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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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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시문학소사전] - "블랙리스트"이란?... 댓글:  조회:3789  추천:0  2017-01-01
블랙리스트:   특별히 주의하고 감시할 필요가 있는 인물의 명단.  주로 불법적인 행위와 관계된 것을 이른다. (례) 검찰에서 비밀리에 조합 간부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감시를 한 사실이 밝혀졌다. 블랙리스트(영어: blacklist)는 경계를 요하는 사람들의 목록이다. 이와 반대로 화이트리스트는 허용되거나 권한이 있는, 식별된 실체들을 모아놓은 목록이다. 블랙리스트는 공식적일 수도, 비공식적일 수도 있다. 고용 환경에서 수많은 직위에 지원하는 신청자들은 자격 요건에 관계 없이 일부 또는 모든 차후의 신청 프로세스 기간 동안 곧 무시될 수 있다. 이는 개인이 취한 비공식적인 선택일 수도 있고 한 오피스에 의해 취해진 공유된 공식적인 응답일 수 있는데, 이는 블랙리스트로 기술되는 문제는 아니다. 과거에는 연합 구성원들의 블랙리스트가 여러 단체들 간에 공유되어, 불완전하다는 이유가 아닌, 경영 활동에 지장이 되는 직원들의 고용을 막았다. 블랙리스트에 등재되었다는 까닭에 사람들은 수십년 간 일을 하지 못하였으며, 일부 사례의 경우 블랙리스트의 정보는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출처: 지식in}
89    시인은 모든 리익과 다툼에서 손해보는 사람이다... 댓글:  조회:3335  추천:0  2016-12-31
      옛 중국 시인들의 노래가 있다. 들어본 듯 익숙한 노래도 있고, 생경한 노래도 있다. 어떤 노래는 삶에 대한 하소연이고, 어떤 노래는 관조다. 이 책에서는 하소연의 노래를 ‘시인의 노래’라고 하고, 관조하는 노래를 ‘어부의 노래’라고 했다. 시인은 다툼에서 지고, 이익 앞에서 손해를 자처하는 사람이다. 모든 생명은 한 그루 나무에서 피고 지는 꽃들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책은 같은 나무에서 피고 지는 모든 생명의 아픔을 옛 사람들이 어떻게 승화시켰는지 보여준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옛 시인들의 서정시를, 그 배경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각각의 꽃들이 피고 지는, 웃고 우는 유아지경을 말한다. 뒷부분에서는 나와 남, 세상과 내가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는 시적 무아지경을 이야기한다. 이백, 백거이, 두보, 설도, 어현기, 이욱, 송휘종, 이청조, 소식, 도연명, 맹호연, 왕유 등의 시를 담고 있다. 「棄我去者昨日之日不可留(기아거자작일지일불가유) 亂我心者今日之日多煩憂(난아심자금일지일다번우) 長風萬里送秋雁(장풍만리송추안) 對此可以酣高樓(대차가이감고루)」 이백 -‘宣州謝朓樓餞別校書叔雲’(선주사조루전별교서숙운)- 중에서 이백의 시 ‘선주의 사조루에서 교서 이운을 전별하다’는 시는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비교적 많이 알려진 작품이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방식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나를 버리고 가 버린 어제는 머물게 할 수 없고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오늘은 근심만 많다 긴 바람은 만 리에 가을 기러기 보내는데 이렇게 마주하니 흥겨워라 높은 누각」 글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한문의 글귀에 엄격하게 얽매이기보다는 우리말의 운율과 느낌에 맞추어 감각적으로 번역한다. 이런 식이다. 「나를 두고 가 버린 지나간 세월/ 남은 것은 내 마음 휘젓는 오늘/ 아득한 가을바람 기러기 난다/ 풍경을 마주하고 술잔을 들자」 중국 당나라 290년 동안 207명의 여성 시인이 있었다. 이 숫자가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단 한 편이라도 시가 전해오는 여성 시인들만 챙긴 것이다. 그중 눈에 띄는 시인이 설도(768∼832)다. 설도는 유채춘, 어현기, 이야와 함께 당대 4대 여성 시인이었다. 생활고에 쫓긴 설도는 16세에 모친의 권유로 기녀로 등록했다. 설도는 재능이 뛰어났다. 절도사로 온 사람의 눈에 띄어 관청의 공문서를 관리하는 직책을 얻기도 했다. 그녀는 42세에 장안에서 감찰어사로 내려온 대시인 원진(779∼831)과 일생일대의 사랑에 빠졌다. 시간이 흘러 원진은 장안으로 돌아갔고, 출세한 원진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데다 기녀인 설도를 돌아보지 않았다. 설도는 원진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春望詞'(춘망사)다. 「꽃이 펴도 함께 즐길 수 없고/ 꽃이 져도 함께 울 수가 없네/ 묻노니 그리운 이 어디 계신가/ 꽃은 피고 그 꽃 또한 지고 있는데/ 풀 뽑아 묶어 보네 사랑의 약속/ 동심초 그대에게 보내려는데/ 봄의 슬픔 한없이 가슴 아플 때/ 봄 새도 목이 멘 듯 구슬피 우네/ 꽃잎은 하루하루 바람에 지고/ 우리가 만난 날은 아득하구나/ 어째서 사랑은 묶지 못한 채/ 공연히 동심초만 묶고 있을까/ 어쩌랴 가지마다 가득한 저 꽃/ 날리어 그리움만 더하는 것을/ 거울 보며 흘리는 두 줄기 눈물/ 아느냐, 봄바람은 알고 있느냐」 연작시인 이 애달픈 노래 중 세 번째 시 '꽃잎은 하루하루 바람에 지고/ 우리가 만난 날은 아득하구나/ 어째서 사랑은 묶지 못한 채/ 공연히 동심초만 묶고 있을까'는 김성태 작곡의 우리나라 가곡 ‘동심초’가 됐다. 물론 번역한 사람이 다른 만큼 가사는 다르다. 지은이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모두 시인이다. 삶의 순간순간, 어떤 사람은 그 느낌을 글로 남기고 어떤 사람은 다른 것으로 남길 뿐이다. 사는 동안 남에게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면 그가 바로 시인이다. 남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달려간다면 그가 바로 시인이다. (중략)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이 있을 때 별말 없이 부축해 주고 떠나는 사람, 다툼이 생겼을 때 기꺼이 지고, 이익이 되는 줄 알면서 때로는 손해를 자처하는 사람, 경쟁에서 한 걸음 물러서고, 자신의 작은 성취에 만족하는 사람, 낮은 목소리로 얘기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시인이다”고 말한다. 지은이 안희진은 단국대학교 중국어과 교수로 있다. 어린 시절 조부에게 천자문을 배웠고, 한문에 익숙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는 서예공부를 했다. 그 모든 경험들이 중국 시에 빠져드는 배경이 됐다고 한다. 가끔 틈 날 때마다 아무 쪽이나 펼쳐 읽으면 좋을 성싶은 책이다. 「위성 마을 아침 비에 흙먼지 젖고/ 객사에는 파릇파릇 버들잎 핀다/ 그대여 가득한 술 한 잔 더 들라/ 양관 밖 서역 가면 아는 이 없네.」 -왕유, 위성곡(渭城曲)- 원이(元二)라는 관리가 조정의 발령을 받아 안서도호부(현재의 신장 위구르 지방)로 떠나게 됐을 때, 친구들이 자리를 만들었고 왕유가 시를 썼다. 384쪽, 1만8천원.   /조두진 기자
88    문학과 비평은 쌍두마차... 댓글:  조회:2421  추천:0  2016-12-31
 작성자: 최균선                                              비평의 미학                                                       진 언     비평이란 지력, 지성의 싸움의 수단으로서 이 싸움이 있기때문에 인간들이라는 물종이 보다 문명해지고 있는것이다. 무엇에나 만족해 있는 사람이 가장 큰적이라는 말이 있다. 비리한 일을 보고 비평하고싶은 생각이 떠오르면 정의를 신장하려는 마음 이 죽지않았다는것을 의미하며 만약 마음이 죽었다면 “내”가 죽은후 홍수가 지건 말건 알게 뭐냐?하는 혈기가 없고 무정한 미이라에 지나지 않는다.     비평이 없는 사회는 가라앉은 사회이며 희망조차 없는 사회이다. 진정 민주주의 사회라면 그 어떠한 비판도 가능하며 비평의 륜리학도 생생하게 살아있을것이다. 근 간에 평론계에 “비평의 결석”이라는 개념이 통용되고있는데 비평이 현장에 있어야 하는데 부재한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례컨대 현재 문화계와 학술계에 비평다운 비 평의 목소리를 들을수 없는 현상을 례로 들수 있겠다.     중국에도 전국민적으로 비평(비판)의식이 전례없이 왕성한 때가 있었다. 병을 치료하여 사람을 구한다는 그럴듯한 구호를 고창했지만 기실 인격타격이였다. 그러나 다른 타자에 대한 인격모욕과 박해는 되돌아와 자신에 대한 모욕이였고 자아훼멸 이였다. 로신선생이 욕설과 비방은 전투가 아니라고 하였지만 그때는 욕설과 탄압이 상용무기였고 능사였다. 인간은 서로 존중해야 하지만 비평은 필연적으로 충돌의 불꽃을 튕기는 법이여서인가?     사람은 성현이 아니기에 완전무결한 사상과 주장이란 있을수 없고 글도 마찬가지 다. 관습적으로 비평이라면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해야 하는것으로 오해하고 있으며 공식화된 추리와 빈도리를 늘여놓는것인줄 안다. 말하자면 비평의 대상을 그때 그 사물로 한정해야지 그 사람의 인격과 존엄을 몽둥이질하는것은 폭력이다. 무릇 인간 의 기본권리에 대한 무시, 개체의 존엄과 리익을 짓밟는 행위는 모두 범죄이고 법치 정신과 생명에 대한 배반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서책상에 리론일뿐이였다.     지성인들은 모두 비평의 검투사들로서 썩은것을 도려내는 날카롭고 예리한 비평 의 칼날로 우리들이 관심하는 일들을 해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로신선생은 중화문화 사상에서 가장 위대한 비판자로서 그가 무자비한 비판의 무기를 든것은 당시 중국에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때문이다. 만약 로신선생도 함축하고 애매모호하게 에두르는 우아함에 매달렸다면 역시 우아한 그 모든 문필가들처럼 망각의 락엽속에 묻혀 버린지 오랬을것이다. 비평은 언제나 달콤한 죠콜렛트가 아니기때문이다.     리론상에서 말한다면 건강한 사회에서는 로신의 투창과 비수가 수요되지 않는바 따라서 건강한 사회에는 로신같은 위대한 비판자를 배출할수 없다. 역으로 말한다면 오직 기형적인 사회만이 위대한 비판자를 배태한다. 이 시점에서 비판자의 위대함의 정도는 사회의 기형정도와 정비례된다고 할수 있으며 비판자의 수량도 역시 사회적 기형의 정도와 정비례된다고 할수 있을것이다.    딱지투성이 머리는 빗을 꺼린다. 누군가 사회문제를 비평하는것을 싫어한다면 그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있는 시대와 사회에 불만족해야 하는가? 시비곡직을 불문하고 만족해야 하는가? 꾀꼴새 노래하고 제비가 춤추는 아주좋은 형세라해도 회의의 눈길들이 있었다. 비록 문필로 문제를 해결할수 없는 노릇이지만 관념상에서는 금이 그어져 있어야 했다.     인류사회인만큼 시종 문제가 생성하기마련이다. 물질적으로 빈궁하였기에 생산의 속도문제가 제기된것이고 작금에 물질이 풍부해지니까 또 분배상에서의 불공평문제가 튀여나온것이다. 권력비리는 없는가? 여론은 진실한가? 사회, 공중도덕은 곤두박질 하지 않는가? 등등은 인류사회의 항구한 열점들이다. 흐름을 멈춘 물은 썩기마련이다. 추구가 불만족에서 기인된다면 추구야말로 사회발전이 동력이 아니겠는가?       비평이란 말이 나오면 맑스의《도언》에 유명한 구절이 생각날것이다. “비판의 무기는 물론 무기의 비판을 대체할수 없다.” (《맑스엥겔스선 집》제1권 제9페지 중문판) 맑스의 이 명언에서 체현된 철학사상은 리론과 실천의 관계 이다.“비판의 무기”에서 핵심단어는 무기이고 “무기의 비판”에서 핵심단어는 비판으로서 무기와 비판은 별개이다. 그러나 무릇 비판은 위대한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사람들은 함축하고 우아하게 말하기 좋아하여 남을 비평하기를 삼가하였으며 더욱 직언하기를 꺼리였다. 대방의 체면을 살려줘야 한다는 소위 례의이다. 그러나 인성과 리성을 팽겨치고 오직 투쟁만이 대길이였던 광란의 년대에는 인의례의가 설자리 없었다. 환호는 일종 사랑의 표현이고 비판은 또 다른 일종으서 더욱 심각한 사랑이여야 했지만 정서충동이 시킨 만행만이 있었을뿐이다.     사상문화적인 비평도 그렇다. 비평은 비평하는 사람의 존재의 리유이고 증명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방적인 폭언이 아니라 리론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비평은 리성인 지력의 전개이지 감성적인 언어폭력이 아니다. 이 모든 사상과 리론을 정립할 수 있는것은 학문이고 이 모든 학문의 예비학이 비평이다. 비평은 륜리의 채찍이며 이 륜리의 토대우에서만이 모든 학문이 꽃피여 난다. 모든 학문은 하나의 사상론이며 이 사상론은 공유되는것이지 개인의 발설이 아니고 분풀이도 아니다.     사람에 대한 비평의 일반적규률로 말하면 낯선사람, 관심외 사람을 허투루 비평하지 않는다. 그처럼 비평은 관심에서 출발하여 긍정에 이르려는 희망요소가 들어있다. 자신과 차이가 현저한 사람이거나 거리가 먼 사람은 비평하지 못한다. 마치 산간벽지의 초민백성이 황제를 비평할 건덕지도 없고 담량도 없듯이 말이다.     무릇 비평은 비평받는 사람에게 비자재적인 감각을 안겨주기에 무조건 기꺼이 접수하는 군자란 태여나지 않았다. 여기서 비평의 륜리문제가 제기된다. 중국사람들은 자고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좋아하여 쩍하면 어떻게 사람이 되여야 하고 일은 훈계하기 좋아한다. 남을 가르치고 훈계할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다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지만 늘 지엄한 스승으로 자처하는것은 참으로 꼴불견이다.     비판은 비난이나 비아냥이 아니다. 비난, 비아냥은 비뚤어진 심성의 로출일뿐이 다. 남의 견해, 감정표현에 비양거리지 말고 정당하게 반론을 쓰던지 쓸 건덕지가 없으면 공감이 없더라도 반감은 가질 필요가 없으리라. 비평함에서 자신이 무소부지하고 무소불능이고 무불통지한듯 훈계하는것은 비평에서 삼가해야 할 상식이다.          비평거리가 일종 “흠집”이긴 하지만 제흠집은 뒤에 밀어놓고 남의 흠집만 잡고 이렇쿵 저렇쿵하는것은 유치한 발상이다. 남의 흠집이 잘 보이는것은 자신의 흠집만큼만 보이기때문이다. 사람이 자가당착에 빠지면 헛소리를 진담인양 내세운다. 사람이 손가락 하나로 남을 가릴킬 때 손가락 세개는 나자신을 가리키고 남은 하나는 하늘을 가리킨다고 한다. 누구를 손가락질하고 싶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하늘을 쳐다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라, 세번정도 말이다.     지자의 눈은 비평의 자대가 되고 입이 비평의 메가폰이 되여야 한다. 반대로 지자의 귀는 비평을 듣는 귀가 되고 두뇌는 비평의 발원지로 되여 리성으로 맑아지고 심장은 비평의 열정으로 뜨거워져야 한다. 지자의 판단은 비평의 동력으로 되여지고 미래를 내다보고 벼리는 비평의 무기는 서리발쳐야 할것이다. 비평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들의 살속에 있는 피이고 따라서 그들에게 우리의 체면따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것이다.        
87    여보게 친구,분위기가 얼쑤인데 한잔 안할수가 없잖은가... 댓글:  조회:3101  추천:0  2016-12-31
시각·후각·미각 자극…술 한잔 하자는 멋진 초대장               백거이   친구야, 이래도 술 한 잔 안 할끼가                                    백거이 푸른 거품 부글부글 새로 담은 술         綠蟻新醅酒(녹의신배주) 붉은 질화로에 새빨갛게 타는 숯불       紅泥小火爐(홍니소화로) 저물녘 눈이 펑펑 쏟아질 듯, 쏟아질 듯  晩來天欲雪(만래천욕설) 친구야, 이래도 술 한잔 안 할끼가      能飮一杯無(능음일배무) *원제: 問劉十九(문유십구). ‘劉十九’는 대가족 제도하에서 유씨 집안의 형제들 가운데 그 서열이 열아홉 번째에 해당되는 사람. 당나라의 저명한 시인으로 작자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절친한 친구였던 유우석(劉禹錫)을 가리킴.  *綠蟻: 술이 익을 때 푸른빛을 띠며 부글부글 이는 거품. 바야흐로 지금 새로 담근 술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서 푸른 거품이 부글부글 떠오르고 있고, 붉은 질화로에는 새빨간 숯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푸른 술과 붉은 질화로, 그 붉은 질화로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새빨간 숯불의 시각적 이미지가 단연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런데 보다시피 1구와 2구는 모두 서술어가 없는 명사형으로 끝나고 있어서, 1구와 2구의 상호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새빨간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붉은 화로 위에 거품이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푸른 술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는 장면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터다. 따라서 이 대목은 단순히 시각을 자극하는 장면일 뿐만 아니라, 방안에 진동하는 술 냄새로 후각을 자극하고 미각을 자극하기도 하는 것. 그러지 않아도 따뜻한 화로를 끼고 앉아서 맛있는 술을 막무가내로 퍼마시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에 울컥 치솟아 오르는데, 저물어가는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눈이, 그것도 이왕이면 함박눈이 펑펑 쏟아질 기세다. 그러니까 술 마실 수 있는 분위기, 아니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분위기가 완벽하게 조성되어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술도 마음 맞는 친구와 이마를 마주 대고, 주거니 받거니 함께 마셔야 훨씬 더 멋이 있고 맛이 있는 법. 아무리 맛 좋은 술이 있고 술 마실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해도 혼자서야 도대체 무슨 청승으로 술을 퍼마시고 있겠는가. 그러므로 작자는 이 짤막하고도 인정이 물씬 풍기는 시를 일필휘지로 지은 뒤에 이웃에 살고 있는 다정한 친구에게 보내어 묻는다. 여보게 친구, 분위기가 여차여차한데 아무래도 한 잔 안 할 수가 없잖은가. 대답해 보게. 안 그런가 친구! 술이 등장하고 있기는 해도 어렸을 때 본 성탄절 카드 속에 등장하는 포근한 그림처럼 정겨운 시다. 오늘은 올해의 맨 마지막 날! 이토록 멋진 초대장을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채 한 해가 와장창 저무나 보네. 이토록 멋진 초대장을 단 한 번도 보내보지 못한 채, '어 어 어' 하며 우왕좌왕 허둥대는 사이에 올해도 기어이 내 손을 확 탈치고 가, 가나 보네. 새해에는 주위에 인정도 좀 내면서 살아봐야겠네.   /이종문 시인`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매일신문 페이스북
86    술과 시와 삶은 잘 삭혀야 제맛!~~~ 댓글:  조회:2364  추천:0  2016-12-31
[ 2016년 12월 30일 11시 43분 ]     차간호(查幹湖) =길림(吉林)성 송원(松原)시 차간호에서 시를 삭히는 법 / 이섬  음식을 만드는 과정 중에 ‘삭힌다’는 말이 있다. 김치나 젓갈, 식혜 등을 제맛이 나도록 익히는 것인데 중요한 건 인위적으로 익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적당한 온도와 바람, 햇빛 등 자연적인 요소로 숙성시켜야만 잘 삭혀진다고 하겠다. 전문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음식물 속에 있는 효모나 박테리아같은 미생물에 의해서 유기 화학물이 분해·산화·환원하여 유기산이나 탄산가스 등이 생겨서 발효되는 것이다.  잘 익고 맛있게 삭은 고추장만 해도 그렇다. 메주가루와 고추가루, 엿기름가루, 소금물 등을 골고루 섞어 버무린다. 이것을 항아리에 담아 통풍이 잘 되고 양지바른 곳에서 낮에는 햇빛을 쪼이고, 밤에는 뚜껑을 꼭 덮어 물기가 스미지 않게 해서 두 달 이상이 지나야만 제대로 삭혀져서 맛이 나게 된다.  또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내가 좋아하는 반찬 중에 가자미 식해라는 것이 있다. 함경도가 고향인 어머니가 해 주시던 음식인데 잘 삭혀진 가자미 식해의 맛은 ‘입에 살살 녹는다’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겨우내 먹을 김장을 끝내놓고 나면 꼭 가자미 식해를 담그시는데 노르스름한 색깔이 도는 참가자미를 결대로 썰어 놓고, 고슬고슬하게 지은 좁쌀밥에 채로 썬 무와 엿기름가루를 섞은 다음 고추가루를 듬뿍 넣어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다. 버무린 것을 키작은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은 다음 웃소금을 살짝 쳐서 바람이 잘 통하고 그늘진 곳에 두었다가 열흘쯤 지난 뒤에 꺼내 먹는다.  요즘 들어서 건강에 신경들을 쓰다보니까 이처럼 발효된 음식이 항암 효과가 있다고 환영을 받기도 하는 듯하다. 폐일언하고, 앞의 예를 든 조리 과정을 보건대 ‘삭힌다’는 건 지적한 것과 같이 열을 가하는 등의 인위적인 방법으로 익힐 수가 없다는 점,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한두 시간이나 하루이틀에 빨리빨리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음식마다 다르지만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맛이 숙성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멸치젓갈같은 경우는 몇 달간의 낮과 밤이 지나야만 소금에 버무린 생멸치의 살과 뼈가 녹아서 잘 익은 젓국이 우러나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나의 두번째 시집 『향기나는 소리』를 읽어 본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섬 씨 삭힌다는 말을 좋아하나 봐.”  그랬었구나! 내가 ‘곰삭은’ 말을 좋아했었구나. 시집을 펼쳐 보았다. ‘상원사 종루에서 나무공이로 두들겨 삭아져서’ ‘우묵한 오지 뚝배기에 노랗게 삭은’ 등등.  이왕 내친 김에 덕담 한 마디 해야겠다. 잘 익어서 맛있게 삭은 시를 쓰고 잘 삭아져서 감칠맛나게 사는 삶, 좋지 않겠는가!  대전을 오가기 위해서 경부고속도로나 중부고속도로를 자주 다닌다. 어느 비 오는 날 오후 중부고속도로 매표소 지하도를 건너가게 되었다. 도로가 16차선이나 되는 꽤 긴 편인 시멘트 동굴같은 델 들어갔는데, 바로 머리 위 길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났다.  “아니, 아니! 길이 울다니….”  비가 오기 때문이었는지, 차가 달리는 소리가 동굴에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머리 위쪽 길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났다. 사람 하나 없는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 그것은 굉장한 놀라움이고 떨림이었다.  며칠이 지난 뒤 나는 「길도 울 때가 있더라」라는 제목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대부분 시를 먼저 쓰고 제목을 붙이는 평소의 습관과는 달리 제목이 쉽게 튀어 나왔다. 그때 들었던 울음소리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큰 울림으로 내게 닿았을까?  길도 울 때가 있더라  중부 고속도로 매표소 지하도를 건너는데  바로 머리 위 길이 엉엉 우는 소리를 냈어  눈물을 흘리면서 울더라니까①  마음밭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검불들을  쥐어뜯는 그런 울음이었어 검고 진했어  숨도 안 쉬고 맥박도 안 뛰는 줄 알았는데  아픔도 눈물도 없는 줄 알았는데②  심장 안쪽에 피가 돌고 있었어③  끓고 있었어④  살아서 꼬물거리던 작은 생명체들이  길속에 또하나의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야  살아 있음의 생생한 기억들을 불러내고  있는 중이었어  여러 겹으로 포장된 뇌사의 길이  비 오는 날이면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어  다 드러내놓고 쓰기로 했다. 내가 겪었던 체험은 내 의식 주변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연결되었다. 내가 알지 못하고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도 있을 수 있는 갈등과 아픔 그들을 치유하고자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①행을 좀 더 강조해야겠고, ②행과 ③행의 연결고리가 너무 느슨했다. 갈등을 화해로 전환하는 데 좀더 탄력있게 조여줄 수 있는 연장을 찾아보기로 했다.  시를 쓰고 고치는 것도 성격대로인가? 서두르지 않았다. 석 달쯤 지난 후 작품들을 정리하면서 다시 그와 마주했다. 그를 한 등급 높여서 예우해 주기로 했다. 의인화시켜서 그에게 더운 피가 돌게 하고, 다시 ④행을 수정하여 맑은 공기를 흠뻑 들어마시게 해 주었다. 잘 삭혀진 것일까? 고른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길도 울 때가 있더라  중부 고속도로 매표소 지하도를 건너는데  바로 머리 위 길이 엉엉 우는 소리를 냈어  정말이야 눈물을 흘리면서 울더라니까  마음밭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검불들을  쥐어뜯는 그런 울음이었어 검고 진했어  숨도 안 쉬고 맥박도 안 뛰는 줄 알았는데  시멘트에 방수에 겹겹이 포장된 심장 안쪽에  아직도 더운 피가 돌고 있었어  펄펄 끓어서 맑아지게 하고 있었어  살아서 꼬물거리던 작은 생명체들이  길 속에 또 하나의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야  살아 있음의 생생한 기억들을 불러내고  있는 중이었어  여러 겹으로 포장된 뇌사의 길이  비 오는 날이면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어  나는 시에서 운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읽으면서 걸리는 구절이나 어색한 부분은 없는지 몇 번씩 읽어보곤 한다. 또한 탄탄한 집을 지어주고자 한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는 구조가 탄탄한 집, 거기에 유산균이 풍부한 잘 삭은 맛깔스런 시의 국물까지 곁들인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이 섬)   ======================================================================     기차표 운동화  ―안현미(1972∼) 원주시민회관서 은행원에게 시집가던 날 언니는 스무 해 정성스레 가꾸던 뒤란 꽃밭의 다알리아처럼 눈이 부시게 고왔지요 서울로 돈 벌러 간 엄마 대신 초등학교 입학식 날 함께 갔던 언니는 시민회관 창틀에 매달려 눈물을 떨구던 내게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단풍이 흐드러지고 청군 백군 깃발이 휘날려도 끝내, 다녀가지 못하고 인편에 보내준 기차표 운동화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토닥토닥 집으로 돌아온 가을 운동회 날 언니 따라 시집 가버린 뒤란 꽃밭엔 금방 울음을 토할 것 같은 고추들만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지요 국민동요라 할 수 있는 노래 ‘섬 아기’가 떠오른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를 집에 혼자 두고 굴 따러 다녀야 했던 엄마, 그 아기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기도 전에 돈 벌러 서울 가서 안 계시는 형국이다. 화자에게는 다행히도 곁에 언니가 있었다. 엄마 역할을 하던 그 언니가 시집가던 날, 어린 화자의 불안과 슬픔이 오죽했을까. 언니도 어린 동생이 안쓰러워 눈물을 쏟았을 테다.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먼 고장으로 시집 간 언니는 끝내 오지 못하고. 화자는 내내 교문 쪽을 흘깃거리며 공을 던지고, 달리기를 했을 테다. 점심시간에 다른 친구들은 가족과 둘러앉아 맛있는 도시락을 먹었을 테지. 운동회가 끝나고 혼자 터덜터덜 집에 돌아와서 화자는 뒤란으로 간다. 그립고 그리운 언니가 꽃을 가꾸던 뒤란은 이제 고추밭이 됐다. 마치 꽃밭이 언니 따라 시집가버린 듯. 엄마하고만 사는 어린이, 아빠하고만 사는 어린이, 할머니랑 사는 어린이, 친척집에서 사는 어린이, 보육원에서 사는 어린이. 요즘 이런 어린이가 많아졌다고 한다. 이 어린이들은 대개 담담한 척한다. 슬픔은 받아줄 사람이 있을 때나 드러내는 것이기에. 외로움과 두려움뿐 아니라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제 처지에 대한 수치심이 엉겨 있는, 소위 결손가정 어린이의 슬픔. 이 슬픔을 어떻게 달래줄까…, 대책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네 운명이려니, 팔자려니 할까….
85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학생들께 론문쓰는법 가르치자 댓글:  조회:2589  추천:0  2016-12-31
  [ 2016년 12월 30일 11시 12분 ]     호북 샹양(湖北 襄阳)에서 외계 비행체(UFO)로 추정되는 바위가 발견.      2016.12.29 03:02   홍성윤 부경대 명예교수 요즘 한국의 과학 연구 역량을 증진하기 위한 많은 의견이 제안되고 있다. '기초 과학 분야의 연구비 비중을 늘리자' '단기간 연구로는 미래가 없다' '교수들 강의 부담을 줄여 연구에 더 매진하게 하자' 등이다. 그러나 모두 현재의 연구자들을 위한 제안이지, 수년 후 이에 합류할 학부생이나 대학원생들을 위한 배려는 아니다. 많은 교수가 "학생들이 실험은 잘하는데 논문은 못 쓴다"고 불평한다. 학생이 쓴 논문을 교정하면서 교수들은 자괴감에 빠진다. 결국 시간에 쫓겨 많은 부분을 직접 써버리는 경우도 흔하다. 무엇이 잘못인지 일일이 가르쳐줄 시간도 없다. 영어도 대체로 형편없어 보인다. 그렇다 보니 학생들은 실험실 선배들 말이나 기존 논문의 제작 관행을 따르며 쓰기를 흉내 내므로 창의성이 없다. 용감하게 "논문 쓰는 법을 가르쳐주진 않고 잘 쓰라고만 한다"고 불평도 못 한다. 이래저래 교수와 학생 모두에게 논문 쓰기는 큰 압박이다. 이는 우리 대부분이 과학 논문 쓰기에 관해 배운 적 없고, 가르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막연히 '논문은 연구 결과를 기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구만 잘하면 논문은 저절로 잘 쓰게 될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실험을 통해 결과는 냈지만, 이를 정확한 결론으로 정리하는 능력이 없어 쓰기 어려운 것이다. 때로는 실험이나 연구의 목적이 무엇을 주장하는 데 근거를 갖추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것 같다. 무언가를 추론해 가설을 제시하고, 이를 검증할 목적으로 실험하며, 그 결과를 정리해서 내는 것. 이것이 과학의 방법이다. 과학도 소통의 한 방식이므로 제대로 쓰지 않으면 완성될 수 없다. 또 과학 논문 역시 '언어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언어적 표현은 대단히 중요하다. 더구나 외국어인 영어로 써야 한다. 한마디로 과학자에게 쓰기 작업은 연구 역량의 총화인 것이다. 국가적 과학 역량을 증진시키려면 연구비 배분과 연구 기간 장기화 등 여러 가지가 실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래 과학자들의 제대로 된 논문 쓰기를 위해 자연 탐구의 열정, 과학의 방법, 논문의 구성 등을 글쓰기의 기본에 맞춰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이공계 대학의 학부나 대학원에서 논문 쓰기를 가르치는 곳은 드물다. 쓰기를 가르치지 않고 어찌 훌륭한 과학자를 만들 것인가. /ⓒ 조선일보
84    "전설의 편집자", 53, 그리고 외길 인생 댓글:  조회:2869  추천:0  2016-12-31
1천권 책 만든 ‘한국출판 산 증인’ 한용운 전집·역주 목민심서·창비… “다산은 당대 최고 지식인, 행복했다” 편집·교정 반세기 정해렴 지음/한울엠플러스   53년 동안 편집, 교정, 번역 작업을 해 1천여 권의 책을 만들어온 정해렴(77)씨가 첫 저서를 냈다. 다.   자신이 만든 책을 시간 순으로 배열하고 만든 과정과 얽힌 사연을 기록했다. 신구문화사 10년, 창작과비평 20년, 현대실학사 23년 등 53년 동안의 역정이다. 편집 외길 인생을 걸어온 정씨 개인의 자취인 동시에 한국출판의 역사라 할 터이다.   등. 한국 출판의 획을 그은 책들의 탄생 비화가 흥미진진하다. 를 만들 당시 ‘문화공포부’의 검열 행태와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심문을 받던 기억, 판매금지를 당해 책과 지형을 작두질해야 했던 일 등은 군부독재를 건넌 출판인의 나이테에 해당한다.   “편역은 많이 했지만 저술은 처음이다. 나도 쓸 수 있나 시험 삼아서 써봤다. 얘기가 되더라. 한 가지 일에 매진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정씨는 자신이 만든 책 판권란을 보고 기억을 되살려 기술했다며 원고지 1800장에 이르는 양이지만 생각이 안 나서 거론 못한 것도 있다고 했다. 때로 관련된 분들이 불편한 부분도 있으나 한국 출판계의 편집교정 실태의 기록을 남긴다는 뜻이며 누구건 책을 조심스럽게 내야 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장덕순의 교정을 보니 한 면에 평균 3~5자, 최대 15군데나 틀린 곳이 있었다. 전체가 500쪽이니 1500~2500군데가 틀린 셈이다. 지은이가 제자들한테 교정을 맡기면서 벌어진 게 아닌가 추정한다. 그는 교정 이후 학계 행사 때 만나면 슬그머니 피하시더라고 전했다. 이에 비해 이기백의 은 5면당 1자씩 잘못이 있더라면서 우리나라 출판 현실에서 최상의 책이었다고 술회했다.   “재주가 없고 말주변이 없으니 오랫동안 책을 만든 게 아닐까. 해방, 한국전쟁 등 과도기에 대학을 다녀 학창시절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다. 자기계발 기회도 없었다. 출판계 입문해 1천권의 책을 만든 것은 밥벌이인 동시에 제대로 된 공부 과정이었다. 나만큼 독서를 많이 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행복한 인생이었다.”   편집자로서 그가 우선시한 것은 원문 대조. 지은이가 인용한 문장을 원전과 대조하여 잘못을 바로잡았다. 영어나 한문의 번역문도 마찬가지. 지은이의 저술 과정을 되짚어가는 작업이라 저술 못지않은 공부와 노력을 들여야 했고 그것은 그대로 자신의 피와 살이 되었다. 한국문학, 역사의 콘텐츠를 줄줄이 꿰어 어느 면에서는 그 분야 학자들을 능가하는 실력자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연마한 한문 독해력은 실학자들의 저술을 편역하는 기초가 되었다. 창작과비평 퇴임 뒤 현대실학사를 차려 다산의 저서 18권을 편역한 것은 출판계 이력 30년의 결실이다.   “다산은 한중일을 통틀어 당대 제일 가는 학자다. 학문 수준도 그렇지만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컸다. 최고 석학의 책을 펴내는 게 행복했다. 편집자의 눈으로 봐도 그의 책은 거의 오류가 없었다. 인용한 중국 사료는 비교적 정확했다. 저술을 한 뒤 제자를 시켜서 원문 대조를 한 게 틀림없다. 하지만 국내 저서는 조금 달랐다. 연암의 책을 인용하면서 원문과 다른 부분이 있더라. 구하기 어려워 기억이나 필사에 의존하면서 빚어진 게 아닌가 싶다. 편역하면서 바로잡았다.”   가장 빛나는 그의 업적은 정본 만들기. 채만식 전집, 한용운 전집, 홍명희 등이 그것이다. 작품이 처음 선보인 신문, 나중에 나온 단행본 등을 찾아 일일이 대조해 조판과정에서 실수로 빠뜨리거나 뒤바뀐 글자와 문장을 되살렸다. 지은이조차 바로잡지 못한 부분을 잡아내어 지은이의 애초 의도와 최대한 가까운 형태로 완성했다. 정본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그의 철두철미한 작업은 단연 돋보였으며 출판인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 되었다.   “읽다 보면 어색한 부분이 눈에 띈다. 원사료를 확인해보면 대개는 편집자의 오류였다. 활자가 작고 행간이 촘촘해 새 간행물로 옮기는 과정에서 건너뛰는 사례가 종종 있더라. 원사료에도 어색한 부분이 보이는데, 앞뒤를 살펴보면 전말이 드러난다. 문선, 조판하는 과정에서 앞뒤가 뒤바뀌거나 한 글자씩 밀려난 것이다.” 그는 자신이 활판인쇄 과정을 겪었기에 금세 알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추정일 뿐. 몇 번씩 읽어 추론이 합리적일 때에 한해 바로잡았다면서 함부로 고치는 것은 위험하다고 덧붙였다.   이밖에 그는 한글화, 역주, 색인을 보편화했다. 입문 무렵 출판계는 국한문 혼용이 보편적이며 한문은 원문을 그대로 실었다. 그는 한글을 우선하고 필요하면 괄호에 한자를 병기했으며 인용문이 한문일 때는 번역문을 우선하고 원문은 괄호 또는 각주 처리했다. 교수가 대부분인 저자들이 책이 가벼워진다며 이를 반대했지만 어려운 학술서의 가독성을 높임으로써 역사, 철학서의 대중화에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색인 역시 마찬가지. 책에서 밑줄 친 고유명사, 열쇳말을 가로 8, 세로 1.5㎝ 카드에 일일이 옮겨 적어 가나다 순으로 분류해 권말에 붙였다. 이로써 학문하는 이가 이용하는데 편리한 책이 되었다.   는 대체로 이러한 내용인데, 1976년 설악산 대청봉 등산 이야기가 들어있는 게 이채롭다. 얼마나 책 만들기에 전념했으면 그럴까, 싶다. 꼼꼼한 원문대조와 주, 색인 작업은 이제 당연시하는 관행이지만 그것이 한 편집자의 외ч 삶이 이룬 결과임을 알겠다.   “여력이 되면 근대 실학자들의 저술, 특히 유형원의 을 번역하는 게 꿈”이라는 그는 작업 틈틈이 눈을 쉬어주며 시력관리를 한다고 했다.   /임종업 선임기자 =============================== 돋보기를 든 정해렴 대표. 해지도록 사전을 들추며 보낸 반세기 편집 인생이다. [사진 한울] “공판타자(활자판에 활자를 늘어놓고 한 글자씩 찾아 원지에 찍은 후 등사하는 기법)를 사용했는데, 활자가 없으면 같은 계열의 글자를 찍어놓고 철필로 써 맞췄다. 가령 ‘하’자가 없으면 ‘히’자를 쳐놓고 철필로 ‘ㅏ’의 점을 그은 것이다.” 『편집·교정 반세기』 펴낸 정해렴 대표 책 1000여 권 만든 53년차 출판인 “60년대 활자 없어 철필로 써 넣기도” 53년차 현역 출판인, 정해렴(77) 현대실학사 대표가 출판 입문 첫 해인 1964년 교학도서에서 중학교 작문 교과서를 만들며 경험한 일이다. 한국 출판계의 살아있는 역사로 통하는 그는 신구문화사·을유문화사 등을 거치며 1000여 권의 책을 펴낸 편집·교정 전문가다. 1980∼83년엔 창비 대표를 지냈고, 97년부터는 고전 번역서 전문 출판사인 현대실학사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그는 자신의 출판 인생을 꼼꼼히 되짚어 기록한 회고록 『편집·교정 반세기』(한울)를 펴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1980년대까지도 원고는 원고지에 쓰는 것이었다. 신문 연재 소설을 책으로 출간하는 과정은 이랬다. 작가가 200자 원고지에 손으로 써서 신문사로 보내면, 신문사에서 활자를 찾아(문선) 조판해 신문에 싣고, 작가는 신문 연재 분을 모아 한 권 분량씩 출판사에 넘긴다. 출판사에서는 신문을 보며 다시 문선·조판하고 초교·재교·삼교의 과정을 거쳐 지형(紙型)을 떠서 인쇄소로 넘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신문 스크랩이 혹 누락되면 책에서도 그 내용이 빠질 수밖에 없다. 1972년 신구문화사에서 『한용운 전집』을 펴낼 때 일이다. 조선일보에 연재됐던 소설 ‘흑풍’의 교정을 보다보니 한 회씩 빠진 부분이 여덟 곳이나 있어 이야기가 뚝뚝 끊겼다. 그는 사직도서관과 중앙대 도서관 등을 다니며 과거 신문철을 뒤졌고, 마침내 빠진 8회 분을 찾아 내용을 보충했다. 당시엔 복사기도 보편화돼 있지 않아 신문을 일일이 손으로 베껴 옮겼다. 그는 또 “신문의 깨알같은 글자를 보고 문선·조판하다 보면 한두 줄, 한두 단어씩 빠뜨릴 확률이 매우 높았다. 이를 교정에서 못 찾아내면, 교묘하게 빠진 이 문장은 영원히 작품에서 사라지게 된다”고 했다. 그가 평생 ‘철저한 원고 대조’를 강조하고 지킨 이유다.   #‘xxx’은 금기어? 1980년 창비에서 출간한 『독립운동사 연구』(박성수 지음)는 독립운동가 이름에 ‘xxx’을 포함시켰다가 절판되고 말았다. 당시 창비 대표였던 그에게 문공부 간행물 심의관이 “좀 보자”고 했다. 17쪽에 실린 “해방 직전에 3대 독립군사단체가 있었으니 그 하나가 광복군(김구)이었다. 다른 둘은 연안의 조선혁명군(김무정)과 간도 장백산의 조선인민혁명군(xxx)이었다”는 내용이 문제였다. 심의관은 이 구절을 고치거나 xxx에 대해 ‘현재 fh의 xxx이 아니다’라는 각주를 달아 발행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책을 더 찍지 않는 것으로 수습했다”면서 “당시 소문으로는 반공 단체 혹은 경찰이 문공부에 항의해 생긴 일”이라고 기억했다.   #작두질당한 시집 82년 김지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출간한 뒤엔 3박4일 동안 남산 안기부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사무실을 나서 지프차를 타고 가다가 눈을 가리고 남산에 올라갔다. 새벽까지 이런저런 조사를 받고 진술서를 썼다. (…) 나에게 시집과 지형 포기 각서를 쓰라고 하기에 그냥 써주었다. 출판사 폐업계도 쓰라고 하기에 써주었다. 이날 오후 풀려나 회사에 도착하니 서울지방국세청에서 회사에 들이닥쳐 장부 일부를 가져가고 또 목동 내 집에서도 어음장과 장부를 가져갔다.”(199, 200쪽) 당시 제본하던 책과 지형은 작두질해 폐기했다. 이후 출간한 김지하 시인의 『남』 역시 판매금지를 당했다. 그는 “판매금지처분을 문서로 하지 않고 발행인을 불러 통고했다. 공문을 보내면 나중에 이를 근거로 삼아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으니 말로 처리하는 듯했다”고 돌아봤다. DA 300   이지영 기자  [출처: 중앙일보]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냈다 안기부서 3박4일 조사받아”  
83    안중근 유묵 106년만에 해빛 보다... 댓글:  조회:2981  추천:0  2016-12-30
안중근 선생의 志士仁人 殺身成仁 (지사인인 살신성인)             일본에 머물고 있던 안중근 의사의 유묵(遺墨·)이 106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안중근의사숭모회(이사장 안응모)는 28일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최근 기증받은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공개했다. 유묵은 1910년 3월 안중근 의사가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을 앞두고 쓴 옥중 육필 200여 점 중 하나이다. '지사인인 살신성인(志士仁人 殺身成仁·높은 뜻을 가진 선비와 어진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이라는 '논어' 위령공편의 문구를 인용했다.   안용석(맨 오른쪽)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가 지난달 고마쓰 료 선생의 아들(맨 왼쪽)로부터 안중근 의사의 옥중 유묵을 기증받는 모습. 고령인 고마쓰 료를 대신해 아들이 기증했다. /연합뉴스   유묵을 기증한 일본인 고마쓰 료(小松亮·91)씨는 1910년 당시 안중근 의사 공판 장면을 삽화로 그려 만주일일신문(滿洲日日新聞)에 보도한 고마쓰 모토코(小松元吾)의 종손(從孫)이다. 안중근의사숭모회는 "고마쓰 료씨가 가보와도 같은 유묵이 일본 극우화와 자연재해로 손실될 것을 걱정 해왔다. 안중근 의사의 고귀한 정신과 평화사상을 기려 무상 기증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고마쓰 료씨는 유묵과 함께 고마쓰 모토코가 1910년 2월 10일 뤼순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4회 공판'을 그린 삽화집과 공판 방청권 진본도 함께 기증했다. 천안 독립기념관은 고마쓰 료씨가 가지고 있던 이 방청권을 본떠 만든 복제품을 전시 중이다.   안중근 의사 공판 삽화집. 안중근의사숭모회 제공    [출처] 안중근 선생의 志士仁人 殺身成仁 (지사인인 살신성인)|작성자 곡주
82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뜻뜨미지근", "뜨뜻미지근" 댓글:  조회:2580  추천:0  2016-12-30
  요즘처럼 추운 날씨에는 절절 끓는 방바닥에서 몸을 지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지만 난방시설의 현대화로 좀처럼 이런 온돌 바닥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뜨뜻미지근한 온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온도가 아주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을 때 “방바닥이 그럭저럭 뜻뜨미지근하다” “보온통이 고장 났는지 뜨뜨미지근할 뿐이다”에서와 같이 ‘뜻뜨미지근하다’ 또는 ‘뜨뜨미지근하다’고 쓰기 쉽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표현으로 “욕조에 받아 놓은 목욕물이 뜨뜻미지근해졌다” 에서처럼 ‘뜨뜻미지근하다’고 써야 한다.  발음하기 편하기 때문에 ‘뜻뜨미지근하다’ ‘뜨뜨미지근하다’와 같이 잘못된 표현을 쓰는 것으로 보인다. ‘뜨뜻미지근하다’가 ‘뜨뜻하다’와 ‘미지근하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단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헷갈릴 염려가 없다.  ‘뜨뜻미지근하다’는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다는 의미 외에 “불타오르던 사랑이 뜨뜻미지근해졌다” “뜨뜻미지근한 태도에 애가 달았다”에서와같이 ‘하는 일이나 성격이 분명하지 못하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한국 중앙일보 "우리말 바루기" 김현정 기자 
81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임대"냐? "임차"냐?... 댓글:  조회:2487  추천:0  2016-12-30
...의혹과 관련해 많은 사람이 ‘임대’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x빌딩 아십니까? 이 x빌딩을 임대해 사무실로 사용한 적이 없습니까?”라고 묻는다. x의 소유의 건물을 임대했느냐는 이 질문에는 모순이 있다. DA 300   x빌딩의 소유자가 x씨라면 x씨는 임대인, y씨는 임차인이 된다. ‘임대(賃貸)’는 돈을 받고 자기의 물건을 남에게 빌려주는 것이고 ‘임차(賃借)’는 돈을 내고 남의 물건을 빌려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x의 빌딩을 임차해 사무실로 사용한 적이 없습니까?”라고 물어봐야 y가 그 사무실을 빌려 쓰지 않았느냐는 의미가 된다. ‘임대’와 ‘임차’의 뜻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건물이나 가게를 세놓거나 세내는 경우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임대’란 단어를 쓰기도 한다. “...은 b빌딩 3개 층을 임대했다고 밝혔다”와 같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 건물을 빌렸다는 이야기이므로 ‘임차했다’로 고쳐야 한다. “c은 지난해 1억원이 넘는 임대 소득을 올렸지만 사실상 세금을 한 푼도 안 냈다”의 경우 건물을 빌려주고 거둔 소득을 말하므로 ‘임대’란 용어가 적절하다. 헷갈릴 때는 세놓다.세내다, 빌려주다·빌려 쓰다로 바꾸면 문제가 없다. 이은희 기자  [출처: 중앙일보] [우리말 바루기] 에서 발췌...
