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을 견디게 한다
강경화
길을 걷는다 사람이 그리운 날엔
수많은 이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도
그 뒤엔 늘 그리움 채우는 바람이 머문다
한참을 서 있는 우체국 앞 계단은
기다렸다 떠나보내는데 익숙해진 모습이다
어쩌다 나 그대에게 길들여진 길처럼
닮은 얼굴 하나 둘 우체통에 밀어 넣고
한 칸씩 볕을 따라 올라서서 본 거리는
줄에서 빗나간 글씨처럼 눈빛들이 살아있다
매양 담담히 스치는 이들이지만
때로는 사람이 사람을 견디게 한다
오늘도
거리를 나선다
참 푸른 바람 인다
북해 항로
강우식
먹고 살기 위하여 유민이 되어 식솔들을 이끌고
이 항로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던 아버지처럼
오늘 나는 한 마리 회유어로 북해 항로의
짙고 푸르른 막막한 바다 위 선단에 떠 있다.
북으로 오를수록 파고는 높푸르게 하늘과 맞닿고
나는 어이하여 학업도 작파하고
유빙이 칼끝 같은 바다의 끝자락에 떠 흐르는가.
표류하는 내 청춘의 꿈처럼 바다 물빛은 푸르른데
대학노트의 표지마냥 펄럭이는 물결 위에서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이란 부표에 매달려 흔들리는가.
가끔 어디서 왔는지 갈매기조차 고적해 보이는
선창에 기대 휘파람을 호이- 호이 휘- 불면
괜히 젖 뗀 아이처럼 늙으신 어머니가 그리워져서
메마른 가슴에도 어쩔 수 없이 글썽 눈물이 고이고
어머니께 그립다는 편지를 길게, 길게 쓰고 싶어도
북해 항로의 어느 바다 위에도 우체국은 없구나.
이 항로에 서면 잃어버린 사랑도 더욱 그리워지는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자는 떠나보내지 말았어야지…
지난 여자의 눈 그리메도 선히 떠올려지는구나.
까닭 없이 내 주체할 수 없는 외로움일랑
무조건 여자에게 보상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소맷자락이 허옇게 소금기에 절은 오랜 뱃사람답게
나는 여자가 너무 너무 그리워서 다음 기항지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 여자나 만나 회포를 풀어야 하겠다는
기대를 가져보며 바위 같은 가슴을 탁탁 쳐본다.
북해 항로여, 나는 어느 산모롱이를 돌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갑자기 터져 나온 울음을 쏟듯이
모든 것을 털어낼 그늘이 없어 서럽구나.
갓 서른도 못 넘긴 나이가 괜히 억울하고 서럽구나.
이 바다 때문에 바다에 갇히어 사는 거 같아 서럽구나.
저물녘의 노래
강은교
저물녘에 우리는 가장 다정해진다.
저물녘에 나뭇잎들은 가장 따뜻해지고
저물녘에 물위의 집들은 가장 따뜻한 불을 켜기 시작한다.
저물녘을 걷고 있는 이들이여
저물녘에는 그대의 어머니가 그대를 기다리리라.
저물녘에 그대는 가장 따뜻한 편지 한 장을 들고
저물녘에 그대는 그 편지를 물의 우체국에서 부치리라.
저물녘에는 그림자도 접고
가장 따뜻한 물의 이불을 펴리라.
모든 밤을 끌고
어머니 곁에서.
휘파람
강인한
낡은 풍경을 쓰고
불빛은 꽃씨처럼 가벼이 떨어진다.
풍경 속을 흐르는 키 작은 안개,
소년이 걸어간다.
안개 속에서 그립고 흰 손이 나온다.
바람은 밤에 더욱 상냥하고
소년은 바람이 되어
밤의 우체국 안을 들여다본다.
어디엔가 숨어서 곤한 잠을 자는
내일의 안부, 나지막한 귀로,
풍경이 흔들린다.
하나 둘 먼 등불도 꺼져가고
소년이 띄우는 휘파람 하나
밤바람에 가만히 묻어난다.
안테나 위로 올라간 부처님
강준철
부처님이 법당이 답답하여
안마당을 거닐다가
물 한바가지를 마시고
안테나 위로 날아 올라갔다
수만 가정의 안방으로 부처님이 송신되었다. 그러나
전파 장애로 아무도 부처님을 보지 못했다
갈참나무에 올라가 목이 아프게 노래하던 부처님이
방송국으로 날아가 새로운 버전으로 노래를 불렀으나
이날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T.V 수상기 고장으로 보지 못했다
이튿날 조간신문 톱기사에
“보지 못한 시청자들은 www.kbs.co.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라고
대서특필 되었다
목을 길게 빼고 부처님이 슬금슬금
내 방문 안으로 기어 왔다
그때 전화가 왔다
“우체국입니다. 댁으로 택배된 부처님이 반송되었습니다.
확인하시려면 2번을 누르세요!”
점심 때 국수를 맛있게 먹은 부처님이
민들레 홀씨를 타고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들어가 이메일로 송신되었다
대부분 전송 실패로 되돌아 왔다
한사코 고개를 가로 젓던 부처님이
나무에서 추락하여
석간신문으로 배달되었는데
중생들이 광고인 줄 알고 휴지통에 버렸다
장래희망
고경숙
시골 조그만 우체국 창구에 앉아
매일매일 누군가 들고 오는 마음의 중량을 달아
동전 몇 닢 매기는 우표장사 하고 싶다
갯내 묻은 특산김 물량 넘치게 팔아
국장님께 칭찬도 듣고
초등학교 고사리들 저금 걷으러 가다
새로 부임한 총각선생님의 눈길에
얼굴 붉어도 보고 싶다
우체국 계단 제라늄화분에 물 주는 일도
빠뜨리지 말아
언제나 내 자리에서
꽃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르신들 희뿌연 돋보기가 대신 되어
대처에서 보내온 용돈 찾아드리며 함께 뿌듯하고 싶다
타이트스커트 하늘빛 블라우스에
어느 날 눈먼 그대
내 앞자리에 우표 한 장 붙이고 머뭇거리면
못 이기는 척
그의 손을 잡고 풍선처럼
푸른 하늘로 도망치고 싶다
날아가고 싶다
지금부터 한 살씩 거꾸로 먹는다면
아마도 일흔다섯이면 이룰 수 있는 꿈,
장래희망이다.
별에게 묻다
고두현
천왕성에선
평생 낮과 밤을
한 번밖에 못 본다.
마흔두 해 동안 빛이 계속되고
마흔두 해 동안은 또
어둠이 계속된다.
그곳에선 하루가
일생이다.
남해 금산 보리암
절벽에 빗금 치며 꽂히는 별빛
좌선대 등뼈 끝으로
새까만 숯막 타고 또 타서
생애 단 한 번 피고 지는
대꽃 틔울 때까지
너를 기다리며
그립다 그립다
밤새 쓴 편지를 부치고
돌아오는 아침
우체국에서 여기까지
길은 얼마나
먼가.
통증
고영민
중국에는 편지를 천천히 전해주는
느림보 우체국이 있다지요
보내는 사람이 편지 도착 날짜를 정할 수 있다지요
한 달 혹은 일 년, 아니면
몇 십 년 뒤일 수도 있다지요
당신에게 편지 한통을 보냅니다
도착 날짜는 그저 먼 훗날
당신에게 내 마음이
천천히 전해지길 원합니다
당신에게 내 마음이 천천히 전해지는 걸
오랫동안 지켜보길 원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수십 번, 수백 번의 후회가 나에게 왔다가고
어느 날 당신은
내가 쓴 편지 한통을 받겠지요
겉봉을 뜯고 접은 편지지를 꺼내 펼쳐 읽겠지요
그때 나는 지워진 어깨 너머
당신 뒤에 노을처럼 서서 함께
편지를 읽겠습니다
편지가 걸어간 그 느린 걸음으로
내내 당신에게 걸어가
당신이 편지를 읽어 내려가며 한 홉 한 홉
차올랐던 숨을 몰아 내쉬며 손을 내려놓을 즈음
편지 대신 그 앞에
내가 서 있겠습니다
하늘편지
고현수
나는 지금 하늘우체국을 짓습니다
하늘구름을 가져다 우체국을 짓고
우체국 정문 옆에 하얀 우체통을
세울 겁니다
그리고 하얀 등을 만들어
우체국 천장에 달 거에요
또 하나 더 있지요
맑고 맑은 구름만을 모아
우체국아저씨 몇 분을 빚을 거예요
지금 여기 강둑엔
바람집배원과 함께 있지요
알아요? 하늘로 가는 설레임!
잠시 후면 당신햇살마당에
나를 봉한 편지 한 통 놓일 겁니다
효자손
공광규
우체국 앞 가로수 곁에
아낙네가 죽제품 좌판을
벌여 놓았다 대나무로 만든
광주리와 키와 죽침 따위에 섞여
효자손도 눈에 띄었다 건널목
신호등이 황급하게 깜빡이지 않았더라면
그 조그만 대나무 등긁이를 하나
사 왔을지도 모른다
노인성 소양증만 남고
물기 말라 버려 가려운 등을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장난삼아
간질간질 긁어 주던
고사리 같은 손
이 작은 효자손이 어느새 자라서 군대에 갔다
옆에는 나직한 숨결마저 빈자리
어둔 창밖으로 누군가 지나가며
빨리 떠나라고
휴대폰 거는 소리
뒤에서 슬며시 등을 떠미는 듯
보이지 않은 손
벽오동 잎보다 휠씬
커다란 손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부드러운 손
0.75평
곽재구
지금은 북쪽으로 간
장기수 이인모 노인은
6·25후 40년 세월을
0.75평짜리 독방에서 살았다
얼마나 좋았을까
그 방의 침침한 공기와 시멘트 가루와
어쩌다 길을 잃고 찾아든 바퀴까지
다 동무가 되었을 것이다
한 몸 누이면
달빛 한줌 뿌릴 공간 없으므로
외로울 틈도 없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편지 올 이도 없으니
우체국 갈 일도 없을 것이다
침대가 놓일 자리 없으니
오지 않는 연인 때문에 긴 밤
속 끓일 일도 없을 것이다
수석이니 난이니 고상한 취미에
넋 놓을 필요 없을 것이고
신문이나 텔레비전 보여줄 리 없으니
남쪽 동포가 IMF 구제금융에 점령당하고
북쪽 동포가 굶주림에 점령당한 사실도
하마 모를 것이다
얼마나 좋을까
사과 박스 두 개 밀어 넣으면 숨찰 어두운 공간에서
로댕처럼 팔 괴고 앉아
콩밥도 먹고 똥도 싸고 심심하면
똑딱똑딱 시계초침도 세고
울다가 웃다가
0.75평에서
세상을 떠날 그날까지
바지에 찍 피오줌을 갈기고.
마늘 소포 - 둑길行 ․ 37 외 1편
구재기
도시에서 사시는 은사님께
올해도 마늘 한 접 부쳐 올리련다
보꾹 안쪽에 매달린 마늘 묶음에서
알이 굵은 놈만 골라내어
종합선물 빈 과자갑을 열고
한 접 넉넉하게 마늘을 넣는다
붉은 비닐끈을 알맞게 잘라
배배 꼬아 정성스럽게 싸고 있는 나를
아내는 슬프게 슬프게스리 굽어본다
‘그까짓 것, 무얼 그리 해마다 보내려오?
