 다 외운다고 한다.  낮에는 주로 자고, 밤에만 작업하는 야행성(夜行性)인 그는 소설의 플롯을 짜고 얼개를 얽은 다음 집필에 들어가면 일반 사람은 엄두도 못낼 고통스런 공정을 되풀이한다고 한다. 소설 집필 첫날 밤 10장을 쓰고 나서 그 다음 날 집필할 때는 앞서 쓴 10장을 다시 베껴 쓰면서 문장을 다듬고 윤문(潤文)을 하면서 새로 10장을 보태고, 세째 날 역시 앞에 쓴 20장의 원고를 베껴 쓰면서 또 문장을 다듬고 새로운 스토리 10장을 보태고, 소설 집필 네째 날은 먼저 쓴 30장의 글을 옮겨 적으면서 또다시 글발을 지우고 고치는 등 퇴고를 되풀이하면서  새로운 스토리 10장 추가하고…. 이런 식으로 1200장 혹은 1500장 분량의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하는 작업 과정에서 문장의 부호 하나, 어휘 하나하나까지 갈고 다듬는 것은 물론 자연스럽게 줄거리 전체까지도 술술 외워진다고 한다. 이처럼 아무나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외롭고 고통스런 글쓰기 작업을 통해 이외수씨는 끝내 ’아름다운 문장'을 성취해내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의 소설문장은 바로 시'라고 평가하는 비평가의 지적은 빈 말이 아님을 입증하는 예가 될 것이다.  이렇듯 문장은, 특히 시문학은, 백낙천이 말한 ‘즉물적인 것'이거나 ’순간의 포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즉물적 발상법이나 직관적(直觀的) 어프로치(접근)가 필요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썼다가는 지우고, 다시 써서는 또 고치는 무수한 퇴고 과정을 거쳐 비로소 한 편의 시조는 완성되는 것이다. 일단 신문이나 잡지, 인터넷을 통해 발표한 작품이라도 어딘지 미진한 구석이 있거나 흡족하지 않을 경우, 시대의 변천에 따라 발표 당시의 정서나 분위기가 바뀔 경우 평생 두고 고치는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노인과 바다'를 200번이나 고쳐 썼다지 않은가.  어디 한번 상상을 해보라. 소설 한 편을 두고 20번도 아니고 200번을 고쳐 쓴다는 일을. 웬만한 사람은 똑같은 작품을 세번만 고쳐 쓰라고 해도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나고 신물이 난다고 고개를 가로 저을 텐데 200번이라니! 웬만큼 독한 마음을 먹지 않으면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을 헤밍웨이는 해냈으며, 그런 끈질기고 피나는 절차탁마의 노력, 더 나아가 200번에 걸친 퇴고 작업 덕분에 영광의 노벨문학상을 거머쥘 수 있었다는 상상이 가능하지 않는가   =====================================================================       바다 등나무  ―데릭 월컷(1930∼) 내 친구의 반은 죽었다 네게 새 친구를 만들어 주지, 땅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옛 친구들을 그 모습대로 돌려주오, 결점이랑 모두 함께. 난 외쳤다. 오늘 밤 나는 등나무 숲을 스쳐 오는 희미한 파도 소리에서 친구들의 말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달빛 어린 수없는 잎새 같은 바위 위를 걸어서 저기 하얀 길을 혼자 갈 수도 없고, 지상의 짐을 벗어나는 부엉이의 꿈꾸는 동작으로 떠다닐 수도 없다. 아, 땅이여, 네가 가두어 둔 친구들이 내 사랑하는 이승의 친구보다 많구나.     절벽 옆 바다 등나무는 푸른빛 은빛으로 번득인다. 이 나무들은 나의 신앙을 지켜주는 천사의 창이었다. 그러나 상실 속에서 더 굳건한 것이 자라나서 그건 돌 같은 냉철한 광채를 띠어, 달빛을 견뎌내고, 절망보다 더 멀리, 바람처럼 굳세어져 바다와 경계를 이루는 저 등나무 숲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옛 모습대로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니, 결점이랑 모두 함께, 옛날보다 고상하진 않아도, 그냥 그대로.     아무리 사교적인 사람이라도, 친구라면 환장을 하는 사람이라도, 더이상 사람을 사귀어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싶지 않게 되는 시기가 있다. 사람마다 품이 다르니까 무한정 친구를 품을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 사십대 중반쯤 되면 이미 친구가 충분히 많다고 포만감을 느낀다. 매사에 그렇거니와 타인에 대한 호기심도 관심도 엷어지기 시작하는, 즉 타인에 대한 의욕이 줄어드는 나이. 나이가 들면 사라지는 건 의욕만이 아니다. 주변의 친구들도 하나둘 사라진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어느덧 이승의 친구보다 죽은 친구가 더 많아지게 된다. 시인은 그 죽은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자기의 죽음도 멀리 있지 않은 걸 담담히 받아들인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닷가 절벽 위 등나무 아래서.  나무는 인간의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 같다. 소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대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측백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벚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플라타너스를 좋아한다. 남산 하얏트호텔 건너편에 야외식물원이 있다. 그 맨 꼭대기에 플라타너스 길이 있었다. 한 아름이 넘는 둥치에 아주 높다랗게 키가 커서, 그 아래 있으면 깊은 숲에 숨어든 듯 아늑했고, 우듬지를 따라 하늘을 헤엄치는 듯 머리가 시원했다. 재작년엔가, 그 플라타너스들이 전부 사라졌다. 쉰 살은 족히 넘었을 그 나무들을 누가 왜 베어버렸는지 꼭 밝혀내리라. 그리운 플라타너스들….
103    시는 희, 로, 애, 락, 욕, 지, 의, 정 등의 복합적 예술품이다... 댓글:  조회:2646  추천:0  2017-01-08
시를 배울 때 고쳐야 할 표현들 ㅡ도종환  5. 나약한 감상으로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시를 쓰는데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로 정서를 빼놓을 수 없다. 정서란 어떤 사물을 대하면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말한다. 러스킨은 사랑, 존경, 찬탄, 기쁨의 네 가지와 미움, 분노, 공포, 슬픔의 네 가지를 합쳐 '8대 정서'라 했다. 사람의 감정 중에 희, 로, 애, 락, 애, 오, 욕이 모두 시가 될 수 있고, 근본적으로는 지, 정, 의(知情)가 모두 시심의 밑바탕이 된다. 그 중에서 '정'이 정서가 되겠는데, 문제는 이런 감정 중 사랑 또는 이별 슬픔 외로움 등의 감정만이 시의 중요한 정서인 것처럼 편협하게 생각하는 태도이다.  문득 헤어져야 할 때를 생각해 보면 오늘의 이 기쁨이 영원할 것 같지만은 않다. 헤어짐을 전제로 하지 않은 만남이란 없고 만남 자체도 헤어짐이 있음으로써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너의 그림자가 사라져가는 버스 뒤꽁지의 창문을 쳐다보면 또 다시 쓸쓸해지는 어깨를 움찔하며 내일의 만남을 기약해 간다 어쩌다 이대로 헤어진다고 해도 다시 만날 것을 믿으며 어색하지만 반가운 너의 얼굴을 원 없이 쳐다볼 수는 있겠지 - 「사랑 그리고 그만큼의 아픔」 중에서  오늘은 갑자기 내가 너를 그리워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울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서글픔은 고동색 절망으로 흐르고 나란 존재는 정말 무엇일까 하는 생각만 그곳에 가득하다  네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리고 좋아한다고 고백한 적도 없다 그저 내 곁에만 있어 주면 좋았는데 오늘은 네가 곁에 있어도 허전하기만 하다 - 「서정시가 흐르는 화폭」  위의 시 '사랑 그리고~'는 만남의 기쁨과 헤어짐에 대한 불안함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원 없이 쳐다보고픈 마음을 담은 시다. 두 번째 시 '서정시가~'는 그리워하는 마음의 복잡함, 그 심리적 고통에 대해 쓰고 있다. 그런데 그리움을 우울한 슬픔으로 표현한 곳이라든지 서글픔을 고동색 절망이라고 표현한 부분 등은 앞에서 이야기한 삶 또는 사랑에 대한 피상적 인식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동색 절망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은 고동색과 관련이 있는 주관적 경험의 표현일 뿐 객관적인 공감을 얻지 못한다. 이렇게 되니까 5행의 '나란 존재는 정말 무엇일까' 하는 철학적 질문도 전혀 철학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감상적인 자문으로 들릴 뿐이다. 게다가 '오늘은 / 네가 곁에 있어도 허전하기만 하다'라든가 '헤어짐을 전제로 하지 않은 만남이란 없고' '다시 만날 것을 믿으며' 등은 류시화, 서정윤, 한용운의 시에서 많이 접했던 구절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는 서정 또는 정서에 대한 심적 반응이 나약한 감상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윈체스터는 문학의 정서적 효과에 대한 영원한 가치 평가의 항목으로 다음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정서의 공정 혹은 타당, 둘째 정서의 활기 혹은 힘, 셋째 정서의 계속 혹은 안정, 넷째 정서의 범위 혹은 변화, 정서의 등급 혹은 성질이 그것이다. 쉽게 말하면 그럴 만한 이유가 느껴지느냐, 생생한 생동감으로 살아 있느냐, 믿을 만한 힘이 느껴지느냐, 얼마만한 변화를 줄 수 있는 정서이냐, 정서다운 고상함이 있느냐 하는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그대 휘어지게 선 겨울 언 땅 서릿발로 동동거립니다 손을 내밀면 차가운 대기 속에서도 따스하게 전해오는 당신의 맥박 늘 푸른 서향나무로 차 오릅니다. 가늘게 실눈을 뜬 겨울햇살로 당신을 보면 당신은 언제나 쓸쓸한 쪽으로 눈을 주며 내게로 가만히 건너오십니다. 가슴 속 그윽한 강물들 거느리고 강물 위에 드리운 산그늘로 내 온몸을 담고 계신 당신 눈동자 속 엷게 비치는 눈물로 흔들립니다. 그대가 담고 있는 당신은 어느 적 당신의 사람이었기에 오늘은 이토록 당신의 말들을 잃게 합니까 당신의 그대에게 건너가야 할 처녀의 말들 저 눈발로 떠돌고 있는 산천 당신 금이 간 서릿발로 서러웁습니다. - 「갈대 3」  작품 후반부의 그대와 당신의 혼용으로 인한 약간의 혼란스러움은 있지만, 자아 속의 초자아 또는 사랑하는 대상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그가 사랑하는 또 다른 사랑의 모습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체로 이 시의 정서는 잔잔하면서도 믿을만하게 느껴진다. 쓸쓸함과 서러움의 정조를 과장하거나 엄살 떨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가고 있는 잔잔한 서정의 울림이 있다.  6. 추상적인 표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런 놈끼리 저런 놈끼리 요런 놈끼리 끼리끼리 모여 사는 세상 작은 괄호로 묶고 큰 괄호로 묶고 묶고 묶다 보면 결국은 하나  하나라는 것을 이런 놈도 저런 놈도 요런 놈도 알고 있을까? - 「하나로 살기」  시는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때 더 생동감이 있다. 이른바 객관적 상관물을 빌어 생생하게 그려갈 때 느낌이 더 살아난다. 이 시는 끼리끼리 집단 이기주의로 모여 살지 말고 하나되어 살아야 한다는 심정을 표현하려 한 시다. 만약에 다음과 같이 고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비교해 보자  모래알은 모래알끼리 조약돌은 조약돌끼리 버려진 돌들은 버려진 돌끼리 끼리끼리 모여 사는 세상 개울가에서 만나고 여울로 가다가 만나고 골짝을 넘는 구비구비에서 만나는 결국은 하나라는 것을 모래알도 조약돌도 버려진 돌들도 알고 있을까  조금은 더 생동감이 있을 것이다. 막연하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내용을 가질 때 시는 더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 '들에는 이름 없는 숱한 꽃들이 피어 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빽빽히 숲을 이루었다'라는 식의 표현보다는, 꽃 이름 나무 이름 새 이름이 적재 적소에 살아 있도록 표현한다면 시의 내용은 그만큼 더 풍부해질 것이다. 다만 진부한 느낌이 들거나 설명적이지 않도록 하는 세심한 주의도 있어야 한다. 자칫하면 상상력의 공간이 그만큼 줄어 들 수도 있고, 시의 중요한 장점 중의 하나인 다의적 해석의 공간이 그만큼 좁아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7. 사실에 맞게 표현해야 한다  시를 쓰다 보면 욕심이 나게 마련이다. 더 잘 표현하고 싶고, 더 적절한 비유를 만들어 보고 싶고, 새롭고 신선한 느낌이 들도록 하기 위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부분을 상상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새로운 것을 찾아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혀 사실과 다르게 표현해 놓는 경우가 있다.  성장이라는 단어의 배를 갈라 내장을 뒤져볼까 그 속 어딘 가엔 분명 숱한 만남과 헤어짐을 주선하는 장기라도 있을까 만남 우혈관과 헤어짐의 좌혈관의 혈액이 감미로운 리듬에 따라 춤을 추다가 혹 장애라도 일으켜 좌충우돌로 뒤범벅되진 않을까 - 「자라기 위한 수술 준비」  이 시는 우리가 성장하면서 겪는 고통의 원인이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데서 착안하여 성장 과정과 관련한 정신적인 개념들을 육체의 일부분과 결합해보는 기발한 착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몸에 좌심방 우심실 이런 이름은 있어도 좌혈관 우혈관은 없다. 상상력의 자유로운 전개는 얼마든지 좋지만, 부정확하거나 논리적 모순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런 한 부분의 오류가 시 전체의 결정적인 결함이 될 수 있기 대문이다. 앞에서 살펴 본 시 중에 이런 부분도 마찬가지다  피는 물 위를 기름처럼 흐르고 사람들은 원심분리기 속에서 제 무게만큼의 속도로 흩어져 간다  피는 물 위를 정말 기름처럼 흐를까? 물과 기름은 서로 겉돌지만, 피와 물은 그렇지 않다. 얼마든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시이지만 사실에 맞지 않게 표현해서는 안될 것이다.  □ 강사 소개―도종환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84년 동인지 제1집에 「고두미 마을에서」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 당신은 누구십니까』, 『 부드러운 직선』 펴냄. 교육에세이집 『마지막 한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펴냄. 1990년 제8회 신동엽 창작기금 수혜, 1997년 민족예술상 수상. 현재 (사)민예총 충북지회장, 동인, 중학교 교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   모기 ―김형영 (1944∼ ) 모기들은 날면서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온몸으로 소리를 친다 여름밤 내내 저기, 위험한 짐승들 사이에서 모기들은 끝없이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살기 위해 소리를 친다 어둠을 헤매며 더러는 맞아 죽고 더러는 피하면서 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 죽음은 곧 사는 길인 듯이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모기 소리로 소리를 친다 영원히 같은 모기 소리로……       꿀벌, 나비, 잠자리, 무당벌레, 방아깨비……. 아름다운 날벌레가 많다. 인간에겐 옷이 날개, 이들에겐 날개가 옷. 사실 모기도 그리 외모가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되는데, 유독 우리 미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이 순간에도 지구별의 수많은 방에서 인간과 대등하게 지력과 운동신경과 체력을 겨루고 있을 모기들. 에이, 그냥 물리고 말자. 항복하고 누운 사람을 기어이 다시 일으키는 건 모기 소리다. 아니, 살그머니 한 모금 빨고 갈 것이지 모기는 왜 그리 소리를 치는 걸까? 페어플레이 정신인가? 기어들어가는 듯 작은 목소리를 ‘모기 소리 같다’고 하지만, 깊은 밤 모기 소리는 귓전에 사이렌 소리처럼 울린다. 그리하여 ‘위험한 짐승’이 된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들었다. 사람의 삶을 모기의 삶에 빗댄 재밌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시. 모기에게 우리 인간은 ‘위험한 짐승들’이다. 그처럼,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들이 ‘위험한 짐승들’이 되면 아무리 악을 써도 모기 같은 인생살이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모기들,/모기들,/모기들,’이라고 되뇌면서 시인은, 사람은 모기가 아니라고, 모기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소리친다.