80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ㅡ우리말 애정 표현은?... 댓글:  조회:2574  추천:0  2016-12-30
신문을 제작하면서 부닥치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외래어 표기입니다. 정확한 표기를 알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또 불만이 많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선 외래어는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적는 것이 원칙입니다. 맞춤법과 마찬가지로 외래어 표기도 이렇게 규칙을 정해 놓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마다 달리 표기함으로써 혼란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DA 300   사회 변화에 따라 새로 등장하는 용어 등은 두 달마다 개최되는 정부언론외래어공동심의위원회의 결정을 따릅니다. 그중 하나가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입니다. 심의위원회는 영어 발음에 가깝게 ‘컬래버레이션’으로 표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교과서와 언론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일반인들은 대체로 ‘콜라보레이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줄임말로 ‘콜라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마치 전문용어처럼 누구와 ‘콜라보’했다는 식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다 보니 기자들도 기사를 쓰면서 ‘콜라보’라 쓰기 일쑤입니다. 심의위원회 결정을 따르면 줄임말이 ‘컬래버’가 돼야 하는데 ‘콜라보’와는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콜라보’를 ‘컬래버’라 바꿔 표기하기도 어렵습니다. ‘컬래버’라면 무슨 말인지 잘 다가오지 않으니까요.  ‘콜라보’를 ‘컬래버’라 쓰기 싫다면 아예 우리말로 바꿔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요? 경우에 따라 ‘협업’ ‘합작’ ‘공동작업’ 등 우리말로 표기해도 의미를 전달하는 데 별문제가 없습니다. 우리말에 대한 애정 표현은 가급적 외래어를 쓰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배상복 기자  [출처: 중앙일보] [우리말 바루기] ‘콜라보’는 ‘협업’으로 ========================= 얼마 전 고등학생인 희진 양에게서 e-메일을 받았습니다.  요즘 '꺾다'를 '꺽다'로 쓰는 경우가 많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친구들이 대부분 그렇게 써 혹시나 하고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해 보았더니 '꺽다'가 너무 많이 나와 한심하다는 생각에 글을 보낸다고 했습니다. 컴퓨터 자판이나 휴대전화 버튼을 한번 더 눌러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꺾다'의 받침을 'ㄱ'으로 쓰다 보니 '꺽다'가 이젠 틀린 글자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틀리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으며, 의사소통만 되면 그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말을 걱정하는 희진 양이 대견스러웠습니다. 그의 지적처럼 인터넷 언어다, 외계어다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스스로 우리말을 파괴하고, 물속에서 외래어(魚)가 토종어를 마구 잡아먹으며 활개치듯이 외래어(語)가 국어를 유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DA 300   한글과 국어는 우리 민족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의 최대 문화유산임을 생각할 때 우리말 훼손을 다 함께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처: 중앙일보] 우리말 바루기에서 발췌.
독감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엄마가 끓여준 달콤하고 따뜻한 배즙 한 사발이면 독감이나 감기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배를 푹 고아 배즙을 만들 때 “배를 다리다”고 해야 할까, “배를 달이다”고 해야 할까. “배의 꼭지를 도려내 그 안에 생강·대추 등을 넣고 다려 먹으면 감기에 좋다”에서와 같이 액체를 끓여 진하게 만들거나 약재에 물을 부어 우러나도록 끓이는 경우 ‘다리다’를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이때는 ‘달이다’라고 써야 바르다. ‘다리다’는 옷이나 천의 주름을 펴거나 줄을 세우기 위해 다리미로 문지르는 행위를 뜻한다. “다리지 않은 와이셔츠라 구김살이 잔뜩 가 있다”처럼 쓸 수 있다. DA 300   ‘달이다’와 ‘다리다’가 헷갈린다면 ‘다리미’를 떠올리면 된다. 옷을 다리는 ‘다리미’를 ‘달이미’라고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리미’와 ‘다리다’가 서로 짝꿍이라 생각하면 ‘달이다’와 ‘다리다’를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와 비슷하게 ‘조리다’와 ‘졸이다’도 헷갈리기 쉽다. ‘조리다’는 양념을 한 고기나 생선, 채소 등을 국물에 넣고 바짝 끓여서 양념이 배게 한다는 뜻이다. “감자를 간장에 조렸다”처럼 쓸 수 있다. ‘졸이다’는 ‘졸다’의 사동사로, 찌개·국·한약 등의 물이 증발해 분량이 적어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 “불 조절을 잘못해 된장찌개가 졸아 버렸다”처럼 쓸 수 있다. 행위의 목적을 생각하면 ‘졸이다’와 ‘조리다’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목적이 단순히 국물을 줄어들게 만드는 것이라면 ‘졸이다’, 바짝 끓여 재료에 간이 배게 만드는 것이라면 ‘조리다’를 쓰면 된다. 김현정 기자 [출처: 중앙일보] [우리말 바루기] 배를 ‘다려’ 먹을 수 있을까
78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치어"를 쓸때, "치여"를 쓸때... 댓글:  조회:2637  추천:0  2016-12-30
송년회 등 모임이 잦은 연말연시에는 평소보다 음주운전 사고가 늘어난다고 한다. “음주운전 차량이 지나가던 행인을 치어 숨지게 한 뒤 도주한 끝에 붙잡혔다” “30대 남성이 횡단보도를 건너다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졌다” 등처럼 음주운전 관련 사고 기사도 자주 볼 수 있다. 이처럼 자동차 사고와 관련해 ‘치다’는 단어가 나올 경우 활용형을 ‘치어’ ‘치여’ 어느 것으로 해야 하는지 헷갈린다. 이런 경우 행위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치어’ ‘치여’를 구분해 써야 한다. DA 300   ‘치다’는 차나 수레 등이 사람을 강한 힘으로 부딪고 지나가는 것을 뜻하는 단어다. 이를 활용할 때는 행위의 주체가 사고를 낸 경우 ‘치어’를 써야 한다. ‘치-+어’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음주운전 차량이 지나가던 행인을 치어 숨지게 한 뒤 도주한 끝에 붙잡혔다”의 경우 음주운전 차량이 사람을 치고 간 주체이므로 ‘치어’가 사용된 것이다. 행위의 주체가 사고를 당한 피해자일 경우에는 ‘치여’를 써야 한다. ‘치다’에 피동 표현을 만들어 주는 접사 ‘이’가 붙어 이루어진 ‘치이다’를 활용한 것이다. “30대 남성이 횡단보도를 건너다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졌다”는 30대 남성(행위의 주체)이 차로 친 게 아니라 차에 치인 경우를 의미하므로 ‘치어’가 아닌 ‘치여’가 사용됐다. 즉 능동의 뜻이냐, 피동의 뜻이냐에 따라 ‘치어’와 ‘치여’를 구분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무언가를 치는 행위를 한 주체가 주어가 된 문장이라면 ‘치어’, 당하는 주체가 주어가 된 문장이라면 ‘치여’를 사용하면 된다. 김현정 기자 [출처: 중앙일보] [우리말 바루기] 차에 ‘치어’일까, ‘치여’일까
77    소리로 날려 보내던 생각을 그 소리를 붙잡아 시로 남기기... 댓글:  조회:2202  추천:0  2016-12-29
      치매 걸린 시어머니  ―진효임(1943∼)     눈도 못 맞추게 하시던 무서운 시어머니가 명주 베 보름새를 뚝딱 해치우시던 솜씨 좋은 시어머니가 팔십 넘어 치매가 왔습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손발은 말할 것도 없고 방 벽에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소변도 못 가리시면서 기저귀를 마다하시던 시어머니, 꼼짝 없이 붙잡힌 나는 옛날에 한 시집살이가 모두 생각났는데, 시어머니가 나를 보고. 엄니, 엄니 제가 미안 허요, 용서해 주시요 잉. 공대를 하는 걸 보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우리 시어머니 시집살이도 나만큼이나 매웠나 봅니다. 이제는 전설 속에나 있을 캐릭터, ‘눈도 못 맞추게 하시던 무서운 시어머니’가 등장한다. 시인의 연배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위 시가 실린 시집 ‘치자꽃 향기’에서 시인 소개를 보니, 시인은 열여덟 살에 결혼했다. 사십여 년, 그 긴 세월을 매운 시집살이 시키던 시어머니, 치매가 와서도 유난해서 시인은 ‘꼼짝 없이 붙잡힌’다. 시인도 젊지 않은 나이, 새삼 옛날 생각에 미운 생각이 버럭 나기도 하고, 어쩌면 고소하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는데, ‘엄니, 엄니 제가 미안 혀요, 용서해 주시요 잉.’ 이 한마디에 마음이 풀린다. 치매 걸린 시어머니 눈에 나이 든 여인이 며느리가 아니라 시어머니로 보인다. 치매로 상한 머리에도 그 오래전 무서움이 지워지지 않는 시어머니! 우리 어머니들, 그렇게 제 며느리한테 호랑이 노릇 톡톡히 하고는 늙은 몸을 푹 맡겼단다. 고부(姑婦)간에 대를 물려 그랬단다.  진효임은 일흔 다 돼서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한글을 배우니까 즐거운 일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좋은 건 머릿속 생각들을 내 손으로 직접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치자꽃 향기’ 앞머리에 적힌 ‘시인의 말’이다. 평생 소리(말)로 날려 보냈던 생각들을 이제 그림(글)으로 남기는 도취감! 소리를 붙잡아 앉히는 두근두근함을 그의 시 곁에서 숙연히 맛본다.
76    세기의 혁신가 10인 댓글:  조회:2780  추천:0  2016-12-29
  회화를 최첨단 예술로 승화시킨 "미술계 혁명가", 잭슨 폴록(artist, 1912~1956) 잭슨 폴록은 1956년 8월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44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그의 죽음은 미국의 대표적인 ‘반사회적 예술가’라는 폴록의 신화적 지위를 한층 더 확고히 했다. 캔버스 가득 선과 움직임으로 층층이 이루어진 패턴을 만들어낸 이 미술계의 혁명가는 사실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등학교를 두 번이나 퇴학당했고, 성인이 된 후에도 폭력, 알코올, 기억 상실, 자학, 그리고 창작의 한계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들이 세상에 막 나오기 시작하던 1940년대 후반은 예외였다. 1945년에 결혼한 동료 화가 리 크레이스너(Lee Krasner)와의 관계는 그의 창작욕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폴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고정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이젤을 거부했으며, 이젤 안에 표현되는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으로 이루어진 질서 정연한 우주를 거부했다. 폴록은 캔버스 주위를 옮겨 다니면서, 때로는 캔버스를 가로질러 다니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물감을 방울져 떨어뜨리거나 마구 뿌리고 휙 던질 때마다 끊임없이 생겨나는 실처럼 가는 선들로 캔버스를 채워나갔다. 눈부실 정도로 명쾌한 작품 속에서 에너지와 선들이 나타났다. 불편하기만 했던 전통적인 작업 도구들에서 해방되자 폴록은 캔버스, 합금판, 카드 보드, 금속 같은 다양한 표면 위에 여러 가지 물감 사용법을 실험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이미지들이 그것의 내용이나 개념과 거리를 두게 하려고 작품에 제목을 붙이는 대신 번호를 매겼다. 폴록의 인기는 꾸준히 올라갔다.   그의 예술적 후원자인 존 D. 록펠러 부인도 여러 작품을 구입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과 예술적 자유도 폴록을 자유롭게 해주지는 못했다. 크레이스너와 별거 중이던 1956년, 밤새도록 술을 마신 폴록은 자신의 정부, 절친한 친구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이 자동차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그의 정부뿐이었다. 미국의 미술을 최첨단 예술로 발전시킨 주인공은 그렇게 눈을 감았지만 우리에게 엄청난 유산을 남겼다. 거대한 캔버스 위에 인간의 마음을 담은 명료한 풍경화 과 도 그 가운데 속한다. 이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미국 미술가로 확실하게 자리 잡은 폴록은 요즘도 심심찮게 언론에 등장한다. 폴록의 이름이 등장하는 뉴스 제목에는 대개 달러 표시가 따라다닌다. 지난해 11월 할리우드 미디어 재벌 데이비드 게펜이 소장하던 폴록의 초기 작품 가 무려 1억4천만 달러에 팔렸다. 미술 작품 매매 사상 최고가였다.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 르 코르뷔지에(architect, 1887~1965) 동료들은 그를 ‘코르부(Corbu)’라고 불렀는데, 프랑스어로 ‘까마귀’를 뜻한다. 사실 ‘르 코르뷔지에’라는 이름도 본명이 아니다. 프랑스 건축가 샤를르 에두아르 잔네르(Charles Edouard Jeanneret)는 20대 초부터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직업상의 가명으로 사용했다. 성(姓)을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이름을 바꾸는 것이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한다면,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 역시 형식에 충실했다. 르 코르뷔지에 이전의 건축은 대부분 예스럽고 운치 있는 멋을 강조했는데,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는 지역적으로 영감을 받은 단일 가족 주택들이, 반대쪽에는 역사적으로 알려진 육중한 공공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르 코르뷔지에의 등장으로 ‘도시 공간의 중요한 장식품’이던 주택이 그저 ‘사람들이 살기 위한 기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장식을 배제한 르 코르뷔지에의 주거 공간에는 강철, 콘크리트, 유리판같이 규모가 크고 잘 사용되지 않던 재료들을 과감하게 사용했으며, 건물을 지면에서 분리하기 위해 ‘필로티’나 각주를 사용했다. 또 천장과 바닥의 높이를 다양하게 함으로써 자유와 뜻밖의 놀라움을 선사했다. 건축가들에게 건축 미학을 넘어 유기적 실체로 도시를 이해할 것을 촉구한 르 코르뷔지에의 성명서는 오늘날의 도시화를 예견했다. 1914년 조립식 부품을 이용해 실험적인 대량 주택 건설을 계획했던 ‘도미노 프로젝트’는 르 코르뷔지에에게 부와 함께 세계적인 성공을 안겨주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안경을 쓰고 옷과 예의범절에 지나칠 정도로 까다로웠던 이 건축 천재의 영향력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지만, 정작 본인은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도 화가로서의 야망 때문에 좌절하곤 했다.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화가로서의 야망은 그가 세운 롱샹 교회의 날개 지붕처럼 더 많은 건물들이 솟아오르기를 희망했는지도 모른다.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유산, 다이애나 왕세자비(princess of Wales, 1961~1997) 다이애나 스펜서가 서른여섯 살의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자 싸움과 반목을 일삼던 전 세계는 하나가 되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장례식을 지켜보고, 조문객 명부에 이름을 남기고, 그녀를 기리기 위해 꽃으로 장식된 제단을 세운 것은 그녀가 단지 미모의 왕세자비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다이애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세계에서 카메라 세례를 가장 많이 받은 이 여성이 성숙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모든 과정을 지켜본 것이다. 대중은 다이애나를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고자 애쓴 여성으로 기억했기 때문에, 그녀가 사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언론의 무자비한 추적을 받고 왕족들이 출연하는 화려하고 값싼 드라마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을 박차고 나왔다는 사실은 거의 문제 삼지 않았다.   1996년 막을 내린 다이애나와 찰스의 ‘잘못된’ 결혼 생활은 미친 듯이 눈물을 쏟아내며 법정을 나서는 다이애나의 모습을 통해 알려졌다. 전 세계는 배신당한 여성이 느끼는 고통과 사랑받고 싶은 욕구에 충분히 공감했다. 그녀가 왕세자비라는 호칭마저 박탈당하자 그녀의 추종자들이 직접 나서 ‘국민의 공주(The People’s Princess)’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사람들은 다이애나가 명성을 이용해 자신이 지지하던 자선 사업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지켜보았으며, 에이즈로 죽어가는 환자를 껴안거나 지뢰밭 한가운데 서 있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랑과 선행 그리고 사랑의 가치에 대한 다이애나의 고집은 영국 왕실을 궁지로 몰아넣은 원인인 동시에 왕실의 재건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다이애나가 전 세계 사람의 상상 속에 영원히 젊고 아름답고 활기찬 모습으로 살아 있음을 의미했다. 다이애나는 자신이 이룬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한 것 때문에 세기의 아이콘이 되었다.     미국이 낳은 무용계의 가장 큰 축복, 이사도라 던컨(dancer, 1878~1927)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천으로 직접 옷을 만들어 입고 맨발로 무대에 올랐던 이사도라 던컨은 미국 현대무용의 창시자였으며, 또한 미국이 낳은 무용계의 가장 큰 축복이었다. 그녀는 틀에 박힌 전통적인 발레 양식에서 벗어나 영혼에서 바로 솟아 나온 듯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전혀 새로운 무용 이론을 발전시켰다. 순수한 기교와 ‘예쁜’ 동작을 거부한 던컨에게 자유란 창의적 활동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최고의 명제였다. 성적 욕구를 억압하던 시대에 자유연애를 주장한 이 매력적인 무용수는 매끈한 감색 머리와 유연하면서도 육감적인 몸매, 그리고 자유주의 사상가의 솔직함으로 수많은 유럽의 지성인과 귀족을 자신의 숭배자로 만들었다. 던컨의 조국은 이 쾌활한 성격의 무용수를 처음에는 별로 환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런던의 관객들은 브람스, 바그너에 대한 그녀의 해석에 열광했으며, 베를린에서는 ‘신 같은 이사도라’라는 찬사를 보냈다.   무명의 사교댄스 강사였던 던컨이 런던 안주인들의 약속자 명단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1900년 멘델스존의 을 공연하면서부터다. 이 공연으로 교향곡 전체를 해석한 최초의 무용가가 된 던컨의 사생활은 그녀의 무대만큼 축복받지 못했다. 던컨은 평생 두 자녀를 두었는데, 1906년에 태어난 첫째 아이의 아버지인 배우 겸 무대 디자이너 고든 크레이그는 던컨에게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그녀에게 둘째 아이를 갖게 한 백만장자 패리스 싱어와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의 두 아이와 가정교사가 탄 차가 센 강에 빠져 모두 익사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세 번째 남편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러시아 출신의 시인으로, 아내를 학대하는 남자였다)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그녀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어쩌면 ‘극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수 있겠다. 은퇴한 뒤 코트다쥐르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그녀는 1927년 어느 화창한 가을날 “안녕, 친구들. 나는 영광을 찾아 떠나”라는 인사말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     우리의 영원한 피에로, 찰리 채플린(actor, 1889~1977) 채플린은 자신의 작품 가운데 특히 1925년에 제작한 고전 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기를 소망했다. 이 영화에는 우리 기억에 길이 남을 명장면들이 많이 등장했다. 특히 채플린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등장인물 ‘리틀 트램프’가 저녁 식사를 위해 구두를 냄비에 끓인 다음 미식가처럼 오묘한 맛을 음미하면서 먹어 치우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 장면은 희극과 비극이 미묘하게 조화를 이뤄 영화의 서정성을 끌어올렸다. 가진 것이라고는 지팡이 하나와 찌그러진 중산모, 그리고 진취적인 기상뿐이던 그는 개인적인 역경과 고통에도 굴복하지 않은 채 뒤뚱거리며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채플린의 후기 작품은 정치적인 비평 때문에 충분히 평가받지 못했다. 의학적으로 정당한 사유가 있었는데도 보수주의자들은 그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개했으며, 미국에서 40년간 면세 혜택을 누리고 살면서도 미국 시민이 되지 않았던 점과 1940년대에 그가 보였던 ‘공산주의 경향’에 대해서도 비난을 퍼부었다. 무엇보다 팬들은 채플린이 보여준 가난하지만 용기 있는 방랑자의 이미지와 실제로는 백만장자로 살아가는 그의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캔들, 정치적 문제,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채플린의 인기는 꺾이고 말았다. 그는 말년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조용히 은둔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채플린이 영화 예술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채플린의 비범하고 고집스러운 천재적 자질은 감동적인 팬터마임인 와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킨 , 그리고 그가 가장 아끼는 영화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들 때문에 이 자그마한 팬터마임의 거장은 쇼 비즈니스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엔터테이너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20세기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한 작은 영웅, 에드워드 R. 머로(journalist & reporter, 1908~1965) 한 비평가가 ‘신의 손위 형제(God’s Older Brother)’ 같은 목소리라고 표현했던 20세기의 목소리 주인공은 초창기 방송인 에드워드 R. 머로다. 침착하고 사려 깊으며 지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완벽한’ 기자의 성품을 대변하는 그의 목소리는 라디오에서 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중요한 역사적 순간들과 함께했다. 1938년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합병, 영국 본토 항공전, 진주만 공습, 소련과 미국 간 적대 관계 형성 등이 그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었다. 머로는 같은 세대의 기자 중에 가장 통찰력이 뛰어났으며, 가장 여러 곳을 돌아다닌 구술 역사가였다. 꾀가 많고 비참한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던 그에 대해 시청자들은 사건을 전달하는 그의 진실성만큼이나 다각적인 면에서 사건을 취재하려는 그의 노력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런던 대공습 순간을 지붕 위에 서서 용감하고 생동감 있게 보도해 미국의 연합군 가담을 도모, ‘전쟁의 흐름’까지도 완전히 바꾸어놓는 데 일조한 이 남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여 30여 년간 일했던 CBS를 사임하고 미국 정보국의 책임자가 되었다. 머로가 마지막으로 맡은 일은 사회적으로 권위 있는 자리이기는 했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과는 다르다. 우리가 기억하는 머로는 위험을 즐기고 사건 현장 한가운데 있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한 용감한 청년 기자다. 나아가 불의를 폭로한 훌륭한 베테랑 기자이며, 사회를 바꾸기 위한 최선이자 취후의 희망이 ‘보도’라고 믿은 사람이다. 그는 전쟁을 보도하던 도중 흐느껴 운 적이 있을 정도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머로는 자신이 하는 일의 핵심이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만큼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완벽한 전달자였다. 그의 직업은 우리 시대의 중대한 문제에 대해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잘 보이도록 빛을 비추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키 마우스에서 디즈니랜드까지, 월트 디즈니(enterpriser, 1901~1966) 전설의 미키 마우스는 1928년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기차 안에서 탄생했다. 미키 마우스를 창조한 주인공은 자신이 만든 만화 작품인 에 대한 판권을 잃은 후 사업을 다시 일으킬 방법을 모색하던 스물일곱 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대 근처에 놓인 쓰레기통 안에서 살던 들쥐들을 기억해냈다. 그리하여 월트 디즈니는 기차가 로스앤젤레스 역으로 들어서는 순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 중 하나를 탄생시켰다. 미키는 곧 대공황으로 지친 미국인에게 활기를 주는 상징이 되었다. 영화 에서 처음 선보인 이 장난꾸러기 캐릭터는 곧 전 세계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사랑받게 되었고, 얼마 안 있어 미키 마우스 가족(미니 마우스, 도널드 덕, 구피 그리고 플루토)과 하늘을 나는 서커스 코끼리, 똑똑한 두더지, 수줍음 많은 파랑새를 포함한 변덕스러운 동물 일당이 탄생했다. 디즈니는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가 생각하고 말하고 느끼기를 원했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과 파산의 고통을 겪은 끝에 애니메이션의 황금 시대를 열었다.   디즈니는 정밀한 묘사를 위해 아무리 사소한 것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대단한 집중력을 가진 각본 편집자였던 그는 몇 시간 동안 심사숙고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대사나 특수 효과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디즈니의 전기 작가들은 디즈니가 미키를 창조한 뒤 내린 결정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바로 유성영화의 엄청난 가능성을 인식하고 1927년 에 소리를 덧입히기 시작한 점이다. 멜로디에 맞춰 유쾌하게 움직이는 미키와 영화는 대히트를 했고 기술적인 도약도 이뤄냈다. 화가가 그린 캐릭터를 의인화하는 디즈니의 능력은 1937년 최초의 장편 만화인 를 통해 새로운 영역에 도달했다. 3년의 제작 기간과 1백60만 달러에 달하는 제작비를 투자해 만든 는 8백만 달러의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인물 애니메이션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찬사를 받았다. 미국의 가정에 텔레비전이 보급되자 ‘월트 아저씨’는 29년 동안 TV 프로그램 의 사회자로 출연하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평생 담배를 좋아한 그는 1966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찰나를 포착한 시대의 눈, 앙리 카르티에-브레송(photographer, 1908~2004) 브레송은 35mm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 ‘세계의 상처’를 찍는 다큐멘터리 작가로 전 세계를 누볐다. 그는 처음 카메라를 산 후로 찰나의 현실을 탐닉하는 스토커가 되었다. 우리의 일상에 갑자기 의미가 나타나는 순간, 아이러니와 연민과 기쁨이 영혼에 닿는 순간을 기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사진의 아름다움이 예술의 관점에서 볼 때 충분하지 않다고 가정하더라도, 만약 사진술이 예술의 영역으로 정당한지를 묻는다면 이 겸손한 사진가의 작품이 그것을 증명해줄 것이다. 브레송의 사진을 ‘본다’는 것은 거기에 ‘있는 것’, 그리고 사진 속의 ‘순간’이 보여주는 그 시간의 일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자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로 여기며 늘 몸에 지니고 다녔던 그는 ‘가장 절친한 친구’와 함께 스페인 내전과 조지 6세의 화려한 대관식을 목격했다. 또 독일에서는 강제수용소 해방 운동을, 중국에서는 마오쩌둥과 민족주의 국민당 간의 혁명적 투쟁을 기록했다.   1948년 1월 30일에는 인도에서 평화주의자 간디가 암살되기 바로 몇 분 전에 그의 초상화를 찍었고, 파리의 학생·노동자 혁명을 사진에 담았다. 원래 화가였던 브레송은 사진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보다 더 깊은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찍은 유명한 작품들인 마티스의 누드화를 감상하는 수녀나 나치 협력자를 고발하는 프랑스 여인은 아주 개인적인 모습들이지만 그 시대의 정신을 잘 잡아내고 있다. 그는 흑백 필름으로 수천 장에 달하는 사진을 찍었는데, 원판을 잘라내지 않는 것으로 피사체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1947년 로버트 카파, 조지 로저와 함께 ‘매그넘 포토’를 설립했으며, 자신의 노력을 항상 오이겐 헬리겔의 과 비교했다. 궁수가 그러하듯이 특별한 기술을 배울 필요를 못 느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속임수를 내던지고 빛을 찾아 여행하며, 사람과의 ‘기본적인 연결’을 찾아 헤맸다. 그는 걸었다. 결코 뛰지 않았다.               격정적인 삶을 살다간 프리마돈나, 마리아 칼라스(opera singer, 1923~1977) 극작가 테렌스 맥낼리가 “노래하는 거대한 상어 같다”라고 표현했듯이, 마리아 칼라스는 극 중 소프라노로서 노래를 한 것이 아니라 라이벌들을 잘근잘근 씹어서 삼키는 듯했다. 전혀 힘들이지 않고도 울려 나오는 그녀의 풍부한 성량은 뛰어난 예술적 기교와 탁월한 음악적 표현력에 힘입어 더욱 빛을 발했다. 칼라스는 1947년 스물네 살의 나이로 베로나 프로덕션의 를 공연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2년 후 나이 많은 이탈리아 백만장자와 결혼한 칼라스는 남편의 사랑과 재력 덕분에 , 같은 대작에서 노래하는 행운을 누렸다. 또 체중을 27kg이나 줄여 의 네페르티티 왕비 역에서는 날씬하고 매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는 칼라스와 그리스의 선박 왕 오나시스가 처음 만난 장소이기도 했다. 그 후 30년에 달하는 격동기 동안 까다롭고 당당한 이 여배우는 세계의 오페라 무대를 누비면서, 그녀의 요구 사항 앞에서 풀이 죽는 오페라하우스 매니저들의 목을 죄었다. 유명세 때문에 변덕이 더 심해진 칼라스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느끼면 공연 중에도 무대에서 내려왔는데, 심지어 1958년에는 대통령이 지켜보는 중에도 공연을 중단했다.   1958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감독과의 불화로 오페라단에서 쫓겨났고, 오나시스는 약물 중독에 빠진 그녀의 곁을 떠나 재클린 케네디에게 안착했다. 오나시스가 떠난 뒤, 그녀는 13개월 동안 고별 순회 공연에 올라 세 번째 남편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합동 공연을 펼쳤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목소리는 형편없었고, 당시 한 평론가는 “개들이 서로 바라보며 짖는 것 같다”고 혹평했다. 칼라스는 53세가 되던 해에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더는 노래를 부를 수 없었고 아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예술가로서 그녀의 전설적인 재능은 영원히 남았다. 수많은 음반에 담긴 불후의 목소리에 전 세계가 아직도 전율하고 있다.       한때는 ‘신’보다 위대했던 4인조 음악 천재들, 비틀스(singer, 1961~1974) 비틀스는 한마디로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밴드였다. 멤버 모두 작곡을 해 리더가 없는 그룹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고, 가장 먼저 4인조 밴드의 우수성을 알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주문처럼 “그들의 이름은 존, 폴, 조지 그리고 링고”라고 인용했지만 사실 그들은 개개인의 성격보다는 그룹 전체의 성격이 더 중요한 최초의 ‘그룹’이었다. 비틀스는 여러 요소로 구성된 하나의 밴드였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비틀스로 남을 것이다. 침울하고 반항적인 성격의 존 레넌은 1957년 영국 리버풀에서 폴 매카트니를 만났을 때, 말재주가 좋고 매력적인 이 왼손잡이 기타리스트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났으며, 그야말로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먼 촌뜨기들이었다. 이어 조지 해리슨과 링고 스타가 합류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비틀스의 라인업이 완성됐다.   이 네 명의 음악 천재들은 영국에서 ‘작은’ 인기를 얻은 데 이어 1963년 미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에 출연한 뒤 하룻밤 사이에 벼락 스타가 되었다. 조심스럽게 쌓아온 이미지만큼 멋지지는 않았지만 팬들은 순수한 노랫말이 시사하는 바를 꿰뚫어보았기 때문에 호소력은 그만큼 더 컸다. 비틀스 가발, 비틀스 부츠, 비틀스 영화, 심지어 비틀스 만화 쇼까지 생겨나면서 명실 공히 비틀스 마니아는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 비틀스가 그토록 엄청난 인기를 누린 비결은 멤버 각자의 전문가적 자질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리라. 매카트니의 취향이 묻어나는 곡에 레넌이 쓴 강력한 가사, 힌두 음악에 대한 해리슨의 열정과 도전, 비틀스의 패션 스타일을 만들었던 스타까지 그 누구도 그들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끝이 있게 마련이고, 실제로 그들에게도 끝이 다가왔다. 시작이 그랬듯이 변호사, 회계사, 아첨꾼, 그리고 옛 동료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끝 또한 소란스러운 가운데 순식간에 다가왔다. 우정과 경쟁 사이에서 줄다리기했던 레넌과 매카트니는 진정한 경쟁 관계에 돌입했고, 각자의 음악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1980년 레넌이 뉴욕에서 총격을 받아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비틀스가 다시 뭉치기를 바라던 올드 팬들의 희망은 영원히 물거품이 되었다.       출처:네이트닷컴
75    [시문학소사전] - 추상표현주의란?... 댓글:  조회:2748  추천:0  2016-12-29
1. 추상표현주의 작가의 특징 -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주자는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이라는 한 전위적 작가였습니다. 그는 서부의 와이오밍주 출신으로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채 뉴욕으로 향합니다. 한동안 인디안의 전설같은 서부의 토착문명을 상기시키는 그림을 그리던 그는 47년경부터 뿌리기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는 붓으로 무언가를 그리는 대신, 뿌리고, 던지고, 튕기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의 그림들은 대개 전시실의 한쪽 벽면을 모두 차지하는 초대형 사이즈입니다. 이것도 세로가 7피트 4인치, 가로가 9피트 11인치의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림입니다. 폴락의 경우 멕시코 벽화 화가들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만,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자들은 미국이라는 커다란 나라에서 살아서 그런지 엄청난 스케일의 그림을 주로 그렸습니다. - 네덜란드 태생의 드 쿠닝(de Kooning)은 잭슨 폴락과 함께 추상표현주의의 선두주자로 간주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한동안 매우 공격적이고 격정적인 형상을 한 연작을 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 그림 역시 대형 사이즈로 그려진 것입니다. 이런 격노한 여인의 형상이 초대형 캔버스에 그려져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끔찍스러운 일로 느껴질 겁니다. 그림 속의 여인은 참지 못할 분노의 형상인 것 같기도 하고, 사랑과 증오가 투쟁하고 있는 형상인 것 같기도 합니다. - 추상표현주의라고 불리우는 미술가들은 지난 시간에 보았던 잭슨 폴락이나 윌렘 드 쿠닝같은 "액션 페인팅" 작가들이 있었는가 하면, 커다란 색면을 주로 그렸던 색면 추상(color-field abstraction)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거대한 스케일의 화면을 강렬한 색채로 채우는 작업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태생의 화가 로스코(Rothko)는 신비스러운 종교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일련의 색면화를 제작하였습니다. 그의 그림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 등이 그의 작품의 제목들입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앞에 선 관객들은 그의 그림을 그렇게 단순하게 느끼지 않습니다. 윤곽선이 뚜렷하지 않은 커다란 사각형은 그저 사각형 모양 이상의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아니, 저것을 사각형이라 해야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위의 그림에서 보이는 노란색의 형태는 일정한 형태로 규정되지 않은채 오렌지색 화면 안으로 스며들어 가는듯 합니다. 어찌보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숨을 쉬는 듯도 하고요, 조금씩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로스코는 물감이 캔버스에 스며드는 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붓대신 스폰지를 사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윤곽선이 불분명해진 사각형들은 미묘한 색채와 함께 애매한 형태를 통해 신비적인 효과를 창출하였습니다. 화면 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강렬한 색채의 사각형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숭고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커다란 화면이 불러일으키는 신비스러운 신성함은 사람들에게 종교적 상징주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사실 로스코도 그런 의도가 없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2. 1950년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사회적 배경 1940년대 이후 현대미술의 중심지는 미국으로 이동하는데, 미국의 문화적 주권은 70년대까지 유지됩니다. 미국의 미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미국적인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한편, 유럽의 새로운 미술을 배우는데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이 미국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떠나 최초로 국제적인 미술 양식을 이뤄낸 것이 바로 "추상표현주의"입니다. 추상표현주의 양식은 큐비즘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만, 명백히 유럽의 추상미술과는 구별되는 미국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덤으로 더 알아보기===@   *1330억원에 팔린 사상 최고의 그림 / 미국 화가 잭슨 폴록의 [넘버 5, 1948] *  미국 화가 잭슨 폴록의 대표작 ‘넘버 5, 1948’(1948년 작·사진)이 1일 회화 사상  가장 비싼 값에 팔렸다. 뉴욕타임스는 그림 매매에 정통한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이 그림이 뉴욕 소더비 경매사 토비아스 마이어씨의 중개로 할리우드 음반 미디어업계 재벌 데이비드 게펜 씨에게 1억4000만 달러(약 1330억 원)에 팔렸다고 보도했다. 이는 6월 화장품 제조업자의 상속인 로널드 로더 씨가 1억3500만 달러(약 1282억 원)에  사들인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작 ‘아델레 블로흐 바워 1’(1907년)의 최고 가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넘버 5, 1948’은 폴록이 드리핑(물감 떨어뜨리기) 기법을  사용해 제작한 작품이다 1억 4천만 달라라는 사상 초유의 최고가격으로 멕시코 금융가에게 팔린 Pollock의 1948년 제 5번 작품 이하 Pollock의 여러 작품들:     //////////////////////////////////////////////////////// /제주도민일보     크레이스너와 폴록의 격렬한 사랑, 서로에 대한 인내와 존경에 대한 이야기들은 크레이스너가 폴록을 후원하는 데 행복을 느꼈음을 말해준다. 반면, 지적 견고함과 포용력, 실험성이 돋보이는 그녀의 그림들은 폴록의 난감한 천재성에 대처할 수 있었던 그녀의 성숙함을 입증해 준다. ‘컬러 토템’은 크레이스너가 자신의 활기찬 색채 구성 속에 폴록의 드로잉 조각을 결합 시켜 만든 일련의 작품들 중 하나이다.  폴록의 회화 조각은 크레이스너의 캔버스에 통합됐으며, 여기서 그 색채 조각들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들처럼 소용돌이치고 있다. 크레이스너는 자기 작품의 본체를 자주 파괴했음에도, 되려 폴록이 단념한 회화의 잔존물에는 새로운 생명과 맥락을 부여함으로써, 그것들을 되살려냈다. 그의 작품과 그녀 작품의 유기적이고, 조화로운 합병은 창조성에서 쌍벽을 이룬 두 사람의 협력에 관한 아름다운 메타포라 할 수 있다. 발췌=「명화 1001」 =========리 크레이스너 그림작품 일부 ======= 아쉬운 마음에 설명을 읽어보았습니다. The Springs 1964 Oil on canvas, 43 x 66 in. Gift of Wallace and Wilhelmina Holladay ?2002 The Pollock-Krasner Foundation/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Painting, for me, when it really 'happens,' is as miraculous as any natural phenomenon-as, say, a lettuce leaf."1 Although she consistently refused to "explain" the meanings of her works, Lee Krasner often indicated that even her most abstract paintings had ties to nature. Like many of her pieces, The Springs is partly autobiographical. Its title refers to the village near East Hampton, on Long Island, where she and Jackson Pollock moved in 1945 and where she remained until settling in Manhattan two decades later. Stylistically, this is an example of gestural abstract expressionism: a large canvas, entirely covered with thick paint applied quickly in curving marks. Although it does not describe anything in particular, its rich texture, the various shades of green and white, and implied motion suggest grass and wind. In many parts of the painting "accidental" drips and splatters were left visible to emphasize the "automatic," unplanned way the pigments were applied. Krasner painted The Springs soon after completing a group of dark abstractions called the Night Journeys and immediately after a series of personal traumas (surgery for a brain aneurysm, followed by a fall in which she broke her wrist, and then a second serious illness). Once Krasner had recovered, she began a new, very different series of paintings, much lighter in both palette and mood. As a result, many writers have interpreted The Springs as a symbol of rebirth and renewal. 1 Artist's statement, quoted in Bryan Robertson and B. H. Friedman, Lee Krasner: Paintings, Drawings, and Collages (London: Whitechapel Gallery, 1965), n.p.        그녀가 크게 아픈 후에 그린 작품인데 그 이전의 어두운 작품 경향에서 벗어나서 훨씬 밝은 모습으로 그린 작품이라고 하네요. 그녀의 작품이 추상적인 것이긴 하지만 자연과의 유대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74    [쉼터] - 작문써클선생님들께; 작문평정과 평어쓰기 댓글:  조회:2531  추천:0  2016-12-28