차리리 다른 걸 부쳐 드리지‘
그러나 부쳐 드릴 다른 걸 찾지 못한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비닐끈을 힘껏 잡아당겨 마늘을 묶는다
자전거에 마늘을 싣고
잘도 포장된 도로를 따라 달렸다
우체국에 갔다
창구의 직원이 무엇이냐며
저울대에 올려놓았다
3,230g 1,870원의 요금을 내놓으며
마늘이라고 대답했다
창구의 직원이 소포우편물수령증을 떼어 주고는
마늘값보다도 소포요금이 더 많겠다며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나는 괜스리 부끄러워
쫓겨나듯 우체국을 나왔다
우체국 앞에
햇살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하늘을 우러러보니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무엇이 아내를 슬프게 하고
무엇이 나를 부끄럽게 하였는가
우체국 앞 구멍가게에
조무래기 몇몇 무리 지어 몰려오더니
마늘 한 접 값도 넘는 천 원짜리 몇으로
아이스크림과 바꾸어
히히거리며 열심히 핥아댔다
기다린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것은
내일이면 다시 만나려는 사랑에
한 번 더
믿음을 더한다는 것이다
한 차례 소낙비가 지나간 자리
바람이 불고 낙엽이 촁촁촁 구르는
시월의 끝 무렵
으스스으 햇살조차 떨려오는 날
우체국 앞을 지나다가 갑자기
한 장의 우표를 사고 싶다는 것은
너로 하여 자못 기다림과 만나는
순간을 얻는다는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 분명
너의 부름을 넉넉히 한다는 것이다
내일처럼 그렇게 버티어 있다는 것이다
자작나무
권경업
애동대동하던 날
눈 덮힌 잦은 골
백단목 여린 껍질에 서린 사연들
우체국 소인도 없고
더러는 주소도 잊어버린 채
수취인은 먼 도시의 世波
눈가의 잔주름으로 밀려들어
쉬 알아볼 수 없을 아낙
오늘은
그 숲 그 눈밭에서
다 전하지 못했던 사연들
회한으로 일어나
하얀 알몸으로 떨고 있을
잦은골 자작나무
압화
권운지
오래된 책갈피 펼치다 너를 만난다
한 때 이슬 맺히고 번개가 지나가던 몸
비로소 주술이 풀린 듯 고요하구나
내 마음 갈피에도 자국이 깊다
어느 이름 모를 지상의 우체국에서
세상으로 보내는 마지막 편지 속 눈물방울
더 이상 갈 곳 없던 육체의 마지막 그 곳
그 벼랑 위의 꽃
알락꼬리마도요
김경란
남쪽의 섬에서 바닷물에 밀려 편지가 날아왔네
알락꼬리마도요의 길고 가느다란 부리가
발신 우체국 소인消印의 검은 물결에 갇혀
어느 섬의 바다 소리, 따스한 해풍海風
아득히 멀어져 가는 기억의 한 끝을 물고 있었네
파도처럼 찢어지는 봉투 끝자락, 새 발자국만큼
작은 글씨들이 이내 바닷물결에 지워지고 있었네
생生은 언제나 아무렇지 않은 듯 저렇게
고르고 평온한 숨의 물결로 흘러가는데
모래 위로 밀려온 물고기의 아가미에 흔들리던
바다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내 사랑의 폐활량
부끄러운 기억만 모래 위에서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네
소인 자국의 검은 물결에 날아온 알락꼬리마도요만
모래빛 깃털을 반짝이고 있었네
잃어버린 지상을 찾아서
김경미
우체국은 어디쯤인가
편지를 들고
빌딩 옥상에 올라가 퇴근하는 저녁바다를 내려다본다
파도 위로 자동차 불빛들 주황색 구명조끼처럼
헤드라이트 불빛을 껴입은 채 파닥이고
길을 잃었음을 잊은
시든 물고기들이
정거장에서 반복과 번복의 물방울을 서로에게 뿜는다
플라스틱꽃처럼 아무도 마음까지는 젖지 않고
드물게 몇은 흙과 먼지로 빚던 인간의 숨을 기억하기도 하지만
기억이 깊으면 붉은 폭죽 같은 두통의 생에 시달려야 한다
먼 원양어선들 끝없이 식인의 물고기들을 데려오고
인근해부두에선 날마다 태풍이 숙박계를 쓴다
종이꽃들마다 나무젓가락처럼 자주 다리를 벌리고
언제나 목이 탄다
무슨 일이 일어나긴 날 것인가
어둔 하늘 위 돋아오는 저 빛조각들은
별이 아니라
혹은 일제히 겨눈 총구들인가
혹은 구원의 방주로 불려올라간 우체국인가
내 편지 받을 땅의 몸 맑은 나무들인가
아무도 몰래 어둔 심해 속 손톱처럼 형광빛으로 떠다니는
도망한 땅들인가
별정 우체국
이경희
시장 모퉁이를 돌아들면 별정 우체국이 있다
나는 가끔 아들에게 보낼 우편물을 안고
우체국을 찾곤 하는데
스므 남짓 처녀둘이서 하루 종일
소국같은 웃음을 피워 물고 있는
문방구처럼 차려놓은 소포대 위에
가위 풀 테이프 볼펜 싸인펜 자 일호봉투
빈 소포상자가 어디로 갈지 모를
미지의 골목을 조용히 꿈꾸고 있다
한 중년의 여자가 모양새답지 않게 돋보기를 챙겨 끼고
미지의 골목을 더듬어 찾아가나 보다
꾹꾹 짚어가는 까만 볼펜 끝이 파르르 떨린다
세상의 모든 길들이 봉투 속에서 봉함되는 순간
다시 마음으로 열어가는 따뜻한 길을 본다
길은 점점 더 넓은 곳에서 좁아져
마침내 한점으로 서 있는
어느 막다른 골목끝의 그리운 사람들
어른이니까 나는,
김나영
모 문학상 동시 공모에 응모를 했다
어린아이의 마음쯤이야
어린아이의 눈동자쯤이야
쉽게 훔칠 수 있겠다 싶었다
어른이니까 나는,
어린아이의 눈동자를 렌즈처럼 갈아 끼우고
어린아이의 몸에 나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어른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최대 관건이니까
혀 짧은 목소리도 천진한 속내처럼 부려놓았다
서둘러 쓴 동시 몇 편을 밀봉해 부치고
우체국을 채 빠져나오기 전
나는 얼른 어른으로 갈아입었다 날렵하게
가슴 환해질 명예와 짭짤한 상금
그 돈이면 몇 달간의 용돈도 되지 싶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따위의 반성은
잠시 서랍 안에 밀쳐두기로 했다
어른이니까 나는,
당선자가 발표되기 며칠 전
나는 어른에서 어린아이로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몇 번을 갈아입고
시상식장으로 가는 환상열차를 타고
'감사합니다, 제게 이런 과분한 상을 주시다니…'
나는 힘차게 달렸지만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어린아이의 세계로 진입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어린아이의 세계를 넘보기엔
비만한 정신에 붉고 두꺼워지는 몸
채워도 채워도 잃어가는 게 늘어나는
어린아이로부터 유배된
어른이니까 나는,
자작리 사생활
김남수
마을 한 채 짓고 싶네, 자작리
입구에 간이우체국 팻말을 바람개비로 매달고 담장 없는 앞마당에 자작나무 우편함을 외발로 세우는 거야 시간마다 열어보는 거야
앞산 가을걷이 소식 뜨락 채마밭 저녁상 차린다는 소식 한 묶음씩 들어앉아 있을 거야 뒤꼍 어미고양이 몸 푸는 시각도 달려와 있을 거야 쉬엄쉬엄 읽으며 밑줄을 긋는 거야 아침이 오는 소리로 답장을 쓰는 거야
편지를 부치러 읍내리로 나갈 일 있겠나 지천으로 배달된 이슬 한 장 솎아다 반짝 우표 붙이고 여치 울음 척척 문질러 봉하는 거야
수취인 : 자작나무 우편함 귀하
발송인 : 자작나무 우편함 드림
자작리 사생활 들통 나겠네 나, 바빠지겠네
간이우체국네자작나무우편함네앞산네채마밭네이슬네여치네어미고양이네
더불어 자작자작 살아가는 속사정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김남숙
받은 편지함 열어
읽은 편지 또 읽으며
담대해지려 했어요
받은 편지함
보낸 편지함 비워내며
아파하지 않으려 했어요
자꾸만 아린 가슴
눈물샘 터뜨리지 않으려 했어요
달라진 것 없는 세상
하고픈 말
듣고픈 말 얼마나 간절해서
이리 목이 메이는가
우체국 가서 보낸 편지
한달 지나 도착하고
다시 한달 지나야 받는 답장
그런 기다림도 있었는데
하루 가고
며칠 가고
몇 주밖에 안 되었는 걸
이리도 마음 졸여
쌓인 정을 비워 내는가
이야기 한 시간들
함께 한 마음들
왜 접속 않는 걸까
무슨 일 있는 걸까
무슨 큰일 있는 걸까
진해
김명인
간밤 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던 로타리 옆 카페
취한 나를 누군가 억지로 택시에 태워
숙소로 안내했을 텐데
한낮이 다 되어 깨어나니
엊저녁 헤매던 그 로타리 근처다
화창한 일요일이라 이 오전은
인적도 드물고 차도 듬성듬성한데
함께 술 마시던 친구들 모두 어디로 갔을까
속은 쓰린데 멍하니 혼자뿐이다
건너편 회색 단층의 러시아 풍
오래된 우체국 유리창 안쪽을 기웃거리는데
누군가 있다! 뉘게 부칠 편지를 쓰고 있다!
빛깔 고운 벚 단풍 잎새에
아련한 파도소리로 소인 찍어 배달된
그런 엽서 예전에 나도 받았거니
절로 흥건한 추억이 가을을 담아서 반짝거린다
오래된 약속
김미성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까지라도 기다려야 하는 내 운명처럼 불쑥 등 뒤에서 나타날지도 모른다 운명은 장난처럼 찾아오길 좋아하니까 좀 늦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지켜지는 약속은 그리 많지 않으므로
광화문 우체국 앞에서 가고 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은 슬프다 사람들은 꼭 지켜야 할 약속을 어긴 채 그것을 잊으려고 우체국에 와서 편지를 쓰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알 수 없는 누군가와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모양이다 오래 익은 버릇처럼 눈 내리는 날엔 나도 모르게 광화문 우체국 앞에 와서 잘 생각나지 않는 누군가를 만나야만 한다고 고집하곤 한다
기억은 상실해가기 때문에 오늘은 어제나 새롭다 그럼에도 새로운 기억은 또다시 어제의 기억이 된다
그냥 지나쳐 가버린 건 아닐까? 약속한 그 사람이 혹시 나를 못 알아본 건 아닐까? 그래서 스쳐 가버린 건 아닐까? 그렇더라도 눈은 여전히 내리므로 내가 먼저 약속장소를 떠날 수는 없다 눈이 내리는 한 그 사람도 한번쯤 다시 되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약속한 그 사람이 이미 나를 지나쳐갔다 해도 눈 내리는 날 어쩔 수 없이 나는 잊혀져가는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려야 한다
황금 물고기
김선진
개포1동 우체국 옆 담벼락을 기둥 삼고
지아비를 잃은 아낙네
앞치마를 두르고 황금붕어를 낚는다
겨울 바람을 막는
펄럭이는 비닐 가리개 안에서
주전자만 기울이면
붕어는 일렬종대로 나란히 헤엄친다
내장은 다 어디 가고
삶은 단팥만 배 터지게 물고 있나
뜨거운 불판
돌리고 뒤집고 또 엎어서
영혼이 빠져 나간 붕어를 팔고 있다
해거름 그림자 길게 누울 때까지
수 없이 붕어를 찍어내도
부부가 함께 낚던 그때만 하겠는가
짧은 해
어둠이 골목으로 마실 나올 때
식어가는 붕어가 약속한 듯 주둥이를 달싹인다.
월간지
김선호
그녀는 한 달에 한 번 배달된다
작은 별들을 별책부록으로 달고
거무스름한 우체국 소인을 가슴에 찍었다
나는 매달 보름이면
그녀의 스커트 깃을 넘긴다
달에겐 뒷면이 없음을 알리는
원색 화보들이
사랑에 목숨 걸다 퇴락한 여배우처럼
기억만 붙잡고 웃는다
발효된 글자들이 구름에 부딪치고는
허공에서 그림자가 되어 흘러 내린다
운석이 된 시간들은 외계 밖으로 떨어지고
표지에 그려 넣은 새들의 깃털은 지문에 지워졌다
바람 편에선 깨진 거울 이야기가 가득하다
사춘기 때 깨진 이후
물체를 온전히 반사하지 못하는 거울
달아난 조각들은 우주 어느 곳에 박혀있는지.
맞춰지진 않지만 달마다 연재된다
내 몸에 차올랐던 붉은 달은
초승달이 되어 부메랑처럼 날아간다
낯선 사람이 되는 시간
김소연
네 발 짐승이 고달픈 발을 혓바닥으로 어루만지는 시간. 누군가의 빨아 널은 운동화가 햇볕 아래 말라가는 시간. 그늘만 주어지면 어김없이 헐벗은 개 한 마리가 곤히 잠들지. 몸 바깥의 사물들이 그네처럼 조용히 흔들리고 있어.
(깊은 밤이라는 말은 있는데 왜 깊은 아침이란 말은 없는 걸까)
언덕 위 사원에는 감옥이 있었고, 감옥에는 돌 틈 사이 작은 균열에 대고 감옥 바깥의 사물들에게 끊임없이 혼잣말을 속삭이던 한 공주가 있었대. 감옥은 그녀를 가둘 수 있었겠지만 그녀의 속삭임만은 가둘 수가 없었대. 속삭임은 사람의 퇴화한 향수들을 들어 올려 안개처럼 난분분하게 흩어졌고 언젠간 소낙비처럼 우리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려올 거래. 우린 비를 맞겠지. 물비린내를 맡겠지. 자귀나무가 수백 개의 팔을 좍좍 뻗어 이 모든 은혜들을 받아내겠지. 사방천지 검은 나무들이 나무이기를 방면하는 시간이 올 테지.
사람이 보트에 모터를 달기 위해 전념해오던 시간, 강물은 물총새의 날갯짓을 오랫동안 지켜보다 손바닥을 날개처럼 활짝 폈겠지. 그리곤 모난 바위를 동글동글하게 다듬었겠지. 그 바위들이 언덕 위로 굴러 올라가 사원의 탑이 되는 시간. 아무도 여기에 없었을 거야. 언제나 그런 때에 우린 그곳에 있지 않지. 단지 물가에 집을 짓고 어리석음을 자식에게 가르치고 자식의 이마 정중앙에 멍울을 새겨 넣지. 격렬한 질문들을 가슴에 담고 자식들은 낙담한 채 고향을 떠나지. 강물이 보다 두터워지는 또 다른 아침. 물가에 나가 겨드랑이를 씻고 사타구니를 씻는 부모들은 자신의 선의를 반성하지 않은 채 수많은 아침을 맞지.
이제 나는 사원 너머 시장골목 어귀에 먼지를 뽀얗게 얹은 채 졸고 있는 작은 우체국에 갈 거야. 너의 질문에 대한 나의 질문이 시작되는 아침. 우리가 잘못되기 시작한 건 허무를 이해하기 시작한 그때부터가 아닐까. 나는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며 돌계단에 앉아 강물에 비친 검은 얼굴을 보고 있어.
(아침에 보던 것들은 다음날 아침에야 다시 볼 수가 있겠지)
오늘은 무얼 할까. 맨발의 사람들이 두 팔을 힘껏 써서 너럭바위에 이불빨래를 너는 시간. 세찬 비는 어제의 일이고 거센 강물은 오늘의 일이 되는 시간.
하늘우체국
김수우
시립묘지 납골당 입구 하늘우체국은 열두 달, 가을이다 오늘도 헐렁한 쉐터를 입은 가을이 소인을 찍는 중, 우표 없는 편지들이 시시로 단풍든다 몰래 지나는 바람에도 집채만한 그림자들 일어서는 말의 잎새더미들, 한장 한장 젖은 목소리로 뒤척인다
하늘우체국에서 가장 많은 잎새말은 ‘사랑해요’이다 ‘미안해요’도 가랑잎 져 걸음마다 밟힌다 ‘보고 싶어요’ ‘편히 쉬세요’ ‘또 올께요’도 넘쳐흘러 하늘이 자꾸 넓어진다 산자에게나 망자에게나 전할 안부는 언제나, 같다, 언제나, 물기가 돈다
떠난 후에야 말은 보석이 되는가 살아생전 마음껏 쓰지 못한 말들, 살아 서로에게 닿지 못한 말들, 이제야 물들며 사람들 몸속으로 번진다 가슴 흔들릴 때마다 영롱해진다 바람우표 햇살우표를 달고 허공 속으로 떠내려가는 잎새말 하나, 반짝인다, ‘내 맘 알지요’
편지 3
김시천
썼다 지우고 지우고 다시 쓰고
겉봉에 주소와 이름까지 다 쓰고 나서
한참을 보고 다시 또 본다
우체국에 들러 우표를 붙이면서 다시 보고
우체통에 넣기 전에 또 한참을 바라보다가
오늘 알았다 나는 비로소
산다는 건 이렇게 제 마음을 꺼내어 들고
보고 또 다시 보면서
저무는 일이라는 걸
##
저무는
하루
서시
김영은
가로수 밑을 지나다
툭!
나뭇잎 떨어지고 발이 멈춘다
집어든 손가락 끝에서 가을이 시리다
부치지 못한 편지는 아직도 가슴에 있고
문득,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바람이 미는 대로 정처없이 흔들린다
그림자 작게 접어 제 몸 속에 집어넣고
낙엽은 걸음이 조급한데
작별인사는 될수록 짧게
서둘러 떠나는 발자국 소리, 서걱 서걱 서걱......
멀어지는 모습 뒤로 흰구름이 눈부시다
지난 여름
사랑은 모든 걸 휩쓸고 지나간 전쟁 같았지
그 화염 속 아직도 나는 쓰러져 있는데
깊어질수록 보이지 않는 그대 마음
상처는 꽃잎처럼 붉구나
우체국 가는 길
마음은 편지보다 한 발 앞서고
낙엽 뒤에서 흩어진 시간을 만지작거리다
돌아서는 시선 끝, 하늘이 푸르다
아직 편지는 부치지 못했고
가. 을. 이. 깊. 다.
