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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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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詩人 - 언어를 버려 詩를 얻는 者 댓글:  조회:4548  추천:0  2015-05-05
  시인―언어를 버려 시를 얻는 자 ―이승훈 시집 『비누』를 읽고   이 승 하     이승훈 선생님께     백담사에서 선생님을 뵌 것이 한창 추울 때였는데 4월 하순인 이즈음 한낮의 날씨가 어언 여름을 방불케 합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요즘도 하이트 맥주 두 병과 담배 에세와 박카스 두 병과 더불어 하루를 보내고 계십니까? 제 주변에도 담배를 끊은 분이 제법 되는데 같은 한양대 국문학과의 정민 선생이 시집 『비누』의 권말에 올리신 발문을 보니 선생님은 오전에는 담배 에세를, 오후에는 금연초를 태우신다고요.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선생님의 건강을 생각하시어 담배를 일시에 끊는 시도를 해보시는 것은 어떨지요? 카페인 성분이 들어 있는 박카스도 매일 드시는 것은 안 좋을 텐데……. 선생님의 건강을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이니 너무 고깝게 여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선생님의 이번 시집을 읽고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이 있어 딱딱한 문체의 정식 서평이 아니라 사신 형식의 독후감을 써볼까 합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내신 그 어느 시집에서도 ‘시’ 혹은 ‘시 쓰기’에 대한 명상을 지금처럼 집중적으로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80편 수록 시 가운데 시를 쓰는 행위와 시 자체에 대한 생각을 전개한 시가 무려 서른 편에 달합니다. 저는 우선 그 시편을 읽은 소감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세계 문학사를 수놓은 뒤 명멸해간 수많은 문학인 가운데 제가 인간적으로 애정을 갖고 있는 이는 볼프강 보르헤르트ㆍ도스토예프스키ㆍ이하ㆍ두보ㆍ딜런 토마스ㆍ애드가 앨런 포ㆍ다자이 오사무…… 많고 많지만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이하(790~816)만큼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시인도 달리 없을 것입니다. 한문 실력은 없지만 이하 시 전집을 제가 번역하여 내보는 것이 오래 전부터의 소원일 정도입니다. 선생님은 아마도 정민 선생의 『한시미학산책』을 읽으셨을 것입니다. 그 책 178~179쪽에 나오는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옮겨놓고 제목을 ‘李賀’라고 붙이셨습니다. 선생님이 창의적으로 쓰신 부분은 “그의 시는”으로부터 시작되는 마지막 한 문장인 듯합니다.     당나라 시인 이하는 체구가 가냘프고 연약했고 시를 빨리 지었고 (…) 그의 시는 일반 규범에서 벗어나 흉내낼 수 없고 그는 길에서 쓴 많은 시들을 바로 버리고 스물일곱 살에 죽었다     ―「李賀」 부분     이하의 생애는 처절했으나 그는 26년 몇 개월을 살면서 줄기차게 ‘자기 시’를 썼습니다. 시단을 주름잡던 대가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고, 산수전원시와 변새시(邊塞詩)가 주류를 이룬 문단의 유행과 굴원 이래 중국 시가를 지탱해온 문학적 규범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그의 시를 낭만주의로 규정합니다만 서구의 문예사조를 구태여 들먹인다면 초현실주의에 가까울 것입니다. 아니면 퇴폐주의나 신비주의, 혹은 유미주의? 아니, 귀신의 세계를 넘나들었으니 판타지문학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는 줄기차게 자기 자신의 시 세계를 유지하였기에 1천 몇 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후대인은 시귀(詩鬼)라는 별칭을 붙여 그를 기리고 있으며, 당시사걸(唐詩四傑:이백ㆍ두보ㆍ왕유ㆍ이하)의 한 사람으로 높이 받들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이하」를 쓰신 이유를 조금 알 듯도 합니다. 시인 이하의 인상이 선생님과 참 많이 닮았고, 또 선생님은 “일반 규범에서 벗어나 흉내낼 수 없”는 시를 지난 40년 동안 써오신 것이 아닙니까. 앞으로도 그런 시를 쓰고자 애쓰실 것이고요. 물론 비대상에서 대상으로, 관념에서 일상으로, 추상성에서 구체성으로 전환해간 시적 역정은 이 글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어서 언급을 피하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근년에 선생님이 내신 시집들이 쉽게 이해가 되어 좋았습니다만 사물을(혹은 시적 대상을) 메모하듯이 가볍게 터치했다고 여겨지는 작품들이 더러 있어 아쉽기도 했었습니다. 제목에 ‘시’가 들어간 3편의 시와 ‘시’를 제목으로 삼은 3편의 시, 그리고 ‘시집’이 제목인 시를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쓰는 건 모두 시다 원고지 뒷장에 갈기는 낙서 거리에 떨어지는 햇살 아스팔트에 뒹구는 낙엽 달리는 자동차 달리는 오토바이 해안에 부서지는 포말 새기고 사라지고 쓰고 다시 쓴다 낙서도 편지도 일기도 만화도 신문도 마침내 신문도 시다 (…) 간판도 거리에 시를 쓰고 마네킹도 유리창에 시를 쓰고 이 저녁도 시를 쓰네 시를 쓰며 한 세상 산다 시는 없으므로     ―「모두가 시다」 부분     시도 없다 시도 없다 다만 시라는 이름이 있을 뿐 이 이름 붙잡고 40년 허망한 언어 붙잡고 40년 이 허망한 바람 모아 오늘 책 한 권 내 무엇 하나? 마당에 내리는 햇살 보고 절이나 하자 저 마당이 시를 써야 하리라     ―「시도 없다」 전문     외로워서 쓰고 답답해서 쓰고 그리워서 쓰네 그러나 사람들 그리움 모르고 가까운 사람 가까워 모르고 먼 사람 멀어서 모르네 여름 저녁에 쓰는 시 가엾고 절반은 나도 모르는 소리 마음만 여위네 그러나 시름도 근심도 하늘의 일     ―「여름 저녁 시」 부분    「모두가 시다」를 읽고 제가 느낀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이승훈 선생님은 요즈음 모든 자연현상과 사물들한테서도 시심을 느끼고 계시는구나. 한편으로는 시라는 것이 참 별 볼일 없게 된 현실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느끼고 계신 것 같다. 시라는 것의 허망함과 시 쓰기의 허무함에 대해서도 비감함을 느끼고 계시나보나.’ 안타까움이나 비감함까지는 아닐지라도 오늘날에 이르러 시가 점점 더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탐색도, 인정에 의한 따뜻한 포용도, 혁명을 하겠다는 비장한 결심도, 진정한 문명비판도, 우주의 신비에 대한 성찰도, 뭇 독자를 위한 위안의 노래도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햇살 내리는 저 마당이 시를 쓸 일이지 내가 왜 허구한 날 시 쓰기에 얽매이고 있나, 한탄이 절로 나오시나 봅니다. 그렇지만 시인이 된 것이 천형인 바, 선생님은 지난 40년 동안 시를 써오지 않을 수 없었고 오늘도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여름 저녁 시」에서 시 쓰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외롭고 답답하고 그립기 때문이라고요. “절반은 나도 모르는 소리”인 시 자체가 가엾기만 합니다. 그래서 시를 쓰는 동안 선생님은 마음이 여위기만 한 것입니다. 애당초 시를 쓰지 않았더라면 시로 말미암은 시름도 근심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시를 씀으로써 잊어버린 시름이며 근심 또한 적지 않았겠지요. 선생님이 최근에 내신 시론집 『시적인 것도 없고 시도 없다』의 제목은 바로 이런 마음을 대변한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선생님은 지난 40년 동안 시인이었으며 아무리 연세를 드셔도 계속 시인으로 살아가실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시인이 된 것이 천형이니까요. 그 운명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은 시라는 것의 허망함과 시 쓰기의 허무함에 대해서도 자주 한숨을 내쉬듯 토로하고 계십니다. 특히 제목을 「시」로 정한 3편의 시를 통해서.     시를 써서 무엇하나 횡설수설 시를 쓰고 잡지에 발표하고 발표해서 무엇하나 (…) 글 없는 글, 말 없는 말, 시 없는 시가 있다면 한줌에 들고 그대 찾아가리라     ―「시」(44쪽) 부분     시 쓰기가 권력과 영광과 무관한 것임은 40년의 시력을 갖고 있는 선생님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차라리 그것은 외로운 작업이며 괴로운 노동이지요. 문예지가 매달 수십 종, 매 계절 수백 종이 쏟아지니 어느 누가 한 시인의 시를 꼼꼼히 읽어줍니까. 시집을 내본들 독자는 극히 한정되어 있어 재판 찍기도 쉽지 않게 된 세상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글 없는 글, 말 없는 말, 시 없는 시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 아닐까요. 불가에서 말하는 불립문자와는 다른 차원의 말씀을 하신 것일 겝니다. 그만큼 시라는 것에 대한 절망감이 가슴에 사무쳐 이 시를 쓰신 것이 아닐까요.   이 시는 여우도 못 읽고 지나가는 바람도 못 읽고 우리 석준이 호준이는 마루에서 논다네 어떻게 가벼운 마음이 되랴 말 한마디 시 한 줄이 두려울 뿐이다   ―「시」(90쪽) 부분     손자의 이름이 석준이와 호준인가 봅니다. 두 손자는 물론 동화책 속 여우도 바람도 같이 읽으라고 시를 써보지만 쓸수록 추위만 더하고,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시를 읽어주지는 않습니다. 시인의 시작 행위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지요. 이제는 다만 “말 한 마디 시 한 줄이/ 두려울 뿐”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다른 사람이/ 쓰면 좋겠다/ 나말고 저 나무가 쓰면/ 좋겠다/ 아니 현관에 있는 구두/ 벽에 걸린 모자/ 나 대신 시를 써라”(94쪽의「시」)고 부르짖게 된 것이겠지요. 시 쓰기의 자의식이 뼈에 사무치지 않고서 어찌 시 쓰기에 대해 이렇게 괴로워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은 어느덧 시집을 내는 행위가 자랑도 정열도, 권력과 영광도 아닌 참회록 발간과 진배없는 것임을 설하고 계십니다.     생각하고 따지고 3부로 나누고 다시 읽고 고치고 도대체 이게 무언가? 그 동안 나는 없다고 공부한 게 덧없고 부끄럽고 망측하고 갑자기 화가 나서 시집 원고를 던지네 머리를 숙여야 하리 그 동안 무슨 공부를 하고 어디서 놀다 왔는가? 시집 한 권은 무엇이고 두 권은 무엇인가?     ―「시집을 내며」 부분     시집 내는 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냐고 자신을 책하는 말이 한 편의 시가 되었군요. “머리를 숙여야 하리”라는 문장 앞에서 제 머리가 숙여집니다. 저는 이제껏 몇 권의 시집과 시론집을 내면서 스스로 주선해 출판기념회를 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문들과 더불어 동인활동을 했던 시절에도 민폐를 끼칠 출판기념회만은 한사코 거절했었습니다. 최근에 시론집을 한 권 냈더니 예술대학원 졸업생 10명 정도가 조촐한 저녁자리를 마련해놓았다고 하여 끌려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참 어색하고 쑥스러운 자리였습니다. 그날 받은 꽃다발은 세상에 나서 받은 제일 부끄러운 꽃다발이었습니다. 「시집을 내며」의 끝 문장이 인상적입니다. “아직도 머언 바위 하나 앉아 있네”. 그렇지요, 이백과 두보가, 왕유와 이하가 시로써 명리를 얻고 치부를 하려 들었다면 어찌 ‘당시사걸’이라는 불멸의 명예를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선생님이 쓰신 시에 나오는 “머언 바위”라는 낱말을 통해 또 한번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선생님처럼, 꿈꾸어야 할 것은 머언 바위입니다.     세인 중에는 선생님이 그저 일기 쓰듯이, 메모 적듯이 시를 쓰고 있는 줄 아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선생님 자신도 “그 동안 쓴 시는 모두 바람이 쓴 시”(「낯선 도시에서」), “시 쓰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능력이고 생략, 여백, 결핍의 웃음이고 사막의 웃음이다”(「여백」), “생각나는 대로 나는/ 시를 쓴다”(「매미」), “바람 속에 앉아 시를/ 쓰네/ 그러나 바람 속에 아무도/ 없고”(「떠돌이」) 같은 시구를 통해 시 쓰기 행위를 퍽 자조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저는 선생님의 그런 자조가 궁극적으로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몸부림임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시의 가장 작은 단위인 낱말 혹은 언어에 대해 누구보다 투철하게 싸워 오신 분임을 저는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출간하신 10권이 넘는 시론집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특히 이번 시집이 그것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나도 버리자 나도 버리고 나도 버리고 남은 건 언어 이 황량한 언어 언어가 나이므로 언어도 버리자 언어도 버리고 시를 써야 한다 언어를 버리는 심정으로! 이런 심정도 없는 심정으로!     ―「언어도 버리자」 마지막 부분     돈 때문에 시를 쓰지 않았고 나이 든 어린애처럼 낱말들과 놀고 살았으니!     ―「예술은 작은 놀이」 마지막 부분     앞의 시에서 선생님은 나를 버리고 남은 것이 언어인데, 언어가 곧 나(I)라는 등식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도 버리고 언어도 버리고 시를 쓰자는 말씀은, “나도 버리고 남은” 언어에 투철해야 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닙니까. 뭇 시인들의 도저한 역사의식과 첨예한 사회의식과 늘 일정한 거리를 두어온 선생님은 나이 든 어린애처럼 낱말들과 놀고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술, 곧 시 쓰기는 작은 놀이에 지나지 않은데 시대적 소명감 때문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해온 것이 아니냐는 비판적인 뜻도 들어 있는 듯합니다. 한편으로는 시가 뭐 그리 거창한 것이냐는 뜻도 들어 있는 듯합니다. 제목에 짐승이 나오는 시 2편이 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합니다.   그는 벽에 호랑이를 그리고 벽 속으로 들어갔지 나도 이 시를 쓰고 시 속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가능한 적게 먹고 적게 공부하자 그는 웃고 나는 시를 쓰네   ―「호랑이」 전문     물론 저 닭은 내가 시인인 걸 모르고 내가 교수인 걸 모르고 내가 감기로 고생인 걸 모른다 그러나 저 닭이 안다면? 그때도 나는 닭처럼 살아야 하리 닭처럼 처마 아래 앉아 있어야 하고 닭처럼 시를 써야 하고 닭처럼 알을 낳아야 하고 닭처럼 고백해야 한다 닭처럼 닭처럼 하늘을 보고 있어야 한다 저기는 저렇게 푸르고 여기는 이렇게 푸르다     ―「닭처럼」 전문     앞 시의 ‘그’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그가 호랑이를 그리고 벽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과 벽 속의 그가 웃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라는 자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문제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짐승도 다름 아닌 호랑이를 그렸으니 거대담론을 논하거나 큰 목소리를 내는 문학인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누가 뭐라고 하든 어느 자리에서나 시상을 떠올리거나 시를 쓰고 있어야만 하는 자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시에서 선생님 시의 진정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춘천교대 교수 시절 초여름 밤 석사동 논에서 울던 개구리 소리도 언어다 나는 이 언어들을 버리려고 이제까지 시를 썼다 아아 힘이 든다     ―「언어를 버리려고」 마지막 부분     힘이 든다고요. 이제 저도 알겠습니다. 시인은 언어를 버려 시를 얻는 자임을. 언어의 사슬에서 풀려나 언어를 갖고 노는 자, 그 언어마저도 버리려 하는 자, 그가 바로 시인임을. 아무리 시가 말놀음이라 하지만 말재주는 잔재주와 통하는 것이겠지요. 선생님은 이제껏 줄기차게 시를 쓰고 시론을 전개해오셨지만 시의 질료인 언어와 이렇게까지 싸우고 화해하고, 또 싸우고 화해해왔는지 저는 솔직히 몰랐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의 기인 한산자를 노래한 시 「寒山」을 읽고 저는 ‘옳거니! 이건 이승훈 시인의 자화상이로고’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오해를 한 것입니까?     그는 나무 잎사귀에 시를 쓰고 마을 벽에 시를 쓰고 가난한 햇살 먹고 살았다 떨어진 옷 입고 바람 부는 저녁이면 절 부엌에서 밥을 짓고 그릇을 씻었다 밥을 지으며 중얼거리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고 그는 허공을 향해 호통을 치고 사람들이 때리면 손뼉을 치고 깔깔 웃으며 달아났다 지금도 달아난다 지금도 달아나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寒山」 전문     생몰년이 불확실한 한산자는 명확한 전기적 사실도 전하지 않습니다. 후세 여구윤이란 사람이 쓴 시집 서문(「寒山子詩集序」)을 읽어보면 그 인물이 더욱 신비로워질 따름입니다. 김달진 선생이 역주하신 『唐詩全書』(민음사, 1987)를 보니 한산자에 대해 설명이 비교적 잘 되어 있습니다. 그 일부를 여기에 적습니다.     성명은 알 수 없고, 항상 天臺 始豊縣에 있는 寒岩의 깊은 굴 속에 있었으므로 ‘寒山’이라 한다. 몸은 바짝 마르고, 보기에 미친 사람 비슷한 짓을 하며, 늘 國淸寺에 와서 拾得과 함께, 대중이 먹고 남은 밥을 얻어 대통에 넣어 가지고 둘이 서로 어울려 寒山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미친 짓을 부리면서도 하는 말은 佛道의 이치에 맞으며 또 詩를 잘하였다. 어느 날 臺州刺史 閭丘胤(여구윤)이 寒岩으로 찾아가 옷과 약 등을 주었더니, 그는 큰소리로 ‘도적놈아, 이 도적놈아, 물러가라’ 하면서 굴 속으로 들어간 뒤에는 그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한다.     한산자는 후세 사람이 붙인 이름이겠지요. 그는 세상을 등진 채 굴 속에 은거해 살면서 밥을 해결하기 위해 국청사에 내려오곤 했습니다. 절의 불목하니 습득을 도와 땔감도 갖다주고 물도 길어다주며 밥을 얻어먹지 않았을까요. 한산자는 나무와 바위에 시를 써두었고, 국청사의 중이 편집하여 300여 수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역시 김달진 선생의 역주로 『寒山詩』(민음사, 1991, 제2판)가 나와 있습니다. 제 손때가 묻어 있는 책으로, 한산자의 시에 대해선 월간 『현대시학』의 ‘고전을 다시 읽는다’ 시리즈에 글을 한 편 기고한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한산에 살았던 한산자를 ‘한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그의 기행을 한 편의 시에 담았습니다. 어떻게? “달아났다 지금도 달아난다 지금도 달아나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고. 동네사람들에게 미친놈 취급을 받으며 깊은 산 굴 속으로 달아나는 한산자의 모습이 선생님 눈앞에 자꾸만 어른거려 이 시를 썼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은 선생님뿐만이 아니라 21세기인 지금 시인이 처해 있는 모습이 아닐까요. 최첨단 과학문명, 혹은 초고속 인터넷 시대에 시인이 발붙일 영토가 너무 좁아 외롭고 괴롭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써야만 하는 천형을 선생님은 마다하지 않으시겠지요?     제목을 ‘비누’로 삼은 시가 또한 3편인데 시집의 제목이니 만큼 이제부터 이 시편에 대한 느낌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게는 비누라는 것이 몸이나 의복의 깨끗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물건, 거품을 내는 물건, 향기를 풍기는 물건 등으로 인식됩니다. 12쪽과 54쪽의 시는 선시(禪詩)로 다가와 어렵기만 합니다. “비누는 씨앗도 아니고 열매도 아니다 아마 추운 밤 깊은 산 속에 앉아 있으리라”(12쪽 「비누」), “비누는 배추가 아니다 그러나 가을 아침 햇살에 젖는 비누는 푸른 배추 배추밭에 바람 불고 배추가 피를 흘린다”(54쪽 「비누」)는 등의 시구는 어렵기만 합니다. 하지만 비누를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으로 인식하신 76쪽의 「비누」는 십분 공감이 갑니다.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시 쓰기의 외로움과 괴로움이 이 시에도 나타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겨울 저녁 난 시를 쓰네 비누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앉아 있네 문득 비누가 다가와 나를 만지네 나는 비누 속에 사라지네 나도 물거품 비누도 물거품 벗어날 길은 없네 비누의 길이 삶의 길 비누와 함께 비누를 따라 비누 속에 살자! 비누는 매일 사라진다     ―「비누」 부분     선생님은 비누를, 매일 물거품을 일으키며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조금씩 사라지는 물건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시인 또한 그런 것이지요. 시가 물거품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시인은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늙어가는 존재이기에 “비누의 길이 삶의 길 비누와 함께 비누를 따라 비누 속에 살자”고 다짐해보는 것이 아닐까요. 저 역시도 선생님의 연세에 이르도록 열심히 쓰는 시인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가능한 적게 먹고/ 적게 공부하자”(「호랑이」)는 말씀에는 따르지 않겠습니다. 안 그래도 말라깽이인데 살이 더 빠지면 곤란하니까요. 적게 공부하자는 것은 농담이시겠죠? 우리 시단에 선생님만큼 성실한 학자는 많지 않으니까요.     그럼 이것으로 시집 『비누』에 대한 독후감 쓰기를 마칠까 합니다. 늘 건강하시어 앞으로도 계속 시를 쓰는 현역시인, 시론을 전개하는 문학평론가로 계셔주시길 기원합니다.                                                                                     젊은 날의 이승훈     1942년 11월 8일 강원도 춘천 출생. 춘천고ㆍ한양대 섬유공학과를 거쳐 다시 한양대 국문과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을 마치고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춘천교육대학 국어과에 재직했으며,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등을 수상하였다 1962년 『현대문학』에 작품 「낮」 「바다」 등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시집 『사물 A』(1969), 『환상의 다리』(1976), 『당신의 초상』(1981), 『사물들』(1983), 『당신의 방』(1986), 『너라는 환상』(1989), 『길은 없어도 행복하다』(1991), 『밤이면 삐노가 그립다』(1993), 『밝은 방』(1995), 『첫사랑』(덕수출판사) 등을 간행하였다.     또한 『시론』(1979), 『문학과 시간』(1983), 『비대상』(1983), 『이상시 연구』(1987), 『한국현대시론사』(1993), 『모더니즘 시론』(1995), 『해체시론』(1998) 등의 평론집을 간행하였다.     이승훈의 시 세계는 그가 춘천 생활을 하던 초기 시에서 주로 ‘나’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로 나타났으며, 그 이후로는 ‘너’ 와 ‘그’ 그리고 ‘나와 너와 그’에 대한 대화적 탐구를 하는 데로 나아갔다. 특히 이승훈의 시는 자유연상기법, 자동기술법 등을 통하여 자신의 시에는 시니피앙의 유희만이 있을 뿐이라고 스스로가 말할 정도로 새로운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099    人體旗 댓글:  조회:2453  추천:0  2015-05-05
[ 2015년 05월 05일 08시 21분 ]     하남성 제원황하삼협(河南济源黄河三峡)에서의 . 
1098    백두산 야생화 댓글:  조회:2116  추천:0  2015-05-03
  백두산 야생화   ▼ 바위구절초                 ▼ 두메양귀비                     ▼ 바위돌꽃         ▼ 바위돌꽃과 바위구절초    ▼  바위구절초와 두메양귀비   ▼ 두메자운       ▼ 곰취   ▼ 금매화       ▼ 큰오이풀     ▼ 산오이풀       ▼ 큰앵초    ▼ 구름송이풀     ▼ 담자리꽃나무    ▼ 담자리꽃나무와 두메자운   ▼ 나도개미자리   ▼ 각시투구꽃      ▼ 두메양귀비와 구름송이꽃     ▼  호범꼬리        ▼ 화살곰취     ▼ 산속단   ▼ 만주붓꽃   ▼ 가솔송       ▼ 넓은잎꼬리풀   ▼ 하늘매발톱          ▼ 좀참꽃       ▼  피뿌리풀         ▼ 은방울꽃   ▼ 흰복주머니란   ▼ 분홍복주머니란   ▼ 자주복주머니란     ▼ 황금복주머니란   ▼ 미색복주머니란   ▼ 노랑복주머니란   ▼ 털복주머니란      
1097    재미나는 시 몇수 댓글:  조회:4083  추천:0  2015-05-03
  자위                      함민복      남기는 족보 쓰는 신성한 필기구다 낙서하지 말자, 다시는...                   기 차 는 간 다                                  허  수  경        기차는 지나가고 밤 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 1992년 시집 "혼자가는 먼집"                   어느 쉰 살들의 모임                                           유정임     쉰 것들이 모여 앉았다 한 살부터 아홉 살까지 모두 쉰 것을 앞에 차고 앉았다 "나, 이혼 할까봐" 한 쉰 것이 자못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다른 쉰 것들이 놀란 척 "왜?" 하고 쉰 것을 바라본다 "우리 영감이 바람이 났어" "응? 그 나이에?" 쉰 것들은 놀란 척 하지만 속으로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 떨어져 나갈 생각을 안 해" "몇 살이나 먹었는데?" 속으로 그 여자가 영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냥 우리 또래야?" 쉰 것들은 쉰것에는 흥미가 없다 "경제권은 네게 있잖어?" "그럼" 쉰 것이 자신있게 대답한다 "야,그럼 내비둬" 쉰 것들은 쉬지 않은 음식을 아귀아귀 먹으며 앞에 찬 쉰 것들을 연신 흔들어 댄다. 방안이 쉬척지근하다.                   엘레지                            오탁번     말복날 개 한 마리를 잡아 동네 술추렴을 했다 가마솥에 발가벗은 개를 넣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장작불을 지폈다 참이슬 두 상자를 다 비우면서 밭농사 망쳐놓은 하늘을 욕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아랫집 김씨가 말했다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 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 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   -엘레지 몰라요? 개자지 몰라요?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라는 우리말을 모르고 있었다니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그날 밤 나는 꿈에서 개가 되었다 가마솥에서 익는 나의 엘레지를 보았다                  굴 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                                    오탁번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  껄껄걸 웃으면서 악수하고  이데올로기다 모더니즘이다 하며  적당히 분바르고 개칠도 하고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똥끝타게 쏘다니면 된다  똥냄새도 안 나는  걸레냄새 나는 방귀나 뀌면서  그냥저냥 살아가면 된다  된장에 풋고추 찍어 보리밥 먹고  뻥뻥 뀌어대는 우리네 방귀야말로  얼마나 똥냄새가 기분좋게 났던가  이따위 추억에 젖어서도 안 된다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옛마을이나  개불알꽃에 대한 명상도  아예 엄두 내지 말아야 한다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  걸레처럼 살면서  깃발 같은 시를 쓰는 척하면 된다  걸레도 양잿물에 된통 빨아서  풀먹여 다림질하면 깃발이 된다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된다  -벙그는 난초꽃의 고요 앞에서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을  쓰고 있을 때  내 마빡에서 별안간  '네 이놈!'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만 연필이 딱 부러졌다  손에 쥐가 났다                  오이를 씹다가                            박성우     퇴근길에 오이를 샀네 댕강댕강 끊어 씹으며 골목을 오르네     선자, 고년이 우리 집에 첨으로 놀러 온 건 초등학교 오학년 가을이었네 밭 가상에 열린 오이나 따 줄까 해서 까치재 고추밭으로 갔었네 애들이 놀려도 고년은 잘도 따라왔었네 밭을 내려와 도랑에서 가재를 잡는디 고년이 오이를 씹으며 말했었네 나는 니가 좋 은 디 실한 고추만치로 붉어진 채 서둘러 재를 내려왔었네 하루에 버스 두 대 들어오는 골짜기에서 고년은 풍금을 잘 쳤었네 시오릿길 교회에서 받은 공책도 내게 줬었네 한번은 까치재 밤나무 아래서 밤을 까는디 수열이가 오줌싸러 간 사이에 고년이 내 볼테기에다 거시기를 해 버렸네 질겅질겅 추억도 씹으며 집으로 가네   아무리 염병을 떨어도 경찰한테 시집간 고년을 넘볼 순 없는 것인디 고년은 뱉어도 뱉어도 뱉어지지 않네 먼놈의 오이 꼭다리가 요러코럼 쓰다냐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정희성     주일날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갔다가 미사 끝나고 신부님한테 인사를 하니 신부님이 먼저 알고, 예까지 젓사러 왔냐고 우리 성당 자매님들 젓 좀 팔아 주라고 우리가 기뻐 대답하기를, 그러마고 어느 자매님 젓이 제일 맛있냐고 신부님이 뒤통수를 긁으며 글쎄 내가 자매님들 젓을 다 먹어봤냐고 우리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그도 그렇겠노라고                 작명의 즐거움                                            이정록 콘돔을 대신할  우리말 공모에 애필( 愛 (애) 必 (필) ) 이 뽑혔지만  애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중 한글의 우수성을 맘껏 뽐낸 것들을 모아놓고 보니 삼가 존경심마저 든다  똘이옷, 고추주머니, 거시기장화, 밤꽃봉투, 남성용고무장갑, 정관수술사촌,  올챙이그물, 정충검문소, 방망이투명망토, 물안새, 그거, 고래옷, 육봉두루마기,  성인용풍선, 똘똘이하이바, 동굴탐사복, 꼬치카바, 꿀방망이장갑, 정자지우개,  버섯덮개, 거시기골무, 여따찍사,버섯랩, 올챙이수용소, 쭈쭈바껍데기,  솟아난열정내가막는다, 가운뎃다리작업복, 즐싸, 고무자꾸, 무골장군수영복,  액가두리, 정자감옥, 응응응장화, 찍하고나온놈이대갈박고기절해  아, 시 쓰는 사람도 작명의 즐거움으로 견디는 바  나는 한없이 거시기가 위축되는 것이었다  봄 가뭄에 보리누룽지처럼 졸아붙은 올챙이 눈  그 작고 깊은 끈적임을 천배쯤 키워놓으면  그게 바로 콘돔이거니, 달리 요약 함축할 길 없어  개펄 진창에 허벅지까지 빠지던 먹먹함만 떠올려보는 것이었다  애보기글렀네, 짱뚱어우비, 개불장화를 나란히 써놓고  머릿속 뻘구녕만 들락거려보는 것이었다  (2008년 제3회 윤동주상 수상 작품집)
1096    비속어의 例 댓글:  조회:6597  추천:0  2015-05-03
비속어의 례가 필요한 것 아닌가요?  비속어는 곧 '상스러운 말'입니다.  硬音(경음;된소리)이나 激音(격음;거센소리)이 많이 들어갑니다.  1. 흔히 '씨팔'이라고 하는 욕의 예를 들면 '씨발' '씨부럴' '쓰벌' 등등 발음과  표기의 변화가 아주 많은데 어원은 '씹 + 할'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본래는 '개와 씹을 할 놈'의 말이었다가 앞뒤 생략해서 중간만 씁니다.  2. '육시럴'이란 말 또한 비슷합니다.  본래는 '戮屍(육시)를 할 놈'의 말이었다가 줄어든 거지요.  육시라면 부관참시나 마찬가지로 아주 욕된 죽음을 뜻합니다.  시체가 된 것을 또 죽인다는 뜻입니다.  3. '뽀록'이란 말이 있습니다.  '뽀로꾸'라고 하면 영어 fluke에서 온 말로 '엉터리'라는 뜻이며 그 뜻대로 씁니다.  그런데 '뽀록나다'라고 하면 들통났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暴露(폭로)가 변한 말로 봅니다.  4. '조까'라는 말은 '좆까'라고도 씁니다.  좆을 까라는 말인데, 지금은 포경수술이 보편적이지만 본래 우리나라는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라 해서 신체의 일부라도 훼손하는 것은 효가 아닌  것으로 쳤습니다. 따라서 좆을 까라는 말은 불효를 하라는 말도 됩니다.  5. '니미럴'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국제적으로도 너무나 흔한 욕으로 '니 에미와 할' 이 말의 준말입니다.  '너의 어머니와 **를 할 놈'의 뜻입니다.  곧 영어의 fuck you 또는 son of a bitch에 해당하고,  중국어의 王八蛋(왕빠단) 정도에 해당합니다.  이상 간단한 몇 예를 들었는데요, 은어나 비속어는 그 어원이 불분명한 것이 아주 많음을 참고해야 합니다.      추천해요0 xfile0363 1. 염병 : 전염병의 준말로 장티푸스, 열병이라고들 하지요. 응용작은 염병에 땀 못낼 놈. 2. 씨발 : 씹할이 좀 변한 말인데요. 풀네임은 제 어미랑 씹할 놈. 즉 제 어미와 성관계를 가질 녀석. 이런 뜻으로 주로 오랑캐들에게 썼다네요. - _-;; 어느 족인지는 모릅니다. 3. 좆 : 남자의 성기를 뜻하지요. :) 응용작은 좆같은놈, 좆같은 새끼 등이 있습니다. 4. 개새끼 : 뭐 달리 있나요. 개의 새끼, 즉 강아지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죠. 5. 병신 : 몸이 좀 온전치 못한 사람을 뜻하지요. - _-;; 6. 애자 : 병신과 비슷합니다. 장애자의 준말. 7. 또라이 : 무식하다, 등신, 바보 이런 뜻입니다. 8. 촌년 : 촌스러운 여자를 뜻하지요. 촌놈은 촌스러운 남자. 9. 좆같다 : 남자 성기같다. - _-; 10. 눈깔 : 눈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죠. 11. 주디 : 입의 사투리랄까나;; 전 주디 주디 그랬습니다. 어릴적에... 12. 똘추 : 음.. 제가 듣기론 스모선수들이 너무 뚱뚱해서 스스로 엉덩일 못닦는다 하더이다. 그 스모 선수들이 볼일을 보고나서 똥꼬를 닦아주는 사람.. 이라죠. 13. 쪼다 : 바보랑 비슷합니다. 14. 십장생 : - _-웃찾사에서 나온뒤로 욕이 된듯... 원래 뜻은 오래 사는 열가지 생물입니다. 15. 개꼬치 : 개의 성기밖에 더있남유; 16. 씨부랄 : 나눠 보자면.. 여자의 성기와 남자의 성기네요. 17. 좆빠라 : 남자의 성기를 빨라... 는 뜻이겠죠. 18. 개년 : 개같은 여자. 욕하는 거죠 뭐. 19. 걸레 : 걸레가 더럽잖아요. 그러니까 뭐, 추잡하고 그런 사람. 그냥 욕하는 거죠. 20. 창년 : 왜 기생같은 사람들 있죠? 사창가나 유흥가에서 몸파는 여자들. 21. 쌍놈 : 한마디로 상놈, 상것, 즉 천한 신분의 사람을 말하죠. 22. 개또라이 : 개와 또라이가 합쳐진겁니다. 23. 개방구 : 개가 뀌는 방귀라... 뭐 그정도? 24. 지랄 : 시끄럽게 나불나불, 지랄이 원래는 간질입니다. 지랄병은 간질병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고요. 뭐 발작하듯이 그러는 사람보고 하는 말입니다. 25. 삽질 : 혼자서 삽푼다고, 즉 헛짓한다는 거죠. - _-; 26. 제기랄 : 풀네임은 제 애기랑 할 놈. 즉 자식과 성관계를 나누다.. 라는 뜻이죠. 27. 쌍판 : 면상. 얼굴을 뜻하지요. 28. 늬미럴 : 자기 어미와 성관계를 가질 녀석. = _= 29. 초딩 : 원래는 욕이 아니었는데 요즘은 정신상태가 어리고 철이 없는 초등학생을 뜻하죠; 30. 중삐리 : 중학생을 속되게 이르는 말. 31. 고삐리 : 고등학생을 속되게 이르는 말. 32. 앰창 : 니 어머니는 창년이다.. 이뜻이죠. 33. 육시랄놈 : 풀네임은 육시를 할 놈. 육시는 죽은 사람의 관을 파내어 다시 머리를 베는 끔찍한 형벌이죠. 뭐.. 육시를 할 정도로 나쁜 사람 이정도가 되겠습니다. 34. 우라질 : 원래는 오라질이라 하죠. 미운 짓을 한 사람에 대한 질책이나 욕으로 쓰이죠. 원래는 오라가 결박할 때 쓰는 줄이고 질은 묶다. 그래서 오랏줄로 묶다는 뜻입니다. 35. 오사리 잡놈 : 온갖 지저분한 짓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이나 불량한 시정 잡배들을 가리키는말. 36. 짭새 : 경찰들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죠. 37. 짭새둥지 : 경찰서입니다; 38. 마빡 : 이마를 좀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39. 개차반 : 원뜻은 개가 먹을 음식. 즉 똥을 말합니다. 하지만 행세가 고약하고 성격이 나쁜 행동을뜻하지요. 40. 가시내 : 여자의 순우리말 '가시'와 태생을 뜻하는 '나이"가 합쳐서 가시내, 가시나라 칭하게 되었지요. 41. 곤죽 : 원래는 썩어빠진 죽이란 뜻입니다; 즉 몹시 상하고 엉망이 되어 갈피를 잡기 어려운 상태를 말합니다. 42. 깡패 : 영어의 갱(gang)과 한자의 패(패거리를 뜻하죠)가 합쳐진 말입니다. 43. 꺼벙이 : 꿩의 어린 새끼를 꺼병이라 하죠. 이 꺼병이는 생긴게 못생겼는데, 이에 빗대어 어딘가 모자란 듯하거나 못생긴 사람을 꺼벙이라 하게 되었지요. 44. 멍청이 : 멍청이는 멍텅구리라고도 하죠. 멍텅구리란 바다에 사는 물고기의 이름인데 이 물고기는 못생기고 동작이 느려 여기에 비유하여 판단력이 느리고 시비를 잘 모르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죠. 45. 바보 : 밥보에서 자연스럽게 밑받침의 ㅂ이 탈락된 단어입니다. 어리석고 멍청한 사람을 뜻하지요. 46. 사이비 : 영어인줄 아시는 분들이 몇명 계시는데, 한자입니다. 가짜를 뜻하지요. 진짜같지만 가짜. 47. 삿대질 : 배의 삿대를 젖는 행동으로 싸울 때의 손가락질이 삿대질과 비슷한데서 유래되었습니다. 48. 아니꼽다 : 장을 뜻하는 '안'과 굽은 것을 뜻하는 '곱다'가 합쳐져서 '장이 뒤틀린다'는 뜻이지요. 즉 장이 뒤틀려 토할 것 같이 불쾌하고 매스껍다는 뜻입니다. 49. 밸 : 또다른 장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 _- 배알이라고도 하며 창자를 뜻합니다. 50. 얼간이 : 음식을 소금에 약간 절이는 것을 '얼간'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대충 어리숙하고 어딘가 모자라는 사람을 뜻한다.
1095    미국 <<욕>> 종류 댓글:  조회:5924  추천:0  2015-05-03
Bullshit!  이런 엉터리.  Goddamnit!  빌어먹을! You, idiot! 넌 바보야. fucking retard!  바보 같은 놈   you, jerk!   멍청한 놈. Stupid!    어리석은 놈! Fuck you! 18 놈. Son of bitch  or SOB   개놈아 mother fucker  너금마 10 이다. Fucking American gigolo.  야이, 오입쟁이 새끼야.  You bastard  양아치 새키야 좀더 강도 높은 욕들,- Fucking nigger!  이 깜둥이 새끼 Fuck you, gook!  더러운 동양놈의 새끼 Suck my Dick!  좆이나 빨아라. Nasty bitch!   더러운 화냥년 Fucking asshole!  똥꼬나 박아라! Fucking ho!  똥갈보! 실전으로 들어 가서 여자에게 욕 할때 Hey, Nasty bitch, mother fucker! You, so bitch!  your mouth is so bad because of boiling my stomach.  Goddamnit. get out of here, Fucking ho!    