102    문학예술가와 病, 그리고 창작 댓글:  조회:2525  추천:0  2017-01-07
문학예술가와 병(病), 그리고 창작  사람은 누구나 병에 걸린다. 몸뿐이 아니라 마음에도 병이 든다. 그런데 유독 예술가들의 병에 대해서는 옛부터 보상(補償), 즉 질병이 창작활동의 동기였다는 논의가 있어 왔다.  예컨대 비발디는 ‘천식’때문에 미사를 주관할 수 없게 되어 작곡의 길로 들어섰고, 롱사르는 ‘귀’가 먹어 외교관 생활을 포기하고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마티스는 ‘충수염’으로 법조계를 떠나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질병으로 해서 신부·외교관·변호사를 잃고, 대신 작곡가·시인·화가를 얻게 된 것이다.  예술가와 질병을 논할 때, 으레 앞세우는 것은 최초의 시인 호머가 ‘장님’이었다는 일화이다. 거기에 최초의 여류시인 사포가 ‘동성연애자’였다는 얘기도 첨가되곤 한다. 시각장애로 말한다면 밀턴은 맹인이 된 후에 ‘실락원’을 썼고, 조이스·헨델·보르헤스·고야도 거의 시력을 상실했으며, 색맹이 된 모네는 색을 입힌 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두 눈에서 빛을 앗아갔으나/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노래를 재능으로 얻었도다”라는 호머의 시는 바로 그 질병과 예술창작의 보상관계를 예찬한 것이다.  청각장애로는 베토벤이 있다. 고야, 스위프트도 청각을 잃었다. 그들에겐 “귀에 들리는 멜로디도 아름답지만/ 들리지 않는 멜로디는 더욱 아름답다”(키츠)는 시구가 위안이 되리라. 하기야 신은 음악의 뮤즈들에겐 청각기능을 당초부터 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많은 예술가들에게서 ‘성스러운 병’이라는 ‘간질’과, ‘화학적 휴가’라는 ‘아편중독’의 예를 본다. 도스토예프스키, 플로베르, 테니슨, 몰리에르, 바이런, 스윈번, 페트라르카, 파스칼, 고흐 등은 간질발작을, 콜리지, 키츠, 드퀸시, 포우, 콕토, 보들레르, 헉슬리, 미쇼, 푸르스트 등은 아편에 알콜중독까지 겻들였다.  ‘낭만병’이라는 ‘폐결핵’도 있다. 파가니니, 체홉, 로렌스, 노발리스, 쇼팽, 카프카, 몰리에르, 키츠, 브론테, 엘리어트 등이 폐병에 시달렸다. 그런가 하면 ‘천재병’이라는 ‘매독’이 또 있다.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보들레르, 플로베르, 모파상, 고흐, 와일드, 니체, 조이스, 로트레크, 토마스 만이 이병에 괴롭힘을 당했다.  정신질환은 더 복잡하다. 대표적으로 미켈란제로, 슈만, 바이런, 헨델, 로시니, 칼라일, 스트린드베리, 에즈라 파운드, 스위프트, 횔덜린, 단테, 뭉크, 울프 등은 조울증·편집증·정신착란의 희생자들이다. 그 희생 덕분으로 우리는 명작을 감상하게 된 것이다.  그밖에도 릴케의 백혈병, 르누아르의 관절염, 몬드리안의 결벽증, 버나드 쇼의 골수염, 스위프트의 염세증, 세잔의 당뇨, 코린트의 뇌졸증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여류시인 딕킨슨은 사팔뜨기, 미켈란제로·고골리는 일그러진 코, 바이런은 안짱다리로 평생을 고민했다. 로트레크는 짧은 다리에 큰 머리의 기형으로 일생을 술과 창녀에 묻혀 살며 ‘그려라 마셔라 사랑해라’라는 명언을 남겼다. 꼽추였던 작곡가 상튀엘은 ‘꼽추의 노래’를 작곡하고, 그 발표회 첫날에는 꼽추들만 초청했다.  “질병과 불구의 상태는 그 시대에 최고의 인물을 따라다니던 수행원”이라고 바이런이 정리했다. 그러나 누구나 병에 걸린다고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란 운명의 선택을 받은 것만은 확실하다.  文鄕 김 대 규  안양 시민신문사 本社 회장·시인 
101    2017년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모음 댓글:  조회:2635  추천:0  2017-01-06
  2017년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1. [경남신문]   인어의 꿈 / 임채주 바닥을 기고 있는 인어 같은 저 남자 풀 수 없는 가슴앓이 누군들 알까마는 진창길 바닥에서도 꿈을 줍고 있나보다 눈물로 짓이겨온 질척이는 저잣거리 밀고 가는 무거운 짐, 고단한 삶이지만 저 길이 끝날 즈음에 일어설 수 있겠지 찢어져 펄럭이는 검은 고무 가죽 또다시 동여매고 두 팔로 끌다보면 인어가 바다를 가듯 푸른 생이 열릴 거야     2. [경상일보]   도르래, 빛을 물다 / 박수근 한 치 틈도 허여 않고 흙과 돌 살을 맞댄 성곽 안 둘레길엔 넘지 못할 선이 있다 배흘림 성벽을 따라 나부끼는 저 깃발들 밑돌은 윗돌 받치고 윗돌은 밑돌을 괴고 저마다 가슴에는 난공불락 성을 쌓는, 팔달문 층층 불빛이 도르래에 감긴다 망루에 올라서면 성채 너머 또 다른 성 가납사니 군말 아닌 실사구시 공법으로 날마다 허물고 쌓고 허물어선 다시 쌓고 장안문 홍예(虹霓)를 짓던 옛 사람은 어디 갔나 그때 그 거증기로 들어 올린 금빛 아침 빗살문 빗장을 따고 성문 활짝 열고 싶다     3. [국제신문]   과녁 / 김장배 겨운 날 활터에서 낯선 활을 당겨본다 번번이 빗나가다 운이 좋게 다가가도 내 인생 한가운데는 맞출 수가 없었다. 삶도 한낱 무예일까 날과 기(氣)도 무딘 지금 펄펄하던 지난날이 초점을 흐려놓고 빗나간 화살 한 대는 행방마저 묘연하다. 숨 고른 시간 앞에 조용히 활을 내리고 욕심의 핀을 뽑아 모난 마음 다스린다 마지막 남은 화살이 명중하길 바라며.     4. [농민신문]   다산茶山, 마임 무대에 선 / 송태준 천 리 밖 매운 탄식이 돌옷 거뭇 배어 있는  신새벽 화성華城 안길 헤집는 손수레 한 대 거중기 발치에 쌓인  야사野史 더미 고른다 빈 박스, 빈 깡통에 빈병서껀 넝마 조각  체념하듯 되돌아와 널브러진 성벽 위로  한잠 든 사직을 깨워 뒤척이는 깃발 소리 도돌이표 궤도 위를 수레는 굴러가나 받아든 푼돈 온기로 세밑 바람 뚫고 가는 판박이 목민牧民 앞에서  혀 차는 다산 줌 업  휴! 긴 숨 몰아쉬며 한 평 쪽방 찾아드는  노인의 굽은 등 위 펄럭이는 열두 만장挽章* 긴 심서心書 적어가던 붓  그예 꺾고, 암전暗轉이다  *자살률 세계 1위 대한민국에서는 매일 평균 12명의 노인이 자살한다   5. [동아일보] 자반고등어 / 정진희 푸른 등이 시린지 부둥켜안은 몸뚱이 제 속을 내주고 그리움을 묻어둔 채 장마당 접었던 밤은 해풍만 가득하다 기댈 곳 없었다, 그냥 눈 맞은 너와 나 천지사방 혼자일 때 보듬고 살자했지 소금물 말갛게 고인 눈알 되어 마주친 동살이 밝힌 물길 야윈 등을 다독이다 나 다시 태어나 너의 짝이 되리라 살 속에 가시길 박힌 그 바다를 건넌다.   6. [매일신문]    동강할미꽃의 재봉틀 / 김태경 솜 죽은 핫이불에 멀건 햇빛 송그린다 골다공증 무릎에도 바람이 들이치고 재봉틀 굵은 바늘이 정오쯤에 멈춰 있다  문 밖의 보일러는 고드름만 키워내고 숄 두른 굽은 어깨 한 평짜리 가슴으로 발틀에 하루를 걸고 지난 시간 짜깁는다  신용불량 최고장에 묻어오는 아들 소식 호강살이 그 약속이 귓전에 맴돌 때는 자리끼 얼음마저도 뜨겁게 끓어올랐다   감치듯 휘갑치듯 박음질로 여는 세밑 산타처럼 찾아주는 자원봉사 도시락에 그래도 풀 향기 실은 봄은 오고 있겠다 7. [부산일보]   겨울, 횡계리에는 / 김종호 횡계리 황태밭에 비린내로 돋는 달빛 송천(松川) 얼음물에 무장무장 뜨는 별빛 영 너머 파도소리까지 에돌다가 매달렸네. 눈발 들이치는 목로에 마주앉아 내 배알, 버렸지라, 빈 가슴 두드리던 노인의 시린 등허리가 흔들리고 있었네. 돌아보면 산문 밖은 모두다 덕대였지, 한 생애 흔드는 게 눈발이며 바람뿐일까 노랗게 물들어가다 엇갈리던 환한 꿈들, 무두태*로 떨어져서 드난사는 동안에도 코를 꿰인 영혼들이 칼바람에 흔들리며 노을 진 엄동설한을 건너가고 있었네. * 건조과정에서 머리가 떨어진 명태.     8. [서울신문]   막사발을 읽다 / 송가영(본명 송정자) 너만 한 너른 품새 세상천지 또 있을까  먼 대륙 날고 날아 난바다도 건너갈 때  태산도 품안에 드는 은유를 되새긴다  털리고 짓밟히고 쓸리기도 했을 게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친구가 되지 못해  바람에 말갛게 씻긴 꽁무니가 하얗다  바람에 몸을 맡긴 가벼운 너의 행보 새처럼 구름처럼 허공을 떠돌다가 양지 뜸 아늑한 땅에 부르튼 생을 뉜다  그리하여 정화수에 묵은 앙금 갈앉히고  눈빛 맑은 옛 도공의 손길을 되짚으면 가슴에 불꽃을 묻은 큰 그릇이 되느니  9. [조선일보]   쌍둥이 - 양보의 대가 / 김상규 언니는 모르겠지, 그해의 봄 소풍을 반숙된 달걀에선 병아리가 나왔고 사라진 보물종이가 영원한 미궁인 걸 두 발은 위태로워 네 발이 필요했어 날개 없는 말개미가 꼭대기에 오르듯이 나 대신 이어 달렸던 언니만의 거친 호흡 서로의 옷을 입고 고백했던 그런 하루, 강에 버린 구두 대신 목발을 짚었을 때 우리는 만쥬를 가르며 용서하고 있었어     10. [중앙시조맥일장 연말장원]   사과를 만나다 / 박연옥 길어야 일주일쯤 머무는 줄 미리 알아 올핸 꼭 만나리라 서둘러 꽃 피워놓고 받침이 집인 줄 모른 채 사과꽃은 지더니 떠난 자리 들어선 열매 뙤약볕에 담금질하고 비바람에 지는 벗들 가슴으로 배웅하며 모질게 견뎌온 나날 과즙으로 고이더니 끝내 그를 알고 안절부절 못하는 낯빛 그걸 헤아린 듯 크게 한 입 베어 무니 달디단 사과향 속으로 그림자 두엇 잠긴다 11. [한라일보]   솥 / 서희정 따끈한 흰밥으로 아침을 열어 주며  우리 식구 이어 주던 식탁의 전기밥솥  한 달째 하품 중이다  속이 텅텅 빈 채로 어머니는 일터에서 동생은 기숙사에서  나는 또 새벽 출근, 끼니가 다 다르니  저 친구 존재 가치가  슬그머니 없어졌다 빵 조각에 커피 한 잔 홀짝이고 있는 사이  덩그러니 나앉아서 빠끔히 쳐다본다  저 혼자 배고프다고  시무룩한 늦저녁                                 
100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 위하여" 건배!... 댓글:  조회:2680  추천:0  2017-01-06
"나가자", "우아미", "너나잘해"…. 흔히들 외친다는 새해맞이 구호다. '나라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 '우아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위하여' '너와 나의 잘나가는 한 해를 위하여'. 이 위하여, 꽤 묵은 말인데 아직은 정정(亭亭)해 보인다. 오죽하면 그 이름으로 숙취(宿醉) 해소제까지 있을까. 무언가를, 누군가를 위함은 좋은 일이다. 다만 불문곡직(不問曲直) 위할 때는 또 얼마나 위험한가. 지난가을부터 실컷 겪는 일이다. 그 통에 '위하여'를 빗댄 '위하야'도 새삼 기세를 탔다 하니…. '함 선생은 우리나라 마라톤 미래를 위해 어렵게 쓴소리를 꺼냈다.' '측천무후는 인재를 몹시 아끼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다고 한다.' 이런 '위하다' 쓰임새는 자연스럽다. '사람(이나 사물)+위하다' 구문(構文)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하다'는 뜻으로 쓸 때다. '~하기+위하다'나 '동작성 명사+위하다' 형식이 그렇다.   'AI 차단을 위한 전문가 회의' '한 끼를 때우기 위해 찾는 편의점' '전투 능력 향상을 위한 차원'…. 굳이 '위하다'를 쓰지 않아도 될 말들이다. '차단을 꾀할, 한 끼를 때우고자(때우려고), 능력을 향상하려는' 식으로 쓰면 되니까. '돌아가기 위한 교통편, 감상을 위해 미술품 앞에 머무는, 성공적으로 협상하기 위해서'는 어떤가. 역시 한사코 '위하다'에 매달렸다. 영어 구문(in order to, for the purpose of 따위) 직역(直譯)에 인이 박인 탓이다. '돌아갈 교통편, 미술품을 감상하느라, 성공적으로 협상하려면' 하면 되는 것을. 이렇게 가지가지인 우리말 어미(語尾)가 말광에서 썩고 있다. '반죽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는'은 아예 '반죽에 한평생을'처럼 쓰면 깔끔하다. 문장 전체를 되짚어보게 하는 표현도 있다. '국제 대회 출전을 유도하기 위해 포상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유도하려면'으로만 고쳐도 좋다. 살짝 바꿔 '국제 대회에 출전하게끔 포상 제도를 만들어야' 해도 괜찮겠다. '포상 제도를 만들어 국제 대회에 출전하도록 해야'처럼 어순과 표현을 달리할 수도 있다. 새로운 해가 솟았다. 새로운 꿈을 품는다. 나라를 위하는 백성, 백성을 위하는 나라를 위하여….   ⓒ 조선일보 / 양해원 {필자 주}= "개나발" ㅡ 개혁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99    금서, 70, 베스트셀러 그리고 독재자... 댓글:  조회:2571  추천:0  2017-01-06
황하 호구폭포 [ 2017년 01월 06일 08시 49분 ]           산서(山西) 길현(吉縣)과 산서성(陜西省) 이천현(宜川縣) 인접지역에 위치한 황하 호구폭포(壺口瀑布), 중국 저장 하늘에 뜬 ‘하트 구름’, 신이 저장을 사랑하나 봐      새해1월 1일, 저장(浙江)성 진화(金華) 하늘에 나타난 ‘대형 하트 구름’....  ==========================   아돌프 히틀러[연합뉴스 자료사진]===   “살인자 히틀러가 쓴 책을 다시 출판 할 필요가 있는가?” 독일을 전쟁국가로 내몬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저서 《나의 투쟁(Mein Kampf)》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소식이 최근 독일에서 들려왔다. 이 책을 재출간한 독일 뮌헨현대사연구소(IFZ)조차 1월3일 “《나의 투쟁》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의외다”고 발표할 정도다.   히틀러의 살아온 궤적과 반(反)유대사상 등이 기록된 《나의 투쟁》은 1925년 처음 출판됐다. 첫 해 판매량은 9473부 정도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필독서가 되면서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에서만 1200만부가 팔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가 패망하자 책의 저작권은 바이에른 주정부로 넘어갔고, 이 책은 출간이 금지됐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비판적 주석을 보태 지난해 1월 새롭게 출판된 책이 독일 내에서 8만5천부나 팔리면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 AP연합   제2차 세계대전 끝날 당시 독일서만 1200만부 팔려    하지만 2015년 말 저작권 보호기간이 만료되면서 발매 금지도 덩달아 해제됐다. 그리고 2016년 1월 IFZ가 다시 발간하기 시작했다. IFZ에 따르면 다시 펴낸 이후 지금까지 약 8만5000부가 팔렸다.   전후 70년의 시간 동안 독일에서 발매 금지됐던 이 금서가 지난해 다시 세상에 등장하게 된 이유는 뭘까. 《나의 투쟁》은 히틀러의 반(反)유대주의에 대한 지론을 800페이지에 걸쳐 장황하게 기록했다. 홀로코스트로 향하는 길을 열어준 책이기도 하다.    이처럼 위험한 책의 저작권 만료시점이 점점 다가오면서 독일 내부에서는 책의 출판 여부를 놓고 여러 해 동안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2012년 독일 정부는 《나의 투쟁》이 주는 역사적·도덕적 교훈을 고려해 주석을 붙여 발간할 것을 결정했다. 하지만 2년 뒤인 2014년에 정부 입장이 바뀌었다. 원래 약속했던 재정지원을 취소하고 학술서로만 출판하는 것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여론도 갈렸다. 여론조사기관인 ‘YouGov’의 설문조사에서 독일인의 51%는 이 책의 국내 출판을 반대했다. 시판하는 것 자체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부의 정책조차 오락가락하게 만들 정도로 뜨거운 감자였던 이 책. IFZ는 2016년 1월, 출판을 결정했다. 그들은 왜 출판해야 했을까. IFZ가 이 책을 펴낸 1차적인 이유는 저작권이 소멸된 이 책을 극우 신나치가 출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나치의 사상이 독일 사회에 퍼지지 않도록 하려면 그 위험성을 이해하도록 돕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IFZ는 3년에 걸쳐 원본에 비판적인 논평을 붙이는 작업을 해 왔다. 그 결과 800페이지였던 원본은 2000페이지로 확장됐다.   안드레아스 비르싱 IFZ 소장은 “신랄한 비판을 담은 주석은 연구 소재로도 중요하지만 공개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석 없이 원본을 그대로 출판하는 것이 무책임한 태도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비인간적인 책을 모두가 읽을 수 있도록 방치해 두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한 일이다. 