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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권의 책을 읽고 만장의 글을 써라...
2017년 01월 02일 00시 27분  조회:2958  추천:0  작성자: 죽림



BARCROFT / TheSun
 



목이 탄 개처럼 헤매지 마라

글쓰기를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이 있다. 20대의 젊은이들도 있지만 30대 40대 들도 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이미 문화센터의 글쓰기 교실에서 이선생 저선생의 강의를 들은 바 있고, 또 쓴 글 한두편을 들고 어느 고명하다는 선생을 찾아다니면서 지도를 받고, 어느 대학 사회교육원에 다니면서 글짓기 비법 강의를 듣는 등 수많은 과정을 거쳐 드디어 나에게 이른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이제 정말로 마음먹고 글을 한번 써보고 싶어 선생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대 나는 그들에게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 남긴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예문>

목이 타서 죽을 지경이 된 개가 있습니다. 그 개는 수많은 우물 옆을 지나쳐 달려왔습니다. 모든 우물은 깊었습니다. 거기에는 두레박을 만들어 넣어 힘들게 길어 올리지 않으면 마실 수 없는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그개는 성급했으므로 그 우물을 외면하고 발을 돌렸습니다.

 

두레박을 이용하지 않고 수고롭지 않게 마실 수 있는 물을 찾아 헤매면서 달리고 또 달려갔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우물도 매우 깊었습니다. 그 개는 또 그 우물에 절망하고 어디론가 다른 우물을 찾아 달려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드레스 샤흐,<수피의 가르침>중에서

 

 

 

5천권의 책을 읽고 만 장의 글을 써라

추사 김정희 선생의 <인재설人才說>에 이런 대목이 있다.

"모든 사람이 아이였을 적에는 대개 총명한데, 이름을 기록할 줄 알만 하면 아비와 스승이 <경전의 주석>과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들을 위하여 모아놓은 어려운 어구풀이>들만을 읽히어 그 아이를 미혹시키는 바람에, 종횡무진하고 끝없이 광대한 고인들의 글을 읽지 못하고 혼탁한 흙먼지를 퍼먹음으로써 다시는 그 머리가 맑아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김정희 선생은 후세들의 사고가 단세포화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우리는 다섯수레이상의 책읽기와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천개를 ?아붓으로 만든 부지런함을 통해 얻은 신통과 향기로움의 결과로 아름다운 서체를 만들어낸 한 천재 선인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글을 쓰려 하는 사람의 생각이 가볍고 막히는 것은 책 읽기가 부족한 까닭이다. 책 읽기가 부족한 까닭은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한 공부만을 한 때문이다.

 

선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5천권의 책을 읽고 쓰려고 하는 대상에 대하여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좋은 글을 쓰기위해 만 장의 종이를 허비해야 글다운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참고의 말>

대학 다닐 때 강의 없는 날이나 토요일 일요일에 도시락을 사들고 도서관에 갔다. 열람실에 자리 하나를 마련해 놓고, 세계문학전집을 한 권씩 빌려다가 읽었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은 다음에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그것을 읽은 다음에는 <악령>을 읽었다.

앙드레지드의 <전원교향곡>을 읽은 다음에는 <배덕자>를 읽고 <지상의 양식><법황청의 지하도><사전꾼>을 읽었다.

 

전남 장흥 바닷가에 작가실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어린 시절에 읽은 <맹자>를 읽은 다음<논어>를 읽고 <대학><중용><시경><주역>을 차례로 읽었다.

이후 나는 친구나 후배들에게 <죄와 벌>을 읽었다고 말하지 않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다고 말하고,><전원교향곡>를 읽었다고 말하지 않고 '앙드레 지드'를 읽었다고 말하고, <논어>를 읽었다고 말하지 않고 '주자학'을 읽었다고 말하곤 했다.

 

어떤 작가의 한 작품을 읽고 나서 어떻게 그 작가에 대하여 아는 체할 수 있는가. 그 작가의 모든 작품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작가에 대하여 아는체할 수 있는 것이다.

 

 

 

낙화의 슬픈 마음으로 써라

근래에 들어 이상 기후로 인해 봄이 너무 따듯하니 모든 꽃망울들이 거의 동시에 미친듯이 터지곤 한다. 매화꽃, 진달래꽃, 개나리꽃, 민들레꽃, 살구꽃, 능금꽃...

 

황홀한 꽃 산하 속에서 우리는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광기처럼 들뜨면 심성이 흔들린다. 흔들리면 파도 위에 뜬 배 위에서처럼 어지럼을 느끼게 되고 사물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게 된다.

 

세월은 우리를 더 오랫동안 들 떠 있지 못하게 하려고 화사한 꽃의 장막을 거두어 준다. 동시에 연두색 신록의 산하로 바꾸어 준다. 꽃이 진다는 것은 성숙으로 간다는 것이고, 그것은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이 질 때 나비와 벌과 새와 우리는 슬퍼한다.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과 모든 멈추어 있음은 번갈아 나타난다. 우리에게 환희만 주고 슬픔을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늘 들떠 있기만 하고 가라앉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슬픈 눈을 가지는 것은 행운이다. 슬픈 눈으로 볼 때 세상은 제모습대로 보인다. 빛 저쪽에 어둠이 보이고, 환희와 열락의 삶 저 쪽에 비애와 허무와 죽음이 보인다.