1094    욕의 범주를 알고 욕하기... 댓글:  조회:7188  추천:0  2015-05-03
    1. 序論(서론) 말을 할줄 아는 사람들 가운데 아마 욕 한두 가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말을 배우는 어린 아이들 조차도 욕을 입에 담는 경우가 왕왕 있어 부모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기도 한다. 이렇듯 욕은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언어 수단이 되었다. 심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욕을 빼면 언어 소통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까지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청소년층에 많이 있으며, 저학력, 저소득층 일수록 일상 생활에서 욕을 쓰는 빈도가 잦아진다. 그렇다고 고학력이나 고소득층, 소위 말하는 엘리트 계층의 사람들이 욕을 모르고 사는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욕을 입에 담곤 한다.  그렇다면 욕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욕을 함으로 해서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이 미칠까? 그리고, 또 우리가 쓰고있는 욕에는 어떤 종류의 것들이 있으며 자주 쓰는 욕과 그 사람의 심리 상태에는 어떤 상관 관계가 있을까? 욕을 하는 사람은 욕을 먹는 사람의 기분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으며 상대방에게 어떤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 욕을 하는 것일까? 인간이 아니고서는 욕을 할 줄 모른다. 역설적으로 욕은 가장 인간다운 것이 아닐까? 이러한 욕에 대한 정확한 考察(고찰)을 통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미묘한 심리 상태를 파악하고 나아가서는 좀더 원만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데 굳이 이 글의 목적을 삼는다고 하겠다. 이 글의 草案(초안)은 본인이 1년 전에 결성했던 "辱友會(욕우회)"의 창단 취지에서 비롯한 것임을 밝히며, 현재 욕우회는 유명무실 그 뜻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음을 아울러 添言(첨언)한다.  그리고, 한가지 당부하고 싶은 말은 이 글에서 다루어지지 않았거나 새로운 욕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들었을 경우 그 욕을 Hitel I.D copycom으로 mail을 통해서 해주기 바란다. 욕, 모르고 함부로 하는 것 보다는 정확히 알고 하지 않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2. 욕의 基本(기본)  욕에도 기본이 있을까?  이런 질문 자체가 愚問賢答(우문현답)인것 같기는 하지만 세상 모든 것에는 이치가 있으며 근본이 있듯이 욕에도 분명 기본은 있다. 物有本末 事有終始(물유본말 사유종시)라 하지 않았던가? 우리나라 욕의 기본은 바로 이 세상의 이치와도 부합되는 동양 사상의 주축인 二元論(이원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원론이란 무엇인가? 바로 陰陽(음양)의 조화로서 세상이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이론이 아니던가. 구체적인 예로서 "좆"과 "씹"을 말하는 것이다. 욕 가운데 가장 많이 응용과 변형이 되고있는 것이 바로 이 "좆"과 "씹"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 하게도 二元論的(이원론적)으로 해석을 하면 이 "좆"과 "씹"은 욕과는 거리가 먼 단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왜 그런가를 밝히기 전에 먼저 국어사전에 명시된 이 단어의 뜻 부터 살펴보자. 좆 = 어른의 자지. 씹 = ①어른의 보지. ②성교. 위에서 보았듯이 辭典的(사전적) 의미로서의 "좆"과 "씹"은 어른의 性器(성기)를 나타낸 말이다. 그렇다면, 성기를 나타낸 말 가운데 이것 말고 다른말은 없었을까? 물론 아니다. "자지"나 "보지"라는 순 우리말 외에도 "陽物(양물)"이나 "陰門(음문)"이라는 소위 점잖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한자어도 있었다. 그런 단어가 있어 언어 소통에 불편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좆"이나 "씹"이라는 단어가 생겨났을까?  욕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좆"이나 "씹"은 동양 사상의 근간이 되는 음양이론에 있어서 각각 남자와 여자의 대명사가 된다. 음양이론을 토대로 해서 쓰여진 周易(주역)에서 남자는 陽(양)으로 표현되며 곧 하늘을 나타낸다.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은 陰(음)으로서 땅을 표현한다. 하늘의 기운은 언제나 말라있어 건조하다. 하늘에 습기가 많아지게 되면 비가 내려 곧 그 습기를 없애버리는 것은 현대의 과학을 빌리지 않더라도 잘 알고있는 바이다. 옛날 사람들은 그래서 하늘로 대변되는 남자를 乾燥(건조)하다는 말에서 乾(건)자를 빼고 말라있다는 뜻의 燥(조)자를 상징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땅은 하늘과 반대에 있으면서 항상 축축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 그 축축한 기운은 이내 하늘로 올라가 다시 비로 내려오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땅 위나 땅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땅으로 대변되는 여자를 일컬어 축축하다는 뜻의 濕(습)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땅이 여자였다는 사실은 주역에 나오는 坤道聖女(곤도성녀)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으며 우리나라 전역에서 발견되는 장승을 보더라도 하늘과 땅에 대한 부가설명이 필요 없을것 같다. 남자 장승은 天下大將軍(천하대장군), 여자 장승은 地下女將軍(지하여장군)이 아니던가? 아뭏튼 燥(조)자와 濕(습)자는 이런 연유로 각각 남자와 여자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고 그 뜻은 남자와 여자의 커다란 신체적 차이점인 생식기를 나타내는 말로 轉移(전이)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한동안 "조"와 "습"으로 불리우던 말은 세상이 끊임 없는 전쟁으로 시달리며 인심이 흉흉해지는 사이 激音化(격음화)를 통에 오늘날의 "좆"이나 "씹"으로 변화되어 왔고 각박해진 세태를 반영하듯 그 발음은 더욱 드세어지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한가지 더 추가적으로 말을 하자면 "씹"은 어른의 보지라는 사전적인 뜻 외에 性交(성교)를 나타내는 뜻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씹한다"라고 하면 곧 남녀간의 성행위를 말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왜 성교를 나타내는 말로 "씹"이 사용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예로부터 농경국가로서 父權(부권)중심의 씨족이 살아왔던 우리나라에서 남자의 상징인 "좆"을 제쳐두고 "씹"을 성교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한 점은 우리 민족이 성행위에 대해 다분히 메저키즘적 思考(사고)를 잠재의식에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될것이다. 이것은 또한 농경국가였기 때문에 특히 多産(다산)의 바램도 포함된다고 본다. 즉, 우리 민족의 성행위에 대한 잠재의식은 들이 밈이 아니라 받아들인다는 수동적 의미로서, 또한 "좆"을 삽입함으로서 母胎 歸屬本能(모태 귀속본능)의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의미도 될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개국설화인 단군신화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잘 아다시피 단군은 熊女(웅녀)의 아들로서 신화에서는 곰의 자손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설화이기는 해도 어찌 곰이 사람이 될 수 있으며 그 곰이 낳은 자식이 한 나라의 始祖(시조)가 될 수 있겠는가. 단군신화에서 말하는 웅녀는 곰이 아니라 땅의 신을 섬겼던 부족장의 딸로 생각되어 진다. 여기서 곰은 곰(熊)이 아니라 우리말의 땅에 해당하는  이고 발음이 같은 동물의 곰으로 표현된것으로 보아진다. 갓난아이가 태어나면 대문 밖에 걸어놓는 줄을 우리는 금줄이라고 하는데 이는 땅의 신을 섬겼던 웅녀의 후예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이렇듯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땅은 특별한 의미를 지녔으며 그 의미는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잠재의식 속에 면면이 담겨져 있다.  **단군신화에 대한 더욱 자세한 자료는 정신세계사에서 펴낸 임승국씨가 번역한 "桓檀古記(한단고기)"를 참조하기 바람. 이제까지 우리는 욕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좆"과 "씹"에 대해서 알아 보았고 다음 장에서는 "좆"과 "씹"이 사용, 응용되어지는 구체적인 욕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3. "좆"이 사용된 욕 지난 장에서 "좆"과 "씹"은 욕의 기본이라는 설명을 마쳤다. 이제부터는 이 "좆"과 "씹"이 어떻게 욕의 기본이 되는가에 대해 설명을 하도록 하겠다.  욕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것 중의 하나가 "씹새끼"나 "좆같네"라는 욕일 것이다. 욕의 고전이라고 해야할까? 그럼 이제부터 "좆"이 들어가는 욕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보겠다. ① 좆같네. 좆같이. 개 좆이다. "좆같네"나 "좆같이"는 어떠한 상황이나 어떠한 모양이 좆과 같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좋지 않은 상황이나 모양을 가리켜서 하는 욕으로서 잘 풀리지 않는 일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쓰이기도 한다. 이렇듯 모양이 좆과 같다는 것이 욕이 된 연유는 아무래도 예로부터 생식기, 특히 남성의 性器(성기)가 터부시 되어왔다는데 있다. 그 예로서 욕 가운데 "씹같네"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개 좆이다"라는 욕도 비슷하게 쓰이기는 하지만 사회적으로 아주 천하게 여겨졌던 개의 좆과 동일시 함으로해서 사람의 좆보다 더 심한 모멸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이 욕에 대한 대응으로서 "좆이 갓이면 쓰고 다니지"라는 말도 있다. "좆같다"에서 "같"자를 쓰고다니는 갓으로 해석을 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 욕을 변형시켜 한가지 제안을 한다면 "좆같다"를 "珠玉(주옥)같다"로 바꿔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발음상으로는 "좆"을 연상시키지만 뜻은 아주 깨끗한 이미지이다.  ② 좆나게 ~ 하네 이 욕은 형용사의 앞에 주로 쓰이며 대부분은 사용되어지는 형용사를 극대화 시켜준다. "좆나게 크다""좆나게 더럽다""좆나게 춥다" 등등으로 쓰이고, "좆같이"에서 파생된 욕인듯 하며 비교적 형용사를 최상급으로 만들어 주는 것으로 보아서는 "좆 물이 나올 정도"의 줄인말로 보아진다. 성교시 精液(정액)이 나올 정도가 된다면 그 성기의 상태를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③ 좆만한 새끼 상대방을 아주 작게 卑下(비하)시키는 욕이다. 또는 어떤 물건에 대하여 아주 작게 표현을 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좆나게 ~ 하네"와는 크기상으로 비교해 볼때 반대로 쓰이기도 하며 더 극단적으로 작은 표현에는 "쥐 좆만한 것"이 쓰이기도 한다. ④ 좆까라. 좆까고 자빠졌네. 좆지랄 까네. 좆까라 마이신. "좆까라"라는 욕은 동양권에 속한 우리나라 남성들의 性器(성기)가 포경수술을 받지 않았을 경우 대부분 완전 包莖(포경)이거나 반 包莖(포경)이라는 점에서(포경은 순 우리말로 우멍거지라고도 한다.) 좆이 까짐, 즉 성인 자지의 귀두가 껍질에서 벗겨짐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의 성기가 성적 흥분상태에서 勃起(발기)됨을 일컫는다. 발기란 자지의 해면체 내부의 모세혈관이 충혈하여 팽창, 강직해지는 생리적인 현상으로 鼓子(고자)가 아닌 남성이라면 지극히 정상적인 일로서 성교를 행하기 전이나 성적으로 흥분상태에 이르게 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성교나 성적 흥분이 되지 않는 상대방에게 "좆까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성기를 꺼내들고 귀두를 껍질에서 벗겨 내라는 말이다. "좆까고 자빠졌네"도 이와같은 욕이다. 단지 누워있다는 말만 덧붙여진 욕이라 하겠다. 이 욕에 대한 대응으로서 이런 말이 있기도하다. "내 좆이 다마네기 좆이냐? 깐좆 또 까게?" 여기서 다마네기라 하면 양파의 일본 말이다. 양파의 껍질은 까도까도 또 나온다는 착상에서 이런 댓구가 만들어진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좆지랄 까네"를 해석해 보면 자지를 가지고 지랄을 한다는, 즉 手淫(수음) 속된 말로 딸딸이를 친다는 말이 된다. "좆까라 마이신"은 "좆까라"와 性病(성병)에 특효약인 마이신을 결합시킨 욕으로 너의 자지가 성병에 걸렸다는 말이기도 하다. 외간 여자와 성행위를 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이런 욕설을 한다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할까. 이만하면 가히 욕도 세계적인 수준이 아닐까 생각하는 바이다. ⑤ 좆뺑이 치네. 이 욕은 아주 힘든 일을 할때나 힘들었던 일을 끝마치고 나서 그 상황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좆으로 팽이를 돌렸다는 말이다. 상상을 해보면 그런 일이 얼마나 힘든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듯 하다. 손으로 팽이를 돌려도 힘이 드는 일인데 "좆"으로 돌린다니 얼마나 힘이 들까? 어떻튼 말로나마 성기를 이렇듯 酷使(혹사)시키는 민족은 우리나라 말고는 또 없을 게다. "좆뺑이"에서 "뺑이"를 팽이가 아닌 ~뱅이(어떤 습관이나 성질, 모양 등으로서 그 사람을 낮게 이르는 말. 주정뱅이. 가난뱅이. 앉은뱅이 등등)가 변한 격음화 현상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욕의 쓰임새로 보아서는 팽이로 보는게 옳을듯 하다. "뺑뺑"이라는 단어의 이미지에서 풍기는 "돈다는" 의미와도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⑥ 좆빠는 소리 하네. 이 욕은 에로틱한 성애의 심볼인 숫자 69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숫자는 남녀가 서로 거꾸로 포개져 口腔(구강)섹스(Oral sex)를 하고있는 형태로서 조금 동떨어진 얘기지만 오래 전 李箱(이상)이라는 시인이 경영했던 까페의 이름이기도 하다.  보통 이 욕을 남자에게 하면 동성연애(Homo)를 한다는 말이 되고, 여자에게 한다면 물론 오랄섹스를 한다는 말이 된다. 어떻튼 옛날부터 이 욕은 口傳(구전)되어 왔고, 그렇게 본다면 서양 문물이 들어오기 전에도 우리 조상들은 오랄섹스를 즐겨 왔던게 틀림없다. 단지 성에 대한 모든 것을 너무 숨기고 비밀스럽게 취급을 하다보니 이렇듯 성에 대한 욕설이 난무하는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 생각으로 이조 말 철종 때 김삿갓(본명 김병연1807~1863)이라는 사람이 지금 얘기하는 오랄섹스에 대한 일화를 한토막 남겨놓은 것이 있어 잠시 소개를 하고 지나갈까 한다.  이름하여 嚥乳三章(연유삼장). 父嚥其上 (부연기상) 시아비가 그 위를 빨고 婦嚥其下 (부연기하) 며느리가 그 아래를 빠니 上下不同 (상하부동) 위와 아래는 같지 않으나 其味則同 (기미즉동) 그 맛은 아마 같았으리라 父嚥其二 (부연기이) 시아비가 그 둘을 빨고 婦嚥其一 (부연기일) 며느리가 그 하나를 빠니 一二不同 (일이부동) 하나와 둘은 같지 않으나 其味則同 (기미즉동) 그 맛은 아마 같았으리라 父嚥其甘 (부연기감) 시아비가 그 단것을 빨고 婦嚥其酸 (부연기산) 며느리가 그 신것을 빠니 甘酸不同 (감산부동) 달고 신것은 같지 않으나  其味則同 (기미즉동) 그 맛은 아마 같았으리라.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불륜의 관계를 詩(시)로 표현한 김삿갓의 재치가 번득이는 절묘한 작품이다. 아니, 이것은 작품이라기 보다는 시 그 자체로서 바로 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뭏튼 그 당시 불륜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성행위에 있어서 애무의 농도가 이정도의 것이라면 가히 포르노 영화가 판을 치고 있는 현대보다 성적 기교에 있어서 한 수 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위 시에서 나타내는 "上(상)""二(이)""甘(감)"은 며느리의 젖을 말하며 "下(하)""一(일)""酸(산)"은 시아버지의 性器(성기)를 뜻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좆"을 사용한 욕들에서는 하나같이 겉으로 들어 내놓고 말하기는 민망스러운 표현들로 가득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서 확실히 우리 민족은 여지껏 性(성)에 대해서 너무 은폐 시키려는 경향이 두드러지는것 같다. 앞으로 우리는 이런 점을 고려해 성을 수치가 아닌 떳떳한 인간 생활의 한 방편임을 깨닫고 올바른 성교육을 통해 이런 욕들을 하나씩 도태시켜 나가야할 것이다. 그럼 "좆"에 대한 욕은 여기서 접도록 하고 다음 장 부터는 "씹"자가 들어간 욕에 대해서 알아 보도록 하겠다. 4. "씹"이 사용된 욕 "씹"자가 들어간 욕에서는 그 뜻이 "어른의 보지"와 "性交(성교)" 이렇게 두가지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욕의 語頭(어두)에는 "니미"나 "니기미"라는 말이 주로 붙여지게 되는데 이 "니미"나 "니기미"라는 말은 니네 어미, 즉 너의 어머니의 줄인 말로 그 뜻을 가만히 살펴보면 다른여타의 욕보다 더욱 심한 치욕적인 모멸감을 상대방에게 안겨주는 그런 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기에 이런 욕은 정확히 그 뜻을 파악하고 상대에게 돌아갈 그 수치스러운 치욕감이 입장이 바뀌어 내게 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서 아무리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다고 하더라도 쓰지 않는것이 좋을듯 싶다. 특히 습관적으로 이런 욕을 자주 하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것은 明若觀火(명약관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누워서 침 뱉기라고나 할까? 그럼 이제부터 실제적으로 사용되어지는 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는데, 그 전에 "니미"라는 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의미에서 "씹"자는 안들어 가지만 그 뜻이 거의 비슷한 한 가지 욕부터 알아 보도록 하자. ① 지미 붙을 놈. 제미 붙을 놈. "지미 붙을 놈"이라는 욕은 주로 옛날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종종 사용하였던 것인데 비교적 그 억양은 다른 욕에 비해서 부드럽긴 하지만 뜻은 그와는 정반대로 아주 치욕적이다. 여기서 "지미"는 "니미"와도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로서 "지 에미", 즉 너의 어머니를 줄인 말이다. (영화배우 김지미를 떠올리기 쉬우나 여기서의 의미는 김지미가 절대 아님.) 이 욕은 또 "제미 붙을 놈"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 뜻은 "지미"와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 말이 무엇인가? 너의 어머니와 붙는다는 얘긴데, 그 말은 바로 너의 어머니와 性交(성교)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서양의 신화 가운데 오이디푸스라는 자가 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몸을 섞었다고는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제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오이디푸스는 괴로움에 못이겨 자신의 눈을 파내고 고통스러워 하다가 결국은 미쳐 죽어버리고 말았지 않는가. 하물며 제 어미라고 알려 주면서 붙으라고 하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말인가. 농담이라도 이런 말을 듣고나서 기분 상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떻튼 이 욕은 서양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동양적으로 克明(극명)하게 설명해 주는것 만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니미"라고 욕을 하는 사람의 심리상태는 다분히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 싶다. 역설적으로 유아기나 유년기에 어머니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 이 욕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자기만족을 얻는 것이라 분석할 수 있겠다. 성인이나 스스로 성인이라 생각하는 청소년의 입장에서 어린 아이처럼 "엄마"라고 부를 수 없는 입장이고 보면 "니미"라는 이 욕을 통해 사랑의 결핍으로 인한 욕구 불만을 해소 시키려는 인간의 메카니즘적 요소가 깔려 있다고 하겠다. 이것으로 "니미"라는 말의 분석은 끝났고 이제부터 "씹"자가 사용되어지는 욕의 구체적인 분석을 시작해 보도록 하겠다. ② 씨발. 씹팔. 씹빨. 씹알. 이 욕처럼 여러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도 드물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 욕이 습관적으로 입에 배서 혼잣말로 중얼거릴 때도 서슴없이 이 욕을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사람을 어떻게 판단하는지는 판단하는 사람의 자유이다. 그렇지만 좋은 인상이 심어질 리는 만무하지 않겠는가? 어떻튼 이욕은 발음상 네 가지 뜻으로 나뉘어진다. 보통 이 욕은 "씨발"이라고 가장 많이 쓰는데 이 뜻은 辭典的(사전적) 의미의 두번째 것, 즉 "性交(성교)를 하다"라는 뜻의 "씹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씨발놈"또는 "씨발년"이라고 하면 성교를 할 놈이라는 말이다. 어찌 생각해 보면 욕은 아닌것 같기도 하지만 性(성) 그 자체를 비밀스럽게 여겨왔던 우리 민족에게는 드러내 놓고 "씹할"이라고 하면 당연히 상대방에게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씹"도 하고 싶을 때 해야 좋은 것이지 아무 때나 이 놈 저 놈과 성교를 갖는다면 동네를 배회하는 개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이 욕 앞에 주로쓰이게 되는 "니미"라는 말이 붙게 된다면 천하에 몹쓸 욕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욕보다 억양이 좀 세게 들리는 "씹팔"은 말 그대로 "씹"을 판다는 것이다. 숫자로 18이라고 쓰이기도 하는 이 욕은 여성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치욕적인 말이 되는 것이다. 賣春婦(매춘부)라는 얘기인데 청량리 588번지 사창가의 직업여성도 아닌 사람에게 "씹"을 팔라는 것 만큼 또 치욕적으로 들리는 말은 없을듯 하다. 매춘을 인류 최초의 직업이라고 反問(반문)을 제기하며 떳떳한 직업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겠느냐는 사람도 있겠는데 아직 우리나라의 윤리관으로서는 어려운 얘기다. 물론 매춘을 지금과 같이 사회의 必要惡的(필요악적)인 존재로서 놓아두는 것도 에이즈가 확산되는 이 마당에서는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문제는 지금 말하고 있는 욕과는 거리가 먼 관계로 다음 기회를 빌어 말하기로 하고 계속해서 다음 욕을 살펴 보겠다. "씹빨"은 독립적으로는 그렇게 많이 쓰이고 있지는 않지만 語頭(어두)에 붙여지는 "니미"와 맞물려서 "니미 씹빨고 있네" 등으로 쓰여지고 있다. 이 욕은 "좆"자가 들어가는 욕 가운데 "좆 빠는 소리하네"와 그 뜻이 一脈相通(일맥상통)하고 있다. 단지 "니미"라는 단어가 이 욕을 더욱 욕스럽게 해주고 있을 뿐이다. 차라리 이런 욕을 굳이 쓰겠다면 성애의 심볼, 또는 Oral Sex의 심볼이라고도 말 할 수있는 69를 따서 "육구하고 있네" 정도로 표현해 주면 어떨까 생각 한다. 물론 그 반대는 96이다. 끝으로 "씹알"이라고 발음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어찌보면 道(도)를 깨닫는 이치와 부합이 되는듯 하다. "씹"을 안다, 즉 "씹을 터득한다"는 것으로 2장 욕의 기본 에서 밝혔듯이 "씹"은 여성을 의미 하기도 하며 땅을 의미 한다고 했다. 땅이란 중복되는 이야기 같지만 세상의 만물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은 의미로서 陰(음)에 해당된다. 다시말해 "씹알"이라 하면 음양의 이치 가운데 음의 이치를 깨우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로서 세상의 섭리를 깨우친다는 조금은 비약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완전한 도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음의 이치뿐 아니라 양의 이치까지도 깨달아야 하는 과정이 있다. 양의 이치까지 터득을 한다면 天氣(천기)를 알 수 있다는 말인데, 그 정도가 되면 그야말로 진정한 "道士"가 되는것이 아닐까. 아니,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의 어떤 이름으로도 불리기를 거부하는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道(도)란 이미 진정한 의미로서의 도가 아닌 것이기에 뭐라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것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그러니 "씹알"이라 하면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라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바꿔 말하자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반쯤 도사가 되라는 권유인 셈이다. 이제 이 글에 대해서 정리를 하기에 앞서 당부를 한 가지 해야겠다. 항상 이 글을 읽고난 뒤에는 두 귀를 맑은 물로 씻어주기를 당부한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 이 글을 소리내서 읽었다면 당연히 양치질 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蔽一言(폐일언)하고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이렇다. "씨발"이나 "씹팔""씹빨", 아니 "씹빨"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있었으니 생략하도록 하고, 남은 두가지 욕 앞에 붙는 접두어는 언제나 "니미"가 된다. 물론 독립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非一非再(비일비재)하다. 특히 사투리로 발음되는 "씨발놈"은 "씨부럴놈"으로 그 억양에 있어서 사뭇 표준말의 욕보다 더 욕스럽게 들리기도 한다.  또한 "씹팔"의 어두에도 "니미"라는 말이 붙음으로 해서 그 뜻은 한층 더 악화 되어지고 있다. 實例(실례)를 들어 "니미 씹팔 놈"하면 너희 어머니의 씹을 판다는 말인데 과연 어떤 자식이 어머니의 "씹"을 팔 수 있을까. 가히 戰慄(전율)이 느껴질만한 욕이다. 이 외에도 "니미 씹"이나 "니미 뽕"과 같이 "니미"가 들어가서 응용이 되는 욕도 몇가지 있다. 여기서 "니미 씹"이라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네 어머니의 性器(성기)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니미 뽕"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부가 설명이 필요할것 같다. "니미"는 이제 무얼 말하는지 잘 알 것이고, "뽕"이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방귀소리를 연상하게 된다. 그렇다면 "니미 뽕"은 그저 너희 어머니의 방귀소리라고 해석 해야할까. 그런것은 아닌듯 싶은게 욕으로서 그 의미의 강도가 좀 낮다고 보여진다. 그럼 나도향의 소설에 나오는 식물로서의 "뽕"이라고도 보아지는데 하기야 뽕나무 밭에서 벌어졌던 은밀한 일들 하고도 전혀 상관이 없는것은 아닌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욕에서 등장하는 "뽕"은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즉 너희 어머니의 신임을 얻지 못하는 사람으로 다시 말하자면 너희 어머니의 콧방귀라고나 할까? 콧방귀의 방귀에서 방귀소리인 "뽕"이 연상되어 쓰여진 것으로 보는게 옳다고 생각한다. 이런 해석으로도 "니미 뽕"이 욕인게 오죽 못났으면 저를 낳아준 어머니에게도 콧방귀를 들을만큼 신임을 얻지 못했냐는 질책의 소리인 것이다. 살인범인 자식을 둔 어머니도 그 자식에 대해서 만큼은 믿는다는데 그런 어머니에게서 조차 믿음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살아있을 가치가 있을까. 그래서 욕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③ 니미 씹물에 밥말아 먹을 놈. 이 욕은 상대방에 대한 輕蔑(경멸)의 수준이 과연 어디까지 낮아질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 쐐기를 박듯 그 응용성에 있어서 저급의 극치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껏 진행되어 왔던 餘他(여타) 욕의 설명으로 이 욕의 의미는 충분히 알 수 있을것 같기에 별도의 해석이 없이 다음 욕으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④ 씹새끼. 이 욕도 욕의 대명사라 할 만큼 많이 쓰이고 있는 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다른 의미로 이 말의 뜻을 풀이 하자면 욕이라고 말 할 수 없을것 같다. 왜냐하면 이 세상 어떤 사람이건 어머니의 "씹"에서 나온 "씹새끼"가 아닌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니미 씹새끼"하면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말이 욕으로 바뀌었으며, 이런 욕을 들으면 왜 기분이 나빠지는 것일까?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욕으로서 이 말을 듣기 때문에 當沿之事(당연지사)다.  그럼 왜 이 "씹새끼"라는 말이 욕이 되었을까. 帝王切開(제왕절개) 수술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까? 제왕절개 수술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건 自然分娩(자연분만)으로 태어난 사람이건 세상 사람 중에 99.9%는 "씹"과 연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너나 할것 없이 싫든 좋든 간에 어머니의 子宮(자궁)에서 280일을 양수속에 있었으며 양수와 함께 어머니의 陰門(음문)을 통해 세상 구경을 하게된 것이다.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精子(정자)가 다른 경로를 통해 어머니의 난자와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험관 아기라면 다르지 않겠냐고 묻는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지금 하고있는 얘기는 보편적인 것이지 그런 특수한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묵살하고 넘어가겠다. 주제와는 약간 거리감이 있기는 하지만 세상 사람이 모두 "씹새끼"라고 인정 하는데 도움이 되는 얘기 하나를 하겠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개구쟁이 꼬마를 골려주려는 속셈으로 너는 어렸을 적에 저기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는 말이 있다. 물론 이 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던 아이들 골려먹기의 常用手段(상용수단)이다. 이 말을 듣고 울지 않는 꼬마는 아마 드물것이다. 그만큼 어린이에게 있어서 어머니에 대한 情(정)이 깊다는 것이다. 그럼 이 말에서 가리키는 "저기 다리 밑"이라는 곳은 어디일까? 이 말을 듣고 울움을 터뜨린 아이들이 모두 장성을 하게되면 그곳이 어디라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게된다. "다리 밑"은 바로 어머니의 다리(脚) 밑이고, 주워 왔다는 것은 어머니의 음문을 통해 나왔다는 말이다. 다르게 해석을 하면 그 아주머니들은(아주머니에 복수명사를 쓰는 이유는 이런 말은 항상 여러 사람이 모여있는 상황 아래서만 나오기 때문임.) 어린 아이를 상대로 淫談悖說(음담패설)을 즐겼다고도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들 주변에는 사람들 모두가 "씹새끼"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말들이 많다. 그런데, 왜 "씹새끼"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상할까? 그것은 어려서부터 정이 많이 들고 절대적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를 그것도 인간이 노출하기를 꺼리는 恥部(치부)를 가리켜 노골적으로 卑下(비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자신을 깍아 내리는 말로 "새끼"라고 하니 과연 듣는 사람이 기분 좋을 리 없겠다. 어머니를 깍아 내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逆說的(역설적)으로 이런 욕을 하는 底意(저의)는 상대방 어머니의 치부를 함부로 발설함과 동시에 상대방의 출생까지 격하시킴으로서 자신이 모든 면에 있어서 한 수 위라는 자기우월감을 잠재의식 속에서 만끽하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이 욕을 복수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어 "야, 이 씹새끼들아!"하면 다수의 사람, 또는 세상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싸잡아 罵倒(매도)하는 것이다. 아니면, 그 반대의 해석으로 스스로 自虐(자학)하는 의미로서 풀이 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불만이나, 또는 어떤 집단에 대해 강한 스트레스를 받음으로서 폭발하는 울분을 특정 대상보다 더 광범위하게 싸잡아 넣고 이런 욕설을 퍼부어 화를 삭히는 경우이다. 이런 면에서 보았을 때 어쩌면 이 "씹새끼"라는 욕은 인간의 메카니즘(Mechanism)적인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지기도 한다.  참고로 "새끼"라는 말의 어원은 '시아기'(시아우의 사투리)가 변하여 이루어진 말로서 다시 말하면 남편의 아우 곧 시동생을 가리켰지만 오늘에 와서는 자식이나 어린아이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 되었다. ⑤ 씹창나다.  이 욕의 의미는 두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하나는 혼쭐을 내준다는 뜻으로 "좆나게 팬다"는 의미와 같고, 하나는 폭로한다, 또는 발설한다는 의미의 隱語(은어)로 쓰이고 있다. 전자의 경우 "씹창"에서 "창"은 瘡疾(창질), 즉 한의학에서 말하는 梅毒(매독)으로 풀이된다. 물론 이 병은 무수히 많은 남자와 성관계를 가짐으로서 걸리게 되는데 만성성병으로 자손에게까지 유전이 되는 아주 더러운 병이다. 욕으로서 "씹창"을 낸다는 말은 매독이 걸릴 정도로 무수히 많은 남자와 성관계를 가진것 만큼 구타를 가해 상대방의 꼴을 매독에 걸린것 같이 더럽게 만들겠다는 의미이다. 후자의 "씹창"에서 "창"은 마주 뚫린다는 말로서 "씹"을 뚫어 버리겠다는 의미이다. 여성의 성기가 구멍으로 轉移(전이)되어 나타나고 있는 인간의 잠재의식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라 하겠다. 아마 이런 연유로 남성들의 놀이에는 구멍에 어떤 것을 집어 넣음으로해서 승부가 나는 게임이 많은 모양이다. 사내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구슬치기에도 구멍이 있고, 당구나 골프도 구멍에 볼을 넣음으로 해서 승부를 가리는 운동이지 않는가?  어떻튼 한가지 인정할 것은 욕에서 만큼은 인간의 假飾(가식)이 전혀 섞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이 그대로 말에 묻어 나오는 것은 아마 욕 밖에는 없지 않을까? 하기야 조금이라도 가식이 섞여 있다면 욕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⑥ 희쭈그리. 이 말은 욕이라기 보다는 隱語(은어)로서 더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그 뜻은 아주 누추하거나 남루한 모습을 빗대어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 語源(어원)이 "씹"에서 발생을 하였기에 욕의 범주에 넣은 것이다. 다시말해 "희쭈그리"의 "희"는 "씹"이 변한 말로서 원래의 말은 "씹쭈그리"이다. 이는 "씹"이 쭈그러 들었다는 말로 情事(정사)후 보지가 쭈그러들어 보기싫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말이 변천을 거듭하면서 격음화 현상은 많이 겪게되지만 이 말에서와 같이 오히려 "씹"에서 "희"로 순화되는 경우는 못보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이 말이 생겨난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닌것으로 짐작되며, 한 가지 "희"자로 바뀐것에 대한 보충 설명을 할까 한다. "희쭈그리"의 "희"는 "희다"에서 왔고, "희다"는 "해(陽)"라는 명사에서 바뀐 형용사로서 한자로는 白(흰 백)이라고 쓴다. 이 글자의 형상을 가만히 보면 해를 뜻하는 日(일)자 위에 햇빛을 내려그은 모양이다. 그러므로 해는 우리 민족이나 중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흰색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매우 길(吉)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표현에 있어서 흰색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보통은 핏기가 없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희뜩거리다. 흰수작. 희멀겋다. 희읍스름하다. 등등)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지만 이 욕에서는 안좋은 뜻으로서의 "희"를 "씹"에 대입 시킨것으로 보인다. 陰毛(음모)가 없는 여성의 성기를 "빽(白)보지"라하고 그런 여성과 성교를 하면 3년간 재수가 없다라는 俗說(속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씹쭈그리"의 "씹"이 "희"로 변한것은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참고로 "빽보지"는 순 우리말로 "밴대보지"라 하고, 여성끼리의 동성연애는 "밴대질"이라 한다. ⑦ 엿먹어라. 이 말은 상대방에게 골탕을 먹으라고 하는 소리다. 또는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한 채 그 사람의 말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의도가 담겨있는 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욕이 왜 여기에 소개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욕에서의 "엿"이 바로 "씹"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잘 알고있다싶이 여성의 성기인 "보지"나 "성교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씹"은 다른 여러가지 은어로서 불리워지고 있기도한데 이 욕에서의 "엿"도 바로 그런 은어 가운데 하나이다.  예로부터 口傳(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은어로서의 "엿"은 다름아닌 남사당패 사이에서 "씹"으로 통해졌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에까지 이르러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는것이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엿먹어라"하면 보지를 먹어라, 또는 보지를 빨라는 뜻이 된다. "씹빨"이나 "좆빠는 소리하네"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있는 욕이라 하겠다. 단지 이 욕은 전문 집 단의 은어로 포장을 하고있을 뿐이다. 참고: "씹"의 어원으로 種口(종구), 즉 "씨의 입"으로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 해석은 씨(정자)를 먹어 생명을 孕胎(잉태)하는 신성한 곳이 바로 "씹"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음이 있으면 양이 있듯이 이에 상응하는 양에 대한 추가 설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5. 身體(신체)에 관한 욕 신체에 관한 욕은 크게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로 제목에서도 밝혔듯이 신체(외관)에 관한 것이고, 둘째로 신체 중에서도 內臟(내장)에 관한 것이며, 세째로는 상대방 건강에 대한 혹독한 詛呪(저주)이다. 이렇게 세가지로 분류를 한것은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한 편의상의 분류일 뿐이고 그 공통점은 다분히 상대에 대한 詛呪(저주)가 깃들여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욕이라는 특수어가 아니고서는 좀체로 다루기 힘든 주제이기도 하다. "좆"이나 "씹"자가 들어간 욕에서는 상대의 수치심이나 치욕감을 느끼게 했다면 이제부터 설명하려는 욕에서는 좀 다른 차원의 느낌을 전하게될 것이다. 그럼 이번 章(장)부터는 신체에 관한 욕이 실제적으로 쓰이는 예를 들어가면서 이야기를 풀어갈까 한다. 아무쪼록 재미있게 읽고 한국인의 욕을 통해서 가장 한국적인 한국인의 정서를 탐구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① 가랑이를 찢어 죽일년. 이 욕은 주로 여성이 여성에게 퍼붓는 욕설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말만 들어도 섬뜩해지는 이 욕은 여성이 자신의 남편과 정을 통한 여자, 즉 남편이 바람을 피운 상대 여성에게 주로 사용하는 욕으로서 남편의 性器(성기)를 받아들인 보지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섞여있는 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처녀들끼리 이 욕을 남용하는 것은 욕을 한 스스로에게도 어느 정도의 욕됨이 인정되어지고 있다고 하겠다. 이 욕과 비슷하게 쓰이는 욕으로는 앞으로 다루어지게될 "조선시대 형벌이 사용되어진 욕"에서 소개될 "주리를 틀년"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② 염불 빠진년. 이 욕 역시 여성에게 국한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남성에게는 염불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염불은 스님들이 외는 念佛(염불)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있는 일종의 병으로서 자궁이 음문 밖으로 비어져 나온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염불이 빠지게되면 어기적거리며 걸음을 잘 걷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모양이 아주 보기 흉하다.  염불이 빠지는 이유로는 선천적으로 자궁이 약한 경우도 있지만 출산 후 힘든 일을 했을 때도 이런 증상을 보이게 된다. 또한 과다한 房事(방사. sex)로도 이런 증상이 나타날 수 있으며, 이런 증상이 있는 여성은 임신을 해서도 유산될 확률이 높다. 흔히 옛날 어른들은 이런 증상을 가리켜 "밑이 빠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욕으로 쓰일 때는 직설적으로 "염불 빠진년"이라고 가차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③ 채신머리 없는 놈. 채신 또는 치신은 處身(처신)을 얕잡아 일컫는 말로서 "채신머리 없다"고 하면 언행이 경솔하여 남을 대하는 위신이 없으며, 소견이 좁고 인정도 없다는 말이 된다.  "채신머리"에서 "머리"는 여러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에서 뜻하는 머리는 신체 부위로서의 頭部(두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앞 단어의 뜻을 格下(격하)시키는 의미로서 쓰여지고 있다. 이와 비슷한 성격의 말로서 "人情(인정)머리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인정이 없다"와 비교해서 그 뜻을 음미해 보면 같은 인정이라도 전자와 후자의 것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동물의 수를 세는 "마리"라는 단어는 "머리"에서 파생된 말로서 정확한 의미는 동물의 머리를 나타낸다. 흔히 여럿이 모여 술을 마시러 가거나 어떤 모임을 가질 때 회비를 걷게 되는데 이때 사람의 수를 "頭當(두당)"으로 헤아리곤 한다. "두당 오천원"이니 "두당 만원"이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치 동물의 마릿수를 헤아리는것 같아 기분이 언잖아지곤 한다. ④ 비루먹을 놈. 이 욕은 앞으로 다루어지게 될 "직업에 관한 욕"에 있는 "빌어먹을 놈(비럭질 할 놈)"이라는 욕과 그 음이 비슷하나 뜻은 서로 다르다. 비루는 개나 말, 나귀등 가축에 걸리는 피부병의 일종으로 이 병에 걸린 가축은 아주 지저분하고 추하게 보인다. 비루먹는 것은 이 병에 걸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에게 "비루먹을 놈"이라고 하면 역시 욕이 된다. ⑤ 염병할 놈.(옘병할 놈) 염병은 장티푸스(장질부사)나 전염병을 나타내는 말이다. 장티푸스는 잘 알다시피 법정 전염병의 하나로서 장티푸스균이 창자를 침범하여 생기는 全身病(전신병) 가운데 하나이다.  전염 경로는 주로 입이며, 전염된지 1~2주일이 지나야 증세가 나타난다. 처음에는 몸이 피로하고 머리나 허리가 아프며 열이 난다. 열은 점점 높아지고 이 고열은 2~3주일째 계속되며 헛소리를 隋伴(수반)한 장미빛 발진과 설사를 하게되며 염통이 약해지고 창자가 터져 피가 나오는 등 매우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병이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전염성이 매우 강하므로 격리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이야 왁찐이 개발되어 미리 예방도 할 수 있어서 그리 큰 병으로 생각되지 않지만 옛날에는 이 병을 앓다가 죽는 경우도 非一非再(비일비재)했다.  그리고, 이 병은 땀을 내야 났는 병이기도 해서 "땀을 낼 놈"이라던가 "염병 앓다 땀도 못내고 죽을 놈"이라는 욕들이 파생되기도 했다.  과연 염병 앓다 땀도 못내고 죽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고 이런 욕이 생겼는지 자못 궁금하다.  이렇듯 상대에 대한 저주가 가득찬 욕임에도 불구하고 이 욕이 세간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심이 각박해졌다는 말이 아닐까. 하기야 요즘같이 장티푸스에 걸리더라도 어렵지 않게 치료하는 세상에서 "염병할 놈"은 심한 욕이라고 할 수는 없을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어원에 있어서는 무서운 저주의 뜻이 숨겨져 있으므로 역시 욕은 욕이라 하겠다.  이 욕을 굳이 현대식으로 해석을 하자면 "AIDS 걸릴 놈"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⑥ 병신 육갑하네. 病身(병신)의 辭典的(사전적) 의미는 불구자나 병든 몸, 또는 智力(지력)이나 재질이 변변치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병신이 아닌 온전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단지 불구자가 아니라고 온전한 사람이라 말 할 수 있을까? 육체적인 병신보다 마음이 병신인 사람이 이 세상에는 더 많다. 서로 私利私慾(사리사욕)을 챙기기 위해서 헐뜯고, 싸우고, 죽이고,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려고 語不成說(어불성설)을 늘어 놓는가 하면 一身(일신)의 안녕과 가족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蔓延(만연)하는 이기주의. 이런 세상에서 사는 사람은 모두 병신이다. 진정으로 온전한 사람도 병신들의 세상에서는 병신이다. 이렇게 병신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이 욕은 욕이라는 의미로서 보다는 철학적인 의미로서 해석을 하고싶을 따름이다. 병신이 六甲(육갑)을 맞았으니 이것은 치욕이다. 병신으로 그리 오래 살았으니 세상이 얼마나 오염이 되었을까. 또 얼마나 많은 병신들이 육갑을 향해 달리고 있을까.  병신들 육갑 떨고있네. ⑦ 肝(간)이 쓰여진 욕. 간이 쓰여진 욕을 알아보기 전에 간단히 간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것 같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간은 臟器(장기) 외에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기도 한데, 먼저 장기로서의 간에 대하여 한의학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양의학 보다 한의학을 논하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는 한의학이 더 깊이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의식을 분석하자면 아무래도 한의학을 약간이라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옳다고 보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한의학의 기본은 陰陽五行(음양오행)에 있다. 그리고, 오행에서 간은 木(목)에 해당한다. 목에 해당되는 다른것을 알아보면 이렇다. 五味(오미)=酸(신맛), 五色(오색)=靑(푸름), 五氣(오기)=風(바람), 時令(시령)=春(봄), 六腑(육부)=膽(쓸개), 五官(오관)=目(눈), 五體(오체)=筋(근육), 五志(오지)=怒(성냄), 發展過程(발전과정)=生(생). 이것을 풀이 하자면, 봄에 초목이 發芽(발아)하며 生長(생장)을 시작하고, 발랄 생기가 나서 청색을 나타낸다. 生長化收藏(생장화수장) 가운데 生(생)의 단계는 기후의 변화로는 바람이 많고, 인체에 결합 시키면 肝臟(간장)은 순조롭게 뻗어남을 좋아하므로 春(춘)과 木(목)의 性狀(성상)을 상징한다. 五臟(오장)중의 간은 육부중의 膽(담)과 表裏(표리)의 관계를 이루어 간은 눈에 開孔(개공)하며, 五體(오체) 중에서는 筋(근)을 主宰(주재)한다. 때문에 간장질환은 항상 눈병과 때로는 경련의 病變(병변)을 나타내기도 한다. 肝木(간목)이 盛(성)하면 노하기 쉽고, 大怒(대노)하면 간을 상하기 쉬운 관계로 五志(오지)에서는 怒(노)를 主宰(주재)한다. 그래서 간장병엔 왕왕 청색을 나타내게 된다. 이렇게 자연현상을 생리, 병리현상과 연결시키면 木(목). 春(춘). 肝(간). 膽(담). 目(목). 筋(근). 怒(노). 靑(청). 등과 같이 일계열의 사물과 현상이 木(목)의 같은 종류로 귀속되어 하나의 계통이 형성된다. 이상이 한의학에서 말하는 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인데, 더 이상 깊이있는 논의는 主題(주제)와 乖離(괴리)된다는 염려때문에 이만 접도록 하겠다. 다만, 한가지 참고적으로 五行(오행)의 相生(상생)과 相克(상극)을 알고 넘어가도록 하자. 相生(상생)=오행간의 相互資生(상호자생), 相互助長(상호조장). 木生火(목생화). 火生土(화생토). 土生金(토생금). 金生水(금생수). 水生木(수생목). 相克(상극)=오행간의 相互制約(상호제약), 相互沮止(상호저지). 木克土(목극토). 土克水(토극수). 水克火(수극화). 火克金(화극금). 金克木(금극목). 한의학에서 이렇게 이해되고 있는 간은 다른 뜻으로 사람의 마음이나 용기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간에다 많은 비유를 하곤했다. 예를들어 깜짝 놀랐을 때 간이 콩알만해 졌다라든가 간이 떨어졌다라고 하고, 겁이 없이 날뛰는 사람에게 간뗑이가 부었다라든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라고 하고, 무서운 일이 닥쳤을 때 간담이 서늘하다고 얘기들을 한다. 또, 아주 친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간도 쓸개도 다 빼준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간과 쓸개는 자존심을 말하고 있는것이다. 또, 자신의 마음이 흡족하지 않거나 음식을 양에 안차게 먹었을 때 간에 기별도 안간다라고 말하고, 이성간에 서로 애틋한 사랑을 나타내거나 일방적으로 여자에게 홀딱 반했을 때, 그리고 몹시 애를 태울 때 간장을 녹인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외에도 줏대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는 경우에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라는 말이 쓰여지기도 한다. 이렇듯 간에 대한 얘기들은 음양오행을 토대로 발전한 한의학에 있어서의 간과 서로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아니, 오히려 의학을 일반 대화 속에 접목시켜 사용했다고 보는편이 옳바른 설명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상에서 설명한 간이 쓰여져 욕이 되는것에는 어떤 말이 있을까?  간도 쓸개도 없는 놈. 등치고 간 내어 먹는놈. 간을 내어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 쓸개 빠진 놈. 이렇게 네 가지 욕이 있는데, 이제부터 이 욕의 설명을 시작할까 한다. 가. 간도 쓸개도 없는놈. 간은 지난 章(장)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사람의 마음이나 용기를 대변해 준다고 했다. 물론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는 臟器(장기)로 심장을 빼놓을 수 없지만 심장보다는 간이 마음의 상태를 극명하게 나타내 주는데 더 많이 응용이 되고있다.  예를들어 깜짝 놀랐을 때도 "어이구, 심장 떨려."하는것 보다 "어이구, 간 떨어지겠네."하는 편이 놀란 마음을 아주 잘 표현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 욕은 간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간이 없다라는 것이다. 나쁜 마음이건 좋은 마음이건, 또는 치사한 마음이건 애초부터 인간의 마음이 없다고 부정을 해버리는 것이다. 차라리 나쁘다고 욕을 하는것보다 따지고보면 더 치욕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이 욕은 항상 쓸개와 더불어서 사용이 되고있는데 쓸개에 대해서는 다음 항목에서 계속하겠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욕으로 쓰이는 것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라는 말인데 지난 章(장)에 잠깐 언급했다시피 이 말은 줏대 없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했다. 즉, 간과 담은 表裏(표리)의 관계에 있으므로 표리가 不動(부동)하다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더 압축을 하자면 二重人格(이중인격)이라고 할까? 나. 쓸개 빠진놈. 쓸개는 보통 膽(담)이라는 말로 더 많이 쓰이며 간과는 表裏(표리)의 관계에 있다. 곰의 쓸개는 웅담이라고 하여 약으로 쓰이나 사람의 쓸개는 용기를 나타내는데 자주 등장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膽(담)은 痰(담)이 아니다. 痰(담)은 몸 속의 분비액이 순환이 안되어 어느 한곳에 접질려서 응결이되어 그곳이 결리거나 아픈증상을 말할때 쓰는 병명이다. 말이 약간 다른 방향으로 흘렀는데, 어떻튼 六腑(육부)가운데 하나인 쓸개는 용기를 대변하고 있다. 膽力(담력)이라는 말도 쓸개의 힘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쓸개는 자존심을 가리키기도 한다. "간도 쓸개도 다 준다"고 할때 쓸개는 바로 자신의 속마음이나 마지막 자존심까지 모두 준다는 말이다. "쓸개 빠진놈"은 그래서 용기가 없는 비겁한놈 이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자존심조차 없는 뻔뻔스런 놈 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어찌보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범주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요즘 세상에 진정으로 용기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다시 말해서 옛날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지키려했던 선비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냐는 얘기다. 선비정신은 곧 자존심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칠 사람이 있을까? 하기야 요즘은 돈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기는 하지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경우는 그렇게 많이 보지를 못했다. 그리고, 이것 한가지. 돈을 위해서 버려지는 자존심은 비록 버려졌다 하더라도 결코 자존심이라고 말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만연하고 있는 기회주의 황금만능주의 한탕주의 그리고, 이기주의의 씨앗들...... 돈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하기도 하는 이 세상 자체가 쓸개 빠진 세상은 아닐까? 다. 간을 내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놈. 간을 꺼내 씹어 먹는다? 소 간을 肉膾(육회)쳐서 먹으면 맛은 좋지만 사람 간은 어떤 맛일까 자못 궁금해진다. 문제는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니 얼마나 더 지독한 욕을 해야 직성이 풀릴까?  이 욕은 욕치고는 아주 공격적인 인상을 풍기는 욕이다. 간을 내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간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으니 죽일놈이라는 욕은 아예 욕 축에도 끼지못할 정도가 아닌가.  아마도 이 욕은 臥薪嘗膽(와신상담)이라는 고사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그렇더라도 아마 사람의 쓸개를 맛보지는 않았을 일이지만, 어떻튼 이런 공격적인 욕을 듣는 입장에서 생각 해보면 방어의 수단도 강해져 결국 싸움으로 飛火(비화)되는 일이 벌어지는 당연한 결과가 예상된다. 욕도 이쯤 되고보면 욕 먹어 당연한 사람에게 욕을 할 때도 가려서 해야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라. 등치고 간 내어 먹는놈. 이 말은 욕이라기 보다는 사기꾼을 가리키는 隱語(은어)로서 많이 쓰이고 있다. 그렇지만 사기꾼이 아닌 사람에게 종종 이런 말이 쓰이는 것으로 봐서 욕의 범주에 넣었다. 등을 친다는 말은 "뒷 다마(당구공)친다."라고도 흔히 쓰이고 있는 말로서 상대방이 생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변칙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아무래도 正道(정도)에서 어긋나는 처세를 비꼬듯 하는 말로 풀이된다. 물론 등(背)은 인체 부위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친다는 것은 물리적인 힘을 가한다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이 욕에서 간을 내어 먹는다 함은 前(전)항목에서 언급되었던 五臟(오장) 가운데 하나인 간을 내어 먹는다는 공격적인 뜻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의 마음을 빼앗는다는 뜻으로 쓰여지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의 肝(간)은 心(심)을 말하는 것이다. ⑧ 뼈를 갈아 마실 놈. (뼈다귈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  이 욕에도 증오의 빛이 역력히 보이고 있다. 원한에 사무친 마음을 이 한마디 욕에 섞어 뱉음으로서 나름대로의 카타르시스를 꾀하고 있다고 하겠다. 殺父之讐(살부지수)나 不具戴天之讐(불구대천지수)에게 쓰여지는 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원수가 있다면 욕으로 끝낼 문제는 아니겠지만...... 우리 민족에게 뼈는 위에서 설명한 肝(간)만큼이나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이 욕을 통해 알아본 뼈에 대한 몇가지를 참고적으로 설명하도록 하겠다. *뼈빠진다 : 몹시 힘든 일을 나타낸다. (좆뱅이 친다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뼈다귀도 못추린다 : 상대방과 섣불리 싸웠다가는 심하게 얻어 맞아 뼈도 추스리지 못한다. (씹창난다와 비슷한 뜻으로 쓰이고 있다.) *뼈다귀를 추려 버린다 : 죽여서 뼈를 추리겠다는 협박의 말로서 혼쭐을 내주겠다는 뜻. *뼈를 녹인다 : 느낌이 너무 좋아 恍惚(황홀)하다. 주로 여자가 남자를 성적으로 만족하게 했을때 쓰는 말로서 뛰어난 미모의 여자를 가리켜서 뼈깨나 녹였겠다라고 하기도 한다. 隱語(은어)로 죽여준다라는 말이 있다. *말 속에 뼈가 있다 : 意味深長(의미심장)한 말이라는 뜻으로 言中有骨(언중유골)이라고 하기도 한다. *뼈없는 사람이다 : 성품이 온화해 어떤 일에도 성낼줄을 모르는 사람이다. 無骨好人(무골호인) *뼈속에 사무친다 : 도저히 잊지못할, 죽어서도 잊지못할 일을 말한다. ⑨ 불알값도 못하는 놈. 사내 노릇이나 사내구실을 못한다는 말이다. 주로 여자가 남자에게 쓰는 욕으로 째째하거나 남자답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는 욕이다. 이 욕을 하는 여성의 잠재의식 속에는 자신에게 없는 불알, 또는 자지에 대한 컴플렉스, 즉 去勢(거세) 컴플렉스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여성이라면 한번쯤 남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춘기 때나 성인이 되어서, 혹은 아주 어렸을 때라도 말이다. 아마 단호히 거부 의사를 표할 수 있는 여성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프로이드의 심리학을 잠시 인용해 설명을 하자면, 여성은 어렸을 때 자기 또래 남자 아이들이 자지를 꺼내들고 소변 보는것을 보고 자신에게 없는, 또는 없어진 性器(성기)에 대한 막연한 憧憬心(동경심)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이런 동경심의 유발은 원래 있었던 성기가 없어졌다고 하는 생각에서 부터 비롯된다. 그 후로 여성들은 부모나 학교에서 받는 교육으로 性(성)에 대해서 알게되고, 어렸을 적 자신이 가졌었던 생각은 자연스럽게 의식의 바깥 즉, 무의식의 영역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상시 의식의 표면으로 나타나지 않는 잠재의식 속에 성기가 잘려 나갔다는 생각은 계속 남아있게 된다. 이런 잠재의식은 깨어있는 의식만큼이나 행동양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은 인간 행동의 모든 것을 깨어있는 의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갈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여성심리의 단편적인 예를 한가지 알아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남녀간에 性交 後(성교 후) 여성의 심리상태는 삽입된 남성의 성기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으려고 한다. 다시 말해 성교 후 餘韻(여운)을 즐기려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위에서 설명한 거세 컴플렉스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이 시기에 여성의 심리는 거세되었다고 생각했던 무의식 속의 기억을 상대방의 性器(성기)로서 보상 받으려는 보상심리가 발동하게 된다. 심리학 용어로 남성의 성기를 그 순간이나마 자신의 것으로 착각을 일으키는 同一視(동일시) 현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스운 사실은 소위 제비족이라고 불리우는 난봉꾼들은 이러한 여성의 심리 상태를 교묘히 이용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넘어가는 여자가 바보여서 만은 아니다. 상대방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고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칼 날이 아닌 자루를 잡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잠시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흘렀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잠을 잘때 꾸게되는 꿈이야 말로 잠재의식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꿈에 나타나는 몽둥이나 권총, 또는 대포등 돌출부위가 뚜렸한 물건들은 남성의 성기를 암시하고 있다. 어떻튼 이 욕의 底邊(저변)에는 이상에서 간략히 소개한 거세 컴플렉스가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참고적으로 이러한 거세 컴플렉스는 여성 뿐만이 아니라 남성들에게서도 발견이 되고있다.  다시 한가지 예를들어 어린아이(남아, 2~4세)에게 귀엽다는 표현으로 "고추 따먹자"라던가, 자지를 자주 만지작 거린다는 이유로 "자꾸 만지면 고추 잘라버린다"라는 말을 하게되는데 이 시기에 아이에게 던져진 거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잠재의식 속에 남아 성장과정에서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주게된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적인 입장에 놓인 심리 상태로 한국 남성들에게 발견되고 있는 남성 우월주의 식의 표현방법이 몇가지 있어 소개를 할까한다.  * 가진 것이라고는 불알 두 쪽밖에는 없다.