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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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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오늘의 시는 하나의 시적 세계어의 성립을 지향해야.. 댓글:  조회:1907  추천:0  2017-04-18
    밤비-김소영   비는 지붕을 두다린다. 비소리에 내 몸은 젖고야 만다. 나는 침묵의 음계와 묵상을 잃고 깊은 밤 쓸쓸히 자리에 드러 눕는다 비는 참밖에 어둠을 헝클고 살라먹는다.   비는 지붕을 두드린다. 밤의 어둠에 못질한다. 우주의 침묵에다 돌맹이질 한다.   나는 길을 잃은 어린아이 어머니는 인젠 나를 찾으려고 하지 않었다. 그 여인의 광란된 눈물은 북녘 하늘 밑에서 메말라 버렸다......   비는 백양나무 푸른 가지에서 줄곳 나린다. 비는 무엇을 이야기 하려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스런 혼의 쓸데없는 잠고대런지........ .....라고 누가 말해 주는 것만 같은 맘이다.         - 1956년 김소영시집 -     요양 중인 김소영 시인. 시인은 매우 연로하셨으며, 지팡이를 짚어야 움직이실 정도로 거동이 불편하신 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시론에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계신 달변가였다. 정말 시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말씀을 전해주신다.   김소영 시인은 한 시대를 풍미하신 시인이다. 문학평론가 임중빈은 김소영의 시를 들어 “김소영의 포에지 입법은 매우 다양하면서 자못 간명한 시안에 의존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長江大河 高山 深谷을 샅샅이 누비는 大自然과의 合一, 남성적이기만 한 역사적 흐름과의 統一, 그리고 초자연과 역사 현장과의 合命題를 동시에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시작을 결실해 나가기에다, 일체감으로서의 대자연 속에 大我가 깃들어 있으며, 역사 靜脈 하나가 되려는 성스러운 싸움 속에 시맥의 역동함이 여실하다.”고 평가한다.   또 민병욱 문학평론가는 김소영의 서사시에 대하여 “한국문학의 비평적 폐쇄성을 웅변하고 있는 김소영의 시적 생애는 향토경험, 가족경험, 문화적 교양경험, 실향민 경험 등 시적 경험을 기반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의 이러한 경험세계와 그것이 형성한 민족의식, 전통의식에 의해서 제작된 시편이 『어머니』와 『조국』이다. 『어머니』는 그의 가족경험, 특히 어머니의 정신적 감화경험과 실향민 경험이 서로 어울려서 창조된 것이라면 『조국』은 그의 모든 경험들이 총체적으로 어울러 선택된 것이다.”라고 그의 서사시를 높이 평가한다.   김소영 시인의 본명은 김면식으로 본은 경주 김씨다, 1922년 11월 9일에서 태어났으며 황해도 이원초등학교와 일본 와세다 중학교를 나왔다. 이후 1945년 일본 경도京都 입명관대학立命館大學 문학부 수학한다. 해방 직후 한국에 들어온 그는 단국대 강사를 비롯하여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였으며 고등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그의 이력은 탄광생활, 신문기자. 영화인, 서점 경영 등 다채로운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서사시 『조국』을 써내는 데 큰 역할을 한 듯싶다. 슬하에는 두 아들이 있다.   향년 92세의 김소영 시인.   선생님에게 있어 시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시란 인간이 창출하는 것 중에서 가장 소박한 것이며 넉[魂]에 밀착된 肉聲의 예술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을 위하여 줄기차게 미화하려는 의도를 배척하여야 합니다. 시의 본래 목적은 인간의 가슴속 깊이에서 움직이고 있는 감정, 그 자체의 본질을 의심스런 눈으로 보아 더욱 감정을 활발하게 흘려 내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시란 감정의 신경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시의 특성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시의 세계는 시대를 초월하여 어느 시대, 어느 곳을 막론하고 남과 더불어 성장하는 법이지요. 그 깨달은 사람이 사람들 사이에 어울려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는 황홀경(ecstasy)의 발동체와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황홀경 자체가 근원이 되어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지요, 따라서 언어의 모든 수사학은 이미지의 황홀경에 의하여 유기적으로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미루어본다면 시란 꿈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꿈은 불가능의 가능이기에 시간적, 공간적 사물일지라도 꿈의 세계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실상 이처럼 놀라운 황홀경이 이 지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영상을 통하지 않고 추상화된 주관적인 감정만으로 직접 독자의 감정으로 옮겨가려는 따위의 경향을 지닌 시작품이 오늘 우리 주변에서 봇물 터지듯 범람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감상적인 낭만주의의 시를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직접적인 표현주의의 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은 이 같은 시의 위협에 직면한 나머지 아주 심한 역경에 부딪히기 일쑤입니다. 격렬한 애수에 젖어 넘치도록 차 있는 감정이나 정서가 그들 시에 담겨져 있다 손치더라도 그로 말미암아 인생의 구체적인 현실과 어떠한 연관성을 이루고 있는가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와 같은 감정만을 노출시킨 시는 독자와의 사이에 아무런 교감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시인에게 있어 시풍이란 어떤 것일까요? 또 시인의 시풍은 변화하면 안 되는 것인가요?   슬픔에 젖어 눈물짓는 것을 보고 감상에 젖을 수 있을 런지는 몰라도, 자칫하면 억울한 눈물의 강요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구체적인 현실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무엇 때문에 눈물짓지 않을 수 없었던가를 자각하였다면 그 눈물은 거짓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진정한 눈물입니다. 시인은 그 황홀함이 인생의 시간적 공간적 관계는 사건과 어떤 연관성에서 이어져 있는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또 시 그 자체는 하나의 주제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의 형식적 인습을 체득해야만 시를 쓸 수 있다고 고집하는 것은 지나친 아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평생을 나들이 옷 단 한 벌로 지냈다는 황희 정승의 아내처럼 자신의 개성으로 다져진 자기만의 시풍이라는 옷을 걸치고 다녀야 한다는 지난날의 사학은 이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비록 한 편의 시라 할지라도 시정신은 한 시대에 대한 역사적,사회적 감각과 비판이 밀착되어 있을 때, 비로소 민중과 더불어 새로운 시의 탄생을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현대에 있어 시문학의 경향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다고 보시나요? 근년에 이르러 시문학의 상황은 아주 극단적인 혼맥을 빚어내고 있음은 누구나 느끼는 사실입니다. 또 그 중에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든지, 지적 무정부주의가 판을 쳐온 나머지, 시의 출판물은 어느 때보다도 놀랄 만큼 소책자로 둔갑한 자비출판이 헤아릴 수 없도록 봇물이 터진 듯 쏟아져 나돌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시인들은 자유시라는 미명하에 멋대로 형식적 개인주의가 횡행한 나머지, 수많은 독자로 하여금 혼돈으로 빠뜨려 넣는 테러행위를 저질러 놓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평가기준을 마음대로 정한다는 것은 광풍과도 같은 횡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단의 이 같은 횡포는 전통에 의하여 다져진 시적 탐구의 영역을 협소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시인이 진실을 표출하여야 할 사명을 등진 나머지 '노래쟁이‘라는 부끄러운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럼 오늘날 시인은 어떤 자세를 취하여야 할까요?   오늘의 시인은 오늘보다도 내일을 위하여, 랭보, 보들레르, 아뽈리네르, 엘뤼아르 등이 그랬던 것처럼 이미지의 풍요로움과 신선함에 충실한 나머지 어디까지나 모던하게 표출하려고 몸부림쳐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우리의 아늑한 시환경을 실현하기에 알맞은 시의 쟁기를 지녔다고 큰소리 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뽈엘뤼아르는 “연결이 없는 언어의 얼빠진 돌조각임에 지나지 않는 자유율시라는 손쉬운 유혹만은 뿌리쳐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실상 ‘지난날의 낡은 詩와의 밀교의 전통’은 오늘의 시를 해쳤을 뿐만 아니라 독자인 민중까지도 멀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시를 위하여 새로운 리얼리즘을 찾아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한다는 것은 여러 시인들에 의해 누차에 걸쳐 강조되어온 지론입니다. ........ 우리나라 시의 근대사를 정리하신다면 어떻게 정리하실 수 있을까요?   돌이켜 보건데 해방 반세기에 이르는 오늘날, 시인 자신의 상아탑이라 할 수는 없더라도 독자적인 착색 속에 몰입하였다가 또다시 시인과 민중의 거리를 두고 나타나듯이 우리의 국토는 8.15광복과 더불어 38선이라는 놀라운 20세기의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피해서 갈 수 없는 비통한 상황에 놓여있음을 현대인들은 잊고 있습니다. 그래서 70~80년대 시들은 이 같은 현실에 직면하여 있는 상황에서 시인으로 하여금 빵과 평화를 위해 땀 흘리고 있는 민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성과 영혼의 갈등 속에서 지난날의 숱한 개념들이 침전되어 수많은 껍데기를 벗겨내는 한편 걷잡을 수 없는 거센 회오리바람 속에서 진정한 내일을 조명하려고 애썼습니다. 그것은 한밤에 태양이 뜨게 하는 것과도 비유될 수 있는 엄청난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시, 즉 새로운 시를 위해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시와 현실은 어떤 상관관계를 지닐까요?   시도 현실도 모두 새로워져야만 합니다. 일찍이 A. 랭보는 “시란 절대 새로워야 한다. 시인은 창조자인 동시에 발명가다. 그러므로 항상 전통에 혁신적인 정신을 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에 나타난 현실은 단순한 현실의 한 조각만일 순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의미적인 현실일 따름이지요. 시는 현실이 문명의 시간적 공간적 관계로부터 진실하게 파악된 나머지 언어를 통해서 구성된 것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의미적 현실이란 어디까지나 현실의 본질적인 부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안일한 시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비판적인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작업이야말로 민중과 더불어 값진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길입니다. 내일의 희망찬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달과 작별하여야 하니까요. 우울을 용기로, 의혹을 확신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악의를 선의로, 회의를 신뢰로, 편견을 침착 냉정으로, 오만을 겸손으로 대치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이제 시가 나가야 할 방향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오늘의 시는 하나의 시적 세계어의 성립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시는 온상이며 대평원이라 할 수 있는 민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민중이란 세계를 상대로 한 민중임에 틀림이 없구요. 오늘의 민중을 감동시키게 하는 힘은 자유요, 사랑이라는 심장의 고동소리입니다. 시인은 세계를 향해서 어떤 자수의 시선을 던질 것인가를 깨닫고, 언어에 의해서 전달되는 사명을 짊어진 사람이 오늘의 시인이라는 사명감에서 새로운 내일을 찾아 역사적 현실을 조명하는 동시에 내일로의 힘찬 발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하략(대담했던 것을 정리해서)     단상-김소영   10년이 가고 하루가 왔구나   하루가 가고 10년이 왔구나   10년이니 강산이 변했다   하루가 변해 10년이 되고 10년이 변해 하루가 되고.   하루는 10년이요 10년은 하루다.   그래서 나는 나아닌 또 하나의 그림자를 봐야 했다.
409    시가 려과없이 씌여지면 시가 산만해지고 긴장감을 잃는다... 댓글:  조회:1843  추천:0  2017-04-18
너무 많은 소재의 남용 대상 작품 가을비 1* 어스름한 저녁 무렵 약속없는 빗줄기를 만나면 2* 오던 길을 뒤돌아 봅니다 3* 빗길 저 끝으로 4* 사주팔자 짚어가던 할머니가 서 계십니다 5* 고불고불 골목마다 6* 이름없는 들풀이 비를 맞습니다 7* 명분 세운 고목나무도 8* 비에 젖습니다  9* 이리저리 이럭저럭 함께 왔으니 10*스스로 대견하여 손길이 다정합니다 11*비에 젖은 불빛이 말을 시작하자 12*가장들은 젖은 어깨 위에 13*고단한 생활을 올려놓고 바삐 갑니다 14* 나는 맨 몸을 다시 걸으며 15* 그러려니 하고 16* 초라한 삶을 웃어봅니다 평설 처음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안고 있는 작품이다. 초심자의 경우, 한 편의 시 속에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본 것, 느낀 것을 여과없이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시가 산만해지고 긴장감을 잃고 만다. 그리고 언어의 선택에도 문제가 있다. 어휘력이나 언어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여 부적절한 비유법을 사용한다거나, 상투적인 표현을 하는 점 등이다.  위의 시를 살펴 보자. 비가 오는 날의 저녁 풍경을 할머니, 풀잎, 고목, 불빛, 귀가하는 가장들을 소재로 삼아 그려내고 있지만, 정작 지은이가 이 많은 소재들을 통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는 나타나 있지 않다. 지은이는 14행부터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라고 할 지 모른다. 독자들도 그렇게 짐작은 하겠지만, 구체적으로 닿아오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어떠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 꼼꼼히 따져 보기로 하자. ‘사주팔자 짚어가던 할머니’ ‘이름없는 들풀’ ‘명분 세운 고목나무’ ‘가장들의 고단한 생활’ ‘초라한 삶의 나’는 모두 함께 비를 맞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서로 어떤 연관성을 지니지 못하고, 비오는 저녁의 풍경을 단순히 나열한 것으로 그치고 있다. 각기 이야기는 성립하되, 전체적으로는 서로 어떠한 영향도 주고받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초심자들은 이야기를 벌려놓고 그것을 다시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몰아가는 힘이 부족한 탓이다.  시를 포함해 모든 글은 초점이 뚜렷해야 한다. 시는 짧은 형식에 비유법을 위주로 내용을 전달하므로 더욱 그러하다. 위의 시는 모든 소재들이 제각기 하나씩의 이야기로 독립되어서, 시의 초점을 흐려놓고 있다. 지은이가 비 오는 저녁 우산도 없이 맨몸으로 걷고 있는 초라한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했다면, 앞의 소재들은 모두 자신과 연관된 어떤 내용들이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독자들을 설득시키고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시는 주위 풍경의 감상적인 묘사가 아니다. 그 묘사 속에 자신의 감정이나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들어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의 상징성이며 묘미이다. 잘못된 표현에 대해 지적해 보기로 한다. 이 시는 거의 모든 행에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지만, ‘약속없는 빗줄기’ ‘사주팔자 짚어가던 할머니’ ‘명분 세운 고목나무’ ‘초라한 삶’은 특히 거슬리는 부분이다. 낡은 언어끼리, 혹은 의미없이 갖다 붙인 언어의 결합은 시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예를 들면 ‘사주팔자 짚어가던 할머니’는 이 시의 이미지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비 오는 날과 할머니, 그것도 사주팔자를 짚어보시는 할머니를 떠올릴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독자들이 시를 읽고 공감하는 것은 자신도 그러한 체험이나 느낌을 가졌을 때이다. 개인적인 체험이 아닌 보편적인 체험이나 감정만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또 ‘명분 세운 고목나무’는 앞뒤 행을 읽어보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이렇게 자신만이 알고 있거나, 그럴 듯하다고 해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마구잡이로 언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시는 일단 언어를 도구로 삼아 표현하는 예술 행위이다. 아무리 머리 속에서 뛰어난 발상이나 고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하더라도, 표현된 언어 자체가 유치하면 시 역시 그러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만다. 아직 언어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아마추어 때일수록 더욱 언어를 치열하게 갈고 다듬어야 할 것이다. 5, 6행의 골목길과 들풀은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골목길에 들풀이 어떻게 자라고 있겠는가. 시가 상상의 세계라고 해서 아무 말이나 서로 연결시켜 놓아서는 안 된다. 그 상상의 세계에서도 논리가 있고 질서가 있는 법이다. 9행과 10행의 대화체는 누가 하는 말인지 불분명하다. 지은이 자신이 하는 말인지, 11행에 나오는 불빛이 하는 말인지를 분명하게 처리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리저리 이럭저럭’과 같이 불필요한 부사가 중첩되었으며, 누가 함께 온 것인지 무엇이 대견한지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그 다음 11행과 12행에서도 불빛과 젖은 어깨의 가장 역시 무의미하게 연결되어 있다. 위의 시는 전체적인 의미가 통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수정해야 할 곳도 많아 고치기가 쉽지 않다. 필자는 이러한 때 작품을 버리라는 충고를 하고 싶다. 자신이 꼭 쓰고 싶은 작품이라면 언젠가 다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고 약간의 수정만 가해 보았다.  수정 가을비 어스름한 저녁 무렵 빗줄기를 만나면 오던 길을 뒤돌아 봅니다 빗길 저 끝 골목마다 이름없는 풀들이며 나무들이 비에 젖어듭니다 비에 젖은 불빛은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들의 고단한 어깨 위에 초라하게 흔들립니다 나는 우산도 없이 걸어가며 삶이란 다 그러려니 가볍게 웃어봅니다 ----------------------------------------------------------------   강가 ―이용악(1914∼1971) 아들이 나오는 올 겨울엔 걸어서라도 청진으로 가리란다 높은 벽돌담 밑에 섰다가 세 해나 못 본 아들을 찾아오리란다 그 늙은인 암소 따라 조밭 저쪽에 사라지고 어느 길손이 밥 지은 자췬지 그슬린 돌 두어 개 시름겹다 시집 ‘오랑캐꽃’에는 이용악이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쓴 시들이 수록돼 있다. ‘강가’는 그중 하나다. 1939년이면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이고,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 전쟁이 태평양으로 확대된 때가 1941년 말. 그러니까 전쟁은 나라 밖에서 벌어졌지만 식민지에 대한 수탈이 극도로 치닫기 시작한 시기에 쓰인 시다. 노인은 암소한테 물을 먹이러 강가로 몰고 나왔을 테다. 그 김에 등짝이랑 뱃구레랑 엉덩이에 말라붙은 오물도 씻어주고 있었을 테다. 누가 먼저 말을 걸었는지, 어느새 노인은 초면의 화자에게 속에 담긴 말을 털어놓는다. (노인의 떳떳한 발설로 짐작건대)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 갔을 아들, 청진까지 갔다 올 차비를 마련하기 힘겨운 가난. 갈 때는 혼자 겨울 삭풍을 헤치고 걷겠지만, 아들과 함께 돌아올 때의 차비는 꽁꽁 여퉈 놓으셨으리라.     조밭은 어쩐지 논이나 밀밭보다 풍요롭지 않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암소도 비쩍 말랐을 것 같다. 시 전편에 쓸쓸한 가난과 시름겨운 유랑의 기운이 자욱하다. 어느 길손인가 이 적빈한 마을의 강가에서 돌 두어 개 모아 불 지피고 밥을 지어 먹고 지나갔구나. 노인도 청진 가는 길에 어느 길섶에서 밥을 지어 드시게 될 테다. 화자도 정처 없이 떠도는 중이었을 테다. 그런데 시 속의 ‘그 늙은이’는 어머니일까, 아버지일까? 어머니일 것 같다. 이 늙은이의 결기는 간절한 모성이다.  
408    불쌍한 시들을 위하여 시인들은 장인정신을 갖추어야... 댓글:  조회:2174  추천:0  2017-04-18
  정호정/수정작품과 단번에 완성한 작품 나는 시를 어림으로 고친다. 무슨 이유로 어떻게 고친다는 이론이나 전문 용어는 잘 모른다. 그러므로 ‘나의 시 이렇게 고쳤다’고 하기보다는 ‘나의 시 이렇게 썼다’고 밝히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시를 완성해 가는 길이라는 동질성에서 감히.  써 놓은 시에 수정을 가한 것과, 초점이 잘 맞아 단번에 완성할 수 있었던 작품 두 편을 예시하기로 한다. 1 ‘능견난사(能見難思)’라는 유기 응기(應器)를 보았다. ‘잘 살펴보고도 보통의 이치로는 추측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을 가진 ‘능견난사’의 정보에 충실하기로 한다. 송광사 박물관 소장. 고려 후기. 전남 유형문화재 제19호. 구경 16.7cm, 높이 4.7cm. 두께 1mm. 송광사 구전에 의하면 금(金)나라의 장종황제의 황후가 쓰러져 기도할 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사용했던 접시라 한다. 숙종조에 사찰을 중창하며 나라에 진상하였으며, 어떤 대장장이도 그대로 만들어내지 못함에 왕이 어필로 ‘能見難思’라 써 내린 것이 이름이 되었다 한다. 어필은 남아 있지 않다. 송광사 기록에는 500개, 1828년 충청도관찰사 홍석주의 기행문 「여천옹유산록」에서는 50개를 보았다 하나, 지금의 송광사에는 30개가 현존한다. 조계산을 넘어 선암사로 가고 있었다. ‘능견난사’는 내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날아갈 듯이 고운 살결에 나의 모습이 어려 있었다. 그것은 나의 별이며 나의 시였다. 조계산의 밤하늘에서 총총히 빛나던, 나의 유년의 별이 아니라, 살아오는 동안에 갈개다 찢긴, 상처자국들 그득한, 빛을 잃은 별이었다. 부득부득 태어나고 있는 나의 시집이 세상에 나와 어떤 수모를 당할지, 많은 좋은 시들 앞에서 얼마나 초라할지 모를 불쌍한 나의 시였다.  조계산을 넘으며①(초고분)  능견난사能見難思에서 너를 본다② (너는 많이 일그러져 있다  능견난사는 송광사 박물관이 소장한  방짜유기접시 숙종때 사찰을 중창하며 진상한,  어떤 장인도 그대로 만들어내지 못해  왕이 어필로 써서 내렸다는 이름)  고운 살결에 가장자리를 가는 실금으로 말아올렸다③ (16.7cm의 구경이며 4.7cm의 높이, 1mm의 두께가  한결같다 차곡차곡 겹쳐진다)  겹쳐지는 놋쇠덩이를 주무른 망치의 힘을 본다④ 스치며 날아앉는 얇은 사의,  스미는 물소리의,  깊이 가라앉은 하늘빛의, 유년의 냇가에 구르던 웃음소리의 춤, 춤의 흔적같은  너의 살결은 뭉쳐 있는가 하면 창이 나려 한다  돌산이 들판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다  (‘능견난사’에 비치는 나의 너)  돌각다리 길을 오르며 내릴 때  내 안에서 이는 물 소리 바람 소리, 갈대의 서걱임마저 나를 깨운다 (누구도 재현하지 못한 신기만이 사랑이 아니라고 잘 생기지 못한 너를 다독인다.)  쪻괄호는 수정에 필요한 것임. ⑴ ①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하는 제목을 버리고, 구전을 참작하여 ‘누군가 방짜유기접시를 능경난사라 했네’로 개작하였다. ⑵ ②에서 ‘능견난사’를 ‘방짜유기접시’로 수정하였다. ⑶ 구전이나 사실의 서술 또는 군더더기로 여겨지는 괄호 안의 부분을 모두 삭제하였다.  ⑷ ③과 ④의 순서를 바꾸어 놓았다.  누군가 방짜유기접시를 ‘能見難思’라 했네 (수정분) 방짜유기접시에서 너를 본다  겹쳐지는 놋쇠덩이를 주무른 망치의 힘을 본다  고운 살결에  가장자리를 가는 실금으로 말아올린  스치며 날아앉는 얇은 사의  스미는 물소리의  깊이 가라앉은 하늘빛의  유년의 냇가에 구르던 웃음소리의  춤 춤의 흔적같은  너의 살결은 뭉쳐 있는가 하면 창이 나려 한다  돌산이 들판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다  돌각다리 길을 오르며 내릴 때  내 안에서 이는 물소리 바람소리  갈대의 서걱임마저 나를 깨운다. 2  고산(孤山)의 세연지(洗然池)는 매우 아름답다. 굴뚝다리로 보(洑)를 삼은 계담(溪潭)으로 물이 소리 없이 스민다. 이리저리 늘어놓은 바위들을 돌며 ㄹ자의 물길을 따라 다시 회수담(回水潭)으로 흐른다. 나는 동산에 떠오르는 달이며, 춤추는 무희의 너울이 잠기는 물을 그려 보기로 하였다. 아무리 그려 보아도 세연지의 아름다움일 뿐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는 세연지의 홍보원이 아니지 않은가. 문득 고요한 물에서 묵묵한 인종이 보였다.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이어온 아름다운, 그것은 바로 나와의 관계였다. 이 여인들의 인종이 고요하게 가라앉아서 모든 힘의 원천이 되고 있었다. 굴뚝다리에서 한바탕씩 갈등이 풀리고 있었다. 울리는 물소리를 즐기고 싶었을지, 물의 갈등을 풀어주고 싶었을지, 굴뚝다리를 놓은 고산의 의도를 내가 헤아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다만 물의 입장을 헤아리면 그만이었다. 창으로 넘나드는 자연은 늘 신선하다  고산은 흐르는 물에 굴뚝다리를 놓아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물이 고개를 숙이며 돌틈으로 스며듭니다  숨을 죽입니다 발뒤꿈치를 듭니다 소리 없이 이리저리 늘어놓은 바위며 배롱나무섬을 돕니다 산에서 흐른 암반 위에서 물은 맑고 고요합니다 맑고 고요한 물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서로 얼싸안고 싶은, 목놓아 울고 싶은, 위로받고 싶은, 살아 있음이며 반가움 서러움 고달픔들  두드리면 통통 소리가 납니다 속이 텅 비어 있습니다 암반 위에 양쪽으로 돌판을 세우고, 다시 돌판으로 덮은, 평소에는 건너다니는 다리가 되고, 물이 넘치면  폭포가 됩니다 물의 소리에 공명하는,  모두 다 내어준 이의 가슴입니다 때때로 차오른 나의 갈등이 풀리는 가슴으로 하여  계담의 물은 늘 아름답습니다.◑ ◇정호정 경기 안산 생. 98년 『문학과 창작』 신인상 당선. 시집 『프로스트의 샘』. ---------------------------------------------------------------------------------     빈 무덤―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에서 ―문충성(1938∼ ) 댓잎 바람 소리 봉분들 빈 무덤들 만들었네 시신들 찾지 못해 시뻘겋게 미쳐나 제주 하늘 떠돌다 시커멓게 멍든 혼들아! 50년도 더 지나 고작 눈물 무덤들 지어냈으니 와서 보아라! 무자년 그 처참한 삶과 죽음들 나라는 어디에 있지? 백의민족은? 우리가 창조해낸 삶, 아! 그 빈 무덤들!  이 시를 옮긴 시집 ‘허물어진 집’은 금빛 햇살 물고 한가로이 파도치는 아름다운 제주 바다, 수심(水深) 깊이에서 자욱이 피어오르는 제주도 사람의 처연한 역사로 독자 가슴을 벤다. ‘제주어(제주 토박이말)가 사라져간다./제주도인도 사라져간다./사라지기 전에 이 언어로/제주 4.3사태 등에 대한 몇 편의 시를 썼다.’(‘시인의 말’에서) 사람들아, ‘와서/보아라!’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그에 서린 애통함과 의분(義憤)이 언제까지고 가슴을 쑤시는 ‘무자년 그 처참한 삶과 죽음들’. 4·3사태 유적지 ‘무등이왓’, 정확히는 ‘무등이왓 터’에서 새삼 무너지는 시인의 억장이다.     ‘왓’은 ‘밭’이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다. ‘무등이왓’에 대한 사진과 글이 인터넷에 많이 올라 있다. 1948년 11월에 ‘시뻘겋게 미쳐나’, 불을 내서 주민을 몰살시키고 폐촌을 만들었다지. ‘댓잎 바람 소리/봉분들/빈 무덤들/만들었네 시신들/찾지 못해’, 인터넷 사진 속의 돌담을 뒤덮은 무성한 대나무 숲, 솨솨 흔들리는 소리 들리는 듯하다. ‘행복한사람’이라는 블로거가 글을 맺은 말이 가슴에 남는다. ‘먹고살기 힘들다고/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고/잊어버리지 않기를/소홀히 하지 않기를/나는 제주인이니까!’ 거칠게 선동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우러나 움직이게 하는 선생의 제주 시편들. 무너지는 억장에서 나오는 여리고 맑은 시어가 가슴에 촉촉이 젖어든다. 가령 ‘할로산과 흐르지 않는 남수각 시내/개떡 같은 초가 마을이/살았어요 검둥개와 조랑말/복숭게낭/돔박낭과 돔박생이/밥주리와 독수리/머쿠슬낭과 머쿠슬생이’(시 ‘회귀·回歸’에서), 언제까지고 나직나직 이어질 듯한 이 서럽고 아름다운 옛이야기 가락. 선생의 시집들을 다시 찾아 읽어야겠다.  
407    시는 쉬지않고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여야... 댓글:  조회:2046  추천:0  2017-04-18
6. 사랑 시는 삶의 길 찾기이다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그 대상을 향하여 쉬지 않고 움직인다, 어떤 때는 식물의 뿌리가 물 있는 곳을 향해 움직이듯이 꽃나무 줄기가 햇빛을 향해 방향을 틀듯이 그렇게 움직인다. 그러나 어떤 때는 회오리바람처럼 한 곳을 향해 불어 가기도 하고 폭포를 만난 물줄기처럼 급하게 아래를 향해 떨어지기도 한다. 사랑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쉬지 않고 움직인다.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던지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움직인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사랑하는 그 대상을 ‘향하여’,사랑하는 대상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동시에 자신을 향한 움직임이며 자신을 위한 움직임이기도 하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얼굴을 그려보라고 하면 대개 자기 얼굴을 그려 놓는다고 한다.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본 얼굴, 가장 낯익은 얼굴 형상이 곧 자기 얼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 경우도 자기가 가장 친숙하게 생각해 오던 모습, 가장 마음에 드는 얼굴과 마음을 채워 주는 행동을 하는 사람, 그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인 경우가 있는데 그게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의 반영일 수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나의 반쪽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뒤집어 놓고 보면 내 똑같은 모습의 반영이라는 얘기와 같다. 사랑하는 자기의 반쪽을 찾아 나서는 어른을 위한 동화 속의 이야기나 영어에서 아내를 ‘My Deer Better Half'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런 뜻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사랑이란 결국 자기와 하나가 될 수 있는 또 다른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요 다르게 말하면 그를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해 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또 다른 자기 존재를 확인해 가는 과정은 그리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 없이 고통 받고 상처 받는 일을 되풀이 해 가며 이루어진다. 분홍 지우개로 그대에게 쓴 편지를 지웁니다 설레이다 써 버린 사랑한다는 말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 나갑니다  그래도 지운 자리에 다시 살아나는  그대 보고 싶은 생각 분홍 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그리운 그 생각의 끝을 없애려고 혼자 눈을 감아 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 같습니다.                --안도현 「분홍지우개」중에서 그대에게 편지를 쓴다. 썼다가 지운다. 사랑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랑의 상처 때문일 수도 있다.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랑의 확신이 아직 서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설레면서 썼던 사랑한다는 말을 조금씩 지운다. 그래도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살아난다. 생각뿐만 아니라 실제로 만나 사랑하다가도 그런 과정을 거친다.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지워 버려야 한다는 생각의 끊임없는 반복으로 불면의 밤과 번뇌의 시간을 갖는다. 스탕달이『연애론』에서 이야기한 제1 결정작용과 제2 결정작용 그런 것을 수 없이 되풀이한다. 마지막으로 그 생각의 끝까지 없애려고 눈을 감아 본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를 지워 버리면서 나 역시 이 세상에서 지워져 버리고 말 것 같은 느낌. 사랑은 존재의 확인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은 결국 내가 사랑 받으며 살아 있다는 자기 존재의 확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대에게 쓴 편지를 지운다’는 말과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 질 것 같다’는 말은 결국 그 어떤 것도 지워 버릴 수 없다는 바람, 즉 문학 용어로 소망적 사고(Withful Thinking)의 표현이다. 그것은 마치 「가시리」에서 ‘셜온 님 보내옵노니 가시는 듯 도셔 오쇼셔’하고 표현할 때처럼 서러운 것은 남아 있는 자기 자신이요 떠나는 님이 아닌데 님도 자기처럼 서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생긴 소망적 발언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정호승 시인의 유명한 시 「또 기다리는 편지」도 마찬가지다.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 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 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정호승「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시인은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다리는 고통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 행복한 법이다. 사랑하는 일이 더 행복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은 물론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보다 기다리고 있는 동안이 더 행복하다고 표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정말은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소망적 표현일 것이다.  이 시속에서 말하는 시적 화자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아주 외로운 모습으로 있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가슴 부풀어오르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사랑하고 있다. 저녁 해 질 때부터 시작하여 잠든 세상 밖에서 새벽 달 빈 길에 뜰 때까지 밤을 새운다.  사랑 때문에 밤을 새워 괴로워한 그는 지금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운다. 저무는 섬처럼 바다 한가운데 외롭게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외롭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자기처럼 외로운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했고 그렇게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해마다 첫눈이 내릴 때면 다시 눈 같은 그리움으로 생각나곤 했을 것이다. 그렇게 울면서 외롭게 있으면서도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다고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의 모습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은 채로 혼자 외로워하고, 울고, 기다리며 밤을 새우는 정호승 시인의 시적 자아는 급기야 이런 처절한 사랑의 고백에까지 이른다. 내 이제 죽어서도 증오의 죄는 없다  내 이제 죽어서도 그리움의 죄는 없다 나는 언제나 너를 죽이고 싶었으나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하고 싶었다  너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릴 수는 있어도  나를 위해 내 목숨을 구할 수는 없었다                    ---정호승「나의 길」중에서 이런 마음 상태에 이를 정도로 사랑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얼마나 모든 것을 다 바쳐 그리워했으면 그리움의 죄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다림의 죄 사랑의 죄는 없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한 목숨 다하도록 사랑한 것일까. 거기다가 죽어서도 증오가 되는 일이 없을 정도로 사랑했다면. 사랑 때문에 죽이고 싶어지는 마음. 그러나 사실은 그 마음보다 더 크게 사랑하고 싶었던 마음.‘나를 위해 내 목숨을 구할 수는 없어도 너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릴 수는 있는’사랑을 했으므로 ‘내 이제 죽어서도 사랑의 죄는 없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가는 길이 ‘사랑의 길’ 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사랑했으면서도 끝끝내 채워지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그 아득한 거리를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좁혀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대가 한 자락 강물로 내 마음을 적시는 동안 끝없이 우는 밤으로 날을 지새우던 나는 들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밤마다 울지 않으려고 괴로워하는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래오래 별을 바라본 것은 반짝이는 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어느 날 내가 별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헬 수 없는 우리들의 아득한 거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지상의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길들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해뜨는 아침부터 노을지는 저녁까지 이 길 위로 사람들이 쉬지 않고 오가는 것은 그대에게 가는 길이 들녘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랍니다.                               ---안도현 「그대에게 가는 길」 이 시의 화자는 ‘끝없이 우는 밤으로 날을 지새우던 들판’ 처럼 황량하게 있다. 지상에서의 사랑의 아픔 때문에 처음엔 별을 바라다본다. 그러면서 ‘헬 수 없는 우리들의 아득한 거리’를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지상에 크고 작은 길들 내는 작업을 시작한다. 하늘이 아니라 지상에 길을 낸다. 이 시를 읽으며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는 ‘사랑은 길 찾기’라는 것과 또 하나는 ‘그 길은 하늘에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에서 찾아야한다’는 것이다. 관념이나 이상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과 다름 아닐 것이다.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는 말을 했다. 사람의 일이기 때문에 사람 속에 사랑의 끝도 있고 시작도 있는 것이다. 헤어짐도 있고 만남도 있으며 다시 만나야 한다는 믿음도 별 속에서가 아니라 사람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머릿속에서가 아니고 삶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 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정호승 「강변 역에서」중에서 이 말은 기다림의 전 과정을 통해 결국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닌 것이다. 사랑하며 사는 전 과정이 곧 삶의 전 과정이며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우리들의 몸부림 그 자체는 결국 우리 삶의 길 찾기인 것이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우리 삶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대가 한 자락 강물로 내 마음을 적시는 동안 끝없이 우는 밤으로 날을 지새우던 나는 들판’이었지만 ‘그대에게 가는 길’은 ‘들판’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외롭고 황량한 내 자신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들판’. 그러나 그대에게 가는 길도 바로 그 들판 어딘가에 있다는 이 말은 사랑의 길은 곧 내 자신의 삶 속에 있다는 말인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캄캄한 어둠을 지나 밝은 모습으로, 싸늘한 들판을 걸어 따뜻한 체온으로 다가가는 그런 사랑을 하게 되기를 꿈꾸는 것이다.                  해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 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 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 다오 .............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 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 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 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 줄 따뜻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안도현 「그대에게 가고 싶다」 중에서 사랑이 긴 고통의 과정을 통해 한 사람을 ‘맑은 사람’‘금방 헹구어 낸 햇살 같은 사람’을 만드는 일이라면 사랑의 고통은 아름다운 고통이다. 거기다가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 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 질 수 있다면’ 사랑보다 더 큰 것은 없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여 그들의 사랑이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구멍난 삶을 기워내는 일이 된다면 사랑은 구원이다. 그리고 서로의 개인적인 구원에 그치지 않고 두 사람의 사랑으로 새날이 밝아 오고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사랑으로 나아간다면 사랑은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가장 큰 생명의 원천이다.  ------------------------------------------------------------------------     해남에서 온 편지  ―이지엽(1958∼ ) 아홉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꾹꾹 쑤신다 아가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쪼간 부친다 비민하것냐만 그래도 잘 챙겨묵거라 아이엠 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딸랑 하고 지난 설에도 안 와브럿다 애비가 알믄 배락을 칠 것인디 그 냥반 까무잡잡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릉 따라 나서야 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안 그냐. 쑥 한 바구리 캐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잔 혔다 지랄놈의 농사는 지먼 뭣하냐 그래도 자석들한테 팥이랑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할코 종신서원이라니… 그것은 하느님하고 갤혼하는 것이라는디… 더 살기 팍팍해서 어째야 쓸란가 모르것다 너는 이 에미더러 보고 자파도 꾹 전디라고 했는디 달구똥마냥 니 생각 끈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     종이에 꾹꾹 눌러 쓴 낯익은 글씨에 벌써 딸은 와락 그리움이 치밀 테다. 어머니만의 말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편지에 어머니의 모습과 목소리가 아른거리리. 삭신은 꾹꾹 쑤시고 마음은 질컥거리고, 그래서 사는 게 팍팍하단다. 하나 있는 아들이 ‘지난 설에도 안 와브럿다’고 딸에게 일러바치며, 그리움과 외로움과 서운함을 알뜰히 전하신다. 딸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각별하신 듯하다. 그만큼 살갑고 미더운 딸이 수녀 종신서원을 했으니, 알지 못할 세계로 가버린 듯 가슴이 휑하실 테다. 보고자파라, 내 딸! 편지로 미루어 시원시원한 성격인 어머니시지만 눈 밑 주름 고랑을 타고 ‘달구똥(닭똥)’ 같은 눈물이 흐르셨을 테다. 그 마음 감추고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라신다. 아, 그리운 어머니, 그리운 복사꽃! 곡식을 거둘 때도 자식 생각, 복사꽃이 피어도 자식 생각.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이 생기면 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일래라. 길지 않은 시에 홀로 농촌을 지키는 노인이며 한 집안의 서사가 담겨 있다. 구어체 편지 형식의 맛깔스러운 사투리가 시를 생생히 전한다.  
406    시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필치로 속이 꽉차게 써야... 댓글:  조회:2276  추천:0  2017-04-18
5.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디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디다. 그리고 일진 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 최승자 「가을」 사람은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한다. 단 한 순간도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면 견딜 수 없어 한다. 이내 절망하게 되고 사랑이 없는 상태를 죽음과 같다고 느끼게 된다. 그것이 이성에게서 느끼는 사랑이든 자식이나 연인 또는 종교적인 대상에게서 느끼는 사랑이든 누군가로부터 어떤 사랑도 받고 있지 못하면 그는 살고 싶은 의욕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요 살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동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시로 그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한다. 끊임없이 사랑을 찾아 나서고, 느끼려 하고, 순간 순간마다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 보려 한다.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최승자 시인은 아주 무심한 척 달관한 척 이런 어조로 말했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숨기려 하고 무관심하게 내팽개쳐 두고 있는 듯한 태도의 이면에는 누군가 이런 모습으로 있는 나를 발견해 주고 다가와 주고 그래서 나의 외로움을 매만져 주길 바라는 마음의 딴청부리기일 것이다.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심리학 용어로는 ‘반동형성’ - 리액션 포메이션이라고 한다. 2연에서 ‘세월이 내게로 ’왔다고 했다. 세월. 그러니까 무심하게 나를 버려 둔 채 흘러가던 시간이 시간 속에 외롭게 버려져 있는 나를 발견하고 다가와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낙엽 한 장의 모습으로. 어느 가을에. 실은 그런 가을 그런 시간에 사랑이 내게 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가, 고대하고 있었는가를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낙엽 한 장만 떨어져도‘일진광풍이 몰아치’는 것이다. 낙엽과 함께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이 함께 휘몰아치고 사랑의 폭풍에 감기고 마는 것이다. 1연의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하는 말의 속마음이 그게 아니었다는 것은 3연의 ‘오래’라는 말로서도 확인된다. 실은 오래도록 기다리고 사모하면서 세월 속에 묻혀 있었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며 마지막 행의 ‘기어이’라는 말로도 얼마나 그대를 생각하며 참아왔던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연애라 하는 것은 한 시간 전까지 전혀 모르던 남남이 일생을 통해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종류의 뜻밖의 일이 연애의 조건일 것이다.”(朱門)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지만 ‘전혀 모르던 남남’이라기 보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인 쪽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은 물론 한 시간 전과 후가 크게 차이가 나겠지만 그 순간의 휘몰아치는 일진광풍, 사랑은 늘 그런 모습으로 오곤 한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 우리가 그 사랑이 언제 올 것인가 하고 늘 찾고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그런데 다음 시들을 읽으며 우리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사랑은 무엇인가? 왜 사람은 그렇게 끊임없이 사랑하고 사랑의 존재를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하는가?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매 꽃같이 숨었느냐.                  ---유치환 「그리움」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귀절을 쓰면 한 귀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김남조 「편지」 유치환의 ‘그리움’을 보면 ‘없는 얼굴’을 찾고 있다. 그는 일찍이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다.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거리를 헤매며 울고 있다.‘꽃같이 숨은’너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는 시이다. 김남조의 ‘편지’는 사랑스러운 그대 때문에 생기는 외로움과 그 외로움으로 인한 아픔을 노래한 시이다. 그러나 그대로 인한 슬픔을 통해 내가 더 정직해지고 나를 성찰하게 하는 거울로 작용하며 그대의 끝에서 내가 시작되는 그런 관계임을 알게 한다. 그래서 헤어져 있는 그대에게 편지 한 구절을 쓰면 그 한 구절을 와서 읽는다고 느낀다. 하나는 그리움을 또 하나는 외로움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지만 헤어져 있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되고자 하는 아픈 갈망을 갖고 있는 점에서는 같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정신작용 중에 가장 예민하고 예리한 과정인 사랑에 대한 사회과학적인 분석을 하면서 사랑은 근원적으로 소외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에게 가장 뿌리깊은 욕구는 그의 소외감을 극복하고 고독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시대, 어떤 문화에서나 한결같이 똑같은 질문을 받아 왔다. 어떻게 하면 소외감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결합이 가능할까, 어떻게 하면 개인 생활을 초월하여 일체감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사랑이란 인간 내부에 있는 활동력의 하나이며, 인간을 그의 동료들로부터 소외시키는 장벽을 허물어뜨리고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고립감과 소외감을 극복시켜 주면서 동시에 나를 나이게 하는 개성을 유지시켜 준다.” “스스로의 고립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는 인간의 비밀을 알고 싶어하는 또 하나의 인간 특유의 욕망과 깊은 관계가 있다....인간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려고 하면 할수록 신기루처럼 멀리 달아나 버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의 신비 속에 ‘그’라고 불리는 존재의 가장 깊숙한 핵 속에 파고 들어가 보고 싶은 욕망을 누르지 못한다.” “인간의 신비를 알아보는 다른 길은 사랑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능동적으로 침투하는 행위이다. 사랑 속에서는 신비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 남과 결합함으로써 해소된다. 결합을 통해 나는 상대를 알게 될 뿐 아니라 나 자신과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결국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에서 소외감과 고립감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상대방에 대해 알고 싶어하며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 드는 마음의 상태가 곧 사랑이라고 프롬은 말한다. 그러나 결국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된다는 점과 인간이 근원적으로 고독한 존재라는 데서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비극이 있다.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냐’는 탄식과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절제는 그런 사랑의 비극성에 대한 깨달음 또는 사랑 때문에 울음 우는 내 심정을 헤아려 주고 이제는 네가 내게로 와주기 바라는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다음 시들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 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 쳐갔습니다                      ---조병화 「초상」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 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이성복 「숨길 수 없는 노래 2」 조병화의 「초상」은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아픔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1연 그대와의 첫 만남 2연 사랑의 시작 3연 사랑의 고독 4연 잊어야 하는 슬픔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기 승 전 결의 방식으로 서술해 가고 있다.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때 느꼈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모에서 오는 아름다움만은 아니라는 의미를 우리는 읽을 수 있다. 내가 꿈꾸던 이상적인 사람의 모습 아마 그런 걸 발견했을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만의 생각이고 그대와의 사랑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고독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독은 아름다운 그 사람을 남몰래 사랑한다는 것만으로 호사스럽게 생각되는 고독이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그대를 만나고는 잊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닷가를 미친 듯이 달려가야 했던 슬픔과 괴로움이 함께 하는 그런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과 아픔은 있지만 그대 쪽의 생각과 반응은 전혀 그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이성복의 ‘숨길 수 없는 노래 2’를 보자. 이 시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사랑하던 그대의 부재와 그로 인한 서러움이다. 그대와의 사랑으로 보낸 어둡고 답답했던 세월, 너무 빠르거나 늦은 속도로 비껴 가기만 하던 운명, 그래서 근원적으로 서러움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사랑을 한다. 그런 줄 알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그대의 부재로 괴로워한다.   그래서 칼릴 지브란은 일찍이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그대들을 부르면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를 싸안을 땐, 전신을 허락하라.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들을 상처받게 할지라도. 사랑이 그대들에게 말할 땐 그 말을 믿으라, 비록 북풍이 저 뜰을 폐허로 만들듯 사랑의 목소리가 그대들의 꿈을 흐트러 놓을지라도. 왜? 사랑이란 그대들에게 영광의 관을 씌우는 만큼 또 그대들을 괴롭히는 것이기에. 사랑이란 그대들을 성숙시키는 만큼 또 그대들을 베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기에.   .......... 스스로 사랑을 깨달음으로써 그대들 상처받게 되기를. 그리하여 기꺼이, 즐겁게 피 흘리게 되기를.                 ---칼릴 지브란 ‘예언자’중에서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 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도종환 「봉숭아」 이 시는 손가락 끝에 봉숭아물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쓴 시다. 시적 자아와 사랑하던 사람과의 관계를 봉숭아꽃잎과 물이 든 손가락과의 관계로 대비시켜 가며 쓴 이 시는 내용적으로 사랑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핏자국과 아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앞의 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몸을 섞었던 사랑. 정신적이면서 육체적이기도 한 사랑의 구체적이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아픔과 고통을 동반하는 사랑의 길, 그것을 손톱에 물이 들어 지워지지 않고 있는 봉숭아물의 모습에 구체적으로 비유하여 형상화하고 있다.‘사랑이란 언제나 이별의 시간이 오기까지는, 자기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칼릴 지브란이 말했던 것처럼 이별 이후에 느끼는 사랑의 아픔과 남아 있는 상처까지를 시는 담고 있다. 곽재구는 사랑의 고통을 도리어 희망으로 승화시키며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섬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 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 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 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곽재구 「새벽편지」 사랑의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 속에서 아름다움과 자유로움과 따스함을 찾아내며 사랑의 섬 하나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게 하는 시적 화자의 사랑에 대한 자세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냥 얻어진 게 아니라 ‘다시 고통 하는 법을 익히면서’만들어 가는 것임을 알게 한다. 너를 사랑한다는 일은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함’이며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 향기를 맡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이란 새벽에 만나는 깨어 있는 정신이요 깊숙한 뜨거움임을 눈시울 붉어지며 깨닫고 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득임 사이에서 더욱 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문병란 「호수」 사랑이 외로움이다 그리움이다 아픔이다 많은 시인들이 그렇게 이야기 할 때 문병란 시인은 기다림이라고 말한다. 어떤 기다림?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난 그 끝에 만나는,‘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에 대한 기다림이다 .그리고는 다시 묻는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이렇게. 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긴 여정.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기다림의 끝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목마름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은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고 무수한 사람들의 어깨와 무수한 눈길 다 지나고 시간의 변두리로 물러나 혼자 있게 되었을 때, 더욱 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서 있는 그런 순간에 비로소 만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현종도 사랑은 생 뒤에 온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생 뒤에 온다. 그대는 살아 보았는가. 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 만일 타인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 그리고 타인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 뒤에 온다면 사랑은 항상 생 뒤에 온다. 그렇다면 ? 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정현종 「사랑의 꿈」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사랑은 그 당시에는 모르다가 지나고 난 뒤에 늦게서야 그것이 사랑이란 걸 깨닫게 된다는 뜻일까? ‘사랑은 생 뒤에 온다’는 말은 또 무얼까? 살면서, 살고 난 뒤에 비로소 삶 속에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뜻일까? 삶으로서 삶 속에서 느끼고 깨닫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이 사랑이라는 관념을 향한 사랑 또는 막연한 그리움이었다면 그것은 ‘생 뒤에 오는’것이리라. 그래서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고 말하게 되었으리라. 삶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아 알고 난 뒤에, 그 사랑의 뒤에 오는 것이라면 사랑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삶과 사랑의 관계. 삶 속에서 삶으로 부딪히며 깨달아 가는 사랑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살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실재를 알기 위해서, 아니 내가 가지고 있는 환상이나 불합리하게 이지러진 선입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상대나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고 에리히 프롬은 말했다.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 속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 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 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 하나가 다 이뻐 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 당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 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한 봄입니다.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김용택 「사랑」 헤어진 뒤의 괴로움과 아픔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이 시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필치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상대방의 입장으로 돌아가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 잊을 건 잊어야 ’함을 생각하며 자기의 마음이 치유되기를 기다리는 이 시의 시적 화자가 가장 크게 깨달은 부분은 1연의 마지막 행일 것이다. 이제 생각해 보면 / 당신도 이 세상 하고 많은 사람들 중의 /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을 단순히 감상적이거나 심정적인 차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삶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특히 사람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헤어짐의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보이고 / 사람들의 몸짓 하나 하나가 다 이뻐 보이고’‘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랑의 아픔을 통해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솔직하고 진솔하게 고백하며 리얼리즘 시의 알짜배기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서로 사랑하다 미워하며 돌아서야 하고 함께 있으면서도 사랑하는 괴로움 때문에 가슴 아파할 때 우리는 ‘칼릴 지브란’의 다음과 같은  시 구절을 조용한 목소리로 읽고 또 읽게 된다.   서로 사랑하라, 허나 사랑에 속박되지는 말라.   차라리 그대들 영혼의 기슭 사이엔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두라   서로의 잔을 채우되 어느 한 편의 잔만을 마시지는 말라.   ......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게 하라,   비록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외로운 기타아 줄들처럼.   서로 가슴을 주라, 허나 간직하지는 말라.   오직 삶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허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칼릴 지브란 ‘예언자’ 중에서 -----------------------------------------------------------------------------   낙엽 ―레미 드 구르몽(1859∼1915)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 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가만가만, 소리 내 읊조리게 되는 시다. 바람에 흩어지며 구르는 낙엽처럼 상냥히 외쳐, 시를 읊어 보자. 정답고 쓸쓸한 낙엽 밟는 소리, 발바닥엔 낙엽의 감촉, 공중에 떠도는 낙엽 냄새…가슴이 아릿하다.     아름다움이여, 가을바람의 소슬함을 견디게 하는, 가을 시의 아름다움이여. 구르몽, 나도 좋다!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이제 곧 거리마다 낙엽이 풍성하리라. 나는 설레며 걸으리라. 한적한 곳에서는 눈을 감고 걸으며, 낙엽이 영혼처럼 우는 소리에 귀 기울이리라.
405    시는 삶의 희노애락이 얼룩진 보물상자에서 나온다... 댓글:  조회:2414  추천:0  2017-04-18
  4. 시는 싸우고 감동하고 눈물 흘리는 삶의 얼룩에서 나온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짧은 안내문이나 편지글을 써 달라고 부탁을 하면 “아유, 저는 글 못 써요.”하고 정색을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런 사람들은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글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전문가들만이 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는 그런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구나 시를 쓰자고 하면 더 펄펄 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태도를 보인다. 아마 시라는 것이 어렵고 특별한 내용을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끼리 암호처럼 주고받는 것쯤으로 생각하지 않나 싶다. 그런 사람들은 글은 잘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잘 쓴다는 것 속에는 유식한 말들이 많이 나오고 몇 줄 건넌 한 번씩 어려운 말과 처음 들어보는 구절이 등장하며 화려하고 그럴 듯한 표현들로 이어져 나가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쉽고 진솔하게 써 나가는 것이 좋은 글이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한다. 시도 마찬가지다. 그런 시가 더 진솔한 감동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진짜 이렇게 써도 괜찮으냐는 표정을 짓는다. 글에 대한 그런 편협한 생각을 깬 사람중의 하나가 김용택 시인이다. 그의 시는 쉽다. 어렵지 않고 진솔하다. 강 마을에서, 학교에서 농촌에서, 살아가면서 접하고 느끼는 삶의 이야기들로 쓰여져 있다. 그러나 전혀 어렵지 않은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풋풋한 정을 느끼고, 감동을 받고, 김용택 시인이 사는 강변으로 찾아가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든다. 김용택 시인뿐만 아니다.‘ 노동의 새벽’의 박노해 시인,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의 고재종 시인, ‘인부수첩’의 김해화 시인 ‘공친날’의 김기홍 시인 이런 시인들의 시도 쉽다. 다 자기들 삶에서 우러난 시들이다. 공장 노동자, 농사짓는 사람, 시내버스 안내양, 철근 다루는 일용노동자, 주부 이런 사람들 중에도 시를 잘 쓰는 훌륭한 시인들이 많다. 이들 중에는 고등학교 중퇴, 중학 졸업,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인 사람들도 여럿 있다. 시란 꼭 높은 학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잘 쓸 수 있다는 통념을 깬 사람들이다. 시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쓸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시인들이 쓰는 시는 특별한 이야기를 화려하고 아름답게만 장식해 나가는 시어가 아닌 평범한 일상어들로 표현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삶의 진실성과 문학적 진정성을 동시에 얻어내는 특징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이런 문학적 분위기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 속에 생활시가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미 1930년대에 이러한 생활시가 주조를 이루던 생활시 시대가 있었다. 일본의 생활시 이론가 이나무라 갱이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조풍월의 취미가 생활에서 도피하려는데 비해서 생활시가 나가는 방향은 생활에 밀착하려는 태도이다. 어디까지나 자기의 생활 가운데 뛰어들어 거기서 나아가려는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참가하려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생활 위에 서 있지 않으면 안 된다......새로운 생활적인 정신으로 살아가려는 우리들이 사념하는 것은 근심 많은 이 세상, 더렵혀진 이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다. .....거기에 생활시의 근본적인 태도가 근거한다.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인간이 영위하는 생활과, 그 인간이 만든 사회와, 인생을 사랑한다. 그것에 부딪쳐 가는 강인한 생활의욕을 희구한다. 우리들은 생활을 속사(俗事)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그 속사(俗事)에야말로 시가 있는 것이다.1)       속사, 즉 세상의 이런 저런 일 속에서, 우리들의 때묻고 남루한 삶의 한복판에서  시가 쓰여지는 것이라는 이러한 자각은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땀과 눈물과 기쁨과 분노와 고통과 소망, 이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뒹굴며 살아가는 동안 묻어나는 삶의 얼룩 그것이 시가 되어야 하며 오철수 시인의 말대로 ‘우리의 생활은 우리 시가 사는 보물상자인 것’2)이다.  다음 시를 보자.       처음엔 남자가 할 짓이 아니라며 짜증도 냈지만 요즘엔 나 스스로 재미가 나서 언제 적 것인지도 모를 신문지를 깔아 놓고는 아내와 마주앉아 콩나물을 다듬습니다 콩나물은 노란 대가리와 흰 뿌리로 신문지 위에서 언제나 의연합니다 우루과이 라운드니 농산물 개방이니 어쩌구 하는 대문짝만한 일면 기사 위에서나  백 억인지 천 억인지 그 큰 돈을 떡 주무르듯 했다는 탐욕스런 큰 손 아줌마의 눈빛 위에서나 거리낌 없이 꼿꼿한 뿌리를 쭉쭉 내뻗기도 하고 더러는 몸뚱아리 하나로 먹고 산다는 어느 광고 모델의 요염한 사타구니 사이로 천연덕스럽게 대가리를 디밀기도 하면서 풋풋한 재미를 즐깁니다       돈도 없고 명예는 물론 권세도 남만 못한              이 땅의 교사인 내가  오백 원어치 콩나물을 정성스레 다듬다 보면 콩나물처럼 머리를 맞대고 사는 평생을 살아도 신문 기사에 이름 석자 오르지 못할 많은 이웃과 아이들이 손을 내밀며 걸어 나오고 콩나물만으로도 풍요로울 줄 아는 우리들의 소박한 식탁이 떠오릅니다       욕심을 낼래야 낼 건덕지도 없는 콩나물은 콩나물끼리 뿌리를 얽고는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다듬어 줍니다 마주 앉은 아내와의 사랑이 다듬어지고 이웃들의 정겨운 웃음이 다듬어지고 아이들의 건강한 꿈이 다듬어지고 그렇게 다듬어진 콩나물들은 욕망으로 얼룩진 신문 활자를 당당히 즈려밟고는 싱싱한 우리의 양식이 되어 보란 듯이 손을 흔듭니다              --- 장문석 「콩나물 사랑법」전문                                                               이 시는 콩나물을 다듬고 앉았다 쓴 시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참 짜증나고 답답한 남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는지 몰라도 이 시속의 시적 화자는 이 사소하고 시시해 보이는(이런 표현 자체가 남성중심문화 속에서 몸에 밴 습성이고 남자는 그런 일이나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가부장의식과 그런 일은 여자나 하는 것이라는 여성 비하적인 삶의 태도가 내면화 되어버린 것이지만) 일을 하는 동안 결코 사소하지 않은 자각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이 땅의 소시민으로 태어나 남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평범하기 때문에 시인도 될 수 없고 시도 쓸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 따위는 이미 뛰어넘고 있다.   아니 바로 그 평범한 삶 속에서 삶의 소박한 진리를 깨닫고 있는데 이 시의 미덕이 있다. 콩나물을 다듬기 위해 깔아 놓은 신문지를 보며 대문짝만한 기사들로 연일 채워지는 이 땅의 큰일, 큰일을 만드는 사람들과 ‘콩나물처럼 머리를 맞대고’‘평생을 살아도 신문기사에 이름 석자 오르지 못할 많은 이웃’들의 삶을 비교해 보고 ‘우리들의 소박한 식탁’을 떠올린다. 그러나 결코 주눅들지 않고 소박한 삶 그 자체에서 더 큰 풍요로움을 느낀다. 물욕과 육욕 그 유혹을 콩나물의 모습으로 깔아뭉개는 여유로운 모습도 있다.   ‘욕심을 낼래야 낼 건덕지도 없는’삶의 콩나물 다듬는 작은 일 속에서,그것도 아내와 마주 앉아 하는 가사일속에서 ‘서로의 상처를 다듬어 주고’‘마주 앉은 아내와의 사랑이 다듬어지고’‘이웃들의 정겨운 웃음’‘아이들의 건강한 꿈이 다듬어지’는 이런 과정은 얼마나 싱싱한 삶의 활력이 되는가. 삶의 한복판에서 시가 쓰여지고 그렇게 쓰여진 시가 삶을 가꾸는데 기여하게 되는 이러한 과정이 문학과 삶의 가장 온당한 모습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양정자 시인은 「나의 시」라는 시에서 시가 어떻게 생활 속에서 쓰여지는 것인가를 아주 잘 이야기한 바 있다.   나의 시에는  세 살 다섯 살 된 내 딸, 아들의 떼쓰는 울음소리 눈물나도록 어여쁜 재롱 내 악쓰는 소리가 섞여 있다 아이들이 떠들고 그림 그리는 옆에서 부대끼며 싸우며 시를 쓰므로 피노키오 파스 색깔 미운 오리새끼, 인어공주의 눈물 몇 방울 떨어져 얼룩져 있다 ......................................... 나의 시에는  물 묻은 내 손에서처럼 설겆이질의 야릇한 냄새, 갖은 양념내 걸레 썩는 냄새가 배어 있고... 시는 꼭 아름다운 꽃이어야만 하는가 부대끼며 싸워가며 살아가는 실팍한 생활의 시를 쓰고 싶다 내 시에서는 어떤 소리가 날까. 내 시는 어떤 빛깔이 배어 나올까. 내가 쓰는 시에는 어떤 냄새가 날까. 자기가 쓰는 시의 개성을 생각하며 이런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가장 영롱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향기로운 어떤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양정자 시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자기의 시에서 소리가 난다면 그 소리는 “딸 아들의 떼쓰는 소리, 재롱소리, 내 악쓰는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한다. 시에 빛깔이 있다면 그 빛은 떠들면서 그림을 그리는 아이의 크레파스 빛, 동화책을 읽다가 흘린 눈물 빛 그런 빛깔들이 배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자기 시에 냄새가 배어 있다면 그것 역시 설거지질의 야릇한 냄새, 갖은 양념내, 걸레 썩는 냄새 같은 냄새가 배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양정자 시인은 시가 꼭 아름다운 꽃의 빛깔, 꽃의 향기를 지녀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대끼며 싸워가며 살아가는 / 실팍한 생활의 시” 자신은 그런 시를 쓰고 싶다고 한다. 설거지한 손에서 나는 냄새로부터 벗어나고자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냄새에서부터 시가 우러나오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부대끼고 싸우는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려고 시를 가까이 하는 게 아니라 떠들고 싸우고 감동하고 눈물 흘리는 삶의 얼룩에서 시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거기서 실팍한 시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안은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가 아니라 속이 꽉 찬 시가 진짜 시라고 믿는 이런 리얼리즘적인 태도가 좋은 시의 밑바탕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전문 유명한 김광규 시인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다. 이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4.19가 나던 해 이십 대 초반 무렵 때묻지 않은 청년으로 개인과 사회와 사람과 일에 대해 고민하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후반부는 그로부터 18년 후 중년의 나이가 되어 모인 그때 그 친구들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똑같이 세밑에 만난 친구들의 모습이 사실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대비되며 지금 우리 부끄럽게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자기 반성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유종호 교수는 이런 김광규시인의 시 세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김광규의 시 세계는 사회적 경험의 현장을 이루고 있는 생활세계를 향해서 늘 열려 있다......생활세계와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을 줏대 삼아 회전하고 있는 김광규의 시가 일상생활의 낯익은 정경을 리얼리스틱한 필치로 포착하는데 비상한 솜씨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라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속의 대목은 예사로운 듯하면서도 비근한 일상 경험을 일급의 소설장면에서처럼 영속화시켜 놓고 있다....... 흔히 소설의 전문 영역이라고 지목되어온 평범한 일상 생활의 제상諸相이 김광규의 시 세계에서처럼 남김없이 포착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다.3)                     유종호 교수의 말대로 평범한 일상생활의 여러 모습이 남김없이 포착되어 있어서인지 삶의 현장을 향해 열려 있는 그의 시는 읽기에 편하다. 막힘이나 걸림 없이 술술 잘 읽힌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쓴 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편안한 일상어를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는 단순하지가 않다. 난해하고 형이상학적인 설명으로 유식하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시를 읽고 있는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서는 안 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런 생활시를 읽으며 너무나 익숙하고 낯익은 정경 속에 자기를 집어넣고 함께 떠들고 이야기하고 걸어나오다 지금 나의 노래는 밤하늘 별빛이 되어 떨어지고 있는가 아니면 침묵하고 있는가 묻게 된다. 나는 진정 피 흘리며 사랑하던 것들을 잊지 않고 있는가 아니면 늪 같은 생활의 나락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돌이켜 보게 된다. 생활시는 단순한 생활의 나열이나 재현이 그치지 않는다. 자신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게 하는 시이다. 삶에서 우러나오지만 시를 통해 다시 삶을 돌아보고 가꾸게 하는 역할을 한다. ----------------------------------------------------------------------------------------       은는이가 ―정끝별(1964∼ )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을 완성해다오  ‘이(가)’는 주격조사고 ‘은(는)’은 격조사가 아니라 보조사(補助詞)다. 예컨대 ‘나는 너는 사랑하지만 걔는 사랑하지 않아’에서 ‘너는’과 ‘걔는’의 ‘는’은 ‘너를’과 ‘걔를’의 ‘를’이라는 목적격을 대신한다. 그런데 대개 ‘나는’의 ‘는’처럼 주격조사 자리에 들어가서 쓰인다. 이때의 ‘은(는)’은 화제(話題)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 ‘나는’은 ‘나에 대해서 말하자면’이란 뜻이다. 주격조사 자리에 있는 보조사와 주격조사의 구별이 한국인에게는 아주 쉬운데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에게는 어렵다고 한다. 한국인에겐 ‘은는이가’의 문법이 내면화되어 있어서 ‘은(는)’을 쓸 때와 ‘이(가)’를 쓸 때를 잘 구별하지만, ‘전철이 곧 들어옵니다’라는 지하철 안내방송을 ‘전철은 곧 들어옵니다’라고 하면 안 되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외국인도 있을 테다. 이 시가 담긴 시집 ‘은는이가’를 일독한 감상은 한마디로 정끝별 시가 한창 물이 올랐다는 것이다. 뜻은 웅숭깊고 형상은 무르익었다 할까. 첩첩 겹겹으로 말을 쌓는 ‘말발’은 여일하고, 거기 어떤 단심(丹心)이 표표히 아리땁게도 나부낀다. 죽음을 아우르는 생, 그리고 시에 대한 단심이리라. 조사 ‘은는’과 ‘이가’가 지니고 있는 느낌, 그리고 용법 차이를 절묘하게 묘사해 서정적 아치마저 아로새긴 이 시의 ‘당신’과 ‘나’는 둘 다 시인 자신일 테다.