작문평정과 평어쓰기                                                          최 균 선       학생작문을 평정하고 평어를 쓰는 종지가 학생글짓기능력과 수준제고에 있을진대 평어의 내용,형식도 어디까지나 학생글짓기에 지남이 되고 인도가 되여야 한다.     작문교원은 평어쓰기를 학문적으로 대하고 유효로동을 하기에 힘써야 한다. 아래에 작문평정과정에서 직업내용과 평어쓰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1. 매 한차례 글짓기지도의 총화는 매 한차례 글짓기에 대한 하나하나의 평정과 전방위적으로 하는 평정으로 나뉘여진다. 매편의 작문을 평정하는 방법에는 서면형식이 주요한것인바 이에도 총평과 협서평이 있다.     협서평이란 말그대로 글줄을 따라가면서 여백에댜 평어를 써주는것인데 글짓기에서 지도성으로는 협서평이 더 실혜적이고 실용적이 된다.     교원은 협서평을 하든 총평을 하든 지도사상부터 바르게 가질것이 요청된다.     1) 평어의 종지는 지도성에 두어야 한다. 잘된곳은 어떤 면에서 잘되였다고 지적해주고 틀렸거나 서투른 곳은 그 원인을 꼭 짚어 알게 해야 그 학생이 우점을 발양 하고 부족점을 재빨리 고치는데 유조하다.     2) 평어에는 계발성이 주도로 되여야 한다. 즉 문제점을 밝히는데만 그치지 말고 수정방안을 중점적으로 제기해주어 학생자신이 머리쓰게 하고 손을 놀려 고치도록 계 발해야 한다.     3) 이거저것 두루 지적하지 말고 한고리가 풀리면 여러고리가 잇달아 풀리도록 중점이 명확하고 관건적인 곳을 지적하여야 평정결과에 실효성이 있게 된다.     4) 지도교원이 우선 가져야 할 심리자세는 표양을 앞세워 학생들로 하여금 고무격려의 추동하에 글짓기정서가 확 펴이게 하고 사유가 활성화되도록 량호한 심리전제를 잡아주는것이다.       2. 작품평어내용에 다음과 같은것들이 포괄되여야 할것이다.    1) 쓰려는 글의 중점이 선명한가?    2) 제목과 내용이 통일되여있는가?    3) 작자의 주장, 견해, 평가가 정당한가?    4) 구성이 잘 째이고 단락, 층차가 분명한가?    5) 묘사, 서술이 잘 결합되고 론리성에 문제가 없는가?    6) 문맥이 순통하며 어휘발굴이 잘되고 창조성이 보이는가?    7) 맞춤법, 띄여쓰기가 옳게 되였는가?    8) 문장부호가 바르게, 적절하게 사용되였는가?    9) 글속에서 비낀 작자의 심리자세가 바람직한가?   10) 원고지격식에 맞게 쓰고 글씨가 단정한가?     이외 여러가지 구체적요구들이 있을수 있으나 략한다.     상술한 평정내용들이 매편의 형식을 잘 장악하고 전면적으로 체현될수는 없으므로 소기의 목적에 근거하여 평정이 중점적으로 진행되여야 한다.       3. 작문지도교원은 평의의 형식을 잘 장악하고 목표성있게 응용해야 한다. 작문 평의형식은 다양하다.    1) 해부식평의: 대표성을 띤 작문을골라 학생들과 함께 글감의 가치성, 결구의 우결함, 언어표현의 능란성여부 등 문제를 하나하나 해부하고 평의하여 저마다의 작 문수정에 참조계로 되게 하는것이다.    2) 대비식평의: 교재에서 배운 본보기글과 학생글의 대비, 학생들의 글과 글의 대비ㅡ부동한 층차, 부동한 개성의 글을 대비하여 창조성인소를 찾아내고 공통한 문 제점을 찾아내는 평의방법이다.    3) 전제식평의: 경향성적인 문제, 보편적인존재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제를 확정하고 그것을 둘러싸고 평의하는것이다.      4. 평어쓰기    작문교원은 평어를 쓰기에 앞서 글짓기지도를 거쳐 곧 그 사람을 키운다는 이 전제를 잊지 말고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때론 콕 찌르듯이 따끔하게 , 때론 타매하듯 날카롭게 지적해주기도 해야 한다.    1) 공고성평어: 학생이 지은 글가운데 교재, 과외독서에서 닦은 창작기능, 기교와 해당된 부분을 점찍어 학생자신의 기능, 기교로 굳혀지도록 할 필요가 있을 때 이 형식을 쓸수 있다.    례를 들어 한 학생의 작문에 상세한 서술과 간략서술이 잘 체현되였거나 묘사가 재치있게 되였다거나 묘사가 재치있게 되였다거나 언어가 풍부하고 운치있다거나 과도가 멋지게 되였다거나 수사법사용이 잘 되였거나 하였다면 이를 충분을 잘 말해주어 자기의 장점, 내지는 풍격으로 되게 해야 한다.     2) 격려성평어: 한 학생의 작문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교정에 척 들어서면 나의 마음은 저도모르게 화단의 아름다운 꽃들에 사로잡힌다. 보라, 아름다운 저 미인초며 아름다운 모란이며 아름다운 국화, 그리고 한여름 재글거리는 해볕아래 아름다움을 한껏 무르익혀가는 해당화… ”     보다싶이 이 학생은 형용어에 신경을 쓰고있다. 그런데 각이한 특징과 자태를 가진 여러가지 꽃들에 “아름답다”는, 크기만 하고 특징적이 못되는 모자만 씌워주고 감각이 좋아있다. 어휘의 결핍성이 꼭 지적되여야 한다. 만약 그후 작문에서 한 단어의 중복이 피면되고 생동한 비유, 딱 맞는 형용사들이 사용되였다면 마음 풋풋이 칭찬해 주어야 한다. “…전번 작문에서 단어중복이 너무 많아 따분하였는데 이번 글에는 언어의 풍부성이 기쁘게 안겨옵니다. 어떤 구절은 아주 생동하여 감칠맛이 납니다. 아마도 과외서적의 덕택을 보았겠지요. 글짓기공부는 먼저 언어공부로부터 시작되니깐요, 계속적인 창의성을 기대합니다.”     이렇게 평어를 쓴다면 그 학생의 글짓기열성과 창의성에 크게 충격을 줄것은 의심할바 없다.     3) 협상성평어: 한 학생의 글이 주제가 돌출하고 글감이 생신하며 구성 등 면에서 괜찮다 할 때, 혹은 그와 정반대일 때 긍정, 혹은 부정을 간단히 하지 말고 전자는 보다 높은 요구에서, 후자는 글의 주인인 학생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각도에 협의적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례하여 글감고르기능력을 높이기 위한 명제작문을 쓰게 했는데 워낙 글짓기수준이 비교적 높았던 학생이 그번에는 글감의 신선도가 실망스러울 정도로 되였다면 다음과 같이 따끔하게 찔러주어야 한다.     “××학생, 학생의 글짓기수준이 원래 높았는데 이번 작문은 우선 글감선택에서 자기에 대한 요구를 낮추었다는것이 엿보입니다. 새로운 탐색이 없다면 억울한가요?”     4) 계발성평어; 여러번 지적해도 그냥 엄중한 결함이 지속될 때 직방배기로 툭 찍어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고 완곡하게 써서 학생자신이 얼굴이 뜨거워지게 하고 독립사고와 분석능력을 제고하도록 하는것이다.     례를 들어 “들끓는 거리”라는 작문에서 한 학생이 서두에서 너무 질질 끌었다면 이렇게 계발할수 있다. “제목의 중점단어로부터 자기 글을 다시 검토해보시오. 글을 쓰게 된 동기 비슷한 서두라해도 중심에 들어가기까지 너무 늑장부렸습니다…”     5) 비판성평어: 어떤 학생의 작문에 고질적인 결함이 재현되였다면 정면으로 지적해주어야 한다.     례문, “봄날의 교정”     “…학교운동장 서북쪽에 있는 화단에는 벽돌장 몇개가 빠져나와 여기저기 나딩굴고 있고 바람에 종이쪼각들이 흩날리고있다. 꽃밭의 왼켠에 있는 잔디밭에는 어데서 날려온 꽃씨가 각가지 꽃들을 피워놓아 오랙령롱하다. 비가 밤새 내려 물웅덩이에 널쪼각이 쪽배처럼 떠다니고있다. 그러나 교정의 봄은 무르녹고 있으며 그윽한 정서를 자아낸다…”     “학생은 너무 성의없이 글짓기를 하였습니다. 착안점이 종잡을수 없고 사유의 론리성이 흐트러져 있습니다.” 이같이 결함을 날카롭게 비판해주어 글짓기자세를 바로잡도록 해야 한다.       5. 작문평의에서의 교원의 심리정서.     매 한차례 작문에서 교원이 수십백편의 작문을 제한된 시간내에 보게 되는데 흔히 여러가지 인소로 하여 평정에 공정성, 합리성이 보장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작문평정시 교원의 정서파동이 평어쓰기, 채점에 심각한 영향을 일으킨다는것을 시종 자각하고 고도의 자률성 확보가 앞장세워져야 한다.     이률배반이라고까지는 말할수 없지만 정서가 좋으면 자연히 교원의 접수심리가 관용에서 기울고 수정의견도 근신하게 제기될것이며 평정에 공정성이 담보될수 있다. 반대로 모종 원인으로 정서가 불온정하면 자칫 외삼촌산소에 벌초하기식으로 되기 십상이다.     다음, 교원의 편애에 락차가 심할 경우 자신이 즐기고 싫어하는 문체 혹은 구사풍격에 따라 채점의 분동이 잘못놓이기 마련이다. 또 학생에 대한 선입견, 인상주의도 작문에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평가를 내리는데 걸림돌이 되기가 십상이다.     그리고 작문지도교원의 심리부담은 평정과정에 해의성, 무책임성을 인기시킬수 있다. 도식적인 평어 몇마디로 학생작문을 처리하는것은 그 작문에 대한 홀대라기보 다 그 학생에 대한 홀대가 되고 무책임이 되여진다. 작문교원은 부지런한 농사군의 마음으로 글밭을 가꾸면서 비료도 주고 김도 잡아주고 잡초도 뽑아주고 고무격려의 단비도 뿌려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글밭에 알찬 열매가 주렁지도로고 정성을 다하자.                                       《중국조선어문》
73    시는 추상적관능과 비평정신을 고도의 음악성과 결부해야... 댓글:  조회:2608  추천:0  2016-12-28
  가을의 노래---보들레르  1 이윽고 우리는 추운 어둠 속에 빠져 들리니 너무나 짧은 여름날의 강렬한 밝음이여, 안녕! 이미 나는 불길한 충격을 주면서 안마당 돌바닥에  장작 던지는 소리를 듣고 놀란다. 겨울의 모든 것 - 분노와 증오, 전율과 공포 또한 강제된 고역은 내 몸 속에 되돌아 온다. 북극의 지옥의 날에다 비유할 것인가 내 마음은 얼어붙은 쇳조각이다. 나는 몸서리쳐짐을 느끼며 장작 던지는 소리 듣노니 세워진 단두대의 소리없는 울림조차 이렇지 않다. 내 가슴은 무거운 쇠망치를 얻어맞고 허물어지는 성탑과도 같다. 이 단조로운 충격에 내 몸은 흔들려 어디선가 관에다 서둘러 못질하고 있는 듯하다. 누굴 위해? - 어제는 여름이었으나 이제는 가을? 흡사 죽은 자를 매장하는 종소리와도 같다. 2 나는 그대 지긋한 눈의 푸른 빛이 좋아, 다사론 미녀여, 나 오늘은 모두가 쓰디써, 그대 사랑도, 침실의 즐거움도, 화끈한 난로도, 그 어느 것도 바다의 눈부신 태양만 못해. 하지만 사랑해주오, 다정한 그대여! 박정하고 심술은 놈일지라도 어머니 되어 주오. 애인이건, 누님이건, 가을 영롱한 하늘 또는  낙조의 한 순간 그 따스한 정을 베풀어주오. 잠깐의 수고를! 무덤 기다리니, 그 탐욕한 무덤이 아! 내 이마 그대 포근한 무릎에 얹고, 백열의 지난 여름 그리며, 이 늦가을의  따스하고 누른 햇살 맛보게 해주오! 요점 정리  작자 : 보들레르  내용 연구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악의 꽃' 재판에 수록되어 있는데, '처녀와 같은 순진성'을 지닌 여배우 마리 부뤄노에게 바쳐진 작품이라고 한다. 초조하고 불안한 가을의 상념을 노래한 시이다. 1부는 닥쳐올 겨울의 음울함과 음향이 갖는 불길한 예감을 보여주고 2부에는 인생의 늦가을에 따뜻한 사랑의 정을 애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제 2부에서 "낙조의 한 순간, 그 따스한 정을 베풀어주오"라고 노래한 대목은 그의 실연을 암시한인 듯하다.  심화 자료  보들레르 (Baudelaire, Charles-Pierre) [1821.4.9~1867.8.31]  파리 출생. 아버지는 62세의 원로원(元老院)사무국 고관이었고, 어머니는 후처로 28세였다. 이러한 부모의 연령 불균형이 이상신경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6세 때 아버지가 죽고, 이듬해에 어머니는 육군 소령 자크 오피크와 재혼하였다. 의붓아버지가 대령으로 승진하여 리옹에 부임하자, 11세 된 그는 리옹의 사립학교에 들어갔고, 이어 리옹 왕립중학교의 기숙생이 되었다. 다음으로 군인 아버지의 파리 전근에 따라 루이 르 그랑 중학교로 전학했는데, 최고학년이 된 18세 때 품행관계로 퇴학처분을 당했다. 그러나 대학 입학 자격시험(리세)에는 단번에 합격하였다. 그 후 문학지망을 표명하여 양친을 실망시키고, 카르테 라탱을 방랑하며 방종한 생활을 하였다. 보다 못해 내려진 친족회의의 결의로 캘커타행 기선을 탔으나, 인도양의 모리스섬(모리셔스 本島)과 부르봉섬(프랑스령 레위니옹섬)에 체재하였을 뿐, 9개월 후에는 파리로 되돌아갔다. 이윽고 성년이 되어 의붓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상속하여, 센강(江)의 생 루이섬[島]에 거처를 두고 댄디슴의 이상을 추구, 호화판 탐미생활에 빠졌다. 흑백혼혈의 무명 여배우 잔 뒤발과 알게 되자, 관능적인 시흥(詩興)의 원천으로 삼았고, 평생의 악연(惡緣)을 맺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2년 동안에 유산을 거의다 낭비해 버리자 법정후견인이 딸린 준금치산자(準禁治産者)가 되었다. 24세 때 《1845년의 살롱》을 출판하여 미술평론가로서 데뷔하였으며, 문예비평 ·시 ·단편소설 등을 잇달아 발표하여 문단에서 활약하는 한편, 1848년 의붓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2월혁명의 폭동에도 가담하였다. 또 E.A.포의 작품을 번역 ·소개하였고 만년에 이르기까지 17년 간에 5권의 뛰어난 번역을 완성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배우 마리 도브륀과 연애관계를 가졌으며, 또 사바티에 부인의 살롱의 단골이 되어 그녀를 성모처럼 추키면서 많은 연애시를 썼다. 1857년, 청년시절부터 심혈을 기울여 다듬어 온 시를 정리하여 시집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을 출판하였으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벌금과 시 6편의 삭제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해 의붓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는 센강(江) 어귀의 옹푸루르 별장으로 옮겨 살았다. 1860년에 《인공낙원(人工樂園)》을 출판하고, 1861년에 《악의 꽃》의 재판을 간행하였다. 이 무렵부터 문학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1864년, 벨기에의 브뤼셀에 가서 궁색한 생활을 면하기 위한 강연여행을 가졌으나 건강이 악화되었다.  1866년, 나뮈르시(市)의 생 루 교회를 구경하던 중 졸도하여, 뇌연화증(腦軟化症)의 징후로 브뤼셀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다음, 어머니를 따라 파리로 돌아와서 입원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여름, 실어증으로 46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있는 오피크가(家)의 무덤에 묻혔다. 그의 사후,1868~1869년에 간행된 전집 속에는 고티에가 서문을 쓴 《악의 꽃》(제3판) 《소산문시 Petits po憙mes en prose》, 만년의 작품인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이 수록되었으며, 또 들라크루아 ·바그너 ·고티에 등을 논한 평론은 《심미섭렵(審美涉獵) Curiosit暴s esth暴tiques》(1869) 《낭만파 예술 L’art romantique》(1868)이라는 총제목하에 수록되었다. 또한 만년의 수기인 《화전(火箭)》 《벌거벗은 마음》은 《내심(內心)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보들레르의 서정시는 다음 세대인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 상징파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죽은 지 10여 년이 지나서야 그의 문학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었다. 발레리는 “그보다 위대하고 재능이 풍부한 시인들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중요한 시인은 없다”라고 절찬하였다. E.A.포의 지적 세계에 감동하여 낭만파 ·고답파의 구폐(舊弊)에서 벗어났으며 명석한 분석력과 논리와 상상력을 동원하여 인간심리의 심층을 탐구하고, 고도의 비평정신을 추상적인 관능과 음악성이 넘치는 시에 결부한 점에 그의 위대성이 있다   =================================================================================       활짝 편 손으로 사랑을  ―빈센트 밀레이(1892∼1950) 활짝 편 손에 담긴 사랑, 그것밖에 없습니다. 보석 장식도 없고, 숨기지도 않고,  상처 주지 않는 사랑. 누군가 모자 가득 앵초 꽃을 담아 당신에게     불쑥 내밀듯이, 아니면 치마 가득 사과를 담아 주듯이 나는 당신에게 그런 사랑을 드립니다. 아이처럼 외치면서 “내가 무얼 갖고 있나 좀 보세요!      이게 다 당신 거예요!” 거침없는 사랑이어라! 두 뺨은 사과처럼 탱탱하고 머리칼은 희고 붉은 앵초 꽃이 다발로 나부끼는 듯, 그리고 눈동자는 사랑의 기쁨으로 초롱거리리. 제 젊음과 아름다움에 자신만만할 때에야 이렇듯 한 점 그늘 없이 사랑하리. 하, 풋풋하고 싱그럽다!  앵초는 봄의 꽃, 사과는 가을 열매. 온 계절이 사랑의 계절인 청춘은 아름다워라! “이게 다예요! 사랑이 다예요!” 구가하시라. 분하게도, 나이 들어서 거침없이 사랑을 드러내면 주책없는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노라. 에로스로서의 사랑에서 소외자가 돼 버리는 것이다. 젊디젊은 이들 가운데도 사랑의 서민이 있다. 빈민도 있고. 그렇다고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나도 사랑의 서민이었다. 그때는 기가 죽기도 했지만, 살아보니 그렇더라. 인생 전체로 놓고 보면 사랑이 그렇게나 죽고 못 살 만큼 대단한 게 아니라는. 뭐, 젊은 당신에게 위로가 될 말이 아니겠군요…. 그래요! 사랑의 갈증도 젊을 때나 있는 거예요. 그 고통을 즐기세요. 당신의 젊은 피에 흐르는 뜨겁고 순수한 사랑의 열망은 기어이 대상을 찾는답니다. 사람이 아니라면 음악이라든가 시라든가, 뭣이 됐든 그 대상을 탐스럽게 꽃피운답니다!
72    말안장에서 용사를 가려내고 달빛아래에서 미인을 보다... 댓글:  조회:2581  추천:0  2016-12-28
                                        문학예술의 몽롱미                                                               /최균선 1. 몽롱미리론의 기원 소위 몽롱이란 사물이 모호하여 똑똑하지 않고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여 사이비하고 이렇기도 한것같고 저렇기도 한것같은 현상 즉 명료성과 상반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몽롱성은 미감을 순수화하고 풍부하게 하며 인차 사라지지 않게 하는 특성이 있다. 몽롱미란 곧 형상의 모호, 개념의 불확정성, 터득할수는 있으나 말로 전달하기는 어려운 몽롱하고 함축된 미를 지칭한다. 몽롱미는 보일듯 말듯하고 그 뜻을 밝히기 어려운 미로서 모호미라 지칭하는 미감의 일종이다. 옛글에 “말우에서 용사를 가려내고 달아래에서 미인을 본다.”고 하였다. 미는 일정한 거리감에서도 오지만 몽롱성에서도 온다. 장강 3협의 선녀봉은 일년내내 구름에 덮혀 험준한 절경이 태반이나 가리워진다. 그리하여 “선경절반, 인간세상 절반” 이라는 경구가 나왔다. 일정한 조건하에서 몽롱미는 완전히 로출된것보다 더욱 매력이 있을수 있다. 만약 구름이 걷힌 날 가까이서 본다면 “신선세계”의 절반은 사라지고 들쑹날쑹한 면면한 산봉에 기암괴석만이 보일것이다. 구름속에 달, 교교한 월색, 운무속에 황산, 자오록한 비발속에 잠긴 계림의 산수, 동정호의 묘망한 돛배그림자…등등은 다 몽롱미의 극치라 해야 할것이다. 이처럼 몽롱성은 일부 모종 사물의 허물을 덮어감추고 일종의 특이한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활짝 드러낸 상태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지구적인 미적향수를 느낄수 없을것이다. 마치 확대경속에는 비단결처럼 보드랍고 아름다운 피부가 없는것과 같은 도리이다. 이와같이 몽롱성은 모종 사물의 진면모를 투철하게 꿰뚫어볼수 없게 함으로써 심미심리에 미지의 공간을 남겨 그냥 흥미를 보유하게 한다. 몽롱은 선명함에 상대되는 개념이지만 대천세계에 허다한 객관사물 지간의 계선은 몽롱하고 모호하다. 달빛도 몽롱하고 안개도 몽롱하고 산도 몽롱하고 물도 몽롱하고…안개속에 다소곳한 꽃을 흔상할 때, 물속에서 비낀 달에 홀릴 때, 눈앞아물아물하는 아지랑이 등은 몽롱한 느낌을 준다. 몽롱미는 자연경물중에 고유한 일종의 풍경선이 아닐수 없다 사람들의 전통관념과 관습속에는 몽롱성이 나쁜 의미로 락인찍혀있는데 이는 심미표준의 시대적변천과정에서 생긴 심미심리장애라고 할수 있다. 기실 문학작품에서의 모호이미지, 회화에서 몰롱성 등은 다 미적표상이다. 몽롱미는 일종 미일뿐만아니라 일종 예술풍격미이기도 하다. 몽롱미의 특징은 몽롱하고 모호하며 함축된 형식으로 다의성내용을 표현하여 흔상자로 하여금 알아맞추고 상상해 보고 곰곰이 음미해야 비로소 심미향수를 만끽하게 하는것이다. 자기의 시로써 세상과 대화는 하려하면서도 열독을 방애하는 회삽(晦涩)이야말로 병태이며 내용상의 빈혈이다. 미국계통론학자 쟈드는 20세기 60년대 사물의 모호성문제를 제기하여 과학리론으로 연구되였다. 1975년 모호학은 하나의 학과로 세계적범위에서 중시받았다. 20세기 80년대 중국의 첫전문서인《모호학인론》나왔고 70년대 몽롱시에 대한 대론쟁을 거친후 문예계에서 모호리론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기에 모호이미지와 몽롱한 미적표상은 더는 생소하지 않게 되었다. 칸트는 “모호개념은 선명한 개념보다 더 표현력이 있다. 미란 응당 말로 전달할수 없는것이 되여야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우리들이 생각하는것을 언어로 충분히 표현할수 없다.”고 쓰고있다. 현대 중외의 작가들이 창작에서 모호성, 추상성을 추구하는것은 몽롱미의 효과에 이르려는 시도이다. 예술작품속에 몽롱미는 내용속에 숨겨둔 모호성, 다의성, 추상성, 적라라하지 않은 함축된 내함으로 표현되며 비흥(比兴), 상징,은유, 말속에 말 등으로 체현된다. 사물의 모양과 색채와 소리가 융화되여 불확정적이고 일상을 초월하도록 변형시켜 직관과 상식적인 도리로는 리해하기 어려워 풍부한 상상력으로 예측하고 추단해야 그것의 진실한 함의와 내재미를 파악할수 있다. 2. 몽롱성의 미학공능 사람은 금방 접촉한 사물에서 미적향수의 수요가 왕성하지만 일차성적으로 완전히 만족시키지 못하는 바로 그 순간에 “접근성 미감”이 산생된다. 이때가 바로 미감수요가 가장 강렬할 때이다. “행위과학”의 시점에서 볼 때 인간행위의 발동기라고 할수 있는 욕망(심리수요)이 일단 만족되면 곧 소실되고 새 욕망이 새 행위를 발동한다. 몽롱성의 미학공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적대상에 흥미도도하여 련련한 정을 보류하는 그 미감의 지속성, 접근성 미감에 있다. 몽롱미는 특정한 의경(意境)을 창조하여 호기심을 유발하며 탐구욕에 불을 지펴 알듯하면서도 묘망한 느낌속에 특수한 심미감수를 얻게 한다. 심미적대상에 대한 이런 고유한 심미심리 혹은 그런 기대심리를 예술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수법을 운용한다. 이를테면 “뜻은 명철하나 말은 에두른다.”는 수법으로 글에 함축미가 있게 여지를 남겨두거나 서정토로도 곧이 곧대로가 아니라 몽롱성속에 숨김으로써 예술미를 창조한다. 몽롱미에서 펼쳐지는 경지는 깊은 사색을 불러일으키며 미적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렇듯 문학예술창조활동에서도 창조적사유의 일종인 련상의 공간을 제공하는 몽롱성은 중요하다. 객관적사물의 몽롱성은 결코 희미한것이 아니고 알쏭달쏭함도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시창작에서 몽롱성원리를 리용하여 몽롱미를 창조하더라도 흔상자들에게 파악불능이 되게 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새 시기 현대시의 영향을 받아 젊은 일대들이 몽롱성이 짙은 시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례하면 “어두운 밤은 나에게 검은 눈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눈으로 광명을 찾았다.”, “광풍은 꿈속에 재부를 빼앗아갔지만/도리어 나에게 사고의 유산을 남겨주었다.” 등에서처럼 몽롱성을 리용하고 몽롱미를 창조한것은 흔상자들에게 끝까지 파악불능의 수수께끼를 내는것이 아니다. 물론 충만된 격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것이 아니라 한폭한폭의 구체적도화(图画)로써 시인의 사상감정을 은근히 암시하고 상징하며 두드러지게 하는 새로운 시형식이 독자들앞에 돌연 나타났을 때 일반사람들의 흔상심리지각상 필연코 습관되지 않아 입에 잘 오르지 않는다거나 개운하지 않다거나 알수 없다거나 하면서 심지어 노해서 외면하기도 한다. 례하여 이런 시가 있다. 비둘기마저 성숙한 울음을 운다. 지나간 비바람 모질던 그 여름을. 이 시는 얼핏 보면 대자연속에 가을을 쓴것 같다. 그러나 다시금 음미해보면 “10년동란시기”의 그 “비바람 모질던 여름”을 읊고있고 오늘의 조국을 그려내고있다. 시는 리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작자는 직설적으로 자기 감정파동을 토로하지 않고 시속에 한층의 상징적의미를 깔아놓고있는데 이 역시 미적창조의 새로운 풍경이 아닐수 없다. 3. 몽롱미의 필수성 문예는 몽롱성을 수요하며 문예는 몽롱성을 떠날수 없다. 문예의 몽롱은 일종의 미를 현시한다. 그러나 무작정 새것을 추구하고 색다른것을 표방하기 위한것이 아니다. 문예작품은 인류생활정보의 일종 귀환으로서 작가들이 모호세계에서 취한 정보와 소재가 또 인간의 관측할길 없는 “흑상(黑箱)”속에서 가공되므로 충분히 몽롱성을 띠게 된다. 작가가 가공해낸 작품은 몽롱세계에 대한 투시 혹은 굴절반사의 형상일뿐이다. 례하면 화면에 나타나는 장백산이나 계림산수는 비록 부분적모습만이라도 장백산은 장백산이고 계림산수는 계림산수이다. 한것은 량자는 부동한 개념으로서 장백산, 계림의 완정한 형식과 내용을 포괄하기때문이다. 허적인 각도에서 보아도 선명하다. 화면에 나타난것이 각자의 특징을 구별해주기때문이다. 다음 문학형상은 모두 모호개념 집합으로 구성되였다고 할수 있을진대 작가는 상상, 허구로 형상을 창조한다. 즉 실체적대상을 떠난 정황하에서 원래 저축하였던 흩어지고 모호한 인상으로 개조하여 다시 결구를 짜는바 모호수거의 결합체일수밖에 없는것이다. 자연물에 대한 형상묘사는 더구나 모호언어를 위주로 한다. 미국의 현대 시인 로닐의 시 ≪조우≫를 보자. 단풍잎에 이슬은 붉게붉게 빛나는데 련꽃잎에 이슬은 눈물처럼 투명하네. 이 시에서 단풍잎, 이슬, 련꽃잎, 눈물방울은 모두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딱히 알수 없다. 황차 세상에 똑같은 사물이란 없음에랴, 사물의 상대론각도에서 볼 때 모인물, 모사물도 순간마다 그것일수도 있고 또 그것이 아닐수도 있다. 모두어 말해서 사물의 무궁한 변화, 형상의 천차만별로 하여 종잡을수 없기에 사물의 특수성과 몽롱성이 충만되여있게 된다. 문예는 오직 사물의 이런 특수성과 몽롱성을 형상적으로 드러낼 때에야만이 풍부하고 다채롭고 정취가 그윽한 매력과 미감을 선물할수 있다. 무형속에 형상이 현연되여야 볼 때는 없는듯하지만 사색속에서는 실재를 느낀다. 이것은 전통적예술추구로서 일종 몽롱미에 대한 야릇하고 불가항력적인 추구이다. 표현방면에서 본다면 시가, 소설, 산문에서의 생략 혹은 비약이며 회화에서의 공백이고 영사막, 무대에서의 공간 모두가 기실 일종의 몽롱미이다. 례하면 영화 ≪붉은수수≫에서 “나의 할아버지”와 “나의 할머니”가 만나는 장면에서 우리앞에 펼쳐진것은 설레이는 일망무제한 붉은수수밭이다. 그들은 인적기가 없고 장려한 대자연속에서 하늘을 이불로 삼고 대지를 침상으로 삼고 그렇게 미칠듯이 야하게 그러면서도 순결하고 자연스럽게 정욕을 불태운다. 그 광활한 대자연은 “실재적”인 붉은수수밭이 아니라 “허적인 예술공간”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유로이 나래칠수 있는 황야이고 정감의 심연이며 사랑의 바다의 상징이다. 거기서 자유의 불길, 사랑의 불길, 생명의 불길이 활활 타번진것이다. 정직하고 강인하며 랑만적이고 호현한가하면 온순하고 순박한 다종기질의 사나이가 거기서 원시적인간성이 빛을 발산한다. 바로 그 붉은수수가 우매무지하던 시대의 인간성복귀의 상징이다. “한뙈기 붉은수수는 한사발의 붉은수수술을 고아낼수 있고 또 붉은 선혈로 변하여 나중엔 붉게 타오르는 민족정신으로 승화하였다.”고 상상해보라. 넓고 거칠고 야한 록색의 공간이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는 얼마나 모호하고 몽롱한가? 립체감도 있고 류동감도 있어 실로 끝이 보이지 않고 사색이 끝없는 공령(空灵)의 경지에 이르게 할수 있다. “사람은 아름답기에 사랑스러운것이 아니라 사랑스럽기에 아름다운것이다.”(레브 똘쓰또이) 이 명제에 근거하여 우리는 문예의 몽롱미를 련인의 눈속의 “서시”에 비유할수 있다. 서시가 그토록 아름다운것은 “서시”를 심미적눈길로 바라보고 “서시”를 죽도록 사랑하고 추구하는 련인의 모호하고 몽롱한 심령즉 아름다운 기대심리에 도취되여있끼때문이다. 바로 그래서 얼마의 련인이 있으면 얼마의 “서시”가 있게 된다. 문예의 몽롱미는 이처럼 현묘하고 알쏭달쏭하며 풍부하고 다채롭다. 사람이 몽롱하면 사실도 몽롱해지고 몽롱한 붓끝아래 대중도 따르기 어렵게 된다. 시 ≪가자!≫(북도)를 음미해 보자. 가자!락엽은 골짜기에 날려들고 노래는 오히려 갈곳이 없다. 가자!얼음위에 달빛이 강바닥에 넘쳐흐른다. 가자!눈은 한곳 하늘을 보라. 눈은 한곳 하늘을 보라. 마음은 황혼빛 북을 친다. 가자! 우리는 기억을 잃지 않았다. 우리는 가서 생명의 호수를 찾자. 가자!길이여, 길이여, 붉은 양귀비 흩날린다. ≪가자≫는 인생도로의 험난함이 주제로 된 서정시이다. 시에는 감상적인 기분이 짙게 흐른다. 그러나 “생명의 호수”를 찾는것은 잊지 않고있다. 인생의 가을에 “갈곳이 없고” 황혼빛 창망한데 일체 희망은 모두 물거품이 되여버려 마음속에서 북소리 울린다. 현실속에 인생의 길, 갈래갈래에 붉은 마취제인 아편꽃 흩날린다. 어디가서 생명의 호수를 찾는단말인가? 그러나 가지 않으면 안된다. 가자! 가자! 가자! 한걸음 한걸음 가는데까지다. 이것이 북도의 마음의 절규이다. ≪가자≫는 얼핏 보고는 알둥말둥하다. 마치 지옥에 오래 갇혀있다가 도망쳐나온 도주범의 번뇌와 갈망이 숨겨져있는것 같다. 어찌 생각하면 한창 청춘시절을 잃어버린 처녀가 아무리해도 되찾을길 없는 그 아픈 마음과 쓰라림을 호소하고있는듯도 하고 방불히 실총당하여 버림받은 적자가 다시 총애의 품으로 돌아오고 싶어하지만 이미 아득히 흘러가버린 세월을 한탄하며 돌아와도 들어갈 문이없어 처절한 신음을 토해내는것같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을 쏟아지는 울분대로 직설하지 않고 시적대상물에 정감을 이입시키는 수법으로 보일듯 말듯 정감의 베일속에 감추고 은근히 토로한다. 독자는 바로 그 숨겨진 심령심처의 구석구석에 더 호기심이 끌리고 보이지 않는 그 말을 더 풍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그곳을 엿보고 싶어하고 밟아보고 싶어진다. 시인은 이렇듯 수수께끼로가 아니라 몽롱미로 자기의 절절한 감수를 장식함으로써 시에 더 없는 매력을 싣고있다. 4. 몽롱의식의 영구성 인류가 생활하고있는 환경으로 말하면 어느 사람에게나 하나의 모호 세계라고 말할수 있다. 인간의 정신령역과 정감세계는 오색잡다하고 변화무상하여 조종할 방법이 없는 미형컴퓨터나 열수 없고 또 내부상태를 직접관찰할수 없는 “흑상(黑箱)”같다고 할수 있다. 객관세계와 주관세계 자체의 정지상태에서나 변화각도에서 보아도 완전히 다 알수 없고 다 꿰뚫어볼수 없는 몽롱성이 존재하므로 인식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몽롱의식이 산생된다. 인간의 현실에 대한 개조, 사람지간의 투쟁 및 사물자체의 발전변화는 사물을 시종 운동상태에 처하게 한다. 만약 인간이 정지적인 안광으로 변동속의 사물을 투시한다면 필연적으로 의혹과 모호의식이 산생된다. 만약 인간이 정지적안광으로 변동속의 사물을 투시한다면 필연적으로 의혹과 모호의식이 산생된다. 이런 주관의식의 몽롱성은 부단히 소실되고 부단히 산생된다. 그런데 이런 소실은 국부적이고 잠시적이다. 인간의 인식과 운동하는 세계사이에는 시공간적차이가 있기에 주관의식의 몽롱성은 불가피면적이다. 세계상의 어떠한 언어이든지 물질세계와 복잡다단한 심령세계의 기술하고 묘사함에서 의도적인 다의성보류, 추상성, 편파성, 파생성 등 불확실성을 가지게 되므로 핍진하지 못한 표현의 곤혹을 철저히 극복할수는 없다. 예술언어도 주관의식을 표현할 때 스스로 막무가내한 모호성과 몽롱성을 의식하게 된다. 이는 인류언어의 빈곤증을 의미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다.
71    시를 쓴다는것은 인생의 마지막역을 잘 인테리한다는것... 댓글:  조회:2791  추천:0  2016-12-27
스페인 '인간 탑 쌓기' 축제, 보기만 해도 아찔 [ 2016년 12월 27일 02시 29분 ]     스페인 카탈루냐(西班牙加泰罗尼亚市) 지방에는 ‘인간 탑 쌓기’ 전통이 있다. 이 전통은 200년 넘은 력사를 가지고 있으며 201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                             떠나면서 떠나지 않은 것  1. 하나의 전제  박인환은 8.15직후에 김경린, 김수영, 조병화 등과 더불어 나온 일군의 모더니스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들은 스스로 모더니즘의 갈래에 드는 시를 쓰고자 하는 시인들로 공동시집인 을 발간하여 당시 시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46년 에 로 문단에 들어선 인환은 도시적 비애와 감상주의적 기질과 1940년대의 시대고를 주로 읊었다. 또 1950년대의 전쟁과 비극, 퇴폐와 무질서, 불안, 초조 등의 시대적 고뇌를 리드미컬하게 노래하였다. 1946년부터 1956년까지 광복의 기쁨과 동족상잔의 6.25, 그리고 조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안 속에서 인환은 시를 썼다. 기성 질서에 대한 대담한 반역과 도전을 끊임없이 시도했고, 남들이 전 생애를 통하여 이룩한 일을 30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온 힘과 정열을 기울여서 성취하려고 몸부림쳤으며, 자유에의 강렬한 열망과 좌절과 고뇌를 술과 친구와 사랑과 시를 쓰는 일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여기에는 인환의 내면에 산재해 있는 부정과 긍정, 자기 존재와 부재, 그리고 생명에 대한 경외로움은 평론가들에 따라서 입장을 달리 하고 있다. 윤석산 교수가 `내재적인 정신의 면모를 외모에까지 나타내려고 했던, 전형적인 댄디스트’였다고 한 반면에 이동하 교수는 `한자어의 범람, 어휘의 빈곤, 경박한 멋부리기, 산만한 이미지’ 등의 이유로 부정적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인환은 자기본능의 요소가 다른 누구보다도 강했다. 그래서 자신이 시를 쓴다는 사실에 대해 한 번도 회의나 부정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31세의 짧은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신경쇠약으로 27세라는 짧은 나이에 음독 자살을 한 고월 이장희에 비해 인환은 31세로 유명을 달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詩作을 단순히 겉멋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단조로운 면이 없지 않아 있다.  따라서 그의 실질적인 본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갈등하고 지향했던 문제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이런 차원에서 이 글은 인환이 모더니스트로서 추구하고 현실의 고통 속에서 더욱 憺者로서 빛나게 되는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고통에서 빛나는 단독자  1) 갈등과 지향  인환은 1946년 12월 에 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후 48년의 과 49년에 출간한 동인지 , 그리고 전후에 구성된 동인 활동을 했다. 는 동인지 없는 동인으로 무산되고 말았기 때문에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으나 인환이 새로움에 대한 뜨거운 열망과 어둠을 바라보게 되는 과 은 인환의 독특한 개성과 침잠된 존재에서 고조된 세계를 추구하는 모더니즘의 요소를 갖고 있다.  김기림의 모더니즘 선언에 의하면 모더니즘은 감상적 낭만주의와 편내용주의에 대한 두 개의 부정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그들의 시방법은 `이미지의 창조와 추구’라는 회화성(繪畵性)이다. 그리하여 기성에 대한 강한 반발과 외부의 눈을 뜨게 된다. `새로움’ 이란 존재는 항시 과거의 것에 대해 지독히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인환에게도 본질적으로 가장 강하게 나타났던 것은 지난 것에 대한 기성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었다. 이러한 형태는 그의 첫 작품 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스콜 같은 슬픔, 코코아의 시장, 아세틸렌 냄새, 베링 해안, 베고니아’ 등과 같은 엑조틱한 어휘들과 시대를 예민하게 관찰한 도시적 감각이 잘 드러나 있다.  넓고 개체 많은 토지에서  나는 더욱 고독하였다  힘없이 집에 돌아 오면 세 사람의 가족이  나를 쳐다 보았다 그러나  나는 차디찬 벽에 붙어 화상에 잠긴다.  <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일절  비록 겉으로는 화려하고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듯 하지만 인환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가족’에서 갈등과는 상관없이 오히려 회상에 잠기는 인환의 강한 자존과 단독적인 정신의 소유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시이다. 이 세상에 나온 지 1년이 지난 1949년 4월 합동시집 을 발간하게 된다. 이 동인지를 내면서부터 인한은 본능과 현실이라는 현장에서 체험하게 되는 불안을 항상 지니고 살아 간다. 그러면서 나아가서는 두 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고뇌에 침잠하게 된다.  나는 불모의 문명, 자본과 사상이 불균정한 싸움 속에서,  시민정신에 이반된 언어작용만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 중략 ……  그러나 영원히 일요일이 내 가슴 속에 찾아 든다. 그러할  때에는 사랑하던 사람과 시의 산책의 발을 옮겼던 고뇌의  원시림으로 간다. 풍토와 개성과 사고의 자유를 즐기던 시  의 원시림으로 간다.  <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문 일절  여하튼 나는 우리가 걸어 온 길과 갈 길, 그리고 우리들 자  신의 분열한 정신을 우리가 사는 현실 사회에서 어떻게 나  타내 보이며 순수한 본능과 체험을 통해 본 불안과 희망 두  세계에서 어떠한 것을 써야 하는가를 항상 생각하면서 작품  들을 발표했었다.  (선시집 후기에서)  위의 두 인용문에서와 같이 `풍토와 개성과 사고의 자유를 즐기던 시의 원시림’으로 가서 `불안과 희망 두 세계에서 어떠한 것을 써야 하는가’를 고뇌해서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인환이었다. 인환은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며, 서구지향적 일면의 단점을 내포하고 있으나 전통적 세계와는 다른 도시적 우수가 깃든 페이소스와 센티멘탈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적으로 토착화시키고 있다.  거북이처럼 괴로운 세월이  바다에서 올라 온다  일찍이 의복을 빼앗긴 土民  태양 없는 말레이  너의 사랑이 백인의 고무園에서  자스민처럼 곱게 시들어졌다.  …… 중략 ……  눈을 뜨면  南方의 향기가  가난한 가슴팍으로 스며든다.  < 남풍> 일절  이 시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이미지의 산만함이 없으며 어휘의 경박한 멋부림도 없다. `눈을 뜨면 태양 없는 말레이’가 `남방의 향기’가 되어 밀려드는 현실의 과학적 통찰이 잘 수용된 상당히 수준 높은 시이다. 에서 증명되듯 현실의 여러 고통스러운 문제들에 대하여 문학이 갖고 있는 궁극의 목적, 인간 정신의 회복과 시대와 사회에 대한 투명한 비평정신을 좀 더 가까이서 느끼고자 한 인환의 면모를 볼 수 있다.  2) 자기 존재와 부재  인환이 편집을 맡아 조판까지 끝낸 상태에서 6.25가 터졌다. 인환은 서울 수복이 될 때까지 지하실과 골방을 전전하며 수복이 될 날을 기다렸다.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가 너의 나라는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 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일절  적 치하라는 공포 속에서 태어난 딸을 생각하며 쓴 이 시는 딸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살아 있을 것인가’하는 존재를 의식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겉멋이 아닌 심정적인 진실을 표현하는 예지를 갖고 있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회상과 체험일지도 모른다  …… 중략 ……  …… 아 최후로 이 성자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의 회화 속의 裸女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에게 팔은  철없는 시인  나의 눈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일 것이다.  <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시는 고독과 불안으로 충만된 작품으로 `살아 있는 것’은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한 체험’으로 존재를 부재로서 연결하여 `속죄’나 `裸女’에게 팔은  `단순한 상태의 시체’로 보고 있다. 이것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싸르트르식 명상을 수용하여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인간적 가치를 상실한 시체의 상태로서만이 가능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인환이 존재와 부재를 모두 초월하려고 한 의지를 암시 받을 수 있다. 이와는 좀 색다르게 자기 부재를 갈망하는 라는 시가 있다.  슬픔대신에 나에게 죽음을 주시오  인간을 대신하여 세상을 風雪로 뒤덮어 주시오  건물과 창백한 묘지 있던 자리에  꽃이 피지 않도록  하루의 1년의 전쟁의 처연한 추억은  검은 신이여  그것은 당신의 主題일 것입니다.  < 검은 신이여> 일절  죽음은 존재가 아닌 부재이다. 인환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인간존재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되면서 전쟁이 주는 인간의 한계와 신의 존재를 실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인환 자신도 심경의 변화에 동요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차라리 `슬픔 대신에 죽음’을 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죽음을 관장하는 것도 `당신의 주제’로 파악하여 한 줌의 슬픔에 절규하고 있다. `인간을 대신하여 세상을 풍설로 뒤덮어 줄’ 신의 부재, 여기에는 존재를 가탁한 부재의 참담함이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또 다른 존재를 규정하기 위한 의식의 주제로 인환이 현실을 바라보는 직시적인 안목이 나타나 있다.  나는 10여년 동안 시를 써 왔다. 이 세대는 세계사가 그러한  것과 같이 참으로 기묘한 불안정한 그러한 연대였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해 온 그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  하였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것이다.  시를 쓰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의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이었다.  (선시집 후기에서)  인환이 마치 이것을 의식하였는듯이 대표작 를 쓰게 된다. 이 시는 인환 자신의 `마지막 것’처럼 떠나간 것에 대한 비애의 분위기로 가득차 있다. `목마를 타고 떠난, 가을 속으로 떠났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떠나는 것일까’ 등의 현실 부재의 정황을 나타내고 있다. 는 인환의 존재와 부재, 또는 자신의 세계를 리리시즘의 방법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다소 표면적인 감정에 치우친 면이 없지 않아 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부재의 현실을 극복하고 있다. 그래서 목마를 타고 떠난 지금도 우리들 가슴에 `술병에 별이 떨어지는 소리’로 귓전에 남아 깊은 여운을 준다.  3. 떠나면서 떠나지 않은 것  인환이 31세의 젊은 나이로 작고하기까지 10여년 동안 작품활동을 하면서 60여 편의 시와 다섯 편의 산문을 썼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인환의 시는 시대고와 도시민의 삶의 애환을 리드미컬하게 표현한 모더니스트이다. 그러나 인환은 서구적 문명을 선망하는 본질이 갖게 되는 갈등을 작품을 통해 인간적인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비애와 고독감에 빠지게 된다.  나는 돌아가서도 친구들에게 얘기할 것이 없고나  유리로 만든 인간의 묘지와  벽돌과 콘크리트 속에 있던  도시의 계곡에서  흐느껴 울었다는 것 외에는……  일절  `벽돌과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도시의 계곡에서’ 인환은 울었다. 그러나 도시적 문명의 위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순수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뒤이어 나온 에서는 인환의 주관적인 감성에 의해서 보다 면밀하게 직조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이것은 그만큼 인환이 내적 변화를 주관적이며 가장 개성적인 입장에서 노래했다는 뜻이 된다.  1953년 육군 종군작가단에 가입한 인환은 전장을 떠돌며 사실적이고 보다 절박한 작품을 구상하게 되는데, 그것은 거개가 전쟁이 주는 허무감과 비참한 `벽’이었다.  담배를 피우듯이  태연한 작별을 했다  그가 서부전선 무명의 계곡에서  복잡으로부터  단순을 지향하던 날  운명의 부질함과  생명과 그 애정을 위하여  나는 이단의 술을 마셨다.  < 어떤 날까지> 일절  어두운 밤이여  마지막 작별의 노래를  그 무엇으로 표현하였는가  슬픈 인간의 유형을 벗어나  참다운 해방을  그는 무엇으로 신호하였는가  일절  전장의 종군시, 해병대 중위와 수색대장 K중위의 장렬한 전사를 읊은 두 시는 죽음을 `복잡으로부터 단순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인환에게 죽음은 개인의 궁극적인 소멸로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담배를 피우듯이 태연한 작별’을 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따라서 죽음을 단순으로 인식하고 `마지막 작별의 노래’를 `참다운 해방’으로 보았던 것이다. 즉 그것은 단순한 최후의 표현이 아닌 참다운 해방과 죽음과 생명에 대한 경외로움의 순화였다.  인환의 시에 많이 산재해 있는 시어는 떠나기 위한 몸짓의 어두운 이미지들이다. 주지하다시피 인환의 대표작인 도 `떠난다’는 결별에 대한 이미지가 강하게 내재되어 있다. 다음 시 에서도 죽음에 대해 평면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당신과 내일부터는 만나지 맙시다  나는 다음에 오는 시간부터는 인간의 가족이 아닙니다  왜 그러할 것인지 모르나  지금처럼 행복해서는  조금전처럼 착각이 생겨서는  다음부터는 피가 마르고 눈은 감길 것입니다.  < 밤의 미매장> 일절  오직 단독자로서의 고독을 뼈아프게 절감하고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예시할 수 있는 직관력으로 일체의 죽음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면은 `죽음을 친구와 같이 다정스럽게’ 생각하는 에서도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떠나기 위해 부침했던 인환에게 작용한 요인들은 상흔과 같이 남아 있는 불안과 허무였다. 전쟁이후 반자연, 반서정, 거기에다 시대고가 겹친 허무와 휴전협정 이후 각종 문인총회가 결성되고 기타 종합지로 인한 문단의 재변화가 위축된 심리로 불안하게 하였다. 이것은 시대의 고민이었건, 한 개인의 고민이었건 그에게는 실로 심란한 요인들이었다.  불행한 신  어데서나 나와 함께 사는  불행한 신  당신은 나와 단 둘이서  얼굴을 비벼대고 비밀을 터 놓고  오해나  인간의 체험이나  孤絶된 의식에  후회치 않을 것입니다  또다시 우리는 결속되었습니다  황제의 신하처럼 우리는 죽음을 약속합니다  지금 저 광장의 전주처럼 우리는 존재합니다.  < 불행한 신> 일절  인환이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으면서도 `광장의 전주처럼 존재’하고 있는 현실적인 어둠을 거부하지 못하고 있다. 떠나기 위한 시를 쓰면서 인환은 어쩌면 세네카의 역설과 같이 `완벽하게 사는 길은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라는 삶에 대한 의지적 모습을 보여 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불행한 신’과 단 둘이 있는 인환이 `불행한 신’이다. `어데서나 얼굴을 비벼대고 비밀을 터 놓아도’ 후회하지 않는 `결속된 우리’로 보아 언젠가다가 올 죽음에게 `신화처럼’ 약속을 하고 있다.  인환이 작고한 지 45년이 되지만 그의 시는 아직도 `그의 눈동자 입술’처럼 남아 人口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인환이 떠나면서 떠나지 않은 인상을 주는 시는 , 의 끝부분이다.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일절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일절  두 시 다 여운을 남겨 아쉬움을 나타내고, 또 긍정의 기대감으로 영원히 떠나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에서 인환이 죽은 후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면서 오래오래 부리워지기를 예감했을까? 또 에서와 같이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처럼 허무하고 쓸쓸한 시대를 조용히 그리고 체념했을까? 비록 그가 죽음, 울음, 허망, 불안 등에서 심리상태가 위축되었다하더라도 결코 겉멋과 센티멘탈만으로 시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환에게는 그 이상의 자기 고통이 있었다. 그것은 인환이 죽기 전 `이상 추모의 밤’에서 `인간은 소모품 그러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야지’하며 이진섭에게 써 준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인생을 소모품’이라고 보는인환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그는 죽는 날까지 섭렵하였다. 난잡한 이국적 어휘와 외면과 내면의식의 대립, 그리고 도시민의 애환, 겹친 시대고에서 모더니즘에 대한 강한 열의를 그는 자신의 고통문제로 수용하여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인환에 대한 평가는 논자에 따라 분분하나 너무나 절실했던 자기 고통 때문에 더욱 빛나는 `등대’로 밝힌 그의 시심은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인환이 선시집 후기에서 밝혔듯이 `시를 쓴다는 것은 사회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것’으로 보아 인환도 `본질적인 시에 대한 정조와 신념’만을 지켜 온 시인이었으나, 그 자신도 결국 `불행한 신’이 되어 목마를 타고 하늘 속으로 떠나고 말았다   ====================================================================     후련한 수련 ―박성준(1986∼ ) 항상 얼굴의 북쪽에서만 키스를 하겠소 한 무리의 싱거움을 조롱하고 가는 입김 수련의 속내가 태양의 뿌리를 흔들며 연못을 개봉하고 가라앉은 얼굴을 꺼내 봉인해온 말을 터뜨리면 자꾸 모르는 이름만 가시를 쥐고서 여름을 방문하고 있소 외침이 될 때까지 몸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헤매는 춤의 하소연이란 애인의 소란스러운 울음을 감싸 안을 때처럼 반짝이는 빈틈으로 여기에 거울을 깨고 있소 모르는 말이 건너오는 동안 바늘을 쥐고 삼베처럼 웃으며 깊은 혀를 꾹 다문 수련 저기 후련하게 수련이 물을 쥐고 솟아 있소 물속을 듣던 바위의 귀는 오래오래 초록을 껴안고 시시때때 하얀 발톱들은 잇몸 근처에서 자라나오 어쩌자구 물속에는 찡그린 미간들이 그리도 많아 물의 어깨를 비튼단 말이오, 비바람과 수련이 키스를 나누는 동안 저 부력은 감은 눈꺼풀에서 풀려 나오는 힘 눈을 감고 응결하는 입술과 입술들의 향연 빗줄기의 청력이 허공과 연못을 꿰매고 있소 서로가 서로에게 눈이 없어 몰라도 좋을 얼굴, 그저 묻고 있소 향기로 취미를 가진 우울한 표정들이여, 꺼져가는 물속의 핏빛을 보오 툭 터진 엄지에서 연못을 향해 배어 나오는 개봉된 허공의 저 피를 보시오      ‘저기 후련하게 수련이 물을 쥐고 솟아 있소’, 이 한 구절만으로도 감각을 후련하게 치고 들어오는 생생한 이미지의 시다. 그러나 여름날 빗속에서 연못에 피어 있는 수련을 모사하는 시인들은 ‘한 무리의 싱거움’이라는 게 박성준의 시 의식(詩 意識). 그에게 세상 만물과 만사는 그 수면 아래 ‘가라앉은 얼굴’이 있는 것이며 시 쓰기는 그것에 ‘몸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헤매는 춤’, 언어의 고행이자 축제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거울(수면)을 깨고’ 있는 ‘하얀 발톱들’인 ‘비바람’은 수련과 ‘키스를 나누는’ 동시에 ‘모르는 말’로 ‘허공과 연못을 꿰매고’ 있는 것이다. ‘항상 얼굴의 북쪽에서만 키스를 하겠소’, 죽은 이의 머리를 북쪽에 두는 관습과 잘 때 머리를 그리 두지 말라는 미신이 떠오른다. 죽음의 세계인 ‘북쪽’에서만 접촉하겠다니…. ‘바늘을 쥐고 삼베처럼 웃으며 깊은 혀를 꾹 다문 수련’이 상복이나 수의를 짓는 처녀처럼 귀기 서리고 처연하다. 생이 뿌리 내리고 있는 연못의 깊은 속내를 휘저으며 하염없이 쏟아지는 비. 삶을 언제나 간섭하는 죽음이 연기처럼 증기처럼 ‘풀려 나오고’ ‘배어 나온다’. 이 낯설고 음습한 세계의 긴장된 고요, 들끓는 정적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박성준은 ‘어쩌자고’ 무당 같다. 엄지손가락을 물어뜯는.