(은어로 마늘 두 쪽이라고도 한다.) : 재산이 하나도 없는 알거지란 뜻. * 불알에 땀나도록 뛴다.(은어로 쌍방울 소리 들린다라고도 한다.) : 아주 바쁘게 돌아다닌다는 뜻. * 불알친구 : 아주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온 친구. 竹馬故友(죽마고우)나 소꼽친구라는 말도 있으나 이 말만큼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표현이다. * 불알을 잡고 늘어진다. : 끈질기게 매달려 떨어질 줄을 모른다는 뜻. * 불알을 살살 긁어준다. : 상대방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게 아부를 하거나 아첨을 떤다는 뜻. 위에 열거한 몇가지 "불알"들의 표현은 모두 남자들 앞에 놓인 상황 아래서만 쓰여지는 말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유독 남자의 專有物(전유물)인 불알이 쓰여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것이 바로 이조시대 이후 현재까지 답습되어 온 男尊女卑(남존여비) 사상의 일례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것을 지키고 계승해 나가되 惡習(악습)이나 부조리한 것은 과감히 버리는 현명함을 잃지 말아야겠다.  지금까지 응용된 심리학 분야의 좀 더 자세한 사항은 프로이드나 융(C.G.Jung)의 저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 글에서 욕의 분석에 필요한 이상의 것에 관해서는 주제와의 괴리감을 고려해 깊이있게 다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으로 신체에 관한 욕을 마치고 다음 章(장)부터 "출생및 사망에 관한 욕"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까 한다. 6. 출생및 사망에 관한 욕. 욕 가운데는 상대방은 물론 상대방의 조상까지 욕되게 하는 욕이 있다. 후손의 잘못으로 인해 그 조상까지 욕되게 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닌것 같다. 역설적으로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 이런 욕을 남용 한다면 결국 그 욕은 자신에게 되돌아 오는 결과를 얻게될 것이다. 그럼 이런 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지금부터 이런 종류의 욕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한다. ① 칠뜨기 같은 놈. 七朔(칠삭)둥이, 즉 열 달만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일곱 달만에 태어난 어딘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朔(삭)은 달이 차고 기우는데 걸리는 시간, 즉 한 달을 가리키는 옛사람들이 사용하던 일개월의 의미이다. 이와 비슷한 욕으로 "여덟 달 반"이라는 것이 있다. 팔삭둥이라고도 하는 이 욕도 역시 어머니의 胎(태) 속에 있던 달수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滿朔(만삭)둥이는 가장 완벽한 사람이라는 말인가?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 황보인등을 죽이고 端宗(단종)을 폐위시키며 세상을 거머쥐었던 한명회가 칠삭둥이라고 한다. 이 사람은 어디가 그렇게 많이 부족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와 권력을 거머쥐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태 속의 달수와 사람의 됨됨이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증명이 되는 셈이다. 이 욕을 도태시키기 위해서 출생시 인큐베이터(Incubator) 신세를 졌던 요즘의 칠삭둥이나 팔삭둥이들은 만삭둥이들 보다 두배 세배의 노력을 기울여 결코 부족하지 않은, 오히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② 후레아들 놈. 배운 데 없이 제 멋대로 자라서 버릇이 없는 놈이라는 뜻으로 두 가지의 어원이 하나로 합쳐져서 전해 내려오는 이 욕의 이면에는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뜻이 숨겨져 있다. 두 가지의 어원 가운데 어떤 것이 먼저 이 욕을 만들어지게 했는지 자세하지 않지만 그 뜻에 있어서는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것이다. 먼저 국어학적인 면을 살펴 보자면, 이 욕의 원 말은 "홀의 아들" 또는 "홀의 자식"에서 호레자식-> 호로자식-> 후레자식으로 변화 되었다고 보고 있다. 홀은 짝이 없는 외톨이란 뜻으로 ?鐸 ?-> ?殆웩?-> ?鐸?-> ?殆?-> 홋-> 홀 이라고 변화가 되어왔고, 이 욕에서는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을 한 자식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 욕 때문인지는 몰라도 요즘에도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을 한 사람은 버릇이 없고 독선적이라 하여 취직을 할때나 맞선을 볼때 감점의 요인으로 작용을 하고있다. 아무래도 집안에 무섭게 훈계하며 이끌어주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없어서 함부로 자랐고, 그래서 버릇이 없다고 단정을 짓는 처사인것 같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비록 무능하더라도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존재 가치만을 따져 보아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인것 만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다음으로 역사학적인 면을 살펴 보자면, 후레자식으로 변화 과정을 거친 "호로아들" 혹은 "호로자식"의 호로를 胡虜(호로), 즉 중국 북방의 이민족인 凶奴(흉노)를 가리키는 말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욕은 상대방을 오랑캐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오랑캐의 자식이니 아버지가 오랑캐인 것은 당연지사가 아닌가?  우리 민족은 단일 민족으로 그 자긍심이 대단하다. 이는 세계화 추세에 있는 현재의 싯점으로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민족성 때문에 타민족, 그것도 오랑캐라고 업신 여기고 있는 北方胡虜(북방호로)의 피가 섞인 자식을 예의도 없는 버릇없는 놈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비록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세계화의 물결 속에 있더라도 우리의 것을 무시하거나 잊어버리고는 올바른 세계관이 정립될 수 없다. 우리의 것을 지키지 않은 채 세계화의 물결 속에 휩쓸린다면 그것은 隸屬(예속)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아닐까? 소위 말하는 X세대의 머리 속에 한국적인 의식이 빠져나가 정신적 의미로서의 "후레아들 놈"을 만들지 않도록 기성세대나 신세대 모두가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것이다. 앞으로 20년 또는 30년 후 그들이 이끌어 나갈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③ 종간나 새끼. 이 욕은 주로 함경도 지방에서 쓰이던 욕으로 정확한 뜻은 종년의 새끼를 말한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어머니를 종년으로, 상대방을 그 종년에게서 태어난 새끼로 비하시켜 부르는 것이다.  "간나"는 여자를 일컫는 "가시나" 또는 "가시내"에서 비롯된 말이다. "간나"의 어원인 "가시"는 15세기 이전까지 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다가 그 후로는 아내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이에 대한 보충 자료로는 신라시대의 화랑을 들 수 있겠다. 화랑을 옛날에는 '가시나'라고 불렀다. 이렇게 부르게 된것은 화랑이 초기에는 처녀로 조직이 된데서 비롯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화랑은 처녀 차림을 한 총각으로 代替(대체)되고 처녀는 '가시나'로 부르게 되었다. 이 '가시나'의 吏讀式(이두식) 표현이 바로 花郞(화랑)이다. 그래서 花郞(화랑)의 명칭도 초기에는 花娘(화랑)으로 불리다가 총각으로 대체되면서 娘(랑)이 郞(랑)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郞(랑)은 이두식 표현으로 무리(徒)를 나타내는 '네'의 옛 형태인 '나'를 소리옮김 한 것이다. 또한 '가시'는 꽃을 뜻 옮김 한 이두식 표현이다. 그러므로 '가시나'를 直譯(직역) 하자면 '꽃들'이 되는 셈이다. 아직도 지방의 사투리나 俗語(속어)들 속에는 이 '가시'라는 말이 살아있어 이상의 說(설)을 뒷받침 하고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이렇다. * 각시 : 갓 시집 온 여자.  * 가시버시 : 부부의 낮춤말. * 가시어미 : 장모. * 가시아비 : 장인. * 가시집 : 각시의 집, 곧 처갓집. 이상의 설명과는 별도로 우스갯 소리로 구전되어 오는 '가시내'에 대한 다른 어원이 하나 있어 소개할까 한다. 옛날, 갓 쓰고 도포입던 시절에 남장을 한 처녀 하나가 길을 가고 있었는데 뒤따라 가던 선비가 길을 물어보려고 불러 세우자니, 뒷모습이 체구도 작고 아담한게 걸음걸이도 남자같지는 않은데 갓 쓰고 도포를 입었더라. 뭐라 부를 길이 막연하던 선비가 급한 김에 부른다는 소리가 "어이, 앞에 갓 쓴애!" 했단다. 이렇게 불러 세워놓고 길을 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문제의 '갓쓴 애'는 남자가 아닌 여자였단다. 그 이후로 여자를 가리켜 '갓쓴애'라고 부르게 된것이 오늘날의 '가시내'로 변화되어 왔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우스갯 소리지만 화랑, 즉 '가시나'가 변화되어 온 역사적 사실이 배후에 깔려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여장을 한 남자가 남장을 한 여자로 둔갑(?)을 했을 뿐이다. 어떻튼 이 "종간나 새끼"에서 '간나'의 어원은 좋은 것에서 비롯 되었지만 오늘날의 뜻은 욕으로 통용이 되고 있으니 함부로 써서는 않될것 같다. 어떤 여자고 간에 '가시내'라고 부르면 좋아 하겠는가? 하기야 지나간 유행가 가운데는 '범띠 가시내'라는 곡도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욕 가운데 가장 애교스러운 욕이 이 "가시내"인것 같다. ④ 촌놈. 이 욕은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태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로 촌은 시골을 가리키고 있다. 아무래도 지방화 시대를 맞고 있는 요즘에는 어울리지 않는 욕인것 같다. 그리고, 이 '촌놈'이라는 뜻에는 꼭 출신성분만을 나타내고 있지는 않다.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도 이 '촌놈'이나 '촌년'이라는 욕이 쓰여지기도 한다. '촌'은 숙달되지 않거나 어울리지 않는 것에 대한 형용사로 쓰이는 것이다. 좋게 말하자면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진함 이랄까? 그렇더라도 촌놈소리 들으면 기분이 좋지는 않다. 더군다나 여자에게 쓰여지는 '촌년'이라는 욕은 그 억양에 있어서 '촌놈'보다 더 천박하게 들린다. 이 욕이 쓰이는 몇가지 실례를 들면서 이번 회는 이만 마칠까 한다. * 촌놈 배부른게 최고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 에게는 이것저것 가릴것 없이 많이 먹는게 우선이다. (배고픈 시절에 많이 쓰였던 말이다.) * 촌년 바람나면 씹구멍에 불난다.-> 순진한 여자가 남자를 알게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 * 촌년 서방질에 날 새는줄 모른다.-> 위의 뜻과 비슷하다. 또 이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에는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줄 모른다'라는 것이 있다. ⑤ 쌍놈.(쌍놈의 새끼) 이 욕은 兩班官僚體制(양반관료체제) 하에 있던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를 반영하고 있는 욕으로서 사회적으로 가장 천대를 받았던 賤民(천민)을 가리키고 있다. 양반은 잘 알고 있다시피 文班(문반)과 武班(무반)을 일컫는 말로서 사회적 신분이 높고 경제력이 강하며, 사회를 이끌어 가는 최고의 신분계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양반이라는 계급은 후손에게 세습되었으며, 이는 다른 계급의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의 신분을 살펴보면 크게 네가지로 나뉘는데 兩班(양반, 사대부), 中庶(중서), 常民(상민), 賤民(천민)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계급은 다시 士(사)와 庶(서), 良(양)과 賤(천)으로 대별 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천민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천민의 자유는 朝廷(조정)이나 그가 속한 士大夫家(사대부가)에서 통제를 하고 있었으며, 원칙적으로 천민과 자유인(천민을 제외한 모든 계급의 사람) 사이에는 모든 인간적인 교통이 단절되어 있었다. 즉, 천민은 인간 이하로 취급되고 있었으며 노비의 경우 생사여탈권은 전적으로 그 주인에게 주어져 있었다. 이런 천민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었는데 참고적으로 몇가지 알아보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 公賤(공천)-> 죄를 범하여 신분이 강등되거나 조정의 관리에게 배분규정대로 나누어 주고 남아 관청에 귀속된 奴婢(노비). 官婢(관비)라고도 한다. * 私賤(사천)-> 사사로이 개인집에서 부리던 종으로서 婢僕(비복), 白丁(백정), 俳優(배우, 노래나 줄타기, 연극 등을 직업으로 하는 광대), 娼女(창녀), 巫覡(무격, 무당과 박수를 뜻함) 등이 이에 속한다. 조선시대에 이런 노비들은 상당수 있었으며, 英祖(영조) 40년(1764년) 刑曹(형조)에 귀속되어 掌隸司(장예사)라고 불리기 전까지 掌隸院(장예원)이라 하여 독립된 관청에서 관할하고 있었다. 이런 노비들에게 免賤(면천)의 기회가 있었는데 천민에서 양민으로 신분 상승하는 것을 贖良(속량), 또는 贖身(속신)이라고 했다.  공천이 속량할 수 있는 기회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우거나 2품 이상의 官員(관원, 오늘날의 고급공무원)에게 첩으로 들어가 자녀를 낳게되면 속량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에는 자신의 나이와 비슷한 노비 하나를 자기 대신 賤役(천역)에 종사하게 하고 장예원에 신고를 해야했으며, 대역을 보충시키지 못하면 다시 천민으로 환원된다. 사천인 경우에는 전적으로 그 주인에게 권한이 주어졌다. 이렇게 비참하게 생활을 했던 천민을 쌍놈이라고 일컬었던 바, 이 욕은 상대방의 출신성분을 비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낳은 자식에게 화가 난다고 '이 쌍놈의 새끼'라고 한다면 자기 스스로는 물론 조상에게까지 욕이 미친다고 할 수 있겠다. 요즘이야 양반 쌍놈이 따로 없지만 그래도 '쌍놈'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⑥ 뙤놈. '뙤놈'은 중국인을 비하시켜 부르는 말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욕에는 우리 민족 스스로를 비하시키고 있는 숨은 뜻이 있다. 조선시대나 그 이전의 시대에서 우리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물론 중국은 우리보다 문화나 힘에 있어서 앞서 있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중국은 우리 민족에게 大國(대국)이라 불리웠다. 이렇게 대국이라 불리우던 중국 사람을 대국놈이라 했는데 이 대국이라는 말 자체가 '놈'이라고 비하시키는 인칭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小國(소국)이라고 인정하는것 밖에는 안된다.  '대국놈'은 그 후 격음화 현상을 겪으면서 '떼국놈'으로 변화되었고, 다시 '국'자를 탈락시킨 '떼놈'으로 불리다가 발음상 더 된소리인 '뙤놈'으로 바뀌었다. 이 욕의 뜻에는 중국인을 가리키는 말 외에도 의심이 많은 사람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아마도 중국인의 과장된(속된 말로 '뻥'이라고도 한다.) 표현을 좋아하는 민족성이나 기질을 반영하고 있는것 같다. 자신들이 과장이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 많은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 가지 예로 의심이 많은 사람을 가리켜서 '뙤놈 빤스를 입었냐?'라고 되묻는 말이 있다. 이 말에서도 중국인이 의심이 많다는 것이 간접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아뭏튼 이런 중국이 이제는 경제적으로 우리에게 뒤지고 있으니 예전에 대국이라 불렀던 우리가 스스로에게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우리가 중국보다 월등 했다는 上古史(상고사)에 관한 재평가 작업이 진행 중이며, 이에 대한 책이 많이 팔리고 있다. 상했던 자존심을 복구하려는 보상심리가 적절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객관적인 史料(사료)를 토대로한 정확한 史觀(사관)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에 민족간의 감정 개입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이런 점에서 일본 교과서에 오류로 지적되고 있는 동남아 역사에 대한 문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심히 유감이라 생각한다. ⑦ 애비 모르는 자식. (절자식) 이 욕은 상대방의 어머니를 욕되게 하는 뜻이 담겨있다. 버릇없고 막 되먹은 사람을 가리켜서 하는 이 욕은 '후레아들 놈'과 비슷한 뜻을 담고 있지만 속 뜻이 어머니를 표적으로 삼는 것이 다르다 하겠다.  어미가 자식을 낳으면 분명 아비가 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나, 그 아비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은 뭔가 출생의 비밀이 담겨져 있다는 말이 된다. 성교의 상대가 너무 많아서 그 아비를 가늠할 수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왔던 이 욕의 기원은 다른 곳에 있다. 잘 알다시피 여자가 受胎(수태)를 못하는 이유는 두가지 경우가 있다. 여자가 石女(석녀, 돌계집)이거나, 남자가 생식기가 불완전한 鼓子(고자)이거나 하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는 씨받이라 하여 다른 여자를 통해 자식을 낳음으로서 대를 이어가는 수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때 수태를 못하는 여자를 대신하여 남자의 씨를 받아주는 여자를 씨받이라고 일컬었던 바, 영화배우 강수연이 열연한 영화의 제목과 동일하다. 씨받이의 애환(?)이랄까, 아뭏튼 씨받이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이 영화를 참고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그리고, 한가지 더 첨부 하자면 현대판 씨받이인 대리모는 육체적인 관계를 갖지 않고 人工受精(인공수정)을 통하여 수태를 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문제가 약간 다르다. 씨받이와 반대의 입장인 씨내리는 절대 공식적으로 행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비밀 유지를 위하여 씨내리 한 남자를 멀리 보내거나,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런 일은 그리 흔치 않았으며, 이와 병행해서 쓰이던 또 한가지 방법은 절에 가서 치성을 드리는 것이다. 소위 말해서 백일치성을 드린다고 하는 방법인데, 종교적인 힘을 빌어 아이를 갖겠다는 의도이다. 그런데, 이 종교적인 힘(?)이 옛날에는 절대적이었던 모양이다. 백일 이라면 석 달 하고도 열흘인데, 그동안 부부관계를 맺지 않았음에도 수태를 해서 하산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보통은 시어머니와 동행을 하는데, 이 때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절에 가서는 스님의 말에 절대 복종하라는 다짐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얌전한 여자를 가리켜서 '절에 간 색시같다'라는 말도 생겨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렇게 얌전한 색시를 수태시키는 것은 시어머니의 使嗾(사주)를 받은 스님이 할 일 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어머니의 사주를 받았다 하더라도 맨 정신의 사대부집 며느리와 정을 통하기는 어려웠으리라 보아진다. 그래서 종종 쓰이던 방법이 정신을 잃게하는 약초를 사용해서 劫奪(겁탈)을 했던 것이다. 물론, 며느리가 고분고분 스님의 말을 잘 듣는다면 굳이 약초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부처님에 대한 치성은 성공적으로 끝냈을 일이지만...... 어떻튼, 이런 경위로 태어난 사람을 '애비 모르는 자식'이나, 절에 가서 부처님의 은덕으로 났다해서 '절자식'이라 불렀던 것이다. 비밀에 부쳐졌어야 될 일이 누설이 되고 이 사실이 상대방에게 욕으로 쓰일 때, 상대방은 물론 이려니와 그 어머니의 수치심을 짐작할 수 있을까. 하물며 떳떳한 출생의 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욕을 쓴다는 것은 시쳇말로 명예훼손으로 고소 당해 싸다고 하겠다. 아이를 못낳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고통을 받았는데 이런 욕까지 듣는다면 과연 살고싶은 생각이 날까? 하기야 요즘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정자은행이나 인공수정같은 과학적인 수태방법이 많이 개발되어 있어서 옛날같이 일방적으로 서러움을 받지는 않는 세상이 되었지만 말이다. 이와 흡사한 얘기로 日精寺(일정사)와 月精寺(월정사)에 관한 근거없는 流言蜚語(유언비어)가 있는데 이는 특정한 姓氏(성씨)에 대한 모독이 될까하여 이곳에는 쓰지 않겠다. 다만, 이 유언비어가 위의 얘기를 뒷받침하고 있는 예이기에 언급했던 바 오해의 소지가 없기를 바라며, 이 욕을 위시해 이런 유언비어는 퍼뜨리지 않는것이 밝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초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⑧ 씹어 죽일 놈. 쳐 죽일 놈.(박살낼 놈) 이 욕도 아주 원색적인 욕 가운데 하나이다. 이 욕이 원색적인 이유로는 그 억양이 드센 것을 차치하더라도 인간의 목숨을 강제로 끊어지게 하겠다는, 그것도 편히 죽이는게 아니라 씹던가 쳐서 아주 고통스럽게 죽이겠다는데 있다. "씹어 죽일 놈"이라는 욕은 말 그대로 씹어 죽인다는 저주의 뜻이 담겨져 있는데 "간을 내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과 그 의미의 전달 효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아진다. 또 하나 "쳐 죽일 놈"이라는 욕은 "박살낼 놈"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이 "撲殺(박살)"이라는 말은 사람만이 아니라 물건에도 쓰여지고 있다. 원래의 의미는 '쳐 죽인다'라는 한자말로서 살아있는 생명체에 해당되는 말이지만 요즘에는 어떤 물건을 산산이 조각내어 부순다는 뜻으로도 통하고 있다. 다시말해 어떤 사물이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파괴되어 원래의 쓰임새가 없어질 경우 '박살났다'고 하는데, 이는 인간의 죽음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진다. 여기서 잠깐 죽음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또는 받아들여져 왔는지 생각해보고 가도록 하자. 삶과 대칭 관계에 있는 죽음에 대한 문제는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각종의 종교에서도 이 문제를 깊이있게 다루고 있지만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아직 얻어지지 않고 있다. 만일 이 문제 대한 해답이 얻어진다면 인간의 삶에 대한 목적 또한 명확하게 밝혀지게 될것이고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 또한 획일화 될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들이 지금보다는 훨씬 재미가 없어질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지옥이 있다는 것이 확인 된다면 과연 나쁜짓을 하면서 살아갈 사람이 있겠는가. 어떻튼, 이 죽음이란 문제는 인간이 살아있는 한 풀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愚問賢答(우문현답) 같은 말이 될지 모르겠지만 한마디 확실하게 할 수 있는 말은 죽어봐야 안다는 것 뿐이다. 그렇다고 살아있는 동안 이 죽음이란 문제를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비록 종교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나름대로 죽음에 대한 철학은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가 한번은 죽는다는 것을 긍정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런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 인간의 메카니즘이라고 생각한다. 욕에 연관되어서 죽음을 생각해 보는것은 죽음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함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어떤 것이며 어떤 말로 변천되어 지금에 이르렀나를 알아봄으로 해서 우리 민족의 의식을 더듬어 보자는 것이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소중한 우리것이 빛을 잃어가고 있는 이 때에 우리 민족의 의식을 더듬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죽음은 동사형인 '죽다'에서 온 말이다. '죽다'는 명사 '죽'+ 접미사 '-다'가 붙어 이루어진 말로서 파찰음이 없었던 고대국어 '숙'에서 변화 되었다는 학설과 '뒤(ㄱ)'에서 변화 되었다는 학설이 있는데 이 글이 욕에 대한 글이니 만큼 비속어를 중심으로 풀이한 후자 쪽의 학설을 따르겠다. '죽다'의 비속어로 쓰이는 표현은 '뒤지다' 또는 '뒈지다'이다. '뒈지다'는 '두어'+'지다'가 합해져서 이루어진 말로 '두어지다'의 줄임말로 볼 수가 있다. '두어지다'에서 '두어'의 원형은 '뒷다'로 '뒷'은 뒤(ㅎ)->뒷 으로 히읗 종성체언이 변형된 것이다.(참고:釋譜詳節석보상절 6-2, 히읗 종성은 기역소리로 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뒤'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뒤'는 방위로는 북쪽을 뜻하고, 계절로는 겨울을, 동물로는 곰을, 별로는 북두칠성을, 소리로는 우면조를, 성으로는 여성을 상징한다. 여성이나 곰으로 상징되는 '뒤'는 이 글의 앞부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땅과 연관지어 진다. 땅은 인간이 태어난 곳이며, 또 인간이 되돌아 갈 곳이기에 땅으로의 회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죽다'는 '뒤'에서 발전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 민족에게 북두칠성에 대한 별 신앙은 원시신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화 인류학에서는 우리 민족이 북쪽의 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를 고아시아족의 원 거주지가 시베리아 부근이였기 때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별'이 쓰인 흔적을 여러 곳에서 찿아볼 수 있다. 유명한 산의 봉우리 가운데 비로봉이라는 봉우리를 많이 보는데, 이 비로봉이라는 말이 별의 방언형인 '빌'에서 비롯된 말이라 하겠다. 그리고, 자기의 소원대로 되기를 바라며 기도한다는 뜻의 '빌다'라는 말도 '별'에서 발전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두고 온 고향 하늘 위의 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있다고나 할까. 이처럼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뒤'는 시간적으로는 지나온 과거이며, 공간적으로는 두고 온 고향(시베리아 부근)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뒤지다'라고 하면 우리의 원거주지였던 곳으로 되돌아 갔다는 말이 된다. 즉, 현재의 삶이 아니라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 갔다는 말이다. 죽음을 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싯점에서의 삶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죽었다'의 존칭어로 쓰이는 '돌아가셨다'라는 말을 보더라도 이상의 학설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죽음의 동사형인 '죽다'를 정리해 본다면 이렇다.  디다 -> 뒤(ㄱ)다 -> 뒥다 -> 쥑다 -> 죽다 * 삼국사기등의 자료에서 뒤를 디(知)로 쓰고있는 경우가 보이고 있으며, '죽인다'를 '지긴다'로 발음하는 경상도 사투리도 참고가 된다고 하겠다. *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책을 참고 바람. 서재극 "중세 국어의 단어족 연구" 1979 배해수 "현대 국어의 생명종식어에 대한 연구" 1982 정호완 "우리말의 상상력" 1991 ⑨ 급살 맞을 놈. 조살할 놈. 지난 장에서는 욕에 연관해서 우리 민족이 생각하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것을 말의 뿌리를 더듬어 가며 잠시 생각해 보았다. 물론 이 짧은 글 속에서 죽음에 대해 해답이나 결론을 내리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지, 한 번쯤 이런 기회를 통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해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다. 누구나 한 번은 맞이하는 것이기에 나름대로의 의의는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날마다 이런 생각에 집착해 있다면 이것은 정상적인 삶에 있어서 아주 곤란한 문제일 수 밖에 없다. 최소한 이 글을 대하는 사람들 만큼은 죽음에 매료되지 말기를 바라면서 욕에 대한 얘기를 계속할까 한다. 이 욕은 보통 "급살 맞아 뒈질 놈"이라고 쓰이는데 "뒈질 놈"의 말 풀이는 지난 회에서 한 바와 같으며, "조살할 놈"은 단독적으로 주로 쓰이고 있다. 이 두 가지 욕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죽음을 말하고 있으나 그 죽음의 내용은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급살"의 '살'은 煞(살)로 종교적이거나 정신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사람이나 물건을 해치는 아주 독하고 모진 기운을 일컫는다. 우리 민족의 정서 속에서의 '살'은 악귀가 씌였다고 하여 무당의 살풀이 굿을 통해 이런 기운을 씻어버리곤 했다. 세간에서 쓰이는 말로 "살 맞았다"라던가, "살 내렸다""살 올랐다"라고 쓰이는 말이 모두 이런 종류의 '煞(살)'인 것이다. '살' 맞은 예로는 초상집이나 혼인집, 또는 고사 지내는 집에 갔다가 탈이 난 경우가 있고, 친구들끼리 장난치다가 주먹으로 한 대 때렸는데 상대방이 죽어버린 경우도 있다. 이런 '살'을 철저히 믿어왔던 우리 선조들은 그래서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거나 태어날 달에는 초상집 출입을 하지 않았고, 평상시에도 초상집이나 귀신을 부르는 행사에 참여하고 와서는 소금을 몸에 부리면서 "고수레"를 불러 "살오름"또는 "살맞음"을 예방하곤 했다. 물론 요즈음에는 미신이라 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행동 하지만 아직 그 옛날의 사고방식이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다. 특히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미신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풍습이 되어버린 듯 하다. 이 욕이 간혹 들리는 것으로 봐도 증명이 되고 남음직 하다. 참고로 "고수레" 또는 "고시레"의 뜻은 건강을 지켜주는 福神(복신)을 가리키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원시신앙인 "굿"이나 "무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살할 놈"의 '살'도 인간의 죽음을 말하고 있지만 他動詞(타동사)인 殺(살)이라기 보다는 自動詞(자동사)인 死(사)로 해석이 된다. 즉, "早死(조사)를 할 놈"이 줄어서 된 말로 인간의 염원인 無病長壽(무병장수)에 역행되는 욕이라 하겠다. 그리고, 여기서 죽음의 의미는 보편적인 것이며, 포괄적이고, 물리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죽음을 細分化(세분화)한 이 두 욕설은 죽은 뒤 영혼의 이동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다시 만나게 된다. "죽다"의 의미를 가지고 파생된 우리말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다양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거니와 죽은 뒤 영혼의 이동에 따라 그 표현이 달라짐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즉, 우리말에 있어서 죽음이라는 단어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곳에서 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죽은 뒤 영혼이 이승에서보다 높고 좋은 곳으로 가는것을 상승이동이라 하여 昇天(승천)하다, 昇遐(승하)하다, 登仙(등선)하다, 神仙(신선)되다, 陟方(척방)하다, 天堂(천당)가다, 極樂(극락)가다, 往生極樂(왕생극락)하다, 入滅(입멸)하다, 圓寂(원적)하다, 入寂(입적)하다, 歸元(귀원)하다, 歸眞(귀진)하다, 彼岸(피안)으로 가다 등으로 표현된다. 이와는 반대로 영혼이 이승에서보다 낮고 나쁜 곳으로 가는것을 하강이동이라 하여 地獄(지옥)가다, 地下(지하)가다, 黃天(황천)가다, 九泉(구천)가다, 冥府(명부)가다, 餓鬼(아귀)되다, 畜生(축생)되다 등으로 표현된다. 또한 상승도 하강도 아닌, 단지 이승과 緣(연)을 끊는다는 표현으로 魂魄(혼백)이 떠나다, 혼이 나가다, 세상을 하직하다, 棄世(기세)하다, 別世(별세)하다, 세상을 달리하다, 幽明(유명)을 달리하다, 永訣終天(영결종천)하다 등이 있다. "급살맞아 뒈질 놈"이나 "조살할 놈"이라는 이 두 욕설에서 나타나고 있는 죽음은 하나같이 영혼의 하강이동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욕을 자세히 풀이 하자면 이렇다. 이승에서 급살을 맞거나 早死(조사)를 하라고하니 욕이 되고, 저승 간 영혼은 몹쓸 곳(소위 말하는 지옥이나 연옥)으로 가라고하니 이 또한 욕이 되니, 이 어찌 심한 욕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문제는 이런 욕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에게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욕을 먹어도 싼 사람이 이승에서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으면 썩을 몸 아끼느라 죄짓고 살다저승 간 영혼 하강이동 하지말고 몸이 수고롭더라도 하늘에 떳떳하고 스스로에 떳떳한 삶을 살도록 하자. 이것은 종교를 초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⑩ 썩을 놈. 이 항목을 욕의 범주에 넣을까를 두고 무척 고민했다.  어차피 죽어 썩을 몸인데 단지 '놈'자 하나 붙였다고 욕이라 해야하나? 누구는 죽으면 火葬(화장)한다고 하니 "썩을 놈"이라는 욕이 성립이 않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썩을 놈"은 "썩을 놈"이다. 뼈가루 한 티끌이라도 땅에 뿌려져 들꽃, 들풀, 나무에 거름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에 뿌리면 물고기밥 되어 물고기의 살과 뼈 되었다가 다시 썩을진대. 인간은 누구나 "썩을 놈"이 아닐까. 여기서 '놈'자는 그저 愛稱(애칭)으로 받아 들였으면 한다. '놈'자는 꼭 욕으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니까. 卑下(비하)의 뜻은 내포되어 있으나 받아들이는 경우에 따라 귀엽게 들릴 수도 있는것이 바로 이 '놈'자인것 같다.  굳이 욕이라 해석을 하자면 "씹새끼"와 같지 않을까?  어떤 경우에는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말함으로서 그것이 욕이 되는 때가 있다. 그렇다면 욕은 진실인가. 아니면 진실이 욕인가?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힘들게 이렇게 많이 올렸어요... ㅠㅠ...  
1093    식칼론 / 竹兄 댓글:  조회:3982  추천:0  2015-05-03
식칼論 1       창 틈으로 당당히 걸어오는   햇빛으로 달구었어!   가장 타당한 말씀으로 벼리고요.     신라의 허황한 힘보다야 날카롭게   정읍사의 몇구절보다는 덜 애절한   너그럽기는 무등산 허리에 버금가고   위력은   세계지리부도쯤은 한 칼이지요.      흐르는 피 앞에서는 묵묵하고   숨겨진 영양 앞에서는 날쌔지요.   비장하는 데 신경을 안 세워도 돼.   늘 본관의 심장 가까이 있고   늘 제군의 심장 가까이 있되   밝게만 밝게만 번뜩이면 돼요   그의 적은   육법전서에 대부분 누워 있고……   아니요 아니요   유형무형의 전부요       식칼論 2-허약한 詩人의 턱밑에다가       뼉 다귀와 살도 없이 혼도 없이   너희가 뱉는 천 마디의 말들을   단 한 방울의 눈물로 쓰러뜨리고   앞질러 당당히 걷는 내 얼굴은   굳센 짝사랑으로 얼룩져 있고   미움으로도 얼룩져 있고     버려진 골목 어귀   허술하게 놓인 휴지의 귀퉁이에서나   맥없이 우는 세월이나 딛고서   파리똥이나 쑤시고 자르는     너희의 녹슨 여러 칼을   꺾어버리며 내 단 한 칼은   후회함이 없을 앞선 심장 안에서   말을 갈고 자르고   그것의 땀도 갈고 자르며   늘 뜬눈으로 있다   그 날카로움으로 있다.       식칼論 3       내 가슴 속의 뜬 눈의 그 날카로움의 칼빛은   어진 피로 날을 갈고 갈더니만   드디어 내 가슴살을 뚫고 나와서     한반도의 내 땅을 두루 두루 날아서는   대창 앞에서 먼저 가신 아버님의 무덤속 빛도 만나 뵙고   반장집 바로 옆 집에서 홀로 계신 남도의 어머님 빛과도 만나 뵙고   흩어진 엄청난 빛을 다 만나 뵙고 모시고 와서   심지어 내 男根 속의 미지의 아들 딸의 빛도 만나 뵙고   더욱 뚜렷해진 無敵의 빛인데도, 지혜의 빛인데도   눈이 멀어서, 동물원의 누룩돼지는 눈이 멀어서   흉물스럽게 엉뎅이에 뿔돋친 황소는 눈이 멀어서   동물원의 짐승은 다 눈이 멀어서 이 칼빛을 못 보냐.     생각 같아서는 먼 눈 썩은 가슴을 도려파 버리겠다마는,   당장에 우리나라 국어대사전 속의 「改憲」이란   글자까지도 도려파 버리겠다마는     눈 뜨고 가슴 열리게   먼 눈 썩은 가슴들 앞에서   번뜩임으로 있겠다! 그 고요함으로 있겠다!   이 칼빛은 워낙 총명해서 관용스러워서       식칼論 4     내 가슴 속의 어린 어둠 앞에서도    한 번 꼿꼿이 서더니 퍼런 빛을 사방에 쏟으면서    그 어린 어둠을 한 칼에 비집고 나와서    정정당당하게 어디고 누구나 보이게 운다.    자유가 끝나는 저쪽에도 능히 보이게,    목소리가 못 닿는 저쪽에도 능히 들리게    한 번 번뜩이고 한 번 울고    번개다! 빨리 여러 번 번뜩이고    천둥이다! 크게 한 번 울고    낮과 밤을 동시에 동등하게 울고    과거와 현재와 까마득한 미래까지를    단 한 번에 울고 칼끝이 뛴다.    만나지 않는 내 가슴과 너희들의    벼랑을 건너 뛰는 이 無敵의 칼빛은    나와 너희들의 가슴과 정신을    단 한 번에 꿰뚫어 한 줄로 꿰서 쓰려뜨렸다가    다시 일으키고, 쓰러뜨리고, 다시 일으키고    메마른 땅 위에 누운 나와 너희들의 國家 위에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끌어다 놓고    더욱 퍼런 빛을 사방에 쏟으면서    천둥보다 번개보다 더 신나게 운다    독재보다도 더 매웁게 운다.       식칼論 5        왜 나는 너희를 아슬아슬한 재치로나마 쉽게 못 사랑하고   너희가 꺼리며 침까지도 빨리 뱉는   내 몸뚱아리까지도 아슬아슬한 재치로나마 쉽게 못 사랑하고   도둑의 그림자가 도둑의 그림자가 사알짝 덮치듯,   그렇게나마 못 만나고,   너희들이 피하는 내 땅과   내가 피하는 너희들의 땅은   한번도 당당히 못 만나는가   땅속 깊이 침묵으로 살아서   뼉다귀가 뼉다귀를 부르는   저 목마른 음성처럼,   땅 속 깊이 아우성으로 흐르는   저 눈물같은 물줄기가   물줄기를 만나는 끈기처럼   만나지 못하고 왜 사랑하지 못하는가.   내 홀로 여기 서서   뜨드득 뜨드득 이빨 갈듯이   내 정신만을 가는가   내 외로운 살결은 살결끼리 붙어서   시간을 가는가, 아아 칼을 가는가.  
1092    민중시인 竹兄 - 조태일 댓글:  조회:5491  추천:1  2015-05-02
삶의 순결성을 파괴하는 제도적 폭력에 맞섰던 죽형 조태일 시인     태안사 올라가는 숲속 길에 조태일시인의 시문학 기념관이 있다. 시인은 식칼론과 국토, 겨울공화국 등으로 1970년대 대표적 민족, 민중시인으로 불리며 월간지 시인을 창간해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 박남준 등 이 고장 출신의 많은 시인들을 등단시켰지만 암으로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입구에 있는 시문학 기념관 표지석 시인 고은의 기념시와 목장승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 전경   조태일의 시는 역사 속에서 사는 민중의 삶이다. 이 시에서도 나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노래한 것으로 그것은 곧 민중의 역사를 노래한 것으로 받아 들이면 된다.  시의 3연까지 ~ 수 밖에 없는 일이 반복 되는데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 수 밖에 없는 상황의 반복이므로 올바른 인식의 통로를 차단하고 바른 삶을 왜곡하는 시대의 질곡이지 않는가...     시의 어조는 격앙되어 있고 강인한 의지까지 엿보인다. 나아가 어려운 현실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에게 실천적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스스로가 주체자임을 명확하게 인식하여 자기가 자신의 주인임을 확인하라는 강렬한 메세지인 것이다. 기념관 내부   지식인의 무사안일한 침묵이나 혼자만 아는 지적인 유희를 경멸했던 시인은 순수문학의 기교적 태도를 거부했고 민족의 구체적 삶과 민중적 열망을 구현하려 노력하였지만 결국 원론적 순수함을 피우지도 못하고 아깝게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갔다. 기념관 옆 잔디밭엔 시인 닮은 괴목이 서있다                              조태일 기념관 주차장에서 비포장 도로 따라 가면 2km에 태안사                                                                  태안사 일주문                                    태안사  경내 진신 사리탑과 연못                            충혼탑                                                                                 국토서시  발바닥이 다 닳아 세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세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러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목소리  ― 國土•23  잃어버린 목소리를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잃어버린 목소리를  어디가면 되찾을 수 있을까,  바람들도 만나면 뭉풍지를 울리고  갈대들도 만나면 몸을 비벼 서걱거리고  돌멩이들도 부딪치면 소리를 지르는데  참말로 이상한 일이다.  우리들은 늘 만나도 소리를 못내니  참말로 이상한 일이다.  山川은 변함이 없고  숨결 또한 끊어지지 안했는데  참말로 이상한 일이다.  입들은 벌리긴 벌리는데  그 폼만 보이고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목소리는 아예 목청에 가둬 뒀느냐,  山川에 잦아들었느냐,  내 귀가 멀어서  고막이 울지 못하느냐,  내 五官을 뒤집고 보아도  품만 보이고 껍데기만 보이고,  목소리를 만날 수가 없구나.  대낮에 그린 그림  ―國土•28  답답한 목소리는 풀어야 한다.  기필코 풀어야 한다.  조건없이 풀어야 한다.  얽매인 목소리를  모든 만물의 눈에까지 훤히 보이도록  국토 위에 野生馬처럼 풀어 주어야 한다.  그리움이 넘쳐서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더욱 그리워서  산천은 누운 채 가슴 답답하다더라.  내가 풀어 주는 목소리는  굳은 수풀을 파아랗게 흔들고  흔들리는 시커먼 그림자를 흔들다가  돌멩이에 닿아 소리치고  바닷가의 무수한 모래알에 닿아  일어서게 하고 반짝이게 하고  만물에 닿아 흔들리는 빛으로 터지고  또한 그리움으로 피어오르리.  너희가 뱉는 천 마디의 말들을  단 한 방울의 눈물로 쓰러뜨리고  앞질러 당당히 걷는 내 얼굴은  굳센 짝사랑으로 얼룩져 있고  미움으로도 얼룩져 있고  버려진 골목 어귀  허술하게 놓인 휴지의 귀퉁이에서나  맥없이 우는 세월이나 딛고서  파리똥이나 쑤시고 자르는  너희의 녹슨 여러 칼을  꺾어 버리며 내 단 한 칼은  후회함이 없을 앞선 심장 안에서  말을 갈고 자르고  그것의 땀도 갈고 자르며  늘 뜬 눈으로 있다  그 날카로움으로 있다  모레•별•바람  ―國土•39  저 파도 우는 소리 듣고파서  저 넓은 가슴팍에 안기고파서  수많은 모래들은 밤낮으로  바닷가에 귀 세우고 모여않아  끼리끼리 몸비비며 반짝일 뿐!  헤어져 돌아올 줄 모른다.  저 대낮의 잠이 그리워서  저 가없는 푸름에 안기고파서  수많은 별들은 긴긴 밤을  달 주위에 모여 끈눈으로 반짝일 뿐!  돌아앉아 눈감을 줄 모른다.  저 일렁이는 숲의 숨결을 듣고파서  저 깊고 푸른 고요를 일깨우고파서  수많은 바람드은  잎새에 붙어 조잘거릴 뿐!  돌아와 폭풍이 될 줄 모른다.  아직은 모래고 별이고 바람일 뿐!  헤어져 돌아올 줄 모른다  돌아앉아 눈감을 줄 모른다  돌아와 폭풍이 될 줄 모른다.  내가 뿌리는 씨앗은  ―國土•42  모든 맹렬한 싸움은 끝났다.  이 고요하고 고요한 시간에  가릴 것은 가리고, 버릴 것은 버려야지.  사람아, 사람아, 떠나가라.  나로부터 떠나가라.  내가 딛는 땅도 내가 받는 밥상도  떠나가라 떠나가라.  그리하여 혼만 남고 내 육체도  내가 걸치는 옷도 땀도 때도  손톱도 발톱도 털도 떠나가라.  산과 하늘이 마주 닿는  저 파아란 地平의 저 넘치는 뜨락에는  마음놓고 뿌릴 수 있는 品種이란  내 혼의 씨앗이어라  산간벽지 호젓한 개울물로 씻은  내 혼의 씨앗이어라.  사람아 사람아  모든 맹렬한 싸움은 끝났지만  최후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남아 있다.  아아! 그것은 죽는 일인데  죽어서 다시 깨어나는 일인데  아아! 그것은 씨앗을 뿌리는 일인데  우리들은 아직 혼을 찾지 못했는데  산과 하늘이 마주 닿는  저 파아란 地平과 뜨락만 넘쳐나네라.  마음  마를 대로 마른 사랑을 머리에 두르고서  꺼져가는 잿더미 속 불씨들은  제 몸이 뜨거워서 향기로와서  서로 엉켜 타오르고,  녹슨 말들을 움켜쥐고  내 가슴속 마음들은  정처없이 떠돌다가  거친 살갗으로 나타나 아파하고,  그렇게 불씨들은 불을 기르고  그렇게 마음들은 울멍울멍하고  곧음은 처음이자 영원이라 일깨워주고  그것이 표현이자 삶이라 타이르고,  산너머 산너머 보다 더 멀리  하늘 너머 하늘 너머 보다 더 높이  넘치더라, 넘치더라.  풀씨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추는 곳  그곳이 나의 고향,  그곳이 묻히리.  햇볕 하염없이 뀌노는 언덕배기면 어떻고  소나기 쏜살같이 꽂히는 시냇가면 어떠리.  온갖 짐승 제멋에 뛰노는 산속이면 어떻고  노오란 미꾸라지 꾸물대는 진흙밭이면 어떠리.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출 곳 없어 언제까지나 떠다니는 길목,  그곳이면 어떠리.  그곳이 나의 고향,  그곳에 묻히리.  황홀  들꽃들과 바람들이 낮거리하는 들녘으로  순아,  돌아,  이슬처녀 저 혼자 햇님 껴안고  불그레 얼굴 붉히는 길섶을 지나  흰 구름 검은 구름 몸 섞으며 떠도는  하늘을 보며  순아,  돌아,  들꽃들과 바람들이 낮거리하는 들판을 지나  붉은 해 산과 신방 차리려  노을이불 펴며 내려오는  해거름 속으로  순아,  돌아,  우리 함께 가자.  들꽃의 몸으로  바람의 몸으로  낮거리하러.   홍시들  한 오십여년 남짓 웃은 웃음이리  아니야, 한 오십여년 흘린 피눈물이리.  빠알갛구려, 알알이 밝혔구려,  청사초롱, 홍사초롱.  아아, 눈감으리  까치밥으로 두어 개 남을 때까지  발가벗고 신방 차리는 소리.  청살문을 닫아라  홍살문도 닫아라.   봄이 오는 소리  어렸을 적,  발바닥을 포개며 뛰놀던  원달리 동리산 태안사에  봅이 딛는 발자국 소리  여기까지 들여오네.  살얼음 밑에서 은빛 비늘 희살대며  봅기운에 흐물거리던 피래미떼들도  광주의 내 눈에 가득 넘치네.  지금 종달새 노래 그쳤어도  새싹이 다투어 돋아나는 곳,  그곳을 향해  모든 일 젖혀놓고 눈을 감네.  동리산에서  날이 샐 무렵  어둠 더불어 빨치산들이 산으로 오른 뒤,  골짜기 대밭에서  죽순 서로 키재기하는 걸 보고  나는 무럭무럭 자랐다.  어린 짐승새끼  어미 읽고 집 잃어 밤새 울어쌀 때  동리산 품 같은 어머니 가슴 파고들며  속으로 꺼이꺼이 울며  나도 밤을 샜다.  홍시감 익어갈 때,  홍사초롱 수천 새씩 가지 휘어져라  매달릴 때,  아랫집 남순이랑 얼굴 붉히며  왼종일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그 빨치산들 다 어디 갔나  그 어린 짐승 자라서 다 어디 갔나  그 죽순 자라서 어디 갔나  그 홍시 다 어디 갔나  그 남순이 어디 갔나.  달빛  달빛 속에서 흐느껴본 이들은 안다.  어째서 달빛은 서러운 사람들을 위해  밤에만 그렇게 쏟아지는지를.  달빛이 마냥 서러워  새들도 눈을 감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세상을 껴안을 때  멀리 떠난 친구들은 더 멀리 떠나고  아직 돌아오지 않는 기별들도  영영 돌아오지 않을 듯 멀어만 가고,  홀로 오솔길을 걸으며  지나온 날들을 반성해본 사람들은 안다.  달빛이 서러워 오늘도  텅 빈 보리밭에서 통곡하는  종달새들은 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세상을  힘껏 껴안으며 터벅터벅  걷는 귀가길이  왜 그리 찬란한가를 아는 이는 안다.    노을  저 노을 좀 봐.  저 노을 좀 봐.  사람들은 누구나  해질녘이면 노을 한 폭씩  머리에 이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서성거린다.  쌀쌀한 바람 속에서 싸리나무도  노을 한 푹씩 머리에 이고  흔들거린다.  저 노을 좀 봐.  저 노을 좀 봐.  누가 서녘 하늘에 불을 붙였나.  그래도 이승이 그리워  저승 가다가 불을 지폈냐.  이것 좀 봐.  이것 좀 봐.  내 가슴 서편 쪽에도 불이 붙었다.  골목을 누비며  어렸을 적 동무들 다 어디 갔나.  그 활달했던 팔다리들 다 어디로 숨었나.  그 부끄럼 많던 계집애들 다 어디로 갔다.  도무지 알 길 없어  신새벽부터 동무들 발자국 따라  골목 골목을 누빈다.  들려오려나  쏟아지려나  울타리 넘어  골목까지 얼굴 내민  붉은 장미꽃 한 송이.  이슬처럼  이슬처럼,  이슬처럼,  밤새껏 울고 울어서  보석을 만들 수만 있다면  내 평생토록 흘렸던 눈물을  무덤에 들 때까지 흘려야 할 눈물을  한데 모아  이 세상을 파도치리라.  온 세상을 안쓰러이 매달고 있는  이 이슬 앞에서  파도치리라 파도치리라.  겨울산  사람 동네 그리워 살냄새 그리워  흰 눈 뒤집어쓴 산들.  닫힌 문 앞까지 찾아와 큰절하는 침묵들,  내 마음 한 홉 주면  두어 섬지기로 쏟아붓는 너그러운 정.  새소리 풀잎 떠는 소리 데리고  우리를 맞아 산마루 높이 세워두고  팔다리 벌려 계곡을 거쳐  터벅터벅 예까지 뻗었다!  방구석 서랍 속에 말아둔 하얀 한지 풀어  얼굴 감싸고  아이 나는 부끄러워, 아이 나는 부끄러워.  떠난 사람  꽃피면 돌아오리라  마을 텅텅 비어 귀신만 들락날락하면  돌아오리라 하고 떠난 사람.  꽃이 벌써 스무 차례나 치고  꽃이 벌써 스무 차례나 열매 맺어  스무 차례나 땅에 묻혔다 피어나도  영영 돌아오지 않는 그 사람.  나의 곁에 땅심 다한  흙 몇줌 남겨두고  숨결만 가득 퍼뜨려놓고  길고 먼 길을 따라  그림자만 길게 터벅터벅  석양 따라 떠난 사람.  봄이 온다  봄이 온다.  봄빛이 어른거린다 눈을 뜨자  봄눈이 내린다 봄눈 녹듯 녹아버리자  봄볕이 쏟아진다 낯바닥을 그을리자  봄바람이 분다 가슴을 보풀리자  봄비가 내린다 속타는 마음 젖어버리자  봄꽃이 피다 노릇파릇 물들자  봄사돈 꿈에 보인다 잠에서 깨자  봄추위가 온다지만  봄은 봄이다 품은 자식 풀어놓자.  꽃  너는!  오로지 피어 있으면 그뿐  나는 너의 이름을 짓지 않으련다.  너는!  오로지 지면 그뿐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련다.  이름없이 잡풀들 곁에  오늘도 피고 지는 너를  온 힘으로 껴안을 뿐.  참빗, 얼레빗으로  너의 향기를 빗어줄 뿐.  피어라,  찬바람이 부는 모든 가슴속에  피어라,  찬바람이 부는 모든 가슴속에  피어라,  쓸쓸히 죽어가는 모든 숨결 속에.  지거라,  너의 이름을 함부로 짓는 시인 위에.  지거라,  너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대는 시인 위에.  봄비  젖어버리자 젖어버리자고  우산도 버리고  저벅저벅 걸어서 예까지 왔다.  흙은 간지러워서 발ㅂ에 누워 있고  나무들은 모두  어깨를 걸면서 산으로 오르고 있을 때,  봄비에 취해  나 예까지 와서  홀로 거닐면서 무엇을 부끄러하랴.  알몸으로 천번이고 만번이고  세상을 껴안는다.  물과 함께  물은 발걸음도 안 보이게  느릿느릿 혹은 쏜살같이 걷다가  세상살이 싫증나면  땅속 깊에 스며 숨는다.  물은 온몸이 온통 맑은 눈이어서  햇빛 별빛 달빛이 그리우면  슬그머니 솟아나 밤낮없이 이 땅을 누비다가  산산이 조각내어 하늘을 날기도 한다.  그러다가, 이 땅이 걱정이 되면  지상에서 죽어야지, 지상에서 죽어야지,  때맞춰 내려와  발걸음도 안 보이게 또  느릿느릿 혹은 쏜살같이 걷는다.  그러다가, 이 땅에 몸을 던져 죽고 싶으면  아무데나 있는 웅덩이를 찾아가  지친 몸, 아니 아직 견딜 만한 몸을 푼다.  세상의 온갖 티끌과 낙엽을 끌어모아  함께 고여 썩는다.  나도 물과 함께 고여 썩는다.  다시 살아날 시간들을  저 개울가에, 강가에, 바다에 보내놓고.  새벽, 골목을 거닐며  찬바람이 귓불에 뜨겁다.  밤새 헛것들을 보고 짖어대던 개들은  늦잠을 자고  발끝에 노니는 새끼은행잎들  노오랗게 노오랗게 살이 올랐고  머리에 떨어지는 새끼대추알  오동포동 살이 올랐다.  담쟁이덩굴 아직도 샛별을 휘감지 못했나,  가냘픈 몸으로 기를 쓰며 오른다.  겨울 보리  뒤덮인 하이얀 눈 속에서  더 붉은 사랑.  푸득푸득 꿩이 날아오르는  후미진 산등성이 옆에  더욱 푸르러 뜨거운 몸뚱이.  매운 찬바람 속에서도  이제 삶을 죽음이라  죽음을 삶이라 말하며  밟힐수록 힘이 솟는 우리들,  타오르는 태양 아래서  끼리끼리 그림자 만들어  마침내 더불어 큰 산 이루었네.  태안사 가는 길 1  나라가 위태로웠던 칠십년대 말쯤  아내와 어리디어린 세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 떠난 지 삼십년 만에  내가 태어났던 태안사를 찾았다.  여름 빗속에서 칭얼대는  아이들을 걸리며 혹은 업으며  태안사를 찾았을 때  눈물이 피잉 돌았다.  그리고 두번째로  임신년 겨울,  팔십을 바라보는 어머님을 모시고  아내와 아젠 웬만큼 자란 아이들을 데리고  터벅터벅 태안사를 찾았을 땐  백골이 진토 된  증조부와 조부와 아버님이  청화 큰스님이랑 함께  껄껄껄 웃으시며  우리들을 맞았다.  산에 올라, 바다에 나가  산에 올라 가만히 살펴보면  태산도 티끌들의 세상이더라.  바다에 나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바다도 물방울들의 세상이더라.  티끌이 앓으면 태산이 앓고  물방울이 앓으면 바다가 앓고  중생이 앓으면 부처가 앓고  모기의 눈이 멀면  하늘도 눈이 멀더라.  누우런 호박이 울타리에 붙어 울면  지붕 위의 박들도 소복을 하더라.    된장  님아,  너의 썩은 얼굴에 침  아니고 콩을 붙인다  흰자질이랑 탄수화물을 붙이고  물도 굳기름도 붙이고  비타민을 붙인다 소금을 붙인다  한 많은 찌거기를  정 도타운 부부를 붙인다  아아, 현명한 된장을 붙인다  님아,  너의 썩은 얼굴에 미움  아니고 새로운 머리카락을 붙인다  눈썹이랑 눈을 붙이고  코도 입도 붙이고  턱을 붙인다 귀를 붙인다  희고 억센 이빨을  거친 살결을 붙인다  아아, 뜨거운 목소리를 붙인다.  시여,  나의 얼굴을  너에게 붙인다.  석탄  참나무 숨결이 파도치는 두 어깨며  지나치게 이글대는 두 눈망울,  온몸을 철조망 같은 심줄로 무장하고  도계탄광서 온 그 사내와 만나던 날  눈에 핀 다래끼여 터져버려라  터져 버려라 다래끼여, 폭음을 했다.  이 趙哥야, 그 거창한 체구엔  노동을 하는 게 썩 어울리겠는데  詩를 쓴다니 허허허 우습다, 趙哥야.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는 갑다고  회색 바바리코트 사줄 테니 詩人 폼 내라고  왜 그리 못생겨 울퉁불퉁하냐고  악쓰고 힘쓰고 힘뱉고 악뱉고 있을 때  韓民族의 巨軀요 표준을 넘는 美男은  검다검다 지쳐 흰빛도 튀기는  새카만 석탄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쌔카만 석탄이 되고 있었다.  맨 밑바닥에서 서러우나 즐거우나  언제 어디를 안가리고 솟구치고  꿈틀거리는 석탄이 되어서  韓民族의 거구요 미남인 나는  꺼멓게 꺼멓게 울고 있었다.  元達里의 아버지  모든 소리들 죽은 듯 잠든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 1리*  九山의 하나인 桐裡山속  泰安寺의 중으로  서른다섯 나이에 열일곱 나이 처녀를 얻어  깊은 산골의 바람이나 구름  멧돼지나 노루 사슴 곰 따위  혹은 호랑이 이리 날짐승 들이랑 함께  오순도순 놀며 살아라고  칠남매를 낳으시고  난세를 느꼈는지  산 넘고 물 건너 마을 돌며  젊은이들 모아 야학하시느라  처자식을 돌보지 않고  여순사건 때는  죽을 고비 수십 번 넘기시더니  땅뙈기 세간 고스란히 놓아둔 채  처자식 주렁주렁 달고  새벽에 고향을 버리시던 아버지.  삼십 년을 떠돌다  고향 찾아드니 아버니 모습이며 음성  동리산에 가득 듯하나  눈 에 들어오는 것  폐허뿐이네 적막뿐이네.  * 원달 1리 : 이곳에 桐裡山이 있고 泰安寺가 있는데 필자가 태어난 곳임.  대낮에 그린 그림  뉘 것일까?  떼 벗겨진 무덤가에 구름 그림자 붙들고  바람따라 흐느끼는 머리칼 한 올.  뉘 것일까.  성난 포도를 베고 아우성에 귀 기울이는.  시간따라 흐느끼는 고무신 한 짝.  뉘 것일까.  병난 봄房의 한 나절 벽 사이  누워 있는 고요를 굴리는 사나이.  젊은 아지랑이  반란이다, 저건 반란이다, 반란이다.  어허, 저건 숨결이다, 숨결이다.  시냇가의 조약돌도 미치게 하고  내 눈 속의 하늘도 미치게 하고  우리들의 몸도 불질러 버리는  젊은 아지랑이.  젊은 아지랑이의  푸른 수염을 보거라.  수염을 헤치고  푸른 오월의 숨결을 헤치고  저 건너에서 저 건너에서  똑똑히 살아 움직이는  무덤들을 보거라.  무덤 건너  잘잘히 흐르는  의로왔던 조상들의  핏방울이며 땀방울의  영롱하게 뜬 눈을 보거라.  우리들의 눈은 멀었다 할지라도,  귀까지 먹었다 할지라도,  저 젊은 아지랑이 사이로  푸른 오월의 수염을 헤치고,  살아 꿈틀거리는  역사의 비탈마다에  아슬아슬하게 아로새겨진  영광의 말씀을 듣거라.  젊은 아지랑이 너머의  푸른 수염 너머의.  뙤약볕이 참여하는  밥상 앞에서  폭우도 멀리 떠나 버렸고  습기까지 죽어 말라 붙은 여름 근처  끼니마다 알몸으로 내외는 마주 앉네.  무릎 끓고 온몸으로 앉는 밥상 위  지난 몇 해 굶주린 남도평야  그릇마다 뜨겁게 넘쳐나고.  황소 섞인 찌개며  칼질 잘된 생명을 넘어서서  어린날의 눈물이 후두득 후두득 치면  동강이 난 바람은 동강이 난 부분마다에  눈물을 부릅뜨고 부들 부들 떨고.  장끼 까투리 홰치는 소리 멧돼지의 발자국 소리  모두 여기 올라서 부들 부들 떠네.  엊그제 만나서 덜 친근하지만  심줄을 보여다오.  平野 앞에 엎드려 땀도 눈물도  보여다오.  땅의 딸이여, 아내여, 어머니여,  바람 속에 붙어 있는 초가삼간 불질러 버리고  그대 메마른 입술을 불질러 버리고  일터에서 익힌 억센 심줄을 나부끼며  끝없는 반란의 아들로 뛰란 말이여?  가슴 펴고 내가 달리는 남도평야,  발바닥에 붙는 노동, 풍성한 울음소리,  고을마다 넘쳐나네.  바위  이슬이여,  이젠 그만 풀잎 끝에서 떠나다오.  밤새도록 이 어둠을 지켜 서서  몸을 보채며 뒹굴던  그 지긋지긋한 몸뚱어리를  거두어서 아침 햇살 속을 따라 떠나다오.  떠나다오.  눈물이 죄다 마른 사람들 곁에서  우리들의 착하디착한 어린것들 곁에서  이제, 그만 이 작은 땅을 울리지 말고  이젠 파도 위에 부서져 파도가 되고  광풍에 휘몰려 쫓기는 폭우가 되어  온 강토에 스며드는 소리가 되어다오.  새벽부터 그 다음 새벽까지  통곡으로 누워 있는 이 땅의  가녀린 풀잎 끝에서 떨고 있는  눈물이여.       식칼론 2  ―허약한 詩人의 턱 밑에다가  뼉다귀와 살도 없이 혼도 없이  너희가 뱉는 천 마디의 말들을  단 한 방울의 눈물로 쓰러뜨리고  앞질러 당당히 걷는 내 얼굴은  굳센 짝사랑으로 얼룩져 있고  미움으로도 얼룩져 있고  버려진 골목 어귀  허술하게 놓인 휴지의 귀퉁이에서나  맥없이 우는 세월이나 딛고서  파리똥이나 쑤시고 자르는  너희의 녹슨 여러 칼을  꺾어 버리며 내 단 한 칼은  후회함이 없을 앞선 심장 안에서  말을 갈고 자르고  그것의 땀도 갈고 자르며  늘 뜬 눈으로 있다  그 날카로움으로 있다.        조태일 문학 다시 읽기  -이동순(시인.영남대 교수)  흔히들 이라고 하면 먼저 「國土」와 「식칼論」 연작시 따위를 떠올리며, 그가 남성적이며 역동적 기질의 소유자, 또 그러한 분위기의 시를 썼던 시인으로 기억한다. 이것은 조태일 시인의 문학에 대한 하나의 편협한 고정관념이다.  물론 조태일의 문학에서 이러한 분위기의 시작품이 적은 것은 아니나, 전체 작품을 다시금 자세하고 신중하게 통독해 보면 시인이 얼마나 작고,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들에 대한 애착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던가를 확연히 알 수 있다. 필자는 이미 연전에 「눈물, 그 황홀한 범람의 시학」이란 본격적 비평을 통하여 조태일의 시작품이 지닌 이러한 관점을 나름대로 정리 분석한 바 있거니와, 당시 그 글에서 조태일 문학의 중심 소재를 눈물이라는 관점에서 찾고 연역하며, 의미를 귀납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로부터 수년의 세월이 흘러 조태일 작품세계의 전모를 다시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필자에게 부여되어 굵고 줄기찬 작품 활동의 전모를 헤집고 다니는 동안, 과거 본인의 관점이 정당한 경로였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되었다. 위에 가려 뽑은 35편의 시작품 초(抄)는 이러한 경로를 보여주는 하나의 구체적인 증거라 하겠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위 작품 중 「풀씨」 이후 19편의 작품이 모두 마지막 시집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에서 선정된 것이다. 전체 선정작 가운데 거의 절반이 넘는 시작품이 모두 한 권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조태일의 마지막 시집이 지닌 의의를 강화시켜 주는 의미와도 관련된다. 말하자면 시집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야말로 조태일 문학을 대표하는 시집이라 할 만하다.  초기 시작품이 보여주는 관념적 모호성, 김수영的인 스타일에 대한 필요 이상의 관심은 조태일의 시작품의 존재성과 당위성을 지탱해 주는 힘을 한결 약화시키는 기능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는 마지막 시집에 이르러 마치 먹구름이 일시에 걷힌 만월(滿月)처럼 맑고 투명하고 눈물겨운 정서를 담뿍 개화시켜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를 운파월래(雲破月來)의 시정신이라 불러도 좋을 것인가.  시인은 마지막 시집에서 드디어 시정신의 빛나는 완성을 감격적으로 이루었던 것이다.     조태일은 한 마디로 눈물의 시인이었다.  1965년 발표작 「눈물의 幻想」에서부터 시작된 작품의식은 1965년 「밤에 흐느끼는 육체를」을 거쳐 「식칼論」2와 4, 「대창」 「뙤약볕이 참여하는 밥상 앞에서」 「베란다 위에서」 「발바닥 밑에」 「산에서」 「석탄」 「바위」 「통곡」 「황혼」 「빗속에서」로 이어지며 전개된다.  그러한 시정신은 마지막 시집인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에 이르러 한껏 꽃을 피우게 되는데, 그 증거들은 「홍시들」 「봄이 오는 소리」 「桐里山에서」 「달빛」 「이슬처럼」 「아침 산보」 「단 한 방울의 눈물」 「청보리밭에서」 「골목을 누비며」 「달빛」 「물과 함께」 「노래가 되었다」 「풀씨」 등의 순정한 세계로 정착된다.  작고 여린 것, 가냘프고 소외된 것들에 대하여 연민의 자세를 가지며 더불어 눈물을 흘리는 태도는 조태일 문학이 일관되게 보여온 시적 변용이라 하겠다. 이것은 지난날 관서지방 출신의 시인 백석(白石)의 경우처럼 어린 시절의 경험공간을 추억의 실루엣으로 개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변용의 결과는 두 시인이 매우 상이한 스타일로 정착된다.   마땅히 눈물이 있어야 할 곳에 눈물이 마르고 없는 이 비통하고 삭막한 시대에서 시인 조태일은 따뜻한 가슴을 가진 눈물의 시인으로 우리들에게 차츰 되살아나고 있다. 우리는 한 시인의 시정신이 변화해온 경과를 참으로 정교하고 신중한 시각으로 접근하고 규명해야만 한다. 조태일 문학에 대한 평가와 관점은 아무래도 문학사를 엮는 비평가들의 선입견에 의해 지나치게 견인(牽引)된 혐의가 있다. 아무리 시대가 문학을 낳고, 또 그 문학이 시대를 결정한다 하더라도 시인이 근원적으로 지향했던 작품세계의 진정성은 별도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60년대 중반에서 출발하여 90년대 중반까지 약 30여 년 동안 전개된 조태일 문학의 성격과 본질의 규명은 그러한 점에서 새롭게 접근되어야 마땅하다.  여기 선정한 대표시선은 라는 재조명의 측면에서도 상당한 비평적 의의가 있다고 판단된다.  [출처] [스크랩] 조태일 시 모음|작성자 한동안    
1091    현대 과학 시 - 실험 시 댓글:  조회:3891  추천:0  2015-05-02
  “실험 시”   한 곡면의 극한치를 구하면 평면이 되고 임의의 시간이 그 평면과 교차한다 교차점에 서 수직 상승 아이겐 벡터는 우주 공간의 비틀려진 곡면이다 원자로의 액체가 확산되 는 시간 t 동안 기체는 침전되어 원심 분리기에 의해 블랙홀의 질량 m 원소로 추출된 다 시간이 가속도를 가지고 입자와 빛의 평균속도로 직선과 충돌한다 반발계수는 미 적분의 상수로 남는다 사이클로트론의 소장과 십이지장은 파형이 사이노 소이달인 입 자군 이 가설을 필요조건으로 설정하면 확률에 의해 충분조건이 성립한다 질량이 에 너지로 변환되는 함수 동안 엔트로티는 등온 가역 반응을 보인다 이런 원리에 의해 우주는 서서히 빅뱅 이전의 시스템으로 귀납하게 된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연역적 폐 쇄 반응이다 상대성 이론은 뉴턴 사과의 시초다 종말이 시작되는 무한궤도의 순환사 이클은 기존 운동량을 유지한다 모든 이론이 나선형 성운을 거쳐 블랙홀에 수렴된다 모든 시작은 끝을 대치한다 고로 가설은 철저한 증명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세계는 필연적으로 모래 속에 존재하게 된다.      