 

꽃 피어 있음만을 보는 환혹의 눈으로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마녀의 달거리처럼 땅에 질펀하게 떨어져 누워 있는 꽃잎들을 보는 슬픈 눈으로라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모든 글은 참되게 살다가 참되게 죽어가는 길 가르치기이다.

 

 

<예문>

내 손은 왜 부처님손이고 다리는 왜 나귀다리인가. 내 얼굴은 왜 바야흐로 만개한 연꽃이고 아랫도리는 진흙탕 속의 연뿌리인가.

이곳에서 백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황지란은, 줄기가 절대로 구부러질 줄 모르고 하늘을 향해 곧게 치솟듯 자라기만 하는 삼나무 숲속의 조선참솔 통나무집 황토방 속에서 반가부좌를 한 채 머리속에 그 화두를 굴리면서 비발디의 만돌린 협주곡을 듣고 있었다.

 

음악이 초가을 청자색 하늘 한가운데서 투명한 날개를 퍼덕거리고 맴을 도는 고추잠자리들을 떠오르게 했다. 그녀는 머리 파르라니 ?은 작달막한 체구의 앳된 비구니가 한 소식 하겠다고 용맹정진을 하듯이, 조개가 진주를 키우듯이 자궁 속의 아기를 키우고 있었다.

-<내 서러운 눈물로> 서두에서..

 

 

막고 품어라

고기 잡이 에는 낚시나 그물이라는 기교가 사용된다. 가느다란 대 끝에 낚싯바늘 한 개를 달아 쓰는 세월 낚기 같은 낚시질이 있고, 몇백 미터 되는 줄에 낚싯바늘 수백 수천개를 줄줄이 달아 던져넣는 주낚질이 있다. 그물을 던져 포획하는 투망질이 있고, 물목에 그물을 막아 잡는 정치망이 있고, 어선 꽁무니에 저인망을 매달아 갯벌 바닥을 훑어 잡는 무지막지한 방법이 있다.

 

고기잡이 가운데서 가장 미련스러운 것은 낚시나 그물을 사용하지 않고 잡는 방법이다. 개울의 위쪽과 아래쪽에 둑을 쌓아 막은 다음 땀 뻘뻘 흘리면서 양동이로 물을 퍼내고 바닥에서 퍼덕거리는 고기를 잡는 방법.

그것을 '막고품기'라 한다. 아무런 꾀도 쓰지 않고 무조건 막고 품어 잡는 이 방법은 가장 힘이 들기는 하지만 개울안에 들어 있는 고기라는 목표를 놓치지 않고 가장 확실하게 잡는 비책이다.

 

운동선수들은 조련하는 유능한 감독들은 모두 이 방법을 곁들여 쓴다. 무조건 땀 뻘뻘 흘리면서 연습을 하고 또 하면 유능한 선수가 된다 모든 예능인들, 마라톤 선수들은 다 이 방법을 쓴다.

글쓰기도 그러하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무조건 많이 쓰면 작가가 될 수 있다. 고기가 보이기만 하면 막고 품어라.

 

<막고 품어야 하는 까닭>

내가 젊었을 적에 소설 한 편을 쓰고 나면 그것을 최소한 다섯번쯤은 고치곤 했다. 1968년에 소설 <목선>으로 당선 되어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지 4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소설 한 편을 쓰면 열번쯤 고치곤 한다.

 

나는 요즘 늙어진 나의 감수성을 의심하곤 한다. 이 문장에 제대로 쓰였는지, 이 낱말은 제대로 선택되었는지, 이 소설의 서두는 독자들의 마음을 끌어들일 수 있는지, 이 소설의 결말은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지 성난 얼굴로 살피면서 거듭 고치곤 한다.

 

청탁받은 권두언이나 에세이나 칼럼의 경우에도 고치고 또 고친다.

그렇게 고치는 일은 자기 운명을 교정해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거듭 고치는 일은 막고 품는 고기잡이와 다르지 않다.

 

 

한승원

1939년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 1968년 <대한일보>에 <목선>당선 작품활동시작한 이래 40년간 소설가와 시인으로 활동. '내소설의 9할은 고향바닷가 마음이야기'라는 고백처럼 그의 작품속에는 남해 바닷가의 비릿한 풍경과 정겨운 토착어가 살아 숨쉰다.

혼이 담긴 살아 있는 글을 쓰기 위해 평생을 몰두해온 작가 한승원은 세상속에 떠다니는 글의 씨앗들이 제대로 된 글로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책을 썼다.

 

이책 안에는 글을 쓸 대마다 화두처럼 그를 따라 다녔던 질긴 고민과 깊은 사유끝에 얻어낸 글쓰기 철학이 정련되어 담겨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장편소설<불의 딸><포구><아제아제 바라아제><아버지와 아들><해일><시인의 잠><동학제><아버지를 위하여><해산가는 길><멍텅구리배><사랑><물보라><초의><흑산도 하늘길><원효><키조개><추사><다산>소설집 <한승원 중단편전집>-전7권. 어른을 위한 동화<어린별><우주색칠하기> 시집<열애일기><사랑은 늘 혼자 깨어 있게 하고><노을아래서 파도를 줍다><달 긷는집>산문집<차 한잔의 깨달음><바닷가 학교>등이 있다.

 

한국소설문학상<1980>,대한민국문학상<1982>한국문학작가상<1983>현대문학상<1988>이상문학상<1988>서라벌문학상<1994>한국해양문학상<1997> 현대불교문학상<2001>미국기리야마 환태평양도서상<2002> 김동리문학상<2006>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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