70    진리를 멀리서 구하지 말고 자기 자신속에서 구하라... 댓글:  조회:2654  추천:0  2016-12-27
              [인민망] 중국 고생물학자 싱리다(邢立達) 미얀마에서 가져온 호박-공룡 꼬리 화석... ========================= [새 평론집 '네오 샤먼으로서의 작가' 낸 문학평론가 임우기]  16년 만에 990쪽 평론집 펴내…  4·19세대의 문학 한계 드러낸 '문지'와 '창비' 집중 비판 “한국 문학의 유전적 전통과 뿌리를 돌봐야 한다”며 평론집 ‘네오 샤먼으로서의 작가’를 낸 문학평론가 임우기씨. /고운호 기자 "4·19세대 문학의 한계를 철저히 비판하는 과정 속에서 한국 문학의 새 이념을 모색해야 한다. 197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은 4·19세대의 서구 자유주의적 문학 이념의 틀에 갇혔다. 한국 문단은 지금껏 한국인의 심층 무의식을 이룬 샤머니즘을 외면해왔다. 단군 신화의 홍익인간부터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에 이르기까지 샤머니즘의 전통문화가 우리 문학의 새 희망이 될 수 있다." 문학평론가 임우기(60)씨가 새 평론집 '네오 샤먼으로서의 작가'(아트인라이프)를 내면서 한국 문학의 샤머니즘 부활을 역설하고 나섰다. 임씨는 한번 글을 썼다 하면 200자 원고지 500~800장을 써내는 괴력을 발휘해왔기에 이번에 16년 만에 낸 평론집은 무려 990쪽이나 된다. 임씨는 1990년대 초 문학과 지성 편집장을 지낸 뒤 솔출판사를 차려 박경리의 '토지' 완간과 김지하 시전집 등을 낸 바 있는 중견 출판인이기도 하다. 그는 새 평론집을 내면서 계간지 '문학의 오늘'도 인수해서 발행인을 맡아 문단의 새 목소리를 내겠다고 선언했다. 임씨는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자재연원(自在淵源)'이란 말을 꺼냈다. 그는 "진리를 멀리서 구하지 말고 자기 자신 속에서 구하라는 말"이라며 "문인들이 자신의 삶과 싸우며 치열한 인생 공부를 해야 하는데, 대부분 서양의 인문학 이론에 박학다식한 채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꼽혀온 '문지'와 '창비' 모두 4·19세대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문지'는 처음부터 모더니즘을 내세워 반(反)샤머니즘을 선언했고, '창비'는 서구적 리얼리즘의 시선으로 샤머니즘을 일부 수용했지만 깊은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 임씨는 1990년대 이후 '문지'와 '창비'의 시(詩)를 집중 비판하면서 "새로운 시학을 보여주지 못한 채 오래된 권력을 누리고 행세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문지 시집들은 지적(知的) 기교나 허황한 감각의 시들을 내놓고, 창비 시집들은 타성화된 리얼리즘과 경박한 현실 참여시들로 어지럽다"는 것.     임씨가 주장하는 한국적 샤머니즘 문학은 복고주의와 국수주의를 거부한다. 그는 샤머니즘이 '한국인의 본능적 축제 의식이며 문화·예술적 기질'일 뿐 아니라 '외래 사상이나 종교를 받아들인 회통(會通) 정신'도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김동리와 서정주의 무속 문학을 재평가하면서 모더니스트로 꼽혀온 백석, 윤동주, 김수영 시인이나 2000년대의 작가 김애란의 문학에서도 '샤먼의 노랫소리'를 읽어내려고 했다. 특히 백석의 시를 대표하는 '갈매나무'는 북방 샤머니즘의 신목(神木)을 상징한다는 것. 백석의 시 중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이란 제목은 주문을 외듯 읽어야 하는 '주술 언어'라고도 했다. 임씨는 "정상적이고 만족하는 삶의 세계는 샤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며 "샤먼은 가난하고 억울하고 소외되고 쓸쓸한 삶의 이름들을 저 높은 별빛 하나하나 위에 간절히 불러보는 존재"라고 했다. 그는 샤머니즘과 함께 '방언 문학'도 역설했다. 4·19세대 작가들 중 상당수는 지방을 무대로 한 소설을 쓰면서도 표준어만 고집했다는 것. 임씨는 "작가는 지역 사투리뿐 아니라 자기 고유의 '개인 방언'을 구사하면서 문학의 본질인 '소리'를 살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6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소나무와 첫락엽 댓글:  조회:2208  추천:0  2016-12-27
‘첫낙엽’을 밟는다. 청명한 소리가, 먼 여행을 마친 마지막 파도 소리처럼 빈 숲속에 부서진다. 그 소리는 파도 소리가 다시 수평선 너머 원점으로 돌아가듯, 텅 빈 나뭇가지에 걸린다. 지난여름의 폭풍우, 사랑을 나누던 새들을 재잘거림, 잘 마른 햇살이 팔랑거린다. 잎을 갉아먹던 애벌레가 그네를 타고, 폭염에 지친 어깨 위에 소낙비가 선다. 첫낙엽 속에는 지난 봄, 여름, 가을 너머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시간의 배꼽이 달려 있다. [월간산]북바위산 북동릉의 소나무 사이로 본 부봉. 첫날, 첫걸음, 첫새벽, 첫머리, 첫봄, 첫여름, 첫가을, 첫겨울, 첫눈 따위의 말은 있지만 ‘첫낙엽’이라는 말은 (사전에 오르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없다. 하지만 첫낙엽은 실재한다. 마냥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지 않게 문득문득 얼굴을 돌리는 가을과 아직은머뭇거리며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겨울 사이에 있다. 나는 그 불확실한 시간이 좋다. 갓 태어난 아기의 탯줄을 자르기 직전 같은 시간. 첫낙엽은 가을과 겨울 사이에서 부서진다. 부서짐으로써 존재한다. 첫사랑이 그렇듯이, 세상 모든 ‘첫?’들은 부서질 운명을 타고 났다. 그것으로써 불멸한다.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은 기억되지 않는다. 홀로서도 아름다운 산, 주변 명산 조망의 즐거움은 덤 북바위산 남동쪽 능선에 걸린 사시리고개에서 첫낙엽을 밟는다. 아무도 밟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첫낙엽이 아니다. 이미 말했듯이, 첫낙엽은 낙엽과는 다른 시간 속에 존재한다. 내가 밟지 않아도 첫낙엽은 햇살과 바람에 의해 곧 부서질 것이다. 첫낙엽 부서지는 소리는 낙엽 밟을 때의 소리와 다르다. 바스락거리는 것도 푸석거리는 것도 아닌 소리. 그 소리 속에는 수액이 오를 때의 파동, 바람의 결, 햇살의 지문이 새겨져 있다. 이제 곧 영원한 과거로 봉인되기 직전의, 무시무종한 시간이 거기 있다. 텅 빈 능선에는 갓 떨어진 참나무 잎으로 가득하다. 지나간 시간의 모든 햇빛이 여기에 다 쌓였다. 이 빛들은 언젠가 다시 세상을 초록으로 물들일 것이다. 삶과 죽음을 가뿐히 넘어 선 빛이다. 그런데 그 빛을 밟고 가는 나는 숨이 차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실감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만, 자신이 어떤 세계에 속했는지를 아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아직 나는 어둡고 무거운 욕망이 충돌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사단’이 난다(지금 우리나라가 그 처지에 놓였다). [월간산]북바위와 소나무. 지금 내가 선 곳은 산. 이곳에서는 아무리 나쁜 생각을 품어도 세상에 어떤 해악도 끼칠 수 없다. 그래서 언제나 산을 오르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물론 산에 사는 생명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갚을 길 없는 미안함이다. 오직 감사할 따름이다. 북바위산(772m)은 월악산국립공원에 속한 산이다. 월악산국립공원의 서쪽을 남북으로 가르는 송계계곡 서쪽에 자리했다. 남쪽으로 백두대간의 마패봉과 마주하고 북서쪽으로 송계계곡 건너 월악산을 바라본다. 북바위산은 월악산은 물론 주흘산, 조령산 같은 이름 높은 산에 가려져 널리 알려진 산은 아니다. 하지만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변 명산을 조망하기 좋은 산으로 사랑 받는다. 그러나 이 또한 북바위산의 독자성을 간과한 시각이다. 북바위산은 형식상 월악산국립공원에 속해 있을 뿐 월악산과는 독립된 산이다. 송계계곡을 사이에 두고 있어 산줄기도 연결되지 않는다. 산 북쪽으로는 용마산을 마주 보면서 그 사이에 동산계곡, 남쪽으로는 597번 지방도와 석문천을 흐른다. 북바위산에서 남동쪽 사시리고개에서 송계계곡으로 흘러드는 사시리계곡은 온전히 북바위산의 동남쪽 자락에 깃들어 있다. 거듭 말하건대 북바위산은 독자성이 강한 산이다. 북바위산의 조망만을 강조하는 것도 본말 전도다. 북바위산은 홀로서도 충분히 아름다운 산이고, 주변 명산을 조망하는 즐거움은 덤이다. 만약 안개 자욱한 날 이 산을 오른다 치자. 이 산의 가장 빼어난 면모를 보게 될 것이다. 하늘과 맞닿은 넉넉한 암반 위에 홀연히 솟아오른 듯한 소나무와 함께하게 될 것인즉, 그때는 누구라도 신선의 경지를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말의 낭비를 무릅쓰고 거듭 말하자면, 북바위산을 오르는 최고의 즐거움은 암릉을 걸으며 바위와 하나가 된 소나무와 함께하는 일이다. 참나무 숲 사이로 첫낙엽을 밟으며 부드럽게 오르던 능선이 동쪽으로 방향을 틀 즈음 우람한 소나무가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북바위산 정상부의 서쪽이다. 이곳에서는 정상이 거의 눈높이에 걸린다. 완만한 암릉을 걸으며 숨을 가지런히 할 즈음 너럭바위 같은 정상에 닿는다. 북바위산의 정상은 소나무라 해도 좋다. 바위 속에서 홀연히 솟은 듯하다. 바위 기슭으로도 눈 가는 곳마다 화가의 손을 빌릴 것 없이 그림이 되는 소나무가 선경을 이룬다. 멀리 부봉과 백두대간의 능선은 기꺼이 소나무의 배경이 되어 준다. 우리 소나무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공감할 터이지만 이곳 북바위산 소나무의 아름다움은 새삼스러운 데가 있다. 울진 소광리나 대관령 어흘리의 금강송, 경주 계림의 용틀임하는 소나무가 지닌 아름다움을 모두 갖추었는데, 그 바탕이 암릉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사람의 눈길 말고는 닿을 데 없는 암벽의 소나무를 눈앞에서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현실성이 오히려 경이감을 줄인다. 비현실적이어서 경탄하던 아름다움을 눈앞에서 감당하지 못하는 역설이다. 북바위산 소나무는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고유의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월간산]1 정상부 동쪽 암릉의 소나무. 2 북바위산 정상 동쪽 기슭의 소나무 소나무는 허공과 한몸이다 소나무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우리는 고절미를 으뜸으로 여긴다. 최고의 인품과 초인의 이미지를 소나무에 투사한다. 기암창송(奇巖蒼松), 만학송풍(萬鶴松風), 백목지장(百木之長), 백사청송(白沙靑松), 설야송뢰(雪夜松?), 설중송백(雪中松柏), 세한삼우(歲寒三友), 세한송백(歲寒松柏), 송백지조(松柏志操), 송수천년(松壽千年), 송죽지절(松竹之節), 송풍수월(松風水月), 송학청월(松鶴靑月), 일학송풍(一壑松風), 정청송풍(靜靑松風. 소나무의 아름다움에서 고절미에 대한 경도는 지나친 의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부박한 세월에 대한 위안일 수도 있겠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소나무에 대한 이미지는 고고하고, 강건한 면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북바위산 소나무에서 나는 소나무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과 상반된 아름다움을 봤다. 바위 위에서 창공으로 솟은 소나무를 보는 순간 그동안의 생각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소나무는 강함으로 바위를 뚫고 솟은 것이 아니라, 더 없는 부드러움으로 바위에 스며들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세상에 소나무보다 부드러운 나무는 없을 것이다. 빗물보다 더 부드럽게, 안개보다 더 섬세하게 바위로 스며들지 못했다면 결코 목숨을 이어갈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 소나무보다 소박한 나무는 없을 것이다. 지나가는 바람이 전하는 투명한 물방울만으로 지족할 줄 알기에 소나무는 사철 푸를 수 있는 것이다. [월간산]1 북바위산 정상에서 본 부봉. 2 북바위산 정상 서쪽 능선에서 바라본 월악산의 암릉. 세상에 소나무보다 가벼운 나무는 없을 것이다. 소나무는 온 몸을 허공에 내어 주고 산다. 소나무는 허공과 한몸이다. 소나무와 함께 송계계곡을 향해 서서히 몸을 낮추니 부드럽게 흐르는 슬랩 위로 월악산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월악산을 조망하는 최고의 전망대다. 하늘의 성채 같은 월악의 바위 능선이 장관이다. 슬랩을 지나 회랑처럼 선 소나무 숲길을 빠져 나오자 수직의 벼랑과 한몸을 이룬 소나무가 눈앞에 걸린다. 북바위 벼랑에 걸린 소나무다. 북동쪽 능선에서 이 바위를 바라보면 그 모습이 북과 흡사하다. 북바위산이라는 이름이 이 바위에서 비롯되었다. 북바위를 지나면서부터 암릉은 곧장 송계계곡으로 미끄러진다. 산그림자가 송계계곡의 계류에 누워 있다. 계곡을 따르는 찻길(597번 지방도) 위로 마지막 가을 햇살이 가득하다. 길모퉁이를 돌면 겨울이 기다리고 있을까. 늦가을과 첫겨울 사이에서 나는 또 흔들린다. 하지만 그 흔들림은 무욕하다. 나는 강해지기 위해 애쓰지 않을 것이다. /윤제학
68    [시문학소사전] - "퓨전"이란?... 댓글:  조회:2673  추천:0  2016-12-27
종래에 지켜져 오던 순수주의적 태도를 배격하고 이들을 혼합하여 생산하고자 하는 새로운 경향을 일컫는다. 과거에는 역할과 장르를 구분한 가운데 기능화·전문화를 추구하여 왔으나, 이제는 사고와 생산활동에 있어서 잡종 또는 변형된 형태가 보다 합리적이라는 주장이 점차 대두되고 있다. 실제 자연계에서의 진화란 잡종화의 역사이며 최근의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달은 생명공학을 통해 새로운 변형 유전체를 가능하게 했으며 문화적·사상적으로 이종간의 접합이 시도되고 있다. 잡종화 또는 퓨전의 요점은 물리적인 잡종화 그 자체가 아니라 잡종화의 과정에 내재되어 있는 창조성에 있다. 맹물도 아니고 사이다나 주스도 아닌 퓨전음료, 유전공학과 사이버네틱스에 의한 인간과 동물, 인간과 기계의 잡종, 금융백화점, 좌파도 우파도 아닌 제3의 길 등이 새로운 퓨전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정치·행정·사회·산업·기업 등이 혼합된 퓨전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미국경제의 유연성, 고성장 저물가의 지속 등도 퓨전현상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詩창작 실기에 대한 단상-김경수  4. 詩 쓸 때, 불현듯 떠오르는 詩적 영감은 어떻게 詩화할 것인가,  나는 서정을 느낄 때 뜻 모를 선율의 부딪힘을 깨닫는다.  나의 경험으로 그것은 거의 완전 투명한 선율, 그것의 순도를 가지는 것이다.  때로는 몇 주일, 몇 달 흥얼거리는 상태가 지속되지만 완강하게 언어의 의상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순수한 가락으로서 모든 감정을 애절한 흥얼거림으로 순화시키고 투명하게 용해시켜 그 흥얼거림이 언어를 용납해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진종일 흥얼거릴 뿐이다. 허지만 이와 같은 상태가 시일이 흐름에 따라, 약화되고 처지기 시작하게 된다.  그 무렵에 이르러 그것은 이미지를 환기시키고 세계의 사상과 융합되며 시적 표현의 불순물, 즉 언어를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언어의 건반 위에서 멜로디를 육화할 수 있는 심적 안정과 침착성을 얻게되고,  뜻모를 것으로 소멸하게 되고 또 다를 성질의 선율이나를 사로잡게 되는 것이다.  山은 九江山/ 보라빛 石山/ 山桃化/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 슴/ 발을/ 씻는다.  -박목월. -산도화 당시에 쓴 작품,  이것이 7.5조를 바탕에 깔고 있음을 제작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이점이다. 내게 있어 '뜻모를 선율' 은 그것이 수그러지는 일종의 여운 적인 상태에서 시적 형상을 입게되고 선율 자체에 의존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수그러진 상태라는 것은 공간적 확대를 의미하며 그러므로 한결 객관적 침착성이나 냉정성을 지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5. 詩의 언어는 일상어와 다른 것인가,  시는 일차적으로 관념적, 추상적, 직설적 진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 내 마음은 슬프다 --- 이 문장은 시적 진술이 될 수 없다.  즉, 시적 화자가 주관적으로 체험한 특별한 감정반응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내 마음은 벌레 먹은 능금이다  이처럼 시는 시인 자신에게 환기된 독특한 감정 이입이 형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정보소통을 중심으로 한 인식적기능을 떠나서 별도의 미적기능을 말하기란 어렵다.  그렇지만 미적인 것의 영역이 매우 넓어서 그것이 어떻다고 한마디로 정의 하기란 어렵다.  한 예를 들기로 하자.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 저기 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황동규.  조그만 사랑노래 매우 쉽게 쓰여진 이 詩에는 '어제, 편지, 그대, 길, 어린 날, 사랑, 저녁하늘 몇 송이 눈' 등의 詩어가 사용된다.  이들 언어들은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일상용어인 동시에 어감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詩에 자주 동원하는어휘들이다.  이 詩는 '조그만 사랑노래'라는 제목에 걸맞게 그다지 논리적일 필요도 없고 또 뭔가 철저히 일상생활에 가까워야 한다는 강박관념과도 거리를 둔, 평범한 어휘들로 구성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 詩는 詩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 즉 뭔가 현학적이어야 한다던가 대단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반성하게 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詩의 인식적 측면은 무시할 수 없다.  '얼굴을 가리고 박혀있는 돌'들과 '눈뜨고 떠다니는 몇 송이 눈' 이 환기하는 불안과 불온의 심리적 배경이 그것이다.  남쪽에선 과수원 입김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산 위에 마른풀의 향기/ 들 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어... -김현승. 가을향기 1,2연에서 가을 향기를 맡는다.  과수원의 사과 마른풀과 장미 등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4연에 이르러서는 생명의 소멸이라든가, 인간의 이별에 대해 좀더 높은 질서를 부여한다.  죽어 없어져도 거기에는 '풍성한 향기'가 남으며 상하였지만 아름답다는 것,  그리하여 '높고 깊은 하늘'이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쯤이면 앞에 둔 황동규의 시도 그저 단순한 서정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몇 마디 시어에도 이처럼 인식적 기능과 미적 기능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     “제발 개구리처럼 앉지 마시고 여왕처럼 앉으세요” ―데니즈 두허멜(1961∼ ) ―필리핀 어느 대학의 여자 화장실 벽에 쓰인 낙서 제멋에 살기를 잊지 말라, 멋 부리기를 잊지 말라. 세상은 여드름투성이 소녀에게 보상하지 않는다.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아라. 머리채에 광채를 내는 샴푸를 사라. 머릿결이 직모라면 파마를 해라. 제멋에 살기를 잊지 말라, 멋 부리기를 잊지 말라. 숨결은 박하 향이 나도록 하고 이는 희고 깨끗이. 손톱은 매니큐어 발라서 반짝이는 진주 열 개로.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아라. 웃음 지어라. 특히 기분이 더러울 때. 차를 운전하면서 급회전할 때에는 머리를 숙여라. 제멋에 살기를 잊지 말라, 멋 부리기를 잊지 말라. 욕망에 자신을 내맡기지 말고 날씬한 몸매를 유지해야 사교춤 출 때 치맛자락을 추켜올릴 수 있지.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아라. 교수와 혼인하지 말고 학장하고 해라. 왕하고 혼인하지 백작하고는 하지 마라. 제멋에 살기를 잊지 말라, 멋 부리기를 잊지 말라.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아라. ‘주한 미국대사관 공보과’에서 한국어판으로 발행한 ‘2006 미국 올해의 가장 좋은 시’에서 옮겼다. 이 시선집의 편집자로 시를 선정한 빌리 콜린스(시인)가 쓴 서문 제목이 ‘시의 건초더미에서 찾은 75편의 바늘’이다. 해마다 거듭 탈락된 ‘건초더미’ 시인들의 불쾌감을 언급하며 그는 ‘제목은 기껏해야 마케팅 전략일 뿐’이라고, ‘그럭저럭 읽을 만한 시’라는 시집에 독자의 손이 선뜻 가겠느냐고 눙친다.     여대생과 여왕처럼 변기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있을까. 새침한 여대생도 고고한 여왕님도 거기서 거기일 화장실에서 취할 자세가 떠오르면서 빙긋 웃게 되는 화장실 낙서. 그에 촉발된 요즘 젊은 여성의 살아가는 모습과 생각을 나열하며 언뜻 부추기는 모양새다. ‘멋 부리기’는 기본! 화장 안 해도 예쁜 나이라는 건 네 라이벌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다. 몸을 가꾸는 데 돈과 시간을 투자해라. 그렇게 해서 기껏 멋진 여인이 돼도 아무 남자나 만나면 ‘꽝’이니라! 최고의 남자를 만나라. 좌식변기에서는 여왕인들 개구리처럼 앉을 수밖에 없다는 걸 명심해라.  결혼을 신분 상승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젊은 여인에게 결혼시장에서 상품 가치를 높일 지침을 이리 내려주시는 이는 아마 신붓감의 어머니이리. 젊은 여인들이여, 이런 삶에 완전 공감인가요? 여하간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는 건 바람직한 자세.
66    시인이 시 한수를 빵으로 바꿀수 있을까?... 댓글:  조회:2505  추천:0  2016-12-26
아시아 시론· 타이완  시, 생활과 사색 /린후안장(林煥彰)  나의 시는 생활에서 나온다. 또한 사색에서 나온다. 시는 생활과 경험, 생각과 깨달음, 상상력과 동경의 결합체이다. 때문에 시는 무한한 존재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시는 자기를 찾는 방법이요 반성과 사색의 방법이다. 시는 관심이고 필요이다. 시는 즐거움인 동시에 고통이다. 시는 부드러우면서도 딱딱하다. 시는 고양이인 동시에 물고기이다. 시는 흑백이 분명하지만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시는 매일 함께 있으면서도 항상 그리운 존재이다. 시는 한마리 상처 입은 새이다. 그러나 이 새는 화살을 몸에 단 채로 계속 날아간다. 시는 흐르는 피를 멎게 하고 눈물을 멈추게 한다. 시는 영원히 아내가 될 수 없는 애인이다. 시가 애인이긴 하지만 반드시 미인인 것은 아니다. 시에는 애증이 교차한다. 시는 사랑스러우면서도 얄미운 존재이다. 시는 일종의 감각이다. 시는 가장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때로는 너무 긁어서 살갗이 벗겨지고 피나 나기도 하지만 그 아픔과 즐거움의 느낌을 계속 긁어대는 것이다. 시는 필요이다. 서정을 필요로 할 때도 있고 슬픔을 필요로 할 때도 있다. 원망과 울분, 비판과 반항, 격려를 필요로 할 때도 있다. 시는 의미를 지녀야 하지만 그 의미는 화려한 어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언어문자의 정확성과 그 언어가 지니는 신선한 감각에 있는 것이다. 때문에 시의 언어는 굳이 천박함과 저속함을 피하지 않아도 된다. 언어에는 음(音)과 의(意), 형(形)이라는 기본요소와 함께 전달의 기능이 있다. 시적 언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요소들의 극치를 발휘하여 최상의 효과를 거두는가 하는 것이다. 관념은 창작을 인도하고 그 방향을 결정한다. 사랑이라는 관념이 내가 쓰는 시를 인도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오늘날 산업사회의 인문사상은 이미 시든 꽃이 되어버렸고, 구시대의 인간과 사물들은 제도의 개혁과 새로운 상품에 대한 욕구로 인해 도태되어버렸다. 문화의 정화가 남든 사라지든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옛것을 없애고 새것으로 채우려는 추세가 지배적이다. 여기에는 일정한 기준도 없고 정해진 궤도도 없다. 우리는 신문지상에서 사회에 대단한 공헌을 했던 모 인사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물러나게 됐다거나, 오래된 성문이 철거되게 됐다거나 혹은 백년이 넘은 고목이 개발을 위해 베어진다는 등의 소식을 흔히 접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지만 결국은 이 모든 것들이 버려지는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리를 목적으로 살아가다 보니 우리에게 시는 더 이상 중요한 존재가 못된다. 모두들 시가 없어도 변함없이 밥을 굶지 않을 수 있고 오락을 즐길 수 있으며, 변함없이 잠을 자고 재신(財神)을 향해 향을 올릴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물론 시는 개인의 성정을 도야해주고 마음을 정화시켜주며 부패와 몰락을 면할 수 있게 해준다. 시인은 시를 통해 세인들의 심령이 지나치게 물화(物化)되고 이욕(利慾)에 침식당하는 것을 막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대중매체는 모두 상업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있고, 모든 성광형색(聲光形色)이 이 같은 문화에 점령당해 있다. 시는 너무도 무력하여 서재 한구석으로 밀려나 서가에 꽂힌 채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고 있을 뿐이다!  현대 세계에서 시가 담당하는 역할이 정객이 내뱉는 한마디 공허한 구호보다도 못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시는 상인들이 내미는 수표 한 장만도 못하다! 정객은 그럴듯한 구호로 유권자들의 표를 얻어 그것을 민주의 보좌로 내보낸다. 또한 상인은 돈으로 사람들을 고용하여 노동이라는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시인이 시 한수를 빵으로 바꿀 수 있을까?  시인이 시 한수를 써서 통치자가 될 수 있을까?  시인이 시 한수를 써서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시인이 시 한수를 써서 여인의 꽃다운 마음을 살 수 있을까? …  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도 의아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지 비관적인 가설이 아니다. 소극적인 신음은 더더욱 아니다. 시인은 사물을 정확히 바라보아야 한다. 자기를 속일 필요도 없고 자신에 도취될 필요도 없다. 자아도취야말로 시인에게는 정말 무익한 짓이다.  그러나 사물을 분명히 인식한 후에, 시인은 관념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며, 적극적인 작위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작위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하여 스스로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무엇 때문에 시가 이렇게 변했는가?’  ‘시가 현대인을 거부하는 것인가, 아니면 현대인이 시를 거부하는 것인가?’  오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한 반성을 해볼 필요가 있다.  시는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 쓰는 것인가? 만일 후자가 맞는다면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  현대사회(혹은 세계)에서 시가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높이기 위해선, 시인들이 인간과 사회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억압당하고, 가난하고, 불구이며, 도움을 받지 못해 절망에 빠진… 사람들(다른 동물과 자연, 생태계까지 포함하여)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들을 위해 시를 쓰고, 그들을 대신해서 외치며, 그들에게 위로와 믿음을, 용기와 성원… 을 아끼지 말아야 할 때이다.  시가 담당해야 할 역할은 영원히 대중과 만물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대변자로 남는 것이다. 시가 확보해야 할 지위 또한 영원히 대중과 만물에게 없어서는 안될 어머니의 자리여야 한다.  /김태성 옮김 
65    술,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시, 머리에서 짜여져 나오는 시... 댓글:  조회:2621  추천:0  2016-12-26
고은"시인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 원로시인 고은씨가 "시인들 가운데 술꾼이없다"며 소시민으로 전락해가는 젊은 시인들에게 일갈(一喝)했다.  고 시인은 계간 「시평」에 게재한 '시의 벗들에게'라는 편지에서 "도잠, 이백, 두보는 중국문학의 근본에 술이 얼마나 깊이 관련되는가를 자랑한다.  시와 술이 혼연일체가 된 것이 그들 고대 서정의 광활한 세계였다"면서 "이제 시인들 가운데 술꾼이 현저하게 줄었다.  막말로 최근의 시가 가슴에서 터져나오지 않고 머리에서 짜여져 나오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그는 "술의 고전적 의미가 이렇게 모독당하는 것과 함께 시적 절실성이 자꾸 감소되는 것 같다"면서 "부디 시의 위기를 외부에서 찾지 말기 바란다. 첨단문명이나 영상문명, 산문의 폭력과 시장주의에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한다. 또한 인간으로부터시가 멀어져가고 있는 현실도 시 쪽의 책임이라는 내재적 인식이 필요하다"고 후배시인들에게 호소했다. 