나치즘과 인종 차별을 설명하고 비판적인 해설을 붙여 책을 출판하는 것이 오히려 사회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고 주장했다.   모두가 읽을 수 있도록 방치해 뒀다는 건 무슨 뜻일까. IFZ가 우려한 것은 독일이 아닌 해외의 인터넷 사이트였다. 독일을 벗어난 웹 공간에서는《나의 투쟁》을 누구나 원본으로 열람할 수 있던 상황이었다. 심지어 출판이 가능한 국가도 있었다. 이런 곳에서 《나의 투쟁》은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2003년 한해에만 영어판 《나의 투쟁》의 매출 부수가 연간 2만부 정도에 달했다. 이것보다 더욱 저렴한 보급판은 이 책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몰라도 오랫동안 베스트셀러가 됐다. 터키와 인도의 경우가 그랬다. 심지어 e북의 경우 2014년 최고의 다운로드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생각 그대로를 담은 원본의 확산을 경계하기 위해 IFZ는 주석본을 출판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IFZ의 결정은 유대인 커뮤니티 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독일 유대인 중앙위원회의 전 회장은 “《나의 투쟁》은 판도라의 상자다. 독자의 마음속은 알 수 없다”며 출판을 반대했지만, 오히려 현 회장은 찬성하는 일이 벌어졌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독일 교육계에서는 《나의 투쟁》의 출판을 찬성하는 목소리가 많은 편이다. 독일 교원노조는 16세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 수업의 교재로 《나의 투쟁》을 추천하기도 했다. 교원노조의 요제프 크라우스 대표는 “인터넷에 떠도는 것을 학생들이 보게 되면 오히려 통째로 삼켜버릴 우려가 있다. 교사가 수업을 통해 가르치면 그런 걸 막을 수 있다”고 말하며 젊은이들에게 면역력을 주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dpa연합   독일 내부에서도 《나의 투쟁》 출판 놓고 찬반 갈려   2017년을 맞은 지금 독일 국민들은 《나의 투쟁》을 어떻게 평가할까.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는 시기와 맞물려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에 대해서 우려의 시선도 존재한다. 반면 IFZ는 이런 우려를 부정하고 있다. 오히려 ‘전체주의 정치’에 관해 깊은 논의를 불러온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IFZ는 “전국 서점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정리해보니 정치와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 혹은 교육 관계자가 주 구매자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연구소의 분석과는 별도로 독일에서는 현재 극우의 바람이 조금씩 강해지고 있다. 2017년 10월22일은 독일 총선이 열린다. 만약 현재의 독일 정당 지지율을 그대로 대입할 경우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독민주당과 연립정부 파트너인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3당이 될 수도 있다. 불과 4년 전에는 원내 진입조차 하지 못했던 정당의 대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이다. 이런 조건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나의 투쟁’에 보내는 우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일 지도 모른다. =========================  
98    시는 늘 육화(肉化)된 언어를 찾아 써야... 댓글:  조회:2648  추천:0  2017-01-05
[ 2017년 01월 03일 04시 01분 ]     [인민망 한국어판] 호남(湖南)성 녕향(寧鄉)현에는 1,000년 된 사찰인 밀인사(密印寺)가 있다. 이곳에는 커다란 천수관음상(千手觀音像)이 하나 있는데 높이가 99.19m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천수관음상이다. =================================================== 시를 배울 때 고쳐야 할 표현들 ㅡ도종환  3.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제대로 드러나야 한다  사람들은 돌아오고 흐느끼는 소리는 없었다 아무도 앓는 소리 듣지 못하고 나도 어딘가로부터 돌아왔다  피는 물 위를 기름처럼 흐르고 사람들은 원심분리기 속에서 제 무게 만큼의 속도로 흩어져 간다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유방들이 다가올 봄을 대비해 욕망을 충족시키고 수많은 옷가지들이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면 어느새 나는 벌거벗은 병정이 되어 거리를 간다 속이지 말라고 사람들은 외치고 그래도 나는 속인다 나는 속이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내가 죄를 벗어나는 길은 죄를 잊는 길밖에 없다 나의 원죄는 이토록 망각 앞에 무력하다 또한 그것은 종이 위에서 다소간의 위안을 찾기도 하지만 여전히 노란색 가로등에 뿌리는 외로운 빗줄기 옆에 있다 하염없이 달리는 차창가에 정면으로 달려오는 운명 앞에 있다 - 「갑자기 그러나 천천히」  이 시속의 시적 화자는 지금 죄 때문에 괴로워한다. 죄를 짓고도 그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속이고 있어야 하는 괴로움에 마치 벌거벗은 병정이 되어 거리를 가고 있는 듯한 부끄러움에 싸여 있다. 시적 화자가 그토록 괴로워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물론 알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를 쓴 사람이 이 시를 통해서 결국 무엇을 말하려 하고 있는지가 불명확한 데 있다. 1연 3행 '나도 어딘가로부터 돌아 왔다'는 것은 어디일까.  끝까지 읽어보아도 그곳이 어디인지는 나와 있지 않다. 2연에 와서 죄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한다는 이야기가 길게 전개된다. 그런데 18~19행 '그것은 종이 위에서 다소간의 / 위안을 찾기도' 한다고 말한다. 무슨 위안을 찾는다는 것일까. 그리고 21행 '외로운 빗줄기 옆에 있다'와 23행 '정면으로 달려오는 운명 앞에 있다'고 했는데, 무엇이 그 앞에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죄에 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끝 구절이기도 한 18행부터 23행까지는 역시 모호한 채로 던져져 있다.  2연 1행부터 7행까지는 이 시 속의 시적 자아가 서 있는 공간적 배경을 나타내는 것들인데, 죄의식을 느끼게 된 원인과 어떤 연관을 갖는다든가 아니면 상징적인 구실을 한다든가 하지 못하고 산만하게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주제를 향한 응집력도 부족할 뿐더러 '유방' '병정' '종이' '운명' 등의 시어들이 이해되지 않는 채 자꾸만 걸린다. 거기다 제목 「갑자기 그러나 천천히」는 시 전체 내용과 어떤 연관을 갖는 것인지 역시 알 수 없다. 또 다음과 같은 시를 한 편 더 보자.  이름보다 먼저 그대 귀를 찾았을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더한 부름으로 버거웠던지 유령처럼 스르르  가버렸다 - 「겨 드 랑 이 에 각 개 표 로 손 을 끼 워 넣 는 건 그 어 느 한 쪽 의 필 요 만 은 아 니 다」 이 시의 시적 자아는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버거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 버린 빈 공간에 서 있다. 이 시의 제목대로 '겨드랑이에 각개표로 손을 끼워 넣는' 것은 어느 한 쪽의 필요에서가 아니듯 서로 따뜻한 온기가 필요해 사랑했을 텐데 그냥 황망히 떠나 버린 것을 못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심정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제목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내용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고, 거기에다 원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더해서 한 편의 시로 자기 감정을 제대로 형상화하려는 노력이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겨드랑이~'로 시작되는 긴 제목이 새롭다는 느낌을 주기보다는 제목도 내용도 다 미완성으로 끝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는 시를 쓰면서 내가 지금이 시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표현하려고 하고 있는가 하고 되물어 보아야 한다. 다음 시는 어떤가 함께 읽어보자.  돌담은....., 아닙니다. 어릴 땐 가지런한 층층에 끄덕머리 하다가, 흔들고 다시, 여물게 손가락질 하나 둘 헤다가, 마침내 올라서서 이쪽과 저쪽 세상 가운데를 걸으며 조심스레 팔저울도 했지요.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 저는 이미 많이 자라서 한여름 놀던 그 그늘, 한 겨울 고인 볕뉘와 속살거림, 모두 까닭 없었어요. 때로 생각이야 나지요. 가을이었어요 누군가 싸리비 하나 꺽어들고선 저 산 너머로 가라며 저를 자꾸 내쫒았어요. 가라면 간다며 그 길로 돌담 등지는데, 때깔 곱게 물든 단풍 숲 사이 바알간 노을이 깃들더니 이내 두 눈 가뭇가뭇 멀게 했어요.  그 후론 여기 이 바깥 세상에 쭉 살았지요. 어떤 날은 취해 밤낮을 바꾸고 또 어떤 날엔 싸우다 승리, 패배, 승리 패배 패배했어요, 삭신 다 닳은 세월 속절 없지만 아파서 제겐 더 살뜰한 기억이지요. 다만 잊을 수 없는 건 그 낮은 돌담. 웃자란 키로 들여다봅니다. 안팎으로 그늘과 속살거림 거느린 것이며, 자라지 못하는 속엣 것들 고즈넉이 품은 모양이며, 누군가 또 싸리비 꺾어 괜찮다고, 가라고, 사는 건 그렇게 등지는 거라며 저를 쫓아내는 것까지도 두고 올 적 그대로지만, 삶이란, 예전에 그랬듯, 홱 떠나는 것은 아니더군요. ....안됐거든요. 저물 무렵 그 모든 게 노을 함께 지면 참 안돼 보이거든요. 이제 와서 저는 슬퍼할 밖에요. - 「돌담」  많은 쉼표와 현실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실로 들락거리는 구성은 자칫 혼란스럽게 비쳐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 속에도 정연한 내적 질서가 있다. 돌담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유년기와 성장기, 세월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면서 아름답고 아프던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떠나기 싫던 우리들 근원적 삶의 터전과 그 터전을 떠나와 끊임없는 싸움을 되풀이하며 성장 해야하는 현실의 경계에 돌담이 있다.  '괜찮다고, 가라고, 사는 건 그렇게 등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주제를 내포한 구절도 자연스럽게 시 속에 녹아 있고 우리 모두가 체험한 통과의례의 상징으로 '돌담'이 제 구실을 한다. 그러면서도 자꾸 되돌아 보여지는 유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성장시'로 손색이 없다. 전통적인 기법으로 표현하든 새로운 기법으로 그려내든, 문제는 한 편의 시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제대로 나타나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있는 것이다.  4. 관념성과 불필요한 난해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간다 무한한 공간 속으로 닫혀 있는 창을 열고 雨의 장막을 넘어  나는 간다 영원한 침묵 속으로 저자 거리의 소음을 뒤로 하고 검은 숲 오솔길을 걸어  나는 간다 절대의 고독 속으로 닫혀 있는 창 너머로 누구와도 아닌 홀로서 순수 이전으로 돌아간다. - 「순수 이전으로」  a--a'--a" 형식으로 씌어진 이 시는 '나는 간다, 어디 어디로.' 의 기본 골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시적 화자인 내가 가는 곳은 '무한한 공간' '영원한 침묵' '절대의 고독' 속이다. 그곳을 작자는 순수 이전의 곳이라고 한다. 순수 이전의 곳, 그러니까 지금 순수한 곳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때묻지 않은 그 어떤 곳으로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순수 이전의 곳이라는 무한한 공간, 영원한 침묵, 절대의 고독 등은 대단히 관념적이다. 雨의 장막도 마찬가지다. '닫혀 있는 창을 열고' '저자 거리의 소음을 뒤로 하고' '누구와도 아닌 홀로서' 가는 길이라면 죽음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죽음의 세계는 절대 순수의 세계일까. 문제는 이 시의 시어들이 육화되지 않은 관념성에 빠져 있다는데 있다.  미지에의 두려움에 망설이며 되돌아갈 수 있는 줄 알았던 이 길이 그러나 길은 앞으로만 뚫려 있고 등 뒤엔 이미 수렁 나의 사색은 병약했으며 암흑에 가두었고 고통일 뿐이던 젊음 삶과의 치열한 투쟁 그러나 자신의 밀실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묶여 있던 감각 굳어 있는 뼈마디 나는 그것이 어둠인 줄도 몰랐었다. - 「봄」 중에서 나약하던 자기의 밀실을 깨치고 나오는 어느 봄날의 기억에 대해 쓴 시이다.  이런 자각과 깨달음을 통해 역사를 알게 되었고 쓰러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이 시의 뒷부분에 이어진다. 그러나 어딘지 미더웁지 못한 데가 있다. 바로 지금 이 시에서 보는 것과 같은 육화되지 않은 언어들 때문이다. '사색' '병약' '암흑' '투쟁' '밀실' '감각' 등의 관념적인 시어들은 삶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는 느낌보다는 삶과 언어가 따로따로 겉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     사랑 또는 두 발  ―이원 (1968∼) 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 벼랑처럼 감추어져 있다 달처럼 감추어져 있다 울음처럼 감추어져 있다 어느 날 당신이 찾아왔다 열매 속에서였다 거울 속에서였다 날개를 말리는 나비 속에서였다 공기의 몸 속에서였다 돌멩이 속에서였다 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 당신의 발자국은 내 그림자 속에 찍히고 있다 당신의 두 발이 걸을 때면 어김없이 내가 반짝인다 출렁거린다 내 온몸이 쓰라리다 벼랑처럼 아찔하고 위태롭게, 달처럼 가깝고도 한없이 멀리, 내 발 속에 감추어져 있는 당신의 두 발. 북받치는 울음을 꿀꺽 삼킨 내 사랑. 사랑의 깊은 곳에 있는 공허함과 서정이 감각적으로 그려져, 독자 내면에 있는 사랑의 서사와 서정을 자극한다.      어느 날 사랑이 찾아와, 거울을 봐도 당신이 있고, 공기의 ‘몸’ 속에는 당신과 나의 숨이 섞여 있다. 열매처럼 향기롭고 옹골지고, 날개를 말리는 나비처럼 애틋하고 대견하고, 돌멩이처럼 단단한 이 사랑. 넓고도 깊은 당신과 나의 관계. 혼자 걸어도 당신과 함께 걷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나는 당신과 밀착돼 있다. 당신이 어디선가 걸을 때면 어김없이 나는 안다. 당신도 내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반짝이고 출렁거리고 온몸이 쓰라리다는 것을. 이토록 집중되고 온몸으로 감지하는 사랑! 이런 연애를 할 상대를 만난 화자는 행운아다. 그러나 달콤하게 들뜬 와중에도 왠지 마음 저 깊은 곳에 쌉쌀한 슬픔이 방울방울 작은 기포를 터뜨리는 사랑이여.  (참고, 혹은 김 빼기: 연애를 할 때 집착을 드러내는 건 대개 여자다. ‘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고 하면 ‘아고, 발목 잡혔네!’ 할 남자도 있을 테다.)  
