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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녀류시인 이바라키 노리코가 윤동주 시에 해설을 달다...
2017년 03월 12일 00시 00분  조회:2613  추천:0  작성자: 죽림

"일본을 대표하는 문인들 속에 윤동주 작품이 게재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학교에서는 지금까지 이 교과서를 채택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금년 3월 24일 개최된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오사카부 지방본부> 제58회 정기지방위원회의장에서였다.
 
그리고 필자는 윤동주의 <서시>를 낭송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죽어 가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가야겠다.
오늘 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때아닌 필자의 시 낭송에 회의에 참석한 150여명의 지방위원은 물론 고문, 내빈, 방청석에 가득 모인 방청객들까지 깜짝 놀랬다.
 
"저는 이 교과서를 여러 위원님들께 알리고 싶었고 또 우리 민족학교에서 꼭 채택하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필자는 다른 보고 사항을 마치고 연단을 내려왔다.
 
윤동주 시인의 작품이 일본 고교 검정교과서에 게재된 것은 1990년도였다.
 
이 사실을 안 필자는 재일동포사회 속에 유일한 일간지 <통일일보>에 이 내용을 기사화 할 것을 요청했다.
 
윤동주 시인은 물론 이 점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그럼 당신이 쓰라는 신문사의 부탁이었다.
 
당시 민단 이쿠노<生野>북지부 사무부장이던 필자는 임박한 대회 보고서 작성을 제쳐 놓고 1990년 5월 15일부터 3회에 걸쳐 통일일보 문화란에 일본 고교 검정교과서에 게재된 <윤동주의 시 일본 교과서에 소개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다.
 
일본의 유명한 여류 시인 이바라키 노리코<いばらき のりこ;茨木 のり子. 2006년 작고. 향년 80세> 씨가  아사히신문에서 발행한 "한글에의 여로"에서 발췌한 내용이었다.
 
처음부터 윤동주 시인을 알아서 읽은 것이 아니었다.
윤동주의 청순한 사진을 보고 이렇게 순수한 청년이 어떤 시를 쓰는가 하고 읽은 것이 <서시>였다.
 
"젊음과 순결을 그대로 동결 시켜버린 것 같은 청결함이 후세의 독자들을 끌어드릴 것이며 읽으면 수선화의 향기처럼 피어오른다."는 찬사와 윤동주가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하기까지의 경위를 자세히 쓰고 있다.
 
그리고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씨와 만남도 기술하고 있다.
 
1984년도였습니다. 그때 윤일주씨는 "요즘 아버지가 자꾸 생각 납니다. 어떤 심정으로 형님의 유골을 안고 후쿠오카에서 부산, 그리고 기차에 흔들리면서 북간도의 집까지 돌아오셨는가를... ...."
 
한반도의 끝에서 끝까지의 먼 길을 당시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유골을 안고 울분에 넘치는 아버지의 그때 마음을 헤아리는 아들의 말은 어떤 격렬한 탄핵보다도 가슴을 푹 찔렀다.
 
"한글에의 여로" 에세이집에 들어있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은 <주>치쿠마쇼보<ちくましょぼう;筑摩書房> 출판사 노가미 타쓰히코<のかみ たつひこ;野上 龍彦>국어편집장도 윤동주를 전혀 몰랐었다.
 
1984년 해가 저물 무렵 어느 콘서트 공연장에서 한권의 시집이 팔리고 있었는데 그 시집이 바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페지를 펼치는 순간 싱싱하고 감성에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언어들이 마음에 푹 들어 와서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면서 그 후 이바라키 노리코의 에세이집을 읽고 4년여의 구상 속에 갖은 장해를 극복하고 문부성 검정교과서에 합격했다"고 했다.
 
이렇게 우연히 윤동주의 시를 읽게된 두 사람의 일본인에 의해서 윤동주의 <서시> <쉽게 쓰여진 시> <돌아와 보는 밤> <아우의 인상화> 모두 4편의 시와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의 해설이 게재 되었다.
 
2011년에 발행된 <전망 현대문>에는 <돌아와 보는 밤>의 시가 빠졌지만 본문 278페지 속에서 14페지가 윤동주 시인의 기사이다.
 
1990년도 5월 통일일보에 게재한 필자의 <윤동주의 시 일본 교과서에 소개의 의미>는 재일동포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이르켰다.
 