404    시는 상투적인 설명에 그치지 말아야... 댓글:  조회:2419  추천:0  2017-04-18
  3. ‘못 하나’ 그 세부 묘사의 진실성과 구체성을 보자 사람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게 사람이다. 다른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저 사람은 어떤 인간일까. 그녀는 어떤 성격일까. 그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분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해결했을까...... 다른 사람에 대한 궁금증은 끝이 없다.  사람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특히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어하고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자연히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많이 쓰게 된다.  사람이 최초로 접하는 죽음의 문제도, 사랑과 상실에 대한 두려움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경험한다. 가족을 단위로 한 삶에서 함께 겪는 최초의 경험들, 보살핌과 사랑에 대한 욕구,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것에 대한 갈등, 가난과 행복, 시련과 어려움, 학창시절의 힘든 과정, 개인과 집단의 갈등과 조절, 불화와 화해, 이별과 그리움 이런 가장 기본적인 경험들을 유.소년기부터 성장기에 걸쳐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함께 겪어 나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글에는 가족의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가족과 함께 자기 경험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는 이웃, 친구, 선생님,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반드시 하게 된다.  그러나 글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면서 가장 일반적인 것이 또한 사람이기 때문에 대상의 특징과 특별히 기억하게 되는 부분들을 충실하게 그리고 읽는 이들의 기억에 깊은 인상으로 남을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어야 한다. 테드 휴즈의 말을 들어보자   어떤 인물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보인다고 해서--예컨대 ‘그의 코는 크고 그의 머리는 벗겨졌으며 그는 주로 청색 옷을 잘 입지만 때로는 갈색도 입는다. 그는 갈색 눈을 가졌던 것 같다.’는 식으로 묘사하는 그러한 말로써 그를 생생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할 수는 없다. 그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즉 묘사된 그 인물은 수백만의 다른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묘사로부터 아무 것도 확실하게 할 수는 없다.     눈썹 위에 있는 그의 이마는 너비가 정확히 23센티이고 이마 위쪽 머리 경계 부위의 중앙에 있는......그의 머리카락은 떫은 코코낫 색깔이고......그의 머리 어느 부분의 머리카락도 8센티 이상 긴 것은 없다. 이런 식으로 한 인물을 묘사하려면 한 권의 책을 써야 할 것이며 그 첫구절을 읽는데도 지루해지고 말 것이다. 이 인용문의 어느 한가지라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있을까. 있다. 그 사람의 머리색이 떫은 코코넛 색깔이라고 묘사되었을 때 나는 그것이 정확히 무슨 색깔을 가리키는 것인가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 결과 거칠고 뻣뻣한 상태라는 것까지도 느꼈다. 이 비유는 상상력을 움직이는 것이다. 두 개의 사물이 은유나 직유와 같은 비유로 표현되면 그것들이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따로따로 언급될 때보다 훨씬 더 뚜렷하게 보이게 된다.  만일 당신이 당신 아버지에 관해 20줄 이내로 설명해 보도록 요청을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그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분케 해주는 그에게 있어 가장 특징적인 행위나 행실을 묘사하려고 할 것이다. 당신은,‘그는 매일 매일 일하러 간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인데 그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투창 챔피언이라거나 그는 늘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앉아 있다거나 그의 이는 송곳처럼 생겼다는 식으로는 말할지도 모른다. 잡담이나 일상적인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세부들을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것이다.1)                                               위의 글에서 우리는 사람에 관한 글을 쓰고자 할 때 유의해야 할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세부 묘사의 중요함과 진실성이라고 하는 점이다. 똑같은 대상에 대해 시를 쓰더라도 하고자하는 중심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그치는 글과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구체적인 경험과 근거가 되는 인상적인 장면들로 이루어진 글은 전달되는 느낌에 큰 차이가 있다. 세부묘사가 잘 된 글이 훨씬 더 생생하며 설득력이 있다. 상투적이고 누구나 다 아는 설명에 그치지 말고 그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모습으로 읽는 이에게 다가올 수 있도록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시를 보자.    용산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 매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 있니 맛 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주더니 왜 가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섣달 긴 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당잘그당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나올 것만 같더니 한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이시영 「정님이」    지금 시속에서 말하는 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인가. 용산역 늦은 밤의 거리이다. 그 거리를 지나가는데 어떤 여인이 자기의 팔을 잡아끌다 화들짝 놀라 손을 놓고 사라져 가는 걸 보았다. 그 순간 화자는 현재 시점에서 회상 시점으로 이동하면서 그 인물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 사람과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낸다. 구체적으로 짚어 보자. 우선 화자는 그 여인이 정님이 누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정님이 누나는 어떤 누나로 그려지고 있는지, 생생하게 그 모습이 떠오르도록 묘사되고 있는지 생각하면서 찾아보자. 정님이 누나는 이마에 흉터가 있고 그 흉터를 긴 머리로 가리고 있었다. 발이 날래어 운동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했었다. 지금 놀라서 손을 놓고 달려간 여인의 모습을 보며 그 생각이 났는지도 모른다.  정님이 누나는 학교도 못 다녔고 농사를 거들며 살았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냥 농사꾼이었다고 하지 않고 “수수밭을 매거나 새를 보다가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기도 하고 콩깍지를 털어 주기도 했다.”고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하이얀 목, 하얀 무릎을 가진 누나로 기억 속에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대한 세부묘사만 생생한 게 아니라 화자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정님이 누나가 어떤 인물인지 선명하게 떠오르도록 형상화하고 있다. 부모 없는 고아이면서 슬퍼하지 않는 모습, 이 부분 뒤에 따라오는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는 시적 진술은 읽는 이들을 유년기 농촌 정서 속으로 끌고 가면서 마음을 더 애틋하고 선하고 아련하게 만든다. 꿋꿋하고 웬만한 시련과 아픔도 잘 견디어내던 정님이 누나에 대한 시적 화자의 이야기 속에는 정님이 누나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낸 부분이 없다. 그러나 시적 화자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정님이 누나는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나올 것만 같”은 거리에 있다. 심리적 거리가 매우 가까운 자리에 정님이 누나가 있는 것이다. 그만큼 내 기억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아직도 화자는 정님이 누나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삼을 삼고 베틀에 무명을 짜던” 농사꾼인 정님이 누나는 식모, 방직공장 노동자, 영등포 색시집을 전전하는 힘들고 가파른 삶의 길을 걸어야 했고 결국 그 삶의 끝은 용산역 앞에서 몸을 파는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방금 그 여자가 정님이 누나라고 단정하지는 않았다. 유추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당대에 이런 수많은 정님이 누나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누구도 정님이 누나의 맵고 쓴 삶에 대해 확인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간접화법으로 진술하고 있지만 이 시를 읽는 사람들은 정님이 누나라는 한 개인을 통해 인간의 운명과 삶의 여정을 포함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거꾸로 우리가 가장 천박하게 여기는 사람의 삶을 역순으로 짚어나가면 그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삶은 단순한 개인의 힘과 선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시대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농민의 아들딸들이 도시화, 산업화되는 시대의 흐름에 이끌려 도시빈민이나 노동자가 되었다가 자본의 논리에 휩쓸려 들어가면서 결국 어떤 삶의 결론에 이르고 마는 가를 종합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정님이 누나가 섰던 자리는 정님이 누나 한 사람의 어두운 발걸음이 머물다 간 자리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 시대와 운명이 교차하는 지점이며 인간에 대한 새롭고 깊은 이해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생각하며 함께 서 있게 하는 자리이다.    너의 고향은 아가야  아메리카가 아니다. 네 아버지가 매섭게 총을 겨누고 어머니를 쓰러뜨리던 질겁하던 수수밭이다. 찢어진 옷고름만 홀로 남아 흐느끼던 논둑길이다. 지뢰들이 숨죽이며 숨어 있던 모래밭 탱크가 지나간 날의 흙구덩이 속이다. 울지 마라 아가야 울지 마라 아가야 누가 널더러 우리의 동족이 아니라고 그러더냐 자유를 위하여 이다지도 이렇게  울지도 피 흘리지도 않은 자들이 아가야 너의 동족이 아니다. 한국의 가을 하늘이 아름답다고 고궁을 나오면서 손짓하는 저 사람들이  아가야 너의 동족이 아니다. 초승달 움켜쥐고 키 큰 병사들이  병든 네 엄마 방을 찾아올 때마다 너의 손을 이끌고 강가로 나가시던 할머니에게 너는 이제 더 이상  묻지 마라 아가야 그리울 수 없는 네 아버지의 모습을  꼭 돌아온다던 네 아버지의 거짓말을  묻지 마라 아가야 전쟁은 가고 나룻배에 피난민을 실어 나르던  그 늙은 뱃사공은 어디 갔을까 학도병 따라가던 가랑잎같이 떠나려는 아가야 우리들의 아가야 너의 조국은 아프리카가 아니다. 적삼 댕기 흔들리던 철조망 너머로 치솟아 오르던 종다리의 품속이다.                ---정호승 「혼혈아에게」 울면서 외국으로 입양 가는 혼혈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 시는 ‘울지 마라 아가야 울지 마라 아가야’이렇게 말하면서 시를 읽는 이들을 울리고 있다. 지금 시속에서 말하고 있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그릴수도 있고 사회문제의 하나로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역사적인 기록보다도 더 뛰어나게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를 시로 형상화하고 있고 어떤 신문 잡지의 기록 사진보다도 더 생생하게 장면 장면들을 그리고 있다. 혼혈아가 생길 수밖에 없던 장면을 그리고 있는 이 시의 1연,‘찢어진 옷고름만 홀로 남아 흐느끼던 논둑 길.’‘지뢰들이 숨죽이며 숨어 있던 모래밭’이런 묘사들을 보자. 찢어진 몸뚱이 대신 찢어진 옷고름이라고 표현한 이 부분이 갖는 뛰어난 형상화와 그 옷고름이 홀로 남아 흐느낀다고 묘사함으로써 겁탈 당한 뒤 혼자 버려진 여인과 그 여인으로 상징된 민족적인 비극, 능욕 당한 것은 여인이 아니라 곧 우리 국토임을 말해주는 논둑 길. 질겁하던 수수밭. 이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떠오르게 하고 있다. 지뢰들이 숨죽이며 숨어 있던 모래밭도 마찬가지다. 사실은 지뢰가 터지지 않고 가만히 묻혀 있는 모래밭일 것이다. 똑같은 사실을 전자는 미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후자는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크다. 단순하게 전쟁의 위험성만을 나타내는데 그치지 않고 곧 폭발할지도 모르는 분노까지도 그 속에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초승달 움켜쥐고 키 큰 병사들이 / 병든 네 엄마 방을 찾아올 때마다’이런 표현이나 ‘적삼 댕기 흔들리던 철조망 너머로’이런 부분에 이르기까지 이 시는 세부묘사를 충실하게 해냄으로써 진실성과 리얼리티를 획득하고 있다. 누님. 누님들 중에서 유난히 얼굴이 희고 자태가 곱던 누님. 앞산에 달이 떠오르면 말수가 적어 근심 낀 것 같던 얼굴로 달 그늘진 강 건너 산 속의 창호지 불빛을 마루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있던 누님. 이따금 수그린 얼굴 가만히 들어 달을 바라보면 달빛이 얼굴 가득 담겨지고, 누님의 눈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그 그렁그렁한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누님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왠지 나는 늘 그랬어요. 나는 누님의 어둔 등에 기대고 싶은 슬픔으로 이만치 떨어져 언제나 서 있곤 했지요. 그런 나를 어쩌다 누님이, 누님의 가슴에 꼭 껴 안아주면 나는 누님의 그 끝없이 포근한 가슴 깊은 곳이 얼마나 아늑했는지 모릅니다. 나를 안은 누님은 먼 달빛을 바라보며 내 등을 또닥거려 잠재워 주곤 했지요. 선명한 가르마 길을 내려와 넓은 이마의 다소곳한 그늘, 그 그늘을 잡을 듯 잡을 듯 나는 잠들곤 했지요. 징검다리에서 자욱하게 죽고 사는 달빛, 이따금 누님은 그 징검다리께로 눈을 주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지요. 강 건너 그늘진 산 속에서 산자락을 들추며 걸어나와 달빛 속에 징검다리를 하나둘 건너올 누군가를 누님을 기다리듯 바라보곤 했지요.     그러나 누님. 누님이 그 잔잔한 이마로 기다리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니라는 것을, 누님 스스로 징검다리를 건너 산자락을 들추고 산그늘 속으로 사라진 후 영영 돌아오지 않을 세월이 흐른 후, 나도 누님처럼 마루 기둥에 기대어 얼굴에 달빛을 가득 받으며 불빛이 하나둘 살아나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누님이 그렇게나 기다리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니며 그냥 흘러가는 세월과 흘러오는 세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나도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과 헤어져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이며 아픔과 괴로움을 겪었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과 만나고 또 무엇인가를 기다렸는지요.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아픔과 슬픔인지요 누님. 누님, 누님의 세월, 그 세월을, 아름답고 슬픈 세월을 지금 나도 보는 듯합니다.       누님, 오늘도 그렇게 달이 느지막이 떠오릅니다. 달 그늘진 어둔 산자락 끝이 누님의 치마폭같이 기다림이 세월인 양 펄럭이는 듯합니다. 강변의 하얀 갈대들이 누님의 손짓인 양 그래그래 하며 무엇인가를 부르고 보내는 듯합니다. 하나둘 불빛이 살아났다 사라지면서 달이 이만큼 와 앞산 얼굴이 조금씩 들춰집니다. 아, 앞산, 앞산이 훤하게 이마 가까이 다가옵니다. 누님, 오늘밤 처음으로 불빛 하나 다정하게 강을 건너와 내 시린 가슴속에 자리잡아 따사롭게 타오릅니다. 비로소 나는 누님의 따뜻한 세월이 되고, 누님이 가르쳐준 그 그리움과 기다림과 아름다운 바라봄이 사랑의 완성을 향함이었고 그 사랑은 세월의 따뜻한 깊이를 눈치챘을 때 비로소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님, 오늘밤 불빛 하나 오래오래 내 가슴에 남아 있는 뜻을 알겠습니다. 누님, 누님은 차가운 강 건너온 사랑입니다. 많은 것들과 헤어지고 더 많은 것들과 만나기 위하여, 오늘밤 나는 사랑 하나를 완성하기 위하여 그 불빛을 따뜻이 품고 자려 합니다. 누님이 만나고 헤어진 사람을 사랑하며 기다렸듯 그런 세월, 그 정겨운 세월…… 누님의 초상을 닦아 달빛을 받아 강 건너 한 자락 어둔 산 속을 비춰봅니다.                                      ---김용택 「섬진강 4-누님의 초상」 이 시에서 이야기하는 누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을까. 어찌 보면 너무나 흔히 보던 서정적인 그리움의 대상으로서의 누님일수도 있고 관념적인 모습의 누님 상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연의 누님에 대한 그리움, 2연의 누님의 기다림, 3연의 누님의 세월, 4연의 누님이 가졌던 사랑의 완성을 이야기하는 시인의 잔잔한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 누님의 모습은 단순히 평이하지마는 않고 삶의 깊이를 지니고 있으며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형상을 지니고 있는 누님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아주 진한 그리움의 장면 장면으로 이어지는 세부 묘사의 사실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며 다음과 같은 시인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님이 그렇게 기다리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니며 그냥 흘러가는 세월과 흘러오는 세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나도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과 헤어져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이며 아픔과 괴로움을 겪었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과 만나고 또 무엇인가를 기다렸는지요.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아픔과 슬픔인지요 누님.” 그리고 그런 누님의 사랑은 “세월의 따뜻한 깊이를 눈치챘을 때 비로소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알아내는 철학적 깊이가 밑바탕을 이루고 있어서 이 시를 단순히 평이하게만 만들지 않는다. 누님이 사랑하던 사람은 그늘진 산 속에 있었다. 그 산자락을 들추며 산과 누님 있는 곳 사이를 이어주던 징검다리를 건너올 그 사람을 기다리다 누님 스스로 운명의 징검다리를 건너 산그늘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이후 시속의 서정적 자아인 나는 오랜 세월 누님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누님의 기다림과 그리움과 누님이 그렇게 보낸 세월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구조로 이 시는 짜여져 있다. 누님이 사라진 그 산은 역사적인 공간이며 산 속을 향한 누님의 선택이 따라서 역사적 실존에 대한 선택일수도 있으며 그런걸 떠나 보편적으로 삶과의 사별로도 해석이 가능해지게 하는 상상력을 이 시는 열어두고 있다. 서정주, 고은, 송기원 등의 시를 통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한국시 속의 누님--이른바 남성시인의 여성지향성, 모성컴플렉스와 맥을 같이하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역사의 공간으로 누님의 이미지를 끌고 가고 있다. 몇 편의 시를 더 보도록 하자.             역을 지날 때면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산을 굽이 돌아 멀어져간 철길처럼 이제는 가물가물한 어머니. 낡은 사진첩 속에 한 장 빛 바랜 사진으로 남아 있는 어머니는 언제나  50의 중년 나는 해마다 연륜의 그릇을 하나씩 비워내고 한 걸음씩 어머니의 나이가 되어 간다. 어머니와 나의 나이가 가까워지는 만큼 어머니와 나의 인연은 멀어져 가고, 때 없던 목메임도 뜸해져 간다. 불현듯 어머니가 그리운 마음이 허전한 날이면 꿈이 길고 긴 꿈 내내 어머니는 뒷모습만 보인다.            --- 김경호 「사모곡」 먼 길 떠나시던  아버님 발자욱이 보인다 어두운 밤 홀로 흰 두루막자락 날리시며  검은 산 넘어 넘어 먼 길 가시던 날        어머님이 감추시던 눈물어려 몇 방울 내 이젠 나이 들어 어린 딸 거느리고 여름 저녁 한 때 언덕에 서면      만주땅 어느 곳에 잠들어 계실 아버님 모습……    풀벌레들 정적 더하던 고향 옛집에서 철모르던 우리 남매 잠재워 놓고 두만강 된서리 묻어온 두루마리  남 몰래 읽으시던 우리 어머니       촛불에도 떨리시던  당신의 눈물 모두 어려 보인다.              ---김명수 「북두칠성」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로만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 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나희덕 「못 위의 잠」 「사모곡」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시고,「북두칠성」은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주제로 한 시다. 「못 위의 잠」역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사모곡」은 역을 지나다가 어머니 생각이 난 것이 시를 쓰게 된 동기 같다. 「북두칠성」은 어린 딸과 함께 언덕에 서서 별을 바라보다가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모곡」에서 어머니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보자. ‘산을 굽이돌아 멀어져 간 철길처럼 / 이제는 가물가물 한 어머니’ 그리고 ‘낡은 사진첩 속에 한 장 빛 바랜 사진으로 남나 있는’ 50대 중년의 어머니이다. 이제는 꿈속이 아니고는 만나볼 수 없는데 꿈속에서도 뒷모습만 보이는 어머니이다. 「북두칠성」에서는 ‘어두운 밤 홀로 흰 두루막 자락 날리시며 / 검은 산 넘어 넘너 먼 길 가시던’ 아버지 모습과 눈물을 감추시던 어머님을 생각한다. 두만강 된서리 묻어 온 두루마리 편지를 남 몰래 읽으시던 어머니의 모습도 있다. 이 시에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은 북두칠성에서 발견한 아버님 발자국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는 일곱 개의 별에서 나라를 빼앗겼던 시대에 만주로 몰래 떠나시던 아버님의 발자국을 발견하는 상상력은 뛰어나다. 어둠 속의 별과 어두운 시대를 헤쳐나가던 발자국을 연관시킨 부분과 그 주위에 흩어진 별에서 어머님이 감추시던 몇 방울의 눈물을 떠올리는 장면 역시 집약된 시상의 결정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못 위의 잠」은 제비집이야기에서 출발한다. 갓 태어난 제비들로 가득한 둥지와 새끼들을 날개로 덮은 채 잠들어 있는 어미 제비를 발견한 것까지는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시인의 섬세한 눈이 찾아낸 절묘한 곳은 박힌 못에서 꾸벅거리며 앉아 있는 아비 제비이다. 이 못 위에서 불안하게 잠자고 있는 제비를 보며 시인은 아버지를 떠올린다.  9행부터 시작되는 가족사 속에는 아이 셋을 데리고 버스정류장에서 아내를 기다리는 실업의 아버지, 굳게 쥐어야 할 주먹으로 주머니 속 호두알을 만지작거리며 한 걸음 늦게 뒤를 따라오는 아버지 모습을 너무도 선명하게 그리고 있다. 흙바람이 그치지 않고 몰려오던 가난한 날들과 피곤에 지치도록 일하던 어머니의 창백한 얼굴과 좁은 골목길, 이 시의 감동은 충실한 세부묘사와 진실성이 뒷받침되어 있어서 더욱 빛이 난다. 시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그리움이야 다 같겠지만 「사모곡」이 보여주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목메임이 「못 위의 잠」이 보여주는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과 차이가 있다면 그건 어디서 오는 걸까. 구체성, 세부 묘사의 진실성에서 오는 것이다. 「북두칠성」은 상징성이 잘 나타나 있지만 고전적이라는 점에서는 사모곡과 비슷하다. 고전적이란 말속엔 전형적이란 좋은 의미도 포함시킬 수 있겠는데 그 대신 생생하게 다가오도록 하는 데 있어서는 「못 위의 잠」만 못하다. 세부묘사에 충실했으면서도 「못 위의 잠」은 설명적인 시로 떨어지지 않았다. 제비집에서 출발한 착상이 좋고 어려운 시절의 가족사와 대비시킨 표현의 기법이 아귀가 딱 맞아떨어진다. 그리고자 하는 구체적인 특징과 읽는 이들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각인될만한 인상적인 장면들을 충실하게 그려내는 일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     물리치료 ―이정주(1953∼ )       여자는 내 어깨 아래 핫백을 밀어 넣는다 나는 데워진다 따뜻하고 어지럽다 여자는 내 어깨에 멘소레담을 바르고 근육들을 만진다 시원하고 아프다 여자는 내 어깨에 전극을 붙이고 스위치를 올린다 찌릿찌릿하고 간지럽다 여자는 물리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미진하다 이 통증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내 팔은 다른 것을 찾고 있다 지난여름의 돌을 더듬고 있다 돌에 걸려 넘어져 얼굴이 처박혔던 백사장을 더듬고 있다 얼굴 쳐들고 하늘로 뿜었던 욕설을 그리워하고 있다 옆에서 박수치며 웃던 여자를 그리워하고 있다 나는 여자에게 인사한다 여자는 나를 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인다 여자는 이미 다른 사람을 데우고 있다 목이 마르다 하늘에 맑은 물 한 잔과 붉은 알약 하나가 떠 있다 어깨 통증으로 정형외과에 가면 시의 첫 연에 그려진 물리치료를 받으리라. ‘나는 데워진다’ ‘따뜻하고 어지럽다’ ‘시원하고 아프다’ ‘찌릿찌릿하고 간지럽다’. 물리치료사가 처치하는 과정에 따르는 감각을 사실 그대로 진술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관능적 쾌감을 겹쳐 떠오르게 하는 효과를 의도한 화자의 능청. 남자인 화자는 굳이 물리치료사의 성을 가려 ‘여자’라 칭한다. ‘여자는 물리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물리치료사가 능숙하고 세심하게 치료를 마친 것을 화자도 인정한다. 통증도 사뭇 가셔서 환자로서는 만족스럽다. ‘하지만’ 몸을 추스르고 치료대에서 내려오며 화자는 ‘미진하’단다. 그의 마음은 속삭인다. ‘이 통증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고. 내게 필요한 것은 물리치료사의 손길이 아니라 다른 손길이라고.      화자의 어깨 통증은 사랑이 끝난 뒤 생긴 것. 마음의 상처를 꾹꾹 누르면 몸의 통증으로 나타난다. 화자는 예민하면서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 듯하다. 그런 사람이 어두운 욕망이든, 밝은 욕망이든 서로 삼갈 것 없이 ‘뿜었던’ 오직 한 사람을 잃었으니 이중 삼중으로 고통일 테다. 외로움으로 심약해진 화자는 물리치료사가 다른 환자를 보느라 저를 벌써 잊은 것에도 설핏 섭섭하다. 아, 어깨가 도로 아파지는 것 같네. 병원을 나서니 저녁 하늘에 빨간 동그라미로 떠 있는 태양. 잘 익은 버찌 같은 그 해가 화자 눈에는 ‘붉은 알약’으로 보인다. 혹시 진통제? 화자의 어깨 통증에는 마음의 안마, 심리치료도 필요하겠다. 이 시를 씀으로써 화자의 응어리진 마음이 조금은 풀리지 않았을까. 시 쓰기의 효능은 많기도 하다.  
403    시인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오늘도 많이 떨어지고... 댓글:  조회:2129  추천:0  2017-04-18
    2. 시는 내 인생의 길이었다 네게 시란 무엇이었니? 윤미야, 너는 시를 좋아하고, 시도 자주 읽고, 또 시를 쓰고 있잖니. 그런데 시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니까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지. 그러면 왜 시를 가까이 하는지, 시를 가까이 하면 시가 네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 말해 볼래. 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그러면 우리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는 내 시 있잖니. 몇 행 안 되는 짧은 시니까 그 시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그래, 「어떤 마을」이라는 시말이야. 이 시의 첫 행은 이렇게 시작하지.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참 많이 떴다.” 이 시의 첫 행을 읽고 학생들이 이런 질문을 한 대.  “선생님,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 거 하고 별들이 많이 뜬 거 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해 주어야 할까.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니? 과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무 관계가 없어. 그렇잖니? 사람들이 착하게 안 산다고 별이 안 뜨는 건 아니잖아. 그럼, 이 시는 잘못 쓴 시일까?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별들이 많이 뜬 걸 보고 왜 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착하게 사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 시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지. “개울물 맑게 흐르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물바가지에 떠 담던 접동새 소리 별 그림자 그 물로 쌀을 씻어 밥 짓는 냄새나면 굴뚝 가까이 내려오던  밥티처럼 따스한 별들이 뜬 마을을 지난다 사람들이 순하게 사는지 별들이 참 많이 떴다.”    이 시를 쓰게 된 곳은 박달재 밑에 사는 친구네 집이었어. 산골동네에 와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판화가 이철수라는 친구네 집을 찾아갔는데 밤에 잠시 마당에 나와서 하늘을 보았더니 별들이 그렇게 많이 떠 있을 수 없었어. 우리가 어린 시절에 사랑했던 모든 별들이 다 모여 있었어. 하얗게 뿌려진 듯한 별밭이었다고나 할까. 그런 별들을 보다가 문득 내가 사는 도시 하늘의 별들은 왜 보이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그 생각을 처음 한 것은 우리 딸이 숙제를 해야한다고 해서 함께 별자리를 찾으러 나갔다가 도시를 떠나지 못한 희미한 별 몇 개만 깜빡이는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어.  윤미야, 우리가 사는 도시 하늘의 별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별들이 도시의 하늘을 떠나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물론 이건 문학적 상상이야.  너도 같이 한번 생각해 볼래?  만약 별들이 도시의 하늘을 하나씩 둘씩 떠난 것이라면 별들은 왜 도시의 하늘을 떠나고 있는 것일까. 밤이면 머리 바로 위에 메밀꽃처럼 돋아나던 별들. 별자리도 선명해 자로 금을 긋듯이 눈으로 이어지게 하던 그 많은 별들은 언제부터 이 도시의 하늘을 떠나기 시작한 것일까. 우리가 우리 일에만 얽매여 사는 동안 옛날처럼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별들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사람들이 모두 바쁘다는 이유로 제 발 밑만 쳐다보며 사는 동안, 그리하여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을 잊어 가는 동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별들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별들도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은 아닐까. 침침한 등불이 켜 있는 방보다는 들마루에 앉아 있기를 좋아하거나 멍석을 깔고 마당에 나와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수시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절,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 하나씩 사랑하는 별을 간직했었지. 먼길을 가면서 별을 보았고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며 별을 올려다보곤 했어. 별 아래서 가슴을 졸이며 사랑을 했고 별 아래서 눈물로 가슴을 씻으며 수 없는 맹세를 하기도 했어. 사람들은 오만하지 않았고 제 생각을 밤이면 별에게 되물어 보면서 마음을 다지곤 했었단다. 별은 희망이었고 믿음이었어. 별은 어머니의 그 어머니의 어머니 적 아리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었고 별 그 자체로서 늘 출렁이는 신화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어.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별을 보며 인생의 가파른 고개를 넘었지. 그렇게 자연과 하나 되고 이웃과 하나 되어 살던 마을을 떠나 도시로 도시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별을 잊어 갔던 거야. 별을 바라볼 마당이 없는 집에서 살아야 했어. 별을 바라볼 창문이 없는 집에 살아야 했어. 사는 일에 뒤엉켜 아우성치는 소리가 가득한 곳에 살아야 했고 우울한 얼굴로 내뱉는 한숨 소리, 고통받는 많은 이들의 비명 소리 속에서 살아야 했어. 그때부터였을까. 우리들의 우울한 그림자와 한숨, 우리들의 고통에 찬 소리와 나날의 절망, 이런 것들이 별과 우리들 사이의 허공을 가득 메우면서 별과의 거리를 멀어지게 한 것은. 그것 때문만도 아닐 거야. 사람들이 모두 제 사는 일에 급하여 남을 돌아다볼 여유가 없게 되었을 때, 우리 이웃의 아픔과 고통 따위는 어찌해 볼 도리 없다고 결정해 버렸을 때, 별들은 이 땅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을 거야. 자기 자신의 잃어버린 마음과 자기 이웃의 고통받는 모습조차도 외면한 채, 제대로 쳐다보려 하지 않는데 밤하늘의 별 따위를 쳐다볼 여유가 어디 있겠어.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이 저마다 하나씩의 등불을 들고 있지 않니.  지식의 등불, 욕망의 등불, 오만의 등불, 과학의 등불, 논리의 등불, 그런 등불 말이야. 이런 등불을 하나씩 들고 있는데 구태여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꺼질 듯 꺼질 듯 깜빡이며 밤을 지샐 필요가 없어졌을 거야. 더 이상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도시의 하늘을 떠난 별들은 모두 어디에 가 있을까. 어둠 속에서 가슴 졸이며 산을 넘어오던 날 나는 보았어. 우리가 길을 잃고 두려워 떨면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 별들은 거기 기다리고 있는 거야. 두려움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말라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듯 머리 위에 몰려와 있었어. 오순도순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 마을 위에 많은 별들이 모여 있었어. 일찍 뜬 별 그림자가 어리는 맑은 물로 쌀을 씻는 동안 접동새 우는 소리가 들리던 그런 마을에 뜨던 별이었어. 서로 도와가며 더불어 함께 살 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동네 어귀 느티나무 위에서 아직 돌아올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떠 있었어. 그 별은 가난하던 시절 저녁밥 짓는 연기가 오르던 굴뚝 위에 내려와 밥티처럼 따스하게 반짝이던 별이었어. 별은 우리가 그들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그들이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어. 그 날 밤 나는 별을 바라보며 시 한 편을 썼단다. 윤미야 어쩌면 시는 잃어버린 별을 찾아 나서는 일인지도 몰라. 우리를 떠난 별들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 다시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착한 마음과 별 하나에 따뜻한 얼굴을 심어 가는 일인지도 몰라. 시는 그러면 현실을 떠난 비현실적인 상상 속의 세계로 돌아가자는 것일까. 아니야, 시를 가까이 하면서 우리가 잊고 있는 아름다운 자기의 별 하나씩 간직하며 살자는 거야.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고 살자는 거야. 자연과 사람과 착한 심성이 하나로 어우러진 삶을 되찾자는 거야. 우리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되찾게 해 주는 게 시라고 나는 생각해. 아름다운 마음 따뜻한 심성을 되찾기 위해서 시를 읽고 감상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정작 교실에서는 한 편의 시를 앞에 놓고 거기서 어떤 문학지식을 배워야 할 것인가를 더 많이 고민하고 있어.  이 시만 해도 시에 들어 있는 심상을 찾는 일에 더 주안점을 두고 시를 배우고 감상하고 있어. 정작 시를 쓴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 시에는 시각적 심상, 청각적 심상, 후각적 심상, 촉각적 심상이 모두 나 들어 있고 거기다가 공감각적 심상으로 표현한 곳도 두 군데나 있다는 거야. 그리고 이건 너무 중요해서 국어시험에 반드시 출제가 되는 거야. 그러다 보니 정작 내가 이 시를 통해서 이야기하려던 건 뒤로 밀려나고 심상과 관련된 문학지식만 강조하게 되는 거야. 윤미야, 문학지식은 몰라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 시에서 시인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 문학지식을 공부하는 일보다 먼저라는 걸 잊지 말라는 거야.  시를 통해 아름다운 마음을 되찾게 되는 것 이게 우리가 시를 가까이 하는 첫 번째 이유라면 우리가 시를 가까이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무얼까.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시는 무엇이었나요?’ 하고 물으면 사람들마다 다 대답이 달라. 어떤 사람은 거울이라고 대답하고 어떤 사람은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하고, 깃발이나 나팔소리 같은 것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장식품 같다고 대답하기도 하고, 등대와 같은 것이었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어. 거울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시를 읽으면서 늘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지금 어떤 모습 어떤 얼굴로 살고 있는 가를 비추어 보게 되기 때문에 거울이라는 거야. 친한 친구 같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에게도 못하는 말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는 숨김없이 다 털어놓고 말하는 것처럼 시를 쓸 때는 가슴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다 솔직하게 이야기하게 되기 때문에 시는 친한 친구 같다는 거야. 깃발이나 나팔소리 같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살면서 지쳐 쓰러지거나 포기하고 싶을 때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우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울리는 나팔소리 같은 것, 내 앞에서 나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워 주는 깃발 같은 것이 시라고 말해.   그런가 하면 시를 모르면 교양 있는 사람들 속에 낄 수 없으므로 가까이 하긴 하지만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보조적인 방편이지 시가 자기의 전부일수는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 그런 사람들에게 시는 목거리나 장식품 옷 위에 걸치는 숄과 같은 것으로 느껴지겠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반대로 시가 곧 자신이요, 자신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어.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믿는 거지. “내 시 여기서 더 이상 필요 없어 나 또한 필요 없게 되었다.”며 자살한 쎄르게이 예쎄닌 같은 시인도 그랬을 거야.  등대와 같다고 말한 사람은 인생의 가없이 넓은 밤바다 한복판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 한 줄기 등대 불빛처럼 자기 인생의 불을 밝혀 준 것이 시였다고 말하지.  윤미야, 네게 시는 무엇이었니? 네겐 샘물과 같은 것이었을까?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누구인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비쳐보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시는 우리에게 참 고마운 존재야. 거기다 내 몸과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주는 샘물과 같다면 참 좋겠지. 그래서 늘 깊이 있게 생각하고, 차분하고 사려 깊게 행동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것도 얼마나 기쁜 일이냐. 내게 시는 길과 같은 것이었어.  아니 길이었어.  내가 내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마다 시와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시가 가라고 하는 대로 지금까지 살아왔어. 시는 내게도 등대 같고 나침반 같고 이정표 같은 것이었어. 나는 시가 가라는 대로 선택하고 살아온 삶을 다행스럽게 생각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이었다고 해도 가치 있는 길이었어. 내가 오랜 전에 학교에서 쫓겨나 거리의 교사로 살던 시절이 있었어.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 해야할지,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힘을 모아야할지, 무엇보다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하던 시절이 있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가야 할 것인가를 모여서 논의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좋은 의견을 내 놓아도 마땅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 답답해 하다가 우연히 창 밖을 내다보게 되었어. 창 밖 옆 건물 벽에 담쟁이 잎이 가득 붙어 있는 게 보였어.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의 벽을 파랗게 기어오르고 있는 담쟁이 잎들을 바라보다가 저 벽에는 물 한 방울 마실 곳이 없고 뿌리를 내릴 흙도 없는데 저런 담벼락에서 처음 살도록 던져진 담쟁이 씨앗은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 그렇지만 저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른 담쟁이 잎들과 함께 손을 잡고 벽을 기어올라간 담쟁이를 생각했지. 숲과 비옥한 대지에서 자라는 다른 식물들보다 자라는 속도도 느리고 초조했겠지만 서두르지 않고 여럿이 함께 힘을 합해 어려움을 헤쳐나간 담쟁이에 대한 생각들이 미치자 나는 몰래 연필로 회의 서류 뒤에다 시를 써나갔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담쟁이」전문 나는 절망의 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꾸어 놓는 담쟁이처럼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 그리고 ‘서두르지 말자.’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해결하자’ ‘나 혼자 천 발짝을 앞서가지 말고 천 명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로 일하자’ 이런 생각을 이 시는 가르쳐 주었어. 그리고 이 시가 가르쳐 주는 삶의 길을 걸었고 10년의 해직교사 시절을 헤쳐 나올 수 있었어.   그런데 언제부턴가 인터넷에 이 시가 떠돌아다니기 시작하는 거야. 사람들이 자기가 읽고 나서 다른 친구들에게 이 시를 보내기도 하고 e카드로 예쁘게 만들어 보내기도 하고 자기 홈페이지 첫 화면에 올려놓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 내게 용기를 주고 나를 꿋꿋한 걸음으로 걸어가게 한 시가 이제는 나를 떠나 다른 이들이 저마다 위안을 받고 자기가 아끼는 사람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기 위해 이 시를 보내고 있는 거야. 몇 해 전에는 고등학교 참고서를 만드는 회사에서 전화가 왔어. 이 시를 참고서에 싣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당연히 국어참고서에 시 읽기 자료로 싣겠다는 줄 알았거든 그랬더니 그게 아니야. 과학, 수학, 영어 이런 여러 과목 교재의 첫 쪽에 이 시를 싣겠다는 거야. 부교재를 만드는 사람들이 정말 어렵고 힘든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읽히고 싶었던 가봐. 야후나 엠파스에 들어가서 검색어에다 ‘담쟁이’라고 써넣고 치면 ‘담쟁이는 포도나무과에 속하는 반양지 식물로.....’ 이런 생물학적 설명보다 이 시가 먼저 뜨고 있어.  시는 내 인생의 길이 되고 내 삶에 힘을 주고 나를 떠나 다른 이들에게도 위안과 용기를 주는 것임을 담쟁이는 잘 보여주고 있어. 하나만 더 예를 들게. 해직생활을 끝내고 학교로 되돌아가게 되었을 무렵 나는 우리나라 고건축의 추녀를 보다가 ‘부드러운 직선’ 이라는 시어를 만나게 되었어. 우리나라 궁궐이나 사원 건축의 추녀는 중국이나 일본의 고건축과 다르게 추녀의 끝이 부채살처럼 펴진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 끝이 부드럽게 휘어 올라간 모습의 건축미를 일본과 중국의 건축은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거든.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다가 그 추녀의 아름다움이 휘어진 나무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곧게 다듬은 직선의 나무들을 촘촘히 잇닿아 가며 만든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 곧게 다듬은 나무처럼 자기 삶의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부드럽고 유연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자세로 문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    높은 구름이 지나가는 쪽빛 하늘 아래 사뿐히 추켜세운 추녀를 보라 한다 뒷산의 너그러운 능선과 조화를 이룬 지붕의 부드러운 선을 보라 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내게 이제 다시 부드러워지라 한다 몇 발짝 물러서서 흐르듯 이어지는 처마를 보며 나도 웃음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저 유려한 곡선의 집 한 채가 곧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을 본다 휘어지지 않는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잡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걸 본다 사철 푸른 홍송 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잇는 절 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부드러운 직선」전문   ‘부드러운 직선’ 이 말은 얼핏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말 같기도 해. 부드러우면 곡선이지 어떻게 직선이 될 수 있겠어. 그러나 그게 가능할 수 있는 게 또 시라는 거야. 너도 배운 적 있지?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그래 유치환 시인의 시 「깃발」이야. 멀리서 깃발이 바람에 마구 나부끼며 휘날리고 있는 장면을 그린 건데, 아우성치는 것처럼 휘날리지만 멀리서 보고 있으니까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을 이렇게 표현한 거 쟎니. 이런 표현을 우리는 이라고 하지. 김영랑 시인의 쓴 ‘찬란한 슬픔’과 같은 시구절도 마찬가지야. 슬픔이 어떻게 찬란할 수 있겠니. 그러나 모란꽃처럼 화사하고 찬란한 꽃이 지는 아름답고도 슬픈 모습을 이렇게 앞뒤가 서로 모순되게 표현하여 그 느낌을 더 극대화하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시가 할 수 있는 독특한 표현양식이야.  어쨌든 나는 이 시를 쓰면서 이런 삶의 자세로 인생을 살기로 했단다. 시가 매 순간 순간 기로에 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할 때마다 대답이 되어 주고 길이 되어 준 것을 나는 고맙게 생각한단다. 그리고 이렇게 시를 쓰며 살게 된 것을 나는 고맙게 생각한단다.  윤미야, 너도 네 가 쓰는 시가 네게 샘물이 되기도 하고 거울이 되기도 하고 등대가 되기도 하고 길이 되기도 하면서 너와 함께 흘러가게 되길 바란다. 시가 너를 이끌어 주고, 시가 가자는 대로 함께 걸어간 삶에서 우러난 네 시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다움과 위안과 기쁨을 주게 되길 바란다. -------------------------------------------------------------------------------   지울 수 없는 노래 ―4·19혁명 21주년 기념시 김정환 (1954∼ ) 불현듯, 미친듯이 솟아나는 이름들은 있다 빗속에서 포장도로 위에서 온몸이 젖은 채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던 시절 모든 것은 사랑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죽음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부활이라고 했다 불러도 외쳐 불러도 그것은 떠오르지 않는 이미 옛날 그러나 불현듯, 어느 날 갑자기 미친 듯이 내 가슴에 불을 지르는 그리움은 있다 빗속에서도 활활 솟구쳐 오르는 가슴에 치미는 이름들은 있다 그들은 함성이 되어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사라져버린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있다 그들의 뜨거움은 아직도 있다 그대 눈물빛에, 뜨거움 치미는 목젖에   대한민국의 첫 시민혁명인 4·19혁명을 소재로 삼은 최고의 시일 것이다. 이 시가 발표된 게 1981년, ‘그것은 떠오르지 않는 이미 옛날’, 그때 젊은이에게도 자꾸 잊히고 있었으니,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거의 일제강점기 일만큼이나 멀고 관심도 없을 4·19혁명은 3·1운동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정신적 밑둥이다.(3·1운동-민족주의, 4·19혁명-민주주의). 이 시에서 화자는 그때의 함성과 죽은 이들의 젊은 이름들을 안간힘을 다해 망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 기억의 힘으로 당대의 불의(5·18민주화운동 한 해 뒤다!)와 싸우려 노력한다. 기억은 역사를 밀치고 이끄는 힘이다. 뜨겁게 젊은 시! 절창이다!  
402    초현실주의는 문학예술운동을 넘어선 삶의 한 방식이다... 댓글:  조회:3725  추천:0  2017-04-11
브르통과 초현실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한 초현실주의surrealism는 20세기 미술운동 중 가장 고도로 조직화되고 엄격하게 통제된 운동이었습니다.  초현실주의가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1896-1966)이 을 발간한 1924년부터이며, 1925년에는 이 운동의 첫 종합전이 파리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초현실주의의 뿌리는 다다이즘입니다. 다다이즘은 1차 세계대전 후의 기존의 전통, 질서에 대한 파괴운동이었던 만큼 비합리를 예찬하고 때로는 비윤리적인 방향으로 흐르며,  콜라주와 같은 새로운 기법, 오브제와 같은 직접적인 표현도 채택했으며,  초현실주의의 강력한 무기인 에로티시즘에 이르러서는 다다이즘의 비도덕적인 자세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초현실주의의 도덕적, 실천적 지도자는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불린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었습니다. 14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브르통은 보들레르, 말라르메, 위스망 등 상징파 시인에게 열중했습니다.  의학생으로 파리대학 재학 중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각지의 육군병원 정신과 및 신경과에 근무하면서 프로이트의 저서를 애독하게 되었고,  프로이트를 통하여 계발된 인간정신의 무의식 영역에 관한 인식은 후일 그가 초현실주의 이론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상상력과 감정적인 힘이 늘 과학과 이성주의의 실추를 상쇄해왔다고 믿은 그는  1차 세계대전 중 육군병원에서 근무하며 목격한 고통과 괴로움에 큰 충격을 받고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군복무 후 파리에 정착하고 재능 있는 새로운 미술가들과 특히 다다운동을 지원하고 장려하던 비평지 의 편집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브르통은 마르셀 뒤샹을 자신의 영웅 중 한 명으로 간주했습니다. 브르통은 1924년 친구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헌정한 을 발표하고 이를 계기로 초현실주의 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선언문은 주로 초현실주의 문학과 관련 있었지만, 회화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1925년 파리의 피에르 화랑에서 개최된 첫 초현실주의 전시회 ‘초현실주의 회화전’의 기획을 도왔습니다. ‘초현실적surrealiste’이라는 용어는 아폴리네르에 의해 1917년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브르통의 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습니다. “초현실주의: 남성 명사. 순수한 심리적 자동주의로서, 이를 통해 말이나 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사고의 진정한 과정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이성의 통제가 없는 곳에서, 그리고 모든 미학적 혹은 도덕적 선입견의 밖에서 이루어지는 사고의 받아쓰기. 백과사전: 철학 용어. 초현실주의는 이제까지 소흘히 해온 연상 작용과 관련된 최상의 실재를 믿으며, 꿈의 편재성과 무관심한 사고 작용을 믿는다.  이는 모든 다른 정신적인 메커니즘을 없애고, 대신에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초현실 그 자체를 해결방법으로 제시하려 한다.” 초현실주의는 문학, 미술 운동을 넘어선 삶의 방식이며 철학적 견해의 표현으로 진전되었습니다. 초현실주의의 본질은 논리적인 사고에 의해 이해 가능한 사건들의 질서 잡힌 시스템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인 우연’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현실은 무의식에 대한 비논리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이런 통찰은 특정한 비논리적인 자동주의 방법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브르통의 자동주의       자동주의automatism는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1896-1966)에 의해서 처음으로 알려졌습니다. 브르통은 1920년 친구시인 필리프 수포Philippe Soupault(1897-1990)와 함께 자유 연상의 방법을 이용하여 창작한 글을 실은 을 출간했으며,  이것은 자동주의 방법의 첫 사례가 되었습니다. 회화가 초현실주의에서 타당한 위치를 가지는가에 대한 논쟁이 일자 브르통은 말했습니다. “시각은 가장 강력한 감각이므로, 시각적인 이미지를 명확하게 하는 능력은 초현실주의가 회화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  총체적으로 초현실주의 회화 또한 다른 초현실주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의 의식 속에서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회화를 혁명을 수행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이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브르통은 회화 자체의 미학적 목적보다는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시만큼이나 회화를 늘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몇몇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성공으로 인해 대중이 초현실주의가 우선적으로 양식상의 문제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자 몹시 당황해 했습니다. 브르통은 달리를 교의상의 이유를 들어 여러 차례 초현실주의 운동으로부터 추방했습니다. =================================================   초현실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몇 달 전 영국 런던과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초현실주의 전시회가 열린 데 이어, 파리 퐁피두센터에서도 3개월여간 열린 초현실주의전에 연일 관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미국 뉴욕과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도 초현실주의전이 곧 열릴 예정이다.    초현실주의는 여태까지 르네상스, 낭만주의, 인상주의 예술 등에 비해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 예술사조로만 인식되었던 초현실주의가 최근 들어 갑자기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퐁피두 전시를 기획한 뒤셀도르프대학의 미술사 교수이자 전 퐁피두 현대미술관 소장인 워너 스파이스는 세 가지 가설을 내세운다. 첫째, 1960년대까지 관객들이 인상주의에만 관심을 가져왔다면 이제 그 다음 사조인 초현실주의에 눈을 돌릴 시기가 됐다는 것. 둘째, 이 사조는 20세기를 관통하면서 마티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점. 마지막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이 시도한 부조리한 현실에의 초월, 보이지 않는 세계, 꿈의 세계와의 유희 등은 오늘날 특별히 느껴지는 불안과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될 수 있다고 평가된다는 것.  냉전 이후 미국이라는 단일 패권주의 세계체제와 신자유주의가 내포한 불확실성, 그리고 출구가 없을 것 같은 현실에 대한 막연한 극복 의지가 20세기 초에 등장했던 초현실주의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는 얘기다.    초현실주의는 1924년 이 운동의 교황으로 불리는 앙드레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세상에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두 가지 모순된 흐름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아 시인 로트레아몽과 랭보를 자신들의 선조로 여기면서 그들의 가치, 서정성, 예술이 갖는 초월의 힘,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힘을 신뢰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부르주아 사회, 금융자본주의, 경제적 번영, 보수적 교회와 정치가들, 정형화된 예술 등에 반대하며 등장한 다다이즘을 계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도발이나 스캔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주목적이었던 다다이즘과는 달리 니힐리즘을 배격하였으며, 문학과 사회의 변혁에 대한 좀더 체계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기존의 선입견과 도덕성에 반기를 들고 삶을 다시 창조하고자 했으며,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욕망, 꿈과 무의식이 자유롭게 표현되는 방법을 모색했다. 브르통이 얘기한 삶과 죽음,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소통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높은 것과 낮은 것이 모순되지 않는 지점은 이 유파의 다양한 예술가들의 공통된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1929년 벨기에 잡지인 ‘다양성’이 ‘초현실주의시대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펴낸 지도를 보면 이들의 인식세계를 극명하게 엿볼 수 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초현실주의 태동에 기여한 순서로 다시 만든 이 지도에서 미국은 사라지고, 오세아니아의 조그만 섬들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원시예술에 심취했다는 이유로 크게 확대되어 나타나 있다. ‘초현실주의 혁명’이라고 이름 붙여진 파리 퐁피두센터의 전시회는 초현실주의자들이 특히 왕성하게 활동했던 192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의 작품 중 200점의 그림, 200점의 데생을 비롯한 그래픽 예술, 100여점의 조각, 70여점의 사진을 소개하고 있다.  특별히 이 전시는 화가 살바도르 달리, 막스 에른스트, 앙드레 마송, 호안 미로, 드 키리코, 르네 마그리트와 조각가 자코메티, 사진가 만 레이 등 이 흐름을 주도했던 예술가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들에 관한 특별한 테마 연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관객들은 전시실을 돌며 꿈, 밤, 산책, 도시, 자연사, 에로티즘, 신성모독의 주제들로 정리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루이 아라공, 폴 엘뤼아르, 로베르 데스노스, 벤자멩 페레 등 프랑스의 주요 초현실주의 시인들과 공동작업을 했던 미술가들의 특색을 볼 수 있도록 문학과 미술의 만남에 관한 전시실도 마련되어 있다.  미술 전시와 더불어 초현실주의 영화 상영도 퐁피두센터가 준비한 대형 이벤트 중 하나다. 초현실주의자들의 활동을 알 수 있는 다양한 다큐멘터리와 르네 클레르의 ‘잠이 든 파리’ ‘상상 여행’, 루이 뷔뉘엘의 ‘안달루시아의 개’ ‘황금시대’ 등 100여편의 초현실주의 관련 영화들이 전시기간 내내 되풀이 상영된다. 이어 초현실주의자들이 열광했으며 1911년 수베스트르, 알랭이 창조하고 루이 페이야드, 폴 페조스 등이 영화화한 ‘팡토마스’(프랑스어로 ‘유령’이라는 단어에서 파생한 말)를 상영한다. 악의 화신인 이 인물을 시작으로 이후 영화들에 악한 주인공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후대 영화감독들의 작품 중 람베르 힐러의 ‘배트맨’을 비롯해 프리츠 랑, 조르주 프란주, 올리비에 아사야의 작품들도 함께 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체코 초현실주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간도 마련된다. 일부 평론가들은 1960년 앙드레 브르통의 죽음으로 초현실주의는 끝났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오늘날 파리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초현실주의 전시회는 이런 생각이 편협한 것임을 보여준다. 초현실주의는 한 시기를 풍미하다 사라진 고정된 유파가 아니라 그 흐름이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자유로운 운동이라고 일반인들에게 소개하고 재해석해 주는 것이 바로 이번 전시회의 기획 의도다.   시 미술 사진 영화 등 모든 장르를 수용하는 초현실주의의 정신은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미술가, 비디오 아티스트, 퍼포먼스, 바디 아티스트, 안무가, 사진가, 디자이너, 패션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의 현대 예술가들은 알게 모르게 이 예술사조의 영향을 받고 있다. 모두를 위한 모두에 의한 예술을 내세웠던 초현실주의는 민주주의의 정신과도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초현실주의의 첫 선언문’    1942년 10월 14일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처음으로 그들을 위한 전람회를 메디슨 가에 있는 ‘화이트로 라이드 Whitelaw Reid ’에서 개최했다. 전람회의 명제는 ‘초현실주의의 첫 선언서 First Papers of Surrealism’이었는데, 미국 작가들은 아직껏 그처럼 왁자지껄하고 요란한 전람회를 본 적이 없었다. 전람회는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이 주최했고, 뒤샹은 2마일 가량의 기다란 끈을 사용하여 내부를 장식했다. 그들은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 안에 아이들이 놀며 떠드는 소리가 울려퍼지게 했고, 뒤샹은 사람들을 고용하여 전시장 안에서 미식축구나 돌차기 놀이(hopscotch), 줄넘기를 하게 했다. 뒤샹이 기획하고 건축가 프레데릭 키슬러가 공간을 구성하여 탕기, 뒤샹, 마타, 에른스트, 마송, 그리고 미국작가 만 레이의 작품들을 배치했다. 전람회장의 실내에서는 지하철역에서 들을 수 있는 기차소음이 재생되었으며 기차소리가 날 때마다 전람회장의 불들이 껌뻑거렸다. 그러나 그런 장치들이 작품을 자세히 관람하는 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를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미로, 에른스트, 쿠어트 셀리그만,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 옆에는 피카소와 클레의 그림이 함께 걸려 있었는데 피카소와 클레는 자신이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불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미국 작가들로는 바지오츠, 마더웰, 데이비드 헤어가 참여했으며 마타와 달리의 그림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폴록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는 그들이 미국인들에게 대적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의 유럽 예술가들 중 꿈, 정신이상, 시에 관심이 많았던 브르통은 당시 마타의 아파트 윗층에 살고 있었다. 브르통은 뉴욕에 5년 동안 체재했는데 문화적으로 아주 뒤떨어진 미국생활에서 만족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영어를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고, 예술가들의 모임에도 덜 참석했으며, 돈이 떨어지자 라디오 방송국에 취직하여 나치를 비난하는 방송을 했다. 그는 미국인 조각가 데이비드 헤어와 우정을 나누었고, 그와 함께 잡지 『VVV』를 창간했다. 번역은 브르통의 아내가 맡았다. 그러나 브르통과 헤어는 우정관계에서 연적의 상대로 돌변했는데 이는 브르통의 아내 재클린이 헤어와 사랑에 빠져 브르통의 아이를 데리고 헤어에게로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 성적으로 더욱 자유분방했다. 달리도 친구인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 카라를 자신의 아내로 낚아챘었다. 브르통은 뉴욕 생활에 더욱 실망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이 빨리 끝나 파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레제는 차이나타운에 있는 식당에서 예술가들을 종종 만났는데 그들은 레제를 늘 주인공으로 여겼다.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했던 레제의 유물론에 근거한 기계주의 미학은 그 논리적 귀결로서 당연히 그로 하여금 공산당에 입당하게 했다. 레제와 피카소의 공산당 입당은 당시 신문에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몬드리안은 재즈를 좋아했으므로 할렘(Harlem)에 있는 댄스홀에 자주 갔고, 여가가 생기면 블루스를 추었다. 페기와 결혼한 에른스트는 이스트 51번가에 있는 페기의 고급주택에서 살고 있었으며, 뒤샹은 1915년 뉴욕에 온 이래로 파리를 자주 방문하고 있었다. 피카소, 마티스, 미로는 유럽에 남아 있었지만 나치의 반(反)모더니즘적 태도로 인해 활동할 수가 없었다. 피카소의 경우 나치는 언론이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처럼 대부분의 중요한 예술가들이 뉴욕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파리는 텅 빈 것처럼 보였다.  폴록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주제들에 매료되었던 것이 아니라 학문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들의 회화방법에 감동했고 그들의 무의식 세계에 대한 진지한 탐험을 마음에 들어했다. 그는 특히 미로의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좋아했고, ‘자동주의’ 기교의 창시자인 마송의 그림들에 관심이 많았는데 마송은 그때 코네티컷 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입체주의는 하나의 화법으로서 그 우수함이 알려졌지만 초현실주의는 하나의 미학운동으로서 그 영역을 계속 넓혀가고 있었다.   초현실주의 선언/앙드레 브르통 지음·황현산 옮김/미메시스 발행·296쪽· 피카소, 자코메티, 달리, 엘뤼아르, 아라공 등 1920년대 파리에서 활동했던 문학ㆍ미술 거장들의 교유 관계를 살피다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앙드레 브르통(1896~1966). 독자에겐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매혹적인 여성과 교제했던 몇 달 간의 경험을 두서없고 몽환적으로 기술한 산문집 의 작가로 기억되는 프랑스 태생의 시인이자, 평론가, 편집자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예사조인 초현실주의를 주창하고 일군의 작가 그룹을 주도, 당대에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브르통이 1924년 사실주의 문학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무의식을 중시하는 창작론을 제시한 '초현실주의 선언'(이하 '제1선언')은 그를 일약 새로운 미학의 리더로 자리매김했고, 당시 세계 문화의 중심지였던 파리에 모여든 젊은 작가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그룹의 내분, 비시정부(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면서 수립된 괴뢰정부)의 탄압에 의한 미국 망명 등의 시련을 겪으며 존재감이 약화되는 와중에 제2, 제3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한다. 이 세 건의 선언문과 브르통의 강연문, 잡지 기고를 묶고, 프랑스 시 분야의 권위자이자 빼어난 번역가인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가 우리말로 옮기고 해설한 책이 이번에 출간된 이다. 브르통이 세우고자 했던 초현실주의의 이론적 뼈대를 보여주는 이 책에서 요체가 되는 글은 시기적으로도 가장 앞서는 제1선언이다. 선언문이라는 형식이 말해주듯, 정교하고 체계적인 설명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그래서 오히려 변혁을 향한 당시의 열정과 의지가 오롯이 묻어나는 이 글에서 브르통은 창작자에게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수동적인, 또는 가장 수용적인 상태에 자신을 가져다 놓으라"(95쪽)고 주문한다. 여기서 초현실주의 문학의 대표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자동기술법이 도출되는데, 이는 무의식 영역에서 자유롭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포착해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묘사와 심리분석을 통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존 사실주의 문학과의 완전한 결별 선언인 셈이다. 브르통은 이어 "어떤 종류의 연상으로부터 바람직한 돌발성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좋다"(111쪽)면서, 신문에서 잘라낸 표제들을 아무렇게나 이어붙인 콜라주에 '시(詩)'라는 제목을 붙이는 도발을 감행한다. '무의식'을 끌어들여 인간 존재의 확장을 꾀한 프로이트와, 세계의 변혁을 추구하는 마르크스의 사상의 수혜를 받은 브르통이 주창하고 이끌었던 초현실주의를, 황 교수는 "존재의 총체성을 문제 삼은 거의 유일한 운동"(48쪽)이라고 평가한다. 철 지난 듯한 20세기 문예사조의 본질을 짚는 이 날카로운 안목이 초현실주의의 현재적 의미를 되살린다. 예컨대 '미래파'를 위시해 2000년대 한국문단에 대거 등장한 젊은 작가군의 반(反)리얼리즘 작풍의 저변에 깔린 정신은 90여 년 전 파리에서 사실주의의 아성에 맞섰던 초현실주의 그룹의 그것과 거리가 멀지 않아 보인다. 브르통의 선언문을 그의 개인사, 당대 파리 문화계의 사정과 연결 지어 47쪽에 걸쳐 자세히 다룬 황 교수의 해설은 그 자체로 이 책의 값어치를 톡톡히 해낸다.  