귀 먼자(KIMEUNJA)
김은자
공항에서 잃어버린 두 개의 이민가방이 도착한 것은
미국에 도착하고 육개월 후, 동네 간이 우체국
찌그러진 깡통 이민 가방이 내 발 앞에 놓여을 때
이름표에는 이름이 반쯤 지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KIMEUNJA 귀. 먼. 자. 로 불렀다 운명 같은 해독 이후 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모국어가 목마른 날이면 먹먹해진
귀를 홀로 만지며 대숲을 뒹구는 사람들 틈 속에서
지퍼를 열면 붉은 울음이 빗방울처럼 매달려 있었다
이민 올 때 엄마가 사준 꽃무늬 원피스는 아직도
한쪽 팔이 꺾인 채 옷장 한 켠 박제처럼 걸려 있다
귀머거리의 속성은 엷게 떨다 눈을 잠가 버리는 것
겨울에 떠나 여름에 도착한 개화를 모르는 그리움
깊숙이 손을 넣으면 이민 올 때 언니가 사준 벙어리
장갑이 딸려 나온다 귀가 멀면 입도 멀어지는 법
異國은 명치뼈 아래께 느껴지는 통증 같은 것
흰 편지에 봉인된 얼굴들을 넣고 돌아서는 色色의
사람들 발음 틀린 소통이 오래 아프다
마지막 편지
김초혜
완성될 줄 모르는
편지는
너에게 도달되지 않고
공간에 머무르면서
우체국으로 접수될 줄 모른다
부치지 못할 편지는
쓰지도 말자면서
돌아서는 법을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연습하지만
정작으로
돌아서야 할 시간에는
변두리만 돌다가
다시 돌아서 버리는
건망증
필생에 한 번
혼자서만 좋아하고
잊어야 되는
삶의 징벌
우체국 계단
김충규
우체국 앞의 계단에
나는 수신인 부재로 반송되어 온
엽서처럼 구겨진 채 앉아 있었다
빨간 우체통이 그 곁에 서 있었고
또 그 곁에는 늙은
자전거가 한 대 웅크려 있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단물이 다 빠져나간 바람이
싱겁게 귓볼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편지 혹은 엽서를 안 쓰고 지낸 지
몇 해가 지났다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애써 기억의 밭에 파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길 건너편의 가구점 앞에서
낡은 가구를 부수고 있는 가구점 직원들,
그리움도 세월이 흐르면 저 가구처럼 낡아져
일순간 부숴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낡은 가구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정 그리워서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면
내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배달을 보내리라
우체국의 셔터가 내려가고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갔다 여름의 끝이었고
나는 아직 무성한 그리움의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김현성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 같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 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들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우체국 가는 길
김현태
이른 아침에 우체국에 갑니다
출판사에서 받아 온 시집과
밤새 쓴 편지 한 장을
자전거에 싣고 우체국에 갑니다
아침햇살이 신호등이 걸릴 때마다,
내 생이 브레이크를 질끈 잡을 때마다
행여, 자전거 뒷칸에 매단
누우런 봉투가 아파하지 않을까,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체국은 항상 사람향기가 납니다
그리움 향기가 가득합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말 못할
그리움이 더 많은가 봅니다
내 이름보다도 그대 이름이
크게 적힌 봉투를 저울에 올려 놓습니다
몇 그램이나 나갈까,
우체국 아가씨는
방황하는 저울바늘의 끝을 바라 봅니다
문득, 봉투의 무게가
내 사랑의 무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스레 두볼이 바알갛게 달아오릅니다
며칠 후면,
지구의 한 모퉁이에 닿을
내 그리움의 편린들
악어 입 같은 우체통에 고이고이
묻어 두고 자전거에 몸을 싣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겨울바람이 자전거 앞바퀴에 걸려
치즈처럼 얇게 잘리었는지,
바람 끝이 맵습니다
가슴팍이 왈칵, 시려 옵니다
낭만우체국
나태주
나는 이런 우체국을 알고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우체국 문을 열고는
휑하니 마을로 술 마시러 나가는 중늙은이
우체국장이 근무하는 우체국
여자 직원 혼자서 하루 종일 사무실을 지키는 우체국
한나절을 두고 찾아오는 손님도 별로 없고
전화조차 잘 걸려오지 않아
여자 직원은 뜨개질을 하다가 하품을 하기도 하는 우체국
(요즘 세상에 그런 곳이 있을까 싶지만)
어쩌다 마을의 노인이 돈이라도 찾으러 오면
여자 직원은 비로소 제 할 일이 생겼다는 듯
방글방글 웃으며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안녕히 가세요, 수선을 떠는 우체국
그 바람에 출렁, 파문이 생기는 우체국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손님이 돌아가고 나면 다시금
적막에 휩싸이고 마는 우체국
나도 가끔은 이 우체국에 우편물을 부치러 가는 날이 있다
볼일을 보고서도 나는 금방 오지를 못하고
한참동안 우체국 안에서 머뭇거린다
왠지 모르게 곧바로 우체국 문을 밀고 돌아오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서다
목소리가 참 이쁘네요, 꽃이 막 피어나는 것 같애요
실없이 지꺼리는 말 한마디에도 우체국 여자 직원은
하르르 웃으며 좋아한다
정말 그 웃음이 다시 한 번 꽃과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이런 우체국을 오늘 낭만우체국이라 부르고 싶다.
느리게
나호열
우체국은 산 속 저물녘에 있다
이 가을에 나는 남루한 한 통의 편지
산길 초입 그리고 저물녘에서
느릿느릿 우체국을 찾아간다
블랙홀처럼 어둠은 황홀하다
문득 아찔한 절벽 위에 몸을 가눌 때
바위에 온몸을 부딪치고
으깨어지면서 물은
맑고 깊어지는 흩날리는 꽃잎이다
바람은 또 이렇게 깊은 산에 들어야
솔내음을 품어 낼 수 있는 것
이 가을에
우체국 소인이 찍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에게 가는 길 - 장생포
도순태
햇살이 뜨겁던 날 장생포에 갔다.
고래가 사라진 장생포에는 붉은 햇살이
흔적만 남은 고래막 외벽에 황량하게 내렸다.
옛 분주함도 허름한 옷같이
세월의 뒤안길에서 깨어진
유치창처럼 서서히 늙어가고 있었다.
이층 다방 사진 속에는
오래 전 고래 한 마리
혼자 물마시며 빈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지붕이 낮은 우체국에서 엽서를 샀다.
언젠가 돌아 올 고래를 기다리며 서 있는
장생포 방파제가 슬퍼 보인다고,
기다림은 늘 그늘진
기다림을 만든다고
어젯밤 내 꿈에 찾아온 그에게
비릿한 바다내음 같은
이야기를 실어 보냈다.
돌아서 뽑은 자판기 커피의
따뜻한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질 때 눈물이 났다.
똬리를 튼 한 마리 뱀장어
가슴에 넣고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 속에 그도 나도 있었다.
혼자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한다는
그처럼 누구나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가슴에 묻고 산다.
기다림에 지친 바다 앞에서
다 젖은 내 안으로
고래 한 마리 살아 꿈틀거리며 돌아왔다.
그리운 우체국
류 근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은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밝혀 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안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비파나무 그늘
마경덕
일제히 소인을 찍고 있는 나무들,
봄부터 쓴 장문의 편지들이 쏟아진다
허공에 쓰는 저 간절한 필체들
해마다 발송되는 편지들은 모두 어디로 가나
켜켜이 쌓인
주소불명, 수취거절, 수취인부재
미처 소인도 찍지 못한, 저 미납의 사연들
비파를 타던 그 사내
단물이 흐르는 목소리를 내 일기장으로 옮겨오곤 했다
그 소리를 만지며 사나흘 울었다
울음소리에 비파나무 귀는 파랗게 자라
그때 나를 찢고 다시 썼다
몸은 기억한다
그때 우리는 젖은 머리를 털고 있었다
손끝이 스칠 때 비파나무 그늘도 가늘게 떨렸다
빗물에 젖은 열개의 손가락으로 그의 갈비뼈를 더듬고 싶었다
끈끈한 시간의 뒷면에 혀를 대면
그는 떨어진 우표처럼 기울어 있다
우체국은
마감된 하루를 가지 끝에 내건다
어둑한 그늘 아래 시큼한 연애가 익어가고
비파를 켜듯, 그 사내를 연주하고 싶던
그 가을
건너간 마음이 수취인불명으로 걸어 나온다
한 다발의 묵은 편지를 태우듯
노랗게 발등으로 떨어지는 기억을 털어내는
우체국 앞 나무들
키 큰 비파나무가 마지막 현을 퉁긴다
수없이 반송된 계절이 또 한 페이지 넘어간다
우체국을 지나며
문무학
살아가며 꼭 한 번은 만나고 싶은 사람
우연히 정말 우연히 만날 수 있다면
가을날 우체국 근처 그쯤이면 좋겠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엔 우체국 앞 만한 곳 없다
우체통이 보이면 그냥 소식 궁금하고
써 놓은 편지 없어도 우표를 사고 싶다
그대가 그립다고 그립다고 그립다고
우체통 앞에 서서 부르고 또 부르면
그 사람 사는 곳까지 전해질 것만 같고
길 건너 빌딩 앞 플러타너스 이파리는
언젠가 내게로 왔던 해묵은 엽서 한 장
그 사연 먼 길 돌아와 발끝에 버석거린다
물 다 든 가로수 이파리처럼 나 세상에 붙어
잔바람에 간당대며 매달려 있지만
그래도 그리움 없이야 어이 살 수 있으랴.
가을 우체국
문정희
가을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인보다 때론 우체부가 좋지
많이 걸을 수 있지
재수 좋으면 바닷가도 걸을 수 있어
은빛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낙엽 위를 달려가
조요로운 오후를 깨우고
돌아오는 길 산자락에 서서
이마에 손을 동그랗게 얹고
지는 해를 한참 바라볼 수 있지
시인은 늘 앉아만 있기 때문에
어쩌면 조금 뚱뚱해지지
가을 우체국에서 파블로 아저씨에게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시인이 아니라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가 아니라 내가 직접
크고 불룩한 가방을 메고
멀고먼 안달루시아 남쪽
그가 살고 있는
매혹의 마을에 닿고 싶다고 생각한다
각이도* 그 후 2
박 일
법성포로 가자. 썰물이 석양을 배웅하며 당도하는 사이 육지에서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막배에 오르자. 포구의 사람들이 희미해지는 즈음이 그리움의 거리가 될는지도 몰라. 우럭떼를 불러들이듯이 내 손목을 마다하지 않고 잡아주던 각이도여, 몇 해 전 내가 그곳을 떠나오던 날, 선창가에서 한없는 눈빛으로 응시하던 견우라는 개를 기억한다. 이런 머언 후일에서야 그 눈빛의 의미를 알게 되었지. 떠나는 자보다 보내는 자의 쓸쓸함이 더욱 크다는 것을.
익명의 공간이었다. 육지라는 곳은, 나는 늘 한 자루 칼이었고 웃음 짓는 수많은 얼굴 뒤에선 수시로 화살이 시위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찰나에 베지 못하면, 언제 어디서건 그의 칼에 목이 잘릴지 모를 일이었다. 대게 우리는 배신과 피를 먹고 자랐다.
먼데 불빛이 그리워 질 때까지 너의 품에서 지내고 싶다. 추락과 부딪힘의 힘만으로도 파도는 진경眞景에 이름할진데, 다시 너를 떠날 때에는 소매를 걷고 첫배에 오르겠다. 굴비 열댓두름을 사가지고서 내게 쏜 화살의 주인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려마. 햇살 한줌과 손끝의 온기도 함께 동봉하여서는 우체국의 유리문을 환하게 당겨보겠다.
*전남 영광군에 속해있는 섬
떠도는 자의 노래
박경림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뭇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별정 우체국의 봄
박기섭
편지 배달 나간 봄빛은 오지 않고
별정 우체국 나직한 창 틈으로
바람난 아래윗각단 복사꽃만 환한 날
추석 무렵
박남준
모처럼 동네가 흥청거렸다
우체국 앞 삼미식당도 찬새미 송어횟집도 동창회다 뭐다
밀려드는 주문에 일손이 달렸다
고작해야 경운기나 일 톤 트럭이 서 있던 길목마다
미끈한 자가용들이 줄을 지어 들어섰고
아이들이 청년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들썩거렸다
잔치는 짧다
울긋불긋
단풍 같은 고향을 매달고 사람들은 떠나갔다
마을 길은 텅 비어 해는 더 바짝 짧아지고
밤새 환하던 집들은 벌써 깜깜해졌다
늙은이들의 두런거리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 잔기침 소리 너머
꼬부랑 꼬부랑 고로롱고로롱 풀벌레 소리
홀로 남아 등 굽은 가로등이 노안처럼 침침하다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
박미라
코피를 쏟았다
검붉은 꽃잎이 수북이 쌓인다
꽃잎으로 위장한 편지
핏빛 선명한 이 흘림체의 편지를
나는 읽어낼 수 없다
행간도 없이 써 내려간 숨 막히는 밀서를
천천히 짚어간다
꽃잎 뭉개지는 비릿한 냄새 온 몸에 스멀댄다
기억의 냄새만으로도
노을이 타오르고 맨드라미 자지러지는 저녁을
맨발의 내가 엎어지며 간다
이 편지의 수취인은 내가 아니다
녹슨 우체통 속에서 늙어가는
뜯지 않은 편지를
먼지 자욱한 세상의 뒤쪽으로 반송한다
젖은 꽃잎을 떼어 빈 봉투에 붙인다
어딘가의 주소를 적는다
여기는 백만 년 후의 무덤이라고 쓴다
집 잃은 아이처럼 헤매는 비린내를 거두어 담는다
붉은 글자들을 손바닥으로 쓸어 담는다
받는 이의 주소를 적는다
몸이 쓴 편지를 읽을 줄 아는 마음에게 라고 쓴다
백만 년 전에도 마음이었던 그대
여기, 지워진 행간을 동봉한다
이팝나무 우체국
박성우
이팝나무 아래 우체국이 있다
빨강 우체통 세우고 우체국을 낸 건 나지만
이팝나무 우체국의 주인은 닭이다
부리를 쪼아 소인을 찍는 일이며
뙤똥뙤똥 편지 배달을 나가는 일이며
파닥파닥 한 소식 걷어 오는 일이며
닭들은 종일 우체국 일로 분주하다
이팝나무 우체국 우체부는 다섯이다
수탉 우체국장과 암탉 집배원 넷은
꼬오옥 꼭꼭 꼬옥 꼭꼭꼭, 열심이다
도라지 밭길로 부추 밭길로 녹차 밭길로
흩어졌다가는 앞다투어
이팝나무 우체국으로 돌아온다
꽃에 취해 거드름 피는 법이 없고
눈비 치는 날조차 결근하는 일 없다
때론 밤샘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다
빨강 우체통에 앉아 꼬박 밤을 새고
파닥 파다닥 이른 우체국 문을 연다
게으른 내가 일어나거나 말거나
게으른 내가 일을 나가거나 말거나
게으른 내가 늦은 답장을 쓰거나 말거나
이팝나무 우체국 우체부들은
꼬오옥 꼭꼭 꼬옥 꼭꼭꼭, 부지런을 떤다
용산을 추억함
박소란
폐수종의 애인을 사랑했네,
중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용산우체국까지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한강로 거리를 쿨럭이며 걸었네
재개발지구 언저리 함부로 사생된 먼지처럼
풀풀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시의 몸 구석구석에선 고질의 수포음이 새어나왔네
엑스선이 짙게 드리워진 마천루 사이 위태롭게 선 담벼락들은 저마다
붉은 객담을 쏟아내고 그 아래 무거운 날개를 들썩이던
익명의 새들은 남김없이 철거되었네
핏기 없는 몇 그루 은행나무만이 간신히 버텨 서 있었네
지난 계절 채 여물지 못한 은행알들이
대진여관 냉골에 앉아 깔깔거리던 우리의 얼굴들이
보도블록 위로 황망히 으깨어져갔네
빈 거리를 머리에 이고 잠든 밤이면 자주 가위에 눌렸네
홀로 남겨진 애인이 흉만(胸滿)의 몸을 이끌고 남일당 망루에 올라
오, 기어이 날개를 빼앗긴 한 마리 새처럼
지옥불 일렁이는 아스팔트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쳐가는 불온의
미몽이 사이렌처럼 머릿속을 낭자하게 물들였네
상복을 입은 먹구름 떼가 순식간에 몰려들었네 깨진 유리창 너머
파편 같은 눈발이 점점이 가슴팍에 박혀왔네
한숨으로 피워낸 시간 앞에 제를 올리듯
길고 긴 편지를 썼으나 아무도 돌아올 줄 모르고
봄은 답장이 없었네 영영
애인을, 잃어버린 애인만을 나는 사랑했네
폭설
박이화
밤새 보태고 또 보태어 쓰고도
아직 못다 한 말들은
폭설처럼 그칠 줄 모릅니다
우리, 그리움에 첩첩이 막혀
더 갈 데 없는 곳까지 가 볼까요?