1090    보기 드문 사진들 댓글:  조회:2257  추천:0  2015-05-02
    보기 드문 사진들   ▲ 에티오피아의 활화산 Erta Ale의 용암호수   ▲ 만리장성의 끝, 산해관   ▲ 분출직전의 간헐온천   ▲ 1400백만년전에 운석이 떨어진 웅덩이에 건설된     Nordlingen시의 바바리안 마을 풍경         ▲ 2013년초에 호주해안에 불어닥친 거대한 모래폭풍   ▲ 비행기에서 찍은 희귀한 원형 무지개   ▲ 2013년 5월의 에버레스트 등반객들   ▲ 1957년 여름의 Daytona 비취 풍경    ▲ 폐 '타이어'의 야적장   ▲ 지상에 있는 차량중 제일 큰 차량, Bagger 288   ▲ 해저 '케이블'의 단면도   ▲ Google '컴퓨터 데이터 센터'의 내부 일부   ▲ 아인슈타인(Einstein)박사 별세 직후의 그의 책상 모습   ▲ 미켈란제로의 장바구니 리스트, 그의 하인이 문맹자인 관계로 그림을 같이 그려 놓았다.   ▲ 미국 FedEx 배달회사의 Boeing 757 내부 모습   ▲ 남미 엘 사바도르(El Salvador)의 비좁은 감방 모습  ▲ 나치 '히틀러'의 집무실 내부  ▲ 몽골의 거대한 '징키스칸' 동상  ▲ 문어 알     ▲ 미국 '죠지 워싱톤' 대통령의 이빨  ▲ 1945년 일본 '히로시마' 원폭투하 시점(08:15)에 멈춰버린 시계     ▲ 인간의 혓바닥 돌기 확대화면     ▲ 5 파운드 무게의 지방과 근육의 크기 비교  ▲ 전자현미경으로 본 암세포      ▲ 특별히 선명하게 찍힌 수성표면 사진                 ▲ 위성에서 본 북극 '오로라'                       ▲ 척추 수술 전후의 비교 X-ray 사진  
1089    명시인 - 파울 첼란 댓글:  조회:4606  추천:0  2015-05-01
시간의 눈 -파울 첼란(1920~70)  이건 시간의 눈 일곱 빛일까 눈썹 아래서 곁눈질을 한다 그 눈꺼풀은 불로 씻기고 그 눈물은 김이다.  눈먼 별이 날아와 닿아 뜨거운 속눈썹에서 녹으니 세상이 따뜻해지리 죽은 이들이 봉오리 틔우고 꽃 피우리.  시간은 지속하는 것의 분할이다. 삶이 지속하는 ‘지금’을 무한으로 쪼갠다면, 해에서 달로, 달에서 주로, 주에서 날로, 날에서 시간으로, 시간에서 분으로, 분에서 초로, 초에서 밀리초로, 밀리초에서 나노초로, 나노초에서 펨토초로 미세한 분할이 가능하다. 인생 짧다고 한탄하지 마라! 펨토초의 차원에서 삶은 거의 무한이고 영겁이다. 어떤 사람에겐 그 무한과 영겁을 감당할 내구성이 부족하다. 파울 첼란은 가족을 나치의 가스 처형실에서 잃고 혼자 살아남았다. 죽은 이들이 봉우리 틔우고 꽃 피우기를 바랐다. 첼란은 이 불가능한 꿈을 안고 흐르는 삶을 견디지 못하고 나이 쉰에 세느강에 투신자살한다. 파울 첼란       파울 첼란 파울 첼란(Paul Celan, 1920년~1970년)은 루마니아 출생의 독일어 시인이다.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전쟁으로 중단하고 소련군 점령 후에는 빈으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최초의 시집을 발표하였다(1947). 1948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얻어 파리에서 살면서 프랑스어·러시아어(語) 어학교사 겸 번역가로 일하면서 시인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시는 시선(視線)이 포착(捕捉)한 사물을 금욕적이라 할 만큼 응축된 시어에 정착케 하는 투명함과 순수함을 갖는 것으로 독일 현대시 가운데 이채를 발하는 존재이다. 주저(主著)로는 시집 (1952), (1955), (1959) 등이 있다. 세계의 명시/ 파울 첼란 죽음의 푸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아침에 또 점심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그가 외친다 더욱 깊이 땅나라로 파 들어가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연주하라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너를 맞힌다 정확하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타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마르가레테는 전형적인 독일 여인 이름이고, 줄라미트는 전형적인 유대 여인 이름이다. 출전 : , 전영애 옮김, 민음사, 2011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를 읽고 그린 헝가리 화가 라슬로 라크너(László Lakner, 1936-1974)의 . 시를 말하다 문태준 l 시인 파울 첼란의 시를 읽는 일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그의 시에는 비의(悲意)가 꽉 차 있다. 한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제(우리)가 어디 있으며 저(우리)를 끌고 가는 힘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저(우리) 자신을 위한 현실을 기획하기 위해” 창작된 그의 작품들은 아우슈비츠라는 비극적 사건을 출발의 지점으로 삼고 있다. 그의 유대인 부모는 나치 수용소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하다 죽었고, 그 또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을 뻔한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다. 이런 우울한 개인사로 인해 그의 시는 많은 경우 시간을 뚫고, 무언가를 마주해, “말을 건넬 수 있는 현실 하나를 향해”, 자기 자신의 “현존하는 경사각(傾斜角)” 아래서, 타자에게로 나아갔다. 인간 이성의 폭력성과 야만성에 맞서서. 파울 첼란의 시에서 아우슈비츠라는 역사적 비극의 화인(火印)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남녘 만(灣)의 물은 아직 알고 있을까요,/ 어머니, 당신에게 상처를 남긴 파도를?”(‘무덤')에서 “남녘 만”은 유대인들이 송치되었던 지역인 드네프르 강 연안을 연상하게 하고, “그들은 파고 또 팠다, 그렇게 하여/ 그들의 낮이 가버렸고, 밤 또한 갔다. 그들은 신을 찬양하지 않았다,/ 그들이 듣기로 이 모든 것을 뜻했다는 이/ 그들이 듣기로 이 모든 것을 알았다는 이.”(‘그들 속에 흙이 있었다’)라는 시구나 “천막 앞에 백 명의 병사가 집합하고, 우리는 마시며 너를 무덤으로 나른다./ 이제 세상의 석판 위에서 꿈의 단단한 은화가 쨍그렁 울린다.”(‘마리아네')라고 쓴 대목에서 우리는 강제노역에 동원된 유대인들의 참상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가 주로 동원하는 시어들을 살펴보아도 그의 내상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즉 창살, 꺾인 무릎, 어둠, 뒤엉킴, 박해, 파괴, 울부짖음, 광란, 유골 항아리, 포획, 교살, 꺼진 눈, 수의, 가묘(假墓), 휘몰아치는 바람 등의 시어들은 그에게 상흔의 언어들이었던 것이다. 파울 첼란 시에서 ‘돌'과 ‘돌들'은 이러한 위협에 노출되고야 마는 개별적 존재 혹은 집단을 뜻하는 것으로 각별하게 읽힌다. 그의 시에서 ‘돌’은 ‘돌들’이라는 무더기를 이루면서 서로를 연대하여 보호하지만, 어느 순간 외부적 요인인 강압적 물리력에 의해 와해되고 사멸할 위기에 빠지고 만다. “오, 이 돌 언덕, 사랑아,/ 우리가 쉼 없이 구르는 곳,/ 돌인 우리가,/ 얕은 물줄기에서 물줄기로,/ 한 번 구를 때마다 더 둥글게,/ 더 비슷하게, 더 낯설게.”(‘돌 언덕’)라고 썼던 시인은 “어느 돌을 네가 들든―/ 너는 드러내 버린다,/ 돌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벌거벗긴/ 그들은 이제 짜임을 새롭게 한다,”라고 동시에 쓰고 있는 것이다. 시 ‘죽음의 푸가’는 원래 제목이 ‘죽음의 탱고’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7년 한 잡지에 발표되었다가 1952년 펴낸 시집 에 수록되었다. 이 시를 통해서도 우리는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벌어졌을 법한 비참상을 그려 볼 수 있다. 이 시에는 지극히 수세에 몰려 있는 ‘우리’와 점점 지시와 요구가 난폭해지는 ‘한 남자’가 대치 관계 아래 등장한다. ‘우리’가 하는 행위는 검은 우유를 마시는 것, 무덤을 파는 것뿐이다. 순종을 버리고 맞서서 반항할 위치에 있지 않다. ‘검은 우유’는 죽음의 은유로 읽힌다. ‘무덤’은 학살당한, 무력하기만 했던 이들의 시체가 묻힐 매장지로 읽힌다. 이에 반해 ‘한 남자’는 몹시 거칠고 사나운 권력자의 함의로 읽힌다. 적의에 차 명령하는 그는 뱀을 갖고 있고, 사냥개를 불러내고, 마침내 살해하고, 주검을 묻게 한다. ‘마르가르테’는 독일 여인을, ‘줄라미트’는 유대 여인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이 둘의 관계는 ‘한 남자’와 ‘우리’의 관계 그것과 대위적으로 진행되고 이해된다. 이 시를 통해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그 어떤 ‘호곡(號哭)’이다. ‘마신다’, ‘판다’ 등 동작어의 규칙적인 반복은 잔인함과 처참함의 절정으로 몰아가면서 독자들을 더 강도 높게 전율케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라슬로 라크너, . 이반 골(Iwan Goll)과의 표절 시비에 휩싸여 생의 의욕과 활력을 소모한 파울 첼란은 유대 신학과 신비주의를 접하고 또 이스라엘 방문을 계기로 힘을 얻는 듯했으나 입원 생활은 반복되었고 결국 1970년 센 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시는 죽음의 대성황을 보여 주었고 한 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역사적 고통의 최대치를 보여 주었지만, 한 평자의 지적처럼 타자의 고통을 향해 열린 ‘대화의 문학’이기도 했다. 다음의 시에서 우리는 그가 갈망한, 그러나 꺾인 한 줄의 희망과 유토피아를 읽을 수 있다. “그대 나를 안심하고/ 눈(雪)으로 대접해도 좋다./ 내가 어깨에 어깨 걸고/ 뽕나무와 여름을 지날 때마다/ 그 갓 돋은/ 잎이 소리 질렀거든.”(‘그대 나를') 파울 첼란(Paul Celan, 1920-1970) 1920년 루마니아 북부 부코비나의 체르노비츠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물한 살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체르노비츠가 유대인 거주 지역(게토)으로 확정됐으며 독일군이 도시를 점령한 후 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갈 때 첼란의 가족도 포함됐다. 강제노역을 하던 중 부모가 처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첼란 역시 가스실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이후 끔찍한 기억에 고통스러워하며 삶을 이어 갔다. 종전 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번역과 출판 일을 하다가 오스트리아 빈으로 건너가 첫 시집 를 발표했다. 1948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여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까지 꾸준히 시작(詩作) 활동을 해 모두 7권의 독일어 시집을 남겼다. 1958년 브레멘 문학상을, 1960년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했다.   라라와복래가 좋아하는 첼란의 시 몇 편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 캔버스에 유채와 짚, 1981. 키퍼는 과거사와 논쟁하며 현대사에서 터부시되는 논쟁적인 주제들을 다뤄 왔다. 나치 통치와 연관된 주제들이 특히 그의 작품세계에 잘 나타난다. 작품 ()는 파울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에서 영감을 받았다. 첼란의 시는 침묵을 통해 극도의 경악을 말하고자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어떠한 서정시도 쓰일 수 없다는 (나의) 말은 잘못이었다. — 테오도어 아도르노 꽃 돌, 내가 쫓아간 공중의 돌, 돌처럼 눈먼 너의 눈. 우리는 손이었다. 우리는 어둠을 공허하게 창조하였다, 우리는 여름을 건너 찾아온 말을 발견하였다. 꽃. 꽃― 눈먼 자의 말. 너의 눈과 나의 눈, 이들은 물을 걱정한다. 성장. 마음의 벽마다 낙엽진다. 이처럼 또 한 마디 말, 그리고 망치는 야외에서 흔들거린다. 이슬 이슬, 그리고 나는 너와 더불어 누워 있었다. 쓰레기 더미 속의 너. 축축한 달이 우리에게 응답을 던져주었다. 우리는 서로 부서져 나갔다 우리는 다시금 하나로 부셔졌다. 주님은 빵을 자르고, 빵은 주님을 잘랐다. 찬미가 누구도 다시 흙과 진흙으로 우리를 빚지 않으리라. 누구도 우리의 먼지에 관해 말하지 않으리라. 누구도. 누구도 아닌 자여, 당신은 찬양받을지어다. 당신을 위해 우리는 피어나려 하나이다. 당신을 향해. 우리는 무(無)였고, 무(無)이며, 무(無)로 남을 것입니다. 꽃을 피우며, 무(無)의 장미, 누구의 것도 아닌 장미. 영혼의 해맑은 줄기, 하늘의 황량한 꽃실, 빨간 화관(花冠)을 지닌. 우리가 노래 부른 자색(紫色) 단어 위에서, 오 가시 위에서 나뭇잎 하나 나무 없는 나뭇잎 하나,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위해. 그렇게도 많은 말해진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대화가 거의 범죄처럼 되어버린 곳에서, 이 무슨 시간들인가?  
1088    누가 쓰레기인가?... 그 누가 파지인가?... 댓글:  조회:2195  추천:0  2015-05-01
[ 2015년 04월 28일 09시 26분 ]      
1087    저명한 작곡가 - 鄭律成 댓글:  조회:6465  추천:2  2015-04-27
격동의 시대를 거창한 악장에 담아낸 위대한 작곡가 정률성 석화       작곡가 정률성(鄭律成, 1918~1976)은 격동의 시대를 거창한 악장에 담아낸 위대한 작곡가로서 우리민족과 우리나라 음악예술의 전당에 빛나는 이름을 새겨놓은 걸출한 예술가이다. 한 사람이 두 나라의 군가를 지어 국내외 음악사상 유례없는 기록을 남긴 작곡가이기도한 정률성은 일생동안 397수(편)의 음악작품을 창작하였는데 《연안송》(1938), 《중국인민해방군군가(원 팔로군행진곡)》(1939), 《조선인민군행진곡》(1948)과 가극 《망부운》(1957)등은 모두 20세기 우리민족 및 우리나라 음악사에 빛나는 위치를 자리매김하고있다.    1. 나젊은 혁명음악가의 길    정률성은 조선에서 삼일만세항쟁이 발발하기 약 7개월 전인 1918년 8월 13일(음력 7월 7일) 한국 전라남도 광주시 양림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슬하에 아들 다섯, 딸 다섯 모두 열 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리어 열 자식 중  다섯이나 죽고 아들 넷에 딸 하나만 남았다. 아버지 정해업은 아홉 번째 자식으로 출생한 아들이 부유하고 은혜롭게 살아가라는 뜻을 담아 부은(富恩)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정률성이 태어나 성장한 1920년대는 조선에 대한 일제의 민족적 억압과 가혹한 수탈이 극도에 달하고 또한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이 전개되던 때로서 중국 동북에서 유명한 청산리대첩이 펼쳐지고 북경, 상해를 비롯한 곳곳에서 윤봉길의거 등 항일투쟁이 치열하게 고조되던 시기였다. 그의 아버지는 민족정신이 투철한 분이였고 그의 맏형과 둘째형은 직접 반일투쟁에 투신한 투사들이였다. 그들은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제의 검거선풍을 피하여 중국에 망명해 항일활동을 하였는데 맏형 정효룡은 그 후 조선에 돌아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여 8, 9년간의 옥살이 끝에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둘째형 정인재는 운남 강무당에서 주덕장군과 동창생으로 군사를 배웠고 중국공산당에게 가입하였으며 국민혁명군 제 24군 중좌참모로 일하다가 대혁명 시기에 장렬히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항일애국 가정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생활은 그의 가슴속에 침략자를 증오하는 씨앗을 묻어주었으며 민족의 독립을 이룩하고 광명과 행복을 위하여 굽힘없이 싸우는 정신을 키워 주었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정률성은 일제의 노예교육을 외면한 부친의 고집으로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공립학교를 거부하고 대신 민족정신이 농후한 사립학교인 신흥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별안간 돌아가시고 큰형도 감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가세가 기울게 되자 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외롭게 남은 정률성은 중국으로 망명한 둘째형이 남겨 놓고 만돌린을 타며 노래를 부르고 오선지를 베끼며 세월을 보냈는데 이렇게 음악과 만난 정률성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외삼촌 최홍종의 축음기였다. 이 축음기를 통하여 정률성은 이 시기에 벌써 슈만의 《환상곡》과 《유모레스크》그리고 드보르작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등 세계명곡과 접촉하게 되였다. 1933년 봄에 항일애국자들이 중국의 남경에서 학교를 꾸리고 학생들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조선 남부도시 광주시에까지 전해졌다. 이 무렵 셋째형 정의은이 누님 정봉은을 남경에 데려가 황포군관학교 4기 졸업생 박건웅과 결혼을 시키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고향으로 비밀리에 들어왔다. 정률성은 셋째형이 중국 남경 독립군학교의 밀령을 받고 우리민족 청년들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단호히 그를 따라 중국에 망명할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어머님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큰 형이 죽고 둘째형, 셋째형과 누나가 모두 망명을 떠난 집에 그라도 남아야 한다는 당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셋째형이 중국으로 망명할 청년들은 목적지에 보내고 오다가 일제정탐군에 들켜 순사들에게 잡혀갔다. 물론 셋째형은 상인으로 가장을 했고 외삼촌이 도움을 주어 곧 풀려났으나 이 바람에 놀란 어머니는 정률성도 즉시 함께 떠나라고 하였다. 사회의 탁류 속에서 갈길 몰라 헤매며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통탄하던 정률성은 이렇게 16세의 어린 나이에 고향을 등지고 목포에서 “평안환” 배를 타고 셋째형과 함께 일본을 거쳐 중국 상해로 망명해 왔다. 그 후 양자강 아래 기슭에 위치한 큰 도시 남경에서 독립운동가들의 반일단체 의열단이 조직한 조선혁명간부학교에 들어가 항일애국이론을 학습하고 민족재생의 빛발을 보게 된 정률성은 1934년 겨울 이 학교를 졸업한 뒤 남경에서 강도일제를 반대하는 의열단 비밀활동을 진행하면서 피아노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그 뒤 친구의 소개로 상해에 있는 레닌그라드의 유명한 음악가인 소련교수 끄릴노와를 만나 성악공부를 하였다. 그의 음악적 천부는 성악교수로부터 이탈리아에 가서 계속 공부한다면 반드시 훌륭한 가수가 되리라며 극찬을 받았을 정도로 뛰어났다. 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한해 반 동안에 그는 남경에서 수백리 떨어진 상해로 매주 한번씩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성악리론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많은 명곡을 배워 중국어와 외국어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1935년 중국공산당의 호소에 따라 북경의 학생들이 “내전을 중지하라!”, “일제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소리높이 외치면서 벌인 “12․9학생운동”은 즉시 전국 각지에 파급되었으며 항일구국의 노래를 부르는 운동이 온 나라 방방곡곡에서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당시 전한 작사, 섭이 작곡으로 된 《의용군행진곡》은 진군의 나팔 소리와도 같이 거리와 마을, 공장과 광산들에 울려 퍼졌으며 나라를 사랑하는 수억만 인민들의 심장을 불타오르게 하였다. 이 세차게 굽이치는 노래의 물결 속에 뛰어든 정률성은 시위대열의 앞장에서 사람들의 붐비는 거리에서 항일구국의 노래를 부르고 가르쳐주었으며 애국청년들의 모임들에서 언제나 《의용군행진곡》을 목청껏 불러 그들의 가슴에 필승의 신념과 굽힐 줄 모르는 투지를 안겨주었다. 1936년 봄, 정률성은 진보적 청년들이 조직한 항일문예 단체인 “5월문예사”에 들어가 핵심요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문예사 발기자 추취도가 쓴 가사에 곡을 달아 《5월의 노래》라는 노래를 지었는데 그 즉시 “5월문예사”의 사가로 인정받고 전체 사원들 속에 퍼지게 되었다. 이 문예사의 활동에서 정률성은 중국의 문예일군들한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고 그들의 투쟁에서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큰 힘을 얻었다. 1937년 “7․7사변” 후 정률성은 상해에서 대공전복무단(大公戰服務團)에 참가하여 선전대대 음악대장의 중책을 맡고 열화 같이 뜨거운 심정으로 선전선동사업을 진행하였으며 항일애국정신으로 자기를 무장하고 애국적인 음악가들과 사귀었다. 이해 8월 그는 남경에서 파리음악대학 고급작곡반을 졸업하고 돌아온 선성해를 만났다. 선성해는 그 때 자기가 방금 지은 노래 《구국군가》를 정률성에게 주면서 불러보라고 하였다. 오래 전부터 음악작품을 통하여 선성해를 잘 알고 있으며 흠모해 오던 정률성은 그의 작품을 받아 쥐자 노래의 격조 높은 선율, 절절한 정서에 깊이 매혹되였다. 첫 상봉에 이처럼 정열적이고 재간있는 젊은 음악가와 사귀게 된 선성해는 몹시 기뻐하면서 “우리 함께 합작해 봅시다!”라고 하며 정률성의 손을 굳게 잡아 주었다.       2. 《연안송》, 어머니품에 바치는 송가    1937년 여름에 항일전쟁의 포성이 울렸다. 온 나라 여러 민족의 청년들은 일제를 몰아내고 나라를 구원할 진리를 탐구하기 위하여 항일의 중심인 연안에 밀려들었으며 여기서 항일애국의 사명을 받아 안고 또다시 항일전선으로 달려 나갔다. 이해 10월 열아홉이 된 정률성은 그때 항일구국운동의 지도자들이었던 리공박, 두군혜의 고무와 지지하에 서안 팔로군행정처 주임 림백거동지에게 보내는 지하공산당원 선협부(조선인, 후에 국민당에 의해 암살당했음)의 소개편지를 지니고 남경을 떠나 연안으로 향하였다. 수십일 후, 바이올린을 어깨에 메고 세계명곡집을 가슴에 품은 그는 끝내 왜적의 첩첩한 봉쇄망을 뚫고 수많은 위험한 고비를 넘으며 꿈에도 그리던 혁명의 성지 연안에 도착하였다. 정률성은 어려서부터 음악으로 성공할 결심을 하여 많은 민요와 세계명곡을 익혔고 배의 힘을 키우기 위해 복부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호흡훈련을 하였다. 그는 모든 삶에서 음악을 떼어내지 않아 캄캄한 방안에서도 콧노래로 작곡을 했고 잠자리에서도 악곡을 구상했을 정도였다. 연안의 땅굴집에 살면서 조밥을 먹는 생활은 고통스러웠지만, 어디에서나 항일애국의 기상이 나래치고 명랑한 노래소리가 울려퍼지는 혁명의 성지는 말 그대로 민족애의 정열과 청춘의 기백으로 정률성의 심장을 틀어잡았다. 그는 섬북공학원 제 1기 7대에서 공부하면서 끓어 넘치는 열정으로 가창활동에 참가하였으며 수천명 대중들의 앞에 나서서 대합창을 지휘하고 하였다. 그 이듬해 5월 연안 로신예술학원이 창립됨에 따라 정률성은 섬북공학원으로부터 로신예술학원에 들어가 근 넉달동안 공부하였다. 어느 날 저녁 무렵 군중집회가 끝난 뒤 정률성은 몇 명 학우들과 함께 북문 밖에 있는 산기슭에 올라가서 연안성의 전경을 굽어보았다. 연안의 장엄한 옛성, 석양에 비친 산마루의 보탑, 맑은 연하수, 그리고 동녘에 떠오르는 밝은 달은 예술가의 가슴을 치는 장면이었다. 대열을 지어 보무당당히 행진하는 전사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노래소리, 웃음소리, 보탑산 봉우리와 연하강물결에 비낀 저녁노을, 이처럼 장엄하고 황홀한 화폭 앞에서 정률성은 가슴속에 넘치는 격정을 누를 길 없어 ‘아, 연안!’하고 환성을 올리었다. 연안에 들어온 뒤 몇 달 동안 이 영광의 도시에 드리는 서정적이며 전투적인 송가의 선율 속에 밤낮으로 갈등을 느끼고 있던 그는 옆에 서있는 문학학부의 여학생 막야에게 “나에게 가사를 써주오!”라고 부탁하였다. 그의 정서는 즉시 막야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비록 민족은 달라도 하나의 신념과 이상을 품고 새로운 기상이 나래치는 연안의 품에 안긴 같은 열혈청년으로서 그들의 생각과 지향은 너무나도 일치되었다. 때문에 막야가 쓴 《연안송》의 가사를 받아 쥐었을 때 정률성은 용솟음쳐 오르는 샘물과도 같이 심장의 뜨거운 격정을 쏟아부어 단숨에 작곡을 끝낼 수 있었다. 중국혁명의 역사와 더불어 빛나는 혁명송가 《연안송》은 바로 이와 같이 우리 조선족의 참된 아들 정률성에 의해 작곡된 것이다.    아, 연안! 장엄하고 웅위한 도시 철벽의 성새(城塞), 승리의 요람 그대 이름 세월과 함께 역사에 길이 빛나리    이 해 봄 어느날 저녁 모택동주석을 비롯한 중앙지도자들이 참석한 련환모임에 《연안송》이 처음으로 무대에서 불려졌다. 끓어 넘치는 정치적 격정을 담은 정률성의 격양된 노래소리는 모주석의 박수와 관중들의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공연이 있은 다음날 중공중앙선전부에서 《연안송》악보를 가져갔고 이 노래는 재빨리 전선과 후방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는데 심지어는 국민당통치구와 동남아의 화교에게까지도 퍼졌다. 송가로서의 정서적 폭과 숭엄한 감정을 잘 살린 노래 《연안송》은 실로 중국인민의 애국투쟁을 승리의 한길로 인도하는 당중앙의 소재지 연안에 대한 열렬한 찬가이며 침략자를 몰아내고 자유로운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그날을 그리는 희망찬 포부와 혁명적 낭만을 그대로 진실하게 담은 불멸의 송가이다. 이 노래의 창작과 유행 과정에 대하여 정률성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항일전쟁이 진행되던 8년동안에 이 노래는 정식으로 출판된 적이 없지만 나래가 돋친 것처럼 연안으로부터 전선에로 해방지역으로부터 국민당 통치지역에로 심지어는 멀리 동남아세아 지역에까지 날아갔습니다. 실로 이것은 상상밖의 일입니다. 이 노래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은 인민들을 항일투쟁에로 부른 당의 호소가 온 나라 인민의 항일열의를 불어일으키고 우리 음악예술인들에게 넓은 무대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며 이 노래가 이렇듯 널리 유행되고 커다란 생활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온 나라 인민들이 혁명의 성지이며 항일의 중심인 연안을 무한히 동정하며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로 불멸의 송가《연안송》은 항전시기 중국의 수천수만의 열혈청년들에게 일제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영웅적인 투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때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도 우리들은 이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연안시대의 혁명전통을 생각하게 되며 원로항일애국자들을 그리게 된다. 극악무도한 “4인무리”들이 살판치던 살벌한 나날에도 행동의 자유와 말할 권리마저 빼앗긴 우리 당의 오랜 동지들이 《연안송》을 입속으로 부르면서 서로 고무지지하고 진리를 위하여 용감하게 싸우지 않았던가!    3. 《팔로군행진곡》의 탄생    1939년 1월 10일 정률성은 연안항일군정대학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당조직의 교양과 동지들의 배려아래, 정률성은 들끓는 항일활동속에 더욱 깊이 빠져들어 꾸준히 모색하고 탐구하는 과정에, 음악창작에서도 생기발랄한 왕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률성은 항일군정대학의 음악교원으로 나라의 방방곡곡에서 온 학생들에게 《연안송》등 애국가요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의 노래소리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와 믿음을 안겨 주었다. 이해 8월 정률성은 연안 남문밖 서산요에 있는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의 한 땅굴집에서 시인 공목과 함께 생활하였다. 어느 날 정률성은 공목에게 “우리도 대합창을 만들어 봅시다.”라고 말하였다.   “대합창이라니?” “물론《팔로군대합창》이지요!”    선성해의 《황하대합창》이 방금 불려지기 시작한 그 때였으므로 《팔로군대합창》을 창작하자는 정률성의 뜻을 공목은 대뜸 알아차렸다. 원래 전선에서 연안에 돌아온 지 얼마 안되는 공목은 풍부한 전투생활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불과 사나흘 사이에 《팔로군대합창》의 가사 여덟수를 전부 써내었다. 작품은 팔로군이란 이름에 맞추기 위해 여덟 부분으로 구성된 것인데 《팔로군 군가》, 《팔로군행진곡》, 《유쾌한 팔로군》, 《자야강 병사의 노래》, 《기병가》, 《포병가》, 《군대와 인민은 한집안 식구》, 《팔로군과 신사군》이 여덟수의 가사는 그 이름으로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률성의 요구에 의해 씌어진 것이다. 피아노도 풍금도 없는 조건에서 정률성은 방안에서 팔을 저으며 걸음을 걸으면서 작곡했으며 때로는 산속에 들어가 목청을 돋아 불러보면서 작곡하였다. 실로 천재음악가라는 표현이 어울릴 일인데 이는 동서고금을 털어서 거의 맨손으로 위대한 음악을 창작해 낸 사례이기도할 것이다. 단지 21세 나이의 어린 청년이 제대로 된 작곡교육을 받은 바도 없건만 포연이 쏟아지는 전쟁터 토굴 속에서 지내며 온몸에서 우러나오는 천재성이 용솟음치며 이 노래를 작곡을 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중국어가 서툴렀다. 그러나 시인 공목을 조르고 다그치며 작사를 재촉하면서 그의 구상을 확실하게 공목에게 전하였다. 《기병가》를 창작할 때에 말발굽 소리를 가사에 써 놓도록 요구하고 《포병가》를 창작할 때에는 쿵쿵하는 포소리를 가사에 써 넣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행진곡은 긴 구절과 짧은 구절을 섞어 엮고 음률이 조화를 이루게 되며 절주가 강하되 중간에 네글자로 된 구절을 세 개 만들어 넣을 것을 요구하여 공목이 그대로 가사를 써주었다. 정률성은 공목이 쓰는 대로 갖다가 작곡을 하는데 피아노도 풍금도 없는 속에서 그저 머리를 흔들며 흥얼거리다가 손으로 박자를 치기도 하고 때로는 책상 주위를 빙빙 돌며 발구름으로 곡조를 구상하다가 공목이 옆에서 웃고 있으면 움집을 나가 산기슭에서 산비탈에 올라 작곡을 하였다. 그는 늘 피아노 대신 콧노래로 곡을 부르며 고쳐 나갔고 온몸을 바쳐서 창작에 열중하였다. 그는 자기가 지은 노래들을 먼저 작사자인 공목에게 불러주면서 그의 의견을 듣고는 하였다. 이와 같이 작곡하는데서 시간이 좀 걸려 8월말인가 9월초에야 《팔로군대합창》의 작곡이 전부 끝났다. 이 해 12월 당조직의 결정에 의하여 로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서 성악을 가르치게 된 정률성은 영용한 팔로군장병들에게 드리는 노래 《팔로군대합창》을 학생과 전사들에게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전진, 전진, 전진! 태양을 향한 우리 대오 조국의 대지 위에 섰다. 민족의 희망을 안은 우리 힘 막을 자 그 누구냐? 우리는 싸움의 전위 우리는 민중의 무장 두려움 없이 굴함 없이 영용하게 싸워 왜놈들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자 자유의 기치 높이 날리자 아, 나팔소리 울린다. 아, 항전의 노래 우렁차다 동무들 발을 맞춰 항일의 싸움터로 동무들 발을 맞춰 적들의 후방으로 전진, 전진 태양을 향한 우리 대오 나가자 화북벌로! 장성밖으로!               ― 《팔로군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인민군대의 영용무쌍한 형상을 창조하고 인민군대의 백전백승의 영웅적 기백을 심각하게 표현한 《팔로군대합창》 그의 박력있고 장중한 노래들은 누구의 비준도 받지 않았으나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하여 삽시에 연안의 여러 기관과 부대, 학교들에 퍼졌으며 항일전쟁 대오에서 널리 불리게 되었다. 《팔로군대합창》은 1939년 겨울에 로신예술학원 음악부에서 등사판 책으로 만들어지고 1940년 초에 정률성의 지휘하에 로신예술학원 악단과 합창단의 출연으로 《팔로군대합창》의 첫공연이 연안 중앙대강단에서 진행되어 절찬을 받았다. 이 해 여름 팔로군 총정치부 선전부장 소향영은 정률성과 공복을 식당에 청하여 불고기를 대접하고 《팔로군대합창》의 노래들이 이미 여러 항일근거지들에 퍼져 광범한 전사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고 알리면서 그들의 성과를 치하하였다. 그 뒤 《팔로군군가》와 《팔로군행진곡》이 중공중앙 군사위원회의 비준을 받고 정식으로 《팔로군잡지》에 발표되었다. 지난 항일전쟁의 초연탄우 속에서 이 노래들은 일본침략자들을 때려 엎는 승리의 한길로 우리 군대 전사들을 힘있게 고무한 진군의 나팔로 되었다. 항일전쟁이 끝나고 팔로군이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이 바뀌어짐에 《팔로군행진곡》은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고쳐졌다. 1949년 10월 1일 수도 북경에서 성대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의식이 진행되었을 때 정률성이 지은 이 명곡은 천안문광장 상공에 울려 퍼졌다. 그 뒤 이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확정되어 인민군대의 필승불패의 상징으로 되었으며 따라서 정률성의 이름은 전국 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4. 조선에서의 나날에    1945년 일제를 몰아내고 민족의 해방을 맞은 조선은 재능 있는 작곡가 정률성을 불렀다. 10여년만에 찾아온 어머니의 나라는 사람마다 환희에 들끓고 산천도 거리도 마을도 새롭게만 안겨 왔다. 조국을 되찾은 기쁨 속에서 일어서는 조선의 새 모습은 작곡가 정률성의 가슴을 한없이 설레게 하였다. 그는 조직의 배치에 의하여 1946년 1월 해주에 가서 황해도 당선전부장으로 일하면서 해주음악전문학교를 꾸렸으며 1947년 봄에는 평양에 돌아와 보안간부훈련대대부 구락부장(즉 문화부장)을 담임하였고 이해 3월 10일 보안간부훈련대대부협주단(현재 조선인민군협주단 전신)을 조직하고 그 협주단 단장의 중책을 맡았다.         우리는 강철 같은 조선인민군       평화와 정의 위에 싸우는 전사       불의의 원쑤들을 다 물리치고       조국의 완전독립 쟁취하리라       인민의 자유행복 생명을 삼고       규율과 훈련으로 다진 몸이니       승리의 민주대열 조선의 인민군       나가자 용감하게 싸워 이기자          ― 《조선인민군행진곡》    정률성이 작곡한 《조선인민군행진곡》(박세영 작사)은 조선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혁명전통을 계승한 조선인민군의 군가로서 인민군장병들을 승리와 영광의 한길로 고무한 우수한 음악작품이다. 이밖에도 정률성은 《조선해방행진곡》(강승환 작사), 《조중친선》(김순석 작사), 《조국의 아들》(김우철 작사) 그리고 대합창곡인 《두만강》(조기천 작사), 《동해어부》(김학철 작사)등 30여 수의 노래들을 창작함으로써 조선인민의 새 조국건설과 중조 두 나라 인민들 사이의 친선단결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음악가 정률성의 자랑찬 성과는 조선 정부와 인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은 1948년 2월 8일 일제에게서 되찾은 조국의 경제건설을 위하여 훌륭하게 일한 정률성에게 표창장을 수여하였으며 1948년 11월 23일에는 또 “8․15 조국탈환 3주년기념공동준비위원회”의 상을 수여하였다. 1949년 4월 조선국립음악대학이 창립된 뒤 정률성은 그 대학에 발령을 받아 작곡부장으로서 교편을 잡고 후대양성 사업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끓어넘치는 열정으로 조선의 새 가극창작에 달라붙었다. 그는 가극 《막을 수 없는 그의 노래소리》(사량 작사)를 창작하여 1950년 8․15 축전무대에 내놓으려고 하였지만 이 해 6월 25일 조선전쟁이 발발함으로 말미암아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지키기 위한 조선 조국해방전쟁의 불길 속에서 정률성은 농촌에 나가 인민대중들에 대한 조직전선 사업을 진행하면서 《인민공화국의 기치》(석광희 작사), 《공군의 노래》(김학철 작사), 《우리는 땅크 부대》(박남수 작사)등 10여 수의 노래들을 창작하여 인민군 장병들을 힘있게 고무하였다. 이 노래들은 대부분이 방공호나 눈보라치는 길가에서 입김으로 만년핀을 녹여가며 쓴 것이다.    5. 새나라 건설의 교향곡을 울리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1년 후인 1950년 10월, 정률성은 80고령이 되는 어머님을 모시고 다시 중국에 왔다. 그의 안해와 딸은 이보다 먼저 북경에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 중국에 돌아온 후 작곡가 정률성의 창작적 재능은 더욱 빛났다. 그는 선후하여 북경예술극장, 중앙가무단, 중앙악단의 직업작곡가로 있으면서 많은 음악작품을 창작하였다. 1952년에 그는 사품치며 흐르는 중국남방의 가릉강에 가서 뱃사공들과 함께 생활하며 합창곡 《강위의 노래소리》를 지었으며 1953년에는 흰 눈에 뒤덮인 중국북방의 흥안령 원시림속에 들어가 벌목공들과 함께 일하며 《채벌가》, 《홍안령에 눈이 내리네》등 노래들을 지었고 1954년에는 남해의 주산군도에 찾아가 《강대한 함대 바다를 누비네》,《포정은 출동했다》,《전진, 인민공군》등 군가들을 창작하였다. 그 뒤 그는 새 기상이 나래치는 중국 농촌의 새 모습을 노래한 대합창 《행복한 농장》등을 내놓았다. 이밖에도 그는 조국의 미래인 귀여운 어린이들에게 《우리는 행복해요》, 《푸른 조국》, 《별노래》, 《평화의 비둘기》,《소년운동원가》등 소년아동가요를 비롯한 40여수의 노래들을 지어 주었다. 로동자와 농민, 해방군전사와 어린이들을 위한 다방면적 주제의 이런 음악작품들, 생활의 기백과 정열이 넘쳐흐르는 그의 노래들에서 우리는 새 중국의 건설사업과 빛나는 미래에 대한 음악가 정률성의 불같은 사랑과 기대를 가슴 뜨겁게 느낄 수 있다 1957년과 1958년에 그는 운남성에 여러번 찾아가서 라이족의 민간전설과 음악을 깊이 연구하고 5막 가극《망부운(望夫云)》을 창작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 뒤 1962년과 1963년에 그는 또 현실주제의 새 가극 《설란(雪蘭)》 창작에 심혈을 전부 쏟아 부었다. 그러나 음악가의 이러한 불타는 창작정열은 1966년에 이르러 “문화대혁명”이란 때 아닌 시련을 맞았다. 그러나 이 “10년 동란”의 무서운 재난과 고통을 이겨낸 작곡가 정률성은 다시 오랫동안 막혔던 창작열의를 터뜨려 중국인민해방군 창건 50돌과 항일전쟁 개시 40돌에 드릴 교향악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중국 인민해방군》, 가극 《베쮼》을 비롯한 대형음악작품 창작계획을 짜놓고 새로운 창작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기나긴 혁명의 길에서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으며 병이 생겨도 제때에 의사를 찾지 않고 제대로 쉬지 않은데다가 “4인무리”의 심한 압제와 타격을 받아 여러해 동안 고혈압으로 고생하여 오던 정률성은 이 때 혈압이 180~220 사이를 오르내렸지만 손에서 한시도 붓을 놓지 않았다. 혈압이 높아 지탱해낼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책상에 엎드려 좀 쉬었다가 계속 일하곤 하였다. 서거하기 이틀전에는 지프차를 타고 수백리 길을 달려 장가구에 가서 주은래 총리를 추모하는 조곡을 창작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장가구에서 돌아온 이튿날인 1976년 12월 7일 아침, 그의 몸은 몹시 지쳤고 혈압은 올라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야외에 나가 신선한 공기도 마시고 새 작품도 구상하려고 여나므살되는 조카딸과 어린 손자애를 대리고 북경의 서북쪽 교외에 있는 창평에 고기잡으러 갔다. 찌뿌듯하게 흐린 날씨에 맵짠 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이날은 몹시도 추웠다. 오전 열시에 창평운하에 이른 정률성은 투망도구들을 꺼내어 다년간 익힌 솜씨로 고기그물을 던졌으며 이윽고 그물을 잡아당기려 하였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뇌출혈이 생겨 강기슭에 쓰러지고 말았다. 두 어린이의 놀란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이웃동네 고마운 사람들에 의하여 즉시 창평병원에 호송되어 구급치료를 받았지만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이날 오후 5시10분에 58세를 일기로 그의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다. 그 후 그는 북경 근교의 팔보산에 묻혔다. 정률성의 서거는 온 나라 여러 민족 인민들과 예술인들의 커다란 슬픔을 자아내었다. 그의 서거를 알리는 비보를 접한 조선족인민들은 그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하였다. 한평생을 빛나는 공산주의 위업과 중국인민의 해방과 건설위업에 남김없이 바친 우리 조선족의 우수한 음악가 정률성은 애석하게도 우리 곁은 떠나갔지만 그가 남긴 불멸의 노래들은 의연히 우리나라 인민들속에서 높이 불리고 있으며 그의 이름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6. 정률성음악의 가치    작곡가 정률성의 생애는 바로 음악의 생애이다. 그는 우리민족이 낳은 저명한 작곡가로서 우리나라에서 섭이, 선생해와 나란히 3대 작곡가로 꼽히는 훌륭한 작곡가이다. 작곡가 정률성의 음악가적 생애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로 그는 혁명투쟁사를 대변하는 훌륭한 작품을 남긴 위대한 음악가이다. 그의 음악은 혁명을 위해 불타오르는 불덩어리 그대로였다. 그는 늘 력사상황을 떠난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일제침략으로 유구한 민족력사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에 항일전쟁에 투신하기위해 망명한 애국음악가가 정면으로 마주한 것은 항일전쟁 그것뿐이었다. 또한 중국과 조선에서의 전쟁시기 그리고 조국의 평화건설시기에도 그의 음악은 항상 인민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았다. 그의 음악은 바로 이렇게 혁명투쟁의 서사시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둘째로 그의 음악적생애는 독창적인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한 세계적인 천재음악가로서의 삶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섭이나 선성해 같은 음악가가 있었고 그들에게는 여러 악조건의 어려움 속이라 할지라도 나름으로 최소한의 음악환경은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정률성은 사실상 뚜렷한 정규음악교육을 받은 기간이 없었고 대신 혈혈단신 망명청년에게는 이국땅에서 전란에 쫓기고 총탄에 흔들리는 극한상황만이 주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예술적삶은 여러 천재들이 그러하듯 악조건을 승화시켜 영광을 얻어낸 위대한 인간승리의 삶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률성이 위대한 천재성으로 이끌려진 천부의 음악가임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셋째로 그는 인간과 풍속과 생활을 사랑한 작곡가였다. 그는 단지 책상머리에 앉아서 잔재주로 작곡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작곡을 할 때는 정면으로 삶에 뛰어들어 완벽할 정도로 처절한 경험을 겪고서 창작을 했다. 그는 무서울 정도로 처절한 체험이 없는 잔재주 음악을 항상 거부하며 정열의 삶을 산 인물이였다. 정률성이 평생을 바쳐서 작곡한 300여곡의 작품은 국내외 음악사로 볼 때 결코 쉬운 기록은 아닐 것이다. 넷째로 정률성은 철학이 있는 음악가였다. 문화대혁명의 어둠 속에서도 끝까지 변절을 하지 않고 어둠의 음악을 만들지 않은 그의 지조는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정률성의 음악을 이용하려는 “4인무리”들의 집요한 공격과 회유, 탄압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고서 올곧은 철학을 지킬 수 있었음에 그의 삶은 더욱 빛나는 것이다. 시류에 따르며 안일을 추구하는 음악을 통해서 편한 삶을 살겠다는 의식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 그의 생애이다. 정률성은 예술을 정면으로 사랑한 본격 창작의 참다운 음악가였다. 일찍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왕진은 정률성의 창작성과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섭이, 선성해의 뒤를 이어 나타난 또 한분의 걸출하고도 우수한 작곡가이며 중국무산계급혁명음악사업의 개척자의 한 사람이다.”고 말했고 저명한 시인 하경지는 “나는 정률성을 통하여 조선민족을 알았다. 정열적이고 재간 많고 정의감과 헌신성이 강한 것이 조선민족인줄 알았다. 뿐만 아니라 정률성을 통해 또 수많은 조선민족의 아들딸들이 중화민족의 해방위업을 위해 총을 들고 용감하게 싸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정률성처럼 시대의 앞장에 서서 중국인민을 혁명의 제1선으로 고무추동해준 일류의 예술가를 낳아 키워준 것이 조선민족인줄 알았다.”고 말하였다. 일찍 조선에서는 정률성의 음악생애를 담은 예술영화《음악가 정률성》을 제작하였는데 이 영화는 1992년 제2차 “2·16 영화상” 작품상을 받았다. 또한 2002년 장춘영화촬영소에서도 정률성의 혁명예술생애를 그린 영화 《태양을 향해》를 제작하였는데 이 영화는 그해 중공중앙선전부 등 부문에 의해 16차 당대회 헌례작품으로 확정되였으며 2004년 조선 평양국제영화제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2005년 11월 11일 그가 태어난 고장인 한국 광주시에서 정률성의 이름으로 진행된 음악제가 개최되었다. 이 음악제에서는 작곡가 정률성의 영상물 및 노래 등을 중심으로 중국과 한국의 대표적 가수와 합창단들이 그의 음악을 함께하였고 한국과 중국 그리고 조선에서의 작곡가 정률성의 삶과 예술을 재조명하였다. 이 음악제는 현재 한국에서 《광주정률성국제음악제》라는 이름의 국제적인 행사로 자리 잡아 매년 성황리에 펼쳐지고 있다. 정률성, 그 이름은 그의 불멸의 작품과 함께 영원할 것이다.  