64    대만 현대시의 흐름을 알아보다... 댓글:  조회:2834  추천:0  2016-12-26
대만 현대시의 흐름   티엔 위안田原_한성례 옮김     1. 대만의 현대시 하면 대학시절에 처음 읽었던『대만현대시선』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간체자판으로 중국에서 출판된 시 선집이었다. 대만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대립과 적대 정책이 오랫동안 이어진 탓에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내세우기 전까지 대만의 현대시인과 작가들의 작품은 중국에서 출판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래서인지 대만 현대시를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신선함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같은 중국인이고 같은 중국어로 시를 쓰는데 왜 이리도 대만 시와 중국 시는 다를까. 번체자와 간체자의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내용은 전혀 달라서 몹시 놀라웠다. 이때가 내가 대학에 들어가 막 시를 쓰기 시작한 1980년대 초였다. 얼마 후에 중국 시인의 현대시와 대만의 현대시가 왜 다른지 알게 되었다. 그건 중국과 대만은 체제도 다르고 시를 창작하는 인문적·정치적 환경이 상이했기 때문이었다. 대만 현대시인의 작품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점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만의 현대시는 중국과 달리 건전한 문화 환경과 언론의 자유로 인해 일찍부터 유럽 현대시를 음미할 수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처럼 대만 현대시는 유럽 현대시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한시와 같은 중국의 전통적 고전문학을 중시하고 계승하는 노력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른바 동서고금을 융합하여 그들 나름의 시혼詩魂을 형성한 것이다. 이 점이 대만 현대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렇긴 하지만 대만의 현대시를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대만 현대시의 탄생은 일반적으로 1920년대부터라고 파악한다. 따라서 대만에서 현대시라고 하면 1920년부터 1945년까지의 작품을 가리킨다. 1895년부터 1945년까지 대만은 반세기 동안 일본의 식민지 시대와 장제스蔣介石 정권의 친미노선 시기를 거쳤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통해 대만의 시인을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일본의 식민지 시대 일본어 교육을 받은 시인들’이며, 이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을 당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장제스와 함께 중국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이른바 ‘외성인 시인’이다. 이 외성인 시인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뉜다. ‘대만에 오기 전부터 이미 중국에서 시를 쓴 경험이 있는 시인’과 ‘대만에 건너온 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이다. 그리고 ‘본성인 시인’이 존재한다. 본성인이란 중국에서 온 외래자가 아니라 대만에서 태어나 자란 시인을 말한다. 일본 식민지 시대부터 시를 써온 대만 국적의 본성인 시인으로는 초기에 활동한 라이허頼和, 양서우위楊守愚, 양화楊華 등이 있다. 그 후에 등장한 이가 왕바이옌王白淵, 린시우얼林修二, 천챤우陳千武, 잔빙詹氷 등이다. 그밖에 린우푸林巫福, 바이디白萩, 황허성黄荷生, 린헝타이林亨泰, 양무楊牧도 본성인 시인에 속한다. 이 시인들이 식민지 시대에는 어떤 언어로 시를 썼을까. 첫 번째는 백화문이다. 백화문은 그때까지 사용해온 고문을 뒤엎고 탄생한 새로운 중국어다. 이들은 분명 1920년대를 전후해서 베이징北京에서 시작된 백화문 운동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 두 번째는 대만어인데, 대만 원주민의 방언을 사용하여 시를 썼다. 세 번째는 식민지 지배자의 언어인 일본어이다. 이 무렵 대만의 현대시는 비판적 리얼리즘과 전위 모더니즘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와 동시에 반제국주의적인 식민지 통치와 반봉건적 사상, 대만의 풍토와 인정人情을 주제로 한 작품도 많다. 식민지 지배자의 언어뿐 아니라 일본 현대시의 새로운 관념과 표현법 등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이 시대와 관련하여 동인 시문학지〈풍차Le Moulin〉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1933년 10월부터 1934년 9월까지 발간된 이 동인지의 멤버 중 일부는 일본인이었다. 당시의 대만 현대시에서 이들 일본인 시인들은 일본과 대만의 시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자연스럽게 일본의 현대시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일본의 패전으로 식민지 시대가 끝난 1945년부터 장제스 정권이 대만에 들어온 1949년까지 대만의 현대시는 고적한 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는 그동안 사용해온 일본어와 대만어를 국어인 ‘중국어’로 교체하는 언어의 과도기 탓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대만의 현대시는 195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50년대 대만의 시단은 중국에서 건너온 시인들이 주도했다. 이 무렵 대만 현대시는 중국과의 정치적 대립에 따른 반공산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띠는 정치적 서정시가 등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시인들이 순수시와 비슷한 모더니즘 작품을 중심으로 창작했다. 이 무렵 활약한 대표 시인은 지샨紀弦, 종딩원鐘鼎文, 위광종余光中, 러우푸洛夫, 야샨瘂弦, 저우멍뎨周夢蝶, 정처우위鄭愁予 등이 있다. 특히 지샨이 1953년 2월 1일 창간한 동인 시문학지〈현대시〉는 이후 대만의 모더니즘 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대만 시인의 3분의 2에 달하는 103명이 ‘현대파’ 멤버였을 정도로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후 1953년 6월 친찌하오覃子豪, 종딩원, 위광종 등이 동인 시문학지〈남성藍星〉을 창간한다. 1954년에는 국민당의 건국기념일(10월 10일)에 맞춰 러우푸, 야샨을 중심으로 동인 시문학지〈창세기〉를 창간한다. 특히〈창세기〉는 대만 현대시단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초기에 보여준 ‘신민족 시형新民族詩型’에서 전환한 후기의 ‘초현실주의’라는 창작 기법은 당시 시단의 다른 그룹과 존재를 구분 지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지금도 대만의 뛰어난 시인을 거론할 때면 이〈창세기〉에 소속된 시인들이 많다.     2.  일반적으로 전후 대만 현대시의 발자취는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a. 1940년대 후반~1950년대 초반 :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끝난 후부터 장제스 정권의 초기까지로, 대만 현대시가 잠시 부활했다가 정치적 속박과 제압으로 침묵한 시기 b. 1950년대 초기~1960년대 중반 : 모더니즘 시운동이 활약했던 시기 c. 1960년대 중반~1970년대 : 현대시의 리얼리즘 사조가 활발해지고 모더니즘 시에 대한 제고와 조정이 이뤄진 시기 d. 1980년대 이후 : 낭만주의, 사실주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등 서로 다른 다양한 예술 경향이 다원적으로 불어난 시기.     사실 처음 대만의 현대시를 접했을 때 나는 이런 구분법을 알지 못했다. 시인이 어디 출신인지, 그들이 개인적으로 어떤 삶의 태도를 지향하고 있는지 등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내 관심은 그들의 시가 얼마나 내 마음을 파고들지, 나를 계발시킬 힘은 있는지, 혹은 공부가 될 만한 수준인지에 있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에서 현대시가 발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 대만의 현대시는 내가 일본에 오기 전에 읽었던 그 상황과 그 시대에 머물러 있지 않다. 내가 일본에 유학 온 후, 특히 최근 몇 년간 대만 시인의 작품을 보면 상당히 다원적으로 발전해 왔음을 파악할 수 있다. 유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주로 신문 잡지 등 종이 매체에 실리던 시를 인터넷 세계의 확장에 따라 인터넷과 자신의 블로그 등에 활발하게 발표하여 종이 매체의 시와 인터넷 시가 공존하는 시대가 되었다. ‘인터넷 시’는 그 질감의 옥석 수준을 가리기 힘들다는 점을 제외하면 어느 면에서는 현대시가 퍼져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에 태어난 대만의 시인들에게 외성인과 본성인이라는 정체성의 경계는 사라졌다. 중국에서 건너온 부모에게서 태어난 시인도 마찬가지다. 일부 외성인 시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던 지워지지 않는 향수 콤플렉스는 대만에서 태어나 자란 시인들의 작품에서는 사라지고 없다. 대만 출생의 시인에게는 고향이나 머나먼 방랑, 그리움에 대한 표현보다는 자신의 정신적 고향 또는 진정한 뮤즈를 갈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책무인지도 모른다. 1950년대〈현대시〉라는 시문학지의 창간은 혈기 넘치는 현대시의 한 시기를 이끌었다. 1950년대 말〈창세기〉는 개정판을 내고 ‘세계성과 초현실성, 오리지널과 순수성’을 제창하며 초현실주의시라는 현대시 붐을 일으켰다. 아울러 대만의 현대시사에 두 가지 논쟁도 발자취를 남겼다. 하나는 1957년에 일어난 논쟁으로, ‘횡적 이식移植’을 추진하고 ‘종적 계승’을 반대하는 지샨의 주장에〈남성〉의 멤버가 극렬히 반발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1959년부터 1960년까지의 작가 쑤쉐린蘇雪林과 친찌하오가 벌인 ‘전통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3. 1960년에 들어서면 다시 여러 시문학지가 창간된다. 그 중〈포도원葡萄園〉이라는 동인지가 1962년 7월에 시인 원샤오춘文曉村, 천민화陳敏華, 구딩古丁 등에 의해 탄생한다. 그 뒤를 이어 일본의 식민지 시대 리얼리즘 정신의 연장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동인지〈립笠〉도 1964년에 시인 천챤우, 두궈칭杜国清, 리퀘이샨李魁賢등에 의해 세상에 나온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수많은 현대시집이 출판되었다. 이 무렵 맹활약한 시인과 화제가 된 시집은 야샨의『심연深淵』, 러우푸의『석실지사망石室之死亡』, 상친商禽의『꿈 또는 여명』, 저우멍뎨의『환혼초還魂草』, 러우먼羅門의『아흐레의 저류底流』, 위광종의『고타악敲打楽』등 무수히 많다. 1970년대에 접어들자 향토 상상鄕土想像과 본토 의식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쟝순蒋勲, 샹양向陽, 두예渡也, 리민용李敏勇 등이 대표적 시인이다. 시 평론가 샹양은 1970년대 대만 현대시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전통을 바꾸고 민족적 시풍을 재건했다. 2. 사회로 환원하고 현실생활을 배려했다 3. 대지를 수용하고 본토 의식을 수긍했다. 4. 세속을 중시하여 대중의 마음속 목소리를 반영했다. 5. 자유를 존중하여 다원적 사상을 격려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대표적 시인은 샹양, 뤄지청羅智成, 천커화陳克華, 양무, 천리陳黎등이 있다. 1980년대부터 나는 대만의 몇몇 시인과 함께 해외에서 열리는 국제 현대시 축제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들의 시를 접하고서 작풍의 다원성과 언어의 불확실성이 점점 선명해져간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가장 인상에 남는 시인은 정신과 의사인 징샹하이鯨向海와 안과 전문의 양커화楊克華다. 그밖에 쟌정전簡政珍, 링위零雨, 천리, 샤위夏宇, 러우칭羅青, 린야요더林耀徳, 양쟈샨楊佳嫺, 양쩌楊澤 등이 있다. 실험성 강한 시를 비롯하여 영상과 시를 융합하여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 낸 작품들을 처음 접하고서 굉장히 신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만 한정된 시론이 아니고 현대시의 사명이란 무엇보다도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로움과 신비감을 지닌 언어를 창조해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릇 현대시라는 장르는 시간과 공간, 시공을 꿰뚫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정치 운동으로 얼룩진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시대, 특히 잔혹했던 10년간의 문화대혁명 시대는 중국에 있어 진정한 현대시의 공백기였다. 그 시기에 대만의 현대시가 건강하게 발전하고 존재했다는 것은 중국어로 쓰인 현대시에 있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2014년 10월 11일 이나게稲毛해안에서         티엔 위안田原 1965년 중국 허난성河南省 출생. 시인, 번역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허난河南대학교 재학 중에 첫 중국어시집 출간. 대학 졸업 후 1991년에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2003년 리쓰메이칸立命館 대학 대학원에서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郞론’으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 다니카와 슌타로의 작품에서 감명을 받아『다니카와 슌타로 시선집』4권을 중국어로 편역하여 중국에서 일본 시가와 다니카와 슌타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중국어와 일본어로 시 창작을 계속하는 한편으로 일본 현대시인의 작품을 중국어로 다수 번역하였고, 동시에 일본과 중국 시인들의 본격적이고 폭넓은 문학교류에 앞장서 왔다. 중국어 번역서『다니카와 슌타로 시선집』, 편저『다니카와 슌타로 시선집』1~3권, 박사논문집 『다니카와 슌타로 론』등이 있다. 그 외에도 다무라 류이치田村隆一, 쓰지이 다카시辻井喬 등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시인의 작품을 다수 중국에 번역 소개했다. 리쓰메이칸 대학 대학원생이던 2001년 제1회 유학생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일본어로 시 창작을 시작했으며, 2004년에 첫 일본어시집『그리하여 낭떠러지가 탄생했다』를 출간했고, 2009년에는 중국 스촨四川대지진의 슬픔 등을 쓴 제2시집『돌의 기억』을 출간하여 이 시집으로 2010년도 제60회 ‘H씨 상’을 수상했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이 상을 외국인이 수상하여 크게 화제를 모았다. 2011년에는『티엔 위안 시집』이 시초샤思潮社의 ‘겐다이시분코現代詩文庫’시리즈 205권 째로서 출간되었는데 이 또한 외국인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그 외에도 2005년에 번역한『다니카와 슌타로 시집』으로 중국 북경에서 제2회 ‘21세기 딩준鼎鈞문학상’과 2011년에 여러 권의 중국어시집 번역서로서 제3회 ‘종쿤中坤시가상’을 수상했으며, 중국어, 영어 시집으로 중국, 미국, 대만 등에서 여러 시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 일본 도쿄의 조사이城西대학 중문과 교수.       한성례 (번역) 1986년 〈시와 의식〉 등단 한국어 시집 『실험실의 미인』 외 일본어 시집 『감색치마폭의 하늘은』 외 현 세종사이버대 겸임교수  
63    대만 녀성시인 - 수샤오리엔 댓글:  조회:2567  추천:0  2016-12-26
일곱 자의 천 /수샤오리엔(타이완)  어머니는 천 일곱 자만 사가지고 돌아오셨다. 나는 몹시 화가  났다. 왜 내가 직접 사러가지 않았을까. 내가 말했다. "엄마 일곱  자로는 부족해요, 여덟 자는 있어야 만들 수 있어요." 어머님이 말  씀하셨다. "전에 만들 때는 일곱 자로도 충분했는데, 네가 그렇게  컸단 말이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만 스스로 왜  소해져가셨다.  어머니는 옛 치수대로 천 위에 나를 하나 그리셨다. 그런 다음  가위로 천천히 오려나가셨다. 나는 천천히 울었다. 아! 나를 오려  나가셨다. 나를 오리신 다음, 다시 침선으로 나를 꿰매셨다. 그러  곤 나를 기워...사람이 되게 하셨다.  *김태성 옮김  ㅡ계간(2003. 겨울) 아시아 교과서 명시 중에서  ----------------------------------  타이완에서 산문시에 관해 언급하자면 수샤오리엔이란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산문시는 비교적 늦게 등장한 시가 유형으로 글쓰기의 체제가 산문과 현대시를 넘나들기 때문에 '기술적인 위치 설정'에 있어서 항상 질의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와 관련하여 말이 막힐 때마다 산문시 시인들은 수샤오리엔의 산문시를 들어 상대방에게 시가의 체제와 시정신의 본질을 이해시키곤 했다. 이런 평가를 반증하듯 그녀의 시 은 타이완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최초의 산문시로 기록되었다.  이 시에서 '어머니'는 일종의 전통을 대표하는 개념으로서 현실의 윤리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나'로 하여금 일곱 자의 천의 범위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지 않기를 희망한다. 결국에는 '나'를 오려 사람이 되게 하긴 했지만 사실 이는 현실 속에서 이미 성장해버린 '내'가 아니라 여전히 어머니의 마음속에 자라고 있는 아이인 것이다.  150자도 채 안 되는 시문에서 독자들이 가장 먼저 해독해야 할 것은 '나'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삶에 대한 희망과 어머니의 따스함과 강경한 보호 사이에서의 선택으로서, 이는 부모 곁을 떠나려는 욕망과 계속 남고자 하는 미련 사이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크고 강한 모성애의 제약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어머니가 "옛 치수대로 천 위에 나를 하나 그리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런 다음 어머니가 고집스럽게 "가위로 천천히 오린" 다음 "침선으로 꿰매는" 것을 참아내야 한다. 마침내 어머니가 옷을 만드신 후에는 여전히 천이 모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그러곤 나를 기워...사람이 되게 하신 것"은 쌍방이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종의 어색함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강렬한 정서의 전환을 이처럼 짧은 편폭에 담아내는 것이 수샤오리엔의 필력이 갖는 오묘함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허구적' 정감의 변화를 '실제적' 동작묘사와 결합시켜 산문시가 갖는 산문적 서술특성을 이용하면서 그 안에서 시적 이미지의 도약을 주입함으로써 마치 높은 산봉우리를 빙빙 돌아서 올라가듯이 긴장으로 충만하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시의 새로운 경지를 빚어내는 것이다. ㅡ'옌아이린'의 시평 중에서 요약함.  서구의 문예사조에 편승한 우리의 현대시는 그동안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 타이완 등 아시아의 현대시에는 무관심했거나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 빚어진 서구화의 부정적 반영이기도 할 것이다. 시와 다소 장황하고 지루한 시의 평문을 소개하는 것은 그들의 정서와 (시의 밑그림이 되는) 시인의 원체험이 우리의 그것들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수샤오리엔 : 타이완 여성 시인. 중국시보(中國時報) 문학상 시 부문, 연합보(聯合報) 시 부문 당선. 주요시집으로 , , , , 등이 있다.  *옌아이린 : 타이완 여성 시인. 주요시집으로 , 등이 있다.  ------------------------------------------------------------------------------ 
62    리백 음주시 관련하여 댓글:  조회:2540  추천:0  2016-12-25
  이백의 음주시 연구   려원                             초 록      세인들이 다 알다시피,당시(唐诗)는 중국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이백의 시작품들은 당시에서 한마디로 평판할 수 없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걸작들은 현재 약900여수가 유전되고 있다. 이런 시 들은 이백의 평생의 포부와 미학사상을 표현하였으며 성당시기 사회 현실 과 정신 생활을 예술적으로 집중화하고 있다.    “성당지음”의 걸출한 대표로 되어 있는 그의 시작품들은 독특한 낭만 적 풍격으로 하여 천고절창이 되었고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다.그는 초당이래 시가 혁신의 역사적인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였는데 중국 고전시가의 혁신과 중국고전문학의 발전에 크게 탁월한 공헌을 하였다.    이백의 시창작 풍격을 연구하는 것은 당조시기 시가의 기본면모를 이해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뿐만 아니라 중국고대 시가들을 한걸음 더 이해할 수 있고 미래 시가의 발전을 위한 방향을 가일층 모색할 수 있다. 이백의 시가들은 이미지가 아주 많은데 본고는 이백의 음주시 중의 낭만주의와 호방표일한 풍격을 재조명하려 한다. 키워드: 이백 시풍격 음주시 호방표일 낭만주의   차 례 논문초록…………………………………………………………………………1~2 제1장  서론……………………………………………………………………4~5 제2장  본론……………………………………………………………………6~10 2.1이백의 생애…………………………………………………………………6~8 2.2대표적인 음주시의 분석…………………………………………………8~10 2.2.1 장진주(将进酒)의 분석 2.2.2 월하독조(月下独钓)의 분석 제3장 결론………………………………………………………………… 12~13 감사의 말………………………………………………………………………14 참고문헌………………………………………………………………………15                                        제1장 서 론       본 고는 이백의 생애와 그를 대표하는 음주시를 둘러싸고 이백의 창작 사상과 그의 문학관에 대해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백은 중국 시가사에서 대표적 시인이다. 흔히 당시를 중국 문학의 꽃으로 비유하는데 이백이야말로 당시 가운데 꽃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이다. 또한 이백의 시는 다른 시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월등한 위치에 있으며 현전하는 이백의 시는 약 천 수에 달한다. 이백의 시는 당시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백은 천재시인이라 불린다. 그는 시를 지을 때 퇴고 없이 일필 휘지로 써 내려간다. 이백은 호방하며 자유로운 분위기의 시를 썼으며 자연과 인생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누구나 이백하면 음주 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백의 시가들 중에서 많은 것이 정치서경시이다, 이것들은 시인의 비범 한 포부,분방한 격정, 호쾌한 기개를 충분히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당 (盛唐)시가 앙양되고 분발한 전형적인 음조를 집중으로 대표하였다. 이백 의 시가 제재는 아주 다양한데 7언절구,5언절구와 고체시등 있다. 이백은 술의 친구이어서 음주시는 대표적이고 유명하다.     이백은 성당문화 속에서 배출된 천재적 시인이어서 성당시가의 기(气)와 정이 이백의 시가들에서 남김없이 표현되고 있다. 그의 시가창작은 열정 으로 넘치고 있으며 기특한 상상의 세계를 펼쳐보이고 있다. 장쾌한 경치 도 있고 자연스러럽고 명쾌한 경지도 있어서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래서 이백의 매력은 바로 성당의 매력이라는 말이 있다.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이백의 강렬한 감정의 분출에 의해 과장된 비유,풍부한 상상 등 낭만주의 표현 기법과 신화전설을 능란하게 운용해서 호방한 기개, 앙양된 정조, 기특한 형상과 비범한 경지를 개척하고 있어서 강렬한 예술감화력을 발산한다. 게다가 생생하고 명랑하고 우미하고 청신 한 언어를 구사하였기에 아름답고 눈부시여 이목을 끌며 천고에 길이 이름 을 남기게 되었다.    본 고에서는 이백의 많은 작품중에서 음주시를 위주로 고찰하고 있다. 이백의 시의 제재는 어느 누구보다도 다양하지만, 그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백은 직감적으로 술고래를 떠올리 게 된다. 그것은 이백은 시선인 동시에 주선이라는 두 이미지가 결부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부는 이백을 평하여 ‘술 한 말에 시 백 편(李白斗酒詩百篇)이라 하였다. 이렇듯 이백과 술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이백시에서 음주시가 차지하는 영역은 초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본 고에서는 이백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이백의 음주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2. 본 론   2.1 이백의 생애   술과 달의 시인 이백은 중국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이며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로 당대 가장 뛰어난 시인이자 중국 문학사상 굴원 을 잇는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위대한 시인으로 ‘시선(詩仙)’ 이라고 불린다.(이백은 시선, 두보는 시성, 왕유는 시불이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태백성을 보고 출산했기 때문에 자를 태백이라 했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조상이 농서 성기(현재 감숙성 천수현 부근)사람, 조상이 수나라 말엽에 서역으로 흘러들어감, 이백은 중앙아시아 쇄엽에서 출생,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면주(지금의 사천 면양지방)에 거주하여서, 어릴 때부터 촉나라에서 수학,유람함. 25세 때에 혼자 몸으로 촉나라를 나와서 임협방도(의협을 신뢰하고 도리를 찾는것)와 교유간알(신분이 높은 사람과 사귀는 것)을 통해 벼슬의 고위직에 올라,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 들을 평안하게 하는" 큰 뜻을 실현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동정, 금릉, 양주 등지를 유람했으며 수년후, 전 재상이었던 허어사 의 손녀와 결혼을 하여 안륙(지금의 호북 안륙)에 머물러 살았으며,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양양,낙양,태원 등지를 유람했다. 후에 또한 공소   부등 "죽계육일"이라는 칭호를 가진 사람과 함께 동노에서 은거하였다.    천보 초기에 오균이라는 도사의 추천으로 임금의 부름에 장안으로 들어가, 한림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귀족들로 여러 차례 비방을 받아, 천보 34년 관직을 버리고 장안을 떠나와 개봉을 중심으로 제, 노, 회, 사, 강동사이 북으로는 유연 일대까지 왕래하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이백은 노산에 은거하였으며 계속해서 국가와 백성의 운명을 면밀히 주시하였고 후에 영왕 인의 막부에 참가하게 되었다. 숙종 지덕 2년 영왕 인은 패배하고 이백은 연루되어 욕양에서 옥살이를 하게되고 이듬해 야랑으로 유배가는 도중에 사면을 받고 무창, 욕양, 의성 각지를 전전했다. 대종 보응 원년에 친척 아저씨인 당도(지금의 안휘성 당도현)현령인 이양빙의 집에서 병사했다.     그는 불운을 겪었고 복잡한 사상을 가진 천재적인 시인이며 또한 자객, 은사, 도인 등과 같은 기질을 지니기도 했다. 유가, 도가 그리고 협객 등 세 가지 사상을 몸소 실천했는데, ‘공성신퇴 (功成身退:공을 세운 후 물러 나자)’ 는 그의 일생을 지배한 주도적 사상이었다.     불우한 생애를 보내었으나 이백은 그의 천거로  43세 때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장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이백은 너무 기뻐 ‘남릉에서 애들과 이별하고 서울로 가노라 [남릉 별아 동입경]’라는 시에서 양천대소하면서 문을 차고 나가노라. 이 장부가 아무 렴 촌에 묻혀 살소냐? 라고 호기롭게 읊었다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 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장안을 떠났다. 현종 의 마음에 들어 호탕하고 방탕한 생활을 3년간 지속하며 당시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신을 벗기도록 하였으며, 현종의 애첩 양귀비 (楊貴妃)에게 벼루를 들고 서있게 했던 기인이다.      장안에서 보낸 3년의 정치 생활은 이백의 창작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정치적 이상과 암울한 현실은 첨예한 갈등을 보였으며, 가슴 속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과 불만이 쌓였다. 분노는 훌륭한 시를 낳았고, 그래서 , 등의 시에는 옛 선인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으 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훌륭한 명작들을 써나갔다.    이백은 후세 사람들에게 9백여 편의 시를 남겼다. 이렇게 빛나는 작품 들은 그 일생의 마음 역정을 표현한 것으로, 성당(盛唐)시기 사회의 현실과 정신생활 모습의 예술적인 묘사이다. 이백은 일생동안 원대한 포부를 품고 한치의 속임도 없이 업적을 쌓으려는 바램을 표현했다. 어려서부터 협객 을 좋아해서 그에 대한 많은 시를 썼는데, 이 그중 대표작이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 (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 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 (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 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 (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 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2.2 대표적인 음주시    이백이 술을 좋아하였다는 사실은 그를 주선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에서 충분이 증명된다. 그의 벗 두보가 “이백은 술 한 되에 시를 백 편이나 쓴다”고 읊은 사실과 이백 자신이 “백년은 삼만 육천일, 하루에 삼백 잔의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사실에서도 음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음주는 삶의 충족을 위해 마신 것만은 아니였다. 영원한 것으로의 지향, 유한한 인생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마셨다. 이백은 술을 마시 면 마음이 쾌활하고 호방해졌다. 취중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고 도취 속에서도 각성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술에 대한 시를 볼 때 잠꼬대 같은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것은 결국 그 표현 속에 엄연한 객관화 정신이 있었으며 동시에 정확한 작시 기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2.2.1 “장진주(将进酒)” 君不見黃河之水天上來 그대 보지 않았는가 황하수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奔流到海不復回               기운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君不見高堂明鏡悲白髮 그대 보지 않았는가 고당의 밝은 거울에 비친              백발의 슬픔을 朝如靑絲暮成雪 아침에 푸른 실 같은 머리 저녁에는 눈같이 되었다 人生得意須盡歡 인생이 뜻을 얻었을 때엔 모름지기 환락을 다해야 하며 莫使金樽空對月 황금 술단지 공연히 달빛 아래 버려두지 말아라 天生我材必有用 하늘이 나에게 재능을 주었으니 반드시 쓸데 있을 것이다. 千金散盡還復來 천금 다 써버려도 다시 손에 돌아올 날 있으리 烹羔宰牛且爲樂 양고기를 삶고 쇠고기를 저며서 술 잔치를 즐겨보자 會須一飮三百杯 모름지기 술은 한 번에 3백잔은 마셔야지 岑夫子         잠부자여 丹邱生         당구생이여 進酒君莫停        지금 곧 술을 권하여 하니 잔을 멈추지 말아요 與君歌一曲        그대 위해 한 곡조 시를 읊으리니 請君謂我傾耳聽 청컨대 그대는 나를 위해 귀 기울여주오 鏡鼓饌玉不足貴 아름다운 음악 맛 좋은 음식은 귀한 것이 못된다 但願長醉不用醒 다만 소원은 오래 취하여 깨지 말기를 古來聖賢皆寂寞 옛 성현들은 죽으면 그뿐 잊혀지지만 惟有飮者留其名 술 잘 마시는 사람만이 그 이름을 남겼다 陳王昔時宴平樂 옛날 진왕은 그의 평락관에서 주연을 베풀고 斗酒十千愁換謔 두주를 만금에 사서 마음껏 즐기고 노닥거렸다. 主人何爲言少錢 집주인인 내가 어찌 돈이 적다 말하겠는가 徑須沽取對君酌 모름지기 술을 사서 그대에게 권하겠노라 五花馬                 다섯가지 꽃 무늬의 말 千金衣                 천금의 모피 呼兒將出換美酒 아이 불러 끌어내어 맛 좋은 술과 바꾸어 與爾同銷萬古愁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우수를 쫓아 버리자       이 시에는 인생의 무상함을 개탄하고 술을 마셔야만 우수를 잊을 수 있다는 이백 특유의 술철학이 담겨있다. 황하가 분류하는 것 같은 웅대한 시, 자유분방, 종횡무진으로 구사한 화려한 시구에는 억제하기 어려운 인생의 비애가 넘쳐 흐른다.     이 시와 비교하여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내용상 이질적인 면이 보이고 있 는데 예하여“조여청실막성설(朝如靑絲暮成雪)”에서‘아침에 푸른 실같은 머리 저녁에는 눈같이 되었다’라고 표현하고 《對酒》에서는 어제의 홍안 소년 오늘은 백발(昨日 失顔子 今日白髮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내용 상에 있어서도 대조를 보이고 있는 곳이 있는데 (莫使金樽空對月) 황금 술단지 공연히 달빛 아래 버려두지 말아라 하고 《把酒問月》에서는 바라 는 것은 노래 부르고 술 마실때 달빛이여 깊이 비쳐다오 금술독 속 (唯願當歌對酒時 月光長照金樽裏 ) 까지 라고 표현하고 있다.       달과 술은 서로 이질적인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한 데 묶어서 다루어 보려는 의도는 그만큼 이백의 시의 특수성 때문이다. 한 편의 시 속에서 그는 달과 술을 동시에 소재로 활용하는 경우가 다른 시인에 비하여 많을 뿐만 아니라 이 계열의 시가 유명하다. 이백의 시에는 달과 술이 동시에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시 제목에서도 이러한 현상 이 나타나고 있는데 月下獨酌등이 바로 그런한 예이다.   2.2.2                   달 아래에서 혼자 마시다     花問一壺酒 꽃나무 사이에 놓인 한 단지 술은 獨酌無相親 서로 친한 벗도 없이 혼자 마신다 擧杯邀明月 술잔을 들고 밝은 달 맞으니 對影成三人 내 그림자까지 모두 셋이 되었다 月旣不解飮 달은 이미 술 마실 줄 모르고 影徒隨我身 그림자는 부질없이 내 하는 대로 따른다 塹伴月將影 얼마 동안 달과 그림자를 벗으로 行樂須及春 행락은 오로지 봄이 가기 전에 즐기는 것 我歌月徘徊 내가 노래하니 달은 바장이고 我舞影凌亂 내가 춤추니 그림자 어지럽게 흔들린다 醒時同交歡 술이 깨어서는 함께 즐기고 醉後各分散 취한 뒤에는 제각기 흩어진다 氷結無情遊 길이 무정한 놀이를 그들과 맺어서 相期邈雲漢 아득한 은하수에서 만나기를 기약한다.       밝은 달 아래 꽃나무 사이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달과 그림자를 벗 삼아 마음이 내키는 대로 술을 마시며 즐기는 심경을 독특한 기법으로 노 래하고 있다. 전부 4수로 되어있는 이 시들은 각각 착상이 다르다.    중국문화는 장르중에 시는 역사적으로 주총을 이루었고 특히 당대에 있어서는 최성기를 이루었다. 당대에서도 성당이 당시의 절정기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은 이백이다. 이백은 진보적인 낭만주의 시인이었다. 그는 진보적인 낭만주의를 굴원 이래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 그렇기 때문에 당조때 두보가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하나의 경향을 이루어 기봉을 이루었다면 이백은 진보적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하나의 경향을 이루었다.     이백은 반평생을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했는데 전국 수많은 명산과 대천을 다니며 조국의 자연을 찬미하는 많은 분량의 우수한 시들을 썼고, 시를 통해 자유를     사랑하고 해방을 갈망하는 심정을 표현했다. 이러한 작품 속에 기묘한 산천은 거스르고 머무르지 않으려는 그의 성격과 완벽 하게 맞아떨어졌다.     이백은 조국을 매우 사랑하고 백성을 보살폈으며 현실을 인식했던 위대한 시인이였으며, 전쟁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에게는 열정을 담아 보내는 노래를, 통치자들의 불쌍한 병사 들에 대한 무정한 채찍질을 담은 시들을 썼다. 이백은 또한 많은 악부시를 지어, 노동자들의 힘든 생활을 묘사하고 그들에 대한 관심과 동정을 표현 했다. 이백의 시는 ‘붓이 떨어져 비와 바람을 놀라게 하고 시가 되어 혼을 울리는’ 예술적 매력을 담고 있는데, 이것도 이백 시의 가장 뚜렷한 예술적 특징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풍부한 자아실현의 주관적 정서의 색채가 매우 강하고, 감정표현에 있어 위세당당하고 일사천리한 기세를 담고 있다.     시는 항상 상상, 과장, 비유, 의인 등의 기법을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신기하며 사람을 감동시키는 경지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이백의 낭만주의 시가 사람들에게 자유분방함과 신선같이 뛰어난 운치를 주는 원인이다.     이백의 시는 이전 낭만주의 창작의 성과를 이어받아 반역사상과 호방한 풍격으로 성당시대의 낙관적이고 진보적인 창조정신 및 봉건질서에 만족 하지 못한 잠재된 역량을 반영하며, 낭만주의 표현영역을 넓히고 기법을 풍부하게 하는 동시에 상당한 수준까지 낭만주의와 현실주의의 결합을 실현시켰다. 이런 한 성과로 인해 그의 시는 굴원 이후 낭만주의 시가의 새로운 절정이 되었다. 이백은 당대 시가의 혁신에 대해서 뛰어난 공헌을 했다. 그는 진자앙 시가의 혁신적인 주장을 계승하여 이론과 실천에서 시가혁신의 최후 성공을 거두었다.                                                       3. 결 론       이백의 위대한 시편들은 성당시대의 상승발전하는 기백을 반영하였다.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그는 극대한 용기로써 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항에 몰두하였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질책과 열려있는 밝은 정치를 하고자 이에 투쟁하였다. 이러한 완강한 투쟁정신과 자유해방의 열정에 대한 추구는 그의 시가에서 적극적인 낭만주의 정신의 핵심이었다.   ‘성당 (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 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짧은 일생에 천만고의 시름을 안고 있는 인생, 무엇으로 그 시름을 잊고 이 인생의 무상을 극복할수 있을가 술이 야말로 바로 그 시름을 녹여 없애는 것이며 선물이라는 대 전제하에 과연 이백다운 종횡무진의 낭만과 과장으로 호기로운 음주예찬을 펼쳐가는 작품이다. 취중인 만큼 과장도 호기도 백배로 부풀어 있는 가운데 또한 은근히 때를 얻지 못한 자신의 불우의 분한을 시종 그 밑바닥에 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자연과 인생은 하나의 사랑으로 귀의가 되어있다. 산천초목이며 일월신성이다. 그러한 중에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달과 꽃과 새와 바람과 구름은 그의 술자리에 동참하여 항상 이백과 함께 하였다. 이백에게 있어서 자연은 적극적 능동의지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시대에 있어서 이백의 음주시는 그저 단순한 작시하는 그러한 작품이라기 보다는 천인하일의 경지로 들어가는 입장에서 파악 될 수 있다고 보며 이러한 면에서 새로운 각도로 해석을 시도해 보아야 하며 이백의 음주시를 더욱 더 음미해보아야 한다.   감사의 말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선생님의 사심없는 지도를 받아 순리롭게 완성 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 문헌   1. 孫宗燮, 『李杜詩新評』, 정신세계사, 1996 2. 郭沫若, 『李百과 杜甫』, 까치, 1996 3. 張基槿, 『李太白評傳』, 乙西文化社, 1987 4. 金學主, 『中國文學史』, 新雅社, 1993 5. 丁範鎭, 『中國文學史』, 學硏社, 1993 6.《李白诗歌鉴赏集》,巴蜀书社 1998年2月 7. 《李白集》山西古籍出版社,2004年6月 8. 安旗:《李白全集编年注释(上、下)》巴蜀书社,2000年4月第1版 9. 王寅明著:《李白全传》长春出版社,2002年7月第一版 10. 霍松林、尚永亮:《李白诗歌鉴赏》,上海教育出版社,1989年 11.《李白诗》,人民文学出版社,2005年5月 12. 王步高:《唐诗鉴赏》,南京大学出版社,2006年7月 13.  박충룩저, 북경민족출판사, 2003년10월제1판 14. 이창룡, 『李百』, 건국대학교출판부, 1994  
61    로신과 겨레의 문인들 댓글:  조회:2660  추천:0  2016-12-25
    로신과 우리 겨레 관계연구    리함        1.     들어가기   현대중국의 위대한 문학가와 사상가, 혁명가로 불리우는 로신(원명 주수인, 1881―1936)은 절강성 소흥출신으로서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승리에 고무되여 그 시절의 리대소, 진독수 등 허다한 선진적인 지식분자들과 더불어 글을 쓰고 잡지를 꾸리면서 중국 신문화운동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로신은 문학에 투신한후, 1918년에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봉건을 반대한 첫 백화문(白话文)소설로 불리우는 “광인일기(狂人日记)”를 발표하면서 로신이란 필명을 처음으로 쓰게 되고 이어 “공을기”, “약”, “아Q정전” 등 허다한 소설과 잡문, 수필, 평론, 시들을 써내여 명실공히 중국 신문화운동의 선구자, 중국 현대문학의 선구자로 떠오른다.   이와 더불어 로신의 작품들은 이웃 조선과 일본 등 나라들에 전해져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인민들을 크게 고무한다. 이를 두고 조선의 저명한 작가 한설야는 지난 세기 50년대 중반에 한편의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중국의 위대한 사실주의작가이며 중국 신문학의 창시자인 로신의 이름이 우리들에게 친숙된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로신의 이름은 그가 잡지 《신청년》에 관계하고 그의 첫 단편인 “광인일기”를 비롯하여 불후의 로작 “아Q정전” 등이 발표되면서부터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졌다.[1]   조선작가 한설야의 이 한단락 말은 로신이란 이 이름이 20년대 그 시절 조선사람들에게 친숙히 알려져있음을 잘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로신을 중국의 대문호로 숭배하면서 그의 사상, 그의 작품을 따르는 문인들이 늘어가고 중국의 북경이나 상해, 광주 등지에서 로신을 직접 만나 가르침을 받거나 1936년 서거후 로신을 추모하고 따르는 문인들이 적지 않았다.   본문에서는 로신과 관련되는, 조선문인들의 사실과 글 이모저모를 력사적으로, 개략적으로 밝히면서 로신선생이 우리 겨레와도 관련되며 그의 문학이 조선(한국) 현대문학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치였음을 서술해보려 한다.   2.     로신의 작품을 접촉한 사람들   본문 서두에서와 같이 조선의 저명한 작가 한설야는 상기의 글에서 또 이렇게 말하고있다.   로신은 중국에서뿐만아니라 국제적으로 알려진 20세기의 탁월한 사실주의작가이다. 그의 이름은 이미 20년대 초기부터 조선인민에게 친숙되여왔다.   이는 로신의 이름이 지난 20세기 20년대 초기부터 조선에 알려졌음을 단적으로 증명하고있다. 살펴보면 중국 로신의 이름이 당시 조선에 알려지게 됨은 국내 번역을 통한 로신작품의 접촉, 중국내에서의 직접 접촉, 일본에서의 접촉 세갈래로 나타나고있다.   1)     조선(한국)국내를 통한 접촉   조선(한국)에서 로신을 제일 먼저 소개한 글은 량백화(梁白华, 1889-1944)가 1920년 《개벽》 제8호에 발표한 “호적씨를 중심으로 한 중국 문학혁명”으로 밝혀지고있다.   소설로 로신은 미래가 유망한 작가이다. 그의 “광인일기”와 같은것은 한 박해광의 공동적인 환각을 묘사하여 지금의 중국 소설가의 미도한 경지에 발을 들여놓았다.   로신의 “광인일기”가 1918년 4월에 씌여지고 그해 5월 “신청년”(제4권 제5호)에 발표되였다면 그로부터 2년 남짓한 뒤 로신에 대한 평가의 글이 발표되였다는 말이니 로신에 대한 량백화의 이같은 평가는 중국 현대문학에 대한 접촉이 매우 빨랐음을 알려주고있다. 그뒤 로신의 대표작 “아Q정전”이 또 량백화에 의해 23회에 걸쳐 《조선일보》(1930. 1. 4―2. 16)에 번역,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실 로신의 작품이 조선(한국)에 처음으로 번역, 발표된것은 1927년이다. 이해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 류수인의 번역으로 1927년 8월에 서울에서 발행되는 《동광》잡지에 로신의 소설 “광인일기”가 발표되였었다.   2). 중국내에서의 직접 접촉   로신작품의 중국내 접촉은 류수인[2]의 회억에서 그대로 잘 드러난다.   나와 많은 조선 청년들이 1920년초에 연길 도립제2중학에서 공부할 때 진보적교원을 통하여 《신청년》에 실린 “광인일기”를 읽었다. 처음에 우리들은 읽어도 뜻을 알수 없었다. 여러번 읽고 몇차례 의논한후에는 너무도 격동되여 거의 미칠 지경이였다. 로신선생은 중국의 미친 사람들을 썼을뿐만아니라 조선의 미친 사람도 썼다는것을 인식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로신선생은 우리들이 숭배하는 첫번째 중국사람으로 되였고 나의 마음속에는 로신선생을 만나뵈고싶은 생각이 생겼다.[3]   지난 세기 20년대를 헤아리면, 조선(한국)사람들에게 북간도로 불리운 연변땅에는 19세기 60년대 이후부터 살길을 찾아서 또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삶의 무대를, 투쟁무대를 중국으로 옮긴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었다. 류수인도 그런 조선이주민의 한사람으로 중국인중학교를 다닌데서 중문으로 된 로신의 작품을 직접 읽을수 있었다. 로신의 작품을 중문으로 읽은 사람이 류수인을 비롯한 많고많은 젊은이들임은 두말할것도 없다. 20―30년대 중국의 북경이나 상해, 남경, 광주 등지에서 공부하는 조선류학생들이 많았다는것을 념두에 둘 때, 광주 중산대학에만도 50여명에 달했다는것을 념두에 둘 때 더욱 그러하다.   3). 일본 국내에서의 접촉   20년대와 30년대 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일본으로 떠났다면 공부하기 위해 일본류학길에 오른 젊은이들도 많았다. 당시 일본은 로신의 “아Q정전”을 제일 먼저 번역, 출판한 나라여서 일본문으로 출판된 로신의 선집, 문집, 단행본들이 적지 않았다. “아Q정전”만 해도 15가지의 서로 다른 번역본이 있었다고 하니 일본에  류학한 조선류학생들이 로신의 작품을 얼마든지 접촉할수 있었다. 20―30년대는 아니지만 40년대에 일본에 류학한 한국류학생 리병주(李炳注,1921―1992)는 1941년 12월에 도꾜에서 로신의 작품을 접촉하였다면서 그의 《리병주 고백론》[4]에 이렇게 쓰고있다.   나는 신전의 서점에서 몇권의 책을 샀다. 그 가운데 낀것이 《로신선집》이란 문고본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여 나는 프랑스문학과 일단 결별하고 로신에 몰두하게 되였다. 고서점에서 《개조사》판의 대로신전집을 구할수 있었던것도 하나의 행이였다.   한국류학생 리병주의 글은 일본에서 로신의 작품을 접촉한 생동한 실례로 되고있으며 일본에서 로신열이 대단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3.     로신을 만난 우리 겨레   로신의 작품이 조선 독자들과의 만남을 중국, 조선, 일본 등 세갈래로 나누어 두루 살펴보았다. 그중 조선에서만도 일제치하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행한 “조선총독부 단행본 금지목록”에 로신의 “아Q정전”, 《현대소설집》, 《로신선집”》, 《로신문집》, “로신 유작” 등을 금지도서목록으로 기재하였다는것으로 보아 일제치하의 조선에서 로신의 작품이 얼마나 널리 읽히였는가를 헤아릴수가 있다.   조선사람들, 더우기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이런저런 관계로 중국에 온 젊은이들 가운데는 로신과 로신작품에 대한 관심이 독서와 숭배로부터 직접 찾아뵈려는 마음으로 번져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지금까지 알려지는데 의하면, 그중 6명의 지식인들이 끝끝내 로신선생과의 만남을 실천했고 일부는 만남을 이루지 못한 유감을 남기고 일부는 로신선생의 강의나 강연을 직접 듣기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로신과 로신작품에 대한 숭배와 관심이 그대로 잘 보여진다.   원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수였던 리정문(李政文)생은 한편의 글에서 중국측 우리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로신선생과 래왕하였던 조선벗들이 구경 얼마나 되는지 알수 없으나 필자는 리우관(李又观), 김구경(金九经), 류수인(柳树人), 리륙사(李陆史) 등 네분을 확실히 알고있다”[5]고 밝힌바 있다. 그후 중국인학자 양소전(杨昭全)도 “로신과 조선작가”[6]란 글에서 지금 알고있는 사료에 의하면 로신과 래왕한 조선벗들이 리우관, 김구경, 류수인, 리륙사 등 4명이라고 지적하였다.   하다면 리정문, 양소전 등은 로신을 만난 조선벗들이 4명이라는것을 어떻게 알았을가? 그들은 약속이나 하듯 그 근거를 로신의 일기에 두고있다. 《로신일기》(상, 인민문학출판사, 1976년)에 의하면 리우관, 김구경, 류수인과의 만남이 기재되여 있다.   1923년 3월 18일: 개임, 휴일 휴식. …오후에 리우관군이 왔다.   1928년 9월 1일: 개임, 오후…류수인이 왔다.   1929년 5월 31일: 개임, 오후 김구경…이 왔다.   관련자료를 보면 리우관(1897-1984)은 원명이 리정규(李丁奎)이다. 그는 1919년 일본에 가서 류학하던중 조선의 3.1운동소식을 접하고 중국에 와서 독립운동에 뛰여든 형님 리을규(李乙奎)을 찾다가 1921년에 중국에서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게 된다. 그의 “년보(年谱)”에는 리회영, 신채호, 북경사범대학 교수 로신 형제(주수인, 주작인, 주건인), 대만 혁명동지 범본량(范本梁) 등과 래왕하였다는것이 기록되여있다.[7]   류수인(원명 류기석, 1905-1980)은 그의 저서 《중국을 찾아온 조선의 옛사람들》(13)에 실린 저자 략력에 따르면, “1905년 1월 조선 황해도 출생, 부모를 따라 길림성 연길현으로 이주, 1926년 북경 조양대학 경제학과에 입학, 그후 중학교 교원, 교장 및 《천진상업보》, 《하남민보》, 《중한월간》 등의 편집, 주필을 담임. 또 하남대학 농학원, 강소교육학원, 남통학원 농업경제학부 교수 력임, 1952년부터 1980년까지 강소사범학원 력사학부 교수”라고 되여있다. 그는 대학시절에 리우관을 따라 무정부주의자련맹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에 뛰여든 사람인데 언제부터 로신의 원명인 “수인”을 자기의 호로 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김구경(1900-1950)은 1926년에 일본 교또에서 대학을 졸업, 귀국후 경성제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1928년에 중국으로 건너와 북경의 “미명사(未名社)”에 거주하였으며 북경대학에서 일본어와 조선어를 강의하였다. 그 시절 로신이 상해에 있었으나 연경대학과 북경대학의 초청으로 북경에 가서 강연하기도 하여 김구경을 알게 되고 수차의 만남을 가지게 되였다.   리륙사(원명 리원록, 1904-1944)는 조선(한국)의 이름난 애국시인으로서 일찍 20년대에 중국에 와서 북경대학 사회학부에 다니였고 귀국하였다가 1931년에 다시 중국으로 와서 독립운동에 뛰여들었다. 그후 1933년 6월에 적들에게 피살된 중국인권보장동맹 부주석 양행불(杨杏佛)의 상해장례식에 참가하였다가 송경령, 로신과 맞띄우게 되고 벗의 소개로 로신과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하게 된다. 그러나 로신은 기억하지 못하였는지 그날 6월 20일의 일기에 리륙사와의 만남을 기록하지 않았다. 로신의 일기에서 찾을수 없는것은 이 때문이라 하겠다.   여기까지 보면 로신을 만난 조선사람으로서 1923년 3월 18일의 리우관이 처음이였을가? 리우관의 자작 “년보”에 의하면 리우관이 로신을 만난것은 1923년이 아닌 1922년이다. 원인은 1922년에 쓴 로신의 일기가 전부 산실되여 고증할 방법이 없기때문이다. 다행한것은 로신의 동생의 《주작인일기》가 1996년에 대상(大象)출판사에 의해 출판된것인데, 주작인은 일기에서 로신과 자기가 만난 조선인 5명의 이름을 적고있다. 흥미로운것은 1922년 4월 14일에 조선인 오공초(吴空超)가 북경의 로신선생저택을 방문하여 로신을 만난것인데 주작인은 오공초가  로신을 방문한 첫 조선인이라고 일기에 적은것이다.   그해 1922년 5월 8일에는 오공초가 리우관을 안내하여 로신저택에 가서 로신형제한테 인사를 시키고 8월 3일에 로신네 가족, 벗 등 19명과 더불어 북경의 향산을 유람했다[8]고 하니 1922년에 로신을 만났다는 리우관의 “년보”는 틀리지 않는다. 이같이 오공초는 주작인의 일기에 로신을 만난 첫 조선인으로 선후 5차나 만난 사람으로 기록되고있다.   오공초(1894-1963)는 원명이 오상순이고 일본에서 대학 종교학부를 다닌 졸업생이다. 그는 1922년에 북경으로 갔다가 “새마을운동”을 이끄는 주작인을 찾고저 1922년 4월 14일에 로신의 저택을 찾았고 로신형제 셋을 만나게 된다. 그후 또 리우관과 같이 로신저택을 찾은후 귀국길에 오른다.   중국과 한국 여러 관련학자들의 노력으로 1922년부터 로신이 만난 조선인들이 오공초, 리우관, 김구경, 류수인, 리륙사 등 5명으로 밝혀졌다. 그외 또 한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신언준(申彦俊, 1904-1938)이다. 그는 1923년에 중국 동오대학을 졸업하고 독립운동가 안창호가 꾸린 흥사단(兴士团)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가 1929년에 《동아일보》사 남경, 상해 특파원으로 활약한다. 1933년 5월 중국좌익작가련맹 녀작가 정령이 국민당정부에 불행히 체포된후 《동아일보》사에서는 로신선생을 취재하라고 한다. 신언준은 채원배의 도움으로 로신의 저택을 알게 되고 이해 5월 16일에 편지로 만날것을 요구하나 국민당정부의 체포를 피해있는 로신의 거절을 당한다.   5월 22일에 신언준은 로신의 가까운 일본친구가 꾸리는 로신저택 부근의 서점 2층에서 끝내 로신을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이 1934년 4월의 《신동아》잡지에 “중국의 대문호 로신 방문”으로 실린다. 5월 22일 만남에 앞서 로신과 신언준이 주고받은 편지날자가 1933년 5월 16일, 17일, 18일, 19일의 로신일기에 고스란히 적혀있다. 이러면 로신이 만난 조선사람은 6명으로 나타난다. 이밖에 더 있는것으로 보이나 현재로는 아직 더 밝혀지는 사람이 없다.   3.     로신의 강연을 들은이들   필자가 지난 몇년래 로신의 발자취를 쫓아 중국내 소흥, 북경, 하문, 광주, 상해 등지 로신기념관이거나 박물관을 전부 답사한데 의하면 로신은 북경, 하문, 광주, 상해 등지에서의 대학 재직생활과 거주생활시에 대학의 연단들에서 많은 강연을 하였는데 북경과 광주 대학생활시기에 그의 강연을 들은 조선인들이 적지 않은것으로 알려진다. 정래동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한국 김시준(金时俊)교수의 론문소개에 따르면, 정래동(丁来东, 1903―1983)은 일본 도꾜 대성중학 출신으로서 1924년에 중국 북경에서 한해 중국어를 배운후 1925년에 북경 민국대학에 입학, 1930년에 졸업하고 무정부주의자단체에 가담한 사람으로 알려진다. 그는 1929년 7월부터 《조선일보》에 12기에 걸쳐 “중국 현대문단개황”을 련재하고 1931년 1월 14일부터 그달 30일까지 또 《조선일보》에 장편평론 “로신과 그의 작품”을 련재하였다. 그는 비록 중국의 대문호 로신선생을 직접 만날 기회를 갖지는 못했지만 로신이 1929년 5월 29일과 1932년 11월 22일 북경대학 제3원에서 두차례 강연을 할 때 두번 다 강연을 들은 행운을 가지였다.   이밖에 로신은 1927년 1월부터 1927년 9월까지 광주 중산대학 재직시절에 1927년 1월 25일과 3월 11일 중산대학 종루례당에서, 1927년 4월 8일에는 황포군관학교에서 “혁명시대의 문학”이란 강연[9]을 가지였다. 그때 중산대학에는 수십명의 조선청년들이 공부하고있었고 황포군관학교에는 수많은 조선청년들이 정치를 배우고 군사를 배우고있었는데 로신의 강연을 들은 조선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더우기 중산대학에서 로신이 “중국문학사”, “문예론” 등 과목을 강의할 때 그의 강의를 선택한 학생들이 200여명에 달하고 사회의 많은 문학애호청년들까지 참가하여 서당(西堂)의 문과교실이 비좁아 종루례당에서 강의할수 밖에 없었다.   4.     로신을 만나려던이들   다 아는바와 같이 로신은 중국의 대문호로서 로신을 만났거나 강연을 들었거나 만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것으로 나타난다.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작가인 김학철(1916-2001)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김학철은 1936년 여름 어느날 리수산이라는 조선청년과 함께 상해 대륙신촌 9번지에 있는 로신선생저택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그러던 그들 둘이 로신저택 문앞에 이르러 걸음을 주춤하였다. 그때까지 시 한수, 수필 한편 써본적이 없은데서 문을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로신이 가끔 다닌다는 부근의 우찌야마서점에 가서도 책도 사지 않으면서 기웃거리고싶었으나 책도둑으로 몰릴것 같아 또 물러설수 밖에 없는 그들, 그뒤 10월 20일에 전날 19일 로신선생이 병으로 서거했다는 부고를 접하고 그들은 놀랐다. 장례식에라도 참가하려니 그들 소속단체의 책임자가 일본 특무, 경찰들이 우글대는 판에 조선인으로서 어디를 가겠는가고 호통치는통에 이 념원도 접어야 했다.[10]   중국에서 “영화황제”로 불리우는 조선인 김염(1910-1983)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김염은 원명이 김덕린. 일찍 학생시절부터 로신선생의 “납함” 등 작품을 즐겨 읽으며 존경한 김덕린은 로신의 이름에서 신자를 따서 김신이라고 지어보았으나 대문호의 필명을 그대로 옮긴다는것이 당돌하다고 생각되여 마음에 드는 별호를 찾던중 젊은이들의 정열을 상징하는 불꽃 “염(焰)”자가 마음에 들어 김염이란 별호[11]를 택했다. 그때부터 김염으로 통했으니 서울태생인 그는 상해시절에 첫 계몽스승인 중국 현대연극의 정초자이며 걸출한 희곡작가인 전한의 도움으로 영화예술인으로 성장하며 그와 더불어 상해의 중국좌익작가련맹 회원으로 활약한다. 