슬픔에 푹푹 빠져 헤매다
함께 눈사태로 묻혀 버릴까요?
나 참 바보 같은 여자지요?
눈 오는 먼 나라 그 닿을 수 없는 주소로
이 글을 쓰는 난 정말 바보지요?
그래도 오늘 소인까진
어디서나 언제라도 유효하면 안 될까요?
끝없이 지루한 발자욱처럼 눈발,
어지럽게 쏟아지는 한 길가
빨갛게 발 시린 우체통이
아직 그 자리를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군요
한편에선 쿨룩이며 숨가쁘게 달려온 제설차가
눈길을 쓸고 거두어 위급히 병원 쪽으로 사라집니다
아, 그렇군요
내 그리움도 이렇게 마냥
응달에 쌓아 두어선 안 되는 거군요
아직 남은 추위 속에
위험한 빙판이 될 수 있겠군요
슬픔에 몸둘 바 몰라
저 어둔 허공 속 지치도록 떠도는 눈발처럼
나, 당신 기억 속에 쌓이지 말았어야 했군요
그러나,
그러나 그 사랑이 전부이고 다인 나에게는
해마다 어디로든 추운 겨울은 오고
큰 눈 도무지 그치지를 않네요
우체국 옆집
박정수
수취인 불명 도장 찍힌 그곳
매일같이 찾아와 제 집인 양 머무는 바람이 있다
첫사랑은 아카시아 같아서
때만 되면 하얗게 부풀어 오르는데
우표를 붙인 적이 없는 마음
홀로
살구꽃 되었다가
빈 빨랫줄에 거미줄도 되었다가
수런수런 바람으로 자라서
종아리 하얀 계집아이가 공기놀이를 한다
햇살은 종일 풀숲에서 뒹굴고
오눨의 바람이 툭툭 기억을 흔드는
빨간 우체통을 지나는 그곳
나비 * 2
상희구
봄을
전령하는
노랑우표 한 장
우리 고장에는
우체국이 없습니다
오늘도 우체국에 간다
서경원
오늘도 난 우체국에 간다
마른 잎 수북히 추억처럼 쌓인 길
홀로 걷는 외로움도 축복이라며
하늘 호수에 담근 흰 구름
청량한 햇살에 말린 단풍잎과
그늘 한 점 없는 구절초의 보랏빛 미소
잔가지 눈물처럼 흔드는 방울새 울음소리
하나도 새지 않게 쪽빛 한지에 싸서
네 이름 꽃씨처럼 새긴 봉투에 넣고
떨리듯 기도를 하지
네 품에 안길 이 편지 바로 나였으면...
편지를 물고 가는 흰 제비도
기쁘게 날갯짓하겠다
오늘도 나는 우체국에 간다
너에게 나를 보내기 위해
지상에서 1
성윤석
저녁이었기때문견디며
괴롭게성장한나무와사
람들을엿보았기때문지
방관청과이층산동반점
그멀고도먼처마사이아래에서
누군가는비를긋고나는
비를세운다전파상오래
된세고비아기타소리현
이가늘수록높은음표를
건드리고퉁퉁슬픔치며
가던가수와70년대소리
아직도여기엔당신만이
잘가는집이있고우체국이
있고당신만이잘가지못하
는비탈이있다우리는모른
다그래도사라지진마라그
래도우리는최상의화질
로당신을찾아내야한다그
대는한편의영화도잊지마
라개봉관앞가는비굵어물
살로흘러간다
우체국 앞 평상
손순미
길은 저 혼자 우체국으로 들어가 버렸고, 바람은 측백나무 겨드랑이를 부채질하다 기절해버렸다 우체국 앞에는 한 토막의 평상이 놓여 있고 직원들은 편지를 쓰지 않는 인류의 앞날을 걱정하며 평상 위에 놓인 더위를 구경한다
한 남자가 평상을 향해 걸어온다 남자의 바지를 그대로 갈아입은 그림자를 데리고 온다 남자가 측백나무 쪽으로 평상을 옮기자 그림자는 황급히 배웅을 마치고 돌아간다 못난 남자에게서 태어난 불행한 껍데기는 가라! 노숙에 지친 남자가 겨우 헛소리를 삼키며 평상 위에 눕는다 약지가 없는 남자의 손이 나뭇잎처럼 흔들린다 여름이 이렇게 춥다니!
십자가를 짊어지듯 남자는 평상을 짊어지고 예수처럼 누워있다 영원히 오지 않을 부활을 꿈꾸지 않으며, 각도를 조금만 비틀면 폭염에 순교한 자로 기록될 광경이다
남자를 태운 평상은, 생각하면 눈물이 핑~도는 모양이다
장생포 우체국
손택수
지난 밤 바다엔 폭풍주의보가 내렸었다
그 사나운 밤바다에서 등을 밝히고
누구에게 무슨 긴 편지를 썼다는 말인지
배에서 내린 사내가 우체국으로 들어온다
바다와 우체국의 사이는 고작 몇 미터가 될까 말까
사내를 따라 문을 힘껏 밀고 들어오는 갯내음,
고래회유해면 밖의 파도 소리가
부풀어오른 봉투 속에서 두툼하게 만져진다
드센 파도가 아직 갑판을 때려대고 있다는 듯
봉두난발 흐트러진 저 글씨체,
속절없이 바다의 필체와 문법을 닮아 있다
저 글씨체만 보고도 성난 바다 기운을 점치고
가슴을 졸일 사람이 있겠구나
그러고 보면 바다에서 쓴 편지는 반은 바다가 쓴 편지
바다의 획순을 그대로 따라간 편지
수평선을 긋듯 반듯하게 접은 편지를 봉투 속에 집어넣고
뭍에 올랐던 파도 소리 성큼성큼 멀어져간다
뿌- 뱃고동 소리에 깜짝 놀란 갈매기 한 마리
우표 속에서 마악 날개를 펴고 있다
새가 된 시인
송수권
스륵스륵 향 연필 깎는 밤
창 밖에선 눈 오는 소리
인터넷 세상 속에서도
바람 불고 비가 오는 걸까
연필로만 향그런 시를 쓰는 시인
e-mail이 아니라 우체국에 가서 매일
편지와 원고를 발송하고 오는
새대가리 시인
답청踏淸 날 교외의 풀밭을 밟으며
족두리풀 풀각시 쪽을 지어
쪽- 소리나게 입맞춤하며
하늘 보고 새초롬하네요, 말하는 시인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따금 운전 핀을 잊고
맹- 하니 서 있는 시인
나 완전히 새 됐어
혼자서 어깨짓을 하며 가만하게 웃는 시인
그 나이에 차 없이도 잘 나다니네요.
제자들이 핀잔하면
얘들 봐라, 물에 빠진 선비가 개헤엄치는 거
봤니,
달구지 누가 타는 건데,
패대기로 걷다가 구두창이 나간 것도 모르는 시인
늘 한쪽 어깨가 기울기만 한 시인
나 완전히 새 됐어
새벽 세 시에 횡단보도를 비틀거리다가
어느 날 구두창이 아니라 창이 나간 시인
강물에 재를 뿌리자 재빨리 날아가
새가 된 시인
그의 영혼이 너무 가벼운 게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너무나 무거운 게 아닐까.
* '나 완전히 새 됐어'는 싸이의「새」에서 따온 구절임.
명자나무 우체국
송재학
올해도 어김없이 편지를 받았다
봉투 속에 고요히 접힌 다섯 장의 붉은 苔紙도 여전하다
花頭 문자로 씌여진 편지를 읽으려면
예의 붉은별무늬병의 가시를 조심해야 하지만
장미과의 꽃나무를 그냥 지나칠 순 없다
느리고 쉼 없이 편지를 전해주는 건
역시 키 작은 명자나무 우체국,
그 우체국장 아가씨의 단내 나는 입냄새와 함께
명자나무 꽃을 석삼년째 기다리노라면,
피돌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아가미로 숨쉬니까
떨림과 수줍음이란 이렇듯 불그스레한 투명으로부터 시작된다
명자나무 앞 웅덩이에 낮달이 머물면
붉은머리오목눈이의 종종걸음은 우표를 찍어낸다
우체통이 반듯한 붉은색이듯
단층 우체국의 적별돌에서 피어나는 건 아지랑이,
연금술을 믿으니까
명자나무 우체국의 장기 저축 상품을 사러 간다 *
삭제하다
송종규
피자를 시켜 놓고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텅 빈 오토바이가 도착했다 화를 내며 돌려보냈는데 오토바이의 두 바퀴가 철가방에 실려 왔네 뭔가 툭 부딪혔는데 어깨가 부러졌네 다급하게 아버지를 불렀는데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가지 않는데
누군가 슬쩍 곁을 스쳐 갔는데 파일이 삭제 됐다 초인종이 울리고 택배를 받으러 나갔는데 덩그러니 초인종만 매달려 있다 두통약을 먹었는데 웬, 하수구가 막혔다네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낡은 전화번호가 자꾸만 앞을 가로막는데
하수구에서 펑펑 검은 시간이 솟구쳐 올랐다 나는 몰상식하게 늙었고 치명적으로 헐거워졌다 발을 동동 굴렀지만 발은 허공에서 내려오지 않았네 음악은 쇳소리를 내면서 어디론가 둥둥 떠내려갔지만,
낡은 전화번호를 삭제하고 나서 세상은 복구되어 갔다 오토바이 바퀴와 아버지와 구름과 부러진 어깨를 싣고 우체국으로 달려갔네 혁명처럼, 은행나무 잎사귀가 흩날리고 있는 생의 한 날
나팔꽃 우체국
송찬호
요즈음 간절기라서 꽃의 집배가 좀 더디다
그래도 누구든 생일날 아침이면 꽃나팔 불어준다
어제는 여름 꽃 시리즈 우표가 새로 들어왔다
요즘 꽃들은 향기가 없어 주소 찾기 힘들다지만
너는 알지? 우리 꿀벌 통신들 언제나 부지런하다는 걸
혹시 너와 나 사이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다 하더라도
이 세계의 서사는 죽지 않으리라 믿는다
미래로 우리를 태우고 갈 꽃마차는
끝없이 갈라져 나가다가도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저와 같은 나팔꽃 이야기일 테니까
올부터 우리는 그리운 옛 꽃씨를 모으는 중이다
보내는 주소는, 조그만 종이봉투 나팔꽃 사서함
우리 동네 꽃동네 나팔꽃 우체국
떠도는 자의 노래
신경림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된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빨간 우체통 앞에서
신현정
새를 띄우려고 우체통까지 가서는 그냥 왔다
오후 3시 정각이 분명했지만 그냥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그냥 왔다
난 혓바닥을 넓게 해 우표를 붙였지만 그냥 왔다
논병아리로라도 부화할 것 같았지만 그냥 왔다
주소도 우편번호도 몇 번을 확인했다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그대여 그 자리에서 발길을 돌려서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알 껍질을 톡톡 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새여 하늘은 그리도 푸르렀건만 그냥 왔다
새를 조각조각 찢어버리려다가
새를 품에 꼬옥 보듬어 안고 그냥 왔다.
해발 680m의 굴뚝새
심은섭
면사무소에서 4㎞ 더 지나 우편번호 233-872에 살던
굴뚝새는 사내 굴뚝새를 산 14번지에 묻어 두고
경적소리와 높은 빌딩들이 난무하는 우편번호 100-866
69층 아랫목에서 무-말랭이가 되어 간다
우체국에서 지어준 100-866의 우편번호를
문패에 문신처럼 새겨놓고 살지만
산 14번지 바람소리 전해줄
우편배달부의 발길이 끊어져버린 지가 오래다
몇 날을 견딜 수 있는 수분이 얼마 남지도 않은
해발 680m에 살던 굴뚝새를
굴뚝새의 굴뚝새들이 바라보며 쌀독에
파랑주의보가 내려 호미자루를 놓지 못하던 날들과
냉수에 간장을 섞어 헛배 채우며 새우잠 자던 날도
미납된 등록금 영수증 머리맡에 두고
밤새워 신열을 내던 일들을 떠올린다.