1086    <폭포> 시모음 댓글:  조회:4343  추천:0  2015-04-27
    + 폭포  한 가마니씩 쏟는 저 하얀 웃음 누가 저렇듯 웃을 수 있을까 산이 쪼개지듯 말입니다 한바탕 지르는 저 우렁찬 소리 누가 저렇게 소리를 지를 수 있을까 산이 흔들리듯 말입니다.  (이진호·시인) + 폭포 떨어져 내려도 희망이다 절망의 힘도 이렇게 크면 희망이 된다 비명도 없이 곤두박질 치다보면 딛고 섰던 땅까지 움푹 파지지만 그보다 더 세찬 무엇이 생명을 받들고 위로 솟구치고야 만다 수직의 절망이 수평의 희망으로 튕겨 흐르는 숨막힘 (고옥주·시인) + 폭포 앞에서 찬란히 부서졌다가  다시 이룬다  용솟음치는  열망  장엄한  헌신  모든 것이 다  자상한 가르침이다  (임영준·시인, 부산 출생)  + 불일폭포 폭포에 나를 던집니다 내가 물방울이 되어 부서집니다 폭포에 나를 던집니다 갑자기 물소리가 그치고 무지개가 어립니다 무지개 위에 소년부처님 홀로 앉아 웃으십니다  (정호승·시인, 1950-) + 폭포  흐르는 물도 때로는 스스로 깨지기를 바란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끝에서 처연하게 자신을 던지는 그 절망, 사람들은 거기서 무지개를 보지만 내가 만드는 것은 정작 바닥 모를 수심(水深)이다. 굽이치는 소(沼)처럼 깨지지 않고서는 마음 또한 깊어질 수 없다. 봄날 진달래, 산벚꽃의 소매를 뿌리치고 끝 모를 나락으로 의연하게 뛰어내리는 저 폭포의 투신. (오세영·시인, 1942-) + 직소폭포  얼마나 오래도록 탁한 생각을 흘려버려야  직소폭포, 저 차고 깨끗한 물빛이 되는가.  얼마나 많은 주저와 두려움을 베어버려야  직소폭포, 저 꼿꼿한 풍경으로 설 수 있는가.  얼마나 숱한 울음을 안으로 눌러 죽여야  직소폭포, 저 시원한 소리의 그늘을 드리우는가.  그래, 저러히 높고, 크고, 깊게 걸리는 폭포로서만이  내변산 첩첩산중을 두루 흔들어 깨울 수 있는 것이리. (김선태·시인, 1960-) + 폭포의 미래     내가 폭포를 좋아하는 것은  물이 땅에서 솟는 것이 아니라  아득한 옛날에서 직접  미래로 뛰어내리기 때문이다  나 하나만 보고 뛰어내리는  아주 겁 없는 여인이기에  반갑다가도  뛰어내린 그 길로 돌아오지 않아  나는 항상 디딤돌로 남아 있어  서럽다 (이생진·시인, 1929-)  + 폭포  밑으로 밑으로  몸을 굽히다 보면  천둥치는 바닥이 보인다.  슬픔의 끝을 밟고 선  눈물의 강도 보인다.  추락한 폭포는  고통을 이겨낸 하얀 입술로  안개 속 가는 빛을 뿜어내어  오르고 또 오르고  바닥을 딛고 선 물방울은  절벽 끝에 무지개 꽃을 피운다.  잔잔한 수면 위에  정점의 추억을 딛고 선  바닥은 이제 희망이다. (이남일·시인, 전북 남원 출생) + 폭포 오직 한 길만 아는 이  그저 하편향할 뿐이다  추락이 아니라 더 낮아지기 위하여  몸부림칠 뿐이다  더 낮고 더 외진 곳을 향하여  때론 깊은 계곡에서 무지개를 피우기 위하여  더 깊고 더 음습한 그늘을 향한다  부서지는 것은 통증만 유발하는 건 아니다  산산이 부서짐으로써  더 새로워지고 더 맑아지고  더 생생해지는 것이다  얼얼한 피부로 얼얼한 정신으로  눈에 힘이 서고 팔뚝에 근육이  팽팽히 차오르는 것이다 (권순자·교사 시인, 1958-)  + 백두산 폭포  아, 아, 터져 나오는 감탄의 소리들 누가 飛流直下三千尺이라 했다던가. 날아 떨어지는 폭포, 삼천 척은 못될 듯하나 동해안 백사장에 밀려드는 잔잔한 파도 같은  물무늬 지으며 하늘에서 쏟아지는 장대한 강물 모두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멀리서 보면 앞산에 널어 바래던  어머니의 한 필 무명베 같고  어찌 보면 전설 속에 등천하는 용 같더니, 다가갈수록 일대에 안개비처럼 물보라 날리며 가뭇한 하늘에서 포효하며 뛰어내리는  저 거대한 것들은 아프리카 들소 떼, 또는 그 검은 몸뚱이와 다른 흰 혼백들의 낙하. 아, 하는 감탄사 속에 묻히는 숱한 문장들 아득한 신비 속으로 사람들을 빨아들이는데, 저 많은 물이 하늘 못 어느 샘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쏟아지는 걸까. 나이아가라나 이구아수 폭포를 못 봐서  이 물줄기가 감탄의 폭포로 쏟아지는 걸까. 압록 두만 송화 3강의 근원이 된다는  네 위대함 앞에서 내 왜소함을 깨달으며 얼음 같은 물에 얼굴을 씻고 폐부를 헹군다.  고래의 배보다 희고 상어보다 억센 너를 보며 나를 삼키려다 토해낸 동해 바닷물처럼 물은 살아 있는 존재임을 다시 깨달으며 몇 장의 사진으로 다 담을 수 없는 폭포수  그 감격을 아, 아, 소리로만 담아 가노라. (최진연·목사 시인, 경북 예천 출생)    
1085    상말, 해학, 풍자적 속담 댓글:  조회:6563  추천:0  2015-04-27
  ★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상말속담 모음 ★                                                          나... 임삿갓인데 기냥 웃고 넘어갑시다......허허허!!!   *좆 빠진 강아지 모래밭 싸대듯 한다. -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며 싸대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  *어미 씹에 새끼 좆 걸리듯 한다. - 집안이 망하려면 망측스런 일이 생긴다는 뜻. *사타구니만 봐도 보지 봤다고 한다. - 별 것도 아닌 것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떠벌리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이 말이 생각난다.  *화냥년 시집 다니듯 한다. - 요즘 철새정치인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 합종연횡(合從連橫)을                                            일삼고 있는 모습이 이 말을 연상케 한다. *개 씹에 덧게비 끼듯 한다. - 흘레하고 있는 암캐에게 다른 수캐가 덤비듯,                                            관계없는 일에 덧게비처럼 덩달아 덤벼드는 사람.  *좆 물린 강아지처럼 앵앵거린다. - 무슨 소린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마구 지껄이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 *공씹하고 비녀 빼간다. - 배신과 야합을 일삼는 배은망덕하고 추잡한 인간들을 두고 하는 말. *낡은 바지에 좆 나오듯 한다. - 나와서는 안 될 것이 주책없이 아무데나 나온다는 뜻.  *속곳 벗고 함지박에 앉았다. - 벌거벗고 함지박에 앉아서 망신을 당하듯,                                               온당치 못한 끼여들어 망신살을 당함을 일컫는 말. *염치 없기는 씹 본 좆이다. - 한번 맛들인데 길들여져 주변의 눈치를 의식치 않고                                             막무가내로 덤비는 것을 이르는 말. *거미줄로 좆 동이듯 한다. -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을 두고 일컫는 말. *도깨비 보지털 같다. - 비슷하기는 하지만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히 말할 수 없다는 뜻. *귀에 당나귀 좆을 박았나? - 큰소리로 말을 하거나 여러 번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일컫는 말. *부처도 씹 얘기만 하면 돌아앉아 웃는다. - 부처같이 점잖은 사람도 성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웃듯,                                                                누구나 관심있고 좋아하는 얘기를 하면 관심을 기울인다는 말.   ★ 가시나 못된 것이 과부 중매선다.  - 처녀가 해서는 안될 일을 하면 남에게 욕을 먹게 된다 는 뜻.  ★ 가지 밭에 자빠진 과부다.  - 복이 있는 사람은 불행한 일로도 오히려 행복하게 된다 는 뜻.  ★ 곁눈질에 정 붙는다.  - 남녀간에는 흔히 곁눈질 끝에 서로 사귀게 되고 정도 들게 된다는 뜻. ★ 계집과 숯불은 쑤석거리면 탈난다.  - 여자는 유인하게 되면 타락하게 되고, 숯불은 쑤석거리면 사그라지게 된다는 뜻. ★ 고쟁이 열두 벌 입어도 보일 것은 다보인다.  - 여자의 고쟁이는 아무리 여러 벌 입어도 가랑이를 벌리  면 보여서는 안될 것이 다 보이듯이 아무리 많아도 제 구 실을 못한다는 뜻. ★ 길 건너 큰아기는 내다보다가 다 늙는다.  - 길가에 사는 처녀는 길에 오가는 총각만 내다보다가  시집을 못가고 늙듯이, 처녀가 총각을 너무 고르다가는 시집을 못가게 된다는 뜻. ★ 길에 돌이 많아도 연분이 있어야 찬다.  - 세상에는 사람이 많지만 연분이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뜻.  ★ 길 터진 밭에 마소 안 들어갈까? (제주도)  - (1) 입구를 열어둔 밭에는 마소가 들어가게 된다는 뜻.  - (2) 바람끼 있는 여자에게는 남자가 들러붙는다는 뜻. ★ 낳을 적에 봤더라면 도로 틀어박을 걸  -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이 태어났다는 뜻. ★ 노처녀 시집 보내느니 대신 가는 것이 낫다.  -눈이 높아져 비위를 맞춰주기가 매우 어렵다는 뜻. ★ 놀던 계집은 결단이 나도 엉덩잇 짓은 남는다.  - 화류계에서 놀던 여자는 성행위가 능숙해져 화류계를  은퇴해도 그 짓만은 남듯이,  한번 든 버릇은 환경이 바뀌어져도 버리지 못한다는 뜻. ★ 눈덩이와 갈보는 구를수록 살찐다.  - 눈덩이는 굴리면 점점 커지고, 갈보는 구를수록 돈이 많이 생긴다는 뜻.  ★ 늦바람난 여편네 속곳 마를 여가 없다.  - 40대 여자가 바람이 나면 젊은 여자보다도 더 심하게 바람을 피운다는 뜻.  ★ 다른 도둑질은 다 해도 씨도둑질은 못한다.  - 일반 물건은 도둑질해서 써도 표가 나지 않지만, 씨 도둑질은 어디가 닮아도 닮기 때문에 탄로가 난다는 뜻. ★ 달걀에 모난 데 없고, 화냥년에 순결 없다.  - 화냥질을 하는 음란한 여성에게는 순결성이 있을 수 없다는 뜻.  ★ 더부살이 총각이 주인 아가씨 혼사 걱정한다.  - 제 앞 갈무리도 못하는 주제에 쓸데없는 남의 걱정을 한다는 뜻.  ★ 도랑 새우도 삼년이면 씨꽃이 돋는다.  - 아무리 못난 여자라도 나이만 들면 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뜻.  ★ 도리깨 구멍마냥 하나밖에 쓸 것이 없다.  - 여자라고 여자다운 데가 하나도 없고, 다만 잠잘 때나 쓰일 뿐이라는 뜻.  ★ 닷 돈 보고 보리밭에 갔다가 명주 속곳만 찢겼다.  - 재산 있는 줄 알고 보리밭에 따라갔다가 몸만 버렸다 는 뜻.  ★ 돈 있으면 처녀 불알도 산다.  - 돈만 있으면 세상에서 못 사는 물건이 없고 못 하는 일도 없다는 뜻.  ★ 들은 귀는 천 년이요, 말한 입은 사흘이다.  - 언짢은 말을 들은 사람은 두고두고 잊지 않고 있지만, 말 한 사람은 바로 잊어 버리게 된다는 뜻.  ★ 돌팍이 매끄럽게 길이 나야 남편 맛을 안다.  - 여자는 시집 가서 몇 해가 지나야 성생활에서 진미를 알게 된다는 뜻.  ★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안다.  - 정은 들 때는 몰라도 정이 떨어질 때는 역력히 알게 된다는 뜻.  ★ 딸년은 알도둑이다.  - 딸은 친정에 오면 좋은 것만 가져간다는 뜻.  ★ 딸은 쥐 먹듯 하고, 며느리는 소 먹듯 한다.  - 미운 며느리는 많이 먹는 것 같이 보인다는 뜻.  ★ 딸의 시앗은 바늘 방석에 앉히고, 며느리 시앗은 꽃 방석에 앉힌다.  - 사위가 첩을 얻어 딸을 구박 하는 것은 미워도, 자식이 첩을 얻어 며느리를 구박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다는 뜻.  ★ 딸의 오줌 소리는 '은조롱 금조롱' 하고, 며느리 오줌  소리는 '쐐' 한다.  - 딸의 오줌 소리나 며느리의 오줌 소리나 다 같지만, 상대방이 예쁘고 미운 데 따라서는 듣는 사람의 감정이 달라진다는 뜻.  ★ 뜨물로 된 놈이다.  - 정액으로 된 놈이 아니고 뜨물로 된 사람이라 사람 구실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  ★ 무릎을 벗겨가며 자식 헛낳다.  - 힘들게 성교해서 낳은 자식이 못되게 되어 자식 농사를  버리게되었다는 뜻.  ★ 물동이 인 여자 귀 잡고 입 맞추기(흥부전) .  - 남의 약점을 이용하여 못된 짓을 한다는 뜻.  ★ 물에 빠진 건 건져도 계집에게 빠진 건 못 건진다.  - 남자가 여자에게 한번 빠지게 되면 끊기가 매우 어렵다 는 뜻.  ★ 미인 소박은 있어도 박색 소박은 없다.  - 흔히 미인의 마음씨는 너그럽지 못하지만 박색의 마음 씨는 너그러워 가정이 화복하므로 이혼하는 일이 없다는 뜻.  ★ 미인은 사흘에 싫증이 나고, 추녀는 사흘에 정이 든다.  - 여자의 겉만보고 좋아하면 길게 못간다는 뜻.  ★ 사랑은 풋사랑이 좋고, 바람은 늦바람이 좋다.  - 이성간의 사랑은 첫사랑이 좋고, 오입질은 40대가  지나서 늦게 바람을 피우는 맛이 좋다는 뜻.  ★ 시시덕 사랑이 서방된다.  - 처녀총각이 시시덕거리다가 정이 들어 결혼을  하듯이 무슨 일을 시원찮게 시작한 일이 성사가 된다는 뜻.  ★ 시어머니 죽고 처음이다.  - 시어머니와 한방에서 거처하는 부부가 시어머니의  방해로 부부간의 정사를 못하다가 시어머니가 죽은 뒤에 처음으로 자유스럽게 부부간에 정사를 하듯이, 기다렸던 일이 오랜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졌다는 뜻  ★ 시집가는 날 등창난다.  - 시집 가는 날 등창이 나서 등을 대고 눕지도 못하게  되듯이, 가장 중요한 때 병으로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는 뜻.  ★ 씹도 못하고 불알에 똥칠만 한다.  - 목적한 일을 하지도 못하도 망신만 톡톡히 당했다는 뜻.  ★ 씹 본 벙어리요, 좆 본 과부다.  - 평소에 몹시 그리위 하던 것을 보고도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좋아 한다는 뜻.  ★ 암내 맡은 수캐가 싸대듯 한다.  - 암내 맡은 수캐가 암캐만 찾아다니듯이, 일은 하지 않고 계집 뒤만 따라다닌다는 뜻.  ★ 억새에 좆 베었다.  - 풋나무 하러 가서 오줌 누다가 억새에 남근을 베이 듯이 하찮은 것에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는 뜻.  ★ 얼굴 못난 년이 거울만 탓한다.  - 자신의 결함은 모르고 남의 탓만 한다는 뜻.  ★ 엎어지면 궁둥이요, 자빠지면 좆 뿐이다.  - 재산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다만 알몸뚱이 하나듯이 밖에 없다는 뜻.  ★ 여자는 서울 말씨에 평양 인물에 강원도 살결이라야 한다.  - 여자의 말씨는 서울 말씨를 써야 귀엽고,  인물은 평양 인물이라야 미인이며, 살결은 강원도 여자 살결과 같이 아름다워야 미인이다.  ★ 여자 얼굴은 스물은 타고난 얼굴이고, 서른은 자기가 꾸민 얼굴이고, 마흔은 남편이 만들어 준 얼굴이다.  - 여자의 20대 얼굴은 타고난 본바탕의 얼굴이고, 30대는 자신이 화장으로 꾸민 얼굴이고, 40대는 남편이 예쁘게 봐주는 데 달렸다는 뜻.  ★ 열녀전 끼고 서방질한다.  - 겉으로는 행실이 깨끗한 척하면서도 못된짓 한다는 뜻.  ★ 장가 가는 놈이 불알 떼놓고 간다.  - 무슨 일을 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을 잊어버린 채  건성으로 한다는 뜻.  ★ 저렇게 급하면 왜 외할미 씹으로 안나왔나?  - 그렇게 급한 일이 있으면 어미한테서 태어나지 말고 일찌감치 외할머니한테서 태어났더라면 지금 와서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 아니냐는, 급히 서두르는  사람에게 조롱하는 말.  ★ 술은 차야 맛이고, 임은 품어야 맛이다.  - 술은 잔에 채워야한다는 뜻.  ★ 코 큰 총각 엿 사주는 년 하듯 한다.  - 크고 좋은 물건을 가진 사람을 유혹하려고 선물까지 주어 가면서 유인한다는 뜻. 
1084    文學作品에서의 諷刺 댓글:  조회:5118  추천:0  2015-04-27
답변 고마워요 문학작품에서 의 출전(出典)은 중국의 시서(詩書)인 《시경(詩經)》에 “시에는 육의(六義)가 있는데 그 하나를 풍(風)이라 한다. 상(上)으로써 하(下)를 풍화(風化)하고 하로써 상을 풍자(風刺)한다.…이를 말하는 자 죄 없으며 이를 듣는 자 훈계로 삼을 가치가 있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을 후세 사람들이 한마디로 풍자(諷刺)라고 표현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라틴어의 satura(원의는 매우 혼잡함)에서 나온 영어의 새타이어(satire)를 번역한 말을 이에 해당시켜서 쓴다.  본래 시의 한 형식이었으나 널리 산문 쪽에서도 발달하여 풍자소설 또는 풍자문학 등의 호칭이 생겼다. 또 전편이 풍자를 주로 한 작품은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 풍자 정신을 느끼게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문학 이외의 회화 ·영화 등에도 풍자적인 작품을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아리스토파네스 등의 그리스 희극(喜劇)에서 이미 왕성한 풍자 정신을 볼 수 있었고, 고대 로마의 루킬리우스, 호라티우스, 주베날리스 등 시인에 이르러 풍자시의 장르가 확립되었다. 이후 풍자문학을 쓴 작가는 많으나, 프랑스에서 라블레, 부알로, 볼테르, 영국에서 양(兩) 새뮤얼 버틀러, 스위프트, 버너드 쇼, 헉슬리, 오웰 등, 독일에서 J.파울, 하이네, 러시아에서 고골리, 시체드린 등은 그 대표적 작가라고 할 것이다. 그 밖에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몰리에르 등의 작가도 풍자적 수법을 크게 활용한 사람들이다.  한국에서는 1930년대에 이 방면의 작품이 나왔는데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이기영(李箕永)의 《인간수업》이다. 주인공은 서재에서 인간수업을 하겠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며 자기가 철학서적에서 얻은 것을 사람들에게 설교한다. 그러나 이론보다 실제의 농촌생활에서 인간을 배운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이 소설은 인텔리의 비현실적인 사고를 풍자하였다. 이 밖에도 채만식(蔡萬植)은 《사라지는 그림자》 《레디 메이드 인생》 《인텔리와 빈대떡》 등의 우수한 풍자소설을 썼으며 김유정(金裕貞)의 《금따는 콩밭》, 계용묵(桂鎔默)의 《백치 아다다》 등도 이 부류에 넣을 수 있는 작품이다. 풍자는 문학 ·회화 ·영화를 불문하고 퇴폐한 시기나 언론이 억압당하기 쉬운 시기에 걸작이 나오는 경향이 많으며 이로 인하여 정치나 세상 돌아가는 방향을 불건전에서 건전한 쪽으로 돌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1083    풍자시 한 둬어 토리... 댓글:  조회:5727  추천:0  2015-04-27
아래 시는 어느 땡중이 쓴 시로 이것과 똑같은 내용을 쓰는 자에게 천냥을 주겠다고 공표를 했으렷다!       이에 김삿갓이 아래와 같이 쓰고 천냥을 받아 가고~     김삿갓이 데리고 온 의원이 아래의 내용으로 또 천냥을 받아가고~     함께 온 기생이 아래의 글로 또 천냥을 받아 갔도다!      
1082    5.000 : 10.0000 = 경쟁 = <<人>> 쓰나미 = <<자연의 분노>> 댓글:  조회:2066  추천:0  2015-04-27
[ 2015년 04월 27일 08시 20분 ]      2015년 04월 27일 08시 13분 ]     2015년 4월 25일 네팔에서 8.1급 지진 발생, 잇따른 주무랑마봉의 눈사태.
1081    송강 정철 <속미인곡> 댓글:  조회:4208  추천:0  2015-04-26
전용뷰어 보기         속 미  인 곡 / 續 美 人 曲   시대:  조선(朝鮮)                 유형 : 작품(作品) 성격 : 가사(歌詞)                작가 : 정철(鄭澈) 창작·발표연도 : 1585∼1589 선조(宣祖)         [1] 작품해설 조선 선조 때 정철(鄭澈)이 지은 가사. 4음보 1행으로 따져 48행이며, 기본 율조는 3·4조가 우세하다. 작품 연대는 정철의 나이 50세(1585)에서 54세(1589) 사이로 추측되고 있다. 군왕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은유적(隱喩的)으로 노래하였다.     이 작품은 『송강가사 松江歌辭』라는 판본에 수록되어 있다. 『송강가사』에는 이외에도 『관동별곡 關東別曲』·『사미인곡 思美人曲』·『성산별곡 星山別曲』 등의 가사와 아울러 그의 시조작품 여러 편이 함께 실려 있다.     『송강가사』는 성주본(星州本)·이선본(李選本)·관서본(關西本) 등의 이본(異本)이 현전하고 있다. 그 밖에 관북본(關北本)·의성본(義城本)·황주본(黃州本) 등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전하는 세 이본간의 표기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다. 가사의 내용 전개는 대화체로 되어 가사문학 구성에 있어 새로운 면을 보여준다.     [2] 작품구성 서두는 먼저 갑녀(甲女)로 표시할 수 있는 시중의 한 화자가 을녀(乙女)로 표시할 수 있는 여인에게 “뎨 가 뎌 각시 본 듯도 뎌이고”라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어서 천상 백옥경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가 다 저물어가는 날에 누구를 보러 가느냐고 묻는 데에서 두 여인의 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에 을녀는 “아, 너로구나 내 이야기를 들어보게. 임이 예쁘지도 않은 나를 사랑하여 그만 내가 너무 버릇없이 굴다가 임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으니 그것은 조물의 탓일 것일세.”라고 하면서 자탄(自歎)한다 .   을녀의 말을 듣고서 갑녀는 “그게 아니라 임에게 맺힌 일이 있다.”라고 하여 을녀의 생각을 고쳐 준다.   그러나 을녀는 “나도 임을 뫼셔 보아 임의 사정을 잘 아나 지금 임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며, 독수공방하는 내 신세도 처량하며 차라리 낙월(落月)이나 되어 임의 창밖에 비추어 보고 싶다.”고 토로한다. 이에 대하여 갑녀는 “달빛도 좋지마는 궂은 비나 되라.”고 권하는 것으로 가사의 끝을 맺고 있다.   이러한 대화의 분석은 연구자에 따라 다소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김사엽(金思燁)이 갑녀의 사설, 을녀의 사설, 갑녀의 사설로 삼분하여 『속미인곡』의 구조를 설명하려 한 것이 그러한 예의 하나이다.     이러한 대화체의 가사에 있어 갑녀와 을녀는 각기 작자의 분신이면서 작자가 의도하는 바를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등장시킨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갑녀는 을녀의 하소연을 유도하며 더욱 극적이고 효과적으로 가사를 종결짓게 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속미인곡』은 제목에 ‘속(續)’자가 있어 같은 작자가 지은『사미인곡』의 속편(續編)처럼 생각되는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른 측면에서 임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읊었으며, 그 표현이나 지은이의 자세(姿勢)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사미인곡』은 평서체인 데 비하여 『속미인곡』은 대화체이다. 그 길이도 전자가 126구인 데 비하여 후자는 96구의 단형이다.     『사미인곡』이 임에게 정성을 바치는 것이 주라면 『속미인곡』은 자기의 생활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주이다. 전자가 사치스럽고 과장된 표현이 심한 데 비하여 후자는 소박하고 진실하게 자기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속미인곡』은『사미인곡』을 지을 때보다도 작자의 생각이 한결 더 원숙하였을 때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 西浦漫筆』에서 정철의 『관동별곡』과 전후 미인곡은 우리나라의 ‘이소(離騷)’라 할 만하며, 그 중에도 『속미인곡』이 더 고상하다고 하였다.     『관동별곡』이나『사미인곡』이 한자를 빌려 꾸몄다는 데에서 그 이유를 들고 있다. 그러나 한자를 빌려 꾸민 것 이외에 『속미인곡』의 표현이 그만큼 진솔하고도 간절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속미인곡』은 이렇게 역대에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입었을 뿐 아니라 한역(漢譯)도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김상숙(金相肅)과 그의 6세손인 정도(鄭棹)가 번역한 것이 있다. 정철의 가사문학사에서 절정을 장식하는 회심작(會心作)인『속미인곡』은 이러한 한역을 통하여 단 하나 감상의 대상을 넓히게 되었다.     『속미인곡』은『사미인곡』과 더불어 뒷날 연군(戀君)의 정서를 읊은 여러 가사의 시원(始原)이 되어 그 본보기로 활용되었다. 또한 이에 대한 연구도 많아 한국 가사문학연구에 있어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3]『속미인곡』원문과 해설    뎨 가난 뎌 각시 본 듯도 한뎌이고.           저기 가는 저 각시 본 듯도 하구나   텬상 백옥경을 엇디하야 니별 하고,           하늘나라의 백옥경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 다 뎌 져믄 날의 눌을 보라 가시난고.           해 다 져서 저문 날에 누구를 보러 가시는고     : 甲女의 물음 – 백옥경을 떠난 이유    어와 네여이고 이내 사셜 드러 보오.        오오 너로구나 이내 사정 들어 보오.   내 얼굴 이 거동이 님 괴얌즉 한가마난       내 얼굴이 이 행동이 임께서 사랑함직한가마는   엇딘디 날 보시고 네로다 녀기실 세      어쩐지 나를 보시고 너로구나 하고 특별히 여기시기에   나도 님을 미더 군 뜨디 전혀 업서      나도 임을 믿어 다른 뜻이 전혀 없어   이래야 교태야 어즈러이 구돗떤디      아양이야 애교야 어지럽게 굴었던지   반기시난 눈비치 녜와 엇디 다르신고.       반기시는 얼굴 빛이 옛과 어찌 다르신고   누어 생각하고 니러 안자 혜여하니      누워 생각하고 일어나 앉아 헤아리니   내 몸의 지은 죄 뫼가티 싸혀시니       내 몸이 지은 죄 산 같이 쌓였으니   하날히라 원망하며 사람이라 허믈하랴       하늘이라고 원망하고 사람이고 탓하랴   설워 플텨 혜니 조물의 타시로다.       서러워 풀어 헤아리니 조물주의 탓이로다.     : 乙女의 대답 – 창조물의 탓    글란 생각 마오.       그런 생각 마오.     : 甲女의 위로의 말    매친 일이 이셔이다.       맺힌 일이 있습니다.   님을 뫼셔 이셔 님의 일을 내 알거니       임을 모시어서 임의 일을 내가 아는데   믈 가탄 얼굴이 편하실 적 몃 날일고.       물 같은 얼굴이 편하실 때가 몇 날일꼬   츈한고열은 엇디하야 디내시며       이른 봄의 추위와 여름철의 무더위는 어떻게 지내시며   츄일동텬은 뉘라셔 뫼셧난고.      가을과 겨울은 누가 모시는가   쥭조반 조셕 뫼 녜와 갓티 셰시난가.       자릿조반과 아침 저녁 진지는 누구와 같이 잡수시는가   기나긴 밤의 잠은 엇디 자시난고.       기나긴 밤에 잠은 어찌 주무시는가     : 乙女의 임의 생활에 대한 염려와 충정    님다히 쇼식을 아므려나 아쟈하니        임 계신 곳의 소식을 어떻게라도 알려고하니   오날도 거의로다 내일이나 사람 올가.        오늘도 다 지났다. 내일이나 사람이 올까   내 마음 둘 데 업다. 어드러로 가쟛 말고.        내 마음 둘 곳 없다. 어디로 가잔 말인가   잡거니 밀거니 놉픈 뫼헤 올라가니        잡기도하고 밀기도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니   구름은카니와 안개난 므사 일고.        구름은 물론이거니와 안개는 무슨 일인가   산쳔이 어둡거니 일월을 엇디 보며        산천이 어두운데 해와 달을 어찌 보며   지쳑을 모라거든 쳔 리를 바라보랴.        바로 앞을 모르는데 천리를 바라볼 수 있을까   찰하리 믈가의 가 배길히나 보쟈 하니        차라리 물가에 가서 뱃길이나 보려고 하니   바람이야 믈결이야 어둥졍 된뎌이고.        바람과 물결 때문에 어수선하게 되었구나   샤공은 어데 가고 븬 배만 걸렷나니.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걸려있는가   강텬의 혼쟈 셔셔 디난 해를 구버보니        강가에 혼자 서서 지는 해를 굽어보니   님다히 쇼식이 더옥 아득한뎌이고.        님 계신 곳 소식이 더욱 아득하기만구나     : 乙女의 임의 소식을 알고자 하는 마음    모쳠 찬 자리의 밤듕만 도라오니       초가집 찬 자리에 한밤중이 돌아오니   반벽 쳥등은 눌 위하야 발갓난고.       벽에 걸린 푸른 등은 누구를 위하여 밝았는가   오르며 나리며 헤뜨며 바니니       오르내리며 헤매며 방황하니   져근덧 녁진하야 픗잠을 잠간 드니       잠깐 사이에 힘을 다하여 풋잠을 잠깐 드니   졍셩이 지극하야 꿈의 님을 보니       정성이 지극하여 꿈에서 임을 보니   옥 가튼 얼굴이 반이나마 늘거셰라.       옥 같은 얼굴이 반이나 늙었구나   마음의 머근 말삼 슬카장 삶쟈 하니          마음 먹은 말씀 실컷 사뢰려하니   눈믈이 바라 나니 말인들 어이하며       눈물이 바로 나니 말인들 어찌하며   졍을 못다하야 목이조차 몌여하니       정을 나누지 못하여 목조차 메니   오뎐된 계셩의 잠은 엇디 깨돗던고.       방정맞은 닭소리에 잠은 어찌 깨었단말인가     : 乙女의 독수공방의 심정과 꿈에 본 임     어와, 허사로다 이 님이 어데 간고.      아아, 헛된 일이로다 이 임이 어디 갔는가   결의 니러 안자 창을 열고 바라보니      잠결에 일어나 앉아 창을 열고 바라보니   어엿븐 그림재 날 조찰 뿐이로다.      불쌍한 그림자만 나를 쫒을 뿐이로다   찰하리 싀여디여 낙월이나 되야이셔      차라리 죽어서 떨어지는 달이나 되서   님 겨신 창 안헤 번드시 비최리라.      임 계신 창 안에 환하게 비치리라     : 을녀의 죽어서라도 이루려는 임에 대한 간절한 사모의 정    각시님 달이야카니와 구잔 비나 되쇼셔.       각시님, 달은 커녕 궂은 비나 되오소서     : 갑녀의 위로의 말                                                        - 續美人曲. 終了 -        
1080    송강 정철 <사미인곡> 댓글:  조회:3644  추천:0  2015-04-26
      사미인곡(思美人曲)   이 몸 사기실제 임을 쫓아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면 하늘 모를 일이련가  나하나 젋어있고 임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이 살아 견줄데 노여 없다, 평생에 원하오되 한데 내자 하였더니 늙게야 무슨 일로 외오 두고 그리는고 엊 그제 임을 뫼셔 광한전에올랐더니 그뎐에 어찌하여 하계에 내려오니 올적에 빗는머리 얽힌 언정 삼년일세 연지분 있네만은 늘위하여 고이할꼬 마음에 맺힌시름 첩첩히 쌓여있어 짓느니 한숨이요 지느니 눈물이라 인생은 유한한데 시름도 그지없다,   무심한 세월은 물흐르 듯 하는고야 염량이 때를 알아 가는듯 고쳐오니 듣거니 보거니 느낄 일도 하도할사   동풍이 건듯불어 적설을 헤쳐내니 창밖에 심은매화 두세가지 피었세라 가뜩 냉담 한데 임향은 무슨일꼬 황혼에 달이 쫒아 벼말에 비치니 느끼듯 반기는듯 임이신가 아니신가 저 매화 걲어 내어 임계신데 보내고자 임이 나보고 어떻다 여기 실꼬   꽃지고 새잎나니 녹음 깔리는데 나위 적림하고 수막이 비어 있다, 부용을 걸어놓고 공작을 둘러두니 가득시름한데 날은 어찌 가돗던고 원앙금베어놓고 오색선풀쳐내어 금자에겨누어서 임의 옷지어내니 수품은 커니와 제도도 갖을시고 산호수 지게위에 백옥함에담아두고 임에게보내오리 임계신데바라보니 산인가 구름인가 머흠도 머흘시고 천리 만리 길을 뮈라서 찾아갈꼬 이거든 열어두고 날인가반기실까   하루밤 서릿김에 기러기 울어엘제 위룽에 혼자올라 수정렴걷는 말이 동산에 달이나고 북극에 별이뵈니 임이신가반기닌 눈눌이 절로난다 청광을 치어내어 봉황루에 붙이고자 누위에 걸어두고 팔황에 다비치어 삼산곡궁 점낮같이 댕그소서   건곤이 폐색하여 백설이한빛인제 사람은 커니와 날새도 그쳐있다, 소상남반도 추움이 이렇거든 옥루고쳐야 더욱 일러 무삼하리 양춘을 부쳐내어 님계신데 쏘이고자 모첨비친 해를 옥루에 올리고자 홍상을 이믜차고 취수를 반만걸어 일모수죽의 헴가림도 하도할사 짧은 해수이지어 긴밤을 고추앉아 청둥검은 곁에 전공후 놓아두고 꿈에난 임을 보려 턱받고 비꼈으니 암금도 차도할사 이밤은 언제샐꼬   하루도 열두 때 한달도 서른날 적은 덪생각말아 이시름 잊자하니 마음에 뱆혀있어 골수에깨쳤으니 편작이 열이오나 이병을 어찌하리 어와 내병이야 이님의 탓이로다 차라리 싀어지어 범나비 되오리다 꽃나무가지마다 간데 족족앉니다가 향묻은 나래로 임의 곳에 옮으리라 임이야 날인줄 모르셔도 내 임쫓으려 하노라,   송강/ 정철이 50세에 1588년에 쓴 가사이다 서조18년에 동인이 서인을 몰아내자 서인의 영수였던 송강은 고향에 내려가 지내게 되었는데 이에 쓰인 작품이다, 임금선조에 대한 간절한 충성심을 한 여인이 지아비를 사모하는 마음에 비유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토로한 글이다, 사미인곡은 순수한 우리말이나 아름다움을 마음껏 살려 가사문학의 최고봉의 하나로서 평가를 받고 있다, 2음보1구126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3.4조의 음수 율 을 기저로 하고 있다,  
1079    가사의 대가 - 송강 정철 댓글:  조회:4467  추천:0  2015-04-26
정철 (1536년 - 1594년)     정철 (1536년) 정철 영정 출생 1536년 12월 6일 (음력)  조선 한성부 종로방 장의동 사망 1593년 12월 18일 (음력)  조선 경기도 강화군 송정촌 사인 병사 거주지  한성부 → 전라남도 창평 → 한성부 → 강화도 국적  조선 별칭 자는 계함, 호는 송강·칩암거사, 시호는 문청, 별명은 총마어사, 작위 인성부원군 학력 사가독서 (1562년 별시문과 장원) 직업 문신, 시인, 정치인, 문인 종교 유교(성리학) 자녀 정기명, 정종명, 정진명, 정홍명 부모 정유침 / 죽산 안씨 친척 누이 귀인 정씨 정철 (鄭澈, 1536년 12월 18일(음력 12월 6일) ~ 1594년 2월 7일(1593년 음력 12월 18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시인이자 문신, 정치인, 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또는 迎日),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칩암거사(蟄菴居士)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별명은 총마어사이다. 돈령부 판관(敦寧府 判官)을 지낸 정유침(鄭惟沉)의 아들[1]이며, 인종의 후궁 귀인 정씨의 남동생이다. 1562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의정부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인성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당시 국문을 주관하던 형관으로 사건 추국을 담당하였으며, 기축옥사 수사 지휘의 공로로 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推忠奮義恊策平難功臣) 2등관에 책록되었다. 훗날 심문 과정에서 기축옥사로 동인과 그 일족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하여 동인들의 비난을 받았고, 정여립의 난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세자 건저문제를 계기로 귀양에 위리안치되었고, 임진왜란 직후 복귀하였다. 전란 초기에 양호체찰사 직을 수행하였으나, 복귀 후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일로 모함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도에 우거하던 중 사망하였다. 당색으로는 서인(西人)의 지도자였고, 이이, 성혼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적으로는 기대승(奇大升) · 임석천 · 송순(宋純)·김인후(金隣厚) · 양응정(梁應鼎)의 문인이다. 《관동별곡》(關東別曲) 등 가사와 한시를 지었으며, 당대 시조문학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윤선도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동시대에 살던 군인 정철(丁哲)과의 구분을 위해 보통 '송강 정철'로 부른다.[출처 필요]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기 1.1.1 출생과 가계 1.1.2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 사건 1.1.3 수학과 청년기 1.2 관료 생활 1.2.1 관료생활 초반 1.2.2 경양군 처형과 좌천 1.2.3 당쟁과 파란 1.2.4 동인과의 갈등 1.2.5 강원도 관찰사 재직과 관동별곡 1.2.6 정치 활동 1.2.7 은거 생활 1.3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1.3.1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당시 위관 1.3.2 기축옥사 직후 1.3.3 논란 1.4 생애 후반 1.4.1 세자 건저 파동 1.4.2 파직과 유배 1.4.3 동인의 공세와 유배 1.4.4 유배와 이배 1.4.5 임진왜란과 최후 2 사후 2.1 추탈 2.2 복권 3 가계 4 관련 작품 4.1 드라마 5 저서와 작품 5.1 저서 5.2 작품 6 문학적 기여 7 정치적 평가 7.1 성격 7.2 기축옥사와 관련된 논란 8 기타 8.1 꾹저구 발견 8.2 기생의 이름시 9 같이 보기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송강 정철은 1536년(중종 31년) 음력 12월 6일 한성부 종로방 장의동(藏義洞,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돈녕부판관을 지낸 정유침과 죽산 안씨의 아들로 출생하였다.[2] 그의 고조부는 병조판서, 증조부는 김제 군수를 역임했으나 할아버지 대에는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가 아버지 정유침은 딸이 왕의 후궁이고 왕족의 부인이 된 관계로 관직에 나가 돈령부판관을 역임하게 됐다. 어머니는 죽산 안씨는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안팽수의 딸이었다. 그는 7남매 중 막내 아들로 그가 태어날 때 위로 형 세 명이 있었고, 누나 세 명이 있었다. 그의 맏누이가 인종(仁宗)의 후궁인 귀인(貴人)이었고, 둘째 누이가 왕족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의 부인이 되었기에 어려서부터 궁중에 출입하였고, 어린 경원대군(慶原大君 : 후일 명종)과 친숙해졌다. 어느 정도 장성한 뒤에도 누이를 보러 동궁(東宮)에 자주 출입하면서 경원대군을 자주 만났고 명종이 즉위하자 그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 사건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 사건 그러나 인종이 죽고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매형인 계림군이 윤임에 의해 추대받았다는 이유로 역모죄로 붙잡혀 처형을 당하고, 그의 맏형은 곤장을 맞고 전라남도 광양군으로 유배되었으며, 아버지 정유침은함경북도 정평으로 유배되었다. 그 역시 계림군의 처가 일족(一族)으로서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유배될 때 정평으로 따라간 이후, 아버지의 배소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곧 아버지 정유침은 유배가 풀려서 되돌아왔다. 그러나 1547년(명종 2년) 전라도 양재역에서 벽서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관련자로 지목되어 아버지 정유침은 경상북도 영일로 유배되었으며, 맏형은 다시 붙잡혀와 형문을 당하던 중 곤장을 맞고 함경북도 경원으로 귀양가는 길에 형독으로 32살의 나이에 장살했다. 이후 그의 둘째 형 정소는 과거를 준비하다가 벼슬길에 환멸을 느껴 처가가 있는 전라남도 순천으로 은거하였다. 그는 다시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전전하게 되었다. 수학과 청년기 1551년(명종 6년)에 원자(元子) 탄생 기념으로 아버지가 특별히 사면되자 온 가족이 고향이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군 창평(昌平)으로 이주,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그는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의 문하생이 되었다. 용소를 목욕하던 정철은 김윤제를 만났다.[3] 그가 영특하고 총명한 인물임을 알아본 김윤제는 그를 자신의 문하에 받아들인다. 이후 지곡(芝谷) 성산(星山) 기슭의 송강(松江) 가에서 10년 동안 수학하면서 김윤제 외에도 임석천의 문하에서도 학문을 배웠으며,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송순, 기대승 등 당대의 석학들을 사사(師事)하였으며, 김윤제의 조카인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고경명 등과 동문수학(同門修學)하였다. 이때 이이·성혼·송익필(宋翼弼) 등과도 교우했다. 이때 그가 거주하던 곳의 지명을 따서 스스로 아호를 송강이라 하였다. 그는 한성부에서 태어났지만 이후 그의 집과 그의 가족들이 거주한 곳은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이었으므로, 일각에서는 창평을 그의 고향으로도 간주하게 된다. 그 뒤 스승인 김윤제의 사위인 류강항(柳强項)의 딸과 혼인하여 김윤제의 외손녀사위가 되었다. 을사사화 이후 가문이 연루되어 몰락하였으므로 경제적으로는 곤궁하였으나, 처외조부이자 스승인 김윤제와 처외숙부이자 동문인 김성원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아 근근히 연명하기도 했다. 관료 생활 관료생활 초반   정철의 편지 서신, 연대미상3월 10일자 1561년(조선 명종 16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고, 이듬해 27세로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임금인 명종이 과거 합격자 명단을 보고 정철이라는 이름이 동문인가 여부를 수소문한 뒤 어린 시절의 우정을 생각하여 기뻐하면서 "정철이 급제하였구나." 하며 기뻐하여 따로 주찬(酒饌)을 내리어 축하연을 베풀어주었다. 이후 사헌부지평(持平)을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 등을 역임하였다. 성균관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지평에 임명됐다. 이어 좌랑·현감·도사를 지내다가 1566년(명종 21)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됐다. 그 뒤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32세 때인 1567년(명종 32년) 이이와 함께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때 이이와 사물에 대한 담론을 한 뒤 그의 박식함에 감탄하여 그와 깊이 교류하며 본격적으로 친밀하게 지내게 된다. 일찍부터 청백하고 곧은 성품으로 유명하였으며, 왕의 각별한 지우로 총마어사( 馬御史, 한나라 때 어사 환전이 매우 엄정하였고 항상 총마를 타고 다니므로 사람들이 총마어사라 불렀다)〉라는 별명을 얻어 회자화되었다. 경양군 처형과 좌천 이후 어릴 적 친구였던 명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왕의 사사로운 청을 거절하여 명종의 미움을 받아 왕이 그를 멀리하게 된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을 때, 명종의 사촌형인 경양군(景陽君)이 자신의 처가의 재산을 약탈하고자 그의 처조카를 죽인 죄로 수감되었다. 이에 명종은 송강에게 관대하게 처리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성격이 결백하고 강직한 정철은 왕족이라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경양군 부자를 계속 규탄, 탄핵하여 경양군 부자(父子)를 사형시켰다. 화가 난 명종은 이후 그를 피하였다. 그 뒤 형조, 예조, 공조, 병조의 좌랑을 거쳐 공조, 예조의 정랑을 두루 지내고 1565년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로 나갔다. 이후 홍문관수찬·좌랑·종사관·홍문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1566년초 형조정랑이 되었다. 그해 1월에 형조정랑으로 재직 중 을사사화 관련자들의 석방과 사면해줄 것을 건의하였으며, 그해 3월에 인종의 귀인이었던 맏누이의 상을 당해 곡을 하였다. 이후 성균관 직강,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고 동년 9월에 북관어사로 나아가 함경도를 순시하였다. 북관어사로 순행하는 도중에 우연히 시조 한 수를 짓게 되는데, 그 내용이 명종의 죽음을 예언하고 있다 하여 오래도록 화제가 되었다. 10월에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었다. 당쟁과 파란 1567년(선조 즉위년) 정랑(正郞), 성균관직강(直講) 등을 역임했다. 1568년(선조 1년) 3월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6월에 원접사 박순의 종사관이 되었다. 그해 홍문관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다시 사헌부지평이 되었고1569년 5월에 홍문관 수찬, 교리, 지평 등을 지냈다. 이때 조정의 대신들이 언관 17인을 논죄하고 조정에서 내쫓으려 하자, 선조 앞에 나아가 그들을 통렬히 논박하기도 했다. 1570년(선조 3년) 4월 35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3년상을 마쳤다. 모든 의례와 절차를 스승과 벗들에게 물어 예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함으로써, 주위의 큰 칭송을 받기도 했다. 1572년 7월 부친의 3년상을 마치고 복직하여 성균관직강, 이조정랑, 의정부 검상 및 사인,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했으나 1573년(선조 6년) 홍문관 전한, 사헌부 집의, 군기시정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1573년 4월 38세 때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으로 낙향하여 다시 3년상을 치렀다. 1575년(선조 8년) 5월 시묘살이를 끝내고 복직하여, 직제학, 성균관사성, 사간원사간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해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에 벌어진 갈등이 비화되어 동인과 서인의 분쟁에서 서인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분쟁에 휘말려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전라남도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에 있을 때에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동인과의 갈등 그 뒤 을해당론으로 사림파가 동서로 분당되자 그는 서인에 가담하였다. 1577년 11월에 계림군에게 출가했던 막내 누이가 죽자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 와서 일시적으로 지내기도 했다. 같은 달에 인종의 정비였던 인성왕후 박씨가 세상을 뜨자, 대궐에 들어가 상에 임하였다. 이어 송익필을 만나 거취를 상의하기도 하였다. 1578년(선조 11년)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기용되고, 사간·직제학 등을 거쳐 통정대부로 승진, 승정원 승지에 올랐다. 그해 5월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으로 승진했으며, 그 해 11월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윤두수 등의 진도 군수(珍島郡守) 이수(李銖)의 뇌물수수 사건 처리 문제로 동인계 언관들의 공격을 받아 사직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2월에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지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사양하였다. 이수의 옥사 사건 이후 한동안 그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1579년(선조 12년) 5월 형조참의, 6월 승정원 우부승지를 거쳐 8월에 다시 동부승지에 제수되지만 역시 나가지 않았다. 당쟁의 소용돌이가 빚어낸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다가 정치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그 동안 머물러 있던 서울 및 고양군 음죽을 떠나 다시 창평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직설적인 성격으로 거침없는 비판을 가하였으며, 타인의 뒷담을 즐기는 것을 불쾌히 여겼다. 그러나 그의 직설적인 성격과 화법은 원수를 많이 만들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율곡 이이는 그에게 '제발 술을 끊도록 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을 없애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강원도 관찰사 재직과 관동별곡  관동별곡 1580년(선조 13년) 1월에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되었다. 이 무렵 〈관동별곡〉, 할아버지 : 정위(鄭潙) 아버지: 정유침(鄭惟沈) 어머니: 죽산 안씨 부인: 문화 류씨 장남: 정기명(鄭振溟, ? - 1589년) 손자: 정운(鄭沄) 차남: 정종명(鄭宗溟) 손자: 정직(鄭溭) 손자: 정수(鄭洙) 손자: 정연(鄭沇) 손자: 정양(鄭瀁) 손자: 정전(鄭淟) 삼남: 정진명(鄭振溟) 손자: 정한(鄭漢) 사남: 정홍명(鄭弘溟) 손자: 정이(鄭涖) 첩: 진옥(眞玉, ? - ?, 기녀 출신[26]) 첩: 강아(江娥[27]) 형님: 정소(鄭沼) 누나: 귀인 정씨, 인종의 후궁 누나: 군부인 정씨, 계림군의 비 관련 작품 드라마 《서궁》(KBS2, 1995년~1995년, 배우:박웅) 《왕의 여자》(SBS, 2003년~2004년, 배우:윤주상) 《불멸의 이순신》 (KBS, 2004년~2005년, 배우:안대용) 《왕의 얼굴》 (KBS, 2014년~2015년, 배우:주진모) 《징비록》 (KBS, 2015년, 배우:선동혁) 저서와 작품   정철의 《송강문집》 저서[편집] 저서로, 후대에 그가 남긴 시조와 가사를 엮은 《송강가사》와 《송강집》이 있다. 《송강집》 《송강가사》 《송강별집추록유사》 《문청공유사》 작품 사미인곡 속미인곡 애련당 현판 문학적 기여  관동별곡, 성산별곡   개인적으로는 술을 좋아하였다.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이름이 높다. 《성산별곡(星山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훈민가(訓民歌)》 등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가사와 한시, 단가를 남겼다. 저서로는 문집인 《송강집》 《송강가사》 《송강별추록유사(松江別追錄遺詞)》, 작품으로 시조 70여 수가 현재 전하고 있다. 가사 그의 가사는 종래의 한문투를 벗어나 3·4조의 운율에 의해 자유자재로 한국어를 구사했으며, 그의 호탕하고도 원숙한 시풍은 가사문학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시풍은 호탕하고 비장하며, 한문투를 벗어나 자유자재로 (중세)한국어를 구사하여, 구운몽을 지은 김만중은 그의 저서 《서포만필》에서 “예로부터 좌해(左海 ; 한국의 별칭)의 참된 문장(眞文章)은 오직 이 세 편(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뿐”이라 평가하는 등, 한국 시가문학의 대가로 인정하였다. 시조 그는 시조작가로서도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니, 그가 백성의 교화(敎化)를 위해 지은 《훈민가(訓民歌)》 16수는 비록 도덕군자의 냄새가 나는 듯하나 현실적 효용으로 그 의의를 지니며, 그의 시조 77수가 《송강가사》에 실려 전하는데 그의 호방한 일면과 동양적인 유적한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한시 그의 한시가 장·단가에 비해 격이 낮다고도 하고, 전수에 미치지 못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 장·단가의 모태가 한시요, 그 시격은 ‘준영·고매’하며, ‘당나라 태종 연간의 여러 작가들과 나란하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시어마다 날아 움직이는 듯하고, 뜻밖의 시취가 있다’고 기린 점 등은 주목을 요하는 바 있다. 더구나 그의 한시가 굴원과 두보의 ‘사미인’과, ‘시어 한 자도 임금을 잊지 아니한다’는 우시연군의 정한을 이었고,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비롯한 전원시풍을 받아들였는가 하면, 이백의 호방함과 취선의 풍모를 이어받았고, 수월을 더불어 노래한 소식의 풍류로 작시상의 환골은 물론, 시풍의 영향을 천착하여야 한다고도 한다. 정치적 평가 성격 성격은 직설적이고 감정적이었다, 후일 같은 서인이 된 조헌은 그를 싫어하여 그가 부임하면 다른 곳으로 가곤 했다. 한번은 정철이 조헌과 한 관청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조헌이 다른 곳으로 가려 하였다. 한번은 정철이 조헌을 불러 왜 나를 피하느냐고 묻자, 입소문이 안좋아서 피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정철은 이이를 찾아가 조헌과 한 관청에서 근무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함께 지방으로 파견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성격을 본 조헌은 '공의 됨됨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사람 하나 잃을 뻔 하였다'며 정철을 멀리한 것을 사과하고,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한다.[28]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호방한 성품 탓에 동인들의 스승인 퇴계 이황으로부터 간신(諫臣, 바른 말로 임금에 간하는 신하)의 기질이 있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29][30] 기축옥사와 관련된 논란  기축옥사 기축옥사와 관련된 논란 중 대표적인 것은, 정여립의 옥사를 조작하였는가, 위관으로서 옥사의 처리가 공정하였는가에 대한 것이다. 조선시대를 포함하여 정여립이 실제로 역모를 한 것은 사실이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조작설이 조선시대부터 존재했고, 1950년대 이후에 당쟁을 배경으로 송익필 형제가 조작한 것이라는 주장들이 등장하였으나 의견이 분분하다.[31] 조작설은 정철과 서인 세력이 동인 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주장이다. 결과적으로 정언신, 정개청(鄭介淸), 백유양(白惟讓), 이발(李潑), 이길 등 많은 동인이 죽거나 귀양을 갔고, 이산해를 얽어 넣으려고 했다는 것이다.[6] 조작설은 김장생이 엮은 〈송강행록〉(松江行錄)을 근거로 들기도 한다. 정여립 등이 모반한다는 고변이 있자 정철은 그의 도망을 예상하였고, 자진하여 옥사처리를 담당하려 했다고 하여, 정여립의 도망을 미리 안 것과 추국관이 되기를 자청한 것으로부터 정철이 이를 지휘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32][33] 위관으로서의 공정성에 대하여는 임진왜란으로 수사 자료가 모두 유실되어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34] 기축옥사 당시 80명의 동인 인사들을 체포하여 형문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1천여 명의 동인계열 인사와 가족들이 체포되어 형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서인의 영수로서 형문의 초기 책임자였던 그는 옥사를 확대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여기에서 이발의 가족들이 죽은 책임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이에 대하여 1591년 초에 위관이 바뀌었기에 그와 무관하다는 견해가 있다.[15][35] 기타 꾹저구 발견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 중 1580년(선조 13년) 강릉부의 한 연못에서 발견한 담수어에 꾹저구라는 이름을 붙였다. 강릉 연곡을 방문했던 그는 어느 백성이 선물로 대접한 탕을 먹게 됐다. 이때 백성이 선물로 대접한 탕이 바로 꾹저구로 끓인 탕이었다고 한다. 당시 그 지역 현감은 관찰사를 접대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맛있는 물고기로 만든 별식을 마련하라고 지시하였으나 그 무렵 장마철이라 고깃배가 전혀 출어하지 못해 마땅한 해산물이 없었다. 백성들은 할 수 없이 인근 연곡천에 흔하던 작은 물고기를 잡아 탕을 끓여 올렸다. 이를 매우 흡족히 먹은 그는 "맛이 시원하고 담백하다." 며 무슨 물고기로 끓였느냐고 물으니 그때까지 이름없이 대하던 작은 물고기라 백성들이 주저하였다. 이후 연곡천에서 저구새(雎鳩물수리)가 물속에 부리를 훑으며 잡아먹던 것을 본 정철은 "저구새가 꾹 집어 먹는 물고기"라 하여 "그러면 앞으로 이 고기를 꾹저구라 부르면 되겠다."고 하여 이름을 꾹저구라 지었다. 기생의 이름시 술과 풍류를 즐기던 그는 기녀의 이름을 따서 시를 지었는데, 기녀가 그의 시를 되받아, 운을 따서 화답시를 짓자 기녀의 재주에 놀라게 된다.     근악槿樂 옥이 옥이라 하거늘 번옥(燔玉)으로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이 분명하다 내게 송곳 있으니 뚫어 볼까 하노라 철(鐵)이 철(鐵)이라 하거늘 잡철(雜鐵)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이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있으니 한번 녹여볼까 하노라 같이 보기 작품 시조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박인로 윤선도 허난설헌 송강가사 유적 환영정 죽서루 송강정 정송강사 관동팔경
1078    송강 정철 <관동별곡> 댓글:  조회:3273  추천:0  2015-04-26
​ 서 사   江강湖호애 病병이 깁퍼 竹듁林님의 누엇더니, ⇒자연을 사랑하는 병이 깊어, 죽림(담양 창평)에서 지내는데 .자연을 사랑하는 병: 연하고질(煙霞痼疾), 천석고황(泉石膏肓) 關관 東동 八팔百백里니에 方방面면을 맛디시니, ⇒(임금님께서)관동 팔백리(강원도) 관찰사 직을 맡겨 주시니 어와 聖셩恩은이야 가디록 罔망極극하다. ⇒아아, 임금님의 은혜가 갈수록 끝이 없구나. 延연秋츄門문 드리다라 慶경會회南남門문 바라보며, ⇒경복궁의 서쪽문인 연추문에 도착해, 경회루 남쪽문 바라보며 下하直직고 믈너나니 玉옥節졀이 알패 셧다. ⇒하직 인사드리고 물러나오니, 관찰사 증패인 옥절이 앞에 있구나. .관찰사에 임명되어 하직인사하고 나오는 장면까지가  생략과 비약적 표현을 통해 빠르게 진행되어 속도감과 경쾌감을 준다. 平평丘구驛역 말을 가라 黑흑水슈로 도라드니, ⇒경기도 양주지역인 평구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경기도 여주지역 흑수로 돌아드니 蟾셤江강은 어듸메오, 雉티岳악이 여긔로다. ⇒강원도 원주지역에 있는 섬강은 어디인가? 치악산(원주)이 여기로구나. .은거지 전남 창평에서​ 관찰사의 임무를 받고 부임지 원주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죽림-연추문-평구역-흑수-섬강, 치악)이 ​나타나 있다. . 표현기법상으로 문답법이다. .원주: 조선시대 강원 감영의 소재지이다.​ 昭쇼陽양江강 나린 믈이 어드러로 든단 말고. ⇒소양강에서 흘러내린 물이 어디로 흘러들어간단 말인가 (임금이 계신 한양으로 흘러들겠지)?// .소양강물➩한강(한양에 소재)➩한양에는 임금이 계심: 연군지정(戀君之情)이 보임 孤고臣신 去거國국에 白백髮발도 하도 할샤. ⇒(임금이 곁에 없으니)외로운 신하 화자가 임금이 계시는 한양을 떠날 때 (나라 걱정에) 백발이 많기도 많구나.//우국지정(憂國之情)이 보임 東동州쥐 밤 계오 새와 北븍寬관亭뎡의 올나하니, ⇒철원 동주에서 밤을 겨우 새우고 북관정에 올라가니   .사자성어로 ​전전반측(輾轉反側)이다. 三삼角각山산 第뎨一일峯봉이 하마면 뵈리로다. ⇒북한산이 제일 높은 봉우리가 웬만하면 보일 것 같구나. .북한산은 한양에 소재ㅡ한양에는 임금이 계심: 연군지정(戀君之情)이 보임 弓궁王왕 大대闕궐 터희 烏오鵲쟉이 지지괴니, ⇒궁예왕의 옛 대궐 터에서 까마귀와 까치가 지저귀니 .이는 나라의 멸망을 이야기 함: 맥수지탄(麥秀之嘆)과 인생무상   千쳔古고 興흥亡망을 아난다, 몰아난다. ⇒한 나라의 흥하고 망한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淮회陽양 녜 일홈이 마초아 가탈시고. ⇒강원도 북부 회양 이라는 이름이 마침 같구나. 汲급長댱孺유 風풍彩채를 고텨 아니 볼 게이고. ⇒(선정을 한 중국 한나라의 회양 태수 인)급장유의 풍채(선정)를 다시 볼 것이 아닌가!// .선정을 다짐하고 있음 ​ ​ ​     ​
1077    술과 문화예술인들... 댓글:  조회:5686  추천:0  2015-04-26