97    무지하고 께제제한 눔들 하곤 할 말이 있다?... 없다!... 댓글:  조회:3756  추천:0  2017-01-04
  [ 2017년 01월 03일 04시 01분 ]     호남(湖南)성 녕향(寧鄉)현에 있는 1,000년 된 사찰인 밀인사(密印寺), 천수(千手)관음상 높이가 99.19m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천수관음상이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모차르트의 1770년대 초상화 기본 정보 출생 1756년 1월 27일  신성 로마 제국 잘츠부르크 사망 1791년 12월 5일 (35세)  신성 로마 제국 빈(현재의 오스트리아 수도) 국적  신성 로마 제국 직업 작곡가 장르 서양 고전 음악 악기 피아노, 하프시코드, 바이올린 등 배우자 콘스탄체 모차르트 가족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 어머니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 누나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 장남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 차남 프란츠 크사퍼 볼프강 모차르트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모차르트의 친필 사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년 1월 27일 ~ 1791년 12월 5일)는 오스트리아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궁정 음악가였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고 그후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서 작곡하는 법 및 지휘를 배웠다.   목차   [숨기기]  1생애 1.1베토벤과의 만남 2죽음 3음악 3.1모차르트가 받은 영향 3.2후세에 준 영향 3.3쾨헬 번호 4일화 4.1전설 4.2프리메이슨 5작품 6참고 문헌 7바깥 고리 8각주   생애[편집] 175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출생 직후에 가톨릭의 성당에서 받은 세례명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라틴어: 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였다. 흔히 알려진 중간 이름인 아마데우스(독일어: Amadeus)는 세례명에 있는 중간 이름 중 하나인 테오필루스(Theophilus)를 같은 뜻의 라틴어로 바꾼 것이다. 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이었는데, 볼프강의 누나인 난네를을 어려서부터 가르쳤고, 이를 볼프강은 지켜보았다. 세 살 때부터 볼프강은 누나를 보고, 스스로 건반을 다루고 연주하는 법을 터득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어린 아들의 재주를 보았고, 아들의 음악적 재능이 뚜렷이 빛을 발하게 되면서 작곡을 그만두었고 볼프강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그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매우 뛰어났다. 난네를의 뮤직북에 쓰여진 레오폴트의 기록에 따르면 어린 볼프강은 네 살 때 여러 곡을 배웠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음악적 능력은 빠르게 발달하여, 다섯살 때 이미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믿지 못하여 일부러 모차르트의 집에 찾아와서 모차르트를 시험해 보았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가 모차르트의 곡을 써주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그 사람들에게 뛰어난 작곡 실력과 재능을 보였고, 사람들은 그제서야 모차르트를 믿기 시작하였다. 그후 아버지 레오폴트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 아들을 보내 작곡하는 법에 대한 기예를 더 배우게 했다. 1777년에는 어머니와 함께 뮌헨, 만하임, 파리를 여행하였는데, 그 와중에 파리에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가운데에 볼프강, 왼쪽에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 오른쪽에 레오폴트 모차르트, 벽에 죽은 어머니의 초상화 여행을 다니면서 모차르트는 많은 음악가들과 만났는데, 그중에서 1764년에서 1765년 사이에 런던에서 만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바흐로부터 처음으로 교향곡을 작곡하는법을 배웠으며 이러한 토대로 모차르트는 사후까지 수많은 걸작의 교향곡을 남기는 중요한 계기가된다. 베토벤과의 만남[편집] 또한 모차르트는 빈에서 생활하던 1784년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도 만났다. 그는 어려운 집안사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찾아온 베토벤을 반갑게 맞이하였는데, 이때 베토벤의 나이는 불과 14세였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이 자신이 만든 즉흥곡으로 하여금 또다른 작품으로 훌륭히 소화해내자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교육비를 일절 거절하고 베토벤을 교육시키는데 전념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어머니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모차르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빈을 갑작스럽게 떠났다. 만난 지 불과 1달만의 일로 이것이 두 거장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베토벤이 다시 빈에 찾아온 건 1792년으로 그때는 모차르트가 죽은지 1년이 지난 뒤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전거는 오토 얀이 저술한 모차르트의 전기가 유일하다. 따라서 오늘날은 그 신뢰성이 부인되고 있다. 죽음[편집]   모차르트의 초상화. Johann Nepomuk della Croce의 1780년 경 작품. 모차르트의 죽음과 그 원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설을 비롯하여 학설이 많다. 낭만적인 주장으로는 모차르트의 건강이 점점 약해지면서 그의 모습과 작품 역시 다가오는 죽음과 함께 쇠퇴하였다는 것이 있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해가 그에게 성공적이었으며, 그의 죽음이 가족들에게 충격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의 죽음이 급작스러웠다고 주장한다. 그의 죽음의 원인 또한 추측이 무성하다. 기록에는 그가 "무수히 난 좁쌀만한 발열"("hitziges Frieselfieber")로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현대 의학으로 진단할 수 있는 것에 비해서는 충분한 정보가 되지 못하고 있다. 사인에 대한 학설 중에는 선모충병, 중독, 류머티스열, 덜 익힌 돼지고기에 의한 식중독 등이 있다. 환자의 피를 뽑았던 당시의 의술도 모차르트의 죽음을 앞당기는 데에 기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오전 0시 55분경에 죽었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 작품 레퀴엠의 완성을 여러 제자들에게 맡겼으나 끝내 완성시키지 못하다가 결국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가 완성시켰다. 모차르트가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 죽었다는 이야기와 달리, 그는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수입이 있었고 프라하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꾸준한 작곡 의뢰를 받았다. 그가 말년에 전성기 때만큼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으며 돈을 꿔 달라고 쓴 편지가 있지만, 이는 그가 가난해서가 아니라 번 돈보다 더 많이 썼기 때문이었다. 그 실례로 모차르트가 입은 옷은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의상이었다. 모차르트는 빈 외곽의 성, 마르크스 묘지에 묻혔다. New Groove에 따르면 그가 여러 사람과 함께 묻힌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가난해서가 아니라 당시 빈 중산층의 장례 풍습대로였다. 그것은 잘 정비된 묘지였으며 나무로 된 것이었으나 묘비도 있었다. 묘비가 나무였던 것 또한 당시 빈 중산층의 장례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 실제 당시 빈에서는 화려한 장례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장례식 날 비가 오고 천둥이 쳤다고 하나 New Groove에 따르면 사실은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이었다고 한다. 현재 모차르트의 무덤의 위치를 알 수 없는 것은 성 마르크스 묘지가 더 많은 묘지를 수용하기 위해 이장을 거듭하였기 때문이지 아무렇게나 묻었기 때문은 아니다.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남편이 죽은 후 추모 음악회, 미발표 작품의 출판 등으로 경제적으로 성공하였다. 1809년 그녀는 덴마크 출신 외교관이었던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과 재혼했다. 그들은 덴마크로 이주했다가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여생을 마감했다. 콘스탄체와 새 남편은 모두 모차르트에 대한 전기를 남겼다. 음악[편집]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작품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모차르트는 다작을 한 작곡가로, 오페라 약 27곡, 교향곡 약 67곡, 행진곡 약 31곡, 관현악용 무곡 약 45곡, 피아노 협주곡 약 42곡, 바이올린 협주곡 약 12곡, 회유곡 약 40곡, 그 외 독주곡, 교회용 성악곡, 실내악곡 칸타타, 미사곡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600 여곡을 작곡하였다. 그의 많은 작품이 그 당시에 있던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피아노 협주곡만큼은 모차르트 혼자서 발전시켜서 대중화했다. 모차르트는 미사곡을 포함한 종교 음악과 실내악곡, 그리고 디베르티멘토와 춤곡과 같은 가벼운 곡도 썼다. 주요 작품으로는 《교향곡 41번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돈 죠반니》, 《마술 피리》 등과, 최후의 작품인 《진혼곡》이 있다. 고전 음악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모차르트가 받은 영향[편집] 모차르트의 유년기는 궁정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 레오폴트의 교육으로 클라비어에 숙달하여 유럽 각지를 일찍부터 순회연주하였다. 당시 유럽의 각지에서는 여러 가지 새로운 양식적 시도가 있었으므로 모차르트의 여행은 그러한 새로운 예술적 동향에 직접 접할 기회를 부여받고 그의 창작능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처럼 그가 일찍부터 부친의 천재교육과 유럽의 연주여행에서 직접 체험하고 또한 받은 중요한 영향을 살펴보면 대강 알수 있다. 잘츠부르크 음악 - 어린 모차르트가 출생지에서 받은 영향은 그의 예술적 소질을 형성하였다. 잘츠부르크의 음악은 결코 깊이가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우아함이 감도는 경쾌감이 특징으로서, 이 지방의 작곡가 에이베를린이나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 미하엘 하이든의 음악에 기조를 이룩하기도 했다. 파리의 음악 - 1763년에서 1764년, 파리에서 알게 된 요제프 슈베르트, 에카르트(Eccard), 르그랑(Legrand)의 영향을 받아 당시 파리를 휩쓸던 우아하고 경쾌한 클라브생 음악에서 감명을 받았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 1764-5년의 영국 체재 중, 대 바흐의 막내아들 크리스티안의 교향곡에서 배운 바가 많았다. 이시기 쳄발로 소나타로 곡을 편곡한 쳄발로 협주곡 3곡을 작곡하였다. 이탈리아 음악 - 1770년의 이탈리아 여행 중, 마르티니 신부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아 엄격한 대위법 음악에 대한 흥미를 더하였다. 전(前)고전파의 작곡가들 - 1773년 여름의 빈 여행에서 하이든, 바겐자일, 몬 등의 견고한 구성미의 음악에 결정적인 자극을 받아 독일 음악을 재인식하였다. 갤런트 양식 - 미하엘 하이든의 우아한 작풍에 감명을 받고 모차르트의 선천적인 음악적 기질과도 어울려 우아한 표현이 개화하였다. 미하엘곡의 작품 중에는 쾨헬목록에 잘못 포함되어있는 곡도 있다. 요제프 하이든 - 모차르트가 1781년 빈에 정착한 뒤부터 직접적인 교류에 의하여 한층 그 유대가 강해졌으며 그는 1782-1785년에 걸쳐 작곡한 6곡의 현악 4중주곡 을 하이든에게 바쳐 감사를 표하였다. 후세에 준 영향[편집] 그는 감정과 감각이 극도로 예민하여 당시의 각종 음악 양식을 부드러운 태도로 흡수, 여기에 개성의 심오한 특성을 반영하여 독일 고전주의 음악의 정수를 표현함으로써 후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의 교향곡은 그 개성적인 창작이 베토벤에게 이어졌고, 가극은 베버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조아키노 로시니는 모차르트가 "천재성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만큼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음악가"라고 말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그의 제자 페르디난드 리스에게 자신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 의 1악장의 주제만큼 대단한 선율을 생각해낼 수 없다고 말했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에게 보내는 경의로 쓴 작품이 있는데, 마술 피리의 주제에 의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곡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위해 쓴 카덴자 등이 그것이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을 만나고 나서 그를 칭찬한 적이 있었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모차르트를 위해 《모차르티아나》를 썼으며, 구스타프 말러는 모차르트의 이름을 부르다 죽었다. 막스 레거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 《모차르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에 의한 것이다. 쾨헬 번호[편집] 모차르트의 작품을 정리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1862년 루트비히 폰 쾨헬에 의해서였다. 쾨헬은 쾨헬 번호에 따라 모차르트의 작품들을 정리했다. 일화[편집] 전설[편집] 모차르트는 전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작곡가이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가 남긴 레퀴엠이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는 것인데, 많은 작가들이 이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글을 썼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한 학자들의 연구에는 방해가 되는 것이다. 유명한 것은 모차르트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와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독을 먹여 죽였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연극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피터 섀퍼의 연극 《아마데우스》의 주제로 다뤄졌다. 《아마데우스》는 영화로 만들어져 여덟 개의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섀퍼의 연극에서 모차르트가 천박하고 촌스럽게 그려졌다 하여 이를 거짓 과장이라 비난하였다. 다른 전설은 모차르트의 음악적 천재성에 대한 것이다. 또한 영화《아마데우스》에서 그려진 것처럼 모차르트가 영감을 받아 머릿속에서 음악을 완성한 다음 한 번도 고치지 않고 써내려갔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한번에 거침없이 작곡하는 것이 아닌 신중하고 노력하는 작곡가였으며, 그의 음악적 지식과 기법은 오랜 시간 동안 이전 시대의 음악을 연구함으로써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 그는 젊은 시절에 당대 내려오던 작품들을 분석하지 않은 게 거의 없었다 할 정도로 엄청난 노력을 했으며, 한 편에서는 '표절의 천재'라는 비아냥과 오명에 대해 평생을 싸워야 했다고 한다. 프리메이슨[편집]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784년에 12월 14일에 프리메이슨 '자선' 지회에 가입하였고, 후에는 장인, 마스터 메이슨까지 되었다.[1] 다만, 당시에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한다는 것이 가입자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과시의 의미가 컸으므로, 친목 단체인 프리메이슨의 특성상 그리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돼지 저금통에 들어 있던 동전 논산읍 '할매해장국' - 국밥집 지할매 동전 "사랑의 의연금"... =======================================   처음 시를 배울 때 고쳐야 할 표현들  시 창작 초기에 나타나는 고쳐야 할 표현들  1. 피상적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때가 있다. 화폭에 산, 나무 들, 꽃, 하늘, 사람의 밑그림을 연필로 그려놓고, 나무는 고동색, 나뭇잎은 초록색, 하늘은 푸른색 이런 식으로 화폭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색칠을 해나간다. 아이들 머릿속에는 이미 선험적으로 얼굴은 살색, 머리는 까만 색 땅은 황토색으로 칠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  앞에 있는 나뭇잎 색깔이나 하늘의 변화하는 빛깔을 잘 관찰하면서 그리는 아이는 별로 없다. 그렇게 그려놓은 그림들은 그래서 늘 그게 그것 같고 새롭지 않다. 나무둥치에 고동색을 가득 칠해 놓은 아이에게 고동색 크레용을 들고 가 나무에 직접 대보게 하며 "어때, 색깔이 같니?" 하고 가르치는 선생님을 본 적이 있다.  사물의 모습을 직접 보고 자세히 관찰하며 피상적인 인식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 이것은 아마 예술 창작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추억을 실은 버스가 나의 마지막 종착역에 서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귓전에 들렸다. 서쪽하늘 가까이에서 실려오는 바다 내음을 맡으며 황금벌판 풍요로움에 홀쭉한 고향길을 말없이 걷는다. 어린 시절이 벌판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속삭였던 숱한 언약들이 다시 귓전에 들려온다. 살아오면서 버려진 덧없는 것들이었지만 그때처럼 가슴 설레어 눈망울 적시었고 마음은 이미 바다와 들판 작은 마을 소박한 집들에 백지장처럼 깔려버렸다.  하얗게 깔린 백지장 위로 그리운 사연들이 써져 내려가고 낯설지 않은 이름들이 내 마음 호수에 돌을 던질 때마다 잔잔한 갈등을 일으킨다……  세월이 어느덧 흘러 밉던 얼굴마저 그리워져 모질게 내쫓았던 당신에게 다시 돌아온 것은 이곳이 나의 비둘기가 둥지를 틀고 파랑새가 날개짓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 「애착」  이 시는 고향에 다시 돌아오면서 느낀 생각들을 쓴 시이다. 그런데 고향에 대한 그의 인식은 어떠한가. '황금벌판 풍요로움~.' 그는 고향 벌판을 바라보며 황금 벌판이라고 말한다. 대단히 피상적이다. 오늘날 농촌의 실제 모습이 어떤가 하는 구체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고, 농촌의 모습을 이야기할 때면 으레 묘사하던 상투적인 관용어구를 그대로 따라 쓰고 있다. 이런 대상에 대한 피상적 인식의 흔적은 이 작품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작은 마을 소박한 집들', 이런 표현도 마찬가지이고, 고향을 '비둘기가 둥지를 틀고 파랑새가 날개짓하던 곳'이라고 묘사한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2. 상투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위의 시 '애착'에서 보는 것처럼, 삶 또는 대상에 대한 피상적 인식은 자연히 상투적인 표현으로 이어지게 된다.  '내 마음 호수에 돌을 던질 때마다~', 이런 구절 역시 그렇다. 마음을 호수에 비유하는 표현, 그 호수에 돌을 던진다는 표현 등은 너무 흔하게 쓰여온 표현이며, 따라서 전혀 새로운 느낌을 주지 못한다.  눈부신 밤거리  달빛 한 가닥 들어설 틈도 없다.  휘황한 불빛 속엔  검은 하늘 향해 벌린 하얀 살뿐이다.  아무 것이든 빨아들이는 불가사리 식욕  붉은 웃음은 잿빛 거리를 휘돌아 하늘에 퍼지고  현란히 부서지는 물결 속에  검은 세계는 찬란히 부상한다.  달이 떨어져 나무에 걸려 있다.  - 「밤거리」  이 시에 나오는 '붉은 웃음' '잿빛 거리' '검은 세계' '하얀 살' 등의 표현은 각각의 색깔이 갖고 있는 고정적인 이미지를 상투적으로 답습하면서 쓰고 있다. 