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推敲), 퇴고(推敲)를
# ‘기다림의 미학’ 터득해야
소설가 이호철 선생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단편소설 ‘닳아지는 살들’을 집필할 때였다. 소설의 도입부(導入部)를 20장 정도 초안하고 나서 더 이상 다음 줄거리를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상상력이 바닥나고 영감(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의 고갈 현상에 부딪쳤다. 며칠 동안 밤을 지새워가며 끙끙거렸지만 ‘줄거리의 가닥’이 잡히지 않았고 이야기의 진척이 전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소설 집필을 중단, 초고 노트를 덮어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1년쯤 지난 후에 문득 ‘닳아지는 살들’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고, 마치 신 들린 것처럼 소설의 가닥이 술술 풀려 나갔다. 책장 서랍 깊숙이 묵혀 두었던 초고 노트를 다시 꺼내 단숨에 소설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나중에 저 유명한 동인문학상(東仁文學賞)을 거머쥐게 된 동인(動因)이었고, 그 작품이 바로 ‘닳아지는 살들’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작가 이호철 선생이 고백한 대로 소설은 물론 시나 시조 등 문학작품의 주제·소재에 대한 충분한 취재 및 방계 자료(傍系 資料) 수집을 게을리 하거나, 쓰고자 하는 ‘그 무엇’ 즉 내용이 청국장처럼 충분히 곰삭는 숙성(熟成)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경우 집필(執筆) 작업은 힘 겨울 수밖에 없고 작품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없는 일이요, 좀체 창작 진척에 가속도가 붙을 수 없는 노릇이다.
판소리 ‘심청전’에 나오는 아니리 한 대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사람의 설움이 어지간 해야 눈물이 나오는 법이지, 기가 차고 멱이 꽉 차면 뛰고 미치고 환장을 하는 법이렸다.’ 뛰고 미치고 환장을 하는 경지. 이것이 바로 쓰고자 하는 시조작품이 충분히 곰삭아서 저절로 ‘꼭지가 떨어지는’ 경지가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뛰고 미치고 환장할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미학’을 터득해야 하는 일이고, ‘인내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쓰고자 하는 대상(시조)에 대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그것이 숙성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도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취사 선택한 주제나 소재에 대해서 인터넷을 뒤지고 방계 자료를 찾고, 때로는 관련 책자를 읽고 때로는 관련 영화나 비디오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며, 꿈 속에서 헛소리를 하며, 입술이 다 부르트는 산고(産苦)를 겪으며, 그것을 숙성시키는 것이다.
‘기다림의 미학’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좀체 실감을 못할 수도 있다. 글쓰기란 하얀 원고지를 메워야 하는, 피 말리는 작업이라 하여 ‘백색 공포’라고 했을까.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인ㆍ작가는 모니터의 깜박이는 커서가 마치 “빨리 글을 쓰라고 재촉하며 윽박지르는” 강박감마저 느끼는 수가 있다.
개인에 따라, 그 작품의 주제 및 소재에 따라 천차만별 시차(時差)가 있게 마련이지만, 시조 한 편을 구상하여 손을 털기까지 소요되는 기간은 1주일도 걸리고 한 달도 걸린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조 한 편을 하룻밤 사이에 완성, 쾌재를 부르는 수도 있으나 대체로 1주일 혹은 한 달, 심하면 1년도 가고 2년도 간다. 그러면서 그 작품이 완전히 곰삭아서 꼭지가 떨어지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인내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불안ㆍ초조ㆍ조바심 때문에 버둥대는가 하면, 때로는 조그마한 일에도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며 ‘기다림의 미학’을 터득하는 것이다.
인스피레이션이 떠오르고, 떠오른 이미지가 숙성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리는 머릿속에서, 혹은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 무수한 정보(情報)를 입력(入力)하고 수정·가필(加筆)하는 작업을 되풀이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작품을 줄줄 외우게 마련이다.
드디어 마지막 탈고했을 때의 희열이란! 밤을 꼬박 새워도 성취감에 젖어 절로 신명이 나고 창작 복무 때문에 겹친 피로가 한꺼번에 가시는 것이다. ‘뛰고 미치고 환장할 경지’를 이런 때 맛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작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기 카타르시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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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 캐는 사람
―이동훈(1970∼ )
언젠가 일 없는 봄이 오면
약초 캐는 산사람을 따라가려 해.
짐승이 다니는 길로만 가는 그를
안간힘으로 따라붙으면
물가 너럭바위 어디쯤 쉬어가겠지.
버섯이나 풀뿌리 얼마큼을 섞어
근기 있는 라면으로 배를 불리면
마른 노래 한 소절이라도 읊게 될 것만 같아.
볕에 그을린 몸이 단단해지고
비탈을 평지처럼 걷게 되면
약초 이름도 더러 외게 되겠지.
외운 만큼 곁을 주는 건
산 아래와 다르지 않을 거고.
장마 지는 날엔
화전민 움막에 나란히 앉아
그리운 것들을 빗물로 내려 보내고
산안개 따라 도리바리 울음이라도 들릴라치면
경건한 묵상에 빠지기도 하겠지.
이따금 장터에 내려서서
도매로 물건을 넘길 때
축농증 앓는 둘째를 위해
효험 있다는 약초를 따로 챙길 것이고
어디론가 송금이 끝난 그도
술 한 잔 받아줄 것이기에
한나절, 구름처럼 둥둥 떠 있게 될 거야.
언젠가 일 놓는 봄이 오면
그 누군가를 위해
약초 캐는 사람이고 싶어.
이 시가 실린 이동훈 시집 ‘엉덩이에 대한 명상’의 시편에서는 여린 마음과 정 깊고 선한 기운이 담뿍 배어난다. 문학평론가 이성혁은 해설을 ‘어떤 시는 시를 쓴 사람의 인간됨을 느끼게 해준다’라고 시작한다. ‘이 시인이 참 성실하고 진실한 사람일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는 것이다. 사람의 느낌이라는 게 참 비슷하구나!
아직 일할 나이로 직장인인 화자가 봄날에 펼쳐보는 낭만적인 꿈이다. 일장춘몽이 아니라 건강하고 싱그러운 장래의 꿈. ‘언젠가 일 없는 봄이 오면’ ‘언젠가 일 놓는 봄이 오면’, 즉 은퇴한 뒤에는 이렇게 살아보리라. ‘장마 지는 날엔/화전민 움막에 나란히 앉아/그리운 것들을 빗물로 내려 보내고/산안개 따라 도리바리 울음이라도 들릴라치면/경건한 묵상에 빠지기도 하겠지.’ 도리바리는 호랑이를 이르는 심마니(산삼 캐는 사람) 은어라고 한다. 호랑이만 울까, 고라니도 울고 산새도 울고 뱀도 울겠지.
약초 캐는 산사람의 건강하고 떳떳하고 단순한 삶이 그 험함과 고됨과 외로움까지 살갑게,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독자도 한번쯤 따라다니고 싶다. 노년을 ‘그 누군가를 위해 약초 캐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니, 화자의 각박하지 않은 현재 삶이 짐작된다. 약초 캐는 산사람을 따라다닐 근력을 착실히 키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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