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인 윤동주를 연변 룡정 고향에서 모실수 있다는것은...
[ 윤동주탄생100주년 계렬행사 2]
우리가 윤동주를 기리는 리유
(ZOGLO) 2017년3월6일
룡정.윤동주연구회 “百年의 记忆,윤동주를 읽다”특강회 행사 펼쳐
룡정.윤동주연구회가 기획한 윤동주탄생100주년 계렬기념행사- 2, “百年의 记忆,윤동주를 읽다” 특강회가 3월5일 연변대학 종합청사 세미나실에서 펼쳐졌다.
올해는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온 겨레가 추앙하는 시인의 백년제를 맞아 한국,일본, 미국, 오스트랄리아등 세계각지에서 년초부터 시인을 기리는 행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있는 가운데 룡정.윤동주연구회는 지난 2월 16일 윤동주 옥사 72주기를 맞아 룡정 동산의 윤동주묘소에서 시민 200여명이 동참한 대형추모행사를 가진후 또 한번 자치주 수부 연길에서 시인을 기리는 뜻깊은 자리를 마련했다.
특강회에서는 우선 룡정.윤동주연구회 임원들이 지역사회 문화령역에서 날로 그 기상을 떨치고 있는 룡정윤동주연구회가 이 3년간 걸어온 길에 대해 회고하고 “룡윤회”의 올해 행사 기획과 “룡윤회” 산하 력사답사팀의 답사기획을 발표하였다.
특강회는 연변시랑송협회의 협력으로 진행, 시랑송협회 회원들이 윤동주의 주옥같은 시편들인 “또 다른 고향”, "자화상", "참회록", “별헤는 밤”, "쉽게 씌어진 시"를 랑송했다.
곁들어 연변대학 “불사조” 풍물패의 공연, 그리고 룡정시 문화관 배우들의 독창과 독무 등 다채로운 공연으로 이어졌다.
특강회에서는 일본 교토 불교대학의 시노무라 리에 박사가 “일본에서 일고있는 윤동주 붐”에대해 소개하였다.
마지막으로 김혁 룡정.윤동주연구회 회장이 “우리가 윤동주를 그리는 리유” 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였다.
특강은 방대한 량의 도편자료를 곁들어 윤동주의 문학생애와 그 주변부 인물들의 력사의 갈피에서의 부침, 그와 더불어 중국조선족의 생성사, 한반도의 근대사를 폭넓게 아우르면서 윤동주라는 인물을 다각적이면서도 립체적으로 접근, 조명하여 청중들의 공명과 찬탄을 자아냈다.
김혁회장은 특강의 말미에서 “윤동주와 같은 민족시인을 고향에 모실수 있고 또 그이의 백주년을 기념할수 있는건 우리 문단, 나아가 우리 사회의 축복이다, 백년을 기록하는 그이의 생애와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인생의 유한을 넘어서는 문학과 예술의 영원을 본다”고 했다. “따라서 그이를 기리는 일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의 자긍심과 책임감을 일깨우는 시간과 기회로 될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소회를 밝히면서 “우리 다함께 손잡고 백년을 기록하는 민족인걸의 생애와 작품들을 읊조리면서 우리의 민족시인을 목청껏 노래하자”고 주문했다.
윤동주탄생100주년 계렬기념행사의 일환으로 펼쳐지게 되는 특강회는 연변지역뿐아니라 조선족 집거구역인 북경, 상해, 청도, 심양 등지에서도 펼칠 계획이다.
한편 윤동주의 고향인 룡정에서 발족되여 윤동주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고양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룡정.윤동주연구회는 고향의 시인을 기리는 일에 게으름 모르고 달려 연변지역에서 새롭게 “윤동주 붐”을 일으키고 있다.
대형 특강회에는 민족의 문화창달을 위해 로심초사하고 있는 많은 사회단체의 주요맴버들과 문인 그리고 윤동주를 애대하는 시민 160여명이 참석했다.
/조글로미디어
윤동주 시비
위치 :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민족 시비 공원
간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우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려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윤동주 (尹東柱 1917∼1945)
시인. 아명은 해환(海煥). 북간도(北間島) 명동촌(明東村) 출생. 기독교 장로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 1929년 문예지 《새명동》 발간에 참여하였고, 1931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관립학교를 거쳐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35년 평양(平壤)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로 옮겼으나 신사참배문제로 폐교되자, 용정의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였다. 1938년 서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에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하였다. 1942년 일본 리쿄대학[立敎大學(입교대학)] 영문과 입학, 그해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동지사대학)]으로 전학하였다. 1943년 귀국 직전에 항일운동을 한 혐의로 송몽규(宋夢奎)와 함께 체포되어 2년형을 받고 규슈[九州(구주)] 후쿠오카형무소[福岡刑務所(복강형무소)]에서 복역중 1945년 옥사하였다. 그의 시는 초기 시부터 마지막 작품으로 보이는 《쉽게 쓰여진 시》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적 변모를 드러내고 있다. 초기 시 《겨울》 《조개껍질》 《버선본》 등에서는 암울한 분위기와 유년적 평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후기 시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등에서는 역사감각을 지닌 자아성찰을 보여준다. 그는 자전적이고 내성적인 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바탕을 둔 실존적 윤리의식, 그리고 시대와의 갈등에 성실했던 민족의식을 나타낸 시를 썼으며, 이러한 주제를 고도의 상징과 은유적 기법으로 독특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한국시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유해는 용정에 묻혔고, 1968년 연세대학교에 시비가 세워졌다.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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