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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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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    윤동주 서울 하숙집 가보다... 댓글:  조회:2519  추천:0  2017-03-17
... ...무작정 걸었습니다. 이 골목 저 골목 기웃기웃... 그러면서 든 생각.... 아, 이곳에서 한 달만 살았으면 좋겠다... ...           윤동주는 자신이 존경하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집터... ...             예전의 그 집은 사라졌지만, 터는 남았으니까...       윤동주 시인 하숙집터    
329    시쓰기는 보석쟁이가 값진 다이아몬드를 세공하는것과 같다 댓글:  조회:2546  추천:0  2017-03-17
      중국 성도(成都)ㅡ 미국 직항 비행기체의 "판다" 캐리치... 한 편의 시가 태어나기 까지/이희정  5  사실 한 편의 시는 어느 정도까지는 작자와 관계없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9행에서 12행까지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우리 어른은 어린 시절의 안개가 어린이를 위해 제발 사라져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안개가 걷히면 어린이는 이 세계가 처음에 생각하고 있던 것처럼 기분 좋은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므로」라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어린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그 유년시대에 매어두고 싶다, 인생에 상처를 입는 일()에서 구해주고 싶다,  누구든 어른이 되면 인생에서 상처를 입는 일은 늘 있는 일이므로. 그러나 시는 이런 결말을 지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역시 아무리 부모라도 자기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다. 비록 부모로서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무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또 사실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마지막 2행에서 나는 아이들이 어떻게 부모를 떠나 성장해 가는지, 마치 안개나 물()이 우리의 손끝을 빠져나가듯 빠져나가는 것을 묘사했다. 어린이는 스스로 자기를 지켜야 한다. 자기의 경주를 달려야 한다. 시간은 이미 있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 6행에 대해 뭔가 깨달음이 없는지? 모래더미와 난파의 이미지를 빼면 거기에는 새로운 이미지가 하나도 없다. 는 문구 (사실 이 문구도 나의 기억에서 따온 이미지로, 내가 14세의 소년이던 때 2마일의 장애물 경기를 했을 때의 기억이다.) 속에 있는 flag(깃발로 경주로의 표시를 하는)라는 동사는 4행의 flags(깃발)의 반향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새로운 이미지를 쓰는 대신 처음 8행의 이미지―안개와 샘과 하구와() 깃발의 이미지로 반복했다. 이따금 시에서 반복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복이란 단순히 단어나 프레이즈에 한한 것이 아니라 이미지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시에서 이미지가 반복되고 있는 것은 마치 우리가 많은 거울이 있는 복도를 지나면 자기 모습을 여러 가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듯이, 나의 두 개의 주제를 몇 개의 다른 각도에서 보아달라기 위해서다.  끝으로 이들 각각 다른 특정한 이미지의 원천에 대해 내가 지금 이야기한 것을 여러분이 참고해준다면 한 편의 시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지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시의 씨앗에 해당하는 것이 나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다. 나의 일생의 각각 다른 시기에 내가 겪고 그 뒤에 잊어버린 몇 개의 경험을 내가 전혀 깨닫지 않는 동안에 어찌된 셈인지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말았다. 그 씨앗은 데번셔 주의 안개와 아일랜드의 샘과 도우셋 주의 장애물 경주를 잡았다. 그리고 또 요트가 돛을 올리고 달리고 있는 어느 강의 하구를 덧붙였다. (이 광경은 어디서 따오게 됐는지 나도 아직 알 수 없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이 시를 쓰기 시작하고 보니, 이들 네 개의 이미지가 이 시의 주제를 조명하기 위해 나의 마음속에서 자연히 떠올라 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를 쓸 때의 실제의 줄거리는 다이아몬드 브로우치가 만들어지는 순서와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마치 광부가 산허리에서 구멍을 파듯이 자기의 마음속을 파내려 가서 가장 귀중한 보석―시의 주제와 이미지를 발견하려고 한다. 광부가 아무리 그 기술이 뛰어나고 부지런히 일해도 산에 다이아몬드가 없으면 그것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속에 시가 없으면, 즉 우리의 상상력이 높은 열을 내뿜고 굳센 힘을 발휘하여 우리의 경험을 시의 소재인 보석이 될 때까지 융합하지 않고는 자기의 마음속에서 단 한 편의 시도 낳을 수는 없다.  그것은 땅속의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데 어떠한 몇 가지 화학적 조건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일이다. 우리는 다만 시를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시를 쓸 수 없다. 다이아몬드가 캐내어지면 그것을 선별되고 순위가 정해지고 잘리어서, 비로소 장식품으로 쓸 수가 있다. 이 순서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시인이 그의 상상력이 낳은 소재로부터 완성된 한 편의 시를 만들어내기 위해 행해야 하는 일에 해당된다. 그리고 또 보석쟁이의 손에 들어오는 다이아몬드의 질과 크기에 따라 그가 만드는 브로우치의 디자인이 정해지듯이, 시인의 소재의 성질과 품질이 완성된 시의 바탕무늬를 만들어 내기 위한 커다란 힘이 된다. -끝-  ================================================================================       경계  이영광(1965∼ ) 모내기철 기다리는 남양주 들판 해질녘, 논은 찬데 황새는 물 위에 떠 있다 보이지도 않는 긴 다리를 철심처럼 진흙에 박아놓고 가까이서 보면 그는 외발, 가늘고 위태로운 선 하나로 드넓은 수면의 평형을 잡고 있다 물 아래 꿈틀대는 진흙 세상의 혈을 짚고 서 있다 황새는 꿈꾸듯 생각하는 새, 다시 어두워오는 누리에 불현듯 남은 그의 외발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한 발마저 디딜 곳을 끝내 찾지 못했다는 것일까 진흙 세상에 두 발을 다 담글 수는 없다는 것일까 저 새는 날개에 스며 있을 아득한 처음을, 날개를 움찔거리게 하는 마지막의 부름을 외발로 궁리하는 새, 사라지려는 듯 태어나려는 듯 일생을 한 점에 모아 뿌옇게 딛고 서 있었는데     사람 그림자 지나가고, 시린 물이 제자리에서 하염없이 밀리는 동안 새는 문득, 평생의 경계에서 사라지고 없다 백만 평의 어둠이 그의 텅 빈 자리에 밤새도록 새까맣게 들어앉아야 한다     발레의 기본동작 중 하나인 파세(passe)를 하고 있는 듯 우아하게 외다리로 선 모습이 특징처럼 떠오르는 황새. 문득 황새가 왜 외다리로 서 있는지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 봤다. ‘두 발을 다 들면 자빠지기 때문’은 웃자고 한 답이고, ‘대개 오래 서 있을 때에 체온이 땅으로 빠져나가는 걸 반으로 줄이기 위해서’가 정답일 테다. 과학 상식이 어떻든 외다리로 서 있는 황새는 고고하고 초연해 보인다.  해질녘, 물이 차 있는 논에 황새가 외다리로 서 있다. 하늘을 나는 것도 아니고 두 다리로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외다리로 선 그 모습을 보며 시인은 ‘한 발마저 디딜 곳을 끝내/찾지 못했다는 것일까/진흙 세상에 두 발을 다 담글 수는/없다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날이 컴컴해져 외다리는커녕 황새도 안 보이자 빛에서 어둠으로 넘어가는 ‘평생의 경계’를 본다. 시에서 외다리는 있음과 없음,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 등등 두 상반된 세계를 이어주는 점이(漸移) 지점이다. 중학생 때 영어선생님이 생각난다. 어딘지 고결하게 느껴졌던 건 그분 성품이 닿은 거지만 한쪽 다리를 저셔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두 다리 동물이 두 다리로 굳건히 땅을 딛고 있지 않을 때의 아슬아슬한 균형은 보는 이를 긴장시키면서 비세속적 세계로 한 발 이끈다. 시인 이영광의 세밀한 자화상을 보는 듯한 시.
328    윤동주의 시는 끝까지 한글 작품으로 남아있다... 댓글:  조회:2818  추천:0  2017-03-17
   ▲​윤동주 관련 전시관에 공개된 시인 윤동주의 육필 원고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지난 2월 16일은 시인 윤동주가 서거한지 72주년 되는 날이었다. 윤동주는 우리에게 참 아름다운 시어를 남긴 시인이다. 육신은 비록 처참하게 산화되었지만, 그가 남긴 작품 덕분에 그는 어려웠던 시대의 행복한 크리스천 시인으로 각인돼 있다.   1947년 2월 그의 유작이 처음 소개됐고, 추도회가 거행됐다. 1948년 1월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뤄진 유고시집 가 세상에 나왔다. 자신의 분신 같은 육필 원고를 후배 정병욱에게 보관케 함으로써 첫 시집이 나온 이후 꾸준히 그의 작품들이 발굴돼, 지금은 130편의 옥고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윤동주 서거 72주년을 추모하며, 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의 과정을 거친 시인의 삶과 그 시대에 관심을 갖고자 한다.    숭실 활천과 '공상(空想)'    ▲ 15호(왼쪽)와 이곳에 실린 시 ‘공상’(空想)'    윤동주는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명동학교에서 수학했다.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윤동주는 집안 어른들을 설득, 그해 여름 숭실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한다. 문익환이 진학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숭실중학교는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는 평양에 자리잡은 학교로, 1897년 선교사 배위량(裵緯良, William M. Baird)이 자택에서 13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학교였다.    윤동주는 숭실중학교 시절 문학에 심취했고, 1935년 10월 발간된 제15호에'공상(空想)'을 발표한다. 이 시는 최초로 활자화된 윤동주 시로 주목받고 있다. 윤동주가 쓴 최초의 동시인 '조개껍질- 바닷물 소리 듣고 싶어'와 '오줌싸개 지도' 등도 이때 쓴 작품으로 추정된다.    1935년 9월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윤동주는 1936년 3월까지 객지생활 7개월 동안 시 10편과 동시 5편 등 무려 15편의 시를 썼다. 그는 시인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심취해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 세계를 열어 나간다.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그가 만난 것은 뜻밖에도 '신사참배 강요'였다. 일제는 각지에 신사를 세웠고, 학교와 가정에도 소형 신사를 설치하도록 하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기독교는 1935년을 기점으로 조선총독부의 강경한 신사참배 정책에 저항하면서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1936년 1월, 일제 총독부는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숭실중학교 윤산온(尹山溫, George S. McCune) 선교사를 교장직에서 파면한다. 이에 일어난 학생들의 항의 시위로 숭실학교는 무기휴교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윤동주의 숭실중학교 생활은 이렇게 단 7개월만에 끝났다. 1936년 3월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게 된다. 광명학원은 숭실중학교보다 더 나쁜 상황이었다.    대륙낭인 출신의 일본인이 경영하던 친일계 학교가 돼 버렸던 것이다. 광명중학 재학 2년 동안 윤동주는 동시에 더욱 몰두하여, 연길에서 발행되던 월간잡지 에 모두 5편의 동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연희전문학교와 '문우'    윤동주는 1938년 4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 해 10월 조선일보에 시 '아우의 인상화'와 1939년 2월 조선일보에 수필 '달을 쏘다'를 발표하게 된다.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그는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조선일보에 실린 동시 ‘아우의 인상화’   윤동주의 작품 중 눈에 띄는 것은 에 발표했던 작품이다. 는 1932년 12월 18일 연희전문학교 문과 문우회에 의해 태어났다. 에 비해 훨씬 문예지 색깔이 나는 잡지였다.    1941년 는 5호를 마지막으로 종간하게 됐다. 당시 송몽규는 문예부장으로 활동했는데, 시대의 압박으로 마지막 발간되는 에서 송몽규는 '꿈별'이란 필명으로 '하늘과 더불어'를, 윤동주는 '새로운 길', '우물 속의 自像畵(자상화)'를 각각 발표했다. 편집 겸 발행인으로는 나중에 일본 유학을 하게 되는 강처중(姜処重)으로 돼 있다. 이들은 모두 문과 4학년 동급생으로, 절친한 우정을 나누던 사이였다.    그리고 이는 최소한 1941년 6월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티면서 작품활동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문학을 사랑했던 그들이었기에, 숱한 고생 속에 겨우 모았던 원고 대부분이 검열에 걸려 게재 불가능했다.    이와 함께 식민지 공간 속에서 군국주의 체제 강화 총력전으로 인해, 교우회가 발행한 는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억압 속의 현실이 더욱 서글프게 느껴졌음을 행간에서 엿보게 한다. 마지막 호 전체 내용이 거의 대부분 일문(日文)으로 쓰여져 있을 정도였지만, 윤동주 시는 끝까지 한글 작품으로 남아있다.     ▲잡지 와 그 속의 시 ‘새로운 길’, ‘우물 속의 자상화’.   밤하늘 별빛 같은 시인 동주를 추모하며    올해 12월 30일은 윤동주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 음울하고 가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반드시 여명은 오리라 믿고 써내려간 주옥같은 시어들은, 오늘날까지 해맑은 영혼의 징표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 윤동주 시집이 수없이 발행돼 왔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를 지며 순례자의 삶을 묵묵히 살아간 시인 동주의 삶과 시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심도 있게 진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윤동주 전시관에 비치된 관련 서적들   한국교회에서도 올해는 윤동주를 기리는 문화 행사들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이는 한국교회가 놓쳐버린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대의 아픔을 안고, 밤하늘에 별빛 같은 삶을 산 시인을 오늘도 기억하게 된다. ​   이효상 목사/ 교회건강연구원 원장
327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도 시인이었다... 댓글:  조회:3718  추천:0  2017-03-16
많은 시 독자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꼽으라면 윤동주 시인을 꼽는다. 그만큼 우리에게 친숙하고 국민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 윤동주 시인이다. 그런데 그의 친동생 윤일주가 시인이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윤동주 사후에 유고시집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윤일주도 사후에 시집 "동화"를 남겼다. 윤동주의 시에 아우가 등장하는 시가 두 편이 있는데 '아우의 인상화'와 '오줌싸개 지도'이다.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여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된 손을 잡으며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윤동주, '아우의 인상화' 전문, 1938. 9. 15. 여기에 나온 동생이 바로 윤일주의 초상인 것이다. 윤일주는 1927년 요즘 '연변'이라는 지명으로 우리에게 친근한 만주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났다. 윤동주는 해방 직전 일본 감옥에서 옥사했지만 윤일주는 해방 직후 진학을 위해 서울에 왔다. 1946년 9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에 입학하여 1953년 3월 졸업했다. 동란 때문에 학업이 늦어진 것이다. 그후 1961년 3월 해군중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해군에 복무 했다. 제대한 후에는 부산대학교, 동국대학교, 성균관대학교에서 건축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85년 간암으로 58세의 삶을 마감했다. 윤일주는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이 옮겨가는 바람에 용정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거기서 우리말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집 '동화'에는 65편의 시가 실렸는데 31편이 동시다. 윤동주의 시집에도 115편 중에서 동시가 37편인 걸 보면 이 두 형제 시인의 유사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그들의 시엔 유난히 동심이 많이 드러나 있는데 시심은 동심과 상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심정의 서술만으로는 현대시가 되기 어렵다. 윤일주의 시가 심정의 시이면서도 진부한 서정시가 아니라 세련미를 갖추고 있는 것은 언어의 그림, 즉 시각적 이미지의  제시라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축도(縮圖) 따가운 모랫벌을 모래 투성이 된 개구리 한 마리 톡 톡 톡 뛰어가네 사막(沙漠)       -'축도' 전문 위 시에서 마지막 한 행을 이루고 있는 '사막'이라는 단어가 이 소품을 감칠맛 나는 시작품으로 만들고 있다. 그 한 단어로 금세 시의 이미지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윤일주는 1955년 "문학예술"지에 두 차례에 걸쳐 '설조 雪朝'와 '전야 前夜'가 추천되어 정식 시인으로 데뷔했다. 그러나 군에 몸담고 있을 때까지 종종 이어지던 시 창작이 대학 강단으로 옮긴 후 중단됐다. 그의 시작 기간은 20년 정도 되지만 작품 수는 65편에 불과하다. 그의 시에서 특히 두드러진 내용은 고향과 가족에 관한 회상이다. 작품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들 낡은 맥고모 아래 허어연 수염 바람에 날리며 단을 묶는 할아버지는 진종일 내 반나체(半裸體)의 배경(背景). 곡식을 베고 난 들에 해는 서산에 걸리어 들은 할아버지 손바닥.       -'들-전문     봄 파아란 하늘 밑으로새로 일군 이랑들이 끝없이 끝없이 뻗어나간 밭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진종일 바쁘시다. 아버지는 괭이로 이랑을 지으며 나가면 나가는 대로 어머니는 졸졸 따르며 씨앗을 넣으니 괭잇날에 솟쳐나는  먼 할아버지들의 뼈. 소리 잃은 암탉과  조는 고양이를 데리고 집에 홀로 남은 나는 새파란 하늘에 송이송이 구름처럼 비낀 할아버지들의 뼈를 진종일 바라보는 것이다.              -'봄' 전문 망향(望鄕) 푸른 하늘이 멀리 국경을 넘어가고 송이와 송이 서로 부닥치며 휘감겨 눈보래를 일으키던 먼 하늘가, 이제 종달새 울음 넘쳐흐르며 대지의 가슴으로 사래 긴 이랑들 늑골처럼 휘어져 뻗는데 어느 이랑 끝에서 아버지는 또 소를 돌려세우시는가 하늘, 저 깊은 곳에서 아스라이 들아오는 정다운 메아리, 뒷산 어느 바위에 서서 그리운 아이들이 노래부른다 진달래를 꺾으며 흥얼거린다.            -'망향' 전문 언덕길 여름내 소를 이끈 할아버지와 꼴망태를 맨 손주가 다정스레 오르고 내리던 길. 오늘  손주는 목메어 흐느끼며 상여에 뒤따라 오르고, 하늘 비낀 눈망울을 꿈벅이며 새김질 하며 황소는 풀밭에 저만치 서 있고-               -'언덕길'전문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 몇 편 전문을 옮겼다.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 하는 시들이 주류를 이루는가운데 1947년에 쓰여진 '언덕길'은 할아버지의 장례풍경이 나타나 있다. 그의 시엔 소에 대한 내용이 자주 보이는데 소도 가족의 일원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망향에 보면 대지나 밭고랑까지도 의인화 돼 표현됐는데 이것은 그 시절 우리들의 생활이 농경과 밀접했기 때문일 것이다. 외의 여러 작품에 고향과 가족을 회상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의 시중에 기독교에 관 한 시가 몇 편 있기도 한데 윤동주의 시에 '팔복' '십자가'처럼 기독교 관련 시가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윤일주의 기독교 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골 목사관(牧使館) 시골목사 목사관은 초가 삼간, 처마 밑에 자전거가 비스듬히 놓이고 동지섣달 추운 밤을 눈이 내린다. 교회당의 불을 끄신 다음 목사관의 불을 켜시고 두터운 성경책을 펴신 목사님은  돋보기 알에 그윽한 말씀의 사래 긴 이랑을 더듬으신다. 목사관의 불을 끄시고 목사님은 엎드려 기도 하실 제 지붕엔 흰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눈앞에 삼삼이는 교우의 초막들- 세찬 눈보라와 기도의 대목에서 나직이 울리는 도야지 울음에 뉘우쳐 눈을 뜨며 혀를 차신다. 미처 덮지 못한 우리의 지붕을 생각하고 돌아누우며 눈 속에 파묻혀 떨고 잇을 어린 도야지를 근심하여 밤내 잠 이루지 못하시는 목사님. 목사관의 불을 끄신 다음 교회당에 불을 켜시고 목사님은 손수 새벽종을 치실 것이다.             -'시골 목사관' 전문  윤일주 시인은 그 심정으로 보아 타고난 시인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타고난 시인이었던 형 윤동주가 있었다. 아버지를 뒤를 이어 성균관대 건축공학고 교수로 있는 그의 장남 윤인석의 말대로 "유고집으로 시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두 분의  운명"이었던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집은 시인이 작고한 뒤 그의 장남이 김종길 시인에게 맡긴 것을 시인의 20주기에 맞춰'솔'출판사에서 시집으로 편찬한 것이다. ======================   시대 현대 출생 1927년 사망 1985년 유형 인물 직업 건축사가, 시인 대표작 한국양식건축80년사 성별 남 분야 예술·체육/건축 본관 파평(坡平) 요약 1927∼1985. 건축사가·시인.   내용 만주 간도성(間島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 출생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시인 윤동주(尹東柱)의 동생이며, 만주의 간도성 용정가(龍井街)공립 홍중(弘中)소학교, 만주 광명(光明)영신(永信)중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에서 의과대학을 다녔다. 1945년 월남해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공대 건축과에 입학했고, 졸업과 동시에 해군에 입대해 시설장교로 근무했다. 군장교 시절에는 시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1955년 6월 『문학예술(文學藝術)』에 시 「설조(雪朝)」로 등단했으며, 이어 1959년 1월 『사상계(思想界)』에도 시를 발표해 사상계 출신 문인 반열에 들기도 했다. 제대 후 부산대학교 교수로 취임해 한국근대건축사(韓國近代建築史)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해 「1910년 이전의 부산의 양풍건축」과 「부산상품진열관(현 저금관리국) 건축에 대한 사적고찰」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연구업적 중 대표라 할 수 있는 『한국양식건축80년사』는 이후 한국 건축계의 가장 훌륭한 저서 중 하나로 꼽히며,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부분의 건축인들이 현대건축을 향해 앞을 다투던 시절, 그는 한국의 근대건축역사를 수집 정리했다. 건축사에 대한 인식이 대체로 전통건축사에 한정되고, 도시가 현대화되고, 개화기 이후의 건축들이 대부분 철거되던 시기에 그는 한국 근대건축뿐만 아니라 개화기와 식민지기의 건축가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그들의 업적을 발굴해냈고, 특히 그들이 건축사에 끼친 영향을 부각시켰다. 또 하나의 업적은 한국 근·현대건축의 통사적(1880∼1978) 체계를 수립했다는 것으로, 관련한 여러 논문들을 발표해 후학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건축의장학, 색채학 연구에 이어졌고, 영세적인 1970년대 건축출판계에서 훌륭한 번역서들을 내놓아 한국 건축출판문화의 발판을 이루어 내기도 했다. 한편 건축교육적 측면에서는 부산대학교(1960∼1967)와 동국대학교(1968∼1971), 성균관대학교(1971∼1985)의 건축과 창립에 기여해 많은 제자를 길러냄으로써 건축계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의 사후, 제자들은 『한국근대건축사연구』를 펴냈으며, 동시집 『민들레피리』를 출판해 그의 업적을 기렸다. [Daum백과] 윤일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26    시비(詩碑)가 뭐길래 시비(是非)인거야... 댓글:  조회:2855  추천:0  2017-03-16
[천안=일요신문] 박하늘 기자 = 충남 천안시가 시비(詩碑,시를 새긴 비석) 건립을 둘러싼 지역 문화예술인 간의 갈등을 조장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 시비(詩碑)는 천안시 출범 이후 최초로 세워지는 것이라는데 그 의미가 있다. 지역 문화예술인들은 시비로 세워지는 시(詩)의 선정이 편파적이었다며 첫 시비 건립인 만큼 천안의 시인이 들어가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반면 시비 건립을 주관한 백석대학교는 전국적인 명소를 표방하기 때문에 천안지역 시인에만 국한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에 천안시는 문제가 되는 시비만 골라 철거하는 것으로 갈등을 무마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천안시가 시비에 대한 지침을 제시했다면 불거지지 않았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천안 도솔공원에 설치된 '시(詩)가 있는 산책로'. 도솔공원은 동남구 신부동 경부고속도로 천안IC 일원 6만1507㎡ 규모로 조성되며 올 4월 준공을 앞두고 있다.일요신문 충남지부 박하늘 기자   #시비(詩碑)가 뭐길래  한국문인협회 천안지부(천안문협)는 14일 천안시에 도솔공원의 '시(詩)가 있는 산책로'에 설치된 시비(詩碑)에 대한 질의서를 제출했다.  이 질의서는 ▲특정 문학단체 일률적인 시비 선정 이유와 경위 규명 ▲선정 시인 중 고 김명배 시인에게만 건립비용을 수수한 이유 ▲애초 시비가 20기에서 2기가 추가된 이유 등을 골자로 한다.  천안 도솔공원은 6만1507㎡ 규모로 동남구 신부동 경부고속도로 천안IC 인근에 조성된다. 공원에는 565억 원의 예산을 투입됐으며 지난 2013년 12월 착공했다. 백석대 문현미 산사현대시 100년관장은 지난해 7월 도솔공원 내 '시(詩)가 있는 산책로' 건립을 제안했다. 시는 이를 받아들였다.  당초 시는 공원조성 예산을 540억 원으로 책정했으나 '시(詩)가 있는 산책로'를 비롯, 공원 활성화를 위한 인공암벽, 야외광장, 체육시설 추가, 건립 등을 위해 설계변경을 하고 25억 원 추가 투입했다.  백석대는 지난해 10월 도솔공원의 주 시공사인 (주)대림과 시비 20기 설치를 골자로 한 '시가 있는 산책로' 조성 계약을 맺었다.  문현미 관장은 자신을 포함해 백석대 디자인과 교수와 국문과 교수, 산사현대시 100년관 근무자 등 7명으로 '시가 있는 산책로 프로젝트' 팀을 꾸렸으며 3~4개월에 걸쳐 시비 제작에 들어갔다. 디자인과 교수들의 재능기부로 시비 시공에는 시에 대한 저작권료, 시공비, 기타비용만 사용됐으며 9600만 원이 들었다.  #이육사 '청포도', 윤동주 '서시'가 사랑과 희망을 노래? 시비 선정 기준은? 프로젝트팀은 자체 협의로 시 20편을 선정했다. 문현미 관장 본인의 작품도 포함됐다. 이후 천안문인협회 초대회장인 故 김명배 시인과 윤동주 시인의 시비 2기가 추가됐다. 프로젝트팀의 문학과 관련된 팀원은 문현미 교수와 국문과 교수 1명, 현대사 100년관에 재직 중인 팀원 1명 등 3명이었다.  문현미 관장은 "처음에는 천안과 어울리는 '애국·애족'과 관련된 시를 다루기로 했으나 다소 딱딱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사랑과 희망'으로 주제를 바꿨다. 이 주제가 공원을 찾는 시민들에게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시의 선정 기준을 밝혔다. 프로젝트팀이 선정한 시인은 ▲신달자, 김남조, 정호승, 고은, 유한진 등 전국적이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진 시인 13명 ▲나태주, 이근배, 이제무, 구제기 등 충남 출신 시인 4명 ▲윤동주, 이육사 등 민족시인 2명 ▲안수환, 김명배, 문현미 등 천안지역 시인 3명 등 22명이다. 이를 두고 천안문협은 "특정 문학단체에 편중된 선정"이라며 문 관장의 지인 위주로 선정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22인에 포함된 작가 중 이육사, 윤동주, 안수환, 김명배를 제외한 18명이 모두 한국시인협회(한국시협)의 전·현직 임원이었던 것이다. 문현미 관장은 현재 한국시협의 부회장과 교류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유정 천안문협 지회장은 "도솔은 천안의 옛 이름으로, 도솔공원에는 천안을 노래하는 시가 당연히 있어야 한다. 천안의 정체성과 관련된 공원에 개인의 사견이 들어갔다. (안수환, 김명배를 제외한) 20명 선정의 이유가 모호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2인에 포함된 안수환 시인도 "천안예술인을 배제한 문 관장의 시인 선정이 편파적이었다"고 말했다. 천안문협과 문현미 관장의 갈등이 불거지자 안수환 씨는 자신의 시비 철거를 요구하며 저작권료를 반환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시(詩)가 있는 산책로에 설치된 안수환 시인의 시비(詩碑)가 비닐에 싸여 있다. 안수환 시인은 한국문협과 백석대 간의 갈등이 불거진 후 자신의 시비철거를 요구하고 있다.일요신문 충남지부 박하늘 기자   문현미 관장은 "도솔공원을 전국적 명소로 만들기 위해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해 시인을 선정했다"고 해명했다.  한국시협에 편중된 시인 선정이라는 지적에 대해선 "사실 학교 일이 바빠서 한국시협의 일을 잘 하지 않았다. 사실 한국시협이 부회장직을 제안했을 때도 놀랐다. 한국시협 회원들과의 친분이 많지 않다"고 일축했다.    문 관장이 제시한 '사랑과 희망'이라는 주제와 실제 제작된 시비의 주제가 맞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다. 시비로 만들어진 이육사의 '청포도'와 윤동주의 '서시'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일반적이지 사랑, 희망과는 다소 동떨어진 주제라는 것이다.   천안문협의 윤성희 평론가는 "2편의 시 모두 저항적 성격이 크다. 청포도는 일반적으로 암흑기에 미래에 대한 염원 의지가 담겼으며 서시는 자기고백과 내면적 성찰이 주가 된다"며 "일반적 의미의 사랑과 희망이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고 평가했다. #추가된 시비 2기의 진위는?  백석대 프로젝트팀은 당초 (주)대림과 시가 있는 산책로에 시비 20기를 세우기로 계약했다. 천안시도 20기만 제작되는 것으로 보고 받았다.  그러나 이후 시비 2기가 추가됐다.  천안문협은 추가된 2기가 지역의 반발을 두려워해 천안지역의 시인인 안수환, 김명배의 시를 추가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조유정 지부장은 "미안한 마음에 2명 추가해서 김명배 안수환 시인이 포함됐다. 이점을 치욕스럽게 생각한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문현미 관장은 천안문협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단언했다. 문 관장은 "추가된 2기는 윤동주 시인과 김명배 시인이며 안수환 시인은 이미 최초 선정된 20기 안에 포함됐다"며 "(주)대림이 시비가 세워지는 공간에 여유가 있으니 시비를 추가해달라고 제안이 들어왔다. 이에 윤동주 시인을 포함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성열 천안문화역사 실장을 통해 김명배 시인의 유족이 자비를 들여서라도 시비를 건립하겠다는 의사를 전달받았으며 1기를 더 추가토록 했다"고 설명했다. 추가된 2기의 시비의 제작비용에 대해서는 "시비 시공업자가 좋은 일에 쓰이는 것이라며 2기를 기부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천안 도솔공원 전경.일요신문 충남지부 박하늘 기자     #시비는 천안시가 건립하는데 제작비용은 시인이 납부? 천안문협은 김명배 시인의 유족이 김 시인의 시비 건립비용으로 400만 원을 송금했다가 다시 반환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김명배 시인에게 지급돼야 할 저작권료가 시비가 완성된 지 2달 뒤인 올해 2월에서야 받았다며 이와 관련된 의혹을 제기했다. 문현미 관장은 "시비 시공업자가 윤동주 시인의 시비는 기부할 수 있으나 김명배 시인의 시비제작에는 난처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래서 시비 제작비용 지급을 자처한 김명배 시인의 유족에게 시공업자에 직접 비용을 송금하라고 전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중에 시공업자가 김명배 시인의 시비도 부담하겠다는 뜻을 보이고 400만 원을 직접 돌려준 것으로 안다"고 해명했다.  # 천안시의 졸속행정이 지역 문화예술인의 갈등 자초  이런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갈등은 천안시의 안일한 행정이 자초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지역 문화예술인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담긴 문제를 무책임하게 시공사에 일임해서 비롯된 문제라는 것이다.  도솔공원 조성을 맡은 천안시 도시계획과 관계자는 "이런 갈등이 생길 줄 예상치 못했다. 시비 선정에서 백석대가 전문성이 있으므로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며 말꼬리를 흐렸다. 또한 문화예술에 관련된 사안을 관련 부처와의 상의없이 진행한 것도 일을 키웠다는 지적이다. 도시계획과는 시비 건립 문제에 있어서 문화관광과의 협의하지 않았다고 시인했다. 문화관광과는 시비가 세워진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윤성희 평론가는 "시청의 관리가 부족했다. 문화관광부와 의논했다면 지역 문화예술인과 협의해 문제를 키우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개발만 생각하다 문화단체 간의 갈등이 촉발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천안문협의 불만표출 이후 천안시의 감정적 대처도 문제 되고 있다. 앞선 도시계획과 관계자는 "추가된 2기의 시비를 제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조유정 지부장은 "2명(안수환, 김명배)의 시비를 철거하는 것으로 안다. 천안 문인들의 자존심을 뭉갠 것"이라며 "추후 시장의 질의서에 대한 답변을 보고 협회 원로, 이사회와 의논해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심화된 갈등을 예고했다. 
325    한 편의 시에서 시의 1행이 주조행(主調行)이라 할수 있다... 댓글:  조회:2599  추천:0  2017-03-16
      호북성 의창시 황화(黃花)진 쌍두사(雙頭獅)풍경구역에서ㅡ  한 편의 시가 태어나기 까지 4 /이희정  4  그러면 이제부터 몇몇 시인의 구체적인 시를 통해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보며 지금까지 얘기해온 것의 의미를 실제적으로 알아보자. 먼저 외국시부터 한 편 본다.  Children look down upon the morning gray  Tissue of mist that veils a valley"s lap:  Their fingers itch tear it and unwrap  The flags, the roundabouts, the gala day.  They watch the spring rise inexhaustibly―  A breathing thread out of the eddied sand,  Sufficient to their day : but half their mind  Is on the sailed and glittering estuary.  Fondly we wish their mist might never break,  Knowing it hides so much that best were hidden:  We"d chain them by th spring, lest it should broaden  For them into a quicksand and a wreck.  But they slip through our fingers like the source.  Like mist, like time that has flagged out their course.  아이들은 아침 안개를 내려다보고 있다,  어느 골짜기의 개울가에 보얗게 서린 아침 안개를:  아이들의 손끝은 이 베일을 찢어버리고 싶어 설렌다.  깃발과 회전목마와 명절날을 싸고 있는 걸 벗겨버리고 싶다.  아이들은 언제까지나 그칠 줄 모르는 샘물을 지켜보고 있다―  잔모래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숨쉬고 있는 한 가닥의 실,  어린 날엔 그것으로 충분하리 : 그러나 어린 마음의 절반은  돛이 달리는 반짝반짝 빛나는 河口쪽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아이들의 아침안개가 내내 끊이지 않길 바란다,  안개는 숨겨져도 좋은 것을 그렇게도 많이 감추어주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저 샘물로 묶어두고 싶다, 샘물이 흘러 개울폭이 넓어지면  거기에는 모래더미와 難破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샘물처럼 우리의 손끝에서 빠져나간다.  안개처럼, 또한 경주로의 길가에 있는 깃발 사이로 빠져나간 시간과도 같이.  이 시는 아일랜드 출신의 세실 데이 루이스라는 시인의 이란 시인데 시인의 시작과정을 직접 들어보자.  “이 시의 씨앗은 나의 두 아이에 대해 내가 느낀 어떤 격렬한 감정이다. 이건 세상의 대개의 부모들이 조만간에 갖는 감정, 즉 자기의 아이들도 얼마 안 가서 어른이 되어 부모 곁을 떠나 위태롭고 살기 힘든 세상 한가운데로 진출해야 한다는 슬픔의 감정이다. 누구나 젊을 때에는 자기 부모가 이런 기분을 갖는 데 대해 가끔 불만을 느끼는 법이다. 아이들은 하루빨리 어른이 되어 혼자 독립하고 싶어하는 법이다.  그런데 한번 더 앞의 시를 읽어보면 거기에는 두 개의 테마 또는 주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하나는 뒤의 6행에 나타나 있는 내 자신의 감정으로 그것이 본디 테마다. 또 하나는 처음 8행에 나타나 있는 안타까운 듯한,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아이들의 감정으로서, 이들 두 개의 테마가 서로 밸런스를 유지하며 서로 대비되는 듯한 기분으로 이 시는 씌어지고 있다.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펜을 잡기 전에 나는 시의 1행이 실제로는 이미 내 머릿속에 떠올라있음을 흔히 발견한다. 그 1행은 그 시가 전개하는 그 시의 주제와 바탕모양에의 계기를 내게 주는 것, 즉 음악으로 말하자면 主調音에 해당하는 일종의 主調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14행 시를 쓰려고 내가 책상 앞에 앉았을 때, 그런 의미의 한 행이 곧 내 머리에 떠올라왔다. 그 한 행은(이 한 행만이 나중에 손을 댈 필요가 없었는데) 이었다. 나는 이 한 행에 대해 생각하고 이 한 행이 명절날, 즉 아이들이 몹시 기다리는 것의 이미지임을 알았다. 분명히 이 이미지는 어린이가 들어가 보고 싶어하는 어른의 세계를 상징(대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안타까움의 관념을 기초로 하여 다시 또 다른 행― 처음의 3행을 덧붙이기로 했다.  여기에서 강 유역을 덮고 있는 새벽안개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 그것은 어린이들이 생일날에 받는 선물의 얇은 종이를 찢어보고 싶은 하는 하나의 막―어린이를 어른의 세계에서 가로막고 있는 막을 말한다. 이 이미지는 몇 년 전의 어느 날 나의 기억이다. 내가 나의 아이를 데번셔 주의 초등학교에 데리고 가서는 어느 언덕 위에서 쉬면서 안개로 덮인 아래 골짜기를 바라보았을 때의 기억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때 그 안개가 마치 얇은 종이처럼 보이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시를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 그 사건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처음의 4행에 표현된 테마의 변주곡으로서 그 테마를 보조하는 다음 이미지를 바라게 되었다. 여러분은 5행에서 8행까지에서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즉 땅위에서 퐁퐁 솟아오르는 샘과 숨쉬고 있는 한 가닥의 실을 바라보려고 앞으로 쭈그리고 있는 어린이의 묘사다. 라는 단어가 이전의 이미지에 대한 손잡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샘은 생명의 원천이요, 젊은 생명을 나타낸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생명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다. 은 마치 시냇물이 확대되어 하구가 되듯, 그들의 생명이 확대되고 위대한 사람이 되고 지극히 많은 생활을 영위할 시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샘의 이미지도 안개의 이미지와 같이 나의 기억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아일랜드의 어느 시골 저택 근처에 있던 실제의 샘으로, 나는 어릴 때 그 샘에 몹시 매력을 느꼈었다. 나는 몇 시간이나 그 샘을 지켜보며 어째서 이렇게 자그마한 한 가닥의 물줄기가 이 대지에서 힘차게 솟아나는지 이상스럽게 느꼈던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또 하나의 다른 테마를 덧붙일 필요를 느꼈다.―즉 아이들이 세상에 진출해 가는 데 대해 부모가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해 주기 바라는 것은 이 테마는 이 시의 근본씨앗이 되고 있으나 이 시에서는 비교적 작은 부분(9행에서 12행까지)을 차지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시를 쓸 때 흔히 있는 일이지만 완성된 시는 처음에 생각하고 있던 것과 완전히 다르게 되어버리는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한 편의 시가 어떤 형태의 것이 되는지 그 시를 다 쓰기 전까지는 짐작을 못하는 수가 많다.      ================================================================================   앨범 속의 방 ―허혜정(1966∼)     검은 마분지로 만들어진 갈피마다 하얀 습자지로 덮여 있는 빛바랜 사진들. 하나의 방처럼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모여든 얼굴들이 기억의 영사기에 비춰오듯 흐릿하다. 딱히 언제 사진인지 짚어낼 순 없어도 앨범 속에 죽어 있던 풍경이 스며드는 방. 산 자와 죽은 자의 장소는 다르다고 믿어왔지만 사진 속의 일몰은 나의 창에 물들고 있다. 푸르게 젖어가는 옥양목 마당 너머에는 바라볼수록 여백이 넓어지는 하늘. 늦가을 바람에 창살은 구슬픈 울음소리를 낸다. 녹이 먹어버린 문고리와 발바닥에 닳아 얇게 패인 문턱들. 몇 세대가 머물다 간 낡은 집으로 그들은 바람처럼 돌아와 바스락댄다. 슬픈 아이가 잠결에 따스한 체온을 느끼듯이 혼자가 아닌 것 같아. 세대의 눈빛 안에 고여 있는 나의 눈이 어떤 슬픔을 꺼내놓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비워낸 시공간을 옮겨 적는 것. 잊었던 말들이 밀려온다. 스쳐가는 그림자의 방에서. ‘검은 마분지로 만들어진 갈피마다 하얀 습자지로 덮여 있는 빛바랜 사진들’, 사진 한 장 한 장을 소중히 갈무리한 이런 앨범이 집집마다 다락이나 장롱 깊은 곳에 있었다. 가족 앨범은 대개 스냅사진으로 채워진다.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흘러갈 시공간을 찰칵찰칵 잡아채서 우리는 기억을 닳고 바래게 하는 시간의 물살에 대처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진으로 남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현재 삶이 살아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인생은 저마다 기록해 남길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리라.     화자는 낡은 앨범을 보고 있다. 검은 마분지도 하얀 습자지도 바싹 말라 화자는 조심스레 앨범을 넘길 테다.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모여든 얼굴들’, 오래된 과거와 가까운 과거가 모여 있는 앨범이다. ‘몇 세대가 머물다 간 낡은 집’, 조부모님의 젊은 모습, 아버지나 고모 삼촌의 어린 모습…, 잘 모를 사람의 모습도 있겠지만 모두 화자의 혈족일 테다. ‘세대의 눈빛에 고여 있는 나의 눈’, 당연히 그럴 테다. 이미 작고하셨건 구존해 계시건 그들은 어딘가 화자와 닮았을 테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장소는 다르다고 믿어왔지만 사진 속의 일몰은 나의 창에 물들고 있’단다. 사진 속의 풍경이 화자의 회상과 포개지며 현재 공간을 아스라이 물들인다. 오래된 가족 앨범을 보면서 제가 세상에 불쑥 던져진 돌멩이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힘을 얻는 화자다. 
324    윤동주 묘비에는 "詩人尹東柱之墓"라고 워낙 각인되여... 댓글:  조회:3065  추천:0  2017-03-16
[문화]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                           /2017.02.10 시인 윤동주 이야기 =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  시인, 연호, 묘 찾기, 묘의 위치  · 묘비에 ‘詩人’이라 붙인 이유  윤동주는 죽을 때까지 시인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용정의 윤동주의 묘비에는 “詩人尹東柱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윤동주의 최초 창작 시는 1934년 12월 24일 자 시 3편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이다. 최초 발표 시는 1935년 10월에 숭실중학교 학생회의 《崇實活泉》 제15호의 「공상」이다. 동시는 1936년 「병아리」가 연길의  11월 호에 발표되었다. 조선일보 학생란에 1939년 1월 23일 시 「遺言」에 이어, 시 「아우의 印象畵」와 산문 「달을 쏘다」가 실렸다. 동시 「산울림」이 1939년 지에, 1941년에 연희전문 문과의  6월 호에 시 「새로운 길」이, 시 「자화상」이 1941년  6월 호에 발표되었다. 사후(死後)에 최초로 발표된 시는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京鄕新聞) 4면에 게재된 「쉽게 씌어진 시」이다. 첫 시집은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 발행한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이런데도 4월 16일에 세운 묘비에 “시인윤동주지묘”라 하였다.  2003년 6월 28일 용정의 집으로 초대받은 자리에서, 여동생 오형범(吳瀅範), 윤혜원(尹惠媛) 부부는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었다. 1945년 3월 6일에 윤동주 장례 후 묘비 건립을 준비하던 조부와 부친이 “詩人”이라 붙이기로 하였다. 윤동주의 자선 육필 시집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연희전문 시절의 윤동주 이 육필시집은 윤동주가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19편을 골라 자필로 써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제목을 단 것이었다. 1942년 동경 입교대학 영문과에 다닐 때 여름방학에 용정에 가지고 와서 보여주며, 3벌을 만들었는데 1벌을 당시 이양하(李敭河) 교수에게 드리고 출판을 하겠다고 하였더니 시기상조라고 하였다고 하고, 또 1벌은 후배인 정병욱(鄭炳昱)에게 주었다고 하였단다. 이 시집을 근거로 조부 윤하현(尹夏鉉)과 부친 윤영석(尹永錫)이 묘비에 “시인”이라고 붙인 것이다.  · 묘비에 年號 대신 西紀를 쓴 까닭  윤동주는 서기 191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7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1945년 2월 16일 금요일 오전 3시 36분에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나이로는 29세이지만, 실제로는 만 27년 1개월 17일 동안을 살았다.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로 가서 화장하여, 1945년 3월 6일에 용정 동산의 교회 묘지에 안장했다.  그런데 윤동주 묘비에는 연도가 서기(西紀)로 되어 있다. 비문 속의 연도도 서기이고, 묘비문 끝에도 “1945년 6월 14일 謹竪”라 새겨져 있다. 이것은 특이한 것이다. 당시에는 연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해 3월 7일에 작고한 송몽규(宋夢奎)의 묘비에도,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현석칠(玄錫七) 목사의 묘비에도 일본이 세운 만주국 연호 “康德”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오형범 장로는 다음과 같이 의견을 말해 주었다. “윤동주는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잡혀가서 일본 감옥에서 죽었지 않았어요? 그러니 어떻게 일본 연호를 쓰겠습니까?” 한창나이의 자식을 잃은 어버이로서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비문은 부친의 친구인 김석관(金錫觀) 선생이 짓고 썼는데, 윤동주의 스승이었고, 명동학교의 학감을 지냈다. 그도 연호를 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건립일자가 서기인 시인 윤동주의 묘비 · 尹東柱 墓를 찾게 한 사진  1984년 봄에 미국의 현봉학(玄鳳學) 선생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8월에 중국을 방문하여 연변의 유지들과 윤동주의 묘를 찾았다. 그런데 아무도 윤동주를 모르고 관심을 안 주어서, 위대한 애국시인임을 역설하고, 내년 방문 때에는 묘소를 꼭 찾아볼 수 있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친동생인 윤일주(尹一柱) 교수가 1984년 여름에 일본에 가 있던 중, 연변대학 교환교수로 가게 된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를 찾아가, 윤동주의 묘소가 동산 교회 묘지에 있다는 것을 말하며 찾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오오무라 교수는 1985년 4월 12일에 연길에 도착하였는데, 연변 문학자들은 윤동주는 물론 작품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오오무라 교수는 5월 14일 연변대학 권철(權哲) 부교수, 조선문학 교연실 주임, 이해산(李海山) 강사와 용정중학의 한생철(韓生哲) 선생과 함께 동산의 교회 묘지에서 윤동주의 묘를 찾아냈다.  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가지고 간 묘비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왼쪽에 오형범과 윤광주, 오른쪽에 윤혜원·윤영선·윤갑주 5명이 들어 있었는데, 묘비제 “詩人尹東柱之墓”가 중앙에 뚜렷하다.  오오무라 마쓰오 교수가 윤동주 묘를 확인하게 한 사진 이 묘비 사진이 아니었던들 공동묘지의 수천의 묘비들을 하나하나 살펴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내고 확인할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자료는 이 가족사진이었다. 1995년 문학사상사 간행 는 윤영선(당숙)과 오형범(매부)이 서로 바뀌어 설명되어 있다.   · 윤동주 墓의 정확한 위치  윤동주의 묘는 용정시(龍井市) 동쪽 합성리(合成里) 동산(東山)의 교회 묘지 8부 능선쯤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의 위치가 글과 책에 따라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동산교회 묘지’, ‘중앙교회 묘지’, ‘동산 중앙교회 묘지’, ‘교회 공동묘지’ 등으로 나온다. 실제로 ‘동산교회’와 ‘중앙교회’가 있었고, 지명으로 ‘동산’도 있었으며, 묘도 공동묘지에 있어서 혼란스럽다.  이에 대하여 1947년까지 용정에서 살았던 오형범·윤혜원 부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윤동주의 묘지 위치는 “동산에 있는 교회 묘지”가 맞다. 당시 용정에는 장로교회로 중앙(中央)교회와 동산(東山)교회와 토성포(土城浦)교회가 있었다. 서부의 감리교회와 북부의 성결교회까지 모두 5개가 있었다. 1942년에 교단이 합쳐져 만주기독교단이 되었다. 당시 동산의 공동묘지는 이들 5개 교회의 공동묘지였다. 그러므로, “동산에 있는 교회 공동묘지”가 맞다. 윤동주의 묘는 1945년 3월 6일에 설치된 이후 지금까지 용정시의 동쪽인 합성리 마을 뒤 동산의 교회 공동묘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윤동주의 묘는 1945년 3월 6일에 설치했을 때는 봉분만 있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1945년 6월 14일에 화강암 묘비가 세워졌다. 전면의 폭이 39.5㎝, 높이 100㎝이고, 측면의 폭은 17㎝, 측면 높이는 93㎝이다.   묘소의 첫 개수 작업은 1988년 6월에 이루어졌다. 미국에 거주하는 현봉학 선생이 주동한 미중한인우호협회(美中韓人友好協會)가 연증(捐贈)하고, 용정중학교 동창회가 수선을 하였다. 이때 봉분 밑을 20여㎝ 높이로 둥글게 시멘트로 둘러놓았다. 묘비 앞에다 오석(烏石)으로 상석을 새로 설치하였는데, 가로 90㎝, 세로 60㎝, 높이 20㎝ 정도이다.   두 번째로 개수한 것은 2003년이다. 호주 시드니에서 살고 있는 오형범·윤혜원 여동생 부부가 개수하여 7월 15일에 완료하였다. 봉분 밑의 시멘트 테를 걷어내고, 봉분을 중심으로 사방 4m가 되는 곳에 사각형으로 대리석 판을 둘러 세웠다. 그 안 16평방미터는 모두 잔디를 심어 봉분 모습을 여유롭게 만들었다.   석상을 한 개의 오석으로 새로 만들어 놓았다. 가로 100㎝, 세로 60㎝, 높이 15㎝ 정도이다. 그 아래에 계절(階節)도 설치해놓았다. 왼쪽 구석 위에 오석으로 개수비(改修碑)를 세웠다. 가로 60㎝, 높이 40㎝ 정도인데, 앞면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詩人의 祖父 尹夏鉉과 祖母 南信弼, 父 尹永錫과 母 金龍, 弟 光柱의 생졸 연월일을 6줄로 배열하고, 그 아래에 “이 동산 어딘가에 잠들어 계시지만 / 오늘날 묘소를 찾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 누이 惠媛, 조카 仁石, 仁河, 卿 새김 / 2003. 7. 15.”이라 하였다.  사람은 가도 이름은 남는다. 그러나 그 이름도 잊힌다. 하지만, 이름이 사라져도 그의 작품은 남는다. 그리고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윤동주는 이름도 작품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신길우 (본명 신경철) / 수필가, 국어학자, 문학박사 ==================================== ============== ///////////////////////// ============== 정지용은 일제말 저항시인인 윤동주 시인의 실질적 스승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우리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 '서시' 전문이다. 이 서시를 시작으로 자신의 자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던 윤동주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죽는 날까지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걸어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보인다. 또 한 편의 시를 보자. '누워서 보는 별 하나는/ 진정 멀- 고나./ 아스름 다치랴는 눈초리와/ 금실로 잇은 듯 가깝기도 하고,/ 잠살포시 개인 한밤엔/ 창유리에 붙어서 였보노나./ 불현듯, 소사나 듯,/ 문득 령혼 안에 외로운 불이/ 바람처럼 일는 회한에 피여오른다./ 힌 자리옷 채로 일어나/ 가슴 우에 손을 념이다.' 정지용 시인의 '별'이다. 정지용은 이 시에서 유리창 밖의 별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방 안에서 창밖에 멀리서 빛나는 별을 바라보다가 문득 '영혼 안에 외로운 불'이 피어나는 것을 느끼며 자리옷을 입은 채 일어난다. ◆ 정지용 시에서 보는 하늘, 바람, 별 '정지용의 시적 감각과 윤동주의 시적 개성'이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에 나선 고려대학교 최동호 교수는 이 시에 등장하는 별과 바람과 하늘은 모두 원초적 소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혼 안에 외로운 불을 피어오르게 함으로써 윤동주의 '서시'의 한 단서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해보게 만든다'라고 밝힌다. 최 교수가 이처럼 추정하는 것은 정지용 시 '별'에서 나오는 하늘과 바람과 별이 단순히 서시 만이 아니라 윤동주의 시 전체를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최 교수가 윤동주의 시가 정지용 시를 닮았다고 조명한 것은 비단 이 시 한 편만이 아니다. 정지용의 '비로봉', '슬픈 인상화', '바다2', '별똥', '향수'는 윤동주의 '비로봉', '아우의 인상화', '바다', '별똥 떨어진 데', '또 다른 고향' 등으로 전이된다. 정지용이 쓴 시적 어구에서 촉발된 시적 상상이 윤동주의 시를 낳게 한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이들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언뜻 보아 크게 연관성이 없어보여도 중요한 어절이 서로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는 것이 최 교수의 설명. 다만 정지용이 대상을 관찰하는 시인이라면, 윤동주는 자신을 성찰하는 시인이다. 윤동주가 정지용 시를 시적 상상력의 출발점으로 삼았어도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최 교수는 보고 있다. 정지용이 일본 동지사대학을 졸업했듯, 윤동주 또한 동지사대학의 동문이자 후배. 같은 영문과였고, 기독교라는 종교도 같았다. ◆윤동주 존재를 알린 정지용 정지용은 일제에 검거돼 1945년 2월 세상을 떠난 윤동주의 유고시 '쉽게 쓰여진 시'를 그가 주간으로 재직하고 있던 경향신문에 자신의 소개문과 함께 게재해 윤동주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또 윤동주 첫 추도회에도 참석했으며, 1947년 12월18일에는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을 쓰고 1948년 시집 발간을 도왔다. 정지용이 쓴 서문은 윤동주를 일제 암흑기를 빛낸 시인으로 자리매김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1930년대말 문장지를 통해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 청록파 시인을 추천한 정지용이 비록 사후였지만 윤동주 시를 신문에 소개하며 추천해 시인의 반열에 오르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최 교수의 결론이 정지용과 윤동주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습작기의 윤동주는 정지용이라는 선배 시인이 없었다면 시적 언어를 자각하고 시인으로 자기의 개성을 인식하는데 또 다른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윤동주는 정지용을 그대로 모방하지는 않았다. 보고 배우되 그 나름대로 새로운 개성적 목소리를 찾아낸 것이다. 정지용의 시적 감각을 바탕으로 윤동주의 시적 개성이 발휘되었다는 것은 한국문학사에서 드물게 보는 선후배의 행복한 만남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23    시인은 늘 령감의 메시지를 잡을줄 알아야... 댓글:  조회:2694  추천:0  2017-03-15
  한 편의 시가 태어나기 까지/이희정  3  이제 드디어 시인은 하나의 시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그 욕망은 단순히 욕망이라기보다는 마치 육체에까지 스며드는 實感인 경우가 많다. 어쩌면 지금까지 시의 씨앗이 뿌려짐과 그것의 자람은 밖으로는 먼 곳을 나는 시조새의 실루엣처럼 막연하게 보이거나 안으로는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태아의 숨결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는데 이제 그것이 내 몸에 확연히 들이닥치려 하거나 내 몸에서 뜨겁게 분출하려는 찰나에 시인은 흥분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펜을 잡기를 계속 주저하기도 하고 온 신경이 곤두서기도 한다. 이때가 바로 시가 탄생하려는 순간이다.  시인은 숨을 죽이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아니면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아니 미친 듯이 시골길을 헤매고 돌아다녀도 상관없다. 아니면 기차로 여행하고 있어도 괜찮다. 무엇이든 좋다. 시를 자기의 태내에서 끄집어내는 데 주의를 집중시키게 해주는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좋다. 시인은 그러한 가운데서 그 시의 속을 들여다보고 몇 주일이나 몇 달 전에 처음으로 머리에 떠오르거나 겪은 그 씨앗, 그러니까 그 뒤 감쪽같이 잊어버리고 있던 그 씨앗을 발견한다. 그러나 어느새 그 씨앗은 훌륭하게 성장하고 발전해 있는 것이다.  < 한마디로 이번 단계는 방안에 갇혀 있던 시가 문에 몸을 부딪치면서 빨리 내어달라고 조르고 있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이 열린다. 그러나 놀랍게도 맨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완성된 시가 아니다. 그것은 그 시의 대체적인 모습과 관념이다. 때로는 그 시의 1절이 얼렁뚱땅하게 맞추어졌을 뿐인 경우도 있다. 실은 시를 쓰는 괴로운 작업이 시작되는 것은 이때부터인 것이다.>  사실 과장할 것 없이 그것은 괴로운 작업이다. 시인은 그 시의 완성되지 않은 부분을 끌어 내와야 한다. 여기다 형태를 맞추어주어야 한다. 그 시 속의 하나하나를 개개 시인이 각종 자재들을 골라 집을 짓는 건축가나 데생 위에 각종 색을 칠해 입체적 그림을 완성하는 화가처럼 말이다. 이는 참으로 괴로운 작업이다. 시에 따라서는 비교적 쉽게 순산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도 괴로운 작업이어서 자기 스스로 납득할만한 단 한 줄을 쓰는데 몇 시간 또는 며칠이나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여기서 나의 독특한 경험을 한 가지 말하고자 한다. 시의 씨앗이 뿌려지고 그것이 무척 자라있는데도 그것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망설이고 두려워하고 헤맨다. 그렇게 헤매다 보면 내게는 출산을 돕는 어떤 계기가 대개 찾아온다. 그것은 특히 그 마음속에서 분출을 기다리는 시, 곧 대상에 대한 새로운 감정, 새로운 해석의 심리적 상태가 찾아왔을 때이다.  가령「직관」라는 다음의 제 시를 보자.  간밤 뒤란에서  뚝 뚜욱 대 부러지는 소리 나더니  오늘 새벽 큰 눈 얹혀  팽팽히 휘어진 참대 참대 참대숲 본다  그중 한 그루 톡, 건들며 참새 한 마리 치솟자  일순 푸른 대 패앵, 튕겨져 오르며 눈 털어 낸 뒤  그 우듬지 바르르바르르 떨리는  저 창공의 깊숙한 적막이여  사랑엔, 눈빛 한번의 부딪침으로도  만리장성 쌓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대나무 고장인 담양, 그것도 대밭 밑 집에서 오랫동안 살았기에 폭설이 내린 대숲의 장관을 해마다 몇 번씩 보고 살았다. 그 폭설에 밤이면 뒷문으로 대 부러지는 소리가 밤새 들리고,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면 어른 팔뚝만한 대들이 팽팽히 휘어져 고샅길을 아치인양 덮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팽팽히 휘었으면 거기에서 톡, 날아오른 참새 한 마리의 발짓에도 일순 패앵, 소리가 날 정도로 튕겨져 오르며 그 우듬지를 창공 깊숙이 바르르바르르 떨겠는가. 그런 장관이 진즉 마음속에 시의 씨앗으로 심기고 그것이 대나무처럼이나 자라있음에도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출산시킬까 몇 년을 망설였는데 어느 아침 그 계기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그 전날 낮에 아내와 경제 문제로 심하게 다툰 뒤, 밤에 어찌어찌 화해하고 그 긴장된 몸과 마음으로 섹스를 나누었는데, 부부 싸움 칼로 물베기요 하룻밤에 만리장성 쌓는 일이라고 하더니 그것이 딱 들어맞더라는 것이다. 기분이 상쾌해져 아침 방문을 열고 마루에 나오니 예의 그 장관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순간 “눈빛 한번의 부딪침으로도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 일이 사랑이다”라는 말이 떠오르며 앞에 펼쳐진 대숲의 장관이 금방 사랑과 연결되는 것이다. 휘어진 참대는 절정을 향한 그 팽팽한 긴장의 순간, 그런 대가 새 한 마리 톡 건들자 패앵 튕겨져 오르는 순간은 절정이 터지는 순간, 그 대 우듬지가 바르르바르르 떨리는 순간은 절정의 환희와 여진의 순간, 저 창공의 깊숙한 적막은 오르가슴 뒤의 죽음과 같은 적막과 혹은 평안의 순간, 큰눈 곧 폭설은 크나큰 사랑의 마음을 상징화하는 순간이었다.  혹자는 이 시를 단순한 풍경시로 보아 2연은 없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했지만 그러나 그 부분이 없었으면 아예 이 시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를 잘 눈치 챈 어느 평론가는 이 시에 대해 “사랑은 절대순결의 충만이며 그 탄력이다. 마침내 저 무한 穹窿의 아득함으로 치솟아 올라 가물가물 점 하나로 잦아들게 하는 몰입이 있다”고 했으니 나의 의도와 잘 들어맞는 평문이었다.  < 어쨌든 그런 형편이니 비록 이라고 해도 그 의미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마침 황금과 같은 아름다운 단어의 홍수가 시인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와 그것이 솜씨 좋게 자연적으로 시의 한 행 한 행에, 한 절 한 절에 늘어놓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감은 결코 전가의 보도나 요술지팡이가 아닌 것이다. 영감이란 한 편의 시에 있어 첫 씨앗이 시인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는 때를 말한다.> 여기서 ‘뿌리를 내리다’라는 말에 주의하자. 시인은 온갖 경험을 가질 수가 있다. 온갖 관념이나 이미지를 받을 수가 있다. 그러한 것들을 몇 개의 시의 씨앗으로 삼으려고 하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까닭인지 그것들은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즉 반드시 시인의 상상력 안에 깊이 뿌리박고 상상력을 풍부하게 배양한다고만 할 수 없다. 그리고 또 시인은 과연 자기의 온갖 경험 가운데 어느 것이 스스로 형태를 갖추어서 한 편의 시가 되어, 마치 그 시가 제발 나를 낳아달라고 조르는 그러한 시가 되는가: 그 줄거리는 바로 당자인 시인으로서도 도무지 모르는 것이다. 영감이란 단어를, 시가 만들어지는 단계의 이러한 순간, 즉 시인이 금방이라도 한 편의 시를 낳을 준비가 다 되었다는 것을 마음을 두근거리면서 자각하는 순간으로 적용해도 틀림없다.  이 순간을 설명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마치 우리가 어딘가 먼 방송국에서 오는 방송을 캐치하려고 우리의 라디오에 스위치를 넣는 것과 같다.「다이얼을 돌린다, 1밀리미터만 틀려도 안 된다, 오랜 침묵이 있다, 기계가 열을 띠어온다, 한참 있으면 희미하게 소리가 들려온다, 말이 점점 알아듣기 쉽고 알기 쉬운 말이 된다.」 도대체 이 영감이 어디서 오는지 정말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치 어느 방송국으로부터 보내는 전파를 잡기 위해 우리가 라디오 세트를 필요로 하듯,  시인은 영감의 메시지를 잡기 위하여 자기 몸 안에 장치된 일종의 예민한 기계장치를 필요로 한다. 이 기계장치가 곧 시적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조금의 상상력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상상력은 또 몇 가지 특수한 방법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나는 얼마 전 시적 상상력을 잘 구사하는 일곱 가지 방법을 얘기한 적이 있다. 앞으로 시의 일곱 가지 재료와 그것의 사용법을 강의하여서 시적 상상력을 발달시키는 데 도움을 드리겠다.)  < 그런데 무엇보다도 시인이 상상력을 발달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즉 시를 쓰는 일이다. 습관적으로 쓰는 일이다. 이 습관은 직업적인 진짜 시인과 가끔 심심풀이로 시를 써보는 사람을 구별하는 차이점의 하나다. 또한 시인은 마치 마술사가 무의식적으로 늘 동전을 만지작거려서 오른손을 가만두지 않듯이 늘 언어를 만지작거림으로서 상상력을 발달시킨다.  만일 여러분이 언어라는 것-그 음운과 모양과 의미( 리듬과 이미지와 의미)에 몹시 매력을 느껴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머릿속에서 회전시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시인이 되기 힘들다. 특히 중요한 것은 시인은 凝視라는 것을 통해서 그의 시적 능력을 발달시킨다. 그것은 자기 밖에 있는 세계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같이 가만히 바라보는 일, 자기의 모든 감각을 사용하여 인생의 불가사의와 슬픔과 기쁨을 느끼는 일과 또 끊임없이 인생의 밑바닥에 숨어있는 신비적인 바탕무늬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그러나 시인이 자기의 직무에 아무리 충실하다 해도, 아무리 응시와 연습을 쌓아도, 아무리 교묘한 말의 장인이 된다 해도 시인은 영감을 자기 힘으로 좌우할 수는 절대 없다. 영감은 몇 달간이나 시인 곁에 머물러 줄지 모른다. 또 몇 년 동안이나 시인을 팽개쳐버릴지도 모른다. 언제 그것이 찾아올지, 언제 그것이 사라져 버릴지 시인 자신도 모른다. 셸리가 말했듯이「창조하는 정신은 꺼져 가는 석탄의 불꽃과 같다. 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변덕스러운 바람처럼 불꽃을 불어 순간적인 밝음을 준다.」    ===========================================================================   관악산 꽃 무더기 (冠峀花層·관수화층)         앞다퉈 핀 철쭉꽃 위로  ??花爭發(척촉화쟁발) 아침 햇살 내려 쪼인다  朝曦又照之(조희우조지) 온 산 가득 붉은빛이라  滿山紅一色(만산홍일색) 파란 데가 외려 멋지다  靑處也還奇(청처야환기) 제철 만난 산꽃은 어여쁘게  得意山花姸(득의산화연) 한 무더기 또 한 무더기 꼭대기까지 에둘렀다  簇簇繞峨嵯(족족요아차) 봄이 저물까 걱정일랑 아예 말게나  莫愁春已暮(막수춘이모) 단풍 들면 붉은 빛이 더 퍼질 테니  霜葉紅更多(상엽홍갱다) ?신경준(1712~1781) 1760년 봄에 철쭉이 만발했다. 실학자 신경준(申景濬)이 한강 북쪽에 위치한 첨학정(瞻鶴亭)에 앉아 관악산을 바라보니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온 산은 벌겋게 불이 난 듯했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붉은 철쭉! 그런데 붉은색 일색이라 그런지 군데군데 파란 빛깔로 보이는 곳이 꽃보다도 사랑스럽다. 제철 만나 산을 뒤덮은 철쭉도 철 지나면 사라질까. 천만에. 그런 반전(反轉)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여름 지나 가을이 되면 단풍은 더 붉게 산을 태우리라. 이 시는 관악산을 붉게 물들인 철쭉꽃 찬미가가 분명하다. 그런데 그 붉은색 관악산을 본 시인의 눈에 권력을 독점한 당파의 전횡이 오버랩됐다. 붉고 푸른 빛깔은 당파의 색목(色目)이다. 시인은 푸른 빛깔의 소수당 소속이라,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다. 계절이 바뀌면 달라질까. 천만에. 단풍이 산을 뒤덮듯 주도권을 쥔 세력은 때가 되면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봄날의 붉은 꽃에도 정치는 살아있다.         