시대를 현대로 거슬러 올라와 소위 한국의 주당 10걸이라는 것이 있더군요. 주당 10걸의 선정기준-- 1) 주량 2) 마시는 스타일 3) 스케일 4) 지구력(평생을 즐겼는가) 5) 사람을 감화시켜 세계의 주당 인구를 늘린 기여도 등등... 1) 우리나라 최고의 주당은 황진이(생몰년 미상, 조선 중종 때의 명기. 본명은 眞, 妓名 明月)입니다. 고금을 통틀어 각계 인사들이 추천한 주선은 모두 140명. 두주 불사의 주량과 풍류가 특출한 당대의 호걸들을 망라한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최고의 주선으로 황진이가 선정되었다. 樂酒終生의 기라성 같은 대장부들을 젖히고 가장 많은 17명의 인사들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서화담, 박연폭포와 더불어 松都三絶이라고 불리는 그녀는 '여성으로서 일종의 당연직'처럼 추천을 받은 셈이다(張德順).  '동짓달 기나긴 밤', '산은 옛 사이로되',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란 시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뛰어난 시서음률과 술로 당대의 문인, 碩儒들을 매혹시켰다는 점을 높이 샀다(김정옥, 김종길, 이어령, 朱宗恒, 사기주 제씨). 말하자면 주선 중의 주선이자 '한국적 낭만파의 거장'(최정호)으로 떠올려진 셈.  2) 수주 변영로(1898-1961, 시인, 성대교수) 술과 시로 자기 이상에 취해 살다간 樹州 변영로이다(김용성, 송지영, 신우식, 이규동, 전봉건 등). 두주 불사의 기행을 담은 을 보면 그는 이미 대여섯 살 때 술독에 기어올라가 술을 훔쳐 마신 천부적인 모주꾼이다. 또 이 수필집에서 그는 성균관대 뒷산에서 공초 오상순, 성제 이관구, 횡보 염상섭 등과 함께 술에 취해 벌거벗고 소를 탄 기상천외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다.  거룩한 음주는 종교보다도 깊고 달콤한 술잔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서 또 한 잔 하리라 3) 조지훈(1920-1968, 시인 고대교수) 시인 조지훈을 두고 "신출귀몰의 주선" 또는 "행동형의 주걸"이라고 한다(김용권, 김진찬 씨). 통금은 안중에도 없고 "야밤에 酒朋의 집을 습격, 대작하다가 새벽에 귀가하기가 예사였다(정한모 씨)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생생하게 기억한다(백인호, 이광훈 씨). 그는 밤새 눈 한번 붙이지 않고 통음을 해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4) 김삿갓(1807-1863, 본명 炳淵, 호 蘭皐. 방랑시인) 삼천리 방방곡곡을 떠돌며 풍자와 해학으로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노래한 시인 김삿갓은 풍류가 넘치는 주선이다. 장원급제는 했으나 자신이 홍경래난 때 항복한 宣川 방어사 김익손의 손자임을 뒤늦게 알고 일생을 방랑하며 술과 시로 보냈다. 동가식 서가숙하며 사를 주고 술을 얻어 마셨다는 등 많은 시를 남겼다.  5) 김시습(1435-1493, 호 梅月堂, 생육신의 한 사람) 생육신의 한 사람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의 작가인 매월당 김시습도 한 시대를 풍미한 주선이다. 그는 당대의 비리를 닥치는 대로 조롱하며 중이 되어 산천을 주유할 때도 툭하면 시내로 들어와 대취한 채 거리를 누볐다. 당시의 領議政 鄭昌孫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나쁜 놈, 영상이고 뭐고 집어치워라" 하고 일갈했을 만큼 세상과 담을 쌓으며, 한평생을 술과 방랑으로 보냈다. 6) 임제(林悌, 1549-1587, 호 白湖, 예조정랑. 조선의 문장가) 백호는 우리나라의 '주선 문장가 중의 한 사람이다(송지영 씨). 황진이의 묘 앞을 지나가다 지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의 시조는 그의 호방한 기질을 잘 나타내 준다. 일생을 술로 벗삼으며 봉건적인 권위에 저항하는 가운데 詩文으로서 인간미가 돋보이는 저서 을 후세에 남겼다.  7) 김동리(金東里 1913- 본명 始鍾, 소설가, 중앙대 교수) 4살 때부터 술을 입에 댄 타고난 애주가로 알려졌다. 술이라면 청탁불문의 주량 제일주의자. 그러면서도 끝까지 주석을 이끄는 대주가로 명성을 얻었다(이해랑, 조경희 씨). 음치이면서 주석이 익으면 노래를 즐겨 부르고, 매일 저녁상 앞에서 취할 때까지 반주를 든 다음 식사를 하는 애주가이기도 하다.  8) 임꺽정 (林巨正 ?-1562, 조선 명종때의 의적) 신출귀몰의 의적으로 관가를 닥치는 대로 부수고, 재물을 털면서도 유유히 한양에 나타나 술을 마신 임꺽정을 두고, '심장에 털 난 주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백정 출신으로 서민이던 그는 조선조 명종 10년(1555년)에 도둑의 우두머리가 되어, 12년 간 황해도 일원에서 탐관오리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며 의적으로 종횡무진 누볐다. 그런 와중에서도 한양에 4명의 애첩을 두어 거느리고 술을 마셔댄 배짱 두둑한 사내.  9) 대원군(大院君 1820-1898) 대원군은 왕권을 손아귀에 쥐기 전 막강한 세도가들을 의식, 철저히 파락호로 위장해 술로 야망을 불태운 술의 영웅이다(최일남 씨). 세도가들의 잔치 집이나 詩會에 나타나 술을 얻어먹고 대감의 품계를 가지고 여염집 상가를 버젓이 드나들었다. 때론 시정의 잡배들과 어울려 대작을 하는가 하면, 투전판에까지 끼어 들기도 했다. 술값이 떨어지면 난초 그림을 팔아 충당하면서 그는 술독에 파묻혀 민심의 동향을 살피고 세도가들의 정보를 입수하였다. 후일 야망을 달성한 뒤에는 파락호 시절의 주붕인 심복들을 중용해 술과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주선이다. 10) 원효대사, 연산군, 마해송, 심연섭, 박종화 이들은 각기 5명씩의 추천을 받아 나란히 10위에 오른 주선이다. 원효는 고대 인물가운데 유일하게 주선의 반열에 올랐다. 화엄종의 고승으로서 신라 무열왕 때 요석 공주와 사랑을 나눠 대유학자 薛聰을 낳은 승려. 화엄경을 노래로 지은 를 부르며 시정의 술집까지 출입, 기녀들에게 불법을 전파하였다. 범사에 구애받지 않고 비파를 타며 '깊은 삶의 멋과 슬픔'을 노래한 행동형의 주선이다(이홍구 씨등 추천). 주지육림 속에 묻혀 산 주선으로는 단연 연산군이 으뜸이다. 채청사, 채홍사를 두고 8도의 미녀들을 뽑아 춤과 술과 노래를 즐기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에서 파격적인 주선이라고 불린다.  마해송은 '따뜻한 청주 한 잔을 컵에 따라 1시간 동안 핥아 마시는 술의 신사요 선비'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남재희 씨). 방안에는 늘상 술과 안주를 준비해 두고 주야불문 조금씩 마시는 선비풍의 기질을 지니며 술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칼럼리스트 심연섭은 일반적으로 소문난 언론인 중 첫손에 꼽히는 애주가였다(백승길, 임승준, 임영 씨 등). 서울 명동 무교동 일대의 단골 술집이 칼럼의 산실이었고, 스스로 '한국에서 술맛을 가장 잘 아는 언론인'이라고 자랑스레 말하며 술과 함께 살다가 갔다. 月灘 박종화는 한창 마실 때 동대문과 종로를 오가며 50사발의 막걸리를 마신 일화를 남기고 있다. '술권하는 사회'의 玄鎭健, 金基鎭, 李象範 등 당대의 모주꾼들이 모두 주붕들. 일생을 술과 원고지에 묻혀 지낸 주선으로 "댁에서 내놓은 술도 좋았지만 알찌개 등 술안주가 별미였다"고 회고하는 인사도 있다(송지영, 정한모 씨 등). 비록 10걸에 들지는 못하였지만 술을 마시면 '기생의 치마폭에 시를 써주던 대주선' 고려 때 문장가 이규보(이어령 씨 등)와 집을 팔아 술을 마시며 "내가 네안에 들어가 살았으니 이젠 내 안에 들어와 보라"라며 웃은 국어학자 權德奎(이흥우 씨)도 특출한 주선으로 손꼽힌다. 여성으로는 모윤숙, 최정희(백석이 연모하였던) 등이 추천되기도 했고, '꿈의 정치, 환상과 현실을 술로 달랜' 여운형이 주선의 후보에 오른 것도 이채롭다(이홍구 씨).    술     임병호     “막걸리처럼 소주를 배부르게 먹고 싶다“   남산 용산도서관 ‘시인의 집’ 동인들이 죄다 웃었다.   일찍이 그 꿈을 위하여 달빛 쌓이는 화홍문 언덕 느티나무 아래서 사홉들이 샛별소주로 甁喇叭을 울렸다. 高三生 박석수도 따라붙었다.   청계리 농촌주택 현장 비 오는 날이면 천렵국 끓여 막소주, 양재기로 마셨다. ‘천둥산 박달재’를 같이 부르며 벽돌장이들도 마다하지 않았다.   술이란 무엇이냐, 노을 속에서, 강둑에서 소주를 마시면, 인생사 서러움 외로움 염세주의도 노을 내리는 강물 따라 흘러갔다.   ‘시인의 집’ 둘레에서 어울려 소주를 마셔도 배는 부르지 않았다. 영혼이 먼저 마신 탓이다. 육신만 술 취해 쓰러졌다. ----------   주중선(酒中仙)의 술 시(詩)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이태백은 자칭 주중선이라고 했다. 술을 즐기면서 술과 더불어 사는 것을 신선이라고 명명했다. 이태백은 주선(酒仙)답게 술과 시를 함께 음미하는 당대(唐代)의 대시인이었다. 그가 ‘술 석 잔에 대도에 통하고 술 한 말에 자연에 합치거늘(三盃通大道 一斗合自然)’이라는 「월하독작(月下獨酌)」에서 읊었던 것과 같이 술과 시인의 함수관계는 무한이다. 임병호 시인의 주력(酒歷)은 상당한 시간을 거슬러야 한다. 나는 그를 주중선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도 그가 좋아하는 술과 그의 인연이 아마도 전생에서부터 이어진게 아닌가 하는 사유에 까지 도달하게 한다. 조지훈 선생의 주도유단(酒道有段)에서 말하는 주력(酒力)을 아무리 살펴봐도 그는 음주중에 기고만장하다든지 영웅호걸인 척 한다든지 하는 술주정은 없다. 그냥 조용히 마시고 홀로 취하는 특징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정성수 임병호 김송배 셋이 만나면 술판이 벌어져야 정상이다. 오대주법(五大酒法)에 해당하는 청탁불문(淸濁不問)인데 정성수만은 ‘청하’를 특히 좋아지만 우리 둘은 없어서 못마시고 안줘서 못마시는 주도삼매(酒道三昧)의 경지를 스스로 탐닉하고 있다. 또한 무슨 문학행사에서 셋이 만나면 의례히 대폿집에 진을 치고 있는 광경을 목도(目睹)할 수 있다. 그가 이 작품에서 화자를 통해서 이어지는 어조와 같이 ‘막걸리처럼 / 소주를 / 배부르게 먹고 싶다’라는 도입부분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그가 기원처럼 내뱉는 언어가 술을 배부르게 먹고 싶다는 걸신(乞神)의 경지에까지 가 있다. 그의 술판의 공간은 다양하다. ‘남산 용산도서관 / 둘레’이거나 ‘화홍문 언덕’에서는 ‘사홉들이 샛별소주로 병나팔을’ 불고 ‘청계리 농촌주탯 현장’에서는 ‘막소주, 양재기로’ 마셔대면서 ‘천둥산 박달재’를 목청 높이 부르고 있다. 우리 시인들 중에는 술을 좋아하는 분이 많이 있다. 어쩌면 선비연한 풍류를 즐기기도 하지만, 거나하게 한 잔 걸쳐야 제대로 작품이 탄생한다는 진실도 내재해 있다. 중국의 시문학을 빛낸 이태백과 백낙천, 도연명 등을 비롯해서 우리의 정송강(鄭松江)도 「장진주사(將進酒辭)」를 읊었으며, 근대에서 수주 변영로의 「명정(酩酊) 40년」, 무애 양주동 박사는 우리나라 인간국보 제1호라는 천재성을 과시하면서「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를 통해서 자신이 술에 입문하는 과정과 문인들과 교유(交遊)하는 술에 관한 일화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 그후에 평론가 신동한 선생이 「문단주유기(文壇酒遊記)」를 써서 우리 문인술꾼들의 일화를 남기고 있다. 대체로 문인들은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술마시기에서 임병호는 단호하게 ‘술이란 무엇이냐’하고 의문을 제시하고 스스로 ‘인생사 서러움 / 외로움 / 염세주의도’ 강물에 떠내려 보내는 처방을 내리고 있다. 그것도 ‘노을 속’이거나 그 ‘강둑에서’ 훌훌 털어 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막걸리처럼 / 소주를 / 배부르게 먹고 싶다’던 기대에 부응해서 ‘소주를 마셔댔지만 ’배는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영혼이 먼저 마신 탓‘으로 돌리고 그는 ’육신만 술 취해 쓰러졌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이 이 작품「술」에 대한 경건한 주제이며 그의 시적진실이다. 어이 임병호 시인. 달빛 쌓이는 언덕이나 비 오는 날 아니면, 노을 내리는 강물 옆에서 ‘천렵국’은 끓이지 않더라도 언제 또 우리 주당(주선(酒仙)끼리 모여서 이태백처럼 일배일배 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 합시다.   ----------------------------------------------------------------------------------------------------------------------------------------------------- “맥주 한잔과 목숨의 보증만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명예 같은 건 버려도 괜찮다”는 명언을 남겼던 영국 작가 셰익스피어.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은 보통사람들보다 술을 좋아하고 술이 없으면 고통스러워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틀린 생각이라고 단정짓기도 곤란하다. 역사상 위대한 예술가들의 다수는 술을 좋아했고 술을 통해 명작을 남기기도 했다. 매일 술을 마신 후 빈 병을 팔아 물감을 샀다는 화가의 이야기와 술을 마셔야만 글과 그림이 술술 풀린다고 주장하는 사람, 심지어 술이 없으면 아예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말했던 예술가들의 이야기처럼 예술작품이 아닌 술과 관련된 그들의 뒷이야기는 흥미롭다. 그 중에서 안견, 김홍도와 함께 조선시대 미술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영화 ‘취화선’을 통해 그의 예술성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다고 하지만 장승업의 작품을 기억하는 사람보다 그의 술과 관련된 기행만을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조선 말기의 화가로 근대 회화의 토대를 마련한 장승업은 일생을 술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지냈다. 임금의 명령을 받아 대궐의 병풍을 그리던 중에도 채색도구를 산다는 핑계로 주막에 가 술을 먹을 만큼 그에게 있어서 술은 떨어지면 불안한 가족 같은 존재였다.       ◇장승업의 '산수영모10병풍' 중국 역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 받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도 소문난 주당이다. 이백은 술 한 말(약 18L)을 마시며 시 100편을 지었고 술을 먹으면 고상하고 오묘한 말솜씨로 좌중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두보는 당대 주호(酒豪)로 불릴 만큼 음주를 즐겼고 그가 남긴 1천400여 편의 시 중 20%가 술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술로 유명했던 당대 인물 8명의 기이함을 묘사한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를 남길 만큼 술과 인연이 깊었다. 신경정신의학적으로 예술가들이 술을 통해 창작활동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음주를 하면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 분비가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세로토닌’이 뇌에 전달되면 예술가들이 가장 많이 앓는 불안감과 우울증을 단기적으로 다스릴 수 있다. 또한 음주로 고취된 상태에서 즉흥적 영감을 주는 촉매제 역할을 담당해 많은 예술가들이 술을 마신다. 김병기(인문대 ㆍ중문) 교수는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하는 예술가들의 직업특성 상 불안감과 우울증을 해소하고 영감을 얻기 위해 술을 이용한다”며  “옛 동양의 화가나 서예가를 보면 술을 적당하게 마시고 한숨에 글씨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예술을 지향했다고”설명했다.
1076    주당(酒黨)들 이야기 댓글:  조회:6144  추천:0  2015-04-26
조선의 주당들의 이야기 모음    문성(文星) 그리고 주성(酒星) -윤회     윤회(尹淮, 1380 ∼1436)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윤회는 당대의 주당으로 세종이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하루에 술 석잔 이상을 마시지 말라고 명령했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술 석 잔은 그에게 너무나 적은 양이었다. 윤회는 꾀를 냈다. 술을 먹을 때마다 반드시 가장 큰 그릇으로 석 잔씩을 마시기로 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은 웃으며, "내가 술을 적게 먹게 하려고 한 것이 오히려 술을 많이 먹게 한 꼴이 되었구나."라고 탄식했다 한다.   어느 날 윤회는 술에 만취되어 부축을 받고 왕 앞에 불리어 나갔다. 그러나 윤회는 만취한 가운데서도 왕의 명대로 글을 써 내려갔다. 붓대가 나는 듯이 움직이자 세종은 참으로 천재라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문성(文星)과 주성(酒星)의 정기가 합하여 윤회와 같은 현인을 낳았다' 고 말했다고 한다.   풍류를 사랑한 왕자 - 양녕대군   양녕대군 (讓寧大君, 1394∼1462)은 이름은 이제, 자는 후백(厚伯)으로 태종의 장남이자 세종의 형이다. 태종 4년(140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일을 많이 했다. 양녕대군은 공부는 뒷전으로 두고 여색을 탐하며 궁궐 담을 뛰어넘어 잡인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즐겼다. 그의 곁에는 항상 술이 끊이지 않았고 술과 더불어 기생들과 질펀하게 놀기를 즐겼다고도 한다. 그러나 시(詩)와 서(書)에 능하였고, 세자 자리에서 물러난 후 방방곡곡을 유람하며 풍류객들과 어울려 사귀다가 일생을 마쳤다.  충녕, 즉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의 기행은 그치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술과 풍류를 즐겼다. 그의 술잔은 말가죽신 - 이사철   이사철 이사철(李思哲, 1405∼1456)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역사가는 이사철이 종친이었으므로 일찍부터 현달했으나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가부를 명백히 결단하지 못하는 결점이 있었다고 평한다. 또 술을 무척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이사철이 젊은 시절 여러 벗들과 삼각산으로 놀러갔다. 그런데 산으로 올라가서 보니 모두가 술은 가지고 왔으나 술잔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 함께 온 사람 가운데 새로 만든 말가죽신을 신은 이가 있었다. 이것을 본 이사철이 그 신을 벗게 한 후 그 신에 술을 담아 먼저 마셨다. 이것을 본 다른 친구들도 그 신에 술을 담아 차례로 술을 마셨다. 서로 보며 크게 웃고 말하기를, "가죽신 술잔의 고사를 우리가 지어도 괜찮겠소." 라고 했다. 대식가(大食家)이자 대주가(大酒家) - 홍일동   홍일동(洪逸童, ?∼1464)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호는 마천(麻川)이다. 세조 10년(1464) 행상호군(行上護軍) 선위사(宣慰使)로 홍주에 갔다가 거기서 과음으로 죽었다. 그는 사부(詞賦)를 잘 짓고 술을 즐겨 마셨다 한다. 홍일동은 홍길동의 실제 형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홍일동은 술을 잘 마셨고 취하면 풀피리를 만들어 즐겨 불었다고 한다. 그는 엄청난 대식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진관사로 놀러갔을 때 떡 한 그릇, 국수 세 그릇, 밥 세 그릇, 두부, 청포 아홉 그릇을 먹고 내려오다가 산 아래서 다시 삶은 닭 두 마리, 생선국 세 그릇, 어회 한 그릇, 그리고 막걸리 40여 잔을 비워 주위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술정치의 대가 - 세조   세조 세조(世祖, 1417~1468)는 조선 제 7대 왕으로 세종의 둘 째 아들이다. 세조는 무예에 능하고 병서에 밝았다. 세종 승하 후 왕위를 계승한 문종이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3년 만에 단종이 선위(禪位: 임금의 자리를 물려줌)하게 하고 왕위에 오른다.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국방력 신장에 힘쓰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나,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이유로 많은 저항을 받았다. 세조는 신하들과 술자리를 자주 가졌다. 이는 세조의 왕위 계승이 정당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초기부터 왕위에서 물러날 때까지 자주 종친이나 공신, 다른 여러 신하들에게 술자리를 마련하여 친화의 계기로 삼았다. 정치적 목적으로 술을 사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역시 술을 좋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세조가 집권하던 시절 많은 신하들이 술병에 걸려서 일찍 죽기도 했다고 한다. 한 말이 들어가는 술잔 - 손순효   손순효(孫舜孝, 1427~1497)는 조선시대 문인으로 옛 사람의 고사에서 삼휴(三休: 쉴 수 있는 세 가지 이유)와 사휴(四休: 자기 처지가 좋은 네 가지 이유)를 인용해 자신의 호를 칠휴거사(七休居士)라고 지었다. 성종은 손순효의 재주를 매우 사랑하여 그가 술을 자주 마시는 것을 늘 염려했다. 그래서 성종은 손순효에게 부분적인 금주령을 내렸다.  “경은 이제부터 하루에 석 잔 이상을 마시지 말라.”라고 했다. 그 후 임금이 손순효를 불렀다. 그런데 손순효는 술에 취해 흐트러진 차림새로 나타났다. 호통을 치는 임금에게 손순효는 술을 권하는 바람에 반주로 술 석 잔을 마셨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그러나 그 잔은 한 잔에 한 말이 들어갈 정도로 큰 잔이었다. 임금은 손순효가 술에 취해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부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손순효는 정신을 가다듬더니 한 번에 표문을 완성하였다. 이에 성종은 감탄하여 그에게 술상을 내렸다. 그리고 그가 마음껏 먹도록 허락하였다. 이에 술을 마음 놓고 마신 손순효는 너무 취하여 일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임금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에게 덮어주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노여움과 슬픔을 달래준 술 - 김시습   김시습(金時習, 1453~1493)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3살 때부터 시를 지었으며 신동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김시습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겪으며 가치관의 혼란과 인생살이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그 이후, 벼슬길에 대한 꿈을 접게 된다. 김시습의 짙은 노여움과 슬픔을 달래주었던 것은 바로 술이었다. 그는 지조를 팔아 목숨을 부지했던 당시 사람들과 절개를 꺾은 변절자들을 질타하며 통렬한 풍자의 시를 지었다. 김시습의 옛 글벗 신숙주는 항상 떠돌아다니는 김시습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하루는 사람을 시켜 김시습을 대취하게 만든 뒤에 그를 집으로 데려오게 하여 좋은 옷으로 갈아입히고 비단이불을 덮어 재웠다. 술에서 때어난 김시습은 깜짝 놀랐다. 그는 곧 자신이 변절자 신숙주의 집에 있음을 깨달았다. 자기에게 입혀진 좋은 옷을 보더니, 그 좋은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집을 나섰다. 신숙주가 급히 와서는 나가는 그의 손을 잡았다.  “이왕 온 거, 밥이라도 먹고 가게. 제발.” 그러나 김시습은 잡힌 손을 뿌리친 채 한바탕 욕설을 그에게 퍼부었다.  “이 손 놔라 놔! 니가 입은 좋은 옷과 신발은 백성의 가죽이요, 니가 먹는 맛있는 음식은 백성의 살과 피라는 사실을 알기나 하느냐? 난 그런 것에 조금도 미련이 없다. 너나 백성의 가죽과 피를 먹고 배불리 살아라!” 이처럼 조정 대신들 치고 길거리에서든지 집에서든지 김시습에게 한두 번 망신당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왕위와 바꾼 평생의 친구, 술 - 월산대군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의 본명은 이정(李정), 호는 풍월정(風月亭)이다. 조선 전기의 종실로 성종의 형이다. 사실상 왕위계승권을 성종에게 넘겨준 월산대군은 이후 현실을 떠나 자연 속에 은둔하여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후에 양화도 북쪽 언덕에 망원정(望遠亭)을 짓고 서적을 쌓아둔 채 시문을 읊으면서 풍류 넘치는 생활을 한다. 그의 시는 중국에서도 널리 애송되었다. 성품은 침착하고 깨끗했으며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였다. 성종의 형이었기 때문에 월산대군은 함부로 처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연 속에 은둔하며 조용히 사는 삶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시조를 보면 유유자적하고 한가로운 삶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들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역으로 그가 외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운데 그의 벗이 되어 준 것이 술이었다. 그가 쓴 술에 관한 시조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밖에 국화를 심고 국화 밑에 술을 빚어 놓니 술 익자 국화 피자 벗님오자 달이 솟네 아희야 거문고 청처라 밤새도록 놀아보리라. 유유자적한 그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시조다. 그러나 왕위를 동생에게 내주고 은둔해야 했던 심정을 월산대군 외에 또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술이 월산대군의 마음을 달래주는 친구요, 위로였음은 자명한 일이다.     국화와의 대작 - 신용개 신용개(申用漑, 1463∼1519)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신숙주의 손자이다. 신용개는 글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성품이 호탕하고 술을 좋아했다고 한다. 때로는 늙은 계집종을 불러 서로 큰 잔을 기울여 취하여 쓰러져야 그만두기도 하였다. 국화를 좋아해, 여덟 분(盆)을 길렀는데, 하루는 그가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좋은 손님 여덟 분이 오실 것이니 술과 안주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라.” 그러나 해가 저물어 가는데도 손님은 오지 않았다. 이윽고 밤이 됐고, 달이 떠오르자 국화의 꽃빛과 달빛이 흐드러져 희고 깨끗하였다. 그제서야 그는 술을 내오라 이르고, 여덟 개의 국화 분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것이 내 좋은 손님들이다.”  하고는 화분마다 각각 두 잔씩을 따라 주고 끝냈는데, 신용개도 또한 취하였다. 기생의 소매 자락에 시를 쓴 사대부 - 강혼   강혼(姜渾, 1464~1519)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도량이 크고, 작은 일에 거리낌이 없는 호방한 사람으로 특히 시문에 능한 풍류객이었다. 강혼은 젊은 시절 진주에서 살았다. 관직에 나아가지도 못한 때였지만, 그는 진주의 관기와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기녀가 진주목사의 수청을 들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관기의 신분으로 관의 명령을 거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청을 들러 가는 기생을 보며, 강혼은 그 기녀의 소매에 시 한수를 적어 준다. 미처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기녀는 진주목사에게 갔다. 그런데, 기녀의 소맷자락에 쓰인 시를 발견한 진주목사가, 이 글을 지은 사람을 빨리 찾아오라며 엄명을 내렸다. 모두들 진주목사가 강혼에게 큰 벌을 내리리라 여겼다. 그러나 진주목사는 불려온 강혼에게 오히려 술상을 대접했다. 목사는 강혼에게 글이 매우 좋으니 좀 더 공부하여 과거를 보고 벼슬에 나아갈 것을 권고했다. 좋은 시를 알아보는 진주목사의 혜안 덕에, 강혼은 진주기생과의 인연을 이후에도 지켜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파격의 주선(酒仙) - 연산군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은 성종의 맏아들로 조선조 제 10대 왕이다. 재위 초기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죽음을 알고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이고, 또 조모인 인수대비를 구타하기도 하며 윤씨가 폐비가 되는데 찬성한 사람들 수 십 명을 죽였다.   또한 각 도마다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를 파견해서 아름다운 여인과 좋은 말을 구해 오게 해, 춤과 술과 노래를 즐겼다. 미녀라면 다른 사람의 아내를 뺏는 일도 서슴지 않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쫓아내 그곳을 놀이터로 삼기도 했다. 결국 중종반정(1506)으로  폐왕이 되며 연산군으로 강봉되고 그 해 병으로 죽었다. 연산군은 폭군이라 불리운다. 자신의 퇴폐와 향락 때문에 스스로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혹자는 연산군을 파격적인 주선이라고도 한다. 권력이 두렵지 않은 주당 - 박은   박은(朴誾, 1479∼1504)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학자로 호는 읍취헌(읍翠軒)이다. 15세에 이미 문장이 능하여 그를 기특하게 여긴 대제학 신용개(申用漑)가 사위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박은은 당대를 주름잡던 권력자 남곤과 친분이 있었다. 그는 이색과 함께 늘 술을 들고 남곤의 집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남곤이 벼슬길에 오른 후에는 그를 만나기가 무척 어려워졌다. 어느 날 박은이 남곤의 집에 갔다가 역시나 남곤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남곤의 집 뒤에는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박은은 그 바위를 만나기 어려운 남곤에 빗대 대은암(大隱岩·크게 숨어있는 바위)이라 불렀다. 또한 그 밑을 흐르는 시내를 만 리 밖에 있는 여울과 같다는 뜻으로 만리뢰(萬里瀨)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풍류객다운 호기이다.     죽음의 이유 - 유운   유운(柳雲, 1485∼152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항재(恒齋), 성재(醒齋)이다. 연산군 10년(1504) 과거에 급제하여 후에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정사를 돌보지 않고 기생들과 술만 마신다고 탄핵을 받아 동지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 기묘사화 때 남곤에 의하여 대사헌이 되었으나 조광조(趙光祖)를 구원하려다가 파직 당했다.   주당은 술을 즐기는 사람이지만 술에 빠져 살다보면 자신의 책임을 잊어버리게 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유운이 바로 그러한 경우인데 그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기생과 술을 많이 마셨다는 이유로 탄핵될 정도였으니 그 정도가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운은 파직 당한 후 향리에 묻혀 살았는데 술로 자신의 울분을 달래다가 죽었다고 한다. 야담에서는 그가  술을 먹고 배가 터져 죽었다고 전한다.   거칠 것 없는 호기 - 윤결   「시정기(時政記)」 필화사건으로 참형된 안명세(安名世, 1518~1548)를 술자리에서 변명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윤결은 성격이 고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호를 취부(醉夫: 취한 사나이)로 지을 만큼 술을 좋아하였다. 술에 취하여서도 그는 언제나 자기가 할 말은 다 했다.   문정황후 수렴청정 시절 진복창이 득세할 때의 일이다. 한번은 진복창이 주최하는 연회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하게 될 일이 있었다. 그 자리가 탐탁치 않았던 윤결은 술을 연거푸 마시고 진복창에게 토해버렸다. 후에 다른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간악한 자가 준 술을 어찌 뱃속에 담아 둘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다고 한다.      천하의 풍류 가객 - 정철   정철(鄭澈, 1536~1593)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시인으로 호는 송강(松江)이다.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한국 시가의 쌍벽으로 불린다. 그의 빼어난 산문과 절편의 시들은 그가 술과 함께 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지은 권주가 「장진주사(將進酒辭)」는 400년의 세월을 넘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사랑을 받고 있다.       ( 한 잔 먹어 보세 또 한 잔 먹어 보세. 꽃 꺾어 셈을 하면서 한없이 먹어 보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꽁꽁 졸라매어져서 가거나 호화로운 상여에 만인이 울면서 따라가거나, 억새풀과 속새와 떡갈나무와 백양나무 숲에 가기만 곧 가면, 누런 해, 흰 달, 가는 비, 함박눈, 음산한 바람이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고 할 것 같은가. 하물며 무덤 위에 잿빛 원숭이가 휘파람을 불때, 뉘우친들 무엇하리)   장진주사는 인생이 덧없음을 이야기하면서, 죽고 나서 후회하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젊을 때 술을 마시며 즐기자 라는 내용의 사설시조이다.   파격의 명문장가 - 임제   임제(林悌, 1549~1587)는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시인으로 호는 백호(白湖), 겸재(謙齋)이다. 임제는 성격이 강직하고 고집이 세며, 아부하지 않는 천성으로 인해 벼슬 운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조정의 당파 싸움에 개탄하며 벼슬길에 물러난 임제는 명산을 찾아 시문을 즐기며 호방하게 여생을 보냈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시와 술로 울분을 삭혔다. 임제는 당대 명문장가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기녀들과의 사랑, 그리고 양반사대부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파격적인 행동으로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죽을 때 자신을 위한 곡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평안감사로 임명을 받은 후, 개성의 황진이 묘에 들러 시 한 수를 읊고 술을 부어주었다는 이유로 파직당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불세출의 여인 - 황진이   황진이(黃眞伊, ?-?)는 조선시대의 명기이다. 본명은 진(眞) 기명은 명월(明月)이다. 황진이는 미모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가창력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자존심도 강하여 그녀가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킨 일,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려다 실패한 뒤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다. 또한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었으며 글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愛情觀)을 드러내기도 했다. 기녀라는 독특한 직업 속에 술이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녀의 작품들은 술과 더불어 사는 풍류적이고 낭만적인 삶 가운데서 지어진 것이다.   시와 술로 한 평생을 삼은 주당 - 권필   권필(權齬, 1569∼1612)은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호는 석주(石洲)이다. 한문소설 [주생전]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났으며 시 속에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기도 하였으며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 풍자하기도 하였다. 선조 20년(1587)에 장원급제를 했지만 임금에게 거슬리는 글자가 있어 과거에서 떨어졌다. 권필은 그 이후로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광해군 4년(1612)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척족(戚族)들의 잘못된 행실을 풍자하였는데 그것이 광해군에게 발각되어 해남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 떠나는 날, 장독이 퍼지고 거기다가 행인들이 동정으로 주는 술을 과음하여 이튿날 동대문 밖에서 죽었다.   권필은 「희제(戱題)」라는 시에서,     시는 고민 걷어가기에 붓을 잡았고   술은 가슴 적셔주기에 잔을 들었지   라고 노래하고 있다.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자신의 한과 분을 달래는 것은 시와 술 밖에 없다는 그의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 다른 그의 시를 보면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허전함을 술로 달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을 만나 술을 찾으면 술이 없더니 / 逢人覓酒酒難致   술을 두고 님 그리면 오지를 않네 / 對酒懷人人不來   평생 내 몸의 일이 매일 이러하니 / 百秊身事每如此   크게 웃고 홀로 서너 잔 술을 기울이네 / 大笑獨傾三四杯   안빈낙도의 표상 - 윤선도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시인으로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해옹(海翁)이다. 윤선도는 정철·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으로 불린다. 윤선도는 조선 중기 정치 권력 면에서 약한 남인 출신이었다. 그래서 오랜 은거 생활과 유배생활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기간을 통해 수많은 한시와 시조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다. 그는 보길도에서 은거하며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며 술과 시로 세상을 살았다고 한다. 윤선도는 그가 지은 낙서재에서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다가 날씨가 좋은 날이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노비들에게 술과 안주를 마차에 가득 싣게 하고 기생들을 거느리고 나와 술을 한 잔 걸치고서는 어부사시사를 노래 부르게 했다. 또한 남쪽 산중턱에 있는 자연암석의 옥소대 위에서 채색옷을 입힌 기녀에게 풍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게 하여 연못에 그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감상하기도 했다. 유배생활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사치스러운 삶이었다.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았던 탓인지, 그의 술사랑에는 기행이나 파격이 뒤따르지 않았다.   품격 높은 주당 - 송민고   송민고(宋民古, 1592~?)는 조선 중기의 서화가로 호는 난곡(蘭谷)이다. 송민고는 삼절(三絶)로 불릴 정도로 글, 글씨, 그림이 뛰어났다고 하며 특히 산수화를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작품에 「산수도(山水圖)」가 있고 문집에 『난곡집(蘭谷集)』이 있다. 그는 일찍이 과거를 포기했다. 그 후 평생을 은거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송민고는 혼란한 정치판에 뛰어 들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연에 은거하며 살았다. 그런 그의 벗이 되어 준 것이 바로 술이었다. 그 중 조속(趙涑, 1595~1668)과의 일화가 야담에 전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강 조속이 전라북도 임피의 수령이 되어 부임하자, 난곡 송민고가 한산에서 조속을 찾아왔다. 조속은 그를 매우 반가워하며 술상을 차려 대접했다. 많은 술잔이 오고가고 송민고는 만취하여 쓰러져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 조속은 즉시 관아에 있는 말에 태워 송민고를 서재로 보내고 그 뒤를 따라갔다. 송민고는 말에서 내려 서재에 쓰러져서는 눈을 부릅뜨고 조속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내 시를 다 지었네.” 하고는 낭랑하게 다음과 같이 읊었다. 무더위에 정신없이 흠뻑 취하니,        / 昏昏욕暑醉如泥 바람결에 송별가가 벽제관에 흩어지네.  / 送客風驪散碧蹄 관로의 역정이 꿈에서처럼 지나가니,    / 官路驛亭如夢過 몸이 이미 작은 다리 서쪽에 이른 것도 몰랐네 / 不知身已小橋西 조선시대 사대부에게 시작(詩作)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대취한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시를 막힘없이 지을 수 있었던 송민고의 재능은 400여년이 지난 오늘도 빛나고 있다. 더욱이 술을 마음껏 즐기면서도 시인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은 그는, 술에 끌려 다니면서도 주당이라 자처하는 세인들에게 ‘진정한 주당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반드시 취해야 붓을 잡는 화가 - 김명국   김명국(金明國, 1600∼?)은 조선 중기의 화가로 일명 김명국(金鳴國), 김명국(金命國)으로도 알려져 있다. 호는 연담(蓮潭), 취옹(醉翁)이다. 김명국은 의기가 장하여 작은 일에 거리낌이 없는 호방한 성격으로 해학에 능했다. 그의 호 가운데 하나가 취옹(醉翁: 취한 늙은이)일 만큼 술을 좋아했다. 주당으로 알려진 화가들이 그렇듯이, 그림을 그릴 때는 반드시 술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하면 술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따졌다고 한다. 그리고 술에 취한 후에야 그림그리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도 술에 취한 후 그림을 그려야만 그의 재능이 다 발휘 된다고 말했다. 어떤 역사학자는 “김명국은 술에 취하지 않으면 그 재주가 다 나오질 않았고 또 술에 만취하면 만취해서 제대로 잘 그릴 수가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취해야 그림을 그리고 또 너무 취해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명국이 그린 그림의 대부분은 술에 취하여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그림은 대부분 술에 취해 재빨리 그려낸 듯한, 굳세고 거친 필법으로 그려져 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 민정중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노봉(老峯)이다. 인조 26년(1648)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직언을 잘 하여 사간원정언·사간에 제수되었고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다.   민정중은 그 아우인 민유중과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두 형제는 술을 매우 즐겨 마셨는데 이에 아버지 민광훈이 그들에게 금주령을 내릴 정도였다. 그에 관한 일화가 야담 『동패락송』 에 나와 있다. 민정중과 민유중 두 형제의 아버지가 강원도 관찰사로 가 있을 때의 일이다. 민정중 형제도 근친(近親: 멀리 있는 보모를 찾아가 뵘)을 하러 강원도에 와 있었는데, 거기 머물면서 형제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형인 민정중은 승지에 임명되었다는 어명을 받았고, 아우인 문유중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의 금주령도 그날만큼은 느슨해졌다. 형제는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술을 마셨고, 흠씬 취하게 됐다. 더는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연달아 술을 가져오라고 하자, 하인이 관찰사의 분부라면서 더는 가져올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민정중이 취중에 크게 호통을 쳤다. “너희 사또 나리의 접대가 어찌 이 모양이냐?” 사또라 하면, 곧 자신의 아버지를 가리키는데, 민정중은 너무 취해 자신의 아버지를 험담한 꼴이 된 것이다. 후에, 술이 깬 두 형제는 실언을 한 것에 크게 놀라 문 밖에 거적 자리를 깔고 처벌을 기다렸다. 그러나 관찰사는 웃으며 꾸짖지 않았다고 한다.   달관에 이른 주당 - 김창업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화가로 자는 대유(大有), 호는 가재(稼齋), 노가재(老稼齋)이다. 숙종 7년(1681) 진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한양의 동교(東郊) 송계(松溪)에 은거하며 전원생활을 하였다. 스스로를 노가재라 부르며 향리에서 거문고와 시 짓기를 즐기면서 사냥으로 낙을 삼았다. 김창업이 술을 좋아하였다는 것은 그가 지은 시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벼슬을 저마다 하면 農夫(농부)하리 뉘 이시며 醫員(의원)이 病(병) 다 고치면 北邙山(북망산)이 져려 하랴 아히야 盞(잔) 가득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여러 번 벼슬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를 마다하고 자연 속에 묻혀 살기를 원했던 김창업의 옆에는 항상 술이 있었다. 자신은 술을 먹으며 뜻대로 살아보겠다는, 소박한 소망이 담겨 있다. 술에 관해서는 달관에 이른 듯한 김창업의 소견은 다음 시에서도 나타난다. 거문고에 술대를 꽃아 놓고 호젓이 낮잠이 들었는데, 삽작문 개 짖는 소리에 반가운 벗이 찾아오는구나. 아이야! 점심 겸해서 마실 테니 외상으로 막걸리 상이나 차려오너라 이 시조 역시 자신을 찾아온 친구에게 술상을 대접하려는 김창업의 소박한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스스로 눈을 찌른 화가 - 최북   최북(崔北, ?-?)은 조선 숙종·경종·영조 시대의 화가이다.원래 이름은 최식(崔埴)이나 스스로 이름을 최북(崔北)이라고 개명 하였다. 붓(毫)으로 먹고 사는(生) 사람이라는 뜻으로 호생관(毫生館)이라는 호를 지었으며, 자신의 이름인 북(北)자를 둘로 나누어 최칠칠(崔七七)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산수화에 뛰어났으며 대담하고도 파격적인 자신만의 조형 양식을 이룩하여 조선 후기 회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최북은 술을 즐겼고 그림을 팔아 가며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전해진다. 특히 심한 술버릇과 기이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술에 취해 그가 벌인 행적들을 보면 과연 조선의 주당이라고 할 만하다. 최북은 하루에 5, 6되의 술을 마셨고 집안의 책과 종이로 술을 바꿔 먹어, 세간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주광'이라 불렀다. 이른바 예술인치고 구속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최북은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이름을 얻지만, 조선 중기 엄격한 신분제의 구속은 일개 화원(畵員)이었던 최북의 영혼을 억누르기에 충분했다. 그림 실력으로 이름이 나자 숱한 청탁이 들어왔다. 어느 날 권문세가의 한 귀인이 찾아와 최북에게 그림을 청했다. 그런데 그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다. 최북은 그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이에 귀인은 매우 화가 났다. 천한 그림쟁이가 양반 부탁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귀인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최북에게 협박을 했다. “감히 양반의 명령을 거절하느냐, 이 괘씸한 놈. 나에게 그림을 그려주지 않으면 네 심신이 편치 못할 것이다. ” 이 말을 들은 최북의 가슴에서 무엇인가가 폭발했다. 최북은 술을 진탕 마신 뒤, 문갑 위 필통에서 송곳을 꺼내서 자신의 눈을 찔러 버린다.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차라리 내가 나를 손대야겠다!” 그 이후, 최북은 애꾸가 되었고 늘 반 안경을 쓰고 다녔다. 그의 자존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기이한 행동과 술, 그림을 벗 삼아 한평생 살았던 최북은 어느 겨울날 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성벽 아래에 잠이 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 밤에 내린 폭설로 죽음을 맞게 된다.   ‘술낚시’의 원조 - 박지원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다. 호는 연암(燕巖)이다. 박지원은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한 실학자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실린 『허생전』, 『호질』, 『양반전』 과 같은 한문소설들은 당시 양반계층의 타락상을 고발하였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문학계,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연암 박지원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벼슬길에 오른 것도 만년의 일이다. 그러나 그의 집에는 항상 많은 선비들이 들끓었다. 그 손님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만만치가 않았다. 그래서 박지원의 아내는 손님이 올 때만 술을 마시라고 박지원에게 통사정을 했다. 집안 사정을 아는 박지원 역시 싫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박지원은 언제나 술이 고팠다. 1784년(정조 8년)의 어느 날의 일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관인 이 승지가 입궐하는 중이었다. 진고개를 지나는데 갑자기 초라한 선비 하나가 앞을 가로 막고는 이렇게 말했다. “영감, 누추하지만 잠깐 저희 집에 들렀다 가시지요. 바로 저깁니다.” “...나랏일이 바빠 그럴 겨를이 없소. 그런데 당신은 도대체 뉘시오?” 그러나 그 선비는 자신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임금을 모신다고 도도하게 군다느니, 담배 한 대 피우고 가라는데 비싸게 군다느니 갖은 핑계를 다 대며 놓아주지 않았다. 입씨름에 지친 이승지는 할 수 없이 그의 집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손님 오셨으니 술상 내 오너라.” 그 선비가 안에다 대고 외쳤다. 이윽고, 막걸리 두 사발에 안주라고는 김치밖에 없는 조촐한 술상이 나왔다. 술상이 나오자 선비는 술을 권하지도 않고 자기 잔의 술을 냉큼 마시더니, 이 승지 앞에 따라 놓은 술도 가져다가 다 마셔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승지가 기가 차서 그 선비에게 물었다. “도대체 나를 청한 이유가 뭐요? 그리고 당신은 뉘시오?” 그 선비는 끝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답하는 것이었다. “영감! 달리 생각 마시오. 오늘은 영감이 내 술 낚시에 걸려들었소이다. 하하하……” 좋아하는 술을 마실 수 없게 된 박지원이 손님이 와야만 술상을 내주는 아내를 속이고자 한 일이었다.   쉰(시큼하게 쉰) 술값 치른 사연 - 김병연(김삿갓)   김삿갓(金笠, 1807~1863)은 조선시대의 방랑시인으로 본명은 병연(炳淵)이다. 주로, 큰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김삿갓이라 불렀다.  폐족자(廢族子: 조상이 큰 죄를 짓고 죽어, 벼슬을 할 수 없는 자손)이기 때문에 벼슬을 할 수가 없었던 그는 20세 무렵부터 전국을 방랑하며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바람과 구름처럼 세상을 떠도는 자유인이 되기를 갈망했다. 방랑생활 가운데 그의 위안이 되고 벗이 되는 것이 술이었다. 황오(黃五)는 녹차집(綠此集)에서 김삿갓을 평하기를 “술을 좋아하고 광분하여 익살을 즐기며 시를 잘 짓고 취하면 가끔 통곡하면서도 평생 벼슬을 하지 않는 기인”이라고 평했다.   김삿갓이 어느 여름날 고개를 넘다 목도 마르고 해서 주막에 들렀다. 김삿갓은 주모에게 탁주 한 사발을 청했다. 주모는 김삿갓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술값을 떼일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너무 야박하게 내쫓는 것도 그렇고 해서 시큼하게 쉰 탁주를 한 사발 내 놓았다. 김삿갓은 더운 터라 탁주 한 사발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데 그 맛이 시금털털하였다. 김삿갓은 주모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꾹 참고 탁주 값을 물었다. 주모는 탁주 값이 두 닢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김삿갓은 주모에게 네 닢을 주었다. 주모는 어리둥절해 하며, 네 닢을 준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김삿갓이 말하기를, “ 두 닢은 탁주 값이요, 나머지 두 닢은 초 값이요.”   시대를 조롱한 희대의 익살꾼 - 정수동   정수동(鄭壽銅)-1808~1858)은 조선 후기의 시인으로 호는 하원(夏園)이다. 본래 역관의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나, 생업을 돌보지 않고 방랑생활을 즐겨 늘 가난하였다. 그는 당대의 사회적 모순에 불만을 느껴 광인처럼 행동하였고, 그가 권력이나 금력을 향해 날카로운 풍자와 야유로 저항한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그의 시는 번거로운 문장이나 허황한 형식을 배격하고, 간결한 가운데 높은 격조를 담고 있다. 정수동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기발한 익살꾼'이라 불렀다. 그는 흐르는 물과 같이 세상에 매달리지 않고 마음 가는대로 살았던 인물이다. 정수동은 돈과 벼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술만 마시면 기이한 행동과 해학을 연출했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풍류객이었다. 술을 매우 즐겨 마셨으며 술 한 두 잔 마신 후면 세상을 향한 비판과 풍자의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곤 하였다. 술을 너무나 좋아해서 죽을 때 저승에서도 외상술을 먹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술안주 얻어먹는 재치 정수동이 하루는 목이 칼칼하여 친구를 찾아가 술을 청했다. 주인이 곧 술상을 들여왔는데, 안주가 시원치 않았다. 정수동은 심술이 났다. 그래서 곧 주인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안주 없이 어찌 술을 먹을 수 있겠나? 내가 타고 온 나귀를 잡게.” 그러자 주인이 놀라며 물었다. “아니, 자네 갈 적엔 뭘 타고 가려나?” “저 뜰에 노니는 닭을 타고 가지.” 그 주인은 닭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파락호(破落戶)시절의 기억 -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은 고종의 아버지로 본명은 이하응(李昰應)이고 호는 석파(石坡)이다. 흥선대원군이 대권을 잡기 이전, 그는 안동김씨의 세력을 의식하여 일부러 자신을 파락호(破落戶)로 위장한다. 그는 세도가들의 잔치집이나 연회에 일부러 찾아가 술을 얻어 마시고 추태를 부리기도 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낮추었다. 혹시라도 종친에게 품을 수 있는 한 가닥 의심을 없애려는 의도에서였다. 대원군이 상가 집을 찾아다니며 술을 얻어 마시고 주정을 하기도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상갓 집의 개'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 양반의 신분으로, 보잘 것 없는 건달이나 잡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노름판에 끼어들어 노름을 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흥선대원군은 어떤 때는 술값이 모자라 자신의 난초 그림을 팔기도 하는 등 거의 젊은 시절을 술독에 빠져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야망을 잊지 않고 술자리를 통해 민심을 살피고 세도가의 정보를 입수하기도 하였다. 술자리에서 만난 사람을 기용한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젊은 시절, 춘홍이라는 기생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날도 거기서 술을 마시는데 우연히 옆자리에 있던 군금별장 이장렴(李章廉)이 시비 끝에 그의 뺨을 치며, "나라의 종친이 기생집에서 외상술이나 먹느냐?" 고 호통을 쳤다. 이 일을 기억한 대원군은 정권을 잡은 후 그를 불렀다."지금도 내 뺨을 때릴 수 있겠느냐?" 이장렴은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대원군께서 예전에 기생집에 드나들 때처럼 행동을 하신다면 다시 뺨을 때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되었다며 기뻐하며 그에게 술상을 대접했다.   술과 여자가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화가 - 장승업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은 안견,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의 3대 화가로 불린다. 호는 오원(吾園)이다. 화원(畵員)을 지내고 벼슬은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고아로 자라 어려서 남의 집살이를 하면서 주인 아들의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장승업은 취명거사(醉暝居士)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술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예술적 영감을 북돋아주는 매개가 바로 술이었던 것이다. 그는 어딘가 매여 있는 것을 싫어해서, 임금이 궁궐로 와 그림을 그리게 하면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을 정도이다. 또 결혼을 했지만 부인과 단 하룻밤을 보낸 후, 다시 방랑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술을 목숨처럼 좋아해서 그림을 그리고 받은 돈은 주막에서 술 먹는데 다 허비하였다. 그에게서 그림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사랑방과 술집이 바로 그의 집이었다. 세상에 널린 집들을 전전하며 장승업은 뜬구름 같은 일생을 보냈다. 특히 그림을 그릴 때 고운 여인네에게 술병을 들리고 술을 따르게 하여야 신이 나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장승업의 생애는 영화화되기도 했다. - 고운 여인 옆에서 그림을 그리다 장승업의 그림을 얻기 위해 어느 귀인이 그를 자기 집 사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좋아하는 술을 줄 터이니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마고 약속한 장승업은, 술만 마실 뿐 그림 그리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보다 못한 집 주인이 하루는 동네의 예쁜 기생을 데리고 왔다. “네가 가서 승업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말을 해 보아라.” 이 명을 받은 기생은 장승업에게 술을 따르며 그림 그리기를 종용했다. 이에 신이 난 장승업은 그 여인이 따라 준 술을 마시며 한 폭의 훌륭한 그림을  완성했다.  