401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영화를 본후 시쓰기... 댓글:  조회:2838  추천:0  2017-04-10
 영화를 응용하여 시를 써보자   ― 시, 영화를 만나다   프레베르의 시 중에는 영화 같은 시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도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영화를 보고 와서 그 영화가 준 인상이 생생할 때 시를 써 보십시오. 영화의 제작 기법이 문학에 전이된 예도 적지 않습니다.     시 같은 영화, 영화 같은 시   여러분은 최근에 무슨 영화를 보셨습니까?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 시보다는 영화를 화제로 삼을 때가 더 많지요? 지금 개봉 중인 무슨 영화가 볼 만하다느니 무슨 영화는 영 재미가 없다느니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생활 가운데 영화는 성큼 들어와 있는데 시는 멀어져만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영상 매체와 활자 매체 사이의 거리가 먼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고 쓴 감상문류의 시가 무척 많으며, 시 같은 영화도 꽤 많습니다. 시 같은 영화의 예로는 장 콕토의〈시인의 피〉〈오르페우스〉〈미녀와 야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거울〉〈향수〉〈희생〉같은 영화를 들겠습니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영상 시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가 만든〈희생〉의 그 유명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세워진 집, 그 곁에 죽어 있는 나무의 생로병사, 물의 친화력을 암시하는 바닷가 배경……. 기독교적인 희생의 정신을 통해 인류의 미래 사회에 대한 구원의 희망을 암시한, 대단히 시적인 영화였습니다. 르레 클레망의〈금지된 장난〉이나 페데리코 펠리니의〈길〉, 배용균의〈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광모의〈아름다운 시절〉을 저는 시적인 영화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장 콕토는 영화감독이면서 시인이었습니다.           불쑥         진흙과 풀더미의 구덩이에서 나타난         집시 여인이         서커스단을 위해         백작의 아들을 훔쳤네.           미쳐버린 엄마가         길거리에서 소리쳐 부르고 있을 때         아이는 서커스의 사다리 꼭대기에서         날기를 배우고 있네.           (…)           씁쓸한 술을 너무 마셨기에         어린애는 졸려 몸을 가누지 못하네.         수프 그릇 옆에서         그애의 머리는 바닷가를 헤매고 있네.           꿈은 훔치는 것에 길들어 있는 것         아이는 길거리에 있는         무서운 석상을 꿈꾸네.         손으로 훔치는 석상을 꿈꾸네.                                         ―〈어린아이를 훔치는 자들〉부분(전채린 역)     총 7연으로 된 시의 앞의 두 개 연과 끝의 두 개 연입니다. 시의 세계를 서커스의 세계에, 시인을 집시에 빗대어 쓴 시입니다. 보들레르는 시인을 날지 못하는 커다란 새, 어부들에게 잡혀 조롱감이 되는 알바트로스 같은 존재로 봤지만 콕토는 영원한 떠돌이로 봤습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역마살이 낀 사람이 시인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에밀 쿠스트리차의〈집시의 시간〉과 폴커 슐렌도르프의〈양철북〉의 여러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두 영화는 명작 중의 명작이지요. 소설가 이제하는 영화 평론도 곧잘 쓰는데, 언젠가〈길〉과〈집시의 시간〉을 자신이 본 모든 영화 중 최고작으로 꼽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수긍이 가는 선정입니다. 콕토는 영화를 편집하는 식으로 시를 쓰다가 에라, 영화를 만들자 하고는 영화감독이 됩니다. 영화의 몇몇 장면이 시가 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물론 1930년대에 쓴 시라 에밀과 폴커의 영화보다 훨씬 앞서 나온 것입니다. 자크 프레베르의 시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이는 잔에         커피를 담았지         그이는 커피잔에         우유를 넣었지         그이는 우유 탄 커피에         설탕을 탔지         그이는 작은 숟가락으로         커피를 저었지         그이는 커피를 마셨지         그리고 그이는 잔을 내려놓았지         내겐 아무 말 없이                                         ―〈아침식사〉앞 부분(김화영 역)     이 시는 마친 영화처럼, 카메라 앵글을 고정시키고 ‘천천히 보여주기’로 진행이 됩니다. 웬 사람이 식당에 들어가 아침 식사를 하는 장면이 클로즈업됩니다. 즉, 시인이 필름을 돌리는 것이지요. 독자는 흡사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내겐 아무 말 없이         나는 보지도 않고         그이는 일어났지         그이는 머리에         모자를 썼지         그이는 비옷을 입었지         비가 오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이는         빗속으로 가버렸지         말 한마디 없이         나는 보지도 않고         그래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어 버렸지.                                         ―〈아침 식사〉뒷 부분(김화영 역)     참 매정한 그이입니다. 시적 화자한테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가버리다니. 저는 이 시를 읽을 때면 시도 영화같이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레베르의 시 중에는 영화 같은 시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도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영화를 보고 와서 그 영화가 준 인상이 생생할 때, 시를 써보십시오. 영화의 제작 기법이 문학에 전이된 예도 저적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 갑시다, 그대와 나,         지금 저녁은 마치 수술대 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 갑시다, 거의 인적이 끊어진 거리와 거리를 통하여         값싼 일반 여관에서 편안치 못한 밤이면 밤마다         중얼거리는 말소리 새어나오는 골목으로 해서         굴 껍질과 톱밥이 흩어진 음식점들 사이로 빠져서 우리 갑시다.                                         ―〈J.A. 프루프록의 연가〉앞 부분(이창배 역)   T.S. 엘리엇 시의 위대함은 이분법적 사고를 통합하려 하거나 혹은 넘어서려 한 데 있지 않을까요? 선과 악, 영원과 순간, 지상과 천상, 세속과 신성, 전통과 현상…….〈J.A. 프루프록의 연가〉는 주제도 주제이지만 병행몽타주, 원근법 등의 화면 구성을 해서 시각적인 효과를 드높였습니다. 시에서 시각적 이미지는 참으로 중요한데, 저는 ‘이 시는 시각적 이미지가 뚜렷해 영화의 한 장면 같군’ 하고 생각하며 외국 시를 읽을 때가 많습니다. 프랑스 시인 테오필 고티에, 영국 시인 톰 건, 독일 시인 고트프리트벤……. 이들의 시를 읽으면 뇌리에 영상이 펼쳐집니다. 이것이 곧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문학과 영화 사이의 거리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고 사물을 모방하는 것처럼 영화도 현실의 재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예사조 가운데 사실주의는 현실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정신인데 영화도 현실에 근거하여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화상(畵像)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사실주의입니다. 문학과 영화가 어떤 만남을 이룩해 왔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미국 최초의 장편 영화인 그리피스의〈국가의 탄생〉(1915)은 영국의 사실주의 작가 찰스 디킨즈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피스는 몽타주 기법을 최초로 구사한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스타인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에이젠스타인의 대표작이〈전함 포템킨〉인 것, 알고 계시죠? 예전에는 영화가 예술이 아니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어떻게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가 예술이냐는 것이지요. 문학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뒤틀기도 하고 여러 가지 기법을 동원해 변형, 재구성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 사람이 많았던 탓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자 인도에서는 영화를 드르시아 카비아(drsya kavya), 즉 ‘눈에 보이는 시’라고 했습니다. 리치토 카누도 같은 사람은 영화를 공간예술(조각 ․ 건축 ․ 회화)과 시간예술(음악 ․ 무용 ․ 문학)을 종합한 제7예술이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알렉상드르 아스트뤼크란 영화학자가〈카메라 만년필론〉(1948)에서 영화감독도 시인이나 소설가처럼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카메라가 펜처럼 현실을 뒤틀고 재구성할 수 있다고 보았던 거지요. 인생의 희로애락을 시는 짧은 시행 속의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소설은 언어로 설명하고(스토리 텔링), 영화는 영상으로 표현합니다. 좋은 예술형화나 문예영화는 시적 영상을 담지 않던가요. 이인성은 오버랩과 시간의 비약이라는 영화 제작 기법을 응용하여 소설을 썼고, 유하는 편집 효과를 적절히 응용해 시를 썼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장 콕토,〈마지막 황제〉를 만든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오이디푸스〉를 만든 파울로 파졸리니는 모두 시인이었습니다. 시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로는〈일 포스티노〉(파블로 네루다),〈그라나다에서의 죽음〉(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토탈 이클립스〉(랭보와 베를렌느),〈금홍아 금홍아〉(이상) 같은 것들이 있었지요. 우리 문학도 90년대에 들어와 영화와의 만남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소설 속에 영화를 끌어들이거나 소설가의 영상 체험 자체를 갖고 소설을 쓰는 일이 빈번해집니다. 최성각은 엽편소설집《택시 드라이버》에서 영상 체험이나 영화 이야기를 소설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 방법을 썼습니다. 조성기는〈피아노, 그 어둡고 투명한〉에서 영화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 사이사이에 작중 화자의 이야기를 넣는 방식을 썼습니다. 소설로 쓴 영화 관람기라고 할까요, 영화 평론이라고 할까요. 김경욱은《바그다드 카페에는 커피가 없다》에서〈시네마 천국〉〈택시 드라이버〉〈지존무상〉같은 영화의 제목을 따와 영화 관객을 대상으로 한 소설을 완성했습니다.   유명한 감독의 대표작 가운데 원작이 명작 소설인 경우가 많지만 소설을 영화화한 것을 보는 것과 책을 보는 것은 분명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영상은 뇌리에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에 인간 의식의 심층을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문학은 인식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길러주고, 영화는 감각에 호소하고 현장감을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문학과 영화가 서로 배척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영역이 다르기는 하지만 공유하는 영역도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인데, 앞으로 영화적 기법을 이용한 시들이 더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언젠가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가 대담에서 한 말이 기억납니다. “저는 활자 문화의 종교성을 믿고 있습니다. 활자 문화가 경시되고 있기 때문에 충무로 영화가 안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상황에서는 좋은 시나리오가 안 나옵니다. 충무로 사람들은 시나리오를 문학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품으로, 이게 장사되겠느냐 생각하는 거지요. 그래서 전혀 설득력도 없고 개연성도 없는 작품을 내놓게 되지요.” 지당한 말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어느 시상식장에서 “지금 영화를 하는 후학들에게 해줄 말이 없냐”는 질문을 받자 “책을 많이 보세요”라고 말했다고 하지요. 시를 영상으로 옮기는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장정일과 유하 시의 영상미   자, 그렇다면 국내 시인 가운데 영화와 시를 넘나든 이로 누가 있을까요? 물론 장정일과 유하지요. 장정일의 소설은 여러 편이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만 그는 영화 같은 시를 여러 편 쓴, 영상 미학을 아는 시인입니다.           서서히 8미리 촬영기가 돌아가고, 그녀의         두 뺨은 흥분으로 달아오른다. 실연이자, 연기!         그녀의 연기에는 대역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허벅지에 버터를 바른다. ‘여기서 컷!’         ‘이 장면은 위에서 내리, 찍어, 줘요’ 촬영기사에게         명령하니, 그녀는 감독을 겸하는구나, ‘점점 클로즈업         시키면서 컷트, 알죠?’ ‘레디 고’                                         ―장정일,〈8미리 스타〉부분     이 시에 나오는 포르노 영화 전문 여배우는 돈을 벌려고 마지못해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라 영화 찍기 자체를 즐깁니다. 8미리 필름의 영화를 찍으면서 포르노 영화계에서의 출세를 꿈꾸는 한 여인의 욕망이 시가 되었습니다. 장정일은〈잔혹한 실내극〉이나〈즐거운 실내극〉같은 희곡 형식의 시를 쓴 바 있고 시나리오 형식의 시와 영화 감상문을 시로 발표한 적도 있습니다.〈샴푸의 요정〉같은 시는 텔레비전 단막극으로 만들어졌었지요.             S#1.           *F.I.           카메라가 높은 하늘에서 점점 내려오며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는 오픈카를 클로         즈업시킨다. 운전자는 잘생긴 청년으로, 즐거운 듯 경쾌한 휘파람을 불고 있다. 카메라         가 그의 상반신을 비추다가 뒤로 빠진다. (D ․ I ․ S)                                         ―〈자동차〉제1연             영화〈파리, 텍사스〉를 보고           대구 유일의 종합잡지인《빛》에다           원고지 열 매의 감상문을 쓴다.             지상에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있고 그 숱한 이야기들은 흔히 이렇게 시         작된다. ‘옛날, 먼 옛날, 아주 살기 좋은 아름다운 마을에 누구와 누구가 살았더란다. 그         런던 어느날……’           빔 밴더스 감독의 84년도 칸느영화제 대상 수상작인〈파리, 텍사스(Paris, Texas)〉         역시 이런 이야기 방식의 너무나 보편적인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슬픔〉부분   〈자동차〉는 총 12연으로 된 시인데 아주 짧은 시나리오입니다.〈슬픔〉은 원고지 10매의 영화 감상문을 다른 지면에 발표한 것인데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시집에 수록함으로써 시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를 보면 장정일의 영상 미학과 서사 구조에 대한 관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런 시에 만족할 수 없어 소설가가 되고 시나리오를 손보고 연극대본을 썼던 것이겠지요. 영문학도였던 유하 역시 영화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영화 감상문 연작시인 ‘영화 사회학’ 시리즈를 씁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영화학과 대학원에를 가더니 영화〈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결혼은 미친 짓이다〉〈말죽거리 잔혹사〉를 만들었습니다. 유하의 ‘영화 사회학’ 시리즈는 단순한 영화 감상문이 아니라 1970~80년대 우리 사회에 대한 예리한 비판이고 유쾌한 풍자였지요.           미국영화에 나오는 수십만 마력의 무쇠 로보캅이         우리 사회에도 곧 등장할 필요가 있을 거라구?         돌과 화염병쯤은 어린애 장난 같을 불사신의         사이보그 경찰, 강철도 종이 구기듯 하는         그 초강력 파워가 민중의 지팡이가 되는 미래 사회?         삐삐삐삐 시인분주웅 조옴 보옵시이다                                         ―〈로보캅―영화 사회학〉부분           베드룸 윈도우에서 본 그 엽색의 살인귀도         집에선 홀어머니에게 늦게 들어온다고 꾸중 듣는         평범한 아들이고, 직장에선 성실한 직원이다         마치 악랄한 고문을 일삼는 자도, 집에선         딸네미 대입 학력고사 걱정하는 자상한 아버지인 것처럼,         밤마다 살인귀는 뱀눈을 치켜 뜨고 여자 사냥을 한다                                         ―〈베드룸 윈도우―영화 사회학〉부분     앞의 시는 미국 영화〈로보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는 듯하다가 분위기를 한순간에 바꿉니다. 로보캅은 행인을 무작위로 잡아 불심검문하는 이 땅의 전경이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시인은 한국의 살벌한 정치적 상황을 풍자합니다. 영화〈베드룸 윈도우〉에 나오는 ‘엽색의 살인귀’가 한국적 상황에서는 정치범에게 갖은 고문을 하는 경관으로 탈바꿈됩니다. 영화 속의 살인귀가 그렇듯이 그도 집에 가서는 자상한 아버지가 되는 것이지요. 영화 속의 살인귀는 어머니의 꾸지람에 말대꾸 한마디하지 않을 정도로 얌전합니다. 그야말로 ‘영화 사회학’적으로 시를 쓰던 유하는《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와《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에 가서는 온갖 키치적인 것들을 끌어와 90년대 우리 사회의 지형도를 그렸는데, 영화배우와 영화 및 영화에 관련된 것들을 시의 양념으로 삼았습니다.     영화가 있었기에 시가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김춘수 시인이 말론 브란도 주연의 영화〈혁명아 사파타〉를 보았다고 믿도 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멕시코의 농민 혁명을 주도한 사파타의 일대기를 그린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말더듬이 一字無識 사바다는 사바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處容斷章 第二部 Ⅴ〉)라는 시를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파타가 왜 사바다로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영화를 보면 사파타가 아닌게아니라 일자무식이어서 글을 깨치는 문제로 고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탁번 시인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원작, 데이빗 린 감독의 영화〈닥터 지바고〉를 보지 않았더라면 아래의 시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原州高校 이학년 겨울, 라라를 처음 만났다. 눈 덮인 雉岳山을 한참 바라다보았다.             (…)             라라, 그 보잘것없는 계집이 돌리는 겨울 풍차소리에 나의 아침은 무너져 내렸다. 라         라여, 본능의 바람이여, 아름다움이여.                                         ―〈라라에 관하여〉첫 연과 끝 연     하재봉의 시〈비디오/극장에 다녀왔다〉는 영화〈장미의 이름〉을, 김혜순의 시〈또 하나의 타이타닉호〉는 영화〈타이타닉〉을 보고 와서 쓴 시입니다. 시인 배용제는 삼류극장에 죽치고 앉아 젊은 시절을 보냈던가 봅니다. “나는 줄곧 에로 영화만을 원했다”(〈삼류극장에서의 한때 2〉)고 말한 시인은 제목부터 에로틱한 영화를 제법 많이 보았던가 봅니다. 시인의 영감을 자극한 영화가 어디 에로 영화뿐이었겠습니까.           무릎과 무릎 사이에 엎드려         깊은 밤 깊은 곳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네         뻐꾸기가 밤에 우는 이유를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 난,         날마다 허물 벗는 꽃뱀의 매끄러운 살결을 더듬으며         사랑의 방식에 대해 터득했네         어둠의 성역에서 타락과 포옹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신이 감춰둔 또 하나의 천국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라고,                                         ―〈삼류극장에서의 한때 1〉부분     우이동 시인 채희문은 시의 제목으로 자신이 본 영화의 제목을 붙이고 ‘세계 영화 추억 만나기’라는 부제를 달아 53편의 시를 써 시집《추억 만나기》라는 시집을 낸 바 있습니다. 시로 쓴 영화 감상문이 한 권의 시집이 된 것이지요. 박용재는 연극 관전기와 연극인에 대한 인상기를 모아 시집《우리들의 숙객―동숭동 시절》이라는 시집을 냈습니다. 아마도 앞으로는 영화를 시적 상상력의 근간으로 삼는 시인들이 나오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영화 보기’를 생활의 일부로 삼으신 분들이 많을 텐데, 시와 영화가 동떨어진 예술 세계가 아니므로 접목을 시도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물론 시가 영화에 수렴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새로운 상상력의 불꽃놀이를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영화〈러브 액츄얼리〉를 보러 가려는 참입니다.      
400    단시 모음 댓글:  조회:3082  추천:0  2017-04-10
      아름다운 여인 -H. 헤세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 기어이 부셔버리고   다음날엔 벌써 그를 준 사람조차 잊고 있는 아이와 같이 당신은 내가 드린 내 마음을 고운 장난감같이 조그만 손으로 장난을 하며 내 마음이 고뇌에 떠는 것을 돌보지도 않습니다.     감각 -A. 랭보   푸른 여름 저녁, 보리날 쿡쿡 찔러대는 오솔길 걸어가며 잔풀을 내리 밟으면, 꿈 꾸던 나도 발 밑에 그 신선함을 느끼리 바람은 내 맨 머리를 씻겨 줄게구.   아,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래도 한없는 사랑 넋 속에 올라오리니 보헤미안처럼, 내 멀리, 멀리 가리라. 여인 데리고 가듯 행복에 겨워, 자연 속으로     서  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삶   푸쉬킨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프고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리고 지난 것은 그리워지느니.       나그네   박목월   강 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         무지개   W.워즈워드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며 내 가슴은 뛰누나 내 어렸을 때도 그랬고, 늙어서도 그러기를 바라노니 그렇잖음 차라리 죽는 이만 못하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내 삶의 하루 하루가 자연에의 경건으로 얽어지기를       사  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에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동  화   G .벤더빌트   예전에 어느 小女는 날마다 날마다 내일은 오늘과 다르기를 바라면서 살았답니다.       그리움   청마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귀   J. 꼭또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소리 그리워라         산비둘기   Jean Cocteau   두 마리의 산비둘기가 상냥한 마음으로 사랑하였습니다.   그 나머지는 차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호  수   정지용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충  고   괴테   너는 자꾸 멀리만 가려느냐 보아라 좋은 거란 가까이 있다.   다만 네가 잡을 줄만 알면 행복은 언제나 거기 있나니.       엄마야 누나야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 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진달래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 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지하철 정거장에서   E. Pound   군중속에 낀 얼굴들의 환영, 비에 젖은 검은 나뭇가지에 걸린 꽃잎들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축축한 검은 가지 위의 꽃잎들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 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5月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한한 슬픔의 봄을.         묵도   모윤숙   나에게 시원한 물을 주든지 뜨거운 불꽃을 주셔요 덥지도 차지도 않은 이 울타리 속에서 어서 나를 처치해 주셔요   주여 나를 이 황혼 같은 빛깔에서 빼내시와 캄캄한 저주를 내리시든지 광명한 복음을 주셔요 이 몸이 다아 시들기 전에 오오 주여         한 가슴의 깨어짐을 막을수만 있다면   E.디킨스       제가 만일 한 가슴의 깨어짐을 막을 수만 있다면 저의 삶은 헛되지 않아요. 제가 만일 한 생명의 아픔을 덜어주고 고통 하나로 식혀줄 수 있다면 그리고 또한 힘이 다해 가는 로빈새 한 마리를 그 둥지에 다시 올려줄 수 있어도 저의 삶은 진정 헛되지 않아요         문둥이   서정주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해도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어       저 산 너머   칼 부세 (독, 1872-1918)    저 산 너머 또 너머 저 멀리 모두들 행복이 있다 말하기에 남을 따라 나 또한 찾아갔건만 눈물지으며 되돌아 왔네. 저 산 너머 또 너머 더 멀리 모두들 행복이 있다 말하건만……         귀천    천 상 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반복가   게오르그 트라클   한낮의 화사함은 흘러가 버렸네 저녁을 물들이는 갈색과 푸르름 목동의 피리소리는 사라지고 없었네 저녁을 물들이는 갈색과 푸르름 한낮의 화사함은 흘러가 버렸네       눈뜸 J.R 히메이네스   너를 위해 나는 언제고 꽃이고 싶다 꽃잎을 달고 끝없이 풍요한 꿈을   밤이 끝나고 새벽과 함께 필 때 그 꿈의 정을 활짝 한꺼번에 퍼뜨리는 꽃이고 싶다.       기도서 R.M. 릴케   내 눈을 감기세요. 난 당신을 볼 수 있어요. 내 귀를 막으세요. 난 그대 음성 들을 수 있어요. 발이 없어도 나는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께 맹세할 수 있습니다. 팔이 꺾이면, 나는 당신을 내 마음으로 잡을 겁니다. 심장이 멎는다면, 나의 머리가 울릴겁니다. 만약 당신이 머리에 불을 지르면 나는 그대를 내 피 속에 실어 나르렵니다.       술 노래 W.B.  예이츠   술은 입으로 흘러들고 사랑은 눈으로 든다 우리가 늙어서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진실은 이것뿐   술잔을 입에 대면서 나는 그대를 바라보고 한숨 짓는다.         모음들(Voyelles) A. 랭보   A는 흑, E는 백, I는 홍, U는 녹, O는 남색(파란색, 청색) 모음 을이여 네 잠재의 탄생을 언젠가는 말하리라 A(아), 악취(냄새)나는 둘레를 소리내어 나는 눈부신 파리의 털 섞인 검은 코르셋 그늘진 항구, E(으), 안개와 천막의 백색 거만한 얼음의 창날, 하이얀 王者, 꽃 모습의 떨림.   I(이), 주홍빛, 토해낸 피, 회개의 도취련가, 아니면 분노 속의 아름다운 입술의 웃음이련가   U(우), 천체의 주기, 한 바다의 푸른 요람, 가축들 흩어져 있는 목장의 평화, 연금술을 연구하는 넓은 이마에 그어지는 잔 주름살 O(오), 기괴한 날카로운 비명이 찬 나팔소리려니, 온 누리와 천사들을 꿰뚫는 침묵 오오, 오메가! 신의 시선의 보랏빛 광선.         교감(상응; Corespondences)   C.P. 보들레르       자연은 하나의 신전, 거기선 살아있는 기둥들이 이따금 어렴풋한 말들을 하고 사람은 다정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는 상징의 숲 속을 지나간다.   어둡고 깊은 조화 속에 멀리서 합치는 메아리처럼, 밤처럼 그리고 광명처럼 한없이, 향기와 색채와 음향이 서로 화답한다.   어린애의 살결처럼 신선하고, 오보에처럼 부드럽고, 초원처럼 푸른 향기가 있고, - 또 한편엔 썩고, 풍요하고 승리에 찬 향기가 있어,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한 것으로 퍼져나가 정신과 감각과 환희를 노래한다.   1)자연이 하나의 사원이어서 거기서 살아있는 기둥들은 때로 혼돈한 언어를 숨으로 내쉬니 인간은 친밀한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그 안으로 들어간다.   어둠이며, 빛처럼 광활하며 아둡고도 깊은 통일 속에 멀리서 뒤섞이는 긴 메아리처럼 색채와 음향과 향기가 서로 응답한다.       가을   Thomas Ernest Hulme (영. 1881-1917)   가을 밤의 싸늘한 촉감 나는 밤을 거닐었다. 얼굴이 빨간 농부처럼 불그스레한 달이 울타리 너머로 굽어보고 있었다. 나는 말은 걸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도회지 아이들 같이 흰 얼굴로 별들은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길 오카모토 쥰   올라가니 산이 있었다. 내려가니 골짜기였다. 산에도 골짜기에도 눈이 있었다. 하나님도 짐승도 만나지 않았다.   안개    칼 샌드버그   안개가 온다  작은 고양이 걸음으로  그건 웅크리고 앉아  항구와 도시를 바라보다가  다시 움직여 간다   Fog C.Sandburg   The fog comes on little cat feet. It sits looking over harbor and city on silent haunches and then moves on.       봄은 고양이로다                 고월  이 장 희(1900-1929)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399    시는 온몸으로 온몸을 다해 밀고 가는것이다... 댓글:  조회:2154  추천:0  2017-04-10
1. 시는 온몸으로 온몸을 다해 밀고 가는 것이다                                                                      ---  윤미에게                                                              어제는 굴뚝연기가 하늘로 못 오르고 자꾸만 담 아래로 고개를 꺾더니 오늘은 구름이 산 너머로 밀려 내려갔구나. 하루종일 날이 흐려도 앞산에는 진달래 뒷산에는 산벚꽃 피는구나. 너희 학교에는 지금 무슨 꽃이 피었니? 벚꽃이 화사하게 핀 걸 바라보다가 우리가 같이 공부하던 중학교 담 옆에 서 있는 살구나무도 지금쯤 꽃을 피웠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어. 기억나니? 그 살구나무. 잘 안 난다고?  초여름이면 애들이 돌 던져서 살구를 따먹다가 혼나곤 하던 그 나무 말이야. 그 살구나무의 꽃은 향기가 얼마나 은은한지 몰라. 달콤한 향기를 풍겨오면서도 결코 요란하지 않고 색깔이 화려하거나 진하지 않은 그저 잔잔한 연분홍 빛이면서도 속되지 않지. 멀리서보면 그저 눈에 잘 안 띄는 평범한 나무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그런 줄 몰랐다고? 시를 쓰는 사람은 자연현상의 작은 흐름 하나에도 관심을 갖고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한단다. 시를 쓰는 사람이 특별한 사람은 아냐. 시를 쓰는 사람과 시를 쓰지 않는 사람은 큰 차이가 없어. 시 쓰는 사람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슬퍼하고 화를 내거나 속상해 하고 그러지.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함께 섞여 살아가다가 한번 더 되돌아본다는 점 일거야. 남들은 살구나 열려야 군침을 흘리며 쳐다보는 살구나무도 늘 눈여겨본다는 거야. 꽃이 피기 시작할 때, 꽃이 피었을 때, 꽃이 지고 잎이 돋아날 때, 그 잎에 단풍이 들었다가 잎도 꽃도 다 잃은 빈가지 만으로 겨울을 견디고 있을 때 자주 그 나무를 바라보는 거야.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흘러가는 강물,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를 가다가 한 번 더 쳐다보고 가는 거지. 그러는 동안 나무 한 그루에 담겨 있는 삶의 의미도 볼 줄 알게 되고 나무가 우리에게 건네는 소리를 들을 줄도 알게 되는 거야. 꽃 한 송이를 사랑하게 되고 내가 꽃을, 꽃이 나를 길들이는 사이가 되는 거지. 풀 한 포기, 들꽃 한 송이도 하찮게 보지 않고 사랑하며 지켜보는 동안 사람도 그와 같이 사랑하게 되거든. 아름다운 걸 아름답게 바라볼 줄 알게 되고 가여운 것을 가엾게 여기게 되며 옳은 것, 의로운 것을 구분해 낼 줄 알게 되지. 그러나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에 담겨 있는 삶의 의미는 그냥 계속 쳐다보고만 있다고 보이는 건 아니야. 지혜의 눈으로 보아야 보이는 거야. 다시 말해서 내 세계관의 눈으로 보아야 보인다는 거야. 그냥 보는 건 ‘관찰’이라고 한다면 마음의 눈, 세계관의 눈으로 보아서 그 안에 들어 있는 의미를 읽어 내는 건 ‘간파’한다고 말해. 자연의 모습과 사람살이를 ‘관찰’하는 습관도 있어야 하지만 ‘간파’해 내는 눈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러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해. 책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한 오랜 발자취가 담겨 있고 가장 지혜로운 말씀들이 가득 들어 있어. 나는 중학교 때 『레미제라블』을 읽고 처음으로 사람을 한 쪽 면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죄인이라는 편견을 갖고 사람을 끝까지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 사람에 대한 사랑 이런 걸 알게 되었어. 알고 깨닫고 다시 바라보면 세상은 다르게 보이는 거야. 바른 지혜를 얻게 되면 바르게 보이고 새로운 걸 알게 되면 새롭게 보이는 거야.  책을 많이 읽어야 되는 이유는 또 있어. 우리가 시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된다는 거야. 우리가 시를 읽고 ‘내 마음을 너무나 잘 표현한 것 같아.’ 이렇게 말하는 때가 있지. 어떤 날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 때로는 한 편의 시를 읽고 의로운 마음이 생겨 주먹을 쥐기도 하지. 이건 시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거든. 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어. 이런 걸 변화의 정서라고도 하는데, 그래서 시가 위대한 거야. 남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인생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다 주기도 하는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기 때문에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 거야. 남에게 바른 변화와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려면 남들보다 더 많이 읽고 더 깊이 생각할 줄 알아야겠지. 그렇게 많이 읽고 깊게 생각한 것이 있으면 자연히 그게 넘쳐서 글이 쓰여지는 거야. 하루하루 학교생활에 얽매여 책을 읽고 생각할 여유가 많지 않다는 걸 누가 모르겠니. 그러나 그 하루 하루의 생활 중에 짧게 5분이나 10분씩 몇 번의 시간을 내는 노력도 해 봐. 요즘은 그런 책들도 많아졌어. 5분이면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면서 긴 여운을 주는 글도 많거든. 그리고 그걸 읽고 난 느낌을 간단히 메모하고 거기 자기 생각을 곁들이는 습관 이런 것도 여러 해 쌓이면 큰 재산이 될 거야. 아니면 한 주일이나 한 달 기간을 정해두고 목표한 책을 읽어나가는 계획도 괜찮지 않을까. 긴 시간이 필요한 책은 방학을 이용해서 읽는다든가 하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책을 읽는 것도 좋고.  책을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이 글이 되는 튼튼한 토대 없이 글 쓰는 재주만을 배워서 손끝으로 쓰는 글은 당장 눈에 띌지는 몰라도 오래 가지 못해. 자기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필요 없다는 게 아냐. 똑같이 보고 느낀 것도 더 생생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 그러나 진실하지 않으면 억지로 만든 것이 곧 드러나게 되고, 손재주에만 의지해서 쓰는 글은 얼마쯤 가다보면 자기 한계를 들어내고 말지. 생명력이 길지 않은 시가 되고 마는 거야. 지금 당장 인정받고 상을 받고 싶은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해 기교만 부리려고 하거나 남의 것을 표절해서라도 대학 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겠다고 하면 그 사람은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없어. 설령 이름 난 시인이 되지 못하더라도 바른 길을 가야 해. 오래 걸려도 많이 읽고 깊이 있게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쓰며 살아가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진실한 시인이 될 수 있어.  윤미야, 김수영시인 알지?  일찍이 김수영시인은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강연에서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  여기서 김수영시인이 말한 머리는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이론이나 문학에 관한 지식 또는 생각이나 사상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심장이란 가슴 즉 마음속으로 느끼고 반응하는 정서, 감정 등을 뜻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머리로 하는 것이나 심장으로 하는 게 아니고 몸으로 하는 거라고 말했거든.  몸으로 한다는 게 뭘까. 육체노동이란 뜻일까. 이론이나 감정, 사상이나 정서 어느 하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합해져서 하나의 몸을 이룬 상태 그걸 뜻하는 걸 거야. 그냥 몸이 아니라 온몸이라고 덧붙였지. 나는 거기다가 바로 손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말을 보태고 싶어. 그래서 머리나 가슴이나 손끝 어느 하나에만 의지해서 쓰는 시가 아니라 그것들 모두가 합해진 시, 즉 문학에 관한 지식이나 공부, 독서를 통해 다져진 지혜, 그리고 사물과 사람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과 가슴, 아름다운 걸 아름답게 느끼고 불쌍한 걸 불쌍하게 바라볼 줄 아는 마음과 자기 생각을 바르게 표현할 줄 아는 손, 이 모든 것이 합해져서 동시에 온몸으로 온몸을 다해 자기 전 생애를 밀고 가는 것 그게 시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자세만 가졌자면 지금 당장 인정을 받든 받지 못하든 상을 받든 받지 못하든 그건 상관이 없는 거야. 시인의 이름을 얻는 일이 중요한 게 아냐. 나는 지금도 내 이름 앞에 시인이란 호칭을 붙이기가 쑥스러울 때가 많아. 내가 진짜 시인이란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가, 시인이란 이름을 붙여도 좋을 만큼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가 이런 반성을 하기 때문이야.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이야기를 하면 나는 학교 다닐 때 문학상을 제대로 받아 본적이 없어. 상에 대한 욕심을 낼 때도 많았고 마음이 조급할 때도 많았지만 상을 받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진 덕분에 더 많이 읽고 쓸 수 있었어. 그러니까 내가 시인의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일찍 많은 상을 받고 이름을 떨쳤기 때문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인정받지 못하고 실패하고 좌절했기 때문이야. 그 실패와 절망과 상처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밑거름이야.         윤미야, 여기까지 내 이야기를 듣다가 선생님, 시 쓰는 일이 너무 어려워요. 시인이 되는 길이 정말 이렇게 어려운 길이라면 힘들어서 어떻게 그 길을 가요? 하고 말하고 싶을지 몰라. 그래 시인이 되기 위한 길은 어려운 길이야. 그걸 전제로 하고 시작해야 해. 워드프로세스 자격증을 따는 일이나 일본어 회화를 배우는 일처럼 열심히만 하면 바로 인정을 받고 급수가 올라가는 거와는 좀 달라.  남의 인생관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고 아니 남의 인생 방향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는 게 시이고 문학이기 때문에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게 아닐까. 글 쓰는 내가 올바른 세계관을 갖춘 사람이 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글을 써댄다면 그건 폭력일 수 있고 세상을 망치게 하는데 기여할 수도 있기 때문이야.  그러나 남의 삶을 바르게 가꾸는데 도움을 주는 시인이 된다면 그 사람은 그의 시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우리가 한용운 시인이나 조지훈 시인 신경림 시인의 시와 이름을 기억하듯 너의 이름을 우리 겨레가 살아 있는 동안 영원히 기억해 줄 거야. 더 정확히 말하면 네가 뜨겁고 치열하고 참되게 산만큼의 시간 동안 너를 기억하고 사랑해 줄 거야. 그래서 어렵지만 가치 있는 길이 시인의 길이야. 어렵지만 바른 자세로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시작해야 하는 길이야.   착한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이 망설이고 겁먹고 비틀대면서 내놓는 말들이 자신과의 피나는 싸움 속에서 괴로움 속에서 고통 속에서 내놓는 말들이 어찌 아름다운 별들이 안되겠는가. 아무래도 오늘밤에는 꿈을 꿀 것 같다, 내 귀에 가슴에 마음 속에 아름다운 별이 된 차고 단단한 말들만을 가득 주워담는 꿈을.               --- 신경림 「말과 별」 중에서 윤미야 이 시는 “나는 어려서 우리들이 하는 말이 / 별이 되는 꿈을 꾼 일이 있다.” 이렇게 시작하는 신경림 시인의 시 「말과 별」의 뒷부분이야. 우리들이 하는 말이 별이 되는 꿈이란 어찌 보면 비현실적일 수도 있지. 그러나 우리들이 착한 마음으로 피나는 싸움과 괴로움과 고통을 딛고 내놓는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이라면 별보다 빛나는 아름다운 언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 아름다운 언어들을 모아 이루어내는 별빛 같은 시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아니야 바탕이 참 순박하고 때묻지 않은 너는 그런 시를 쓸 수 있을 거야. 나 아무래도 오늘밤에는 네가 시인되는 아름다운 꿈을 꿀 것 같다.  -------------------------------------------------------------------------------------       떨어뜨린 것들  ―김행숙(1970∼) 여름 과일은 물주머니지 겨울에 물은 얼지 강물이 단단해지고 있어 10센티쯤…… 내 얼굴에도 눈이 쌓였으면…… 나의 시체처럼 그것은 내가 볼 수 없는 풍경이겠구나 아이들은 흙장난을 하다가 이상한 것들을 발견하곤 하지 어느 날은 야구공이 굴러간 곳에서 이상한 것을 줍지 손을 잃어버린 손가락 같은 것 뭐지? 찾았니? 저쪽에서 한 아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어 과일을 깎다가 둥근 과일을 떨어뜨리지 향기로운 벌레가 기어 나왔어     자기만의 공간에서 과일을 깎든, 뜨개질을 하든 고개를 수그리고 나른히 손을 움직이며 빠져드는 상념의 흐름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과일을 깎는다, 손목까지 흘러내리는 과일즙,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달콤한 향기. 과일을 깎는다, 한 손에 과일, 다른 한 손엔 칼! 방심해도 좋을 ‘과일 깎기’란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시인은 방심의 부드러움과 방심의 아슬아슬함을 보여준다. 고삐를 놓으면, 생각이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  ‘떨어뜨린 것들’은 자동연상기술의 매력이 담뿍 담긴 시다. 자동연상기술이란 떠오르는 대로 그리는 것, 자유로이 자기 상념에 몰두하는 것. 그리하여, ‘그리하여’가 생략됐기에 시구들에 묘한 뉘앙스가 발생하는 것. 김행숙은 이 뉘앙스를 십분 살리면서, ‘맥락 없이 흘러가는 상념’이라는 그림 안에 미묘하게 맥락의 그림자를 새겨 넣은 홀로그램을 만든다. ‘내 얼굴에도 눈이 쌓였으면’, 얼굴에 흰 눈이 쌓인다면 누워 있는 것일 테지, 누워서 얼굴에 흰, 시트가 덮인 죽은 사람…. 마치 ‘흙장난을 하다가 이상한 것들을 발견하곤 하는’ 아이처럼, 여름 과일을 깎다가 ‘볼 수 없는 풍경인 나의 시체’를 발견하는 과정이라니. 김행숙의 시를 읽을 때면, ‘뭐지?’ 싶을 때가 드물지 않다. 누구나 어렸을 때 길바닥에서 정체 모를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뭐지?” 놀라면서 소중히 주운 기억이 있을 테다. 도토리껍질인지 조가비인지 알쏭달쏭한 것, 닳아서 모서리가 둥글어진 유리조각이나 사금파리, 병뚜껑이나 돌멩이 같은 걸 보물이나 되는 듯 두근거리며 주머니에 넣곤 했지. 김행숙의 시, 향기로운 벌레!  
398    장 콕토는 시인이자 화가이자 영화감독이였다... 댓글:  조회:2979  추천:0  2017-04-10
  이 로고는 매년 5월 프랑스 남부지역인 깐느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영화제인 “깐느 국제영화제”를 상징하는 로고이다. 영화에 대한 관심이 한국도 뜨거워지는 차에 여러 매체들을 통해 자주 보고 지나쳤을 법한 이 로고를 디자인 한 사람이 바로 아래 보이는 사진의 주인공 "장 콕토"이다.       아마 장 콕토 만큼 예술 전반에 걸쳐 이렇게 다방면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친 인물은 드물 것이다. 그는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극작가이자, 연출가이자, 화가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당당히 동성애자라고 밝히기도 했던 장 콕토. 당시 그의 삶과 작품들에 대한 평가는 호평과 혹평을 오갔고, 인기를 얻기도 했으나 질시와 야유, 비난까지도 한꺼번에 받았던 터다. 사생활까지도 시인의 것으로서 공개하여 인기를 모으고 그 때문에 사기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던 그는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여러 분야에서 다재다능한 활약을 한 까닭에 마술사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그의 최고의 예술 작품은 그 자신의 삶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는 온몸으로 자신이 존재하던 그 시대와 그 정신을 표현해낸 예술가였다. 그의 삶은 예술 그 자체였다.    장 콕토의 작품을 살펴보다보면 어떤 일관된 통일성을 발견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 중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듯한 문자로서의 그림들, 그가 남긴 희곡 작품들, 그리고 특히 영화 작품([영원 회귀], [시인의 피], [오르페우스], [미녀와 야수] 등)들을 보면 전체적으로 시적 이미지를 풍기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어쩌면 그렇게 느낀 이유는 콕토 그 자신도 자신의 시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예술의 형태로 작품화 시켰는데 그 작품들의 분류를 시로 나누곤 했다. 예를 들어 그림은 서사시(書寫詩, Póesie graphique), 소설은 소설시(Póesie de roman), 희곡은 극시(Póesie de theatre), 영화는 영화시(Póesie cinématographique)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이 시적 느낌이 났던 것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시 이외의 소설, 희곡, 미술, 영화 등에서도 그만의 독자적인 시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파리 근교의 메종 리피트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장 콕토는 출생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 기질에 있어서도 순수한 파리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불안정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을 지녔던 장 콕토는 학교 수업은 등한시하고 시 습작과 연극에 몰두한 까닭에 두 번이나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실패한다. 아주 일찍부터 서커스와 연극에 매료된 콕토는 문학 사교계를 드나들면서 시를 쓰기 시작하여 문단에서 로스탕, 프루스트 등 그 당시의 대가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909년에 첫 시집 「알라딘의 램프」를 펴낸 콕토는 1910년에는 당시 파리에서 러시아 발레단의 공연을 지휘하고 있던 디아길레프와 만난다. 그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은 1917년 무용과 연극을 혼합한 전위극 [열병식](Parade, 에릭 사티가 음악을 맡고 피카소·디아길레프·콕토가 공동 제작했다)을 상연하여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다. 콕토는 시인 아폴리네르·막스 자콥·화가 피카소·모딜리아니 등 그 시대의 전위 예술가들과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다. 이들과의 교류는 콕토의 예술 세계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장콕토가 찍은 친구들의 모습. 좌-모딜리아니, 가운데-피카소) 1919년에 콕토는 16세의 미소년 레이몽 라디게(Raymond Radiguet, 시인이자 작가)를 만나 열정적인 관계를 갖는다. 하지만 4년 되에 라디게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콕토는 절망에 빠져 아편 중독에 이르게 된다. 콕토는 아편 중독을 치료하기 위하여 17일 동안에 한 편의 소설시 「무서운 아이들」을 쓴다. 시인 장 콕토는 특히 소년기의 동심을 소중하게 여겼는데, 이것은 그저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비추고 그들의 맑고 투명한 생활, 또는 그 정신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고, 소년기에 오는 증오와 질투, 어른들의 세계와는 또 다른 비극성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독특한 생각을 가졌고 그만의 방법으로 시의 세계를 이룩했다.   콕토의 모든 작품들은 비밀과 수수께끼에 대한 탐색이다. 주어진 물음을 탐색한다. 하지만 답은 찾을 수 없다. 아니 일부러 찾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마치 거울 저편에 있는, 무엇이 있는 것 같지만 알 수 없는 공간 같은 것 말이다. 또, 어떤 침묵의 세계에 대한 탐색이기도 하다. 그는 현상 뒤에 있는 불가시성을 탐구하여 가면을 쓴 채로 진실을 제시하고자 했다. 불안과 부재가 생겨날 때 그는 거기에서 시를 발견할 뿐이었다. "인간은 지금 살아 있는 인간이어야 하지만 예술가는 후세 속에 살아야 한다" 그는 비록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가 남긴 그의 삶, 작품, 그리고 예술을 불태웠던 그의 혼은 우리의 가슴속에 함께 하고 있다.        장콕토가 남긴 작품/ #1   나는 죽어 간다오, 프랑스여 !  가까이 와서 내 말을 들어주오, 좀더 가까이.  난 그대 때문에 죽어 간다오.  그대가 나를 욕하고 야유하고 속이고 망가뜨리고 말았오.  이젠 모든 게 상관없는 일이오.  프랑스여, 나 이제 그대를 안아야 하리, 그대 음탕한 세느강에,  그대 천한 포도밭에, 그대 못된 밭에, 그대 너그러운 섬에,  그대 썩은 파리에, 지겹게 하는 그대 석상(石像)에 마지막으로 입맞추리.  좀더 가까이, 더 가까이 와서 그대를 보게 해주오.  아 ! 이번엔 내가 그대를 붙잡았오.  소리쳐도, 누구를 불러도 소용 없다오.  죽은 자의 손가락을 펼 수는 없다오.  기쁨에 겨워 나 그대 목을 조르리.  나 외로이 죽지 않으리.  -장 콕토 [시인의 죽음]        장콕토가 남긴 작품들/ #2                     *참고: 네이버 블로그, 해외문예/불어권   [출처] 장콕토, Jean Cocteau|작성자 lina_chung  
397    "...뼛가루 한점이라도 원쑤의 땅에 남길수 없다"... 댓글:  조회:3435  추천:0  2017-04-09
송몽규 아명:송한범(宋韓範)   시인 윤동주의 평생의 동반자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 역동적인 《문우》 시절 소오우라 무게이가 되어 현해탄을 건너다 치안유지법의 마수에 걸리다 조선 독립의 미래를 엿보다 원수의 땅에 아들의 뼛가루 한 점 남기지 않겠다   윤동주와 친구들 앞줄 중앙 송몽규, 뒷줄 오른쪽 윤동주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가족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면 친구는 내가 선택한 가족이다.’라고 말했다. 언제나 나를 믿어주는 가족과 친구는 지난한 인생살이에 기쁨과 위안을 주는 존재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시인 윤동주에게는 가족이자 친구로서 평생을 동행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이다. 고종사촌 사이였던 송몽규와 윤동주는 석 달 간격으로 한 집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같이 보냈고 나란히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했다. 이어서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서 유학 생활하던 도중 독립운동 혐의로 함께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수감되었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한 달 간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윤동주는 오늘날 민족시인으로서 널리 추앙받고 있지만 그와 함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발휘했고 뚜렷한 민족의식으로 조국의 독립을 갈망했던 송몽규는 그 동안 까맣게 잊혀져 있다가 2016년 개봉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계기로 그 삶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시인 윤동주의 평생의 동반자 송몽규(宋夢奎)는 1917년 9월 28일 지금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에 있는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 아명은 한범(韓範)이다. 아버지는 교육자였던 송창의, 어머니는 윤동주의 큰고모 윤신영이다. 그의 가족은 본래 충청도에 살았는데 구한말 간도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봉금정책이 풀리자 할아버지 송시억이 가솔을 이끌고 연해주로 가다가 길목에 있던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에 눌러앉아 터전을 잡았다. 연변 명동촌 송몽규의 집 그의 집안은 전래 초기였던 기독교와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몹시 진취적인 가풍을 지니고 있었다. 송시억은 웅상동에 북일학교를 세웠으며, 송창의의 육촌동생 송창빈은 홍범도 부대 소속의 독립군으로 활약하다 1920년에 전사했고, 송창근은 미국에 유학하여 1931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목사로 활동했다. 이런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송창의는 서울에서 신교육을 받고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한글강습을 받았다. 1916년 그는 주시경의 《우리말본》의 서문을 쓴 박태환을 따라 명동촌에 가서 민족운동가이자 교육자인 김약연의 집에 머물렀다. 그때 김약연의 딸이자 윤동주의 어머니였던 김용 여사의 눈에 들어 윤신영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때부터 송창의는 처가에 살면서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로 봉직했고, 일제에 의해 명동중학교가 폐교되자 명동소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다. 1917년 9월 송몽규가 태어나고 석 달이 지난 12월 30일 윤신영의 동생 윤영석이 맏아들 윤동주를 얻었다. 그리하여 윤동주와 송몽규의 평생에 걸친 인연이 시작되었다. 송몽규는 8세 때인 1925년 4월 4일 윤동주, 문익환, 윤영선, 김정우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4학년 때부터 송몽규는 경성에서 간행하던 《어린이》, 《아이생활》을 구독하며 문학의 꿈을 키웠다. 5학년 때는 윤동주와 함께 등사판으로 《새명동》이란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성품이 엄하고 코가 커서 명동학교 생도들은 송호랑이, 콧대 등의 별명으로 불렀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윤동주, 김정우와 함께 인근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다니다 1932년 4월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두뇌가 명석했을 뿐만 아니라 성격이 활발하고 리더십이 뛰어나서 늘 앞장서서 친구들을 이끌었다. 나이보다 조숙했던 그는 윤동주와 함께 수많은 책을 섭렵하면서 창작 활동에 열중했다. 그 와중에 ‘문해(文海)’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고,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새긴 도장을 마련하여 자신의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은진중학 3학년 때인 1934년 12월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부문에 ‘술가락’이 송한범이란 필명으로 당선되어 뭇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 은진중학교 재학 시절 송몽규는 교사로 봉직하던 애국지사 명희조 선생의 독립의식에 크게 감화되었다.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출신이었던 명희조 선생은 그 무렵 춘원 이광수의 계몽문학이 제시하는 사이비 이상주의에 도취된 제자들에게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역사를 보는 바른 시각과 대의를 일깨워주었다. 재기발랄했던 송몽규는 명희조 선생의 강의를 통해 일제의 폭압과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고 비감에 젖었다. 그리하여 19세 때인 1935년 3월, 명희조 선생으로부터 남경에 있는 낙양군관학교에서 2기생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자 은진중학교 4학년에 진급하지 않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혈혈단신 남경에 다다른 송몽규는 은진중학교 1년 선배인 라사행을 만나 백범 김구가 국민당 장제스 정부의 지원으로 운영하던 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2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때부터 송몽규는 30여 명의 생도들과 함께 남경의 동관두 32호에 있는 민가에서 합숙하면서 군사훈련과 중국어 등을 공부했다. 교관은 엄항섭과 안중근 의사의 막내동생으로 독일 베를린대학 출신의 안공근이었다. 김구는 종종 찾아와 이들의 교육상황을 점검했다. 생도들은 중국정부로부터 식비 9원, 용돈 3원, 도합 12원을 지급받아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2개월여 뒤 생도들은 강소성 의흥현 용지산에 있는 불교사찰 용지사로 이동하여 10월 초까지 훈련을 받았다. 그때는 엄항섭이 총책임자였고, 김구의 장남으로 낙양군관학교 1기생이었던 김인이 교관으로 나섰다. 고된 훈련의 와중에도 송몽규는 생도들에게 원고를 받아 등사판으로 《신민(新民)》이란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일제의 감시망이 촘촘하게 깔려있었으므로 그는 다른 생도들처럼 왕위지, 송한범, 고문해라는 세 가지 가명으로 활동했다. 송몽규는 정열적으로 훈련에 임했지만 현실과 이상은 달랐다. 함께 피땀 흘리며 훈련하던 생도들이 독립운동의 방법적 문제 때문에 점차 김구파, 김원봉파, 이청천파 등 세 갈래로 나뉘어 대립하는 등 분열상이 드러났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산당과 내전을 벌이고 있던 국민당 정부의 처지가 어려워지면서 낙양군관학교에 대한 지원이 끊어졌다. 그 때문에 1935년 10월 초 낙양군관학교 생도들은 해산하여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 했다. 송몽규는 용지산에서 내려온 뒤 산동성 성도인 제남(済南)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지도자 이웅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1936년 4월 10일 제남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6월 27일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았고, 8월 29일 청진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16일 동안 구금되었다. 하지만 혐의가 중하지 않았던지 9월 14일 웅기경찰서로 복귀한 뒤 거주제한의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렇지만 송몽규는 경찰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북간도의 집으로 돌아가 그 동안 피폐해진 심신을 달랬다. 이듬해인 1937년 4월 그는 은진중학교로 복학하려 했지만 학교당국에서는 문제학생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복학을 불허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용정에 있는 윤동주 집에 기숙하면서 대성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때부터 와신상담, 실력을 키워 독립운동의 대열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다잡은 송몽규는 문학 활동 및 학업에 열중했다.   역동적인 《문우》 시절 1938년 초봄,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 가서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동반 합격이었다.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에 입주한 그는 윤동주, 원산 출신의 수재 강처중과 함께 3층 꼭대기에 있는 방을 함께 썼다. 윤동주의 산문 〈달을 쏘다〉에는 그들이 머물던 기숙사 창문으로 내려다본 가을날 달밤의 풍경이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 ‘가을 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 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 소리가 날 듯하다.’ 엄혹한 일제 치하였지만 연전은 기독교계 학교였으므로 송몽규는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영위할 수 있었다. 중학 시절 이미 문단에 데뷔한 바 있던 송몽규는 9월 12일 조선일보에 〈밤(夜)〉이란 시를 발표했다. 이 시에는 참담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가 드러나고 있다. 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 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도 깊구나. 홀로 밤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도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보며 휘파람 분다. 1941년 4학년이 된 송몽규는 학생회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잡지 《문우》의 편집을 맡았다. 당시 회장은 기숙사 동기였던 강처중이었다. 그해 6월 발행한 《문우》에 ‘꿈별’이란 필명으로 〈하늘과 더불어〉란 시를 게재했다. 윤동주는 여기에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발표했다. 《문우》는 창씨개명, 조선어 사용 금지, 언론사 폐간 등 당시의  폭압적인 상황에 따라 본문이 일본어로 제한되었지만 시(詩)는 언어표현의 특성상 조선어 표기가 용인되었다. 하지만 편집과정에서 많은 원고가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고, 일제의 강요로 문우회가 해산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처럼 부산한 시기에 《문우》가 최후의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뒤편에 실려 있는 발행 후기에는 폐간 인사 및 발간 과정의 고충을 설명하는 송몽규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   소오우라 무게이가 되어 현해탄을 건너다 여름방학을 맞아 윤동주와 함께 용정 집에 들른 송몽규는 집안 어른들의 고답적 의식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그들은 졸업을 앞둔 두 사람이 하루 빨리 사회에 나가 번듯한 직장을 잡고 가족들을 위해 살아가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고단한 삶에 부대끼고 있던 그들에게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송몽규는 내심 반발했지만 곁에 있던 윤동주의 만류로 끓어오르는 울화통을 식혔다.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태평양전쟁의 개전으로 인해 이듬해 3월에 거행되어야 할 일정이 앞당겨진 것이다. 연전의 명예교장이었던 원한경 박사와 원일한 교수는 진주만 공습이 벌어진 12월 8일 하오에 체포되어 폐교가 된 감리교 신학대학에 연금되었고, 친일파인 윤치호가 교장으로 부임하여 의식을 주관했다. 졸업생은 문과 21명, 상과 50명, 이과 18명이었는데 송몽규는 졸업성적이 전체 2등이었으므로 우등상을 탔다. 한데 윤치호 교장이 부상으로 준 보따리를 펼쳐보니 일본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책자 일색이었다. 분개한 송몽규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성을 내며 책을 땅바닥에 집어던져버렸다. 그처럼 반일의식에 투철한 송몽규였지만 졸업 후 일본 유학을 떠나는 과정에서 창씨개명이라는 난관을 만나 초지를 꺾는 아픔을 겪는다.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자칫 전선으로 끌려가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집안의 설득을 받아들여 소오우라 무게이(宋村夢奎)가 되었다. 그때 윤동주 역시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가 된다. 당시 두 사람은 도항증명서를 받기 위해 직접 연희전문학교의 졸업생 명부에 수록된 이름을 새로 바꾼 일본식 이름으로 고쳐야 했다. 윤동주는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다. 그렇게 치욕을 감내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간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서양사학과에 들어갔고, 함께 응시했다가 낙방한 윤동주는 도쿄에 있는 릿교(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진학했다.   치안유지법의 마수에 걸리다 교토에 도착한 송몽규는 명문으로 알려진 제3고등학교 재학생 고희욱과 함께 하숙을 시작했다. 그해 여름방학에 윤동주는 고향 용정으로 갔지만 그는 따로 조선과 만주 일대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왔다. 여름방학이 끝난 뒤 윤동주가 릿교대학을 나와 교토의 사립 기독교계 학교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로 전학했다.그렇게 해서 송몽규는 윤동주와 또 다시 한 공간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일면 그것은 윤동주가 낙양군관학교 이래 요시찰인물이었던 송몽규의 우산 속으로 걸어 들어간 셈이었다. 그때부터 송몽규는 고희욱, 윤동주, 백인준 등과 자주 만나 조선의 앞날에 대하여 토론했다. 일본경찰은 오래 전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된 송몽규의 하숙집을 수시로 감시하면서 그와 고희욱, 윤동주와 나눈 대화내용을 엿들었고, 그들이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는 사실에 대하여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해 7월 10일, 일본경찰은 송몽규와 고희욱을 급거 체포하여 시모가모(下鴨)경찰서에 구금했다. 이어서 7월14일 하숙집에서 귀향을 준비하던 윤동주까지 체포했다. 1941년 5월 15일 실시된 개정 치안유지법은 한층 엄격해지면서 ‘준비행위’를 했다고 판단되면 검거가 가능했다. 사실상 누구라도 범죄자로 만들 수 있었다. 이들에 대한 갑작스런 조치는 그해 7월 24일로 예정된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의 간도 시찰을 염두에 둔 예비검속이라는 풍문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송몽규는 면회 온 가족들에게 곧 석방될 것이라고 안심시켰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경찰과 검찰의 지루한 심문이 이어지면서 구금 기간이 길어지는가 싶더니 이듬해인 1944년 1월 19일 고희욱은 기소유예의 처분을 받고 풀려났지만 2월 22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정식 기소되었던 것이다.   조선 독립의 미래를 엿보다 1977년 10월, 일제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에서 발행한 극비문서 〈특고월보(特高月報)〉 1943년 12월분에 실린 송몽규와 윤동주의 심문기록 〈재경 조선인 학생민족주의 그룹사건 책동 개요〉가 입수되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두 사람의 혐의의 대강이 밝혀졌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79년 1월 일제 사법성 형사국 발행의 극비문서인 〈사상월보(思想月報)〉 제109호 1944년 4~6월분에 실린 송몽규에 대한 판결문과 관련자 처분결과 일람표가 입수되면서 두 사람의 형량이 알려졌고, 두 사람의 체포 혐의가 ‘독립운동’이었음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1982년 8월에는 교토지방재판소의 판결문 사본을 통해 송몽규와 윤동주의 체포와 재판에 관련된 전모가 완전히 밝혀졌다. 이 판결문에 씌어있는 송몽규의 혐의 내용을 살펴보면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그 시기에 당시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재일유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송몽규는 고희욱에게 이전의 조선독립운동은 외래사상에 편승한 것이라 확고한 이론 없이 감정적 폭동이라 실패한 것이라 하며, 우리는 학구적, 이론적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면서 독립의식을 앙양했다. 둘째, 송몽규는 윤동주에게 최근 조선에서 총독부의 압박으로 소학생, 중등학생이 일본어를 사용함으로써 조선어와 조선문이 멸망해가고 있으며, 만주국에서는 조선인들이 식량배급에 차별대우를 받고 있고, 최근의 징병제도는 훗날 조선독립을 실현할 때 일면 위력을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 송몽규는 하숙집에서 윤동준, 백인준에게 징병제도를 비판하면서 앞으로 징병제도 때문에 조선인이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까지 얻으면 장차 일본이 패전할 무렵 우수한 지도자를 앞세워 무력봉기를 결행하여 독립을 실행할 수 있으며, 독립 초기에는 군 출신의 인사를 내세워 강력한 독재를 취해야 하고, 그 시기가 올 때까지 함께 실력을 양성하자며 독립 의식의 강화를 꾀했다. 넷째, 송몽규는 고희욱에게 태평양전쟁은 강화조약으로 종결될 가능성이 큰데, 그 과정에서 버마, 필리핀이 독립국으로 참가할 것이니, 우리도 그때 조선독립 여론을 환기하고 세계 각국의 동정을 얻어 단숨에 바라는 바 목적을 이룩해야 한다며 민족의식을 유발했다. 다섯째, 송몽규는 6월경 윤동주에게 찬드라보스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아직 일본의 세력이 강대하므로 우리도 그런 지도자를 얻기는 힘들지만 민족의식은 왕성하므로 훗날 일본이 피폐하여 호기가 도래하면 위대한 인물이 출현할 테니 그를 도와 궐기하자며 서로 격려했다.   원수의 땅에 아들의 뼛가루 한 점 남기지 않겠다 1944년 4월 13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송몽규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윤동주는 이보다 앞선 3월 13일에 역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은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규슈의 북서쪽에 있는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어 고달픈 수형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그해 3월 6일 문익환 목사의 부친이었던 용정중앙장로교회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한데 그 다음날인 3월 7일에 송몽규마저 만27세의 창창한 나이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간 친척들과 면회한 자리에서 자신이 투옥 이후 매일 밤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는 증언을 남김으로써 일제로부터 생체실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당시 조카에 이어 아들의 부음까지 들은 어머니 윤신영은 주먹으로 가슴에 푸른 멍이 들 정도로 두드리며 통곡했다. 하지만 아버지 송창의의 처신은 더욱 비장했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송창의는 후쿠오카 화장터에서 아들의 시신을 화장한 다음 타고 남은 뼈를 빻는 자리에서 뼛가루가 주위에 튀자 주변의 흙을 모조리 쓸어 담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몽규의 뼛가루 한 점이라도 원수의 땅에 남기겠느냐.” 송몽규의 시신은 명동의 장재촌 뒷산에 안장되었다. 1945년 5월 20일 언 땅이 녹자 아버지는 애달픈 심정으로 그의 무덤 앞에 ‘청년문사송몽규지묘(靑年文士宋夢奎之墓)’라는 비석을 세워 주었다. 훗날 유족들은 송몽규가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했다고 주장했지만 정부와 학계 공히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재일유학생에 대한 일제 탄압의 일환으로 검거되었다가 억울하게 희생당했다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다. 하지만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송몽규와 윤동주의 죽음에 관련된 진실이 빛을 볼 수 있었다. 송몽규의 삶은 일면 친구이자 동반자였던 윤동주의 순수한 문학에 가려진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의 문학과 독립에 대한 열정은 해맑은 윤동주의 시어와 함께 민족의 아름다운 역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396    "부끄럼 없는 인생"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댓글:  조회:2378  추천:0  2017-04-08
일본 기자 '윤동주 때문에 우익세력과 싸운다' (ZOGLO) 2017년4월8일  【서울=뉴시스】민윤기 서울시인협회장(왼쪽), 우에무라 교수 【서울=뉴시스】신동립 기자 = “윤동주 시인을 위해서 일본 우익 역사수정주의자들과 싸우고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 우에무라 다카시(59·植村隆)가 한국 시인 윤동주(1917~1945)를 논한다.  “왜 일본인인 내가 윤동주 시인에 큰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됐는지, 왜 일본 우익과 역사수정주의자들과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지, 윤동주 시인에 대한 일본 내 추모 열기가 왜 그치지 않는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고 사망한 데 대한 사인 규명에 왜 힘을 모아야 하는지”를 밝힌다.  1984년 윤동주의 시 전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일본에서 번역·간행됐다. 양심적인 수많은 일본인이 감동했다. 그해 ‘저항시인 윤동주의 죽음’이라는 르포르타주도 나왔다. 우에무라는 이 책 두 권으로 윤동주를 알게 됐다.  2006년에는 윤동주가 태어난 간도, 현 중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자치주에서 6개월 동안 살기도 했다. 옌볜과학기술대 객원연구원으로 북한을 조사하면서 윤동주의 생가 터와 학교를 여러 차례 찾았다.  지난해부터 한국 가톨릭대학교 초빙교수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문화’를 강의하고 있다.  “동주의 ‘서시’에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이 있다. ‘부끄럼 없는 인생을’이라는 것이 동주의 시 정신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부끄럼 없는 인생’이란 ‘부끄러움을 모르는 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자들에게 언제나 말한다. 우리도 동주의 시처럼 ‘부끄럼 없는 인생을 살자’고.”  우에무라 교수는 김학순(1924~1997) 할머니를 인터뷰, 1991년 8월 ‘일본 위안부 강제 동원은 사실이었다’는 기사를 써 일본 사회에 위안부의 실체를 최초로 알렸다. “그 때문에 역사수정주의자들로부터 ‘날조 기자’라는 비방과 중상을 받고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심지어는 ‘딸을 죽이겠다’는 협박장까지 받았다. 역사수정주의자들은 가짜 논리로 나를 공격한다. 그들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동주 팬으로서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절대 질 수 없다’고 생각하며 싸우고 있다.”  우에무라 교수가 11일 오후 5시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에서 특강을 한다. ‘윤동주 100년 생애’전이 열리고 있는 곳이다. 17일까지 계속되는 전시에서는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최초본이 처음 공개됐다. 서울시인협회 시 낭송가 100명이 윤동주의 시 100편을 낭송 중이다. 윤동주 문학강좌도 마련돼 있다. 