절구공이에 짓이겨진 그녀의 가슴에는
슬픈 보석 몇 개 박혀 있다
두어 개의 천둥소리
하얀 달 몇 개와 서너 개의 태풍 그리고
몇 밤에 내린 무서리에 말라진 몸, 더 말려야
천국의 층계만이라도 가볍게 오르려는 듯
남아 있는 그들의 짐이 가벼워진다는 것도 안다
점점 더 멀어진 눈과 눈 사이의 간격
문 밖까지 나온 기침소리가 폐경을 맞는다
우편번호 없는 묘비를 들고 오후 내내
창 밖에서 서성이던 검은 도포를 입은 바람이
조등(弔燈)을 든 굴뚝새들의 포효를 뿌리치며
반송되지 않을 정량(定量)의 화석을
목관 속에 편히 눕힌다
해발 680m의 굴뚝새
심은섭
면사무소에서 4㎞ 더 지나 우편번호 233-872에 살던
굴뚝새는 사내 굴뚝새를 산 14번지에 묻어 두고
경적소리와 높은 빌딩들이 난무하는 우편번호 100-866
69층 아랫목에서 무-말랭이가 되어 간다
우체국에서 지어준 100-866의 우편번호를
문패에 문신처럼 새겨놓고 살지만
산 14번지 바람소리 전해줄
우편배달부의 발길이 끊어져버린 지가 오래다
몇 날을 견딜 수 있는 수분이 얼마 남지도 않은
해발 680m에 살던 굴뚝새를
굴뚝새의 굴뚝새들이 바라보며 쌀독에
파랑주의보가 내려 호미자루를 놓지 못하던 날들과
냉수에 간장을 섞어 헛배 채우며 새우잠 자던 날도
미납된 등록금 영수증 머리맡에 두고
밤새워 신열을 내던 일들을 떠올린다.
절구공이에 짓이겨진 그녀의 가슴에는
슬픈 보석 몇 개 박혀 있다
두어 개의 천둥소리
하얀 달 몇 개와 서너 개의 태풍 그리고
몇 밤에 내린 무서리에 말라진 몸, 더 말려야
천국의 층계만이라도 가볍게 오르려는 듯
남아 있는 그들의 짐이 가벼워진다는 것도 안다
점점 더 멀어진 눈과 눈 사이의 간격
문 밖까지 나온 기침소리가 폐경을 맞는다
우편번호 없는 묘비를 들고 오후 내내
창 밖에서 서성이던 검은 도포를 입은 바람이
조등弔燈을 든 굴뚝새들의 포효를 뿌리치며
반송되지 않을 정량定量의 화석을
목관 속에 편히 눕힌다
우산을 쓰다
심재휘
어제는 꽃잎이 지고
오늘은 비가 온다고 쓴다
현관에 쌓인 꽃잎들의 오랜 가뭄처럼
바싹 마른 나의 안부에서도
이제는 빗방울 냄새가 나느냐고
추신한다
좁고 긴 대롱을 따라
서둘러 우산을 펴는 일이
우체국 찾아가는 길만큼 낯선 것인데
오래 구겨진 우산은 쉽게 젖지 못하고
마른 날들은 쉽게 접히지 않을 터인데
빗소리처럼 오랜만에
네 생각이 났다고 쓴다
여러 날들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많은 것들이 말라 버렸다고
비 맞는 마음에는 아직
가뭄에서 환도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너무 미안하다고 쓴다
우습게도 이미 마음은
오래 전부터 진창이었다고
쓰지 않는다
우산을 쓴다
함피 우체국
심창만
우체국 앞에서 나는 어쩌지 못하네
사원을 거니는 소에게 우표를 붙일 수 없네
꽝꽝 고무 스탬프도 찍을 수 없네
그건 함피의 소에게 너무 놀랄 일이네
소가 기웃거리기에도 너무 작은 함피 우체국
되레 소를 따라가 버릴지도 모르네
무수한 돌들의 뒤꿈치와 원색의 염료들
그대에게 부쳐갈 우표를 나는 모르네
하루 한 번 해와 달과 우체부가 쇠똥 사이로 지나가고
늙은 寺院이 오래오래 제 그림를 거둘 때
탑이 된 우체통 앞으로
앞발 뒷발 번갈아 지우며
소들이 지나가네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들..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 할 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체국은 멀수록 좋다
안효희
누런 서류봉투 하나만큼의 하늘을 이고
천천히 걸어서 간다
비를 피해 가슴에 꼭 끌어안은 시
말랑말랑하고 따뜻하다
글자 한 자 한 자에 묻은 지문과 고통 새기며
상처의 겨드랑이에 날개 달린 우산 하나 받쳐 준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던 얘기,
밤마다 꿈으로 떠오르고 꿈속에서
살아난 깨알 같은 글자들 다시 끄집어낸다
마음도 젖어 있는 날
사랑이 익기를 기다리는 붉은 우체통
우체국에서 소인을 찍고
등기 속달의 바코드 앞에서 쭈뻣거리는 이름,
또 다른 내가 훨훨 날아간다 누군가의 곁,
잠시 섰다가 이내 잊혀질 붉게 물든 이름
수줍은 사랑을 위해 우체국은 멀수록 좋다
남원 가는 길
양애경
임실을 지나 남원 가는 길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면
조그만 동네에도 있을 건 다 있지
여기 살 수 있을 것 같지
북부농협에서 예금을 찾고
농협 상점에서 식료품을 사고
오수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며
당장 오늘부터라도 살 수 있을 것 같지
나는 넝쿨장미인지도 몰라
철사로 엮은 길가 담장에서
이제 막 무더기 무더기 피어나기 시작하는 붉은
꽃
한 송이 송이로는 보이지 않고
초록으로 무성한 이파리들 사이에
중간크기 붓으로 몇 군데 문질러 놓은 것 같은
넝쿨장미로 살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여기서 내려서
논두렁 옆 둑길 하나로 걸어 들어가서 방 한 칸 얻고
편지를 쓰고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고
농협에 계좌를 트고
그리고 농협상점에서 쌀 한 봉지하고 비름나물 한 묶음 사고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 같아
어디 있는지 모르는 당신
더 찾지 못하게 꽁꽁 숨어서 살고 싶은 마음
허탕을 친 당신 한 번 더 차를 타고
나 사는 곳으로
찾아오게 하고 싶은 마음
지금 나 그런 마음 아닐까 몰라
임실에서 남원 가는 길.
마음 우체국
양재건
마을 속 교회 길 지나
불교 포교원 거쳐
성당 가는 길로 난 숲길 오르면
마음 밭에 아담한 우체국 하나
하늘이 내려앉은 듯 흐린 날
마음 울적해지면 가슴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는
무거운 마음 조각들 떼어내어선
광주리에 하나 가득 담아 우체국으로 향하네
숲길 지나
산 속 개울가 흐르는 물줄기 만나니
흐린 마음 있으면 조금 떼다가
제 흐르는 몸 속으로 흘러 보내라하네
숲 속 뛰어다니던 청설모들과
나뭇가지 사이 날아다니던 까치들도
길을 막고선 흐린 마음 있으면 도와줄 테니
몇 조각 떼어놓고 가라하네
비에 묻혀온 바람으로 솔 향내가 얼굴을 스치고
숲의 흔들림 소리 실로폰 소리같이 마음을 맑게 해주는
우체국엔 마음씨 곱게 생긴 아가씨가
정답게 맞아주며 수신 처를 물어
대한민국 “내 마음”시 “정답게”군 “받아줄”면 “고운님”
이라고 말하니 방끗 웃음 띄우네
하늘이 내려앉은 듯 흐린 날
우체국 앞에 퍼질러 앉아 무거운 마음 내려놓으니
맑은 날 햇살 가득 푸른 하늘 보다
오히려 가슴 후련하고
마음 밭에 우체국 하나 두고 있어
흐린 날에도 무거운 마음 전혀 두렵지 않으니
시집보내다
오탁번
새 시집을 내고 나면
시집 발송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속 표지에 아무개 님 청람(淸覽), 혜존(惠存), 혜감(惠鑑), 소납(笑納)
반듯하게 쓰고 서명을 한다
주소와 우편번호 일일이 찾아 쓰고
튼튼하게 테이프로 봉해서
길 건너 우체국까지
내 영혼을 안고 간다
시집 한 권 정가 8000원,
우표값 840원, ×200권, 300권......
외로운 내 영혼을 떠나보낸다
십 년 전 《벙어리장갑》을 냈을 때
- 벙어리장갑 받았어요
시집 잘 받았다는 메시지가 꽤 왔다
어? 내가 언제
벙어리장갑도 사 줬나?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 끼고
옥수수수염빛 입김 호호 불면서
내게로 막 뛰어오는 아가씨와
첫사랑에 빠진 듯 환하게 웃었다
오 년 전《손님》을 냈을 때
- 손님 받았어요
시집 받은 이들이
더러더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때면 내 머릿속에
야릇한 서사적 무대가
흐린 외등 불빛에 아련히 떠올랐다
서울역 앞 무허가 여인숙에서
빨간 나일론 양말에 월남치마 입고
맨 허리 살짝 드러낸 아가씨가
팥국수빛 입술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가씨 몇 데리고 몸장사하는
포주가 된 듯 나는 빙긋 웃었다
지난가을《우리 동네》를 내고
많은 시인들에게 시집을 발송했는데
시집 받았다는 메시지가
가물에 콩 나듯 온다
- 우리 동네 받았어요
어? 내가 언제 우리 동네를 몽땅 사 줬나?
줄잡아 몇 만평도 넘을 텐데
무슨 돈으로 그 넓은 땅을 다 사줬을까
기획부동산 브로커가 된 듯
나는 괜히 우쭐해지다가도
영혼을 팔아 부동산을 산
못난 졸부의 비애에 젖는다
수백 권 넘게 시집을 발송하다 보면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통 헷갈려서
보낸 이에게 또 보내고
꼭 보내야 할 이에게는 안 보내기도 한다
- 손현숙 시집 보냈나?
난감해진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박수현 시인이 말참견을 한다
- 선생님이 정말 시집보냈어요?
그럼 진짜 숨겨 논 딸 맞네요
뒤죽박죽이 된 나는 또 중얼거린다
- 김지헌 시집 보냈나?
- 서석화 시집 보냈나?
- 홍정순 시집 보냈나?
마침내 이 세상 모든 여류시인이
시집을 갔는지 안 갔는지 죄다 아리송해지는
깊은 가을 해거름
내 영혼마저 흐리게 이울고 있다
풀꽃 편지
유경환
내 편지는
지금쯤 어딜 가고 있을까
낯선 우체부 고마운 마음 같은
큰 가방 속에 있을까
아니, 아직 시원한 들판을
기차 타고 달리고 있을까
아니, 겨우 우리 마을 우체국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부친 지 하루도 안 되었는데
갈피 속의 풀꽃 시들었을까.
춘설
유금옥
이 고장에서는 눈을 치우지 않습니다
이 고장에서는 봄도 치우지 않습니다
지난 가을 요양 온 나는
그리움을 치우지 않고 그냥 삽니다
대관령 산비탈 작은 오두막
여기서 내려다보면, 눈 내린 마을이
하얀 도화지 한 장 같습니다
낡은 함석집들의 테두리와 우체국 마당의 자전거가
스케치 연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3월, 겨울이 긴 이 고장에서는
폭설이 자주 내리지만 치우지 않고 그냥 삽니다
여름도 가을도 치운 적이 없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도시처럼 눈을 포클레인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다만, 담뱃가게와 우체국 가는 길을
몇 삽 밀쳐놓았을 뿐입니다 나도 山만한 그대를
몇 삽 밀쳐놓았을 뿐입니다
山 아래 조그만 태극기가 그려져 있는
면사무소 뒷마당,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포클레인 한 대가 보입니다
지지난해 들여놓은 녹슨 추억도 이 고장에서는
치우지 않고 그냥 삽니다
저녁에 스님이 스쳐갔다
유종인
셔터가 내려진 우체국 앞에서 괜히 우물쭈물하였다
이 우물쭈물의 시간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몇 개의 바람떡을 빚으셨을까
이 우물쭈물을 어디 당신만 아는 곳에다
몰래 파묻어두었다 패랭이꽃이라도 피우고픈 저녁인데
못 먹는 떡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저물녘
우물쭈물 고르지 못하는 게 너무 많은
나도 참 내가 맘에 안 차서 저녁바람 속에 섰는데
문득 젊은 스님이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의 빗장을 담담히 열고 나가는
잘 빚어진 스님 옆모습만 나도 옆구리로 보고 있는데
어이 도반道伴! 그래도 요기는 좀 하고 가시게
짐짓 까까머리 불러 세워, 어느 절에 묵느냐 묻고 싶은 저녁인데,
그것도 내 속에만 우물쭈물 빚어지다 마는 겨를인데
마침 내 인기척도 모른 체 지나던 개가
붉은 우체통에 놀라 흠칫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곤
못 본 척 마저 길을 가는 저녁인데
저녁 한 끼를 못 넘어서는 맘이여
깨우치러 가지 않아도 깨우치러 오는 배고픔이
속가의 어머니 이름처럼 불 켜지는 식당 간판들이여
행복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도솔천 밑 우체국
유홍준
눈구멍이 석 자나 들어간 사람이라야
보이는 도솔천, 머리카락이 떡덩어리가 된 사람만이
찾아내는 도솔천 밑 우체국
검정 누비바지에 털신 신은 사람이
마른 목구멍에 삼키는 침처럼
빨간 우체통 속으로 유서를 밀어 넣으면
관상 나쁜 미간처럼 좁은 포구 밖으로
또 무엇을 잡겠다고 고깃배는 떠나
아낙들은 말없이 동태 배를 훑는다
제 배를 제가 훑을 때 더 깊어지는 겨울
동구밖 언덕은
암 덩어리처럼 더 불거져 나오고
암, 암, 자꾸 나무를 옮겨 앉는 까마귀
어김없이 죽으려 돌아온 연어의 자취마저 사라지고
죽음이 구경거리였던, 죽음이
즐거움이었던 죽음이
뚝 끓겨
도솔천 푸른 시내 굽이쳐 흐르고
골짝 깊은 사타구니에 얼굴을 처박으면
커다란 땅거미 한 마리, 도솔천을 덮는다 덮쳐버린다
폭설
윤제림
싸락눈으로 속삭여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니까
진눈깨비로 질척여봐야 고샅길도 못 막으니까
저렇게 주먹을 부르쥐고 온몸을 떨며 오는 거다.
국밥에 덤벼봐야 표도 안 나니까
하우스를 덮고, 양조장 트럭을 덮는 거다.
낯모르는 얼굴이나 간지럽혀봐야 대꾸도 없으니까
저렇게 머리채를 흔들며 집집을 때리는 거다.
점, 점......으론 어림도 없으니까 삽시에, 일순에!
때로 몰려와 그리운 이름 소리쳐 부르는 거다.
어른 아이 모다 눈길에 굴리고 자빠뜨리며
그리운 이의 발목을 잡는 거다.
전화를 끊고 우체국을 파묻는 거다.
철길을 끊고 정거장을 파묻는 거다.
다른 세상으론,
비행기 한 대 못 뜨게 하는 거다.