그런 김염이, 그토록 로신을 숭배하던 김염이 좌익작가련맹의 지도자의 한사람인 로신선생을 모르고 지냈을가, 대답은 로신과의 어울림이다. 그러나 관련자료가 보이지 않아 로신과의 인연을 긍정적으로 밝힐수가 없어 유감스러울뿐이다.   그외 광복전에는 독립운동가로, 광복후에는 중국에서 저명한 교육가와 농학교수로 활약해 온 류자명교수가 또 있으니 그는 로신 다음으로 손꼽히는 중국 현대문학의 대표작가인 파금과 절친한 관계였다. 지난 30년대 상해 시절, 적절히 말해 상해 좌익작가련맹시절 로신이 가장 아끼는 문학도도 파금이요, 파금이 가장 존경하는 중국내 선생이 로신이라면 류자명이 로신을 숭배하고 존경하도록 이끈이는 분명 파금이였다. 이런 류자명이 로신과의 관계에서 한획을 그으니 다음 론문에 그 한부분으로 전문 밝혀보려 한다.   5.     로신 추모에 참녜한이들   중국의 20세기는 위인을 수요로 하는 20세기였으며 위인을 배출한 세기이기도 했다. 로신은 이 세기에 걸맞는 중국 사상문화분야의 위인답게 1918년부터 1926년 기간에 신문화운동, 혁명문학운동에 나서 인생의 휘황한 10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향년 56세로 1936년 10월 19일에 병으로 별세하였다. 이에 조선인들도 비통해하면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 등 추로글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1). 리륙사   1936년 10월 20일, 상해의 여러 신문들에 로신 별세부고가 실리자 로신을 숭배하며 로신을 마음으로 받들던 조선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1933년 6월 20일, 상해 만국빈의관 양행불(중국인권보장동맹 부주석, 민국혁명의 원로)장례식에서 로신을 만난적이 있는 리륙사는 조선 국내서 로신서거소식을 접하고 로신추모문인 “로신론”을 써서 그해 1936년 10월 23일부터 7일간 《조선일보》에 련재하였다. 장장 1만여자에 달하는 “로신론”은 로신의 략력, 로신을 만난 경과, 로신 작품의 연구와 평가 등으로 씌여졌는데 일제의 검열도 마다하고 비교적 공정한 태도로 “로신론”을 게재했다는것은 웬간한 사람으로서는 행할수 없는 일이다. 그는 그해 12월 또 로신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여 《동광》잡지에 련재하기도 했다.   2). 한설야   일찍 1925년에 조직되고 1927년에 개편된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지도자의 한 사람이였던 한설야는 로신서거소식을 접했을 때의 정황을 1956년 10월호 《조선문학》에 발표한 “로신과 조선문학”에서 이렇게 썼다.   로신 서거의 부음(讣音)이 전해오자 조선 작가들은 전체 조선인민과 함께 애도의 정을 금할수 없었으며 23일 신문지상들에는 로신에 대한 추모문들이 발표되였다.   한설야는 이 글에서 1936년 이 한해에 조선의 작가들은 “사회주의사실주의문학의 창시자인 고리끼와 중국의 고리끼로 불리우던 로신 두 위대한 문호를 잃게 된 슬픔을 참을 수 없”었고 이 슬픔속에서 자기도 추모의 글을 썼다고 스스로 밝혔다.   3). 야생=류자명?   로신이 서거한 이튿날 10월 20일, 야생(也生)이라고 필명을 단 한 조선청년이 만장과 함께 “로신선생을 애도한다”는 시 한수를 써서 상해의 로신장례위원회에 드리며 로신서거에 대한 자기의 애끓는 심정을 나타내였다.   고리끼선생이 돌아갔습니다   로신선생이 또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기념합니다   그들이 끝내지 못한 일   그들을 기념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노력하며 이어갑니다[12]   …   이 한편의 추모시에서 추모자는 야생이라는 필명을 쓰면서 로신을 쏘련의 고리끼와 병행시키며 중국의 대문호 로신을 심심히 애도하였다. 다른 글에서 전문적으로 서술하겠지만 이 야생이 다름아닌 독립운동가 류자명으로 알려져있다.   6.     나오면서   본문에서 필자는 로신과 우리 겨레 관계연구란 과제로 로신의 작품을 접촉한 사람들, 로신을 만난 사람들, 로신의 강연을 들은 사람들, 로신을 만나려 했던 사람들, 로신 추모에 참녜한 사람들 등으로 나누어 로신과 관련되는 우리 겨레의 이모저모를 처음으로, 전방위적으로 고찰하여보았다.   이 가운데서도 보다 힘을 기울인 부분은 로신을 만난 사람들과 로신의 강연을 들은 사람들이다. 자료의 부족과 자료의 한계로 로신을 만난 사람들과 강연을 들은 사람들을 더 이상 서술하지 못하였지만 기필코 더 많으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이는 로신연구의 보다 심층연구를 통하여 규명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며 로신과 우리 겨레연구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고싶다. 이는 또 우리 겨레 로신연구가들이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모름지기 가르치는것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로신은 정말 중국 현대의 위대한 문학가, 사상가, 혁명가로 되기에 손색이 없으며 그가 남겨놓은 정신적유산은 우리 조선민족을 포함한 우리 전체 인류의 재산임을 말하고싶다.   --------------------------------------------------------------------------------   주해 [1] 《조선문학》 1956년 10월호, 제 189페지   [2] 류수인(1905―1980)은 조선 황해도태생 독립운동가. 중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면서 1922년 7월 24일에 북경에서 처음 로신을 만났다.   [3] 리정문, “로신과 조선사람”, 《연변문예》 1981년 10월호, 제49페지   [4] 《이병주 고백록》 기린원, 1983. 제11페지   [5] 리정문, “로신과 조선사람”, 《연변문예》 1981년 10월호. 제49페지   [6]양소전, 《외국문학연구》 1984년 제2호   [7] 북경로신박물관 편, 《한국로신연구론문집》, 하남문예출판사 2005년 7월. 제58페지   [8] 김시준 “중국에 망명한 한국 지식분자와 로신”, 북경 로신박물관 편, 《한국로신연구론문집》, 하남문예출판사, 2005년 7월. 제54페지   [9] 광주로신기념관 장경 편저 《광주로신옛집》(수정본), 광동과학기술출판사. 제25페지.   [10] 김호웅 김해양 편저 《김학철 평전》, 실천문학사, 2008년 7월. 제86-88페지   [11] 김창석 저 《동방명주를 빛낸 사람들》, 연변인민출판사, 2009년 10월. 제51페지   [12] 중국사회과학원 로신연구실 편 《로신연구학술론저자료휘편》(제2권), 문련출판공사,  1986년. 제286페지   연변문학 2010년 제11호           루쉰과 한국 여러분 반갑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청년 학생 여러분, 그리고 노신 애독자 여러분과 이렇게 노신을 통해 만나게 되어 감회가 깊습니다.   저는 오늘 한국의 외교관으로서가 아니라 노신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여기에 나왔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제목이「노신과 한국」입니다만 저는 학자도 전문가도 아니기 때문에 그져「수이비엔」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옆 길로 나가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노신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노신과 한국 또는 한국인과의 관계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노신 애독자들에게도 전문가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중국에서 출판된 노신관계 서적들을 상당히 많이 떠들어 보았습니다만, 단 한 줄이라도 노신과 한국관계를 언급한 책을 찾아 보기 힘들엇습니다. 노신과 한국인은 무관계일까요?   노신의 작품을 세계에서 최초로 외국어로 번역한 외국인은 바로 한국인 이었습니다.  1927년 8월「東光」이란 조선어 잡지에 실린「광인일기가 그것입니다. 그 후 2개월이 지나서야 일본에서 최초로 노신의「고향」이 번역되어 나옵니다. 물론, 이보다 몇 년 앞서 노신의「쿵이지」가 베이징 거주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주간지에 일본어로 번역되어 나옵니다만, 그것은 노신의 동생인 周作人이 번역한 것입니다. 외국인으로서는 조선인에 의해 노신의 작품이 세계 최초로 번역 소개되었는 것은 당시 나라 잃은 조선인들이 세계의 어느 사람들보다도 노신에게서 희망과 길을 찾으려 했음을 말해줍니다.   요즈음은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노신을 즐겨 읽는 젊은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할 일입니다.  암울한 시대의 괴로운 이야기를 누가 즐기려 하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여러분에게 노신의 대표작 몇 편과 약간의 잡문들을 읽어볼 것을 권유하고 싶습니다.  노신의 유명한 소설들 광인일기, 고향, 쿵이지, 아큐정전을 처음으로 펼쳐 본 사람들은 좀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아큐정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고작 다섯장내외 정도 분량이니까요.  짧지만 여운은 길게 남고 뇌리에 오랫동안 남는 것이 노신의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노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접했던 것은 아마 중학교 아니면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습니다. 중국 현대문학의 개척자이고 대표작은 아큐정전이라는 것.  「물에 빠진 미친 개는 두들려 패라고 그가 말했다는 것 정도가 노신에 대한 전부였습니다. 아큐정전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바 없었던 저는 그것이 아편전쟁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노신 선생이 말했다는「물에 빠진 미친 개는 두들겨 패라」는 말도 당시 저에게는 좀 기괴하게 들렸습니다. 물론 여기서 개는 위선의 가면을 쓰고 민중을 속이고 지배하는 권력자, 위선적인 지식인 등을 상징하겠지만 그때는 그런 걸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실제로 노신 선생이 싫어한 동물은 개가 아니라 고양이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최근이었습니다. 좀 옆길이지만 그 이야기를 좀 나누겠습니다. 노신 선생이 고양이를 얼마나 싫어했든지, 한때 북경에서는 노신 선생이 고양이를 학대하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노신 선생은 그 소문에 퍽이나 시달린 나머지 그에 대한 변명을 긴 글로 써서 남깁니다.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거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노신의 유년시절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뱀에 물려 숨이 할딱거리는 생쥐 한 마리를 노신이 구해 줍니다. 그 후 생쥐는 노신의 친구이자 가족이 됩니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언제나 생쥐는 노신의 주변을 맴돕니다.  특히 밥을 먹고 나면 언제나 생쥐는 식탁 위에 올라가 흘린 음식 찌꺼기들을 깨끗이 청소해 줍니다.  어린 노신이 먹물을 갈아 글씨를 쓰고 나면 쪼르르 책상으로 생쥐가 올라와 남은 먹물을 깨끗이 먹어 치워 줍니다. 그런데 어느날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보니 생쥐가 안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밥을 먹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상심한 어린 노신을 보다 못해 보모 키다리 아줌마 阿長이 노신에게 동정어린 표정으로 조용히 말해줍니다.   「고양이가 생쥐를 먹어버렸다」   그때부터 노신의 가슴에 고양이에 대한 증오감이 깊히 자리잡습니다. 한번 각인된 그 증오감은, 나중에 노신이 사실은 생쥐를 죽인 것은 고양이가 아니었고 바로 그 키다리 보모였다는 진실을 알게된 뒤에까지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노신은 그래서 오랫동안 고양이만 보면 돌을 던졌다 합니다.   이야기가 좀 옆길로 가고 있습니다만, 간 김에 조금 더 가자면 노신이 아주   싫어한 곤충이 하나 있습니다.  모기 입니다.  벼룩이나 파리보다 모기를 특히 싫어한 노신의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피가 아까워서가 아닙니다. 모기의 장광설, 그 연설 때문입니다.   모기는 사람을 물기 전에 에엥하고 길게 소리를 내지 않습니까?  노신의 귀에는 그 소리가「왜 내가 당신의 피를 요구하는가」하는 이유를 길게 연설하는 소리로 들렸던 모양입니다. 빨아먹고 싶으면 그냥 조용히 빨아먹을 일이지 왜 그렇게 변명이 많고 장광설을 늘어놓느냐는 것이죠.  민중을 착취하고 속이는 지배자들은 항용 자신의 탐욕을 숨기기 위해 많은  이유와 논리를 만들어 떠들어대지 않습니까? 노신의 귀에는 모기의 에엥 소리가 그렇게 들렸던 모양입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아까 노신 작품의 번역 이야기를 꺼냈습니다만 일제시대때 조선의 여러 지식인, 지사들이 노신에 주목하고 공감했던 것은 노신이 그만큼 시대의 어둠과 절망속에서 지식인으로서 강렬한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신은 자신을 문사라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싸우기 위해, 마비된 민중의 정신을 뜯어고치기 위해 문예를 택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노신은 자신의 글을「비수와 투창」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전사,투사로 묘사했으며 자기 몸에 난 상처를 자기 혀로 핥으며 황야를 헤메는 한 마리 하이에나에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상처 입은 황야의 하이에나의 절규, 허위와 위선의 심장을 겨냥하는「비수와 투창」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들이 나라 잃은 조선의 지사들, 문인들에게 메아리쳤을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조선의 시인 김광균은「노신」이라는 시를 지어 이렇게 읋기도 하였습니다.   「魯迅」    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 氣笛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 것의 베개 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無數한 손에 빰을 얻어맞으며  恒時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날을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五臟을 씻어 내린다.    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 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傷心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한국의 식민지 시인이 절망의 시대에 중국의 위대한 작가 루쉰의 용기를 추모하여 스스로를 다짐하는 시입니다.   광인일기를 최초로 번역했던 柳樹人 이라는 분은 항일애국지사였습니다. 본명이 유석기인 그는 얼마나 노신을 좋아했던지 자신의 이름조차도 노신의 본명인 樹人을 따서 유수인 이라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름 이야기가 나오니까 생각납니다만 여러분 김염, 중국 발음으로 진이엔   쇠금에 불꽃염자 진이엔을 혹시 들어본 적 있습니까? 13억 중국인들이 '영화황제'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1932년 영화 전문지 [電聲]이 1년여에 걸쳐 인기투표를 한 결과 김염이 '가장 좋아하는 남자배우', '가장 잘 생긴 남자배우', '가장 친구가 되고싶은 남자배우'등 전분야에 걸쳐 1위를 차지,「영화황제」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의 나이 24세 때입니다. 그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한국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님 웨일즈는 '나는 그에게서 육체의 아름다움 너머에 깃든 정신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말하였습니다.  본명이 김덕린인 그는 1910년 서울 출신입니다.  그의 아버지 김필순(金弼淳)은 세브란스 의대 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였습니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하였습니다.   김염은 그 당시 좌파 시나리오 작가인 田漢과 노신의 반봉건, 반억압 진보사상에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김염은 소년시절부터 노신의 사상에 깊은 감화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가 10대  였을 때 장래 굉장한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집니다. 영화배우면 멋진 이름을 써야되지 않습니까.  소년 김염은 미리서 이름을 하나 지어 놓습니다. 노신을 존경했던 그는 노신에서 신을 따서 金迅이라고 지어 놓습니다.  그러나 영화배우의 꿈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무작정 상하이에 오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냉대와 가난이었습니다. 「상하이의 어느 골목 조그마한 음식점, 이미 몇 끼를 굶은 한 젊은이가 식사를 하고 돈이 없어서 섣달그믐까지도 돈을 갚지 못해 입고 있던 웃옷을 저당 잡혀 식대를 갚아야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더 강력하게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는 전에 지어 놓았던 金迅 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불꽃처럼 타오리라는 열망을 담아 불꽃 염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김신이 될 뻔한 영화황제가 김염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김염의 솔녀가 얼마전에 자신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추적하여 쓴 「상하이 올드데이스」라는 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노신의 영향은 10대의 조선 소년의 가슴에까지 파고 들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염은 자신의 연기를 민중의 오락거리로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영화에 나타나는 정신은 반봉건, 반억압, 반일정신이었다 합니다. 「大路」「壯志凌云」으로 대표되는 항일영화의 제작에 앞장섰던 김염을 통해, 중국인들은 외세를 배척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진보적인 젊은이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화를 보고 따라 했으며, 청소년과 대학생들은 그의 동작과 말투까지 따라 했다고 합니다.  저는 며칠 전 김염의 미망인 친이여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사는 노신의 미망인 쉬광핑 여사와 교류하면서 같이 활동하였다고 들려 주었습니다. 「상하이 올드데이스」는 내년쯤 중국어 번역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김염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한 비판적 지식인의 선각자적 정신이 얼마나 깊고 넓게 공명되는 지를 알게 됩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김염은 한류의 원조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참 묘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중국인이 더 이쁜데 그들은 한국인이 더 예쁘다고 합니다.  요즈음 한류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리 보아도 중국 배우나 탈렌트가 더 예쁩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한류배우에 푹 빠져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일부러 짐짓,그러는지 왜 그러는지, 어떨땐 의심이 납니다.   김염이 영화계의 한류원조였다면 당시 음악계에서는 鄭律成이라는 음악가가 또한 한류원조였습니다.  나이든 중국인들은 그가 지은「연안송」을 다 안다고 합니다. 1990년 북경에서 개최된 아세안게임 개막식에서 울려 퍼진 노래「중국인민해방군가」를 지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도 당시 나라 잃은 조선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곳 상해에서 음악공부를 하였고 연안의 노신 예술학교에서 음악을 연마하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고향 전남 광주에서 오는 11.12일 제1회 정율성 국제음악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저는 김염과 정율성이 모두 노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를 느끼지만 중국인의 포용성에 대하여 경이에 가까운 느낌을 받습니다. 어떻게  이민족의 배우를「영화황제」로서 받아들이며, 어떻게 이방인에게 자국의 군가를 짖게 하느냐는 것이지요.  아마 우리 한국에서였더라면 상상도 못할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중국인의 이런 포용성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포용하는 자가 결국 크게 되고 승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중국이 땅 덩어리가 커서 큰 것이 아니고 중국인들의 이러한 포용성 때문에 크게 보입니다.     노신에 대한 묘사와 비유는 수 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표현은 아무리 보아도 일품입니다.   '메스를 손에 들고 만나는 사람마다 마취약도 사용하지 않고 그들의 환부를 도려내고 마는 기이한 의사'   딱 노신의 모습이 앞에 나타나지 않나요? 이것은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노신을 방문취재 했던 언론인 신언준의 묘사 입니다. 그가 노신을 인터뷰한 것은 1933년 5월이었습니다.  기사는 그로부터 1년 뒤인 1934년 4월 신동아에 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국민당정부의 要注意 인물로 반은 숨어살다시피 하고 있던 노신을 몰래 탐방하여 인터뷰한 노신방문기는 희귀한 자료에 속합니다.  그를 만나게 된 과정부터 그의 수입에 비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생활상과 세계혁명이 완성되어야 약소 민족도 해방될 것이라는 노신의 육성을 전한 것은 상해 거주시기의 노신을 이해하는 데 간명하면서도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노신은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 문학가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예를 여기에서 다 열거할 수 없고 또 제가 자세히 알지도 못합니다. 단지, 노신과 관련해서 꼭 알아야 될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학생 여러분이 다 아는 이육사입니다. 「청포도」,「광야」의 시가 지금도 교과서에 나오죠? 그는 노신에게서  영혼의 감화를 받았고 노신을 찾아가 만났으며 노신이 죽자 장문의 추도사를 조선일보에 연재하였으며, 그리고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17차례나 옥고를 치른 끝에 북경의 일본 감옥에서 40세의 젊은 생을 슬쓸히 마감합니다. 그는 조선인으로서 항일 독립 운동을 하다가 최초로 옥사한 시인이기도 합니다. 이육사라는 이름은 대구형무소에서 옥살이할 때 죄수번호 264에서 음을 따온 것입니다 . 노신과 한국관계를 탐색하던 중 내가 다시 만나게 된 이육사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청포도에 투영된 그런 서정시인만은 아니었습니다.  백마를 탄 채 세상을 내려다보는 그런 세속을 초월한 초인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일제의 암흑 속에서 온 몸을 불살랐던 더 없이 순결하나 더 없이 뜨겁게 타올랐던 불꽃같은 영혼이었습니다.  시대의 어둠과 격량을 온 몸으로 부딛치며 고뇌하며 행동 했던 지식인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노신을 길잡이 삼은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노신을 찾아가 만난 것은 1932년 6월 국민당에 의해 암살 당한 혁명원로 양싱푸(楊杏佛)의 장례식에서였습니다. 노신이 죽기 3년전의 일입니다. 이육사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관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 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역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였다. (중략)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차는 만국빈의사 앞에 다았다. 간단한 소향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막에 검은「마괘아(馬掛兒)」을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싸인 관을 붙들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난 십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 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앞이며 처소가 처소인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한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써 이붓을 잡는 나뿐이랴.」     자 이제 우리의 시선을 노신에게로 돌려봅시다.  조선 지식인들에게 이렇듯 큰 영향을 미쳤던 노신 자신은 조선을, 조선인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노신의 글 속에는 조선이 어떻게 언급되어 있을까요? 노신의 글 어디에도 조선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고작, 한 두 마디가 전부이며, 그것도 조선에 대하여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인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부차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노신 자신이 번역한 어느책 서문에 이런 언급이 있을 뿐입니다.     이 글에서 조선을 언급한 것도 중국인을 비판하기 위한, 또는 계몽하기 위한 맥락에서  '조선'을 언급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한국인 학자가 쓴 책을 보니까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그렇다면 노신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한 것으로 보았을까 라며 스스로 곤혹스러운 의문을 제기한 것을 읽었습니다.  저는 그가 과민반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민족감정에 이르면 누구라도 병적인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노신의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태도랄까.  견해 같은 것이 어떠했는지는 그의 글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단지 노신과 이육사가 만났을 때 노신이 이육사를 친근하게 대한 정황을 통해 노신의 대조선 정서를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또한 조선인으로서 그를 최초로 방문 취재했던 신언준과 나누었던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속에서 간접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노신은 신언준과의 대화에서 조선의 문학계와 교류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  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 아쉽게도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신언준이 노신의 바램대로 노신과 조선 문학계를 연결해 주었더라면 노신과 조선인간에는 의미있는 교류가 이루어졌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느껴집니다.   노신 선생이 상해에서 서거한지 약 10년후 한국은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 1992년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길고 긴 냉전, 동면상태를 거쳐야 했습니다. 모택동 주석이 찬양한 바 있었던 노신이 당시 한국에서 읽히지 않았던 것은 한국이 반공이데올로기에 결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택동 주석의 책이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소지하고만 있어도 끌려가 조사를 당하고 고문을 당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저는 1952년생으로 한국전쟁중에 태어난 세대인데 잊지 못할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초등학교 2-3학년때부터 였을 것입니다.  어느날 학교에 갔더니 모두 모여 놓고 뭘 강제로 외우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쿠테타를 일으켰는데 소위「혁명 公約」을 만들어 전국 국민학생들에게까지 외우게 한 것입니다.  날마다 그것을 선생님들과 함께 복창하며 외웠습니다.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제1조는 기억이 뚜렷합니다. '반공을 國是의 제1義로 삼고…' 뭐 그렇게 시작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날마다 외웠습니다.  반공이란 말은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거니까 알겠는데 국시라는 말은 생전 처음 들어본 말로 전혀 모르겠고 제1까지는 알겠는데 제1義 라는 말 같은 것은 무슨 뜻인지 통 몰랐습니다. 선생님들도 무조건 외우라고만 하지 무슨 뜻인지 안가르쳐 줍니다. 그래도 선생님을 따라 열정적으로 외웠습니다.  그때 노신선생이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 묘한 것은 그래도 일부 한국의 지식인에게 노신이 읽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유별난 아웃사이더들이었습니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리영희, 박영복, 전우익 같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그런 아웃사이더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지식인, 청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신을 좋아했던 그들의 인생역정에 재미있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뭘까요? 모두가 감옥에 갔다는 사실입니다.  죄명도 같았습니다. 좀 색깔이 붉다는 것이었지요.   노신의 비수와 같은 단문의 일부가 한국 일반에게 소개된 것은 리영희에 의해서였습니다. 리영희는 독학으로 습득한 중국어로 사전을 들쳐가며 노신을 읽었습니다. 리영희는 죽은 노신이 무덤속에서 소리쳐 자기를 불러 일으켰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는 노신을 삶의 지표로 삼은 지식인이었습니다.  노신은 리영희를 통해 한국에서 부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가 한국의 현대 지성사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잠깐 보겠습니다. 한 예로서 1999년 말 연세대학원신문이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는 특집으로 교수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하면서 '현재 우리 학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학자와 저작을 국내와 외국으로 나누어 조사했는데 국외 학자로는 프로이드가 1위, 국내학자로는 리 영희가 1위로 나타났습니다.   리영희에 대한 일치된 의견은 '1970-80년대 한국 변혁 운동의 중심이었고, 폭압적인 시대 상황에 맞서 싸웠으며, 70년대 냉전주의적 사회분위기에 새로운 시각을 불어넣은 학자'라는 평가였습니다.   그의 글은 노신이 자기글을 비유했던 바로 비수와 투창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노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여러 책에 수록된 노신에관한 글들에서 자주 언급하였지만 나의 글쓰는  정신이랄까, 마음가짐이랄까 하는 것은 바로 노신의 그것이에요.  글의 기법,문장미, 속에서 타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때로는 정공법으로, 때로는 비유.은유.풍자.해학.익살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세련된 문장 작법을 그에게서 많이 배웠지요.'   그의 글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그덕분에 그는 수차례 감옥을 가고 해직되고 고문당하고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고통과 절망과 씨름하고 있을 때 그의 정신을 버텨 준 것도 노신 이었습니다.   그는 '노신과 나'라를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누구나 그렇듯이 정신적·사상적 모색으로 고민하던 나는, 노신의 많은 저서를 읽으면서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에 감동했다.  단순히 지식을 상품으로 파는 것에 안주하는 교수나 기술자나 문예인이 아니라, 부정한 인위적·사회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고난 받는 이웃과 고난을 바꾸어 보려는 지식인의 사회적 의무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소명감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싹튼 것임은 물론이다. 1950년대 말에 중국어 저서(작품)를 사전을 찾아가며 힘겹게 읽어가던 어느 날 가슴에 와 닿는 한 구절에 마주쳤다.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가령 말일세, 강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자, 창문은 하나도 없고 여간해서 부술 수도 없는 거야.  안에는 많은 사람이 숨이 막힌 채 깊이 잠들어 있어.  오래잖아 괴로워하며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혼수상태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에 놓여 있으면서도 죽음의 비애를 느끼지 못한다.  이때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서, 그들 중에서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불행한 이 몇 사람에게 살아날 가망도 없는 임종의 고통만을 주게 될 것인데,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도 몇 사람이 정신을 차린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모든 면에서 군벌지배와 장개석 치하 중국을 방불케 했던 박정희 대통령 치하에서 고민하던 나는 이 구절을 읽는 순간 그 구절은 무덤에서 노신이 나에게 타이르는 소리같이 들렸다.  나는 눈을 뜨고 정신을 번쩍 차렸다.  나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맹목적이고 광신적이며 비이성적인 극우, 반공주의에 마취되어 있는 사람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여 의식을 바로 잡아주는 일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었다. 내가 몇 사람의 잠을 깨우고 몇 사람의 의식을 깨우쳤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노신처럼 '역사'를 밀고 갈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한 '시대'와 함께 살아왔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30년전 나의 의식의 눈을 뜨게 해 준 노신에 대한 조그마한 답례를 한 셈이다.」     노신을 일러 많은 중국 사람들이 민족혼이라 하는 거 같습니다. 지금부터 69년전인 1936년 10.19일 노신이 서거했을 때 그의 유해 위에는 민족혼이라고 크게 쓴 銘旌이 덮힙니다. 북경의 노신 박물관 사이트르 열면 거기에도 크고 굵은 글씨로 써진 민족혼이라는 제목아래 노신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방의 한 노신 애독자로서 관위에 민족혼이라는 글자가 쓰인 사진을 볼 때 마치 노신 선생의 혼이 민족혼이라는 굴레속에 유폐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이방인으로서 소통하는 노신은 어느 한곳에 딱 규정하여 넣기 힘든 그런 자유스러운 존재입니다.   노신 선생의 삶과 글, 사상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노예화에 대한 분노어린 외침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그 외침은 물론 보편적 인간애에 굳건히 바탕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의 심안에 비친 중국의 역사는 황금빛 찬란한 역사가 아니라 노예의 역사  였습니다.  노예가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한 시대와 잠시 노예로 안정되었던 시대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처음 대할 때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노예화는 중국의 현상만이 아니고 바로 나의 문제이고 인류  역사의 문제임을 말입니다.   노신이 한국에 지금 나타난다면 우리에게서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모습을 볼까요?  5살쯤이면 여러 학원으로 끌려 다니는 어린이의 모습에서 노예화의 모습을 볼지도 모릅니다.  끊임 없이 맹목적인 경쟁속에서 삶을 소진하고 있는 청소년들, 소비와 생산의 객체로 전락한 인간군상에서도 그는 노예의 모습을 볼지 모르겠습니다.   루쉰은 언제 읽어도 지금을 살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값싼 희망을 팔지는 않습니다.   참, 묘합니다.  희망을 파는 사람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들리는데 희망을 말하지 않는 노신의 저음속에서는 웬지 모를 희망이 느껴집니다.   노신은 그의 작품 [고향]의 말미에서 희망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 나와 윤토사이는 마침내 이렇게 멀어지고 말았구나. 그러나 우리의 후대들은  여전히 한마음으로 이어져 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닮지 않기를 바라며, 사람들 사이에 장벽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에게는 마땅히 우리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생활이 있어야 한다........ 희망이란 본래부터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사실은 길이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다.]   이렇듯 노신이 꿈꾸었던, 사람 사이에 장벽이 없고 나라 사이에도 장벽이 없는, 아직 겪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세상, 그것은 여전히 21세기 동아시아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꿈이기도 할 것입니다.   돌아보면 노신이 고뇌속에 살다간  지난 20세기는 야만이었습니다. 한 중 일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같은 전쟁터에서 만나 서로 총부리를 겨눠야만 했던, 그런 야만과 악몽은 이제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노신의 다음과 같은 말로 제 이야기를 끝마칠까 합니다.   「현재에 불만을 품은 자는 그러나 복고적이어서는 안된다. 왜냐면 우리 눈앞에 또한 갈 길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미증유의 제3의시대를 창조하는 일.  바로 이것이 오늘날 청년들의 사명  이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coindian (상하이 화동사대 강연고)  
60    李陸史는 魯迅을 만나 보았을까? 댓글:  조회:2685  추천:0  2016-12-25
이륙사는 노신을 만나 보았을까?    - 이륙사(李陸史) 의 공과(功過)문제                김병활(金秉活)       목차 1. 魯迅연구-동아시아 문학 비교연구의 접점 2. 이륙사의 의 비교문학적 가치 3.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문제 1)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2) 노신의 反滿사상과 ‘마괘아(馬褂兒)’문제 3) R씨의 신분과 노신을 만난 장소의 분위기가 석연치 않다. 4) 노신이 양행불의 ‘관을 붙잡고 통곡했다’는 문제 5) 고쳐 써야 할 이륙사 연보(年譜) 4. 주석을 달고 시정해야할 일부 문제 5. 맺음말 참고문헌     1. 魯迅연구--동아시아 문학 비교연구의 접점     21세기 동아시아 문학의 방향을 탐구함에 있어서 中國, 韓國, 日本 등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공명을 일으키고 상호 이해하고 대화와 담론을 할 수 있으며 공동연구도 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야 한다. 그 접점중의 하나가 바로 3국 문단에 모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魯迅연구이다. 중국과 일본이 현대문학 연구 분야에서 한국보다 한발 앞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일부 정치적인 요소도 작용하였겠지만 공동으로 담론할 수 있는 하나의 접점-노신연구를 돌출이 내세운 데 있다고 본다. 근년에 한국에서도 노신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비교문학의 시각으로 중한현대문학을 연구하려는 활발한 움직임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추세로 발전한다면 중한문화교류는 증일 교류보다 못지않은 수준과 태세를 갖출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취지에서 본 논문은 노신에 대한 한국에서의 수용을 연구대상으로 하면서 중점적으로 이륙사의 을 텍스트로 이륙사의 노신관(魯迅觀)을 분석하고 일부 문제점도 제기하려 한다.    2. 이륙사의 의 비교문학적 가치     20세기 20-30년대에 한국에서 노신(魯迅)을 소개한 중요한 논문 중에는 이륙사(李陸史)의 이 있다. 이 문장은 노신이 서거된 지 4일후인 1936년 10월 23일부터 에 5기로 나누어 연재되었다. 이 문장의 집필속도의 빠름과 내용의 광범성은 당시 한국의 노신연구 분야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비교문학의 수용이론에 따르면 똑 같은 작품일지라도 독자들의 이해와 반응은 다종다양하다. 한국에서의 노신수용도 마찬가지로 부동한 문인들과 독자들은 부동한 수용입장에 따라 부동한 평가를 내리게 된다. 이륙사의 이 발표되기 전에 한국에는 이미 양백화(梁白華)가 번역한 일본학자 아오키 마사루(靑木正兒)의 논문 에서 처음으로 노신을 거론하였고 1931년 1월에는 정래동(丁來東)이 장편논문 을 에 20기로 나누어 연재하였다. 1934년에는 신언준(申彦俊)의 가 한국 지 제4기에 발표되었다. 이밖에 노신의 소설작품이 한국에서 널리 번역된 상황을 감안하면 이 시기에 노신은 한국문단에 광범히 알려진 중국작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시기에 노신을 부정적 시각으로 본 문인들도 있었다. 이경손(李慶孫)은 1931년 2월에 라는 문장을 에 2기로 나누어 발표하였는데 당시 항간에서 떠돌던 노신의 일상생활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두로 쓰면서 노신에게는 새로운 창작이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고 노신이 (중국좌익작가연맹)에 가담한 것을 시답지 않게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이경손은 후일에 한간(漢奸, 매국적)으로 전락한 장자평(張資平)을 노신보다 더 월등한 것으로 보고 정래동의 노신론에 대해서도 관점 상 다소 별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륙사의 은 일반적인 추도문의 수준을 초월하였고 학술적 연구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정음사의 출판으로 된 에서는 제목을 으로 고치기까지 하였다. 이륙사는 중국현대문학연구에서 주로 노신, 호적, 서지마(徐志摩)에 치중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노신을 숭배하였다. 그가 30년대 초반에 이미 좌익 켠에 선 노신을 숭앙하였기 때문인지 그의 조카 이동영(李東英)교수는 지난 세기 70년대에 이륙사의 사상은 어느 정도로 사회주의계통에 속하며 아마 그 자신은 ‘한국의 노신’이 되려고 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1) 이륙사가 노신에 대해 경모의 감정을 지니고 있기에 그의 노신연구는 경향성이 선명하다. 때문에 그는 노신을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 ‘중국문단의 막심 고리키’, ‘문화의 전사’라고 높이 찬양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노신의 부보를 듣고 더없이 비통해하였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 시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노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서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2) 노신에 대한 이런 심후한 감정은 그 앞서 노신을 소개하고 평론한 정래동, 신언준 등 문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이륙사는 에서 를 분석하는데 각별한 주의를 돌리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노신의 백화소설 가 발표된 후 “문학혁명운동은 실천의 거대보무를 옮기게 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그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 되였다.”“이 주인공들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하였다.”“어린이를 구하자”는 말은 “당시 ‘어린이’인 중국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 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순결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노신을 가리킴--필자 주)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이였다.” 이런 평가는 그 경향성이 아주 선명하며 노신에 대한 숭배와 노신의 반대편에 섰던 복고(復古)파들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완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륙사는 에서 을 분석하였는데 그 관점은 대체로 정래동, 신언준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유명한 이 연재되면서부터는 노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일인적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그는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아Q시대였으며 노신의 이 발표될 때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 지식군들은 라거나 라는 말을 평상 대화에 사용하기를 항다반으로 하게 된 것은 중국문학사에 남겨놓은 노신의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 개의 재료”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해 1월에 이광수는 작가들에게 톨스토이의 와 같은 빛나는 사시적 작품을 창작하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면서 부정적 예로 노신을 거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신의 나 는 노신의 소설가적 재분의 표현으로는 영광일지는 모르나 그 꽃을 피게한 흙인 중국을 위하여서는 수치요 모욕이다. ... 관우, 장비는 아Q와 공을기로 퇴화해버린 것이다.”3) 여기에서 이광수는 본의가 여하하든지간에 노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오독(誤讀)’하고 있는바 노신의 창작동기와 작품의 사회적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륙사는 9개월 후에 쓴 에서 의 현실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이광수와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실로 수많은 아Q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 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서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시고탑로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탄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4)   정래동, 신언준 등 문인들이 노신의 잡문을 거의 거론하지 않은데 반해 이륙사는 노신잡문의 가치를 인정하고 노신잡문에 대한 해독을 통해 노신의 사상발전을 연구하려고 시도하였다. 노신의 문학관에서 홀시할 수 없는 문학과 혁명의 관계에 대해 이륙사는 정래동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정래동은 소설작품에 대한 연구에 치우면서 잡문연구를 멀리하였기에 노신 문학관에 대해 일부 편차가 생기기도 하였다. 그는 “노신은 철두철미 문예는 혁명에 인연이 가장 먼 것임으로 암만 문학자가 혁명, 혁명하고 떠들어도 제3선의 전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여 왔었다.”   이런 주장과는 달리 이륙사는 노신이 국민성을 개조하고 봉건제도를 개변하려는 목적에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노신에게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이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 작품이 산출하는데서 문호 노신의 위치는 높아갔고 아Q도 여기서 비로소 탄생하였으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5) 뿐더러 이륙사는 노신의 잡문집 에 수록된 잡문들을 인용하면서 노신이 진화론을 포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 단계’에 들어섰다고 찬양하였다.   이 대목은 이륙사가 노신이 중국좌익문단에 합세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는 이륙사가 한 아래의 말에서 진일보 입증할 수 있다. 국민당의 쿠테타로 하여 상해에 모여온 ‘원기 왕성한’ ‘젊은 프로학자’들이 극좌적인 태도로 노신을 공격할 때 노신은 “프로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하여 아버지 같은 애무로서 푸레하노프, 루나차르스키들의 문학론과 소비에트의 문예정책을 번역 소개하여 중국프로문학을 건설”하였다.6) 당시에 ‘카프’계통의 작가, 비평가들이 노신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이륙사의 이런 견해는 특별히 주목되는 점이다.   이륙사는 북양군벌정부와 국민당 당국이 노신을 박해한데 대해서도 통분해마지 않았다. 그는 노신의 창작생애가 너무 짧은 것을 애석해하면서 노신이 후기에 “작가로서의 화려한 생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된”원인은 국민당정권의 박해로 하여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아나기에 더 바쁘게”한데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관점은 이경손처럼 노신에 대해 편견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노신의 후기에 창작원천이 고갈되었다고 폄하하는 의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3.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문제      이륙사의 생평에는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일부 남아있다. 이것을 구명하는 일은 비교적 어려운 작업이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여러 면에서 자술과 가설을 고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자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심중히 고증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이륙사의 자술에 나타난 문제점을 제기하고 논의하려 하는데 우려심도 없지 않아 있다. 광복 전 많은 한국문인들이 친일경향을 나타낸데 반하여 이륙사는 독립투사, 저항시인으로 추대되어 한국현대문학사에서는 더없이 귀중한 존재로 나서고 있다. 이런 이륙사에게서 흠집을 찾아내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어쩐지 위구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 학문의 사명이라고 자처해 온 이상 아는 대로 연구 선색을 제공하고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것은 한국에서 이미 정설로 된 듯싶고 무릇 이륙사의 생평을 거론하면 반드시 그와 노신과의 만남이 빠지지 않고 소개된다. 예컨대 김학동(金㶅東) 편저로 된 에서는 이륙사와 노신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은 그 표제와는 달리, 노신문학을 본격적으로 다룬 이라 할 수 있다. 육사는 중국에 있을 당시 노신을 직접 만났을 뿐만 아니라, 노신의 소설 을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이때 육사는 호적, 서지마, 노신 등을 포함한 중국근대문학에 경도되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런 소개는 완전히 이륙사의 자술에 근거한 것이다. 양행불의 추도식에서 노신과 만난 경과에 대해 이륙사는 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차는 만국 빈의사 앞에 닿았다. 간단한 소향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마기에 검은 ‘마괘아’를 입은 중년 늙은이가, 생화에 쌓인 관을 붙잡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란 것을 말하고 난 10분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 앞이며 처소가 처소인 만큼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였다.     이상의 서술에서 우리는 이륙사가 노신을 더없이 존경했다는 것, 노신도 생면부지의 조선청년을 아주 따뜻이 대해주고 초면에도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가 될 수 있는 훌륭한 분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아래에 이 기술을 권위인사와 학자들의 서술과 대조해 보자.    양행불의 장례식 상황에 대해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권위인사인 정사원(程思遠) 주필로 된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6월 20일 오후 2시, 폭우가 쏟아졌다. 양행불 장례식은 만국 빈의관 영당(靈堂)에서 거행되었다. 국민당 특무들은 또 동맹의 기타 지도자들을 암살한다는 소문을 퍼뜨리었다. 송경령, 채원배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만국 빈의관에 가서 의연히 조문을 하였다. 노신도 조문하러갈 때 집을 나서면서 열쇠를 두고 나갔는데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각오를 보여주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노신은 비를 무릅쓰고 귀로에 올랐는데 그 비속에 충만된 피비린내를 감수한 것 같았다.7)    중국의 노신연구 학계에서 권위학자들인 임비(林非), 유재복(劉再復)이 쓴 에는 이 일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6월 20일, 양전(楊銓,양행불-필자 주)의 장례식이 만국 빈의관에서 거행되였다. 국민당특무들은 채원배와 노신을 암살하련다는 요언을 사처에 퍼뜨리었다. 이 날 오후 노신은 이미 희생될 사상적 준비를 충분히 하고 아주 침착하게 옷을 갈아입고 대문 열쇠를 조용히 허광평에게 넘겨주었다. ... 그리고는 정오에 온 허수상과 함께 대문을 나섰다.   만국 빈의관의 장엄하고 엄숙한 회장에는 심심한 애증의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몇 십 명의 조객들은 문어귀에 서서 감시하는 특무들을 멸시하면서 가슴을 뻗치고 회장에 들어섰다. 송경령과 채원배는 이미 양전의 영구 앞에 서있었다.8)          이 몇 가지 서술을 대조해 보면 일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1)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륙사는 노신이 송경령과 동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의 기술에 의하면 양행불의 장례식에 송경령(宋慶齡)과 채원배(蔡元培)가 동행한 것으로 되어 있고 노신에 대해서는 별도로 기술하고 있다. 노신의 이 날 일기에도 “점심에 계시(季市, 許壽裳--필자 주)가 왔는데 오후에 둘이 함께 만국 빈의관에 가서 양행불의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라고 적혀있다.9) 임비, 유재복의 기술에는 송경령과 채원배가 노신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빈의관의 양행불 영구 앞에 서있었고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허수상이라고 하였다. 