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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1. [경남신문]
인어의 꿈 / 임채주
바닥을 기고 있는 인어 같은 저 남자
풀 수 없는 가슴앓이 누군들 알까마는
진창길 바닥에서도 꿈을 줍고 있나보다
눈물로 짓이겨온 질척이는 저잣거리
밀고 가는 무거운 짐, 고단한 삶이지만
저 길이 끝날 즈음에 일어설 수 있겠지
찢어져 펄럭이는 검은 고무 가죽
또다시 동여매고 두 팔로 끌다보면
인어가 바다를 가듯 푸른 생이 열릴 거야
2. [경상일보]
도르래, 빛을 물다 / 박수근
한 치 틈도 허여 않고 흙과 돌 살을 맞댄
성곽 안 둘레길엔 넘지 못할 선이 있다
배흘림 성벽을 따라 나부끼는 저 깃발들
밑돌은 윗돌 받치고 윗돌은 밑돌을 괴고
저마다 가슴에는 난공불락 성을 쌓는,
팔달문 층층 불빛이 도르래에 감긴다
망루에 올라서면 성채 너머 또 다른 성
가납사니 군말 아닌 실사구시 공법으로
날마다 허물고 쌓고 허물어선 다시 쌓고
장안문 홍예(虹霓)를 짓던 옛 사람은 어디 갔나
그때 그 거증기로 들어 올린 금빛 아침
빗살문 빗장을 따고 성문 활짝 열고 싶다
3. [국제신문]
과녁 / 김장배
겨운 날 활터에서 낯선 활을 당겨본다
번번이 빗나가다 운이 좋게 다가가도
내 인생 한가운데는 맞출 수가 없었다.
삶도 한낱 무예일까 날과 기(氣)도 무딘 지금
펄펄하던 지난날이 초점을 흐려놓고
빗나간 화살 한 대는 행방마저 묘연하다.
숨 고른 시간 앞에 조용히 활을 내리고
욕심의 핀을 뽑아 모난 마음 다스린다
마지막 남은 화살이 명중하길 바라며.
4. [농민신문]
다산茶山, 마임 무대에 선 / 송태준
천 리 밖 매운 탄식이 돌옷 거뭇 배어 있는
신새벽 화성華城 안길 헤집는 손수레 한 대
거중기 발치에 쌓인
야사野史 더미 고른다
빈 박스, 빈 깡통에 빈병서껀 넝마 조각
체념하듯 되돌아와 널브러진 성벽 위로
한잠 든 사직을 깨워
뒤척이는 깃발 소리
도돌이표 궤도 위를 수레는 굴러가나
받아든 푼돈 온기로 세밑 바람 뚫고 가는
판박이 목민牧民 앞에서
혀 차는 다산 줌 업
휴! 긴 숨 몰아쉬며 한 평 쪽방 찾아드는
노인의 굽은 등 위 펄럭이는 열두 만장挽章*
긴 심서心書 적어가던 붓
그예 꺾고, 암전暗轉이다
*자살률 세계 1위 대한민국에서는 매일 평균 12명의
노인이 자살한다
5. [동아일보]
자반고등어 / 정진희
푸른 등이 시린지 부둥켜안은 몸뚱이
제 속을 내주고 그리움을 묻어둔 채
장마당 접었던 밤은 해풍만 가득하다
기댈 곳 없었다, 그냥 눈 맞은 너와 나
천지사방 혼자일 때 보듬고 살자했지
소금물 말갛게 고인 눈알 되어 마주친
동살이 밝힌 물길 야윈 등을 다독이다
나 다시 태어나 너의 짝이 되리라
살 속에 가시길 박힌 그 바다를 건넌다.