322    시의 씨앗은 시인의 몸 안에서 "무자각적"으로 싹터 자란다... 댓글:  조회:2662  추천:0  2017-03-14
      하남성 숭(嵩)현 구점(九店)향, 돌이 유명해 돌 이름이 붙여진 작은 산골마을 석장(石場)촌에서ㅡ 한 편의 시가 태어나기까지/이희정  2  < 그러나 그 시의 씨앗은 시인의 몸 안에, 이른바 ‘무자각적 의식’ 부분 안에 숨어든다. 거기서 그 씨앗이 점점 자라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때 물론 그 씨앗과는 다른 많은 시적 씨앗이 함께 자라는 수도 있다. 시인은 자기 몸 안에서 몇 편의 시가 동시에 자라나도 전혀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아까 어느 새벽에 느낀 죽음에 대한 시의 씨앗은 자꾸 자란다. 일어나 기지개 켜다가 고혈압으로 죽은 사람, 봄 내내 일한 남편의 몸보신을 시킨답시고 아내가 사온 산낙지의 다리가 목구멍에 붙어 기도를 막는 바람에 되레 죽어버린 남편, 군사통치 시절에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사람, 공사장 앞을 지나다가 골재가 머리 정수리에 떨어져 죽은 사람, 방금까지도 희희낙락 얘기를 나누다가 자기도 모른 심장병 때문에 숨이 억 막혀서 죽는 사람, 그뿐인가,  온갖 고생고생 끝에 이제 아이들 대학도 다 졸업시키고 나서 살만하니 덜컥 암이 걸려 죽는 사람, 아흔 일곱을 사는 할머니 앞에 일흔 두 살 먹은 딸이 먼저 죽자 예순 살 먹은 며느리가 “아이고 똥오줌 받아내는 우리 어머니나 돌아가시지 고모가 돌아갔다”고 탄식하자 “아 제 년 제 명대로 살고 나는 내 명대로 사는데 너는 내가 그렇게 죽었으면 좋겠느냐”며 역정을 냈다는 결코 안 죽겠다는 사람, 또 요사이 나온『자살』이라는 책에서 보듯 각종 이유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영원한 사랑을 위해 자살을 택해 죽은 사람, 불로장생을 위해 수많은 신하와 많은 국가예산을 들여 불로초를 캐러 보냈으나 끝내 죽은 진시황 같은 사람 등등에 대한 생각들이 자꾸 되고, 그 죽음 의식은 마침내 동물, 식물과 온갖 생물에까지 이어져 결국 죽음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나 해석에까지 미친다. 그리고 그런 수많은 죽음들을 타인의 죽음이라고 생각했으나 어느 순간 나의 실존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될 때부터 그 인식의 성장속도는 급격히 빨라진다.  또 우리가 어떤 이별을 보았다 하자. 마침 이시영 시인의「어떤 이별」이란 시가 있어 그것을 먼저 여기에 적는다.  여름 한낮의 햇빛 속을  맨 손의 한 여자가 울면서 길을 가고 있다  저 적요의 뒷모습에 쏟아져 내리는  한낮 여름의 강렬한 함성!  여름 한낮의 햇빛의 그늘 속에서  가방을 든 한 남자가 비스듬히 서서  그 여자를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다  아, 사라지고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는  흰 길 위의 두 점의 가없는 펄럭임  보다시피 이 시는 어떤 이별의 광경을 그 이유나 사정에 대한 시시콜콜한 천착이 없이 거시적이고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기본적 이별의 경험 뒤에 나의 생각은 더더욱 자란다. 그녀를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떠나보내면 더 서럽겠지, 소슬한 바람에 낙엽이 지는 날 보내는 것은 너무 고전적이니까 차라리 벚꽃 만발한 그 화려한 날 보내는 게 더 서럽겠지, 불치병에 걸린 걸 알리지 않고 떠나는 여인의 속내를 모르는 남자의 미칠 것 같은 마음에 천착해보는 게 났겠지, 산모퉁이를 기적소리와 함께 돌아서 떠나버린 여인 뒤의 철로에 주저앉아 그 많은 눈물로 주변에 무더기무더기 망초꽃을 피우거나 언약의 징표였던 구리반지를 구겨버리는 남자의 속마음에 대해 탐구해보는 게 났겠지… 회자정리라는 말이 있는데 그 관념의 실제를 겪는 자의 서러움과 고통에 대한 생각은 날로 자라서 시인은 실제로 삶에서 이별을 겪고 마는 경우까지 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한 편의 시가 바로 탄생하려는 순간이 온다. 한 편의 시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 씨앗의 자람이 며칠이 될 때도 있고 몇 년이 걸릴 때도 있다. 더구나 시의 씨앗은 우리의 의식 속에도 자라고 꿈같은 무의식 속에서도 자란다. 그 씨앗의 배경과 전경, 그 씨앗의 본질과 실존, 그 씨앗의 꿈과 현실, 그리고 씨앗의 형태의 구체성과 본질의 철학성에까지 미치도록 자란다.     ===================================================================================   쌀 빚을 탕감해달라고 관아에 바친다(呈分司乞?戶米·정분사걸견호미)     호젓한 집을 개울가 응달에 장만하여 메추라기와 작은 숲을 나눠 가졌는데 썰렁한 부엌에는 아침밥 지을 불이 꺼졌고 쓸쓸한 방아에는 새벽 서리만 들이친다. 초가삼간에는 빈 그릇만 달랑 걸려 있고 쌀알 한 톨은 값이 만금(萬金)이나 나간다. 낙엽 쌓인 사립문에 관리가 나타나자 삽살개는 짖어대며 흰 구름 속으로 달아난다. 幽棲寄在澗之陰(유서기재간지음) 分與??占一林(분여초료점일림) 冷落山廚朝火死(냉락산주조화사) 蕭條野確曉霜侵(소조야확효상침) 三椽小屋懸孤磬(삼연소옥현고경) 一粒長腰抵萬金(일립장요저만금) 落葉柴門官吏到(낙엽시문관리도) 仙尨走吠白雲深(선방주폐백운심)   ―정초부(鄭樵夫·1714~1789)     가난뱅이 시인의 낭만적인 넋두리 시다. 영조 시대의 노비 시인 정초부의 초가집으로 쌀 빚을 갚으라고 아전들이 쳐들어왔다. 그에게는 갚을 쌀도 없었고 버틸 권력도 없었지만 다행히 시를 쓸 능력은 있었다. 며칠 굶은 궁상을 늘어놓아 빚을 갚을 처지가 못 됨을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메추라기와 산자락을 나눠 차지했다니 그의 삶은 메추라기처럼 미약해보이고, 삽살개가 짖어대며 흰 구름 속으로 달아났다고 하니 조금만 더 몰아세우면 그도 곧 영영 인간 세상을 버릴 것만 같다. 시를 아는 관리라면 연민의 정이 들어 그냥 되돌아갔으리라. 시는 때때로 논리가 정연한 문서보다도 더 강한 힘이 있다.              
321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이골이 나다"의 유래 댓글:  조회:2231  추천:0  2017-03-14
  직원: 다녀왔습니다. 사장: 벌써 왔어? 혹시 과속한 거 아니야? 직원: 안전하고 신속하게 배달하자! 이게 제 배달의 신조입니다. 사장: 그래? 일 잘하네! 직원: 그동안 배달을 하도 많이 해서 이제는 이골이 날 정도예요. 배달 아르바이트만 햇수로 10년입니다. [정재환] 이골이 나다! 이 정확한 뜻은 뭔가요? [조윤경] 네. 이골이 나다는 어떤 방면에 길이 들여져서 버릇처럼 아주 익숙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정재환] 그렇군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골'은 뭐죠? [조윤경] '이골'은 본래 몸에 밴 버릇을 말하는데요. 모시 째기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습니다. [조윤경] 모시의 속껍질을 벗겨 햇볕에 말린 것을 태모시라고 합니다. 이 태모시를 잘게 쪼개는 모시 째기는 모시의 품질을 좌우하는 가장 어려운 작업인데요. 이때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정재환] 네? 이요? 그러니까 이로 모시를 쨌다? 듣기만 해도 고통스럽네요. [조윤경] 네. 맞습니다. 아랫니와 윗니로 태모시를 물어 쪼개다 보면 피가 나고 이가 깨지게 되죠. 그러다 어느 순간 이에 골이 파지고 모시 째기가 수월해지게 됩니다. 이처럼 이에 골이 생길 정도로 오랫동안 같은 작업을 하면 능숙하게 일 처리를 할 수 있다고 해 '이골이 나다'라는 말이 나오게 됐습니다. [정재환] 오늘 배운 재미있는 낱말, '이골이 나다'입니다. [조윤경] 어떤 방면에 길이 들여져서 버릇처럼 아주 익숙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골이 생길 정도로 모시 째기가 능숙해져 일이 수월해지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정재환] 뜻을 알고 보니까 정말 숨은 땀과 노력이 있는 단어네요. 조윤경 씨도 대본 외우고 이러는 거 이골이 나지 않습니까? [조윤경] 네. 맞습니다. 그런 정재환 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정재환] 아닙니다. [조윤경] 실수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는 그만큼 노력이 필요한 법이죠.
320    일본 교토 윤동주 마지막 사진 찍은 자리에 詩碑 세우다... 댓글:  조회:2737  추천:0  2017-03-13
윤동주 시인 교토서 마지막 사진 찍은 자리에 詩碑 세운다(ZOGLO) 2017년3월13일  [동아일보]= 탄생 100주년 맞아 ‘기억과 화해의 비’ 우지 강변에 설치 윤동주 시인(1917∼1945)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일본 교토(京都) 부 우지(宇治) 시의 강변에 기념비가 설치된다. 우지 시를 관통하는 우지 강은 윤 시인이 1943년 도시샤(同志社)대 영어영문학과 유학 시절 일본인 학우들과 야외 송별회를 하며 생전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은 장소다. 일본 시민단체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의 곤타니 노부코(紺谷延子) 사무국장은 최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지방자치단체의 협력을 얻어 우지 강변에 터를 확보했다. 인근에서 진행 중인 공사가 끝나는 대로 설치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며 “늦어도 올해 10월 전에는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윤동주 시인(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은 1943년 5, 6월경 도시샤대 유학 시절 학우들과 우지로 야외 송별회를 나와 생전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그해 7월 윤 시인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수감생활을 하다 옥사했다. /동아일보DB 윤 시인의 마지막 사진은 NHK가 KBS와 함께 1995년 방영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중 윤 시인의 학우였던 기타지마 마리코(北島萬里子) 씨의 앨범에서 발견했다. 기타지마 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징병을 피하기 위해 귀국을 결심한 윤 시인은 1943년 5, 6월경 열린 송별회 자리에서 학우들의 요청을 받고 ‘아리랑’을 불렀다. 윤동주 연구자인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 씨는 현대문학 2006년 9월호에 당시 정경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목소리가 강물을 따라 흘렀다. 다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끝나자 박수를 쳤다.” 송별회로부터 한두 달 뒤인 그해 7월 14일 윤 시인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붙잡혔고 1년 7개월 뒤 옥사했다. 윤 시인을 기리는 이들은 이 사진의 배경이 우지 강에 놓인 아마가세쓰리(天ヶ瀨吊り) 다리라는 걸 알아냈다. 이후 뜻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기념비 제작 움직임이 일었다. 2005년 시민단체가 결성됐고, 2007년 각계의 모금을 받아 비석 제작까지 마쳤으나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설치를 미뤄 왔다. 곤타니 사무국장은 “교토 부 등에 수십 번 찾아갔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다 지난해 말 우지 시 시즈가와(志津川) 구에서 구 소유 땅에 건립하도록 허가해 줬다”고 말했다. 건립 예정지는 윤 시인이 아리랑을 부른 강변 근처로 사진을 찍은 다리가 보이는 장소다.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올해 일본 우지 시 강변에 세워지는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에는 시인의 작품 ‘새로운 길’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새겨진다.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 제공비석의 정식 명칭은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로 정해졌다. 높이 2m, 폭 1.4m의 이 비석은 일본과 한반도의 화강암이 하나씩 배치돼 원통을 떠받치는 형태로 제작됐다. 비석에는 윤 시인의 1938년 작품 ‘새로운 길’을 한국어와 일본어로 새긴다. 곤타니 사무국장은 “시인의 탄생 100년이 되는 해에 기념비를 세울 수 있게 돼 뜻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일본에는 윤 시인이 유학했던 교토의 도시샤대와 당시 하숙집이 있던 자리(현 교토조형예술대)에 비석이 있다. 이번에 건립되는 우지 기념비는 가장 크며 시민들의 노력으로 대학 교내가 아닌 장소에 처음 세워지는 것이다. ====================== \\\\\\\\\\\\\\\\\\\\\\\\\ ////////////////////////////////////////////////// ====================== "험한 세상에 아름다운 詩 남긴 천재.. 난 매일 동주를 만납니다" 도쿄/최인준 특파원 입력 2017.01.18 03:06                     [탄생 100년, 윤동주 돌아오다] [2] 일본 윤동주 연구가 오무라 교수 한국 문학계는 윤동주 연구에서 이 일본 노(老)학자에게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다. 잊히다시피 했던 윤동주의 무덤을 1980년대 중국 시골 야산에서 찾아내고, 윤동주 육필 원고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그의 노력 덕에 국내 윤동주 연구도 풍성해질 수 있었다. 영하로 내려간 16일 오후 지바현 이치카와(市川)시의 한 작은 전철역에서 '윤동주 연구가' 오무라 마스오 (大村益夫·83) 와세다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한국말로 "안녕하십니까, 오무라입니다" 인사한 그는 잰걸음으로 자신의 집을 안내했다. 한국 문학 연구서들이 수백 권 보관된 자신의 서재를 먼저 보여줬다. "매일 여기서 나는 동주를 만납니다." 오무라 교수는 일본 학자 중에서 독보적인 윤동주 연구가로 꼽힌다. 윤동주 관련 논문과 책을 10편 이상 발표했고, 지난해에는 '윤동주와 한국근대문학'(초판·2001) 개정판을 펴냈다.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후쿠오카 형무소 부지에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를 세우기 위해 동료 학자들을 모아 백방으로 뛰기도 했다. 책 개정판 출판을 위해 방한한 작년엔 서울 대한극장에서 영화 '동주'를 관람했다. 오무라 교수는 1957년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대학원에서 중국 문학을 전공했는데, 지적 호기심이 넘쳤던 청년 오무라는 청나라 말기 중국의 정치소설을 조사하던 중 우연히 조선 문학에 빠져들었다. 이후 그는 전공을 바꿔 조선 후기와 한국 근대문학을 파고들었고, 윤동주의 시와 조우하게 된다. 일본인 학자에게 윤동주 연구의 길은 쉽지 않았다. 1985년 5월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에서 윤동주의 묘를 발견할 당시 한국에선 "일본이 윤동주를 두 번 죽였다"는 날 선 비난이 날아왔다. 오무라교수는 "윤동주가 일본에서 돌아가셨고, 그 묘를 일본인이 찾아냈으니 아이러니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내에서 차로 1시간 거리였던 야산의 공동묘지. 산짐승이 파헤친 듯 어지러웠고 '詩人 尹東柱'라고 새겨진 묘비만이 윤동주의 무덤임을 증명했다. "'여기구나!' 싶은 생각에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1986년 경기도 과천에 있는 윤동주 유족을 찾아가 긴 설득 끝에 육필 원고를 손에 넣었다. 당시 그가 받아든 육필 원고 중엔 윤동주가 일본 유학 시절 남긴 습작 노트도 있었다. 1999년 이 원고들을 모아 한국 교수들과 공동으로 출판한 '윤동주 자필시고집'은 윤동주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시뿐 아니라 윤동주생가 터와 그가 다녔던 광명중학의 학적부, 송몽규 생가 등을 직접 확인한 결과를 담아 발표한 논문 '윤동주의 사적(事跡)에 대하여'도 주목을 받았다. 반평생 윤동주 연구에 헌신한 오무라 교수는 '시인 윤동주'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윤동주는 천재이면서 마음이 따뜻한 시인, 고뇌하는 시인입니다." 그는 "나 스스로 '부끄러움 덩어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서시의 구절을 읽으면 아직도 마음이 깨끗이 씻겨지는 기분"이라며 "일본어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정갈한 시어들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오무라 교수의 서재에선 한기(寒氣)가 느껴졌다. 고령 탓에 연구는 멈췄지만 노교수는 매일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을 만나게 된다면 꼭 물어보고 싶어요. 어떻게 그렇게 험한 세상에서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었는지…. 윤동주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 예쁜 동시를 많이 썼을 겁니다."      
319    시 한편이 태여나는것은 늘 울고 웃는 과정을 그려가는것... 댓글:  조회:2407  추천:0  2017-03-13
  한 편의 시가 태어나기까지 / 고재종 시에 대하여 얘기하다보면 흔히 받는 질문이 있다. 그건 "영감(靈感․인스피레이션)이 뭐예요"라든가 "시를 쓰기 전에 시인은 영감을 받아야 하나요"라든가 아니면 "선생님은 영감을 받으셨나요"라는 것이다. 이건 상당히 곤란한 질문이며 특히 세 번째 질문은 매우 신랄하기까지 하다. 영감을 받았다 하면 시인이 무슨 무당 같은 생각이 들고 안 받았다 하면 재능 없는 시인으로 몰릴 것 같아서다. 그래서 난 그런 질문에 대개 농담으로 대신한다. "왜 처녀를 받지 영감을 받습니까?"라고.  얼마 전 TV사극『명성황후』중 황후시해 장면에서 일본공사 미우라의 사주를 받아 현장을 총지휘한 하수인이 황후를 시해, 소각한 후에 왕궁 뒷길을 홀로 중얼거리며 돌아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는 하버드대학을 나온 인텔리겐차이며 시를 지망하는 사람이었던가. 마침내 중얼거리는 것을 넘어 머리칼을 쥐어뜯는 그가 왜장쳐대는 말은 놀랍게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영감이! 이 역사적 대사건을 단박에 표현할 그 시 한 줄이 떠오르지 않아. 아이구 이 돌대가리야."라는 게 아닌가.  영감을 무슨 신적 계시 같은 걸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그런 악마에게 무슨 영감이 주어지겠는가. 영감이 풍부한 천부적 시인이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분명히 말해둘 것은 시인이 자기 펜을 잡으려고 손을 뻗어 무엇인가를 종이 위에 쓰기까지 시를 만드는 작업의 대부분은 이미 거기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그 시의 대부분을 시인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다는 말도 아니다. 역시 시인에 따라서 지적조작의 방법으로 시를 만드는 시인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한 편의 시는 대개 다음과 같은 세 단계의 순서를 거쳐 만들어진다.  1  < 한 편의 시의 씨, 또는 싹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시인의 상상력을 강하게 때린다. 그것은 뭔가 몹시 강하지만 막연한 감정이나 어떤 특정의 경험, 또는 하나의 관념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때로 그것은 맨 처음에 하나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또 한층 더 나아가서 아마도 이미 말이라는 옷을 입은 시구의 형태로, 아니면 또 완전히 한 줄의 운문 형태로 나타나는 수도 있다.>  어느 새벽 흉몽에 시달리다 깨어나 홀로 느끼는 고독이나 불안감, 나아가서 얼마 후엔 이 삶도 먼지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소멸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감, 그러다 보니 지금이라도 누군가 옆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강렬한 그리움의 감정을 겪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뭔가 몹시 강하지만 막연한 형태로 느껴진 감정이지만 어쨌든 나는 이때 존재의 본질에까지 의문을 품게 된다.  또 일상을 살아가다가 어느 햇빛 좋은 날 옥상 위에서 펄럭이는 하얀 빨래를 보는 것처럼 가슴이 환히 열리는 경이로운 순간, 사랑하면서도 피치 못해 떠나보내야 하는 애인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뒷모습을 하고 빗속을 터덜터덜 돌아서 가는 걸 볼 때처럼 명치끝이 찢어지도록 아프고 슬픈 순간, 요즘 탄핵정국에서 보듯 국민을 안하무인으로 여기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국민의 이름을 빌리는 우리나라 모든 정치인의 몹쓸 행태를 볼 때마다 느낄 수밖에 없는 그 격렬한 분노의 순간, 그리고 등교하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경쾌한 발걸음 혹은 그런 손자를 대문 밖까지 나와서 배웅하는 할머니의 그윽하고 흐뭇해하는 눈길을 보는 때 느끼는 즐거움의 순간들을 늘 경험하게 된다. 그런 경험은 우리의 희로애락의 사생활에서부터 사회적 삶에서까지 곧잘 겪게 된다.  그런가 하면 책을 읽다가 이런 말들을 발견한다. 빈자의 등불 하나, 자유의 종, 신비의 꽃, 야생, 슬픈 열대, 욕망의 불꽃, 주체상실, 매우 가벼운 담론, 슬픔의 온도, 나무의 신화, 풍류, 빵과 수선화, 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 슬픔만한 생의 거름이 어디 있으랴,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별의 바탕은 어둠이다,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등등 관념․이미지․말․시구․한 줄의 운문들이 가슴을 흔들고 영혼을 흔들고 삶을 흔든다. 본질에 대립하는 실존만이 아니라 본질과 실존의식이 동시에 인생 속으로 삼투해버리는 이런 흔들리는 순간은 책을 읽을 때만이 아니라 남과 대화할 때도 오고 강의를 들을 때도 오고 나날의 삶 속에서도 곧잘 찾아오곤 한다.  하지만 시인은 이런 여러 감정이나 관념이나 이미지 등을 그의 습작노트에 적어 놓거나 머릿속에다 잠깐 저장해둔다. 그리고 시인은 그런 것을 아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만다.  다음 정호승「들녘」은 어린 날 겪고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기억이 어느 순간 분출한 시다.  날이 밝자 아버지가  모내기를 하고 있다  아침부터 먹왕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다  비온 뒤 들녘 끝에  두 분 다  참으로 부지런하시다  지금 시인은 삼십여 년을 서울에 살고 있다. 그런데 어린 시절 농촌 경험이 느닷없이 분출한 것이다. 왜 어린 시절인가. 볏잎에 먹왕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농약 때문에 메뚜기나 미꾸라지도 없는 실정인데 거미가 거미줄을 칠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오늘 여기에서 이 시가 튀어나오는가.  요사이 생태학적 상상력의 시들이 많이 나온다. 서구 중심의 근대문명이나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바로「만물은 생명의 그물 속에서 동동한 목숨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을 가진 시인들이 시대정신에 부응한 시들이다. 이 시에서도 오월 푸르른 날 아버지는 모를 내고 먹왕거미는 거미줄을 치는 농촌풍경을 선연하고 깨끗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의 핵심은 “두 분 다/ 참으로 부지런하시다”라는 구절이다. 비 온 뒤 모를 내는 아버지나 거미줄을 치는 먹왕거미나 ‘두 분 다’ 부지런하시다 라고 말함으로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일 따름이고 차별이 없다”는 장자의 말처럼 공경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 중심, 이성중심, 욕망중심의 현대인의 심성에 맑고 깨끗한 구원의 힘을 제시한 것이다. 결국 요새 근대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면 이 시의 씨앗은 시인의 무의식이나 기억의 창고 속에서 영영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     아침  ―이상(1910∼1937)     캄캄한 공기(空氣)를 마시면 폐(肺)에 해(害)롭다. 폐벽(肺壁)에 끌음이 앉는다. 밤새도록 나는 몸살을 앓는다.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 실어내가기도 하고 실어들여오기도 하고 하다가 잊어버리고 새벽이 된다. 폐(肺)에도 아침이 켜진다. 밤사이에 무엇이 없어졌나 살펴본다. 습관(習慣)이 도로 와 있다. 다만 치사(侈奢)한 책이 여러 장 찢겼다. 초췌(憔悴)한 결론(結論) 위에 아침햇살이 자세(仔細)히 적힌다. 영원(永遠)히 그 코 없는 밤은 오지 않을 듯이. ‘책(冊)’과 ‘장(張)’을 뺀 한자어들을 전부 한자로 쓴 시 ‘아침’의 원본에는 한자가 괄호에 들어 있지 않다. 한글 뒤에 한자를 병기하는 것보다 모양새가 자연스럽고 맵시 있다. 그러나 이상이 살았던 시대에는 사람들이 한자에 익숙했다. 그래서 소설과 성경을 제외한 그 시대 글에는 한글과 한자가 섞여 있다. 한글과 한자가 섞이면 의미가 즉각적으로 들여다보인다. 하지만 ‘한자맹(漢字盲)’에게 그것은 언감생심의 치사(侈奢)이리라. 한자라면 도무지 무섭기만 한 나로서는 한글전용인 이 시대를 사는 게 천만다행이다. 폐가 약한 사람의 ‘밤으로의 긴 여로’ 기행(紀行)이다. 오독일지 모르지만(오독은 해석의 지평을 확대시키는 창조적 읽기라고 우겨 본다!), ‘밤새도록 나는 몸살을 앓는다’에서 몸살은 진짜 몸살이기도 하고 정신적 몸살이기도 하다. 그가 ‘폐벽에 끌음이’ 앉도록 담배를 피우면서 몸살을 앓은 결과로 치사한, 즉 사치스러운 책이 여러 장 찢긴 것이다. 설마 각혈이라도 해서 책을 찢어 거기 뱉어냈다는 말은 아닐 테고, 정신의 사치를 다한 글을 쓰려 했으나 성에 차지 않아 찢었다는 말일 테다.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랄지 ‘초췌한 결론’이랄지 ‘아침햇살이 자세히 적힌다’랄지…. 서로 어울릴 법하지 않은 말들을 충돌시키며 이어 신선하고 효과적으로 읽히게 하는, 시적 허용을 최대한 누리는 시어들의 병렬이 과연 이상답다. 그런데 ‘코 없는 밤’이 무슨 뜻일까?
318    있어야 할건 다 있고 없을건 없다는 "화개장터" 댓글:  조회:2648  추천:0  2017-03-12
  화개장터 조영남 가수상 화개장터 조영남 전라도와 경사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따라 화개장터엔 아랫말 하동사람 윗마을 구례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구경 한번 와보세요 보기엔 그냥 시골 장터지만 있어야 할건 다 있구요 없을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광양에선 삐걱삐걱 나룻배타고 산청에선 부릉부릉 버스를 타고 사투리 잡담에다 입씨름 흥정이 오손 도손 왁자지껄 장을 펼치네 구경 한번 와보세요 오시면 모두 모두 이웃사촌 고운정 미운정 주고받는 전라도 경상도의 화개장터
317    우리 고향 연변에도 "詩碑자연공원"을 조성해야... 댓글:  조회:3046  추천:0  2017-03-12
                      숲길 문학의 전망과            시비 또는 육필문학비의 보존가치                                                              장사현(시인, 수필가, 문학평론가)                                                  ▣ 숲길 문학의 전망 ◎ 한국의 문학비 현황    전국에 있는 문학비가 모두 몇 곳에 몇 기(基)가 세워져 있을까? 일일이 세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많은 문학비를 누가, 어떤 이유에서 세웠는지 일목요연하게 알 수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문학비를 만들려고만 했지,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영남지역의 통합문예지인 계간《영남문학》을 발행하고 있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영남지역 문인들의 흔적을 남기기 위하여 ‘영남문학 문학공원’을 조성하려고 준비 중이다. 하여, 문학공원 부지 2만평을 확보하였으며 이곳 ‘개화예술공원’과 ‘시와 숲길 공원’을 견학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전국의 문학비 현황을 파악하는 가운데 김구림 시인 저 『한국의 문학비를 찾아서』(1995. 12. 1 문학아카데미)와 최근 죽순문학회가 엮은 『한국의 문학비』(2011. 12. 25 북랜드) 등 자료를 검토하였다. 또한 문학기행을 통하여 견문한 자료 등을 토대로 논고(論考)를 정리하였다. 전국적으로 산재되어 있는 문학비는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2013년 현재 1,100여 기가 세워져 있다.    1. 공원별 현황    1) 보령 개화예술공원        전국 최대, 세계 최대의 조각공원이다. 55,000여 평 규모에 조성된 조각상, 시비 등 250(육필 230기)여 기가 세워져있다. 그 경내에는 연못과 조형미술관, 허브랜드 등 장엄한 관광명소로 되어있다.   이곳에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삼은(三隱: 포은, 목은, 야은)의 한시를 비롯하여 숙종대왕 어필과 김유신, 이황, 류성룡, 한석봉, 허난설헌, 황진이, 윤선도, 추사 김정희 등 옛 명사의 필체 및 한시가 새겨져있다.   또한 현대문학의 주요 문인으로 윤동주, 한용운, 이육사 등 작고 문인과 고은, 황금찬, 성기조 등 현존 시인의 문학비가 있어 한국문학사와 문화사를 다 볼 수 있는 ‘한국문화사사전’이 펼쳐져있다.       2) 시와 숲길 공원        이곳 주산에 있는 ‘시와 숲길 공원’은 소나무 숲길 공원이다. 주변 보령댐과 20리 벚꽃길을 비롯하여 인근에 무창포 모세의 기적과 같은 바다를 배경으로 용이한 지형지물을 안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현대문학 100주년 기념탑’과 ‘항일민족시인추모분향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30리 둘레길을 조성하고 있다. 항일민족시인 등 작고문인과 현역 시인들의 문학비 250(육필 50기)여 기가 있다.   특히 ‘한국현대문학 100주년 기념탑’의 경우는 훗날 국보(國寶)감이 되리라 기대한다. 2008년 11월 1일 (사)국제펜클럽한국본부와 (사)한국육필문예보존회에서 추진하고 보령시에서 후원한 이 탑은 육당 최남선이 문예지 《소년》에 발표한 「해에서 소년에게」를 한국현대문학의 기점으로 삼아 100주년이 되는 해에 건립한 것이다. 이 탑에는 일제강점기, 6․25 한국전쟁, 산업화과정, 민주화과정, 21세기 정보화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근, 현대사가 집대성되어있다.   이러한 민족정기와 문사들의 혼이 서려있는 탑을 시작으로 소나무 숲길 30리의 둘레길이 완성되면 이곳은 한국문학사의 사전이요 국민정서함양에 더할 나위 없는 문화예술 공간이 될 것이다.       3) 강릉 경포대호반시비공원        강릉 저동 소재 경포호반에는 박인환, 심연수, 정순응의 시비 등 11기     4) 강릉 한시공원        경포대 주차장 옆 산길에 구사맹, 손순, 김세필을 비롯한 11기     5) 강릉 허난설헌공원        경포대 뒤편에 있는 허난설헌 공원에는 허씨 일가의 문학비 5기     6) 만해마을 시비공원        인제군 소재 백담사 경내에는 한용운, 김시습, 오세영 등 6기     7) 서울 어린이대공원        능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에는 김동인, 방정환의 흉상을 비롯하여 4기     8) 제주 서귀포칠십리시공원        서귀포 서흥동에는 구상, 김춘수, 박재삼, 이생진 등 15기     9) 제주 현대미술관시비        제주 한경면에 한용운, 조지훈, 성기조 시비 등 5기     10) 지리산 지안재시비공원         경남 함양 오도재에 김일손, 김종직, 신숙주 등의 10기     11) 부산 용두산공원         부산 광복동에 유치환, 박태문, 홍두표 등 9기     12) 부산 어린이대공원         부산 초읍에 조지훈, 신동엽, 천상병 등 6기     13) 마산 산호공원         창원 합포구에 이은상, 천상병 등 9기     14) 광주 사직공원         광주 사동에 이순신, 김덕령, 윤선도 등 8기     15) 구례 시의 동산         김광균, 김소월, 문덕수 등 21기     16) 전북 덕진공원         전주 덕진에 신석정 등 4기     17) 김천 직지문화공원         김천 대항에 김수영, 노천명, 서정주 등 18기     18) 대구 도동시비공원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 인근에 고은, 도광의, 구석본 등 20기     19) 대구 두류공원인물동산         두류공원에 백기만, 이상화, 이장희, 이인성, 현진건 등 5기     20) 대구 육필시비공원 시인의 길         동구 도학동에 김수영, 김용택, 김지하, 박노해, 안도현 등 17기     21) 대구 중리공원         중리동에 정철, 김소월, 김영랑, 박목월, 서정주 등 5기     22) 단양 소금정공원         단양읍에 권섭, 김경자, 신동문 등 10기     23) 한용운 생가 민족시비공원         홍성군 결성면에 신동엽, 김광섭, 심훈 등 18기     24) 옥천 대청호반 장계관광단지 테마시비공원         옥천 군북에 정지용, 오세영, 오탁번 등 12기가 있다.     2. 작가별 낱개 시비 현황     1) 현대문학 이전의 문사 등       - 권벌 (조선 중종 때 문신) 경북 봉화 석천정사 길목에 시비1기       - 권섭 (조선 후기 문신) 단양, 제천 등 시비 3기       - 김굉필 (조선 중기 문신) 대구 도동서원 부근에 시비1기       - 김병연 (김삿갓, 조선 말기 시인) 영월 등 시비 5기       - 김시습 (조선 초기 문신) 청주, 인제, 서울 등 시비 3기       - 최치원 (통일신라 말기 학자) 부산, 합천, 함양 등 시비4기       - 박인로 (조선 중기 무신, 시인) 영천, 포항, 부산 등 5기       - 서거정 (조선 전기 문신) 서울에 시비3기       - 송순 (조선 중기 문신) 광주, 담양, 강릉 등 시비 4기       - 송시열 (조선 후기 문신) 완도에 시비1기       - 숙종대왕 (조선 19대 임금) 강릉, 보령 등 2기       - 신득청 (여말선초 학자) 영덕에 시비1기       - 신사임당 (조선 중기 예술가) 평창, 강릉, 대구, 보령 등 4기       - 영조대왕 (조선 21대 임금) 사직동에 시비1기       - 왕방연 (조선 세조 때 문신) 영월에 시비1기       - 윤선도 (조선 중기 학자) 서울, 보령, 광주, 완도 등 시비5기       - 이달 (조선 중기 시인) 원주, 홍성 등 시비2기       - 이매창 (조선 중기 여류시인) 남원, 부안에 시비2기       - 이숭인 (고려 후기 학자) 성주에 시비1기       - 이조년 (고려 말기 문신) 성주, 달성에 시비2기       - 이현보 (조선 중기 문신) 안동 도산에 시비2기       - 이황 (조선 중기 대학자) 안동 도산에 시비2기       - 정몽주 (고려 말기 학자) 서울, 용인, 영천, 보령, 대구 등 시비5기       - 정조대왕 (조선22대 임금) 강릉에 시비1기       - 정철 (조선 초기 문신) 서울, 고양, 원주, 진천, 대구 등에 시비5기       - 최경창 (조선 중기 문신) 파주, 영암에 시비2기       - 홍랑 (조선 전기 기생) 파주에 시비1기       - 황진이 (조선 중기 기생) 파주, 보령에 시비2기가 있다.       2) 현대문학 주요 문인들의 문학비       - 구상 시인 시비는 여의도 나루터 앞을 비롯하여 개화예술공원 등 6곳       - 김광균 시비는 서울 대학로, 구례 화엄사 등 4곳       - 김달진 시인은 진해, 홍성 등 2곳       - 김동리 소설가는 경주, 보령 등 2곳       - 김소운 수필가는 부산 쌈지공원       - 김소월 시비는 왕십리 역, 대구 유가사, 홍성 등 9곳       - 김영랑 시인은 강진 생가를 비롯하여 광주, 서울, 보령 등 6곳       - 김유정 소설가는 춘천 일원에 4기       - 김춘수 시인은 통영, 보령, 대구 등 7곳       - 노천명 시비는 김천, 고양 등 4곳       - 박경리 소설가는 통영, 원주 등 2곳       - 박두진 시비는 김천, 보령, 옥천 등 7곳       - 박목월 시비는 서울, 경주, 보령 등 16곳       - 박재삼 시비는 사천, 보령, 김천 등 5곳       - 방정환 아동문학가는 서울에 2곳       - 서정주 시비는 고창, 보령, 대구 등 9곳       - 설창수 시비는 진주에 2기       - 심훈 시비는 당진과 홍성에 2기       - 유치환 시비는 거제, 보령, 통영, 부산 등 9곳       - 윤동주 시비는 연세대, 부산, 대구, 보령 등 8곳       - 이상화 시비는 서울, 대구, 보령 등 7곳       - 이영도 시비는 청도, 부산 등 3곳       - 이원수 아동문학가는 서울, 마산, 보령 등 6곳       - 이육사 시비는 안동, 김천, 홍성, 보령 등 4곳       - 이은상 시비는 마산, 부산, 태안 등 4곳       - 정지용 시비는 옥천, 서울, 제주 등 9곳       - 조병화 시인은 바르셀로나, 서울, 보령 등 5곳       - 조지훈 시비는 영양, 대구, 서울, 보령 등 10곳       - 천상병 시비는 서울, 대구, 마산, 보령 등 6곳       - 한용운 시비는 인제, 홍성, 서울, 보령 등 12곳       - 그 외 고정희, 구석봉, 권태웅, 권정생, 김기림, 김동인, 김상옥, 김성도, 김억, 김윤식, 김현승, 민태원, 박곤걸, 박양균, 박용래, 박용철, 박인환, 백기만, 백석, 백신애, 변영로, 신동엽, 신석정, 심연수, 오영수, 오일도, 윤곤강, 이달, 이병기, 이상, 이생진, 이설주, 이성선, 이영순, 이윤수, 이호우, 이효석, 이장희, 이태준, 이형기, 이효상, 전상렬, 정상구, 정한모, 제해만, 주요한, 채만식, 한흑구. 현진건, 홍사용 등의 문학비가 연고지를 중심으로 산재해 있다.            3) 현존문인들의 문학비        여러 가지 사정상 생략    ◎ 생존 작가의 문학비와 개관이정(蓋棺而定)에 관한 문제     비(碑)를 사전적 의미로 보면 ① 어떤 사람의 공적이나 은혜를 기리기 위하여 돌이나 쇠붙이, 나무 따위에 그 내용을 새기어 세워 놓은 물건. ② 무덤 앞에 죽은 사람을 기릴 목적으로 세우는 비석. 죽은 사람의 신분, 성명, 행적, 자손 관계, 나고 죽은 때 등을 새긴다. 로 되어있다.   문단에 영향을 끼친 공덕이 있는 작고문인에 대한 문학비 건립은 당연시되고 있다. 그러나 문학성이나 문단에 미친 공덕이 없는 문인의 문학비 건립은 항시 문제시되어왔다. 더구나 자화자찬을 하거나 경제력이 있어 자기과시를 하는 문학비는 공해(公害)라는 비난까지 받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문단에 기여한 공덕과 문학성에 대한 경계가 모호하다. 개관이정(蓋棺而定)이라는 말이 있듯이 생존 작가에 대한 문학비 건립은 신중을 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관 뚜껑을 덮기 전에는 평가를 할 수 없다는 옛말이 그르지 않기 때문이다.   ◎ 정곡 이양우 선생의 치적(治績)    정곡 선생이 이룬 과업은 지대한 공적(公的)이며 문학단체를 이끌어오면서 이룬 성과이므로 치적(治績)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개화예술공원과 시와 숲길공원은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문학 동산이다. 전국에 세워진 문학비가 1,100여 기라고 볼 때 정곡 선생이 세운 문학비가 무려 500여 기나 된다. 그 중에 육필문학비가 280기나 되니 엄청난 업적을 남긴 것이다. 자연경관의 지형지물을 여하히 활용하였으며 조경 또한 친환경적이다. 이곳은 대국민 정서함양과 휴식공간으로써 성공한 사례로 볼 수 있다.   ◎ 향후 대책과 숲길 문학의 전망    문학공원은 환경을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묘지 또는 납골당 같은 혐오스런 분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구에 있는 ‘도동시비공원’의 경우는 작은 절집 앞에 조밀하게 세워진 시비는 섬뜩한 느낌이 든다. 우연히 들러본 일부 사람들은 무서워서 얼른 빠져나왔다고 한다. 문학공원은 특정 종교적인 색채가 짙게 풍기면 좋지 않다. 종교나 계층, 연령층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대중적인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문학공원은 여유 있게 산책하는 휴식공간으로 힐링이 되는 곳이어야 한다. 또한 정서함양에 도움이 되어야하며 문단사와 문학사, 나아가 시대를 조명할 수 있는 문화사(文化史)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숲길 문학의 전망은 고무적이다.     ▣ 시비 또는 육필문학비의 보존가치 ◎ 문학비의 중요성     고대로부터 있어온 비(碑)는 역사의 자료이며 그 시대 문화사를 알 수 있는 사료다. 광개토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는 우리민족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임을 증명하고 있으며 처용의 ‘향가비’와 진흥왕 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등을 통하여 우리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알 수 있다.   문학비는 작가의 문학세계와 문학정신이 서예가와 석공의 손길을 거쳐,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활자화된 문헌보다 더 값지다.   ◎ 육필문학비의 보존 가치    육필(肉筆)문학비는 컴퓨터 서체(書體)가 아닌 그 작가의 서체를 보존하는 것이다. 서체를 통하여 시대성을 알 수 있고 그 작가의 성품, 그리고 개성이 잘 드러나므로 예술적 가치가 더욱 크다.   이상과 같이 문학비의 현황과 장․단점을 살펴보았다. 지금은 지식기반 경제시대가 아니고 창의성기반 경제시대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학창의도시(에든버러, 멜버른, 아이오와시티, 더블린, 레이카비크)가 경제의 꽃을 피우고 있다.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문학공원은 그 도시의 경제브랜드가 되고 있다. 육필문학비야말로 우수한 경제브랜드가 될 수 있으며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문화예술의 보고(寶庫)다.           출처 :영남문학 \ ​ 생전 윤동주는 자신이 쓴 19편의 시를 골라 책으로 펴내려 했다. ​ 1941년 일본으로 유학가기 전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붙이고, 책머리에 넣는 서문도 적어뒀다.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로 시작되는 서시가 서문이다. ​ 그러나 시대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           윤동주에게서 원고를 받은 이가    이곳 출신 정병욱(1922-1982)이다. ​ 서울대 교수를 지낸 정병욱은 어머니한테 원고의 보관을 당부했다. ​ 정병욱의 어머니는 이곳 망덕포구에 있는 집 마룻장 아래에다 원고를 숨겨뒀다. ​ 광양문인협회와 광양시청에서 광양 섬진강 하단 망덕포구에 윤동주 시비 "별 헤는 밤"을 세웠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이곳 친구 (국문학자 정병욱)에게 원고를 맡겨 두고 일제 학병으로 갔던 인연이 있습니다. 유일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라는 시집이 세상에 나오게 된 연유가 있지요. ​ 이 시집이 광복 이후 1948년 빛을 보게 된다. ​ 여기에 보관돼 있던 시 19편에다 윤동주가 생전에 써둔 다른 원고와 함께 묶었다. ​ 윤동주의 유일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다. ​ 망덕포구에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진 것도 이런 연유다. ============================================ 일제에 저항하다 옥사한 윤동주(1917-1945) 시인의 시비가 2010년 2월 19일 전남 광양에 세워졌다.  광양시는 이날 광양시 진월면 선소리 마을 어귀에 윤 시인을 기리는 폭 6m, 높이 2.8m 사각형 화강암 재질의 시비를 건립했다.  시비에는 국민 애송시 '별헤는 밤' 전문이 새겨졌다.  광양시는 윤 시인이 북간도에서 태어나 광양과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으나 윤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친필 유고집이 보존됐던 장소가 광양이었다는 의미를 살려 시비를 세웠다.  윤 시인은 1941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다 실패하고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당시 하숙집 후배로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가 고향인 정병욱(1922-1982.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역임)씨에게 원고를 맡겼다.  이 원고는 정씨의 어머니에 의해 소중하게 보관됐으며, 윤 시인이 독립운동을 한 죄로 일본 형무소에서 옥사한 뒤 광복후인 1948년 시집으로 발간돼 세상에 선을 보였다. /(광양=연합뉴스) =================================== 광양 망덕포구에 '윤동주 시비' 설치  - 윤동주 시인의 육필원고가 보관된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 입력날짜 : 2010. 02.22. 01:04 광양시에서는 진월면 선소리에 사업비 45백만원을 들여 폭 6m, 높이 2.8m 규모의 시비를 건립하고 지난 19일 오후 4시에 현지에서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성황리에 개최했다. 광양시가 이처럼 윤동주 시비를 건립하게 된 배경에는 윤동주 시인과의 각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광양시는 윤동주 시인의 육필원고가 보관되었던 ‘윤동주 유고보존 정병욱 가옥’(근대문화유산 제341호)이 소재한 곳으로 이 원고를 통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유고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발간될 수 있었다.  광양시는 이러한 인연을 기념하고 윤동주 시인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시인의 육필을 그대로 새겨 시비를 제작했다. 특히 이번 시비에 새겨지는 ‘별 헤는 밤’은 그의 절친한 친구인 정병욱(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1922~1985)의 조언에 따라 마지막 연이 덧붙여진 시로 자신의 시를 절대 고치지 않기로 유명한 윤동주 시인의 성격으로 볼 때 이 둘의 사이가 얼마나 각별한지를 보여주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다. 또한 제막식에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에서 참석해 행사의 의미를 더욱더 빛내 주었다. 시 관계자는 “망덕포구에는 윤동주 시비 건립 외에 망덕포구(백두대간) 랜드마크 설치 및 클린 섬진강 관광명소화사업 등 다양한 사업들이 추진 중에 있어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거듭날 예정”이라고 밝혔다. 광양/연합방송기자   전남 광양 망덕포구 윤동주 시비 [출처] 김밥은 왜 ‘김밥’일까...광양 김시식지 역사관|작성자 이슬떨이  
316    일본 문화예술인들 윤동주를 기리다... 댓글:  조회:4159  추천:0  2017-03-12
지난 2월 13일 오후 3시, 스물일곱의 나이로 순국의 길을 걸은 조선 청년 윤동주를 기리는 한국과 일본 시인들의 뜻깊은 추모회가 윤동주가 다니던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윤동주시비' 앞에서 열렸다. ▲ 윤동주시비 교토 도시샤대학 구내에 있는 윤동주시비에는 헌화가 가득하다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 붉은 매화 윤동주시l비 앞 예배당의 붉은 매화가 활짝 피었다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 흰매화 화답하듯 흰매화도 활짝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교정에는 아직 찬 겨울바람이 볼을 스치고 있었지만 붉은 매화, 흰 매화꽃이 활짝 피어 봄이 머지않았음을 알렸다. 이런 가운데 '일본ㆍ한국ㆍ재일코리언 시인 공동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모임'이 열린 것이다. '오오, 푸름이 윤 씨 동주여! 그대가 그렇게 끔찍하게 목숨을 앗기지 않았더라면 다섯 해 뒤, 열해 뒤에는 더 많은 좋고 훌륭한 글 노래들을 지어 냈을 것이어늘...' - 김리박 '바람과 별과 시와 믿나라 -무르익은 시인 윤 씨 동주를 돋구어 본다(風と星と詩と祖国, 青年詩人尹東柱を思い遺って )- 재일본한국문학회 회장인 김리박 시인이 푸름이(청년) 윤동주를 위한 자작시를 낭송했다. 이어 한국과 일본 시인들이 잇달아 윤동주를 그리는 시를 낭송했다. 올해 다섯 번째인 이날 행사를 주최한 사람들은 모두 시인들로 자신의 자작시 또는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일본어와 한국어로 낭송하여 도시샤대학 교정을 수놓았다.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 내 이름 석 자를 써보고 / 흙으로 덮어 버렸습니다"  한국 시인으로 참석한 나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낭송하다가 그만 목에 메어 버렸다. 멀고 먼 북간도에 계시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차마 어찌 그립다고만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자 눈물이 핑 돌았다. 비행기가 수시로 뜨는 지금도 여전히 북간도는 멀고도 먼 곳이 아니던가? 시 낭송이 있기 전 사회를 맡은 오오하시아유도(大橋愛由等) 시인은 "단지 한국어로 시를 쓴다는 이유 하나로 체포되어 몇 달 뒤면 맞이할 조국의 광복(1945년 2월 16일 옥중 순국)을 보지 못하고 떠난 윤동주 시인을 그리며 같은 문학인으로서 깊은 연대감을 느낀다. 지금 한일간의 관계가 암울하지만 시인 윤동주를 통해 그가 추구하던 표현의 자유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또한 '일본ㆍ한국ㆍ재일코리언 시인 공동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모임' 공동 대표인 김리박 시인은 "조국을 사랑하고 모국어로 시를 썼던 윤동주는 아직도 우리 가슴에 남아있는 위대한 시인이다. 윤동주 시인을 통해 한일 두 나라의 문학인들이 앞으로 활발한 교류가 이어지길 바란다"고 추모회 인사를 했다. ▲ 추모행사 한일시인들이 윤동주시비 앞에서 시낭송으로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 시낭송1 시낭송을 경청하는 모습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 시낭송 시인들 시낭송을 하는 모치츠키시코, 홍명미, 후쿠다도모코, 김리박, 오오하시아유도, 한남수, 이윤옥, 우에노미야코 시인(왼쪽부터 시계방향)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 추모제 기념 추모회에 참석한 시인과 일부 한국인들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앞줄임) 당신을 생각할 때 / 자신을 돌이켜 보고 / 당신을 그리워할 때 / 부끄러움으로 가득 찹니다 / 당신은 살아있습니다 / 아니 살고 있습니다 / 우리 가슴속에..." -리방세,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오사카 지부 '백년이 지나도(100年の光陰)- " "(앞줄임) 당신은 남들이 만들어 내는 일 / 꾸며내는 일을 하지 않았소 / 거짓의 등불을 들고 행진하지 않았소 / 대열(隊列)에 밟힌 길가의 초라한 제비꽃을 위해 새벽까지 / 하늘을 우러러 / 당신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오 / 당신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오... - 키타하라치요 '태초의 아침 시인에게(太初の朝の詩人に)-" " 시인이여 / 오늘은 어디에서 / 누구의 가슴에서 살아있는지요 / 시인이 떠난 자리에 꽃이 피고 / 죽어 가는 모든 이들에게 검은 옷을 입혀주시오 / 살아갈 모든 이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 푸르른 햇살 속에 펼쳐지는 / 말 꽃 / 독과 같이 / 나팔소리와 함께. -후쿠다도모코 '눈과 꽃과 하늘과 시(雪と花と空と詩)- " 이 밖에도 모치츠키시코(望月至高), 오오하시아유도(大橋愛由等) , 우에노미야코 (上野都) 등의 시인들이 윤동주를 기리는 시를 낭송했다. 이날 행사에 참여하기에 앞서 일본의 중견시인 우에노미야코(上野都)씨와 함께 윤동주가 도시샤대학 시절 학우들과 놀러가서 사진을 남겼던 우지강(宇治川)에 다녀왔다. 푸른 물이 넘실대는 우지강의 나무다리는 아마가세댐(天ヶ瀨) 하류 지역에 줄다리(밧줄로 당기는 모습의 다리, 츠리바시 '吊り橋') 모습으로 놓여있었는데 윤동주 시인이 이곳을 찾은 것은 순국하기 2년 전인 1943년 5월, 신록이 우거진 무렵으로 추정된다. ▲ 윤동주 송별회 교토 우지강에서 열린 윤동주 송별회 사진. 현존하는 윤동주 최후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현대문학》 2006년 9월호 발표) ⓒ 현대문학 관련사진보기 ▲ 우지강의 나무다리 교토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윤동주가 학우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던 우지강의 나무다리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 우에노미야코 시인 윤동주의 하숙집이 있던 다카하라에 세워진 시비 앞에 선 우에노미야코 시인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케이한 우지역(京阪 宇治駅)에서 천천히 걸어 20여 분 거리에 있는 우지강 다리에 이르는 오솔길은 월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74년 전 윤동주 시인도 기자가 걷는 이 오솔길을 걸었을 것으로 생각하니 무언가 모를 그리움이 와락 밀려든다. 시인은 학우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이 오솔길을 걸었을까? 윤동주의 시에 매료되어 30년 넘게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우에노미야코 시인은 2년 전 윤동주의 시 170여 편을 일본어로 뒤져서 라는 이름의 책을 펴냈다. 시인의 섬세한 언어로 일본에서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우에노 시인과 기자는 우지강변의 오솔길을 걸으며 청년 시인 윤동주의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날 오후 3시에 있을 도시샤 대학의 추모회에 참석하기 위해 교토로 돌아온 우리는 잠시 짬을 내어 윤동주 시인의 옛 하숙집을 찾았다. 이곳은 현재 교토조형예술대학 다카하라 캠퍼스가 들어서 있어 하숙집은 온데간데없이 헐렸지만 그 자리에는 시비가 서 있다. 도시샤대학에 이은 두 번째 시비다. 윤동주는 1942년 9월 도시샤대학으로 유학 온 뒤 1943년 7월 14일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가모가와경찰서(下鴨警察署)로 잡혀갈 때까지 약 2년 간 교토에서 지냈다. 기자는 그의 발자취를 찾아 하숙집과 가모가와강변 그리고 학우들과 모처럼 놀러나갔던 우지강변 등을 두루 둘러보았다. 그리고 오후 3시부터 열린 추모회에 참석했다. 올해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한국과 일본 곳곳에서 그를 기리는 뜻 깊은 행사가 많이 열린다고 한다. 그 가운데 윤동주 시인이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 교토 도시샤대학에서의 추모제는 매우 뜻깊은 자리였다. 기자는 3회 때 한번 참석을 한 적이 있으며 이번이 두 번째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번 모임이 시인들의 추모회라고는 하지만 한국에 알려지지 않아 한국 쪽의 참가자는 기자 혼자였다는 사실이다. 다른 곳에서 진행되는 대규모 행사에 견주면 조촐한 행사지만 윤동주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마음만은 그 어느 행사 못지않게 뜨거웠다. 추모회를 마치고 윤동주 시인을 추모하는 마음은 뒤풀이로 이어졌다. 교토역 앞의 아담한 한국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시인들은 막걸리를 나눠 마시면서 못 다한 시낭송을 하며 윤동주 시인의 짧은 생을 기렸다. 모임을 마무리 하는 자리에서 한 말씀을 해달라는 주최 측의 주문에 기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했다. "일본인들의 윤동주 시인을 추모하는 마음에 감사한다. 한국인으로 한마디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윤동주 시인이 스물일곱의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둔 것은 일제국주의의 분명한 만행이었다. 윤동주 시인이 사랑한 것은 일제에 강탈당한 조선(한국)이었으며, 한국어요, 한국 혼이었음을 일본인들은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의 죽음은 조선 침략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윤동주를 단순한 한 사람의 시인으로만 기억하지 말길 바란다." 이날 도시샤대학에서 열린 추모회에는 '윤동주를 노래하는 가수' 재일 동포 이용보씨의 공연도 함께 했다. 그는 윤동주의 서시를 한 점 부끄럼 없는 마음으로 한국어와 일본어로 노래하는 재일동포 가수다. 이날 추운 날씨에도 기타를 치며 윤동주의 서시(序詩)에 직접 작곡한 노래를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들려준 이용보 가수에게 한일 두 나라 시인들은 아낌없이 손뼉을 쳤다. ▲ 가수 이영보 윤동주를 노래하는 재일동포 가수 이영보 씨도 함께 했다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 윤동주시비 찾은 한국인들 때마침 윤동주 시비를 찾은 한국인들과 가운데 한복 입은 기자 그리고 두루마기를 입은 김리박 시인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 윤동주 시비를 찾은 한국인 2 윤동주 시비를 찾은 한국인들과 함께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또한 도시샤대학에 윤동주 시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교토 방문길에 이곳에 들러 마침 추모회를 하고 있는 자리에 동참했던 대학생과 회사원 곧 이규원, 신동님, 유제일, 안재우, 김건식, 양승규, 박세익 씨들과 이름을 밝히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추모회 자리를 지켜준 한국인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윤동주 시인은 1945년 2월 16일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국의 길을 걸었지만 그는 영원히 가슴 속에 지지 않는 별이 되어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을 것으로 믿는다. 올해로 5회째 '일본ㆍ한국ㆍ재일코리언 시인 공동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모임'은 내년에도 변함없이 제6회를 열 것이다. 부디 내년에는 한국의 뜻있는 시인들과 일반인들이 많이 참석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윤동주의 체취가 가득한 도시샤대학 교정을 나왔다./이윤옥 * 재일한국시인, 일본시인 공동 윤동주 추모회 문의 일본 : 090-8147-7689, ribak@hera.eonet.ne.jp 한국 : 02-733-5027, 59yoon@hanmail.net =========================================== "윤동주 노래를 통해서 한·일 간 문화교류의 가교(架橋)가 되고 싶습니다. 지난 1월 한국에 갔을 때 연세대학교의 윤동주 시비 앞에서 '서시(序詩)' 노래를 불렀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2001년부터 한국어강좌에 등록했는데 이때 재일본문학회장인 김리박 시인을 알게 되었고 윤동주 시인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음악과 함께 한 세월은 올해로 41년이지만 재일동포로서 이영보(李榮寶)라는 이름(전에는 기무라 시게보 '木村榮寶')으로 활동한 것은 16년째입니다." 윤동주를 노래하는 재일동포 가수 이영보씨를 만난 것은 그제(13일, 월) 교토 도시샤대학 윤동주 시비 앞에서였다. 마침 이 날은 이 오후 3시부터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이영보씨는 윤동주의 서시(序詩)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기타 반주를 넣어 불러 큰 호평을 받았다. 재일동포 2세인 이영보씨는 부모님이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강제 연행된 뼈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당시 부모님은 일본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심지어는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풍토를 우려하여 일본말 우선으로 공부시켰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한국말과 멀리 하게 되고 본의 아니게 한국의 문화와 멀어지게 되었다.   이십대부터 음악에 미쳐 가수 지망생을 꿈꿀 때만 해도 이영보씨는 일본인 이름인 기무라 시게보(木村榮寶)로 활동했다. 그러던 그가 아버지의 성인 이(李)를 되찾고 영보(榮寶)라는 이름으로 재일동포 사회에 당당하게 선 것은 '시인 윤동주'와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한글로 시를 쓴다는 이유로 유학하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재학 중 잡혀가 27살의 꽃다운 나이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진 시인 윤동주와 가수 이영보와의 만남은 어쩜 운명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 이영보 윤동주를 노래하는 재일동포 가수 이영보와 부인 스가와라 유카리 씨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남편은 노래를 통해 한일 문화 교류를 하고 싶어 합니다. 특히 윤동주를 노래할 때처럼 행복한 때가 없다고 하는 남편의 꿈은 한국에서 윤동주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올해 윤동주 탄생 100주년 되는 해를 맞이하여 지난 2월 11일 오사카 이쿠노쿠(生野區)에서 '윤동주를 노래하다(尹東柱を歌う)'라는 음악회를 성황리에 열었습니다."  이영보씨 부인은 기자와의 대담에서 남편의 음악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 당당히 말했다. 원래 일본인인 부인 스가와라 유카리(菅原ゆかり)씨는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으로 친정과 시댁 두 집안으로부터 극한적인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그러나 첫 아들을 낳고 난 뒤 겨우 양가의 허락을 받을 만큼 어려운 결혼 생활을 극복하고 딸 둘에 아들 셋을 둔 다복한 가정을 이룬 이영보씨 부부는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심어주기 위해 모두 한국 국적을 갖게 했으며 막내딸은 올해부터 경희대 관광학과에 유학한다고 귀띔했다. "아시겠지만 재일동포의 몸으로 일본 땅에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본과 한국 사회 모두 재일동포의 삶을 이해해주고 따뜻이 받아들여 주는 곳은 없습니다. 그런 만큼 피나는 노력이 필수적이었지요. 남편도 그런 노력가 중에 한 사람입니다." ▲ 이영보 음악회 지난 2월 11일 오사카 이쿠노쿠에서 열린 ”윤동주를 노래하다“ 음악회 포스터(왼쪽), 오는 3월 24일 오사카 히가시나리쿠 구민센터 대형홀에서 공연할 음악회 포스터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올해 56살인 부인 유카리씨는 앳된 소녀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재일동포 가수의 아내로, 한국인 며느리로, 다섯 자녀의 어머니로의 삶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매우 밝고 긍정적인 표정이 남편인 가수 이영보를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수 이영보는 오사카 이쿠노쿠에서 태어난 재일코리안 2세로 싱어송라이터이다. 기타를 치면서 시를 읊듯 노래하는 스타일로 라이브 콘서트 중심으로 40년간의 경력을 자랑한다. 자연과 우정을 테마로 한 작품이 많은 이영보는 베이비붐 시대(団塊時代, 1947~51)세대로부터 중고생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인기를 얻고 있다. 대표곡인 '보라, 봄이 왔다(ほら!春が來た)'는 살아있음의 기쁨이 용솟음치는 곡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는 3월 24일 오사카 히가시나리쿠 (東成區) 구민센터 대형홀에서 열리는 홍보 전단에 나오는 이영보씨에 대한 간략한 약력이다. 그제 13일 교토 도시샤대학 윤동주 시비 앞에서 열린 '윤동주 100주년 추모회'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윤동주의 '서시'를 노래한 가수 이영보! 이날 행사를 마치고 자리를 옮겨 담소를 나누는 시인들의 모임에도 함께 참석한 이영보씨는 '윤동주를 통해 한일간의 문화 교류와 더 나아가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교류의 폭'을 확대하길 바랐다. /이윤옥