한글 세대가 거의 없는 재일동포사회에서 윤동주 시인을 전혀 몰랐던 동포들은 그의 순수한 시의 세계는 물론 27세의 나이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사상범으로 옥사했다는 사실에 많은 충격을 받았다.
 
윤동주는 재일동포들과 마찬가지로 해외동포였다.
1917년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나서 평양 숭실학교에서 약 10개월간 다니지만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가 폐교 되자 용정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3년 8개월 동안 다녀서 고국에서의 생활은 4년 반에 지나지 않는다.
 
1943년 도오시샤<どうししゃ;同志社>대학 재학 중 7월 14일 귀향하기 전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 받고 1945년 2월 16일 옥사햇다.
 
1982년 일본의 검정교과서 왜곡 문제로 아시아 국가들의 일본 정부에 대한 비난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사상범으로 옥사한 윤동주 시인의 일본 교과서 게재는 그때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있었지만 필자는 베를린 장벽보다 더 육중한 일본의 권력과 관료의 폐쇠성에  뻥하게 구멍을 뚫었다고 썼다. 
 
그 후 1992년 12월은 한국에서 <윤동주의 달>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한국일보를 구독하던 필자는 이 사실을 알고 문화칼럼을 쓰고 있던 김성우 한국일보 논설위원에게 윤동주 시인이 일본 교과서에 게재된 것을 알렸다.  
 
김성우 논설위원의 요청에 따라 윤동주 시인이 게재된 교과서와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 주소 등의 자료를 보냈다.
 
김성우 논설위원은 그 해 12월 28일자 한국일보에 <윤동주의 달에>라는 칼럼을 썼는데 이 기사가 한국에 처음으로 윤동주 시인이 일본 교과서에 게재된 것을 알렸다.
 
필자가  통일일보에 쓴 기사를 이바라키 시인에게 보냈을 때도 그렇지만 김성우 논설위원이 한국에 대한 관심도를 물었을 때도 한국어로 회답이 왔었다고 기사에 썼었다.
 
처음 보는 순간 한국어의 달필에 필자는 놀랐던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같은 해인 1992년도에 도오시샤대학 출신 재일동포 졸업생들이 모임을 갖었다.
모교 출신에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 윤동주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의 생애에 감동과 충격을 받고 윤동주 추모기념 사업으로서 <윤동주 시비 건립위원회>를 발족했다.
 
<도오시샤교우회 코리어클럽>의 졸업생 모임은 학교 당국과 많은 협의 끝에 대학 교정에 시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1995년 2월 16일 윤동주 시인 옥사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 제막식에는 한국에서 윤동주 시인 유족 일가와 김우종 문학평론가,  이애주 무용가 등이 참가했고 일본에서는 윤동주 시를 번역한 이부키 고오<いぶき ごう;伊吹 郷>, 오오무라 마스오<おおむら ますお;大村 益夫>씨도 참가했었다.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은 초대를 받았지만 정중히 사절했다고 한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같은 쿄토시에 있는 쿄토 조형예술대학 교정에도 윤동주 시비가 2006년 건립 되었는데 도오시샤대학의 시비와 같은 "서시"를 새겼다.
 
쿄토 조형예술대학에 시비 건립 동기는 그 교정에 윤동주가 거처했던 하숙집의 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교토시 바로 옆 우지시에는 윤동주가 가끔 산책했던 곳이 있어서 그곳에도 시비 건립을 위해 시민단체가 시비까지 전부 준비했으나 공원에의 건립을 행정당국이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보류 상태에 있다.
 
여러 곳에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시비가 세워지는 점에는 널리 알리기 위해서 무척 좋은 일이다.
 
그러나 가까운 주변 여기 저기 건립하는 것보다 응축된 상징성을 띄는 의미에서는 하나만이 좋지 않을까 하는 견해도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계속 되는 윤동주의 심포지움과 추모 행사로 그의 이름은 일본 곳곳에 알려지고 있는데 우리 민족학교에서 그 교과서를 채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필자는 허탈감을 느꼈다.
 
2년 전부터 동포 최대 밀집지인 민단 이쿠노 남지부 의장직을 맡게 되어 매년 개최 되는 민단 오사카지방본부 지방위원회에 참가하고 소속은 문교분과위원회였다.
 
금년은  그 위원장으로서 분과위원회에서 토론을 마치고 윤동주에 대해서는 시간이 없어서 전체 위원회에서 발표한다고 했다.
 
그래서 필자는 토론된 사항과 함께 윤동주에 대해서 설명하고 "서시"를 낭송했다. 필자의 이 행위에 대해서 찬반의 의견이 팽팽했다.
 