395    시는 압축과 생략의 문학이다... 댓글:  조회:2758  추천:0  2017-04-08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박종헌  1) 시를 압축하고 생략하기  시를 쓸 때 감각의 깊이를 더해가는 노력과 끈기, 그리고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게 된다. 상식적인 생각과 관습적인 사고로서는 결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낼 수 없다.  길가에는 벚꽃이 뿌려지고  언제 저버릴지 모르는 벚꽃은  계속 피고, 피고 있었다.  위의 글에서 '길가에는 벚꽃이 계속해서 피어난다'는 사실 이외에는 별다른 요소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분명 벚꽃이 피고지고 하는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느꼈기 때문에 쓴 것일텐데 단순한 자연의 현상만이 나타나 있어 왜 이런 시를 썼는지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글을 쓰게 한 것일까? 시는 바로 이러한 이유와 근거마저도 시 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만 한다.  우리는 흔히 시는 감정의 표현이라고 말하면서도 왜 그런 표현을 썼느냐는 되물음에는 묵묵부답이거나 그것이 정서다라는 말로 얼버무리는 경우를 본다. 마치 시는 적당히 써놓으면 이렇게 저렇게 이해하면 된다는 안일한 답변을 듣는 경우도 생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이름 있다는 반짝거리는 시인들의 시에서도 발견한다. 시는 그렇게 무책임한 것이 아니다. 길다란 산문보다도 더욱 엄격히 완벽성을 요구하는 것이 시이다.  최초에 느꼈을 그 '무엇'을 찾아내어 시를 빚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잘 빚은 항아리는 보기도 아름답고 그 기능면에서도 쓸모가 있기 마련이다. 위의 시를 아래와 같이 고쳐보면 어떨까?  길가에는 벚꽃이 지고  지는 꽃을 보면서  지는 꽃 사이사이에  다시 뜨는 하늘의 별처럼  꽃봉오리가 매달리고  꽃봉오리가 벙글고.  위의 3행을 여섯 행으로 늘리면서 비유을 통한 이미지화를 꾀하고 있다. 앞의 시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그런데, 시는 압축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길어졌으니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 자신이 쓴 글이나 시에서 빼거나 줄여도 내용을 전달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줄이고 빼야 한다. 물론 리듬의 조화를 위해 남기거나 오히려 늘릴 수도 있지만 이는 한 두 음절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압축을 위해 우리는 상징이나 비유 등의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길가에는 벚꽃이 지고  지는 꽃 사이사이에  다시 뜨는 하늘의 별처럼  꽃봉오리가 벙글고.  이러한 시 고쳐쓰기는 활자화되기 전까지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또 고쳐서 보다 완전한 시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활자화가 된 이후에 고치는 경우도 있게 되는데 이를 개작(改作)이라고 한다. 다음은 김소월의 이 어떻게 개작되어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시가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에는 ←가실  에는 말업시  말업시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고히고히 보내들이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내   아름 다 가실길에  리우리다  가시는거름거름  노힌그 츨  삽분히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고히나 즈러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에는  죽어도아니 눈물흘니우리다  김소월의 이 처음 『개벽』25에 실렸을 때는 오른 쪽의 모습이었으나, 후에 자신의 시집 『진달래꽃』에는 왼쪽의 모습으로 개작되어 실렸다. 이렇듯 시는 끊임없는 퇴고 속에서 다듬어지고 완전해지는 것이다.  흰 달빛 흰 달빛이 비치는  자하문(紫霞門) 경주 불국사 자하문을 열고 들어서면  달안개 달빛 젖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물 소리 물소리는 청량하게 들려 온다.  대웅전(大雄殿) 절의 대웅전 뜨락에 서니  큰 보살 큰 보살님이 미소짓고 있네  바람 소리 바람소리가 시원하게  솔 소리 소나무사이 소근거리는 소리로 불어오네  범영루(泛影樓) 절 앞의 누각인 범영루는  뜬 그림자 추녀깃을 들어 올리는 그림자로  흐는히 달빛에 흐릿하게  젖는데 젖고 있는데  흰 달빛 흰 달빛이 내리 비치는  자하문(紫霞門) 불국사 자하문 근처의 밤은  바람 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한데 어울려  물 소리. 달빛 안개 속에서 깊어만 가네  박목월, 필자가 늘여 쓴 박목월의   시와 산문의 가장 큰 차이는 같은 내용이라면 길이가 짧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는 압축과 생략의 문학이라고도 한다. 없어도 상상이 되는 불필요한 수식이나 어휘, 조사, 어미 등은 과감히 생략할 수 있어야 한다. 의미의 생성과 전달, 그리고 음악적인 리듬감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불필요한 언어라고 보아도 된다.  위의 박목월 시인의 를 본래대로의 의미와 묘사로 확장시켜보면 오른쪽에 늘여 쓴 시와 같은 모습이 된다. 왼쪽의 원문과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구체적인 오른쪽의 시는 오히려 풀어지면서 상상의 여지가 사라져 버렸다. 시에서 언어의 과감한 생략은 많은 어휘를 쓰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표현 방법이 된다.  처음 시를 쓰는 사람은 자꾸 덧보태려 하는데, 시는 더하기의 미학이 아니라 빼기의 미학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아기야. 너는 어디서 온 나그네냐? 보는 것, 듯는 것, 만 가지가 신기롭고 이상하기만 하여 그같이 연거푸 울음을 쏟뜨리는 너는, ―몇 살이지? ―네 살? 어쩌면 네가 떠나 온 그 나라에선 네가 집 나간 지 나흘째밖에 아닌지 모르겠구나!  유치환,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동서문화사, 1960 ----------------------------------------------------------------------------     들국화  ―천상병(1930∼1993)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쳐진 이 순간이……     선생님의 생몰(生沒) 연대를 옮겨 적으며 무심히 나이를 계산하다가 깜짝 놀랐다. 정말 63세에 돌아가셨어? 인사동에서 우연히 몇 차례 뵈었던 모습을 떠올리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틀림없다. 서른 안팎 사람의 눈에는 예순 안팎 사람이 한참 노인으로 보이기 십상이지만, 그걸 감안해도 선생님은 십년 세월은 더 지나간 모습으로 기억된다. 가슴이 시리다. 선생님의 창창하게 젊은 시절을 짓밟은 모진 시대, 그 뒤에 만신창이가 된 선생님의 삶…. 그래도 천진하고 선한 성품을 잃지 않으셨다. 사회인으로 세상 안에 계실 곳은 없었지만 보석 같은 시를 계속 쓰셨다. 들국화, 나이 들어서도 애기 들국화 같았던 시인. 들국화 꽃은 가을에 피어나 가을에 진다. 그래도 들국화 꽃은 봄도 모르고 여름도 모르는 저를 슬퍼하지 않는다. ‘가을은/다시 올 테지’ 고개를 갸웃이 기울인 들국화의 애잔한 속내가 들리는 듯하다. 져가는 들국화의 가녀린 모습에 시인의 모습이 겹친다. ‘다시 올까?/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지금처럼/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내가 내년 가을에도 살아 들국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니, 내 마음이 이렇게 순하게 살아나는 순간이 또 올까? 고마워라, 들국화! 시인의 지순하고 맑은 마음과 만나 들국화, 이렇듯 향기로운 시로 자취를 남겼네. 이 시를 기약 없는 이별을 애달파 하는, 들국화 같은 연인의 짧은 조우로 읽어도 좋겠다. 이제 들국화를 보면 천상병 선생님 생각이 날 것 같다.  
394    시작은 조탁(彫琢)과 사랑이다... 댓글:  조회:2552  추천:0  2017-04-08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박종헌  3. 시 쓰기와 고치기  시 쓰기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퇴고의 과정 속에서 완성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어쩌면 이 과정이 몹시 지루하고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바로 이 과정이 창작의 과정이고 자신을 확인하는 아주 귀중한 시간이다. 고쳐 쓰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시가 태어날 확률이 높아간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촉발된 시상을 부여잡고 하얗게 밤을 새우는 날, 비로소 언어의 조탁(彫琢)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고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다음은 필자 자신의 시 쓰기 과정을 보인 것이다.  지난 해 여름, 방학을 했지만 보충수업은 여전히 실시되고 있었다.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뭐든지 붙들어야만 하는 교사와 고3 입시생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땀을 흘렸다.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열고도 흐르는 땀은 멈출 줄 몰랐다. 앞 뒷문을 열어 젖히고 언어영역 참고서 문제에 나온 김수영에 거품을 물다보니, 아이들은 어느 새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잠들어버렸다. 반 이상의 잠들고 나머지 반은 비몽사몽이다. 칠판 한 쪽에는 'D-99'가 선명했다. 이른 바 수능고사 99일전이란 무언의 압력이었다. 정말 고3교실은 전쟁터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싸움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공격 99일전에 이미 패잔병이 되어가고 있었다.  벽에 걸린 전자식 둥근 시계가 눈에 들어 왔다. 유리는 벌써 오래 전에 없어진 듯 자판이 누렇게 변색이 되었다. 이리저리 구부러진 빨간 초침은 전지가 다 닳았는지 9자를 건너뛰지 못하고 움찔거리고만 있었다. 시침도 ㄹ자로 구부러졌고, 시침도 반쯤 꺾어져 나간 채였다.  고3이란 정말 불가사의의 특수 그룹이다. 그들에게는 초능력이 요구되고 그들에게는 판단이나 청소년의 푸른 삶이 존재하지 않았다. 잠든 아이들과 벽에 걸린 초현실적 시계가 그대로 오버랩 되었다. 그리고 거의 단숨에 다음의 시를 썼다.  누군가의 손에서  시침이 부러졌을 거다.  또 누군가의 입에서  분침은 부러졌을 것이다.  남은 초침이  마흔 여섯 명의 손아귀에  이리저리 구부러졌을 거다.  지금은 폭염.  아이들은 모두 D-99를 보고 있었다.  훅훅거리는 교실  백일주로 무너진 녀석은  아직 한밤이다.  두 대의 선풍기로 맴도는 교실처럼  남은 전지가 다할 때까지  마지막으로 초침을 밀어 올리는  달리의 시계처럼  3학년 7반 교실은  초현실주의자의 식탁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 시를 두 번째 고쳐 썼을 때는 1연의 마지막 초침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이지 못해 '이리저리'를 고3학생들이 꿈꾸는 S대학의 이니셜로 바꾸어 대학과 아이들의 반항적인 행위를 상징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2연에서는 'D-99'의 상징적 숫자가 타의에 의해 빚어진 일종의 엄포요 압력수단임을 드러내기 위해 ' 눈 앞에 내걸린 D-99'로 바꾸어 썼다.  3연에서 '남은 전지가 다할 때까지 (마지막으로 초침을)밀어 올리는 달리의 시계처럼'의 뜻이 되어 이미지의 연결이 되지 않을뿐더러 초현실주의 미술가 달리가 지나치게 강조되는 면이 있어 '남은 전지가 초침을 밀어 올리다 지쳐버린'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해서 다음의 시가 되었다. 조금 정리된 듯하지만 아직도 선명치 못한 구석이 있었다.  남은 초침이  마흔 여섯 명의 손아귀에  S자로 구부러졌을 거다.  아이들은 모두  눈앞에 내걸린 D-99를 보고 있었다.  백일주로 무너진 녀석은  아직 한밤이다.  두 대의 선풍기로 맴도는 교실처럼  남은 전지가 마지막으로 초침을 밀어 올리는  3학년 7반 교실은  초현실주의자의 식탁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이다. 사실적이지만 구체성은 오히려 살리지 못하고 있다. 시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직 만족할 수가 없다. 분침을 익명성에, 아이들은 특수성을 강조했다. 2연에서는 교실분위기를 좀더 구체화시키고, 시계의 고통스러움과 교실의 풍경을 삽입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살지 못하는 아이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3연에서 현실을 떠난 교실의 모습으로 이미지화시켰다. 차라리 희극적이던 선풍기를 교실을 들어올리는 프로펠러로 비유하면서 초현실주의자 달리의 그림처럼 흘러내리는 시간성을 드러냈다.  누군가의 손에서  시침이 구부러졌을 것이다.  또 누군가의 손에서  익명의 분침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남은 초침이  마흔 여섯 명의 특수반 아이들의 손아귀에  S자로 구부러졌을 것이다.  눈앞에 내걸린  D-99를 보고 있는 고3반  백일주로 무너진 녀석은 아직 눈알이 새빨갛다  책들만 어지러이 쌓이고  분필가루 속에서 벽 속의 시계는 컥컥댄다.  교사의 다그침이 메아리지는  여기는 삶의 변방.  두 대의 선풍기는 프로펠러가 되어  교실을 들어올린다.  초침을 밀어 올리다 지쳐버린  3학년 교실은  초현실주의자의 식탁처럼  흐르고 있었다.  아직 시상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3연 구성이 단조로움을 주고 있다. 강조할 부분과 시적 배경이 조화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연과 2연을 바꾸어 '상황 제시- 상징적 묘사- 시상의 전환- 부정적 인식의 끝맺음'으로 4연 구성으로 정리했다. 먼저 1연에 교실 상황과 분위기를 속도감 있고 건조하게 묘사했다. 2연은 시상의 구체적 전개부다. 여기서는 상징의 방법을 썼다. 따라서 굳이 추정적 어미를 버리고 단정적인 어미로 바꾸었다. 3연에서는 지친 시계와 아이들을 초현실주의자들의 식탁으로 시적 전환을 꾀했다. 이어 4연을 1행으로 처리하면서 삶의 변방으로 끝맺음을 했다. 어느 정도 만족한 모습이다. 제목은 아무런 수식 없이 로 했다. 비로소 주제가 살아난다. 군더더기도 많이 사라졌다.  눈앞에 내걸린  D-99를 보고 있는 고3 교실.  펼쳐진 책장 위에서  아이들은 고개를 꺾었다.  분필가루 속에서 벽 속의 시계는 컥컥댄다.  누군가의 손에서  시침이 ㄱ자로 구부러졌다.  또 누군가의 손에서  익명의 분침은 떨어져 나갔다.  남은 초침이  마흔 여섯 명의 손아귀에  S자로 구부러졌다.  초침을 밀어 올리다 지쳐버린  3학년 교실  초현실주의자의 식탁처럼  흐르고 있었다.  두 대의 선풍기는 프로펠러가 되어  교실을 들어올린다.  여기는 삶의 변방. ---------------------------------------------------------------------       장독대가 있던 집  ―권대웅(1962∼) 햇빛이 강아지처럼 뒹굴다 가곤 했다 구름이 항아리 속을 기웃거리다 가곤 했다 죽어서도 할머니를 사랑했던 할아버지 지붕 위에 쑥부쟁이로 피어 피어     적막한 정오의 마당을 내려다보곤 했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떠나가던 집 빨랫줄에 걸려 있던 구름들이 저의 옷들을 걷어 입고 떠나가고 오후 세 시를 지나 저녁 여섯 시의 골목을 지나 태양이 담벼락에 걸려 있던 햇빛들마저 모두 거두어 가버린 어스름 저녁 그 집은 어디로 갔을까 지붕은, 굴뚝은, 다락방에 모여 쑥덕거리던 별들과 어머니의 슬픔이 묻은 부엌은 흘러 어느 하늘을 어루만지고 있을까 뒷짐을 지고 할머니가 걸어간 달 속에도 장독대가 있었다 달빛에 그리움들이 발효되어 내려올 때마다 장맛 모두 퍼가고 남은 빈 장독처럼     웅웅 내 몸의 적막이 울었다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 문득 떠오르고, 다시 제 온 곳으로 물러나 사라지는 시공간이 있다. 언덕 위의 교회당, 동네 한복판에 있던 호박밭, 곡마단이 들어서던 공터, 담장 너머로 내려다보이던 한강과 강 건너 흰 모래밭, 어느 늦저녁 누구네 집에서인가 마루에 동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보던, 내용도 생각나지 않는 영상물, 어둠 속에서 돌아가던 영사기 소리…. 딱히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머릿속 저 아래 가라앉아 있다가 마치 무언가 살며시 흔든 것처럼 저 혼자 떠올라오는, 내 어릴 적 시공간들. ‘장독대가 있던 집’은 어머니와 할머니뿐 아니라 그 집 자체에 대한 그리움에 찬 시다. 한국인의 정취와 정서를 소박한 필치로 아련히 그려낸, 가령 박수근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어머니의 슬픔이 묻은 부엌’이라니 아마 아버지로 비롯된 그늘이 드리워진 집일 터인데, 그 그늘로 다른 가족들은 더욱 결속돼 있었을 테다. 집이 아니라 아파트, 개인주택이 아니라 공동주택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은 ‘집’이라는 공간에 마치 생명체처럼 정드는 심성을 알 수 없을 테다. 이사를 갈 때면 같이 살던 ‘집’을 버려두고 떠나는 듯한 생이별의 슬픔 같은 걸 느끼지 않을 테다. 현재 도시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1960년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향수를 부르는 시.  
393    윤동주의 무기는 "시"였다... 댓글:  조회:2374  추천:0  2017-04-06
윤동주는 시를 들고 일제와 싸웠다 (ZOGLO) 2017년4월6일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의 무대. 거대한 달이 떠 있다. 손민호 기자  2017년은 시인 윤동주(1917∼45)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올 봄 윤동주를 기리는 문화예술 행사가 잇따르는 까닭이다.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담은 공연도 여럿 있었는데, 눈길을 끌었던 한 편을 소개한다.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이다. 3월 21일∼4월 2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 오른 작품은 전 객석 매진 기록을 세우고 화려한 막을 내렸다. 서울예술단의 레퍼토리 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를 중심으로 윤동주의 짧았던 생애를 돌아본다.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로 재구성한 윤동주의 삶과 시 만주 용정에서의 중학교 시절 일본어 낙제 점수 받아 창씨개명에 고뇌하던 시절 '자화상' '서시' 등 대표작 남겨 가무극의 하이라이트는 토해내고 절규하는 '별 헤는 밤' 창작가무극은 서울예술단이 주도하는 한국형 뮤지컬의 형식  # 윤동주 vs 히라누마 도주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명동촌에서 태어났고, 1945년 2월 16일 일본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숨졌다. 윤동주의 국적은 한 번도 조선인 적이 없었다. 조선이 망한 뒤 일제가 점령 중이던 만주에서 태어났고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일본 열도에서 죽었다. 현재 중국 정부는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 시인’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윤동주는 평생 조선어로 시를 썼다. 중국 연변에 있는 룽징마을. 만주벌판을 가로지르는 해란강을 끼고 있다. 손민호 기자  윤동주의 고향이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에도 등장하는 룽징(龍井)이다. 일송정 푸른 소나무가 자라고 해란강이 광활한 평야를 가로지르는 고장이다.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에 속한다.     룽징에 가면 윤동주가 스무 살에 편입해 2년간 다녔던 광명중학교가 있다. 이름은 중학교이지만 지금의 고등학교다. 이 학교 본관 건물 앞에 윤동주의 대표작 ‘서시’를 새겨놓은 시비가 서 있다.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광명중학교에서 윤동주의 성적은 의외로 평범했다. 특히 일본어 실력은 낙제 수준이었다. 제일 잘 받은 점수가 62점이었고, 40점을 받은 적도 있었다.   윤동주가 2년간 다녔던 명동중학교. 본관 건물 앞에 윤동주 시비가 서 있다. 손민호 기자 명동중학교에 전시 중인 윤동주의 학적부. 윤동주는 특히 일본어에 약했다. 4학년 때는 40점을 받기도 했다. 손민호 기자  윤동주도 창씨개명을 했다. 히라누마 도주(平沼東住). 그의 일본 이름이다. 일본에 유학을 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윤동주는 1942년 4월 도쿄(東京) 립교(立敎)대학에 입학했고, 일본으로 떠나기 전 착잡한 심정을 여러 편의 시에 남겼다. 조선어로 시를 쓰는 일본 이름의 시인. 이 부끄러운 현실이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참회록’을 낳았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윤동주는 ‘욕되다’고 썼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참회록’ 1연, 1942년 1월 24일.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윤동주, 달을 쏘다.’에는 모두 9편의 윤동주 시가 등장한다. 8편이 전편 인용되고 1편이 부분 인용된다. 노래에 쓰인 시는 없다. 작곡을 담당한 오상준은 “윤동주의 시 안에 음악적 선율이 내포돼 있다는 생각에 시는 독백과 낭독으로 표현하고 음악은 시의 감성과 비슷한 결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오상준 작곡의 설명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윤동주의 시는 굳이 멜로디를 얹지 않아도 음악성을 띤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윤동주의 시를 스스럼없이 암송하는 까닭이다.   '윤동주, 달을 쏘다.'의 오프닝 장면. 윤동주가 시 '팔복'을 천천히 읊으며 감정을 고조시킨다. [사진 서울예술단]  윤동주 시에 내재한 음율 덕분에 ‘윤동주, 달을 쏘다.’의 인상적인 첫 장면이 탄생할 수 있었다. 배우는 오로지 시를 읊었으나, 관객은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 것 같은 감상에 빠졌다. 무대를 보자. 깜깜한 무대 왼쪽 구석에 윤동주가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끼적거린다. 처음에는 나지막이 한 행을 읊는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시행을 반복할 때마다 감정이 상승하고, 마침내 윤동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관객을 마주 본다. 배우가 시를 읊을 때마다 무대 중앙 스크린에선 시어가 한 자 한 자 새겨진다. 1940년에 쓴 ‘팔복(八福)’이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가 모두 여덟 번 되풀이된다. 시어는 같지만 행마다 감정이 다르다. 처음엔 서글프다가 나중엔 복받친다. 올해 공연에서 처음 윤동주 역할을 맡은 배우 온주완은 오프닝 장면이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온주완 배우의 대본을 보면 치밀했던 고민이 뚝뚝 묻어난다. 윤동주 역을 맡은 온주완 배우의 실제 대본. '팔복'의 한 행 한 행마다 다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빼곡히 메모를 했다. [사진 서울예술단]  이 처연한 구절은 성경에서 따왔다. 마태복음 5장 예수가 축복을 내리는 장면에 등장한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온유한 자 등 여덟 부류의 사람이 축복을 받는다고 말했다. 예수가 내리는 축복 중에서 두 번째가 슬퍼하는 자의 축복이다. 슬픔이 곧 축복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시인은 꾸역꾸역 받아 적었다. 그리고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갈무리했다.     영원히 슬프겠으니 영원한 복을 달라는 자학적인 바람이었다. 여기에 윤동주 시의 미학이 있다. 윤동주의 시는 염결한 기독교주의에서 기인한다. 할아버지 대부터 윤동주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도 윤동주의 짧은 생애를 다뤘다. 그 영화로 많은 사람이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의 존재를 알게 됐다. 영화를 보면 윤동주가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이다. 송몽규는 윤동주보다 공부도 잘했고 먼저 등단했다. 무엇보다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했다. ‘윤동주, 달을 쏘다.’에도 둘 사이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슬쩍 끼워져 있다.   '윤동주, 달을 쏘다.'의 한 장면.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급우들이다. 사진 맨 오른쪽부터 윤동주, 강처중, 정병욱, 송몽규. [사진 서울예술단]  하나만 더. 윤동주는 만주 명동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송몽규을 비롯한 급우들과 문학에 심취했다. 그 시절 윤동주와 함께 아동잡지를 구독하고 연극활동을 했던 급우 중 한 명이 고(故) 문익환(1918∼94) 목사다. 문 목사는 돌아가기 전까지 수차례 만주를 드나들며 윤동주 추모사업을 벌였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윤동주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본  윤동주는 단 한 권의 시집을 남겼다.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 발간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다. 그가 죽은 뒤 시집이 나왔으므로 그는 제 이름이 적힌 시집을 본 적이 없다. ‘윤동주, 달을 쏘다.’에서는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 윤동주가 함께 하숙했던 연희전문학교 2년 후배 정병욱에게 시 19편을 담은 원고를 건네는 것으로 그려졌다.     윤동주는 원래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시집을 출간할 작정이었다. 하나 사정이 생겨 포기하고 정병욱에게 원고를 넘겼다. 정병욱이 건네받은 시편은 19편이었지만 다른 유고를 더 모아 모두 31편으로 시집을 묶었다. 서문은 생전의 윤동주가 존경했던 시인 정지용(1902∼50)이 썼다. 정지용과 윤동주는 도시샤 대학 동문이다. 정지용이 쓴 서문에서 일부를 인용한다.    무시무시한 독방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역 문사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뱉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윤동주가 애초에 생각했던 시집 제목은 ‘병원’이었다. 윤동주는 제가 쓴 시로 병든 세상을 치유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1941년 11월 20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쓰면서 윤동주는 이 시의 제목을 시집의 제목으로 삼았다. 시집에 제목을 넘긴 시는 대신 ‘서시(序詩)’가 됐다.   윤동주가 남긴 '서시' 원고. 글씨도 시처럼 반듯하다. 손민호 기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쓴 무렵은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가 극에 달했을 때였다.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한 달쯤 앞둔 시점이었고 그는 유학을 고민하고 있었다. 역시 시는 고뇌의 산물인가 보다. 이즈음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비롯해 ‘십자가’ ‘별 헤는 밤’ ‘참회록’ 등 주요 작품 대부분을 생산했다.      # 달을 쏘다 '윤동주, 달을 쏘다.'의 한 장면.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학생들이 반발하고 있다. [사진 서울예술단]  윤동주는 1943년 7월 14일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리고 1944년 3월 31일 교토 지방재판소 제2형사부는 윤동주에게 징역 2년형을 선고했다. 판결문이 적시한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이다. 주요 혐의는 다음과 같다.    유년 시절부터 민족적 학교 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학서 등을 탐독하고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던 바, 우리의 조선 통치 방침을 조선 고유의 민족문화를 절멸시키고 조선 민족의 멸망을 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결과, 독립운동의 소지를 배양할 수 있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 유발에 힘써야 한다고 결의하기에 이르렀으며 …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행복 추구의 견지에 입각해야 한다는 뜻으로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하는 등 민족의식의 유발에 부심함.    그러니까 윤동주는 일본에 유학을 가서도 조선어로 조선의 정서를 담은 시를 쓰다 처벌된 것이었다. 윤동주의 독립운동 이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의 주장처럼 윤동주는 만주 벌판에서 총칼 들고 싸우지 않았다. 그러나 윤동주는 그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무기를 들고 일제에 맞섰다. 윤동주의 무기는 ‘시’였다.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 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 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꼿꼿한 나뭇가지를 끊어 띠를 째서 줄을 메워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산문 ‘달을 쏘다(1938. 10)’에서 부분 인용    시인은 무사의 마음을 먹고 갈대로 화살을 삼아 달을 쐈다. 부질없는 짓이고 어처구니없는 행동이다. 하나 정지용이 윤동주의 시집 머리에 쓴 것처럼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가무극의 제목이 이 산문에서 발췌됐고, 2시간 30분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노래로 활용됐다.  '윤동주, 달을 쏘다.'의 하이라이트 장면. 병든 윤동주가 '별 헤는 밤'을 절규하며 읊는다. [사진 서울예술단]  가무극의 하이라이트는 병든 윤동주가 ‘별 헤는 밤’을 부르짖는 장면이다. 하나 이 장면은 차마 글로 옮기지 못하겠다. 윤동주가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를 한 음절 한 음절 토해낼 때, CJ토월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 767명 가운데 절반이 훌쩍거렸고 나머지 절반이 펑펑 울었다.    이 마지막 20분을 위해 2시간을 기다렸다는 평이 쏟아졌을 만큼 ‘별 헤는 밤’의 장면은 강렬했다. 윤동주의 잔잔한 시어가 이렇게 폭발력이 있을 줄 몰랐다. ‘별 헤는 밤’ 장면이 있어서 ‘윤동주, 달을 쏘다.’는 윤동주를 빌린 작품이 아니라 윤동주와 어울린 작품이 될 수 있었다. '윤동주, 달을 쏘다.'의 장면. 후쿠오카 감옥에서 만난 윤동주와 송몽규가 껴안고 울고 있다. [사진 서울예술단]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었다. 그와 함께 수감돼 있었던 송몽규도 윤동주가 간 지 23일 뒤인 3월 10일 죽었다. 생전의 송몽규는 면회 온 친척에게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으로 희생됐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는 윤동주가 일본 유학 시절에 쓴 5편이 포함돼 있다. 조선의 친지에게 우편으로 부친 시다. 윤동주는 일본에서도 부지런히 시를 썼다고 전해지지만, 이 5편 말고 추가로 발견된 작품은 없다. 아직도 어느 깊은 책장 구석에 윤동주가 눈물로 쓴 노래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윤동주의 유학시절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쉽게 쓰여진 시’ 일부를 옮긴다. 윤동주의 말마따나 그래, 사는 것은 늘 부끄러운 것이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손민호 기자  //중앙일보 \\\\\\\\\\\\\\\\\\\\\\\\\\\\\\\\\\\\\\\\\\\\\\\\\\\\\\\\\\\\\\\\\\\\자료= \\\\\\\\\\\\\\\\\\\\\\\\\\\\\\\\\\\\\\\\\\\\\\\\\\\\\\\\\\\\\\\\\\\\ 프랑스 시인 장 콕토는 ‘윤동주가 사랑한 시인’ 중의 한 명으로 윤동주는 콕토의 시를 ‘염증이 나다가도 그 날씬날씬한 맛이 도리어 매력을 갖게 해서 좋다’라고 표현하였다. 장 콕토는 자신의 창작욕 전부를 표출해 내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고, 그 예술혼을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로 발현하며 숨겨진 본질을 포착하고자 하였다. 
392    시는 정서의 흐름으로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댓글:  조회:2484  추천:0  2017-04-06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박종헌  라. 시상의 형상화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있다. 그리고 그 삶은 자신의 생각 속에서 명령하는 대로 살기 마련이다. 이러한 생각은 다시 말로 표현되고 이를 글로 나타내기도 한다.  자연 속에서 느끼는 발견이나 미적 감동, 깨우침 등을 창작이란 기능으로 다듬어 낼 때, 비로소 시상이 머리 속에 자리 잡는다. 우리가 흔히 '참 표현이 시적이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상의 표현이 언어화되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상의 머무는 단계에서 체험과 의지, 사고력, 역사성, 사회적 배경 등이 작용하면서 재구성되어야만 한 편의 시로 태어날 수 있게 된다. 시가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는 이러한 재구성의 단계가 분명하며 미적 감동으로 형상화(image) 되었느냐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재구성의 모습은 성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다음에서 보듯이 어린이는 자신의 경험을 사실대로 말하고, 소년기가 되면 수식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성인들은 이를 자신의 경험 세계에 비추어 비유와 상징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청소년들은 단순 수식의 과정에서 상상과 비유의 과정까지 폭넓게 펼쳐지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성인의 단계에 도달한 시를 쓰는 학생이 있는 반면에 아동기의 발상으로 시를 쓰는 단계까지 상당히 넓게 펼쳐져 있다. 이러한 현상은 청소년의 정신발달과 괘를 같이하는 것이므로 적절히 아이들의 생활시(어린이시)에서  성인들이 쓰는 일반시로 유도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무너지는 것이 '백일장' 대회란 필요악이다.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백일장의 경우에는 감동보다는 반짝이는 말재주를 뽑고,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백일장에서 당선작들은 자신들의 삶과 무관한 성인시 수준의 작품을 뽑게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청소년들의 문학적 성장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으므로 신중해야만 한다.  아래의 는 삶이 없고 관념만 남은 아동시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자/ 너와 나/ 해바라기처럼 항상 웃고/ 친구와의 우정, 슬픔을/ 함 께 나누자/ 추억을 만들기 위해/ 김밥을 싸가 뒷산에서 먹고/ 소풍도 간 날/ "친구야, 오늘 재미있었니?"/ 하고 말하면/ 친구는 "어∼"/ 하고 대답한다./ 마음속에 남는/ 나 의 아름다운 추억 만들기  (2000.6.12일자 강원도민일보 어린이 판에 실린 춘천 ㄴ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가 쓴 동시)  글쎄? 무엇이 추억 만들기며 마음속에 무엇이 남은 것인지 감이 안 잡힌다. 추억을 만들기 위해 김밥 싸 뒷산에 가서 먹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그러니 "재미있었니?" 하고 물어도 "어∼"라는 대답 밖에 더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글에서 솔직한 것이라곤 "어∼"하는 대답뿐이다.  이런 시들이 잘 된 시로 신문에 실리고, 그것을 본 아이들은 시는 '저렇게 써야 되는구나' 하며 선생님의 말 시 지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이 뻔한 일이다. 교실에서 올바르게 시 지도를 하려 해도 주위의 시들이 이런 모습일 때, 아이들은 오히려 혼란을 느끼게 된다. 정말 아이들의 삶이 베어 나오는 살아있는 아이들 시를 보여줄 수 있도록 아이들 작품을 선별하는 어른들은 신중해야만 한다.  내 몸집보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나는 오늘도 학교에 간다.  성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아주 공갈 사회책  외우기만 하는 자연책  부를 게 없는 음악책  꿈이 없는 국어책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잘 부러지는 연필 토막  검사받다 벌이나 서는 일기장, 숙제장  검사받다 벌이나 서는 혼식 점심밥통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얼마나 더 많이 책가방이 무거워져야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집어넣어야  나는 어른이 되나, 나는 어른이 되나?  5학년 학생작품   "나는 이 작품이 아이들에게 감동으로 받아들여질 것을 확신한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아이들의 가장 절실한 생활문제를 그들의 친근한 일상어로 표현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아이답지 못한 좀 지나친 표현이 있어 순수한 아동의 작품임을 의심하게 하기도 하나,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이들이 그토록 감동으로 읽는다는 데 있다. 아이들이 감동하는 것은 반드시 반항적인 마음이 나타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솔직한 그들의 일상―아무도 어른들이 시로 써 보여주지 않던 그들의 절실한 생활이 과감하게 씌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아동문학에서 동시에서 거의 완전히 망각되었고 버림받았던 것이 아동의 생활세계였던 것이다."  이오덕 중에서,『詩精神과 遊戱精神』 318-319쪽  아이들의 체험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그대로 시가 될 수 있다. 즉 체험의 세계는 사실의 세계요 마음이며, 삶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군더더기를 덧붙이고 깎고 다듬다 보면 감동은 사라지고 재미만 남게 된다.  생선 비늘이 뛰어  번뜩거리는 바다  노오란 지느러미를 펴다가  그물에 걸려든  해.  바다를 휘감고  퍼덕거린다.  개펄이 묻은  장대로  뛰는 바다를 치면  그 빠알간  해의 아가미 속에서  비린내 나는  햇살이 쏟아진다.  이상현 , 이오덕 지음『詩精神과 遊戱精神』255쪽에서 재인용.  이오덕 선생은 이에 대해 "말이 매우 신선하고 매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독자들의 머리 속에 바다의 풍경을 펼쳐 보이는 데 있어서 사물 자체로서 던져지는 살아 있는 말이 못 되고, 적어도 머리 속에서 한 차례 번역을 해야 하는 성가신 과정을 거쳐야 짐작이 되는 이질적인 말의 덩어리, 곧 죽은 말의 조립으로 되어 있다." (위의 책 255쪽)고 지적하면서 감동이 아니라 말재주의 재미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은 시의 본질이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감동은 체험이 없는 상상의 세계에서는 오지 않는다. 아이들의 세계는 체험(삶)의 세계이면서 솔직한 느낌이 그대로 전달될 수 있는 살아있는 세계다. 그래서 시적인 미숙함이 드러나면서도 오히려 읽는 이로 하여금 미소 짓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들이 쓰는 동시는 시적인 완성도는 있을 지 몰라도 감동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아이들의 체험 세계에 들어가려는 잘못 된 동시 쓰기의 자세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이상현의 동시에서 '생선 비늘이 번뜩거리는 바다' , '그물에 걸려든 해' , '비린내 나는 햇살이 쏟아진다' 등이 바로 그러리란 개연성(蓋然性) 속에서 빚어진 언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감동이 없는 말장난의 시어가 되고 말았다.  2. 정서의 흐름 따르기  시도 일반적인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를 시에서는 정서의 흐름이라고 한다. 일어난 감정의 첫 단계(도입)가 주위의 배경과 함께 확장되고(발전), 감정의 극대화(정점-전환)를 이루고 드디어 정리단계(맺음)로 이르는 4단 구성의 흐름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정서의 흐름이 곧 시의 흐름이며, 이러한 단계는 시낭송을 할 때 감정의 상승과 하강으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한 편의 시에 담겨 있는 시인의 감정 상태를 독자는 직감적으로 파악하게 되고, 시를 읽을 때 자연스럽게 그 감정의 오르내림에 따라 어조의 높낮이를 달리해 읽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의 기복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시인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의 자작시 낭송을 들어보면 감정의 높낮이나 어조의 변화가 없어 뜻 전달이 전혀 안 되는 경우를 심심찮게 경험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오늘의 시가 가지는 낭송의 부적절함에도 원인이 있겠으나, 시인들의 상당수는 시가 여전히 나약하고 애처로움 속에서 읽히고 음미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그대로 아이들에게 전수되어 시를 낭송해보라 하면 백이면 백 모든 학생들이 예쁘게 애처롭게 읽기 마련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교과서에 실린 시들의 대부분을 목청을 돋워 침튀기며 낭송할 작품이 별로 없음은 물론, 시는 이런 것이다라는 듯이 한결같이 감정을 내리 깔아야하는 시들이기 때문에 시낭송의 즐거움과 향유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독자들은 이런 시의 감정의 흐름을 1차적으로 파악해가며 시에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정서의 변화나 흐름이 느껴지도록 시를 읽고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시에 담겨 있는 이러한 정서의 흐름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또는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반대로 긍정에서 부정으로, 밝음에서 어둠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러한 정서의 흐름은 시인의 의식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마련이다. 정서의 흐름은 바로 주제 의식과 직결되어 독자의 마음속으로 전달된다. 시적 형상화(이미지)의 모습도 바로 이와 같은 정서의 흐름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미당 서정주의 대표시로 꼽히는 다. 전형적인 기승전결의 4단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1연에서는 시상의 진술이다. 2연에서는 촉발된 시상이 확장되고, 3연에서는 누님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며 감정의 극대화에 이른다. 4연은 정리 단계다.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남에서 삶의 깊은 의미를 읽은 시인은 불교적 연기설을 떠올리며 형상화에 이른다.  시는 소설과 달리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게 된다. 비유나 상징의 표현을 사용하는 목적도 바로 이 내면의 정서를 보다 구체적으로 또한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된다. 이 점에 있어서는 1인칭의 수필이 가지는 고백적 성격과 같으나 수필보다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정서의 변화와 주제 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정지용의 에서 정서의 변화와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1930.1 89호에 발표)  < 유리창(琉璃窓) 1>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유리창에 어린 영상은 새의 이미지다. 안과 밖을 단절시키는 유리창 속에서 내다보는 밤하늘의 별들은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러나 시적화자는 여전히 유리창 속에 머문다. 시적화자는 열없이 유리창에 어리는 물먹은 별의 반짝임을 보고 싶어 입김 자국을 지우고 지우면서 더 잘 보려한다. 이런 행동은 슬프고 애절한 마음의 행동이다.  여기서 유리창은 이승(밝음,화자의 세계)과 저승(어둠, 죽은 자식의 세계)의 경계이며,투명한 유리의 속성에서 보이듯 서로를 연결시키는 영매적 세계이다.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 죽어버린 자식은 산새처럼 사라져 버렸다. 여기서 별의 이미지는 죽은 아들의 이미지와 아버지의 눈에 고인 눈물의 이미지로 복합되어 있다. 죽은 영혼과의 교감은 격리된 유리창을 통해 가능하지만 유리창을 열 수 없고 다만 '지우고 보거나, 유리를 닦는'행위로 밖에 자신의 안타까움을 표현할 길이 없다.  < 유리창2>에서는 정서의 변화가 더 구체적이다. 모더니즘 계열의 정지용 시인의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밖의 세상은 어둡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도 잣나무는 자란다. 그것은 희망이다. 일제하의 어둠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아직 요원하다. 목이 마르다. 나는 유리항아리 속에 갇힌 금붕어다. 목마름을 달랠 물도, 희망의 등대가 될 별도 보이지 않는다. 갇힌 나를 꺼내달라고 외치지만 현실을 꿈쩍도 않는다. 현실과 타협할 수 있다면 이 고통도 사라지리라. 그러나 시인에게 허용될 수 없는 차가운 입맞춤에 지나지 않는다. 쓰라리고 아련한 향기는 멀리 도회의 하늘을 피어오르는 화재의 불꽃처럼 멀리만 있는 것이다.  내어다보니  아주 캄캄한 밤,  어험스런 뜰 앞 잣나무가 자꾸 커 올라간다.  돌아서서 자리로 갔다.  나는 목이 마르다.  또, 가까이 가  유리를 입으로 쪼다.  아아, 항 안에 든 금붕어처럼 갑갑하다.  별도 없다, 물도 없다, 쉬파람 부는 밤.  소증기선처럼 흔들리는 창  투명한 보랏빛 유리알 아,  이 알몸을 끄집어내라, 때려라, 부릇내라.  나는 열이 오른다.  뺨은 차라리 연정스레이  유리에 부빈다, 차디 찬 입맞춤을 마신다.  쓰라리, 알연히, 그싯는 음향―  머언 꽃!  도회에서 고운 화재가 오른다.  < 유리창(琉璃窓) 2>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은 정서의 흐름을 볼 수 있다. ============================================================================       아아, ―박소란(1981∼ ) 담장 저편 희부연 밥 냄새가 솟구치는 저녁 아아, 몸의 어느 동굴에서 기어나오는 한줄기 신음 과일가게에서 사과 몇 알을 집어들고 얼마예요 묻는다는 게 그만 아파요 중얼거리는 나는 엄살이 심하군요 단골 치과에선 종종 야단을 맞고 천진을 가장한 표정으로 송곳니는 자꾸만 뾰족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아직 아침이면 무심코 출근을 하고 한 달에 한두 번 누군가를 찾아 밤을 보내고 그러면서도 수시로 아아, 입을 틀어막는 일이란 남몰래 동굴 속 한 마리 이름 모를 짐승을 기르는 일이란 조금 외로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언젠가 동물도감 흐릿한 주석에 밑줄을 긋던 기억     아니요 말한다는 게 또다시 아파요 나는 아파요 신경쇠약의 달은 일그러진 얼굴을 좀체 감추지 못하고 집이 숨어든 골목은 캄캄해 어김없이 주린 짐승이 뒤를 따르고 아아, 간신히 사과 몇 알을 산다 붉은 살 곳곳에 멍이 든 사과 짐승은 허겁지겁 생육을 씹어 삼키고는 번득이는 눈으로 나를 본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길을 가다가 마주 걸어오던 청년에게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여장남자 같아.” 같이 찧고 까불던 그의 일행이 일순 조용해지며 아무도 웃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나를 두고 한 말이 분명했다. 그런가? 늙고 살이 찐 뒤 바그너같이 생겨진 것도 같다. 이제 지나가던 젊은 남자가 친구들 웃기자고 함부로 대할 만큼 늙은 여자가 된 것인가. 늙은 것은 서럽지만, 서러운 젊음도 있다. 박소란의 시를 읽노라면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내 청춘의 가슴 저린 시간들이 떠오른다. 화자는 활달하고 낙천적인 사람이 아니고, 환경도 밝지 않은 듯하다. ‘수시로 아아,’ ‘한 줄기 신음’인지 한숨인지 ‘몸의 어느 동굴에서 기어나온’단다. 절망감과 외로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는 것이다. ‘아침이면 무심코 출근하는 직장’은 호구지책일 뿐 아무 즐거움이 없는 곳, 거의 매일 곧바로 퇴근해서 돌아가는 집도 ‘캄캄’하다. 저녁의 긴 그림자를 밟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는, 박소란이 그리는 필경 가난하고 외로운 청춘의 초상에 젊은 여성 독자는 더 깊이 공감할 것이다. 그의 시를 하나 더 소개한다.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늘//안간힘으로/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닿는 꼭대기//그러니 모두/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주소’).
391    [시문학소사전] - "그로테스크"란?... 댓글:  조회:2657  추천:0  2017-04-05
그로테스크(The Grotesque)라는 용어는 15세기말 이탈리아에서 로마 유적이 발견되면서 생겨났다. 당시 발견된 것은 로마 황제 타이터스의 목욕탕으로 가는 지하통로와 네로의 황금 궁전의 폐허였다.   이 유적지의 벽과 천장의 디자인에는 식물과 인간 머리, 그리고 동물의 몸과 새의 꽁지 및 물고기의 꼬리가 결합되어 있었고, 온갖 신화적 형상들이 결합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보는 이들에게 낯선 형상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이미지들에 대해 놀라움, 불편함, 매혹, 공포 등등의 여러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충격적이기도 하면서 매력적이기도 해서 당시 미술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물론 그 충격성과 불합리성을 이유로 당시 많은 예술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음은 당연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유적이 발견된 곳은 동굴(당시 이탈리아어로 grotte)이었고, 이 단어로부터 그로테스크라는 파생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그로테스크는 이질적인 것의 결합을 뜻하는 말로 이해된다. 인간과 동,식물의 결합은 그로테스크의 고전적 예의 대표가 된다.   그로테스크라는 용어가 생긴 것은 15세기 말이지만 실제로 그러한 이미지와 형상들은 원시 시대부터 있어왔다. 고대 민족은 예외 없이 주술적 신앙과 결합하여 토템이나 페티쉬(Fetish, 物神)라고 하는 괴이한 조형물을 남기고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문명의 그림자에 영향을 덜 받은 민족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로테스크는 보통 이미지로부터 드러난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을 접한 사람에게 공포와 웃음, 천박함과 두려움, 혐오감과 매력 등의 이질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핀투리치오 혹은 라파엘로의 그림 등이나,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 라르테의 이미지들은  이러한 그로테스크를 잘 드러낸다.   그로테스크는 지배적인 질서와 예술 경향에 반(反)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주류로서 보다는 민중적 성향의 예술에서 그 모습을 많이 드러내왔다. 유럽 여러 나라의 민중극이나 장터 연극 같은 경우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을 많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로테스크는 빅토르 위고가 자신의 희곡 의 서문에서 그것을 새 시대의 예술적 방법론으로 내세우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예술사의 전면에 등장했다고 평가된다. 위고는 세계는 모순되는 것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을 올곧게 드러내지 않고 아름다운것만, 혹은 천한 것만 드러내는 것은 예술의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결합하고, 우스꽝스러운 것과 고귀한 것을 결합하는 그로테스크가 진정한 예술의 방법론으로 대두되어야 한다고 기록했다.   이후 서구에서는 그로테스크를 미학적 방법론으로 조금씩 연구해가는 경향이 생겨났고 이런 연구와 예술적 실천들이 여러 학자와 예술가들에 의해 진행되어 가면서 그 미학적 의의가 인정을 받게 되는 계기를 얻어갔다.   20세기 중반 독일의 비평가 카이저는 그로테스크에 대한 통시적 접근의 연구서를 통해 그 미학적 의의를 제시하였다. 오늘날 그의 저작은 그로테스크를 문학과 예술의 방법론으로 총체적, 심층적으로 살핀, 그로테스크 미학의 고전으로 평가 받는다. (The Grotesque in Art and and History -국내 미번역)   또한 러시아의 바흐친도 자신의 중세의 소설가 '라블레'에 관한 박사 학위 논문에서 그로테스크를 중세 민중 문화의 중요한 자산으로 평가한 논문을 냈고, 이후 그것을 심화 확장 시켜 책으로 출판하였다.(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 문화 -대우 학술총서 국내 번역) 이 책에서 바흐친은 그로테스크의 생산적 육체성에 천착하여 독창적인 이론을 전개한다.   그로테스크의 주요한 특징 및 기능을 간단히만 살피면... 그로테스크는 민중적, 중심적 문화에 반하는 특징을 보여주며, (민중적, 반주류적 특징) 이를 통해 세계가 온전하게 이성적이며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폭넓은 리얼리즘의 기능)   이러한 그로테스크는 특히 사회적 격변기나 혼란기에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는 동안 민중적 성향의 예술들 속에서 그로테스크는 그 모습을 숱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미국의 대공황기에도 많은 문학과 연극, 영화 예술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로테스크 예술 작품들은 그것을 접하는 이에게 당혹감을 준다. 예를 들어 연극에 적용되어 사용되는 그로테스크는 관객들을 불편하게 하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연극 속에 벌어지는 세계를 하나의 진정한 세계로 인식하고 그 안에 동화되어 버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적인 연극의 문제점를 극복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그 이질감으로 인해 연극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이야기에 관객들이 거리감을 느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거리감은 연극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몰입해서 보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보게하는 기능을 한다.   메이어홀드의 연극 연출이나 브레히트는 이러한 그로테스크의 기능을 잘 이해했고, 자신들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그로테스크를 도입한 예이다. 이유야 똑같지 않지만 이오네스코나 베케트의 소위 부조리극이라 불리는 연극들에서도 그로테스크는 드러나며, 독일의 극작가 뒤렌마트의 작품들에서도 효과적 표현 방식으로 그로테스크가 드러난다.