바람개비 별 4 — 마음의 귀
이가림
바람구두를 신고
굴렁쇠를 굴리는 사나이
늘 마음의 귀 쏠리는 곳
그 우체국 앞 플라타너스 아래로
달려가노라면,
무심코 성냥 한 개비
불붙이고 있노라면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마중 나오듯
그렇게
그대의 신발 끄는 소리……
저 포산包山 남쪽에 사는 관기觀機가
불현듯 도성道成을 보고 싶어 하면
그 간절함
바람으로 불어 가
산등성이 떡갈나무들 북쪽으로 휘이고
도성 또한 관기를 보고 싶어 하면
그 기다림
바람으로 불어 가
산등성이 상수리나무들이 남쪽으로 휘이는 것
옛적에 벌써
우리 서로 보았는가
내가 보내는 세찬 기별에
그대 사는 집의 처마 끝이나
그 여린 창문이 마구 흔들리는
뜨거운 연통관連通管이 분명 뚫려 있어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달려가는
내 눈먼 굴렁쇠여!
가을 우체국
이기철
외롭지 않으려고 길들은 우체국을 세워놓았다
누군가가 배달해 놓은 가을이 우체국 앞에 머물 때
사람들은 저마다 수신인이 되어
가을을 받는다
우체국에 쌓이는 가을 엽서
머묾이 아름다운 발목들
은행나무 노란 그늘이 우체국을 물들이고
더운 마음에 굽혀 노랗거나 붉어진 시간들
춥지 않으려고 우체통이 빨간 옷을 입고 있다
우체통마다 나비처럼 떨어지는 엽서들
지상의 가장 더운 어휘들이 살을 맞댄다
가을의 말이 은행잎처럼 쌓이는
가을엽서에는 주소가 없다
동피랑에 오면
이동훈
동피랑에 오면 통영이 보인다.
강구안을 내려다볼 것 같으면
서귀포 앞바다와 남덕이 그리운
이중섭의 봉두난발이 보이고.
항구에 철선이 닿을 때면
오르내리는 손님과 화물을 좇는
김춘수의 반짝이는 눈빛이 보이고.
서문고개와 세병관 사이
아버지 집을 멀찍이 돌아서 지나는
박경리의 가여운 자존심이 보이고.
길 건너 이층집을 보며
중앙우체국에 편지 부치러 가는
유치환의 은은한 연애가 보이고.
명정동의 난이를 잊지 못해
술에 취해 시장 거리를 헤매는
백석의 닿을 데 없는 유랑이 보이고.
통영에 오지 못하고
통영의 멸치와 흙 한 줌에 울었다는
윤이상의 서러움이 보이고.
벽마다 꽃 피는 동피랑에 오면
중섭과 중섭의 사랑이
통영과 통영의 사람이
다 보인다.
풀 2
이명윤
1
풀 한 포기
보도블록 틈새 비집고 설레설레 고개를 든다
봄이 왔다고 한 소식 전하신다
들은 척 만 척
구두가 밟고 지나간다
납작해진 풀의 모습이
꼭
한 마디 욕설 같았다
2
노점상 일제단속 후 거리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리어카는 파란 천막으로 덮여 있었고
누군가 그날의 소란이 새지 않도록
밧줄로 꽁꽁 묶어 놓았다
(빨리안치워모못한다이눔들아챙그라앙어어이아줌마
가미쳤나저리안비켜어억어딜물어이런씨팔년이저리
비켜아악우리가튼사람은우에살라꼬야야야빨리뿌셔
어억헉이개새끼드라아차라리나알죽여라아아아아악)
3
비 그치고 우체국 가는 길
우연히도 다시 그를 보았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물기를 털며 허리를 편다
길가 고인 빗물 속
언뜻언뜻 비치는 하늘 입가에 피어있는
웃음꽃이 고왔다
이제 막 무언가 배운 초등학생처럼
도로변의 웃음들이 밟히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었다
봄은 모든 곳에서 피어날 권리가 있다
모든 숨소리는
그 스스로 존엄하다
아무것도 아닌 편지
이병률
어느 먼 지방 우체국 사서함번호가 적힌 편지가 배달되었네
면회를 와달라는 어느 감옥에서 보낸 편지
봉투엔 받는 이의 이름만 다를 뿐 버젓이 내 집 주소가 적혀 있었네
오래 책상 위에 올려둔 알지 못하는 이의 편지
화분이 편지봉투 위로 마른 꽃잎들을 한 웅큼 쏟아놓은 어느 날
새 봉투에 또박또박 그의 주소를 적고 편지를 밀어넣고 풀칠을 하였네
이 편지를 되받는 이는 누구인가
사랑이 참 많은 사람이어서
들판이나 강가에서도 물살처럼
또 어느 먼 곳에서도 터벅터벅 그리워할 줄 아는 사람일런가
며칠 뒤 편지는 나에게로 되돌아왔네
그가 출감한 것으로 치자며
마음에서 꺼낸 못으로 집 한 채라도 지어올리기를 바라자며 내 감옥의 자물쇠들을 흔들어보네
과도한 세상이 다시 그를 결박하지 않기를
그가 더 이상 모두를 미워하지 않기를
우체국이 없는 나라
이복현
우체국이 없는 나라 난 지금 우체국이 없는 나라로 편지를 쓴다. 아직 아프게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무백(無白)의 흰 벌판에 가슴으로 쓰는 글 엊저녁, 눈이 내린 다음으로도 빈 가지를 울리던 높바람은 여전히 흐느끼는 갈대의 울음소리로 가슴에 남아 잿빛 하늘을 흔든다 찢어진 채 펄럭이는 깃발은 수평선을 향하여 고개 들고 일어서고 나는 항구를 찾아가는 표류선과도 같이 그대의 가슴을 찾아간다 이런 날, 닿지 않는 편지를 쓴다는 건 몹시도 서글픈 일이다 기대할 수 없는 답신의 편지는 슬프다 밤 새워 읽히지 않을 편지를 쓴다는 건, 우체국이 없는 나라로 편지를 띄운다는 건.
푸른 곰팡이
이문재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가도 또, 눌차만에 오시거든
이민아
꽃잎이 우표처럼 흩날리는 날
계절의 선창이 마음을 흔들어놓을 때가 있지요
가덕도 선창에 서면 꼭 그런 마음 들킨 듯
유행가도 한 소절 그립고, 추억은 파랑치지요
가덕도 등대가 목덜미처럼 내려놓은 둘레길 따라
동선새바지 느루 걸어 항월고개에 닿으면
정거마을 골목도 환했지요, 달 보는 봄밤이
먼데서도 그리운 이유를 여기 와서 알았지요
눌차만에 차오르는 겹진 파도는 추억의 밑줄
서로 다른 생의 길목을 향하던 정거장 아래로
밀물처럼 당신과 내가 누차 당도했었다는 걸, 바다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기억의 찬장을 열다 들킨 척
가만히 글썽이곤 하는 거지요
천가동 우체국에 발길이 머무는 것도,
그늘의 유랑을 오래 지켜보는 가덕도 등대에
회복의 탄성처럼 불이 밝아오는 순간을 보는 것도,
눌차만이 태풍 후 연잎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같아서지요
바로 당신이, 하늘의 둘레를 걸어온 사람들이
만월이 차오르도록 걷고 걸어 돌아와 웃는 까닭이지요
가도 또, 가덕도 눌차만에 오시거든, 그것 때문이지요
아침의 창원우체국
이상옥
출근길 등기우편 찾으러
아침 우체국에 들르다
수위실 젊은 아저씨 참 친절하다
전화로 금방 내 앞에 푸른 웃음
머금은 청년 하나 하늘에서 금방 떨어진 것처럼
불러 세운다
푸른 걸음 따라 오른
이층의 부산한 집배원들 손놀림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거나 우편물을 챙겨 담거나 하나같이
등 푸른 바다처럼 싱싱하다
저마다 “즐거운 편지”를
그에게 혹은 그녀에게 한 걸음 먼저 닿게 하려고 … 아,
日常이 주름 접힐 즈음
아침의 창원우체국으로 가서
당신이 아직 찾지 않은
등기로 배달된 희망 하나 찾으러 가도 좋다.
겨울 우체통
이상현
모두들
그냥 지나갑니다
바람도 사람들을 따라
그냥 지나갑니다
온종일 추워서
빨갛게 떨고 있는 겨울 우체국
오늘도 해 지도록
편지를 부치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날마다 텅 비어 있는
우리 동네 우체국
우편 배달 아저씨도
빈 손으로 그냥 돌아갑니다
빈 걸음으로 쓸쓸하게 돌아갑니다.
우체국 아가씨
이생진
우체국 가면서 생각했다
꼭 연인네 가는 것 같다고
가다가 개울을 건너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를 꺼내 마시며 생각했다
꼭 연인네 집 앞에 온 것 같다고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난롯가에 앉았던 아가씨가 일어서서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냐고 묻지도 않고
일부인을 꽝꽝 내리친다
봉투가 으스러져 속살이 멍드는 줄도 모르고
꽉꽉 내리칠 때
내 손가락이 바르르 떨었다
우울한 샹송
이수익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되어 젖어 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 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질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하면,
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1974
이시영
항구 남쪽에서도 귀신이 나왔다고 한다
해안통 쪽에서 나타나 시내 복판으로 들어가는
더벅머리 셋을 보았다고 한다
사람들을 향하여 무슨 말을 중얼거리다가
볼일이 있다고 재빨리 사라졌다고 한다
아무도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없다
光州에서도 대낮에 여우가 나왔다고 한다
온몸에 불을 켜고 충장로를 달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여우는 사람들 다리 사이로 빠져 달아나면서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고 한다
아무도 그 말을 소리낸 사람은 없다
永登浦에서도 여자 둘이 나왔다고 한다
야근을 하고 돌아가는 새벽 철둑길에서
여자 둘을 본 여자들은 집에 와
문을 걸어닫고 사흘 낮밤을 숨어 있었다고 한다
아무도 그들을 본 사람은 없다
龍山우체국 옆길에서도
붕대를 감은 대머리들이 나왔다고 한다
어깨들을 끼고 돌아가는 삼각지를 불러제끼며 돌아갔는데
아무도 그들을 기다린 사람은 없다
삼각지를 따라 부른 용산 술꾼들은
땅을 치며 하룻밤을 새우고 왔는데
이튿날부터 술을 끊었다고
술꾼 중의 1인이 쉬쉬하며 내게 전해왔다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이언지
가을, 입질이 시작되었다
만물이 보내는 연서가 속속 배달 중이다
온몸이 간지럽다
배롱나무 붉은 글씨는 화사체라고 하자
작살나무가 왜 작살났는지
내야수는 내야에만 있어야 하는지
계집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작살나게 이쁜 열매가 미끼였다고
의혹은 무조건 부인하고 보는 거야
경자년이 정해년에게 속삭인다
낮은 음들이 질러대는 괴성에 밥숟갈을 놓친 귀들
은해사 자두가 맛있었다고 추억하는
입술을 덮친다
누가 빠앙 클랙슨을 누른다
-당신의 유방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테이프을 갈아끼우는 사이
농염의 판타지가 물컹 섞인다
비탈 진 무대에서 마지막 스텝을 밟는다
끼어들고 싶다 소리와 소리 사이
스텝과 스텝 사이, 소문과 소문 사이
납작하게 드러눕고 싶다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죽은 나에게 말 걸고 싶다
거시기, 잠깐 뜸들이고 싶다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노랑 소인이 찍힌 연서는
하룻밤만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사라져 도착할 것이다
소멸을 윙크하는 가을 프로젝트
데카당스도 이쯤이면 클래식이다
쏙독새에게 부치다
이영식
동네 간이우체국에서 시집을 부쳤네
등기도 속달도 아니요
야생화 그려진 우표 두 장 붙여
빨간 우편함에 밀어 넣었다네
내 시집이, 시집가는 곳은
해남 땅끝마을 후박나무가 있는 집
나무늘보 걸음처럼 느릿느릿
내 노래는 해거름 바닷가에 닿겠지
저 아무개 님은 첫날밤 옷고름 풀 듯
내 첫 시집을 펼칠 것인데
기다리던 안부, 알싸한 향기는 무슨
책갈피마다 생의 비린내만 진동할 테지
쏙독쏙독-
어둠 썰어놓는 쏙독새 울음소리와 함께
시의 행간을 더듬어갈 사람
그럴수록 내 노래는 속내를 감추고
후박나무 그늘 속으로 잦아들 것인데
애인아, 땅끝이라는 지상의 주소만큼
막막함 끝에 닿는 그리움이 어디 있으랴
별정우체국 먼지 낀 창가에 서서
내 가슴에도 꽃잎 우표 몇 장 눌러 붙이고
바닷가 사서함 어디쯤
쏙독새 울음 쪽으로 귀를 기울여보네
마지막 편지 -그대에게로 가는 편지 2
이영춘
토요일 오후 그대에게로 가는
마지막 편지를 부치러 간다.
집시의 샹송 같은 우울을 접어서
우울 속에 흐르는 눈물을 접어서
그대에게로 가는 마지막 편지를
부치러 간다
텅 빈 우체국, 우체통 속에
내 마지막 언어를 구겨 넣고
돌아서는 토요일 오후
하늘 지붕은 낮게 내려 앉고
그래도 남은 말,
못다 쓴 어휘 하나씩 골라
생각 밖으로 내 던지며
절망과 슬픔을 앞 세우고
나는 빈집으로 돌아온다.