문교분과위원회에서 정식으로 토의된 사항이 아닌 것을 발표한 것은 위원장의 권리 남용이며 혼자 다 아는 척했다는 비난과 윤동주 시인을 처음 알았다는 위원은 잘했다고 했다.
 
이러한 비난에 대해서는 그런대로 받아들이지만 민단의 연중행사 중에 가장 큰 지방위원회의 공식 석상에서 윤동주 시인을 알렸다는 자부심에 충만했다.
 
그 후 약 한달이 지났을 때였다.
오사카에 있는 민족학교 금강학원 허응석 사무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필자의 이야기를 듣고 금강학원에서 검토한 결과 그 교과서를 채택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허응석 사무부장도 지방위원인데 무척 기뻤다.
 
지금 윤동주 시인이 게재된 <전망 현대문>은 1990년도부터 146개의 고교에서 약 4만 6천명이 배우고 있다.
 
윤동주 시인을 배우게 되는 것은 일본의 식민지 역사를 다시 배우는 거나 다름없다. 그것은 결코 왜곡된 역사가 아니다.
/<제주투데이> / 김길호


 

1991년 <한국현대시선>을 번역하여 요미우리문학상을 수상한 이바라키 노리코<茨木のり子>시인이 1986년 아사히신문에서 발행한 <한글에의 여로>에 윤동주 시인의 시를 소개했다.
 
여기에 소개된 윤동주 시인의 시들이 1990년 치쿠마쇼보에서 발행한 교과서 <전망 현대문>에 게재 되었다.
 
2006년 79세로 타계한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은 토쿄에 거주하는 왕수영 시인과 한국의 홍윤숙 시인들과도 교류가 있었다.
 
약 17년 전에 왕수영 시인으로부터 홍윤숙,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이 서로 자택을 방문하면서 쓴 시를 필자가 받았다.
 
그때 받은 두편의 시를 당시 필자가 가르쳤던 한국어 수강생들에게 번역 교재로서 제공했었다.
 
홍윤숙 시인의 <지상에 남은 또 하나의 이야기>는 한글 그대로이며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의 <그 사람의 사는 나라>는 필자가 번역했다.
 
왕수영 시인은 시를 보내면서 두 사람의 시인의 응답가라고 썼었다.  
 
그 두편의 시를 소개한다.
 
"그 사람의 사는 나라"
 
그것은 온기를 갖고 있다
악수의 부드러움과
낮은 목소리
배를 깎아 준 손놀림이며
온돌방의 따뜻함이랑

 
시를 쓰는 그 사람의 방에는
책상이 두개
회답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편지 뭉치가 산적해 있고
무언가 아주 나의 일처럼 느껴지고
벽에 늘어뜨린 큰 옥돌 하나
서울 장충동의 언덕 위의 집
앞뜰에는 감나무 한 그루
금년도 휘어지게 감이 열렸는지
어느 해의 만추
우리 집을 찾아온 때는 
황폐한 뜰의 풍정<風情>이 좋다고
유리창 너머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부석거리는 낙엽 쓸지도 않고
꽃은 말라 죽고
황폐한 뜰의 주인으로서 부끄럽지만 
무조작이 좋다고 하는 손님 뜻에 쓸지 않았었다
일본어와 한국어가 뒤섞여
지난 간 옛일들을 기탄 없이 나누며
이쪽의 뒤가 캥김을 감싸는 것처럼
당신은 좋은 친구가 될 것이라고 말해 준다
솔직한 말에
청초한 풍자<風姿>

 
그 사람의 사는 나라
 
눈사태와 같은 보도도 진부한 통계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 나름대로 조정이 가능하다
지구의 여기 저기서 이러한 일은 일어나고 있겠지
제각기 강직한 정부 따위는 내버려 두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사귐이
조그마한 회오리바람이 되어
 
전파는 자유대로 뒤섞여 오가고
전파는 재빠르게 뒤섞여 오가고
전파보다는 느리지만
무엇인가 받아 잡고
무엇인가 되돌려 던지고
외국인을 보면 스파이라고 생각하라
그러한 가르침에
나의 소녀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

 
다음은 홍윤숙 시인의 "지상에 남은 또 하나의 이야기"이다.
 