315    일본 한 신문사 부장이 윤동주의 "빼앗긴 시혼(詩魂)"다루다... 댓글:  조회:2881  추천:0  2017-03-12
    ▲ 안영진 前 중도일보 주필   광복 66주년을 보내면서 애국인사들의 면면이 뇌리를 스쳐갔다. 김구, 안창호, 신채호, 여운형, 윤봉길 등 이루 열거할 수 없이 많은 얼굴들. 그 중 시인 윤동주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 '후테이센징(不逞鮮人)'으로 몰려 후쿠오카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끝내 옥사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시는 몇몇 일인 양심인사들에 의해 발굴되면서 양명가도를 달렸다.  물론 패전 후에 있었던 일이다. 그러니까 윤동주는 일제에 의해 죽었으나 일인들 손에 양명을 하는 묘한 운명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1917년 12월 30일 당시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나 서울 연희전문 문과(2년)를 졸업하고 일본유학길을 떠났다. 그러나 교토의 동지사대학 재학 시 불순분자라 해서 경찰에 의해 투옥된 후 옥사를 하고 말았다. 채 펴보지도 못한 꽃봉오리처럼 20대에 요절한 그에게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남겼다. 처음에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으나 세월이 가면서 국내에서 인기가 치솟았다.  필자는 그간 윤동주를 인양한 일본의 양심파 지성들을 추적한 바 있다. 이부키고오(伊吹鄕)는 윤동주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화제를 모은 지성이다. 번역솜씨가 원작 못지 않게 유려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이기도 하다. 오무라 마쓰오(大村童夫) 와세다 대학교수인 그는 1985년 5월 14일 중국 용정중학교를 찾아가 윤동주 시집을 전하는 한편 그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바람에 윤동주 명성은 용정 뿐 아니라 한국으로 파급된 것이다.    여류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는 윤동주의 시세계를 섬세한 안목으로 재평가한 인물이다. 그녀는 대화, 이바라기 노리코 시집, 자신의 감수성 정도, 촌지=寸志, 시심을 읽는다 등의 저서를 갖고 있다. 도쿄 출생인 그녀에게 우리가 향의를 갖는 것은 공주, 부여를 주제로 한 한글나들이라는 저서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녀는 윤동주의 시세계를 대담하게 해부하고 있다. 1980년대 초 필자가 그녀를 찾아가보니 도쿄한복판 '이나리신사' 옆에 예쁜 2층 양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작품집 한글나들이(はんぐるへの旅)를 번역해서 팔아먹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청을 선선이 받아들이며 메모지에 “'한글나들이' 번역을 수락합니다”라고 적은 후 수정도장을 찍어주던 여류시인…. 출판기념회 때는 꼭 참석해달라는 청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이 떠오른다.  풍만한 체구에 귀족 티가 흐르는 그런 시인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점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면 이바라기의 윤동주 평은 어떤 것인가. '돌아와 보는 밤'= 평소 '다치와라(立原道造)'를 좋아했던 윤동주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서로 다르다는 지적이다. 정감은 서로 피아노의 선율처럼 흐르고 있지만 그 깊이는 윤동주 쪽이 한수 위라고 했다.  '다치와라'의 시가 음악처럼 부드럽긴 하나 핵이라 할 중심부가 허약하다는 지적이었다. 이에 비해 윤동주는 밑바닥에 힘이 깔려 있을 뿐 아니라 섬세하다. 그리고 윤동주는 '쉽게 쓴 시'에서 부모님의 땀내 나는 학비봉투에 비해 쉽게 글을 쓴다는 건 사치라며 자책을 한다.  '또 다른 고향'은 윤동주가 24세 때 쓴 시로 3년 후에 다가올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예언하고 있다. 필자 역시 윤동주 발자취를 캐러 도시샤대학을 찾아간 일이 있다. 정문(수위실)에선 윤동주의 시와 선전물을 방문객에게 건네준다. 정지용 시인도 이 대학 출신이지만 인기는 단연 윤동주 쪽이었다. 이밖에도 윤동주 연구에 힘쓴 언론인이 있다.  니시닛퐁(西日本)신문 이데(井手俊作)부장이 그 장본인이다. 그는 종전(태평양전쟁) 50주년 특집물로 윤동주의 '빼앗긴 시혼(詩魂)'을 다뤘다. 그는 윤동주가 형무소 수감 당시 약물 주사를 맞고 미친 듯이 소리치며 몸을 꼬았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당시 규슈(九州)대학에선 전쟁으로 부족한 혈장 대용인 식염수 사용을 위해 생체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윤동주의 죽음과 무관치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데 부장이 그 연재물을 필자에게 보내주어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한다. 늦었지만 이를 한국 측 지면에 소화할 생각이다. 이데 부장은 후쿠오카 형무소와 동지사대학, 시다카모(下鴨) 경찰서, 국회도서관을 꽤나 찾아다녔다고 했다. 어떻든 윤동주는 요절했지만 그의 작품들은 격조 높은 것이라는 데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논쟁거리가 있다면 그의 시가 '저항시'냐 아니면 '서정시'냐 하는 점이다. 이 또한 한국문단이 챙겨야 할 숙제라 할 수 있다. 요즘 독도문제로 한·일간의 국민감정은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윤동주를 발굴한 일본의 양심파 지성들은 요즘 어떤 표정일까를 생각해본다.   ▲ 필자가 소장한 윤동주에 관한 일본 연재물로 이는 종전 50주년 특집으로 이데부장이 속한 서일본(西日本) 신문에선 ‘빼앗긴 詩魂’, ‘尹東柱의 獄死’라는 표제를 달았다. 가운데 책은 윤동주에 대해 시평을 한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 기행문이다.   “이념 날과 서정 올로 짜여진 詩”  옥사 후 日人에 의해 ‘햇빛’  국내선 70년대 비로소 본격 연구  日신문 종전 50주년 특집 기획  “생체실험 진행 당시 죽어” 제기    전쟁아픔 공감대 형성 앞장  日人에 빼앗긴 시  애국시인 윤동주가 세상을 뜬지 올해로 60주년을 맞았다. 그는 1917년 북간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중학교를 나오고 연희전문 문과를 거쳐 경도(京都)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재학 중 감옥에 끌려간다. 죄명은 독립운동 혐의였다. 저 악명높은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옥사를 했다.  중학교 재학 당시 동시(童詩)를 쓰다가 시로 전환한 것은 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당시에는 이렇다할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윤동주 시가 햇빛을 보게 된 것은 국내에서가 아니라 일본인에 의해서였다. 그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밖에 없다.  일인 손에 죽은 윤동주가 사후 몇몇 일인(양심파 지성)에 의해 제 모습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윤동주는 한국에서보다 일본에서 먼저 유명해지면서 그 진가가 한국으로 상륙했다.  국내에서 윤동주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이후였다. 우리 문단의 거성 김현과 김윤식에 의해 윤동주는 제 모습을 드러냈고 그로 인해 특히 젊은층에서 우상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가 저항시냐 아니면 서정시냐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끊이지 않는다. 한 쪽에서는 저항시라고 보기에는 첨예성이 결여된 매우 소극적인 숨결이라 지적하기도 하고 반면 반대편에선 매우 세련된 격조 높은 저항시라고 옹호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분석해 볼 필요를 느낀다.  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길….’  이 땅의 사회지도층에선 요즘도 서시구절을 곧잘 인용한다. 이렇듯 윤동주는 젊은층과 애국시민들에겐 우상으로 태양등처럼 빛을 발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일본에서 본 윤동주  ‘이바라기 노리코’의 윤동주 시평을 살펴본다.  돌아와 보는 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다치와라’와 윤동주 시인의 능금의 이미지가 공통일 뿐만 아니라 언뜻 보기에 약한 것 같이 보이면서 피아노의 선(線)처럼 쭉 뻗은 투명한 서정의 질에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윤동주 쪽이 다치와라 쪽보다 율적 서정이 깊지만 다치와라의 시를 어떤 식으로 읽었는가를 알고 싶어 새삼스럽게 두 사람의 시를 그러한 각도에서 꼼꼼히 읽어 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르다. 다치와라 시는 음악과 같고 의미에 중점이 놓여져 있지 않으나 윤동주의 시는 핵이라고 할만한 힘이 있어 끊임없이 거기에 집약되어 숨겨진 의미 또한 무겁고 깊다. 윤동주는 ‘다치와라’ 사후에 그의 시를 즐겨 읽은 셈이지만 퍽 겸허하게 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동시에 한 하늘 아래 같이 살아온 지성(시인)끼리 통하는 그 어떤 선율 같은 것이 엿보인다.  쉽게 쓴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이 포근히 풍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씩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心澱하는 것일까.  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詩가 이렇게 쉽게 쓰여진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후의 악수  흔해 빠진 향수(鄕愁) 타령 같지만 찡하니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다. 부모님 땀내가 벤 학비봉투 앞에서 쉽사리 시가 써진다는데 죄책감을 갖는 시인.  비 내리는 밤에 잠은 오질 않고 시가 쉽게 써지니 이는 지독한 사치가 아니냐며 자책을 한다. 윤동주는 유학생 시절 다치와라 도조(立原道造)의 시에 탐닉해 있었다. 연보(年譜)에서 그것을 알았을 때 필자는 흠칫했다. 윤동주의 시를 읽다 보면 그 서정(抒情)의 질이 다치와라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낀다.  잠의 유혹 등불처럼 바람처럼 별처럼  내 목소리는 한 마디에 저기로 여기로….  그러면 너희들은 능금의 하얀 꽃이 피어 작은 초록의 열매를 맺어 그것이 빠른 속도로 빨갛게 익는 것을 짧은 동안에 자면서 보거나 할 것이다. 다치와라의 사진은 대개 어렴풋이 입을 벌리고 있는데 윤동주의 사진은 언제나 입을 꽉 다물고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예쁜 얼굴이다. 다치와라와 윤동주는 아직도 각각 자국의 젊은 여학생에게 사랑을 받으며 계속 읽혀지고 있는데 사진에서 보이는 순수성은 시에서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또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서 한 방에 누웠다.  어둔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면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24세 때 쓴 작품으로 3년 후의 죽음을 예견한 듯한 시(詩)이다. 크리스천이기도 했던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은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동요를 쓰고 있던 무렵 윤동주는 동주(同舟)라는 사랑스런 필명을 갖고 있었다. 나의 뇌리엔 ‘인간의 질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봤다.  그러나 3년 가까운 일본 유학시절의 윤동주의 발자취는 이부키시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안타까운 일이다.  일본에서 윤동주의 인기는 아직도 대단하다. 무명이던 그를 일약 대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오무라’, ‘이부키’, ‘이바라기’, ‘이데’씨의 인기도 상승가도를 달려왔다. 그 뿐만 아니라 동지사대학은 경도대학과 담하나 사이로 이웃하고 있는 사학명문이다. 정지용도 이 대학출신인데 일본에선 윤동주의 인기를 따르지 못한다. 이렇듯 그는 오늘에 부활하고 있다.   윤동주를 빛낸 일본인  伊吹鄕(이부키 고오) 일어로 詩 옮겨 일본에 소개  윤동주의 시를 일어로 옮겨 일본 지식인들에게 소개한 인물로 원작을 능가할 정도의 유려(流麗)한 번역솜씨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래서 윤동주는 오늘에 더욱 빛나는지도 모른다.  大村童夫(오무라 마쓰오. 와세다대 교수) 中 연변에 연구붐 일으켜  어학교수인 그는 1985년 5월 14일 연변 용정중학교를 찾아 윤동주 시집 한 권을 전했고 이어 부근에 있는 그의 묘를 찾았다. 이때까지 윤동주를 몰랐던 연변에서도 갑자기 연구 붐이 일었다. 일본 땅에 윤동주를 알리고 이를 연변으로 연결지은 오무라 교수는 일본 지성의 면모를 여지없이 우리에게 보여준 셈이다.  茨木(이바라기 노리코) 詩세계 재평가한 여류시인  일본의 여류시인으로 ‘對話’, ‘茨木 노리코 시집’, ‘자신의 感受性 정도’, ‘寸志, 詩心을 읽는다’ 등의 저서를 갖고 있다. 그녀는 1926년 도쿄 태생으로 우리에게 더욱 호감을 주는 건 ‘한글 紀行’이다. 이 책에선 윤동주의 시 세계와 연금술(테크닉)까지를 재단(평)하고 있다.  또 윤 동주가 다치하라(立原道造)의 영향을 받은 경위와 시 ‘잠의 유혹’을 재단(평가)하는 날카로움까지 보였다.  필자가 도쿄에서 그녀를 만난 것은 그의 저서 ‘한글기행’ 번역권을 얻어내려는 데 있었다. 하지만 허락을 얻고서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직껏 빛을 못 봐 미안한 감을 금할 길이 없다.  윤동주의 시에 대해 그녀는 이념의 ‘날’과 서정의 ‘올’로 잘 짜여진 직물(비단)과 같다고 말했다. 윤동주 그는 대학생이고 그녀는 당시 여고생이었으며 일본 하늘아래 한 시대를 같이 산 셈이다. 만약 그 때 얼굴을 알았다면 ‘동주오빠’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고 농담까지 섞었다.  井手俊作(이데 준사쿠·서일본신문 부장) 종전 50주년 특집으로 다뤄  일본의 문예지에 윤동주 이름이 오르내린 것은 ‘오무라’, ‘이바라키’씨 때문이지만 신문에서 특집을 기획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그것을 ‘이데’ 부장이 해냈다. 종전 50주년 특집으로 그가 속한 西日本 신문에선 ‘빼앗긴 詩魂’, ‘尹東柱의 獄死’라는 기막힌 표제까지 달았다.  이데 부장은 후쿠오카 형무소와 동지사대학 시다카모(下鴨) 경찰서, 국회도서관 등을 누비고 다녔다. 그는 윤동주가 형무소 수감 당시 약명 미상의 주사를 맞고 미친 사람처럼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는 점도 캐냈다. 이는 당시 규슈(九州) 제국대학 생체 해부사건과 관련이 있다. 전쟁 시 부족한 혈장 대용으로 식염수를 사용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생체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윤동주의 죽음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윤동주 연구에서 한국내의 유족과 친인척 향맥, 학맥을 수소문 사실 그대로 다뤘다. 이데 부장은 자신이 쓴 종전 50년 특집물 15회분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암울했던 과거사, 그 아픔을 같이 나누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이데 부장의 기사는 구구절절 문장이 간결하고 사건추적에 더 없이 치밀함을 보였다. 그래서 규슈 지방에선 민완기자로 통한다.   ▲ 윤동주 시인
314    일본 녀류시인 50세부터 한글 배워 시를 번역하다... 댓글:  조회:3071  추천:0  2017-03-12
        子さ 전후를 대표하는 여류 시인의 이바라키 노리코 (본명·미우라 노리코=미우라·노리코) 1926년에 태어난 일본의 시인으로, 일본이 패전했을 때 열아홉 살이었다. 그녀는 전후 일본 시단에서 여성시인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국정교과서에도 실렸다. 오사카부 태생. 제국여자약전졸(帝国女子薬専卒). 20대에 시를 시작해 시지 「시학」의 투고 동료였던 고 카와사키 히로시씨와 동인지 「노-櫂(かい)」」를 창간. 시원시원한 표현으로, 자립한 전후 여성을 실감나게 노래한 작풍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다. 쇼와 30년에 제1시집 「대화」를 간행. 헤세이 11년의 시집 「倚(よ)りかからず-의지하지 않고」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다른 시집에는 「보이지 않는 배달부」 「진혼가」 「자신의 감수성 정도」 등이 있다. 50 세에 한글을 배우기 시작해 한국의12인의 시인의 작품을 번역한 1990년에는 「한국현대시선」을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한국 현대 시선」으로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했다. 2006년 2월9일, 도쿄도내의 자택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46年 戯曲「とほつみおやたち」-희곡 [도보벌 부모들] 1948年 童話「貝の子プチキュー」、 「雁のくる頃」-동화 [조개아이 뿌티큐], [기러기가 올 무렵] 1955年 詩集「対話」 1958年 詩集「見えない配達夫」 1965年 詩集「鎮魂歌」 1967年 「うたの心に生きた人々」 1969年 「茨木のり子詩集」「おとらぎつね」(愛知県民話集)-「이바라키 노리코 시집」「호랑이여우」(아이치현 민화집) 1971年 詩集「人名詩集」 1975年 「言の葉さやげ」 1977年 詩集「自分の感受性くらい」 1979年 「詩のこころを読む」 1982年 詩集「寸志」 1983年 「現代の詩人7 茨木のり子」 1986年 「ハングルへの旅」「うかれがらす」(金善慶童話集・翻訳)-「한글로의 여행」「신이 난 유리 」(금선경 동화집·번역) 1990年 「韓国現代詩選」 1992年 詩集「食卓に珈琲の匂い流れ」 1994年 選詩集「おんなのことば」 1999年 詩集「倚りかからず」「기대지 않고」                                        시집『의지하지 않고』(筑摩書房)1999年   ( 「휴식중에」에서) 40년전의 어느 가을 저녁 밤에 출발해서 아침 일찍히 나라역(奈良駅)에 도착했다 호류사(法隆寺)에 가고 싶었지만 아직 버스도 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어제밤 산 역에서 파는 도시락먹고 있자 그 대합실에 역장이 가까이 닥아와 2, 3명의 손님에게 차를 대접해 주었다 완만하게 흐르고 있던 시간 역장의 얼굴은 잊어 버렸지만 큰 주전자와 제복과 따라 준 뜨겁고 진하고 떫은 차의 맛은 지금도 생각이 난다.         죽은자가 보내온 부음/서경식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가 부친 편지가 왔다. 봉투를 뜯어 보닌 첫 행에 이렇게 씌어 있다. “이번에 저는 (2006)년 (2)월(17)일, (지주막하출혈=뇌막졸중)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됐습니다.” 인쇄된 글이지만 ()속만은 손으로 쓴 글씨다. 2행에는 “이것은 생전에 써 둔 것입니다”라고 돼 있다. 그 분이 돌아가신 것은 2월20일 신문보도를 보고 알았다. 고령이었고 몸이 편찮으신 것도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어쨌든 장례식 안내라도 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본인이 직접 쓴 편지가 온 것이다. “내 의지로 장례·영결식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집도 당분간 사람이 살지 않게 되니 조위금이나 조화 등 아무것도 보내지 말아주세요. ‘그 사람도 떠났구나’하고 한순간, 단지 한순간 기억해주시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자신의 죽음이 가까운 것을 안 시인은 사전에 편지를 준비한 뒤 사후에 우인이나 지인들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해 두었던 것이다. 어쩐지 그답다고나 할까. 언제나 우뚝 서 있던 사람이 조용히, 깔끔하게 떠나갔다. 이바라기 노리코는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시인이다. 내가 그의 시를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의 첫 시집 (1955), 두번째 시집 (1958)는 이미 나와 있었으나, 세번째 시집 (1965)는 당시 아직 나와 있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13살 아이였지만, 그도 아직 30대로 ‘젊은이’라 해도 좋을 나이였다. 그런데 어쩌면 그토록 뚜렷한 존재감을 갖고 있었던 걸까. ‘장 폴 사르트르에게’ ‘6월’ ‘내가 가장 고왔을 때’… 못보던 신선한 과일을 손에 넣은 듯한 기쁨에 들떠 그의 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때 생각난 이미지는 불에 탄 기왓장들이 나뒹구는 거리를, 눈부신 오후 햇살을 온몸에 받으면서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걸어가는 여성의 모습이다. 봉건제의 속박과 군국주의의 중압에서 해방된 여성들이 주권재민, 평화주의, 남녀동등권 등 전후 일본 헌법이 구가한 민주주의 이념을 향유하면서 그것을 대담하게 실천해가는 모습이다. 그 무렵부터 오늘날까지 거의 40년간 그의 시를 계속 읽어왔다. 긴 세월 동안 내게 그는 멀리서 동경하는 대상이었을 뿐 서로 어떤 연락도 없었다. 그런데 1980년대 전반 어느 날 뜻밖에도 당시 내가 살고 있던 교토에 그가 찾아와 직접 만나게 됐다. 그 경위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나의 형(서준식)도 또한 그의 시에 대해서는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는 17년간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250통 이상의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차례에 걸쳐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야간비행). 1982년 7월31일 소인이 찍힌 편지에서는 ‘6월’을 자신이 우리말로 번역해, “이것은 하나의 아름다운 ‘유토피아’다. 내 마음 속에는 이런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고 썼다. 82년이라면 군사정권 시대 중에서도 가장 험악한 시기였다. 형은 옥중생활 10년을 넘기고 출옥 전망도 전혀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 그가 그럼에도 자기 마음속에는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가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어디엔가 아름다운 마을은 없을까”로 시작하는 그 시 ‘6월’의 마지막 부분을 소개한다.   어디엔가 사람과 사람의 아름다운 힘없을까 같은 시대를 더불어 살아가는 친근함과 재미, 그리고 분노가 날카로운 힘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형의 편지를 받아든 뒤 나는 당시 일면식도 없었던 이바라기 노리코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굳이 교토까지 찾아와 주셨던 것이다. 실제로 만나 본 그는 예상했던 대로 몸집이 크고 삽상한 사람이었다. 말하는 거나 동작 모두가 명쾌했으며, 여리거나 정서과잉인 듯한 구석은 전혀 없었다. 전후 일본의 여성시인 이바라기 노리코가 그려 보인 유토피아가 옥중의 형에게 버틸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스며있는 ‘일본’을 “알코올로 씻어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했던 형은 설령 일부분이었을지라도 그것이 자신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른 편지에서 나에게, 설사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가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거기서(즉 일본 시인들의 시적인 세계에서) 억지로라도 빠져나와 조선민족의 치열한 시적 세계에 몸을 던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것은 현실의 고통을 토대로 한 근거 있는 주장이고, 일본에서 계속 살아온 나를 근저에서 위협하는 문제제기였다. 지금도 나는 그 화두가 정당하다는 걸 인정하고 계속 그 해답을 찾고 있다. 이바라기 노리코는 80년대 후반부터 한글을 배워 조선민족의 시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윤동주를 소개한 그의 에세이는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수록돼 있다. 만년의 그는 일본사회의 우경화를 우려하면서 전후 민주주의 이념이 줄줄이 삭아가는 현실을 개탄했다. 전후라는 시대의 빛을 함께 쬔 시인들(특히 남자들)이 현상 긍정적인 자세로 변절한데 대해 분개했다. 1999년 시집 는 분노의 시집이었다. 그 시처럼 그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홀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나는 지금 조용히 형에게 보고하고자 한다. -형, 형과 나에게 ‘유토피아’를 주었던 시인이 세상을 떠났어. 그 다운 최후였어. “어딘가에 아름다운 마을은 없을까”, 일본인들 대다수가 잊었든지 체념하고 있던 그 마을. 기억하고 있는 자들도 어색하게 냉소를 흘리며 얘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을.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건 얄궂은 일이겠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일지도 몰라.     /한겨례     유월 - 이바라기 노리코   어딘가에 아름다운 마을은 없는가 하루의 일과 끝에는 한 잔의 흑맥주 괭이를 세우고 바구니를 내려놓고 남자나 여자나 커다란 조끼를 기울이는   어딘가에 아름다운 거리는 없는가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단 가로수가 어디까지나 잇달았고 제비꽃 빛깔의 석양녘은 젊은이들의 다정한 속삭임이 충만한   어딘가에 아름다운 사람과 사람의 아름다운 힘은 없는가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친숙함과 우스꽝스러움과 노여움이 날카로운 힘이 되어 솟아오르는       한국 시를 누구보다 사랑했고 일본어로 가장 완벽하게 번역해낸 일본의 여류시인이 영면했다.   아사히신문 등에 따르면 한국 시인 12명의 시를 실은 일본어 번역시집 ‘한국현대시선’을 펴내 1991년 요미우리문학상을 수상한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이 최근 자택에서 별세한 것으로 확인됐다. 향년 79세. 한국현대시선은 출간됐을 당시 번역시집이 아니라 창작시집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었을 정도로 작품성을 높이 평가받았다. 번역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영역에 속하는 시 번역을 이처럼 뛰어나게 해 낸 이바라기 시인이 한국어 공부를 처음 시작한 것은 모국어를 공부하기도 쉽지 않은 50세 때였다. 당시는 한국어를 배운다고 하면 모든 일본인이 “왜 하필 한국어냐”고 물을 정도로 한국을 무시하던 때다. 이바라기 시인이 ‘한글에의 여행’이라는 에세이집에서 “오싹하다”고 썼을 정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한국어 공부에 이바라기 시인이 혼신의 힘을 쏟은 이유는 홍윤숙(洪允淑) 시인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이바라기 시인은 홍 시인이 일본어를 무척 잘하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다. “학생 때부터 배워서”라는 대답을 들은 이바라기 시인은 자신의 둔감함을 뼛속 깊이 뉘우쳤다. 이바라기 시인은 많은 일본인에게 27세의 젊은 나이로 일제의 형무소에서 요절한 한국의 민족시인 윤동주(尹東柱)를 알게 해 준 시인으로도 기억된다. 이바라기 시인이 윤동주에 대해 쓴 수필이 1995년 일본의 한 출판사가 펴낸 고교 현대문 교과서에 실렸던 것. 이바라기 시인은 ‘윤동주’라는 수필에서 “그는 일본 검찰의 손에 살해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통한(痛恨)의 감정을 갖지 않고는 이 시인을 만날 수 없다”고 썼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 그녀가 50세에 한국말 공부를 시작해 63세때 펴냈다던 번역시집 한국현대시선(韓國現代詩選) (1990년 東京 花神社)       이바라기 노리코와 관련하여 도움이 될 만한 책   > 1) (對譯版) 일본 명시선(名詩選) / 김희보 지음 (1985년 종로서적) > 2) 현대일본어시집(現代日本語詩集) 2-4 / 유정 (1984년 탐구당) > 3) 일본여성시인대표시선(日本女性詩人代表詩選) / 영뢰청자 (1988년 문학세계사) > 4) (日本) 현대시(現代詩) / 오영진 편 (1988년 성학사) > 5) (日本) 명시감상(名詩鑑賞) / 오영진 편 (1992년 성학사) > 6) 일본현대 대표시선 / 유정 편역 (1997년 창작과비평사) -> 새책으로 판매함 > 7) 일본 근.현대 詩 / 임성규 편 (2000, 제이앤씨(계명)) -> 새책으로 판매함       이바라기노리코는 모든 일을 남의 탓으로, 친구 탓으로, 가까운 친척 탓으로, 시대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한다. 3연에서 말한  なにもかも下手だったのはわたくし처럼 무얼하든 서툴기만 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꼬집어 이야기 하고 있다.   요즘 세상이 각박해져가고 메말라 간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정을 찾아보기 힘들다. 남을 밟지 않으면 자신이 밟히고 마는 각박한 사회 현실 속에서 우리의 감수성은 사회의 모습과 같이 메말라 간다.   바싹바싹 말라간다, 나날이 까다로워진다, 초조함이 더해간다, 초심이 사라져간다, 바람직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난다 - 는 문구들의 나열은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작가는 마지막에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키라고 한다. 사회를 한탄 하지 말고 그 누구를 탓하지도 말고 바로 나 자신이 지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회의 한탄을 안 할 수가 없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인문학의 위기 라는 말이 있다. 실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취업이 어렵다고 해서 이공계에 비해 인문학을 멀리하는 경향을 말한다. 사람을 다루는 학문인 인문학이 없이는 어떠한 학문도 출발할 수가 없다. 아무리 의술이 뛰어난 사람도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의사로서의 자질이 없다. 사람을 다루는 일을 의학적 지식만으로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문명의 발전도 모두 사람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이 좀더 편리한 생활을 추구하는데서 과학을 개발하고 발전시킬 필요성을 얻게 된 것이고, 사람을 기준으로 사람의 쓰임에 맞추어 과학이 발전한다. 모든 근원의 중심이 사람인데, 이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을 경시한다는 것은 뿌리를 잘라내고 꽃이 피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과 같다.   요즘 도시 어린이들은 자연을 많이 접하지 못한다. 매일 집에 틀어박혀 컴퓨터 게임만 하는 아이가 많다. 일본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져 가상공간이 마치 자신의 삶처럼 생각하는 아이들을 히키코모리라고 하여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어릴 때 동심이라고 일컬어지는 순수한 마음이 요즘 도시 환경에서 자라기 어렵다. 어린이들에게 IQ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시 되야 할 것은 EQ 라고 한다. 창의력과 상상력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바로 감성, 감수성에서 온다.   이러한 현실 사회 속에서 감수성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는 이 시대에, 어린이들이 자연을 접하지 못하고 컴퓨터 가상현실 속에서 재미를 찾고 있는 이 때에 우리가 메마를 대로 메말라버린 감수성을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까? 나는 그 해답을 '시'에서 찾아보았다. '시'를 읽음으로서 인간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투영해 본다. 또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여유와, 자신이 그토록 힘들어했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도 한다. 시는 풍부한 상상력과 감정을 지니고 있다. 시를 읽는 것만으로 우리의 메마른 감수성을 채울 수 있다.   자신의 감수성은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바보같으니라고! 경종을 울린다. 아무리 사회가 각박해도 그 사회를 이루는 것은 개인이다. 나도 사회를 이루는 개인으로서 메말라져가는 현실에 조금이라도 보템이 되고 싶다. 시인에게 바보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시를 많이 접하고 읽음으로서 내 마음에 차곡차곡 감수성을 담을 생각이다. 한사람 한사람이 모여 나부터라는 생각으로 실천하면 조그만 감수성들이 모여, 각박한 사회에 윤활유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따뜻한 정을 지닌 나라이다. 급박하게 사회발전을 이룩하느라 놓쳐버린 우리 고유의 정을 되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된다.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키자!       한글의 독특한 매력과 저력     “한글은 마치 편물(뜨개질) 기호 같은 문자야.”   같이 한글을 배우던 친구가 무심결에 중얼거린 말이다. 편물 기호라니. 재미있는 말을 한다. 그러고 보니 코늘림, 코줄임, 교차뜨기 같은 기호와 닮지 않은 것도 아니다.   '멋이 있습니다, 맛이 있습니다' '님의 것, 남의 것'   모음에 달린 막대기가 하나인가 둘인가, 오른쪽을 보고 있는가 왼쪽을 보고 있는가, 위로 튀어나왔나 아래로 튀어 나왔나, 그 작은 차이 하나로 발음도 의미도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모음이 다채롭지 못한 일본인 입장에서는 어색한 게 많지만, 하나하나 알아 갈수록 너무나 훌륭하게 창조된 문자라고 탄복할 수밖에 없다. ...중략...   한글은 지금부터 500여 년 전, 세종대왕이 집현전의 학자들에게 명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한반도의 역사는 5,000여년으로 ‘말하는’ 언어는 조선조 이전부터 꾸준히 쓰여 왔지만 ‘쓰는’ 언어는 한문밖에 없었다. 지금도 ‘유식한 사람’, ‘무식한 사람’과 같은 표현이 쓰이고 있는데, 이른 바 ‘지식인’, ‘교양인’이란 한문을 쓰고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대다수의 ‘무식한 사람’들의 경우, 말은 해도 읽고 쓰지는 못했다. 이것은 옛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세종대왕은 한국에서 성군으로 추앙받는 위대한 임금으로, 이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심정을 누구나 손쉽게 쓰고 읽을 수 있도록 문자를 만들게 했다. 이에 명석한 학자들이 언어를 모조리 음소로 분해해 한문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표음문자를 창조한 것이다. 혀나 목구멍, 입 안, 이, 입술의 움직임을 본뜬 독특한 발음기호를 발명, 그 조합이 그대로 문자가 되었다고 하면 될까. 따라서 문자를 읽을 때도 혀를 위턱에 붙인다, 뒤로 뺀다, 중간에 딱 멈춘다, 입술을 딱 다문다, 같은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렇게 분석적이고 복잡한 작업은 머리 나쁜 나 같은 사람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다.     인용도서: [한글로의 여행] 이바라키 노리코 지음, 원저 1986, 번역판 2010 뜨인돌 발행    
313    일본인 = "윤동주 선배가 나와 같은 의자에서 공부했다니"... 댓글:  조회:2750  추천:0  2017-03-12
“윤동주 선배가 나와 같은 의자에 앉아 공부했다니…” 2015-02-03    야나기하라 야스코 대표가 윤동주 시인이 1942년 일본 릿쿄대학 재학 시절 공부했던 교실을 안내하고 있다. [짬]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릿쿄의 모임 야나기하라 야스코 “여기가 윤동주가 실제 수업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교실입니다. 저도 이 교실을 사용한 적이 있지요.” 지난달 30일 오전, 도쿄 이케부쿠로에 자리한 릿쿄대학 캠퍼스는 하얀 눈에 뒤덮여 있었다.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의 모임’(이하 릿쿄의 모임)을 이끌고 있는 야나기하라 야스코(68)가 1942년 윤 시인 재학 시절 그대로인 본관, 채플과 지금은 전시관이 된 도서관 등을 직접 안내했다.   73년 전 젊은 윤동주는 이곳에서 식민지 지식인이라는 부끄러움을 안은 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쉽게 씌여진 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야나기하라는 “그는 단순한 저항보다 더 깊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한 시인이었고, 인간으로서도 청아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죽게 한 일본인으로서 속죄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90년 아들에게 한일 과거사 가르치다 윤 시인이 릿쿄대 선배란 사실 발견 “안타까운 죽음 충격…유학 흔적 추적” 릿쿄시절 하숙집 위치 찾아내기도   “저항 넘어 보편 가치 추구한 지성” 올해 70주기 맞아 유품 등 순회전시     릿쿄대학 사학과 64학번인 야나기하라가 윤동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25년 전인 90년 초등학생 아들이 한국으로 야구 원정경기를 떠나게 됐다. 아들에게 한국이란 나라에 대한 역사를 설명하다 자신이 생각보다 한-일 과거사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를 계기로 지난 역사를 공부하던 그는 일본에 한국의 현대시를 소개해온 작가 이바라키 노리코(1926~2006)의 에세이에서 깜짝 놀랄 만한 구절을 발견하게 된다. 윤동주가 자신의 모교인 릿쿄대학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야나기하라는 “윤동주가 릿쿄의 선배로 나와 같은 의자에 앉아 수업을 들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도무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겨우 20여년 전에 자신과 같은 대학에 다녔던 이가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운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한국에선 조사하기 힘든 윤동주의 일본의 흔적을 조사하는 일”을 시작한다.   윤 시인은 42년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정도 이곳에 머물렀다. 이후 교토의 도시샤대학으로 편입한 그는 43년 7월 치안유지법 위반(독립운동 등의 혐의)으로 체포돼 복역 중이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45년 2월16일 숨졌다.   야나기하라는 지난 20여년 동안 릿쿄 동창생이라는 ‘장점’을 활용해 옛날 대학신문을 찾거나 150여명의 동창생에게 편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윤동주의 일본 생활의 공백을 하나씩 메워가기 시작한다.   이 가운데 그가 확인한 가장 큰 성과는 윤동주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쉽게 씌여진 시’에서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표현했던 릿쿄 시절 하숙집의 위치를 ‘도쿄 신주쿠구 다카다노바바 1초메’로 특정한 것이다. 야나기하라는 윤동주와 함께 릿쿄대학에 다녔던 백인준(1920~99) 북한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이 89년 문익환 목사와 북한을 방문했던 작가 황석영에게 “윤동주와 같은 하숙에 있었다”는 증언을 남긴 사실에 착안해 그의 학적부 주소 등을 통해 하숙지의 위치를 특정해낼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보니 윤동주가 ‘사랑스런 추억’에서 “봄은 다 가고 도쿄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중략)/ 오늘도 기차는 몇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간다”고 말했던 기차역은 현재의 제이아르(JR) 다카다노바바역으로 추정이 된다.   이미 70년 전에 숨진 타국의 시인을 기억하는 게 일본인들에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야나기하라는 “현재 일본은 위험한 사회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물론 우리가 죽게 한 시인이지만, 그 가운데 윤동주가 살아온 방식과 그 시에 대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윤동주는 시대의 가치관에 미혹되지 않고 긴 시야에서 보편적인 가치를 끌어내왔다. 그는 키르케고르와 같은 실존철학을 열심히 공부했고 그래서인지 그가 70년 전에 쓴 시가 보편적인 힘을 갖고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 릿쿄의 모임에서 매년 2월 말에 진행하는 윤동주 추도식에는 그의 시를 사랑하는 300~400여명의 일본인들이 모이고 있다.   올해는 윤동주가 비운의 죽음을 맞은 지 70돌이 되는 해다. 야나기하라는 이를 기념해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일본 도시들인 후쿠오카(5~9일), 교토(13~17일), 도쿄(21~15일) 등을 돌며 유품과 유고를 전시하는 행사를 준비 중이다. 이 행사는 윤동주의 조카인 윤인석(58)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가 2013년 2월 연세대에 기증한 윤동주의 유품의 복제본을 연세대에서 빌려 진행하는 것이다.   야나기하라는 “윤동주는 책에다 자신의 감상이나 구입처 등을 꼼꼼하게 적어 놓았다. 그런 낙서까지 꼼꼼하게 재현한 복제품이기 때문에 원본과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히 그는 정지용의 시집에는 ‘걸작’이라는 낙서를 남기기도 했다”고 말했다.   도쿄/글·사진 길윤형 특파원
312    일본의 중견 시인이 윤동주 시를 일본어로 완역하다... 댓글:  조회:2972  추천:0  2017-03-12
  우에노미야코 시인의 윤동주 시 일본어 완역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표지       일본에서 윤동주 시인의 시가 생각보다 많이 공부하고 평가도 좋다고 함   이바라키 노리코 라는 일본에서 진짜 유명한 시인을 통해서 알려졌어 이전에 교과서를 만들때 이 분한테 시를 몇개 추천해 달라고 집필진이 부탁했는데 윤동주시인 작품을 5편 실어서 보냈대   검정위원회에서 이걸 어떻게하면 좋냐라고 이야기는 나왔었는데  이 분(이바라키 노리코)이 추천한거라면 맞다고 결정돼서 그대로 실렸고 여전히 교과서에 있고 연구도 계속 되고있어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도시샤 대학을 가면 기념비가 있는데 시를 공부하다 잡혀들어간,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생체실험으로 옥사했다는 내용까지 다 써있대요.(그것이 당연한것이지만...ㅠ)   도시샤 대학에 있는 윤동주 시비 
311    일본 녀류시인 이바라키 노리코가 윤동주 시에 해설을 달다... 댓글:  조회:2692  추천:0  2017-03-12
"일본을 대표하는 문인들 속에 윤동주 작품이 게재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학교에서는 지금까지 이 교과서를 채택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금년 3월 24일 개최된 제58회 정기지방위원회의장에서였다.   그리고 필자는 윤동주의 를 낭송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죽어 가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가야겠다. 오늘 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때아닌 필자의 시 낭송에 회의에 참석한 150여명의 지방위원은 물론 고문, 내빈, 방청석에 가득 모인 방청객들까지 깜짝 놀랬다.   "저는 이 교과서를 여러 위원님들께 알리고 싶었고 또 우리 민족학교에서 꼭 채택하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필자는 다른 보고 사항을 마치고 연단을 내려왔다.   윤동주 시인의 작품이 일본 고교 검정교과서에 게재된 것은 1990년도였다.   이 사실을 안 필자는 재일동포사회 속에 유일한 일간지 에 이 내용을 기사화 할 것을 요청했다.   윤동주 시인은 물론 이 점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그럼 당신이 쓰라는 신문사의 부탁이었다.   당시 민단 이쿠노북지부 사무부장이던 필자는 임박한 대회 보고서 작성을 제쳐 놓고 1990년 5월 15일부터 3회에 걸쳐 통일일보 문화란에 일본 고교 검정교과서에 게재된 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다.   일본의 유명한 여류 시인 이바라키 노리코 씨가  아사히신문에서 발행한 "한글에의 여로"에서 발췌한 내용이었다.   처음부터 윤동주 시인을 알아서 읽은 것이 아니었다. 윤동주의 청순한 사진을 보고 이렇게 순수한 청년이 어떤 시를 쓰는가 하고 읽은 것이 였다.   "젊음과 순결을 그대로 동결 시켜버린 것 같은 청결함이 후세의 독자들을 끌어드릴 것이며 읽으면 수선화의 향기처럼 피어오른다."는 찬사와 윤동주가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하기까지의 경위를 자세히 쓰고 있다.   그리고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씨와 만남도 기술하고 있다.   1984년도였습니다. 그때 윤일주씨는 "요즘 아버지가 자꾸 생각 납니다. 어떤 심정으로 형님의 유골을 안고 후쿠오카에서 부산, 그리고 기차에 흔들리면서 북간도의 집까지 돌아오셨는가를... ...."   한반도의 끝에서 끝까지의 먼 길을 당시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유골을 안고 울분에 넘치는 아버지의 그때 마음을 헤아리는 아들의 말은 어떤 격렬한 탄핵보다도 가슴을 푹 찔렀다.   "한글에의 여로" 에세이집에 들어있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은 치쿠마쇼보 출판사 노가미 타쓰히코
310    작문써클 선생님들께: - "실랑이" = "승강이" 댓글:  조회:2477  추천:0  2017-03-11
두 사람이 의견이 달라 이러쿵저러쿵하면서 옥신각신하고 있다. 이를 본 한 사람은 ‘실랑이를 하고 있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승강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실랑이’와 ‘승강이’ 중 어느 게 맞을까? ‘실랑이’의 본디 뜻은 ‘이러니저러니, 옳으니 그르니 하며 남을 못살게 굴거나 괴롭히는 일’이다. “버스 운전기사에게 실랑이하는 주정꾼” “빚쟁이들한테 실랑이를 받는 어머니가 불쌍하였다”처럼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남을 못살게 굴거나 괴롭히는 경우에 쓴다. 이에 비해 ‘승강이’는 ‘서로 자기주장을 고집하며 옥신각신하는 일’을 의미한다. 따라서 “접촉 사고로 운전자들 사이에 승강이가 벌어졌다” “젊은이들이 한참을 승강이하다가 화해를 하였다” 따위로 쓴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실랑이’와 ‘승강이’를 구별하지 않고 같은 뜻으로 쓰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포함해 몇몇 사전은 ‘실랑이’에 ‘승강이’ 뜻을 덧붙였다. “나는 아이들과의 실랑이로 몹시 피곤하였다” “엄마와 지게꾼은 지게 삯을 놓고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가 그런 예다.    ‘실랑이’가 언중의 지지를 얻어 ‘승강이’의 의미까지 포함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제 ‘서로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옥신각신하는 일’은 ‘실랑이’와 ‘승강이’ 중 어느 것을 써도 무방하다.  