보다싶이 과 임비, 유재복의 의 기술은 이륙사가 에서 한 기술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노신과 동행하여 만국 빈의관에 들어온 사람은 송경령이 아니라 허수상이며 송경령은 노신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채원배와 함께 양행불의 영구 앞에 서있었다는 것이다.      2) 노신의 反滿사상과 ‘마괘아(馬褂兒)’문제     노신의 반만 사상에 대해 중국에서는 여러 민족의 상호 단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고려한 모양인지 별로 거론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노신은 당시 시대적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분명히 반만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노신이 1933년에 만족(滿洲族)의 대표적 의상인‘마괘아’를 양행불의 장례식에서 그냥 입고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마괘아’는 중국어로 ‘馬褂’, ‘馬褂兒’라고 하는데 기마민족인 만주족들이 말 타고 싸우는데 편리하도록 허리까지 짧게 만든 웃옷이다. 명 왕조 이전에 중국의 한족들은 무릎 아래까지 길게 내리 드리운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는데 만족이 중국을 통치하면서 ‘마괘아’와 같은 만족의상을 입기 시작하였다. 청조말기에 조정이 부패해 지고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될 위기에 처했을 때 한족들에게는 반만 사상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고 구국, 애국을  ‘만청(滿淸)’정부를 반대하는 것과 직결시키기도 하였다. 손중산이 조직한 동맹회의 誓約盟書에도 라고 쓰여 있고10) 노신이 일본에 있을 때 가담한 광복회의 서약서에도 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한다.11)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젊은 시절의 노신도 반만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 유학 간 후 제일 먼저 청 왕조가 한족들에게 강요한 치욕적인 머리태를 베여버리고 “나는 나의 피를 조국에 바치련다(我以我血薦軒轅)”고 선언하였고 또 한족들의 강산을 광복하려는 에 가담하였다. 이런 경향은 그의 문학작품에서도 간간이 노출되고 있는데 에서 丁擧人의 금은보화를 실어간 신해혁명시기의 ‘혁명당’도 바로 명왕조의 말대황제인 숭정(崇禎)황제를 기리고 명 왕조를 ‘광복’하려는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 노신의 수필 에서도 노신은 한 고향사람인 범애농이 일본에서 무턱대고 자신을 반대할 때의 감수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처음에는 세상에서 제일 미운 것이 만주족이라고 생각했댔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 버금이고 제일 미운 것은 범애농이였다.” 여기에서 노신은 젊은 시절부터 청조의 만족통치에 대단한 적개심을 가지였고 한족으로서의 민족적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일본에서 귀국한 후 처음에는 주변사람들의 풍습에 따라 간혹 ‘마괘아’를 입기는 하였으나 1927년 1월 후부터는 ‘마괘아’와 ‘서양 마괘아’라고 칭하는 양복을 한 번도 입지 않았고 서거할 때까지 줄곧 한족들의 대표적의상인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필자가 노신이 1902년부터 1936년까지 남긴 사진 114점을 조사해 보았는데 1926년까지의 사진 40점 중에 ‘마괘아’를 입은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그것도 대체로 敎師직과 교육부 공무원으로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마괘아’를 입은 장소였다. 1927년 1월부터 서거할 때까지의 74점 사진 중에는 ‘마괘아’를 입은 사진이 한 점도 없다.12) 아마 청조 시기 근 300년 입고 있던 ‘마괘아’를 관습의 힘에 의해 하루아침에 벗어버리지 못하다가 점차 반만 사상이 의상에까지 신경 쓰게 된 것이 아닌가고 추정된다. 혹자는 이륙사가 중국 의상문화를 잘 알지 못해 두루마기를 ‘마괘아’로 잘못 인식하지 않았는가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륙사가 노신이 두루마기 위에 ‘마괘아’를 입었다고 서술한 것을 보면 이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 1991년 7월에 북경 노신박물관에서 일보던 張연구원한테도 이 일을 자문해보았는데 그도 단마디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3) R씨의 신분과 노신을 만난 장소의 분위기가 석연치 않다.     에 따르면 R씨는 상해 불란서 조계지 여반로(侶伴路)의 서국(書局) 편집원이다. 그는 노신과 사전에 아무런 약속이 없는 상황 하에 양행불의 장례식에서 한 무명의 조선청년을 노신에게 스스럼없이 소개할 수 있는 미스터리 식 인물이다. 사실 이날 노신은 국민당 특무들에게 피살될 각오를 하고 집 열쇠마저 두고 나왔으며 추도식은 특무들의 삼엄한 감시 밑에 있었고 일기도 좋지 않아 폭우가 억수로 퍼부었다. 이처럼 열악한 천기와 수시로 총알이 날아올 수 있는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노신이 이륙사와 같은 무명의 조선청년을 만나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있었겠느냐가 의문스럽다.   4) 노신이 양행불의 ‘관을 붙잡고 통곡했다’는 문제     노신은 언제나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공적인 장소에서는 냉혹할 정도로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중국문인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찾아볼 수 있는 자료에는 노신이 양행불의 추도식에서 관을 붙잡고 통곡하였다는 서술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륙사의 기술과  임비, 유재복의 다음과 같은 기술을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만국 빈의관의 장엄하고 엄숙한 회장에는 심후한 애증의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 처량한 애도곡이 울리는 가운데, 비애에 찬 흐느낌 소리 속에서 사람들은 묵묵히 선서하는 듯하였다. 영별이외다! 하지만 당신이 채 걷지 못한 길을 우리 모두가 걸어갈 것입니다.                                                                                       -- 임비, 유재복     이와 달리 이륙사의 기술처럼 관을 붙잡고 통곡하였다는 것은 노신의 종래의 성격, 이미지 그리고 장소의 분위기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서 역시 중국인들에게 잘 접수되지 않는 점이다. 낭만주의 시인인 곽말약(郭沫若)이라면 이런 모습을 보일런지 모르지만 노신의 경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륙사의 에 왜 이런 묘사가 나왔겠는가는 한번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노신은 양행불 추도식이 있은 이틑날에 일본 벗(樋口良平)에게 시 한수를 써서 증송하였는데 이 시는 후에 라는 제목으로 많은 저서에서 수록되고 있다. 시 원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豈有豪情似舊時,        花開花落兩由之,        何期淚灑江南雨,        又爲斯民哭健兒。13) (대의: 그 옛날 호기와 격정 어디로 갔나        꽃이 피고 지여도 할 말이 없구나        어느새 눈물이 강남의 비 되어 쏟아지는데        여기 백성들 또 건아를 위해 통곡하누나 )      이 시에서 ‘눈물이 강남의 비’로 되었다거나 ‘건아를 위해 통곡’한다는 것은 단지 문학적 표현으로서 이 시를 근거로 노신이 추도식 현장에서 통곡했다고는 할수 없다. 아마도 이 시가 항간에서 노신이 추도식 현장에서 통곡했다는 것으로 와전되지 않았는가고 추정된다.   5) 고쳐써야 할 이륙사 연보(年譜)     지금까지 한국에서 출판된 이륙사 관련저서에는 이륙사가 노신을 만난 시일이 모두 ‘1932년 6월 초’로 되어있다. 김학동 편저로 된 (새문사, 1986)에서 이륙사가 노신을 만난 시일을 1932년 6월 초라고 쓰고 있고 심원섭 편주로 된 (집문당, 1986)의 작가연보에도 “1932년 (29세) 6월 초 만국 빈의사에서 노신을 만나다.”라고 쓰여 있다. 이동영 편으로 된 (문학세계사,1981)의 에는 “1932년 6월 초 어느 날 중국과학원의 부주석이요 국민혁명의 원로이던 양행불의 호상소인 만국 빈의사에서 노신을 만났으며...”라고 적혀있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자술의 진실성 여하를 잠시 제쳐놓더라도 이 연보는 틀린 것이다. 양행불의 장례식은 1933년 6월 20일이다. 여기에서 우선 연도가 틀리며 일자도 틀리게 적혀있다. 양행불이 암살된 날은 6월 18일 (일요일)이고 장례식은 6월 20일 (화요일)인데 이륙사는 ‘6월 초’의 어느 ‘토요일’ 아침에 조간신문에서 양행불 피살 기사를 읽었고 그 뒤 3일후에 장례식에 참가했다고 쓰고 있다. 이는 기억의 오차라고 추정할 수도 있는데 주석을 달아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문제는 이왕의 연보에서 이륙사의 1932년 행적이 잘못 되였으면 1933년의 행적도 따라서 의문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것을 자그마한 기억오차로만 간주하지 말고 보다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심중한 검토를 필요로 하고 있다.      4. 주석을 달고 시정해야할 일부 문제     이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집필되었기에 오차가 나타난 것은 피면할 수 없다고 인정된다. 그런데 지금 을 출판할 때마다 이런 오차에 대해 주해를 달지 않고 그대로 답습한다면 독자들에게 그냥 ‘오독’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필자는 여러 개 판본으로 된 을 두루 살펴보았는데 모두 똑 같은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문장의 순서에 따라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노신이 1917년에 귀국하여 절강성의 사범학교와 소흥 중학교 등에서 리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는 문제 - 노신은 1902년에 일본 유학을 갔고 1909년에 귀국하여 교편을 잡았고 1912년에 교육부에 취직하였다. 그가 작가적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1918년에 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2) 노신이 북경에서 주작인, 경제지, 심안빙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였다는 문제 - 노신은 문학연구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지 않았고 회원으로 된 적도 없다. 다만 문학연구회의 결성을 지지, 성원하였을 따름이다.   3) 1928년에 중산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상해에서 지를 주재하였다는 문제 -  노신은 1927년 4월에 중산대학 교수직을 사직하였고 동년 9월에 광주를 떠나 10월에 상해에 이주하였다. 당시 상해에는 지가 간행되지 않았고 그 후 1930년 1월에 지가 창간되었는데 노신이 이 간행물의 주필로 되었다.      4) 노신이 1931년에 상해에서 체포되었다는 문제 - 1931년에 ‘좌련 5烈士’중의 유석(柔石)이 체포될 때 노신의 도서출판 계약서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이것을 발견한 특무들은 노신의 집 주소를 대라고 핍박하였으나 유석은 시종 불복하였다. 이런 정세에서 노신은 친우들의 서신들을 불살라버리고 일본인 우치야마(內山完造)씨의 도움을 받아 온 가족이 황륙로 화원의 한 일본 여관에 피신하였다. 사람을 질식케하는 작은 방에서 노신 일가는 하나의 침대를 사용하면서 한 달 동안이나 피신생활에 시달리었다. 아마 이 일이 외부에는 노신이 체포되었다고 와전된 듯싶고 이륙사도 그 소문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5) 국민정부의 어용단체인 를 반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에 서거하였다는 문제 - 현존 자료를 살펴보면 이 시기에 국민당 어용단체인 라는 조직이 없었다. 노신은 임종 전에 트로츠키 파 진중산(陳仲山)과 논쟁을 벌린 일은 있다.   6) “유명한 오사(五四)운동이나 오주(五州)운동”- ‘오주’운동은 ‘오삼십’(五卅)운동의 오기(誤記)이다. ‘5.30’운동은 1925년 상해에서 일본제국주의와 북양군벌정부가 파업에 나선 상해의 방직노동자들을 참살하여 발생한 혁명적운동이다.   7) 1926년 4월 15일 장개석의 쿠데타- 장개석의 쿠데타는 ‘1927년’의 오기이다.                  5. 맺음말     이륙사의 은 학술적으로 노신의 문학세계를 평론하려한 정래동이나 신문기자 신분으로 노신의 생활을 살펴보려 한 신언준과는 달리  노신 숭배자이며 저항시인으로서의 이륙사의 숭배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비교적 전면적으로 노신의 문학세계에 접근하고 높은 평가를 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도 갖고 있다. 때문에 일부 에서 을 으로 고친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이 문장은 노신서거 후 4일 만에 발표된 장편추도문이기에 일부 문제점도 안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필자는 이 논문을 집필하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다. 독립투사이고 저항시인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는 이륙사의 자술에서 흠집을 찾아내고 문제점을 제기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여간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할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이 문제를 제기하려고 했는데 동료들의 권고로 포기하였었다. 필자는 종래로 이륙사를 숭배하는 사람으로서 이륙사의 독립투사로서의 공적과 저항시인으로서의 위상을 부정하려는 시도는 조금도 없다. 하지만 진실을 구명하여야한다는 학자의 사명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다.     비근한 예로 일본 학자 와타나베 죠우(渡邊 襄)씨는 노신을 숭배하는 입장이면서도 노신의 자술에서 ‘환등(幻燈)사건’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많은 정력을 투입하여 조사, 연구하였다. 그리고 논문 를 발표하였다.14) 이처럼 자신이 숭배하는 문인일지라도 진실은 구명되어야 한다는 태도는 아마 모든 학자들의 공동한 인식일 것이다. 거기에 또 돋보이는 것은 중국학자들이 이 논문을 중요시하고 학술논문집에 실어준 것이다.   이륙사의 자술에 나타난 문제점을 해외의 한 俗人이 거론한다는 것이 실로 외람되고 죄송스러운 줄은 알고 있는 바이지만 순전히 학술적 입장에서 출발한 본문의 취지를 넓은 아량으로 대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4. 6     참고문헌   김학동 편저: , 새문사, 1986 심원섭 편주: , 집문당, 1986 이동영 편: , 문학세계사, 1981 《魯迅日記》:《魯迅全集》15捲, 人民文學齣版社,1981 林非、劉在復:《魯迅傳》, 中國社會科學齣版社,1981 程思遠 主編:《中國國民黨百秊風雲》,延邊大學齣版社,1998 《魯迅》(影集):北京魯迅博物館 編輯,文物齣版社,1976    주: 1) , 제290페이지  2) , 정음사, 1980, 제76페이지    3) , 1936년 1월 6일 4) , 정음사, 1980, 제77페이지  5) 동상서, 제83페이지  6) 동상서, 제88-89페이지  7)  《中国国民党百年风云》, 程思远主编,延边大学出版社, 1998, 第424-425页  8) 《魯迅傳》: 林非、劉再復,中國社會科學出版社,1981年,第312-313頁  9) 《魯迅日記》:《魯迅全集》第十五卷,第85頁,人民文學出版社,1981  10) 《中国国民党百年风云》,程思远主编,延边大学出版社,1998, 第44页  11) 동상서,第37页  12) 《魯迅》:北京魯迅博物館編輯,文物出版社,1976  13) 《魯迅全集》15卷, ,第85頁, 人民文學出版社, 1981  14) 《日本學者中國文學硏究譯叢》(第三輯),吉林敎育出版社, 1990, 第154頁     《朝鲜-韩国学语言文学研究(3)》(民族出版社‘北京’2006.2) ==================================   [ 2016년 12월 26일 08시 58분 ]     2016년 12월 22일 스페인 헤로나, 베트남 출신 Quoc Co Giang, Quoc Nghiep Giang 형제가 헤로나 성당 앞에서 머리 위에 머리를 맞대고 계단을 올라가는 기네스 신기록에 도전. 두 사람은 당일 52초 동안 총 90개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성공!!! [ 2016년 12월 26일 08시 58분 ]     [인민망 한국어판]에서ㅡ   [ 2016년 12월 26일 08시 58분 ]      
59    력사, 문학, 그리고 미래... 댓글:  조회:2717  추천:0  2016-12-25
중국 문학사는 1949년이 분기점이 된다. 1840년 아편전쟁부터 1919년 5·4운동까지를 진다이(近代), 1919∼49년을 센다이(現代)로 부르는 시기 구분에 따라 49년 중화인민공화국 출범 이후의 문학을 중국은 당다이(當代) 문학이라 이른다. 중국 당다이 문학은, 다시 말해 중국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의 문학을 가리킨다. 90년대 들어 몇몇 학자들이 20세기 전체의 흐름에서 중국 문학사를 조망하는 작업을 시도했으나, 21세기 들어서도 당다이 문학은 여전히 문학용어로 쓰이고 있다. 49년 이후 중국 문학은 중국 현대사와 함께 부침을 거듭했다. 중국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문학은 시대의 거울이었다. 그 60년 세월을 되짚는다.   손민호·이에스더 기자         라오싼제 하방에서 복귀한 지식청년 … 문학 조류 주도 ‘라오싼제(老三屆)’란 말이 있다. 1967∼69년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세대를 가리킨다. 이들 지식청년(지청)이 문화혁명 시기 전국 농촌에 투입된다. 이른바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 또는 하방(下放)이다.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예신(葉辛)에 따르면 문화혁명 시기 십 년간 하방에 동원된 도시 지청은 1700만 명에 달한다. 상하이에서만 50만 명이 넘는다. 문화혁명이 끝난 뒤 이들이 도시로 상경한다. 70년대 후반 이후 신시기 문학은 이들 복귀한 지청에 의해 주도되었다. 80년대 상흔문학(傷痕文學)·반사문학(反思文學)·뿌리찾기문학(심근문학·尋根文學)의 조류는 지청이 각자 처한 입장에 따라 그려낸 문화혁명의 문학적 초상화였다. 말하자면 문화혁명은 “20세기 중국 문학의 마르지 않는 샘”(비평가 천쓰허)이었다. 몽롱파 서정 강조 … 서슬 퍼런 문혁시절 자생적 활동     ‘몽롱(朦朧)’한 시를 썼다 하여 ‘몽롱파’다. 여기엔 부정적인 함의가 있다. 문학마저도 분명하고 명확했던 문화혁명 시절, 젊은 몽롱파 시인들은 주관과 서정을 강조했다. 이들이 구사한 알쏭달쏭한 표현은 기존의 정치 서정시와 전혀 다른 문학적 입장을 드러냈다. 하여 보수적인 문단은 그들을 ‘몽롱파’라 이르며 비난했다. 여성시인 수팅(舒婷·사진)은 지금도 인정받는 몽롱파 시인이다. 1951년 푸젠성(福建省)에서 태어났고, 베이징의 공장에서 일하던 70년대 중반 베이다오(北島)·장허(江河)·구칭(顧城) 등과 함께 지하 문학서클을 조직했다. 그 서클이 78년 무크지 ‘오늘(今天)’을 창간한다. 몽롱파가 첫 선을 보인 순간이다. 그러나 문단은 이들을 정신오염척결운동의 대상자로 지목하고, 몽롱파는 끝내 83년 활동을 중단한다. 몽롱파는 당다이 문학 최초의 유파다. 문화혁명 시기 감시를 무릅쓰고 자생적 문학운동을 펼쳤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뿌리찾기문학 향토색·전통 중시 … 주류 문화 은근히 비판     1984년 리투오(李陀)가 ‘인민문학’ 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듬해 한사오궁(韓少功·사진)이 ‘작가’에 ‘문학의 뿌리(文學的根)’란 글을 발표한다. 한사오궁은 거기에서 “문학엔 뿌리가 있다. 문학의 뿌리는 마땅히 전통문화의 토양 깊은 곳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향토색 짙은 고향 이야기, 전통 문화에 얽힌 옛 이야기 등을 적극적으로 재현한 소설 양식이다. 심근문학의 의도는 분명하다. 고유의 것을 말함으로써 사회주의 이념과 서구 문명이 판치는 중국의 주류문화를 비판한다. 한사오궁의 『마교사전(馬橋詞典)』(1996)이 대표작이다. 작가가 문화혁명 시기 후난성(湖南省)의 오지 ‘마교’에 하방됐을 때의 경험을 옮겼다. 소설은 표준 중국어와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이는 마교 방언을 사전처럼 정리했다. 소설 형식에서도 서구 근대소설의 틀을 따르지 않고 중국 문인소설의 전통을 잇는다. 중국은 80년대 이후 전통문화 복원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심근문학은, 그러한 움직임의 문학적 표현이다. 선봉문학 문혁 이후의 첫 문학세대 … 자유롭고 파격적     1980년대 후반에 등장한 선봉(先鋒)문학은 중국 당다이 문학에서 가장 전위적인 문학 유파다. 다른 어떤 장르보다 폭력과 피와 죽음이 직접적으로 서술된다. 살점 너덜너덜하고, 피 뚝뚝 듣는 살벌한 장면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재현된다. 현재 가장 주목 받는 중국의 세 작가 위화(余華·사진)·모옌(莫言)·쑤퉁(蘇童)이 20년쯤 전에 선봉문학을 주도했다. 선봉문학은, 이른바 지청문학 이후 세대의 첫 문학 사조다. 특히 위화와 쑤퉁은 1960년대 출생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문화혁명을 온몸으로 겪지 않고 문학에 뛰어든 첫 세대다. 따라서 이전 세대보다 훨씬 자유로이 문화혁명을 발언하고 중국 사회를 비판한다.  무엇보다 위화의 작업은 놀랍다. 그는 80년대 선봉문학으로 시작해 90년대 신사실주의와 신역사주의, 21세기 괴탄문학에 이르기까지 20년 동안 중국 당다이 문학의 최첨단 경향을 선도한다. 국내외 문단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독자 호응도 상당하다. 특히 캐릭터 창출에 탁월하다는 평이다. 『허삼관매혈기』(1996)의 ‘허삼관’은, 루쉰(魯迅)의 『아Q정전』에 등장하는 ‘아Q’ 이후 최고의 소설 캐릭터란 평가다. 21세기 문학 급속한 상업주의 대세 타고 문화혁명 조롱     21세기 들어 중국 문학출판계는 급속한 상업주의의 길을 걷는다. 그 선두에 ‘80후(後)작가’가 있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작가란 뜻으로, 10∼20대의 사랑과 방황을 그린 청춘소설을 주로 쓴다. 수려한 외모 덕분에 연예인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 대표적인 작가로 궈징밍(郭敬明·25·사진)과 한한(韓寒·21)이 있다. 궈징밍은 중국 신경보(新京報)가 발표한 ‘2007년 중국 부호작가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고, 한한은 재경시보(財經時報)가 지난해 발표한 ‘지난 10년간 인세 수입을 근거로 한 부호작가’ 3위에 올랐다. 90년대 중반 문단에선 ‘괴탄(怪誕)문학’이란 말이 생겨났다. 문화혁명을 공포나 반성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일종의 유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문학 조류다. 만화처럼 과장된 기법으로 문화혁명을 비꼬고 의식적으로 성애와 혁명을 뒤섞어 황당한 효과를 연출한다. 옌롄커(閻連科·49)가 대표적인 작가다. 특히 『인민을 위해 봉사하라(爲人民服務)』은 노골적인 성애 묘사로 중국 대륙에선 금서로 묶였지만 전 세계 십여 개 국가에 이미 소개돼 있다. 사회주의 찬양으로 출발 시장지향적 대중문학까지     중국 건국 이후 중국 문학은 사회주의 거대 담론 아래에서 개성을 잃고 이렇다 할 뚜렷한 유파를 형성하지 못한다. 1917년부터 49년 중화인민공화국 출범 전까지 활발했던 30여 년간의 중국 문단을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고 중국 당다이 문학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중국 문학은 중국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해 왔다. 49년 이후 중국 문학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된다. 49년 건국 이후 66년까지 17년간의 사회주의문학, 문화혁명 십 년간의 문화혁명 문학, 76년 개혁개방 이후의 신(新)계몽문학, 그리고 89년 천안문사건 이후 다원화 문학의 시기가 그것이다. 건국 이후 17년간, 중국 문학은 사회주의 공화국에 대한 찬송이 주가 되는 정치 서정시와 혁명 영웅의 로맨스(romance) 일색으로 뒤덮인다. 이러한 정치적 경향은 이어지는 문화혁명 10년간 더욱 극단적으로 펼쳐진다. 76년 문화혁명 종식과 함께 ‘북경의 봄’이 찾아오지만, 웨이징성(魏京生) 같은 인권투사는 감옥에 갇힌다.  문단에는,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다시 핀 신선한 꽃’(50년대 반우파 투쟁 때 비판 받은 작품 모음집의 이름. 1979년 상하이문예출판사 발간)의 시대가 열린다. 30년대 후반 ‘구국과 혁명’의 정치 서사에 의해 단절됐던 계몽적 문학의 전통이 개혁·개방과 더불어 부활했다는 의미다.  개혁·개방 시기 최초의 문학 유파는 문화혁명 당시 지하 서클에서 활동한 젊은 시인들에 의해 등장한다. 베이다오(北島)와 수팅(舒) 등을 중심으로 한 ‘몽롱시파(朦朧詩派)’다. 이들은 1978년 ‘오늘’이란 잡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해, 당시까지 군림했던 정치적이고 명징한 언어 체계를 몽롱한 시어로 부정한다. ‘비굴은 비굴한 자의 통행증, 고상은 고상한 자의 묘비명’이라는 베이다오의 시구는 문화혁명에 대한 대표적인 부정 담론으로 일컬어진다. 한편, 수팅은 열린 사랑을 노래한 ‘상수리나무에게’ 라는 시를 지어 닫힌 중국인의 마음을 열어젖힌다. 소설 영역에서는 상흔문학(傷痕文學)·반사문학(反思文學)·뿌리찾기문학(심근문학·尋根文學)·선봉문학·신사실주의 등의 유파가 차례로 나타나 새로운 계몽 서사를 주도하거나, 전위적인 탐색을 담당한다. 이들은 80∼90년대 중국 문학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상흔문학은 문화혁명이 중국 인민에 끼친 재난을 고발하고 상처를 폭로하는 문학으로, 루신화(盧新華)의 소설 『상흔』과 바이화(白樺)의 소설 『짝사랑』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상흔문학 작가는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으로 참가한 경험이 있어, 도덕적 참회를 주제로 한다는 특성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반사문학이 등장한다. 반사문학 작가들은 문화혁명 당시 우파로 몰리거나 감옥살이를 하는 등 당국의 탄압을 받았던 이들이 중심이 된 문학사조다. 상흔문학 작가들보다 연배가 높다. 장셴량(張賢良)의 소설 『남자의 반은 여자(男人的一半是女人)』 등이 대표작이다.  이상의 문학 계보가 참여문학의 계보에 해당한다면 1985년에 접어들면서 깃발을 올린 뿌리찾기문학과 이후 모더니즘 성향의 선봉문학은 문학 자체의 내적 규율과 관심으로 회귀하는 순수문학 계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뿌리찾기문학은 전통 문화에 대한 새로운 문학적 탐색을 시도하지만, 기법은 서구의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적극적으로 흡수한다. 한사오궁(韓少功)과 자핑와(賈平凹)가 대표적인 작가다.  1980년대 후반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선봉파는 모더니즘 사조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중국적 특색을 드러낸 새로운 문학 유파다. 형식의 탐구와 실험적 문체로 선봉파란 호칭을 얻었다. 류쑤어라(劉索拉)의 『너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가 선봉문학을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되지만, 위화(余華)·모옌(莫言)·쑤퉁(蘇童) 등 최근의 인기작가도 처음엔 선봉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신역사주의와 신사실주의가 선보인 것도 80년대 후반이다. 역사적 사건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신선한 수법으로 서술한 역사소설이 신역사소설이고, 이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보다 더 생활 본래의 모습에 천착한 리얼리즘 소설이 신사실소설이다. 위화의 『허삼관매혈기』, 쑤퉁의 『홍등』이 신역사소설이라면, 류전윈(劉震雲)의 『닭털 같은 나날』은 신사실소설이다. 1989년 천안문사건이 발발한다. 시위에 참여했던 수많은 지식인이 투옥되거나 망명한다. 문학에도 여파는 컸다. 이미 해외로 망명하여 중국어로 창작 활동을 벌이는 가오싱젠(高行健)이나, 천안문사건 이전에 해외에 있다가 항의 성명을 내고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베이다오 같은 망명파 작가들이 생겨난다.     90년대 이후 중국 문학은 시장에 영합하는 세속적인 대중문학이 주류를 이룬다. 급속한 경제 성장에서 소외된 노동자·농민의 열악한 현실을 반영하는 신현실주의 작품도 눈에 띄지만, 시장지향적 대중문학은 시류에 편승해 큰 인기를 누린다. 웨이훼이(衛慧)의 성애소설 『상하이 베이비』가 대표적이다. 최근엔 20대 초반 연령의 인터넷 작가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박재우 한국외대 중국어과 교수·전 한국 중국현대문학 학회 회장
58    영웅이 없는 시대에 그저 하나의 사람이 되고싶을 뿐... 댓글:  조회:3008  추천:0  2016-12-25
  출전: 우 성(吳 晟)작  __ 중산대학출판사    몽롱시는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는가(1)     1) 인성(人性)의 세계 구축   몽롱시파는 “ 시인은 응당 작품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야 하는데, 그것은 진실하고 독특한 세계이며 정직한 세계이자 정의와 인성의 세계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인성의 세계란 문화혁명 10년 동란 중에 파시즘의 독재에 대항해온 인도주의를 말한다. 시대에 역행한 때문에 보통 사람의 가치와 존엄성은 짓밟혔고, 인격과 인성은 왜곡되고 추상화되었으며,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는 일종의 비역사화, 비정상적 환경 이화(異化)에 의해 오랫동안 적대시하며 그 괴리 속으로 빠져 들었다.      “ 까만 밤은 나에게 검은 안경을 쓰게 했다/난 오히려 그를 쓰고서야 햇빛을 찾았다”                                         (꾸청顧城 중에서)   황당한 시대는 광열(狂熱)에서 미망(迷惘)으로, 그리고 다시 깊이 사고하며 떨쳐 일어나는(深思奮起) 청년의 세대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인도주의를 기치로 내건 몽롱시라는 새로운 시의 풍조를 잉태하였다.  몽롱시가 사상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지향하는 가치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시켜, 새롭게 확립하는 것, 즉 인도주의를 부르짖은 것이다.      “ 영웅이 없는 시대에/ 난 그저 하나의 사람이 되고싶을 뿐이다 ”   이것은 베이다오(北島)가 라는 시에서 내뱉고 있는 장엄한 부르짖음이다. “하나의 사람이 되고 싶을 뿐”, 다시 말해 ” 진실“되고 ”정직“하며 ” 정의“롭고 또 ”인성“을 갖고 있는 보통 사람, 이것은 생활에 대한 최소한의 요구이다. 그러나 그 착오의 시대에 그러한 요구를 제기하는 것은 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 나는 사람이다/ 난 사랑이 필요하다/ 난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 안에 있기를 갈망한다/ 조용한 황혼을 지날 때면/ 요람의 흔들림 속에서/ 아들의 첫 번째 울음소리를 기다린다 /풀밭과 낙엽 위로 / 모든 진지한 눈빛 속에서/ 난 생활의 시를 쓴다/ 이 지극히 평범한 바램이/ 이제 와서 사람 구실하는 대가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이 베이다오의 시 은 에게 참혹하게 살해된 위루어커(遇羅克)열사에게 바치는 시이다. 그 의의는 이미 시 자체를 벗어나 보다 넓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저 인간과 요괴가 뒤바뀐 시대에 얼마나 많은 우루오커와 장즈신(張志新) 같은 “진지함”과  ”정직“, ” 정의“의 진리수호자들이 기본적 생존의 권리를 위해 젊은 생명을 바쳤던가. 또한 얼마나 많은 선량한 공민들이 이화(異化) 속에 왜곡당하고, 심령을 심각하게 상처받았는지 모른다. ” 나는 일찍이 형체가 없는 인간과/ 악수하였다, 한번 울부짖으니/ 나의 손은 화상을 입고 / 낙인이 찍혔다“에서 더 나아가 “ 나의 내면 깊은 곳에 / 낙인이 남겨졌다/” (베이다오의 ), 여기에서 “ 형체가 없는 인간” 은 10년간의 문화혁명 시기의 이데올로기를 가리킨다. 베이다오의 이란 시는 바로 인도주의의 찬가이다.      “ 부드러운 어린 풀들의 팔이 태양을 받쳐 든다 / 피부색이 다른 사람이 널 향해 간다 / 빛이 모여들고, 넌 벽시계처럼 종소리를 내고 / 산 정상에 쌓인 눈을 털어버린다 / 주름살 깊이 전율의 공포와 슬픔 / 마음은 다시는 무대 뒤로 숨지 않는다 / 책이 창을 열고, 새들은 무리지어 자유롭게 비상한다 / 늙은 나무는 다시는 코를 골지 않고, 다시는 마른 등나무를 가지고/ 어린 아이의 저 민첩한 종아리를 붙잡아 두지 않는다 / 보석 같은 열매가 소녀의 손 안에서 반짝이고 / 모든 사람들은 각기 자기 이름을 갖고/ 자기의 소리, 사랑과 소망을 갖는다 ...,”   이것은 1981년 제 5기에 발표한 시로, 시간적으로 보면, 분명 우리민족과 인민들이 10년 대란을 거쳐 새로운 삶을 획득한 것을 노래한 시이다. 아침의 태양은 벽시계처럼  저 황당한 시대에 대해 조종(弔鐘)을 울리고, 기나긴 밤과 적설의 냉혹한 겨울을 마감했던 것이다.  선량한 인민의 “전율의 공포와 슬픔”도 없애 버리고,  서로 경계하던 방어선도 없애고 나서,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하게 되었다. 한 때 황폐했던 학업이 다시 시작되어, 이상의 돛을 달았다. 사상이 해방되어, 새떼처럼 하늘 아래 자유롭게 비상한다.  노인들은 현상에 안주하지 않고, 아량 있고도 너그러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다시는 청년들의 손과 발을 구속하지 않는다. 소녀는 빛나는 사과를 받쳐 들고 있는, 여전히 아름다운 작은 천사이다: 한 때 자아가 왜곡되고 상실되었던 사람들은 사람됨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그 인격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_______      “ 바로 그렇게, 늦은 밤에서 늦은 밤까지/ 넌 매번 죽어갔고, 매번 다시 태어났다/ 생명은 연연히 이어지고, 지평선도 계속 연장되고/ 모든 이야기는 새로운 시작이 있는 것이니/ 그럼 다시 시작해보자꾸나”     “늦은 밤에서 늦은 밤으로”이어진 10년 동란 중에 우리 민족은 전대미문의 재앙을 맞아 준엄하고도 파멸적인 시련을 견디어냈다. 그러나 그녀는 한 거인 같아서 일단 일어서면, 아무도 다시 밀어 넘어뜨릴 수 없었다. 보라, 그녀는 동란 중에 새 삶을 획득했다, “ 생명은 연연히 이어지고, 지평선도 계속 연장되고” 그녀는 새로운 자태로 동방의 지평선 위에 우뚝 서있다. 만물이 다시 소생하고 모든 폐허가 다시 부흥하여, 우리 민족은 마치 막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이 새 날을 맞아 새로운 역사발전의 시대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수팅(舒婷)은 말하기를 “나는 내 자신을 통해 오늘날 사람들은 존중과 신임과 온난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할 수 있었다. 나는 가능한 한 시를 통해 사람에 대한 모든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  ”사람과 사람은 충분히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마음의 길을 따라가면 결국은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따라서, 그녀는 사람과 사람의 마음세계를 깊이 들어가 인성을 깊이 탐색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존중과 신임, 이해를 갈망하며, 더 나아가 집착하게 된다. 그녀는 이라는 시에서 ”모든 고난과 실패를 견디어내고/ 따뜻한 광명의 미래를 향해 영원히 날아오르는/ 아, 피 흘리는 날갯죽지/ 한 줄이라도 만족할 만한 시를 쓰고/ 모든 이의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 /모든 연대로 진입하고 싶다/ “   에서는:         오직 승인 받지 못할 때에만 / 비로소 특별히 용감하고 진실해 질 수 있는 것 / 비록 눈물처럼 부서져 내릴지라도 / 민감한 대지 / 아직도 곳곳에는 / 오래고 깊숙한 메아리 소리가 있다/   그녀의 에서 중심이미지는 “진주조개”이다. 인생의 가치를 상징한다. 시인은 그것을 시를 통해 “바다 눈물”의 결정체로 의미심장하게 보았다. 개체의 생명가치의 실현은 마치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같아서 무수한 어려움과 고통을 견뎌내어 무수한 실패의 엄중한 시련을 이겨낸 뒤, 마침내 생명의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에서도 지적하듯, 인생가치의 실현은 외부 현실 환경에 대한 투쟁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고질적 결함의 도전을 받아야 한다. 에서는, “하늘에서는/한 떨기 별이 되고 싶다”, “땅 위에서는/ 한 개의 등불이 되길 바란다”라 하면서 조금이라도 열기가 남아 있으면, 그만큼의 빛을 발하고 싶다고 한다. 개인 가치의 실현은 반드시 개인의 사회에 대한 책임과 공헌, 그리고 사회의 개인에 대한 승인과 존중이 결합되어야 하며, 어느 한 쪽만 강조하는 것은 모두 단편적인 것이다. 에선 생명을 “못"  “기계” “나뭇잎” “물보라” 등과 등가로 보는 가치관을 철저히 부정하였다.          누가 영웅이 이미 추인되었다고 말했나 / 사망은 잊혀질 수 있다/ 누가 말했던가, 인류 현대화의 미래가 / 반드시 생명으로 이처럼 선혈 낭자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맹렬한 공격으로 “발해 2호” 시추선 72명 대원들이 조난을 당하게 한 관료주의 작태는 사람들의 생명가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꾸청(顧城)은 말한다, “ 후에 아주 긴 사상반복의 과정을 겪었다 . 당시 서방문화가 중국대륙에 들어오도록 해금된 후, 하나의 유행이 생겨나, 영향력이 아주 컸는데, 이를 ”자아 찾기“라 불렀다. 나 역시 당시의 그 사상 논리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어 갔다.” *(주: 105) “자아 찾기”란 이것은 잃어버린 생존가치와 생명의 의미를 되찾자는 것이다. 꾸청의 시에 비교적 빈도 높게 나타나는 이미지는 “ 작은 풀” 이다.  그것은 “고통의 대지 위에서 성장해온, 그렇게 여리고 작게, 그렇게 밀집되어 하늘아래 서 있다. 더군다나 먹구름과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어떤 것도 피하지 못하고 모두를 다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그들을 알지 못하고, 색깔 고운 나비도 벌꿀도 날아오지 않으며, 아름다운 찬미의 말도 경이로운 탄식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태어나 성장하여, 작고 작은 꽃을 피워내며 자랑스럽게 머리를 쳐들고 있다“ *(주: 106) 이 평범하고도 보잘것없는 ”작은 풀“은 시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생명 의지의 창의적 표현이며, 역시 저 시대 청년들의 생존상태를 드러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비록 열악한 환경 조건 아래서, 심각한 기형으로 자라고, 사람들로부터 주목받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완강하고도 자랑스럽게 병든 것처럼 보이는 꽃잎으로 ” 머리를 쳐들고“ 자신의 가치실현을 위해 항쟁하고,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일시 유행했던 개인숭배나 영웅 신화에 대한 배반이나 전복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긍정이며, 예찬이다.   다른 몽롱시인과 다르게 꾸청은 보통사람의 생존 가치와 인생을 탐구하고, 사람의 자성(自性)의 본질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그 당시 나는 자연에 대하여 일종의 신앙을 갖고 있었고, 나의 자성에 대하여도 일종의 신앙을 갖고 있었다. 나는 자연 속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수많은 망상을 갖지 않게 되고, 내 생명의 자연미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느낀다. *(주 107) 그의 작품으로 보면, 이러한 자성은 인간의 자연성과 본질이다. 꾸청이 보기에, 그들이야말로 사람들이 특수시대에 이화되어 잃어버린 가장 진귀한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순박과 진실로 되돌아 가고, 사람의 자연성을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물고기고, 나는 새다/순은의 비늘과 깃털이 가득 나서“ ”가야금 줄을 강 뚝에 보내고/ 꿀을 꽃의 애인에게 보내는“ 인생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夢痕〉) 〈感覺〉에서 ”새빨감“과 ”연녹색“은 ”아이들“을 주제로 한 동화세계를 상징하며, 인간의 자연성을 은유한다.  ”한 무더기 죽음의 재 가운데/두 아이가 지나간다/ 하나는 새빨갛고/ 하나는 연록색이다“에서 인간의 자성과 본질 즉 자연성과 순진에 대한 회귀를 암시하고 있다.   양리앤(楊煉)의 〈푸른 광상곡〉은 “깎아지른 절벽 몸서리치면/ 흑색 메아리가 들리고”, “차디찬 도깨비 불 음산하게 흔들리면/ 시끄러운 대낮이 이미 죽어버렸다”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또 하나의 “향기로운 세계”를 환상하게 된다. 또 “”하늘과 대해의 흉금에는/ 천천만만 송이 자주 붓꽃을 가득 꽂고“, ”소녀들은 금 빛 조개껍질을 뛰쳐나가/ 시원한 달 빛 아래 노래하고/ 하늘은 아름답고, 바닷물은 조용한 데“, 깊은 사색을 거쳐 시인은  마침내 철저히 깨닫게 된다.      나의 자작나무가 침묵하고 있네 /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 돗대처럼 /  세계의 색체는 그의 발 아래 변화하고 / 바로 여기, 무수히 날아가 버린 순식간 / 그것은 햇볕을 고맙게 생각하지도 않고, 매미의 우수를 따라 노래하지도 않는다 / 오직 낳고 자라는 것만이 자신의 운명을 증명해 준다   자작나무는 시인의  “자아”를 나타내 준다. 시인은 개체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외부의 힘을 빌거나, 현실을 도피하거나, 환상에 희망을 걸거나 하는 것은 모두 쓸데없는 일이라 여긴다.             2) 이미지의 충격과 신속한 전환   새로운 시의 조류로서 몽롱시는 예술적으로도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시가는 형식의 위기를 맞고 있다. 많은 낡은 표현 수단은 이미 매우 부족한 상태이다. 은유. 상징, 통감(通感), 시각 변화, 관계 투시, 시공 질서 타파 등 수법을 자신의 시 속에 끌어 들여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 나는 영화의 몽따지 수법을 내 시 속에서 시도함으로써 이미지의 충격과 신속한 변환을 이루고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대대적 도약이 남긴 공백을 메꾸고자 한다. 또한 나는 시의 용량, 잠재의식, 순간 감수(感受)의 포착을 중요시한다. *(주 108)   신 중국 탄생 이후의 중국 시단은 기본적으로 현실주의와 낭만주의의 두 가지 창작방법을 조작하는 것이었다. 현실주의는 객관적 진실 반영을 특징으로 하여, 객관을 충실히 모사하는데 비해, 남만주의는 주관, 이상의 표현을 특징으로 하여, 주관, 이상에 대하여 아름다운 동경을 하고 있다. 70, 80년대에 들어서 사람들의 생활과 정감이 날로 풍부하고 복잡해 지며, 특히 젊은 이들이 10년 동란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심각한 상처와 환멸, 방황과 미망, 그리고 각성을 남겼다 섬세하면서도 민감한 여 시인인 수팅은 솔선해서 새로운 시의 조류의 미학선언인 〈나의 동시대인에게 바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의 처녀지를 개척하기 위하여 / 금지구역에 들어갔다, 아마도- / 바로 그곳에서 희생되어 / 비뚤어진 발자국을 남긴 것은 / 후세 사람들을 위해 / 통행증에 시인을 해준 것인가 보다 /   “마음의 처녀지를 개척”한다는 것은 예술적으로 낭만주의처럼 그렇게 감정을 직접 나타내거나, 이미지를 빌려서 상징, 은유 또는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몽롱시가 취하고 있는 “상(象)”은 대부분이 현실의 象이지만, 그 뜻은 현실 사물 자체가 아니고, 시인의 주관적 정서의 일종의 대응물이다. 의화(意化)되었기 때문에 취득한 물상이 그것 자신이었건 그것 자체가 아니건 심미적으로 불확정성과 다원성, 모호성을 조성하고 이에 따라 주제의 다의성과 복사성(輻射性)을 만들어 낸다. 몽롱시란 명칭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몽롱시의 예술적 가치 지향 중의 하나는 바로 이미지화- 이미지의 고도 밀집을 통해 충격의 태세를 형성하게 된다. 수팅의 〈思念〉을 보자.       한 폭의 색채현란하나 선감이 부족한 괘도, / 청순하나 해답 없는 대수 한 문제, / 한 줄 거문고 하나, 처마 낙수의 염주를 튀긴다, /  피안에 다다를 수 없는 한 쌍의 노. / 꽃봉오리처럼 묵묵히 기다린다, / 석양처럼 멀리서 주목하고, / 아마 먼 바다를 감추고 있나 보다, / 그래도 흘러나오면, 두 방울 눈물일 뿐.   그것은 누구를 사념한다거나, 어떻게 사념한다거나 하고 쓰지 않고, 일련의 이미지로써 사념의 특징을 포착하여, 사념을 깊이를 투시하며, 추상족 사념을 느낄 수 있는 구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괘도”는  “색체현란하나 선감이 부족”하고,  대수는 청순하나 해답이 없어서 사념을 포착하는 것이 분명한 데서 모호한 데로 운행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빗소리와 한줄 거문고가 화음을 이루고, 서로 받쳐 주면서 한 방울씩 빈 계단에 떨어지는 처마 빗물과 선사의 손안에 있는 염주가 상응 대조하여, 사념의 고적함과 지속성을 체험한다. 피안에 다다를 수 없는 노 한 쌍으로 사념의 영원과 집착을 느낄 수 있고, 꽃 봉오리도 사념이 기다림의 희망이 있어 아름다운 고통임을 비유한다. 석양은 사념이 아름다운 사물에 대한 연민과 사물에 충만한 생동의 이치를 포함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마음 속 깊은 곳에 먼 바다를 감추고 있으나, 흘러나오면 두 방울 눈물일 뿐이라 한 것은 사념의 풍부성과 심각성, 그리고 함축의 품격- 동방 민족의 심오함축적 정서적 특징을 나타내 주고 있다. 짧은 몇 줄의 시에서 사념의 품격을 남김없이 통쾌하고, 충분히 풍부하게 투시하고 있다. 이는 현실주의나 낭만주의가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수팅과 꾸청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이미지와 다르게 베이다오의 시의 이미지는 보다 냉엄하고 장려하며, 심지어 얼마간 황당기괴함까지 있다. 예를 들어 〈雨中紀事〉에서는 초현실주의 수법으로 직각을 썼다.        책이 탁자 위에 펼치면/ 푸석푸석 소리가 나네, 마치/ 불 속에서 나는 소리 같이/ 부채를 접은 듯한 날개/ 아름답게 펼치면, 심연의 상공에/ 화염과 새가 같이 있네   탁자 위에 펼친 책은 시인의 심미적 직각 속에서 갑자기 불속에서 푸석푸석하는 소리와 펼쳐진 날개로 바뀌고, 이는 각각 열정과 이상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잘못된 시대에 가슴 가득 열정이 충만하지만, 이상은 항시 물거품으로 변한다. 열정이 높아질수록, 이상이 더욱 고통스러워져, 마치 “화염과 새가 같이 있는” 것과 같고, 열정은 이상에 고통을 주고, 양자는 깊은 모순에 빠지게 되어, 비정상적 시대에 대한 시인의 분노를 표현해 주고 있다.   쟝허(江河), 양리앤(楊煉)의 후기 몽롱시 필묵을 원시 신화시대로 뻗어, 민족 문화의 심층구조를 다루면서, 민족 문화 정신을 발굴하고, 현대 동방의 역사시를 창조하고자 한다. 양리앤의 연작시 〈敦煌〉, 쟝허의 연작시 〈태양과 그의 반사〉는 모두 원시 신화로부터 제재를 따오고 있지만, 단순히 신화를 다시 서술한 것이 아니라, 신화 원형에 대한 개조를 통하여 선명한 현대 의식을 부여하고 있다. 〈태양과 그의 반사. 해쫒기〉에서는 “길 떠나던 그 날, 그는 이미 늙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태양을 쫒지 않았을 것이다/ 청춘 자체가 바로 태양인 것을”, “전설에 의하면, 그는 목이 말라 위수와 황하를 다 마셔 버렸다지만/ 사실은 자기자신을 가득 따라 태양에게 보낸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울퉁불퉁한 땅 위에 깔고/ 길이 있고, 주름 살이 있고, 말라버린 호수가 있어“, ”태양을 그의 마음 속에 잘 간직하고 있을 때/ 그는 태양이 매우 연약하서 아플 정도로 연약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 시는 신화 〈과부추일(誇父追日)〉의 완강한 투지와 희생정신을 보존하면서도, 과부라 하는 인류 주체성의 추상적 공동(空洞)을 버리고 그의 자신의 가치와 생명의 의의에 대한 추구를 추가시켰다. 그가 해를 쫒는 것은  인류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또한 자기 자신의 청춘불로를 위해서 이기도 하다, 과부와 태양, 즉 인류와 자연의 대항이 인류와 자연의 화합으로 개조되고, 자연이 인류를 위협하던 데서 인류에 의해 정복된 역사 과정과 사회 진화로 융화되어, 민족성과 현대 의식이 성공적으로 융합되는 것이다.                                      2007. 여름호에 발표    [출처] 중국의 몽롱시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1)|작성자 푸른섬  
57    몽롱시와 그 "찬란한 빛" 댓글:  조회:2374  추천:0  2016-12-25
중국 몽롱시의 황제이며 저명한 세계적 시인인 꾸청(顧城)= "태양을 쓰면 그 찬란한 빛을 써야하는데 자꾸 태양의 물리적성분이나 화학적 성분을 알려달라고 하지 마세요"   현대주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중국의 문학사조를 가리키는데, 서구의 모더니즘과 다른 중국적 특색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다르게 부르고자 하는 의도에서 도입된 문학사조의 명칭   모더니즘   민주주의와 소비문화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지속적으로 왜소화되는 개인의 무기력과 허무함을 특유의 스타일로 표현한 20세기 초에 대두한 문학사조     몽롱시 개인성과 자의식을 비일상적인 언어와 상징적인 기호체계를 통해 표현하는 특유의 스타일로 인해 젊은 시인들이 발표한 현대주의 계열의 시는 기성 문인과 평론가들에게는 매우 난해하게 느껴졌는데, 이런 난해성에 착안하여 현대주의 시에 대해 기성문인들이 붙인 희화적인 이름
56    시는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세계를 담아야... 댓글:  조회:2532  추천:0  2016-12-25
詩창작 실기에 대한 단상- 김경수  1.詩는 왜 쓰며 어떤 사람이 시인이 될 수 있는가  공자는 논어 에서 詩를 삼백수쯤 알게되면 한마디로 사악함이 없다고 했다 (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詩는 사람에게 모든 사물을 바로 보게 하며 또한 시로서 새나 짐승, 풀, 나무들의 이름도 많이 배우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에서 詩가 인간의 감정을 "카타르시스"해준다고 하였다.  허균은 정신이 빼어나고 음향이 밝으며 격이 높고 생각함이 깊으면 가장 좋은 詩가 된다고 했다.  심덕잠은 詩란 사람의 천성과 정서를 조정하고 인간관계를 향상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익은 詩는 교화(敎化)하는 것이니 힘써 그 뜻을 전달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인간이 잃어버린 순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순진성을 올곧게 되살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물의 본질을 직시하는 것이며 시가 가지고 있는 타성의 길을 벗어나는 일이며 삶이 가지고 있는 허위성을 깨트리는 일이다.  싸륵 싸륵 /설탕이 녹는다 / 그 정결한 투신 / 그 고독한 용해  아아 / 심야의 커피 / 암갈색 심연을 / 혼자 / 마신다  詩를 왜 쓰느냐란 질문을 자주 받는다. 이 詩가 그와 같은 회의나 해답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생활이 무엇 때문에 사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사업이 무엇을 위해 성의를 바치는 것도 아니다. 그와 같은 이유나 목적의 일반적인 것에 구속되는 일이 없이 성의를 집중하는 것에서 구체적인 삶의 보람과 생기가 살아나는 것이다.  굳이 詩가 무엇이며 왜 쓰느냐고 따지면 그것은 일상적인 언어의 저 편에서 불 가시적이며 구체적인 진실에 접하려는 노력이며 그와 같은 노력을 통해서만 우리는 싱싱하게 살아가는 인간 그 것과 그것의 진실을 우리의 것으로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빈 것의/ 빈 것으로 결집한/ 세계는 고드름 막대기로/ 꽂혀 있는 겨울 아침에/ 세계는 마른 가지로/ 타오  르는 겨울 아침에/ 허지만 세상은/ 빈 것이 있을 수 없다/ 당신의 서늘한 체념으로 채우지 않으면/ 신앙의 샘  물로 채운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나의 창조 의 손이/ 장미를 꽂는다/ 로오즈리스트에서/ 가장 매혹적일 조  세피즈, 블르느스를/ 투명한 유리컵/ 중심부에 빈 컵의 중심부에 창조의 손으로 장미를 꽃을 수 있는 자에게  세상은 한결같이 충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한 창조적 작업도 '오늘 쓰다만 시는 오늘의 꽃봉오리 내일  피게될 꽃송이는 내일의 신의 플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박목월. 무상의 역정  2. 詩를 처음 쓸 때 지녀야할 마음가짐은 무엇인가  누구나 詩를 쓸 수 있다. 詩란 詩적 재능이 있거나 또는 어떤 종류의 사람 즉 시인 만이 쓸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을 나타낸 글 가운데 산문이 아닌 운문의 형태로 된 것이면 모두가 詩이다 누구나 이런 형태의 글, 즉 詩를 쓸 수 있다.  문제는 詩에는 좋은 詩와 그렇지 못한 詩, 또는 잘된 詩와 그렇지 못한 詩가 있다. 곧 詩를 쓸 줄 모른다는 말은 잘된 詩를 쓸 줄 모른다는 말이다.  詩를 쓸 바에야 또는 써야 될 바에야 좋은 詩, 잘된 詩를 쓰고싶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좋은 詩 잘된 詩를 쓰기는 어렵다. 일정한 습작기간을 거치지 않고는 좋은 詩를 쓸 수 없다. 詩를 쓰는 일, 詩를 창작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과 좋은 詩를 써야겠다는 욕망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곧 처음부터 좋은 詩를 써야겠다는 과욕이 좋은 詩를 쓰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그런 과욕이 우리의 사고를 흐리게 하고 우리가 가진 무한한 재능을 잘못 낭비하게 한다. 시인이 詩를 쓰는 것은 좋은 詩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의 생각을 詩라는 형식의 글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좋은 詩가 되고 안 되고는 그런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글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다. 글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과 좋은 詩를 쓰고 싶다는 욕망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창조하는 즐거움과 창조된 결과를 탐하는 것과의 차이만큼이나 다른 것이다. 좋은 詩는 결과에 욕심을 두지 않는, 아는 체 하거나 흉내 내지 않는, 거짓 없이 쓴 글에서 나온다.  3. 詩의 착상은 어떻게 하는가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지어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는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 박목월. 나무  매우 산문적이고 일상적인 어투로 쓰여진 이 詩는 시상을 착상한 후 그 詩가 점점 한편의 완성된 서정시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눈에 보듯 선연하게 보여주고 있어 인상적이다.  이 시상의 계기는 산문에 대한 시인의 관찰력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 관찰은 지나치게 예리하거나 논리적인 고찰보다는 시인이 사물을 보는 선한 태도에서 비롯한다. 나무를 바라보다가 문득 추울 것이라 느낀다. 시인의 이러한 자연과의 교감은 이내 발전하여 나무를 늙은 수도승과 어설픈 과객과 동일시하게 되며 지상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서 있는 나무의 모습에서 인간 존재의 초월성을 읽어낸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이 그것이다. '아아 고독한 모습' 이라는 매우 진부한 표현도 이러한 詩적 계시의 순간을 통과하면 갑자기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원래 에피파니는 동방의 세 박사의 베들레헴 내방을 상징하는 예수의 공헌을 뜻하며, 비유적으로는 어떤 사물이나 본질에 대한 뜩박의 통찰이나 발전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위의 詩에서 시인은 나와 나무의 일체감을 '놀랍게도' 라고 말한다. 그 놀라운 일체감이 바로 詩정신이 아닐까,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이 詩적 화자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려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 나무' 곧 그의 인격이 된 것이다. 이처럼 詩의 소재와 에피파니의 순간은 우리 주변 도처에 널려있다   ==================================================================       상치꽃 아욱꽃 ―박용래(1925∼1980) 상치꽃은 상치 대궁만큼 웃네. 아욱꽃은 아욱 대궁만큼 잔 한잔 비우고 잔 비우고 배꼽 내놓고 웃네.     이끼 낀 돌담 아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다는 시인의 이름 잊었네. 아욱 잎은 국 끓여 먹고, 상추 잎은 생것을 쌈으로 먹고. 먹을거리로만 그 잎을 보아 온 사람들은 상추와 아욱도 꽃이 핀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기 쉬우리. 때는 한여름, 해는 저의 긴 날을 늘어지는 걸음으로 지나고 있었을 테다. 마루에 앉아 ‘잔 한잔 비우고/잔 비우’며 건너다보는 마당 텃밭에 ‘상치꽃은/상치 대궁만큼 웃네.//아욱꽃은 아욱 대궁만큼’ 웃네. 남겨진 대궁마다 함초롬히 상추꽃 아욱꽃, 화자가 보기 좋은 높이로 피었으리.      화자는 ‘배꼽/내놓고 웃네’. 자기 집에 있는데 무더운 날에 옷을 대충 걸친들 어떠랴. 화자는 러닝셔츠를 가슴께로 훌떡 걷어 올리고 있을 테다. 어쩌면 웃통을 벗고 있을지도. 상추와 아욱도 ‘배꼽/내놓고 웃네’. 꽃은 식물의 배꼽, 씨앗의 근원이라네. 꽃이 없으면 세대에서 세대로 어찌 이어지리. 그러니 상추와 아욱의 꽃은 임부의 자랑인 불룩한 배인 것, 그 배꼽인 것. 꽃 핀 텃밭을 정답게 완상하며 술을 마시는 나른한 흔쾌함이 ‘이끼 낀/돌담’부터 편치 않은 정조로 바뀐다. 하루 이틀 전까지 이어졌을 장마에 이끼 무성해진 돌담은 볕이 안 들어 축축하리라. 그 위로 저물어가는 하늘 동편에 실낱같은 달이 뜨고, 문득 ‘이즈러진 달이/실낱같다는’ 시구가 떠오르는데 그 ‘시인의 이름’ 떠오르지 않고. 어떤 부분은 더 선명하고 어떤 부분은 더 가물가물한 명정 상태에서 왠지 화자의 기분이, 술 잘 마셔놓고, 자욱이 가라앉는 듯.  박용래의 시들은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세계를 담는 게 미덕인 시의 전범으로 삼을 만하다. 독자는 그 간결한 시들이 우아하게 이끄는 정답고 소박한 세계에서 가슴 아릿한 원초적 향수에 젖어든다.