밤거리의 풍경을 그리고 있지만, 어딘가 답답하다. 답답한 풍경을 통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잘 잡히지 않는다.  키스를 하고 돌아서자 밤이 깊었다  지구 위의 모든 입술들은 잠이 들었다  적막한 나의 키스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정호승 시인의 「키스에 대한 책임」이라는 시이다. 입맞춤을 하고 돌아서는 깊은 밤, 너는 눈물을 흘리는데 나의 키스, 나의 사랑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적막해지는 심정을 '적막해지는 나의 키스'라고 표현했다.  신선하지 않는가.  첫 키스의 느낌을 각자 한 번 시로 표현해 보자.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첫 키스의 느낌을 수식하는 말을 만들어 보자고 하면 '황홀한' '달콤한' '갑작스런' '아련한' '부끄러운' '잊지 못 할' '지워버리고 싶은' '감미로운' '떨리던' 등등의 말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표현들 중에 참신한 표현은 무엇일까. 잘 찾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용운 시인은 어떻게 표현했는가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는가. 지금부터 70여 년 전 그런 참신한 말로 표현했다. '날카로운'이란 형용사는 키스라는 말이 주는 느낌과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이다. 광물질적인 속성, 금속성 이런 이미지를 주는 말이다. 그러나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말이 결합하면서 '갑작스런' '충격적인' '강하게 다가온' '찌르듯이 내게 온' 이 모든 느낌이 함께 들어 있는 다양한 의미 공간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런 신선한 언어의 만남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낯설게 하기'라고 한다.  * 다음의 시를 보자  세상의 모든 아내들은  한 꽃에 꽃잎 같은 가족을 둘러 앉혀 놓고  지글지글 고깃근이라도 구울 때  소위 오르가슴이란 걸 느낀다는데  노릇노릇 구워지는 삼겹살  그것은 마치 중생대의 지층처럼  슬픔과 기쁨의 갖가지 화석을 층층히 켜켜로 머금고  낯뜨거운 오르가슴에 몸부림친다  그 환상적인 미각을 한 점 뜨겁게 음미할 새도 없이  식구들은 배불리 식사를 끝내고  삼겹살을 구워 먹은 뒤 폐허 같은 밥상은  ..........  헐거운 행주질 한 번으로도 절대 깨끗해지질 않는다  하얀 손등에 사막의 수맥 같은 파란 심줄을 세우고  힘주어 밥상을 닦는 아내의 마음속엔  수레국화 꽃다발 사방으로 흩어지고  - 「돼지」 중에서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의 모습을 무어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한 꽃에 꽃잎 같은 가족', 그렇게 표현했다. 비유가 신선하다. 돼지고기의 삼겹살을 보며 떠올린 '중생대의 지층' 그리고 '층층히 켜켜로 머금은 슬픔과 기쁨의 갖가지 화석', 이런 비유들은 이 시를 쓴 사람만이 본 독특하고 새로운 시적 발견이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돼지고기와 오르가슴을 연상시킨 비유에 이르기까지 이 시는 전혀 상투적인 데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시가 새로운 느낌을 준다.  3.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제대로 드러나야 한다  사람들은 돌아오고 흐느끼는 소리는 없었다  아무도 앓는 소리 듣지 못하고  나도 어딘가로부터 돌아왔다  피는 물 위를 기름처럼 흐르고  사람들은 원심분리기 속에서  제 무게 만큼의 속도로 흩어져 간다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유방들이  다가올 봄을 대비해  욕망을 충족시키고  수많은 옷가지들이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면 어느새 나는  벌거벗은 병정이 되어  거리를 간다  속이지 말라고 사람들은 외치고  그래도 나는 속인다  나는 속이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내가 죄를 벗어나는 길은  죄를 잊는 길밖에 없다  나의 원죄는 이토록 망각 앞에 무력하다  또한 그것은 종이 위에서 다소간의  위안을 찾기도 하지만  여전히 노란색 가로등에 뿌리는  외로운 빗줄기 옆에 있다  하염없이 달리는 차창가에  정면으로 달려오는 운명 앞에 있다  - 「갑자기 그러나 천천히」  이 시속의 시적 화자는 지금 죄 때문에 괴로워한다. 죄를 짓고도 그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속이고 있어야 하는 괴로움에 마치 벌거벗은 병정이 되어 거리를 가고 있는 듯한 부끄러움에 싸여 있다.  시적 화자가 그토록 괴로워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물론 알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를 쓴 사람이 이 시를 통해서 결국 무엇을 말하려 하고 있는지가 불명확한 데 있다.  1연 3행 '나도 어딘가로부터 돌아 왔다'는 것은 어디일까. 끝까지 읽어보아도 그곳이 어디인지는 나와 있지 않다.  2연에 와서 죄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한다는 이야기가 길게 전개된다. 그런데 18~19행 '그것은 종이 위에서 다소간의/ 위안을 찾기도' 한다고 말한다. 무슨 위안을 찾는다는 것일까. 그리고 21행 '외로운 빗줄기 옆에 있다'와  23행 '정면으로 달려오는 운명 앞에 있다'고 했는데, 무엇이 그 앞에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죄에 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끝 구절이기도 한 18행부터 23행까지는 역시 모호한 채로 던져져 있다. 2연 1행부터 7행까지는 이 시 속의 시적 자아가 서 있는 공간적 배경을 나타내는 것들인데, 죄의식을 느끼게 된 원인과 어떤 연관을 갖는다든가 아니면 상징적인 구실을 한다든가 하지 못하고 산만하게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주제를 향한 응집력도 부족할 뿐더러 '유방' '병정' '종이' '운명' 등의 시어들이 이해되지 않는 채 자꾸만 걸린다. 거기다 제목 「갑자기  그러나 천천히」는 시 전체 내용과 어떤 연관을 갖는 것인지 역시 알 수 없다.  또 다음과 같은 시를 한 편 더 보자.  이름보다 먼저 그대 귀를 찾았을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더한 부름으로 버거웠던지  유령처럼 스르르  가버렸다  - 「겨 드 랑 이 에 각 개 표 로 손 을 끼 워 넣 는 건 그 어 느 한 쪽 의 필 요 만 은 아 니 다」  이 시의 시적 자아는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버거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 버린 빈 공간에 서 있다. 이 시의 제목대로  '겨드랑이에 각개표로 손을 끼워 넣는' 것은 어느 한 쪽의 필요에서가 아니듯 서로 따뜻한 온기가 필요해 사랑했을 텐데 그냥 황망히 떠나 버린 것을 못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심정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제목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내용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고, 거기에다 원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더해서 한 편의 시로 자기 감정을 제대로 형상화하려는 노력이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겨드랑이~'로 시작되는 긴 제목이 새롭다는 느낌을 주기보다는 제목도 내용도 다 미완성으로 끝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는 시를 쓰면서 내가 지금이 시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표현하려고 하고 있는가 하고 되물어 보아야 한다. 다음 시는 어떤가 함께 읽어보자.  돌담은.....,  아닙니다.  어릴 땐 가지런한 층층에 끄덕머리 하다가, 흔들고 다시, 여물게 손가락질 하나 둘 헤다가, 마침내 올라서서 이쪽과  저쪽 세상 가운데를 걸으며 조심스레 팔저울도 했지요.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 저는 이미 많이 자라서 한여름 놀던 그 그늘, 한 겨울 고인 볕뉘와 속살거림, 모두 까닭 없었어요. 때로 생각이야 나지요. 가을이었어요 누군가 싸리비 하나 꺽어들고선 저 산 너머로 가라며 저를 자꾸 내쫒았어요.  가라면 간다며 그 길로 돌담 등지는데, 때깔 곱게 물든 단풍 숲 사이 바알간 노을이 깃들더니 이내 두 눈 가뭇가뭇 멀게 했어요.  그 후론 여기 이 바깥 세상에 쭉 살았지요. 어떤 날은 취해 밤낮을 바꾸고 또 어떤 날엔 싸우다 승리, 패배,  승리 패배 패배했어요, 삭신 다 닳은 세월 속절 없지만 아파서 제겐 더 살뜰한 기억이지요.  다만 잊을 수 없는 건  그 낮은 돌담. 웃자란 키로 들여다봅니다.  안팎으로 그늘과 속살거림 거느린 것이며, 자라지 못하는 속엣 것들 고즈넉이 품은 모양이며, 누군가 또 싸리비 꺾어 괜찮다고, 가라고, 사는 건 그렇게 등지는 거라며 저를 쫓아내는 것까지도 두고 올 적 그대로지만, 삶이란, 예전에 그랬듯, 홱 떠나는 것은 아니더군요.  ....안됐거든요.  저물 무렵  그 모든 게 노을 함께 지면  참 안돼 보이거든요.  이제 와서 저는  슬퍼할 밖에요.  - 「돌담」  많은 쉼표와 현실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실로 들락거리는 구성은 자칫 혼란스럽게 비쳐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 속에도 정연한 내적 질서가 있다. 돌담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유년기와 성장기, 세월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면서 아름답고 아프던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떠나기 싫던 우리들 근원적 삶의 터전과 그 터전을 떠나와 끊임없는 싸움을  되풀이하며 성장 해야하는 현실의 경계에 돌담이 있다. '괜찮다고, 가라고, 사는 건 그렇게 등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주제를 내포한 구절도 자연스럽게 시 속에 녹아 있고 우리 모두가 체험한 통과의례의 상징으로 '돌담'이 제 구실을 한다. 그러면서도 자꾸 되돌아 보여지는 유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성장시'로 손색이 없다. 전통적인 기법으로 표현하든 새로운 기법으로 그려내든, 문제는 한 편의 시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제대로 나타나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있는 것이다.  4. 관념성과 불필요한 난해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간다  무한한 공간 속으로  닫혀 있는 창을 열고  雨의 장막을 넘어  나는 간다  영원한 침묵 속으로  저자 거리의 소음을 뒤로 하고  검은 숲 오솔길을 걸어  나는 간다  절대의 고독 속으로  닫혀 있는 창 너머로  누구와도 아닌 홀로서  순수 이전으로 돌아간다.  - 「순수 이전으로」  a--a'--a" 형식으로 씌어진 이 시는 '나는 간다, 어디 어디로.' 의 기본 골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시적 화자인 내가 가는 곳은 '무한한 공간' '영원한 침묵' '절대의 고독' 속이다. 그곳을 작자는 순수 이전의 곳이라고 한다. 순수 이전의 곳, 그러니까 지금 순수한 곳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때묻지 않은 그 어떤 곳으로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순수 이전의 곳이라는 무한한 공간, 영원한 침묵, 절대의 고독 등은 대단히 관념적이다. 雨의 장막도 마찬가지다. '닫혀 있는 창을 열고' '저자 거리의 소음을 뒤로 하고' '누구와도 아닌 홀로서' 가는 길이라면 죽음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죽음의 세계는 절대 순수의 세계일까. 문제는 이 시의 시어들이 육화되지 않은 관념성에 빠져 있다는데 있다.  미지에의 두려움에 망설이며  되돌아갈 수 있는 줄 알았던 이 길이  그러나  길은 앞으로만 뚫려 있고  등 뒤엔 이미 수렁  나의 사색은 병약했으며  암흑에 가두었고  고통일 뿐이던 젊음  삶과의 치열한 투쟁  그러나 자신의 밀실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묶여 있던 감각 굳어 있는 뼈마디  나는 그것이 어둠인 줄도 몰랐었다.  - 「봄」 중에서  나약하던 자기의 밀실을 깨치고 나오는 어느 봄날의 기억에 대해 쓴 시이다. 이런 자각과 깨달음을 통해 역사를 알게  되었고 쓰러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이 시의 뒷부분에 이어진다. 그러나 어딘지 미더웁지 못한 데가  있다. 바로 지금 이 시에서 보는 것과 같은 육화되지 않은 언어들 때문이다. '사색' '병약' '암흑' '투쟁'  '밀실' '감각' 등의 관념적인 시어들은 삶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는 느낌보다는 삶과 언어가 따로따로 겉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5. 나약한 감상으로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시를 쓰는데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로 정서를 빼놓을 수 없다. 정서란 어떤 사물을 대하면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말한다.  러스킨은 사랑, 존경, 찬탄, 기쁨의 네 가지와 미움, 분노, 공포, 슬픔의 네 가지를 합쳐 '8대 정서'라 했다.  사람의 감정 중에 희, 로, 애, 락, 애, 오, 욕이 모두 시가 될 수 있고, 근본적으로는 지, 정, 의(知情)가 모두 시심의 밑바탕이 된다. 그 중에서 '정'이 정서가 되겠는데, 문제는 이런 감정 중 사랑 또는 이별 슬픔 외로움 등의 감정만이 시의 중요한 정서인 것처럼 편협하게 생각하는 태도이다.  문득 헤어져야 할 때를 생각해 보면  오늘의 이 기쁨이  영원할 것 같지만은 않다.  헤어짐을 전제로 하지 않은 만남이란 없고  만남 자체도  헤어짐이 있음으로써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너의 그림자가 사라져가는  버스 뒤꽁지의 창문을 쳐다보면  또 다시 쓸쓸해지는 어깨를 움찔하며  내일의 만남을 기약해 간다  어쩌다 이대로 헤어진다고 해도  다시 만날 것을 믿으며  어색하지만 반가운 너의 얼굴을  원 없이 쳐다볼 수는 있겠지  - 「사랑 그리고 그만큼의 아픔」 중에서  오늘은 갑자기  내가 너를 그리워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울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서글픔은 고동색 절망으로 흐르고  나란 존재는 정말 무엇일까 하는 생각만  그곳에 가득하다  네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리고 좋아한다고 고백한 적도 없다  그저 내 곁에만 있어 주면 좋았는데  오늘은  네가 곁에 있어도 허전하기만 하다  - 「서정시가 흐르는 화폭」  위의 시 '사랑 그리고~'는 만남의 기쁨과 헤어짐에 대한 불안함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원 없이 쳐다보고픈 마음을 담은 시다. 두 번째 시 '서정시가~'는 그리워하는 마음의 복잡함, 그 심리적 고통에 대해 쓰고 있다.  그런데 그리움을 우울한 슬픔으로 표현한 곳이라든지 서글픔을 고동색 절망이라고 표현한 부분 등은 앞에서 이야기한 삶 또는 사랑에 대한 피상적 인식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동색 절망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은 고동색과 관련이 있는 주관적 경험의 표현일 뿐 객관적인 공감을 얻지 못한다. 이렇게 되니까 5행의 '나란 존재는 정말 무엇일까' 하는 철학적 질문도 전혀 철학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감상적인 자문으로 들릴 뿐이다.  게다가 '오늘은 / 네가 곁에 있어도 허전하기만 하다'라든가 '헤어짐을 전제로 하지 않은 만남이란 없고' '다시 만날 것을 믿으며' 등은 류시화, 서정윤, 한용운의 시에서 많이 접했던 구절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는 서정 또는 정서에 대한 심적 반응이 나약한 감상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윈체스터는 문학의 정서적 효과에 대한 영원한 가치 평가의 항목으로 다음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정서의 공정 혹은 타당, 둘째 정서의 활기 혹은 힘, 셋째 정서의 계속 혹은 안정, 넷째 정서의 범위 혹은 변화, 정서의 등급 혹은 성질이 그것이다. 쉽게 말하면 그럴 만한 이유가 느껴지느냐, 생생한 생동감으로 살아 있느냐, 믿을 만한 힘이 느껴지느냐, 얼마만한 변화를 줄 수 있는 정서이냐, 정서다운 고상함이 있느냐 하는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그대 휘어지게 선 겨울 언 땅 서릿발로 동동거립니다  손을 내밀면 차가운 대기 속에서도 따스하게 전해오는 당신의 맥박  늘 푸른 서향나무로 차 오릅니다.  가늘게 실눈을 뜬 겨울햇살로 당신을 보면 당신은 언제나 쓸쓸한 쪽으로  눈을 주며 내게로 가만히 건너오십니다.  가슴 속 그윽한 강물들 거느리고  강물 위에 드리운 산그늘로 내 온몸을 담고 계신 당신  눈동자 속 엷게 비치는 눈물로 흔들립니다.  그대가 담고 있는 당신은 어느 적 당신의 사람이었기에  오늘은 이토록 당신의 말들을 잃게 합니까  당신의 그대에게 건너가야 할 처녀의 말들 저 눈발로 떠돌고 있는 산천  당신 금이 간 서릿발로 서러웁습니다.  - 「갈대 3」  작품 후반부의 그대와 당신의 혼용으로 인한 약간의 혼란스러움은 있지만, 자아 속의 초자아 또는 사랑하는 대상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그가 사랑하는 또 다른 사랑의 모습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체로 이 시의 정서는 잔잔하면서도 믿을만하게 느껴진다. 쓸쓸함과 서러움의 정조를 과장하거나 엄살 떨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가고 있는 잔잔한 서정의 울림이 있다.  6. 추상적인 표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런 놈끼리  저런 놈끼리  요런 놈끼리  끼리끼리 모여 사는 세상  작은 괄호로 묶고  큰 괄호로 묶고  묶고 묶다 보면 결국은 하나  하나라는 것을  이런 놈도  저런 놈도  요런 놈도  알고 있을까?  - 「하나로 살기」  시는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때 더 생동감이 있다.  이른바 객관적 상관물을 빌어 생생하게 그려갈 때 느낌이 더 살아난다. 이 시는 끼리끼리 집단 이기주의로 모여 살지 말고 하나되어 살아야 한다는 심정을 표현하려 한 시다. 만약에 다음과 같이 고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비교해 보자  모래알은 모래알끼리  조약돌은 조약돌끼리  버려진 돌들은 버려진 돌끼리  끼리끼리 모여 사는 세상  개울가에서 만나고  여울로 가다가 만나고  골짝을 넘는 구비구비에서 만나는  결국은 하나라는 것을  모래알도  조약돌도  버려진 돌들도  알고 있을까  조금은 더 생동감이 있을 것이다. 막연하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내용을 가질 때 시는 더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 '들에는 이름 없는 숱한 꽃들이 피어 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빽빽히 숲을 이루었다'라는 식의 표현보다는, 꽃 이름 나무 이름 새 이름이 적재 적소에 살아 있도록 표현한다면 시의 내용은 그만큼 더 풍부해질 것이다. 다만 진부한 느낌이 들거나 설명적이지 않도록 하는 세심한 주의도 있어야 한다. 자칫하면 상상력의 공간이 그만큼 줄어 들 수도 있고, 시의 중요한 장점 중의 하나인 다의적 해석의 공간이 그만큼 좁아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7. 사실에 맞게 표현해야 한다  시를 쓰다 보면 욕심이 나게 마련이다. 더 잘 표현하고 싶고, 더 적절한 비유를 만들어 보고 싶고, 새롭고 신선한 느낌이 들도록 하기 위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부분을 상상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새로운 것을 찾아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혀 사실과 다르게 표현해 놓는 경우가 있다.  성장이라는 단어의 배를 갈라 내장을 뒤져볼까  그 속 어딘 가엔 분명 숱한 만남과 헤어짐을 주선하는  장기라도 있을까  만남 우혈관과 헤어짐의 좌혈관의 혈액이 감미로운  리듬에 따라 춤을 추다가 혹  장애라도 일으켜 좌충우돌로 뒤범벅되진 않을까  - 「자라기 위한 수술 준비」  이 시는 우리가 성장하면서 겪는 고통의 원인이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데서 착안하여 성장 과정과 관련한 정신적인 개념들을 육체의 일부분과 결합해보는 기발한 착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몸에 좌심방 우심실 이런 이름은 있어도 좌혈관 우혈관은 없다. 상상력의 자유로운 전개는 얼마든지 좋지만, 부정확하거나 논리적 모순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런 한 부분의 오류가 시 전체의 결정적인 결함이 될 수 있기 대문이다.  앞에서 살펴 본 시 중에 이런 부분도 마찬가지다  피는 물 위를 기름처럼 흐르고  사람들은 원심분리기 속에서  제 무게만큼의 속도로 흩어져 간다  피는 물 위를 정말 기름처럼 흐를까? 물과 기름은 서로 겉돌지만, 피와 물은 그렇지 않다. 얼마든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시이지만 사실에 맞지 않게 표현해서는 안될 것이다.  ================================================================================     밤눈 ―김광규(1941∼ ) 겨울밤 노천 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처음부터 시는 춥고 난감한 상황에서 시작한다. 때는 겨울밤이고 장소는 노천 역이다. 사방이 트여 바람이 몰아치는데 불행히 눈까지 내린다. 역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언 발을 동동거리지만 전동차는 쉽게 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추운 때, 시인은 춥다고 말하지 않았다. 점점 더 추워질 때, 시인은 아프고 힘들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가난한 온기가 서로 만난다면 따듯한 우리가 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추운 한 사람은 겨우 ‘추운 한 사람’이 아니라 ‘온기가 될 수 있는 한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이 시는 착한 시다.      가장 추운 곳에서 만난 추위는 고난이지만, 그것은 때때로 타인과 나를 단단하게 연결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한 사실을 이 시로부터 건네 들으면, 적어도 몇 밤의 추위는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시는 참 고마운 시다.       길고 긴 밤, 동지가 지나니 성탄절이 다가온다. 이날은 아주 오래전, 아기 예수가 태어난 생일이라고 한다.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도, 문화적으로 알고만 있는 사람에게도, 달력의 성탄절은 동일하게 찾아온다. 크리스마스라고 부르든, 성탄제라고 부르든, 휴일이라고 부르든 간에 세상의 성탄절은 공평하게 지나간다.   사실 우리는 무슨 핑계라도 대고 싶은 것이다. 날을 정해놓고 사랑을 생각해야만 하는 날. 적어도 하루만큼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해 주고 싶은 날. 온기가 한기를 이길 수 있다고 믿어도 되는 날. 그런 날을 억지로라도 달력에 그려놓고 싶은 것이다.   이런 곱고 거룩한 핑계 때문에 이 시는 이번 주말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이 된다. 나를 사랑하는 나를 잊고, 너를 사랑하는 나를 되찾기. 이것이 바로 이 시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바로 성탄제의 주제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95    [시문학소사전] - "판도라의 상자"란?... 댓글:  조회:3623  추천:0  2017-01-03