안개중독자
이외수
그대가 떠나고
세상의 모든 길들이 지워진다
나는
아직도 안개중독자로
공지천을 떠돌고 있다
흐리게 지워지는
풍경 너머 어디쯤
지난날
그대에게 엽서를 보내던
우체국은 매몰되어 있을까
길 없는 허공에서 일어나
길 없는 허공에서 스러지는
안개처럼
그토록 아파한 나날들도
손금 속에 각인되지 않은 채로
소멸한다
결국 춘천에서는
방황만이 진실한 사랑의 고백이다
서른 부근
이은림
초등학교 동창녀석에게 미뤘던 답장을 쓰고 도서관을 나선다 뻑뻑한 회전문 밀치고 몇 개의 계단을 딛고, 우체통에 편지를 찔러 넣는다 횡단보도를 절반쯤 건넜을 때 느닷없이 쏟아지는 진눈깨비 어쨌거나 첫눈이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한다
오늘따라 발자국이 느리게 몸에서 빠져나간다 보증금 500만원 월 20만원짜리 반지하 자취방 가는 길은 가깝고도 멀다 천주교이문성당 성인용품점 뷰티러브 영원산부인과 삼일여관을 지나고 푸른피아노 제일은행 동문부동산을 스친다 터진 진주목걸이의 알맹이처럼 진눈깨비, 아무렇게나 널브러진다 앞서 가던 길이 힘겹게 커브를 튼다 人道 끝에 겨우 몸을 얹은 플라타너스가 몇 장의 이파리를 놓친다 굼뜬 발자국들 옆으로 자매식당 모닝글로리 LG25가 비켜선다 어느새 발끝은 집 근처 명성빌딩 앞에서 멎는다 4층짜리 명성빌딩 1층 상가 경원가전재활용품센터 앞에는 설치미술품처럼 넣여진 낡은 가전용품들이 추위에 떨고 있다 거세지는 진눈깨비가 비늘처럼 덮이기 시작한다 딱딱한 빛 내뿜는 비늘더미들 기억 저편에서 오래된 광고필름이 차르르차르르 돌아간다 금성김치 냉장고, 대우세탁기 예예, 삼성 크린 가스렌지… 늘어진 전선들은 자궁 떠난 탯줄처럼 꼼짝 않는다 가로등이 弔燈마냥 우울하게 흔들린다 진눈깨비 점점 더 거세진다 급한 사선을 그으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얼어붙은 그림자 위에도 진눈깨비 박힌다
동수원 우체국 63-507호라는 주소를 가진 동창녀석 벌써 3년 가까이 복역 중이다 녀석에게 한번도 罪名 물은 적 없다 드문드문 보내는 답장마다 서른이 가까워졌다는 말만 습관처럼 내뱉을 뿐 서른서른서른… 중얼거릴 때마다 울컥울컥 끓어 넘치는 설움 그래서 요즘 자주 화상을 입는다 화상연고처럼 차가운 진눈깨비, 두 손으로 비벼본다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가리키고 큼직한 숫자를 새긴 버스들 월계 상계 우이동으로 허둥지둥 달려간다 종점인지 시발점인지 알 수 없는,
우체국
이재무
우체국 옆 지날 때면
다 풀지 못한 밀린 숙제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
불쑥 솟아나 발걸음 앞에
덫을 친다 마음의 서랍 속에는
부치지 못한 편지,
잘못 배달된 푸른 사연 몇 장
눈을 뜨고
내 가슴 읽고 간 기러기는
강바람 거슬러 날아간 뒤
돌아오지 않고 있다
우체국 옆 지날 때면
몸 속의 소년
비 온 뒤 초록으로 일어서고
가슴의 처마 끝으로
늙지 않는 설렘의 물방울
듣는 소리 또렷하다
비
이정환
비가 왔다, 각시붓꽃 자욱한 서정의 안뜰
먼 데 우체국이 젖어 환히 붉은
그 아침 비는 내리어 우표가 잘 뜯겨졌다
어느 날엔가 내 안에 닿은 당신의 편지
소인 찍힌 자리, 잠시 눈빛 머물렀을
그 아침 울음에 싸인 먼 데 산을 보았다
바닷가 편지
이종암
바닷가 벼랑에 강단지게 서 있는
한 그루 해송은 우체국이다
파도와 바람의 공동 우체국
수평선, 지평선 너머의 소식들
푸른 솔가지 위로 왔다가 가네
영원한 定住는 없다는 걸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나는 예감하네
물 알갱이 하나
햇살 따라 바람 따라 오고 가는 것
누가 여기 이 자리에
나를, 또 너를 비끄러매려 해도
소용없는 일임을 알겠네
소용없는 길 위에 서서
내가 본 만큼의 내용으로 그 빛으로
편지를 쓰네
봄날 흙 속으로 내려가 앉는
물의 걸음으로, 숨을 놓으며 쓰네
편지의 꿈
이하석
송전탑 아래서
에코나비고*의 유충을 줍는다.
예쁘다.
아파트 거실 텔레비전 옆에 두니 몇 번인가
허물을 벗은 다음 날개까지 난다.
어두운 구석에 알들을 슬어놓는다.
자주 날려보내고 쓸어낸다.
그러나 이미 바퀴벌레보다 더 교묘하게
집안 구석구석을 그 기계충들이 점령했음을 안다.
편지를 꼭 우체국에 가서 부친다면,
이메일들을 저것들이 먼저 점검하고
소리의 색깔까지 씹어대는 게 기분 나쁘기 때문이리라,
나도 자주 핸드폰 밧데리를 뽑고 컴퓨터를 끈다.
그러나 그걸 끝내 버리지 못하니,
나도 그 기계충들에 사로잡힌 셈이다.
형형색색의 기계충들을 애완으로 기르는 친구들이 많다.
그들은 그런 내게 자주 연락두절을 투덜댄다.
그 투덜대는 소리의 전파를 야금야금 파먹는
기계충들의 이빨이 가지런하다.
*열 안테나 주위에 살며 송수신 전파를 먹고사는 기계충.
우체국 가는 길
이해인
세상은
편지로 이어지는
길이 아닐까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하나
미루나무로 줄지어 서고
사랑의 말들이
백일홍 꽃밭으로 펼쳐지는 길
설레임 때문에
봉해지지 않는
한 통의 편지가 되어
내가 뛰어가는 길
세상의 모든 슬픔
모든 기쁨을
다 끌어안을 수 있을까
작은 발로는 갈 수가 없어
넓은 날개를 달고
사랑을 나르는
편지 천사가
되고 싶네, 나는 *
우체국에서
이향아
우표를 산다.
11월 해풍에 엽서를 쓴다
아슬한 고향의 열차를 타듯
저 창구에는 숱한 사람들이 뿌리고 간
세세한 통사정
내가 또 두고 갈 쓸쓸한 고백
우주의 귀퉁이
협소한 주소에
당신은 내가 아는 땅 위의 한 사람
벌거벗은 목숨 곤곤한 물살을
순수의 바가지로 길어 올려서
떠나 보내야지,
속죄하듯
풀어서 전해야지
오늘도 흐린 날씨
자욱한 먼지 속에
창천에 파묻힐라
매운 눈물
한 방울
당일 택배
이희숙
별난 음식 차리면 자식 생각 목에 걸려
아침시간 우체국엔 발길이 분주하다
겹겹이 에두른 상자 아이스팩 다 녹을까
성인병 불러들인 빨간불 켜진 식탁
간편한 인스턴트 그 맛에 길들여질까
어미 정 녹아든 반찬 애면글면 보낸다.
폐허주의자의 꿈
장석주
1.
술취한 저녁마다
몰래 春畵(춘화)를 보듯 세상을 본다.
내 감각속에 킬킬거리며 뜬소문처럼
눈뜨는 이 세상,
명륜동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도보로 십분 쯤 되는 거리의
모든 밝음과 어두움.
우체국과 문방구와 약국과
높은 육교와 古家(고가)의 지붕 위로
참외처럼 잘 익은 노란 달이 뜨고
보이다가 때로 안 보이는 이 세상.
뜨거운 머리로 부딪치는
없는 壁(벽), 혹은 있는 고통의 形象(형상).
깨진 머리에서 물이 흐르고
나는 괴롭고, 그것은 진실이다.
2.
날이 어둡다.
구름에 갇힌 해, 겨울비가 뿌리고
웅크려 잠든 누이여.
불빛에 비켜서 있는 어둠의 일부,
희망의 감옥 속을 빠져나오는 연기의 일부,
그 사이에 풍경으로 피어 있던
너는 어둡게 어둡게 미쳐가고
참혹해라,
어두운 날 네가 품었던 희망.
문득 녹슨 면도날로 동맥을 긋고
붉은 꽃피는 손목 들어 보였을 때, 나는
네가 키우는 괴로움은 보지 못하고
그걸 가린 환한 웃음만 보았지.
너는 아름다운 미혼이고
네 입가에서 조용히 지워지는 미소.
열리지 않는 자물쇠에서 발견하는
생의 침묵의 한 부분, 갑자기 침묵하는 이 세상
비가 뿌리고, 비 젖어 붉은 녹물
땀처럼 흘리고 서 있는 이 세상
가다가 돌아서서 바라봐도 아름답다.
3.
무너진 것은
무너지지 않은 것의 꿈인가?
어둠은 산비탈의 아파트 불빛들을
완벽하게 껴안음으로 어둠다와진다.
살아 떠도는 내 몸 어느 구석인가
몇 번의 투약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몇 마리 기생충,
그것이 나를 더욱 나답게 하는 것인가?
효용가치를 상실하고 구석에 팽개쳐져
녹슬고 있는 기계, 이 세상에 꿈은 있는가?
녹물 흘러 내린 좁은 땅바닥에
신기하게도 돋고 있는 초록의 풀을
폐기처분된 기계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체국 가는 길
전다형
봉투의 주둥이를 입으로 훅 분다 추신으로 눈이 새까만 채송화 꽃씨를 함께 넣는다 만삭의 봉투가 뒤뚱, 봄 벚꽃길 열고 네거리 우체국 간다 나냐너녀 노뇨누뉴 왕벚꽃 말문 트는 돌담을 따라 시옷이응 지지배배 초등학교 담장을 지나 두근두근 사랑의 능선을 돌아 붉은 우체통 기다리는 소박한 우체국으로 들어선다
앉은뱅이저울이 벌떡 일어나 눈이 까만 채송화 꽃씨를 안아 올린다 그립다 사랑한다 씨알 굵은 고백은 아껴두고 사랑의 변죽만 울렸던가 꽃대궁에 올라앉은 잠자리가 부드러운 날개를 사뿐 접는다 날아가듯 저울 눈금이 요동친다 꽃씨가 꽃대의 거리를 재는지 발가락이 허공을 툭툭 찬다 발뼘을 잰다 봉함엽서 봉투의 솔기가 자꾸 터진다
휘파람새 한 마리 푸드덕 붉은 마음을 물고 날아간 그곳, 추신으로 넣은 채송화 꽃씨가 속닥속닥 꽃말을 터뜨린다 하얀 치아를 활짝 드러내고 깔깔 쏟아놓을 비단길, 중년의 아낙이 연초록 설레임을 펼쳐 읽는다 그곳에는 활짝! 만개한 주름들도 다 핀다 화들짝 눈부시게 펼쳐낸다
가을 우체국에서
정문규
지금까지 받은
사랑의 선물
다시 돌려드립니다
너무나 많이 받아
더 이상 저장할
공간이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단풍잎 제 마음도
함께 부칩니다
그 동안 다정했던
봄과 여름도
고마웠습니다
답장은 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하얀 겨울로 가는
망각의 열차를 탔거든요
안-녕-히-계-세-요
우체국이 헐리다
정선호
오래된 우체국을 인부들 허물고 있다
몇 십 년 동안 동네 입구에 서서
제비들 세상과 교신을 맡아 수없이
날아다니던 곳,
이젠 수명 다하여 재건축 위해
그동안 받고 보냈던 편지만큼의
먼지 날리며 허물어지고 있다
제비들이 떨어지는 먼지들 물고
지구를 떠나 달을 향해 간다
달에서 먼지 긁어모아
화성과 목성, 그보다 멀리 있는 별들과
지구와의 교신을 위해 계수나무 옆
공터에 우체국을 짓고 있다
우주의 모든 생명들이 누구나
편지를 적을 펜 만들기고 하고
편지를 보낼 초고속 우주선 만들고 있다
또 과거 우주인들 지구인들에게
편지 보낼 수 있게 타임머신 만들고 있다
그대 몇 달 후에 뜬 달을 자세히 보라
계수나무 옆 우체국 한 채 보일 것이며
수많은 편지들 그대 머리 위로
밤마다 우수수 쏟아질 거다
청산우체국 가는 길
정유화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대둔사 입구에 있는 불두화 꽃나무는 어느 새 제멋대로 꽃을 달고 불경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담쟁이덩굴은 지 성깔대로 사다리도 없이 벽을 오르며 이웃집 창문 안을 염탐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담벽은 등이 굽어질까 봐 꿈틀거리고 있고요. 앉아 있던 풀잎들이 오금이 저리다고 제멋대로 일어서서 리듬체조를 하니까, 너무 오래 서 있었더니 허리가 아프다고 투정하는 버드나무는 앉아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겠다고 기어코 허리를 숙이고 있습니다. 어떤 바위는 마냥 누워 있었더니 엉덩이가 짓물렀다고 하면서 나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달라고까지 합니다. 황금새는 계곡 구석구석에 황금소리를 깔면서 제멋대로 마음에 드는 나무들의 품속만을 골라 다니고 있지요.
이제 그들의 반란을 통제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들을 불러모아 살게 하던 내 문장 속의 살림살이가 거의 바닥이 났거든요. 사실 그들을 기르기 위해 내 품속에 아껴두었던 지난 봄의 햇살과 바람 가을 저녁놀 계곡의 함박눈까지 거의 다 뿌려주고 말았거든요. 또한 그 동안 내가 이름을 붙여주고 물을 주고 잠을 재워주었던 언어의 손길이 그들에게는 감옥처럼 생각되었나 봅니다. 그것을 알기라도 한 듯 심지어 벼를 가꾸어 온 그 여자조차 떠나려는 눈치입니다. 시를 아껴먹던 그 여자.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청산우체국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 곳에 칩거하면서, 그들을 다시 불러모을 수 있는 새로운 문장을 짓기 위해.
우체국 앞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정윤천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누군가를 기다려본 기억을 가진 사람과,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누구라도 한 사람을 기다려본 기억이 없는
사람의 인생의 무늬에는 어딘가 차이가 있을 것도 같았다.
모든 생의 바닥으로는 다른 빛깔의 그늘이 와서 깔리고,
모든 생의 그 그늘들은 다른 방식으로 스러지기도 할 것 같았다.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등에 대고서라도,
이제라도 `그’를 한번 기다리며 서 있어보라고,
가만히 말을 건네주고 싶었던 가을날이 있었다.