1075    주도 18 댓글:  조회:4846  추천:0  2015-04-26
    주도(酒道) 18단계 1. 불주 (不酒) : 될 수 있으면 안 마시는 사람. 2. 외주 (畏酒) : 술을 겁내는 사람. 3. 민주 (憫酒) :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4. 은주 (隱酒) : 돈이 아쉬워 혼자 숨어서 마시는 사람. 5. 상주 (商酒) : 잇속이 있을 때만 술을 마시는 사람. 6. 색주 (色酒) : 성생활을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7. 수주 (睡酒) : 잠을 자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8. 반주 (飯酒) : 밥맛을 돋우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9. 학주 (學酒) : 술의 전경을 배우는 사람. 주졸(酒卒)의 단계. 10.애주 (愛酒) : 취미로 술을 맛보는 사람. 주도(酒徒) -1단. 11.기주 (嗜酒) :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 주객(酒客)- 2단. 12.탐주 (耽酒) :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 주호(酒豪) -3단. 13.폭주 (暴酒) :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 주광(酒狂)- 4단.! 14.장주 (長酒) : 주도 삼매에 든 사람. 주선(酒仙) -5단. 15.석주 (惜酒) :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주현(酒賢)-6단. 16.낙주 (樂酒) :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 주성(酒聖) -7단. 17.관주 (觀酒) :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술을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사람. 주종(酒宗)- 8단. 18.폐주 (廢酒) : 일명 열반주,                           술로 인해 다른 세상으로 떠난 사람. 주신(酒神). '언제나 즐겁게...  언제나 신나게' 사는 것은 권리...  
1074    <발바닥> 시모음 댓글:  조회:3835  추천:0  2015-04-26
    + 발바닥이 전해주는 말  산불로 폐허가 된 곳  돋아나는 고사리 꺾으며  축축하게 흐르는 땀  개울물에 발을 담그니  뼛속까지 깨달음이 새롭다  태초에 하나님 인간을 만드실 때  두 발로 걸으라고  튼튼하게 만들어 주셨는데  그 뜻 거역하고  자동차만 타고 다니니  이곳저곳 아픈 곳만 늘어난다  이제라도 그분의 뜻 따라  산새들과 들짐승처럼 뛰어다닐 때  지천명의 언덕을 훌쩍 넘을 것이라고  발바닥이 귓속말로 전해 주고 있다 (김귀녀·시인, 1947-) + 아내의 맨발 - 갑골문甲骨文  뜨거운 모래밭 구멍을 뒷발로 파며  몇 개의 알을 낳아 다시 모래로 덮은 후  바다로 내려가다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다  몸체는 뒤집히고 짧은 앞 발바닥은 꺾여  뒷다리의 두 발바닥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었다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 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한밤중 병실마다 불꺼진 사막을 지나  침대차는 굴러간다  얼굴엔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송수권·시인, 1940-) + 시인의 발바닥   목욕탕엘 갔다 굴참나무처럼 갈라진 내 발바닥을 보고 시인의 발바닥이 그 모양이냐고 누군가 말을 했다 유심히 보니 산도적의 발바닥 도망 나온 발바닥 어디를 쏴 다녔기에? 한쪽에 등 돌리고 앉아 발바닥을 문지른다 (김상현·시인, 1947-)  + 내 나이 마흔 넷의 발바닥  내 발바닥 꺼칠꺼칠한 게  어쩌면 낙타가 사막을 쉬임없이 걸어온 것처럼  물 한 방울 스밀 데 없어라  그처럼 하늘은 매냥  모래바람만 불어온 듯도 하거니와  갈 길 먼 낙타처럼 가다가  쉬어갈 때도 있거니 하면서  이제는 옆이나 뒤로 눈 돌릴 게 아니라  무작정 앞을 보며 걸어가는 것도  상책이려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서지월·시인, 1956-) + 발바닥아       발바닥아,  티눈 박여 못 쓰게 된 발바닥아,  오늘같이 할 일 없는 날은  때묻은 신발 하이타이 비누로 바래어 신고  아침 이슬 채이며  우북히 자라난 우리들 꿈의 옛 자취  보리밭머리 보리 팬 거나 보러 가지.  보리밭머리  깜부기로 입에 먹칠을 하고  그린 듯이 서 있으러나 가지.  발바닥아, 발바닥아,  매맞고 쫓겨나 갈 데 없는 발바닥아,  자운영 꽃핀 논두렁길로  구름 마중 우리 둘이 신나게  달려나 가지. (나태주·시인, 1945-) + 발바닥에게  발바닥으로 사는 그대 보고 싶다  자신을 억누르며 인내하는 바닥으로 사는  낮은 그대가 오늘은 보고 싶다  낮은 그대 낮은 생각 속으로  아침 창문이 열리면 슬픔처럼  가늘은 빗줄기가 쏟아진다  낮은 풀잎 뿌리를 적시고  그대 젖은 발자국 남기면서 걸어간다  땅과 가까이 온몸으로 물이 흐를 때  먼저 젖고 마는 그대 하얀 발가락  그대를 데리고 멀리 가고 싶다  그러나 오늘은 처참하게 비 내리고  수목들 뿌리가 젖는 것처럼  더욱 낮은 곳에서 떨고 있는 그대  오늘은 보고 싶다 (강영환·시인, 1951-) + 발바닥으로 읽다  찌든 이불을 빤다  무거운 이불 한 채, 물에 불린다  모란 잎, 때 절은 이파리  고무통에 담그니 발바닥에 풋물이 든다  모란꽃이 쿨럭쿨럭 거품을 토해낸다  고무통 수북히 거품이 솟는다  맥을 짚듯 두 발로 더듬는다  삶에 찌든 내가 밟힌다  먼 기억 속 부드러운 섬모의 숲을 거슬러 오르자  작은 파문 일렁인다  나비 한 마리 날지 않는 행간  지난 날 부끄런 얼굴, 밟히며 밟히며  자백을 한다  좀체 읽히지 않던 젖은 문장들  발로 꾹꾹 짚어가며  또박또박 나를 읽는다  눈부신 햇살 아래 모란꽃 젖은 물기를 털어 낸다  어디선가 날아든 노랑나비 한 마리  팔랑팔랑 꽃을 읽고 날아간다  (조경희·시인, 충북 음성 출생) + 발바닥     누워있는 아내 발바닥이  절여놓은 총각무 같다  온종일 버무려지던 열기 속에서  뒤죽박죽 얼마나 숨가빴을까  걷는 게 별것이 아니라는 듯  붉었다가,  희어지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듯  내보이는 희끄무레한 바닥  내 족보 속에 온갖 피톨들이  이곳에 몰려들어 길을 가자는데  신경통처럼 기울어지는 세간붙이를  희락 붉으락한 발바닥으로  다잡고 가라는데  더듬어보는 뒤꿈치에  뭉툭한 독기  이 모진 기운이 아내를  똑바로 서게 하였구나  때때로 귀찮아지는 체중을  받치게 하였구나. (정건우·시인, 강원도 양구 출생) + 발가락  양말과  신발 속에서  보낸 긴 하루  집에 와  양말을 벗으니  아, 예쁜 발가락 가족  어루만지고 싶을 만큼  저절로 정이 든다.  담담한 신발 속에서도  지치지 않기 위해  서로들 껴안고 지냈나 보다.  하얀 발가락들의  어깨가 좁다.  (권영상·아동문학가, 1953-) + 발가락 꼼질거리는 발가락이 오늘도 맨 아래에서  나를 지탱하고 있다.  단 한번도 호사를 모르는 발가락은  내가 가라면 가고  내가 오라면 오는  순종이 삶의 이유인 것처럼  처음부터 태어났던 모양이다.  오늘도 이유를 모르는 뜀박질을 하는 발가락은  온통 땀이 흥건하다.  온통 악취가 흥건하다.  길바닥은 혼탁한 매연에 숨쉬기가 버겁고  무심히 버려진 양심들이 겹겹이 쌓여  두 눈으로는 참아 건너지 못할 곳을  묵묵히 걷고 있다.  처음 누워있는 나를 일으키더니  이제는 앞을 향해 가라한다  이제는 앞을 향해 뛰라한다  그렇게  무언의 든든한 후원자는 오늘도  최후의 밑바닥에서 열심히 자신의 몫을 하고 있다.  (김노인·시인)
1073    알쏭달쏭 새끼고기 이름 댓글:  조회:5940  추천:0  2015-04-26
 방어 새끼 - 마래미  * 감성돔 새끼 - 남정바리 * 갈치 새끼 - 풀치  * 돌돔 새끼 - 뺀치 * 고등어 새끼 - 고도리  * 돌고기 새끼 - 가시리 * 숭어 새끼 - 모쟁이  * 전어 새끼 - 전어사리 * 농어 새끼 - 껄떼기  * 괴도라치 새끼 - 설치 * 명태 새끼 - 노가리  * 잉어새끼 - 발강이 * 조기 새끼 - 꽝다리  * 작은붕어 새끼 - 쌀붕어 * 청어 새끼 - 굴뚝청어  * 누치 새끼 - 모롱이 * 참돔 새끼 - 상살이  * 열목어 새끼 - 팽팽이 *흰베도라치 새끼 - 실치
1072    동물들 이름 어원 댓글:  조회:5258  추천:1  2015-04-26
동물들 이름의 어원 '돼지'의 원말 '도야지'는 원래 '새끼돼지'를 일컫던 말-  우리 속담 중에 '멧돝 잡으려다 집돝까지 잃는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멧돼지를 잡으려다가 집돼지까지 잃는다는 말이다. 지나친 욕심은 이미 가진 것도 잃게 한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멧돝'이나 '집돝'이란 말은 지금의 우리말 속에서는 아주 생소할 수도 있다.  * 멧돝;산돼지  '멧돝'이란 말은 우리의 국어사전에 이렇게 '산돼지'란 뜻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집돝'이란 말은 웬만한 국어사전에는 없다. 그러나, '돝'이란 말은 어느 사전에나 나와 있다. 그 곳을 보면 '돝'이 '돼지'의 옛말이라고 나와 있다. 옛날에는 '돼지'를 '돝'이라고 했던 것.  돼지'라는 말은 '도야지'라 했던 것이 변한 말이다. 즉, '도야지'란 말을 짧고 쉽게 하다 보니 '돼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야지'란 말은 '돝(돼지)의 새끼'란 뜻의 '돝의아지'가 변해 된 말이다.  돝의아지>도의아지>도이아지>도야지  '아지'는 '새끼'의 뜻이다. 지금의 '송아지-망아지-강아지' 등의 말도 '새끼'의 뜻인 '아지'가 들어간 것이다. '송아지-망아지'의 옛말은 '숑아지-망아지'이다. 그보다 더 오래 전의 옛말은 '쇼아지-마아지'이다. '개'의 옛말은 '가히'여서 여기에 '아지'가 붙어 '강아지'가 되었다. '돝+아지'에서 나온 '도야지(돼지)'는 원래 '새끼돼지'를 의미했던 것이다.  '아지'는 '작다'나 '새로 나다'의 뜻으로도 씌었다. 그래서 목의 작은(가느다란) 부분을 '목아지'(모가지)라 하고, 갈(갯가)에서 돋아난 풀을 '갈아지'(가라지)라고 한다. '도라지'는 돌밭에서 돋아나 원래 '돍아지(돌가지)'였다.  '아지'의 뿌리말은 '앗-앚'으로, 이 말은 '시작-처음'의 뜻을 가진 말이었다.  옛날의 여자(지금의 할머니) 이름을 보면 '김아지-이아지'식으로 '아지'라는 이름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아지'는 '아기'라는 뜻인데, 옛날엔 딸을 낳으면 아예 이름도 지어 주지 않고 '아기'나 '아지'로 그냥 부르다가 그것이 그대로 이름으로 굳혀져 버린 것이다.  '앗'(앚)이 '어머니'와 '아비'란 말 앞에 붙어 이루어진 것이 '아주머니'와 '아자비(아재비)'이다. 즉, '앚어머니-앚아비'가 변해 '아주머니-아재비'가 된 것이다. '아주머니'는 원래 '새 어머니'의 뜻이었고, '아재비'는 '새 아비'의 뜻이었다. 그러나, '아재비'는 현재의 의미로 '아저씨'의 낮은말로 되었다.  '앗'에서 나온 말에 '아찬'이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새로운' 또는 '새로'나 '처음'의 뜻을 갖는다.  '까치설'이라고도 부르는 '아찬설'은 '작은 설'의 의미로, 설 전날을 가리킨다. 또 한 해의 마지막 때(세밑)도 '아찬설'이라 했었다.  '아찬아달'은 '조카'를 일컫고, '아찬딸'은 '조카딸'을 일컫던 말이었다.  '아찬'은 '버금'의 뜻으로도 되었다. 신라시대엔 '아찬'이란 벼슬이 있었는데, '으뜸' 다음의 벼슬이었다. 이것은 '앚'이 '앛'으로도 되어 '버금(둘째)'이나 '작은'의 뜻으로 씌어 나온 것이다.  '앗'에서 나온 '아슴'이란 옛말은 지금의 '겨레' 또는 '친족'이란 뜻을 갖는 말이었다.'앗'은 또 지금의 말의 '아침', '아직', '아까(조금전)' 등 많은 친척말을 이루게 했다.  '아침'은 '앗'과 '참'이 합쳐 '아참'이던 것이 '아츰'으로 되었다가 변한 말이다. '참'은 '새참'(간식), '밤참'(야식), '한참' 등과 같이 '때'를 나타내는 말로, 결국 '아참'은 '이른 때'라는 뜻이다. '아직 안 왔다'의 '아직'도 '이른 때'라는 뜻의 '앗윽'이 '아즉'으로 되었다가 자리잡은 말이다.  '처음-새로' 등의 뜻을 갖는 이 '앗'은 '아시'로도 옮겨 갔다. 이 '아시'는 또 다음과 같은 말들을 이루게 했다.  *아시갈이:애벌갈이(초벌갈이)  *아시매기:김매기를 처음 하는 것  *아시빨래:본 빨래를 하기 전에 대강하는 빨래  '앗-아시'는 또 '아희'로 변하다가 지금의 '아이'란 말로 변하기도 했다. 또 '앗'은 '아스-아수'로도 되었다가, '아우'로도 되어 지금의 '동생'이란 뜻의 말로도 되었다. '아우'는 원래 '새로 태어난 사람'의 뜻이었다.  돝+아지  옛날 사람들은 돼지를 늘 작다고만 생각해 왔던 것일까?  '돝'이라는 말로도 충분할 텐데, 왜 '새끼'란 뜻의 '아지'를 붙여 '도야지(도돼지'란 말이 나오게 했을까? 우리에게 고기를 대어 주는 돼지. 커도 커도 또 크기를 바랐겠지. 그래서, 돼지가 아무리 커도 새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새 이름  '소쩍소쩍'은 '솥 적다' 우는 소리로 생각  '큰 새'라는 뜻의 '한새'는 '황새'로 변하고  새의 이름들은 그 우는 소리뿐만 아니라 크기, 모양, 빛깔, 성질 등 그 특징을 따라 붙인 것이 많다.  소리를 따라 이름붙인 새 이름들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뻐꾸기-뻐꾹뻐꾹  꾀꼬리-꾀꼴꾀꼴  따오기-따옥따옥  뜸부기-뜸북뜸북  부엉이-부엉부엉  개개비-개개개  '꾀꼬리'는 옛날엔 '곳고리'라고 했는데, 그러고보면 옛 사람들은 꾀꼬리의 울음 소리를 '꾀꼴꾀꼴'로 듣질 않고, '곳골곳골'로 들은 듯도 하다.  '개개비'는 휘파람과의 작은 새로, 휘파람새보다 조금 크고, 날개는 갈색인데, 늦은 봄에 날아와 갈대밭에서 '개개개' 하고 시끄럽게 운다. '개개비사촌'이라는 새도 있는데, 이 새는 개개비보다 작은 새이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여기서의 '노고지리'는 '종달새'의 옛말이다. '노골노골지리지리' 운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나왔다고 보고 있다.  휘파람을 불 듯이 우는 새에는 '휘파람새'라고 이름붙은 것도 있고, 피리를 불 듯이 우는 새라고 해서 '피리새'라는 것도 있다.  소리를 따라 이름붙은 새에 '소쩍새'라는 것이 있다.  소쩍새는 올빼미과에 딸린 새로, '작은 부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람에게 유익함을 주는 새이다. 그런데, 옛 노래 등에서는 이 새를 대개 '두견이(두견새)'라고 써 왔다.  이 새는 밤에 잘 우는데, 꼭 '소쩍소쩍' 하고 소리내어 우는 것 같다. 그리고, 조금은 처량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렇게 울기는 해도, 이 새가 많이 울면 농촌에 풍년이 든다고 믿어 왔다.  "올해도, 소쩍새가 저렇게 울어 대는 걸 보면, 가마솥이 터지도록 많은 벼를 거두겠구나."  이렇게 생각해 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소쩍소쩍' 하는 이 울음 소리를 사람들은 '솥 적어, 솥 적어.' 하는 소리로 좋은 뜻으로 해석을 해 온 것이다. 솥이 적다는 것은 솥의 크기가 작다는 뜻이 아니라, 올해는 풍년이 들어 벼를 많이 거두어 밥을 많이 지을 일이 생기니, 보다 큰 솥을 준비하라는 뜻으로 생각한 것이다.  꿩도 소리를 따라 이름붙은 것으로 보는데, 다른 새와 달리 암수의 이름이 완전히 독립적이다. 즉, 암꿩을 '까투리'라고 하고, 수꿩을 '장끼'라고 한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 낸 까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청파에 조이 씻은 몸을  더러힐까 하노라.  이것은 고려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에게 그 어머니가 고려를 뒤엎으려는 이성계의 무리와 어울리면 나쁜 생각에 물들게 되니 가까이 하지 말라는 뜻으로 지은 시조이다. 이 시조에서 까마귀는 이성계의 무리를, 백로는 정몽주를 가리킨다. 흰(선한) 빛깔의 해오라기(백로)와 검은 빛깔의 까마귀를 대비시켜 놓은 점이 재미있다.  이 시조에 나온 '해오라기'나 '까마귀'처럼 새 이름에는 색깔을 따라 이름붙은 새들도 많다.  까만 빛깔을 나타낸 이름에는 '까마귀' 외에 '가마우지', '검둥수리', '검둥오리', '검은지바뀌', '검은목두루미', '까만딱다구리' 등이 있고, 흰 빛깔을 나타낸 이름에는 '해오라기', '흰매', '흰꼬리수리', '흰배지바뀌' 등이 있다.  노랑 빛깔을 나타낸 이름에는 '노랑발도요', '노랑지바뀌', '누른도요', '황오롱이', '황조롱이' 등이 있고, 붉은 빛깔을 나타낸 이름에는 '붉은다리도요', '붉은배오목눈이' 등이 있으며, 푸른 빛깔을 나타낸 이름에는 '푸른해오라기', '청둥오리' 등이 있다.  흰 빛깔 때문에 나온 '해오라기'는 '회오라비'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해'는 '희다'는 뜻의 '희'의 소리가 변한 것이다.  '까마귀'는 몸 전체가 검은 새이다. 이 새는 예부터 '가마괴'라고 불러 왔었는데, 그것이 변해 '까마귀'라는 음으로 되었다.  겨울 철새인 '청둥오리'는 등이 퍼렇다고 해서 '푸른 등(청등)을 가진 오리'라는 뜻으로 이 이름이 붙었다.  모양을 따라 이름붙은 새들도 많다.  오목한 눈을 가진 '오목눈이(뱁새)', 꼬리가 긴 '꼬리치레'와 '긴꼬리닭', 알록달록한 무늬를 가진 '알락도요', '얼룩해오라기', 할미처럼 보이는 '할미새' 등이 그것이다.  '말똥가리'는 몸 모양이 말똥 같아 나온 이름 같지만 그렇지 않다. 배 부분이 갈색이고, 여기에 넓고 누런 바탕이 따로 있는데, 그 모양이 말똥 같아 나왔다고 보는 학자가 많다. 그러나, 학자 중에는 유달리 말똥말똥한 눈을 가져 그런 이름이 나왔다고 보는 이도 있다.  크기를 따라 이름붙은 새들도 있다.  '황새'라는 새는 원래 '큰 새'라는 뜻의 '한새'가 변한 말이다. 여기서의 '한'은 '크다'는 뜻을 나타낸다. '한새'가 '황새'로 된 것은 '큰 소'라는 뜻의 '한소'가 '황소'라는 이름으로 변해 온 것과 같다.  '크다'는 뜻을 '대'자를 붙여 나타내기도 하는데, 새 이름에서 그러한 꼴로 이름붙여진 것에는 '댓닭'이 있다.  '쇠'라는 말을 앞에 넣어 '크다'는 뜻이 들어간 새 이름도 있다. '쇠기러기', '쇠딱다구리', '쇠봉다리' 등이 그것이다.  '병아리'는 닭의 새끼를 말한다.  이 말은 '병'에 '아리'가 붙어서 된 말인데, '아리'는 '작다'는 뜻이다. '병아리'의 옛말은 '빙아리'로, 학자들은 '빙'이 '새'라는 뜻을 가진 '비'에 ㅇ이 덧들어간 말로 보고 있다. 즉, '병아리'는 '작은 새'의 뜻을 가진다는 것이다. '서리병아리'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이른 가을에 깨는 병아리를 말한다.  성질을 따라 이름붙은 새에는 떼를 지어 다닌다는 '떼까마귀(당까마기)', 싸움을 잘 한다는 '싸움닭' 등이 있다.  사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 붙은 새 이름들도 있다.  들에서 사는 '들꿩', '들비둘기', '들새', 산(메)에 사는 '메까치', '멧닭', '멧새(맵새)', '멧종다리', '산비둘기', 물에서 사는 '물까마귀', '물까치', '물수리', '물오리', '바닷가마우지', '바다꿩', '바다제비', '바다지빠귀(바가직박구리)', '바다종다리' 등이 그것이다. 굴뚝 근처에 자주 날아오는 '굴뚝새', 논에 사는 '논종다리', 섬에 사는 '섬새' 등도 사는 곳에 따라 붙은 새 이름이다. 그런가하면 덤불에 사는 '덤불백로'도 있다.  
1071    재미있는 새끼동물의 이름 댓글:  조회:6442  추천:0  2015-04-26
새끼동물에 붙이는 우리 말 이름   개 --> 강아지  닭 --> 병아리  말 --> 망아지  소 --> 송아지  '새나 짐승,물고기의 어린 것'을 이르는 이름  가사리 : 돌고기 새끼  간자미 : 가오리의 새끼  개호주(개오지) : 호랑이 새끼  고도리 : 고등어의 새끼  굴뚝청어 : 청어의 새끼  굼벵이 : 매미의 애벌레. 누에와 비슷하나 몸이 짧고 똥똥하다  귀다래기 : 귀가 작은 소를 일컫는 말  금승말 : 그 해에 태어난 말  꺼병이(꺼벙이) : 꿩의 어린 새끼  껄떼기 : 농어의 새끼  꽝다리 : 조기의 새끼  노가리 : 명태 새끼  능소니 : 곰의 새끼  담불소 : 열 살 된 송아지  돗벌레 : 가두배추밤나비의 애벌레  동부레기 : 뿔이 날 만한 정도의 송아지  동어 : 숭어의 새끼  마래미 : 방어의 새끼  며루 : 각다귀의 애벌레. 땅속에 살며 벼의 뿌리를 잘라먹는 해충  모롱이 : 누치의 새끼  모쟁이 : 숭어의 새끼  무녀리 : 한배에 낳은 여러 마리의 새끼 가운데서 맨 먼저 나온 새끼  물송치 : 잠자리의 애벌레  발강이 : 잉어의 새끼  발탄 강아지 :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한 강아지  부룩소 : 작은 수소를 일컫는 말  설치 : 괴도라치의 새끼  솜병아리 : 알에서 갓 깬 병아리  솔발이 : 한 배에서 난 세 마리의 강아지  송치 : 난 지 얼마 안 되는 소의 새끼. 암소의 뱃속에 있는 새끼  쌀강아지 : 털이 짧고 부드러운 강아지  쌀붕어 : 작은 붕어 새끼  애돝 : 일년 된 돼지 새끼  애소리 : 날짐승의 어린 새끼  어스럭 송아지 : 중소가 될 만큼 자란 큰 송아지를 뜻하는 말  엇부루기 : 아직 큰 소가 되지 못한 수송아지  전어사리 : 전어의 새끼  초고리 : 매 새끼  태성 : 이마가 흰 망아지  팽팽이 : 열목어 새끼  풀치 : 갈치의 새끼  하릅 송아지 : 한 살 된 송아지  학배기 : 잠자리의 애벌레  햇돝 : 그 해에 난 돼지  꿩 새끼는 사람이 보기에는 못나 보였나 봅니다. 그래서 외양이 잘 어울리지 않고 거칠게 생긴 사람을 꺼병이(꺼벙이로 변함)라고도 하는가 봅니다.  어릴 때 이가 빠지면 '앞니 빠진 개오지(개호주)'라는 놀림을 받곤 했는데 '앞이빨이 빠진 새끼 범'이라는 뜻이었군요. 뜻으로만 보면 놀리는 말도 아닌것 같은데 ... :-)  동물은 아니지만 식물의 새싹을 '싹아지'(싸가지)라고 하네요. "싹아지 없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등은 일맥상통하는 말들인 것 같기도 하고...  영어에서도 다양한 새끼의 이름을 사용하는군요. 알파벳순으로 정리한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주로 개과 동물에는 pup, 고양이과 동물에는 kit, 어린 새는 chick, 갓 부화한 새끼는 hatchling 등과 같이 붙이는군요.  [출처] 동물의 새끼이름 등... |작성자 물불 이종열    
1070    시와 술, 술과 시... 댓글:  조회:4124  추천:0  2015-04-26
‘시의 벗들에게 보내는 고은 편지’를 받고  주벽(酒癖)의 시인들을 비판한다 / 정세훈  “어찌 시인을 수행의 계율과 윤리로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시평』 창간호 『관심』 통권9호 고은 「시의 벗들에게」에서)  시인 고은 씨가 시단의 시객들에게 편지로 전한 이 반문은 예사롭지 않다.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첫째로 경직되어 있는 시단의 현실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고은 씨의 외로운 질책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경직되어 있다는 것은 곧 안주하고 있다는 말과 직결되고 있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두번째로 고은 씨는 그 무엇인가 큰 결단을 내리고  그것을 이미 실행해 옮기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리하여 그 결단에 따른 고은 씨의 시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사뭇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고은 씨의 편지에서 위의 반문에 대한 해답을 곁들이고 있다.  “이제 시인들 가운데 술꾼이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막말로 최근에 시가 가슴에서 터져나오지 않고  머리에서 짜여져 나오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일견, 한마디로 가슴을 찡하게 하는 편지다.  술은 때로 개인과 개인 사이를 한결 부드럽게 하고 여유롭게도 하며  너그럽게도 한다. 따라서 흥겹게 한다.  그 무엇보다도 소통의 장을 마련해주며  그에 따라 상상의 공간을 넓혀주는 매개체로서 술만한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런 면에서 고은 씨의 외로운 질책을 달갑게 받고 싶다.  그러나 술에게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어서  우린 이 가운데 부정적인 면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술에 대한 부정적인 면은 시단에서 종종 보여왔다.  36살의 나이로 요절한 시인 김관식을 예로 든다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닐 듯싶다.  이 지면은 김관식의 시편을 평가하는 지면이 아니고,  또 시평에 있어 일천한 내가 도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앞서 전제한다.  다만 시객이 술에 지나치게 집착할 경우 그 삶은 물론 시에 있어서도  얼마나 피폐해지는지를 알아보고자 할 따름이다.  그의 「病床錄」이란 시를 보자.  그는 이 시에서 “오장(五臟)이 어디 한군데 성한 데 없이”  병상에 10년째 누워 있는 상태에서 이 시를 지었음을 밝히고 있다.  왜 병상에 누웠는가.  그가 이 시에서 밝혔듯이 폐 또는, 간장 한두 군데가 아니고,  심장 비장 신장 등 오장이 다 상하게 된 지경에 이른 것은,  어떠한 연유에서일까.  무리한 노동으로 인해 몸이 혹사당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나친 술꾼 행세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이 시에서 “방안 하나 가득 찬 철모르는 어린것들”이  얼크러져 잠든 모습을 보며 다음과 같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만다.  “내가 막상 가는 날은 너희는 누구에게 손을 벌리랴./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그러면서 급기야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고  지극히 무책임하면서도 말도 안되는 당부를 자식들에게 남긴다.  치열한 삶을 살지 못하고 술에 의탁한 나약한 삶의 말로다.  그야말로 독자를 분통터지게 하는 시다.  시객은 시만 잘 쓰면 된다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작태의 결과다.  시객에게 시를 잘 써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면  아울러서 주위사람 특히 가족을 성실하게 책임지는 의무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시객이기 전에 인간의 기본 인륜이기 때문이다.  만약 시 때문에 가족을 책임지지 않겠다면 애초에 가족을 이루지 말아야 한다.  가족을 이뤄놓고,  그 가족 앞에 그 무슨 해괴망측한 술꾼의 이름을 가진 기인 행세를 한단 말인가.  시객은 가족을 내팽개쳐 버려도 괜찮은 부류들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또 다른 시인을 만나보자.  고은 시집 『만인보』에서 ‘아름다운 시인’이라고 읊은 시  「백석」의 주인공인 백석의 경우도 김관식에 못지 않다.  시 「백석」 2연에서 “아내도 집도 다 없어지고/압록강 끄트머리/  신의주 목수네 집 문간방에 들어”라고 서술했듯이  백석의 가족은 백석의 곁에서 없어졌다. 왜일까?  단순히 이 시만 접한 독자는 마치 백석의 가족이  아무 이유 없이 무정하게 백석을 버린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 원인은 백석의 지나친 음주행각과 여성편력으로 인한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사생활 또는 여인관, 연애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대체 시객이 아무렇게 행동하면 기인이 된다는 왜곡된 통념은  누가 만들었나.  그것은 은연중 자신도 답습하고 싶은 주변의 시객들이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민중이 술꾼으로 행세하며 가족을 내팽개치고 제멋대로의 삶에 취해 있다면  기인이라고 이름 붙여줄 것인가.  아마 시객들은 이들에게 ‘미친놈’이라고 힐난할 것이다.  기생 ‘자야’를 사랑한 백석은 자야가 선물한 넥타이를 소중히 생각하며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라는 연정의 시를 남겼다.  그런 그가 제자 김진세의 누이에 반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를 남겼다.  그는 이 시에서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라며 비몽사몽에 가까운 딱한 시어를 남긴다.  김윤식은 이 백석을 「백석론」에서 ‘천재시인’  ‘영원한 매력을 지닌 시인’ 또는, ‘백석 시학은 우리 민족의 북극성’이라는  새로운 성좌론(이 성좌론은 『학풍』 창간호,  1948년 10월, 편집후기에 처음 언급되었다.)으로 극찬하고 있다.  그러나 술집을 자주 찾았던 그의 삶은 이러한 극찬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가족에게 씻어내지 못할 한을 남겼다.  이화여전 출신으로 알려진 그의 아내가 1949년 외아들을 데리고 월남하면서,  백석이 만약 월남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증오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은 씨가 『시평』지를 통해 시객들에게 준 편지는 이와 같은 기인을 빙자한,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술꾼들이 되길 열망하는 뜻에서가 아닐 것이다.  다만,  현재 시단이 너무 삭막하도록 소통이 안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으로 이해된다.  “술 한잔 마신 김에 아마도 이런 이야기나 한가롭게 주고받는 시단이  얼마나 풍류스럽겠는가를 미루어보자는 것인가 봅니다.”  또는,  “또 하나는 시인에게는 그래도 세상의 악다구니로부터 좀 물러서서  유한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행로의 비애에 잠길 때  술이 근친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러한 대목에서 그렇다.  백번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는 농경사회를 한참 벗어나 산업사회를 넘어  정보화 사회에 흠뻑 빠져 있는 우리 시객들의 영원한 숙제인 것을.  더구나 이로 인한 핵가족화 속에서 자란 젊은 시객들은 오죽할 것인가.  고은 씨가 안타까워하듯이  “시가 머리에서가 아니라 가슴에서 터져 나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가슴에서 터져나오게 하려면  지나치게 술에 의존해서는 이룰 수가 없다.  지나친 음주는 가슴을 피폐하게 만든다.  피폐해진 가슴에서 어찌 제대로 된 시가 터져나올 수 있겠는가.  따라서 시객들은 시를 짓겠다는 미명하에 지나치게 술꾼들이 되어선 안된다.  술꾼 대신 삶꾼이 되어야 한다.  삶의 진정성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삶꾼이 되어야 한다.  술에 흐물흐물 취해 가는 방랑자가 되지 말고,  삶에 촉촉하게 배어 가는 유랑자가 되어야 한다.  1809년 유배 당시, 기근으로 허덕이는 민초들의 고통을 함께 하고자  「田間紀事」를 집필한 다산 정약용이  “음풍농월을 일삼는 시인의 시는 이미 시가 아니다”며,  민초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과 여자와 가무로 일관한  당시의 시객들에게 단호히 선언했음을 우린 아직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가슴에서 시가 터져나오게 하는 진정한 길은 술이 아니라  맑은 가슴과 맑은 정신으로 오직 만상(萬象)의 삶을 흠모하는 곳에서  찾아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악다구니판이라 해도  절대로 술을 그것의 도피처로 삼아선 안된다.  수행의 계율과 윤리를 초월한, 진정한 시객의 모습도 그렇게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결단코, 시객의 삶은 녹록하지 않은 것이다.       