390    [시문학소사전] - "아라베스크"란?... 댓글:  조회:3521  추천:0  2017-04-05
요약 원래 고대 그리스 공예가들에게서 유래했으나 1000년경 이슬람 공예가들이 종교적 이유로 새·동물·사람 등을 제외시켜 매우 정형화시킨 이슬람 장식 문화다.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초까지 채식사본·벽·가구·공예품 등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다. 보통 뒤틀렸거나 꾸불꾸불한 나뭇가지·잎사귀의 소용돌이무늬 또는 그러한 자연형태에서 추상한 장식적인 선 등으로 구성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아라베스크는 중간 대칭, 세부장식의 자유로움, 장식의 이질성 등 고전적인 전통을 유지했다. 바로크 시대 이후 쇠퇴하다가 18세기 이후 부활하여 아름다운 아라베스크 작품들을 남겼다. 프랑스 대혁명 시대의 디자인의 딱딱함으로 점차 이 양식이 종지부를 찍었다.   소아시아에서 활동한 고대 그리스 공예가들에게서 유래된 이 양식은 원래 매우 자연스런 배경의 새 모양이 있었으나 1000년경 이슬람 공예가들이 이를 종교적인 이유로 개작하여 새·동물·사람 모양 등을 제외시킴으로써 매우 정형화되었고 이 양식은 이슬람 장식 문화 전통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초까지 채식사본·벽·가구·금속공예품·도자기 등을 장식하는 데 이 양식을 사용했다. 디자인들은 보통 뒤틀렸거나 꾸불꾸불한 나뭇가지·잎사귀의 소용돌이무늬 또는 그러한 자연형태에서 추상한 장식적인 선 등으로 구성했다. 서양의 아라베스크 디자인은 인물 형상이 필수적인 요소였다. 16세기 프랑스에서 아라베스크라는 말은 단순히 '아라비아의'라는 뜻이었지만 1611년에 간행된 사전에는 '작고 기발하게 꽃피운 리베스크 제품'이라고 규정했다.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고무했던 최초의 서양 모델은 로마 무덤에서 발견된 석고 모형인 고대 로마의 수투치였다. 15세기 중엽에는 아라베스크 석공예가 디자인되었고, 줄리오 로마노가 아라베스크풍의 회화를 그렸으며, 16세기에는 라파엘로의 제자들이 바티칸 궁전의 로지아[開廊]를 아라베스크로 장식했다. 또한 북부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도 섬세한 은공예품에 이 양식을 사용했는데 그것들은 우르비노 성당의 마욜리카 장식, 밀라노의 갑옷과 투구 장식, 피렌체의 태피스트리, 만토바의 채식사본 등에서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아라베스크 장식은 중간 대칭, 세부장식의 자유로움, 장식의 이질성 등 고전적인 전통을 유지했다. 이 시기에는 많은 뒤얽힌 덩굴, 리본 등과 함께 상상적이고 환상적인 장면을 만드는 데 사람·동물·새·물고기·꽃 등 광범위한 장식 요소들을 곁들였다. 바로크 시대가 도래하면서 아라베스크 장식의 사용은 쇠퇴했는데 18세기 중엽에 비로소 헤르쿨라네움(폼페이의 고대도시)에서 일련의 새로운 로마 아라베스크 장식품이 발견되었다. 1757년 켈뤼스 백작이 〈고대 회화 모음집 Recueil de peintures antigues〉을 발간했고, 1770년경에는 다시 아라베스크 양식의 사진판이 파리에서 발행되었다. 후기의 부조와 회화들은 지금까지 제작된 아라베스크 작품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 총재정부시대와 제정시대의 디자인의 딱딱함은 점차 이 양식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Daum백과] 아라베스크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89    현대시를 알려면 현대시의 구조를 알아야... 댓글:  조회:3275  추천:0  2017-04-05
현대시의 구조 저자 후고 프리드리히 출판 지식을만드는지식 발매 2013.05.13.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짧지만 무겁다. 책 한 권이 될 정도로 답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령, '운율을 담은 언어 예술'이라고 누군가 정의를 내렸다 하더라도 시의 전체가 온전히 규명되지는 못한다. 지극히 일부만을 살짝 들춰낼 수 있을 뿐이다. 한 권 분량으로 질문에 답하더라도 그것이 시의 실체를 온전히 보여주지도 못한다. 이론적 설명만으로 김소월의 이 품은 아름다움을 설명해낼 수는 없다. 개별 작품과 직접 대면하고 소통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현대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어떠한가. 범위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난감하다. '현대시'라는 용어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역사의 어느 시점부터를 현대라고 부를 것인가? 특정 시기 이후의 시는 모두 현대시인가? 아니라면 현대시의 범주에 포함되는 작품은 무엇인가? 어떤 특성을 가져야 하는가? 왜 그러한 특성이어야 하는가? 하나의 질문에 딸려나오는 논점들이 하나 같이 명쾌히 해결하기 어렵다.    그런데 책 『현대시의 구조』는 이처럼 난처한 질문에 답하려 한다. '구조'라는 개념으로 현대시의 전체상을 그려내려 한 것이다. 후고 프리드리히가 이야기하는 구조란 무엇인가? "문학 현상에 있어서 '구조'는 유기적인 구성체, 상이한 것들 속에 내재하는 유형적인 공통점을 가리킨다. (중략) 서로 간에 영향을 주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개별적인 특성들이 서로 일치하고 상호 해명될 수 있으며, 동일한 성층(成層)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기 때문에 우연으로 간주될 수 없는 일련의 시 작품들의 전체상이 여기에서 의도하는바 '구조'의 의미다."(8~9쪽, 「제9판 서문」) 간추리자면 구조는 개별 작품 사이에서 발견되는 공통의 특성, 상동성이다. 예술작품은 특수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고유하다. 그러므로 공통성을 찾아서 묶는 이론적 행위에 저항한다. 저자도 이 점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대시의 범주에 포함되는 여러 시들에게서 무시하거나 간과할 수 없는 구조를 발견했으며 그 구조가 현대시를 현대시답게 해주는 요인임을 주장하고 싶어 한다.   문학과 미술, 음악은 알면 알수록 미궁 속을 헤매는 느낌이 든다. 정전으로 등극한 작품들을 접하면서 예술사의 흐름을 짚어가는 입문 단계를 지나면 문학사와 미술사, 음악사에서 언급하는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어째서 기념비인지 궁금해진다. 지금도 한 해에 수천 편의 시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 중에서 훌륭한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어떻게 선별할 수 있을까? 누가 선정하였고, 누가 동의하였는가? 이 작품이 현재에 비평의 대상으로 검토할 만큼 중요한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와 토대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의 평가와 후세의 평가가 다른 경우에는 그 작품의 가치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가령, 1920년대에 김소월보다 김억이 훨씬 유명했지만 오늘날 대다수는 김소월을 기억하며, 모네의 는 출품 당시 조롱거리였지만 오늘날에는 미술사에 반드시 언급되는 중요한 작품이 되었다. 그것이 중요해진 것은 탁월하기 때문인가, 새롭기 때문인가? 작품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오늘날 유통되는 예술은 '작품성'을 운운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다음과 같은 작품은 예술적으로 훌륭한가?   마티스, , 종이에 구아슈, 콜라주, 286X287, 1953.   마티스 말년의 대표 작품이다. 달팽이 껍질의 소용돌이 무늬를 색종이를 오려붙여서 형상화했다. 나는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마티스의 작품이라고 해서 놀랐고, 말년의 대표작이라서 또 한 번 놀랐다. 이것은 어린이의 작품 아닌가? 내 딸도 이런 식으로 색종이를 자르고 붙여서 알록달록하게 종이를 꾸민다. 이 작품이 훌륭한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미술비평가, 미술사학자들은 훌륭하다고 평가한다. 훌륭함의 기준을 나 같은 아마추어 감상자는 묘사의 디테일과 사실성에서 찾을 테지만 전문가들은 미술가의 정신이나 새로움의 시도에서 찾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평가의 기준이 다름을 이해하더라도 문제는 해소되지 않는다. 상대주의로 도피하면 도무지 미술사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을 터이다. 미술사나 문학사에 기록되는 작품은 그만한 가치를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 그것이 임의적인 선택의 산물이라고 치부하는 건 편하지만 참된 길은 아니다.    현대 예술의 작품성을 운운하는 것은 까다로워졌다. 말로비치의 을 보면 아연실색하게 된다. 말로비치가 그림을 못 그려서 캔버스를 검정색으로 가득 채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더라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그린 어린이의 그림과 대가의 작품을 일반인이 구별할 수 없고 심지어 전문가들도 구별하기 쉽지 않은 시대에 도대체 예술은 무엇인가? 작품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관의 영역인가 객관의 영역인가? 현대시의 경우에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시는 일반 대중과 불화한다. 상식적인 이해를 거부하는 정체불명의 언어들이 독자를 내쫓는다. 전깃줄 위에 도열한 새들에게 로시인이 말한다     결국 동물은 발의 세계     저마다 발 닿는 곳에 집이 있다     새들도 마찬가지 로시인에게 저희 집은 뒤집어진 고슴도치 털 속 같은 까만 기억 속에 있어요 말해봤자 소용없다 그 까만 집으로 들어가면 실컷 찔리고 처음으로 쫓겨나요 말해봤자 소용없다 날개를 반으로 접어 어깨 속에 감추고 더러운 돼지 우리에서 밴드를 꾸려 돼지들과 함께 꿀꿀거리다 가야 한다     네 음악은 안 돼지     뒷걸음치며 입을 틀어막게 하는 음악은 안 돼지     배설물 위를 뒤뚱뒤뚱 돌아다니는 음악을 음악이라 할 수 있어? 안 돼지     더러워서 나를 화나게 하는 음악은 안 돼지 - 김혜순, 일부, 『피어라 돼지』, 2016   이 시에서 '로시인'이 누구인가? 2연의 의미는 무엇일까? '날개를 반으로 접'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2연과 5연은 들여쓰기가 되어 있는 것일까? 5연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산문을 읽어나가듯 읽어도, 리듬감을 느끼려고 노력하며 낭독해도 우리는 이 시에서 수월하게 얻어낼 수 있는 내용이 없다. 이 작품은 훌륭한가, 훌륭하지 않은가? 목소리의 파편들과 리듬의 불균형성, 이미지의 비실재성으로 가득한 김혜순의 시집에 대해서 문학평론가 권혁웅은 이렇게 평가한다. "이 다면체-돼지의 죽음과 부활, 희생과 구원의 서사는 「황무지」와 넓이를 겨루며 「실낙원」과 높이를 다툰다. 놀라운 일이다. 한국의 현대시가 여기에 이르렀다."(권혁웅, 「단 한편의 시 - 김혜순의 돼지복음서」) 현대시의 정점에 이르렀다는 상찬이다. 아마추어 독자는 시에 대한 접근조차 녹록치 않은데, 전문가는 작품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현대시가 무엇이길래 아름답지도 않고 우아하지도 않은 작품이 인정받는 것일까?    『현대시의 구조』는 시의 '현대성'에 주목하고 있다. 시를 현대적으로 만들어 주는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책의 논의를 단순하게 압축하자면, 현대시의 구조적 본질은 불협화음이다. 현대시는 현실의 사물을 변형시키고, 언어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문법틀을 파괴함으로써 충격을 주고, 불가해성을 지향한다. 따라서 현대시는 이성적 사유에 따른 논리적 이해를 거부함으로써 난해해지며, 비실재성에 가까워진다. 후고 프리드리히는 현실의 사물이 연결되는 관계를 해체하여 폭력적으로 연결시키는 전제적 상상력, 그러한 상상력의 수단인 데포르마시옹(변형), 추상과 아라베스크, 시 창작의 이론화와 지성의 강조, 엄격한 수학적 통제에 따른 언어 마술의 추구, 추(醜)의 상대적인 격상, 감정이나 자아를 배제하는 탈인간화, 현대 문물에 대한 거부와 매혹의 이중성, 공허한 이상성 등이 현대시의 구조임을 보들레르로부터 랭보, 말라르메를 지나 20세기에 만개한 유럽 각국의 현대시를 들어 증명해보인다.  이러한 제반 특성을 포괄하는 용어가 불협화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인들은 불협화음에 의해서 진술한다. 한정적인 말들로써 불확실성을, 간단한 문장들로써 복잡한 것을, 하나의 근거로써 근거 없는 것을(혹은 역으로), 하나의 연관으로써 연관이 없는 것을, 시간의 표시로써 공간과 무시간성을, 마술적 언어의 힘으로써 추상적인 것을, 엄격한 형식들에 의해 내용적으로 자의적인 것을, 감각적인 형상의 부분들로써 불가시적인 형상을 기술한다. 이것들은 시어의 현대적 불협화음들이다. 이것들은 이해시키기 위한 언어와는 극단적으로 상이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언어임은 분며하다. 왜냐하면 언어란 마치 어떤 음향과 의미를 생성할지 예견할 수 없는 피아노의 건반과 같이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언어와 함께 홀로 있을 뿐이며, 또한 언어만이 그들을 구제한다."(411쪽)   어째서 현대시는 불협화음을 내재하게 되었는가? 후고는 연원을 루소로부터 찾는다. 루소는 기계론적 시간이 지배하는 현실을 거부하고 내면성의 시간을 되찾으라고 주문한다. 과학주의에 의해 탈신비화되는 세계에 저항하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현대성은 세계의 탈마법화와 궤를 같이하는데, 보들레르 이래로 현대성에 진입한 시인들이 되찾고자 하는 것은 진부하고 합리화된 세계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을 파괴하는 상상력이 요구된다. 현대시의 일그러진 형상은 기계론적 합리성과 과학주의에 저항하는 표식이다. 아도르노가 "예술작품은 미메시스의 도피처다."라고 언명한 바와 동일하다. 예술작품은 이미 도구적 이성이 잠식한 현실세계에서 도피하여 미메시스라는 비합리성, 마술성을 보존하는 유일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현대시는 존재 그 자체로 현실을 탄핵하고 징벌한다.   문학을 이론적 논의로 그치면 공허해진다. 뼈대만 있고 말랑말랑한 살이 없는 건조함만 남는다. 구체적인 작품을 감상하면서 현대시의 구조를 재확인하는 작업은 필요하면서 재미도 있다. 잠시 후고 프리드리히를 흉내내보자.  그녀에게서 훔쳐온 것은 모두에게 어울린다 사물들은 하얀 곰가죽을 덮어쓴다 부푼 보리씨가 자라고 청소용 트럭, 빨간 우체통 그리고 떠다니는 집들 자동차는 멈춰 있고 폐타이어들이 굴러다닌다, 내 애인의 유두처럼 까맣다 그런 아침 사람들은 칼날처럼 일찍 일어나 피 묻은 자줏빛 살덩이의 살해자를 찾으러 다닌다 바람에 묶인 흰 털들이 공중으로 도망친다. - 진은영, 전문,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는 이 시에서 서정적 자아의 살해를 목도한다. 엄정하고 객관적인 목소리의 '탈인간화'된 자아가 눈이 내리는 풍경을 중성적인 목소리로 묘사한다. 도무지 정감의 노출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훔쳐온", "폐타이어", "피 묻은 자줏빛 살덩이"와 같은 시구들은 시의 아름다움을 훼손할 수 있는 '추(醜)'한 이미지이다. 시인은 눈오는 풍경을 전체로서 묘사하기보다는 부분적 사물을 돌출시켜서 포착한다. 문명적 이미지인 "청소용 트럭", "빨간 우체통", "자동차", "폐타이어"들이 호명되는데 이러한 도시 풍경은 하얀 눈에 덮이는 형국이다. 풍경은 색채로 '추상화'된다. 이 '아라베스크'는 흰 색 바탕에 붉은 색과 검정색 점들이 찍혀있다. 검정색은 애인의 유두로 연상되는데, "내 애인의"와 "유두처럼 까맣다"가 행으로 분절되면서 리듬 상의 단절과 '부조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관능적 이미지임에도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붉은 색은 우체통에서 "피 묻은 자줏빛 살덩이"로 이동하는데, 동물의 시체로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붉은 색은 핏빛으로 살해됨을 연상시켜 잔혹하다. "칼날처럼 일찍 일어나"라는 시구는 '전제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시체와 아침 기상을 폭력적으로 연결시켰다. 흰 빛도 불행을 환기시킨다. 눈들은 "바람에 묶인 흰 털"로 은유되면서 '부자유'를 내포하는데, "공중으로 도망친다"는 서술부와 연결되기 때문에 이율배반을 낳는다. 4연의 한 행은 풍경을 '비현실', '비실재성'으로 몰고간다. 눈이 흩어져 내리는 풍경은 실재 너머의 영역으로 해체된다. "떠다니는 집들"은 풍경의 '비실재성'을 강화하는 이미지다.  제목인 "눈의 여왕"에서 "여왕"은 풍경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부재'한다. 다만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 '암시'로서만 인식할 수 있다. 시의 풍경은 흰 빛으로 가득차 있지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공포'와 '불안'이다. 현대 문명의 총화인 도시 생활이 몰고 오는 '현대성'의 징후다. 우리는 시에서 아름다우면서도 부자유하고 잔혹한 '불협화음'을 감지한다.     이상의 해석에서 은 현대시의 구조를 내장하고 있음을 확인했으며, 현대시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시에 대한 이론을 이해했다고 해서 즉각 현대시의 감상이나 창작이 탁월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론에 대한 이해는 감상이나 창작의 안목을 높여줄 수는 있다. 『현대시의 구조』는 현대시란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것은 후고가 예를 들고 있는 작품이 모두 불어, 스페인어, 독일어, 영어로 창작된 시라는 것이다.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의 시가 가진 언어의 마력은 번역을 거치면 상실되고 만다. 불어에 대한 기본적 소양만 있었어도 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20세기 시인들의 이름들, 생존 페르스나 고트프리트 벤 같은 이들도 생소하고 대학 도서관 같은 곳이 아니면 작품을 구하기도 쉽지 않아 이론과 실제를 접붙여서 이해하기 더욱 어려웠다.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세 사람에 대한 서술이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니, 시를 공부하기로 마음 먹은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들을 조만간 진하게 거쳐갈 생각이다.    [출처] 현대시의 구조는 무엇인가, 『현대시의 구조』|작성자 달지기    
388    시인은 추한 명예를 베고 눕지 않는다... 댓글:  조회:2470  추천:0  2017-04-05
    현대 시의 문제점         시조   첫째:그 운율을 잃어버렸다. 둘째:운치가 사라졌다. 셋째:형상은 있되,그 내용이 없다. 넷째:새로운 실험 의식의 난무로 그 형태가 파괴됐다.        자유시   첫째:형식적 나열에 불과하다. 둘째:시어가 같은 맥락에서 숨쉬기에 독특함이 없다. 셋째:새로운 실험의식의 난무로 그 형태가 무질서하다. 넷째:깊이에로 향유가 없다!   = 위에서 전체적인 공통점으로 나타난 점은 과거 우리 시를 이끈 장본인 (원로시인) 들의 잘못이   가장 크다.그들이 자신들의 틀을 마련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한 상태에서, 시의 하향(下向)곡선을   그린 탓에 오늘날의 시는 위태로운 지경에 접어들었다.고로 현대 우리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먼저 비평가는 그 문제부터 풀어 새로움에 대한 도전장을 펼쳐야 마땅하리란 판단이다.     * 비평의 시각   첫째: 명료함이 깃들어야 한다.   둘째:철저한 삶의 모방에서 출발해야 한다.   셋째:어떤 작은 형식의 틀에 갖혀선 절대 안된다.   넷째:개인적 교류를 탈피해야 한다.   다섯째:그 작품의 원류와 더불어 탄생시기를 연구해야 한다.   여섯째:비교 문학을 갖춰야 한다.   일곱째:과거적 비평원론에 의존하되 결코 그에 얽매임은 금물이다-   여엷째:미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   아홉째:하나의 큰 획을 그어야 한다-   열번째:깊은 포용과 더불어 날카로운 비도(匕刀)의 춤사위를 연출해야 한다.                 * 시와 형식    인생을 형식으로 살면 그 시인의 시 또한 그 형식에 그친다- 삶은 피나는 땀과 그 구조의 결정체와도 같다.헌데 그런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게을리하면 과연 어디에 자신이 갖힌 것일까-? 그것은 누가 대답하지 않아도 이미 뻔한 사실이다- 스스로의 고뇌와 깊은 항해가 아니면 결코 인생은 그 완성단계에 도달 할 수 없다!... 고로 어리석은 자는 낮은 언덕배기에서 보다 높은 산맥을 평가하고,큰 인물은 보다 높은 위치에서 이 지상을 내려보는 경우와도 같다- 시란 곧 형식이란 갑옷을 뒤집어 쓰되,절대 그 형식의 노예가 되면 망친다- 다만 그 내용이 형식이란 분포(미세한 분자)를 스스로 안을 때,비로소 그 가치가 마치 한 알의 아름다운 보석처럼 빛나는 것이다....!    * 시에 혼이 없다면 새의 날개가 없는 형상이요,     시에 정신이 깃들지 않으면 나무에 수액이 마른 경우와 같다!                  * 언어를 다루는 간략한 기법     첫째:정재된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그 이유는 시는 일반 언어로 씌여지되,일반 글에 비해        훨씬 값진 그 무엇-즉,형상과 뜻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그런 정재된 언어를 갖추기        위해서는 話者는 먼저 숱한 생의 체험과 더불어,지식과 사상이 고루 충만되야 한다.   둘째:언어의 배열 순위를 스스로 잘 간파해야 한다-만약 그 서두와 끝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표출된 경우라면 마치 용두사미(龍頭蛇尾)나 아님, 사두용미(蛇頭龍尾)와 같은 형상이         되어 전체 분위기와 그 틀을 망칠 것이다.   셋째:운율(리듬)을 잘 갖춰야 한다-현대 시에 접어들수록 그 운율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첫째 이유는, 시인 자신이 어떤 실험의식에 접어들어 전혀 그 틀을 마련하지못하고        전전 긍긍한 상태에서,마치 마른 나뭇가지를 꺾어 시의 형상으로 덮어씌워버린 까닭이다.        그러나 시에 리듬이 붙으면 마치 물의 흐름처럼 유연하고,봄의 대지위에 파아란         새싹이 돋듯 아름다운 풍취가 솟는다.   넷째: 운치와 그 깊이를 지녀야 한다- 현대 시에서 이 운치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싯점이다.        그러나 시에 정작 운치가 비치면,그것은 마치 한폭의 아름다운 동양화를 감상하는 기분이다.                               * 글쓰는 중요 자세 3가지    글을 쓰는 것은-   첫째,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 반추를 회고하는 잣대이다. 고로 누굴 위해 글을 쓴다는 자세나 아울러 타인의 의식체에 갖히기 위한 글은 결국 상업적 수단을 낳는다.흔히 요즘 잘 나가는 시인들이 그 유형에 속한데,그 이유는 오직 비평적 시각에 맞춰 글을 쓴다는 점이다.   둘째:개인적 깊은 사유를 끌여들여 글을 써야 한다.  그 이유는,깊은 사상이 없는 글은 결국 언어적 형상 나열에 불과하거나  아님 그저 말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고로 글의 깊은 향기가 없다!   셋째:참회하는 자세로 글 자체를 마치 신앙처럼 여기고 써라! 글이 자신을 구원해주고 마침내 새로운 세계(미래)를 마련해준다는 의식체 없이 글을 쓰면, 결국 스스로의 혼동만 낳는다.   = 한편의 글은 그 인물의 마음이요,정신이요,영혼의 집합체에 해당된다.  그래서 타인이 그 글을 읽으면 그 작가의 향기가 은은히 베어나오고,아울러 그 깊은 품위와 더불어 자신의 생을 그곳에 비쳐볼 수 있는 위치가 된다.  그것이 곧 훌륭한 글에 속한 작품이다-아울러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의미와 방법   첫째:자신을 극복하기 위한 자세로 써야 한다 둘째:생을 관조하는 정신으로 써야한다 셋째: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개척하는 위치에서 써야한다 넷째:타인과의 동조의식에서 나눔이란 법칙을 성립해야 한다 다섯째:그 모두를 다 버리는 과정으로 다시 되새김질 해야 한다.        詩人은 명예를 베고 눕지 않는다   詩人은 명예를 베고 눕지 않는다 그것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영혼이 서로만나 춤추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詩人은 명예를 베고 결코 눕지 않는다 그것은 그토록 더럽고 추한 명예가 자신에게 온갖 오물을 뒤집어 씌울까 두렵기 때문이다   한절 푸른 계절이 스쳐 지나가면 그곳에는 다시 계절의 꽃이피어 홍옥(紅鈺)빛 열매를 내비추듯이 오늘의 발자취는 곧 먼 미래의 거울이요 나는 또한 그 거침없는 세월의 순환에 잠들리...!   천년의 한(恨)을 삭여 한 올 피를 토한 선혈(鮮血)이 처마끝에 낙숫물처럼 똑 똑 떨어져나린 밤에도 그 참상에 눈부셔서 하마 잠못이루고 뱀처럼 또아리튼 몸체는 그 베개 모서리에 명예라는 무서운 비수(匕首)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 시를 쓰는 시각은   첫째: 먼 사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즉,가장 멀리 있는 거리를 관찰하여 자신의 심부(深膚)에 채워 그것을 다시 정재된 언어로 표출해야 한다.대다수 시인들이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끌여들여 시를 쓰는데, 그것은 아주 작은 틀속에서 오직 자신의 시각의 한계에 부딧쳐 살아가는 과정과도 같다. 인간의 시각은 극히 한정된 공간에 대한 이미지만 표출할 뿐이다- 보다 먼 공간을 찾으라!...     둘째:사물의 근본 이치를 케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의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보는 과정과도 일치한다.고로 처음 자연을 대상으로 시를 쓰고,보다 성숙한 단계에 들면 곧 자신의 내면세계를 파고들어 정신의 힘을 시어로 끌어내야 한다- 이것은 위대한 시를 탄생시킨 근본이다.     셋째:전체 언어의 조율이 꼭 필요하다-   아무리 훌륭한 문귀를 끌여들여 시어를 완성했어도 그 전체적 맥락이 안맞으면 뒤죽박죽의 시어가 표출된다.고로 먼저 낱말을 찾지말고 전체에서 그 중간에 꼭 필요한 낱말을 찾는 버릇을 항상 길들여야 한다.     넷째:탈고는 항상 자신의 머릿속에 그 시어를 가두고 자주 떠올려야 한다-   그 경우 마침내 잘못된 부분은 저절로 그 위치가 자신의 지각에 선명하게 드러난 위치가 된다. 그때 그 부분을 수정하면 된다.또한 그것이 곧 완성이란 판단은 금물이다.오직 그 한부분만 채워졌을 뿐,아직도 미세한 부분을 더욱 정리하는 최후 작업이 남았기 때문이다.      * 詩의 4正道      1: 많이 체험하라-       삶의 체험이 없이 시를 쓰려는 자세는 마치 사공이 노가 없이 배를 저으려는 자세와 같다.     고로 시인은 항상 많은 체험을 해야하고,또한 어떤 틀에 박힌 체험보다 다양하고 자유로운     자신만의 삶을 체험해야 한다.이것은 훗날 자신의 시 세계를 넓혀주는 계기가되며,아울러     가치 깊은 시어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2: 많이 사고(생각)하라-      생각이 없는 글은 결국 그 근본이 이미 형식을 쫒고 있음을 나타낸다.    고로 항상 사물을 보고 관찰하는 시각을 갖춰야하고,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흐르는 고요한 샘물의 흐름같은 내면의식체를 읽어야 한다.또한 거기서 멈추지 않고    범 세계적인 시각으로 자신을 내몰아야 한다.이것은 위대한 창작의 길이다-    3:많이 퇴고하라-      퇴고 없는 명작은 결코 없다! 그러나 걸작은 그 예외에 속한다.    그 이유는,걸작은 작가 자신도 모르게 탄생하는 신의 음성이기 때문이다.    퇴고란 항상 그 시어를 머릿속에 떠올려하고(이것은 자신이 어떤 일에 부딧쳐도 결코    놓쳐선 안되는 화두(話頭)와도 같다) 또한 그때마다 정확한 단어나 시어가 떠오르면    수정하는 버릇을 항상 습관화시켜야 한다.그러나 이것은 어느 경지에 접어들면 점차    그 퇴고할 가치가 사라진다.그리고 무위에 들면 -오직 보석빛이다!    4:쓴것을 많이 버려라-      마음을 비우지 않고 새로움에 대한 눈을 뜰 수 없다.    고로 자신이 쓴 시는 되도록 깊은 서랍에 감춰두고 일체 꺼내보지 말고-만약 꺼내볼 경우    다시 과거적 좁은 틀속에 갖힌다- 오랜 시일(적어도 몇년 후)이 지난 후에 그것을 꺼내보고    마침내 그 시어가 아직도 자신의 시각에 또렷한 형체로 전해짐은 괜찮은 시라 평가해도 좋다.    그러나 자신의 시각에 미약할 경우 가차없이 그것을 버릴 줄 아는 지혜를 갖춰야 한다.          * 시의 상징과 탈바꿈의 변형체            새   어린 새는 나는 연습보다 창공을 먼저 탐내고 큰 새는 두려움이 갖힌 창공보다 작은 가지에 앉기를 망설이네...   * 현재 이 시는 일상적 언어로 씌여진 문귀이다.    그러나 상징과 비유의 흐름이 아주 깊다.    현대 시를 이끈 장본인들이 그 싯적 의미와 형상을    오직 외부에서 찾기를 희망한 것은 곧 자신들의    깊은 사상성이 결여된 탓이다.    만약 깊은 사상성이 담기면 언어는 저절로 비유나    아님 그 상징성을 갖추기 때문이다- 곧 시적 탈바꿈이나,    변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펌]       / 언어의 치장이 눈부실수록 그 내용은 사라진다- //  
387    시를 쓰는 기본자세는 사물에 대한 애정이다... 댓글:  조회:2612  추천:0  2017-04-04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박종헌  II. 시창작의 실제  1. 시상(詩想)의 발견  시상(詩想)이란 좁은 의미로써 시를 직접 마음속에 그려내는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다. 시상의 시작은 시심(詩心)에서부터 시작된다. 시심 속에서 싹이 튼 시상은 마음속에 그림처럼 그려짐으로써 시를 일으키는 그 첫 단계가 된다.  여기에서 시심(詩心)이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이나 자연의 현상, 인간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고서 느껴지는 가장 순수한 마음의 상태로서 일상적으로 느끼는 슬픔, 고통, 기쁨, 황홀감 등의 일상적 심리상태와는 달리 자기가 일상적 감정으로 느낀 대상과 하나가 되는 순수한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시심은 시상을 일으키는 텃밭이 되며, 시심의 순수함은 시쓰기의 가장 기본이 된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은 아름다움을 느끼고 애틋함을 느끼는 이같은 시심이 풍부해 누구나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조건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아쉽게도 청소년들이 자신이 지닌 순수함을 계발하고 드러내어 한 편의 글로 표현하는 습관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글을 무조건 두려워하거나, 글이란 어려운 단어나 추상적 어휘가 들어가야만 하는 것처럼 오해를 가지는 경우도 있어 자신이 무얼 쓰는지 조차 분명하지 않은 글들이 쓰여지게 되고, 결국은 글과 자신이 멀어지는 결과가 되고 있다.  시상의 발견은 우연(偶然)이라기 보다는 필연적이며, 수동적이라기 보다는 의지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냥 앉아 있으면 다가오는 것이 아니란 거다. 늘 마음속에 준비하는 자세로 인생을 살아갈 때 비로소 시상도 찾아온다고 할 수 있다.  시상을 맞을 준비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자세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가. 자연이나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하자.  관찰이란 이미 자신의 능동적 태도와 마음의 준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다. 평소에 사물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습관이 갖추어질 수 있어야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고 사물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이해한다'는 것은 '잘 안다'는 것이며, 따라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느냐이다. 시인의 사상과 이념, 그리고 관심 영역에 따라 발견의 깊이와 모습은 달라진다. 자연을 아름답게 보는 마음에서 바라보면 처럼 아름다운 시가 된다. 나비가 예쁘기 때문에 예쁜 나비가 앉은 꽃은 당연히 예쁠 수밖에 없다. 꽃이 예쁜 이유는 꽃 자신에게 있던 것이 아니라 예쁜 나비가 앉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나비는 아주 예쁘다.  나비는 날 때도 예쁘다.  나비가 앉은 곳에는  꽃도 예쁘게 피어 있다.  (성주 대서초등학교 4년 한상재 )  다음의 은 시인의 체험 속에서 발견한 시다. 농삿일에 허리가 휘어보아야 감자꽃이 허리 아픈 꽃임을 안다. 그 끊어질 듯 아픈 허리를 찍어누르며 모녀가 오뉴월 따가운 여름 햇살에 감자밭을 매는 모습이 결코 꽃처럼 예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감자꽃이 있기에, 농사를 짓는다는 삶의 진정한 모습이 거기 있기에 그 처절한 삶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앞의 와 그 발상과 관찰이 똑같다. 10살짜리가 바라본 사물과 50세의 시인이 바라본 사물이 너무도 똑같지 않은가?  앉아 피어도 허리 아픈 꽃  자줏빛 흰빛  서로 물들이며  어머니도 누이도  오뉴월 빛 속에 엎드리면  그렇게 꽃으로 보였다  (이상국, , 시집 『내일로 가는 소』)  나. 상상력을 동원한다.  상상력이 부족하면 감정이나 감동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전율할 듯 강한 감동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사실이 남이 알 수 있게 전달하지 못한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만의 감동일 뿐 남의 공감을 얻어낼 수 없다. 이러한 감동의 표현을 위해서는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감동을 구체화시키고 이를 표현하여 전달할 수 있어야 글이 되는 것이다.  엄마의 일요일  장마철이 좋다.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이…….  비가 많이 오면 늘 밭에서 호미질에 모종에 일만 하는 어머니가  쉴 수 있는 날이다.  그래서 난 늘 비 오는 날은 우리 어머니의 일요일로 정했다.  생전 비라도 안 오면 밭에서 사실 것만 같다.  비가 가끔 많이 왔으면 좋겠다.  (대천 여중 3년, 최선화, 창비아동문고 『나도 쓸모 있을 걸』)  < 엄마의 일요일>에서 시적화자는 비가 오는 날 이외에는 늘 밭에 나가 밭일로 하루 해를 다 보내고 쉬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을 쓰고 있다. 가끔 비가 와서 쉬는 날(일요일)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상에 대한 애정과 상상이 있다.  그러나 다음의 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저 시커멓게 썩어버린 곰팡이 자국을 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을 바라보려는 시인의 상상력의 깊이를 알 수 있다.  곰팡이  곰팡이를 마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현미경 속  아름다운 흑백의 나선, 벌거벗음을 먹었다  축축한 회색빛 그늘 속에서  주검의 흔적처럼 은근한 냄새, 검은 화약자국  버짐처럼 번지는  저 말릴 수 없는 거부의 몸짓  메마른 세상에 너의 터전을 넓혀라  긴 장마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검게 스미는 불꽃  하나 됨을 위해 소리 없이 일어서야 하리  ( 박종헌 )  다. 늘 보았던 대상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 보자.  세상의 모든 글감들은 이미 다른 사람이 모두 다 썼다고 슬퍼하지 말자, 소재는 무궁무진하지만, 만약에 한정되어 있다하더라도 모양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고 크기가 다르고 냄새가 다르며 촉감이 다르다면 그것은 내가 쓸 수 있는 소재다.  즉, 글이란 소재가 아니라, 그 소재에 대한 해석과 의미가 글이다. 따라서 아무리 낡은 소재라도 자신만의 세계에서 바라볼 때 새로운 의미가 탄생되는 것이다.  다음은 같은 제목으로 쓰여진 시들이다. 즉 소재가 같지만 모두 다른 시이다.  구상(具象)의 강(江) 연작시는 강을 다양한 의미에서 조망하고, 깊은 사유와 관조로 의미를 파악한다. 평등과 겸손, 용기, 자유를 가르쳐 주는 강은 벌써 강이 아니다.  (江) 16.  구상  강은  과거에 이어져 있으면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강은  오늘을 살면서  미래를 산다.  강은  헤아릴 수 없는 집합(集合)이면서  단일(單一)과 평등(平等)을 유지한다.  강은  스스로를 거울같이 비춰서  모든 것의 제 모습을 비춘다.  강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한다.  강은  그 어떤 폭력이나 굴욕에도  무저항(無抵抗)으로 임하지만  결코 자기를 잃지 않는다.  강은  뭇 생명에게 무조건 베풀고  아예 갚음을 바라지 않는다.  강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려서  어떤 구속(拘束)에도 자유롭다.  강은  생성(生成)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무상(無常) 속의 영원을 보여준다.  강은  날마다 판토마임으로  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다.  < 구상연작시집, 시문학사, 1985>  신경림 시인은 강을 '울음'이 밴 강으로 보고 있다. 역사 속에서 한없이 울기만 했던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강(江)  신경림  빗줄기가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진흙 속에 꽂히고 있다  아이들이 빗줄기를 피하고 있다  울면서 강물 속을 떠돌고 있다  강물은 그 울음소리를 잊었을까  총소리와 아우성소리를 잊었을까  조그만 주먹과 맨발들을 잊었을까  바람이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강물 위를 맴돌고 있다  아이들이 바람을 따라 헤매고 있다  울면서 빗발 속을 헤매고 있다    김용택은 섬진강변 시골 분교의 교사다. 그가 바라보는 강물은 어둠의 강물이면서 핏줄이다. 어둠을 씻어주면서 어둠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스민 강이다.  강  김용택  겨울 짧은 해 침침하게 진다  저뭄에 홀리고 홀려서  저문 데로 가서 그림자만 부리고  저물어 돌아오면 누가 그대 온 줄 알겠는가  하루를 저물게 하여  강물은 끊임없이 어둠을 실어가  세상을 다 저물게 한다  보아라 어두운 강물에 언뜻언뜻 보이는  강물의 희디흰 뼈  피도 보이지 않는다  저물 때 저물어 가서  저물어 돌아오면 누가 그대 돌아온 줄 알겠는가  소리없이 흐르는 물 가까이 걷는  그대의 기쁨을 누가 알겠는가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에  그대 핏줄을 잇고  핏줄 끝을 잡고 나는 풀잎처럼 쓰러져 강이 된다    강 1  이성복  남들은 저를 보고 쓸쓸하다 합니다  해거름이 깔리는 저녁  미류나무 숲을 따라갔기 때문이지요  남들은 저를 보고 병들었다 합니다  매연에 찌들려 저의 얼굴이  검게 탔기 때문이지요  저는 쓸쓸한 적도 병든 적도 없습니다  서둘러 그들의 도시를  지나왔을 뿐입니다  제게로 오는 것들을 막지 않으며  제게서 가는 것들을 막지 않으며  그들의 눈 속에 흐르는 눈물입니다    이성복 시인의 은 의인화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을 생명 있는 존재로 인식하면서, 모든 것을 씻어주고 거두어가는 존재로 보고 있다. 이렇듯 동일한 소재라도 바라보는 이의 시각이 어디에 머물고 있으면 어떤 의식에서 사물을 보느냐에 따라 사뭇 달라지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재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일이다. 나의 시각에서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소재를 발견하는 일은 자신의 몫이다. 소재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시를 쓰는 이의 의식에 달려 있다. 건강한 의식과 건전한 비판 정신, 그리고 사물에 대한 애정은 좋은 시를 쓰는 기본 자세다. =======================================================================================       휴전선 ―박봉우(1934∼1990)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신문을 읽다가 한 흑백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누더기 옷에 보퉁이를 멘 어린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라는 글이 달려 있다. 아, 육이오…,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커튼을 내리고 불을 꺼서 캄캄한 교실,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 속에서 빗발치는 포화며 울부짖는 피란민들이며 그들을 가득 실은 트럭이며 기차를 숨죽이고 보던, 1960년대 초등학생 적 기억이 떠오른다. 전쟁에 대한 공포가 가슴을 가득 메웠더랬다. 대부분 사람이 죄 없이 영문 모르게 터지는 전쟁. 어린아이나 동물은 전쟁의 비참을 더 가혹하게 겪는다.  휴전선에서 다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이라며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을 예상하고 진저리치는 이 시는 전쟁의 상처에서 아직 진물이 흐르는 1956년에 발표됐다. ‘시방의 자리’ 휴전선이 일촉즉발로 여겨지던 때. 세월이 흘러 많은 한국인의 전쟁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고 삶이 화사해졌지만, 시인 박봉우는 끝내 그 상흔을 벗지 못했다. 민족의 구원을 개인의 구원보다 앞에 뒀던 시인은 술과 가난의 나날을 보냈다 한다. 이제 ‘시방의 자리’가 일촉즉발로는 여겨지지 않지만, 여전히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인 휴전선. 경의선 임진강역 구내에 가면 이 시를 새긴 시비를 볼 수 있다고 한다.  
386    현대시는 전통과 현대 서구적인것의 접목작업을 공감하기 댓글:  조회:2300  추천:0  2017-04-04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박종헌  3. 상상력을 부르는 체험과 관찰  천 년 몇 천 년이 걸릴지라도  네가 내게 입맞춤하고  내가 네게 입맞춤한  그 영원의 한 순간을  말, 다할 수가 없으리.  겨울 햇볕이 내리쪼이는 아침  공원에서의 일이었네.  < 몽수리>공원은 파리의 안,  파리는 지구 위,  지구는 별의 하나.  자크 프레베르   시의식의 확대를 통해 범우주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시이다. '벤취 위에서 입맞춤을 하는 연인―몽수리 공원―파리―지구―우주' 로 확대되는 상상력이 독자를 자연스럽게 우주적 사고로 이끌고 있다.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 이토록 크고 넓은 우주적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바로 시인의 상상력이다.  시는 소재가 훌륭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재를 어떤 의식에서 비라보고 관찰하며 또한 상상력으로 표출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 1968.5.29)  4. 시- 체험의 결과물이다  시는 결국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쓰여지지만, 그 이전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면 시인의 체험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시를 머리로 쓰느냐, 아니면 가슴으로 쓰느냐, 아니면 몸으로 쓰느냐 하는 구분을 확연히 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시는 '온몸으로 쓴 시'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가슴(情)으로 쓴 시'에서 막연한 감동을 공감하게 된다. 이는 천박한 감상주의로 인해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명시'라고 들어 온 많은 시들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고운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관념적 체험만 있으며, 그 관념도 '왜?'란 질문에 뭐라 답할 수 없는 막연함이 느껴진다.  읽는 이에게 ' 깃발을 꽤나 어렵게 표현했군'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할 뿐 별 감동을 주지 못한다. 교과서에도 실린 에서 비유·상징의 묘미는 얻을 수 있을 망정 시가 지녀야할 내용성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별로 할 말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추상적 의미를 구체화시키며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체적 사물을 추상적 의미로 바꾸어 낯설게 하고 있음에 의의를 찾아야 할까? 날아가지 못해 찢기우고 헤지는 색바랜 깃발이 더 우리의 마음을 흔들지 않는가? 지금은 그래도 많이 바뀌었지만 이 같은 시들이 중·고등학교의 국어교과서를 온통 뒤덮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의 어린 학생들 시에서 우리는 머리로 쓴 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진실된 체험이기보다는 '그럴 것이다'란 당위성에서 쓰여지는 시, 어른의 흉내를 낸 시들이 백일장을 휩쓸고 있다.  봄의 소리  새롭다.  꽃잎이  열리는 소리.  나비의  날개 젓는 소리.  봄의 소리  들으면  가슴이 열리고  마음은 훠얼훨  하늘을 난다.  초등학교 6학년 의 시  초등학교의 어린이가 쓴 시에도 이처럼 억지 감동의 글이 있다. 어른들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심한 이 같은 꾸며진 상상은 상상이 아니라 거짓이다. 상상력과 거짓은 다르다. 상상력은 현실에 뿌리박고 있는 건강함과 진한 감동을 느끼게 하지만(딱지 따먹기), 거짓은 뿌리가 없으면서도 마치 있는 듯이, 그럴 수 있을 것이란 짐작으로 위장된다(봄의 소리).  딱지 따먹기를 할 때  딴 아이가  내 것을 치려고 할 때  가슴이 조마조마한다.  딱지가 홀딱 넘어갈 때  나는 내가 넘어가는 것 같다.  강원 사북초등학교 4학년 강원식 ,『나도 쓸모 있을걸』1990.창작과 비평사  시는 마음이다.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다. 시삼백이면 사무사(詩三百 思無邪)라고 했다. 진실된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거짓이 없다는 얘기다.  우리는 이쯤에서 뛰어난 독일의 서정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충고 몇 마디를 떠올려 보아야겠다.  ①모든 사건은 언어를 넘어선 영역 속에서 일어난다.  ②자기 자신 속에 침잠(沈潛)하라  ③쓰라고 명령하는 근거를 캐어라  ④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써라  ⑤쓰지 않고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필연 속에서 써라  ⑥자연에 근접하라. 그리고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게 될 것을 모방하지 말고 표현하라  ⑦보편적 주제를 피하라  ⑧창조하는 자에게는 빈곤도 없다  ⑨어린 시절의 풍성한 추억의 보고(寶庫)를 간직하라  ⑩자기 자신 즉, 고독 속에 파고 들라  릴케의 이와 같은 충고는 우리를 주눅들게 하기 충분하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시도 하나의 글에 지나지 않으며, 글이란 자신의 생각을 담는 것에서 시작된다. 글에 대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포기하기 때문이다. 릴케의 충고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라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독(毒)을 차고 ―김영랑(1903∼1950)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이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훑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고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 마주 가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얼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김영랑 시집’(범우)에 실린 시인 연보를 훑어보다가 ‘1926년 장녀 애로(愛露) 출생’에서 입 끝이 빙긋 올라갔다.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딸 이름을 정성껏 짓는다면, 요조하고 현숙한 여인을 기원하는 마음이나 인생의 심원한 뜻을 담던 시절에 ‘애로(사랑의 이슬)’라니! 세상 눈치 보지 않는 자유로운 의식, 그리고 사랑과 아름다움과 쾌락을 추구하는 찬란한 감각이 엿보인다.      선생의 시는 ‘서구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전통적인 시형을 현대시 속에 끌어들여 전통적인 것과 현대 서구적인 것의 접목 작업에 성공하고 있다. 특히 호남지방의 토착적인 언어를 탄력적으로 구사하여 언어예술로서 시의 참맛을 살려나간다’(평론가 김우종). 쉽고 친근한 시어로 시심을 불러일으키는 선생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내 마음을 아실 이’ ‘오― 매 단풍 들것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에 공감하고 애송하는 독자가 많을 테다.  ‘독을 차고’는 선생이 나긋나긋한 감성의 ‘초식남’이기만 한 게 아니라 강건한 뼈와 근육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짧은 인생 그냥저냥 살고지고, 하는 친구에게 설핏 경멸의 독기를 뿜으며 끝내 독을 차고 가련다는 이 기개! 의당한 독을 버리고서야 어찌 사람이겠는가. 이 슬픔의 독, 분노의 독을 차고 가리라! 이 시는 식민지 시대 말기의 반항의식을 나타낸다고 한다. 선생이 6·25전쟁을 무사히 넘기셨으면 이후 어떤 시를 쓰셨을까….  
385    시작하기전 철학공부를 하지 안아도 된다?... 꼭 해야 한다!... 댓글:  조회:2296  추천:0  2017-04-03
  철학이란 무엇인가 - 철학의 이해 강의론  1. 철학이란 무엇인가  *G.Simmmel 1858-1918 인간의 生 1)보다 많은생 more life을 위한 본능적,충동적 노력  2)理性에 의한 생 more than life :logos  *비판적 삶: 내가 나의 주인이되는 것 :의 라스콜리니프의 의식,타성으로부터의  탈피  *phliosophy philos(사랑)와 sophia(지)의 합성어  Platon의 饗宴: 풍요의 神 polos와 빈곤의 여신 penia의 자식 eros(중간자)니체는 인간을 줄 타기 하는 존재라고 하였고 사랑은 완전을 향해 노력하는 과정이다.  *Sokrates (BC 470-400)는 sophist(지자)들-修辭學,雄辯術-詭辯학파로 변질-에 반대하여 자신은 참된 지식을 가지지 않은 無知者임을 깨닫고 참된 지식을 사랑하며 그것을 차지하려고 노력하는 자라라고 천명함.  *인간의 정신활동은 1)知:학문의 세계 2)情:예술3)意:종교로 나눌 수 있다. 知는 로고스의 세계이고 정과 의는 파토스의 세계이다  *logos는 言語.이성,사유,도덕율,법률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HerakleitosBC544-484는 만물을 지배하는 영원한 법칙으로 세계법칙 즉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서 모든 변화에 질서와 조화를 주는 법칙으로 이해한다.  *철학은 로고스의 세계이다.변화 속에서 영원히 불변한,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세계를탐구한다.철학은 감각적 지식으로부터의 탈피를 구한다.감각적 지식은 플라톤의 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에 나타난 바와 같이 동굴 속의 인간은 감각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철학과 과학의 차이  1) 철학은 존재를 전체로서 다룬다. 존재론 Aristoteles:제일철학,形而上學  2) 철학은 주체를 주제적으로 다룬다: 인간 자신에 대한 자가,반성  3) 철학은 여러 과학의 기초를 비판한다.:公理와 같은 전제:認識論:지식에 관한 이론  *인식론은 참된 인식,진리에 관한 이론이다  2. 진리에 대한 탐구  *진리의 의미:1)진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진리의본성이 무엇인가?2)어떤 판단이 거짓이아니고 참이란 것을 어떻게 아는가?  1)對應說(관념이실제와일치,대응할때의진리,판단이사실에대응할때진리이다 correspondence theory  模寫說copy theory;우리의 인식능력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반영한다.마음에 가 지는 表象이나 관념은 바깥 세상의 모사이다  @감각적 모사설:대상이 주관과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실재한다.실재론realism대상이 먼저 실재하며 우리 감각이 이것을 그대로 모사한다.감각은 사물을 사실 그대로 모사하지는 못한다.  사물의 성질: 제1성질 primary qualities:크기,형태,운동,정지,수,충전성 제2성질secondary qualities:색,미,향,음,차가움과 따뜻함,硬軟 제1성질은 객관적이다.제2성질은 주관적이다.-모사설이 적용되지 않는다.사과가 둥글다는 나의 관념이 사실과 일치하는가?게속 새로운 관념만을 만든다.  @이성적 모사설:이성이 파악하는 대상은 보편적 존재이다.이성은 논리적 추리이외에도 직관의 능력도 가지고 있다.직관은 대상을 한꺼번에 파악한다.  @Platon의 Idea  이데아는 모든 존재의 본질이다.본질이란 어떤 것을 바로 그것이게끔 하는 것으로서 관념,개념의 이데아도 존재한다.이데아는 天上界에 있다.현실게를 초월하여이데아는 불생불멸하고 영원불변하는 존재이다.지상계의 만물은 이데아를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므로 세계는 천상게와 지상계로 나뉜다.이데아는 지상게를 초월하여 있으며 우리의 이성은 천상계의 이데아를 모조리 파악하고 있다.lethe(망각의 강)을 건너면서 모든 지식을 잊는다.인간의 육체 속에 갇혀 있으므로 想起하여 aletheia(진리)를 찾아야 한다.  @물음  진리란 발견이고 발명은 아닌가? 우주선은 창조가 아닌가?과거적 진리관이 아닌가?  2)整合說:새 이론이 기존체제와 부합할 때의 진리coherence theory,새로 가진 지식 또는 판단이 기존의 판단체게에 모순됨이 없이 알맞는가?  @ 형이상학적 관념론 F.H Bradley 1846-1924  실재란 완전한 질서를 가지고있고 충분히 이해 가능한 체제이다.개개의 것은 언제나 전체와의 관련에서만 올바르게 관찰되고 이해된다.어떤 한 판단의 진리는 그 판단 하나만을 검토해서는 안되고 더 질서있는 전체와의 정합에서 이루어진다.지니리는 우리의 사유가 전체로서의 실재에 무한히 접근해 가는데 있다.  @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사실들의 세계  언어,지식의 세계. 언어분석학은 사실에 대한 記述,이미 얻은 지식의명료화가 주요 임무이다.사실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언어를 문제 삼는다.형식과학  분석명제:주어를 분석하면 끌어낼 수 있는 주엉와 술어가 일치하는 어떤 조건하에서도 옳은 명제이다.  종합명제:경험을 매개로 한 주어와 술어의 종합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게될 때  형식과학은 분석명제만을 다룬다.  @ 물음: 정합만이 유일한 본성일까?  3)實用主義pragmatism진리관(어떤 생각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보아 예상대로 들어맞을 때의 진리):지식을 그 자체로 다루지 않고 생활상의 수단으로 간주한다.편리와 유용성을 확보할 때 참이다  C.S Peirce 1839-1914,W.James 1842-1910,J.Dewey 1859-1952  과학의 실험적 방법 도입,과학적 조작,객관적으로 관념을 명석하게 하는 방법,보통 사용되는 정언명법은 가언명법으로 번역한다. if - than 만일에 조작 O를 하면 그러면 경험 E가 결과할 것이다.진리란 만족스러운 것 What is satisfactory 유용한 것 What is useful 효험이 있는가 What works  *숲속에서의길찾기  실용주의는 도구주의이다,檢證verification 따라서 진리란 영원불변한 고정적인 것이아니다.인식자,행위자에 의헤 창조된다.  3. 진리의 기준  1)合理論:본유관념의 직관적 파악에서부터 연역적 추리에 의하여 진리에 이른다  2)經驗論:본유관념을 부정하여 우리의지식을 오로지 감각적 경험에서 설명함  3)Kant의비판론:1),2)의 종합,인식이 경험적이므로 실질적 내용도 갖추고 동시에 논리적이므로 보편타당성을 띠므로 진리이다.  4)生哲學:직관,이해,해석의 방법:베르그송,딜타이  5)과연 인식은 머리 속의사고로 이루어지는가?  물리학의 操作主義,不確定性원리,미국의실용주의;행동과 실천의 측면,논리적 실증주의  *인식론의 과제  인식에는 인식의 주체와 객관의 두 요소가 있다.즉 주관이 객관(대상)을 아는 것이다.거꾸로 대상으로부터 앎 자체로 옮겨 앎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으로 돌릴 수있다.  theory of knowledge 지식에 관한 이론 지식론:지식 자체에 대한 반성  * J.Locke 1632-1704  확실성 범위를 확정시켜야 한다.즉 이성에 대한 비판.인식한다는 것은 하나의 심적 과정이다. episteme(진리) epistemology 진리에 관한 학.지식을 가지기 위해서는 감성적 직관과 이성적 사유가 필요하고 이것으로 인식의 진위를 결정하지 못한다  *Kant 1724-1804  사실의 문제,권리의 문제 개인적 심리작용을 넘어서서 그것을 보편타당한 진리이게 하는 근거는 무엇이며,지식이 진리임을 주장하는 권리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어떤 조건을 갖출 때 지식을 진리라고 하는가?  *사회적 통용성을 지니고 있는 지식을 常識이라 한다.상식은 일상생활의 편리성,시행착옹의 과정을 회피하게 해주는 사회적 유용성을 가진다.상식은 유동성을 가진다.상식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지식이다.  *진리는 普遍妥當性,때와 장소,사람에 따라,시간과 공간,주관을 초월하여 타당한 것이다ProtagorasBC 484-414소피스트는 '인간은 만물의척도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의미는 진리에 하나의 척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주관마다 자기 자신이 척도라는 듯이 강하다. 즉 보편적으로 타당한 절대적 진리가 있을 수 없다는 상대주의나 회의론에 봉착한다.회의론을 주장하는 당사자들의 주장도 또한 상대적이지 않은가?  철학의 이해 강의록 (합리론)  合理論 (Rationalism:唯理論,理性論:경험론에 대립된 합리론)  Descartes: 인간의 인식능력은 이성과 감각에 있으며 이성만이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이성은 선천적 인식능력이다.이성은 무한한 절대자가 유한한 인간에게 부여한 절대적인 능력,신적인 능력이다.가장 엄밀한 진리는 수학적 방법,直觀과 演繹적 절차를 거치는 것이다.다른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 公理를 구하는 것이다.  1. 수학적 방법  진리의 확실한 인식을 위해서 인간에게 허용된 길은 명증적 직관과 연역 이외에는 없다. 즉 모든 명제를 자명적인 공리로부터 연역해내는 기하학적 방법이다 기하학은 공리를 시인하면 나머지 전 체제도 인정해야하는 필연적인 논증의 체제이다.  철학에 필요한 방법적 懷疑: 제1원리,다른 명제로부터 논증되지 않고 스스로 명백한 원리를 찾기 위한 방법  지식의 분류 1.特殊知 2. 普遍知 3. 一般知는 제1원리가 되지 못한다.  1)특수(Particular):감각적 지식은 꿈의 假說에 의해 반증된다.  2)일반(general):사티로스Satylos(半人半羊의 숲의 神)의 예 공상적  3)보편(universal): 延長,形狀,數 ,空間,시간에 관한 지식 전능한 악마의 가설  데카르트의의 제1원리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 직관에 의해 파악된 명제(직관은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이다)직관은 오로지 이성의 빛으로 부터만 생기는,순수하고 주의깊은 정신의 의심할 여지 없는 인식이다.  明晳: 주의하는 정신에 現前하여 분명한 인식  判明: 명석하고 또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구분되어 있어서 그 속에 명석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내포하고 있지 않은 인식  2. 본유관념설(innate ideas)  * 관념(지식)의 분류: 1)감각으로부터 얻어지는 외래관념 2)외래관념을 기초로한 虛構觀念  3)본유관념(生具觀念,生得觀念):선천적 a priori:신의 관념  * 합리론은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데카르트는 극히 일부분만 본유관념이고 대부분은 외래관념이라고 주장한다.  *라이프니즈 Leibniz는 외래관념을 인정하지 않고 정신은 우리가 가지는 모든 표상을 본래부터 가지고있는 것이며 감각은 정신이 본래부터 가지는 표상을 가지되 이것을 무의식적으로 잠재적,함축적으로 가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철학의 이해: 경험론  경험론empiricism우리의 인식은 오로지 감각적 경험에서부터만 생긴다.자연과학의 업적을 바탕으로 감각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자연과학의 객관적 태도)  참된 철학은 오로지 이성의 힘에만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박물학이나 실험에 수집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어거나 기억 속에 저축하지 않고 오히려 그거을 변화시켜 오성 속에 저축하는 것이다.  베이컨Bacon은 과학적 연구를 방해하는 편견(선입견)을 4가지 偶像으로 나눈다  1)종족의 우상(idola tribus):자연은 인과관계에 따라서 기계적 변화를 하며 인간이 가지는 감각이나 오성에 따라 세게가 변화해 나가는 것이아니다.  2)동굴의 우상(idola specus): 각 개인은 기질으 차이,교육과 지식의 차이,성격과 기호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 그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3)시장의 우상(idola fori): 언어 사용에 따른 폐단이다 언어는 한갓 기호에 불과하다.  4)극장의 우상(idola theatri):권위나 전통에 따르려는 편견  歸納法(induction): 관찰과 실험에 의해 사실을 수집하고 난 다음에 이 사실들의 원인과 법칙을 발견하는 방법 knowledge is power: 앎이란 자연에 관한 앎이며,힘아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힘으로써 인류문화를 발전시킬 힘을 말한다.  로크 J.Locke;인간의 마음은 백지이다.(tabula rasa).지식의 기원은 경험이다.경험은 감각(sensation)과 반성(reflection)으로 구성되는데 감각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반성이다.이로 인해서 단순관념이 얻어지고 단순관념이 결합하여 복합관념 및 이것들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단순관념의 제1 성질: 사물이 가지고 있는 객관적 성질 크기,모양,운동,정지  제2 성질: 주관적 상태 색,맛,향기 (인간 주관의 해석)  * 마음이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관념이다. 인식이란 두 개의 관념의 일치,도는 불일치에 대한 지각이고,진리란 두 개의 관념의 올바른 결합 또는 분리를 뜻한다.  * 지식의 분류  직각적 지식 : 다른 관며을 개입시키지 않고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지식:제일 확실한 지식  논증적 지식 : 사물이나 자연현상에 대해서 내려지는 보편적 명제는 개연성을 가진다.  감각적 지식 : 감각을 통해서 사물에 관해서 아는 지식 :제일 불확실함  버클리 G.Berkeley  *로크의 관념의 제1,2성질을 부인함. 모든 지식은 주관적이다.제 1성질은 제 2성질에 관한 감각들 상호간의 관계에 불과하다  * esse est percipi= To be is to be perceived =있다 함은 지가되어 있음을 말한다=존재는 지각이다.  *관념들의 묶음 bundle of ideas: 우리의 주관은 지각에 있어서 결코 주관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관념론idealism  인식의 대상이 우리 주관을 떠나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이 인식함으로써만이 존재한다.  주관적 관념론 subject idealism,spiritualism(唯心論)  버클리: 지각은 언제나 어떤 주관이 하는 것이고,관념을 가지는 자는 반드시 어떤 주관이다.그 주관이 지각함으로써만 사물은 존재한다.  *실재론  주관과 관게없이 대상이 객과넉,독립적으로 실재한다.  흄 D.Hume  *지각내용은 印象impression과 관념 idea이다  인상:내적인 감정이나 외적 감각에 최초로 나타나는 생생한 표상  관념: 인상들을 마음 속에 재현시킬 때 의식되는 덜 생생한 지각  *모든 단순관념은 그에 선행하는 단순인상의 模寫이다  *관념들의 결합에 있어서 로크는 인간 오성의 능력을 중요시 하지만 흄은 관념들 상호간의 引力과 같은 힘이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관념결합의 규칙들:연합관념의 법칙 law of association of ideas  1)類似 resemblance:  그림이 실물을 연상하게 하듯이 서로 유사한 관념끼리  2)隣接 contiguity in time and space  어떤 방이 그 옆방을 연상하게 하듯이 서로 인접해 있는 관념끼리  3)因果 cause and effect  상처가 고통을 연상하게 하듯이 서로 인과관계에 있는 관념끼리  *思考,學問의 대상  1) 관념상호간의 관계:수학은 객관적 사실을 도외시하고 관념간의 관계를다루기 때문에 그 명제는 모두 직각적으로 확실하거나 논증적으로 확실하다. 이런 지식은 절대적 필연성을 갖는다.  2)사실:경험에 의존 ①사실에 관한 감각적 경험에 관한 서술 ②감각과 기억을 넘어서 다른 사실로 추리해 가는 것:논리적 필연성이 없슴.추리는 인과관계를 토대로하는 인과적 지식.  *인과적 지식 :경험적 지식으로부터 초경험적인 인과적 주장을 할 수 있는가?  *인과적 지식은 인접의 연합법칙으로부터 習慣이 형성되고 신념으로 확장된다.  *인과는 필연성이 아니라 개연성 probability이기 때문에 인과적 지식은 필연적이고 보편타 당한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적 지식을 파악할 수 없다;懷疑論  * 물질적 실체도 정신적 실체도 없고 오직 인상과 관념만이 존재한다.  철학의 이해 : Kant의 종합론  *합리론:지식의 원천을 이성의 사유에서만 찾기 때문에 그 지식은 선천적이며 따라서 필연적,보편타당적이다.그러나 경험과 관게가 없는 지식이므로 내용이 없고 공허하다  *경험론:지식의 원천이 감각적 경험에만 있으며 그 지식은 후천적이고 현실에 부합되므로 객관적이다.그러나 필연성이 없고 개연적이며 보편작이지 못하고 주관적.상대적이다.  *Kant :진리는 경험적이어서 내용도 있어야 하고 동시에 이성적이어서 필연적이고 보편타당성을 가져야 한다. 즉 진리는 실질적 진리이어야 한다.  *실질적 진리는 존재한다:자연과학과 수학  *인간의 인식능력  1)감성: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수용능력  2)오성: 감성이 받아들인 지각에 관해서 사유함.필연적 보편타당성 보장  3)이성: 초감성적인인 것에 관한 사유  * 감성과 오성의 기능이 결합되어 인식이 성립함.  * 인간의 감성은 신적 감성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낼 수 없다.그러므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質料가 필요하다.질료란 그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장차 어떤 것으로도 될 수 있는,인식으로 만들어질 소재 즉 雜多이다. 잡다는 질서가 없고 정돈되어 있지 않다는 것,혼돈이다. 감성은 잡다한 질료에 질서를 주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지식으로 만든다.이것이 능동적인 감성의 形式이다.  * 감성의 형식은 선천적 a priori 즉 논리적으로 경험에 앞서며 경험에서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그러나 질료는 인간 감성에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므로 후천적이고 경험적이다.  * 직관:선천적 형식은 후천적으로 주어진 것에 능동적으로 관여하여 감성적 지식을 성립  한다.  * 先驗的 형식:선천적이면서 동시에 경험적 지식을 가능케하는 것이다.인식형성상 경험과 무관하면서도 감각적인 질료에 관여하여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구성하는 기능이다.  * 인간감성의 선험적 형식: 시간과 공간:어떤 지각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하에 있다.  * 직관은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식이 아니다.  * 오성: 자발적,능동적인 사유기능으로서 오성에 주어지는 질료는 감성에서 성립된 직관이다.이 직관은 감성에서와 같이 잡다하여 오성의 형식이 필요하다  * 오성의 형식: 範疇 category:단일성,실재성,실체와 속성,원인과 결과  * 인식의 대상은 대상의 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성립한다.  * 대상이 외계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은 인간 주관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외부에서 들어오는 질료는 이것을 정리하는 인간의 주관형식에 따른다.  * 物自體: 현상계에 자기자신을 현상으로서 나타내면서 스스로는 나타나지 않는 것,현상의 원인이 되는 것,질료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 理性: 물 자체는 인식될 수 없으므로 있다고 할 수 없지만 물 자체에 대해서 논의는 할 수 있다.질료가 감성에 주어져서 직관으로 정리된 것울 사유하는 것이 오성작용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감성에 주어지지 않은 초감성적인 것에 관해서 사유하는 능력이 있는데 이것이 이성이다.  * 이성의 二律背反  1) 세계는 시간,공간적으로 시초가 있다- 없다  2) 세계에서의 모든 것은 단순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니다  3) 세계에는 자유가 있다- 없다  4) 세계의 모든 것의 궁극적 원인으로서의 절대적 존재 즉 신이 있다- 없다  * 이율배반: 서로 모순,대립하는 두 명제가 동시에 같은 원리를 가지고 주장되는 것  *矛盾: 反對의 개념과 다르다(대의 반대는 소이지만 대의 모순은 대 아님이다)  * 진리는 감성과 오성의 종합에서만 이루어지며 두 기능의 범위에서만 존재한다.  *이성적이 아니면서 인간에게 고유한 성질들:충동,본능,의지,생;비합리주의적 견해들  * 생철학: 의지나 충동같이 비이성적이고 반 이성적인 운동,생성,변화가 참된 존재  A.Schopenhauer 1788-1860: 생에의 의지(결핍의 상태를 채우고자하는 끝없는 노력)  F.W.Nietsche 1844-1900:힘에의 의지  H.Bergson 1859-1941:생동하는 대상을 추사적인 언어나 개념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대상을 어떤 기호로 번역하는 것이다.대상의 속으로 들어가 직관 즉 대상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내부적인 것과 합일하는 정신적 공감,주객합일의 경지에 들어가야 한다.  W.Dilthey 1833-1911:생은 충동적인 흐름이다.이 충동적인 흐름은 역사적이다.생의일반적 특징 1)구조연관:생은 아무리 분석해도 결코 단순요소로 환원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2)발전연관:충동은 정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도약한다. 3)획득연관:이미 체험된 과거의 구조연관이 현재의 생에 살아 있어서 습관,전통,성격을 이루고 무의식으로 움직인다.  체험:생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활동-표현:내면에서 체험된 것을 외면화,객관화함- 이해:표현의 파악,즉 바같에 나타난 표현을 통해서 속에 있는 것을 인식하는 과정- 해석:지속적이고 고정적인 표현의 기술적 이해  *실용주의적 진리관  1) 실용주의는 진위의 기준을 有用性에 둔다  2) 탐구: 불확정적 상황 - 가설의 설정-추리-실험-확정된 상황 생은 탐구의 연속이다.  3) 지성: 이성이 추상적인 개념을 재료로 하여 보편타당적인 지식을 목표로 하여 초경험적이다. 그러나 지성은 경험속의 사고로서 경험이 부단히 제공하는 문제적 상황을 과거에 비추어 미래의 가능성을 예측하여 해결의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     
384    시작은 섣부른 감정을 억제하고 간접화법으로 노래하라... 댓글:  조회:2204  추천:0  2017-04-03
    -이근배- 김기림의 수필 [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글은 1936년 그가 스물여덟 살 때  쯤 발표한 것입니다. 김기림은 함경도 성징 태생으로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1914년, 즉 막 한일합방이 되던 무렵, 아버지는 계모를 들였고, 어린 소년이 어떻게 자라왔  느냐를 짧은 수필에 담았습니다.  '나의 소년 시절은 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喪輿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江가로 내려 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江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  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  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이 수필은 몇 대목에서 우리가 음미할 대목이 있습니다. 즉 도입부는 한 문장입니다. 첫 문  장에서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자기 마을의 풍경과 두 번째로는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라  는 대목으로 어머니를 일찍 여의였음을 말하고, 세 번째로는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  다'라는 대목에서 유년 시절이 방황과 배회로 점철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두 번째 문장의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는 얼마 전 작고하  신 황순원 선생의 [소나기]에서와 같은 사랑을 그린 겁니다. 그래서 푸른 하늘 빛에 이끌려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줏빛으로 젖어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강가라는 공간과  노을이 지는 시간이 자기 속에 어떻게 각인되느냐를 이미지로 그린 게 실감나게 그려졌습니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가마귀는 텃새입니다. 반면에 두루미는 철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새를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가마귀와 두루미로 상징되는, 어린 소년을 보살펴 주던 어머  니며 누이들이 떠나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 '모래둔(모래언덕)'과 '어두운 내 마음  '은 병치되어 있습니다. 쓸쓸한 마음을 깔깔하고 음산한 모래둔에 비긴 것입니다.  '어느 새 어둠이 기어와서'에서는 동구 밖에 우두커니 서 있는 소년이 보이고, 뺨의 얼룩에  서는 그 소년의 볼에 흐른 눈물이 보입니다. 어둠이 눈물을 가려주는 것을 수사법으로 그린  것입니다.  제가 이 수필을 굳이 들려 드리는 까닭은, 가령 저 같으면 한번쯤이라도 슬프다거나 울었다  거나, 눈물이라거나 그립다거나 외롭다거나 하는 말들을 쓸 법한데 잘 절제되어 있기 때문  입니다. 말을 쓸 때 직접적인 말을 쓰지 않고, 어떻게 간접화법으로 수필이며 시를 썼는가  하는 것에 눈뜨게 하는 명편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도 간접화법을 이용하여 말맛을 자아내면  서 자신의 심상을 그리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383    시는 멀리에 있는것이 아니라 가까운 삶속에 있다... 댓글:  조회:2703  추천:0  2017-04-03
    -이근배- 끼니때가 되면 온 가족이 다 모입니다. 알 전등이 켜질 무렵에야만 직장에 갔던, 학교에 갔  던, 밖에 나갔던 온 가족이 모이는 그 때에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이 모이는 거죠. '  내 신발은 19문 반 /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곁에 벗어놓으면 / 육문 삼의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하고 노래했는데, 가장인 박목월 선생에게 '눈과 얼음의 길'은 추  워서가 아니라 바깥 세상이 늘 살얼음판같이 춥고 냉혹하다는 걸 그린 겁니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는 밖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가장은 늘 넉넉하고 자신이 있어  야 함을 말한 겁니다. 영국의 경찰은 뛰지를 않는답니다. 경찰이 뛰면 시민이 불안하다고 해  서 말입니다. 어쨌든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어도 아버지는 웃습니다.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 여기는 / 지상.' 하는 대목도 얼음집이 아니라, 세상은 그  렇게 냉혹하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 내가 왔다. / 아버지가 왔다. /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  半)의 신발이 왔다.' 하는 대목은 박목월 선생의 절창이라고 봅니다. 일제와 해방과 육이오  를 지내면서 살아온 십구문반의 신발을 신은 아버지지만, 그는 여전히 웃습니다.  이런 시 하나를 보더라도 그 시대상 그 자신을 씀으로 해서 시인은 그 시대를 쓴다고 했는  데, 목월 선생이 사시던 시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미당 선생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앞에서 잠깐 말씀드린 [수대동시]의 무대인 수대동은  미당 선생이 나신 마을입니다. 이 시는 사회집에 실려 있고, 41년에 [사회집]이 나왔으니까  30년대 후반에 쓰신 [자화상]과 같은 무렵에 씌어진 시일 것입니다.  흰 무명옷 갈아입고 난 마음  싸늘한 돌담에 기대어 서면  사뭇 쑥스러워지는 생각, 고구려에 사는 듯  아스럼 눈감었던 내 넋의 시골  별 생겨나듯 돌아오는 사투리.  등잔불 벌써 켜지는데……  오랫동안 나는 잘못 살았구나.  샤알 보오드레―르처럼 섧고 괴로운 서울 여자를  아주 아주 인제는 잊어버려,  선왕산 그늘 수대동 십사번지  장수강 뻘밭에 소금 구어먹던  증조할아버지 적 흙으로 지은 집  어매는 남보다 조개를 잘 줍고  아버지는 등짐 서른 말 졌으니  여기는 바로 십 년 전 옛날  초록 저고리 입었던 금녀, 꽃각시 비녀 하여 웃던  삼월의  금녀, 나와 둘이 있던 곳.  머잖아 봄은 다시 오리니  금녀 동생을 나는 얻으리  눈썹이 검은 금녀 동생,  얻어선 새로 수대동 살리.  -[수대동시(水帶洞詩)] 전문  이 시는 제가 보기에는 미당 선생이 타향에 나와서, 고향인 수대동이라고 하는 마을을 돌아  다보며 쓰신 시 같습니다. 그런데 제일 처음 이렇게 시작합니다. '흰 무명옷 갈아입고 난  마음' 저는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가 목화를 따서 명을 자아, 베틀에다 무명을 짠 옷을 입고  자랐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옷을 자주 얻어 입지를 못했는데, 요새는 얼마든지 시장이나  백화점 같은 데서 기성품을 많이 사서 입습니다만, 그때는 명절 때나 한 벌 얻어입는 설빔  이나 추석빔 같은 것이지요. 우리의 시어, 모국어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흰 무명옷 갈아입  고 난 마음'을 서양 말로 옮겨 놓으면 그 뜻이 전혀 통하지 않겠지요.  미당의 시를 영어나 불어로 번역하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옷을 갈아입은 게  어떻단 말이냐 하겠지만, 미당은 당신이 어렸을 때 어머니나 할머니가 새로 지어주신 흰 무  명옷을 갈아입었을 때의 그 마음, 산 게 아니라 어머니, 할머니가 손수 짜고 손바느질된 것  을 입었을 때의 기쁨과 편안함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재작년인가 금강산을 찾았을 때의 일입니다. 장전항에서 배가 돌아오는데, 어둑어둑해  질 무렵 배가 동해 바다로 돌려고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궁금해서 갑판 위로 나가 보았더  니 '어머니 어머니!' 부르면서 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향에 부모를 두고 온 이산가족  들로, 고향 근처까지 왔는데 안부도 전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서야 하는 슬픔이 북받쳐 그렇  게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인지상정이니까 어머니를 부르며 울 수 있겠다 싶어  서 별로 감동스럽지 않아, 당연하다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저를 울린 말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찬 바다를 향해 울부짖으며 하  는 말 가운데 이런 게 들렸습니다.  "어머니, 저는 김치만 먹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를 그렇게 두고 제가 어떻게 잘 먹겠습니까?"  저는 이 말을 듣고서, 박완서 선생께 "저건 시인이나 작가들이 상상력으로는 쓸 수 없는 말  입니다"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 중에서 '어머니, 저는 김치  만 먹고 살았습니다.'라고 한 건 참으로 절묘하지요. 이것도 축자적으로 번역한다면, 서양인  들은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모국어라는 건 무엇일까요. 김치만 먹고 살았다는 말은 곧 '잘 먹고 잘 살지 않았다'는  뜻이듯, 축자적으로만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 속에는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과 어머니의  가난한 삶과 그리움이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당의 '수대동시'에서도 흰 무명옷으로 갈  아입고 난 마음을 그냥 두면 안 됩니다. '싸늘한 돌담에 기대어 서면 / 사뭇 쑥스러워지는  생각, 고구려에 사는 듯'이라는 대목은 미당의 레토릭(수사법)인데, 왜 고구려까지 가는지  모르지만 아주 먼 옛날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얼마 안 되는 세월이지만 '내가 고향으로부  터 너무 멀리 왔구나' 하는 감회를 노래한 게 아닌가 합니다. '아스럼 눈감었던 내 넋의 시  골 /별 생겨나듯 돌아오는 사투리.' 하는 대목도 좋습니다. 고향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내  넋의 시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스럼 눈감었던'은 '한동안 잊고 살았던'의 뜻일 것입  니다. 초저녁이 되면 하늘에서 별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듯이, 고향을 생각하면 고창의 동  네 아저씨들이며 어머니들이 부르는 소리 들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등잔불 벌써 켜  지는데…… / 오랫동안 나는 잘못 살았구나.' 하고 노래한 걸 왜일까요. 저녁 시간은 늘 자  기를 반성하는 시간이 되기 마련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지요. 객지에 와서 사느라 집  으로 돌아가 어머니가 끓여주는 국밥을 먹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성에서 '오랫동안 나는 잘  못 살았구나' 하고 시인은 생각했겠지요.  '샤알 보오드레―르처럼 섧고 괴로운 서울 여자를 / 아주 아주 인제는 잊어버려' 하는 대목  은 무슨 뜻일까요. 보들레르는 여자가 아닌 남자입니다. 미당이 그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서울 여자가 '샤알 보오드레―르'가 될까요. 미당이 보들레르의 시를 좋아해서 불  어로 읽으시는 것도 보았습니다만, 그의 시집에 {악의 꽃}이 있지요. 눈썹이 검은 금녀 같은  그런 데 살다가 객지에 와서 서울 여자를 보니까, 전부 '악의 꽃들'로 보인 거죠. 이상하게  사랑을 주는 것 같으면서도 아니고, 돈에 눈이 멀어 있는, 즉 샤를 보들레르 같은 서울 여자  가 아니라 '악의 꽃들 같은 서울 여자'를 노래한 것입니다.  중앙일보의 문학담당 전문기자 이경철은 미당을 가리켜 '우리 시의 정부이고 시의 학교이다  '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미당 팔순 잔치 마당에서 황동규는 '이 나라에서 미당 시를 읽지 않  고 시를 쓴 사람이 있으면 나와 봐라.'라고 했습니다. 미당은 지금 자리에 누워 계십니다만  그분이 끼친 모국어에 대한 새로운 해석, 모국어를 어떻게 쓰면 다양하게 쓸 수 있나 하는  것을 보여준 점은 위대하다 할 것입니다.  