6. [매일신문]
동강할미꽃의 재봉틀 / 김태경
솜 죽은 핫이불에 멀건 햇빛 송그린다
골다공증 무릎에도 바람이 들이치고
재봉틀 굵은 바늘이 정오쯤에 멈춰 있다
문 밖의 보일러는 고드름만 키워내고
숄 두른 굽은 어깨 한 평짜리 가슴으로
발틀에 하루를 걸고 지난 시간 짜깁는다
신용불량 최고장에 묻어오는 아들 소식
호강살이 그 약속이 귓전에 맴돌 때는
자리끼 얼음마저도 뜨겁게 끓어올랐다
감치듯 휘갑치듯 박음질로 여는 세밑
산타처럼 찾아주는 자원봉사 도시락에
그래도 풀 향기 실은 봄은 오고 있겠다
7. [부산일보]
겨울, 횡계리에는 / 김종호
횡계리 황태밭에 비린내로 돋는 달빛
송천(松川) 얼음물에 무장무장 뜨는 별빛
영 너머 파도소리까지 에돌다가 매달렸네.
눈발 들이치는 목로에 마주앉아
내 배알, 버렸지라, 빈 가슴 두드리던
노인의 시린 등허리가 흔들리고 있었네.
돌아보면 산문 밖은 모두다 덕대였지,
한 생애 흔드는 게 눈발이며 바람뿐일까
노랗게 물들어가다 엇갈리던 환한 꿈들,
무두태*로 떨어져서 드난사는 동안에도
코를 꿰인 영혼들이 칼바람에 흔들리며
노을 진 엄동설한을 건너가고 있었네.
* 건조과정에서 머리가 떨어진 명태.
8. [서울신문]
막사발을 읽다 / 송가영(본명 송정자)
너만 한 너른 품새 세상천지 또 있을까
먼 대륙 날고 날아 난바다도 건너갈 때
태산도 품안에 드는 은유를 되새긴다
털리고 짓밟히고 쓸리기도 했을 게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친구가 되지 못해
바람에 말갛게 씻긴 꽁무니가 하얗다
바람에 몸을 맡긴 가벼운 너의 행보
새처럼 구름처럼 허공을 떠돌다가
양지 뜸 아늑한 땅에 부르튼 생을 뉜다
그리하여 정화수에 묵은 앙금 갈앉히고
눈빛 맑은 옛 도공의 손길을 되짚으면
가슴에 불꽃을 묻은 큰 그릇이 되느니
9. [조선일보]
쌍둥이 - 양보의 대가 / 김상규
언니는 모르겠지, 그해의 봄 소풍을
반숙된 달걀에선 병아리가 나왔고
사라진 보물종이가 영원한 미궁인 걸
두 발은 위태로워 네 발이 필요했어
날개 없는 말개미가 꼭대기에 오르듯이
나 대신 이어 달렸던 언니만의 거친 호흡
서로의 옷을 입고 고백했던 그런 하루,
강에 버린 구두 대신 목발을 짚었을 때
우리는 만쥬를 가르며 용서하고 있었어
10. [중앙시조맥일장 연말장원]
사과를 만나다 / 박연옥
길어야 일주일쯤 머무는 줄 미리 알아
올핸 꼭 만나리라 서둘러 꽃 피워놓고
받침이 집인 줄 모른 채 사과꽃은 지더니
떠난 자리 들어선 열매 뙤약볕에 담금질하고
비바람에 지는 벗들 가슴으로 배웅하며
모질게 견뎌온 나날 과즙으로 고이더니
끝내 그를 알고 안절부절 못하는 낯빛
그걸 헤아린 듯 크게 한 입 베어 무니
달디단 사과향 속으로 그림자 두엇 잠긴다
11. [한라일보]
솥 / 서희정
따끈한 흰밥으로 아침을 열어 주며
우리 식구 이어 주던 식탁의 전기밥솥
한 달째 하품 중이다
속이 텅텅 빈 채로
어머니는 일터에서 동생은 기숙사에서
나는 또 새벽 출근, 끼니가 다 다르니
저 친구 존재 가치가
슬그머니 없어졌다
빵 조각에 커피 한 잔 홀짝이고 있는 사이
덩그러니 나앉아서 빠끔히 쳐다본다
저 혼자 배고프다고
시무룩한 늦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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