1069    <신발> 시모음 댓글:  조회:4229  추천:0  2015-04-26
  + 구두에 관하여 내 신발은 어느 늙은 소의 가죽을 잘라 만든 것, 내가 걸어다닌 길들의 역사, 내 육체의 발이 오래 길들인 애인, 일몰의 시각에 저 혼자 외로운 추락의 왕자, 신발이 어느 날 갑자기 무겁다. 문 앞에 기운 없이 웅크리고 있는 헐벗은 개 한 마리, 세상을 비관하지는 않았다. 발은 불안한 바람을 딛고, 기우뚱 발은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을 딛고, 기우뚱 발은 공중변소도 다녀왔고, 길에 함부로 버려진 오물도 밟는다. 내 신발은 무겁다, 그것의 뒤축은 닳고 그것은 내 걸음걸이의 오랜 습관을 말해준다. 한밤중의 빈 구두는 말이 없다. 침묵 속에 숨은 한숨과 비명 소리를 듣는다. 이미 저를 많이 버린 구두는 비천하다, 삶도 저와 다를 바 없다. 시간은 모두 질기고 뻣뻣한 것들을 부드럽게 만든다. 굴종의 편안함이여, 헛된 욕망의 끝없음이여 그러나, 언제까지 굴종 속에 웅크리고 있을 것인가. 오래 신어 이미 발의 일부가 되어버린 구두여, 네 몸의 일부는 오래 닳고, 내 걸음걸이는 가끔 기우뚱거린다.  (장석주·시인, 1954-) + 구두 한 켤레의 시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만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쑬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소리가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 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있는 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 점 꾸려주지 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  (곽재구·시인, 1954-) + 네 켤레의 신발 오늘 저 나직한 지붕 아래서  코와 눈매가 닮은 식구들이 모여 앉아 저녁을 먹는 시간은  얼마나 따뜻한가  늘 만져서 반짝이는 찻잔, 잘 닦은 마룻바닥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소리 내는 창문 안에서  이제 스무 해를 함께 산 부부가 식탁에 앉아  안나 카레리나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가 긴 휘파람으로 불어왔는지, 커튼 안까지 달려온 별빛으로  이마까지 덮은 아들의 머리카락 수를 헬 수 있는  밤은 얼마나 아늑한가  시금치와 배추 반 단의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의 전화번호를  마음으로 외는 시간이란 얼마나 넉넉한가  흙이 묻어도 정겨운, 함께 놓이면 그것이 곧 가족이고 식구인  네 켤레의 신발  (이기철·시인, 1943-) + 구두 한 짝  비 맞고 있다 개나리 덤불 후미진 데 버려진 구두 한 짝, 발이 아닌 흙덩이를 신었다 어디서 어떻게 기막히게 알았는지 어린 채송화가 와 뿌리내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발의 추억과 냄새가 눈시울을 흔들어 놓기도 했지만 끈 떨어지고 뒤축 닳은 뒤에도 세상 넓어 누울 곳 남았는지 채송화 거처로서 별 불평 없다 사실, 사람이 신지 않으면  구두는 아무도 밟지 않는다 사람만이 구두를 신고 무언가 짓밟는다 그럴 때마다 구두는 허리끈 풀며 가까스로 발벗는 꿈에 젖었었다 다시 사람 꿈을 이제 꾸지 않아도 되는 오래된 구두 한 짝, 그 채송화네 집 처마 끝으로 빗방울 소리 수런수런 내리고 있다. (이진수·시인)                 + 신발의 꿈 쓰레기통 옆에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이 있다 벗어놓은 게 아니라 버려진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한 짝쯤 뒤집힐 수도 있었을 텐데 좌우가 바뀌거나 이쪽저쪽 외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얌전히도 줄을 맞추고 있다 가지런한 침묵이야말로 침묵의 깊이라고 가지런한 슬픔이야말로 슬픔의 극점이라고 신발은 말하지 않는다 그 역시 부르트도록 끌고 온 길이 있었을 것이다 걷거나 발을 구르면서 혹은 빈 깡통이나 돌멩이를 일없이 걷어차면서 끈을 당겨 조인 결의가 있었을 것이다 낡고 해어져 저렇게 버려지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내팽개치고 싶은 날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누군가 그를 완전히 벗어 던졌지만 신발은 가지런히 제 몸을 추슬러 버티고 있다 누가 알 것인가, 신발이 언제나 맨발을 꿈꾸었다는 것을 아 맨발, 이라는 말의 순결을 꿈꾸었다는 것을 그러나 신발은 맨발이 아니다 저 짓밟히고 버려진 신발의 슬픔은 여기서 발원한다 신발의 벌린 입에 고인 침묵도 이 때문이다 (강연호·시인) + 신발論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마경덕·시인) + 신발 벗고 들어가는 곳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熱帶漁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든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 생을 '쇼부'칠 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황지우·시인, 1952-) + 상가에 모인 구두들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喪家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 신고 담장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유홍준·시인, 1962-) + 향해일지 영안실 뒤뜰에 노아의 방주 떠 있다. 들어선다. 뒷굽 안쪽까지 젖은 구두는 벗어두고 벌써부터 구김살이 움켜쥔 넥타이는 풀어둔다. 없는 게 없다. 뻘건 국물엔 오늘 아침 잡았다는 소의 옆구리가 뜨고 붉은 화투패에선 화사한 꽃들이 피었다 진다. 환호성도 터진다. 투망한 화투패로 한 두릅 싱싱한 지폐를 낚아 올리고 푸른 새벽이 와도 충혈된 눈은 감길 줄 모른다. 기우뚱! 기울어진다. 배가 세찬 풍랑을 만날 때마다 승객들은 기우는 쪽으로 쓰러져 불편한 새우잠이 든다 이제 나서야 한다. 뒤엉킨 신발 속에서 용케 딱 맞는 구멍을 찾아내고 아직 하품이 덜 끝난 구두 속에 발을 쑤셔 넣는다. 어디로 가는가? 몸무게라도 재듯 잠시 구두 속에 서 있으면 어느새 내 몸은 긴 돛대가 되어 255미리 배 두 척 끌고 또 어디로 힘겨운 출항을 하려는가? 허공을 떠가는 고인의 배 한 척, 상주는 발인을 걱정하는데 빗줄기는 굵어진다. 다시 삶으로 회항할 수 있다면 (김종보·시인, 경기도 화성 출생)
1068    현대 그리스문학 대표 시인 - 니코스 카잔차키스 댓글:  조회:4640  추천:0  2015-04-26
편도나무에게 -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 나는 편도나무에게 말했노라.    편도나무야, 나에게 신에 대해 이야기해다오. 편도나무야, 나에게 신에 대해 이야기해다오.    그러자 편도나무가 꽃을 활짝 피웠다. 스물 하고도 다섯 살 때 출판사 편집부 말단으로 들어갔더니, 첫 일감이 낯선 그리스 작가의 자서전 교정이었다. 이 낯선 작가의 삶은 피의 려로(旅路)이고, 령혼은 사상과 리념의 격전지였다. 단박 이 낯선 작가에게 홀려 전집을 내자고 출판사 사장을 꼬드겼다. 그가 태어난 저 멀고 먼 크레타 섬에 꼭 가보리라고 했지만 정작 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꿈은 기어코 이루어지는 것인가. 마침내 재작년 여름, 크레타 섬에 갔다! 카잔차키스의 소박한 돌무덤 앞에 서 있는 묘비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살아 있을 때 작가가 직접 쓴 묘비명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니코스 카잔차키스 Νίκος Καζαντζάκης 출생 1883년 2월 18일  그리스 크리티 이라클리오 사망 1957년 10월 26일  독일 프라이부르크 직업 소설가, 시인, 정치가 국적  그리스 주요 작품 《그리스인 조르바》, 《미할리스 대장》, 《전쟁과 신부》 외 배우자 갈라테아 알렉시우(1926년 이혼), 엘레니 사미우(1945년 결혼) 니코스 카잔차키스(그리스어: Νίκος Καζαντζάκης, 1883년 2월 18일 ~ 1957년 10월 26일)는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동 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지형적 특성과 터키 지배하의 기독교인 박해 겪으며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스 민족주의 성향의 글을 썼으며, 나중에는 베르그송과 니체를 접하면서 한계에 도전하는 투쟁적 인간상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소설 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시적인 문체의 난해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1]   목차   [숨기기]  1 생애와 문학세계 1.1 태어나서 제1차 세계 대전 까지 1.2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죽을 때까지 1.2.1 공산주의 경도 1.2.2 제2차 세계대전과 내전 1.2.3 사회주의 운동과 결혼 1.2.4 교회의 박해 1.2.5 별세 1.3 문학세계 2 남긴 말 3 저작 3.1 소설 3.2 여행기 3.3 서사시, 희곡, 자서전     생애와 문학세계 태어나서 제1차 세계 대전 까지   이라클리오에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 1883년 오스만 제국 치하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미할리스 카잔차키스는 곡물과 포도주 중개상으로 중산층에 속했다. 그는 크리티 섬에서 중등 교육을 마치고 1902년 아테네 대학교에서는 법학을 공부했으며, 재학 도중 수필 《병든 시대》와 소설 《뱀과 백합》을 출간하기도 했으며 희곡도 쓰기도 했다. 1907년에는 파리로 유학했으며 베르그송과 니체 철학을 공부했다. 1911년 그리스로 돌아와 갈라테아 알렉시우와 결혼했으며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에 자원 입대하여 베니젤로스 총리 비서실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1917년 고향 크리티 섬에 돌아와 후에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알렉시스 조르바의 모델이 된 요르고스 조르바와 함께 갈탄 채굴 및 벌목 사업을 했었으며, 이것이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로 발전하였다. 1919년 베니젤로스 총리에 의해 공공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1차대전 평화 협상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이듬해 베니젤로스의 자유당이 선거에 패배하여 장관직을 사임하고 파리로 갔으며 그 후 유럽을 여행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 경도 빈에 체재하는 도중 1922년 그리스 터키 간 전쟁에서 그리스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전 민족주의를 버리고 공산주의 성향을 나타내기도 했으며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동경으로 러시아 어 공부를 하기도 했다. 1925년, 1928년에는 공산주의 활동으로 인해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했으나 루사코프 사건이 발생한 이후 소비에트 체재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으로 변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내전 1926년 갈라테아 알렉시우와 이혼했으며 이후 프랑스어와 그리스어로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1940년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이 그리스를 침공하자, 일시적으로 민족주의 쪽으로 돌아서기도 했으며 1944년 독일군이 그리스에서 철수하자 아테네로 돌아왔다. 그때 12월 사태로 알려진 내전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사회주의 운동과 결혼 이후 정치로 다시 뛰어들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리스 사회당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소풀리스 연립정부의 정무 장관으로 임명된다. 1946년 정무 장관직을 사임했다. 그해, 그리스 작가 협회는 카잔차키스와 앙겔로스 시겔리아노스를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랜 동반자였던 엘레니 사미우와 결혼했다. 교회의 박해 1953년 소설 《미할리스 대장》이 발간되자 그리스 정교회는 맹렬히 카잔차키스를 비난했으며 이듬해 로마 가톨릭 교회도 《최후의 유혹》을 금서 목록에 올리기도 했다. 이후 카잔차키스의 소설은 그리스에서 일시적으로 출간되지 않기도 했다. 카잔차키스는 교부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의 말을 인용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에 자신의 입장을 옹호했다. 1955년에는 그리스 왕실의 도움으로 《최후의 유혹》이 그리스에서 발간되었다. 별세 1956년에는 국제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7년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중국을 여행했으며 일본을 경유해 돌아오는 도중 백혈병 증세를 보여 급히 독일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때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와 만나기도 했다. 고비를 넘겼으나 독감에 걸려 10월 26일 독일에서 사망했다. 문학세계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베르그송과 니체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탐구, 한계에 저항하는 투쟁적 인간상을 부르짖었다. 대다수의 작품에서 줄거리 전개보다는 사상의 흐름을 강조했으며, 1951년과1956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어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대표작으로는 후에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최후의 유혹》과 《그리스인 조르바》,《오디세이아》(시)가 있다. 이중 소설 《미할리스 대장》과 《최후의 유혹》은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으로부터 신성모독을 이유로 파문당할 만큼 당시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니코스 카찬차키스는 교회로부터 반기독교도로 매도되는 탄압을 받았어도, 평생 자유와 하느님을 사랑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극작으로 1946년에 , 1959년에는 , 1962년에는 가 각기 상연되었다. 남긴 말   카잔차키스의 묘비 비문. 생전에 미리 써놓은 묘비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έφτερος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저작 소설 《향연》 《토다 라바》 《돌의 정원》 (1936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1940년) 《크노소스 궁전》 (1940년) 《그리스인 조르바》(Βίος και πολιτεία του Αλέξη Ζορμπά) (1943년) 《수난》 《미할리스 대장》(Ο καπετάν Μιχάλης) (1953년) 《최후의 유혹》(Ο τελευταίος πειρασμός) (1951년) 《성자 프란체스코》 《전쟁과 신부》 여행기 《스페인 기행》 《지중해 기행》 《러시아 기행》 (1940년) 《모레아 기행》 《영국 기행》 《일본, 중국 기행》 서사시, 희곡, 자서전 《오디세이아》(Οδύσσεια) (1938년) 《붓다》 《소돔과 고모라》 《영혼의 자서전》 《카잔차키스의 편지》
1067    묘비명 모음 댓글:  조회:9075  추천:1  2015-04-26
묘비명 일화        묘비명을“됐어!”라고 정해 놓은 사람을 안다  그의 아내의 묘비명은“생긴 것보다 더 많이 사랑받고 가다”이다  “됐어!”씨와“생긴 것보다 더 많이 사랑받고 가다”씨의  결혼 생활은 그런대로 행복했을 것 같다    가을날, 허공에서 묘비명들이 떨어진다  “이곳은 영혼이 말을 갈아타는 역참”*  “말 탄 자여 지나가라”*가 뚝 뚝 땅을 구른다    “어쨌든 죽는 건 늘 타인들이다”*  응 응 응  노란 엉덩이들이 대답을 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  손바닥들이 무원 삼매(無願 三昧)로 지상을 다둑인다  애쓰지 마라! 애쓰지 마라!  “여기 아내의 혀와 음부를 사랑한 만큼  아내의 배도 사랑하였던 돈 리고베르또 잠들다”**  봄이 되면 세상 아내의 배에서  묘비명들이 파릇파릇 또 태어나면 좋으련만  “흘러가는 물 위에 자기 이름을 쓰려고 한 자 여기 누웠 노라”*    * 쉬페르비엘, 예츠, 마르셀 뒤샹, 니코스 카잔차키스, 키츠의 묘비명들.  **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새엄마 찬양』에서.   ----------------------------------------------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유명한 묘비명들   묘비명은 Epigram[경구,풍자시]의 시작 epigram이란 원래는 기념비에 새겨넣기에 적합한 비문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그리스의'그리스 사화집(詞華集)'이 나온이후 부터는 짧고 간결한 시, 특히 신랄하고 도덕적인 교훈을 주로 담은것을 가리킴, 혹은 경구. 헤드헌터들은 6개월에 한번씩 이력서를 써보라고 조언한다. 이력서가 자신이 어떻게 일하는지, 경력관리차원에서 무엇이 부족한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기회라면 묘비명을 상상하는것은 좀더 넓은 눈으로 자기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차분히 응시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살아온 인생을 한 줄로 정리하는것.   -조지 버나드쇼(1856~1950 영국 극작가)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줄 알았지' -스탕달(19세기 프랑스 대문호)  '썼노라, 살았노라, 사랑했노라' -예이츠(1865~1939 아일랜드의 시인 극작가,1923년 노벨문학상수상)  '삶과 죽음에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마부여 지나가라!' -프랑스와 모리악(1885~1970 프랑스 소설가,1952년 노벨 문학상)  '인생은 의미있는것이다. 행선지가 있으며 가치가 있다.' -바이런(18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그러나 나는 살았고, 헛되이 살지 않았다.' -에밀리 디킨슨(1830~1886 미국의 시인)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모파상(1850~1893 프랑스 소설가)  '나는 모든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헤밍웨이(1899~1961 미소설가 1953년 퓰리처상,1954년 노벨문학상)  '일어나지 못해서 미안' -미셀 트루니(현존 프랑스 작가)  '내 그대를 찬양했더니 그대는 그보다 백배나 많은것을 내게 갚아 주었도다. 고맙다, 나의 인생이여!' -조병화(시인)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박인환(시인)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것' -에이브라함 링컨(미16대 대통령)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에디슨(발명왕)  '상상력, 큰 희망, 굳은의지는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것이다.' -이순신(장군)  '필생즉사(必生卽死), 필사즉생(必死卽生)' -김수환(1922~2009 추기경)  '나는 아쉬울것 없어라' (시편의 한구절) -중광스님  '에이 괜히 왔다' -모리야 센얀(일본 선승)  '내가 죽으면 술통밑에 묻어줘, 운이 좋으면 술통바닥이 샐지도몰라' -프랭크 시나트라(미 가수)  '최상의 것이 앞으로 올 것이다' -'최초는 짧고, 최고는 길다'         러시아의 문호(文豪)'니콜라이 고골리' 묘비명 - "고골리는 죽었다. 그는 러시아인 이었다.             그 손실이 너무 잔인하고 갑작스러워,우리는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쇼' 묘비명 - "내 우물쭈물하다 이럴 줄 알았다"   시인 천상병 묘비명 - 귀천(歸天)   중광스님 묘비명 - "에이, 괜히 왔다"   헤밍웨이 묘비명 -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다"   스탕달 묘비명 - "살고, 쓰고, 사랑했다"   노스트라다무스 묘비명 - "후세 사람들이여, 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마시오"   영국 소설가 헨리 필딩 묘비명 - "영국은 그가 낳은 자식을, 그 가슴에 안지 못함을 슬퍼한다"   임마누엘 칸트 묘비명 - "생각하면 할수록, 날이가면 갈수록,  내 가슴을 놀라움과 존경심으로 가득 채워주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속 도덕률이다"   프랭크 시나트라 묘비명 - "최상의 것은 앞으로 올 것이다"   아펜젤러 묘비명 -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이소룡 묘비명 - 브루스 리. 절권도의 창시자   르네 데카르트 묘비명 - "고로 이 철학자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블레즈 파스칼 묘비명 - 근대 최고의 수학자, 물리학자, 종교철학자인 파스칼   정약전(정약용의 형) 묘비명 - "차마 내 아우에게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며, 나를 보러 오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키에르케고르 묘비명 - "잠시 때가 지나면, 그 때 나는 승리하고 있으리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 묘비명 - "오오 장미여, 순수한 모순의 꽃"   칼 마르크스 묘비명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재미있고 유명한 묘비명| ▒  묘비명 모음   메모장 자기자신보다 휼륭한 사람을 활용하여 성공한 사람이 여기 잠들다 -데일카네기>   메모장 내 묘비는 원기둥에 구가 내접한 모양으로 세워달라 -아르키메데스-   메모장 웃기고 자빠졌네 -우리나라 개그우먼이 미리 써놓은 묘비명-   메모장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다 -버나드 쇼-   묘비명으로 미리 읽는 내 삶의 기록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습니다. 죽고 나면 묘지에 묻히고, 그 사람이 살아온 여정을 기록한 묘비가 세워집니다. 유명한 사람들은 과연 어떤 묘비명을 남겼을까요? 한 번 알아볼까요?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는 사업에 온 열정을 바친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듯한 묘비명을 남겼어요.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들을 주위에 모으는 방법을 알던 사람, 여기에 잠들다.         근대인의 고뇌를 그린 장편 철학시 《오디세이아》,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등으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는 평소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잘 담아낸 묘비명을 남겼죠.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인간의 존재와 고독을 평이하고 자연스런 언어로 표현한 조병화 시인은 자신의 묘비명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담았어요.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칭송받는 스탕달(Stendhal)의 묘비명을 보면 작가답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       독일의 대철학자이자 계몽주의 사상가 칸트(Kant)의 묘비명은 윤리의식 강한 학자의 사상을 잘 나타내주고 있죠.   날이 갈수록 내게 더욱더 새로워지는 것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다.       영국의 극작가이자 비평가, 소설가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버나드 쇼(Bernard Shaw)의 묘비명은 CF로도 널리 알려져 있어요. 작품과 생활 속에서 늘 풍자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그인만큼 묘비명도 익살 그 자체네요.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훗날 내가 세상과 작별을 고하고 다른 사람이 나의 묘비명을 봤을 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요?   '그럭저럭 무의미하게 살아온 사람, ○○○, 여기 잠들다.'     최소한 이런 묘비명은 남기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이 세상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지는 나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답니다.      중에서...   
1066    추억 댓글:  조회:2469  추천:0  2015-04-26
[ 2015년 04월 25일 08시 31분 ]      전 쏘련 령도자 레닌. [ 2015년 04월 25일 08시 31분 ]      모스크바 붉은광장 중앙에 위치한 레닌릉묘. [ 2015년 04월 25일 08시 31분 ]      전 쏘련 령도자 레닌 유체, 모스크바 붉은광장 중앙에 위치한 레닌릉묘에서. [ 2015년 04월 25일 08시 31분 ]      모스크바 붉은광장 중앙에 위치한 레닌릉묘에서 유체의 완정한 장구보존을 위하여 200여명의 과학자들로 구성된 '레닌묘소조'가 전 쏘련 령도자 레닌의 유체에 대해 2년에 한번씩 과학적 수복작업 수행. [ 2015년 04월 25일 08시 31분 ]      전 쏘련 령도자 레닌.  2015년 04월 25일 08시 31분       
1065    <<삼류 트로트 통속 야매 련애시인>> 댓글:  조회:4651  추천:0  2015-04-26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작가   류근 출판   곰 발매 2013.07.30      겨우 100만부 팔리는 무협지 한권 만 쓰겠다는 소박한 소망을 품고 있는 자칭 인 류근의 산문집을 만났다. 시인으로 등단 한지  22년이지만 그가 그동안 출간 한 책은 이 책을 포함해서 단 두권 뿐이다. 첫 시집이 줄간 되기까지 무려 18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골때린다. 술 안마실 때만 골라 쓰느라 18년이나 걸렸다는 거다.  술을 얼마나 마시길래 그런걸까?라는 의문은 책을 읽기 시작하면 금세 풀린다. 매일 매일을 술과 함께 하기에 글을 쓸 시간이 없다는 그의 일상. 정말 술을 마셔도 너무 마신다. 어금니 하려고 3년간 모아 두었던 돈도 술값으로 탕진하는 저자. 월세가 밀려 쫓겨나게 생겼어도 술만큼은 밀리지 않는, 일주일의 반 이상 필름 끊긴 폐인의 일상을 사는 저자는 책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류근을 알게 된건 그의 책이 아니라 책에서도 등장하는 소설가 겸 시인 김도언의 산문집 [나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를 통해서다.  김광석의 노래'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작사한 류근이 산문집을 집필하고 있다고 해서 특별한 산문집이 나올거 같다는 기대를 하면서 출간이 되면 만나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금세 잊어버리고 있다가,책을 보면서 다시 생각이 났다.    저자는 중학교때 장래희망이 시인이 되고 부터는 절대로 욕을 입에 담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 책엔 욕이 넘쳐난다. 무수히 많은 욕이 있지만 그가 시종일관 내 뱉는 욕은 '조낸 시바'다. 그의 글은 대부분이 이 욕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 욕은 거슬리지 않는다. 오히려 읽는 즐거움을 주는 조미료 역활을 톡톡히 한다. 비가 오는 날은 비의 사람과, 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의 사람과  꽃이 피는 날은 꽃의 사람과 햇살이 눈물나게 좋은 날엔 햇살의 삶과 술을 마신다는 저자. 구속받지 않으며 자유롭게 사는 그의 삶. 구군가는 부러워 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왜 저러고 사냐고 혀를 찰 수 도 있는 그의 코미디 같은 일상을 만나면서 시인은 어떻게 사는지 엿보는 즐거움이 있는 책 ,'술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라는 제목이 더욱 어울릴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이 책은 그의 책들 중 가장 많이 팔린 책이될듯하다.  18년만에 나온 시집이 7쇄 인쇄가 되어 수입이 생긴다고 무척이나 좋아 하던 저자. 그런데 이 책은 출간된지 불과 2달이 조금 넘었는데 벌써 7쇄를 넘어 섰으니 어디선가 기쁜 마음으로 술을 마시고 있을 듯 하다. ---------------------------------------------------------------------   가족의 힘    류근 ​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등켜 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을 봐 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 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 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 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대한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 ----------------------------------------------   시인들       류근   이상하지 시깨나 쓴다는 시인들 얼굴을 보면 눈매들이 조금씩 찌그러져 있다 잔칫날 울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심하게 얻어맞으면서도 어떤 이유에서든 이 악물고 버티는 여자처럼 얼굴의 능선이 조금씩 비틀려 있다   아직도 일렬횡대가 아니고선 절대로 사진 찍히는 법 없는 시인들과 어울려 어쩌다 술을 마시면 독립군과 빨치산과 선생과 정치꾼이 실업자가 슬픔이 과거가 영수증이 탁자 하나를 마주한 채 끄덕이고 있는 것 같아 천장에 매달린 전구알조차 비현실적으로 흔들리고 빨리 어떻게든 사막으로 돌아가 뼈를 말려야 할 것 같다 이게 뭐냐고 물어야 할 것 같다   울어야 할 것 같다   -----------------------------------------------------     반가사유      류근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겠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 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 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나이롱 커튼 같은 헝겊으로 원피스 차려입은 여자와 현실도 미래도 종말도 아무런 희망 아닌 여자와 외향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와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와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와 취해도 울지 않는 여자와 왜냐고 묻지 않는 여자와 아,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저문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돌아오지 말아야지 -----------------------------------------------------     너무 아픈 사랑        류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 없는 것 다만 사랑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 벌레처럼 울다        류근    벌레들은 죽어서도 썩지 않는다 우는 것으로 생애를 다 살아버리는 벌레들은 몸 안의 모든 강들을 데려다 운다 그 강물 다 마르고 나면 비로소 썩어도 썩을 것 없는 바람과 몸을 바꾼다   나는 썩지 않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서 남김없이 썩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다   풍금을 만나면 노래처럼 울고 꽃나무를 만나면 봄날처럼 울고 사랑을 만나면 젊은 오르페우스처럼 죽음까지 흘러가 우는 것이다 울어서 생애의 모든 강물을 비우는 것이다   벌레처럼 울자 벌레처럼 울어서 마침내 화석이 되는 슬픔으로 물에 잠긴 한세상을 다 건너자   더듬이 하나로 등불을 달고 어두워지는 강가에 선 내 등뼈에 흰 날개 돋는다   ------------------------------------------------   법칙                      류근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허공에 흩어진다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구름에 매달린다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빗방울 하나로 몸을 바꾼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허공에 흩어진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잎사귀에 매달린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물방울 하나로 몸을 바꾼다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인다 사는것도 죽는것도 한 몸 우주 안에서   도망갈 데가 없다 -------------------------------------------------   영화로운 나날   류근     가끔은 조조영화를 보러 갔다 갈 곳 없는 아침이었다 혼자서 객석을 지키는 날이 많았다 더러는 중년의 남녀가 코를 골기도 하였다 영화가 끝나도 여전히 갈 곳은 생각나지 않아서 혼자 순댓국집 같은 데 앉아 낮술 마시는 일은 스스로를 시무룩하게 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날은 길었다 다행히 밤이 와 주기도 하였으나 어둠 속에서는 조금 덜 괴로울 수 있었을까 어떤 마음이든 내가 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밖에서 오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시간은 공연했다 심야 상영관 영화를 기다리는 일로 저녁 시간이 느리게 가는 때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식민지 출신이었다 아프리카엔 우리가 모르는 암표도 많을 것이다 입을 헹굴 때마다 피가 섞여 나왔다 나에겐 숨기고 싶은 과거가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어떤 밤엔 화해를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했다 그래도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그것이 지나갔다는 것 때문에 퍽 안심이 되었다 심야 상영관에서 나오면 문을 닫은 꽃집 앞에서 그날 팔리지 않은 꽃들을 확인했다 나 또한 팔리지 않으나 너무 많이 상영돼 버린 영화였다     ------------------------------------------------------- 상처적 체질                   류근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 그리운 우체국                류근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은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매달아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안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류근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친구여 나는 시가 오지 않는 강의실에서 당대의 승차권을 기다리다 세월 버리고 더러는 술집과 실패한 사랑 사이에서 몸도 미래도 조금은 버렸다 비 내리는 밤 당나귀처럼 돌아와 엎드린 슬픔 뒤에는 버림받은 한 시대의 종교가 보이고 안 보이는 어둠 밖의 세월은 여전히 안 보인다 왼쪽 눈이 본 것을 오른쪽 눈으로 범해 버리는 붕어들처럼 안 보이는 세월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나는 무서운 은둔에 좀먹고 고통을 고통이라 발음하게 될까 봐 고통스럽다 그러나 친구여 경건한 고통은 어느 노여운 채찍 아래서든 굳은 희망을 낳는 법 우리 너무 빠르게 그런 복음들을 잊고 살았다 이미 흘러가 버린 간이역에서 휴지와 생리대를 버리는 여인들처럼 거짓 사랑과 성급한 갈망으로 한 시절 병들었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버림받는 곳은 우리들의 욕망에서일 뿐 진실로 사랑하는 자는 고통으로 능히 한 생애의 기쁨을 삼는다는 것을 이발소 주인은 저녁마다 이 빠진 빗을 버리는 일로 새날을 준비하고 우리 캄캄한 벌판에서 하인의 언어로 거짓 증거와 발 빠른 변절을 꿈꾸고 있을 때 친구여 가을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살아있는 나무만이 잎사귀를 버린다     ------------------------------------------------------   폭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할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출처] 류근 시인의 시 모음|작성자 느낌표   [출처]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작성자 난가능성  
1064    詩여, 침을 뱉어라! 댓글:  조회:4264  추천:0  2015-04-25
     시여, 침을 뱉어라                             / 김수영                       -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 나의 시에 대한 사유(思惟)는 아직도 그것을 공개할 만한 명확한 것이 못 된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이러한 나의 모호성은 시작(詩作)을 위한 나의 정신구조의 상부 중에서도 가장 첨단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없이는 무한 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유일한 도구를 상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교회당의 뾰족탑을 생각해 볼 때, 시의 탐침(探針)은 그 끝에 달린 십자가의 십자의 상반부의 창끝이고, 십자가의 하반부에서부터 까마아득한 주춧돌 밑까지의 건축의 실체의 부분이 우리들의 의식에서 아무리 정연하게 정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시작상(詩作上)으로는 그러한 명석(明晳)의 개진은 아무런 보탬이 못 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는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이 물음이 포괄하고 있는 원주가 바로 우리들이 오늘의 세미나의 논제인, 시에 있어서의 형식의 내용의 문제와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 ----즉, 노래----이 시의 형식으로서의 예술성과 동의어가 되고,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의 현실성과 동의어가 된다는 것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나는 20여 년의 시작 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똑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思辨)을 모조리 파산(破算)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詩作)은 로 하는 것이 아니고 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으로 하는 것이다. 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 ----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의 대답은 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 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 게 된다.   그러면 이번에는 시를 논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나는 이미 는 것이 시의 형식을 대표한다고 시사한 것만큼, 는 것이 시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제를 한 폭이 된다. 내가 시를 논하게 된 것은 ----속칭 이나 을 쓰게 된 것은 ----ㅡ극히 최근에 속하는 일이고, 이런 의미의 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 는 본질적인 의미에 속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태여 그것을 제1의적인 본질적인 의미 속에 포함시켜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논지의 진행상의 편의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그것은 산문의 의미이고 모험의 의미이다.   시에 있어서의 모험이란 말은 세계의 개진(開陳), 하이데거가 말한 의 반대되는 말이다. 엘리엇의 문맥 속에서는 그것은 의미 대 음악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엘리엇도 그의 온건하고 주밀한 논문 「시이 음악」의 끝머리에서 라는 말로 의 토를 달고 있다. 나의 시론이나 시평이 전부가 모험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들을 통해서 상당한 부분에서 모험의 의미를 연습을 해보았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나는 시단의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참여시의 옹호자라는 달갑지 않은, 분에 넘치는 호칭을 받고 있다.  산문이란, 세계의 개진이다. 이 말은 사랑의 유보(留保)로서의 의 매력만큼 매력적인 말이다. 시에 있어서의 산문의 확대작업은 의 유보성에 대해서는 침공적(侵攻的)이고 의식적이다. 우리들은 시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내용과 형식의 동일성을 공간적으로 상상해서, 내용이 반, 형식이 반이라는 식으로 도식화해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의 유보성, 즉 예술성이 무의식적이고 은성적(隱性的)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반이 아니다. 예술성의 편에서는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시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의 예술성이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기가 시의 기교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시의 기교라는 것이 그것을 의식할 때는 진정한 기교가 못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자기의 시인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울이 아닌 자기의 육안으로 사람이 자기의 전신을 바라볼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가 보는 것은 남들이고, 소재이고, 현실이고, 신문이다. 그것이 그의 의식이다. 현대시에 있어서는 이 의식이 더욱더 정예화(精銳化) ----때에 따라서는 신경질적으로까지----되어 있다. 이러한 의식이 없거나 혹은 지극히 우발적이거나 수면(睡眠) 중에 있는 시인이 우리들의 주변에는 허다하게 있지만 이런 사람들을 나는 현대적인 시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현대에 있어서는 시뿐만이 아니라 소설까지도 모험의 발견으로서 자기 형성의 차원에서 그의 을 제시하는 것이 문학자의 의무로 되어 있다. 지극히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말이지만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산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도,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는 말은 사실은 이 하는 말이 아니라 이 하는 혼잣말이다. 이 말은 밖에 대고 해서는 아니 될 말이다. 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는 을 정복할 수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여야 한다. 이 것을 계속해서 지껄이는 것이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숫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 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기점(起點)이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여시의 효용성을 신용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나는 아까 서두에서 시에 대한 나의 사유가 아직도 명확한 것이 못되고, 그러한 모호성은 무한 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호성의 탐색이 급기야는 참여시의 효용성의 주장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을 못 주고 있다. 이 시론은 아직도 시로서의 충격을 못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태까지의 자유의 서술이 자유의 서술로 그치고 자유의 이행을 하지 못한 데에 있다.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자유이 이행에는 전후좌우의 설명이 필요없다. 그것은 원군(援軍)이다. 원군은 비겁하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처럼 시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내가 지금 ----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자아 보아라,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나도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다. 이러고서도 정치적 금기에만 다치지 않는 한 얼마든지 문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다. 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의 성립이 사회조건의 중요성을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다음과 같은 평범한 말로 강조하고 있다. 이 인용문에 나오는 기인이나 집시나 바보 멍텅구리는 과 을 논한 나의 문맥 속에서는 물론 후자 즉, 에 속한다. 그리고 나의 판단으로는,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도 우리의 주변에서는 기인이나 바보 얼간이들이 자유당 때하고만 비교해 보더라도 완전히 소탕되어 있다. 부산은 어떤지 모르지만 서울이 내가 다니는 주점은 문인들이 많이 모이기로 이름난 집인데도 벌써 주정꾼다운 주정꾼 구경을 못한 지가 까마득하게 오래된다.  주정은 커녕 막걸리를 먹으로 나오는 글쓰는 친구들의 얼굴이 메콩 강변의 진주를 발견하기보다도 더 힘이 든다. 이러한 의 해독은 문학주점에만 한한 일이 아니다.   그레이브스는 오늘날의 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없는 것을 개탄하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는 것이다. 나는 자유당때의 무기력과 무능을 누구보다도 저주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만,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도 자유는 없었지만 은 지금처럼 이렇게 철저하게 압제를 받지 않은 것이 신통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이 없는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의 건설은,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가 없는 혼란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다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로서의 의 향수가 문화의 세계에서 싹트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징조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본질적 근원을 발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인 것이다.   시는 온몸으로 ,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순간에 와 있다. 시인은 이라는 아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에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1063    시대의 천재시인 - 기형도 댓글:  조회:2940  추천:0  2015-04-25
  시대의 천재 기형도 평론                                                                                 奇亨度 (1960-1989)       나는 이제 다르게 살고 싶다.  그럴 경우 모든 굳은 체념들이 살아날 것이다.    - 기형도      예술가에게 뛰어넘기 힘든 신화(神話) 혹은 콤플렉스라면 아마 이런 종류의 것들이리라. "바람처럼 빨리 살고, 아직 젊을 때 죽어서, 아름다운 시체를 남긴다." 자신의 죽음으로 불멸의 금자탑을 완성하고 싶다는 유혹은 예술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품어봄직한 희망이다.  그러나 세상은 모든 예술가들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시대는 모든 시인이 릴케처럼 장미 가시에 찔려 백혈병으로 숨지도록 하지도 않을 뿐더러 혁명의 시기에 소총을 들고 전장을 누비다 장렬하게 전사할 기회를 주지도 않는다.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침상에 누운 채 병들어 잔뜩 주름진 얼굴에 경우에 따라서는 추한 오명(汚名)을 남긴다. 우리나라에서 시(poem)는 낭만주의(romanticism)의 영향과 조선시대 사대부(士大夫)적 전통 속에 풍류의 한 가지 혹은 젊음의 광기를 담은 그 무엇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시인이란 존재는 소멸하지 않는 청춘의 상징 혹은 시대와 불화하는 그 무엇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가 죽은 시인에 열광하는 까닭이 혹시 그가 더 이상 우리를 배신할 가망이 없기 때문이라는 안도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기형도, 1980년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가장 빛나는 크리스마스 전구 1980년대도 저물어가던 어느 해 세밑 몇몇 친구들은 공장으로,  대학으로 떠나고 홀로 된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그 무엇으로도 삭이지 못했다.  그때 기형도의 시집 이란 시집이 우연하게 손에 들어왔다.  아픈 마음을 다스리는 약으로 시만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1960년 2월 16일 생의 시인, 기형도.  생년의 끝이 영(0)년으로 끝나는 사람들에게 숙명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번외자(番外子)의 설움 같은 것이다.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닌, 가도가도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  중학교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기형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기형도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친구 한 명이 있다. 그 녀석은 뒤에서 두 번째였지만 그의 모친에게 그는 항상 막내보다 더한 막내였다. 기형도의 경우도 이와 같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에게 선천적으로  여릴 수밖에 없는 가정적 환경은 이미 갖추어져 있었던 셈이라고 추측된다.  중학교 때부터 시에 관심이 있었던(1975년 그의 바로 손 위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부터 그는 시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1979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서  잠시 방위로 군복무를 한 뒤 1985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시절 윤동주 문학상 등 교내 주최 문학상을 받았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면서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중앙일보에 근무하는 동안 여러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9년 시집을 준비하던 중 뇌졸중으로 죽었다. 이상이 그의 짧막한 생애에 대한 정리이다.  1960년에 태어나서 1989년 3월 7일에 죽었으니 그가 세상에 나서 공기를 호흡한 시간은 다 합쳐 봐야 만 29년에서 엿새가 빠지는 기간이었다.  요절(夭折)이란 말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죽음이었다. 서울의 우울, 시대의 우울 기형도가 1980년대를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우리들은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그는 우리 시대의 주변에서 너무 가까이 태어났다가 죽은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많은 이야기들은 아직 풍문이다.  그가 문학적으로 정리되기까지는 좀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친구이자 동료 시인이었던 원재길의 회상을 보면 기형도가  1980년대라는 엄혹한 터널을 지나면서도 그 시대의 아픔에 대해 크게 공감했던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그는 철야 농성과 교내 시위에 가담했다가 형사가 찾아와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듬해 방위병으로 입대했다.) 생전의 그는 성실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깊어서 실수로라도 누구를 괴롭히는 일이 드물었으며, 늦도록 술을 마셔도 평정을 잃지 않았다. 얼굴이 심하게 붓는 걸 꺼려서 술을 많이 들진 않았지만 술자리에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특히 문학이 화제라면 매우 즐거워했다.  휴일엔 밖에 나다니는 일이 없었는데, 아마도 어머니의 일을 도왔던 걸로 여겨진다. 집에서 기르던 새끼 돼지들한테 예방 주사를 놓았다면서,  주사기 바늘이 뼈에 닿는 순간 손목으로 전해지던 느낌을 들려주며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집안일 돌볼 거 다 돌보고, 친구들과 놀 거 다 놀면서도 학교땐 과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다. 시간과 생활을 관리하는 능력이 뛰어났다는 얘기가 되겠다. 사실 그가 복학한 1981년은 전두환 정권의 차가운 칼바람에 모두가 숨죽이지 않을 수 없던 시기였다. 그러나 1985년부터의 대학 생활이란 것이 경험해본 이들은 알겠지만 집회가 있는 날 강의실에 앉아 있거나 도서관만 지키고 있기에는 다소 민망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역시 시대의 우울에 공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집회마다 나가면서도 시험 성적 좋은 것이 기이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의 전 학년 성적표를 보면, 체육과 교련에서 B학점을 몇 번 받은 걸 빼곤 모조리 A다. 시험 기간을 앞뒤로 해선 도무지 얼굴을 대하기 힘들었다.  공부 못하는 친구들은, 절반은 부러워하면서 또 나머지 절반은 '비겁한 놈, 혼자만 공부 잘하다니' 하고 이상한 소리로 그를 나무랐다.  비단 공부뿐만이 아니었다. 스케치 솜씨가 대단했으며, 당장 가수로 나가도 밥 먹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 노래를 잘했다. 직접 작곡한 노래를 선보일 때도 있었다. 레퍼토리가 차고 넘쳐서, 어느 해 여름에 대천 바닷가에 놀러갔을 땐 민박집 평상에서 혼자 서너 시간 쉬지 않고 노래했다.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참여한 까닭에, 그렇지 못하고 그 주변을 배회한 사람은 배회한 까닭에, 그들을 무시한 사람들은 무시한 까닭에, 억압하려 들었던 사람들 역시 어김없이 억압하려 한 까닭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런데 기형도가 죽었다는 소식에는 모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사실 기형도의 등장과 퇴장은 기이한 현상이었다. 그가 처음 문단 데뷔를 하고, 첫시집을 내고 그리고 종로3가 (사실 종로 3가는 기형도 이전에도 많은 시인들이 거쳐갔던 곳이기도 하다. 김수영과 신동엽도 이곳의 구석진 술집에서 자주 술을 마셨다고 한다. 어딘지는 나도 모른다.) 의 허름한 극장에서 죽었을 때,   우리들은 몇 가지 풍문을 들었다. 하나는 그 극장이 동성애자들이 자주 들락거리던 곳이란 것과 그가 어째서 심야의 그 극장에서 고개를 뒤로 꺽고 숨져야 했는가?하는 사실이 기묘한 씨줄날줄이 되어 풍문을 증폭시켰고, 그의 연애에 얽힌 이야기들이 또한 그의 전설에 먼지를 더했다. 소설가 강**씨와의 연애설 같은 것들이 그러한 것이었다. 어쨌든 기형도의 시는 80년대의 많은 상처입은 청춘들에게 알수없는 위안을 주었다. 무엇보다 그의 시는 풋풋한 자기 성찰들로 가득했고, 따뜻했고, 외로와서 상처입었고, 그리고 사랑해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모성 본능을 자극했다.   기형도는 대학 시절 따르던 형의 자살을 두고서 그의 죽음을  형의 죽음이 나의 생활에 단순히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간직되어질 수 있는,  혹은 예술적 체험 세계의 확장으로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라고 쓸 만큼 섬세하고 타산적이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의 친우이자 문학적 동료였던 원재길은 기형도가 스스로의 스승을 보들레르(Baudelaire)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를 "서울의 우울"을 노래한 한국의 보들레르라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나는 이것이 꼭 어울리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형도는 시적으로는 분명히 보들레르의 자식이라는 흔적이 곳곳에서 보이기는 하나 일반 독자들에게 그는 한국의 보들레르라기 보다는 '1980년대의 윤동주'였기 때문이다.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한 학대의 현장을 보여준다고는 하더라도 그의 시는 보들레르와 같이 가학적인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자학적인 이미지들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우울을 노래했지만 기형도는 안으로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고,  그것이 단순히 서울의 우울을 노래한 것도 아니요, 보들레르의 그것과는 다른 내면의 우울이었다. 기형도의 우울은 시대의 우울이자, 상처받은 양심과 청춘의 우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형도의 시는 오히려 윤동주의 시와 닮아 있다. 오히려 기형도에게는 그런 점에서 '80년대의 윤동주'로 비견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술자리에서는 분위기를 맞춰줄 줄 알고, 노래도  잘했고, 공부도 잘했고, 작곡까지 할 정도의 이 재기 넘치는 젊은 시인은 '보들레르의 자식'이었지만 그보다 대학에서조차 교련을 배워야 했던 '시대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런 시대의 우울을 몸소 견뎌야 했던 시인이다.  백혈병 초기 증세를 앓았고, 한 쪽 귀는 거의 청력을 잃을 지경이었고, 고혈압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는 기자였다. 그의 온몸은 시대의 우울을 감지하는 촉수였고, 레이더였고, 그런 우울은 그의 정신과 육신을 상하게 했다.  자화상(自畵像)                윤동주 산모통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1939년 9월)   포도밭 묘지에 걸린 기이한 시체. 기형도 그리고 보들레르 그의 시 을 읽으면 어쩐지 윤동주의 자화상이란 시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집 앞'에서 한참 동안을 서성이던 내 젊은 날의 사랑이 떠오른다.  기형도의 데뷔 작품인 를 보자. 마치 김승옥의 의 영향이라도 받은 것처럼 이 시의 첫 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1982년 9월 25일 밤 1시. 기형도는 의문에 빠진다. "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는 자답하기를 "그것은 우문(愚問)이다.  구원할 수 '있다' 혹은 '없다'의 구분은 이미 시에 기능이나 효용의 틀을 뒤집어 씌운다. 따라서 어떠한 예술 장르가 최초에 성립되었을 때 본연적으로 갖는 기능이란 두말할 필요 없이  '있다'에 귀착한다."라고 한다. 앞서 기형도를 "서울의 우울을 노래한 보들레르"로 표현한 원재길의 표현을 맞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 점은 그대로 두고서라도 기형도가 보들레르를 자신의 시적 스승으로 생각했다는 점은 의미를 둘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시가 보들레르와 비교할 만한 성질의 시가 아니라는 뜻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어떤 인물인가?  - 혁명붕괴의 해인 1848년 이후의 유럽 예술에서 우리는 환멸과 같은 어떤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시민계급의 빛나는 예술적 시기는 끝났다.  예술가와 예술은 인간의 총체적인 소외, 모든 인간적 관계의 외화(外化) 및  물화(物化), 분업, 분해, 엄격한 전문화, 사회적인 연결의 불투명화,  개인의 증대되는 소외와 반항 등의 모순들과 더불어 완전히 발전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세계로 진입하였다. 진지한 휴머니스트 예술가는 그러한 세계를 더 이상 긍정할 수 없었다.  그는 시민 계급의 승리가 휴머니즘의 개선을 의미한다고 더 이상 분명하게 믿을 수 없었다. - 예술을 위한 예술 (기본적으로 리얼리스틱하고 위대한 시인이었던 보들레르가 취했던 태도) 역시 통속적인 공리주의, 부르주아지의 무미건조한 일상업무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세계에서 상품을 생산할 수 없다는 예술가의 결의에서 생겨났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보들레르에 대한 독창적인 해설 속에서 그를  '부르주아지가 예술가로부터 그의 위임장을 철회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  - 이러한 인식은 무한한 중요성을 가졌다 - 한 최초의 인물' 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보들레르의 '예술을 위한 예술'은 부르주아라는 눈에 보이는 자본주의  세상을 향해 자신의 시(詩)를 토해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익명의 시장(가령, 그것은 대중mass일 수도 있고, 역사적 평가일 수도 있다.)을 겨냥한 것이었다. (1848년은 프랑스 2월 혁명이 일어난 해이며 보들레르는  의붓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2년만에 탕진해버리고 혁명에 가담했었다.)  기형도가 그런 보들레르를 자신의 시적인 스승으로 생각했으며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은 문학평론가 김현이 문학월평을 통해 기형도의 시에  '그로테스크 리얼리즘'라는 칭호를 붙여준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로 돌아가서 '읍'으로 상징되는 기형도가 머무르는 시적인 공간은 아이들이 느릿느릿 새어나오고, 여직공은 겁탈당하고, 취객이 얼어죽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런 공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닌 것이다. 안개의 고장을 욕하며 떠난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그들의 기억조차 희미해진다.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그에게 '1980년의 봄'은 어떤 의미였을까? 박정희 유신 체제의 붕괴를 목격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갓 입학한 대학 신입생으로서 경험한 1980년의 봄,  민주화 운동의 봄이자 미처 꽃 피워 보지 못한 민주주의 혁명의 좌절을 경험한 그에게서 1848년 프랑스 대혁명의 좌절을 경험한 보들레르의 영토을 찾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시(詩)의 길을 열고, 생(生)의 문(門)을 닫다 요절한 시인들에게 안도하는 이유는 그가 나이가 들며 보수화 되거나  오명을 남기게 될까 두려운 까닭에서이기는 하나 요절한 시인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이유는 시인의 성숙해 가는 변모의 과정을 지켜볼 수 없기 때문이다.  기형도는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시를 탐구했고, 시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모색했던 것 같다. 그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도피의 기록으로 남겨놓은 조카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역사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기록이던가. 기형도가 광주 5.18 묘역을 찾고서 남긴 글에는 "그러나 아니다. 나는 광주에서 그 이상한 청년을 만난 것이다.  어쩌면 전혀 예기치 못했던 역사를 만나고, 그 역사의 허망함에 눈뜨고,  지상을 떠난 청년들이 묘역에서 잠들어 있다. 나는 무엇인가.  가증스러운 냉담자인가, 나에게 있어 국토란 무엇인가. 내가 탐닉해온 것은 육체없는 유령의 자유로움이었다.  지금 이곳의 나는 무엇인가. 너 형이상학자, 흙 위에 떠서 걸어다니는 성자여.  어두워진다. 나의 희망은 좀더 넓은 땅을 갖고 싶다. 이 게으른 손들" 이라고 적고 있다. 유럽의 지식인들에겐 허용되지만 한국의 지식인들에겐 용납될 수 없는 것이 망명이었다면, 보들레르에겐 용납되었으나 기형도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것, 그것은 타락이었다. 그가 내딛는 땅 어디에서도 그는 '육체없는 유령의 자유스러움'을 만끽할 수 없었다. 도처에서 그는 안개에 둘러싸인 소읍을 발견했고,  그곳에 풍겨 나오는 피냄새와 폐수 냄새, 오염된 사람들의 썩어가는 냄새가 그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유중하(연세대 중문과 교수)는 "이러한 반성은 기형도로서는 미증유의 것이었다" 고 말하지만 아니 그렇지 않았다.  기형도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반성하게 했고, 그는 마치 고독한 수도승처럼 시를 통해 낯선 기쁨과 전율에 젖고자 했다. 다만 그가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으려 한 것은 권태와 무기력이었다. 광주를 방문하기 전의 그는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고 말했던 조로(早老)의 젊은 시인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나는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상들을 향해 기차는 전속력으로 달린다.  물 밑에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다시 너절하게 떠오르리라. 그렇다면  너 지친 탐미주의자여, 희망이 보이던가. 귀로에서 희망을 품고 걷는자 있 었던가? 그것은 관념이다. 따라서 미묘한 흐름이다. 변화다.  스스로 변화하기. 얼마나 통속적인 의지인가. 그러나 통속에서 출발하지 않는  자기 구원이란 없다. 나는 신(神)이 아니다. 차창 밖 국도에서 붉은 꼬리등을 켠 화물 트럭들이 달린다. 멀리 보이는 작은 불빛 하나하나마다 일생(一生)의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다.  흘러가버린 나날들에게 전하리라.  내 뿌리없는 믿음들이 지금 어느 곳에서 떠다니고 있는 가" 라며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이제 그의 생의 주도권은 다시 그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가식과 허위를 버리고' 다시 태어나길 소망했던 시인 기형도의 희망은  동성애자들이 상대를 물색하는 장소로 사용한다는 서울의 한 허름한 극장에서  멈춘다. 기형도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짧은 여행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서울에서 나는 멎는다."  기형도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것은 시작 메모로 채워진 푸른 노트,  이국에서 온 몇 통의 편지, 꼼꼼히 줄쳐 읽던 몇 권의 책과 소화제 알약이 든  가방이었다. 기형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인은 뇌졸중이었고,  보들레르는 뇌경색이었다. 세상의 아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촉수인  병약한 시인들에게 '시대의 우울'은 감내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가버린 친구 형도를 회상하면서...                                                     ㅡ하늘수.                                     孤獨의 깊이                                   - 기 형도 한차례 장마가 지났다.  푹푹 파인 가슴을 내리쓸며 구름 자욱한 江을 걷는다.  바람은 내 외로움만큼의 重量으로 肺腑 깊숙한  끝을 부딪는다  傷處가 푸르게 부었을 때 바라보는  江은 더욱 깊어지는 法  그 깊은 江을 따라 내 食事를 가만히 띄운다.  그 아픔은 잠길 듯 잠길 듯 한 장 파도로 흘러가고.....  아아, 雲霧 가득한 가슴이여  내 苦痛의 비는 어느 날 그칠 것인가. 기형도 시인의 약력 1960. 2월 16일 인천시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 4녀중 막내로 출생. 1965. 부친이 서해안 간척사업에 실패, 유랑하다가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에 정착 '85년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인 "안개"는 이 마을이 배경이 된다. 1967. 시흥국민학교에 입학. 1969. 부친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석에 눕다. 가계가 힘들어짐. 1975. 당시 고등하교 2학년이던 셋째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음.  이 사건이 깊은 상흔을 남기다. 1979. 신림중학교을 거쳐 중앙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  연세대학교 정법대 정법계열 입학, 교내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입회,  본격적인 문학수업 시작. 1980. 대학문학상인 박영준 문학상(소설부문)에 당선없는 가작으로 입선 ('영하의 바람'). 1981. 방위병으로 입대, 복무중 안양의 문학동인인 '수리'에 참여.  동인지에 '사강리'등 발표, 시작에 몰두. 1982. 6월 전역후 다수의 작품을 쓰며, 대학문학상인  윤동주문학상(시부문)에 당선('식목제'). 1984. 10월 중앙일보사에 입사. 1985.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안개')되어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 2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신문사 수습을 거쳐 정치부에 배속. 1986. 정치부에서 문화부로 옮김.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 주목을 받음. 1988.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옮김. 여행 등을 하며 많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 1989. 가을에 시집출간을 위해 준비하다 3월 7일 새벽,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 사인은 뇌졸중 만 29세, 독신.  시작메모로 채워진 푸른 노트, 이국에서 온 몇통의 편지,  꼼꼼히 줄쳐 읽던 몇 권의 책과 소화제 알약이 든 가방을 가지고 있었음.  경기도 안성 소재 천주교 수원교구 묘지에 묻힘. 5월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이 발간됨. 1989년 5월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90년 3월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살림출판사) 1994년 2월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솔출판사) 1999년 3월 전집 '기형도 전집'(문학과지성사)                                                           
1062    문단 마지막 순수奇人시인 - 千祥炳 댓글:  조회:3279  추천:0  2015-04-25
  막걸리와 "괜찮다"의 시인 천상병                                    전 태 익 (문단잡기/예술인들의 괴벽과 기행) 中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여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그 일이 화근이 되어 극도로 피폐해진 시인, 천상병 ! 그가 길가에 쓰러진 행려병자로 취급되어 정신병원에 누워있을 때 동도 시인들이 유고시집을 낸바 있다.    막걸리로 끼니를 때우던 그의 기행은 상상을 초월한다. 술에 취해 친구의 신혼 단칸방에서 오줌을 싼 일, 여류 소설가의 집에 기거하면서 한밤중에 부부가 자는 방에 몰래 들어가 양주병으로 잘못 알고 향수를 마신 일, 동가식 서가숙하며 만나는 친구마다 "백원만, 이백원만"하며 막걸리 값을 구걸하던 일,,,,    이 땅의 마지막 순수 시인이었던 그는 "소능조", "귀천", "새"등 주옥 같은 시를 남겼다.            (아버지 어머니는/고향 산소에 있고/외톨배기 나는/서울에 있고/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여비가 없으니/가지 못한다/저승 가는데도/여비가 든다면/나는 영영/가지도 못하나?)   그런데 그는 몇해 전에 여비 한 푼 없이 잘만 갔다. "귀천"이란 시에서 밝혔듯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이 세상 소풍 끝내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아름다운 새로 환생하여"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시에서 읊었듯이 생전의 약속처럼 그렇게 말하고 있다.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새 한 마리 새"가 되어 이 가지에서 저가지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아니 가는 곳이 없다.   그는 저승에서도,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까닭은 아니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돈과 권력과 명예, 세속적 가치는 하찮게 여기고 장주壯周처럼 초월적 세계에서 유유자적했던 시인, 언제나 순수하고 천진난만했던 일곱살짜리 천상병 !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를 연발하며 입을 씰룩거렸던 그 모습 ! 그는 일찍이 용庸을 터득하여 이 것을 따랐을 뿐, 그런 까닭조차 의식하려 하지 않았다.    인사동 골목, 목순옥 여사가 경영하는 "귀천"이라는 찻집은 지금도 손님이 많은지 궁금하다.                                                                                                                                                 천상병[千祥炳]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출생.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 4년 중퇴. 1949년 마산중학 5학년 때, 《죽순(竹筍)》 11집에 시 《공상(空想)》 외 1편을 추천받았고, 1952년 《문예(文藝)》에 《강물》 《갈매기》 등을 추천받은 후 여러 문예지에 시와 평론 등을 발표했다. 1967년 7월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가난 ·무직 ·방탕 ·주벽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1971년 가을 문우들이 주선해서 내준 제1시집 《새》는 그가 소식도 없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그의 생사를 몰라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으로 불리던 그는 지병인 간경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막에서》 《귀천(歸天)》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등의 시집과 산문집 《괜찮다 다 괜찮다》, 그림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등이 있다. 미망인 목순옥(睦順玉)이 1993년 8월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라는 글모음집을 펴내면서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를 함께 펴냈다.                                                           소풍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 다웠더라고 말하리라      
1061    천상병 / 귀천 댓글:  조회:2959  추천:0  2015-04-25
    ▲ 시인의 사진      ▲ 시인의 생전 모습        천상병 시 모음   귀천(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나의 가난은 천상병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서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을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갈매기 천상병 그대로의 그리움이 갈매기로 하여금 구름이 되게 하였다. 기꺼운 듯 푸른 바다의 이름으로 흰 날개를 하늘에 묻어보내어 이제 파도도 빛나는 가슴도 구름을 따라 먼 나라로 흘렀다. 그리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날이오르는 자랑이었다.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강 물 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한가지 소원(所願) 천상병 나의 다소 명석한 지성과 깨끗한 영혼이 흙속에 묻혀 살과 같이 문들어지고 진물이 나 삭여진다고? 야스퍼스는 과학에게 그 자체의 의미를 물어도 절대로 대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억지 밖에 없는 엽전 세상에서 용케도 이때컷 살았나 싶다. 별다를 불만은 없지만, 똥걸래 같은 지성은 썩어 버려도 이런 시를 쓰게 하는 내 영혼은 어떻게 좀 안될지 모르겠다. 내가 죽은 여러 해 뒤에는 꾹 쥔 십원을 슬쩍 주고는 서울길 밤버스를 내 영혼은 타고 있지 않을까?         나는 행복합니다 천상병 나는 아주 가난해도 그래도 행복합니다. 아내가 돈을 버니까! 늙은이 오십세 살이니 부지런한 게 싫어지고 그저 드러누워서 KBS 제1FM방송의 고전음악을 듣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오. 그래서 행복. 텔레비젼의 희극을 보면 되려 화가 나니 무슨 지랄병(炳)이오? 세상은 그저 웃음이래야 하는데 나에겐 내일도 없고 걱정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 어기겠어요?       난 어린애가 좋다 천상병 우리 부부에게는 어린이가 없다. 그렇게도 소중한 어린이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난 동네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요놈! 요놈하면서 내가 부르면 어린이들은 환갑 나이의 날 보고 요놈! 요놈한다. 어린이들은 보면 볼수록 좋다. 잘 커서 큰일 해다오!         봄을 위하여 천상병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회사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론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했는데 내가 어찌 이 말을 잊으랴? 봄이 오면 생기가 돋아나고 기운이 찬다. 봄이여 빨리 오라       푸른 것만이 아니다 천상병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은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외로움에 가슴 조일 때 하염없이 잎이 떨어져 오고 들에 나가 팔을 벌리면 보일 듯이 안 보일 듯이 흐르는 한 떨기 구름 3월 4월 그리고 5월의 실록 어디서 와서 달은 뜨는가 별은 밤마다 나를 보는가.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약속 천상병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러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을 가도 가도 황토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어두운 밤에 천상병 수만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하늘에, 하나, 둘, 셋, 별이 흐른다. 할아버지도 아이도 다 지나갔으나 한 청년이 있어, 시를 쓰다가 잠든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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