382    어머니의 말은 풍성한 시의 원천 댓글:  조회:2097  추천:0  2017-04-03
    -이근배- 우리 나라의 시는 옛날 [찬기파랑가], [제망매가] 등의 [향가(鄕歌)]에서부터 고려 가요나 속  요 등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손으로 이루어진 노래들이 많습니다.  병자호란 때 '가노라 삼각산아'를 쓴 김상헌의 형 김상인이 쓴 시조에 이런 게 있습니다. 그  는 강화도로 피난차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모시고 갔는데, 오랑캐가 갑자기 쳐들어오는 통  에 화약으로 폭사를 한 분입니다. 대단한 기상이 있는 남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런데 이분은 그의 시조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임 사랑 거짓말이 님 날 사랑 거짓말이/꿈에 와 뵈온 말이 그 더욱 거짓말이/날같이 잠 아  니오면 어느 꿈에 뵈오리'  시인 황동규는 이 시조를 가리켜 사랑시 가운데서 최고의 으뜸이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우  리 나라 여류 시인들이 한때는 황진이 '동짓날 기나긴 밤에'를 으뜸으로 치다가, 김상인의  시조를 최고라고 견해를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언뜻 이 시조를 보면, 아녀자들이 안방에서나  할 소리지 오랑캐와 맞싸우다가 나라를 못 지킨 것이 한스러워 자결하고 만 헌헌장부가 쓴  글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따지고 보면 소월의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며, 김영랑의 '나는 기두리고 있을 테  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또 만해 한용운의 절창들도 지극히 여성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조시대에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의 와중에 서 있던 정철의 [사미인곡(思美人曲)]도  여성적인 정조에 바탕하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에 한결같이 여성적인 정서가 넘치는 것은 어머니의 말을 갖고 쓰기 때문입니다. 아  무리 헌헌장부라도 그가 쓰는 시는 여성적인 대목이 많습니다.  정몽주 선생은 다 알다시피 고려 오백 년 왕조를 한몸으로 지탱하려가 목숨을 던진 분입니  다. 그분이 남긴 시조에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  쳐 죽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고 노래했는데,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는 춘향이가 변학도 앞에서 해도 그만인 노래가 아닙니까. 다 이게 여성적  입니다. '임'은 연모의 대상일 뿐 아니라 '나랏님'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우리 시가는 모두 여성적인 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에는 겉말과 속말이 있습니다. 중국 청나라의 문인 '원매(袁枚)'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언제언(言制言) 의제의(意制意) 경제경(景制景), 이것이 아니면 시는 납을 씹는 거와 같다."  즉 "말 밖의 말, 뜻 밖의 뜻, 풍경 밖의 풍경, 이런 것이 아니면 시는 납을 씹는 거와 같다."  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시의 속내를 다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파고들어가고 그 몸 속으로 들어가 보면,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  을까 합니다.  지금 강남 성모병원에는 미당(未堂) 서정주 선생께서 누워 계시는데 저한테는 은사이십니다.  제가 그분께 처음으로 시를 배웠고, 1960년에 제가 처녀 시집을 낼 때 서문도 써주셨고, 세  계여행 떠나실 때 동국대학교에서 그분이 하는 '시론(詩論)'을 제가 한 학기 동안 대강한  적이 있을 정도로 깊은 인연이 있는 어르신이십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 그분의 시집을 통  째로 한 권을 외운 일이 있습니다. 1966년에 미당 서정주 선생님이 현대문학 5월호에 [동천  (冬天)]이라는 시를 발표했습니다. 1936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이 되어서 시  단에 나오셨으니 그로부터 만 30년 뒤의 일입니다. 오늘로부터 34년 전의 일입니다. 그러니  까 미당 선생의 시작 활동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절정기에 한 것입니다. 지금도 평론가  들이 미당 서정주 선생의 시를 이야기 하려면 {동천}을 반드시 들춰냅니다. 며칠 전에도 제  가 나가는 한 학교에서 젊은 시학 교수가 뭘 자꾸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동천}이라는 시를 놓고 중얼중얼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 줄 안  되는 걸 가지고 그러느냐고 제가 했습니다만 우선 {동천}을 가지고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동천] 전문  이것은 7.5조입니다. 너무 시를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동천은 겨울 하늘인데 거기에  눈썹을 하나 심어놨다는 겁니다. '즈믄'이라는 것은 천인데 그냥 많다는 겁니다. 많은 밤의  꿈으로 그 눈썹을 씻고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동지섣달 나  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서 시늉하며 비끼어 간다고 노래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들 논의가 물끓듯 합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밝혔듯이 그 속내를 알면 간단합니다.  미당 선생은 어느 자리에선가 이렇게 글로 밝혔습니다. 질마재가 있는 고창의 수대동이 당  신의 고향인데, 고향 마을에 살 때 열여섯 살쯤 되는 한 처녀의 눈썹이 유난히 좋았던 것  같습니다. 모시밭 사잇길로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는 처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집 할머  니가 자기 집에 들락날락 하는 것을 봤는데 아마 혼삿말이 오가는 것 같았답니다. 미당 선  생이 고향을 떠나 대처로 나오는 통에 결국 혼인은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평생 미당 선생은  눈썹만 찾아다니는 겁니다. 1966년 현대문학 5월호에 {동천}을 썼는데, 같은 해 9월 29일자  중앙일보에 {추석}이라는 시를 발표합니다. 그것을 옮기면 이렇습니다.  대추 물들이던 햇볕에 눈 맞추어 두었던 눈썹  고향을 떠나올 때 꾸려 가지고 온 눈썹  열두 자루 빗은 날에 숨기어져 살던 눈썹  비수들 다 녹슬어  시궁창에 버리던 날  삼시 세 끼 굶던 날에  역력하던 너의 눈썹  안심찮아 먼 산 바위에 박아넣어 두었더니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추석이라 밝은 달아  먼 골방에서 한잠도 안 자고 앉았다가  그 눈썹 뽑아들고  기왓장 너머 오는고  신문사에서는 추석 이야기를 써달라고 청탁했는데, 미당은 '대추 물들이던 햇볕에 눈 맞추  어 두었던 눈썹'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고향을 떠나올 때 꾸려 가지고 온 눈썹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미당의 [수대동시]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오기도 합니다. '속옷  초록 저고리 금녀 나와 둘이 있던 곳 / 머잖아 봄은 다시 오리니/ 금녀 동생 나는 얻으리 /  눈썹이 검은 금녀 동생'이라고 노래했는데, 여기에도 '눈썹이 검은 금녀 동생'이 등장합니  다.  미당은 어느 글에서 술회하기를 낙원동에 있는 밥집에 자주 들렀답니다. 선생은 밥집 여자  의 손목 한번 잡아본 적이 없는데, 그 여자에게 예의 고운 눈썹이 있었답니다. 이를 통해 확  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미당은 여자의 미를 고운 눈썹에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마음에 두는 것은 '눈썹'으로 되어 있다는 거죠. 또 [여행가]라는 시에서는 '어젯밤  내 꿈 속의 네 눈썹이 무거워/그걸로 여기 한 채의 절간을 지어두고 갔느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미당에게는 눈썹이 모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천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선 겨울 하늘에 눈썹 같은 달이 하나 떠 있었겠지요. 밝은 달을  보며 미당은,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겨 심어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새가 나는 걸 보면 마치 눈썹같이 날고 있었고, 반달도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  끼어 간다고 노래한 겁니다. 그것만 가지고 무슨 뜻인가 하겠지만, 거기에는 미당 선생 개인  의 눈썹에 대한 의지가 여러 가지로 환생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눈썹은 눈썹으로 있지  않고, 열두 자루 빗은 날에 숨기어져 살던 눈썹도 되고 삼시 세 때 굶던 날의 눈썹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그 시의 비밀을 알았을 때 [동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  다.  1964년에 박목월 선생이 {가정}이라는 시를 발표를 했습니다. 그 무렵에는 박목월 선생이  대학 교수도 하시고 유명한 시인으로 책도 많이 낼 무렵이었는데, {가정}을 읽고 시의 내용  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최근 우리 사회에도 고개 숙인 아버지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이 시에 보면 시라는 것은 멀  리서 가져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도 흔히 학생들에게 자기 자신을  움파는 일이다라고 말해 줍니다. 박목월 선생의 '가정'이라고 하는 말은 아홉 식구의 가장으  로서 그 힘이 얼마나 드는지를, 십구문반의 신발에다 얹힌 것입니다. [가정]이라는 시에서  보면 박목월 선생의 십구문반의 신발은 짚신도 아니고, 구두도 아니고, 운동화도 아닌 그 시  대 고무신의 단위입니다. 그 신발을 떠올리게 됩니다.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면, 지상에는 아  홉 켤레의 신발로 시작하죠. 지구 위, 하늘 아래는 모두가 지상입니다. 이 지상에 아홉 켤레  의 신발이 있습니까. 지금 같으면 60여 켤레의 신발이라고 해야 되는데, 그건 다 필요 없습  니다. 박목월 시인의 어깨에는 오직 아홉 켤레의 신발만이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신발과  등가성을 갖는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381    시에 우리 겨레의 숨결을 옮겨 놓아야... 댓글:  조회:2398  추천:0  2017-04-03
  우리 숨결을 옮겨놓은 시를  -이근배-  제가 시 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일, 제가 읽은 좋은 시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자 합니다. 시 읽기란 무엇인가는 저보다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동  물하고는 다르다는 것, 일반적인 목석이나 자연 식물과 다른 것은 인간이 영혼을 가진 동물  이라는 것이지요. 영혼이라는 말로 포장할 수 있습니다만, 그 안에는 감정이나 정신이라든가  정서, 생각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구별되는 것들이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다른 말을 빌어 표현한다면 시심(詩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심은 시를 쓰는 분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밭을 가는 농부에게도 있고 빨래하는 아  낙네나 공장에서 용광로에 쇳물을 끓여 붓는 이들에게도 시심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  가 일상 생활을 해 나가면서 그 시심이 나의 삶 속에서 어떻게 표출되느냐 하는 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시를 쓰고 시를 생활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  지, 가령 여러분들이 입고 있는 이 의상 속에서도 미술이 있고, 또 젊은이들이 무대에서 춤  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데, 끝없이 우리 생활 속에 음악이 있고 노래가 들어 있습니다. 음악  뿐 아니라 모든 예술 분야가 우리 삶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를 알게 모르게 생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다만 생활하면서 시를 즐  기는, 즉 의도적으로 시집을 사서 읽고 외우고 하는 층이 있고, 조금 더 나아가서 시를 창작  하는 분들이 있고, 또 더 나아가서는 시를 직업적으로 생산해내는 분들이 있을 뿐입니다. 정  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 시를 생활화하고 시를 쓰는 것입니다. 특  히 우리 민족은 아주 고대로부터 시를 생활화해 왔고 또 시 짓기를 잘하는 민족입니다. 우  리 민족이 시를 쓰는 민족이라는 걸 가리켜 저는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어머  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 될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요.  몇 해 전에 제가 중국 연변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세미나장에서 우리 조선족 출신 연변대  학 교수 한 분이 주제 발표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조선족은 누구나 다 시의 천재적 기질을 가지고 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우리 민족은 누구나 다 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왔는데, 그분은  한술 더 떠서 시의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증거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  을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습니다만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여서 시인, 작가를 비롯한  문학인들은 중국 정부로부터 공무원처럼 급료를 월급으로 받습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정부  로부터 급료를 받는 시인 작가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 오천 명 가량 있답니다. 그런데 그 가  운데 조선족이 오백여 명으로 십분의 일 정도 된답니다. 중국의 전체 인구는 14억이고 조선  족은 중국 전체에서 2백만 명을 헤아립니다. 인구 비례로만 따진다면 적어도 오백 명의 작  가를 배출하려면 적어도 한 1억 4천만쯤 있어야 되는데, 불과 2백만 명의 조선족이 14억 전  체 인구가 배출한 작가의 십분의 일이나 되는 문학가들을 낳았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  습니다.  그런데 어찌 5백 명뿐이겠습니까. 다른 분들도 시적 문학적 자질을 갖고 있습니다만 농사도  지어야 되고, 공장에서 일도 해야 되는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탓에 시를 안 쓰고 있달 뿐  이지 누구나 다 시를 쓸 수 있고 문학을 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옛날에 서  당에 가서 서너 살쯤 되어 [천자문]만 떼기 시작하면 시 짓기부터 배웠지 않습니까. 그래서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우리 민족은 누구나 시를 곧잘 쓰고 사랑해 왔습니다.    사람에게는 영혼과 육신 두 가지가 공존합니다. [성서]에 이런 말이 있지요. '나에게 두 덩  이의 빵이 있다면, 하나는 먹고 하나는 팔아서 꽃을 사리라.' 여기서 빵은 육신의 양식이요,  꽃은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또  좋은 잠자리를 갖기 위해서 참 많은 일을 하고 많은 노력들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  육신의 편안함을 가져다주고 좋은 양식은 살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곧 영혼의 양식이 되지  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꼭 문학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 여러 가지 예술  을 영혼의 양식으로 마련하는 것입니다.  시심이라는 것이 꼭 시만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시심이 있으니까 미술심도 있고 음  악심도 있고 연극심도 있는 것은 아니고 그게 다 통틀어서 시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영화나 연극을 보면서, 그 속에서 내가 주인공도 되어 보고 내가 아버지도 되어 보고 아들  딸도 되어 보곤 합니다. 그런 보상 심리를 통해 사랑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고, 이별도 해  보는 것입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에 담겨 있는 시인의 마음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이  시 읽기 본래의 뜻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위안을 받고 마음의 평화를 받고, 공감하여 때  로는 웃고 울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서도 시를 쉽게 접할 수 있고, 2, 3년 전부터 주요 일간지에서도 연재  소설을 싣지 않는 대신 매일 시를 싣는 등 서점에 가지 않아도 쉽게 시를 접할 수 있게 되  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는 시집 한 권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가령 소월 시집 정  도를 찾아볼 수 있을까 시집이라는 것이 서점에도 거의 없었고, 누구한테 빌려볼 수도 없었  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시가 지하철역에도 있고 속된 말로 보고싶으면 얼마든지 공짜로 인  터넷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되지 굳이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것에 우리가 의문을 품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회적으로도 시 읽기에 대해서 많은 얘기들이 오가고 있고,  특히 초·중·고등학교 교과서, 대학교재 같은 데서는 명시들을 중심으로 다각도로 해석, 분  석하는 글들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꼭 옳은 답인가 하는 것은 의문입니  다. 실제로 대입 수능시험에 출제된 시에 관한 문제에 따라 제시된 답이 정답인가 하는 것  은 누구도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일찍이 T. S. 엘리어트는 '시 해석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  라고 갈파한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해석을 하더라도, 심지어는 작자 자신이 '이것은  뭐다'라고 말했다 해도 불변의 정답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일단 그것은 언어라는 기호로 표현을 했을 때, 받아들이는 사람이 각자 지닌 언어의 스펙트  럼에 의해서 여러 가지의 얼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낱말이 가지고 있는 것들  이 이런 얼굴도 있고 저런 얼굴도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를 생산할 때 이미 같은  사물이라고 하더라도, 즉 장미꽃 한 송이를 본다고 하더라도 보는 사람이 여기 있는 여러분  이 백 명쯤 된다고 하면 백 명의 사람이 장미를 보았을 때 각각 느끼는 생각, 거기서 받아  들이는 감정들은 동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제3자가 정확히 집어낼 수 있  겠습니까.  김시습이라는 천재가 있었습니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에 앉았을 때 글을  그만 읽겠다고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책을 불에다 태웠다는 말도 있고, 또 똥통에 절였다  는 말도 있습니다만, 천하를 떠돌면서 시를 쓴 아주 천재입니다. 다섯 살 때 이미 {사서삼  경}을 마스터하고 세종대왕이 특별히 비단도 내렸다는 전설적인 인물이 김시습입니다. 이분  이 돌아가신 지 89년 뒤인 선조 임금 당시, 최대의 등용문인 과거에 율곡 이이는 장원급제  를 아홉 번이나 했습니다. 그래서 해동공자라고도 하고 대학자이고 대문장가인 율곡 이이에  게 {김시습전}을 쓰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래서 김시습이 작고한 지 89년 뒤에 율곡 이이가  김시습전을 썼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매월당의 시는 귀신이 부르고 대답하는 것 같고, 산 속에도 숨어 있고, 바다에도 들어 있고  해서, 글자를 아로새기는 자들이 넘겨다볼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공부해야 할 점입니다. 율곡 같은 대문장가도 89년 전에 돌아가신 김시습을  시를 가지고 찬탄을 한 것이 있습니다. 아주 시를 잘 쓰는 분들이, 위대한 시인들이 쓴 그  시대의 언어들이 있습니다. '시인은 그 자신을 씀으로 해서 시대를 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 우리는 그분들이 어떤 생각, 어떤 시대, 어떤 위치, 어떤 상황에서 그 시를 노래했는지  정확히 판별하지 않고 그것을 다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대한 시인들이 쓴  글은 율곡이 김시습의 시를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저 글자나 아로새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속에 있는 깊은 뜻을 어떻게 다 듣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의 시는 모국어로 되어 있습니다. 모국어는 어머니의 나라 말이라는 뜻인데 저는 이것  을 줄여서 어머니의 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쓰는 말입니다만 내 나라라고 할  때는 '조국(祖國)'이라고 씁니다. 왜 내 나라라고 할 때는 조국이라는 할아버지 '조(祖)'자를  쓰는데, 굳이 내 나라 말이라고 할 때는 여성인 어머니 '모(母)'자를 쓰는가 하면, 조국이라  고 하는 말속에는 아주 강한 우리의 줄기찬 역사가 있습니다. 단군 할아버지도 계시고 을지  문덕, 연개소문, 이순신, 강감찬, 윤봉길 안중근 같은 분들의 이름이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우선 총칼과 창으로 나라를 지키는 드센, 뿐만 아니라 민족이 살자면 먹고살아야 합니다. 바  다에 가서 고래도 잡고 논밭도 갈고 고구려 벽화에 보면 활로 호랑이를 사냥도 하고 이렇게  농경사회에서 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다 남성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지키고 생활을  일구어 온 조국의 역사를 이끌어온 힘을 조국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 나라 말이라고 할 때 모국어라고 어머니 모자를 쓰는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말을 배우는 것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에게서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  머니의 뱃속에서 어머니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바로 모국어가 아닙니까. 어머니라고 하는  말속에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젖줄, 부드러움, 눈물 등이 복합적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그  따뜻하고 부드럽고 한 그런 언어들이 어머니의 말입니다. 또 하나는 모국어라고 하는 까닭  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충청도 당진에서 할아버지 품에서 자랐습니다. 할아버지는 말을 별로 만들  어 쓰시는 분이 아닙니다. 진술적인 말인 밥먹어라 어디 갔다오라든지 딱딱한 말만 쓰시는  데 우리 할머니는 아주 유난스럽게 말을 비틀어 쓰셨습니다. 그래서 곁말 쓰기를 많이 하시  는데 우리가 쓰는 문학적인 언어들은 다 어머니들이 만든 언어였습니다. 남성들은 말을 잘  만들지 않는데 어머니들은 비틀기를 해서 곁말을 많이 씁니다. 그 예가 속담입니다. 남성적  인 속담도 많습니다만 대개는 여성들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  넣어야 짜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죽 쑤어서 개 좋은 일 시켰다', '누워서 떡 먹기, 바  늘 가는 데 실 간다' 등의 상징적인 말을 쓰는 것은 어머니들입니다. 어머니들로부터 그런  말을 배운 것입니다.  
380    시작은 생활로부터의 도피이며 해방이다... 댓글:  조회:2657  추천:0  2017-04-03
  詩作 및 詩는 救援이다  등산이나 낚시나 바둑이 구원이듯이 시작도 구원이다. 구원이란 말을 너무 무겁게, 또는 비장하게 생각하는 것은 로맨티스트의 나쁜 버릇이다.  시작이 구원이 된다고해서 하루 왼종일 시작에만 몰두하고 있을 수가 없다.그러나 그렇게 해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생활을 멸시하고, 소시민이니 속물이니, 하고 백안시 하는 것은 또한 로맨티스트의 나쁜 버릇이다. 아니, 악덕이다. 이런 경우 시작은 오히려 구속이 되어 그의 인생을 망치게도 되지만, 위대한 시를 남긴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일들이 있었다. 물론 아ㅣㄴ생도 망치고 시도 남기지 못한, 그야말로 로맨티스트의 수는 더할 나위 없이 많은 것이지만- 시와 생활을 구별 못하는 사람을 나는 로맨티스트라 부른다. 시작이 생활의 전부가 아니라는것을 괴테는 질풍노도기를 겪으면서 깨달았다. 그러나 딜란 토마스라든가 김수영은 훌륭한 시를 남긴 로맨티스트다. 이 두시인에게 시작은 숙명이었다. 그들의 죽음까지가 시작의 연장선상에 있다.  누구는 은행의 행원이면서 일급의 시를 쓰고, 만년에는 출판사의 중역을 지내기도 하면서 시작을 했다고 하지만, 이런 비전문가적 처신은 시를 생의 구원이게 한다. 시작은 생활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말라르메처럼 (폴 발레리)를 유일한 생의 보람으로 삼으면서 시작을 의 으뜸으로 여기는 태도도 구원이다.  시작은 하나의 장난game이지만, 휠더린과 같은 로맨티스트에 있어서는 이 장난 위에 형용사이란 말이 붙어 있었다. 내 경우에는 이란 이 로맨틱한(비장한)형용사 대신에 이란 형용사를 붙이고자 한다.  나에게 있어 시작은 생활로부터의 도피가 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말하면, 시작은 생활로부터의 해방이 된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하면 비전문가적 처신을 할 때 시작은 생의구원이 된다는 뜻이다. 운동선수는 운동경기가 오히려 지옥일는지도 모른다. 지옥이란 말이 과장된 말이라고 한다면 생의 가장 강열한 구속이라고 해도 된다. 비전문가란 생활과 시작을 구별하는 사람이니까 시작은 구속이 아니라 해방이 된다.  시에서 뭔가 구원을 노래함으로써 어떤 시적 결론을 얻게 되는 그 과정이 구원이 아니라, 시를 쓴다는 어떤 과정 그 자체가 구원이고, 보다는 나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에 시가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구원일 수도 있다. 마치 하늘이 있고 아름다운 노을이 (내 의지와는 관게없이)있다는 그 사실이 그대로 구원이 되듯이 말이다.  ----의미와 무의미, 김춘수, 문학과 지성사, 22쪽에서 23쪽----  * 펌-나호열교수(경희대)      
排泄(배설)의 아름다움  1.  숨을 들이키고 내쉬지 않으면 우리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들숨과 날숨의 원리는 이 우주 전체에 적용되는 생명의 원리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의 표현의 욕구는 배설의 매카니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체적 배설이 생명순환운동의 중요한 기능이듯이 표현은 정신의 배설물이면서 정신을 淨化하는 기능입니다.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시로써 무엇을 이룰지/깊이 생각해볼 틈도 없이/헤매어 여기까지 왔다/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한여름 뜨락에 발돋음한 상사화/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한줄기에 나서도/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끝없이 저잣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정희성 - 詩를 찾아서  위의 시는 올 6월에 발간된 시집 『詩를 찾아서』에 수록된 시입니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시 읽기를 즐겨하고, 습작을 하는 분들뿐만 아니라 현재 詩作을 하고 있는 시인들에게도 끊임없이 다가오는 話頭 입니다.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정도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 하나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시의 구성력을 검토해 보는 일이고 또 하나는 '시의 주체가 시인인가, 독자인가' 하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해서 '도대체 시의 기능은 무엇인가?, 시로서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수한 定義의 숲 속을 헤매고 있으며 무수한 갈림길에서 각자 헤어져 자신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위의 시는 바로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이나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무형의 형식으로서의 시를 찾아가는 시인의 태도가 오롯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시인이 보통의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주 만물의 그 모든 것에 촉수를 들이대는 탐구의 소유자라는 점일 것입니다.  이 시집의 마지막 부분, 시인의 말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현실주의자가 되어 우리를 억압하는 자들에게 맞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우리의 낭만적 환상을 가로막기 있었기 때문이지 현실주의 자체가 문학적 이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시인은 불가피하게 현실주의자가 되기는 하여도 본질적으로는 천진한 낭만주의자라는게 나의 생각이다.  위의 글에서 등장하는 현실주의라든지, 낭만주의하든지 하는 용어에 대해서 상세히 이야기할 수 없는 자리이기에, 그 개요만을 살펴본다면 대충 이런 내용이 될 것입니다. 현실주의라는 것은 말 그대로 내 앞에 주어져 있는 시간과 공간에 조응하므로서, 문학이 현실문제에 계몽적으로, 전투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짐을 뜻하며, 낭만주의란 내 앞에 주어져 있는 時空의 제한을 풀고 보다 본질적인 인간의 정서를 노래하므로써 아름다움을 향수하는 인간 존재의 발견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서 바로 낭만주의적 이 시론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뽕잎을 먹은 누에가 명주실을 자아내듯이, 현실 속의 존재가 경험하는 사건과 세계를 또 다른 의미와 세계로 확대하여 나가는 것이 시이며 시인의 할 일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루 중에도 무수한 행동과 사건을 겪고 있습니다. 이 경험 자체가 너무 반복적이고, 평범해서 시심을 일으키는데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를 쓰는 사람들은 보다 특수한 사건이나 환경 속에서 자신이 써야할 재료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한 예를 들어서 이야기 해 봅시다. 금강산은 명산입니다. 기암괴석이 즐비한 풍광이 수려하여 나는 금강산에 갔습니다. 금강산을 다녀와서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시로서 그 아름다움을 시로 옮기려는 순간부터 절망하게 됩니다. '금강산은 아름답다'라는 구절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아온 많은 여행시들이 자신의 여행을 미화하거나 자랑하는 글로서 밖에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금강산에 갔었다라는,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경험한 주체인 나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왜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는 쉽게 실패해 버리고 말까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메타포어metaphor에 대해서 잠깐 생각을 해봅시다. meta는 轉移를 뜻하고 phor는 움직임을 뜻하는 phora를 어원으로 합니다. 즉 메타포어는 한 명칭이 원래 지시하던 사물로부터 그것이 자연스럽게 적용될 수 있는 다른 사물의 명칭으로 전이되는 현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A는 B이다'의 형식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원 관념인 A와 그것을 표현하는 보조관념인 B를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서 詩作의 성패가 갈라진다고 보여집니다.  우리는 금강산을 원 관념으로 하고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보조관념을 구할 때 곧바로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그 무슨 소재로, 사건으로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겠습니까? 잠시 생각을 돌려서 원 관념을 금강산으로 하지 않고 보조관념으로 돌려놓으면 어떻겠습니까?  원 관념을 내가 사모하는 어떤 사람과의 관계로 설정하고, 그 어렵고 긴 사랑의 길을 가는 모습을 금강산을 찾아가는 행위로 표현한다면 읽는 사람들은 훨씬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 앞에 하염없이 흘러가는 사물과 현상을 놓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게 아니라 그 일상의 무의미성 속에 자신을 비추어보고 몸 섞는 일을 하면서 자아의 반성을 촉구하는 시인은 어떤 소재를 놓고도 누에처럼 아름다운 시의 선율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정리해 봅시다. 1) 시는 현실로부터 주어지는 정서적 반응의 매개물이다. 2) 시의 효용은 정서의 낭만적 표출에 있다 3) 낭만적 표출은 현실체험의 미적 탐구이다.  2.  우리는 우리를 감동시킨 많은 시인들 속에서 최영미 시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를 기억합니다. 1994년도 「창비시선 121」로 발간된 이 시집은 찬사와 폄하를 동시에 받은 시집입니다.  정영자 교수는 '최영미의 시 세계'라는 짧은 평론에서 이 시집이 성공한 요인으로 다음의 8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1) 시인이 **대학교를 졸업하였다는 화려한 학벌 2) 30대 초반의 젊은 여성 시인이라는 점 3)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자유와 민중적 삶에 고뇌한 세대 4) 시집 제목이 주는 단호한 청산주의와 호기심 유발 5) 출판사의 상업적 전략 6) 비평계의 엄호 사격 7) 80년대의 청산을 통한 현재를 정당화하려는 사회적 분위기 8) 여성 시단의 맥을 잇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 필요성.  위와 같은 평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논의가 필요한 사항임에는 틀림없으나, 시를 새롭게 써보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여러 덕목을 두루두루 갖추고 있음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김용택 시인이 쓴 이 시집의 발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난 여기서도 시대가 어쩌고저쩌고 오늘이 어쩌고 저쩌고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만큼 거침없고 솔직하고 자유분방하며 확실하고 현실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을 보고자 한다. 최영미는 응큼 떨지 않는다. 의뭉하지 않으며 난 척 하지도 않는다. 다만 정직할 뿐이다. 정직하다는 것은 세상을 종합하는 눈이 정확하다는 뜻도 된다. ...중략  그의 시에서는 또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 자기와의 싸움이 짙게 배어있다. 무차별하게 자기를 욕하고 상대를 욕한다.....중략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이며 사회에 대한 솔직한 자기 발언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글에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솔직하며, 피 비린내 나는 자기와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시인의 자세입니다. 주어진 소재를 자신의 현실 체험과 맞물리면서 피 흘리는 자신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자세 속에 삶의 아름다운 자세 하나가 옹골차게 뛰쳐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시를 쓰고자 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려는 자세와 부끄러운 자신의 알몸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두려움의 극복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추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릴 지 모르지만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으려는 百尺竿頭의 실험정신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하나의 덕목입니다.  이 시집은 우리 일상에 널브러진, 상식의 더께에 함몰하는 조그만 소품과 생각들을 상식 저 너머로 집어던지는데 그 의미가 있기도 합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내 속에 피어날 때 처럼/잊는 것 또한 그렇게/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어도/잊는 건 한참이더군/영영 한참이더군  시,   위의 시는 시집의 첫 자리에 있는 시입니다. 단순한 구조를 가진 사랑의 이별을 노래하고 있으면서도 ~군의 어미로 여성적 톤을 절제하고, 냉소적이면서도 처량한 이별의 정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선운사는 동백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그러나 시인은 동백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산 넘어 가는 그대'를 원경으로 삼으므로서 직정적인 感傷의 위험을 피해가면서 이별의 정감을 반어법으로 배설해내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보다 참신한 시를 쓰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라는 체험과 '선운사에 가서 동백꽃을 보았다'라는 체험 중에 어떤 것을 시의 모티브로 삼겠습니까? 선운사에 가서 동백꽃을 보니까 떠나간 사람이 그리워집니까? 아니면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기 위해 동백꽃을 보러 갔습니까?  시는 글쓰는 사람이 뱉어내는, 그러나 결코 더럽거나 추하지 않은 절절한 외침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를 짓기 전에 내가 들여마셔야 할 공기와 내 뱉어야 할 공기가 어떤지 한 번 생각해 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 퍼옴-나호열교수(경희대)  
쉬운 시의 어려움 시인들은 쉬운 시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독자들 또한 어려운 시를 선호하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名詩라 일컬어지는 많은 시들, 베스트 셀러가 되는 시집들의 대부분은 낭송하기에 알맞은 가락과 누구나 쉽게 해독할 수 있는 언어로 짜여져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시인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쉬운 시'의 매력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이 ' 쉬운 시'의 명제는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생각거리를 파생시키고 있다는 점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인구에 회자되는 소월의 '진달래 꽃'이나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천상병의 '귀천'이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우선 독자들의 일차적인 정서를 충족시켜 줍니다. 일차적인 정서라고 함은 우선 시에 나타난 의미가 독자들의 감성 내용과 일치된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恨'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단순한 관념이 시에 표상되므로서 문학 예술의 두 기능인 '배설'과 '정화' 또는 '교훈의 전달'이라는 목표에 부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위에 열거된 시들은 결코 그러한 일차적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의미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는 중층 구조를 내포하고 있음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말은 발화자인 시인의 의도와 독자가 체험한 내용이 일치되거나 독자가 직접 체험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와 유사한 추체험의 형식으로 전이되는 것 이상의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님의 침묵'에서의 '님'이 한 개인의 사랑의 대상이면서 그 이상의 존재 의미로 확대될 수 있으며 확대된 상태이면서도 시의 구조 또한 그 논리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시는 분명히 로고스의 세계가 아닌 파토스의 세계에서 진행되므로 시인의 상상력은 비논리적인 직관에 연유함은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언술과 달리 시라는 틀에 얹힌 언술은 질서정연한 상상력의 통로를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내용과 형식의 조화라는 큰 틀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 님의 침묵'은 하나의 연시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으며 불교적 세계관의 인식 배경을 놓고 읽어도 그 다양한 의미는 결코 훼손되지 않습니다.  시는 일반적인 진술과는 달리 언어에 옷을 입히는 행위입니다. 시인이 겪어낸 삶에서 우러나는 시의 향기는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쉬운 시'는 그러므로 삶을 벼려내는 시인의 정신이 현실과 부딪치면서 일으키는 섬광과도 같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한 편의 시에는 고스란히 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태도가 담겨져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외면상으로 평이한 구조와 평범한 진술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면서 시가 함의하는 의미의 내포가 큰 시야말로 진정한 '쉬운 시'의 반열에 오른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시 한 편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꿈꾸듯 편지를 쓴다①  이민 간 친구에게  짝사랑했던 그에게  가슴 저리도록 그리운 어머니에게②  요란한 자명종 소리에 아침은 깨고③  남편의 성으로 바뀌어버린 그녀에게  가을의 전설이 되어버린 브래드 피트에게  인명구조견이 되어서라도 찾아낼 것만 같았던 어머니에게④  세 통의 편지를  한 통만 부친 채⑤  이 시는 습작기에 있는 분의 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매우 잘 짜여진 구조와 명료한 메시지가 도드라지면서 쉽게 읽혀지는 시입니다. ①과③, ②와④처럼 대구법을 사용하여 그리움의 대상을 점층적으로 묘사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는 기법은 예사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하루 중에 밤은 안식 뿐만 아니라 꿈 꿀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며, 시간인 셈이지요, 그러나 그리움의 대상에게로 향하는 날갯짓은 인위적인 자명종 소리에 깨이는 아침과도 같이 무엇엔가 끌려가는 현대인의 고독한 심상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⑤에서와 같이 마음 속에 써 내려간 편지는 부치지 못하는 무위의 행위로 그쳐버리고만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꼼꼼하게 살펴보기로 합시다. ②에서의 친구, 그. 어머니는 현실적으로 나에게서 떠나버린 존재들입니다. ②는 내게 인식된 대상들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데 ④에서는 부재의 상태를 명료하게 하는 구체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이민 간 친구'는 이민을 감으로 해서 '남편의 성으로 이름이 바뀐' 상태이며, 짝사랑의 대상인 그는 영화 '가을의 전설' 에 나오는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처럼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존재이며 '그리운 어머니'는 내가 인명구조견이 되어서라도 찾아야할 대상으로 변화된 듯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②의 진술에서 ④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서 본다면 ②에서 ④로 진행되는 필연적 구조가 생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②와④는 'A는 B이다'로 지칭되는 은유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A와 B의 의미망이 유사한 관념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을의 전설' 같은 막연한, 즉 가을이라는 심상과 전설 이라는 심상의 결합에 있어서의 적합하지 않은 유추가 시의 멋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 시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맹점은,- 이 점은 많은 시인 지망생 여러분이 시적 진실과 사실의 관계를 혼돈하는데서 발생하는 문제인데- 시에 있어서의 순수성을 시의 내용과 사실과의 일치에서 찾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 시의 작자는 실제로 세 통의 편지를 쓰고 그 중 한 통의 편지를 실제로 부쳤는지 모릅니다. 부쳐진 한 통의 편지는 누구에게 보낸 것일까 하고 글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갖게 하는 것도 아주 재미있는 시의 트릭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한 통의 편지를 부쳤다는 사실로 인하여 이 시가 가지고 있는 일상의 고립감이나 허무감은 반감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결국 한 통의 편지도 부치지 못했다든가, 부치긴 했는데 그 편지들이 수신인 불명으로 되돌아왔다든가 하는 결말을 보여주었다면 더욱 큰 감동을 전달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이 시는 한 편의 시가 결코 많은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는 좋은 작품일 수 있으나 누구나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 이상의 의미를 모색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시인의 현실인식의 한계를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뻐꾸기 소리  - 장석남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복숭아 꽃빛같이  아무 생각없이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복숭아 꽃빛만 같이  사랑은 꼭 그만큼에서  그 빛깔만 같이  이 시는 아주 평이한 어휘와 단순한 어조로 아주 쉽게 읽혀질 것 같이 보이는 시이지만 이 시의 올바른 감상을 위해서는 몇 단계의 유추의 단계를 지나가야 하는 시입니다. 현대시의 조류에 있어서 시에서의 주제와 소재의 분류 같은 의도적인 시 해석의 도구를 배제하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주제와 소재를 찾아보기로 합시다. 이 시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소재는 무엇일까요? 복숭아꽃? 뻐꾸기 소리? 그렇습니다. 이 시의 모티브는 뻐꾸기 소리입니다. 시인은 뻐꾸기 소리를 듣습니다. 어느 산에서 우는 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뻐꾸기 소리는 사랑의 실체이기도 하면서 사랑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뻐꾸기 소리는 어느덧 창호지에 복숭아 꽃빛으로 물듭니다. 시인은 창호지 문 안쪽에서 차단된 저 쪽 세계의 메시지를 분홍 복숭아 꽃빛으로, 그림자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뻐꾸기 소리 - 창호지 안에서 듣는 나 - 나에게서 발화되는 뻐꾸기 소리의 관념 - 복숭아 꽃빛 - 그림자로 어리는 창호지를 바라보는 나와 같은 의식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을 보여주면서 사랑을 뻐꾸기 소리로 뻐꾸기 소리는 복숭아 꽃빛으로 변화시키는 상상의 질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사랑'이라는 관념을 소리로 빛깔로 치환시키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의 관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상식으로부터 빗겨 서 있는 시인의 태도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사유의 깊이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감상 방식은 이 시를 읽어내는 많은 통로 중에 하나에 불과할 것입니다. 만일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다른 방식의 시 읽기를 주장하신다면 바로 그 순간에 이 시는 좋은 시로 평가될 수 있는 덕목 하나를 갖추고 있는 셈이 될 것입니다.  茶道는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즐기기에는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합니다. 한 잔의 녹차를 마시는 방법 중에 하나는 인스턴트 녹차를 마시면 될 것입니다. 끓는 물에 봉지 하나만 넣으면 쉽게 우리는 차를 즐길 수 있습니다. 차를 마신다는 행위에 있어서는 다도를 배우고 절차를 따르고, 다기를 준비하는 등의 번거로움은 불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기를 씻고 배열하고, 물을 적당한 온도로 끓이고 우려내는 행위를 거듭하면서 마시는 차에는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베어있게 마련입니다.  '쉬운 시' 는 눈으로 쉽게 읽히고 가슴에 금방 와 닿는 시가 아닙니다. 시의 내용이 독자에게 쉽게 동의를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려낼수록 깊은 향을 풍기는 차 처럼 오래 가슴에 담아두고 되내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재생산시키는 시를 많은 시인들을 쓰고 싶어합니다.  * 퍼옴- 나호열교수(경희대)  
377    시는 정보의 전달 수단이 절대 아니다... 댓글:  조회:2761  추천:0  2017-04-03
  삶의 체험으로부터 길어올린 미학  - 도종환의 시세계  봄이 오는 듯 싶더니, 아카시아 하얀 꽃들이 여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고 읊었던 어느 시인의 목소리가 그리웠던 지난 겨울과 봄은 개인적으로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어려웠던 시간을 시를 읽으며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씀드리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읽은 시집은 도종환 시인의 『부드러운 직선』이었습니다.  『부드러운 직선』은 1998년 7월에 창작과 비평사 창비시선 177로 발간된 도종환 시인의 시집입니다. 1954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충북대 국어교육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84년에 동인지 에 『고두미 마을에서』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85년에 시집『고두미 마을에서』를 발간하였지만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었고, 1986년에 시집『접시꽃 당신』을 펴내면서 세인들에게 도종환이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1988), 『지금 비록 너의 곁을 떠나지만』(1989),『당신은 누구십니까』(1993)등의 시집을 발간하면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해온 바 있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전교조 활동으로 말미암아 오랜 기간을 교단을 떠나야 했고, 제가 알기로는 지금은 다시 교사로 복직되어 충북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찍이 도종환 시인은 우리나라의 분단현실을 직시하고, 그 아픔이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껴안고 뒹굴어야할 것임을 시를 통해서 알리고자 노력한 시인이었습니다. 앞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도종환이라는 이름은 『접시꽃 당신』을 통해서였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이별,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려는 처절한 극복과정이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도 시인의 시를 낮게 평가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누구나 한 번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생노병사, 희노애락의 분기점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시의 대중화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여집니다. 이른바 , 또는 라 불리는 현실 모순에 대한 비판과 지사적 토로에 있어서 도 시인이 거두어들인 성과가 얼마만큼인가는 조금 더 시간이 경과해야 할 것 입니다만, 도 시인에게 우리가 배워야할 점은 자신이 처한 현실과 자신의 인생관 내지 철학에서 비롯되는 삶과 자신과의 힘겨루기에서 한걸음도 비켜서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인식 범위내에 포착된 현실 상황을 시로서 직정적으로 그려내려 하였다는 점이 시인으로서 도종환의 미덕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자신이 쓴 글을 통해서 위로와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돌보는 자위행위일 것입니다. 이 강좌를 보고 계신 여러분이나 저나 불가피하게 마주치는 삶의 고단함, 외로움, 불행함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어하고, 위로의 따듯한 손길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 지 모르겠습니다. 시를 쓰는 마음은 이렇게 자신이 자신을 돌보는 행위, 자신을 스스로 따뜻하게 하려는 몸짓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의 원천은 삶의 체험입니다. 삶의 체험은 시인에게 반성과 비판 그리고 각성을 요구합니다. 체험으로부터 빚어지는 것은 비단 비판과 각성 뿐만은 아닙니다. 그러한 비판과 각성을 넘어서서 있는 그 무엇,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 세계를 기웃거리는 경지가 바로 훌륭한 시와 그렇지 못한 시의 경계선입니다. 시가 아니더라도 삶의 아름다움과 진실을 일러주는 동서고금의 경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고전이나 수상록들이 아닌 시를 쓰고 읽는 이유는 작품을 통해서 미(학)적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학)이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잠깐 美學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기로 합시다  미학 Aesthetics는 18세기 중엽 서구의 라이프니쯔-볼프 Leibniz-Wolff 학파의 알렉산더 고토리프 바움가르텐 Alexander Gottolieb Baumgarten(1714- 1762)의 『Aesthetica』에 그 근원이 있습니다. 이 용어는 그리스어로 감각을 의미하는 '아이스테에시스'란 말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Logica가 고급인식능력에 의해 파악되는 노에티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임에 반해서 Aesthetica는 저급 인식능력에 의하여 파악되는 '아이스테타'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 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감성적인 인식의 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미학을 독자적인 학문으로 성격을 부여한 사람은 관념철학을 집대성한 칸트Kant입니다  동양에서는 1867년 일본의 계몽주의자 西周 - 이 사람은 phiosophy를 哲學이라는 용어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가 '善美學'으로 번역 소개 하였으며 이는 孔子가 말한 盡善盡美를 염두에 두고 명명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대 미학의 대상영역은 예술 및 자연의 미적 현상을 포괄하며, 이에 관한 직접적인 관찰과 다양한 성찰, 쉽게 말하여 미적인 것 일반에 관한 학문, 예술과 자연에서의 미적 현상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미적 체험, 미적 대상, 미적 범주, 미적 가치, 예술체계, 예술기능, 예술사, 예술비평 등에 관한 제반 문제를 논구하는 가운데 미적 혹은 예술적 현상의 원리를 정립하고 그 본질을 추구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미학을 언급하는 이유는 모든 예술작품에는 반드시 미(학)적 요소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며 그 미적 요소는 창작자의 인격의 완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뜻에서 입니다.  今道友信  미는 인간의 감각기능에 의한 감성적 인식의 상관자임과 동시에 초감각적이기도 한 것, 즉 가시적, 가청적인 것으로서의 미 뿐만 아니라 비가시적, 비가청적인 미 - 단순한 감각적인 미를 초월한 인간의 행위나 정신상태, 덕의 미 등과 같은 인격적, 정신적 미 등의 현상도 존재하므로 미의 문제를 단순히 감정적인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이에 미를 존재라고 볼 때, 미에 관한 학으로서의 미학은 존재로서의 존재 해명을 위한 존재론적 미학이 되고, 미를 존재의 현상으로 볼 때의 미학은 현상적 존재로서의 미의 현상을 해명하기 위한 현상 존재론적인 미학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 繪事後素(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만든 뒤에 한다)의 정신  회사후소는 공자가 그의 제자 子夏의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한 내용입니다. 질문은 이러합니다. "예쁜 웃음에 보조개가 이쁘며 아름다운 눈에 눈동자의 선명함이여, 흰 비단으로 채색을 한다. 는 것은 무슨 뜻 입니까?"  회사후소는, 즉 아름다운 자질을 갖춘 후에 문식(치장)을 더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고, 외면적 미적 형식은 내면적 수양을 거친후에야 가능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 充實之謂美(충실함을 일러 미라고 한다)  孟子는 본성의 욕구대로 하는 것을 착하다 하고, 생득적 착한 것을 몸에 지니는 것을 신실하다 하고, 몸에 지닌 것을 충실케하는 것을 아름답다하고, 충실케하여 광휘가 있는 것을 위대하다 하고 위대하여 남을 감화시키는 것을 성스럽다하고 성스러워 남이 알 수 없는 것을 신령스럽다고 하였습니다.  * 詩를 통하여 순수한 감정을 일으키고, 禮로서 자신의 주체를 확립하고, 樂을 통하여 자신의인격을 완성한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시는 감흥을 일으킬 수 있고, 상고하여 볼 수 있게 한다. 사람과 사람을 어울릴 수 있게 하며, 은근하게 탓할 수 있게 한다.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나아가서는 군주를 섬기며,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  위에서 간략히 말씀드린 바는 창작자의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미야말로 참된 미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창작자의 인격완성이 어떻게 작품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일까요?  * 得手應心(손에 익숙하여 마음에 응하는 것)의 세계  다음 글은 郭熙라는 사람이 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붓을 놀려 쉽게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만 아는데, 사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쉽지않다는 사실을 모른다. 장자는 "화가가 옷을 벗고 다리를 쭉 뻗고 편히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경지야말로 진실로 화가의 법을 터득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마음 속을 너그럽고 유쾌하게 하고 뜻이 사리에 맞도록 수양해야 한다. 그러면 이른바 평이하고 바르고 사랑스럽고 신실한 마음이 생긴다, 이같이 여유있고 침착한 마음이 생기면 곧 사람의 웃고 우는 온갖 모습과 사물의 뾰족함, 기울어짐, 옆으로 누움의 갖가지 모양이 자연히 마음 속에 터득되어서 저절로 표상이 떠올라 화필로 나타난다........ 그렇지 못하면 뜻과 생각이 억압되고 침체되어 한쪽으로만 치우쳐 버리고 말 것이니, 어찌 사물의 실정을 그릴 수 있으며 사람의 생각을 펼칠 수 있겠는가?..... 경계에 이미 익숙해지고 마음과 손이 서로 잘 어우러져야 비로소 자유자재로 법도에 맞고 전후좌우가 근원에 맞게 제대로 그려지게 된다.  * 大巧若拙(큰 기교는 졸렬한 것과 같다)의 정신  노자도덕경 45장에 나오는 윗 글은 인위적인 기교와 의식을 떨쳐버리고 재물이나 명예등의 外物에 전혀 지배를 받지 않는 최고의 경지인 무의식 상태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완벽한 기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莊子는 정신수양의 방편으로서 技 숙련의 필요성을 인정합니다. 인위적인 것을 가미하면서도 사물의 본성에 적합한, 사물의 본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의 기교의 운용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 莊子 : 養生主 : 抱丁 포정이 문혜군을 위하여 소를 잡는데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에 따라 칼을 놀림에 소의 뼈와 살이 갈라지면서 내는 소리가 모두 음율에 맞고, 은나라 탕왕 때의 명곡인 상림(桑林)의 무악과 조화되며, 요임금 대의 명곡인 경수(經首)의 음절에도 맞는다.  문혜군은 감탄하면서 "아!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하면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포정은 칼을 내려놓으며 말하였다."이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신은 기술을 넘어서 도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신이 처음으로 소를 잡을 때는 소만 보여 어디에 어떻게 칼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겨우 소가 하나의 작은 덩어리로 손에 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소가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각과 지각이 멈추어진 채 정신이 행하고자 하는 대로 따를 따름입니다. 천리를 좇아 소가죽과 고기, 살과 뼈 사이의 커다란 틈새의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몸이 생긴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래서 아직 한 번도 칼놀림의 잘못으로 티끌만큼도 살이나 뼈를 다친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저의 칼은 십 구 년이나 되었고 수 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저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이 움직이는데도 여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근육과 뼈가 엉킨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그 일의 어려움을 알고 충분히 경계하여 눈길을 거기에 모으고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칼의 움직임을 아주 미묘하게 합니다. 살이 뼈에서 털썩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으면, 칼을 든 채 일어서서 둘레를 살펴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득의만면한 채 한없는 즐거움을 맛보면서 칼을 씻어 챙겨 넣습니다.  위의 글들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창작자의 인격의 완성이 미의식의 근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위적이고, 감각적인 작품들이 유용성이 없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모든 작품은 그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의 반응을 요구하며, 그 반응은 각양각색일 수 밖에 없으며 그 반응은 반성 또는 각성, 비판적 사색으로 전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강좌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까? 또는 좋은 시는 어떤 것일까? 하는 점에 주목하고 계십니다.  강좌의 첫 머리에 저는 도종환의 시를 통해서 위로와 힘을 얻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시인이 체험한 세계  2.시인의 체험으로부터 빚어진 사색의 결과에 대한 정서적 공감  3.정서로부터 빚어지는 미의식의 발로  이 세 가지가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합니다. 이 세가지의 통로는 시인과 작품 그리고 독자를 하나로 묶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소설은 사건을 통해서, 사건을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을 통해서 저자의 말하고자하는 의도를 전달합니다. 그런데 한 편의 시를 읽을 때 시를 만들어가는 話者는 시인 자신일수도, 가공의 인물일수도 있을 것이며 시에 나타나는 정경도 가공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인이나 독자는 시에 나타난 화자나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제, 『부드러운 직선』의 시들을 분석해 보기로 합시다.  (1) 화자가 "나"로 드러난 경우  봄  아무도 들꽃이 겨우내 비겁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도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나 같은 사람도 앞장서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를 살았다 우리들은  힘은 없지만 비겁하지 않으려 했다  아직도 크게 달라질 것 없어  마음 허전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나 같이 허약한 사람도 쫓기며 끌려가며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위해 싸웠다고  그 생각을 하며 이 저녁 자신을 위로한다  꽃샘바람에도 순이 터 올라오는 나뭇가지가 보인다  산천에 봄소식이 오고 강물이 풀려도  내가 아직 불법이란 딱지에 묶여 있는 게 가슴 아프다  젊은 날을 다 바쳐 싸우고 돌아보는 이 저녁에  이 시의 모티브는 이른 봄, 아무 것도 다시 돋아오를 것 같지 않고 죽어서 더 이상 잎을 낼 것 같지 않던 나무에 푸르름이 솟는 광경을 통해서 드러나는 심상입니다.  내가 아직 불법이란 딱지에 묶여있는 게 가슴 아프다  평범한 시인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시대는 과거 속에 존재하며 그 투쟁은 인간으로서 비겁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화자는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복권되지 않은 상태를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 시는 어떤 상태를 드러내고 화자의 심정을 드러내지만 더 이상의 이미지의 발산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시의 후반부에서 이른 봄의 소재성이 부각되고 있기는 하지만 4행의 시대, 나같은, 희망, 젊은 날을 다 바쳐 싸우고  등등의 어휘로부터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있는 듯 싶습니다.  『부드러운 직선』의 첫 번 째 시 「길」도 위와 같은 지적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화자의 체험은 이 시대를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 지에 대한 진지성과 투쟁성을 지니고 있지만 화자의 의도가 너무 확연히 드러나면 날수록 오히려 독자들은 그 의도를 부담스러워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시 읽기는 發憤이 아니라 정서의 기묘한 가라앉음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를 쓸 때 1)주제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그 주제에 알맞는 소재를 찾아서 창작을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2)어떤 아름다운 풍경이나 感想에서 야기되는 시 쓰기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한 편의 시에서 주제와 소재를 명확하게 판명해 내기란 그렇게 쉬운 작업이 아니고 굳이 그런 식으로 시를 짓거나 읽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만, 시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주제와 소재를 다루는 연습을 많이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시인은 분명 일반인보다 다양하고 특이한 체험을 많이 가지고 있기도 하고, 일반인들보다 깊은 통찰의 눈으로 사물과 사건을 해석하는 감각과 예지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해 본다면 시인의 세계와 인간, 자연에 대한 인식과 주관적인 태도가 시의 소재를 다양하게 다룰 수 있는 기법을 생성시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습작을 하는 분들의 어려움은 소재로부터 감흥을 이끌어내고 그 감흥을 시로 옮기려 하는 수동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꽃이 핀다. 비가 온다. 안개가 끼었다. 바람이 분다. 등등의 자연적, 외적인 조건이 나에게 다가올 때 시적 반응을 하거나 사랑을 하거나 이별을 하거나 등등의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사건이 자극적으로 반사될 때 시작에의 욕구를 느낀다는 점입니다. 대상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으면 시작에의 욕구는 일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시인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주관적이면서도 독자에게 교훈이 될 수 있는 인생관과 철학이 확립되어 있어 소재를 자유자재로 취사선택할 수 있고 시에 녹여낼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소재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꽃' 자체에 대하여 시를 쓰려고 하면 할수록 '꽃'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제한되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전개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소재는 연극에서의 무대장치와 같은 것입니다.  몇몇의 시인- 도종환 시인도 포함되지만-을 제외하고는 극적인 삶의 체험을 가진 시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發話者로서의 시인은 작품에 나타난 세계에 대해서 일정부분 책임을 가져야할 뿐 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 반영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부분이 다른 예술 장르와 변별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운동의 추억  추억으로 운동을 이야기하는 사람 많다  운동한 기간보다  운동을 이야기하는 기간이 더 긴 사람이 있다  몸으로 부닥친 시간보다  말로 풀어놓는 시간이 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운동  현재가 없는 운동을 현재로 끌어오는  그들의 공허함  위의 시는 한 시대가 끝난 후 태평성대(?)에 와서 투사연하는 위선에 가득찬 사람들을 쓸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슬픔이 배어 있습니다. 옆으로 비껴가는 삶을 살았으면서도, 전방에서 총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구국과 민족을 이야기하는 현실을 짚어내는데 이 시 또한 너무도 충실하게 사실을 사실답게 표현하므로서 독자로 하여금 시적 감흥을 제한하는 역효과를 낳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기억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의 체험, 사실의 전달에 주안점을 둘 때 시의 완성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  (2) 사실적 체험에서 사색의 경지로 나아감  지난 사월은 잔인하였습니다. 나라의 곳곳에서 산불이 일어나서 아까운 삼림이 폐허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실로 엄청난 국력의 손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강원도 고성지역은 계속해서 산불의 피해를 입어 다른 지역보다 더 큰 피해가 있었다고 합니다. 소방장비를 완비해야 한다!. 산불예방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들끓었었습니다. 산불이 나서는 안됩니다. 아까운 인명과 삼림이 파괴되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미국이나 호주 같은 큰 나라에서도 산불이 자주 일어난다고 들었습니다. 삼림의 면적이 넓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미국에서는 자연발생적이고 인적인 피해를 주지 않으면 산불을 그대로 방치(?)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에 대한 찬반 양론이 비등하지만 자연의 섭리는 200년에 한 번 꼴로 산불이 일어나서 생태계를 새롭게 구성한다는 학설이 설득력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200년에 한 번 큰 불이 난다는 사실은 우리의 감각적 체험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중국대륙에서 불어오는 황사가 온갖 오염물질을 옮기기도 하지만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 또한 그렇지요.  폐허 이후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메말라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며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한 편의 시를 짓는데 있어서 사실적 표현(체험)은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모든 시구가 시적 표현(비유)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사실적 진술이 시적 진술보다 훨씬 많습니다. 위의 시는 자연의 재생성을 사실적으로 진술합니다. 그런데 중간 부분의 3행은 사실적 진술이 아니라 체험을 넘어서서, 체험을 꿰뚫은 진실입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언명은 나에게 주어진 자연적 현상을 투시해서 얻어낸 결과입니다.  (3) 의인법을 활용하라  시인들이 소재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모든 대상,-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사건이든간에 -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나와 동일한 인격으로 구름과 달, 별과 바람을 대한다는 것이고 그것들이 전해주는 말들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직선』의 시편 중에서 뛰어난 작품들은 주로 2 부, 3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부분들은 나무와 꽃들을 의인화하여 삶의 체험과 등치시킨데 있습니다.  「복숭아 나무」,「가죽나무」, 「숲」,「겨울나무」등의 시편은 소재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매우 섬세하게 관찰하고 의인화해서 이루어낸 삶의 진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죽나무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 것 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  편안히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 걸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 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하나라도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기꺼이 팔 한짝을  잘라 줄 마음 자세는 언제나 가지고 산다  부족한 내게 그것도 기쁨이겠기 때문이다  가죽나무는 장자에도 나오는, 쓸모없어 베일 염려 없이 오래 사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런 가죽나무를 화자 자신으로 삼고 가죽나무가 말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아주 작지만 소중하고, 힘 없지만 더 힘 없는 사람들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민중들의 삶을 의인화하므로서 앞의 시들에서 보이는 지사적 토로보다 더 강력한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들은 소재에 대한 면밀한 관찰 없이는 지어낼 수 없습니다. 의인법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관찰의 극대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물의 관찰만으로 이루어진 시를 하나 읽어 볼까요  잎차례  하늬바람에 모과나무잎이 올라오는 걸 보니  이파리 하나 내는 데도 순서가 있다  해 뜨는 쪽으로 하나 내보내면  해 지는 쪽으로도 하나를 내고  그 사이에 양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잎 하나를 꽃 세워둔다  좌우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게  꼭 그렇게 잎을 낸다  밤나무나 동백나무도 오른쪽에서 잎이 나면  다음에는 왼쪽에서 잎이 돋는다  마주나는 건 마주나고 돌려나는 건 꼭 돌려난다  하찮은 들풀이나 산기슭 작은 꽃들도  꽃잎이 다섯 개인 건 꼭 다섯 개만 내고  여덟 개인건 여덟 개만 낸다  냉이나 민들레나 우리가 보기엔 그저  이무렇게나 피어있는 들꽃도  저희끼린 다 정교한 질서를 따르고  생명의 사소한 일 하나를 끌어가는 데도  반드시 지킬 줄 아는 차례가 있다  이파리 하나에도  이 시에서 시인의 주관적인 주장은 마지막 3행을 제외하고는 전혀 없습니다. 사실적 관찰만으로도 얼마나 감동적인 시를 쓸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됩니다. 어렵거나 장식적인 어휘 또한 눈에 띠지 않습니다. 매우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진술을 통해서 자연의 보이지 않는, 하잘 것 없는 것들의 질서지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우리 주위를 잘 살펴보면 시로서 형상화할 수 있는 진실과 생명현상이 곳곳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시적 감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세밀한 관찰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감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4) 훌륭한 시는 체험 자체가 특수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체험 속에서 특수성을 찾는 것이다.  도종환 시인은 분명히 보통 사람들이 겪을 수 없었던 체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체험들이 도 시인을 시인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시가 신념을 강화하고 실천력을 드높이는 역할을 했다는데 주목을 해야 합니다. 繪事後素의 정신은 시인 자신의 인격수양과 행동양식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시인은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는 존재입니다. 詩作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을 벼려내고 자신의 시작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시세계(현실세계)에 동화될 것을 권유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美的 세계에 인도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시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언어는 물감이나 음률과는 또 다른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상 이야기하는 의미의 애매성을 보다 많이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의미를 드러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의미를 감추어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소재가 가지고 있는 의미망이 작고 단순할수록 詩作은 쉽게 진행됩니다. 그런데 길, 희망, 운동과 같이 의미망이 넓은 언어를 소재로 다루게 될 때에는 그 소재를 형상화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길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무수한 의미로부터 시인은 몇 개 또는 단 하나의 의미를 선택하지 않을 수 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의도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난점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한 편의 시를 통해서 독자들은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면서도 자신만의 영역으로 그 의미를 끌고 들어가서 자신만의 세계로 구축하고자하는 심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시에 있어서 의미의 드러남과 감춤의 경계 설정은 매우 어렵다고 보여 집니다. 드러남과 감춤은 의도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기지고 있는 타성, 한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다른 단어와 충돌할 때 빚어지는 또 다른 이미지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은 시를 쓰는데 필수불가결한 첫 번 째 관문입니다.  (5) 연상(聯想)의 사용을 생활화하라  이미 지난 번 강의에서 연상의 법칙이 우리의 사유를 성립케 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관찰의 방법으로서 연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화사하게 꽃이 피어 있고, 무엇인가 그 꽃으로부터 빚어지는 감정의 움직임이 있다면 꽃으로부터 파생되는 이미지들을 낱말잇기식으로 전개시켜 봅니다. 꽃 - 푸름 - 하늘 - 편지 ....... 이와 같은 식으로 연결되어지는 이미지들을 정리해 보면 내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던 느낌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다가옴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등잔  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  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  심지만 뽑아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  그으름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하랴  욕심으로 타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  결국 심지만 못 쓰게 되고 마는데  들기름 콩기름 더 많이 넣지 않아서  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  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  넉넉하기 때문이다  넘치면 나를 태우고  소나무 등잔대 쓰러뜨리고  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  욕심 부리지 않으면 은은히 밝은  내 마음의 등잔이여  분에 넘치지 않으면 법구경 한권  거뜬히 읽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빛이여  요즈음은 전기 공급이 잘 되어서 두메산골에도 형광등 불빛이 환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등잔불은 우리의 밤을 지키는 소중한 존재였지요. 등잔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갑자기 불이 나갈 때, 제사때 쓰는 촛불을 생각해도 되겠지요  위의 시는 등잔을 소재로 화자의 생각을 펼쳐 나갑니다  1연은 등잔의 심지를 내리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입니다. 심지가 많이 올라와 있으면 그으름이 생기고 연기 때문에 눈이 따갑지요  2연은 등잔의 속성에 대한 관찰입니다  3연은 그 등잔이 나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는 상징적 존재로 그려집니다.  등잔의 심지를 내리는 행위 - 등잔의 속성 - 내 마음 속의 등잔 - 따뜻한 마음의 빛  우연히 시인은 등잔불을 바라봅니다. 심지가 많이 올려진 탓에 그으름이 생깁니다. 그래서 심지를 내립니다. 등잔을 가만히 보니 등잔 기름을 담는 종지가 작습니다. 방안 하나를 비추는 등잔 하나가 밤을 지탱할 때까지의 용량. 그런 등잔이 내 마음 속에 존재 합니다. 은은한 빛으로 법구경 한권 읽을만큼의 마음의 빛을 냅니다.  이 시는 욕망의 덧없음을 눈 제대로 뜰 수 없음, 심지만 못 쓰게 됨, 소나무 등잔대를 쓰러뜨림, 창호지와 문설주를 태움과도 같은 사실로 빗대면서 節欲의 상태를 감동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시는 등잔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우리네 인생사와 대입시켜 나가면서 평화로운 상태의 우리의 마음을 아름답게 그려냅니다. 심지를 조금 내리는 사태에 대한 시인의 해석, 등잔불이 밝혀주고 있는 공간의 좁음에 대한 인식, 좁은 내 마음에 존재하는 등불에 대한 느낌들을 배열하므로서 등잔이 주는 여성적이고 수동적인 상징들을 평화로움으로 바꾸는 신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에 드러나는 바와 같이 특수한 경험은 일상사에서 내버려지는 수많은 사태에서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는 관찰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한 편의 시를 더 감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산맥과 파도  능선이 험할수록 산은 아름답다  능선에 눈발 뿌려 얼어붙을수록  산은 더욱 꼿꼿하게 아름답다  눈보라 치는 날들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놓은  외설악의 전 산맥 보이는가  모질고 험한 삶을 살아온 당신은  그 삶의 능선을 얼마나 아름답게  바꾸어놓았는가  험한 바위 만날수록 파도는 아름답다  세찬 바람 등 몰아칠수록  파도는 더욱 힘차게 소멸한다  보이는가 파도치는 날들을 안개꽃의  터져오르는 박수로 바꾸어놓은 겨울 동해바다  암초와 격랑이 많았던 당신의 삶을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 파도로  바꾸어 놓았는가  2 연 對句 형식으로 구성된 위의 시는 잘 짜여진 구도 때문에 시적인 감동이 감소되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습작을 하는 분들께는 시작법의 전형을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됩니다.  시인은 겨울여행을 떠납니다. 인제를 거쳐 한계령을 넘으며 설악 준봉을 보고 동해 바다로 갑니다. 눈이 덮힌 산은 웅장함, 비장함, 올곧음, 부동성을 상징하고, 파도는 역동성, 깨어짐,도전, 허망함을 상징합니다. 산은 정(靜)의 상징이고 파도는 동(動)의 상징입니다. 겨울은 또 무엇입니까? 모든 사물이 생명력을 버린 허망한 시간이면서 새로운 봄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절망이면서 희망인 겨울, 그래서 예로부터 동지가 지나면 봄의 기운이 일어나는 것으로 선인들은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요.  1 연에서는 눈 덮힌 설악산을 한 장의 사진으로 고정시켜 놓고 멀리서 바라보며 느끼는 비장한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2 연에서는 허망하게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의 모습을 안개꽃의 터져오르는 박수로 묘사하므로서 시의 활력을 더해 줍니다. 이 시가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시를 읽는 재미는 반감되어 질 것입니다. 이 시는 화자가 독자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대상에게 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구비치는 산맥과 끊임없이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는 험난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우리 자신이며 바로 당신입니다. 그대(들이)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단어는 화자와 독자와의 간격을 좁히고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장치입니다.  시인은 시를 통하여 자신을 정화하고 부단한 각성을 스스로에게 요구합니다. 독자는 시를 통하여 시와 더불어 시를 쓴 시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창조적 인간은 주어진 세계에 순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져 있는 세계를 새로운 세계로 바꾸려는 꿈과 희망을 가진 존재입니다. 세계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진실을 드러내고, 공유하는 일과 함께 아름다움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이제 이번 강의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부드러운 직선  높은 구름이 지나가는 쪽빛 하늘 아래  사뿐히 추켜세운 추녀를 보라 한다  뒷산의 너그러운 능선과 조화를 이룬  지붕의 부드러운 선을 보라 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내게  이제 다시 부드러워지라 한다  몇발짝 물러서서 흐르듯 이어지는 처마를 보며  나는 웃음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저 유려한 곡선의 집 한 채가  곧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을 본다  휘어지지 않은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잡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것을 본다  사철 푸른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이 시도 시인이 어는 절집 처마를 보며 허공을 부드럽게 감싸안은 모습을 보면서 모나지 않게 사는 것이 정도라는 것을 깨우칩니다. 그러나 이 시의 미덕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곡선을 이루고 있는 지붕 밑에 올곧은 기둥들을 상기해 내는데 있습니다. 外柔內剛의 정신은 안으로는 자신을 준엄하게 다듬고 밖으로는 약자를 포용하고 어루만질 줄 아는 삶의 예지를 표현하는데에서 이 시의 참맛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반성적 사색을 이끌어내고 그것이 독자들에게 보편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형식미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 강의 모두에 盡善盡美의 정신을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에 절실한 것 그러면서도 독자들에게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체험을 통하고 난 후에야 시에서 갖추어야할 형식 (비유)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 정리 *  1. 시는 정보의 전달 수단이 아니다. (정서의 전이)  2. 자신의 느낌과 이야기할 내용을 정리한다.  3. 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소재를 발굴한다.  4. 시의 얼개를 구상한다.  5. 적절한 비유를 통하여 자신의 전달 내용을 이미지화 한다.  *퍼옴- 나호열교수(경희대)    