서울의 하늘이 흐린 날은
마음의 날개를 달고 바다를 건넌다
"그 사람의 사는 나라"
언어와 풍습이 다르고
나라 사이 풀어야 할 숙제도 많고
어린 시절 숱한 상처의 기억도 아직 생생하지만
우리들 머리 위에는 같은 하늘이 있고
하나의 태양을 우러러 사는 
하늘 아래 지붕도 비슷이 고즈넉한
사람도 집처럼 고즈넉한
그 나라 시인이 사는 집
토쿄도 호야시 히가시후시미쬬
작은 뜰엔 홍백의 산다화 두 그루와
바람이 대문 대신 지키고 있는
시인의 집 뜰에 내 마음 날개 접고 내려앉는다
 
그 집엔 집보다 큰 침묵이
오래 묵은 오동나무 덩치만한 큰 침묵이
잠잠히 누었다가 천천히 깨어난다
따뜻한 체온으로 오래 삭은 술 같은
침묵 속에 은거하는 그 집 시인도
잎이 푸른 오동나무 그늘 같은 깊은 눈매로
때아닌 내객으로 술렁대는 침묵의 이마 쓰러주며
향기로운 차를 달여준다
오래 막혔던 바다 건너 이야기에
오래 막혔던 침묵도 무릎 세워 귀 기울이고
말 없는 말 속에 시인의 마음은 
향기로운 다향<茶香>처럼 석양에 맴돈다
아쉽고 그리운 시간들이 흘러가고
이윽고 일어나 오동나무 그윽한 그늘 같은
그의 집 침묵과 바람과 산다화를 작별한다
그를 닮은 따뜻하고 커다란 침묵이
그와 함께 골목 밖까지 따라나와
눈으로 잠잠히 이별을 고하고
나느 돌아서 기약 없는 하늘을 잠시 바라본다
건너간 바다를 다시 건너오며
지상에 두고 갈 또 하나 그리운 
석양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한일 양국을 대표하는 시인의 시를 오래만에 다시 읽어 보았다.
 
역사 인식과 독도 문제로 한일 양국의 팽팽한 평행선을 서로 좁히지 못한 채 치닫고 있는 지금
이 두편의 시는 개인적인 관계를 떠나서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제주투데이> / 김길호

   
     











▶김길호
1949년12월 제주시 삼양출신, 
1973년 후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 집필하고 있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이바라키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 거리는 와르르 무너져서
말도 안되는 곳에서
푸른 하늘 같은 게 보이거나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변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꽃단장할 이유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누구도 아름다운 선물을 주거나 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는 할 줄 몰랐고
서늘한 눈빛만을 남기고 모두 떠나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비었고
내 마음은 완고했고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 졌다
그런 바보같은 일이 있을리가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 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으스대며 걸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흘러 넘쳤다
금연을 깼을 때처럼 어지러워하며
나는 이국(異國)의 달콤한 음악에 도취되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정말 불행했고
나는 정말 영문을 알 수 없었고
나는 진짜 쓸쓸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가능한 한 장수하기로
나이가 들고 나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말이야
 

 //////////////////////////////////////////////////

倚りかからず   ㅡ茨木のり子

기대지 않고          ㅡ이바라키 노리코

 

もはや

이미

 

できあいの思想には 倚りかかりたくない

만들어져 버린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고

 

もはや

이미

 

できあいの宗教には 倚りかかりたくない

만들어져 버린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고

 

もはや

이미

 

できあいの学問には 倚りかかりたくない

만들어져 버린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고

 

もはや

이미

 

いかなる権威にも 倚りかかりたくない

만들어진 어떠한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아

 

ながく生きて

오래 살아서

 

心底学んだのはそれぐらい

마음 밑바닥에서 배운 것은 그것뿐

 

じぶんの耳目

자신의 귀와 눈

 

じぶんの二本足のみで立っていて

자신의 두 다리만으로 서야 하네

 

なに不都合のことやある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倚りかかるとすれば

기대고자 하면

 

それは

그것은

椅子の背もたれだけ

의자의 등 받침일 뿐이야




 
▼茨木のり子さんの「内部からくさる桃」という詩から、一節を引きたい。〈ひとびとは/怒りの火薬をしめらせてはならない/まことに自己の名において立つ日のために〉。ここが新たな始まりになる。 
  이바라키 노리코의 ‘내부에서 썩은 복숭아’라는 시에서 한 구절 인용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분노의 화약을 꺼뜨려서는 안 된다/ 참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일어설 날을 위해서>. 지금부터가 새로운 시작이다.
 
*이바라키 노리코와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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