309    조선어의 자멸의 길은 있다?... 없다!!!... 댓글:  조회:3369  추천:0  2017-03-11
조선어는 자멸해야 마땅한가?             글쓴이/ 최 균 선       조선어는 마땅히 자멸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자체가 어리석은 물음이겠지만 확실히 조선어가 한국화하지 않으면 자살행위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다. 졸고는 그런 주장을 전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쓰는것이다.       류연산선생은 2007년 《문학과 예술》제2 기에《우리말의 현주소와 미래지향에 대한 고찰》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1. “평양기준”, 2. 《조선어문사업 조례》, 3. 우리말의 현주소, 4.우리말의 미래지향 네개부분으로 구성되였다. 필자는 서술의 편리를 위해서 글의 순차에 따라 나름대로의 소감과 견해를 설파하려고 한다.   1.     “평양기준”에 대하여   작자는  이 단락에서 주은래총리의 “평양기준”지시의 리페에 대해 론술하면서  기본주장의 전제로 삼고있다. 작자는 쓰고있다.《겉으로 보기엔 우리말은 조선과 많이 닮았다. 그것은……중국과 조선의 정치, 외교 수요에 의해 우리말은 자연히 조선을 본받게 되였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 1957년 주은래총리가《평양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한 지시를 들수 있다.주은래는 언어학자가 아니다. 더구나 우리말도 모른다.  그런 분이 우리말 발전방향을 정해주었다고 하면 학술에 위배되는 일이 아닐수 없지 않다는 추측도 무리는 아닐것이다. 그랬으면서도 그 지시정신이 당시 조선족사회에 복음이나 다름이 없었던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이러저러한 설에 비추어서 나름대로 추측할수 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배경에서 어떻게 지시를 했는가가 중요하지 않다.  ……그후 …소수민족에 대한 강제적인 동화정책이 살판을 치던 때인 1972년 당시에 이르러 주은래총리의 이 한마디는 다시 우리말을 죽음의 낭떠러지에서 구해주기도 했다. ……모든 학술이 무시되고 정치기준이 유일한 진리로 간주되던 당시에 있어서 “평양기준”은 우리말 생존과 발전의 정치적담보였다.》   발취문에서 “평양기준”지시시가 내린 시대적배경에 대해 작자도 《나름대로 추측할수밖에 없다》고 쓰고있다싶이 충분한 파악이 없는 상황에서 론술하고있어 앞뒤가 모순되고있다.사실 주총리는 언어학자의 신분에서 조선어를 알아서 지시한것이 아니라 언어정책상에서의 기준문제이다.   아래에 언어학자인 리윤규선생이《훈민정음》반포 550돐 기념론문집《말. 글. 얼》에 실은 문장에서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가를 참조해 보자.   《…40년래 우리 나라에서의 조선어는 고정된 기준이 없이 각양각색의 언어기준 이 대두되여 서로 교차적으로 사용되는데서 필연적으로 정책시비가 벌어지게 되였다. 이 정황을 시기별로만 요약하여 밝히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해방전부터 50년대 중기까지 서울표준을 기준으로 한 시기. 이 시기 조선어기준문제를 둘러싸고 정책시비가 따로 제기되지 않았고 다만 전통적관념에서 재래로 형성된 서울표준어를 기준으로 삼고 사용하여 왔다. 그러나 조선전쟁을 계기로 한국과 적대관계로 되고 문화교류가 완전히 끊어진 정황에서 점차 조선에서 쓰는대로 따라나가기 시작하였다.   둘째, 50년대후기부터 60년대초까지 한어를 기준으로 삼고 한어화방향으로 나아간 시기.   셋째, 1963년부터 《문화대혁명》전까지 평양표준에 기울어진 시기.   넷쨰, 1966 ㅡ1976년, 《문화대혁명》이 발생하여서부터 결속되기까지 《나를 위주로 하라!》는 결책에 연변표준이 대두한 시기   다섯째, 1977년이후부터 현재까지 세계 대다수 조선사람들이 알고 쓰는 말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규정한 시기   이상에서 보다싶이 중국에서의 조선어는 서울표준으로부터 시작하여 한어기준으 로 넘어갔다가 평양표준으로 넘어오고 다시 연변표준으로부터 도로 평양표준으로 넘어왔다가 지금은 세계 대다수 조선사람들이 알고 쓰는 말을 기준으로 삼고있다.》   사실 필자도 소학교에 다니던 1954년까지 한국에서처럼 1937년도에 개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에 기준한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상기론 문에서 보다싶이 순수“평양기준”시기는 불과 3년간이다. 그것도 지난세기 50년대 중,하반기에 있었던 반우파운동, 소위《민족주의분자》숙청, 대약진운동 등이 일어났던 시기 중국조선어에《전정(专政)》,《투꼬루(土高炉)》,《유훙유쫜(有红有专)》 같이 한어를 마구 음독, 음차하여 혼란한 국면을 조성하고 있는 정황에서였다.   당시 중국에 방문온 조선대표단이 조선문《붉은기》잡지를 받아보고 무슨 말인지 알수 없고 통역이 하는 말도 알아들을수 없다고 반영하였다. 그리하여 주총리가 평양 표준을 전형표준으로 삼고 따라배우라고 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1963년부터 평양을 기준한것이다. 그렇다고 중국조선어가 백분의 백으로 평양말과 일치하라는것은 아니 였다. 실례로 《모택동선집》을 번역할 때 생긴 이런저런 문제들이 생겼는데 국무원 판공청에서 중국의 조선어와 조선의 조선어가 같고 다 아는 이상 일부 중국의 특수정 황을 반영한 말을 쓰는것은 응당한 일이라고 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1977년부터 다시 평양기준이 회복되였으나 역시 3년후 80년대부터 평양말도 변화발전하여 그것을 고스란히 따라배울수 어려운 정황에 부딪 치게 되였다. 그리하여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에서는 세계 대다수 조선사람들이 알고 쓰는 말을 기준으로 삼는 원칙을 채택하였다. 지금 우리 조선족들이 《한국어능력 시험》을 치지 않고도 한국에 나가면 별스러운 외국어를 내놓고 언어장애가 크게 없게 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근원적으로 우리가 쓰고있는 조선어는 조선민족으 언어임과 동시에 중국 조선족의 언어이기때문이다. 특히 중국은 조선과 한국의 조선어가 자유로이 쓰일수 있는 중간지대로써 조선과 한국으 언어의 모순 즉 언어의 차이가 나타날수 있는 특수 지대로 도고있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량자를 다 수용할수도 있고 우리 중국조선의 순수한 발전에 불리한 점도 있으나 결코 한 개인의 주장대로 일방화가 될 수 없는 일이다. 가령 몽땅 한국인으로 귀화할수 있다면 몰라도.   2.     《조선어문사업조례》 작자는《조선어문사업조례》가 학술교류상 조선을 상대한것이고“평양기준”을 전제로 한것으로서 2003년도의 조례수정에서도 《그것은 신성시된 유럽 중세의 카톨 릭사원처럼 감히 범접할수 없는 금지구역으로 되였다.》고 쓰고 있는데 사실은 그와 다르다.   《말, 글, 얼》이라는 론문집에 실린 최윤갑선생의《중국에서의 조선어규범화와 조선어사용의 현황》에서는 이렇게 론술되고있다. 《1977년이전 시기는 중죽조선족 자체로 조선어규범을 정한것이 없이 조선의 조선어규범을 그대로 따른 시기이다. 1977년이후 시기 조선어규범은 조선을 따르면서도 모두 자체로 규범을 정한 시기이다.》라고 쓰면서 규범원칙의 지도사상의 첫조목을《우리의 규범은 중국조선족들 의 의사교환에 유리하게 하여야 할뿐만아니라 전체 조선인민과의 의사교환에도 유리하게 하여야 한다.》라고 규명하고있다.   사실상 언어규범화원칙에서 한국과 조선에서 같게 다듬은 말은 받아들여 쓰고 한국과 조선에서 다르게 쓰거나 우리 나라의 특수성을 반영한 학술술어는 우리 나라 언어실제에 립각하여 적당히 처리하도록 하였다. 최윤갑선생은 상기한 론문에서 《한어를 조선글자로 적는 법은 조선과 한국의것을 참고로 하기는 하였으나 조선과 한국이 규정한것은 그대로 따른다는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라고 서술하고있다.   중국조선어의 가급적인 한국화를 주장하다보니 앞뒤 사정을 잘 살피지 않은것 같다. 툭 찍어말하면 지금 우리 조선어가 당면에 처한 문제는 한국화가 아니라 중국의 조선어규범에 교란을 주는 문제 즉 조선과 한국에서의 언어차이를 제거하는것이다. 그리하여 조선과 한국의 학자들이 참가한 《korean규범문제에 관한 학술토론회》도 열리였다. 그리고 원견있고 현명한 처사는 편파적인 한국화가 아니라 장래 조선반도 의 통일에 대비한 조선어의 통일을 도모하는것이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세종대왕의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저 할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할놈이 많으니라. 내 이를 위하여 딱하게 여겨 새로 스믈여덟자를 만드노니》의 만고업적을 기리는 단군님후손다운 마음가짐이라 하겠다.   3.     《우리말의 현주소》에 대하여    작자는 이 부분에서 중국에서의 한국어사용정황을 론거로 한국어화의 합리성을 설파하고있다.《지난세기 80년대말 한국을 다녀온 사람이 한국말을 하면 왕따를 당하기가 십상이였지만 오히려 지금은 한국말을 하지 않으면 무식한 사람취급을 당한다.》 라고 쓰면서 한국에 다녀온 사람이 50만명 이상이고 관내에 들어간 사람 이 50만명 이상이며 《흑룡강신문》과《송화강》잡지에서 한국어로 꾸린다는것, 그리고 중국에 체류하는 한국인이 급증한다는것 등 현실태로 한국어사용의 필수성을 론증하고있다.       작자는 《신문출판업에서도 한국어를 점차 사용하고있다. 대체로 한국어를 사용 하는 신문과 도서의 판매량이 조선어를 사용하는 신문과 도서에 비해 훨씬 많다. 우리는 한국어를 매개로 하는 언어환경속에 처해있다. 그런데도 우리말을 계속 고집 한다면 세계 조선민족과의 교류에도 장애를 만드는 격이 될것이다. 한국어를 하는 모든 조선민족한테서 소외될것이고 한국어를 선호하는 한족들한테서도 소외되는 결과를 가져올것이다.》라고 주장하고있다.   이 말의 진가를 캐기전에 알고싶은것은《세계 조선민족과의 교류》에는 한국인이 들어있는지? 그리고 2천여만의 조선인민은 들어있지 않는지? 그리고 중국에 한국어를 하는 사람들을 많게 잡아 50만이라쳐도 그들이 어떻게《한국어를 하는 모든 조선민족》이 되는지 알고싶다.       물론 서술상의 소홀이라고 생각하고 의론은 말꼬투리를 잡아쥐고 본론과는 무관한 시비를 캐는것이 아니지만 여기서는 그게 아니다. 우선 한국어를 모르면 무식한 취급을 당한다는데 그러면 한국어를 하는 몇십만을 제외한 모든 조선사람들은 무식하다는 말이 되는것 같다. 그저 말이 아니라 이전에 이룩한 모든 교육, 문화, 문학창작품들이 다 《우리말》로 한것이기에 무식한 사람들이 한 무식한 짓거리인가?       일축하여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지기에 조선어는 한국어로 대체되여야지 불원이면 자살행위라고 독단하는데는 리유불충분이다. 이것은 한국말을 할줄 아는 사람과 한국인들간의 교제문제만이 아니라 독립적민족군체인 중국조선민족의 존재의 정당성문제이다. 민족어가 있기에 그 민족이 있다. 우스운 말이지만 한국어는 우리 말이 아니던가? 왜 기어이 《우리말》이 다르고 한국어가 다르고 조선어가 다르다고 금을 딱 그으려는지 리해가 되지 않는다. 죽이 풀어져도 가마안에 있지 않던가?       뿌리가 같은 어종인데 왜 《우리말》은 못쓸 말이 되고 무식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 되는가? 필자가 아직 완전한 통계는 못내왔지만《조선말사전(6권)》과《새 우리말 큰 사전》과《현대조선말사전》, 연변에서 자체로 편찬한 사전을 한장한장 대조하며 보노라니 “ㄴ. ㄹ”의 두음법과 맞춤법, 띄여쓰기 등 면에서 차이성을 가지고있고 필요이상의 외래어가(그대로 음차한것이 어찌하여 한국어로 사전에 버젓이 오르는지 알수 없었다.) 별스레 많고 한자어를 음차한것이 더 많은 등 차이가 있으나 결국은 다 조선말이라고 단언할수 있었다. 왜냐하면 자모음(배렬순서와는 관계없이) 과 고유어근, 단어합성법에 의한 기본개념들은 같았기때문이다.   내가 문제를 너무 극단적으로 리해하고 풀이하는지 아니면 작자가 너무 급진적 이고《한국어》에 아집을 가지고 전통적조선어를 매도하는지 모르겠다. 주지하다싶이 언어학의 모든 분야에서 그러하듯이 표기법을소의 맞춤법도 과학문화의 진보에 따라 변화발달하는것으로서 영원히 고정불변한것이란 있을수 없다.   4.     《우리말의 미래지향》에 대하여 이  부분은 작자의 주장에 력점이 찍혀진 부분이다. 작자는 쓰고있다.《우리말 의 미래지향은 한마디로 한국어이다.…역시 문제는 《조선어문사업조례》이다. 《조례》 속에 한국어방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런데 정치를 우선시하는 연변의 정치환경에서는 주은래총리의“평양기준”이 걸림돌이 될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 은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이라는 특수한 정치상황에서 조선족의 언어문자를 보호 하는 지시라는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때로부터 세월은 반세기가 지났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으니 이미 세상은 다섯번이나 변한 셈이다. “평양기준”은 때지난 골동품이 되였다. 한국어 방향으로 나가야 할 시점에 와있다. 지금도 실제를 떠난 허상을 붙잡고 앉아서 준엄 한 현실을 외면하는것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것이며 자살행위인것이다.》   우선 알고싶은것은 “평양기준”이 “골동품”이라고 한 가치척도가 언어자체에 있는가 아니면 경제발달, 미발달문제인가. 중국조선민족의 고국은 한국만이 아니다. 그리고 조선어가 모국어에서 제외될 리유가 없다. 경제발전에 언어의 발전도 수반되지만 어종은 변할수 없으며 언어의 뿌리는 더구나 변색할수 없다. 이 세상에서 오직 분명한 하나의 진리는 모든것이 변한다는것이다. 어찌 세월속에 오늘만 있고 래일이 없을손가? 많고 믾은 문제를 력사에 맡겨야 한다. 언어의 발전도 력사에 맡겨야 한다. 언어는 자체의 규률대로 발전하기 마련, 일방화주장은 미숙을 예기하는 성급함이다.   류연산선생은 한국어화의 유력한 근거로 남북학자들이 장래의 통일언어를 대비한《겨레말 큰 사전》의 편찬회의에서 최윤갑선생이“ㄹ, ㅇ”의 두음법칙을 두고 그외의 모든 방면에서 한국어를 따를수 있다고 한데 대해 한국학자들이나 조선의 학자들도 동감을 표시했다고 쓰고있다. 그럴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구체 조작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을줄로 안다.   사전편찬은 조선어의 통일을 기한것으로서 결코 한국어를 절대적으로 기준한다는 말이 아니다. 조선에서 만약 백프로 한국어를 기준할 의향이라면 학자들을 참여시킬 필요도 없고 한국에서 만들어놓은 사전을 들여다가 조선에 보급시키면 될일이다. 남북인민들이 다 알고 공통하게 쓰는 사전을 만들어 통일에 이바지하려는것은 의심할바 없다. 하다면 장차 우리도 그 사전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것이니 그때는 우리가 또 새로운 기준을 따라야 할게 아닌가?   이 시점에서 필자는 함부로 감투를 씌울 생각도 없고 그럴 권리도 없지만 어덴가 사대주의적인 관념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한국국민이 아니며 그렇게 되여 질 리유도 없다.   2050년이면 중국에 조선족이 19만밖에 안된다는 예측통계를 본 기억이 나는데 조선족이 자연스럽게 동화되든 자멸하든 그때 볼일이지 지금부터 민족이 앞당겨 자멸할 필요도 없고 그만큼 민족의 첫표징인《우리 말》도 자멸할 필요가 없다. 우리 말이 “평양기준”의 말이기에 고집하면 자멸의 길밖에 없는 못쓸 “골동품”인가도 어느 개인이 어떻게 주장하느냐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작자는 반세기전에 우리 말이 한국어로 환골탈태하지 못한것을 몹시 안쓰러워 하는것 같은데 기실 한국어에도 장단점이 있다. 가장 치명적인 결함은 완전히  잡탕말이 되여버린 그것이다. 이것은 필자의 독단이 아니다. 한국에서의 영어단어의 무차별 사용은 기실 한국과 한국사람들에게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으며 해당부처의 시책과 법령에 의해 바로잡혀나가고 있는중이고 본질적이며 주류로 되고있다.   도이치란트 마인츠대학교 최락구교수는 《오늘 날 우리 말을 백의민족이란 말을 꺼내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더러운 꼴이 되여있다. 문제는 우리 말만으로 말하고 글을 쓸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한자말, 일본말, 영어나 다른 서양말을 섞어쓰 고 있는것이다. 그것도 남이 하는짓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를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마구 흉내를 내는것이 문제이다.》   또 한국의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정장섭부회장은 《옳바른 가치관을 뒤집어버린 상업주의와 황금만능의 탁류속에서 익사직전에 놓인 배달겨례의 얼을 되살려내야 한다.》고 절절하게 호소했으며 옳은지 그른지 잘 생각해 보지도 않고 외국말을 마구 흉내내는 사람들의 사상을 진단해서 《…사대주의, 봉건주의와 지식인의 특권의식이 결합된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전임 강영훈총리도 《남의 나라 문자에 의존하는 문화적사대주의를 물리치고 독창적인 민족문화를 개발해나가고저 하는 자주정신속에서 한글의 진정한 가치를 보아야 할것읻. …배타적민족주의자가 아닐지라도 우리의 일상생활주변에 순화되지 않은 외래문화의 말과 글이 잡연하게 혼재하여 민족고유문화를 훼손하고있는 현상에 무관심할수만은 없는것이다.》라고 역설했다.   한국의 모든 지성적인 언어학자들도 한국어가 잡탕말이 되여간다고 개탄하고 시정하려고 나선지 오래다. 그외에 한국어에서 한자어두음《ㄴ,ㄹ》에 대한 표기규정 은 한자어에서 표의적인 일자음의 법칙을 엄중하게 위반함으로써 리해에 불리하며  상기한 규정이 거기의 외래어표기규정과도 위반되여 발음규칙에도 모순되는 등등 이다, 실례는 작자도 알고 있고 또 지면관계도 있고해서 렬거하지 않겠다.   물론 세계 모든 언언들에 장단점이 있듯이 한국어에도 장점이 없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장점은 곧 우리 조선어일반의 장점으로도 되여있기에 특별히 밝히고 넘어 갈 필요가 없다고 본다. 기실 한국어이나 우리 말이나 근본은 같다.    중국조선어는 해방전 표준조선어를 바탕으로 계승발전 시켜온 언어이다. 이러한 언어를 왜 우리가 기어이 바꿔치기 해야 하는가?《바꿔, 바꿔, 바꿔!》라는 노래가 있듯이 모든것이 바뀌여지는 이 시대라지만 언어만은 바꿔치기를 할게 아니다. 황차 바꾸어 봤대야 그게 그것이 아닌가? 옥수수라 부르든 강냉이라 명명하든 그 맛이 그 맛이 아닌가?   작자가 주인대회의에 의정서를 내고 시급히 현언어상태를 시정해야 한다고 하였 다는데 아쉽게도 언어란 혁명의 방법이나 행정적인 명령의 수단으로 이렇게 저렇게 번져놓고 바꾸고 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언어문제는 민족문제인만큼 심중해야 할것이다. 하긴 필자도 공연히 한 지성인의 개인 견해를 두고 콩팔칠팔하는것 같아서 경솔한 감이 들지만 내킨김에 끝까지 횡설수설해보았다. 그러나 우리 모두 자존, 자강, 자애를 가지고 자중하자!!!   2007-09-18   /만남의광장 중국연변카페
308    시는 짧음속에서 큰 이야기를 보여줘야... 댓글:  조회:2036  추천:0  2017-03-11
시는 짧으면서도 큰 이야기/枯花-이희정  시가 만약 감동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경우에서처럼  사건 속의 인물을 내세워 묘사와 서술에 의지하여 표현하는 것이라면  도저히 찗아질 도리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시는 시인의 생생한 체험의 직접성에 기초하여  시인의 정감을 고도로 집중하여 표현하기 때문에,  또 정서라는 것이 순간적인 충동과 격정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문학 갈래와는 달리 짧으면서도 큰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도 결과를 두고 하는 이야기이지  실제 처음 시를 쓰는 분들에게는 그 자체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서정시의 이 같은 특징이 어떤 노력과 과정으로부터 나오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 프리들랜제르의 글은 이 같은 궁금증에 좋은해답을 줍니다.  서정시는 극히 작은 것--순간적이고 개체적이고 유일무이한--과  가장 넓고 보편적인 것과의 통일을 지향한다.  개별적이고 일시적인 넋의 상태나 현실의 가장 작은 화면을 통하여 서정시는  현실의 가장 작은 부분 속에서도 반영되어 있는 동시대 실재성의 보편적 양식과  구조 주변 세계의 모든 특성과 리듬을 표현하고자 한다.  -리얼리즘의 시학  바로 이 점, 작은 화면 속에 보편적인 것을 통일시키려는 노력에서  이 같은 효과가 나오는 것이지요.  다음 시를 봅시다.  1947년 봄  沈夜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해주의 경계선 용당浦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 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김종삼, 민간인  "동족 상잔의 비극, 그것이 어떠했는가!" 하는 웅변을 듣고,  '분단의 아픔이 어떻게 남아 있는가'라는 천 페이지가 넘는 논문을 읽는다 한들  어찌 이 시가 주는 감동을 따르겠습니까?  참말 진짜 비극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리고 반세기에 가까운 분단의 아픔이 아직도 그 수심을 모르고  우리 현대사에 드리워져 있구나 하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 시입니다.  그래서 칠흑 같은 밤,  피난민을 가득 태운 직은배는 해 용담포에도 떠 있고,  이 시를 읽는 시점인 청산되지 않은 분단의 칠흑 같은 어둠 한가운데에도 떠 있습니다.  언제 퍼부을지 모르는 기관총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고 있는 그들 앞에도 있고  지금 제 앞에도 있습니다.  그때 한 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것입니다.  이제 엄마 젖이나 떼었을까 한 그 아이.  어쩔 수 없어 입을 막습니다......  그리고 그런 비극이 지금도 변주된 모습으로 존재할 것 같습니다.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는  여운 속에 아직도 그 비극이 시퍼렇게 살아 있음이 느껴집니다.  그야말로 '극히 작은 것--순간적이고 개체적이고 유일무이한' 사건 속에  가장 넓고 보편적인 동족 상잔의 비극과  그것이 환기하는 분단 청산이라는 민족의 염원이 통일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시는 짧으면서도 큰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시를 쓰는 분들은 현실의 작은 국면 하나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면 가치없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현실이 우리에게 "너는 눈 뜬 장님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때 그것이 환기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하여  커다란 감동으로 승화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시의 으뜸 특징을 취할 길에 들어 서게 됩니다.   ===========================================================   연 ―신미나(1978∼ ) 아버지는 고드름 칼이었다 찌르기도 전에 너무 쉽게 부러졌다 나는 날아다니는 꿈을 자주 꿨다 머리를 감고 논길로 나가면 볏짚 탄내가 났다 흙 속에 검은 비닐 조각이 묻혀 있었다 어디 먼 데로 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동생은 눈밭에 노란 오줌 구멍을 내고 젖은 발로 잠들었다 뒤꿈치가 홍시처럼 붉었다     자꾸만 잇몸에서 피가 났고 두 손을 모아 입 냄새를 맡곤 했다 왜 엄마는 화장을 하지 않고 도시로 간 언니들은 오지 않을까 가끔 뺨을 맞기도 했지만 울지 않았다 몸속 어딘가 실핏줄이 당겨지면 뒤꿈치가 조금 들릴 것도 같았다                    어린 시절은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어린이가 이따금 다른 삶을 꿈꾼다. 자상한 아버지, 늘 예쁘게 화장을 하고 있는 엄마, 형제자매가 헤어져 있지 않고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사는 집. 그런 축복받은 가정은 드물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뿐일까. 우리는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대개는 선택되는 것이다.      시인은 ‘몸속 어딘가 실핏줄이 당겨지면/뒤꿈치가 조금 들릴 것만’ 같은 나이, 사춘기가 막 시작되려는 시기의 기억을 불러낸다. 춥고 쓸쓸한 겨울의 기억. ‘아버지는 고드름 칼이었다.’ 늘 화가 나 있는 무서운 아버지. 제 고된 삶이나 세상에 대해 화가 난 거지만 만만한 게 가족이라 집안에서는 화를 참지 않고 벌컥 터뜨리곤 했을 테다. 큰 딸들은 대처에 나가 있으니 남은 딸 중 큰 애인 시인의 뺨을 때리기도 했나 보다. ‘자꾸만 잇몸에서 피가’ 났다니 잘 먹지 못해 혈색도 좋지 않았을 여자아이…. 섬세한 시어에 애절한 서사를 담은 시집 ‘싱고, 라고 불렀다’에서 옮겼다. 위 시의 아버지와 언니들이 담긴 시를 소개한다. ‘날계란을 쥐듯/아버지는 내 손을 쥔다/드문 일이다//두어 마디가 없는/흰 장갑 속의 손가락/쓰다 만 초 같은 손가락//생의 손마디가 이렇게/뭉툭하게 만져진다’(시 ‘신부입장’) ‘신새벽 논산 오일장에 우시장이 열렸다/고삐를 당기자/송아지는 자꾸 어미 소 곁에서 뒷발로 버텼다/머리에 홍화씨만 한 뿔이 돋아 있다//열일곱에 여공이 된 큰언니가/서울로 간 직행버스를 타던 날도 그랬다’(시 ‘입동’)
307    독자들도 시를 보고 도망치고 있다... 댓글:  조회:2603  추천:0  2017-03-10
4 젊은 시인들이 도망치는 공간은 결코 추억이나 상징 혹은 초월처럼 안락하거나 안전한, 그래서 조용한 곳이 아니다. 단조로운 부정의 한 곡조만 되풀이되지도 않으며 자기 소멸로 향한 일정한 방향이 있는 것도 아니다.(소멸하고 싶은 자가 왜 도망을 치겠 는가? 도망이란 생에 대한 강력한 집착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한 유하나 박청호가 탈출하는 개인적인 공간 이 정적이고 움직임이 없는 봉쇄라면, 여기에서 논하는 젊은 시인들이 도망치는 공간은 그 역시 비좁고 개인적인 공간이기는 해 도 쉼없는 움직임과 들락거림이 있는 곳, 그야말로 도망가서 숨는 공간이 아니라 도망치고 있는 공간이다. 그곳은 시끄럽고 불안 하다. 도망쳐 들어오고 싶은 욕망과 도망쳐 나가고 싶은 욕망 그리고 도망쳐 들어온 자를 밀쳐내고 싶은 욕망이 와글와글 뒤엉키 면서 싸움박질을 한다. 이선영은 이러한 분열된 공간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선영은 자신을 '구겨넣어서라도' 글자 속으로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의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선영이 진정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싶은 공간은 '사랑'이다. 더욱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글자에 대한 사랑만이, 육체에 대한 사랑만이, 당 신에 대한 사랑만이 가능한 곳, 글자와 육체와 당신이 각각 완전한 존재로 머무를 수 있는 곳이다. 나는 꿈꾼다 글자, 네가 나의 육체를 파기하고 내 육체의 황홀한 폐허 위에 견고한 글자의 집을 짓기를 그리고 나는 꿈꾼다 글자, 내 육체에 더께처럼 내 려앉은 너를 낱낱이 파기해버리고 내 육체만의 홀가분한 길을 떠나기를 -------- [글자 밖에서]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는 '글자의 문턱에서 서성'거리면서 글자의 안과 밖을 들락거린다. 그에게 있어서 글자와 육체와 당신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글자는 육체를 가로막고 육체는 글자를 비집고 나오며 당신은 나를 글 자 밖으로 불러낸다. 당신은 당신의 육체가 닿을 수 없는 나의 글자 밖에서, 나는 나의 완고한 글자들이 가로막는 당신의 육체 밖에서  나는 나의 육체 뒤로 뒤죽박죽 글자들을 몰아넣었다 나는 나의 글자로 육체를 지웠다가 다시 나의 육체로 글자를 지웠다 -------- [글자 밖에서] 그런데 문제는 오직 육체로만 당신 앞에 서고 싶은 나를 가로막는 글자의 벽이다. 아니, 사랑을 글자로밖에 풀지 못하는, 당신 과 희희낙락하다가도 글자를 잊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이선영은 '글자 속에 당신을 가'두었다가 '그 글자를, 아니 당신을 내 문장에서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어한다. 때로는 '새로 만들어지는 글자들마다에' 육체의 새로운 집을 지었다가 '육체 자옥이 먼지 낀 글자들'을 털어내어 '글자의 나목이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글자 속에 육체를 넣어 보아도 당신 속에 나의 육체를 넣어 보아도 글자 속에 당신을 넣어 보아도 단 한 순간도 평화로 운 공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글자와 육체와 당신이 서로 화해하는 공간, 그곳이 바로 이선영이 진정으로 원했던 '단 한 권의 시집'일 것이다.'단 한 권의 시집으로 그러나 강렬한 하나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것.' 그러나 육체와 글자와 당신 사이를 맴돌면서 도망치던 이 선영은 결국 '종이 안에 내 생을' 집어 넣는다. 실패한 사랑을 종이 안에 쓰고 종이 밖에서 사랑한 당신을 종이 안에 남긴다. 종 이는 그 단 한 권의 시집을 얻기까지 어쩔 수 없이 두 권, 세 권, 네 권 거듭 써나가는 시지푸스의 시집이다. 시인의 욕망이 세 계를 분열하고 좌절된 욕망이 시/글자를 낳는 것이다. 여기에 시인의 딜레마가 있다. 절대적인 실체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 때 문에, 아니 그 욕망의 지점에 도달하고 싶어서 시를 쓰는 데 사실상 시는 그 욕망의 좌절로만 생성되는 것이다. 삶을 초월하고 욕망을 버린 사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숱한 침묵의 언어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시는 멀리 사라진다. 글자에서 육체로 그리고 당신에게로 끊임없이 도망치는 시인의 움직임은 아직까지도 충족되지 않은 욕망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글자'가 그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절대적인 실체 ---- 사물 그 자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진정 초월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 아직도 도망치고 있는 자의 몫이다. 이선영이 분열된 개인의 공간 속에서 맴돌고 있다면, 성윤석은 나와 너 와 모든 시간이 분열된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도시 속에는 90년 대의 공간은 물론, 이미 지나간 80년대와 70년대 심지어 60년대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까지도 다 함께 살아서 움직인다. 이곳에서는 비틀즈가 신곡을 발표하고 나폴레옹의 머리카락이 보존되어 있고 모짜르트가 작곡을 하고 죽은 친척들이 아직 신혼의 비디오에서 웃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에선가 본 듯한 이미지, 어디에선가 들어본 듯한 말, 낯익은 귀절들이 무의미하게 결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생산  양식이다. ---- 담당을 만날 거예요. ---- 오래된 애기가 아냐. ---- 단지 매독과 같은 병일 뿐이야. ---- 동호회를 만들어야지요. -------- [지하 3미터] 이러한 도시의 '거리에서 겨우 살아나온/경력을 갖고 있'는 성윤석은 '연분홍 얼굴로/그 거리에 다시 갔다/슬그머니 돌아오곤 하는 습관을'([흉터 있는 남자])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한때 거리에서 투쟁을 혹은 전쟁을 벌였을지도 모르는 그는, 겨우 살아남아 이제는 수줍은얼굴로 살짝 거리에 나갔다가도 행여 다른 사람의 눈에 뜨이는 것이 싫어서 슬그머니 도망치는 것이다. 그가 보여주고 있는 도망의 형식은 요란스러운 질주나 뱅뱅 맴돌기가 아니라 '슬그머니'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때때로 그의 도망은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마치 문지방에 다리를 걸쳐놓은 채, 우리를 향해 자신 이 지금 나가고 있는 것인지 혹은 들어가고 있는 것인지를 묻고 있는 듯하다. 가령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아도/그는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어두어진그가 돌아보지 않도록/나는 소리를 내야 한다.'(['그 날'])와 같은 시에서 그는 계속해서 앞선 연의 정보 에 따른 당연한 기대(그의 뒷모습만 바라보아도/나는 이미 그를 알고 있었다./어두어진 그가 돌아보지 않도록/나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를 역전시키고 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시에서 이런 식의 배반은 너무나 슬그머니 왔다가 사라지기 때문 에 좀처럼 눈치를 채는 것조차 어렵다. 5 그는 '사랑하는 애인을 눈치채지 않으려고' 지방관청과 이층 산동반점 사이를, 다방과 햇빛이 잘 드는 골목길을, 공장과 사무실 을,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를 왔다갔다하면서 누비고 있다. 아니, 그의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왔다 간다. 그리고 갔다 온다 . 지구의 운동에 따라 세월이 가고 왔다. 나의 운동에 따라 그녀가 오고 갔다. 그녀의 운동에 따라 내 이념이 달라지고 유리집 박씨의 운동에 따라 옛추억의 창문들이 갈아 끼워졌다. 바람의 운동에 따라 재해 예방 축대가 세워지고 협회의 운동에 따라 회원들은 달라졌다. 운동을 따를 때마다 붉은 사람의 얼굴 ------- [회계 사무소가 있는 거리] 이러한 '왔다 갔다' 하는 진자운동 속에서 '운동'의 의미는 순간순간 흔들린다. 수많은 운동들의 배경에는 분명히 80년대의 폭 풍처럼 강렬했던 '운동'이 운동하고 있다. 거대하고 단일했던 그 시절의 '운동'은 세월의 운동에 따라 유리집 박씨에게로 바람으 로 협회로 흩어진 것이다. 80년대의 패러다임은 성윤석의 시에서 이런 식으로 종종 사용된다. 굳이 작은 따옴표를 붙인 ['그 날' ]이란 시에서 ''그 날'이 오면/'그 날'은 다시 '그 날'을 향해 갈 것이다.'라는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한때 그토록 많은 희망과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던 '그 날'이란 말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한다. '그 날'이 다시 '그 날'을 향해 이동하는 운동, 지구의 운동이 세월의 운동로 이어지고 나의 운동이 그녀의 운동으로, 그녀의 운동이 내 이념의 운동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움직임 그리 고 오다가 가버리며 가다가 돌아오는 배반, 이러한 도망이 바로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에서 성윤석이 살아가는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공간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이곳을 벗어나 구름 위로 올라가지도 않는다. 그에게는 사막의 길을 걸어가는 시 인과 같은 초연함이나 목적지에 반드시 도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는 이 도시 어디로든지 주저하지 않고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비디오나 극장, 골목길, 신데렐라, 지하 3미터, 공장 굴뚝, 회계사무소가 있는 거리, 심지어 인디언표 티셔츠 속으로까지. 그가 도망쳐 들어가는 곳은 어디든지 시의 공간이 되고 시끄러운 소리들이 밀려 들어온다. 그는 말 을 하는 입이나 글을 쓰는 손이 아니라 혹은 세상을 내려다보는 눈이 아니라, 삶의 모든 소리를 듣고 마침내 온 우주를 뒤흔드는 '귀'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귀는 우리에게 전할 거야 편지할게, 라든지 안녕, 귀는 우리가 잠들어도 한 동네의 입구를 넓히고 들어오는 바람과 비를 막을 거야. 두고 온 말씀들과 정신으로 기울여야 할 침묵들을 조용히 나누고 어디 서건 쉽게 붐비는 우리의 사랑 따위 죽음 따위 운명 따위로 오늘도 고막을 울리며 나에게 알릴 거야. 나는 삶을 향해 노래부르며 박수치며 자랐을 뿐, 그 동안 누구의 귓바퀴 하나 울려놓지 못했지만 귀는 계속해서 스스로 떨며 아침과 밤, 가을 잎 접는 소리까지 전할 거야. 조심해, 분명 귀는 어딘가에 동굴을 가지고 있을 거야. 박쥐를 날리며 적막강산을 넘기며 돌아가는 눈보라 가라앉는 먼지들의 발신음을 내고 있을 거야. 밤말을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 해도 우리의 귀는 우리가 숨겨왔던 말조차 한번도 숨겨놓지 않고 후후 불며 온 우주를 흔들고 있을 거야 -------- [귀] 성윤석이 꿈꾸는 귀는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소리만 들을 뿐, 나머지 모든 소리들을 소음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분열된 귀가 아니다. 그의 귀는 '편지할게, 라든지 안녕'하는 일상적 대화에서부터 동네 입구에 불어오는 바람과 침묵, 우리의 사랑, 죽음, 운명 따위까지 모두 듣고 전하는 그런 귀다. 그 귀는 '계속해서 스스로 떨며 아침과 밤, 가을 잎 접는 소리까지'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성윤석은 귀를 듣기 위한 수동적 기관으로 보지 않는다. 귀의 진정한 역할은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소리를 '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열린 입은 아무리 '삶을 향해 노래부르며 박수'를 치더라도 '누구의 귓바퀴 하나 울려놓지' 못했 다. 아무리 입으로 화려하게 떠들어도 그 말이 귀를 울릴 수 없다면 그 소리는 침묵일 뿐이다. 문명의 위기,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의 술책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문학이라는 지평 위에서 오고 갔지만, 과연 누구의 귀를 울렸는가? 80년대는 입의 시대였다. 수많은 말들이 떠돌았지만 그것은 결국 침묵이나 소멸을 낳고 말았다. 반면에 90년대로 넘어오는 길목 은 눈의 시대였다. 그 눈은 80년대의 폐허 혹은 텅 비어있는 중심을 응시하면서 추억이나 상징의 숲으로 돌아갔지만 미래를 발견 할 수는 없었다. 좌절한 눈은 현실을 떠나 구름이나 하늘로 그 시선을 옮겨 놓았다. 하지만 성윤석은 삶과 시선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이제 귀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그의 귀는 그저 들려오는 대로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떨면 서 소리를 낸다. '박쥐를 날리며 적막강산을 넘기며/돌아가는 눈보라 가라앉는 먼지들의 발신음을' 내는 것이다. 이 귀의 진동은 '우리가 숨겨왔던 말조차 한번도 숨겨두지 않고 후후 불며 온 우주를 흔'든다. 성윤석의 도망은 마치 이 귀의 진동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잠들어도 스스로 진동하고 공명하면서 우주를 울린다. 도망치는 시인들은 세상을 벗어나려고 하는 도피자가 아니라, 거리가 사라져버린 이 도시의 전사들이다. 전사들이 달려나가서 싸움을 벌일수 있는 거리는 이미 사라졌다. 현대 문명은 거리의 곳곳에도 빅브라더의 얼굴인 대형 텔레비전을 세워 놓고 우리를 지배한다. 젊은 시인들은 이 거리에서 이리 저리 도망친다. 그것은 분명히 가슴이 숙연한 투쟁, 당당한 정면 대결은 아니다. 그 러나 도망은 적어도 우리가 무엇에  기고 있음을, 아직은 한 곳에서 머무를 때가 아님을 반증하고 있다. 그리고 안주하려는 우 리에게 무엇이 그들을 쫓고 있으며 왜 도망치는지를 자문하도록 만든다. 막연하게 가슴 떨리는 불안을 느낄 때, 우리는 자신이 멈추어 있었다는 사실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지금까지는 적어도 시의 세계에서만큼은 절망과 부정은 만연된 질병이었다. 아니, 차라리 시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 었다. 그러므로 이제 문제는 '절망이나 부정'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수렴되는 개념이 아니라 절망으로부터 달아남이다. 희망은 획일적으로 제시될 수 있다. '이것이 희망이다'라는 집단적인 혹은 정치적인 선언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절망은 그에 대한 역으로 존재한다. 희망이 하나일 때, 절망도 하나이다. 하나로 수렴된 절망은 바로 죽음, 침묵이다. 그러나 도망은 개 인적이다. 그것은 단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며 매순간, 모든 경우에 각기 다른 독특한 경험으로 다가오고 또한 독 특한 경험으로 남아있어야만 한다. 이 도망의 독특성이야 말로 타자의 이타성에 따라 매번 달라지는 삶의 결정의 순간들을 획일 적인 한 개념에 수렴하지 않고 겪어낼 수 있게 한다. 도망의 경험은 개별적인 것이며 심지어 '나'로 의해서도 통합될 수 없는 것 이다. 바로 다음 순간에 내 앞에 어떤 도망의 길이 펼쳐질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므로 도망의 주체는 '나'가 아니라, 나와 공간( 구체적인 역사와 현실이 담겨진)이 만나는 그 순간인 것이다. 매순간 구별되고 매번 새롭게 대응하려는 감성적 독특성이 없다면 획일화와 대중화, 균등화, 그 화려한 이익성을 추구하는 질서라는 절대적 명제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한 시인의 시가 이 시대로부터 가장 개인적이고 독특한 공간 속으로 달아날 때, 우리는 자신과의 변별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리고 하나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그 차이점이 우리를 깨어있도록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주어야 할 것은 명제나 결론적인 진리가 아니다. 단지 흔들림,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의심하도록 만들고 다시 생각하도록 하는 움직임, 도망의 글쓰 기인 것이다. ===============================================================================   앵두꽃이 피면  - 곽재구(1954~ ) 앵두꽃이 피면 가시내야 북한 가시내야 너에게 첫 입맞춤을 주랴 햇살도 곱디고운 조선 청보리 햇살 거두어다 바람도 실하디 실한 남도 산머루 바람 거두어다 너의 속살 고운 치마폭에 널어놓고 돌산머리 애장터 아메리카나 소비에트나 팔푼 얼간패 좀 보라고 앵두꽃이 피면 가시내야 북한 가시내야 너에게 오천 년 조선 머스마의     까치동 첫사랑을 주랴.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로 시작되는 시 ‘사평 역에서’는 1981년 새해 벽두를 떠들썩하게 했지요. 그해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었습니다. 그 곽재구 시인의 다른 시편 ‘앵두꽃이 피면’을 읽습니다. 돌산머리에 앵두꽃이 피면 북한 가시내와 남한 머스마의 첫사랑이 이루어지겠네요. 오롯이 우리가 자주적으로 이룬 통일, 그것을 염원하는 시인의 말이 달콤합니다. 2만 달러 이상 국민소득에 5000만 인구를 가진 강국. 세계 일곱 나라밖에 없다는 강국들의 클럽인 2050. 우리나라도 그 클럽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6·25전쟁으로 초토화된 지 60년 만에 일어난 일이라 모두들 기적이라 말합니다. 이제 통일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남과 북 모두에게 ‘대박’입니다. 앵두꽃만 피면 됩니다. < 강현덕·시조시인>  
306    시인들이 시가 싫어 도망치고 있다... 댓글:  조회:2269  추천:0  2017-03-10
거리를 잃어버린 시를 위한 형식 /최인자         1 젊은 시인들이 우르르 도망을 치고 있다. 그 무엇인가(자신의 욕망이든, 죽음이나 폭력처럼 두려운 대상이든)에 쫓기면서 어디 론가 가기는 가는데, 숨기 위하여 간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이동'은 도망이다. 그것은 줄지어 같은 방향을 향해 뛰어가는 달리기 도 아니고 세상을 관조하면서 즐기는 산책도 아니다. 활짝 열린 곳, 트인 곳으로 향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탈출도 아니다. 그 것은 필사적이면서도(죽음을 불러올 수 있으므로) 대단히 우스꽝스러운(시대착오적임으로) 행동이다. 그러다가 간혹 커다란 심장 을 가지고 있는 운 나쁜 시인은 갑작스러운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여기 침묵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하여 자신이 선택한 공간 속으로 뿔뿔이 도망치고 있는 네 명의 젊은 시인들이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침묵은 죽음의 또 다른 얼굴이기에 그들은 필사적으로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전대호는 어둡지만 행복했던 중세의 시절로, 김태형은 소란스러운 로큰롤 헤븐의 땅으로, 이선영은 비좁고 견고한 글자의 집으로, 성윤석은 현실과 환상이 서로 공 존하는 극장이 너무 많은 동네로 뛰어들어/나간다. 신비라는 말을 쓰고 싶어질 때 운명을 얘기하는 무식의 따뜻함과 속 깊음을 알게 될 때 난 자랑스럽게 중세 암흑으로 불리는 그 성곽에 갑니다 -------- 전대호, [가끔 중세를 꿈꾼다 1] 글자 밖에서 어여쁜 당신과 희희낙락 세월 가는 줄 모르다가 무엇에 놀란 듯 글자 안으로 쫓겨들어가지나 않을지? -------- 이선영, [글자 밖에서] 일찍부터 빈 자리 하나 없는 우드스탁을 돌아 나와 퍼펙트 셀렉션 그녀는 도어즈의 좁은 이층 문을 당긴다 -------- 김태형, [짐 모리슨 듣는 밤] 어둠 속에 들어앉아 지붕을 쓰고 있으면 내 봄을 보여주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 성윤석,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1] 우리는 '부정'이란 말로 80년대와 90년대의 시인들을 특징지우면서 구별했다. 80년대의 시인들이 외부세계와 사회 현실에 대한 부정을 시도했다면, 90년대 시인들은 외부세계를 부정하려고 했던 스스로를 부정하고자 노력한 것으로 파악된다. 물론 그것은 사 회 현실에 대한 부정을 부정하는 작업이 아니라, 부정할 중심이 온 사방으로 스며들어간 상황 속에서 텅 비어버린 중심을 향한 자기 파괴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부정과 죽음의 블랙홀 속으로 빠져드는 시인들의 움직임을 오히려 긍정의 형식으로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90년대의 그러한 형식은 어디까지나 80년대를 전제로 한 80년대와의 힘겨루기, 후기, 뒷풀이에 불과하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벌써 90년대의 후반으로 들어섰다. 지금 또 다시 권력의 맨 얼굴을 그리워하거나 부정과 절망의 방식으로서 긍정을 이야 기한다면, 그것은 변주곡도 고별사도 아닌 베껴먹기, 토한 것을 다시 주워먹기,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불모성을 드러내기일 것이 다. 이제 더 이상 부정할 대상이나 절망할 현실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절망이나 부정이 더 이상 새로운 형식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절망과 부정의 형식은 달라진 현실 속에서 낡고 허름한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과거의 전략은 새로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되지 못한다. 억압과 광기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억압'과 '광기'로 읽어내던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는 90년대 시의 새로운 형식을, 새로운 실험을, 새로운 읽기를 불러와야만 한다. 90년대 후반의 시를 거론하면서 굳이 '도망'이라는 형식을 선택한 것은, 그들의 움직임이 더 이상 적극적인(과거의 시대를 부정한다거나 혹은 지금 이 시대를 부정한다는 의미의) 방식의 탈출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거리가 사라진, 그래서 투쟁 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이 시대에 '도망'은(80년대와는 달리) 단지 비겁이나 회피가 아니라 죽음을 각오한 필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들 더 이상 도망갈 필요가 없다고 믿고 있을 때, 이제는 안전하다고 그러므로 여기에서 낙원을 꿈꾸 자고 말할 때, 멀리 달아나는 자는 복이 있다. 70년대도 80년대도 아닌 바로 지금, 심장이 마비되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도망치 는 한 젊은이의 모습은 분명히 시대착오적인 모습으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시대착오적인, 우리가 생각하는 혹은 믿고 있는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것 때문에, 그의 도망은 작은 걸림돌이 되어 순탄하고 그럴 듯하게 흘러가는 세상의 흐름 앞에서 걸리적거린다. 세상에! 요즘도 죽기까지 도망치는 젊은이가 있다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었거나 혹은 그의 도망이 잘못되었다고……. 하지만 어떤 식으로 결론을 내리더라도 도망치는 자의 발걸음 소리는 우리의 귓가에 남아 끊임없이 불안을 불러 일으킨다. 온통 물결 위로 은모래빛 죽음들이 반짝(김태형, [천산북로])'이는 호수 속에 모든 시름과 피로를 잊고 누워있는 시인을 일깨우는 그 소리처럼. 언뜻 무슨 소린가 들려왔네 그 온갖 소리들, 이제 다시 길을 떠날 때가 되었는지 눈을 들어 바라보는 길 끝에 더 먼 산맥의 끝자락 이 이어지고 있었네 -------- [天山北路] 그러므로 여기 젊은 시인들의 도망은 죽음과 절망의 블랙홀로 빠져들어서 귀가 멍멍한 침묵에 사로잡힌 90년대의 시에 '소리' 를 가져다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말하는 시대에, 보다 많은 시인들이 도망치는 순간을, 제각기 고통스럽고 필사적으로 발을 구르는 소리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젊은 네 명의 시인들이(그 중에서 이선영을 제외한 세 명의 시집은 모두 첫번째 시집이다) 보여주고 있는 도망은 이런 의미에서 과거의 시대가 구축한 형식으로부터의 도망이다. 그들은 부정과 절망이라는 거대하고 집단적인 움직임으로부터 달아난다. 그리 고 아주 좁고 내밀하고 개인적인 공간 속으로 스며 들어간다. 이런 조짐은 이미 유하나 박청호의 시에서도 읽혀지고 있다. 그들 또한 개인적인 '추억에로의 회귀'와 개인적인 '상징의 숲으로 들어서기'를 통해 '소극적인 탈출방식'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을 떠나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또 미래를 지향하 지 않는다는 점'(강상희, [추억과 상징의 시, 그 희망없음의 세계])에서 이들의 탈출방식은 여전히 이전 시대와 궤도를 같이 한 다. 그것은 또 다른 절망의 한 방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현실과 조응하지 않는 상징, 미래를 담보로 하지 않는 추억이란 결국 죽음으로 이어질 뿐이다. 이것이야 말로 '그가 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몸짓으로 죽음을 달'래는 행위(정과리, [기억의 저편 ])일 것이다. 그들의 상징과 추억은 더 이상 힘을 얻지 못한다. 오직 연약한 껍질 속에 웅크린 채 서서히 소멸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2 젊은 시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이전 시대와의 단절은 역설적이게도(어쩌면 당연하게도) 80년대에 대한 그리움과 회상으로 가득 차 있는 전대호의 시집 {가끔 중세를 꿈꾼다}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라져간 벗들과 시간으로 대체되고 만 역사를 말하 는 전대호의 시들은 80년대의 환상과 그에 따른 환멸로 읽을 때, 매우 진부하고 시대착오적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아름 답고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흘러간 세월에 대한 서글픔과 탄식이라면 '조로한 벗들의 잔등에 업혀…… 다 들 어디 갔니 다들 어디 갔니'([가끔 중세를 꿈꾼다 1.4]) 힘없이 중얼거리는 잠꼬대 이외에 달리 무엇일 수 있겠는가?그러나 전대호의 이러한 시들은 그 시대착오적인 언술, 맥 빠진 타령 때문에 오히려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지나간 일들은 정 말로 지나가 버린다'는 것, '지나간 일은 일도 아니([상처])'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80년대는 사라졌다. 그것은 과거 속으로 역사 속으로 가버렸다. 이제는  아무런 통증도 느낄 수 없는, 딱딱해진 흉터만이 남았을 뿐이다. 전대호의 시에 이르러 '이미 가버린 것들이 마침내 떠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일들, 처음으로 시간을 말한 '어느날의 대학 동창회'([시간을 얘기하다])나 시간의 손 안에서 '두려움 없이 쪼개지'([시간의 손 안에서])는 벗 들의 모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가리키고 있으며, 닭벼슬처럼 머리를 세우고 거품의 노래를 부르며, 그러면서 울었다는 그의 모습은 영웅적이지 않고 희화된다. 앞서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선언이 있었지만, 전대호의 시는 보다 구체적이고 철저하게 80 년대의 형식을 구식舊式화한다. 과거를, 온전한 과거의 것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90년대는 80년대의 그림자먹다 남은 음식이기를 거부한다. 젊은 시인들은 90년대를 새로운 기점으로 삼는다. 80 년대의 무게에 억눌린 채 신음하지도 않고 고통스럽게 여기지도 않는다. 이제 그곳은 완전히 지나간 과거라는 의미에서 수백 년 전의 중세와 동일한 선상에 놓인다. '다른 눈을 준비해야' 하는 다른 마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끔 중세를 꿈꾼다}의 첫장을 여는 [별똥별]은 김중식의 {황금빛 모서리}의 첫머리에 실린 [이탈한 자가 문득]과 더불어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 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 [이탈한 자가 문득] 별똥별이 천구에 한 십오도 쯤 원호를 긋고 사라진다 이렇게 멀리 있어 내 귀와 눈은 느끼지 못했지만 아주 높은 곳에서는 장엄했으리라, 공기를 찢는 그의 속도가 쏟아 놓는 소리 불타 오르는 그의 몸뚱이가 내뿜는 빛 그 장엄함 앞에 거미줄처럼 어둠 속으로 길게 이어져 있던 그의 이탈의 궤적(軌跡)도 일순간에 불타 없어졌으리라 모든 별들이 침묵했으리라 그리고 그가 보여준 마지막 궤적을 이어 나는 이렇게 적어야겠다: 방금 그가 별들의 무리 속으로 돌아갔다고. -------- [별똥별] 동일한 별똥별의 움직임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두 시인의 시각은 천동설과 지동설만큼이나 커다란 차이가 있다. 김중식은 궤도 를 따라 움직이는 태양이나 다른 별들을 '우리'와 동일시한다. 단 한 치의 이탈도 허락되지 않지만 어쨌든 그는 별들의 무리 중 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별똥별은 무리 중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이탈한 자가 될 수 있었으며, 문득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김중식에게 별똥별의 움직임은 궤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 무한히 열린 공간(비록 그곳이 어두운 암흑이더라도)을 향한 자기 파괴적인 탈출이다. 그러나 전대호에 이르면, 별들의 무리로부터 '이렇게 멀리 있어 내 귀와 눈은' 별똥별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한다. 그의 몸은 어디까지나 이 땅 위에, 별들로부터 아주 먼 곳에 있다. 별똥별의 이탈이 장엄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그가 직접 목격한 장면도 아니 며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그와 별들은 전혀 다른 궤도, 다른 공간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별똥별의 이탈이 가 져온 장엄한 소리와 빛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별똥별의 이탈의 궤적도 일순간에 불타 없어지는 소멸과 모든 별들의 침묵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 별똥별의 이탈은 텅 빈 소멸과 거대한 침묵을 낳았다. 결국 전대호에게 별똥별의 이탈은 더 이상 이탈이 아니며 자유를 향한 탈출도 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수많은 '별들의 무리 속으로 돌아'가는 행위이다. 무한한 공간, 텅빈 자유는 어느 곳에도 없다. 이젠 우주조차도 붐빈다. 똑같은 하나의 움직임을 두고 무리 속에서의 이탈과 무리 속으로의 돌아감이라는 엄청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탈한 별똥별을 별들의 무리 속으로 돌려보냄은 90년대의 시가 소멸과 침묵의 블랙홀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필연적 전환이다. '방금 그가 별들의 무리 속으로 돌아갔다고.'라는 마지막 귀절에는 이 시집에서는 유일한 마침표가 찍혀 있다. 우리는 이 마침 표에서 80년대를 중심으로 한 이전 시대의 거대한 문이 마지막으로 쾅 닫히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 80년대는 일상의 나날 위에서 그가 가끔 꿈을 꾸는 혼자만의 공간 '첨단이 아닌 기반에 있는 큰 집'을 향한 도망의 공간이 다. 80년대의 의미를 재확인하기 위해 존재하는 90년대가 아니라, 90년대를 역동적으로 살아있게 하기 위한 80년대인 것이다. 그 에게 중요한 것은 지나간 80년대가 아니라 바로 여기 '방금 그가 별들의 무리 속으로 돌아갔다고' 이렇게 적을 수 있는 '나'의 공간이다. 그는 이곳을, 나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곳이야 말로 죽음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죽음을 무화시킬 수 있는 '이야기'이 며, 나는 그 이야기를 들려줄 주체이기 때문이다. 나도 내 나름대로 죽음 이후의 모습일 거라고 상상해 둔 게 있다 어릴 적부터 즐겼던 상상인데, 그것이 죽음 이후와 닿아 있음을 알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많은 이들이 내게로 와서 내가 거쳐온 세상을 얘기해 달라고 부탁할 것 같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그들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정녕 얘기를 듣고 싶은 이들 그 자리에 설 때까지는 내 안에 이 세계가 정리되어 있기를 바란다 여기에서의 삶이 그것을 허락한다면, 내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 [죽음 이후] 김태형의 시를 두고 '사막의 길, 생성과 동시에 소멸하는 자기 파괴적인 길'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막의 길'은 오래 전부터 나 있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황지우로부터 김중식까지 앞서 간 자들이 너무 많아서, 길없는 사막에 이미 길이 생겼을 정도인 것이다. 3 [청라길], [타클라마칸], [낙타의 길], [부족] 등을 비롯한 김태형의 많은 시들이 사막을 지나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 라 '여기서 멈춰 버리면 그뿐 어깨가 필요한 것은/아니지만/그렇다고 막무가내 될 대로 되라는 듯이 죽음을 딛고/발끝을 들어 황 망히 휘날리고 싶지는 않다' ([타클라마칸]) 혹은 '나의 노역은 힘들어도 결국 짐을 벗은 몸의 갈/곳은/딱딱한 바닥과 긴 다리 힘 겹게 꿇려진 비굴함이/라는 것을'([낙타의 짐])과 같은 시에서 느낄 수 있는, 시인이 걸어가는 사막의 길은 비장하다 못해 장엄 하기까지 하다. 과연 시인은 이토록 의연하게 고난의 사막을 지나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냥 소멸을 향해? 김태형은 '툭툭 몸 아픈 불거진 가지 잘라내지 않고도/온전히 들 수 있는 물방울의 집, 그 눈빛 맑은 그곳'([물방울의 집])으로 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의 시에서 '물방울의 집'의 현실적인 표상인 '빗방울'이나 '물방울'에 서로를 환히 비추어 줄 수 있는 불빛이나 눈빛이 등불처럼 매달리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건조한 사막의 길을 걸어가던 시인은 소망한다. 그곳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서로 물방울처럼 투명하게/맺혀질 수 있다면 서로에게 제 얼굴만큼 비춰질 수/있다면'([뒷문 밖 에는 갈잎의 노래]) 얼마나 좋을까? '물방울의 집'은 그가 힘들게 걸어가는 '사막의 길'과 너무나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서 더 이상 행복한 만남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물과 사막, 길과 집의 만남을 어떻게 갈라놓을 수 있을까? 그러나 김태형이 물방울의 집을 향해 의연하고 꿋꿋하게 사막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면, 또한 그 길이 생성과 동시에 소멸하는, 그래서 언제나 영점이 되고 마는 길이라면, 모래를 날리는 바람소리 이외에 도대체 무슨 '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을까? 사막에서 무슨 도망치는 자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그러나 김태형의 시에서는 그 어느 시집에서보다 요란하고 이질적인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그 소리는 사막과는 전혀 동떨어진 또 다른 공간에서 들려온다. 그곳은,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을 서역의 이미지, 식물성 이미지, 동물시, 설화시 등으로 꼼꼼 하게 나누면서 자세히 구획을 정리한 해설에서조차 단 한 번도 언급되지 못할 만큼 외지고 음습한(도망자들이 돌아다니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일단 먼지바람 부는 사막으로 초연히 걸어가는 히말라야 시다가 아니라 요란스럽게 달아나는 도망자로서의 시인 의 이미지를 받아들인다면, 무시해도 될 만큼 무의미하게만 느껴지던 소리는 우리의 귀를 쟁쟁 울린다. 해변의 락 페스티발 그런지 하드코어 펑크 락 사이키델릭 트윈 기타 오오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여성 보컬이 첫 무대에 등장한 그룹 겟 잇 업 ------- [락 페스티발 퍽 유] 그냥 만지기만 해 제발 손가락은 집어넣지마 그년한테나 가라구 꺼져버려 더러운 새끼 겟 아웃 겟 아웃 단지 넌 지저분하게 놀지만 않으면 괜찮아 넌 냄새가 좋아 아이 내가 너무 취했나 봐 벌써 다 젖었잖아 젠장 모르겠어 그런데 말이야 팬티를 벗고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해 하지만 여기선 안 돼 우리 저기 화장실에 가 거기서 한번 해 줘 어서 -------- [펑키 걸] '사막의 길'과 '물방울 집'의 완벽한 구조로 이 시집을 파악한다면, 이런 시들은 오갈 데가 없다. 오직 '록큰롤 헤븐'이라는 제목 때문에 그나마 '시의 집'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한 것은 그의 시집 어디에도 '록큰롤 헤븐'이란 시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록큰롤 헤븐'이란 대개의 시집이 그렇듯이 어떤 하나의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시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이 집의 문패로써만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자면 시집 전체의 방향을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그가 정말로 가고 있는 곳은 물방울 집이 아니라 록큰롤 헤븐? 해탈한 성자처럼 사막이라는 고난의 길을 걸어서 도달한 곳 이, 분명히 무슨 락카페 이름일 것 같은 록큰롤 헤븐이라니? 그래도 헤븐은 헤븐이니까! 좀 더 간단하고 쉬운 길을 택해서 우리에게 지극히 익숙한 논법을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록큰롤 헤븐으로 이름지어진 이 공간은 삭막하고 메마른 현대판 사막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해결이야 말로 순간적이고 서정적인 화해, 바로 상징의 함정이 아닐까? 비릿한 피 냄새만이 이빨 자국 뜯어진 모래 속으로 스멀스멀 스며' ([部族])드는 사막이나 '메가데 스 헬리콘 잉베이의 다크 에이지스'가 울리는 록큰롤 헤븐이나 똑 같은 불모성의 상징이라면, 그 상징 속으로 무화되어 버리는 숱한 이질적 요소들을, 그 단절의 의미들을 서툴고 힘 들게나마 읽어내려는 노력은?)'사막'이 우리나라 자연환경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국적인 공간이라면 '록큰롤 헤븐' 또한 결코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외래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사막은 이미 자연스러운(혹은 의미 깊은 그러므로 바람직한) 시적 공간 형식의 하나로 인정 받고 공인된 것이지만, 외래어와 상소리가 난무하는 록큰롤 헤븐은 기존의 형식 속에 어설프게 끼어든 새로운 공간 형식이다. 김 태형의 시집에서는 바로 이러한 두 개의 형식의 힘겨운 몸싸움, 밀어내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툼의 공간 속에서 시인은 때때로 '모래 바람에 길을 잃고 노련한 채찍조차도 힘을/잃을 때/나의 눈 나의 메마른 다리는 길을 찾아야 한다'([낙타의 짐])고 다짐하다가도, 메탈 지프를 타고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틀어도 좋을 거야/빗속으로 시속 백구십 이백 어때 숨쉬기조 차 힘'들게 달리면서 도망친다. 그의 모터사이클에는 백미러도 없다. 뒤돌아볼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가 순간 순간 도망치 는 길, 그것이 록큰롤 헤븐을 만든다. 물론 그곳은 결코 이상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다. '여기서는 단 한 줄의  시조차 쓸 수 없다'([커트 코베인 듣는 밤]). 오직 록큰롤 음악이나 의상, 영화 혹은 영화 배우나 가수의 전설만이 그들의 삶을 지배한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이자 행동 강령으로서 그 들이 해야할 행동을 철저하게 결정해준다. '그날 입은 옷에 따라/체위도 바뀌게 되거든 올리버 스타일엔 아스트라드/더티 진엔 렉스 오버([모터 사이클 온리])'. 듀크의 음악을 들으며 펠라티오를 즐기는 여자나 지미 헨드릭스를 들으며 에이널을 즐기는 남 자, 혹은 베이스 인트 부분만 들려도 흥분을 하는 여자, 레오 까락스에 미쳐 있는 그 남자들은 모두 이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것 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이 자유분방한 에너지가 넘쳐 흐르지만 그들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이곳은 그들의 헤븐이 아니라 록큰롤의 헤븐이기 때문이다. 이 인공적인 공간에서 사막을 건너는 시인의 이미지는 세속화된다. 낙타는 메탈 지프나 모터 사이클이 되고 모래바람 소리는 락 음악의 소리가 된다. 목마른 갈증은 메마른 성욕이 되고 피 냄새는 정액 냄새로 떠돈다. 그러나 이 공간에 투영된 문명 비판적인 이미지들, 세속화된 시인의 이미지들에 시선을 고정시켜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곳을 자유롭게 떠도는 록큰롤, 그 외래어와 생경한 언어들을 주목해야만 한다. [커트 코베인 듣는 밤], [락 매니아 케이스 바], [메탈 지프], [그런지 보이], [모터사이클 온리], [펠라티오를 즐기는 여자], [에이널을 즐기는 남자]  등의 시로 표현되는 이 공간은 시끄럽고 무식하고 생경한 언어들로 온통 가득 차 있다. 진정 '요즘 애들' 그것도 흔히 하는 말로 '오렌지족'들이나 사용할 것 같은 이 직설적이고 폭력적인 언어는 '여직 잎 피기 전 몸이라곤 미욱한지라 낡은 버/스에 달랑 싣고 거슬러 길 거슬러 폴폴폴 내려선/길이지요'([작은키나무숲]) 혹은 '가는 곳 그것을 길이라 한다면 이곳의 운명은/스스로 저의 한쪽을 닫아 놓고 끝없이 뒷 걸음치/는 것으로/마지막 제 소멸의 끝을 완성한다'([낙타의 길]) 등과 같이 진지하고 깔끔하고 철학적인 언어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레이어드 룩 매니시 풍 가끔 그녀는 재봉선을/겉으로박아/바디 라인을 고스란히 드러낸 재킷을 걸치고'([락 매니아 케이스 바])와 같이 외래어가 난무하는 시는 '한 사나흘 산갓 사방 거 된통 눈 내렸다지요 무/쇠솥 등긋한 부뚜막에 불을 넣으면 매운 굴뚝 연/기'([산수갑산])와 같은 토속적인 언어에 정면으로 맞선다.  한 시인이 이토록 상반된 언어를 마음대로 구 사할 수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아마도 사막의 길이나 물방울 집과 같은 친숙하고 그럴 듯한 이미지에 도취 되어서 고개를 끄덕였던 독자들은 이러한 시들 앞에서 크게 속은 듯한, 혹은 놀림을 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이 시끄 러운 록큰롤은 그런 모든 시들을 점잖만 빼는 허상으로, 현실을 미화하는 죽은 언어로(그것이 아무리 절망과 부정을 이야기 한다 하더라도) 느껴지도록 만든다. 물론 사막의 길에서 듣는 록큰롤 또한 죽은 언어, 무의미한 소음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먼 이 국의 사막과 사막과 같은 도시의 록큰롤 헤븐 사이에 놓인 그 엄청난 거리감은 겟 아웃 겟 아웃이라고 소리치며 도망가는 시인의 숨가뿐 질주를 가능하게 한다. 그 이질적인 공간의 맞부딪힘, 그 사이의 오고감이 이 시에 '소리'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결국 김태형이나 전대호가 80년대의 형식으로부터 달아남은 그것에 대한 절대적 동경도 환멸 때문만도 아니며, 다만 침묵 속에 가라앉지 않으려는, 추억이나 회상에만 머무르지 않으려는, 바로 지금 이곳을 끌어 안으려는 노력이다. 그들은 '비릿한 피똥이라 도 찢어지게 내지르려면/한 덩이 비애로운 제 몸 숨길 어둠조차도 갉작 갉작/갉작갉작 뭐든지 또 우겨 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을'([두 마리 쥐])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백주대낮에 여자들이 칼을 들고 설치는 이유  ―문성해(1963∼ ) 이 시절에는요 여자들이 시렁 위에 얹힌 작지만 앙칼진 칼 하나씩 손에 들고 나오는데요 여자들이 칼을 들고 설쳐도 암말 못하는 건 지천에 내걸린 풋것들을 오살지게 베어다 서방과 새끼들을 거두기 때문인데요 이 시절에는요 세상 모든 여자들은 코밑이 거뭇해지고 팔뚝 속에 알이 차올라서는 지천에 돋는 풋것들이 아까워라, 아까워라 저도 모르게 들판과 한판 엉겨붙게 되는데요 난생처음 억세디억센 수컷이 되는데요 가끔씩 그 독한 칼날에 논배미가 잘리고 칡뿌리가 잘리고 수맥이 잘리기도 하는데요 이 시절 여자들은요 푸줏간 안주인이 내걸린 고기들을 슥슥 잘라가듯 이 나무 이 바람 이 구름을 훌훌 베어 망태기에 담아서는 종다리처럼 지저귀며 언덕을 넘어가는데요 하늘도 암말 못한다는데요     산과 들에 풋것들이 지천으로 돋아나는 봄날, 망태기 가득 나물을 캐는 건강한 여인들을 그린 풍경으로만 읽어도 썩 호쾌하다. 그런데 이 시에서 ‘이 시절’을 자연의 계절로만 읽으면 좀 아깝다. 자연 속에서 나물 캐고 뛰놀던 어릴 적 기억을 현재의 시대상(時代相)으로 끌어올리는 시인의 힘! 자연을 공간 배경으로 삼으면 시에 힘이 생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시인의 기량이다. 여자가 결혼을 하면 집안에서 살림이나 해야지 직장에 다니면 흉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1970년대까지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80년대부터는 신붓감을 물색할 때 직업이 뭔지 은근히 묻기 시작했고, 90년대에는 여자가 맞벌이를 안 하면 남편이나 시댁 어르신이 무시하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급기야 현재는 당연히 맞벌이다. 여자가 살림은 물론이요 경제활동도 해야 하는 게 사회적 추세다. 항구나 선착장 같은 데는 남자 인부가 많겠지만, 시장에는 여자 상인이 많다. 저임금의 생활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이도 대부분 여성이다. 그이들이 갖고 다니는 가방들은 왜 그리 큼지막한지. 어떤 역경이나 고난도 썩썩 베어낼 작은 칼이 들어 있는 그 큼지막한 망태기! ‘서방과 새끼들을 거두기’ 위해 ‘코밑이 거뭇해지는’, 모든 일하는 여성들! 시인은 그들 힘의 원천인 모성성을 찬양하고, 여성성을 격려하며, 힘찬 승리를 기원한다.