        삼아(三亚) 남산(南山) 풍경구에서ㅡ 판도라의 상자(Pandora's box)는 판도라가 열지 말라는 뚜껑을 열었더니 그 속에서 온갖 재앙과 재악이 뛰쳐나와 세상에 퍼지고, 상자 속에는 희망만이 남았다는 그리스 신화의 상자이다. 뜻밖의 재앙의 근원을 말하기도 한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태초의 세상에, 제우스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불러 여자인간을 만들라고 했고, 판도라라는 여자인간이 탄생하였다. 제우스는 판도라의 탄생을 축하하며 상자를 주었고,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경고를 주었다. 판도라는 신 프로메테우스의 동생과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어느 날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결국 상자를 열고 만다. 그 상자안에는 온갖 욕심, 질투, 시기, 각종 질병 등이 담겨 있었으며, 이것들은 판도라가 상자를 여는 순간 빠져나와 세상 곳곳으로 퍼졌다. 평화로웠던 세상은 금세 험악해지고 말았다. 판도라는 깜짝 놀라 급하게 상자를 닫았으나 상자 안의 나쁜 것들은 이미 전부 빠져나온 뒤였다. 그러나 그 안에 있었던 희망은 빠져나가지 않아서, 사람들은 상자에서 빠져나온 악들이 자신을 괴롭혀도 희망만은 절대 잃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판도라의 항아리'라고 한다고 한다. 번역을 잘못해서, '판도라의 상자'라고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에서(205페이지)는, 이렇게 나온다. 판도라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모든 선물을 받은 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의 뜻을 거역하고 인간들에게 불을 훔쳐다 주자 그 대가로 인간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하였다. 그는, 헤파이스토스(기술.공예자이자 대장장이)에게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헤파이스토스가 여자를 빚어내자 다른 신들은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저마다 여자에게 선물을 주거나 자기가 지닌 재능울 불어 넣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단박에 판도라가 겉보기엔 너무나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마음속에는 거짓을 품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에피메테우스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홀짝, 반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이때, 제우스는 그들 부부에게 결혼 선물로 상자 하나를 주었다. 그러면서, "이 상자를 받아서 안전한 곳에 고이 간직하거라. 하지만, 미리 일러두건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것을 열어 보면 안 된다."라고 말하였다. 에피메테우스는, 사랑에 흠뻑 빠진 나머지 제우스가 주는 선물을 받지말라는 프로메테우스의 경고를 잊고 상자를 받아 집 한구석에 숨겨 두었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판도라는 상자 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였고 에피메테우스를 졸랐다. 그러나, 에피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다며 완고하게 거절하였다.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가 나가고 없는 사이에 상자를 열었다. 상자를 열자, 증오, 질투, 잔인성, 분노, 굶주림, 가난, 고통, 질병, 노화 등 장차 인간이 겪게 될 온갖 재앙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마지막, 상자에 남은 것은 '희망'이었다. 그 뒤로, 인간들은 갖가지 불행에 시달리면서도 희망만은 고이고이 간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글은 그리스 신화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               만악의 근원 그 자체   제우스가 판도라에게 딸려서 인간세계에 내려보낸 상자. 만물이 창조될 때 생명들에게 줄 선물들을 모두 동물들에게 줘버려서 신들에게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를 증오한 제우스가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아내로 삼으라며 판도라를 선물했다.제우스가 자신을 증오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프로메테우스는 동생에게 아무 선물도 받지 말라고 했지만 판도라가 너무 아름다워 받아버린 것. 나중에 제우스는 상자를 하나 주며 '절대 열지 말라'고 했는데 판도라는 너무 궁금해서 몸이 쇠약해질 정도가 되었고 결국 상자를 열어버리고 말았다. 말이야 인간에게 줄 선물이라고 하였지만 그 상자 안에는 인간세계를 이간질시키고 재앙을 불러오는 요소로 가득했고 놀란 판도라가 상자를 닫았을 때는 어째서인지 희망만이 남겨져 있었다.   판도라에 관한 최초의 언급이 나타나는 서사시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이다. 다만 여기에선 여성의 존재 자체가 재앙이고 그 전의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인간은 전부 남성들 뿐이었다고 한다. 이게 보다 구체화된 것은 헤시오도스의 다른 서사시인 "일과 날들"인데, 여기에서 비로소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어서 질병을 위시한 수많은 재앙이 풀려났다고 되어 있다.   판도라의 상자라는 말은 실은 '오역'이다. 16세기에 신통기를 라틴어로 번역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큰 항아리를 의미하는 그리스 어 Pithos를 라틴 어로 상자라는 뜻인 pyxis로 번역했고 이게 널리 퍼진 것이다.     • 왜 재앙이 가득한 상자에 희망같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 들어 있었는가에 대해선 여러가지 이야기가 많이 있다만 정설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일들과 날들"에선 남아 있는 희망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간이 가지는 쓸데없는 희망',즉 헛된 희망이라는 마지막 재앙이라고 하고,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어딘가에서는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나오지 못하고 갇혀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즉"미래가 보이지 않음으로써 인간은 절망적인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라는 이야기이다. 어떤 버전에선 "그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수많은 재앙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믿으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라는 정반대의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나다니엘 호손의 "아이들의 나라"에서는, 그나마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제우스로 생각되는 사람이 인간들이 어떠한 재앙이 있어도 이겨낼 수 있도록 재앙들 사이에 희망을 넣어 둔 것이라는 희망찬 버전도 있다. 이 버전의 경우는 판도라가 상자를 다시 닫지 않거나, 서둘러 상자를 닫았지만 상자 속에 자신이 남아있다는 희망의 말에 판도라가 다시 상자를 열어 희망이 세상에 나갈 수 있게 한다. 여기서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림으로서 계절의 변화와 인간의 노화가 시작되었다고 처리한다.   •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에는 희망에 관한 괴테의 해석이 나오는데 괴테는 희망에 대해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는 것으로서 희망은 악인 것이다'라는 해석을 하였다. 즉, 희망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현재를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현재를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힘든 삶을 통해서 미래를 대비하나 미래에도 더 먼 미래를 위해 고통스런 삶을 살다 죽고 만다는 의미이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악과 선을 담은 항아리라는 표현은 더 오래 전부터 있었다.호머의 일리아드에도 그러한 묘사가 나온다.   이 세상의 모든 축복을 담은 항아리로 묘사되는 이야기도 있는데, (기원전 6세기의 애가 시인 메가라의 테오그니스, 기원 후 2세기의 우화작가인 바브리우스) 이는 헤시오토스 이전의 판본이며, 여기서는 신들이 모든 축복을 담은 항아리를 인간에게 주었지만 어리석은 자(판도라가 아님)가 항아리를 여는 바람에 그 안에 들어 있던 모든 축복이 달아났고 희망만이 남았다고 한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는 크리스틴 다에가 팬텀의 가면을 벗겨내자 팬텀이 크리스틴에게 "저주한다, 이 몰래 훔쳐보는 판도라!(Damn you, you little prying Pandora!)"라고 소리친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가면을 벗긴 크리스틴을 판도라에 비유한 것.     갓 오브 워 시리즈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비디오 게임인 갓 오브 워에서도 등장한다. 극중에서는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의 손길을 거쳐 만들어졌으며, 때문에 만큼 파괴가 거의 불가능할만큼 견고하다.   신화에서의 설정을 본따와서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온갖 악한 감정과 재앙을 거두어 봉인해놓은 상자이다. 그러나 신화에서 처럼 인간들에게 재앙을 내리기 위해 만든 물건이 아니라, 신들의 권위에 도전할 위험성이 있는 것들을 봉인한 물건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점이 있다.   제우스가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상자를 만든 후에 그 내부에 사악한 것들을 봉인한 후, 아테나가 사악한 기운을 억누르기 위한 목적으로 궁극적인 힘인 희망을 함께 상자 속에 넣었다. 이 상자에 봉인된 힘은 곧 전지전능한 힘이자 신을 죽일 수 있는 힘으로 묘사된다.   한편, 헤파이스토스는 이 상자를 인간이 손만 대도 목숨을 잃게 되는 올림푸스의 성화 내부에 보관하려 하였으며, 필요할 때에 스스로를 소멸하여 성화를 끄고 상자를 열 수 있게 하는 열쇠 역할의 판도라도 창조하였다. 그러나 판도라를 자신의 자식처럼 아꼈기 때문에 제우스에게 이 사실을 숨겼다.   때문에 제우스는 재앙과 악한 감정을 이 상자에 봉인한 후에 올림푸스의 성화가 아닌 황무지로 추방시켰던 크로노스의 등에 쇠사슬로 메단 바위 사원 내부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갓 오브 워 1편에서 아레스를 죽일 힘이 필요했던 주인공 크레토스가 기어코 상자를 열어 신을 죽일 수 있는 힘을 얻었고 아레스를 살해하는데 성공한다.   그 후 3편에서 제우스를 죽일수 있는 희망이 있는 상자를 크레토스가 판도라를 희생시키면서 까지 다시 찾아내었지만 상자 안은 비어있었다. 덕분에 그걸 본 제우스는 크레토스의 희생이 모두 헛된것 이었다고 비웃었고 크레토스는 분노 상태로 제우스와 최종전을 벌인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으니....   사실 희망은 크레토스 몸안에 있었다! 1편에서 아레스를 죽이기 위해 상자를 열어서 힘을 얻었고 그리고 그 힘을 3편까지 무의식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 마침내 그걸을 깨달은 크레토스는 결국 각성하여 결국 제우스를 죽이기 성공한다.         =====================   제우스 = 올림포스 최고의 신 ( Zeus = ruler of Olympos )   올림포스 산의 주신으로 신과 인간의 아버지로 불립나다. 자연의 모든 현상을 주재하고, 인간 사회의 정치, 법률, 도덕을 관장하는 존재이니 가장 강력한 최고의 신이라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질서의 감시자, 제우스 신과 인간의 지배자로서 제우스는 바람과 구름, 비, 천둥, 번개 등 모든 자연의 변화를 주관한다.  그는 좋은 날씨를 보내주어 인간에게 풍요와 평화를 주기도 하지만, 인간세상이 복잡해지거나 인간들이 타락해지면 홍수와 가뭄을 내려 벌을 가하기도 한다.   제우스는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욕심을 내어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제우스는 자연의 질서를 혼란케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엄정한 처벌을 내렸으며, 또한 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오만한 인간의 오만함에는 용서가 없었다.   :: 제우스의 연인들   제우스는 천하의 바람둥이로 묘사되고 있는데 수많은 여신들과 요정들을 유혹했고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제우스의 바람기에 애를 태우던 헤라는 그 때문에 질투의 여신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였다. 또한 여성의 결혼생활을 지키는 신이기도 했습니다.   신화나 전설에서는 남편 제우스의 연인이나 그 자식들을 질투하고 박해하는 여신으로 좋지 않은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기도 하고,  제우스와 여신 헤라가 부부싸움을 하면 하늘에서 큰 폭풍이 일어난다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재밌는것은 헤라는 제우스의 누이이자 세번째 부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경제, 시사 용어를 하나씩 같이 배우다 보면 거의다 용어들은 영어이고,,,, 각종 경제현상이나 사회현상을 표현하는 말들이 그리스신화에서 유래된것이 꽤 많습니다. 단어의 유래와 뜻을 알고 내용을 접하면 이해도 쉽고, 어떤 느낌이나 이미지, 표현하고 하는 말뜻을 정확히 간파해낼 수 있습니다.   오늘 언급한 제우스는 쉽게 가장 강력한 신입니다. 그러다보니 성능이 좋은 제품의 제품명이라던지, 최고의 운동선수를 지칭하거나, 또는 모든것을 제공한다는 서비스명 등에서 봤었네 하는 생각이 드실겁니다. 마찬가지로,,, 유명 회사의 여성 화장품 브랜드명인 헤라도 이런 유래를 알고 보시면 그 화장품의 이미지도 떠오르시겠죠!   작은 하나라도 알고나시면 관점이나 생각을 경제에 맞춰 보는 습관을 갖으세요... 성공의 지름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판도라의 상자가 있으시거나, 판도라의 상자에 담아두는게 있나요?           
94    [시문학소사전] - "판도라"란?... 댓글:  조회:3734  추천:0  2017-01-03
요약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초의 여자.   불의 신이며 뛰어난 책략가인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의 나라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자, 주신 제우스는 이 축복에 맞먹는 불행을 주기로 한다. 그래서 제우스는 불의 신이며 장인들의 수호신인 헤파이스토스에게 부탁해 흙으로 여자를 빚게 했고, 신들은 이 여자에게 자신들이 고른 가장 좋은 선물들을 주었다. 판도라는 온갖 고통과 악이 들어 있는 단지('판도라의 상자')를 갖게 된다. 제우스는 판도라를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냈는데 그는 형제인 프로메테우스의 경고를 잊어버리고 판도라를 아내로 삼는다. 나중에 판도라는 그 단지를 열었으며, 그 안에서 악들이 나와서 땅 위에 퍼졌다. 다른 설에 의하면 '희망'만은 빠져 나가기 전에 뚜껑을 닫았기 때문에 안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뒤에 나온 이야기에 따르면 그 단지에는 악이 아니라 축복들이 들어 있었는데, 인간은 스스로의 호기심 때문에 그것을 열게 되어 인류를 위해 보존될 수도 있었을 축복들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   판도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줄 조셉 르페브르의 1882년 作 〈판도라〉 판도라(Pandora)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초의 여성으로, 판도라의 상자는 인류의 불행과 희망의 시작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신화[원본 편집] 그리스 신화에서 판도라는 최초의 여성으로서 지상으로 내려가기전에 신과 여신들로부터 선물들을 받게 된다. 그녀는 제우스에게서 판도라의 상자를 받았는데, 상자와 더불어 절대 그 상자를 열지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판도라라는 이름은 '모든 선물을 받은 여인'으로, 신들이 그녀에게 선물을 준데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판도라는 사실 프로메테우스를 비롯한 인간들이 불을 훔친것에 대해 화가난 제우스의 또다른 벌이었다. (제우스는 이미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묶어두고 독수리로 하여금 그의 간을 쪼아먹도록 하는 벌을 내렸다.)후에 지상에 내려와 판도라는 프로메테우스의 아우인 에피메테우스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결혼생활 도중 결국 호기심을 이겨내지 못한 판도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고 그속에 있던 모든 질병, 슬픔, 가난, 전쟁, 증오등의 모든 악이 쏟아져나왔다. 놀란 판도라는 상자를 닫았고 맨밑에 있던 '희망'만이 상자에 남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인간들은 힘든 일을 많이 겪게되었지만 희망만은 잃지 않게 되었다.항아리에 남은 희망은 어떤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이지만 불행속에서 이루어지지않는 것을 원하는 헛된 희망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 ====================    ]       [ 2017년 01월 04일 03시 47분 ]     ‘롱구공소녀’로 유명한 첸홍연(钱红艳) - 장애인 수영선수로 발탁... 편벽한 벽촌 운남성 루량현(云南省 陆良县)에서...  