55    진정으로 뛰여난 담시(譚詩) 한수라도 보고지고... 댓글:  조회:2497  추천:0  2016-12-23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낙서 오봉옥  1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바쳐라 …… 술 마시고 싶을 때 한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보아라.” 노래를 듣다가 문득 생각한다. 시야말로 목숨을 걸고 써야 한다는 것을. 한편의 시가 죽어가는 이를 살려낸다고 한다. 죽어가는 이를 살려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아름다운 시를 쓰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아픔이 없어서는 안된다. 시는 정말이지 그런 것이어야 한다. 시 초겨울 바람에 부르르 떨고 보니 시 쓰고 싶다 그 옛날 콜레라에 걸린 아이처럼 덕석말이로 마당 한가운데 누워 피가 질질 흐르도록 덕석만 할퀴다가 제 몸 위를 소가 쿵쿵 뛰어다니는 소리에 다시 놀라 까무러치기도 하다가 끝내는 온통 땀에 젖은 작은 몸으로 그 무서운 병을 툴툴 털고 일어나 히히 웃는 마치 그런. 2 서정의 특성은 개성적이라는 데에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고도 그것을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르게 나타난다. 노동자로서 보는 달과 자본가로서 보는 달은 느낌이 다른 법이다. 또한 같은 노동자라 할지라도 내성적 성격을 갖고 있는 사람과 외향적 성격을 갖고 있는 사람의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특성이 개성적인 것만큼 모든 인간이 느끼는 감정도 다르다는 것이다. 통일에 관한 시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어쩌면 통일을 생각하는 느낌이 그렇게나 비슷한지. 진달래가 어떻고 백두와 한라가 어떻고 등등. 자신의 생활 속에서 깊이 있게 통일을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서정의 개성을 살리지 못하고 시를 관성적으로 쓰는 탓이다. 3 흔히 시평을 읽으면 ‘사상성’이라는 개념이 눈에 띈다. 시에서 ‘사상성’이란 무엇일까? 노동자의 생활을 다루면 사상성이 충실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상성이 불투명한 것인가? 사상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문제는 생활 속에 담긴 사상에 있다. 다시 말해 생활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사상을 어떻게 하면 올곧게 끄집어내어 정서적으로 잘 표현하는가에 있는 것이다. 그것의 성공 여부가 ‘사상성’ 운운으로 되어야 한다. 4 시에 있어서 상징어는 생동감을 보장하기 위하여, 비유는 말하고 싶은 바를 가장 적절히 표현해내기 위하여, 그리고 반복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시각․청각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내 독자를 시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좋은 시일수록 이러한 시적 장치가 잘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5 시적 정서란 무엇일까? 시인이 생활 속에서 한 계기를 만났다 치자. 그래서 충동을 느꼈다 치자. 외치고 싶은 충동을, 춤이라도 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치자. 그럼 그 정서적으로 느낀 충동이 시적 정서일까? 맞는 말이다. 반쯤은 맞는 말이다. 반쯤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충동의 삭이는 과정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삭인다는 것은 그 충동을 자기의 것으로 되게 하는 것이며 모두의 것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삭임이 끝난 그 어떤 정서적 표현이어야 비로소 ‘시적 정서’가 아니겠는가. 6 시에서 생활 반영의 진실성은 어떻게 구현될까.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복사하듯이 옮겨놓으면 되는 것인가. 아니다. 생활 속에서 보고 느낀 것을 시인 자신이 내화시켜낼 수 있어야 그것은 가능하다. 내화시킨 뒤의 정서적 토로라야 생활 반영의 진실성을 보장한다.  7 우리가 흔히 현실을 왜곡시켰다고 하는 것은 현실을 잘못 그렸다는 것만은 아니다. 넓게는 생활과 거리가 먼 이야기를 했다거나 생활의 본질이 아닌 이러저러한 현상만을 나열하는 식으로 그린 것은 물론 현실을 과장되게 묘사하는 것까지를 일컫는다. 그러한 것은 모두 사람의 요구와 지향을 묵살하는 데 공통점이 있다. 우리 현실 속에서 자연주의적 경향은 그러한 것이다. 우리가 현실을 폭로하는 데 있어서도 ‘대안없는 폭로’를 우려하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8 시의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일차적으로 형상화의 높이를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는 내용과 형식의 대중적 성격을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시의 평가는 사상의 관점이나 주제의 방향이 얼마만큼 서정 속에 적절히 녹아들었는가를 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모두 시 속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9 시들을 보면 종종 생각한다. 어떤 시는 절실한 문제를 형상적 비유에 의해 더욱더 선명하고 절실하게 문제를 전해주는 데 반해 또 어떤 시는 절실한 문제를 형상적 비유의 실패로 인해 더욱더 불투명하고 왜곡되게 문제를 전해주고 만다는 점이다. 왜일까? 창작적 사색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사상학습이 부족한 결과로 자신 스스로가 생활과 사상의 연결 끈을 정확히 포착하지 못한 탓일 터이다. 10 담시와 서사시는 어떻게 다를까. 서사시가 이야기 구조를 짜임새 있게 보여준다면 담시는 이야기의 핵심적인 부분만을 잘라내 보여준다는 데 그 차이점이 있다. 또한 서사시보다는 보다 더 서정적 측면을 담시는 가지고 있다. 시인의 정서가 보다 더 직설적으로 관통되는 것이라고나 할까. 뛰어난 담시 하나 보고 싶다. 11 시에서 서정을 느끼는 주체가 독자임은 당연한 사실이겠다. 때문에 독자가 요구하는 정서에 깊이 파고드는가의 문제는 서정시에 있어서 관건이 된다. 독자의 구미를 파고들지 못한 시는 제 아무리 보기 좋은 시라 하더라도 실패작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그럼 독자 즉, 다수 민중의 구미에 맞는 내용이란? 다수 대중의 구미에 맞는 형식이란? 창작자의 고민은 한사코 거기에 있다. 12 시는 생활의 한 단면을 충격적으로 보고 느낄 때 쓰는 것이라고 한다. 정말 그런가? 세상 사는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은 느낄 그 충동이 시를 쓰게 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언정 종착점까지를 보장해 주진 못한다. 문제는 충동을 주는 그 대상의 구체적인 내면 세계까지를 정서적으로 충분히 공감했을 때 비로소 감동을 주는 시가 쓰여지는 것이다. 13 노래 같은 시들이 있다.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흥얼거리고 싶은 시 말이다. 그것은 일정한 흐름을 반복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느껴진 것이다. 깊은 뜻을 아우르고 있으면서도 쉽고 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일 터이다. 어느 한 시가 박자를 머리 속에 그려지게 만든다면 그 시는 명시가 아닐 수 없다. 14 정서적으로 느끼고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얼마 전에 가뭄이 극성을 떤 적이 있다. 논바닥이 갈라지고 농부들은 일손을 놓고 한숨만을 내쉬기에 바빴었다. 그런데 비가 왔다. 그때 TV에 비친 농부들은 비를 손바닥에 받으며 “아, 쌀이 옵니다”, “이것이 돈입니다. 지금 수천만 원이 내리고 있어요” 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러한 농부들의 표현이야말로 정서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을 “아, 지금 태양의 복사열을 받아 증발된 수증기가 구름을 이루어 떠돌다가 높은 곳에서 찬 기운을 만나 중력의 가속도로 인하여 물방울이 되어 비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라고 했다 치자. 물론 농부라면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말이다. 이 때의 표현은 생활정서로부터 벗어난 논리적 느낌․표현이 된다. 정서적으로 느끼고 표현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그런 것이다. 논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15 음악을 모르고서 시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시를 모르고서 음악을 안다고도 할 수 없다. 시와 음악은 쌍둥이와 같은 존재이다. 16 시인은 응당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고속버스를 타고 갈 때 보게 되는 비디오의 삼류영화를 보고도 울 줄 알아야 하고 저 숱한 뽕짝을 듣다가도 평펑 울 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소한 것에도 웃음을 풍기는 사람이 시인이다. 가족과 주위의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전혀 모르는 사람의 즐거움에도 함께 할 수 있어야 진짜 시인이다. 결국 시인은 감정의 폭이 큰 사람인 것이다. 17 대학을 가보면 가끔씩 벽시가 눈에 띈다. 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목적으로, 학생운동에 관심이라도 가져줄 것을 호소하는 목적으로, 당면 투쟁의 의미를 정서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벽에 붙이는 것이다. 그런 벽시는 대부분의 경우 문예일꾼들이 조직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꽤나 세련된 시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못쓴 시라 하더라도 일반 학우들이 써서 붙인 것을 보고 싶다. 자신들이 그것을 즐기면서 이용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문학예술의 주체와 향유자는 결국 민중 일반이니까. 18 왜 서정시는 길이가 짧은가, 여운을 주기 위해서이다. 생활의 작은 세부를 통하여 전체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은 사실로 많은 것을 연상시켜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읽어볼수록 새로운 여운을 느끼게 하는 것이랄까. 그래서 그 감동적 충격을 오래오래 기억되게 만드는 것이랄까. 아무튼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요즘 시들을 보면 너무나도 길기만 함을 느낀다. 산만함이 감동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19 우리 시대의 시인들은 ‘이야기 시’를 많이 쓰고 있다. ‘이야기 시’란 하나의 사건적인 이야기를 통해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적 주인공의 정서를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를 빌려서 쓰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이야기 시에 등장한 인물은 시인이 뭔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잠시 빌려온 인물일 뿐이다. 20 선동시라는 게 있다. 우리 시대의 문제점들을 낱낱이 밝혀 주면서 사람들을 고무․추동해내는 시 말이다. 그런데 선동시라고 쓰여진 시들을 보면 하나같이 개념이 남발한다는 점이다. 개념이 남발하는 곳에 감동은 없는 법이다. 감동이 없는데 선동이 될 까닭이 없다. 문제는 생활정서를 얼마나 잘 선동적으로 보여주는가에 선동시의 특성이 있다. 21 집회장에서 낭송시를 들으면 흔히 느끼는 일이다. 비교적 형상화가 잘된 시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는 전혀 먹혀들지 않을 때가 있고 시적 형상화에 서툰 그 어떤 시가 오히려 대중의 심장을 흔들어 놓을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 것일까? 우선은 시적 호흡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정서적으로 다가가는 호흡률을 가져야 대중은 꿈틀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시적 소리의 문제이다.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정서적 시어를 가져야 호소력을 얻게 된다. 우리의 시단도 낭송시의 영역을 개척해야 될 때가 온 듯싶다. 22 발표된 시들을 보면 객관적 실재를 묘사하면서 그 속에 시인 자신의 목소리를 집어넣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시인 자신의 정서적 토로와 객관적 실재의 묘사를 결합시켜내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는 말이다. 이것도 시를 쓰는 한 방법이겠다. 23 분신 현장을 목격했다. 나는 그때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어쩌지 못해 안절부절해야 했다. 호흡은 호흡대로 가빠져 그 자리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손을 심장 위에 올려놓고 길게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그때를 생각하며 시를 쓴다면 나는 필시 짧게 끊어치며 넘어가는 반복적 형식으로 시를 쓸 것이다. 그 상황을 옳게 반영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될 것 같다. 24 생활을 그림처럼 그려내는 시들이 있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선명하게 그려내는 것도 있고 반대로 두리뭉실하게 굵게 그려낸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시적 대상을 생동감 있게 묘사해내는 장점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머리를 스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시가 생활의 한 단면을 정서적으로 느껴서 그것을 안으로 삭인 결과로 일반화시켜내며 또 그 결과로 정서적 토로를 하게 되는 것이 서정시의 근본특성이라면 위와 같은 방식은 그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다시말해 생활은 그림처럼 선명하게 그려내지만 서정시라는 근본특성은 잘 살려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러나 이런 생각도 함께 든다. 그림 같은 시 중에서도 감동을 주는 경우와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서정의 특성을 비교적 잘 살렸기 때문이며 후자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25 시를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를 배우기 위해서는 생활 속에서 민중들의 요구와 지향을 내용으로 배우고 민중들의 호흡법․말법을 그 형식으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시적인 기교를 연마할 수 있어야 한다. 시적인 기교를 말하고 싶은 바를 가장 적절히 표현해 내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뿐만 아니라 과거 역사 속에서 우리만의 시적 재부로 내려오고 있는 바를 습득해내야 한다. 시를 배운다는 것은 일종의 그런 것들이다. 26 풍자시는 사람들에게 통쾌함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형태이다. 포악한 자에게 비웃음을, 간사한 자에게는 야유와 멸시를, 누리는 자에게는 통렬한 조소를 보내기 위한, 그래서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통쾌함을 주기 위한 것이다. 최근 어느 한 시인의 풍자시를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통쾌함은 느껴지는데, 왜 가슴 한켠에 아쉬움이 남는 걸까.” 새로운 실험적 형식으로 쓰여진 그 풍자시는 다름아닌 서정성이라는 고유한 특성을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7 돌아보면 80년대는 정치적 격변기였다. 그래서일까. 80년대 시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전투적 서정시가 많이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내용만을 보아도 그렇다. 감상적인 내용보다는 과학성을 앞세운 내용이 훨씬 더 많았다. 이제 90년대이다. 90년대로 넘어오면서 우리의 시단은 80년대의 관념적인 경향을 극복하고 서정시의 본령을 찾아나가자는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서정을 제대로 찾아나가는 것이 아닌 본 뜻도 없는 잘못된 서정으로, 정서적 표현으로 흐르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정서적으로 표현되어야 서정인 것이지 요즘의 풍토처럼 그럴싸한 미사여구식의 시가 남발하는 것은 서정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28 외국에서 교포가 왔다. 그가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우리 문학을 일어로, 영어로 번역해 많이 많이 소개하겠습니다. 밖에 있는 우리가 할 일이 그런 것인 거 같아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소설은 몰라도 시는 전문성을 요구할 듯합니다. 우리의 시어를 외국어로 옮기기가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아요.” 정말이다. 우리 말처럼 표현이 풍부한 말도 드물다. 더구나 시란 게 백 마디의 말을 한 마디로 줄이는 것이기에 거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는 것이고 그 한 마디의 표현일지라도 그 표현에만 맞는 고유한 색깔이 있는 것이어서 그것을 표현하기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듯 싶었다. 이를테면 운율을 살려내기 위한 ‘줄임말’은 얼마나 많으며 반대로 ‘늘임말’은 얼마나 많은가. 표준어와 사투리의 다른 맛은 어떻게 할 것이며 현재 쓰는 말과 옛말의 다른 맛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29 오늘 나는 결혼식장에서 축시를 읽었다. 그런데 풍자적 요소를 도입한 축시였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는 것이었다. 돌아오면서 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축시의 특성을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해 한편으로는 신랑․신부에게 미안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축시는 응당 묵직하고 밝은 것이어야 한다. 순결성과 숭엄성이 흐르는 것이어야 한다. 30 우리는 흔히 시인이 말하고 싶은 바를 정서적으로 토로한 시들을 접하게 된다. 호수가의 물처럼 잔잔하게 흘러가는 방식으로 쓴 것도 있고 태풍을 동반한 바닷물처럼 격정적으로 다가오는 식으로 쓴 것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러한 것들을 적절히 결합하여 굴곡을 이루는 방식으로 쓴 시들도 많다. 서정시의 특성을 가장 잘 살려내는 이러한 방식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방식인 것 같다. 31 내가 좋아하는 한 선생이 말하기를 “평론에 그만 관심 쏟고 창작에 더욱 더 매진하시지요. 창작자가 갖는 고집은 중요한 재산입니다.” 내가 그 선생에게 대답하기를 “어디 우리 풍토가 그러나요. 비평의 목소리가 워낙 크다 보니 엿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맞는 말이에요. 창작자가 가져야 할 창작적 고집은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겠지요. 비평을 엿보다 보면 작품을 관념적으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이나 그런 것 같아요.” 비평을 엿보면 엿볼수록 관념적인 작품을 쓰게 된다? 넌센스이다. 우리 시대의 넌센스. ===============================================================================       희망(希望) ―전봉건(1928∼1988) 아름다운 어느 한 아름다운 날을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가슴께에서 꽃과 사과이고 싶은 것은 꽃바구니의. 달빛에 씻긴 이슬을 이슬 머금은 배추가 진주(眞珠)처럼 아롱지며 트이는 아침을 푸른 바다 어리는 비둘기의 눈동자를 태양(太陽)이 웃으며 내려오는 하늘… 그 눈부신 계단에 핀 진달래를 또 신문(新聞)이 음악(音樂)처럼 뿌려지는 거리를 생각하는 것은. 여기 무수히 검은 총(銃)알 자국 얼룩진 나무와 나무 사이 눈이 깔린 밤 … 여기에서.     오 두 마리 버들강아지 꼼지락이는 은(銀) 목걸이를 생각하며, 꽃바구니의 꽃 그리고 사과이고 싶은 것은… 당신의 가슴께에서. 구름도 지구(地球)도 인간(人間)도 생활(生活)도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 다 함께 그리운 내가 전쟁(戰爭)의 숯검정이 자욱이 얼어붙은 내 눈시울 속에 서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 겨울날 아지랑이처럼 아스라이 서 있는 까닭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의 소용돌이인데 겨울이 오고, 탄흔 무수한 ‘나무와 나무 사이/눈이 깔린 밤’, 깨어 있는 한 병사가 있다. 방한복이나 제대로 입었을까. 어쩌면 닳아진 군복과 군화, 배도 고플 테다. 떠나지 않는 공포와 고통이 병사에게 ‘아름다운/어느 한 아름다운 날을’ 절절히 떠오르게 한다. ‘꽃바구니’ 같았던 사랑의 시간, 아 너무도 그리운, 눈에 삼삼한 ‘당신의 가슴께’ ‘꽃과 사과’! 달콤한 안식과 평화의 그런 날이 다시 올까. ‘푸른 바다 어리는 비둘기의 눈동자’ 같은 그날이. 소중한지 모르고 흘려보내던 일상이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다 함께 그리운’ 병사다. ‘구름도/지구도/인간도/생활도’! 신문도 참 오래 못 보았구나. 신문 파는 소년들이 손님을 부르는 외침으로 들썩거리던 거리, 시내 한복판의 소요며 분답도 평화의 그것인 양 어찌나 가슴 저리게 그리운지 ‘신문이 음악처럼 뿌려’진단다. ‘전쟁의 숯검정이 자욱이 얼어붙은’ 병사의 눈시울에 이 모든 것이 꿈인 듯 ‘아스라이’ 들어선다. 시 속의 병사는 시인 자신일 테다. 시인은 살아남아 시를 쓰는데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병사, 전쟁이 끝난 뒤에도 욱신거리는 이 상흔이 전봉건의 많은 시에 담겨 있다.
54    시인은 정화가 된 "저체온의 성스러운 언어"로 시를 써야... 댓글:  조회:2663  추천:0  2016-12-22
가혹한 운명의 겨울에 맞서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슬픔으로  불씨 피워 빚어낸 詩라는 結晶… 비탄에 젖기보다 황홀을 찾아내  황폐한 풍경을 견디게 하니 겨울을 깨달음의 계절로 만드네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아름답다 너, 오 흰 설원이여!/ 가벼운 추위가 내 피를 덥힌다/ 내 몸으로 꼭 끌어안고 싶다/ 자작나무의 벌거벗은 가슴을.' 러시아 시인 예세닌이 쓴 시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의 일부다. 첫눈을 맞은 기쁨을 '더운 피'로 표현했다. 혹독한 추위는 사람의 몸을 움츠러들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람의 의식을 일깨우기도 한다. 가벼운 겨울바람은 적당한 생기를 불어넣는다. 뜨겁게 자작나무를 껴안겠다고 한 예세닌을 비롯해 수많은 시인의 겨울 노래는 황폐한 풍경 속에서 비탄에 젖기보다는 황홀을 찾아냈다. 시인은 겨울 풍경에 투명한 언어를 투사하고 생각의 불씨를 피워 추위를 녹이며 순백의 미학으로 순수한 영혼을 그려내 왔다. 추운 겨울을 견디게 하는 시의 힘이다. 한국 현대시에서 겨울을 예찬한 시인을 꼽으라면 황동규 시인(78)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58년 스무 살에 등단해 지금껏 시를 써오는 동안 숱하게 겨울을 노래했다. '막막히 한겨울을/ 바라보는 자여,/ 무모한 사랑이 섞여 있는/ 그런 노래를 우리 부르자'라고 했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눈이 내리는 소리로 바뀌는 소리 들린다'라고도 했다. 그의 시에서 눈송이는 천상과 세속 사이에서 떠도는 존재의 비유이고, 얼음은 시인의 의식이 빚어내는 결정(結晶)이고, 눈 내리고 그친 순간의 적요가 겨울을 깨달음의 계절로 만들었다. 황동규 시인은 최근 낸 열여섯 번째 시집 '연옥의 봄'에서도 겨울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그중 시 '나의 동사(動詞)들'이 대표적이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 오랜만에 허브차를 마시며/ 생각이 조금 따뜻해지기를 기다린다/ 그동안 나와 함께 살아온 동사들, 그중에도/ 떨구다 드러내다 털다의 관절들 아직 쓸 만하다/(중략)/ 가만, 현관 앞 나무들은 잔뼈들까지 모두 드러낸 채/ 추위를, 추위보다 더한 무감각을 견디고 있다/ 앞으로 나는 무엇을 더 떨구거나 드러내야/ 점차 더 무감각해지는 삶의 표정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60년 가까이 시를 써온 시인이 요즘 아끼는 우리말 '떨구다'는 겸손, '드러내다'는 솔직, '털다'는 달관의 미덕을 각각 가리키는 듯하다. 그런 정신의 경지는 나목(裸木)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절망하기보다는, 벌거벗었기에 더 감각이 예민해진 실존의 상징을 떠올리면서 삶이 지속되는 한 무감각해지는 것을 끝까지 경계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추구하는 감각은 시 '외등(外燈) 불빛 속 석류나무'에 쓴 '간지럼 타는 눈송이의 살갗/ 어둠 속에서/ 그 간지럼 전하는 공기의 미진동(微振動)'처럼 섬세한 의식의 촉수로 포착한 심상(心象)으로 드러난다. 그의 또 다른 겨울 노래는 '몸이 말한다'이다. 날씨가 쌀쌀해지자 노령자 무료 독감 백신을 동네 병원에서 맞은 뒤 끙끙 앓고 나서 쓴 시다. '이제 감기 몸살하고도 인사 한번 나눠야 않겠나/ 빨리 가라고 자동차에 매질 않지만/ 재갈 물린 말은 채찍을 들어야 말처럼 달린다'며 노년의 건강한 해학을 풀어놓았다. 이처럼 자연의 겨울과 인생의 겨울을 버무린 시집 속에는 연작시 '연옥의 봄'도 들어 있다. 기독교에서 연옥(煉獄)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장소를 가리킨다. 세속에서 죄짓고 온 인간 영혼이 고통을 겪고 정화되면 천국의 문으로 간다고 한다. 황동규 시인은 현존하면서도 연옥에 있다고 상상한다. 지난 몇 년 사이 오랜 친구들이 잇달아 세상을 뜨면서 허탈한 고통을 자주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연히 죽음을 다룬 시를 자주 쓰면서 현실도 초현실도 아닌 정화계(淨化界)를 체험했기에 지금-이곳은 연옥이기도 하다. 종교적으로 연옥은 명계(冥界)이므로 황폐하고 어두운 겨울의 이미지에 가깝다. 문학적으론 고통의 승화가 향기롭게 피어나는 곳이다. 그래서 시인은 노년의 삶을 '연옥의 봄'이라 부른 모양이다. 시인은 또 다른 겨울 노래인 '마음 어두운 밤을 위하여'에서 눈 내리는 폐광촌의 술집을 무대로 삼은 극(劇) 서정시를 펼쳐놓았다. 눈바람에 기차 소리마저 얼어붙는 겨울밤, 외딴 술집에서 형광등 불빛 아래 시인의 분신 같은 어느 사내가 홀로 술을 마신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떨치기 힘든 것은/ 이런 뜻 없는 것들'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래도 이 세상의 꼼수가 안 통하는 게/ 이 저체온(低體溫)의 슬픔, 이런 뜻 없는 것들이 아닐까'라고 덧붙인다. 시인이 패배적 허무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다. 그는 평소 감상(感傷)을 경계하면서 언어와 정서의 지적(知的) 통제에 바탕을 둔 서정시를 써왔기 때문이다. 육체의 삶이란 어차피 덧없기에 슬프다. 하지만 시인의 정신은 '이 세상의 꼼수가 안 통하는 저체온의 슬픔'을 놓지 않으려 한다. 꼼수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슬픔이다. 그것이 '저체온의 슬픔'인 까닭은 가혹한 운명의 겨울에 맞선 인간 육체의 하찮은 온기(溫氣)에 감싸여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기운을 통해 정화된 영혼의 언어를 시집에 남긴다. 독자가 그 책을 음미하면서 상상하는 겨울의 밤하늘은 성(聖)스러운 슬픔의 흔적으로 아롱진다.      ⓒ 조선일보
53    시인, 석류, 그리고 파렬, 분출, 문여는 소리... 댓글:  조회:2615  추천:0  2016-12-22
석류가 영글어 터지는 계절  성숙이고 파열이고 분출이며 시큼한 슬픔이거나 환희인 열매  알갱이 하나하나에 생각 쏟아져…  붉은색은 우리 자랑거리인 푸른 가을 하늘과 잘 어울려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한여름 내내 뙤약볕에 시달리던 석류(石榴)가 여물어 붉은빛으로 터지는 계절이 왔다. 솔직히 석류 맛이 뭔지 잘 모른다. 지금껏 한두 번 먹어봤을까. 그래도 이 계절이 오면 괜히 생각나는 과일이다. 봄에 머리에 쓰고 싶은 화관(花冠)처럼 가을엔 이마를 간지럽히는 허영(虛榮)이라고나 할까. 석류를 칼로 싹둑 잘라 먹기보다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싶을 뿐이다. 석류 한 알은 과일이라기보다는 여러 개의 밀실을 내부에 지닌 종자(種子)들의 집이기도 하다. 그 단단한 덩치를 깨물기도 전에 붉은 속내를 떠올리기만 해도 꿀꺽 침을 삼키게 된다. 이 계절에 읽을 시 한 편을 꼽는다면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가 1920년에 발표한 '석류'를 빼놓을 수 없다. '알맹이들의 과잉에 못 이겨/ 방긋 벌어진 석류들아,/ 숱한 발견으로 파열한/ 지상(至上)의 이마를 보는 듯하다!'라며 시작하는 작품이다. 우리말로 여러 차례 옮겨졌지만, 평론가 김현의 번역 시집 '해변의 묘지'를 통해 읽은 이들이 많다. 이 시의 도입부는 익을 대로 익어서 터진 석류를 시각적으로 묘사했다. 곧이어 둥그스름한 석류는 심사숙고 끝에 얻은 깨달음으로 인해 절로 이마를 치게 되는 시인을 떠올리게 한다. '지상(至上)의 이마'(des fronts souverains)는 지존(至尊)의 경지에 이른 지성(知性)이 담긴 두뇌를 가리킨다. 발레리는 언어의 건축가였다. 그는 감정의 절제와 이성의 통제를 통해 마치 집을 짓듯 시어를 차곡차곡 쌓으며 시를 지었기에 지적(知的)으로 섬세한 시인으로 꼽혔다. 최근엔 성귀수 시인이 발레리의 대표시를 옮겨 시집 '바람이 일어난다! 살아야겠다!'를 내면서 '석류'를 새롭게 번역했다. '알갱이들의 과잉에 못이겨/반쯤 벌어진 단단한 석류들아,/ 마치 자신의 발견들로 터져 나간/ 당당한 이마들을 보는 듯하여라'라고 도입부를 옮겼다. 그는 내부의 힘에 겨워 터진 단단한 석류를 '당당한 이마'라고 위풍당당하게 옮겼다.   김현의 번역으로 이 시를 이어서 읽어보면 이렇다. '너희들이 감내해 온 나날의 태양이,/ 오 반쯤 입 벌린 석류들아,/ 오만(傲慢)으로 시달림 받는 너희들로 하여금/ 홍옥(紅玉)의 칸막이를 찢게 했을지라도,// 비록 말라빠진 황금의 껍질이/ 어떤 힘의 요구에 따라/ 즙(汁)든 붉은 보석들로 터진다 해도,// 이 빛나는 파열은/ 내 옛날의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밀스런 구조를 꿈에 보게 한다.' '이 빛나는 파열'로 시작한 마지막 3행은 원문의 산문적 서술 구조를 기막히게 한글로 고스란히 반영한 번역이다. 시를 언어의 건축술에 비유한 발레리의 생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석류는 가혹한 햇빛을 오만하게 견디면서 스스로 껍질을 찢어 붉은 내부를 터뜨린다. 시인은 오만할 정도로 자긍심이 강한 영혼을 궁굴려서 시를 빚어낸다. 석류를 정물화처럼 세밀하게 묘사한 이 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창작의 신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성귀수 시인의 번역은 마지막 3행시에서 남다르다. '그 찬란한 파열은/ 꿈꾸게 한다, 내 지난 영혼의/ 은밀한 건축술을'이라며 원문의 구조를 살리면서 운문(韻文)의 맛을 가미했다. 원문에 없는 '쉼표'(꿈꾸게 한다, 내 지난 영혼의)까지 창안해 시 읽기의 말맛을 살리려 애썼다. 발레리의 석류가 사람의 머리를 떠올리게 한다면, 숱한 한국 시인들의 석류는 가슴을 가리킨다. 이가림 시인은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중략)/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라며 가슴에 맺힌 그리움을 토로했다. 박라연 시인은 '오 열어젖힌/ 석류의 말 못 할/ 알알이 알알이'처럼 연속된 'ㄹ' 받침의 음악성을 살리며 가슴속 슬픔을 노래했다. 발레리의 석류가 내적 성숙을 거쳐 튀어나온 언어를 노래했다면, 한국 시인들은 억눌렸던 감정의 분출을 참지 못해 서러워한다. 그 설움을 해소하느라 석류를 관능적으로 노래한 시인들도 적지 않다. 아무튼 석류는 성숙이고 파열이고 분출이다. 시큼한 슬픔이거나 달콤한 환희다. 알갱이 하나하나 음미하다 보면 저마다 맛이 달라서 이러저러한 생각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시인 정지용은 겨울 밤 화롯가에 앉아 익을 대로 익은 석류 알갱이를 하나씩 씹었나 보다. '한 겨울 지난 석류 열매를 쪼개어/ 홍보석 같은 알을 한알 두알 맛 보노니/ 투명한 옛 생각,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 금붕어처럼 어린 녀릿 녀릿한 느낌이여'라고 노래했다. 서정주는 석류가 열린 것을 보곤 '어쩌자 가을 되어 문은 삐걱 여시나?'라고 읊었다. 그는 다른 시에선 '석류꽃은 영원으로 시집 가는 꽃'이라고도 했다. 붉디붉은 석류는 우리 산하의 자랑거리인 푸르디푸른 가을 하늘과 잘 어울린다. 올가을엔 석류 맛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 석류가 터지면서 가을이 익어간다.    ⓒ 조선일보
52    [쉼터] - 작문써클선생님들께; 마구잡이로 쓰는 "~의 대하여" 댓글:  조회:2443  추천:0  2016-12-22
럭비공답다. 일찌감치 샅바 매고 한판 붙자는 그분. 초장(初場)부터 기를 꺾어놓고 싶은가 보다. 앞으로 내내 씨름해야 할 맞수니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11일 "중국이 무역 등의 문제에서 우리와 협상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왜 '하나의 중국' 원칙에 얽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 북핵과 무역 문제 등에서 중국이 협력하지 않으면 '하나의 중국' 원칙을 깰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중국은 미국의 수중(水中) 드론 낚아채기로 맞섰다. 이 양강(兩强)의 전초전 결과 말고 궁금한 점이 또 있다. '하나의 중국'은 영어로 'one China(policy)'다. 우리말로는 '한 중국'이 옳지만 어색하다. 만약 넷으로 쪼개진 중국이라면? '넷의 중국'보다 '네 중국'이 자연스럽다. 어찌 된 영문일까. 우리는 흔히 '한 잔의 커피'라고 쓴다. 영어 'one(a) cup of coffee'를 고스란히 옮긴 표현이다. 허울만 한국어일 뿐, 영락없는 영어다. 입으로는 아직 '커피 한 잔'이라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 직역(直譯) 딱지가 신문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 세 명의 학생, 20억원의 비용, 두 곳의 업체, 10발의 미사일…. 자연스러운 우리말에서 웬만하면 안 쓰는 조사(助詞) '의'가 어김없이 들어간다. 자연스럽지 않은 어순(語順·수관형사+단위명사+보통명사)이니 그럴 수밖에. 제대로 한번 써보자. 세 학생(학생 셋, 학생 세 명), 20억원, 두 업체(업체 둘, 업체 두 곳), 미사일 10발…. 단위명사나 보통명사 성격이나 수량에 따라 '수관형사+보통명사' '수관형사+단위명사' '보통명사+수관형사+단위명사' 식으로 어순이 다양하다. 때로는 '학생 셋'처럼 수관형사를 수사(數詞)로 바꿔도 된다. '거액의 탈세를 했거나→거액을 탈세했거나'처럼 아예 표현 자체를 달리해야 할 때도 있다. 간추려 보면 토씨 '의'가 굳이 낄 일이 없다. 영어는 진작 '두 잔의 커피(two cups of coffee)'에서 '커피 두 잔/커피 둘(two coffees)'로 흐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모습만으로는 한국어를 좇는 셈이다. 정작 우리는 오래도록 역주행(逆走行)하고 있다. '여러 사람'을 '여러 명의 사람들'이라고 쓰는 엉뚱한 사고(事故), 그만 낼 때가 됐다.  /양해원 
51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댓글:  조회:2324  추천:0  2016-12-22
        농담-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사랑이란 그런 것,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 사람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될 때면 그 사람에게도 먹이고 싶어 다음에 꼭 함께 먹어보리라 기억해 두는 것. 가족 간에도 애틋하게 일어나는 이 사랑의 작용이 연애 상대에서 시작해 점점 대상이 넓어지는 시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아직 즐기실 수 있을 때 경치 좋은 곳과 근사한 식당에 자주 모시고 가면 나중에 가슴이 덜 아프리라. 그런데 2연의 ‘그 사람은’ 정말 ‘정말 강하거나/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일까? 그렇기 쉽지만 그냥 성격이 그런 사람일 수도 있다. 아들 며느리 딸 사위의 돈을 모아 기어이 미국 여행을 하신 친구 아버지, 다녀오신 날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여행 가방을 푸는데 나오는 새 물건마다 당신을 위한 것이었단다. 맨 마지막은 장난감 자동차. 선물을 기대하던 어린 손자가 기쁘게 손을 뻗었지만 그것도 당신 것! 어른들은 애 보기가 민망했단다. 자기 생각만 하는 게 행복한 사람이 있다. 이 성향으로 예술을 하면 아주 유리하다.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그 매혹에 몰두해서 극한까지 갈 수 있을 테다. 그 매혹을 앓을 테다. 그래서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낼 수 있을 테다. 이타적인 사람은 마음이 무르기 쉽고, 무른 마음은 초점을 독하게 잡고 있기 어렵다. 하지만 삶은 건강하리라.     시 제목이 왜 ‘농담’일까? 시인 이문재는 착한 사람이다. 그래서 착한 말씀, 아름다운 말씀을 하시는데 그게 겸연쩍어서 ‘농담’이라고 한 게 아닐까? 시에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농민운동가 전우익 선생의 수필집 제목)라는 만고의 진리를 담는 게 시인의 자의식을 건드린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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