305    작문써클 선생님들께= 아름다운 순 우리말로 작문짓게 하기... 댓글:  조회:2765  추천:1  2017-03-08
시 쓰는데 필요한 순 우리말들  아름답고 유익한 순 우리말 사전  ㄱ  ●가납사니 : ①쓸데없는 말을 잘하는 사람. ②말다툼을 잘하는 사람.  ●가년스럽다 : 몹시 궁상스러워 보이다. cf)가린스럽다 :  몹시 인색하다.  ●가늠 : ①목표나 기준에 맞고 안 맞음을 헤아리는 기준.  ②일이 되어 가는 형편.  ●가루다 : 자리를 나란히 함께 하다. 맞서 견주다.  ●가래다 : 맞서서 옳고 그름을 따지다.  ●가래톳 : 허벅다리의 임파선이 부어 아프게 된 멍울.  ●가라사니 :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지각이나 실마리.  ●가말다 : 일을 잘 헤아려 처리하다.  ●가멸다 : 재산이 많고 살림이 넉넉하다.  ●가무리다 : 몰래 훔쳐서 혼자 차지하다.  ●가분하다·가붓하다 : 들기에 알맞다. (센)가뿐하다.  ●가살 : 간사하고 얄미운 태도.  ●가시버시 : '부부(夫婦)'를 속되게 이르는말  ●가위춤 : 빈 가위를 폈다 닫쳤다 함.  ●가장이 : 나뭇가지의 몸.  ●가재기 : 튼튼하지 못하게 만든 물건.  ●가직하다 : 거리가 조금 가깝다.  ●가축 : 알뜰히 매만져서 잘 간직하거나 거둠.  ●가탈 : ①억지 트집을 잡아 까다롭게 구는 일.  ②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일.  ●각다분하다 : 일을 해 나가기가 몹시 힘들고 고되다.  ●간동하다 : 잘 정돈되어 단출하다.  ●간정되다 : 앓던 병이나 소란하던 일이 가라앉다.  ●갈개꾼 : 남의 일을 훼방하는 사람.  ●갈래다 : ①정신 또는 길이 섞갈려 종잡을 수가 없다.  ②짐승이 갈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하다.  ●갈마보다 : 이것저것을 번갈아 보다. cf)갈마들다 : 번갈아 들다  ●갈무리 : ①물건을 잘 정돈하여 간수함. ②일을 끝맺음  ●감잡히다 : 남과 시비(是非)가 붙었을 때, 조리가 닿지 않아  약점을 잡히다.  ●강짜를 부리다 : 샘이 나서 심술을 부리다.  ●강파르다 : ①몸이 야위고 파리하다. ②성질이 깔깔하고 괴팍하다.  ●갖바치 : 가죽신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  ●개골창 : 수챗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  ●개구멍받이 : 남이 밖에 버리고 간 것을 거두어 기른 아이.=업둥이.  ●개맹이 : 똘똘한 기운이나 정신.  ●개사망 : 남이 뜻밖에 이득을 보거나 재수가 생겼을 때 욕하여  이르는 말.  ●개어귀 : 강물이나 냇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  ●개차반 : 똥이란 뜻으로, 행세를 더럽게 하는 사람을 욕하는 말.  ●개평 : 남의 몫에서 조금씩 얻어 가지는 공것.  ●객쩍다 : 언행이 쓸데없이 실없고 싱겁다.  ●거니채다 : 기미를 알아채다.  ●거레 : 괜히 어정거리면서 느리게 움직이는 일.  ●거우다 : 건드리어 성나게 하다.  ●건목 : 정성들여 다듬지 않고 거칠게 대강 만드는 일,  또는 그렇게 만든 물건  ●걸싸다 : 일하는 동작이 매우 날쌔다.  ●걸쩍거리다 : 성질이 쾌활하여 무슨 일에나 시원스럽게 덤벼들다.  ●걸태질 : 탐욕스럽게 마구 제물을 긁어모으는 것.  ●게정 : 불평을 품고 떠드는 말과 행동.  ●게염 : 부러워하고 탐내는 욕심.  ●겨끔내기 : 서로 번갈아 하기.  ●겨리 : 소 두 마리가 끄는 큰 쟁기.  cf)호리한 소 한 마리가 끄는 작은 쟁기.  ●결곡하다 : 얼굴의 생김새나 마음씨가 깨끗하고 야무져서  빈틈이 없다.  ●겯고틀다 : (시비나 승부를 다툴 때지지 않으려고)서로  버티어 겨루고 뒤틀다.  ●결딴 : 아주 망그러져 도무지 손을 쓸수 업게 된 상태.  ●결두리 : 농사꾼이 힘드는 일을 할 때 끼니밖에 간식으로  먹는 음식.새참.  ●고갱이 : 사물의 핵심.  ●고거리 : 소의 앞다리에 붙은 살. cf)사태  ●고빗사위 : 고비 중에서도 가장 아슬아슬한 순간.  ●고삿 : ①마을의 좁은 골목길. ②좁은 골짜기의 사이.  ●고수련 : 병자에게 불편이 없도록 시중을 들어줌.  ●고뿔 : 감기  ●곧추다 : 굽은 것을 곧게 하다. cf)곧추뜨다 : 눈을 부릅뜨다.  ●골갱이 : ①물질 속에 있는 단단한 부분. ②일의 골자.  ●골막하다 : 그릇에 다 차지 않고 좀 모자라는 듯하다.  ●곰살궂다 : 성질이 부드럽고 다정하다.  ●곰상스럽다 : 성질이나 하는 짓이 잘고 꼼꼼하다.  ●곰비임비 : 물건이 거듭 쌓이거나 일이 겹치는 모양.  ●곰파다 : 사물을 자세히 보고 따지다.  ●곱살끼다 : 몹시 보채거나 짓궂게 굴다.  ●공성이 나다 : 이력이 나다. 길이 들다.  ●공중제비 : 두 손을 땅에 짚고 두 다리를 공중으로 쳐들어서  반대 방향으로 넘어가는 재주.  ●공치하다 : 공교롭게 잘못되다.  ●괴덕 : 수선스럽고 실없는 말이나 행동.  ●구듭 : 귀찮고 괴로운 남의 뒤치닥꺼리.  ●구메 농사 : ①규모가 작은 농사.  ②곳에 따라 풍흉(豊凶)이 다르게 되는 농사.  ●구쁘다 : 먹고 싶어 입맛이 당기다.  ●구성없다 : 격에 맞지 않다.  ●구성지다 : 천연덕스럽고 구수하다.  ●구순하다 : 말썽 없이 의좋게 잘 지내다.  ●구실 : ①공공이나 관가의 직무(職務). ②세금(稅金).  ③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책임.  ●구어박다 : 사람이 변동이나 활동을 자유로이 못하게 한 군데나  한 상태로 있게 하다.  ●구완 : 아픈 사람이나 해산한 사람의 시중을 드는 일.  ●구유 : 마소의 먹이를 담아 주는 큰 그릇.  ●국으로 : 제 생긴 그대로. 잠자코.  ●굴레 : 마소(말과 소)의 목에서 고삐에 걸쳐 얽어 매는 줄.  ●굴침스럽다 : 억지로 하려는 빛이 보이다.  ●굴타리먹다 : 오이·호박·수박따위를 벌레가 파먹다.  ●굴통이 : 겉모양은 그럴듯하나 속은 보잘것없는 물건이나 사람.  ●굼닐다 : 몸을 구부렸다 일으켰다 하다.  ●굽도리 : (방안의)벽의 아래 가장자리.  ●굽바자 : 작은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얕은 울타리.  ●궁따다 : 시치미떼고 딴소리를 하다.  ●커나다 : ①모가 반드하지 않고 비뚤어지다.  ②의견이 서로 틀어지다.  ●귀살쩍다 : ①물건이 흩어져 뒤숭숭하다.  ②일이 복잡하게 뒤얽혀 마음이 산란하다.  ●그느다 : 젖먹이가 대소변을 분간하여 누다.  ●그느르다 : 보호하여 보살펴 주다.  ●그루잠 : 깨었다가 다시 든 잠.  ●그루터기 : 나무나 풀 따위를 베어 낸 뒤의 남은 뿌리 쪽의 부분.  ●그악하다 : ①장난이 지나치게 심하다. ②사납고 모질다.  ③몹시 부지런하다.  ●금새 : 물건의 시세나 값.  ●기이다 : 드러나지 않도록 숨기다.  ●기를 : 일의 가장 중요한 고비.  ●길라잡이 :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사람.  ●길마 : 짐을 싣기 위하여 소의 등에 안장처럼 얹은 도구.  ●길미 : 빚돈에 대하여 덧붙여 주는 돈. 이자(利子).  ●길섶 : 길의 가장자리.  ●길제 :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구석진자리. 한모퉁이.  ●길품 : 남이 갈 길을 대신 가 주고 삯을 받는 일.  ●김바리 : 이익을 보고 남보다 앞질러서 차지하는  약은 꾀가 있는사람.  ●까대기 : 건물이나 담 따위에 임시로 붙여서 만든 허술한 건조물.  ●까막과부 : 청혼한 남자가 죽어서 시집도 가 보지 못한 과부.  망문과부(望門寡婦)  ●까막까치 : 까마귀와 까치. 오작(烏鵲)  ●깔죽없다 : 조금도 축내거나 버릴 것이 없다.  ●깜냥 : 얼음 가늠보아 해낼 만한 능력.  ●깜부기 : 깜부기병에 걸려서 까맣게 된 밀이나 보리의 이삭.  ●깨단하다 : 오래 생각나지 않다가 어떤 실마리로 말미암아  환하게 깨닫다.  ●꺼병이 : ①꿩의 어린 새끼. ②외양이 거칠게 생긴사람.  cf)꺼펑이 : 덧씌워 덮거나 가린 물건.  ●꺽지다 : 억세고 용감하고 과단성이 있다.  ●꼲다 : 잘잘못이나 좋고 나쁨을 살피어 정하다.  ●꾀꾀로 : 가끔가끔 틈을 타서 살그머니.  ●꽃샘 : 봄철 꽃이 필 무렵의 추위.  ●꿰미 : 구멍 뚫린 물건을 꿰어 묶는 노끈.  ●끄나풀 : ①끈의 길지 않은 토막. ②남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  ●끄느름하다 : 날씨가 흐리어 어둠침침하다.  ●끌끌하다 : 마음이 맑고 바르며 깨끗하다.  ㄴ  ●나래 : ①배를 젓는 도구. ②논밭을 고르는데 쓰는 농기구.  ●나부대다 : 조심히 있지 못하고 철없이 납신거리다.  ●난든집 : 손에 익은 재주.  ●남새 : 무·배추 따위와 같이 심어서 가꾸는 채소.  ●남우세 : 남에게서 비웃음이나 조롱을 받게 됨.  ●남진계집 : 내외를 갖춘 남의 집 하인.  ●낫잡다 : (수량·금액·나이 따위를)좀 넉넉하게 치다.  ●낳이 : 피륙을 짜는 일.  ●내남없이 : 나나 다른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로.  ●내숭 :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이나 속은 엉큼함.  ●너널 : 추울 때에 신는 커다란 솜 덧버선.  ●넉가래 : 곡식·눈 따위를 한곳에 밀어 모으는 데 쓰는 기구.  ●넉장거리 : 네 활개를 벌리고 뒤로 벌렁 나자빠지는 짓.  ●넌더리 : 소름이 끼치도록 싫은 생각.  ●널출지다 : 식물의 줄기가 처렁처렁 길게 늘어지다.  ●노가리 : 씨를 흩어 뿌리어 심은 일.  ●노드매기 : 물건을 여러 몫으로 나누는 일.  ●노닥이다 : 잔재미있고 수다스럽게 말을 늘어놓다.  ●노량으로 : 어정어정 놀아가면서 천천히.  ●노루잠 : 깊이 들지 못하고 자주 깨는 잠.  ●노적가리 : 한데에 쌓아 둔 곡식 더미.  ●노총 : 기일(期日)을 남에게 알리지 말아야될 일.  ●놀금 : (물건을 살 때)팔지 않으면 그만둘 셈으로  크게 깎아서 부른 값.  ●높새 : 뱃사람들이 북동풍(北東風)을 이르는 말.  ●눈거칠다 : 하는 짓이 보기에 싫고 마음에 들지 아니하다.  ●눈비음 : 남의 눈에 들도록 겉으로만 꾸미는 일.  ●눈썰미 : 한두 번 보고도 곧 그것을 해낼수 있는 재주.  ●눈엣가시 : ①몹시 미워 항상 눈에 거슬리는 사람.  ②남편의 첩을 이르는 말.  ●느껍다 : 어떤 느낌이 생긴다.  ●느루 : 한꺼번에 몰아치지 않고 오래 도록.  ●느루먹다 : 양식의 소비를 조절하여 예정보다 더 오래 먹다.  ●는개 : 안개처럼 부옇게 내리는 가는비. 연우(煉雨)  ●늘비하다 : 죽 늘어서 있다.  ●늠그다 : 곡식의 껍질을 벗기다.  ●능 : 넉넉하게 잠은 여유.  ●능갈치다 : 능창스럽게 잘 둘러대는 재주가 있다.  ●늦사리 : 철 늦게 농작물을 거두는 일. 또는 그 농작물.  ●늦 : 미리 보이는 조짐.  ㄷ  ●다따가 : 갑자기. 별안간.  ●다락같다 : ①물건값이 매우 비싸다. ②덩치가 매우 크다.  ●다랑귀 : 두 손으로 붙잡고 매달리는 짓.  ●다직해야 : 기껏해야.  ●닦아세우다 : 남을 꼼짝 못하게 몹시 호되게 나무라다.  ●단물나다 : 옷 같은 것이 오래 되어서 바탕이 헤지게 되다.  ●달구치다 : 꼼짝못하게 마구 몰아치다  cf)달구질 : 달구로 땅을 단단히 다지는 일.  ●달랑쇠 : 침착하지 못하고 몹시 까부는 사람.  ●달포 : 한 달 남짓.=달소수, 삭여(朔餘)  ●답치기 : 되는 대로 함부로 덤벼드는 짓.  생각 없이 덮어놓고 하는 짓.  ●당나발붙다 :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다.  ●당도리 : 바다로 다니는 큰 나무배.  ●대갚음 : 남에게 받은 은혜나 원한을 그대로 갚는 일.  ●대두리 : ①큰 다툼. ②일이 크게 벌어진 말.  ●댓바람 : 단번에. 지체하지 않고 곧.  ●댕기다 : 불을 옮겨 붙이다.  ●더껑이 : 길쭉한 액체의 엉겨 붙은막.  ●더께 : 찌든 물건에 앉은 거친 때.  ●더치다 : 병세가 도로 더해지다.  ●더펄이 : 성미가 활발한 사람.  ●덖다 : ①때가 올라서 몹시 찌들다.  ②음식에 물을 붓지 않고 볶아서 익히다.  ●던적스럽다 : (하는 짓이) 보기에 매우 치사스럽고 더럽다.  ●덜퍽지다 : 푸지고 탐스럽다.  ●덤받이 : 여자가 전남편에게서 낳아 데리고 들어온 자식.  ●덤터기 : 남에게 넘겨 씌우거나 남에게서 넘겨 맡은 걱정거리.  ●덧거칠다 : 일이 순조롭지 못하고 가탈이 많다.  ●덧게비 : 다른 것 위에 필요 없이 더덧엎어 대는 일.  ●덧두리 : ①정해 놓은 액수 외에 더 보태는 돈(웃돈).  ②헐값으로 사서 비싼 금액으로 팔 때의 그 차액.  ●덩둘하다 : 매우 둔하고 어리석다.  ●덩저리 : 물건의 부피.  ●도거리 : 몫으로 나누지 않고 한데 합쳐서 몰아치는 일.  ●도두보다 : 실제보다 더 크게 또는 좋게 보다.  cf)도두치다 : 시세보다 더 많게 셈치다.  ●도드미 ; 구멍이 널찍한 체.  ●도린결 : 사람이 별로 가지 않는 외진곳.  ●도사리 : ①감·대추 등이 다 익지 못하고 도중에 떨어진 열매.  ②못자리에 난 작은 잡풀.  ●도섭 : 능청스럽고 수선스럽게 변덕을 부리는 것.  ●도스르다 : 무슨 일을 하려고 벌려서 마음을 가다듬다.  ●도파니 : 죄다 몰아서. 통틀어.  ●돈바르다 : 성미가 너그럽지 못하고 까다롭다.  ●돈사다 : 무엇을 팔아서 돈으로 바꾸다.  ●동곳빼다 : 잘못을 인정하고 굴복하다.  ●동그마니 : ①홀가분하게. ②외따로 떨어져 있는 모양.  ●동뜨다 : ①시간적·공간적 간격이 생기다.  ②다른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  ●동아리 : (목적이 같은 사람들이)한패를 이룬 무리.  ●동이 닿다 : ①차례가 잘 이어지다. ②조리(條理)가 서다.  ●동자아치: 부엌일을 맡아 하는 여자 하인.  ●동티 : ①흙을 잘못 다루어 지신(地神)을 노하게하여 받는 재앙.  ②공연히 건드려서 스스로 걱정이나 해를 입음을 비유하는말.  ●되모시 : 결혼한 일이 있는 여자로서 처녀 행세를 하는 여자.  ●되술래잡히다 : 나무라야 할 사람이 도리어 나무람을 당하다.  ●되지기 : ①찬 밥을 더운 밥 위에 얹어 다시 찌거나 데운 밥.  ②(논밭을 헤아리는 단위인) 마지기의 10분의 1.  ●되퉁스럽다 : 하는 짓이 찬찬하지 못하고 실수를 자주 하다.  ●된바람 : 북풍(北風)을 이르는 말.  ●될성부르다 : 잘될 가망이 있다.  ●두남두다 : ①편들다. ②가엾게 여겨 도와주다.  ●두동지다 : 앞뒤가 서로 맞지 않다. 모순되다.  ●두례 : ①농사꾼들이 모내기와 김매기를 공동으로 하기 위해  이룬 조직.  ②웅덩이나 도랑 에서 지대가 높은 논으로 물을 퍼올리는  기구. cf) 두레먹다 : ①여러 사람이 둘러 앉아 먹다.  ②음식을 장만하고 농군들이 모여놀다.  ●두멍 : 물을 길어 담아 두고 쓰는 큰 가마솥이나 큰 독.  ●둥개다 :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쩔쩔매다.  ●뒤란 : 집 뒤에 울타리 안.  ●뒤스르다 : (일어나 물건을 가다듬느라고)이리저리 바꾸거나  변통하다.  ●뒤웅박 : 쪼개지 않고 속을 긁어 낸 바가지.  ●뒤통수(를)치다 : 뜻을 이루지 못하여 매우 낙심하다.  ●뒨장질 : 이것저것 뒤져내는 짓.  ●뒷갈망 : 일이 벌어진 뒤에 그 뒤끝을 처리하는 일. 뒷감당.  ●뒷귀 : 사리나 말귀를 알아채는 힘.  ●드난 : (흔히 여자가)남의 짐에 매이지 않고 임시로 붙어 살며  일을 도와주는 고용살이.  ●드레 : 사람의 됨됨이로서의 점잖음과 무게.  ●드림흥정 : 값을 여러 차례에 나눠 주기로 하고 하는 흥정.  ●드티다 : 자리가 옮겨져 틈이 생기거나 날짜·기한 등이  조금씩 연기되다.  ●들마 : (가게나 상점의)문을 닫을 무렵.  ●들메 : (벗어나지 않도록)신을 발에 동여매는 일.  ●들썽하다 : 마음이 어수선하여 들떠있다.  ●들입다 : 마구 무리하게.  ●들피 : 굶주려서 몸이 여위고 쇠약해 지는 일.  ●듬쑥하다 : 사람의 됨됨이가 가볍지 않고 속이 깊고 차 있다.  ●따리꾼 : 아첨을 잘하는 사람.  ●딸각발이 : 신이 없어 마른 날에도 나막신을 신는다는 뜻으로,  가난한 선비를 이르는 말.  ●떠세 : 돈이나 세력을 믿고 젠 체하고 억지를 쓰는 것.  ●떡심이 풀리다 : 맥이 풀리다. 몹시 낙망하다.  ●떨거지 : 일가 친척에 속하는 무리나 한통속으로 지내는 사람들.  ●뚝벌씨 : 걸핏하면 불뚝불뚝 성을 내는 성질. 또는 그런 사람.  ●뚱기다 : ①악기의 줄 따위를 튀기어 진동하게 하다.  ②슬쩍 귀띔해 주다.  ●뚜쟁이 : 남녀의 결합을 중간에서 주선하는 사람.  ●뜨께질 : 남의 마음속을 떠보는 것.  ●뜨악하다 :마음에 선뜻 내키지 않다.  ●뜯게 : 헤지고 낡아서 입지 못하게 된옷.  ㅁ  ●마고자 : 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  ●마디다 : 쓰는 물건이 잘 닮거나 없어지지 아니하다. (반:헤프다.)  ●마뜩하다 : 제법 마음에 들다.  ●마름 : ①지주의 땅을 대신 관리하는 사람.  ②이엉을 엮어서 말아 놓은단.  ●마름질 : 옷감이나 재목(材木) 등을 치수에 맞추어 자르는 일.  ●마수걸다 : 장사를 시작해서 처음으로 물건을 팔다.  ●마장스럽다 : 무슨 일이 막 되려는 때에 헤살(방해)이 들다.  ●마전 : (피륙을 삶거나 빨아서)바래는 일. 표백(漂白).  ●마파람 :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남풍(南風)  ●말결 : 무슨 말을 하는 김.  ●말림갓 : 나무를 함부로 메지 못하게 금한 산림.  ●말재기 : 쓸데없는 말을 꾸며내는 사람.  ●말코지 : 물건을 걸기 위하여 벽에 달아 놓은 나무 갈고리.  ●매개 : 일이 되어 가는 형편.  ●매골 : (볼품없이 된)사람의 꼴.=몰골  ●매나니 : ①일을 하는 데 아무 도구도 없이 맨손뿐임.  ②반찬이 없는 맨밥.  ●매지구름 : 비를 머금은 검은 조각 구름.  ●매캐하다 : 연기나 곰팡내가 나서 목이 조금 칼칼하다.  ●맨드리 : ①옷을 입고 매만진 맵시. ②물건의 만들어진 모양새.  ●맨망 : 요망스럽게 까부는 짓.  ●맵자하다 : 모양이 꼭 체격에 어울려서 맞다.  ●맷가마리 : 매맞아 마땅한 사람.  ●맹문 : 일의 시비나 경위(經緯)  ●머드러기 : 많이 있는 과일이나 생선 가운데서 크고 굵은 것.  ●머줍다 : 몸놀림이 느리다. 굼뜨다.  ●메꿎다 : 고집이 세고 심술궂다.  ●메지 : 일의 한 가지 한 가지나 끝나는 단락.  ●멧부리 : 산동성이나 산봉우리의 가장 높은 꼭대기.  ●멱차다 : ①더 이상 할 수 없는 한도에 이르다. ②일이 끝나다.  ●모가비 : 인부나 광대 등의 우두머리. 낮은 패의 우두머리=꼭두쇠  ●모래톱 : 강가나 바닷가에 있는 모래벌판. 모래사장.  ●모르쇠 : 덮어놓고 모른다고 잡아떼는 일.  ●모주망태 : 술을 늘 대중없이 많이 먹는 사람.  ●모집다 : 허물이나 과실을 명백하게 지적하다.  ●모춤하다 : (길이나 분량이)어떤 한도에 차고 좀 남다.  ●목매기 : 아직 코를 뚫지 않고 목에 고삐를 맨 송아지.  ●물강스럽다 : 보기에 억세고 모질며 악착스럽다.  ●몽구리 : 바싹 깎은 머리.  ●몽니 : 심술궂게 욕심부리는 성질.  ●몽따다 :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모르는 체하다.  ●몽종하다 : ①새침하고 냉정하다. ②부피나 길이가 좀 모자라다.  ●몽짜 : 음흉하게 몽니부르는 짓. 또는 그렇게 하는 사람.  cf)몽짜(를)치다 : 겉으로는 어리석은 체하면서 속은  딴생각을 지니다.  ●몽태치다 : 남의 물건을 슬그머니 훔치다.  ●무꾸리 : 무당이나 판수에게 길흉(吉凶)을 점치는 일.  ●무녀리 : ①태로 낳은 짐승의 맨 먼저 나온 새끼.  ②언행이 좀 모자란 사람.  ●무드럭지다 : 두두룩하게 많이 쌓여 있다. (준:무덕지다.)  ●무람없다 : (어른에게나 친한 사이에)스스럼없고 버릇이 없다.  예의가 없다.  ●무릎마춤 : 대질(對質)  ●무서리 : 처음 오는 묽은 서리 (반:된서리)  ●무수다 : 닥치는 대로 때리거나 부수다.  ●무싯날 : 장이 서지 않는 날.  ●무텅이 : 거칠 땅에 논밭을 일구어서 곡식을 심는 일.  ●묵새기다 : 별로 하는 일 없이 한 곳에 오래 묵으며 세월을 보내다.  ●물꼬 : 논에 물이 넘나들도록 만든 어귀.  ●물보낌 : 여러 사람을 모조리 매질함.  ●물부리 : 궐련을 끼워 입에 물고 빠는 물건. 빨부리.  ●물수제비뜨다 : 얇고 둥근 돌로 물위를 담방담방 뛰어가게 팔매치다.  ●물초 : 온통 물에 젖은 상태, 또는 그 모양.  ●뭉근하다 : 불이 느긋이 타거나, 불기운이 세지 않다.  ●미대다 : 하기 싫어서 잘못된 일을 남에게 밀어 넘기다.  ●미립 : 경험을 통하여 얻은 묘한 이치나 요령.  ●미쁘다 : ①믿음성이 있다. ②진실하다.  ●미투리 : 삼·모시 따위로 삼은 신.  ●민낯 : 여자의 화장 하지 않은 얼굴.  ●민둥산 : 나무가 없어 황토가 드러난 산.  ●민패 : 아무 꾸밈새 없는 소박한 물건.  ●민충하다 : 미련하고 덜되다.  ●민틋하다 : 울퉁불퉁하지 않고 평평하고 미끈하다.  ●밀막다 : 핑계를 대고 거절하다.  ●밀절미 : 기초가 되는 본바탕.  ㅂ  ●바자위다 : 성질이 너무 깐깐하여 너그러운 맛이 없다.  ●바장이다 : 부질없이 짧은 거리를 오락가락 거닐다.  ●바투 : ①두 물체의 사이가 썩 가깝게. ②시간이 매우 짧게.  ●반거들충이 : 무엇을 배우다가 중간에 그만두어  다 이루지 못한 사람.  ●반기 : 잔치·제사때에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작은 목판에 담은 음식.  ●반살미 : 갓 혼인한 신랑이나 신부를 친척집에서  처음으로 초대하는 일.  ●반색 : 몹시 반가워함.  ●반자받다 : 몹시 노하여 펄펄뛰다.  ●반지빠르다 : 교만스러워 얄밉다.  ●받내다 :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의)대소변을 받아내다.  ●발림 : 판소리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행하는 몸짓.  ●발발다 : 기회를 제빠르게 붙잡아 잘이용하는 소질이 있다.  ●발쇠 : 남의 비밀을 알아내어 다른 사람에게 일러 주는 짓.  ●방물 : 여자에게 소용된는 화장품·바느질 기구·패물따위.  ●방자 : 남이 못되기를, 또는 남에게 제앙이 내리도록  귀신에게 비는 것.  ●방자고기 : 양념도 하지 않고 소금만 뿌려서 구운 짐승의 고기.  ●방짜 : 품질이 좋은 놋쇠를 부어 내어 다시 두드려 만든 놋그릇.  (좋은 물건을 비유.)  ●방패막이 : 어떤 것을 내세워 자기에게 닥쳐 오는 공격이나  영향 따위를 막아내는 일.  ●배내 : 남의 가축을 길러서 다 자라거나 새끼를 친 뒤에 주인과  나누어 가지는 일.  ●배냇짓 : 갓난아이가 자면서 웃거나 눈·코·입 등을  쫑긋거리는 짓. cf)배내버릇 :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버릇. 즉 오래 되어 고치기 힘든 버릇.  ●배때벗다 : 언행이 매우 거만하고 반지빠르다.  ●배메기 : 지주와 소작인이 수화한 것을 똑같이 나누는 제도  .=반타작. 병작(竝作)  ●버겁다 : 힘에 겨워 다루기가 벅차다.  ●버금 : (서열 등의 차례에서)'으뜸'또는 '첫째'의 다음.  ●벋대다 : 순종하지 않고 힘껏 버티다.  ●버덩 : 나무는 없이 잡풀만 난 거친들.  ●버력 : 하늘이나 신령이 사람의 죄악을 징계하느라고 내리는 벌.  ●버르집다 : ①숨은 일을 들춰내다. ②작은 일을 크게 떠벌리다.  ●버름하다 : ①틈이 좀 벌어져 있다. ②마음이 서로 맞지 않다.  ●비커리 : 늙고 병들거나 또는 고생살이로 살이 빠지고  쭈그러진 여자.  ●벌충 : 모자라는 것을 다른 것으로 대신 채움.  ●배갯잇 : 베개에 덧씌우는 헝겊  cf)베갯밑 공사(公事) : 잠자리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바를 속삭이며 청하는 일.  ●베돌다 : 한데 어울리지 않고 따로 떨어져 밖으로만 돌다.  ●벼리 : ①그물의 위쪽 코를 꿰어 오므렸다 폈다 하는 줄.  ②일이나 글의 가장 중심되는 줄거리.  ●벼리다 : 날이 무딘 연장을 불에 달구어서 두드려 날카롭게 만들다.  ●변죽 : 그릇·세간 등의 가장자리.  cf)변죽(을)울리다 : 바로 집어 말을 하지 않고 둘러서  말을 하여 상대가 눈치를 채서 깨닫게 하다  ●볏가리 : 차곡차곡 쌓은 볏단이다.  ●보꾹 : 지붕의 안쪽.  ●보깨다 : 먹은 것이 잘 삭지 아니하여 뱃속이 거북하고 괴롭다.  ●보드기 : 크게 자라지 못한 나무.  ●보쟁이다 : 부부가 아닌 남녀가 남몰래 서로 친밀한 관계를  계속 맺다.  ●보짱 : 꿋꿋하게 가지는 속마음.  ●본치 : 남의 눈에 뜨이는 태도나 모습.  ●볼멘소리 : 성이 나서 퉁명스럽게 하는 말.  ●볼모 :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담보로 상대편에 잡혀 두는 물건.  또는 사람.  ●부넘기 : 솥을 건 아궁이의 뒷벽(불길이 방고래로 넘어가게 된 곳).  ●부닐다 : 가까이 따르며 붙임성이 있게 굴다.  ●부르터나다 : 감추어져 있던 일이 드러나다.  ●부대끼다 : 무엇에 시달려 괴로움을 당하다.  ●부아나다 : 분한 마음이 일어나다.  ●부지깽이 : 아궁이의 불을 헤치는 막대기.  ●북새 : 많은 사람들이 아주 야단스럽게 부산을 떨며 법석이는 일.  ●붓날다 : 말이나 행동이 경솔하고 들뜨다.  ●붓방아 : 글을 쓸 때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아 붓대만  놀리고 있는 것.  ●붙박이 : 한 곳에 고정되어 이동할 수 없게 된 사물.  ●비나리치다 : 아첨을 하면서 남의 비위를 맞추다.  ●비를 긋다 : 잠시 비를 피하여 그치기를 기다리다.  ●비말 : 비용(費用)  ●비설거지 : (비가 오려고 할 때)물건들이 비에 맞지 않게  거두거나 덮거나 하는 일.  ●빌붙다 : 남의 환심을 사려고 들러붙어서 알랑거리다.  ●빗물이 : 남이 진 빛을 대신 갚는 일.  ●빚지시 : 빚을 주고 쓰는 일을 중간에서 소개하는 일.  ●빌미 : 재앙이나 병 등이 불행이 생기는 원인.  ●빙충맞다 : 똘똘하지 못하고 어리석다.  ●뻑뻑이 : 틀림없이.  ●뿌다구니 : 물건의 삐죽하게 내민 부분.  ㅅ  ●사금파리 : 사기 그릇의 깨진 작은 조각.  ●사람멀미 : 사람이 많은 데서 느끼는 어지러운 증세.  ●사로자다 : 불안한 마음으로 자는 둥마는 둥하게 자다.  ●사시랑이 : 가냘픈 사람이나 물건.  ●사위다 : 불이 다 타서 제가 되다.  ●사재기 : 필요 이상으로 사서 쟁여둠.  ●사태 : 소의 무릎 뒤쪽 오금에 붙은 고기.  ●사품 : 어떤 일이나 동작이 진행되는 '마침 그 때(기회)'를 뜻함.  ●삭신 : 몸의 근육과 뼈마디.  ●삭정이 : 산 매꾸에 붙은 채 말라 죽은 가지.  ●삯메기 : 농촌에서 식사는 없이 품삯만 받고 하는 일.  ●산돌림 :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한 줄기씩 쏟아지는 소나기.  ●신망스럽다 : 말이나 하는 것이 경망스럽다.  cf)실망스럽다 : 몹시 짓궂다.  ●살갑다 : ①(집에나 세간 따위가)겉으로 보기 보다 속이 너르다.  ②마음씨가 부드럽고 다정스럽다.  ●살강 : 그릇을 얹기 위하여 부엌벽에 가로지른 선반.  cf)시령 : 물건을 얹기 위해 방이나 마루에 건너질러 놓은  나무.  ●살거리 : 몸에 붙은 살의 정도와 모양.  ●살붙이 : 혈육적으로 가까운 사람.  ●살소매 : 팔과 소매 사이의 빈틈.  ●살손(을)붙이다 : 일을 다그쳐 정성을 다하다.  ●살피 : ①두 곳의 경계선을 표시한 표. ②물건과 물건과의  사이를 구별지은 표.  ●심사미 : 세 갈래로 갈라진 곳.  ●삼짇날 : 음력 삼월 초사흘날.  ●삼태기 : 대나 헝겊으로 엮어 거름·흙·쓰레기 따위를  담아 나르는 물건.  ●삼하다 : 어린아이의 성질이 순하지 않고 사납다.  ●상고대 : 나무나 풀에 눈같이 내린 서리.  ●새경 : 농가에 일년 동안 일해 준 대가로 주인이 머슴에게  주는 곡물이나 돈.=사경(私耕).  ●새물내 : 빨래하여 갓 입은 옷에서 나는 냄새.  ●새룽이 : 말이나 행동을 밉살스럽고 경망스럽게 하는 짓.  또는 그러한 사람.  ●샛바람 :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동풍(東風).  ●생무지 : 일에 익숙하지 못하여 서투른 사람.  ●생인손 : 손가락 끝에 나는 종기.  ●생채기 : 손톱 따위로 할퀴어 생긴 작은 상처.  ●생청 : 시치미를 떼고 하는 모순된 말.  ●생화 : 먹고 살아 나가기 위하여 벌이 하는 일.  ●서름하다 : ①남과 가깝지 못하다. ②사물에 익숙하지 못하다.  ●서릊다 : 좋지 못한 것을 쓸어 치우다.  ●섟 : 순간적으로 불끈 일어나는 격한 감정.  ●섟삭다 : ①불끈 일어난 노여움이 풀리다.  ②의심하는 마음이 풀리다.  ●선겁다 : ①놀랍다. ②재미롭지 못하다.  ●선바람 : 차리고 나선 그대로의 차림새.  ●선불걸다 : ①섣불리 건드리다.  ②관계없는 일에 참견하여 해를 입는다.  ●선술집 : 술청 앞에 선 채로 술을 마실 수 있도록 된 집.=목로주점.  ●선웃음 : (우습지도 않은데)꾸미어 웃는 거짓웃음.  ●섣부르다 : 솜씨가 설고 어설프다.  ●설멍하다 : 옷이 몸에 짧아 어울리지 않다.  ●설면하다 :①자주 만나지 못하여 좀설다. ②정답지 아니하다.  ●설피다 : 짜거나 엮은 것이 성기고 거칠다.  ●섬돌 : 오르내리기 위하여 만든 돌층계.  ●성금 : 말한 것이나 일한 것의 보람.  ●성기다 : 사이가 배지 않고 뜨다. (반:배다)  ●성마르다 : 성질이 급하고 도량이 좁다.  ●세나다 : ①물건이 잘 팔려 나가다. ②부스럼 따위가 덧나다.  ●소담하다 : ①음식이 넉넉하여 먹음직하다. ②생김새가 탐스럽다.  ●소댕 : 솥을 덮는 뚜껑.  ●소두 : 혼인 관계를 맺은지 얼마 안되는 사돈끼리 생일 같은 때  서로 주고받는 선물.  ●소드락질 : 남의 재물을 마구 빼앗는 짓.  ●소래기 : 독 뚜껑이나 그릇으로 쓰는 굽이 없는 짐그릇.  ●소롱하다 : 재산을 되는 아무렇게나 써서 없애다.  ●소소리바람 : 이른봄의 맵고 스산한 바람.  ●소수나다 : 그 땅의 소출이 늘다. (준:솟나다)  ●소양배양하다 : 나이가 아직 어려 철이 없이 함부로 날뛰다.  ●소태같다 : 맛이 몹시 쓰다.  ●속종 : 마음속에 품고 있느 소견.  ●솎다 : 군데군데 골라서 뽑아내다.  ●손대기 : 잔심부름을 할 만한 아이.  ●손떠퀴 : 무슨 일이나 손을 대기만 하면 나타나는 길흉화복.  ●손 맑다 : ①재수가 없어 생기는 것이 없다.  ②후하지 아니하고 다랍다.  ●손바람 : 일을 치러나가는 솜씨나 기새.  ●손방 : 할 줄 모르는 솜씨.  ●손사래 : 남의 말을 부인할 때 손을 펴서 내젓는 짓.  ●손타다 : 물건의 일부가 없어지다. 도둑맞다.  ●손포 : 실제 일하는 사람의 수. 또는 일한 양.  ●수발 : 시중들며 보살피는 일.  ●수지니 : 사람의 손으로 길들인 매.  ●수채 : 집 안에서 버림 허드랫물이나 빗물 따위가  흘러 나가도록 만든 시설.  ●숙수그레하다 : 어떤 물건들의 크기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고  거의 고르다.  ●숙지다 : 어떤 현상이나 기세 따위가 차차 줄어 들다.  ●숱 : 물건의 부피나 분양.  ●스스럼 : 조심하거나 어려워하는 마음이나 태도.  ●숨베 : (칼·호미·괭이 등의)날의 한 끝이 자루 속에 들어간 부분.  ●습습하다 : 사내답게 활발하고 너그럽다.  ●승겁들다 : 그리 힘들이지 않고 저절로 이루다.  ●시게 : 시장에서 거래되는 곡식, 또는 그 시세.  ●시나브로 :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시뜻하다 : 어떤 일에 물려서 싫증이 나다.  ●시래기 : 말린 무잎이나 배춧잎.  ●시르죽다 : 기운을 못차리다. 풀이 죽다.  ●시름없다 : ①근심·걱정으로 맥이 없다. ②아무 생각이 없다.  ●시먹다 : 나이 어린 사람이 주제넘고 건방지다.  ●시쁘다 : 마음이 흡족하지 아니하다.  ●시세 : 가는 모래.=모세, 세사(細沙)  ●시설궂다 : 싱글싱글 웃으면서 수다스럽게 자꾸 지껄이다.  ●시앗 : 남편의 첩.  ●시역 : 힘이 드는 일.  ●시위 : ①홍수(洪水), ②'활시위'의 준말.  ●시적거리다 :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다.  ●시치다 : 바느질할 때 임시로 듬성듬성 꿔매다.  ●실랑이 : ①남을 못견디게 굴어 시달리게 하는 짓.  ②서로 옥신각신하는 짓(승강이).  ●실큼하다 : 마음에 싫은 생각이 생기다.  ●실터 : 집과 집 사이의 길고 좁은 빈터.  ●실팍하다 : 사람이나 물건이 보기에 매우 튼튼하다.  ●심드렁하다 : ①마음에 탐탁하지 아니하여 관심이 거의 없다.  ②병이 더 중해지지도 않고 오래 끌다.  ●심마니 : 산삼을 캐려고 돌아 다니는 사람.  ●싸개통 : ①여러 사람이 둘러싸고 승강이를 하는 일.  ②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욕을 먹는 일.  ●싹수 : 앞으로 잘 트일 만한 낌새나 징조.  ●쌩이질 : 한창 바쁠 때 쓸데없는 일로 남을 귀찮게 구는 것.  ●쓰레질 : 갈아 놓은 논밭의 바닥을 써레로 고르는 일.  ●쏘개질 : 있는 일 없는 일을 얽어서 몰래 고자질 하는 짓.  ●쓸까스르다 : 남을 추켰다 낮췄다하여 비위를 거스르다.  ●쓿다 : 곡식의 껍질을 벗기어 깨끗이 하다.  ●싸도둑 : 조상의 성질과 모습을 닮지 않고  남을 닮는 것을 비유하는 말.  ㅇ  ●아귀차다 : 뜻이 굳고 하는 일이 야무지다.  ●아기똥하다 : 남달리 교만한 태도가 있다.  ●아가씨 : ①시집갈 만한 또래거나 갓 시집은 이에 대하여  아랫사람이 이르는 말. ②올케가 손아래 시누이를 높여 이르는 말.  ●아니리 : 판소리에서 창(唱)을 하는 중간에 장면의 변화나  정경 묘사를 설명하는 말.  ●아람치 : 자기의 차지.  ●아름드리 : 한아름이 넘는 큰 나무나 물건.  ●아리잠작하다 : 키가 작고 얌전하며 어린티가 있다.  ●아우르다 : 여럿이 합쳐서 하나로 되게 하다.  ●아주버니 : 여자가 남편의 형제가 되는 남자를 일컫는 말.  ●아퀴짓다 : 일을 끝마무리하다.  ●악도리 : 모질게 덤비기 잘하는 사람이나 짐승.  ●안날 : 바로 전날.  ●안다미 : 남이 져야 할 책임을 맡아짐.  ●안차다 : 겁없고 당돌하다.  ●안를다 : (수량이나 값 따위가)어떤 한도를 넘지 아니하다.  ●안팎장사 : 이 곳에서 물건을 사서 다른 곳에 가져다가 팔고,  그 돈으로 그 곳의 싼 물건을 사서 이 곳에 가져다가  파는 장사.  ●알섬 :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  ●알심 : ①은근히 동정하는 마음. ②보기보다 야무진 힘.  ●알짬 : 여럿 중 가장 중요한 내용.  ●알천 : ①재물 가운데 가장 값나가는 물건.  ②음식 가운데 가장 맛있는 음식.  ●암상 : 남을 미워하고 샘을 잘 내는 심술.=양심.  ●암팡지다 : 몸은 작아도 힘차고 다부지다.  ●앙금 : 액체의 바닥에 가라앉은 가루 모양의 물질.  ●앙달머리 : 어른스러운 체하면서 야심을 부리는 짓.  ●앙세다 : 몸은 약해 보여도 다부지다.  ●앙증하다 : 모양이 제격에 어울리지 않게 작다.  ●애면글면 : 약한 힘으로 무엇을 이루느라고 온갖 힘을 다하는 모양.  ●애물 : 몹시 속을 태우는 물건이나 사람.  ●애벌갈이 : 논이나 밭을 첫 번째 가는 일.(준:애갈이).  ●애성이 : 분하고 성나는 감정.  ●애오라지 : 좀 부족하나마 겨우, 오직.  ●애옥살이 : 가난에 쪼들리는 고생스러운 살림살이.  ●앤생이 : 잔약한 사람이나 보잘것없는 물건을 얕잡아 이르는 말.  ●앵돌아지다 : 마음이 토라지다.  ●야바위 : ①그럴 듯한 방법으로 남을 속여 따먹는 노름.  ②협잡의 수단으로 그럴 듯한 광경을 꾸미는 일.  ●야발 : 야살스럽고 되바라진 태도.  ●야비다리 : 대단찮은 사람이 제멋에 겨워서 부리는 거드름.  ●야수다 : 기회를 노리다.  ●야지랑스럽다 : 얄밉도록 능청맞고 천연스럽다.  ●야짓 : 건너뛰꺼나 빼놓지 않고 모조리.  ●약비나다 : 정도가 너무 지나쳐 몹시 싫증이 나다.  ●얌생이 : 남의 물건을 조금씩 훔쳐 내는 짓.  ●양지머리 : 소의 가슴에 붙은 뼈와 살.  ●어거리풍년 : 드물게 보는 큰 풍년(豊年).  ●어니눅다 : 짐짓 못생긴 체하다.  ●어엿하다 : 행동이 당당하고 떳떳하다.  ●어줍다 : ①말이나 동작이 부자연하고 시원스럽지 않다.  ②손에 익지 않아 서투르다.  ●언걸 : 남 때문에 당하는 괴로움이나 해.  ●언구럭 : 말을 교묘하게 떠벌리며 남을 농락하는 일.  ●언막이 :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막은 둑.  ●얼렁장사 : 여러 사람이 밑천을 어울러서 하는 장사.  ●얼레 : 실을 감은 나무 틀.  ●얼레살풀다 : 난봉이 나서 재물을 없애기 시작하다.  ●업시름 : 업신여겨서 하는 구박.  ●엇부루기 : 아직 큰 소가 되지 못한 수송아지.  ●엉거능축하다 : 보기에는 얼뜬 듯하면서 능청스럽게  남을 속이는 수단과 태도가 있다.  ●엉겁 : 끈끈한 물건이 마구 달라붙은 상태.  ●엉구다 : 여러 가지를 모아 일이 되도록 하다.  ●엉너리 : 남의 환심을 사려고 능청스러운 수단을 쓰는 짓.  ●엉세판 : 몹시 가난하고 궁한 형세.  ●에끼다 : 서로 주고받을 물건이나 돈을 서로 비겨 없애다.  상쇄하다.  ●에다 : ①예리한 연장으로 도려 내다. ②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다.  ●여낙낙하다 : 성미가 곱고 상냥하다.  ●여남은 : 열 가량으로부터 열 좀 더 되는 수.  ●여리꾼 : 상점 앞에 섰다가 지나는 손님을 끌여들여 물건을  사게 하는 사람.  ●여우비 : 볕이 나 있는데 잠깐 오다가 그치는 비.  ●여정하다 : 별로 틀릴 것이 없다.  ●여줄가리 : 중요한 일에 딸린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  ●여루다 : 물건이나 돈 따위를 아껴쓰고 나머지를 모아 두다.  ●역성 :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덮어놓고 한쪽만 편들어 주는 일.  ●열고나다 : ①몹시 급하게 서두르다. ②몹시 급한 일이 생기다.  ●열없다 : ①조금 부끄럽다. ②겁이 많다.  ●영절스럽다 : 말로는 그렇듯하다.  ●영바람 : 자랑하고 뽐내는 태도나 기세.  ●영판 : 앞날의 길흉(吉凶)을 맞추어 내는 일. 또는 그 사람.  ●예제없이 : 여기나 저기나 구별없이.  ●오금 : 무릎의 구부러지는 쪽의 관절부분.  ●오달지다 : 야무지고 실속이 있다.  ●오례쌀 : 올벼의 쌀.  ●오릇하다 : 모자람이 없이 완전하다.  ●오쟁이지다 :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다.  ●오지랖넓다 : 주제넘게 자기와 상관없는 남의 일에  참견함을 비웃는 말.  ●옥셈 : 생각을 잘못하여 자기에게 불리하게 하는 셈.  ●올되다 : ①나이보다 일찍 철이 들다.  ②곡식 따위가 제철보다 일찍 익다. (준:오되다)  ●올무 : 새나 짐승을 잡는 데 쓰는 올가미.  ●올케 : 누이가 '오빠나 남동생의 아내'를 일컫는 말.  cf)시누이 : 남편의 누이.  ●옷깃차례 : 처음 시작한 사람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하게 되는 차례.  ●옹골지다 : 실속 있게 속이 꽉 차다.  ●옹아리 : 생후 백일쯤 되는 아기가 사람을 알아 보고 옹알거리는 짓.  ●옹추 : 자기가 늘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  ●옹춘마니 : 마음이 좁고 오그라진 사람.  ●왕청되다 :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  ●왜골 : 허위대가 크고 언행이 얌전하지 못한 사람.  ●왜자하다 : 소문이 퍼져 자자하다.  ●왜장치다 : 일이 지난 뒤에 헛되이 큰소리를 치다.  ●욕지기 : 토할 것 같은 메슥메슥한 느낌.  ●용수 : ①술이나 장 따위를 거르는데 쓰는 기구.  ②죄수를 밖으로 데리고 다닐 때 얼굴을  보지 못하게 머리에 씌우던 물건.  ●용심 :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심술.  ●용지 : 헝검이나 헌 솜을 나무 막대기에 감고 기름을 묻혀서  불을 켜는 물건.  ●용천하다 : 썩 좋지 않다. 꺼림칙한 느낌이 있다.  ●용춤 : 남이 추어 울리는 바람에 좋아서 하라는 대로  행동을 하는 짓.  ●용트림 : 거드름을 피우며 크게 힘을 들여 하는 트림.  ●우금 : 가파르고 좁은 산골짜기.  ●우꾼하다 : ①어떤 기운이 한꺼번에 세게 일어나다.  ②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소리치며 기세를 올리다.  ●우두망찰하다 : 갑자기 닥친 일에 어쩌할 바를 몰라 정신이  얼떨떨하다.  ●우듬지 : 나무의 꼭데기 줄기.  ●우렁잇속 : 내용이 복잡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비유.  ●우멍하다 : 뭉체의 면(面)이 쑥 들어가서 우묵하다.  ●우선하다 : ①앓던 병이 조금 나은듯하다.  ②몰리거나 급박하던 형세가 다소 풀리다.  ●우세 : 남에게 놀림이나 비웃음을 받음.  ●우수리 : ①물건 값을 제하고 거슬러 받는 잔돈.  ②일정한 수효를 다 채우고 남은 수.  ●우접다 : ①남보다 빼어나게 되다. ②선배를 이겨 내다.  ●울대 : 울타리에 세운 기둥같은 대.  ●울력 :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일을 함. 또는 그 힘.  ●움딸 : 시집간 딸이 죽은 뒤에 다시 장가든  사위의 아내를 일컫는 말.  ●웁쌀 : 잡곡으로 밥을 지을 때 위에 조금 얹어 안치는 쌀.  ●웃날들다 : 날이 개다.  ●웃비 : 한창 내리다가 잠시 그친 비.  ●워낭 : 마소의 귀에서 턱밑으로 늘여단 방울.  ●윗바람 : 겨울에 문틈이나 벽틈으로 방안에  새어 들어오는 차 바람.=외풍(外風).  ●으르다 : ①물에 불린 곡식 따위를 방망이 같은 것으로 으깨다.  ②말이나 행동으로써 위협하다.  ●은결들다 : ①내부에 상처가 나다.  ②원통한 일로 남몰래 속을 썩이다.  ●은사죽음 : 마땅히 보람이 나타나야 할 일이 나타나지 않고 마는 일.  ●의초 : 동기간(同氣間)의 우애.  ●이르집다 : ①껍질을 뜯어 벗기다.  ②없는 일을 만들어 말썽을 일으키다.  ●이물 : 배의 머리 쪽. 뱃머리. (반:고물).  ●이악하다 : 자기 이익에만 마음이 있다.  ●이울다 : ①꽃이나 잎이 시들다. ②점점 쇠약해지다.  ●이지다 : 짐승이 살쪄서 지름지다.  ●입찬말 : 자기의 지위와 능력을 믿고 장담하는 말.  ●잇바디 : '치열'의 우리말.  ㅈ  ●자닝하다 : 모습이나 처지 따위가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다.  ●자리끼 : 밤에 마시려고 잘 자리의 머리맡에 준비해 두는 물.  ●자리보전 : 병이 들어 자리를 깔고 누워서 지냄.  ●자맥질 : 물 속에 들어가서 떳다 잠겼다 하며 팔다리를 놀리는 짓.  ●자발없다 : 참을성이 없고 경솔하다.  ●자부지 : 쟁기의 손잡이.  ●자빡대다 : 딱 잘라 거절하다.  ●자투리 : (팔거나 쓰다가 남은)피륙의 조각.  ●잔다리밟다 : (출세하기까지)지위가 낮은 데서부터 차차 오르다.  ●잔달음 : 걸음의 폭을 좁게 잇달아 떼어 놓으면서 바뼈 뛰는 걸음.  ●잔질다 : ①마음이 굳세지 못하고 약하다. ②하는 짓이 잘고 다랍다.  ●잡도리 : (잘못되지 않도록)엄중하게 단속함.  ●잡을손 : 일을 다잡아 하는 솜씨.  ●장맞이 : 길목에 지켜서서 사람을 만나려고 기다리는 일.  ●장족박 : 간장을 뜰 때 쓰는 조그만 바가지.  ●갖추다 : 동작을 재게하여 잇달아 재촉하다.  ●장돌림 : 각 처의 장으로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장수. 장돌뱅이.  ●잦히다 : 밥이 끓은 뒤에 불을 잠깐 물렸다가 다시 불을 조금  때어 물이 잦아지게 하다.  ●재강 : 술을 걸러 내고 남은 찌꺼기.  ●재우치다 : 빨리 하도록 재촉하다.  ●저어하다 : 두려워하다.  ●적바르다 : 어떤 기준이나 한도에 겨루 미치다.  ●적바람(뒤에 들추어 보려고) : 글을 간단히 적어 두는 일.  ●점지 : 신불(神佛)이 사람에게 자식을 갖게 해 주는 일.  ●정수리 : 머리 위에 숨구멍이 있는 자리.  ●제키다 : 살갗이 조금 다쳐서 벗겨지다.  ●조라떨다 : 일을 망치게 방정을 떨다.  ●조리차하다 : 물건을 알뜰하게 아껴서 쓰다.  ●조치개 : 어떤 것에 응당히 딸려 있어야 할 물건.  (밥에 대하여 반찬 따위)  ●족대기다 : ①함부로 우겨대다. ②남을 견디기 어렵도록 볶아치다.  ●졸가리 : ①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  ②사물의 군더더기를 다 없애 버린 나무지의 골자.  ●졸들다 : 발육이 잘 되지 않고 주접이 들다.  ●좁쌀여우 : 됨됨이가 좀스럽고 요변을 잘 부리는 아이를 이르는 말.  ●종요롭다 : 없으면 안 된 말큼 요긴하다.  ●좆다 : 틀어서 죄어 매다.  ●주니 : 몹시 지루하여 느끼는 싫증.  ●주럽 : 피곤하여 고단한 증세.  ●주릅 : 구전을 받고 흥정을 붙여 주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  ●주저롭다 : 넉넉하지 못하여 퍽 곤란하다.  ●주저리 : 너저분한 물건이 어지럽게 매달리거나  또는 한데 묶여진 것.  ●주전부리 : 때를 가리지 않고 군음식을 자주 먹는 입버릇.  ●주접 : 사람이나 생물이 탈이 생기거나하여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일.  ●줏대잡이 : 중심이 되는 사람.  ●중절거리다 : 수다스럽게 중얼거리다.  ●쥐락펴락 : 자기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휘두르는 모양.  ●쥘손 : 물건을 들 때 손으로 쥐는 부분.  ●지다위 : ①남에게 의지하고 떼를 씀. ②제 허물을 남에게 덮어씌움.  ●지돌이 : 등을 대고 가까스로 돌아가게 된 험한 산길.  ●지실 : 재앙이나 해가 미치는 일.  ●지위 : '목수(木手)'를 높여 부르는 말.  ●지청구 : 까닭없이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짓.  ●직수굿하다 : 풀기가 꺾여 대들지 않고 다소곳이 있다.  ●진솔 : 한 번도 빨지 않은 새 옷.  ●진번질하다 : 물자나 돈이 여유가 있고 살림살이가 넉넉하다.  ●질통 : 짐을 넣어 지고 나르게 만든통.  ●짐짓 : 마음은 그렇지 않으나 일부러 그렇게. 고의로.  ●짜개 : (콩, 팥 따위의)둘로 쪼갠 한쪽.  ●짜발량이 : 찌그려져서 못 쓰게 된 물건.  ●짜장 : 과연. 정말로.  ●짝자꿍이 : ①남몰래 세우는 일이나 계획. ②서로 다투는 일.  ●째다 : ①옷이나 신발 따위가 몸이나 발보다 작아서 바짝 죄게 되다. ②일손이 모자라서  일에 쫓기다. ③베어 가르거나 찢다.  ●째마리 : 사람이나 물건 가운데서 가장 못된 찌꺼기.  ●쭉정이 : 껍질만 있고 알멩이가 들지 않은 곡식이나 과실의 열매.  ●찌그렁이 : 남에게 무리하게 떼를 쓰는 짓.  ●찜부럭 : 몸이나 마음이 괴로움 때에 결핏하면 내는 짜증.  ㅊ  ●차돌박이 : 양지머리뼈 한복판의 기름진 고기.  ●차반 : ①맛있게 잘 차린 음식. ②예물로 가져가는 맛있는 음식.  ●척(隻)을 짓다 : 서로 원한을 품을 만한 일을 만들다.  ●천둥 벌거숭이 : 두려운 줄 모르고 함부로 날뛰기만 하는 사람.  ●천둥지기 : 비가 와야만 모를 심을 수 있는 논. 천수담(天水畓).  ●천세나다 : (어떤 물건이)사용되는 데가 많아서 퍽 귀하여지다.  ●첫밗 : (행동이나 일을 시작해서)맨 처음의 국면.  ●초들다 : 어떤 사물을 입에 올려서 말하다.  ●초라떼다 : 격에 맞지 않는 짓이나 차림세로 말미암아  창피를 당하다.  ●추레하다 : ①겉모양이 허술하여 보잘 것 없다.  ②생생한 기운이 없다.  ●추지다 : 물기가 배어서 몹시 눅눅하다.  ●치사람 : 손윗사람에 대한 사랑.  ●치신없다 : 몸가짐이 경망스러워 위신이 없다.  ㅋ  ●켕기다 : ①팽팽하게 되다. ②불안하고 두려워지다.  ●코뚜레 : 소의 코를 뚫어서 꿰는 고리 모양의 나무.  ●코숭이 : 산줄기의 끝.  ●콩케팥케 : 사물이 마구 뒤섞여 뒤죽박죽된 것을 가리키는 말.  ●큰상물림 : 혼인 잔치 때 큰상을 받았다가 물린 뒤,  받았던 이의 본집으로 싸서 보내는 음식.  ●킷값 : 키가 큰 만큼 부끄럽지 않게 행동함을 일컫는 말.  ㅌ  ●타끈하다 : 인색하고 욕심이 많다.  ●타래버선 : 들 전후의 어린아이들이 신는 누비버선의 한 가지.  ●타울거리다 : 뜻한 바를 이루려고 애를 쓰다.  ●터럭 : 사람이나 짐승의 몸에 난 길고 굵은 털.  ●터알 : 집의 울 안에 있는 작은 밭.  ●톡탁치다 : 옳고 그름을 가릴 것 없이 다 없애 버리다.  ●틋 : 김 40장씩을 한 묶음으로 묶은 덩이.  ●투미하다 : 어리석고 둔하다.  ●튀하다 : (세나 짐승 따위를)털을 뽑기 위해 끓는 물에  잠깐 넣었다가 꺼내다.  ●트레바리 : 이유 없이 남의 말에 반대하기를 좋아하는 성격.  ●들거지 : 듬직하고 위엄이 있는 겉모양.  ㅍ  ●파임내다 : 일치된 의논에 대해 나중에 딴소리를하여 그르치다.  ●판들다 : 가진 재산을 함부로 써서 죄다 없애다.  ●판수 : 점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소경.  cf)판수 익다 : 전체의 사정에 아주 익숙하다.  ●푸네기 : 가까운 제살붙이.  ●푸닥거리 : 무당이 하는 굿.  ●푸접없다 : 남에게 대하는 태도가 쌀쌀하다.  ●푹하다 : 겨울 날씨가 춥지 아니하고 따뜻하다.  ●푼더분하다 : ①얼굴이 두툼하여 탐스럽다. ②여유가 있고 넉넉하다.  ●푼푼하다 : 모자람이 없이 넉넉하다.  ●풀무 :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  ●품앗이 : 힘드는 일을 서로 거들어 주면서 품을 지고 갚고 하는 일.  ●풍년(豊年) 거지 : 여러 사람이 다 이익을 보는 데 자기  혼자만 빠진 것을 비유하는 말.  ●피새 : 조급하고 날카로워 걸핏하면 화를 내는 성질.  ●피천 : 아주 적은 액수의 돈.  ㅎ  ●하냥다짐 : 일이 잘 안되는 경우에는 목을 베는 형벌이라도  받겠다는 다짐.  ●하늬 : 농가나 어촌에서 '서풍(西風)'을 이르는 말.  ●하릅 : 소·말·개 등의 한 살 된 것.  ●하리놀다 : 윗사람에게 남을 헐뜯어 일러바치다.  ●하리다 : ①마음껏 사치를 하다. ②매우 아둔하다.  ●하리들다 : 일이 되어 가는 중간에 방해가 생기다.  ●하릴없다 : ①어찌 할 도리가 없다. ②조금도 틀림이 없다.  ●하비다 : ①손톱이나 날카로운 물건으로 긁어 파다.  ②남의 결점을 들추어 내서 헐뜯다.  ●한겻 : 하루의 4분지 1인 시간.  ●한둔 : 한데서 밤을 지냄. 노숙(露宿).  ●한사리 : 음력 매달 보름과 그믐날, 조수가 가장 높이 들어오는 때. cf)한무날 : 조수  간만의 차가 같은 음력 열흘과 스무닷새를 아울러 이르는 말.  ●한풀 : 어느 정도의 끈기나 기세.  ●할경 : ①말로 업신여기는 뜻을 나타냄.  ②남의 떳떳하지 못한 근본을 폭로하는 말.  ●함진아비 : 혼인 전에 신랑측에서 신부측에 보내는 함을 지고  가는 사람.  ●함초롬하다 : 가지런하고 곱다.  ●함함하다 : 털이 부드럽고 윤기가 있다.  ●핫아비 : 아내가 있는 남자. (반:홀아비).  ●핫옷 : 솜을 넣어서 지은 옷.  ●해거름 : 해가 거의 넘어갈 무렵.  ●해껏 : 해가 넘어갈 때까지.  ●해소수 : 한 해가 좀 지나는 동안.  ●해찰 : 물건을 이것저것 집적이어 해치는 짓.  ●해찰하다 : 일에는 정신을 두지 않고 쓸데없는 짓만 하다.  ●행짜 : 심술을 부려 남을 해치는 행위.  ●허구리 : 허리의 좌우쪽 갈비 아래의 잘룩한 부분.  ●허닥하다 : (모아 둔 것을)덜어서 쓰기 시작하다.  ●허드레 : 함부로 쓸 수 있는 허름한 것.  ●허룩하다 : 줄어들거나 없어지다.  ●허룽거리다 : 언행이 경망스럽다.  ●허릅숭이 : 언행이 착실하지 못하여 미덥지 못한 사람.  ●허물하다 : 허물을 들어 나무라다.  ●허발 : 몹시 주리거나 궁하여 함부로 먹거나 덤비는 일.  ●허방 : 움푹 팬 땅.  cf)허방(을)치다 : 바라던 일이 실패로 돌아가다.  ●허섭쓰레기 : 좋은 것을 고르고 난 뒤의 찌꺼기 물건.  ●허수하다 : (모르는 사이에 없어져 빈 자리가 난 것을 깨닫고)  허전하고 서운하다.  ●허출하다 : 허기가 져서 출출하다.  ●헛물켜다 : 이루어지지 않을 일을 두고,  꼭 되려니 하고 헛되이 애를 쓰다.  ●헛장 : 풍을 치며 떠벌리는 큰소리.  ●허대다 : 공연히 바쁘게 왔다갔다 하다.  ●헤먹다 : 들어 있는 것보다 구멍이 헐거워서 어울리지 않다.  ●헤살 : 짓궂게 훼방하는 짓.  ●헤식다 : ①단단하지 못하여 헤지기 쉽다. ②탐탁하지 못하다.  ●호다 : 바느질할 때 헝겊을 여러 겹 겹쳐서 성기게 꿰매다.  ●호드기 : 물오른 버들가지나 짤막한 밀짙 토막으로 만든 피리.  ●호락질 :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가족끼리 짓는 농사.  ●홀앗이 : 살림살이를 혼자 맡아 처리하는 처지.  ●홀지다 :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  ●화수분 : 재물이 자꾸 생겨서 아무리 써도 줄지 않음을 이르는 말.  ●홰 : ①새장·닭장 속에 새나 닭이 앉도록 가로지른 나무 막대.  ②옷을 걸도록 방안 따위에 매달아 둔 막대(횃대).  ●확 : ①돌이나 쇠로 만든 절구.  ②절구의 아가리로부터 밑바닥까지 팬곳.  ●회두리 : 여럿 중에서 맨 끝, 맨 나중에 돌아오는 차례.  ●훈감하다 : ①맛과 냄새가 진하고 좋다. ②푸짐하고 호화스럽다.  ●흥글방망이놀다 : 남의 일이 잘 되지 못하게 훼방하다.  ●흐드러지다 : ①썩 탐스럽다.  ②아주 잘 익어서 무르녹다(흐무러지다).  ●허벅지다 : 탐스럽게 두툼하고 부드럽다.  ●희나리 : 덜 마른 장작.  ●희떱다 : ①속은 비었어도 겉으로는 호화롭다.  ②한푼 없어도 손이 크게 마음이 넓다.  ●한풀 : 어느 정도의 끈기나 기세.  ●할경 : ①말로 업신여기는 뜻을 나타냄.  ②남의 떳떳하지 못한 근본을 폭로하는 말.  ●함진아비 : 혼인 전에 신랑측에서 신부측에 보내는  함을 지고 가는 사람.  ●함초롬하다 : 가지런하고 곱다.  ●함함하다 : 털이 부드럽고 윤기가 있다.  ●핫아비 : 아내가 있는 남자. (반:홀아비).  ●핫옷 : 솜을 넣어서 지은 옷.  ●해거름 : 해가 거의 넘어갈 무렵.  ●해껏 : 해가 넘어갈 때까지.  ●해소수 : 한 해가 좀 지나는 동안.  ●해찰 : 물건을 이것저것 집적이어 해치는 짓.  ●해찰하다 : 일에는 정신을 두지 않고 쓸데없는 짓만 하다.  ●행짜 : 심술을 부려 남을 해치는 행위.  ●허구리 : 허리의 좌우쪽 갈비 아래의 잘룩한 부분.  ●허닥하다 : (모아 둔 것을)덜어서 쓰기 시작하다.  ●허드레 : 함부로 쓸 수 있는 허름한 것.  ==================================================================       아아, ―박소란(1981∼ ) 담장 저편 희부연 밥 냄새가 솟구치는 저녁 아아, 몸의 어느 동굴에서 기어나오는 한줄기 신음 과일가게에서 사과 몇 알을 집어들고 얼마예요 묻는다는 게 그만 아파요 중얼거리는 나는 엄살이 심하군요 단골 치과에선 종종 야단을 맞고 천진을 가장한 표정으로 송곳니는 자꾸만 뾰족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아직 아침이면 무심코 출근을 하고 한 달에 한두 번 누군가를 찾아 밤을 보내고 그러면서도 수시로 아아, 입을 틀어막는 일이란 남몰래 동굴 속 한 마리 이름 모를 짐승을 기르는 일이란 조금 외로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언젠가 동물도감 흐릿한 주석에 밑줄을 긋던 기억     아니요 말한다는 게 또다시 아파요 나는 아파요 신경쇠약의 달은 일그러진 얼굴을 좀체 감추지 못하고 집이 숨어든 골목은 캄캄해 어김없이 주린 짐승이 뒤를 따르고 아아, 간신히 사과 몇 알을 산다 붉은 살 곳곳에 멍이 든 사과 짐승은 허겁지겁 생육을 씹어 삼키고는 번득이는 눈으로 나를 본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길을 가다가 마주 걸어오던 청년에게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여장남자 같아.” 같이 찧고 까불던 그의 일행이 일순 조용해지며 아무도 웃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나를 두고 한 말이 분명했다. 그런가? 늙고 살이 찐 뒤 바그너같이 생겨진 것도 같다. 이제 지나가던 젊은 남자가 친구들 웃기자고 함부로 대할 만큼 늙은 여자가 된 것인가. 늙은 것은 서럽지만, 서러운 젊음도 있다. 박소란의 시를 읽노라면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내 청춘의 가슴 저린 시간들이 떠오른다. 화자는 활달하고 낙천적인 사람이 아니고, 환경도 밝지 않은 듯하다. ‘수시로 아아,’ ‘한 줄기 신음’인지 한숨인지 ‘몸의 어느 동굴에서 기어나온’단다. 절망감과 외로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는 것이다. ‘아침이면 무심코 출근하는 직장’은 호구지책일 뿐 아무 즐거움이 없는 곳, 거의 매일 곧바로 퇴근해서 돌아가는 집도 ‘캄캄’하다. 저녁의 긴 그림자를 밟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는, 박소란이 그리는 필경 가난하고 외로운 청춘의 초상에 젊은 여성 독자는 더 깊이 공감할 것이다. 그의 시를 하나 더 소개한다.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늘//안간힘으로/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닿는 꼭대기//그러니 모두/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주소’).