  안도현의 시세계  구정 연휴도 지나고, 이제 졸업과 입학 그리고 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많이 기다리셨을 것으로 생각되면서도 예정을 넘기게 되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우선 여러분들께서는 자료실에 올려져 있는 안도현 시인에 관련된 자료들을 꼼꼼히 읽어 주셔야 하고 그렇게 하셨을 것으로 간주하고 강의를 진행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는 안도현의 시집 『그리운 여우』를 읽으신 것으로 판단하겠습니다.  지난 8주차 강의록 말미에 숙제 내드린 것 있지요? 시 제목 알아 맞추기. 시 제목은 입니다. 시를 쓴 이가림 시인은 사랑하는 이에게 향하는 절절한 사랑의 감정을 석류가 막 터져 나오는 모습에 대비시키면서 진한 감동과 아름다움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시를 읽고 감동한다는 것은 미묘한 것입니다. 똑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참 맛있다!'라고 서로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맛있다'를 측정할 도리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정서와 감동의 강도는 각자 틀릴 수밖에 없지요. 시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사랑은 모든 예술 분야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왜 그럴까요? 가르쳐주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아지는 것,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홍역처럼 일생에 한 번 이상은 거쳐야 하는 감정의 통로이기 때문이겠지요. 지금 이 강좌를 보고 계신 여러분이 에 관련된 시를 한 편 쓰신다면 어떤 시를 쓸까요?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이라는 것처럼 관념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은 무엇이다.'라는 정의는 무수히 많고 아가페적인, 에로스적인, 상호 호혜적인 여러 부류의 사랑을 논할 수도 있고..... 언제부터인가 국적불명의 발렌타인데이(바로 오늘이군요), 화이트데이가 서로의 사랑을 전하고 확인하는 행사로 젊은이들 사이에 성행하고 있는데 막상 '좋아한다'와 '사랑한다'의 차이가 무어냐라고 물으면 그 대답은 난감해지지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막연한 관념의 상태를 구체적인 실물로 재현해 내는 연상의 법칙을 기억하고 계시지요. 여러분들은 자주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 감정을 어떤 구체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까? 하고 궁리를 거듭하다 보면 상상력이 깊어집니다. 일상적으로 무심하게 지나가던, 말하자면 상식적으로 눈에 보이던 사물이나 현상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자료실에 올려져 있는 올해 신춘문예 작품들을 살펴보면 제가 말씀드린 새로운 의미 해석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나 호 열  사랑은 꽃이 아니다  꽃 지고 난 후의 그 무엇  사랑은 열매가 아니다  열매 맺히고 난 후의 그 무엇  그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이 지상에서 처음으로 피어나는 꽃  이 지상에 마지막으로 맺히는 열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제가 쓴 이라는 시입니다. 2,3년 전에 결혼한 젊은 부부를 축하하기 위하여 쓴 시입니다. 마침 며칠 전 황청원 시인이 진행하는 방송프로그램에 언급이 되기도 하였는데요, 이 시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설명을 하더군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란 서로를 그리워하고, 감촉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사랑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사람마다 사랑의 의미는 다르고 사랑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신기루를 향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헌신하며 실체를 완성하려고 하는 과정, 그리고 그 이후에 남겨지는 또 하나의 의미이다.'  그렇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이가림 시인의 가 훌륭한 시인 까닭은 사랑을 느끼고, 그리워하는 감정을 넘어서서 비극적인 자세, 자신을 낮추어 낮은 땅 위로 떨어지는 행위- 헌신하는-를 보여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용한 저의 시의 소재는 무엇일까요? 뚜렷하게 드러나는 소재는 보이지 않고 , , 과 같은 일반적이면서도 관념적인 의미를 지닌 명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느끼십니까? 지금 빨리 자료실로 이동하셔서 '시의 네가지 유형' - 이승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십시오. 그 네 가지 유형 중에 제 시는 어디에 속할 것 같습니까?  이쯤에서 여러분은 조금 혼돈스러우실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는 시는 소재와 자신의 생각을 연상의 법칙을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뒤에서는 그와 상반되는, 사물의 묘사가 아닌 시의 형태를 보여 드렸기 때문입니다. 은 사랑을 정의합니다. 무엇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이기 때문이다의 형식으로 논술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의도하는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의 형식이 의 형식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물의 형태, 동작, 일련의 현상을 관찰하고 그것과 자신의 생각을 연결시키는 작업이 좋은 시를 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관념적인 내용을 관념적인 표현으로 구사한다는 것은 시의 완성도에 있어서 문제가 많다는 점입니다.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원로시인이신 조병화님은 시는 짧을수록 좋다고 하였습니다. 요즈음 시들이 난삽해지고, 산문화되어가는 경향이 많은데 어디까지나 시의 본령은 '언어의 압축'을 통해서 상징화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위의 시는 안도현 시인의 시이지요. 본 강의는 안도현 시인의 시세계를 폭넓게 조망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창작할 때 필요한 테크닉을 배우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시를 깊이 연구하고 싶으신 분은 자료실의 평론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너에 묻는다'라는 시는 정말 짧습니다. 어려운 말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잊고 있었던 진실 하나를 화살처럼 우리 가슴에 꽂습니다. 우리를 반성시키는 것이지요.  연탄재,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긴 겨울밤 우리들의 등짝을 덥혀주던 연탄이, 다 타고나면 좁은 골목길에 하얀 얼굴로 버려지던 연탄재, 눈오는 날이면 비탈길 미끄러지지 말라고 길 위에 부서지던 연탄재, 화난다고, 심심풀이로 발길질하던 연탄재를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연탄으로 활활 타오르던 그 시절을 생각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우리는 동심의 세계를 그리워합니다. 왜냐하면 순수한 마음을 점점 잃고 산다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점점 더 이기적이 되고, 물질에 어두워지고 자신이 무엇인지 누구인지를 잃어버리기가 쉬운 까닭이지요. 갑자기 공자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子曰(자왈),君子有三戒(군자유삼계) 하니, 少之時(소지시)에는 血氣未定(혈기미정)이라 戒之在色(계지재색)하고, 及其壯也(급기장야)하여선 血氣方剛(혈기방강)이라 戒之在鬪(계지재투)하고, 及其老也(급기노야)하여선 血氣旣衰(혈기기쇠)라 戒之在得(계지재득)이니라  군자가 경계하여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다. 연소할 때에는 혈기가 아직 진정되지 못하여 여색을 경계하여야 하고, 장년이 되어서는 혈기가 굳세어 남과 다투기를 즐겨하므로 이를 경계하여야 하고, 늙어서 혈기가 쇠약해지면 재물을 탐내므로 이를 경계하여야 한다.  쉬운 듯 하면서도 참으로 어려운 말이지요. 한 평생을 살면서 자신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요즈음은 사람들을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지요, 좋으면 만나고 싫어지면 헤어지고, IMF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는 현상을 우리는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지요. 자식이 가출하고 지아비가, 지어미가 집을 떠나고, 경제력이 없다는 이유로, 아이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백년가약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너무 많이 보고 있지요. 정글의 법칙이 횡행하는, 제로섬의 번득이는 칼날이 날아다니는 이 세상에서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연탄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의 몸을 태움으로써 타인을 따뜻하게 하는 힘! 자신은 소멸하면서 타인을 일으켜 세우는 헌신!  시인은 우리 모두에게 묻습니다. 연탄재처럼 쓸모 없다고, 늙었다고, 능력이 없다고, 함부로 홀대하고, 그러나 그런 존재들에게도 청춘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고, 꿈과 희망이 있었음을 알고 있냐고, 연탄처럼 자신을 소멸시키는 그런게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세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삶에 대한 곧고, 건강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논어를 읽고, 노자도덕경, 장자를 수 백 번 읽어도 자신의 생활에 접목시키지 못한 채 識者然 한다면 좋은 소양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시를 쓰는 마음은 맑고 깨끗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신 바와 같이 안도현 시인은 전교조에 가입하여 해직 당하고 (젊은 나이에), 생활의 신고를 겪어내면서 이 사회와 가족과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곧게 가꾸어온 시인입니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씨도 섬진강가의 조그만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동심의 세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출세에 대한 열망을 접고 사람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천착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존경과 좋은 시를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를 통해서 타인에게 묻고 다시 자기 자신에게 되묻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의 건강성을 위해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쑥부쟁이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쑥부쟁이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뜻이다. 또한 쑥부쟁이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자연을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산서에서 내가 얻은 소득이 있다면, 부끄럽지만 그것은 자연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아주 조금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환경운동이나 녹색운동, 혹은 생명운동을 이끌어가고 있는 이들처럼 적극적 자연주의자는 아니다. 차라리 나는 인간을 위한 그러한 모든 운동을 폐기하고, 쑥부쟁이의 입장에서, 느티나무의 입장에서, 돌고기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그들의 입장에서 인간을 테러하고 싶은 과격한 생물이 되고 싶다. 유사 이래 문학과 철학과 과학의 배후조종자인 인간중심주의의 이기성을 나는 쑥부쟁이에게서, 느티나무에게서, 돌고기에게서 배우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지금 나의 삶과 문학의 중요한 스승이다. 인간아, 입장을 바꿔 사유해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이 나에게 건네는 말의 깊이를 나는 사랑한다. 나는 요즈음 하루에 한 번 이상 그들에게 엎드려 절한다.  시인이란 거칠게 말하면 세상을 조금 삐딱하게 보는 사람, 보통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보는 세계를 비상식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발상 자체를 바꾸어 봄으로서 이 세계를, 사람들을, 자연을 다른 방면으로 해석하고,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세계를 또 하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위의 글은 안도현 시인이 직접 쓴 글(자료실에 올려져 있음)입니다. 밑줄 그어진 강조 부분을 보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발상을 바꾸어 본다고 해서 기괴하거나 퇴폐적이거나 하는 쪽으로 흘러가서는 안되겠지요? 시인은 건강하여야 합니다. 특히 정신은 어떤 외압이나 고통에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강인함을 지녀야 합니다. 세상과 맞서는 힘이 있어야 시로서 독자들에게 희망과 삶의 기쁨을 전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인이란 이런 자가 아닐까. 이 세상의 모든 관계와 관계의 긴장 상태를 들여다보는 자. 연자새를 감고 있는 아이와 공중에 떠 있는 방패연과의 팽팽한 관계, 들길에 핀 쑥부쟁이 한 송이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 사이의 그윽한 관계, 그 둘 사이의 긴장.  우리가 시를 쓸 때 관찰의 중요성을 자주 말합니다. 관찰이란 다른 말로(안도현 식으로) 나 아닌 것들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나의 입장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입장에서 나를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관찰을 행하기 위해서는 속도에 민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어떻습니까? '핏자를 20분 안에 배달하지 않으면 핏자값을 받지 않습니다' '속성 20분 현상' '퀵 서비스' 모든 일상의 일들을 속도를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조급증은 이제 우리의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제 TV를 보니까 한국 사람이 영국사람 보다 1분당 보행 속도가 배가 빠르다고 하더군요. 밥 먹는 속도는 어떻습니까? 저도 반성해야 합니다. 3분이면 식사를 마치니까요. 식사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배고프니까 그냥 먹는거지요. 속도가 나면 날수록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음미할 시간을 놓칩니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그런 속도전쟁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남이야 가던 말던 느린 걸음으로 꽃 한 송이, 싹 하나가 세상에 고개를 내미는 모습을 끈기 있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컴퓨터를 모르면 세상에서 완전히 낙오되어 버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다음 세대엔 또 무엇이 우리를 스트레스 받게 할까요? 그렇게 허겁지겁 세상 살다가는 이 세상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제 걸음을 조금 늦추고 우리들의 주위를 둘러봅시다.  지금까지 안도현 시인의 시를 감상하면서 시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항목들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1. 삶에 대한 진지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냥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지는 상황들을 반성적으로 탐색하고 행동하는 자세를 견지한다는 것  2. 상식으로부터의 탈피를 꾀하는 것  기존의 세계가 아닌,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대상에 대한 관찰을 행하는 것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확고한 자신의 관점을 가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관점을 갖는 것을 포기하면 좋은 글을 쓰기 힘듭니다. 관점이라고 말하면 자신의 세계관, 인간관, 등등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장이 되겠지요, 편견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매우 가난한 상태로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떤 생각을 지니게 될까요? 세상이 모순투성이다. 살고 싶지 않다. 나도 돈을 벌어야겠다. 가난해도 떳떳하게 살겠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의 주장이고 관점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써야할까요? 가난에 대하여? 왜곡된 사회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방도에 대하여? 기성시인들이나 아마추어 시인에게나 다같이 필요한 것은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수 십 편, 수 백 편의 시를 써 보는 것입니다. 쓰는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이 정리되고, 직설적인 주장이 묘사를 통해서 하나의 아름다운 글로 되살아나고 하면서 수많은 태작이 버려지고 하는 것입니다.  자, 쓰고자 하는 내용이 정리되었습니다. '아! 저 꽃은 아름답다. 저 꽃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전하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에 여러분들은 시의 형식에 대하여 생각이 갑니다. 형식이란 그릇입니다. 접시에 물을 담을 수 없듯이, 여러분들이 전하고 싶어하는 글에 합당한 그릇을 찾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형식에 대해서 막연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배운 방식대로 습관적으로 쓰기 시작합니다. 지금부터 그러한 습관을 의식적으로 탈피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앞에서 인용한 는 단 3 줄로 시를 완성하고 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여러분) (길가에 버려진)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마세요)  (여러분은) (연탄처럼) (몸을 달구어) (당신이 사랑하는 이)에게 뜨거운 사람인 적이 (있습니까)  이 시를 산문투로 바꾸어보면 바로 위 글처럼 될 것입니다. 화자는 나이고 청자는 불특정 다수이기 때문에 여러분이라고 해야 되겠지요? 그러므로 마세요. 있습니까? 라고 부드러운 청유형의 질문을 하게 되지요. 위 글은 시가 아니지요? 왜 그럴까요? 시는 언어의 압축과 비유를 통한 상징화 작업입니다. 어떤 시가 잘 형상화되어 있다라고 말할 때, 형상화는 하나의 뚜렷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라고 다시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의 이미지가 뭐냐? 라고 물으면 대답이 곤란해집니다. 각자가 느끼는 그 이미지는 매우 심리적이고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이지요  에서 너는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입니다. 시인은 가짜 사랑이 횡행하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묻기 전에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정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헌신하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을 지니고 있는 시인은 어느날 버려져 있는 연탄재를 발견합니다. 이제는 쓸모 없이 버려진, 그러나 한 때는 온 몸을 사루어 우리를 따듯하게 했던 그러한 존재..... 아무 조건 없이,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만이 사랑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닌지요. 시인은 명령합니다. ∼ 마라. 굉장히 강한 어투입니다. 그 다음 '너는' 이 한 줄이 한 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만일 '너는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왜냐하면)누구에게 너는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렇게 구성한다면 굉장히 늘어지지는 문장이 되지요. ∼마라 라고 강한 어조로 명령한 다음 '너는' 이 한 줄을 배치하므로서 1 행과 긴장관계를 형성하면서 바로 너 라고 손으로 지적하는듯한 1:1의 대립 구도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3 행의 ∼ 느냐 라고 되묻는 것은 완곡하게 너는 그렇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각성시키는 것이지요.  사랑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이 시인에게 사랑이란 정의는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 옆에 붙어서 우는 것'으로 인식 됩니다. 울지 읺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부연합니다. 시는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습니다. 여백의 미, 독자가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지요. 전통 동양화(수묵화)는 검은 먹 하나로 그림을 그리고 여백이 훨씬 많지요. 그것은 그냥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고결한 상태를 상징하는 보이지 않는 그림입니다. 시인은 매미가 우는 까닭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라고만 말하지 더 이상 구체적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의 여백은 독자들의 몫입니다. 독자들이 생각하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 시인의 또 다른 할 일입니다.  인생  밤에, 전라선을 타보지 않은 者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이 시의 키포인트는 전라선입니다. 전라선은 이리로 해서 남원, 구례, 순천, 여수까지 가는 노선이지요. 전라선을 타 보지 않은 자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니! 이 무슨 소리입니까? 전라선에 대한 인식과 경험의 폭에 따라 이 시는 천차만별의 정서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분명히, 시인은 전라선을 타 본 경험이 있을 터이고, 전라선을 타고서 느낀 어떤 정서가 있을 터이고, 밤에 전라선을 타고 가면서 아! 인생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자신의 정리된 생각이 있을 터인데 더 이상 자신의 설명을 붙이지 않지요. 그 다음은 독자들이여! 알아서 하라! 참 무책임하고, 독자들을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이 시를 읽기 위해서 전라선을 일부러 타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제가 가지고 있는 정서란 한 구비 한 구비 넘어가는 첩첩 산중과 가물거리는 몇 점의 불빛, 덜커덩거리는 기차 바퀴 소리,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상기시키는 寂寞江山, 어떤 쓸쓸함 정도로 어림짐작이 되지만 그 이후에 남는 여운은 그리 녹녹한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바 있듯이, 시를 잘 쓸 수 있는 첫 번 째는 대상의 입장에서 나를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제가 잘 쓰는 말로 대상에게 말걸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풀, 나무, 구름, 별, 달, 이런 것들을 나와 대화를 하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 안도현 시에 서 연탄이라든가, 매미라든가 하는 무생물 또는 생물을 의인화하는 것입니다. 연탄과 매미를 뜨거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존재로 등치시키는 능력. 안도현 시인의 많은 시들은 의인법의 묘사를 구사하고 있는데 여러분들도 의인법을 잘 익혀 두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그는 삼라만상을 일단 닥치는대로 의인화시켜놓고 본다. 의인법 뿐만 아니라 무릇 그 모든 비유법들이 시에 동원되는 일이 당연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육회 안주를 특별히 좋아하는 안도현의 식성처럼, 그가 어쩌면 편식이다 싶게 즐기는 이 의인법이라는 방식으로 말미암아 그의 시편들은 쉽고 만만하게 여겨지면서도 독특한 참신성을 자랑하게 된다.  - 시집 『그리운 여우』 발문 이병천 111쪽  삼라만상을 닥치는대로 의인화 시킨다는 것은 시 씀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삼라만상을 나와 대화가 통하는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개인적인 소견으로 전 편을 통해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데요, 여기서도 예외없이 눈과 강을 의인화하여 자연의 아름다움, 저마다의 이치를 가진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감동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눈이 내리고, 강이 어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사실로부터 相生하는, 절대로 相剋이 아닌 평화의 경지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사진작가가 포착하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의인화의 기법으로 펼쳐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몸 속으로 허망하게 빠져드는 눈발이 사라짐이 안타까워 제 몸을 얼리는 행위는 이 번 강좌에서 일관되게 언급한 '사랑'의 관점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눈이 오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강물이 어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에게 눈과 강, 그리고 얼어붙음은 모두 서로 서로를 사랑하는 그윽한 눈빛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윽한 눈빛은 탐욕으로 얼룩진 일상의 눈에 담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린 상태에서, 잔잔한 애정을 가져야만 들여다 볼 수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시를 통해서 우리는 알지 못했던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이 세계에 대한 喚起가 보다 큰 시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월에서 4월 사이  산서고등학교 관사 앞에 매화꽃 핀 다음에는  산서주조장 돌담에 기대어 산수유꽃 피고  산서중학교 뒷산에 조팝나무꽃 핀 다음에는  산서우체국 뒤뜰에서는 목련꽃 피고  산서초등하교 울타리 너머 개나리꽃 핀 다음에는  산서정류소 가는 길가에 자주제비꽃 피고  산서라는 곳은 안도현 시인이 복직되어 교사로 근무한 전라북도 산촌의 면 소재지입니다. 사실적으로 열거된 꽃들이 순서대로 피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3월과 사월 사이에 우리나라를 지나가는 봄을 역동적으로 그리기 위해서 몇 개의 장소와 꽃들을 열거하므로서 마치 봄이 발걸음을 옮기는 듯한 동작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궁리를 해 보세요, 요모조모 따져보고 옮겨도 보고 그러는 가운데 맛갈스런 시의 형태가 갖추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어떤 시집을 읽을 때 쉽게 읽지 마시고, 그 시인이 구사하는 시적 기교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참신성, 그리고 만일 내가 같은 주제로 글을 쓴다면 어떻게 할까 하고 따져보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스개 소리로 집에 100권 이상의 시집이 없으면 시를 논하지 말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좋은 시를 가려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충분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로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료실에 올려져 있는 방민호 평론가의 글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 글에서 방 평론가는 안도현 시인이 시인 백석의 영향을 받고 일정 부분 백석시를 본뜨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분석해내고 있습니다. 20년에 걸친 안도현 시의 세계를 음미하면서 시인이 걸어왔고 앞으로 지향해야할 세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입니다. 여러분들이 좋은 시를 읽고 자신의 경향에 맞는 시인이나 시를 닮아보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시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눈이 뜨이는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바로 그런 한 편의 시를 위해서, 수 백 편의 시를 쓰고 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퍼옴- 나호열교수(경희대)    
375    혼을 불사르지 못하는 시인은 그 생명력이 짧을수밖에 없다... 댓글:  조회:2413  추천:0  2017-04-03
  언어의 특성  시라고 하는 것은 낮은 현실의 천장을 뚫고 그것을 통하여 하늘의 높이를 볼 수 있게 하는 일이며, 사방을 둘러싼 어둠의 장벽을 뚫고 외부와 내통할 수 있는 숨길을 내는 일이며, 아스팔트로 뒤덮힌 지상의 각질 같은 두께를 뚫고 대지의 깊이와 온기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일이며, 냉동인간처럼 굳어진 우리의 몸에 생명의 기운을 뜨겁게 불어넣는 일이다.  『몽상의 시학』중에서 인용 (정효구, 민음사, 1998년)  사이버 시창작 교실의 가족 여러분들이 보내주신 습작시들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몇 분은 일상의 틈을 쪼개어,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쳤던 일상의 작은 부분에 감성의 촉수를 들이대고 시로써 표현해 보려는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마음 든든합니다. 12주부터 15주 사이에 진행될 작품실기 시간에는 매우 풍성한 상차림이 될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간단하게 요약을 해 봅시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시의 역할이랄까, 효용이라 할까 하여튼 시인의 입장이거나 시를 읽는 독자의 입장이거나를 막론하고 총체적으로 시를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현실의 천장을 뚫고 하늘의 높이를 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2) 어둠의 장벽을 뚫고 외부와 내통할 수 있는 숨길을 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지상의 각질같은 두께를 뚫고 대지의 깊이와 온기를 느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4) 우리의 몸에 생명의 기운을 뜨겁게 불어넣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시를 쓰는(읽는) 행위는 理想을 꿈꾸는 행위입니다.  현대의 인간은 그 이전의 인간보다 더욱 경제동물화 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식투자를 하고 부동산 투기를 하고..... 사실 돈 없이 어떻게 생활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꿈은 부자가 되겠다, 출세를 하겠다하는 현실적인 요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근원적인 것, 말하자면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등등 무형의 정신적 가치를 꿈꾸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외부와 내통할 수 있는 숨길을 낸다는 것은 개인지향이 아니라 어울림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이 군림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단순한 군집생활이 아니라 위계와 질서를 갖추고서 나만을 위하는 삶이 아닌 남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함임을 아는 利他的 삶에 무게를 둔다는 것입니다.  3) 대지의 깊이와 온기를 느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相爭의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相生의 관계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토인비는 인간의 역사를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응전의 역사'라고 정의하였고, 지금까지 자연은 인간이 마음대로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자연을 약탈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의 의식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습니다. 구 소련시절 중앙 아시아의 아랄호 주변은 거대한 목화 재배지로 관개를 위하여 아랄호의 물을 마구 끌어다 썼습니다. 몇 십 년이 지나자 아랄호의 면적은 1/3로 줄어들었고 목화 재배지는 사막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연의 보복이 시작된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돗물을 불신합니다. 그 맑던 팔당호 물이 3급수로 전락한 것 잘 아시지요. 그래서 우리는 생수를 사다 먹지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바로 우리들 자신들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상 쓰는 샴푸, 한 번 머리 감을 때마다 정화를 위해서는 수 톤의 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애써 외면합니다. 물가에 골프장, 호텔, 음식점 마구 지어놓고, 거기서 놀고 마시고 그 오수를 우리가 마셔야할 그 물에다 마구 버립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노자가 말한 無爲自然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 즉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무위는 '하지 않음'이지요.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것' 자연의 일부인 나. 영어권에서는 nature를 자연으로 번역하고 (인간의)본성으로도 해석하지요. 동양의 사유는 그렇지 않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發明으로 생각되어지는 것들이 동양세계에서는 숨어져 있던 이치의 發見으로 이해되는 것, 오늘날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화약은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 중에 하나입니다. 서양사람들에게는 발명의 의미이지만 동양(중국)의 사고에서는 화약의 이치를 발견한 것에 불과 합니다. 우리가 배를 만든 것도 가벼운 것이 물에 뜨는 이치를 발견한 것 뿐이라는 것이지요.  4) 우리는 기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명령어를 집어넣고 디지털 계산에 의해 출력이 되는 기계가 아니라 자연의 숨결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변화하고 반응하는 '몸'을, 그 '몸'에서 탄생하는 '정신'을 가진 존재입니다. 대체적으로 정신을 고차원적인 것으로 그리고 우리의 '몸'은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저급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몸'과 '정신'은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우리 인간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몸은 more life를 지향하지요? 정신은 more than life 즉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지향합니다. 단순히 오래 살고자 하는 것이 본능이라면 보다 가치있게 사는 것 그것이 생명을 올바로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올바르게 시를 이해하는 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자, 여기에서 잠깐 숨을 돌리고 시를 한 편 읽어 볼까요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  최 승 호  1.  -시화호의 아름다운 처녀시절을 떠올리며 술 한잔 마시고 베란다 밖을 내다본다. 황량한 밤이다. 누군가 죽은 딸 곁에서 울고 있다.-  2.  시화호에선 시체 냄새가 난다. 몇 년을 더 썩어야 악취가 사라질지 이 거대한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3.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다 어느 바닷가를 지날 때였다. 마을 사람들이 짐을 꾸려 마을을 떠나고 있었다. 달마가 물었다 「왜들 떠나시오?」마을 사람들이 대답했다. 「악취 때문에 떠납니다」달마가 보니 바다 속에서 대총이라는 큰 이무기가 썩고 있었다. 달마는 해안에 육신을 벗어놓고 바다로 들어간다. 하지만 돌아왔을 때 자신의 몸, 해안에 벗어놓았던 몸이 사라진 걸 알고는 당황한다. 달마는 결국 자신의 육신을 찾지 못한다. 대신 누군가가 바닷가에 벗어놓은 얼굴 흉측한 육체, 그걸 뒤집어쓰고 중국으로 건너간다.  4.  시화호에선 악취가 난다. 관료들에게서도 악취가 난다. 구역질, 두통, 발열, 숨막힘, 마을 사람들은 떠났다. 개펄은 거대한 조개무덤으로 변해 버렸다. 쩍 벌어진 조개껍질 위로 허옇게 소금바람이 분다. 갯지렁이들도 떠났다. 도요새들은 항로를 바꾸었다.  5.  무력감에서도 악취는 난다. 산 송장들, 시화호 바닥에 누워 공장 폐수와 부패한 관료들의 숙변을 먹는 산 송장들, 이것은 그로테스크한 나라의 풍경인가, 시화호라는 거대한 변기를 만드느라 엄청난 돈을 배설했다.  달마는 시화호에 오지 않는다. 시화호에 달이 뜬다.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 누가 죽은 시화호를 딸처럼 부둥켜 안고 먼 바다로 걸어나가며 울겠는가.  6.  나는 무력한 사람이다. 절망의 벙어리, 그래도 세금은 낸다. 세금으로 시화호를 죽였다. 살인청부자?  7.  내가 시화호의 살인청부자였다. 나를 처형해다오. 달 뜨는 시화호에 십자가를 세우고 거기 나를 못 박아다오. 아니면 눈 푸른 달마를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리게 하든지.  이 시를 읽어보니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 시화호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워낙 많아서 어린 학생들이라도 무엇이 문제인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시화호에 대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셨는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한다면 어떤 내용일지 염두에 두시고 다음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A.  경기도 시흥시와 화성군 및 안산시에 걸쳐 있는 시화호 간척사업은 60년대부터 그 가능성이 검토되다가 87년 6월부터 사업이 시작되어 94년 1월 물막이 공사가 완료됐다. 그러나 발전과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5 천억 원이 투입된 시화호 방조제 사업의 결과 남은 것은 「썩은 물이 넘실대는 죽은 호수」뿐이다. 주변환경은 돌이킬 수 없도록 망가졌고 현지 주민들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이같이 대규모 개발사업에 의한 물리적 환경변화가 현지 주민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변화의 물질적, 상징적 의미를 「거대한 사기극」의 개념으로 인식한 「시화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가 발간돼 눈길을 끈다.  어느 누구도 일부러 현지주민들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이들에게 엄청난 피해와 불편을 안겨주려 의도한 바 없지만 결과적으로 주민들은 「사기꾼 없는 사기극」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시화호 사업 이전 전적으로 바다에 의존해 살아온 이들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대체 생계를 찾는데 실패했으며 자신감과 정체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이 지역은 바다가 막힌 후 갯벌이 마르면서 소금이 하얗게 드러났고, 바람이 불면 미세한 먼지와 함께 소금이 날려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였다. 생활의 터전이던 바다를 잃은 대신 새로운 삶을 기대하면서 융자를 얻어 심어 논 포도나무들은 말라비틀어지고 빚만 남았다. 뿐만 아니라 마을 공동체는 깨어지고 염분으로 인한 2차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  이같이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결정되고 시행된 사업 대문에 삶의 터전을 잃은 직접적인 피해자이면서도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채 소외되고 있는 시화호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이 책의 저자들은 「환경의 파괴는 바로 인간의 삶과 미래에 대한 파괴행위」임을 강조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도 경제 성장기를 거치면서 개발을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들이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환경변화와 함께 주변환경이 심하게 오염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현지 주민들은 국가적 필요와 공익성을 내세운 사업 시행자들의 강압적 태도나 법률적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금전으로 환산될 수 없는 상징적, 문화적 변화나 정신적 피해, 미래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는 이를 이해하고 안정하려는 노력 자체가 부족했던 것이 우리의 현실.  - 1999년 6월 12(금) 조선일보  B.  태어나선 안될 호수였다.  시화 담수호가 결국은 '사망선고'를 받게 됐다. 농림부가 시화호 남쪽 간척 농경지에 필요한 농업용수를 우정호로부터 끌어들이겠다는 계획을 확정함으로써 담수호로서의 기능이 포기된 것이다. 1천 8백만 평 규모로 조성될 도시와 공단지역의 용수(하루 90만T)는 한강으로부터 공급할 것이라는 수자원공사의 설명이고 보면, 시화호의 용도는 사실상 사라졌다.  정부의 담수화 포기는 어떤 방법으로도 시화호의 오염을 막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정부는 시화호의 오염이 사회적 쟁점으로 대두된 후 96년 7월 4천 5백억 원을 수질개선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었다. 그 뒤 정부는 안산시 하수처리장의 용량을 늘리고 ,시화공단 종말처리장의 방류수를 먼 바다로 뽑아내는 등의 대책을 시행해 왔다. 그럼에도 수질은 계속 악화돼 97년 6월 화학적 산소 요구량 22.8ppm을 기록했다. 결국 수자원공사는 97년 7월부터 바닷물을 집어넣기 시작했고 지금은 해수화가 완료됐다.  시화호 수질개선 관련 용역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한양대 신응배 교수는 "담수호로 유지하면서 수질을 개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해다. 정부는 4천5백억 원의 투자를 밝혔지만 적어도 1조원 이상이 소요되리라는 의견이다. 특히 축산폐수의 처리가 어렵다는 신교수의 설명이다.  정부는 시화호 건설계획을 세우면서 호숫물 위로 유람선이 떠다니는 수도권 서남방의 대형 유원지를 조성하겠다고 큰 소리 쳤었다. 87년 4월 29일 시화개발사업 착공식 때 찍은 당시 사진에는 이규호 건설부 장관과 김용래 경기도 지사 등이 장미빛 구상을 내놓고 박수를 치는 장면이 잡혀 있다.  하지만 96년 7월 수질대책을 내놓으면서 환경부장관이던 정종택씨는 "태어나서는 안 될 호수였다" 고 얘기했다. 공업도시들을 끼고 있는 수도권 소하천 최하류의 물을 가둬놓고 이걸 용수로 공급하겠다는 계획 자체가 무모했다는 것이다. 시화호로 흘러드는 반월천 동화천 안산천  등 7개 소하천의 유량을 합해 봐야 연간 3억 7천만 톤이다. 여기에 저수용량 1억 8천만 톤의 방조제를 쌓아놓고 보니 물이 거의 흐르지 못하고 정체되면서 오염도가 급속히 높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무리한 계획이 강행된 것은 환경을 도외시한 개발 일변도의 정책 마인드 때문이었다. 시화호 방조제 사업은 80년대 초반 중동 건설붐이 퇴조한 후 국내로 되돌아온 유휴 건설인력과 장비를 활용하겠다는 정치적 고려에서 입안됐다는 게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더구나 시화개발사업에 대한 환경평가 협의가 환경당국에 접수(87년 10월)된 것은 착공(87년 4월)후 여섯 달이 지난 다음이었다. 애당초 환경 문제는 안중에 없었다는 증거다. 또한 환경당국은 하수처리장 방류수를 먼 바다로 빼내기 전에는 방조제를 막지 말라고 협의조건을 달았지만, 수자원 공사는 이를 무시하고 94년 1월 둑을 막아버렸다.  - 1999년 11월 27일 조선일보  C.  경기 안산시 사동 시화호 북쪽 간석지에 서식하는 갯지렁이가 대량 폐사돼 한국수자원공사가 원인 조사에 나섰다. 22일 위원장 최종인씨는 "시화호 상류에 대한 생태조사를 벌이던 중 갯지렁이가 갯벌에 대량 폐사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폐사된 갯지렁이들은 폐사된 지 3∼4일이 지난 듯 흰색으로 탈색되어 바다위에 떠다니고 있으며, 일부는 갯벌에 묻혀 악취를 풍기고 있다. 죽은 갯지렁이들은 한국해양연구소 앞에서부터 목내동 반월 열병합발전소, 시화공단 입구에 이르는 간석지 7.5㎞ 구간에 걸쳐 있다.  - 1999년 6월 23일 조선일보  D.  시화호에서 3천 여 년 전에 서식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굴껍질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경기도 안산지역 환경운동가 최종인(45)씨에 의해 지난 7월 처음 발견된 이 굴껍질은 한국해양연구소와 여수대학교의 공동분석 결과 3천 여년 전 서식했던 것으로 12일 판명됐다.  이 굴껍질은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굴껍질과 같은 타원형이며, 긴 쪽의 길이가 25㎝로 보통 굴껍질의 10 배 가량 된다. 여수대 이영규 교수는 "탄소동위원소의 반감기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확인한 결과 3015∼3253년 전에 서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또 "이 굴은 하천과 바다가 접하는 갯벌지역에서 자라는 참굴의 일종으로 국내에서 발견되기는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굴껍질을 발견한 최씨는 "안산시 대부동 방아머리와 탄도 중간 지점에서 탐사작업을 벌이다 무릎 깊이의 물에 잠긴 갯벌에서 찾아냈다"며 "갯벌 속에 상당량이 묻혀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시화호에서는 지난해 9월 공룡알 화석지가 발견되는 등 우리나라 자연상태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1999년 11월 12일 , 조선일보  * 1, 2, 3, 4, A, B, C, D는 편의상 필자가 임의로 붙여놓은 것임.  최승호 시인의 시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를 읽기 전에 신문기사 A,B,C,D를 먼저 읽는 것이 순서인데.... 좋습니다. 신문기사를 보면 시에 나타난 내용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신문, 잡지,TV의 기사, 오락 프로그램 등등에는 무수한 정보가 있습니다. 저도 시화호에 대한 위의 글들을 인터넷 신문 검색을 통해서 찾았습니다. 시화호에 대한 정보는 누구나 이렇게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보를 가지고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로 써야할 이유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를 쓰는 사람들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가는 사회적인 문제라든지, 개인적인 문제라든지 그 어느 것을 가리지 않고 시로 써 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집니다. 문제화하는 것이지요. 이런 상상을 한 번 해 봅시다. 위의 기사들을 시인은 빠트리지 않고 다 읽습니다. 읽고보니 슬슬 시로 옮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옮긴다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한다는 것이 아니지요. 사실을 정서를 지닌 다른 그 무엇으로 묘사한다는 것이지요. 어폐가 있을지 몰라도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감동적이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시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보의 내면에 자리잡은 또 하나의 현상에 대해 시인은 반성 작용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꽃은 아름답다'라는 정보를 "꽃이 왜 아름다워야 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성찰의 단계로 끌어가는 것, 그것이 시를 쓰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의 기사를 요약해 봅시다.  A : 시화호는 환경을 파괴하고 개발 위주의 정책을 무리하게 시행함으로써 그 지역에 터전을 둔 주민들의 생활을 황폐화시켰다  내가 그곳에 터전을 둔 사람이라면 나는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B : 시화호는 정치인들의 책략에 의해서 천문학적인 세금을 낭비하고 실패가 예견된 사업이었다. 그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한 사람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국민의 세금을 사리사욕에 채우고 지도자라고 으시대었던 정치인들에 대해서 분노를 느낀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단죄할 수 있을까?  C : 시화호는 완전 오염된, 갯지렁이도 살 수 없는 호수가 되어버렸다. 오,폐수를 방류하는 사람들은 경제적 이유 때문에 오,페수시설을 할 수 없다. 내가 공장을 가동하는 운영자이거나, 축산업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D : 시화호 지역은 옛날부터 민물과 바다물이 만나는 지역으로서 생물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공룡도 살았었다.  그 옛날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원래의 자연상태의 시화호 - 그곳에 살던 각종 생물들, 사람들 - 정책입안자들 - 사화호 공사로 부를 축적한(부정부패) 사람들 - 오,폐수를 버리는 사람들 - 망가진 자연 - 시화호 개선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 - 시화호가 어찌 되었던 무관심한 사람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아마도 두, 세개의 항목에 다 걸치게 될 것입니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모순...... 작년인가요? 모 공영방송에서 영월 동강지역을 집중취재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사실 그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총괄한 PD가 저의 친구여서 더 관심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주 흥미로웠지요.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남한강에는 홍수를 조절할 수 있는 댐이 충주댐 하나 밖에 없어서 큰 비가 내리면 아주 난처해지지요, 충주댐 수문을 열자니 서울지역이 범람하고, 수문을 닫자니 충주지역의 농경지가 아수라장이 되고. 그래서 아예 상류지역에 댐을 만들자. 이렇게 생각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영월지역은 석회암 지역이라 수많은 동굴이 있고..... 오히려 물이 오염되고, 수몰지역이 생기고, 이런저런 이유로 지역의 갈등 (주로 경제적 이익에 관한 다툼이지만)은 증폭되고 말았지요.  서울 강남의 모 치과의사께서 사비를 털어 영월 동강 지역에 사람들을 데리고 갔지요. '자, 봐라, 얼마나 아름다운 환경이냐, 자연생태계의 보고! 댐 만들면 이게 다 무너지고 결국 우리 생활도 파괴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동강의 비경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래프팅 한다고 사람들이 몰려가서 시끌벅석...... 마시고 버리고, 누구 탓을 해야 할까요?  시를 쓰는 마음은 반성하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시화호을 놓고 여러분은 무엇을 반성하겠습니까? 무엇을 시로 옮기시겠습니까?  는 프롤로그(서언)을 포함하여 7 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말할 때 單刀直入的으로, 요약해서, 간단하게 이런 등등의 말을 하게 됩니다. 서론, 본론, 결론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시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절대로 직설적으로 말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영화를 본다고 합시다. 옛날 우리 한국 영화는 30분 정도 보면 그 결말이 뻔해서  재미가 없었지요. 구태의연한, 권선징악적인 내용, 사람들은 '에이, 시시해, 재미없어' 그랬지요. 전 번 시간에 임보 시인이 '시는 우선 재미있고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고 한 그 내용을 기억하시지요. 시도 처음부터 무겁게 나가거나 내용이 뻔하면 일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시를 오래 쓰다 보면 시의 서두와 결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독자를 흡인하는 능력, 독자의 상상력을 뒤집고 뛰어넘는 재치, 이런 것들이 시인들에게 매우 필요합니다.  의 내용은 인용한 A, B, C, D 안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이 시화호의 문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카피하는 형식으로는 시로서의 의미를 찾기 힘듭니다.  프롤로그를 봅시다.  1) 시화호의 아름다운 처녀시절을 떠올리며 술 한 잔 마시고 베란다 밖을 내다 본다. 황량한 밤이다. 2) 누군가 3) 죽은 딸 곁에서 울고 있다.  시인은 파괴되지 않은 자연, 순리대로 생명을 나누는 그 시절을 아름다운 처녀시절이라고 묘사합니다. 시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기법은 묘사입니다. 언어의 기능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지시기능, 정보기능 등등 6 가지의 기능이 있다고 했지요. 다른 측면에서는 언어를 과학적 언어(숫자, 수학공식)와 정서언어로 구분하기도 한다는 것, 기억하시지요? 정확한 표현(묘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합니다. 나의 주관이 개입될 때, 언어는 매우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합니다. 지시적이기도 하고 정보 전달기능이기도 하고 ......  시인은 시화호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면서 프롤로그로 암시를 줍니다. 2)의 누군가라는 표현은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의 죽은 딸은 무엇입니까? 바로 시화호입니다. 2)는 1)과 연결 시켜 볼 때 내가 죽은 딸 곁에서 운다라고 해야 될 것 같은데 시인은 누군가라고 우는 대상을 확정시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내가 운다라고 하면 왜 내가 우는 까닭을 계속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객관성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시를 마칠 때까지 내내 그런 부담을 지울 수도 없고 읽는 독자도 그런 관념에 빠지기 쉽습니다. 누군가라고 표현하면 그 범위는 매우 불확실하면서도 한 둘이 아닌 여러 사람이라는 그래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정서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절묘한 시적 장치입니다.  1 연은 시화호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생명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죽어버린 그 무엇들, 시체냄새는 물질이 썩는 것일 수도, 잃어버린 양심이 썩는 소리일 수도 있고, 문명 자체가 썩는 냄새일 수도 있습니다. '몇 년을 더 썩어야 악취가 사라질지'라는 표현을 잘 생각 해봅시다. 완전히 썩으면 냄새가 사라진다라는 생각은 매우 시적인 발상입니다.  2 연은 달마가 등장합니다. 장면의 전환이지요. 달마는 누구입니까?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고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그 도통을 이어받은 달마는 37대 쯤 되지요? 달마는 동쪽으로 갑니다. 물론 동쪽은 중국이지요. 몇 년 전에 '달마가 동쪽으로 간 뜻은?' 이런 영화도 있었지요. 저도 철학공부 시간에 우스개 소리로 학생들에게 물어봅니다. 왜 달마는 동쪽으로 갔게? 학생들은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왜일까? 저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중국이 동쪽에 있기 때문에. 달마는 불교가 더 이상 펼쳐질 수 없는 인도를 떠나 해로를 통하여 중국에 상륙합니다. 달마는 중국 선불교의 시조가 되지요, 禪佛敎는 直指人心 즉 사람의 마음속에 모든 진리가 담겨져 있다고 믿기 때문에 敎外別傳 : 경전공부를 좋아하지 않지요. 불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고, 기원하고 그런 것을 거부합니다. 오로지 자신의 마음을 궁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이심전심의 불법을 주장하지요. 어째든 역사상의 달마는 매우 신비화된 존재입니다. 2 연에 나타난 달마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잠깐 미루어 놓읍시다. 믿거나 말거나 달마가 행한 일들이 사실적으로 2연에 전개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의 우화를 통하여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우회적으로, 자 이 이야기는 나의 주관이 아니라 어디에 근거가 있는,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야 라고 심리적으로 독자를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도의 시적 장치이지요. 는 상징이 깊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욱체를 벗어놓는다는 행위는 무엇입니까? 淨化한다는 것? 희생한다는 것?  얼굴 흉측하다는 것은 敎化의 실패라고 보아야 할까요?  3 연은 시화호 악취의 근원을 파고들어 갑니다. 악취의 근원이 관료들이라고 적시하면서 시화호의 황폐로 인한 결과를 보여 줍니다.  4 연은 어찌할 수 없는 시화호의 부패에 대해서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되돌아 보면서 2 연에서 등장한 달마조차도 오지 않는 비극적 상황, 교화할 수 없는 나락의 상태, 절망의 상태를 처연하게 읊게 됩니다.  5 연은 드디어 시화호를 오염시킨 주역이 자신이라는 반성에 이르게 됩니다. 앞 연에서 무력감에서도 악취가 난다고 했지요? 나는 무력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에게도 악취가 납니다. 세금을 내고 그 세금으로 시화호를 만들었기 때문에 나도 살인청부자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프롤로그에서 누군가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이 자리를 위해서 계산된 것이었습니다. 세금을 내는 우리 모두. 꼬박꼬박 세금을 내면서도 생색을 내고 배불리는 것은 위정자들, 그런 위정자들을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없는 사람들 그 모두가 살인청부자이고, 악취가 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일에서 결코 국외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연은 그러므로 처형당해야 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임을 당당하게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처연함. 눈 푸른 달마는 무엇입니까? 사실적으로 인도인인 달마는 눈이 푸를 수도 있겠지만 이 시에서 표현된 눈 푸른 달마는 한국외적인 것, 서양적인 것, 현대문명을 일으켜 세운 서양의 시스템, 과학, 이런 것들을 총칭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시에서 새로운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신문기사를 스크랩 해 드린 것도 시에서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한 번 생각 해보고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사실적 정보를 어떻게 시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하는 것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시는 반성의 힘을 키워준다고 믿습니다. 중국의 철학자들은 先知後行할 것이냐, 아니면 知行合一할 것이냐에 대해서 많은 논쟁을 해 왔습니다. F.Bacon의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것은 선지후행의 계열에서는 내용이겠지만 저는 '아는 만큼 행동해야 한다' 쪽에 서고 싶은 사람입니다. 시인은 지사일수도 선각자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로 표현되는 자기반성이 없는 시인은 시를 써야하는 존재이유를 찾기 힘든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혼을 불사르지 못하는 예술가는 그 생명이 짧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번 강의의 주제는 언어의 특성이었습니다. 강의의 의도는 여러분들에게 시는 언어를 도구로 한다는 것을 우선 말씀 드리고 나서 시에서 씌여지는 언어들을 어떻게 적절하게 사용하여야 하는 것인가를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比喩法 등 수사학적인 내용을 기대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유법에 대한 강의는 실제 작품토론 시간에 게재할 것이니 기다려 주세요)  시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가 지닌 특성을 먼저 알아 두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시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따로 있다는 생각입니다. 의 시에서 여러분들이 잘 모르는 단어가 몇 개나 있었습니까? 시에서 표현되는 언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은 시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연유합니다. 멋있는 것, 시적인 어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배열, 조합에 의해서 아름다움이 생성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고가 깊어지면, 언어의 사용 또한 깊어지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게 되겠지요, 그런 수련 기간이 경과하면 아마 여러분은 몰라보게 아름다워지고 시적인 상태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는 지시적인 기능을 대단히 강조하고, 사전적 의미로 해석되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시는 일상적인 언어를 구사하되, 상투적인 표현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시는 정확히 현실을 인식하고 관찰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내용이란 그만큼 공감대를 형성하기 쉽다는 장점도 있지만, 그만큼 상식적인 내용으로 전락할 수 도 있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은 정말 시적이야'라고 말합니다. 詩的이라는 것은 그 자체에 어떤 美의 형태를 갖추고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그 무엇에 대한 관점이 확립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의 단어는 그 의미망이 매우 넓습니다. 그리고 하나 이상의 단어가 서로서로 결합할 때 그 의미망은 크게 증폭합니다.  한 권의 시집을 여러 사람이 읽고 나서 어느 작품이 좋으냐고 물으면 그 대답은 각양각색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환경과 자신의 시각에서 시를 해석하기 때문에 선호하는 작품은 그 편차가 매우 큽니다.  언어는 그 하나마다 內包와 外延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연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개념이 지시하는 사물을 적용시킬 수 있는 범위'를 말하는 것이며 내포란 '한 사물이 함유하고 있는 속성의 집합'입니다. 언어의 조합과 배열이란 이렇게 우리가 관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내포와 외연을 틀을 조화시키거나 깨트림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의미망을 경험하게 하는 喚起의 장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어트Eliot는 '시는 감정의 해방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매우 숙고해 보아야할 내용입니다. 새로운 의미망은 처음 '아! 이것을 시로 써 보아야 하겠다'라고 자신을 환기하는 동시에 어떤 사태에 대한 복사가 아니라 재해석하겠다는 의지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시에서 쓴 언어가 보편적 일상언어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해서 피해야할 어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공간, 소리, 문자, 가로, 세로 등등의 단어'는 내포와 외연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이 시로 드러날 때에는 매우 모호한 상태로 빠지게 됩니다. 모호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뒤죽박죽 되어서 분간이 가지 않는 상태가 아니겠어요? 시의 특성은 曖昧性이다라고 한다면 그 애매성은 다양한 내포와 외연의 결합으로 다각적으로 해석 가능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리움, 슬픔, 외로움' 이런 단어들은 시에서 항용 사용되는 것이지만 시에서 정작 표현되어야 하는 것은 그리움의 상태, 외로움, 슬픔의 상태를 표현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정서를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일례로 한용운 시인의 ' 님의 침묵'이 훌륭한 시로 평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님'이 상징하는 바의 의미폭이 매우 넓고 다양하다는 데 있는 것이지요.  어느 사람에게는 한 편의 연애시로 읽힐 수도 있겠고, 또 어느 사람에게는 구도의 의미로, 또 어느 사람에게는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라고 廣義로 해석할 수 있는 그 다양성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할 중요한 점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강조점 :  1. 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관습적 표현이 되어서는 안된다.  2. 詩語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3. 하나의 언어는 그 하나마다 지닌 의미가 있다 (배열, 조화: 바둑에서의 무궁한 포석처럼 언어의 무수한 포석을 생각하라  4. 시는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묘사를 통하여 미적 상태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편의 시를 읽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 이가림 시인의 시인데 시 제목은 여러분에게 숙제로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물에 관한 이미지를 통해서 사랑하는 대상에게 사랑의 감정을 토로한 수작입니다.  언제부터  1) 잉겅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 속에 2)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구나  3)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 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 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4) 어지러운 충만이기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5)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6)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 주소서  이 시도 특별하게 어렵거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는 보이지 않습니다. 1)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은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직유법은 A는 B처럼(같이)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요. 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직유법을 많이 씁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직유법을 많이 쓰는 시인들이 거의 없지요. 1)의 잉겅불과 그리움의 결합, 잉걸불이 어떤 불인지 잘 모르는 분들도 바짝 마른 잎들이 바작바작 소리를 내며 타는 모습을 쉽게 상상해 볼 수 있겠지요. 잉걸불은 정감이 있는 순수한 우리말이지요. 여러분들은 象徵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 보셔야 합니다. 언어는 약속이지요.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서로 약속을 하므로서 지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지요. 사회가 발전해 나가면서 새로운 의미가 늘어나게 되고 하나의 단어는 점차적으로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의미로 분화해 나갑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상징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무엇이다' 라고 정의하는 순간 그 사람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심상(이미지)을 생성시킨 것으로 볼 수 있는 겁니다.  다음을 볼까요.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이글거린다. 불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그리움이 이글거린다는 이미지는 근접성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지요 3) 영혼의 가마솥이라는 표현도 재미있지요. 시를 공부하는 여러분은 이와같은 'A는 B이다'의 형식을 많이 연습해야 합니다. 영혼과 가마솥이라는 두 단어, 영혼은 추상적이지요. 가마솥은 현존하는 물질입니다. 추상적인 것을 물질화(구상화)하는 연습이 시를 잘 쓰는 한 방법입니다. 4) 어지러운 충만, 또한 쉽게 얻을 수 없는 표현입니다. 어지럽다와 충만의 결합 어지럽다라는 동작과 충만이라는 추상이 결합되는 상태는 어떤 상태가 될까요 얼마나 절실하게 가득찼길래 어지러운 상태에 이르게 되겠습니까? 6) 홍보석의 슬픔, 홍보석은 이 시가 스케치하고 있는 어떤 사물의 색깔인데 그것을 홍보석이라고 비유하고 슬픔을 연결시켜 놓아 확연하  게 어떤 슬픔인지 알 수는 없지요. 그렇지만 막연하게나마 어떤 무드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어요? 슬픔의 빛깔화, 붉은 슬픔? 5)는 아픔의 상태를 드러내기 위하여 찾아낸 문구입니다. 지구가 깨지는 소리...... 우리가 살고 있는 전제조건은 이 지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구가 없으면 우리는 그 존재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런 지구가 깨진다? 지구가 깨지면 60억이 넘는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지구가 깨지는 소리는 그 어떤 아픔보다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 그 소리가 어떤 소리냐고 묻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시를 쓰는 재미가 있다면 바로 이와 같은 표현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시간이 있으시면 책방에 들러 상징어사전을 한 권 구입하십시오. 물, 불, 눈, 밤, 말.......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무수한 말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알아둔다는 것은 여러분의 상상력을 한껏 키워주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또 여유가 있으시다면 시어사전도 한 권 구입하십시오. 우리가 일상에서 쓰이지 않는 결곱고 살겨운 우리말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아마도 여러분들은 놀라실 것입니다.  와 위의 시를 읽으면서 저는 치밀한 구성력에 눈길을 둡니다. 좋은 시일수록 잘 짜여진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을 품어내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삭이면서 마치 카펫트를 짜듯이 한 올 한 올 짜 올려 한 폭의 아름답고 포근한 양탄자를 만들어 내는 것, 더 이상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상태까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해 내는 것. 독자는 한 조각 한 조각의 풍경을 맞추어나가는 행위를 통하여 마지막으로 한 폭의 큰 풍경화를 보게 됩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성급하게 나의 감정을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안으로 감추려고 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도 언어행위는 드러나는 것 입니다.  여러분들께 현대시인에 대한 질문을 드렸습니다. 많은 분들이 응답을 해 주셨는데 안도현, 기형도, 도종환, 정호승, 장석남, 나희덕, 최영미, 김정란, 등의 시인을 거명해 주셨습니다.  이 다음 주에는 먼저 안도현 시인의 시집 을 다루고, 그 다음에는 도종환 시인의 을, 마지막으로는 최영미 시인의 시를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급적이면 시집을 구해서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에 올려져 있는 작품들을 꼭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퍼옴-나호열교수(경희대)    