93    시문학이 이땅에서의 생존의 길, 그것은 곧 "사랑"과 "고뇌". 댓글:  조회:3009  추천:0  2017-01-02
  감동적인 사랑 詩를 찾아서 /이승하 1  세계 시문학사는 어찌 보면 연애시의 역사이다. 동서의 어디를 보아도 연애시가 씌어지지 않았던 나라가 없었고, 고금의 어디를 보아도 연애시가 씌어지지 않았던 시대가 없었다. 2600년 전 희랍의 서정시인 사포의 작품은 거의 전부가 염정가(艶情歌)이다. 이성에 대한 광적인 사랑이 초래한 질투와 배신과 증오가 그녀 시의 주된 테마였다. 기원전 11세기부터 500년 동안 중국 각지에서 불려진 민요를 모은 『詩經』을 봐도 태반이 이성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이다. 사랑이 주는 달콤한 맛을 감미롭게 노래한 남성 화자의 시 와 어떤 난관이 닥쳐도 사랑을 성취하겠다는 당찬 여성 화자의 시 은 그 옛날 중국인의 연애감정이나 오늘 우리의 연애감정이나 별 차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워즈워드, 바이런, 마야코프스키, 네루다, 김소월, 서정주……. 위대한 시인은 모두 주옥 같은 연애시를 남겼다.  우리 나라의 경우 최초의 서정시 는 실연의 비애를, 고조선 시대의 는 님을 잃은 슬픔을 담은 시이다. 유리왕이나 백수광부의 처나 잃어버린 사랑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했기에 시를 남겼다. 조선조 초기 성리학자들에게 남녀상열지사라고 욕을 먹은 고려가요와 조선의 명기 황진이의 시조는 이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노래함으로써 우리 고전문학의 백미가 되었다. 사랑이야말로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일진대 어느 시인인들 연애시를 쓰고 싶지 않을 것인가. 특히 이른바 ‘베스트셀러’ 시집은 연애시 일색이다. 시인이 읊조리는 사랑노래에 아직은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 수십 판을 찍는 시집이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지금 우리 시단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정통문학권(혹은 순수문학권?) 시인들의 시를 몇 편 읽어보며 이 땅에 그려지는 사랑의 풍속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2  사랑은  눈 멀고  귀 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 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 부분  연애시의 대종은 뭐니뭐니 해도 이성에 대한 그리움을 솔직히 토로하는 것이다. 허영자는 사랑이야말로 모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Love is blind.”라는 서양의 명언에서 시작하는 이 시를 통해 시인은 이기적인 사랑과 이타적인 사랑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이기적인 사랑은 우리의 눈과 귀를 멀게 하겠지만 이타적인 사랑은 그렇지 않다고, 남을 배려하는 사랑을 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눈이 뜨이고 귀가 열려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될 수 있다고 설파한다. 하염없이 기다리고 한없이 베푸는 고전적인 사랑법을 두고 시대에 맞지 않는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욕할 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랴.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을 꿈꾸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영원을 가능하게 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태어나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겠는가. 사랑은 또한 동물에 불과한 인간을 사고하는 인간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는 유치환의 시구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 그 자체에서 환희와 보람을 느끼는 플라토닉 러브에 대한 예찬을 허영자 시인은 이 시에서 하고 있다. 이성에 대한 정신적인 사랑은 충분히 ‘별이 되는 일’이지만 이런 사랑은 사실 실체가 확연히 잡히지가 않는다. 그래서 감동이 약화될 수 있는데, 허영자의 다른 시를 보자.  가만히/바라보리라//原始의 숲에 타는/野性의 불길//황홀히/너를 사를 때까지//새까만 숯으로/태울 때까지.(에서)  잠들 줄 모르는 그리움/출렁이는 관능이여/네 영혼과/육신의/끝없는 갈증이/마침내/천 길 벼랑에 이마를 짓찧고/희디흰 포말로 부서지는/마조히즘의 결정이여.( 전문)  이 세상 끝끝머리/그 어디메쯤서/흔들리고 있다 해도/장님처럼 나는 더듬어 갈 수 있으리니/蜜蠟의 살갗에 물결이 이는/내 觸角이 아는 비밀(에서)  이런 시편에서 시인이 보여주는 러브 신은 별이 되는 막연한 그리움과는 다르다. 가슴에 담아둔 사랑도 사랑이지만 내 몸으로 확인한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실현 불가능한 음란한 사랑을 꿈꾸며 너를 사르고 싶어했지만 정작 타오른 것은 화자의 몸이었다(). 이 세상에는 학대받기를 원하는 이상 성욕도 분명히 있으며(), 살갗에 가 닿은 나의 촉각으로 기억하는 육욕적인 사랑도 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의 실체가 아니겠냐고 시인은 역설한다. 그렇다, 사랑은 실천하는 것이다.  비 온 뒤에 무지개 서고  사랑하는 일  죄도 서러움도 안 되는 땅  정다운 어루만짐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금빛 찬란한  열매를 맺는  위대한 어머니가 되고 싶다.  ― 부분  죄도 서러움도 되지 않는 사랑이란 이성간의 사랑이 아니라 혈육간의 사랑이다. 모성을 실천할 꿈을 꾸는 것도 사랑을 전제로 한 것임에 틀림없다. 잉태의 과정이야 어떠했든 ‘따뜻한 땅’인 모태에서 자라난 생명이 바깥세상으로 나오기만 하면 정다운 어루만짐과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키우겠다고 결심하는 것, 바로 사랑의 창조가 아니고 무엇이랴. 허영자는 이처럼 사랑이란 수많은 색깔을 갖고 있는 일종의 스펙트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일근은 『처용의 도시』와 『경주 남산』에서 천상의 사랑, 혹은 천년의 사랑을 노래하였다. 사랑이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 수 있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고 그는 역설하였다. 믿어지지 않는 사랑, 그러나 시인이기에 응당 꿈꾸어 보아야 할 사랑. 현실에서도 사랑은 얼마든지 국경과 인종과 연령을 초월하게 하지 않는가.  여름에는 가뭄이 겨울에는 장마가 계속됐다  마침내 나라의 모든 슬픔의 우물 말라  한 남자의 죽음이 한 여자를 거둘 때  감은사 쌍탑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았다  삶과 죽음이 한 몸이 되는 것을 보았다  ― 부분  경주 남산 머리 위로 보름달이 뜨는 저녁  사랑, 그 아름다운 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우리 약속을 보라  우주의 모래알 같은 작은 지구에서  육계육천 우주를 환히 비추는 우리 사랑을 보라  ― 부분  오십육억 칠천만 년, 멀고 먼 윤회의 바다 다 건너가서라도 그리운 그대가 내 이름 부른다면 사랑의 원을 그리며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아름다운 약속, 어느 별 어느 하늘에서 그대가 내 이름 부른다면 불타는 혜성이 되어 돌아오는 약속이 있습니다.  ― 부분  감은사 쌍탑이 그렇듯이 삶과 죽음이 한 몸이 되는 사랑이나 육계육천 우주를 환히 비추는 사랑, 그리고 오십육억 칠천만 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려 이루는 사랑도 시인이 다루기에 불가능한 것이 아니리라.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니까. 하지만 ‘사랑’이라는 추상명사가 너무나 먼 공간과 긴 시간을 사이에 두고 떠다니고 있어 도무지 현실감이 와 닿지 않는 것을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 누가 누구를, 어디가 좋아서, 어떤 과정을 거쳐 사랑했는지 그 중요한 이야기가 다 생략되어 있어 고개를 자꾸만 갸웃거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과 조부님이 했던 ‘사랑의 기교’를 시인은 연작을 통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오히려 이런 시가 한결 진정성을 느끼게 한다.  마루 끝에 걸터앉은 아버지는 말이 없다. 저녁햇살에 길어진 감나무 그림자가 그 곁에 눕고 댓돌 위에는 가을하늘처럼 맑은 옥색 고무신 한 켤레가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어머니 낮은 목소리 사이 가끔씩 낯선 울음소리가 흘러나와 안방 문풍지를 적시고 툭툭 할머니의 타이르는 소리 무겁게 새어나왔다.(…) 아버지는 돌아앉아 말이 없었지만 어둠 속에서도 견고한 어깨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 부분  무슨 사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시적 화자의 아버지는 바람을 피워 옥색 고무신을 신은 ‘그 여자’를 집에까지 데려온 것이리라. 아버지는 그 여자와의 사랑을 원했지만 할머니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고, 결국 아버지는 그 여자를 단념하기로 마음먹는다. 나 자신의 체험일 수도 있고 이웃집 친구네 집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아버지 세대의 러브 스토리가 참으로 잔잔히 전개되어 감동을 주는 시이다. 이 시의 마지막 문장에는 아버지의 이루어지지 못한 로맨스에 대한 아들의 안타까움까지 배어 있다. “마흔 고개 힘겹게 넘어 출산한 장모 문안 가던 젊은 서른 사위”의 이야기를 펼쳐놓은 는 또 어떠한가.  가물치 한 마리 짚으로 꿰어들고 경남 양산군 하북면 삼감리로 걸어가는 키 큰 고모부 모습 나도 보이네. 산후조리하고 있던 할머니의 민망한 마음 보이네. (…) 금줄 친 사립문 밖에서 백년손님 맏사위 멋쩍게 맞으며 신라 와당의 얼굴로 웃는 할아버지 젊은 웃음소리 듣네. 아직도 살아 푸드덕거리는 가물치 소리 생생히 들려오네.  ― 부분  이 시에는 느낄 수 있는 사랑은 일가붙이 사이의 사랑, 즉 시로써 다루기가 결코 쉽지 않은 사랑이다. 시적 화자의 고무부가, 출산을 한 장모한테 축하를 해주러 가물치를 사 들고 갔으니 이 아니 쑥스러운 일인가. 그런데 다들 웃고 있다. 고모부는 선한 눈가 웃음을 웃고, 할머니는 민망한 얼굴로 미소짓고, 할아버지는 신라 와당의 얼굴로 크게 웃는다. 독자도 씩, 웃게 된다. 이 세 사람 사이의 사랑은 세상 그 무엇보다 고결한 것이라 독자는 감동의 물살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젊은 시인들이 초스피드의 이 시대에, 쉽게 부딪치고 크게 상처받는 사랑법을 노래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나는 앞선 세대 사람들이 했던 이런 식의 사랑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흑백 사진 속에 숨어 있는 그들의 사랑법을 공개한 시인의 기억력에도 박수를 보낸다. “운명의 목덜미를 잡아 흔들어 달아나기에는 늦은, 반음 늦은 60년대의 사랑법”()이 나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 어찌 필자의 나이 때문이랴. 누구나 하는 첫사랑, 인간의 보편적인 그 사랑의 체험을 진솔하게 그려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정일근의 연애시는 고색창연하다. 신라를 무대로 한 연애시는 형이상학적이면서 추상적이고, 연작은 유년기의 추억을 더듬고 있어 회고적이면서 구체적이다.  정일근의 연애시와 극단적으로 다른 시가 김신용의 연애시일 것이다. 천상의 연애시가 아니라 공사장과 선술집과 창녀촌의 연애시이며, 천년의 연애시가 아니라 그날 벌어 그날 먹는 하루살이들의 노래이다. 하염없이 기다리고 한없이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살과 살의, 성기와 성기의 사랑이다. 김신용이 그린 사랑은 형이하학적인 사랑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외시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  발가벗어야 한다.  저기 시멘트의 벌판, 불모의 땅이 보이지. 네 풀씨의 넋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모든 버려진 것을 사랑해야 한다. 남들이 먹고 걷어차 버린 깡통처럼  쭈그러진 여인의 성기까지.  ― 부분  이 시의 제1연은 “그때 그가 나타났어, 마치 幻影처럼”이다. 화자는 대합실 구석에서 걸레처럼 구겨 박혀 굶주려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가 나타나, “쓰레기통을 뒤져”, “밥 찌꺼기 앙상한 생선 뼈다귀를 내밀며”, 말한다. 그는 역을 제집인 양, 대합실을 안방인 양 여기고 살아가는 거지이다. 위에 인용한 부분이 그가 말한 내용이다. 거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나 심오했는지 화자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먹은 것을 다 토하고 만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거지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배운다. “모든 버려진 것들”과 “남들이 먹고 걷어차 버린 깡통”을 사랑하는 법을. 그리하여 시인은 그들의 사랑을 인정해주어야 하며, 그들을 사랑해주어야 한다고 독자에게 말한다. 김신용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같이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가난했기 때문에 배우지 못했고, 그래서 몸으로 벌어먹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용직 노동자, 창녀, 부랑자, 전과자들, 이른바 양아치들(넝마주이를 속되게 표현한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밑바닥 인생을 통칭해서 쓰고 있다)이다. 배운 사람의 눈에 그들은 무식한 놈들이고 가진 사람의 눈에 그들은 거지이지만 사랑도 하지 못하게 저주받은 생은 아니다.  그녀는 왜 마약중독자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어도  새벽털이를 위해 숨어 있는 게 분명했어. 난 눈 부릅떴지.  그리고 등불을 켜듯, 그녀의 몸에  내 몸을 심었네. 사방 막힌 벽에 기대서서, 추위 때문일까  살은 굳은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었지만  솜털 한오라기 철조망처럼 아팠지만  내 뻥 뚫린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머리 위  작은 창에는, 거미줄에 죽은 날벌레가 흔들리고 있었어. 그 밤.  ― 부분  이런 사랑도 가능한 것이리라. 화자는 공중변소 속에서 만난 마약중독자 여인의 몸에 자신의 몸을 ‘심는다’. 더러운 두 몸의 더러운 엮어짐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이유는 이어지는 다음 시행 덕분이다.  내 몸에서 풍기던, 그녀의 몸에서 피어나던 악취는  그 밀폐의 공간 속에 고인 악취는 얼마나 포근했던지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네. 마약처럼  욕정을 이기지 못해 이루어진, 성기와 성기의 만남이라고 하여 이런 사랑을 비난할 이유를 나는 찾아낼 수 없다. 갈 데가 없는, 기댈 곳이 없는 두 사람이 이렇게 ‘포근하게’ 체온을 나눈 그 밤의 사랑도 분명 사랑인 것이다. 김신용은 하층민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이별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수건을 입에 물고 섹스폰을 불면  소매치기 벙어리 여인은 노래를 불렀지  문둥이 미쓰 리는 몽그라진 손으로 젓가락을 두드리고  돗자리 부대 남희 엄마 넘치도록 막걸리를 따뤘지  …(중략)…  속치마 바람으로, 자고 가요. 제발  자고 가요. 지나가는 남자만 보면 술 취해 미친 듯  손 흔드는 남희 엄마 기어이 부녀보호소로 끌려가고  벙어리 여인 신음 하나 행적 없이 사라져가고  미쓰 리 또한 소록도를 향해 풍문으로 떠나갔지만  ― 부분  시인이 시방 몹시 그리워하고 있는 세 여인은 굴곡이 많이 진 생애를 살다 간 사람이다. 특히 돗자리 부대 남희 엄마는 몸으로 벌어먹고 살았던 사람이다. ‘돗자리 부대’란 아마도 돗자리를 들고 다니며 들판과 산에서 몸을 파는, 옛날로 치면 들병이 같은 여자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남희 엄마는 결국 부녀보호소로 끌려가고 벙어리 여인은 행적도 없이 사라진다. 미스 리는 소록도로 갔다는 풍문을 듣는다. 노래를 부르고 젓가락을 두드리고 막걸리를 따르는 세 여인과 더불어 수건을 입에 물고 색스혼 부는 흉내를 내며 놀았던 그 어느 날 밤을 시인은 ‘사모치게’ 그리워한다. 마지막 행 “사모치게 수건 섹스폰이 불고 싶은 날”은 그들 밑바닥 인생들을 시인 자신이 얼마나 연민하고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한 뼈아픈 고백이다. “못났으므로/살아 있을 가치가 있다는 의미 같은 것……”이라는 시구에는 김신용의 몸으로 익힌 인생철학이 담겨 있다. 그의 시는 나로 하여금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해야 하고,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아름다운 여인,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이별……. 동서고금의 시인들이 갖고 있던 사랑에 대한 개념을 깨뜨리며 김신용은 이처럼 ‘처절한’ 사랑을 아름답다고 노래하였다. 그의 시에서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실체이다.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고, 정신이 아니라 육체이다.  3  오늘 우리 시단이 봉착해 있는 크나큰 문제점의 하나는 독자와 시인과의 괴리현상이다. 평론가가 격찬을 했다고 해서, 문예지 여러 곳에 서평이 실렸다고 해서, 신문지상에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고 해서, 유명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고 해서,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그 시집이 많이 판매되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다수의 독자가 즐겨 읽는 시집은 따로 있다. 류시화, 용혜원, 원태연, 이정하, 이해인 같은 이가 낸 시집은 모두 수십 판씩을 찍은 ‘베스트셀러’이다. 그들이 낸 시집 가운데 대표적인 한두 권만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 아니라 간행하는 족족, 즉 근 10년의 세월(혹은 그 이상)을 두고 지속적으로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것도 공통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그들의 시집에 대해 문학권에서의 평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필자가 졸고 (『작가세계』, 1999. 가을)에서 류시화의 시를 비판한 적이 있는데, 위에 나열한 다섯 시인을 비롯하여 베스트셀러 시인군에 속하는 시인의 작품을 다룬 평문을 아직은 보지 못하였다.  오늘날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세계사, 창작과비평사 등 유명 출판사의 시집 판매고는 IMF 사태 이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져 있다고 한다. 시의 질적 저하를 문제삼는 평론가가 있기는 하지만 질적 저하가 주된 이유인 것 같지는 않고, 시의 문화적 역할 영역이 축소된 탓이 아닌가 싶다. 전에 이들 출판사의 시집을 사서 읽던 사람들이 요즈음은 인터넷 세상을 유영하고 있거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실용서를 읽고 있거나,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재미있는 영화 비디오를 빌려보고 있다. 즉, 시인 지망생이거나 시집을 즐겨 읽는 취미를 갖고 사는 사람이 아닌 한 시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이다. ‘시집을 즐겨 읽는 취미를 갖고 사는 사람’은 대중 취향의 시집을 그때나 지금이나 읽고 있다. 시인이 여러 해 갖은 마음고생을 겪으며(출판사를 찾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펴낸 시집이 독자와 아름다운 만남을 이룩하지 못하고 시인이 아는 몇몇 주변 사람, 특히 동료 시인들이나 읽어주는 동인지가 되고 있는 이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은 베스트셀러 시집과 좋은 시집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언젠가 베스트셀러 시집들을 싸잡아 다음과 같이 공박한 바 있다.  첫 번째 특징은 두말할 것 없이 사랑의 시, 그리움의 시, 우정의 시라는 점이다. 시집의 제목에, 시의 제목에, 그리고 편편의 시에 ‘사랑’이라는 명사는 무수히 등장한다. (…) 상업적 연시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과 이별, 우정과 진실의 노래는 이렇듯 유치하기 짝이 없다. 시적 수련의 흔적은 도무지 느낄 수 없는 대신 편마다 어설픈 감상이 넘쳐나고 있다. 그런데 유치함과 감상성이야말로 독자의 감정에 강력히 호소하는 힘을 발휘함으로써 이들 시집을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게 한다. (…) 상업적 연시집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아마도 ‘사랑’과 ‘이별’일 것이다. 누구를 왜 사랑하게 되었고 어떻게 이별하게 되었는지 사건의 추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된 채 그저 사랑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고 이별은 대단히 슬프다는 식의 통속적인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진실이니 꿈이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관념화가 지나쳐 우리네 보편적 삶과는 철저히 유리되어 있는 것이다.  ―, 『현대시』, 1995. 4.  5년 전, 비탄에 사로잡혀 이런 말을 했었지만 유명 서점의 시집 베스트셀러 순위를 보면 나아진 것이 조금도 없다. 그때 내가 언급했던 시인들이 지금도 여전히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다. 그렇다면 상업적인 전략에 입각해서 출간된다고 보여지는 이들 시집과는 달리 정통문학권 내에서 활동하는 시인들의 시집 속에서는 ‘연애시’라는 것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으며, 그 연애시의 값어치가 베스트셀러 시집 속 연애시의 값어치보다 못하지 않음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정된 지면으로 말미암아 나의 심금을 울린 연애시를 더 많이 소개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앞에서 언급한 세 시인의 연애시는 오늘날 이 땅에서 씌어지고 있는 연애시의 작은 예일 뿐이다. 대형서점에서 매긴 순위에 현혹되어 우리의 말초감각을 자극하고, 관념적인 사랑 타령으로 일관하는 베스트셀러 시집에 손을 뻗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에 근거한 사랑의 시, 시인의 고뇌를 동반한 사랑의 시에 지금부터라도 눈길을 주어야 한다. 그것이 이 땅에 시문학이란 것이 생존해 있게 하는 길이므로.  ============================================================================================       송년(送年) ― 김규동(1925∼2011) 기러기 떼는 무사히 도착했는지 아직 가고 있는지 아무도 없는 깊은 밤하늘을 형제들은 아직도 걷고 있는지 가고 있는지 별빛은 흘러 강이 되고 눈물이 되는데 날개는 밤을 견딜 만한지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버린 아름다운 꿈들은 정다운 추억 속에만 남아 불러보는 노래도 우리 것이 아닌데 시간은 우리 곁을 떠난다 (…) 쓸쓸한 가슴들은 아직도 가고 있는지 허전한 길에 씁쓸한 뉘우침은 남아 안타까운 목마름의 불빛은 남아 스산하여라 화려하여라.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송년이 있다. 어딘가에는 잔을 부딪치며, 음식을 나누는 송년이 있다. 서로 수고했다고, 올해도 잘 넘겼다고 정리하는 송년도 있다. 앞으로 더 잘하자고 내년을 기대하는 송년도 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송년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정리하고 다짐하는 송년이, 이 시에는 없다. 함께 나누고 경험하는 송년이, 이 시에는 없다. 제목 때문에 요즈음 생각나는 이 시에는 가장 슬픈 송년이 담겨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송년이 들어 있다. 이것은 홀로 외따로 남은, 고독한 사람의 송년이다.   지금 시인은 기러기 떼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것은 마치 나의 형제들만 같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은 분명 존재했으나 지금 내 곁에는 없다. 아름다운 꿈들과 정다운 추억도 이제는 기억 속에 있을 뿐이다. 가족과 고향, 젊음과 시간같이 다정하고 씩씩한 것들은 기러기처럼 나를 떠나 멀리 멀리 날아갔다. 나이 들고, 혼자, 쓸쓸하게 서 있는 이 사람의 송년은 참으로 쓸쓸하고 묵직하다. 하늘을 바라보는 눈가는 촉촉이 젖어 있고, 떠나온 것들과 떠나간 것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아려온다.   이런 12월들은 시 바깥, 어디에나 있다. 먼저 떠난 친구들을 생각하는 할머니에게도, 말벗 없이 빈방에 잠겨 있는 아이에게도, 실향하여 타지를 떠도는 이들에게도, 지금은 무척 쓸쓸한 때다. 그러니 세상에는 더 다른 송년들이 있으면 좋겠다. 다정하고 따뜻한 모든 송년들이 춥고 외로운 송년을 되돌아보는 송년이면 좋겠다.