304    윤동주의 친구 문익환 목사도 시 "동주야"를 썼다... 댓글:  조회:4548  추천:0  2017-03-07
                 동주야                              문익환      너는 스물 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테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 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 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쿠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 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버릴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 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고 문익환목사는 “원통하기 그지 없지만 나는 동주형의 추억을 써야한다. 나는 이글을 쓰고     싶었다.” 라고 술회한 바 있다.  어린 시절 소학교를 같이 다니던 친구 윤동주가 일제의 고문     에 의해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것을 원통해 하며 쓴 시이다.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1930년대 은진학교   시절 교복을 입은 윤동주(뒷줄 오른쪽)와 문익환(뒷줄 가운데) 모습    *문익환(文益煥, 1918~1994) 만주출생의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이자 재야운동가. 호는 늦봄 만주(현재의 길림성 용정시)에서 태어나 1947년 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 졸업 1954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받음 이후 한국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구약성서학을 강의하였으며, 1970년대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의 공동번역성서 번역사업에 개신교 대표로 참여 친구이자 사회운동가인 장준하(張俊河)의 의문사를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 1970~80년대 군사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수차례 투옥되었으며 석방 후 활발한 통일운동과 강연활동을 벌이던 중 1994년 심장마비로 별세함 1989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귀국하였으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되었음 2002년 민주화운동에 대한 업적이 인정되어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음  저서에 , 등이 있고  시집으로 , , 등이 있음                 [아시아경제 김철현 기자] 사진 한 장이 있다. 1930년대 중반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다니던 네 명의 친구들이 찍은 것이다. 세 명은 뒷줄에 나란히 서있고 앞 줄 가운데는 약간 비딱하게 한 명이 앉아있다. 세간에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는 이 사진 속 네 명이 저마다 다른 의미로 한국 현대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고 한다. 뒷줄 왼쪽부터 장준하 선생, 문익환 목사, 윤동주 시인이며 앉아 있는 이는 대한민국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냈던 정일권이라는 것이다. 특히 한때 함께 사진을 찍을 정도로 친한 동창이었지만 극과 극으로 나뉜 삶을 산 세 명의 친구와 정일권 전 총리를 비교하는 설명이 많다. 한 장의 빛바랜 사진에 함께 등장하는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 그리고 정일권. 이 설명은 사실일까.  1월 18일은 23년 전,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문 목사와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너무 다른 삶을 살았던 정일권 전 총리는 공교롭게도 하루 전인 1994년 1월 17일 사망했다. 하루 차이로 세상을 떠난 이 두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 앞서 언급한 사진 한 장이다. 하지만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 정일권이 함께 찍었다고 알려진 이 사진의 설명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소설가 송우혜가 쓴 '윤동주 평전'에는 이 사진의 진실이 담겨 있다.  이 사진은 윤동주 평전이 집필될 때 문 목사가 인터뷰를 하며 제공한 것인데 뒷줄 가운데는 문 목사, 그 오른쪽이 윤동주 시인인 것은 맞다. 윤동주 평전은 문 목사가 밝힌 이 사진의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당시 교모를 모자 가게에 가서 맞춰 썼는데 문 목사의 것은 반듯했는데 윤동주 시인의 모자는 우그러진 형태였다는 것이다. 평소 물욕이 없던 시인이 이상하게 모자를 탐내자 문 목사는 대신 호떡을 사라고 하고 바꿔 줬다고 한다. 이 사진 속 모자가 서로 바꿔 쓴 것이라고 문 목사는 설명했다.  윤동주 평전에 따르면 문 목사는 사진 속 나머지 두 친구가 누구인지도 밝혔다. 은진중학교 출신으로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온 네 명이 찍은 것인데 그의 왼편은 이름을 잊었고 앞에 앉은 이는 장로신학대 교수를 지낸 이영헌이라고 했다. 장준하로 알려진 사진 속 인물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고 정일권으로 알려진 이는 이영헌 목사라는 것이다. 장준하 선생의 유족도 사진 속의 인물이 선생이 아니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게다가 은진중학교 출신 전학생들이 찍은 사진이라는 문 목사의 설명과 달리 정 전 총리는 은진중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그렇지만 문 목사가 윤동주 시인과 죽마고우였고 장준하 선생과도 평생 친구였으며 세 사람이 같은 시기에 숭실중학교를 다닌 것은 사실이다. 문익환 목사가 쓴 시 '동주야'에는 28살에 세상을 떠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 재야의 거목, '늦봄' 문익환 목사. [자료사진]   이시우 전문기자=     ▲2002년 6월 중국 용정 옛집 자리에서 포즈를 취한 박용길 장로(맨 왼쪽)와 문 목사의 동생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내가 1944년에 결혼해서 시집살이 온 집이 바로 이집이지. 58년전 기차에서 내려 용정에서 마차를 타고 이집으로 들어가는데 목사님이 굉장히 좋아하시며 흥분하셨어.”  2002년 6월 박용길 장로님을 모시고 함께한 만주 용정여행 때였다. 박 장로님은 문익환 목사의 옛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서서 마치 가마를 타고 막 골목으로 들어서는 새색시처럼 상기된 얼굴로 함께한 가족들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아주 잠시 이어진 침묵의 응시. 나는 골목길에서 보았던 박장로님의 그 표정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질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장면은 여러 생각과 감상이 쌓이고 쌓여 나에겐 그저 단순히 시집가는 날의 풍경, 그 이상이 되었다.  소녀 박용길은 경기여학교를 거쳐 일본 요코하마여자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관동조선신학생회모임에서 청년 문익환을 만나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문익환이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안 부모님은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자 “반년만 살아도 좋다. 이 남자와 결혼 못한다면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버티며 집안을 설득했다. 박용길은 이 가엾은 청년과 결혼한 뒤 6개월 뒤에 죽으면 나머지는 평생 전도사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사람을 알아보는 천재가 사랑의 이름으로 실현됐다는 점에서 이 선택의 주도권은 청년 문익환의 몫이기 보다는 소녀 박용길의 몫이 되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 고 문인환 목사의 생가를 찾아 중국 용정과 명동촌을 방문한 2002년 6월 당시의 박용길 장로와 필자. [자료사진 - 통일뉴스]     두 사람의 열애는 결실을 맺어 1944년 6월 17일 안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2차대전의 전세가 기울고 식민시대가 마지막 정점에서 발악하던 시절, 전쟁 속에서 피어올린 꿈같은 사랑의 결실이었다. 반년도 못살 거라던 문익환 목사의 예고된 운명은 결혼 후 반년이 지나고 일년이 지났지만 보기좋게 빗나갔고 그 대신 만주에 들려온 소식은 제국주의 일본의 운명이었다. 사랑의 힘은 죽음을 넘어 승리했고, 세기의 폭력은 평화의지 앞에 좌절된 것이다.  해방 후인 46년 만주 피난민 수용소에서 난민을 돌보던 두 사람은 ...가족과 난민을 데리고, 걷고 또 걸어 압록강을 넘어 신의주로, 다시 38선을 넘어 서울로 이르는 대장정에 오른다.  따라서 박 장로님이 만주에서 생활한 시간은 채 2년 안팎이다. 박 장로님이 만주를 떠난 뒤 해방은 분단이 되었고, 분단은 전쟁이 되었으며, 전쟁은 독재를 낳았다. 일본제국의 심장에서 피워낸 사랑과 길지 않았던 만주에서의 생활은 단순히 일본에서 만주로의 거리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 이후 만주와 일본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전략지대로서의 지정학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유라시아극동의 전략지대인 만주로 이주하여 이러한 지정학의 숙명을 몸으로 체득한 ‘문씨네’ 집안과 함께 하게 된 박 장로의 운명 역시 이에 동화되고 일치되었다. 문영환은 만주에 정착했고 문동환은 미국에 정착했다. 문익환.박용길 부부의 장남 문호근, 삼남 문성근은 문익환의 길을 따랐지만 차남은 JP모건의 시카고 부사장이다. 가족들의 복잡해 보이는 이력은 극동유라시아의 지정학이 관통되던 만주라는 무대를 지우고서는 설명되기 힘들어 보인다.  시인 김형수가 “문익환의 영혼적 혈통은 유목민이었고 그는 늘 광활한 무대를 그리워했으며 좁은 칸막이 안에서 형성된 기득권을 타고 안주하는 것을 경계했다”는 표현은 어느 샌가 박 장로님에게도 발견되는 일치점이었다. 두 세기에 걸친 박 장로님의 인생 여정에는 한순간도 어김없이 작동된 유라시아지정학의 긴장이 겹쳐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 우리 역사는 문익환이란 거목을 발견하지만 그 거목이 뿌리내리고 있던 대지와 수분과 바람을 놓칠 때가 많았다...  \\\\\\\\\\\\\\\\\\\\\\\\   지난 2010년 11월 13일 기자는 젊은 지성들의 모임 “중국조선족력사문화동호회” 회원들과 더불어 룡정의"산증인"으로 불리는 저명한 사학자 최근갑 옹(85세)을 모시고 룡정의 여러 명소와 명물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와중에 윤동주의 마지막 길을 바래였던 룡정에서의 자택 옛터를 확인할수 있었다.     태여난 명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한뒤 윤동주는 명동에서2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학교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소학교6학년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아들의 처경을 안타까이 여기던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위해 당시 연변지역 사람들이면 너나가 선망하던 “서울”격인 룡정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씨가 생전에 “나라사랑”이라는 잡지에기고한 추모문 ”윤동주의 생애”라는 글에 따르면”1931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30여리 떨어진 룡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카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룡정으로 이사하였다.”고 밝히고있다.   윤동주네 일가가 룡정으로 이주한것은 대변혁이였다.명동에서 일껏 이룬 터전을 버린 것은 당시36세의 나이였던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의 도시로 향한 새로운 열망도 있었지만 주로는 파령 윤씨가문의 장남이였던 윤동주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였다.   막상 이사를 단행했지만 거주환경은크게 변했다. 윤동주네가 이사온 룡정집은 룡정가 제2구1동36호로서20평방메터 정도의 초가집이였다.명동에서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20평방메터 정도밖에 안되는 초가집으로 옮겨온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윤일주, 윤광주3형제 거기에다 큰 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8명의 식구가20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하는 환경속에서 윤동주의 은진중학교시절이 시작되였다.    환경은 여의치 못했지만 윤동주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버릇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으로 학업에 열중해 나갔다.지금 남아있는 은진중학교 학생시절의 윤동주에 관한 증언들을 보면 그 모습이 풋풋하고 싱그럽다.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의 30년대의 모습윤일주교수의 ”윤동주의 생애”에 있는 증언을 보자.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또 숭실중학교 그리고 광명학원 중학부를 같이 다닌 절친한 친구인문익환목사는 “중앙월간”(1976년4월)에 실린”하늘, 바람, 별의 시인 윤동주”라는 글에서 윤동주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페소트를떠올리고있다.   “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   문익환목사는이어 그들의 은진중학교 학창시절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한다.   “1932년 봄에 동주, 몽규와 나는 룡정 은진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은진중학교는 한때 모윤숙(毛允淑)씨가 교편을 잡았던 명신녀학교와 한 언덕우에 자리잡고있었다. 그곳에는 또 카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이 있고 선교사들 집이4채가 있었다. 이 언덕은 룡정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우리는 그 언덕을‘영국더기’라고 불렀다. 그 지경은 만주국이 서기까지 치외법권지대여서 일본순경이나 중국관원들이 허락없이 들어갈수 없는 곳이였다.”    여기서 말하는 “영국더기”는 지금 룡정 동남쪽에 위치한 더기로서 당년에 연변의 첫 조계지가 이곳에 설립되여 있었다. 그 더기우에 일떠선 은진중학은 1만평 부지에600평의 본관과150평의 기숙사, 400평의 대강당을 가지고있는 ,명실상부한 룡정 최고의 신식근대교육기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다른 학교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민족교육을 거침없이 실시해 일제가 금지하던 조선말 교육은 물론 영어-성경-국사 등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지식인을 양성하는 수업이 이뤄졌다. 간도 개척기에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산실이 명동촌의 명동학교였다면 일제 강점기에는 룡정의 은진중학이 그 맥을 이였던것이다.   “영국더기”와 가까이 상거한 이 자택에서 윤동주는 근8년간이나 지냈다. 집과 불과200메터 상거한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교내 웅변대회에서“땀 한방울”이라는 제목으로1등상을 땨내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윤동주는  그 청년기를 담금질했다.   현재 오스트랄리아에 거주, 현존하는 윤동주의 유일한 혈육인 녀동생 윤혜원녀사는  2007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룡정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절구통우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있었다”고 윤녀사는 회상했다.   친지와 친구들의 증언을 따라가며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축구선수인 문학소년,잘 생긴 외모에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입는 멋쟁이, 웅변대회에서1등상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소년치고는 의외로 수학마저 잘하고…  1940년 은진중학 졸업후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지망해 고종사촌 송몽규와 당시 간도지역에서는 단 두사람으로 합격했다. 1942년 연희전문 을 나와 윤동주는 일본으로 류학, 선후로 도꼬 립교대학 영문과, 도꾜도지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이른바“사상범”으로 체포되여 일본 규슈의 후꾸오까형무소에 갇혔고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한다.                                    룡정의 자택에서 치러진 윤동주 장례식 광경.   상주들중에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영정곁의 오른쪽 첫번째), 아버지 윤영석(그 두번째), 동생 일주(세번째), 어머니 김룡(다섯번째), 여동생 혜원(여섯번째), 막내동생 광주(왼쪽으로 네번째)의 모습이 보인다. 영정 바로 왼편에 선 이가 문익환 목사이다.  윤동주가 비명에 간뒤 근 한달이 지나 아버지에 의해 일본에서 부터 그의 골회가 운송되여 왔다 . 1945년3월6일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윤동주의 장례가 치러졌다.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장례식에서 연희전문“문우”잡지에 실렸던 윤동주의 시“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봄이였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고  그날 따라  눈보라가 몹시 날려서 동주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춥게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한 확인은 력사의 행간에 묻혀졌던 윤동주가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에 의해 연변에서 처음 알려지던1985년에 이루어졌다.          서대숙 (미국 하와이대학 정치학 석좌교수    30~40년대 룡정에 거주했던 서대숙 일가는 윤동주의 룡정 자택과 불과100여메터 떨어진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고 명동학교 설립자인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의 자택과도 역시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다. 서대숙은 그후 미국콜롬비아대학교 정치학 박사,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 일본 게이오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미국 하와이대학교 정치학 석좌교수를 지내면서 조선문제연구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발돋움했다. 그는 명동의 정초인이며 이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약연에 대한 위인전기를 집필해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형인 서화숙(뉴욕 한인교회 장로)이32년 은진중학에서 재학하고있었는데 바로 윤동주와 동기생으로 되고있다.    1985년 이들 일행은 룡정으로 행차, 옛날 기거하고있던 “영국더기”를 찾으면서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자택을 확인했다.           명동마을의 정초자,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룡정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사학자 최근갑옹이 김약연 목사의 옛집 터를 확인하고있다. 지금은 한 아파트단지의 접수실로 변모해 있다.     최근갑 옹은30년대 김약연목사의 자택(현재 룡정 안민가 “해란의 별(海兰之星)”아파트)부근에서 당시 “벌채조합(伐采组合”의 조합장으로 있는 일본인 오오마가리(大曲)네 집 급사로 종살이를 한적있었다. 이들은 당시 개혁개방으로 국문을 열어젖힌 중국에서 자주 만날수 있었고 조선족력사에 관한 어제의 “산증인”으로 학술계에 많은 의거있는 자료를 제공했다.   1926년독립운동가 최청남의 아들로 태여난 최근갑옹 역시 은진중학교 23기 졸업생이다. 즉 윤동주와 은진중학의12년 후배로 되는것이다.   해방후 맡은바 직무에 충실하면서수차례 길림성정부와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의 표창을 받기도 했던 최근갑옹은1986년룡정시 건설국 국장에서 정년 리직한 뒤 제2의 인생 즉 우리 민족의 력사발자취를 찾고 그것을 발굴, 복원해 후세에 남김과 아울러 력사관광전적지건설에 혼신을 바치고있다.       윤동주의 룡정자택 옛터     최근갑옹이 확인하는 윤동주의 자택 옛터는 지금의 안민가 동산사회구역의 룡정시 기계수리공장의 뜨락으로 변모해 있다. 성이 조씨인 한족 공장장이 경영하는 작은 규모의 공장으로서 주로 지체장애인을 위해 민정국계통에서 차린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공장마저 조업을 중단하고 그곳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었다.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동생 광주가 뛰여놀았을 곳, 처음으로 “동주”라는 필명으로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에 동시를 발표했던 곳, 그 유명한 동시 “오줌싸개 지도”를 산출시킨 곳, “초 한대”등 자신의 시작품에 처음으로 이름과 날자를 명기한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린 유명한 일화를 남긴곳이 바로 이 룡정의 자택에서였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이제는 한국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 그리고 아세아를 넘나들며 그의 위상이 재조명되고있지만 그의 생전 거처를 밝히는 표지석 하나조차 없어 보는 우리의 마음을 아릿하게 했다. /김혁 기자       [출처] 두 세기의 역사를 응시하던 눈빛 - 박용길 장로님에 대한 기억 한편(이시우) |작성자 잠수함  
303    청년문사 송몽규도 시를 썼다... 댓글:  조회:2729  추천:0  2017-03-07
  하늘과 더불어     송몽규       하늘-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   푸름이 깃들고 太陽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싶다     오오- 하늘아- 모-든것이   흘러 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思念들만 뿌려 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意欲의 殘滓만 쓰디쓴 追憶의 反추만 남아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戀人이 없어 孤獨스럽지 않아도 故鄕을 잃어 향수(鄕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의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맘속의 하늘을 간직하고 싶어   미풍(微風)이 웃는 아침을 기원(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 부르기를   가만히 祈願하련다. \\\\\\\\\\\\\\\\\\\\\\\\\\\\\\\\\\\\\\\\ ///////////////////////////////////////덤으로 더 보기 @+@=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윤동주에게는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가 있었다. 소울메이트-마음의 벗, 성격이 잘 맞는 사람들 사이를 가리켜 말한다. 그 죽이 잘 맞았던 친구가 바로 송몽규이다. 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는 겹경사가 났다. 명동촌 친정집에 와있던 윤하현 장로네 큰딸 신영이가 9월 28일 아들애를 낳았고 외아들 영석이네가 12월 30일에 또 아들애를 보았다. 석달을 차이두고 태여난 그들이 바로 송몽규와 윤동주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그들은 다섯살이 될 때까지 한집에서 자랐다. 이런 혈연때문이였던지 얼굴과 키도 비슷해 쌍둥이같았던 두 사람이다. 송몽규는 부끄럼 잘 타고 조용한 성정미의 윤동주와는 대조적이였다. 소년시절부터 문학소년이면서도 활동적인 성격을 갖고있어 동료간에 리더십이 돋보였다고 한다. 크리스마스나 학기말에 이르면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연극을 연출하는 등 무서운 활동가의 재질을 보인 야무진 소년이였다. 어릴적부터 둘은 삶과 문학을 거의 같이했다. 1925년 여덟살인 송몽규는 윤동주, 문익환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교장이자 외숙부였던 김약연선생의 훈도아래 철저한 반일교육을 받았다. 그들 둘이 문학에 뜻을 둔것은 바로 명동소학교시절이였다. 4학년때 동주와 고종사촌이고 동갑인 송몽규는 서울의 월간잡지 《어린이》를 구독하고 윤동주는 《아이생활》을 구독하였다. 1931년 우수한 성적으로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달라자에 있는 당시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소학교 학생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산길을 둘은 함께 매일이고 걸었다. 윤동주 가(家)는 1931년 늦가을 룡정으로 이사하게 되고 윤동주와 송몽규는 1932년 4월 봄 은진(恩眞)중학교에 함께 입학한다. 이때에도 송몽규는 윤동주네 집에 얹히게 된다. 문단 진출도 남보다 빨랐다. 송몽규는 1934년 12월 은진중학 3년생으로 열여덟 어린 나이에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부문에 응모한다. 송한범(宋韓範)이란 아명으로 응모한 작품인 꽁트 《숟가락》이 당선되여 고향 간도사람들을 놀래웠다 윤동주보다 빠른 문단진입이였고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였다. 자기의 문호를 《문해》-《문학의 바다》라 지으며 문학적소망을 드러냈던 송몽규는 당시 은진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시던 민족주의자 명희조선생의 영향하에 결연히 직접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길로 나간다. 송몽규는 은진중학을 중퇴하고 남경에 있는 중앙군관학교 락양분교의 한인반에 입학하였다. 이 한인반은 한국림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하던 김구선생이 반일민족독립전쟁에 수요되는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 운영하는 학교였다. 청년문사라는 그에 대한 별칭은 그 어디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락양군관학교에서 송몽규는 군사기능을 열심히 련마하면서도 학생들을 조직하여 한인반 잡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등사로 인쇄하여 만든 두툼한 책을 보고 김구선생은 몹시 칭찬하시면서 책이름을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주었다. 1년간 교육을 받다가 1936년 4월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濟南)에서 제남 주재 일본 령사관 경찰부에 체포된다. 그는 이제 일제의 경찰들의 검은 리스트에 그 이름이 오른것이다. 갖은 고문에 시달리다 겨우 석방되여 나오기는 하였으나 그때부터 그에게 《요시찰인물》이란 딱지가 붙어 늘 일제당국의 감시망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것이 그후 일본 류학시기 교도에서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는 한 원인이 된것이다. 이때의 윤동주의 행적을 보면 또 다른 친구인 문익환과 함께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한다. 얼마 다니지도 못한 상태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학교에서 자퇴를 하고 룡정으로 되돌아와 윤동주와 문익환은 룡정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되였다. 광명학교는 당시 흉년의 여파로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일본인에게 매각되여 친일계 학교가 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한 윤동주와 문익환은 조선인의 황국화(皇國化)를 위해서 세워진 중학부에서 공부할수밖에 없는 신세에 《솥에서 뛰여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구나.》하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여기서 《이런 날》(1936.6.10)이라는 윤동주의 시 한편을 보자.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중략)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싶다. 동주가 다니는 친일계 광명중학교 정문 량쪽 돌기둥에는 만주국 기발과 왜놈들의 일장기가 걸려 펄럭이고있었다. 이런 무가내한 상황에서 동주는 하소연하고 기대고싶은 존재로 송몽규를 찾고있었다. 겨우 석달이상이지만 랭철한 현실 대처의 자세로 언제나 그들의 선두주자였던 의젓한 형 송몽규를 사무치게 그리고 마음으로 부르고있는것이다. 1937년 4월,송몽규는 룡정대성중학에 입학하여 그동안 중단했던 학업을 다시 계속하였다. 그는 문학에 대한 뜻을 버리지 않고있었다. 그의 졸업일기에는 영어로 《일체는 문학을 위하여》라는 글발이 남겨져있다. 1938년 초봄, 그들은 당시 간도에서는 단 두사람으로 연희전문에 나란히 합격한다. 윤동주는 의사나 고등고시로 출세하라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문과를 택했고 몽규도 같이 문과로 간다. 남성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성격인데다 달변인 그의 주도하에 문과학생회는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를 펴냈다. 송몽규는 《꿈별》이라는 필명으로 《문우》지에 《하늘과 더불어》라는 시를 발표했다. 우리 말이 억압당하던 시기 몽규(夢奎)를 꿈별이라 굳이 우리 말로 풀어 이름을 단것이다. 서울생활 4년을 마친 뒤 1942년 봄 두 사람은 일본류학을 함께 떠났다. 남의 나라, 적국이였지만 대학과정으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이것은 당시 많은 젊은이들의 무가내한 선택이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송몽규는 교도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에 입학하고 윤동주는 이케부쿠로에 있는 릿교대학에 들어간다. 1940년대에 조선인이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후 윤동주는 학교를 바꾸어 1942년 도시샤대학에 입학, 다시 송몽규와 재회한다. 늘 머리를 맞대고있으면서 그들은 일경이 그를 감시하는줄 모르고 《우리 민족의 장래》며 《민족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강렬한 민족의식의 지배하에서 민족독립의 래일을 기원하였고 일제당국의 조선민족과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을 비난하였다. 송몽규는 자신은 앞으로 연극분야에 투신해 연극을 통한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겠다는 포부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일본경찰의 마수에 떨어진다. 송몽규는 1943년 7월 10일, 윤동주는 7월 14일 각각 교도에서 특고 형사에게 체포되여 교도 시모가모경찰서 류치장에 감금된다.일제 경찰의 감시하에 있던 송몽규가 그 사정권에 들었던것이다. 죄명은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이라는것이였다. 1944년 봄, 두 사람에 대한 결심공판이 있었다. 재판시에는 《치안유지법 위반 피고사건(조선독립운동)》으로 그 죄목이 정해졌다. 징역은 각각 2년이였다. 형은 같았으나 형 종료시기는 윤동주는 1945년 11월 30일, 송몽규는 1946년 4월 12일이였다. 송몽규의 형이 더 무거웠다. 지난 2011년 7월, 일본 교도검찰청은 송몽규의 재판판결문을 최초로 전격 공개하였다. 물론 윤동주 연구자들에 의해 내용은 이미 알려진 상태지만 일본의 검찰청 기록과에서 공식적으로 공개한것은 처음이다. 7매로 된 재판판결문에는 송몽규의 주된 활동이 비교적 정리가 잘 되여있었다. 판결문 내용을 보면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 특히 언어문화를 말살하는 사회상황구조를 파악하여 지적하고있고 기존의 독립운동의 한계를 자성하며 학구적 리론적 필요성을 역설하고있다. 또한 일본이 머지 않아 대동아전쟁에서 패전을 할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 한꺼번에 대세를 몰아 조선의 독립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전략적방법론도 전개하고있다. 형이 확정된 그들은 후꾸오까형무소로 이송되였다. 머리를 깎고 또 사상범인 연고로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붉은색 죄수복을 입었다. 이때 일제는 패망으로 줄달음치고있었다. 마구 잡아들인 조선인 복역자들은 일제에 큰 짐이 되고있었다. 그들은 이들의 처치방법을 생각하고있었다. 바로 생체실험이였다.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절명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송몽규는 그 며칠 뒤인 3월 7일 윤동주를 따라갔다. 민족에 대한 충정과 민족문화에 대한 수호의 의지를 한가슴 지녔던 애젊은 나이의 문사는 비참하게 적국의 땅에서 한줌의 재로 스러졌다. 윤동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죽었고 송몽규는 눈을 감지 못했다. 시신을 거두러 간 아버지 송창희가 통곡하며 눈을 감겼다. 일제의 패망과 광복을 불과 5-6개월 앞둔 때, 《밤보다 깊은 꿈》을 펼치지도 못한 두사람의 원통한 옥사였다. 이들의 의문사에는 후꾸오까형무소와 구주제대 의학부의 생체실험의 의혹이 강력히 제기되고있다. 후꾸오까 화장장에서 재로 변한 윤동주의 시신은 고향 룡정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1945년 3월 6일 장례를 치르고 룡정 동산의 교회 묘지에 묻었다. 《시인》 윤동주 지묘라 비석을 새겼다. 한학에 밝은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비문을 썼다. 송몽규의 시신도 후꾸오까 화장장에서 재가 되였다. 명동의 장재촌 뒤산에 묻으며 가족들은 《청년문사(靑年文士) 송몽규 지묘》라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역시 윤동주의 비문을 작성했던 김석관이 썼다. 1990년 4월 그들을 기리는 이들에 의해 송몽규의 묘는 룡정 동산으로 이전했다. 불과 몇메터 가까이 손잡힐듯한 곳에 친구 윤동주가 묻혀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였다. 지성인들에 의해 근년에 송몽규의 《밤》이라는 시 한편이 또 발굴되였다. 《조선일보》 1938년 9월 20일자에 실린 작품으로서 연희전문 1학년때 쓴것으로 보인다. 송몽규의 작품은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과 연희전문시절 《문우지》에 발표한 시 《하늘과 더불어》 등 두편이 고작이였다.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맑고 고운 결, 고운 마음으로 캄캄했을 세상에 대한 고심이 깊다. 젊은이의 사색이 잘 옹글었다. 벗인 윤동주의 시를 닮은듯하다. 그들은 같은 해에 한집에서 태여났고 같은 해 한 형무소에서 함께 죽는다. 참으로 기이한 운명이였다. 윤동주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며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글발을 통해 저항의 표현을 했다고 한다면 송몽규는 일찍 그의 문학적재질을 인정받으면서도 시대상황에 대한 선견지명을 갖고 문학보다는 반일운동에 적극 뛰여들었고 그 와중에 젊은 몸을 바쳤다. 오늘날 윤동주가 겨레 시인으로 높이 추앙됨은 천행이라 하겠다.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송몽규는 그에 비해 아는이가 적다. 뒤미처 한반도 나아가 그를 숨지게 한 적국에서까지 사랑받고있는 친구의 곁에 우두커니 서있는 송몽규이다. 그러나 차라리 숙명의 동반자였던 윤동주가 옆에 있어 그는 외로웁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존재가 다시금 각인되는것은 그 역시 친구가 읊조리고 지켜왔던 생의 수칙처럼 《한점 부끄럼 없이 주어진 길》을 걸어간 위인이기때문이다.   /김혁     ㅁ꿈별(송몽규의 필명)     하늘과 더부러 꿈별(송몽규의 필명)   하늘 ー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수있어 알수있어… 푸름이 깃들고 태양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별이 미소하여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 싶다. 오오ー 하늘아 ー  모ー든것이 흘러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사념들만 뿌려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의욕의 잔재만 쓰디쓴 추억의 반추만 남어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연인이 없어 고독스럽지않아도 고향을 잃어 향수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ー 하늘속에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 맘속에 하늘을 간직하고싶어.   미풍이 웃는 아침을 기원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부르기를 가만히기원하련다.   ----------------------- 송몽규의 알려지지 않은 '밤'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 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 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맘은 험한 山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조선일보' 1938년 9월20일치'). 연희전문 1학년때 쓴 작품 '밤'이다. 맑고 고운 결 고운 마음으로 캄캄했을 세상에 대한 고심이 깊다. 젊은이의 사색이 잘 옹글었다. 벗인 윤동주의 시를 보는 듯하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벗 가운데서도 으뜸 벗이었다. 북간도 명동촌의 한 집에서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났다. 송몽규가 1917년 9월28일, 윤동주가 12월30일이다. 둘은 고종사촌 사이였다. 송몽규의 아버지 송창희가 윤동주의 고모부다.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로 일했다. 이런 혈연뿐만 아니라 얼굴과 키도 비슷해 쌍둥이 같았던 두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둘은 삶과 문학을 거의 같이 했다. 1938년 봄 연희전문 진학도 함께했다. 처음 기숙사도 한 방을 써다. 서울 생활 4년을 마친 뒤 1942년 봄 섬나라 경도 유학을 함께 떠났다. 거기서 왜로(倭虜) 경찰에 붙잡혀 갖은 고초를 겪고 비슷한 시기에 영면했다. 지금 용정 동산에 위 아래에 가까이 묻혀 있다. 윤동주와 송몽규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다. 둘 다 미혼이었다. 차이가 난다면 송몽규는 윤동주에 견주어 외향적이었다. 문단 진출도 빨랐다. 1935년 열여덟 어린 나이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학업을 그만두고 김구 선생 밑에 들어가 낙양군관학교에서 항왜활동을 위한 비밀 훈련을 마쳤다. 이 일로 1936년 왜로 경찰에 붙잡혔다. 그 뒤로 송몽규는 '요시찰인'으로 감시망의 대상이었다. 1942년 봄 경도에 들어간 송몽규와 윤동주는 "줄곧 조선 독립을 궁극의 목표로 삼아" 서로"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경도에 있는 조선인 학생들을 충동"('재경도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 책동개요')했다. 그러다 송몽규는 1943년 7월10일, 윤동주는 14일 왜로'특고경찰"에게 체포됐다. 그 뒤 2년 징역을 선고받고 갇힌 채 숱한 고문과 생체실험까지 겪은 두 사람이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윤동주가 절명한 날이 1945년 2월16일이다. 송몽규도 3월10일 그 뒤를 따랐다. 둘 다 스물일곱 나이였다.윤동주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송몽규는 눈을 감지 못했다. 시신을 거두러 간 아버지 송창희가 통곡하며 눈을 감겼다. '밤보다 깊은 꿈'을 펼치지도 못한 두사람의 원통한 옥사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옥사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위해 큰 일을 했을 것이다. 윤동주가 겨례 시인으로 되살아난 일은 천행이엇다. 송몽규는 이름조차 없다. 오늘 북방 용정 동산에는 두 젊은이의 무덤이 여름 햇살 아래 따가울 것이다. 문득 찾아낸 송몽규의 시 한편으로 이저런 감회가 깊다. /박태일 시인. 경남대 교수 
302    청년문사 송몽규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에 들다... 댓글:  조회:3934  추천:0  2017-03-07
  (193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단편소설   술가락   송몽규   윤동주의 문학생애를 영화한 "동주"가 절찬리에 상영되고 있는 와중에  윤동주의 숙명의 동반자였던 송몽규가 새롭게 회자되고 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사촌이자 동지였으며 문학에서는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다.  젊은 나이에 동아일보 공모에 소설작품으로 당선된 그에게서 윤동주는 큰 자극을 받고 그때로부터 작품에 날자를 표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독립운동가이자 청년문사였던 송몽규의 작품 한편을 소개한다.    - 독고혁   영화 속 송몽규의 형상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봐요!」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러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外國) 가잇는 내 안해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대게 이러한 뜻이엇다.       청년문사 송몽규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뺨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XX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 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술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이라고 해서(偕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을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 --동아일보 1935년1월1일자에 게재된  신춘문예 콩트 부문 당선작인 송몽규의 「술가락」 전문.     아명인 송한범(宋韓範)으로 게재. 1934년 무렵에 '문해(文海)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다. 그는 '文海藏書'라고 크게 새긴 큼직한 사각도장을 마련해서  자기의 책을 분류,정히하는데 썼다. 오늘날 윤동주의 유품인 『철학사전』(일어판)속장에  그의 도장 자취가 남아 있다.                                                                        ==================================== /////////////////////////////////////////////////////////////////////////////////// \\\\\\\\\\\\\\\\\\\\\\\\\\\\\\\\\\\\\\\\\\\\\\\\\\\\\\\\\\\\\\\\\\\\\\\\\\\\\\\\\\\ ==================================== 1917년 9월 28일~1945년 3월 7일 일본 유학 첫해인 1942년 여름에 방학을 맞아 귀향한 송몽규와 윤동주.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 윗줄 오른쪽이 윤동주. 윤동주의 왼쪽은 윤동주 조부의 육촌 동생인 윤길현. 송몽규의 왼쪽은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의 동생이자 몽규, 동주와는 학우였던 윤영선이며, 오른쪽은 그의 조카사위인 김추형.   1. 소개2. 생애 2.1. 출생2.2. 학업2.3. 독립군 투신2.4. 학업 재개2.5. 체포와 사망 3. 사후4. 송몽규 전집5. 대중문화   1. 소개[편집] 그들은 한 집에서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나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냈고, 거의 평생을 동반자로서 살아갔다. 그들은 같이 일본에 유학했고, 같은 도시에서 같은 사건, 같은 죄목으로 얽혀서 체포되고 재판을 받았으며, 같은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일 간격을 두고 나란히 옥사했다. 두 사람은 참으로 평생을 두고 생과 사를 함께 나누었다. 그래서 윤동주 연구에서 송몽규란 인물은 도저히 빠뜨릴 수 없는 존재로 크게 자리 잡고 있다."-《윤동주 평전》 宋夢奎. 독립운동가. 윤동주의 사촌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으로 활동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으로서 어린 시절 같이 자라고, 학업과 유학을 함께 했으며, 윤동주와 함께 잡혀가 똑같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아명은 송한범(宋韓範). 문호는 문해(문학의 바다). 필명으로 몽규(夢奎)를 우리말로 풀어쓴 "꿈별" 등이 있다. 이 본명은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큰 별을 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가명으로는 '고문해(高文海)'가 있다. 아명은 '한범'으로 어린 시절 송몽규를 알던 사람에게는 '한범이'로 불리는 일이 많다. 1917년 9월 28일생이며, 1945년 3월 7일 해방을 몇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본적지는 함경북도 경흥(慶興)이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출생지는 만주 간도성(間島省) 연길현(延吉縣) 지신촌(智新村) 명동둔(明東屯). 지금의 중국 조선족 자치구이다. 성격이 부끄럼 많고 조용한 윤동주와는 대조적으로, 소년 시절부터 활동적이고 리더쉽이 강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와 거의 모든 생애를 함께 한 형제 같은 인물. 다만 윤동주와는 달리 그리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에 회고한 문익환 목사에 따르면 그 당시 어려서부터 성적을 보면 송몽규, 윤동주, 윤영선, 문익환 자신이 항상 선두 그룹이었는데, 그 중에서 윤영선은 나중에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문익환은 자신은 윤동주가 자신보다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꼈고, 윤동주는 또 자신보다 송몽규가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동주는 몽규를 보고 "대기는 만성이다"라고 벼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뒤집어보면 현재는 내가 뒤진다는 걸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라고. 윤동주가 약관의 나이에 쓴 시가 사망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을 보면, 그 윤동주가 열등 의식을 가졌던 당시 송몽규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2. 생애[편집] 2.1. 출생[편집] 송몽규의 아버지는 북간도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宋昌羲, 1891~1971)이다. 송몽규의 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5세 때 충청도에서 연해주로 가다가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우상동에 머물러 가문을 일으켰으며, 송창희는 서울에 유학을 다녀왔다. 송씨 문중은 북일학교(北一)라는 교육기관을 세웠는데, 송몽규의 삼촌 손창빈은 홍범도 부대에서 독립군으로 싸우다 1920년 전사, 송창근은 일본-미국으로 유학하여 1931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몽규의 어머니는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의 딸로서, 윤동주의 아버지인 윤영석(永錫, 1895-1962)의 큰 누이동생인 윤신영(信永,1897-?)으로 그녀는 윤동주의 고모가 된다. 송창희는 25세 때 명동에 왔는데, 체격과 인물이 뛰어나서 윤동주의 어머니가 큰 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소개하였고,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가 자기 큰 딸과 선을 보게 하여 결혼시켰다고 한다. 송창희는 윤 장로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조선어와 양잠을 가르쳤다. 송몽규는 1917년 파평 윤씨 가문에서 친정집에 와 있던 윤하현 장로의 큰딸 신영에게 9월 28일 태어났다. 이후 12월 30일 이 집안의 외아들 영식의 가족에서 아들이 태어나서, 3달을 차이 두고 윤동주와 함께 태어나, 5살이 될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윤창식이 따로 집을 구하고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송몽규의 동생으로는 여동생 한복(1923년생), 남동생 우규(1931년생)가 있다. 2.2. 학업[편집] “윤동주는 문학에 특별한 재주가 있었고, 송몽규는 연설을 잘했으며, 정치적 리더십이 두드러져 장래 희망을 일찌감치 독립군으로 정해놓고 있었다.” - 문익환 평전 1925년, 8살 나이로 같은 마을의 또래였던 윤동주, 문익환, 김정우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 교장이자 외숙부 김약연 선생에게 사사 받았으며,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활발하고 리더쉽이 강한 인물로, 학생들을 모아서 연극 등을 공연하는데 주도했고, 5학년 때는 윤동주와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으로 찍은 문예지를 내기도 했다. 이 때,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서 수입해온 아동지 《어린이》,《아이생활》을 구독하여 읽고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윤동주와는 정 반대의 성격이었다. 김신묵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에서 '인민학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송몽규가 큰 일을 했다고 한다. 김신묵 장로는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이다. 1929년 봄, 아버지 송창희 선생은 교회학교를 인민학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송몽규 역시 고작 12살 나이에 송창희 선생의 주장에 따라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워낙 다부진 성격이라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연설을 했다고 한다. 1931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윤동주와 함께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20여리의 등교길을 매일 함께 다녔다고 한다. 룡정으로 이사하면서 1932년 4월에 은진(恩眞)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송몽규는 윤동주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1934년 12월, 중학교 3학년으로 18세 나이로 꽁트 《숟가락》을 써서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다. 아명인 송한범으로 실렸다. 윤동주보다 이른 나이였으며 윤동주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1934년부터 문해(文海)라는 호를 썻다. 글(文)의 바다(海)라는 뜻으로 송몽규가 문학에 품고 있었던 큰 뜻을 짐작케 한다. 송몽규는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크게 새긴 사각도장을 마련하여, 자신의 책을 정리하고 분류하는데 사용했는데,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이 도장이 찍힌 게 몇 권 있다고 한다.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 선생은 민족주의자였는데, 송몽규는 이때부터 민족의식을 강하게 가졌다고 한다. 2.3. 독립군 투신[편집] 돌연 송몽규는 은진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하여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남경으로 떠나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입학하였다. 한인반으로서는 2기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하여 장개석에게 지원을 받아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던 학교로서, 100여명의 조선인 학생이 군사 교육을 받는 곳이었다. 당시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장개석은 이를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송몽규는 '왕위지'라는 중국식 가명으로 교육을 받았다. 은진중학교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明羲朝) 선생[1]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1914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한 라사행(羅士行) 같은 시기에 송몽규와 함께 은진중학교 선배를 통해서 점조직으로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때 잡지를 만들었는데 김구가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줬다고 한다. 1년간 교육을 받다가 중국의 재정지원 중단으로 반이 해체되자 학교를 떠났다. 1935년 11월에는 중국의 제남지구(濟南地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이웅의 일파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는데, 1936년 3월, 산동성 성도 제남(濟南)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이 이래로 일본 경찰의 블랙 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송몽규는 강제귀국 조치를 당하고, 1936년 6월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 등의 혐의로 본적지 함경북도 웅기경찰서(雄基警察署)에 구금되었으며, 고문과 취조를 받다가 8월 말 무렵 석방되었다. 이 떄부터 경찰의 요시찰인물이 된다. 이후 송몽규가 일본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특고월보』에서는 송몽규가 1936년 3월에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권유로 자수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1936년 특고경찰이 작성한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따르면 송몽규가 체포된 시간과 장소는 '1936년 4월 10일, 제남'으로서, 북간도 대랍자에서 일본 경찰에 자수했다고 기록된 '1936년 3월'과는 다르다. 『사상월보』에 실린 판결문에는 송몽규가 1936년 4월 부터 본적지 옹기경찰서에 유치되어 취조를 받았다고 적시되어 있다. 이는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명시된 체포 시기, 정황과 일치한다. 송옹규는 송몽규가 일본 경찰에 잡혀서 본적지로 압송되는 현장을 우연하게 목격하였다. 이 역시 자수설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만일 송몽규가 집안 어른들 권유에 따라서 자수를 해서 압송되었다면 본가에서 연락이 가서 압송 때부터 뒷바라지를 시작했을 것인데, 정작 옹기 본가 사람들은 송몽규의 압송 현장을 우연히 보고서야 체포되었다는걸 알게 되었고, 무슨 사건으로 체포된 건지 전혀 몰라서 집안 어른들이 알아보려고 애썼다고 한다. 2.4. 학업 재개[편집] 1937년 4월, 용정대성중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재개했다고도 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간도에 있던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를 졸업했다고도 한다. 조선족 신문에서는 전자, 국가보훈처 국립유공자 보훈록에서는 후자로 쓰고 있다. 본인은 은진중학교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요시찰인 딱지가 붙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학교에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38년 4월에 서울로 가서 연희전문학교에 윤동주와 나란히 합격하였다. 경제적으로 유망한 학교에 가길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연희전문 문과에 갔다. 하지만 당시 연희전문은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였기 때문에 사촌 간이 나란히 합격했다는 것은 크나큰 경사였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1938년의 8월에 송몽규는 시 《밤》을 적어서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또한 연희전문에서는 1932년에 창간된 문과학생회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文友)》를 이어받아 문예부장으로서 활동했다. 문우의 마지막 호인 1941년 판에서 필명 '꿈별'로 '《하늘과 더불어》'[2]를 발표했다. 윤동주는 이 때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문우에서 함께 발표하였다. 편집인은 일본 유학을 함께 하게 된 강처중(姜處重). 『원고에다 광고에다 검열에다 교정에다… 도저히 2-3명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느꼈다.(중략)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 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후략)』 『原稿やら、広告やら、検閲やら、校正やら・・・・・・とても、二三人の手に依るべきでないことをつくづく感じた。(中略)この雑誌を受け取る人々は、内容の貧弱、編集のまづさなどのために顔をしかめるだらう。然し、これは若い、経験のない学生達の手によって出来上ったものであると云ふことと、東奔西走して、かき集めた原稿の大部分が載せられなかったことを諒解してもらひたい。国民総力運動に統合して、学園の新体制を確立せんがために、文友会は解散するやうになる。そして国民総力学校連盟は徹底的に活動しなければならないやうになる。そこで、交友会の発行としては、これが最後の雑誌になるわけである。然し雑誌発行の事業は連盟に継承されて、もっといい雑誌が出るだらうと思ふ。我々は新しきものへの合流を喜び且つそれへの尽力を誓ひながらこの最後の号を送る(後略)』(원문)[3] 송몽규는 자신들이 참가하게 된 문우 마지막 호에서 안타까운 심경이 가득한 후기를 남겼다. 대학에서 송몽규는 일제의 민족동화정책이 한국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쓰게 하여 고유의 문화와 민족 정신을 말살하는데 있다고 보았고, 민족문화를 지키고 향상시키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39년 2월 부터 동급생 윤동주, 백인준(白仁俊), 강처중(姜處重)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동인잡지 간행, 문학작품 품평회를 열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벌였다.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를 2등으로 졸업하였고, 1942년 봄에 윤동주와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유학을 떠나면서 도항증명서를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게 된다. 윤동주는 후에 이 때의 감정을 이라는 시로 드러내었다. 소무라 무게이(송촌몽규, 宋村夢奎); 1942.2.12 히라누마 도쥬(평소동주, 平沼東柱); 1942.1.29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에 합격했으며, 윤동주는 릿쿄대학에 들어갔다가 1942년 도시샤대학에 입학하여 송몽규와 재회했다. 42년 10월 부터 43년 7월까지, 도지샤대학의 윤동주와 제3고등학교 학생 고희욱(高熙旭) 등과 함께 교토 시내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고,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이 기회를 노려서 민족의 독립을 기획하는 한편, 민족정신을 부흥시킬 수 있는 학문적 연구를 하는 활동을 했다.  2.5. 체포와 사망[편집] 1943년 7월 10일,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윤동주는 7월 14일 체포되었다.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시모가모 경찰서의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1944년 봄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1944년 4월 13일에 윤동주와 함께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을 비판하였으며, 일본이 머지 않아 패전할 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서 대세를 몰아 조선 독립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형이 확정되어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윤동주와 함께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절명했으며, 3월 7일 송몽규 역시 사망하여 순국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옥사에는 생체실험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4]  송몽규의 시신은 명동 장재촌 뒷산에 묻혔으며, 윤동주의 비문을 지었던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청년문사 송몽규 지묘》라는 비문을 썼다. 3. 사후[편집] 송몽규와 인척지간으로 송몽규의 조카가 되는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송몽규의 일생도 함께 정리하였다. 그 동안 무덤의 위치가 잘못 알려져 있어서 찾을 수 없었으나,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수록된 증언 덕분에 올바른 묘지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90년 4월에 송몽규의 묘는 윤동주가 묻혀 있는 용정으로 이전하여 윤동주의 묘에서 10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함께 묻히게 되었다. 사후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4. 송몽규 전집[편집] 송몽규의 작품은 거의 남지 않았는데,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 연희전문학교에 에 발표한 《하늘과 더불어》, 조선일보 1938년 9월 20일자에 실린 《밤》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 문단이 곧 송몽규 전집(…)이다. - 술가락 -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5]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 하늘과 더불어 - 하늘-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 푸름이 깃들고 太陽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싶다 오오- 하늘아- 모-든것이 흘러 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思念들만 뿌려 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意欲의 殘滓만 쓰디쓴 追憶의 反추만 남아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戀人이 없어 孤獨스럽지 않아도 故鄕을 잃어 향수(鄕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의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맘속의 하늘을 간직하고 싶어 미풍(微風)이 웃는 아침을 기원(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 부르기를 가만히 祈願하련다.   - 밤 -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5. 대중문화[편집] 윤동주의 「이런 날」(1936. 6. 10)에서 언급되는 '형'이란 송몽규를 뜻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사이 좋은正門의 두돌긔둥끝에서 五色旗와 太陽旗가 춤을추는날, 금(線)을 은地域의 아이들이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로의乾燥한學課로 해ㅅ말간 倦怠가 깃들고 ‘矛盾’ 두자를 理解치 하도록 머리가 單純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頑固하던 兄을, 부르고 싶다. -1936년 6월 10일 ― 윤동주 이런 날 윤동주를 주제로 한 59편의 시를 엮어 이라는 시집을 낸 이탄 시인이 해당 시집 내에 라는 시를 적어놓은 것이 있다. 송몽규 이 탄 항상 윤동주의 뒤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윤동주의 앞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윤동주의 조용한 얼굴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독립군에 들어가 있을 때도 그의 그림자는 남겨놓고 떠났다 학교는 그럭저럭 윤동주와 맞먹었어도 생각하는 것, 그것을 옮기는 것은 송몽규였다 실천자, 그는 혼자 돌아다니는 윤동주를 나무라지 않았다 윤동주가 시를 쓰는 일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고종사촌의 아들 송몽규도 일본에 와 있었다 송몽규의 그림자는 넓고 넓었다 그는 그 안에서 쓰러진 벼농사를 일으켜 세우고 물을 대주는 일도 해야 했다 신작로에 말없이 백힌 돌 하나 그 돌 하나만이라도 뽑아서 뾰족하게 만들어야 했다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의 힘을 누를 것인가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에게 덤벼들 것인가 벌은 날아다니는 곤충 개미는 애써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곤충 이 두 곤충의 삶을 비교하여 벌은 벌대로 개미는 개미대로 살아야 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 만해의 부릅뜬 언어, 조선독립의 이유서 벌은 일본이고 개미는 조선일지라도 각기 살아가야 한다 벌이 어떻게 개미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송몽규의 생각도 이러했으리라 벌은 하루 종일 꿀을 모아야 하지만 저 허리가 잘록한 개미, 기어다니는 개미는 개미대로 즐거워야 한다 송몽규의 온몸은 이런 생각으로 차 있었다 이런 투로 그의 그림자는 그림자로 가득했다 윤동주의 뒤 윤동주의 앞 항상 그림자 안에서 지냈다 윤동주는 그림자만 보아도 뜻을 알았다 그 뜻에 다치거나 그 뜻에 흠집이 생기거나 그 뜻에 동티가 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림자에 더 첨가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림자를 잘 보관시키도록 해야 했다 마당에 서 있는 사철나무 껌껌해도 볼 수 있는 사철나무 항상 빛을 잃지 않은 사철나무의 뜻을 새삼 나무만큼 알았다 저 하늘에는 여전히 별이 떠 있다 사철나무나 저 별들은 변하지 않는 두 사람의 우정 하나가 동적이면 하나는 정적이다 윤동주는 조용한 성품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은 두 사람이 같았다 하나는 그림자, 하나는 그림자에 싸인 사람 송몽규, 윤동주와 연희전문학교 시절을 함께 했던 벗 강처중(1916-?) 은 윤동주의 유고시집 의 발문에서 아래와 같이 둘을 추모하였다. (전략)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殞命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朝鮮獨立萬歲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후쿠오카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 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주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 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윤동주의 생애를 다룬 2016년작 한국 영화 에서는 박정민이 송몽규 역으로, 윤동주 역을 맡은 강하늘과 함께 사실상의 공동 주연으로 열연했다. 이 작품으로 그해 다수의 주요 영화제에서 신인 남우상을 차지했을 정도.   [1]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동양사학 출신으로서, 민족주의자였다.[2] 목차에서는 "하늘과 더브러"로 되어 있다.[3] 출처[4] 동주(영화)에서도 송몽규(박정민 분)가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 앞에서 '형무소에서 이상한 주사를 맞고 있는 바람에 동주는 먼저 죽었고 자신도 얼마 안 남았으니 고향에 묻어달라'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5] 아내