여름편지
정일근
여름은 부산우체국 신호등 앞에 서 있다
바다로 가는 푸른 신호를 기다리며
중앙동 플라타너스 잎새 위로 여름편지를 쓴다
지난 여름은 찬란하였다
추억은 소금에 절여 싱싱하게 되살아나고
먼 바다 더 먼 섬들이 푸른 잎맥을 타고 떠오른다
그리운 바다는 오늘도 만조이리라
그리운 바다는 만조바다에 섬을 띄우고
밤이 오면 별빛 더욱 푸르리라
여름은 부산우체국 신호등을 건너 바다로 가고 있다
나도 바다로 돌아가 사유하리라
주머니 속에 넣어 둔 섬들을 풀어 주며
그리운 그대에게 파도 소리를 담아 편지를 쓰리라
이름 부르면 더욱 빛나는 7월의 바다가
그대 손금 위에 떠오를 때까지
律呂集 75 - 이름에 대하여
정진규
언제나 내 이름이 변함이 없는 것이 이무래도 오래전부터 수상하였으며 제일 괴로운 내 대목이었다 固有名詞라는 말로 나를 요약 정의할 수는 없다고 오래전부터 나는 확신해 왔다 내가 들여다 본 오늘 아침의 나만 하드래도 그렇다 어제 저녁의 내 우체통과 쇠뜨기 풀, 그 우체국과 그 쇠뜨기 풀에 대한 감성의 두께마저 달라진 내 이름을 자고나면 달라지는 내 이름을 똑같은 억양으로 부르고 쓴다는 것은 인간들의 무모한 약속이며 질서이며 구속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나는 알았다 다른 사물들, 자연들은 이미 탯줄 끊었을 그때부터 제 이름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그때그때 다른 이름들로 태어날 줄 알았던 것이다 응답을 알았던 것이다 사람만 귀머거리였다 청맹과니였다 우체통은 내가 사랑의 화물선! 하고 부르면 네! 손 번쩍 들어 그렇다고 대답하였으며 쇠뜨기 풀도 내가 소도 잘 뜯지 않아 이름만이라도 그렇게 불러달라고 내 앞에 다가앉은 풀! 그렇게 부르면 네!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런 응답들로 모두 열려 있었다 그래서 세상은 넓다 내가 시를 쓰게 하였다 사람은 모두 빗장이 걸려 있다 사람! 불러 보시게 끝소리가 닫혀진 입시울 소리이며 풀! 불러 보시게 끝소리가 끝없이 울리는 울림소리 아니신가 열려 흐르는 물소리 아니신가
장승포 우체국
정호승
바다가 보이는 장승포우체국 앞에는 키 큰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그 소나무는 예부터 장승포 사람들이 보내는 연애편지만 먹고 산다는데
요즘은 연애편지를 보내는 이가 거의 없어
배고파 우는 소나무의 울음소리가 가끔 새벽 뱃고동소리처럼 들린다고 한다
어떤 때는 장승포항을 오가는 고깃배들끼리 서로 연애편지를 써서 부친다고 하기도 하고
장승포여객선터미널에 내리는 사람들마다 승선권 대신 연애편지 한 장 내민다고 하기도 하고
나도 장승포를 떠나기 전에 그대에게 몇 통의 연애편지를 부치고 돌아왔는데
그대 장승포우체통 푸른 소나무를 바라보며 보낸 내 연애의 편지는 잘 받아보셨는지
왜 평생 답장을 주시지 않는지 *
혜화동 우체국 아가씨
조병화
혜화동 우체국 아가씨들은 젊다
예쁘다, 명랑하다
여학생들 같다, 유니폼이 산뜻하다
농담으로 애인이 있습니까, 말을 걸면
결혼을 했습니다, 웃으며
아이도 있다고 수줍어 한다
웃는 얼굴이 유리창 햇살에 비쳐
혜화동이 환해진다
나의 우편물들은
어린 이 엄마 손에 가려져서
국내로, 일본으로, 중국으로, 미국으로 유럽으로,
온 세계로 가고,
온 세계에서 온다
우편물에 묻어, 오고, 가는
따뜻한 손의 향기,
오늘도 가고
오늘도 온다
부지런히, 정확히,
黑板
조정권
내가 걸어가고 있을 때, 비에 젖은 가로수가 발바닥을 말리며 햇빛 속으로 따라오고 있었어, 나는 갇혀 있는 5月의 우체국길을, 주머니에 가득한 햇살을 만지면서 걸었어, 그전에 내가 머문 時節에 못을 박았어. 햇살은 식어 있었어. 안소니 파킨스 얼굴이 지워져 있는 이 黑板, 그 벽까지 내가 먼지를 흘리고 돌아왔을 때, 내가 흘린 먼지들이 내 길을 따라 기어나오고, 누나 누나, 어디에서나 햇살은 식어 있었어, 이놈의 黑板, 젊음이 깨어진 얼굴을 그리면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방에 들어가 울었어. 울면서 나는 들었어. 가로수의 소리침, 소리의 門 뒤에서 하얗게 지워지는 햇살들, 지워지면서 다시 흘러내리는 내 얼굴의 面角을 건져내면서, 나는 하얗게 비어가고 있었어.
눈의 여왕
진은영
그녀에게서 훔쳐온 것은
모두에게 어울린다
사물들은 하얀 곰가죽을 덮어쓴다
부푼 보리씨가 자라고
청소용 트럭, 빨간 우체통 그리고 떠다니는 집들
자동차는 멈춰 있고
폐타이어들이 굴러다닌다, 내 애인의
유두처럼 까맣다
그런 아침 사람들은
칼날처럼 일찍 일어나
피 묻은 자줏빛 살덩이의 살해자를
찾으러 다닌다
바람에 묶인 흰 털들이 공중으로 도망친다
젊은 우체국장이 있는 풍경
채필녀
우체국이 새로 생겼어요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
신호등은 없지만 무단횡단이 가능하죠
주.정차도 할 수 있어요
빨간 우체국을 한 백개쯤 붙여놓은 건물이에요
나는 엽서를 사러 들어갔어요
커다란 우체통 속으로 미끌어지듯이요
문을 여는 순간 꽝!
가슴에 스탬프가 찍혔어요
젊디 젊은 우체국장이 앉아있지 않겠어요?
어서 오세요!
샘 솟는 목소리, 그는 뱃속에 샘물이 있어요
책상이며 화분, 액자, 모든게 새거였고
휴지통엔 휴지가 하나도 없었어요
온도 습도가 알맞아
동양난이 촉촉하게 피어있어요
나는 주소불명의 편지처럼 어리둥절했어요
젊은 우체국장이라니,
뜻 밖의 소포 같은,
축하의 전보 같은,
젊은 우체국장이 있는 우체국에 오시지 않겠어요?
그대, 한장의 엽서가 되고
그리운 편지, 소중한 선물이 되어
어디든 속달로 날아갈 거에요
수취인 불명, 거부, 상실, 부치기 힘들 때, 어서 오세요!
젊은 우체국장과 물결과 바람이
새파란 빛살로 차오르겠지요?
너무 멀다구요? 밤에는 봄이 안 오나요?
(근처에 다른 구경거리 없냐구요? 있죠, 우체국에서 2분만 가면
대덕면사무소가 있는데 뜨락의 국화, 우표 전시장처럼 다양하고
벌떼들 잉잉거림, 관람객의 탄성이지요)
콘체르토
최하연
섬이 있다네, 교회가 있다네, 섬에는 우체국이 있고 좁은 길이 있고, 어둠 속에 숨은 달이 길의 끝을 자꾸만 늘이고 있다네, 바다는 끝내 수평선에 목을 매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네,
뒤돌아보면 하나 이상의 하나가 자꾸만 따라온다네, 앞서 가지도 않으면서 기다리지도 않으면서, 섬의 하루는 달빛을 따라 바다로 간다네,
오늘은 만선이었고, 만선 직전의 어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네, 얼마나 더 가야, 그 섬에 닿을지, 얼마나 더 가야, 나는 섬 밖에서 섬을 바라볼 수 있는지, 누군가 모든 길들을 처음으로 되돌리고 있는데,
교회의 종탑은 순간 반짝인다네,
우체국
탁영환
손바닥 둘만한 행복
하나로 접어 규격봉투에 넣어
네게 부치마.
하늘로 넘나드는
마음 묶어
되도록 작게 여미어 싸 무게를 달면
그토록 엄청나던 무게
가장 작게 오그려
수취인 분명한 소포로
네게 부치마.
계절의 사태진 숲에서
아직도 집이 없어
눈물 어린 감정, 그러고 있거든
허공세계 돌아온 바람등에 실어
너만이 알아볼 듯
물들인 낙엽으로 그렇게
네게 띄우마.
독도 우체국
편부경
기다림이 길었습니다
굽은 등이 걸어온
느린 걸음의 날들
길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강아지풀 억새와 뿌리로 만나
그 속삭임만으로
해가 뜨고 지다가
눈바람에 목 메이다가
돌아본들 망망해협을 서성이다가
고향이 없다던 뜨거운 별들
밤마다 신발을 벗던 등대
웅크린 꿈길 더듬어 심해의
기다림이 쌓은 독도 별정우체국
머지않았습니다
독도리 사람들 낯익은 목소리로
우체국마당을 쓸고
뭍으로 간 이웃 돌아와
주머니 속 깊은 술병 꺼내들 날이
쪽배 뒤척임 위에 갈매기 목청 선연할 때
이 번지 저 번지 모여앉아
목 메인 이야기로 물소리 지워질
오래된 수채화 같은 시골마을 풍경이
거기 우체통에 발걸음 잦을 날이
미치겠네
함성호
우체국에 불이 났다네
우리집 차도와 인도의 경계석이 박살났네
며칠은 청구서가 배달되지 않겠다고
사람들은 불구경을 하면서도
우리집 경계석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네
미치겠네
경계석이 무너진다고 악을 써대도
소방관들은 한가롭게 불꽃에 물을 주고 있네
아내는 큰일났다 큰일났다 하면서도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나는 경계석 근처에서 안타까워 떠날 수 없네
미치겠네
바퀴는 너무 무거워
우리집 경계석이 버틸 수 없네
아무도 우체국에 맡긴 사연은 없는지
사람들은 불꽃에 귀를 기울이다
집으로 돌아가 고기를 굽고 있네
미치겠네
우리집 경계석은 모양도 좋고 높이도 적당해서
앉아 있기 좋았다네
우체국에 불이 났다네
우리집 경계석도 박살났다네
미치겠네
비, 우체국
하순희
난 한 촉 벌고 있는 소액환 창구에서
얼어 터져 피가 나는 투박한 손을 본다.
“이것 좀 대신 써 주소. 글을 씰 수 없어예”
꼬깃꼬깃 접혀진 세종대왕 얼굴 위로
검게 젖은 빗물이 고랑이 되어 흐른다
“애비는 그냥 저냥 잘 있다. 에미 말 잘 들어라.”
갯벌 매립 공사장, 왼종일 등짐을 져다 나르다
식은 빵 한 조각 콩나물 국밥 한 술 속으로
밤새운 만장의 그리움, 강물로 뒤척인다.
새우잠 자는 부러진 스치로품 사이에
철 이른 냉이꽃이 하얗게 피고 있다
울커덩 붉어지는 눈시울,
끝나지 않은 삶의 고리
첫눈 오는 날
한연순
눈답지 않은 눈이 내린다
먼 먼 그리움처럼
우체국에서
마음을 부치고 돌아 나와
낙엽 위에 내려앉기도 전에
어디론가 사라지는
형체조차 희미한 기억을
따라간다
지친 어깨 위로
무거운 가방 위로
사뿐 사뿐히
눈답지 않은 눈이 내리는 것은
오호
하염없이 돌아가고 싶은
은빛 모래 바닷가
눈답지 않은 눈
첫사랑
우체국 이야기
홍윤숙
이제 우체국에 가서
원고를 부치는 노고도 필요 없어졌지만
전화나 팩스 같은 문명의 이기로
대개는 볼일을 보고 말지만
그래도 나는 가끔 옛날처럼
편지나 시를 쓰면
그것들을 들고 골목을 지나 큰길을 건너
나들이 가듯이 우체국에 간다
우체국 아가씨도 옛날처럼 상냥한 소녀는 아니어서
낯선 얼굴의 무표정한 눈총이 서먹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숨결이 그리워서
필요도 없는 말을 몇 마디 주고받으며
풀칠을 하고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는다
냇물 속에 떨어지는 잔돌 같은 작은 음향
그 소리 들으면서 나는 알 수 없는 감동에 가슴 젖는다
날마다 무언가 변하여 가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남아 있다는
그 작은 감동이 나를 위로한다
오늘도 한 통의 편지를 들고
차들이 질주하는 큰길을 건너서
옛날의 내 어머니 새 옷 갈아입고 나들이 가듯이
우체국에 간다
아, 거기 기다리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의
따스한 숨결
우체국을 가며
황규관
다시 이력서를 써서
서울을 떠날 때보다 추레해진
사진도 붙이고, 맘에도 없는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로 끝나는 자기소개서를 덧붙여
우체국을 간다
컴퓨터로 찍힌 월급명세서를 받으며 느낀 참담함이 싫어
얼빠진 노동조합이나
제 밥줄에 목맨 회사 간부들과 싸우는 것이
마치 아귀다툼 같아서 떠나온 곳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밥 때문에
삐쩍 마른 자식놈 눈빛 때문에
이렇게 내 영혼을 팔려는 짓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왜 그럴까, 알고 싶지가 않다
나는 이렇게 늘 패배하며 산다
조금만 더 가면, 여기서 한 발짝만 더 가면
금빛 들판에서
비뚤어진 허수아비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 내게는 욕심이었다
이력서를 부치러 우체국을 간다
한때 밤새워 쓴 편지를 부치던 곳에
생生의 서랍을 샅샅이 뒤져
1987년 포철공고 졸업 1991년 육군 만기제대
이따위 먼지까지 탈탈 털어서 간다
시골 우체국
황동규
지도에서 막 사라지려는 權相老 현판의 절 하나 찾기 위해 소백산맥 남쪽 기슭을 오르내리다 잠시 전화 걸려고 들른 시골 우체국, 직원 하나가 하도 친절킬래 일부러 마음 내려놓고 편지를 쓴다. 오늘 날씨도 흐리려다 말았다. 모든 활엽수들이 입을 벌리고 서 있다. 시골 포장도로 끼고 흐르는 개울엔 물이 기어다닌 흔적도 없다. 그 직원이 입에 손 살짝 대었다 떼듯 부드럽고 단단한 미소 지은 우체국은 접시꽃으로 잘못 볼 뻔한 마음 芙蓉꽃과 잔 꽃들을 모아
넉넉한 꽃이삭을 만들고 있는 부처꽃으로 將嚴되어 있었고, 바람이 꽃 이파리만 가볍게 흔들었고, 매미가 삼중창으로 울었다.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단층 우체국이 그 자리에서 위로 떠오를 것 같다. 지그시 눈을 감는다. 그 직원과 우체국이 우주 영화 전광 속처럼 번쩍이며 사라지고 사방에 소백산맥에는 보이지 않던 雪山들이 소리없이 솟아올랐다
가려워진 등짝
황병승
오월, 아름답고 좋은 날이다
작년 이맘때는 失戀을 했는데
비 내리는 우체국 계단에서
사랑스런 내 강아지 짜부가
위로해주었지
‘괜찮아 울지 마 죽을 정도는 아니잖아’
짜부는 넘어지지 않고
계단을 잘도 뛰어내려갔지
나는 골치가 아프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짜부야 짜부야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엄마가 그랬을 텐데!’
소리치기도 귀찮아서
하늘이 절로 무너져 내렸으면
하고 바랐지
작년 이맘때에는
짜부도 나도
기진맥진한 얼굴로
시골집에 불쑥 찾아가
삶은 옥수수를 먹기도 했지
채마밭에 앉아
병색이 짙은 아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괜찮아 걱정하지마 아직은 안 죽어’
배시시 웃다가
검은 옥수수 알갱이를
발등에 흘렸었는데
어느덧 오월,
아름답고 좋은 날이 또다시 와서
지나간 날들이 우습고
간지러워서
백내장에 걸린 늙은 짜부를 들쳐업고
짜부가 짜부가
부드러운 앞발로
살 살 살 등짝이나 긁어주었으면
하고 바랐지
붉은 우체통
황지우
버즘나무 아래
붉은 우체통이
멍하니, 입 벌리고 서 있다
소식이 오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思想이 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여, 비록 그대가
폐인이 될지라도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
고 쓴 편지 한 통 없지만,
병원으로 가기 위해
길가에서 안개꽃 한 묶음을 사는데
두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뱃가죽에 타이어 조각을 대고
이쪽으로 기어서 온다