374    시인은 구도자로서 억지를 부려 결과물을 얻어서는 안된다... 댓글:  조회:2364  추천:0  2017-04-03
시의 발상과 전개방식 2  새해 첫 째 날 각 일간신문에는 일제히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화려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참으로 멋있고 축복 받은 것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 새로운 형식과 실험정신 가득한 시들을 읽는다는 것처럼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아마도 해마다 우리나라와 같이 일간 신문들이 앞다투어 각 장르의 응모를 통하여 신인을 배출하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저의 강의실 자료실에 올해의 신춘문예 시 당선작들을 올려 놓았으니 꼭 감상하시고 자신의 느낌을 정리해 보기로 합시다.  저번 주 강의 말미에 인용한 임보 시인의 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 상상적 이미지 즉, 사물(현상)에 내재되어 있는 이미지를 찾아내는 작업이 시이다.  * 영감은 어느날 문득 나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상상적 이미지라는 것과 영감은 서로 일치하는 부분도 있고 성질이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내재되어 있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만 - 이건 좀 복잡한 문제입니다. 철학적인 논쟁거리도 되기도 하지요. 어떤 이미지가 본래부터 그 사물 속에 있는 것이냐 아니면 이성과 같은 주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냐 하는 논쟁은 오늘날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구조주의와 같은 거대 담론을 통해서도 지속되고 있는 형편이지요.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상상적 이미지는 창조의 작업입니다. 사물 속에 본래부터 있었거나 아니거나 간에 어떤 사물이 가지고 있는 통념적 인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  다시 임보 시인의 글을 읽어 보기로 할까요  흥겹고 재미있게  - 임보 (시인, 충북대 교수)  하나의 시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시의 씨가 있어야 한다. 그 씨를 詩想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이는 靈感이라는 신비로운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흔히 쓰는 말로 이미지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나의 경우 이 이미지는 새로운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서 많이 얻어진다. 그래서 여행은 나에게 시의 씨를 얻는 좋은 방편이 된다. 이 글에서는 졸작 과 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가를 들춤으로 내 시 쓰는 습성의 일단을 보이고자 한다.  *  어느 해 봄의 일이다. 학생들이 졸업여행을 떠나던 날 강의를 쉬게 되어 나도 어디든 잠시 다녀오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계룡산 남쪽 골짝에 자리한 동학사였다. 진달래는 이울고 철쭉이 피어날 무렵이었다. 평일이어서인지 절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많지 않았다. 한적한 계곡길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혼자 기어올랐다. 동학사 어구에 있는 길상암이라는 작은 암자 가까이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주위의 산천이 마치 저녁놀에 젖듯 환하게 밝았다. 무슨 연고인가 하고 주위를 살펴봤더니, 길상암 뜰에 한 그루의 거대한 꽃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온몸으로 수 만개의 꽃봉오리들을 밀어올리고 있는데 마치 이글거리는 모닥불같았다. 영산홍(暎山紅)이라고 했다. 평소에 작은 영산홍만 보아왔던 내게는 무척 낯설고 여간 경이로운 일이 아니었다. 꽃이 아무리 곱다기로소니 천하에 저렇게 황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온 산천에 울긋불긋 피어난 철쭉들이 다 이놈의 꽃그림자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나는 이놈에게 한동안 정신이 팔려 멍청히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다리마저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  영산홍 구경을 한 뒤 길상암 입구의 돌계단을 다시 내려오는 도중이었다. 문득 하나의 섬광이 나의시선을 붙들어 잡았다. 한 여승이 나를 올려다보며 잔잔히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길가에 책상을 내다놓고 앉아서 기왓장 시주를 받고 있는 비구니인데 스물 한, 둘쯤 되었을까, 바로 그 섬광은 옥처럼 맑은 그녀의 얼굴에서 반짝이는 영롱한 눈빛이었다. 선녀의 아름다움이 아마 저러하리라. 그 여승의 신묘한 아름다움은 조금 전까지 영산홍에 사로잡혔던 내 마음을 단숨에 앗아가 버렸다. 세상에 저렇게 눈부시게 고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제대로 바라볼 수 없어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터벅터벅 동학사를 오르는데 절은 보이지 않고 그 여승의 얼굴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기왓장 시주라도 하면서 몇 마디 얘기라도 건네볼 걸...... 생각이 이에 미치자 절구경은 안중에 없고 마음이 급해졌다. 절의 책방에 들러 김달진의 한 권을 사들고는 서둘러 경내를 돌아 부랴부랴 다시 내려왔다. 시주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였던가 길상암의 그 여승은 자리를 거두고 막 일어서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어인 일인가. 지금의 얼굴은 조금 전의 그 여승의 것이 아니었다. 볼 옆 비스듬히 칼자국인 듯 싶은 큰 흉터가 끔찍스럽게 이 여인의 얼굴을 갈라놓았다. 선녀는 간 곳이 없고 흉칙한 한 여인이 주섬주섬 그 자리를 거두어 총총히 절 안으로 사라진다. 이 무슨 변고인가. 마치 도깨비에게 잠시 홀렸던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나는 절을 내려오면서 내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이 부처님의 어떤 조화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꽃에 흠뻑 빠져 정신을 잃고 있는 나를 보고, 세상에는 그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느니라 하고 슬쩍 보여준 것이 아마 그 여인인지 모른다. 그래 이젠 그 여인의 아름다움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불쌍한 내 몰골을 보고, 네가 지금 마음 빼앗기고 있는 그것의 진면목은 사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이렇게 흉칙스러운 것이니라 하고 다시 일깨워 주려는 그런 의도였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 체험을 바탕으로 그날 저녁 밤잠을 설치며 써 내려간 것이 이다.    동학사 아랫절  길상암 뜰에  흐드러진 영산홍  온산천 태우는데  고놈보다 더 고운  사미니(沙彌尼)* 한 년  절문 뒤에 숨어서  웃고 섰다가  달려나온 돌부처에  귀잽혀 가네  * 사미니 : 불도를 닦는 스무살 이하의 어린 여승  제 6행까지 내가 본 영산홍과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그린 것이다. 그런데 그 여승의 변모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 궁리타가 위와 같은 극적 구성으로 엮어보았다. 가만히 세속을 엿보고 서 있는 사미니를 깜짝 놀란 돌부처가 달려나와 귀를 잡고 끌고 들어가는 장면으로 만든 것이다. 여승의 불가사의한 변모를 돌부처의 의인화로 대치했다. 이렇게 만들어 놓고 보니 내가 겪었던 정황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의도했던 대로 작품이 완성되지 않더라도 별로 아쉬워하지 않는다. 체험과 작품을 반드시 일치시킬 필요는 없다. 체험보다는 상상력을 따르는 것이 더 아름다울 수 있으니까.  - 시창작 이론과 실제, 시와시학사 380쪽에서 382쪽  여행 - 동학사 (길상암) - 영산홍을 보다 - 사미니를 만나다 - 새로운 확인(부처님의 조화)  시인은 첫번째로 거대한 영산홍 나무를 봅니다. (경이로움: 작은 영산홍만 보던 통념으로부터의 변환)  두번째로 시주를 받는 사미니를 봅니다. (영산홍의 아름다움에 빠져 매우 아름다워 보입니다)  세번째로 다시 사미니를 봅니다. (흉칙한 얼굴입니다)  여기까지는 사실적 체험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얻어들여지는 자각은 부처님의 조화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연스럽게 부처님의 조화를 이야기했지만 꽃에 취한 나에게 꽃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첫번째 사미니를 보여주고, 그 아름다움에 다시 빠져있는 나에게 두번째 사미니를 보여주고 이 세상의 참 모습은 저렇게 흉칙한 것이라고 일러준다는 생각은 불교 교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공부가 있지 않고는 일으킬 수 없는 생각인 것입니다.  불교에는 二諦法 이라는 것이 있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걸 한 번 생각해 볼까요. - 색이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여기에서 색이란 延長을 가진 물체를 뜻하지요. 불교의 교리는 부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용납하고 있는 진리를 부정하기 위해서 불교에서는 이 세상은 덧없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덧없는 것이 진리라고 또 그것에 집착하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공허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진리를 부정하고 그 부정된 것을 또 부정하고...... 참다운 진리는 그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은 이 세상의 재물을 모두 다 가지려는 듯이 남과 끊임없는 경쟁을 계속 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승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물욕에 집착하다보면 다른 사람을 다치고 종국에는 자신의 마음도 노예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색은 곧 공이다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공에 집착하게 되면 우리 생활은 말 그대로 허무한 상태에서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모든 것은 다 그저 흘러가는 것인데, 내일 죽을 지 모레 죽을 지 모르는 목숨인데 일해서 무엇하며, 밥은 먹어서 무엇합니까? 사는 날까지는 사람답게 살아야 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어느 일변에 치우치지 말고 중도를 행하라 이렇게 이야기하면 될까요? 얘기가 옆길로 샌 것 같은데, 영산홍과 사미니의 바라봄에서 이러한 부처님의 조화를 알게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새로운 체험(시상)을 얻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데, 그 새로운 체험이라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시각, 주장 이런 것들이 전제될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지 단순히 그 여행 자체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알아두어야 합니다.  초심자들은 위와 같은 체험을 그대로 글로 옮기려 합니다. 초심자뿐만 아니라 기성 시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체험을 그대로 옮기는 작업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것은 사실의 전달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버무린다'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체험의 양상을 나의 주관과 버무리는 일, 시 한 편에 나의 인생관이나 인식이 맛이 골고루 배도록 하는 일이 좋은 시를 쓰는 일의 시작입니다.  그림 그리기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여기 평화로운 농촌을 사실적으로 그린 풍경화 한 폭이 있습니다. 그림을 보고 여러분들이 떠올리는 하나의 이미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어떤 정감이 있다면 그림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보여집니다.  이라는 시는 시인이 체험한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거나 어떤 주장을 펼치지 않습니다. 진행되고 있는 상태, 한 폭의 그림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쓰는 일을 정의합시다.  시인이 설명한 여러 정황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영산홍을 보았을 때의 경이로움도 사미니 아름다움과 흉칙함의 교차도 시에는 나타나지 읺았습니다. 영산홍과 사미니의 아름다움의 대비 속세를 훔쳐보는 영산홍과 사미니를 잡아 끌어가는 돌부처의 등장은 매우 상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를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영산홍이 아름답다라든가, 사미니가 아름답다라는 표현은 어느 한 구석에도 없습니다. 온 산천을 태우는 영산홍과 그 보다 더 고운 사미니 영산홍이라는 꽃을 보았거나 보지 않았거나 이런 대비법을 통하여 영산홍과 사미니의 아름다운 자태가 드러나지 않습니까? 절문 뒤에 숨어서 웃고 있다는 표현은 또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순진무구함? 철없음? 하여튼 시인이 인식한 부처님의 조화는 이 시 속에서 돌부처를 통해서 스케치하듯 드러날 뿐 힘주어 자신의 지식을 뽐내거나 영감을 과장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체험을 재구성하는 것!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생자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녹여내는 것!  여기에서 아마튜어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서 이 문제를 다시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청호동 갯배  상한 물 위라도 건너야할  강은 깊었노라고  청호동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뱃사공이 되어  업보의 줄을 당긴다  반생을 저린 오금에 눌려 살아도  고향은 끊어진 탯줄  기워도 구멍만 커지는  잘못 꿰맨 그물코  청호동에 오르면 버릇처럼  고향을 묻는 사람들  이제 와서 고향이  무어 그리 대단할건가  수전증에 떠는 세월  이승을 버리고 있을 피붙이들  갯배에 오른 사람은 안다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아픔이 아니란 것을  * 갯배: 속초시 중앙동과 청호동을 잇는 나룻배. 갯배는 승선한 사람들이 갈구리 철선을 당기어야 이동한다. 이 고장이 수복된 이후로 고성군 봉수리(현재 북한)에서 남하한 조막손이라고 하는 김씨 노인이 20명쯤 탈 수 있는 갯배를 만들어 청호동과 중앙동 사이를 잇는 교통수단으로 배삯을 받았던 것이 청호동 갯배의 효시다.    갯배를 타다  뽀얗게 분칠한 오징어 몸통을 씹으며  비릿내나는 물속  애증처럼 질긴 쇠줄 늘어뜨린 갯배를 탄다  검은 얼굴의사내는  제 발뿌리만 쳐다보며 배를 밀고 있다  고집센 노파처럼  수 만 번도 더 내디뎠을 물에 든  바닥 위를  갈고리에 당겨졌다 놓여지는 꿈  세끼니 힘껏 목숨줄을 당기면  얼마치 삶의 길이 지나질까  그의 마른 팔뚝에서 바닷물이 꿈틀댄다  위의 시들은 갯배라는 공통된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속초로 여행을 갔다가 갯배를 타게되는 경험을 가지게 되었나 봅니다. 말미에 주석이 붙어 있지요. 갯배의 내력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이 잘 되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 두 편의 시를 자세히 분석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색다른 경험을 가지고 시를 만들어 갈 때 앞서서 말씀드린 체험의 직설적 토로를 억제하고 그 체험을 재구성하여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편의 시는 갯배라는 소재를 공통적으로 다루면서도 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매우 상이합니다.  우선 에서는 청호동이라는 특수지역- 실향민촌-과 고향을 잃고 사는 실향민들의 집단적 애환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애환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져버린 테마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까요? 시의 초점이 확산되어 있어 주제가 너무 손쉽게 드러나 버리는 느낌은 들지 않는지요? 예술행위는 주어진 현실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반응하기는 하지만 정치적인 활동이나 경제적인 활동처럼 직접적인 반응이 아니라 감성적 반응, 말하자면 미적으로 승화된 변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학을 이야기하자면 너무 광역화되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를테면 모든 예술행위나 작품에는 미적인 요소가 반드시 함유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에 드러난 바와 같이 사미니가 절문 뒤에 숨어서 웃는다는 상황은 다각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속세에 대한 그리움이나 동경을 미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은 언제 웃게 될까요?  은 집단적 상황을 이야기하지만 시를 쓴 작자의 생각의 버무림이 보이지 않아 감동의 폭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독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갯배에 대한 주석을 달아놓았는데 이 또한 시 속에 갯배에 대한 묘사를 자연스럽게 설치하여야지 주석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독자들에게 고정된 관점에서 읽어 달라는 주장(?)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는 작자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와 사공 노인으로 좀 더 현실감있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 속에 갯배의 정의(애증처럼 질긴 쇠줄 늘어뜨린 갯배)를 삽입하고 실향민의 슬픔을 배제하고 오직 가난한 한 노인의 반복되는 노동(갯배를 움직이는)의 현장을 묘사하므로서 훨씬 시적 재미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요약하면 한 편의 시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말고 이야기를 집약하는 수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시를 읽는 독자가 매우 높은 안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내가 처음 를 탔다는(발견) 사실이 나를 흥분하게 하지만 나보다 갯배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자연히 설명적인 부분은 배제되겠지요. 나보다 더 많은 정보와 해석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나는 의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까요? (여기까지 생각하니 식은 땀이 절로 납니다)  다음에 다룰 시를 읽어 볼까요    빗물에 젖은 눈  아침에 나부끼는  바람소리에  몸 실은 저 물방울  뭘 말하는 지  싸늘한 가을 거리에  흐르는 비바람 맞으며  나의 눈물은 젖어들고  낙엽은 애써 땅에 흐른  눈물 닦으려 이렇게 바람에 몸을 실어  파란 새벽에 날 찾아와  야윈 눈물로 떠나버린 너  빗물이라도 내 맘을 아는 지  촉촉히 젖은 내 눈 닦아  소설과 시의 극명한 차이점은 사건의 전개와 사건의 전개에 따르는 시,공간적 넓이에 있습니다. 소설은 어떤 사건에 연루되는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서 인과관계가 형성되고 작자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뚜렷한 반면 시는 구체적 사건의 한 단면을 절개하여 보여주는 형식을 취하게 됩니다. 압축이란 깡통을 우그려뜨려 납작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우그려뜨리기 전의 깡통은 깡통안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데 우그려뜨리는 순간 그 공간이 사라져 버리지요  우그려뜨려짐으로서 그 깡통의 내력 또한 압축되어지고 맙니다. 무엇인가가 담겨져 있었는데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지요. 알 수 없음으로 파생되어지는 수 많은 생각들......  시는 그 수많은 생각들을 유발시키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구체성을 은폐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그 구체성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시에도 구체적인 경험 즉 이야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구체적 경험의 이야기는 읽는 이들에게 좀 더 개연성있는 설득력을 확보하게 하여 줍니다. 어디까지 압축해야 하는가?  은 비오는 가을날의 정경을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낙엽이 시나브로 구르고 내 곁을 떠난 사람 때문에 눈물이 흐르는데 그 눈물은 스산하게 바람이 몰고 온 빗물과 같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게 되는 사랑의 부재와 이별 이런 것들을 감수해야하는 고독한 한 사람의 내면풍경을 그리고 싶은데 어떤 구체적인 정황이 결여되어 있어 글쓴이의 발상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하고 어색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신 분은 연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연의 나눔은 장면의 전환과도 같은 것입니다. 앞 연과는 차별되는 비약일 수도 있고요. 바람 소리에, 뭘 말하는 지, 비바람 맞으며, 몸을 실어, 내 눈 닦아 등으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동작의 연결이 지속되어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루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굳이 연으로 나누고 싶다면 첫 번 째 연에서는 어떤 내용 2연에서는 어떤 내용....식으로 구성을 해 보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시는 나에게 절실한 어떤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미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  다시 임보 시인의 글로서 강의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나는 시도 소설에 못지 않게 읽어서 즐거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독자가 시를 외면하는 가장 큰 요인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들이 읽히기를 바란다면 우선 재미있게 쓸 일이다. 나는 시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주로 두 가지 장치를 선호한다.  첫 째는 가능하다면 운율에 싣고자 한다. 가락은 시를 흥겹게 한다. 같은 내용이면 가락에 실어 표현하는 쪽이 보다 효과적이다. 운율은 시를 시이게 하는 원초적인 시적 자질인데, 요즈음의 자유시들 가운데는 아예 운율을 회피하려는 경향도 없지 않다. 이는 운율을 시의 구속으로 잘못 판단하고 있는 때문으로 보인다. 운율은 시의 장애물이 아니라 독자의 흉금을 흔들 수 있는 무기다. 음악의 가락이 얼마나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는가만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시에는 시의 형식 곧 시의질서가 있다. 결코 무질서한 글이 아니다. 자유의 이름으로 질서를 깨드린다면 이는 방종에 불과하다. 아무나 시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시의 질서를 지켜 글을 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운율은 시에 질서를 부여하는 중요한 장치의 하나다.  둘 째는 시의 내용을 구상화하는 일이다. 달리 말하면 스토리화한다. 흥미를 유발하는 소설적 요소를 시에 끌어들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을 담은 시는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오래 기억에 남는다. 산문체의 긴 시에서는 물론이고 나는 짤막한 단시 속에서도 즐겨 얘기를 담는다.  그러면 시가 흥겹고 재미만 있으면 다 되는가. 사실 그렇지 않다. 재미있는 소설이 다 훌륭한 소설이 될 수 없듯이 시도 마찬가지다. 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시의 품격은 사람의 체취처럼 시인의 인품에서 자연히 스며나온 것이므로 억지를 부려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시인을 구도자의 반열에 앉히고자 한다. 사실 시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 숙 제 >  1. 관심이 있는 현대시인 세 명을 적어 보기  2. 과 을 가지고 시 한 편 이상 써 보기  3. 2000년 일간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읽고 소감 써 보기  * 퍼옴-나호열교수(경희대)  
  시의 발상과 전개방식 1  경진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저와 함께 에 참여하여 주신 여러분께 새해 인사 올립니다.  예정일 보다 늦게 6주차 강의록을 올리게 되어 무척 죄송합니다. Y2K 대비, 입학접수 등 저희 학교 사정으로 접속에 어려움이 많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무쪼록 넓은 이해 있으시기 바랍니다.  이 번에 저의 6번째 시집을 발간하게 되어 지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언제 이렇게 많은 시를 썼어요? 시간도 없을 텐데......" . 그렇습니다. 시를 써서 밥을 먹을 수는 없기 때문에 저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하는 등의 생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에서든지 "당신의 직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시인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도 하루 하루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가롭게 앉아서 '무엇을 쓸까?'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시를 생각하고 쓰게 될까요?  '눈 떠서 잠들기 직전 까지!'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시를 쓰는 일은 고도의 정신집중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에 모든 정신력을 잠시도 쉬지 않고 시 쓰는 일에 쏟아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에게 다가오는 일상과 사물 앞에 나의 모든 감각을 개방시켜 놓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시를 쓰고자 하는 초심자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시를 쓸 수 있는 여건 - 분위기- 이 조성되어야만 시 쓰기가 수월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일년, 이년 점차적으로 연륜이 더해지다 보면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대상들이 다 시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주어져야 하는 것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 세계관, 실험정신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시적 분위기에 매료되거나 자신이 억누르지 못하는 희로애락을 바탕으로 시를 쓰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는데 나중에 써놓고 보면 다른 사람들이 쓴 것과 비슷비슷한 그런 글들이 되고 마는 경험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이 쓰디쓴 경험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성시인의 시들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제가 자료실에 올려놓은 시집을 참고하셔도 좋고 다른 경로를 택해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시를 요모조모 분석해 보는 일입니다.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어렵다! 이런 난관을 헤치고 그 시인이 쓰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해독하는 일을 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해독을 통해서 발상으로부터 시작해서 한 편의 시로서 완결되기까지의 경로를 나름대로 터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저에게도 존경하는 선배 시인들이 많습니다만 그런 분 중에 오늘은 임보 시인의 글을 통해서 강의를 시작할까 합니다.  임보 시인은 좋은 시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란 하나의 발언 : 곧 남에게 들려주는 짧은 말이다 - 언어의 범주를 벗어서서는 곤란하다.  1) '남에게 들려주는', 2) '짧은 말'  내가 시를 쓴다는 것은 남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이야기를 하던 제 3 자의 이야기를 하던 아니면 너에게 이야기를 하던 그 이야기는 함축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함축성이라는 것은 중언부언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폭이 넓은 상징성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습작시를 한 편 읽어 볼까요  첫눈 오는 날  눈이 내린다  (내가 내린다)  하이얀 송이들이  지붕으로 내려 앉고  *(부유하는) 그 속에 나도 내린다  지면에 닿아 쌓이거나  녹아 내려야 했다  바람은 나를 안고 (눈을 안고)  공중으로 솟구친다  *(갈망하는 것은) *((착지)였을 뿐)  고단한 몸을 누이고자 했을 뿐인데  *(영원처럼) 떠도는 이런 것이라니  어디까지 몰고 갈 것인가  순간 몸이 가볍다  (난 (너를) 베고 누웠다)  녹아지리라    대기 중의 찬 수증기가 찬 기운을 만나 얼어서 땅 위로 떨어지는 얼음의 결정. 눈은 그 색깔이 하얗다는 속성 때문에 순결성과 진실성의 표상이 된다. 또 눈은 모든 것을 덮는다는 측면과 관련해서는 포근함과 높낮이 없이 고르게 내린다는 점에서는 평등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눈이 환기하는 정조는 그리움과 기쁨이며 특히 첫 눈은 막연한 설레임도 동반한다. 싸락눈과 진눈깨비는 불완전함을 상징하는데 비해 함박눈은 완전함을 상징한다.  - 한국 현대시 시어사전, 김재홍 편저, 고려대학교 출판부  이 글을 쓴 분은 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눈은 객관적 상관물인 셈이지요. 이 글을 쓴 분이 눈이라는 대상을 만나기 전에 이미 주어져 있는 심리적 상태가 존재합니다. 즉 눈이라는 대상을 마주치는 순간 어떤 정조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막연했던 어떤 심리가 눈이라는 대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 글을 쓴 분은 정처없이 부유하는 삶의 고단함으로부터 내려앉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려앉는 것 뿐만 아니라 체온이 있는 것(사람)에 자신을 던지고 녹아 내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눈은 바람에 의해 착지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날아다닙니다. 그러다가 '너'라는 대상을 만나 녹습니다. 그러나 '너'는 지상에 뿌리내린 그런 사물이 아니라 허공에 자리잡고 있는 것, 나와 같이 부유하고 있는 허무한 그 무엇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되겠지만 일차적으로 시는 메시지의 전달이 아닙니다. 앞에서 시의 함축성이란 상징성이라고 정의했지요? 1,2차 강의에서 유추와 연상의 문제를 다룬 바 있음을 기억하고 계시지요? 여기에 책상이 있습니다. 책상의 정의는 글을 쓰거나 밥을 먹거나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라고 할 수 있지요. 이렇게 책상을 정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개념입니다. 개념을 이용하여 우리는 관념을 형성하게 됩니다. 알기 쉽게 관념이란 하나의 이미지라고 정의합시다. 이미지야말로 시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임을 꼭 기억합시다!  시를 읽는 이유는 시로부터 어떤 정보나 지식을 습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情調 (mood)를 체감하는데 있습니다. 어떤 시를 읽고 공감한다는 것은 시에서 드러난 이미지를 독자가 잘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사물 사이의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근거하는 것이 類推이고 인접성이나 친근성에 근거하는 것이 聯想의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를 읽고 공감하는데에는 원관념(주제)과 보조관념(소재)의 동일성과 인접성이 커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지요.  다시 습작시를 분석해 보기로 합시다.  첫 연에서 '눈이 내린다/ 내가 내린다' 라고 눈과 나의 동일성을 이야기합니다. 두 번 째 연에서는 내리는 눈과 나의 동작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세 번 째 연에서는 어디엔가 내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불화의 상태를 드러내고 네 번 째 연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언명하고 마지막 연에서는 부질없이 허공 또는 바람을 껴안는 비극적 인식을 보여 줍니다. 사실 이 정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연마가 필요합니다.  일단, 괄호 쳐진 것을 제외하고 이 시를 읽어 봅시다.  첫눈 오는 날  눈이 내린다  하이얀 송이들이  지붕으로 내려 앉고  그 속에 나도 내려 앉는다  지면에 닿아 쌓이거나  녹아내려야 했다(는데)  바람은 나를 안고  공중으로 솟구친다  고단한 몸을 누이고자 했을 뿐인데  떠도는 이런 것이라니  어디까지 몰고 갈 것인가  순간 몸이 가볍다  녹아지리라  훨씬 시가 간결해졌습니다. 임보 시인의 짧은 글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화하는 데에는 허사가 사용되지요. 음, 그런데, 말이지, 라든가 인과의 과정이라든가, 동작의 진행이라든가 하는 등등,.....시는 이런 것들을 뭉텅뭉텅 잘라내 버립니다. 과감하게!  부유하는, 갈망하는, 영원처럼, 이런 단어 혹은 표현들은 일상에서는 아주 자연스럽지만 시에서는 부적절하게 사용되는 말들입니다. 浮游는 떠도는 것, 渴望하는, 永遠처럼 에서와 같이 한자어는 詩作에서 회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시를 읽고나서 사실 많은 영감을 얻습니다. 허공을 안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여인의 춤사위, 동작 하나 하나에서 떨어지는 꽃잎같은, 눈물같은, 빛의 환영들.......  이 글을 쓰신 분은 충분히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계속 노력해 주십시오  두 번 째 시를 읽어 봅시다.  뻐꾸기 소리  장석남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복숭아 꽃빛같이  아무 생각 없이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복숭아 꽃빛만 같이  사랑도 꼭 그만큼에서  그 빛깔만 같이  이 시는 매우 간략한 형태인데 읽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우리가 공부한 동일성이라든지 인접성이라든지 하는 독법으로 뻐꾸기 소리와 복숭아 꽃빛을 대치시키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다릅니다. 자, 이 시는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요? 분명히 이 시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이 시는 공간적으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뻐꾸기 소리: 어느 한 지점으로부터 내가 그 소리를 듣게 되는 이 지점까지의 거리, 그 속에 가득 차는 뻐꾸기 소리 (뻐꾸기는 보이지 않는다) → 창호지에 → 우러나는 복숭아 꽃빛 = 뻐꾸기 소리  어느 봄날 뻐꾸기 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 옵니다. 뻐꾸기가 왜 우는 지 나는 모릅니다. 뻐꾸기는 보이지 않고 뻐꾸기 소리만 기쁘게, 슬프게 들려 옵니다. 나는 방안에 앉아 그 소리를 듣습니다. 창호지에 복숭아 꽃빛이 환한 그런 화창한 날입니다. 뻐꾸기 소리가 복숭아 꽃빛으로 창호지에 물듭니다. 사랑은 멀리 있습니다. 몸(뻐꾸기)은 멀리 있으면서도 감정(소리)은 바로 내 마음(창호지)을 물들입니다. 복숭아 꽃빛은 창호지에 물들고 사랑은 결코 몸 부딪치지 않아도 충만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 거리감으로 인해 더욱 간절해지고 애틋해 집니다.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이 시의 키 포인트는 바로 뻐꾸기 울음소리(파동)가 복숭아 꽃빛(빛깔)로 변화하는 그 시간의 흐름과 동화의 상태를 사랑으로 인식하는데 있습니다.  위와 같은 해석은 물론 저의 자의적인 해석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 시를 읽으시겠습니까? 이 시는 뻐꾸기가 울음우는 사실로부터, 복숭아꽃이 피는 사실로부터 빚어지는 상상의 세계를 상징화하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뻐꾸기 소리는 복숭아 꽃빛이다' 라는 상상력!  시를 쓰고 시를 읽는 재미는 시인의 궤적을 좇아서 그 흔적을 탐색하고 그 끝트머리에서 시인과 만나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세 번 째 시는 저의 졸작입니다.  불꽃  타오르는 불꽃 속에는  두 사람이 있다  하나가 되기 위하여  가슴을 맞대어도  더욱 활활 타올라도  우리는 서로를 밝히지 못한다  한숨이 되어  뿜어 나오는 향기  그 몸짓만이 남아  하나가 되자  하나가 되자  더도 가지 말고 이 자리에서  풀썩거리는 한줌의 재  불꽃 속에는  타오르는 두 사람이 있다.  몇 년 전 일입니다. 서울 근교에 화가가 운영하는 카페가 있었는데 그 카페에서 그림 한 점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상체를 벗은 젊은 두 남녀가 서로를 부둥켜 안은 그림이었는데 얼싸안은 두 사람의 힘찬 근육의 움직임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며 차 한잔을 마시면서 그 부둥켜 안은 그 모습에서 문득 불꽃을 연상하게 되었습니다. 타오르는 모습이지요  타오르는 불꽃 속에는  두 사람이 있다.  - 모닥불이든, 촛불이든 타오르는 불꽃은 스스로 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  하나가 되기 위하여  가슴을 맞대어도  더욱 활활 타올라도  -사랑은 하나가 되는 행위입니다. 정신과 육체의 합일을 희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모순에 빠집니다.  우리는 서로를 밝히지 못한다  한숨이 되어  뿜어나오는 향기  그 몸짓만이 남아  - 서로를 위하여, 헌신하기 위하여 갈구하는 것인데, 때로는 그 사랑이 정신과 육체를 소모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자  하나가 되자  더도 가지 말고 이 자리에서  풀썩거리는 한 줌의 재  -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이란 바로 이 자리에서 한 줌의 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다  불꽃 속에는  타오르는 두 사람이 있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는 두 사람이 있다 → 불꽃 속에는 타오르는 두 사람이 있다로 변환되는 인식의 흐름, 즉 하나의 불꽃은 어둠을 밝히기도 하고 추위를 가시게 해주는 따사로움이기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되어지는 탈 것 나무와 석유, 휘발유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는 존재의 허무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어떤 결론을 미리 상정하고 시를 쓰기 보다는 새로운 의미망을 창조하기 위해서 시를 씁니다.  포옹하는 그림 → 불꽃 → 불꽃의 1차 의미 (하나됨을 희구함) → 불꽃의 2차 의미 (타자를 위한 따사로움, 빛) →불꽃의 3차 의미 (완전한 연소 : 사리화) → 불꽃이라 일컬어지는 모든 존재 속에 존재하는 사랑의 실재)  이 시의 발상은 그림을 보지 않았으면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사랑에 대한, 존재에 대한 막연한 인식이 저의 마음 속에 그려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잠자는 시간 빼 놓고 시를 생각한다는 바의 의미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나에 대한 반성과 탐색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임보 시인의 말을 빌려 강의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상상적 이미지는 대상이 시인에게 스스로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대상 속에 파고들어 발굴해 내야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광부가 하나의 광맥을 찾기 위해서 수 백 미터의 지하를 뚫고 들어가듯이, 창조적 이미지를 찾는다는 것은 예지와 인내와 노역을 동반하는 고행의 길이다. 그것은 사물과의 피나는 투쟁이며, 세계를 처단하는 폭력이며,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독재다. 시인이 그러한 고뇌를 감수하면서도 시의 길을 가는 것은 바로 이 독재적인 창조를 통해 맛보는 환희로 보상받기 때문이리라.  시의 눈부신 씨앗 - 영감은 기다리는 자의 것이 아니라 땀흘려 찾는 자의 몫이다  - 임보, 시의 씨앗에서 일부분  * 퍼옴-나호열교수(경희대)    
372    시를 쓰는 행위는 신과의 씨름이다... 댓글:  조회:2346  추천:0  2017-04-03
  주제와 소재의 연결  오늘 새벽 큰 눈이 내린다고 하더니 장대비가 출근길을 막았습니다. 과학의 힘도 아직 자연의 미묘한 변화를 예측하는데는 역부족인 모양입니다.  점차 사이버 가족이 늘어나고 작품을 보내주시는 분들도 늘어나고 있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시의 주제에 대해서 강의 요점 정리를 한 바 있습니다마는 그 기억을 되살려서 보내 주신 작품을 놓고 같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우리는 한 편의 시를 읽을 때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즉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 전달하고 싶어하는 것 (심리적 정서, 어떤 사태, 사건, 사물의 형상 등등)을 탐색하여 가는 것이 시 읽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시는 진술이 아니라 표현인 까닭에 지시적 영역을 넘어서서 압축과 비유가 시 속에 스며들어감으로서 시를 읽는 사람들의 연상과 상상력을 발동하게 하고 더 나아가서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감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시를 공부하면서 이 시의 주제는 무엇이냐, 이 시의 소재는 무엇이냐 하는 가름을 일상화 해 왔습니다. 실제로 시를 쓰는 입장에서 본다면 시의 주제를 먼저 정해 놓고 쓰는 경우보다는 어떤 소재에 의해서 영감을 얻고 그 영감을 숙성시켜서 시를 완성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우리가 수필을 定義하면서 '붓 가는대로 쓰는 형식' 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붓 가는대로 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옛날에 공자의 제자가 道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을 때 공자는 一以貫之(일이관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나의 원칙(생활법칙, 원리)으로 모든 세상사를 꿰뚫어 본다'는 것이지요. 세상사는 원리,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 인간관이 정립되어 있어서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후회 없이, 망설임 없이 행위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붓 가는 대로 쓴다는 것은 풍부한 학식과 경험이 그냥 축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리에 통합되어 자연스럽게 용해되어 나오는 경지에 다다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들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각이 있습니다. 그 시각 속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성격도 포함될 수 있겠지요, 학교에 공부한 전공지식과 상식도 포함될 수 있겠지요.  다시 시의 주제로 돌아가 봅시다. 시의 주제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물에 대한 해석이나 현상에 대한 분석등이 있을 수 있겠고 더 나아가서 매우 관념적인, 뭐라고 딱 집어서 말 할 수 없는 애매한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를 감상함에 있어서 이 시의 주제는 '뭐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인간심리의 복잡성' 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시를 쓰기 시작 할 때에는 다른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단 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이행해 나가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시를 쓰는 첫 단계는 내가 전달하고 싶어하는 이야기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이 꽃은 정말 아름답다. 이 꽃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다.' '세상이 잘못 되었다. 고쳐야 한다' 등등. 자신이 꼭 전달해야 하는 것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그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시가 모호해지기 십상입니다.  두번째 단계에서는 그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소재를 찾는 것입니다. 그 소재는 하나일 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습니다.  세번째 단계에서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표현한다는 것은 시에 필수적인 요소인 각종의 비유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편의 시가 완성되면 자신이 직접 읽어보십시오. 낭독을 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일상적인 평서문의 느낌이 들면 아직 정리가 덜 되었다고 생각하십시오.  이쯤 정리를 하고 여러분들께서 제출하신 시를 감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소나기  1 아이들의 얼굴이 단편처럼 읽히기 시작할 무렵  2 학교종이 울렸다. 그러나 낡은 종소리에  3 발랄한 동작들은 물음표를 물고  4 한 곳으로 날아갔다  5 먼지와 함께 잠잠해진  6 창백한 오후의 건물 속에서  7 우리의 선생님들은 정직한 분이실까  8 채 물들지 않은 투명한 종이 위로  9 몇 점의 물방울들이 낙서처럼  10 굴러다녔다. 그리고 나는 하늘을 보며  11 웃음을 일삼았다  12 종소리가 할퀴고 간 빈 종이의 틈으로  13 그들만의 소나기는 신나게 오후를 즐기는 것이었다  14 다시 상처를 핥아주고 떠난 운동장에  15 아이들은 무럭무럭 쏟아져 나왔다.  이 시의 제목은 소나기입니다. 시의 제목은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의 골격, 전하고 싶어하는 것의 축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즈음의 시인들은 시 제목을 붙이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옛날처럼 꽃, 낙화 등등의 명사형 제목을 붙이지 않고 예를 들면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 시집)이라든지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유하 시집)이라든지 하는 서술형 제목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시를 읽을 때 처음 대하게 되는 제목이 주는 심상을 따라 시를 읽어 내려 갑니다.  소나기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주로 여름철에 갑자기 내리는 일회성 비'라고 정의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소나기에 대한 각자의 인상은 매우 다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나기의 기억을 하나씩 걸머지고 시를 읽어내려 가는 것이지요  ∼처럼, ∼같이와 같은 직유의 기법은 현대의 시작법에 있어서는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비유라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A와B를 관념의 유사성으로 일치시키는 기법은 사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진부해지기 쉽기 때문이지요.  에서 '단편처럼' 은 매우 모호한 표현입니다. 아마도 이 글을 쓰신 분은 권태로운 어떤 상황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단편이 주는 의미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명확한 심상이 불러일으켜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군요  는 어떤 소리 입니까? 낡은 종이 내는 소리를 어떻게 하면 더 절실하게 표현할 수 있을 지 연구해 봅시다.  는 것은 아이들이 끝없는 질문들을 가지고 수업이 끝나고 어딘가로 달려갔다 이렇게 해석하면 될까요?  요즈음 세태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보게 되는 질문이지요?  10행과 11행에서의 나는 누구일까요? 선생님 자신 아니면 한 교실을 관찰하는 시 속의 화자? 웃음을 일삼았다라는 것도 눈에 거슬립니다. 일삼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습관적 행위, 반복, 조금은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어감을 가지게 되지요.  1 연을 다시 해석해 보겠습니다.  한 교실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선생은 거의 습관적인 '가르침'을, 수 십 명의 아이들을 각자 개성에 맞춰 가리키지 못하고 획일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선생님도 권태스럽습니다. 종이 울리고 수업이 끝나서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마치 소나기처럼 금방 왔다가 사라져 버립니다. 화자 또는 선생님은 반문 합니다. 나는 정직한가? 그러나 다른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냉소가 흐릅니다.  12 을 여러분들은 머리 속에 확연하게 그려낼 수 있습니까? 이 문장은 매우 부정확한 묘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13 에서 주어는 소나기입니다. 소나기는 의인화 되어 있지요. 소나기가 오후를 즐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소나기가 내리는 것이지요. 그들은 누구일까요? 아이들이겠지요. 그들만의 소나기는 어린 학생들 마음속에 자리잡은 자유분방함, 그런 것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14 라는 구절은 비가 내린 후의 운동장, 획일적이고 단조로운 수업의 장소인 학교라는 곳에 소나기가 내렸다고 해석이 됩니다.  15 는 표현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되겠습니다. 획일적인 교육을 받는 아이들이 생산의 개념으로 계속 배출되는 우리의 교육현실을 빗댄 것으로 볼 수도 있겠고, 열악한 교육의 현장 속에서도 동심을 잃지 않은 아직은 건강한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총평:  시를 쓰는 것은 표현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표현이란 무조건 멋있게,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의사전달이 될 수 있도록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 정서적 자극을 주고, 상상할 수 있도록 색과 맛을 입혀주는 것입니다.  시를 쓴다는 행위는 일상적인 어법하고는 틀립니다.  요즈음 학교는 획일적인 교과목을 학습함으로서 아이들의 자유롭고 개성적인 능력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선생님들은 타성적으로 자기계발을 하지 않고 있어 문제이다.  시는 위와 같은 인식을 밑그림(스케치)으로 가지고 그런 정서를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공감할 수 있도록 소나기가 내리는 광경에 오버랩시켜 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확한 표현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즉 어느 한 문장을 읽었을 때 하나의 이미지, 머리 속에 하나의 풍경이 그려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시 속에 등장하는 진술자(화자)가 누구인가를 명확히 하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시에서 1인칭 화자와 3인칭 화자를 사용하는 경우도 1인칭 화자와 3인칭 화자를 혼용하는 경우를 글 쓰는 사람은 글을 쓰기 전에 확정하여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하여 본다면 글 쓴이는 소나기의 심상을 빌어 오늘날의 교육현장을 슬며시 꼬집어 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나기에 대한 정밀한 스케치 소나기에서 연상되는 여러 가지 사건을 나름대로 구성하여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소나기와 학교의 풍경을 연결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두 번 째 시를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의 모습  1 이렇게  2 허물어지는 모습이  3 사랑일지도 모르지  4 저물어가는 계절에  5 한 철 무성했던 은행잎들이  6 노랗게 물들어  7 곱게 무너져 내릴 때  8 가슴 깊은 곳에서  9 눈 감아도 좋을 한 순간의  10 고운 기억이 끝내  11 마르지 않고  12 흘러내려  13 허물어지는 모습이  14 사랑일지도 모르지  이 시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사랑을 정의해 보는 것 즉 라는 것이지요. 그런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소재를 가을날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잎에 빗대어 보는 것이지요  처음 시라는 것을 막연하게 대할 때 우리는 사물과 나의 심성을 1:1로 대치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사물에 나의 감정을 대입시키는 방법!  會者定離; 만나는 날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지는 날이 온다는 삶의 법칙성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의 정수는 사랑입니다. 팜송이든, 가요든 거의 대부분 사랑타령이지요. 한물간 구시대 사람들이라고 신세대가 외쳐도 그 외치는 내용은 사랑을 잃은, 사랑을 버린, 사랑을 하고 있는 그런 내용이지요. 뭐가 다릅니까? 노래의 주제는 같아도 그것을 인식하는 방법은 매우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마디만 더 짚고 넘어 갑시다.  몇 년 전 김건모의 이라는 노래가 대히트를 했지요.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친구의 친구를 사랑한 친구에게 나의 애인을 빼앗겨 버린 사람의 허탈한 감정을 노래한 것이지요. 기 막히고, 슬프고, 화나고, 허무하고 그런 심정이지요. 예전의 상식적인 관념이라면 그런 내용을 노래로 담으려면 일단은 템포는 느리고 단조의 음계를 가져야 하겠지요, 예전의 수많은 노래들처럼...... 그런데 은 그런 통념을 확 깨트려 버렸습니다. 노래를 부른 본인 자신도 템포가 너무 빨라 라이브로 그 노래를 부를 수 없다면서요? 이별을 했는데, 애인을 빼앗겼는데 노래는 경쾌하고 리듬이 있고.....  시를 쓰는 기본은 통념을 거부할 줄 아는데 있습니다.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보겠다 하는 것이지요.  다시 시로 돌아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앞의 시는 매우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각으로 시를 구성하고 있는데 이 시는 매우 정감이 깊어 보입니다.  벌써 차이가 나기 시작 합니다. 어느 사람은 정감으로 시를 쓰고 어느 사람은 이성으로 시를 쓰고.......  이 시는 4 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聯(연)을 나눈다는 것은 각 연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연을 바꾸니 다른 생각으로 넘어 갑니다' 이렇게 읽는 사람들에게 통고하는 것입니다. 시를 쓰는데에는 참으로 많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무언가 막연하게 글을 쓰기 시작하였어도 그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지요.  저는 여러분에게 '처음에 글을 쓸 때 구상을 잘하여야 한다' 라고 말씀드립니다.  영화찍는 사람들이 영화를 찍기 전에 장소 헌팅을 하지 않습니까? 소설가들도 소설의 무대를 설정하기 위해서 많은 여행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시를 쓰는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계산된 장면 연출을 구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 구분이 되지 않은 시들은 많은 수련을 거친 시인들이 쓰는 기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시를 몇 개의 연으로 구성하십시오 !  1) 기승전결의 형식  2) 서론, 본론, 결론의 형식  그 밖에도 여러분들이 스스로 만든 원칙을 가지고 연을 구성하여 보십시오.  1연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어떤 풍경을) 2연에서는 또 무엇을...... 하는 식으로 미리 구성을 해 놓고 자신의 생각을 맛있게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위의 시는 4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연에서는 사랑은 무너지는 것이다라고 정의합니다  2 연에서는 그 실례를 가을날 나무에 비유하여 보여주고  3 연에서는 그 나무가 내 마음의 상태와 같음을 보여주고  4 연에서는 다시 사랑은 무너지는 것이다라고 확인합니다  이 글의 작자는 사랑의 아픔을 경험한 분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사랑의 아픔을 다 알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 해 봅시다. 무너지는 사랑만 있습니까? 평생을 가는 사랑도 있고, 만나자마자 헤어지는 사랑도 있습니다. 지금 막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이 시는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의 아픔을 경험한 사람에게 이 시는 유용할 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말씀을 드립니다.  시는 어떤 정보(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 온몸을 부딪쳐 가면서 깨달은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과 진실과 거리가 멀수도 있습니다. 시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시적 진실' 즉 개연성이 있는 진실인 것입니다. 이 시는 무너져 내리는 것을 넘어서는 어떤 심리상태까지 나아가야만 합니다. 무너져 내리는 사랑 앞에 그대로 멈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여 가는 쓰린 마음을 안고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어떤 모습...... 그런 것들이 시를 완성시켜 주는 것입니다.  저물어가는 계절이라는 표현은 너무 상식적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간다. 하루가 저물어간다라는 표현은 자주 쓰이지만 계절이 저물어간다는 표현은 어색하지요?  2연과 3연은 순차적인 수법을 사용했지만 즉 은행잎이 곱게 물들어 떨어지니까 -원인-,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기억)도 따라서 떨어져내린다 -결과- 로 구성되어 있는데 조금 더 생각을 해 보면 2연의 끝 : '곱게 무너져 내릴 때'는 '곱게 무너져 내려'로 바꿈으로서 자연스럽게 3연의 내 마음의 상태로 전이되거나 아니면 等價로 해석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므로 사실 2연과 3연은 연 구분을 안 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지름길은 없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글 쓰는 일을 습관화하는 것,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습작시를 보내 주신 두 분께 감사 드립니다.  ⊙ 강의 요점 정리 ⊙  한 편의 좋은 시를 쓰기 위한 과정 (Stephen Spender :영국 시인)  1. 정신집중  2. 영감  3. 기억  4. 신념  5. 노래  ★ 참고 인용문 :『시의 발상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한광구 (시인, 추계대 교수)  『시창작 이론과 실제』 오세영외, 시와시학사 p 79- 80  스펜더가 말하는 첫 번째의 정신집중은 모든 창작의 근본이다. 시인들은 자신의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저마다의 다른 버릇을 가지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생명 깊은 곳에서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본질에 도달하고자 하는 수단이다. 이 집중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靈感(영감)이다. 스펜더는 영감이야말로 시의 시초이며 최후의 목표라고 말한다. 그것은 시인의 마음속에 떨어지는 최초의 아이디어이며 시인이 최후로 성취하는 마지막 아이디어라고 한다. 그래서 시인에게 영감을 빼면 모두 작업이라고 말한다. 다음은 기억이다. 이 기억은 시인이 경험한 감각적 인상들을 잊지않고 생기있게 재생하기 때문이다. 시인에게는 어렸을 때 경험이 늘 시로 재생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신념이다. 이 신념은 자기 천직에 대한 믿음이 시인을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즉 시를 쓴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성자의 천직과 마찬가지라는 천직의 신비성과 자기 직분에 대한 헌신의 신념이 있어야 계속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래를 들고 있다. 스펜더는 시인에게 있어서 영감과 노래는 시인의 궁극적인 성질이라고 한다. 이 노래는 영감이 우리의 몸 속에 떠오르는 상태를 말한다. 즉 영감이 몸 속에 육화되는 상태이다. 이는 시인의 의식 속에서 영원히 정자를 기다리는 시의 자궁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 마음 속에 지나가는 말의 흐름, 비록 의미는 없지만 소리, 열정으로 시를 회상시키는 요소이다. 그래서 그는 시를 쓰는 행위는 신과의 씨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퍼옴-나호열교수(경희대)    
371    시는 시인의 삶을 반추하는 그 시대의 사회적 산물이다... 댓글:  조회:2248  추천:0  2017-04-03
  시의 주제는 무엇인가?  새벽, 흰 눈이 조금 오다가 그쳤습니다.  '눈' 하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떠올리십니까? 뭐라고 딱 잘라서 이야기할 수는 없어도 느낌이 가슴 언저리로부터 스며오는 것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조금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눈이 내린 것을 보고 '오늘 길이 미끄럽겠군' 하면서 출,퇴근 걱정을 하게 될 것이며, 또 어느 사람은 지난 겨울 '첫 눈이 내리는 날 만나자'고 약속했던 사람을 기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눈이 오니 길이 미끄럽다'라는 생각은 아주 현실적이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사고의 형태입니다. 사물이나 사건은 우리에게 다양한 행동을 요구하게 되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전 번 시간에 논의되었듯이 시를 쓰는 가장 원초적인 발단은 '서정'입니다. 서정은 어떤 사태로 인하여 발생하는 미묘한 심리상태로 효용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즉 '첫 눈이 내리는 날 만나자'는 것은 첫 눈에 의미를 두는 것이지만 그 의미는 일상적인 효용을 따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첫 눈이라는 의미는 아주 복합적이고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상징'에 대해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첫 눈 내리는 날 만나자고 했을 때의 첫 눈은 ( )에 대한 상징입니다, ( )안에는 우리는 많은 의미를 넣어볼 수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첫 눈은 이러이러한 것이다 라고 마음 속에 정의를 내렸습니다. 당신의 정의 내용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어 당신은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전하고 싶습니까?  당신은 언제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드십니까? 기쁠 때보다는 슬플 때, 외롭다고 느낄 때, 무엇인가를 새롭게 발견해 내었을 때......  우리는 자주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돌아온 후에 그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써 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막상 글로 옮기려 하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 그럴까요? 설악산은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객관적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설악산은 아름답다라고 느낍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시쓰기의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설악산이 아름답다 라고 표현하면 할수록 내용은 진부해 집니다. 설악산이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것은 1차적인 감정의 단계입니다. 2차적인 단계는 글 쓰는 내가 설악산 그 자체와 마주치는 것입니다. 설악산이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가를 생각하는 단계입니다. 3차적인 단계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표현(장식)해 내는 것입니다. 주어져 있는 설악산(소재)을 설악산의 아름다움이 내게 (우리에게) 주는 의미 (주제) 로 변환해 나가는 것이 시쓰기의 어려움이며 즐거움입니다.  글을 처음 쓰기 시작 할 때에는 시의 소재와 주제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해 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소재는 나에게 서정을 주었던 것 (시를 쓰게 만들었던) 그 대상이요, 주제는 그 대상으로부터 얻어들여지는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은 의미이다.!  시쓰기의 실제를 하나 들어 봅시다. 우선 세 편의 시를 감상해 보기로 합시다.    겨울 파계사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쉽게  지나쳐버린  삶 또는 죽음  헝크러진 바람 한 꾸러미  대숲에 놓아주려  흔적없이 푸르른 웃음으로  전생을 걸어가려 하네  아픔을 잊고  아픈 다리까지 잊어버릴 때  나무들이 뿜어내는 침묵이  더욱 짙은 향기로 퍼져가고  새들이 날아가네  수신될 수 없는 전파처럼  다시 만나야 할 곳으로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쉽게  낙엽 대신  반야심경 독경 소리가  우수수  발 밑에 떨어졌네    팔공산 파계사  파계사 진입로는 울창한 숲길,  좌우편 아홉 개의 물줄기를 하나로 모아서일까.  계곡엔 맑고 차가운 물이  철철 흐르매, 그냥 발 담그고 쉬고 싶구나.  진동루 앞의 넓은 마당에는  느티나무, 전나무, 은행나무 거목들이.  이곳 저곳 눈에 띄는 돌축대가 아름답다.  이 유서깊은 고찰이 영조 때엔 왕실의 원찰로도.  법당인 원통전의 관음보살 뵙고 나서  다시 사찰의 규모를 살피니,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것이  정말 알뜰 살뜰 잘도 가꾸어진  절임에 틀림없다. 주변의 울창한  산림과 어울려서 그윽하고 한적한 맛이 좋구나    마음. 47  마음에 근심 없으면  날마다 좋은 날  마음에 번뇌 없으면  날마다 기쁜 날  사랑도 미움도  마음에서 비롯되고  시기도 질투도  마음에서 비롯된다  한 마음 놓아 버리면  새 마음 살아나서  사는게 즐거운  사바가 정토러니  세 편의 시를 읽고 나니 어떤 시가 가장 마음에 와 닿는가요? 아마도 이 가장 구체적인 심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요? 는 원로시인이신 박희진 님의 시이고 첫번 째 는 강의자의 시입니다. 박희진 시인의 시는 자신의 주관적 인식을 배제하고 가급적 객관적인 풍경묘사로 사실감을 전해 주려고 함으로서 오히려 더욱 큰 진실감, 산사의 고적함을 표현해 내려고 한 것 이겠지요. 그에 비해서 는 작가의 주관적인 생각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것 같습니다. 파계사의 분위기는 배경으로 자리잡아 있고 작가의 삶에 대한 인식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굳이 시의 주제를 이야기 한다면 삶은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쉽게 지나쳐 버리는 것이고 우리의 삶은 후생(미래)을 향하여 가는 것 같지만 삶의 반복성으로 인하여 오히려 되돌려 지는 것, 전생을 향하여 가는 반성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시의 소재는 겨울 파계사의 정경이 되겠습니다.  박희진 시인의 시의 주제는? 도시세계의 번잡함을 떨친 적요의 세계, 다툼이 없는 세계, 그런 것이겠지요. 있는 그대로 보여 줍니다. 다른 번듯한 주제를 찾으려 하면 더 허망해지지요. 나무와 절의 역사 그런 것들이 이 시의 소재가 되는 것이지요.  은 파계사 원통전 벽면에 붙어 있던 글입니다. 작자는 누구인지 잘 모르겠고....  일단 읽으면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다 옳은 이야기이고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져 보면 이 글은 시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글 쓴 이의 체취, 생활, 구체적인 사색의 땀방울, 이런 것들이 보여지지 않습니다.  강의 요점 정리에 보시면 '시는 무용이다' 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걸음은 어느 한 점에서 다른 어느 한 점으로 이동하여가는 동작입니다. 춤은 어디로 향하는 목적이 있는 것 아니지요? 몸을 구부리고 펴면서 드러나는 근육의 움직임, 표정, 공간과 육체의 배합으로 춤은 어디에 닿는다는 목적에는 전혀 맞지않는 행위입니다. 결론이 없는 사색의 과정, 어떤 분위기의 전달만으로도 시의 역할은 충분히 수행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한참 김장들을 하느라고 집집마다 난리들이지요. 맛있는 김장김치를 먹으려면 무슨 재료가 필요할까요, 배추, 무, 갓, 마늘, 고추가루, 소금 등등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하나요? 소금으로 배추를 절이고 속을 버무리고 섞는 일! 그렇습니다. 섞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섞는 것이 아니라 김치를 만든다는 목표가 있어야 하겠지요. 나의 생활의 체험, 반성 이런 것들이 시의 소재를 만나서 함께 버무려져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는 멋있는 단어를 골라서 나열하는 것이 아니고 그럴싸한 결론을 내는 것도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건과 사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에다 자신의 입김을 불어넣는 것이지요.  은유, 상징, 아이러니 등의 기법이 자연스레 녹아드는 것이 좋은 시의 요건 입니다.  시적 소재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주제라는 것은 내가 전달하고 싶은 그 무엇이다!  同價紅裳이라고 이왕이면 전달하고 싶은 그 무엇을 예쁘게 포장하는 것!(표현하는 것)  아! 저 꽃은 너무 아름다워요 하는 것 보다 달덩이 하나 매달린 저 꽃 ! 하는 것이 훨씬 낫지요?  * 시간이 있으신 분은 저의 홈페이지 (http://www.poet.or.kr/hy - 메뉴중에서 '신작'부분에 있음.)에 들어 가셔서 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시인이 시적 소재를 구하는가? 소재를 통하여 자신만의 상상력을 키워나가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게 되겠지요.    1. 시 속에 함유된 여러 의미중 가장 중심적인 내용이 주제이다.  2. 시의 話者를 통하여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시인의 중심 생각이다.  3. 시의 주제는 매우 다양하나 주제를 위하여 시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 주제를 배제하고 언어 자체가 가지는 감각적 요소를 바탕으로 아름다움 그 자체를 강조하는 시들도 많다.  4. 시의 주제는 시인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이다.  5. 시의 주제는 미로 속을 헤매는 보물찾기처럼 그 과정 탐색을 통하여 예술적 희열을 맛보게 하는 그 속에 있다. (은페성과 암시성)  6. 시인의 생각은 시 속에, 마치 과일 속에 숨어있는 영양소처럼 숨어 있어야 한다. - 발레리  7. 독창적 사고에 의한 낯설게 하기, 그리고 응축!  8. 어떤 경험을 정서화하고 형상화한다는 것은 시의 독창적 예술성을 만드는 것이다.  9. 시는 자아의 세계를 1)정서적으로 2)주관적으로 통일하는 양식이다.  10. 시는 舞踊의 언어이다.  11. 소재를 추상화 한 것이 주제이다.  12. 시는 시인의 상상이나 직관에 의해 형성되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인류의 보편적 사고 체제나 정서에 합치되어야 생명력이 있다. (보편성의 문제)  13. 시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하여 쓰여졌다기 보다는 의미요소를 다른 요소와 융합하여 미적 구조를 실현하는 장르이다.  14. 주제가 명시적으로 드러날수록 시의 품격이 떨어질 위험이 크며, 그것이 독자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실현한다는 말은 성립되기 힘들다.  15. 나의 상상력이나 환상은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꿈꾸기에 고리를 달고 있으며, 그 꿈꾸기는 시의 뼈대, 또는 몸짓을 만들어준다. 나의 시는 그러므로 꿈꾸기에 다름 아니다. 꿈은 메마른 삶을 적셔준다. 보다 나은 삶을 올려다보게 한다. 그곳에 이르는 사닥다리를 놓아주고, 오르게 한다. 좌절감이나 절망감을 흔들어 가라앉히고,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그 길을 걸어가도록 밀어주고 이끌어준다. 지금, 여기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세계, 어쩌면 이룰 수 없는 세계도 꿈의 공간에서는 반짝인다. 꿈의 공간 만들기, 그 공간에서 살기는 뒤틀리고 추한 몰골을 하고 있는 현실을 뛰어넘게 한다. - 이태수  16. 오늘의 시가 상업예술이 아니고 비상업적 예술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입장에서 우리는 모든 상업주의를 거부한다. 지나친 테크닉 위주의 장인적인 상업성과 지난친 독선의 정치적인 또 다른 상업성도 우리는 거부한다. 시인은 가수도, 정치가도 아니다. 시인은 다만 운율있는 언어로 자신의 성을 구축하는 언어의 주인일 뿐이다. 주제가 없이 도도히 범람하는 현란한 의상과 공허한 핏대를 똑같이 우리는 배격한다. 그러나 시는 시인의 성실한 삶을 반추하는 그 시대의 사회적 산물이며 무엇보다도 시정신을 내포해야 한다는 점을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올바른 주제와 올바른 아름다움이 있는 참다운 시를 지향하며 우리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강인한  *퍼옴-나호열교수(경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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