301    시인과 수석인은 이웃이다... 댓글:  조회:2290  추천:0  2017-03-07
      길림시 이도 금풍촌에서...  ▶ 은유의 숙성 방법                  - 돌을 키우는 사람들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잘 나가는 시인도 아닐진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좀 쑥스럽기는 하지만 ……. 그래서 우회적으로 되물어 볼 때가 많다. ‘돌을 키울 줄 아느냐?’는 물음이 그것이다. 난초나 분재만 가꾸고 키우는 것이 아니라 돌멩이인 수석도 기르고 가꾸는 것이다. 수석인들을 두고 필자는 ‘돌을 키우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가 있다. 돌은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잘 읽고 키울 줄 아는 사람이 수석을 아는 사람이며 수석을 사랑하는 애석인(愛石人)이라고 할 수 있다. 수석은 산지(産地)에 따라, 또는 질(質)․형(形)․색(色)에 따라 읽고 키우는 방법이 다르다. 산에서 얻은 것은 산에서 얻은 것대로 강이나 해안에서 얻은 것은 그것대로, 산수경석은 산수경석대로 형상석(形象石)은 형상석대로 키우고 가꾸는 양석(養石)의 방법이 다르다.  시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대상이나 현상을 단순하게 보고 느끼는 것을 글로 옮겨놓는 것만으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보고 느낀 것을 정서에 맞게 가꾸고 키워 나가면서 숙성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문학의 문은 열리는 것이다.  콩을 삶는다고 바로 된장이 되는 것이 아니 듯이. 콩을 삶고 메주를 만들고 잘 트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고 이를 다시 소금물에 담가 숙성을 시켜야 그 속에서 진간장이 나오고 또 된장이 나오는 것처럼 발효되고 숙성되는 시간이 필요하게 된다. 수석의 경우도 하루아침에 양석되지 않고 끊임없는 애정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필자는 시작 교실을 열 때마다 ‘은유 연습’부터 시작하여 시의 싹을 틔우고 시로써 커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할 때가 많다. 돌을 키워 나가듯 메주를 숙성시키듯 한 마디의 은유를 키워나가면서 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해 본다고나 할까. 은유의 형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무엇은 무엇이다’, ‘무엇은 무엇으로’, ‘무엇이 무엇이라면’ 등의 형식을 바탕으로 키워나가는 연습을 해 보자. 다음은 어느 시작 교실에서 한 수강생이 연습한 내용이다. ① 가을은 오솔길     → 가을은 가지 못한 오솔길     → 설레는 가을은 가지 못한 오솔길  ② 가을은 조용한 반란으로     → 가을은 기지개 켜는 주부의 반란으로     → 한밤중의 가을은        기지개 켜는 주부의 조용한 반란으로 ③ 가을이 주머니 속 열쇠라면     → 추억이 그리운 가을이 주머니 속 열쇠라면     → 가을이 주머니 속 열쇠라면        앨범 속으로 여행을 떠나  ①은 ‘무엇은 무엇’형 은유 ②는 ‘무엇은 무엇으로’형 은유 ③은 ‘무엇이 무엇이라면’형 은유 등 세 종류의 은유를 3단계로 확장하고 키워나간 예이다. 다듬어야 할 부분이 여러 군데 있지만 그런 대로 커나갈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 간단하게 3단계로만 확장했는데도 다음에 와야 할 내용을 제한하고 그 범위가 좁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다음에 와야 할 내용을 제한하고 범위가 좁아지면 막연했던 내용들이 좀더 구체화되어 시어들 스스로 응집력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위에서 연습한 것들은 이제 막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재료를 적당히 섞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①의 경우를 “가지 못한 오솔길 / 가을 들녘 저 켠에 / ……” 등으로 다듬어나가는 숙성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옮겨 놓은 것만으로도 단순 연습 차원에서 시적 성숙으로 한 발짝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숙성은 일상에서 보고 느낀 것과는 좀 다르다. 예전에 “라디오는 수도꼭지다. 틀면 나오니까.”와 같은 재치문답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시에서는 ‘틀면 나오니까’와 같은 이유를 제시해 주지 않고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풀어놓게 되는 경우가 많다.  다음의 시를 보자.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그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장정일의 ⌈라디오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길안에서의 택시잡기』. 민음사, 1988, 64쪽)의 전문이다. 위의 재치문답을 문학적으로 숙성시킨 것은 아니지만, 재치문답의 차원과는 다르게 문학으로 숙성된 맛을 실감할 수 있게 해 준다.(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한 것이지만 … ) 이렇게 정서를 가꾸고 키워나가는 방법으로는 돌을 키우는 사람처럼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난초를 키우든 돌을 키우든, 키우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잘 키운 돌 하나가 그 사람의 석력(石歷)과 안목을 말해 준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시를 쓴 시인에게도 그를 대표하는 시는 문학적으로 잘 숙성된 한 편의 시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     그이 얼굴 ―김연희(1981∼ ) 돈이 없어서 힘들었다 맛있는 거 못 사 먹고 기저귀도 못 사고 갑자기 똑 떨어지니 어떡해 이럴 줄 몰랐는데 어떡해 난 몰라 난 몰라 생기겠지 생기겠지? 저녁에 해지고 애들이랑 구루마* 끌고 온 그이 마중 문 앞에서 그이가 웃는다 그을린 얼굴엔 찌든 땀이 가득     돈 많이 벌었어 십만 원 가까이 벌었다 그래서 맛있는 거 먹고 기저귀도 사고. * 내 남편 한받은 ‘구루부 구루마’를 끌고 홍대 앞을 다니며 음반과 책을 판다     화자는 젊은 여자지만 어린애가 딸렸으니 일거리를 찾기 힘들 테다. 젊은 남자일 화자 남편도 일자리가 불안정하다. ‘난 몰라/난 몰라’, 화자는 속수무책으로 애를 태운다. 아기 기저귀도 떨어져가고 어쩌면 쌀도 간당간당하고. 지난 세기의 60년대나 70년대 얘기가 아니다. ‘삼포세대’ 남녀가 부잣집 자식도 아니면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지 않아 처한 작금의 현실이다. ‘생기겠지/생기겠지?’, 문 앞에서 작은애를 업고 큰애의 손을 잡고 일 나간 남편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늦저녁. 다행히 ‘그이가 웃는’단다! 힘없고 쓸쓸한 웃음이 아니라 활짝 갠 웃음일 테다. 빤한 살림을 모를 리 없는 남자도 온종일 속이 탔겠지. ‘돈 많이 벌었어/십 만원 가까이 벌었다’! 의기양양한 남편의 보고에 아내 얼굴이 환해졌겠지. 애들도 영문 모르며 까르륵거렸겠지. ‘그을린 얼굴엔 찌든 땀이 가득’, 고맙고 안쓰러운 내 남편, 애들 아빠! ‘그래서 맛있는 거 먹고/기저귀도 사고’, 당분간의 다행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소박한 기쁨을 만끽하는 화자다.  내가 알기로 김연희는 일반적인 등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시인이다. 삶을 섬세한 촉수로 더듬는 자세를 잃지 않고 살려는 이가, 그 일상을 일기 쓰듯 시로 써서 그게 모이면 혼자 작은 시집으로 내는, 말하자면 ‘재야’ 시인이다. 이 시는 2년 만에 낸 그의 두 번째 시집 ‘작은 시집’에서 옮겼다. 쉽고 군더더기 없는 시어로 다듬은 시들에서 편편이 전해지는 시인의 여리고 따뜻하면서도 견결한 심성이 독자를 기어이 정들고 편들게 만든다. ========================= ////////////////////////////////////////////////////////// =========================우연이냐?!... 일치이냐?!...@@ {1234567891011}... [이데일리 e뉴스 최성근 기자] ...탄핵 심판 진행 과정에서 나온 숫자가 화제다. 지난해 12월 9일 ...탄핵안이 재적의원 300명 중 299명이 표결에 참여해 찬성 234명, 반대 56명, 무효 7명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여기에 탄핵안 발의일인 8일과 가결일 9일, 그리고 탄핵 선고 날짜 10일과 탄핵선고 시간 11시를 연결하면 결과가 1부터 11까지 나란히 연결되는 숫자 조합이다. 이에 일부 네티즌은 ‘역시 우주의 기운인가요’라는 반응을 내놓기도 했다... XML:N    
300    민족시인 윤동주를 연변 룡정 고향에서 모실수 있다는것은... 댓글:  조회:2373  추천:0  2017-03-07
[ 윤동주탄생100주년 계렬행사 2] 우리가 윤동주를 기리는 리유 (ZOGLO) 2017년3월6일    룡정.윤동주연구회 “百年의 记忆,윤동주를 읽다”특강회 행사 펼쳐   룡정.윤동주연구회가 기획한 윤동주탄생100주년 계렬기념행사- 2, “百年의 记忆,윤동주를 읽다” 특강회가 3월5일 연변대학 종합청사 세미나실에서 펼쳐졌다.   올해는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온 겨레가 추앙하는 시인의 백년제를 맞아 한국,일본, 미국, 오스트랄리아등 세계각지에서 년초부터 시인을 기리는 행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있는 가운데 룡정.윤동주연구회는 지난 2월 16일 윤동주 옥사 72주기를 맞아 룡정 동산의 윤동주묘소에서 시민 200여명이 동참한 대형추모행사를 가진후 또 한번 자치주 수부 연길에서 시인을 기리는 뜻깊은 자리를 마련했다.   특강회에서는 우선 룡정.윤동주연구회 임원들이 지역사회 문화령역에서 날로 그 기상을 떨치고 있는 룡정윤동주연구회가 이 3년간 걸어온 길에 대해 회고하고  “룡윤회”의 올해 행사 기획과 “룡윤회” 산하 력사답사팀의 답사기획을 발표하였다.   특강회는 연변시랑송협회의 협력으로 진행, 시랑송협회 회원들이 윤동주의 주옥같은 시편들인 “또 다른 고향”, "자화상", "참회록", “별헤는 밤”, "쉽게 씌어진 시"를 랑송했다. 곁들어 연변대학 “불사조” 풍물패의 공연, 그리고 룡정시 문화관 배우들의 독창과 독무 등 다채로운 공연으로 이어졌다.    특강회에서는 일본 교토 불교대학의 시노무라 리에 박사가 “일본에서 일고있는 윤동주 붐”에대해 소개하였다.   마지막으로 김혁 룡정.윤동주연구회 회장이 “우리가 윤동주를 그리는 리유” 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였다.   특강은 방대한 량의 도편자료를 곁들어 윤동주의 문학생애와 그 주변부 인물들의 력사의 갈피에서의 부침, 그와 더불어 중국조선족의 생성사, 한반도의 근대사를 폭넓게 아우르면서 윤동주라는 인물을 다각적이면서도 립체적으로 접근, 조명하여 청중들의 공명과 찬탄을 자아냈다.   김혁회장은 특강의 말미에서 “윤동주와 같은 민족시인을 고향에 모실수 있고  또 그이의 백주년을 기념할수 있는건 우리 문단, 나아가 우리 사회의 축복이다, 백년을 기록하는 그이의 생애와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인생의 유한을 넘어서는 문학과 예술의 영원을 본다”고 했다. “따라서 그이를 기리는 일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의 자긍심과 책임감을 일깨우는 시간과 기회로 될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소회를 밝히면서 “우리 다함께 손잡고 백년을 기록하는 민족인걸의 생애와 작품들을 읊조리면서 우리의 민족시인을 목청껏 노래하자”고 주문했다.   윤동주탄생100주년 계렬기념행사의 일환으로 펼쳐지게 되는 특강회는 연변지역뿐아니라 조선족 집거구역인 북경, 상해, 청도, 심양 등지에서도 펼칠 계획이다.   한편 윤동주의 고향인 룡정에서 발족되여 윤동주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고양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룡정.윤동주연구회는 고향의 시인을 기리는 일에 게으름 모르고 달려 연변지역에서 새롭게 “윤동주 붐”을 일으키고 있다.   대형 특강회에는 민족의 문화창달을 위해 로심초사하고 있는 많은 사회단체의 주요맴버들과 문인 그리고 윤동주를 애대하는 시민 160여명이 참석했다.  /조글로미디어       윤동주 시비 위치 :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민족 시비 공원                      간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우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려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윤동주 (尹東柱 1917∼1945)   시인. 아명은 해환(海煥). 북간도(北間島) 명동촌(明東村) 출생. 기독교 장로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 1929년 문예지 《새명동》 발간에 참여하였고, 1931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관립학교를 거쳐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35년 평양(平壤)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로 옮겼으나 신사참배문제로 폐교되자, 용정의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였다. 1938년 서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에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하였다. 1942년 일본 리쿄대학[立敎大學(입교대학)] 영문과 입학, 그해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동지사대학)]으로 전학하였다. 1943년 귀국 직전에 항일운동을 한 혐의로 송몽규(宋夢奎)와 함께 체포되어 2년형을 받고 규슈[九州(구주)] 후쿠오카형무소[福岡刑務所(복강형무소)]에서 복역중 1945년 옥사하였다. 그의 시는 초기 시부터 마지막 작품으로 보이는 《쉽게 쓰여진 시》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적 변모를 드러내고 있다. 초기 시 《겨울》 《조개껍질》 《버선본》 등에서는 암울한 분위기와 유년적 평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후기 시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등에서는 역사감각을 지닌 자아성찰을 보여준다. 그는 자전적이고 내성적인 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바탕을 둔 실존적 윤리의식, 그리고 시대와의 갈등에 성실했던 민족의식을 나타낸 시를 썼으며, 이러한 주제를 고도의 상징과 은유적 기법으로 독특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한국시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유해는 용정에 묻혔고, 1968년 연세대학교에 시비가 세워졌다.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있다.  
299    시는 생명의 황금빛이며 진솔한 삶의 몸부림이다... 댓글:  조회:2526  추천:0  2017-03-06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 허형만 진솔한 삶의 역사를 위하여 ―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   나는 누가 무어라 해도 '시'와 '삶'은 하나라고 믿고 있다. 나의 삶이 잠시도 쉬지 않고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전력투구 온몸으로 나의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면, 나의 시 또한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기에 나의 시에는 가장 가까이 나의 가족사(家族史)가 많다. 그러나 이 가족사가 한정된 범주의 나만의 가족사에만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간사(人間史), 나아가서 모든 생명 있는 것에까지 확산되기를 바란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졸시 한 편을 보자.     시월이라 청자빛 우리나라 하늘 닮은     만고에 순하디 순한 우리네 許松氏는     일자나 한 자도 무식에 무식이지만     아들 딸 서울 유학에 발톱 빠진 許松氏는     젊었을 적엔 머슴도 했다. 소작도 했다.     고향 그리워 고향 찾아 돌아오던 날 밤     절 먼저 물꼬부터 훑으면서 눈물 씹던 許松氏는     국법을 조심하고 국토를 중히 하야     전라도 순천땅 닷마지기 논빼미에 혼을 거두는     초야의 잡초보다 질긴 심줄 許松氏는     이마에 흐르는 땀이 푸르딩딩 번득거린 허허청청 달도 밝은 이 한밤     짚가리 옆에 쭈그려 지성으로 낫을 가는 許松氏는     조선낫이사 잘 들어야지야, 암 잘들어야지야 다짐하며     황토내음 오금 박힌 손바닥에 탁탁 침 뱉는 許松氏는     살아야 밍(命)인께, 먹어야 뵉(福)인께     푸른 댓잎 서걱이는 소리로     하얗게 하얗게 밤이슬에 젖어드는     낼 모래가 환갑이신 우리네 許松氏는                                        ―「許松氏」전문   이 시는 80년대 초반에 씌어져『현대문학』에 발표되고, 그 후 두 번째 시집『풀잎이 하느님에게』(1984, 영언문화사)에 실린 작품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許松氏'는 실제 인물로 필자의 숙부님이시다. 이 시 어느 한 구절에도 거짓은 없다. 그만큼 숙부님의 삶의 역사가 허튼 기교도 없이 과장도 없이 있는 그대로 객관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어찌 내 숙부님이신 '許松氏'한 분만의 삶의 역사이겠는가. 이는 곧 이 나라 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우리네 농투산이 모두의 이야기이지 않겠는가.   하이덱거(Heidegger)는 말했다. 언어라는 것은 인간이 역사의 존재로 존재할 수 있는 보증을 한다고, 언어란 인간존재의 드높은 가능성을 좌우할 수 있는 계기라고.   그래서일까. 다음과 같은 졸시를 쓰던 날 밤은 퍽도 많이 울었던 기억이 새롭다     비나리는 밤이면/어머니는/팔순의 외할머니 생각에/방문 여는 버릇이 있다.     방문을 열면/눈먼 외할머니 소식이/소문으로 묻어 들려오는지/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기대앉던/육순의 어머니.     공양미 삼백석이야 판소리에나 있는 거/어쩔 수 없는 가난을 씹고 살지만/꿈자리가 뒤숭숭하시다며/외가댁에 다녀오신 오늘,     묘하게도 밤비 내리고/방문을 여신 어머니는/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젖어     ― 차라리 돌아가시제./돌아가시제.                                                  ―「밤비」전문   내 갓태어났을 때부터 나는 외할머니의 사랑과 정성 속에서 자랐다 한다. 그 외할머니는 지금도 눈먼 채로 살아 계신다. 나이는 아흔 중반. 따라서 이 시 역시 80년대 초에 씌어져 그후『현대문학』,『살아있는 시』에 실린 뒤 세 번째 시집『모기장을 걷는다』(1985, 오상출판사)에 수록 되었다.   이 시를 쓰면서 나는 앞서 밝혔듯 한없는 울음을 울었다. 그것은 아마도 밤비가 주는 분위기와 창호지 방문을 여시고 머엉하니 빗속의 먼 허공을 바라보시는 늙으신 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외할머니 생각 끝에 내뱉으신 독백 등이 한데 어우러져 가슴을 저미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마지막 연, 어머니의 기가 막힌 넋두리, 한숨섞인 그 독백의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당시 육순의 어머니와 팔순의 외할머니를 통해 이땅의 모든 여인의 인간사를 시로써 서사화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강했지 않았나 싶다.   그후 나의 시는 80년대 중반을 넘어서 후반으로 오면서 정치적·사회적 상황 속에서 당시 시대가 내리꽂는 뜨거운 문초에 아파하며 그 대답으로 여섯 번째 시집『洪草』(1988, 문학세계사)를, 그리고 북녘시인에게 띄우는 형식의 화해와 통일의 조국을 갈망하는 일곱 번째 시집『진달래 산천』(1991, 황토)을 내놓았다. 두권 모두 연작시 형태로 발표된 시들로서 각각 한 가지 주제의식 속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이러한 작업은 지금도 변함없이 '땅시'연작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만큼 詩想의 체험은 항상 새로운 의미를 갖게하고, 그것은 관념과 관습과 나태를 거부한다. 휠더린(Holderlin)의 말처럼 시인은 神이 내리는 번갯불을 끊임없이 쐬야하고, 제비처럼 자유로워야 한다. 빠쁠로 네루다(P.Neruda)의 말처럼 사람은 날지 않으면 길을 잃기 마련이고, 새들의 비상을 보며 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오늘도 시를 쓴다. 시를 쓰는 순간, 살아 있는 나를 확인한다. 나는 시를 쓸 때마다 시는 곧 내게 있어 생명의 입맞춤이며 빛이며 목마른 희망이라는 신념으로 쓴다. 적어도 나에겐 고도의 기교나 말장난은 없다. 더더욱 어떤 아류나 유파나 유행성출혈병과는 거리가 멀다.   오직 '역사 속에서의 시인의 존재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진솔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며, 이러한 진솔한 삶의 역사를 새로운 언어로 쓰고자 지난한 몸짓을 멈추지 않을 뿐이다.   =====================================================================================   서정주 (1915∼2000)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엄청 뭉클한 시다. 잊혔던, 닫혔던, 억눌렸던, 그리움의 감정을 덜컥 열어젖히는 시. 논리를 깨부수는 이 그리움의 해방구에서 우리는 가슴이 벅차다가, 벅차다가, 뻥 뚫린다.  닥친 일들, 풀어야 할 문제들, 고된 노동, 이별의 슬픔, 조락의 불안, 잠시 놓아두고 하늘을 보자. 비운 마음을 청명한 눈부심으로 가득 채우자. 인생에 진짜 좋은 건 모두 공짜다.  
298    시인은 죽기전 반항하면서 시를 써야... 댓글:  조회:3179  추천:0  2017-03-03
알베르 까뮈와 명언들 Story Board/Wise Saying 카뮈Albert Camus, 1913∼1960 :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 평론가.  저서로는 [이방인] [시지프의 신화] [페스트] 등  나는 가난 속에서 자유를 배웠다. -카뮈  나는 죽음이 또 다른 삶으로 인도한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닫히면 그만인 문이다. -카뮈  노력은 항상 이익을 가져다준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게으름의 문제가 있다.  노력은 결코 무심하지 않다.  그 만큼의 대가를 반드시 지급해준다.  성공을 보너스로 가져다 준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을지라도 깨달음을 준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공통점은 게으름에 있다.  게으름은 인간을 패배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성공하려거든 먼저 게으름을 극복해야 한다. - A. 카뮈  병은 죽음에 대한 수련이다.  그 수련의 첫단계는 자신에 대한 마음 약한 연민의 감정이다.  사람은 결국엔 죽게 마련이라는 확신을 기피하려는 인간의  그 엄청난 노력을 병은 도와준다.  병을 통해서 인간은 성숙하게 된다.  병을 통해서 인간은 죽음 저 편의 세계를  깊이 묵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병을 두려워하지 말고 똑바로 응시하여  그것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귀담아 들을 일이다. - A. 카뮈  사람들은 경험을 당한다.  경험을 당하고 나면, 사람은 유식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련해진다.  경험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교사이다.  경험은 과학의 어머니다.  경험은 길을 안내해주는 램프이다. - A. 카뮈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희망도 없다. -카뮈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태반이 거의 무지에서 유래되는 것으로  양식(良識)이 없으면 착한 의지도 악의와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줄 수 있다. -카뮈  여행은 무엇보다도 위대하고 엄격한 학문과도 같은 것이다. -카뮈  영원한 존재가 아닌 인간에게는  완전히 모순된 가면(假面) 속에서의 엄청난 모방이 있을 뿐이다. 창조,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모방이다. -카뮈  우주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은 거대한 고독뿐이다. -카뮈  인간에게는 제각기 다른 운명이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을 초월한 운명은 없다. -카뮈  인간은 그가 말하는 것에 의해서보다는  침묵하는 것에 의해서 더욱 인간답다. -카뮈  인간은 자기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천재(天災)나 전쟁이 있는 한은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카뮈  인간이란 죽는 것이다. 그러나 반항하면서 죽어야 하겠다. -카뮈  인생은 건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불태워야 할 대상이다.  - A. 카뮈  자기 자신을 죽일 수 없는 한,  사람은 인생에 관하여 침묵을 지켜야 한다. -카뮈  자살이란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카뮈  절망도 기쁨도 저 하늘과 거시서 내려오는  빛나는 은근한 열기 앞에서는 아무런 근거도 없어 보인다. - A. 카뮈  정치와 인류의 운명은 이상이 없고  위대성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모양지어진다. -카뮈  진실은 빛과 같이 눈을 어둡게 한다.  반대로 거짓은 아름다운 저녁 노을과 같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카뮈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카뮈 창조한다는 것, 그것은 두 번 사는 것이다. -카뮈  행복을 잃는 것은 쉬운 일이다.  행복이란 항상 분에 넘치는 것이니까. -카뮈  혁명적 정신은 모두, 인간의 조건에 반대하는  인간의 항의 속에 있다. -카뮈  현재를 체험한 자만이 지옥이 무엇인지를 진실로 알 수 있다. - A. 카뮈  희망은 우리가 믿는 것과는 반대로 체념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삶을 체념하지 않는 것이다. -카뮈 ///////////////////===@ 덤으로 더 보기@===   1. 행운은 마음의 준비가 있는 사람에게만 미소를 짓는다.(파스퇴르) 2. 가장 귀중한 사랑의 가치는 희생과 헌신이다.(그라시안) 3.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은 힘이 아니라 불굴의 노력이다.(사무엘존스) 4. 실패란 성공이란 진로를 알려주는 나침판이다.(데니스윌리트) 5. 행동의 씨앗을 뿌리면 습관의 열매가 열리고,    습관의 씨앗을 뿌리면 성격의 열매가 열리고,    성격의 씨앗을 뿌리면 운명의 열매가 열린다.(나폴레옹) 6.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는 사람이 강한 적을 물리친 사람보다 위대하다.(아리스토텔레스) 7.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마음의 평온함을 뜻한다.(시세로) 8. 큰일을 이루기 원한다면 우선 자기를 이겨라. 자신을 이기는 것이 가장 큰 승리이다.    (드러먼드) 9. 나는 한 마디의 칭찬으로 두 달을 기쁘게 살 수 있다.(마크트웨인) 10.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생텍쥐베리) 11. 행동하는데 만족하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 몫으로 남겨두라.(발타자르 글라시안) 12. 행복은 무엇보다 건강 속에 있다.(G W 커티스) 13. 행복을 사치한 생활 속에서 구하는 것은 마치 태양을 그림에 그려놓고 빛이 비치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나폴레옹) 14. 행복을 잃기는 무척 쉽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언제나 분에 넘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 15.  행복이란 불만에 자기가 속지 않으면 된다.(러셀) 16. 행복이란 우리집 화롯가에서 성장한다.      그것은 남의 집 뜰에서 따와서는 안 된다.(제롤드) 17.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은 대개 노력가이다.     게으름뱅이가 행복하게 지내는 것을 보았는가.     수확의 기쁨은 흘린 땀에 정비례한다.(윌리엄 블레이크) 18. 행복하려는 것은 권리지만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한 알고 싶은 것을 배우고,     자신에게 최고의 기쁨을 가져다 줄 재능과 능력은 연마해야 함이 분명히 요구된다.     (버트런드 아서 윌리엄 러셀) 19. 행복한 결혼에는 애정 위에 언젠가는 아름다운 우정이 접목되게 마련이다.      이 우정은 마음과 육체가 서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한층 견고한 것이다.      (앙드레 모루아) 20. 행복함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욕망을 적게 하거나 재산을 많게 하거나 하면 된다.(프랭클린) 21. 행실은 각자가 자기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괴테) 22. 거룩하고 즐겁고 활기차게 살아라.      믿음과 열심에는 피곤과 짜증이 없다.(어니스트 핸즈) 23. 때맞춰 면학에 힘써라.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도잠) 24. 뜻을 높이 세우지 않으면 그 사람의 학문도 평범한 것으로 되고 만다.(진관) 25. 육체에 꼭 맞는 옷만을 입지 말고 양심에 꼭 맞는 옷을 입도록 하라.(톨스토이) 26. 참다운 벗은 좋은 때는 초대해야만 나타나고 어려울 때는 부르지 않아도 나타난다.      (보나르) 27. 친구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소로) 28. 위대한 행동이라는 것은 없다.      위대한 사랑으로 행한 작은 행동들이 있을 뿐이다.(테레사 수녀) 29. 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좋게 말하는 사람은 진정한 친구이다.(토마스 풀러) 30. 사랑은 바위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빵처럼 늘 새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어슐러 르귄) 31. 친구란 이름만큼 흔한 것이 없고, 진솔한 친구만큼 진귀한 것도 없다.(라 퐁텐) 32. 사랑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주는 것이다.(에리히 프롬) 32. 노력이 적으면 얻는 것도 적다. 인간의 재산은 그의 노고에 달렸다.(헤리크) 33. 사랑이란 쉽게 변하기에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서머셋 몸) 34. 결혼의 성공여부는 이미 혼전에 80퍼센트 가량 예상할 수 있다.(워렌) 35.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만은 완벽한 존재일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산다.      (시드니 포이티에) 36.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37. 사람의 위대함은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다.      문명이란 참다운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스마일즈) 38. 그들은 먹기 위해 살고, 소크라테스는 살기 위해 먹는다.(아데나이오스) 39. 실패를 걱정하지 말고 부지런히 목표를 향해 노력하라. 노력한 만큼 보상받을 것이다.      (노만 V. 필) 40. 만약 한마디로 삶의 정의를 내려야 한다면, "삶은 창조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클로드 베르나르) 41.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다.(소포클레스) 42. 오늘 계란 하나를 가지는 것보다 내일 암탉 한마리를 가지는 쪽이 낫다.(플러) 43. 방황과 변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바그너) 44. 시간을 단축시키는 것은 활동이요, 시간을 견디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안일함이다.(괴테) 45. 더 이상 자신있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당당하게 죽음을 택하라.(니체) 46. 나는 장래의 일을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틀림없이 곧 오게 될 테니까.(아인슈타인) 47. 미래를 신뢰하지 마라. 죽은 과거는 묻어버려라. 그리고 살아있는 현재에 행동하라.     (롱펠로) 48. 내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는 나로 하여금 헛되이 살지 않게 하라.(에머슨) 49. 생명은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발명이며, 죽음은 더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한 기교이다.      (괴테) 50. 조국을 위해,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만이 나의 희망이요 목표이다.(간디)
297    시는 천년을 기다려서 터지는 샘물이여야... 댓글:  조회:2372  추천:0  2017-03-03
         詩 쓰는 사람이 착한 이유 /윤성택         1. 들어가는 글  詩 쓰는 사람이 착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칸트의 미학에서 찾고자 한다. 물론 내가 詩를 쓰는 문청文靑이기에 갖고자 하는 답은 아니다. 이 시대가 갖고 있는 어두운 면들을 살펴볼 때 詩를 쓰는 사람이라도 착한 사람이었음 하는 바램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해 이 시대의 詩人들에 대한 나의 희망일지도 모른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미학을 다룬다. '자연의 목적론'이라 하기도 하고 '유기체철학'이라고 하기도 하는 그의 철학세계를 접하다 보면 한 가지 답에 도달하게 된다. 도덕적 감수성이 선행되어야 진정으로 미를 감상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이 말의 이면에는 詩 쓰는 사람이 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내포하고 있다. 칸트가 말한대로 자연미와 도덕성에 관련지어 알아보기로 하자.  2. 몸 글  예전에 나는 수원 근교에 있는 광교산에 간 적이 있었다. 나는 산 정상에 올라 가뿐 숨을 내쉬며 산의 아름다움에 취해 한동안 멍하니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詩를 썼었다.  빈몸으로 나를 초대하는 나무들이 있다  걷다 보면 산은 돌아누우며 어느새  좁은 샛길을 열어 보인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올라  오르는 것이 산 앞에 조금 더 겸손해 질 즈음  바람은 나뭇가지를 빗질하며  눈부신 햇살을 쏟아 놓는다  좁은 길 하나 사이로 서로 뿌리를 잇대고  가지를 잇댄 나무들  사랑하라 사랑하라  고개를 끄덕이며 귀엣말로 속삭이는 것 같다  언제나 갑갑한 넥타이에 매여  꽉찬 만원버스에 섞여  이정표도 없이  지금껏 얼마나 흘러 왔던가  세상 살아가며  한 해 한 해 나이테를 생각하며  봄산에 올라간다 묵묵히 겨울을 이겨낸  나무들의 수화를 배우러 간다  층계를 밟아 오르며 나를 짓눌렀던  삶의 무게 떨쳐 버리고 싶을 때,  하늘을 나누어 이고  서로 넉넉히 몸 맞대다 보면 알 수 있을까  저 아래 도시에서 키웠던 허물 많은 것들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얼마나 슬퍼지는가를  가리울 것 없는 이른 봄산에 올라서면,  나의 황량한 정신에 초록 물을  들이고 싶다.  ― 이른 봄산을 오르다, 윤성택  물론 나는 진정한 詩人이 못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진정한 詩人이 되고 싶어한다. 그 간절한 바램처럼 자연 속에서는 노래가 있다. 들판에는 풀잎과 동물들이 부르는 노래가 널려 있으며, 하늘에는 별과 바람이 부르는 대자연의 합창이 메아리친다. 진정한 詩人은 그 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공감한다.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의 관찰은 그 사람에 대한 정신의 깊이와 섬세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이러한 아름다움을 통해서 도시의 세속적인 소음을 극복하려는 충동을 가지게 된다. 그 아름다움을 고찰 할 수 있는 예술가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진정한 詩人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칸트는 도덕성이 자연에 의해서 투사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자연의 목적론은 법칙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자연의 유기적 질서와 근원을 탐구한다는 이론을 보인다. 이러한 노력은 취미 능력과 많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칸트의 취미능력은 바움가르텐으로부터 쉴러에게 이어지는 계보를 형성한다. 미적인 것에 대한 즉각적인 반성적 판단력이 취미 능력이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누구나 선천적으로 미를 판단하는 능력을 가졌음을 인정하고 거기서 보편적인 도덕성을 계발시켜야 하는데, 그러한 원리를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취미비판이라고 말한다. 잠깐 더 자세히 들어가자면, '이것이 아름답다!'라고 말할 때 거기서 드러나는 미적 판단의 분석을 칸트는 성질, 양, 관계, 양태의 네 가지로 분석을 했었다.  어쨌든 칸트는 미적 형식이 갖고 있는 특성은 목적 없는 한 목적성으로서 유기적 통일적인 질서구조가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진정 자연의 아름다움은 예술미의 모범성이 된다. 인간이 도덕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을 때 자연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자연이 마치 누군가 창조한 예술작품처럼 보일 때 아름답게 느낀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기막힌 자연을 창조한 사람이 누구냐라는 자연의 기술 앞에서 창조주에게 겸허함과 경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누가 쓴 편지일까?  거미가 소인을 찍고  능금나무가 저렇게 예쁜 우표를 붙인.  ― 가을 하늘, 김영남  칸트가 말하듯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암호를 해독하는 임무를 지닌 사람은 이렇듯 예술가이다. 또한 칸트는 '천재는 자연의 총아이다'라고 말한다. 자연을 해독하는 상상력의 중요성을 보이는 것인데 여기서 이러한 천재는 천성이며, 교육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칸트는 지적한다. 그래서 일까. 詩人은 고민한다. 자연 앞에서 해독되어지는 많은 것들이 천재가 아님으로 드러나는 일말의 불안감!  그는 그때  구름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을 뚫고  터져 흐르는 상처, 따가운 햇살 같은 상처를  아름다움이라고 해독했다  아름다움의 가장 처절한 結晶  단단한 바위 속의 어둠을 깨기 위해  천년을 기다려서 터지는 샘물  차가우면서 때로는 따사롭게 느껴지는 그것을  그는 눈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 땅의 도처에 살아 움직이는  눈물의 내력을 모른다  눈물의 가장 단단한 부분과 부드러운 부분이  어떻게 만나서 어둠 속에 함께 녹아 흐르는지  알지 못한다  내 주위의 싱싱한 풀들이며 바위며 샘물들  그가 이 땅에 풀어놓은 온갖 언표들을  나는 쉽게 해독할 수가 없다  무지한 내 생각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늘도 이 땅의 책들 위엔 이상한 꽃이 피고  이상한 열매가 맺히고 이상한 향기들이  춤을 추고 있다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 이상한 독서 (2, 3연), 박남희  결국 칸트는 진정한 예술은 자연처럼 보이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천재의 자연적인 능력은 미적인 정신과 맞닿아 있고, 이러한 미적 정신은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놀이에서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선천적인 내부의 것을 감성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미적 이념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쉴러가 말한 미적 직감 능력처럼 천재는 미적 이념을 표현해 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퓨즈가 나간 숲은 깜깜하다. 나무 꼭대기 새집조차 어둡다.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지고 온전한 것이 있다면 푸르던 기억에 항거하는 단단한 그리움이다.  한계절 사랑의 불 환하게 밝혔던 나무들, 열매들, 그리고 새들, 그 사랑의 흔적을 罪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물론 그냥 상처다. 이 겨울의 어둠 아니 한줄기 빛을 참고, 그래 빛이야말로 얼마나 많은 것들에게 상처가 되었나. 눈부신, 찬란한, 아름다운 따위의 형용사와 눈이 맞아 저지른 빛의 횡포, 가지마다 넘치는 축복인 양 위선의 잎새 덕지덕지 달아주며 오늘의 상처를 마련했었다. 누구라도 헛발 자주 내딛고 나뒹굴던 시절, 쌈짓돈마냥 숨겨둔 사랑의 잎새 하나만 있어도 가슴은 이리 훗훗한 그리움이다.  어딘가에 한 뭉치 퓨즈가 분명 있을 것이다. 계절과 계절의 끈을 잇고 명치 끝을 꾸욱 누르면 혼곤한 잠의 머리 절레절레 흔들며 숲은 그날처럼 홀연히 일어날 것이다. 때문에 새들은 이 겨울 떠나지 않고 하늘 받들어 빈 숲을 지키고 있다.  - 퓨즈가 나간 숲, 한혜영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생명을 창조하는 것처럼 예술가는 예술작품을 남긴다. 예술작품은 곧 삶을 해석하는 것이며 그리고 매우 독창적이다. 여기서는 모방이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유일한 작품인 것이다.  미학에는 두 가지 방법론이 있다. 하나는 '인식으로서의 예술'인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과 행위로서의 통합으로 이어져 근대 미학으로 감성적 인식의 최초였던 바움가르텐, 영국의 경험론이었던 칸트, 그리고 현대의 분석미학, 현상학적 미학을 등을 꼽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행위로서의 미학'예술로서 쉴러, 헤겔, 신막스주의의 미학으로 들을 수 있다. 이러한 미학을 살펴볼 때 칸트의 미학은 단연, 도덕적 감수성이 선행되어야 진정으로 미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결론을 생각하게 만든다.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 그 아름다움의 탐구에서 헤겔은 미적가상이라고 말했고 칸트는 미적 이념의 표현이다라고 말했다. 그러한 인상적이면서 경험적인 바탕을 둔 칸트 미학은 숭고미에 중점을 둔다. 도덕적으로 접근하여 마치 거대한 성당에 들어갔을 때 거기서 느끼는 경외감, 즉 종교적 신성미 등을 그는 중요시했다고 본다.  고드름 기둥  층층이 얼어붙은  층암절벽에  소나무 한 그루  눈을 이고 서서  희망과 절망의 수십 년 세월  안간힘으로 뻗어간 뿌리의 용틀임과  뿌리가 엉키는 자리에 터잡은  어린 진달래의  녹두만한 꽃눈을  바람 타고 나는  기러기 소리 들으며 시리게 바라보네.  - 세한도, 최두석  결국 칸트는 예술미와 자연미의 비중을 생각했을 때 자연미 쪽에 좀더 비중을 두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3. 나오는 글  음악의 성인이라 불리우는 악성 베토벤이 존경하는 철학자는 칸트였다. 그의 생전에 음악 악보에는 칸트의 실천이성 이론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칸트의 미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미학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도덕적 감수성이 선행되어야 진정으로 미를 감상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그 바탕은 참으로 詩人이 선할 수밖에 없는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 준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선천적으로 미를 판단하는 능력이 있으며,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은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도덕적 심성에서 우러난다는 절대절명의 명제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이 아름답지 못하다라고 아우성치면서 위장된 절망과 죽음을 외치는 무리들, 아니면 미증유의 행복을 가져다주었다고 외치면서 이 시대와 야합하여 살아가는 불나방 같은 무리들. 그 진흙탕 속에서 시를 일구어 내는 진정한 시인을 그리워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동양의 예로볼 때 공자는 공자어록에서 '시를 공부하지 않고서는 말할 게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시를 배움이 곧 말배움임을 뜻하면서 시가 말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하물며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지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만드는 좋은 예이다.  나는 솔직히 칸트의 미학을 공부하면서, 간절한 소망 하나를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시대의 시인은 분명 착해야 되는 것이며,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암호를 해독하는 그 작업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시인의 길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     강남춘(江南春) ―이흔복(1963∼ ) 산에 산에 두견 너는 어이 멀리를 우짖는가. 너는 어이 가까이를 우짖는가. 달 가운데 계수나무 그늘도 짙을러니 내 후생하여 너를 엿듣는 봄은 이리도 화안히 유난하다. 일찍이 내가 먼 곳을 떠돈 것이 내가 나를 맴돎이었으니, 미쳐 떠돎이 한결같이 쉬지 않았으니 도화는 붉고 오얏꽃은 희며 장미꽃은 붉다. 꽃은 꽃대로 잎은 잎대로 가끔 슬쩍 앞자리를 다투는 듯 나고 죽고 가고 온다. 날마다 당당(堂堂)하여 천천만만의 산 멀리서 바라볼 때는 앞에 서 있더니 어느새 뒤에 서 있다.     오늘 맑은 바람만 두루 불어 뿌리 없는 눈(眼) 속의 꽃을 오며 흩고 가며 흩으면서 그침이 없으니 아름다운 날들은 점점 멀어지고 나는 홀연 서러워진다.     이 시가 담긴 시집 ‘나를 두고 내가 떠나간다’는 인간 사회를 떠나 산으로 들로 섬으로 떠돌면서 달에서도 바람에서도 산천초목에서도 무상한 존재인 ‘나’를 확인하는 시편들로 채워져 있다. ‘내 후생하여 너를 엿듣는 봄’, 후생이라니! ‘오, 내 몸……오오, 내 사랑하는 몸!/나는 내가 내 몸을 벗었을 때 울었다’(시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죽음을 겪었으나 미처 몸은 이승을 떠나지 못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이후의 삶은 덤이니 ‘후생’과 다를 바 없을 테다. 두견새 멀리서 가까이서 우짖고 ‘달 가운데 계수나무 그늘도 짙’은, ‘이리도 화안히 유난’한 봄! ‘도화는 붉고 오얏꽃은 희며 장미꽃은 붉다’! 이 선연한 생의 감각! 그러나 중음신처럼 떠도는 존재에게는 스며들지 못하고 겉돌리.  제 생명의 유한(有限)함에 질겁해서 그 너머의 무엇을 찾아 헤매는 유정(有情)한 존재의 서럽고 쓸쓸한 마음이 유장한 시어로 아득히 펼쳐진다. ‘나란 무엇인가?’ ‘인생은 무엇인가?’ 아득한 질문을 좇아가는 데는 따로 힘이 필요하리라. 그 힘은 당장 생존에 급급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가 있어야 낼 수 있을 테다. 지난 시절에 사회의 불의에 나서서 저항한 젊은이들 중에 살 만한 집 자식이 많았던 소치다. 먹고사느라, 등록금 버느라 쫓기면서 사회에 눈을 돌리기는 쉽지 않다. 삶의 격을 높일 기회도 평등하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네.
296    시는 이미지 무덤이다... 댓글:  조회:2743  추천:0  2017-03-02
      "얼~ 쑤~ 신난다..."  3.인습적 상징을 이용하라  이상에서 나는 상징의 세 유형 가운데 이른바 개인적 상징에 대해 말했다.  다음은 이른바 인습적 상징. 말 그대로 이런 상징은 이미지와 관념의 관계가  내적 필연성(개인적 상징)이 아니라 오직 인습, 습관, 사회적 약속에 의존한다.  따라서 이런 상징은 일정한 역사적 사회적 특성을 소유한다. 말하자면 한 시대나 한 사회에서만 공유하는 상징이다. 예컨대 십자가는 기독교 정신을 상징하고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고 태극기는 조국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런 상징은  보편성을 띠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인들의 진리이고, 비둘기는  구약의 문맥에서 평화이고, 태극기는 한국인들의(그것도 남한만의) 조국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태극기를 보고 조국을 생각하지 않는다.  시대적 역사적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상징은 인습적으로 습관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난해하지 않고, 난해하지 않기 때문에 알기는 쉽지만  한편 시적 깊이가 사라진다. 오늘 이 시대에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 한다고,  비둘기를 보면서 평화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없고, 그런 생각은  과거의 인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치 않은가? 내가 사는 아파트 약방 앞 보도 블럭에는 언제나 비둘기들이 모여있다. 놀고있나 하고 가까이 다가가보면  평화롭게 놀고있는 것이 아니라 모이를 찾느라고 정신이 없다.  너희들이나 우리나 모두 먹고 살기가 이렇게 어렵구나. 이런 비둘기들은  평화가 아니라 먹고 살기위한 고통, 싸움, 전쟁을 상징 한다. 물론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유념할 것은 이런 인습적 상징을 사용하는 경우 그 상징적 의미를  시의 문맥에 의해 변형 시키고 변주해서 새로운 의미를 보여 주라는 것.  다음은 비둘기라는 이미지를 인습적 의미로 사용하되 변주시킨 보기이다.  비둘기들이 걷고있는 이 고요한 지붕은  반짝거린다, 소나무 사이, 무덤 사이에서  여기 공정한 ‘정오’ 가 불로서 구성 한다  바다를,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바다를!  산들의 고요를 오래 관조하는  오 사색이 받는 보상이여!  ㅡ발레리,[해변의 묘지](민희식, 이재호 역)  시의 표제가 ‘해변의 묘지’ 로 되어있기 때문에‘이 고요한 지붕’은 ‘바다’를 비유한다. 그렇다면 ‘비둘기들’은 바다를 걷고 있는 비둘기로 읽을수 있지만  바다에는 비둘기가 아니라( 물론 조금 미친 비둘기들은 바다에 떠 있을수도 있다. 김기림의{바다와 나비}에는 조금 미친 나비가 바다에 떠있음) 갈매기가  많고 따라서 이 비둘기들은 바다위에 떠있는 ‘고기잡이 배들의 하얀 돛대’를  비유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시행은 이중 구조로 되어있다. 하나는 지붕/ 비둘기가  바다/ 하얀 돛대를 비유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고요한 지붕을 비둘기가 걷고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 시행이 주는 시적 효과는 이런 이중 구조가 산출하고  그것은 고요한 지붕(바다)에 하얀 돛대가 비둘기처럼 평화롭게 떠있다는  독특한 의미를 낳는다. 물론 여기서 비둘기의 이미지는 평화라는 인습적 의미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 비둘기는 비둘기 이면서 동시에 하얀 돛대이기 때문에  이중적 의미를 암시한다. 요컨대 비둘기의 평화는 하얀 돛대의 평화가 된다.  이 시의 전경은 소나무 사이, 무덤 사이에서 바다가 반짝이는 풍경이고 후경은  하얀 돛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습적 상징은 그 의미를 이렇게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다음은 그 보기.  쫒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려 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수 있었을까요.  ㅡ 윤 동주.[십자가]  4. 원형적 상징  인습적 상징이 시대적 사회적 제약을 받고 그 의미가 사회적 인습에 의존 한다면  이와는 달리 이런 시대적 사회적 제약을 초월하고 상징(이미지)과 관념의 관계가 보편성을 띠는 것이 있다. 이른바 보편적 상징 혹은 원형적 상징 원형 archetype 은 으뜸가는 이미지, 원초적 이미지라는 뜻으로 시인들, 화가들이  수많은 이미지들을 생산 하지만 결국은 몇 가지 원형으로 환원 된다는 점에서  모든 이미지들의 바탕 이라고 부를 수 있다. 융에 의하면 이런 이미지는  사회와 역사를 초월하는 인간의 보편적 무의식이 생산하고 그런 점에서  집단 무의식의 산물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미지(상징)는 개인 무의식  그것도 성적 욕망이 생산 하지만 그의 제자인 융에 의하면 집단 무의식이 생산하고 이런 보편적 상징은 옛날부터 현재까지 인류에게 무의식적으로 계승되는  이미지이다. 그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소유하는 인간적 꿈, 소망, 원망을 암시한다. 이런 소망은 지금도 계속된다. 예컨대 이 세계는 물, 불, 바람, 흙의 원형으로  되어 있다거나 자연은 계절적으로 순환하기 때문에 인간도 다시 태어난다는  재생 원형 등이 있고, 재생 원형은 결국 우리 인간들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죽고 싶지 않다는 것, 이른바 불사不死,영원에의 꿈을 상징한다. 그런가 하면  지상의 삶을 초월해서 하늘, 천상의 세계에 닿고 싶은 소망도 있고,  이런 소망은 흔히 계단, 산, 나무, 탑의 이미지로 구현된다. 예컨대 이런 꿈은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 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 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ㅡ김 현승,[플라 타너스]  같은 시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시의 중심적 이미지는 ‘플라 타너스’ 이고  여기서 이 나무는 단순히 가로수를 의미 하는 게 아니라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있다’는 시행이 암시하듯이 하늘과 닿은 나무, 이른바 초월을 상징하고, 이런 초월은 지상으로부터 벗어나 신의 세계에 닿고싶은 인간의 꿈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시의 후반에는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는 시행이  나오고, 이런 시행을 전제로 할때 인간의 꿈이 나무의 꿈이고 이꿈은  신의 세계에 닿고 싶은 인간의 보편적 소망을 의미한다. 한편 인간 에게는 탄생,  창조, 재생에의 꿈이 있고, 이런 꿈은 계절적으로는 봄, 하루의 수준에서는  새벽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 피기 전에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  소년들의 성기에는 까닭 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 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ㅡ 이 성복,[1959년]  이 시의 경우‘봄’은 오지 않고, 그것도 여름이 되어도 오지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봄은 자연으로서의 봄이면서 동시에 이런 의미를 초월하고 따라서  관념으로서의 봄이고(‘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이런 봄이 암시하는 것은 새로운 삶, 신생, 창조, 계몽 등이다. 말하자면 죽음을 상징하는  겨울’과 대비되는 삶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런 삶, 새로운 삶의 창조가  불가능 하다는 것을 노래한다.  5.상징이냐 알레고리냐  상징과 알레고리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두 기법 모두 이미지를 보여줄뿐  직접 진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취의가 생략되고 매재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징과 알레고리는 다르고, 이 차이가 중요하다. 알레고리allegory 는 흔히 우유㝢兪, 우화偶話, 로 번역되고allegory는 그리스어로 ‘다른것’을 뜻하는 allos 와 ‘말하다’를 뜻하는 agoreuein 이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알레고리는 어떤말 혹은 이미지가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의미 한다는  뜻이고, 우화가 암시하듯이 이런 말하기는 상징과 다른 몇가지 특성을 보여준다.  첫째로 상징이 사물이나 이미지에서 출발해서 관념에 이른다면 알레고리는  거꾸로 관념에서 출발해서 이미지에 이르는 과정을 밟는다.  둘째로 상징의 경우 이미지와 관념의 관계가  1 : 다 로 나타 난다면 알레고리의 경우엔 1 : 1 로 나타나며 시간적  계기성을 띠고 그런점에서 연속성을 띤다.  셋째로 상징의 의미는 모호 하지만 알레고리의 경우엔 분명하고 교훈적이고,  넷째로 알레고리는 이 교훈적인 것과 관계가 있지만 실화성을 띤다는 것이다  ( 좀더 자세한 것은 이승훈, 시작법, 탑 출판사.1988, 201-206면 참고바람).  다음은 알레고리에 의한시.  그는 들어왔다.  그는 앉았다.  그는 빨강 머리의 이 열병은 바라보지도 않는다.  성냥불이 켜지자  그는 떠났다.  ㅡ 아폴리네르,[시](오 증자 역)  ‘그’는 시를 의미하고, 따라서 이 시는 시스기에 대한 시이며, 시쓰기  혹은 시상이 전개되는 과정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노래한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른, 혹은 환각으로 나타난 시가 성냥불을 켜자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 다음과 같은 시도 알레고리의 기법에 의존한다.  태양신이라고 불리우던 루이14세는  그의 통치 말기에  종종 구멍 난 의자에 앉곤 했다  지독히 어둡던 어느 날 밤  태양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가 앉더니  사라지고 말았다.  ㅡ 프레베르,[일식](오 증자 역)  루이 14세를 풍자한 시로 일종의 교훈이 있고, 설화성도 있고,  이미지가 시간적으로 발전한다.  =====================================================================     공일 ―임강빈(1931∼ ) 백목련 자리가 너무 허전하다 누가 찾아올 것 같아 자꾸 밖을 내다본다  우편함에는 공과금 고지서 혼자 누워 있다 이런 날엔 전화벨도 없다 한 점 구름 없이 하늘마저 비어 있다 답답한 이런 날이 또 있으랴 마당 한 구석에 노란 민들레 반갑다고 연신 아는 체한다 그래그래 알았다 오늘은 완전 공일이다      공일(空日)은 휴일, 곧 쉬는 날이다. 전에는 일요일 하루가 공일이었지만 주 5일 근무가 대세인 요즘은 토요일도 공일이다. 젊은 사람들은 일주일에 이틀 공일도 짧게만 느껴질 것이다. 밀린 잠 벌충하랴, 데이트하랴, 혹은 가족에게 봉사하랴, 거기에 더해 정신과 체력을 충전하고자 바쁜 여가를 보내다 보면 시간이 후딱 갈 것이다. ‘인생은 무료하면 길고 충실하면 짧다’고 독일 시인 실러가 말했다지. 싱겁기도! 하나 마나 한 말인 만큼 맞는 말씀이다. 누구 입에서 처음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싱겁지 않게 가슴을 치는 말이 떠오른다. ‘하루는 길고 일생은 짧다.’  ‘백목련 자리가 너무 허전하다’, 꽃 진 지 하루 이틀 아니련만 ‘백목련 자리’에 유독 가슴 허해지는 화자, ‘누가 찾아올 것 같아/자꾸 밖을 내다본’단다. 평일에도 배달되는 우편물이라고는 공과금 고지서요, 전화벨을 울리는 건 마케팅 전화이거늘 오늘은 공일, 아무도 화자를 찾지 않는다. ‘한 점 구름 없이/하늘마저 비어 있다’, 화자의 마음 상태는 가문 봄날의 공기처럼 촉촉함과는 거리가 멀다. 화자의 마음을 설렘과 기대로 그윽이 채워주던 봄의 생기는 꽃들과 함께 지고 여름을 향해 가는 긴긴 낮의 아무 자극 없는, 권태롭고 막막한 공일. ‘답답한 이런 날이 또 있으리’! 누구라도 반갑겠지만 화자가 정말 애타게 기다리는 건 시심(詩心)이리라. 세상에서 잊힌 듯 외롭고 답답해하는 화자는 ‘마당 한 구석에 노란 민들레’를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힌다. 홀연히 날아와 홀연히 핀, 홀연히 떠나갈 노란 민들레, 그것이 인생이거늘. 우리 비자꾸나, 비우자꾸나! ‘오늘은 완전 공일’!