92    5천권의 책을 읽고 만장의 글을 써라... 댓글:  조회:2988  추천:0  2017-01-02
BARCROFT / TheSun   목이 탄 개처럼 헤매지 마라 글쓰기를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이 있다. 20대의 젊은이들도 있지만 30대 40대 들도 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이미 문화센터의 글쓰기 교실에서 이선생 저선생의 강의를 들은 바 있고, 또 쓴 글 한두편을 들고 어느 고명하다는 선생을 찾아다니면서 지도를 받고, 어느 대학 사회교육원에 다니면서 글짓기 비법 강의를 듣는 등 수많은 과정을 거쳐 드디어 나에게 이른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이제 정말로 마음먹고 글을 한번 써보고 싶어 선생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대 나는 그들에게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 남긴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목이 타서 죽을 지경이 된 개가 있습니다. 그 개는 수많은 우물 옆을 지나쳐 달려왔습니다. 모든 우물은 깊었습니다. 거기에는 두레박을 만들어 넣어 힘들게 길어 올리지 않으면 마실 수 없는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그개는 성급했으므로 그 우물을 외면하고 발을 돌렸습니다.   두레박을 이용하지 않고 수고롭지 않게 마실 수 있는 물을 찾아 헤매면서 달리고 또 달려갔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우물도 매우 깊었습니다. 그 개는 또 그 우물에 절망하고 어디론가 다른 우물을 찾아 달려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드레스 샤흐,중에서       5천권의 책을 읽고 만 장의 글을 써라 추사 김정희 선생의 에 이런 대목이 있다. "모든 사람이 아이였을 적에는 대개 총명한데, 이름을 기록할 줄 알만 하면 아비와 스승이 과 들만을 읽히어 그 아이를 미혹시키는 바람에, 종횡무진하고 끝없이 광대한 고인들의 글을 읽지 못하고 혼탁한 흙먼지를 퍼먹음으로써 다시는 그 머리가 맑아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김정희 선생은 후세들의 사고가 단세포화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우리는 다섯수레이상의 책읽기와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천개를 ?아붓으로 만든 부지런함을 통해 얻은 신통과 향기로움의 결과로 아름다운 서체를 만들어낸 한 천재 선인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글을 쓰려 하는 사람의 생각이 가볍고 막히는 것은 책 읽기가 부족한 까닭이다. 책 읽기가 부족한 까닭은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한 공부만을 한 때문이다.   선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5천권의 책을 읽고 쓰려고 하는 대상에 대하여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좋은 글을 쓰기위해 만 장의 종이를 허비해야 글다운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법이다."   대학 다닐 때 강의 없는 날이나 토요일 일요일에 도시락을 사들고 도서관에 갔다. 열람실에 자리 하나를 마련해 놓고, 세계문학전집을 한 권씩 빌려다가 읽었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을 읽은 다음에는 을 읽고 그것을 읽은 다음에는 을 읽었다. 앙드레지드의 을 읽은 다음에는 를 읽고 을 읽었다.   전남 장흥 바닷가에 작가실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어린 시절에 읽은 를 읽은 다음를 읽고 을 차례로 읽었다. 이후 나는 친구나 후배들에게 을 읽었다고 말하지 않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다고 말하고,>를 읽었다고 말하지 않고 '앙드레 지드'를 읽었다고 말하고, 를 읽었다고 말하지 않고 '주자학'을 읽었다고 말하곤 했다.   어떤 작가의 한 작품을 읽고 나서 어떻게 그 작가에 대하여 아는 체할 수 있는가. 그 작가의 모든 작품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작가에 대하여 아는체할 수 있는 것이다.       낙화의 슬픈 마음으로 써라 근래에 들어 이상 기후로 인해 봄이 너무 따듯하니 모든 꽃망울들이 거의 동시에 미친듯이 터지곤 한다. 매화꽃, 진달래꽃, 개나리꽃, 민들레꽃, 살구꽃, 능금꽃...   황홀한 꽃 산하 속에서 우리는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광기처럼 들뜨면 심성이 흔들린다. 흔들리면 파도 위에 뜬 배 위에서처럼 어지럼을 느끼게 되고 사물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게 된다.   세월은 우리를 더 오랫동안 들 떠 있지 못하게 하려고 화사한 꽃의 장막을 거두어 준다. 동시에 연두색 신록의 산하로 바꾸어 준다. 꽃이 진다는 것은 성숙으로 간다는 것이고, 그것은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이 질 때 나비와 벌과 새와 우리는 슬퍼한다.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과 모든 멈추어 있음은 번갈아 나타난다. 우리에게 환희만 주고 슬픔을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늘 들떠 있기만 하고 가라앉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슬픈 눈을 가지는 것은 행운이다. 슬픈 눈으로 볼 때 세상은 제모습대로 보인다. 빛 저쪽에 어둠이 보이고, 환희와 열락의 삶 저 쪽에 비애와 허무와 죽음이 보인다.   꽃 피어 있음만을 보는 환혹의 눈으로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마녀의 달거리처럼 땅에 질펀하게 떨어져 누워 있는 꽃잎들을 보는 슬픈 눈으로라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모든 글은 참되게 살다가 참되게 죽어가는 길 가르치기이다.     내 손은 왜 부처님손이고 다리는 왜 나귀다리인가. 내 얼굴은 왜 바야흐로 만개한 연꽃이고 아랫도리는 진흙탕 속의 연뿌리인가. 이곳에서 백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황지란은, 줄기가 절대로 구부러질 줄 모르고 하늘을 향해 곧게 치솟듯 자라기만 하는 삼나무 숲속의 조선참솔 통나무집 황토방 속에서 반가부좌를 한 채 머리속에 그 화두를 굴리면서 비발디의 만돌린 협주곡을 듣고 있었다.   음악이 초가을 청자색 하늘 한가운데서 투명한 날개를 퍼덕거리고 맴을 도는 고추잠자리들을 떠오르게 했다. 그녀는 머리 파르라니 ?은 작달막한 체구의 앳된 비구니가 한 소식 하겠다고 용맹정진을 하듯이, 조개가 진주를 키우듯이 자궁 속의 아기를 키우고 있었다. - 서두에서..     막고 품어라 고기 잡이 에는 낚시나 그물이라는 기교가 사용된다. 가느다란 대 끝에 낚싯바늘 한 개를 달아 쓰는 세월 낚기 같은 낚시질이 있고, 몇백 미터 되는 줄에 낚싯바늘 수백 수천개를 줄줄이 달아 던져넣는 주낚질이 있다. 그물을 던져 포획하는 투망질이 있고, 물목에 그물을 막아 잡는 정치망이 있고, 어선 꽁무니에 저인망을 매달아 갯벌 바닥을 훑어 잡는 무지막지한 방법이 있다.   고기잡이 가운데서 가장 미련스러운 것은 낚시나 그물을 사용하지 않고 잡는 방법이다. 개울의 위쪽과 아래쪽에 둑을 쌓아 막은 다음 땀 뻘뻘 흘리면서 양동이로 물을 퍼내고 바닥에서 퍼덕거리는 고기를 잡는 방법. 그것을 '막고품기'라 한다. 아무런 꾀도 쓰지 않고 무조건 막고 품어 잡는 이 방법은 가장 힘이 들기는 하지만 개울안에 들어 있는 고기라는 목표를 놓치지 않고 가장 확실하게 잡는 비책이다.   운동선수들은 조련하는 유능한 감독들은 모두 이 방법을 곁들여 쓴다. 무조건 땀 뻘뻘 흘리면서 연습을 하고 또 하면 유능한 선수가 된다 모든 예능인들, 마라톤 선수들은 다 이 방법을 쓴다. 글쓰기도 그러하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무조건 많이 쓰면 작가가 될 수 있다. 고기가 보이기만 하면 막고 품어라.   내가 젊었을 적에 소설 한 편을 쓰고 나면 그것을 최소한 다섯번쯤은 고치곤 했다. 1968년에 소설 으로 당선 되어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지 4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소설 한 편을 쓰면 열번쯤 고치곤 한다.   나는 요즘 늙어진 나의 감수성을 의심하곤 한다. 이 문장에 제대로 쓰였는지, 이 낱말은 제대로 선택되었는지, 이 소설의 서두는 독자들의 마음을 끌어들일 수 있는지, 이 소설의 결말은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지 성난 얼굴로 살피면서 거듭 고치곤 한다.   청탁받은 권두언이나 에세이나 칼럼의 경우에도 고치고 또 고친다. 그렇게 고치는 일은 자기 운명을 교정해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거듭 고치는 일은 막고 품는 고기잡이와 다르지 않다.     한승원 1939년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 1968년 에 당선 작품활동시작한 이래 40년간 소설가와 시인으로 활동. '내소설의 9할은 고향바닷가 마음이야기'라는 고백처럼 그의 작품속에는 남해 바닷가의 비릿한 풍경과 정겨운 토착어가 살아 숨쉰다. 혼이 담긴 살아 있는 글을 쓰기 위해 평생을 몰두해온 작가 한승원은 세상속에 떠다니는 글의 씨앗들이 제대로 된 글로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책을 썼다.   이책 안에는 글을 쓸 대마다 화두처럼 그를 따라 다녔던 질긴 고민과 깊은 사유끝에 얻어낸 글쓰기 철학이 정련되어 담겨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소설집 -전7권. 어른을 위한 동화 시집산문집등이 있다.   한국소설문학상,대한민국문학상한국문학작가상현대문학상이상문학상서라벌문학상한국해양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미국기리야마 환태평양도서상 김동리문학상등을 수상했다.
91    글쓰기 비법 아닌 비법 12 댓글:  조회:3454  추천:0  2017-01-02
프로작가들이 공통적으로 밝히는 글쓰기 비법 12가지=   1. 항상 ‘Research Mode’를 유지할 것 아이디어는 필요한 그 순간에 맞춰 떠오르지는 않는다. 언제라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그 순간, 곧장 어딘가에 메모해두어야 한다. 그것이 당신의 콘텐츠 아이디어와 직결되는 것이 아니어도, 잘 다듬어진 아이디어가 아니어도 좋다. 이런 아이디어를 놓쳐 버리지 않으려면 에버노트 (evernote.com)와 같이 편리하게 기록하고 스크랩할 수 있는 툴을 하나 정도는 사용하는 것이 좋다. 폴더별로 토픽을 정리해 두고, 뉴스를 보다가 또는 소셜 미디어에서 관심 있는 주제가 나타나면 꼭 스크랩해둔다. 글감으로 삼고 싶은 주제를 찾고, 여기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검색하다보면, 그 주제를 잘 설명하고 있는 웹페이지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2. 당신만의 개성있는 스타일을 확립할 것 누군가를 흉내내려 하지 말고, 당신만의 개성이나 브랜드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당신만의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다된 것은 아니다. 글쓰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콘텐츠 작가로서 끝없이 당신의 글쓰기 능력을 연마해야 한다. 당신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것이 막막하다면 당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작가 5명을 찾아서, 그들의 대표적인 글을 하나씩 골라 단어 하나 하나 천천히 읽어본다. 각 글의 구조와 도입부, 어떤 토픽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글이 어떻게 마무리 되는지, 어떤 행동을 유도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그 중에 가장 쓰기 쉽고 당신의 스타일과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글을 하나 골라서, 당신이 여섯 번째 작가가 되어 당신의 스타일을 입힌 글을 써본다. 당신만의 개성있는 스타일을 찾을 때까지 이렇게 연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3. 한 번에 한 가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 글쓰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는 그 한 가지 핵심 주제에 집중하여 독자가 글을 읽고 난 후,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쓸데없는 내용은 삭제하고 모호한 표현은 정리해라.   4. 깊이 있는 내용을 쓰고 싶다면 길이를 늘릴 것 깊이와 길이는 비례해야 한다. 글쓰기의 고수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맞는 아웃라인을 설정하는 데에 능하다. 당신이 하려는 이야기가 과연 어느 정도의 분량이 필요한지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다. 쉽게 말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려면 글의 길이를 길게 정해야 할 것이고, 요점만 알려주는 글을 써야 할 땐 길이를 짧게 설정해야 할 것이다. 깊이가 없는데 길기만 하다면 읽다가 도중에 모두 떠나갈 것이다.   5. 독창적인 앵글을 찾을 것 파리에 에펠탑이 있다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에펠탑이 아름답다는 사실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에펠탑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면, 에펠탑에 대한 독창적인 접근법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언제나 ‘낯설어 보이는’ 것을 캐치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6. 제목을 중요하게 여길 것 제목은 당신의 글을 남에게 어필하는 ‘첫 번째 수단’일 수도 있지만, 만약 그 제목이 매력적이지 않다면 그 글을 어필하는 ‘마지막 순간’이 되고 말 것이다. 제목만 보고 독자는 지나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써야할 글에 따라 알맞은 제목의 용례를 파악하고 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7. 첫 번째 문장 또한 중요하게 여길 것 소위 훌륭한 작가로 인정받는 이들은 입을 모아 첫 번째 문장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독자가 계속 읽을 생각이 드는 임팩트 있는 첫 문장을 작성하는 것은 문학은 물론, ‘콘텐츠 마케팅’에 있어서는 더욱 중요하다. 문학은 표지와 작가의 ‘이름 값’이라는 완충제가 있고, 책의 가격이 아까워서라도 계속 읽으려 하지만 ‘콘텐츠 마케팅’에 있어서 이런 완충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8. 거부할 수 없는 첫 문단을 작성할 것 앞선 얘기와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제목 – 첫 문장 – 첫 문단에 이르는 과정은 독자가 당신의 글을 계속 읽을지 말지 판단하는 과정이다. 당신의 글을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 독자가 글을 다 읽고 나서 갖게 될 가치에 대한 확신을 첫 문단에서 주어야 한다.   9. 허풍은 금물, 독자에게 속았다는 느낌을 주지 말 것 당장 독자가 당신의 글을 읽게 만들 자극적인 소스를 남발한다고 하더라도, 글을 모두 읽은 후에 ‘속 빈 강정’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면 당신의 노력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이런 ‘속 빈 강정’으로 판단되어 사람들이 당신의 글에 ‘비추천’ 버튼을 찍도록 놔둬선 안 된다. 6번에서 말했듯 제목은 중요하지만 그 제목이 독자에 게 갖게한 기대를 글이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것.   10. 시작만큼 마무리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 좋은 글은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언제, 왜를 이야기한다. 훌륭한 글은 ‘그래서 무엇을’까지 이야기한다. 당신의 아이디어 부족으로 김 빠진 글을 만들지 마라. 모든 글의 결말에서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논점을 요약하고 독자들이 당신글에서 어떤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지 알려줘라.   11. 편한 글이 좋은 글이라는 것을 인지할 것 간결한 문단, 짧은 문장, 쉬운 단어가 가장 잘 읽힌다. 문학상 수상은 염두에 두지 마라. 디지털 콘텐츠는 문학 수업에서 배운 글쓰기와는 다르다. 짧고 간결하게 쓰는 것이 더 잘 읽히기 위한 핵심비법이다.   12. 퇴고하고, 또 퇴고하고, 그리고 다시 한 번 퇴고할 것 첫 원고는 대개 당신의 아이디어를 단어로 표현해낸 결과물일 뿐이다. 당연히 그 결과물은 매끄럽게 보이지 않는다. 훌륭한 글은 수차례 수정하고 다듬는 과정에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당신은 우선 아이디어를 써내려 가라. 머리 속 생각의 속도에 맞춰 빠르게 써내려 가야 한다. 그리고, 수정하고 다듬는 과정에 최선을 다해라. 한 번의 퇴고로 끝내선 안된다. 양질의 글을 위해서는 몇 번이고 되풀이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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