295    시는 상식, 틀, 표준 등 따위가 깨질 때 탄생해야... 댓글:  조회:2561  추천:0  2017-03-01
      음력 2월 2일, "룡두절" 중국 전통 명절의 하나,ㅡ 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  상징과 이미지의 변주  1. 은유냐 상징이냐  직유가 발전하면 은유가 되고 은유는 서로 다른 범주에 있는 두 사물을  동일시하는 기법이라고 말한바 있다.  직유가 상사성을 토대로 두 사물을 비교한다면  은유는 비 상사성을 토대로 비유하고, 그런 점에서  전자에 비해 신비한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시적 호소력이 크다.  그러나 두 기법 모두 두 사물을 비교하고 비교되는 두 사물이 시에 나타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예컨대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사랑 빈집에 갇혔네  ㅡㅡ기형도,(빈집)  같은 시행에서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는 직유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말하자면 ‘나는 장님처럼’은 직유이고 따라서 이런 형식은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 시행을 예컨대 ‘나 장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라고 쓴다면  은유가 되고, 직유의 형식에서 비교조사‘ㅡ처럼’을 생략하면 은유가 된다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나는 장님처럼’이라는 말과  나는 장님’이라는 말은 두 사물을 비교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내용은 매우 다르다 전자가 문을 잠그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만  후자는 그런 설명보다 ‘나’와‘장님’의 동일시가 강조되고 따라서 이때  '나’는 ‘장님’이면서 ‘장님’이 아닌 이상한 특성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기형도는 장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만일 이렇게 쓴다면 그는 장님이고 장님이 아니다. 그리고 은유의 형식으로 시를 쓴다면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 아닌 다른 내용이 나오는게 좋다  한편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의 경우 ‘빈 집’의 이미지는 이 시행만 놓고 보면 무엇을 비유하는지 알 수 없고 따라서  취의 tenor 와 매재 vehicle 의 관계가 시행에 드러나지 않고 취의가 생략된 형식이 된다. 직유나 은유 에서는 취의와 매재의 관계가 드러나지만  이런 이미지의 경우에는 취의가 생략되고 매재만 드러난다.  이런 이미지를 상징 이라고 부른다. 그런 점에서 상징은 은유가 발전한 형식이고 그 의미는 하나가 아니고 분명치 않고 모호하다.  간단히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직유] t : v = 1 : 1 (나는 장님처럼)  [은유] t : v = 1 : 1 (나는 장님)  [상징] t : v = ? : 1 (빈 집)  ‘빈집’ 은 무엇인가를 의미하지만 이 시행만 놓고 보면  그 내용,취의 하고자 하는 말을 알 수 없다. 그렇치 않은가?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라는 시행만 놓고 보면  이 ‘빈 집’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분명치 않고 다만 전체 시를 찬찬히 읽을때  그 의미가 드러난다.이‘빈 집’이 무엇을 상징한다는 것은  (상징象徵은 영어로 symbol이고 그리스어로 뜻하는 명사 symbolon 에서오고  이 명사는 짜 맞춘다는 뜻의 동사 symballein 과 관계가 있다.  좀더 자세한 것은 이승훈, 시작법, 탑 출판사,1988,201면 참고바람),  그러니까 다른 무엇과 짜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이 이미지가 어떤 관념을 지시한다는 것은 이 ‘빈 집’이 말 그대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런 ‘빈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가엾은 내 사랑’ 을 의인법으로 읽어  ‘가엾은 내 애인’이 갇혔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랑이든 애인이든  ‘빈 집’에 갇혔다는 말은 이상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랑의 경우가 그렇다.  사랑이 어떻게 빈 집에 갇힐수 있는가?  요컨대 은유와 비교하면 상징은 비유되는 두 사물 가운데  취의가 생략되는 형식이고 또한 이미지와 관념의 관계로 치환하면  [은유] 이미지 : 관념 = 1 : 1 (장님은 나)  [상징] 이미지 : 관념 = 1 : 다 (빈 집은 무엇?)  와 같다. 이미지와 관념의 관계가 ‘1 ; 다’ 라고할 때 다는 다라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모자란다는 뜻이고 말하자면 상징의 의미는 아무리 퍼내고 쏟아 붓고  계속 의미를 부여해도 모자란다는 뜻이고 그러므로 다多는 다이고 다가 아니다.  그런가하면 또한 다는 다da이다. 이 다는 디자인 dasein,현존재라는 의미의  디자인의 접두사이고 현재 존재하는 나, 지금 여기있는 나의 의미를 강조한다.  현 존재는 존재 sein 와 현da이 결합된 존재이고 그러므로 여기da가 중요하다.  여기는 어디인가? 프로이트는 18개월짜리 손자가 혼자 노는 것을 관찰하며  그 아이가 오/아를 반복 하는것에 주의한 바 있다.  엄마가 없는 빈 방에서 아이는 혼자 실패 놀이를 하고 실패가 멀리가면 ‘오’ ,  실패가 돌아오면‘아’ 라고 소리친다, ‘오’는fort(저기),‘아’는 da(여기)  라고 해석한 것은 프로이트이다. (프로이트,“쾌락 원칙을 넘어서”).  나는 나를 멀리 던지고 그 나는 다시 돌아온다. 나를 던질 때 나는 돌아온다.  무슨 말인가?그러나 나는 떠나고 돌아오고 다시 떠나고 돌아온다.  요컨대 반복이 있을 뿐이고 이 반복, 죽고 싶은 마음이 칼을 찾는다.  칼은 날이 접혀서 펴지지 않으니 날을 노호하는 초조가 절벽에 끊어지려 한다’(이상,“침몰”).  나는 지금 시작법 (그것도 알기 쉬운?)에 대해 글을 쓰는지  1 ; 다’에 나오는 다에 대한 잡념에 시달리는지 잡념을 즐기는지  나도 모르겠다. 아마 다ㅡ 콤플렉스가 아니면 다ㅡ 강박증 인가보다.  요컨대 현재는 없기 때문에 현 존재의 다da는 그런 無,  불교식으로는 空 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이 무,공의 의미는 무엇인가?  모두는 무엇이고 많다는 것은 무엇이고 다 da는 무엇인가?  지난밤에는 밤새도록 비가오고 어두운 새벽 빗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갑자기 무섭고 서럽고 불안한 생각이 들어 작은방, 지금 이글을 쓰는방,  옛날에 딸애가 공부하던 방으로 와서 전등을 켜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돌아가  다시 잠이 든 이런 행위는 무엇을 상징 하는가?  2.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다시 요약하면 상징은 하나의 낱말, 어구, 이미지가  복잡한 추상적 관념을 암시하지만 그 의미는 전체 시를 전제로 알수 있다는 것.  말하자면 그 낱말이 나오는 시행에서는 생략된다는 것.  따라서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상징은 은유보다 고급이고  한편 은유보다 난해한 기법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기법이 나오고  이런 기법, 말하자면 상징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에서 상징을 강조한 것은 19세기 말 상징주의 시인들이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보들레르 이다. 그는‘교감’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자연은 하나의 신전神殿, 거기 살아 있는 기둥은  이따금 어렴풋한 말소리 내고  인간이 거기 상징의 숲을 지나면  숲은 정다운 눈으로 그를 지켜본다.  밤처럼 그리고 빛처럼 아득한  어둡고 그윽한 통합 속에  긴 메아리 멀리서 어울리듯  향기와 빛깔과 소리가 상통 한다.  ㅡ 보들레르,[교감](정기수역)  ‘교감’ correspodence 은 ‘만물 조웅’ 으로도 번역된다.  자연은 인간이 모르는 가운데 저희들끼리 무엇인가를 주고 받는다는뜻.  이 시에서 보들레르가 강조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자연이 주고받는 것들이다. 낭만주의자들의 경우  자연의 시인의 정서를 환기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치만 여기서는 ‘  신의 궁전’으로 노래된다. 신의 궁전 이기 때문에  자연은 이 세상을 초월하는 이상의 세계,  혹은 그런 세계로 갈 수 있는 수단이 되고 그런 점에서 자연은 신, 초월자, 절대자의 목소리를 상징하는 ‘상징의 숲’이 된다.  시인은 이런 숲의 목소리를 듣는자 이고, 그 목소리는 만물 조웅, 곧  '향기와 빛깔과 소리’가 서로 주고받는, 상통하는 것을 들을때 알 수 있다.  만물 조웅은 향기(후각), 빛깔(시각), 소리(청각), 가 서로 통합 하는 것  이라는 점에서 이른바 감각의 교감이고, 교감의 세계가 된다.  물론, 현대시를 쓰는, 혹은 쓰고자하는 분들은  반드시 이런 상징의 미학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 그  러나 최소한 상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역사적 문맥에 대한 지식이 요구된다.  요컨대 상징을 강조하는 시들은 이 시가 암시 하듯이  관념을 전제로 사물을 보는 게 아니라  감각에 의해 사물을 보고 그 감각이 환기하는 혹은 암시하는 여러 관념들을,  자신도 모르는 그런 관념들을 이미지로 전달해야 한다.  앞에서 인용한 기형도의 경우 ‘빈 집’은 상징적 이미지 이고 그는 살아가면서 ‘빈 집’ 을보고 혹은 감각적으로 체험하고 그 체험의 내용을 시로 노래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는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ㅡ 기 형도,[빈 집]  그가 쓰는 것은 ‘사랑을 잃은 마음’이고  따라서 ‘빈 집’ 은 이런 마음을 상징 한다.  상징적 이미지는 시에서 반복되는 수도 있고 이 시처럼 변주되는 수도 있다.  이 시의 경우 ‘빈 집’ 은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는 나’,  그리고‘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로 변주된다. 한편 이런 마음,  그러니까 ‘빈 집’이 상징하는 것들은 ‘짧았던 밤들’, 창밖을 떠돌던 안개들’,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로 변주된다.  이런 변주는 상징적 이미지가 보여주는 난해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적 책략이고  따라서 상징을 강조하는 시인들은 하나의 상징적 이미지를 선택하면  그 이미지를 시에서 여러번 반복하거나 다양하게 변주 시켜야 된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한 시인이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혹은 상상력에 의해  창조한 이미지를 개인적인 상징 이라고 부른다.  상징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는바  첫째는 개인적 상징, 둘째는 인습적 상징, 셋째는 원형적 상징이다 (좀더 자세하 것은 이승훈, 시론, 고려원, 1979, ‘상징의 유형’, 206ㅡ211면 참고바람).  개인적 상징은 사물에 대한 시인의 개인적 감각을 중심으로 그 내면성 혹은 상상의 세계를 강조하고, 이때는 그 의미가 모호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구조에 의해  혹은 시 전체의 문맥에 의해의미를 암시해야 한다. 인습적 상징과  원형적 상징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다루기로 한다. 개인적 상징을 중심으로  특히 그 상징적 이미지를 변주 하면서  한편의 시를 완성하는 시들을 좀더 살피기로 하자.  결국 그것은 제 몸 치근대는 바람 때문일 거야 큰 송아지만한 사  냥개 절뚝절뚝 저녁 어스름 이끌고 날 찾아왔지 큰 채와 사랑채  이음새 헛간에서 주먹밥을 나누어 먹던 한철을 잊을 수 없네 헛간 고  요에 상처 아물고 주먹밥의 유순柔順에 길들여졌다 할지라도 어느 날  훌쩍 사냥개 사라지고 텅 빈 고요만 비에 젖어 슬펐네  ㅡ 강 현국,[가난한 시절4]  이 시에서 ‘사냥개’는 ‘가난한 시절’을 상징한다.  그러나 '사냥개‘ 라는 이미지에는 단순히 먹이를 사냥하는 동물 이라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 공포, 사냥이 암시하는 야수성, 짐승이 짐승을 잡는  아이러니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강현국이 노래하는 가난은  단순히 배가 고프다는, 굶주린다는 의미가 아니고 또한 이 시에서 그는  사냥개가 ’절뚝절뚝 어스름 이끌고 나를 찾아 온다‘고 노래함으로써  그것이 병든 가난, 어스름이 표상하는 무력감을 동반하는 가난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는 현재 ’컹 컹 컹 밀려오는 저녁놀‘을 본다/듣는다.  그 가난은 밀려오며 무너진다. 말하자면 아직도 그를 지배하는 것은  옛날의 가난이다. 그는 지금도 저녁놀에서 사냥개 울음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석탄을 적재한 무개화차들이 굴러가는 철길 너머에 저탄장이 있다. 거대한 재의  무덤, 바람에 석탄 가루들이 일어난다. 그것은 흩어진다. 그것은 바람에 불려간다.  검은 바람, 펄럭이는 검은 작업복, 탄부들이 움직이고 있다  ㅡ최 승호[재]  이 시의 경우‘재’는 석탄 가루를 표상하고 그것이 재라는 점에서  죽음을 상징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불타고 나면 재가 된다.  그러나 이재, 죽음은 이 시에서 일어나고 흩어지고 불려간다.  물론 바람을 매개로 하지만 재의 이미지는 이런 변주에 으해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낳고 개인적 상징의 한 개를 초월한다.  재라는 이미지가 이렇게 변주 됨 으로써 그 상징적 의미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시에서 ‘재’는 죽음을 상징 하지만 그 죽음은 바람에 의해 일어나고  흩어지고 불려간다. 결국 재는 바람과 동일시된다.  바람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바람이 있다.  쾌락으로 가는  길목에 털이 있다. 궁창이 열리고  땅이 혼돈을 멈추었을때,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인간을  가장 나중에 완성 시킨건, 아무래도 털이다. 당신이 떠나고  세상에서 가장 싼값으로  인생을 구겨버리고 싶을 때, 낡은 침대나  주전자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털.  ㅡ 원 구식,[털]  이 시의 지배적 이미지는 ‘털’ 이지만 그 이미는 분명치 않고,  따라서 상징이 된다. 무엇을 상징 하는가? 이 ‘털’은 ‘쾌락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점에서 쾌락과 관계되고, 따라서 머리털이나 수염이 아니라  음모를 의미하고, 시인은‘당신이 떠난’ 방에서 낡은 침대와 주전자 옆에 떨어진 음모를 본다. 이 털은 육체에서 떨어진 것이므로 털로서의 기능이 없고,  따라서 죽음을 표상 하지만 이 시에서는 꼼지락거린다. 살아있다.  그리고 이 털은 대지의 풀에 비유된다. 말하자면 풀은 ‘땅의털’ 이다.  도대체 정사가 끝나고 ‘당신이 떠난 다음’ 낡은 침대에 떨어진 털을 보는 것도  이상하고 이 털이 살아 꼼지락거린다고 노래하는것도 이상하고 풀을 땅의 털이라고 노래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러나 모든 진리는 이렇게 이상한데 있고  이상한 것이 진리이다. 상식, 기준, 표준이 깨질때 진리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털은 육체를 보호한다는 의미가 있고, 머리털은 신체 정상에서 자란다는 점에서  정신적 힘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음모는 생식, 성행위를 돕는다는 의미가 있지만 이 털은 그런 의미를 벗어난다.  그러나 이 털은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을 상징한다. 죽은털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는 모두 상징적 이미지의 변주를 통해 변주와 함께 변주를 먹고 태어난다.  =========================================================================     묵매(墨梅) ―강영은(1956∼ ) 휘종의 화가들은 시(詩)를 즐겨 그렸다 산 속에 숨은 절을 읊기 위하여 산 아래 물 긷는 중을 그려 절을 그리지 않았고 꽃밭을 달리는 말을 그릴 때에는 말발굽에 나비를 그리고 꽃을 그리지 않았다 몸속에 절을 세우고 나비 속에 꽃을 숨긴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붓을 묻었다 사람이 안 보인다고 공산(空山)이겠는가 매화나무 등걸이 꽃피는 밤, 당신을 그리려다 나를 그렸다 늙은 수간(樹幹)과 마들가리는 안개비로 비백(飛白)질하고 골 깊이 번지는 먹물 찍어 물 위에 떠가는 매화 꽃잎만 그렸다 처음 붓질했던 마음에 짙은 암벽을 더했다      휘종이라면 중국 송나라의 그 유명한 제8대 황제를 말하는 건가. 민정(民政)은 몰라라 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다 제 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지. 한 남성의 못된 행각이 줄줄이 드러나서 그를 지탄하는 말로 세상이 떠들썩해도 누군가 안타까이 중얼거릴 수 있으리. ‘나한테는 참 좋은 오빠였어요.’ 휘종은 황제로서는 무능하고 괘씸한 자였지만 궁정 서화가(書畵家)를 양성하는 등 문화예술 애호가이자 수호자였으며 오늘날에도 ‘당대에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로 빼어난 화가’라고 평가받는 예술가다. ‘예술밖엔 난 몰라’ 하는 황제가 예술가들에게는 참 좋은 오빠이려나…. 그리 생각하고 태평성대를 누린 예술가도 많을 테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붓을 묻은’ 예술가도 적지 않을 테다. ‘사람이 안 보인다고 공산(空山)이겠는가’, 이 구절에서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에둘러서 표현하곤 했던, 검열이 일상적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는 건 지나치려나. ‘당신을 그리려다 나를 그렸다’, 당신을 그리려고 이런저런 맥락을 찾다 보니 내가 그려졌단다. 두 사람의 인연을 짐작하겠다. 화자가 그린 그림은 어두운 ‘물 위에 떠가는 매화 꽃잎’ 몇 점이다. 굽은 나뭇가지며 거기서 뻗은 잔가지며 다 생략하고 그린 ‘매화나무 등걸이 꽃피는 밤’, 매화꽃 향기 묵향(墨香)인 듯 배어나는 어떤 사랑의 내력…. 시인의 은근하고 진중한 삶의 자태랄지 시론(詩論)이 엿보이는 시다.
294    시 한수라도 마음속에 깊이 갈무리 해야 함은?!...ㅡ 댓글:  조회:3408  추천:0  2017-02-28
  우리의 시인을 노래부르자 - "별을 노래하다" 제1회 윤동주 시 가영歌詠대회에서 김혁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용정.윤동주연구회 회장)   존경하는 통화청산그룹 리청산 회장님, 존경하는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님, 존경하는 룡정시 문체국 라송화 국장님 그리고 윤동주를 애대하여 이 자리에 모인 문인 여러분, 시민 여러분… 오늘 우리는 조선족의 문화의 발상지이자 시인의 고향인 룡정에 모여서 겨레의 걸출한 시인 윤동주를 기리고 그이의 작품을 소리내여 읊조리는 뜻깊은 모임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오늘의 이 모임은 조선족의 유명한 기업인인 통화청산그룹 리청산 리사장님의 강개한 협찬으로 펼쳐지게 되였습니다. 리청산 리사장님은 땀으로 일구어낸 사재를 털어 “두만강 문학상”을 제정하고 지역사회의 조선족문화행사들에도 커다란 선행을 베푸는 등 문화와 굳게 손잡은 큰 기업인인줄로 알고 있습니다. 몇달전 두만강 문학상 시상식에서 저는 “청산을 에돌아 두만강은 흐르고”라는 제명으로 감개를 토한적 있는데 오늘은 또한 “청산을 에돌아 해란강이 흐르고”있네요. 짙푸른 청산처럼 우뚝이 서서 우리 문화의 흐름을 포용하는 청산그룹의 정성과 면려에 오늘 이 자리를 빌어 다시한번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 일제 암흑기, 우리말을 빼앗고 그 말로 된 시를 읊조리는 이들을 희생하도록 강요했던 그 시대의 문화는 얼마나 사악하고 충격적이였던가요. 하지만 그 암흑기의 시대 윤동주는 우리말 한자락을 붙잡고 으스러지는 육성으로 가장 아름다운 서정과 아픔을 읊어냈습니다.  한수의 좋은 시는 인간의 삶에 풍요롭고 아름답게 흘러들어 위로와 치유를 선사합니다.  윤동주의 시가 바로 그러한 시라고 해야겠지요. 시를 읽는 내내 시인의 심성 속에 녹아든 서정이 너무 좋아 소리 내 읽는것 또한 윤동주의 시였습니다. 때문에 시인이 태여난 옛 북간도에서도, 지어 그를 희생케 한 적국 일본에서까지도 그의 시가 일반에 읊혀지고 읽혀지는것이 아닐가요. 란세속에서도 윤동주 시인이 보여준 행동은 절망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놓지 않게 해 준 아름다운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러한 시적인 설교가 오늘날 부침속에 고심하고있는 우리 공동체의 삶에도 어필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시의 언어를 간직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을수록 삭막한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수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시가 독자들에게 나날이 외면당하는 세월입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위챗, 트위터, 페이스북 등 현대화 기기와 참조계가 넘쳐나고 공리에만 매인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라지만 시는 그무엇으로도 대체할수 없는 그런 역할을 분명히 하고있습니다. 그렇게 오늘 우리가 읊조리는 시 한수가 우리들의 삶에 보탬이 되였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명년이면 고향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 됩니다. 백년을 기록하는 그이들의 생애와 작품들을 오늘 다시 목청껏 읊조리면서 인생의 유한을 넘어서는 문학과 예술의 영원을 바라봅니다. 그러한 시인이 우리곁에 있다는것을 커다란 자호로 알고 그이의 시 한수라도 마음속에 깊이 갈무리 해야겠지요. 우리 함께 우리의 시인을 목청껏 노래부릅시다. 감사합니다. 2016년 7월 15일       동주님전에 제주(祭酒)를 올리며 김혁 (룡정.윤동주 연구회 회장,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 인물전 "윤동주 평전"의 저자)   오늘 꽃샘추위가 소슬한 이 산자락에서 동주님전에 삼가 맑은 술 한잔 올려 봅니다.  오늘 머리카락을 가득 스치는 솔바람속에 다시 동주님전에 머리를, 허리를 깊이 숙여 봅니다. 그제는 행사를 앞두고 눈이 내렸습니다. 마지막 시악을 쓰듯 하늘 가득 내리는 눈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조렸습니다. 모두다 동주님전에 내려쌓인 차가운 눈이 걱정되였던 것입니다.  동주님이 “눈오는 지도”에서 읊었듯이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처럼 함박눈이 나려,  슬픈것처럼 내가 끝 없이 찾아가야할 지도우에 덮인다. 바로 문자 그대로였습니다. ​ ​모두는 밤새 전화를 주고받으며 오늘의 행사에 차질이 빚어질가 무심히 내리는 마지막 눈을 안타깝게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온 산자락 가득 하얗게 만장처럼 덮인 눈자락을 헤치고 우리는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제 시인이 가신지도 어언 70주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오늘에도 이렇게 숙명처럼 시 줄 그적이다 홀연히 간 한 젊은 시인을 잊지 못해 모두들 추위를 가르며 고적한 산더기를 찾아드는 원인은 무엇일가요? 윤동주 시인은 민족적 저항시인,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시인으로 평가되며 일제암흑기, 식민지 시인으로서의 숙명을 안고 잊혀져가는 우리 말, 우리 시를 붙안고 현해탄 넘어 차디찬 감옥에서 스러지기까지 민족애를 고취한 시인으로 정평되고 있습니다. 민족사랑이 그의 저항의 원동력이였으며 그의 삶의 궤적이요, 지표였습니다. 그의 시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암흑기 지식인의 고뇌와 깊은 자기성찰의 의식이 글귀의 구절구절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는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내용과 사유를 일반인의 보편적인 정서에 꼭 걸맞게 서정적으로 표현하였기에 국계와 민족과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읽혀지고 애대되고 있는것입니다.  문학이 죽어가고, 민족공동체의 위기론이 거론되는 오늘 날, 그 부흥을 위해서는 윤동주의 문학정신과 민족사랑정신을 되새기는 와중에 우리는 그 공동에서 헤여나올 해법을 찾을수 있지 않을가요?  어느 특정일에나 시인일 떠올리고 시인의 몇수의 시를 읊조릴줄 아는것으로만 끝이 아닌, 우리가 자호하는 민족시인에 대한 사랑이 일반화, 보편화로 문단에 민족에 퍼질때 그때야말로 우리는 진정 그의 문학정신의 진수를 깨쳐 알고 민족사랑을 실천하는 문인으로, 민족인으로 거듭날수 잇다고 생각해 봅니다.  지난 80년대 중기 한 일본인 학자에 의해 묘소가 발굴된 이래 두 번의 큰 개수 작업을 거친 이 묘소우에 오늘 우리가 정성의 흙 한줌 다시 얹어 올립니다. 따끈한 제주 한 잔 받쳐 올립니다.  어느 학자님이 면려를 주었듯이 시인의 고향 룡정에서 발족된 시인을 기리는 연구단체로서 진정 “본가집”의 자세로 시인을 기리고 그의 정신을 민족일반에 선전하는 과업을 꾸준히 이어갈때 삭막해 지려는 우리들의 마음에도 “보람처럼 풀이 무성”할것임을 저희들은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당금 청명이라 가족의 막중한 기일도 뿌리치고 달려오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금방 발족한 저희 연구회에 커다란 신뢰를 주시고 굳게 손잡아주신 “장백산”잡지사와 불원천리 달려오신 남영전시인님에게 커다란 감사를 전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2015년 4월 4일   
        ▲ 상형문자인 한문으로 산(山) 자가 뚜렷한 암봉들. [제5절] 두음법칙 제10항 한자음 ‘녀, 뇨, 뉴, 니’가 단어 첫머리에 올 적에는, 두음 법칙에 따라 ‘여, 요, 유, 이’로 적는다. (ㄱ을 취하고, ㄴ을 버림.) ㄱ ㄴ ㄱ ㄴ 여자(女子) 녀자 유대(紐帶) 뉴대 연세(年歲) 년세 이토(泥土) 니토 요소(尿素) 뇨소 익명(匿名) 닉명 다만, 다음과 같은 의존 명사에서는 ‘냐, 녀’ 음을 인정한다. 냥(兩) 냥쭝(兩-) 년(年) (몇 년) [붙임1] 단어의 첫머리 이외의 경우에는 본음대로 적는다. 남녀(男女) 당뇨(糖尿) 결뉴(結紐) 은닉(隱匿) [붙임2] 접두사처럼 쓰이는 한자가 붙어서 된 말이나 합성어에서, 뒷말의 첫소리가 ‘ㄴ’ 소리로 나더라도 두음 법칙에 따라 적는다. 신여성(新女性) 공염불(空念佛) 남존여비(男尊女卑) [붙임3] 둘 이상의 단어로 이루어진 고유 명사를 붙여 쓰는 경우에도 붙임 2에 준하여 적는다. 한국여자대학 대한요소비료회사 제11항 한자음 ‘랴, 려, 례, 료, 류, 리’가 단어의 첫머리에 올 적에는, 두음 법칙에 따라 ‘야, 여, 예, 요, 유, 이’로 적는다.(ㄱ을 취하고, ㄴ을 버림.) ㄱ ㄴ ㄱ ㄴ 양심(良心) 량심 용궁(龍宮) 룡궁 역사(歷史) 력사 유행(流行) 류행 예의(禮儀) 례의 이발(理髮) 리발 다만, 다음과 같은 의존 명사는 본음대로 적는다. 리(里) : 몇 리냐? 리(理) : 그럴 리가 없다. [붙임1] 단어의 첫머리 이외의 경우에는 본음대로 적는다. 개량(改良) 선량(善良) 수력(水力) 협력(協力) 사례(謝禮) 혼례(婚禮) 와룡(臥龍) 쌍룡(雙龍) 하류(下流) 급류(急流) 도리(道理) 진리(眞理) 다만, 모음이나 ‘ㄴ’ 받침 뒤에 이어지는 ‘렬, 률’은 ‘열, 율’로 적는다. (ㄱ을 취하고 ㄴ을 버림.) ㄱ ㄴ 나열(羅列) 나렬 치열(齒列) 치렬 비열(卑劣) 비렬 분열(分裂) 분렬 선열(先烈) 선렬 진열(陳列) 진렬 규율(規律) 규률 비율(比率) 비률 실패율(失敗率) 실패률 선율(旋律) 선률 전율(戰慄) 전률 백분율(百分率) 백분률 [붙임2] 외자로 된 이름을 성에 붙여 쓸 경우에도 본음대로 적을 수 있다. 신립(申砬) 최린(崔麟) 채륜(蔡倫) 하륜(河崙) [붙임3] 준말에서 본음으로 소리나는4) 것은 본음대로 적는다. 국련(국제연합) 대한교련(대한교육연합회) [붙임4] 접두사처럼 쓰이는 한자가 붙어서 된 말이나 합성어에서, 뒷말의 첫소리가 ‘ㄴ’ 또는 ‘ㄹ’ 소리로 나더라도 두음 법칙에 따라 적는다. 역이용(逆利用) 연이율(年利率) 열역학(熱力學) 해외여행(海外旅行) [붙임5] 둘 이상의 단어로 이루어진 고유 명사를 붙여 쓰는 경우나 십진법에 따라 쓰는 수(數)도 붙임 4에 준하여 적는다. 서울여관 신흥이발관 육천육백육십육(六千六百六十六) 제12항 한자음 ‘라, 래, 로, 뢰, 루, 르’가 단어의 첫머리에 올 적에는, 두음 법칙에 따라 ‘나, 내, 노, 뇌, 누, 느’로 적는다.(ㄱ을 취하고, ㄴ을 버림.) ㄱ ㄴ ㄱ ㄴ 낙원(樂園) 락원 뇌성(雷聲) 뢰성 내일(來日) 래일 누각(樓閣) 루각 노인(老人) 로인 능묘(陵墓) 릉묘 [붙임1] 단어의 첫머리 이외의 경우에는 본음대로 적는다. 쾌락(快樂) 극락(極樂) 거래(去來) 왕래(往來) 부로(父老) 연로(年老) 지뢰(地雷) 낙뢰(落雷) 고루(高樓) 광한루(廣寒樓) 동구릉(東九陵) 가정란(家庭欄) [붙임2] 접두사처럼 쓰이는 한자가 붙어서 된 단어는 뒷말을 두음 법칙에 따라 적는다. 내내월(來來月) 상노인(上老人) 중노동(重勞動) 비논리적(非論理的) 본음이 ‘라, 래, 로, 뢰, 루, 르’인 한자가 첫머리에 놓일 때는 ‘나, 내, 노, 뇌, 누, 느’로 적는다. 붙임 1.단어 첫머리 이외의 경우는 두음 법칙이 적용되지 않으므로, 본음대로 적는다. ‘릉(陵)’과 ‘란(欄)’은 독립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뜻에서 ‘능, 난’으로 써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왕릉(王陵), 정릉(貞陵), 동구릉(東九陵)’처럼 쓰이는 ‘릉’이나, ‘독자란(讀者欄), 비고란(備考欄)’처럼 쓰이는 ‘란’은 한 음절로 된 한자어 형태소로서, 한자어 뒤에 결합할 때에는 통상 하나의 단어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본음대로 적기로 한 것이다. 강릉(江陵) 태릉(泰陵) 서오릉(西五陵) 공란(空欄) 답란(答欄) 투고란(投稿欄) 다만, 예컨대 ‘어린이-난, 어머니-난, 가십(gossip)-난’과 같이 고유어나 (구미) 외래어 뒤에 결합하는 경우에는, 제11항 붙임 4에서 보인 ‘개-연(蓮), 구름-양(量)’의 경우처럼 두음 법칙을 적용하여 적는다. 붙임 2.접두사처럼 쓰이는 한자어 형태소가 결합하여 된 단어나, 두 개 단어가 결합하여 된 합성어(또는 이에 준하는 구조)의 경우, 뒤의 단어는 두음 법칙에 따라 적는다. 반-나체(半裸體) 실-낙원(失樂園) 중-노인(中老人) 육체-노동(肉體勞動) 부화-뇌동(附和雷同) 사상-누각(砂上樓閣) 평지-낙상(平地落傷) 한편, ‘고랭지(高冷地)’는 ‘표고(標高)가 높고 찬 지방’이란 뜻을 나타내는 단어이므로, ‘고-냉지’로 적지 않고 ‘고랭-지’로 적는 것이다.
292    시는 "빈 그릇"이다... 댓글:  조회:2403  추천:0  2017-02-28
1,일상성과 시 인간의 삶은 일상성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일상성이란 사전적인 의미로 말하면 인간이 노동을 하고 소비 생활을 하고 가족-사회생활 등을 영위해나가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의미를 지니는 정상적이고 반복적인 생활과정의 특성을 말한다. 일상성은 일반적으로 비일상성에 대비되는 개념이지만, 종종 미적, 예술적 창조성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인식되거나, 성(聖)에 대한 속(俗)으로, 공적인 것에 대한 사적인 것으로, 놀이나 축제에 대비되는 노동이라는 특성을 지닌 개념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처럼 일상성은 우리의 삶 속에서 폭 넓은 의미망을 구축하고 있으며, 그 중요성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일상성이라는 개념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1년 프랑스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가 ‘일상성’을 사회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도입하면서부터 였다. 그 이후 인류학, 역사학,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일상성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일상성이 일정한 범주에 머물러 있지 않고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 현대에 이르러서 획기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의 일상은 과거 농축업 중심의 사회에서 컴퓨터와 자동차, 휴대폰,고속전철 등으로 대변되는 거대한 정보-소비중심의 사회로 급속하게 변모되어 왔다. 이러한 변모는 르페브르가 제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일상성의 세 가지 단계, 즉 일상적 삶의 성격과 리듬이 자연의 성격과 리듬과 구별되지 않았던 시기에서, 산업화와 도시화가 맹렬히 추진되고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대체함으로써 상품, 시장, 기표, 화폐의 논리가 일상의 삶을 지배하던 시기를 거쳐서, 일상이 프로그램화되고 집단적으로 관리되고 행정화되는 시기에 이르는 과정과 대체로 일치한다. 최근에는 일상성이 광고에 의해서 과장, 조작되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복잡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일상성이 단순히 생존의 문제에만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루하루의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은 단순히 생존의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의미의 차원에까지 확대된다. 인간의 삶에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면 인간이 삶을 영위해야 할 당위성은 없어지게 된다.  문학에 있어서 일상성은 인간의 생존의 문제와 더불어 의미의 문제를 주요 주제로 삼고 있다. 문학에서 나타나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주제가 확장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시에서의 ‘낯설게 하기’는 일상성의 메너리즘을 극복하고 자아와 세계를 새롭게 인식한다는 점에서, 일상성의 비일상성화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인간이 일상성을 비일상성화 하려는 노력은 일상적 삶의 세계가 차츰 광고, 언론, 미디어 등에 의해 포위되어서 일상이 물질문명의 식민지로 전락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에서의 ‘낯설게 하기’야말로 일상성에 매몰되어 가는 삶을 새롭게 조명해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발견해내려는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들은 누구나 일상을 시적 소재로 삼고 싶어한다. 흔히 환상이나 꿈, 축제나 놀이의 세계를 지향하는 시들에서 볼 수 있는 비일상성도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일상성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점에서 일상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2.일상에서의 비일상성 찾기-박소원의 시  박소원의 시는 일상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일상성을 뛰어넘어서 대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보인다. 이러한 노력은 일상성을 의도적으로 허물어서 우리가 일상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비일상적인 세계를 제시하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다.  생수 한 병 들고 앞산을 오른다  누가 베어 놓았을까  아카시아 나무가 한 짐 꽃을 짊어지고  중턱에 탁,하니 누워 있다  그다지 크지 않던 나무 한 그루가  유월의 가슴을 펑 뚫어 놓았다  그 곳에선  바람만이 부지런히 길을 넓히는 중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 자리처럼  저 나무의 몸이 언제 저렇게 거대했던가  한 세상을 짓고도 터가 남겠구나  매일 산행을 하면서  몸 기대 쉬면서도 눈치채지 못했다  (중략) 오늘 내린 비는 범람한 홍수처럼 아카시아꽃을  휩쓸고 지나간다  마지막 몇 몇 꽃들은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천진하게 누워 비에 젖는다  자작자작 굴러 떨어지는 빗방울을 따라  떨어진 꽃잎들이 우루루 몰려나간다  때, 아닌 봄 홍수다  ―「봄, 홍수」부분 시인은 매일 생수 한병을 들고 산행을 하다가 어느날 문득 한짐 꽃을 짊어지고 산 중턱에 누워있는 아카시아를 발견하다. 평소에는 그다지 크게 보이지 않던 나무가 쓰러져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새삼 거대하게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무가 서있던 하늘이 새삼 커다란 구멍으로 보이고 시인에게는 그것이 유월의 가슴이 펑 뚫린 것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시인의 인식은 쓰러져 누운 아카시아가 돌아가신 아버지로 겹쳐보이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물론 자연적 대상을 인간으로 인식하는 것은 시의 일반적인 문법이지만, 시인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이 시의 후반부에서 오늘 내린 비가 아카시아 꽃을 휩쓸고 가는 상황을 제시한다. 그런데 몇몇 꽃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천진하게 누워 비에 젖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상황의 대비는 아카시아 나무(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심각한 상황이 아카시아 꽃(자식)에게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여기서 비가 아카시아 꽃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은 실제적인 상황으로 제시되어 있지만 필자의 눈으로는 시인의 내면적인 상황으로도 읽힌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지막 연 “때, 아닌 봄 홍수다”를 읽으면, 쓰러진 아카시아를 보면서 아버지의 빈 자리를 느낀 시인이 돌연 눈물을 쏟는 것으로도 보인다. 흔히 봄에는 홍수가 나지 않는데, 시인은 낯설게도 봄과 홍수라는 이미지를 병치시킴으로써 일상적인 문법을 허물고 상황을 새롭게 읽어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비가와서 홍수가 나는 것은 아카시아가 쓰러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죽은 아버지와 연관된다. 시인은 쓰러진 아카시아, 즉 일상성의 세계를 죽은 아버지, 즉 비일상성의 세계와 연관시킴으로써 ‘봄-홍수’의 의미를 전경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다른 시에서도 보인다.  불을 끄고 바닥에 등짝을 붙이고 가만히  혼자가 되면  잔꽃무늬 벽지를 바른 천정과 흰색 북박이장 문짝이 60럭스를 한 순간 꿀꺽 삼키고 어머나 잔꽃무늬들 자취없이 몸색이 사라진다 실컷 먹었으니, 입맛이 없다는 듯 마음속에 그어 놓은 금들도 자취없이 쿨럭 사라진다는 듯 돌아 누워 벽에 이마를 붙인다 나에게도 진정 세월이 약이 되어줄까 세월의 차디찬 가슴에 머리묻고 있으면 이상하게 아늑해져요 그의 등뒤에는 덩어리 몇 개 꿀꺽 넘기는 배고픈 누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또르륵, 또르륵, 킁 또르륵, 또르륵, 킁 좀체 잠을 못 이룬다  ―「소등」부분 인용 시에서 불이 켜있는 상태가 일상적인 세계라면 소등한 상태는 비일상적인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은 불을 끄고 바닥을 등짝에 붙이고 천장을 본다. 그 순간 불이 켜져 있을 때 보이던 금들과 잔꽃무늬들이 자취없이 사라진다. 이러한 현상은 시인에게 “마음속에 그어놓은 금들”이 사라지는 것으로 겹쳐져 보인다. 시인은 돌아누워 벽에 이마를 붙이고 “나에게도 진정 세월이 약이 되어줄까”를 생각한다. 이러한 시인의 소망은 그의 등 뒤에서 “또르륵, 또르륵, 킁”하는 문짝 소리를 내면서 시인처럼 잠들지 못하고 있는 장롱의 독백, 즉 “세월의 차디찬 가슴에 머리묻고 있으면/이상하게 아늑해져요”라는 진술과 맞물려서 은연중에 해답이 제시된다. 하지만 이러한 진술은 단순히 긍정의 차원에 서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진술은 “세월의 차디 찬 가슴”이 풍겨주는 뉘앙스처럼 따뜻하지 않고 냉소적이며 역설적인 느낌이 강하다. 이런 시인의 관점을 감안해 보면, 시인의 마음 속에 있는 상처는 그리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시 「나무 도마」에서도 시인은 “평생 칼질을 당하다가 죽어서도/ 또 칼질을 당하는/ 나무도마”를 보면서 자신의 “엇나간 두 번의 수술자국”을 더올리며, “서른이 넘어가면 線이 점차 흐려진다”는 사실을 들어 “모든 상처는 스스로의 치료방법을/ 들고 오는 것일까”를 자문하고 있다. 이 시 역시 그 주제나 기법 면에서「소등」의 연장선상에서 읽혀진다는 점에서 박소원시인의 시적 성향을 대변해주는 작품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박소원의 시들은 일상성을 이미지를 통해서 낯설게 부각시킴으로써 관습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비일상성의 세계를 전경화시켜서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고 있는 비일상성의 세계는 그다지 과격하지 않아서 마치 일상성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3.일상의 병치와 진실찾기-정호의 시 일상이 우리의 삶과 너무 밀착되어 있을 때 우리는 일상의 관습 속에 숨어있는 허위성이나 모순을 발견해내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헛점 투성이라서 매일매일의 일상에는 우리가 극복해 나가야 할 것들이 무수하게 숨어있다. 정호 시인 역시 그의 시를 통해 일상에 숨어있는 허위성이나 새로운 진실를 탐색해 나간다. 그런데 정호 시인의 일상 바라보기는 나란히 놓고 보기, 즉 병치를 통해서 구현된다. 빈 들 밭둑 뽕나무 가지 끝에 꿰어진 개구리 몸통 하나 두 눈 툭 불거진 채 하늘 나르듯  앙상한 사지 쭉 뻗어있다 지난 가을에 꿰논 것 깜빡 잊어먹은, 아니다 그게 아니다 홀어미 늙은 까치 봉양하느라 여기저기 몰래 감춰둔, 아니다 그게 아니다 죽은 어미 생각날 때마다 뽕나무 밭둑 찾아와  저 조촐한 제물 앞에 머리 조아리며 우짖는,  그 슬픔 겨울 한 철 상고대에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며 끝내는 가지째 굳어버린 제망모가(祭亡母歌).  어머니 제사상을 거두며 장롱 위에 올려둔  제삿밥 한 그릇 그만 깜빡 잊고 말았다  경칩날 상추씨앗 봉지 찾느라 깨금발로 딛고 보니  놋뚜껑 한 쪽으로 나둥그라져 있고  밥알이 개구리처럼 말라비틀어져 있다 ―「파제(罷祭)」전문 정호의 시 「파제(罷祭)」는 시인이 평소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밭둑 뽕나무 가지에 꿰어 걸어둔 개구리 몸통과 “어머니의 제사상을 거두며 장롱 위에 올려둔/ 제삿밥 한 그릇”을 나란히 병치 시킴으로써, 파제 후 어머니를 잊고 지내온 자신의 무관심을 스스로 비판하고 있는 시이다. 그런데 이 시에 나오는 ‘까치’는 시인이 봉양하고 싶어하는 “홀어머니 늙은 까치”이다가, 뒤에는 “조촐한 제물 앞에 머리 조아리며 우짖는” 자식 까치로 전이된다. 이렇게 볼 때, 1연의 ‘개구리 몸통’이 2연에서 시인과 어머니를 연결해주는 ‘제삿밥 한 그릇’과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연에서 말라 비틀어진 개구리는 “두 눈 툭 불거진 채 하늘 나르듯/앙상한 사지 쭉 뻗어있”고, 2연에서 장롱 위에 올려둔 밥그릇은 “놋뚜껑 한 쪽으로 나둥그라져 있고/밥알이 개구리처럼 말라 비틀어져 있다”는 점에서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이처럼 ‘개구리’와 ‘제삿밥 한 그릇’을 비일상적인 형태로 나란히 제시 함으로써 자신의 그동안의 무관심과 불효를 새롭게 환기시키고 있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재촉하듯 서둘러 꽃피워 놓고 이제 겨우 손바닥 내미는 연두색 라일락 이파리 틈새로  고개 삐쭉 내미는  저 봄의 꼬투리  보일락, 4월의 새끈한 숨소리  가냘프게 들릴락,  순간 확 끼쳐오는 알싸한 내음 화장 짙은 여인의 농염이다 황홀이다 어느새 탱탱해진 내 아랫도리 봄이 질펀하게 올라오고 있다 ―「라일락 꽃잎에 숨다」전문  시인은 산수유와 개나리와 진달래처럼 일찍 피는 꽃들을 피워놓고 이제 막 이파리 내미는 라일락 이파리 틈새로 보이는 ‘봄의 고투리(꽃봉오리)’를 보고 있다. 그런데 시인이 일찍 피는 꽃들에 주목하지 않고 늦게 피는 라일락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라일락이 시인 자신의 봄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의 제목이 ‘라일락꽃잎에 숨다’인 것은 시인 자신이 라일락이 되고 싶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즉 시인은 라일락이 되어 ‘보일락’ ‘들릴락’하는 라일락의 자태와 숨소리를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연에서 시인이 화장 짙은 여인의 농염과 황홀을 맛보고, 탱탱해진 아랫도리로 올라오는 봄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단순히 보면 시인이 라일락 꽃을 보면서 자신의 청춘의 봄을 새삼 깨닫는 것으로 읽히지만, 더 나아가서 보면 늦깎이 시인으로서 희열을 늦게 피는 라일락꽃에 비유해서 읊은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정호 시인의 또 다른 시「소사에서 듣다」역시 “물속에서 기다린 몇 년”을 오직 ‘짝짓기’에만 바치고 소사나루 “물가 젖은 돌에 하얗게 들러붙은 채 죽어있는” 하루살이의 삶을 자신의 삶과 나란히 놓고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읽은 시들과 동일한 관점에 놓여있는 시이다. 정호의 시들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두가지 상황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깨닫게 되는 삶의 허위성이나 진실성을 천착해 내는 특성이 있다.  4.일상이라는 단면 들여다 보기-한영숙의 시  한영숙의 시들은 일상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데서 출발하고 있다. 시인이 일상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은 일상이야말로 시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삶의 터전이며 문학적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시만 보더라도 시적 모티브가 노래방(「유정천리」),인터넷 경매(「하루」), 산불(「자화상」), 수선 (「이별 뒤에는 반드시 수선자국이 남는다」)등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시인은 일상을 들여다 봄으로써 때로는 자신이 그동안 모르던 것을 깨닫기도 하고, 일상의 애환이나 피말리는 삶의 생존경쟁을 전경화시켜서 보여주기도 한다.  눈 뜨면 컴퓨터 모니터부터 켠다 갓 잡아올린 자연산 활어들이 HTS*에서 퍼덕거린다  산지에서 직송한 한정된 횟감들을  서로 낙찰 받으려고 떼개미들 경매꾼처럼 수신호를 보내며 시커멓게 몰려든다  한바탕 폭우가 쏟아질 듯 장관이다 전날 시세보다 후한 값을 치룬 도다리  알고 보니 양식종. 감칠맛 나는 미끼에 제대로 아가미 꿰인  그 개운찮은 뒷맛이  계좌잔고 구석구석 거미줄처럼 처져있다 어닝쇼크니 블랙 먼데이니  검은 뉴스들로  온 세상 신문과 인터넷이 24시간 꼬박 새우기도 했다 오히려 대범하게  실탄 비축한 조사들을 여(洳)*까지 출조 시키는,  간 졸이는  모니터 속 전광판을 숨도 못쉬고 바라다본다  어쩌다  대박에 눈 멀어 고,고하다 졸지에 피박에 쪽박까지 쓰지만 그래도 쥐젖만한 미련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산지에서 낚아올린 몇 수 안되는 자연산 횟감 맛에  오늘도 모니터부터 켠다 *HTS: 홈트레이딩시스템  *여(洳):썰물 때에는 바닷물 위에 드러나고 밀물 때에는 잠기는 바위 ―「하루」전문  시인은 아침에 눈을 뜨자 마자 활어 경매 사이트를 열고 산지에서 직송된 횟감들을 낙찰 받으려고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일상의 단면을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일상은 낭만적이거나 명상적인 쪽과는 거리가 멀다. 시인이 느끼는 일상은 그야 말로 피 말리는 경쟁이 펼쳐지는 곳이며, 약육강식의 법칙 아래 허위와 속임수가 판을 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날 시세보다 후한 값을 치룬 도다리”가 “알고보니 양식종”임이 드러나고, 경매꾼들은 “감칠맛 나는 미끼에 제대로 아가미 꿰인/ 그 개운찮은 뒷맛”을 맛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도박은 쉽게 멈춰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이 그들에게는 쉽게 손 놓을 수 없는 생존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박에 눈 멀어 고,고 하다 졸지에 피박에 쪽박까지 쓰지만”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일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어쩔 수 없는 삶의 방식을 비판하기 보다는 그냥 바라보고 있다. 시인의 이러한 태도는 본질적으로 삶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다. 그의 또 다른 시「유정천리」에서 “기생 두엇 불러 장구 치며/낭창한 세월 몇 줄기 끼고 한가락 하던”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 “일흔 훌쩍 넘긴 어머니”가 노래방에서 한 섞인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자식들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도, 어머니의 고생과 한에 대한 시인 자신의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인의 연민은 타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자신에 대한 연민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볼만하다. 고작 1m 쇠사슬에 묶여 저 불길 속을 정녕 탈출할 수 없었단 말인가 산불 화마가 지나간 아침 한나절 뚝딱 비우고 간 임자 없는 개밥그릇 하나  덩그러니,  비로소 자유다 ―「자화상」전문 얼마 전에 있었던 낙산사 산불을 연상시키는 이 시는 어떤 장소라든가 어느 시간은 생략하고, 단지 “1m 쇠사슬에 묶여” 불길 속을 탈출하지 못하고 불길 속으로 사라져 버린 개와 임자 잃은 개밥그릇에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개와 개밥그릇에 주목하는 단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마지막 연에 한 줄로“비로소 자유다”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산불 화마 속에서 죽어간 개에 대한 연민뿐만 아니라 개밥그릇의 자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시인에게 있어서 일상은 1m 쇠사슬에 묶여 있는 개와 개밥그릇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시인은 1m 쇠사슬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에 묶여 있는 것들을 연민할 수 밖에 없지만, 그 속에는 그러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 시의 제목이 ‘자화상’인 것은 일상에서 느껴지는 연민과 자유야말로 시인의 삶의 본질이며 자화상이라는 것을 암시해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시의 마지막 연의 ‘자유’는 문맥상으로 보면 개밥그릇의 자유이지만, 그것은 더 나아가서 개의 자유도 될 수 있고, 개 주인의 자유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다른 시「이별 뒤에는 반드시 수선자국이 남는다」에서 장롱속의 해묵은 바지의 “겅중 올라간 목마른 바짓단”을 보면서 한번 제대로 터뜨리지도 못했던 자신의 “애써 억누른” 사랑의 절제를 탓하고 있는 것도, 시인의 절제된 사랑의 이면에 숨어 있는 ‘자유’의 본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     봄, 소주 ―김완(1957∼ ) 벚꽃잎 분분분 날리는 부곡정에 들어선다 연탄불 돼지 삼겹살 구이 상추에 마늘, 매운 고추 얹어 된장 쌈 하니 세상살이 여여(如如)하다 도가지 헐어 내온 갓지에 소주 한 잔 하니 가야 할 길들 환해진다  ‘부곡정’은 광주 무등산 초입에 있는 식당이다. 아무래도 유적지는 아닌 듯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바로 나온다. ‘연탄불 양념구이’로 광주시민의 발길을 끄는 곳이란다. ‘벚꽃잎 분분분 날리는’ 참 좋은 시절, 화자는 ‘부곡정에 들어선다’. ‘연탄불 돼지 삼겹살 구이/상추에 마늘, 매운 고추 얹어/된장 쌈 하니’, 대개 한국인이라면 듣기만 해도 ‘회가 동할’ 맛일 테다. 그 모양 눈에 선하고, 그 냄새 코에 선하고, 그 맛 혀에 선하다. 가볍게라도 산행을 마친 뒤라면 더 입맛이 당겼겠다. 화자가 산행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지만 일행은 있을 것 같다. 어째 이 메뉴는 화기에 찬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가. 아니, 화자가 혼자일 것 같기도 하다. 뭔가 심경이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이 있어서, 세상살이가 여여(如如)하지 않아서, 터벅터벅 무등산을 찾았을지 모른다. 그래 머리도 좀 가벼워지고 마음도 좀 눅어진 참에 식욕을 돋우는 상을 받으니 ‘세상살이 여여(如如)하다’! 화자는 이 식당의 단골인가 보다. ‘도가지 헐어’서까지 ‘갓지(갓김치)’를 내온다. 돌산갓김치일까, 토종갓김치일까. 귀한 대접을 받은 화자, 소주 한 잔 안 할 수 없다. 식욕은 생명력! 맛있는 음식이 주는 행복감은 비할 데가 없어라. ‘가야 할 길들 환해진’단다! 심장내과 전문의이기도 한 시인이 이 시에 앞서 썼을 듯한 시 ‘환자가 경전이다’를 소개한다. ‘봄 들녘에 아지랑이 피어오른다//레지던트 수련 중에/스트레스 견디지 못하고/병원을 떠나는 전공의들/4월 초 담장마다/목련 두근두근 벙그는데/떠나는 이들의/까만 눈망울이 젖어 있다//유구무언//그럼에도 불구하고/환자가 우리들의 경전이다’  
291    시문학도들이 알아야 할 시창작원리 12가락 댓글:  조회:2536  추천:0  2017-02-27
시인과 시와 창작의 본질에 대한 소고(小考)                                               /이양우 시는 미사려구, 모든 문장의 절체(絶體)가 되어야 한다. 그는 뼈다귀이고 기둥이고 진액이다 시는 아픔의 절두(截頭)에 서서 모순을 제거하는 지침이고 고독의 현실을 출발하는 출발점이고 생성소멸의 영혼적 모티브이고  그 내면의 상습적인 지혜의 기준점이어야 한다. 시는 모든 문장의 우위에서 지도력을 가져야하고 도덕적 이상과 가치관의 미학이어야 한다. 시인은 권력을 무시해야, 악의적 권력과는 사투하는 습관, 독재와 싸워야 하고 비겁한 자를 책망해야 하고 자유의 기초가 되어야 하고 시는 온갖 비정한 비인간에 대한 인간적 대변자가 되어야 하고 불의를 밀어내는 상징적 기념비가 되어야 하고 독창성이 강한 괴팍한 성질로 사람의 불의의 궤적을 꿰뚫는 송곳 그 창조의 세계에서 맴돌다가 죽을 때까지 참 인간으로 마치는 존재 가장 소박하고 소탈하고 진지해야하고 남이 버린 것에, 남이 안보는 곳에 내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항상 먼저, 항상 빈곳을 채우는 정신 그토록 순수이성 비판자로서 결백을 위해 싸우다가 응어리진 자의 산물 바로 그것 을 기본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끊고 맺는 맛이 탁월해야 하고 맑은 공기와 같은 시원(始原) 기, 승, 전, 결보다도 한 층 고뇌에서 짜낸 각고성에 집착하는  다음과 같이 를 수행해야만 한다. 시(始), =첫째는 주제파악과 더불어 소(素)의 (이미지)에 집착해야 한다. 둘째는 도(圖),=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그림(韻)을 그려야 하고 셋째는 묘(妙), = 상징과 실상과 조화를 이루는 것 그 묘안을 짜낼 것이고 넷째는 논(論)=논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고 다섯째는 골(骨)= 뼈다귀 있는 핵심적인 상상과 철학의 살점(容)이 붙어야 하고 여섯째는 축(縮)=짜낼 만큼 짜내고 줄일 만큼 줄여서 진국이 되도록 하는 시인의 창조정신이 절실하다 일곱째는 절(切)=맺고 끊고 꺾고 대패질을 하는 맛이 있어야 하고 여덟째는 유(喩)=깊숙이 내부까지 파고들어가서 뜻을 숨겨 놓거나 꺾거나    새끼를 꼬아 진리를 캐어 재검토 비판하고 그 재료로 장(醬)을 담는다. 아홉째는 관(觀)=맛과 멋이 풍기고 가치가 있어야 의미의 매력을 갖는다. 열째는 양(養)=먹기가 좋고 사고에 유익한 영양가 높은 가치가 있어야 한다 열 한 째는 각(覺)= 시는 깨달음을 주는 가치가 있어야만 한다 열 두 째는 결(結)=잘 빚어진 건축물의 골격과 재질과 다듬어진 경관을 자랑할 품격있는 세계관을 보여줌으로    꽃피는 가치, 결과적으로 창조의 내연적 영혼, 즉 영감의 가치와 , 씨맺음의 본질이 나타나게 된다.  문학속의 뼈대 중심 이것이 시인의 시로서의 본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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